00140 Side story 9 =========================================================================
“그렇게 아픈 게 좋다면, 짐의 앞에서만 아프도록 해라.”
셀리안 크레이누는 벌어지는 여자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부드러운 하얀 손, 부러질 것처럼 작은 손이다. 마법조차 쓰지 않은 그에게도 저항하지 못하고 있다. 작고 작아 연약하고, 사랑스러울 정도로 불안하고, 셀리안 크레이누에게 더없이 무르고 다정한 여자다. 역시 말도 안돼, 라고 생각한다.
“에-”
“걱정마라, 그대가 다쳐도 금방 낫게 해주지. 이렇게 주변에 꽃이 많으니.”
“아, 자, 잠깐-”
경악하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마치 지금의 셀리안 크레이누가 이런 일을, 윤하영에게 이런 일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는 것 같았다.
“잠깐, 잠깐!!”
그리고, 언젠가를 기억해낸다. 처음 만났던 날 이후,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셀리안 크레이누는 왕으로서 상냥한 말을 건네고, 윤하영은 의심했다.
[너는, 생각이 너무 많군. 아니. 대체 짐을 어떻게 생각하는 건가.]
라고, 셀리안 크레이누는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렇다. 결국 윤하영에게 있어 셀리안 크레이누는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처음에는 무시무시한 폭군이었고, 그 후에는 남모르는 열등감과 약점을 가지고 있는 가련한 왕이었으며, 지금은 사랑에 빠져 그녀에게 함부로조차 할 수 없는 남자였다.
아마도 그렇게 결정되어 있을 거라고, 명확하게 정의하지는 못하겠지만 셀리안 크레이누는 윤하영이 그렇게 느끼고 있음을 확신했다.
“리안, 셀리안!!”
“큭-”
“?”
“크, 하하하.”
셀리안은 손을 딱 멈췄다. 동시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윤하영의 손을 놓고 그녀와 멀어진 뒤, 크게 웃기 시작했다.
우스운 일이다. 말도 안 되지만, 이제 알 것 같다. 알 수 없는 것, 알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 그저 윤하영이 셀리안 크레이누를 걱정하고, 동정하고, 손을 내미는 걸로 충분해 보고 싶지 않던 게 이제는 다 보이고 있었다.
“다행히, 아픈 걸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군.”
“리안-!!”
얼굴이 새빨개져 소리치는 여자는 여전히 사랑스럽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셀리안 크레이누에게 더없이 사랑스러운 여자가 되었다.
더없이 사랑스러워 죽일 수 없다. 죽여마땅한 건방진 동정에도 죽일 수 없었다. 그저 그마저도 기뻤을 뿐이다.
"후...이거군."
그리고, 동시에- 지금도다. 지금도,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던 게 사실이라고 확신하면서도 눈앞의 여자를 죽일 수 없다. 버릴 수 없다. 그렇다고 강요할 수도 없다.
"이거였어."
자, 이제 진실이 보이고 마음은 정리 되고, 결정만이 허공을 맴돈다. 그렇다면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셀리안 크레이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랑스러워서는 안 되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Side story 9
셀리안 크레이누는 눈앞의 용에게 역겨움을 느꼈다. 용은 반격하지 못한다. 어차피 또 에피룬 크레이누니 뭐니 뜬구름 잡는 감상에 사로잡혀 꼼짝도 못하는 거겠지.
‘죽이는 게 낫겠군.’
시간을 버릴 생각은 없다. 엘킨이, 그 엘킨이 윤하영을 그의 눈앞에서 데려갔다. 아마 엘킨이라면, 힘의 차이를 극복하고 셀리안 크레이누의 눈에서 벗어나는 법을, 윤하영을 데리고 꽁꽁 숨는 법도 알고 있을 것이다.
셀리안 크레이누가 언제까지 그를 놓칠 일은 없지만-
뱀의 공주를 죽인 셀리안에게, 윤하영은 돌아가겠다고 이야기했다. 그 복잡하고 언제나 도망치기만 하는 여자가. 그 자신이 납치를 당하는 순간조차 눈을 감는, 언제나 도망치는 여자가 제 손으로 셀리안에게 손을 뻗은 것이다.
윤하영은 셀리안을 응석부리게 했고, 셀리안은 그녀에게 응석부리고 있다. 그녀는 셀리안을 잘 알았고, 그에게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아했다. 어느 순간 셀리안은 깨달았다. 그녀는 엘킨을 사랑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셀리안을 선택한다는 것을 말이다.
사랑도 아니고 연애감정도 아니고, 그것이 명확하게 무엇인지 셀리안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에 만족했다.
그날- 엘킨이 윤하영에게 그녀만의 기사가 되겠다고 이야기했던 날. 자신의 기사가 추락하고 추락해 사랑을 고백하던 날- 셀리안 크레이누는 모든 결정을 윤하영에게 맡겼지만, 사실은 참고 있던 것 뿐이었다.
윤하영만의 기사가 되겠다는 엘킨 다이브, 그걸 받아들이는 윤하영.
그렇다면, 그렇다면 언젠가 그 둘은 떠날지도 모른다. 엘킨 다이브‘만’이 윤하영이 이곳에 있을 거처가 된다면? 그렇다면 그녀는 이 성을 떠날지도 모른다.
그것을 셀리안 크레이누가 막을 수 있을까.
하지만, 윤하영은 엘킨을 거절했다. 달콤하게 속삭여 기사의 마음을 흩트러뜨려 결국은 또 도망친 것이다. 무엇을 위해 도망쳤는가.
오만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것은 엘킨 다이브가 셀리안 크레이누를 떠나게 하지 않으려는 건 아니었을까.
엘킨이 윤하영만의 기사가 된다는 것은 셀리안 크레이누를 버린다는 것. 그것을 거절한다는 건-
억측일지도 모른다. 사랑에 미쳐, 냉정하지 못한 판단일지도 모른다.
셀리안 크레이누는 이제 인정했다. 자신은 윤하영을 사랑한다. 깨달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윤하영이 엘킨을 거절한 날이다.
왜 신경이 쓰이는 걸까. 왜 그녀에게 구애되는 걸까. 왜 죽이지 못하는 걸까.
그 답이 그 순간, 윤하영이 셀리안 크레이누를 선택한 순간 결정된 것이다.
셀리안은 그걸로 충분했다. 윤하영이 제 정원에서 엘킨과 함께 행복해져도 좋았다. 그걸 보는 걸로 충분했다.
이후에는 더 없는 만족이 찾아왔다. 그녀가 납치당한 건 상정외지만, 수확은 있었다. 그가 뱀의 공주를 터뜨리던 걸 분명히 본 윤하영이 셀리안 크레이누와 돌아가는 걸 선택한 순간 모든 것에 만족했다.
그녀가 셀리안 크레이누를, 셀리안 크레이누로서 인정해준 것이다.
“화가 난 것 같네.”
"새삼스러운 말이군."
"하영을 납치한 하프엘프 때문에 머리끝까지 화난 건 알겠는데. 우리가 그 아이를 데리고 있던 것보다 더 화가 나 보이는 건 왜일까."
"..."
진의 이야기에 셀리안은 그저 무표정으로 응수할 뿐이다.
왜 화가 나간 거냐고? 엘킨 다이브가 셀리안 크레이누를 배신했으니까- 이 세상 누구보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엘킨이었다. 그, 엘킨이-
단지 지켜보는 것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건가.
‘자신도 깨끗하지 않은 주제에.’
엘킨 다이브는 이제 올곧지 않다. 언뜻보면, 지나치게 엇나간 셀리안 크레이누, 뱀족의 호수를 차지하고 에드나 공주를 죽였다 살리고, 키오후에게 히아신스를 맡겨버린 자신에게 반발한 것 같지만 그저 윤하영을 독점하고 싶은 것 뿐이다. 그녀의 마음만이 아니고 그녀 전체를 갖겠다고 그 눈은 이야기 하고 있었다.
셀리안은 손가락이 저릿하다고 느낀다. 이리저리 과도하게 마나를 사용했음에도, 분노로 줄줄 새어나가는 마나를 제어하지 못한다.
"휘유, 무서운 걸. 하프엘프 죽이면 그 아이, 울 텐데."
그것도, 알고 있다.
“뭐, 어느 쪽이든 그 전에 용이 한 마리 죽겠지만.”
“아니, 아니- 도망 갈 거야. 도망은 칠 수 있을 것 같아.”
셀리안의 눈이 꿈틀한다. 아까는 셀리안과 윤하영을 같이 있게 할 수 없다느니 영문도 모를 소리를 하던 남자가, 두 손을 들고 항복 하는 자세를 취한 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짐은 윤하영을 찾을 거다만-”
“어, 음... 뭐.. 그렇겠지.”
붉은 용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헤매는 것처럼 셀리안 크레이누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도 너에게 무르니까. 아마, 스스로 하프엘프에게서 도망치지 않을까.”
“...”
“...우, 우와. 바보 같은 표정. 우와악-”
그의 손가락에서 뻗어나간 한 줌의 황금빛줄기가 진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간다. 그는 그걸 피하면서 붉은 날개를 퍼득여 하늘로 뛰어오른다.
“에피룬도 그런 표정은 안 했다. 진짜... 윤하영이 널 선택한다는 이야기가 그렇게 좋냐? ...어휴... 대체 뭐가 뭔지.”
진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무심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정말 닮았다. 아니 완전히 같다. 마나의 양도, 외관도. 인간의 외관 따위 인외생물, 그것도 용인 진에게는 의미가 없다. 그에게는 여자 모습인 윤하영이나 셀리안 크레이누나 다 에피룬 크레이누의 다른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저렇게 닮아서야 에피룬 크레이누 자체를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도망 가기로 마음 먹었다면 얼른 가지 그래? 꾸물거리면 정말 죽을 수도 있으니까.”
“말하는 게 참 예쁘기도 하지.”
다만 성격이 지독하게 나쁜 게, 여자 모습의 에피룬 만큼이나 이색적이라고 생각했다. 성격 나쁜 에피룬이라니, 진으로서는 생각도 못 한 일이다.
이기적이고, 연약하고-
“하나, 조언하지.”
“?”
“정말 네가, 그녀를-으음... 어쨌든 윤하영을 생각하는 네 감정에 이성생물을 바라보는 감정이 섞여 있다면.”
“뭐라고 하는 건지.”
아니, 네가 윤하영을 특별하게 여기는 건 이해하는데-라고 이야기하며 진은 어물어물 말을 더듬었다. 더듬다가 조금 불쌍하게 여기는 것 같은 눈으로 셀리안 크레이누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셀리안 크레이누는 차갑게 받아쳤다. 그에게 용은 의미가 없고, 그런 용이 자신을 어떻게 보던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일단 호수에게 물어보는 게 어때,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붉은 용은 그의 차가운 시선에 약간 상처 받은 얼굴을 완벽하게 숨기지는 못한 채, 비틀 뒤로 물러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
물뱀의 호수-
대장로도 아닌, 인간의 왕이 온 것으로 물뱀의 일족은 고개를 숙인다. 긍지 높은 인외생물이 마치 신을, 세계를 현신화한 무언가를 만난 것처럼 일제히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셀리안 크레이누는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며, 제 마나로 가득 채워진 호수로 척척 걸어나갔다.
호수의 물은 투명하고, 이제는 원래 물뱀의 호수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무생물에게 이상한 말이지만 호수는 죽은 것이다.
지금 존재하는 호수는 어린 아이다. 아니 아기다. 셀리안 크레이누에게서 태어난 그 전의 호수를 닮은 어린 호수.
제 주인의 등장에 호수는 기뻐한다. 셀리안 크레이누는 자신의 피조물이 기뻐하는 것을 알았지만 무시했다. 그에게 있어 호수는 도구다. 그저 도구일 뿐. 경애도 무엇도 없다.
“윤하영은 어디 있지.”
그는 호수에게 무심히 물었다.
곧 호수는 제 창조주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 이리저리 일렁인다. 보이는 건 모래바람이다. 모래바람이 분다.
“지온이군.”
그렇다면 목적지는 시모갈일까. 시모갈로 가도 상관은 없지만, 성에는 류라는 남자도 없어졌다. 그 남자가 시모갈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모갈로 흘러간다면 찾는 게 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윤하영이 엘킨을 벗어나 자신에게 오기도 시모갈보다는 지온이 편할 것이다.
“...”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했지만 용의 말이 떠올랐고 마음이 술렁거렸다. 사랑으로 엘킨의 청을 거절한 윤하영이다. 그런 그녀가, 만약 엘킨으로부터 도망친다면. 이번에는 사랑조차 거부하는 게 아닐까.
아니다. 거기까지는 욕심이다.
그녀가 어찌되었든 엘킨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알고 있다. 그녀 자신이 도망치려 해도, 그 감정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득하고 깊어서. 셀리안 크레이누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었다.
물이 흩어지듯 흐릿해진다.
셀리안은 호수로부터 등을 돌렸다. 지온으로 가려면 이동마법을 써도 전통적인 교통 수단도 사용해야 했다.
밤에라도 도착하려면 지금부터 움직여야 했다.
[일단 호수에게 물어보는 게 어때,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시시하군.”
셀리안 크레이누는 순간 멈칫했지만, 용의 말 따위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마음 속 어딘가에서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직감적으로 확인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셀리안 크레이누는 외면했다. 일단은 윤하영이었다. 윤하영을 데리러 가야 했다.
*
윤하영을 품에 안고 왕성에 돌아오면, 성문 앞에 초록 머리카락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호박색 눈으로 증오스러운 듯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셀리안 크레이누와 윤하영이다.
“찾을 수고를 덜었군. 다행히, 히아신스도 없군.”
“그녀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수는 없으니까요.”
키오후의 눈이 원망으로 번들거린다. 살기는 두 사람 모두를 향했지만 특히 윤하영을 향하고 있다. 셀리안의 눈이 날카롭게 남자를 본다.
“죽고 싶나?”
“...아직은 죽고 싶지 않군요.”
“그래. 짐도 네 놈을 ‘아직은’ 죽이지 않겠다. 히아신스가 어떤 식이든 결정이 되면 죽여주지.”
“결정이라고요?”
“어차피, 영혼이 그녀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늦든 빠르든 그녀는 바뀔 테고- 네 놈은 그마저도 빨리 해결하지 못했어.”
“그건-”
그것도 윤하영 때문이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키오후는 입을 다물었다.
윤하영에게 들러붙어 있는 듯한 ‘그것’을 없애지 않는한 그의 안나는 완전히는 돌아올 수 없다. 아니 히아신스 에이나의 인격은 곧 완전히 안나가 될 것이지만, 영혼이 찢어져 안나인 히아신스와 히아신스의 조각이 세상에 두 개나 존재하겠지. 그런 건 키오후가 생각하기에도 좋지 못한 일이었다.
하영 옆에 들러붙은 ‘그것’, 즉 히아신스의 자아가 스민 그 마나덩어리는 명백하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세계에 윤하영을 묶어 두고 있었다. 처음 윤하영이 여기 왔을 때부터 '그것'이 그런 형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그 본래목적이 뭔지는 모르고, 그 목적을 심은 윤하영조차 스스로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것’은 본 존재목적과 함께 조금이라도 ‘히아신스 에이나’를 지키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완전히 안나가 되려 하는 ‘히아신스 에이나’를 방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전생의 기억을 자신의 기억으로 받아들이는 걸 방해한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히아신스 에이나’로서 존재하고 싶어하는 그녀의 영혼이 ‘그것’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히아신스의 자아를 받아들였다.
문제는 키오후로서는 윤하영 옆의 ‘그것’을 없애기가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그걸 없애 윤하영을 무사히 그녀가 있던 세계로 돌려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사랑은 완성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윤하영은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것’만 없어지면 윤하영은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고 안나가 돌아올 것이라 여겼다. 본인은 부정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윤하영이라는 인간은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키오후에게 반발하면서도 그 말에는 흔들리는 걸 알 수 있었다. 윤하영이 마음에는 안 들어도 그녀는 환생한 안나에게 사랑받고 있다. 위해를 가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또한, 그것이 사라지는 대로 히아신스 에이나는 안나의 기억을 모두 되찾고 안나의 연장선에서 살게 될 테지.
하지만, 이제 아니다. 설사 그렇게 된다 해도, 키오후는 윤하영이 존재하는 걸 용납할 수가 없게 되었다. 어떤 세계에서라도.
“원하시는대로 궁을 떠나지요.”
“아아. 얼른 꺼져라.”
키오후는 셀리안 크레이누 품의 윤하영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언젠가- 반드시.
“호수를 손에 넣은 걸 축하드립니다.”
“꺼지라고 했을 텐데? 네 놈의 비난을 들어줄 생각은 없다만.”
“비난이 아닙니다. 순수한 감탄입니다. 설마 인간이 물뱀의 호수를 손에 넣을 줄이야. 과연 에피룬 크레이누의 진정한 환신은 당신이군요.”
“진정한?”
셀리안은 그저, 그의 기묘한 어조에 되읊은 것 뿐이지만 키오후의 입가는 끌려올라간다. 뱀처럼 웃으며 키오후는 저주처럼 이죽였다. 그의 탁한 호박색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당신의 호수에게 물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무얼? 짐이 에피룬 크레이누냐고?”
“설마요. 그녀가 무엇인지요-”
“뭐?”
그 말과 함께 뱀족의 대장로는 왕궁으로부터 멀어져갔다.
*
용의 말이 맞았다.
윤하영은 엘킨 다이브로부터 도망쳐 류라는 남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다치게 했다.
그리고 셀리안 크레이누를 선택했다.
셀리안 크레이누는 침상에 누워 있는 윤하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가 다친 게 아프다.
그녀가 자신을 택해줘서 기쁘다.
자신을 위해 다친 건 달콤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어째서 나를 위해 여기까지 하는 걸까.’
알 수 없다.
꿈에서 이곳을 본다는 여자.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아는 여자.
자신의 응석을 받아주듯 원하는 이야기를 해주는 여자.
우정? 설마- 연애감정? 그것도 아니다.
윤하영이 왜 셀리안 크레이누에게 거기까지 해주는지 알 수가 없다.
[일단 호수에게 물어보는 게 어때,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설마요. 그녀가 무엇인지요-]
담긴 감정은 다르지만, 붉은 용도 물뱀의 대장로도 맥락은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녀가 어떤 존재냐고?
“왜일까... 무섭구나.”
무섭다고?
무엇이 무섭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셀리안은 그렇게 읊조렸다.
해야 할 게 많다.
히아신스도, 뱀의 공주도, 그리고 엘킨에 대해서도. 그녀가 안심하고 이곳에 머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녀는 옆에 있는데.
불안해지기만 한다. 무섭다.
“리안- 아무것도 무서워 할 필요 없어요.”
자고 있던 윤하영이 셀리안에게 대답하듯 중얼거렸다. 안심시키는 말이다. 건방진 말이고. 감히 약하디 약한 여자가 무엇을 알고 마법왕 셀리안 크레이누를 달래는 건지.
“열어보면 모두 별것도 아닐 거예요.”
“그럴까.”
신기하게 안심하는 스스로가 있었지만 이제 놀랍지도 않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이 있다.
그녀가 무엇이라도, 어떤 존재라도, 설사 그의 전생, 에피룬 크레이누와 관련된 누군가라 해도 셀리안은 이제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
셀리안 크레이누는 호수를 보았다.
호수는 얼마 안 되어 다시 자신을 찾아온 창조주에게 일렁거리며 애정을 표했다.
"..."
반면 그는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윤하영의 말에 위로받긴 했지만 셀리안은 여전히 무섭다고 생각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무섭다니, 무엇이 무섭다는 걸까. 한심하게.
[열어보면 모두 별것도 아닐 거예요.]
“그래, 열어보면 별 것도 아닐 것이다-”
다정하게 그를 바라보는 새까만 눈동자를 떠올리며 셀리안은 그녀의 말을 그대로 읊었다. 그리고 무릎을 굽혔다.
호수에 물어볼 때조차 언제나 힐끗 시선을 주며 질문을 던질 뿐이었지만 그는 무릎을 굽히고 호수를 바라보았다.
호수, 푸르고 청명한 금빛이 도는 호수에는 셀리안 크레이누가 비춰지고 있었다. 금발, 붉은 눈- 광장의 에피룬 크레이누와 같은 얼굴.
정말 싫다고- 어릴 때부터 점점 그 동상과 같아지는 자신을 보며 생각했지만.
윤하영의 검은 눈에 거울처럼 비치는 자신의 얼굴은 제법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어떤 존재인 거지?”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용기도, 무서움도- 모두 처음 아는 감정이다. 사랑스러움도-
그런 윤하영이 너무 소중해서, 분명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여자들이 즐겨보는 사랑 이야기 속 남자들처럼 사랑하기에 무섭다는 바보같은 기우, 감정.
곧 호수가 일렁거린다. 황금빛으로 흩어지듯 일렁이는 호수를 셀리안 크레이누는 멍하니 바라본다.
일렁일렁거리던 호수는 곧 잠잠해진다.
“?”
호수에 비치는 건 없다. 그저 있는 건 자신의 얼굴뿐.
“...윤하영은, 어떤 존재지?”
다시 한 번 물었고, 또 한번 호수가 일렁거렸다. 황금빛으로 일렁거려 다시 잠잠해지고-
비치는 건 자신의 얼굴뿐이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한 끝에, 셀리안 크레이누는 간신히 그게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 작품 후기 ============================
적매화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ㅁ/ 즐거운 주말 되세요!
선추코 항상 감사 드립니다. 이 꼬인 소설의 완결을 달리면서ㅜㅜ 좌절(?)할 때마다 코멘과 추천을 보며 힘을 내고 있습니다! 이러저러 피곤해서 들쑥날쑥거리는 요즈음입니다만,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체셔빈 님 // (139) 셀리안은 알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냐 하면 오늘 보셨으면 알겠지만, 무섭다느니 중얼거리고 하영이 토닥거리니까 얼른 보러갔지요. ㅎㅎ 키오후 안티가 늘고 있습니다.ㄷㄷㄷ
(136) 성녀는 미쳤으니까요. 자책감과 기타 등등 복잡해진 감정으로 강박증 같은 것에 걸렸다고 해야 할까. 음식 먹을 때 칼로리를 신경쓰는 게 일상이 되다니.ㅜㅜ 행복한 식사에 왠 헬게이트인가 싶습니다.ㅜㅜ 체셔빈님이 쓰담쓰담해주셔서 3연참 해봤쪄요. 막 요러고.ㅎㅎ
옆집바나나 님 // 오늘은 쉬려고 했는데...ㅜㅜ 여러분의 말이 저를 올리게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름날그하늘 님 // 엘킨은 다시 등장합니다. 완결도 얼마 안 남았는데 얘를 언제까지 왕궁 밖에서 야영하게 할 수는 없지요.;;ㅎㅎ
lokok님 // 엘킨은 상남자지요. 저래뵈도 용병도 하고, 이러저러 험하게 굴렀으니까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