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1 Side story 10 =========================================================================
소년에게 방향을 준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 소년은 몰랐으니까.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에 대해.
*
“먹지 그래?”
남자는 소년에게 깨끗한 옷과 따뜻한 음식,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했다. ‘이용하기 위한’ 것이긴 했지만 어느새 자신과 닮은, 자신보다 마법에 재능이 있는 소년에게 마음이 갔던 게 사실이었다.
그는 최근 상당히 우울했으니까.
누구 못지 않게 진창을 구르며, 사람다운 마음도, 기쁨도, 슬픔도 버렸다. 본의 아니게 하루드의 정점에 오르게 되었지만, 그는 자신에게 집착이나 욕구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무욕은 본인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에서 온 것이었다. 그는 사실 누구보다 세계의 정점에 어울리는 남자였으니까, 그것은 자연스러운 마음이었다. 마법만 해도 마탑의 수장 안즈 밀레나를 실력이나 마나에 있어 월등히 앞서고 있었다. 희대의 마법사-라는 칭호도 아깝지 않았고, 어떻게 보면 그에게 대적할 상대가 없었기에- 그의 마음을 흔드는 게 없었다는 말이 더 가까울 것이었다.
그것이 최근에 무너졌던 것이다. 한 명의- 아니 이변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존재에 의해.
“왜, 안 먹어?”
먹지 않는 소년을 바라보며 남자는 재차 묻는다.
자신의 자신감이나 자부심을 무너뜨린 '그 이변'보다 5살 정도 어릴까.
인위적인 학대에 의해 감정을 잃은 소년- 하루드의 실험장에서 살아남은 흥미로운 아이.
“...”
“먹는 법 알려줬잖아?”
남자의 말에 소년은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루드의 실험장은 실험쥐들이 입으로 음식물을 섭취하게 하지 않으니까- 남자는 살아있는 게 용한, 아니 신기한, 기묘한 소년을 자신의 시선으로 이해하고 동정하고 있었다.
“자-”
남자가 수저로 음식을 떠 입으로 넣는 모습을 보였다. 여느때와 같다. 소년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관찰하다가 따라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먹는 행위가 아니라, 자세, 숨결, 떠먹는 양까지 똑같이 따라한다.
“그래- 잘 하네. 어떻게 할지 모르겠으면 그냥 나를 따라하면 돼.”
남자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소년의 기이하기까지한 모방도 그를 흡족하게 했다. 아무것도 의지할 게 없는, 텅 빈 아이를, 자신한테 충실한 심복으로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가 소년을 데려온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소년이 ‘기척을 지우는’ 실험장에서 성공한 실험체였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소년이 가진 마나의 양이었다.
그를 굴복시킨 '이변', 크레이누 왕조의 다시 찾아온 축복, 셀리안 크레이누 황태자- 그는 현재진행형으로 세계를 들쑤시며 하루드에 어깃장을 놓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정보원에 의해 잡히는 소식이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전부 황태자의 충동이었고 황태자에게는 단신으로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마나가 있었다.
고작 어린 남자 아이, 그런 아이에 의해 몇 번이고 그가 짠 술식과 마법들이 휴짓조각처럼 무력화되고 그가 세운 계획은 그 터무니없는 마법에 부딪쳐 스러졌다.
"느껴져? 지긋지긋하기도 하지."
"...?“
남자는 소년에게 제 팔을 내밀었다.
하루드의 수장이 아닌 하루드의 간부로 속여 셀리안 크레이누와 마주한 건 얼마 전의 일이다. 셀리안이 만들어낸 황금의 사슬에 묶였었던 손에는 여전히 황태자의 마나가 흉터처럼 남아 있다.
소년은 그 마나와 닮은 황금색 눈으로 손을 빤히 바라본다.
"세상을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신 위대한 규격외께서 친히 영향력을 행사한 증거지.“
남자는 큭큭 웃었다.
그 규격외의 정체를 알게 된 건 그 후였다. 막연하게 크레이누 왕조의 축복이라느니, 희대의 마법왕이라느니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루드의 실험장 중에서는 ‘안나’라는 이름의 여자가 운영하는 실험실이 있었다. 그녀는 원래 ‘죽은 자를 살리는 마법’을 실험한다는 명목하에 하루드에 들어왔던 자였지만, 지금은 이런 저런 다른 종류의 마법을 실험하고 있었다. 그 여자가 실험하는 마법 중에 마법의 해주도 있었다.
[이런- 감회가 새롭네요.]
[뭔 소리야?]
수장의 손을 본 여자는 평범한 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드물게 미소지었다.
[아뇨. 이제 선조의 숙원과는 상관없이 살려고 했는데... 설마 그 숙원이 이루어진 결과물의 편린을 보게 될 줄이야.]
여자는 피식 웃는다. 그 눈은 기묘한 향수를 품고 있었다.
여자의 이야기는 남자가 듣기에도 조금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고대왕 에피룬 크레이누를 사랑했던 여자, 그 여자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고대왕의 부활을 획책하며 살아온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 제 눈 앞의 ‘안나’라는 여자도 그런 이유로 하루드에 들어왔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 불량품이었나 봅니다. 이곳에서 실험을 하다보니 실험 자체가 재미있어졌으까요.]
[흐음- 그러고 보니, 너 죽은 자를 살린다느니 하면서 들어왔었지? 그건 이제 안 하나 보지?]
[그건 성공했답니다. 일반적으로 죽은 자를 부활시켜봤자 언데드나 실패작이겠지요. 애초에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마나를 공급할 소체가 별로 없어요.]
[모순되는데? 성공했다며?]
[애초에 단 하나를 위한 마법인걸요. 그 하나가 성공한 거니까요.]
여자는 황금의 마나로 연결된 남자의 손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 날, 남자는 제 손에 흉터를 남긴 황태자가 그 마법의 성공작- 즉 고대 마법왕의 환신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 어쨌든-"
"?"
"맛있냐?”
입맛 떨어지는 회상에 남자는 눈을 찌푸리며 다시 소년에게 집중했다. 소년은 여전히 남자와 같은 자세로 음식을 퍼먹고 있었다.
“맛...?”
소년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 반응에 남자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그 표정 알아. 맛있다, 맛없다가 잘 분간이 가지 않지?”
자신도 그랬으니까. 소년은 제법 자신을 닮았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갖은 학대 속에서도 그 재능으로 빛난다. 그리고, 분하지만 자신보다는 마법왕을 넘어설 가능성이 소년에게는 더 많았다.
“나도 맛있다는 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이건 꽤 오래 먹고 있으니까. 내 취향이라면 취향이겠지. 자, 모르겠으면 그냥 날 따라하면 돼.”
“모르겠으면...”
소년이 앵무새처럼 남자의 이야기를 읊었다. 남자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 후, 소년은 남자를 따라하며 빠르게 남자를 흡수해간다. 말하는 법, 웃는 법, 행동하는 법- 전부 남자를 따라하며 텅 빈 소년은 사람으로서 자신을 이루어간다. 그 모습을 남자는 제 아들을 키우는 마음으로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
“너, 이름이 뭐냐?”
“수장... 이 꼬마랑 지낸지 꽤 되신 걸로 아는데, 이제야 물어보는 겁니까.”
“이름 부를 일이 없었으니까.”
“그러시겠죠. 야, 너, 이봐 정도면 충분하셨을 테니까요.”
남자는 조금 쑥스러운 듯 수하를 외면했다. 그의 수하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제 주인이 저렇게 인간적인 표정을 짓는 건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에피룬 윈드아.”
“뭐?”
소년의 말에 남자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아, 재수없게. 너 이름 바꿔라.”
“수장-”
“...”
평상시라면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소년은 드물게 멀뚱히 남자를 볼 뿐이다.
“왜, 마음에 드는 이름이냐? 널 낳은 여자, 혹시 에피룬 크레이누의 신봉자였냐?”
남자가 삐딱하게 이야기한다. 제 아이를 버리는 여자 따위 정상적인 정신일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애 이름을 에피룬이라고 짓다니. 어진간히 에피룬의 신봉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기록에 의하면 이 아이를 주운 곳이 시모갈이라고 했다.
“그 이름은 이 세상에 훨~씬 잘 어울릴 남자가 있으니까. 셀리안 뭐시기라고.”
“수장-”
“아- 어쨌든 나는 얘한테 그 남자의 이름이 붙는 거 싫어. 바꿔. 바꾸기야.”
“셀리안...”
“있어, 있어. 죽은 놈의 심장을 이용해 살아난 좀비 주제에, 황태자로 여기저기 들쑤시는 놈이지.”
“...”
“그래, 알았어. 조용히 한다니까."
안나의 이야기를 아는 건 수장과 그의 수하인 여자뿐이었다. 그녀의 눈치에 수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소년의 이름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
"...?"
"네 이름은 류다. 류-”
“...수장, 그거 수장의 이름이잖아요.”
“얘는 내 후계자가 될 예정이니까.”
남자는 소년의 머리를 마구 헝크러뜨렸다. 심복으로 삼겠다는 마음은 어느새 후계자로 바뀌어 있었다. 여자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남자는 사실 꽤 호방한 성격에 야심가였으며 별개의 이야기지만 얼굴도 미남에 속했다. 하루드의 수장으로 키워지면서 본래의 성격은 음습하게 가려지고 그의 미소는 마음을 감추는 가면으로 작용했다. 어릴 때부터 그를 모셔왔던 그녀는 그것이 못내 안타까웠고, 눈앞의 소년을 만나 뒤부터 그의 얼굴에 ‘진실된 감정’이 스며드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
하지만-
“어때, 이름 마음에 들어?”
“...별로.”
“좋다는 이야기지?”
소년의 눈빛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그 눈은 공허해서 아무것도 담지 않았다. 마치 지금도- 잠시 고민한 것 뿐이지. 그의 어머니가 지어줬을 이름과 수장이 준 이름의 무게를 달아, 어느 것도 차이가 없어 수긍한 것 뿐 아닌가 하고- 그녀는 소년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
“아아, 재미없다.”
여자는 피웅덩이에서 뒹구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 주인이 서서히 정신과 마음이 깎여 결국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이렇게 죽어버렸다. 죽고 말았다. 쓰레기처럼.
“너-”
여자의 말에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선 남자가 생글 웃는다. 웃는 방법이 제 주인과 비슷하다. 아니 완전히 같다. 이름도 같다. 제 주인을 죽인 류라는 남자 뒤로 기분 나쁜 존재들이 있다. 검은 머리의 소년과 붉은 머리의 청년이다. 제 주인은 벌써부터 스스로의 오른팔을 데려왔다며 기특하게 여겼지만 여자는 그것들이 불길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유리알 같은 눈으로 자신들을 보고 있다.
“걱정마. 마법왕은 꼭 쳐부술 테니까.”
류는 웃으며 눈깜짝할 사이에 이동해, 공격을 가하려는 여자의 머리를 짓뭉개버렸다.
"나도 마법왕이 '싫으니까.'"
짓뭉개진 머리에서 튀어나와 뒹구는 여자의 눈에 공허한 황금색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반사되듯 새겨졌다.
소년의 마음은 텅 비어,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방향을 준 남자가 있다.
하지만, 그 방향을 준 남자조차 소년에게는 특별하지 않았던 것이다.
Side story 10
[에피룬, 미안해]
그녀는 아이를 그렇게 불렀다. 그게 아이의 이름이었다. 성녀를 찾아왔던 신관 남자는 에피룬 크레이누의 열렬한 신봉자였고, 아마 그녀에게도 자주 이 세계의 영웅으로서 그 이름을 읊어준 것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황금빛 눈을 가진 아이는 제 어미의 손가락이 자신의 목을 부러뜨리는 감각을 맛보고 있었다. 아이의 나이는 이제 7살이었다. 그에게 이건 별로 충격적인 일은 아니었다. 어미가 자신을 죽였다 살리는 걸 몇 번이고 반복한 걸 기억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언제부터인가 그랬고, 어느샌가 멈췄다. 몇 년째 멈췄기에 아이는 제 어미가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제 목을 파고드는 여자의 손에, 소년은 꽤 커진 자신이 어떻게 그녀를 통해 태어날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목이 꺾여간다. 저항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아무리 마나가 많아도 그에게 마나 운용법을 가르쳐주는 자가 없었다. 힘은 그저 7살배기의 것이었고, 그렇다고 소망실현을 하기에는 그의 소망이 너무 옅었다. 가끔 배가 고프다거나 하는 기본적인 소망은 실현되었지만, 그에게는 제 어미를 막을 강한 소망의식은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때 어미를 막는 것이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과 은색 눈- 사람의 형상을 한 남자가 어미의 손을 잡았다. 남자의 뒤에는 어쩐지 우울해보이는 눈을 한 청년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을 가진, 은색 눈보다 덩치가 커 보이는 남자였다.
[다, 당신 누구?]
[누구라고 말해도 말이야. 뭐 하는 거지?]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고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여자는 약간 주춤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자각이 없는, 미쳐버린 여자였다. 그렇지만 새로운 3자의 개입에 새삼스럽게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한순간 스몄던 건지도 모른다.
[우리 아이가 아파서...]
[아파?]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는 흘끔 공간을 바라본다. 충만한 동족의 마나와 그에게 사랑받는 듯한-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추레하게 망가진 여자가 하나. 그리고 가득찬 독기가 있었다.
[무슨 마법이지, 이건?]
[...에피룬을 탄생시켰던 마법이잖아.]
붉은 머리카락 남자의 말에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웅얼거린다.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 진은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 엔실렌을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한심하다는 것 같기도 하고, 동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키오스 궁에 있는 안나의 아이를 도와 헤르티아로부터 그 주술을 도운 게 엔실렌이었다. 이중삼중으로 보호되는 신전에서 에피룬의 심장을 꺼내와 헤르티아에게 쥐어주었다. 그렇기에 알고 있는 거겠지, 이런 더러운 흑마법을.
게다가 오늘은- 에피룬, 아니 셀리안 크레이누의 12번째 생일이 있고 일주일되는 날이었다. 엔실렌은 그에게 거절당하고 주욱 우울해 있었다. 그 모습이 짜증 나 간만에 잠들어 있는 동료를 만나러 온 것이다.
하얀 용이 인간 여자를 애지중지 하고 있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설마 이런 광경이 펼쳐질 줄은 몰랐다.
[에피, 룬을 탄생시키다니?]
그때 여자가 멍하니 엔실렌의 말을 따라 읊었다.
[아? 설마 너 몰랐냐?]
[어이, 잠깐. 렌-]
[이 마법은, 고대의 위대한 왕- 에피룬 크레이누를 탄생시키기 위해 고안한 마법이야. 그것도 모르고 사용한 거냐?]
엔실렌의 말에 여자의 눈이 떨렸다.
[아니지, 애 이름이 에피룬이었잖아. 알고 한 거 아니야? 에피룬을 탄생시키려고 한 거 아니냐고.]
어미의 손에 의해 시뻘겋게 부어오른 목을 만지작 거리던 소년은 멍하니 그녀의 눈빛이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보던 절박한 눈빛이 바뀌고 있다.
그 미세한 변화를, 정작 말한 엔실렌도 말렸던 진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부터, 성녀는 다시는 소년을 죽이지도 살리지도 않았다. 소년을 너무 사랑했던 성녀는, 자신이 탄생시킨 게 제 자식인 소년이 아니라 생각해버린 것이다.
- 실수했다. 죽은 아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죄를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아이를 굉장히 닮은 ‘에피룬’이라는 소년을 용납할 수 없어- 소년이 8살 무렵에는 직접 남편을 찾으러 밖으로 나와 그를 두고 떠나버린 것이다.
사실은 소년은 줄곧 여자의 아이였는데.
소년과 용들의 첫만남은 일단 거기서 끝이었다. 그들은 에피룬이 아닌, 그저 마나가 많아보이는 결여된 소년 따위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두 번째 만남은 하루드에서였다. 안나의 아이들은 하루드 내부에도 있었는데 그녀를 제거하고자 찾아온 진과 그를 쫓아온 렌을 만났다. 이번에는 에피룬이라는 이름도 아니었다. ‘류’라는 이름을 달고 하루드의 수장의 오른팔로서 그들을 만났다.
류를 다시 만난 진과 렌은 그의 이야기를 하얀 용에게서 들은 터라, 제법 그에게 동정을 품었다. 인간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소중히 여기는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부정당했다는데서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것을, 류라는 남자는 깨끗하게 부쉈다.
아무리 강해도 에피룬에는 못 미쳤던 류와 대단한 용들의 싸움은 그야말로 개싸움에 가까웠다. 얼마나 싸웠을까. 싸우다가 용들이 일방적으로 말을 걸고, 류는 대답하고 또 싸우고. 그렇게 몇날며칠을 싸우면서, 이 기묘하게 감각이 비틀어진 소년에게서 용들은 계속해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감정’을 물어왔고 류는 자신에게서 동질감만을 찾으려는 용들을 지긋지긋하게 여겼다.
[아, 진짜- 모르겠다니까!!]
[왜 몰라!! 너도 알 텐데!!]
[성가시게!! 진짜 지겹네- 에피룬, 에피룬- 대체 왜들 그러는지.]
류는 마나로 엔실렌의 날개를 잡아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하지만!! 계속 같이 있어주겠다고 했으면서 인간들을 택했다고! 그리고 다시 태어나고는 우리를 잊고!! 원망...하고.]
[...]
[어휴, 시끄러운 놈도 조용한 놈도 구질구질하게.]
류는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모습을 렌은 멍하니 바라보았었다. 희박하게나마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이야기할수록 더 했다. 아이는 안나의 희생자, 게다가 뭣도 모르고 한 이야기에 제 어미에게까지 부정당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네. 그렇게 질리지 않고 오래 생각할 수 있다니.]
하지만 소년은 오히려 진이나 렌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동시에 꽤 신기한 것처럼 시선을 준다. 결여한 게 많은 소년은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있었다. 누구보다 강하게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무엇도 스며들지 않지만, 스며들지 않는 만큼 오는 것에는 지독하게 관대한 면이 있었다.
부정하지 않는다. 긍정하지도 않는다. 원망하지도 않고 갈구하지도 않고 그저-
[그럼... 네가 내 주인이 되어줄래?]
[엥?! 진!!]
긴 싸움 끝에, 스스로도 설명하기 힘든 충동으로 그 이야기를 할지 말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진이 입을 열었다. 마나도 꽤 대단해서 그런 점도 일단은 좋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타입은 다르지만 어떻게 보면 시원시원하게도 느껴지는 남자에게 의지하고 싶어진다고- 순간적인 감정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진이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다.
사실 진도 지쳐있었다. 안나의 아이들을 죽이고 돌아다니며, 에피룬의 환생에게 꺼려지고 있다. 만나고 싶었을 뿐인데- 우리도, 안나도. 왜 이게 잘못된 걸까 하고.
[...]
붉은 용의 제안에 싸우는 내내 날카롭게 빛나던 황금빛 눈이 가늘어지고 남자가 맥이 빠진 듯 손을 내린다.
거절당한다- 또 거절 당할 거야.
렌은 약간 조마조마하게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남자는 뭔가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
[엥? 좋다고?!]
[이 싸움도 슬슬 질리고. 에피룬 크레이누가 버린 걸 내가 줍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
변덕이다. 이상한 변덕이라고 렌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 그럼 나도!]
[엉?]
[서, 설마 진만? 너, 너 모르는 거 많잖아. 내가 알려줄게! 그, 그래. 인간 수컷은 인간 암컷을 유혹하는 법을 궁금해하잖아. 내가 가르쳐줄게, 나 많이 알거든.]
[...]
[니가 싸우는데 질리면 내가 대신 싸워도 주고. 나 인간 죽이는 거 완전 좋아해.]
진의 눈이 자신을 한심하다는 것처럼 보는 게 느껴진다.
한참 설득하면, 결국 해가 질무렵 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변덕이든 뭐든 순간 용들은 그를 선택했고 그에게 선택받은 것이다.
“어휴, 완전 늦었어. 너희.”
류는 셀리안이 친히 만든, 흰 공간을 찢고 들어온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의 소년을 향해 투덜거렸다.
“진이 땅 파고 있잖아. 달래는데 시간이 걸렸어.”
“땅 파도 나 없는데? 여긴 지하지만 땅 속에 있진 않아.”
“아니아니, 이건 비유야.”
검은 머리의 소년 옆에는 붉은 머리카락의 청년이 우울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래서, 히아신스 에이나는 죽였어? 그 틈을 타 소동을 일으킨다며.”
“아니, 것도 실패한 것 같아. 진이 은근 허당이잖아.”
렌이 난감하다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류는 상관없이 다음 화제로 넘어간다.
“하루드 녀석들은?”
“후후, 이 몸이 회복하기 전에 죄다 정신에 사슬을 걸어놨지. 쟤들은 이제 그냥 내 인형이야. 이 끔찍한 키오스를 부술 인형들이지.”
이번에 렌은 웃었다.
에피룬을 붙잡은 키오스- 줄곧 부수고 싶었다. 에피룬이 선택한 키오스를 줄곧 부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자, 그럼 하영을 데리러 가볼까.”
“일단, 셀리안 크레이누부터 부술래.”
“엉?”
류는 얼굴을 찌푸린 뒤 제 얼굴을 벅벅 긁으며 대답했고 렌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류는 에피룬 크레이누도, 셀리안 크레이누도 싫어하긴 했다. 다만 그 ‘싫어함’은 만들어진 적의였다. 그 감정은, 굳이 이야기하자면 자신을 키워준 남자를 따라한 감정이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를 불행에 빠뜨린 건 에피룬이었고, 그 주변 사람들은 어머니, 하루드의 수장까지도 류에게 그에 대한 미움을 심어줄만 했다. 다만, 류에게는 그 감정이 커지기가 어려웠다. 류가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도 셀리안 크레이누의 마나가 워낙 규격외라 자꾸만 그에게 그의 존재를 상기시키곤 했어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셀리안 크레이누’ 자체가 류에게는 잡음이었지만 잡음이라는 것은 사실 그 정도의 ‘싫어함’이란 반증이었다.
그랬기에 싫다, 싫다 하면서도 직접적인 행동을 취하진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가, 셀리안이 에피룬임을 폭로하게 한 것도, 지금 셀리안 크레이누를 일단 부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렌에게는 의외의 연속이었다.
“그...왜?”
“왜라니? 싫으니까.”
류가 피식 웃으며 어이없다는 것처럼 반문했다.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
“어? 혹시 고문이라도?!”
“설마, 마법왕 자식, 나를 어찌나 애지중지하던지.”
류는 킥킥 웃으며 심장을 찌르는 듯한 ‘윤하영의 아픔’을 공유하며 입을 휘었다.
“이건 ‘그 아이’의 아픔이야.”
“...하영의? 어디 아파?”
금시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렌을 보며 류는 빙긋 웃는다.
“응, 아프지. 셀리안 크레이누 때문에 언제나 아프지. 덕분에 나는 매일매일이 황홀하고 정말 화가 나.”
류를 뒤흔드는 건 셀리안 크레이누가 아니다. 그가 셀리안 크레이누를 정말로, 진심으로 싫어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한 건 윤하영 때문이었다. 윤하영을 쫓아 성에 들어와 실제 셀리안 크레이누를 보고 그에게 흔들리는 윤하영을 보며- 뜬구름 잡는 듯 불쾌하기만 했던 셀리안 크레이누에 대한 감정이 점점 형태를 갖기 시작했다.
“마법왕을 때려눕히고, 그 때문에 우는 하영을 볼 거야.”
“...”
“그건, 아마 엄청나게 고통스럽고 황홀하겠지.”
류는 기지개를 켜며 킥킥 웃었다.
이 감정이, 감각을 공유했기 때문에 생긴 건지, 아니면 그 전부터 있던 것이 감각을 공유하며 보충된 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저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된다.
“자, 가자고. 전쟁이야, 전쟁!”
히죽 웃으며 류는 이야기했고 멍하니 그를 보던 렌이 고개를 끄덕인다. 진은 우울해보이긴 했지만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
밖이 소란스럽다. 그건 순간적이었다. 곳곳에 숨어 있던 하루드들이 일제히, 어떤 목표없이 파괴활동을 시작했다. 목표로 하는 건, 그저 키오스 내 모든 인간들의 말살인 것처럼 파괴활동을 행하고 대부분이 왕궁으로 쳐들어온 건 한 순간이었다.
어떤 계획도 없었던 만큼 미리 예상할 것도 없었다. 마치 갑작스레 누군가가 내린 지령에 따르는 인형들처럼 돌변했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을 죽이고, 파괴하고, 키오스로 넘어온다.
그런 소란 속에서 ‘안나’는 눈을 떴다. 히아신스 에이나의 방이었다. 창으로는 흔들흔들 바람이 불어오고,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불쌍하게도.”
그녀의 눈가를 어루만지는 손이 있다. 차가운 손이다.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남자와 안나 사이에만 고요함이 흐르고 있다. 그런 정적 속에 있었다.
“...키오후.”
안나는 눈을 깜빡였다. 초록색 머리카락과 호박색 눈동자. 남자의 외모는 그 옛날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그의 뒤로는 인형같이 서 있는 비슷한 외견의 여자가 있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다만 그와 닮은 호박색 눈은 텅 빈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걱정마십시오. 저는 예전부터, 변함없이 당신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 자신을 기다려주기로 한 에피룬은 안나를 잊었다. 아니 그녀가 잘못한 걸까. 그저 만나고 싶었을 뿐인데.
그와 같은 얼굴을 한 남자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으며, 그와 같은 눈빛을 가진 여자는 자신이 아닌 히아신스 에이나를 찾았다.
그리고, 진이 그녀를 죽이려 했다.
다시 눈을 뜬 세상 어느 누구도 그녀를 원하지 않았다. 옛날과 같았다. 에피룬을 만나기 전 이 세상 누구도 그녀를 원하지 않았다. 그때와, 같았다.
부모님도, 세상도 안나를 원하지 않는다. 같은 영혼인데도 히아신스 에이나는 누구에게나 사랑 받고 있었는데.
“키오후...가 나빠.”
안나는 어린애처럼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히아신스 에이나로 사는 게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뱀의 남자는 안쓰러운 시선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예전의 안나라면 이런 이야기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에피룬 외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았다. 조언을 구했을 뿐 키오후에게 단한 번도 감정적으로 완전히 의지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그녀의 감정을 깍아내리고 괴롭힌 건 단 한 사람뿐이다. 이 세상 단 한 사람뿐.
“걱정마세요.”
“...”
“나는 당신의 사랑을 이루어주기 위해 있는 겁니다.”
키오후는 고장난 것처럼 울고 있는 사랑스러운 인간 여자를 바라본다. 안아주고 위로하고 싶다. 자신이 하고 싶다.
'안 되지.'
그런 건 그녀는 원하지 않을 테니까. 자신도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아니니까.
그녀의 사랑을 이루어줄 것이다.
안나는 안나로서, 에피룬 크레이누의 환신 셀리안 크레이누와 사랑을 종결짓는다. 그 종결을 끝으로 셀리안 크레이누는- 에피룬의 영혼은 그걸로 끝이 날 것이다. 마지막 영혼인 윤하영은 죽을 거고, 셀리안 크레이누가 이 세계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안나에게 영원히 에피룬 크레이누를 안겨줄 것이다.
*
“키오스를 파괴해라!! 키오스를!!”
강한 증오를 갖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 들으면 공허한 외침 같이도 느껴졌다. 한무리의 사내들은 눈에 핏발이 선 채 외쳤다. 왕궁의 하녀는 주변에 쌓인 다른 하녀들의 시체를 보며 몸을 떨었다. 자신이 마지막이었다.
“히이익!!”
여자는 비명을 지른다. 왜 이런 지옥이 펼쳐졌는지 알 수 없다. 에피룬 크레이누님이, 이 키오스에는 환신하셨는데. 영원한 평화가 약속되었는데!
여자는 눈을 감았다. 왕궁으로 쳐들어와 악귀같은 표정으로 자신에게 육박하는 남자- 죽는다- 죽는다고, 느낀다.
“흐하하-하?!”
그러나 무너진 건 남자의 몸이었다. 여자가 조심스럽게 눈을 뜨면 무너지는 남자의 몸 뒤로 누군가 서 있었다.
아름다운 남자였다. 푸른 머리카락과 청명한 푸른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신성하고 깨끗한 무언가- 동시에 당장 죽을 것 같이 창백해보이는 느낌을 주었다.
“에...엘킨 다이브 님.”
누구인지 알고 있다. 폐하의 특명으로 지온에 가있다는 엘킨 다이브님이었다. 그 분이 이 성에 있다니, 든든하긴 하지만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엘킨의 시선이 복도를 향해 있었다. 여자의 시선도 복도를 향했다.
복도를 뛰고 있는 건 에이나님이었다. 최근 몸이 안 좋다고 하는 폐하의 약혼녀였고, 그녀를 이끄는 건 녹색 머리카락을 가진 장신의 이종족 남자였다. 어느 종족인지는 모르지만, 인간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에? 엘킨 님?!”
불러세웠지만, 엘킨은 조심스럽게 그들을 쫓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Hyun●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ㅁ/ 마침 바람도 불겠다, 낙엽춤으로 보답합니다.ㅎㅎ
네이버에서 우연히 검색질로 이 소설의 팬아트를 보았습니다.ㅜㅜ 역시 검색은 소중합니다. 정말 기뻤어요!
스즈카 님 // 히아가 하영이에게 지나치게 좋은 첫인상을 받은 건 에피룬의 영혼에 끌린 거겠지만 그 후에는 역시 하기 나름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ㅎㅎ 그리고, 히아가 에피룬과 별개로 셀리안을 어떻게 생각했을까는...ㅎㅎ 생각하시고 싶은 대로 생각해주심 됩니다./ㅁ/
체셔빈 님 // 저에 대한 사랑을 불태워주십시오! 저도 체셔빈님을 향한 사랑으로 오늘도 한땀한땀 루나 패러독스를... 이번 편엔 셀리안이 안 나왔네oㅅo...(퍽퍽) 셀리안 시점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ㅋㅋ 하영이 한 마디에 바로 달려갔는데 별 일이었음. 그렇게 셀리안은 하영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고 호감도가 올랐다(읭?)
lokoko 님 // 가, 감사합니다. ㅜㅅㅜ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너무 행복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여름날그하늘 님 // 해피엔딩, 해피엔딩!! ... 해피엔딩?!;; 노, 노력합니다! 저는 말 하는 건 지키는 나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