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2 132 =========================================================================
언제부터?
언제부터 안 거지?
언제부터, 어떻게- 어떻게-
숨도 쉴 수가 없다. 나는 셀리안 크레이누의 품에 안겨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떨고 있던 그의 손은 더 이상 떨지 않게 되고, 나만이 그의 품안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떨리는 몸이 멈추지 않는다.
한 마디의 말도 하지 못했고, 셀리안 크레이누의 붉은 눈에 담긴 윤하영은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담은 셀리안의 눈동자에 들어찬 체념이 된 절망과 다정하게 스며든 사랑스러움을 본다. 나를 사랑하게 된 건 그에게 절망이고 기쁨이라고, 깨닫는다.
엘킨에 대한 사랑은 그에게 기쁨이었고, 그가 떠난 건 그에게 짙은 절망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윤하영은 다르다. 나는 곁에 머물러도 떠나도 그에게는 절망이었다.
“아-”
입이 열린다. 셀리안의 눈이 커진다. 나는 눈이 흐릿해짐을 느꼈다.
“아아아아!!!”
벌어진 입에서 쏟아진 건 비명이다. 가느다랗게 신음한 나는 그것을 시발점으로 미친듯이 비명을 지르고, 셀리안을 밀어내고 달리기 시작했다.
*
나는 도망치고 있다. 셀리안으로부터 벗어나 미친듯이 복도를 달려 도망치고 있었다. 다 부질없는데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의아한 얼굴이 보였지만 무시한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뛴다. 아니 터져버리면 좋겠다. 사라지면 좋겠다.
셀리안의 얼굴이 머리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붉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윤하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들어찬 사랑스러움과 절망이 나를 좌절시켰고, 동시에 그 사랑스러움도 절망도 모두 받아들이고 나를 여전히 사랑스럽다고 하는 그가 나를 비참하게 했다.
윤하영은 히아신스를 버리고 셀리안은 히아신스를 살린다. 윤하영은 전생에 얽매여 제 사랑도 지키지 못해 엘킨을 버렸건만 셀리안은 전생에 얽매인 채 윤하영을 계속 사랑하는 걸 택했다.
끔찍했다. 윤하영이라는 존재가 너무 보잘것 없고, 나 자신이 끔찍해 나는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도망쳐, 내 방- 들어와 문을 걸어잠근다.
- 내 방?
“헉헉-”
숨을 몰아쉰다.
창문으로는 아름다운 장미정원이 있었다. 장미야 원래 세계에도 있고, 비슷한 정원이야 찾아보면 있겠지만 저런 식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정원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었다. 꿈 같이 아름다운 정원이다.
창문에서 시선을 떼며 문을 꾹 붙잡으면 옆에 거울이 있었다. 침대 바로 앞에 마련된 커다란 거울. 세르미아 영애로서 몸가짐을 연습하게 하기 위해 부러 달아준 커다란 거울이다.
- 세르미아 영애라고
나는 머뭇거리며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 어린 얼굴을 한 여자는 지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하고 하찮고 약해보인다고 생각했다.
"...싶어."
그 말은 무심코 흘러나왔다.
언제부터인가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던 말, 생각도 하지 않게 된 말이다. 히아신스를 구하고, 셀리안의 곁에 있겠다고 한 순간부터. 엘킨과 함께 있기로 했을 때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말이기도 했다.
"돌아가고 싶어-"
순간 거울에 금이 갔다. 손도 대지 않았던 거울에 금이 간다. 쩌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금이 간 거울에는 윤하영이 여러 갈래로 반사되듯 비치고 그 뒤로 히아신스의 가위가 서있는 걸 알았다. 아니 가위가 아니다. 내가 버린 히아신스가 나를 꼭 껴안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거울에는 반사되지 않았고 그저 나를 위로하듯 껴안았다.
그 온기만이 느껴지고 있다.
하지만, 그조차 끔찍했다.
지금이라면 알겠다. 히아신스의 자아가 들러붙은 나와 연결된 황금의 마나- 이게 나를 이 세상에 붙잡고 있는 거다. 윤하영을 이 세계에 불러들인 건 윤하영이다. 그러니까 윤하영이 원한다면 반드시-
“돌아가고 싶어!!”
나는 말한다. 말할 수록 윤하영을 반사시키고 있는 거울에 쩌적쩌적 금이 가고 있었다.
"나는-"
한 번 더-
사실 사라지고 싶다. 윤하영을 끝내고 싶다. 이 영혼을 끝내고 싶다.
사라지고 싶다고- 사라지고 싶다고 마음 깊이 생각하며 돌아가고 싶다고 외쳤다.
거울에 완전히 금이 가고, 히아신스의 손이 느슨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녀를 구성하는 마나가 흩어지는 것처럼,
“돌아가고-”
“그러지 말아다오.”
다시 입을 벌리면, 더 큰 황금빛 마나가 뒤에서부터 눈이 부시게 퍼져나가고 그가 히아신스의 가위와 나를 전부 끌어안았다. 어느새 히아신스의 가위가 주던 중량감은 사라지고 나는 거울에 비치는 셀리안 크레이누를 바라보았다. 눈부신 황금의 마나, 그 마나와 같은 황금의 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남자가 다급한 얼굴로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의 절망을 품고 있는 눈동자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강함을 품고 붉게 반짝이고 있다.
윤하영은 전생에도, 지금도 한 번도 품지 못한 강함이었다.
“싫어!”
나는 남자에게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리며 거울로부터 시선을 피했다. '윤하영이 모르는' 셀리안 크레이누 따위 보고 싶지 않다, 꿈 속에서 몇 번이나 보았던 연약한 남자와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윤하영 따위 보고 싶지 않다. 이제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다.
다시 한 번 소리친다.
“나는 돌아가고 싶으니까!!”
“!!”
거울은 이제 완전히 금이 가고 있었다. 쩌적쩌적- 가루처럼 부서질 듯 위태롭게 금이 간다.
“돌아갈 거야!! 돌아갈 거야!!”
“짐이 그렇게 내버려둘 줄 아느냐!!”
“그래봤자야!! 나도 너니까!”
네가 세상을 바꿀 소망을 품을 수 있다면 나도 마찬가지라고- 너따위에게서 도망쳐주겠다고 나는 악을 쓴다.
어차피 이제 끝이다. 그가 아무리 강해도 내 소망이 먼저였다. 그의 황금빛 속에서 그와 닮았지만, 그보다 훨씬 약하고 희미한 황금빛이 반딧불처럼 깜빡인다. 이제 나는 정말로 도망칠 거니까.
“나인 주제에!! 혼자 뭘 받아들인거야?! 알아봤자 나보다도 나중에 안 주제에!!”
"..."
"나는 태어날 때부터 너를 봤어! 너는 계속 너였잖아. 에피룬의 기억 따위 하나도 없이, 그저 셀리안 크레이누였잖아. 나는 달라. 나는 윤하영이었던 적이 없어!"
나는 고민했다. 고민하고 연민하고 나를 잃고 그래도 그래도 셀리안 크레이누가 걸리고 이 세상이 마음에 걸려 도망쳐야 하는 걸 도망치지도 못했다.
결국 내가 오고 나서 상황은 최악이 되었다. 모든 건 내가 아는 전생과 똑같이 흘러갔지만 더 나빠진 것 같았다. 엘킨이 셀리안을 떠나려 하고, 히아신스는 안나가 되었다. 그런 운명을 그대로.
아니 그런 운명이라면 오히려 최악이 된 건 나뿐이다.
실제적으로 안나든 히아신스든 그녀는 죽지 않았고, 엘킨 역시 그의 주변 누구도 희생당하지 않았다.
불행해지고 비참해진 건 나뿐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건 벌인가?'
전생에 지은 죄를 받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이제 충분하지 않은가.
돌아가도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돌아갈 거야!”
돌아가서 다 잊고 싶다.
그런 소망을 간절히 품었다.
“나는 이제 여기에 있고 싶지 않-”
“그렇게는 안돼-”
“네게 무슨 자격이 있는데? 애초에 너만 없었으면 나는-”
*
커다란 소리를 내는 거울이 쩌적거리는 걸 멈췄다. 하지만 이미 금이 간 것은 수복되지 않아 부서져 투둑투둑 떨어지는 소리만이 방안을 가득채운다.
하지만, 그건 더 이상 무언가의 예고는 아니었다. 방안의 황금빛은 완전히 사라지고, 정적만이 방안을 감싸고 있었다.
그저 물리적인 힘에 의해 깨진 거울이 부서지는 것뿐이다.
저항하던 내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구속구처럼 하나하나 얽어맨 채, 그와 나의 거리가 없어졌다. 서로의 모습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리는 가까워져 셀리안의 숨결이 내 안으로 파고들고 있다. 나는 숨을 멈춘 채 그의 눈동자를 보고 있었다.
체온은 따스하게 얽어와, 그보다 차가운 체온의 나조차 미지근하게 물들였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입을 마주한 채, 숨을 멈추고, 그저 움직이는 건 눈뿐인 것처럼.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어떡하면 좋아.
정말 어떡하면 좋을까.
전생과 그저 똑같은 일이 일어난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 좋아진 걸지도 모르지.
다만, 이제 내막을 모두 안다. 알지 못했던, 알지 않는 게 더 좋은 것들까지도, 나도 셀리안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있었다. 이 세계에 내가 있다. 먼 과거 셀리안 크레이누였던 나와, 그 셀리안과는 너무도 달라진, 그 자체인 그가. 그런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내가 자신이었다는 것까지도 상관없다고 이야기했다. 끝없이 끝없이 내가 사랑스럽다고 이야기한다.
지금의 키스가 그랬다.
윤하영을 놓치기 싫다고.
언젠가 셀리안이었던 나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남자가 고백하고 있었다.
먼 옛날 그때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그로부터 도망치기까지 손도 대지 못했다. 그런 그가 사랑하는 이에게 닿고 있었다. 내가 도망쳐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규칙성으로 엮어 설명하는 것도 지친다.
맞춰보면 규칙이 있었지만 사실 감정에도 행동에도 규칙 따윈 없는 것이다.
셀리안의 입이 살짝 떨어졌다.
"너는 아무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어."
"그럴 수는-흐- 하아-흡-”
숨을 멈추고 있던 만큼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그를 거부하려고 하면, 다시 셀리안이 입을 부딪쳐왔다. 방금 전보다 더 깊게 그가 내게로 파고 들어오고, 흐르던 눈물이 나와 그의 입술 사이로 스며들었다. 눈물은 생각보다 짜지 않았고 그저 밋밋하게 입가를 적신다.
충분히 가까워졌는데도 셀리안이 좀더 몸을 기대온다. 마치 하나가 될 것처럼 하지만 가까워지는데는 한계가 있고 나는 비틀거리며 거울 쪽으로 기울어지려 했다. 셀린안의 몸이 그것을 막듯 나를 지지해 안고 내 뒤로 미적지근한 바람이 지지대처럼 자리했다. 덕분에 우리는 좀더 가까워졌다. 하지만, 결국은 다른 사람이어서 가까워지는 게 한계였다.
그래, 다른 사람이다. 아무리 붙어 있어도 그랬다. 양손은 여전히 그에게 꽉 맞물려 마주 잡혀 있었고 그를 밀어 떨어뜨리려 했던 거리는 방금보다 더 확 좁혀졌지만 그래도.
‘이상한 일이구나.’
눈물은 멈추지 않는데 심장은 조용히 박동한다. 셀리안의 심장도 그랬다. 그의 눈동자는 흐릿하게 슬픔과 열기를 담고 있었다. 그게 또 아파서 나는 입을 벌려 그의 이름을 읊었다.
입을 마주한 채로 셀리안은 조금 웃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거리가 벌어지면, 그가 장난스럽게 나른하게 웃고 있었다. 웃었지만, 그도 나도 당혹해하고 있는 걸 안다. 멀어진 거리로 우리는 서로의 눈 속에 있는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도.
한참의 침묵 끝에 셀리안이 좀더 내 손을 꽉 잡았다.
“...이상한 일이구나.”
이상한 일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