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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를 운운하는 키오후의 눈동자는 적의를 가득 담고 있었다. 그의 말에 의지한다면 그것은 안나를 혼자 내버려둔 에피룬을 향한 것이었지만, 내게로 향하는 시선이 기묘하게 집요하다.
그 적의가 내 안의 누군가, 안나의 이야기에 마음 아파하는, 아마도 에피룬 크레이누를 향한 거라고 짐작 했지만, 조금 다른 느낌이다.
'기분 탓일까.'
셀리안이나 에피룬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숨기고 있긴 해도 불쾌함을 내포해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에 대한 경외를 담고 있었다. 설사 자신도 모르게 품고 있는 경외에 프라이드가 깎인다 해도, 그가 인외종족이기에 기본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그런 경외감.
반면, 나를 보는 그의 시선은...
“누구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거냐.”
진의 눈이 날카롭게 키오후를 보았다. 키오후는 코웃음 친다.
“아주, 에피룬과 관련된 거면 어떤 거라도 좋아죽겠나 봅니다. 그런 찌꺼기 따위까지... 당신들은-”
"말 조심해."
“하-그런 것 치고는... 셀리안 크레이누를 당신들의 주인과 이공간에 가둔- 거군요?”
“그 녀석이 원하니까."
진의 시선이 빛의 기둥이 솟아올랐던 곳을 향했다가 다시 키오후에게로 돌아온다.
“그건 또- 에피룬 에피룬 하는 것치고는 지조가 없군요. 뭐, 덕분에 방해자가 없어 좋지만요. ‘그녀’를 감싸는 셀리안 크레이누를 또 보다니, 역겨워 견딜 수가 없어요.”
무감하게 내려앉았지만 분명한 적의를 품고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자, 그 눈은 하찮다는 감정을 품었고, 그 때문에 더욱 불쾌감을 갖고 찌푸려졌다. 키오후는 윤하영에게 가장 큰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내 존재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고 있다.
셀리안이나 에피룬보다 더 깊게, 아니 더 얕게- 매우 간단하게 윤하영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다.
'기분 탓이 아니구나.'
그의 적의도, 감정도 명확하게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려다보는 시선이었다.
“방금 이야기로 돌아오죠. 제발, 막지 말아주십시오.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당신’- 에피룬 크레이누- 그 하찮은 껍데기 안에서 잘 듣고 있을지나 의심스럽지만 어쩔 수 없지요."
물을 처벅처벅 밟으며 거리를 휙 좁혀온다. 흥분에 차 거침없이 내 바로 앞에 선다. 엄밀히 말하면 진 바로 앞이다. 다만 나를 보는 호박색 눈동자가 좀더 가까워진 건 확실했다.
"‘안나를 위해’ 그녀를 취하지 않고 그 생애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면서 나라를 위해 죽은 ‘당신’-”
그는 지긋지긋하다는 것처럼 왕궁을 둘러 보았다.
“이런- 한 줌도 안 되는 인간들의 문명을 위해, 이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제 몸을 키오스에 바친 거죠."
몇 백년 간 계속된, 크레이누 왕조에 의해 지탱되고, 에피룬 크레이누의 성물에 의해 지켜진 나라- 그 나라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던 늙은 뱀은 조소하는 것이다.
"아? 혹시 당신들이 새로운 주인과 그를 가둔 건 그런 의미도 있는 건가요?"
"늙더니 과대망상이 심해진 것 같군."
"아뇨, 과대망상이 아닌 것 같은데요? 셀리안 크레이누의 관심은 지금 저 찌꺼기를 향하고 있긴 하지만 그 다음은 이 빌어먹을 나라 같으니까요. 당신들도, 당신의 주인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겠지요. 그 반발일까요?"
"..."
"뭐, 위대한 용의 마음 따위 저는 알 수도 없지만- 뭐- 아무래도, 좋아요. 좋습니다. 그저, 나라를 선택한 주제에 안나에게 약속도 했지요. 만나러 가겠다고 했나, 기다리겠다고 했나. 안나는 그 약속에 의지해 지금까지, 이종족조차 정신이 아득해질 시간을 인간이 버텨온겁니다.”
말은 여전히 에피룬을 욕하고 있었다. ‘안나’를 떠나고 ‘안나’를 타락시킨 게 그라고 소리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내게로 손을 뻗었다. 뻗었지만 닿을 수 없다.
“!”
진이 가로막지는 않았다. 그는 보란듯이 그의 손이 내게 닿도록 내버려두고 나를 감싼 황금의 빛은 그를 튕겨내도록 했다.
“뭘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너는 하영에게 손도 댈 수 없어.”
렌도 닿을 수 없던 것을 그가 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
그는 진의 말에 튕겨내진 제 손을 바라보며 웃었다. 기가 막힌 것처럼 입가를 끌어올리더니 나를 본다. 마치 더러운 무언가를 보는 듯한 눈이었다.
그런 키오후를 보는 진의 눈이 짙은 혐오를 담았다.
"여전하군. 저보다 약한 것을 깔보는 성미는... 그러니까, 안나는 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
"..."
"나도 네 과대망상에 편승해주도록 하지. 너는 에피룬이나 셀리안 크레이누는 그런 눈으로 볼 수 없어. 본다 해도 한계가 있지. 에피룬의 마나가 거의 남지 않은 하영에게만 그런 눈을 향하는 거야. 비겁하게."
진은 몸을 돌려 나를 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에피룬 크레이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담고 있던 애정과 윤하영을 향하는 듯한 애정이 이리저리 뒤섞여 상냥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
"크, 크하하하."
키오후는 미친듯이 홍소하기 시작했다. 미친듯이 광소한다. 배를 쥐고 웃는다. 내 앞에서 남자는 허리를 꺾어대며 키득키득 웃는다. 그 호박색 눈동자의 적의가 짙어진다.
“대단하군요! 우와, 역시 대단합니다. 모든 이에게 사랑 받았던 에피룬의 찌꺼기는 붉은 용에게도 사랑받고 있는 거군요. 대단해요, 대단해. 저도 그 매력을 좀 알고 싶은데-"
키오후의 눈동자에는 천박한 적의가 섞여든다. 그는 뱀같은 눈동자로 나를 오래도록 보더니 에드나를 흘끔거린 뒤 눈꼬리를 내리며 웃음을 멈췄다.
"유감스럽게도 시간이 없네요. 저도- 이 나라도."
100년만 젊었어도...라는 말을 섞으며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셀리안 크레이누도 대단하군요. 당신의 주인과 싸우면서도 왕궁에 이리저리 간섭하고 있긴 하군요. 미약하긴 해도, 점점 간섭이 강해지고 있어요. 당신들이 망가뜨려놓은 인간들을 제어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마나를 쓰고 있군요.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나라에 얽매이는 건 아주 똑같군요. 참, 그마저도 벅찰 텐데 저 찌꺼기한테까지 꾸준히 마나를 넣어주고 있어요. 어찌나 대단한 사랑인지-”
사랑-
주먹을 쥐었다.
키오후라는 남자에게 공감할 수가 없다. 그가 어떤 적의를 품어도, 어떤 궤변을 늘어놓아도 나는 남자에 대해 그만큼이나 적의밖에 품을 수밖에 없었다.
'저 남자가 내게 적의밖에 없기 때문일까.'
렌이나 진, 류, 심지어 '안나'에게 품는 감정과도 달랐다. 어쩌면 에피룬이나 셀리안이 그에게 아무 감정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윤하영은 키오후라는 남자가 순수하게 싫다고 생각했다.
감정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이곳은 전생과 현생, 마음과 마음이 얽혀 엉망이 되어 있다. 무엇이 옳은지 따위 점점 분별할 수 없게 되어간다. 그래도, 에드나에게 반발했듯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윤하영에게는 키오후가 그랬다.
“당신 말대로네요. 시간이 없어요."
"..."
"이제- 당신의 헛소리는 됐어요.”
바닥으로 꺼지긴 했지만 애초에 복도였던 탓에 풀숲이 있는 땅보다는 지대가 높았다. 그런데도 벌써 발목까지 물이 차올라 있었다. 발목이 짜릿짜릿하다.
내 목소리에 그의 눈이 가늘어진다. 깔보고 있다. 그래, 깔보라지. 언제까지나 깔보라지.
"당신 말대로, 당신이 가진, 그 저주의 핵이 만능은 아닐지 모르지만-"
"?"
"그래도 빼앗고 싶네요. 진심으로.
진심으로.
순간 내 손에 묵직한 무언가가 쥐어졌다. 나는 시선을 내렸다. 키오후도 내 시선을 따라 내 주먹을 바라보았다. 진의 눈이 재미있다는 것처럼 가늘어졌다.
키오후가 확 얼굴을 구기더니 복도의 끝에서 약간 옆으로, 난간도 없는 복도 바로 밑의 바닥을 향해 몸을 돌린 뒤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초록의 마법진이 걸린다. 그는 무언가 중얼거리며 평범해보이는 풀숲의 공간을 뒤적였다. 뒤적였지만 소득이 없었는지 다시 나를 보았다.
나는 내 손을 들어 그것을 확인했다. 손에는 흰색 살점이 피와 함께 엉겨 붙어 있는 검은 비늘을 쥐어져 있었다.
- 에드나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것이 에드나였다. 진짜 에드나- 에드나의 부활을 막는 저주의 한 조각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랜만에 왔는데도 선추코 감사합니다.ㅜㅜ/
옆집바나나 님 // 그런가요. 외모버프를 더 넣겠습니다. 그의 뒤로는 마치 초원의 햇살처럼 녹빛으로 부숴지는...(이하생략)... 이제부터 쭉 달립니다. 심하게 달리고 싶습니다. 즐겁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여름그하늘 님 // 진도 매력발산을 할 수 있을까여...(또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