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150화 (15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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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진을 삼킨 검은 물에서 붉은 빛과 검은 빛이 한 번 반짝이긴 했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곧 검은 물은 어떤 색도 섞이지 않은 채 그저 새까맣게, 주변을 가득채워가기 시작했다.

낮의 하늘은 청명하게 높건만 땅 아래는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 것 같은, 그런 불길함-

"세상을 덮어버리십시오! 그 분노로, 증오로, 용들의 마나로- 이 계집까지-"

물은 늘어나고 늘어나 부글부글 끓으며 자리를 넓혀간다. 그리고-

"!"

어느 순간 넓어지길 멈춰 내가 서 있던 복도 자리부터 깊게 웅덩이를 만들었다.

"..."

"..."

거대한 웅덩이, 거대한 검은 호수.

“정말이지 다들 대단한 고집이네요.”

미친듯이 웃고 있던 키오후가 웃음을 멈추고 호수가 곁에 생긴 언덕에 착지했다. 나 역시 황금의 고리에 감싸여 반대쪽 언덕에 착지한다.

물은 더이상 넓어지지 않았다.

“아시겠나요? 용들은 검은 호수가 만들어지기 전에 자신들의 마나를 제 주인에게 넘겨줬답니다. 대단한 충성심이랄까, 지조가 없달까.”

방금 전 보았던 붉은 빛과 검은 빛이었을까. 하지만 그에게 있어 그건 지나가는 말이었는지 그는 넓어지길 멈춘 검은 호수에 눈길을 주었다.

“뭐, 남 말 할 일이 아니지만요. 여전히 고집이 센 아이라니까.”

키오후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호수를 바라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솔직히- 그 상태에서 설마, 당신을 밀어낼 줄은 몰랐습니다. 검은 용의 의지일지도 모르지만, 에드나도... 참. 호수도, 설마 이 상태로 멈춰놓을 줄이야.”

호수는 점점 깊어지는 느낌이 든다. 깊이를 모를 어둠 같은 검은 호수는 지금도 계속 안으로 파고들고 있는 것 같았다. 에드나의 몸이 그 양을 견디지 못해 터졌듯 호수의 물은 여전히 넘쳐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자리를 더 넓히지는 않았다. 땅 속에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호수에 의한 피해는 늘어나지 않고 있음을 깨닫는다.

“아-”

그런, 그녀의 다정함까지도 내게는 참담하게 느껴졌다. 에드나는 인간을 특별히 아끼는 이종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을 자신들과 다른 위치에서 보는 오만한 이종족도 아니었다. 그녀의 오만함은 스스로에게 당당했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그 모습은 언제나 빛났던 것이다. 마지막까지도.

“어리석고 이기적인 아이- 당신을 용들을 끌어내는데는 사용했으면서, 마지막 결심이 부족한 아이에요.”

키오후가 천천히 둔덕을 걷는다. 가볍게 혀를 차며 천천히 걸었다. 검은 호수를 경탄하며 보고 있지만 그 시선에는 더럽다는 빛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하찮게 보는 눈동자.

“그러니까, 가장 소중한 건 지키지 못하고 마는 거지요.”

“닥...쳐요.”

키오후가 가늘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감싸는 건가요? 저는 당신을 욕하긴 했지만, 실상 에드나가 당신을 이 자리로 끌고 왔기에 용도, 그녀도 이 상태가 된거랍니다. 원망의 번지수가 잘못되었어요.”

“에드나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아요.”

그가 에드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에드나는 나를 찾아왔으면서도, 누구에게 피해를 줘도 상관없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결코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다. 삼키는 건 공격하는 누군가만, 나에 대해서도-

“에드나는, 내가 따라오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했어요.”

나를 끌고 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했다. 안 따라와도 좋다는 이야기도 했다.

키오후는 내 눈을 마주하더니, 예의 역겹다는 얼굴을 했다.

“아, 뭐 됐어요. 좋네요. 좋아.”

“?”

“그런데도 따라와주신 거네요. 그럼 당신에게 감사하지요.”

역겹다는 얼굴을 가면처럼 감추고, 아니 드러내고 조롱하는 것처럼 허리를 굽혔다.

“복수를 눈앞에 두고도- 이기적인 게 아니라 어리석었던 아이에게 기회를 주셔서. 어리석고 가여운 아이를 도와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시에 그가 훅 하고 이쪽 언덕으로 넘어왔다.

“그거 아십니까. 이 아이가 고집을 부려도-”

바로 내 앞에 선 그가 내게 손을 뻗는다. 길다란 녹빛의 손톱은 황금의 고리에 가로막혔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손톱을 움직인다.

황금의 고리에 가로막힌 보이지 않는 벽을 긁어댄다.

“당신을 찾아갔지 않습니까. 그래요, 에드나는 애초에 이 성에 용들이 있다면 찾아가 복수하겠다는-그런 얄팍한 생각을 했겠지요. 그정도 그릇의 아이였어요.”

“...”

“그런데도 당신을 찾아갔습니다. 어떻게 가능한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나에게 닿지 않는 손톱을 거두어 들여 호수를 향해 뻗었다.

“저는, 제가 통제할 수 없는 저주를 흩뿌릴 정도로 나이를 헛먹지 않았습니다.”

그의 손이 지휘를 하는 것처럼 유려하게 움직이고, 깊이 깊이 고여 있던 호수가 좀더 다시 주위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주위의 땅을 녹여 옆으로 옆으로-

“핵은 핵이죠. 그리고 핵을 조종할 수 있는 저주의 주도권은 제게 있습니다.”

“!”

“저 깊은 호수 밑바닥에, 저주의 핵만 있따면 호수는 제 말을 따른답니다. 아뇨, 그 아이의 영혼이 제 주문 아래 있다 해도 좋겠지요. 이 호수의 근원은 그 아이니까.”

“!”

웅덩이에서 멈춰있던 호수가 옆으로 넘친다. 마치 키오스를 전부 삼키려는 것처럼-

“어...어떻게?”

“어리석은 아이니까요. 전부는 아니지만, 약간은 저도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해놓는 게 당연하잖아요.”

멍하니 바라보는 내 눈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간신히 만든 통제권을, 허투루 쓸 수 없어서 안 쓴 것 뿐입니다. 그 붉은 용이 거기까지 방해를 하는 건 불쾌하니까요. 당신들은 그저 핵에만 매달려서.”

변명하는 말투였다. 작고 초라한 늙은이- 그가 저주를 통제한다는 걸 알면 진은 그 자리에서 남자를 죽였을 것이다. 그래서 움직이지도 못했던 주제에-

그릇이 작은 어리석고 오만한 척하는 남자.

“말했죠. 나이는 허투루 먹는 게 아니고- 나는-”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죠?”

그리고, 잔인한 남자다. 잔혹하고 잔인해- 자신밖에 모르는 남자였다.

“아, 그쪽이었나요? 에드나는 자신의 복수를 했으니- 이제 제 차례가 아닌가요.”

그는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광기에 차 번들거린다. 흥분에 차 있다. 견딜 수 없다는 것처럼 나를 보고 있다. 어떤 열망보다 강한 열망에 차 나를 보았다.

“제 소망은 말이죠. 저는 윤하영이라는 존재를 소멸시키고 싶습니다.”

“나를?”

“네- 다만, 당신에게는 당장 피해를 입힐 수 없어요. 그러니까- 그게 가능할 때까지, 이 지긋지긋한 키오스를 무너뜨릴 생각입니다. 그 용들을 삼킨 호수니 이 왕궁을 정말 잘 부숴줄 거라고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방금까지가 전초전이었던 것처럼 거침없이 호수가 넓어져간다.

“그리고- 셀리안 크레이누를 이 정도로 붙잡아둘 수 있다니- 후후-과연 용들이 찾은 다음 주인- 게다가 용들의 마지막 힘까지 받았으니- 제가 당신이든, 이 왕궁이든 어느 한쪽을 소멸시키기 전까지 버텨주길 바랍니다.”

키오후는 비웃듯이 입가를 끌어올렸다.

호수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왕궁을 침략한다. 걷잡을 수 없는 흐름 속에서, 내 시야가 닿지 않는 곳까지 호수가 넓어지고 비명소리가 들렸다. 에드나에게 삼켜질 때 남자들이 내던 비명과 비슷한 소리였다.

*

호수는 급속하게 왕궁을 삼켜나갔다. 적어도 내 눈에 보이는 것 중 호수 이외의 것은 히아신스, 아니 안나가 주저앉은 복도 건물의 한 구석과 나와 키오후가 있는 둔덕 뿐이었다. 살아 있는 건 주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건물의 부서진 곳에는 녹빛 눈동자의 여기사가, 여기사의 모습을 한 소녀 같은 시선의 여자가 주저앉아 있다. 그녀는 망연히 호수에 집어삼켜지는 왕궁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달리, 지대가 높은 그녀가 있는 자리에서는 좀더 왕궁이 전체적으로 보일 게 틀림없었다.

공포와 참담함으로 그녀의 눈이 흔들리고 있다. 다만, 그 눈동자에는 절망과 동시에 기묘한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그 시선을 키오후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윤하영은 위대한 영혼의 마지막이랍니다. 한 마디로 찌꺼기인거죠. 에피룬 크레이누는 오래도록 키오스에 그 영혼이 묶여 젊었던 그의 영혼을 소모했죠. 뭐, 자업자득이죠. 그러니 딱히 안나의 주문 탓은 아니에요.”

키오후는 위로하는 것처럼 안나에게 이야기한다. 혹시나 그녀가 죄채감을 가질까 달래는 것처럼. 하지만 여자는 그와 눈을 마주하지 않는다. 그저 왕궁을 보고 있었다. 그에게 의지하는 것 같았지만, 담백할 정도로 키오후에게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키오후는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정말이지, 에피룬 크레이누가 그토록 사랑하고 지키고 싶어했던 나라건만, 그를 사랑했던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나라네요. 정말 재미있는 일입니다.”

말은 왔다갔다 한다. 마치 여자의 환심을 사고, 관심을 끌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말을 멈추고 그가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역시 더러운 걸 보는 듯한 그런 눈이었다.

“그것도 그럴 수 밖에 없긴 합니다. 그,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남자가, 모든 것을 버릴 정도로 사랑하게 된 게 자기 자신이라니, 우습기 그지없다고 할까요. 그 남자는 고작 다시 태어나서 제 영혼의 찌꺼기를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이 나라조차 상관없을 만큼-”

키오후의 말에 여자의 눈동자가 흠칫 떨며 나를 내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키오후는 자신의 말에 반응한 여자에 신이 난듯 덧붙인다.

“아니, 애초에 그런 사랑밖에 못하는 영혼이 만든 나라가 이꼴이 되는 것도 당연하지요. 어이없지 않나요. 그 남자가 뭐라고 했는지 아나요? 히아신스 에이나도, 에드나도 상관없고 저 여자만 지키면 전부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다고요.”

키오스가 무너져간다. 비명소리, 검은, 뭔지도 알 수 없는 물 속에 잠겨 사라져간다.

그 모습에, 내 안의 누군가가 절망하는 건 알겠다. 이 영혼의 가장 처음이 가장 처절하게 슬퍼하고 있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윤하영 양- 우습지 않습니까. 골계라고- 멍청한 희극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는 지휘를 하듯 계속 손을 움직이고 있고, 나를 향해 이야기했지만 안나만을 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 맞춰 호수는 점점 넓어져갔다. 그에 심취한 것 같았다. 남자는.

“저는 참, 당신이 신기합니다. 그저 에피룬 크레이누의 찌꺼기일 뿐인- 아무것도 아닌 당신이 이 참사의 중심에 있는 겁니다.”

비명소리가 멀리서 계속해서 울려퍼진다. 그는 그 소리에 안타깝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저 흘러왔다- 흘러온 거다- 라고 저는 이야기했습니다만, 어쩌면 이 형편없는 나라를 종식하기 위해 당신은 온 건지도 모릅니다. 불안하고 부족한 셀리안 크레이누가 결국 당신을 선택함으로서, 그 부족함을 만천하에 드러낸거겠죠-”

“...”

“자- 에피룬, 위대한 마법왕이여- 그녀의 안에서 지켜보십시오. 당신이 지키려 했던 이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그가 한 번 더 손을 휘젓는 순간 파도가 형성되어 굉음을 내며 일렁였다.

“왕궁을 넘으세요- 에드나!”

왕궁을 넘어-

하지만-

높게 치솟은 파도는 무언가에 가로막힌다.

곧 나를 감싼 황금의 고리와 닮은 거대한 황금의 고리가 이 자리에서도 보일 정도로 넓게 생겨났다. 언뜻 보기에는 왕궁을 감싸는 것처럼 보인다.

왕궁을 삼켜버린 이 호수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황금의 고리에 진흙같은 호수가 막혀버리자 키오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이 앞에 나타날 수도 없는 남자가, 제 왕궁도 지키지 못하면서... ”

황금의 고리-

‘정말 비틀린 남자야.’

성군은커녕, 이거야 키오후의 말대로 부족하고 불안한 남자다.

그는 크레이누 왕조가, 에피룬 크레이누로 지탱되는 나라를 싫어했다.

그런데도 모질어질 수 없다. 버릴 수 없다.

왕궁 자체가 없어진다 해도, 왕인 셀리안 크레이누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백성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성군은 될 수 없다. 암군이 될 뻔하다가 간신히 간신히 본연의 긍지를 되살려 왕의 책임을 다 할 뿐.

“당신이 틀렸네요. 그는 이 나라 사람들을 지킬 것 같네요.”

나는 입을 열었다.

“이 왕궁이 멸망해도, 그들은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에피룬 크레이누의 흔적은 없어질 텐데? 이 왕궁, 왕조는 이미 끝이 났는데?”

“별로, 사랑받지 않아도 별로 상관없으니까요.”

내 말에 키오후 뿐 아니라 여자의 시선도 나를 향했다.

“뭐가 말입니까?”

“방금 전에 물으셨잖아요. 어떻게 생각하냐고, 제 의견 말이에요.”

“...”

그가 황당하다는 것처럼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이 어마어마한 절망에 윤하영은, 에피룬 크레이누의 찌꺼기는 그저 절망하며 입을 다물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맞다. 맞는 이야기다.

방금 전까지 나는 인정하긴 싫지만 내 영혼의 원초가 느끼는 절망과 동시에 어느 때보다 스스로의 무력함을 지긋지긋하게 느끼고 있었다. 에피룬 크레이누의 찌꺼기- 그 말대로다. 나는 계속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에드나를 따라와, 그녀를 설득하려 하고, 이런 저런 말도 하고, 행동도 했지만 결국 그저 셀리안의 고리에 의해 지켜지며 그가 오길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는 나뿐 아니라 이 나라도 지키고 있다.

뒤늦었지만, 왕궁은 호수에 잠겨버렸지만- 그래도 힘을 내준 거다. 기억해준 거다. 맹세를, 몇 번이나 그 녹색의 신전에서 가슴에 품었던. 내가 이 세계에 와서 그를 인정하게 된 근원을.

용의 결계를 넘어, 류를 넘어 이렇게.

“일단, 이 나라일까요. 이 나라가 ‘당신들에게’ 사랑받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이야기부터인데요.”

나를 감싸는 황금의 고리, 이 왕궁을 격리시키는 황금의 고리-

“이 나라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고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에피룬 크레이누가 싫다 싫다 하면서도 당신, 너무 에피룬 크레이누에게 좌우되는 거 아닌가요? 나라란 무슨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고요.”

“...”

“이 나라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미움받는 그저, 그릇일 뿐이에요. 깨지면 다른 그릇이 만들어져도 충분한. 당신의 말대로 에피룬도, 심지어 당신조차 그걸 모르고 있어요.”

당연한 이야기를 나는 부러 비웃음을 담아 이야기했다.

키오후의 얼굴이 구겨진다.

약하디 약한 내가 이곳에서 가장 강한 감정을 받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아무 힘도 없을 지리한 내 말들에 그들이 반응하고 있다.

내가 에피룬 크레이누의 환생이고, 셀리안 크레이누의 환생이며, 셀리안 크레이누에게 사랑받기 때문에-

안나라는 여자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어디까지 그에게 공감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모두, 그 아득한 예전이 현재 기억의 연장선이었고 그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세월조차 무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소중히 여겼던 옛유물을 증오하면서도 그것이 잊혀졌다고 들이대지면 화를 내고 있었다.

내가, 윤하영이, 에피룬 크레이누도, 셀리안 크레이누도 아닌, 다른 세계에서 온 윤하영의 말에 특히-

“그리고- 셀리안의 이야기인데 말이죠.”

나는 나를 감싸고 있는 황금의 고리에 손을 댄다. 잡히지 않는 황금의 마나는, 닿을 때마다 따스한 온기를 느끼게 했다.

세계는 그의 편-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를 성군이라고 받든다.

그게 싫었다. 그 속에서 고독했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와 모르는 군중의 지지를 근거로 나는 세계와 가장 가까운 이종족을 마주한다.

왜냐하면 셀리안이 끝까지 왕으로 있어주는 걸 택해줬으니까. 내 말에 힘을 실어준 거다.

“당신들이 사랑해주지 않아도- 그는 사람들과 세계에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고요- 이 황금의 고리를, 아마 사람들은 오래 기억해줄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들의 재앙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준.”

“오만하기는.”

“오만? 그것도 이상한 말이죠. 저는 하찮은 찌꺼기로서 감상을 이야기한 건데요? 저랑 그는- 생김새부터, 모르긴 몰라도 마나부터 다른데 말이에요.”

나는 어깨를 으쓱인다. 그와 나는 다르지만, 그래도 같은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래도- 셀리안 크레이누와 내가 같은 사람이라면- 되게 쑥스러운 이야기인데요. 그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신뢰받고 사랑받는다는 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

남자는 장신이어서 바로 내 앞에 남자가 선 것만으로도 위압을 받게 된다. 그는 내게 닿을 수 없었지만- 무표정하게  나를 보는 남자의 눈동자에 오싹오싹하다. 광소하고 홍소하고 미친듯이 낄낄 댔을 때보다 더한 비틀림을 느꼈다. 숨기고 보이지 않던 적의가 그대로 쏟아진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 정도로 진심으로 무섭다고 생각했다. 호박색 눈동자가 세로로 가늘어지고 그 검은 자가 나를 놓치지 않을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궤변이군요. 우습지도 않군요. 이제는-”

“...”

“그렇네요- 이건 그냥 생각만 했던 건데요. 이 왕궁이 더 이상 무너지는 걸 보기 싫으면 당신의 마법을 제거하라-는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답니다.”

키오후가 싱긋 웃는다. 눈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는 채로 입가만 끌어올렸다.

“당신도 얼굴을 마주했던 하녀나 그 외 인간들이 죽는 걸 보면 그럴 마음이 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이 나라는 어차피 멸망했을 테지만- 덧붙이며 그가 손을 들었다. 손을 드는 순간 검은 호수가 스스로를 넓히는 걸 멈추고, 고요함만이 주변에 감돈다.

“하지만- 그만두겠습니다. 셀리안 크레이누의 당신에 대한 익애까지 합쳐- 우리의 호수가 녹일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황금의 고리는 나를 지키지만, 에드나에게 오랫동안 노출된 순간 윤하영은 분명히 존재의 위협을 느꼈다.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를 붙잡는 뱀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물리 공격 외에 암시는 가능한 것 같습니다.”

키오후가 웃는다. 웃고 그가 한 번 더 손을 들고 검은 호수가 나에게 쏟아질 것처럼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과연- 위대한 마법왕께서- 용들의 주인과 이공간에 갇힌 그대로, 이 왕궁에서 호수가 넘치는 걸 막고 당신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는지-”

모든 악의가 나에게 집중된다. 그대로- 관통할 것처럼-

“시험해보도록 하죠-”

그가 나를 향해 손짓하는 건 순간이다.

그 순간, 그의 목을 푸른 검이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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