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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는 순간 모래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지온의 검은 밤은, 이 세계에 온 윤하영의 시작이었다.
그 시작의 공간에서 윤하영은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상대를 향해 고백과 동시에 이별을 고한다.
“엘킨-”
“네.”
내 부름에 대답하는 엘킨 다이브의 눈동자는 투명하고 올곧게 나를 보고 있었다.
당신은 나로 인해 변했지만, 사실은 변하지 않아서. 그저 내 마음대로 재단했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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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를 놔주십시오.]
그날을 기억한다. 여전히 그 날은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어, 그에 대한 모든 연정의 기억 속에서도 그날만은 윤하영의 것이었다.
"헉-"
키오후는 제 목을 관통한 날카로운 칼날에 무겁게 숨을 들이켰다.
“그..어..억.”
성대 쪽을 건든 걸까, 키오후의 말은 발음되지 못한 채 단말마처럼 흘러나오고, 그를 찌른 남자의 푸른 눈이 말없이 키오후를 빗겨보고 있다.
전혀 다른 상황이건만-
이어 그가 눈을 들어 탁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는 기묘할 정도로 맑게 나를 비추고 있었다.
*
엘킨 다이브-
셀리안 크레이누를 생각하는 것도, 그를 생각하는 것도 윤하영에게는 고통이었지만, 셀리안 크레이누와 달리 엘킨 다이브는 지나치게 손쉽게 밀어둘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밀 수 없지만, 지울 수 없지만 나는 언제든 내 의지로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어했다.
한 번도 그와 같이 있는 미래를 꿈꿔본 적이 없었다. 그와 함께 있는 순간조차 셀리안을 위해 그의 곁에 있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렇기에 지금도 나는 도망가고 싶다고 느꼈다.
나를 선명하게 담고 있는 푸른 눈은 탁해서- 나의 죄를 들이대온다. 이 세계에는 없어진 셀리안 크레이누의 죄와, 이 세계에서 윤하영이 그에게 진 죄들을 들이대왔다.
동시에 윤하영이 제 사랑을 버린 죄를-
"..."
"그- 커허억-"
엘킨이 그의 목을 찌른 채로 남자를 양단한다. 스으윽-쩌걱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키오후의 발이 휘청거렸지만 그마저도 기묘한 동작이 되어버린다. 다만 쓰러지는 방향 탓인지, 잘리는 방향 탓인지 남자의 한 쪽 손톱 끝이 엘킨의 가슴켠을 긁어버리긴 했다. 하지만 성대에서부터 양 옆으로 좌악 갈리는 장신의 남자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잘려버린다. 호박색 눈동자가 증오로 번들거리며 나를 보았다. 죽는 순간조차 그의 알 수 없는 증오는 나를 향하고 있었지만 전부 의미 없는 일이었다.
엘킨의 검은 거짓과 허실을 찢는 요정의 검 '발루아'- 아름다운 녹색 머리카락의 이종족 남자는 그 피부가 흐물흐물 녹으며 노인만이 남는다.
진이 사라졌을 때 절망적으로 소리쳤던 안나는, 이번만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얼굴이 궁금했지만 그녀를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엘킨이 계속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
“...”
엘킨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칼을 거두는 것과, 키오후가 두 갈래로 땅에 쳐박히는 건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 순간 키오후에 의해 높이 솟았던 진흙 같은 물기둥은 방향을 잃고 자신을 부리던 남자를 덮친다. 호숫물은 양 갈래에서 키오후를 삼켜간다. 쓰러지는 순간에도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눈동자는 진흙탕에 녹아 검은 물 위로 흐물흐물거리다 사라졌다.
남자를 삼켜버린 물은 그대로 그 자리에 스며들듯 남아있는 지반의 일부를 녹였다.
“이 호수는-”
그 기묘한 광경을 끝으로 먼저 입을 연 건 엘킨이었다.
“곧 폐하가 직접 정화를 하실 겁니다.”
그는 왕궁을 감싼 셀리안의 황금 고리를 바라보았다.
“왕궁은- 재건이 될지 이대로 끝이 날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키오스는 미쳐버린 하루드의 잔당들만 처리하면 될 일이고. 그것은 현재 칼미온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엘킨은 담담하게 고한다.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이기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칼미온 기사단은 왕궁이 아니라, 키오스를 지키기로 결단을 내려- 이 왕궁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아."
"..."
그리고 전할 말을 모두 마친 사람처럼 몸을 돌렸다.
오랫동안, 키오후가 죽는 순간까지도 나를 보던 그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망설임없이 등을 돌린다.
'간다-'
간다- 엘킨이 떠난다.
문득 이 만남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아마 나는- 결코 그를 만날 수 없을 거라는 그런 생각-
곧은 자세, 바른 걸음. 그의 성품을 대변하는 반듯한 자세로 남자는 내게서 멀어져간다.
“엘킨!!!”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외친다. 저절로, 나도 모르게- 어째서.
윤하영은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몸은 괜찮냐고?
그것도 아니면- 그때처럼 셀리안의 곁에 있어 달라고? 엘킨답게 있어 달라고?
그런 게 아니다. 그저- 이것은 이미 사라져버린 셀리안 크레이누의 사랑이 아니고, 그런 게 아니고-
[소녀를 놔주십시오.]
그저, 그날 싹튼 연정이, 윤하영의 미미하기 그지없는 사랑이 그를 그대로 보내기 싫어서 그를 붙잡았다.
내 스스로 몇 번이고 그를 밀친 주제에, 그를 거부한 주제에.
다행히 내 목소리에 엘킨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슬로모션같이 천천히, 마치 이 세상 모두가 그를 따라 멈춘 것 같은 고요함 속에서 바람만이 잔잔하게 불고, 엘킨의 푸른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린다.
“...”
“...”
나는 내 치맛자락을 부여잡는다. 그의 푸른 눈 속에 담긴 윤하영이 견딜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여전히 나는 그를 거부한다. 아무리 윤하영이 그를 사랑해도, 나는 그와 함께 있는 걸 택하지 않는다고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그저 도망치고 싶고, 잊고 싶고- 그럼에도 나는 그의 시선에서는 달아날 수 없어서. 언제나, 언제든- 그저 언제나 도망치고 싶을 뿐.
영원 같은 순간이었다.
그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길 바란 건, 이걸로 그와 마지막이라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오래도록 바라본 엘킨이,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여전하시군요.”
엘킨의 입가가 미세하게 휘어진다. 본 나조차 착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짧고 미미한 미소다.
“-엘-”
“이미, 오염되었군요- 엘킨 다이브-”
그리고 그의 심장 부분에서- 아니 키오후의 손톱에 의해 긁혀져 검게 얼룩졌던 그의 가슴켠에서부터 독사 같은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
그 목소리는 기묘했다. 분명 남자의 목소리지만 생물체의 목소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거품이 이는 것 같은 목소리- 울리는 건 성대가 아니라, 물이다. 물을 울려 내는 목소리, 이명이라는 생각이 드는 소리였다.
“충만한 악의- 이 호수에 섞인 거대한 마나와 동일한 마나로 오염되어 있어요.”
"..."
"그 덕분입니다- 정말이지, 유쾌한 일입니다. 하늘이 제 편인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검은 얼룩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이어 녹빛 손톱이 그 자리를 찢을 듯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손은 엘킨의 앞에 선 나를 잡을 듯이 공간을 휘젓는다.
“에-엘킨-”
그의 심장에서 검은 손이 뻗어나오고, 녹빛 손톱이 빛나, 엘킨은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비명을 삼키며 그의 이름을 부르면,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린다. 젊은 것 같기도 늙은 것 같기도 한 기분 나쁜 목소리로 그것은 변형한다. 젊었지만 늙었고 늙었지만 젊은 그런 자-
“이 상태로 당신에게 닿아봤자 무리겠죠- 자 윤하영- 이 남자를 손에 넣으면 당신에게 닿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호수와 융화된 지금- 저에게는 모든 게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주도권을 갖고 있던 제가, 누구보다 우위의 의식으로 존재하고 있지요. 이 남자는 말이죠. 지금 병들어 있습니다.”
엘킨은 움직이지 않는다. 남자의 손은 나를 잡고자 움직이고 있지만, 마치 그 손이 엘킨의 목숨을 쥔 것처럼. 엘킨은 멈춘 채 숨만 내쉬고 있었다.
“검은 용의 악의가 남자를 오염시키고 있어요. 정화 할 수 있었겠지만- 당신을 얻기 위해 치료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마법왕의 손을 벗어났군요.”
알고 있었다. 그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들었으니까.
엘킨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으로부터 뻗어나온 검은 어둠에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가볍게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멈춘 것 같은 숨 속에서 천천히 숨을 쉰다.
“고귀한 자를 파멸시키고 고귀한 자에 의해 파멸한다- 당신이 고귀한지와는 별개로 요정의 예언은 정확하네요. 무서운 일입니다. 무서운 일이에요- 청명하고 올곧은 엘프들의 긍지, 하프엘프임에도 누구보다 깨끗한 무욕의 기사가 이런 식으로 파멸할 줄이야.”
키오후는 킬킬댄다. 킬킬대며 나를 조롱했다.
엘킨 다이브를 버리고 상처 입힌 윤하영과, 그 윤하영으로 인해 충직한 기사를 잃은 가련한 왕 셀리안 크레이누를-
“...”
뻗어나온 건 손 뿐, 들리는 건 목소리뿐이건만. 뱀족의 대장로가 만족스럽게 웃는 게 느껴진다. 나의 침통함과 절망에 그는 환희하고 있었다.
조롱은 잠시 멈추고 그는 침묵 속에서 나의 고통을 충분히 음미했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당장이라도 멈출 것 같이 내쉬어지는 엘킨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키오후가 다시 목소리를 냈다.
“자, 이대로라면 이 남자는 죽습니다. 그것도 저에 의해,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고 그저 숨만 쉬다가 죽고 말아요- 윤하영-”
마치 구원을 전하는 것 같은 달콤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다.
“당신이, 정말 고귀한 자라면- 당신을 사랑한 정말로 고귀한 남자를 위해 자신만 마법왕에게 보호받는 건 너무 비겁하지 않습니까. 그를 위한 일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엘킨을 위한 일...”
“물뱀의 호수는 답을 내지요. 제가 내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찾아야 할 답을-”
검은 손은 진흙같은 호수의 물을 뚝뚝 흘리며 황금의 고리 바로 앞에서 유영하듯 움직인다.
나는 떨리는 눈동자로 엘킨을 바라본다. 숙이고 있는 그의 푸른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것 같지만 미미하게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했다.
'엘킨-'
순간 나를 감싼 황금의 고리가 희미해진다. 아무 것도 원하지도, 소망하지도 않았지만 절로- 윤하영은 자신을 지키는 것을 포기하기로 한다.
그리고- 엘킨의, 검을 들지 않은 한 손이 꿈틀 움직였다. 마치 건반을 누르는 것처럼 가볍게 움직이고-
“!”
가쁘게 숨을 내쉬던 엘킨이 숨을 멈췄다. 그는 숨을 멈추고 검을 든 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심장 부근을 검으로 찔렀다.
미론 다이브에게서 엘킨 다이브에게로 이어진 푸른 그 검은 ‘감정’이 있어 주인을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따른다. 부정한 것을 없애는 고결한 검, 그 검은 때때로 주인의 의지를 먼저 감지하고 움직이기도 한다.
“---”
“큭-”
살을 찢는 쇳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린다. 쇳소리는 제 주인을 찌른 검의 비명이며, 다른 하나는 검에 의해 찢긴 부정한 것의 비명이다. 그 비명들 속에서 엘킨 다이브가 이를 사려무는 소리가 들린다.
일련의 과정은 순식간이라, 그 비명들 속에서 엘킨 다이브가 비틀 거리며 나로부터 물러난다. 뒷걸음질쳐 둔덕을 넘어 검은 호수로 추락했다.
*
“...”
나는 그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고 비틀비틀 호수가로 걸어갔다. 나를 감싸고 있는 황금의 고리, 이것이라면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엘킨을 내버려둘 수 없다- 그를 이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안돼요.”
달려가는 내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눈앞에는 녹색 눈을 가진 여기사가 서 있었다.
============================ 작품 후기 ============================
아싸!(의미불명)
앞으로 루나패러독스는 하영 시점 3화, 사이드 시점 1화를 끝으로 완결될 예정입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
리젯트 님 // 루나는 스페인어로 거울, 패러독스는 패러독스입니다~>ㅁ 무슨 의미일가요!(끌려간다)
체셔빈 님 // 저도 사실 키오후를 너무 나불대게 했다고 마음 깊은 반성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대를 찔러주었습니다.(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