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3 Side story 11 =========================================================================
Side story 11
셀리안 크레이누는 윤하영의 방에서 나와 몇 걸음 걸었다. 발걸음을 떼 그녀의 방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아쉬었지만 지체할 틈은 없었다. 얼마 안 가 그의 인영이 황금빛에 휩싸였고 셀리안이 도착한 곳은 부숴진 이종족의 감옥이었다.
이동하는 동안 감지한 궁의 상황은 엉망이었다. 어떤 계획도, 목적도 없이 그저 ‘충동’에 휩싸여 폭력적으로 일어난 사람들. 왕성에 잠입한, 의도적으로 내버려두고 있던 하루드와 밖으로부터 침입한 수도의 하루드들.
그리고, 그 사건의 중심에는 눈앞의 남자와 용이 있을 거라고.
남자는 이종족의 감옥- 반즈음 부서져 도망가고도 남았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옆에는 검은 용과 붉은 용이 있고, 남자는 새하얗고 푹신한 자리에 여유롭게 앉아 셀리안 크레이누를 기다렸다.
검은 용은 셀리안을 보자 제 주인처럼 호기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 안에 깃든 숨은 감정은 복잡하다. 붉은 용은-
‘죄책감이라니 우습군.’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지고의 용답지 않게 감정을 줄줄 흘리고 있다. 감정을 주체 못하는 건 두 용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붉은 용은 약간 분위기가 바뀐 것 같았다. 히아신스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그 여자를 죽이려고 했던 일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으나 셀리안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우와~ 기다렸어.”
황금색 눈을 반짝이며 류는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셀리안이 무표정하게 그를 향해 발을 내딛자 이 때를 기다렸는지 깡총 가볍게 일어선다.
“폭도들의 중심에 서서 지휘해야 하는 거 아닌가.”
류가 하루드의 수장이기에 던진 말이지만, 셀리안 역시 그런 게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윤하영과 감각을 연결하는 것도, 셀리안이 에피룬 크레이누라고 터뜨리는 것도- 실상 하루드에는 실익이 없는 일이었지만 그런 일들을 남자는 끊임없이 하고 있다. 남자가 하는 일은 일관성이 없고, 의미가 없었다.
“응, 중심에 있잖아. 여기 왕궁의 중심이지? 걔들은 이리로 달려올 거니까.”
류가 피식 입가에 미소를 걸며 농담을 했다. 셀리안 크레이누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
“...”
손이 찌릿하게 아파온다. 외상은 없지만 타들어가는 고통이 전이되고 있었다. 이 정도 고통이라면 이제 곧 외상도 나타날 것이다. 셀리안의 감옥을 일부러 만진 류의 고통이 하영의 손을 부풀어오르게 한 것처럼.
하지만, 류는 그 손으로 재빠르게 마법의 창을 쥐었다. 새하얀 창으로 손바닥을 가득 채우고 셀리안 크레이누는 이 고통과 상처를 모르도록-
윤하영과 감각이 공유된 채로는 싸울 수 없었다. 류는 개의치 않아 했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용들이 류와 셀리안을 외부와 격리시키는 이공간에 가둬버리고, 감각 공유에 마력을 소진하고 있는 류에게 마나를 공급해주었다. 이공간은 그저 감각의 공유를 멈추는 것으로 그 둘의 영혼은 여전히 연결되어 있던 탓에 류에게는 마나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우와 아파라-'
창을 꼭 쥐는 순간 타들어가는 손이 아프다. 감각이 끊겼지만 그에게 여전히 감각이 공유되는 이유- 용들이 강행으로 저지른 짓이긴 하지만, 그들은 류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결국 류는 셀리안이 모르게 한가지 제약을 결계에 걸었다. 그의 감각은 하영에게 더 이상 전이되지 않게 되었지만, 하영의 감각은 여전히 류에게 공유되도록 하는 제약이었다. 셀리안조차 남자가 그런,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을 다시 건 것을 모르고 있다.
류는 어쩐지 그 사실을 셀리안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윤하영과 감각을 공유하는 게 자랑스러웠지만, 이제 저 남자에게 그조차 알리고 싶지 않다고. 비밀처럼 소중히.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자각조차 갖지 않은 채 류는 그런 걸 생각했다.
“자- 이번엔 이 공격을 받아보지 그래?”
“짜증나는군.”
흰 창을 세게 잡아 던지자 손이 찌릿하니 아프다. 새까맣게 새까맣게 비틀린다. 창을 셀리안에게 던지고 잽싸게 새로운 창으로 손을 가렸다.
‘무슨 마법에 당하는 거야, 대체.’
사실 윤하영은 항상 아파했다. 정신의 고통은 전이되지 않기에 모르긴 몰라도, 그녀의 정신적 고통은 쉽사리 육체적 고통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그만큼 정신적 고통이 강하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윤하영의 영혼이 그정도로 불안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정신과 육체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결국 류는 윤하영과 연결된 순간부터 그녀가 매순간 아파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윤하영은 언제나 그랬다. 뭐가 그렇게 생각할 게 많고 뭐가 그렇게 고통스러운지 류는 알 수 없었지만-
모르던 고통, 모르는 감정- 강렬하고 집요한 그런 감정들-
어느새 류의 바람은 윤하영의 모든 감각을 공유하는 것, 그 집착은 점점 강해져 류와 하영의 연결은 굳이 용들의 도움이 없어도 한 방향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윤하영은 류를 원하지 않았고 류는 윤하영을 원했으니까.
타들어가는 손의 고통을 참으며 몇 차례 셀리안을 공격하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자신을 전혀 공격하지 않는 남자에 짜증스러움을 느끼면서도, 결계 탓에 아무리 신경 쓰려해도 윤하영이 현재 어떤 고통을 겪는지는 모르는 듯한 남자에게 쾌감을 느낄 무렵-
은빛의 공간 속에서 류는 잠시 허공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셀리안의 시선도 허공을 향했다.
“용들의 기운이 사라졌군.”
“사라졌…다고 해야 할까...”
곧 사라질 것 같지만, 아니 섞여 버릴 것 같지만. 결계 안으로도 확실히 느껴지던 거대한 용의 마나가 무언가에 먹혀 사라진 것이다. 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상황을 반추했다.
그들이 전해주는 마나는 여전히 류에게 흐르고 있다. 마나만은 계속해서-
“왕궁을 소란스럽게 하는 건 네가 망가뜨린 하루드의 인간들만은 아닌 것 같군.”
셀리안 크레이누는 찢어진 이마의 상처를 훔치며 용들이 만든 결계를 확인했다.
완전 격리된 공간도 본 주인들을 잃자 조금씩 일렁인다. 게다가 셀리안의 마나 중 일부는 하영에게 있었다. 용들의 통제가 없어진 결계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지가 서서히 가늠이 되고 있었다.
“여유롭기도 하지-“
류의 손에 쥐어져있던 새하얀 빛의 창은 몇 십개로 불어나 날카롭게 셀리안을 덮친다. 셀리안은 그 창들을 반은 막고 반은 피하고 일부는 스쳐지나가게 하며 황금의 진을 류의 발 아래에 펼친다. 그것을 류는 간발의 차이로 피해간다.
셀리안은 류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류를 가두는 것이었다.
“장기전이라 재미는 없는데, 이러면 내가 이길 걸?”
하영에게 감각이 공유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셀리안 크레이누는 류를 ‘잡는 데 몰두’했다. 그가 강구한 ‘영혼의 공유를 끊는 법’에 몰두하고 있었다. 반면 류는 거침없이 공격을 퍼부어 상처는 셀리안 쪽이 심했다.
“네 놈의 용들을 삼킨 게 뭔지 알 것 같군.”
“집중하라니까.”
"..."
결계밖 하영의 움직임을 신경쓰다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게 있다. 결계에 막혀 시간차는 있지만, 왕궁에서 일어나는 일이 서서히 보였다.
칼미온 기사단은 대부분 각지로 흩어져 하루드를 제압하게 했다. 왕궁 내에는 전속 호위들이 있고 마도사들도 있기에. 하지만-
그것은 의도치 않게 그들을 살리는 일이 되고 있었다. 그들이 누군가를 지키게 한 명령이건만.
셀리안은 왕궁이 사라져가는 걸 느끼며 그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
어린 시절부터- 셀리안 크레이누는 에피룬 크레이누가 지켰던, 끝까지 지켰던 크레이누 왕조가 싫었다. 그래서 싫다고 생각했다. 까놓고 보면 그런 이유로 싫을 것도 없었는데, 그렇게 포장했다.
사실은 사실은 아버지가, 자신을 혐오하는 다리스 크레이누가 지키려 했던 나라이기에 반대급부로 싫어했던 거였는데.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어린애 같은 마음이 계속 남아 이런 저런 이유를 붙여 가며 왕조를 혐오했다. 그런 혐오가 알게 모르게 왕궁일에는 소홀하게 한 게 아닐까. 왕궁 소속의 기사를 전부 밖으로 내보낼 정도로 말이다.
그들을 왕궁에 머물게 했다고 결계 안에서도 느껴지는 압도적인 재앙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본인의 의도를 반추하면 허무해지는 일이었다.
“한심하군.”
“응, 너 한심해.”
“귀도 좋구만.”
셀리안은 웃었다.
지금 밖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갑작스럽고 이질적이며 폭력적이다. 마치 낮에서 밤이 되는 것처럼 이질적인 현상이 자연스레 왕궁을 침범했다. 이제는 결계를 넘어 흐르는 썩은 호수의 냄새도 확실하다. 용들의 기운이 사라진 탓일까, 결계가 약해져 있었다. 이 불길한 기운이 용들을 사라지게 하고, 왕궁을 삼켜가는 게 분명하다고.
그 기운은 곧 왕궁을 완전히 삼켜, 왕궁을 멸망시키고 밖으로 향할 것이다. 곧 넘쳐 흐른다. 곧.
'그렇게 둘 수는 없겠지.'
이걸 막으려면 한순간 하영을 신경쓸 수 없다.
한심한 일이다. 불가항력이라고는 해도 왕궁이 완전히 삼켜지기 직전 깨달아, 여전히 윤하영을 걱정하고 있다. 이 나라보다도 더 말이다.
동시에 그녀에 대한 생각이 그가 나라를 생각하게 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혼자서 폼잡길 좋아하는, 전혀 훌륭하지 않은 허세왕님은 세상에 셀리안 크레이누, 당신뿐인 걸요.]
다정하게 위로하는 목소리는 조롱하는 것 같으면서도 믿음을 담고 있다. 그녀가 정말 셀리안 크레이누라면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 남자인지 알 텐데도 여자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게 내가 아는 이 나라의, 지금의 왕님인 걸요.]
셀리안은 눈을 감았다 뜬다.
용들이 없어진 지금이라면, 결계를 뚫는 것도 가능하리라. 셀리안이 나가는데는 더 시간이 걸릴 테지만, 결계를 뚫고 적어도 키오스로 이 어둠 같은 재앙이 빠져나가는 건 막을 수 있다.
[바~보. 에피룬 크레이누는 완벽하게 다정한 성군이었다는데요. 아, 전 책은 안 읽어요. 이건 꿈이 말해준 거죠.]
에피룬보다 더한 성군이 되겠다고, 반발하듯이 다짐했던 어린 날의 자신과, 자신을 믿는 눈으로 바라봤던-
“성군 실격이군.”
“뭐?”
이런 생각에 이르러, 마음을 다잡는 것부터가 성군과는 동떨어진거라고. 항상 비웃긴 했지만 나라를 위해 거침없이 모든 걸 버리고 자신을 키오스에 묻은 에피룬 크레이누는 따라가지 못할 것 같다고-
류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셀리안 크레이누는 결계의 벽을 살펴보았다. 그녀에게 건 황금의 고리가 잠시간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그 잠시간이 불안하긴 하지만 지금은 일단 키오스를 지키는데 집중한다.
“갇히는 것도, 격리되는 것도, 놀리는 것도 질리는군.”
용들이 그 주인의 응석을 받아주는데 어울리는 것도 그만두기로 한다. 성군은 아닐지라도 그는 이 나라의 왕이었으니까.
“여유 부리지 말라니까.”
날이 선 하얀 창이 다시 한 번 셀리안을 덮친다. 이번에는 반절 이상이 그를 스쳐지나간다. 피보라가 불었지만, 셀리안은 그 속에서 입가를 휜다.
“네놈에게는 이 여유로 충분하다.”
그가 손뼉을 치는 순간, 황금의 마나는 류가 아닌 결계의 회로를 따라 밖으로 뻗어나갔다.
*
류는 자신이 만든 새하얀 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감싸인 채로 공중으로 올려졌다. 언젠까지일지 모르는 부유에 그는 가볍게 혀를 찼다.
교활한 마법왕은 결국 그를 끝까지도 공격하지 못했고, 그와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다. 그에게 우선순위는 일단은 나라였고, 그보다 더 우선순위는 윤하영이었으니까.
‘...’
결계를 빠져나와 마법왕이 만든 새하얀 상자는 위로 위로 치솟고, 류는 심드렁한 기분이 되어 자신을 가둔 공간에 드러누웠다.
‘치사하게.’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이 으슬으슬 아프다고 느낀다. 윤하영이 무얼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무언가 차갑고 더럽고 불길한 무언가에 쳐박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감각을 넘어 마치 그가 윤하영의 감각을 공유하는 걸 아는 것처럼, 그녀를 쳐박고 있을 더러운 무언가가 그에게 적의를 보내고 있었다.
마치 감각이 공유된 채로 죽어버리라는 듯한 적의였다.
그것은 이런 저런 욕망과 마음이 뒤섞여 어떤 부분은 윤하영 자체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 같았고, 또 어떤 부분, 근원의 바탕에서는 윤하영이라는 매개를 사이에 두고 태연하게 누워 있는 그를 죽이고 싶어 견딜 수 없다는 것처럼 기운을 보내왔다.
“뭔가, 날 되게 미워하는 것 같네.”
강한 적의, 그를 미워하는 적의가 더 크다. 그것은 바탕이니까. 하지만 류는 윤하영을 향하는 적의에 집중했다. 그녀가 느끼는 고통이 더 흥미롭다. 자신을 향하는 고통보다.
그런 것에 심취하고 있으면 그를 향한 적의는 공간을 뒤틀어 마법왕의 하얀 감옥 안으로 스며 그의 목을 조를 것처럼 압박해오려 했다.
했지만-곧 류는 온 몸이 끌어안겨지는 기분이 된다. 기분 나쁠 정도로 거대한 황금의 마나가 아마 그녀를 건져내고, 동시에 익숙하고 친숙한 무언가- 류에게 마나를 넘겨주고 녹아든 누군가들이 그를 보듬듯 보호하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어느 쪽도 어색하고 불쾌하다.
‘류-’
라고,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윤하영을 끌어안는 셀리안 크레이누의 손길을 불쾌하게 공유하며 류는 자신을 감싸안는, 검고 붉은 기운의 마지막 편린 속에서 그렇게 보호받았다.
*
‘안나’는 에피룬의 영혼이 사라진 검은 호수를 망연히 바라본다.
자신을 어루만졌던 손은, 과거 에피룬 크레이누보다 훨씬 작은 여자의 손이었지만, 그의 손만큼 따뜻했다.
“이제 끝이야.”
끝이다.
저 호수가 어떤 건지 알고 있다.
에피룬을 기다리기 위해, 그를 되찾기 위해 그녀는 생전 수많은 마법과 이현상을 접했다. 접하고 헤맸다. 헤맸기에 안다. 저 진득한 어둠을, 어둠 같은, 시체 같은 호수를-
그녀는 얼굴을 감쌌다.
이걸로 끝. 정말로 끝.
넘쳐흐르는 검은 호수는 에피룬이 사랑하고, 에피룬이 마지막까지 선택했던 크레이누의 왕성을 집어 삼키고, 에피룬 크레이누의 마지막 영혼을 삼켜버린다.
“…윤하영은 그 속으로 들어간건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안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절망적인 상황이건만, 담담한 목소리다. 허망한 것 같았지만, 절망하지 않은 목소리였다.
“정말 한 순간도 기다려주질 않는군. 믿을 수가 없어.”
에피룬 크레이누와 완전히 같은, 완전히 똑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뒤에 서 있다. 남자의 눈동자를 보고, 그의 기가 막히다는 것 같은 탄식을 듣는 순간 안나는 깨달았다.
‘그는 내 것이 되지 않아. 키오후.’
키오후도 그 자신이 모순된 이야기를 했다는 걸 알까.
윤하영에 대한 원인 모를 미움으로 그녀를 죽이는 것이 안나에게 영원히 에피룬 크레이누의 영혼을 안겨, 그녀가 긴 여행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었던 남자.
하지만.
그녀의 여행은 다시 만회하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로 끝나버릴 것 같지만- 윤하영의 침몰로 모든 게 끝이 나긴 했지만- 그래도 눈앞의 남자는 제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키오후가 말한 것처럼, 그는 ‘윤하영’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하니까.
흔들리는 눈동자로 윤하영이 침몰한 호수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동자는 자신을 보던 에피룬의 눈과도, 이 키오스를 선택했던 그의 눈동자 어느 쪽과도 비슷하면서 달라서.
그 비슷함에 구원받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다. 에피룬 크레이누는, 그래도 안나를 사랑했구나, 하고.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거 아나요?”
호수로 다가가는 남자를 향해 안나는 물었다.
“그녀는 당신의 후생이며, 그녀로 당신의 영혼은 끝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가요, 하고 조금은 심술궂게 물었다.
“아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이 영혼의 끝이라는 건 몰랐던 이야기로군.”
셀리안의 붉은 눈동자는 안나에게는 향하지 않는다. 윤하영과 비슷하다. 그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이 생의 삶에서 소중한 것만을 바라본다. 다만 그녀와 다르게 이 남자는 마지막까지도 에피룬으로서의 정따위는 제게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않을 거겠지.
“그걸로 충분한가요? 당신들에게 다음은 없어요. 아니, 어쩌면 이미 다음은 없을지도.”
진득한 어둠의 호수- 셀리안 크레이누가 이 순간 나타날 건 생각도 못했지만, 지고의 마법왕이라도 그녀를 무사히 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안나의 말에, 언젠가 소중한 사람이었던 녹빛의 기사를 향해 셀리안 크레이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짐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오만하게 이야기한다. 그 시선에는 히아신스를 향하던 애정도 없었지만, 안나를 향할 법한 지독한 원망이나 미움도 없었다. 그저 셀리안 크레이누답게 응수했을 뿐이다. 그는 윤하영을 구할 생각이니까.
“그럼, 윤하영을 구하는 것보다 이 호수를 어떻게 하는 게 낫지 않나요? 이 나라를 위해.”
안나도 부러 오만하게 그를 도발했다. 셀리안 크레이누의 눈이 커졌다.
“물론, 호수도 어떻게 할 거다. 왕으로서 마지막으로 소임을 다 해야겠지.”
“마지막?”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여자를 먼저 구할 테니까 말이야. 이건 짐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릇이 작네요.”
“그래.”
“...”
수치스러워하고 있다. 부끄러워 하고 있다. 왕으로서 살아온, 왕의 영혼을 품은 남자는 제 말에 수치스러워하면서도 후회하지 않는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모순되고 그릇도 작고 에피룬과 정말 다르다고. 남자를 안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피룬과 닮았으면서도 정말 닮지 않았다. 같은 영혼이지만 다르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 그런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런 생각 따윈 해본 적이 없는데.
“같은 영혼인데?”
고작 선택한 게 같은 영혼의 여자냐고. 안나는 키오후를 따라 이죽여도 보았다. 그 말에 셀리안의 눈이 가늘어진다. 가늘어지고 곧, 셀리안 크레이누가 조용히 호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황금의 빛이 퍼져나가고 남자가 작게 중얼거린다. 흡족한 듯이, 서글픈 듯이, 사랑스러운 듯이, 황홀한 듯이 작게 읊조렸다.
- 이 생명의 끝이 그녀라면, 그리고 또다시 그녀가, 짐을 만나러 온다면 그건 얼마나 황홀한 일인지.
*
윤하영은 스스로가 누워 있음을 알았다. 누워 있는 곳은 아마도 풀 밭이다. 이 왕궁의 단 한 곳 남아 있는 살아있는 땅에 그녀는 눕혀져 있다. 물론 그녀 스스로는 누워 있는 풀밭이 어떤 모습인지 몰랐다. 그저 그녀 자신의 몸을 스치는 차가운 풀잎의 감촉으로 그런 추측을 했다.
황금의 바람은 그녀와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기사를 건져냈고, 기사는 그 기회를 이용해 결국은 ‘지킬 수밖에 없는’ 사람을 구해낸 것이다.
그녀는 어렴풋하게 현실과 꿈의 경계에 있었다. 윤하영의 인생이 전부 그랬다. 꿈과 현실, 전생과 현생, 삶과 죽음 그 경계 속에서-
이번, 그녀의 꿈 속에는 엘킨 다이브를 사랑하는 셀리안 크레이누와, 그를 거부하는 엘킨 다이브와,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엘킨 다이브가 있었다.
‘그녀’의 꿈 밖에서는 ‘그녀’를 사랑하는 엘킨 다이브가 그녀의 머리를 넘겨주고 있다.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는 ‘엘킨 다이브’의 존재로 하나가 된다. 머리카락을 어루만져, 가볍게 이마에 입맞추는 그의 동작 하나하나가 그녀를 용서하는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제 이별입니다.”
이별을 고하는 말은 사랑을 고백하는 것처럼 다정하게 귓가를 울리고, 그는 그녀에게서 천천히 손을 뗀다. 윤하영은 그의 몸이 자신에게서 완전히 떨어져 발길을 돌리는 걸 알았다. 그를 붙잡고 싶다고, 감히 생각해버린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스스로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원망이 더 컸다. 그를 붙잡고 싶다. 붙잡을 수 없다.
“사랑합니다.”
멀어진 그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속삭이듯 들려오면 그 사랑의 고백은 이별을 고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엘킨 다이브가 멀어져간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으니까. 먼 전생, 그는 셀리안 크레이누로부터 멀어지려 했다. 그게 이제야, 이제야 가능한 것처럼- ‘그녀’는, ‘그녀 안의 그’는 멀어져가는 엘킨의 발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그의 발소리가 사라지면, 긴 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잘 잤느냐.”
풀잎의 침상도, 긴긴 전생의 기억도, 이별과 사랑을 고하던 엘킨 다이브도 모두 꿈인 것처럼, 윤하영은 이 세계 자신의 침상에 누워 있었다.
상실감과 그래도 눈앞에 그가 있다는데 안심하며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안녕, 리안-“
깨어난 눈 앞에는 ‘윤하영’을 사랑하는 셀리안 크레이누가 있었고, 윤하영은 윤하영으로서 제 사랑을 잃은 것을 그제야 진심으로 슬퍼할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귀염둥이a님 // 거의 맞습니다~ 헤헤. 많은 분들의 코멘트를 읽으며 어떤 이야기를 보완해야할지, 더 써나가야 할지 여러가지로 고민합니다만. 코멘트에서 해주시는 말들이 다 그 나름대로 맞고 있어서, 본의 아니게 헷갈리게 해드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해해 주시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부족한 소설인데 많이 생각해주셔서 항상 감사해요>ㅁ/
네르비안 님 // 나루토 이야기를 오랜만에... ㅎㅎ 저는 개인적으로 카카시가 제일 좋았습니다. 시카마루랑... 음...ㅋㅋ 엘킨에 대해 아껴주시는 분들이 많아 너무 좋습니다.ㅜㅜ 엘킨, 이 복받은 녀석.
사하란 님 // 이건 여러가지로 자유롭게 생각해주심 됩니다만. 조금 설명을 하자면 셀리안이 원했던 존재가 '하영'이며, 하영이 원했던 바람이 '셀리안의 곁'에 있는 게 아니었을지... 전부는 아닙니다만. 물론. 셀리안과 하영이 합체가 되면... 음... 안돼요. 두 사람은 같지만 다른 사람이니까요.ㅎㅎ
옆집바나나 님 // 저는 그래도, '그 사람이 없으면 무너지는 사람들'이 좋네요. 좋아하는 것치고는 이 글에서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취급이 가혹했지만.ㅜㅜ 에피룬은 너무 사랑받았고 거기에 책임을 지고 싶었지만 결국 인간이었기에 한계에 부딪쳤던 것 같아요. 이미 사라진 사람들이 남긴 것들을 향유하며, 그들이 남긴 죄는 후세의 몫...ㅋㅋ 갑자기 심각한 이야네용. 긴 코멘트 항상 감사합니다!!
리젯트 님 // ㅋㅋㅋ 설정 할 때 이런 저런 이유를 설정하긴 했는데 그걸 전부 설명하면 왠지 구질구질, 작위적인 느낌이 들어버려서 약간 포기한 부분도 있어요. ㅎㅎ 제가 더 잘 표현할 수 있음 좋았을 텐데... 설명할 부분만 이야기해보자면... 엄밀히 말해 에피룬의 영혼을 깎아먹는 건 안나의 주술이라기보다는 그가 키오스를 위해 제 영혼을 희생해 오랜 시간(거의 몇 백년)을 환생하지 않고 나라에 자신을 바친 게 더 문제였습니다. 안나가 한 일은 말하자면 원래 잘 타고 있던 집에 기름을 끼얹은 정도라고 할까요. 그리고 하영의 경우, 마나가 있긴 했는데 그걸 박박 긁어 셀리안이 있는 곳으로 가는데 사용했던 거였습니다. 전개에는... 이런저런 암시로 이미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능력이 아직 부족해 통쾌한 설명을 못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류는,에피룬처럼 몇년에 걸쳐 제 영혼을 소모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별로 다음 환생에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 같아요.ㅎㅎ 그저... 영혼이라기보다는 류라는 사람 자체의 인격에 손상을 입힌 정도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스즈카 님 // 지금까지 히아는 궁에 머물고 있고, 셀리안의 통제 안에 있어서... 가족들은 가끔 그녀를 만나 그녀가 뭔가 달라졌다고는 느껴도, 아파서 그러려니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래 있다면 눈치 챘을 것 같습니다만. 렌과 진은 바이바이입니다.ㅜㅜ 키오후는, 죽었지만 죽는 순간 아무래도 호수에 융화되었으니까요. 그 사념이 발현된다고 생각해주심 되겠습니다.ㅎㅎ
체셔빈 님 // 둘보다는 많이, 많이랍니다. ㅎㅎ 엘킨도 남주긴 합니다.; 이어지지 않는 남주...(퍽퍽) 엘킨은 살았답니다. 본편으로 산 게 느껴지셨으면 좋겠습니다..;ㅁ; 불안불안. 수능날입니다. 아, 진짜 아련하네요. 수능은 싫었지만 그 당시의 나이로는 돌아가고 싶어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