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155화 (완결) (155/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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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完)

그렇게, 아셀란의 오두막에서 셀리안과 함께 하는 나날이 계속 되고, 어느샌가 키오스가 거의 원래대로, 셀리안 크레이누의 치세보다는 못하지만 재건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

셀리안 크레이누의 치세보다는 못하다- 특히 이 말이, 나는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저 사람들이 의지할 곳을 잃은 투정으로, 이제 정말 키오스는 에피룬 크레이누와 상관없이 제 힘으로 일어설 준비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내 안에서 왕궁의 멸망을 비통해했던 '누군가'도, 이미 다른 길을 걷게 되어 사라져버린 셀리안 크레이누도, 윤하영도 내심 만족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오두막에서 외출한 적이 없는 내게 이 소식을 전해준 건, 셀리안과...

“이거 복잡하군.”

히아신스였다.

테이블에는 그녀와 함께 한 티컵 두 개와, 그녀에게 선물로 받은 달콤한 과자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어쩌면 가까운 날이라고 생각했지만, 히아신스는 아셀란의 숲에 내가 있다는 걸 알고나서는 꽤 자주 들르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어떤 날은 3일에 한 번 꼴이었다.

가주 수업을 받는 중 시간이 나면 들러서, 나와 예전처럼 티타임을 즐겼고, 그 시간 대부분 셀리안을 쫓아냈다.

오늘도 저녁 늦게까지 밖에 있던 셀리안은 히아신스가 떠났을 무렵, 머리를 긁적이며 집안으로 들어왔다.

“뭐가요?”

“...설마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전부 경계대상이라니. 아무리 나라지만 좀 심하군.”

“뭔 이야기에요.”

셀리안은 내 옆에 앉으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곧바로 히아신스의 티컵을 치우고 자신의 컵을 소환한 뒤,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좀 늦었지만, 오늘은 시내에 가볼까?”

“시내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놀란다. 언젠가 나가볼까 생각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럼 대체 컵은 왜 소환한 거야, 싶지만 히아의 티컵과 내 티컵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던 것에 단순히 질투를 했던 것 같다. 여전히 이상한 부분에서 쪼잔한 남자다.

"슬슬, 내가 움직여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히아신스도 짐, 아니 나를 쫓아내는 것치고는 과감하지 못하군."

"그야, 그녀도 내 몸을 걱정하고 있으니까요."

셀리안을 쫓아내고 나와 티타임을 즐기는 것과, 셀리안의 허락 없이 나를 데리고 나가는 건 별개였다. 히아신스는 그런 점에서는 꽤나 고지식했다.

“히아도 과보호군. 특히 그대도, 아무리 호수의 독에 당했어도 그렇지... 한 달내내 침상에 있다가는...”

셀리안의 손이 내 볼을 주욱 늘린다.

“흐에?”

“통통해졌군.”

“!”

*

“없어.”

“없지.”

키오스의 광장에 나왔다.

나도, 셀리안도 마법으로 머리색과 눈색을 갈색으로 바꾸었다. 거기에 그만은 워낙 유명해서 정체를 숨기는 마법까지 곁들였다. 곁들였지만 내게는 통하지 않게 했고 덕분에 머리와 눈을 갈색으로 바꾼 셀리안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 그는...

‘뭔가... 평범한 색이라, 더 멋진 훈남으로 보이잖아.’

강렬한 색에 가려진 미모가 나온달까. 분하게도 그의 새로운 모습에 약간 두근거리는 게 짜증이 난다.

반면, 거울에 비친 나는 조금 얼굴이 예쁜 평범한 마을 여자 같았다.

“하르두 녀석들, 죽어라고 부순 것 같군."

광장의 중앙에 있던 에피룬 크레이누의 동상은 부서졌다. 완전히 부서져 형체도 없어졌다고 듣긴 했지만 정말 없다니 기묘하다. 그것은 이 키오스의 상징이기도 했던 것이다.

"기분 좋아보이네요. 이제 상관없는 거 아니었어요?"

"별로. 다만 유리가 새로 짓겠다고 하는데 그건 사양이야.”

상관은 없다고 하지만, 동상은 없는 편이 좋은 것 같다. 어린 날부터 거리끼던 것에 대한 불쾌함은 쉽사리 사라지진 않는다.

"가지."

"우왓, 끌지 말아요."

셀리안은 심드렁하게 이야기하며 내 손을 잡아 끌었다.

*

히아신스에게 듣기는 했지만 수도 휴론은 그 참상 후 꽤 활기를 되찾은 것 같았다. 이곳 저곳을 둘러보다가 셀리안이 권한 가게의 야외 테라스로 나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도시의 활기가 한눈에 보이는 자리였다.

“여긴 꽤 맛있다고. 기대해도 좋아.”

“흐응, 제가 입맛이 좀 까다로워서요.”

“그래봤자, 내 입맛이겠지.”

셀리안은 피식 웃으며 손을 든다. 나와 그의 입맛은 비슷했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그는 그 점에 대해 재미있게 여기는 것 같았다. 의외로, 의외로 그는 내가 ‘그’였다는 것에 나보다도 스스럼이 없었다.

‘그릇 차이일까. 아니면 고집일까.’

그게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다시 존대를 하는군."

"버릇이에요, 랄까. 버릇이야. 리안이 자신을 짐이라고 여전히 부르는 것처럼 말이야."

"흐음, 그렇다고 바로 잽싸게 바꾸는군."

"나보다 어린, 왕도 아닌 백수남에게 존대를 하는 것도 이상하다고 문득 생각해서."

"건방지긴."

흐흥, 하고 이야기하면 그가 피식 웃는다.

“부상 당한 사람들의 회복이 엄청 빠르다며.”

그때 옆 테이블로부터 한 무리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경이적인 회복력이라고 하더군.”

“아아, 덕분에 수도의 재건도 비약적으로 빠른 거라고. 그 녀석 말이야. 애시스에서 온 상인 녀석도 놀라더군.”

상인으로 보이는 남자들이었다. 그들의 화제는 그 재앙의 날 살아남은 사람들의 치유속도가 빠르다는 것이었다. 유리 크레이누가 왕궁 치유사와 의사를 붙이고 지원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경이적인 회복력이라는 이야기. 그 역시, 히아신스에게 조금은 들었던 이야기였다.

“놀랄 것도 없지. 나는 사실 이런 기적을 보았거든.”

“아아. 기적의 날을 이야기하는 거군.”

남자들의 목소리가 작아진다. 작아지긴 했지만 흥분에 차 있다.

기적의 날- 시모갈의 사절이 찾아왔을 때, 병자들이 일제히 병상에서 일어났던 것을 사람들은 기적의 날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폐하가 여전히 키오스를 지키고 있다는 거겠지.”

“처음엔 어둠으로 사라지셨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최근 음유시인 놈들 노래를 들으면 어둠을 빛으로 바꿔 사라진 거라고 하던데.”

“아아, 나도 그 노래 정말 좋더군.”

남자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으면 음식이 나왔다.

"그만 엿듣고 먹지 그래?"

"그걸 꼭 꼬집어 말아야 해?"

돼지 등갈비와 감자, 사과를 함께 찐 요리였는데 버터와 허브 냄새가 먹음직스러웠다.

“혹시, 폐하... 치유 마법 쓰고 있어?”

“폐하 아닌데... 유리를 도와야지. 거의 떠맡긴 거니까.”

경이적인 사람들의 회복속도, 그 이야기에 짐작가는 생각을 물으면 셀리안은 시원스레 인정했다.

떠맡긴 거라... 무너진 나라를 동생에게 넘기다니, 어떤 의미로는 무책임한 게 맞긴 하다. 세피오스 역시 제 아들이 황제 자리를 받아 좋은 것과는 별개로 그를 가볍게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뭘 대가로 한 거야?”

“음..."

그는 그 점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왕궁이 사라진 것도, 키오스가 피해를 입은 것도, 유리 크레이누가 이 시국에 왕이 된 것도. 사실 그는 히아신스에게 쫓겨나는 게 아니다. 형태가 그리 되긴 했지만, 그는 유리 크레이누를 도와 어느 때보다도 바쁘게 왕궁 재건을 돕고 있었다. 왕궁 재건이 빠른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치유 속도가 빠르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히아신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미심쩍어 하던 부분이었다.

뭘 대가로 한 걸까.

심각한 표정을 짓고 물으면 셀리안은 곤란한 듯 고민하다가 또다시 가볍게 대답했다.

"검은 호수?”

“뭐어?”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쾅 소리와 함께 식탁의 음식들이 요동을 친다. 살짝 미풍이 불어 그릇들을 지지했지만, 소리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나는 얼굴을 찌푸린 채 조심스럽게 주저앉는다.

“호수라니...”

“걱정마라. 정화는 하고 있고... 이번에는 이상한 저주도 끼어있지 않으니까.”

셀리안이 내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었다.

“용 두 마리와 왕궁, 뱀의 대장로와 공주까지 삼킨 호수를 어떻게 완전히 소멸시키겠어. 짐의 마나로 가두고 있던 것 뿐이야.”

“...”

“그런 걸 계속 가두니, 마나는 계속 고갈되고. 마침 쓸 곳이 있어 정화해서 쓰기로 한 거지. 짐의 마나도 이 호수가 전부 고갈되면 제대로 기능할 거야. 아마도.”

이걸 천재라고 해야 하나, 대범하다고 해야 하나, 뻔뻔하다고 해야 하나. 기가 막혀 헤매고 있으면 그는 제 접시에도 음식을 덜어 담았다.

“어서 먹지 그래?”

“음, 잘 먹을게.”

“!”

대답한 건 내가 아니었다.

음식을 덜고 남은 큰 접시를 누군가가 제 앞으로 끌어들이며 나와 셀리안 사이에 앉는다.

갈대를 닮은 베이지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리고, 황금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의자를 끌어와 억지로 나와 셀리안 사이에 파고드는 작은 체구의 남자에 셀리안이 얼굴을 구긴다.

“류?!”

“오오, 갈색 머리네. 사실 생각해보니까. 나는 그때 변장하지 않아도 아무도 모르는데... 엘킨 다이브 때문에 괜히 염색했던 것 같아.”

남자가 키득키득 웃으며 음식을 퍼먹는다. 정정, 퍼먹으려 했지만 셀리안이 가볍게 손을 들고, 그가 들고 있는 수저가 무언가에 묶인 것처럼 허공에 고정되었다. 류는 작게 치사하다고 중얼거렸다.

*

불편하다.

그 후, 셀리안과 류는 한 마디도 말을 섞지 않았고, 각자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둘다 번갈아가며 말을 건다. 서로의 말에 끼어들었다가 섞이는 것도 싫다는 듯이.

류는 셀리안에게 요리를 빼앗기고 구운 양파와 당근을 곁들인 오리 콩피를 시켰는데, 반절 정도를 내 접시에 담아주었다. 덕분에 원래의 요리와 함께 내 접시는 포화상태였다.

그리고 대화도 포화상태- 두 남자가 번갈아가며 말을 거는 탓에 머릿속이 엉망이다.

"---?"

"---?"

두 남자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들린다.

그나마- 셀리안이 권한 것도, 류가 권한 것도 분위기와 맞지 않게 엄청나게 맛있다는 게 구원일까. 이 불편한 분위기를 잊을 겸 부지런히 입안으로 음식을 넣기로 한다. 무엇보다 입에 무언가 넣으면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음식을 입에 넣고 볼을 빵빵하게 부풀려 말 할 수 없다는 걸 어필하고 있으면 류가 고개를 갸웃한다. 내가 대답하지 않는 것에 의아해하는 걸까.

“그보다, 너 어째 동글동글해졌다?”

“!”

“...”

셀리안은 류에게는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명백하게 그의 어깨가 떨리는 게 보인다.

...저 자식 웃고 있어.

“아얏-”

쥐고 있던 포크로 먼저 류의 허리를 쿡 찌르면 그가 짧게 신음했다. 아픔은 내게 전이되지 않는다. 감각의 공유는 풀린 것 같다.

바로 그 포크를 셀리안을 향해 던졌다. 셀리안은 휙 하고 피했고, 나는 그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쳤다.

"무슨 짓이냐. 그대는...음, 폭력적이군."

“폭력적인 것도 좋아. 폭력적이고 건강하고 좋은 일이야.”

"...짐... 아니, 나도 그대가 건강한 건 좋다고 생각하지만..."

이 멍청이들!!!

그것은 내 안의 소리 없는 절규였다. 이상한 부분에서 의기투합하지 않으면 좋겠다. 이건 의기투합이랄까, 어째 내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부를 하는 것 같지만 이런 아부는 필요없다.

정말 아부하고 싶으면 통통하다느니, 동글동글해졌다는 말을 애초에 하지 말라고...

*

"아, 나 할 말 있어."

식사가 다 끝날 무렵 류가 입을 열었다.

"말은 계속 하고 있었잖아."

핀잔을 주면, 류는 아랑곳 않고 속삭이듯 내게 바싹 붙었지만- 바로 떨어진다. 셀리안이 손을 들고 있고, 류는 이를 갈았다. 한동안 셀리안과 류는 의자를 움직이는 문제로 말없는 마나 대결을 벌이는 것 같고- 결국 접시가 전부 치워지고 디저트가 나올 무렵 류 쪽이 포기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채 이야기를 잇는다.

"셀리안 크레이누는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 너로부터 나를 떼어놓으려고."

"..."

"알고 있어?"

"뭘?"

지금도 그는 류가 내게 다가오지 못하게 하려 했다. 하지만, 류는 그 황금빛 눈을 묘하게 접으며 웃는다.

말의 꼬리를 잡을 수 없다. 류야 원래 이런 남자지만.

"...죽고 싶나 보군."

"응, 죽여. 네가 날 죽여도 더이상 하영은 감각의 공유를 받지 않으니까... 하지만- 넌 못 하겠지?"

"왜?"

되물은 건 나다. 셀리안의 시선은 날카롭게 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드렁한 것처럼도 느껴졌지만 그 안에는 확실히 짜증스러움이 담겨 있다.

류 역시 셀리안에 맞춰 이죽이긴 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짜증스러운 기색이 담겨 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서늘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서로가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

"내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하나. 언젠가... 네 놈의 소망을 들어주지."

"내 소망? 하하, 내게 자살 의욕 같은 건 없는데. 내 소망은 지금, 어느정도 적용되고 있고- 앞으로- 나는 내가 몰랐던 많은 것을 알 것 같으니까.”

류는 황금의 눈을 셀리안으로부터 떼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윤하영- 행복해져도 되고, 불행해져도 돼. 어느 쪽이든 난 평생 모를 감각이지만, 네가 날-"

"?"

그 눈동자는 사랑스럽다는, 그에게는 어울리지도 않는, 그가 품을 수도 없는 감정을 담아 나를 보았다. 사랑스럽다는 감각과 유사하고 유사해, 정말로 진짜 같은 그런 감정-

“...네 놈- 내가 하영에게 사랑을 주는 걸 느끼기라도 하려는가 보지. 굉장한 변태군.”

잉?

갑자기 셀리안이 분위기를 풀어버린다. 그는 푸시식 바람 빠지는 듯한 비웃음을 흘리며 내게 손을 뻗었다.

무슨 소리일까.

그보다 내게 뭘 줘?

“...리안이 더 변태같아.”

“그렇지?”

“남자는 좀 변태여도 돼.”

“얘 뭐야.”

내 말이... 방금 저 영문 모를 이야기를 하던 류에게 말하던 것과 모순된다. 어느새 나른하게 웃으며 셀리안은 내 손을 끌어당겨 깍지를 꼈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쓰다듬듯 옭아매는 게 쓸데없이 야하다.

"간...간지러워."

"간지럽다니... 아직, 하영은 어린애지만 말이야."

“치사한 자식..."

류가 불쾌한 듯 제 손을 쥐었다 펴면서 간지러운 것처럼 표정을 구기고, 셀리안의 얼굴은 여유로웠지만 어쩐지 불쾌해보였다.

*

류는 끝까지도 특별히, 진과 렌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심드렁하게 내게 얽혀올 뿐이었다.

이건 나중의 이야기지만- 그건 그 후로도 마찬가지였다.

그 날의 만남 이후, 그는 오두막까지는 들어올 수는 없었지만 회복 후 돌아다닐 수 있게 된 나를 자주 만나러 왔다. 셀리안은 싫어했지만.

다만 그의 허리춤에는 내가 준 검이 꽂힌 검집과 빈 검집이 두 개 있었다. 빈 검집 두 개에 새로운 검이 꽂히는 일은, 적어도 내가 아는한 그 후로도 없었다.

*

류와 헤어져, 식당을 나와 어두운 밤길을 셀리안과 함께 걸었다.

“배부르네.”

“그 남자가 준 것 까지 먹으니까 그렇지. 버려도 되는데 말이야.”

“쪼잔하긴.”

달은 휘영청 밝고, 바람은 적당히 산산했으며, 주변은 조용하다. 다만, 하루가 끝나 모두가 잠든 시간 특유의 적막함이다.

그 거리를 나와 셀리안 단 둘이 걷는다. 셀리안의 커다란 손이 내 손을 부드럽게 쥐고 있다. 놓치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집착이 없는, 그저 자연스럽게. 마치 이대로 계속 잡고 있어도, 잡아도 상관없을 것 같은 그런 감각으로 손을 잡고 걷는다.

“역시 이상하네.”

“뭐가? 내가 쪼잔하다는 그대의 말이?”

“아니. 그런 게 아니고-정말. ... 그냥, 다.”

나는 자연스럽게밖에 느껴지지 않는 그의 손을 흔들며 피식 미소를 돌려준다. 갈색이지만, 여전히 강렬하게 타오르는 느낌을 주는 그의 눈동자에 비친 ‘윤하영’은 역시 그렇게 비참해보이지 않았다. 아니 비참해보이지 않는 걸 넘어...

“역시 이상하네.”

“흠...”

셀리안 크레이누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다시 보았다. 그 역시 내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확인하는 것처럼 내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내가 여기 와서 더 나빠진 건지, 좋아진 건지 알 수가 없다. 죽은 사람을 통계적으로 생각하면 더 적은 것 같고 내가 살리고 싶은 사람은 살았지만 죽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죽기도 했다.

결국 이 죄도, 이 찜찜함도 앞으로의 삶으로 갚아갈 수밖에 없다. 그 죄는 이제, 전생의 셀리안 크레이누나 에피룬 크레이누가 아닌 윤하영의 것이었다. 윤하영이 삶으로 갚아야 할 무언가.

어떻게, 에 대한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리안은 나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역시 짐은 멋지군. 아니지, 나-는 멋지군.”

“진짜~ 언제 고치냐. 평생 말 못 고치는 거 아니야? 이 멍청이 전 왕님, 거기다가 왕자병이라니.”

“왕자병? 왕도 아니긴 하지만 왕자를 할 나이도...게다가 사랑하는 여자의 눈에 비친 나는 멋지다는 이야기였는데.”

“우와.”

그의 손을 잡지 않은 한 손으로 양 어깨를 번갈아 긁으면, 셀리안은 다른 한손으로도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내 의지로도 쉽게 손을 뺄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손을 잡고 마주본다.

“그리고, 내 눈에는 그대의 얼굴도- 앞으로 행복해지고 사랑에 빠져 예뻐질 얼굴로 보이는군.”

“...근거 없는 자신감...”

“내가, 그대를 행복하게 할 생각이니까 말이야. 그리고, 나도 점점 행복해지고, 점점 멋있게 그대에게 비춰지겠지.”

“진짜, 바보 같은 이야기만...”

"..."

어이없다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의 손을 마주 꼭 잡는다. 그가 쉽게 뺄 수 없도록. 그렇게. 그렇게 다시금 가까워지면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눈앞의 남자와 완전히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그의 말대로의 미래도, 어쩌면-

'이상한 일이야.'

앞으로 계속 눈앞의 ‘나’이자 내가 결코 아닌 남자와 있는 그런 미래를- 서로의 눈동자에서 확인했다.

셀리안을 따라 여자도 미소짓고 있다. 그 여자가 언젠가 굉장히 행복해질 것 같은 그런 꿈을 꿨다.

- END ... AND

*

*

*

“어머니,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하루는 바쁘다. 밀린 건 없지만 확인이 필요한 일은 늘어난다. 이제 그만해야 할 일, 새롭게 기획해야 할 일, 일상적이고 기본적인 일...

언젠가 이세계에서 온 평범한 여자는- 무얼 했냐는, 어떻게 살았고 무얼 꿈꿨냐는 왕의 물음에 일로 승진하고, 결혼해 가정을 이룬다는- 평범하지만 어쩐지 여자에게는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답을 했다.

그리고 왕은 절박하게 그녀에게 답을 주었지.

'정말 매일이 너무 바쁜 거 아냐...'

나는 세르미아의 인장을 서류에 찍으며 이마를 감쌌다.

[그래, 죽죽 승진해 그대가 세르미아를 더 크게 부흥시켜보는 야망을 꿈꾸는 것은 어떤가. 그대는 꽤 야심가였던 것 같은데... 무엇보다, 엘킨은 매우 좋은 남자니까. 그러니까, 그대에게 분명 행복한 사랑을 줄 거야. 최고군. 일에서도 성공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여자로서의 삶에 그대다운 야심까지 이루고.]

왕이 했던 그 말은- 결국 이루어졌다. 가정을 이루어준 건 말을 했던 왕이었다는 것만이 다르다면 달랐지만.

“어머니!!”

다시 한 번 목소리가 울렸지만, 중요한 서류였다. 눈을 뗄 수가 없다. 이거야 엄마 실격에, 일중독이다.

“하영, 우리 엘렌이 어머니를 부르지 않는가?”

“아아, 알았어! 근데 저번부터 왜그래? 어머니라니, 나 부르는 줄 몰랐잖아."

"거짓말..."

엘렌이 작게 웅얼거린다.

금발에 검은 눈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는 엘렌 세르미아. 나와 셀리안의 딸로 내년 성인식을 치룰, 눈에 넣고 싶을 정도로 예쁘고, 객관적으로 미인이었고, 똑똑하고, 검도 잘 쓰고, 마나도 많아 완벽했지만, 사실 까놓고 보면 무서운 아이다. 이 서류 중 일부는 저 아이가 정의 구현을 위해 철퇴를 가한 사람들의 명단이었다. 거기서 넘어가야 할 사람과 보상해줄 사람을 골라야 한다.

나는 얼른 말을 돌리기로 했다. 팬은 멈추지 않고.

"자~ 엘렌. 엄.마, 엄.마. 아악! 리안, 그만 좀 떨어져."

"으음?"

"~~~"

참고로 일중독이지만 아내 실격은 아니다. 그는 내가 놀아주지 않아도... 지나치게 엉겨붙고 있었다.

‘이제 좀 귀찮...’

마련된 커다랗고 폭신한 의자 위에는 항상 셀리안이 앉아 있었고, 나는 그 옆에 앉아 그의 입맞춤을 받으며 서류를 정리하곤 했다. 제 무릎에 앉으라는 걸 거부하고 옆에 함께 앉아 일할 수 있는 의자로 타협하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왜 그런 걸로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하지.’

가뜩이나 쌓여 있는 서류를 보면 한숨만 나오는 설정이었다. 나는 손을 재게 놀리며 서류를 하나하나 정리했고 오늘 셀리안은 내 바로 뒤에 서서 내 목덜미에 입맞추고 있었다.

이럴 거면 의자는 왜 만들었냐.

“여행을 떠날까 해요.”

팬이 멈추고, 셀리안의 입맞춤도 멈췄다.

책상에 손을 짚고 딸은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빠는 반대야.”

흠, 하는 소리와 함께 리안은 팔짱을 끼며 내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도 팬을 놓고 아이를 보았다.

설마 가출 선언이라니.

엄마의 지나친 일 몰입이 결국은 아이를-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있으면, 리안이 진지하게 일갈했다.

“아직 성인식도 안 한 네가, 그것도 여자애가 여행이라니. 너무 위험해.”

“위험하다니-”

사람들이 위험하겠지. 하지만, 셀리안의 눈은 엘렌이 위험할 거라는 데 한 점 의심도 없어보였다. 나이긴 하지만, 이제 솔직히 좀 모를 면이 많아진다. 셀리안 크레이누가 딸을 낳으면 팔불출이 될 거라는 건 내 기억 속에 없던 미래니까.

“전혀 안 위험해요. 이래봬도 전-”

“위험해..”

“사람들이 위험해. 엄마는 세르미아 가에 피해보상 청구서가 오는 건 더이상 사양이야.”

“어머니!!!”

"난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또- 어머니라니, 귀엽게 엄마라고 부르던 게 한 달 전인데. 이건 정말 무슨 놀이니? 리안이 무슨 소설이라도 보여줬어?”

“설마- 그대도 나도 소설은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 그래, 아빠도 줄곧 따지고 싶었던 일인데, 대체 아버지 어머니가 뭐냐? 귀족 영애가 나오는 소설이라도 읽은 거냐?”

“내가, 이 엘렌 세.르.미.아가 진짜 귀족 영애거든요!!”

앨렌의 가출선언, 아니 여행선언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멍하니 창으로 시선을 주면 류가 창에 딱 달라붙어 있다.

'오늘 왜 이러니.'

그래, 저 자식도 있었다. 요즈음 얌전했는데... 정정, 엘렌을 몰래 몰래 빼가는 것은 마음 졸이게 했지만, 최근은 또 옛날 같은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내 시선을 따라 셀리안도 살짝 류를 보고 미간을 구긴다. 우리는 엘렌이 눈치 채기 전에 얼른 다시 엘렌을 보았다.

갑작스런 여행선언은 어쩌면 류와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

이 아이는 고집이 세서, 한 번 결심한 건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도... 문제였다.

‘히아에게 설득을 부탁할까.’

아니, 어쩐지 히아신스는 적극 찬성할 것 같은 예감이...

"하아."

"한숨 쉬고 싶은 건 나라고요..."

"난 별로... 여행은 반대지만 말이다."

이 좋은 날씨에 딸은 가출 선언에, 옆에는 셀리안 크레이누가 웃고 있고, 책상 위로는 할 일이 쌓여 있다.

원래 세계에서 그랬든 이 세계의 일도 어느새 일상이 되어 있었다. 이 세계가 나의 일상이 된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데는 굉장히 긴 시간이 걸린 것 같기도 하고 짧은 시간이 걸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그런 생각을 한다.

윤하영은 더 이상, 전생의 셀리안 크레이누의 꿈을 꾸지 않게 되었고, 꿈 속에서 보는 건 끝없는 일지옥의 반복이거나, 전혀 의미없는 평범한 꿈이었다. 그리고 가끔, 아니 자주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그런 꿈들이다.

"역시 안돼."

꿈속에는 이제 윤하영과 셀리안 크레이누가 각각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아직도 나는, 이제는 없어진 그 시간을 떠올리지만, 그것은 ‘나’의 기억이나 있었던 과거라기보다는 정말 꿈 같아서. 꿈을 꾸지 않게 된 지금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게 아이러니하지만, 그랬다.

"엄마!!"

"옳지-"

그리고, 눈앞의 아이가, 옆에서 제 딸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보고 있는 리안이 나를 윤하영으로 존재하게 했다.

어쩌면 이런 게 행복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평범한 생각을 할 수 있는 나날들이 계속 되고 있었다.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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