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셰프 영애님 1권
1장
하녀들이 축 처진 내 팔을 비틀듯 잡아 끌어냈다. 끊어질 것 같은 신음에도 아랑곳없었다. 그저 명받은 대로 나를 식당 안으로 욱여넣을 뿐.
“모셔왔습니다.”
하녀의 말에 팔짱을 끼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여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 자막 같은 것이 떠올랐다.
[플로헤타 메리아덴.]
‘내’ 아버지의 네 번째, 아니, 정식으로는 세 번째 부인 후보로 1년 전 이 집안에 들어와 후작 부인 대행 중이다. 그녀가 앉으라는 말과 함께 하인을 쳐다보자 내 곁에 서 있던 하인이 냉큼 의자 위로 나를 찍어 눌렀다.
“네가 하루하루 말라가니 어른들을 뵐 면목이 없구나. 자, 세니아나. 너를 위해 준비했단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테이블에 접시가 올라왔다. 접시의 돔을 치우자 지독한 외형의 음식이 보였다. 반쯤 녹은 연어는 본래 색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잔뜩 곰팡이가 피어 있었고, 진동하는 썩은 내는 구역질이 날 만큼 독했다.
“세니아나.”
그녀가 포크를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나를 불렀다.
“나는 네 천한 어미가 각하를 꼬여내지만 않았다면 일찌감치 이 집안의 안주인이 되었을 거란다.”
“…….”
“그러니 그 천한 년을 빼닮은 네가 오죽 역겹겠니.”
요요한 얼굴이 왈칵 구겨지며 눈초리가 표독스러워졌다. 그녀가 우악스럽게 썩은 연어가 찍힌 포크를 내 손에 쥐여 주었지만, 내가 움직이지 않자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가 매춘부의 자식이 아니랄까 봐 말귀를 못 알아먹는구나.”
하녀들이 킥킥, 조소하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플로헤타는 눈을 부라리며 크게 일갈했다.
“매달아 매질하기 전에……!”
나는 그녀의 입이 벌어지는 틈을 놓치지 않고, 다 문드러져 썩은 물이 줄줄 흐르는 연어를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
“…….”
역한 냄새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상황 파악을 하기까지 수 초.
“꺄아아악!”
플로헤타의 날카로운 비명에 별채가 요동쳤다. 동시에 입에 들어가 있던 연어가 그녀의 무릎 아래로 툭 떨어졌다.
“욱! 웨엑!”
소스라치게 놀란 하녀들이 황급히 그녀에게 뛰어갔다. 플로헤타가 토악질을 하느라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너……, 너! 우웩!”
한겨울에 난방조차 되지 않는 방으로 내몰고, 얇은 홑이불 하나만 덜렁 놔둔 것은 참았다. 수틀릴 때마다 찾아와 시비를 거는 것도 그러려니 했다. 매달아 매질할 때도 꾸역꾸역 눌러 참았단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썩은 음식까지 먹으라고?’
더는 못 참겠다. 나는 바닥에 엎드려 구역질하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나 많이 드세요.”
세니아나는 죽으면 된다고 여겼을지 몰라도 난 아니다. 네 눈앞에 있는 나는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겪은 윤세나였으니까!
* * *
보름 전만 해도 나는 식당을 운영하는 20대의 사회인이었다. 그때의 내 아버지는 좋은 부모라고 할 수 없었다. 노름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여자를 좋아하는 데에 이어 천성이 게을러서 일자리를 구해도 사흘이 못 갔다.
‘그래서 사채 빚이 어마어마했지.’
우리는 매일같이 빚쟁이들에게 쫓겼다. 운 없는 날이면 나 혼자 잡혀서 ‘아버지 있는 곳을 대라’며 두들겨 맞았다. 그래서 여덟 살에 고아원에 버려졌을 땐 차라리 고마울 지경이었다. 물론 고아원이라고 마냥 편한 곳은 아니었지만.
나는 글자도 모르고, 말도 어눌한 데다가 사람이 다가와도 버려질까 두려워 담을 쌓는 아이였다. 그런 탓에 언젠가부터 따돌림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부모님 같은 선생님을 만났어.’
선생님은 날 선 내게 끊임없이 손을 내밀어 주셨다. 철옹성 같은 벽도 그분 앞에선 소용이 없었다. 그분은 내게 유일한 친구였고, 동시에 부모님이었다. 나는 애정을 비롯한 모든 것을 그분에게서 배웠다.
성인이 된 후엔 선생님과 함께 작은 식당을 차렸다. 아주 작지만 내겐 세상 제일가는 안식처였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췌장암이었다. 병을 알았을 땐 이미 손을 쓸 수 없었고, 선생님은 1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선생님의 유골을 바다에 뿌리고 돌아오던 길에 나는 멍하니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덤프트럭에 치였다. 꼼짝없이 죽었구나, 싶었는데 일어나 보니 이 세계였다.
‘―라는 건 흔한 패턴일까.’
소설에선 말이야.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거울을 빤히 쳐다보았다. 청녹발에 짙은 분홍색 눈, 작은 키와 빼빼 마른 몸을 한 소녀가 보였다.
‘세니아나 프렌시프.’
동부의 절대강자라 불리는 프렌시프 가문의 막내딸. 타이틀만 보면 근사할지 몰라도 나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야 가족이 이상하니까!’
세니아나는 위로 오빠가 둘이 있는데 남매는 모두 어머니가 달랐다. 오빠들의 어머니들은 대단한 권력가의 여식이거나 왕국의 공주로 고귀한 핏줄이었으나 세니아나의 모친은 아니었다.
비천한 떠돌이 민족. 그것도 매춘부라는 소문의 노예. 그녀는 세니아나를 빼앗긴 채 성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설상가상 서부로 이동 중에 이민족 탄압으로 사망했다.
사람들은 세니아나만 보면 수군거렸고, 그 때문인지 세니아나의 성격은 표독해졌다. 모든 불행을 가족 탓이라고 여기며 시위하듯이 각종 사건을 일으켰다. 종국엔 극심한 우울증까지 생겨 눈만 떼면 자살을 시도할 정도였다.
‘마지막 시도에 기어이 성공해서 빈 몸에 내가 들어온 거야.’
가뜩이나 꺼림칙한 핏줄을 가진 애가 집안을 매번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 탓에 조부는 세니아나를 혐오했고, 아버지는 피했으며 오빠들은 벌레 취급했다.
1년 전엔 플로헤타까지 등장했다. 처음엔 살살 눈치를 보며 괴롭히더니 점점 정도가 심해졌다. 내가 이 몸에 들어왔을 땐, 하녀들을 포섭해 매질까지 했다.
‘여긴 완전히 헬게이트야. 전쟁 위험 지대라고!’
그런 생각을 하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틀자 나이 지긋한 남자가 나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아, 집사다.’
내가 그런대로 이 세계에 적응하는 건 이것 덕분이었다. 세니아나의 육체가 일부나마 기억을 저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큰 주인님께서 부르십니다.”
집사의 말에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큰 주인님이라면 세니아나의 할아버지를 뜻하는 것이다. 그가 나를 부른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플로헤타와의 일 때문이겠지.
‘우우, 가고 싶지 않아.’
하지만 가지 않으면 더 큰 일이 벌어질 게 틀림없으니 어쩔 수 없이 나는 집사를 따라나섰다.
* * *
내가 홀로 지내는 별채를 떠나 성안으로 들어왔다. 이 몸으로 들어온 지 보름이 됐지만, 성안 구경은 처음이었다.
‘우와아……!’
먼지 한 톨 없는 반질반질한 바닥을 거닐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면은 휘황찬란한 금빛이고, 걷는 곳마다 기가 질릴 정도로 고급스러운 장식물이 놓여 있었다.
‘저 꽃병 하나만 있어도 평생 먹고 살겠다.’
‘세상에, 저 액자는 뭐지? 보석이 빽빽하잖아.’
‘부엉이 조각상 목에 다이아가… 주먹만 한 다이아가…….’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언젠가 티브이에서 보았던 고상한 이름의 프랑스 성이 꼭 이랬던 것 같다.
집사와 함께 대접견실이라는 곳으로 들어가니 조부는 사치스러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양옆으로 세니아나의 두 오빠, 란슬롯과 가웨인이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흑, 흐으윽.”
플로헤타는 란슬롯의 옆에서 연신 훌쩍였다. 눈을 감고 있던 조부가 느리게 눈꺼풀을 올렸다. 세니아나의 눈을 본뜬 것 같은 붉은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내 성에 미친 망아지가 있었군.”
소리를 친 것도, 그렇다고 노려본 것도 아닌데 온몸이 긴장된다. 기묘하리만큼 강렬한 위압감이었다.
‘과연 동부의 왕이라고 불릴 만하네.’
대륙의 패권을 차지한 제국, 그 제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유서 깊은 가문이 바로 프렌시프였다. 그런 집안의 지배자가 바로 나베리우스 프렌시프, 세니아나의 조부다. 그는 이른 나이에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었지만, 여전히 동부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네 행동이 도를 넘었다, 세니아나.”
그러자 플로헤타가 나를 감싸는 체하며 끼어들었다.
“아버님, 모든 게 다 제 탓이에요. 제가 못나서 어미로 인정받지 못했어요.”
그러면서 손수건에 거짓 눈물을 찍어 내는 모습을 보니 대충 상황 파악이 된다. 저 여자가 온갖 거짓말을 섞어서 연어 사건을 일러바친 게 틀림없다.
플로헤타는 어깨를 가늘게 떨며 말했다.
“세니아나, 네 사과 한마디면 나는 괜찮아.”
나는 기가 막혔다. 세니아나의 성격을 뻔히 알면서 이런 쇼라니. 세니아나라면 절대로 사과하지 않을 거다. 정말 잘못을 한 것도 아니거니와 그녀의 자존심상 사과할 리가 없다.
‘그걸 알면서 이러는 건 더 큰 벌을 받으라는 거잖아.’
플로헤타가 다정한 척 내게 다가왔다.
“응? 세니아나,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면 용서해 줄 테니…….”
‘흐음.’
사실 나는 싸움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어제까지 저 여자의 만행을 참았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나를 오래 보지 않은 사람들이 ‘순둥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여기서 요점은 ‘나를 오래 보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는 거다.
나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고아였다.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면 먹이 사슬의 최하층으로 전락하는 건 순식간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나는 조부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음.”
뭐라고 불러야 할까? 사람들은 공경의 의미로 그를 ‘어르신’이라고 불렀다.
‘세니아나도 어르신이라고 불렀어.’
그렇지만 남들과 같은 뜻은 아니었다. 남보다 못한 사이라는 걸 보여 주려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건 역효과만 나겠지. 고민하던 나는 부드러운 어조로 그를 불렀다.
“할아버지.”
―하고.
그의 냉소적인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할아버지께서 정 사과하라고 하신다면, 할게요.”
예상치 못한 말이 연이어 나오자 몇몇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도 제게 사과해 주세요.”
할아버지의 미간이 구겨졌다. 또 무슨 수작이냐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사과를 하는 건 저 여자의 거짓말에 굴복하는 거고, 제가 굴복하는 이유는 할아버지와 다투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뭐라고?”
“그러니까 제가 억울해져서 매일매일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게 되는 건 다 할아버지의 잘못이잖아요?”
할아버지는 한동안 굳어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작은 실소가 흘러나왔다.
“허……. 뭐가 그토록 억울해서 매일매일 눈물로 베개를 적신단 말이냐.”
나는 검지를 쭉 뻗어 플로헤타를 가리켰다.
“제가 준 건 원래 저 사람이 준 음식이거든요.”
대접견실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렇죠?”
플로헤타는 잔뜩 당황해서 입술만 옴짝거렸다. 세니아나는 플로헤타가 이 집안에 들어오기 전부터 삶을 포기했다. 죽을 생각만 했기에 그녀에게 반격한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반격당한 것이니 당황할 만도 하지.’
당황은 흥분으로 이어지고, 흥분한 사람은 틈이 생긴다.
“나는 그게 상한 음식인지 몰랐어! 하지만 너는…….”
그렇지. 지금처럼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거든.
“그렇다면 저도 몰랐겠지요. 좁은 테이블에 함께 있었잖아요. 그쪽이 모르는데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건……!”
당황한 그녀가 할아버지를 힐끔거리다가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거짓말은 그만둬. 너는 알고도 내게 썩은 음식을 먹였어!”
나는 비음을 흘리며 그녀를 지그시 보았다.
“증거는요?”
“뭐?”
플로헤타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녀들이 그 일을 다 보았……!”
하녀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 별채의 하녀는 대부분 그녀에게 매수당했으니까 거짓말을 서슴없이 할 거다. 하지만 예상했던 바이기에 태연히 대꾸했다.
“하녀들이 알았다면 더 이상하지요. 썩은 음식인 걸 알고 내왔다는 거니까요.”
“그, 그건……!”
“주인을 얼마나 무시했으면.”
할아버지는 묘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치를 본 플로헤타가 버럭 소리쳤다.
“나, 나는 그런 느낌을 받았어! 너는 분명……!”
나는 고민하는 척 고개를 모로 꼬았다.
“그러니까 이런 건가요? ‘그런 기분’만으로 이 소란을 만들었다.”
“……!”
그녀는 말문이 막혀서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콱 깨물었다. 할아버지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플로헤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 그게 아니라…….”
그녀가 얼른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일어섰다.
“형편없군.”
“오해예요! 해명하게 해 주세요. 그러니까 이건……!”
“어리석은 녀석.”
“……예?”
“성의 일에서 손을 떼라.”
“그, 그런…… 아버님!”
예비 후작 부인으로 온갖 호사를 누리던 플로헤타는 세상이 무너진 표정이었다. 그녀는 마치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 같았다. 할아버지를 향해 뻗은 손이 달달 떨렸으나 그는 변명을 들어주지 않고 그녀를 지나쳤다. 그때, 할아버지와 나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응?’
세니아나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굉장히 무서웠고, 항상 한심한 눈으로 손녀를 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평소와 표정이 달랐다. 평소처럼 한심하다거나 혐오스럽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어쩐지…….’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라고 생각하며.
* * *
별채로 돌아온 나는 의자에 쪼그려 앉았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대로 살아야겠지.’
이 몸에 들어온 후로 별짓을 다 했으나 돌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귀족은 엄청 잔인했잖아.’
미디어에서 본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권력을 위해 부모가 자식을 희생시키고,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형제가 서로를 죽였다.
‘세니아나의 가족들이 피붙이라고 봐줄까?’
절대로 아니다. 봐줬더라면 애초에 플로헤타의 만행이 불가능했을 테니까.
‘세니아나의 평소 행실상 죽게 될 가능성이 매우 매우 높아.’
머리가 뎅겅, 잘려서 맥없이 떨어지는 상상을 하자 소름이 돋았다.
‘주, 죽긴 싫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
‘그렇다고 땡전 한 푼 없이 도망칠 수도 없는데…….’
끙끙거리며 고민을 하던 나는 이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일단 잘해 주자.”
그러면 쉽게 죽이지는 못하겠지……. 나는 우울한 얼굴로 결심했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세니아나의 기억은 완전한 게 아니었다. 흐릿한 기억도 있고, 아예 지워진 것처럼 모르는 일도 있었다.
‘별채로 쫓겨나게 된 사건도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겠어.’
만약 돌이키기 힘든 일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일이 어디까지고, 모르는 일이 어디까지지?
‘정보원이 필요해.’
정보원으로 가장 적합한 건 하녀였다. 가까이에 있으니 언제든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별채는 플로헤타의 끄나풀로 가득했기에 사람을 잘 보고 골라야 한다.
‘아…!’
그런 생각을 하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시트론!”
이 별채에서 유일하게 플로헤타에게 맞서던 인물이었다.
* * *
나는 시트론을 찾기 위해 방을 나섰다. 하지만 시트론은커녕 사용인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때마침 괘종시계가 뎅― 뎅― 울었다.
‘아, 사용인들의 석간 회의 시간이 이쯤이었던 것 같아.’
나는 석간 회의를 하는 지하로 내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코너 안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쪽으로 걸어가려는데 짝―! 하고 날카로운 마찰음이 들렸다.
“어디서 말대답이야!”
이어서 터지는 고함은 하녀장의 것이었다. 복도 모퉁이를 돌자 예상대로 하녀장이 보였고, 그녀 앞에 낡은 제복의 하녀가 쓰러져 있었다. 쓰러진 하녀를 보자마자 난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이 시트론이야.’
그때 하녀장이 기척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을 본 그녀가 왈칵 인상을 쓰며 침묵했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모르셔도 될 일입니다.”
그녀는 턱을 치켜들고 성가시다는 듯 대답했다. 몹시 오만한 태도였다. 누굴 믿고 이렇게 오만한지는 뻔하지.
‘태도가 딱 플로헤타 판박이잖아.’
하녀장 니콜은 플로헤타의 유모 출신으로 그녀와 함께 이 성에 들어왔다. 그 뒤로 그녀의 충실한 앞잡이가 되어 별채를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플로헤타가 매질할 때, 나를 공중에 매단 사람도 하녀장이었다.
‘내 방에 불도 때지 않고 이불을 뺏어간 것도, 옷장에 가둔 것도!’
다른 건 몰라도 이불을 뺏어 갔을 땐 정말 우울했다.
‘지금은 한겨울이라고. 얼어 죽을 뻔했단 말이야.’
“이 별채에서 내가 몰라도 되는 일은 없어.”
하녀장의 입매가 우그러졌다. 그녀는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고개를 삐뚜름하게 젖혔다.
“사용인을 교육 중이었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되바라졌거든요.”
그녀의 말에 소수의 사용인들이 쓰러진 시트론을 소리 없이 비웃었다. 하녀장과 말을 섞은 건 이번 한 번뿐이지만, 나는 대번에 그녀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오만하고 비열한데 눈치는 없는 사람.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플로헤타의 입에 썩은 연어를 쑤셔 넣었을 때부터 자중했어야 옳다. 그건 내 안에서 무언가 변화했다는 뜻이었으니까.
내가 움직이려 마음먹는다면, 플로헤타를 단번에 아웃시킬 수는 없어도, 하녀 하나의 인생쯤은 쥐고 흔들 수는 있다. 나는 하녀장에게 다가가 짝! 뺨을 내리쳤다.
“이, 이게 무슨 짓……!”
“되바라진 하녀를 교육한 것뿐인데.”
“뭐라고요?”
처음엔 기가 막힌 듯 어버버거리던 하녀는 이내 눈을 표독하게 치켜떴다.
“저는 레이디 메리아덴을 유년 시절부터 모셔 온……!”
짝! 한 번 더 맞은 그녀가 홱, 고개를 돌리고 나를 찢어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노려보았다.
“이 일을 레이디 메리아덴에게……!”
짝! 하녀장이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파르르 떨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서 수치와 굴욕감을 읽을 수 있었다. 세 대를 연이어 뺨을 내리쳤더니 내 손바닥도 새빨갛게 부어올랐다.
‘사람을 때리고 싶지 않지만.’
나는 윤세나일 적 경험으로 진상은 가만히 두면 점점 더 심하게 군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술을 따라 보라고 명령하거나 허리를 쓰다듬으려 굴었다. 경찰에 신고한 후에야 잠잠해지는 종자들이 진상이었다.
손을 가볍게 털던 나는 사용인들을 쭉 둘러보았다. 경악한 사람도 있었고, 긴장한 사람도 있었다. 눈치 있는 몇은 처음 내가 왔을 때부터 쭉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하녀장 또한 그제야 나의 변화를 느끼고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하녀장의 가슴에 달린 휘장을 떼어 냈다.
“해고야, 당신.”
하녀장의 눈이 크게 뜨이더니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무어라 뻐끔거렸으나 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뻣뻣하게 굳은 사용인들에게 말했다.
“휘장을 반납하고 싶은 사람이 더 있어?”
사용인들의 어깨가 흠칫 솟아올랐다.
“아, 아닙니다!”
“여기 외부인을 끌어내.”
“예, 옛!”
하녀장이었던 여자가 당황하며 팔을 내저었지만, 사용인들은 양팔과 다리를 단단히 붙잡고 질질 끌어냈다.
“이거 놔! 놓으란 말 안 들려?! 레이디 메리아덴께서 아시면 너희들이 무사할 성……!”
그녀가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지만 그뿐이었다. 해고에 겁먹은 사용인들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모두 나간 뒤 대기실엔 나와 시트론만 남았다.
“자.”
내가 손을 내밀자 그녀의 동공이 일렁거렸다. 하지만 곧 조심스레 내 손을 잡으며 몸을 일으킨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괜찮니?”
“예.”
“달리 다친 곳은 없고?”
“…….”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회유하시는 건가요?”
‘회유?’
무슨 의미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말했다.
“소용없어요. 저는 이곳을 나가지 않을 겁니다.”
그때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아가씨, 다시는 주제넘은 말을 입에 담지 않겠습니다. 떠나란 말씀만은 거두어 주세요.]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혼란스러워졌다.
‘세니아나가 시트론을 쫓아내려고 했다는 거야?’
어째서? 시트론은 그녀를 위해서 플로헤타와 맞선 인물이었기에 쫓아낼 이유가 없었다.
‘시트론을 싫어한 걸까?’
그렇다기엔 또 이상한 점이 있었다. 가족들과 플로헤타를 처음 봤을 땐 거부감이 느껴졌다.
‘육체가 감정을 기억하고 있어서 그런 걸 거야.’
하지만 시트론은 달랐다. 뭐랄까, 오히려 반가웠다. 나는 짧게 침음을 흘리다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쫓아내려던 게 아니라며 거짓말을 해 봤자 소용이 없을 거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어.”
그래서 나는 ‘말해 줄 수 있는 선’까지의 사실을 얘기하기로 했다.
“네?”
“기억나지 않아. 자살 시도 후에 몇 가지 기억을 잃었거든.”
내 말에 눈매가 발갛게 달아오른 시트론이 치맛자락을 꽉 비틀었다.
“그러니까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차라리 제가 도망치자고 할 때 함께 가셨으면……!”
시트론이 휙 고개를 돌리더니 숨을 골랐다.
‘아, 그래서…….’
이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이 왔다.
‘세니아나는 시트론을 싫어하지 않았어.’
처음으로 받는 호의는 아프다. 마치 아물지 않은 상처에 소독약을 바른 것처럼 쓰라렸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세니아나도 상처받기 싫어서 가시를 세운 것이다. 시트론이 손가락을 꽉 그러쥐고는 고개를 숙였다.
“제가 또 주제넘은 말을 했습니다. 용서하세요.”
그녀의 얼굴 위로 선생님의 얼굴이 덧그려졌다. 나는 얼른 시트론의 손을 잡았다.
“겁이 나서 그랬어!”
그 당시 선생님의 손을 뿌리치며 상처 주었던 것이 가슴에 말뚝처럼 박혀 있었다. 선생님에게 솔직하게 사과하고 싶었는데, 겁쟁이인 나는 돌아가실 때까지 말하지 못했다. 선생님이 달라진 내게 안심하고 떠나실지도 모르니까.
“친절이 나를 약하게 만들까 봐서. 그래서 동정에 익숙해질까 봐 무서웠어…….”
“…….”
“상처 줘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요.
시트론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한참을 내 손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이, 아니, 시트론이 내 손을 뿌리칠까 봐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손이 덜덜 떨렸다. 떨리는 내 손을 바라보던 시트론은 가는 한숨을 흘렸다.
“감사해요.”
“…….”
“사과해 주셔서.”
시트론이 살며시 웃었다.
* * *
나는 시트론과 함께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사실 세니아나가 아니다’라는 사실만 빼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것은 자살 기도 후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는 말로 포장되었다. 내 말을 경청하던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아가씨를 도울 수 있을까요?”
시트론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가 원하는 정보원의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부모 대부터 성에서 일해 정보에 밝아. 무엇보다 신뢰할 수 있지.’
매몰찬 대우에도 시트론은 세니아나가 걱정되어서 별채를 떠나지 않았다. 플로헤타를 고발하려다가 화장실의 오물이나 치우는 신세가 되기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이보다 더 좋은 정보원은 찾을 수 없을 거다. 나는 확신에 찬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뭐든 물어보세요.”
“우선 첫 번째. 저건 대체 뭐야?”
내가 방에 널브러져 있는 책들을 가리켰다. 이건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난 후로 계속 궁금했던 것이었다. 귀족 영애의 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책, 바로 요리서였다.
“아카데미의 교재예요. 동부에서 손에 꼽는 요리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셨거든요.”
“내가 다니는 아카데미가 요리 아카데미라고?”
“네.”
“요리 아카데미가 집안과 무슨 상관인데?”
“그건 황궁 총요리장이 가진 권한 때문이에요. 로열 셰프라고 불리는 총요리장은 식품에 관한 모든 것을 총괄해요.”
“전부라고?”
“네. 식료 물자 관리부터 식품 수출입 허가권까지 그에게 있지요.”
즉, 제국의 돈줄을 쥔 자리라는 거네. 그래서 귀족들이 기를 쓰고 요리를 배우는 건가. 총요리장의 기본은 ‘요리 실력’일 테니까.
“귀족 가의 차남은 모두 식칼을 쥐어 봤다는 말이 있을 정도예요.”
‘그런데 왜 하필 나를? 란슬롯과 가웨인도 있잖아.’
시트론이 내 생각을 읽은 양 덧붙였다.
“큰 도련님은 가문을 이으셔야 하고, 작은 도련님은 기사단을 맡고 계시니까요. 남는 게 아가씨였죠.”
할아버지도 되면 좋고 아니면 마는 식으로 내게 큰 기대는 없었다고 했다. 시트론이 어색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으응. 무슨 뜻인지 알겠어.”
시트론에게 이야기를 듣고 나니 아카데미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론 성적 하위, 실습 성적은 최하위.’
골탕이라도 먹이려는 것처럼 항상 꼴찌 성적표를 들고 왔다.
‘아니, 실제로도 그럴 생각이었겠지.’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시트론을 보았다.
“그럼 할아버지는 성의 일을 잘하는 것보다 요리를 잘하는 걸 더 좋아하겠네?”
“그렇죠.”
내겐 좋은 일이었다. 나야말로 평생 칼을 잡아 왔으니까.
‘하지만 칼질이나 불을 다루는 건 몸에 익어야 하는데.’
세니아나의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시험 삼아 식칼을 잡아 보면 좋겠다.
“시트론. 그럼 혹시 내가 쓸 수 있는 주방도 있어?”
“있지요. 하지만 플로헤타의 계략 때문에 열쇠를 빼앗겼어요. 큰 도련님께서 보관하고 계세요.”
“흐음.”
이제야 내가 뭘 해야 할지 알겠다. 우선은 열쇠를 찾아야지.
* * *
다음 날 성에 들어간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세니아나예요.”
방 안에선 잠시 침묵이 흘렀으나 이내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와라.”
내가 방으로 들어가자 란슬롯이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우리 아가씨가 나를 무슨 일로 찾아왔지?”
란슬롯이 생각보다 친절해서 나는 깜짝 놀랐다. 세니아나의 기억 속의 란슬롯은 음흉한 독사였으나 내가 직접 본 그는 달랐다. 나를 백 퍼센트 호의로 대하는 건 아니지만, 독을 숨기고 내 목덜미를 물어뜯을 때를 노리는 것도 아니었다.
‘열쇠가 란슬롯에게 있어서 다행이네.’
둘째 오빠인 가웨인에게 갔으면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났을 거다. 그보다는 독사라도 대화를 할 수 있는 쪽이 낫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조리실 열쇠를 주세요.”
일순 란슬롯의 미소에 옅은 파동이 일었다.
“일단 앉아.”
그가 소파를 가리키고는 하인에게 차를 가져오라 명했다. 나와 란슬롯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이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구나, 막내야.”
“왜요?”
그의 반듯한 잇새로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와…….’
낮고 아름다운 미성에 절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눈이 동그래진 나를 보고 눈매를 둥글게 휘었다.
“그건 너와 레이디 메리아덴의 관계 때문이야.”
“플로헤타가 저를 싫어하기 때문에요?”
“레이디 메리아덴이 널 싫어하는 이유는 뭐지?”
“어…… 제가 어머니와 닮아서요.”
“나를 여러 번 당황시키는구나.”
내 말에 그는 곤란한 듯한 표정을 하며 중얼거렸다.
‘그게 아니면 나를 싫어하는 이유가 뭐지?’
집중해서 생각하느라 나도 모르게 입술이 헤 하고 벌어졌다. 그러자 그의 오른손이 잠시 움찔했다가 다시 무릎 위에 놓였다.
‘아, 선생님과 비슷한 표정이다.’
선생님에게 믿음이 없을 땐 나도 세니아나만큼 가시가 많은 사람이었던지라 남의 손이 내 몸에 닿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 싶을 때면 가끔 이런 표정으로 손을 다른 손으로 꾹 붙들곤 했다.
“플로헤타가 너를 적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네 신분 때문이야.”
“신분이요?”
그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플로헤타 메리아덴은 아버지와 사랑 없는 결혼을 할 예정이다. 그녀에게 집안일을 맡기는 대신에 메리아덴 가를 지원해 주었다. 물론 프렌시프에서도 이득을 보긴 했지만, 메리아덴처럼 가문이 들썩이는 이윤이 남는 건 아니다. 다시 말해 플로헤타는 어떻게든 집안일을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가장 방해되는 요소는 너다. 너는 그녀의 대체재가 될 수 있는 신분이니까.”
“저는 원래 집안의 일을 하지 않았는데요?”
“사람은 언제 바뀔지 모르는 거지.”
음, 그러니까 이 와중에 내가 뭔가를 하겠다고 나서면 그 여자가 더 불안해지겠네.
‘특히 요리라면 더더욱.’
할아버지가 기회를 준 분야이므로 내가 나서게 되면 원망의 화살은 조리실 열쇠를 준 란슬롯에게도 향할 거다.
“그러니까 오빠는 나를 도와봤자 손해만 생긴다는 거죠?”
란슬롯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리고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목소리로 내게 영리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요?”
“왜지?”
“제가 오빠에게 앙심을 품을 테니까요.”
“뭐라고?”
“제가 ‘제 기능’을 하면 플로헤타는 필요 없는 말이라는 거잖아요?”
“…….”
“저는 이제 제 기능을 할 거고 플로헤타는 필요 없어질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플로헤타와 제 관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오빠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오빠와 제 관계의 이야기라는 거죠.”
이런 말을 할 줄 예상 못 한 모양인지 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 나는 어색한 침묵에 눈을 도륵도륵 굴렸다. 그러다 덜컥 걱정이 들었다.
‘란슬롯이 나를 건방지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그래서 열쇠를 주기 싫다고 하면?’
나는 슬그머니 머리를 숙였다.
“저기, 쓰다듬으실래요?”
“괜찮아?”
그렇게 말한 그가 퍼뜩 미간을 좁혔다.
“이게 아닌데……”
―라고 중얼거리며.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아.’
내가 속으로 한숨을 삼키던 때에 하인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란슬롯이 직접 내게 찻잔을 내밀었다. 뜨거운 차를 호호 불면서 마시자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지?”
“네?”
“갑자기 네가 달라진 이유 말이다.”
“…….”
언제고 이 질문을 받게 될 줄 알았기에 나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알았을 뿐이에요.”
“무엇을?”
“내가 달라지지 않는 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요.”
윤세나일 적에는 어려서도 커서도 미움을 받았고, 평생 불행한 일들이 따라다녔다. 물통에 벌레가 들어 있었을 때. 열심히 한 숙제가 사라졌을 때. 부모 없는 고아라 도둑으로 몰렸을 때. 그때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원래 불행한 사람이라서 불행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을 만난 뒤 세상에 불행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바뀌니 억울한 상황에서도 의연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세니아나도 바뀔 수 있어.’
란슬롯은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열쇠를 줄게.”
“정말요?”
나는 번쩍 고개를 들며 물었다.
“대신,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게 뭐지요?”
“저녁 식사를 하자. 조부님과 함께.”
“그래요.”
내가 선뜻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속내가 예상이 가니까.’
란슬롯은 할아버지의 명으로 내게서 열쇠를 빼앗았다. 그런데 허락 없이 돌려준다면 할아버지는 란슬롯의 저의를 의심할 거다. 플로헤타와 날 싸움 붙여 놓고 이득을 취하려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아예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진 않지만.’
그러나 열쇠를 주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달라진 나에 대한 호의’였다.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에게도 그걸 어필하려는 생각일 것이다.
‘내겐 나쁘지 않은 일이야.’
달라진 나를 보여 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세니아나는 절대로 가족들과 식사하지 않았다. 함께 식사하는 것만으로도 내 변화를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할아버지를 볼 기회잖아.’
“왜 이렇게 순순히 대답하실까.”
그의 물음에 나는 여상하게 대꾸했다.
“한 번이라도 더 봐야 정이 붙지요.”
그가 픽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러워서 기분이 좋았다. 나도 모르게 스르륵 눈을 감을 정도로.
* * *
내가 식당 문을 향해 손을 뻗자 란슬롯은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자, 레이디 먼저.”
그러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정중한 대우가 처음이라서 나는 조금 콩닥콩닥했다. 식당에 들어가니 할아버지와 둘째인 가웨인이 먼저 앉아 있었다. 나는 란슬롯 뒤에 숨어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너…!”
가웨인이 왈칵 인상을 구기며 나를 쏘아보았다. 란슬롯은 그의 어깨를 가만히 누르며 할아버지에게 가볍게 묵례했다.
“세니아나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마침 식사 때라 함께 왔습니다.”
“흠.”
할아버지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잠깐 나를 보았을 뿐 다시 식기로 시선을 돌렸다. 란슬롯은 다른 말 없이 할아버지 맞은편에 가웨인과 함께 앉았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어디에 앉지?’
이런 자리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모르겠다. 꼭 참석해야 하는 만찬 자리 같은 곳에선 할아버지와 오빠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았다. 나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할아버지 옆에 앉았다.
“……!”
가웨인이 크게 놀라 나를 쳐다보았고, 란슬롯도 조금 당황한 듯했다. 할아버지는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스푼이 멈추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만 덩그러니 두고 셋이서 몰려 앉는 건 이상한걸.’
정작 나는 별생각 없이 집사가 내온 게살 수프를 조금 떠먹었을 뿐이었다.
‘맛있어!’
게살은 비린 맛 없이 담백하고, 함께 든 버섯의 식감도 아주 좋았다. 간이 절묘했다. 수프 자체는 짭조름한 편인데 게살 특유의 부드러운 단맛이 식욕을 자극했다.
‘아시아 음식 같은걸.’
고명으로 올라온 길게 채 썬 파라든가, 뒷맛이 얼큰하다든가. 정통 프렌치 요리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내가 음식에 푹 빠져 있었을 때, 할아버지와 오빠들은 대화 중이었다.
“반란군 토벌 건은 얘기 들었다. 우리 군이 수세에 몰렸다던데.”
란슬롯의 물음에 나를 쏘아보고 있던 가웨인이 시선을 거두고 포크를 집었다.
“세드릭 장군의 계책이야. 수세에 몰린 척 농성하고, 지원군으로 반란군의 뒤를 칠 예정이지.”
할아버지가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며 가웨인을 쳐다보았다.
“반란군의 우두머리는 교활한 자다. 빈틈을 보여선 안 돼. 보급엔 문제가 없겠느냐?”
“농성 전에 비축해 두었습니다. 무기부터 식량까지 완벽합니다.”
반란군과의 전투는 워낙에 유명한 일이라서 세니아나도 귀동냥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필립테스 강을 낀 지역에서 전투, 수세에 몰린 척 성문을 닫았다.]
‘잠깐만 강? 강이라고?’
“그거 위험한 거 아닌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니 세 남자의 시선이 쏠렸다. 할아버지가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냐.”
“아, 그게…….”
갑자기 얼어붙은 분위기에 나는 슬쩍 눈치를 보며 말했다.
“필립테스 강은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잖아요.”
즉, 반란군이 있는 지역에서 농성지로 흐른다는 얘기다. 가웨인이 미간을 좁혔다.
“군사들이 강으로 통해서 기어들어 올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란 말이야?”
“독을 풀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가웨인이 실소를 흘렸다.
“물은 따로 비축해 놨어.”
“그러니까 음수의 문제가 아니라 땅이요.”
그곳 주민들은 봄이 되면 농사를 지을 텐데 강이 독에 오염되면 큰일이다. 그렇게 되면 봄이 오기 전에 다른 곳으로 떠나려는 사람들이 분명히 생길 터였다. 농성 중에 떠나려면…….
‘닫힌 성문을 몰래 열어야 할 것 아냐. 그럼 때를 노려 반란군이 쏟아져 들어오겠지.’
두 형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 화났나?’
나는 냅킨 끝을 매만지며 우물거렸다.
“반란군이 방법을 가릴 것 같지 않아서요. 전쟁이란 건 처음부터 비인도적인 일이니까.”
“…….”
“또 반란군의 우두머리가 교활하다고 하셨잖아요. 프렌시프의 군사력이 강대하다는 건 어린애라도 알 거예요. 그런데 너무 쉽게 우리 군의 계책에 넘어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식당이 고요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웨인이 벌떡 일어났다.
“세드릭 장군에게 서신을 보내야겠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저 나를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너 어떻게…….”
“네?”
“아니다.”
그 말을 끝으로 할아버지가 식사를 마쳤다. 란슬롯과 단둘이 식당에 남겨진 나는 어리둥절했다.
* * *
별채로 돌아온 나는 시트론과 함께 전용 조리실로 향했다. 가족 식사에서의 일이 살짝 걸리긴 했지만, 곧 털어 냈다.
‘그래도 열쇠는 받았으니까.’
란슬롯은 식사 후에 나를 불러 열쇠를 건네주었다. 서양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예스럽고 화려한 열쇠였다. 내가 그것을 건네받고 기뻐하자 란슬롯은 다정히 웃으면서 말했다.
[요리를 만들면 맛보게 해 줘.]
―하고. 그가 시식해 준다면 여기 사람들의 음식 취향을 알 수 있으니 내게는 좋은 일이었다. 조리실로 들어간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세상에…….”
시트론이 그런 나를 보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안 쓴 지 오래돼서 조금 지저분하죠? 치우면 말끔해질 거예요.”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너무 멋져서!
세니아나의 지식을 통해 신비한 마도구들이 잔뜩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마력을 전력으로 변환한 전력석으로 움직이는 냉난방 장치나 조명 같은 것들이 그 예였다.
하지만 주방 기구에 관한 기억은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보니 엄청 놀라웠다. 쿡탑은 물론이고, 제빙기까지 있었으나 그중에서 가장 황홀한 건…….
‘대형 오븐!’
나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오븐을 행주로 닦았다. 반질반질해진 표면에 황홀한 표정이 비쳤다.
‘이거 진짜 가지고 싶었는데.’
식당을 하기로 결심했을 때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게 오븐이었다. 하지만 업소용 오븐은 너무 비싼 데다 주방이 작아서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포기했었는데 이곳엔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 오븐이 있었다.
“하아…….”
시트론은 한숨을 내쉬는 나를 보고 안타까워했다. 다시 요리할 생각을 하니 우울해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때 내가 생각하고 있던 건,
‘부자가 최고야!’
―였다. 그날 밤, 나는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온전한 나의 것을 가져본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전용 조리실이라니. 나의 전용. 전용…….’
설렘에 새벽녘까지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었다. 그리고 이튿날, 눈을 뜨자마자 조리실로 달려갔다. 어제와 달리 말끔한 모습인 건 시트론이 새벽부터 부지런히 청소했기 때문이었다.
“칼도 갈아 놓았어요.”
“고마워.”
시트론은 싱글벙글한 나를 보고 기뻐했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마음을 잡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만들 요리는 정해져 있었다.
‘양념치킨!’
여긴 치킨이라는 게 없었다. 이 세계로 온 뒤로 계속 생각나서 한번 만들어 보고 싶었다. 나는 재료실에서 닭과 우유, 각종 조미료 등을 꺼냈다.
‘치킨 파우더는 없지만, 뭐 좋아. 빵가루로 식감을 살리자.’
닭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밑간을 하고 잠시 숙성시켜 놓았다. 숙성되는 동안 양념을 만들었다.
‘과연 미식의 나라네. 케첩도 있고.’
케첩에 고춧가루와 꿀, 마늘과 생강가루 등을 넣었다. 캡사이신 등의 핫소스는 없었지만, 하바네로(고추의 일종)를 넣어서 매운맛을 추가했다. 그 뒤로는 비교적 간단하다. 밑간한 닭에 튀김옷을 입혀 튀기고, 만들어 둔 소스를 넣어서 볶았다. 시트론은 나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응?”
“아……. 아니에요. 실력이 몰라보게 좋아지셔서요.”
“으응, 뭐……. 전에는 하기 싫어서 안 했던 거지…….”
내가 변명하자 시트론은 수긍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곧 완성된 음식을 먹어 본 나는 신이 났다.
‘맛있어, 맛있어.’
여기에 맥주까지 있으면 금상첨화일 거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시트론에게 슥 접시를 밀어 주었다.
“먹어 볼래?”
그녀는 조금 머뭇거렸다. 만드는 건 그럴듯해 보여도 역시 맛엔 신뢰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내 치킨을 입에 넣었다.
“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맛있어요, 아가씨!”
“그렇지?”
치킨은 내가 제일 자신 있는 요리 중에 하나였다.
‘사실 닭 요리는 뭐든 자신 있어.’
돼지, 소보다 저렴해서 단백질이 절실할 때면 닭으로 이것저것 만들었다.
“이 정도면 어르신께서도 크게 만족하실 거예요!”
“그래? 으음, 그럼 란슬롯에게 시식을 부탁한 다음에 할아버지께 가져다드려야겠다.”
“그럼 접시도 좋은 것으로 준비해야겠네요. 계셔요, 제가 다녀올게요.”
“아니야, 같이 가. 나도 장식할 재료가 있나 봐야겠어.”
나는 란슬롯에게 줄 치킨을 덜어 놓은 뒤 시트론과 함께 조리실을 나섰다. 잠시 후, 우리는 식용 허브와 당근을 가지고 돌아왔다. 바로 개수대로 향해서 당근을 닦고 있는데 시트론이 말했다.
“접시 크기는 이거면…… 어머? 아가씨, 요리를 치워 두셨나요?”
“아니?”
그녀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당근을 내려놓고 황급히 그쪽으로 향했다.
“뭐야, 이게 왜…….”
사라졌다. 요리가!
* * *
그 시각, 나베리우스의 서재에서 나베리우스와 란슬롯은 대화 중이었다.
“반란군의 일은 어떻게 되었지?”
“세니아나의 생각이 맞았습니다. 반란군과 맹독을 거래했다는 상단이 있었습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가웨인이 들어왔다.
“상황은?”
“독을 풀기 전에 지원군을 투입했습니다.”
“칼립스를 보내라. 그자라면 확실히 처리하겠지.”
“거리가 먼지라 포털을 이용해야 합니다. 사비에르에서 포털 이용을 허가할까요?”
포털을 이용하면 단숨에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지만, 사비에르 후작가는 프렌시프를 적대하는 권력가였다. 이번 반란군 토벌에 성공하면 프렌시프는 황실로부터 큰 포상을 받을 터. 그걸 아는 사비에르에서 순순히 포털을 열어 줄 리 없었다.
그의 말에 나베리우스가 혀를 찼다.
“항상 포털이 문제로군.”
란슬롯이 동의했다.
“우리 쪽에서도 포털을 확보하고 있다면 좋을 텐데요.”
“포털이 될 마원을 찾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포털을 여는 것은 성녀의 권능이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그 작자의 딸이 성녀라니.”
나베리우스가 짓씹듯 이야기하자 두 형제가 한숨을 삼켰다.
“사비에르 쪽엔 내가 서신을 보내도록 하지. 가웨인 너는 칼립스를 만나도록 해라.”
“예.”
“그리고 란슬롯.”
란슬롯이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십시오.”
“세니아나에게 조리실의 열쇠를 주었다지.”
“예.”
“쓸데없는 수작은 그만둬라.”
나베리우스의 마른 시선이 란슬롯에게 꽂혔다.
“조부님, 세니아나는 달라졌습니다. 죽지 못해 사느니 변화하고자 한다는 말에서 진심이 느껴지더군요.”
“…….”
나베리우스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연초를 물었다.
“그 녀석의 실력은 이미 확인했지 않으냐. 나는 불모지에 투자하지 않는다.”
그때, 가웨인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 실력이 진짜인지는 모르는 것 아닙니까.”
“뭐라?”
“아카데미에서만 4년이 넘도록 수양했습니다. 한데 그것에 비하면 이전에 시식한 요리는 너무 형편없었지요.”
“사실은 제법 요리를 한단 말이냐.”
“의심이긴 하지만…….”
“흐음…….”
나베리우스는 희끗희끗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타당한 의심이긴 했다. 세니아나라면 하기 싫은 일을 하느니 실력을 감췄을 것이다.
‘확실히 달라지긴 했어.’
플로헤타를 궁지에 몰 때부터 세니아나는 이상했다. 썩은 생선처럼 푹 퍼져 있던 눈에 이채가 생기고, 음울하던 표정에 생기가 돌아왔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두고 보도록 하지.”
“옳은 결정이십니다.”
“예.”
대화가 끝나고 란슬롯과 가웨인은 함께 방을 나섰다. 란슬롯이 픽 웃으며 가웨인을 보았다.
“네가 세니아나의 편을 들 줄은 몰랐는데.”
“뭐, 은혜를 입긴 했으니까.”
세니아나가 아니었더라면 반란군의 술수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프렌시프 공자이기 이전에 은혜를 천금처럼 여기는 기사였다. 세니아나가 싫은 건 싫은 거고, 은혜를 입었으면 갚는 게 도리였다.
“그리고 실력이 형편없는 게 아닐지 모른다는 말은 진심이야.”
란슬롯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 동생의 입가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입가에 묻은 그 빨간 건 뭐냐?”
“아.”
가웨인이 입가를 훔치자 양념이 손끝에 묻어났다. 란슬롯은 대답 없는 동생을 빤히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됐다. 점심이나 들러 가자.”
“별로.”
“뭐?”
“배부르거든.”
* * *
‘치킨 도둑…….’
대체 누구지? 시트론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으나 누군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플로헤타의 끄나풀이 아닐까 하는 추측만 나올 뿐이었다.
“알아볼까요?”
“아니야. 괜찮아.”
언제고 요리는 선보일 생각이었으니 들켜도 상관없다. 나는 요리를 다시 만들었다. 이번엔 아예 간장치킨과 프라이드치킨까지 세 종류를 만들었다. 장식까지 예쁘게 해서 성으로 가져갔을 때는 이미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란슬롯의 서재 앞에서 똑똑 문을 두드렸다.
“응?”
대답이 없다.
‘어디 갔나?’
요리만 전달하고 돌아가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지만, 하인도 보이지 않았다.
‘두고 가야겠다.’
나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이상하게 살금살금 걷게 되었다. 책상에 요리를 내려놓은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깜짝이야!’
나는 소파에 길게 누운 인영을 보고 화들짝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가만히 보니 잠들어 있는 란슬롯이었다.
‘참, 란슬롯은 항상 잠이 부족하지.’
기억 속 란슬롯의 수면 시간은 4―5시간 정도였다. 선잠을 자면서도 그의 손엔 서류가 들려 있었다.
‘귀족이라고 마냥 편한 건 아니구나.’
나는 의자에 걸려 있던 재킷을 그에게 덮어 준 뒤 조심조심 손끝에 걸린 서류를 빼냈다. 그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다. 할아버지의 버릇과 비슷해서 역시 피는 못 속인다고 생각했다.
“아, 속눈썹 길다…….”
나도 모르게 조그만 감탄사가 나왔다. 황금색에 가까운 밝은 갈색의 속눈썹은 어찌나 긴지 눈 밑에 그늘을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프렌시프 형제는 타국에까지 유명한 미남이었지.’
[가웨인 님이 기대고 싶은 야성적인 사내라면 란슬롯 님은 유혹당하고 싶은 매혹적인 남자죠.]
―라던 모 영애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의 세니아나는 콧방귀를 꼈지만.
‘내가 보기엔 진짠데.’
목덜미를 살짝 덮는 금발은 세상의 온갖 귀중한 것들을 다 그러모은 것처럼 찬란하게 반짝였다. 키가 훌쩍 크고 어깨도 넓지만, 이목구비가 워낙 섬세해서 그런지 아름답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진짜 잘생겼네.”
“내가?”
“네…. 네?!”
나는 너무 놀라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어느새 깬 란슬롯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미안. 놀랐어?”
“그, 저기, 훔쳐보려던 건 아니고요…….”
원하지 않는데 몰래 훔쳐보는 건 성희롱이고, 나쁜 짓이었다. 내가 울상을 지으며 말하자 그는 픽 웃으며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덮어 주려던 거잖아.”
그가 가슴에 덮여 있던 재킷을 살짝 들췄다.
“네.”
“내가 네 눈에도 잘생겼나?”
그가 뺨을 쓸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조금 민망해져서 슥 시선을 돌리며 웅얼거렸다.
“그렇게까지는 아니고…….”
“그래?”
“그냥 보고 있으면 깜짝 놀랄 정도…….”
란슬롯이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떠는 걸 보고 나는 좀 뾰로통해졌다. 민망한 걸 꾹 참고 진심으로 얘기했는데 이렇게까지 웃다니.
“갈 거예요.”
“미안 미안.”
그가 일어나려는 내 손목을 붙잡았다. 얼마나 웃었는지 눈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용건이 있지 않아?”
“아……. 어제 그러셨잖아요. 시식하게 해 달라고.”
“그랬지.”
“네. 그래서 가져왔어요.”
치킨이 담긴 쟁반을 소파 테이블로 가져오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걸 네가 만들었다고?”
“네.”
“고마워. 잘 먹을게.”
‘어?’
란슬롯은 평소에도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었지만 미소 저편에 얼핏 독니가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빤히 쳐다보자 그는 왜 그러느냐는 표정이었다.
“아니에요. 그럼 저는 가 볼게요.”
“늦었는데 데려다줄까?”
“괜찮아요.”
나서려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요리요. 맥주와 함께 먹으면 더 맛있어요.”
“맥주라고?”
“네. 그런데 지금은 많이 피곤한 것 같으니까 마음에 들면 나중에 몸 상태 좋을 때 다시 만들어드릴게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방을 나온 뒤에 가는 숨을 내쉬었다.
‘왠지 피곤해.’
잘생긴 얼굴은 굉장하구나.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력이 소모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복도를 걷는 중이었는데, 내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우뚝 굳어졌다. 가웨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에 다녀가는 길이지?”
그가 수상한 사람 보듯 내게 물었다.
“란슬롯을 보고 가는 길인데요.”
“무슨 용무로?”
확실히 가웨인은 란슬롯과는 달랐다. 평생 검을 잡아 온 만큼 예리하게 벼린 듯한 위압감이 흘렀고, 서 있는 것뿐인데 솜털이 쭈뼛 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음식을 가져다줬어요.”
“음식?”
가웨인이 고개를 삐딱하게 젖혔다.
“튀긴 닭인가?”
“그렇긴 한데……. 그걸 어떻게 아세요?”
무당도 아닌데 내가 뭘 만들었는지 그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잠시 침묵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기름 냄새가 나잖아.”
“아.”
나는 옷에 밴 냄새를 킁킁 맡았다.
“네. 튀긴 닭 요리예요.”
“더 있나?”
“아니요. 란슬롯에게 가져다준 게 다예요.”
“흠…….”
그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럼 더 만들어.”
“왜요?”
“요리에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니까 나도 먹어 봐야겠다.”
나는 인상을 쓰며 한 발 더 그에게서 멀어졌다.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리고 제가 정말 음식에 나쁜 짓을 했다면, 새로 만드는 요리에는 똑같은 일을 하지 않겠죠.”
“…….”
“저, 저는 갈 거예요.”
난 그렇게 말하고 후다닥 뒤로 돌아 빠져나갔다.
‘되게 무섭다.’
좀 수상해 보였으려나? 하지만 아무런 짓도 안 했는걸. 어차피 란슬롯에게 이상이 생기지도 않을 테니 괜찮을 거다.
“그런데 튀긴 게 닭인 줄 어떻게 알았지?”
그걸 아는 건 시식할 란슬롯과 만든 나, 그리고 나를 도와준 시트론 뿐이었다.
‘아니지. 한 명 더 있긴 해.’
치킨 도둑.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등 뒤를 쳐다보았다.
‘에이, 설마.’
성에서 온갖 맛난 것들을 먹고 사는 가웨인이 왜 그런 짓을 하겠는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 * *
가웨인은 집무실로 들어가려다가 우뚝 멈춰 섰다.
‘남았나?’
란슬롯은 입이 짧으니 남겨 놓았을 수도 있었다. 세니아나의 조리실에서 맛본 짭조름하며 매콤하던 튀긴 닭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오늘 아침, 그가 세니아나의 조리실을 찾은 건 우연이었다. 본래라면 잠겨 있어야 할 건물의 문이 열려 있었고, 안에선 뭔지 모를 맛좋은 냄새가 흘러나왔다. 누가 허락 없이 조리실의 문을 열었나 싶어 들어갔는데 재잘재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야, 같이 가. 나도 장식할 재료가 있나 봐야겠어.]
그건 세니아나의 목소리였다. 세니아나와 하녀가 밖으로 나간 후, 가웨인은 조리실에 들어갔다. 막 만든 듯한 요리가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그것을 맛본 건 우려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절대로 요리 같은 건 하지 않았을 테니까.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인가 싶어 독에 익숙한 제가 맛을 본 것이다.
‘뭐, 나쁘지 않은 맛이었어.’
정신 차려 보니 전부 해치워져 있었다. 가웨인은 제 집무실이 아닌 란슬롯의 서재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란슬롯이 무슨 일이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손에 포크가 들려 있었는데, 아침에 맛본 붉은 닭이 아닌 검은 닭이었다. 가웨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란슬롯에게 다가가 접시를 휙 쳐다보았다.
“……다 먹었군.”
“뭐라고?”
“아니야.”
“시답잖긴.”
란슬롯은 픽 웃으며 빈 접시를 밀어 놓았다.
“세니아나가 만든 요리를 시식했다. 네 말이 맞더군. 실력을 숨겨 온 걸지도 모르겠어.”
막내가 만든 요리는 정말로 괜찮았다. 단맛과 짠맛의 균형이 매우 훌륭했고, 바삭한 튀김옷 다음에 부드러운 닭이 나오면서 양념과 부드럽게 섞여들었다.
“한 번 더 맛보고 싶을 정도야.”
“…….”
“맥주와 잘 어울리는 요리라는데 함께 먹으면 또 어떤 맛이 날지…….”
“맥주?”
가웨인이 눈을 홉뜨고 란슬롯을 보자 그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맥주라면 환장을 하지. 딱 네 취향이로군.”
“…….”
“세니아나에게 부탁해 보든가.”
아직도 세니아나의 만행이 선명하게 떠오르기에 가웨인이 얼굴을 왈칵 구겼다. 그날의 모멸감과 분노는 잊을 수 없었다. 그가 입을 열려던 찰나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란슬롯이 입실을 허락하자 젊은 집사가 들어와 형제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무슨 일이지?”
“레이디 메리아덴이 어르신을 뵙고 있습니다.”
“왜?”
“아가씨의 조리실과 관련된 일인 듯싶습니다.”
“무슨 짓을 벌이는 거지?”
“그것까지는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란슬롯이 재킷을 입고 나서자 가웨인도 그의 뒤를 따랐다. 형제가 나베리우스의 서재에 들어갔을 때, 플로헤타는 누군가를 소개하는 중이었다.
“제 조카입니다. 서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죠. 안드레, 인사드려야지?”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 모습을 본 가웨인은 실소를 삼켰다.
‘무슨 수작인지 알겠군.’
황궁 총요리장은 프렌시프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자리이므로 세니아나가 요리에 능숙해진다면 조부는 지원을 아끼지 않을 터. 그렇게 되면 세니아나의 입지는 지금과 차원이 다를 것이다. 플로헤타가 우려하는 건 바로 그것이었다.
‘그 전에 조카를 내세워 자리를 빼앗겠다는 것이겠지.’
플로헤타의 조카는 적절한 인재였다. 혼인 동맹으로 묶일 예정이니 배신이 쉽지 않은 데다가 서부 아카데미 수석이라면 세니아나보다는 로열 키친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약삭빠르긴.’
세니아나도 마음에 들진 않지만, 저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플로헤타는 연신 싱글거렸다.
“아버님의 생신 만찬에 이 아이의 요리를 내놓을까 해요.”
“흠…….”
나베리우스는 테이블을 손끝으로 툭, 툭, 두드렸다. 그리고 이내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플로헤타의 얼굴이 밝아졌다.
조카와 함께 나베리우스의 방을 나선 플로헤타는 벌써부터 승리한 것 같은 기색이었다. 그녀의 조카 안드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 이모님, 저는 수석이 아니었는데요…….”
“그게 뭐가 중요하니. 성적표쯤이야 학교장에게 돈만 쥐여 주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어.”
“하지만 제가 프렌시프 영애에게 진다면…….”
그 말에 플로헤타는 깔깔 소리 높여 웃었다.
“제깟 게 어딜 감히! 게다가 그 계집애와 나는 여기 수준이 다르단 말이야.”
그녀가 머리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픽, 웃었다.
“예?”
“이미 만찬의 대가를 수배해 놨다. 너는 하는 척만 하면 돼.”
무엇보다 애초에 그 계집애는 글러 먹었다. 매번 성적이 그 모양이었으니 칼 쥐는 법도 제대로 모를 것이다. 그런 년이 만찬 요리라고 제대로 하겠는가. 다 탄 고기나 가져오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렇다면야…….”
안드레가 한숨을 내쉬자 플로헤타는 그의 턱을 강아지 어르듯 매만졌다.
“그 계집애가 쥐어야 할 것들을 전부 앗아다 줄 터이니 너는 이 이모가 시키는 대로만 하려무나.”
“알겠습니다…….”
그녀가 음험하게 웃으며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이튿날, 시트론이 나를 급히 찾아왔다.
“무슨 일이야?”
“플로헤타가 조카를 성으로 데려왔다고 합니다!”
“조카?”
내 물음에 시트론은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눈을 가름하게 뜨고 중얼거렸다.
“할아버지의 생신 만찬이라…….”
시기가 이르긴 하지만, 언제고 플로헤타가 수작을 부릴 줄은 알았다. 그래서 크게 당황스럽지는 않다.
“할아버지 생신이 언제야?”
“열흘가량 남았어요.”
‘열흘이라. 빠듯하긴 하네.’
고민하는 표정을 본 시트론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야 이쪽에서도 나서야지.”
“하지만 상대는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예요.”
나도 10여 년 가까이 칼을 잡았다. 물론 제대로 한 건 6년이 조금 넘지만, 매일 같이 전쟁터 같은 식당 주방에서 프라이팬을 돌렸다. 생각을 마친 나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해 보는 수밖에.”
곧바로 시트론과 조리실로 향했다. 그런데 이전엔 볼 수 없었던 무리가 조리실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시트론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죠? 여긴 아가씨의 조리실이에요. 허가 없인 들어갈 수 없어요.”
그러자 무리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시트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니콜 님……!”
별채의 하녀장이었던 니콜이었다. 별채에서 해고당하더니 플로헤타의 직속 하녀가 된 모양이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비죽 끌어당기며 시트론을 보았다.
“앞으로 메리아덴 가의 안드레 님께서도 이 조리실을 사용하실 거다.”
“누구 마음대로요!”
“메리아덴 영애께서 허락하신 일이야.”
“여긴 본래 아가씨를 위해 지어진 곳이에요. 두 분 도련님께서도 다른 용도로 쓰지 못하는 곳인데 어떻게 레이디 메리아덴이 허가를 한다는 거죠?”
“나눠 쓴다고 건물이 닳는 것도 아니잖니.”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어제 반짝반짝하게 닦아 놓은 조리대 앞에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본인의 레시피 수첩을 읽고 있던 그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드레 메리아덴입니다.”
“…….”
때마침 니콜과 시트론이 따라 들어왔다. 나는 거침없이 걸어가 그에게서 수첩을 빼앗았다.
“같이 쓰지.”
“예?! 이건 제가 피땀 흘려 개발한 레시피입니다!”
“닳는 것도 아니잖아.”
내 말에 니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시트론은 그런 그녀를 보고 실소를 삼켰다.
“조리실을 공유해도 좋아. 하지만 나만 공유하는 건 불공평하지.”
“그, 그게 무슨…….”
“나눠 쓰자고. 이 비장의 레시피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새빨개진 얼굴로 걸어 들어온 사람은 플로헤타였다. 찢어 죽이기라도 할 듯이 쏘아보던 플로헤타가 나를 가르치듯 말했다.
“레시피 수첩은 요리사에겐 천금보다 귀중하단다. 네가 알겠냐마는.”
그녀는 눈치를 보고 있는 제 조카를 토닥이며 나를 돌아보았다.
“아버님께서 안드레에게 만찬에 요리를 내달라고 하셨단다. 귀중한 임무를 맡았는데 정신없는 성의 주방을 쓸 수야 없지. 그러니 네 조리실을 빌려야겠다.”
“…….”
“너도 아버님 생신엔 그분을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니? 고집은 그만 부리렴.”
그녀는 ‘조부의 명이라는데 네가 어찌하겠어?’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 침음을 흘렸다.
“그렇군요.”
“그래야지.”
그녀가 우후후 웃고 있을 때, 나는 안드레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와르르―! 꽝! 안드레의 요리 도구를 바닥에 죄 쏟아 버렸다. 식칼이며 팬, 볼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나뒹굴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녀가 고함을 내질렀다.
“저는 레이디 메리아덴의 조언을 따른 것뿐인데요?”
내 말에 그녀의 눈꼬리가 살쾡이처럼 삐죽해졌다.
“그게 무슨 소리니!”
“할아버지를 위해서 뭐라도 하라고 하셨잖아요.”
“그게 남의 물건을 내던진 것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야!”
“할아버지께선 ‘움켜쥔 것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빼앗기지 말라’고 가르치셨어요.”
“뭐라고?”
“또 할아버지께선 말씀하셨죠. ‘내 것을 노리는 무뢰배에겐 쓴맛을 보여 줘야 한다’고요.”
나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말했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가르침대로 했어요. 그분을 위해서.”
“너……!”
새빨개진 얼굴로 파르르 떠는 그녀를 뒤로하고, 나는 안드레를 쳐다보았다.
“여기서 요리를 해야겠거든 해. 난 나대로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지킬 테지만.”
그가 어깨를 흠칫 오그라뜨리고 마른침을 삼켰다.
“아, 아니요. 저는 다른 곳에서…….”
“안드레!”
“신경 쓰여서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요. 이모님, 제발…….”
플로헤타는 입술을 꽉 깨물고 날 노려보았다.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다.”
나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든가요.”
* * *
플로헤타가 조카와 함께 조리실을 나섰다. 눈치를 보던 그녀의 사람들도 슬금슬금 짐을 챙겨서 떠나자 조리실엔 시트론과 나만이 남았다. 시트론이 걱정되는 어조로 물었다.
“괜찮을까요?”
‘안 괜찮겠지.’
플로헤타는 이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를 노릴 것이다. 할아버지의 생신 만찬에서 안드레가 인정받으면 난 자리를 빼앗길 터. 사람들의 관심이 안드레에게 집중되는 때를 노려 별채에 암살자를 넣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일이 좀 빨라졌을 뿐 언제든 생길 일이었어.’
눈엣가시인 나를 그냥 둘 여자가 아니니까.
‘이렇게 된 거 이번 기회에 플로헤타를 처리해야 해.’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조리대로 향했다.
“시트론, 요리할 거야. 도와줘.”
“아…. 네!”
나는 시트론과 함께 여러 번 칠면조 구이를 시도했다.
“어때?”
시트론이 나의 칠면조를 맛보았다.
“이 정도면 아가씨로선 괄목할 성과이긴 합니다만…….”
하지만 그건 나를 대신해서 키울 만한 요리사가 없을 때의 이야기다.
‘어중간한 건 그 여자 조카만 띄워 주는 꼴이야.’
시트론의 말에 따르면 조카는 수준이 높다. 등수는 차치하고서라도 정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평생을 길라게온의 백성으로 살았기에 이 나라 백성의 음식 취향은 그쪽이 더 잘 알 것이다.
‘잠깐, 취향?’
“그래, 취향!”
“네?”
“할아버지는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지?”
시트론이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한국인에겐 맛좋은 냉면도, 서양인들에게 가면 평가가 바뀐다. 차가운 면 요리라는 게 생소해서 ‘당황스러운 음식’으로 꺼리는 것이다.
‘할아버지 취향을 공략하면 돼.’
내 설명에 시트론은 난처한 표정이었다.
“저는 어르신을 모신 적이 없습니다. 곁에 있는 시중인도 자주 바뀌는 터라 취향은 잘…….”
“주방장은? 주방장은 알지 않을까?”
“접근하기 힘들 겁니다. 경계가 대단하거든요. 플로헤타도 허물지 못한 위인이죠.”
나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했다. 목적지를 알았는데도 길이 어두워서 나아갈 수 없는 기분이었다.
“아!”
시트론이 소리쳤다.
“방법이 있습니다.”
“뭔데?”
나는 반색하여 물었다.
“도련님들이요. 도련님들은 늘 함께 식사를 하시니 알 거예요.”
도련님들이라니…….
‘란슬롯이 이번에도 내 부탁을 들어줄까?’
제 기능을 하겠다고 선언하여 조리실 열쇠를 받아 냈던 터라 계속 그에게 의지하면 우스운 꼴이 될 게 분명하다. 괜히 그의 자비에 기댔다간 애써 쌓은 호감까지 날아가 버릴 것이다.
‘그럼 둘째인 가웨인에게 가야 하나?’
다시금 앓는 신음이 나왔다.
‘무서운데……. 게다가 나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그가 대화를 나눠 줄까?’
찾아갈 핑곗거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우울한 표정을 한 채 성으로 향했다.
* * *
성안에서 반나절을 서성였는데도 마땅한 핑곗거리가 생기지 않았다.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는 중에 모퉁이 뒤에서 하녀들의 기죽은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도련님께 가져가는 거야? 어떡해. 오늘도 찬바람 장난 아니던데.”
“운도 없지…….”
‘가웨인에게 가져간다고?’
핑곗거리다! 그녀들에게 냉큼 다가갔다. 갑자기 다가온 나에게 놀란 그녀들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벼… 별채! 아니, 아가씨!”
“그거 내가 가져갈게.”
내 말에 하녀들의 눈이 도르륵 굴러갔다. 좌우로 구르던 눈이 제 품에 있던 서류에 고정되었다.
“이거요?”
“응. 내가 가져갈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류를 가지고 있던 하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가 폭탄이라도 떠넘기듯 서류를 건넸다.
‘좋은 핑곗거리야.’
기분이 좋아졌다. 그의 서재 앞에서 서둘러 노크를 하려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가웨인이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보았다.
“뭐야.”
나는 눈이 동그래져서 주춤 뒷걸음질 쳤다.
‘우와, 진짜 무섭게 생겼어.’
가뜩이나 차갑게 생겼는데 웃지도 않으니 더 무서웠다. 천재 검사라고 하더니 몸도 진짜 좋았다. 키가 훌쩍 크고 어깨도 떡 벌어져서 마른 몸이지만 덩치가 크게 느껴졌다. 가웨인의 시선이 내가 가진 서류로 향하더니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네가 그걸 어떻게…….”
그는 황급히 주변을 살핀 뒤 내 손목을 쥐더니 휙 하고 방문 안으로 끌어당겼다. 커다란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읽었나?”
그의 목소리가 땅을 뚫고 들어갈 것처럼 낮았다. 무서운 얼굴로 무섭게 구니 진짜 무서웠다.
“아닉! …요.”
딸꾹. 놀라서 딸꾹질까지 나온다. 나는 서류를 쥐지 않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가웨인이 눈썹을 꿈틀거려서 화가 났나 싶었는데 손목을 잡은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줘. 네 손에 있을 물건이 아니다.”
‘어?’
“이리 달라니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힘을 주어 서류를 끌어안았다. 어쩐지 내가 아주 요긴한 것을 들고 있는 것 같다.
“뭐 하자는 거야.”
위협할 듯 으르렁거리는 가웨인에게 서류를 빼앗기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서웠다. 나는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서류를 안 주면 저를 때리실 건가요?”
그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짜증 나는 농담이라는 표정이었지만, 난 진심이었다. 차라리 맞는다고 생각하는 쪽이 편했다. 어차피 아플 테니까 고통만 견디면 된다.
난 폭력엔 익숙했다. 아주 어릴 땐 친부의 빚쟁이들에게 두들겨 맞았고, 나이 들어선 고아원 원장에게 수없이 맞았다. 뺨을 맞아 고막이 터진 적도 있었고, 발길질에 팔과 다리가 한 짝씩 부러진 적도 있었다.
‘맞는 것보다 때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더 괴로워.’
그러니까 가웨인이 선택지를 하나로 좁혀 줬으면 좋겠다.
“저기, 그럼 안 때리실 건가요?”
“내가 널 왜……!”
반응을 보고 알았다. 안 때릴 모양이구나!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네요.”
내가 활짝 웃으며 가웨인을 보자 그의 눈이 잠시 커졌다.
“대체 무슨…….”
황당함에 중얼거리던 그가 왈칵 인상을 썼다.
“여자를 때리는 인간 말종으로 보였나, 내가?”
“아니시잖아요.”
“당연히 아니지!”
“그럼 됐죠.”
나는 가웨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좀 무섭긴 한데…….’
살짝 얼빠진 모습을 봐서일까. 콩콩 뛰던 심장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무섭긴 해도 내 장기에 가격을 매기던 사채업자보다는 덜 했다. 안 때린다고도 하고. 그런 생각이 드니 딸꾹질도 점차 가라앉았다.
“할아버지의 음식 취향을 알려 주시면 드릴게요.”
“저번부터 계속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
“수작은 저보다는…….”
나는 슬그머니 그를 훑었다. 가웨인이 한 손으로 벽을 짚고 있던 바람에 나는 그의 팔에 갇혀 있는 꼴이었다. 남매인 줄 모르고 보면 수작 부린다는 말이 나올 자세였다. 가웨인이 왈칵 인상을 쓰며 나에게서 몇 걸음 떨어졌다.
“장난은 이쯤 하지. 그거 두고 나가.”
“저는 진지한데요.”
나는 진지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왜 궁금한 건데.”
“알아야 할 일이 있어서요.”
“그러니까 그 일이 뭐냔 말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웅얼거렸다.
“할아버지 생신에 요리를 내려고요.”
“네가 조부께?”
“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계속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을 보니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있어 봤자 시간 낭비겠구나. 돌아가야겠지.’
서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가지고 가면 와 줄까? 그런 고민을 하는데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렁한 감.”
황급히 고개를 돌리니 가웨인이 나를 보고 있었다.
“들었잖아. 그러니까 내려놔, 그거.”
그가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감?’
물렁한 감이면…….
“홍시.”
내 말에 그가 고개를 홱 돌리는 것을 보니 그렇다는 뜻인 듯했다. 나는 뽀르르 달려가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단 걸 잘 드세요?”
동공이 미약하게 흔들릴 뿐 이번에도 답이 없었다. 한 번 더 되물었다.
“단 걸 좋아하시는 거예요?”
“그렇진 않아. 하지만 뭐…… 입맛이 바뀐 걸지도.”
가웨인이 중얼거렸다.
“좋아하지 않던 면도 자주 드시니까.”
‘홍시와 면이라고? 어, 설마…….’
머릿속의 전구에 번뜩 불이 들어왔다.
“고마워요!”
나는 가웨인의 손을 붕붕 흔들고 방을 나선 뒤 급히 별채의 조리실을 찾았다. 만찬 요리의 재료를 옮기던 시트론이 홍조 띤 나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아가씨?”
“필요한 재료가 있어. 아, 근데 이 계절에 있을까?”
“그게 뭔데요?”
내가 재료를 말해 주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할 수 있긴 할 거예요. 그런데 그걸 어디에 쓰시려고요?”
“요리에!”
시트론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자포자기했나 하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그것을 가져오겠다며 조리실을 나섰다. 내 생각이 맞다면 ‘그 재료’가 이번 일의 결과를 좌우할 거다.
* * *
란슬롯이 늦은 시간에도 불이 켜진 세니아나의 조리실을 보고 있을 때였다. 바스락, 마른 풀 소리와 함께 가웨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란슬롯에게 말을 걸던 그가 별채의 불빛을 발견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때마침 별채에서 재잘거림이 들려왔다.
“아가씨, 이번에도 고기가…!”
시트론의 목소리 뒤에 끄응 앓는 소리가 딸려 왔다.
‘정말로 조부님의 생신에 요리를 선보이겠다는 건가.’
가웨인이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미친 걸까.”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이전처럼 완전한 혐오는 아니었다. 란슬롯은 빙긋 미소지었다.
“인정할 건 인정해라. 달라진 건 맞아.”
“형은 저걸 믿어?”
란슬롯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살 시도 후 깨달음을 얻었다’라는 세니아나의 말을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었다. 과거의 세니아나는 기분 나쁜 여자였다. 창백한 얼굴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걷는 모습이 산송장을 방불케 했다. 독선적이고 신경질적이라 주변에 남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변했다.’
반란군의 계략을 짚어내고, 요리를 하려 드는 데다가 혐오하던 가족들과 말을 섞었다.
[쓰다듬어도 돼요.]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란슬롯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겉보기엔 부스스한 머리카락의 촉감이 꽤 좋았다. 해초 같은 머리칼이 손가락에 부드럽게 얽혀들었고, 세니아나는 고양이가 골골거리듯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묘했지.’
사방을 경계하며 하악질하던 고양이가 제게만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느낌은 결코 싫은 기분이 아니었다. 란슬롯은 픽 웃고는 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문에 이득이 된다면 응원할 일이다.”
“저러다 말 거라는 데 내 검을 걸 수 있어. 하다 말면 이득이고 나발이고 없잖아.”
“메리아덴의 견제 도구로는 저만큼 훌륭한 게 없지.”
“뭐…….”
거기에 있어선 가웨인도 동의했다. 플로헤타는 벌써 프렌시프 후작 부인이 된 것처럼 날뛰었다. 일전에 조부 앞에서 세니아나와 그 난리를 친 이후에야 조금 얌전해졌다.
“조부께선 그 여자를 언제까지 놔두실 거래?”
“완전히 눈 밖에 나지 않는다면 나서지 않을 생각이신 듯한데…….”
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난 슬슬 거슬리기 시작하네.”
그녀의 부친인 메리아덴 백작은 프렌시프 내에 딸의 세력을 만드는 데 혈안이었다. 몇몇 가신의 자택으로 금화 실은 수레가 들어갔다는 보고가 있었다. 플로헤타가 손주를 낳은 후에 그 아이를 프렌시프의 후계로 만들어 가문을 주무를 속셈일 것이다. 가웨인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세니아나를 도우려고?”
“스스로 기회를 만든다면.”
란슬롯이 빙그레 웃었다. 늘 그렇듯 사람 좋아 보이는, 녹아내릴 듯 아름다운 미소였다. 가웨인은 그런 형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하여간 독사라니까.’
―하고 생각하며.
* * *
파티 당일, 플로헤타가 수배한 요리사는 은밀히 성안에 들어왔다. 그가 만든 시범작을 맛본 플로헤타의 표정이 만족스러웠다.
“먹을 만은 하군.”
오만하게 말했지만, 실은 정말로 괜찮은 요리였다. 고기 자체엔 간이 심심해도 소스와 함께 먹으면 기가 막힌 하모니를 자아냈다. 플로헤타의 조카인 안드레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요리사는 안드레를 대신해 모든 것을 준비했다. 이대로 굽기만 하면 그들이 맛본 완벽한 맛의 칠면조가 완성될 거다. 플로헤타는 시계를 보며 뇌물을 먹여 둔 문지기가 교체될 시간을 확인했다.
“굽는 건 이 아이가 할 테니 너는 그만 성을 떠나도록 해라.”
“하지만 제 요리의 관건은 불 조절…….”
“하라는 대로 해. 네깟 게 감히 대꾸할 생각 말고!”
날카로운 말에 요리사는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요리사를 쫓아내듯 내보낸 후, 안드레는 굽기에 열중했다. 맛보니 요리사의 것만은 못해도 그럴듯했다. 다소 퍽퍽하긴 하지만, 어차피 세니아나의 요리와는 비교가 안 될 것이다.
“세니아나, 그년이 놀라서 까무러칠 거다.”
플로헤타는 깔깔 소리 높여 웃었다. 제깟 년이 잘난 척을 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래도 자신 있으니 요리를 하겠다고 나선 게 아닐까요?”
“아카데미에선 내내 꼴찌만 하던 계집이야. 뭘 그리 불안해하니.”
그 말에도 소심한 조카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하긴, 완벽하게 코를 눌러 주려면 아예 나서지 못하게 하는 게 나을지도.’
그 계집애가 요리에 재주가 없다는 건 어르신이 제일 잘 안다. 문제는 의욕이었다. 지금은 요리지만, 실패 후엔 다른 것을 하겠다고 나설지도 모른다.
‘그게 집안의 일이 된다면 골치가 아프지.’
이전처럼 제 앞에선 고개도 못 들도록 완전히 어르신 눈 밖으로 밀어내는 게 좋겠다. 플로헤타가 별채의 하녀를 호출했다.
“별채는 뭘 하고 있지?”
“단장 중입니다.”
“그래?”
플로헤타가 머리끝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 애가 오늘 같은 큰 파티에 와도 될까……. 자진 시도의 충격이 아직 남아 있지 않겠니?”
“예?”
“푹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다. 기왕이면 오늘 내내 단잠에 빠지는 것도 좋겠지.”
플로헤타는 작은 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종이에 싸여 있던 흰 가루를 확인한 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 녹여 별채에 가져가겠습니다.”
플로헤타는 픽, 웃고 말귀 빠른 하녀에게 돈 몇 푼을 쥐여 주었다.
* * *
해가 지자 만찬장에 불이 들어왔다. 프렌시프의 권력에 기대고 싶어 하는 하이에나들이 플로헤타의 주위에 북적였다.
“영애께선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십니다.”
“꽃과 함께 있으니 누가 꽃인지 분간이 안 갑니다.”
귀족들이 제 앞에서 손바닥을 비비는 건 언제라도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프렌시프 후작과 약혼 전엔 ‘황도의 개다래 열매’라고 불렸었다.
개다래 열매란 혼기 넘은 남녀를 부르는 은어로, 열매가 맵고 써서 약용할 뿐 먹기 위해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문은 괜찮아도, 매력이 없다는 조롱이었다.
플로헤타는 번듯한 가문, 아름다운 외양임에도 연인이 생기면 석 달을 못 갔다. 그런 그녀가 프렌시프 후작의 약혼녀가 되자 뒤에서 비웃던 사람들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었다. 어디를 가도 플로헤타가 주인공이었고, 늘 꿈꿔 왔던 상황이 현실에 녹아들어 환상적인 일상으로 바뀌었다.
플로헤타가 만찬장으로 걸어오는 두 남자를 발견했다.
“란슬롯, 가웨인!”
그녀는 자랑하듯 아름다운 새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란슬롯과 대화하고 있던 가웨인이 인상을 썼다. 플로헤타는 성큼성큼 걸어가, 태도에 귀찮음이 역력한 가웨인의 팔을 잡았다.
‘각하를 처음 만났을 때가 딱 가웨인의 나이였어.’
황궁 파티에서 만나 첫눈에 빠졌을 때의 아서 프렌시프가 떠올랐다. 플로헤타가 황홀한 표정으로 가웨인의 팔을 쓰다듬었으나 그는 냉정하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녀는 아이가 아직 숫기가 없다며 깔깔 웃었지만, 메리아덴 백작은 표정을 굳혔다.
‘건방진 놈.’
그가 이를 득득 갈고 있을 때, 누군가 물었다.
“오늘 파티엔 두 분만 참석하시는 겁니까?”
만찬이 시작했는데도 세니아나는 보이지 않았다. 마침 만찬의 주인공인 나베리우스 프렌시프가 들어왔다. 플로헤타는 이때다 싶어 난처한 듯 중얼거렸다.
“그게…….”
“몸이 안 좋으시다더니 큰 병인 겁니까?”
“아침만 해도 말짱하기에 기운을 차린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나 봐요.”
“예?”
“몸이 안 좋으니 오지 않겠다더라고요. 얼굴만 비쳐 달라고 설득하긴 했지만…….”
의뭉스러운 태도에 파티장이 술렁였다.
‘정말 아픈 게 아닌 모양인데?’
‘제 조부의 생신이 아닌가. 이럴 때도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고?’
‘망나니 버릇이 어디에 간답니까. 어르신께서 막내 손주 키우기엔 실패하신 게지요.’
‘어르신 망신은 제가 다 시키는군.’
사람들이 속닥거리며 나베리우스를 힐끔거렸다. 그 또한 세니아나가 오지 않은 것이 언짢은 듯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었다. 플로헤타는 웃음을 삼키고 당황한 척 중얼거렸다.
“이게 다 제가 부족하여…….”
말하는 도중에 사람들의 시선이 문가로 집중되었다. 예상치 못한 인물이 들어온 것이다.
“늦었습니다.”
세니아나 프렌시프가 트레이와 함께 등장했다. 그것도 프렌시프 가의 광견이라 불리던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말이다. 덥수룩하고 치렁치렁하던 머리를 곱게 땋아 한쪽으로 늘어뜨렸고, 칙칙한 무채색 드레스 대신 밝은 제비꽃 색깔의 드레스를 입었다.
조금 깔끔해졌을 뿐인데도 평소에 워낙 꾸미지 않았기에 변화가 선명히 느껴졌다. 플로헤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떻게 저 계집애가…!’
* * *
나는 소란스러운 회장을 한 번 둘러보고, 할아버지에게 향했다.
“생신 축하드려요.”
“…….”
할아버지는 눈썹을 한 번 까딱였을 뿐 말이 없었다.
‘늦어서 화가 났나? 하지만 요리 때문에 어쩔 수 없었는걸.’
나의 칠면조 구이는 시행착오 끝에 완성되었다. 단장할 시간도 부족해서 제대로 꾸미지도 못하고 왔다. 할아버지가 만찬 테이블의 상석에 앉는 것이 보였다.
‘오늘은 평소의 세니아나처럼 행동하는 게 좋겠지.’
가족들만 있는 자리가 아니기에 나는 그와 멀리 떨어진 의자를 향해 다가갔다.
“이리로.”
할아버지는 자신의 바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아버지가 없을 때면 항상 플로헤타의 자리였던 곳이다.
‘응?’
의아했지만 시키는 대로 할아버지의 옆에 앉았다. 플로헤타의 움켜쥔 주먹이 바르르 떨리자 메리아덴 백작은 자중하라는 듯 그녀를 툭 쳤다. 그제야 그녀는 엉거주춤 내 옆자리에 앉았다.
프렌시프 가의 일원―반쪽 일원까지도―이 모두 착석하자 손님들도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의자 끌리는 소리에 시끄러운 틈을 타 플로헤타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왔니.”
속삭이는 목소리에 난 태연히 대답했다.
“걸어서요.”
그녀가 휙 고개를 꺾어 살쾡이처럼 날카로운 샛노란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그녀가 궁금해하는 것이 뭔지 안다.
‘차를 왜 마시지 않았냐는 것이겠지.’
하지만 나는 물음에 답을 주지 않았고, 그녀는 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나는 샐러드를 먹으면서 주변을 구경했다. 다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식사하고 있는데, 한 사람만은 달랐다. 할아버지는 반쯤 녹은 치즈를 조금 떠먹을 뿐이었다. 그때 플로헤타가 그를 불렀다.
“아버님, 제 조카가 아버님을 위해 만든 칠면조를 내오겠습니다.”
그녀가 손을 올리자 하녀들이 커다란 은쟁반을 가지고 들어왔다. 쟁반의 크기가 엄청났는데, 내 것과 비교하면 거의 두 배, 아니, 세 배는 되어 보였다. 하인이 은돔을 열자 식당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오오! 굉장하군!”
칠면조는 보통 1미터쯤 되는데 이건 그 두 배는 커 보였다. 질 좋은 칠면조가 윤기로 반질반질했고, 육류 구이 특유의 구수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플로헤타는 의기양양하게 할아버지를 보다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니아나도 아버님을 위해 준비한 게 있는 모양인데…….”
그러고는 시트론이 잡은 트레이를 흘낏 쳐다보았다. 감탄을 자아낸 요리 뒤에 내 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명백했다. 제 조카의 훌륭한 칠면조와 비교당하길 바라는 것이다. 플로헤타의 의도대로 사람들은 큰 관심을 보였다.
“프렌시프 양의 요리라니.”
“어허, 이거 놀랍군.”
체면을 잊고 목을 길게 뺀 자도 있었다. 내가 시트론에게 눈짓하자 그녀는 쟁반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돔을 열었다.
“하…하하, 이거 아주 사랑스러운 칠면조로군.”
“영애께서 애쓰셨겠습니다. 요리는 금세 느는 게 아닌데요.”
“그렇지요. 정성의 산물이라는 게 중요하지요.”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애써 내 요리를 칭찬했다. 내 칠면조는 한눈에 봐도 플로헤타가 내민 칠면조보다 못했다. 플로헤타 조카가 만든 칠면조 요리는 살이 탱글탱글하고, 빛깔이 고왔다. 하지만 내 것은 아주 작은 데다 살은 물러 보이고, 양념에 절였기에 색마저 탁하다. 풋, 하고 플로헤타에게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세상에, 세니아나. 귀엽기도 하지.”
플로헤타는 까르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서툴게 노력한 모습이 귀엽지 않습니까?”
그러고는 하인을 불렀다. 나와 그녀의 칠면조를 각각 덜은 하인이 할아버지에게 가져갔다. 할아버지가 먼저 맛본 건 플로헤타의 칠면조였다. 소리 없이 칠면조를 씹던 할아버지가 미간을 좁히자 메리아덴 백작이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입에 맞으십니까?”
“나쁘지 않군.”
플로헤타와 메리아덴 백작의 입이 함지박하게 벌어졌다. 할아버지는 평생 ‘로열 키친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혔던 요리장’의 음식을 먹고 살았다. 그런 그가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는 것은 정말 훌륭한 음식이란 것이다. 귀족들은 오! 하며 탄성을 터뜨렸고, 플로헤타는 벌써 승리한 기색이었다.
그리고 이번엔 내 차례. 할아버지가 천천히 고기를 입에 넣었다. 회장에 조금 전과는 다른 긴장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나베리우스의 입을 주목했다. 씹기를 서너 번쯤 하더니 꿀꺽, 목젖이 부드럽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가웨인이 세니아나의 고기를 한 번 쳐다보았다.
‘몇 번 안 씹혔군.’
너무 무르다. 프렌시프 성에 질 낮은 칠면조가 있을 리 없으니 음식에 문제가 있었다면 모두 요리사의 솜씨 탓이다. 그런데 나베리우스의 손길이 멈추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훌륭한 메리아덴 가의 칠면조는 한 번 맛을 본 게 다였다. 메리아덴의 요리에 못 미치는 세니아나의 요리를 어째서? 만찬장에 있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죽인 채 속삭였다.
“설마 손녀의 면을 세워 주려는 건가?”
“그럴 리가. 혈육에도 냉정할 만큼 엄격한 분이시오.”
플로헤타는 입술을 짓씹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녀가 세니아나를 노려보았다. 세니아나는 마치 예상에 들어맞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옅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번 일에 가장 놀란 사람은 시식한 당사자, 나베리우스였다.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목 안으로 넘어가는군.’
칠면조의 식감을 완전히 뭉개 버렸는데도 자꾸만 손이 가는 건 양념 때문이었다. 보통 칠면조의 소스는 맵거나 시기 마련인데, 이것은 달고 짭조름했다. 속살을 집어 올릴 때마다 수프의 그것처럼 양념이 주르륵, 접시 위로 흘러내렸다.
‘이 달콤한 건 꿀인가. 아니, 꿀뿐만이 아니야.’
익숙한 향기였다.
‘홍시?’
요새 즐겨 먹는 것을 어떻게 안 것인가. 나베리우스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세니아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앞에 놓인 접시를 텅 비운 채.
* * *
성공이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람들은 물론이고, 란슬롯과 가웨인마저 놀란 듯 할아버지가 비운 접시를 쳐다보았다.
‘예상이 맞았어. 그래, 배가 고프셨을 거야.’
평소에 음식을 제대로 드시지 못했을 터였다.
‘이가 아파서!’
나는 가웨인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홍시를 ‘물렁한 감’이라고 표현한 것에서 말이다. 가웨인이 홍시라는 단어를 몰랐을까? 어린애가 아니고서야 그럴 리 없다.
‘그래서 생각했지.’
할아버지가 그것을 ‘물렁한 것’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하고. 면을 즐긴다는 것도 힌트 중 하나였다. 그래서 나는 시트론에게 파인애플과 키위를 구해 오라고 했다. 파인애플에 있는 브로멜린이라는 성분과 키위에 있는 액티니딘이라는 성분은 단백질을 녹인다.
‘그래서 형태만 남을 정도로 육질을 녹이고, 불고기 양념으로 쪄 냈지.’
굽는 것보다 쪄 내는 게 육질을 부드럽게 한다는 건 상식이다. 거기다 양념에도 꿀과 홍시를 듬뿍 넣어 보다 촉촉하고 부드럽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에서 요리와 재능이라는 단어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나의 평가가 상당히 올라간 듯했다. 란슬롯은 부드럽게 웃으며 할아버지를 보았다.
“두 요리 모두 훌륭한 선물이로군요.”
“흠…….”
“두 요리 중 훌륭한 쪽에 답례를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만찬의 여흥이 될 겁니다.”
귀족들이 껄껄 웃으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플로헤타는 예상과 다른 상황에 놀란 듯했지만, 이내 손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조카가 만들었다는 칠면조 요리도 상당히 훌륭한 축이었다. 나의 요리를 더 많이 먹긴 했지만, 객관적인 판단은 다를 거라는 희망이 엿보였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곤 포크를 집었다. 어느 접시에 포크가 올라가느냐에 따라 승자가 결정된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의 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달칵, 포크가 내려갔다. 나의 접시에.
“오오!”
탄성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란슬롯은 빙그레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자, 세니아나. 조부님께 바라는 바를 말씀드려라.”
나는 두 손을 맞잡고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저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란슬롯과 가웨인, 그리고 할아버지까지도 나를 주시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저를 구해 주세요.”
그리고 검지를 쭉 펴 플로헤타를 가리켰다.
“저는 저 사람에게 학대당해 왔습니다.”
나는 떨리는 눈빛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제가 바라는 건 그 일에 관한 진상 조사예요.”
가웨인의 표정이 얼어붙고, 란슬롯도 얼굴을 굳혔다. 내 입에 이러한 말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뭐, 뭐라고?”
“무슨……!”
회장에 폭탄이라도 놓인 것처럼 터져 나갈 듯한 소음으로 가득해졌다. 플로헤타는 새파랗게 질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 무슨!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버님, 전 그런 적 없……! 이건 모함이에요!”
메리아덴 백작의 동공이 바르르 떨렸다.
“영애, 이성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제 딸이 무슨 이유로 영애를 학대하겠습니까!”
“네, 그래요! 제가 어떻게 세니아나를……!”
플로헤타는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생각에 잠긴 듯 손끝으로 테이블을 툭, 툭, 칠 뿐이었다.
“어르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건 여흥이 아닙니다. 정식으로 항의하겠습니다!”
다급해진 메리아덴 백작이 협박하듯 나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때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 홀로 막내의 말을 잘못 들은 모양입니다.”
란슬롯이었다.
“예?”
“막내는 진상을 조사해 달라고 했지, 무작정 믿어 달라고 한 것이 아니잖습니까.”
“그건……!”
“오해가 있었다면 조사를 하여 풀면 될 일.”
“하지만 가당키나 한 소리입니까! 말도 안 된다고요! 영애가 제 딸을 매도하고 있습니다!”
가웨인이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백작을 쏘아보았다.
“그러니까 매도인지 아닌지 확인을 해 보자는 게 아닙니까.”
형제의 말에 메리아덴 백작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조부가 손을 들어 올리자 터져 나갈 것처럼 시끄러웠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란슬롯은 헤더우드에게 조사를 명해라.”
헤더우드는 황궁 조사관 출신의 우직한 남자였다. 목전에 칼이 들어와도 거짓을 말하지 않을 자로, 이 자리에 있는 모두 그의 일화를 알고 있었다. 회장에 침묵이 이어지던 때에 할아버지가 나에게 말했다.
“내겐 오해로 사단을 만드는 손주 따윈 없다.”
학대가 사실이 아니었다고 밝혀질 시엔 역풍을 맞을 각오를 하라는 뜻이었다.
나는 파티장을 나서는 란슬롯을 따라갔다. 그가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헤더우드 경에게 제 말을 전해 주세요.”
“그는 청탁 같은 건 받지 않는 사람이야. 물론 협박도 통하지 않지.”
“제 조리실에 증언할 사람이 있어요.”
“뭐라고?”
그 말에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사람들은 나를 바보로 알아. 증거도 없이 이런 일을 벌일 리 없잖아.’
몇 시간 전, 별채 하녀가 차를 가져오며 란슬롯을 언급했다.
[란슬롯 도련님께서 보내 주신 귀한 차입니다.]
나는 듣자마자 시트론에게 명해 그녀를 붙잡았다. 이 일을 전하니 란슬롯의 표정이 묘해졌다.
“너는 내가 보내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확신했지?”
“그야 이상한걸요.”
“무엇이?”
‘별채의 하녀’가 ‘란슬롯의 명’을 받았다는 게.
“별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플로헤타의 세상이었잖아요. 제게 선물을 보내려 했다면 간계를 꾸밀 수도 있는 별채 하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보냈겠죠.”
게다가 굳이 파티 시작 전에 차를 보낸다는 것도 수상하다. 내 말을 듣고 란슬롯이 물었다.
“어떻게 확신하지?”
“오빠는 똑똑하니까요.”
란슬롯이 그런 걸 놓쳐서 불상사를 만들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그가 눈을 가름하게 떴다.
“내가 너를 해하려 했을 수도 있어.”
“아니요. 그럴 수 없어요.”
나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는 플로헤타의 견제 도구로 쓸 만하잖아요. 그러니까 오라버니는 이용 가치가 있는 저를 버리지 않을 거예요.”
란슬롯의 눈이 조금 커지더니 이내 부드럽게 휘었다. 그는 헤더우드 경에게 꼭 전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덕에 조사는 생각보다 더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 * *
헤더우드 경의 보고서가 할아버지에게 전달되었다. 플로헤타는 만찬에서의 당황이 거짓말인 것처럼 기세등등했다. 학대의 현장을 목격한 건 별채의 하녀들뿐이었고, 그들은 침묵했다. 아예 팔을 걷어붙이고 도운 이들의 수도 제법 되었다.
다시 말해 모두가 공모자인 것이다. 절대 입을 열지 못할 테니, 쫓겨나는 건 눈엣가시 같은 나라고 생각한 것일 터다.
‘시트론이 내 사람인 건 모두가 알 테니, 시트론의 증언은 힘이 없고.’
메리아덴 백작도 딸과 같은 생각이었기에 그다지 위기감을 느끼는 표정이 아니었다.
‘과연 그럴까?’
나는 조사 보고서를 읽는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가 테이블 위에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하게, 그러나 위험하도록 낮게 읊조렸다.
“뺨을 내려치는 건 예삿일이고, 한겨울에 언 이불만 남기고 담요까지 불태웠으며 옷장에 가둔 적도 다수, 오물까지 먹이려 했다, 라.”
거기에 짤막한 한 마디가 덧붙었다.
“감히 내 피붙이에게.”
플로헤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메리아덴 백작이 다급하게 딸과 할아버지를 번갈아 보았다.
“무… 무슨! 오해가 있을 겁니다! 그럴 리가……!”
대접견실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플로헤타에게 박혔다. 그녀가 딱딱 이를 부딪치며 어깨를 오들오들 떨었다. 할아버지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증언이 있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말이라는 걸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딸의 표정을 본 백작은 사색이 되었다.
“플로헤타!”
“아, 아니, 그러니까 이건…….”
누가 토설했고, 몇 명이나 증언하였는지 모르는 이상 함부로 변명할 수 없을 거다.
‘차라리 시인하는 쪽이 이로울 텐데.’
일이 이렇게까지 빨리 풀린 건 뒤에서 조종한 인물이 있다는 뜻일 테니까.
‘내 생각에 그건…….’
란슬롯을 슬그머니 쳐다보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역시.’
플로헤타가 허둥지둥 소리쳤다.
“거짓말! 거짓말이에요!”
“거짓말이라고?”
“저를 궁지에 몰려고……! 하녀들을 매수해서……!”
플로헤타의 변명에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바보. 이럴 때 변명은 역효과라고.’
하기야 그녀가 머리를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이런 사달은 만들지 않았을 거다. 문이 벌컥 열리고 헤더우드 경이 익숙한 면면들과 함께 등장했다. 별채 하녀들이었다.
플로헤타가 한 말을 들은 모양인지 그들의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되어 있었다. 겁, 기막힘, 억울함, 분노. 충성의 빛 같은 건 한 점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앞잡이 노릇을 했건만 돌아온 건 꼬리 자르기였다.
플로헤타는 이제 하녀들의 도움마저 구할 수 없을 것이다. 하녀들이 하나씩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메리아덴 백작의 얼굴이 썩어들어 갔고, 플로헤타는 안절부절못했다.
세니아나가 오물을 맞은 이튿날, 자살 시도를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자 백작은 플로헤타의 뺨을 올려붙였다. 짜악!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플로헤타의 얼굴이 돌아갔다.
“이 개돼지만도 못한……!”
나는 기가 막혔다. 그런 플로헤타를 물밑에서 도운 것이 바로 백작이었다. 하녀들을 매수할 돈을 플로헤타에게 쥐여 준 것도 그였고, 헛소문까지 만들어서 세니아나를 궁지에 몬 것도 그였다.
‘그래 놓고 본인은 모른 척이라니.’
어떻게 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납작 엎드려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어, 어르신, 이 일은 어떻게든 보상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가웨인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사람을 죽일 뻔해 놓고 보상이라. 조부님, 저자는 딸보다 형편없습니다.”
란슬롯도 그의 말에 힘을 보탰다.
“저런 여자를 가문의 안주인으로 들일 수는 없지요.”
할아버지는 턱을 느리게 매만졌다. 어찌할까 고민하는 듯한 표정에 백작과 플로헤타는 잠시 용서를 기대했다. 물론 아주 잠시였지만.
“파혼만으로는 안 되지.”
“어… 어르신!”
“나는 내 뒤에서 발톱을 드러낸 자를 가만히 둔 역사가 없다.”
고함을 지르지도 않았는데 엄청난 위압감이었다.
“어찌할까, 세니아나.”
“예?”
갑자기 돌아온 말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당사자인 네가 결정해라. 사냥 정도는 해 주마.”
“사냥이요?”
“단번에 숨통을 끊어 주랴? 아니면 팔다리를 죄 잘라 네 장난감으로 만들어 줄까? 돈줄을 막아 굶어 죽게 하는 것도 좋겠지.”
할아버지가 아주 위험한 표정으로 낮게 웃었다. 메리아덴 백작이 엉금엉금 기어 나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아가씨!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평생 충성……!”
“아버지!”
플로헤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자존심 상한 그녀가 무어라 말하려 할 때였다. 벌떡 일어난 메리아덴 백작이 딸의 멱살을 잡았다.
“입 닥치지 못하겠느냐! 내가 평생을 일군 가문이 네년 때문에 풍비박산 나게 생겼어!”
“그, 그렇지만…….”
“노예로 내다 팔아 주랴!”
진심이 담긴 말에 플로헤타는 흠칫 놀랐다.
“당장 무릎을 꿇고 아가씨께 사죄드려!”
찢어질 것 같은 노성에 플로헤타는 덜덜 떨었다. 그녀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 아가씨…….”
메리아덴 백작이 애걸하며 늘어져서 나는 조금 고민이 되었다. 나이 많은 어른이 한참 어린 내 앞에서 절절매니 마음이 쓰인 것이다. 실수 한 번은 할 수 있기도 하고. 짧게 신음하며 고민하는 나를 본 메리아덴 백작의 표정이 밝아졌다.
“제발…….”
쥐어짜 낸 목소리에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할아버지를 보았다.
“돈줄을 끊어서 굶어 죽게 하는 게 좋겠어요.”
바로 죽이는 게 아니니 얼마나 자비로운 판결인가. 잘하면 살아날 수도 있잖아? 란슬롯과 가웨인이 음험하게 웃는 걸 보면 쉽지는 않겠지만.
* * *
할아버지는 그날 즉시 행정 관리에 명해 메리아덴 가에 투자한 전액을 회수했다. 죽으라는 소리였다. 그 길로 메리아덴 부녀는 쫓겨났고, 백작은 프렌시프 성을 떠나면서도 당장 투자자를 찾아야 한다며 날뛰었다. 아마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나베리우스 프렌시프의 눈 밖에 난 그에게 누가 돈을 빌려주겠는가.
나와 할아버지, 그리고 오빠들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어색한 침묵을 깬 사람은 란슬롯이었다.
“상은 마음에 들어?”
‘플로헤타를 쫓아낸 걸 말하는 건가? 그야 물론…….’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란슬롯 옆에 서 있던 가웨인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보인 것 같았다. 빤히 쳐다보니 뭘 보냐는 듯 팩 인상을 쓰긴 했지만 말이다. 란슬롯은 다행이라며 눈을 나붓이 휘었다.
“그럼 이제 알려 줄래?”
눈을 동그랗게 뜬 나를 보는 란슬롯의 눈빛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네가 변한 진짜 이유.”
“…….”
대접견실 안, 세 쌍의 눈동자가 모두 내 얼굴에 박혔다.
“그건…….”
이런 상황이 올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세니아나의 기억이 있다고 해도 내가 그 애를 완전히 흉내 내는 건 무리였다. 난 세니아나와는 다른 사람이었기에 할아버지와 오빠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을 리 없다. 충분히 수상했을 것이다. 내가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어……?’
삐익―! 날카로운 이명이 머릿속을 가로질렀다. 눈앞이 희뿌옇게 변하고, 천지가 빙글빙글 회전했다. 몸이 휘청거리더니 쿵! 쓰러졌다.
“세니아나!”
“……아나!”
커다란 인영이 내게 다가왔지만, 발끝만 겨우 보였다. 시야가 좁아지면서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 * *
손을 내려다본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꼭 단풍잎처럼 작고 야들야들한 손이다. 마디며 손톱 밑은 새카맣고 손등엔 큰 화상 흉터가 있었다.
‘이건…….’
윤세나의 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어릴 적 윤세나의 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한순간에 주변이 바뀌었다.
“어디 있어!”
“네 애비 어디 갔느냐고!”
“내 돈 떼먹고 너는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 줄 알아? 어?!”
알이 큰 반지가 몇 개나 끼워진 손. 솥뚜껑처럼 두꺼운 남자의 손. 손톱에 새빨간 매니큐어가 발라진 손. 몇 개나 되는 손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나는 얼른 몸을 웅크렸다. 최대한 둥글게 말고 머리 위를 팔로 막아야 덜 아프다.
‘눈을 꼭 감고 백까지 세면 돼.’
괜찮아, 지금의 나는 백까지 정확히 셀 줄 아니까. 옛날처럼 구까지 세고 다시 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데,
‘……어라.’
어느새 주변이 또 바뀌어 있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다 숨었니?”
“다 숨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나는 익숙한 터널 안에 있었다.
‘놀이터의 터널이잖아.’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고아원? 놀이 시간인가?’
고아원에선 놀이 시간에 항상 숨바꼭질을 했다.
“예은이 찾았다!”
“주호 찾았다!”
숨을 죽이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나는 이곳에서 가장 숨바꼭질을 잘하는 아이였다.
‘아무도 나를 찾아 주지 않았으니까.’
간식 시간이 지나서도 이곳에 홀로 있었다. 마음속으로 누군가 찾아 주길 바라며.
‘누구도 오지 않을 텐데 나는 왜 항상 끝까지 기다린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조금 웃었다. 그때의 내가 바보 같고, 가련해서. 나는 터널 안으로 밀려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계속 듣고 있었다. 까르륵, 맑은 웃음소리와 열댓 개의 발소리는 여전히 다른 세상의 소리 같았다. 무릎에 고개를 묻고 흐르는 코를 쿨쩍 들이켜며 손으로 훔쳐 냈다.
‘혼자서도 괜찮아, 혼자서도 나는 괜찮아.’
세뇌하듯 속으로 말하면서.
“세나 찾았다.”
코 묻은 손을 바지춤에 문지르던 손이 느려지고, 숨이 멈추었다. 나는 이 목소리를 알고 있다.
“세나야.”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목소리. 꿈에서라도 듣고 싶어서 끈질기게 잠을 청했던 목소리.
“세나야 같이 놀자.”
엉금엉금 기어 터널을 나왔다. 손과 다리가 모두 덜덜 떨렸다. 사라져 버릴까 봐 무서워서. 낡은 옷을 입은 어른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선생님…….”
“자, 이리 와.”
나는 선생님을 향해 뛰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도 선생님은 자꾸만 멀어졌다.
“선생님! 선생님!”
무서웠다. 이러다 선생님을 놓칠 것 같아서.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얼굴로 계속 뒷모습을 쫓아갔다.
“서, 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찰나였다.
“그러다 넘어지면 코 깨져요.”
선생님이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선생님을 붙들었다.
“나, 나…… 버리지 마세요.”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다정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선생님 품에 안겨서 나는 펑펑 울었다.
“착한 아이가 될게요. 그러니까 선생님, 저를 혼자 두지 마세요.”
―하고 말하면서.
* * *
침대에 죽은 듯 누워 있는 세니아나를 살피던 의사가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된 거지?”
가웨인이 묻자 의사가 안경알을 추켜올렸다.
“몸 상태가 엉망인데 피로까지 축적되어 혼절한 것뿐입니다.”
그 말에 란슬롯이 미간을 좁혔다.
“쓰러지기 직전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어. 아무런 전조도 없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되는 게 말이 되나.”
“글쎄요. 제가 보기엔…….”
그가 새파랗게 질린 세니아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렇지 않았을 리 없다. 몸살처럼 온몸이 욱신거리고 열이 올랐을 것이다.
“내색하지 않으신 듯합니다만.”
“혼절할 때까지?”
가웨인이 왈칵 성을 내듯 묻자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는 게 익숙하신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심심하면 패악을 떨던 녀석인데!”
가웨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의사는 침대 아래로 떨어진 그녀의 손을 다시 올려 주었다. 소매가 밀려 올라가며 노랗게 변한 멍 자국들이 보였다.
“…….”
모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베리우스 프렌시프는 시체처럼 누운 손녀를 빤히 보았다. 세니아나의 것과 꼭 닮은 붉은 눈에선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때마침 성의 행정관이 들어왔다.
“어르신, 황도에서 연락책이 왔습니다.”
“……가지.”
가웨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여간 더럽게 바쁘시지.’
쓰러진 손녀보다 일이 더 중요한 사람인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인지 기분이 나빴다.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짜증이 나는 것도 같고, 화가 나는 것도 같았다.
나베리우스가 등을 돌리려던 찰나 세니아나가 그의 옷깃을 잡았다. 간호하던 이들도, 가웨인과 란슬롯도, 나베리우스마저도 우뚝 멈춰 그녀를 돌아보았다.
“버리지…… 마세요…….”
“…….”
“…….”
“…….”
세 남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착한 아이가 될게요…….”
가웨인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란슬롯이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타인이 제 몸에 닿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나베리우스조차 세니아나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 * *
내가 눈을 뜬 건 창밖이 어슴푸레 밝아올 때였다.
‘새벽인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푹 자고 일어나서인지 상태가 한결 좋았다.
‘아니면 꿈 때문일 수도 있고.’
좋은 꿈을 꾸었다.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저 기분이 아주 좋았다는 것만은 알겠다. 주변을 둘러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가 어디지?”
“아가씨!”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흠칫 놀랐다. 뒤를 보니 시트론이 대야와 물수건을 들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녀가 대야를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내게 다가왔다.
“몸은 어떠세요?”
“괜찮아.”
그녀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혼절하셨대요!”
“혼절?”
“몸이 안 좋은데 과로하셔서……. 안 좋으시면 말씀하셔야죠.”
죽을 것 같진 않았다.
‘참을 만해서 괜찮은 줄로만 알았지.’
“이제 정말로 괜찮아. 그런데 시트론, 여기가 어디야?”
“작은 도련님의 침실이에요. 여기가 대접견실과 가장 가까워서 이쪽으로 모신 것 같아요.”
가웨인의 침실이라고? 나는 헉! 숨을 들이켜고 헐레벌떡 일어나 베개를 탁탁 털어 냈다. 시트론이 당황한 낯빛으로 물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하룻밤을 꼬박 썼다고 화내면 어쩌지?”
“하룻밤이요?”
“하룻밤이잖아? 새벽인걸.”
“사흘이에요.”
“뭐?”
“아가씨께서 쓰러지신 후로 사흘이 지났어요.”
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시트론을 쳐다보았다.
“그만큼 몸이 안 좋으셨던 거죠.”
그녀가 내 어깨를 살며시 눌러 나를 다시 침대 위에 눕혔다.
“괜찮아지시거든 가도 좋다고 하셨어요.”
“가웨인이?”
“다른 분들도요.”
잠든 새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들이 성의 침실을 내주었지? 그럼 가웨인은 어디서 잤을까?
‘이렇게 커다란 성이니까 방이야 많겠지만…….’
어리둥절한 얼굴을 본 시트론이 싱긋 웃었다.
“도련님들께서 매일 오셨어요. 그리고…….”
“그리고?”
“아니에요. 일단 주무세요.”
시트론이 꿀을 탄 우유를 가져다주고는 계속해서 나를 돌봐 주었다. 하지만 도무지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대체 왜?’
나는 내가 달라진 진짜 이유를 말하라는 가족들 앞에서 쓰러졌다.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건가? 그래서 깨어나면 쫓아내려고?
‘어쩌지……. 아직 여비도 못 모았는데.’
우울한 얼굴로 천장만 빤히 바라보았다.
* * *
하지만 의외로 프렌시프의 사람들은 인간성이 있었다. 내가 아픈 후라서인지 바로 쫓아내지는 않았다. 며칠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는데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 옅어졌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귤을 입에 쏙쏙 집어넣던 나는 부르르 기지개를 켰다.
“휴가 온 것 같아.”
시트론이 후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헤타가 없으니 평화롭네요.”
“오늘은 하녀들 우는 소리도 안 들리고.”
플로헤타의 끄나풀들은 죄 잘렸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모두가 영지민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대로 프렌시프 아가씨의 학대범이 되면 영지에서 살 수 없다’며 매일매일 무릎을 꿇고 울었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용서하는 일은 없었다. 이제 그들은 터전인 영지에서도 쫓겨나 유랑하게 될 것이다. 그것도 평생에 걸쳐 막대한 배상금을 갚으며.
“좀 심했나…….”
내가 중얼거리자 시트론이 눈을 부릅떴다.
“아가씨 몸에 멍을 보세요. 그들은 아가씨를 공중에 매달고 플로헤타와 함께 채찍을 들었어요!”
그렇긴 하다. 나는 동정하지 않기로 하고, 말을 돌렸다.
“참, 니콜은 어떻게 됐어?”
하녀장이었던 자를 언급하자 시트론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별채의 운영 자금에도 손을 댔나 봐요. 아가씨 일까지 더해서 고문받고 있어요. 아마 앞으로 죽는 게 더 나은 삶을 살겠죠.”
그녀는 플로헤타도 마찬가지일 거라며 덧붙였다.
“으아, 살벌하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뒹굴거렸다. 그런 날 보던 시트론이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어머! 아가씨, 늦겠어요.”
오늘은 할아버지, 그리고 오빠들과 함께 점심을 먹기로 한 날이었다. 시트론은 드디어 점수를 회복한 거라고 기뻐했다.
“……나 오늘 아프면 안 될까?”
내가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옷을 갈아입은 뒤 성으로 향했다. 식당 안에 들어가자 할아버지, 그리고 란슬롯과 가웨인이 앉아 있었다. 나는 눈알을 도륵 굴리다가 벽면에 붙은 시계를 보았다.
‘제시간에 맞춰 왔는데?’
“늦었… 습니다?”
란슬롯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일찍 왔다. 나눌 이야기가 있었거든.”
“아…….”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곧 애피타이저가 나왔는데, 커다란 관자가 여러 개 든 수프였다. 할아버지는 국물만 조금 떠먹다가 스푼을 내려놓았다.
“늘 먹던 것을 가져와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물렁한 것이요?”
“…….”
‘아직 이가 아프신가.’
그러자 할아버지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네.’
가웨인에게 힌트를 얻어서 알게 되었지만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굳은 얼굴로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기에 말을 돌렸다.
“치료를 받으세요.”
“……별것 아니다.”
“몇 달째 계속 아프시잖아요.”
“…….”
나는 할아버지 쪽으로 몸을 틀었다.
“할아버지, ‘아’ 해 보세요.”
그의 얼굴이 굳어졌고, 란슬롯과 가웨인은 눈을 홉떴다.
“여긴 가족밖에 없는걸요. 괜찮아요.”
“정신 사나우니 그 입 좀 다물어라.”
“하지만 계속 아프시잖아요.”
“음식이나 먹어.”
“그럼 칠면조 찜을 또 해드릴까요?”
“…….”
그건 싫지 않은지 핀잔이 돌아오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레시피를 요리장에게 전해라. 값을 치러 주마.”
“값이요?”
그가 테이블 아래에 걸린 작은 벨을 흔들자 문밖에 있던 집사가 들어왔다.
“세니아나에게 레시피 값을 내줘라.”
집사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세니아나는 오빠들처럼 사재(개인적으로 운용 가능한 재산)가 따로 없다. 몇 년 전까진 있었는데 어떤 사고를 쳐서 몰수당했다. 레시피는 그냥 줄 생각이었지만, 값을 치러 준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우와, 내가 돈을 벌었어.’
여기 와서는 처음이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도 돈을 무척 좋아했다. 식당의 매상을 세는 게 삶의 낙 중 하나였다. 내가 헤실거리며 웃자 란슬롯이 픽 실소를 흘렸다.
“그 돈으로 뭘 할 거야?”
“일단 시트론에게 얼마쯤 주려고요.”
칠면조 찜을 만들 때 시트론도 나만큼 고생했다.
“그리고 구두를 살 거예요.”
“구두?”
“네. 원래 있던 구두가 안 맞나봐요. 신으면 쓸리고 아파요.”
“수제화로 맞추는데 안 맞을 리가.”
“올해 맞춘 건 플로헤타가 다 불태웠어요. 작년에 있던 걸 신고 다녔더니 피고름이 생기더라고요. 안 맞는 게 맞아요.”
세니아나는 주로 침대에서만 지냈기에 구두가 필요할 일이 없었지만, 나는 다르다. 매일매일 안 맞는 구두를 신고 돌아다녔더니 발이 망가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관자를 입에 넣었다. 살이 탱탱한데 얼마나 잘 손질했는지 이에 조금도 끼지 않았다.
“음, 맛있다.”
한참 맛있게 먹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응?’
그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구두 얘기 때문에?’
나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 고아원 애들이 신발을 숨겨 놔서 한겨울에 맨발로 학교에 간 적도 있었다.
‘게다가 아예 못 걸을 정도는 아닌걸. 왜 그런 표정으로 쳐다본담.’
그러고 보니 가족들의 눈빛이 평소와 다른 것 같았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은 관자를 입에 넣었다.
* * *
식사가 끝난 후 나는 할아버지에게 돈주머니를 받았고, 가웨인은 벌을 받았다. 일전에 반란군 토벌 사건 때 일을 그르칠 뻔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벌을 내린 사람은 란슬롯이었다.
‘그런데 왜 나도 함께 받아야 하는 거지?’
가웨인의 벌은 나의 쇼핑을 돕는 것이었다.
“장인을 불러서 맞추면 될 것을.”
“상점에 가 보고 싶었는걸요. 안 와도 된댔는데 오셔 놓곤…….”
우리는 서로 구시렁거리며 상점 거리로 나왔다. 상점 거리 안까지는 마차가 들어갈 수 없기에 내려서 걸었다. 나는 가웨인의 뒤를 졸랑졸랑 쫓아 걸었다. 하지만 걸음이 빠르고 사람도 많아서 여차하면 놓치기 일쑤였다.
앞서 걷던 가웨인이 우뚝 멈춰 섰다.
“거북이냐?”
“빨리 걷는 건 그쪽이에요.”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평소보다 훨씬 느린 걸음이야. 네 쪽으로 기척을 살피면서 걸었다고. 또…!”
그가 말하려다가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내 발까지 슥 내려온 시선이 다시 휙 올라갔다. 그러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모로 꼬았다.
“어디가, 어떻게, 대체 왜 빠른 거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한 그를 보고 있자니 울컥했다.
“그쪽은 다리가 기니까요!”
“…….”
“엄청 길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훌쩍 크고.”
내가 그를 새초롬히 노려보자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내 곁으로 다가와 섰다. 그의 발걸음이 현저히 느려진 덕분에 한결 편하게 걸었다. 노란 간판의 상점 앞에 다다르자 그가 문을 열었다. 딸랑, 맑은 차임벨 소리에 점원들이 몸을 일으켰다. 가웨인을 본 그들의 눈이 떨어질 것처럼 커졌다.
“프, 프렌시프 경!”
주인인 듯한 남자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여긴 어떻게…….”
“동생의 구두를 사러 왔다.”
“동……? 아! 예예! 이리 오십시오.”
남자 뒤에 있는 사람들의 눈알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천덕꾸러기라고 불리던 내가 어째서 가웨인과 함께 왔는지 몹시 궁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남자의 지시에 바쁘게 뛰어다녔다. 내 앞에 서른, 아니, 마흔 켤레는 족히 되어 보이는 구두가 쫙 늘어섰다.
‘예뻐…….’
나는 멍하니 꽃밭 같은 구두 밭을 구경했다. 세니아나에겐 단순한 구두만 있어서 역시 현대보다는 디자인이 발전하지 못했나 싶었다.
‘그냥 세니아나 취향이었구나.’
스틸레토에 펌프스, 웨지힐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이 세계를 막연히 중세에서 빅토리아 시대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지구의 역사와는 사뭇 다른 흐름이었다.
‘판타지 세계라서 그런가? 하긴 오븐도 있으니까.’
나는 눈을 반짝이며 구두를 하나하나 살폈다. 내가 디자인을 고를 때마다 점원들이 색깔별로 구두를 보여 주고, 신겨 주었다. 한참 고민하던 나는 선택지를 두 가지로 좁혔다. 아주아주 편한 갈색 플랫 구두, 그리고 보송보송한 재질의 벚꽃색 메리제인 구두. 전자는 편하게 신을 수 있고, 후자는…….
‘너무 예뻐!’
하지만 당장 신을 구두를 사러 온 것이다. 발이 퉁퉁 부은 지금은 굽 높은 메리제인 구두를 신을 수 없다. 나는 시무룩해져서 메리제인 구두를 바라보았다.
“둘 다 사든가.”
가웨인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 비상금은 가지고 있어야지.’
가족들이 날 쫓아내면 쓸 여비가 필요하니까 말이다. 생각을 끝낸 나는 메리제인 구두를 내려놓고 플랫 구두를 내밀었다.
“이걸로.”
신고 가겠다고 하자 점원이 정중한 손길로 구두를 신겨 주었다. 맞춘 것처럼 꼭 맞는 아주 편한 구두였다. 나는 주인에게 값을 지불했다.
‘하나 사길 잘했어.’
엄청 편하고 좋은 구두긴 하지만 이렇게 비쌀 줄은 몰랐다. 그래도 새로 산 덕분에 상점을 걸어서 나올 수 있었다. 나는 가웨인의 뒤를 따라서 졸졸 걷다가 좋은 냄새에 걸음을 멈추었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크레프다!”
크레프는 길거리에서 덥석 베어 무는 것도 즐겁지만, 나이프로 썰어 먹는 것도 재미있다. 게다가 전문점! 내게는 ‘한 메뉴를 전문으로 하는 곳은 웬만해선 맛있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앞서 걷던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거 먹으려고?”
아무 말 하지 않고 꾸물꾸물하자 가웨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든가.”
“정말요?”
“기사는 빈말을 하지 않아.”
나는 활짝 웃으며 크레프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길거리에서 파는 크레프가 아니라 제대로 된 예쁜 디저트 전문점의 것이라 다행이다.
‘아니었더라면 가웨인은 허락하지 않았겠지.’
메뉴판을 보고 한참 고민하다가 초콜릿 바나나 크레프로 결정했다. 즐겁게 기다리고 있는데 가웨인이 가게 안을 슥 훑어보았다.
“귀족 여성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 경비병을 고용했군.”
“그런가 보네요.”
가게의 경비병은 마치 성의 근위병처럼 제대로 갖춰 입고 있었다. 입구마다 한 명씩, 내부에도 두 명이나 있다.
“잠깐 나갔다 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
“네.”
내부를 눈으로 훑으며 일어나던 가웨인이 다시 나에게 시선을 맞췄다.
“모르는 사람은 따라가지 마.”
“안 가요.”
“혹시 도자기를 팔면…….”
“안 사요.”
“시답잖은 놈이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하면서 접근하면 사기꾼인 거다.”
“알겠어요.”
그는 몇 번이나 나를 주의시켰다.
“어디로 튈지 모르니 안심할 수 있어야지.”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가게를 나섰다. 가웨인이 밖으로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크레프가 나왔다. 곧바로 나이프를 손에 쥐고 슥슥 움직였다.
썰리는 감촉이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다. 질긴 곳 하나 없이 나이프가 움직이는 대로 조각났다. 조각난 곳에서 초콜릿과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조그맣게 자른 크레프를 포크로 집어 입에 넣었다.
‘흐으음, 이거야, 이거!’
이가 녹아내릴 것처럼 달다. 입안에서 당이 마치 폭죽처럼 펑펑 터지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크레프 하나를 비우고 다시 메뉴판을 보았다.
‘좋아, 단것은 먹었으니 이번엔 짠 거.’
스크램블과 참치, 달콤한 식초에 절인 올리브, 체더치즈가 들어간 크레이프를 주문했다.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풍경이 울렸다. 가웨인인가 싶어서 문을 보았는데 아니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응?”
여기저기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졌다. 어머! 하는 소리를 내는가 하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앓는 소리도 있었다.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까지 들어온 남자들을 쳐다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앞서 걷는 흑발의 남자를 말이다.
‘란슬롯과 가웨인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메뉴판으로 얼굴을 슬쩍 가린 채 힐끔힐끔 지켜볼 뿐, 저 정도로 격한 반응을 끌어내진 못했다. 남자들은 카운터가 아닌 나를 향해서 성큼성큼 걸었다.
‘뭐야?’
나를 아는 사람인 건가 했지만, 세니아나 기억 속엔 없었다. 그때 흑발의 남자가 마치 인사하듯 고개를 조금 까닥였다. 그러면서 반쯤 가려져 있던 뒤편의 남자가 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가 들고 있는 것에.
‘도자기……?’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남자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들고 있는 건 웬 화려한 청자였다.
‘가웨인의 말이 정말이었잖아. 진짜로 도자기 파는 사람이 있었어.’
그들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영…….”
“안 사요.”
흑발 남자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며 미미하게 눈살이 찌푸려져 있었다. 그는 상황 파악을 하려는 듯 내 시선이 고정된 도자기를 돌아보았다.
“하?”
남자는 이건 무슨 장난이냐는 것처럼 미간을 좁혔다. 도자기를 든 남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재미난 농담을 배우셨습니다, 영애님.”
“농담?”
흑발의 남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중얼거렸고, 도자기를 든 남자는 공손한 투로 말했다.
“홀로 계시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저희가 실례했군요.”
‘응응, 실례했어.’
가웨인이 돌아왔을 때 도자기를 들고 있으면 엄청나게 혼날 거야. 오죽했으면 가게 안까지 들어와서 영업일까 싶기도 했다. 식당을 운영할 때도 가끔 껌이나 초콜릿을 팔러 잡상인이 출입했다. 대체로 등이 굽은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손자의 손을 잡고 왔다. 그럼 안쓰러운 마음에 한두 개 사 주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사지 멀쩡해 보이는걸.’
가엽게 생각하지 말자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들이 인사하듯 고개를 잠깐 숙이곤 가게를 떠났다.
달걀 참치 크레이프를 한 조각 정도 남겨 놨을 때, 가웨인이 돌아왔다.
“가자.”
마차를 불러온 모양인지 유리문 앞에 익숙한 마차가 보였다. 가웨인의 시선이 접시로 향했다.
“바나나가 든 크레이프를 시키지 않았나?”
왜 참치와 달걀이 보이냐는 표정이었다.
“새로 시켰어요.”
“또? 점심에 식사를 하고 나왔잖아.”
“단 걸 먹은 뒤엔 짠 걸 먹어야죠.”
‘상식이라고?’
나는 뭘 묻냐는 듯 그를 보았다. 그리고 남은 크레이프를 입에 쏙 집어넣고 일어났다. 계산하려는데 그가 됐다며 돈을 내주었다.
어느새 해가 산등성 뒤로 사라지고 캄캄한 밤이 찾아왔다. 달리는 마차 안에서 창밖을 보던 나는 황홀해져서 중얼거렸다.
“아, 예쁘다.”
하늘 위에 설탕을 듬뿍 뿌려 놓은 것 같았다. 새카만 도화지 위로 셀 수 없이 많은 별이 반짝였다.
‘여기에도 은하수가 있구나.’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조금 내밀고 하늘을 구경했다. 그때 갑자기 가웨인이 내 머리 위를 손으로 막았다. 동시에 마차가 덜컹! 하더니 내 몸이 위로 통 튀어 올랐다. 가웨인이 아니었으면 머리를 박을 뻔했다.
“이 부근은 길이 험해.”
계속 덜컹거릴 테니까 밖으로 고개를 내밀지 말라는 것 같았다. 나는 얌전히 그의 말을 따랐다. 한동안 마차에 침묵이 감돌았다. 가웨인이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의자 밑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가 퉁명스레 웬 상자를 슥 내밀었다.
‘응?’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그가 내 무릎 위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익숙한 로고라고 생각하던 차에 구두 상점 간판에 그려져 있던 로고가 떠올랐다. 나는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이거……!”
벚꽃색의 메리제인 구두가 곱게 누워 있었다.
“제 거예요?”
“그럼 내가 신을까?”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왔지만, 나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왜?’
그가 나에게 구두 같은 것을 선물할 이유가 없다.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헉, 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이거 신고서 꺼져 버리라고?’
지구에선 신발을 선물하는 건 그런 의미이지 않은가! 내 얼굴을 본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표정은 뭐야? 너 하라고, 그거. 그냥 가져.”
“…왜요?”
그가 고개를 팩 돌렸다. 설마 아침에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나? 하지만 그가 어째서?
“저를 싫어하시잖아요?”
“……나를 싫어하는 건 너잖아.”
“네?”
그가 눈을 감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의 일을 잊은 건 아니야. 아마 형도, 조부님께도 너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이 있겠지.”
‘그때의 일?’
그가 다시 눈을 뜨고 나를 보았다. 검붉은 눈동자에 어리둥절해 보이는 내가 비쳤다.
“하지만 플로헤타에게 끔찍한 일을 겪도록 마냥 내버려 둔 건…… 미안하게 생각해.”
나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치.”
“……!”
“응, 잘못하셨죠.”
“나도 그 정도인 줄은……!”
―하고 말하려던 그가 입을 다물었다. 아주 미미한 변화긴 했지만, 다시 입을 열었을 땐 어쩐지 풀이 죽은 것 같은 목소리였다.
“네 말이 맞다.”
그는 다시 조용해졌다. 마치 면목이 없다는 것처럼 나를 보지 못했다. 이들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뚝 떼서 버린 것처럼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상상보다 심한 일이 있었다고 해도 모든 게 정당화되는 건 아니지.’
나도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세니아나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 한겨울에 추운 방에 갇혀 이불 없이 잔 것도 비슷했다. 죽을까 봐 무서워 몸을 동그랗게 말고, 한숨도 자지 못했다. 오물도 맞아 봤고, 사물함에 쥐나 개구리가 들었던 적도 있었다. 물론 폭력은 예삿일이었다. 그런 내게 누군가는 말했다. 너를 위해 그들을 용서하라고.
‘나는 그 말이 더 힘겨웠어.’
당연한 말이지만,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을 상처 입힌 사람을 용서하려면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당사자가 아니라면 용서라는 말을 쉽게 입에 담아선 안 된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건 세니아나가 아닌 윤세나였다. 내가 그 애의 갈등과 시련을 겪어 낼 당사자라서 선택도 내 몫이었다. 나는 가웨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거 고마워요.”
“뭐?”
상자를 조금 흔들며 나는 생긋 웃었다. 내 얼굴을 빤히 보던 그가 홱 시선을 돌렸다. 그의 귓불이 붉어져 있었다.
어느새 마차가 성에 도착했고, 마차에서 내린 가웨인은 작게 헛기침했다.
“밤에 돌아다니지 마.”
“눈에 띄지 말라고요?”
“그게 아니라 널 걱……! 됐다.”
그렇게 말한 가웨인이 먼저 뒤돌아 걸었다. 어쩐지 토라진 것 같아서 어리둥절했지만, 나도 상자를 끌어안고 별채로 향했다.
‘밝은 데서 제대로 봐야지.’
빨리 신어 보고 싶어서 두근두근했다. 그때 멀리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아, 할아버지.’
그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다녀왔습니다.”
“……그걸 산 거냐?”
내가 안은 구두 상자를 보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를 아는 체하는 것도 신기했지만, 내 일에 신경 쓰는 게 더 신기했다. 그러다 불현듯 드는 생각에 상자를 끌어안았다.
‘빼앗으려고?’
나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
“…….”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상자를 꼭 끌어안고 살짝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눈썹을 까딱여서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어떻게 도망치지…….
“들어가.”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 * *
별채로 들어온 나는 상자를 슬며시 열어 보았다. 상점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고운 자태였다.
“예뻐…….”
―하고 중얼거리자 어느새 다가온 시트론이 한번 신어 보라며 미소 지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구두를 신고 커다란 거울 앞에 섰다. 구두만 덜렁 볼 때보다 신고 있을 때 더 예뻤다. 굽이 높긴 하지만, 그렇다고 불편하진 않았다.
‘발의 부기가 가라앉으면 신어야지.’
신발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와 다시 상자 안에 잘 넣어 두었다. 잠옷으로 갈아입는 중에 시트론이 무언가 떠올랐는지 나를 보며 말했다.
“이제 슬슬 아카데미에 복학계를 내셔야지요? 학교로 돌아가실 건가요?”
잠시 멈칫한 나는 다시 단추를 꼭꼭 여미며 말했다.
“생각 중이야.”
“달리하고 싶은 일이 있으세요?”
나는 이 세계에 떨어진 후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계속 고심해 왔다. 할아버지 생신 만찬에서 요리한 후 명확하게 느꼈다.
‘요리하면서 살면 좋겠어.’
익숙한 것도, 하고픈 것도 그것뿐이었다. 요리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데, 내 요리를 기분 좋게 먹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쁠 거다.
‘여기서 식당을 하면 어떨까?’
오늘 상점가에 다녀온 이유도 사실 그와 비슷한 이유였다. 식당의 수요를 직접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미식의 나라라 다행이야.’
거리가 온통 식당인 것에 안도하기도 했다. 옷을 갈아입은 나는 시트론을 빤히 쳐다보았다.
“시트론, 만약에 내가 여길 떠나고 싶다고 한다면…….”
눈치를 보며 말하자 그녀는 잠시 쓰게 웃었다. 그러나 이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가 가자면 가요, 전.”
“…….”
그녀에게 고마워서 코가 조금 시큰했다.
“성을 나가시게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니라고 답했다.
‘큰일 날 소리!’
밑천도 없이 나가면 엄동설한에 굶어 죽기 딱이다.
“밑천을 가지고 나가야지.”
“어떻게요? 사재 한 푼 없으시면서.”
“이제 벌 거야.”
나는 방긋 웃었다. 문제는 방법인데…… 그건 차차 고민하기로 했다. 가족들은 아직 나를 쫓아내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아직은 시간이 있어.’
* * *
다음 날, 나베리우스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식기를 내려놓았다. 꽤 오랜 기간을 무른 감과 좋아하지 않는 면류로 연명하다 보니 입이 짧아졌다. 그런데 칠면조 찜을 알게 된 후론 달랐다. 이틀을 내리 그것만 먹었는데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 녀석의 음식이라.’
제법이다. 시위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던 녀석이 만든 것치고는 말이다. 마지막 자살 시도 후 세니아나는 변했다. 뭐라도 하려는 모습이 썩 나쁘지 않았다. 처음엔 수상했는데, 그건 두 손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문득 세니아나가 중얼거리던 소리가 떠올랐다.
[버리지 마세요…….]
[착한 아이가 될게요.]
‘정말 마음을 고쳐먹은 건가.’
턱을 매만지던 그가 요리장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요리장이 그를 향해 정중히 절했다.
“레시피는 어떻던가.”
“칠면조 찜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아가씨의 레시피라고 들었습니다만…….”
요리장은 말을 골랐다. 나베리우스가 손녀를 싫어한다는 건 유명했다.
‘좋은 말을 뱉었다가 불똥이 튀면 곤란하긴 하지만…….’
그가 나베리우스의 붉은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이제껏 몰랐던 것이 아쉽습니다.”
나베리우스의 미간에 미미한 주름이 잡혔다.
“무슨 뜻이냐.”
“훌륭합니다. 현장에 있는 요리사들과 비교하면 능숙한 솜씨라곤 할 수 없지만, 노련한 자들에게 없는 재치가 있습니다.”
거짓말은 할 수 없었던 건 그만큼 칠면조 찜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고기를 무르게 만드는 방법은 가히 혁신적이었다. 넘겨받은 레시피를 보고 나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세니아나는 무려 과일로 육질을 녹인 것이다.
‘키위와 파인애플이 그런 작용을 할 줄은…….’
게다가 자신도 알아보지 못한 나베리우스의 문제점을 정확히 알아챘다. 나베리우스는 느릿하게 턱을 쓰다듬었다.
“재치라.”
“저희는 이것을 타고났다고 합니다.”
손놀림으로는 순위를 매길 수 없다. 십 년, 이십 년 끊임없이 불 앞에 선다면 손재간은 늘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한 까닭에 이 세계에서 승자와 패배자를 가르는 건 창의성이었다. 그리고 세니아나에겐 그것이 있었다.
“그만큼 재능이 있다는 말이냐?”
“저만한 연배의 요리사라면 누구든 제자로 두고 키우고 싶을 겁니다.”
나베리우스는 요리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너도 그런가?”
“주제넘은 생각입니다만…… 솔직히 그렇습니다.”
요리장 아곤은 미식의 나라 길라게온에서도 이름난 요리사였다. 실력은 물론이고, 사람 보는 눈이 유달리 훌륭했다. 로열 키친의 관복을 벗은 이후 황실 직속 아카데미의 교수직을 제안받을 정도였다. 그가 이토록 칭찬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나베리우스의 눈이 번뜩였다.
‘시험해 봐야겠군.’
마침 괜찮은 문제가 있었다.
* * *
할아버지가 나를 호출했다. 점심을 함께하는 날도 아니어서 의아했지만, 성으로 들어갔다. 나를 본 집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할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양피지를 보고 있었다.
“앉아라.”
그의 맞은편에 앉자 붉은 눈이 나를 응시했다.
“네게 시킬 일이 있다.”
‘나한테?’
란슬롯이나 가웨인이 아니고?
“내 성에 황궁의 손님이 와 있다. 해산물을 입에 대지 않지.”
“네.”
“정치판은 짐승의 우리야. 아주 사소한 틈도 허용되지 않는다.”
“사소한 틈이라면……. 아, 할아버지의 이가 부실했던 것처럼요?”
“……부실한 건 아니었어.”
할아버지가 한쪽 눈을 찌푸렸지만, 일단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치통을 내색하지 않는 이유를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이가 부실하다’에서 ‘노화로 인한 건강 이상’, 그리고 ‘호랑이의 이빨 빠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로 소문이 흐를 수도 있다.
소문이 힘을 갖는 경우는 뉴스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모 그룹 경영자 건강 이상! 주가 곤두박질쳐…….]라든지, [모 국가 원수 돼지고기를 먹어 종교 단체 반발]이라든지.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눈을 도륵 굴렸다.
“음, 그러니까 그건 저를 이용해서 손님에게 빚을 만드시겠다는 거죠?”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상황을 가늠했다. 이 성엔 실력 좋은 요리사들이 많았다. 게다가 매번 사고만 쳐 온 나보다는 다른 요리사에게 더 신뢰가 있을 거다. 그런데도 굳이 나에게 일을 맡겼다.
‘시험… 일지도.’
어쨌든 이건 내게 나쁜 일이 아니었기에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러면 이용료를 주세요.”
“뭐라고?”
마침 차를 내오던 집사가 굳어졌다. 그 바람에 쟁반 위에 놓인 찻잔이 덜컹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나도 조금 무섭긴 했지만, 기회를 날릴 순 없었다. 일이 잘 풀리면 돈도 얻고, 신뢰도 얻는다. 안 풀려도 할아버지가 차후 나를 어떻게 이용할지 알 수 있었다.
“저는 가문의 일원이니 할아버지를 따라야 하는 걸 알아요.”
“안다니 다행이군.”
“예를 들어 그런 거죠. 직원이 상사를 따르는 것처럼요. 그리고 직원이 상사를 따르는 이유는 보상이 있기 때문이잖아요?”
“허.”
“또 할아버지께서도 보수 없는 일에 제가 정성을 들일지 확신하실 수 있겠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급료 챙겨 주세요’라는 의미였다.
“…….”
그는 침묵했다. 화가 난 게 아니라 마치 할 말이 없는 것 같아서 조금 신기한 기분이었다. 나는 손가락을 꼬물꼬물 얽으며 조심스레 말했다.
“열심히 할게요…….”
“그러니까 보수를 내놔라?”
내가 헤헤 웃자 그가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꾹 눌렀다.
“말을 아주 잘하는군.”
칭찬인가 싶어서 나는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던 할아버지가 눈썹을 꿈틀하며 물었다.
“무얼 원하지?”
나는 냉큼 대답했다.
“사재요!”
그는 낮게 침음을 흘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