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나는 오후에 다시 성에 불려갔다. 응접실로 들어가자 할아버지와 프렌시프 형제, 그리고 낯선 남자 둘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인사해라, 세니아나.”
란슬롯의 말에 배수한 나는 테이블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테이블 위에 올려진 것을 보고.
‘도, 도자기!’
“이, 이건…….”
그러자 란슬롯이 답해 주었다.
“황궁에서 조부님의 생신 선물로 보내 왔다.”
나는 볼이 화끈거렸다. 가웨인이 도자기를 운운하기에 이 세계에서는 도자기 상인이 거리에서 영업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때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니 할아버지의 맞은편에 크레프 전문점에서 보았던 흑발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도미니크 저하시다.”
‘도미니크? 도미니크라면…….’
세니아나의 기억 속에 있는 이름이었다. 생김새는 흐릿하지만, 사람들이 하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황제가 신관과 간통하여 낳은 비운의 황자, 전장의 마물, 인간성이 결여된 괴물. 좋은 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기억이어서 긴장됐다.
‘저번 일을 일러바치면 어쩌지?’
그러나 도미니크는 별말 없이 고개만 돌렸을 뿐이었다.
나는 도미니크 전하에게 화원을 보여드리라는 할아버지의 명을 받았다. 도미니크와 나는 함께 화원에 들어갔다. 그가 앞서 걷는 탓에 나는 울상을 지으며 뒤를 졸랑졸랑 쫓아갔다.
‘여기 남자들은 왜 이렇게 걸음이 빠른 거람.’
아직 발이 다 낫지 않았는데 걸음이 빨라서 가웨인과 외출했을 때처럼 그를 놓칠 것 같았다. 그가 한 걸음 걸을 때 나는 서너 걸음 걷는 기분이었다. 낑낑거리며 쫓아가던 나는 결국 그를 불러 세웠다.
“자, 잠깐만요…….”
그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이때다 싶어 재빨리 그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때, 발목이 크게 휘며 몸이 휘청했다.
“앗!”
‘넘어진다!’
눈을 꼭 감았는데…….
“아?”
그가 나를 받아 주었다.
‘조, 좋은 냄새.’
도미니크의 손목 안에서 아주 좋은 향을 맡았다. 시원한 코롱 같기도 하고, 깔끔한 비누 같기도 한 묘한 향이었다.
“조심. 다칩니다.”
동굴에서 울리는 것 같은 낮은 저음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등의 솜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다. 잠시 상황 파악을 하다가 흠칫 놀라서 얼른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어색함에 우물쭈물하다가 퍼뜩 고개를 숙였다.
“아! 오늘은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자 그는 의아하다는 듯 나를 보았다.
“넘어질 뻔했는데 받아 주시고, 또 저번 일도 모르는 척해 주셨으니까요.”
황자를 도자기 상인으로 오해했다는 걸 할아버지가 알았다면 곤란해졌을 거다.
“그건 농담…… 아니었습니까?”
“네……?”
“…….”
“…….”
눈을 도르륵 굴리고 있자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루할 테니 가 보세요.”
“지루하지 않은데요?”
“다른 사람들은 나와 있는 걸 지루해하던데.”
“지루한 게 아니라 어색한 거예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농담을 모르니까.”
“농담과는 상관없는 일인데요?”
“그렇습니까…….”
“네.”
희미한 미소였지만, 그가 웃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냉정해 보이던 얼굴이 부드럽게 풀리니 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래도 가 보는 게 좋겠군요. 그대 조부가 바라는 건 정원 구경이 아닐 겁니다.”
“결혼이요?”
“알고 있었습니까?”
오늘 온 손님이 도미니크 황자라는 걸 알고 눈치를 챘다. 할아버지가 내게 시키려는 게 무엇인지 말이다. 도미니크에게 해산물을 먹여 빚을 졌다는 인상을 남기길 바랐겠지만,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황자와 단둘이 정원 산책을 보내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걸 읽기도 했고.’
처음 가웨인에게 말 붙일 핑계 삼아 하녀들에게 받아 낸 서류. 가웨인에겐 읽지 않았다고 했지만, 사실 읽었다. 정보는 가지고 있을수록 득이 되니까 읽지 않을 이유가 없다. 거기엔 도미니크 황자에게 혼담을 넣은 가문이 적혀 있었다.
‘그걸 보면 답이 나오지.’
프렌시프의 영애는 나 하나. 당연히 혼담에 밀어 넣을 수 있는 사람도 나뿐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이번 일에 실패해도 한 가지는 얻으려 한 것이다.
‘그게 황자와의 결혼일 테고.’
그가 나를 보며 물었다.
“영애의 장점은 뭡니까?”
“네? 음……. 당근으로 꽃을 만들 수 있어요.”
“…….”
“……?”
그의 표정이 묘해져서 난 어색하게 웃었다.
“혹시 결혼했을 때의 이득을 물으시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손을 내젓자 도미니크는 차갑게 굳은 눈으로 물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겁니까?”
“아니요?”
“그럼?”
“저는 결혼할 생각 없어요.”
그의 눈이 살짝 커지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왜죠?”
“네? 으음,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으신데.”
혹시나 그가 화를 낼까 봐 조그맣게 말했다.
* * *
화원 구경을 마친 뒤 황자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나는 조리실로 향하면서 고민했다.
‘매력적이라고 할 걸 그랬나?’
상처 주었을까 봐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요리만 생각하자. 해산물을 싫어하는 사람도 잘 먹을 수 있는 요리.’
몇 가지 요리를 해 봤는데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대부분 비린내 때문에 꺼리지.’
하지만 냄새를 완전히 없앨 순 없었다. 칠면조 찜 때처럼 살을 다 녹인다고 해도 생선 특유의 냄새는 남을 거다. 나는 시작품을 맛보는 시트론을 쳐다보았다.
“어때?”
“맛있어요. 확실히 새우를 튀기니 비린내가 덜 하네요. 하지만 전혀 없는 건 아니라서…….”
나는 끄응 신음을 흘렸다. 도미니크 황자가 떠나는 건 이틀 뒤이기에 그때까지 요리를 마쳐야 한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사재……. 되찾아야 하는데.’
나는 양손으로 턱을 괴고 해산물을 노려보았다. 그때, 시트론이 작게 중얼거렸다.
“완전히 으깨 버리면…… 아, 그럼 식감이 나쁘려나.”
“그야 그렇…… 잠깐, 뭐라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트론을 보았다.
‘설마 그거라면……!’
어쩌면 먹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 날 아침, 성의 식당에 들어가니 할아버지와 란슬롯이 먼저 와 있었다. 자리에 앉자 란슬롯이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잤어?”
“아니요.”
잠이 부족해서 눈 안이 당기고 쓰렸다. 눈을 살며시 누르며 식탁 앞에 다다랐지만, 바로 앉을 수 없었다.
‘어디에 앉지…….’
식사를 할 때면 대개 두 오빠가 함께 앉고, 할아버지는 상석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자리 배치가 조금 달랐다.
‘그렇지, 황자가 있으니까.’
상석이 비어 있고, 오른쪽으로는 란슬롯이, 왼쪽으로는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정신 사나우니 어서 앉…….”
할아버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내가 또 그의 옆자리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
“자리를 옮길까요?”
“……됐다.”
다행히 별말이 없었다. 때마침 도미니크가 들어와 식사를 시작했다. 이날 식사는 이전보다 더 조용했다. 나는 집게로 샐러드를 집으려다가 슬그머니 할아버지 접시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 이가 아프구나.’
황자 앞이라서 다른 걸 내오라고 할 수도 없을 거다. 나는 샐러드에 곁들여 나온 콩을 조금 퍼 그의 접시에 올려 주었다.
“부드러워서 맛있어요.”
“…….”
“이렇게 으깨서 드셔 보세요. 달짝지근해요.”
그가 잠깐 멈칫하긴 했지만, 곧 스푼이 움직였다. 잘 드시기에 한 번 더 떠드렸다. 란슬롯이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열심히 떨었다.
식사하는 동안 나는 도미니크를 주시했다. 무얼 잘 먹는지, 어떤 걸 기피 하는지 꼼꼼히 점검하며 그가 먹는 건 나도 따라서 맛보았다. 가지 구이를 썰어서 먹다가 깜짝 놀랐다.
‘매워! 여기 든 고추가 졸로키아였나!’
입안에 불이 난 것처럼 얼얼하고, 얼굴이 화닥닥 달아올랐다. 기침까지 나올 것 같아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세니안?”
란슬롯이 괜찮으냐는 듯 물었다. 그는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 모르는 나에게 물 잔을 건넸다. 한 컵을 다 마시고도 매운맛이 가시지 않아서 끙끙거렸다.
‘저걸 어떻게 먹지?’
맵기로 유명한 라면 브랜드의 고통스러운 볶음면보다 더 괴로웠다.
“정말 괜찮겠어?”
란슬롯의 말에 나는 겨우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미니크는 가지 요리의 집게를 잡으려다가 멈칫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우유에 졸인 밤을 접시에 덜었다.
‘다행이다…….’
가지 요리를 엄청 좋아하는 거면 다시 먹어야 하나 싶었다. 나는 달짝지근한 밤으로 매운맛을 중화시켰다.
식사를 하고 돌아와 침대에 늘어졌다. 혀는 아직까지 얼얼하고, 위는 화끈화끈하다. 시트론이 나에게 약을 챙겨 주며 말했다.
“전하께서 매운맛을 즐기신대요.”
“그래서 그렇게 매운 게 나왔구나.”
“평소에는 매운 음식이 안 나오나 봐요. 가웨인 도련님이 좋아하시는데도요.”
“할아버지의 몸에 부담될 테니까.”
나는 시트론이 챙겨 준 약을 먹으며 푸르르 고개를 저었다.
‘정신 차려야지.’
오늘 저녁에 내 요리를 선보여야 한다. 사실은 ‘그것’을 그대로 튀겨내 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손님과의 저녁상엔 술이 빠지지 않고, 그건 술안주로 제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매운맛을 좋아한다면 메뉴 자체를 바꾸는 게 좋을 거다.
시트론과 나는 조리실로 향했다. 그런데 조리대 위에 못 보던 것이 올려져 있었다. 쪽지를 묶어 놓은 것 같은 종이였는데, 펼쳐보니 가루약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뭐지?”
“글쎄요?”
‘누군가 나를 방해하려고 또 수면제를 넣어놨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먹는 건 께름칙해서 바구니에 넣어뒀다. 시트론은 어제 정리한 칼과 도마를 꺼냈고, 나는 만들어 둔 것을 꺼내 보았다.
“어때요?”
“고운 빛깔이야.”
“맛도 좋았…… 어머.”
도마를 내려놓던 그녀가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창문 밖에 서 있는 가웨인을 보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 여기 계세요?”
그는 창문틀에 기대어 턱을 괸 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붕어.”
“네?”
“입술이 퉁퉁 부었군.”
‘그야 엄청 매운 음식을 먹었으니까.’
매운맛은 미각이 아니라 통각이라잖아. 졸로키아 소스가 입술에도 닿았으니 퉁퉁 부을 수밖에.
“못생긴 얼굴이 더 못생겨졌네.”
“뭐라고요?”
“남매 중에 제일 못났잖아.”
“그쪽도 그렇게 잘생긴 얼굴…….”
“어머!”
가웨인의 뒤를 지나가던 하녀들이 그를 발견하곤 얼굴을 붉혔다. 나는 그를 새초롬하게 흘겼다.
“란슬롯이 더 잘생겼어요.”
“뭐?! 말도 안 돼. 눈이 삔 거 아냐?”
벌떡 일어나는 그에게서 진심으로 어이없어하는 게 느껴졌다.
“란슬롯이 얼굴도 더 하얗고, 섬세하게 생겼잖아요.”
“그건 약해빠지게 생긴 거지.”
“아름답게 생긴 거예요. 왕자님처럼.”
“말도 안……!”
“기쁜걸.”
어느새 다가온 란슬롯이 나와 가웨인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리 와 봐.”
가웨인이 그를 바짝 끌어당겼다.
“잘 봐. 내 어디가 형보다 못하다는 거야?”
나는 두 남자를 지그시 응시했다.
“역시 란슬롯이 더 잘생겼어요.”
“너……!”
“나도 세니안이 네 녀석보다 예쁘다고 생각해.”
란슬롯이 픽 웃으며 가웨인의 머리를 밀어내자 그가 왈칵 인상을 썼다.
“내가 이 녀석보다 예쁘면 그게 더 문제 아니야?”
날뛰는 가웨인을 뒤로하고, 란슬롯이 나를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내가 다가가자 손에 쥐여 주고는 물과 함께 먹으라고 했다.
“약이에요?”
“응. 위장약.”
“고마워요.”
“뭘.”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왕자를 시켜 줬는데 이쯤이야.”
가웨인을 골려 주려고 한 말이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엄청 부끄러운 말이다. 나는 얼굴을 조금 붉힌 채 약봉지만 매만졌다.
“왕자는 무슨.”
“주라던 약도 잊은 놈이 왕자님 자리는 탐이 나?”
툴툴대는 가웨인을 약 올리듯 란슬롯이 빈정거렸다.
“주려고 했어.”
그가 슥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자.”
“…….”
“왜? 왕자님이 준 건 먹고 왈패 같은 내가 준 건 안 먹으려고?”
왠지 골이 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두 사람의 약을 펼쳐 본 나는 조리대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준 가루약은 노란색, 바구니에 넣어 둔 가루도 노란색이다.
‘저것도 위장약일까? 그럼 누가 준 거지?’
나는 눈을 데루룩 굴렸다. 식당을 나오던 나를 불러 세우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그의 부름에 기다리고 있었으나 한참 말이 없었다.
[아니다. 가 봐라.]
그렇게 말하던 그가 떠올랐다.
‘설마…….’
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를 떠올렸더니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월급을 받지!’
나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란슬롯과 가웨인은 움직이는 나를 구경했다. 가웨인이 다시 창틀에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병아리 같네.”
“뭐?”
“뽈뽈거리는 게 말이야. 입술이 퉁퉁 부어서 새빨간 게 부리 같고.”
“그러네.”
“엄청 작아. 왜지? 같은 걸 먹고 컸는데.”
물을 끓이던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집중이 안 돼.’
나의 우울한 표정을 본 시트론이 웃음을 삼켰다.
* * *
만찬을 앞두고 무사히 요리를 완성했다. 졸로키아가 든 토마토소스 그라탱이었다. 손수 만든 회심의 ‘그것’을 미트볼 대신 넣었다. 방을 정리하고 온 시트론이 나를 불렀다.
“아가씨, 이제 슬슬 준비하셔야 해요.”
“그래.”
“요리는 마무리되었나요?”
“응, 이대로 성의 주방으로 가져가.”
“오븐에 넣고 돌리라고 하면 될까요?”
별채에서 성까지는 꽤 거리가 있기에 요리를 완성해서 가져가면 다 식을 것이다. 그래서 굽는 것은 성의 주방에서 하기로 했다.
“그래, 양이 많으니까 30분 정도. 아, 그리고……!”
“아가씨의 조리실에 있는 오븐과 같은 오븐에 세 번으로 나눠서요.”
시트론은 미리 알려 준 지시 사항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만찬용 주방에 미리 가서 확인해 보니 오븐 화력이 너무 거셌다. 이 세계의 오븐은 윤세나가 살던 세계처럼 세심하게 불 조절을 할 수 없어서 태우지 않기 위해 세 번 나누어 굽기로 했다.
트레이를 맡기고 서둘러 돌아온 시트론이 단장을 도왔다.
‘와, 전문가의 손길은 다르네.’
오늘 드레스는 정말 예뻤다. 에메랄드색의 드레스는 치마 밑단으로 갈수록 짙은 쪽빛이 되었다. 소매며 치맛단에 작은 진주와 큐빅이 콕콕 박혀 있어 마치 밤하늘을 연상시킨다. 시트론은 가을밤은 춥다면서 하얀색 몽실몽실한 망토를 입혀 주었다.
“이렇게 머리까지 땋으니 요정 같으시네요.”
시트론의 평가가 너무 후하다고 생각했는데, 만찬장에 들어가자 다들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세니아나가 꾸미는 걸 싫어하긴 했지.’
매번 할아버지 보란 듯이 엉망인 꼴로 왔었으니 반응이 저럴 만도 하다. 란슬롯과 가웨인이 다가왔다.
“오늘은 봐 줄 만한데?”
“오늘도, 예요.”
그러자 그가 킥킥 웃었다. 우리 남매는 손님들과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도미니크 전하께서 아가씨의 요리를 맛보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늘 운이 좋으시군요.”
“하하, 영애의 요리라니.”
말투는 상냥하지만, 가소롭다는 눈빛이었다. 가웨인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내가 할아버지에게 밉보였다고 생각하니까.’
잘 보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웨인이 인상을 쓰며 입을 열려 했을 때였다.
“아가씨.”
시트론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주변의 눈치를 본 그녀가 내 귀에 속삭였다.
“요리가 전부 타 버렸습니다.”
‘뭐라고?!’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만찬용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라탱이 새까맣게 타서 오븐 도어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전부. 내 눈치를 보던 관리급 요리사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너 이 녀석! 아가씨의 요리를 이따위로 망쳐 놓다니!”
그러자 벌벌 떨고 있던 요리사가 울먹였다.
“제, 제 탓이 아닙니다!”
“아가씨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면 이, 이런 일은 없었을…….”
“뭐라고?”
“오, 오븐의 특성을 모르시니까 그냥 한 번에 구우면 된다고 생각하셨나 본데……!”
그 말에 시트론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거짓말! 아가씨께선 이 오븐을 미리 확인하셨어요! 그래서 세 번에 나눠 구우라고 말씀하셨다고요!”
“나, 나는 못 들었다고요. 그, 그리고 애초에 정말로 그렇게 말씀하신 게 사실인지도 모, 모르는…….”
“뭐라고요?”
“요리에 서툰 아가씨께서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겠습니까!”
“무례한 작자! 감히 아가씨께……!”
화가 잔뜩 난 시트론의 고함과 요리사의 울먹거림, 그리고 허둥거리는 요리사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뒤섞였다. 그때 사달이 났다는 말을 듣고 총주방장 아곤이 주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터질 듯 혼란스러운 주방 가운데에서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막 애피타이저가 나갔으니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20분가량이다. 그동안 음식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시간이 부족해.’
곰곰이 고민하던 나는 문득 탄 그라탱을 쳐다보았다.
‘혹시 그거라면…….’
내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도 소란은 계속되었다.
“거짓말만 늘어놓다니 교활해요! 집사님께 고발하겠어요!”
그 말에 수셰프 제레미가 펄쩍 뛰었다.
“뭐라고? 잠깐! 이건 주방의 일입니다. 이 녀석의 일이 밖으로 퍼지면 주방의 체면이……!”
이어서 이 사달을 만든 요리사가 다급히 변명했다.
“고, 고발?! 나는 잘못한 게 없다니까요!”
짝! 내가 손뼉을 치자 놀란 사람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다들 자리로 돌아가.”
“하, 하지만……!”
제레미가 항변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돌아가. 손님이 기다리고 계시면 요리사는 요리에 집중한다! 그게 요리사의 상식이잖아.”
주방이 고요해졌다. 요리사들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붉은 머리의 여자 요리사가 말했다.
“아가씨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다들 뭐 해요, 어서 자리로 돌아가세요!”
그녀가 조리대에 팽개쳐 둔 에이프런을 두르자 사람들도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총주방장인 아곤이 묘한 시선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아…. 아닙니다.”
“그보다 혹시 테이블용 화로 같은 게 있을까?”
“그거라면 일전에 구비 해 둔 것이 있습니다.”
“그럼 가져다줘.”
나는 조리대에 놓인 빵 끈으로 예쁘게 손질했던 머리를 하나로 틀어 묶었다. 그리고 여분의 조리복을 드레스 위에 끼어 입었다. 내가 팔을 걷어붙이자 요리를 태워 먹은 요리사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안심하란 뜻은 아니었는데.”
“예, 예?”
“이번 일은 차후에 제대로 논의할 거야. 거짓말을 줄줄 토해 냈으니 입이 찢어질 각오 정도는 해 둬.”
남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나는 자비 없이 시선을 거두었다.
“시트론, 너는 내 조리실에 여분으로 만들어 둔 ‘그걸’ 가져와.”
“얼마나 가져올까요?”
“있는 대로 전부. 아, 그리고 그 빨간 소스 있지? 그것도 함께 가져와 줘.”
시트론이 얼른 조리실 밖으로 나섰다.
아곤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정말로?’
정말 저 사람이 프렌시프의 망아지라 불리던 세니아나가 맞는 것인가. 칠면조 찜 사건으로 놀라운 변화가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처럼 기막히게 진화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요리가 탄 것에 가장 당황했을 사람은 그녀였다. 그런데 누구보다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빠르고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움직임도 달라졌어.’
칼질은 아직 몸에 익지 않아서 노련하다곤 할 수 없지만, 행동에 낭비가 없었다. 마치 좁은 주방에서 오래 일해 왔던 사람처럼 움직였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하다.’
이제 메인 요리가 나가려면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재료를 다 익히지도 못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세니아나는 준비한 재료와 소스를 냄비에 우르르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제 옮겨 줘.”
‘뭐라고?’
당황한 아곤이 그녀를 붙들었다.
“자, 잠시만요, 아가씨. 아직 밑 준비에 불과한 것을 어찌……!”
“괜찮아.”
“예?”
“이게 훌륭한 요리가 될 테니까.”
그렇게 말한 그녀는 생긋 웃고는 조리복을 벗었다. 아곤은 우려가 앞서 세니아나를 쫓았다. 이런 요리를 내는 것을 보고도 만류하지 않는다면 주방에까지 피해가 미칠 것이다. 하지만 그가 회장에 들어갔을 땐 이미 늦은 상태였다. 만찬 테이블에 화로와 함께 냄비가 올라가 있었다. 홀 안에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하, 하하.”
누군가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자 하나둘 입을 열었다.
“낯선 요리군요. 이와 같은 요리는 본 바 없습니다.”
테이블에 화로를 올리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북부에선 음식의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 테이블 화로를 자주 이용했다.
‘하지만 동부의 귀족들에겐 생소하지.’
아곤의 생각처럼 사람들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수습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이 와중에 평소와 다름없는 건 세니아나뿐이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화로에 불을 올리라 명했다. 불이 켜지고, 음식이 끓기 시작하자 세니아나는 냄비의 덮개를 열었다. 화아― 음식이 끓으며 나는 강렬한 향이 회장을 뒤덮었다.
“오…….”
“냄새는 꽤…….”
그제야 사람들이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곤은 이제야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서 세니아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영리해.’
만약 이것이 만찬의 여흥을 위한 퍼포먼스라면 성공이다. 완성된 음식의 향기와 조리 중인 음식의 향기는 파급력이 다르다. 분자가 열에 휘발되며 퍼지는 냄새가 가장 강렬하기 때문이다.
‘식(喰)의 시작은 후각이다.’
코를 막으면 양파와 사과를 구분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후각은 미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보글보글, 경쾌한 소리는 마치 타악기가 자아내는 음색과 같았다. 아곤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자극적이다. 눈과 귀, 코까지 사로잡았어.’
세니아나가 시트론에게 명해 음식을 그릇에 덜었다. 시트론은 도미니크 황자의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맛보아 주시겠습니까.”
세니아나의 말에 도미니크는 가만히 그릇 안을 들여다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의 손에 집중되었다. 그가 이내 포크를 들었다.
양배추를 찍어 올리자 배여 있던 소스가 주륵 둔하게 흘러내렸다. 느리게 흘러내린 빨간 소스를 보던 사람들이 꿀꺽 침을 삼켰다. 도미니크가 양배추를 입안에 넣었다. 아삭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그의 입안에서 양배추가 뭉그러졌다.
도미니크는 다른 내용물을 집었다. 둥근 것만 봤을 땐 미트볼인가 싶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전혀 달랐다. 미트처럼 묵직하지도 않고, 색 또한 노르스름했다. 맛은 더더욱 달랐다.
‘가볍다.’
육류 특유의 기름진 맛이 전혀 아니었다. 담백하면서 짭조름했고, 향은 고기 쪽이라기보단 오히려 치즈의 그것과 비슷했다. 동그란 것 옆에 넓적하고, 네모난 재료도 그와 비슷했다.
‘괜찮은 맛이야.’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접시를 반쯤 비운 도미니크를 보고 세니아나가 입을 열었다.
“어떠신가요? 해산물도 나쁘지는 않지요?”
“해산물?”
그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대체 이 음식의 어디에 해산물을 넣었단 말인가. 세니아나가 입매를 둥글게 휘며 말했다.
“전하께서 방금 드신 그것을 어묵(Fish cake)이라고 합니다.”
“어묵…… 이라고요.”
“예. 그 요리는 떡볶이라고 하지요.”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묵의 비린내까지 못 견디면 어찌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는 잘 먹어 주었다. 내가 이번 만찬에 내려던 것은 고추장 소스, 그리고 떡과 어묵을 넣은 그라탱이었다.
‘떡볶이보다는 그쪽이 익숙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떡볶이를 낸 게 차라리 잘 되었구나 싶었다. 도미니크의 흥미를 끌어내서 재료보다는 요리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어묵을 보던 그가 다시 한번 그것을 맛보았다.
“이게 생선으로 만든 요리라.”
“흰 살 생선 세 종류와 오징어를 다져 만들었습니다.”
이제 결과만 괜찮으면 이번 미션은 성공이다.
‘하지만 워낙 생소한 음식이라…….’
란슬롯이 웃는 표정으로 도미니크에게 물었다.
“어떠십니까, 저하. 세니아나가 만든 요리가 입에 맞으십니까?”
한동안 말이 없는 그 때문에 나는 콩닥콩닥 떨리는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다시 한 번 떡볶이를 맛본 그가 입을 열었다.
“맛있습니다.”
난 비명을 삼켰다.
‘맛있대…….’
기쁨으로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이제 저희도 이 떡볶이란 것을 맛보고 싶은데요.”
“예, 굉장히 궁금합니다.”
조급해진 사람들이 음식을 재촉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인들이 음식을 그릇에 담아 날랐다. 맛본 사람들이 모두 감탄했다.
“오오.”
“매콤하고 달짝지근한 것이 계속 손이 가는군.”
“흐음, 이 떡이란 것의 식감이 굉장히 새롭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기뻤다. 정성을 다한 요리를 손님들이 기쁘게 먹어 주는 건 그 무엇보다 가슴이 떨리는 일이었다.
만찬이 끝나고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홀을 나섰다.
‘카메라가 있으면 좋을 텐데.’
싹 비운 냄비를 찍어 두고 싶었다. 내가 흐응, 흥, 콧노래를 부르며 걷자 함께 걷던 가웨인이 픽 웃었다.
“조부님과 대체 뭘 약속했기에 그렇게 기뻐하는 거야?”
“네?”
“거래를 성공시켜서 기뻐하던 거 아니야?”
“아…….”
맞다, 거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세상에, 나 사재를 찾을 수 있어.’
가웨인은 그런 나를 보며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런 바보를 봤나.”
“그냥 도미니크 저하께서 제 요리를 맛있게 드신 게 좋아서…….”
가웨인이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 그놈에게 다른 생각 있어?”
“다른 생각이요?”
“정말 결혼이라도 하려는 거냐고.”
‘아아, 그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정말이냐?”
“네. 도미니크 저하께도 말씀드렸어요. 결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아, 그런데 그것 때문에 상처받으셨을까…….”
가웨인이 눈을 홉떴다. 곁에 있던 란슬롯도 무슨 말이냐는 듯 나를 보았다.
“상처라니?”
“결혼할 만한 매력이 없다고 하지 말 걸 그랬나 봐요.”
가웨인이 이해되지 않는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그자, 냉혹하긴 해도 외모로는 제국 제일가는 사내다. 그런데 매력이 없다고?”
“오빠들과 지내서 그런가…….”
잘생기고, 목소리가 좋고, 몸도 탄탄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큰 감흥은 없었다. 란슬롯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목소리는 란슬롯이 더 좋고, 몸은 가웨인이 더 좋으니까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걷는데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안 가세요?”
―하고 물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우뚝 멈춰선 가웨인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그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밤이라 무서우면 별채까지 같이 가 줄 수도 있어.”
란슬롯도 어쩐지 이전보다 더 화사하게 웃는 것 같았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아니요…….”
두 사람과 함께 가는 게 더 무섭다고요…….
* * *
사흘 후, 할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그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쓸 만하더구나.”
“감사합니다.”
“약속은 지키지.”
그가 작은 상자를 건넸다. 열어 보니 반지형 인장과 몇 장의 서류가 있었다. 전생의 개념으로 따지면 인장은 신용 카드 같은 것이고, 서류는 통장 정도 되는 듯했다.
‘이 인장 자체만으로도 엄청 비싸겠다…….’
그러고 보니 프렌시프 형제의 인장도 멋있었다. 그들이 엄지에 끼고 있던 인장은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고풍스러운 디자인에, 중앙에 각자 다른 보석이 박혀 있었다. 란슬롯은 토파즈, 가웨인은 사파이어였다. 그리고 내 인장의 보석은 토르말린이다.
할아버지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빼앗길세라 냉큼 반지를 끼고 상자를 꼭 끌어안았다. 그런 모습에 그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금액 확인이 먼저지 않으냐.”
나는 상자를 다시 열어 서류 끝에 적힌 숫자를 확인했다. 30만 피니.
‘지구로 계산하면 1피니 당 1달러 정도였던 것 같은데.’
그럼 원(Krw)으로는…… 3억?! 눈이 휘둥그레져서 목록을 다시 살폈다. 다시 봐도 3억, 아니, 30만 피니다. 이렇게 큰돈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어서 손이 달달 떨렸다.
“그, 금액이 잘못된 것 같은데요.”
“네 가치를 환산한 금액이다.”
그는 싸늘한 말투로 이어 말했다.
“란슬롯과 가웨인은 맡은 역할을 지금껏 착실히 수행했지. 그 녀석들과 사재금이 다른 건 당연한 일이다.”
“그게 아니라 너무 많아요!”
내 가치가 3억이라는 건 너무 과대평가였다. 일전에 할아버지가 줬던 레시피 값이 1,000피니였다. 사재는 그 두세 배 정도로 예상했었기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할아버지는 픽 실소를 흘리다가 멈칫하고 얼굴을 굳혔다.
“내가 결정한 바에 토 달고 싶거든 근거를 제시해.”
근거라니. 내 가치는 사실 이것밖에 안 된다고요! 하는 근거를 어떻게 제시한단 말인가. 나는 결국 우물쭈물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히 쓸게요…….”
“나가 봐.”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려던 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궁금한 게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제 조리실에 위장약을 놓고 가셨어요?”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니!”
대답이 빠르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왜 그랬겠어.’
나는 마저 일어나서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그러고 나서 끌어안은 상자를 슬그머니 내려다보았다.
‘30만 피니.’
생각지도 못한 거금이다. 이 정도면 여비로는 충분하다.
‘이제 성을 나갈까?’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친부를 쫓던 사채업자들은 3백만 원의 빚을 3천만 원으로 불려서 우리 부녀를 땅끝까지 쫓아왔다. 그런데 내가 쥔 돈은 한화로 따지면 무려 3억이다.
‘이걸 가지고 도망가면…….’
할아버지와 오빠들이 도깨비처럼 쫓아오는 상상을 하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그걸 견디는 건 무리야.’
빚쟁이를 피해 도피하는 건 전생에서 겪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 사재를 밑천으로 돈을 불리자. 내가 번 돈만 가져가는 거야!’
그렇다고 처음부터 큰 사업에 도전하면 있는 돈까지 깡그리 날릴 것이다.
‘내게 제일 익숙한 건 음식을 만들어서 파는 거니까…… 좋아, 가게를 구하자.’
이 금액이면 중앙 애비뉴는 힘들어도 상점 거리 외곽에 작은 단층 건물 하나는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마친 나는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그러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란슬롯을 발견했다. 그는 내가 품에 안은 상자와 검지에 낀 인장을 잠깐 보고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받았구나.”
“네.”
“다행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기, 상점 거리 지하 건물은 얼마 정도 할까요?”
“글쎄.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외곽의 단층이라면 20만 피니 정도는 할 거야.”
“그렇구나…….”
“그건 왜?”
“오늘 중개업소에 갈 거라서 대충 시세는 알아 두려고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조심해서 다녀와라.”
쓰다듬는 손과 목소리가 다정해서 나도 모르게 헤헤 웃었다. 그러자 그가 물었다.
“왜?”
“그냥 좋아서요.”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조심해서 다녀와’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오랜만에 듣는 다정한 배웅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오라버니 손, 따뜻해요.”
란슬롯이 잠깐 눈을 크게 뜨더니 침음을 흘렸다.
“이거 곤란한데…….”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부드러웠다.
* * *
기사와 시트론을 대동하여 부동산 중개업소를 찾았다. 기사들을 문밖에 대기 시켜 놓고, 시트론과 안으로 들어갔다. 외알 안경을 쓴 노파가 친절하게 웃으며 손을 비볐다.
“어여쁜 아가씨일세. 자자, 여기 편히 앉아요.”
나는 노파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웬 서류에 무언가 잔뜩 쓰여 있었다. 얼핏 보니 주소와 금액 같았는데, 노파가 후닥닥 서류를 뒤집었다.
“건물은 어딜 알아보시려고요?”
“작고 허름해도 괜찮지만, 중앙 애비뉴를 걸어서 오갈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여야 하고, 주방은 필수.”
노파는 고심하는 듯 신음하며 서류를 뒤적거렸다.
“그렇다면 5―31번지를 추천하고 싶군요. 낡긴 했지만 오페라 하우스와 가까워서…….”
주절주절 설명을 늘어놓던 그녀가 외알 안경을 약지로 슥 올렸다.
“그렇지만 상점가 내 건물은 원체 고액인지라 어리신 아가씨께서 구매하시기엔…….”
그러면서 안경 위로 눈을 치켜뜨고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40만 피니라서요.”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말한 조건의 건물은 평균 시세가 20만 피니랬어.’
란슬롯이 한 말이니 확실하다. 그러니까 이건 소위 말해 눈탱이 치기란 것이다. 가격을 부풀려 말해서 고객이 기겁하면 ‘저희가 나서서 주인과 가격을 조정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하고 나오는 게 순서다. 중개료를 비싸게 뜯어내려고. 처음 후다닥 뒤집었던 종이는 아마 건물의 시세표일 것이다.
‘낯선 나를 뭣 모르는 이주민이라고 생각해서 뜯어먹으려는 모양인데.’
나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흐응, 40만 피니라.”
“당황스러운 가격이긴 합니다. 어린 아가씨라 잘 모르시겠지만, 이런 경우엔 중개업자가 나서서…….”
“정말로? 나베리우스 프렌시프와 아서 프렌시프의 이름을 걸 수 있나?”
노파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네가 영주 부자를 어떻게 아느냐는 표정이었다.
“물론이지요!”
나는 팔랑팔랑 손을 흔들어 시트론을 불렀다.
“가서 기사들을 데려와.”
시트론이 씩 웃고는 기사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기사들이 두른 케이프에 수 놓인 프렌시프의 문장을 보고 노파는 희게 질렸다. 그러고는 할아버지와 똑같은 나의 머리칼을 한 번, 그리고 붉은 눈을 또 한 번 쳐다보았다. 나는 평이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래서 5―31번지가 얼마라고?”
“시, 십오만 피니…….”
‘세상에, 두 배 넘게 올려 불렀구나.’
눈살을 찌푸리자 노파가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감히 아버님과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거짓을 말한 자는 어떻게 되지?”
물은 것뿐인데 기사들이 눈을 희번덕 뜨며 안광을 띄웠다. 정말 명예에 먹칠을 당한 것처럼 보였다.
“영지민이라면 재판에 부쳐지겠지만…….”
잿빛 머리의 사내가 중얼거리자 그 옆에 있던 포도주색 머리칼의 사내가 음산하게 말을 받았다.
“과연 재판장까지 살아서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뭐, 프렌시프의 기사며 병사를 다 죽일 수 있는 신화 속 존재라면 모를 이야기지만요.”
프렌시프의 기사와 병사가 죄다 눈에 불을 켜고 노파를 노릴 거라는 소리였다. 나는 그녀를 슥 쳐다보았다. 하얗던 얼굴이 금세 샛노랗게 변했고, 종래엔 시체처럼 거무죽죽해졌다.
“그렇다는군.”
“사, 살려, 살려 주…….”
“자, 그럼 들어.”
노파가 땅에 머리를 처박을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20만 피니를 예산으로 내가 말한 조건에 맞는 곳을 세 군데 찾아와.”
“예?! 하지만 그건……!”
시트론이 크게 헛기침하자 노파는 울상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기한은 일주일 주지.”
“일주일……!”
“못 하겠으면 말해도 좋아.”
“아닙니다…….”
못 하겠으면 시일을 늘려 주려고 했는데, 냉큼 된다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이 좋은 중개업자인가 보네.’
노파와 이야기를 마친 뒤 중개업소를 나섰다. 좋은 가격에 괜찮은 건물을 얻을 수 있겠구나 싶어서 기분이 좋았다.
‘사실 세 곳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일단 세게 불러야 그 근처까지는 도달할 테니 어깃장을 놓은 거다. 시트론은 웃는 나를 보고 함께 미소 지었다.
“이제 돌아가실 건가요?”
“으음, 기왕 나왔으니까 뭐라도 보고, 먹고 갈까?”
“그걸 다 하시게요?”
“뭐든 가성비가 좋아야 하니까.”
뒤에서 풋, 하고 웃음소리가 터졌다. 시트론이 웃은 기사를 흘기며 눈치 주듯 불렀다.
“바커스 경.”
“영애께서 가성비라는 단어를 쓰시는 게 귀, 아니…….”
포도주색 머리의 기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했다. 그의 눈알이 옆에 있는 기사를 향해 도르륵 굴러갔다. 회색 머리의 기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영애.”
“괜찮아.”
내 말을 들은 회색 머리의 기사가 부드럽게 눈매를 휘었다.
“아가씨의 변화를 모두가 달가워합니다.”
“으음, 이름이 뭐더라?”
“고레일입니다.”
“고레일 경이 보기엔 이전의 내가 많이 날카로웠나?”
그의 입매가 딱 굳었다.
‘어떤 성격인지 알겠다. 일은 잘하는데 고지식하구나.’
조금 방정맞아 보이는 바커스 경과는 딴판이었다. 거짓말을 하느니 입을 꾹 다무는 모습에 나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무슨 뜻인지 알았어.”
“……안타까웠습니다.”
“무엇이?”
“과거의 아가씨는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 분처럼 보였으니까요.”
바커스 경이 쑥 끼어들어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지셨죠. 두 분 도련님께서도 그렇고, 어르신께서도 영애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셨잖습니까.”
“그래 보여?”
“그럼요! 작은 도련님께서 저희에게 직접 호위를 명하셨…… 윽!”
고레일이 바커스의 발등을 꾹 밟았다. 나는 흐뭇하다는 듯이 웃고 있는 시트론에게 물었다.
“가웨인이 왜 저들에게 직접 호위를 맡긴 거야?”
“그야 경들이 알아주는 실력자니까요.”
실력자들을 왜? 그러다 불현듯 드는 생각에 헉 숨을 들이켰다.
‘내가 사재를 들고 도망칠까 봐 감시를 붙여 놓은 건가? 할아버지가 시킨 걸지도…….’
내 표정을 본 시트론은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생각했다.
‘믿음이 필요해.’
충분한 여비를 만들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그동안 계속 감시당한다면 행동이 제약될 것이다. 여비를 만들고 난 후에도 감시가 있으면 도망치기 힘들 테니 문제가 된다.
‘이미지는 어느 정도 회복한 것 같으니 본격적으로 친목을 도모해 보자.’
그렇게 결심한 나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돌아갈래.”
“구경하겠다고 하셨잖아요?”
“아니야…….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사이를 돈독히 해서 감시를 뿌리쳐야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뒤로 도는데, 놀란 표정의 바커스와 고레일이 보였다.
* * *
가웨인이 노크 없이 란슬롯의 집무실에 들어갔다.
“버릇없다.”
란슬롯이 미소 지으며 차갑게 말했다.
“화를 내든가, 웃든가 둘 중 하나만 하지?”
“눈치까지 없어서야.”
“요새 유난히 날을 세우네.”
“너보다 깜찍한 놈이 있으니까.”
언제는 날 깜찍하게 봤나. 가웨인은 헛웃음을 흘리며 소파에 앉았다.
“세니안?”
깜찍한 사람이 세니아나냐는 물음에 란슬롯은 말없이 펜을 움직였다. 긍정의 뜻이었다.
“세니아나를 싫어하지 않았나?”
“너야말로. ‘그 일’은 다 잊은 거야?”
란슬롯의 말에 생에 가장 분노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가웨인, 네가 내게 손을 내민다고?]
[정신 차려. 너나 나나 뭐가 다르지?]
[내 어머니는 나를 지키려고 했어. 하지만 가웨인, 네 대단한 공주 어머니는 다르잖아.]
[그 여자가 한 번이라도 널 찾았어? 등신, 넌 여기에 버려진 거야.]
[나도 저 어르신에게 쓰레기지만, 너도 마찬가지라고! 네 어머니에게 쓰레기처럼 버려졌어!]
그날은 가웨인의 열세 번째 생일 파티였고, 사람들은 세니아나의 말을 듣고 수군거렸다. 제 꼴은 비참했다. 세니아나가 발작적으로 던진 찻잔에 찢어진 머리에서 흘러내리던 선혈. 그보다 더 아팠던 건 그녀가 말로 쏘아 댄 활이었다.
‘알고 있었으니까. 버려졌다는 것 따위.’
그렇게 앙금이 켜켜이 쌓여 남매는 서로를 외면했다. 플로헤타가 그 애에게 한 일을 들었을 땐 머리가 새하얘졌다. 전에도 소매 밑에 생긴 멍과 상처를 본 적이 있었기에 또 발작했겠거니 쉽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린애의 독기 때문에 벌어진 일의 대가라기엔 플로헤타의 학대는 과했어.”
“그것뿐이야?”
란슬롯이 빙글빙글 웃으며 그를 보았다. 가웨인이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그게 때릴 거냐고 묻잖아.”
어깨를 떠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럽다고 느껴졌다. 플로헤타가 이 성에 있었던 1년뿐만이 아니라 마치 평생을 맞고 산 사람 같아 보였다. 혀를 찬 가웨인이 란슬롯을 쏘아보았다.
“형도 태도가 변한 건 마찬가지잖아. 형은 그 녀석의 뭐에 마음이 동한 건데?”
“나는…….”
란슬롯이 픽 웃었다.
[쓰다듬어도 돼요.]
그게 귀여웠고, 또…….
“오라버니 손 따뜻해요, 일까.”
가웨인이 왈칵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 녀석이 형더러?”
자신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다정한 말이었다. 란슬롯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오늘. 외출 전에.”
“왜 형한테만……!”
그가 울컥하여 소리쳤다. 란슬롯과 자신이 뭐가 다르다고 차별이란 말인가. 그간 세니아나에게 무심했던 건 란슬롯도 마찬가지인데! 가웨인이 고개를 홱 돌리며 제 형을 쳐다보았다.
“어땠는데.”
“귀여웠지.”
얼이 빠진 가웨인을 보고 란슬롯이 말했다.
“잘해 줘, 인마. 그래야 네놈도 가족으로 인정받지.”
“나도 바커스와 고레일을 호위로 빼 줬다고. 바쁜 날인데 말이야.”
서류에 서명하던 란슬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걸 세니아나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하여간에 수작 부릴 줄 모르는 놈이다. 그는 가웨인에게 다른 방식을 택하라고 조언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자신만 세니아나에게 특별 취급받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었으니까. 란슬롯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 * *
‘왜 저렇게 노려보는 거지?’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슬그머니 내리깔았다. 성에 도착하자마자 가웨인을 만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올려다보니 그는 인상을 콱 찡그리고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듣고 싶은 말이 있나?’
나는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그를 슬쩍 쳐다보았다.
“으음, 저기, 다녀왔… 습니다?”
“…….”
“중개업소에 다녀왔… 어요?”
“…….”
“마차가 아주 편안하고 좋았습니다?”
“…….”
“호위 감사합니다?”
그가 작게 헛기침했다.
‘이건가 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잘해 준 거지?”
“네?”
“그러니까 내가 네게…….”
그렇게 말하던 그가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뭐, 됐어. 천천히.”
그러더니 내 머리를 휙휙 헝클어뜨렸다.
‘으응?’
“가라.”
나와 함께 있던 바커스가 낄낄댔다. 그러다 가웨인에게 배를 얻어맞고 꺽! 소리를 내며 허리를 새우처럼 굽혔다. 뒤돌아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던 나는 가만히 서서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졌다.
나는 별채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 할아버지의 방을 찾았다. 문 앞에 대기해 있던 집사와 가벼운 눈인사를 하던 찰나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쓸모없는 놈.”
문틈 사이로 할아버지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군가 송구스럽다며 사과하는 목소리가 들린 후 침묵이 이어졌다.
‘돌아갈까…….’
괜히 억지로 들어갔다가 불똥을 맞으면 곤란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가려고 했지만, 집사가 한발 빨랐다.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깜짝 놀란 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집사를 보았다. 그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뒤이어 아주 조그만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아가씨께서는.”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문 안에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나는 살짝 긴장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훤칠한 중년의 사내가 할아버지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이름이 떠올랐다.
[세드릭 경.]
반란군 토벌 때, 우두머리의 계책에 속아 넘어갈 뻔했던 기사였다.
‘칼립스 경이 대신 현장으로 갔다더니 본래 책임자였던 세드릭 경은 돌아온 모양이네.’
오늘은 반란군 토벌 사건으로 타박을 들은 모양이다.
‘그렇다면야 혼이 나는 것도 어쩔 수 없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할아버지의 옆에 앉았다.
“…….”
“…….”
할아버지는 별말이 없었다. 반면에 세드릭 경은 많이 놀랐는지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제가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왜요?”
“자리 배치가 좀, 뭐랄까. 당황스럽군요.”
그가 말을 잇지 못하고 할아버지를 바라보자 됐다는 짤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맞아, 우리는 자주 함께 앉는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세드릭 경을 보았다. 내 시선에 그가 낮게 웃고는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가씨를 호위한 아이들이 재미난 이야기를 하기에 무슨 조화인가 싶었는데, 제가 없는 사이 기꺼운 변화가 생긴 모양입니다.”
할아버지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재미난 이야기라니.”
“아가씨께서 예정보다 이르게 귀가하신 까닭이 어르신이 보고 싶어서, 라고 하더군요.”
찰나 간 내 얼굴에 할아버지의 시선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실이냐?”
“그건…… 네. 맞아요.”
‘나를 감시하지 않도록 친해져 보려는 속셈이었지!’
“…….”
할아버지가 휙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어린애처럼 뭘 할애비가 보고 싶다고…….”
투덜대는 목소리가 어쩐지 부드러워서 나는 좀 의아해졌다.
“조손의 애틋한 시간을 방해하면 안 되겠지요. 저는 그럼 이만…….”
“네놈은 전쟁터에서 내빼는 법만 배웠느냐.”
“그럼 계속 두 분 사이에 있어도 되겠습니까? 아가씨께서 불편해하실 텐데요.”
“흥, 약아빠진 놈.”
할아버지가 혀를 차며 나가라며 일갈했다. 세드릭 경은 인사한 후 재빨리 방을 나섰다. 방에 남은 건 할아버지와 나뿐이었다. 나는 손을 꼬물꼬물 얽으며 할아버지를 훔쳐보았다. 그러다가 덜컥 걱정이 들었다.
‘일하는데 방해하는 못된 손녀라고 생각하시면 어쩌지.’
나는 얼른 변명했다.
“대화 중이신 건 알았는데요. 집사가 괜찮다기에 귀가 인사만 잠깐 드리고 가려 했어요.”
할아버지가 방문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네?”
“오해하지 마라. 그저 좀 쓸 만해졌다고 생각할 뿐이니.”
이건 또 무슨 이야기람? 나는 이 집 사람들이 좀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번 주어와 목적어를 빼먹으니 대화가 아니라 수수께끼를 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속으로 꽁알대는 사이 할아버지는 잔을 들었다. 쌉싸름한 커피 향기가 그윽하게 풍겨왔다. 몇 모금 커피를 마시던 할아버지가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손을 접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어?’
나는 할아버지를 빤히 보았다.
“손이 저리세요?”
“별것 아니다.”
“평소에도 자주 그러나요?”
“뭐…….”
“아침에 일어나는 게 이전보다 힘드시고요?”
“그걸 어찌 알았느냐?”
“시력이 안 좋아졌다든가, 종종 어지럽다든가, 아! 화가 날 때, 혹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 목덜미가 뻐근하세요?”
“……그래.”
할아버지 얼굴 위로 식당의 단골손님이던 박 씨 할머니의 모습이 겹쳐졌다.
‘설마…….’
난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다시 물었다.
“무른 음식만 찾으시는 이유요. 그게 혹시 치아 때문이 아니라 턱 때문인가요? 턱이 움직이지 않아서 씹기 힘드신 거예요?”
할아버지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표정이었다.
“……비슷한 이유긴 하다만.”
“혈압은 확인한 적 있으세요?”
“혈압?”
그게 뭐냐는 듯한 말에 나는 완전히 굳어졌다.
나는 바로 프렌시프의 주치의인 마티스 남작을 호출했다. 할아버지는 별일 아닌데 괜히 요란을 떤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 생각이 맞다면 이건 별일이 맞아.’
할아버지의 심박 수를 확인한 의사가 물었다.
“손발이 저리신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석 달 전쯤부터 그러했지.”
“음식물을 제대로 씹을 수 없게 되신 지는요.”
“그건 한 달 정도 되었군.”
남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한 검사를 해 봐야 할 듯싶습니다.”
“내 상태가 심각하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근육에까지 무리가 온다는 건 심각한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의미겠지요.”
할아버지가 나를 쳐다보았다.
“너는…….”
“네?”
“의사도 아닌 네가 어떻게 내 상태를 안 것이냐.”
그야 할아버지와 비슷한 경우를 보았으니까. 나와 선생님이 하던 식당의 단골 할머니가 꼭 그랬다. 고혈압 합병증으로 언젠가부터 가슴에서 목까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셨다. 난 할아버지가 납득할 수 있는 변명을 생각하며 침음을 흘렸다.
“그게……. 예전에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혈액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심장에 무리가 온다고요. 심장에 무리가 가면 움직이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혹시나 한 것이죠.”
“흠…….”
할아버지는 미심쩍은 표정이긴 했지만, 더 묻진 않았다. 도리어 놀란 쪽은 마티스 남작이었다.
“전문 지식이 있는 사람들도 쉽게 유추하지 못하는데 훌륭하시군요. 따로 의학을 배워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가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까지 물어서 좀 민망해졌다.
“아니, 나는 요리만으로도 벅차서…….”
“재능은 그 분야에 대한 호불호와는 관계없지요. 제대로 배워 보시면 좋은 성과를…….”
의사가 눈을 반짝이며 더욱 다가올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르신,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카트를 밀고 들어온 그가 접시 위의 보를 들어 올렸다. 음식을 본 나는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안 돼요!”
음식은 죄다 달고 짠 것들이었다. 해산물이 잔뜩 들어간 붉은 파스타에 버터와 꿀을 바른 바게트, 칠면조 찜과 오렌지 주스.
“달고 짠 음식은 절대로 안 돼요.”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께서 옳습니다.”
“네, 절대로, 절대로요!”
고혈압 환자에게 달고 짠 음식은 독이나 진배없다. 나는 고개를 단호히 저으며 카트를 멀찍이 밀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만든 칠면조 찜도 달고 짠데…….’
할아버지는 근래 나의 칠면조 찜을 달고 사셨다. 그 때문에 상태가 더 나빠진 건 아니었을까 우려되었다. 칠면조 찜이 포크를 들고 할아버지를 찌르는 상상이 들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에게 고혈압이 있는 줄은 몰랐고……. 그렇지만 내 요리 때문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끄응, 신음을 삼키고 할아버지를 힐끗 보았다.
“저…… 할아버지, 괜찮으시면 제가 치료를 돕게 해 주세요.”
“네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요리가 건강을 망쳤다면 미안하니까.
“…….”
할아버지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네가 어떻게 치료를 돕는다는 게야.”
“병에는 식이 조절이 정말로 중요하잖아요. 그렇죠, 남작?”
“맞습니다. 치료의 시작이 바로 식이 조절입니다.”
나는 다시 할아버지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할아버지의 몸 상태는 프렌시프의 앞날이 달린 문제니까 사용인들에게조차 누설되면 안 되고요. 그런데 갑자기 식이 조절을 시작하면 의아해하는 사람이 분명 생길 거예요.”
“흠…….”
“그러니까 어차피 알고 있는 제가 돕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할아버지는 나를 힐끗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부터 할아버지를 위한 치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고혈압에 특히 좋은 재료가…….’
단골 할머니가 걱정되어서 고혈압 환자용 식단을 만든 적이 있었다. 그 덕에 치료식 재료를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비트! 시트론, 비트와 케일을 가져다줘. 그리고 바나나랑…….”
나는 비트와 케일, 바나나 등을 넣고 갈아서 주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주스를 할아버지에게 가져갔다. 며칠 내리 마시던 주스를 보자마자 할아버지가 인상을 썼다.
“몸에 엄청 좋은 건데요?”
“내가 풀 뜯어 먹는 토끼도 아니고…….”
“한 잔 다 드시면 오늘 점심은 고기로 할게요.”
“…….”
“어제 저녁에도 반이나 남기셨다면서요…….”
내가 부루퉁 입을 내밀자 할아버지는 옆에 서 있던 집사를 노려보았다.
‘집사가 이른 걸 어떻게 아셨지?’
집사는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며 모른 체하였다. 그리고 난 할아버지를 닦달했다.
“드세요.”
할아버지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고는 내온 주스 한 잔을 모두 마셨다.
“그럼 이제 산책 갈까요?”
“오늘도?”
그럼! 고혈압 환자에게 최고의 치료는 식이 조절, 그다음이 운동이었다. 할아버지가 또다시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정원으로 나온 후에 나는 할아버지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져 뒤따라 걸었다. 코와 귀가 시렸지만, 기분은 좋았다. 신선한 공기와 앙상한 가지에 핀 눈꽃, 걸을 때마다 몽실몽실 흔들리는 예쁜 망토. 그리고…….
‘가웨인이 사 준 구두!’
원래 봄에나 신어야지 했는데 참기 힘들어서 오늘 신고 나와 버렸다.
“뭐가 그리 좋으냐.”
“구두가 예뻐서…… 네?”
무심코 대답하던 나는 고개를 쑥 들었다.
‘방금 목소리 엄청 다정하지 않았나?’
마치 선생님이 날 귀여워할 때와 같았다.
“내가 빼앗으면 어찌하려고 신고 나온 게야.”
다시 들으니 평소처럼 무뚝뚝한 목소리여서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돈이 엄청 많으시니까 새것을 사시면 안 될까요?”
기죽은 목소리로 말하니 그가 실소를 흘렸다. 그 모습에서 얼핏 가웨인이 보였다.
‘란슬롯은 아버지를 닮았댔지. 그럼 세니아나는 누굴 닮았을까? 역시 세니아나의 어머니?’
그런 생각을 하는데 할아버지가 나를 돌아보았다.
“또 뭐가 궁금해서 눈을 굴리는 게야.”
“아, 저는 누굴 닮았나 싶어서요.”
잠시 침묵하던 할아버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는 나를 쏙 뺐지.”
‘아닌 것 같은데…….’
할아버지와 가웨인이 육식 동물 중에서도 흉포한 사자나 호랑이라면 세니아나는 초식 동물, 그것도 아주 작은 축의 소동물이었다.
“왜.”
“아니요…….”
내가 웅얼거리니 할아버지가 커다랗게 말했다.
“가까이서 걸어라.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으니!”
‘무, 무서운데.’
하지만 안 따르면 더 무서워질 것 같았다. 옆으로 다가가는 길에 할아버지의 다리를 보았다.
“…….”
난 말없이 할아버지의 팔을 잡았다.
“뭐야.”
“높은 구두를 신었더니 불편해서요. 잡아 주세요.”
“거짓말 못 하는 건 네 어미를 닮았군.”
“…….”
나는 양손으로 할아버지를 잡고 천천히 걸었다. 세니아나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아주 거대하고 두려운 존재였다. 거센 불기둥과 같아서 다가가면 온몸을 활활 태워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할 수만 있다면 과거의 세니아나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그냥 지킬 게 많은 외로운 노인이었다고. 지킬 게 너무 많아서 불편한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괜찮은 척, 여전히 강건한 척 걸어야 했다고.
* * *
서류를 든 채 조부의 방으로 들어오던 란슬롯과 가웨인은 멈칫하였다. 소파에 기대 잠들어 있는 세니아나가 보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가자 책상에서 업무를 보던 나베리우스가 말했다.
“막 잠들었으니 두어라.”
“예? 아, 예…….”
가웨인은 곁눈질로 제 형을 바라보았다. 그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인지 눈이 조금 커져 있었다. 세니아나가 조부의 외투를 끌어안으며 뒤척였다.
‘외투까지 덮어 주셨다고?’
란슬롯이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나베리우스가 물었다.
“포털 건은 어찌 되었느냐? 여전히 사비에르에서 어깃장을 부리고 있는 게야?”
“길을 열어 주기로 합의했습니다. 이용료가 다소 높긴 합니다만.”
란슬롯이 서류를 건네자 그것을 확인한 나베리우스가 쯧 혀를 찼다.
“빌어먹을, 사비에르의 딸이 포털을 독점하고 있는 꼴이니 이용료가 천정부지로 치솟았군.”
“사비에르 영애가 가진 포털의 길이로는 제국을 횡단하기도 어렵습니다. 프렌시프에서 항만을 소유하고 있는 한 그쪽에서도 우리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요. 이 이상 이용료를 올릴 순 없을 겁니다.”
나베리우스가 눈길을 돌려 가웨인을 쳐다보았다.
“황자는?”
“아직 별다른 행동은 없습니다.”
“그저 내 생일이나 축하하자고 내려온 게 아닐 거다. 분명 다른 뜻이 있어. 감시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때 세니아나가 잠투정을 하며 냠 입맛을 다셨다. 세 남자는 동시에 픽 실소를 흘렸다. 그녀를 다정한 눈으로 보던 란슬롯이 전보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자의 환영 연회에서 나온 세니아나의 요리 말입니다.”
“요리가 왜?”
“본래 메뉴는 그것이 아니었다고 하던데요.”
“그게 무슨 말이냐.”
“웬 요리사가 준비한 요리를 태웠답니다. 만찬에 나온 건 대안으로 생각한 요리라더군요.”
그의 말에 가웨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대안으로 생각해 낸 요리라고?”
“무려 20분 만에.”
“허……. 이 녀석 머릿속엔 뭐가 든 거야? 그런 걸 어떻게 20분 만에……. 정말 재능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군.”
가웨인이 무릎을 굽히며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 하자 란슬롯이 그의 손목을 비틀었다.
“윽!”
“깨우지 마라. 어쨌든 더 기가 막힌 건 요리를 태워 먹은 요리사의 변명이었어.”
“변명? 태워 먹고 변명까지 해?”
“제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더군. 잘못은 오븐의 세기를 미리 확인하지 않은 막내의 탓이라고. 그런데―”
란슬롯이 표정이 일순 차가워졌다.
“세니아나가 오전에 만찬 주방에서 오븐을 확인하고 간 걸 본 사람이 있다. 세니아나의 명을 전했다던 하녀도 요리사가 거짓말을 했다고 주장했어.”
“뭐?! 그 새―!”
가웨인이 조부의 눈치를 본 후 세니아나가 깨지 않았는지 살폈다. 다행히 막내는 여전히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울컥 인상을 찌푸린 가웨인은 조부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저는 볼 일이 생겨서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형제가 방을 나서자 나베리우스는 잠든 세니아나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가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다음 날, 주스를 갈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라고?”
“거짓말쟁이 요리사요. 입이 찢어졌어요.”
“으응? 대체 누가 그런 짓을?”
“그건 잘……. 당한 사람도 모르던걸요? 웬 괴한에게 잔뜩 얻어맞았는데 다른 괴한이 나타나서 양팔을 부러뜨렸대요. 입을 찢은 건 마지막 괴한이라더라고요.”
“우와……. 무슨 원한을 졌으면 셋에게나?”
“이것저것 죄가 많은 모양이에요. 짚이는 데가 많아서 누군지도 모르나 봐요.”
그 남자는 어찌나 멍청한지 원한을 살 만한 일을 저 스스로 토설했단다. 범인을 찾아 달라면서 말이다.
‘하긴 그런 바보니까 주인의 딸인 나를 걸고 거짓말을 한 거겠지.’
거짓말쟁이 요리사는 정말로 나쁜 놈이었다. 남의 레시피를 훔치고, 자기 아들을 때려 팔을 부러뜨린 데다가 프렌시프의 이름을 운운하며 영지민의 재산을 갈취한 적도 있다고 했다.
“미친 사람!”
“천벌 받은 거죠.”
내가 기함하자 시트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렌시프의 이름을 협박에 쓴 것까지 들키는 바람에 퇴직금 한 푼 못 받고 쫓겨나게 됐어요.”
“그거 다행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스를 컵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감자즙으로 만든 찬 수프와 함께 성으로 가져갔다.
“……그런 일이 있었대요.”
할아버지에게 오늘 시트론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하자 그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의 경비를 강화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경비는 이미 차고 넘칠 만큼 하고 있어. 그러니 내부에서 일어난 일일 거다.”
“그렇군요…….”
‘인과응보였군.’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에 집사와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웃음을 참는 것 같아서 의아했다.
“참, 이제 검사하러 나가시죠?”
“그래.”
“이번에도 비밀 통로로 나가시겠군요.”
할아버지의 몸 상태는 가문의 기밀이라 검사도 영지 밖에 있는 마티스 남작의 연구실에서 은밀히 진행되었다. 검사도 검사지만, 할아버지의 다리가 신경 쓰였다.
‘다리를 저시는 건 마비가 왔기 때문일까? 그럼 뇌졸중? 아니야, 뇌졸중이면 상태가 이보다 훨씬 심각하겠지.’
마티스 남작은 단순히 다리를 접질려서 신경통이 온 것일 수도 있다고 했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부축하기 위해 비밀 통로로 함께 나섰다.
“되었다니까. 통로 끝에 마차가 대기하고 있어.”
“그래도요. 거기까지 가는 길이 꽤 멀잖아요.”
“너 홀로 돌아가야 하잖아.”
“가문의 비밀 통로인걸요. 누가 알겠어요.”
“이상한 녀석. 이리 어두운데 무섭지도 않으냐.”
뺨에 할아버지의 시선이 부딪쳤다. 밤만 애타게 기다린 적도 있어서인지 나에게 어둠은 두려움보다는 안정감을 주었다.
“안 무서워요.”
“겁 없는 녀석인 줄은 알았다만.”
무서운 게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어둠이 별로 무섭지 않을 뿐이지.
“뾰족한 건 찔리면 죽으니까 무서워요. 그리고 혁대도요. 주먹으로 맞는 것보다 훨씬 더 아프거든요.”
“……플로헤타가 너를 혁대로 때린 적이 있느냐?”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딱딱해져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니에요.”
플로헤타는 채찍으로 때렸고, 혁대로 때린 건 날 버린 친부였다. 할아버지가 말이 없어서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이어 말했다.
“진짠데……. 그냥 주먹으로 맞는 것보다 아프다고 들은 거예요…….”
열심히 변명했지만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어떡하지.’
잡고 있는 그의 팔이 차갑게 느껴져서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걸었다. 비밀 통로를 통해 영지 밖으로 나온 우리는 짧은 인사를 나눴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
그는 나를 빤히 보다가 어깨에 걸쳤던 퍼를 벗어 주었다.
“아니에요! 전 괜찮……!”
“들어가.”
거절할 새도 없이 할아버지는 마차에 올라탔다. 난 조심스럽게 보드라운 퍼를 둘렀다.
‘따뜻해.’
가만히 서서 멀어지는 마차를 지켜보았다. 마차는 곧 시야에서 사라졌고, 나는 천천히 걸음을 돌렸다.
‘이제 돌아갈까.’
―라고 생각한 순간, 여러 명의 발소리와 함께 횃대 아래서 일렁이는 몇 개의 그림자를 보았다. 순간 흠칫 놀란 내가 뒷걸음쳤을 때였다.
“읍!”
누군가에게 입이 막혔다.
* * *
그 짧은 찰나에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거짓말쟁이 요리사를 공격한 괴한인가? 내부에서 생긴 게 아니라 역시 외부에서 들어온 걸까? 할아버지 말을 들을걸! 어, 어떻게 도움을 요청하지?
‘선생님!’
눈을 꽉 감았을 때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움직이지 마세요.”
‘어?’
익숙한 목소리였다. 솜털이 쭈뼛 서는 낮고 아름다운 목소리.
‘도미니크 황자?’
“읍.”
“저들이 눈치챌 겁니다. 조용히.”
나와 그는 심장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가깝게 붙어 섰다. 얼마쯤 지나자 황자가 나를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어느새 주변의 인기척이 사라진 후였다. 가슴이 쿵쿵 뛰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방금 본 남자들은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기 위해 워커가 아닌 가죽신을 신었다. 그림자를 통해 본 복장도 병사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은밀했다.
‘다른 령의 첩자일 거야.’
프렌시프는 아주 강대한 가문이다. 군사력, 재력, 가문의 역사. 어느 하나 모자란 데가 없었다. 아니, 소수의 권력자 사이에서도 우위를 점했다. 그런 권력 뒤편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는 법이었다.
‘만약 첩자들이 날 발견했고, 내가 프렌시프 영애라는 걸 알았더라면?’
입에 담기도 싫은 일을 당하거나……. 어쩌면 살해당했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나는 도미니크에게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그가 묘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무엇을 먼저 짚어야 하는지 모르는 겁니까?”
“당연히 감사가 먼저지요.”
그는 실망이라는 듯한 표정이었고, 난 대수롭지 않게 이어 말했다.
“프렌시프의 손님인 저하께서 왜 이 늦은 시각에, 허가도 없이, 성 밖으로, 그것도 이렇게 은밀히 나오셨는지를 따지는 것보다는요.”
“…….”
“왜요?”
“내가 저들과 한패면서 영애를 속이는 걸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수상하게요?”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프렌시프 내에 있는 이방인은 저하 한 분이에요. 제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의심받겠죠.”
“영애는……. 생각과는 다른 사람이군요.”
“제가요?”
“이런 상황이 무섭지는 않습니까?”
그가 할아버지와 똑같은 말을 해서 조금 재밌었다.
‘무서운 짓을 하려고 들 때 도망치면 되지.’
그는 모르겠지만 열 걸음쯤 뒤에 있는 저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비밀 통로의 입구였다.
‘아까는 너무 당황해서 생각도 안 났네.’
통로 안으로 들어가면 안전하다. 기사들을 바로 호출할 수 있는 마도구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때 미처 놓지 못한 그의 팔에서 뜨거운 것이 주륵 흘러내렸다. 비릿한 향이 콧속으로 훅 들어오기에 깜짝 놀라서 말했다.
“피잖아요!”
난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도미니크는 움찔했지만, 순순히 팔을 내주었다.
“이건 임시방편이에요. 돌아가서 꼭 치료받으세요.”
“프렌시프 령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겁니까?”
“그야 손님이시니까 당연히…….”
“수상한 사람을 들여도 되느냐는 뜻입니다.”
손수건 끝을 묶던 나는 그의 눈을 힐끔 쳐다보았다.
“오늘은, 그냥.”
“…….”
“나를 구해 준 사람으로 생각할게요.”
사실 믿는 구석이 있긴 했다. 프렌시프에 해가 될 짓을 계획 중이라면 최대한 숨을 죽여야 한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 수상한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날 구했다.
‘게다가 할아버지라면 이미 대비하고 있을 테니까.’
손을 거두려다가 그가 찬 팔찌와 스쳤다. 팔찌는 묘한 무늬의 푸른색 원석이 두 줄의 검은 끈에 연결된 형태였다.
갑자기 가슴이 기이할 정도로 울렁거리는가 싶더니 삐익― 작은 이명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어지러워.’
나는 눈을 꼭 감고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제야 이명이 사라졌다.
“이제 돌아…….”
―라고 말하던 나는 문득 그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옅은 잿빛의 눈동자에 달빛이 어슴푸레 흘러들고, 신비할 만큼 아름다운 얼굴선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
“…….”
‘까, 깜짝이야. 화보 보는 줄 알았네.’
나는 어색함에 눈을 도르륵 굴리다가 애써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무슨 생각 하세요?”
그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손만 뻗으면 안길 것 같은 거리가 되자 그의 품에서 좋은 향기가 풍겼다. 도미니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내가 여전히 매력이 없나.”
발그레 달아오른 내 뺨을 가볍게 잡은 그가 이어 말했다.
“그런 생각.”
“…….”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별채로 돌아온 나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아가씨?”
시트론이 괜찮으냐고 물었지만,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수상한 짓을 해도 할아버지께 말하지 말라고 미남계를 쓴 걸까.’
그런 외모와 그런 목소리로 쓰는 미남계라니.
‘무섭다…….’
그 후로 별일이 있던 건 아니었다. 도미니크는 돌아가라고 말한 뒤 먼저 떠났고, 나는 재빨리 비밀 통로를 통해 돌아왔다. 내가 멍하게 앉아 있자 시트론이 다가왔다.
“세상에, 얼굴이 새하얗잖아요!”
“응?”
그러고 보니 여전히 가슴이 울렁거렸다.
‘팔찌에 닿고 나서부터 계속 이러네.’
어지럽다고 하자 시트론은 약과 물을 챙겨 왔다. 약을 삼키는 것을 지켜보던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일찍 주무세요.”
“응…….”
힘겹게 몸을 일으켜 대충 씻고, 침대에 누웠다. 푹신하고 포근한 침대에 눕자 잠이 솔솔 왔다. 내일 일어나면 울렁임이 가라앉겠지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이튿날 아침이 되니 확실히 울렁임이 많이 가라앉았다.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중개업소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편지엔 건물 목록도 함께 동봉되어 있었다.
‘세상에, 이런 건물을 이 가격에 팔겠다고?’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오페라 하우스 바로 옆, 그것도 4층짜리 건물이었다. 단면도를 보니 엄청나게 넓었다.
‘적어도 내가 가진 사재의 다섯 배일 텐데.’
나는 중개업자의 편지를 마저 읽었다. 이 건물의 주인이 나와 대화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와 함께 어떤 주소가 적혀 있었다.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하는 건지 궁금했다. 혹시나 중개업자가 내 이름을 대며 강탈한 게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좋아, 그럼 오늘은 건물주와 만나 보자. 하지만 그 전에 할아버지 산책부터!’
나는 성으로 향했다. 집무실에 들어가자 할아버지는 늘 그렇듯 같은 자세로 일을 보고 계셨다.
“할아버지, 산책이요.”
그렇게 말하자 할아버지는 안경을 벗으며 인상을 썼다.
“애완견 산책이라도 시키는 것 같군.”
“설마요.”
질겁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맹수라면 몰라도 애완견이라니 말도 되지 않는다.
그를 이끌고 정원으로 나섰다. 할아버지의 팔을 잡고 걷는 중에 멀리서 란슬롯과 가웨인을 발견했다. 함께 걸어오던 그들이 멈춰서 할아버지에게 인사했다.
“산책 중이십니까?”
란슬롯의 말에 할아버지는 “흠” 하고 소리만 낼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어느새 내가 잡고 있던 팔을 빼냈다. 다리가 불편한 걸 들키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아…….’
불현듯 드는 생각에 나는 입을 열었다.
“저기, 다 함께 산책을 하면 어떨까요?”
일시에 내게 시선이 몰렸다.
‘내가 이 성에서 나가고 나면 할아버지와 산책하는 건 저들 몫이니까.’
내 입으로 ‘할아버지는 몸이 안 좋아요, 운동은 필수지요. 그런데 다리도 불편해서 부축받으셔야 해요’라고 말하는 것보다 산책하면서 자연스럽게 알아차리도록 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됐……!”
“그럼 그럴까.”
할아버지가 거절하기 전에 란슬롯이 다가왔다. 가웨인도 말없이 함께 걷기 시작하자 혼자서 앞서가는 할아버지였다.
‘오기 부리시긴.’
나는 몰래 한숨을 흘렸다. 손주들에게도 몸 아픈 걸 들키면 안 된다는 건 너무 서글픈 일이었다. 할아버지를 주의 깊게 보며 난 그를 따라 걸었다. 가웨인이 그런 나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더 못생겼잖아?”
그가 장난스레 웃으며 이어 말했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못생겼지?”
“저는 할아버지를 쏙 뺐다던 걸요.”
―하고 말하자 가웨인이 침묵했다. 어쩐지 할아버지의 그림자가 짙어진 기분이라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때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란슬롯이 입을 막고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었다. 한참 어깨를 떨던 그가 헛기침했다.
“누누이 말하지 않았었나. 프렌시프에서 가장 못난 건 너라고.”
“어련하겠어.”
가웨인은 그렇게 말하곤 할아버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며 빈정거렸다.
“그쪽은 왕자님이신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럼 반대로 가장 멋진 쪽은요?”
란슬롯이 다정히 말했다.
“우리 막내지.”
“흐응, 그렇구나.”
내 목소리가 너무 건조했는지 가웨인이 픽 웃었다.
“아버님이시겠지.”
“아버지요?”
“뭐, 소싯적엔 대륙이 들썩했다는 얘기가 돌기도 하고.”
그러자 란슬롯이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부님께서도 유명한 미남이셨어.”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는 노인인데도 허리가 굽지 않은 데다가 가웨인과 비슷할 정도로 키가 훌쩍 크고, 여전히 날카로운 턱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구나……. 두 분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겐 댈 것도 아니군요.”
나는 여상하게 말하며 앞서 걸었다. 어쩐지 등이 따가워 뒤돌아보니 가웨인이 기가 막힌 표정을 하고 있었다. 조금 무서워져서 할아버지에게 바짝 붙었다.
* * *
산책 후에 건물주와 만나기 위해 마차를 타고 성을 벗어났다. 나는 창밖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아버지는 고집쟁이!’
결국 오빠들은 할아버지의 다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기어이 혼자서 끝까지, 그것도 아주 태연한 척 걸으셨다. 다음 기회를 노리자고 생각할 찰나에 마차가 멈추었다. 그곳은 호숫가였는데,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중개업자가 호들갑을 떨며 아부를 했다.
“세상에, 오늘은 더욱 아름다우십니다. 눈이 멀어 버릴 것 같군요! 이 얼마나……!”
“건물 주인은?”
듣기 민망해서 말을 끊고 물었다. 중개업자는 호호 웃으며 저 앞에 있다고 말했다. 나와 시트론, 그리고 기사들은 중개업자를 따라갔다.
“나리,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그 말에 호수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땅딸막한 키에 동그랗게 부푼 올챙이 배, 번쩍번쩍한 백구두. 거기다 샛노란 곱슬머리가 개기름에 젖어 이마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세니아나의 육체는 그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알빈도 자작.]
프렌시프의 공신이며 할아버지와 전쟁터를 누빈 여장부 마담 버지니아의 의붓아들. 그는 새어머니 덕에 출세한 노총각이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전엔 새파란 풋과일 같았는데 지금은……. 흐흐, 농익었다고나 할까요.”
나를 아래위로 훑으며 달라붙는 듯한 그의 시선이 불쾌했다. 기사들이 울컥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그와 오래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이야기했다.
“내게 건물을 헐값에 파는 이유가 뭐죠?”
자작이 두꺼운 입술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아가씨께 좋은 제안을 하려 합니다. 건물은 제안 전에 드리는 선물이지요.”
“제안?”
“요새 달라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 잘하신 겁니다. 여자는 무릇 야들야들 여우같이 굴어야 사랑받는 법이지요.”
잠깐 음흉한 시선으로 내 가슴을 훑은 그가 이어 말했다.
“뭐, 하지만 그런들 이제껏 벌인 일이 있는데 어르신께서 아가씨를 얼마나 믿으시겠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죠?”
그가 히죽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인은 사내와 다릅니다. 남편을 든든한 보호자로 두어야 진정 어른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 어르신도 안심을 하시고…….”
“그래서요?”
“그러니까 제 말은, 이쪽에서 결혼해 드리겠다는 겁니다.”
알빈도 자작이 껄껄 호탕하게 웃었다.
“제가 영애보다 다소 나이가 많긴 합니다만, 남자 나이가 어디 흠이겠습니까.”
다소? 나는 어이가 없었다. 세니아나는 석 달 후에 스무 살이 되는 열아홉이지만, 알빈도 자작은 무려 서른여덟 살이었다. 그는 커다란 알 반지를 매만지며 말했다.
“집안에 안주인이 없으니 신부 수업을 받고 오지는 못할 거로 압니다. 뭐, 그런 것은 약혼 후 이쪽에서 가르치면 될 것이고…….”
이 남자의 뻔뻔함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는 알고 있다. 난 여러 가지 일을 통해 어느 정도 이미지를 회복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성 내부에서였다. 외부에선 가족 사이에 끼지 못하는 천둥벌거숭이가 겨우 발돋움을 시작한 거로 보이겠지.
‘게다가 세니아나의 모친은 이민족 매춘부라고 하고.’
반면에 저 남자의 계모인 버지니아 부인은 과거 전쟁에서 할아버지의 목숨을 구한 적도 있었다. 그 덕이긴 해도 저 남자는 어쨌든 출세까지 했다. 자작이 두꺼운 입술을 쭉 늘리며 웃었다.
“약혼을 서둘러 하고 내년엔 결혼식을 합시다. 임신은 되도록 어릴 때 하는 게 좋죠.”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흘렸지만, 그는 연신 싱글거릴 뿐이었다.
“제 제안이 얼마나 큰 호의인지 아가씨는 모르실 겁니다. 솔직한 말로 아가씨의 과거 행실이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하하.”
“괜찮아요.”
“예?”
“그 호의, 괜찮으니 넣어 두시라고요.”
단호한 내 대답에 알빈도 자작은 당황해서 입을 옴짝거렸다. 그러나 이내 껄껄거리며 능글맞게 말했다.
“내숭은. 어린 애들이 하는 밀고 당기기인 모양인데 저한텐 안 통합니다.”
‘우와, 진짜 미쳤잖아.’
나는 이 남자의 망상병이 깊어지기 전에 확실히 말해 두기로 했다.
“난 자작과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뭐라고요?”
“절대로.”
진심을 담아 덧붙인 말에 그의 얼굴이 점차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까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문 자작은 여기까지는 참아 주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잘 생각하세요. 어르신과 도련님 두 분은 아가씨가 당장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나도 아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제가! 아가씨의 보호자가 되어드린다는 겁니다.”
“…….”
그는 히죽 웃으며 내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곁에 있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라면서요.”
[너는 곁에 있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야. 언젠가 선생님도 잡아먹을걸?]
선생님과 함께 고아원을 나갈 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동시에 죽어 가던 선생님의 얼굴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이건 내 트라우마였다.
‘정말로 내 곁에 있는 사람은 모두 고통받았으니까.’
난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내가 자작과 결혼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대체 왜요!”
“그야 자작이 싫으니까요.”
“예?”
“당신 같이 예의 없고 아둔한 데다가 입 냄새 풍기는 남자와 사는 건 소름 끼치게 싫다고.”
순간 주변이 얼어붙었다. 나와 자작을 힐끔거리던 중개업자부터 시트론, 기사들, 그리고 자작 본인까지 굳어 버렸다.
수 초가 흐른 뒤 자작이 입을 뻐끔거렸다. 자신이 들은 말이 정말인지 확인받으려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중개업자가 그의 눈을 피했다. 시트론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고, 두 명의 기사 중 하나인 바커스는…….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가 다른 기사인 고레일에게 발을 밟혔다.
“애물단지에게 기껏 청혼해 줬더니 무례하게……!”
그가 말을 더듬으며 내게 삿대질을 했다.
“후회하게 될 겁니다. 이 일, 정식으로 항의할 테니까!”
이를 악문 알빈도 자작이 새빨개진 눈으로 협박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해. 가서 엄마한테 일러.”
“뭐라고!”
“늘 그래 왔잖아?”
자작은 시뻘건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고, 나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바커스와 고레일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바커스는 선심 쓰듯이 말했다.
“스스로 돌아가시는 게 이로우실 겁니다.”
사라지지 않으면 질질 끌어내겠다는 말이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자작이 무어라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대꾸는 없었다. 나를 휙 지나치는 그의 잇새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성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내가 고레일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성의 하녀가 뛰어왔다.
“아가씨!”
“무슨 일이야?”
“알빈도 자작이…….”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웅얼댔다. 시트론은 올 게 왔다는 표정이었고, 바커스는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오늘 그자가 얼마나 무례했는지……!”
“마음 써주는 건 고맙지만, 내가 할게.”
나는 하녀를 따라 할아버지의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란슬롯과 가웨인까지 있었다. 알빈도 자작은 의기양양해져서 나를 쏘아보았다.
“아가씨가 얼마나 무례하셨는지 어르신은 모르실 겁니다. 호의로 다가갔을 뿐인 제게 일생 동안 잊지 못할 폭언을 하고, 기사를 동원해 협박했지요! 프렌시프의 기사가 가신인 저를 겁박했단 말입니다!”
그는 손짓, 발짓까지 섞어 가며 과장했다. 제 잘못은 쏙 빼고 말이다.
“어르신, 좌시하시면 안 됩니다. 오늘은 저로 끝났지만, 다음엔 프렌시프의 기사들을 동원하여 무슨 짓을 하실지 모르는 겁니다!”
할아버지가 나를 보았다.
“알빈도 자작의 말이 사실이냐.”
“몇 가지는요.”
“몇 가지?! 그럼 제가 거짓말을 했단 말입니까! 어르신, 보십시오! 영애의 행동이 이렇게 기가 막힙니다!”
그는 ‘변명해 봐야 너라면 학을 떼던 가족들이 믿어 주겠느냐’는 표정이었다.
‘바로 찍어 누를까. 아니면…….’
고민하는 중에도 자작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어르신도 아시지요? 저와 제 모친께서 어르신께 보내는 충정을! 영애의 문제로 심기가 어지러우실까 우려하여 청혼한 겁니다. 그런데 영애께선 갸륵한 충심을 헤아리지 못하고……!”
“청혼?”
가웨인의 말에 자작이 씩 웃었다.
“예, 영애의 나이 벌써 스물을 앞두고 있는데 아직 혼담조차 오가지 않으니 어르신께서 얼마나 걱정이 크실까요. 영애께서 어르신의 권위에 기대고자 하는 파렴치한에게 속으실까 봐 제가……!”
우당탕! 가웨인이 순식간에 알빈도 자작의 멱살을 잡았다.
“컥! 겨… 경……!”
“서른여덟 먹은 늙다리가 누구에게 청혼했다고?”
란슬롯이 나를 향해 차갑게 웃었다.
“세니안, 네 잘못이구나.”
그는 낮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아예 입을 찢어 놨어야지.”
‘응?’
분위기가 이상했다. 엄청 혼날 줄로만 알았는데, 도리어 그들의 분노가 향한 건 다른 사람이었다. 자작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왜, 왜 이러십니까, 경…….”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내게 하던 행동과는 영 딴판이었다. 벽에 등을 기댄 채로 팔짱을 끼고 있던 란슬롯이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네?”
“저 작자가 청혼만 한 건 아닌 듯한데.”
란슬롯이 싱긋 웃었다. 미소가 북풍한설보다 차갑게 보여서 나는 우물쭈물했다.
“괜찮으니까 말해 봐.”
방에 있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애물단지에게 기껏 청혼해 줬더니 무례하다고 했고, 또…….”
“또.”
“제가 죽어 나가도 할아버지와 오빠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그가 한 이야기를 이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수그리자 가웨인이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계속 말해.”
“…….”
“세니아나.”
“곁에 있는 사람을 잡아먹는…… 잡아먹는…….”
울컥 치민 설움을 꾹 되삼키고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괴물이라고.”
퍽!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알빈도 자작이 바닥에 처박혔다. 가웨인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이 개자식이…….”
란슬롯이 내 어깨를 끌어안았고, 동시에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담 버지니아께서 오셨습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문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고운 인상의 귀부인이 우아한 걸음걸이로 들어왔다.
‘저 사람이 마담 버지니아구나.’
마담 버지니아는 할아버지를 향해 인사했다. 그간 침묵하고 있던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들었겠지.”
“그렇습니다.”
“받을 배상금을 생각해 둬라.”
마담 버지니아가 고개를 들자 할아버지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저놈을 죽일 생각이니까.”
그 말에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자작이 소스라치게 놀라 땅에 못 박힌 듯 굳어졌다. 나는 슬쩍 마담 버지니아의 눈치를 살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들이니 옹호하지 않을까?
“그런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마담 버지니아가 쯧 혀를 차며 아들을 노려보았다. 자작이 허둥지둥 제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어, 어머니, 저는 억울합니다! 아가씨가 거짓말을……!”
“닥쳐, 쓸모없는 것.”
우아하고 고상한 귀부인에게서 나온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부드럽던 눈매가 한순간에 날카로워지고, 목소리가 낮아졌다. 위압감도 상당했다. 할아버지의 것과는 비할 수 없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기운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제가 아직도 어르신 뒤를 따라다니던 기사인 줄 아십니까?”
마담 버지니아는 깃털 부채를 나붓나붓 흔들며 말했다.
“퇴역한 지 한참 지났습니다. 이제 저도 늙었어요. 쓸모없는 일에 소모할 체력이 없습니다.”
“자식 잘못 키운 녀석이 할 말인가.”
“그게 다 어느 고매한 어르신의 탓이 아닙니까. 허구한 날 어느 고매한 어르신의 원정만 따라다녔더니 집안에 벌레 먹은 나무가 있는지 몰랐던 게지요.”
“흥.”
“떡잎부터 상했다는 걸 알았더라면 진즉에 내쳤을 겁니다.”
“하면 목을 잘라 네 집으로 보내 주지.”
“돼지 여물로나 주십시오. 그런 목 있어서 뭐합니까?”
나는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경계하려 세운 털이 어느 순간 파스스 가라앉았다.
“어, 어머니……!”
알빈도 자작이 다급한 목소리로 자꾸만 어머니를 찾았다.
‘앵무새인 줄.’
“아니라니까요! 제 말부터……!”
그가 버럭 소리치자 마담 버지니아가 제 아들의 장딴지를 걷어찼다. 아주 날렵하고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수작 부리다 그 꼴 난 것을 내 모를 성싶더냐?”
“수, 수작이라니……!”
“욕심에 눈멀어 주인의 핏줄을 희롱했으니 죽어 마땅하다.”
“이……!”
남자가 무어라 항의하려던 때였다.
“모자간 담소는 영혼이 되어 나누든가 하고.”
가웨인이 그의 목을 잡아채자 란슬롯도 눈매를 나붓이 휘었다.
“우리를 잊으면 곤란하지. 아직 이쪽 말이 끝나지 않았거든.”
알빈도 자작은 두 오빠에게 개처럼 끌려 나갔다. 나는 할아버지의 옆에 앉아서 마담 버지니아를 흘긋 쳐다보았다.
‘주름이 저렇게 우아하게 질 수도 있구나.’
흰머리가 성성한데도 그녀는 배우처럼 고왔다. 느긋하게 커피에 설탕을 집어넣던 마담 버지니아가 픽 웃었다.
“늙은 얼굴 뭐 볼 게 있다고 그리 보십니까.”
“아름다우신데요.”
“세상에, 아가씨께 심경 변화가 있다곤 들었지만 이리 다정해지셨을 줄이야.”
그녀가 우후후 웃으며 나를 보았다.
“손녀가 이리 사랑스러우니 어르신 혈색이 좋아진 것도 이해가 가는군요. 나는 복도 없지.”
난 민망해져서 손끝만 매만졌다. 마담 버지니아는 알빈도 자작이 여덟 살일 때부터 직접 키워 왔다. 물론 의붓아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키운 정은 있을 거다.
‘할아버지는 한다면 하는 분이신데 정말로 괜찮은 걸까.’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마담 버지니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염려하지 마세요.”
마치 마음을 읽은 것 같은 말에 나는 흠칫 놀랐다.
“아가씨, 저는 기사입니다.”
“그렇지요.”
“동시에 평민 출신 여자지요.”
“…….”
“나와 같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는데, 내가 기른 아들이 내가 지키고자 했던 부류의 사람을 때려죽였어요.”
그녀는 커피잔을 코스터에 내려놓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부터 포기했을 겁니다.”
그리고 다시 나를 보았다.
“배상은 오히려 이쪽에서 해야죠. 불쾌한 일을 겪으셨으니.”
알빈도 자작의 만행을 직접 본 것 같은 단정적인 말투였다.
‘저, 점쟁인가?’
“사랑스러우셔라!”
내가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녀가 깔깔 웃었다.
“오기 전에 중개업자라는 노파에게 확인해 두었습니다.”
“아…….”
“오늘 만남의 까닭이었던 그 건물이라면 어떠십니까.”
“네?”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며 할아버지를 쳐다보자 그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우물쭈물하자 마담 버지니아가 내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리고 손끝에 살짝 입을 맞췄다.
“청컨대 부디 마음의 짐을 덜게 해 주십시오.”
‘과, 과연 기사 출신……!’
정중하고 낭만적인 말투에 나는 사르르 녹아 버릴 것 같았다.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자 마담 버지니아가 생긋 웃었다. 그때,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리고 굳은 얼굴의 집사가 들어왔다. 우리는 모두 집사를 쳐다보았다.
“대화를 방해해서 송구합니다.”
그러더니 할아버지에게 양피지 묶음을 건넸다. 그것을 찬찬히 읽은 할아버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그의 손에서 양피지 끝이 구겨졌다.
“자리는 이만 파하지. 당장 가신들을 소집해야겠다.”
마담 버지니아도 굳은 얼굴로 할아버지를 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상인 길드에서 사비에르를 등에 업고 황가에 청원서를 올렸다.”
“청원이라니요.”
할아버지는 양피지를 내려놓았고, 버지니아가 그것을 급히 들어 읽었다.
“프렌시프가 소유한 항만의 세가 과하고, 운영은 과격하여 상인들이 지속적인 피해를 당한바, 뜻을 하나로 모아 주청하오니―”
글을 읽는 버지니아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낮아졌다.
“황실에서는 부디 프렌시프의 만행을 벌하여 주시옵고, 항만의 권리를 회수할 수 있도록…… 이게 무슨 소립니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상인 길드에서 갑자기 이리 나올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정말로 세가 과하거나 운영이 과격했던 게 아니니까요.”
할아버지의 눈빛이 검게 일렁였다.
“사비에르의 수작이다. 물류를 독점하려는 것이겠지.”
“항만까지 그들이 소유하게 된다면 필시 그리될 겁니다.”
마담 버지니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성녀의 포털을 가지고 상인들을 협박했겠군요. 사비에르는 그것밖에 패가 없지 않습니까.”
“항만보다 성녀의 포털 쪽이 더 간절할 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 하나 있는 패가 창검보다 강력하다.”
“서둘러 가신들을 소집하겠습니다.”
할아버지와 마담 버지니아는 회의를 위해 급히 떠났고, 나도 별채로 돌아왔다. 밤이 깊어 침대에 누웠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울렁― 가슴이 어제처럼 수런거렸다.
‘산책이라도 할까.’
숄을 걸치고 별채 밖으로 나왔다. 찬 공기 덕에 그나마 속이 나아졌다. 나는 성안을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할아버지와 오빠들이 내 편을 들어 줬어…….’
누군가에게 보호받는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가슴이 콩닥거리고, 따뜻한 무언가가 주변을 감싼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든 나는 화들짝 놀랐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아버지의 와인 창고 근처였다.
‘언제 여기까지 왔지. 여긴 출입 금지 구역인데! 들키기 전에 돌아가야…… 어?’
나는 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밤에는 조약돌이 희게 빛나고,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신비한 구절초를 따라 길이 있어서…….]
선생님과 내가 함께 만든 동화의 풍경이 이곳과 사뭇 비슷했다.
‘어떻게?’
나는 홀린 듯 구절초 길을 걸었다. 와인 창고 뒤로 이어진 길에 아기를 안은 천사 동상이 있었다.
[아기를 안지 않은 손을 잡아야…….]
동상의 손을 잡자 쿠궁 작은 소리와 함께 동상이 움직이고 본래 있던 자리에 통로가 생겼다.
[그곳을 통해 나가면 동굴이 있지.]
선생님의 말씀대로였다. 통로를 통해 나서자 눈앞에 검은 동굴이 나타났다.
[기억해, 세나야. 그곳에 보물이 있어.]
난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굳어졌다. 심장이 쿵쿵 뛰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선생님과 내가 만든 동화에서 나오는 길이 여기에 있는 것일까. 동굴 입구 앞에서 또 한 번 그날 들은 선생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입구는 가짜야. 진짜 입구를 찾아야 해. 그러려면 동굴 앞 여신상에 손을 올리고…….]
여신상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쿠르르릉! 땅이 울리며 동굴 벽 안으로 작은 문이 열렸다.
[기다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곧 동굴 천장에서 창살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촉이 붉은 것들까지 다 떨어진 후에는 움직여도 돼. 벽의 문이 아니야, 바닥에 새로 난 문으로 들어가는 거야.]
어느새 바닥이 갈라져 사람 하나는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생겼다. 틈 안의 계단을 통해 내려간 나는 거대한 흰 사자와 마주했다. 파랗고 노란 색으로 각기 다른 눈동자가 날카롭게 나를 쳐다보았다.
[겁먹지 마라, 세나야. 신수는 허락받은 자에겐 상냥하니.]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비명이 터질 것 같은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얌전히 눈을 내리까니 신수가 한발 물러섰다. 마치 들어오라 허락하는 것처럼 보였다.
거대한 사자가 물러난 자리 뒤로 보이는 광경에 숨을 크게 들이켰다. 푸른색과 흰색이 오묘하게 섞인 거대한 원석 바위.
‘도미니크 황자가 가진 팔찌의 원석과 같은 색이야.’
바위틈에서 에메랄드 빛깔의 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그 사이로 물고기들이 퍼덕거리며 떨어진다.
‘해수어?’
동부에 있는 것이라곤 강과 호수가 전부였다.
‘그런데 어떻게 바닷물고기가 나오는 거지?’
나는 천천히 신수를 지나쳐 바위에 다가갔다. 다시 봐도 물고기는 해수어가 맞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손끝이 닿기 무섭게 파앗―! 하는 소리와 함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윽!”
어지러움에 몸이 휘청였다. 나는 빛을 피하기 위해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을 땐…….
“Quis es?(당신은 누구지?)”
전혀 모르는 곳이었다.
* * *
‘어, 어떻게 된 거지?’
백발과 흰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튜닉을 갖춰 입고 있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나는 기절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분명히 동굴 안에서 바위를 보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모르는 곳으로 이동했다.
‘잠깐만. 여기 길라게온이 맞는 건가?’
주변을 돌아보던 나는 정말로 기절하고 싶어졌다. 길라게온은 현대 지구처럼은 아니어도 일정 수준으로는 발전했는데 여기는 완전히 로마 제국 시대 같았다. 오묘한 암적색 원석이 돌멩이처럼 많아서 엄청 화려한 풍경이라는 것만 빼면 말이다.
“Dea?”
그때 누군가 중얼거리자 사람들이 눈을 홉떴다. 갑자기 주변이 터져나갈 듯 시끄러워졌다.
“뭐, 뭐라는 거야?”
쿵, 쿵, 쿵! 멀리서 엄청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두려움에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며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다시 주변이 하얀빛에 둘러싸이더니 나는 동굴로 되돌아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스르륵 주저앉아 버렸다.
‘환상일까?’
아니, 환상이라기엔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손이 덜덜 떨리지만, 애써 차분히 생각하려 했다.
방금 본 건 현실이다. 그렇다면 어딘가로 이동했던 걸까? 분명히 길라게온은 아니었다. 나는 세니아나의 지식을 떠올려 보았지만, 이 대륙에 흰 머리와 흰 눈동자의 인종은 없었다.
‘그럼 뭐야, 길라게온이 아닌 다른 곳에 갔었다고?’
“크릉.”
낮에 울려 퍼지는 신수의 목울림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일단 돌아가야지.’
너무 오래 별채를 비우면 나를 찾는 사람들이 생길 거다. 돌아가려다가 잠깐 바위를 돌아보았다.
“가져가고 싶은데.”
도미니크가 가진 팔찌의 원석처럼 작다면 가지고 갈 수 있을 거다.
‘목걸이로 만들어서 걸고 있으면 좋겠네.’
그렇게 생각하고 바위 끝에 손을 올렸다. 쿠구궁! 땅이 요란하게 진동하더니 바위에서 또 한 번 빛이 뿜어져 나오며 나를 감쌌다. 삐익―! 날카로운 이명이 귀 안을 가로질렀다.
“헉!”
숨이 차고 눈앞이 뿌옇게 변하는가 싶더니 몸이 휘청하고 무너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처음 보는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었다. 도미니크의 팔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짙은 푸른색의 원석과 그것에 달린 두 개의 금 날개.
펜던트 자체는 손톱만 한데도 왜인지 몇 캐럿이나 되는 다이아몬드보다 존재감이 더 컸다. 나는 목걸이를 옷 안에 집어넣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굴이 사라지고 여신상만 덜렁 놓여 있었다.
‘이건 대체…… 아냐, 일단 돌아가서 생각하자.’
기절한 후로 꽤 시간이 지났는지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져 오고 있었다. 난 서둘러 왔던 길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와인 창고를 지나 별채로 돌아왔는데 예상과는 달리 사람들이 날 찾고 있진 않았다. 시트론만이 희게 질린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가씨!”
나를 발견한 시트론이 뛰어왔다.
“어떻게 되신 거예요? 밤새 어디에 계셨어요!”
“그, 어, 산책! 응, 잠이 안 와서 산책을 오래 했어.”
“어휴, 놀랐잖아요. 성이 난리가 났는데 아가씨까지 사라지셔서.”
“난리? 사비에르 때문에?”
“비슷하긴 하죠.”
시트론은 나를 소파에 앉히고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동부에 포털이 열렸대요.”
“사비에르의 성녀가 연 거야?”
“아마도요.”
“그걸 어떻게 알아?”
“포털을 통해 이동하는 거리가 멀면 멀수록 강력한 반동이 생기거든요. 이번엔 결계가 무너질 정도였대요.”
시트론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현재 이 세계에서 이동 거리가 가장 긴 포털을 소유한 건 사비에르 영애예요.”
“엄청나네.”
“다른 의견이 있긴 하지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의견?”
“역사에 드물 정도로 강력한 반동이었는데 사비에르 영애가 과연 그 정도의 능력자일까, 하는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목걸이를 보았다.
‘내가 본 사람들도 이 대륙의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설마 그 포털이란 게…….’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섣불리 확신하지 말아야 한다. 포털은 엄청난 권력이고, 커다란 권력엔 그만한 위험이 따르는 법이고.
‘하지만 알아볼 필요는 있어.’
동이 완전히 트기 전에 별채를 나섰다.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장서관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살금살금 성의 뒷문으로 걷는데, 쿵! 단단한 가슴과 부딪쳤다. 나는 이마를 문지르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저하……!”
도미니크는 평소와 같은, 표정 없는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
“…….”
그에게서 말이 없으니 지레 찔렸던 나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 저는, 산책 중인데…….”
“그렇군요. 이 새벽에 굳이 뒷문을 통해서.”
그가 덧붙인 말에 민망해져서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리고 몇 초 후에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는 전하께서는요? 왜 뒷문에 계시는 거예요?”
‘나도 그렇지만, 너도 이상하잖아. 그러니까 우리 이번 일은 서로 묻어 두지 않을래?’
―라는 뜻이었는데 도미니크 황자는 동요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정문을 봉쇄했습니다.”
“봉쇄요?”
“어제 포털 개폐 반동으로 결계석이 무너진 자리가 정문이거든요.”
“아하, 그렇…… 앗.”
처음부터 지레 찔려서 먼저 말하지 말 것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내 얼굴을 지그시 보았다.
“얼굴에 상처가 났습니다.”
“상처요?”
손을 올려 오른쪽 볼을 문지르니 그는 내 왼쪽 뺨으로 손을 뻗어 왔다. 차가운 손끝이 느껴졌다.
“이쪽.”
“아, 어제 산책을 하다가 난 모양이에요.”
도미니크는 픽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산책을 무척 좋아하시는 모양이군요.”
이번엔 야무지게 시침 떼기로 하여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편이죠.”
그 순간이었다. 손가락이 뺨에 올려져 있던 탓에 그의 팔찌가 나의 목 부근에 닿았다. 팟―! 팔찌의 원석 주변에 불꽃 같은 노란 빛이 일더니 원석이 가루처럼 흩날렸다. 그리고 나의 목걸이 쪽으로 흘러들었다.
줄을 연결해 주던 원석이 사라지자 팔찌의 끈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와 도미니크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방금 이건…….”
그가 무어라 말하려 했을 때, 인기척 소리가 들려왔다.
“기상이 이르시군요.”
으르렁 맹수의 목울림 같은 낮은 목소리였다. 가웨인이 고개를 삐딱하게 틀고 나와 도미니크를 보고 있었다. 도미니크가 눈만 돌려 그를 쳐다보았고, 가웨인은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손님이 성실하면 기사들은 고생하는 법입니다.”
빈정대는 듯한 목소리에 도미니크는 여상히 대꾸했다.
“손님이 보호받아야 할 정도로 나약하진 않을 텐데.”
“기사들이 지키는 건 손님의 안전뿐만이 아니죠.”
가웨인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낮아졌다.
“불한당의 손에서 가문의 보배를 지키는 것을 언제나 선 순위에 둡니다.”
“그 보배도 지켜지고 싶다던가?”
가웨인이 왈칵 인상을 찌푸렸고, 도미니크 또한 싸늘한 시선으로 그와 눈을 맞추었다. 가웨인이 내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세니아나, 이리로 와라.”
“아, 네…….”
그러자 이번엔 도미니크가 반대쪽 손목을 잡았다.
“가고 싶지 않으면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그럼 그럴까요…….”
“세니아나!”
“영애.”
왜 갑자기 싸울 기세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빼고 싸워 줬으면!
‘선생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내가 두 남자에게 잡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그들의 기운이 점점 더 예리해졌다.
“놓으시죠.”
“그쪽이야말로.”
정말로 몸의 대화라도 나눌 것 같기에 나는 눈을 꽉 감고 말했다.
“아, 아파요…….”
내가 들어도 매우 어색한 연기라 쥐구멍에 숨고 싶어졌다.
“…….”
“…….”
하지만 두 남자는 내 손목을 놓아 주었다. 나는 그 틈에 재빨리 뒷걸음질 쳤다. 그때 문에서 이전에 보았던 황자의 부관이라는 남자가 나왔다.
“황자님……!”
도미니크를 부르던 그가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눈을 끔뻑였다. 도미니크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가지.”
“아, 예…….”
부관은 가면서도 뒤를 힐끔거렸다. 황자와 부관이 사라진 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웨인은 큼 헛기침을 하더니 딴청 부리듯 물었다.
“별일 없었나?”
“네. 좋은 분이시던 걸요. 상처가 났다고 걱정해 주셨어요.”
그가 얼굴을 팍 찡그렸다.
“좋기는. 잔악무도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다. 이민족 패전군을 아예 학살했다고.”
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건 오빠도 마찬가지잖아요. 전쟁 나가면 그렇게 하시면서.”
“나는…… 그래도 몇 놈은 살려 줘! 아이나 여자나.”
“패전국의 아이와 여자는 노예로 거래돼서 죽지 못해서 살잖아요. 색노로 팔리거나 금술(禁術)의 재료로 쓰이거나. 그러니까 그분 나름의 배려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왜 남의 편을 드는 건데?”
“편 드는 건 아닌데…… 아무튼 저는 바빠서 이만.”
고개를 꾸벅 숙이고 그를 지나쳤다. 왜인지 뒤통수가 따가웠다.
* * *
도미니크는 잠깐 문밖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그분 나름의 배려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떤 누구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 주지 않았다. 신관 어미와 황제 아비 사이에서 태어난 불온한 씨. 황제의 아들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태어난 즉시 노기사에게 안겨 국경 지대로 떠났다. 그곳에서도 그는 보호받지 못한 채 살았다.
[저하께선 죽이지 못하면 죽습니다. 그런 운명을 타고나셨죠.]
아주 어린 나이부터 전장에 나갔다. 사로잡혀 포로가 된 적도 있고, 황제의 씨라는 걸 들켜서 금술 재료로 팔린 적도 있으며 그로 인해 눈알이 뽑힐 뻔한 적도 있었다. 그곳에서 자신이 살려 보낸 포로들이 어떻게 거래되는지 또한 알게 되었다.
[차라리 죽이지, 나를 죽여 버리지!]
제 아이를 지키기 위해 대신 금술의 재료가 된 어미. 반 괴물이 된 어미 앞에서 오열하던 어린 사내아이. 그 광경을 본 뒤로 그는 허튼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학살자라고 불렀다. 이해받고 싶은 적은 없었다. 어차피 의사를 묻지 않고 포로를 죽인 건 맞으니까. 하지만 이해받는다는 건 싫은 기분이 아니었다, 결코.
“저하,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도미니크는 걸음을 떼며 부관을 흘깃 쳐다보았다. 부관인 알베르가 질린다는 듯 읊조렸다.
“황궁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수색을 서두르라는 거겠지.”
“닦달은 쉽겠죠. 사지에 있는 건 이쪽인데요. 빌어먹을.”
알베르가 신경질적으로 이어 말했다.
“이곳에 포털이 될 마원이 있고, 그것을 황실에서 은밀히 수색 중이란 걸 알면 프렌시프에서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리 남 얘기하듯 말씀하실 겁니까! 들키면 사비에르 또한 저하를 노릴 겁니다. 저들이 이만큼 부흥한 건 사비에르 영애가 포털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잖습니까.”
분통을 터뜨리던 그가 조심스럽게 도미니크를 보았다.
“솔직한 말로 포털이 정말로 있겠습니까. 있다면 프렌시프에서 진작 찾았겠죠.”
이들이 프렌시프에 포털이 될 마원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안 건 신탁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베르는 그 신탁마저도 신용할 수 없었다. 신전은 4황자의 모후인 황후가 장악했다. 서서히 세력을 불리고 있는 도미니크를 저지하기 위해 계략을 꾸몄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마원을 찾아봤자 성녀가 없다면 포털은 열 수 없습니다.”
성녀 선발이 진행되는 중이긴 하지만, 애초에 성녀란 존재는 그리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길라게온에 성녀가 생긴 건 한 세기만의 일이었지.’
그래서 황실에서도 사비에르의 성녀를 눈독 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 포털이 열린 규모를 알면 더 난리겠지요.”
사비에르에서 얼마나 기고만장해하며 딸로 장사를 할지 눈에 훤했다. 도미니크는 빈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글쎄, 정말 사비에르의 성녀가 연 건지는 두고 볼 일이지.”
“그렇지 않으면 누구겠습니까. 그런 포털을 열 수 있는 새로운 성녀가 나타났다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을걸요.”
“…….”
“황태자고, 4황자고 새로운 성녀를 비(妃)로 들이겠다고 안달을 하겠…… 잠깐, 저하! 마석은요?!”
알베르가 사라진 팔찌를 보며 기함을 했다. 그건 포털의 마원에서 일부 떼어 낸 것으로 현재로선 포털 위치를 찾을 유일한 단서였다.
“그건…….”
입을 열던 도미니크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던 세니아나를 떠올렸다.
“……잃어버렸다.”
“뭐라고요!”
알베르가 기겁을 했다.
성의 경계는 정말이지 엄청났다. 할아버지가 어제부터 내내 회의하고 있는 클리마데우스의 방 앞은 스무 명이나 되는 기사들이 이 열로 서서 지키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겁이 났다.
‘정말로 내가 포털을 연 거면 어떡하지.’
제발 아니어라, 제발. 내가 기도하듯 되뇌며 장서실로 들어가니 란슬롯이 와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냉랭한 눈빛으로 마법서를 읽고 있었다. 내 인기척을 느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세니아나.”
그는 무슨 일이냐는 듯 생긋 웃었다.
“심심해서 책을 보려고……. 뭘 읽고 계세요?”
“포털을 조사 중이었어.”
“아! 저도 궁금해요.”
“네가?”
“영지에 큰일이 난 거니까요. 저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그가 기특하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어서 난 양심이 콕콕 찔려 왔다. 발밑에 있던 책을 테이블로 옮긴 그는 맞은편의 의자를 빼 주었다.
“앉아서 이야기할까?”
‘란슬롯은 정말 자상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헤헤 웃고, 자리에 앉았다.
“포털을 열 수 있는 건 성녀뿐이라는 건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알겠지.”
“네.”
“하지만 성녀라고 무조건 포털을 열 수 있는 건 아니야. 마원을 찾아야 해. 일종의 열쇠 같은 거지.”
포털이 집이고 성녀가 집의 주인이면 열쇠인 마원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는 거구나. 나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원이라면 돌멩이지요?”
내 말을 들은 란슬롯이 쿡쿡 웃었다.
“돌멩이가 맞긴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처음 보는걸.”
나는 좀 민망해졌지만, 이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돌멩이는 아니지만, 바위는 보았는데…….’
그러고는 목에 걸린 원석을 쳐다보았다.
“저기, 그럼 이동할 수 있는 마법은 포털이 유일한가요?”
“현재로선. 그래서 포털은 막강한 권력이 되지.”
란슬롯은 나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상업에선 없어서는 안 될뿐더러 전쟁에서도 아주 유용하거든.”
그럴 것이다. 적이 어디든지 마구 이동할 수 있다면 전략 같은 건 소용없을 테니까.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그런 막강한 권력 같은 건 필요 없다. 막강한 힘엔 그만한 위험이 따르는 법이었다.
‘아냐, 내가 포털을 열 수 있어도 이번에 생긴 엄청난 반동은 사비에르 때문일 수도 있잖아.’
흰 눈동자와 흰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근처에 있다면 내가 연 포털은 그렇게 엄청난 반동을 만들진 못했을 거다. 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물었다.
“혹시 흰 머리에 흰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을 아세요?”
“알기야 하지.”
나는 안심이 되어 활짝 웃었다. 그 순간 그가 이어 말했다.
“아주 멀리 떨어진 대륙에 있어서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속으로 선생님을 부르짖었다. 정말로 나였다. 내가 이 반동을 만든 범인이었던 것이다.
‘왜 나인 거람!’
내 목표는 성에서 도망쳐서 작은 식당을 하며 조용히 사는 것이다. 하지만 포털을 열 수 있다는 걸 들키면 여기저기서 이용하겠다고 날 찾아다닐 거다.
‘……모르는 일로 하자.’
“그렇구나.”
나는 시침을 떼며 슬쩍 목걸이를 다시 옷 안에 집어넣었다.
* * *
시간이 꽤 흘렀지만 할아버지와 두 오빠, 그리고 가신들은 연일 회의로 바빴다.
“사비에르에서는 잡아떼고 있지만, 그걸 누가 믿겠습니까.”
“우리 쪽에서도 강경책이 필요합니다.”
“맞습니다. 언제까지 그들 수작에 놀아나야 합니까! 군사력은 이쪽이 월등해요.”
“하지만 사비에르의 성녀가 포털을 열 수 있는 한 군사력으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루에도 몇 번이나 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일단 서둘러 진지를 구축하고…….”
‘그 포털 사실 내가 열었는데.’
밝힐 수 없는 게 미안해서 그들을 위해 뭐라도 하기로 했다. 내가 도움이 될 일은 딱 하나뿐이었다. 요리.
“아가씨 장어 손질은 끝났습니다.”
시트론이 장어가 산더미처럼 든 카트를 밀며 들어왔다.
“응, 여기다 놔 줘.”
“무얼 만드시려고요?”
“피로 회복에 좋은 음식을 만들 거야.”
피로 회복하면 장어 아니겠는가. 그때, 아곤과 제레미가 오븐을 점검하기 위해 왔다. 오븐을 확인하던 그들이 목을 길게 빼고 나를 구경했다.
“처음 보는 배합인데요.”
“생강가루를 쓰는 건가. 그렇군, 간장과 꿀이라 재밌는 생각이야.”
“행동에 낭비가 없습니다. 일반 주방이라면 바로 투입해도 되겠어요.”
“그건 나도 생각했던 바일세. 손이 빠르시지.”
구경꾼들의 말에 나는 민망해졌다.
“할 일 없으면 좀 도와줘.”
칭찬이 부끄러워서 말을 돌린 건데 아곤은 화색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며 다가왔다. 개수대 한편에 쌓여 있던 것을 본 그가 물어왔다.
“이건 삼이 아닙니까.”
“응, 홍삼. 마티스 남작이 잔뜩 가져다줬어.”
홍삼이 고혈압에 도움이 된다는 걸 증명한 사례를 뉴스에서 봤었다. 그래서 마티스 남작에게 말해 주었더니 흔쾌히 구해다 줬다. 제국엔 인삼이 귀했다. 칼리베타 지역에서만 나는데, 홍삼은 인삼을 따로 가공해야 하기에 더더욱 구하기 힘들었다.
‘역시 권력가가 좋긴 좋구나.’
어느새 제레미가 다가와 훈수를 두었다.
“삼은 약재 아닙니까? 이걸 요리에 넣는다고요?”
“요리로 만들긴 할 건데 장어엔 안 써. 이건 디저트용.”
삼은 향이 독특해서 가뜩이나 생소한 요리에 넣기엔 적합하지 않은 재료였다.
‘홍삼을 손질해서 정과를 만들어야지.’
홍삼정과는 자신 있는 요리 중 하나였다. 선생님이 투병 중이던 병원 앞 고급 카페에서 홍삼 정과를 팔았다. 그때는 병원비에도 허덕일 때라 그렇게 비싼 건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원재료인 홍삼을 찾아서 그중에서도 질이 괜찮고, 저렴한 것으로 열심히 찾아내어 내가 직접 만들었다.
‘인기 좋았지.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들께.’
나는 아곤과 제레미에게 삼을 잘라 달라고 부탁한 뒤 본격적으로 요리에 집중했다.
“아가씨께서 우리에게 식사를?”
파르뎅 남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어르신의 생신 파티와 황자의 환영 연회에 참석했던 귀족들로부터 세니아나 프렌시프의 변화를 듣긴 했다. 하지만 망나니가 회개한다고 하루아침에 실력이 상승할 리 있겠는가.
‘생신 파티와 연회에선 아곤의 도움을 받았겠지.’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매일 지겹게 골머리를 썩고 있는데 식사는 좀 제대로 할 수 없는 건가.”
다들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심 그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렌시프의 핏줄들이 들어왔다. 나베리우스가 상석에 앉자 란슬롯과 가웨인이 그의 양쪽에 앉았다. 세니아나는 나베리우스의 옆에 서 있었다.
그 뒤로 사용인들이 카트를 밀며 회의실에 들어왔다. 사용인들은 한 사람 앞에 커다란 사각 접시와 소스 볼 같은 작은 종지를 두 개씩 내려놓았다. 세니아나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장어로 만든 덮밥입니다. 밥에도 소스가 배어 있어서 장어와 밥을 따로 드셔도 되지만, 함께 드시면 더욱 맛있어요.”
“코스인 겁니까?”
누군가 묻자 세니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식사의 전부예요.”
“이게 다…… 라고요?”
“저도 만찬에는 코스를 선호해요. 하지만 평소에도 그렇게 드시는 건 몸에 좋지 않죠. 과식은 만병의 근원이라고들 하잖아요.”
파르뎅 남작은 생각했다.
‘하지만 적어도 메뉴는 세 가지 이상이어야 할 게 아닌가.’
간단한 아침상에도 빵과 샐러드, 스크램블과 소시지 등을 먹는다. 물론 종지 안에 무언가가 있긴 하지만, 너무 양이 적었다.
‘우리를 위해 요리해 준 건 고맙지만 이럴 바에야 차라리…….’
‘흐음, 장어라니. 생소한 생선이군.’
다들 머뭇거리며 스푼을 들지 않았지만, 세니아나는 태연했다. 충분히 예상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 이들이 식사를 하게 할 마법의 말을 알지.’
그녀가 나베리우스를 보며 입에 열었다.
“할아버지, 장어의 효능을 아세요?”
“효능이라니.”
“의사들은 장어를 바다에서 나는 약재라고 한대요. 기력 회복에도 탁월하고, 노화를 방지하는 데다가…….”
그녀가 슬쩍 고집스럽게 인상을 쓰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정력에도 굉장히 좋다나 봐요.”
‘정력?!’
허리 굽은 귀족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슬금슬금 스푼을 들었다. 란슬롯은 해냈다는 표정의 세니아나를 보고 픽 웃었다. 장어구이를 맛본 귀족들이 오! 하고 소리치며 놀라워했다.
“괜찮은걸.”
“식감이 꽤 좋습니다. 부드럽지만 흐물거리진 않는군요.”
“호오, 단맛과 짠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졌어요. 밥과 아주 잘 어울립니다!”
파르뎅 남작은 즐겁게 식사하는 가신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르신께서 계시는 자리라고 다들 아부가 심하군.’
그는 흥 코웃음 치며 포크로 장어를 집었다. 꽤 괜찮은 냄새와 달콤한 향기가 식욕을 자극했다.
‘배가 고플 시간이니까.’
천천히 입에 집어넣었을 땐,
‘……!’
놀라웠다. 절묘한 균형의 소스가 입안을 묵직하게 눌러 침샘이 자극될 때 장어가 등장한다. 부드럽고 고소한 살은 씹으면 씹을수록 감칠맛이 느껴졌다.
‘밥과 함께 먹으면 더 맛있다고?’
파르뎅 남작이 두 번째 장어를 밥 위에 올렸다. 밥과 함께 맛본 장어는…….
‘훌륭해!’
살짝 간이 진한 감이 있었는데, 담백한 쌀과 섞이면서 완벽한 하모니를 자아냈다. 만족한 표정의 귀족들을 본 세니아나가 말했다.
“취향에 따라서 생강초절임이나 매콤한 새싹 무침을 함께 드시면 더 좋을 거예요.”
장어와 함께 생강초절임을 먹은 파르뎅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 느끼함을 초절임이 잡아 주네요!”
벌써 한 그릇을 뚝딱 비운 이들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파르뎅은 혹시라도 그들에게 빼앗길까 얼른 장어를 입안에 감추었다. 나는 즐겁게 식사하는 사람들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장어로 하길 잘했어!’
다른 생소한 건강식이었다면 스스로 먹고 싶도록 만들기 힘들었을 거다.
‘아저씨들은 왜 저렇게 정력에 신경 쓸까.’
아내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정력보다는 다정한 말 한마디가 효과적일 터였다. 어쨌거나 다행이다. 그때 할아버지가 생강초절임에 포크를 가져가는 모습에 나는 깜짝 놀라서 얼른 손을 잡았다.
“할아버지는 안 돼요!”
이건 너무 달고 짜다. 고혈압 환자에게 절임은 독이었다. 일부러 할아버지의 덮밥만 삼삼하게 만들었는데 절임을 드시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위해 일부러 새싹 무침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할아버지의 상태가 비밀인 이상 대놓고 말할 순 없었다.
“하, 할아버지가 오래오래 제 곁에 계시길 바라니까 되도록 좋은 재료로 만든 음식을 드셨으면 해서…….”
할아버지가 옅게 한숨을 흘리고는 포크를 거두었다. 내가 할아버지의 손을 놓고 허리를 폈을 때는 장내가 고요했다. 몇 초 후, 마담 버지니아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나, 천하의 나베리우스 프렌시프도 손녀 애교에는 못 당하는군요!”
“쓸데없는 소리 하기는.”
“아가씨, 제가 한 가지 알려드리지요. 어르신은 흡족하실 땐 방금처럼 입가에 주름이……!”
“시끄럽다!”
할아버지가 소리치자 다른 사람들이 수습하려는 듯 억지로 입을 열었다.
“하, 하지만 정말로 부럽습니다. 제 손주 놈은 용돈이나 달라고 할 줄 알지 할애비는 전혀 챙길 줄 모릅니다.”
“어디 공의 손주만 그렇겠습니까. 제 손주도 마찬가집니다.”
“여기서 나보다 더 불쌍한 할애비 있으면 나와 보십시오. 할아버지 냄새나니까 오지 말라더이다.”
마담 버지니아가 후후 웃으며 할아버지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도 들었습니다. 요새 아가씨가 그렇게 어르신을 챙긴다고요?”
“글쎄.”
할아버지는 오만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았다.
“매일같이 찾아와서 산책을 하자고는 하더군.”
가신들이 이번엔 진심으로 할아버지를 부러운 듯 보았다. 할아버지는 남은 장어를 마저 먹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또 늙은이 몸에 좋다고 매일 주스를 갈아오는데…….”
마담 버지니아가 픽픽 실소를 흘렸다.
“그리 좋으십니까?”
“좋기는, 귀찮지.”
그렇게 말하는 할아버지의 입가 주름이 짙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신들이 모두 그릇을 비웠다. 난 준비해 온 홍삼 정과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건 홍삼인데 장어만큼이나 효과 좋은 약재예요. 디저트로 드시거나 입이 심심하실 때 드세요.”
몸에 열이 많으면 섭취량을 조절해야 한다는 주의도 주었다. 그러고 나서 나가려 했는데 할아버지가 나를 붙잡았다.
“너도 회의에 참석해라.”
“하지만 회의는 기밀이지 않나요?”
“너도 프렌시프의 혈족이지 않으냐.”
그렇기야 한데……. 이때까지는 문가 근처에도 오지 말라셨으면서?
‘설마 인정…… 받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가슴이 콩닥거렸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할아버지 뒤편에 앉아서 회의를 경청했다. 회의가 끝난 건 밤늦은 시각이었다. 가신들이 할아버지에게 인사한 후 돌아갔고, 난 가족들과 함께 회의실을 나섰다.
“이제 슬슬 봄이 오려나 봐요. 그렇게 춥지는 않네요.”
내 말에 란슬롯이 빙그레 웃었다.
“산책하기엔 더 좋겠네?”
“음, 그건 이제 그만할까 봐요.”
그 말에 앞서 걷던 할아버지와 가웨인, 그리고 란슬롯이 나를 쳐다보았다.
“어째서?”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귀찮아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귀찮기만 하다는 말은 조금 충격이었다. 좋은 마음으로 한 건데 너무 열정만 앞선 모양이다.
‘하긴 불편한 사람과 매일 함께 걷는 건 나라도 싫을 거야.’
내가 편해져서 할아버지도 나를 편하게 여기는 줄 알았다.
“내일부터는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죄송해요…….”
시무룩하게 말하자 두 오빠가 할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니, 나는……!”
할아버지는 눈을 크게 뜨고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잠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좌우로 눈을 굴리던 그가 몇 초 후 갑자기 버럭 언성을 높였다.
“한 번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내일도 와라!”
씨근덕거리며 앞서 걷다가 다시 뒤를 보며 소리쳤다.
“꼭 와!”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눈만 깜빡였다.
‘왜 갑자기 역정이실까?’
오빠들은 알까 싶어서 쳐다보았는데 란슬롯과 가웨인이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고 있었다.
“푸핫!”
가웨인은 아예 소리까지 내면서 웃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웃는 오빠들을 쳐다보았다.
* * *
프렌시프는 크게 분노했다. 전쟁을 벌일 생각이 아니라면, 초장거리 이동 혹은 대규모 이동을 위해 포털을 열 땐 이동지에 허가를 받는 게 규정이었다. 하지만 이번 이동에서는 어떤 언질도 없었고, 프렌시프의 결계는 일부였지만 무너지기까지 했다.
모두가 ‘이 제국에서 포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사비에르 영애’를 범인으로 여겼다. 때문에 프렌시프는 사비에르에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다. 사비에르가 눈독 들이고 있는 항만 건은 논의조차 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
결국 사비에르는 자진해서 선제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협정서를 황실에 제출했다. 그제야 프렌시프엔 평화가 돌아왔다.
“기상관들이 그러더라고요. 다음 주부터는 날이 따뜻해질 거래요.”
내 말에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걷는 건 이제 덥겠죠?”
“그렇진 않은데.”
“시, 실제로 다음 주가 되면 다르실걸요.”
“아니.”
‘제 말뜻은 그게 아닌데요…….’
나는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저번 주에 마티스 남작이 검사 결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내가 생각하던 정도로 큰 병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간 식이 조절을 잘하고, 매일 하루 한 시간씩 꼬박꼬박 걸어서 그런지 몸 상태는 더 좋아졌다고 한다.
게다가 할아버지의 다리는 정말로 접질렸던 거라서 이젠 걷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나는 팔짱을 낀 손이 민망해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어느 순간부터 할아버지는 내 팔짱―부축이라고 불러 주면 좋겠지만―을 아주 당연히 여겼다. 정원만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팔을 내밀었다. 게다가 더 불편한 건…….
“더워?”
“덥냐?”
두 오빠도 산책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란슬롯이 시무룩한 나를 보며 픽 웃었다.
“산책 후에 아이스티를 준비해 놓으라고 할게. 저번에 티라미수를 잘 먹었지? 그것도 함께.”
“초콜릿 스콘도 엄청 잘 먹었잖아, 돼지.”
가웨인의 말에 나는 발끈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돼지 아니라니까요!”
“그럼 오늘 간식은 안 먹을 거야?”
“그, 그건…….”
산책 후에 간식을 먹는 게 버릇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늘 서재에 차와 케이크를 가져오게 했기 때문이다.
“티라미수와 함께 치즈케이크도 가져오라고 할 건데? 제레미의 라즈베리 잼도 함께 내오라고 해야지.”
가웨인이 놀리듯 말해서 나는 움찔했다. 치즈케이크에 라즈베리 잼을 얹어서 먹는 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였다.
“먹을 거예요…….”
“거봐, 돼지 맞지.”
나는 가웨인을 흘겨보며 말했다.
“전 이런 제가 조크든요.”
‘돼지라고 놀리는 게 싫을 뿐이지. 애초에 세니아나는 너무 말랐었다고.’
내 말에 오빠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할아버지의 표정도 살짝 부드러워졌다. 이제 할아버지의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항상 똑같은 무표정이지만, 자세히 보면 살짝 다르다.
“아, 조부님. 세드릭으로부터 반란군 잔당의 거취를 묻는 서신이 왔습니다.”
“뭘 물어. 사내놈들은 힘줄을 끊어서 광산에 보내고 노약자는 정착시켜라.”
표정을 읽을 수 있다고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할아버지와 오빠들은 바로 서재로 향했고, 난 장서실로 들어갔다. 차를 마시며 읽을 책을 가지러 가기 위해서였다. 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어제 읽은 책을 꽂아 놓고, 새 책을 찾았다.
‘이건 어떠려나.’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성녀는 포털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정진하지 않을 경우, 포털은 성녀를 지켜야 할 존재로 인식…… 성녀를 위험에서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문을 여는 경우가…….]
비슷한 내용의 책을 읽은 적이 있어서 난 다른 책을 찾기로 했다. 마침 <포털의 억제>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꽤 멀리 있었지만, 손을 쭉 뻗으면 닿을 것 같아서 최대한 팔을 뻗었다.
“끙, 닿을 듯 말 듯 안 닿네…….”
“떨어집니다.”
“누구……. 꺄악!”
깜짝 놀라서 순간 균형을 잃었다. 몸이 크게 휘청하더니 뒤로 넘어가 버려서 눈을 꽉 감았다.
‘뭐지?’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슬쩍 실눈을 떠 보니 단단한 가슴팍이 눈앞에 보였다.
“어?”
도미니크 황자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가 나를 받아 준 모양이었는지 어느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것도 공주님 안기로 말이다. 당황스럽고 놀라서 몸을 퍼덕이자 그가 날 더 꽉 끌어안았다.
“정말로 떨어집니다.”
“가, 감사…….”
인사를 하려다가 퍼뜩 놀라서 말했다.
“무, 무거울 텐데…….”
도미니크는 고개를 모로 꼬았다.
“그렇지 않은데요.”
“네?”
“가볍습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서 난 말을 돌렸다.
“장서실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인사차.”
“인사요?”
“사흘 후, 황도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좀 더 오래 머물기로 하지 않았나요?”
“더 오래 있어도 소득이 없을 듯하여.”
‘소득?’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던 찰나에 황자가 걸음을 옮겼다. 깜짝 놀란 나는 그의 목에 매달렸다. 황자는 장서실 한편에 비치된 소파에 날 내려놓았다.
“가, 감사합니다…….”
“영애는 사과와 인사가 후하군요.”
“그래요? 전 잘 모르겠는데.”
“후합니다. 과할 정도로.”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런 건 생각만 하세요.”
“왜요?”
“순진하다는 걸 들킬 테니까.”
내가 눈을 깜빡이자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힘을 가진 자가 순진하면 물어뜯기는 법이죠.”
“힘이라니…….”
그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포털.”
“……!”
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를 보았다. 보석같이 오묘한 회색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걸 어떻게…….”
“제가 가지고 있던 마원은 과거 성녀의 열쇠에서 일부 채취한 것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팔찌의 원석이 내 목걸이에 흡수되듯 사라졌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서 새로운 열쇠에 이끌려 흡수된 건가.’
“할 수 있는 한 숨기십시오. 영애의 안전을 위해서.”
“어째서 그런 말을 해 주시는 거예요?”
“영애가 내 비밀을 지켜 주었으니까.”
첩자를 보았을 때, 그가 수상하다는 걸 알았지만 할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았다. 아마 그 뜻인 듯하여 눈을 깜빡이다가 생긋 웃었다.
“역시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요.”
“예?”
“좋은 분이세요.”
도미니크는 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상하군요.”
어디가?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 영애뿐일 겁니다.”
“음……. 제가 보기엔 저하는 선인장이에요.”
“가시 많고 줄기만 덩그러니 있는 흉측한 식물 말이죠.”
“겉보기엔 그렇게 보이지만, 사실은 아름다운 꽃이 피거든요.”
“선인장…….”
도미니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보다 한 뼘은 더 크고, 어리지 않은 나이의 그가 어쩐지 어린애 같아 보여서 나는 활짝 웃었다.
“아주 강인한 식물이라는 점도.”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인상을 썼다.
“기분이 이상합니다.”
“속이 안 좋으세요?”
“아니요. 가슴이…….”
“가슴이?”
“간질거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사흘 후, 나는 양피지에 가출 계획을 끄적였다.
‘여비는 이 정도면 될 테고…….’
마담 버지니아가 준 건물이 있어서 사재를 불려 여비를 마련할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가출 예정이 조금 더 앞당겨졌다. 때마침 시트론이 세탁한 드레스를 가지고 들어왔다.
“오후에 황자 저하를 배웅하러 가시지요?”
“응, 그럴…… 시트론!”
시트론은 이마를 잡은 채 비틀거렸다. 깜짝 놀란 내가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은 거야?”
“네, 열이 조금 올랐을 뿐이에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평범한 열병이에요. 오늘 일찍 들어가서 쉬면 돼요.”
시트론은 부모 형제가 없어서 아파도 돌봐 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간호하고 싶었는데, 시트론은 열병이 옮는다며 펄쩍 뛰었다.
“숙소에 난방은 제대로 들어와?”
“그럼요.”
“그래, 그럼 얼른 가서 쉬어.”
“아가씨도 따뜻하게 계셔야 해요? 환절기라 조심하지 않으면 금세 병에 걸려요.”
몇 번이나 따뜻하게 있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시트론이 숙소로 돌아갔다. 오후가 되어 황자를 배웅하러 성문으로 향했다. 가족들이며 가신, 기사들까지 빼곡하게 서 있었다.
도미니크에게 다가가다가 무심코 그의 곁에 서 있는 부관에게 시선이 향했다. 어두운 얼굴의 부관이 나를 향해 살짝 묵례했다. 도미니크 또한 나를 보았다.
“영애.”
“조심히 가세요, 저하.”
“다음엔 황도에서 뵙죠.”
“기회가 된다면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오빠들이 양쪽에서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때는 저희들도 함께하겠습니다.”
“꼭.”
란슬롯은 차갑게 웃었고, 가웨인은 인상을 썼다. 그러자 도미니크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악수하려는 건가 싶어서 손을 내밀었다. 그는 순식간에 나를 끌어당겼다.
“앗!”
오빠들에게서 풀려난 나는 가까워진 도미니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
그가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순간 바람이 불며 그의 결 좋은 흑발이 나부꼈다.
“세니아나.”
“네?”
“보고 싶을 겁니다.”
옆으로 긴 날카로운 눈이 부드럽게 휜다. 나는 얼굴이 화르륵 붉어져서 눈만 깜빡였다.
황자를 배웅하고 가신들이 흩어졌다. 우리 가족들도 다시 성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속 마음에 안 드네.”
“저하요?”
“오늘도 수작을 부리잖아.”
가웨인이 인상을 쓰며 말하자 할아버지와 란슬롯이 나를 쳐다보았다. 란슬롯이 평소보다 더 화사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도, 라니?”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번에 마주친 적이 있어요.”
“새벽에 단둘이, 그것도 뒷문에서 은밀하게.”
가웨인이 밉살맞게 덧붙이자 할아버지와 란슬롯이 미간을 좁혔다. 나는 ‘그렇기야 하지만 단어 선택이 묘한걸’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란슬롯은 한층 더 화사하게 웃었다.
“새벽에, 은밀히?”
“새벽인 건 우연이었고, 뒷문이었던 건 당시에 정문이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가웨인이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그럼 그 새…… 황자가 왜 네 뺨을 만지고 있었던 건데?”
“뺨?”
“뺨이라고?”
나는 란슬롯과 할아버지의 반응에 당황해서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건…….”
어쩐지 여기서 그럴 일이 있었다고 말하면 큰일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건 제 볼에 생채기가 나서 봐 주시려고…….”
“정신이 나갔나. 왜 남의 여동생 뺨을 멋대로 보는 거야!”
가웨인이 버럭 소리치자 란슬롯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정신이 나간 모양이지.”
그러더니 내 볼을 문지르며 말했다.
“세니아나, 남자의 수작은 간교해. 뺨에서 입술로 넘어가는 건 순식간이란다.”
“그래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세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할아버지와 오빠들도요?”
잠시 침묵이 이어지던 때에 가웨인이 그런 건 지금 중요하지 않다며 소리쳤다.
“흐응……. 그런데 만약에 정말로 도미니크 황자가 수작을 부렸다면 프렌시프 입장에선 좋은 일 아닌가요?”
란슬롯과 가웨인은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할아버지는 원래 저와 황자를 결혼시키고 싶어 하셨으니까요.”
형제의 시선이 동시에 할아버지에게로 향했고, 할아버지는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해 보니 결혼하기엔 아직 이르군.”
그러자 가웨인과 란슬롯이 내 양쪽으로 옮겨와 섰다.
“앞으로 네 뺨을 만지는 놈이 있으면 고환을 걷어차! 알았어?”
“때에 따라선 찔러도 괜찮아.”
“아니, 필히.”
“어지간하면 죽이는 게 처리하기 편하긴 하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 남자들의 뺨을 만지면 난 배가 뚫려서 죽겠구나.’
절대로 그러지 말아야지. 그렇게 결심하고 슬금슬금 뒷걸음치려는데 마침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세드릭 경!”
내 말에 가족들이 별채 쪽에서 걸어오는 그를 돌아보았다. 세드릭 경이 쿡쿡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오늘도 사이가 좋으십니다.”
할아버지는 대답 없이 다른 일을 물었다.
“반란군 포로들은?”
“후일을 도모하는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처자식과 노부모에게 이주금을 주고 정착시킨 데에 감읍한 것이겠지요.”
“정착은 완료했나?”
“제가 직접 진행 중입니다.”
란슬롯과 가웨인도 대화에 꼈고, 나는 방해가 되기 전에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빠져나왔다. 빨리 돌아가서 시트론에게 약과 건강식품, 옷가지를 챙겨다 주고 싶었다. 별채가 보이기 시작해서 나는 조금 더 빠르게 걸었다. 그때였다.
‘응?’
목걸이가 좀 뜨거운 것 같았다. 내가 목걸이 줄을 들어 펜던트를 확인했을 찰나였다. 슈욱―! 반딧불이 같은 빛이 소용돌이처럼 내 몸을 감싸며 현기증이 일었다.
“헉!”
순식간에 사위가 어둠에 감싸였다.
* * *
‘으으.’
빛 한 점 보이지 않은 어둠 속에서 몇 시간을 헤맸는지 모르겠다. 등은 식은땀으로 흥건하고, 발이 아팠다. 하지만 벽이 점점 더 좁아지는 것만 같아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대체 어딘 거지? 포털이 날 삼킨 건가? 그렇다면 어째서 내 명에 응하지 않는 거야?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다리가 떨려서 더는 못 걸을 것 같던 때 눈앞에 푸른빛이 떠올랐다. 나는 허물어지려던 몸을 억지로 일으켜서 그 앞으로 뛰어갔다.
“그쪽이 아니야.”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촉감에 멍하니 옆을 돌아보았다.
“이리로 와.”
나는 이 목소리를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