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3/24)

3장

나베리우스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산책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세니아나가 오지 않는다. 그와 함께 산책을 위해 대기 중이던 프렌시프 형제도 의아한 듯했다.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늦지?”

“조리실에 있을 수도. 그곳에 있을 땐 시간 가는 줄 모르잖아.”

“그런가.”

가웨인이 중얼거리면서 테이블 한편에 놓인 접시를 보고 씩 웃었다. 세니아나에게 주기 위해 동부 레이디들 사이에서 유행 중인 디저트를 사 왔다.

기사들에게 명하니 “차라리 베어 주십시오. 그, 그런 데를 어떻게 갑니까!” 하고 기함을 하는 통에 직접 가는 수밖에 없었다.

‘지옥인 줄 알았지.’

온통 핑크 일색인 가게 안에 남자는 저 혼자였다. 게다가 이상한 설정을 붙여 놔서 들어가자마자 “요정의 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하며 손에 꽃―번호표 대신이라던―을 쥐여 주었다.

다시 생각해도 끔찍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꽃돼지가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릴 생각을 하면 그렇게 끔찍한 일은 아니었다. 란슬롯도 세니아나를 위해 찻잎을 준비해 놓아서 오늘을 유난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나베리우스에게 말했다.

“제가 데려오겠습니다.”

“아, 나도 같이.”

가웨인이 제 형을 따라 일어났다. 별채로 향하며 두 형제는 가벼운 잡담을 나누었다.

“이제 그만 세니아나를 성으로 들여도 되지 않아?”

가웨인의 말에 란슬롯이 조용히 답했다.

“별채에서 지내는 쪽이 움직이기 더 편할 텐데. 막내는 하루 종일 조리실에 있으니까.”

가웨인은 나무 그늘에 가려진 별채를 바라보았다.

“조리실을 성안으로 옮겨 주면 될 것 아냐. 하여간 ‘어르신’은 피도 눈물도 없으시지.”

투덜거리는 말에 란슬롯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거다.”

“아니라고?”

“마지막 방어선일 수도 있지.”

“방어선?”

“감정의 방어선 말이다.”

“복잡하기는.”

가웨인은 투덜거리며 조리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없잖아.”

조리실은 텅 비어 있었다.

‘이 시간에 대체 어디에?’

어쩐지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가웨인과 란슬롯은 서둘러 세니아나의 방으로 향했다.

“없어.”

“성 밖으로 나간 건 아니고?”

“경비병들에게 그런 연락은 못 받았어.”

때마침 지나가던 하인이 형제를 발견하고 고개를 숙였다.

“세니아나는?”

“황자 저하를 배웅하러 가셔서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가웨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황자가 성을 떠난 지 몇 시간이나 흘렀고, 그를 배웅한 뒤 세니아나는 곧장 별채에 돌아간다고 했다. 역시 감이 좋지 않았다. 세니아나를 찾아 나서려던 가웨인이 란슬롯을 돌아봤다.

“뭐 해?”

그는 책상 밑에 떨어진 양피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웨인이 그에게 다가갔다.

“뭐길래 그―”

종이엔 성을 떠난 뒤의 계획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형제는 곧바로 나베리우스의 서재로 향했다.

“조부님!”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가웨인을 본 나베리우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세니아나가 가출했습니다!”

“……뭐?”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 * *

“어떻게, 어떻게…….”

나는 심장이 떨려서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나를 향해 그 사람이 말했다.

“이쪽으로 와.”

신기한 일이었다. 이렇게 어두운 데도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큰 키와 마른 몸, 눈가의 주름, 눈꼬리에 있는 갈고리 모양의 상처. 너무 보고 싶어서 매일 밤 가슴이 미어지게 만들고―

“아가야.”

이렇게 커다란 나도 아가라고 불러 주는 유일한 사람. 이 꿈이 깨 버릴까 봐 움직일 수 없었다. 늘 그렇듯 깨고 나면 괴로워질까 봐서. 나는 자꾸만 치미는 울음을 억지로 삼키고 겨우 입을 열었다.

“선생님…….”

선생님의 눈매가 나붓이 휘었다.

“어서 가자.”

“하지만……, 하지만…….”

이대로 따라가면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아서 불안했다. 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제나처럼 상냥한 손길이었다.

“늦기 전에 가야 해. 포털이 널 지키기 위해 영영 삼켜 버리기 전에.”

“그럼 여긴 포털 내부인가요?”

“그래.”

선생님이 내 손을 잡고 앞서 걷던 때에 벽이 다시 좁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가볍게 허공을 휘젓는 선생님의 손길에 거짓말처럼 벽이 허물어지고, 공중에 호롱불같이 작은 불빛들이 나타났다. 차갑디차가운 어둠 속에 온화한 빛이 가득 퍼졌다.

선생님은 나를 끌고 걸었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베고니아 꽃잎이 휘날리며 아름다운 길을 만들었다. 내가 멍하니 꽃길을 바라보자 선생님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나가 좋아하는 꽃이지?”

“아주 옛날에 했던 말인데 기억하고 계셨어요?”

“그럼. 고아원 화단에서 베고니아를 보며 한 말인 것도 알지.”

“…….”

“꽃 좋아하는 세나가 삶에 허덕이느라 화분 하나 사 본 적 없다는 것도 알고.”

“…….”

“다 낡은 코트 하나로 5년을 버텼다는 것도 알고.”

“…….”

“빚쟁이를 피해 이틀이나 하수구에 숨어 있었던 탓에 커서도 피부병으로 고생한 것도 알고.”

“…….”

“내가 걱정할까 봐 이 모든 걸 숨겼다는 것도 알지.”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알고 계셨구나.’

그런데도 속상한 내색을 하면 내가 마음 쓸까 봐 말씀하시지 않았구나. 입술을 꾹 깨문 날 보고 선생님은 쓰게 웃었다.

“우리 세나가 그렇게 착한 아이인 걸 나는 알아.”

“…….”

“그러니까 이 세상엔 세나를 나보다 더 사랑해 줄 사람이 잔뜩 있을 거야.”

나는 선생님이 이대로 안심하고 영영 떠날까 봐서 두려워졌다.

“싫어요! 못된 애가 될 거예요! 싫어요, 싫어요. 선생님 가지 마세요…….”

선생님이 눈물을 참듯 고개를 숙였다. 그때, 나 홀로 어둠 속에서 보았던 푸른빛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다란 빛이 나타났다. 선생님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이제 가렴.”

나는 소리 없이 울며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과 함께 있으면 안 돼요?”

선생님은 날 끌어안았다. 등을 도닥도닥 두드리는 손길이 언제나처럼 상냥해서 결국 엉엉 소리 내어 울어 버렸다.

“어서 가야 해. 가족들이 기다려요.”

“제 가족은 선생님이에요.”

“그럼. 나도 우리 세나의 가족 중 하나지.”

선생님이 나에게서 떨어지며 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이젠 새로운 가족이 생겼으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정말?”

문득 할아버지와 란슬롯, 그리고 가웨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어깨를 떨구고 힘없이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정말로 저를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세나는? 세나도 그 사람들을 싫어하니?”

“그건 아니지만…….”

“세나야, 난 이제 없어.”

선생님이 부드럽게 내 뺨을 매만졌다.

“……!”

“너 홀로 살아가기 위해선 사람에게 마음을 내주는 법을 알아야 해.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웅크리고 있으면 상대의 진심은 영영 알 수 없을 거다.”

우웅―! 갑자기 공간이 진동하며 꽃길이 흔들리자 선생님이 다급한 손길로 나를 빛 쪽으로 밀어냈다.

“선생님!”

처음 공간을 이동했을 때처럼 점점 빛이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나를 보던 선생님이 입술을 꾹 깨물고 무어라 소리쳤다.

“배…… 를…… 해!”

* * *

팟―! 눈 부신 빛이 사그라진 뒤에야 눈을 뜰 수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은 처음 보는 풀숲이었다. 겨울에도 풀이 잔뜩 돋아 있는 것으로 봐서는 프렌시프 성의 남쪽 경계인 듯싶었다.

‘비밀 통로가 근처니까 찾아서…….’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다리가 후들거려서 도리어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퉁퉁 부어 움직이지 않는 눈을 억지로 감았다.

‘분명히 선생님이었지.’

아직도 내 등을 감싸던 손길이 남아 있는 것만 같다. 또다시 선생님과 헤어졌다는 설움이 치밀어 올라서 고개를 붕붕 저었다.

‘울지 말자. 울면 안 돼. 선생님이 속상해하실 거야.’

입안의 여린 살을 깨물며 바닥을 짚었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바삭 풀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란 내가 어깨를 좁혔다. 지금은 밤이고, 조금 전만 해도 인기척 하나 없던 곳이다. 이번에도 첩자가 있는 걸까 봐 숨을 죽이고, 몸을 한껏 낮추었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이쪽으로 오지 마…!’

포털 내부에서 몇 시간이나 혼자 떠돈 데다 충격까지 받아서 도망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바람이 무색하게 발소리는 내 앞에서 멈추었다. 그런데―

‘왜 움직이지 않지?’

나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

“할아버지…….”

성내에서처럼 가벼운 차림의 할아버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할아버지에게서 말이 없기에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벌써 늦은 밤이었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렀다면 성에서 도망친 줄로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어쩌지…….’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역시 프렌시프에 먹칠을 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던 거냐며 소리칠지도 모른다. 나는 일어나려고 애썼지만, 다리는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질 않는다. 그런 내 앞에 할아버지는 등을 내밀었다.

“업혀라.”

“그렇지만…….”

“돌아가자.”

그가 낮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집으로.”

“…….”

코가 시큰해진 것을 느끼며 천천히 그의 등에 업혀서 목을 끌어안았다.

“무겁지요?”

“아니.”

“하지만 할아버지는 노인이신데…….”

“손녀 하나 못 업을 정도로 삭진 않았어.”

할아버지에게선 누군갈 찾기 위해 뛰어다닌 사람처럼 땀 냄새가 났다. 그는 나를 업고서 비밀 통로로 들어갔다.

“제가 거기에 있는 줄 어떻게 아셨어요?”

“통행자 명단에도 없고, 영지 안에도 없으니 비밀 통로를 이용했을 거라고 예상했지.”

내가 그곳에 이동한 건 우연이었지만, 그 또한 선생님의 배려처럼 느껴졌다. 어느새 우리는 비밀 통로를 지나 성으로 돌아왔다. 난 할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소파에 앉았고, 할아버지는 집사에게 명해 가웨인과 란슬롯을 불러들였다. 이내 탁, 탁, 탁!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쿵! 문이 열리며 오빠들이 들어왔다.

“이 근방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나는 가웨인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소리친 건 란슬롯이었다. 언제나 상냥한 가면을 쓰고 있던 그라서 얼떨떨하고 당황스러웠다.

“시도 때도 없이 도적 떼가 출몰한다고!”

“…….”

기세가 얼마나 흉흉한지 가웨인이 그를 뜯어말릴 지경이었다.

“그만해. 알아들었을 거야.”

“놔!”

“무사히 돌아왔으면 됐잖아. 놀라게 하지 마.”

할아버지도, 란슬롯도, 가웨인도 모두 땀 범벅이었다. 정말로 나를 애타게 찾은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절 걱정하셨어요?”

가웨인이 푹 한숨을 쉬었다.

“당연하잖아.”

“제가 가출한 게 드러나면 가문의 위신이 상해서요?”

이번엔 란슬롯이 인상을 썼다.

“수색령을 내렸다. 근방 영지에도 협조 요청서를 보냈어.”

가웨인이 란슬롯의 말에 덧붙여 말했다.

“동부에서 널 찾을 수 없다면 황실에까지 연락할 생각이었다고.”

가문의 위신을 걱정한다면 그런 일을 했을 리 없다. 순간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웅크리고 있으면 상대의 진심은 영영 알 수 없을 거다.]

정말로 그럴까? 나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웅크렸던 걸까? 이들에게 내가 모르는 진심이 있는 걸까?

나는 용기를 겨우겨우 끄집어내서 물었다.

“그럼 저를 싫어하지 않으세요?”

세 남자가 한동안 말을 잃었다.

“너는 정말…….”

가웨인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란슬롯이 짙은 한숨을 흘렸다. 그때 할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세니아나.”

“네…….”

“성으로 들어와라.”

“네?”

“성으로 들어와. 옆에 있어.”

난 세니아나의 기억을 통해 할아버지가 얼마나 냉혹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싫은 사람에겐 절대로 곁을 내주지 않았고, 두 번 기회를 주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수없이 사고를 친 세니아나를, 아니, 나를 다시 성으로 들이겠다는 건 무엇보다 다정한 답변이었다.

나는 코가 시큰거려서 고개만 열심히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빠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가웨인은 내 볼을 쭉 늘리며 말했다.

“또 사람 간 떨어지게 해 봐라. 평생 돼지라고 놀려 먹어 주마.”

“…….”

란슬롯이 그런 가웨인의 손을 쳐 내고 나를 보았다.

“가출 생각은 오늘로 끝내 줘. 대답은?”

“네.”

그렇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잔뜩 떨리고 있었다.

* * *

다음 날, 성에서 일어난 나는 평소보다 빨리 식당에 도착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오빠들이 더 일찍 도착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수색 협조 요청을 거두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비상령도 해제하였습니다. 병사들에게는 따로…….”

내가 할아버지 옆에 앉자 그들이 말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란슬롯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잘 잤어?”

“네.”

우리는 아침 식사를 하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비를 잘못 계산했던데.”

란슬롯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가 적은 도망 계획서를 흔들었다.

‘쓰레기통에 넣은 줄 알았는데……!’

가웨인은 그에게서 종이를 빼앗으며 구겨 버렸다.

“가르쳐 주지 마. 이번엔 제대로 도망치면 어쩌려고.”

“그럴 거야?”

란슬롯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제 안 가기로 했어요.”

이들에게 죽을까 봐, 혹은 정치적 도구로 팔려 갈까 봐 도망치기로 했던 거다. 이제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으니 굳이 도망갈 이유가 없었다. 가웨인은 샐러드를 집는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널 찾는 사흘은 최악이었어.”

나는 눈을 깜빡였다.

‘사흘?’

체감상 고작 대여섯 시간쯤이었는데 사흘이나 지났다고?

“시트론이 엄청 걱정했겠다…….”

어제는 나도 모르게 잠들어서 시트론에게 인사를 하러 가지도 못했다. 란슬롯이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시트론에겐 휴가를 줬다.”

“휴가요?”

“열병이 쉽게 낫지 않는 모양이더군. 그 때문에 네 일도 듣지 못했을 거야.”

“지금 어디 있어요? 많이 심한 거예요? 제가 가 봐야…….”

“성내 병동에 있고, 목숨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네가 가면 간호해 주는 사람도, 환자들도 불편해할 거다.”

‘그런가…….’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트론이 걱정돼서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 가웨인이 고기를 썰어 내 접시에 올려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요새 환자들이 많군. 민간 병원을 수색할 때도 사람이 바글거렸어.”

그 말에 란슬롯은 고개를 끄덕였다.

“환절기니까 아무래도.”

“부럽네. 나도 좀 아파야 일을 쉴 텐…….”

그 말에 할아버지가 가웨인을 쳐다보았다.

“평생 일하지 못하도록 해 주랴.”

“……아닙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일에 집중해라. 수색에 정신없는 틈을 타 헛생각하는 놈들이 생겼을 것이다.”

“예.”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는 불현듯 포털 안에서 들었던 선생님의 마지막 외침을 떠올렸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선생님은 간절히 소리쳤다.

[배신자를 조심해!]

―라고.

배신자, 선생님은 분명히 ‘배신자’라고 했다.

‘영지 안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이야?’

가장 먼저 집히는 건 이주민 세작이었다. 하지만 세작은 본래부터 충성하지 않는 사람들이니 배신했다고 보긴 어렵다.

‘내부자가 변절했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사용인일까? 가신이나 기사, 행정관일 수도 있다.

‘짚이는 데가 너무 많아!’

고민하는 와중에 란슬롯의 시선이 느껴졌다.

“세니아나?”

“아, 네!”

“우리 막내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실까.”

“아……. 아니에요.”

현재로선 증거가 없으니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일단 며칠간은 수상한 자가 없는지 살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가웨인이 썰어 준 고기를 입에 넣는데, 란슬롯이 말했다.

“세니아나, 네 새로운 방에 들일 가구 말인데.”

“네.”

“직접 보고 고르는 게 어때?”

“제가 골라도 되나요?”

“물론이지. 그 김에 필요한 것도 사 오도록 하자. 드레스룸을 보니까 옷과 장신구가 별로 없더군.”

“아, 그러려면 시간이 좀 필요한데…….”

“왜?”

“저는 사재가 오빠들처럼 많지 않으니까 건물이 팔려야 해요.”

요새 살짝 살이 올랐더니 예전 옷들이 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드레스를 사려고 알아봤었는데 정말 눈이 튀어나오게 비쌌다. 유명한 디자이너의 드레스는 작은 저택 값이나 했다.

‘그런데 가구에 장신구까지 사려면…….’

고개를 젓는 나를 보며 가웨인이 픽 웃었다.

“그런 걸 왜 걱정해?”

“네?”

“말 꺼낸 사람이 사는 거지.”

그렇게 말하면서 란슬롯을 흘깃 보기에 나는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엄청 많이 들 텐데!”

“이럴 때 등쳐 먹는 거야.”

가웨인이 씩 웃자 란슬롯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좋아, 세니아나. 오늘은 좀 당해 줄게.”

“아니 아니! 정말로 엄청 비싸요. 드레스 몇 벌 사면 사재를 몽땅 날릴 수도 있다니까요?”

프렌시프 형제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우릴 너무 무시하는데.”

“얼마나 사야 우리 사재를 탕진할 수 있는지 볼까.”

이 오빠들이 돈 무서운 줄 모르고! 나는 도움을 구하듯 할아버지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의 입꼬리도 슬쩍 올라가 있었다.

“가구는 내가 사 주마.”

그러더니 약지에 끼고 있던 인장을 빼 주었다.

‘신용 카드나 다름없는 인장을 넘기다니!’

나는 당황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러자 가웨인이 감사하다고 인사하라며 제가 냉큼 인장을 받았다.

“그, 그렇지만…….”

난 눈치를 보다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그래.”

내가 이들의 재산을 지켜 줘야 할지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난 정신을 반쯤 놓고 유리 진열대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어디로 돌려도 호화롭고 아름다운 장신구로 가득해서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건 어때?”

가웨인은 분홍색 리본 핀을 들었다. 중앙엔 파파라차 사파이어가 달렸고, 끝단 술엔 진주가 달려서 움직일 때마다 찰캉찰캉 맑은소리를 냈다.

“예뻐요…….”

“막내에겐 이쪽도 어울리겠는데.”

란슬롯은 화려한 다이아몬드와 토파즈를 꽃송이처럼 배열해 붙인 초커를 가리켰다.

“엄청 예뻐요…….”

이번에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하나같이 전부 황홀하게 예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쇼케이스를 구경하며 재밌는 모양의 액세서리를 발견하던 때에 가웨인이 다가왔다.

“달리 마음에 드는 건?”

“아뇨, 별로.”

“방금 뭘 보고 있었잖아.”

“그냥 특이해서요…….”

내가 보고 있던 건 핑크색 토르말린과 에메랄드로 만든 고양이 브로치였다. 진녹색 에메랄드가 양발을 턱밑에 붙이고 있는 고양이 모양으로 세공되어 있었고, 그 위에 핑크색 토르말린이 두 개의 눈처럼 붙어 있었다. 가웨인이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저랑 똑같은 걸 보네.”

“아닌데요?”

그는 내 머리칼을 살짝 잡고, 에메랄드를 가리켰다.

‘비, 비슷한 색이긴 한데.’

인정하기 싫어서 입을 꾹 다물고 휙 고개를 돌렸다. 란슬롯과 호위로 따라온 기사들까지 브로치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잖아.”

‘란슬롯까지!’

부루퉁해져서 쏘아보자 란슬롯이 씩 웃었다.

“귀엽다는 뜻이야.”

“…….”

“고양이 같고.”

“정말!”

울상을 지으며 소리치니 달래듯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 브로치로 할래?”

“그렇지만…….”

나는 가격표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너무 비싼데요.’

이 돈이면 고기가 몇 근이고, 생선이 몇 마린지 계산하는데 란슬롯이 모른 체하며 점원을 불렀다.

“계산.”

“브로치만 하시겠습니까?”

“아니, 지금까지 본 것들을 모두 포장하겠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란슬롯에게 매달렸다.

“아니에요!”

“마음에 들잖아?”

“하나면 돼요!”

이렇게 비싼 건 심장 떨려서 하고 다니지도 못할 거다. 내 말에 가웨인이 좋다고 하면서 점원을 보았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뭐라고?

‘미쳤나 봐!’

나는 와들와들 떨며 란슬롯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돈을 사이버 머니인 줄 아는 동생을 타박하긴커녕 고개를 끄덕였다. 가웨인이 눈썹을 슥 들어 올리며 물었다.

“전부 할래?”

“아니요!”

“그럼 본 것들만 할까?”

“네…….”

가웨인은 영수증에 할아버지의 인장을 냉큼 찍었다. 다음 상점, 또 다음 상점을 지날 때마다 나는 생기를 잃어 갔다. 비싸서 싫다고 하면 가웨인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를 하는 통에 거절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쇼핑을 마치고 카페에 들어왔을 때는 기력이 다 쇠해 있었다.

멍하니 케이크만 떠먹는 나를 보며 란슬롯과 가웨인이 픽픽 웃었다. 란슬롯이 내 입가의 부스러기를 떼어 주자 주변에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서 주변을 바라보니 부채로 입을 가린 여성들이 란슬롯과 가웨인을 몽롱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오빠들에게 속삭였다.

“다들 여길 보고 있어요.”

“우리가 잘생겨서 그래.”

가웨인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서 좀 어이가 없었다. 다시 시선을 돌려서 함께 재잘거리는 여자애들을 바라보았다. 깐 달걀처럼 고운 피부에 생기 넘치는 표정, 발그레 달아오른 뺨.

‘예쁘다, 예뻐.’

고운 여자아이들이 발랄하게 웃는 모습은 정말로 보기 좋았다. 가웨인은 그런 나를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넌 성에 친구를 데려온 적이 한 번도 없네.”

“저는 친구가 없으니까요.”

두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파티에서 자주 이야기를 나누던 영애가 있었잖아. 레베카였나?”

“브리쉴라 영애.”

가웨인의 말에 란슬롯이 덧붙였다. 세니아나의 기억 속에 있는 이름이었기에 곰곰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나는 스푼을 들며 말했다.

“그거 오빠들한테 잘 보이려고 했던 건데.”

“뭐?”

“그 애 아버지가 그러라고 했대요.”

레베카는 그걸 세니아나에게 와서 직접 말했다.

[하지만 뭐, 진짜로 친구가 되어 줄 수도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세니아나가 레베카를 계단에서 떠밀어 버렸지.’

내가 한 일은 아니지만 그 애에게 좀 미안해졌다. 그때 그 애는 고작 열다섯에 중2병을 앓고 있을 때였다.

“다른 친구는?”

세니아나의 친구 기억은 그게 전부이길래 윤세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나도 없는데.’

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요, 친구 같은 거 없어도 괜찮아요.”

“왜?”

“비슷한 사람이 있으니까요.”

‘시트론이!’

헤헤 웃으며 오빠들을 보았더니 가웨인이 헛기침을 했다.

“그래, 친구가 될 수도 있지.”

왜인지 쑥스러운 목소리였지만, 나는 착각인가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주인과 하녀 사이라도 충분히 가능하지.

“기쁘네.”

란슬롯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으응?’

가웨인보다 란슬롯이 신분에 더 엄격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시트론을 떠올리니까 다시 걱정이 들었다.

‘많이 아픈 걸까.’

난 케이크를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맛있어서 그녀와 함께 먹고 싶었다.

“시트론에게도 사다 주고 싶은데…….”

란슬롯이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은 찾아가지 마.”

“왜요? 몸이 그렇게 안 좋은 건가요?”

내가 화들짝 놀라서 물으니 란슬롯은 달래듯 대답해 주었다.

“면역력이 떨어져서인지 피부병까지 올라왔다고 들었어. 갔다가 옮으면 시트론이 더 속상해할 거다.”

아픈데 마음까지 불편하게 하는 건 싫어서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웨인이 빨대로 얼음을 저으며 투덜거렸다.

“쓸데없는 놈들에게 옮겨 줬으면 좋겠는데. 성에서 안 보이게.”

“왜요?”

“수색하느라 잠깐 틈이 생기니까 바로 헛짓거리들이다.”

“뭔데요?”

“사소한 거지. 수색하라고 내린 돈으로 술을 퍼마신다던가, 야간 경비 기록을 조작해서 수당을 챙긴다던가.”

그 말을 들으니 또다시 ‘배신자’가 떠올라서 란슬롯에게 물었다.

“오빠는요? 오빠에겐 다른 일이 없었나요?”

“이쪽은 틈이 없어도 매일 헛짓거리라서 특별할 것도 없어.”

그가 화사하게 웃었다.

“뭔데요?”

“내가 없는 틈에 광산 책임자를 매수해서 돈을 나눠 먹으려고 했던걸.”

그게 사소한 일이란 말에 질려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란슬롯이 어깨를 으쓱했다.

“소란을 언제나 기회로 여기는 자들이지.”

‘잠깐만 란슬롯과 가웨인이 방금 한 말…….’

방금 오빠들이 한 말과 일전에 보았던 광경, 그리고 선생님의 말이 머릿속에서 엉켜들었다.

배신자. 광산. 시트론의 병. 소란을 기회로 여긴다.

‘설마!’

나는 벌떡 일어났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난 어르신께서 그렇게 새하얗게 질린 건 처음 봤어.”

“아가씨가 돌아오셔서 다행이야.”

“언제는 제발 떠났으면 좋겠다면서?”

“이젠 기분이 상했다고 사용인들을 걷어차지 않으시니까.”

“웃으면서 인사도 해 주시고.”

“귀여우시지~!”

하녀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멀어지자 그림자가 창고로 숨어들었다. 결계의 사각을 정확히 찾은 그가 마석을 나무 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윽고 마석이 깜빡거리며 치지직 소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은?]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두 번 실패는 용납하지 않는다.]

마석의 발신자는 이미 한 차례 실패한 전적이 떠올라 마른침을 삼켰다. 이번 일까지 잘못된다면 프렌시프보다 먼저 저들이 제게 검을 겨눌 터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성공만 한다면 지금과는 비할 수도 없는 자리에 오를 것이다. 사방이 황금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손가락 하나로 현재 저와 같은 선상에 있는 인간들을 부릴 수 있었다. 발신자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프렌시프의 핏줄들이 눈치를 챈 것은 아니냐.]

마석의 발신자가 히죽 웃었다.

“그들은 저를 완벽하게 신뢰하고 있습니다.”

[긴장을 늦추지 마라. 눈치가 빠른 늙은이니 조짐만 있어도 대번에 너를 솎아 낼 터.]

“그렇다고 한들 이미 늦었지요.”

이미 일은 터진 후고, 수습하는 동안 모든 게 끝나 있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안전핀도 하나 꽂아 두었다.

‘그 계집애.’

요 근래 프렌시프의 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물고 빠는 그 계집애를 이용하면 될 일이다. 며칠 전처럼 또 한 번 그 계집애에게 위험이 닥치면 나베리우스 프렌시프는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없을 것이다. 세니아나 프렌시프가 사라졌을 때 이성을 잃었던 모습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가. 그림자는 비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럼 다음 연락을 기다리지.]

치지직―! 소음과 함께 마석의 빛이 사라졌다. 마석을 품에 넣은 발신자가 창문 근처로 다가가 기척을 살폈다. 멀리서 와글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그 틈을 타 창고를 빠져나왔다. 성문 쪽으로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그 사이로 해초 같은 머리칼이 보였다. 발신자는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

“이걸 전부 그냥 주신다고요?”

“그래. 많으니까 혼자 먹지 말고, 여기 오지 못한 이웃들에게도 나눠 줘.”

세니아나와 사용인들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토스트를 종이에 감싸서 나눠 주고 있었다. 수셰프 제레미가 제 쪽으로 온 영지민을 보고 버럭 소리쳤다.

“안 돼, 안 돼. 음식을 받기 전에 ‘그것’이 먼저다!”

영지민은 시무룩한 얼굴로 의사들이 있는 반대편 줄에 섰다.

“으아아!”

“어린애도 쉽게 맞소. 엄살 그만 피우고 힘 빼시오. 자자, 따끔합니다.”

주사를 놓은 의사가 큰소리로 외쳤다.

“다음!”

이상한 분위기를 보고 있자니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감이 들었다. 정신없이 토스트을 나눠 주던 세니아나가 굳어 있는 발신자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이쪽으로 와!”

그리고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가씨……. 왜 갑자기 음식을 나눠주시는 거죠? 저 주사는 뭐고요.”

“토스트를 나눠 주는 건 당장 영양가 있는 식사가 필요하니까. 그리고 저 주사는 백신.”

‘배, 백신?’

세니아나의 말에 발신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알아듣게 설명해 주십시오. 백신이라니요……!”

“그야 당신이 더 잘 알잖아?”

세니아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프렌시프에 역병을 푼 당사자니까.”

“뭐…… 라고요?”

챙―!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사들이 발신자를 포위했다. 검이 겨눠진 채 꿇어 앉혀진 자에게 그녀가 말했다.

“이 배신자.”

세니아나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실망이 커.”

그녀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배신자를 노려보았다.

“세드릭 경.”

나는 선생님이 배신자를 조심하라고 일러 준 것 외에 또 한 가지 힌트를 주었다는 걸 깨달았다.

[늦기 전에 가야 해. 포털이 널 지키기 위해 영영 삼켜 버리기 전에.]

즉, 그날 포털이 날 지키기 위해 가둘 만큼 위험한 일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내가 포털에 갇히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세드릭.’

심지어 그는 별채 쪽에서 걸어왔다. 그것으로 세드릭이 별채에 무슨 짓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별채를 뒤진 결과 어떤 것을 발견했다. 난 종이봉투에 넣은 그것을 세드릭의 얼굴에 던졌다. 퍽! 종이봉투가 세드릭의 얼굴에 부딪히면서 그 안에 담겨 있던 옷가지가 빠져나왔다.

“이게 뭔지 알겠지.”

“……모릅니다.”

잡아떼시겠다?

“그래, 그럼 내가 알려 주지. 바커스!”

기사 바커스가 노인을 끌고 오자 그를 본 세드릭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세드릭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저 옷의 주인이 누군가.”

노인은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제 딸입니다.”

그 말에 세드릭이 이를 악물었고,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노인을 보았다.

“세드릭과의 일을 털어놔라.”

“그, 그게…….”

세드릭의 눈치를 본 그가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바커스에 의해 붙들렸고, 그는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경은 제 딸의 병증을 확인하시더니 ‘찾았구나’ 하시면서 제게 거래를 제안하셨습니다.”

“어떤 거래였지?”

“반란에 가담한 척한다면 프렌시프 령에서 살게 해 주시고, 집도 주고, 돈도 주겠다고 하셨습죠…….”

“딸의 증상은?”

“처음엔 열병에 걸린 듯하였지만, 이윽고 발진이 올라왔지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이 모두 병을 옮았습니다. 그리고 제 딸은…….”

노인이 바싹 마른 입술을 핥고는 다시 입을 뗐다.

“죽었습니다…….”

그의 말에 성문에 있던 사람들이 기함했다.

“뭐, 뭐라고?!”

“죽었다니!”

“그럼 병자의 물건을 아가씨의 방에 두고 갔단 말이야?!”

“그, 그런 삿된 물건을……!”

소란이 이는 와중에 다시 세드릭을 보았다.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굳어 있던 그가 휙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는 저 노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아가씨의 방에 그런 옷을 두고 간 적도 없습니다!”

“그럼 다른 포로들은 인적 드문 곳에 정착시키면서 이 노인만 중심지에서 살게 한 까닭이 뭐야?”

덕분에 이 노인이 수상하다는 걸 알아차려서 불러들일 수 있었지만.

“그, 그건…….”

“내가 맞혀 볼까?”

“…….”

“그래야 병을 빨리 퍼뜨릴 수 있으니까. 병을 퍼뜨려서 할아버지의 신경을 그곳에 돌릴 생각이었던 거지?”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별채에 환자의 옷을 두고 간 이유도 비슷했다.

‘그래야 가족들이 더욱 역병에 집중할 테니까.’

동공이 사정없이 떨리는 그를 빤히 보며 말을 이었다.

“사비에르에서 명을 받았기 때문인가?”

“사, 사비에르가 뭣 때문에 그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항만.”

세드릭이 숨을 멈추었다. 그런 그를 노려보던 때에 성문으로 달려왔던 가신들이 입을 뻐끔거렸다.

“자, 잠깐, 이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파르뎅 남작이 어버버거리며 날 보았다.

“말 그대로예요. 물류를 독점하고 싶어서 항만을 빼앗으려고 했던 거죠.”

“우리가 순순히 주지 않을 게 분명하니까 수작을 부린 겁니까?”

“네.”

나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반란군 건도…….’

사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반란군보다 프렌시프의 군세가 월등히 우월한데, 굳이 농성을 하여 반란군의 뒤를 친다? 물론 빠르게 진압하기 위한 계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만약 그때 일부러 패배를 유도한 거라면?’

반란군 진압을 실패한 일로 할아버지가 정신이 없을 때 항만을 노리려고 했던 거라면?

‘하지만 그들은 실패했어.’

그래서 역병이라는 무리수를 뒀을 수도 있다.

‘충분히 가능성 있지.’

세드릭 경이 소리쳤다.

“아닙니다! 저는 억울합니다. 영애는 저를 모함하고, 제 충심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아, 정말 이 아저씨가.’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퍽! 그의 무릎을 걷어찼다. 기사들에게 제압당해 있는 바람에 속절없이 얻어맞은 그가 통증에 신음했다.

“억울하다는 말은 네 영달을 위해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저들이 해야지.”

“크흣…….”

“이 쓰레기야.”

매섭게 노려본 뒤에 등을 돌렸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입을 다문 채 나를 묘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뒤편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할아버지와 오빠들을 발견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들이 픽 실소를 흘렸다.

* * *

감기와 비슷한 증상, 특유의 발진, 강한 전염성을 가진 병의 정체는 ‘홍역’이었다. 우리 가족들은 전염병을 다스리기 위해 쉴 틈이 없었다.

란슬롯은 백신 수급을 맡고, 가웨인은 병으로 쓰러진 영지군 대신 황도군을 데려왔다. 할아버지는 사비에르의 수작에 놀아나지 않기 위하여 항만 건과 세드릭의 고신을 맡았다. 그리고 나는 빈민 구호에 나섰다.

‘면역력을 위해선 영양 관리가 제일 중요하지.’

손목이 나갈 정도로 당근을 썰고 시금치를 볶아야 했지만, 덕분에 손기술은 많이 좋아졌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나는 성의 복도를 걷다가 “아가씨!” 하는 목소리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시트론!”

“고생 많으셨지요?”

“너는? 이제 다 나았어?”

“네, 건강해요.”

“하지만 더 쉬는 게…….”

“벌써 한 달이 넘은걸요. 이제 완전히 건강하다고요.”

“다행이야!”

우리가 손을 맞잡고 방방 뛰던 때에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란슬롯이 쿡쿡 웃으며 우리를 보고 있었다.

“재회 인사는 잠깐 미루자. 조부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아, 네.”

시트론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역병이 빨리 진정된 건 아가씨 때문이라고 다들 감사하고 있어요. 저도 그렇고요. 아가씨가 자랑스러워요!”

내가 헤헤 웃자 그녀도 방긋 웃었다. 아쉽지만 시트론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란슬롯과 함께 할아버지의 방을 찾았다. 할아버지는 날 보자마자 늘 묻던 것을 또 물었다.

“열은?”

“없어요.”

“발진도?”

“네.”

“홍역의 징조는 정말로 없는 거야?”

“제가 제일 빨리 백신을 맞았는걸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보자 그가 픽 웃었다. 백신도 제일 빨리 맞은 데다 포털이 날 지키려고 사흘이나 가둬 놔서 홍역을 앓지 않았지만, 두 오빠는 달랐다. 소파에 기대앉은 가웨인을 쳐다보았다. 그는 홍역에서 막 회복한 직후였다.

“괜찮으세요?”

“아니, 죽었어.”

“뭐예요. 정말로 걱정한 건데.”

그가 씩 웃어 보였지만, 살이 빠져서인지 평소보다 더 아슬아슬한 느낌이었다. 옆에 있던 란슬롯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라. 우린 다 나았어.”

“다행이에요.”

“나와는 손잡고 뛰어 주지 않을 거야?”

그가 ‘시트론과는 방방 뛰었으면서’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내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 안 뛰어요.”

“그럼 손만 잡자.”

그가 내 손을 잡고 휙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그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아서 진짜로 부끄러워졌다. 그런데 가웨인까지 반대 손을 잡으려 들어서 재빨리 등 뒤로 손을 감췄다.

“나는 왜!”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치만 큰오빠는 묘하게 거절하기 어렵단 말이야.’

내 생각을 읽은 듯 란슬롯의 눈매가 달콤하게 휘었다.

“장난은 그만하고.”

할아버지의 말에 우리는 그를 쳐다보았다.

“이번 일은 세니아나의 공이 크다.”

“하지만 세드릭을 토설하게 한 건 할아버지신데요?”

“송곳과 채찍으로 고신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

무시무시한 말을 너무 가볍게 한다.

“뭐, 흠, 원하는 게 있거든 말해 보거라.”

란슬롯이 다정하게 덧붙였다.

“뭐든지 괜찮으니까.”

그러자 가웨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쩨쩨한 소원 말고, 큰 거.”

내가 흘깃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더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큰맘 먹고.’

내가 숨을 홉 들이켜자 란슬롯과 가웨인이 기대되는 표정으로 날 보았다.

“그럼 저거, 저 주시면 안 돼요?”

“저거?”

할아버지의 시선이 내가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오르골?”

“오르골인가요?”

할아버지가 가웨인에게 눈짓하자 가웨인이 그것을 가져와서 내 앞에 내려놓았다. 달걀을 받쳐 놓은 것같이 생겼는데 엄청나게 섬세하고 화려했다. 그 앞엔 금으로 조각한 마차가 있었다.

란슬롯이 마차 꼭대기에 솟은 버튼을 누르자 달걀 윗부분이 갈라지며 아기 천사가 나타났다. 아기 천사는 빙글빙글 돌며 너무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들려 주었다. 맑고 청량하며 부드러운 소리에 난 푹 빠져들었다.

“정말로? 정말로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나야말로 묻고 싶군. 정말 그것이면 되는 것이냐.”

“네!”

“아니…….”

할아버지는 어이없다는 듯이 날 보았다. 가웨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녀석에겐 묻지 말고 그냥 안겨 줘야 합니다.”

“흠…….”

“아니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라고 하시든지요.”

“그렇군.”

할아버지가 다리를 꼬며 벽에 붙어 있던 지도를 가리켰다.

“세니아나.”

“네?”

“주마,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그는 황도 중심가에 네모난 것들을 가리켰다.

“……네?”

오르골 소리에 황홀해하던 나는 눈을 비비고 지도를 다시 보았다. 할아버지가 가리킨 건 황도 중심가의 건물을 의미하는 네모‘들’이었다. 오른쪽부터 왼쪽까지 총 여섯 채. 나는 잘못 이해했나 싶어 한쪽 눈을 찌푸리고 할아버지를 보았다.

“그러니까 저 건물을…….”

“주마.”

나는 말을 잃었다.

‘여기 사람들 진짜 이상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버지의 와인 창고로 들어갔다.

‘무서운 사람들. 건물이 막 레곤 줄 알아.’

싫다고 소리쳤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그럼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주지’ 하더니 행정관을 부르려 들었다.

“예뻐…….”

나는 빈 술통 옆에 철퍼덕 주저앉으며 품에 안은 오르골을 보았다. 티브이에서 보았던 러시아의 보물, 파베르제의 달걀 같다.

‘더 섬세할지도. 이건 오르골도 되고 말이야!’

난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마차의 꼭지를 눌렀다. 천사가 나타나서 빙글빙글 도는 게 너무너무 예뻐서 감동이 일었다.

‘소리 진짜 고와.’

오르골 소리를 따라서 콧노래 부르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고레일과 바커스가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가씨?”

“헉.”

“여긴 제한 구역인데요.”

순찰을 하던 모양인지 그들의 손에 순찰 기록지가 들려 있었다. 나는 눈을 굴리다가 우물쭈물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이를 거야?”

와인 창고는 내가 요즈음 자주 찾는 곳이었다. 아무도 없고, 아무도 안 올 거라는 게 나를 안심시켰기 때문이었다. 바커스가 고레일을 슬쩍 쳐다보았다.

“저는 입이 무거운데 저 녀석은 달라서.”

그의 말에 난 고레일을 보면서 간절한 표정으로 손을 모았다. 고레일이 침음을 흘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다신 안 봐 드려요.”

“응…….”

“다음엔 순찰 없는 시간에 오셔야 합니다.”

“응!”

그러면서 순찰을 돌지 않는 시간을 알려 주어서 나는 그들에게 호감이 생겼다. 고레일은 헤헤 웃는 나를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당분간은 들키지 않도록 정말로 조심하세요.”

“어째서?”

“연일 사비에르의 사자가 찾아오거든요. 오늘은 회의장에서 고함도 들렸고요. 어르신 심기가 많이 불편하실 겁니다.”

“무슨 일인데?”

“뭐, 이번 일을 넘어가지 않으면 더는 포털을 열어 주지 않겠다는 거겠죠.”

‘뭐야, 비겁하잖아.’

내가 인상을 찌푸리니 바커스도 혀를 찼다.

“어르신 성정에 쉽게 넘어가실 리 없지.”

그 말에 고레일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지. 그들에게 카르스족이 전력석의 마원을 내 주는 한.”

“카르스족이라고?”

“길라게온에 공급되는 전력석 마원의 9할은 카르스족의 땅에서 납니다. 그런데 그 지역이 워낙에 찾아가기 힘든 데다 더워서 어떤 상단도 물건을 온전히 옮기지 못하죠.”

“사비에르의 성녀는 다르겠네. 포털이 있으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사비에르는 카르스족과 독점 계약을 맺었죠. 그것도 50년씩이나.”

“어렵네…….”

독점 계약을 했다면 내가 포털을 열어서 가져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숨을 내쉬는 두 기사와 함께 다시 성으로 돌아갔을 땐 고레일의 말대로였다.

할아버지는 몹시 심기가 안 좋았고, 가신들은 안절부절못했다. 그 사이에서 사비에르의 사자는 아주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이 사비에르 공의 뜻입니다.”

가웨인이 그를 노려보았다.

“일언반구도 없이 갑자기 전력석의 공급을 중단하는 게 말이지.”

“이번 일을 묻어 두고, 항만을 저희에게 넘겨주신다면 다시 거래를 재개할 겁니다.”

파르뎅 남작이 버럭 소리쳤다.

“우리도 수력석과 화력석의 공급을 끊는다면 어찌할 것이오!”

“뼈 아프기야 하겠지만…….”

그가 킬킬 웃으며 할아버지를 보았다.

“그게 어디 전력석만큼 소중하겠습니까. 저희는 다른 곳과 거래를 틀 때까지 버틸 수 있습니다.”

다른 가신이 뻔뻔한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사비에르는 전력석을 독점하면서 제국의 질서를 해하지 않는 선을 지키며 유통하겠노라 황실에 서약했소.”

그랬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처음부터 전력석으로 프렌시프의 목을 조이지 못한 것이다. 사자가 뻔뻔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리 궁지에 모시니 저희도 도리가 없는 게지요. 그러니 부디 옳은 판단을 해 주십사 부탁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그는 할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일주일 후 다시 찾아뵈지요. 긍정적인 답변 기대 하겠습니다.”

사비에르 사자는 선물이랍시고 전력석의 마원이 든 작은 상자 하나를 두고 갔다.

‘이게 뭐야. 희롱하는 거잖아!’

사자가 떠난 후 회의실엔 소음이 가득해졌다.

“갑자기 공급 중단이라니! 다 죽으라는 소리가 아닙니까!”

“정신 나간 놈들. 황실과의 서약을 어찌 저리 당당히 어기는지.”

“믿는 구석이 있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사비에르 영애가 황후의 친자인 4황자와 혼약을 앞두고 있지 않습니까.”

“황실에서 그녀를 들이기 위해 이번 일을 눈감아 줄 거라는 겁니까?”

나는 그들이 웅성거리는 틈에 전력석의 마원에 다가갔다.

‘마원을 가공해서 전력석을 만드는 거지?’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이러는 걸까 궁금해서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일단 저 마원이라도 가공해서 나눠 가져야겠습니다.”

“우리 쪽이 더 급하네!”

“저희는 뭐 괜찮은 줄 아십니까!”

가신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가고, 회의실엔 우리 가족만 남았다. 그때까지도 마원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내가 그것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말해라.”

“이게 정말로 전력석의 마원이 맞나요?”

“그래.”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렇다면 이거……. 제가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뭐라고?”

할아버지와 오빠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난 정말로 이렇게 생긴 게 잔뜩 있는 곳을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이게 마원인 줄 몰랐지만.’

“무슨 소리야?”

“잠깐 나갔다 올게요.”

다급하게 말한 나는 얼른 회의실을 나서서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다. 그리고 옷 안에 감춰 두었던 목걸이를 빼서 잡았다.

‘가고 싶은 곳을 생각하고…….’

눈을 꼭 감았다가 뜨자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바뀌어 있었다. 성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다.

‘지, 진짜로 성공했잖아!’

나는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여기에는 가넷보다 더 진한 암적 색깔의 보석이 잔뜩 있다. 전력석의 마원이!

“Dea?”

흰머리와 흰 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전에 보았던 사람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이것도 튜닉이긴 했지만 말이다.

“어, 저기, 전 길라게온에서 왔는데요. 이 마원 제게 파시면 안 될까요?”

흰머리의 여자가 나를 빤히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이 마원을 나한테…….”

“Quid?”

“어쩌지. 말이 안 통하는데.”

내가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 사이 흰머리의 소녀는 무언가를 빤히 보고 있었다.

“아, 가지고 왔네.”

정신이 없어서 할아버지가 준 오르골을 가져왔다. 내가 오르골을 양손에 들자 흰머리의 소녀가 살금살금 다가왔다.

“이게 마음에 들어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걸까?’

대화하길 포기하고 살며시 마차의 꼭지를 눌렀다. 천사가 튀어나와 빙글빙글 도는 것과 동시에 아름다운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소녀의 눈이 반짝거리더니 이내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나는 그녀와 오르골을 번갈아 보면서 끄응 신음을 흘렸다.

“나도 좋아하는 건데…….”

회의실에서 굳어 있던 할아버지와 오빠들이 떠올랐다. 나는 눈을 꼭 감고 그녀에게 오르골을 내밀었다.

“…….”

“……?”

소녀가 나를 빤히 보는 게 느껴졌다. 내가 살짝 눈을 뜨고 그녀의 손에 오르골을 쥐여 주자 소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가 자신을 가리켰다.

“응, 주는 거예요.”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달려가서 무언가를 가지고 돌아왔다. 사자 가죽이었다.

‘보답이라는 걸까?’

“아니 아니, 이건 됐어요.”

내가 고개를 젓자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는 이번엔 엄청 큰 검을 낑낑 옮겨 왔다.

“검도 괜찮은데요.”

또 고개를 흔들자 다른 것을 가져오려는 듯 다시 뒤를 돌았다. 나는 얼른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다른 건 다 됐고요. 이거. 이걸 줘요.”

내가 마원을 가리키자 소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쪼그려 앉아서 마원을 주워들었다. 소녀의 얼굴이 밝아지더니 고개를 힘차게 끄덕거린다. 그러고는 소녀가 또 나가 버린 탓에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역시 전력석 마원이라서 쉽게 못 주는 건가.’

얼마간 지나자 밖에서 끼기긱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녀가 새빨간 얼굴로 커다란 놋 상자를 끌고 왔다.

“어?”

상자를 열어 보니 안에는 마원이 잔뜩 들어 있었다. 하지만 바닥에 널린 것과 약간 형태가 달랐다. 바닥에 널린 것들이 사비에르에서 가져온 것처럼 둥그스름하다면 이건 밤송이처럼 뾰족했다.

‘이것도 비슷한 걸까. 일단 가져가 보자.’

나는 소녀의 손을 붕붕 흔들어 악수하곤 고개를 숙였다. 소녀는 눈을 깜빡이더니 엉거주춤 나를 따라 했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한 나는 놋 상자 옆으로 가서 섰다. 놋 상자와 함께 이동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가 뜨자 다시 성이었다. 다만…….

“너!”

가웨인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런……. 가족들 생각이 잠깐 스쳤더니.’

처음 포털을 열었던 인적 드문 곳이 아니라 회의실에 도착해 버렸다. 난 당혹감에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 * *

트리스탄은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장식물이 마음에 쏙 들었다. 침대에 배를 깔고 누워 청녹발의 여자아이가 누른 버튼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천사가 나타나 빙글빙글 돌며 아름다운 음악이 퍼져 나왔다.

[왕자님.]

시종인 마그누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이건 누구에게 강제로 빼앗으셨습니까?]

[아냐, 그쪽에서 내게 먼저 줬는걸.]

트리스탄이 부루퉁 입술을 내밀었다. 언제 보아도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운 표정이었지만, 마그누스는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천사 같은 외모에 넘어가 무릎을 꿇으면 저 잔인한 왕자는 독배를 건넨다. 마그누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평소처럼 멋대로 왕자님의 물건을 안겨 주고 빼앗아 오신 게 아니라요?]

[아니라니까, 여신이 줬어.]

[여신이요?]

마그누스는 잠깐 고개를 모로 꼬고,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설마 제사 중에 강림했다던 여신 말입니까.]

[그래, 붉은 눈을 가진!]

트리스탄은 흥분하여 번쩍 일어났다. 제사 중에 여신이 강림했다던 소식에 나라가 들썩였다. 그녀를 보았다던 신전장은 감격하여 잠깐 혼절했을 정도였다.

[아주 귀여웠어. 눈이 어린 고양이처럼 크고 동그란 데다 목소리도 티티새처럼 사랑스럽지 뭐야!]

트리스탄은 헤벌쭉 웃다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데 이상하지.]

[이상하다니요?]

[여신이 신물을 내려 주기에 보답으로 사자왕의 가죽을 주었거든? 그런데 싫다고 하길래 이번엔 국보인 카틀란타의 검을 주었지.]

하지만 여신은 고개를 젓고는 다른 것을 가리켰다.

[전부 싫다더니 잡초를 달라지 뭐야.]

[잡초요?]

잡초라면 나라 각지에 나는 암적색 원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뽑아도 뽑아도 자라는 데다가 오랜 시간 묵혀 두면 뾰족한 형태로 변해서 징그러웠다. 이 나라에선 고민거리인 쓰레기 같은 존재였다.

[여신께서 쓰레기를 왜…….]

[그러게 말이야. 그래서 태워 버리려고 모아 둔 변종 잡초를 주었어.]

트리스탄은 오르골을 매만지며 히죽 웃었다. 참으로 상냥한 여신이었다.

‘또 와 주었으면 좋겠다.’

상냥하게 웃던 여자아이를 떠올리던 트리스탄이 마른 입술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또 언제 와 줄까.]

[글쎄요……. 하지만 다시 오신다면 이번엔 꼭 신전에 알리셔야 합니다.]

[여신을 위해서 잡초를 잔뜩 뽑아 두어야지.]

트리스탄은 마그누스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키득거렸다.

* * *

내 이야기를 들은 가족들은 말이 없었다. 노기 외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할아버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네가 포털을…… 포털을 열 수 있다고.”

그가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리자 란슬롯과 가웨인도 딱딱하게 굳어서 그저 나를 보고만 있었다.

“어째서 말하지 않은 거야.”

“언제부터 열 수 있었던 거지?”

나는 손가락을 꼬물꼬물 매만지며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열게 된 건 얼마 안 됐는데요……. 그게…… 알려지면 싫은 일들이 생길 것 같아서…….”

“싫은 일?”

“전쟁에서 군사들을 옮겨 줘야 하니까요……. 사람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어요. 또…… 성에서 도망…… 칠 때 귀찮아질 것 같기도 해서…….”

세 남자의 뜨거운 시선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잘못했어요…….”

란슬롯이 한숨을 흘렸다.

“혼내는 게 아니야. 그저 얼떨떨할 뿐이야.”

“네?”

“흰머리에 흰 눈을 가진 사람들을 직접 보고 온 건 너뿐이거든.”

“멀어서요?”

“그래, 이 세계의 끝에 있다고 하지. 역사상 그곳까지 포털을 열 수 있었던 사람은 없어.”

“게다가 전력석의 마원까지 가져왔으니…….”

그들이 말을 하는 동안 할아버지는 상자 속에서 암적색 원석을 꺼내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그냥 전력석의 마원이 아니야.”

“예?”

“보그다.”

“보……!”

란슬롯이 벌떡 일어나 상자를 잡자 가웨인이 물었다.

“보그?”

“5개국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백년 전쟁을 벌였던 보물 말이다.”

“아, 왕실마다 자랑스럽게 진열해 두던 그거? 이제는 전시용밖에 남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란슬롯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가 나를 향해 손짓하기에 주춤주춤 그에게 다가갔다.

‘이제껏 포털을 숨겨 왔다고 혼나려나…….’

그런데 그가 나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

“아주 잘했다.”

“네?”

“제기랄, 예뻐 죽겠군!”

나는 당황해서 눈만 끔뻑거렸다. 할아버지는 호탕하게 으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이렇게 기뻐하는 건 처음이라서 엄청 당황스러웠다.

‘으응?’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할아버지가 좋아하셔서 다행이었다.

그날 즉시 할아버지는 믿을 만한 가공 전문가를 불러들였다.

“이것으로 전력석을 얼마나 만들 수 있지?”

보그를 보던 그가 가웨인의 물음에 손을 덜덜 떨며 말했다.

“말이라고 하십니까! 이 상자에 있는 것들만으로도 프렌시프는 1년을 거뜬히 지낼 수 있을 겁니다.”

란슬롯이 싱긋 웃었다.

“전력석을 구매금으로 분배한 예산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겠군요.”

그 말에 할아버지는 또 으하하 웃으며 가공 전문가에게 말했다.

“가공에 얼마나 걸리겠느냐.”

“하나당 나흘은 주셔야 합니다.”

“그래. 바로 가공을 시작해라.”

“내 생에 보그를 가공해 보는 일이 생기다니!”

신이 나서 물러나는 가공 전문가를 뒤로하고, 란슬롯이 할아버지를 보았다.

“세니아나의 능력을 밝히실 겁니까.”

“그리 먼 곳까지 포털을 열 수 있는 성녀라는 걸 알게 된다면 길라게온 전역이 뒤집힐 거다.”

“예, 황실이고 귀족이고 세니아나의 눈에 들고 싶어 안달이 날 겁니다. 하지만 정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테지요.”

잠시 침묵하던 할아버지가 나를 쳐다보았다.

“세니아나.”

“네?”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제가 원하는 대로요?”

성녀를 데리고 있다는 건 가문에 엄청난 힘이 되는 게 아닌가? 사비에르의 경우만 봐도 그들이 부흥한 건 모두 성녀의 덕이었다. 그런데 내가 원하면 밝히지 않아도 좋다는 거야?

의아스러움에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밝히지 않으면 프렌시프는 이득을 볼 수가 없잖아요.”

“이번 일을 네가 해결해 준 것만으로도 족해.”

“하지만…….”

“네가 밝히겠다면 전력으로 지켜 줄 것이다. 하지만 반대여도 괜찮아.”

“…….”

“위험에 노출되지 않을 테니까.”

고저 없는 목소리였지만, 난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이 다정하다는 것을―

일주일 후, 예정되었던 대로 사비에르의 사자가 찾아왔다.

“그래서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그는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턱을 치켜들었다. 절대로 거절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의 무례한 태도에 가신들과 기사들이 얼굴을 굳혔다. 마담 버지니아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비에르에선 이따위로 예의를 가르치는 모양이지.”

“나는 계집과는 대화를 나누지 않소.”

그 말에 가신들이 고함을 내질렀다.

“기가 막히는군!”

“무례한 작자!”

“저, 저……!”

회의장이 터져 나갈 듯한 소음으로 가득해졌지만, 사비에르의 사자는 개의치 않았다.

“자, 어르신. 이제 답변을 해 주십시오.”

할아버지는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나를 보았다.

“네가 상대하여라.”

“네?”

사비에르의 사자에, 가신들까지 눈을 홉뜨고 나를 주목했다.

“무슨……!”

가신 중 하나가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란슬롯이 고개를 끄덕였고, 가웨인이 괜찮다고 말했다. 나는 얼떨떨할 뿐이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협상 테이블에 세울 사람으로 아무나 택하지 않는다. 지금껏 그의 대리자로 나갔던 사람은 란슬롯과 마담 버지니아, 그리고 현재 황도에 있는 두 명의 가신뿐이었다.

‘내가 이런 일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어.’

그중에서도 할아버지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는 건 원하는 대로 주물러도 된다는 뜻이었다. 사비에르의 사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아니, 어르신! 이런 어린 아가씨와 제가 무슨 이야기를 나눈단 말입니까!”

모멸감으로 가득한 사자의 표정을 본 나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를 오래 보지 않은 사람들’은 날 순둥이라고 불렀다. 즉, 오래 본 사람들은 다르게 불렀다는 말이다. 내 진짜 별명은 ‘싸움만 안 걸면 순둥이’였다.

사비에르의 사자가 흥분하여 소리쳤다.

“저는 사비에르 공의 명을 받고 정식으로 온 사자입니다!”

그 사이, 나는 그가 희롱의 선물로 가져왔던 상자로 다가가 퍽! 발로 차 버렸다.

‘음, 세니아나가 망나니였어서 다행이야.’

귀족 영애는 쉽게 못 할 행동임에도 사람들이 기함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가신들은 오히려 오래 참았다는 표정이었고, 파르뎅 남작은 차라리 속이 시원해 보였다.

버럭대던 사자가 기가 차다는 듯이 고함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런, 웬만하면 말 시키지 마.”

“뭐라고요?”

“나는 멍청이와는 말을 섞지 않거든.”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던 버지니아의 눈이 커졌다. 사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이런 일을 하고도……!”

“어허!”

열이 오를 대로 올라 있던 가신들이 소리쳤다.

“감히 프렌시프 영애에게 무슨 막말인가!”

“아가씨는 프렌시프의 얼굴이오! 이 이상 모욕한다면 더는 참지 않겠소!”

“영지전이다!”

세니아나를 혐오하던 가신들까지 버럭 소리치며 삿대질을 했다. 그건 나쁘지 않은 기분이라 나는 속으로 좀 기뻤다. 그러나 소심한 몇몇 가신들은 안절부절못했다. 사비에르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전력석을 공급받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었다.

“어르신, 정말 이대로 거래를 끝내고 싶으신 겁니까!”

사비에르의 사내는 협박하듯 말했고, 나는 그의 앞에 섰다.

“그래, 우리는 더 이상 협상하지 않아.”

“예, 예?!”

“이제 자급자족할 수 있거든.”

사자의 얼굴이 흙빛처럼 변했다.

“그게 무슨…….”

난 목걸이를 살짝 쥔 채 마지막으로 그에게 말했다.

“가서 전해. 프렌시프 영애도 포털을 열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한 뒤 포털을 열어 사자를 성 밖으로 날려 버렸다. 장내가 고요해짐이 느껴진 나는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생각했다.

‘너무 심했나…….’

나를 협상 테이블에 세운 건 멋대로 해도 괜찮다는 의미였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사자를 날려 보낸 건 과했을까?

그런 고민을 하던 찰나에 가신들 사이에서 헛바람이 터져 나왔다.

“이, 이게…….”

그 말이 신호탄이라도 되는 양 가신들이 허겁지겁 말을 쏟아냈다.

“내가 지금 잘못 본 거요?”

“아니, 저도 분명……!”

“말도 안 돼!”

“포털이, 방금, 아가씨가……!”

대접견실이 터져 나갈 듯한 소음으로 가득해졌다. 그때까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보던 가족들은 실소를 흘렸다.

“화끈하던데?”

내게 다가온 가웨인이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부, 부끄러워.’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노라니 장내의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가장 먼저 질문을 한 건 파르뎅 남작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내가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피자 그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보신 대로예요.”

“그러니까 아가씨가 포털을, 포털을…….”

“네, 맞아요.”

나는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이곤 이어 말했다.

“포털을 열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럼 아가씨께서 성녀, 아니, 대체 언제부터……!”

“그 전에 전력석을 자급자족한다니요! 카르스족과 계약을 맺은 겁니까?”

“하지만 카르스족의 마원은 사비에르가……!”

“잠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소!”

가신들이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붓자 할아버지가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정신이 반쯤 나가서 소리치던 가신들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소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 때, 마담 버지니아가 내 어깨를 다정하게 잡았다.

“괜찮습니다. 천천히 말씀하세요.”

인자하고 부드러운 말씨에 안심이 되어서 난 가늘게 한숨을 흘렸다.

“포털을 열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어요. 포털 마원을 발견했을 때 힘 조절이 어려웠고, 그 탓에 잠깐 다른 곳에 다녀왔어요. 거기서 전력석 마원과 비슷한 걸 보았지요.”

시제품으로 온 보그를 조심스럽게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서 가져왔는데 예상이 맞았던 거예요.”

보그의 존재를 알고 있던 가신들이 눈을 홉떴다.

“이, 이, 이건……!”

마담 버지니아마저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기에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였다.

“맞아요. 보그예요.”

대접견실은 또 한 번 고요에 휩싸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으하하하!”

가신들이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아가씨는 프렌시프의 보물이라는 둥, 이처럼 속 시원한 일은 30년 만이라는 둥 찬사를 쏟아 냈다.

‘다들 좋아해서 다행이야.’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세니아나.”

“네?”

“잘했다.”

란슬롯이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정한 손길이 기분 좋아서 헤헤 웃었다.

“보그를 확보했으니 사비에르와는 다시 거래할 일이 없겠군요.”

“우리도 상단을 꾸려 보그를 판매해야 합니다.”

“하지만 보그의 단가가 어느 정도일지…….”

“천금이 아깝겠습니까. 보그예요, 보그! 시장에 내놓기만 하면 컬렉터들이 눈에 불을 켤 테지요.”

가신들이 보그를 가지고 왁자지껄 떠드는 틈에 마담 버지니아가 다가왔다.

“아가씨.”

“네, 말씀하세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아가씨를 끌어안아도 될까요?”

“그건…….”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렇겠지요…….”

버지니아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나는 접견실 안을 슬쩍 둘러본 뒤 까치발을 들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중에요.”

“네?”

“여긴 사람이 많으니까요.”

내 말에 웃음을 터뜨리던 그녀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그 작자는 어디로 이동시키셨습니까?”

“어, 그게…….”

버지니아의 물음에 시끄럽게 떠들던 사람들도 이쪽을 주목했다. 난 민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물 구덩이… 요.”

정확히 말하면 거름을 삭히기 위해 만든 거대한 퇴비 시설의 한 가운데였다. 가신들이 말없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걸 보며 귀족 영애가 생각했다기엔 천박한 장소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때 파르뎅 남작이 작게 헛기침했다.

“입으로 배설하던 놈에겐 제격인 장소지요.”

아무도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아서 조금 뿌듯해졌다.

* * *

“가, 각하! 각하!”

사비에르 저에 베르나르가 뛰쳐 들어왔다. 서류를 작성하던 사비에르 후작이 외알 안경을 추켜올리다 인상을 찌푸렸다.

“이 무슨 지독한 냄새인가.”

“그, 씻었지만 냄새가 빠지지 않아서…… 아니, 그보다 큰일입니다!”

“큰일이라니. 프렌시프의 늙은이가 화병으로 죽기라도 한 게냐.”

사비에르 후작의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지만, 베르나르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프렌시프 영애가……!”

“프렌시프의 망나니 말이냐.”

“예, 그 망나니가……!”

거무죽죽한 안색으로 손발을 벌벌 떠는 베르나르를 보며 후작이 미간을 좁혔다. 어쩐지 감이 좋지 않았다. 등줄기를 타고 아린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 망나니가 무얼 했기에.”

싸늘하게 재촉하자 베르나르는 마른침을 삼키고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포털을 열 수 있습니다.”

“뭐?”

“그러니까 프렌시프 영애가 포털을 열 수 있단 말입니다. 성녀라고요! 에이레네 님과 같은 성……!”

퍽! 후작이 재떨이를 들어 그의 얼굴에 던졌다. 컥! 비명을 내지른 베르나르는 벌벌 떨며 뒷걸음질 쳤다. 찢어진 이마에서 새어 나온 피가 후두둑 떨어지며 융단을 적셨다.

“내 딸과 같다니! 그 망나니가 어떻게 내 딸과 같다는 말인가!”

“그, 그렇지만 정말로 저는……!”

“프렌시프의 늙은이가 수작을 부린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후작이 이를 갈며 외알 안경을 거칠게 벗었다.

“하필 이런 때에…….”

항만과 세작이 얽혀 있는 시점이다. 게다가 운이 나쁘면…….

‘그것까지 들킬 수 있어.’

이 와중에 프렌시프 영애가 정말로 성녀라면 지금까지 애써 쌓아 올린 것들에 균열이 갈 수 있었다.

“너는 전력석 마원의 구매자들을 단속해라.”

“예? 어째서…….”

“멍청하기는! 늙은이가 타지를 통해 마원을 사들이고 우리를 속이는 것일 수도 있지 않으냐!”

“하, 하지만 그 계집애는 저를 정말로 이동시켰습니다!”

“다른 대륙에서 성녀를 데려왔을 수도 있지.”

“예? 그럼 다른 자의 힘을 빌려 성녀 행세를 한 겁니까?”

“그러니까 그걸 확인해 보자는 게 아닌가.”

후작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 * *

프렌시프는 바로 백안과 백발의 사람들이 있는 나라에 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나는 가족들과 가신, 그리고 관리들의 정보 수집 능력에 깜짝 놀랐다. 닷새도 안 되어 내가 다녀온 나라가 ‘엘트라’이며 십여 년 전 바다에서 표류하다 엘트라에 다녀온 노인이 있다는 것을 찾아냈다.

프렌시프는 노인을 통역사로 세우고 엘트라와 거래하기로 결정했고, 나는 프렌시프의 서신과 통신석을 포털로 옮겨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트라에서 초청하겠다는 답신이 왔다. 할아버지를 필두로 나와 가신들이 엘트라로 향했다.

통역사의 말을 들은 나는 눈을 깜빡였다.

“제가 여신이라고요?”

통역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라를 구원할 붉은 눈의 여신이 내려올 거라는 신탁이 있었답니다. 이곳 사람들은 포털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나타난 영애를 여신으로 알고 있던 게지요.”

“하지만 전 사람인데요?”

“그래서 다들 실망을…….”

눈썹이 길게 늘어져 눈을 가리고 있던 엘트라의 사람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 그의 옆에 있던 사내가 무어라 말했고, 통역사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니까 여기 계신 아가씨는 여신의 권속이 아니라니까요!”

통역사의 말에 할아버지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무슨 말이냐.”

“그, 그러니까 여신은 아니어도 신성한 힘을 가진 건 맞다고, 이들이 아가씨를 신의 권속으로 떠받들어야 한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평생 머물면서 성녀가 되어 달라고…….”

할아버지의 눈초리가 싸늘해졌다. 함께 온 가신들이 나를 둘러싸고 그들을 경계했다.

“Nostra dea!”

“아가씨는 우리의 여신이오!”

두 쪽에서 나를 두고 싸워 댔다. 사이에 낀 통역사만 어찌할 바를 몰랐고, 난 이만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때 우리가 회의 중인 엘트라의 신전 문에서 무언가 뿅 튀어나왔다. 새하얗고 어여쁜 손가락이 꼬물꼬물하더니 벽 안에서 스륵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 그 애다!’

내가 반가움에 손을 살짝 흔들자 소녀의 눈이 반짝였다. 그 애도 나를 향해 살짝 손을 흔들었다. 이 모습을 본 할아버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아, 저번에 보그를 선물해 준 아이예요.”

“오르골과 맞바꿔서 준 게지.”

할아버지가 날카롭게 거래로 정정했지만, 눈치를 살피는 나를 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도 돼.”

“정말요?”

“그래.”

할아버지가 통역사에게 무어라 말하자 그가 엘트라어로 통역했다. 엘트라 사람들은 내가 그 애와 함께 있겠다는 말에 크게 기뻐했다.

‘응?’

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리를 떠도 된다기에 소녀에게 다가갔다.

“안녕?”

“Dea!”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 이게 여신이라는 뜻인 걸 알겠다.

“아니 아니, 난 여신이 아니야.”

하지만 그 애는 들은 척도 않고, 날 끌고 포르르 달려갔다. 신전 안에서 불경하게 뛰어다니는데도 우리를 막아서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 애가 데려간 곳은 어떤 방이었다.

“우와!”

온통 황금, 보석, 황금, 보석의 천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 애는 금화와 목걸이 등을 잔뜩 끌어안고 와서 내게 안겨 주었다.

“준다고? 아냐 아냐, 됐어.”

내가 손을 내젓자 소녀가 고개를 모로 꼬더니 다른 것을 가져왔다.

“얘는 자꾸 주기만 하네.”

“……?”

“이것도 괜찮아.”

거절하고 있는데 방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Regulus!”

검은 피부의 사내가 인상을 쓴 채 우리를 쳐다보았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손을 감추었다.

“훔친 거 아니에요!”

“압니다.”

“어?”

갑작스러운 대륙어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그러자 그가 떠듬떠듬 답했다.

“조금, 합니다.”

“그렇구나……. 아, 이 아이 이름이 뭐예요? 그쪽은요?”

“트리스탄 님입니다. 저는 마그누스라고 불러 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의 이름을 소리 내어 곱씹어 보았다.

“트리스탄…….”

그러자 그 애의 얼굴이 환해지며 나를 가리켰다.

“나? 나는 세니아나.”

“센?”

“세니아나.”

“세, 니안.”

발음이 어려운지 트리스탄은 자꾸만 우물거렸다.

“뭐, 좋아. 편할 대로 불러.”

마그누스가 통역해 주었고, 트리스탄은 센이라 부르며 나를 끌어안았다.

“귀여워라.”

여동생이 생긴 것 같아서 기뻤다. 트리스탄은 그 후로도 틈만 나면 내게 무언가를 안겨 줬는데, 그때마다 마그누스가 눈에 불을 켜고 고개를 저었다. 조그만 목각 인형에도 소리치기에 이 정도는 괜찮다고 했지만, 마그누스는 고개를 저었다.

“트리스탄 님께서 주신 건 뭐든 받지 마세요.”

의아했지만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 목각 인형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계속 보물의 방에 있으면 선물 공세가 끊이지 않을 것 같아서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우리는 꽃이 잔뜩 핀 들 위에 나란히 앉아서 해가 질 때까지 놀았다. 난 마그누스의 도움으로 트리스탄에게 우리말을 가르쳐 주었다. 영리한 트리스탄은 단어를 몇 가지 알려 준 것만으로도 어물어물 문장을 만들었다.

“센, 좋아.”

“정말 똑똑하네.”

내가 잘했다는 뜻으로 머리를 쓰다듬자 폭 안겨서 쇄골에 얼굴을 비볐다.

“간지러워.”

킥킥 웃고 있으려니 사람들이 우리를 부르러 왔다. 회의장으로 돌아가자 이야기가 잘 끝난 모양인지 할아버지의 곁에 보그가 가득 든 상자가 몇 개나 있었다.

“거래하기로 했나요?”

“그래. 철과 맞바꾸기로 했다.”

할아버지가 내 어깨에 붙은 꽃잎을 떼어 주며 말했다. 손길이 다정해서 내가 미소 짓고 있을 때 마그누스가 물어왔다.

“두 분은 어떤 사이입니까?”

“제 할아버지예요.”

마그누스는 트리스탄에게 말을 전해 주었고, 트리스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어딘가로 달려가 버렸다. 다시 돌아왔을 땐 보물의 방에서 보았던 보석보다 더 호화로운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 트리스탄이 할아버지에게 목걸이를 휙 안겨 주었다.

“선물인가 봅니다. 예의 바른 민족이군요.”

가신들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미심쩍은 눈으로 트리스탄을 보자 트리스탄이 활짝 웃으며―

“그거, 네 것.”

“…….”

내 허리를 한 팔로 휘감는 손길에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트리스탄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나의 볼에 입 맞추며 낮게 말했다.

“이거, 내 것.”

가신들의 눈이 커지고, 엘트라의 사람들이 껄껄 웃었다. 표정이 싸늘해진 할아버지가 나를 덥석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안 돼!”

―하고. 그렇게 말한 할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자고 성화여서 인사도 못 하고 포털을 열었다.

* * *

그 후로는 꽤 평화로운 날이 이어졌다. 가신들은 입을 함지박하게 벌리며 거의 날아다녔고, 나만 보면 “우리의 여신!” 하며 껄껄거렸다. 엄청 부끄러웠지만, 망나니 소리보다는 낫구나 싶었다.

난 란슬롯이 쥐여 준 쿠키를 오물오물 먹으며 할아버지, 그리고 오빠들과 대화를 나눴다. 가웨인은 내가 쿠키를 삼킬 때마다 우유 잔을 챙겨 줬다.

“그래서? 그 공주 이름이 트리스탄이라고?”

“공주래요? 어쩐지, 공주님처럼 예쁘더라.”

“그거 진짜 여자애 맞지?”

가웨인이 울컥 인상을 찌푸리기에 난 고개를 납죽 끄덕였다.

‘그럼, 엄청나게 예뻤다고. 머리도 길고.’

하지만 가웨인은 눈을 가름하게 떴다.

“왜 하필 이름이 트리스탄이야. 찝찝하게. 돼지, 내 말 잊지 않았지?”

“돼지 아니라니까요.”

“그래, 우리 돼지야.”

씩 웃으며 말하는 그를 흘겨보았다.

“기억하고 있어요.”

“남자가 접근하면?”

“왜 이러세요, 저는 오빠가 둘이나 있어요.”

“그리고?”

“정강이를 발로 찬다.”

“그래, 또?”

“일어서기 전에 칼로 찌른다…….”

가웨인과 란슬롯, 거기에 할아버지까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서 좀 무서워졌다.

‘진짜로?’

농담이 아니었단 말인가. 당황해서 눈치를 보다가 슬쩍 말을 돌렸다.

“그, 그러고 보니까 요새는 평화롭네요. 보그도 영지에 잘 보급되는 중이고.”

란슬롯은 빙그레 웃으며 내게 건조 딸기가 콕콕 박힌 새 쿠키를 들려줬다.

“폭풍이 치기 전에도 이렇듯 평화롭지.”

“그래요?”

“가신들을 만만히 보지 마라. 분수 모르는 짓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종자거든.”

“흠, 그렇구나…….”

그렇게 말하고 새 쿠키를 먹으려고 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방 안으로 들어온 마담 버지니아가 우리를 보고 우후후 웃었다.

“오늘도 다복하시군요.”

“용건은?”

“확인해 주셔야 할 서류를 가져왔습니다.”

서류를 할아버지에게 전달한 그녀는 몇 가지 이야기를 전했다. 십여 분쯤 대화를 나눈 뒤, 버지니아는 그리 처리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심심해서 부르르 기지개를 켜는데 걸음을 돌리던 그녀가 날 보며 생긋 웃었다.

“오늘 밤 축제가 있답니다. 지루하시면 가 보시는 게 어떨까요?”

“축제요?”

“다가올 봄의 성공적인 농사를 기원하며 불꽃놀이를 하거든요.”

그런 게 있었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족들을 쳐다보는 내 눈길에 가웨인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 핑계로 날건달이 여자를 꼬시려고 혈안이다. 밤엔 번잡하고 위험하니 성에서 봐.”

“성에서 더 잘 보여.”

란슬롯도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버지니아가 침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미혼의 영애들은 징크스 때문에 집안에서 잘 내보내지 않지요.”

“징크스요?”

“불꽃이 머리 위에서 터지는 걸 보면 결혼을 늦게 한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아하.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가웨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가까이서 봐야 더 잘 보일 것 같군.”

란슬롯도 그의 말을 거들었다.

“상점가의 이벤트에 참여하는 것도 경험일 테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조부님?”

“그렇지.”

언제는 성에서 더 잘 보인다고 했으면서?

“이번 기회에 모두 함께 나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가웨인의 말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아하긴 했지만, 어쨌든 축제에 갈 수 있다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전 준비하고 올게요!”

신이 나서 일어나자 란슬롯이 빙그레 웃었다. 나가려다가 버지니아를 보니 그녀는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

나와 눈이 마주치니 그제야 “부디 즐거운 시간 되시길.” 하면서 깔깔 웃고 사라졌다.

난 시트론과 함께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오빠들과 쇼핑을 나갔을 때 옷을 잔뜩 사 온 덕에 어둡고 칙칙했던 옷장이 봄의 들판처럼 화려하게 개화한 것 같았다.

“아가씨, 이건 어떠세요?”

시트론이 연어색의 드레스를 가져왔다.

“으음, 그것도 예쁘지만 치마가 너무 풍성해서 걷기 불편할 것 같은데.”

“그럼 이건요?”

이번에 가져온 건 밝은 베이지색의 드레스였다.

“좋아, 너무 화려하지도 않고!”

“여기에 장신구는…… 그렇지! 브로치를 달면 귀엽겠어요.”

고양이 브로치를 달아 준 시트론이 생긋 웃었다. 난 그녀가 고른 조합이 마음에 쏙 들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얼른 옷을 갈아입고 단장했다. 밝은 베이지색의 깔끔한 드레스에 귀여운 브로치를 달고 머리는 하나로 굵게 땋아 장미색 레이스 리본으로 묶었다.

“사랑스러워라.”

시트론이 그렇게 말하며 기뻐했다. 거울 속의 나는 정말로 괜찮은 것 같았다. 준비를 마치고 얼른 가족들에게 돌아가니 란슬롯이 내 리본을 매만지며 빙그레 웃었다.

“예쁘네.”

“그, 그런가요.”

그가 내 손등에 입 맞췄다. 부끄러워져서 꼼지락거리자 가웨인이 헛기침을 했다.

“…….”

“왜요?”

“……호위를 추가해야겠어.”

“네?”

그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기사에게 호위를 다섯 명 더 붙이라고 명했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성을 빠져나갔다. 중앙 애비뉴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두 손이 다가왔다. 하나는 란슬롯, 또 하나는 가웨인이었다.

“책보다 무거운 걸 어떻게 드시려고. 내게 맡기지?”

“열세 살 때까진 날 못 이기던 게 누구더라.”

“지금은 달라.”

“섬세한 에스코트가 뭔지부터 배우고 오지?”

두 사람이 서로 빈정거리고 있을 때, 또 하나의 손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난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두 오빠는 할아버지를 비겁하다는 표정으로 보았지만, 할아버지는 그들을 슥 쳐다볼 뿐 별말이 없었다.

축제는 정말로 화려했다. 여러 가지 모양의 등이 어두운 밤을 낮처럼 밝히고 있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소엔 전혀 볼 수 없는 모습이라서 원래 축제가 이렇게 화려하냐고 물었다.

“보그를 무상으로 공급해서 평소보다 더 화려하게 꾸밀 수 있었던 거야.”

“그렇구나.”

프렌시프에선 보그를 거의 헐값에 사들였고, 그 덕에 영지민들에게 무상으로 공급할 수 있었다. 생활의 질이 달라진 게 눈에 보여서 조금 뿌듯해졌다.

“양꼬치! 맛 좋은 양꼬치 팝니다!”

“단돈 십 피니로 참여하는 팔씨름 대회! 우승자에겐 천 피니에 달하는 상품을 증정합니다!”

“축제 명물 코르사주!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하세요!”

상인들이 목청 높은 소리를 듣고 있으니 축제라는 게 실감이 났다. 나는 신이 나서 걷다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런데 의외로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

하긴 좁은 도시라고 해도 시장 얼굴 한 번 보기 힘들다. 지역 신문이나 미디어에 얼굴을 자주 비추고, 선거철마다 시끄럽게 방송하는데도 길가에서 마주치면 누군지 모른다. 거기다 프렌시프의 면적은 약 십만 제곱미터로 한국 면적을 웃도는 크기였다.

‘그러고 보니까 대단하네.’

나는 할아버지를 흘깃 쳐다보았다.

“왜?”

“할아버지가 이렇게 큰 땅을 다스리는 거지요?”

“그렇지.”

“대단해…….”

내가 눈을 반짝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그는 큼하고 헛기침을 했다.

“동부에서 제일 크지.”

“그렇군요.”

“보아르네 령을 제외하면 이 제국에서도 가장 크다.”

“보아르네 령은 더 커요? 보아르네 백작도 대단하네요.”

“거긴 다 황야야!”

그러더니 ‘풀 한 포기 안 자라서 인구는 우리가 제일 많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구나……. 아, 양꼬치 먹어도 돼요?”

“…….”

“안 되나요……?”

시무룩하게 물어보니 그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난 할아버지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양꼬치 상점으로 달려갔다.

“치즈 가루를 뿌린 거, 어니언 소스를 바른 거랑 그리고, 그리고……!”

“칠리도 맛있지요.”

“그럼 칠리까지!”

주인은 주문 즉시 양꼬치를 지글지글 구워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주문한 것들이 포장되어 나왔고, 얼른 칠리 소스 양꼬치를 맛보았다.

“으…….”

한 손으로 뺨을 감싸고 우물거리자 오빠들이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진짜 맛있어요!”

양고기 특유의 군내도 심하지 않고, 간은 적당한 데다 톡 쏘는 고추가 입맛을 끌어당긴다. 나는 즐겁게 먹다가 혀를 데어 작게 신음했다. 그러자 가웨인이 혀를 차며 고기를 후후 불어 고기를 하나하나 입에 넣어 줬다. 열심히 받아먹는 날 보며 오빠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새 새끼 같네.”

“그거 욕이에요?”

“천천히 먹으라고. 자, ‘아’ 해.”

나는 또 입을 벌리려다 주변의 시선을 느꼈다. 호위로 나온 기사들이며 할아버지까지 나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마저 이쪽을 힐끔거린다.

‘어린애도 아니고 오빠들이 주는 걸 넙죽넙죽 받아먹었네.’

성에서 하도 익숙해져서 아무렇지 않게 입을 벌렸다.

‘부끄러워!’

내가 함께 온 시트론에게 우왕좌왕하며 남은 양꼬치를 맡기자 가웨인이 물었다.

“왜? 더 먹지.”

“하지만 사람들이…….”

“뭐 어때서.”

“이상하다고 생각할까 봐…….”

“그런 놈들 있으면 눈알을 파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게 더 걱정인데.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 그들 사이를 빠져나오니 할아버지가 손을 내밀었다.

“자.”

난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다시 걸었다. 한참 상점을 구경하던 우리는 간단한 핑거푸드와 음료를 사서 불꽃놀이 전망대로 이동했다. 전망대에 올라가기 무섭게 피융―! 소리가 들리더니 펑, 펑!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

“봤어? 확실하게 본 거지? 머리 위에서 터졌잖아.”

가웨인이 그렇게 물어왔지만 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촘촘한 눈꽃 모양의 불꽃이 사방으로 갈라지며 작은 광채 부스러기가 머리 위로 흩날렸다.

오색으로 갈라져 떨어지던 유성우가 종국엔 연보라색 꽃잎이 되어 사라졌다. 눈앞에 꽃잎 하나가 나풀, 춤추듯 땅 아래로 가라앉았다. 발등 위에 오른 꽃잎이 바람에 섞여 안타까울 만큼 조금씩 사라져 갔다.

“예쁘다…….”

구름 한 점 없는 새카만 하늘에서 펼쳐지는 불빛의 향연에 시선을 온통 빼앗겼다.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 아래서 사람들이 즐겁게 웃었고, 난 그 속에 섞여 가족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헤헤 웃고 있는 날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그냥요. 좋아서.”

“실없긴.”

그가 픽 웃었다.

* * *

그 시각, 사비에르 후작 저는 또 다른 불꽃이 튀고 있었다. 황도 저택에 모인 사비에르의 가신들은 후작의 노기에 질려 말을 잃었다.

“벌써 프렌시프와 거래가 끊긴 지 열흘이 넘었다.”

“그, 그렇습니다.”

베르나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하자 후작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내 보기엔 그 늙은이 심기를 네 놈이 단단히 거스른 것 같은데.”

“그, 그건……!”

‘그야 그렇기는 하지만.’

프렌시프에 사자로 갔던 베르나르는 사비에르의 위세를 믿고 지나치게 굴었다는 자각이 있었다.

‘프렌시프에서 이리 매몰차게 거래를 끊을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제가 아니라 그 누가 갔더라도 마음껏 오만을 떨었을 것이다. 후작이 새파랗게 질린 베르나르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늙은이가 자존심이 상해 우리와 거래를 끊으려 든 거야. 그렇지?”

베르나르로부터 프렌시프와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가신들이 침음을 흘렸다. 프렌시프 영애는 베르나르를 단숨에 이동시켰다고 했다. 그런 힘을 발휘하는 건 오로지 포털뿐이었다.

하지만 사비에르 후작은 포털의 ‘포’자만 나와도 발작적으로 반응했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에 더욱 강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베르나르가 어물거리며 말했다.

“가, 각하, 프렌시프에서 거래를 재개하지 않으면 이쪽에서도 큰 타격이…… 재정적 타격뿐만 아니라 프렌시프에서 수입하던 화력석과 수력석의 공급마저 끊길…….”

짝! 솥뚜껑 같은 손으로 베르나르의 뺨을 후려친 후작이 그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하여!”

“……요, 용서를…… 용서를, 각하…….”

“이 내가 그 늙은이에게 무릎이라고 꿇으라는 말이냐.”

베르나르는 거무죽죽해진 얼굴로 웅얼거렸다.

“하지만 첩자의 존재를 들켰으니 프렌시프가 황궁에 고발이라도 한다면…….”

후작이 베르나르를 노려보며 라이터를 꽉 쥐었다. 움찔 어깨를 떨며 몇 걸음 물러나는 베르나르를 보며 가신 하나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각하, 고정하십시오. 저자의 말이 틀린 게 없습니다. 이미 거래의 주도권은 프렌시프에 넘어갔습니다.”

“게다가 마원을 매개로 타 령(領)을 겁박하는 건 황궁에서 엄히 금한 일이 아닙니까. 프렌시프에서 그것마저 걸고넘어진다면…….”

가신들의 말을 들은 사비에르 후작이 고함을 내질렀다.

“그건 황후가 내 딸을 며느리로 들이기 위해 눈감아 주기로 한 일이다!”

“인정하십시오. 베르나르가 직접 겪지 않았습니까. 프렌시프에 새로운 성녀가 등장했습니다.”

“……!”

“그녀의 힘이 에이레네 아가씨를 웃돈다면 황후는 지체 없이 우릴 버릴 테지요.”

다른 이들이 가신의 말에 동의하여 고개를 숙였다.

“항만을 포기하고 프렌시프에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성녀의 가문끼리 맞붙는 것은 황궁에만 이득인 일. 프렌시프에서도 황권이 강화되는 건 바라지 않을 겁니다.”

“배상금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가문의 기둥이라도 뽑아 바쳐야 화를 진압할 수 있습니다.”

사비에르 후작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과 희게 질린 주먹이 그의 노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 또한 다른 도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 모든 일의 시작이 세니아나 프렌시프였다. 길라게온 최악의 레이디라 손가락질받던 망나니가 전염병의 존재를 눈치채고, 첩자를 솎아 내더니 이제는 포털까지 열어 사비에르의 앞길에 가시덤불을 놓았다.

“프렌시프에 전령을 보내라.”

“예.”

사비에르 후작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 * *

불꽃 축제를 보고 성으로 돌아온 다음 날, 사비에르의 사자들이 도착했다. 이전에 왔을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태도였다. 그들은 할아버지를 알현하는 즉시 무릎을 굽혔다.

“어르신을 뵙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들의 인사를 받지 않으며 가웨인을 돌아보았다.

“군의 상태는?”

“명하신다면 전군, 언제든 진격 가능합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에 사비에르의 사자들이 새파랗게 질려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어, 어르신……!”

크게 당황한 그들을 보고도 할아버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들이 마른 침을 삼키고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머, 먼저 사비에르 공의 편지를 확인해 주십시오. 이번 일 배상액으로 삼천만 피니를 제안하셨습니다.”

삼천만 피니를 한화로 따지면…….

‘사, 삼백억이 넘잖아!’

듣도 보도 못한 거금에 나는 손이 달달 떨렸지만, 할아버지는 실소를 흘렸다.

“고작 돈으로 해결을 보겠다?”

“그 외에 원하시는 바를 말씀해 주신다면 뭐든 긍정적으로 고려하시겠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면 후작의 목을 내놓아라.”

순간 대접견실이 얼어붙었다. 사자들이 새파랗게 질려 어찌할 바 모를 때, 프렌시프의 가신들까지 숨을 깊게 들이켜며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어르신, 부디 자비를…….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후작께선 어르신의 심기를 거스른 데에 크게 반성하고 계십니다.”

“예, 그렇습니다. 때문에 사비에르 원로원장인 드리즈만 백작을 사자로 보내신……!”

쾅! 가웨인이 검집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놀란 사비에르의 사자들이 입을 다물자 란슬롯이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입, 온전한 채로 돌아가고 싶으시다면 부디 허튼 말은 삼키십시오.”

“겨, 경, 저희는…….”

“협상은!”

그가 크게 일갈하자 사비에르의 사자들이 흠칫 어깨를 좁혔다. 란슬롯이 그들을 싸늘하게 돌아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협상은 사비에르 공이 프렌시프의 문장 앞에 무릎을 꿇은 다음 차례입니다.”

“…….”

“사비에르 공께서 직접 오실 적엔 프렌시프를 능멸한 이전 사자의 수급을 선물로 가져와 주시리라 믿죠.”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가웨인이 문 앞을 지키고 선 기사들에게 명했다.

“잔챙이들께서 돌아가시니 너희들은 배웅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끌어내라는 소리에 사비에르 사자들의 얼굴이 모멸감으로 달아올랐다. 하지만 다른 말 없이 할아버지를 향해 한 번 더 공수한 후 물러났다. 사자들이 돌아가고 나서도 장내는 고요했다. 가족들의 위압감은 프렌시프의 가신들까지 덩달아 짓눌릴 만큼 강렬했다.

“이만 끝내지.”

할아버지가 말하기 무섭게 가신들이 꽁무니를 뺐고, 대접견실엔 나와 가족들만이 남았다. 가웨인이 굳어 있는 내게 손을 뻗었다.

“가자.”

“…….”

“소리쳐서 놀랐어?”

나는 눈치를 보다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그가 픽 웃더니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꺄악!”

“자자, 괜찮다, 괜찮다.”

가웨인이 아기 어르듯 둥기둥기 흔들어서 어이가 없어졌다.

“그 정도는 아닌데요…….”

내가 그를 흘겨보니 란슬롯이 내 볼을 꼬집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 우리 막내는 용감하지.”

“놀리는 거지요?”

오빠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해야 우리 돼지가 안심할 수 있나?”

가웨인의 물음에 나는 슬그머니 그들을 내려다보며 웅얼거렸다.

“저한테는 소리 지르시면 안 돼요?”

“안 해.”

“하지만 예전엔 맨날…….”

“이젠 절대로.”

가웨인의 눈이 드물게 진지해졌다. 란슬롯도 희미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들의 다정함이 좋아서 방긋 웃어 버렸다.

* * *

프렌시프의 결정을 들은 사비에르 후작은 황후궁을 찾았다. 새빨간 모란으로 뒤덮인 황후궁의 정원을 지나 에메랄드와 금사를 촘촘히 엮은 태피스트리 아래 선 그에게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황후 그라니아가 안경을 벗으며 입을 열었다.

“사비에르 영애는 박복하군.”

“예?”

“아비된 자가 우둔하니 결혼을 앞두고 이따위 추문에 휩쓸린 것이 아닌가.”

나붓한 음성에 예기가 실린 것을 느낀 사비에르 후작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폐하.”

“난 내 아들 앞에 깔린 융단이 티끌 한 점 없는 순백이길 원하네.”

“이 일만 진화한다면 필시 그리될 것입니다.”

“진화라…….”

그라니아는 코웃음을 치며 사비에르 후작을 내려다보았다.

“내 눈엔 사비에르의 불길이 사그라들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사비에르는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프렌시프에게 한참 밀리는 가문이었다. 그런 사비에르가 이만큼 성장하고, 가주인 후작이 금좌 11석(길라게온 최고 권력가들로 구성된 회의)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건 모두 그의 딸 에이레네가 성녀인 덕이었다. 그런데…….

그라니아가 입매를 비틀었다.

“새로운 성녀가 등장하지 않았는가.”

“폐하, 그건……!”

매섭게 노려보는 그녀의 눈길에 후작이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바입니다.”

“하면, 이것은.”

그라니아는 테이블 위에 ‘보그’를 올려 두었다.

“그, 그건……!”

“포털이 아니라면 꿈도 꿀 수 없는 보물이지.”

“…….”

“사교계를 우습게 여기지 마시게. 이미 프렌시프 영애가 성녀이며 보그를 가져왔다는 소식이 퍼지고 있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사비에르 후작이 우뚝 굳어 버렸다.

‘정말로 전력석 마원을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인가. 그것도 보그를……!’

그의 얼굴에 낭패가 엿보이자 황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 신탁이 내려왔을 때부터 기를 쓰고 포털 마원을 찾았어야지!”

황후가 노성을 내질렀으나 사비에르 후작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말이 없었다. 프렌시프에 포털 마원이 매립되어 있다는 건 사비에르 또한 알고 있는 바였다.

사실 신탁이 내려온 건 2년 전의 일이었다. 황후는 즉시 사비에르에 이야기를 전했고, 사비에르에선 프렌시프 령에 첩자를 보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마원을 찾을 수 없었기에 반란군 사건과 전염병 사건을 통해 프렌시프를 옭아맨 후 내부를 수색할 생각이었다.

“항만 같은 것에 눈독만 들이지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것이야.”

“새로운 성녀가 등장하기 전에 딸아이의 입지를 다져야 했습니다.”

“그따위 일에 시간을 지체해서 신탁을 더는 숨길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지.”

“…….”

쿵! 그라니아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도미니크가 마원을 가져오는 데 실패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따위 천것이 내 아들과 나란히 설 뻔하지 않았는가!”

“…….”

“프렌시프에서 항의하는 일만은 없어야 해. 어떻게든 수습하시게.”

황후가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프렌시프 늙은이에게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걸해서라도.”

사비에르를 도와줄 생각이 일절 없다는 뜻이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제 딸을 통해 황후를 압박할 수조차 없었다.

“……예.”

“배웅은 않겠네.”

그라니아는 매정히 고개를 돌렸고, 후작은 소득 없이 성을 나서야 했다. 그가 떠나고 시녀장 올슨이 황후의 앞에 차를 내려놓았다.

“진정 사비에르를 돕지 않으실 겁니까?”

황후가 미간을 좁혔다. 이미 사비에르와 한배를 탔고, 배가 난파되면 그녀에까지 피해가 미칠 터였다.

“프렌시프 영애를 만나 봐야겠다.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서 동부 별궁으로 초대해라.”

“예.”

시녀장 올슨이 고개를 숙였다.

며칠 후, 사비에르 후작이 프렌시프를 직접 찾아왔다. 나와 후작이 만나는 걸 꺼리는 가족들로 인해 직접 보진 못했지만, 마담 버지니아의 말로는 정말 무릎을 꿇었다고 했다. 거기에 배상금은 처음에 말했던 금액의 세 배가 되어 사비에르는 운영 중인 상단까지 정리해야 했다.

시트론이 내 머리를 빗겨 주며 빙그레 웃었다.

“이번 일은 일단락되었나 봐요.”

“그런가 봐.”

“세드릭 경, 아니, 세드릭은 사비에르에서 데려간다고 했죠? 살아남긴 힘들겠네요.”

세드릭이 덜덜덜 떨며 애원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사, 살려, 살려 주십시오. 아가씨, 개처럼 살겠습니다! 차라리 광산으로 보내 주십시오! 광산 노예가 될……! 으아악!]

기사들이 얼른 막아서서 그 모습을 다 본 건 아니지만, 제대로 된 꼴은 아니었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그 많은 사람의 목숨을 쥐고 흔들었기에 연민이 생기진 않았다.

‘사비에르가 피해 간 것도 마음에 안 들어.’

란슬롯은 이 일이 금세 사교계에 퍼질 거라고 했고, 실제로 소문이 퍼진 건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사비에르는 황궁의 질책을 피하지 못했고, 가주인 후작은 금좌 11석의 자리를 잃었다.

시트론이 손질한 머리를 깔끔하게 묶었다.

“음, 예쁘네요.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 단출한 차림이세요?”

“뒷산에서 산딸기가 난대. 가서 잔뜩 따올 거야.”

“깨끗한 소쿠리도 있어야겠네요.”

시트론은 활짝 웃고는 커다란 소쿠리를 챙겨 주었다. 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뒷산으로 향했다. 어느덧 겨울이 물러가고 완연한 봄이었다.

‘봄에 돈 걱정 안 한 게 얼마 만일까.’

아니, 없는지도. 사람들은 봄이 시작의 계절이라고 한다는데 내게 봄은 ‘공과금의 계절’, ‘전세 재계약의 계절’, ‘집주인이 연장 안 해 주면 어떡하지의 계절’이었다.

뒷산엔 정말로 산딸기가 가득했다. 햇빛에 닿아 루비처럼 반짝이는 산딸기를 하나 꺼내서 베어 무니 새콤달콤 맛있었다. 나는 덩굴 앞에 쪼그려 앉아서 산딸기를 하나 땄다.

‘잼을 만들까.’

아보카도가 있으니까 함께 과카몰리를 만들어도 맛있겠다. 작은 것들은 산짐승의 몫으로 두고, 산딸기를 똑, 똑 따서 소쿠리 안에 가득 집어넣었다.

부르르 기지개를 켜는데 나무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가 있나 싶어 빤히 쳐다보았지만, 사람이 나타나진 않았다. 소쿠리를 끌어안으며 일어나자 또 한 번 바스락, 풀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

조심스럽게 걷기 시작하니 내 보폭에 맞춰 살금살금 걷는 소리가 들렸다. 난 태연히 걷는 척하다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몰려오던 프렌시프 성의 사용인들이 화들짝 놀라서 굳어졌다.

“뭐야?”

“그, 저, 오늘, 산딸기를 따러 가신다길래……. 여기는 산짐승도 많고…….”

“예에, 뱀도 나옵니다.”

“산 타다 넘어지시면 다치니까요…….”

그들 뒤에서 딴청을 부리고 있는 적포도주색 머리칼의 남자는 기사 바커스였다.

“바커스 경은 왜?”

“살려 주십시오.”

내가 무슨 소리냐는 듯 바커스를 보자 그가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단장이 아가씨 손톱 밑 거스러미 하나도 제 탓이랬습니다. 그런데 덤불 가득한 산에 오시니 제가 오죽 불안했겠습니까.”

기가 막혀서 흘겨보니 그들이 시무룩해졌다. 저 표정에 또 마음이 약해져서 표정을 풀며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산딸기 먹을래……?”

“예!”

다섯이나 되는 사람들이 단숨에 달려왔다.

“다네요!”

“그렇지? 담금주를 해도 진짜 맛있을 거야.”

“와인입니까? 딸기로 와인을 만든다는 얘기는 들어봤습니다.”

“복분자주라고 해.”

말하고 나니까 복분자주가 마시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로 오고 난 뒤에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

“오늘 담글까?”

“그럴까요? 저희도 돕지요.”

사용인들이 몹시 설레했다. 바커스까지 도우면 얻어 마실 수 있냐고 물어왔다.

“응, 줄게.”

“지금 즙을 내면 됩니까?”

“아니, 헹구고 해야지.”

그가 조급하게 구는 게 우스워서 우리는 한참 킥킥거렸다. 모두 함께 내 조리실로 가서 산딸기를 씻고, 손으로 으깼다. 그리고 설탕을 적당히 넣은 다음 소주 대신 보드카를 넣었다. 꼴꼴꼴 소리를 내며 들어가는 술을 본 바커스가 꼴깍 침을 삼켰다.

“언제 마실 수 있습니까?”

“음, 석 달쯤 뒤?”

“그렇게나 오래 걸려요?!”

“숙성되어야 하니까. 칵테일로는 금세 마실 수 있고.”

그러고 보니 안주가 아쉬웠다.

‘보드카는 돼지고기와도 잘 어울리는데, 수육을 만들까.’

아니다. 기왕 하는 거 무채를 해서 보쌈으로 먹어야겠다. 난 커다란 솥에 돼지고기 세 덩이, 원두를 간 것과 된장, 월계수 잎, 마늘, 후추를 넣어 삶았다. 삶는 동안 배추를 절여 두고, 무를 채 썰었다.

‘아! 액젓이 없잖아. 으음, 다시마 육수로 하지 뭐. 어간장도 조금 넣고.’

양념을 만들어서 무치고 있자니 조리실 곳곳에서 탄성이 들려왔다.

“왜?”

“손이 정말 빠르시네요.”

“으응, 그런가.”

나는 어물쩍 대답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윤세나일 적엔 매일매일 혼자서 주방에 있다 보니까 아무래도 빠를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수육이 다 삶아져서 수육을 잘라 무채와 함께 접시에 옮겨 담았다.

“이제 먹어 볼까?”

“기대되네요!”

절인 배추에 무채와 함께 싸서 먹으니 머리에서 펑펑 불꽃이 터졌다. 입안 가득 보쌈을 오물오물 씹다가 목이 막히면 산딸기 칵테일을 홀짝 들이켰다.

“아아아…….”

“천국이다…….”

“맛있네요. 배추 간은 삼삼하고, 무채는 매콤짭짤한 데다 고기는 달큰하고!”

내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고 있는데 조리실 문이 벌컥 열렸다.

“바커스, 너 순찰 안 돌고…… 아가씨?”

고레일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낮에 칵테일 파티를 벌이고 있던 우리는 화들짝 놀라서 굳어졌다.

“이거 술이잖습니까. 다들 근무시간에 뭐 하는 짓들……!”

고레일이 소리치려 입을 열었을 때, 나는 재빨리 그의 입에 보쌈을 집어넣었다.

“어때?”

“맛있…… 아니, 이게 무슨…….”

“우리 이제 공범이니까…….”

“…….”

“이르지 말아 주라.”

내가 기죽어서 우물거리며 말하자 바커스는 얼른 고레일의 손에 술잔을 쥐여 주었다.

“너!”

“아가씨께서 직접 만드신 거라고. 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우리 같은 아랫것들을 위해! 너, 아가씨 정성을 고해바칠 거냐?”

바커스가 나를 향해 지원 사격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내길래 손을 꼼지락꼼지락하며 말했다.

“여, 열심히 만들었는데…….”

“…….”

고레인은 짙은 한숨을 내쉬며 술잔을 힐긋 쳐다보더니 이내 술을 맛보았다.

“훌륭하네요.”

그가 다정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달아서 취하는 줄도 모를 테니 적당히 드셔야 합니다?”

“응!”

나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세니아나는 주량이 얼마나 되지?’

한 번도 마셔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기억 속의 세니아나는 술을 마시면 양주 한 병을 깡그리 비웠다. 물론 어느 시점부터는 인사불성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소주 한 병쯤은 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술잔을 들었다.

* * *

가웨인은 기막힌 광경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황궁에서 세니아나 앞으로 편지가 와서 데리러 왔더니만, 조리실 안은 술 냄새로 진동하고 있었다.

“오바부미다!”

세니아나가 그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며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고, 바커스는 진땀을 흘리느라 바빴다.

“그, 많이 드시지는 않았습니다. 그 양주잔으로 한 잔도 채 안 드셨는데…….”

“입 닥쳐.”

가웨인의 말에 바커스가 뒷짐을 지고 고개를 숙였다. 세니아나는 포크를 입에 물고 고개를 갸웃 기울이더니―

“못됐네~?”

―하고 쫑알대서 가웨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인사불성이구만.”

“아냐, 아냐.”

“가자.”

세니아나는 술병을 끌어안고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가웨인이 훅 한숨을 내쉰 뒤 그녀를 둘러업었다.

“꺄악!”

성으로 돌아가는 내내 ‘싫어, 이 괴물! 오바부미 괴물~!’ 하고 쫑알댔다. 그 소리를 듣고 란슬롯과 나베리우스가 방에서 나왔다.

“무슨 일이냐.”

“사용인들과 술을 마셨습니다.”

“뭐?”

나베리우스가 인상을 찡그리며 세니아나를 쳐다보자 그녀가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할보디!”

공중에서 바둥거려 기어이 가웨인의 손에서 빠져나온 그녀가 나베리우스의 품에 폭 안겨 가웨인을 노려보았다.

“할보디, 쟤 나빠요.”

“뭐?! 이게!”

가웨인이 소리쳤지만, 세니아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나베리우스의 가슴에 얼굴을 비빌 뿐이었다.

“이리 와.”

“싫어~!”

“놔둬라.”

나베리우스가 세니아나의 등을 슬쩍 감싸며 말했다. 가웨인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더니 나베리우스의 입꼬리가 실룩이고 있었다. 란슬롯도 픽픽 웃으며 허리를 굽혀 세니아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러네. 가웨인이 나빴어.”

“응!”

“물 마시러 갈까?”

“술 좋아!”

“귀여워.”

란슬롯이 픽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술. 좀 밍밍할 테지만.”

세니아나는 란슬롯이 내민 손을 잡고 쫄랑쫄랑 그를 따라갔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집사가 얼른 물을 내왔다. 나베리우스는 직접 잔을 받아 세니아나에게 물을 먹여 주었다.

“조금 더, 옳지.”

“싱거운데……. 할보디, 조리실에요. 맛있는 술 있어요.”

“그렇구나.”

나베리우스는 제 손을 잡고 얌전히 물을 마시는 세니아나를 보고 입매가 허물어졌다. 그 후로도 세 남자는 세니아나의 술주정 수발을 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박 먹고 싶다.”

“수박?”

세니아나가 나베리우스의 무릎을 베고 웅얼대자 그는 즉시 줄을 잡아당겼다. 설렁줄이 아닌 비상줄이었다. 세드릭 대신 참모를 맡게 된 칼립스가 굳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하명하십시오.”

“수박을 가져와라.”

“예?”

꽃이 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수박은 아직 색도 안 올랐을 시기인데,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그가 당황스러운 명에 굳어 있자 나베리우스는 덧붙였다.

“당장.”

나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슬그머니 가족들을 돌아보았다.

‘어, 어쩌지.’

화가 났나…….

잠에서 깨어 일어났을 때, 할아버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그것도 란슬롯의 재킷을 덮고, 가웨인의 검을 끌어안은 채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어서 어떤 실수를 했는지조차 모르겠다. 특히 가웨인의 표정이 무서웠다.

“오, 오빠…….”

“오바부미, 겠지.”

“그건……. 어린애 옹알이 같은 말이잖아요.”

가웨인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내 이마를 튕겼다.

“아야!”

“또 한번 취해 봐라.”

“조금은 마셔도 돼.”

란슬롯이 그를 걷어차곤 웃었다. 할아버지는 내게 도각도각 네모나게 잘린 수박이 꽂힌 포크를 쥐여 주었다.

‘봄에 웬 수박?’

고개를 갸우뚱하며 수박을 받는데 눈 밑이 새카만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일이 많은가 보다.’

나는 수박을 오물거리며 가족들의 눈치를 보았다.

‘화가 많이 난 것 같지는 않지?’

다행이다. 얌전히 있었나 봐.

속으로 ‘잘했네, 나!’ 하고 생각하며 뿌듯해하는데, 할아버지가 내 앞에 편지를 내려놓았다.

“황후가 네게 전한 서신이다.”

“황후요?”

깜짝 놀란 나는 포크를 놓고, 얼른 편지를 잡았다. 확실히 편지 제일 앞면에 새겨진 문장은 황후의 것이었다.

“제게 어째서…….”

“네가 성녀라는 게 귀에 들어간 게지.”

보그를 공급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언제고 소문이 날 줄은 예상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빠르다.

“황후와 황비들이 제를 올리기 위해 동부 별궁으로 올 거다. 그때 말벗으로 너를 보내 달라 요청했어.”

‘말벗이라면…….’

학식과 기품, 가문을 따져 선발한 후·비의 측근이었다. 금좌 11석의 딸과 손녀들이 포함된 데다가 황후와 황태자비를 수없이 배출한 사교계 최고의 그룹이었다.

‘황후의 말벗은 사비에르 영애라고 했던가.’

세니아나의 지식을 되짚어 보는 중에 할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가고 싶지 않다면 가지 않아도 돼.”

하지만 가지 않으면 프렌시프와 나는 곤란해질 거다. 황후는 금좌 11석의 수장인 카렌듈라 후작의 외동딸이며 이 나라에서 가장 지체 높은 여성이었다. 그녀의 심기를 거슬러서 표적이 되면 심리적은 물론, 물리적 압박까지 받을 거다.

‘그렇게 될 바에야 얌전히 대화 몇 마디 나누고 오는 게 낫지.’

고민 끝에 나는 대답했다.

“갈게요.”

그러자 가웨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황후가 네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동부 안에서 제게 해를 가한다면 바보지요. 그런 사람은 무섭지 않아요.”

내 말에 오빠들은 눈을 크게 떴다. 란슬롯이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게다가 내겐 포털도 있으니까.’

정말로 황후가 바보여서 내게 해를 가하려 한다고 해도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난 바로 황궁에 수락하는 답장을 보냈고, 황궁에선 내가 당일에 입고 갈 드레스와 비취로 만든 허리 장식을 보내왔다. 그리고 며칠 뒤, 시트론과 호위들을 대동하여 신전으로 향했다.

* * *

내가 별궁 안으로 들어가자 우아한 귀부인이 나를 향해 무릎을 굽혔다.

“황후궁의 시녀장입니다.”

그녀는 내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설명해 줬고, 호위와 시중인은 한 사람씩만 데려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진중한 고레일을 호위로, 시트론을 시중인으로 택했다.

“안내하겠습니다.”

시녀장을 따라 들어간 곳은 정원이었다. 커다란 원형 테이블 앞에 소녀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서 있는 사람들만 보여서 자리가 없나 싶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앉아 있는 소녀들이 있었다. 앉아 있던 소녀 중 융단 같은 흑발을 가진 소녀가 몸을 일으켰다.

“프렌시프 영애지요? 자, 여기 앉으세요.”

그러자 샛노란 머리의 영애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내게 자리를 권한 영애에게 말했다.

“하지만 저보다 먼저 온 분들이 계신 것 같은데요.”

소녀는 서 있는 사람들을 잠깐 돌아보다가 다시 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생긋 웃었다.

“괜찮아요. 우린 특별하니까.”

그러면서 내가 허리에 찬 비취 장식을 가리켰다.

‘아하, 비취가 있는 사람이 1군이면 서 있는 사람이 2군인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찰나, 문가에서 인기척이 들렸고 소녀들이 모두 등을 곧게 세운 채 치맛자락을 들었다.

“황비님들을 뵙습니다.”

세 명의 황비가 인자하게 웃으며 소녀들을 바라보았다. 나도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혔다.

“세니아나 프렌시프입니다.”

“어머나, 사랑스럽기도 하지.”

금발의 황비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란슬롯에게 들었던 황궁의 정보를 떠올렸다.

‘금발. 금발이면…….’

로웨나 황비다!

황비 중 가장 젊은 쪽인 그녀는 죽은 황태자의 모후 대신 황태자를 양육한 사람이었다. 황후 다음으로 입김이 센 비였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손을 양손으로 잡았다.

“자자, 이리 앉아서 얘기하지. 어머, 자리가 부족하구나.”

황비들이 와서 나까지 앉기엔 자리가 모자랐다. 그러자 로웨나 황비가 내게 인상을 썼던 샛노란 머리의 영애를 가리켰다.

“크리스틴, 자리를 비켜 주렴.”

“하, 하지만 황비님……!”

‘크리스틴이라면 지금까지 로웨나 황비의 말벗이었던 사람이잖아?’

“괜찮아요.”

내가 로웨나 황비에게 말했지만, 그녀는 눈썹을 까딱 들어 올릴 뿐이었다. 크리스틴이 입술을 짓씹으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황비는 내 손을 잡고 자리로 향했다.

“그리 겸손할 것 없단다. 특별한 사람은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지.”

로웨나 황비가 이리 친근하게 구는 까닭은 짐작이 간다.

‘로웨나 황비도 내가 성녀라는 걸 알고 있구나.’

황후의 말벗이 사비에르의 성녀이니, 자신 또한 나를 말벗으로 두고 앞으로 후계 쟁탈전에 도움을 받고 싶은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시중인들이 우르르 정원의 문에 정렬했다.

이 열로 정렬한 시중인들 사이에서 걸어들어온 사람은 황후 그라니아였다. 로웨나 황비의 시선이 일순 차갑게 식었다. 하지만 이내 말갛게 웃으며 황후를 향해 예를 표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로웨나 황비가 말하자 정원에 있던 모두가 그녀를 향해 무릎을 굽혔다. 그라니아는 정원을 슥, 둘러보다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프렌시프 영애.”

“예, 폐하.”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맙네.”

“초대해 주셔서 영광이에요.”

그녀의 시선이 내 손목을 잡고 있는 로웨나 황비의 손으로 향했다.

“이런, 로웨나는 손이 빠르군.”

“첫눈에 마음에 쏙 들었답니다. 뺏어 가시면 안 됩니다?”

로웨나 황비는 농담하는 것처럼 까르륵 웃고는 말을 이었다.

“사비에르 영애가 오지 않았으니 그녀 대신 프렌시프 영애를 말벗으로 삼으실까 봐 걱정되어서요.”

“대신이라. 자네의 재치는 알아줘야 해. 하지만 상대에 따라선 듣기 거북한 말이란 것도 알아 두게나.”

“만백성의 어머니신 폐하께서 설마 그렇게 속이 좁으시겠어요. 현명하시다는 걸 아니 드리는 말씀이지요.”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렇게 우아하게 빈정거릴 수도 있구나.’

란슬롯에게 이들의 관계를 듣지 못했다면 사이가 좋은 줄 알았을 거다. 황후가 정원을 걷기 시작하자 황비와 시중인, 소녀들까지 그녀의 뒤를 따랐다. 황후는 꽃송이를 매만지며 나를 힐긋 쳐다보았다.

“그래, 프렌시프에서의 생활은 어떤가? 사교계에도 나오지 않았다고 들었네만, 무료하지는 않나?”

“아닙니다.”

“다른 일에 매진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네?”

“요리 말이네.”

내가 놀라서 쳐다보니 황후가 실소를 흘렸다.

“영애만 한 나이에 데뷔탕트도 하지 않았으니 아카데미에서 수양 중이 아닐까 싶었지.”

황궁 직속의 사방(四方) 아카데미는 로열 키친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정석인 방법이었다. 요리사를 목표로 하는 사람이라면 평민부터 귀족 할 것 없이 아카데미로 향했다.

하지만 두 무리가 섞이면 평민은 당연히 권력에 눌려 설 자리를 잃는다. 그래서 아카데미에서 내건 재학 조건이 ‘신분을 노출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 때문에 로열 키친을 목표로 하는 귀족은 사교계에 나서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내 말에 로웨나 황비는 크게 흥미를 보였다.

“그거 기대되는구나. 그럼 이번에 영애의 요리를 맛볼까?”

황비들과 그녀들의 말벗들도 동의했다.

“요새 어디 귀족이 요리하는 게 흠인가요.”

“그럼요.”

그들의 말을 들은 로웨나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지. 로열 셰프가 귀족이 아닌 게 흠일 정도지. 이래서 사람은 누울 자리를 보고 누워야 해.”

그 말에 다른 황비가 황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현 로열 셰프는 평민이어도 실력은 좋…….”

“어머! 실력만 좋으면 무얼 하나. 덕분에 로열 키친의 기상이 바닥에 떨어졌는데.”

로웨나 황비는 우후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통성 없는 미꾸라지는 물을 다 버려 놓는 법이지. 그렇지 않나?”

아직 어린 말벗들이 “그렇습니다”, “현명하셔요, 황비님.”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나이 있는 소녀들과 황비들, 그리고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저건 로열 셰프 이야기가 아니야.’

황태자와 4황자를 비유한 것이다. 황태자는 전대 황후의 소생으로 가장 막강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 우뚝 선 후계를 위협하는 황후의 아들을 미꾸라지라고 헐뜯는 말이었다.

황후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로웨나가 생긋 눈웃음치자 황후의 손에서 꽃송이가 우그러졌다. 손가락 틈새에서 꽃잎이 후두둑 떨어졌고, 시중인들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자네.”

황후가 로웨나를 불렀다. 로웨나 황비는 가볍게 웃으며 입가를 부채로 가렸다.

“말씀하십시오.”

“물을 가져다주겠나. 목이 마르군.”

“예?”

이번엔 로웨나 황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황궁의 사용인 출신으로 황제의 눈에 들어 벼락출세한 케이스였다. 물론 하녀 중엔 제법 계급이 높은 너스(6세 이하 황족의 유모)였지만, 시녀도 아닌 하녀 출신이란 것은 변함이 없었다.

출신을 되짚는 말에 로웨나 황비의 손이 바르르 떨었다.

“시녀장은 무얼 하고요.”

“자네가 내오는 건 뭐든 달지 않은가.”

황후가 서열을 강조한 것이다. 로웨나는 사람들을 힐끔 쳐다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송구합니다, 폐하. 몸이 좋지 않아서요.”

“그래? 안타깝군. 어쩔 수 없지. 가서 쉬게.”

“예?”

“쉬라고.”

로웨나 황비는 무어라 말하려 입술을 옴짝거렸으나 이미 몸이 아프다고 변명해 버렸으니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부채를 꽉 그러쥔 채 고개를 숙였다.

“내일 다과회에서 뵙지요.”

나는 떠나는 로웨나 황비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황후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영애에게 재밌는 소문이 있던데.”

포털 얘기였다.

“철이 없을 때 지나친 행동을 했지요. 망나니라는 별명은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어물쩍 모른 체하는 나를 보고 황후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정말 정쟁에 끼어들 생각이 없는데 그냥 놔주면 안 될까.’

하지만 이미 황후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이미 반쯤은 나를 적으로 판단한 것 같았다.

우리는 얼마 정도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티타임에서 나누자는 황후의 말에 모두 함께 정원을 빠져나왔다. 시트론이 방으로 돌아온 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곤하세요? 표정이 안 좋으신데요.”

“여기가 전쟁터라서 그래…….”

그렇게 말하곤 소파에 깊게 몸을 기댔다. 시트론이 걱정스럽게 날 보았다.

“이제 좀 쉬세요.”

“말벗은 차를 탈 줄 알아야 한대. 그래서 배워 둬야…….”

나는 담요를 끌어안고 웅얼거렸다.

“주무세요. 새벽에 깨워드릴게요.”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지만, 자꾸만 눈이 감겨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까무룩 잠들고 말았다.

* * *

내가 일어난 건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간단히 세수를 한 뒤 시트론과 함께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이전에 누가 다녀간 모양인지 다이닝 룸 안엔 그윽한 허브향이 풍기고 있었다. 티팟을 꺼내던 시트론이 헉, 숨을 들이켰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저녁에 찻잎을 얻었는데 두고 왔네요.”

“여기 아쌈은 있는데?”

“종류마다 맛있게 우리는 법이 다르거든요.”

“그렇구나.”

“잠시만 계세요.”

그녀가 나를 두고 다이닝 룸을 벗어났다.

‘시트론은 정말 세심해.’

나는 사려 깊은 그녀가 정말 좋았다.

‘친구가 이런 걸지도.’

하지만 시트론은 여덟 살이나 연상이었다. 따지자면 친구보다는 언니 쪽에 가깝다.

윤세나였을 적에도 친구는 없었다.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 아주 우울한 아이였다. 그런 데다가 피부병까지 지독하게 앓아서 고아원 아이들은 나를 괴물이라고 놀리며 따돌렸다.

‘생각해 보면 그때 트라우마가 생긴 게 아닐까?’

또래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게 힘드니까. 선생님을 만난 후엔 많이 나아졌지만, 운이 나빴다. 가난한 고아라고 도둑질 누명을 썼고, 졸업할 때까지 낙인이 찍혀서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말벗으로 온 소녀들이 서로 친근하게 구는 게 부러웠다.

‘친구……. 나도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인기척이 들려왔다. 당연히 시트론인 줄 알고 활짝 웃으며 문가를 보았다.

“시트…… 저하?”

시트론이 아닌 도미니크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이 시간에 뭐 하는 겁니까.”

“말벗은 차를 탈 줄 알아야 한대서 배우고 있었어요. 그러는 저하께선 여기 왜……?”

“호위단 총괄로 왔습니다.”

“아…….”

문득 정원에서 들었던 소녀들의 말이 떠올랐다.

[보셨어요? 오늘은 또 얼마나 근사하신지 몰라요.]

[하녀들 비명이 여기까지 들리더라니.]

[어떻게 해! 그분이 오실 줄 알았으면 좀 더 꾸미고 올 것을.]

‘그분이 도미니크였구나!’

“언제까지 계세요? 아, 호위니까 동부제를 지낼 때까지는 계시지요?”

“예.”

“잘됐다!”

나를 빤히 보던 그가 물었다.

“제가 반갑습니까?”

“물론이죠!”

일전에 나를 구해 준 적도 있고, 포털을 열 수 있는 것도 비밀로 해 준 고마운 사람이었으니까.

그가 허리를 조금 숙여 나와 눈을 맞추었다. 키가 훌쩍 커서 매번 올려다보다가 이렇게 정면에서 얼굴을 보니 어쩐지 그가 달라 보인다.

‘진짜 잘생겼네.’

란슬롯이나 가웨인보다 이목구비가 섬세했다. 사람이 어쩜 이렇게 그린 것처럼 생겼을까. 신기해서 요목조목 뜯어보고 있자니 그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도.”

“네?”

“나도 네가 반가워.”

편한 말투의 그는 처음이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데 왜 반말? 물어볼까 하다가 황족 신분이니 사실은 공대해 줄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 손가락만 매만졌다.

‘빤히 보니까 민망하네.’

“순찰 돌고 계셨던 거 아니에요? 가 보셔야 하지 않나요?”

민망해서 말을 돌리자 그가 허리를 곧게 폈다.

“하녀를 기다리고 계셨던 게 아닙니까?”

어느새 말투가 공대로 돌아왔다. 내가 민망해하니까 배려해 준 것이었다.

“맞아요.”

“올 때까지 함께 있겠습니다.”

“왜요?”

“여긴 프렌시프 성이 아닙니다.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죠.”

“아…….”

“개인 호위가 계시죠?”

“네.”

“항상 곁에 두십시오.”

나는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이다가 슬그머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요. 왜 이렇게 잘해 주세요?”

“제가요?”

“네. 구해 주기도 하셨고, 포털도 비밀로 해 주시고, 또 오늘도…….”

내 말에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뺨에 서늘한 손가락이 닿자 움찔, 몸이 굳어졌다.

“홀로 있을 적에 당신이 떠오르고, 시간이 지날수록 궁금해지고, 다시 보면 반가워서.”

“제가요? 왜요?”

“왜일까요?”

그의 질문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내가 떠오르고, 궁금해지고, 다시 보면 반갑다니. 어째서? 한참 고민하던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친구 하고 싶어서?’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도요!”

그러자 도미니크의 눈이 조금 커졌다.

“예?”

“저도 친구 하고 싶었어요.”

“…….”

“저하와 저는 세 살 밖에 차이 나지 않으니까 친구도 할 수 있는 거지요?”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왜요?”

“나를 보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싶어서.”

“예?”

“반성이 되는군요.”

그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하기 싫은 건가?’

나는 시무룩해져서 어깨를 늘어뜨렸다. 내가 호감이 있는 사람이 나와 친구 하고 싶은 줄 알고 엄청 기뻤는데.

그런 나를 보고 도미니크는 물었다.

“영애는 ‘친구’를 그리워하고 궁금해합니까?”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하자 그가 픽 웃었다.

“그럼 하죠.”

“네?”

“친구부터.”

“정말이요?!”

나는 친구라는 말에 기뻐서 펄쩍펄쩍 뛸 뻔했다. 함께 웃고 있는데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다이닝 룸으로 들어온 시트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도미니크를 쳐다보았다. 도미니크는 다시 평소의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

내가 고개를 가볍게 숙이자 그도 마주 인사했다. 그가 다이닝 룸을 떠나고 나서 시트론이 다급히 물어왔다.

“저하께서 여긴 무슨 일로……?”

“호위단 총괄로 오셨대. 순찰 중이셨어.”

“아, 순찰. 그런데 꽤 오래 머무신 것 같은데요?”

“나와 친…….”

거기까지 말하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황자와 후작 영애가 사사로이 친분을 쌓는 건 남들 보기에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시트론이 걱정하는 건 싫으니까.’

“호위를 데려오지 않아서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려 주신 거야.”

“그렇군요.”

시트론이 찻잎 주머니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냉정하기가 마물 같다던데, 소문이었나요?”

“상냥한 분이셔.”

“하지만 소문엔…….”

“응?”

시트론이 티 세트의 물기를 닦으며 종알거렸다.

“르마르 공작 영애가 도미니크 저하께 홀딱 빠졌다는 얘기 아세요?”

“그랬어?”

“네, 결혼해 주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울고 불며 애원하더래요.”

나는 깜짝 놀라서 시트론을 쳐다보았다.

‘정말로 인기가 많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시트론은 사실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하는 영애에게 검을 던져 주셨고요.”

“왜?”

“죽으려면 죽으라는 뜻이겠죠.”

그렇게 차가운 사람이라고?

미소짓던 도미니크가 떠오르자 난 의아해졌다. 그가 그렇게 매몰차게 구는 건 상상이 가지 않는다.

시트론에게 차를 타는 법을 배우느라 새벽을 하얗게 지새운 나는 열 시가 넘어 눈을 떴다.

“일어나셨어요?”

“으응…….”

눈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트론은 내게 세숫물을 가져다주었다. 장미 오일을 넣은 향긋한 물로 세수를 하니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다. 그녀가 내 머리를 빗기며 물었다.

“식사하셔야죠?”

“다른 사람들은?”

“식사는 친분 있는 분들끼리 모여 간단히 하시나 봐요. 만찬이 있을 땐 미리 연락을 주신대요.”

“그렇구나. 음, 그런 간단하게 준비해 줘.”

나는 가벼운 몸단장을 하고 후원으로 향했다. 벤치에 앉아 있으니 시트론이 샌드위치를 가져왔다. 샌드위치를 집으려고 하는데 샛노란 머리의 영애가 몇몇 소녀를 거느리고 다가왔다. 로웨나 황비의 말벗인 크리스틴이었다.

그녀가 생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식사가 늦으시네요.”

“아, 네. 이제 일어나서요.”

“어머나…….”

그녀가 입가를 가리고 소녀들과 눈을 맞추었다. 그러더니 다시 나를 보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영애는 뭐랄까, 좀…… 게으른 편이군요.”

“시녀장에게 기상 시간이 따로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요?”

“그렇다곤 하지만 상식이란 게 있으니까요.”

고상하게 말하지만, 눈빛에 스민 적의는 숨기지 못했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그녀가 생긋 웃었다.

“설마 제 말에 기분이 나쁘신 건 아니죠?”

“영애―”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

크리스틴은 내 말을 끊고 함께 온 영애들을 돌아보았다.

“설마 프렌시프 영애가 걱정 어린 말을 곡해해서 듣는 어리석은 분이시겠어요?”

“그럼요.”

그녀가 빈정거리듯 말하자 무리의 소녀들이 맞장구쳤다. 다른 때 같으면 한마디 하겠지만, 크리스틴에겐 조금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어제 나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으니까.

“어제 일 때문이라면 사과를…….”

“그 얘기는 됐어요. 포털이 오죽 대단한가요. 후·비님들께서 흥미를 보이실 만해요. 그것도 얼마 못 갈 거라고들 하지만.”

“…….”

“아, 오해는 하지 말아요. 소문이 그렇다는 거예요. 사비에르 양이 워낙 자리를 굳건히 잡아 놔서 영애는 설 자리가 없을 거라는 얘기가 우세하거든요.”

크리스틴이 입가를 부채로 가린 채 후후, 웃었다.

“게다가 황후께서 지원을 아끼지 않으시니.”

“영애는 로웨나 황비님의 말벗이 아닌가요?”

“그러니 영애에게 자중을 부탁하는 거랍니다. 괜히 우리 황비님께 영애의 능력을 오해하게 하지 말라고요.”

내 포털로 헛바람 넣지 말라는 뜻이었다. 갈수록 말이 지나치다. 내가 미간을 좁히자 크리스틴은 생긋 웃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소녀들이 “어머!” 하고 입을 가려다. 크리스틴도 숨을 들이켰다. 그녀들의 시선 끝에 걸린 건―

‘친구다!’

도미니크가 프렌시프 령에서 보았던 부관과 함께 걸어오는 중이었다. 크리스틴이 재빨리 그에게 다가갔다.

“저하.”

“…….”

“일전에 따로 뵈었을 때보다 야위셨네요. 공무가 고되신 모양입니다.”

따로 뵈었다는 말에 소녀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속닥거렸다. 크리스틴은 수줍은 표정으로 도미니크를 올려다보았다.

“아버님께서도 염려가 크세요. 동부제 이후에 저하를 뵈러 가시겠다고 하셨어요.”

“…….”

“그때는 다른 이야기도 있겠지만…….”

그녀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수그렸다. 마치 혼담이라도 오갈 것 같은 뉘앙스였다.

“괜찮으시면 저희와 함께 산책이라도…….”

“누구?”

“네?”

도미니크가 무뚝뚝한 얼굴로 말하자 크리스틴이 당황하여 되물었다.

“누구냐는 말입니다. 그쪽.”

그러자 어딘가에서 풋! 실소가 터져 나왔다. 크리스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취, 취기가 오르셨을 때 뵈어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나 봅…….”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미니크는 걸음을 옮겼다. 나에게로.

“영애.”

나는 도미니크를 향해 무릎을 살짝 굽혔다.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 주무셨습니까?”

“네.”

“새벽까지 차를 끓이시느라 고단하셨을 텐데요.”

“아…….”

“그리 부지런하시면 병납니다.”

아무래도 그는 나와 크리스틴의 대화를 들은 것 같았다. 크리스틴도 눈치챈 모양인지 손마디가 새하얘질 정도로 치맛자락을 꽉 말아 쥐고 있었다. 나를 보는 시선이 살벌하기에 당황해서 그에게 속삭였다.

“다들 우리를 보고 있어요.”

“압니다.”

그러나 그는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입술을 꾹 짓씹은 크리스틴은 소녀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내가 시무룩해져서 한숨을 내쉬자 그의 부관이 내게 물었다.

“마음이 상하셨습니까?”

“네? 아니요, 샌드위치가 그새 퍽퍽해져서.”

부관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조금 발끈했다.

“요리사가 애써 만든 음식이란 말이에요. 맛있게 먹는 게 보답하는 건데…….”

부관은 큼, 헛기침을 하며 “마음만으로도 기뻐할 겁니다.” 하고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에 밴 웃음기까지 전부 지우진 못했다.

“신기하신 분.”

“제가요?”

“텃세를 당하면 움츠러드는 게 보통이니까요.”

“모두가 그런 건 아닌걸요.”

다른 영애들은 오히려 친절한 편이었다. 사람들을 잘 모르는 날 배려해 함께 식사를 하자고 전해 온 소녀들이 여럿이었다. 게다가 시트론이 얻어 온 찻잎도 그녀들이 흔쾌히 나눠 준 것이었다. 찻잎의 보관 방법이나 맛있게 타는 자신만의 방법까지도 알려 주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말해 주니 부관이 중얼거렸다.

“사람은 대게 친절보다 냉대를 기억하죠. 하지만 영애는 다르군요.”

그건 선생님이 가르쳐 준 인생의 지혜였다.

‘우리 선생님 대단하지!’

나는 우쭐한 표정으로 부관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알베르.”

도미니크에게 이름이 불리고 나서야 부관은 웃음을 수습했다. 그들은 내가 샌드위치를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접시를 비우고 우유를 마시자 도미니크가 내 입가로 손을 뻗어 왔다.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리자 그가 천천히 손끝으로 내 입술을 문질렀다.

“묻었습니다.”

“아……. 가, 감사…….”

난 민망해져서 우물쭈물했고,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

“…….”

미, 민망해라……. 친구끼리는 무슨 말을 하더라. 어색해져서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으려니 도미니크가 말했다.

“영애의 취미는 뭡니까.”

어쩐지 배운 걸 발표라도 하는 것 같은 어색한 어조다. 하지만 난 대화할 거리가 생긴 게 좋아서 활짝 웃었다.

“저는 요새 칼을 모아요!”

내가 냉큼 대답하자 알베르가 중얼거렸다.

“칼?”

“식칼이요.”

도미니크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하께서는요?”

“모으는 거라면……. 독일까요.”

“독이 그렇게나 종류가 많아요?”

내가 아는 건 복어 독이라든지, 아몬드 냄새가 난다는 청산가리 정도였다.

“확인된 것만 기백입니다. 산성 독 계열만 해도 수십이 넘죠.”

“산성 독은 어떻게 보관해요? 병도 녹여 버리지 않나요?”

“산도가 천차만별이라 약한 것들은 병에도 보관 가능합니다.”

“놀라워요!”

우리의 대화를 듣던 알베르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남녀 간의 대화인지…….”

* * *

그날 밤, 나는 다과회가 예정된 시간에 그랜드 홀로 내려갔다. 자리에 앉자 소녀들이 다정히 웃으며 말을 붙여왔다.

“차 종류는 어떤 걸 즐겨요?”

“내가 맞춰 볼게요. 오렌지 페코죠?”

“제가 보기엔 다즐링인데요.”

“하지만 눈을 봐요. 과일처럼 달콤하게 반짝이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까르륵, 맑은 웃음소리가 홀에 번졌다. 소녀들은 정말로 친절해서 대화에 잘 끼지 못하는 나를 배려해 여러 가지를 물어봐 주었다. 나는 가슴이 콩콩 뛰었다.

‘멋지다, 즐거워!’

아이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드물었던 터라 이 자리가 설레고 재미있었다.

“보석들의 미소를 보니 흐뭇하구나.”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우리는 모두 몸을 일으켰다. 황후와 황비가 우리를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우리가 그녀들에게 예를 표하자 후·비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로웨나 황비는 내 옆에 앉아 생긋 미소지었다.

“영애는 무슨 차를 마시고 있으려나?”

“저는 실론을…….”

“어머나, 우리는 취향이 비슷하구나. 나도 실론티를 좋아한단다.”

그녀가 후후 웃으며 시종에게 손짓했다. 시종이 그녀의 찻잔에 차를 따랐고, 그녀는 내게 초콜릿 스콘 접시를 내밀었다.

“스콘도 좋아하니?”

황비가 이것저것 챙겨 주었지만,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가 나를 살뜰히 대하는 이유는 호감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은 나를 어떻게 이용해 먹을까 고민하던 사채업자와 비슷했다. 무엇보다 우리 쪽을 보는 황후의 표정이 서늘해서 그녀가 자꾸 신경 쓰였다.

‘체하겠다…….’

로웨나 황비가 밀크 저그를 집으며 나를 보았다.

“그런데 영애는 별궁에 어찌 왔을까? 마차는 아닐 테고.”

“네?”

“포털이 있으니 말이야.”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로웨나 황비는 빙그레 웃었다.

“어디까지 열 수 있니?”

“…….”

“옮길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사비에르 영애는 한 번에 장정 반백 명을 옮긴다던데, 영애는 어떨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묻는 말은 어물쩍 넘길 수도 없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요. 사비에르 영애와 비교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앞으로도 비교할 생각은 없습니다.”

정쟁엔 끼어들지 않겠다는 선언에 로웨나 황비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투명한 밀크 저그를 흔들던 그녀가 “그렇구나.” 하고 낮게 중얼거렸다.

황후 그라니아는 어떤 질문에도 초연하게 대답하는 세니아나를 흘깃 쳐다보았다.

‘속을 알 수가 없군.’

지금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건 세니아나 프렌시프보다도 로웨나였다.

‘찢어 죽일 계집 같으니.’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탓에 오늘만 해도 몇 차례나 신경전이 오갔다. 게다가 보란 듯이 새로운 성녀인 세니아나 프렌시프에게 들러붙어 있었다.

로웨나는 차에 따뜻한 우유를 부으며 세니아나에게 가벼운 농담을 건넸다. 세니아나는 불편한 듯 보였으나, 별다른 내색은 없었다. 하기야 사비에르 가의 성녀가 황후 자신의 며느리가 될 테니, 다른 줄을 잡는 것이 이로울 터였다.

‘꼴 보기 싫군.’

한 모금 더 차를 마신 황후가 몸을 일으키려 했을 찰나였다.

“컥―!”

로웨나가 입을 틀어막더니 컥, 컥, 사레들린 듯 기침을 시작했다.

“황비님, 황…… 꺄아악!”

그녀의 말벗이었던 크리스틴이 비명을 내질렀다. 로웨나의 손 아래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꺄악!”

“경비병! 경비병!”

“폐하, 이쪽으로!”

놀란 시녀장이 황후를 감쌌다. 황후마저 굳어진 채 쓰러진 로웨나를 쳐다보았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즉시 통신석을 통해 오늘 일어난 사건이 황제의 귀에 들어갔다. 크게 분노한 황제는 조사관을 투입했고, 사비에르 가의 포털을 통해서 온 조사관들은 별궁을 발칵 뒤집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나 독이 발견되었다. 황후의 짐 속에서.

조사관이 황후의 시녀장을 추궁했다.

“이건 비상이 아닙니까.”

그러자 황후궁의 시녀장이 소리쳤다.

“희석해서 벌레를 쫓는 약으로 쓰려던 겁니다. 황후 폐하께서 벌레를 극도로 꺼린다는 건 모두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하지만 독인 것은 분명하지요.”

“뭐라고요! 황후 폐하를 의심하신단 말씀입니까!”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다. 하지만 동부 별궁을 발칵 뒤집어도 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황후가 유일했다. 황후는 기사에게 둘러싸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을 허비했다.

그녀는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었다. 표정에 초조함과 근심이 가득했다. 말벗이며 시종들, 다른 황비들조차 그녀와 얽히게 될까 봐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다. 나만 제외하면.

나는 그녀에게 슬그머니 다가갔다.

“저, 폐하…….”

황후가 싸늘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난 까치발을 들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 말을 들은 황후의 눈이 커지더니 그녀가 내 어깨를 잡고 주변을 살폈다.

“사실이냐?”

고개를 끄덕이자 황후의 얼굴이 환해졌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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