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2권) (4/24)

로열 셰프 영애님 2권

4장

나는 문을 지키고 선 경비병들을 살피고 다시 입을 열었다.

“로웨나 황비님의 자작극이 분명해요.”

로웨나 황비가 차에 넣으려고 우유를 찾을 때 보았다. 가까이 있는 밀크 저그를 흔들어 보더니, 일부러 멀리 있는 저그의 우유를 차에 부었다. 그리고 분명히 그 우유는 덩어리져 있었다.

‘우유는 산에 섞이면 응고되지.’

그래서 치즈를 만들 때나 생크림을 만들 때 일부러 레몬즙을 넣는 것이다.

‘우유는 상하면서 응고되기도 하니까 그런 것을 찾으면 즉시 사용인을 다그쳐야 맞아.’

황후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네 목을 걸고 단언할 수 있느냐?”

“네.”

짚이는 건 우유뿐만이 아니었다. 황비는 오늘 과할 정도로 황후를 자극했다. 황후가 그녀를 혐오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처럼.

‘황후의 짓으로 몰아가려고 했던 거야.’

황후의 생각도 나와 같은지 입술을 꽉 짓씹었다.

“음흉한 계집…….”

“…….”

“그런데 영애는 어째서 내게 이런 것을 이야기해 주는 거지?”

“저는…….”

음식으로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싫고, 로웨나 황비가 못된 일을 꾸민 걸 아는데 침묵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더 큰 건…….’

난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그녀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황후 폐하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요.”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내 쪽은 건드리지 말아 주라, 하는 눈빛을 본 황후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러더니 이내 아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난 현명한 사람을 좋아하지. 그리고 영애는…….”

“…….”

“아주 현명하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황도에 오면 나를 찾아라. 이번 일에 도움을 받았으니 귀하게 대접하마.”

나는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혔다.

“멀리서 폐하의 안녕을 기원하겠습니다.”

귀한 대접은 괜찮아! 하는 의미였다. 황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겸손한 사람도 좋아한단다.”

안 좋아해 주는 쪽이 더 기쁜데요…….

황후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무슨 독을 썼는지도 알고 있나?”

“네?”

“알면 일이 더 쉬워지지. 유통책을 잡아들여서 매입자를 토설하게 하면 되거든.”

“독의 종류는…… 모르겠어요.”

내가 눈치를 보자 황후는 괜찮다는 듯 내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어.”

난 양심이 콕콕 찔려서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사실은 로웨나 황비가 먹은 독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까.

* * *

음독 사건이 발생한 지 나흘째가 되었다. 난 로웨나 황비에게 은밀히 불려갔다. 방으로 들어가자 황비가 새하얀 낯빛으로 내게 생긋 미소지었다.

“자, 이리 앉으렴.”

황비가 침대 옆의 간이 의자를 가리켰고, 나는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아직 어지럽긴 하지만.”

황비는 이마를 가볍게 쥔 채 눈을 감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황후도 그랬지만, 황비도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 속에 맹독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황비가 내 손을 다정히 잡으며 물었다.

“그래, 내가 병상에 있는 동안 어찌 지냈니?”

“황후 폐하께서 챙겨 주셨어요.”

“……솔직하구나, 아주.”

어차피 알고 물어본 거면서.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엔 성에가 끼어 있었다. 무엇보다 황후는 며칠 내내 오직 나만을 찾았다. 정원으로 불러서는 과자도 주고, 사탕도 주면서 살뜰히 챙겼다. 그럴 때마다 멀리서 지켜보는 시선을 느꼈다. 고레일이 감시한 결과 로웨나 황비의 시녀였다.

“황후 폐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내게 이야기해 주련?”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비님께서 음독하셨다는 걸 폐하께서 알고 계세요.”

“뭐라고?”

황비의 동공이 바짝 수축하고, 숨결이 거칠어졌다.

“그걸 영애가 어떻게 알지? 누가 그런 소리를 황후에게 지껄이는 걸 본 거니?”

“그게, 음……. 제가 말씀드렸거든요.”

“……!”

한동안 충격을 감내하듯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나를 노려보았다.

“그걸 영애가 어떻게 알고, 왜 황후에게……!”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황후의 줄을 잡겠다는 거니?”

“…….”

“너는 틀렸어. 황후는 에이레네 사비에르를 며느리로 들일 거다.”

“…….”

“같은 성녀인 너와 사비에르의 딸은 필연적으로 맞붙어야 할 터. 그때 황후가 누굴 도울 것 같지?”

황비가 내 손을 거칠게 놓으려던 찰나, 내가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저는 황후 폐하의 줄을 잡을 생각이 없어요.”

“뭐?”

“황비님. 저는 황비님께서 드신 독이 타란 텔라라는 건 황후 폐하께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황비의 눈이 바르르 떨렸다. 내가 독의 정체까지 안다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이를 악물었다.

“그걸, 그걸 어떻게…….”

‘전문가인 도미니크에게 물어봤지. 황비와 같은 증상을 만들 수 있는 산성 독은 타란 텔라 하나뿐이랬어.’

황비가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

가슴이 쿵쿵 뛰었지만, 나는 차분히 말하려 노력했다.

“타란 텔라는 아주 희귀해서 정체만 알면 유통책을 잡는 건 일도 아니잖아요. 유통책이 잡히면 황비님께서 매입하셨다는 것도 드러날 테니까…….”

“…….”

“제가 황후 폐하의 손을 잡으려 했다면 독의 정체까지 알려드렸겠지요.”

그렇다면 로웨나 황비는 곧바로 역풍을 맞았을 테고.

난 조심스럽게 이어 말했다.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는 일을 강행하신 이유가 뭔지 알고 있어요.”

4황자가 성녀와 결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되면 황태자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갈 거다. 그래서 독을 준비한 것이다. 황후를 위험에 빠뜨려야만 결혼을 저지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로웨나 황비도 이게 몹시 위험한 일이란 건 알고 있었기에 주저했다. 그래서 되도록 나를 포섭하려 했지만―

[글쎄요. 사비에르 영애와 비교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앞으로도 비교할 생각은 없습니다.]

난 정쟁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는 말을 했다. 그래서 황비는 기어이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양손으로 황비의 손을 잡았다.

“황후 폐하께서 궁지에 몰리면 더 큰 전쟁이 초래될 거예요.”

“내게 방법은 이것뿐이야. 네가 내 아군이 되지 않는 한!”

“아군은 아니어도 친구를 염려할 순 있어요.”

“뭐?”

“제 염려가 이번처럼 도움이 될 수도 있겠죠.”

“…….”

“사실 낯을 가려서 바로 친해지지는 못하지만요……. 천천히 시간을 들이면…….”

우물쭈물 말하자 황비는 나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눈꼬리에 물기가 어릴 정도로 웃던 그녀가 내 뺨을 쓰다듬었다.

“좋아, 천천히 친구가 되어 볼까?”

내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이자 황비는 다정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난 친구에겐 끝없이 다정하단다.”

―하며.

황비는 곧바로 황궁에 연락했다. 자신은 독을 먹은 적이 없고, 그저 피로가 쌓여 각혈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조사관들이 황궁으로 복귀하는 것을 보고 나는 소파에 털썩 누워 버렸다.

‘거짓말을 몇 번이나 했더니 양심이 아파…….’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두 사람을 생각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음흉한 계략이 있었다. 일이 돌아가는 분위기를 봤을 때 패자가 되는 쪽은 황후였다. 결국 황후는 살기 위해 세력을 모을 거다. 그렇게 되면 후·비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황제가 나서 황후를 제압하려고 하겠지.

‘그건 내전이라고.’

그리고 전쟁엔 포털이 필요하다. 한쪽이 사비에르를 포섭하면, 다른 쪽은 나를 포섭하려 들 거다. 사람 죽이는 일에 도움을 주는 건 절대로 싫었다.

“아가씨는 안전하신 거예요?”

시트론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든 된 것 같아. 문제가 있긴 해도.”

“문제요?”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시트론이 문을 열자 두 명의 시녀가 서로를 노려보다가 우리를 보며 생긋 웃었다.

“폐하께서 영애와 다과를 함께 하시길 바라십니다.”

“로웨나 황비님께서 함께 산책하시고 싶으시다 전하셨습니다.”

“순서를 지키시게. 황후 폐하의 명이 우선이야.”

“막 기운을 회복하신 로웨나 황비님께서 영애를 애타게 찾으십니다. 배려해 주시지요.”

문제는 이거였다. 이번 일을 해결하려다가 황후와 황비 두 사람의 눈에 들어 버린 것!

‘으아아.’

난 울고 싶어졌다.

“내궁의 기강이 이토록 엉망이었나.”

“만인의 어머니신 폐하께서 설마 편찮으신 황비님의 청을 거절하실까요.”

“저…….”

나는 신음을 삼키고 시녀장들을 보았다.

“두 분을 같이 뵈면 안 될까요?”

“…….”

“…….”

가열하게 다투던 시녀장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들도 내가 상대방을 따라가느니 차라리 함께 만나는 게 낫다고 생각한 듯했다. 시녀장들은 내 말을 전하겠다며 가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모시겠습니다.”

“가시지요.”

나는 시녀장들의 뒤를 쭐레쭐레 쫓아갔다. 정원으로 들어간 나는 테이블에 모인 황후와 황비들, 그리고 선별된 말벗들을 발견했다.

“왔는가.”

“왔구나.”

황후와 황비가 동시에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난 잠시 고민하다가 그들 사이에 앉았다. 그녀들은 서로를 노려보았지만, 별말은 없었다. 나는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는 왜 부르셨는지…….”

로웨나 황비가 생긋 웃으며 테이블에 상자를 올려놓았다.

“열어 보렴.”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이건!”

놀라서 황비를 쳐다보니 그녀가 생긋 웃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물방울 모양의 진주, 고혹적인 빛깔과 우아한 자태. 사비에르 영애가 황후에게서 받았다는 티어 블랙이었다.

“이걸 어째서 제게…….”

눈을 동그랗게 뜬 나를 보고 황비는 우후후, 웃었다.

“소중한 사람에겐 귀중한 보석을 내려야지.”

어리둥절한 내 앞에 또 하나의 상자가 놓였다. 이번엔 황후였다. 그녀가 눈썹을 까딱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런. 의견이 같군.”

“폐하께서는 왜…….”

“내 것도 열어 보게.”

황후의 상자를 열자 그곳에는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었다. 그것도 주먹만 한 것이었다.

“영원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테고.”

“…….”

“의미는 ‘오래도록 곁에서 말벗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정도로 할까.”

다른 황비며 말벗들이 기함을 하고 두 개의 상자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준 보석은 그만큼 근사했다. 까막눈인 내가 보아도 어마어마하게 귀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로웨나 황비와 황후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가까스로 삼켰다.

‘큰일 났다.’

그냥 마음에 든 게 아닌가 봐. 쏙 들어 버렸어…….

‘어, 어쩌지.’

나는 손을 테이블 아래서 손을 달달 떨었다.

그 후로 며칠이 지났다. 나는 그간 황후와 로웨나 황비의 지극한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매일같이 경쟁하듯 찾아대서 결국 오늘은 참지 못하고 탈출해 버렸다. 프렌시프의 마차 안에서 숨어 있는데 밖에서 조그만 발소리가 들려왔다. 난 쪼그려 앉아 창밖으로 눈만 빼꼼 내밀었다.

‘헉!’

밖에 있던 도미니크 황자와 눈이 마주쳤다. 삐딱하게 서 있던 그가 나오라는 듯 눈짓하기에 나는 꾸물꾸물 마차 밖으로 나갔다.

“저, 저하…….”

“여기서 뭐 하십니까.”

“피신이요…….”

“호위는 또 놓고 오셨고요.”

“하지만 호위를 데려가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꼬치꼬치 물을 테니까…….”

“귀찮은 게 목숨보다 중요합니까?”

“하지만 황궁의 기사님들은 훌륭하니까 괴한이 숨어들지 못할 거예요.”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위험한 법이죠.”

“내부의 적도 물리쳐 주실 거잖아요.”

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하가!”

그는 어쩔 수 없단 얼굴로 웃다가 다시 얼굴을 굳혔다.

“이리 숨어계시면 힘들겠죠.”

“조심할게요…….”

“부디.”

나는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보았다.

“여기 있다고 말씀하실 거예요?”

“…….”

“돌아가기 싫어요.”

“제가 말하지 않아도 들키실 겁니다.”

“왜요?”

“곧 마차 정비 시간이니까요.”

내가 시무룩 어깨를 떨구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따라오십시오.”

“네?”

“여기 있다간 들킨다지 않았습니까.”

도와주려나 보다!

난 먼저 걷는 그를 얼른 따라갔다. 도미니크는 사람들이 없는 곳을 훤히 알고 있었다. 샛길로 들어가자 머리만 부딪치지 않을 정도로 작은 문이 나왔다. 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서 한참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보인 건―

“와아―!”

새순이 돋기 시작한 광활한 들과 푸릇푸릇한 나무들. 색색의 집, 구름 위로 날아가는 새. 동부가 한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첨탑으로 들어가는 쪽문이었구나.’

“쪽문을 어떻게 아세요?”

순찰하다 발견했나 싶었는데 도미니크는 말이 없었다. 잠시 후에야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릴 적에 잠깐 이곳에 있었습니다. 죽을 곳을 찾아 헤매다 발견했죠.”

“……왜 죽고 싶으셨어요?”

“사람을 죽이는 게 두려워서.”

“…….”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한다는 현실이 고단해서.”

나는 그가 신관의 핏줄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축첩이 가능한 황제가 유일하게 손을 뻗을 수 없는 사람이 신관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릇된 태생이었고, 환영받지 못한 아기였으며 버려져야 했다.

전장에서 공로를 세워야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불행을 떠안고 살아온 것이다. 아무런 말 없이 그를 올려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의 뺨에 닿자 찬기가 느껴졌다.

“저하가 살아계셔서 기뻐요.”

“…….”

“견뎌내 줘서, 살아서 날 만나 줘서 고마워요.”

도미니크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눈을 꽉 감은 그가 내 손을 감싸 쥐었다.

* * *

쾅! 사비에르 후작이 책상을 내리쳤다. 황도에 떠도는 소문을 전한 중년의 사내가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그, 그깟 소문은 흘려들으십시오. 뭣 모르는 얼뜨기들이 함부로 입을 놀린 게 아닙니까…….”

“소문의 발원지가 동부 별궁이지 않나!”

“하지만 정말로 황후 폐하께서 에이레네 아가씨를 두고 프렌시프의 계집애에게 푹 빠지셨을 리는…….”

사비에르 후작이 서류를 내던지며 다시 의자에 몸을 붙였다.

‘그래, 그깟 계집애가 내 딸의 자리를 꿰찰 수는 없다.’

소문에 불과한 것이겠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신경이 쓰였다. 프렌시프에서 요구한 배상액을 해결하기 위해 수면 위의 사업을 대부분 정리했다.

그 덕에 호사가들 입에서 별별 소문이 다 오르내렸다. 사비에르의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는 둥, 가문의 역사를 두고 말하면 사비에르가 어떻게 프렌시프를 뛰어넘겠냐는 둥. 사비에르 후작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통신석을 가져와라.”

남자가 허겁지겁 뛰어나가 통신석을 가지고 돌아왔다. 신호를 맞추자 통신석이 곧 점멸을 시작했다. 이윽고 황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무강하셨습니까.”

[사비에르에서 잘만 해 준다면야 무강하지 아니할 이유가 없지.]

황후의 날 선 목소리에 후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안부나 묻자는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지?]

“황도에 얄궂은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시시한 자들의 입방정이 하루 이틀 일이던가.]

“그야 저도 알고 있습니다만, 폐하와 관련된 소문은 흘려듣기 힘들지요.”

[무슨 소문이기에.]

사비에르 후작이 입매를 우그러뜨렸다.

“폐하께서 프렌시프의 딸을 각별하게 아끼신다더군요.”

물론 소문을 믿는 건 아니었다. 황후는 곁을 잘 내주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사비에르조차 수없이 문을 두드린 후에야 겨우 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황후가 의뭉스럽게 웃음을 흘렸다. 후작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사실인 것은 아니겠지요.”

[사비에르 영애와 나란히 두어도 좋을 아이였네. 영리해. 로웨나의 헛짓거리를 중간에서 수습한 것도 그 아이일 것이야.]

“폐하!”

사비에르 후작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프렌시프는 가문의 역사며 권력이며 재력까지 모자람 없는 가문일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의 그릇에 품어 보게나.]

“척을 져온 세월이 기백 년입니다. 이제 와 어찌 합을 맞춘단 말입니까!”

[그러니 더욱 그대 대(代)에서 마무리해야지 않겠는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통신석의 불빛이 사라졌다. 책상 위에 놓인 물건을 와르르 쓸어내린 후작은 그러고도 한참을 씨근덕거렸다. 제국의 물자가 사비에르의 손안에서 움직일 적엔 황후가 이 정도로 오만하진 않았다.

‘수를……. 수를 써야 한다.’

다시 제국을 움직이는 항로가 되어야 했다.

‘아니, 다시는 나를 무시할 수 없도록 더 높은 곳을 봐야지.’

그러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당장 조슈아를 불러들여라!”

성녀 에이레네와 쌍둥이인 장남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온 건 근 5년 만의 일이었다.

* * *

나는 흔들리는 도미니크의 눈동자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다 타고 남은 재와 같기도 하고, 마른 성벽 같기도 한 묘한 회색의 눈동자가 시리도록 푸르게 빛났다.

“…….”

“…….”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봤다.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만으로 가슴이 수런거렸다.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고 나서야 난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젖겠어요. 어서 안으로―”

그가 내 손목을 잡았다.

“전 오늘 돌아갑니다.”

“네?”

“부황께서 환궁을 명하셨습니다.”

“아…….”

난 아쉬움에 말을 흐렸다. 그가 황도에 돌아가면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른다. 내가 시무룩 고개를 떨구니 그가 말했다.

“다시 보게 될 거예요.”

“언제요?”

“당신이 원하면 언제라도.”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황자였기에 고작 레이디 하나가 원한다고 사사롭게 움직일 수 있는 신분이 아니다. 도미니크가 빙그레 웃으며 내 눈가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곧 다시 보죠.”

‘정말로 언제 볼 수 있는 거예요?’

궁금했지만, 왠지 떼를 쓰는 것 같아서 말할 순 없었다. 우리는 함께 탑을 내려왔다. 그가 나를 성내까지 바래다주었고, 아쉬워하며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날 저녁부터 정말로 도미니크를 볼 수 없었다. 동부제가 끝난 후에 나도 별궁을 나섰지만, 며칠 동안 왜인지 쓸쓸한 기분이었다.

* * *

프렌시프 성에 돌아온 건 보름만의 일이었다. 난 고레일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고생 많았어.”

란슬롯이 다정하게 웃으며 날 반겨 주었다. 가웨인은 내 뺨을 살짝 꼬집다가 인상을 썼다.

“뭐야, 살이 빠졌잖아.”

그런가? 하긴 별궁에서 바짝 긴장해 있느라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다.

“그것들이 괴롭히기라도 했어?”

“아니요?”

나 혼자 괴로운 거였지.

황후는 황궁의 상시 출입패를 주었고, 로웨나 황비는 꼭 황궁에 와 달라고 당부했다.

[로열 키친의 음식을 맛보러 온다고 생각하렴.]

‘로열 키친의 음식이 궁금하긴 해.’

하지만 황궁에 가면……. 두 편으로 나뉜 장난감 병정들이 치고받고 싸우는 상상이 들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아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싫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니아나.”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손을 뻗었다. 무심결에 잡다가 난 깜짝 놀라서 눈을 끔뻑였다.

‘산책할 때마다 잡아 버릇했더니.’

내가 굳어 있으니 할아버지가 손을 끌어당겼다. 란슬롯과 가웨인이 우리를 따라왔다. 할아버지가 나를 데려간 곳은 식당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놀라서 탄성을 터뜨렸다.

“와아―!”

상다리가 부러진다는 말이 이런 걸까. 온갖 산해진미가 테이블에 가득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접시를 본 나는 당황해서 오빠들을 쳐다보았다. 가웨인이 의자를 빼 주었고, 란슬롯은 나를 자리에 앉혀 주었다. 오빠들이 내 양옆에 앉고, 할아버지가 맞은편에 앉았다.

뭐부터 먹어야 할까, 고민하며 쭉 둘러보다가 알았다. 가족들 앞엔 접시가 놓여 있지 않았다.

“안 드세요?”

“우린 먼저 했어.”

그러고 보니 식사시간이 지났을 시간이었다.

‘나 때문에 일부러 와 준 걸까?’

혼자 먹기 민망해하니까 가웨인이 파스타 접시를 덥석 집어서 내 앞으로 옮겨 주었다.

“카르보나라 좋아하지?”

엄청!

특히 수셰프 제레미의 카르보나라는 한 접시를 다 비우고도 아쉬울 지경이었다. 포크로 돌돌 말아 호록 빨아들였다. 담백한 면에 코팅된 계란 소스가 얼마나 고소한지 모른다.

“맛있어요!”

발을 동동 구르며 말하자 란슬롯이 말했다.

“아곤의 음식도 먹어 봐.”

“아곤이 음식을 했어요?”

총주방장인 그는 메뉴 선정과 음식의 검수, 그리고 할아버지의 식사 정도만 맡았다. 접객 만찬에서 종종 메인 메뉴를 만들기도 했는데, 내가 세니아나가 된 이후로는 볼 수 없었다.

‘아곤의 음식이라니…….’

수많은 요리사가 꿈꾸는 로열 키친. 그곳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었던 명장의 요리.

란슬롯이 내게 접시를 건넸다.

“아곤의 특기인 메르게즈다.”

‘메르게즈라면 소시지의 일종인가.’

음식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콩닥거렸다. 나는 곧장 나이프를 들었다. 탱글탱글한 메르게즈는 별로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부드럽게 잘렸다. 포크로 찍어 조심스럽게 입에 넣는데, 가웨인이 씩 웃으며 물었다.

“먹을 만하지? 조부님께서도 자주 찾으시는…… 세니아나?”

“…….”

나는 입을 손으로 막은 채 굳어 있었다.

‘양고기. 양고기로 만든 거지?’

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맛이 나는 거야?

처음 혀에 닿았을 땐 묵직하다고 느꼈는데 몇 번 씹자마자 육즙이 입안 가득 퍼지며 부드럽게 목 안으로 넘어갔다. 양고기 특유의 잡내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향신료와 너무나 잘 어우러져 장점으로 다가올 정도다.

고추의 아린 맛이 혀를 때리기 무섭게 소금기가 부드럽게 감싸 오며 향이 입안에서 불꽃처럼 펑, 터졌다. 가웨인은 멍하니 접시를 바라보는 날 보고 미간을 좁혔다.

“왜? 맛이 이상해?”

“아니요. 너무, 너무 맛있어서…….”

감동이 밀려들었다. 지금껏 내가 해 온 게 요리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나 많은 음식을 먹고 난 후엔 차와 디저트에 둘러싸였다. 오빠들이 번갈아 가며 내 입에 각종 단것을 넣어 주었다. 중간중간 할아버지까지 합세해서 설탕 지옥에 온 기분이었다. 내가 끙끙거리며 배를 두드리고 있으니 란슬롯이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런. 너무 많이 먹였나 보네.”

“끄으응…….”

“괜찮아? 토할래?”

그러면서 손을 내밀었다. 난 기겁하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약이면 돼요…….”

그러자 가웨인이 손에 약봉지를 쥐여 주었다.

“허약해선.”

엄청 많이 먹었는데? 그 정도면 장정도 쓰러질걸?

기가 막혀서 미간을 좁히자 그는 턱을 괴며 나를 보았다.

“그래서? 별궁에선 어떻게 지냈어?”

나는 별궁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내 얘기를 듣던 세 사람은 표정을 굳혔다.

“로웨나 황비가 난데없이 태도를 바꿔서 금좌 11석이 회동까지 했는데 그게 너 때문이었다고?”

가웨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묻자 란슬롯은 픽 웃었다.

“놀랍네.”

할아버지가 말이 없어서 나는 우물쭈물 눈치를 보았다.

“그, 저기…… 잘못했…….”

혹시 혼이 날까 싶어서 목소리가 자꾸만 작아졌다. 란슬롯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황후와 황비가 눈독을 들일 만도 하지.”

나는 의아해져서 물었다.

“하지만 발칙하다고 미워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나도 완전히 눈 밖에 나진 않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결과적으론 황후와 황비 두 사람 모두에게 도움을 준 것이니까. 하지만 그렇게까지 나를 반기게 될 줄은 몰랐다.

“스스로 덫에 기어들어 가는 토끼보다 영리한 고양이 쪽이 더 탐나지 않겠느냐. 이빨만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렇군요.”

나는 차를 호록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웨인이 이어 물었다.

“그리고? 다른 일은 없었어?”

“도미니크 황자님을 만났어요.”

그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그 개자식이 또 왜!”

“개자식이 아니라 황제 폐하 자식인데…….”

“…….”

“그리고 호위단의 책임자로 오신 거예요.”

“알려 준 대로 했어?”

알려 준 거?

‘뭐더라……. 아!’

수작을 부리면 정강이를 걷어차라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수작 부리지 않으셨는데요?”

친구가 되기로 했지.

친구가 생겼다는 게 떠올라서 난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헤헤 웃으며 볼을 감싸니 가웨인의 얼굴이 험악해짐과 동시에 란슬롯이 나를 불렀다.

“세니아나.”

“네?”

내 물음에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해 주었다.

“겉모습이 번드르르한 놈을 조심해.”

가웨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렇지 않은 놈들은 더.”

“사내놈들 속엔 시퍼런 칼이 있다고 생각해.”

“죄다 음흉하다고.”

“이상한 놈들 천지니까 아무도 믿지 마라.”

길라게온 남자들은 이상한가 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후식까지 먹은 후, 나는 방으로 돌아갔다. 터질 것 같은 배를 통통 두드리고 있자 시트론이 들어왔다.

“어디 편찮으세요?”

“아니……. 너무 많이 먹어서.”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며칠 전부터 아가씨 맞이할 준비로 성이 시끄러웠대요.”

“다들 정말 좋은 사람들이야.”

“아가씨께서 좋은 분이시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편지 뭉치를 잔뜩 내려놓았다.

“대부분 파티 초대장이더라고요.”

“이렇게나 많이?”

이따금 파티 초대장이 오긴 했지만, 몇 장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로 산처럼 쌓여 있어서 깜짝 놀랐다.

“성녀라는 게 밝혀지기도 했고, 황후와 로웨나 황비님께서 각별히 아끼신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으니까요.”

“흐음…….”

“아카데미에 돌아가지 않으실 거라면 사교 데뷔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젠 정말로 선택을 할 때였다. 윤세나였을 적엔 나도 일류 셰프를 꿈꾼 적이 있었다. 주방에 남녀차별이 사라졌다는 기사는 연일 쏟아지는데, 현장에서는 그게 웬 말이냐다. 유학은커녕 조리 학교도 나오지 않은 나는 보조부터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야 했다. 하지만 여자의 몸으론 보조 자리도 구하기 힘들었다.

보조들은 주방 기구를 관리하고, 눈알이 빠지도록 재료를 다듬어야 하는 데다가, 새벽같이 나와서 제일 늦게 퇴근했다. 그래서 체력이 약한 여자보다 남자를 선호한다.

‘하지만 이곳에선 나도 할 수 있어.’

불합리한 상황에 끙끙 앓지 않아도 된다. 나만 열심히 노력하면 돼. 아곤처럼 훌륭한 요리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자 욕심이 생겼다.

“시트론, 아카데미 복학계는 언제까지 제출해야 해?”

“마감은 일주일 뒤예요.”

“그래? 그럼 제출할 시간은 충분하네.”

“네?!”

시트론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복학을 저어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응?”

“졸업이 얼마 남지 않으셨으니 로열 키친 응시원을 내셔야 하잖아요. 그걸 꺼리셔서 복학하지 않으시는 줄 알았어요.”

“그게 왜?”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면 물었다.

“응시원엔 보호자의 서명이 필요하잖아요.”

“할아버지의 서명?”

“아니요, 각하의 서명을 받으셔야 해요.”

각하라면…….

‘아빠.’

내 표정이 굳어지자 시트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복학하시면 황도에 서명을 받으러 가셔야 한다고요?”

나는 끙, 신음을 삼켰다. 세니아나에게 아빠는 할아버지나 오빠들보다 더 불편한 존재였다. 사람에게 절대로 정을 붙이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과거의 할아버지나 오빠들보다도 훨씬 무뚝뚝했다. 제국의 절세 미남이라고 불리던 사내. 젊은 나이에 작위를 물려받아 황도를 주무르게 된 권력자. 가족에게조차 정을 붙이지 않는 냉혈한. 아빠에게 붙는 수식어를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로열 키친 입관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건 성적 우수자뿐이었다. 어차피 입관 시험에 응시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 세니아나의 성적은 저 바닥에서 맴돌고 있으니까. 내가 아카데미 졸업 시험에서 1등이라도 하지 않는 한 무리지. 설마 내가 1등을 하겠어?

‘수업만 들으려는 거니까 괜찮을 거야.’

그렇게 생각한 나는 복학계를 곱게 접어서 상자에 잘 보관했다.

* * *

다음 날, 세니아나는 산책 후에 오빠들과 함께 나베리우스의 서재로 향했다. 집사는 세니아나가 좋아하는 차와 주전부리를 준비하여 나베리우스의 서재를 찾았다. 그가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기 무섭게 가웨인이 케이크를 세니아나 앞에 놓았다.

“네가 좋아하는 그루터기 같은 케이크다.”

“바움쿠헨이요.”

“뭐가 됐든. 자, 먹어.”

“배부른데…….”

세니아나는 산책 전에 쿠키를 잔뜩 먹었더니 아직 배가 꺼지지 않았다며 고개를 저었다.

“고작 쿠키 몇 개 가지고 배부를 리가.”

“손바닥만 한 쿠키를 네 개나 먹었는데요?”

세니아나의 말에 란슬롯이 픽 웃으며 케이크 접시를 밀어 놓았다.

“그래, 체하면 안 되지.”

“하지만 형, 저 녀석 손목은 툭 꺾으면 부러질 것 같다고.”

“사람 손목은 꺾으면 다 부러져.”

그의 말에 란슬롯이 세니아나의 편을 들어 주었다. 세니아나는 란슬롯이 쥐여 준 찻잔을 든 채 힐끔힐끔 눈치를 보았다. 주머니를 슬쩍 매만지기도 하고, 할아버지를 빤히 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후다닥 시선을 피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군.’

세 남자뿐만 아니라 시중들던 사용인들까지 웃음을 삼켰다. 어느 땐 깜짝 놀랄 만큼 의연하면서 또 어느 땐 갓 태어난 새끼 오리처럼 허둥댄다. 지켜보고 있으면 꽤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두 형제는 일부러 모른 체 세니아나가 하는 양을 즐겁게 지켜보았다.

“저, 저기…….”

차 한잔을 몽땅 비우고 나서야 세니아나는 겨우 용기를 냈다.

‘드디어.’

“뭔데?”

가웨인이 픽 웃으며 물었다.

“있잖아요, 그, 아카데미 말이에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얘기하던 세니아나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아카데미는 왜.”

“복학 신청을 이번 주까지 해야 한다고 해서요.”

나베리우스와 란슬롯, 가웨인이 잠시 침묵했다. 학기가 시작하면 적어도 반년은 얼굴 보기 힘들 거다.

“굳이 복학할 필요가 있나?”

가웨인이 중얼거리자 란슬롯이 빙그레 웃으며 맞장구쳤다.

“새 학기가 코앞이니 집 구하기도 힘들 거야.”

물론 ‘기숙사 제도가 있긴 하지만’이라는 말은 쏙 빼먹었다. 나베리우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네가 성안에서 지내고 있으니 아곤에게 배우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그 말에 세니아나가 웅얼거렸다.

“입학을 했으니 졸업도…….”

“로열 키친에 들어갈 생각이 없으면 굳이 졸업하지 않아도 돼.”

가웨인의 말에 세니아나는 나베리우스를 쳐다보았다.

“제가 로열 키친에 들어가길 바라셨잖아요.”

“그건……! 상황이 바뀌었다. 네가 황궁에 있으면 정쟁에 휩쓸릴 수도 있어.”

“로열 키친 안에서 있는 거라면 다르지 않을까요? 그곳은 매일이 시험인 곳이니까 후·비들도 형평성 때문에 쉽게 접근하지 못할 거예요.”

그야 그렇겠지만. 세 남자는 말을 돌렸다.

“안 돼, 무리야.”

“굳이 요리를 따로 배울 필요가 있나.”

“썰고 간하는 것쯤이야 성에서도 배울 수 있잖아.”

세니아나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또다시 웅얼거렸다.

“그냥 썰고 간하는 게 아닌데…….”

하지만 나베리우스와 두 형제는 모른 척 계속 말을 이었다.

“오래 하면 뭐든 손에 익는 법이지. 그걸로 충분하다.”

“조부님 말씀이 맞아. 말이 로열 키친이지 그냥 부엌이잖아.”

“요리보다 즐거운 게 얼마든지 있어.”

세니아나가 빈 찻잔을 티 코스터 위에 쿵,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너무해.”

그러곤 휙,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니, 세니아나! 우리 말은 네가 하찮다는 게 아니라……!”

그들이 허둥지둥 세니아나의 뒤를 쫓았다.

형제는 하루 종일 세니아나를 쫓아다녔다. 하지만 세니아나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니까.”

“변명하게 해 줘.”

하지만 세니아나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녀가 샤프너로 식칼의 날을 갈았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손마디가 다 새하얬다.

“세니아나.”

“막내야.”

“…….”

달라지고 나서는 순둥이 같던 녀석이었는데, 한 번 화가 나니 이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식칼을 잘 정리한 세니아나는 흥, 고개를 돌렸다.

“하인을 시키지.”

“…….”

“아, 더 좋은 오븐으로 바꿔 줄까?”

“…….”

세 남자는 입을 다문 세니아나의 눈치를 보았다. 가웨인이 가늘게 한숨을 흘리며 말했다.

“이게 다 조부님 때문이잖습니까.”

그러자 함께 있던 나베리우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냐.”

“세니아나를 아카데미로 보내자고 한 게 조부님이시니까요.”

“네가 검이 아니라 식칼을 들었으면 없었을 일이지.”

“애초에 욕심만 부리지 않았으면…….”

“가문을 위한 일이었다.”

“늘 가문이 우선이시죠.”

조부와 손자가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기어오르는 게냐.”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가웨인!”

“역정 내지 않으셔도 들립니다!”

그때 세니아나가 버럭 소리쳤다.

“그만!”

그러곤 양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이렇게 싸우실 거면 제 조리실에서 나가세요.”

“…….”

“…….”

나베리우스와 가웨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서로 사과하세요.”

“뭐?”

“뭐라고?”

“사과하시라고요.”

세니아나가 인상을 콱 찡그렸다.

* * *

“죄, 죄송합니다.”

“나도 잘한 것은 없군…….”

두 사람이 서로 사과하는 것을 보고, 난 허리에서 손을 풀었다. 그러자 가웨인이 눈치를 보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얘기를, 아까 일은 오해라니까?”

“…….”

“내 말은 요리가 하찮다는 게 아니라 굳이 아카데미를 갈 필요가 있냐는 거지.”

“…….”

고개를 수그리니 이번엔 란슬롯이 내 손을 잡고 눈을 맞췄다.

“화 풀어 주면 안 될까?”

“…….”

“얼굴 봐 주지 않을 거야?”

“…….”

“막내에게 미움받으니 마음이 너무 아픈데.”

그러니까 마음이 약해져서 나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여름이면 요리사들은 땡볕 더위에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켜지 못하고 주방에 서요.”

“…….”

“여름엔 숨이 콱 막혀서 질식할 것 같고, 맨손으로 불과 싸워야 해서 지문은 다 닳아요.”

“…….”

“일이 끝나면 온몸이 아린데, 또 새벽같이 재료를 준비하러 가요. 매일매일.”

검을 드는 기사들만 고된 것이 아니었다. 식칼을 든 요리사들도 하루하루 치열하게 싸웠다. 내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자 란슬롯이 쪼그려 앉아 나를 올려다보았다.

“우리가 잘못했어.”

그러자 가웨인이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들을 슬그머니 쳐다보았다.

“다음부터는 그러시면 안 돼요?”

“그래.”

“물론!”

그들의 대답을 들은 난 우물쭈물 말했다.

“요리사들이 그렇게 힘든 일을 계속하는 건 요리가 좋기 때문이에요…….”

그러고 할아버지를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저도 그렇고요.”

“…….”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싶어요. 그러니까 아카데미에…….”

한동안 침묵하던 할아버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통신석을 항상 소지하고 다녀라.”

“네?”

“저녁엔 꼭 연락해서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말해.”

“할아버지!”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한다면 즉시 불러들일 것이다.”

나는 활짝 웃으며 할아버지에게 달려갔다.

“감사해요!”

그러자 오빠들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지었다. 그날 바로 아카데미에 복학계를 보냈다. 가지고 있는 것들로 짐을 꾸리려고 했는데, 가족들이 제대로 준비하자며 나를 끌고 중심가로 향했다. 나는 의상실 간판을 보고 눈을 끔뻑거렸다.

‘의상실은 왜?’

할아버지가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앉아 있던 여성이 튕기듯 일어나 달려왔다.

“어, 어르신, 부르시지 않고 어찌 직접……!”

그녀가 허둥지둥 인사하고 나서 안을 향해 소리쳤다.

“캐시! 남성복 카탈로그를 가져와라!”

“내 손녀의 옷을 사러 왔다.”

“아아, 그러셨군요.”

그녀는 나를 향해 살짝 무릎을 굽혔다.

“레티샤라 합니다. 동부에선 제법 유명한 재봉사지요.”

레티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동부에서 첫손으로 꼽는 디자이너가 바로 레티샤였다. 예전에 드레스를 사볼까 해서 알아볼 때, 그녀의 드레스 가격을 들은 적이 있었다.

‘작은 저택 두 채 값이었지.’

그런데 아카데미에 갈 건데 왜 드레스를? 의아해서 할아버지를 보고 있으니 그가 입을 열었다.

“드레스가 아냐. 조리복이다.”

“조, 조리복이라고요? 조리복이라면 기성복으로도 많이 나옵니다. 저희는 오더 메이드만 취급하는지라…….”

“그래서.”

레티샤가 잔뜩 당황하자 할아버지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냉기가 배었다. 그뿐인데도 오금이 저릴 만큼 위압적이었다. 나는 레티샤가 가여워져서 괜찮다고 웅얼거렸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레티샤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손녀가 남들과 똑같은 기성복을 입어야 한다는 말이냐.”

왜인지 ‘왜 우리 애 기를 죽이고 그래!’ 하고 소리치던 드라마 속 장면이 떠올랐다. 레티샤가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그, 그렇지요……. 그럼 아가씨, 치수를 재실까요…….”

치수를 잰 후에는 원단을 보여 줬다. 하나같이 조리복으로 만들기엔 너무나 고급인 천이었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오빠들만 힐끗거렸다.

‘도와줘!’

하지만 오빠들은―

“스카프는 황금색이 좋겠지?”

“견습생 스카프는 빨간색으로 통일했던 것 같은데. 그렇지, 세니아나?”

어느새 할아버지의 편에 서서 천을 고르고 있는 그들을 보고, 나는 우울해졌다. 조리복을 만들고 나서는 대장간에 갔다. 대장간의 주인 카일은 세니아나의 기억 속에도 있을 정도로 유명인이었다. 그의 검을 사기 위해서 많은 기사가 바다를 건너올 정도로 명인이었다.

“시, 식칼을 만들라굽쇼?”

“종류별로 두 벌.”

“…….”

“왜?”

“아닙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다음은 황궁에서도 탐을 내는 일류 연금술사에게 프라이팬과 냄비를 주문했고, 그다음은 통신석 세공사를 찾아갔다. 그렇게 장인들을 들들 볶은 후에야 할아버지는 만족했다.

개학을 하루 앞두고 의뢰한 물건들이 도착했다. 아곤이 입을 떡 벌리고 칼을 쳐다보았다.

“신물을 만드는 대장장이라더니 정말이었군요.”

그러자 수셰프 제레미가 침을 꿀떡 삼켰다.

“이 프라이팬 좀 보십시오. 코팅이…….”

“연금술사 시온의 솜씨다. 아무리 함부로 굴려도 3년은 코팅이 벗겨지지 않겠어.”

“무쇠솥이 이렇게 가벼울 수가.”

환복을 도와준 하녀들은 크게 감탄했다.

“세상에나!”

“무슨 조리복이 이렇게 예쁘죠?”

“그러게요. 드레스보다 몸매가 더 아름다워 보여요.”

“레티샤의 조리복이라더니 정말…….”

“이렇게 예쁜데 잠옷처럼 편하시대요.”

그들이 혀를 내둘러서 난 진짜로 부끄러웠다. 아카데미로 갈 준비를 마친 나는 교복을 입고 배웅 나온 가족들을 보았다.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해.”

“밥 잘 챙겨 먹고.”

“기숙사가 엉망이면 말해라. 새로 지어 주마.”

나는 생긋 웃으며 잘 지내겠다고 말했다. 가웨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기분이 왜 이렇게 나쁘지.”

“네?”

“도둑놈 품에 보내는 기분이야.”

“아카데미에 가는 건데요?”

“아는데, 감이 나빠.”

그는 작게 중얼거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잘 지내야 한다.”

“네!”

난 활짝 웃었다. 그리고 목걸이를 쥔 채 눈을 감았다.

* * *

아카데미 구석에서 눈을 뜬 나는 얼른 사무처에 짐을 맡겨 놓고, 개학식을 하는 대강당을 찾았다. 안으로 들어가서 나와 같은 색의 배지를 한 학생들 사이에 섰다. 그리고 학기 일정표를 펼쳤다.

‘내일부터 수업이니까 오늘은 기숙사에 짐을 옮기고…….’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뒤에서 와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새 교장 이야기 들었어?”

“오늘 아침에 결정되었다며? 전임 교장은 경질된 거야?”

“그렇게나 뇌물을 처먹었으니 저도 할 말 없겠지.”

남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이상한 불쾌감이 들었다. 마치 플로헤타를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갑자기 퍽! 머리 위로 종이 뭉치가 날아왔다. 놀란 내가 머리를 잡고 있자 한 무리의 소년들이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이게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기어들어 왔네.”

그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름이 떠올랐다.

“왜? 네 대단한 부모가 졸업장은 따오래?”

[자콥]

“대단한 부모는 무슨. 등신, 그런 허풍을 여태 믿고 앉았냐.”

[피터]

“오우, 그래도 제법 예뻐졌는데. 이번 학기엔 더 귀여워해 줘야겠어.”

[빌리]

그리고―

붉은 곱슬머리의 사내가 내 허리를 슥 매만졌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그의 손을 쳐 냈고, 그는 낄낄 웃으며 중얼거렸다.

“우리 센이 올해는 날 얼마나 즐겁게 해 주려고 이렇게 앙탈을 부리는 거지.”

숨이 콱 막힐 정도로 짙은 불쾌감이 온몸을 감쌌다.

[프란츠]

이 악질 무리의 대장 격이었다. 아카데미에선 신분을 드러내는 것을 엄금하였는데도, 그의 집안 이야기는 알음알음 퍼져 있었다. 하지만 워낙 대단한 가문의 자제라 교수들도 한 수 꺾고 들어간다는 남자였다. 그들이 나를 둘러싸자 다른 학생들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때였다. 뎅, 뎅, 뎅! 종소리가 울리고 교수가 목청을 높여 외쳤다.

“다들 정렬해라!”

교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프란츠 무리가 칫, 혀를 차며 제 자리로 되돌아갔다. 나는 한숨을 삼키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직급이 높아 보이는 교수가 틀에 박힌 인사말과 독려를 했다. 이어 새 교장을 소개한다는 말이 나왔다. 대강당이 크게 술렁였다. 여학생들이 흥분해서 속닥거렸다.

“개학식 전에 멀리서 잠깐 뵀는데 정말 멋지시더라.”

“‘그분’이시라며?”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여기까지 내려온 걸까.”

“그러게. 황궁 직속 학술원도 아니고…….”

“얘, 우리도 황궁 직속이긴 해.”

“요리 아카데미라서 그렇지.”

까르륵, 웃음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거대한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쿠웅― 문이 열리고, 화려한 차림의 사내가 단상으로 올라왔다. 남자와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나는 놀라서 굳어졌다.

‘어떻게…….’

어떻게 도미니크가 여기에!

화려한 무늬가 수놓아진 깔끔한 재킷, 적포도주색의 화려한 케이프. 성장(盛粧)한 그는 환상 속에서 빠져나온 듯 근사했다. 학생들이 숨을 작게 들이켰고, 난 미간을 좁혔다.

“올 거였으면 알려 주지!”

내가 입을 뻐끔거리자―

‘아.’

방금 조금 웃은 것 같아.

착각일까 싶었는데 옆에서 학생이 “나 보고 웃으셨어!” 하며 탄성을 터뜨렸다. 강당을 한 번 둘러본 도미니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미니크 로젠카로튼입니다.”

황가의 성이 그의 입에서 나오자 사람들이 기함을 했다. 미리 소식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정말로 황자가 올 줄은 몰랐다며 멍하니 도미니크를 올려다보았다. 그중 몇몇 학생들은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고 허리를 굽혔다.

“황가에 광영 있기를.”

“황가에 광영 있기를.”

공적인 자리에서 황실의 핏줄에게 하는 인사말이었다. 나는 그것으로 귀족과 평민을 조금 구분할 수 있었다. 평민은 황실의 핏줄을 볼 일이 없기 때문에 인사법을 알 리 없었다. 그런데―

‘어?’

프란츠를 본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개학식이 끝나고 난 교장실로 향했다. 도미니크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왜 이곳에 있는 건지. 동부 별궁에선 어째서 말이 없었는지. 또 보게 될 거라는 얘기가 이런 뜻이었는지. 물어볼 게 산더미였는데 교장실 안엔 들어가지도 못했다. 방 앞에 사람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오늘 그를 보는 건 힘들 것 같았다.

‘일단 기숙사에 짐부터 풀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사무처로 갔다.

“이름이?”

“센이에요.”

아카데미에서 쓰는 이름을 대자 직원은 명부를 뒤적였다.

“어머나, 좋은 방을 신청했네. 이번에 새로 단장한 방인데 어떻게 알았니?”

“원래 새로 단장하는 일은 없지 않나요?”

“몇 주 전에 갑자기 불이 났거든.”

“불이요?”

“방학 중이라 방이 비어 있었는데 난데없이 불이 났지 뭐야.”

갑자기 자연 발화라니 이상하다. 내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자 직원이 후후 웃었다.

“운이 좋은 모양이구나.”

“제가 아니라 가족이 대신해 주었어요.”

란슬롯이 꼭 맡겨 달라고 해서.

“그럼 가족이 운이 좋네.”

사무처의 직원이 작게 웃었다. 그러곤 기숙사 호수가 적힌 서랍에서 열쇠를 꺼내 주었다. 난 열쇠와 짐을 찾아서 기숙사로 향했다.

‘빨리 짐을 풀고 란슬롯에게 고맙다고 연락해야지!’

방문을 연 나는 깜짝 놀랐다.

“와아!”

깨끗한 크림 톤의 벽지와 나뭇결이 산 아기자기한 가구, 넓은 전면 창. 방 안엔 작은 싱크대와 화장실이 있었고, 전면 창밖엔 협소하나마 테라스도 딸려 있었다. 나는 신이 나서 창문을 열었다. 아카데미 주변으로 흐르는 강과 초목이 우거진 숲이 보였다.

‘이게 광고에서만 본 리버뷰일까?’

한강은 아니지만.

나는 방이 마음에 쏙 들었다. 고아원에서 자취를 꿈꿀 때 상상하던 방이 꼭 이랬다. 문을 꼭 닫고 통신석을 연결했다.

[세니아나?]

란슬롯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난 신이 나서 소리쳤다.

“오빠, 최고! 최고!”

[뭐?]

“오빠가 신청해 준 방이요. 새로 단장한 방이래요. 너무 예뻐요!”

란슬롯이 기분 좋은 목소리로 웃었다.

[눈에 아른거려서 어떡하지.]

“네?”

[틈날 때마다 돌아와.]

“그럴게요.”

가족들은 이것저것 물었다. 방은 어떤지, 몸은 괜찮은지, 별일은 없는지, 수업은 언제부터인지. 끊임없이 물어서 대답하느라 바빴다.

수학여행이나 수련회를 갔을 때가 떠올랐다. 난 캠프파이어가 정말로 싫었다. 레크리에이션 강사가 부모님 얘기로 가슴을 사무치게 만들면 아이들은 꼭 가족에게 전화했다.

[엄마, 사랑해.]

[아빠아…… 엉엉.]

없는 용기를 긁어모아 친부의 전화번호를 눌렀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친부의 인생에 나는 없는 사람이라는 것만 다시 확인했다. 나는 헤헤 웃으며 말했다.

“있잖아요.”

[응?]

“여기서 연락할 수 있어서 좋아요.”

[…….]

“애들이 가족한테 연락하는 게 부러워서 항상 구석에 있었는데.”

[…….]

“고맙습니다.”

가족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몇 분이나 침묵이 이어져서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자, 자주 하지는 않을게요. 그냥…… 한 번씩…….”

[자주 해 줘.]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좋으니까, 응?]

“괜찮아요?”

[고마운 건 우리야.]

란슬롯의 목소리가 너무나 다정해서 코끝이 아렸다.

“이제 짐을 풀어야 해요.”

[그래. 좋은 꿈 꿔라.]

할아버지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고 통신을 종료했다. 어쩐지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얼른 짐을 풀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짐을 정리하고 나니 아리던 코도 진정되었다.

* * *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조리복으로 갈아입고, 교실을 찾았다.

“우와, 우와!”

교실엔 영상으로만 봤던 실습용 조리대가 쭉 늘어서 있었다.

진짜 멋져! 나는 황홀한 표정으로 조리대를 바라보았다.

“내 쿡탑은…… 여긴가?”

프라이팬을 내려놓으려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긴 내 자리야.”

나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짙은 적발과 맑은 청안을 가진 장신의 남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보자마자 이름이 떠올랐다.

[아소]

아카데미에선 프란츠에 버금가는 유명인이었다. 시험이란 시험에선 매번 1등에다 전교생을 통틀어 가장 근사한 미소년이었다.

“아, 미안…….”

나는 슬금슬금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다른 조리대로 짐을 옮기려고 하는데 그가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네 자리는 여기.”

“으응…….”

나는 꾸물꾸물 짐을 다시 올려놓았다. 그리고 교재를 뒤적이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그를 쳐다보았다.

“오랜만이라 기억이 안 난 거야.”

“……그렇겠지.”

짧게 대답한 그는 창틀에 기대 책을 읽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이 조리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대화를 나누느라 교실은 왁자지껄했고, 나는 그 안에서 바짝 긴장해 있었다.

‘나, 나에게도 말을 걸어 줄까?’

기다렸지만 아무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나는 시무룩해져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말을 걸어야 하는데…….’

그러나 아이들은 나와 시선만 마주치면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내가 있는 조리대로 여학생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날 지나쳐 아소에게 향했다.

“저…… 아소, 올해 들어갈 조 정했니?”

얼굴이 발그레한 여학생이 아소를 올려다보자 그는 책을 소리 나게 덮었다.

“아니.”

“그럼 우리와 함께 하는 게 어때? 매일 저녁마다 스터디를 하는데 네게도 도움이…….”

“됐어.”

그렇게 말한 아소는 그의 쿡탑 앞에 섰다. 여학생들은 얼굴이 붉어져서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아소를 쳐다보았다.

“왜?”

부럽다…….

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윽고 종이 울렸다. 앞문을 통해 들어온 교수가 쾌활한 목소리로 학생들에게 인사했다. 강의 일정을 설명한 그는 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학생들은 첫날부터 수업이냐고 볼멘소리를 뱉었지만, 난 정말로 즐거웠다.

“음식마다 가장 맛있는 온도가 있다는 건 다들 알고 있겠지. 빵은…….”

교수의 말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빼곡히 적으며 경청했다.

“과일을 메인으로 한 샐러드의 최적 온도는 30도. 다들 한 번씩 먹어 보자.”

나눠 준 음식은 정말로 맛있었다. 아카데미에 오길 정말 잘했어!

수업이 끝나고 뿌듯한 표정으로 교실을 나왔다. 교장실이 있는 복도 끝은 여전히 와글거렸다.

‘오늘도 도미니크는 못 보겠네.’

아쉽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걷는데 갑자기 몸이 휙! 끌려갔다.

복도 창고로 끌려 들어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자 저……!”

“쉿.”

도미니크가 내 입을 막았다. 내가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이고 난 후에야 그는 손을 아래로 내렸다.

“왜 여기 계세요?”

“귀찮은 개떼들이 있어서.”

“여긴 어떻게 오신 건데요?”

“황제 폐하께 벌을 받았습니다.”

“벌이요? 왜요?”

내가 걱정 어린 얼굴로 물으니 그는 여상하게 대답했다.

“명하신 것을 찾아오지 못했거든요.”

“아……. 프렌시프 령에서 찾으시던 그것 말이죠.”

“네.”

“없던가요?”

“제가 찾던 도중에 다른 사람이 먼저 발견했죠.”

“새치기? 그 사람 나빴네요!”

내 말에 그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주인은 그쪽이었습니다.”

“그럼 황제 폐하께서 나빴네요.”

아들에게 남의 걸 훔쳐오라고 시킨 게 아닌가. 이상한 사람이다, 정말.

도미니크는 고개를 숙이고 소리 내어 웃었다. 이렇게 웃는 그를 본 건 처음이라 조금 신기한 기분이었다. 도미니크의 눈빛이 어쩐지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렇죠. 잘 빼앗겼죠.”

“……제가 말실수했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난 어색해져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가 말이 없으면 난 왜 이렇게 어색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도미니크가 물어왔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다른 사람과 있을 땐 말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거든요?”

아까 아소와 있을 땐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저하와 있을 때는 쭈뼛거리게 되고, 콩닥거려요.”

“…….”

도미니크의 눈이 조금 일렁이더니 이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무서워서 그런가.”

“네?”

“저하는 제 첫 친구니까요. 나를 미워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두려운 걸지도.”

“…….”

“……?”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런 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요?”

“내가 당신을 싫어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

“절대로.”

사실 오늘 아무도 말 걸어 주지 않아서 조금 우울했는데 이젠 괜찮았다. 내가 처음 사귄 친구가 날 절대로 싫어하지 않겠다고 해 주었으니까.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려고 해서 양손으로 입술 끝을 꾹 눌렀다. 그런 나를 도미니크는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 * *

사비에르 후작 저.

장남에게 보냈던 하인이 빈손으로 돌아온 것을 보고, 후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인은 곤란한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노, 노력은 했습니다만, 도련님 고집이 보통이 아닌 것을 주인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후작이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장남이라고 있는 녀석이 도통 도움이 될 줄을 몰랐다. 자라며 내내 속을 썩여서 억지로 식칼을 쥐여 놨는데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다.

“어째서 오지 않겠다는 게야!”

“해, 해야 할 일이 있다셨습니다.”

“해야 할 일이라니.”

“웬 사람이 눈에 거슬리시는 듯했습니다.”

“빌어먹을!”

그가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여 그놈이 지금 어디 있다는 것이냐.”

“도, 동부 아카데미에…….”

후작이 쯧, 혀를 찼다. 다른 곳이라면 흠씬 두들겨서라도 데려오겠지만, 아카데미라면 다른 문제다.

‘어차피 로열 키친에 들여보내려면 졸업장이 필요하니.’

그의 목표는 아들을 로열 셰프로 만들어 제국의 물자를 주무르는 것이었다. 거기에 성녀인 딸이 도운다면 세니아나 프렌시프쯤이야 상대도 되지 않을 터였다.

‘사고만 치지 말고 졸업해라.’

그럼 제 손으로 날개를 달아 줄 테니.

* * *

수업이 끝난 저녁. 나는 기숙사 지하의 식당으로 내려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학생들이 꽤 많이 와 있었다. 난 내부를 쭉 둘러보고 접시를 들었다.

‘멋지다! 뷔페식이구나.’

음식이 여러 종류인 데다가 하나 같이 맛있어 보였다. 역시 요리 아카데미의 음식이라고 생각하며 좋아하는 음식을 담았다. 훈제 오리와 아스파라거스 샐러드, 동남아풍 게살 수프가 오늘 내 저녁 메뉴였다. 전 지역의 음식이 다 있지만, 동부는 프렌치를 우선하다 보니 대부분 양식이었다.

‘여기서 배울 수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양식에 약하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스푼을 들었을 찰나에 퍽! 내 접시 위로 각종 음식이 돼지죽처럼 섞인 덩어리가 떨어졌다. 위를 올려다보니 프란츠를 제외한 그의 일당들이 껄렁거리며 날 내려다보고 보았다. 프란츠의 오른팔 격인 자콥은 히죽 웃으며 내 옆에 앉았다.

“많이 먹으라고.”

나는 그를 싸늘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재밌니?”

“무척.”

이들이 이토록 천박하게 구는데도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기숙사 사감까지 이쪽을 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홱 고개를 돌렸다. 자콥은 제 포크로 엉망이 된 내 접시를 쿡쿡 찔렀다.

“작년까지가 좋았지?”

“…….”

“그러니까 프란츠의 여자가 되라고 했을 때 얌전히 말을 들었으면 올해 이런 꼴은 안 당하잖아.”

그의 말을 들으니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이 얼핏 떠올랐다. 방학 전에 이들이 찾아왔었다. 그러곤 프란츠에게 간택된 것을 영광으로 알라며 오만하게 굴었다. 화가 잔뜩 난 세니아나는 프란츠의 뺨을 후려치고 학교를 떠났다.

‘저질이잖아?’

기가 막혀서 그를 쳐다보자 자콥은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네년 때문에 내가 그때 프란츠에게 얼마나 면목이 없었는지 알아?”

여전히 화가 나는지 그는 인상을 왈칵 찌푸렸다.

“프란츠가 제 여자로 삼아 주겠다고 했으면 감사한 줄 알고 얌전히 ‘네’ 할 것이지.”

그러더니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이어 말했다.

“이제 보니까 줘도 안 먹게 생겼구만.”

난 식기를 내려놓고 자콥을 쳐다보았다.

“그 애의 어디에 매력이 있어서 내가 ‘네’ 하고 따라야 하는 거야?”

“뭐?”

“너 같은 흉측한 저질을 친구로 둔 바보인데.”

“이게 오냐오냐하니까……!”

그가 버럭 소리치며 몸을 일으켰을 때, 나는 접시를 그에게 던져 버렸다.

“헉!”

“꺄악!”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자콥의 얼굴에서 음식물 쓰레기가 된 요리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내가 옷을 탁탁 털고서 돌아가려는데 자콥이 내 손목을 틀어잡았다.

“이 미친년이!”

그의 고함에 식당이 쩌렁쩌렁 울렸다. 난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고, 오히려 기숙사 사감이 당황해서 달려왔다.

“이게 무슨 짓이냐!”

사감은 음식물이 잔뜩 묻어 얼룩덜룩해진 자콥에게 손수건을 건네고 날 돌아보았다.

“당장 사과해라.”

“제가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사감은 프란츠 일당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사람에게 음식을 던졌으면 응당 사과를 해야지!”

엄한 목소리에 자콥의 입매가 비죽 올라갔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애들도 제게 같은 짓을 했어요.”

“음식을 사람에게 던진 것과 접시에 던진 것이 어떻게 같아! 당장 사과해라.”

나는 고개를 짧게 끄덕이곤 자콥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비웃음이 만연했다.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 입에서 나오는 말이 전부 더러워서 쓰레기통인 줄 알았지 뭐야.”

그러자 주변에서 풋!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일당은 물론이고 사감의 얼굴까지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사감이 내 손목을 틀어잡았다.

“정말 안 되겠구나! 따라와!”

“죄송하지만, 그 전에 교무 위원회실이 어딘지 가르쳐 주시겠어요?”

“네가 거긴 왜!”

“사감님의 업무 태만에 관해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뭐라고?”

“제게 가해진 폭력을 보시고도 침묵하셨으니 태만이지요.”

“내, 내가 언제 그런 걸……!”

“저는 이 애들이 제게 똑같은 짓을 했다고 했지, 제 접시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렸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걸 안다는 건 직접 봤다는 거잖아?

내 말뜻을 이해한 사감은 낯빛이 거무죽죽해졌다. 손목을 쥐고 있던 손에서 스르륵 힘이 풀렸다. 그녀가 왜 저 애들의 행동을 묵인했는지는 알고 있다. 일당을 건드리면 프란츠의 눈 밖에 날까 봐 겁이 났던 거겠지. 프란츠가 대단한 가문의 자제라는 게 소문이 났으니까.

아카데미에서 신분을 드러내지 못하게 한 건 이런 일을 경계한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학교에 고발하면 당연히 그녀는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때, 멀찍이 있는 테이블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프란츠가 몸을 일으켰다.

“그만들 해.”

자콥과 일당의 표정에 짙은 낭패감이 어렸다.

“프, 프란츠.”

자콥이 그에게 다가갔으나 프란츠는 시선조차 내주지 않았다. 사감이 이때다 싶어 도망치듯 식당을 빠져나갔다. 나에게 바짝 다가온 프란츠가 속삭였다.

“이 미친년, 너 나한테 완전히 찍혔어.”

나는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프란츠의 얼굴이 콱 일그러졌다.

* * *

[이런 덜떨어진 걸 무리에 끼워 줬단 말이지, 내가.]

프란츠의 말을 떠올린 자콥은 이를 갈았다.

‘그 망할 계집!’

그 계집만 아니었어도 프란츠의 화를 사는 일은 없었다. 프란츠가 누구인가. 교수들까지 좌지우지하는 미래의 권력자였다.

‘무려 그분의 핏줄이니까!’

프란츠는 그에게 있어 하늘이 내려 준 동아줄이자 앞으로의 인생에 탄탄대로를 깔아 줄 신이었다. 그래서 자콥은 그가 시키는 일은 범죄라도 서슴없이 했다.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놈이 있으면 곤죽을 만들었고, 마음에 드는 계집애는 겁박을 해서라도 품에 안겨 줬다.

‘5년간 그 난리를 피웠는데 이제 와 버림받는다고?’

그러느니 범죄 경력에 한 줄을 더 추가하는 게 백번 낫다. 자콥은 갈고리가 달린 밧줄을 기숙사 난간을 향해 던졌다. 센, 그 계집애의 방이 3층이니 충분히 기어 올라갈 수 있다.

“망할 년, 잡히면 일단 개처럼 맞는 거다.”

흠씬 두들겨 놓고, 프란츠에게 가서 싹싹 빌라고 협박을 하자.

‘그럼 그 콧대도 꺾이겠지.’

자콥이 히죽 웃고 다시 밧줄을 던지던 그때였다.

“컥!”

뒷덜미가 붙잡혀 그대로 짓눌렸다.

“뭐야, 이 새……! 이거 안 놔?!”

자콥이 손아귀에 잡힌 벌레처럼 버둥거렸지만, 웬 힘이 이렇게 센 건지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었다.

“놓으라니……!”

“조용.”

목소리를 듣는 순간 소름이 전신을 내달렸다. 포식자 앞의 사슴이라도 된 양 뿌리칠 수 없는 공포가 사지를 옭아맸다. 핏물이 배인 것 같은 목소리는 어딘지 낯익었다.

“다, 당신…….”

“그 입 다무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야.”

손발이 와들와들 떨리고,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저, 저는, 그, 그냥 장난을 치…… 치려고……. 드, 들어갈 생각은 없…….”

퍽! 남자가 자콥의 머리채를 잡고 그대로 바닥에 내던지듯 찍어눌렀다. 두개골이 박살 난 것 같은 격렬한 통증에 자콥은 꿈틀, 꿈틀, 떨었다. 코 밑에서 뜨끈한 피가 줄줄 새어 나오고, 입안에선 부러진 치아와 침, 피가 엉망으로 뒤섞였다.

“쟈못…… 요셔를…….(잘못…… 용서를…….)”

치아가 숭숭 빠진 곳을 통해 말이 샜다. 눈물 콧물에 핏물까지 범벅이 된 자콥은 벌벌 떨며 애원했다. 그런 자콥의 목덜미를 지그시 누르면서 사내는 말했다.

“다물어라.”

“끅, 끄윽…….”

“그 사람의 잠을 깨우지 마.”

낮게 읊조린 후에 사내는 손날로 자콥의 목을 내리쳤다. 컥! 단말마 같은 소리와 함께 늘어진 자콥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서 멀찍이 서 있던 부관이 입을 열었다.

“어찌할까요, 저하.”

도미니크는 묵묵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아카데미에서 치워.”

“하지만 침입은 미수에 그쳤습니다. 그러니까 창문이라도 연 후에 잡아야 한다고 말씀드렸…….”

도미니크가 멈춰 서서 부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살벌한 눈빛에 부관이 흠칫, 물러났다.

“부모가 학교 앞에서 시위라도 벌인다면 골치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가 변명하듯 중얼거리자 도미니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아닙니다.”

부관은 비명을 삼켰다. 그가 아카데미에 온 건 황제와 은밀히 나눈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라지만, 남들 눈엔 그저 경질당해 쫓겨온 것이다. 이럴 때 일어나는 소란은 그의 경쟁자들만 신이 나는 일이었다.

‘되도록 조용히 계셔야 한단 말입니다…….’

하지만 도미니크는 한 번 뱉은 말을 바꾸는 남자가 아니었다. 부관은 한숨을 내쉬고 늘어진 학생을 둘러멨다.

* * *

다음 날, 아침. 수업을 가기 위해 기숙사를 나오던 나는 게시판 앞에서 우글거리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자콥이 퇴학이라니.”

“프란츠가 오른팔이 퇴학당하는 걸 그냥 두고 봤대?”

“맞아, 대귀족의 자제라면서.”

“교장이 승인했으면 끝이지 뭐. 프란츠가 아무리 날고 기는 가문의 영식이라도 황족 앞에서까지 기를 펼 순 없지.”

뭐라고? 학생들의 말을 들은 나는 깜짝 놀랐다. 그들 사이에 파고들어 게시판에 다가갔다.

[자콥 멘디.

위 학생은 품행이 불량하고, 수차례 학우들을 폭행…… 면학 분위기를 흐린바…… 제적한다.]

‘정말이잖아!’

어제 식당에서 그런 일이 있었으니 없는 쪽이 더 반갑지만……. 갑자기 왜?

프란츠 무리는 몇 년이나 학교를 발칵 뒤집고 다녔으나 한 번도 징계 대상이 된 적이 없었다. 물론 아이들의 말대로 프란츠가 황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리는 없었을 테지만…….

그가 교장이 된 건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교내 분위기를 다 파악하고, 불량 학생들을 골라냈다고?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도미니크가 일을 엄청 열심히 하나 봐.’

좋은 교장 선생님이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소리쳤다.

“자콥 멘디…… 멘디?!”

그러자 곁에 있던 다른 학생이 물었다.

“왜?”

“내 마부의 성이 멘디야.”

“흔한 성은 아니잖아?”

“자콥이 어디서 왔다고 했지?”

“남부의 아르콜 지방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내 마부도 아르콜에서 왔는데! 아, 그러고 보니까 내 또래의 아들이 있다고 했던 것 같아.”

그러자 다른 애들이 “어머머!”, “뭐라고?” 하고 소리쳤다.

“아카데미에서 그렇게 난리를 치기에 뭐가 있나 했더니. 가자, 집에 연락해야겠어.”

그러자 학생들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며 그 아이를 따라갔다.

‘우와, 퇴학 무섭다.’

성이 밝혀져서 신분이 다 드러나는구나.

‘원래는 보복 때문이라도 퇴학 안내서에 성을 밝히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바뀌었을까? 어쨌든 난 절대로 퇴학당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결심하며 걸음을 옮겼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때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도미니크와 그의 부관을 발견했다. 반가워서 손을 들려다가 시선을 느끼고 슬그머니 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도미니크는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날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도미니크가 지나가며 내가 끌어안은 책 사이로 무언가를 살짝 집어넣었다. 난 살금살금 책 사이로 들어간 그것을 꺼냈다.

‘아, 사탕이다.’

별궁에서 자주 먹었던 달콤한 우유 맛의 사탕. 어쩐지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난 그가 준 사탕을 물고 교실로 들어왔다. 자리에 앉으니 곧 수업 종이 울렸다. 필기구를 꺼내고 있으려니 앞문을 통해 교수가 들어왔다.

‘특이한걸.’

올이 풀린 셔츠, 다 낡은 바지, 앞코가 해진 구두. 머리는 새집처럼 엉망이었고, 안경이 워낙 커서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실습3을 담당하는 쟝뤼크다. 수업 중에 경고를 받으면 퇴실. 퇴실이 세 번 이상이면 더는 내 수업에 들어올 수 없다.”

설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오늘 실습 요리는 오믈렛이다.”

그의 말에 교실이 술렁거렸다.

“오믈렛?”

“오믈렛이라고?”

누군가 손을 들고 말했다.

“오믈렛은 초급 과정에나 배우는 요리인데요.”

그러자 쟝뤼크가 안경을 슥 추켜올렸다.

“너희들이 초짜가 아니라고 누가 그러지?”

“예?!”

“내 눈엔 다 얼뜨기들이야. 다들 뒤에 준비된 재료를 골라 와라.”

학생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교수는 다른 말이 없었다.

‘난 좋은데…….’

오믈렛은 정말 기본적인 음식이지만, 의외로 섬세한 기술이 필요하니까.

학생들은 불만 어린 얼굴로 재료가 있는 교실 뒤로 향했다. 달걀의 종류가 엄청 많았다. 대부분 표면이 깨끗한 달걀을 가져갔다. 나도 그들과 같은 달걀을 들고 가려다가 문득 멈춰섰다. 그리고 짧게 신음하며 달걀을 살폈다.

‘이상한데.’

뭔가, 묘하게 걸렸다. 난 그 옆에 있는 달걀을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풉.”

내 재료를 본 같은 조리대의 학생이 실소를 터뜨렸다. 옆 조리대의 프란츠 무리도 낄낄거렸다.

“저런 달걀로 만든 요리를 먹으면 병 걸리지.”

“더러워.”

그들의 말처럼 내 달걀은 조금 더러웠다. 하지만 난 개의치 않고, 물에 잘 씻어 달걀 보관함에 하나씩 세워 두었다. 쟝뤼크는 학생들이 가져온 재료를 쭉 둘러보았다.

“너.”

“네?”

“나가.”

“너, 너, 너. 나가라.”

“예에―?!”

수업을 듣지도 못하고 퇴실 명령을 들은 학생들이 기함했다.

“뭐가 잘못된 건지는 말씀해 주셔야……!”

“이 조리대에 있는 놈들은 전부 나가라.”

“교수님!”

대부분, 아니, 그가 지나온 조리대의 학생들은 전부 퇴실 명령을 받았다. 난 잔뜩 긴장해서 에이프런을 꾹 말아 쥐었다.

“넌…….”

그는 내가 가져온 재료를 보고 슥 시선을 올렸다. 내 눈을 한 번 바라본 그가 말했다.

“계속 수업을 들어도 좋아.”

“뭐라고?!”

쟝뤼크의 말에 학생들이 소리쳤다. 축객령을 들었던 프란츠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고함을 내지르듯 말하자 쟝뤼크는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이때껏 재료 보는 눈 하나 키우지 못한 놈들이 무슨 수업을 듣는다는 거냐.”

“예?!”

쟝뤼크는 나를 쳐다보았다.

“네가 설명해라. 왜 이 달걀을 골랐지?”

“네? 그건…….”

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른 달걀들은 전부 뾰족한 면이 위를 향해 있었는데, 이 달걀만 완만한 면이 위를 향해 있어서…….”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야!”

나는 미간을 좁히며 소리치는 프란츠를 쏘아보았다.

“달걀의 숨구멍은 뾰족한 부분이 아니라 완만한 부분에 있다고.”

그러니까 다른 달걀들은 보관을 잘못했다는 거지.

다른 학생들이 어버버거리며 말했다.

“무, 무슨! 고작 그런 차이로……!”

“그런 차이를 아는 놈들을 프로라고 부르는 거다.”

그렇게 말한 장뤼크가 교실을 돌아보며 읊조렸다.

“알았으면 썩 꺼져.”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학생들이 하나둘 문을 나섰다. 남은 건 나와 만년 1등인 아소뿐이었다.

‘두 명만 데리고 수업을 한다는 거야?’

하지만 그는 정말로 수업을 시작했다.

쟝뤼크의 수업이 끝나고 나는 내내 멍한 표정이었다.

‘굉장해…….’

그가 시연한 오믈렛은 환상적이었다. 부드럽고, 촉촉한 데다가 색과 모양이 예술품처럼 아름다웠다. 아무리 따라 하려고 해도 좀처럼 되지 않았다.

‘프라이팬을 세 번 정도 흔들었는데…….’

어느 타이밍에 움직여야 그렇게 예쁜 모양이 잡힐까.

나는 얼굴을 발그레 물들인 채 복도를 걷는 쟝뤼크 교수를 쫓았다. 질문이 잔뜩 있었다. 그를 부르려던 찰나, 한 무리의 아이들이 나를 막아섰다. 프란츠가 살벌한 표정으로 내 손목을 틀어잡았다.

“뭐 하는 짓―”

뿌리치려 했지만, 얼마나 힘이 센지 거의 질질 끌려가다시피 했다. 소각장 쪽에서 멈춘 그가 나를 난폭하게 밀쳤다. 쿵! 벽에 머리를 찧어서 뒤통수가 얼얼했다. 프란츠는 살벌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틀어잡았다.

“너, 요새 자꾸 까부는데.”

내가 손을 쳐내니 그가 으득, 이를 갈았다.

“정말로 처맞는 수가 있어.”

천박하고 비열한 말에 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이번엔 게시판에 네 이름이 걸리겠지.”

“정신 나간 계집애가……!”

잔뜩 흥분한 그가 손을 치켜들었다. 순간 빚쟁이들에게 맞던 때가 떠오르고 공포가 엄습했다.

‘선생님!’

무릎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써 눈을 부릅떴다. 남자애들은 그런 나를 보며 기막히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미쳤네, 이거.”

“너 프란츠가 어느 댁 자제인지 알고 나대는 거냐?”

피터는 히죽거리며 소리쳤다.

“프란츠는 무려! 프렌시프 어르신의 조카란 말이다!”

뭐? 프란츠가 할아버지의 조카라고?

놀라서 쳐다본 걸 당황스러워하는 것으로 해석했는지 프란츠 무리는 낄낄거렸다. 피터가 바닥에 침을 탁, 뱉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거 놀란 것 같은데?”

빌리가 킬킬거리며 대꾸했다.

“그렇겠지. 제깟 게 언제 어르신의 조카를 뵙겠어.”

그때, 건물 창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퍽! 바닥에 꽂힌 그것은 책이었다. 위를 올려다보자 2층 조리실에 있던 아소가 표정 없이 여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새끼가…….”

피터가 으르렁거리듯 말하자 빌리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교수들이 껌뻑 죽는 놈이잖아. 괜히 건드리면 귀찮아져. 그렇지, 프란츠?”

프란츠는 살벌한 얼굴이었지만, 이내 몸을 돌렸고, 피터와 빌리도 그를 따라 사라졌다. 나는 떨어진 아소의 책을 주워들고 그가 있을 2층을 향했다.

“고마워.”

그렇게 말하며 책을 건넸다. 책을 조리대에 올려둔 그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별로.”

“하지만 도와줬잖아.”

“너한테 볼 일이 있었을 뿐이야.”

그가 웬 종이를 내밀었다. 쟝뤼크 교수 수업의 조 신청서였다.

“다음 수업도 너와 나뿐일 것 같으니까.”

“아…….”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은 앞으로 다시는 교실에 들어가지 않겠다며 웅성거렸다. 나는 아소의 이름 밑에 내 이름을 적었다.

[Auhso.J]

그의 이름을 보고 나는 조금 웃었다. 그가 미간을 좁혔다.

“왜?”

“아니, 이름이 특이하다고 생각해서. 거꾸로 하면 ‘조슈아’잖아. 보통은 아소보다 조슈아가 더 익숙하니까.”

그러자 그의 얼굴이 잠깐 굳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어?”

“센, 이라니. 이름보다는 애칭 같잖아.”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어, 어떻게 알았지.

변명하려고 했는데 아소는 신청서와 가방을 들고 먼저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때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통신석이 번쩍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문을 꼭 닫고 통신석을 연결했다.

[아가씨?]

“시트론!”

나는 너무 반가워서 펄쩍 뛸 뻔했다.

[세상에, 아가씨! 잘 지내고 계세요?]

“응! 시트론은? 잘 지내고 있어? 통신석은 어디서 난 거야?”

통신석은 워낙에 고가의 물건이라서 평민은 쉽게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어르신께서 아가씨를 챙기라시며 주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시트론이 너무너무 보고 싶었는데 정말 잘됐다. 내가 기뻐하자 시트론은 후후 웃었다.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음, 세안 용품이랑 노트, 그리고…… 참, 시트론.”

[네.]

“할아버지 조카 중에 혹시 프란츠라고 있어?”

[글쎄요. 가문에 워낙 사람이 많으니.]

“알아봐 줘.”

다른 유명한 가문의 아이들처럼 가명을 쓰고 있을 수도 있어서 그의 생김새까지 자세히 설명했다.

[네, 그럴게요.]

시트론의 대답을 듣고 난 통신을 종료했다.

며칠 후, 시트론에게 연락이 왔다.

[인명록에 이름이 있긴 하더라고요. 프란츠 톰슨. 먼 방계예요.]

“조카라고 하던데?”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죠.]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런데 어째서 서로 몰랐지? 세니아나가 사교 데뷔를 하지 않았다지만, 영지 내에선 꽤 모습을 드러냈었는데.

[하지만 톰슨은 자격이 없을 텐데. 의절 당했거든요.]

“의절?”

내가 물으니 시트론이 대답했다.

[30년 전에 부친이 영지민 상대로 사기를 쳤거든요. 그래서 강제 이주 당하고 연이 끊겼어요.]

“못된 사람이잖아!”

내가 기함하여 소리쳤다.

[그렇죠.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온갖 비열한 술수로 돈을 긁어모아서 꽤 알부자라고 해요.]

그래서 귀족 같은 차림새를 할 수 있었구나. 나를 모르는 이유도 이해가 가고.

“고마워, 시트론.”

[아니에요. 그런데 아가씨, 혹시 톰슨과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시트론이 걱정하는 것도 싫고, 혹시나 할아버지의 귀에 이번 일이 들어갈까 봐 무서웠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한다면 즉시 불러들일 것이다.]

그런 비열한 애 때문에 아카데미를 떠나고 싶진 않았다.

“아니야…….”

시트론은 미심쩍어했지만, 이내 한숨을 흘렸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응!”

[식사 거르지 마시고, 자면서 이불 차내지 마시고, 몸 아프시면 참지 마시고 바로 약 챙겨 드셔야 해요? 그리고―]

시트론은 나에게 열 번쯤 대답을 듣고 나서야 통신을 종료했다. 다음 수업을 할 교실로 들어가니 때마침 수업 종이 울렸다. 졸업 시험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학생들의 집중력이 평소와 달랐다. 아소나 프란츠도 굳은 얼굴로 교수의 말을 경청했다.

“이제껏 여러분의 시험 점수와 졸업 시험 점수를 합산하여 로열 키친 응시자를 선발합니다.”

학생들이 신음을 흘렸고, 교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방 아카데미의 졸업 시험은 본교 교수들이 점수를 매기지 않습니다.”

누군가 손을 들었다.

“외부에서 심사 위원을 초청해 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각계 주요 인사들이 졸업 시험의 심사 위원이 될 겁니다. 즉, 여러분 모두가 시험의 수혜자가 될 수 있죠.”

그러자 학생들이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졸업생들 말로는 거의 요식업의 큰 손들이 온다던데.”

“그렇겠지. 그럼 설마 프렌시프 어르신께서 오시겠어?”

“동부의 지배자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나? 백성 독려차.”

“아니면 그 멋지다는 프렌시프의 두 도련님이라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다.”

“어쨌든 요식업의 큰손들 눈에 들면 취업은 떼 놓은 당상이잖아. 잘만 하면 인생역전?”

“그거야 평민 입장이지. 귀족 재학생들은 관심도 없을걸.”

“그렇지도 않아. 어떤 남작 영식이 큰손의 눈에 들어서 그 집 딸과 결혼했다잖아.”

이미 로열 키친 응시를 포기한 하위권 학생들은 들떴고, 상위권 학생들은 결기 어린 표정이었다.

“시험은 총 3차로, 이달 말 첫 시험이 있습니다. 방식은 심사 위원마다 모두 다르니 여러 방면으로 접근해 보세요.”

그 말을 끝으로 교수는 내일 과제를 발표했다. 콩을 이용한 여름 요리였다.

‘그렇다면 딱 하나지.’

나는 하루 내내 콩을 불려 놓았다. 그리고 다음 날 실습 시간에 불린 콩을 가져갔다. 간단히 콩국을 만들어서 소면을 삶아 얼음과 함께 넣고, 오이와 토마토, 달걀을 쫑쫑 썰어 고명으로 올렸다. 완성한 요리를 교수에게 가져갔다.

“면? 여름 음식을 만들라고 했을 텐데.”

그녀는 미간을 좁히고 나를 쳐다보았다.

“여름 음식이에요.”

“흠…….”

콩국수를 시식한 교수는 화들짝 놀랐다.

“너는 남부 사람이니?”

“아니요, 동부 사람인데요…….”

“동부 사람들에게 차가운 면 요리는 익숙하지 않을 텐데, 내 고향 남부에서나 즐겨 먹지.”

그녀는 놀라워하며 국수를 호로록 빨아들였다.

“어쩜 이렇게 고소하지? 콩을 전부 갈아 넣은 거니?”

“우유를 조금 넣었어요.”

가뜩이나 호불호가 강한 음식인데, 전부 콩만 갈아 넣으면 너무 진해서 거부감이 느껴질 것 같았다.

“호오…….”

교수는 감탄하며 말했다.

“이거 정말 괜찮은데. 내게 레시피를 알려 줄 수 있겠니?”

“네, 정말 쉬워요!”

내가 레시피를 알려 주자 교수는 어머나! 하며 깔깔 웃었다. 시험을 설명할 때의 근엄하던 모습과는 달랐다. 학생들이 우리를 힐끔거렸다. “콩으로 만든 차가운 면 요리라고?” 하며 중얼거리는 애들도 있었다.

“자, 주목!”

교수가 교탁을 탁, 탁, 치며 학생들을 집중시켰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콩국수를 맛보게 했다. 찬 면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은 인상을 썼다.

“이게 뭐가 맛있어?”

“아, 너 동부 사람이지. 난 괜찮은데?”

“맛있어!”

“이걸 무슨 맛으로 먹어? 재밌긴 하다만.”

호불호는 갈렸지만, 창의적이라는 면에선 다들 동의했다. 교수가 실습 평가에 A 도장을 찍었다. 나는 슬그머니 두 손을 모은 채 ‘조상님들 감사합니다.’ 하고 생각했다.

며칠 후, 1차 시험에 관한 공지가 내려왔다. 재학생 수가 워낙 많아 예선, 본선으로 나누어 평가한다고 했다. 그리고 내 상대는 프란츠였다.

* * *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조리실의 불이 환히 켜져 있었고, 학생들은 시험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조리실은 만원이었다. 난 자리가 날 때까지 복도에서 대기하며 레시피를 고민했다. 이곳 복도엔 나뿐이라서 집중이 잘 됐다.

‘주제는 콩과 이상한 열매였지…….’

저번 과제가 콩이었던 것도 힌트를 주기 위해서였나보다. 그런데 도무지 그 이상한 열매가 뭔지 모르겠다. 길라게온에서만 나는 건가? 향이 독특한 데다 맛이 엄청 독특했다.

“분디가 대체 뭐지…….”

“남부에서 나는 열매야.”

“어?”

나는 깜짝 놀라서 옆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삐딱하게 젖힌 아소가 나를 쳐다보았다.

“즉, 심사 위원도 남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남부의 요리는 굳이 따지면 지구의 동양 요리와 비슷했다. 그렇다면 동양풍 요리를 해야겠구나.

“고마워.”

“…….”

“……?”

그는 내 옆에 서서 창밖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 네가 실습에서 만든 콩 요리 말이야.”

“콩국수? 왜?”

“나도 만들어 봤는데 네가 만든 것과는 좀 다르던데…….”

표정엔 변화가 없었지만, 목소리에선 살짝 민망함이 느껴졌다. 나는 노트를 꺼내 슥슥 글자를 적었다. 그리고 종이를 찢어 그에게 건넸다.

“자.”

“뭔데?”

“콩국 만드는 법.”

“……그런 거 알려 줘도 되는 거냐?”

“안 돼?”

“…….”

아소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종이를 받았다. 나는 생긋 웃으며 물었다.

“또 궁금한 거라도 있어?”

종이를 빤히 보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교장과는 무슨 사이지?”

나는 화들짝 놀라서 굳어졌다.

“뭐?”

“봤어. 교장과 네가 창고에서 나오는 거.”

새 학기 시작하고 얼마 안 돼서 도미니크에게 끌려갔던 일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아소의 눈이 나를 응시했고,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건…….”

“…….”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고민했다.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지?’

도미니크와 나는 친구지만, 겉보기엔 남자와 여자였다.

‘아직 장가도 안 간 총각한테 이상한 소문이 나면…….’

안 돼, 내 친구의 혼삿길!

나는 그의 장래가 걱정되어서 희게 질렸다.

‘아소는 누군가에게 쉽게 말할 사람은 아닌 것 같긴 한데.’

학기가 시작하고 꽤 많은 사람이 그에게 다가갔지만, 그는 냉정히 쳐냈다.

‘하지만, 하지만.’

내가 고민하고 있자 아소는 종이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곤란하면 됐어.”

“교장 선생님과 나는 곤란할 만한 사이가 절대, 절대 아니야.”

그때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으아아! 도미니크는 호랑이였나? 제 말 해서 온 거야?

그가 냉기 어린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복도에서 떠드는 건 학칙 위반입니다.”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아소도 말없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도미니크의 차가운 시선이 아소를 스쳐 지나갔다.

“그쪽은 감점, 그리고 그쪽은…….”

나를 본 도미니크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교장실로 따라오세요.”

나만? 같이 실수했는데 왜 나만!

나는 억울해져서 아소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한숨을 내쉬며 내 앞으로 나섰다.

“함께 떠들었으니 함께 벌을 받겠습니다.”

어느새 조리실 밖으로 나온 학생들이 무슨 일이냐며 우리를 구경했다. 도미니크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됐다잖아.”

등줄기가 오싹할 만큼 위험한 목소리에 아소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일이라고 날 것 같은 분위기다. 나는 얼른 아소의 등 뒤에서 나와 도미니크에게 갔다.

“갈게요.”

“…….”

“…….”

두 남자는 말이 없었다. 도미니크가 먼저 등을 돌렸고 아소는 인상을 찌푸렸다. 등 뒤로 학생들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프란츠 일당은 내가 무슨 벌을 받을지 내기를 시작했다.

나는 도미니크의 방 소파에 앉아 손을 꼼지락거렸다.

“…….”

“…….”

“……왜, 왜 그렇게 보세요?”

뚫어질 것 같다고요. 내가 울상을 짓자 도미니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은 뭡니까?”

“아소요?”

“서로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해진 겁니까?”

“같은 반 학우니까요.”

그는 다리를 꼬며 삐딱하게 고개를 젖혔다.

“그럼 난?”

“네?”

“나는 뭐냐고.”

“그야……, 교장 선생님이죠?”

그가 쯧, 혀를 찼다. 그리고 다시 말이 없어져서 진짜 무서웠다.

‘무슨 벌을 주려고 이렇게 무섭게 구는 거람.’

자콥의 퇴학 건으로 받았던 ‘일 잘하고 세심한 교장 선생님’이란 인상이 ‘엄청 무서운 도깨비 교장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저기, 벌은 뭔지…….”

그렇게 묻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부관이 들어와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맛있겠다.’

내가 좋아하는 차와 각종 디저트가 가득했다.

“들어요.”

“네?”

“그게 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잔인해.’

우울한 표정으로 쟁반을 잡고서 하늘 높이 받들었다. 그러자 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 하는 겁니까?”

“들라면서요…….”

“아니, 나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던 그가 고개를 숙였다.

“저하?”

“하하.”

도미니크는 어깨를 가늘게 떨며 웃었다. 그러다 내 뺨을 살짝 꼬집었다.

“미치겠네.”

“……?”

“귀여워.”

난 당황해서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쟁반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쏟아지면 어떻게 해!’

내가 울상을 지으니 그가 웃으며 쟁반을 받아 줬다.

‘엄청 예쁘게 웃는다…….’

도미니크는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드세요.”

“이건 벌이 아닌데요?”

내가 주저하자 도미니크가 말했다.

“그럼 뇌물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부탁하실 일이라도……?”

“전 오늘부터 보름간 황성에 다녀와야 합니다. 그동안 다른 놈과 붙어 있지 마세요.”

“다른 놈이요?”

“방금 본 그놈은 특히.”

그가 한 말을 곱씹던 난 아! 하고 손뼉을 쳤다.

“그렇죠. 아소는 1등이니까 방해하면 안 될 거예요.”

아카데미는 로열 키친에 최대한 많은 졸업생을 배출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로열 키친에 입관하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야 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동부 아카데미는 작년에도 로열 키친 입관자를 내지 못했으니 교장인 그라면 신경 쓰일 만도 했다.

도미니크는 한숨을 흘렸다.

“그런 걸로 해 두죠.”

“아, 아닌가요?”

그렇게 물었으나 도미니크는 “드세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나는 꼼질꼼질 스푼을 들었다.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떠서 입에 넣자 당이 입안에서 펑펑 터지는 것 같았다.

“맛있어요!”

“궁정 파티시에였던 파르바티의 케이크니까요. 그가 황궁을 떠날 때 소피아 부인(이전 황태후)께서도 서운해하셨죠.”

정말로 서운할 만한 솜씨였다. 세 종류의 케이크가 모두 다 맛있었는데, 가장 좋은 건 커스터드 푸딩이었다. 입에 넣자마자 달콤쌉쌀한 설탕 시럽과 뒤섞이며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삼키고 나면 기분 좋은 바닐라 향이 코끝에 맴돈다.

‘너무 맛있어!’

나는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종알거렸다.

“신기해요.”

“예?”

“몽실거리는 건 어째서 하나같이 전부 맛있는 걸까요?”

그가 픽 웃으며 물었다.

“어떤 것들이 있기에.”

“솜사탕도 그렇고, 젤리도 그렇고, 두부도……. 두부?”

불현듯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두부, 두부라고…….’

그가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수첩만 빠르게 뒤적일 뿐이었다. 1차 시험의 과제는 콩과 분디로 만든 요리였다. 분디는 처음 보는 열매였는데 맛과 향은 어딘지 익숙했다. 지구의 동양 음식을 주로 먹는 남부 지방. 그리고 두부.

‘설마 그 열매……!’

나는 후다닥 수첩을 챙겨서 일어났다.

“저기, 저기! 남은 벌이 있으면 다음에 받으면 안 되나요?”

“그러시죠.”

황급히 문을 나서려다 방 안으로 고개만 쑥 내밀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도미니크는 잠깐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재빨리 창고로 향했다. 그리고 분디를 다시 먹어 보았다.

역시 이 맛은……!

‘산초다!’

중국에서 자주 쓰이는 재료. 산초와 콩으로 만든 두부를 사용해서 만드는 음식이라면 한 가지밖에 없지.

‘마파두부.’

나는 산초를 가지고 나와서 조리실 앞을 기웃거렸다. 어느덧 해가 저문 덕분에 조리실에 자리가 생겼다. 난 빈 조리대로 가서 산초를 깨끗하게 씻고, 콩을 불리기 시작했다.

‘산초를 넣은 정통 마파두부는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데.’

어느 정도로 매워야 하지? 아카데미의 심사단이 전부 납득할 수 있는 매운 정도는? 또 재료는 뭘 넣어야 동부 사람이 많은 심사단이 익숙하게 느낄까?

일단 여러 가지로 실험을 해 봐야 할 듯했다. 그날부터 마파두부 요리에 집중했다. 그렇게 1차 시험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시험 준비 기간이 길어질수록, 슬슬 한눈을 팔기 시작하는 학생들이 생겨났다. 주말엔 조리실보다 학교 외부의 파티장이나 펍에서 학생들을 보기 쉬웠다.

프란츠 일행도 시험은 뒷전에 두고 거리에 나왔다. 찻집 앞에 학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술렁이고 있었다. 빌리가 유약해 보이는 소년의 목덜미를 잡고 물었다.

“뭐야, 뭔데 이렇게 벌떼처럼 모여 있냐?”

“그, 그게, 유명인이 왔대서 다들 구경을…….”

“유명인? 교장이 황족이라도 불렀어?”

“아, 아니, 사비에르 가의 성녀가…….”

“뭐?!”

그 아름답다는 길라게온의 별이 동부의 촌구석에 왔다고?

빌리와 피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피터가 휙휙 주변을 살펴보았다. 정말로 사비에르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근처에 대기하고 있었다.

“오오오―!”

피터는 흥분해서 괴성을 내질렀다. 사비에르 가의 성녀는 온 나라의 시선이 집중된 제국의 보물이었다. 역대 성녀들이 황궁에서 황도 근경까지 겨우 길을 연결했다면, 그녀는 제국의 절반을 가로지르는 강력한 포털의 주인이었다.

황궁에서조차 그녀의 손톱 거스러미 하나에 벌벌 떨었다. 황후의 극진한 사랑과 황제의 신임을 받고, 차기 황위에 가장 가깝다는 4황자와 혼약했다.

그런 데다 자애로운 성격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우러르니, 만민이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의 숨결 하나로 제국이 들썩이며 타국에서도 끊임없는 러브콜을 보내왔다.

빌리도 얼굴이 벌게져서 프란츠를 흔들었다.

“사비에르의 성녀라니! 프란츠, 너도 아는 사이야?”

“뭐?”

“그야 넌 프렌시프 어르신의 조카니까 볼 기회가 있었을 수도……!”

프란츠는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이내 큰소리를 떵떵 치기 시작했다.

“아, 에이레네?”

“에, 에이레네? 이름까지 부르는 사이라고?”

“종종 파티에서 봤지.”

“크―! 역시 프란츠, 남들과는 다른 인생!”

빌리와 피터가 동경 어린 눈으로 프란츠를 쳐다보았다. 피터는 신이 나서 소리쳤다.

“나 소개시켜 주면 안 되냐?”

그러자 프란츠는 인상을 썼다.

“후작 영양을 소개? 미쳤어?”

“아니, 남녀로서 말고, 그냥 네 친구라고 얘기해 달라는 거지. 한 번만 뵙고 싶다, 응?”

빌리가 육중한 몸을 흔들며 아양을 떨었다.

“그래, 우리 같은 놈들이 언제 성녀님을 뵙겠어! 친구 덕 좀 보자.”

“자자, 들어가자.”

피터는 프란츠의 어깨를 밀쳤다. 그가 당황하여 소리치려던 찰나 찻집의 경비병이 그를 막아섰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영업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런 게 어딨어!”

빌리가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말은 죄송하다는데 표정과 목소리는 위압적이었다. 빌리와 피터가 주춤거리다가 프란츠를 보았다.

“네가 얘기 좀 해 봐.”

“번거로우니까 됐어.”

“하지만 포털을 가진 성녀라고? 너야 다음에도 보겠지만 우리 같은 것들은…… 프란츠!”

빌리와 피터가 양쪽에서 징징거렸으나 프란츠는 묵묵히 자리를 벗어났다.

‘젠장.’

졸업이 가까워지니 별일이 다 생긴다. 자콥이 퇴학당하질 않나, 성녀가 아카데미 근처에 오질 않나. 프란츠가 이를 악물었다. 아카데미에서 권력 맛을 본 그로서는 절대로 이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졸업 후 신분이 밝혀지는 건 죽기보다 싫다.

‘로열 키친에 들어가야 해.’

로열 키친에만 들어간다면 프렌시프에서 자신을 지원할 것이 틀림없다. 어르신의 조카라는 소문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것들을 손에 쥐게 되었는가.

진정 지원을 받게 된다면 금은보화와 동경 어린 시선이 주변을 뒤덮을 터였다. 센, 그 멍청한 계집애가 자신을 이길 수야 없겠지만, 안전핀은 하나 꽂아 두어야겠다.

* * *

예선을 이틀 앞두고 나는 우여곡절 끝에 마파두부를 완성했다. 산초의 비율을 조절하는 게 어려웠다. 난 완성된 요리를 보고 씩 미소지었다.

“시간에 맞춰서 다행이다.”

어지럽게 늘어진 조리 도구를 정리하고 나니 깊은 밤이었다. 학생들은 곧 있을 심사를 위해 전부 기숙사나 근처에 있는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

“맛만 보고 돌아가야겠다.”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으스스하다. 스푼을 들려는데, 덜컹! 문이 열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스푼을 든 채로 굳어졌다. 앞문을 통해 들어온 중년의 남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왜 이 시간까지 가지 않고.”

개학식에서 본 교감이었다.

‘깜짝 놀랐네…….’

난 한숨을 깊게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내가 알기로 너는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곧 졸업이니 뭐라도 해 보려고요…….”

눈을 데루룩 굴리며 변명하자 그는 제비 꼬리처럼 갈라진 수염을 매만졌다.

“이미 늦었어. 그나마 얼굴은 반반하니 어디 식당 점원으로 취직할 생각이나 해라.”

히죽 웃은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자리를 알아봐 주랴?”

“……괜찮습니다.”

“자존심은 이럴 때 부리라고 있는 게 아니지. 괜히 분위기 흐리지 말고 네게 맞는 자리를 찾아.”

나는 눈을 가름하게 뜨고 교감을 쳐다보았다.

“교수님.”

“그래, 점원으로라도 취직하는 게 낫겠지?”

“과거가 어쨌든 저는 지금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말은 그만해.

내가 그런 표정으로 보자 그는 왈칵 얼굴을 찌푸렸다.

“앞뒤 안 가리고 까불다간 철퇴 맞기 십상이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니 따르는 게 이로울 거다.”

교감이 내가 만든 요리가 든 접시를 들었다.

“이게 시험에 낼 음식이냐?”

“그렇습니다.”

“하여간 어수룩한 것들이란. 양념만 진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아는군.”

교감은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요리를 맛보았다. 뭉근한 두부가 소스와 함께 뒤섞여 그의 입으로 들어갔다. 그의 눈이 일순 커졌다.

“두부, 이건 두부로군!”

“맞습니다.”

“그래 콩으로 두부를 만들면 여러 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지. 분디 향이 제법 좋아. 매콤짭짤해서 계속 손이 가고…….”

중얼거리던 그가 나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곧 큼! 헛기침을 하며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너무 자극적이야. 요리란 모름지기 재료 본연의 맛을 잘 살려야…….”

“교수님 비장의 레시피는 모두 커리 아닌가요?”

본연의 맛과 향보다 첨가한 향신료로 코가 질리게 만드는 카레가 그의 주특기였다. 내 말을 들은 그는 얼굴이 벌게졌다.

“그, 그건……. 건방지군! 말대꾸나 따박따박 하고 말이야!”

버럭 소리친 교감이 내 요리가 담긴 접시를 내동댕이치듯 내려놓고, 조리실을 나섰다.

‘왜 저렇게 역정이실까.’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마저 조리 기구를 정리했다.

예선 심사일이 밝아 왔다. 학생들은 각자 그릇을 끌어안은 채 긴장된 표정으로 심사를 기다렸다.

“넌 뭘 만들었어?”

“수프.”

“분디는 어떻게 썼는데?”

“살짝 향을 내는 정도지, 뭐.”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네…….”

“죽을 것 같다, 정말.”

상위권 학생들은 피곤한 듯 이마를 짚거나 주저앉아 있었다. 물론 나도 쓰러질 것 같긴 마찬가지였다. 그 와중에 프란츠 일행이 왁자지껄 떠들며 남의 요리를 품평했다.

“별……. 저런 것도 요리라고!”

긴장감은 전혀 없이 회장의 분위기만 해치는 그들을 보고 학생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쟤들은 걱정도 안 되나.”

“빌리나 피터는 몰라도 프란츠는 그럴걸.”

“왜? 아무리 대단한 집안 자제라도 심사는 똑같이 보는데.”

“교수가 시험지도 훔쳐다 줬다잖아. 이번 시험에서도 무슨 짓을 했을 수 있지.”

“기가 막혀!”

수군수군하던 학생들은 프란츠가 다가오자 시선을 돌렸다. 프란츠는 내 근처에서 얼쩡거렸지만, 난 신경 쓰지 않고 에이프런을 꽉 비틀었다.

‘오늘은 정말 상대하고 싶지 않아.’

매일 같이 팬을 돌리느라 손목이 부러질 것 같았고, 쉬지를 못했더니 다리마저 퉁퉁 부었다. 세니아나의 체력으로 며칠 밤이나 새는 건 무리였다. 피곤하니 몸살이 오려고 하는지 온몸이 욱신거렸다.

‘그래도 요리를 완성해서 다행이지만.’

간도, 향도, 모양도 마음에 쏙 들게 나왔다. 몇 주를 매진한 만큼 좋은 요리가 나온 것 같아서 뿌듯하다. 나는 접시를 조심스럽게 들고 살짝 물러났다. 그런데 웬일인지 프란츠는 나를 보고 씩 웃기만 할 뿐 다가오지 않았다.

‘뭐지?’

뭔가 감이 이상했다. 그를 흘깃 살피고 있는데 교수들이 심사대에 착석했다.

“심사를 시작한다! 우선 1조!”

두 학생이 접시를 들고 나왔다. 교수들은 작은 종지에 각각 음식을 덜어갔다.

“흐음, 콩을 넣은 파스타라.”

“분디는 장식으로 토핑했네요.”

“꾀를 부렸군!”

가장 끝에 앉아 있던 쟝뤼크 교수는 인상을 찌푸리곤 맛도 보지 않았다. 다른 조의 음식도 거의 비슷했다. 콩을 메인으로 사용한 요리보다는 곁들인 요리가 많았다. 메인으로 쓴 요리에선 분디를 장식하는 정도였다. 그렇게 혹평이 이어졌고, 학생들의 표정은 점점 거무죽죽해졌다.

“22조!”

이제 내 차례였다. 프란츠와 나는 돔을 덮은 접시를 가지고 교수들에게 향했다. 프란츠가 선순이라 그의 요리가 먼저 심사대에 올랐다. 우리는 고개를 숙인 채 그들의 평가를 기다렸다. 한 교수가 그의 돔을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오오!”

탄성이 나왔다.

“이건 꽤…….”

“콩을 메인으로 썼구만!”

“그렇지,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고민한 모양이야. 어디 향은……. 좋군, 좋아!”

스푼이 움직이고, 교수들은 연이어 탄성을 터뜨렸다.

“그렇지! 이런 게 요리지!”

“남부 지방에서 본 적 있는 요립니다. 착실하게 조사했군요.”

“으음! 분디와 양념의 조화가 훌륭하군요. 곁들인 야채도 잘 어울리고…….”

‘뭐지? 뭐야?’

무슨 요리를 했을까. 얼마나 훌륭하기에……. 궁금해!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그의 음식을 본 순간이었다.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마비된 듯 온몸이 굳어졌다. 프란츠가 만든 요리의 심사를 마친 교수들이 내 접시의 돔을 올렸다.

“허어……. 이건…….”

그들은 곤란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야 그럴 수밖에. 같은 조에서 똑같은 요리가 나왔으니까!

프란츠가 내온 요리는 마파두부였다. 그것도 내 식대로 토마토를 추가한 마파두부가 말이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프란츠를 쳐다보았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누군가와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와 시선을 주고받는 사람은―

‘교감.’

순간 아이들이 떠들던 소리가 떠올랐다.

[교수가 시험지도 훔쳐다 줬다잖아. 이번 시험에서도 무슨 짓을 했을 수 있지.]

교수들이 탄식하며 내 요리를 맛보았다.

“어떻게 똑같은 요리가…….”

“이건 한쪽이 레시피를 훔쳤다고 볼 수밖엔…….”

“그래도 프란츠의 요리 쪽이 임팩트가 강하죠.”

“향신료를 기가 막히게 썼으니까요.”

아무래도 교감은 내 요리를 그냥 훔쳐다 준 게 아닌 모양이었다. 향신료의 배합까지 조언한 것 같았다.

“그럼 역시 프란츠를 본선에…….”

“교수님.”

나는 손을 들며 그들을 불렀고, 회장의 시선이 일시에 내게 집중되었다.

“졸업 시험은 그저 로열 키친에 응시할 학생을 선발하는 제도가 아니라고 알고 있어요.”

내가 차분히 말하자 일전에 내 콩국수를 칭찬했던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이때껏 배워 온 것을 쏟아내 서로 발전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그녀는 잘 짚어 주었다는 듯 생긋 미소지었다.

“여러 교수님께서 극찬하신 프란츠 군의 요리를 자세히 알 수 있다면 보다 정진할 수 있겠지요.”

교수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긴 하죠.”

“레시피를 알려 달라는 건가? 하지만 그건…….”

나는 생긋 웃으며 프란츠를 보았다.

“설마요. 그저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 정도라면.”

교수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프란츠를 쳐다보았다. 그는 무슨 수작이냐는 듯 얼굴을 왈칵 찌푸렸고, 교감도 인상을 쓰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프란츠에게 첫 질문을 했다.

“두부를 아주 곱게 잘 만들었네. 어떻게 하면 이렇게 고운 모양이 되는 거야?”

“두부는 너도 만들었잖아!”

“나보다 더 잘 만들었으니까. 배우고 싶어.”

프란츠의 표정에 낭패감이 어렸다. 교감이 내 요리를 본 건 이틀 전, 그것도 자정을 앞둔 시각이었다. 그러니까 프란츠에게 할애된 시간은 딱 하루뿐이었다는 것이다.

‘두부를 만들 수 있었을 리가.’

그러니까 저 두부는 분명 어딘가에서 공수해 온 것일 터였다.

“그, 그건…….”

프란츠가 주저하는 사이 학생들 가운데서도 손을 드는 사람이 있었다.

“분디가 안 보이는데? 분디는 어떻게 넣은 거야?”

“향이 엄청 좋은걸. 대체 어떤 향신료를 쓴 거지?”

순수한 호기심으로 나오는 질문에 교수들은 흐뭇하게 웃었지만, 프란츠와 교감의 표정은 굳어졌다. 프란츠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이건 불공평합니다! 왜 저만 질문에 대답해야 하죠? 다른 녀석들은 아무도……!”

“대답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고, 프란츠는 벌게진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럼 대답해 봐. 두부, 어떻게 만들었어? 분디는 또 어떻게 쓴 거지?”

“…….”

회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프란츠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교수들이 미간을 좁혔다.

“프란츠 군.”

“대답하세요, 프란츠 군.”

“설마 남의 도움을 받은 겁니까!”

“어떻게 센 양과 같은 음식을 내올 수 있었던 건가?”

프란츠가 머뭇거리자 교감이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센 양에게 실망이군.”

“아니, 교수님!”

다른 교수가 반박하려 했으나 교감이 살벌하게 노려보자 입을 다물었다.

“프란츠 군이 스스로 만들지 않은 음식을 시험에 냈다는 건가!”

그는 스푼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승부에서 졌다고 같은 반 학우를 매도하는 건 추할 뿐일세.”

“저는 프란츠 군을 매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질문한 것일 뿐이지요.”

“질문의 의도가 명백하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22조에선 프란츠 군이 승리―”

그때 가장 끝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쟝뤼크 교수가 나섰다.

“아무도 프란츠 군의 승리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교감은 당황하여 입을 뻐끔거렸다.

“아, 아니, 모두 프란츠 군의 요리가 더 훌륭하다고……!”

“그게 선언이라곤 할 수 없죠.”

쟝뤼크 교수의 말에 동의하듯 다른 교수들이 싸늘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회장의 모두가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프란츠, 같은 조에서 낸 같은 음식. 하지만 교감이 감싸고 도는 데다 내 레시피를 훔쳤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기에 침묵할 뿐이었다. 쟝뤼크 교수는 탁자를 짚고 일어났다.

“같은 조에서 같은 음식이 나왔으니 심사가 어렵겠습니다.”

그의 말에 교감이 떠듬떠듬 말했다.

“하지만 맛은 프란츠 군이……!”

“조리법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 요리가 이제껏 갈고닦은 실력을 발휘한 게 아니라 운 좋은 실패작일 수도 있다는 말이죠.”

“실패로 만들어진 요리가 얼마나 많은데! 운도 실력일세.”

다른 교수가 교감의 말에 반박했다.

“실패작을 제 레시피로 만든다면야 그렇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졸업 시험에서 심사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22조는 재대결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대다수의 교수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니 교감은 도리가 없었다. 프란츠가 나를 험악한 표정으로 쏘아봤고, 난 생긋 미소지었다. 그렇게 프란츠와 나는 심사에서 제외되었고, 과제 전에 배분했던 콩에서 남은 것들로 새 요리를 만들기로 했다.

“저 망할 년이……!”

교수들이 떠나고 프란츠는 고함을 내지르며 나에게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빌리와 피터가 그를 양쪽에서 붙잡고 만류했다.

“여기서 저 계집애를 폭행하면 꼼짝없이 네 패배야!”

“그래, 진정해!”

프란츠는 씩씩댔지만 제 일행에게 이끌려 회장을 빠져나갔다. 수군거리던 학생들도 눈치를 보며 하나둘 사라졌고, 나는 내 요리를 챙겼다. 접시를 잡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요리 하느라 화상을 입은 손, 무거운 팬을 돌린다고 퉁퉁 부은 손목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듯 되뇌었다. 요리를 다시 할 기회는 얻어 냈잖아. 체력 약한 여자라고, 부모 없는 가난한 고아라고 기회조차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비하면 천국인걸.’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있어.

나는 코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뒤를 돌던 그때―

“깜짝이야!”

아소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꾹 누르고 그를 쳐다보았다.

“왜?”

“넌 억울하지도 않아?”

“억울하지.”

“그럼 가서 교감의 멱살을 잡아. 이건 부당하다고 울고불고 소리쳐.”

“뭐라고?”

“나는 네가 그 요리를 만드는 걸 봤어. 원한다면 도와줄게.”

“…….”

난 한동안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평소처럼 무표정했지만, 어쩐지 조금 화가 난 것 같다고 느껴졌다.

“고마워. 하지만 가지 않을래.”

“왜?”

“그럼 두 번째 기회는 영영 없을 테니까.”

“너…….”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내가 먼저 요리를 만들었다는 걸 본 증인’이 아니라 ‘프란츠가 내 요리를 훔쳤다는 증명’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교감 본인이 훔쳤으니까 그의 증언이 아닌 이상 소용이 없다. 프란츠가 프렌시프에 의절당해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밝힌다고 해도, 교감은 입을 다물 거다. 그가 공범인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내 말을 믿을지도 미지수고.’

믿게 하려면 내가 프렌시프 영애라는 걸 밝혀야 하는데, 프란츠에 한 번 당한 교감이 두 번째라고 그냥 믿겠는가. 할아버지를 직접 보여 주는 정도는 되어야지.

‘그럼 할아버지가 이번 일을 알게 될 테니까 난 아카데미를 떠날 수밖에……. 으아아.’

불행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느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날 생각해서 말해 준 건 정말 고마워.”

내가 생긋 웃자 아소는 고개를 돌렸다.

“널 생각해서 한 제안은 아니었어. 그 자식이 꼴 보기 싫을 뿐이지.”

그러고 한동안 말이 없더니 빈 탁자에 무언가를 올려 두었다.

‘약?’

“화상 입은 손, 보기 거슬려.”

그 말을 끝으로 아소는 훌쩍 떠나버렸다. 나는 그의 등을 보다가 약을 에이프런에 쏙 집어넣었다.

심사장에서 나와 내가 향한 곳은 교내 조리실이었다. 난 남은 재료를 살펴보고 끙, 신음을 삼켰다.

‘부족해!’

두부를 다시 만드는 건 물론이고, 이 정도 양으론 다른 요리를 만드는 것도 어렵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있지.’

프란츠도 나와 비슷한 상황일 테니까.

할당된 콩은 한꺼번에 모두 나눈 게 아니었다. 실온에 오래 두면 상할 우려가 있어 재료실에서 필요할 때마다 기록을 하고 가져왔다.

‘두부는 다른 데서 사 왔을 테니, 콩이 남았겠지만 그걸 쓰지는 못할걸.’

그건 두부를 본인이 만들지 않았다는 자백이나 다름없으니까.

“콩이 없으니까 다른 걸로……. 역시 껍질을 이용해야 할까.”

성에서 콩껍질(Haricot vert)로 만든 음식을 먹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거의 곁요리였고 메인 메뉴라고 하기엔…….’

끙끙거리던 나는 남은 재료를 흘깃 쳐다보았다.

“아, 잠깐만 혹시 그거라면……!”

나는 얼른 냉장창고로 뛰어갔다. 다음에 쓸 수 있을까 해서 남겨 놓은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른 통을 열어 확인했다.

“괜찮아! 아직 쓸 수 있겠다!”

상하지 않았어!

나는 통을 끌어안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 * *

“프, 프란츠…….”

빌리와 피터가 그의 눈치를 보며 웅얼거렸다. 프란츠가 형형한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자 빌리는 얼른 콩을 내밀었다.

“이거 내가 쓰고 남은 건데…….”

“병신 새끼.”

“어, 어?!”

“내가 지금 콩이 없어서 이 난리인 줄 알아?! 내가 쓴 콩이 전부 기록되어 있으니까 쓸 수 없어서 그러는 거지!”

그가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빌리의 어깨가 흠칫 오그라들었다. 프란츠는 마파두부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방을 가득 메웠다.

‘1차 시험의 예선도 통과하지 못하면 로열 키친이 멀어진다.’

그럼 프렌시프에서 영영 지원받지 못할 거다. 프란츠가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을 때, 피터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계집애도 다른 방법은 없을걸. 그 녀석도 껍질 콩을 쓸 거야.”

“…….”

“껍질 콩 요리야 뻔하지. 대부분 볶은 후 소금 간이잖아. 그렇다면 승률은 네가 더 높아.”

그런 뻔한 요리일수록 요리사의 기술이 더 잘 드러나는 법이었다. 칼질이라든가, 화술이라든가.

‘그 계집애는 아직 기술이 몸에 익지 않았어.’

화상으로 새빨갛게 튼 손만 봐도 그랬다. 하지만 보다 더 확실한 승리가 필요하다. 혹시 또 마파두부 같은 것을 가져온다면……!

프란츠는 서둘러 통신을 보냈다. 그리고 그날 밤, 그가 향한 곳은 언제나 교감과 만나는 교내 나무숲이었다.

“가뜩이나 소문이 안 좋을 때 이렇게 찾으면…….”

교감이 타박하듯 말하다가 그의 굳은 표정을 보고 말을 돌렸다.

“무, 무슨 일인가.”

“재시험 심사자가 누굽니까?”

“아……. 안 그래도 전해 주려고 했네. 이들 세 명이야.”

교감이 건네준 명단을 확인한 프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포섭하세요.”

“뭐라고?”

“포섭하시라고요. 다들 내 요리를 찍게 만들란 말입니다.”

“하지만 그건……!”

교감은 당황하여 이마를 짚었다. 프란츠와 단둘이 거래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이는 건 위험했다. 혹시라도 누가 실토한다면 제 인생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교감이 양손을 내저었다.

“그건 안 될 일이네.”

“평생 아카데미에만 계실 겁니까?”

교감의 표정이 굳어졌다. 프란츠는 히죽 웃으며 그의 손에 가죽 주머니를 쥐여 주었다. 손안에서 묵직하게 절그럭거리는 보석이 느껴졌다.

“사업이라도 시작하시려면 제 도움이 필요하실 텐데요.”

“…….”

“아니면 황궁 진출은 어떠십니까.”

“로열 키친에 들어가기엔 난 너무 나이가 많―”

“정계 말입니다.”

“저, 정계? 평민인 내가?”

“부친은 준 귀족이었지 않습니까. 단승 작위라 이어지진 못했어도.”

정계라니……!

화려한 세도가들의 핏줄이 아니라면 천재 중의 천재만 모이는 곳이었다. 과거엔 그런 꿈을 꾸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황궁이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신분 상승을 꿈꾸며 요리를 시작했지만, 그의 재주로는 로열 키친의 문턱을 넘을 수 없었다. 교감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프란츠는 못을 박았다.

“어르신의 도움이 있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

교감의 눈이 욕망으로 일렁거렸다. 주머니를 움켜쥐는 그를 보고 프란츠는 씩, 입꼬리를 올렸다.

* * *

나와 프란츠의 재시험은 공개 심사로 진행되었다. 나는 탁자에 앉은 교수들을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보다가 내 요리와 프란츠의 요리가 든 트레이에 얼른 다가갔다.

“지금 와서 요리에 손댈 순 없어요.”

트레이를 끌고 가던 도우미가 그렇게 말했다.

“돔은 안 열게요.”

난 트레이 위의 삐뚤어진 이름표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제발, 제발.’

그런 나를 보고 도우미는 쓰게 웃었다.

“저번에 좋은 요리를 냈는데 대진운이 나빠서……. 하필이면 프란츠 군일 건 뭐람.”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꼭 로열 키친에 들어가야 성공하는 건 아니잖아요. 힘내요.”

이런 위로를 몇 번이나 들었다. 다들 프란츠의 승리를 확신했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을 터였다.

‘윤세나의 몸이라면 몰라도 세니아나의 몸이니까.’

세니아나는 프란츠보다 기술이 부족하다. 기술은 머리로 안다고 해서 느는 게 아니었다. 몸에 쌓여 있는 것이지.

내가 한숨을 내쉬며 트레이에서 멀어졌을 때, 심사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츠와 내 접시의 돔이 나란히 올라갔다. 심사 교수들이 종지에 음식을 덜었고, 시식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처음 심사대에 섰을 때처럼 나란히 고개를 숙였다.

프란츠의 이름표가 걸린 음식을 먹은 사람들이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은 나의 이름표…….

붉은 타이의 교수가 왈칵 인상을 좁혔다.

“이게 뭡니까?”

그러자 다른 두 명도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센 양의 요리…….”

“올리브 오일에 분디라니. 서로의 장점을 죽이고 있어요.”

“센 양의 요리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조합이야. 재료는 또 이게 뭔가. 아무리 부족해도 그렇지…….”

“성실하게 생각하지 않은 게지요.”

교수들이 크흐흠! 헛기침하며 불쾌한 표정으로 내 이름표가 달린 음식을 밀어 놓았다. 마치 말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단 한 사람의 칭찬도 나오지 않았다.

“반면에 프란츠 군의 요리는 이 얼마나 훌륭한가.”

“그렇지! 이게 요리죠!”

“부족한 재료로 이런 요리를……! 창의적이야!”

“짭짤하고, 고소한 데다 감촉마저 훌륭합니다. 입안을 솜이불이 감싼 것 같은…….”

프란츠가 히죽 웃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봐라, 개죽보다 못한 네 요리. 어디서 네까짓 게 요리를 한다고.”

“…….”

“내가 이런 혹평을 받았으면 부끄러워서 뛰쳐나갔다.”

내가 그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교감이 소리쳤다.

“그럼 승자를 확정해 주시게!”

교수들이 일시에 프란츠의 이름을 외쳤고, 그의 표정은 더더욱 기고만장해졌다. 교감은 입꼬리를 씩 올리곤 탁자로 다가갔다.

“프란츠 군의 요리가 그렇게 훌륭하단 말인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재료를 활용하는 법, 간과 향, 기술,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1차 시험의 수석은 프란츠 군일 겁니다.”

극찬이 이어지자 프란츠는 싱글벙글했다. 교감도 만면에 웃음이 가득해선 프란츠의 이름표가 붙은 요리를 맛보았다.

“그렇군, 훌륭해! 비지라니, 생각도 못 한 재료야!”

그러자 프란츠가 뭔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비지라고요?”

“그래, 프란츠 군이 낸 이 비지 요리 말일세. 프란츠 군과 비교하면 센 양의 요리는…….”

교감이 콩 껍질이 든 요리를 내동댕이치듯 내려놓았다.

“어디 이따위 요리를 심사대에……!”

교감은 크게 노한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고, 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손을 올렸다.

“교수님, 비지 요리가 승리라고 하셨나요?”

“그래, 프란츠 군이―”

“하지만 그 비지 요리―”

나는 생긋 미소짓고 이어 말했다.

“제 건데요.”

교감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고, 심사 교수들이 우왕좌왕했다. 프란츠는 사색이 되어 날 노려보았다.

“너 어떻게……!”

난 그에게 속삭였다.

“네가 수작 부릴 거라고 예상했거든.”

조금 전에 접시를 만지는 척하면서 이름표를 살짝 바꿔 놨지.

프란츠의 표정이 살벌해지자 교감이 떠듬떠듬 말했다.

“이, 이건 무효야!”

“어째서요?”

“이름표가 바뀌어 있지 않았나!”

“이름표가 중요한가요? 어차피 심사는 요리로 하는 건데요.”

교감은 붉으락푸르락해진 채 삿대질을 했다.

“프란츠 군의 요리가 이겼다면 네 승리인 척 입을 닫고 있었을 게 아니야! 운 좋게 네가 이겨서 밝힌 거잖아!”

“공개 심사회에서요?”

“그건……!”

“본래 심사에서는 이것저것 물어보시잖아요. 재료 선택의 이유부터 간은 어떻게 했는지. 그럼 요리를 만든 사람은 쉽게 밝혀질 일이죠.”

나는 교감과 심사 교수들을 빤히 보며 말을 이었다.

“저도 어째서 질문이 없었는지 궁금해요. 마치 심사를 빨리 넘기려고 했던 것 같잖아요?”

“……!”

교수들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애초에 프란츠를 승자로 점찍어 둔 상태였으니, 서둘러 심사를 끝내고 싶었겠지.

교감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어, 어찌 되었든 이번 심사는 무효야!”

그때, 심사에 참가하지 않았던 교수들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22조만 또 재대결할 수는 없잖습니까.”

“이름표가 바뀐 게 그리 큰일도 아니고.”

“어차피 심사 위원 세 분이 모두 비지 요리를 택했는데요.”

의견을 정리한 교수들이 교감을 향해 말했다.

“비지 요리의 승리로 의견이 모였잖습니까. 22조는 센 양의 승리로 마무리하시죠.”

“하지만……!”

팔짱을 낀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쟝뤼크가 물었다.

“프란츠 군이 승리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그럴 리가 없잖소!”

“그렇다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행동은 자제하시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 나를 매도하는―!”

그렇게 말하던 교감이 장내를 둘러보았다. 교수들이며 학생들까지 그를 싸늘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교감은 첫 심사뿐만 아니라 이번 심사에서도 프란츠의 편을 들었다. 이제 누구라도 그와 프란츠의 관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교감은 도리가 없었다. 내 요리를 본선에 올리는 수밖에.

프란츠가 나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쏠려 있었으므로 접근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교수들과 학생들이 빠져나간 회장엔 나만 남았다. 요리를 정리하려는데 내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쟝뤼크 교수님.”

“어떻게 비지를 쓸 생각을 했지?”

“아, 재료가 부족하기도 했고……. 콩 껍질보다는 비지 쪽이 산초의 독특한 맛을 더 잘 살려 줄 것 같아서…….”

내가 웅얼거리자 쟝뤼크가 물었다.

“맛봐도 되겠나?”

“아, 네!”

나는 얼른 접시를 내밀었다. 쟝뤼크가 비지를 떠서 향과 형태를 확인했다.

“흠, 고추기름을 썼구나. 그리고…… 매실?”

“맞아요!”

이것저것 실험해 볼 때 알았다. 산초와 매실은 꽤 잘 어울린다. 하지만 산초 향이 너무 강해서 대부분 매실을 썼는지 몰랐는데…….

‘신기해!’

나는 눈을 반짝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조화롭군.”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불 조절은 아직 미숙하구나. 비지 넣는 타이밍을 다시 생각해라.”

그건 나도 신경 쓰고 있던 부분이었다. 너무 오래 볶아서 비지의 부드러운 식감을 살리지 못한 게 아닐까 고민했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훌륭하군.”

나는 기뻐서 펄쩍 뛸 뻔했다. 쟝뤼크 교수는 한 번도 학생의 요리를 칭찬한 적이 없었다. 아카데미엔 훌륭한 교수님이 많았지만, 그의 요리는 특히 훌륭했다. 내심 가장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칭찬을 들으니 정말 설레고 행복했다. 쟁반을 끌어안은 나는 회장을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기쁘다. 더 열심히 해야지.

재시합이 끝난 다음 날, 본선이 시작되었다. 초청된 심사 위원은 남부에 터를 둔 칼세 백작이었다. 본선에 올라온 요리를 하나씩 맛본 그가 혀를 찼다.

“동부 아카데미의 실력이 겨우 이 정도였나.”

낮은 읊조림에 그와 함께 있던 교수들이 침음을 삼켰다.

“견습생들의 실력이 다 비슷하지요. 공께선 언제나 훌륭한 전문가들의 음식을 드시고 계시니 부족하다고 느끼시겠지만…….”

“남부 아카데미의 요리는 이 정돈 아니었네.”

몇몇 교수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남부 사람 입맛에 남부 요리가 맞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분디는 남부에서만 쓰이는 재료였다. 동부 아카데미에선 한 번도 다뤄 본 적 없는 재료라 이 정도면 그럴듯했다.

“그나마 이건 꽤…….”

칼세 백작이 짚은 접시를 본 교수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소 군의 음식이군요! 아소 군은 항상 수석을 놓치지 않는 인재지요.”

“서부 출신으로 오랫동안 동부에 있었습니다. 남부 요리는 익숙하지 않은데도 훌륭한―”

“됐으니 마지막 음식이나 내오게나.”

말이 끊긴 교수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윽고 세니아나가 만든 요리가 나왔다.

“이건…….”

칼세 백작이 접시를 빤히 보며 말했다. 교수는 헛기침을 하며 그녀를 옹호했다.

“본래 내왔던 요리는 이게 아닙니다. 예선에서 일이 있어 남은 재료로 급히 만들었습니다. 입에 맞지 않으셔도 성의를…….”

“재밌군.”

“예?”

그가 양념이 듬뿍 밴 비지를 살폈다.

“비지는 남부에서도 잘 쓰이지 않는 재료인데.”

그는 두부를 메인으로 한 대형 음식점을 몇 채나 운영하는 사업가였다. 두부를 만들고 나면 비지가 잔뜩 남는데, 그게 언제나 골칫거리였기 때문에 비지를 사용한 음식이라면 일단 호감이 생긴다.

‘이렇게도 비지를 처리할 수 있겠군.’

비지를 조금 떠서 입에 넣은 그가…….

“그렇지! 산초를 썼으면 이 정도는 얼큰해야지!”

“예?”

“다른 요리는 밍밍하기 짝이 없어! 산초를 썼으면 혀가 얼얼할 정도로 매워야 하지 않겠나!”

표정이 밝아진 그가 계속해서 세니아나의 음식을 맛보았다.

“두부보다 훨씬 고소하고 담백하군. 소스가 남부 음식에 필적할 정도로 매운데도 비지에서 나는 단맛이 잘 눌러 주고 있어!”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아주 맛있게 먹으며 접시를 비웠다.

‘비지를 쓴 데다가 대륙 전역의 백성들이 모두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매운맛을 조절했다.’

“레시피! 이 학생의 레시피를 내게 팔게!”

“수석만이 레시피를 거래할 수 있습니다.”

“수석이야! 이런 요리라면 당연히 1등이지!”

교수들 사이에 서 있던 교감이 재빨리 나섰다.

“하, 하지만 공……! 아소 군의 요리가 훌륭하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먹을 만은 하다고 했을 뿐이네.”

“남은 재료로 만든 음식보다야 아소 군의 요리 쪽이……!”

“남은 재료로 이만큼 근사한 요리를 냈으니 더더욱 훌륭하지 않은가!”

비지 레시피를 얻고 싶은 백작은 다급하게 대답했다. 교감의 얼굴이 거무죽죽해졌다.

‘안 돼!’

프란츠를 누르고 본선에 오른 데다가 1등까지 거머쥐었으니 프란츠가 얼마나 역정을 내겠는가. 하지만 칼세 백작의 평가는 바뀌지 않았고, 그날 오후 1차 시험의 결과가 발표되었다.

[수석―센, 남부 풍 비지 포타주

차석―아소, 검은콩 파에야]

* * *

황궁 복도를 걷는 도미니크에게 부관 알베르가 다가왔다.

“수석입니다.”

도미니크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대수롭지 않은 듯 보였지만, 그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간 것을 부관은 놓치지 않았다.

“사고가 있었다기에 염려했었는데, 다행이지요.”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지.”

부관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처음 재시험 이야기를 들었을 땐 표정이 얼마나 살벌했는지 모른다. 당장에 동부 아카데미로 돌아갈까 봐 마음을 졸였다. 부관이 픽 웃으며 말했다.

“프렌시프 양의 운은 알아줘야겠습니다.”

도미니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아무리 운이 좋아도 근성 없이 그 모든 일을 해낼 순 없었다. 부관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운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겠죠. ‘그분’께서 동부 아카데미의 교단에 계실 때 하필 프렌시프 영애의 졸업 시험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녀가 지도 교수로 그 사람을 택할진 모를 일이지.”

“그렇긴 하지요. 지도 교수로 부탁하더라도 그분께서 수락하실지…….”

부관은 아쉬운 한숨을 흘렸다.

‘프렌시프 영애가 그분의 지도를 받는다면 요리사로서의 성공은 떼 놓은 당상인데 말이야.’

그가 누구던가.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요리사. 로열 키친에 자신의 레시피를 무려 33종이나 올린 불세출의 천재. 불미스러운 사건만 아니었더라면 로열 셰프 자리는 맡아 둔 것과 다름없던 신의 손. 그의 제자라는 명함 하나만 있다면 대륙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서 두 팔 벌려 환영할 터였다. 물론 로열 키친까지도.

“하지만 급한 건 영애보다도 우리가 아닙니까. 어서 그를 황궁으로 데려와야 할 텐데요.”

그게 황제가 도미니크에게 내린 명이었다. 아타르 국에서 친교의 의미로 그가 왕세자의 책봉식 요리를 맡아 주길 요청했다. 왕세자는 젊을 적 길라게온에서 볼모 생활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의 요리로 큰 위안을 받았다고 했다.

‘그분을 모셔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닌데.’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싫은 일은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황제도 그걸 아니 도미니크를 직접 보낸 게 아니겠는가. 뭐,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여러모로 어려운 사람이란 말이지.’

그 남자, ‘쟝뤼크’는.

* * *

깨끗하게 씻은 프라이팬을 들고 게시판을 지나가던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벌써 1차 시험의 결과가 붙어 있었다. 프라이팬을 꼭 껴안은 채 실눈을 뜨고 아래서부터 이름을 훑었다.

[7등―프레이야.

6등―지젤.

5등―한스]

어, 없나. 별로였던 걸까, 내 요리.

반쯤 포기했던 순간, 수석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수석―센]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이름을 확인했다. 두 번, 세 번 보아도 수석에 쓰여 있는 이름은 내 이름이었다.

말도 안 돼! 경악도 잠시.

‘야호, 야호!’

나는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

‘1등이야!’

가슴이 벅차고, 폐가 터질 듯 부풀었다. 열과 성을 다한 요리가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이 뛸 듯이 기뻤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숙사를 향해 걸었다.

가족들에게 연락해야지. 1등 했다고 말하면 잘했다고 해 주실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기숙사 문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내 목덜미를 덥석 잡았다. 정말 악 소리가 나게 아파서 어깨가 확 움츠러졌다. 귓가에 아득, 이 가는 소리와 함께 불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따라와, 망할 계집애야.”

프란츠였다.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서슬 퍼런 눈빛. 양옆엔 덩치 큰 빌리와 피터가 있었고 그들마저 씩씩거리고 있었다. 난 침착하게 상황을 살폈다. 사람들이 있어서 포털을 열진 못하지만, 이미 교수나 경비병을 찾아야겠다며 뛰어간 학생이 있었다.

‘경비병이 오려면 5분 정도.’

버티자, 5분. 그렇게 생각하고 프란츠를 노려보았다.

“싫어.”

프란츠는 한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팟!’

내 머리채를 사정없이 쥐었다.

“좋은 말 할 때 따라와.”

언제 좋은 말을 했어, 이 나쁜 놈!

눈물이 쏙 나게 아파서 난 그의 팔뚝을 콱, 물어 버렸다.

“악!”

깨물린 그가 비명을 내지르며 뒷걸음쳤다. 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들고 있던 프라이팬을 휘둘렀다. 깡! 깡! 프라이팬 바닥에 그의 머리가 부딪치며 나는 마찰음에 주변 사람들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자, 잠깐!”

프란츠가 소리를 내질렀고, 빌리와 피터도 어쩔 줄 모르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프라이팬 손잡이를 그러쥐고 그를 노려보았다.

“저질.”

“이 미친년이!”

나는 다시 프라이팬을 확! 치켜들었고, 프란츠가 양팔로 제 머리를 막고는 주춤 뒷걸음질 쳤다.

“남을 때리는 건 무섭지 않으면서 네가 맞는 건 무서워?”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폭력으로 협박하는 건 양아치나 하는 짓이지. 넌 양아치야, 프란츠.”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때, 멀리서 사람을 부르러 갔던 학생과 교수들이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새빨개져 씩씩거리는 나와 프란츠를 교수들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아카데미 내에서 이게 무슨 짓들이냐!”

“기가 차서!”

교수들이 진노한 표정으로 소리쳤고, 그 사이에서 나온 교감이 내 손에 들린 프라이팬을 거칠게 빼앗았다.

“두 사람 다 따라와!”

프란츠와 나는 서로를 노려보았지만, 교감이 “어서!” 하고 소리친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갔다. 교감의 사무실 소파에 앉자 프란츠가 버럭 소리쳤다.

“저 계집애는 돌았습니다. 프라이팬으로 절 폭행했다고요!”

“먼저 날 때린 사람은 너잖아.”

“때려? 내가? 대화를 요청한 거지!”

그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다리를 꼬았다. 교감은 큼, 헛기침한 뒤 나를 쏘아보았다.

“사과해라.”

“…….”

“귀중한 조리 도구로 학우를 폭행하다니. 전대미문의 사건이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교감이 중립을 취하리라곤 예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너무 노골적인 편 들기가 아닌가. 그는 말 없는 나에게 소리쳤다.

“이런 천둥벌거숭이가 이백 년 역사의 동부 아카데미에……!”

“제 생각에 이곳은 그리 훌륭한 교육 기관은 아닌 듯싶은데요.”

“뭐라고?”

교감이 굳은 얼굴로 물었고, 난 침착하게 대답했다.

“프란츠가 제게 이런 천박한 짓을 한 건 오늘이 처음이 아니에요. 학우들을 선동해서 저를 괴롭히고, 협박했어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런데 기숙사의 사감도, 교수님께서도 상황을 따지기는커녕 폭력에 대항했을 뿐인 제게 모든 책임을 돌리시는군요.”

“어디 본 데 없이 말대답이야!”

교감은 위압적인 표정으로 싸늘하게 이어 말했다.

“네 부모가 그리 가르치더냐!”

순간, 도둑으로 몰려 담임에게 회초리를 맞았던 초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부모 없는 티는 너 혼자 다 내는구나.]

[너 같은 녀석이 불쌍한 고아들 욕 먹이는 거야, 알아?!]

나는 교복 치마를 꾹 말아 쥐었다. 프란츠에게 잡혔던 목과 머리가 욱신거렸다. 숨이 턱 막히고 눈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나는 설움을 꾹 되삼켰다. 교감이 내 이마를 손끝으로 꾹, 꾹 누르며 말했다.

“운 좋게 이번 시험에서 괜찮은 점수를 받았다고 기고만장하는 거라면 집어치워라. 다 요행이고, 운이야.”

탁! 내가 그의 손을 쳐내자 교감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 이런 막돼먹은 녀석을 보았나! 안 되겠군!”

“…….”

“어찌 키웠기에 너 같은 녀석이 나왔는지 알아야겠다.”

뭐라고?

나는 표정을 굳힌 채 그를 올려다보았고, 그는 벼락같은 노성을 내질렀다.

“네 부모 불러와!”

아카데미에 학부모 호출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분 노출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제적 전의 학생은 학부모를 호출하여 상담했다.

‘그럼 퇴학…… 이라고.’

제적 전에 상담이 먼저긴 해도, 보호자를 데려오지 않는다면 제적 확정이다. 손발이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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