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5/24)

5장

세니아나가 교감의 사무실을 떠나고, 프란츠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빌어먹을!’

일이 이 지경이 되고도 저 망할 계집애는 기가 죽지 않았다.

[저만 제적당하는 건 불공평해요.]

[정식으로 항의하겠어요.]

[제가 제적당한다면 프란츠도 마찬가지여야죠.]

교감은 냉큼 프란츠의 보호자 또한 호출하겠노라 말했다.

‘능구렁이 같은 놈.’

교수와 학부모의 사사로운 만남은 절대 불가이다. 그 때문에 교수는 전서구와 통신석의 기록까지 감찰 당했다. 학생 자택에 도착하는 안내장조차 사방 아카데미 중앙 행정 기관을 이용해서 보내졌다. 각 아카데미에서 안내문을 전달하면 행정 기관에서 학생의 자택에 따로 발송하는 구조였다.

그 정도로 학생과 교수 간의 연결 고리를 차단했기 때문에 교수들은 학부모와 따로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프렌시프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프란츠의 부모와 끈을 만들려는 것이다.

“프란츠 군.”

“…….”

“그리 걱정하지 말게나. 네 상담은 겉보기용일 뿐이야. 그 독한 계집애가 정말 교무 위원회에 고발이라도 하면 안 되니까, 응?”

“나가 보지요.”

“그래그래, 가서 부모님께 연락드려야지.”

교감은 싱글벙글 프란츠를 배웅했다. 교감실을 나온 프란츠는 그 즉시 부친에게 연락했다.

[상담이라고?]

“예, 아버지…….”

[흐음…….]

부친이 침음을 흘리자 프란츠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차라리 잘되었다.]

“예? 하지만 아버지가 오시면 제가 프렌시프의 먼 방계일 뿐이라는 걸 들킬지도……!”

[어르신이 어디 촌수로 사람을 가까이 두시더냐. 심중에 있는지가 중요하지. 촌놈들 주제에 어르신을 뵙고 확인을 할 수도 없는 노릇.]

“그래도…….”

게다가 의절까지 당했다. 이 사실이 드러나면 더는 아카데미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프란츠의 다급한 말에 그의 부친인 톰슨 남작이 킬킬 웃었다.

[무얼 그리 걱정하느냐. 어차피 네가 로열 키친에만 들어가면 어르신이 자연히 너를 불러들이실 텐데.]

“아직 로열 키친에 들어간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 더더욱 지금 교수들을 만나야지. 프렌시프의 혈족인 내가 나서야 네가 로열 키친에 확실히 들어갈 게 아니냐.]

‘그, 그렇지.’

프란츠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1차 시험에서 예선에도 들어가지 못해 걱정하던 참이었다.

‘교수들이 모두 나를 도와주면 2, 3차 시험에서는 수석을 차지할 거다. 그럼 로열 키친에 응시할 수 있고!’

로열 키친에 응시원만 내면 된다. 제아무리 로열 키친이라도 프렌시프 어르신의 지원을 받게 될 저를 쉽게 탈락시키진 못할 것이다.

[그래, 상담은 언제라더냐.]

“나흘 뒤예요.”

[우리 아들 기 살려 주려면 마차를 새로 구매해야겠구나. 그 계집애 부모의 기가 질릴 만큼 호화로운 마차로 말이야.]

톰슨 남작이 껄껄 웃자 프란츠도 픽 실소를 흘렸다.

‘망할 계집애.’

아카데미 내에서야 기고만장했겠지만, 제적당하고 나면 제 앞에 빌빌 길 것이 틀림없다.

“그년이 퇴학당하면 첩으로 사들여 주세요. 호된 맛을 보여 줄 겁니다.”

제 앞에서 고개도 못 들도록!

[그래그래, 미래 로열 셰프께서 바라시는데 뭔들 못 해주겠느냐!]

프란츠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 * *

아무도 없는 조리실 의자에 쪼그려 앉아 있던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전해야 하지. 떼를 써서 아카데미에 왔는데 제적이라니.

가족들 얼굴에 냉기가 서린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발밑으로 푹 꺼지는 기분이었다.

“선생님…….”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지금 가장 간절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윤세나였을 적에 도둑 누명을 썼던 날, 담임도 보호자를 호출했다. 하지만 도저히 선생님을 모셔 올 수 없었다. 부끄럽고, 죄송해서.

며칠이나 보호자를 데려오지 않던 나는 수업 시간마저 마음 편히 있을 수 없었다. 입에 가시를 문 담임이 어느 때나 내게 호통을 쳤기 때문이었다. 후에 담임은 기어코 선생님에게 연락했고, 그 일을 알게 된 선생님은 나를 끌어안고 말씀하셨다.

[괜찮아, 괜찮아, 세나야.]

다정하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때, 통신석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점멸하며 빙그르르 도는 통신석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세니아나?]

“…….”

란슬롯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설움이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왔다.

[세니아나?]

[뭐야, 안 들려? 연결 안 됐어?]

[그 입 좀 다물어라.]

가족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도무지 입을 열 수 없었다.

[세니아나.]

할아버지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참으려고 애썼지만,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무슨 일이냐.]

[뭐야, 우는 거야?]

[운다고? 막내야.]

“아니에요…….”

[무슨 일이냐니까!]

할아버지가 냉기 서린 고함을 내질렀다. 나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 화내지 마십시오. 아이가 놀라지 않습니까.]

란슬롯이 한숨을 내쉬며 다정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무슨 일이야, 응?]

“그게…… 그게…….”

[괜찮으니까 말해 줘.]

“아, 아카데미에서 보호자를 데려오라고…… 제적 전에 상담을 하는데…….”

세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으득, 이 가는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던 게냐.]

“학생과 싸워서…….”

[고작 다툰 일로 제적 이야기까지 나왔을 리 없다.]

“제, 제가 그 애를 때려서…… 하지만, 하지만 그 애가 먼저 저를…….”

[때렸다고?!]

가웨인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꽉 맞잡았다.

실망이라고, 역시 아카데미에 보내는 게 아니었다고 호통을 치실 거야.

“나, 남자애가 때리니까 무서워서…… 끌려가면 심한 꼴을 당할 테니까…… 그래서…….”

변명하던 나는 입술을 꾹 베어 물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아예 죽여 버리지.]

“네?”

가웨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농담일까?

“죄송해요, 제적당할지도…….”

란슬롯은 자못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서워서 가만히 맞고 있었으면 혼냈을 거야.]

가웨인이 덧붙였다.

[그래, 다음부터는 그런 놈이 있으면 찔러 버려.]

한동안 말이 없던 할아버지도 말했다.

[괜찮아.]

“…….”

[잘못한 게 없으니 너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가족들의 목소리와 선생님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그 순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엉엉 울며 연신 용서를 빌었다.

[울어도 되는데 사과는 하지 마.]

[그래, 못난이. 네가 뭘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앉았어.]

오빠들이 내 편을 들어줘서 자꾸만 더 서러워졌다.

[그래서 상담은 언제냐.]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손바닥으로 눈을 문지르며 말했다.

“나흘 뒤에 교무 위원회 건물에서 한대요…….”

[그래.]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서늘하도록 낮아졌다.

다음 날, 나는 퉁퉁 부은 눈으로 기숙사 방을 나섰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잘 떠지지도 않았다. 식당으로 내려가서 그릇을 꺼내는데,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센 말이야. 퇴학당할 거라며?”

“하지만 그건 프란츠가 전적으로 잘못했잖아. 귀족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 어떻게 여자를…….”

“쉿! 그래서 프란츠의 부모도 불려 온다잖아.”

“보여 주기식이라는 걸 누가 몰라. 교감이고 교수들이고 입이 헤벌쭉하던걸.”

“그러니까 왜 까불어서. 난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어.”

나는 그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수프를 담았다.

‘제적당해 돌아가면 성에서 요리를 배우자.’

어제 소식을 들은 시트론이 광분하며 연락해 왔다. 주변에 사용인들이 가득했는데, 요리사들이며 수셰프 제레미, 그리고 아곤까지 내게 요리를 가르쳐 준다고 약속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말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그것만으로도 억울함이 가셨다. 자리에 앉자마자 문가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기숙사 사감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프란츠를 졸졸 쫓아오고 있었고, 학생들도 그의 곁에 붙어 종알거렸다.

“프렌시프 어르신께서 오시는 거야?”

“설마 어르신께서 직접 오시겠어. 네 부모님이 오시는 거지?”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오셔? 역시 저 밖에 있는 교무 위원회 건물로 가시는 건가?”

프란츠의 양옆에 선 빌리와 피터는 어깨가 잔뜩 솟아서 허공을 휙휙 내저었다.

“꺼져. 프란츠가 피곤해하잖아!”

“날파리들이란.”

빌리와 피터가 으스대자 학생들이 표정을 일그러뜨렸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감이 손을 비비며 말했다.

“프렌시프 귀족이라니. 그런 유명 인사는 처음 뵙는단다.”

프란츠는 접시를 집으며 그녀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날 사감님도 가십니까?”

“내 귀한 학생의 보호자인데 응당 가서 인사를 드려야지, 호호.”

프란츠는 의기양양하게 음식을 담고, 테이블을 향해 걸어왔다. 내 맞은편에 앉은 그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흘이면 꼴 보기 싫은 얼굴이 사라지겠군.”

“그렇지.”

“아아, 정말 저 얼굴 보느라 역겨웠는데 프란츠 덕에 숨 좀 쉬고 살겠네.”

빌리와 피터가 으하하 웃으며 그의 말에 맞장구쳤다. 나는 그릇을 정리하고 일어났다. 상대도 하지 않으니 프란츠는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상담 후에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전처럼 달려들 기세는 아니었다.

그가 코웃음을 치며 떠나는 나를 쳐다보았다. 식당을 나선 뒤 교실로 향했다. 제일 먼저 온 사람은 늘 그렇듯 아소였다.

“항상 빨리 오는구나.”

“기숙사생들이 게으른 거지.”

“기숙사에 안 살아?”

그러고 보니까 기숙사에선 본 적이 없다.

“아카데미 근처에 방을 잡았어.”

“왜?”

기숙사도 엄청 좋은데! 프란츠와 자주 마주치는 건 싫지만, 방도 예쁘고 식사도 맛있다.

“좁아터진 방에선 못 자거든. 귀하게 커서.”

그렇게 안 좁은데?

나는 그의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해서 아하하, 웃었다.

“…….”

하지만 그는 표정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우, 웃는 타이밍이 아니었나?’

꼼질꼼질 교과서 끝을 매만지는데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아소가 턱을 괸 채 나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눈매가 부드러워진 것 같아서 의아했다.

“이상한 녀석.”

“내가?”

“퇴학당할지도 모르는데 웃음이 나? 눈은 퉁퉁 부어선.”

그는 또 한 번 픽 웃었고, 나는 민망해져서 그를 따라 웃었다. 그래도 아소 덕분에 아카데미의 기억이 조금 더 예쁘게 남을 것 같았다.

그리고 며칠 후, 학부모 상담을 하는 날이 밝았다. 난 오전 수업만 받고, 오후엔 교무 위원회 건물로 가야 했다. 교무 위원회 건물은 꽤 멀어서 한 시간을 꼬박 걸어야 했다.

하지만 일찍 출발한 덕에 다행히 20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난 건물 앞 간이 의자에 덩그러니 앉아 사람들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호화로운 마차가 울타리를 넘어 들어왔다.

정차한 마차 주변으로 교수들이 몰려들었다. 그 사이 마부는 헐레벌떡 문을 열었다. 과할 정도로 번쩍번쩍한 차림의 중년 사내가 내리자 교수 중 한 사람이 어이쿠! 소리를 내며 그에게 인사했다.

“프렌시프의 귀족을 다 뵙다니, 제 인생에 이런 영광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교감이 몰려 있는 교수들을 해치고 사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제가 교감인 오로반입니다.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무래도 저 남자가 프란츠의 부친이라는 톰슨 남작인 것 같았다. 교수들이 그에게 정신없이 인사하고 있을 때, 프란츠가 다가왔다.

“아버지.”

“우리 아드님!”

톰슨 남작이 껄껄 웃으며 프란츠의 어깨를 두드렸다. 교감이 나란히 선 부자에게 말했다.

“프란츠 군이 누굴 닮아 이리 훤칠한가 했더니 공을 닮은 것이군요.”

“그렇지요, 우리 아드님은 나를 쏙 뺐지. 훤칠하고 영리하고……. 그래, 우리 아들이 학교생활을 잘하더이까?”

“물론이지요. 학우들에게 귀감이 되는 훌륭한 학생이라 늘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껄껄 웃으며 건물을 향해 다가왔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교감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일찍 도착했구나.”

“네.”

톰슨 남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내 아들에게 손을 올렸다던 계집애냐?”

프란츠가 히죽 웃으며 맞다고 대답하자 톰슨 남작이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내 턱을 우악스럽게 잡고는 호통을 내질렀다.

“천한 게 어디 감히 내 아들에게!”

“이 손 놓으세요.”

싸늘히 말하니 톰슨 남작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학교는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까지 받아 줍니까?”

교감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곧 떠날 녀석입니다.”

“네 싹수가 얼마나 노란지 익히 들었지.”

그가 보란 듯이 더 험하게 내 얼굴을 흔들었다. 손길이 어찌나 거친지 양 볼이 까질 것 같았다. 내가 그의 손을 뿌리치려는 찰나였다.

“그 손 놔.”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톰슨 남작이 미간을 좁히며 뒤돌아봤다.

“어떤 놈이 감히……!”

뒤돌아보던 그가 우뚝 굳어졌다.

“도, 도련……!”

가웨인이 살벌한 표정으로 남작의 손목을 비틀었다.

‘오빠다!’

가웨인의 뒤로 란슬롯과 할아버지가 보였다. 정말로 훤칠한 사내들의 등장에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다. 금좌 11석의 가문에서 총요리장으로 지냈다던 교수가 할아버지를 보고 우뚝 굳어졌다.

“어르신!”

그가 소리치기 무섭게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교감은 펄쩍 뛰어오르듯이 후다닥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이런 누추한 곳까지 몸소 오시다니요!”

얼마나 흥분했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턱까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다른 교수들의 상황도 비슷했다. 땅에 붙을 것처럼 허리를 굽힌 사람도 있었고, 못 박힌 듯 어쩔 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어르신께서 왜…….”

프란츠가 중얼거렸다. 가웨인에게 붙들려 있던 톰슨 남작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였다. 교감이 얼른 할아버지를 모시려다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어허! 어디 어르신 앞길을 막아!”

할아버지의 시선이 그를 향해 슥 돌아갔다. 교감은 ‘어르신을 위해 이쯤이야’ 하는 표정으로 실실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저 계집애는 프란츠 군에게 기필코 무릎 꿇고 사과하게 만들 테니―”

“왜.”

“예? 그야 저 학생이 프란츠 군에게 손찌검을…….”

“내 손녀가 왜 저따위 놈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해야 하는 거지.”

할아버지의 낮은 목소리에 사람들은 한동안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 그게 무슨…….”

톰슨 남작이 중얼거리기 무섭게 할아버지가 내 손을 잡았다.

“할애비가 왔으니 고개를 들어라.”

왜 이렇게 설움이 치밀어 오르는지 모르겠다. 나는 울상을 짓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할아버지…….”

그러자 교감을 비롯한 교수들, 그리고 톰슨 부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하, 할…… 뭐?!”

누군가 소리치자 교감은 사색이 되어 나와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가웨인과 란슬롯이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내게 다가왔다.

“누가 내 동생의 기를 이렇게 죽여 놨지. 죽여 버리고 싶게.”

가웨인이 험악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톰슨 남작은 거무죽죽한 표정으로 오빠와 나를 번갈아 가리켰다.

“머, 머리와 눈이, 가, 같……!”

“말도 안 돼!”

프란츠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란슬롯은 그런 그를 보고 화사하게 웃었다.

“프란츠 톰슨이로군.”

“…….”

“영지민 상대로 사기를 치다 쫓겨난 제 아비와 똑같은 놈이라곤 들었다.”

“그런…….”

“프렌시프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린 죄는 따로 심판하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곤 산뜻한 표정으로 교감을 돌아보았다.

“그럼 갈까요, 빌어먹을 상담인지 뭔지를 하러.”

란슬롯의 입에서 욕이 나온 건 처음이라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으니 란슬롯이 내 귓불을 매만졌다.

“우리 아가씨는 나중에 귀 씻으러 가시고.”

내가 살짝 웃으니 그도 함께 웃어 주었다. 우리 가족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허겁지겁 쫓아왔다. 어떤 방 앞에서 할아버지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는 거기 있거라.”

“저도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닌가요?”

할아버지가 교수들을 쳐다보자 교수 중 하나가 허겁지겁 대꾸했다.

“하, 학생은 들어오지 않아도 됩니다. 들어가시죠…….”

나는 문 앞에 얌전히 서 있었다. 교수들은 할아버지를 쫓아가면서 내내 나를 힐끔거렸다. 프란츠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그가 내게 무어라 말하려고 하자 가웨인이 입을 열었다.

“그 눈알, 뽑아서 짓이겨 버리기 전에 입 다물어.”

“……!”

새파랗게 질린 프란츠가 고개를 숙였고, 가웨인은 내 손을 잡았다.

“오빠는 안 들어가세요?”

“쓰레기 냄새가 불쾌해서.”

“아…….”

“네 방은 어때? 구경시켜 줘.”

“보호자들은 교무 위원회 부지에만 있어야 해요.”

“그럼 근처 산책이라도 하자.”

할아버지와 큰 오빠를 기다리지 않고? 그런 뜻을 담아서 쳐다보니 가웨인이 됐다며 나를 끌고 밖으로 나섰다.

* * *

나베리우스는 아주 당연하게 상석을 차지했다. 그가 착석하자마자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원탁에 둘러앉은 톰슨 남작과 교수들은 희게 질린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센이 프렌시프의 막내라고?’

‘프란츠가 아니라?’

이번 상담진은 교감의 입김이 닿는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프렌시프의 눈에 들어서 정계 진출을 꿈꾼 건 교감만이 아니었고, 이들 중 대다수는 교단을 걸고 프란츠에게 헌신했다. 프란츠의 성적을 고쳐 주는 건 다반사에 종종 그의 부탁을 받고 학생들을 구박하기도 했다. 물론 그만한 대가는 받았지만.

그러니까 더더욱 소문을 믿었던 거다. 몇 년 연봉쯤은 능히 뛰어넘는 보석을 턱턱 안겨 주고, 뭐라도 있는 양 굴었으니까! 교감이 프란츠의 부친인 톰슨 남작을 갈기갈기 찢을 듯이 노려보았다.

‘쳐 죽일 사기꾼 같으니!’

나베리우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

“내 손녀를 제적시키겠다는 이유가 뭔지나 들어 보지.”

교감은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그, 그건 사소한 마찰이 있어서…….”

“여성이 남성의 폭행에 맞서야 했던 것이 사소한 마찰이라.”

나베리우스의 목소리는 섬뜩할 정도로 낮았고, 란슬롯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굳어졌다. 톰슨 남작이 절박한 표정으로 나베리우스의 발치에 납작 엎드렸다.

“오해십니다! 가벼운 마찰 중 일어난 우발적인 사고였을 뿐, 제 아들은 아가씨를 폭행하려는 의도가……!”

쿵! 나베리우스가 구둣발로 톰슨 남작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크흑―!”

“날파리가 윙윙대는 것이 거슬려서.”

“어, 어르…….”

“폭행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가벼운 어투에 장내는 침묵에 휩싸였다. 듣기는 했지만, 정말로 사지가 벌벌 떨리는 위압감이었다. 나베리우스의 옆에 서 있던 란슬롯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조부님, 구두가 더러워지십니다. 이자의 처리는 제게 맡겨 주시죠.”

“그럴까.”

톰슨 남작이 흠칫 오그라들었다. 홀릴 듯 매혹적인 프렌시프의 장자가 그 누구보다도 잔인하다는 걸 그는 익히 알고 있었다.

“도, 도련…….”

“쉿, 더 입을 놀리면 이 자리에서 혀뿌리를 지져 버리고 싶어집니다.”

“……!”

“하루라도 더 살고 싶거든 숨소리도 내지 않는 게 좋겠지요.”

남작의 손발이 벌벌 떨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베리우스가 교수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색이 된 교감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오로반이 아가씨의, 아, 아니, 센 양의 제적은 없던 일로…….”

나베리우스가 눈을 감은 채 인상을 찌푸렸다. 관자놀이를 꾹 누르던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다물어.”

“…….”

나베리우스는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리고,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누구냐.”

“예, 옛?!”

“내 손녀를 울린 놈은.”

교감의 낯빛이 거무죽죽해졌고, 다른 교수들은 일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 * *

내가 멀리서나마 보여 준 기숙사 건물을 보고 가웨인은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헛간이야?”

“아닌데요. 저래 보여도 안에 들어가면 의외로 커요. 제 방도 엄청 좋고요.”

“얼만한데?”

“음, 그러니까…….”

나는 우다다다 뛰어가서 선을 콕 찍고, 또 우다다다 뛰어가서 선을 콕 찍었다.

“오빠가 있는 곳부터 이만큼?”

“좁아터졌군.”

“그야 성의 방에 비하면 그렇겠지만.”

지구로 따지면 일반 원룸보다 조금 더 큰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 가웨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차라리 기숙사 전체에 불을 냈어야 했는데.”

“네?”

“아니야.”

그러더니 다시 내 손을 잡고 걸었다. 성에서 하는 산책 같았지만, 그보다는 볼거리가 없었다. 이 부지엔 교무 위원회 건물만 덜렁 있어서 아무리 돌아봐야 하나밖에 안 보였다.

“성의 정원 예뻐졌지요?”

내가 물으니 그가 장미가 많이 폈다고 대답했다.

“하인들이 너 보여 주겠다고 뭔가 징그러운 이름의 장미도 심었지.”

“징그러운 이름이요?”

“올포러브(All for Love).”

‘모든 것은 사랑을 위하여.’

정말로 낭만적인 이름이었다. 그런 이름의 장미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헤헤 웃고 있으니 가웨인이 씩 웃었다.

“너와 똑같이 생겼어.”

“제가 그렇게 예쁘다고요?”

장미만큼이나?

내가 눈을 크게 뜨자 가웨인이 하하, 웃으며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그러더니 내 머리칼을 매만지며―

“녹색 덩굴에.”

또 내 눈가를 매만지고.

“꽃송이는 분홍색인 장미지.”

“아, 그런 뜻…….”

나 예쁘다고 하는 줄 알았네. 창피해서 얼굴이 붉어지자 가웨인이 킥킥거리며 머리를 마구 흩뜨렸다.

그렇게 삼십 분쯤 걸은 뒤 우리는 다시 건물 안으로 돌아갔다. 때마침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프란츠가 황급히 톰슨 남작에게 뛰어갔다.

“아, 아버지, 어떻게 되었……!”

짝! 톰슨 남작이 솥뚜껑 같은 손으로 아들의 뺨을 후려쳤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프란츠가 비틀거리다 주저앉을 지경이었다.

“네놈이……! 네놈 때문에……!”

“아버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 란슬롯이 몸으로 그들의 모습을 가렸다.

“갈까, 세니아나.”

나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걸었고, 교수들이 헐레벌떡 우리를 쫓아왔다. 그들 사이에 교감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궁금해서 할아버지를 쳐다봤더니 그가 말했다.

“밖에서 식사를 할까.”

“하지만 그건 규율상…….”

할아버지는 교수들을 힐끔 바라보자 교수들이 목청 높여 소리쳤다.

“멀리서 가족이 오셨는데 당연히 함께 계셔야지요! 아니, 있어야지.”

“외출계, 외출계.”

허겁지겁 주머니를 뒤진 교수가 펜으로 휘갈겨 외출계를 써 주었다.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나를 끌었다. 그렇게 엉망으로 쓴 외출계와 함께 교무 위원회 건물을 벗어났다. 나는 가족들을 졸졸 쫓아가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하지만 학생들이 보면……! 아, 제적이라 상관없을까…….”

란슬롯이 낮게 웃곤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적당하지 않을 거야. 오해를 했다며 사과하더구나.”

“정말이요?!”

“그래.”

“다행이에요!”

잠깐만, 그러면 더더욱 밖으로 나가면 안 되지 않나?

사교 활동이 전무했던 나와 달리 할아버지와 오빠들은 너무나 유명 인사였다. 귀족 학생들이 본다면 당연히 이들을 알아차릴 거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멈춘 할아버지가 말했다.

“포털을 열어라.”

“아하, 어디로 갈까요?”

“네가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나는 활짝 웃으며 목걸이를 쥐었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자 주변이 바뀌어 있었다.

“아가씨!”

성으로!

* * *

시트론과 사용인들이 활짝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어머머, 살이 쏙 빠지셨네. 얘, 가서 주방에 연락해라. 아가씨, 드실 것을 어서 만들라고 해.”

“옷! 편한 옷을!”

집사들이며 하녀들이 소리쳤고, 사용인들은 헐레벌떡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며 가족들은 픽 웃었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선생님이 반기던 모습이 떠올라서 난 가슴이 따뜻해졌다. 할아버지가 날 보며 말했다.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와라. 목욕도 하고.”

“그래도 되나요?”

“물론.”

나는 얼른 시트론과 함께 방으로 갔다. 시트론은 욕조에 물을 받으며 물었다.

“입욕제는 어떤 것으로 하시겠어요?”

“으음, 장미?”

“계절에 꼭 맞는 선택이네요.”

시트론이 생글생글 웃으며 입욕제와 꽃잎을 풀었다. 그리고 내 탈의를 도와준 다음 욕조로 들여보냈다. 너무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딱 좋은 온도의 물이 더위에 익어 꿉꿉해졌던 몸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어느새 들어온 하녀들이 기분 좋은 향이 나는 아로마 캔들과 아이스티를 내려놓았다.

시트론은 조물조물 솜씨 좋게 안마해 주었고, 나는 하녀들이 준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 몽롱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자 다른 하녀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마사지를 시작했다.

“후아…….”

“불편하세요, 아가씨?”

시트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너무 좋아서…….”

하녀들이 귀엽다는 듯이 깔깔 웃었다.

머리까지 말리고 뽀송뽀송한 몸으로 가벼운 옷을 입었다. 식당으로 가려 하니 하녀장이 “어르신의 서재로 가시지요.” 하며 나를 데리고 갔다.

할아버지의 서재엔 기숙사 방의 테라스와는 전혀 다른 크기의 엄청난 테라스가 있었다. 테라스에 있는 원형 테이블에 가족들이 앉아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테라스 아래 정원을 바라보았다.

“우와!”

만개한 장미로 가득 찬 아름다운 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저 분홍색 장미가 올포러브인가 봐!’

자줏빛이 약간 섞인 분홍색 장미가 흐드러지게 펴 고아한 자태를 뽐냈다. 풍경은 아름답고, 테이블 위 음식에선 맛좋은 냄새가 나며 덥지 않고…… 응? 안 덥다고?

‘아하, 테라스 문을 열고 냉방 장치를 가동하셨네.’

엄청난 사치였지만, 즐기는 입장에선 덥지 않고 좋았다.

“아곤이 직접 만들었어.”

가웨인의 말에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곤의 음식 정말 좋아해요.”

“다행이네.”

란슬롯이 미소 짓고는 고기를 썰어 내 입에 넣어 주었다. 오물오물 씹고 있자니 육즙이 입안 가득 퍼졌다.

“아우우.”

너무 감동적이라 입을 막고 끙끙거렸다. 가웨인과 란슬롯은 그런 나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도.”

가웨인 한 번.

“아, 해. 착하네.”

란슬롯 한 번. 번갈아 가며 내 입에 음식을 넣어 줘서 난 먹느라 바빴다. 다 먹고 빵빵하게 부른 배를 두드리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물었다.

“그 개…… 녀석이 시험 중에도 장난을 쳤다던데.”

“그건 해결했어요.”

“해결?”

“네, 무사히 본선으로 가서…… 아! 저 1등 했어요.”

프란츠 때문에 성적을 말씀드리는 걸 잊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오빠들의 눈이 살짝 커졌다. 가웨인이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매번 꼴찌만 하던 녀석이 1등이라고.”

“장한데.”

란슬롯도 키득키득 웃으며 내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할아버지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는데, 그때 마침 가신 한 사람이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

“아가씨.”

“안녕하세요?”

“아주 돌아오신 겁니까?”

“아니요, 돌아가야 해요.”

“그렇군요. 아, 어르신, 광산 건으로 여쭐 말이 있습니다.”

가신이 서류를 내밀자 할아버지는 빠르게 내용을 훑었다.

“이 건은 회의에서 다루도록 하지.”

“그렇게 하지요.”

“공의 아들이 몇 살이라고 했던가.”

“올해로 열다섯입니다.”

“학술원에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성적은 좋은가?”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그렇지. 어렵지, 수석은.”

“예?”

가신이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좌우로 눈을 굴리던 그가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 혹시 아가씨께서 수석을……?”

할아버지가 큼, 헛기침을 하고는 중얼거렸다.

“그것도 졸업 시험에서 수석을 받아 왔지 뭔가. 골치 아프게 됐지.”

“골치 아프시다니요! 자식 둔 부모라면 모두 부러워할 텐데요.”

“그러니까 말일세.”

할아버지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가뜩이나 재주가 많은 아이니 어느 쪽으로 지원해야 할지. 쯧, 귀찮게 되었어.”

“그렇겠군요. 제가 부모라도 걱정이 많을 겁니다. 성녀인 것만으로도 세간의 이목이 집중될 텐데 로열 키친에 들어간다면…….”

“고민이 많군.”

“저는 부럽기 그지없지만요. 수석이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입니까. 어르신을 닮아 여러 방면으로 재능이…….”

“이런 것까지 나를 닮을 필요는 없는데.”

가신은 연신 축하의 말을 쏟아냈고, 나는 진짜로 민망했다.

‘그, 그만!’

매번 꼴찌만 하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좋은 성적을 낸 건데! 그것도 1차 시험이었다고…….

“한턱내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가신이 으하하 웃었고, 할아버지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참말입니까?”

“연회를 열겠다. 영지민들에게도 성을 개방할 테니 모두 마시고 즐겨라.”

“이야! 이거 아가씨 덕에 다들 신이 나겠군요.”

연회는 진짜로 아니지 않나요…….

나는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수그렸다. 그래도 내가 좋은 성적을 받아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가신이 돌아가고도 할아버지가 이따금 픽픽, 웃으셔서 나도 따라 웃어 버렸다.

그날은 마침 주말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며칠 동안 성에서 푹 쉴 수 있었다. 새로운 주의 아침이 되어서야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가족들과 사용인들이 바리바리 싸 준 생필품을 침대에 내려놓고, 시간표를 확인했다.

‘첫 수업은 실습이네.’

조리복으로 갈아입고, 기숙사를 나서는데…….

‘뭐지?’

삼삼오오 모여 있던 학생들이 크게 술렁이고 있었다. 그들 시선 끝에 걸린 사람은 프란츠였다. 피터와 빌리가 그를 추궁하고 있었다.

“말해 봐! 정말로 사실이야?”

“물어서 뭐 해! 어제 교감하는 얘기 못 들었어?”

“말도 안 돼! 그럼 정말 프렌시프 인명록에도 못 올라갈 정도의 방계…….”

“방계는 무슨! 옛날 옛적에 쫓겨나서 평민과 다를 바 없다잖아!”

프란츠는 새파랗게 질려서 이를 악물고 있었다. 피터가 그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이 개자식! 나를 속였어!”

프란츠는 그를 확 떠밀었다.

“돈 없어서 빌빌거리는 거지새끼들 거둬 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뭐?! 이 새끼가!”

퍽! 빌리의 주먹에 맞아 쓰러진 프란츠가 이를 악물었다.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몇몇 학생들이 내게 다가왔다.

“저기…….”

“응?”

“너도 교무 위원회 건물에 갔었잖아. 혹시 봤어? 정말로 프란츠의 아버지가 사기꾼이었니?”

누군가 내게 그렇게 물어오던 찰나, 찢어지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사감이 제 짐을 던지는 학교 경비병들에게 매달려 사정하고 있었다.

“시일은 주셔야지요! 이리 바로 쫓아내시면 저는 어찌 살라는 겁니까!”

“교장의 명이오.”

“뵙게 해 주십시오, 저는 정말로 학생을 신분으로 차별한 적이……!”

학생들은 내게 묻던 것도 잊고 새로운 난리에 집중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기숙사를 벗어났다.

‘다행히 내 신분은 소문이 안 난 모양이네.’

하기야 상담은 수업 중에 멀리 떨어진 건물에서 이뤄졌고, 교감과 교수들은 두려워서라도 입을 열지 못했을 거다.

‘그런데 마차는 어떻게 했을까?’

우리는 마차를 놓고 포털로 이동했는데. 그런 고민을 하면서 걷는 중에 누군가 내 앞을 막아섰다.

“아!”

도미니크의 부관이었다. 이름이…….

“알베르?”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저하께서 돌아오셨나요?”

“예. 그렇지 않아도 잠깐 말씀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하지만…….”

사사롭게 만나면 안 된다는 얼굴로 쳐다보니 그는 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에 관하여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아, 그렇지요. 갈게요.”

난 순순히 그를 따라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상담 때 보았던 교수들과 교감이 희게 질린 얼굴로 앉아 있었다.

“아, 아가씨, 뵙고 싶었습……!”

교감이 벌떡 일어나자 도미니크가 테이블을 걷어찼다. 모서리에 무릎을 맞은 그가 꺽!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도미니크는 내게 의자를 내주었다.

“앉으세요.”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의자에 앉았다.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그가 낮게 실소를 뱉었다.

“내 허가 없이 제적 논의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네…….”

“책임 교수들로 이뤄진 상담진이 아니라 교감 오로반이 직접 채택한 인사들로.”

“그런 것 같더군요.”

“센 양의 제적은 옳지 않다고 항의한 책임 교수들은 징계받았고요.”

그렇게까지?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교감을 쳐다보았고, 교감은 흠칫 어깨를 좁혔다.

“센 양의 보호자가 정식으로 항의해 왔습니다.”

교감과 교수들의 얼굴이 거무죽죽해졌다. 교수 몇이 다급히 소리쳤다.

“저희는 오로반 교수님의 명에 어쩔 수 없이 응했을 뿐입니다.”

“상사가 명하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제발 선처를―”

“아가씨, 아니, 센 양, 제발 부탁드립니다.”

“쫓겨나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저희 가족들이 전부 거리에 나앉을 겁니다.”

“정말 그런 꼴을 보고 싶으신 건 아니겠지요? 아가씨,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쾅! 도미니크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만.”

“…….”

교수들이 질겁하여 입을 다물었고, 도미니크는 낮게 중얼거렸다.

“내 인내를 시험하지 마시오. 그리 자비로운 편은 아니니.”

“…….”

“…….”

도미니크는 교수들을 쭉 돌아보며 못을 박았다.

“부디.”

‘우와, 무서워…….’

화났을 때의 할아버지를 보는 것 같아서 나도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러자 도미니크가 내게 말했다.

“교수들을 해직하는 선에서 마무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건…… 음…….”

나는 조그맣게 침음을 흘리며 그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곤란한데요.”

“원하시는 바라도?”

“교단에 발붙이지 못하는 건 물론, 사방 아카데미에 연락을 취해 소식을 알려 주세요. 동문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되면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일 것이다. 교감과 교수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교감은 “아, 아가씨!” 하고 입을 열려고 했지만, 부관 알베르가 교감의 어깨를 찍듯이 누르는 바람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차분히 말했다.

“제가 프렌시프의 핏줄이 아니었더라면 억울하게 제적당했을 거예요.”

도미니크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말씀하세요.”

“저들은 이곳에서 사라져도 주방장 휘장을 달 재원들이고, 비슷한 순간이 온다면 또 아랫사람을 휘두르려 할 거예요. 선생이란 직함조차 신분 상승의 계단으로 쓴 사람들이니까요.”

더는 나 같은 사람을 만들고 싶지 않아. 그러려면 이제 절대 힘을 가질 수 없게 만들어야지.

내 뜻을 알아차린 그는 좋다고 말했다.

“뜻대로 하지요. 알베르, 이들을 퇴직 처리하고 사방 아카데미와 동문회에도 소식을 알려라.”

“저들의 빈자리는 어찌하시겠습니까.”

“2차 시험을 당기도록 하지. 학생들이 시험 준비를 하는 동안 교수를 채용하겠다.”

“예.”

알베르가 고개를 숙였고, 교수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하지만 도미니크의 결정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엎드려 애원하던 교수들은 학생들이 다 보는 앞에서 경비병에게 끌려 나갔다. 교수들이 끌려 나가고, 세니아나도 교장실을 나서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도미니크가 입을 열었다.

“영애.”

“네?”

“마차는 은밀히 프렌시프 성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아! 그거 저하께서 처리해 주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는데…….”

그녀는 종알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도미니크가 그런 세니아나를 보며 픽 웃었다.

“보란 듯이 마차를 세워 놓아서.”

마치 프렌시프 영애가 여기 있다는 걸 알리고 싶다는 것 같았다.

‘누구 생각인지는 뻔하지.’

프렌시프의 장남인 란슬롯.

그는 앞에 나서지 않고도 원하는 바를 손에 거머쥐는 뱀이었다. 아무래도 프렌시프의 장남은 막냇동생에게 아카데미는 위험한 공간이라고 판단한 듯싶었다. 마음을 상하게 하면서 억지로 돌아오게는 못하겠으니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만만치 않군.’

세니아나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네?”

“아닙니다. 돌아가 보시죠.”

세니아나가 고개를 숙이고 교장실을 떠났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도미니크에게 부관 알베르가 물었다.

“영애에게 손찌검을 했다던 학생은 어찌하실 겁니까. 퇴학시킬까요.”

“둬.”

“예?”

“아카데미가 생지옥이 되었을 테지.”

부친이 두려워 집으로 돌아가지는 못하고 하루하루 피가 마를 터. 프렌시프에서 그의 부친이라는 톰슨 남작을 처리한 뒤에 스스로 자퇴서를 내게 만드는 것이 낫다. 눈치 빠른 알베르는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자퇴 후에 사람을 붙이도록 하지요.”

“그녀에게 휘둘렀던 손은 몸에 붙여 놓지 마라.”

도미니크가 낮게 읊조렸다.

그 시각, 사비에르 후작 저. 동부 아카데미에 넣어 놓았던 세작의 보고서가 올라왔다. 사비에르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태피스트리 아래서 찻잔을 들던 여성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에이레네.”

순간 사위를 어둡게 만들던 구름이 해를 비껴가고, 창 안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후작이 딸을 바라보았다. 햇살에 반사되어 결 좋은 은발과 하얀 피부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길고 우아한 속눈썹이 염려 어린 눈동자를 반쯤 가렸다. 눈꺼풀이 깜빡, 움직이는 것조차 한 폭의 명화처럼 아름다웠다. 미인이 많기로 소문난 황도에서도 이처럼 청초하고 고운 미인은 없었다. 황제가 그녀를 일컬어 제국에 핀 한 송이 수선화라 할 정도였으니까.

후작은 자랑스럽고도 자랑스러운 딸을 보곤, 분노마저 잊은 채 미소지었다.

“이런 사소한 일엔 신경 쓰지 마라.”

“아버님의 근심이 제 근심인걸요.”

“조슈아가 네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걱정이 없을 텐데.”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는 너무나 달랐다. 딸은 황제의 귀여움과 황후의 어여쁨, 제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사비에르의 보물이었다. 반면에 아들인 조슈아는…….

후작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별 해괴한 가명까지 쓰며 부득불 아카데미에 기어들어 가더니 성적마저 개판이로군.”

“조슈아는 늘 수석이라지 않았나요?”

“이번엔 웬 계집애에게 밀린 모양이다.”

에이레네는 생긋 미소지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우냐?”

“아버님께서 조슈아에게 신경 쓰시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요.”

에이레네는 받침에 찻잔을 달칵, 내려놓고는 무릎에 두 손을 포갰다.

“실수 한 번은 눈 감아 주셔요. 다음 시험에서는 좋은 성적을 받을 겁니다.”

“녀석을 이겼다는 계집애가 신경 쓰여.”

“그 아이가 대관절 누구기에…….”

“프렌시프 늙은이의 손녀다.”

에이레네의 눈이 동그래졌다.

“프렌시프 양이 동부 아카데미에 있었나요?”

“이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프렌시프 노인네가 질겁을 하고 아카데미에 찾아갔더구나. 그 덕에 가명까지 알아낼 수 있었지.”

정확히 말하면 프렌시프에서 알린 것과 다름없지만.

새로운 성녀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금좌 11석까지 정보 길드를 동원해 그녀를 조사 중이었으니까. 그러니 언젠가는 동부 아카데미에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을 터.

세니아나 프렌시프가 아카데미에 있는 틈을 노리고 접근하는 자들이 분명 생길 것이다. 프렌시프 늙은이의 아카데미 행차는 그런 자들에게 하는 선언이었다. ‘손녀는 제 앞마당에 있으니 접근할 생각 말라’는.

‘여우 같은 늙은이.’

에이레네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어르신께서 손녀를 그리 예뻐하셨던가요…….”

“성녀가 되었으니까 쓸모 있다고 여긴 걸 테지. 빌어먹을, 하필이면 그 계집애가 수석을 해서…….”

성녀인 딸의 자리가 위협당해서 아들을 로열 셰프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아들까지 이겨 먹었으니…….

사비에르 후작이 쿵! 테이블을 내리쳤다.

“로열 셰프 자리까지 노리는 것인가. 빌어먹을 계집!”

“아버님, 진정하세요.”

“하지만……!”

“설마 프렌시프 양이 그렇게까지 욕심 많을까요.”

에이레네는 사뿐히 일어나 부친의 손을 잡았다.

“아버님의 추측일 뿐인걸요.”

“…….”

“그저 요리를 좋아하는 성실한 아가씨일 수도 있어요.”

그렇게 말한 에이레네는 생긋 미소지었다.

“정말로 과욕을 부린다면 아버님이 나서지 않아도 하늘이 천벌을 내릴 테지요.”

“에이레네…….”

그는 상냥한 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 * *

제적 상담 사건 이후로는 평화로운 날의 연속이었다. 나는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한낮의 벤치에 앉아 오늘 배운 요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조제프 교수님의 파스타 진짜 맛있었지.’

나는 식당에서 남겨 온 쿠키를 오물거리며 필기한 것들을 살폈다.

“조제프 교수님의 소스로 라비올리(파스타 반죽 틈에 고기나 야채 등의 소를 채운 요리. 만두와 비슷하다.)를 해도 맛있지 않을까.”

“라비올리는 무리지!”

내 옆 벤치에 앉아서 빵을 물고 있던 남학생이 소리쳤다.

“으응?”

“소스가 너무 묽잖아.”

그러자 다른 학생들도 슬쩍 끼어들었다.

“맞아. 그거 같을걸, 남부에 있는 요리. 피에 고기 부추 소를 넣어서 국으로 끓인 거 말이야.”

“만둣국?”

내 물음에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좀 다른데. 크림 소스를 국으로 생각하는 건 무리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국은 뭔데?”

“콩소메와 비슷할까? 투명한 탕. 거기에 소금 간 해서…….”

학생들과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남부 음식에 조예가 깊네?”

그들이 묻기에 나는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가장 먼저 끼어들었던 남학생이 턱을 괴며 물었다.

“남부 음식 중에 가장 좋아하는 건?”

“비빔밥.”

“비빔밥?”

여기는 없나?

“밥에 나물과 달걀 프라이를 넣고, 고추장에 참기름 한 방울 똑 떨어뜨린 다음에 비벼서 먹는 요리야.”

“그거 개죽 아니야?”

나는 뾰로통해져서 그를 흘겼다. 남의 나라 전통 음식더러 개죽이라니!

“그렇게 따지면 파스타도 개죽 아니야? 잡다한 것 다 때려 놓고 볶은 건데.”

“그건 또 맞는 말.”

그의 말에 내가 히히 웃자 학생들도 으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헉! 그러고 보니까 나 지금 학우들과 얘기하고 있잖아!’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하니 가슴이 콩닥콩닥거렸다.

“센이 이렇게 재밌는 녀석인 줄 몰랐네.”

누군가의 말에 다른 학생이 대답했다.

“프란츠가 무서워서 얘기할 생각을 못 했지.”

“그전엔 세상과 싸우는 애 같았고……. 말만 걸면 성질이었잖아.”

“아, 맞아. 저학년 때 센에게 책 주워 줬던 적이 있었는데 천한 손 닿은 건 더러우니까 그냥 버리라고 했어.”

나는 화들짝 놀라서 말했다.

“그런데 나한테 다시 말 걸어 준 거야? 엄청 착하구나. 고마워!”

그러자 학생들이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재밌는 애네.”

“세상과 화해했나 본데.”

“센, 우리는 매일 여기서 점심 먹거든. 같이 먹을래?”

나는 가슴이 벅차서 한동안 멍하니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이것저것 물었다.

“저기, 그럼 도시락 싸 와야 해? 나눠 먹어야 하니까 앞 접시도 필요한가? 메뉴는 어떤 거로―”

애들이 나를 이상한 표정으로 보길래 나는 떠듬떠듬 변명했다.

“내가 친구랑 밥 먹는 건 처음이라서…….”

“으앙!”

내 옆에 앉아 있던 오렌지색 머리칼의 여학생이 나를 끌어안았다.

“귀여워!”

“어?”

“매일 같이 먹자.”

내가 정말이냐는 듯 주변을 보자 애들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난 너무 기뻐서 펄쩍 뛸 뻔했다.

‘다들 천사인가 봐.’

혼자서 기숙사에 돌아가며 헤헤 웃었다. 내일 점심을 싸갈 생각에 몹시 설렌다. 그런데―

‘어?’

순식간에 사방이 어둠에 잠식되었다. 당황한 나는 얼른 목걸이를 살폈다.

‘이동한 건가? 하지만 이동했을 때의 감각은 아닌…….’

울렁― 가슴속이 갑자기 수런거리더니 발끝에서부터 기묘한 냉기가 올라왔다. 그리고 그 순간 쩌억, 쩍 등줄기가 오싹하는 기묘한 소리와 함께 녹물 같은 덩어리가 나를 향해 스멀스멀 다가왔다.

“제, 물…….”

섬뜩한 목소리였다. 기계음 같은 낮고, 어두운 목소리. 덩어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목소리는 조금씩 더 커졌다.

“도망친, 제, 물.”

“먹, 자.”

“먹, 어 버 리, 자.”

당황한 나는 주춤 뒷걸음질 쳤으나 어느새 덩어리들이 내 주변을 포위했다. 그리고 덩어리의 틈이 세로로 갈라지면서―

“캬악!”

“……!”

징그러운 이빨이 수없이 나타났다. 그때 목에 건 펜던트가 번쩍 빛나고, 일전에 보았던 베고니아 꽃길이 나타났다. 동시에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를 끌어안은 그 사람이 덩어리들을 향해 소리쳤다.

“사라져! 이 아이는 더 이상 제물이 아니야!”

“선생님…….”

선생님은 나를 꽉 끌어안은 채 덩어리들을 노려보았다. 잠깐 물러났던 덩어리들은 하나로 합쳐져 뱀 같은 형상이 되었다. 온몸에 난 비늘 같은 이빨이 흉측하게 꿈틀거린다. 선생님이 손으로 허공을 가르자 새하얀 빛이 퍼져 나왔다.

“캬아아악!”

불에 덴 듯 온몸을 비틀던 덩어리가 이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비틀거리는 선생님을 부축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방금 그것들은 뭐예요?”

“삿된 자들.”

“삿된 자들?”

“버려진 것들을 삼키고 살아가는 부정한 존재지.”

“버려진 것……. 제가 고아라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으니 선생님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아니야, 절대로.”

“하지만 전 아버지에게도 버림받았고, 또 어머니에게도…….”

선생님이 나를 끌어안았다. 귓가에 들리는 가쁜 숨소리가 너무나 아프게 느껴져서 난 가만히 옷깃을 쥐었다.

“선생님 저요. 저번에 첫 친구를 사귀었어요.”

“…….”

선생님이 나를 바라보았다. 동공의 떨림이 멈추고 빛이 스며들었다.

“내일은 학교 애들과 함께 밥을 먹기로 했어요.”

“…….”

“할아버지랑 오빠들도 잘해 주고요. 성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전부 친절해요.”

“…….”

“이제 버려졌다는 말에 상처받지 않아요. 그러니까 선생님.”

자꾸만 눈물이 새어 나와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선생님의 눈가에도 물기가 어렸다. 나는 훌쩍훌쩍 울며 선생님의 눈물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언제 이렇게 컸을까. 품에서 고물거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선생님이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든 게 네 것이다. 그러니 누구에게도 죄스러워할 필요가 없어.”

“네?”

선생님이 빙그레 미소짓자 베고니아 꽃잎이 날아들었다. 나는 순식간에 꽃잎에 감싸였고, 동시에 펜던트가 뜨거워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다음 순간 눈을 떴을 땐 기숙사의 침대 위였다.

* * *

“센?”

“…….”

“센!”

“어?!”

화들짝 놀란 나는 옆을 바라보았다. 내게 바게트를 건네던 오렌지색 머리칼의 여학생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며 물었다.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어제 선생님과 만난 기억이 너무나 선명해서 오늘 내내 정신을 놓고 다녔다. 꿈인가 싶었지만, 너무나 선명했다. 나를 끌어안아 온 선생님의 팔과 손끝에 닿았던 눈물의 감촉마저.

“자.”

오렌지색 머리칼의 여학생은 직접 크림치즈까지 바른 바게트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계속 멍한데? 무슨 걱정 있어?”

그러자 반대편에 앉아 있던 검은 머리의 여학생이 말했다.

“2차 시험에 도움받을 지도 교수님을 고민하는 거지?”

“그렇지, 고민일 만하네. 다들 어떤 교수님께 부탁드릴 거야?”

“난 레아 교수님.”

“나도! 센은?”

아이들의 시선이 내게 몰렸다. 나는 빵을 오물오물 씹으며 대답했다.

“난 쟝뤼크 교수님.”

“뭐어―?!”

아이들이 펄쩍 뛰며 나를 말렸다.

“2차 시험 보기도 전에 탈진할 거야!”

“쟝뤼크한테 지도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으으. 방학 때도 두려워서 쉬지 못할걸.”

아무래도 쟝뤼크 교수님은 인기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첫 수업 때도 다들 수업을 안 들어오겠다고 했지.’

하지만 지도 교수님인걸. 가장 존경하는 교수님께 부탁드리는 게 맞아.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이들은 레아 교수님이나 기욤 교수님을 외치며, 일단 대기표라도 받아야 한다고 아우성이었다. 아이들은 점심을 다 먹기도 전에 교수님을 찾아서 흩어졌다. 나도 쟝뤼크 교수님의 연구실로 향했다. 문 안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계신가 보다!’

나는 잘됐다고 생각하며 문을 두드렸다. 노크를 했는데 몇 분이나 응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인기척도 사라졌다.

‘응?’

다시 한번 노크를 했으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저기, 계신 거 아는데…….”

그제야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응답이 들려왔다.

“……들어와.”

나는 방으로 들어가서 쟝뤼크 교수의 의자 앞에 앉았다. 그가 작게 투덜거렸다.

“답이 없으면 돌아갈 것이지.”

“자주 그러시니까요.”

“뭐?”

“학생들과 말 섞기 싫어서 없는 척하시잖아요.”

“알면 가!”

그가 버럭 소리쳐서 나는 시무룩 어깨를 떨궜다.

“오늘은 용건이 있는데…….”

“다들 용건이 있어서 오지.”

“중요한 용건이에요.”

“뭔데?”

그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2차 시험부터는 교수님들께 지도를 받잖아요. 그래서 저…….”

“기각.”

“아직 말도 다 안 했는데!”

내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하니까 쟝뤼크 교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싫어.”

“어째서요?”

“넌 실력이 없으니까.”

“실력을 쌓으려고 아카데미에 오는 거잖아요? 실력이 있으면 바로 식당을 했지요.”

그러자 그는 할 말이 없는 듯 헛기침을 했다. 한동안 나를 빤히 보던 그가 물었다.

“식당을 차리고 싶으냐?”

“네!”

나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

“바닷가에 새하얀 오두막 식당을 지을 거예요. 테이블은 네 개쯤 놓고요. 메뉴는 날마다 바뀌어요. 밤엔 가벼운 담금주를 팔 거고요.”

“바닷가라……. 재료 보관하기 힘들겠군.”

“하지만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기분 좋게 식사하고 돌아가는 식당을 만들고 싶은걸요.”

쟝뤼크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풍경보다 훌륭한 조미료는 없지.”

차리고 싶은 식당을 떠올렸더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볼이 발그레 달아오른 나를 보고 쟝뤼크 교수가 말했다.

“다들 로열 키친이나 큰 레스토랑에 취직하기를 꿈꾸는데. 넌 이상하군.”

“그런가요?”

잘 모르겠는데. 남들의 목표를 따르면 그게 꿈인가?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데룩데룩 굴리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쟝뤼크 교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교수님.”

아소의 목소리에 쟝뤼크는 나를 보며 입술에 검지를 붙였다. 조용히 하라는 의미였다. 최대한 숨을 죽였지만, 아소는 “들어갑니다.” 하고 말하더니 벌컥 문을 열었다.

“무례한 놈.”

그의 말에 아소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나를 흘깃 쳐다본 아소는 다시 교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지도를 맡아 주시죠.”

“거절했을 텐데.”

“이번에도 아무도 담당하지 않으면 교수님께서도 곤란해지시지 않습니까.”

반 협박에 쟝뤼크는 미간을 좁히더니 가늘게 한숨을 흘렸다.

“담당할 거야.”

“누구를요!”

“저 녀석.”

교수가 나를 가리켜서 나는 깜짝 놀랐다. 안 하신다면서?

‘아, 핑계를 대는 거구나.’

나는 깨달았지만, 아소는 표정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왜! 어째서 센은 되고, 저는 안 된다는 겁니까!”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자 아소가 소리쳤다.

“교수님! 교수님을 기다리느라 고작 이따위 아카데미에서 몇 년을 허비했습니다. 저보다 교수님께 맞는 제자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 오만이 나와 맞지 않다는 것이다.”

“…….”

이를 악문 아소가 거칠게 문을 연 뒤 나를 한 번, 또 쟝뤼크 교수를 한 번 쳐다보더니 곧장 방을 나섰다.

“아소!”

내가 놀라서 그를 잡으려고 하자 쟝뤼크 교수가 말했다.

“놔둬라.”

“하지만…….”

“지도 교수 신청서는? 신청서는 가져왔나.”

“정말로 제 지도를 맡아 주시려고요? 하지만 아소도 교수님께 지도를 받고 싶어 하는데…….”

“저놈은 틀렸어.”

왜? 누가 보기에도 나보다는 아소를 맡는 쪽이 이득이었다. 로열 키친에 들어간 제자가 있다는 건 스승에겐 누구보다 명예로운 일이었으니까.

쟝뤼크 교수는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요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놈은 질색이야.”

그의 표정을 빤히 보던 나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신청서는 가져오지 않았어요. 괜찮으시면 여기서 작성해도 될까요?”

“그래.”

내가 신청서를 작성하는 동안 쟝뤼크 교수는 말이 없었다. 난 빠르게 신청서를 작성해서 그에게 내밀었다. 하단에 서명한 그가 조용히 물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왜 묻지 않지?”

“그렇지만…….”

난 그가 도로 내민 신청서를 받으며 조그맣게 말했다.

“아소에게도, 교수님에게도 상처가 되는 질문일 것 같으니까요.”

“…….”

한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던 쟝뤼크 교수가 말했다.

“빌어먹을, 대충 봐 줄 생각이었는데.”

“네?”

“방학이 끝나면 칼자루 쥐는 법부터 다시 가르칠 테니 각오 단단히 하고 오너라.”

“너무 좋아요! 열심히 할게요!”

“고생시킨다는데 좋아하기는.”

활짝 웃는 나를 보며 쟝뤼크 교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나는 사무처에 지도 교수 허가서를 내러 갔다. 쟝뤼크 교수가 서명한 허가서를 내밀자 사무처의 직원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머! 쟝뤼크 교수님이 개인 지도를 맡으신다고?”

“네.”

“별일이네.”

직원은 허가서를 받으며 연신 중얼거렸다.

“다른 좋은 교수님들도 많을 텐데 왜 하필?”

“쟝뤼크 교수님도 훌륭한 스승이신데요?”

“너도 참 특이하다.”

그녀는 후후 웃으며 허가서를 서류철에 잘 집어넣었다.

“이제 보호자 동의서만 받아오면 2차 시험 참가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갈 거야.”

“네?”

“보호자 동의서 말이야. 로열 키친 응시원을 내려면 필요하단다.”

맞다. 보호자 동의.

시트론의 말에 의하면 친권자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학부모 상담처럼 친족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무조건 아빠의 서명이 필요했다.

“저기, 그, 부모님께서 멀리 사시는데 할아버지나 형제의 서명으로는 안 될까요?”

“그건 안 되지. 그래서 2차 시험 전에 방학이 있는 거잖아? 보호자가 멀리 있으면 방학을 이용해서 받아오렴.”

그렇게 말한 그녀는 산뜻하게 “다음!” 하고 외쳤다. 나는 어깨를 축 떨구고 터덜터덜 기숙사로 돌아왔다.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고민하다가 통신석을 들었다. 시트론이 가진 통신석에 신호를 맞추자 곧 점멸을 시작하더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아가씨!]

“시트론…….”

[왜 이렇게 기운이 없으세요?]

“보호자 동의서를 받아야 할 때가 왔어.”

[저런.]

시트론이 침음을 흘렸다. 나는 우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떡하지?”

[어르신께 대신 받아 달라고 부탁하시는 건 어떨까요?]

“그래도 될까?”

내가 화색이 되어서 물으니 시트론이 어색하게 말했다.

[싸움이야 나겠지만 설마 부자지간에 서로 죽이기야 할까요.]

“……그렇게 사이가 안 좋으셔?”

[당파가 서로 다를 정도니까요.]

내 단편적인 기억 속에서도 그랬다. 할아버지는 아빠와 연락할 때마다 고함을 쳤고, 아빠는 할아버지의 연락조차 잘 받지 않았다.

‘내가 갈 수밖에 없겠다…….’

“시트론.”

[네, 아가씨.]

“방학 때 영지로 못 내려갈지도 몰라…….”

[방학이면 한 달 뒤지요?]

“아니 닷새 후야. 2차 시험이 빨라져서 방학도 이르게 하거든.”

[어디서든 우리 아가씨께서 마음 편히 쉬시면 되지요.]

시트론은 내가 속상해할까 봐 애써 밝게 말했지만, 목소리에 스민 아쉬움을 전부 지울 순 없었다. 통신을 종료하고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방학 때 성에서 뒹굴뒹굴하고 싶었는데…….’

잠깐 시무룩해졌던 나는 곧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아빠한테서 빨리 서명받고 영지로 가자.’

그렇게 결심하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닷새는 금방 흘렀다. 방학식이 끝나고, 학생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난 기숙사로 되돌아가서 할아버지에게 황도로 간다는 소식을 전했다.

[…….]

왜인지 빠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할아버지는 잘 다녀오라고 말해 주었다. 영지에 잠깐 돌아갔다가 황도로 갈까 싶었지만, 얼른 서명을 받아서 영지로 가자고 생각했다.

[기사들을 보내지.]

“포털로 바로 이동할 거니까 괜찮아요. 황도에도 연락해 놨으니까 황도 기사들이 호위할 거예요.”

그러고 나는 웅얼거렸다.

“그리고 포털을 단시간에 두 번 쓰는 건 조금…….”

[흠, 그렇군. 하루에 포털을 두 번 여는 건 너라도 힘에 부칠 테니까.]

“네.”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해라.]

할아버지와 통신을 끝내고 나는 지도를 펼쳤다. 실수 없이 이동하기 위해 황도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목걸이를 잡으며 문득 지도에 그려진 시장 기호를 보았다.

‘황도 대시장엔 없는 물건 빼고 다 있댔지.’

한 번 가 보고 싶다…….

그리고 이동하여 눈을 떴을 때 나는―

“도미 있습니다! 물 좋은 도미!”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햇감자! 햇감자 한 소쿠리에 단돈 1피니!”

황도 대시장의 골목이었다.

‘망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보는 눈이 없는 곳이란 것이었다. 나는 얼른 목걸이를 쥐었다.

‘다시, 다시.’

저택. 나는 황도 저택에 가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포털을 열려던 때였다.

“잡아라!”

“죄인을 잡아라!”

멀리서 고함이 들리는가 싶더니 갑주를 찬 사내들이 우르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앞에서 쫓기던 남자가 나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아차 하는 사이에…….

“오, 오지 마! 오, 오면 다 죽일 거야! 죽일 거라고!”

붙잡혀 버렸다. 내 목을 끌어안은 괴한이 허공에 칼을 휘둘렀다. 남자가 나를 끌고 뒷걸음질 치며 허공에 칼을 휘둘렀다.

“꺄아악!”

흉기를 든 괴한을 본 사람이 소리치자 주변의 시선이 온통 이쪽으로 쏠렸다. 괴한은 더 흥분해서 내 목을 조르듯이 힘주어 감았다.

“윽!”

갑주 찬 기사들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지, 진정해!”

“이, 이렇게 많은 음식이, 이, 있는데 도, 돈이 없어서 나는 나, 나흘을 아무것도 모, 못 먹었다고!”

칼을 휘두르는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남자는 제정신이 아닌 듯싶었다. 그야 백주 대낮에 칼부림을 하는 사람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다시 포털로 이동을……!’

내가 목걸이를 잡았을 때였다. 휙! 눈앞에 짙은 보랏빛 천이 펄럭이는가 싶더니 등 뒤에서 컥!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누군가 내 손목을 끌어당겼다. 내 등을 끌어안은 장신의 사내가 무심한 표정으로 괴한의 가슴을 밟고 있었다.

흩날리는 금발, 짙은 녹색의 눈동자. 괴한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듦과 동시에 나는 숨을 멈췄다. 아름다운 사내의 얼굴에서 내가 아는 사람이 엿보였다. 란슬롯이 나이 든다면 딱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갑주를 찬 남자들이 한쪽 무릎을 굽혔다.

“각하를 뵙습니다.”

“각하를 뵙습니다.”

각하라면…….

‘아빠?’

내가 화들짝 놀라 그를 쳐다보기 무섭게 그는 괴한의 어깨에 검을 찔러 넣었다.

“크아악!”

단말마 같은 비명이 시장에 울려 퍼지고, 괴한의 가슴을 밟고 있던 검은 가죽신에 피가 스며들었다. 그러자 갑주를 찬 남자들의 대장인 듯한 사내가 아빠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폐를 끼쳤습니다.”

아빠의 시선이 남자를 향했고, 그의 눈을 본 나는 흠칫 놀랐다. 두렵다는 말로 설명이 되는 눈빛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와는 궤가 다른 싸늘한 눈빛.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는데, 등에 다시 아빠의 손이 닿았다.

“가만히.”

아빠의 시선이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무, 무서워.’

마치 사자 앞의 생쥐가 된 것 같다. 절대로 넘을 수 없는 포식자 앞에 가로막힌 기분.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괴한을 포박한 사내들이 잔뜩 긴장하여 고개를 수그렸다.

“소, 송구…….”

“버러지들이 국록을 축내고 있었군.”

“…….”

괴한을 포박한 남자들(국록을 먹는 것으로 추측되는)의 표정이 붉어졌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아무래도 황도 경비대는 어린애들 놀이방인 모양이야.”

“예?”

“반성문이 필요한 걸 보면.”

남자들이 무어라 변명하려 했지만, 아빠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나를 데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아빠의 뒤를 열심히 쫓아갔다. 그런데 시장에 사람이 워낙 많아서 걸핏하면 치이기 일쑤였다. 그러자 아빠가 몸을 돌리고 내게로 왔다.

“그, 금방 쫓아갈…… 앗!”

아빠는 나를 휙 안아 들었고, 졸지에 어린애처럼 안겨 버린 나는 아빠의 어깨를 잡았다.

“호, 혼자 갈 수 있는데요!”

“열흘쯤 걸려서 말이지.”

“…….”

할 말이 없어서 손만 꼼지락거렸다. 아빠는 나를 안고도 성큼성큼 잘만 걸었다.

‘프렌시프 사람들은 다 힘이 센가?’

할아버지도 나를 업고 엄청 잘 걸으셨고.

우리는 곧 마차에 도착했다.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가면서 숨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조심조심 숨을 쉬느라 이동 거리가 짧았는데도 피로감이 느껴졌다. 어느새 마차가 멈추었고, 나는 재빨리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긴장돼서 죽는 줄 알았어.’

목을 매만지며 고개를 들었다.

“와―!”

마차 안에선 구경할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황도 저택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커다란 건물 다섯 채가 ‘W’ 형태로 이어져 있고, 네모난 기둥이 늘씬하게 쭉 뻗어 있었다. 기둥을 엮은 주두 하나마저 감탄이 흘러나올 정도로 섬세했다.

현관으로 이어지는 화단 속 장미가 화려하게 만개하여 짙은 향기로 저택 외부를 감쌌다. 현관 앞에 정렬한 사용인들이 아빠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테일 코트 연미복 차림의 집사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나를 보고 잠시 멈칫하였으나 내색은 없었다.

“오셨습니까.”

그가 아빠를 향해 한 번, 나를 향해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아빠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쫓아갔다. 서재 안으로 들어간 그가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

“…….”

방 안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소파 팔걸이를 톡, 톡, 두드리던 아빠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노인네가 노망이 들었군. 너를 여기 혼자 보내는 걸 보면.”

나는 깜짝 놀라서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집사와 사용인들이 있는데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건가?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난 눈을 데루룩 굴리다가 우물쭈물 말했다.

“노, 노인네 아니라 할아버진데…….”

그리고 혼자 보낸 건 믿어 준 거다. 내가 확실하게 이동할 거라고 생각해서.

‘아, 말대꾸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홱 고개를 숙였다. 그 탓에 머리가 조금 헝클어졌다. 아빠는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맞는다!’

나는 눈을 꽉 감은 채 머리를 감쌌다.

“…….”

“…….”

아픔이 느껴지지 않기에 실눈을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아, 내 아빠가 아니라 세니아나의 아빠였지.’

무관심할지언정 술을 사 오라고 때리거나, 기분이 나쁘다고 발로 차지 않는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천천히 팔을 내렸다.

“죄, 죄송…… 놀라서…….”

할아버지나 오빠는 원래 내겐 없던 사람이었지만 아빠는 달랐다. 윤세나였을 적에 겪었던 일 때문인지 ‘아빠’라는 상대는 무의식적으로 공포를 불러왔다. 술에 취한 ‘윤세나의 아빠’에게 목덜미가 잡혀 변기 물 고문을 당한 일이 여전히 생생했다. 최초로 느꼈던 죽음의 공포였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

어른 남자는 전부 무서웠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네가 사람을 무서워하는 걸 노인네도…….”

아빠는 잠깐 미간을 좁혔으나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르신도 아나?”

아버지, 라고는 부르지 않는구나.

나는 조그맣게 대답했다.

“맨날 그런 건 아닌데요. 그냥 오늘은 긴장이 되어서 실수를…….”

아빠가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한 번 ‘윤세나의 아빠’를 떠올려 버리니 손이 벌벌 떨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쉬는 게 좋겠군. 마일로, 세니안을 방에 데려다줘라.”

“예.”

현관에서 보았던 집사가 나에게 다가왔다.

“가시지요, 아가씨.”

아빠를 흘깃 훔쳐보다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일로를 따라 황도 저택에 준비된 내 방으로 향했다. 화이트와 핑크로 꾸며진 방은 책상부터 테이블에 놓인 화장수까지 모두 아기자기 섬세했다. 좋게 말하면 공주님이 금방이라도 하품을 하며 일어날 것 같았고, 나쁘게 말하면…….

‘레이스는 제발 그만!’

―이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마일로가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께서 오신다기에 저택의 모두가 함께 단장했습니다.”

“그렇구나…….”

마일로가 방문을 두드리자 사용인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하녀들과 기사들을 보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마일로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드는 하녀와 기사들을 곁에 두고 부려 주십시오.”

“난 성에 개인 하녀가 있는데.”

시트론이.

집사의 표정이 곤란해졌다.

“이런……. 아가씨를 모시겠다고 시험까지 거쳤는데 다들 아쉽게 되었군요.”

“으음…….”

사람들의 얼굴에서 실망감이 역력하다.

‘그, 그럼 저택에서 머무는 동안이라면.’

어차피 서명만 받으면 금세 돌아갈 테지.

나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 아이로.”

나는 하녀들 중 가장 눈이 반짝이는 아이를 선택했다. 그녀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이름은?”

“마릴린이에요.”

“잘 부탁해, 마릴린.”

내가 악수를 청하자 마릴린은 에이프런에 손바닥을 닦고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곤 집사에게서 얼른 내 짐을 받았다.

“기사는 어떤 분으로 하시겠어요? 빅터, 카터 형제는 황도에서 손꼽히는 실력자랍니다.”

“음, 그럼 두 사람에게 부탁할게.”

마일로가 턱짓으로 다른 사용인을 내보냈고 빅터, 카터 형제는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인사했다. 우직하고 든든해 보이는 쪽이 빅터, 선이 가는 쪽이 카터. 그렇게 외우며 말했다.

“잘 부탁해.”

두 사람은 내 손등에 입을 맞춰 왔다.

‘으아아!’

그, 그렇지. 기사들이니까. 마담 버지니아도 처음 만났을 때 손끝에 입 맞췄었고.

성의 기사들은 이렇지 않아서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좀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럼 아가씨, 저희는 방문 앞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빅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일로가 나가고 방 안엔 마릴린과 나만이 남았다. 마릴린은 정말로 눈치가 빨라서 내가 말하기도 전에 이것저것을 척척 준비해 줬다.

내가 침대에 누워서 꾸벅꾸벅 졸고 있으니 마릴린은 내 머리를 풀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혀 주었다.

“피곤하시지요?”

“으응…….”

“편히 쉬셔요. 아, 통신석으로 연락이 오면 주무시고 있다고 말씀드릴까요?”

“부탁해…….”

내가 꾸물꾸물 침대로 들어가니 마릴린이 이불을 덮어 주었다. 오늘 내내 긴장하고 있어서 그런지 금세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마릴린은 세니아나의 통신석을 들고 나오며 “하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앞을 지키고 섰던 카터가 그녀를 흘깃 쳐다보았다.

“신났네?”

“고대하던 자리를 얻었으니까. 아가씨 정말 사랑스러우시지 않아?”

“뭐……. 영지 놈들이 하도 뿔난 망아지라고 하기에 어떤 분인가 싶었더니. 상냥하고 좋은 분이시네.”

“그렇지~?”

마릴린이 방문을 바라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마릴린은 황도 저택의 총괄 집사 마일로의 외동딸이었다. 부친의 등을 보고 커서 자신도 나이가 들면 프렌시프의 충복으로 봉사하겠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마릴린은 세니아나가 황도에 올라오기를 오랫동안 소원해 왔다.

“아주 소중히 모실 거야.”

마릴린이 꿈꾸듯 몽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카터가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성에 개인 하녀가 있다잖아?”

“흥, 영지의 사용인을 어떻게 믿고? 아가씨가 플로헤타 메리아덴에게 학대당하는 걸 바보 같이 지켜보기만 한 놈들이야.”

“그렇지, 영지 놈들은 한심해.”

“다들 기합을 단단히 넣고 있으니까 너도 열심히 하란 말이야. 아가씨께서 쭉 황도에 머물고 싶어지시도록.”

“당연한 말을.”

카터가 어깨를 으쓱 올리자 빅터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께서 주무시니 그 입들 좀 다물어라.”

마릴린은 고개를 끄덕이곤 사뿐사뿐 멀어졌다. 다이닝 룸에 들어가자마자 세니아나의 통신석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아가씨.]

시트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의 개인 하녀구나.’

마릴린은 입매를 삐뚜름하게 올리고 말했다.

“아가씨는 주무시고 계세요.”

[그쪽은 누군데 아가씨의 통신석을 함부로…….]

“전 아가씨의 개인 하녀예요.”

통신석에선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어르신께서 저와 기사들을 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개인 하녀는 더 필요하지 않아요.]

“이쪽에도 기사들이 있답니다.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위해 실력자들을 붙여 주셨어요.”

[저택으로 가기로 한 바커스 경과 고레일 경도 훌륭한 실력자예요.]

“이쪽은 빅터, 카터 형제가 모시고 있지요.”

빅터, 카터 형제의 무위는 대륙 전역에 소문이 자자했다. 허세 한술 보태 두 사람만으로 거뜬히 백 명의 군사를 베어 버린다는 소문까지 있는.

[……아가씨께서 일어나시면 어르신의 말씀 전해 주세요.]

“그러지요.”

[그리고 아가씨는 밤에 찬 음료를 마시면 배앓이 하시니…….]

“알아요. 아, 말 나온 김에.”

마릴린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바짝 낮췄다.

“월경 주기는 어떻게 되죠?”

[예?]

“월경 전에 몸 상태를 살펴 편히 지내실 수 있도록 도와야 하잖아요?”

[그건…….]

“설마 모르는 건가요? 기가 막혀서. 매달 일주일씩 고생하신다고요.”

시트론이 당혹스러운 듯 침묵하자 마릴린은 ‘믿기지 않아, 정말.’ 하고 중얼거렸다.

“됐네요. 그쪽에게 도움받을 일은 없겠어요.”

그렇게 말한 마릴린이 뚝, 통신을 종료했다.

“영지 사용인들이란.”

그녀가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일은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아가씨를 뿔난 망아지입네, 미친개입네 떠들다니.

“염병한당께.”

시원하게 욕을 하던 마릴린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합, 입을 다물었다.

“아가씨 앞에선 고운 말, 고운 말.”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세니아나의 교복을 세탁하기 시작했다.

밤늦게 일어난 나는 헉, 숨을 들이켰다.

‘아빠한테 인사도 못 했는데.’

어떻게 하지……. 고민하고 있는데 마릴린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주인님께서 깨우지 말라고 하셨어요.”

“아…….”

마릴린은 정말로 눈치가 빨랐다. 내가 허기지다고 느끼자마자 요깃거리를 가지고 왔고, 그 후엔 황도의 이야기를 이것저것 해 주어서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아가씨, 정원을 안내해드릴까요?”

“안내?”

“네. 황도 저택의 사용인들은 대륙 전역에서 모였거든요. 정원사도 그렇고요. 정원사마다 고향의 방식으로 곳곳을 꾸며서 보는 재미가 있답니다.”

“재밌겠다!”

“그렇죠?”

낮에는 아빠 눈치를 봐야 하니까 잘 돌아다니지 못하겠지?

‘응, 밤이 좋겠어.’

마릴린을 따라서 정원에 나갔다. 공터가 꽤 있는 성과 다르게 발을 내딛는 곳마다 세심하게 꾸며져 있어서 정말 보는 재미가 있었다.

여름밤이라 그런지 확실히 더웠다. 내가 손등으로 땀을 훔치자 마릴린이 펄쩍 뛰었다.

“부채를 가져올게요!”

“괜찮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릴린이 저택으로 들어갔다. 난 분수대에 앉아서 손으로 물장난을 쳤다.

‘시원해라.’

“들어가도 괜찮아.”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아, 아빠.”

“…….”

“……?”

“아빠라고 불러 주는구나.”

그의 눈빛이 묘해져서 난 어쩐지 민망해졌다.

“아빠니까 당연히…….”

“…….”

“……?”

“그래, 내가 네 아비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몇 번이나 중얼거린 그가 다시 내게 말했다.

“들어가도 괜찮아. 깨끗한 물이거든.”

내가 주저하고 있으니 아빠는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 아니에……!”

그렇게 말했지만, 아빠는 내 다리를 물속에 넣고, 분수대 틀에 앉혀 주었다. 아빠는 나와 반대로 앉아 다리를 꼬았다.

“놀아라.”

분수대에서 뛰어놀 나이는 지났는데. 나는 난감해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아빠가 내게 물을 튀겼다. 난 우뚝 굳어져서 눈을 데루룩 굴렸다.

“이렇게 노는 게 아닌가?”

“그, 연인들은 그렇겠지요?”

“그렇군…….”

아빠가 팔짱을 낀 채 중얼거렸다. 어색함이 폐를 꽉 짓누르는 것 같아서 우물쭈물하다가 억지로 말을 꺼냈다.

“아빠는 바람둥인가요?”

아니야, 이거 아니야.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말을 입속으로 집어넣고 싶었다.

‘바보.’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가 슬그머니 아빠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내 쪽에서 애타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아, 제국의 절세 미남…….”

아빠의 별칭이 떠올라서 중얼거리니 그는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그건…….”

“……?”

“나이 들어서 딸에게 들으니 민망하군.”

“하지만 할아버지는 자랑하셨는데…… 젊었을 때 미남이셨다고…….”

“노망이 든 게 확실해.”

그러더니 내 어깨를 잡았다.

“늙은이와 어울리지 마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아빠가 물었다.

“왜?”

“할아버지도 똑같은 말씀 하셨어요.”

황도로 출발 전에 잠깐 연락했더니 대뜸 ‘그 녀석과 어울리지 말고 냉큼 돌아와라’ 했다. 아빠는 왈칵 인상을 썼다.

“영감탱이…….”

—하고 중얼거리며.

“아가씨~”

때마침 멀리서 마릴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분수대에서 폴짝 뛰어내린 다음 다급하게 신발을 신었다.

‘헉! 젖은 건 어떻게 하지?’

아빠가 의아한 표정으로 날 보았다.

“왜 그러지?”

“저, 저는 아가씨인데 이 나이에 밤늦게 물장구친 걸 사람들이 알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마릴린이 부채를 가지고 뛰어오다가 아빠를 발견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나는 슬그머니 뒤꿈치를 들었다. 닿는 면적을 최대한 줄여서 덜 젖게 하려고. 아빠는 그런 날 보고 픽 웃더니 마릴린에게 말했다.

“내가 방으로 데려가지.”

“아, 네……!”

마릴린은 나와 아빠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기쁜 모양이었다. 얼굴이 환해진 그녀는 얼른 정원을 나섰다. 나는 다시 구두를 벗고, 분수대에 쪼그려 앉았다.

“안 데려다주셔도 돼요. 발만 마르면 혼자서…… 앗!”

아빠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더니 손수건으로 발을 닦아 주었다.

‘손수건인데……!’

“괜찮아요!”

“가만.”

“…….”

“갓난쟁이일 때 목욕을 시켰던 적이 있었지. 미아가 질겁을 했어.”

“미아?”

구두까지 곱게 신겨 준 아빠는 내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네 어머니.”

“…….”

미아. 미아. 미아. 나는 이름을 속으로 발음해 보았다.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방으로 돌아와서 나는 한참을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자리끼를 놓아주려고 살짝 들어온 마릴린이 물었다.

“낯선 곳이라 잠이 안 오시나요?”

“아니야, 오후까지 자서 그래.”

“그럼 읽으실 책이라도 가져올까요?”

“책?”

“어르신께서 금지하신 책도 황도 저택엔 있지요.”

나는 마릴린을 빤히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저기, 있잖아.”

“네, 말씀하세요.”

“아빠가 나에게 관심이 없는 이유는 엄마 때문이야?”

“세상에, 아가씨!”

마릴린이 깜짝 놀라 나를 붙잡았다.

“주인님께선 아가씨에게 관심이 없어서 찾아가지 않으신 게 아니에요.”

“하지만 영지에 일곱 번밖에 오지 않으셨는데. 황도로도 안 부르셨고.”

“그건 어르신께서 아가씨와 만나지 못하게 엄히 단속하셨기 때문이에요.”

뭐라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릴린을 보았다. 그녀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께서 납치당했다가 돌아오신 후에 어르신께선 주인님이 미치광이라고 하시면서 아가씨와의 만남을……!”

다급하게 말하던 마릴린이 입을 막았다.

“납치?”

“…….”

“납치라고 했어, 방금. 뭐야? 내가 납치당했던 거야?”

“그건…….”

“할아버지에게 물어볼까?”

아차 하여 눈을 꽉 감았던 마릴린이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서너 살쯤에 미아 님과 함께 사라졌던 적이 있어요.”

“엄마와?”

마릴린은 주변을 둘러보고 목소리를 바짝 낮추었다.

“모두 미아 님의 죽음을 이민족 탄압 때문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아니에요.”

“아니라니…….”

“두 분은 납치당하셨고, 아가씨 혼자서 돌아오신 거죠.”

쿵! 심장이 발밑으로 꺼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뭐야. 세니아나가 알고 있던 게 모두 사실이 아니야?’

나는 차분히 생각하려 애썼지만, 머릿속이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꽉 막혀 도무지 사고할 수 없었다. 마릴린이 내 손을 잡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아가씨. 아가씨는 무관심 속에서 자라신 게 아니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한 귀로 들어갔다가 또 한 귀로 흘러나갔다. 가슴 속이 수런거렸다. 어쩐지 펜던트가 뜨거워진 것만 같았다.

“어디 가십니까?”

새벽같이 일어난 나는 살금살금 방을 나서다가 굵직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비, 빅터?”

“카터입니다.”

“일찍 일어나서 도서관이라도 가려고…….”

“모시겠습니다.”

“아냐! 혼자서 산책도 하고 싶어서……!”

카터는 의아한 듯 나를 보았지만, 이내 빙그레 미소지었다.

“주인께서 가시는 길을 막을 수야 없지요.”

―라고 하더니 조용히 물러났다. 성의 기사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내 의사보다는 안전이 중요한 그들과 달리 황도 저택의 기사들은 의사를 최우선으로 여겼다.

‘다행이다.’

나는 사람과 안 마주치게 조심하면서 장서실을 찾았다.

‘장서실에 보통 고용인 일지가 보관되어 있으니까…….’

혹시 거기서 과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택은 너무 크고 복잡해서 장서실을 찾았을 땐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여긴가?”

나는 문을 살그머니 열고 틈으로 안을 살폈다. 커다란 책장이 몇 개나 있고, 바닥엔 책 무더기도 있었다.

‘여긴가 보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일지가…… 으음, 찾으려면 한참 걸리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가 눈에 들어왔다.

“헉!”

아빠의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들!

‘여, 여기 장서실이 아니고 아빠의 서재인가?’

빨리 나가자!

내가 후다닥 방을 나서려고 하는데 문틈 사이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전력석…… 영지의 지원…….”

“늙은이가 쉬이 내줄 리 있나.”

아빠와 행정관의 대화 소리였다. 문고리 잡는 소리가 들리기에 나는 우뚝 굳어졌다.

[쥐새끼 같은 년. 여기서 몰래 뭐 하는 거야!]

‘윤세나의 아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방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을 땐,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가슴이 터질 듯이 뛰어서 나는 쪼그려 앉은 채로 입을 틀어막았다.

“수력석을 약탈한 록타온인은 어찌 처리하시겠습니까.”

“밀어 버려. 빼앗긴 놈들도 함께 처리―”

“각하?”

“나가라.”

아빠의 말에 함께 들어온 사람이 다시 방을 나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숨소리도 내지 않기 위해 바들바들 떨었다. 한동안 주변이 조용했다.

‘아빠도 나가신 걸까?’

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데, 덜컹! 의자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니안, 찾았다.”

“……!”

나는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졌다.

“자, 잘못…… 잘못…….”

새파랗게 질려 사지를 벌벌 떨자 아빠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

“이리 와.”

아빠가 손을 뻗었지만, 얼어붙은 몸이 도무지 움직이지 않았다.

“자.”

아빠는 나를 살며시 끌어서 번쩍 안아 의자에 앉혔다. 그러곤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금세 집사 마일로가 들어와서 고개를 숙였다.

“음료를.”

마일로는 나를 잠깐 보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예.”

그가 음료를 가지고 들어올 때까지 나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고개만 푹 수그리고 있었다. 마일로가 음료를 두고 나가자 아빠는 내 손에 잔을 들려 주었다.

“마셔라.”

“…….”

눈치를 보며 꼴깍꼴깍 차갑고 달콤한 밀크티를 마셨다.

“진정 됐나?”

창틀에 기대 있던 아빠가 물어서 난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수, 숨어들어서 죄송…….”

“어릴 때 숨바꼭질을 좋아해서 같이 하자는 줄 알았지.”

턱을 쓰다듬으면서 하는 말에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 안 내세요?”

“안 내.”

“…….”

“찾는 게 있나?”

“사용인 일지를…….”

“몇 년도?”

“제가 서너 살 무렵일 때의…….”

아빠는 책장으로 걸어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두툼한 종이뭉치를 가지고 왔다.

“자.”

“읽어도 돼요?”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서 난 조심스레 감사하다고 말했다.

“어릴 때도 그랬지.”

“네?”

“네가 제일 처음 한 말이 ‘고맙습니다’였어.”

“엄마, 아빠가 아니라요?”

아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빠보다는 할아버지가 빨랐다.”

내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종이뭉치 끝을 매만지고 있으니까 아빠가 물었다.

“궁금한 게 있나?”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납치당했던 것, 그리고 할아버지가 아빠를 영지에 오지 못하게 했던 이유. 두 가지가 궁금하지만 괜한 것에 호기심을 갖는다고 타박할까 봐 우물쭈물했다.

‘하지만 사용인 일지도 주셨고…….’

이 사람은 세니아나의 아빠야. 윤세나의 아빠가 아니야. 질문을 한다고 때리지 않아. 혁대로 후려갈기지도 않을 거야. 난 스스로를 세뇌하듯 되뇌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가 아빠를 영지에 못 오게 하셨다고…….”

“그래.”

“어째서인지 여쭤봐도 되나요?”

“되는대로 사람을 불러들여 네 육신을 조사했다. 마법사, 연금술사, 그리고…… 금술사까지.”

“그건…….”

내가 말을 이으려던 찰나, 쿵, 쿵, 쿵! 발소리가 들리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나는 거칠게 들어온 사람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할아버지!”

* * *

할아버지와 시트론, 그리고 기사 고레일과 바커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마릴린과 빅터, 카터도 황급히 들어와 아빠의 뒤에 대기했다. 할아버지는 싸늘한 표정으로 아빠를 노려보다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와라.”

“가지 않아도 돼.”

할아버지와 아빠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굴렀다. 아빠는 내게 찬 밀크티 잔을 쥐여 주고 할아버지를 향해 한 발 내디뎠다.

“어찌 오셨습니까.”

“세니아나의 통신석이 먹통이더군. 빌어먹을 사비에르에게 보그를 쥐여 주고 포털을 열었다.”

내 통신석이 먹통이라고?!

나는 얼른 통신석을 꺼내서 확인했다.

‘어?’

처음 가지고 있던 것과 거의 똑같지만, 유심히 보니 내포물의 형태가 달랐다. 원래 내포물은 크로스 형태였는데, 지금 내포물은 캣츠 아이처럼 오묘했다.

‘마릴린에게 줬을 때 바꿔치기 당했나!’

내가 그런 표정으로 아빠를 보자 아빠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당장 응시원에 서명해라. 세니아나는 영지로 데려간다.”

“제 딸은 제가 데리고 있을 겁니다.”

“네가 이 아이를 몇 번이나 찾아왔다고 아비라는 게야.”

“어르신께서 만나지 못하게 하셨으니까요.”

“4년 전부터 허가하였는데도 너는……!”

그렇게 외치던 할아버지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짓씹듯이 말했다.

“쓸데없는 짓 말고 세니아나를 돌려보내. 가자, 아가.”

“여기 있어도 괜찮아.”

“아서!”

“남의 집에서 행패 부리는 건 늙은이의 특권이라도 되는 겁니까?”

“막돼먹은 놈.”

“그런 분의 밑에서 자랐더니.”

전쟁이라도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일단 할아버지를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아서 일어나려니까 아빠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세니아나를 잡는 것이냐!”

“여기서 자격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빠를 살벌하게 노려보던 할아버지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화가 많이 나 있는데도 손을 잡을 땐 아주 살포시 잡아서 조금 신기했다.

“영지로 돌아가자. 다들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시트론이 “아가씨.” 하고 날 불러와서 움찔했다. 아빠가 내 반대 손을 잡았다.

“황도의 사용인들로 충분하다.”

그러자 마릴린도 “아가씨…….” 하고 불렀다.

“세니안을 침실로.”

아빠가 빅터와 카터에게 말하자 그들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할아버지가 내 손을 고쳐 잡았다. 이번엔 고레일과 바커스가 빅터, 카터를 막아섰다.

“아가씨를 겁박하지 마라.”

바커스가 위협하듯 말하자 카터는 실소를 흘렸다.

“아가씨 앞에서 이빨 보이지 마.”

“뭐?!”

“붙어 볼까.”

고레일이 “바커스.” 하고 불렀고, 빅터도 “카터.” 하며 동생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양쪽 다 주인이 명하면 금방이라도 검을 꺼낼 태세였다. 나는 양손을 할아버지와 아빠에게 붙잡힌 채 소리쳤다.

“화, 황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나는 떠듬떠듬 말했다.

“황도…… 구경…… 하고 싶은데요.”

일단 전쟁터 같은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된 걸까요.

나는 덜컹거리는 마차에 앉아 슬그머니 아빠와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빠와 할아버지는 저택을 벗어나 상업 지구에 오는 내내 서로 한 마디도, 정말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피곤하면 누워서 가도 괜찮아.”

할아버지가 말하면,

“이리 기대라.”

아빠도 말했다.

‘빨리 내렸으면……!’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마차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는 마부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우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프렌시프 령은 동부에서 제일 번화했지만, 그래도 황도를 따라올 순 없었다.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건물, 다채로운 상품들,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깜짝 놀랄 만큼 화려했다.

“일단 옷부터 살까.”

“주문 제작하려면 오래 걸리지 않나요?”

“황도의 방식은 동부와는 달라.”

그렇구나.

그렇지 않아도 아카데미에서 올 때 교복과 생활용의 단순한 옷만 가져와서 입을 옷이 필요했다. 나는 슬그머니 할아버지를 보았다. 마뜩잖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빠를 따라서 웬 건물로 들어갔다.

‘웨딩드레스 숍 같다.’

단층이지만 내부 넓이가 운동장 같다는 것만 빼면. 여성 고객이 주로 오는 곳이라 이렇게 특이한 구조인 모양이었다. 높은 구두를 신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건 위험하니까.

“골라라.”

아빠와 할아버지는 소파에 앉았고 나는 시트론, 마릴린과 함께 내부를 둘러보았다. 마릴린은 패턴이며 장식이 하나도 없는 드레스를 집고 물었다.

“형태를 먼저 고르시고요, 다음에 원단, 그리고 장식을 고르면 돼요.”

“그게 오더 메이드 아니야?”

“선택한 드레스가 수치별로 미리 나와 있어서 하루 이틀이면 옷을 받을 수 있어요.”

“굳이 왜?”

“황도는 유행이 굉장히 빠르거든요. 제작하려면 서너 달도 걸리잖아요? 옷을 받기 전에 유행이 지나가 버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동부보다는 황도 쪽이 현대와 가깝나 봐.

‘거의 기성품이나 마찬가지니까.’

“요새는 이렇게 어깨 천이 없는 드레스가 유행이에요.”

“아하, 오프숄더.”

“오프…… 네?”

“아니야.”

점원이 얼른 다가와 드레스 고르는 것과 환복을 도와주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점원들이 드르륵, 커튼을 밀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아빠와 할아버지의 눈이 커졌다.

“잘 어울리는구나. 나를 닮아서 흰색이 잘 받아.”

“저를 닮았죠.”

아빠와 할아버지가 서로를 사납게 노려볼 때 점원이 말했다.

“가슴에 달린 건 진짜 사파이어랍니다. 결혼식 예물로 자주 쓰이는 보석이라 영애 또래의 아가씨들이 행복한 결혼을 꿈꾸며 구매하시지요.”

그러자 아빠와 할아버지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별로군.”

“다른 옷으로 하지.”

“색이 있고.”

“사파이어는 없는 옷.”

처음으로 두 사람의 쿵짝이 맞았다.

‘으응? 왜?’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드레스를 살폈다.

‘마음에 들었는데.’

“그, 그렇, 예…….”

점원은 두 남자의 눈빛에 당황해하며 다시 커튼을 쳤다.

“아가씨, 이전에 보셨던 노란색 드레스로 하실까요?”

“으응, 그래.”

점원은 다시 드레스를 입혀 주며 중얼거렸다.

“아가씨의 부군되실 분께선 여러모로…….”

“응?”

내 질문에 점원은 그저 생긋 웃을 뿐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빠가 내 옷을 사 주겠다고 또 다퉜다. 그럼 나눠서 사 달라고 하니 제가 더 많이 사 주겠다고 또 또 다퉜고, 나는 결국 두 벌씩으로 타협했다.

‘한 벌이면 충분한데.’

숍을 나오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빠의 시선이 느껴졌다.

“식사하러 갈까.”

“그건…….”

“로열 키친에서 퇴직한 셰프가 차린 식당이 근처인데.”

아곤과 같은 로열 키친? 나는 냉큼 좋다고 외쳤다.

“어르신은 세컨 하우스로 가시죠.”

아빠의 말에 할아버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번에도 싸울까 봐 난 얼른 소리쳤다.

“할아버지도 같이 가시면 안 돼요?”

“…….”

“같이…… 가고 싶은데…….”

내가 손을 꼼질거리며 눈치를 보자 아빠가 한숨을 내쉬었다. 화가 났나 싶었는데 별말 없이 먼저 걷기만 하기에 할아버지를 끌고 따라갔다. 아빠와 할아버지가 식당 안에 발을 내딛는 순간 영화처럼 우수수 시선이 쏠렸다.

“프렌시프 후작…… 어르신…….”

“두 분이 어떻게…… 저 여성분은…….”

수군수군 소리가 따라붙었지만, 할아버지와 아빠는 신경도 쓰지 않고 안으로 걸어갔다. 지배인으로 보이는 외알 안경의 신사가 헐레벌떡 이쪽으로 다가왔다.

“각하! 연락을 주셨으면 마중을 나갔을 터인데……! 어르신께서도 오셨군요.”

아빠와 할아버지에게 각각 인사한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이분은…….”

“내 딸이지.”

“아아! 그 유명하신……!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왼 가슴에 손을 올린 그가 허리를 바짝 굽혔다. 나도 모르게 마주 인사할 것 같아서 난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그리고 살짝 손을 건넸다.

“프렌시프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고개 숙이고 있던 지배인이 양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좋아, 익숙해 보였지?’

뿌듯해져서 어깨가 으쓱으쓱했다. 몰래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데 아빠와 눈이 마주쳤다.

“…….”

“…….”

그가 픽 웃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 민망해.’

자리에 앉아서 우리는 각자 메뉴를 시켰다. 정통 코스는 아니었고, 애피타이저와 메인, 그리고 디저트로 간략하게 이어졌다. 지배인이 물었다.

“와인을 곁들이시겠습니까. 루에뱅에서 좋은 와인이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하지. 그리고 내 딸이 마실 샴페인도.”

지배인이 돌아가고 약 20분쯤 후에 애피타이저와 술이 먼저 나왔다. 목이 말랐던 차라 샴페인을 마셨는데 정말이지 엄청나게 맛있었다. 달콤하고 산뜻한 맛의 샴페인이 입안에서 파르르 진동하며 목 뒤로 넘어갔다.

‘탄산인데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나?’

크림 소맥 같은데.

잔 안에서 맑은 샴페인이 출렁, 흔들릴 때마다 새콤달콤한 향이 올라왔다.

“이것도 마셔 보겠느냐?”

할아버지가 와인 잔을 건네기에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와인 잔의 둥근 부분을 양손으로 덥석 잡다가 아차, 하고 아빠를 보았다. 지지대를 손끝에 걸치고 있던 아빠의 눈매가 휘어졌다.

“이렇게.”

아빠는 내 손을 벌려서 와인 잔을 잡는 법을 알려 주었다.

“이런, 짧군.”

하지만 세니아나의 손은 유난히 작아서 아빠처럼 안정적으로 잡을 순 없었다.

‘아니야, 할 수 있어.’

손을 부르르 떨면서 열심히 아빠를 흉내 냈다. 그러자 아빠가 큽― 하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시무룩해지니 할아버지가 아빠를 쏘아보았다.

“왜 아이 기를 죽이느냐.”

그러더니 와인 잔을 덥석 들어서 내 앞에 잔을 기울여 주었다. 먹여 주겠다는 듯이.

“저는 애가 아닌데요.”

“…….”

할아버지는 말이 없어졌고, 아빠는 입매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곧 식사가 나왔고, 우리는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는 근사한 식사였다.

‘로열 키친의 요리사들은 하나같이 대단하네.’

나도 앞으로 이런 요리를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렌다. 얼른 방학이 끝났으면 좋겠네.

“다 먹었으면 갈까?”

아빠가 물어서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나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빠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누군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적갈색의 호화로운 지팡이를 짚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할아버지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사비에르 후작.”

‘이 사람이 사비에르 후작이구나.’

그는 아빠보다 열 살쯤 많아 보였고, 듬직한 인상이었다.

‘역시 사람은 겉만 보면 모르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사비에르 후작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 아가씨가 프렌시프의 성녀로군요…….”

그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나를 향해 쏠렸다.

“반갑소, 영애. 요한 사비에르요.”

나는 치마 끝을 잡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세니아나 프렌시프입니다.”

“듣던 것보다 훨씬 사랑스럽군. 내 딸 에이레네가 영애와 동년배지. 황도에 머무는 동안 좋은 친구가 되어 주게.”

프렌시프에 역병을 퍼뜨리고, 내 방에 감염된 시체의 옷을 넣어 둔 사람이 한 말치곤 고상했다. 후작은 껄껄 웃으면서 이어 말했다.

“내 저택에서 에이레네와 차라도 하며 이야기를 나누게. 내일 사람을 보내지.”

할아버지가 냉기 서린 눈으로 후작에게 말했다.

“그만.”

“어르신.”

“내 손녀와 그리 대화를 나누고 싶거든 대기표를 받고 기다려라.”

사비에르 후작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 하지만 순식간에 표정을 지우고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소문대로 영애를 몹시 아끼시는군요.”

‘할아버지가 싸고 돌아서 내가 버릇이 없는 거라는 말투잖아.’

하기야, 과거 세니아나의 소문을 생각하면 버릇 이야기가 날 만도 하다. 내가 아무리 바뀌었다고 해도 기간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세니아나가 사고를 쳐 온 건 10년이란 세월이었다. 후작이 왜 불쑥 다가왔는지 알 법도 하다.

‘내가 황도에 올라온 게 불안했구나.’

사교 활동을 시작하는 줄 알고. 포털의 소유자에다 프렌시프의 영애인 내가 사교계에서 영향력을 과시하기 시작하면 황궁에서 본격적으로 탐을 낼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미리 평판을 떨어뜨리겠다는 거네.’

아빠와 할아버지가 코를 납작 눌러 주어도 내가 직접 나서지 않는 한 사비에르 후작의 의도대로 될 것이다. 후작은 빙그레 웃으며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영애는 영지에서만 지내서 세상 물정에 어둡지요. 먼저 사교계에 나온 제 딸이 도움을 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후작에게 말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확실히 전 세상 물정에 어두워요. 그래서 말인데, 괜찮으시면 가르침을 주실 수 있을까요?”

후작은 허허, 사람 좋게 웃었다.

“궁금한 게 있나?”

“네. 보통 초대는 상대의 의사를 물어본 후에 하는 것이지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후작이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의사를 물어보지 않는다면 강요고요.”

“…….”

“부모가 있는 자리에서 자식에게 강요하는 건, 그 부모를 업신여길 때나 하는 일이 아닌가요?”

후작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졌고, 난 쐐기를 박았다.

“그런 모욕이라면 장갑을 던져도 할 말이 없다고 알고 있는데 어째서 인망 높은 후작께서 그런 일을 하시나요?”

“…….”

“제가 세상 물정에 어두워서 뭘 모르고 있는 걸까요?”

다시 한 번 레스토랑이 술렁였다. 후작은 억지로 미소지었다.

“그렇군. 내가 반가운 마음에 큰 실수를 한 모양이야. 사과하지.”

나는 고개를 살짝 숙였고, 후작은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할아버지와 아빠가 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 내 손을 잡아 후작을 지나쳤다.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났지만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수군거리지 않았다. 되려 후작을 보며 “망신도 이런 망신이…….” 하며 신나게 쑥덕거릴 뿐이었다.

우리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손님방으로 돌아갔고, 아빠도 행정관들과 함께 집무실에 들어갔다. 두 사람과 외출한 데다 사비에르 후작까지 만나 잔뜩 긴장했더니 피곤이 몰려왔다. 잠깐 쉬어야지, 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졸음이 쏟아졌다.

‘씻어야…… 땀…… 났으니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다시 눈을 떴을 땐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꿉꿉해.”

역시 씻고 잘걸.

얼른 일어나서 욕실로 향했다. 성에선 내 방에 욕실이 딸려 있었는데, 저택엔 방 밖으로 내 전용 욕실이 있다.

‘성보다 커서 좋았는데 이럴 땐 불편하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얼른 샤워를 마쳤다. 옷을 갈아입은 다음 머리를 말리고 나오는데 복도 끝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할아버지 방이네?’

이렇게 늦은 시간지 왜 안 주무시지? 설마 또 아빠랑 싸우시나!

나는 황급히 할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고함이 오고 갈 줄 알았는데, 방 안은 고요했다. 똑, 똑, 노크를 했다.

“누구냐.”

“세니아나예요.”

“……들어와라.”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할아버지는 창가에 있는 티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왜 안 자고.”

“씻고 나오다가 불이 켜져 있길래요.”

“그렇구나.”

난 할아버지의 옆에 앉아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하늘 가득 수놓인 별이 금세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슬쩍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조용히 말했다.

“내가 미우냐.”

“…….”

“아비와 보지 못하게 하여. 이제껏 네게 무심하여.”

나는 의자 위에 쪼그려 앉아 다리를 안았다.

“할아버지는 제가 왜 미우셨어요?”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매번 속을 뒤집어 놓아서.”

“그래서 별채로 보내신 거예요?”

“대치 중인 적군에게 우리 군의 이동 경로를 알렸을 때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지.”

“…….”

“팔백 명이 죽었다. 그 중엔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오랜 지기도 있었어.”

할아버지는 가만히 내 눈을 바라보았다.

“손녀이니 당연히 용서해야 한다는 네가 마귀처럼 보였다. 소름이 끼쳐서 참을 수 없었어.”

“…….”

“그때 너와 이야기를 나눴어야 했나.”

“…….”

“그리 독하게 군 까닭이라도 물었어야 했던 걸까.”

가슴이 조여들어서 나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용서도, 위로도, 변명조차도. 그저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삼킬 수밖에. 나는 세니아나가 아니니까. 그래서 난 자격이 없었고, 동시에 죄스러웠다.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할아버지가, 오빠들이, 또 아빠가 주는 마음이 모두 내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꾸짖고, 또 꾸짖어도 자꾸만 욕심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세니아나는 없잖아. 이제 내가 세니아나잖아. 못된 생각이 가시덩굴처럼 가슴을 옭아맸다.

“세니아나.”

“…….”

“미안하다.”

그 말을 들을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진실을 입 밖에 낸다면 어떻게 될까? 가족들의 미소는 영영 볼 수 없겠지. 세니아나를 돌려내라고 화내고, 다그칠지도 모른다.

‘상처 주고 싶지 않아.’

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울음을 삼켰다. 머리 위로 할아버지의 시선이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오던 그가 흠칫, 물러났다. 늘 그랬다. 언제나 유리 조각을 만지듯 아주 조심스럽게 내게 닿았다. 그럴 때마다 목구멍으로 말이 비집고 올라왔다.

‘할아버지가 좋아요.’

항상 다정하게 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계속 곁에 있게 해 주세요.

“갈게요…….”

“그래.”

나는 손바닥으로 눈을 문지르며 일어났다. 방을 나서는 내내 할아버지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멍하니 저택을 걸었다. 정신 차렸을 땐 현관이었다.

“아가씨?”

복도를 걸어오던 시트론이 놀라 내게 다가왔다.

“표정이 왜 이렇게 안 좋으실까.”

시트론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그냥 길을 잃어버려서…….”

“저도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트론이 생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응?”

“황도 저택은 처음이라서요.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나는 곤란한 척하는 시트론을 보고 웃어 버렸다. 시트론은 길눈이 밝아서 한 번 다녀간 곳은 지도라도 보는 것처럼 달달 외웠다. 게다가 다이닝 룸 같은 곳에서 나오고 있었으면서 내가 걷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까 모른 척해 주는 것이다.

“그럼 저쪽으로 가 볼까요?”

일부러 방과는 정반대 길로 이끌면서.

‘시트론은 정말 상냥해.’

나는 시트론의 손을 잡고 걸었다. 탐험하듯이 이곳저곳을 걸으며 장식물이라든가, 촛대를 구경했다.

“이 올빼미상 성에도 있는데.”

“너무 호화로워서 하인들은 닦을 때마다 벌벌 떨어요.”

나는 아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다, 정말로.

다음 복도엔 그림이 잔뜩 있었다. 미술관 같아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림이지?”

“네.”

그런데 마치 사진 같았다. 착용한 액세서리까지 너무 현실감이 넘쳐서 탄성을 흘렸다. 시트론이 함께 그림을 감상하며 말했다.

“역대 후작 부인들이네요. 성에도 초상화첩이 있어요.”

“후작 부인들? 그럼 할머니랑 오빠들의 어머니도 있을까?”

“아가씨의 할머님은 계실걸요?”

“궁금해!”

우리는 가장 끝으로 달려갔다. 시트론은 마지막 그림 전에 멈춰서 말했다.

“이거네요.”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림 속의 할머니는 매우 아름다웠다. 고혹적인 적색의 머리칼과 고귀한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미인. 선 하나하나가 그린 듯 단정했지만, 하나로 모이니 강인해 보였다.

“너무 멋지다.”

“그렇죠? 실제로도 정말 멋진 분이셨대요. 강한 자에겐 굽히지 않았지만, 약한 자에겐 연시보다 무르셨어요.”

그림은 초대부터 현대까지 나열된 것 같았다.

‘그럼 마지막 그림은 뭘까?’

란슬롯의 어머니? 아니면 가웨인의 어머니일까? 설레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어머, 이분은……!”

시트론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의 어머님이세요.”

“…….”

“아가씨?”

“……말도 안 돼.”

나는 뻣뻣하게 굳어져서 마지막 그림을 바라보았다.

‘거짓말, 어떻게, 어떻게 이 사람이……!’

색이 엷은 갈색 머리칼과 고동색 눈동자, 다정한 미소, 눈가에 있는 갈고리 모양의 상처.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사진 하나 없는 게 사무쳐서 매일 밤 꿈에 그리던 사람.

[세나야.]

[우리 세나.]

[세나, 찾았다.]

“선생님…….”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한국인답지 않게 서구적으로 느껴지던 그 모습이 설마…….

어째서, 왜? 어떻게 선생님이 세니아나의 엄마란 말이야?

* * *

다음 날, 나는 하루 종일 방 안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벌어진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아는 것들을 정리해 보자.’

1. 선생님은 세니아나의 엄마와 똑같은 얼굴이다.

2. 선생님은 포털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마치 나를 위해 남겨 준 것처럼 포털의 마원을 가지고 나오는 방법에 대해 알려 주었다.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이 우뚝 멎었다.

그래, 선생님도 가족이 없었어. 나를 찾기 이전에 지인조차 전무했다.

‘선생님은 이 세계의 사람. 세니아나의 엄마야.’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있는 곳으로 오신 거지?

‘납치당한 적이 있다고 그랬어. 그 뒤로 영영 사라졌고.’

그때 돌아가신 건가? 그래서 내가 죽은 세니아나의 몸에 들어온 것처럼 윤세나의 세계에 온 거야?

‘하지만 죽은 몸에 들어온 게 아니라 원래 몸 그대로 이동했잖아.’

마치 스스로 이동한 것처럼.

나는 엎드려서 끙끙거리다가 펜던트를 매만졌다.

“선생님을 만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면 이 일을 자세히 아는 다른 사람이 있으면 좋겠…… 어?

“맞다, 아빠!”

아빠가 납치에서 돌아온 세니아나의 육신을 조사했다고 했다.

‘좋아, 아빠를 찾아가 보자.’

내가 막 문을 열었을 때였다. 방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우뚝 굳어졌다.

“할아버지?”

“…….”

“무슨 일이세요?”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방에 있다기에.”

할아버지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자 그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어제 내가 괜한 소리를 한 게 아닌가 하여.”

‘그렇지, 참.’

선생님의 일 때문에 잠깐 잊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하려다가 할아버지의 손에 들린 그릇을 보았다. 그가 슬그머니 손을 뒤로 감추었다.

“그거 저한테 주시려고요?”

“속이 불편하면 먹지 않아도…….”

“정원에서 먹어도 돼요?”

“그래!”

아빠한테는 이따가 가지 뭐.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까.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정원에 나갔다. 아빠와 함께 있었던 분수대에 앉아서 할아버지가 가져온 그릇을 무릎에 놓았다. 도각도각 잘린 수박과 복숭아, 청포도, 자두.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라서 좀 신기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어떻게 아실까.’

수박을 포크로 집어서 할아버지에게 건넸다.

“너 먹어라.”

“많은데요.”

“…….”

할아버지와 나는 시원한 분수대에서 함께 과일을 먹었다. 반쯤 남겨 놓았을 때, 할아버지의 검지에 자리한 반지가 깜빡거렸다.

‘통신석이다.’

할아버지가 통신석을 두 번 두드렸다. 그러자…….

[어르신!]

절규 같은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고, 할아버지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리 가시면 어찌하십니까. 오늘은 돌아오셨어야지요. 결재해 주실 서류가 몇 장인지 아십니까!]

얼마나 절박한지 거의 우는 투였다.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는 모양인지 웅성웅성 시끄럽다.

[광산 건이 급합니다. 일단 서류라도 보내 주세요!]

마담 버니지아가 버럭 소리치자 다른 사람들도 [나도 급하네!], [내 관할지엔 해충 떼가……!] 하며 시끄럽게 말했다. 갑자기 쿵!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나도 얘기 좀 합시다!] 하는 파르뎅 남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통신석을 들고 옥신각신하는 중인 것 같다. 할아버지는 짜증 섞인 얼굴로 말했다.

“란슬롯과 가웨인이 있지 않으냐.”

[가웨인 도련님은 하계 훈련 때문에 영지에 안 계시고, 란슬롯 도련님은 손님을 맞이하고 계십니다!]

[급한 건은 어르신께서 마무리 지어 주셔야지요!]

[언제까지 계실 겁니까. 제발 돌아오십시오!]

그러고 보니까 여름이 할아버지에겐 가장 바쁜 계절이었다. 나는 슬쩍 할아버지를 보았다.

“돌아가셔야 하는 게 아닌가요……?”

[아가씨? 아가씨이십니까?]

마담 버지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저희 좀 살려 주십시오!]

그 말에 할아버지가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왜 세니아나를 붙잡고 난리냐.”

[저희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시니 그렇지요! 아가씨, 저희 전부 과로로 죽게 생겼습니다.]

나는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저, 저는 할 수 있는 일이…….”

그러자 마담 버지니아가 또 한 번 소리쳤다.

[어르신께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이렇게까지 부탁하니 입을 꾹 다물고 있기가 뭐했다.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할아버지를 힐끗힐끗 보았다.

‘하지만 나도 어려운데…….’

할아버지는 가신들에게 호통을 쳤다.

“파업이다! 늙은이를 이만큼 부려먹었으면 되었지!”

[아이고, 어르신, 제발……!]

내가 할아버지의 옷깃을 잡자 거짓말처럼 할아버지가 조용해졌다.

“돌아가시면 안 될까요?”

“…….”

“다들 힘들어하니까…….”

할아버지는 나를 빤히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능구렁이 같은 놈들이.”

“네?”

“연락하마. 그때 나를 황도로 다시 이동시켜다오.”

“아, 네!”

그러자 통신석에서 [아가씨, 만세!] 하는 소리가 들려와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할아버지는 짜증 섞인 손길로 통신을 종료했다.

“그럼 이동시켜드릴게요.”

“그래.”

난 할아버지를 영지로 돌려보내 주었다. 할아버지가 들고 있던 포크가 분수대 안으로 뚝 떨어졌다.

‘앗!’

깨끗한 물이랬는데!

당황해서 물 안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보기보다 깊은지 손이 닿지 않았다. 나는 분수대 틀을 잡고 끙끙 몸을 기울였다. 몸이 크게 휘청하였을 때였다.

“위험해.”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가 내 손을 잡아 주었다. 나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뭐 하는 거지?”

“포크가 빠져서…….”

아빠가 곁에 있던 마일로에게 눈짓했다. 마일로는 긴 팔로 단숨에 포크를 꺼냈다.

“접시를 치워드릴까요?”

마일로가 물어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접시와 포크를 들고 정원을 나섰고, 이곳엔 아빠와 나 둘만이 남았다.

“늙은이와 함께 있던데.”

“아, 할아버지께선 영지로 돌아가셨어요.”

“잘됐군.”

나는 눈을 깜빡이며 아빠를 쳐다봤다.

“왜?”

“아빠는 할아버지를 왜 싫어하세요? 혹시 엄…… 마 때문인가요?”

할아버지가 선생님과의 결혼을 반대했으니까?

아빠가 내 옆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미아는 이민족의 신관이었다.”

“신관이요?”

선생님이?!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강력한 힘을 타고 나서 전투가 있을 때면 언제나 선봉에 섰을 정도로. 그때마다 제국의 병사들을 쓸어 버렸지.”

‘선생님 대단해!’

내가 눈을 반짝이자 아빠는 실소를 흘렸다. 내 머리를 쓰다듬은 그가 이어서 말했다.

“그러니 이민족의 나라가 패망한 후에도 제국의 눈엣가시였던 거다.”

제국의 후작인 아빠와는 절대 이어질 수 없는 신분이었다는 거구나.

‘그래서 프렌시프에서 세니아나의 엄마가 이민족 매춘부라는 소문을 잠재우지 않았던 거야.’

그녀의 신분을 철저하게 감추기 위하여.

“네 할아버지를 비롯해 모든 가신들이 미아와 나를 반대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지.”

“…….”

“미아는 너를 낳고도 오두막에 숨어 살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납치된 게 그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빠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래서 프렌시프를 미워하는구나.’

아니, 본인 스스로가 제일 미운 거야. 지키지 못했다고 여겨서.

세니아나와 선생님에게 미안해서 아무에게도 마음을 내주지 않았다. 아빠의 눈이 깊게 가라앉아서 나는 주춤주춤 손을 뻗었다. 마른 눈을 살짝 매만지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할아버지는 아빠를 지키고 싶었던 거예요.”

“…….”

“자식이 겪을 고통이 걱정되는 건 당연하니까.”

“…….”

“아빠가 엄마를 깊게 사랑하셨다는 걸 알겠어요. 죄스러워서 저를 보러 오지 못하셨군요. 다행이에요.”

“다행…… 이라고.”

“미워서 오지 않았던 게 아니니까.”

일순 아빠의 눈이 굳어졌다.

“너.”

“네?”

그가 내 손을 꽉 잡고 나를 끌어당겼다.

“세니아나가 아니군.”

나는 흠칫 놀라 분수대에서 일어났다. 주춤, 뒷걸음질 치자 아빠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때 삐익―! 이명이 화살이 되어 머릿속을 가르고 온몸을 진동시켰다. 눈앞이 희뿌옇게 변하고 무릎에 힘이 빠졌다. 몸이 휘청 무너지고, 시야가 검게 변했다.

“……안!”

아빠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 * *

나는 멍하니 낡은 건물 앞을 바라보았다. 희망원이라고 쓰여 있는 간판석 앞에 오도카니 선 아이를 나는 알고 있었다. 저건 고아원에 버려졌을 때의 나다.

어린 나는 솜이 삐져나온 성인용 패딩을 입고 있었다. 코를 훌쩍일 때마다 고장 난 지퍼 대신 옷깃을 여민 클립이 짤랑짤랑 흔들렸다. 어린 나의 귀가 붉었다. 한겨울에 아주 오랫동안 밖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갛게 튼 인중으로 코가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기다리지 마, 바보야.’

아빠는 안 와. 평생 오지 않았어.

“아이고, 고집하고는! 그만큼 기다렸으면 이제 알 법도 하잖아, 응? 네 애비가 너 여기 버리고 간 거야!”

“온댔는데……. 뻥튀기 사 가지고 온다고 했는데…….”

“가! 좀!”

원장이 나를 거칠게 끌고 들어갔다. 고아원에 들어가고 나서 사나흘쯤 뒤에야 깨달았던 것 같다. 이 아줌마의 말이 진짜구나. 나 정말로 여기에 버려졌구나.

생각해 보면 어린 나는 손이 많이 가는 아이였다. 피부병도 앓고 있지, 말도 안 하지, 아이들과는 매일 같이 싸우지. 그렇게 귀찮은 나를 원장이 좋아할 리 만무했다. 보조금 때문에 데리고는 있지만, 걸핏하면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리고 아이들은 강자와 약자를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영리했다.

“괴물이래요, 괴물이래요~”

“민주랑 괴물이랑 닿았다! 이제 너 괴물 친구야!”

“으아앙, 싫어! 선생님!”

“너, 이 계집애! 또 친구를 울렸어!”

장면이 필름처럼 흘러 여름이 되었다. 어린 나는 자원봉사자들이 주고 간 상자에서 몰래 빵을 꺼냈다.

저 때는 왜 항상 배가 고팠을까? 밥을 먹고도 뒤돌아서면 배가 고팠다. 그런 내 앞에 스티커가 든 초콜릿 빵이 있었으니 참을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어린 나는 빵을 티셔츠 안에 숨기고 얼른 놀이터 구석에 숨었다.

들킬세라 허겁지겁 먹다가 빵이 목에 걸려 켁켁거렸다. 초콜릿 크림이 묻은 더러운 손가락을 쪽쪽 빨던 어린 내가 흠칫, 어깨를 오그라뜨렸다. 원장이 야차 같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원수 같은 년. 내가 손대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

“그 새를 못 참고! 이리 와, 이리 안 와?!”

원장이 나를 끌어내 등이며 다리를 빗자루로 내리쳤다. 저 날은 하루 종일 밖에서 손을 들고 있다가 밤이 되어서야 겨우 방으로 돌아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입양이 결정된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종알종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럼 민주 너는 의사 선생님네 가는 거야?”

“응! 이것도 새엄마가 사 준 거다?”

아이가 네모난 필통을 반으로 열며 자랑했다. 중앙에 화이트보드와 보드마카, 작은 클리너가 달린 캐릭터 필통은 당시 아이들에게 최고로 인기 있었다.

“좋겠다~!”

“새엄마가 이런 거 많이 사 주고 사랑해 줄 거랬어. 내가 제일 예쁘고 착해서 데려가는 거래.”

“그러면은 다음엔 윤정이가 가겠다. 민주 다음으로 예쁘니까.”

“히히, 그럼 괴물은 입양 못 가겠네?”

그 애들의 말이 맞았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도 입양 가지 못했다. 또 한 번 필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겨울. 원장의 눈총과 아이들의 장난도 여전했다. 어린 나는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신나게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방 안에 있었다. 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덜컹,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흠칫 놀라서 얼른 책을 끌어안았다.

학습 만화는 인기가 좋아서 보는 순서가 정해져 있었는데, 그 날은 내 차례가 아니었다. 어린 내가 벌벌 떨며 고개를 수그리자 인기척이 조금씩 다가왔다. 나는 어린 내게 말해 주고 싶었다. 괜찮다고. 겁먹지 않아도 된다고. 오늘은 선생님이 오시는 날이니까.

“안녕.”

“…….”

가지런히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밖은 너무너무 추운데 그녀의 회색 코트엔 햇빛 냄새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어린 나는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선생님의 눈에 뽀얀 눈물이 어렸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가 움츠리는 나를 보고 무언가를 꾹 참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린 나는 그녀가 화가 난 줄 알고 움찔,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녀는 머플러를 꾹 쥐고 서럽게 울었다.

“너무,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지.”

“…….”

선생님은 억지로 환히 웃었다. 그리고 살짝 내 손을 잡았다.

“찾았다, 세니아나.”

뭐라고?

이건 내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왜 나를 세니아나라고 부르는 거예요?

‘선생님!’

나는 다급히 선생님을 잡았다. 하지만 그저 통과할 뿐, 손끝에 어떤 감각도 남지 않았다. 어린 내가 손을 등 뒤에 쏙 감추고 어물어물 중얼거렸다.

“아닌데……. 나 순이인데…….”

저 날이 내가 고아원에 들어간 다음, 처음으로 말문을 연 날이었다. 선생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순이라고 부르면 되니?”

“…….”

“싫으니?”

“…….”

“그럼 예쁜 이름을 지어 줄까?”

“…….”

“어디 보자, 어떤 이름이 좋을까.”

선생님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세나.”

“…….”

“세나라고 하자.”

“세나…….”

“그래, 세나.”

퓨즈가 탁 켜지듯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맞아, 내 이름은 선생님이 지어 주셨어. 왜 몰랐을까. 세나, 세니아나. 이렇게 비슷한 이름인데.

순간 펜던트가 번쩍 빛나고, 나는 다른 공간으로 이동했다.

“크르릉.”

내 앞에 있는 사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포털 마원을 찾았던 동굴에서 보았던 사자였다.

“드디어 내 목소리가 들리나 보군.”

사람 말? 눈을 휘둥그레 뜬 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사자는 기지개를 켜듯 발을 멀리 딛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요.”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무, 무서우니까 거기서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

사자가 우뚝 멈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털이 온통 환히 빛났다. 그리고 순식간에 손바닥만 한 고양이로 변했다.

“이 정도면 되었소?”

“귀여워라…….”

내가 그렇게 말하자 사자, 아니, 고양이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오백 년 살며 처음 듣는 얘기군.”

“싫으신가요?”

“원한다면 귀여움이라고 불러도 좋소. 겁 많은 주인.”

나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곧 웃음이 잦아들었고,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미아가 아니라 실망하였소?”

나는 선뜻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베고니아 꽃잎을 보자마자 선생님이 떠올랐다.

“주인이 본래의 육신으로 만나 온 자는 미아가 아니라오.”

“네?”

“정확히 말하자면 말이오.”

“그럼…….”

“남겨 둔 것이지. 기억이라고도 부르는.”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양이를 보았다. 고양이는 순식간에 내 어깨로 뛰어올라 뺨에 작은 머리를 비볐다.

“선생님에게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주인의 추측이 사실인지?”

“그래요.”

선생님은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세니아나’라고 불렀다. 그리고 삿된 자들에게 포위되었을 적에 그녀는 말했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품에서 고물거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나와 선생님이 만난 건 내가 막 초등학교 들어간 무렵이었기 때문에 고물거릴 정도로 작지 않았다. 또…….

[모든 게 네 것이다. 그러니 누구에게도 죄스러워할 필요가 없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의 말씀은 마치, 마치 제가 정말로…….”

“세니아나인 것처럼.”

고양이의 말에 나는 숨을 들이켰다. 굳은 나를 보고 고양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맞소.”

“그럼 어떻게 제가 세나, 아니, 순이가 된 거죠?”

“억지로 육신에서 벗어난 영혼이 마침 빈 몸을 찾았던 거지. 비록 다른 세상의 것이었지만.”

순이로서의 첫 기억은 담벼락 앞에 쓰러져 오들오들 떨던 것이었다.

‘그때 죽었던 거구나, 순이.’

“혹시 납치당했을 때 선생님은 돌아가셨던 거고, 저는 육신과 영혼이 떨어진 건가요?”

“당시에 미아는 죽지 않았다오. 주인을 찾기 위해 스스로 이세계에 간 것이지.”

“그럼 과거의 세니아나는 대체 누구죠?”

“주인의 운명을 약탈하려 한 자요.”

과거의 세니아나가 내 영혼을 분리했단 말인가.

“제 운명을 약탈했으면서 왜 죽으려고 한 거죠?”

고양이는 빙그레 웃었다.

“프렌시프의 일족은 재미있더군.”

“네?”

“그들은 본능적으로 약탈자를 경계하였다오.”

“…….”

“원하는 바는 이루지 못하는데 본래 몸은 마법이 점점 풀려 썩어 가고 있었소. 불안해질 수밖에.”

“자살해서 본래 몸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건가요?”

“그렇다오.”

“어째서 선생님은 이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은 거죠?”

“약탈자들이 미아를 금제했지. 사후에도 풀리지 않는 고약한 마법이었소.”

그래서 선생님이 내게 무엇인가 말하려 할 때마다 공간이 뒤틀렸던 거구나!

“누가 그런 일을…….”

“나 또한 그것은 알지 못하오.”

“대체 당신은 누구예요?”

고양이가 사뿐사뿐 다가와 내 발치에 엎드렸다.

“나는 당신의 종, 당신의 길이요.”

“……포털?”

“영리한 내 주인.”

“앞으로도 만날 수 있나요?”

“주인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쪼그려 앉아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갸르릉,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우는 그를 보고 나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주인이 부르는 모든 이름이 나의 이름이오.”

“그래도 이름이 있어야 부르기 편한데…… 음, 예삐?”

식당 근처 미용실에서 키우는 푸들의 이름이었다. 고양이는 잠깐 침묵했다.

“……미아는 나를 멀린이라고 불렀다오.”

“저도 멀린이라고 부를게요.”

멀린이 나에게서 멀어짐과 동시에 또 한 번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본래의 우아한 갈기를 가진 사자가 되었다. 그가 공중을 향해 크르릉! 포효했고, 나는 곧 빛에 휩싸였다.

* * *

“……가씨!”

“아가씨!”

멀리서 들리는 소리에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겨우 들어 올렸다.

“으…….”

“아가씨, 괜찮으세요?”

“아가씨!”

울음기 밴 목소리가 양쪽에서 들려왔다. 시트론과 마릴린의 목소리였다. 나는 끙, 신음하며 조그맣게 말했다.

“으응…….”

얼마나 잔 건지 목이 다 쉬고, 눈이 퉁퉁 부어 잘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나 깜빡이고 나서야 점점 시야가 선명해졌다.

“나 얼마나 잤어?”

“오늘로 이틀째예요.”

“그렇게나 오래?”

내가 깜짝 놀라서 물으니 시트론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기회에 자세히 검사를 해 봐야겠어요. 성에서도 한 번 쓰러지신 적이 있잖아요.”

그러자 마릴린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뭐라고요? 쓰러지셨던 적이 있는데 왜 그때 검사하지 않은 거예요!”

“진료한 마티스 남작이 괜찮다고 하셨…….”

“의사 한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어요! 황도로 모셔왔었어야죠!”

“마티스 남작도 훌륭한 의사예요.”

“황도로 모셔 왔으면 황궁의의 진료를 받을 수 있었을 거예요.”

내가 끙 신음을 흘리자 두 사람이 합, 입을 다물었다. 마릴린은 의사를 데려오겠다며 뛰쳐나갔고, 시트론도 물을 가져오겠다며 일어났다.

“시트론.”

“네?”

“잠깐 앉아. 물어볼 게 있어.”

시트론은 의아한 얼굴로 간이 의자에 앉았다.

“옛날의 나한테 같이 떠나자고 했었지?”

민망한 얼굴이 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요.”

“그 말을 듣고 내가 너를 구박했었잖아. 그때 내가 정확히 어떻게 했던 거야?”

시트론이 픽 웃으면서 내 목소리를 흉내 냈다.

“네까짓 게 감히 나를 동정해? 하녀 주제에, 천것 주제에! 이게 다 프렌시프의 찢어 죽일 놈들 때문이야!”

“…….”

“―라고 하시면서 뺨도 찰싹. 너무하셨죠?”

“응…….”

나는 세니아나가 시트론의 호의에 겁을 먹은 거라고 생각했다. 믿었다가 상처받을까 봐 지레 겁을 먹고 피한 거라고. 하지만 시트론의 말을 들으니 알겠다. 세니아나는 내가 가여워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나는 내가 한 말도 아닌데 시트론에게 미안해서 고개를 수그렸다.

“그럼 오늘 식사하시고, 약도 드시고, 푹 주무시는 거로 빚 받을게요.”

“고마워, 시트론.”

“별말씀을.”

시트론이 식사를 가져오겠다고 나섰다. 나는 침대 헤드에 기대 벽에 걸린 거울을 바라보았다.

‘본래 몸으로 돌아간 걸까.’

그녀의 진짜 육체가 썩기 시작했다고 했으니 돌아가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왜 그랬니.’

자꾸만 억울함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긍정적인 생각. 긍정적인 생각.’

이미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다. 세니아나가 살아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으니 복수할 수도 없었다. 나는 우울함을 떨치기 위해 식사를 하고, 책을 읽었다. 멀린과 이야기를 한 뒤에 마법에 관한 게 궁금해져서 그쪽을 찾아봤다.

마릴린이 데려온 의사에게 진료를 받은 후에 뒹굴거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다.”

“네, 넷!”

아빠의 목소리에 나는 다급히 대답하며 얼른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빠와 나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아빠가 물었다.

“몸은?”

“괜찮아요.”

“그럼 내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된 건가.”

아빠의 말이 떠올랐다.

[너, 세니아나가 아니군.]

아빠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네.”

“대답해 봐라.”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아빠 딸…… 이에요.”

“뭐?”

내 입으로 말하려니까 엄청 부끄러웠다. 볼이 붉어져서 난 얼른 손으로 뺨을 가렸다.

“그, 그러니까 아빠 딸 맞다고요.”

“세니아나라고.”

“네, 제가 세니아나예요.”

혹시 믿지 않는 건가 싶어서 나는 슬그머니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믿지 않는 걸까?’

하지만 멀린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할 순 없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였으니까. 세니아나의 기억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영혼을 바꾸는 마법이 있다는 얘기는 없었다. 이세계의 마법은 마도구를 만드는 정도로만 쓰였다. 전투 마법사들이 있기는 했지만,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나도 굳이 얘기하고 싶지 않아.’

가족들이 알게 되면 마음 아파할지도 모르니까.

아빠는 내 눈을 쳐다봤다. 불안해져서 치맛자락을 꼭 쥐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군.”

평온한 대답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아빠가 물었다.

“왜?”

“너무 쉽게 믿으셔서…… 아!”

그렇지, 아빠는 납치에서 돌아온 후에 내 육신을 조사했다고 했어. 혹시 세니아나를 의심하고 있었던 걸까?

“궁금한 게 있는 표정인데.”

“물어봐도 돼요?”

“물론.”

“절 조사하신 건 아빠 딸이 아니라고 의심하셨기 때문인가요?”

“미친놈이라고 생각하나?”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나를 보며 아빠가 픽 웃었다.

“모두가 그리 여기던데.”

“왜 의심하신 거예요?”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이건 내 딸이 아니다, 라고.”

아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스로 미쳤다고 여겼노라고. 또 증거조차 없는 일로 딸을 멀리하는 게 정신 나간 일임을 알고 있었다고.

“하지만 어떻게 해도 딸로 여겨지지 않았지.”

“그럼 저는, 저는 어째서…….”

“태어났을 때의 너를 안았던 순간과 같은 감정을 느껴서.”

“그게 어떤 감정인데요?”

아빠가 다정히 웃으며 내 뺨을 감쌌다.

“내 삶의 주인이 이 녀석이 되겠구나, 하는.”

“아빠.”

“그래.”

“아빠…… 아빠.”

나는 이름을 가슴에 새기듯 몇 번이나 아빠를 불렀다. 아빠가 아무런 말 없이 대답해 주어서 나는 또 한 번 눈물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나는 할아버지에게 연락했다.

[무슨 일이냐.]

“할아버지.”

[그래.]

“저요, 할아버지 좋아해요.”

진짜 세니아나가 아니라는 생각에 할 수 없었던 말이었다. 진심을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다는 건 정말로 멋진 일이었다. 가슴이 벅차고, 설렌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통신석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아가씨께서 방금, 뭐라고?]

얼마쯤 뒤에야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 사람들이 다 들었나 봐!’

“끄, 끊을게요.”

나는 엄청나게 부끄러워져서 얼른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황도로 돌아가겠다. 포털을 열어다오.]

[안 됩니다, 어르신!]

[저희 다 죽습니다!]

사람들이 애원했지만, 할아버지는 들은 척도 않았다. 내가 히히 웃으며 안 된다고 말하자 할아버지를 제외한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터뜨렸다.

다음 날. 마릴린의 빗질을 받으면서 오빠들과 연락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가웨인의 말에 난 통신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그렇게 무서운 얼굴은 처음 봤다.]

어제 일 때문에 부끄러우셔서 화가 나신 건가? 나는 깜짝 놀라서 다급히 물었다.

“할아버지가 왜요?”

[싱글벙글하시잖아.]

“아…….”

내 얼굴이 붉어지자 시트론이 후후 웃으며 얼굴에 파우더를 두드려 주었다. 나는 민망해서 말을 돌렸다.

“훈련은 잘 끝내셨어요?”

[응.]

“큰오빠는요?”

[아직 정신없지.]

[알면 거들어.]

란슬롯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움에 ‘오빠!’ 하고 외치자 란슬롯이 낮게 웃었다.

[영지로 언제 돌아와?]

“조금 더 있다가요.”

[어서 돌아와. 보고 싶으니까.]

란슬롯은 정말로 다정하다. 그를 독사라고 생각하던 세니아나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통신을 종료했을 땐 단장도 마무리되었다. 오늘은 아빠와 단둘이 놀러 가기로 해서 시트론과 마릴린이 평소보다 더 정성 들여 꾸며 줬다. 의자에서 일어났을 때, 아빠가 방으로 들어왔다.

“준비는?”

“마쳤어요!”

아빠가 팔을 내밀었다.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살짝 팔짱을 꼈다. 내가 진짜 세니아나라는 걸 깨달은 뒤에 억지로 쌓아 두었던 벽이 허물어졌다. 불편하고 무서웠던 아빠가 편해졌고, ‘윤세나의 아빠’에 대한 기억이 더는 날 괴롭히지 못했다.

“가지.”

“네.”

나는 아빠와 가장 번화한 살롱에 갔다. 사교 클럽 같은 곳으로 고위 귀족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이런 곳은 처음이라 쭈뼛쭈뼛 안을 훑었다.

“차와 술 중에 어떤 걸로 할래?”

“저는 아이스티요.”

아빠는 와인을, 나는 아이스티를 받아서 주변을 가볍게 걸었다. 당구대며 티 테이블, 카드 판도 있었다.

‘오락 센터 같은 곳인가 봐.’

당구대 앞에 멈춰 서자 아빠 주변으로 중년의 귀족들이 다가왔다.

“이거 해가 서쪽에서 떴나 봅니다.”

“예, 후작께서 살롱을 다 찾으시고.”

“오오! 각하!”

주변에 금방 사람이 몰려들었다. 아빠는 중앙에서 엄청나게 귀찮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방해가 될까 봐 슬쩍 아빠 곁을 벗어났다. 당구대 옆에 있는 테이블 주변엔 내 또래의 영애, 영식들이 잔뜩 있었다.

“어머, 프렌시프 양!”

카드 테이블에 있던 소녀가 날 불렀다.

‘크리스틴!’

후·비들이 동부 별궁에 왔을 때 내게 날을 세우던 영애였다.

그러니까 성이……, 아.

“라지엥 양.”

“이런 데서 다 뵙네요. 황도에 올라오셨군요.”

“네.”

“황후 폐하나 황비님들의 파티에서나 뵐 줄 알았어요. 귀여움받으셨잖아요.”

불리지 못한 걸 보면 눈 밖에 난 모양이지? 라는 눈빛이었다. 그녀가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이어 말했다.

“하기는. 사비에르 영애가 황도에 있으니 폐하와 황비님들께서 시간이 없으실 거예요.”

나 같은 건 어차피 그녀의 대타였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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