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6/24)

6장

“저도 라지엥 양을 파티에서 뵐 줄 알았는데, 여기 계시네요.”

나도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라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크리스틴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녀는 억지로 호호, 웃으며 말했다.

“살롱이 궁금한 날도 있으니까요.”

“저도 그래요.”

“그럼 함께하시겠어요?”

“네?”

“카드놀이요.”

크리스틴이 앉아 있던 사람을 보내고, 나를 그 자리에 앉혔다.

“배팅은 착용한 액세서리로 한답니다.”

“재물을 걸고 하면 도박 아닌가요?”

“오직 착용한 패물만 배팅할 수 있어요. 그래서 도박처럼 큰 판이 아니죠.”

크리스틴이 규칙을 설명했다. 같은 모양의 카드나 똑같은 숫자만을 내서 카드를 다 없애는 사람이 벨을 누르면 승리한다.

‘원 카드와 할리갈리를 섞어 놓은 것 같네.’

그렇지만 이건 눈 가리고 아웅 아닌가. 재물을 거는데 포커를 치면 본격적인 도박 같아 보이니까 조금 바꾼 거잖아.

테이블에 앉은 세 사람이 중앙에 목걸이며 팔찌 등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저 세 사람은 액세서리를 이것저것 많이도 착용했다. 살롱에 온 목적이 명백하다.

‘아, 이게 그건가!’

별궁에서 소녀들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또래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놀이라고 했다. 하지만 패물을 모두 잃으면, 놀이에 빠져 체면을 잃은 도박 중독자처럼 여겨진다고 했다.

‘그래서 큰 망신을 당한다고 했지.’

아무래도 크리스틴은 이번 기회에 내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앉았으니 거절하기도 좀 그래.’

나는 귀걸이를 빼서 테이블 중앙에 내려놓았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카드가 참가자들에게 모두 돌아가자 크리스틴이 히죽 웃었다.

“프렌시프 양은 아직 규칙이 익숙하지 않을 테니 첫 게임은 배우는 정도로 할까요?”

“부탁드려요.”

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뎅―! 게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에 크리스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더 하시겠어요?”

내가 태연한 목소리로 물으니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 앞엔 패물이 온통 가득했다. 이미 참가자 중 한 사람은 드레스 외엔 몸에 걸친 게 없어서 도망치듯 살롱을 나섰다. 크리스틴이 짓씹듯 말했다.

“하죠.”

“하지만 영애는 이제 인장밖에 남지 않았잖아요?”

더 잃기 전에 돌아가시지?

크리스틴이 주먹을 바르르 떨며 말했다.

“서로 가진 걸 전부 걸기로 해요.”

크리스틴은 이번 게임엔 정말 이길 자신이 있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제게 손해인데요?”

“달리 원하는 게 있나요?”

“착용한 패물 외에 다른 건 걸 수 없으니까 받을 게 없지요.”

“허리라도 굽히겠어요!”

크리스틴이 날카롭게 말했다. 허리를 굽히는 건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인사법이었다.

‘체면을 거시겠다?’

그렇다면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크리스틴은 재빨리 카드를 섞었다. 그리고 시작. 나는 저번 판보다 더 빨리 벨을 눌렀다.

“……!”

“이런, 인장까지 가져올 생각은 아니었는데.”

크리스틴의 인장을 내 앞으로 가져왔다.

“정말로 인장까지 가져가는 건 너무 하잖아요!”

“그래서 마지막 게임 전에 만류했던 것 같은데요.”

“……!”

크리스틴이 새빨개져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돌아가려고 하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주실 게 더 남지 않았나요?”

게임을 구경하던 영식이 풉! 하고 웃자 크리스틴은 어쩔 줄을 몰랐다.

“이거 놔요!”

그녀가 손을 뿌리치며 외쳤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귀족이란 자가 약속을 저리 쉽게 어기다니…….”

“남은 체면도 없나 보죠.”

“인장까지 잃었으니 말이에요.”

“좀 한심한데요.”

부채로 입을 가린 영애의 말에 크리스틴이 그들을 매섭게 흘겼다.

“어떻게 나를 이토록 비참하게…….”

궁지에 몰리자 어린애 같은 면모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확실히 어린애이긴 했다. 나와 세 살쯤 차이가 난다고 했으니 열일곱 정도?

‘이번에 당했으니까 다음엔 이런 시시한 기 싸움은 하지 않으려고 하겠지.’

그거면 되었다. 나는 뛰쳐나가는 그녀를 보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게임에서 딴 패물을 가지고 아빠에게 돌아갔다.

“그건 뭐지?”

“카드놀이에서 땄어요.”

“그렇게나 많이?”

양손에 가득 찬 패물을 보고 아빠가 말했다.

“네.”

“게임을 잘하나?”

난 슬쩍 주변을 돌아보다가 까치발을 들고 그의 귀에 속삭였다.

“속임수를 썼거든요.”

원래 속임수는 그들이 먼저 쓰긴 했다. 나는 그걸 역이용한 거고. 크리스틴 무리는 테이블 아래에서 서로서로 패를 교환했다. 이 게임은 벨을 누른 사람이 패물을 다 가져가는 거라서 승리를 몰아 주려던 것이다. 난 그들이 카드를 바꾸는 타이밍을 노려서 포털을 열었다. 그리고 받는 쪽의 패를 내 패와 바꿔치기했다.

“마지막은 그냥 실력이었지만요.”

그걸 아빠에게 말해 주자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런, 내 딸이 도박에 재능이 있군.”

“따서 아빠 드릴게요.”

“부자가 되겠는걸.”

제국에서 손꼽히는 부자인 아빠가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우스워서 나는 키득키득거렸다.

“하지만 그건 두고 가는 게 좋겠다. 황도의 벌레들은 더러운 소문을 쉽게 만드니까.”

“그럴게요.”

나는 사환에게 패물을 맡겼다.

‘아, 인장은 신용카드 같은 거니까 크리스틴의 저택에 보내는 게 낫겠다.’

인장만 쏙 골라서 주머니에 넣으니 아빠가 잘했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살롱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아빠와 상점 지구로 갔다. 가는 곳마다 시선이 몰렸다. 나보다는 아빠에게.

“하아…….”

중년의 부인들이 자꾸만 안타까운 한숨을 흘려서 그때마다 나는 흠칫 놀랐다.

“다들 아빠를 보고 있어요.”

“내가 잘생겨서 그래.”

똑같은 말을 가웨인에게 들었던 적이 있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빠가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장미다!”

“장미의 계절이니까.”

“역시 바람둥이셨지요?”

아빠는 픽 웃었다. 그때, 그의 통신석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잠깐 멈춰서 통신을 걸어온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던 아빠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요?”

내 물음에 그가 싸늘하게 말했다.

“날파리가 꼬였군.”

―하고.

* * *

저택으로 돌아가자 황후의 초대장이 와 있었다.

‘양반은 못 되시네.’

크리스틴과 얘기를 한 게 반나절 전인데. 아니, 어쩌면 벌써 소문을 듣고 날 초대한 걸지도 모른다. 의아한 점은 왜 아빠도 함께 초대했을까, 하는 거였다. 나를 구슬리려면 보호자 동반보다는 혼자인 쪽이 좋을 텐데.

“어찌할 거지?”

“황도에 온 이상 한 번은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벌어질 일이라면 빨리 처리하는 게 낫지.

나는 황후에게 초청에 감사하며 곧 찾아뵙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이튿날, 아빠와 함께 입궁했다.

황궁은 어마어마하게 컸다. 황제가 지내는 아발론 궁부터 후·비가 각각 소유한 궁, 대전 회의가 이뤄지는 본궁, 신전, 기사단의 병영 등. 엄청나게 큰 건물이 십수 채나 있고, 그렇게 커다란 부지를 높디높은 방벽이 감싸고 있었다.

얼마나 넓은지 마차를 타고 들어와서도 한참을 가야 황후궁이 나왔다. 황후궁에 들어가자 궁의 주인인 황후가 우리를 몹시 반겨 주었다.

“이리 반가울 데가!”

“황후 폐하, 강녕하셨습니까.”

내가 치마를 넓게 펼치며 말하자 황후는 빙그레 웃었다.

“그런 인사는 됐네.”

황후, 아빠와 함께 정원에 들어갔다. 정원에 놓인 커다란 테이블에 우리보다 먼저 사람이 와 있었다. 중년의 여성과 내 또래의 소녀였다. 그들이 황후에게 한 번, 그리고 아빠에게 한 번 인사했다.

“자, 앉아서 얘기하지.”

테이블에 앉자 곧 시종이 차를 가져왔다. 황후와 중년의 여성은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의아할 정도로 영양가가 없는 이야기였다. 금좌 11석 중 하나인 아빠를 불러서 일부러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빠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인지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제 본론을 말씀하시죠.”

그러자 황후가 중년의 여성을 쳐다보았다. 그 사이, 나는 그녀의 딸로 보이는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가 생긋 미소지은 순간, 황후가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에게 중신을 설까 하네.”

나는 깜짝 놀라서 황후를 쳐다보았다.

“레제 부인과 딸인 릴리 양일세.”

그리고 황후는 나와 아빠도 그녀들에게 소개했다.

“서로 자식이 있으니 흠 될 것도 없고, 가문 간에 격도 맞으니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어디 있겠는가.”

아빠의 표정이 싸늘해지자 황후는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황제 폐하께서도 두 가문의 합은 제국의 경사라 하시었네.”

황제의 중신과 다름없다는 말이었다. 아빠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니안.”

“네.”

“잠깐 정원을 구경하고 있어라.”

그러자 황후가 릴리에게 말했다.

“레제 양도 함께 가게.”

릴리는 얼른 일어나서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아빠를 잠깐 쳐다봤다가 그녀를 따라 정원 안으로 향했다. 아빠가 보이지 않는 곳에 도착하자 릴리가 입을 열었다.

“네가 세니아나구나. 만나서 반가워!”

대뜸 말을 놓기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우리 동갑이거든.”

“아…….”

“어제 살롱에 왔었다며?”

“어떻게 알아?”

“그 살롱이 어머니 소유거든.”

사뿐사뿐 걷던 릴리가 뒤돌아 다시 나를 보았다.

“후작님은 정말 근사하시다. 멀리서 뵈었을 때보다 훨씬 더 멋지셔.”

“고마워.”

“저런 분이 내 아버지가 된다고 생각하니까 설레는걸.”

그녀는 마치 결혼이 기정사실이라도 되는 양 말했다. 물론 황제까지 찬성한다면 프렌시프로서는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긴 하지만.

레제 부인은 누가 보기에도 좋은 신붓감이긴 했다. 황후의 말에 따르면 가문의 격도 맞고, 살롱의 운영을 보건대 지혜로운 편인 것 같았다. 게다가 미인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릴리는 그녀를 쏙 빼닮았다. 짙은 고동색 머리칼과 맑게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 인상은 약간 달랐는데 레제 부인이 우아하다면, 릴리는 쾌활하고 밝았다. 흰 장미를 매만지며 릴리가 말했다.

“란슬롯 님과 가웨인 님도 정말 멋지시고. 참, 내가 막내야.”

“어?”

“난 12월 하순 생이거든. 그러니까 잘 부탁해, 언니?”

그녀는 대뜸 내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란슬롯이 ‘막내야’ 하고 날 부르던 게 떠올라서 난 기분이 묘했다.

“요리를 한다면서?”

“응.”

“아카데미에 다녀?”

“맞아, 지금은 방학이야.”

“끝나면 다시 돌아가겠구나. 아쉽다. 함께 지내면 좋을 텐데.”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며 “으음…….” 하고 침음을 흘리던 그녀가 다시 활짝 웃었다.

“네가 없을 때 오빠들과 친하게 지내면 되겠다.”

“아빠가 너희 어머니와 결혼을 할 거라고 생각해?”

“그럼. 두 분 폐하께서 모두 지지하시는데. 두 분께 밉보여서 좋을 게 뭐야?”

“…….”

“아, 나비다! 세니아나, 이리 와. 같이 구경하자.”

릴리가 밝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우리가 다시 돌아갔을 땐, 아빠와 황후는 이야기를 마친 상태였다.

“그럼.”

레제 부인이 먼저 인사를 했고, 릴리도 생글생글 웃으며 인사했다. 아빠는 저택으로 돌아가면서부터 바빠졌다. 마차 안에서도 통신석으로 이야기를 나눴고, 돌아와선 긴긴 회의가 이어졌다.

* * *

나는 아빠의 부탁으로 란슬롯과 가웨인에게 포털을 열어 주었다.

“오빠!”

두 사람이 반가워서 폴짝폴짝 뛰었다. 그러자 가웨인이 짓궂게 웃으며 내 볼을 마구 늘렸다.

“더 못생겨졌잖아.”

“아닌데…….”

란슬롯이 빙그레 웃곤 가웨인의 손을 탁 쳤다.

“그래, 예쁘기만 한데. 잘 지냈어?”

“네!”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행정관들이 오빠들을 데리러 왔다. 두 사람은 회의에 들어갔고, 난 정원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서 회의가 끝나길 기다렸다.

‘빨리 스무 살이 되면 좋을 텐데.’

이 나라의 나이로 미성년자는 아니지만, 스무 살이 지나야 정말 성인으로 대우받았다. 회의도 스무 살 생일이 지나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결국 레제 부인과 결혼하는 건가? 아빠에게는 결혼이 큰 의미가 없어 보였는데. 하기야 메리아덴 영애가 누군지도 몰랐는데 결혼하라니까 했잖아.

내 옆에 함께 있던 시트론과 마릴린이 물었다.

“아가씨,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으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나는 턱을 괸 채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네?”

이상하게 자꾸만 시무룩해지는데 왜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목욕하실래요?”

“응?”

마릴린의 말에 내가 되물었다.

“기분이 나아지실 거예요.”

시트론도 좋은 오일이 있다면서 목욕을 권했다.

“그럴까.”

“가요, 아가씨.”

“네, 그래요.”

시트론이 욕조에 오일을 풀어 줬고, 마릴린은 조물조물 마사지를 해 주었다. 정말로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아서 두 시간이나 욕탕에 있었다.

‘개운해!’

욕실에서 나와 방으로 가는데 모퉁이 뒤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놓으라니까.”

가웨인의 목소리였다.

‘회의가 끝났나 봐!’

나는 활짝 웃으며 종종걸음으로 코너를 돌았다. 그런데―

“작은오빠는 말수가 없구나.”

“초면에 대뜸 말을 놓는 건 누구에게 배운 버르장머리지?”

가웨인이 빈정거렸다.

“그렇지만 폐하께서 우리가 격의 없이 지내길 바라신다고 하셨는걸.”

릴리의 말에 가웨인이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세니아나다!”

나를 발견한 릴리가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오빠들도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가지 않으니 그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란슬롯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씻었어? 머리가 젖었네.”

“네…….”

그는 시트론에게 수건을 받아서 내 머리를 닦아 주었다. 그런 란슬롯의 팔을 잡은 릴리가 내 쪽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

“안녕.”

“어머니께서 네게 케이크를 전해 주라셔서 왔어.”

“아……. 감사하다고 전해 줘.”

“응! 우리 먼저 먹고 있을 테니까 머리 말리고 와.”

그러더니 란슬롯과 가웨인의 팔짱을 꼈다.

“여성의 젖은 모습을 보는 건 실례랍니다.”

뒤돌아가려던 릴리가 다시 나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를 오빠들과 반대쪽으로 끌고 가며 말했다.

“오빠들과 이번 기회에 친해지고 싶거든. 그러니까 좀 천천히 와 줘?”

양손을 모으고 애교 있게 웃었다.

“부탁해~”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 응접실로 향했다. 오빠들과 릴리는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본 형태로 앉아 있었다. 릴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여기 앉아.”

내가 앉자마자 그녀는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예뻐라! 그게 어르신과 각하께서 직접 골라 주신 드레스구나!”

“어떻게 알았어?”

“황도는 소문이 빠르거든. 프렌시프의 일은 특히나 자세하지.”

그렇게 말한 릴리는 내 앞에 케이크가 든 접시와 찻잔을 놔 주었다.

“단 걸 좋아한다면서?”

“으응.”

“나도 크림이 너―무 좋아. 그래서 어머님께선 내가 아직도 이렇게 아기 같은데 시집은 어떻게 보낼지 걱정이시래.”

릴리는 정말로 밝았다. 오빠들이 민망할 정도로 말이 없는 데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살롱에 관해서 이야기하던 릴리가 나를 쳐다봤다.

“참, 크리스틴 라지엥과 다퉜다면서?”

“다툰 건 아니고…….”

그냥 사소한 마찰 정도였다. 크리스틴이 벌컥 화를 내긴 했지만, 내 쪽에서 응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들은 것과는 다른데?”

중얼거리던 릴리가 오빠들을 슬쩍 쳐다보더니 “아.” 하며 다시 내게 말했다.

“민망해서 그러는 거야?”

“아니, 정말로―”

“그래, 그런 거로 하자. 넌 싸우지 않았어.”

왠지 내가 눈에 빤히 보이는 변명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릴리는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할 새도 없이 오빠들 접시에 새하얀 쿠키를 하나씩 내려놓았다.

“이건 달지 않으니까 먹어 봐. 오빠들은 단 건 싫어하지?”

가웨인은 대답하지 않고 다리를 꼬았다. 상대방이 묻는데 대답하지 않은 건 사교계에선 아주 몰상식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대신 란슬롯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편하게 대해 달라니까.”

그녀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내 팔을 끌어안았다.

“큰오빠는 고집쟁이인가 봐.”

난 난감했다. 이 상황에서 아니라고 하면 ‘네가 싫어서 그래’ 하는 뜻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란슬롯 앞에서 고집쟁이가 맞다고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차를 마시는 것으로 대답을 피했다. 릴리도 딱히 내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또 오빠들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행정관이 오빠들을 찾아왔다.

“어르신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가지.”

오빠들이 몸을 일으켰다.

“차는 다음에 마시자.”

란슬롯이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가웨인도 내게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 싶다고 울진 마.”

“제가 애인가요.”

내가 뾰로통하게 말하니 가웨인이 “애지.” 하면서 내 볼을 살짝 꼬집었다. 두 사람이 나간 후에 릴리는 내 방으로 가자며 손을 끌어당겼다.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그녀가 탄성을 흘렸다.

“너무 예쁘다! 아아, 나도 이렇게 방을 꾸미고 싶었는데.”

릴리는 침대에 걸터앉아 인형을 끌어안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 방 내가 쓰면 안 돼?”

“어?”

“나랑 어머니가 프렌시프 저에 들어오면 내게도 방이 필요하잖아. 괜찮지?”

그녀가 그렇게 말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다.”

‘아빠!’

나는 얼른 문을 열어 줬다.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버베나 오일을 푼 물로 목욕했어요.”

“그래.”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방에 들어왔다. 릴리는 치맛자락을 잡고 살짝 무릎을 굽혔다.

“각하를 뵙습니다.”

“아직 돌아가지 않았군.”

“세니아나와 함께 놀고 있었답니다.”

릴리가 내 팔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즐거웠지?”

‘아.’

왜 그녀의 말에 기분이 이상해지나 싶었더니 말투 때문이었나 보다. 릴리는 제 의견을 말하곤 늘 ‘그렇지?’라든가, ‘내 말이 맞지?’ 하고 호응을 유도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아니라고 하면 내가 이상한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으니까.

‘사실은 아닌데도.’

별로 즐겁지 않았다. 그녀와 있는 건. 아빠는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잠깐 쳐다보았다.

“저녁 준비가 다 된 모양이더군. 갈까?”

“네, 좋―”

“저도 함께해도 될까요?”

릴리가 끼어들었다. 아빠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시간이 늦었지 않은가.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지.”

“아……. 그렇죠, 늦었네요.”

아빠는 집사에게 꽃다발을 가져오라고 했다. 손님이 돌아갈 때, 꽃을 들려 보내는 게 귀족의 마중법이었다.

“이걸로 주시면 안 될까요?”

릴리가 화병에 꽂힌 장미를 가리켰다.

“괜찮지, 세니아나?”

그건 아빠가 상점 지구에서 내게 선물했던 꽃이었다.

“이, 이건 안 돼!”

내가 깜짝 놀라서 장미가 꽂힌 화병을 끌어안자 릴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고작 장미 한 송이인데…….”

그녀가 너무해! 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응? 이거 나 줘.”

“고작 장미 한 송이니까 더 좋은 꽃다발을 가져가.”

“그래도 난 그게 좋은데…….”

그렇게 말하고 릴리는 아빠를 힐끔 쳐다보았다. 나는 손님 앞에서 추태를 부린다고 혼이 날까 봐 굳어졌다. 그런데 아빠는 픽, 실소를 흘릴 뿐이었다.

“각하…….”

릴리가 부르자 아빠의 얼굴에서 다시 표정이 사라졌다.

“무례한 건 레제의 가풍인가.”

“네? 각하, 그게 무슨…….”

“상대방의 의견은 무시하고, 제 말만 고집하는 게 말이야.”

아빠의 말에 릴리가 크게 당황했다.

“그, 그게 아니라 저는……!”

무어라 변명하려 했지만, 아빠는 듣지 않고 집사에게 마차를 준비하라 일렀다. 축객령과도 같았다. 결국 릴리는 그대로 프렌시프 저를 떠나야 했다.

이튿날, 레제 부인이 릴리와 함께 찾아와서 ‘어제 딸이 범한 무례를 내게 직접 사과하고 싶다’고 전해 왔다. 나는 그들이 있는 탈라리아관으로 향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릴린이 염려 어린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주인님께서 아가씨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손님을 맞이하라고 명하셨어요.”

그러니까 내가 만나길 원하지 않으면 가지 말라는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조그맣게 저었다.

“하지만 탈라리아관에서 기다리시니까.”

탈라리아관은 황제의 칙서나 귀족들의 편지를 전하는 방문자들이 들어가는 곳이었다. 따지자면 성의 우편국과 같은 곳. 저택에 온 손님들이 갈 만한 곳은 아니다.

‘그런데 거기서 기다리는 사람을 거절하면…….’

사과하러 온 사람을 망신 주고 쫓아낸 것과 다름없다. 무엇보다 레제 부인은 황후가 직접 중매한 사람이다. 함부로 대했다고 소문이 났다간 황궁의 분노를 살지도 모른다.

‘아빠가 가지 않아도 좋다고 한 건, 그런 것도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신 거겠지만.’

나 때문에 가족들이 곤란해지는 건 싫다. 마릴린이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레제 영애는 영악해요.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상황만 만들잖아요.”

“마릴린.”

집사 마일로가 경고하듯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내 눈치를 보며 죄송하다고 웅얼거렸다. 나는 또 한 번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탈라리아관에 들어가자마자 릴리가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세니아나, 정말 미안해~!”

울상을 지으며 내 손을 꼭 붙잡고 연신 사과를 해왔다.

“어제 돌아가서 한숨도 자지 못했어. 불쾌했지? 미안해.”

“…….”

“네 기분을 나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생각 없이 말하는 버릇을 고치라고 어머니께 자주 혼이 났는데……. 아니야, 다 변명이지. 정말, 정말로 미안해.”

눈물까지 펑펑 흘리며 말해서 난 입을 뗄 겨를도 없었다. 내가 당황하고 있으니 소파에 앉아 있던 레제 부인이 딸에게 말했다.

“릴리, 그만하렴. 프렌시프 양이 당황하잖니.”

“아……! 놀랐어?”

릴리가 내 팔을 잡고 눈썹을 늘어뜨렸다. 레제 부인은 “정말이지.” 하고 말하며 릴리와 나를 떨어뜨렸다. 그러곤 나를 쳐다봤다.

“갑자기 찾아와서 폐를 끼쳤구나.”

난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혔다.

“별고 없으셨습니까, 레제 부인.”

“릴리와는 다르게 차분하구나. 어제 일은 정말이지 부끄러워.”

그렇게 말하며 릴리를 흘겼다.

“저 아이는 따끔하게 혼을 냈단다.”

그녀는 내게 새빨간 장미를 수십 송이 엮은 꽃다발을 내밀었다.

“사과를 받아 주겠니?”

“본채로 가시지요.”

“면목이 없어서 말이다. 내가 가면 각하와 프렌시프 경들도 불편할 거야.”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이어 말했다.

“영애도 당황스러울 테지.”

“…….”

“너를 보고 사과하고픈 이기심에 실례를 범했어. 그 또한 사과하마. 사실 프렌시프 저에 방문해야 할 이유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요?”

내 말에 릴리가 얼른 편지를 내밀었다. 황후의 티파티 초대장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네게 전하라고 하셨단다.”

“하지만 저는 아직 데뷔탕트를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파티에 초대받기엔 어려운 입장이었다. 레제 부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려워 말려무나. 지인들끼리의 가벼운 모임이야.”

릴리는 밝은 표정으로 그녀의 말에 끼어들었다.

“고위 인사만 모여서 다들 엄청 가고 싶어 해! 우리는 우편으로 받았는데, 황후 폐하께서 네게는 직접……!”

“릴리, 너는 정말.”

레제 부인이 또 딸을 타박했다. 릴리가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특별한 일인걸요. 세니아나가 각별히 귀여움받고 있다는 거잖아요. 부럽다는 말이었는데.”

“상대에 따라서 부담스러울 수 있는 말이야.”

레제 부인의 말이 맞다. 나는 부담스러웠다. 파티에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 특별한 초대를 하였다니까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인상을 약간 찡그리고 초대장을 매만졌다. 그러자 릴리가 말했다.

“갈 거지?”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야.”

황후의 지인들만 있는 파티에 갔다는 게 알려지면 내가 그녀의 줄을 잡았다고 생각할 거다. 그걸 프렌시프의 의사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생겨날 거고. 할아버지나 아빠와 상의 없이 결정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하지만 폐하께선 각하와 너를 함께 초대하셨는데…….”

조그맣게 웅얼거리던 그녀가 나를 쳐다봤다.

“네가 가지 않으면 각하께서 거절하신 줄로 아실걸.”

“…….”

“가자, 응? 재밌을 거야.”

‘뭐지, 이 애는.’

악의가 없는 건가, 아니면…….

가족에게 황후의 초대가 있다는 말을 전하자 가웨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여간에 편 갈라놓는 데엔 귀재지.”

“가웨인.”

혀를 찬 가웨인이 아빠를 보았다.

“가지 않으면 세니아나가 표적이 될 겁니다.”

아빠도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얼른 아빠에게 말했다.

“그런 걱정 때문이라면 가지 않으셔도 돼요.”

‘나 때문에 아빠가 불편한 자리에 가는 건 싫어.’

손을 꼼지락거리자 아빠는 내 손에 쿠키를 쥐여 주었다.

“괜찮아.”

“그래도…….”

“파티 날에 나도 황제와 나눌 말이 있으니 잠깐 들르마.”

“…….”

아빠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지었지만, 나는 계속 마음이 좋지 않았다.

* * *

며칠 후, 파티 날. 나는 시트론, 마릴린과 함께 황후궁을 찾았다. 정원에 들어가니 황후가 생긋 웃으며 나를 맞았다.

“프렌시프 영애.”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와 줘서 고맙네. 프렌시프 공은?”

“폐하와 이야기를 마친 후에 들르신다고 하셨어요.”

“들른다, 라.”

그 정도면 되었다는 듯 은근한 미소를 띤 황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드레스가 아주 잘 어울리는군.”

“조부님께서 골라 주셨어요.”

“아아, 이 옷이 그…….”

그녀가 눈매를 둥글게 휘었다.

“두 사람이 영애를 몹시 아끼는 모양이야. 후작이 직접 꽃을 사 영애에게 선물했다지?”

나는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려다가 릴리의 말을 떠올렸다.

‘참, 프렌시프 소문은 유난히 더 빨리 돈다고 했지.’

나는 헤헤 웃으며 말했다.

“네, 아버지께선 다정하셔요.”

“삼대가 다복하니 보기 좋군.”

황후는 날 살뜰히 챙겼다. 그 덕에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쏟아졌다. 물론 그 중엔 프렌시프 성녀를 향한 호기심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악의에 찬 시선도 있지만.

‘크리스틴도 왔구나.’

이쪽을 파르르 노려보던 크리스틴이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파티장 안으로 레제 부인과 릴리가 들어왔다. 릴리는 사뿐사뿐 걸어 황후와 내게 다가왔다.

“황가의 광영 있기를.”

치맛자락을 잡은 채 무릎을 굽힌 그녀가 밝게 웃었다.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 드레스는…….”

“아, 페어리 숍에서 맞췄답니다. 좋은 옷이 많아요.”

황후가 한 말의 의미는 ‘어디서 샀느냐’가 아니었다. 몇 개의 장식품을 제외하면 나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기에 그런 것이지.

“세니아나! 앗, 우리 옷이 비슷하네.”

“…….”

“프렌시프 저에서 네가 입고 있던 옷이 너무 예뻐서 나도 맞췄는데. 같은 옷을 입고 올 줄은 몰랐어.”

“브로치도 똑같은데.”

“그렇네.”

그녀가 제 가슴에 달린 브로치를 매만졌다. 턱밑에 앞발을 붙이고 있는 고양이 모양의 브로치. 저건 오빠들이 내게 사 준 것과 색깔만 달랐다.

내 것이 에메랄드 바탕에 핑크 토르말린이 눈처럼 달려 있다면, 그녀의 것은 진갈색 원석에 에메랄드 눈이 달려 있었다. 고동색 머리와 초록 눈을 가진 그녀와 똑같이.

릴리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어쩐지, 계속 눈에 들어오더라니. 저번에 황궁에서 보았을 때 네가 하고 있던 브로치와 비슷한 모양이구나.”

“…….”

“혹시 기분 나빠?”

“…….”

“그렇다면 정말 미안.”

릴리는 울상을 지으며 내 팔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에서 버베나 향이 풍겼다. 사람들의 술렁임이 점점 커졌다. 몇몇은 인상을 찌푸리며 릴리를 쳐다봤다.

“저건 좀…….”

“이래서 기성품이 싫다니까요. 역시 오더 메이드여야 이런 일이…….”

“레제 양은 엘리자베스 양 때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쉿, 레제 부인이 계시잖아요.”

파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황후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제 파티에 소란이 생기니 약간 불쾌한 듯 보였다. 그때 황후와 막역한 귀부인이 중재하듯 말했다.

“폐하, 재미난 게임을 준비하셨다면서요?”

“아, 그렇지.”

그러자 사람들이 황후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파티 시작 전 여흥이라네. 의미 있는 것이 이 궁 안에 있으니 영애, 영식들은 그것을 찾아 가져오게나. 하면 보답으로 선물을 주지.”

귀부인들이 물었다.

“저희는 참가하지 못하는 겁니까?”

“이번 게임은 젊은이들에게 양보하시게.”

황후의 말에 귀부인들이 까르륵 웃었다. 황후는 홀을 한 번 돌아보고 이어 말했다.

“우리는 젊은이들이 찾는 동안 카드놀이라도 하세.”

“저희에게도 선물이 있습니까?”

“승자에겐 만족감이라는 선물이 있겠지.”

황후는 파티가 시작될 때까지 각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가져오라고 했다. 영애와 영식들이 흩어져서 궁을 뒤지기 시작했다.

시트론과 마릴린이 내 곁을 따라오며 말했다.

“다른 분들은 정원으로 가셨습니다.”

시트론의 말에 마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 폐하께서 백장미 정원을 아끼시거든요. 분명히 거기에 숨겨져 있을 거라고들 해요.”

“으음, 그렇게 쉬운 곳일까.”

나는 복도를 걷다가 웬 방의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들어가도 되겠지?’

궁 안은 모두 뒤져도 좋다고 했으니까.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음식 창고였다. 파티장에 음식을 나르기 위해 준비해 둔 곳인 것 같았다. 테이블 한가운데 올려져 있는 샌드위치가 보였다.

문득 샌드위치 이야기가 떠올랐다. 워낙 간단한 음식이다 보니 평민들이 제일 처음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샌드위치를 만든 건 귀족이었다.

영국의 존 몬테규 백작은 카드놀이에 홀딱 빠져 식사 시간도 아끼느라 빵 사이에 채소와 고기 따위를 욱여넣어 먹었다. 성실한 그를 헐뜯기 위해 만든 헛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든 샌드위치 탄생에 대한 일화 중엔 가장 유명하다.

‘하지만 그건 윤세나가 살던 세계의 일인데.’

길라게온에도 그런 일화가 있을까? 나는 시트론과 마릴린에게 그런 일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루이지 가의 선조가 그랬지요.”

“유명한 일화랍니다.”

지구나 여기나 도박 중독자는 별반 다르지 않구나. 하기야, 비싼 고기를 빵 사이에 끼워 먹을 생각은 귀족들이나 할 수 있겠지.

‘잠깐만 아까 황후가 귀부인들에게 카드놀이를 하자고 했었는데.’

설마!

“우리는 이걸 내자.”

“네에―?!”

시트론이 놀라서 되물었고, 마릴린도 잔뜩 당황했다.

“하지만 아가씨, 황후 폐하께선 의미 있는 것을 찾아오라고 하셨어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의미가 있지.”

“그게 무슨…….”

“젊은 영애, 영식들이 살롱에서 하는 놀이를 제지하시려는 거야.”

“네?”

“고가의 액세서리를 걸고 하는 놀이이니 도박과 다를 바 없는데 다들 놀이일 뿐이라며 모른 체하잖아.”

“그렇죠. 정도는 갈수록 심해지니…… 아아, 맞네요!”

일부러 젊은 영애, 영식에게만 의미 있는 것을 찾아오라고 한 점. 귀부인들에겐 카드놀이를 하자고 한 점. 상이 없냐는 귀부인들의 물음에 상은 만족감일 뿐이라고 일축한 점. 모두 힌트였던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틴 라지엥이 인장까지 걸었다는 걸 듣고, 이제 ‘놀이’를 제지할 때라고 생각한 거겠지.”

황후의 지인들이 모인 파티인데, 로웨나 황비의 말벗인 크리스틴이 있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그렇군요!”

시트론과 마릴린이 소리쳤다.

“영민하세요, 아가씨.”

“네, 정말로 지혜로우셔요.”

그때였다.

“세니아나, 여기 있었구나.”

릴리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다들 회장에 모였어. 우리도 얼른 가야지.”

“그래.”

“뭘 낼 거야?”

그러더니 시트론이 들고 있는 샌드위치를 쳐다보았다.

“설마 샌드위치?”

“…….”

“그런 걸 가져가면 비웃음만 살 거야! 안 되겠다. 자, 내가 찾은 걸 줄게.”

공작새 장식품이었다. 그녀는 공작새가 황후를 뜻하니 분명 제 것이 정답일 거라고 말했다.

“아니야, 나는 됐어.”

“괜찮대도. 사과 대신이야.”

“릴리, 나는 괜찮다고 말했어.”

“아…….”

내가 굳은 얼굴로 말하자 릴리가 시무룩 어깨를 떨궜다. 난 한숨을 내쉬고 릴리에게 말했다.

“가자.”

“으응…….”

파티장엔 대부분의 영애, 영식들이 돌아와 있었다. 황후가 그들에게 가져온 것을 물었다. 다들 릴리와 비슷한 황후의 상징물을 말했다. 아니면 그녀가 아끼는 것이라든가.

“레제 영애는 무얼 가져왔을까.”

“저는…….”

릴리가 흘깃 시트론을 보더니 그녀의 손에 들린 샌드위치 접시를 잡았다.

“샌드위치를 가져왔어요.”

뭐라고?

“샌드위치?”

눈이 동그래진 사람들이 쑥덕거렸다. 나는 굳은 얼굴로 릴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티 없이 맑게 웃고 있었다. 한 귀부인이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를 조롱하는 건가?”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게요. 폐하께서 마련한 게임인데 너무 성의 없지요.”

“그게 아니라 샌드위치는 도박광을 의미하는 음식이잖아요.”

“그럼…… 어머머, 무례해라!”

파티장이 터져나갈 듯 시끄러워졌다. 카드놀이를 했던 귀부인들이 얼굴을 찡그렸다. 황후가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만.”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황후가 후후, 웃으며 릴리를 쳐다봤다.

“레제 양이 정답을 가져왔네.”

황후는 크리스틴 무리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유난히 카드놀이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희게 질려서 고개를 숙였고, 황후는 마뜩잖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황후가 ‘놀이’를 제지하려 했다는 걸 알고 당황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그런데……. 나와 릴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릴리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무어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황후가 시녀장을 쳐다보았다.

“레제 영애에게 그것을.”

시녀장이 고개를 꾸벅 숙이곤 벨벳 천으로 감싼 상자를 가져왔다.

“열어 보게.”

황후의 말에 릴리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아……!”

상자 안을 확인한 릴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폐하, 이건……!”

그녀가 꺼낸 건 황금 매 펜던트가 달린 팔찌였다. 화려한 패물도 아니고, 고가의 보석도 아니었지만, 릴리는 뛸 듯이 기뻐했다.

‘별궁에서 들었어. 저건 초대장과 같은 거야.’

그것도 황제와 후·비들이 참석하는 대만찬의 초대장 말이다. 그걸 본 마릴린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폐하, 그건 저희 아가씨께서……!”

순간 장내의 시선이 이곳에 쏠렸다. 황후의 파티에서 감히 사용인이 입을 연 것에 불쾌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얼른 마릴린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움찔 떨었지만, 자중하라는 내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황후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나는 얼른 변명했다.

“제가 몸이 좋지 않습니다, 폐하.”

“그런……. 황궁의를 호출하지.”

“아니에요. 피로 때문이니 쉬면 나아질 거예요.”

황후는 시녀장에게 휴게실을 안내해 주라고 명했고, 나와 하녀들은 시녀장을 따라 휴게실에 들어갔다.

“그럼 영애,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불러 주십시오.”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장이 휴게실을 나섰다. 마릴린이 희게 질린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죄송해요.”

치마를 꾹 쥔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일이 잘되든, 잘못되든 마릴린은 엄벌을 피하지 못했을 거다. 그리고 그건 황도에서 오래 산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겠지. 오직 날 생각해서 앞뒤 가리지 않은 것이다. 나는 마릴린의 손을 잡고 말했다.

“고마워.”

“아가씨…….”

“일어나, 무릎 배기겠다.”

하지만 마릴린은 뚝뚝 눈물을 흘릴 뿐,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시트론이 그녀를 일으켰다.

“아가씨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마세요.”

내가 생긋 웃던 그때, 문이 살짝 열리더니 릴리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세니아나…….”

릴리는 내 표정을 보더니 깜짝 놀라서 달려왔다.

“나, 나는 네가 상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에 그런 거야. 공작새가 정답인 줄 알았거든…….”

“…….”

“미안해서 받지 못하는 것 같기에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고 했어. 정말로 샌드위치가 정답인 줄은 모르고……”

우물우물 변명하던 그녀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정답이라는 걸 알았을 때 말했어야 했는데 폐하 앞에서 거짓말을 했다고 할 수는 없잖아.”

“…….”

“파티장이 소란스러워지면 우리 둘 다 곤란해지니까. 그래서…… 미안해.”

“릴리.”

내가 낮은 목소리로 부르자 그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미안하지 않으면서 왜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어리숙한 실수인 척했던 모든 행동들이 고의였으면서. 그리고 난 이번 일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았다.

릴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쏟아질 듯 커다래진 눈에 눈물이 어리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날 그렇게 생각했던 거니?”

가련하게 어깨를 떨며 입을 막는다. 나는 그녀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말했다.

“왜 내 방에 있던 장미를 달라고 했니?”

“그건……!”

“아빠가 준 걸 알고 있었잖아.”

“모, 몰랐어. 각하께서 주신 거였어?”

“아니, 넌 알았어.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니? 프렌시프의 소문은 빠르게 퍼진다고.”

릴리가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그것 때문에 내게 기분이 나빴던 거야?”

“뭐?”

“내가 각하와 오빠들에게 친근하게 굴어서…….”

마릴린과 시트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와중에도 나를 못된 애로 몰고 가는 그녀가 기막히다는 듯이.

릴리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너 없을 때 내가 오빠들과 친해질까 봐?”

“나야말로 궁금한데.”

“어?”

“왜 굳이 내가 없을 때 친해져야 하는 거야?”

“…….”

저택에 왔을 땐 일부러 늦게 와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나와 똑같은 옷, 똑같은 브로치, 똑같은 향.

‘내 자리를 빼앗고 싶다는 거였어.’

릴리의 표정이 일순 싸늘해졌다. 그러나 금세 본래의 어리숙한 표정으로 돌아가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있잖아, 세니아나.”

“…….”

“이건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다른 곳에선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뭐?”

“사람들이 네가 아빠의 의붓딸이 된 나를 질투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릴리가 생긋 웃었다.

“친하게 지내자, 응?”

“…….”

“네가 나를 미워하면 다들 곤란해지잖아. 아빠도, 오빠들도, 그리고 두 분 폐하도.”

그러더니 내 손을 다시 잡았다.

“폐하께 샌드위치 이야기는 하지 않을 거지? 황후 폐하는 소란을 제일 싫어하시잖아.”

“거짓말도 싫어하시지.”

“하지만 네가 그 말을 입 밖에 내면 황후 폐하께서 놀이를 제지하려고 하신 것보다 우리의 싸움이 더 크게 조명될걸.”

“…….”

“폐하께서 그걸 바라시겠니?”

이 애는 고단수였다. 온갖 인간군상을 다 겪은 나도 드물게 본 타입이다.

‘어째 프란츠나 배신자인 세드릭보다 까다롭네.’

플로헤타는 멍청하기라도 했지, 얘는 정말로 교활하다. 내가 릴리를 빤히 쳐다보자 그녀가 생긋 웃었다.

“네 생각에도 그렇지?”

“아니.”

“……뭐?”

“난 그런 거 하나도 안 무서워.”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싸늘한 눈길은 하나도 무섭지 않다.

‘황후가 날 죽일 것도 아니고.’

혁대로 폭행하거나 발길질을 하지도 않을 거 아니야.

릴리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세니아나, 네가 사교계를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흠이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는 세계가 사교계야.”

“그게 흠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괜찮아.”

“뭐?”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게 어떻게 흠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서 걸어가 문고리를 잡았다. 릴리가 다급하게 따라왔다.

“어디 가려고!”

“그야 폐하께 네가 한 말을 해야 하잖아.”

“정말 못됐구나!”

“내가 왜?”

“어른들이 얼마나 염려하시겠어!”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아빠…….”

나는 조그맣게 그를 불렀고, 아빠는 묘한 분위기의 휴게실 내를 슥 훑어보았다.

“큰 소리가 오가더군.”

릴리가 얼른 황후가 준 팔찌를 꺼내 내게 건넸다. 표정은 다시 시무룩하고 가련하다.

“가져가.”

“…….”

“이런 것 때문에 너와 싸우기 싫어.”

싸웠다는 말에 아빠가 미간을 좁혔다. 릴리는 작게 탄식하더니 고개를 수그렸다.

“황후 폐하께서 개최한 놀이 때문에 세니아나가 절 오해했어요.”

“오해?”

릴리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제 위주로 편집, 각색한.

“정답이 샌드위치인 걸 알고 사실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선물을 보고 도무지 입을 열 수가 없었어요.”

“…….”

“세니아나는 성녀잖아요? 대만찬에 가게 되면 정치적으로 얽히게 될지도 모르고요. 그래서 제가 가는 게 낫겠다 싶었는데…….”

릴리가 한숨을 폭 내쉬며 눈을 깜빡였다.

“세니아나에게 가문이 곤란해지는 것보다 대만찬이 우선일 줄은 몰랐어요…….”

아빠는 내게 시선을 돌렸다.

“네 입으로 얘기해라.”

“제 말이 맞아요, 각하~”

릴리는 시무룩 어깨를 떨궜다. 여기서 저 얘기가 제 위주로 한 말이라고 해 봤자 일을 해결할 수 없을 거다. 릴리의 말은 어쨌거나 그럴듯하다. 장미 일이나, 나를 따라 한 것, 가족들에서 떼어 놓으려고 한 것들도 겉보기엔 너무나 사소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본질적인 해결책은 달리 있었다.

나는 아빠의 옷깃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아빠가 고개 숙인 나를 지그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결혼하지 마세요…….”

“…….”

“우리 아빤데…….”

말하고 나니까 어리광 피우는 것 같아서 난 증발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창피해!’

목 끝까지 빨개져서 어쩔 줄 몰랐다. 어른들 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그러면 더 민망해지는데. 하지만 아빠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나는 슬그머니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아빠?”

“…….”

저는 이렇게 창피한데 아빠는 왜 흐뭇하게 웃고 계시나요?

“한 번 더.”

“네?”

“내가 누구라고?”

“우리 아빠?”

아빠가 어리둥절한 나를 웃으면서 보다가 내 뺨을 살짝 꼬집었다. 그러자 릴리가 버럭 소리쳤다.

“세니아나!”

그녀는 얼른 나를 끌어당겼다.

“못 써. 각하를 곤란하게 하면 어떡하니.”

“…….”

“정말…….”

릴리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고 아빠를 쳐다보았다.

“세니아나도 진심은 아니었을 거예요. 용서하세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던 찰나에 노크 소리가 들리고, 레제 부인과 황후가 들어왔다.

“밖에서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레제 부인이 딸을 보며 묻자 릴리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세니아나가 제게 서운했는지 각하를 곤란하게 하기에…….”

“그게 무슨…….”

레제 부인과 황후, 그리고 릴리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아빠는 나를 가리듯 내 앞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황후를 쳐다보았다.

“폐하를 뵙습니다.”

“인사도 없이 딸을 찾아갔대서 무슨 일인가 싶었지.”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말 속에 뼈가 있었다. 아빠는 태연하게 받아쳤다.

“딸아이의 몸이 좋지 않다기에 염려가 앞섰습니다.”

피곤한 애를 억지로 파티에 끌어냈으니, 하는 표정이었다. 황후는 할 말이 없는지 침음을 흘렸다.

“그래, 황제 폐하는 무슨 일로 뵙고 왔는가.”

“황궁의 배려는 마음만 받겠다는 말씀 전했습니다.”

황후와 황제가 주선한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릴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황후도 미간을 좁혔다. 황후가 나와 릴리를 번갈아 보다가 다시 아빠를 쳐다봤다.

“영애들 간에 무슨 일이 있었군.”

“제가 귀찮을 뿐입니다.”

“귀찮다? 나와 황제 폐하의 배려가!”

황후의 표정이 날카로워졌지만, 아빠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세 번이나 결혼했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하죠.”

란슬롯의 어머니, 가웨인의 어머니까지 하면 결혼한 건 두 번이다. 그런데 세 번? 플로헤타는 약혼만 했을 뿐인데?

‘아, 선생님…….’

나는 어쩐지 가슴이 살랑거려서 손을 꼼질꼼질 매만졌다. 그러자 황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 쉬이 결정할 일이 아니네. 레제 부인과의 결혼은 나와 황제 폐하께서 프렌시프에 주는 선물이야.”

아빠는 레제 부인에게 말했다.

“선물, 이라시는데.”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레제 부인만이 유일하게 침착했다. 마치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글쎄요, 저는 이때껏 제가 물건이 아닌 줄로 알고 있었는데요.”

“어머니!”

황후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에 릴리가 그녀를 붙들었다. 레제 모녀를 똑바로 바라보던 황후가 표정을 싸늘히 굳혔다.

“두 사람의 의견이 그렇다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나.”

그러곤 시녀장을 보며 말했다.

“피곤하니 파티는 이만 끝내도록 하지.”

아빠가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레제 부인이 무릎을 살짝 굽혔다. 황후가 불쾌한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 릴리는 아빠를 향해 무어라 말하려고 했지만, 아빠는 듣지 않고 내게 손을 뻗었다.

“갈까?”

“네!”

난 아빠의 손을 잡은 채 레제 부인을 돌아보았다.

“가 보겠습니다…….”

레제 부인이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부인과 나를 보는 릴리의 표정이 살벌했다.

* * *

저택으로 돌아가는 레제 가의 마차 안. 레제 부인이 태연히 신문을 펼치자 릴리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대체 왜……! 어머니는 제가 가엽지도 않으세요?”

레제 부인은 고개를 모로 꼬며 릴리와 눈을 맞추었다.

“네가 왜. 내가 밤낮없이 일해 잘 먹이고 잘 재웠는데.”

“아빠 없이 자라게 하셨죠!”

“누가 보면 내가 네 아빠를 죽이기라도 한 줄 알겠구나. 병들어 간 사람을 어찌 붙잡니.”

릴리가 치맛자락을 꽉 비틀었다. 분노로 어쩔 줄을 모르는 딸을 보고 레제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네 아비가 네 어리광을 너무 받아 줬어.”

“프렌시프 가예요! 금좌 11석의 두 자리나 차지한 프렌시프라고요! 어머니가 제 생각을 하시면 어떻게 이래요!”

신문을 소리 나게 접은 레제 부인이 딸을 매섭게 쳐다봤다.

“네 생각하여 네 아비를 버텼어. 더는 희생을 강요하지 마.”

“프렌시프 후작 부인이 돼서 세상을 호령하는 게 희생이라고요?”

“어찌 제 아비와 외조부를 저리 빼닮았는지.”

“황후 폐하께 가요. 사과하시고, 다시 중신을 서 달라고 부탁하세요.”

릴리가 애원하듯 말하며 레제 부인을 흔들었다. 그런 딸의 손을 쳐낸 레제 부인이 한숨을 삼켰다.

“황후 폐하께서 우리 좋으라고 주선하시는 줄 아니.”

“외가 세력을 흡수하시려는 거잖아요.”

레제 부인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레제 부인의 친정은 대대로 황제의 사역견이었다. 그런 가문을 황후가 빼앗는다면 황제의 눈 밖에 날 텐데, 그런 짓을 왜 하겠는가.

“내가 레제 가를 상속받았기 때문이야. 레제 가를 프렌시프에 선물로 넘기려는 거라고.”

“어째서…….”

“프렌시프 성녀의 마음을 잡고 싶으시니까.”

“세니아나요?”

릴리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레제 부인은 그런 딸을 보고 인상을 썼다.

“레제 가를 넘겨서 프렌시프와 친분을 쌓으려는 거다. 게다가…….”

릴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네가 집안에서 세니아나를 몰아내는 것도 은근히 바라고 계시지.’

그때 손을 내밀면 품에 안을 수 있으니.

하지만 딸이 황후의 체스 말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프렌시프 쪽에서 먼저 거절해 준 건 잘된 일이었다. 레제 부인이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자 릴리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머니는 바보야.’

세니아나를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보던 프렌시프의 남자들이 떠오르자 또 울컥 화가 치밀었다. 프렌시프 후작이며 경들은 막내에게 꿀처럼 달콤했다.

반밖에 섞이지 않았는데도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리 귀여움을 받는데, 자신 또한 가족이 되면 얼마나 사랑해 주겠는가. 그럼 자신은 황금 탑의 꼭대기에서 군림하게 될 거다.

‘이런 기회를 그냥 놓칠까 봐?’

아무래도 ‘그 사람’을 만나 봐야겠다. 릴리의 눈이 욕망으로 일렁거렸다.

* * *

가웨인이 내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걸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왜, 왜요.”

“나는 너한테 뭔데?”

“오빠요.”

“앞에 단어가 빠졌잖아.”

‘우리’ 오빠?

아빠에게 ‘우리 아빤데…….’라고 했던 말을 듣고 난 후로 가웨인은 계속 내 주변을 뱅뱅 맴돌았다. 나는 황후에게 쓰던 편지 끝을 꼭 잡았다.

“진짜…….”

“진짜아.”

그가 내 말을 따라 하며 피식피식 웃었다. 내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휙 돌리니 란슬롯이 그만하라며 그의 머리를 책으로 때렸다.

“하지만 이 녀석 귀엽잖아.”

“드문 일도 아니고.”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도망치고 싶었다. 쥐구멍으로 이동할 수는 없을까.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가웨인이 내 앞에 턱을 괴고 앉아서 히죽 웃었다.

“질투했어?”

“오빠한테는 안 했어요.”

그러자 란슬롯도 웃으면서 물었다.

“그럼 난?”

“…….”

역시 쥐구멍으로 이동할 수 있으면 좋겠어. 여기서 계속 있다간 편지 한 줄 못 쓰겠다. 파티에 다녀온 초청객은 호스트에게 ‘파티 너―무 멋졌고 초대해 줘서 정말 감사’라는 편지를 쓰는 게 예의라고 했다. 거기다 아빠로 인해 황후가 언짢아졌으니 내게 이 편지는 예의가 아니라 필수였다.

방을 나서려고 하는 나에게 오빠들이 물었다.

“어디가?”

“피곤해?”

“방에서 편지를 쓰려고요.”

그러자 가웨인이 말했다.

“여기서도 쓸 수 있잖아.”

오빠가 자꾸 놀리잖아요,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니까 그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나는 영지 경비 때문에 곧 돌아가야 한다고. 얼굴 많이 보여 줘.”

“…….”

“유리관에서 쓰는 건 어때? 더 잘 써질걸.”

“유리관이요?”

“끝내주거든.”

그렇게 말한 가웨인이 일어나서 나를 끌어당겼다. 란슬롯도 우리를 따라왔다.

유리관은 W자로 이어진 건물 중 왼쪽 끝에 있는 건물이었다. 오빠들은 유리관 안으로 들어가서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꼭대기 층까지 어찌나 빨리 걷는지 난 끙끙거리며 그들을 쫓아가야 했다. 숨이 차서 잠깐 멈추자 가웨인이 날 돌아보더니 번쩍 안았다.

“으악!”

“꺄악, 이 아니라?”

“으악, 도 할 수 있어요.”

“야옹, 해야 할 것 같은데.”

“장난치지 말고 내려 주세요!”

하지만 그는 들은 척도 안 했다. 그래서 란슬롯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란슬롯이 빙그레 웃으며 가웨인에게 말했다.

“떨어뜨리면 죽일 거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버둥거리자 가웨인이 한 손으로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나 아직 죽기 싫거든?”

우리는 건물의 꼭대기로 올라왔다. ‘내려 주세요!’만 반복하던 나는 꼭대기 층의 문이 열리자마자 말을 잃었다.

“와아―!”

유리 덮개를 건물 위에 덮은 것처럼 벽이며 천장이 온통 투명했다. 머리 위에 가득 박힌 별이 잡힐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이 너무 아름다워서 숨을 크게 들이켰다.

지지대도 없이 어떻게 이런 구조로 건물이 지어졌을까, 하는 궁금증이 저 멀리 날아갈 정도로 황홀한 광경이다. 가웨인이 내려 주자마자 난 중앙으로 뛰어갔다.

‘플라네타륨 같아!’

빙글빙글 돌면서 천장을 보고 있으니까 딩―,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호화로운 그랜드 피아노 앞에 란슬롯이 서 있었다.

“칠 수 있어요?”

가웨인이 픽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형 건데.”

“큰오빠 피아노 치는구나.”

너무 잘 어울리는 거 아니야?

나는 피아노의 옆 프레임을 잡고 까치발을 든 채 란슬롯을 보았다.

“쳐 주시면 안 돼요?”

그러자 가웨인은 당황한 얼굴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건―”

“네?”

문득 육체에 남은 기억이 떠올랐다. 란슬롯의 어머니는 매사 무심하고, 엄격했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을 붙였던 게 아들의 피아노였다. 그녀는 란슬롯에게 지나칠 정도로 철저히 피아노를 가르쳤다고 했다. 그리고 이혼. 란슬롯의 외가에선 그에게 프렌시프의 정보를 요구했고, 그가 거절하자…….

‘프렌시프에 전쟁을 걸었다고 그랬지.’

그것도 란슬롯이 홀로 성에 있을 때를 노려서.

아들의 앞날은 전혀 생각지 않은 행동이었다. 다행히 전쟁은 프렌시프의 승리였고, 란슬롯은 그날 영지에 있던 피아노를 부쉈다. 그 후로 피아노는 한 번도 치지 않았다. 난 기억이 떠오르고 엄청나게 당황했다. 얼른 피아노에서 손을 뗐다.

“아니에요! 안 쳐도 괜찮―”

“무슨 곡?”

“네?”

“듣고 싶은 곡 있어?”

내가 말이 없자 란슬롯은 빙그레 웃었다. 건반에 가지런히 손을 올려놓은 란슬롯이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콤하고도 달콤한 선율. 가슴이 저미도록 다정한 멜로디는 마치 귓가에 ‘너는 소중해’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바람은 선선했고, 머리 위엔 그림 같은 별들이 수놓여 있으며 방 안을 꽉 메운 선율은 감미롭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만약 주마등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만 담는다면 내가 죽어갈 때 오늘을 보겠구나, 하고.

다음 날 아침. 옷까지 다 입고 나온 나는 복도 반대편에서 오는 아빠를 발견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너는?”

“잘 잤어요.”

우리는 식당으로 같이 내려갔다. 오빠들이 먼저 와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하니까.”

“벌써요?”

내가 깜짝 놀라서 묻자 란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까 두 사람은 황제가 레제 부인과 선을 주선한 일로 급히 올라온 것이었다. 이제 거절을 했으니 돌아갈 때가 되긴 했지.

“참, 거절한 일로 두 분 폐하께서 기분이 상하시지 않았을까요?”

아빠는 냅킨을 펼치며 가볍게 대답했다.

“황후는 그렇겠지. 하지만 황제는 어차피 거절할 줄 예상하고 있었다.”

“네? 그런데 왜…….”

“이번 일로 우리에게서 얻어낼 게 있었던 거다.”

“아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오빠들은 결혼 때문이 아니라 황제가 원하는 바를 준비하려고 올라온 거네.

‘어? 그럼 나 괜히 창피한 일만 한 거잖아!’

우리 아빤데, 라고 말했던 일이 또다시 떠올라서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나는 생각을 떨쳐 내려고 얼른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는 뭘 원하셨는데요?”

아빠가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내가 눈을 깜빡이자 그는 수저를 들며 답했다.

“보그.”

“네?”

“영지에 보그가 있는 건 아는데, 손에 넣을 순 없으니 교활하게 압박해 온 거지.”

“아…….”

그냥 카르스족에서 보그 말고 전력석을 받아올 걸 그랬나.

‘황제한테 한두 개를 주진 않았을 테고, 슬슬 카르스족에게 다녀와야겠다.’

카르스족의 예쁜 공주님 트리스탄이 떠올랐다. 제국어를 공부하겠다고 했는데, 다시 가면 말이 통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식사를 마쳤다. 오빠들은 곧장 방에 올라가서 서류를 챙겨 나왔다. 짐이 서류나 검뿐이라서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것만 가져가는 거예요?”

“그래.”

“다른 건요?”

가웨인이 다른 게 뭐가 있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러니까 옷이라든지, 그런 것들이요.”

하다못해 하인이 짐 가방이라도 들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네?”

“새로 사면 되지.”

“…….”

부자들의 삶이란……. 나는 한숨을 폭 내쉬며 목걸이를 잡았다. 이동할 곳을 생각하고 포털을 여는데―

“어?”

나는 눈을 깜빡이고 목걸이를 쳐다보았다. 포털이 열리지 않는다.

목적지를 생각하고 길을 연다. 다시.

목적지를 생각하고 길을 연다. 다시.

다시.

‘안 열려.’

잠깐 다른 생각을 해서 목적지가 아닌 곳으로 이동한 적은 있어도 열리지 않은 적은 없었다. 가웨인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포털을 열 수가 없어요…….”

내 말에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 * *

“일단 상황을 지켜봐야겠습니다.”

[놀라지 않도록 잘 다독여라.]

서재 쪽에서 란슬롯과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아무런 말 없이 앉아 있자 사용인들이 눈치를 보았다.

“저, 아가씨, 너무 걱정하지…….”

하인이 말하려다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받고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좋은 향이 나는 차를 내려놓고, 살그머니 방을 빠져나갔다. 내게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나는 홀로 남아서 생각을 정리했다.

전력석은 어떻게 하지. 보그를 황제에게 주면 영지는 다시 전력석에 허덕여야 한다. 보그를 못 주면 아빠는 결혼을 해야 하는데. 그보다 앞으로 전력석 수급이 문제다. 사비에르가 거래해 줄까? 그 많은 배상금을 물고, 망신을 당했는데 쉽게 거래를 재개할 리 없다.

‘안 돼, 긍정적인 생각!’

나는 짝, 소리가 나게 얼굴을 치고 찻잔을 들었다.

“하나씩 정리하자. 포털을 다시 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1. 포털의 문제점 확인.

포털이 열리긴 하는데 이동을 못 하는 건지, 아예 열리지도 않는 건지 알아봐야 한다.

2. 황제에게 보그를 주지 않는 것.

후속 대책이 없는 상태로 보그를 주게 되면 영지가 전력석난에 허덕여야 할 거다. 못해도 보그를 건넬 시일을 늦춰야 한다.

‘좋아.’

나는 차를 홀짝 마시고, 서재로 향했다. 방 앞에 서 있던 시트론과 마릴린이 나를 따라왔다. 서재로 들어가자 가족들은 마침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황궁에 보그를 보내기로 하셨습니까.”

“사흘 뒤.”

“빠르군요.”

“그조차 양보한 것이다. 황제는 세니안이 포털을 열 수 있으니 운반엔 시간이 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들어가도 돼요?”

나는 문 안으로 빼꼼 얼굴을 내밀고 물었다. 아빠가 고개를 끄덕여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여쭤볼 게 있는데요.”

“그래.”

“제가 황도로 왔을 때, 아빠가 저를 구해 주셨잖아요.”

“구해 줘?”

내 말에 오빠들이 되물었다. 가웨인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네가 위험했다고?”

“괴한이 습격해서요.”

“경비대는 뭘 했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요.”

나는 손을 살랑살랑 젓고, 아빠를 쳐다봤다.

“그때 어떻게 오신 거예요? 포털이 열린 걸 알고 오신 거죠?”

아빠가 점쟁이라서 내가 거기에 뿅 나타날 줄 알고 오진 않았을 테니까.

“그래.”

“어떻게 아셨어요?”

“황궁 결계는 다른 결계보다 월등히 민감하지. 이동지도 추적이 가능해.”

“아, 제가 대시장에 있는 게 이상해서 오셨군요.”

마침 사비에르 영애가 황궁에 있어서 그녀에게 이동을 부탁한 것이었다.

‘그럼 황궁에 가서 포털을 열어 보면 되겠다.’

결계에 걸린다면 이동은 안 돼도 여는 건 가능한 거다. 그런데 어떻게? 황후에게 두 번이나 불려갔는데 이번에도 그녀를 찾으면 로웨나 황비의 시선이 곱지 않을 거다. 그렇다고 로웨나 황비를 찾으면 황후가 아빠의 결혼 문제로 내가 마음을 돌렸다고 생각할 텐데.

‘아! 황궁 대만찬 초대 팔찌가 있어!’

그때 분명히 릴리가 ‘가져가!’ 하면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줬으니까 내가 써도 되겠지, 뭐. 어차피 샌드위치는 정말로 내가 찾은 거고.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놓고 왔다, 그거.”

내가 끄응, 신음하며 혼잣말을 하자 아빠와 오빠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날 보았다. 가웨인이 물었다.

“뭘?”

“대만찬 초청 팔찌요…….”

“대만찬? 가려고?”

“포털이 열리기는 하는지 황궁 결계로 시험해 보려고요.”

황후나 황비에게 초청을 청하는 게 아니라 굳이 대만찬에 가려는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가족들은 납득했다. 그때 마릴린이 슬그머니 손을 올렸다.

“저어…… 아가씨…….”

“응?”

“그 팔찌, 제가 가져왔는데요…….”

뭐라고?

“아가씨께서 받아야 할 선물인데, 레제 영애가 가져가는 건 싫어서…….”

마릴린이 주눅 든 채 중얼거렸다. 내가 멍하니 쳐다보자 그녀가 또 한 번 변명했다.

“레제 영애는 영악하니까 놓고 가시면 냉큼 가져갈 것 같아서요…….”

“그, 그랬구나. 지금 어디에 있어?”

“아가씨의 침실 서랍에 넣어 두었어요.”

나는 얼른 침실로 돌아가서 서랍을 열었다. 잘 안 쓰는 곳이라 있는 줄도 몰랐는데, 정말 팔찌가 들어 있었다.

“황궁에 갈 수 있겠다!”

지나친 충성심 최고!

오늘은 크게 도움이 되었다. 나는 황후에게 ‘레제 영애로부터 팔찌를 양도받았고, 그녀를 대신해 아빠와 함께 대만찬에 참석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가족들이 나 혼자서는 절대로 보내지 않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

‘우리에게 감정이 상해서 싫다고 하면 어쩌지?’

그럼 로웨나 황비에게 연락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황후가 답장을 보내 왔다. 편지엔 ‘나와 아빠의 참석을 허락하며 우리가 오는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의외로 흔쾌히 허락하네요.”

내 말에 아빠와 란슬롯이 가볍게 대답했다.

“감정에 휩쓸려 봐야 득이 되지 않을 테니까.”

“프렌시프가 황위 싸움에서 로웨나 황비의 편을 드는 것보다 두려운 게 없을 테지.”

“아하.”

이틀 후 저녁. 나는 아빠와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만찬장 앞에 도착하자 시종이 우리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그 틈에 아빠가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황제 앞에서 포털을 열어선 안 된다.”

“네. 불순한 의도로 열었다고 오해받을 수 있으니까요.”

“결계에 걸리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알지?”

“포털을 소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불안정한 상태다. 의도를 가지고 연 건 아니다. 어차피 결계 때문에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좋아.”

아빠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을 때, 문이 열렸다. 나는 치마 끝을 잡고 무릎 굽히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황가에 광영 있기를.”

아빠도 인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게.”

황제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든 나는 소리 없이 숨을 들이켰다.

‘도미니크와 똑같이 생겼어!’

흰머리가 약간 섞인 금발이라는 것과 그보다 분위기가 부드럽다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판박이다. 그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대가 프렌시프의 성녀로군.”

“세니아나 프렌시프입니다.”

“앉아서 이야기하지.”

황제가 미소 지으며 의자를 향해 눈짓했다. 나와 아빠가 착석하자 황제는 날 지그시 응시했다.

“어디까지 이동할 수 있나? 몇 명이나 이동시킬 수 있지?”

별궁에서 로웨나 황비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똑같았다. 말투는 그때보다 더 당당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시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쉽군. 만인이 탐내는 보물을 끌어안고만 있는 건가.”

그러면서 은근히 아빠를 쳐다봤다. 네가 그러라고 시켰지? 라는 표정이라서 여기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빠가 대답했다.

“팔 생각이 없으니 끌어안고 평생 귀히 여길 생각입니다.”

“길거리에서 꽃을 선물할 정도로 말이지.”

황제도 아는 거야?

나는 놀라서 아빠를 쳐다봤지만, 아빠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원한다면 별도 따다 줄 생각입니다.”

“허어……. 딸자식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그러자 황비들이 호호, 웃으며 말을 받았다.

“황자는 차고 넘치시지 않습니까.”

로웨나 황비의 말이었다. 그녀는 나를 향해 눈을 찡끗하고, 다시 황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있는 아들을 귀히 여겨 주십시오.”

특히 장자를, 하는 눈빛이었다. 그러자 황후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늘 자식을 귀히 여기시네.”

로웨나 황비와 황후의 눈에 불똥이 튀니 황제는 귀찮다는 듯 벨을 흔들었다. 이윽고 궁인들이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로열 키친의 음식!’

겉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았다. 예술품처럼 곱고 아름다워서 난 홀랑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황제가 먼저 맛을 본 후에 다른 사람들이 스푼을 드는 게 예법이다. 나는 그가 얼른 식기를 들길 기다렸다. 별안간 문가에서 시종의 목청 높은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만찬장에 뛰어들어온 그가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소피아 부인께서 쓰러지셨습니다!”

소피아 부인은 치매를 앓고 있다는 황제의 친모였다. 황제가 굳은 얼굴로 식기를 놓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군. 만찬은 다음에 이어 하도록 하지.”

그가 몸을 일으키자 황후와 황비들도 그를 따랐다. 아빠는 한숨을 가늘게 내쉬곤 곧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황후가 떠나기 전에 내게 잠시 정원을 구경하고 있으라고 해서 시녀장의 안내를 받아 정원으로 향했다.

‘황족들이 없는 새에 포털을 열어 보자.’

나는 정원을 걷는 척 내 뒤를 따르는 시녀들을 힐끔거렸다. 저들이 한눈을 파는 때를 노려야 하는데 어찌나 세심하게 나를 살피는지 나는 정원 깊숙이까지 걸어야 했다. 장미 덩굴로 이어진 미로 같은 길을 막 지났을 때였다.

“흐―응.”

가냘픈 신음과 함께 당황스러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남녀가 서로 엉켜 입을 맞추고 있었다. 여자의 옷은 반쯤 흘러내려 가슴을 겨우 가리고 있었고, 남자는 여자의 허벅지 사이에 다리를 끼워 넣은 채 그녀의 뒷머리를 잡고 있었다.

입술과 입술이 몇 번이나 부딪쳤다 떨어지면서 새빨간 혀가 얼핏얼핏 보였다. 얼마나 격렬한 키스인지 남자의 입가에 립스틱이 번져 있었다. 그때, 남자와 시선이 부딪쳤다. 나는 깜짝 놀라서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죄, 죄송…… 하시던 거 마저 하세요…….”

츕―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 시녀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황자님!”

황자? 제국엔 황태자 하나와 황자 둘뿐이었다. 도미니크는 아니니 그러면…….

‘황후의 아들인 4황자구나!’

내가 살짝 손을 내렸을 때였다. 4황자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그가 나른히 중얼거렸다. 키스 말고 또 뭘 했는지 그의 가슴팍 단추가 반쯤 떨어져 있었다. 덕분에 가슴팍이 훤히 드러났다. 내가 황급히 다시 손을 올리자 픽, 하는 실소와 함께 그가 말했다.

“누구?”

나는 당황해서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날 대신해 시녀들이 말했다.

“프렌시프 영애십니다.”

“아, 새로운 성녀.”

성녀, 하니까 떠올랐다. 사비에르 영애와 결혼할 거랬잖아? 그럼 저 여자가 사비에르 성녀인가?

‘하지만 저 드레스, 하녀의 옷인 것 같은데.’

황후의 파티장에서 저런 옷을 입은 하녀들을 봤는데. 맞는 거 같은데!

나는 황자에게서 뒷걸음질 치며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그의 뒤로 당황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자 황자가 말했다.

“어머니가 수작 부리는 중이라던 프렌시프의 성녀?”

그런 걸 아들이 대뜸 말해도 되는 거야?

‘이상한 사람인가…….’

일단 나는 그에게 인사했다.

“저하를 뵙습니다. 세니아나 프렌시프입니다.”

4황자가 싱긋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눈을 도르륵, 굴리니 시녀가 대신하여 황급히 그를 소개했다.

“미카엘 로젠카로튼 님이십니다.”

그러곤 옷을 추스르는 하녀를 쏘아보며 “어서!” 하고 눈을 부라렸다. 나가라는 의미였는지 하녀는 서둘러 정원을 빠져나갔다. 미카엘이 빙글빙글 웃으며 나를 쳐다봐서 엄청 당황스러웠다.

“황궁엔 무슨 일로?”

“……대만찬에 초대를 받아서요.”

“붉은색, 녹색?”

붉은색은 황후를 뜻하고, 녹색은 로웨나 황비를 뜻했다.

“일단은 붉은…… 분이시긴 한데…….”

“그렇다면 내가 에스코트해야겠군.”

“그건 옷을 입으신 후에 의논하면 안 될까요?”

눈 둘 데가 없어서 민망합니다…….

“숙녀가 원하신다면.”

미카엘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재킷을 주워들었다. 시녀들이 얼른 재킷에 묻은 풀잎을 털고, 그에게 옷을 입혀 줬다. 흐트러진 머리까지 정리하니 이제야 그가 황자님처럼 보였다.

황제를 닮은 백금발은 남자치곤 길이가 길었음에도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란슬롯이 아름다운 인상이라면 이 남자는 야릇했다. 하녀가 어째서 직무도 잊고 그를 정신없이 탐닉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을 정도로 색기가 흘렀다.

“그럼 갈까.”

“저쪽으로요!”

나는 경비병들이 있는 테이블 쪽을 가리켰다.

“이쪽은 어때?”

그가 반대편―깊숙한 정원―을 가리켜서 나는 질겁하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하.”

“……?”

“귀여운 아가씨네.”

그렇게 말한 그가 내게 손을 뻗던 찰나.

“그 손 치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막 돌아온 모양인지 화려한 외출복 상태의 도미니크가 미카엘을 싸늘히 쳐다봤다. 난 반가움에 소리쳤다.

“저하!”

그러자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도미니크가 손을 뻗으니 미카엘이 내 앞을 한 팔로 가로막았다.

“오늘 에스코트는 이쪽 몫이야, 형님.”

“손목이 날아가도 그따위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지 볼까.”

미카엘이 픽 웃기 무섭게 도미니크의 안광에 새파란 빛이 일렁였다.

“여전히 겁이 없네, 형님.”

‘형님’을 힘주어 발음하는 게 빈정거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도미니크는 신경 쓰지 않고 내 손을 잡았다. 미카엘이 경고하듯 말했다.

“이건 꽤 불쾌한데.”

도미니크가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가서 엄마한테 이르든가.”

미카엘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고, 도미니크는 나를 살짝 끌어당겼다. 일촉즉발의 상황인데도 그가 나를 잡고 있으니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조심조심 건너갔다. 내 등 뒤로 미카엘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나는 도미니크에게 이끌려 정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시녀들이 재빨리 따라오자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모시겠다.”

시녀들이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숙였다. 난 도미니크와 함께 정원을 나서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 마주 본 소파가 나란히 있는 방이었는데 응접실인 듯 보였다.

“문은 열어 놓겠습니다.”

“아, 네!”

단둘이서 응접실의 문을 닫고 있으면 별의별 소문이 다 날 것이다. 도미니크는 시종에게 차를 내오라고 말했다. 난 소파에 앉자 한숨을 내쉬었다.

미카엘은 란슬롯에 버금가는 독사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란슬롯은 절대로 나에게 독니를 드러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지만, 미카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무서웠어.’

그렇게 생각하다가 “아!” 하고 도미니크를 보았다.

“감사합니다.”

곤란했는데 구해 주어서.

도미니크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차와 몇 가지 티 푸드가 나왔다. 시종이 차를 내려놓고 나서자마자 난 덥석 쿠키부터 집었다.

아차.

“먹어도 될까요?”

“물론.”

소피아 부인이 쓰러졌다는 소식 때문에 나온 음식에 손도 대지 못했다. 그 덕에 배가 몹시 고팠다. 쿠키를 오물오물 씹고 있자니 도미니크가 픽 실소를 흘렸다.

“식사를 준비하라고 할까요?”

양 볼 가득 쿠키를 씹고 있어서 대답이 늦어졌다. 나는 얼른 목으로 넘기려고 더 빨리 입안의 내용물을 씹었다.

“아야!”

그러다 혀를 깨물어서 눈물이 찔끔 났다. 도미니크가 내 뺨을 잡았다.

“봐요.”

“괘, 괜찮…… 으.”

“아, 해.”

그가 말까지 놓으며 단호히 말해서 우물쭈물하다가 혀를 살짝 내밀었다.

“피는 안 나는군요.”

그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심장이 쿵쿵거리고 그의 손이 닿은 뺨이 뜨거웠다. 내가 어쩔 줄 모르고 스르륵 시선을 돌리니 그 또한 말없이 나를 놔주었다. 방 안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길 몇 분, 멋쩍음을 견디지 못한 내가 입을 열었다.

“저, 저기, 그, 소피아 부인께서 쓰러지셨다고…….”

“그렇군요.”

“가 보지 않으셔도 되나요?”

“심약한 분이시니 저를 반기지 않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도미니크의 로브 끝자락에 검붉은 물이 들어 있었다.

“피인가요?”

“…….”

도미니크가 대답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하.”

“그렇다고 하면 당신이 날 두려워할까 싶어서.”

“아닌데.”

찻잔을 들며 가볍게 한 말에 도미니크는 눈을 깜빡였다.

“예?”

“무섭지 않아요, 저하.”

그리고 나는 활짝 웃으며 “우리는 친구니까!” 하고 덧붙였다. 도미니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 * *

황제와 후·비, 아서 프렌시프가 소피아 부인의 방에 도착했을 땐, 쓰러졌던 소피아 부인은 정신을 되찾아 있었다. 황제가 침대 주변에 잇는 비즈 발 안으로 들어갔고, 후·비와 아서 프렌시프는 발 밖에서 대기했다. 황제는 비쩍 마른 몸으로 누워 있는 소피아 부인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식사를 그리 안 하시니 매번 쓰러지시는 게 아닙니까.”

“으…… 으으.”

“어머니.”

황제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가시기 전에 ‘그 이야기’를 해 주셔야 합니다.”

소피아 부인이 황제의 손을 휙! 쳐냈다. 반쯤 정신을 놓고 있던 노인의 눈빛이 지금만큼은 이전처럼 또렷했다. 황제는 미소를 지운 채 소피아 부인의 새파란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 고집을 부리셔서야.”

“나가! 나가! 살인마! 내 아들을 죽여 놓고! 죽여 놓고!”

절규 같은 고함에도 황제의 표정엔 동요가 없었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흘러내린 이불을 올려 주었다.

“어머니 아들은 여기 살아 있지 않습니까.”

“올리비에야……. 올리비에야…….”

반역죄로 처형된 형제의 이름이 나오자 황제는 쓰게 웃었다. 그가 소피아 부인의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려 손을 뻗었을 때.

“아아악!”

그녀가 비명을 내질렀다.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고함에 발이 쳐지고 의사들이 다급히 들어왔다.

“부인, 숨을 쉬셔야 합니다!”

“진정제를 가져와라!”

한순간에 난리 통이 되어 버린 방은 꽤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정리가 되었다. 쉭―, 쉭―. 끊어질 것처럼 숨을 토하던 소피아 부인이 아서 프렌시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서는 침대 맡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마른 가지 같은 그녀의 손을 받쳤다.

“예.”

“딸이…… 태어났다지.”

“…….”

“너를 닮아 아주 사랑스러울 테야…….”

“…….”

“나는 네 모친과 친자매 같았으니…… 할미 대신이다……. 아이의 이름을, 이름을 지어 줘야…….”

“지어 주셨습니다.”

“그랬던가……. 내 무어라 지었더라…….”

“세니아나입니다.”

덜덜 떨리던 소피아 부인의 손이 뚝 멎었다.

“그래, 그랬지. 세니아나, 세니아나였어.”

멍하니 중얼거리던 그녀가 아서를 쳐다보았다.

“아기를 안아 주어야겠다……. 갓난아이 젖 냄새가 맡고 싶구나…….”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아서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부탁하네.”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아서는 미간을 좁혔다.

도미니크와 차를 마시던 나는 부름을 받고, 소피아 부인이 기거하는 궁으로 향했다. 침실 안으로 들어가자 후·비가 자리를 비켜 주었고, 나는 천천히 침대에 다가갔다.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세니아나 프렌시프입니다.”

“이리로…….”

나는 흠칫 놀라 어깨를 오그렸다. 산 사람의 목소리 같지 않았다. 선생님을 간병하던 병원에서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생사의 경계에 있는 환자들에게서 들었던 목소리. 나는 손을 뻗은 노인 앞에 살포시 무릎을 꿇었다. 노인이 내 머리칼을 살짝 쥐었다.

“후작과 같은 색이구나…….”

우리 아빠는 금발인데? 아, 할아버지를 말하는 건가.

치매를 앓고 있으시다더니 정말로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옳지, 옳지. 귀엽구나, 귀여워.”

아기 어르는 것 같은 말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황해서 아빠를 쳐다보니 그가 괜찮다고 말하며 내 손을 잡았다.

“네 이름을 지어 주신 분이다.”

나는 양손으로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러자 그녀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기를 안아 주어야…….”

“괜찮아요!”

내가 깜짝 놀라 말하니 소피아 부인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나는 울상을 지었다.

“누워 계세요, 대부인.”

소피아 부인은 엄청나게 말라서 움직이면 금세 뼈가 똑 부러질 것 같았다.

“착해라…….”

다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녀가 수척한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때 이불이 젖어 들었다. 새하얀 이불에 누런 물이 번지고 지린내가 진동했다. 소피아 부인이 실례를 한 것이다.

“어머!”

황비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코를 막았다. 황제는 인상을 썼고, 시종들은 당황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소피아 부인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녀는 흠칫흠칫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제게 향하는 시선이 곱지 못하니 그녀의 얼굴이 벌게졌다. 소피아 부인이 베개를 던졌다.

“꺄악!”

머리에 베개를 맞은 황비가 비틀거렸다.

“어머니!”

황제가 소리치며 시녀에게 손짓했고, 시녀들이 소피아 부인 가까이로 다가갔다. 소피아 부인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악! 아악!”

난 얼른 그녀를 잡았다.

“잘하셨어요.”

“흐…….”

“요의는 참지 않아야 몸에 좋지요. 자, 부인, 화장실에 가서 저와 물놀이를 할까요?”

“…….”

소피아 부인은 흥분하던 일을 금세 잊었다. 나는 순해진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 윤세나였을 적에 친한 이웃 할머니가 치매를 앓아 알게 되었다. 정신을 놔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의외로 자신을 향한 타인의 시선은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실수를 꾸짖거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 흥분한다. 그럼 주변 사람들이 노인을 억지로 진정시키려고 하는데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잊어도, 감정은 남아 우울증까지 앓게 하니까.

‘그럼 밥도 안 드신다고.’

나는 시종에게 눈짓했다. 그녀를 안고 욕실로 옮기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선 건 황제였다.

“가시지요, 어머니.”

“살인자, 살인자……”

“예, 예.”

황제가 소피아 부인을 안아 욕실로 옮겼고, 나와 황후, 그리고 로웨나 황비가 그 뒤를 따랐다. 황제가 그녀를 욕조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커튼이 쳐졌고, 시녀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 소피아 부인의 옷을 벗겼다. 커튼 밖에 있던 황제와 황후, 황비, 그리고 나는 또다시 소피아 부인의 비명을 들어야 했다.

“꺄아악! 꺄악!”

“대부인, 제발……!”

그 소리를 듣고 로웨나 황비가 혀를 찼다.

“목욕을 저리 싫어하시니 피부병이 생기지요.”

황제와 황후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나는 살짝 커튼 안으로 들어가서 시녀들에게 말했다.

“겉옷만 가져가세요.”

“하지만 안에도…….”

“괜찮으니까요.”

난 슬립 차림의 소피아 부인을 그대로 욕조에 들어가도록 도와주었다. 더는 옷을 벗기지 않으니 얌전했다.

“자, 살살 닦을게요.”

나는 드러난 살만 조심스럽게 물로 닦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옷이 물을 가득 머금었다. 무겁고 불편한 모양인지 소피아 부인이 인상을 썼다.

“불편하시지요?”

“으…….”

“그럼 치마만 살짝 벗을까요?”

그러고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욕조 안에 계시니 밖에선 옷을 벗었는지 몰라요.”

“…….”

“괜찮으시죠?”

“으응…….”

난 생긋 웃고, 그녀 치마를 조심조심 잘랐다. 혹시라도 갑자기 움직일까 봐 시녀들에게 주의 깊게 살피라고 명했다. 소피아 부인은 거짓말처럼 얌전히 목욕을 마쳤다.

난 잠든 소피아 부인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조심스레 침대를 벗어났다. 침대 주변에 친 발을 빠져나오니 황제와 후·비들이 모두 놀라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황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떻게…….”

“네?”

“어떻게 네 말을 저리 순순히 들으시지? 목욕할 때마다 황궁이 전쟁통 같았는데.”

“평소에 목욕하실 때 커튼 밖에서 경비병들이 대기하고 있었나요?”

로웨나 황비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야 당연히. 난동을 부리시니까 경비병들이 지켜야 할 수밖에.”

“치매 환자라고 수치심을 못 느끼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소피아 부인은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는 귀부인이었다. 칠순이 훌쩍 넘은 노인이고, 욕실에 커튼이 쳐졌다곤 하나 한 공간에 남자가 있는데 옷을 벗고 싶을 리 없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면 목욕 자체를 끔찍하게 싫어하지. 내 얘기를 들은 황제가 날 빤히 쳐다보았다.

“영애.”

“예, 폐하.”

“당분간 이곳에서 어머니를 도와줄 순 없겠는가.”

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난 곧 개학인데? 내가 곤란해하자 황제가 다시 말했다.

“단 며칠이라도 좋아. 시녀들을 가르쳐다오.”

순간 머릿속의 전구에 번쩍 불이 들어왔다.

‘이거 기회일지도!’

난 황제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전 폐하의 명으로 보그를 가져와야 하고…….”

“시일을 늘려주지.”

황궁에 있으면 포털을 열 기회도 있을 테지?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시종에게 명해 황가의 문양이 새겨진 휘장을 주었다. 상시 출입패를 가진 대귀족이나 후·비의 말벗들도 황궁에 들어오기 전엔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몸수색, 동반 출입하는 사용인들의 인적 사항 확인 등.

하지만 황가의 휘장을 가진 자는 그런 일에서 모두 제외된다. 언제든 쉽고 빠르게 황궁에 들어가고, 나올 수 있었다. 거의 준황족급의 대우였다.

이 소식을 들은 프렌시프의 가신들과 행정관들은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렸다.

“실로 프렌시프의 보물이십니다!”

“보물? 수호신이겠지요!”

“군사 훈련 허가가 이번엔 어찌나 쉽던지요. 벌써 이번 일이 소문난 모양이더이다.”

“그렇겠지요, 뭐든 날름 갖다 바칠 겁니다. 다들 어떻게든 아가씨의 끈을 잡으려고 안달이에요!”

“이게 다 우리 아가씨의 덕이 아니겠습니까!”

껄껄, 웃는 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아빠와 오빠들도 잘했다고 칭찬해 주어서 나는 기뻤다.

이튿날, 나는 소피아 부인의 궁을 찾았다. 침대에서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나를 보고 미소지었다.

“아기가 왔구나.”

“좋은 꿈 꾸셨나요, 대부인?”

소피아 부인은 대답 없이 멍하니 내 뺨을 쓸었다. 나는 시녀들에게 부인이 오늘 식사를 하셨냐고 물었다.

“통 드시질 않으십니다.”

자주 쓰러지는 이유도 그 때문인 듯했다. 나는 소피아 부인의 아침으로 나온 수프를 들었다. 후후, 불어서 입에 가져가자 부인이 홱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 식사를 하지 않으세요?”

“맛이 없어…….”

그럴 리가. 제국이 자랑하는 로열 키친에서 만든 음식이다. 아카데미 교수들의 음식도 그렇게 훌륭했는데 맛이 없을 리가. 나는 수프를 맛보았다.

‘엄청 맛있는데!’

아주 묽은 편인데도 깊은 맛이 난다. 고기를 다진 대신에 식감을 위해 목이버섯을 넣었는데, 특유의 꼬들꼬들한 식감 때문에 개운한 맛이 난다. 내가 먹어 본 수프 중에 최고였다.

“달리 드시고 싶은 게 있으세요?”

“나들이가 즐거웠지…….”

그녀는 대답 없이 다른 이야기를 했다. 시녀들이 또 저런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수프 그릇을 내려놓고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나들이를 가셨어요?”

“조가 가져온 음식이 맛있었어……. 우리는 함께 먹으면서 비밀을…… 비밀을…….”

그러더니 방에 있던 사용인들을 보며 버럭 소리쳤다.

“나가! 말하지 않을 거야! 말하지 않을 거야! 비밀은, 비밀은……!”

갑자기 또 흥분하기 시작해서 나는 재빨리 그들을 내보내고 대부인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요, 대부인. 아무도 대부인에게 비밀을 물어보지 않을 거예요.”

소피아 부인이 어깨를 바짝 움츠리고 주변을 살폈다. 그러더니 날 끌어안고 바짝 목소리를 죽였다.

“오토가 나를 감시한다.”

‘오토면……. 현 황제인 옥타비우스의 애칭인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왜 대부인을 감시하시겠어요.”

“내게서 비밀을 캐내려고!”

그녀의 속삭임에 날이 섰다. 비밀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황제가 소피아 부인을 감시하는 이유라면 딱 하나다. 그녀가 황태후 위(位)에서 강제로 내려오게 된 사건인 올리비에 폐공작의 역모. 황제의 친형제 올리비에는 반역을 도모했다가 실패했다.

그가 반역자이긴 했으나, 소피아 부인에겐 제 배 아파 낳은 자식이었다. 도저히 올리비에가 죽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그녀는 황제에게 ‘올리비에의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눈물로 읍소했다.

그런데도 황제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고, 소피아 부인은 직접 올리비에를 도피시키기에 이른다. 하지만 황궁 추적대에 의해 금세 추포당했다. 결국 소피아 부인은 눈앞에서 아들이 죽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그 일로 소피아 부인이 황태후 자리를 잃고 정신을 놓았다고 들었어.’

하지만 그건 이미 다 끝난 일이 아닌가? 그러니까 황궁에서 보살핌받고 있는 게 아니었나?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일이 있는 걸까?’

소피아 부인이 오들오들 떨며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조가…… 조에겐 모든 것을 얘기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번에도 약속을 어기면…… 그러면…….”

끊임없이 웅얼대던 그녀가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나는 그녀의 신경을 돌리기 위해 얼른 커튼을 쳤다. 드르르륵! 커튼레일이 밀리는 소리에 소피아 부인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대부인, 날씨가 좋아요.”

“날씨…… 정원에 물을, 물을…….”

“그럼 함께 정원으로 갈까요?”

내가 손을 뻗자 소피아 부인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옷을 갈아입고, 정원으로 향했다. 소담한 들꽃 위주로, 인위적이지 않게 꾸며진 정원은 소피아 부인의 성정을 똑 닮아 있었다.

“저 꽃은 뭘까요, 대부인?”

“조가…… 조가 좋아했지.”

“그렇군요.”

“조를 닮은 능소화…….”

조라는 사람이 소피아 부인에게 의미가 깊은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부축했다. 그때 맞은 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왔다. 나는 가장 앞에 선 남자를 발견하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가에 광영 있기를.”

“그래. 산책 중이냐.”

“그렇습니다.”

“짐도 함께 걸어도 되겠느냐.”

나는 멍하니 서 있는 소피아 부인을 힐끔 쳐다보았다.

“괜찮을 듯싶습니다, 폐하.”

황제는 고개를 짧게 끄덕이곤 소피아 부인의 근처에 섰다. 그리고 시중인들을 멀리 물러나게 했다.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소피아 부인이 중간에 다리가 아프다며 중얼거릴 때까지. 나는 그녀를 벤치에 앉히고,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그런 나를 보고 황제가 말했다.

“어머님이 네 앞에서는 순하시구나.”

“감사한 일이지요.”

“네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겠지.”

나를 보는 황제의 시선이 잠시 날카로워졌다. 소피아 부인의 벤치 맞은편에 앉은 그가 이어 말했다.

“네게라면 남들에게 못할 이야기도 하셨을 법한데.”

“예?”

“비밀이라든가.”

황제가 비밀을 캐내려고 한다며 벌벌 떨던 소피아 부인이 떠올랐다.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황제는 나를 빤히 응시했다.

“바라는 게 있느냐?”

“예?”

“갈망하는 일이라든가, 꿈만 꿔왔던 욕망이라든가.”

쉽게 대답하지 못하자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생각해 두어라. 짐이 바라는 바를 그대가 이뤄 준다면 짐 또한 그대의 소원을 들어줄 테니.”

비밀을 알아낸다면 뭐든지 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비밀이란 게 대체 뭐기에?’

* * *

저택에 돌아온 나는 밤늦도록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양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나를 보고 가웨인이 물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으음, 그게…….”

“뭔데.”

“황제 폐하께서 제게 소피아 부인의 비밀을 캐 오라고 하셨어요.”

가웨인이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말이에요…….”

나는 그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남의 여동생을 염탐꾼 부리듯…….”

가웨인은 짓씹듯이 중얼거렸다.

“내키지 않으면 하지 마.”

“그것도 그렇지만, 다른 일도 신경 쓰여서…….”

아빠와 함께 들어오던 란슬롯이 물었다.

“포털이 아예 열리지도 않는 거야?”

“네.”

몇 번이고 시도해 봤지만 결계에 걸렸다는 얘기조차 없었다. 아빠가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평생 열리지 않더라도 괜찮아.”

“그래, 세니아나. 너는 보그를 납품할 시일을 늘린 것만으로도 프렌시프에 차고 넘치는 일을 했어.”

란슬롯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내가 힘없이 웃으니 가웨인이 미간을 좁혔다.

“그게 아니면 다른 고민이라도 있어?”

난 울상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가장 마음이 쓰이는 건 달리 있었다.

“소피아 부인이 식사를 안 하세요!”

내가 테이블에 엎드려 끙끙거리자 가족들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난 그런 가족들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정말 큰일이라고요? 이대로 계속 아무것도 안 드시면 실신하실 거예요.”

가웨인이 픽 실소를 흘렸다.

“억지로라도 조금은 드시게 하잖아.”

“그게 정말 위험해요. 속에도 안 좋고, 기도로 넘어갈 수도 있고, 식사를 더 싫어하시게 될지도 모르고.”

대체 왜 식사를 안 하시는 거람. 소피아 부인은 뭘 가져와도 맛이 없다고만 했다. 하지만 내가 먹었을 땐 하나같이 훌륭했다.

“조라는 사람을 찾아봐야 하나…….”

그 사람과 피크닉에서 먹었던 음식이 맛있었다고 했다. 그거라면 드실지도 모르는데. 내가 중얼거리니 가웨인이 내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돌아가신 분을 무슨 수로 찾게?”

“돌아가셨어요?”

“조모님 성함이잖아. 조세핀.”

“조세핀? 아!”

그럼 할아버지가 알고 계실지도! 나는 얼른 할아버지에게 통신을 연결해서 할머니와 소피아 부인의 추억이 담긴 음식을 물어보았다.

[반백 년이 넘은 일이니 가물가물하군.]

“그럼 할아버지와 나들이 가셨을 때는요? 할머니는 무얼 드셨어요?”

[글쎄…….]

“……할머니가 생전에 좋아하시던 음식은요?”

[흐음…….]

그의 대답을 듣고 나는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할아버지는 좋은 남편은 아니었구나.”

[대신 부자였지. 권력자였고.]

그 말에 아빠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명백한 조소였다. 내가 한숨을 푹 내쉬자 할아버지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 사람은 우유를 전혀 못 마셨다. 우유가 조금이라도 든 음식을 먹으면 호흡조차 힘들어했지. 그리고 남부에서 온 탓에 동부 추위를 못 견뎠어. 그리고…….]

“그리고요?”

[……세바스찬! 차를 내오랬는데 어찌 이리 오래 걸리는 것이냐!]

갑자기 역정을 내는 소리가 들리더니 통신이 뚝 끊어졌다. 옆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지! 아빠는 아시겠지요? 다정하시고, 섬세하시니까! 할머니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셨어요?”

“……서류를 이따위로 작성한 놈이 누구야.”

아빠가 슬그머니 방을 나서서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오늘은 왜 이렇게 다들 화를 내시지?

다음 날, 나는 소피아 부인의 궁에 들었다. 가자마자 보인 건 난장판이 된 침실이었다.

“대부인, 제발……!”

시녀들이 그녀를 억지로 붙잡고 묽은 수프를 떠먹이고 있었다.

“싫어! 싫어! 이것들이 나를 죽이려고! 올리비에야, 올리비에야……!”

나는 황급히 시녀들을 물렸다. 그리고 사지를 발발 떠는 소피아 부인을 진정시켰다. 나를 덥석 끌어안은 그녀가 시녀들을 노려보았다.

“조, 조!”

“네, 대부인, 진정하세요.”

“저것들이 나를 죽이려고 해. 내가 싫다는 데도 묶어서, 묶어서……!”

팔다리에 묶인 흔적은 전혀 없었다. 황제가 두려워서라도 그런 짓은 절대로 못 했을 거다. 나는 눈짓하여 식기와 시녀들을 전부 내보냈다.

“안 드셔도 괜찮아요.”

그제야 진정이 된 소피아 부인이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 나를 샐쭉 노려보더니 홱 돌아앉았다.

“너도 저것들의 편이지?!”

“아니에요. 저는 대부인의 편이랍니다.”

그녀가 슬쩍 나를 훔쳐보았다.

“……정말이냐?”

“그럼요.”

“저것들이 나빴지?”

“맞아요. 아주 나빴어요.”

양심이 콕콕 찔렸지만, 부정하면 흥분할 것 같았다. 소피아 부인이 다시 나를 보더니 활짝 웃었다.

“조, 결혼하지 마라, 응? 나베리우스는 후레자식이야!”

나를 할머니로 착각한 그녀가 갑자기 애걸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욕에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젊을 적에 두 분이 그렇게 말씀하셨나 보다. 나는 소피아 부인 주변에 떨어진 유리 파편을 주우며 ‘그래요~?’ 하고 물었다.

“그 남자는 난봉꾼이다.”

“난봉꾼이셨나요?”

전혀 그렇게 안 보였는데! 내가 깜짝 놀라서 물으니 소피아 부인이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인이 일흔 명이란다.”

“정말요?!”

“그러니까, 응? 응? 결혼하지 마라~”

애처럼 칭얼거리던 소피아 부인이 갑자기 손사래를 쳤다.

“네가 피크닉에 가져온 음식이 쉰 것 같다고 놀리지 않을게! 나 이제 그거 아주 좋아한다.”

쉰 것 같았다고?

‘시큼한 크림이면 그럴 수 있겠어.’

레몬 크림이라든가, 냄새를 생각하면 커스터드도 가능성이 있겠다. 그럼 파이인가?

어쨌든 나는 소피아 부인에게 결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그녀에게 걸쭉한 초콜릿을 먹였다. 일단 칼로리라도 몸에 넣어 줘야 할 것 같았다. 오후엔 낮잠을 재우고, 시간이 나서 뒤뜰에 갔다. 때마침 할아버지에게 연락이 왔다.

“할아버지!”

그가 크흠, 헛기침하고는 잘 잤느냐고 물었다.

“네.”

[네가 어제 물은 것 말인데……. 내가 그녀에게 관심이 없어서 몰랐던 게 아니야. 사용인들도 다 모른다.]

그가 의기양양하게 외쳐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물어보셨어요?”

[…….]

“그런데요, 할아버지.”

[그래.]

“애인이 일흔 명이나 있었으면 두세 달에 한 분씩 만나신 건가요?”

일정 관리하기도 힘들었겠다.

[……뭐?]

“대부인이 그러시던데. 애인이 일흔 명이었다고…….”

[노망난 할망구가…….]

그가 으득, 이를 갈아서 나는 엄청 당황했다. 노망난 사람에게 정말로 노망났다고 하면 실례인데! 나는 주변에 들은 사람이 있을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돼요…….”

[일흔 명이라니, 말도 안 되지.]

“아, 역시! 그랬던 거군요!”

[그래…….]

내가 밝은 목소리로 얘기하자 할아버지가 중얼거렸다.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일곱 명이었던 거지요!”

[…….]

“……?”

[식사 잘 챙겨라…….]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어쩐지 시무룩했다.

* * *

릴리는 외조부인 테르반 백작의 집무실에 들었다.

“제가 걱정할 일은 없겠죠?”

손녀의 말에 테르반 백작이 흘러내린 안경을 슥, 올렸다.

“내가 그리 허투루 보이나?”

“그럴 리가요.”

애교 있게 웃는 손녀를 보고 책을 소리 나게 덮은 그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처음에 이 아이의 부탁을 들었을 땐 놀라웠다. 머리 굳은 딸이 교육하였으니 그만큼 고지식하겠다 싶었는데, 외려 손녀는 저를 닮았다. 명민하고, 욕망에 충실했다.

“세니아나 프렌시프는 절대로 포털을 열지 못할 것이다.”

“다행이네요.”

릴리가 눈썹을 까딱, 들어 올리고 찻잔을 잡았다. 아찔하도록 짙은 장미 향과 함께 열리지 못한 마른 봉우리들이 핏빛 찻물 안에 맴돌았다. 테르반 백작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어미를 제대로 붙들어라. 그 녀석에게 프렌시프보다 더한 혼처는 없어.”

물론 그가 평생을 일궈 온 가문에 그만한 이익을 줄 가문도 없을 터였다. 릴리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여부가 있겠어요. 저도 프렌시프 영애가 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답니다.”

차를 머금고 잔을 소리 없이 티 코스터에 내려놓은 그녀가 나긋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자, 이제 사냥개가 되어 줄 멍청한 개만 찾으면 되겠구나.’

마침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 * *

나는 잠에서 깬 소피아 부인에게 견과류를 조금 먹인 후 퇴궁 준비를 했다. 이제 본성에서 오늘 결계에 이상이 없었는지 확인하면 된다. 복도를 걷다가 앞을 가로막은 그림자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저하!”

도미니크가 희미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이제 돌아가십니까?”

“네!”

“식사는요?”

“돌아가서 가족들과 같이하기로 했는…… 아! 이거!”

나는 그의 손에 들린 상자의 문양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건 로열 키친에서 귀빈용으로만 내준다는 아주 유명한 파이였다.

‘커스터드 타르트!’

아카데미 교수 중에 높으신 나리께 얻어먹었다는 사람이 있었다. 얼마나 맛있는지 타국의 사신들마저 다시 먹고 싶어서 끙끙 앓을 정도랬다. 도미니크가 상자를 다른 손에 가볍게 옮겨 들었다. 내 눈도 상자를 따라 도르륵 움직였다.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지요?”

간절한 표정을 본 그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황족이 명하면 내줍니다.”

좋겠다, 황족…….

도미니크가 상자를 슥 내밀었다.

“저 혼자 먹기엔 많군요.”

같이 먹자는 얘기일까?

나는 잠깐 주저했다. 이 타르트가 엄청나게 궁금하긴 했다. 게다가 소피아 부인의 추억이 담긴 음식에 혹시 커스터드가 쓰인 게 아닐까 싶었다. 황궁의 타르트를 맛보면 도움이 될 거다.

‘하지만 가족들이 기다릴지도 모르는데…….’

도미니크가 상자를 다시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도 모르게 손이 튀어 나갔다.

“함께 드시겠습니까?”

“그래도, 그래도…….”

“로열 키친에서 만든 상그리아를 곁들여 마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

“잘 어울리겠죠?”

“엄청…….”

평소처럼 고저 없는 목소리인데, 어쩐지 내겐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린다. 나는 끄응, 신음했고 그는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남은 것은 포장해 드릴 수도 있는데?”

“갈게요!”

그가 씩 웃었다.

“잘 생각했습니다.”

냉큼 뒤를 졸랑졸랑 쫓자 그가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길고양이를 유인하는 기분이 이런 거였군.”

“네?”

“아닙니다.”

그가 부드럽게 문을 열어 주었다.

커스터드 타르트는 정말로 훌륭했다. 나는 커다란 파이 두 조각에 상그리아 한 잔을 몽땅 비우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이렇게 맛있을까요?”

“일전에 아카데미에서 먹었던 케이크보다 괜찮습니까?”

“으음, 저는 아무래도 이쪽.”

포크로 타르트를 가리키자 도미니크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곤 부관에게 시선을 보냈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준비?’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부관이 문을 열어 주려 하는데, 문밖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 열리는…… 어?”

부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문고리를 확 잡아당겼다.

“으헉!”

거의 끌려 들어오다시피 한 어린 시종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부관은 그를 탓하듯 말했다.

“내가 열고 있으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시종이 얼마 후 아, 아아! 하며 허리를 납죽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가져온 건.”

“예.”

시종이 건넨 건 커스터드 타르트의 상자였다. 그것도 도미니크가 들고 있던 것보다 배는 크다. 내가 도미니크를 쳐다보자 그가 찻잔을 들며 가볍게 얘기했다.

“좋아하시니.”

“아……. 감사합니다.”

“좋네요.”

“제가 감사하다고 해서요?”

잿빛 눈동자가 조명에 비추어 오묘하게 일렁였다.

“뭐든.”

“…….”

상그리아 때문에 살짝 취기가 올라서일까. 어쩐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민망해져서 눈을 돌리다가 문득 시계를 보고 숨을 들이켰다.

‘벌써 6시가 넘었어!’

얼른 가지 않으면 다들 걱정하시겠다. 얼른 돌아가려고 했는데, 도미니크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바래다 드리죠.”

“하지만 마차로 갈 거라…….”

“더 좋군요”

“네?”

“데려다드리겠습니다.”

그가 먼저 일어나 열린 문을 향해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난 우물쭈물하다가 그를 따라나섰다.

마차에 탄 나는 도미니크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정말로? 정말 데려다주는 거야?’

처음엔 ‘농담이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그는 정말 프렌시프의 마차를 타고 성문을 통과했다.

“성에는 어떻게 돌아가시려고요…….”

“말을 빌려 가죠.”

“곧 캄캄해질 텐데요? 밤에 승마는 위험해요.”

내 말에 도미니크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수하의 시체 세 구를 말 요각에 얹어서 돌아온 적도 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하는 말이었지만, 그가 전장에서 자랐다는 걸 아는 나로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조용해지자 그가 물었다.

“동정합니까?”

“마음 아팠겠다고 생각해요.”

내 말에 그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몇 분 후에야 그가 창밖을 보며 대답했다.

“글쎄요.”

“저하는 멋진 상관이었네요.”

도미니크가 짓궂게 웃었다.

“전장에서의 날 보면 그런 생각은 못 할 텐데.”

“설마요.”

나는 아하하, 웃으며 말했다. 내게는 이렇게 다정한데, 도깨비처럼 수하들을 휘두르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자 그가 불쑥 다가왔다. 몇 센티만 더 오면 코끝이 닿을 것 같아서 나는 우뚝 굳어지고 말았다. 그가 나를 지그시 보며 입을 열었다.

“산 채로 눈알을 파낸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난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시선을 돌렸다.

“소, 소문이잖아요…….”

“글쎄. 실제로 그러고 싶어지는데요.”

“네?”

“너를 보는 놈들의 눈알을 죄 뽑아 버리고 싶은 건 왜일까요.”

평소처럼 아주 진지한 목소리였다. 그가 아주 조금 더 다가왔다. 코끝과 코끝이 마주칠 뻔해서 난 휙! 고개를 돌렸다.

“농담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이라면 오해한다고요.”

그가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가서 다리를 꼬았다.

“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 오해.”

“정말…….”

장난이 지나치다. 얼굴에 열이 올라서 손 부채질을 했다. 그런 나를 보는 도미니크의 눈빛이 묘하게 달콤해졌다. 어두운 마차 안에 주홍빛 조명이 낮게 깔렸다. 다각, 다각, 발굽 소리만이 귓전에 맴돌았고, 나는 마치 사람 없는 소극장에서 그와 단둘이 있는 기분이었다.

성에서 저택까지 한 시간이 안 걸렸는데, 나는 고된 등산을 한 기분이었다. 그의 장난으로 잔뜩 긴장해 있었더니 피곤하다. 나는 팔을 주무르다가 멀리서 아빠와 오빠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아빠, 오……!”

굳은 얼굴로 걸어온 가웨인이 팔을 내밀어 나와 그의 사이를 막았다.

“진심으로 거슬리기 시작했습니다.”

란슬롯은 동의하듯 서늘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아빠는 표정이 없었지만, 왜인지 말을 붙이기 어려웠다. 도미니크는 희미하게 웃으며 나를 보았다.

“다시 에스코트할 기회가 생기길 고대하겠습니다.”

내가 대답하려던 찰나 아빠가 내게 손을 뻗었다.

“이리로.”

나는 도미니크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가족들에게 걸어갔다. 등 뒤에 숨기듯이 내 앞을 가린 아빠는 도미니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절 욕망하게 하지 마십시오.”

“욕망이라……. 후작께서 더 가져야 할 것이 남았습니까?”

“제가 딸에게 붙은 날벌레를 쫓기 위해 꼭대기를 목표로 하게 된다면 서로 귀찮지 않겠습니까, 저하.”

저하, 두 글자에 유난히 힘이 들어갔다. 나는 놀라서 아빠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아빠는 내 손을 꽉 붙잡을 뿐이었다. 도미니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후작의 딸을 데리러 올 때는 군대라도 대동해야겠군요.”

그러자 가웨인이 대답했다.

“일, 이만으로는 프렌시프의 문턱도 넘지 못할 겁니다.”

도미니크는 여상하게 받아쳤다.

“명심하죠.”

으응? 가웨인에게 말이 높아졌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가족들과 도미니크를 쳐다보았고, 오빠들의 기세는 점점 더 사나워졌다.

“말씀 낮추시지요.”

가웨인의 말에 도미니크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존경하게 되었으니 말을 높여야겠습니다, 형님.”

가웨인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그런데도 도미니크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말을 빌릴 수 있겠습니까.”

가웨인이 입을 열려던 찰나, 란슬롯이 빅터에게 눈짓을 보냈다. 빅터는 금세 기운이 쌩쌩한 말을 도미니크에게 내주었다.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 가족들은 말이 없었다. 나를 제외하면. 나는 히히 웃으며 양손으로 발그레해진 뺨을 가렸다. 가웨인이 울컥 인상을 쓰며 물었다.

“왜 웃어?”

“저하께서 오빠들에게 형님이라고 하셨잖아요.”

황자에게까지 존경받는 오빠들이라니! 자랑스러워! ―라는 표정으로 가족들을 보자 란슬롯의 얼굴이 싸늘하게 웃었다.

“저런 동생 둔 적 없어.”

“당연하지! 감히 누굴……!”

가웨인도 분개했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오빠들을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못 써요.”

“뭐?”

“뭐라고?”

“좋은 마음에 형님이라고 하신 걸 텐데……. 나쁘다, 오빠들.”

그러고 걸음을 돌리자 오빠들이 “세, 세니아나!” 하며 나를 쫓아왔다.

씻고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가웨인이 자꾸만 내 주변을 맴돌았다.

“어? 왜 대답을 못 해?”

그는 저녁 내내 한 가지만 끈질기게 묻고 있었다. 나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웅얼거렸다.

“자꾸 곤란한 걸 물으시니까…….”

“그게 왜 곤란해!”

“소리치시면 무서운데…….”

그가 감정을 꾹 누르듯 숨을 들이켰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땐 목소리가 낮아져 있었다.

“그 녀석과 우리가 물에 빠지면 누굴 구할 거냐니까?”

“수영하실 줄 아시잖아요.”

“둘 다 못한다고 가정을 했을 때 말이야.”

그런 가정을 왜 한담. 나는 고개를 돌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웨인이 그런 나를 쫓아오며 다시 물었다.

“좋아, 그럼 아사 직전이야. 형과 내가 피골이 상접해서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거지. 낯짝만 번들번들한 그놈과 가여운 우리 중에 누구에게 고기를 줄 거지?”

“아사 직전이면 바로 고기를 먹어선 안 되는데요?”

아주 묽은 죽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위장을 적응시켜야지.

가웨인이 눈을 꽉 감더니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럼 우리와 그놈 중에 골라서 무조건 활 한 발을 쏴야 해. 너를 위해서라면 활에 맞아 죽어도 좋은 가련한 우리야, 아니면 재수 없는 그 새끼야?”

“전 활 쏘는 법 모르는데…….”

“가정! 가정이라니까!”

그렇게 소리친 가웨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아이, 정말!”

나는 버럭 소리치며 문고리를 잡았다. 가뜩이나 할 일이 많은데 자꾸 옆에서 이상한 문제만 내고! 내가 뾰로통해져서 그를 흘기니, 그는 매우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사춘기야?”

“아니,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시니까…… 그렇지 않아도 바쁜데…….”

내가 웅얼거리자 그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뭐가 바쁜데.”

“할머니의 고향에서 피크닉 때 먹은 음식을 조사해야 해요. 남부 음식이라 영지엔 자료가 없어요.”

“그래, 그럼 마지막. 그 자식과 우리가 함정에 빠졌어. 천에 둘둘 싸여서 형과 나는 숨이 넘어갈 것 같아. 싹수없는 그 자식과 딱한 우리 중 어느 쪽을 풀어 줄래?”

“대체 왜 둘 중에 한쪽을 골라야 하는 건…… 네?”

불현듯 머리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왜?”

“방금 하신 말이요!”

“함정에 빠졌다고?”

소피아 부인이 해 준 이야기. 할머니의 고향. 그리고 가웨인의 말. 나는 헉, 숨을 들이켜고 얼른 주방으로 뛰어갔다.

* * *

릴리는 살롱에서 크리스틴을 발견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제 추종자들과 성의 없이 대화하는 그녀의 표정은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카드놀이도 못 하니 재미가 없네요.”

“황후 페하께서 금지하셨으니 도리가 없지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따분한 얼굴로 차만 홀짝이던 그녀들은 테이블로 다가온 릴리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레제 영애가 여긴 무슨 일로?”

릴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테이블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사실 릴리의 사교계 평가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황후의 말벗 중 하나인 엘리자베스에게 붙어 사사건건 그녀를 따라 한 일로 평판이 나빠졌다.

그런 데다가 어린애같이 막무가내로 사람을 휘둘렀다. 혹자는 ‘릴리의 어린애 같은 면은 원하는 것을 손쉽게 거머쥐려는 악랄한 처세다’라고 힐난했다. 하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안녕하세요?”

릴리의 말에 크리스틴이 팔짱을 꼈다.

“우리가 안부 물을 정도로 깊은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제가 또 실수한 건가요?”

울먹거리는 그녀를 보고 크리스틴의 일행이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여기서 울어 버리면 또 저희들 소문만 나빠질 거다.

“별말 안 했는데 뭘 그리 훌쩍이세요?”

크리스틴이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릴리가 턱을 쑥 집어넣고 손을 꼼지락거렸다.

“저는 미움 받는 성격인가 봐요.”

“…….”

“영애들에게도 그렇고, 세니아나에게도…….”

그 말에 크리스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프렌시프 영애가 왜요?”

“제가 또 실수를 해서 세니아나를 화나게 했어요…….”

그러고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터뜨렸다.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자 다른 영애들이 난색을 표했지만, 크리스틴은 이제야 흥미가 돌았다.

“저런, 가여워라. 프렌시프 영애가 레제 양에게 무슨 짓이라도 했나요?”

“어머니와의 결혼이 파투난 게 사실은……. 저는 정말 어머니께 죄송해서…….”

프렌시프와 레제의 약혼이 합의되지 않았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런데 그게 세니아나 프렌시프 때문이었다고?’

크리스틴이 릴리의 손을 덥석 잡고 물었다.

“프렌시프 영애가 그리 표독한 짓을 한 건가요?”

“하, 하지만 세니아나는 좋은 애예요. 분명히 제가 뭔가 큰 잘못을 한 걸 거예요.”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거죠. 프렌시프 양에게 레제 양이 대뜸 실수할 리 있겠어요?”

“하, 하지만 세니아나는 정말 좋은 애예요. 그 애는 똑똑해서 제 검은 속내를 읽었을지도…….”

“검은 속내라고요?”

릴리가 어쩔 줄을 모르고 주변을 살폈다.

“네? 무슨 일인데요.”

“제가 나빠요! 제가 그 애를 의심해서…….”

“의심?”

릴리는 목소리를 바짝 낮추고 중얼거렸다.

“세니아나가 포털을 여는 건 프렌시프 사람들 밖에 못 봤잖아요.”

크리스틴의 무리 중 한 영애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비에르의 가신이 포털로 쫓겨났다는 소문이 있었잖아요?”

크리스틴이 손끝으로 입을 막았다.

“소문일 뿐이죠! 확실히 그래요. 프렌시프의 사람들만이 포털을 이동하는 걸 보았어요.”

“어머……. 그러네요. 다른 건 그저 소문일 뿐이었죠.”

“네, 틈틈이 이동하는 걸 보여 준 사비에르 양과는 달라요.”

릴리가 한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그런 의심을 잠깐 했던 제가 못된 거예요…….”

그러자 크리스틴이 버럭 소리쳤다.

“합리적인 의심은 나쁜 게 아니죠!”

“하지만 세니아나를 화나게 만든걸요.”

“그게 더 이상하지 않나요? 의심뿐인데 레제 양에게 화를 내고, 약혼을 파투내고…….”

크리스틴의 눈이 영악하게 번뜩였다.

“만약에 성녀라는 게 거짓이라면…….”

다른 영애들이 헉, 숨을 들이켰다.

“황실을 능멸한 거예요!”

“맞아요, 새로운 성녀라며 얼마나 귀여움받았어요?”

“어머머!”

릴리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세니아나가 얼마나 착한 데요! 제가 곤란할까 봐 대만찬도 대신 가 주고……!”

다른 영애들이 기함을 했다.

“대신?”

“대신이라니요? 그럼 프렌시프 영애가 대만찬에 참석했다는 게 다 영애 때문에……!”

“대만찬 참석권은 황후 폐하 파티의 게임에서 레제 양이 손에 넣었잖아요?”

릴리는 곤란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사실은 세니아나의 도움이 있었어요……. 그 애가 곤란해질까 봐 도우려고 했던 건데 어쨌든 결론적으로 거짓말을 한 게 되니까…….”

“그런 핑계로 빼앗아 갔단 말이에요?”

“세상에, 간악하긴! 대만찬을 계기로 대부인의 간병까지 맡게 되었다면서요.”

영애들이 시끄러워지자 주변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까지 귀를 기울였다. 크리스틴이 히죽 웃었다.

“전 처음부터 알아봤어요.”

“네?”

“프렌시프 영애가 음흉하다는 걸요.”

순진한 얼굴로 그런 무서운 일을 했단 말이지. 심지어 성녀 행세까지 하며. 크리스틴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이건 우리끼리만 알아선 안 되는 문제 같네요.”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정말 그래요.”

금세 시끄럽게 세니아나에 관해 떠드는 무리를 보고 릴리는 남몰래 입꼬리를 올렸다.

* * *

이곳이 제국의 중심지인 황도라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황도엔 없는 게 없어서 재료를 금방 구할 수 있었다. 나는 밤을 꼴딱 새워서 요리를 했다.

“어때, 간 맞아?”

“맛있어요!”

“네, 적당히 짭짤하고 달아서 나들이 음식으로는 딱이에요.”

그제야 나는 안심하고 요리를 도시락에 담았다. 음식을 한 번 더 확인한 후 밤새 나무 도시락을 만들어 준 사용인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마일로, 정말 고마워.”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눈 밑이 거뭇한데도 인자하게 웃는 그들을 보고 엄청 감동했다. 도시락을 끌어안고 ‘어떻게 보답하지’ 고민하자 란슬롯이 쿡쿡 웃었다.

“휴가는 어때?”

“네?”

“사흘 정도.”

“아, 좋네요! 여름이기도 하고!”

“저, 정말입니까?”

고용인들이 얼굴에 화색을 띠며 물었다.

“응! 휴가!”

내가 말하자 사용인들이 와아―! 소리쳤다. 주방으로 들어오던 아빠가 우리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가볍게 덧붙였다.

“교대로.”

“물론이지요!”

마일로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사용인들은 벌써부터 누가 먼저네, 나는 이때 하겠네, 하며 시끄럽게 떠들었다. 성으로 가는 내내 나도 사용인들도 기분이 좋았다. 엉겁결에 함께 휴가를 얻게 된 기사들도 신이 났다.

“아가씨께서 오시고서 저택에 사람 사는 냄새가 납니다.”

“사람은 원래부터 많이 살았는걸?”

그것도 엄청 많이.

“사람으로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곳엔 그렇지 않은 분들이 많거든요.”

카터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해서 나는 좀 민망해졌다.

성에 도착한 뒤 바로 소피아 부인의 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평소답지 않게 궁 안이 쥐죽은 듯 조용했다. 난 의아한 표정으로 침실의 문을 살짝 열었다.

‘아무도 없네.’

어디 가셨나? 주변을 살피는데 마침 지나가는 하녀가 있었다.

“대부인께서 어디 가셨니?”

“시녀님들과 함께 정원에 계십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피아 부인의 정원으로 향했다. 문 안으로 들어가서 도시락을 벤치에 올려 두었을 때였다.

“어머니!”

황제의 목소리와 함께 소피아 부인의 비명이 들렸다.

“이, 이 끔찍한……! 끔찍한 놈!”

“진정하십시오.”

“어째서 올리비에를 죽였느냐. 하필이면 그 아이 손으로! 네가 사람 새끼일 리 없다. 사람 새끼일 리 없어!”

평소보다 또렷한 목소리였다. 난 얼른 달려가 소피아 부인을 붙잡았다. 헉헉,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내 품에서 축 늘어졌다. 황제의 옷깃이 엉망이었다. 어찌나 격렬하게 멱살을 잡았는지 그녀의 손끝에 황제의 옷에서 떨어진 단추가 걸려 있었다.

황제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고 말했다.

“이곳은 영애에게 부탁하지.”

“예, 폐하.”

황제가 등을 돌리자 그의 시중인들도 뒤를 따랐다. 그들이 우르르 정원을 나서고, 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소피아 부인의 등을 쓰다듬었다.

“영애, 궁정 의사를 불러올까요?”

“저는 약을 가져오겠습니다.”

“기사를 데려오지요.”

시녀들의 말에 나는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고, 정원에 소피아 부인과 단둘이 남은 난 한숨을 내쉬었다.

“대부인.”

옷깃을 꽉 쥔 그녀의 주먹이 희게 질린 채 덜덜 떨렸다.

“올리비에가…… 내 자식이 저놈의 손에…….”

여전히 추억에 빠져있긴 하지만 평소보다는 눈빛이며 말투가 분명했다. 나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께서는요?”

“…….”

그녀가 날 쳐다보았고, 난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께서는 대부인의 자식이 아닌가요?”

“오토는…… 오토는…….”

그녀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짚었다. 핏발이 섰던 눈동자가 이내 천천히 본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난 도시락을 소피아 부인의 무릎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식사하시고, 함께 걸어요.”

“오토…….”

“네, 폐하의 이야기도 해 주세요.”

도시락을 열자 그녀가 멍하니 안의 내용물을 쳐다보았다. 난 포크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조금만 드셔 보세요.”

“…….”

시큼한 냄새가 살짝 올라오자 그녀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러고는 덥석, 손으로 잡아 입안에 욱여넣었다. 나는 그녀에게 함께 가져온 녹차를 건넸다. 소피아 부인은 허겁지겁 내가 만든 음식을 먹었다.

다행이다! 입에 맞으신가 봐!

‘역시 이게 정답이었어.’

나는 빙그레 웃으며 입가에 묻은 밥풀을 떼어 주었다.

“천천히 드세요.”

그 순간, 그녀의 손이 우뚝 멈추고 눈이 커다래졌다.

* * *

소피아는 눈앞에서 미소 짓는 소녀를 쳐다보았다. 소중한 지기가 젊은 날과 어느 한 군데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대부인? 어디 불편하세요?”

조세핀은 귀족답지 않게 수더분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평민들이나 먹을 법한 음식을 가져와서는 ‘이게 꽤 맛있더라?’ 하며 깔깔 웃었다.

[입가에 밥풀 묻었어.]

[조, 네가 가져온 건 항상 먹기 어려워. 나이프로 잘라서 먹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됐네요. 우리끼리 있을 땐 편히 먹자.]

[조세핀, 이거 쉬지 않았니? 냄새가 이상해.]

[바보! 그건 식초 냄새야.]

둘도 없이 소중한 친구였다. 그랬기에 많이도 싸웠지만.

조세핀이 결혼 소식을 숨겼을 때는 토라져서 장장 석 달을 말도 섞지 않은 적도 있었다. 서운함에 두문불출하자 그녀가 자신을 찾아왔다. 그때는 왜 그리 고집을 부렸는지 모르겠다. 찾아온 조세핀을 만나도 주지 않았더랬다.

조세핀은 정말 남다른 아이였다. 귀족 영애가 창문을 넘어 남의 방에 들어올 정도로. 그래 놓고는 대뜸 사과를 했다.

[미안.]

[어떻게 결혼하는 걸 내게 비밀로 해? 정말 서운해!]

둘은 엉엉 울면서 싸우고, 화해했다. 그리고 조세핀이 가져온 음식을 먹으며 둘은 굳게 약속했다. 서로 절대로 비밀을 만들지 말자고.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오늘을 떠올리자고.

그날부터 이 음식은 신호가 되었다. 말 못 할 비밀이 있을 때 찾게 되는. 선대 황제가 제 자식 옥타비우스를 차기 황제로 점찍었을 적에도 조세핀은 그녀에게 이 음식을 보냈다.

‘아…….’

머릿속에서 기억이 엉켜 들었다. 친구가 세상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던 날이 파편이 되어 휘몰아쳤다.

[소피아, 부탁한다. 나 대신 네가 그 아이를 아껴줘…….]

[대신이 아니더라도 귀히 여길 거다. 조, 제발 기운 차려.]

[안아 주지도 못하고 가서 미안하다고, 할미가 정말 미안해하더라고 전해다오.]

[조!]

조세핀의 몸이 조금씩 차가워지던 순간. 아이에게 조세핀의 유언대로 이름을 붙여 준 날. 황태후의 신분 때문에 사사로이 귀족의 영지로 향할 수 없음을 아쉬워하던 지난 시간. 성년이 되어 황도에 발을 디디면 더없이 귀한 자리에 오르게 하겠노라 했던 다짐. 소피아는 눈앞의 소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세니아나.”

* * *

나는 깜짝 놀라서 소피아 부인의 손을 붙잡았다.

“대부인! 정신이 드세요?”

“고맙구나. 음식이 아주 맛있어.”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행이다. 이게 추억의 음식이 맞았어.

내가 만든 음식은 유부초밥이었다. 피크닉에서 귀족 영애 단둘이 먹을 정도로 간편한 음식. 쉰내로 착각할 수 있는 식초 냄새. 두 사람이 지구로 따지면 아시아 음식을 주로 먹는 남부에서 살았다는 점. 모두 종합해서 낸 결론이 유부초밥이었다.

“잠시 계세요. 어서 사람들을……!”

소피아 부인이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네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네?”

“오토가 기를 쓰고 알아내려 했던 비밀이야. 어떻게 쓰든 네게 도움이 될 거다.”

“말씀하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 말에 그녀가 쓰게 웃었다.

“너는 정말로 조를 닮았구나.”

“…….”

“나는 그 애와 약속했단다. 너를 아껴 주기로 하였지. 이때껏 신분과 사정 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으니 이 정도 선물은 하게 해 주려무나.”

소피아 부인이 주변을 둘러보곤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난 새하얗게 질려갔다. 얘기가 끝나고, 얼마쯤 후. 소피아 부인은 피곤한 얼굴로 잠들었고, 깼을 땐 다시 평소 같은 모습이었다.

시녀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제가 꿈꾸는 건 아니겠죠?”

“그러게 말이에요. 대부인께서 식사를 저리 잘하시다니!”

소피아 부인은 양손에 유부초밥을 쥐고, 와구와구 먹었다. 아무래도 비밀을 내게 말해 준 것이 내면에 어떤 변화를 일으킨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하녀들을 보았다.

“워낙 소식하던 분이시니 음식을 달라는 대로 드리면 안 됩니다.”

“물론이지요, 식사량은 궁정의와 상의하겠습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난 소피아 부인의 손을 닦아 주고, 퇴궁을 위해 움직였다. 오늘도 결계를 확인하기 위해 다른 궁으로 나섰다. 그런데―

‘뭐지?’

궁에 방문한 후·비의 말벗들이며 귀족, 몇몇 황궁 사용인들까지 나를 보며 수군거렸다.

뭔가 이상해.

기분 나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때, 별궁에서 보았던 시녀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녀는 허리를 가볍게 굽히고 말했다.

“황비님들께서 영애를 찾으십니다.”

“무슨 일이죠?”

“자세한 이야기는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난 잠깐 인상을 썼지만, 시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날 안내한 곳은 황후궁과 모 황비의 궁 사이에 이어진 실내 정원이었다. 내가 들어가자 모여 있던 십수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자리엔 다른 황비들은 물론, 로웨나 황비까지 있었다. 내가 치마 끝을 잡고 무릎을 굽히자 황후가 말했다.

“궁 밖에 다소 당황스러운 소문이 돌고 있더구나.”

황후의 시선이 로웨나 황비의 뒤에 선 영애들에게로 향했다. 릴리와 크리스틴.

‘저 둘이 뭔 짓을 저질렀구나.’

“어떤 소문이죠?”

내가 묻자 로웨나 황비가 찻잔을 들며 가볍게 말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소문이야.”

“물론.”

황후도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하지만 다른 황비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하나둘 입을 열었다.

“하지만 폐하, 너무나 당황스러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입에 담기도 무서운 말이지요.”

그때 크리스틴이 고개를 살짝 숙이곤 발언의 기회를 청했다. 황비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고, 크리스틴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이번 소문은 영애를 위해서라도 서둘러 정리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그녀와 가까이 서 있던 사람들이 동의했다.

“맞습니다.”

“이런 추문이 오래가면 영애의 체면만 상하게 될 거예요.”

별궁에서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던 영애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진위를 가려도 프렌시프 양의 체면은 상할 겁니다.”

“그래요. 어쨌든 황실에서 영애를 믿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테지요.”

왈칵 인상을 찌푸린 크리스틴이 말했다.

“하지만 소문의 일정 부분은 사실이기도 하잖아요.”

엘리자베스라고 하는 황후의 두 번째 말벗이 미간을 좁혔다.

“헛소문은 대부분 그렇게 만들어지지요.”

“이건 후·비님들과 관련된 일이에요. 쉬이 넘어갈 수 없어요!”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릴리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릴리는 나를 끌어안고 울먹울먹 말했다.

“세, 세니아나는 그렇게 못된 애가 아니에요!”

크리스틴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서 프렌시프 양이 못됐다고 한 사람이 있나요?”

“하지만 다들 세니아나를 믿어 주지 않으시니까…….”

“신뢰의 근거가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세니아나는 정말 착하고…….”

크리스틴 무리가 기가 막힌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런 말을 레제 양이 하니 당황스럽네요.”

부채로 입가를 가린 영애가 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대만찬에 갈 기회를 프렌시프 양이 강탈했다고 들었는데.”

나는 릴리를 쳐다보았다.

‘크리스틴을 네가 끌어들였군.’

“그건, 그건, 그러니까…….”

릴리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하지만 곧 나를 감싸듯 말했다.

“이,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그렇지?”

황후의 표정이 불쾌해졌다. 자신이 선물한 권리를 가지고 이런 일이 생긴 게 몹시 마음에 차지 않는 듯했다. 그녀가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만. 프렌시프 양에게 직접 듣도록 하지.”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내게 집중했다. 로웨나 황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가 거짓 포털을 만들어 황궁을 우롱하고 있다더구나.”

릴리는 얼른 내 손을 잡고 걱정 어린 척 말을 이었다.

“으응, 네가 사실은 포털을 열지 못한다고…….”

순간 표정이 굳어진 나는 릴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포털을 열지 못하게 된 시점에서 난 소문.’

우연의 일치라기엔 타이밍이 너무나 절묘하다.

‘내 포털에 손을 쓴 것도 너였어?’

릴리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가슴이 요동치고,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지금 나는 포털을 열어 증명할 수 없다. 그러니 황실을 우롱한 죄인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내가 포털을 가졌다고 인정한 가족들도 죄를 피하지 못하겠지.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켜고, 생각을 정리했다. 프렌시프 사람들 외에 내가 포털을 연 것을 목격한 사람이 한 명은 있다.

사비에르의 사신. 하지만 그는 절대로 증언하지 않을 거다. 그렇게 된다면 프렌시프 성에서 불명예스럽게 쫓겨난 게 사실이라는 걸 제 입으로 밝히는 거니까. 무엇보다 이 소문은 커지면 커질수록 사비에르엔 이득이었다. 다시 포털을 독점할 수 있지 않은가.

‘당황하면 안 돼.’

최대한 침착하게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이 자리에서 낭설임을 증명하라고 저를 부르신 건가요?”

황비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쉽고 빠른 길이긴 하지.”

“황궁에서 황제 폐하의 허가도 없이 후작가의 영애인 제게 포털을 열어 보라 명하시는 거군요.”

그러자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황비가 헛기침을 했다.

“명이라니…….”

“황비님께서는 저를 믿지 못하시나요?”

콕 집어 얘기하니 그녀가 당황스러운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정말 성녀라면 나와 척을 져서 좋을 게 없으니까.

“그, 그럴 리가.”

“그럼 다른 황비님들께서는 저를 믿지 못하십니까?”

동부의 가브리엘라 황비는 대답이 없었고, 북부의 로웨나 황비는 끼고 싶지 않다는 듯 슬쩍 시선을 돌렸다.

“하면 황후 폐하께서?”

그녀는 생긋 미소지었다.

“나야 영애를 믿지.”

나는 크리스틴과 릴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모두 저를 믿어 주시니 이 자리에서 증명할 이유가 없겠군요.”

“하지만……!”

크리스틴이 다급하게 외침과 동시에 릴리가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세니아나, 영애들의 말처럼 그런 소문은 오래 두어 봐야 좋을 게…….”

“난 서커스 원숭이가 아니야.”

“……!”

“나를 믿는다는 네가 어째서 증명을 강요하는 거니?”

“가, 강요가 아니라…….”

“증명의 끝이 아무에게도 신뢰를 주지 못한 세니아나 프렌시프라는 걸 넌 알고 있을 텐데.”

릴리는 굳어져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릴리는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를 악물고 있었다. 세니아나가 공중 정원을 나선 후, 후·비들은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크리스틴의 절친한 지기를 말벗으로 두고 있는 남부의 코트니 황비는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벗을 잘못 둔 덕에 창피만 당했구나.”

“화, 황비님!”

“너는 당분간 황궁에 들어올 필요가 없다.”

코트니 황비까지 떠나자 영애들은 본격적으로 릴리를 두고 수군거렸다. 릴리는 소리 없이 이를 악물었다.

‘후·비라는 것들이 겁만 많아서.’

역시 후·비를 찔러볼 게 아니라 귀족들을 이용해 황제 쪽을 치고 들어가는 게 나았다. 릴리는 테르반 저로 가기 위해 재빨리 공중 정원을 나섰다. 멀리서 세니아나의 뒷모습이 보였다. 릴리가 입매를 비틀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디 가니? 소문을 수습하러?”

그런데 이상했다. 세니아나는 비아냥에도 흥분하긴커녕 평소와 같이 가볍게 대꾸했다.

“아니, 저택으로 돌아가.”

“가서 도와 달라고 간청이라도 하려는 거야?”

“그건 나중에. 내가 오늘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어서 그것부터 처리할까 싶거든.”

“뭐?”

“밝혀지면 가문 하나는 풍비박산 날 이야기란다.”

세니아나가 빙그레 미소지으며 이어 말했다.

“너희 가문 말이야.”

정말로 손에 쥔 패가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릴리는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네 재능은 아무래도 허풍인 모양이네.”

“지금이라도 사과할래?”

“사과는 모두를 속인 쪽이 해야지.”

릴리가 세니아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그러자 세니아나는 안타깝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기회를 주는 거야.”

그녀가 싸늘히 덧붙였다.

“죽기 전에.”

순간 릴리의 어깨가 흠칫 오그라졌다. 고작 이깟 계집애에게 당황했다는 게 수치스러웠다. 세니아나가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떠나고, 릴리는 바로 테르반 저로 향했다.

“귀족들을 동원해 황제 폐하께 소문의 진상을 밝히길 요청하세요.”

“후‧비 쪽은 실패한 거냐.”

“…….”

“어찌하였기에 멍청한 계집애들 선동하는 것 하나 제대로 못 해!”

테르반 백작이 소리치자 릴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사교계의 잡담 중에 나온 이야기라면 몰라도 정식으로 증명을 요청하는 건 몹시 위험했다. 만에 하나 문제가 생겨서 포털이 열리면 책임을 피하지 못할 거다. 릴리는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절대 열리지 않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곤란해지는 쪽은 그 애예요.”

“프렌시프와 척을 진다면!”

“그러니 할아버지께서 잘 해 주셔야죠.”

“너……!”

“이번 일만 잘 풀리면 프렌시프의 사돈이 되는 거예요.”

“…….”

“금좌 11석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실지도 모르는데, 이런 위험은 감수하셔야죠.”

세니아나가 성녀가 아니라는 게 드러나면 프렌시프는 일을 수습하기 위해 귀족 한 사람이라도 더 포섭하려 할 거다. 테르반과 레제의 손을 거절할 리 없다.

“이 일에 자금이 어디까지 들었는지 똑똑히 새겨 두어라.”

릴리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일이 터진 건 사흘 뒤. 테르반에 의해 움직인 귀족들이 황제에게 알현을 청했다.

* * *

오늘은 소피아 부인을 마지막으로 보는 날이었다. 난 잠든 그녀를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왔다. 때마침 기사 고레일과 빅터가 다가왔다. 오늘은 날이 날인 만큼 아빠가 궁 안에 기사를 대동할 수 있도록 손을 써 주었다. 고레일이 말했다.

“아발론 궁에 파리 떼가 집결했습니다.”

“황제 폐하께선?”

“도착하셨습니다.”

나는 두 사람과 함께 아발론으로 향했다. 알현실 안에선 시끄러운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불을 놓으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

“확인만 되면 가라앉을 소문이지 않습니까.”

“그깟 헛소문에 추밀원의 고문이 나선 것이 문제란 말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프렌시프에서 증명을 해야지요.”

“고작 호사가의 말 몇 마디입니다. 어린 숙녀의 체면을 구둣발로 짓밟으셔야겠습니까!”

프렌시프의 당파와 테르반이 움직인 귀족들이 팽팽하게 맞섰다. 나는 거대한 문 앞을 지키고 선 경비병에게 말했다.

“고하세요.”

곧 경비병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황제가 입실을 허락했고, 나는 천천히 문 안으로 들어갔다. 수십 쌍의 눈이 일시에 내게 모였다. 안엔 소문의 진원지인 릴리와 크리스틴의 무리도 함께였다. 나는 황제를 향해 무릎을 살짝 굽혔다.

“황가에 광영 있기를.”

황제는 옥좌 팔걸이에 기대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얼굴에 피로감이 역력했다. 증명이 필요하다던 귀족이 한발 앞서 나왔다.

“프렌시프 영애가 직접 나와 주었으니 차라리 잘 되었군요.”

“그렇습니다.”

“이 자리에서 포털을 증명해야 합니다.”

릴리와 크리스틴이 히죽 웃었다. 내가 절대로 포털을 열지 못할 거라는 믿음으로 가득한 표정이다. 난 황제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폐하, 발언의 기회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허하겠다.”

“저는 제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는 귀족들의 주장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내 말에 장내가 크게 술렁였다.

“저, 저……!”

“무례하군!”

“증명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반대쪽 사람들이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고, 프렌시프의 당파 몇몇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자세를 바로 하며 내게 물었다.

“영애가 한 말의 의미를 알고 있는가?”

“물론입니다.”

“흐음…….”

“폐하, 저는 포털을 열 수 있긴 하지만, 포털로 인한 그 어떤 권리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증명을 주장했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권리가 없을진대 어떻게 의무가 있나요?”

“……!”

“그러니 포털이 있다, 없다 밝힐 이유도 없지요.”

그러자 중년의 귀족이 고함을 내지르듯 말했다.

“포털은 제국의 앞날을 좌우할 보물이오! 프렌시프에서는 신의 축복을 홀로 독점하겠다는 거요!”

“물론 제 포털이 도움될 날이 있다면 나설 겁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밝혀야……!”

“하지만 만에 하나 포털이 없더라도 힐난받을 이유는 없어요.”

사람들이 당황했고, 난 산뜻하게 이어 말했다.

“정식으로 발표한 것도 아니고, 포털이 있다는 이유로 이득을 취한 것도 아닌데요.”

실제로 포털이 없다면 나와 프렌시프는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하긴 할 거다. ‘우리 영애님 포털 있다, 부럽지?’ 하고 떵떵거리던 가신들을 말리지 못했으니까. 아빠와 할아버지가 포털을 넌지시 인정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렇다고 저들이 이렇게까지 들고 일어날 만큼 큰 벌을 받을 일은 아니다. 아마 저들은 내가 황실과 암암리에 어떤 거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듯했다. 초대부터 현재의 사비에르 영애까지 모두 그랬으니까. 하지만 난 아닌걸.

‘그런 거 별로 필요 없으니까.’

내 주장을 들은 사람들은 입을 뻐끔거렸고, 아빠와 오빠들은 웃음을 삼켰다. 그때, 부들부들 떨고 있던 크리스틴이 소리쳤다.

“영애는 포털로 인해 후·비님들께 귀여움받았잖아요! 황실을 속인 거라고요!”

“말씀 삼가세요.”

“뭐라고요?”

“만백성의 어머니인 후·비께서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 절 아껴 주셨다는 얘기로 들리잖아요?”

크리스틴은 대답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릴리는 어리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까지 온 걸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시선이 쏠렸다.

“아, 아니, 두렵지 않은데 왜 이곳까지 왔는지 난 모르겠어서…….”

크리스틴이 옳다구나 하며 히죽 웃었다.

“그래요! 영애의 말이 진심이라면 헐레벌떡 폐하를 찾을 이유가 없잖아요.”

“…….”

“사실은 두려운 거 아니에요?”

“…….”

“스스로도 황실을 속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나는 생긋 웃으며 황제를 보았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달리 있습니다.”

“달리 있다, 라.”

“그분께서 입을 여셨습니다.”

내가 지칭하는 사람이 소피아 부인임을 황제는 금세 알아차렸다. 순식간에 표정이 달라진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소피아 부인이 지난 십여 년간 절대 입에 담지 않던 비밀. 그건 황제 곁에서 올리비에 폐공작에게 정보를 흘린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껏 한 차례도 입을 열지 않은 노년의 신사를 바라보았다. 릴리의 곁. 그러니까 그녀의 외조부인 테르반 백작을!

“폐하, 테르반 백작은 과거 올리비에 역모 사건의 잔당입니다.”

황제의 시선이 그를 향했고, 장내가 터질 듯 시끄러워졌다. 테르반 백작이 희게 질려 굳어졌다.

“뭐라고!”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돼!”

귀 아픈 소음으로 가득한 공간 안에서 릴리가 입을 뻐끔거렸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릴리가 테르반 백작을 붙들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이대로 거짓말에 놀아나실 건가요!”

잔뜩 당황하니 순진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테르반 백작이 마른침을 삼키고, 억지로 웃음을 터뜨렸다.

“무서운 소리를 입에 담는군. 지금 발언, 책임질 수 있는가.”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황제마저도. 황제는 낮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증좌가 있나.”

나는 쿵쿵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고, 황제와 시선을 맞추었다.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반역을 거론하겠는가. 소피아 부인은 말했다.

[올리비에가 죽어가면서 내게 말해 주었다. 배신하지 않기 위해 서로의 몸에 어떤 표식을 해 두었다고.]

나는 테르반 백작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아킬레스건에 십자 모양의 문신이 있을 겁니다.”

“문신…….”

황제가 중얼거리자 테르반 백작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합니다! 나이 들며 점이 생겼을 뿐……!”

나는 황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그럼 연명장에 찍은 테르반의 인장은 어떻게 설명할 거죠?”

테르반 백작의 무릎이 덜덜 떨렸고, 릴리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제 외조부를 쳐다보았다.

“할아버님.”

“…….”

“연명장이라니요!”

황제가 내게 물었다.

“연명장을 가지고 있느냐.”

황태후는 가장 안전한 곳에 연명장을 숨겨 두었다. 황제의 손에! 연명장을 황태후 궁의 출납 장부로 둔갑시켜 황제에게 들려준 것이다.

“폐하께선 이미 연명장을 가지고 계십니다.”

“설마 장부가…….”

황제가 중얼거렸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르반 백작이 허둥지둥 황제의 앞으로 달려왔다.

“폐, 폐하……!”

“아무래도 짐과 그대는 나눌 이야기가 많은 모양이야.”

“예?”

“고문실에서.”

그 말을 끝으로 황제는 테르반의 추포를 명했다. 테르반 백작이 경비병들에게 질질 끌려가며 “폐하! 폐하!” 하고 소리쳤다. 새파랗게 질린 릴리가 그를 따랐다.

나는 가족들과 함께 성을 나섰다. 가웨인이 히죽 웃곤 내 볼을 살짝 꼬집었다.

“신통방통하단 말이지.”

“놔, 놔주세요…….”

사람들 눈도 있는데! 내가 우울한 표정으로 그를 보자 란슬롯이 쿡쿡 웃었다.

“장하다는 거야.”

난 슬그머니 아빠를 보았다. 먼저 말하지 않았다고 혼을 낼까 봐 걱정했는데 그는 픽 실소를 흘릴 뿐이었다.

“화…… 안 내세요?”

“안 내.”

“…….”

“너를 믿고 있었으니까.”

난 헤헤 웃으며 아빠의 손을 살짝 잡았다.

“왜?”

가족들이 물었다.

“그냥요, 좋아서…….”

내 말에 란슬롯은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나날이 귀여워져서 어떡하지.”

난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바짝 낮추고 미간을 좁혔다.

“사람들이 듣는다니까요…….”

가웨인이 나를 번쩍 안아 마차에 태워 주며 말했다.

“들으라지.”

“하지만…….”

란슬롯이 빙그레 웃었다.

“사용인들 휴가도 보냈으니 식사는 밖에서 하고 갈까?”

“좋아요!”

아빠도 고개를 끄덕여서 우리는 좋은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식사를 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마음 한구석엔 불안이 서려 있었다. 어찌 되었건 오늘 포털을 증명한 게 아니니까. 잠시 회피했을 뿐이었다.

테르반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폭풍에 휘말렸고, 악에 받친 릴리는 절대로 내 포털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려 주지 않을 거다. 약이 바짝 오른 크리스틴이 어떻게든 포털 일을 크게 부풀리려 할 테고…….

식사를 마친 가족들이 중얼거렸다.

“이대로 돌아가는 건 아쉬운데. 이 녀석 방학도 얼마 남지 않았잖아.”

“막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좋아요!”

난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가족이 레스토랑을 벗어나기 위해 문을 막 나서려던 참이었다. 문밖에서 갑자기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우리를 보고 놀라서 “죄, 죄송…….”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문득 최근의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열고 있으니까.]

난 눈이 커졌고, 가족들은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설마……!

* * *

이틀 후, 나는 다시 공중 정원에 불려갔다. 로웨나 황비가 황후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며칠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또 아이를 불러내셔야겠습니까.”

아무래도 로웨나 쪽은 헛소문을 신뢰하는 것보다 내 편을 들기로 한 모양이었다. 황후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사과할 겸 불렀네. 기막힌 가문과 중신을 설 뻔했으니 영애에게 부끄러울 따름이야.”

하지만 눈빛에 스민 날카로움은 숨겨지지 않았다. 황후로서는 애가 타긴 할 것이다. 사비에르의 배상금 사건으로 에이레네 사비에르와 4황자의 결혼이 약간 지체되었다.

‘아마 그동안 나를 포섭하려 했던 거겠지.’

사비에르 영애가 4황자와 결혼을 땅땅 못 박으면 내가 그녀의 줄을 잡는 걸 망설일까 봐. 한데 내가 포털을 열 수 없다면 괜히 아까운 시간만 허비한 것이다.

크리스틴이 다급히 로웨나 황비에게 말했다.

“테르반 사건이 끝나면 다시 포털 얘기로 시끄러워질 텐데 그 전에 후·비님들께서 진상을 파악하셔야지요. 물론 수습을 위해서 말이에요.”

내 걱정은 전혀 안 하는 표정이었지만.

“…….”

“그게 결과적으론 프렌시프 영애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웨나의 말벗은 영리한 편이군.”

로웨나 황비는 팔짱을 낀 채 한숨을 흘렸다. 황후가 내게 말했다.

“얘기가 나온 김에 들어 볼까. 영애는 성녀가 맞는가?”

크리스틴 무리가 얼른 동조했다.

“폐하께서 여쭤보시잖아요.”

“포털이 있든 없든 영애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면서요. 그럼 보여 줘도 되는 게 아닌가요?”

“또 체면 핑계를 대실 거예요?”

나는 황후를 빤히 쳐다보다 이내 생긋 미소지었다.

‘카르스족의 영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먼 장소를 떠올리고 목걸이를 잡았다. 순간이었다. 덜컹! 발 디딘 땅이 진동하고, 성의 천장이 흔들렸다.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주변을 살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놀란 시녀장이 뛰어들어 왔다.

“폐하, 성의 결계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황후와 크리스틴의 표정이 빳빳하게 굳어졌다. 그 말인즉, 내가 포털을 열었다는 뜻이었으니까.

‘왜 안 열렸는지 이제 알았다고요.’

내 포털을 열 수 없도록 뒤에서 조종한 사람이 누군지도!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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