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3권) (7/24)

로열 셰프 영애님 3권

7장

나는 도미니크와 함께 커스터드 타르트를 먹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의 부관과 시종이 동시에 문을 열었지만, 열리지 않았던 그때. 문은 고장 나서 열리지 않은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열고자 하여 움직이지 않았을 뿐. 그리고―

‘더 강한 힘을 가하자 열렸어.’

성은 궁정 마법사들이 몇 겹이나 되는 결계를 펼치고 있는 데다, 특별한 도구가 포털을 제한했다. 그래서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진 못했지만, 시녀는 분명히 말했다. 결계가 일부 무너졌노라고.

내가 다시 포털을 열게 된 것이 틀림없다. 순간 두통이 일며 다리가 휘청였다. 깜짝 놀란 로웨나 황비가 내게 달려왔다.

“영애!”

난 테이블을 잡고 가까스로 서 있었다. 금세라도 바닥으로 늘어져 버릴 것 같아서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내 힘이 닿는 가장 먼 곳을 향하는 문을 열고, 그 앞을 가로막은 방해물까지 튕겨 내니 몸이 버티지 못하는 것 같았다.

‘끄응.’

마라톤이라도 뛴 것 같은 기분이었다. 토할 것 같아 나는 입을 틀어막았고, 로웨나 황비는 그런 날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았다.

“괜찮니?”

“…….”

황후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졌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도 당황이 역력했다. 사람들이 크리스틴 무리와 황후를 힐끔 쳐다보았다. 크리스틴은 새파랗게 질려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고, 황후도 곤란한지 침음을 흘렸다.

“괜찮은가.”

황후의 말에 로웨나 황비가 날카로운 어투로 말했다.

“괜찮아 보이십니까.”

“자네에게 묻지 않았네.”

“이제 이 일을 어찌하나요. 결계가 무너졌으니 황제께서 얼마나 진노하실까요!”

“…….”

로웨나 황비는 나를 두 팔로 감싸며 은근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이게 다 황후 폐하의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에요.”

황후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몸을 일으켰다. 내게 다가온 그녀가 내 손을 살포시 잡았다.

“영애에게 해가 되는 소문이었잖은가.”

“…….”

“영애가 곤란해질까 그랬네.”

그녀는 내 손등을 부드럽게 쓸며 이어 말했다.

“이해할 수 있겠지?”

“……물론이지요.”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황후에게서 손을 살짝 빼냈다. 황후의 낯빛이 파리해진 반면에, 로웨나 황비의 입매는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혈색이 좋지 않으니 진료라도 받게 해야겠어요.”

크리스틴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가 원망과 분노로 일렁였다. 난 그런 그녀에게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로웨나 황비와 나는 함께 복도로 나왔다. 그녀는 복도에 발을 딛자마자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함께 있고 싶지만, 황궁보다는 저택의 진료가 마음 편하겠지?”

“감사합니다.”

“재미난 구경 했으니 되었단다.”

그러면서 낮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매번 깜찍한 일로 날 기쁘게 하는구나.”

“과찬이세요.”

그녀는 고양이 어르듯 내 턱을 다정히 매만졌다.

“내 품은 영애의 자리라는 걸 기억해 주렴.”

후후 웃은 로웨나 황비가 시녀를 향해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아발론으로 가자. 황후가 벌인 짓을 일러바쳐야지.”

시중인들과 함께 떠나는 그녀를 보고 난 한숨을 흘렸다. 이제 일이 일단락되었다. 긴장이 풀려서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황궁 복도에 잠시 기대 서 있는데 인기척 소리가 들려왔다.

“세니안.”

“아빠!”

반가움에 뛰어가려다가 머리가 아찔해져서 흐물흐물 주저앉았다. 아빠의 표정이 굳어졌다.

“결계의 이상은 네가 포털을 열었기 때문인가.”

그가 날 안아 들며 말했다. 난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 사람들이 봐요.”

“아비가 자식을 안는 게 뭐가 어때서.”

그 딸이 이제 곧 성인이니까 말이지요! 난 울상을 지었지만, 아빠는 아랑곳없었다. 끄응, 신음을 흘리자 아빠가 이마를 살짝 마주 댔다.

“열은 없는데.”

“괜찮아요……. 참! 그보다 테르반 백작은요?”

아빠의 입꼬리가 비죽 솟았다. 아주 음험하게.

“죽었나요……?”

어쩐지 불안해서 조심스럽게 물었고, 아빠가 대답했다.

“죽고 싶게 만들어 줄 생각이야.”

그러곤 짧게 덧붙였다.

“곧.”

모르긴 몰라도 엄청난 고통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난 속으로 묵념했다. 아빠가 천천히 걸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포털이 열리지 않았던 이유를 찾은 건가?”

“네. 열리지 않았던 이유를 찾았어요.”

“무엇이기에.”

난 주변을 살피고 아빠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비에르에서 제 주변에 계속 포털을 열어 놓은 것 같아요.”

“사비에르가?”

“네. 이미 문이 열려 있으니 저는 열 수 없었던 거예요.”

“테르반과 거래했겠군.”

“그쪽에도 수지맞는 장사였을 테니까요.”

아빠가 말없이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서늘한 시선으로.

“……아빠?”

“세니안.”

“네…….”

“넌 이제 쉬어라. 마무리는 아비가 할 테니.”

어쩐지 조마조마했다. 대체 뭘 어쩌려고? 하지만 묻기는 겁이 나서 아빠의 목을 끌어안으며 조용히 “네…….” 하고 대답했다.

* * *

쾅! 황후가 불쾌한 얼굴로 방을 빠져나갔다. 망연자실한 코트니 황비가 의자에 주저앉았고, 가브리엘라 황비는 탄식했다.

“그러게 나서지 말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대야 동부에서 왔으니 침묵이 쉬웠겠지!”

코트니 황비가 날카롭게 말했다. 황궁의 황비들은 각각 동, 서, 남, 북 지역에서 차출되었다. 동부의 가브리엘라 황비. 서부의 그라니아 황후. 남부의 코트니 황비. 북부의 로웨나 황비. 후‧비들은 각 부(部)의 구심점이자 중앙과의 통로였다. 길라게온에서 가장 득세한 지역은 ‘황후의 서부’와 ‘로웨나 황비의 북부’였다.

서부는 강과 바다를 모두 끼고 있었다. 덕분에 거대한 농경지를 갖고도 상업이 발달했다. 북부는 사방 중 가장 열악한 조건의 땅이지만, 그 때문에 자치권을 인정받아 가장 강대한 군권을 확립했다. 더불어 일찌감치 중앙과 단단한 끈을 만들었다.

‘그리고 동부엔 프렌시프가 있지!’

나베리우스 프렌시프와 아서 프렌시프는 놀라운 지도자였다. 철기, 광산 사업이라든가, 연금술사와 마법사를 지원하여 기술을 발전시켰다든가. 크고 작은 전투에 꾸준히 군대를 투입해 군권과 황실과의 동맹을 다졌으며, 항만을 사들여 무역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남부엔 아무것도 없어.’

서부처럼 발달하기 좋은 여건을 가지지도 못했고, 북부처럼 강대한 군권과 자치권으로 인한 견고한 동맹도 없다. 그렇다고 동부처럼 믿을 만한 대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권력에 붙어 기생하는 것밖엔 살아남을 길이 없었다. 코트니 황비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번 일로 황후의 신임과 사비에르의 지지까지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녀는 제 등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 말벗들을 노려보았다.

“멍청한 것들.”

“저, 저희는……!”

“상시 출입패를 반납해라.”

“예? 화, 황비님!”

“그리고 이번 일은 너희들 가문에 세세히 전하지.”

“그건……!”

말벗들은 황비를 차출한 부에 터를 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번 일로 남부는 서부의 지원을 받기 힘들어졌으니, 가문에서 펄펄 뛸 것은 자명했다. 운이 나쁘면 남부에서 고립될지도 모른다.

“황비님, 용서해 주세요!”

“저희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코트니 황비가 벌떡 일어났다.

“프렌시프 영애에게 무릎을 꿇고 빌어서라도 이번 일을 수습해야 할 거야.”

“무릎이라니……!”

“그녀가 황후 폐하를 다시 찾지 않으면 남부는 중앙에서 배척될 거다!”

“그, 그런…….”

“못난 것들!”

코트니 황비는 씩씩대며 방을 나섰고, 그 뒤를 가브리엘라 황비가 따랐다. 망연자실한 말벗들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들을 쳐다보는 다른 말벗들의 눈빛이 싸늘했다. 결국, 표적이 된 건 이번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크리스틴이었다. 로웨나 황비의 말벗들이 크리스틴을 붙들고 소리쳤다.

“어떻게 할 거예요! 영애 때문에 우리는……!”

“이게 왜 저 때문이에요!”

“싫다는 사람 구슬린 게 누군데……! 기가 막혀!”

크리스틴은 당황해서 소리쳤다.

“소, 소문을 낸 사람은 내가 아니라 레제 양이잖아요! 우리 모두 그녀에게 당한 거라고요!”

그 말에 후‧비들을 선동했던 영애들이 이를 악물었다.

그날 밤. 그녀들은 레제 가를 찾았다. 레제 가는 엉망이었다. 테르반이 역모에 연관되었기 때문에 황실의 군사들이 한 차례 휩쓸고 떠난 다음이었다. 영애들은 자신들을 만나지 않겠다는 릴리를 억지로 끌어냈다.

“이거 놔요, 이 무례한……!”

짝! 황궁을 나설 때 기어이 상시 출입패를 빼앗긴 영애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라고! 아버님께서 저택으로 돌아오지 말라 하셨단 말이야!”

릴리는 불이 붙은 것 같은 뺨을 감싸 쥐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입술을 꾹 깨문 릴리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날 때렸어……?”

“두 대라고 못 때릴까.”

“두고 봐, 이번 일 절대로……!”

릴리의 말에 영애들이 입매를 비틀었다.

“곧 작위마저 회수될 집안에서 우리를 어떻게 할지 궁금하네.”

릴리가 눈을 크게 떴다.

“뭐?”

“네 어머니가 이번 일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가문의 재산과 작위를 모조리 바치겠다고 황제 폐하께 서약했다는 걸 몰랐나 보네.”

궁정 대신의 딸이 소리치자 릴리의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영애들이 릴리를 떠밀어 넘어뜨렸다.

“돈 한 푼 없이 평민이 되겠구나. 어느 댁 하녀로 갈 건지 미리 말해 주렴. 내가 아주 귀하게 대접해 줄 테니까!”

릴리는 악에 받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벽에 쓸린 팔과 얻어맞은 뺨이 욱신거렸다. 영애들이 떠나고 릴리는 헐레벌떡 모친의 집무실을 찾았다. 짐을 정리하던 레제 부인이 릴리를 흘깃 쳐다보았다.

“너도 어서 필요한 것들을 챙겨라.”

“챙기라니요? 설마 작위까지 반납하실 거예요?!”

“그래.”

“어머니!”

레제 부인은 릴리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딸의 눈에 언제부터 저리 욕망이 선연했을까. 남편이 죽고 딸을 키우기 위해, 제게 명운을 맡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하루도 편히 쉰 적 없었다. 오로지 그뿐이었는데 어째서 이 아이는 악귀가 되었을까.

레제 부인은 오늘 아침에 세니아나로부터 받은 편지를 떠올렸다.

[……부인께서 겪을 고난에 마음이 쓰입니다. 삶을 되짚어 보게 되더라도 부인의 잘못은 어디에도 없음을 기억해 주세요.]

편지와 함께 란슬롯 프렌시프가 만남을 청했다. 그는 말했다.

[귀족 위를 내려놓고, 재산을 헌납하십시오. 그리하면 프렌시프에서 부인의 목숨만큼은 보장해드리겠습니다.]

[어째서 내게 그런 조언을 해 주는 거요.]

[내 동생 마음에 짐이 생기지 않길 바라거든요.]

세니아나 프렌시프는 피해자였다. 그저 릴리와 테르반 백작이 원하는 자리에 있다는 이유로 공격받은. 그런 아이마저 자신이 받을 고통을 걱정하는데, 딸인 릴리는…….

릴리가 레제 부인의 팔을 잡고 애걸했다.

“황궁으로 가요. 가서 우리는 죄가 없다고 말씀하세요!”

“내가 왜 죄가 없니!”

레제 부인이 버럭 소리쳤다.

“어머니…….”

“너를 이리 키웠는데 어떻게 내게 죄가 없어!”

릴리는 굳어져서 제 모친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레제 부인이 눈을 꽉 감았다. 분을 삭이듯 한참을 헐떡이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이제 내 딸이 아니다.”

“어머니!”

“이 저택에서 나가.”

“그런……!”

“당장.”

레제 부인은 사용인들에게 릴리를 끌어내라 명했다. 릴리가 비명을 내지르며 반항했지만, 그녀는 다시 레제 가의 문턱을 밟을 수 없었다.

그 시각, 황궁.

황후는 기가 막힌 얼굴로 새파랗게 질린 사비에르 후작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프렌시프 영애가 포털을 열지 못하도록 한 자가 그대라는 말인가.”

“저희는 테르반의 의뢰를 따랐을 뿐…….”

“이런 못난 인사를 보았나!”

그녀가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결계가 무너진 일로 황제에게 자신이 어떤 꼴을 당했는데!

[짐이 아무래도 황후를 잘못 본 모양이야. 쌍월 축제의 마무리는 로웨나에게 맡기도록 하지.]

쌍월 축제는 하늘에 두 개의 붉은 달이 뜨는 날에 맞추어 진행되는 축제였다. 무려 16년 만에 돌아온 제국에서 가장 화려한 행사. 그날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는데, 공로가 전부 로웨나에게 돌아가게 생겼다. 사비에르 후작은 진노한 황후를 보고 침음을 흘렸다.

“이미 엎어진 물이 아닙니까. 폐하께서 저희를 도와주시지요.”

“내가 또 도와야 할 일이 있나?”

“세니아나 프렌시프가 에이레네의 문을 튕겨 낸 일로 그 아이 몸이 많이 상했습니다.”

“허…….”

“각혈하고 쓰러진 탓에 귀족들이 의뢰해 온 일을 수행할 수 없―”

황후가 이를 악물고 사비에르 후작을 노려봤다. 후작은 마른침을 삼켰다.

“계약이 어그러지면 저희는 배상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프렌시프에 지급한 배상금 때문에 금전적으로 여유가 없다. 하지만 4황자와의 결혼을 핑계로 댄다면 어느 정도 일을 미룰 수 있을 터였다.

“어차피 치러야 할 결혼, 조금 일찍 한다고 무슨 대수겠습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반역을 수사 중이다. 게다가 황후 자신은 황제의 진노를 샀다. 이런 시점에 결혼이라니.

‘나를 우습게 봤군.’

“축하받아야 마땅한 결혼이네. 지금은 내가 시킬 수 없어.”

“폐, 폐하!”

“그대의 과오는 그대가 처리하게.”

그렇게 말한 황후는 안경을 쓰고,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더는 대화를 나누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사비에르 후작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가 인사하자 황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분간 볼 일 없었으면 좋겠군.”

“…….”

“자네 딸도 마찬가지일세.”

후작의 얼굴이 거무죽죽해졌다. 후작이 나서고 황후는 책상에 팔꿈치를 얹은 채 깍지를 끼었다.

‘오늘까진 포털을 열지 못했다는 말이지.’

대처가 워낙에 의연하여 저 또한 반신반의할 정도였다.

‘탐이 나.’

가면 갈수록 더더욱.

4황자의 짝이 굳이 사비에르여야 하는 까닭은 없다. 성녀는 둘이니. 하지만 정보원에 따르면 그녀는 지금 동부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고, 개학을 앞두고 있다.

‘이대론 안 돼.’

접근하지 못하는 틈에 세니아나의 마음이 로웨나 쪽으로 기운다면 황태자는 날개를 날게 될 거다. 황후는 즉시 궁내부 장관을 호출했다.

* * *

나는 아카데미로 돌아갈 날을 하루 앞두고 황궁에 들었다. 황후와 로웨나 황비가 떠나기 전 얼굴을 보여 달라고 간곡히 청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황족이란 귀찮게 구는 데엔 도가 튼 놈들이야.”

“황궁이다. 입조심 해.”

오늘은 오빠들도 함께였다. 아빠는 테르반의 수사로 정신이 없어서 오빠들이 함께 황궁에 와 준 것이다. 그런데 시녀들이 인도하는 장소가 이상했다. 평소엔 정원이나 응접실 등 대화를 나눌 장소로 가는데, 이번엔…….

‘경기장?’

콜로세움처럼 경기장을 높은 관중석이 감싸고 있었다. 황후와 로웨나 황비가 먼저 와 있었다. 우리가 예를 표하자 두 사람은 생긋 웃으며 맞아 주었다.

“이리 앉으려무나.”

황후가 자리를 가리킨 순간, 로웨나 황비가 혀를 찼다. 평소보다 훨씬 불쾌한 표정이었다. 웬일인가 했는데 난 곧 이유를 알게 되었다.

“꺄악―!”

궁인들의 목소리와 함께 경기장에 미카엘 황자와 도미니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카엘은 흰색, 도미니크는 검은색의 단출한 훈련복 차림이었다. 황후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황자 간의 대련은 처음 보겠구나.”

“아, 네…….”

“오늘은 연습이지만 쌍월 축제에선 볼 만할 거다.”

“두 분이 쌍월 축제에서 대련하세요?”

“삿된 자들을 쫓기 위해 황궁의 무위를 자랑하는 거지.”

삿된 자들? 선생님의 기억으로부터 들었다. 일전에 아카데미에서 보았던 그 기괴한 것들…….

“폐하.”

“그래.”

“삿된 자들이라는 게 빈번히 나타나나요?”

그러자 황후와 황비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프렌시프 영애는 귀엽기도 하지.”

“여전히 그런 전설을 믿고 있는 거니?”

로웨나 황비는 픽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하기야 대륙 전쟁에 삿된 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긴 하니. 하지만 황궁의 무위를 자랑하는 전설 속의 삿된 자와는 다르단다. 그건 적국에서 만든 몬스터에 불과하다는 게 학자들의 의견이니까. 쌍월 축제에서 말하는 삿된 자는 전설 속의 그것이란다. 절망 그 자체 말야.”

나는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조금 수그렸다. 삿된 자들이라는 게 여기선 산타 할아버지와 비슷한 건가 봐…….

‘하지만 난 정말 봤는데.’

산타 할아버지처럼 선물은 안 줬다. 대신 잡아먹으려 들었지.

어쨌든 황자 대련은 한국의 지신밟기 놀이(잡귀를 쫓고, 풍작을 기원하며 행하는 전통 놀이)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황후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미카엘과는 일전에 잠시 마주쳤다지.”

그러자 오빠들이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고, 난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폐하.”

“칼자루 한 번 쥐어 본 적 없어 보인다고들 하지만, 무예에 소질이 있단다.”

그 말에 로웨나 황비가 픽 실소를 흘렸다. 황후가 인상을 쓰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자네는 뭐가 그리 불만인가.”

“불만은 아닙니다만.”

“미카엘은 전장에서 살다시피 한 도미니크에게 매번 이겼네.”

“대련 때마다 이리 구경을 오시니 도미니크 황자가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지요.”

황후는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일부러 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글쎄요. 그런 의미로 드린 말씀은 아니었는데.”

로웨나 황비가 부채를 나붓나붓 흔들며 생긋 웃자 황후의 입매가 비틀렸다.

“자네 심사가 어지러운 것도 이해는 가네.”

“제가 무슨.”

“황태자가 응당 참가해야 하는 행사에도 얼굴을 못 비추니 말이야.”

“그건 몸이 약하셔서……!”

“그래, 그게 문제지.”

짧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로웨나 황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사이 나는 도미니크와 시선이 마주쳤다.

‘저하!’

반가움에 활짝 웃으니 도미니크는 잠깐 눈을 크게 떴다.

* * *

‘세니아나가 여긴 어떻게.’

도미니크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를 보좌하고 있던 부관 알베르가 속삭였다.

“황후가 일부러 만든 자립니다. 이번에도 반드시 패배하셔야 합니다.”

황제의 세 아들 중 자질만 따진다면 가장 뛰어난 쪽은 도미니크였다. 가능한 한 침묵하고, 황태자와 4황자 양 진영에서 전쟁을 치를 때 뒷면에서 세력을 키워야 한다. 이런 자리에서 눈에 띈다면 좋을 게 하나 없었다. 그때, 미카엘이 관중석으로 다가가 세니아나 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대와 나, 얼마 만이지.”

세니아나는 잠시 황후를 쳐다보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보름쯤 되었지요.”

“보름 만에 더 아름다워졌다고 하면 난봉꾼의 농이라 생각할 건가?”

그녀의 눈이 커졌다. 잠시 말을 고르고는 정중히 대답했다.

“숙녀를 대하는 신사의 예법이라 생각하겠습니다.”

“하하.”

미카엘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미카엘과 세니아나가 서로를 바라봤고, 도미니크의 손엔 힘이 들어갔다. 배 속에서부터 살의가 들끓었다. 전장에서도 느껴본 바 없는 음습한 감정이었다. 그때 가웨인이 세니아나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황궁의 훈련은 해가 저물고 나서야 시작하는가 봅니다.”

어서 시작이나 하라는 듯한 말에 미카엘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아아, 싹수 노랗다던 프렌시프의 둘째인가.”

“미카엘!”

황후는 당황해서 그를 다그쳤다. 세니아나도 ‘오, 오빠…….’ 하고 가웨인을 불렀다. 하지만 가웨인은 여상하게 미카엘의 말을 받아쳤다.

“저 또한 저하의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뭐라던가?”

가웨인은 세나아나의 두 귀를 막으며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제 동생이 듣기에는 파렴치한 말이라.”

“대부분 맞는 소문일 거다.”

황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미카엘, 그만하지 못하겠느냐.”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미카엘이 자신의 보좌로부터 검을 건네받으며 도미니크를 쳐다봤다. 도미니크의 눈빛이 평소와는 달랐다.

“눈빛 좋은데.”

“평소에 내 눈빛이 어땠기에.”

“같잖은 개새끼를 상대하는 듯했지.”

“제대로 봤어.”

미카엘의 표정이 달라졌다. 미소를 띠고 있긴 하지만, 눈엔 냉기가 서렸다.

“같잖은 개새끼에게 물리면 안 될 텐데, 형님.”

형님이란 단어에 유난히 힘이 들어갔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병사가 거대한 깃발을 흔들었다. 시합 시작의 신호였다. 도미니크는 들어오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순식간에 미카엘이 도미니크와 거리를 좁혔고, 방어하지 않은 옆구리에 검을 겨누었다.

챙! 도미니크가 몸을 비틀어 미카엘의 검을 막아 냈다. 동시에 공격. 빠른 속도로 치고 들어오는 검을 막아 내느라 미카엘은 몇 보나 밀려야 했다. 평소에 성의 없던 행동과는 전혀 달랐다. 미카엘은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그리곤, 멍하니 경기장을 보는 세니아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건가.”

“…….”

“형님 눈빛이 달라진 이유.”

“혀가 토막 나고 싶지 않으면 호칭 정정하지.”

“쓸데없는 말에 신경 쓰는 이유도 저거?”

이번엔 도미니크 쪽에서 선공했다. 재빠르게 미카엘의 반경 안으로 들어갔다. 검 끝으로 그의 어깨를 노리며 발을 걸어 균형을 무너뜨렸다. 순간.

“꺄악!”

시녀들 가운데서 비명이 터졌다. 미카엘의 귀 아래로 선혈이 흘러나왔다. 중심을 잃은 바람에 도미니크의 검을 완전히 피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도미니크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릴 일은 없겠군.”

“아, 이러면 내가 정말 개새끼가 되어 버리는데.”

웃으며 중얼거린 미카엘이 다시 검 자루를 말아 쥐었다. 부관 알베르는 관중석을 쳐다봤다. 황후의 얼굴이 새파란 것을 확인한 그가 신음을 흘렸다.

‘대체 왜 저러시는 거야!’

그것도 하필이면 오늘! 이건 황후가 세니아나에게 미카엘의 멋진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마련한 판이다. 도미니크 또한 그를 모를 만큼 순진하지 않다. 상황이 갑갑한 건 황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런 멍청한……!’

그때 로웨나 황비가 훗, 하고 실소를 흘렸다.

“아무래도 이번엔 제 추측이 맞나 봅니다, 폐하.”

“뭐야?”

“봐주고 있었던 게 확실하네요. 저러다 4황자의 존체가 상하시면 어쩐담~”

“자네는 미카엘이 다치기라도 바라는 모양이군!”

“그럴 리가요.”

로웨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세니아나에게 레모네이드를 챙겨 주었다.

“재미난 구경에 음료가 빠질 수야 없지.”

북부에선 황태자의 짝으로 북부 가문의 여식을 점찍어 놓았다. 원로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기에 황후의 속내를 알고도 저지할 수 없었는데, 이리 보니 묘안이 생긴다. 최악보다야 차악 쪽이 더 낫지 않겠는가.

‘도미니크와 프렌시프라.’

로웨나 황비의 눈빛이 반짝였다.

챙! 챙―! 난 미카엘과 도미니크의 검이 마주칠 때마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아니, 왜 연습 시합에서 진검을 쓰는 거야!’

내 친구, 다치면 안 되는데! 나는 무섭고 당황스러운데 가웨인은 코웃음을 쳤다. 그가 후‧비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둘 다 죽어 버려라.”

“그런 말을……!”

내가 깜짝 놀라서 쳐다보자 그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저 둘을 죽여 버릴 것 같아서.”

저 사람들이 오빠한테 뭔 잘못을 했다고…….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시합 구경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평화로운 게임 많잖아. 씨름이나 닭싸움 같은 거!

시녀들이 또 한 번 비명을 내질렀다. 미카엘과 도미니크가 맞붙고 떨어지자마자 그들 손이며 어깨에서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이번 부상은 꽤 심각했다. 입술을 꽉꽉 짓씹던 황후가 소리쳤다.

“그만!”

병사가 깃발을 흔들었지만, 도미니크와 미카엘은 검을 거두지 않았다.

“그만하라는 말이 들리지 않는가!”

대기해 있던 부관들이 각각 주인을 말렸다. 겨우 그들의 손에서 검을 떼어 냈고, 황후를 비롯한 시녀와 기사들이 미카엘에게 달려갔다.

“세상에, 어디 보자. 의사! 의사를 불러와라!”

황후가 진노해 소리쳤고, 모두 다급히 미카엘을 살폈다. 시합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돌아가기 위해 황궁 복도를 걸으면서 오빠들은 픽, 실소를 흘렸다. 두 사람 모두 다친 게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너무해…….”

내가 우뚝 멈춰 서서 중얼거리자 오빠들이 날 돌아보았다.

“뭐?”

“사람이 다쳤는데 그렇게 즐거워하시다니요. 가웨인, 나빠요!”

“형도 함께 웃었어!”

가웨인이 고자질하듯 란슬롯을 가리켰다. 그러자 란슬롯이 생긋 미소지었다.

“난 막내 앞에선 늘 웃고 있지.”

맞아, 란슬롯은 언제나 그랬다고.

“이 능구렁이가…….”

가웨인이 란슬롯을 노려봤다. 그러고 나에게 손을 뻗었으나 난 흥, 고개를 돌렸다.

“먼저 가세요.”

“왜?”

“……소피아 부인을 뵙고 갈게요.”

가웨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봤다.

“아닌 것 같은데.”

“마, 맞아요.”

“같이 뵙고 가자.”

란슬롯이 내 어깨를 감싸며 말해서 난 후다닥 그에게서 떨어졌다.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한 나는 도망치듯 재빨리 복도를 걸었다. 내가 간 곳은 훈련장이었다. 혹시라도 누가 볼까 봐 궁을 빙 둘러서 왔더니 이미 사람들이 대부분 사라진 뒤였다. 훈련장엔 오직 도미니크와 그의 부관뿐이었다. 경기장 안으로 내려가자 그와 부관 알베르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하, 어째서……!”

“그만. 잔소리는 나중에 듣지.”

“잔소리 들을 일인 건 아십니까? 황후가 진노했으니 이제 우리는…… 영애.”

나를 발견한 부관이 허리를 굽혔다. 나도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부관은 도미니크를 흘깃 쳐다보더니 자리를 떠났다. 도미니크의 손등의 상처가 생각보다 더 깊었다. 난 손수건을 꺼내서 그의 손에 둘러 주었다.

“가서 꼭 치료받으세요.”

“…….”

“영지에서 절 구해 주셨을 때도 이랬던 것 같은데…….”

“그랬죠.”

걱정이 되어서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왜 그러셨어요…….”

황후 성정에 미카엘 황자에게 창피를 준 도미니크를 그냥 둘 리 없다. 손수건 끝을 단단히 묶는 동안 도미니크는 날 가만히 바라봤다.

“당신 앞에서 지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다치는 것보다 이기는 게 더 좋으세요?”

탓하듯 묻자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좋네요.”

“…….”

도미니크는 천천히 손을 들어 손수건에 입 맞추며 작게 중얼거렸다.

“철부지처럼.”

“하나도 안 좋아요. 전 걱정했다고요.”

“당신 걱정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좋다고 하면 웃을 겁니까.”

“웃을 거예요. 마구!”

“그럼 그렇다고 하죠. 좋아요.”

좋아요. 그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가슴이 콩닥거릴 정도로 낮게. 나는 큼,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

“왜 자꾸 좋대……. 오해하게…….”

“제발 좀 해 줘. 그 오해.”

“정말!”

놀리지 말라고 인상을 쓰니 그는 가는 실소를 흘렸다. 내 뺨을 향해 뻗은 그의 손이 닿지 못하고, 다시 거두어졌다. 안타까울 만큼 천천히.

“미카엘 황자님만 바람둥인 줄 알았는데…….”

“그놈만 바람둥입니다.”

“저하께서도 못지않으세요.”

도미니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검을 챙기고 내게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함께 가자는 의미인 것 같았다. 난 그의 옆을 졸졸 따르면서 종알거렸다.

“여자친구 많으셨어요?”

“너뿐인데.”

“친구 말고 연인이요.”

“…….”

그가 어쩐지 당황한 것 같아서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있었구나! 하긴, 나이가 있으니까. 없으면 이상하지.

친구들끼리 연인 이야기로 밤을 새우는 게 늘 부러웠다. 난 히히 웃으며 그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언제 제일 처음 사귀셨어요?”

“……기억 안 납니다.”

“우와, 진짜 바람둥이였구나!”

“아니라니까.”

나는 그가 당황한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웠다.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연인과 손을 잡은 건요?”

“…….”

“포옹은?”

“…….”

“그럼, 그럼 입맞춤은 언제…… 꺅!”

도미니크가 날 벽에 가두고 빤히 쳐다보았다.

“지금인 걸로 해 둘까.”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수그린 채 웅얼거렸다.

“그, 제가, 잘못…… 미안합니다…….”

도미니크의 숨결이, 향기가, 어깨에 닿은 손목에서 느껴지는 온기마저 평소와는 너무나 달랐다.

“죄송…… 진짜로요.”

도미니크의 가는 실소가 이마에 봄바람처럼 내려앉았다. 실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도미니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말로만?”

“네?”

“미안하면 성의를 보여야죠.”

“지금은 돈이 없는데…….”

내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니,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젖혔다.

“됐습니다, 돈은.”

“그럼 뭘…….”

“영애의 시간을 받죠.”

그렇게 말한 도미니크가 드디어 비켜섰다. 난 후다닥 그에게서 떨어졌다.

“시간이요?”

“내일 데리러 가겠습니다. 상점 지구 사자상에서 봅시다.”

“내일? 사자상?”

어리둥절해서 바라봤지만, 그는 말없이 고개만 살짝 숙이고 경기장을 떠났다.

‘아니, 저는 곧 아카데미로 떠나는데요!’

* * *

시종이 아서와 황제 앞에 각각 찻잔을 내려놓았다. 황제가 연초를 물기 무섭게 아서는 다리를 꼬았다. 황제의 미간에 미미한 주름이 잡혔다.

“고약한 예의로군.”

“이 자리를 사석으로 착각하시는 듯하여 분위기를 맞추었습니다만.”

황제는 혀를 차고는 연초를 재떨이에 내던졌다.

“되었나.”

그제야 아서가 다리를 풀었다.

‘하여간에 프렌시프 놈들은.’

부자가 하나같이 황가의 문장을 하찮은 그림으로 여긴다. 황제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테르반은?”

“토설하였습니다.”

“이후 조치는 공에게 맡기지.”

“예.”

짧게 대답한 아서는 말없이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황제는 낮은 한숨을 흘렸다. 아서 프렌시프의 황궁 행차가 테르반의 고신 때문만은 아니라는 건 이미 예상한 바였다.

세니아나 프렌시프가 테르반의 뒷면을 알아낸 것, 그리고 황후의 요구로 황궁에서 포털을 펼치는 바람에 받은 피해. 그 점의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보그는 포기하지.”

“유통권 감찰까지 포기하시죠.”

“이 사람이……!”

전력석 마원은 쉽게 판매가 불가한 상품이었다. 황궁의 세세한 관리 감독을 받기 때문에 광산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개인의 것이라 부를 수 없다. 아서의 눈빛은 단호했다. 절대로 뜻을 물리지 않겠다는 태도에 황제는 침음을 흘렸다.

“좋네. 그리하지.”

“제 딸의 의사에 반하는 그 어떤 강요도 하지 않겠노라 약조해 주십시오.”

“불가!”

황제가 일갈했다. 황궁은 십만 군사 이상이 동원되는 전투에 성녀를 징집할 수 있었다. 아서는 그 징집령의 면제를 요구하는 것이다. 황제와 아서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쳤다. 아서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로젠카로튼 황가와 프렌시프의 결별이 기꺼운 일은 아닐 텐데요.”

“협박인가.”

“간언입니다.”

황제가 의자의 팔걸이를 내리쳤다. 쾅! 둔탁한 마찰음에도 아서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없었다.

“선례를 만들 수 없네.”

황제가 짓씹듯 말을 이었다.

“후대의 성녀들이 프렌시프의 성녀를 선례 삼아 황궁에 반하게 될 거란 말일세.”

“폐하께서 현명한 결단을 내리실 거라 믿습니다.”

“……백만 군사 이하로는 징집할 수 없는 것으로 하지.”

“오백만.”

“대륙 전쟁에서나 그만한 병력이 동원되지 않는가!”

“그 이하로는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서가 오만하게 웃었다.

* * *

황궁에서 돌아온 내내 난 머리가 복잡했다. 도미니크는 왜 상점 지구에서 만나자고 하는 거지. 교장인 이상 그도 아카데미에 내려가야 하지 않나. 다친 건 괜찮을까. 난 끄응, 신음하며 소파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도미니크는 여러모로 어려운 친구다, 정말.

‘일단 자러 갈까.’

밤이 늦었다. 내일 오전엔 도미니크를 만나고, 오후쯤 아카데미에 가야 하니 정신없는 일정이 될 거다.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전실을 가로질러 걷다가 인기척 소리를 들었다.

“아빠!”

황궁에 갔던 아빠가 이제야 귀가한 모양이었다. 그에게 인사하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다녀 오셨…… 술 드셨어요?”

취기가 돈 얼굴은 아니었으나, 근처에 다가가니 짙은 술 냄새가 났다. 아빠는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황제의 분풀이 상대를 해 주느라.”

“분풀이요?”

깜짝 놀라서 묻자 아빠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이겼거든.”

표정이나 목소리에선 변화가 없는데 어쩐지 으스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취하셨나 보네. 윤세나의 아빠가 취했을 때는 언제나 무서웠는데, 지금의 아빠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절대로 나를 때리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아니까.

“어디서 이기셨는데요?”

“게임 같은 거랄까.”

“우리 아빠 최고.”

나는 아하하, 웃으며 말했다. 방으로 모시고 들어가려는데 마침 란슬롯과 마주쳤다.

“내가 할게.”

그는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가 아빠의 팔을 잡았다. 우리는 아빠를 방안 개인실 소파에 앉혀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일로가 찬물과 얼음, 숙취에 좋은 토마토를 가지고 왔다. 아빠가 토마토를 찍은 포크를 내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러자 그가 낮게 웃었다.

“여전히 인사를 잘하는군.”

“제가요?”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막만 한 게 늘 인사하며 다녔지.”

어릴 적의 이야기인가 보다. 내가 납치에서 돌아온 뒤로 아빠는 영지를 거의 찾지 않았으니, 아마도 진짜 내 어릴 적의 이야기인 것 같았다. 란슬롯이 소파에 앉으며 픽 실소를 흘렸다.

“할 줄 아는 말이라곤 ‘고맙습니다’ 한 마디뿐이었으니까요.”

“그랬나요?”

“가웨인에게 얻어맞고 엉엉 울면서 고맙습니다, 인사할 때는 기가 막혔어.”

아기 때 일인데도 창피해져서 머리끝을 꼼질꼼질 매만졌다. 란슬롯이 내 앞에 물잔을 내려놓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다음으로 한 말이 뭔지 알아?”

“알아요, 아빠한테 들었거든요.”

“뭔데?”

“할아버지요.”

란슬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를 회상하는지 눈빛이 다정해졌다.

“그때 넌 특이했지.”

“특이했다고요?”

“매일 같이 회의장에 쳐들어가서 조부님을 찾으며 울었잖아.”

헉! 난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런 짓을 했단 말이야? 당황한 표정으로 란슬롯을 보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겁은 많은 주제에 가웨인도 무서워하는 조부님을 잘 따랐어.”

“할아버지가 제게 잘해 주셨나요?”

“글쎄.”

란슬롯이 의뭉스럽게 말을 늘이자 아빠는 물을 마시며 코웃음 쳤다.

“노인네는 당황했다.”

“아하.”

“착공식에서 노인네 예복에 소변을 눴을 땐 볼 만했지.”

난 또 한 번 숨을 들이켰다.

왜 그랬어, 어린 나! 아니, 아기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내가 어쩔 줄을 몰라 하니까 아빠가 무릎을 두드렸다. 누우라는 뜻인 것 같았다. 란슬롯을 힐끔 쳐다보니 그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영화에서 아버지가 지적 장애를 가진 딸을 무릎에 누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장면을 본 적 있었다. 선생님에겐 말하지 못했지만, 정말로 부러웠었다.

‘이런 어리광은 취하셨을 때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실례할게요.”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무릎을 벴다. 아빠가 내 머리칼을 다정히 쓰다듬었다.

“아빠.”

“그래.”

“또 해 주세요.”

“무얼?”

“옛날얘기요.”

“흠…….”

“엄…… 마와 저는―”

선생님을 엄마라고 부르는 건 아직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전 오두막에서 산 게 아니었나요? 언제 프렌시프 성으로 간 거예요?”

“미아는 몸이 약해서 잔병치레가 잦았어. 어린 네가 옮지 않도록 그때마다 성에 데려갔지.”

“그렇군요.”

“가웨인과 자주 싸웠던 기억이 나는군.”

“왜요?”

이번엔 란슬롯이 말했다.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너를 부러워했던 거지.”

하긴, 가웨인과 나는 몇 살 차이 나지 않는다. 그때는 그도 일곱 살쯤이었을 테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서 가웨인이 저를 때렸군요!”

그러자 문밖에서 가웨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는 황당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뭔데, 나 지금 누명 쓰고 있는 건가.”

“범행이 밝혀진 거지.”

란슬롯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고, 가웨인은 인상을 쓰며 그의 옆에 앉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세니아나의 머리를 쥐어뜯어 놓은 적도 있잖아.”

내가 정말 그랬냐는 눈빛으로 가웨인을 보자 그는 미간을 좁혔다.

“그건……!”

가웨인은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난 궁금해져서 “왜요? 네?” 하고 몇 번이나 물어봤다.

“하녀들이 네 머리를 새싹 같다고 해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웨인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슥, 눈을 피했다.

“진짜 이파리 같은지 염소에게 먹여 봤지.”

아빠가 내 이마를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발견했을 땐 이미 반쯤 먹힌 후였고.”

“너무해…….”

나는 울상을 지은 채 중얼거렸다. 가웨인은 당황했고, 란슬롯이 고소를 머금었다. 아빠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손길이 다정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염소가 배탈 나지 않았을까요…….”

가웨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너무하다는 거야?”

“그럼요.”

내가 당연한 말을 묻는다며 고개를 끄덕이니 가족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네. 가웨인이 너무했지.”

란슬롯의 말에 가웨인이 어깨를 으쓱하고 대꾸했다.

“염소가 병났단 얘기는 없었잖아.”

“다행이에요!”

그러고 난 아빠의 무릎에 얼굴을 비볐다. 아빠는 그런 날 귀엽다는 듯 바라봤다. 집 안의 온도는 적당히 서늘했고, 가족들과의 대화는 즐거웠으며 란슬롯이 종종 집어 주는 토마토는 달콤했다. 행복한 하루의 마무리였다.

‘어제 마무리는 좋았는데, 오늘 시작은 왜 이럴까요.’

도미니크를 만난다고 하면 가족들이 절대로 못 나가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몰래 상점 지구로 나왔는데…….

“처음 보는 사이에 이런 말씀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웬 껄렁한 남자가 자꾸 주변을 맴돌았다. 난 한숨을 내쉬고 똑같은 말을 세 번째로 반복했다.

“그만 가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 이래 봬도 괜찮은 놈이에요.”

“궁금하지 않다고도 이미 말씀드렸는데요.”

“제가 원래 이런 놈이 아닌데, 정말 놓치기 싫은 분이셔서. 이름만이라도 알려 주십시오.”

전형적인 작업 멘트에 난 인상을 쓰고 그를 쏘아보았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니까요.”

“연인? 남편?”

“…….”

“둘 다 없으면 제게 기회를 주시는 걸로.”

남자가 내 손목을 잡았을 때였다.

“컥!”

“영겁을 기다려도 네 차례는 없어.”

도미니크가 남자를 순식간에 제압해 벽으로 밀어붙였다.

“곱게 꺼져.”

“크흑…….”

“죽고 싶지 않으면.”

서늘하게 덧붙인 말에 남자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갈 테니까……!”

도미니크가 그의 머리를 벽에 짓이기듯 누르곤 떨어졌다. 그의 손에서 풀려난 남자는 헐레벌떡 자리를 피했다. 나에게 하는 행동과는 다른 모습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다치게 한 것도 아니고 계속 귀찮게 굴던 사람을 처리해 주어 솔직히 조금 고마웠다. 도미니크가 날 쳐다봤다.

“가시죠.”

“아, 네!”

얼른 그를 따라갔다. 평일 오전인데도 사람들이 정말로 많았다. 난 인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그의 옆에 바짝 붙어 걸었다. 상점 지구 안에 들어가려나 했는데, 외려 그는 외곽으로 나가고 있었다.

‘어디 가려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도미니크가 재빨리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코가 깨졌을 거다.

“아, 감사합니다.”

도미니크가 내 손을 쳐다보았다.

“왜요?”

“……아닙니다.”

그렇다기엔 너무 유심히 보시는데요.

난 내 손바닥을 매만지다가 도미니크에게 물었다.

“우리 어디 가요?”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까?”

“으음,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잠깐 고민했지만 황도는 통 모르겠다.

“저하는 어디 가고 싶으신데요?”

“선택권을 내게 주면 안 될 텐데.”

그는 짓궂은 눈빛으로 날 보았다.

“어디기에?”

“단둘이서 있을 수 있는 곳.”

“네?”

“좁고 어두우면 더 좋겠죠.”

도미니크의 말을 종합해 보던 난 눈을 깜빡였다.

“아! 저 알아요, 그런 곳!”

그러자 도미니크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난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가요.”

그러고 도미니크를 눈앞에 있는 골목으로 끌고 갔다. 사람 눈을 피해 포털을 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주변이 바뀌어 있었다.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어둡고 좁은 곳으로. 주변을 둘러본 도미니크가 미간을 좁혔다. 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말했다.

“여기예요, 저하가 말씀하신 곳!”

“……여기가 어딘데요.”

“저희 집 창고요.”

“…….”

“은밀히 하실 말씀이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날 오늘 불러낸 게 아닌가. 그는 아무래도 황궁에선 못할 말을 내게 하려는 것 같았다.

“여긴 본저와 멀어서 우리 얘기를 아무도 듣지 못할 거예요.”

시트론과 저택을 탐험할 때 찾아냈지. 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편히 말씀하셔도 돼요.”

“…….”

“……?”

“일단 나갑시다.”

말은 않고? 여기가 마음에 안 드나? 나는 기가 죽어서 웅얼거렸다.

“하지만 여기만큼 저하가 말씀하신 조건에 맞는 곳은…….”

“정정하겠습니다.”

그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고 이어 말했다.

“차와 음료를 팔고, 꽃과 조명이 함께 있는 곳.”

“…….”

“프렌시프 저와는 멀리 떨어진.”

그런 곳이라면……. 나는 눈을 도르륵 굴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카페?”

“그쪽이 낫겠습니다. 황도 외곽으로 가죠.”

그의 말에 나는 몇 번이나 속으로 목적지를 생각했다.

황도 외곽. 황도 외곽.

눈을 떴을 땐 커다란 물푸레나무가 곳곳에 보이고, 소담한 들꽃으로 가득한 숲이었다.

여기가 맞나?

도미니크를 힐끔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제법 능숙하게 길을 찾았다. 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 나는 조그만 탄성을 흘렸다. 번화가에 세워진 커다란 카페는 아니었지만, 여행지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곳이었다.

‘역시 관광 대국!’

다른 나라처럼 살롱이 카페 역할을 대신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번듯한 카페가 있었다. 아몬드 색 밝은 나무로 지어진 건물. 창이 모두 열린 테라스에 놓인 새하얀 테이블과 테이블을 감싼 따뜻한 색의 격자무늬 차양. 가게 내부에선 기분 좋은 오르골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멋져…….’

난 고즈넉한 분위기의 카페가 마음에 쏙 들었다. 도미니크와 함께 테라스에 앉아 있자니 가벼운 차림의 사내가 다가왔다. 도미니크처럼 화려한 인상은 아니지만, 다정하고 부드럽게 생긴 호감형의 남자였다.

‘딱 이런 카페를 운영할 것 같은 사장님이네.’

도미니크는 늘 그렇듯 무표정하게 말했다.

“나는 대충.”

그러자 남자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대충이 가장 어려운 겁니다, 저하.”

나는 눈을 깜빡이며 도미니크를 보았다.

“아는 사이세요?”

“악연이죠.”

남자는 섭섭하다고 말했지만, 전혀 섭섭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도미니크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나를 보았다.

“저쪽도 칼잡이입니다.”

“칼잡이면…… 기사?”

남자가 한 손을 가슴에 얹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과거에 잠시 저하의 부대에 몸담았었지요. 다비드라고 합니다.”

“세니아나 프렌시프예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그가 내 손등에 입 맞추려 하자 도미니크가 내 손을 빼냈다.

“차나 가져오지.”

다비드는 쿡쿡 웃으며 내게 원하는 차종을 물었다.

“시원하고 달콤한 게 마시고 싶어요.”

“아이스티와 레모네이드가 있습니다.”

“그럼 아이스티로 할게요. 홍차가 마시고 싶어요.”

“예.”

다비드가 떠나고 나는 신이 나서 도미니크에게 말했다.

“정말로 기사였나요?”

“저는 기사이자 황자죠.”

“아니요, 저분이요.”

우리 집 기사들과는 엄청 다르다. 소설 속에 나올 것처럼 달콤하고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고레일이 좀 비슷하긴 한데.’

하지만 고레일도 저 사람과 비교하면 딱딱한 편이었다. 상상만 하던 기사를 직접 보니 마치 연예인을 본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헤헤 웃으니 도미니크는 인상을 찡그렸다.

“느물거리는 놈이 취향이십니까?”

“으음……. 굳이 따지면 다정한 쪽이 좋기는 하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웃고, 잘 먹는 사람이면 더 좋고요.”

어느새 다비드가 차를 내와서 난 이슬이 어린 컵에 손을 뻗었다. 그런데 도미니크가 나보다 먼저 컵을 잡았다. 그리곤 내 앞에 정중히 내려놓았다.

“드시죠, 레이디.”

입꼬리를 끌어당기는 그를 보고 나는 눈을 깜빡였다.

으응? 아까 다비드가 했던 말과 비슷하지 않나? 도미니크는 내게 늘 정중했지만, 저토록 달콤하게 웃지는 않았다.

‘때때로 그런 적이 있기는 하지만 날 놀릴 때나 그랬는걸.’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닌지 다비드가 고개를 돌리고 콜록, 헛기침을 했다.

“저는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군요.”

둘이 전우 아니었어? 할 얘기가 많을 테니까 내가 피해 줘도 되는데……. 그런 눈으로 보니 다비드는 생긋 미소지었다.

“목숨이 하나라서요.”

“……?”

“그럼.”

다비드가 떠나고 난 도미니크를 쳐다봤다.

“제가 있어서 불편한 걸까요?”

“눈치가 빠른 거죠.”

“네?”

“드세요.”

도미니크가 티 푸드로 나온 밀푀유를 접시째 내 앞에 놔 주었다.

“저하는요?”

“드시는 것을 보는 게 제 기쁨입니다.”

“…….”

갑자기 다정해지니까 어색하다. 나는 밀푀유를 포크로 자르며 그를 힐끔힐끔 보았다.

“……저는 왜 부르신 거예요?”

“그냥.”

“네? 중요한 말씀을 하시려는 게 아니라요?”

무슨 일일까 싶어서 엄청 긴장했는데!

난 억울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도미니크는 찻잔을 잡으며 태연히 말했다.

“할 말이 있기는 합니다.”

“뭔데요?”

“아카데미로 돌아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그맣게 자른 밀푀유를 입안에 넣으려던 난 그대로 굳어 버렸다.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이제 개학인데?

‘설마 나 이번에야말로 제적당한 건가?’

황당하고 당황스럽고, 나도 모르는 새에 무엇을 또 잘못한 건가 싶어 머리가 새하얘졌다.

‘어, 어떡하지.’

나는 떨리는 손으로 포크를 내려놓으려다가 잘못해서 밀푀유를 치마에 흘렸다.

“아!”

밀푀유에 든 오렌지 필링이 흰 치마에 떨어졌다. 도미니크가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놀라서 어깨를 흠칫, 좁히고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도미니크가 손수건을 꺼내 치마에 떨어진 필링과 밀푀유 부스러기를 닦아 냈다.

“오해를 하신 듯한데.”

“네?”

“제적이 아니라 방학의 연장입니다.”

“네에―?!”

눈을 깜빡이던 나는 또 되물었다.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할아버지까지 와서 제적당할 뻔한 걸 무마시켰는데, 이렇게 제적당하면 면목이 없다.

“깜짝 놀랐잖아요!”

순간 억울함에 나도 모르게 그의 가슴을 때렸다. 그러다 정신이 돌아와서 헉, 숨을 삼켰다.

“죄송합…….”

너무 편하게 대해 줘서 정말로 편한 사람으로 착각할 뻔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던 나는 그의 표정을 보고 손가락을 꼼질꼼질 얽었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귀여워서.”

저런 얼굴로 저렇게 웃으니까 가슴이 콩닥거린다.

‘어쨌든 탓하지는 않으려나 보다.’

나는 한숨을 흘리고, 그에게서 손수건을 받아 마저 치마를 닦았다. 그 사이 도미니크가 자리로 되돌아갔다.

“왜 방학이 연장된 거예요?”

“황후 폐하의 명으로 요리 아카데미를 비롯한 전 학술원에 모두 공문이 내려갔습니다.”

“폐하께서 왜…….”

“16년 만에 뜨는 쌍월을 가족과 함께 감상하라는 국모의 배려, 라는 게 표면적 이유죠.”

그럼 배려는 핑계고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걸까.

‘아, 참.’

황후 하니까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다친 건 어떠세요?”

“괜찮습니다.”

“황후 폐하와는…….”

미카엘이 다쳤을 때 황후는 도미니크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았다. 사실 상처보다도 그 부분이 더 걱정된다. 도미니크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처음부터 저를 혐오하셨으니 이제 와 견제하신대도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혐오요?”

“눈 때문에.”

“눈이 어째서요?”

그의 청회색 눈동자에 햇살이 스며들었다. 선생님의 눈동자도 비슷한 색이었다. 맑고도 오묘한 회색. 난 빨대로 얼음을 저으며 중얼거렸다.

“예쁜데…….”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영애뿐일 겁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왜? 저렇게 신비롭고 오묘한 눈을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도미니크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부정한 색이거든요.”

“부정한 색?”

“대륙 전쟁에서 길라게온에 검을 겨눈 자들이 대부분 저와 같은 색의 눈을 가지고 있었죠.”

‘대륙 전쟁이라면…….’

왕국 연합(성국)과 길라게온이 십 년이나 벌인 전쟁. 성국은 대륙에서 가장 번성한, 아니, 번성했던 종교인 아탈란 교의 중심이었다. 아탈란 교는 마력을 부정한 힘이라고 규정했다. 마력은 악신이 내린 권능으로, 아탈란의 품에서 정화해야만 신성력이 된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니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대부분 성국으로 향했겠지.’

힘을 가진 자들을 모두 모았으니, 그들의 세가 제국에 이를 정도로 거대해졌다. 제국이 그 타개책으로 생각한 것이 마법사의 육성이었다. 성국이 반발한 건 당연한 일. 그 때문에 벌어진 전쟁이 바로 대륙 전쟁이었다.

‘선생님이 전선에 나섰던 전쟁도 그거였고.’

나는 도미니크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모후께서 성국에서 넘어온 신관이셨나요?”

“그렇습니다. 제 모친을 후(后)라 부를 순 없지만.”

‘성국의 가호를 받으면 자식의 눈동자마저 회색이 되나 봐.’

선생님의 피를 이은 내 눈이 붉은색인 걸 보면 모두 그런 건 아닌 모양인데.

황자에게는 불행한 일일 수도 있겠다. 대륙 전쟁은 제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뼈아픈 피해를 입었다. 전쟁에 동원된 군사 중 절반이 죽거나 불구가 되었다.

게다가 길라게온에도 아탈란을 믿는 사람들의 수가 꽤 되었다. 아탈란 교의 재건 운동을 지원한 귀족들도 제법 있었다. 그래서 중앙은 삼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아탈란의 신자들을 솎아 내야 했다.

‘올리비에 공작도 아탈란을 믿었다고 하고…….’

“저하께선 아주 특별한 색을 가졌군요.”

“…….”

“어떤 세상에는 이런 전설이 있거든요.”

도미니크는 가만히 내 이야기를 경청해 주었다.

“불사조라는 영물은 자신의 몸을 태워 재가 되는데, 그 재 속에서 다시 태어난대요. 그렇게 영원을 사는 거예요.”

“…….”

“저는 그 재가 항상 궁금했어요. 어떤 색일까, 하고.”

난 그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런 색이 아닐까요?”

“…….”

“맑고, 투명해서 안타까운 잿빛. 계속 보고 싶은 그런 색.”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어쩐지 조금 떨리는 것 같던 그의 눈동자가 움직임을 멈췄을 땐 눈매가 나붓이 휜 뒤였다.

“내가 지금 당신을 끌어안는다면 말입니다.”

“네?”

도미니크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나는 흠칫, 놀라 어깨를 좁히던 때에 그가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모두 네 탓이야.”

“……?”

아니, 그게 왜 내 탓이란 말인가.

나는 기가 막혀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 통신석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아, 오빠다!”

기사도 없이 몰래 나온 걸 들켰나 봐!

내가 당황하자 도미니크가 몸을 일으켰다.

“가죠. 데려다드리겠습니다.”

빨리 돌아가야 덜 혼날 것 같아서 나는 냉큼 그의 손을 잡았다.

* * *

도미니크의 행적을 조사한 보고서가 황후에게 올라왔다. 한 손으로 양피지를 들추던 그녀의 입매가 비틀렸다. 도미니크와 세니아나가 황궁에서 따로 시간을 가진 건 두 번. 소피아 부인을 간병할 적엔 도미니크가 그녀와 함께 프렌시프 저를 방문한 적도 있었다.

“공은 피에로가 돌리고, 돈은 다른 놈이 챙기는 꼴인가.”

황후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던 시녀장 올슨이 물었다.

“어찌 심기가 불편하십니까, 폐하.”

“미카엘과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전 학술원의 방학을 연장하라 명했는데, 그 덕을 다른 놈이 누리고 있구나.”

황후가 쯧, 혀를 차며 찻잔을 들었다. 올슨은 황후의 뒤에서 그녀의 팔을 주물렀다.

“진정 사비에르와의 혼약을 깨실 겁니까?”

“탐이 나.”

“프렌시프 영애가 말이지요.”

톡, 톡. 검지 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그녀가 낮게 읊조렸다.

“이대로 두어선 안 되겠다.”

도미니크는 지지 기반이 부실하긴 하지만, 황제가 가장 귀애하는 아들이었다. 그가 세니아나와 결혼해서 프렌시프를 등에 업는다면 황태자보다 귀찮은 적이 될 것이다.

‘아카데미로 가면 그놈이 영애에게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르지.’

그전에 미카엘과 붙여 두어야 한다. 황후가 시녀장 올슨을 쳐다보았다.

“프렌시프 저에 서신을 보내라. 내가 내일 영애를 만나야겠다고 아주 정중하게 전해.”

“예.”

올슨이 고개를 수그렸다.

* * *

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꼬물꼬물 얽었다. 가웨인이 검을 검집에서 꺼냈다 도로 넣길 반복했다. 날이 빠져나올 때마다 스르렁, 서늘한 마찰음이 생겼다. 늘 다정하게 웃고 있던 란슬롯의 얼굴에선 표정이 사라졌다.

“잘못…… 잘못했…….”

딸꾹! 갑자기 더운 데서 찬 데로 이동한 데다, 긴장까지 잔뜩 하고 있었더니 딸꾹질이 나왔다. 그러자 창밖을 보고 있던 오빠들이 눈을 크게 뜨고 날 돌아보았다. 가웨인이 내게 다가왔고, 란슬롯은 하녀에게 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하녀가 얼른 물을 가져오자 란슬롯이 내 손에 컵을 쥐여 주었다.

“자, 세니아나.”

“…….”

난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물을 마셨다. 그러자 가웨인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를 잘못했다는 거야.”

“호위 없이 나가서…….”

란슬롯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잘못했지.”

나는 기가 죽어서 어물어물 말했다.

“그리고 황족과 사사롭게 만나는 건데 말을 안 했으니까…… 잘못했어요…….”

가웨인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화…… 안 나셨어요?”

“너한테는.”

그럼 왜 그렇게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

‘그러고 보니 도미니크와 만났다는 얘기를 하기 전부터 기분이 안 좋았지.’

만났다고 자백한 뒤로는 더더욱. 가웨인이 도미니크의 멱을 따 버리겠다고 분통을 터뜨릴 땐 진짜로 무서웠다. 난 오빠들이 보고 있던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으응?’

여름인데 뭘 저렇게 열심히 태우고 있을까? 편지 같아 보이는데.

하인들이 지푸라기를 모아서 편지를 잔뜩 태우고 있었다. 가웨인이 편지를 태우는 것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죽여 버릴까.”

나를? 나는 울상을 짓고 치맛자락을 꽉 잡았다.

“역시 제가 뭘 잘못한 거지요…….”

“아니라니까.”

“하지만 계속 화가 나 있고…….”

“아, 정말.”

가웨인은 울컥 인상을 썼다. 난 겁을 먹고 눈을 꽉 감았는데―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뭐라고?

란슬롯이 내게 컵을 받으며 중얼거렸다.

“귀여운 건 잘못이 아니지.”

“누가 잘못이래? 난 들러붙는 하이에나들을 죽이고 싶은 거라고.”

“동감이지만 처리하려면 티끌조차 남기지 마라.”

“당연하지.”

저게 무슨 말이지, 고민하던 난 점차 얼굴이 붉어졌다. 사용인들 보기 민망하다.

‘이 사람들은 판단력을 잃었어!’

제 눈의 안경이라는 말이 이런 걸까. 내가 핏줄이니까 오빠들 눈에는 아주 쬐―끔 귀여워 보일 순 있겠지만 이건 심하다.

‘어쨌든 나한테 화가 난 것 같진 않으니까…… 도망치자.’

부끄러워서 여기엔 더 못 있겠다. 마침 황궁에서 초대장이 도착했다길래 나는 그 핑계로 재빨리 방으로 갔다.

방문을 닫자마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함께 서재에 있다가 돌아온 마릴린과 시트론이 킥킥 웃었다.

“정말…….”

내가 울상을 지으니 시트론은 빙그레 웃었다.

“도련님들께서 아가씨를 아끼시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뜻인 것 같아서 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과해. 누가 날 귀엽게 본다고.”

그러자 마릴린이 펄쩍 뛰며 말했다.

“아니에요! 쌍월 축제 무도회에서 에스코트를 하고 싶다고 편지가 잔뜩 왔…… 헉.”

말하다 말고 마릴린이 움찔, 굳어졌다. 난 의아함에 물었다.

“잔뜩?”

마릴린은 마른침을 삼키고, 어색하게 웃었다.

“―왔, 왔으면 좋겠네요~”

참, 에스코트……. 아무도 신청 안 하면 어떡하지. 쌍월 축제 무도회는 이성과 동반 입장해야 한다던데. 걱정스러운 얼굴로 황후의 서신을 펼치는데, 마릴린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큰일 날 뻔했네…….”

“조심하세요.”

시트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서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황후의 편지엔 긴한 청이 있으니 내일 꼭 황궁에 들러 달라고 적혀 있었다. 황후가 내게 할 청이라.

‘어쨌든 황궁에 가 보긴 해야겠네.’

황후의 편지는 아주 간곡했다. 이렇게나 저자세로 나오는데 거절할 순 없었다.

이튿날, 나는 준비를 마치고 황후궁에 들어갔다. 황후궁의 시녀장은 나를 평소에 가는 정원이 아닌 귀빈 응접실로 이끌었다. 타국의 사신이나 금좌 11석, 그리고 사비에르. 오직 그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문 안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과연 귀빈들을 응접하는 곳.’

가구부터 액자 하나에 이르기까지 호화롭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재질이 뭘까 궁금할 정도로 반질반질 고급스러운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향초에선 짙은 백단향이 풍겼다. 안경을 낀 채 책을 읽던 황후가 고개를 들었다.

“왔구나.”

“폐하를 뵙습니다.”

“초대에 응해 주어 고맙네. 앉게.”

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테이블에 놓인 책을 흘끔 쳐다보았다.

“영애를 기다리는 동안 무료해서 말이지.”

황후쯤 되는 사람이 미리 와서 나를 기다렸다는 건 엄청난 환대였다.

“서둘러 입궁할 것을 그랬습니다.”

“무얼.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라 즐거운 시간이었어.”

“어떤 책인가요?”

“삿된 자들의 기록이지.”

삿된 자. 문득 선생님이 삿된 자들에게서 나를 지키며 소리쳤던 말이 기억났다.

[사라져! 이 아이는 더 이상 제물이 아니야!]

‘맞아, 그건 내가 제물이었다는 말이야.’

프렌시프의 핏줄을 제물로 삼을 간 큰 사람은…….

‘납치범.’

나와 선생님을 납치했던 그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내 운명을 빼앗았다는 약탈자 세니아나. 나는 미간을 좁히고 책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 책이 있으면 납치범들과 약탈자 세니아나의 정체에 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폐하.”

“그래.”

“저도 그 책을 읽어 보고 싶은데. 어디서 구할 수 있나요?”

황후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황족만 열람할 수 있는 기록이라네.”

내가 아쉬운 표정을 짓자 황후는 낮은 침음을 흘렸다. 그녀가 손을 내저어 시녀들을 물렸다.

“영애에게 청할 일이 있어.”

그러고 책의 커버를 매만졌다.

“이건 그 보답으로 하지.”

“하지만 그건 황족만이…….”

“영애와 나 사이에 비밀이 하나쯤 생겨도 좋지 않겠나.”

내 손등을 쓰다듬으며 그녀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내용부터 듣지요.”

“미카엘이 근래 몸살이 잦네.”

“황자님께서요?”

“어릴 때부터 유난히 몸이 약한 아이였지. 지금은 많이 건강해졌지만, 어미로서 마음이 편치 않아.”

“…….”

“영애도 알 걸세. 황족이 병약하다는 게 어떤 뜻인지.”

그건 황족을 자리에서 밀어낼 명분이었다. 지금까지도 자주 앓는 황태자가 그렇게 미카엘에게 밀리지 않았던가. 황후는 황태자의 건강을 핑계로 그의 일을 제 아들에게 대신하게 하였다.

“궁인이나 의사가 드나들면 내 아들의 몸 상태를 의심하는 자들이 생기겠지.”

“제가 대신 황자님을 살피길 바라시는 건가요?”

“영민하구나.”

황후는 상냥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쌍월 축제에서 대련하기 전까지만 내 아들을 보신시켜 주게.”

“좋지 않은 소문이 날 겁니다.”

“쌍월 축제 때문에 포털이 필요할 일이 많다네. 영애가 그 아이를 돕는 것이라 한다면 그리 어색한 변명은 아니지 않겠나.”

“저보다는 사비에르 영애가 적임자일 텐데요.”

황후는 소파에 몸을 깊게 기대고, 치맛자락을 매만졌다.

“그 아이는 요양 중이라더군.”

‘포털을 튕겨 냈던 일 때문일까.’

튕겨 낸 나도 며칠 몸이 좋지 않았으니, 튕겨 나간 사비에르 쪽은 피해가 막심했을 수도 있겠다. 난 잠시 고민했다. 황족만 열람 가능한 문서를 내게 빌려주는 건 황후에게도 위험한 일이었다. 설혹 나와 사이가 틀어진다더라도 쉽게 말하진 못할 거다.

무엇보다 납치범과 약탈자의 정보가 필요했다. 이미 한 번 프렌시프의 핏줄을 납치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간 큰 자들이 두 번은 못 할 거라 장담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야 일이 생겨도 타개책이 생길 거야.’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이자 황후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는 그날 바로 미카엘 황자의 보좌 자격을 받았다.

똑똑. 미카엘의 방문을 몇 번이나 노크했는데도 응답이 없다.

‘안 계시나.’

약과 음식을 놓고 가야 하는데.

‘궁인들 눈에 띄기 전에 그냥 돌아가야겠다.’

그렇게 몸을 돌리려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미카엘은 가벼운 하의와 로브만 걸치고 있었다. 로브 사이로 얼핏 맨가슴이 보여서 나는 움찔, 하고 물러났다.

“폐, 폐하께서 약을 전하라셔서…….”

민망해!

“안녕.”

“아, 네! 황자님을 뵙…… 습니다.”

놀라서 인사하는 것도 잊고 있었네.

그는 나른한 눈빛으로 쟁반을 잠시 보고, 중얼거렸다.

“시녀가 할 일을 귀한 영애님께서 대신하시는군.”

“폐하께서 저하의 장래에 염려가 크십니다.”

너희 어머니가 몰래 간호하라고 하셨어, 라는 뜻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 목을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모후께서 재밌는 일을 하시는군.”

“……네?”

“들어와라.”

거절할 새도 없이 그에게 끌려 들어갔다. 그의 방은 어두웠다. 심홍색의 두꺼운 커튼이 창을 가리고 있어서 빛은 커튼 틈으로 조금 새어 들어올 뿐이었다.

다인용 소파에 길게 누운 미카엘이 눈을 감았다. 난 살그머니 소파 테이블에 쟁반을 올려 두었다. 그러다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아까는 당황했고, 방에 들어와선 잘 보이지 않아 몰랐는데 낯빛이 창백했다.

“저하.”

“…….”

“저하.”

난 그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일어나 보세요. 약을…… 앗!”

죽은 듯 조용하던 미카엘이 내 손목을 끌어당겼다. 나는 깜짝 놀라서 굳어졌고, 그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만 종알거려.”

열이 올라 뜨거워진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등줄기로 오싹, 소름이 밀려왔다.

“…….”

그런데.

“가만히, 좀…….”

눈매가 천천히 일그러지더니 말을 잇지 못했다.

“저하.”

“…….”

그는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큰일 났다. 상태가 심각하다.

‘간호하는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야.’

난 그의 손을 뿌리치고 얼른 통신석을 잡았다. 황후가 사전에 알려 준 코드를 연결하자 이내 시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씀하십시오.]

“상태가 심각하세요! 당장 의사를 불러야 해요!”

[약은 드셨습니까?]

“그건 아직…….”

[약을 드신 후 상황을 보지요.]

“네?”

[폐하께서 절대 의사를 보내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그러고 통신이 끊겼다. 아니, 무슨 이런 사람이 다 있어! 미카엘은 한 눈에도 위중했다. 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란 말이다. 어미로서 걱정된다더니 다 허풍이었나.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다시 통신석을 들었다. 동시에 그가 내 손을 잡았다.

“소용없다.”

“저하.”

“자식보다 정쟁이 우선인 분이시니까.”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 이마에 맺혀 있던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지나 턱 끝에 맺혔다. 미카엘이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안 되겠어. 일단 뭐라도 해야 해.’

난 얼른 몸을 일으켰다.

몇 시간 후. 나는 미카엘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다행이다. 열이 많이 내렸어.’

몇 시간이나 고생한 탓에 나는 기가 쭉 빠졌다.

‘그래도 약 효과는 좋네.’

황후가 준 약을 먹이고 내내 간호를 했더니 이제 슬슬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난 물수건을 다시 그의 이마에 올려 두고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엉망이었다. 미카엘을 침대로 질질 끌고 오느라 떨어진 로브와 실내화. 열을 내리겠다고 가져온 수건, 대야. 떨어진 약 봉투. 허둥지둥 뛰어다니다가 부딪쳐서 깨진 화병. 한숨을 내쉬고 떨어진 물건을 줍기 시작했다. 이렇게 엉망인 방을 보면 시종들이 의심할 거다.

‘미카엘이 아픈 건 비밀이니까.’

그래서 간호 용품도 모두 미카엘의 부관에게 부탁해서 가져왔다. 약 봉투를 줍던 나는 아! 하고 작게 소리쳤다. 발등이 엄청 쓰라리다.

“화병이 떨어질 때 베였나 봐…….”

정신이 없어서 아픈 줄도 몰랐어. 울상을 짓고, 손수건으로 엉겨 붙은 피를 살살 닦았다.

“협탁 안에 약이 있다.”

“저하! 정신이 드세요?”

그가 몸을 일으키려고 해서 난 후다닥 침대로 달려갔다.

“누워 계세요.”

미카엘이 날 빤히 쳐다보았다.

“이상하군.”

“제가요?”

“영애의 상처가 우선 아닌가.”

“죽다 살아난 사람이 우선이죠.”

내가 다행이라며 웃으니 그는 픽, 실소를 흘렸다.

‘진짜 야하게 생겼어.’

도미니크가 단정하고 날카로운 인상의 늑대 같다면, 이 남자는 농염한 비늘을 가진 독사 같았다. 보고 있으면 자꾸만 란슬롯이 떠오른다. 그래서 쓰러졌을 때 더 허둥지둥한 걸지도.

“그건.”

미카엘이 내 손에 들린 약 봉투를 지그시 응시했다.

“아, 약 먹여 드렸……!”

그가 엄지 끝으로 내 입술을 매만졌다.

“직접?”

난 얼굴을 홱 돌리고 뒤로 물러났다.

“물에 타서 드렸거든요!”

“흐응…….”

그가 눈매를 접었다.

“아쉬운데.”

“그냥 둘 걸 그랬네요.”

“하하.”

한 번 그를 쏘아보고서 벌떡 일어나 테이블로 향했다. 등 뒤로 미카엘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난 조금 식은 치료식과 남은 약을 가기고 돌아왔다.

“드세요.”

* * *

“죽이에요.”

세니아나의 말에 미카엘은 오트밀 같은 것이 든 그릇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직접 만들었나?”

“네.”

큰 그릇 옆에 작은 종지가 있었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세니아나가 말했다.

“그건 장조림이라는 건데. 음, 일종의 가니쉬예요.”

“요리를 한다더니 정말이었군.”

미카엘이 오트밀 같은 것을 스푼으로 뒤적였다. 구미가 당기는 모양새이긴 했다. 하얀 바탕에 색색의 고운 채소가 반짝였다. 설원 위에 떨어진 루비나 사파이어처럼. 쌀이 흠뻑 젖어 무른 액체 사이로 또 다른 재료가 보였다.

‘전복.’

그 또한 도미니크와 마찬가지로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 음식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재료였다. 전복과 쌀이 든 오트밀이라니. 낯선 조합이었지만, 냄새는 꽤 괜찮다. 이 고소한 향은 맡아본 바 없었다.

“냄새가 묘한걸.”

“참기름이에요. 황궁이라 없는 재료가 없더라고요.”

“황궁 조리실에서 만든 건가.”

“네, 그래도 안 들키고 잘했어요. 저하의 부관이 도와줬거든요.”

세니아나는 눈을 반짝였다. 맛이 어떤지 묻고 싶어서 근질근질해 보인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 같은데.’

정말로 그를 위해서 이런 수고스러운 일을 했단 말인가. 대련장에서 세니아나는 오직 도미니크만을 시야에 담았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에게 달려올 적에도 세니아나는 한결같이 도미니크를 염려하고 있었다.

‘재밌군.’

미카엘은 세니아나를 흘긋 쳐다보고 스푼을 들었다. 죽을 떠서 입으로 집어넣자…….

‘제법인데.’

쌀이 부드러워서 부은 목에도 술술 감겨 내려간다. 혀에 걸리는 전복은 야들하고 쫄깃해서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배어 나왔다. 둘을 이어 주는 건 참기름이다. 장조림이라는 것도 제법 먹을 만했다. 짭조름해서 간이 삼삼한 죽과 아주 잘 어울렸다.

“어, 어때요?”

“…….”

“맛없나요?”

“괜찮아.”

“정말요?!”

세니아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양 볼이 복숭아처럼 발그레해져선 눈을 반달꼴로 휘었다. 그가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요?”

“디저트로 영애 입술을 물면 어떨까 싶어서.”

“……약 드세요.”

세니아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약 봉투를 펴 주었다.

“하하.”

“왜 자꾸 웃으세요.”

“내게 매정한 여자는 처음이라 신기해서.”

“그런 얘기 많이 들었어요.”

“어떤 찢어 죽일 놈일까.”

“재벌들이 그렇게 얘기하곤 하지요.”

그러고는 “티브이에서.”라고 조그맣게 종알거렸다. 미카엘은 빙그레 웃으며 약을 삼켰다. 세니아나는 그 뒤로도 미카엘을 살펴 주었다. 한 시간쯤 의자에 앉아 있던 그녀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잠결에 들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들을 이렇게 방치하는 게 어디 있어…….]

가늘게 떨리던 목소리를 기억한다.

[저하.]

상냥하게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 또한.

세니아나의 고개가 떨어졌다. 색색, 고른 숨소리를 듣던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든 세니아나를 안아 들었을 때, 그의 부관이 방에 들어왔다.

“기침하셨습니까.”

미카엘은 세니아나를 제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

“황태자에게 붙인 세작은?”

“황태자비 후보 명단을 전달했습니다. 한데…….”

세니아나에게 이불을 덮어 준 그가 부관을 힐끗 돌아보았다.

“정체를 의심받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어찌 처리할까요.”

침대 맡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그가 세니아나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으응.” 하는 잠투정에 그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없애.”

“…….”

“쓸쓸하지 않도록 부모 자식까지 함께 보내 줘라.”

꼬리가 잡히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자신 또한 세작과 같은 꼴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부관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글렌.”

“하명하십시오.”

“한 놈 찾아야겠다.”

“누구를 이르십니까.”

미카엘이 세니아나의 눈꼬리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재벌, 이라고 하더군.”

그가 섬뜩하게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사지를 찢어서 바다에 처박아 둬라.”

흥미가 생겼다. 거슬리는 건 치우고 집중하고 싶을 정도로.

부관이 허리를 깊게 굽힌 후 방을 빠져나갔다.

“수면 향을 너무 강하게 피웠나.”

“응, 저하…….”

네가 꿈에서 보는 남자는 어떤 저하이려나.

“부디 도미니크는 아니길 빌어.”

“…….”

“형님은 아직 살려 두고 싶거든.”

미카엘은 잠든 세니아나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

* * *

황후는 사비에르 후작이 보내온 그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앙투완의 새벽. 첫손에 꼽히는 화가 앙투완이 감옥에 갇혀 두 팔을 잃고도, 입으로 붓을 물고 마무리를 했다는 전설적인 작품이었다.

“과연 명작 중의 명작이로군.”

황후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사비에르 후작은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폐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내게?”

황후가 그림에 가까이 다가갔다. 앙투완의 새벽이 어째서 ‘광명’으로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어둠의 장막을 걷으며 위엄을 떨치는 빛이 그 안에 있었다. 사비에르 후작이 황후를 보며 입을 열었다.

“딸아이가 기운을 차렸습니다.”

“잘됐군.”

“쌍월 축제엔 참석할 수 있을 테니 부디 노여움 푸시지요.”

“흐음…….”

그녀는 낮게 침음하고 그림을 감상했다. 눈에 새기듯 지그시 응시하던 그녀가 가볍게 입을 열었다.

“그림은 가져가게.”

“그림은 그저 작은 성의일 뿐입니다.”

“사비에르 영애는 몸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 확실히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어.”

후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좋게 돌려 말했지만, 내용은 쌍월 축제에 참석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가 억지로 표정을 풀며 하하, 웃었다.

“4황자께는 무도회를 함께할 파트너가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프렌시프 영애에게 맡길 걸세.”

“……!”

황후는 더는 불쾌한 심사를 감추지 못하는 후작을 흘깃 쳐다보았다.

“같은 성녀이니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겠나.”

“약혼자를 교체하겠다는 의미로 보이겠지요!”

“내 아들의 권위가 오롯이 빛날 거란 뜻일세.”

사비에르 후작의 손에 들려 있던 모자가 우그러졌다.

“제 딸의 입장이 난처해질 겁니다!”

“어째서. 내가 이리 에이레네를 아끼는데.”

황후는 시종이 가져온 쟁반에서 찻잔을 들었다. 전혀 거리낄 게 없다는 듯하지만, 눈빛에 스민 조소는 숨겨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폐하께서 영애를 각별하게 여긴다고들 생각합니다.”

“사비에르는 고작 호사가의 몇 마디가 두려운가.”

“소문이 힘을 갖는 경우를 지척에서 보았지요.”

황후가 소문에 휘둘려 세니아나 프렌시프를 억지로 증명시킨 일.

황후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후작을 쏘아보고,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할 말이 그것뿐이면 가 보게. 내 분명 말했을 텐데. 당분간 황궁을 찾지 말라고.”

“폐하께서 이리 나오신다면 어쩔 수 없겠군요.”

“무슨 뜻인가.”

황후가 인상을 찡그리자 후작이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드리웠다.

“제 입이 가벼워질 수밖에요.”

“……공!”

“한 가족이 되리라 믿고 그간 함구했던 일이 어쩌면 아발론(황제의 궁)의 귀에 들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감히 나를 협박해!”

사비에르 후작의 눈빛이 검게 일렁였다.

“딸의 체면을 지키고자 하는 부정으로 여겨 주십시오.”

“…….”

“무도회 전에 황궁의 마차를 보내 주실 것이라 믿고 있겠습니다.”

그러곤 허리를 숙이고 황후의 방을 나섰다. 사비에르의 마차에 오른 후작은 대호(大虎)를 쏜 장수 같았다. 살의와 욕망으로 눈이 온통 번들거렸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가 마차 안의 서류를 바닥에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쳐 죽일 년!”

에이레네가 황후가 되자마자 현 황후 그라니아를 뒷방에 처박아 줄 것이다. 그리 귀히 여기는 세니아나 프렌시프의 수급을 들려서!

* * *

나는 인상을 쓰며 미카엘의 방을 둘러보았다.

‘이상해.’

왜 갑자기 잠이 들었을까. 미카엘 황자를 간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지만, 잠에 끌려 들어갈 정도로 피곤했던 건 아니다.

‘피로를 푸는 향이라고 했지.’

깨어 있을 적에 미카엘이 향로에 넣으라 했던 가루가 떠올랐다. 향이 공기 중에 퍼진 뒤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약, 일지도.’

미카엘의 보좌 자격을 얻으면서 포털 이용의 허가를 받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도망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라면 포털을 열 수조차 없을 거야.’

미카엘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서라도.

때마침 미카엘이 환복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서 조금 물러났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함께 식사하지.”

“몸을 회복하신 듯하니 더 머무를 이유가 없어요.”

미카엘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더 아플 것을 그랬나.”

“…….”

“아플 적엔 그리도 상냥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는 몹시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하께 상냥한 사람은 저 말고도 많을 테지요.”

사비에르 영애라든가, 정원에서 격정적으로 입 맞추던 하녀라든가.

미카엘은 빙그레 웃었다.

“질투?”

“아직 병증이 남은 모양이네요.”

헛소리를 하는 걸 보면.

“하하.”

그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잘게 떨었다.

대체 저 남자는 뭐가 그렇게 웃겨서 웃는 거야. 도와주려던 사람에게 약향을 풀었으면서!

나는 울컥 화가 나서 그를 흘겨보았다. 그러자 미카엘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어떻게 하면 영애의 질투를 받을 수 있을까.”

“제게 무해해지신다면요.”

“형님은 영애에게 무해한 사람인가.”

어쩐지 그의 눈빛이 이전과는 달랐다. 마치 먹잇감을 탐색하는 포식자와 같은 느낌.

‘도미니크는 엄청 바른 친구라고!’

하지만 도미니크에게 피해가 갈까 봐 말을 삼켰다. 미카엘은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썹을 느리게 들었다가 내렸다. 그러곤 나를 붙잡았다.

“식사하고 가.”

“괜찮습니다.”

“나 아직 환자라고?”

“…….”

“다시 쓰러질지도 모르잖아. 살펴 줘.”

눈빛이 애처로워졌다. 과연 바람둥이. 사람을 움찔하게 만드는 뭔가가 저 밑에 깔려 있었다. 솔직히 가엽기는 했다. 아플 때 아무도 찾지 못하는 설움을 난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플 때의 그는 내 어릴 적과 란슬롯, 그리고 선생님을 간호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안 돼.’

섣부른 동정은 위험하다.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대가 처음이야. 나를 애원하게 만든 여자는.”

“그거참, 안타까운 일이군요.”

가볍게 대답하자 그가 또 한 번 눈매를 휘었다.

“본격적으로 애원해 볼까.”

“저하.”

“어떻게 하면 함께 식사해 줄 거지? 데려온 기사들을 모조리 도륙하면 영애의 마음이 바뀌려나.”

나는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졌다. 미카엘은 팔걸이를 잡은 채 소파에 느른히 몸을 기댔다.

“아, 이건 영애의 입장에선 애원이 아닌가.”

“…….”

“내가 애원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협박, 내지는 강요라고 해요, 그런 건.”

“흐응.”

“그리고 전 그런 분과 식사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미카엘이 미간을 좁히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아쉬운데.”

“가 보지요.”

“내일도 와 줘.”

나는 문고리를 잡으며 그를 힐끔 돌아보았다.

“싫어요.”

그 말을 끝으로 그의 방을 휙 나섰다.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야. 웅크린 채 벌벌 떠는 날 보고 미소 짓던 사채업자가 떠올라서 오스스 소름이 돋는다.

‘아무래도 책은 다른 방향으로 얻는 게 좋겠어.’

하지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뒤에서 “영애.”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난 활짝 웃으며 뒤돌았다.

“저하!”

이상한 사람과 함께 있었더니 도미니크가 유난히 반가웠다. 도미니크는 픽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황궁엔 어쩐 일이십니까.”

“황후 폐하께 부탁을 받아서요.”

“부탁?”

나는 잠깐 고민하며 우물쭈물했다. 말해도 될까?

‘퍼져선 안 되는 일이지만 도미니크는 입이 무거운 사람이고.’

내가 포털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비밀로 해 줬으니까. 그리고 친구 사이엔 비밀이 없어야 하는 거 아닐까. 소피아 부인과 할머니도 비밀이 생겨서 다퉜다고 했는걸.

나는 절대로 그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고 보는 눈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 까치발을 들었다. 손을 모으고 귓가에 다가가자 움찔, 도미니크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폐하께서 은밀히 미카엘 저하를 간병하라고 하셨어요.”

그의 표정이 삽시간에 달라졌다.

“어째서 그런 위험한 부탁을……!”

그가 내 손을 끌어당겼다. 난 당황하여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게…… 책이 필요해서…….”

“책?”

“황족만 열람할 수 있는 책이래요. 간호해 주면 몰래 책을 빌려준다고…….”

도미니크의 잇새로 아득, 이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책입니까.”

“삿된 자들의 기록이에요.”

“찾아보죠.”

“저하께서 빌려주시겠다고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하지만 황후는 내 손에 책을 넘겼다는 걸 들켜도 방어할 힘이 있지만, 도미니크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아예 도미니크에게 빌릴 생각을 못 했는데.

“그렇지만…… 그렇지만…….”

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자 도미니크는 단호히 말했다.

“미카엘을 베어 버리는 것보다는 덜 위험하겠죠.”

“네?!”

그런 무서운 소리를! 나는 누가 들었을까 봐 얼른 주변을 살폈다.

“황궁 장서실을 찾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말 괜찮으세요?”

도미니크가 내 머리를 가볍게 흩뜨렸다.

“걱정하지 마.”

갑작스러운 반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놀랐는지 가슴이 뛰었다.

“밤이 깊으면 마차가 다니기 위험합니다. 돌아가세요.”

“……네.”

그러더니 그가 앞장서듯 내가 돌아온 길로 걸었다.

“저하는 어디 가세요?”

이쪽은 도미니크 궁 방향이 아닌데?

내 말에 그는 가볍게 대답했다.

“어두우니까.”

“마차까지 데려다주시려고요?”

“…….”

그가 졸졸 쫓아가는 나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감사합니다.”

나는 헤헤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좋아합니다.”

뭐? 갑자기 심장이 발끝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저도 영애의 눈이 좋습니다. 웃을 땐 더더욱.”

[저는 좋아해요, 저하의 눈.]

카페에서 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답해 주고 싶어서 내내 기억하고 있었나…….

“그래도 주어부터 말씀해 주시지…….”

놀랐다고요.

내가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도미니크는 빙그레 웃었다. 난 도미니크의 배웅을 받으며 황궁을 떠났다.

도미니크는 그날 밤 바로 내게 연락을 해 왔다. 황실 장서실에 있는 삿된 자들과 관련된 책은 황후에 손에 있는 그 한 권뿐이라는 말이었다.

[열람 기간이 있으니 곧 반납할 겁니다. 그때 제가 빌려 오는 것으로 하죠.]

“감사해요.”

도미니크는 잠깐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미카엘에겐 가지 마세요.]

매우 동감입니다.

“저도 만나고 싶지 않아요…….”

내가 조그맣게 대답하니 통신석에서 그의 달콤한 웃음소리가 낮게 퍼졌다.

그렇게 말한 다음 날 바로 황후를 만나게 되는 건 무슨 일일까. 나는 한숨을 삼키고 황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브리엘라 황비와 함께 직접 프렌시프 저에 찾아왔다. 아빠와 오빠들은 집을 비운 상태라 그들을 맞이할 수 있는 건 나뿐이었다. 시트론과 마릴린이 황후와 가브리엘라 황비에게 각각 차를 내려놓았다.

“아버님께선 황궁에 계십니다.”

“들었네. 경들도 함께 갔다지.”

기회를 노리고 온 것 같은 어투였다. 가브리엘라 황비도 느꼈는지 가느스름하게 뜬 묘한 눈으로 황후를 힐끗 쳐다보았다.

‘저 사람이 가브리엘라 황비지. 동부에서 황궁에 보냈다는.’

온건한 성품이라 황후와 로웨나 황비도 그녀에겐 가시를 세우지 않는다고 들었다. 황후는 찻잔의 손잡이를 매만지며 말했다.

“가브리엘라가 워낙에 알뜰한 탓에 쌍월 축제에서 입을 드레스가 마땅치 않더군.”

“그러셨군요.”

“이 사람 드레스를 가봉하는 겸 영애에게도 한 벌 선물하고 싶네.”

축제가 며칠 안 남았는데 이제야 가봉한다고?

‘핑계 같은걸.’

가브리엘라 황비 또한 자신이 핑계로 이용당한다는 걸 아는 듯 침착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청을 들어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이기도 해. 부디 받아 주게.”

“…….”

가브리엘라 황비 앞에서 거절하면, 황후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꼴이었다. 무엇보다 가브리엘라는 프렌시프가 주축인 동부의 황비. 동부 사람인 내가 거절하면 그녀에게까지 피해가 미칠 수 있었다.

‘이러려고 굳이 황비를 데려왔구나.’

나는 앓는 소리를 삼키기 위해 애써야 했다.

“포털을 열겠습니다.”

“신의 축복을 그리 사사롭게 쓸 수야 없지. 이 근방이니 마차로 이동하세.”

꺼림칙했지만 거절할 말이 따로 없었다. 결국 난 황후에게 이끌려 함께 저택을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마차는 두 대였다. 하나는 황후와 가브리엘라 황비가 타고, 또 하나는 나를 위해 준비한 것이라고 했다. 마차의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굳어지고 말았다.

“저하.”

미카엘이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 놀라지 마. 이번엔 끌려온 거니까.”

그러자 황후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의 바깥 구경이라 데려왔지.”

정말 하루 종일 말을 잃게 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팔불출이라 생각하지 말아 주게. 나와 미카엘은 이런 기회가 흔하지 않은 신분이잖은가.”

미카엘과 끊임없이 만나게 하려는 이유를 이젠 알겠다.

‘나까지 그의 비로 만들려는 거야.’

사비에르 영애와 더불어.

“젊은 사람들끼리 잘 통하겠지. 함께 타게나.”

황후는 거절할 새도 없이 가브리엘라 황비와 함께 마차에 올라 먼저 출발했다. 미카엘이 있는 마차에 오른 난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나를 그는 예의 재밌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난 창밖만 보고 있었다.

“밖에 볼 만한 게 있나.”

“안엔 보기 싫은 분이 계셔서요.”

약향, 그리고 기사들을 도륙하겠다고 협박한 일로 그는 내 안에서 불한당이 되었다. 미카엘은 픽 실소를 흘렸다.

“도미니크는 다르고?”

“네.”

미카엘이 내게 손을 뻗어 왔다. 고개를 돌렸지만, 턱을 단단히 붙들고 있어서 피할 수 없었다. 그가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놔주세요!”

“내가 그자와 뭐가 다르지?”

“도미니크 저하께선 이런 짓 안 하시니까요!”

“그것뿐?”

“그분은 다정하세요.”

눈을 가늘게 뜬 미카엘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나도 제법 다정한 편인데.”

“…….”

“몰라 주니 아쉬워.”

그때였다. 히이잉―! 말이 날카롭게 울더니 이내 픽,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차가 덜컹 움직이기 무섭게 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미카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영애는 여기 있어.”

“무슨 일……!”

“있어, 여기.”

그렇게 말한 그가 마차 한구석에 놓여 있던 검을 들고 문을 열었다.

“나오지 마.”

뒤를 돌아 나를 보며 한 그 말을 끝으로 미카엘이 마차를 뛰쳐나갔다. 도무지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난 창문에 바짝 붙어 마차 주변을 살폈다.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흰 제복을 입은 기사의 등이 보인다. 검에 복부를 찔린 기사가 휘청, 쓰러진 뒤 보인 건―

‘농민?’

밀짚모자를 쓴 추레한 차림의 남자. 아냐, 평범한 농부가 황실 기사를 저렇게 능숙하게 죽일 순 없어. 저건 암살자다.

‘황실의 마차를 습격했다고?’

반역인가. 순간 암살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중얼거리는 입 모양이 보인다.

찾았, 다.

‘나를 노리는 거야.’

어째서?

마차 밖에서 황궁의 기사들이 소리쳤다.

“어서 지원을……!”

“통신석이 연결되지 않습니…… 컥!”

저택을 함께 떠나온 황실의 기사 수는 열. 암살자의 수는 작은 창을 통해 보이는 것만 해도 그 배였다. 게다가 움직임이 몹시 노련했고, 황실의 기사와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텅! 마차 문에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동해야 해.’

순간, 미카엘과 호위들이 떠올랐다. 호위들의 얼굴은 익혀 두지 않은 데다, 미카엘의 위치를 몰라서 그들까지 이동시킬 순 없었다. 저택에 돌아가도 기사들을 소집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저들이 다 죽을 수도 있다.

‘나가서 모두의 위치를 확인해야……!’

고민하는 몇 분 사이, 벌컥! 문이 열렸다.

“모시러 왔습니다, 성녀님.”

농민으로 분장한 암살자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쿵! 미카엘이 긴 다리로 그의 복부를 후려쳤다.

“엉겨 붙지 마라.”

서슬 퍼런 눈빛이었다. 햇살에 비치는 하얀 얼굴에 검붉은 피가 튀어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떠밀렸던 암살자가 자세를 고치고 땅을 박찬 후 튀어 올랐다.

챙―! 검과 검이 부딪치고, 미카엘은 대련에서 도미니크가 했던 것처럼 암살자의 다리에 발을 걸었다. 암살자가 휘청임과 동시에 그의 목선에 검을 겨눈 미카엘이 순식간에 그의 숨을 거둬 버렸다. 그때.

“저하!”

그의 양옆으로 다른 괴한들이 다가왔다. 그들의 검날이 미카엘의 허리를 스쳤다. 설백색 예복으로 피가 스며들었다. 미카엘이 허리를 잡은 채 검을 고쳐 쥐고, 그들과 맞섰다.

하지만 검상을 입은 그는 점점 밀려났고, 그사이 또 다른 괴한이 마차에 침입했다. 괴한의 검날이 푸르게 빛났다. 나는 펜던트를 꼭 쥔 채 눈을 꽉 감았다. 가족들의 얼굴이 차례로 머릿속을 지나갔다.

‘선생님!’

그 순간. 크르릉! 거대한 포효에 천지가 진동했다. 별안간 온통 까맣던 시야 사이로 붉은빛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컥!”

괴한의 날카로운 신음과 함께 마차가 덜컹, 움직였다. 나는 황급히 눈을 떴다. 그리고 보인 건……. 설원에 흩날리는 눈발처럼 새하얀 털과 갈기를 지닌 사자.

“멀린!”

멀린이 움직이자 마차가 우지끈, 무너지며 바람이 휘몰아쳤다. 마차 주변에 포진한 괴한들을 향해 뛰어든 멀린은 순식간에 한 사람의 목을 물어뜯었다. 새빨간 선혈이 흰 털을 물들였다.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코안으로 훅 들어왔다.

괴한들이 주춤, 물러났다. 멀린은 한달음에 내 곁으로 복귀해 또 한 번 크게 울부짖었다. 대기가 일렁이는가 싶더니 반투명한 화살로 뭉쳐졌다. 수백, 아니, 기천은 되는 수의 화살이 내 주변을 에워쌌다. 활촉이 모두 괴한에게 향했다.

[명을!]

머릿속에 기묘한 울림이 생겼다. 멀린의 목소리에 나는 홀린 듯 생각했다.

‘쏴라!’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화살들이 일시에 유성우처럼 쏟아졌다. 화살이 괴한들의 육신을 꿰뚫기 무섭게 단말마가 난무했다. 괴한들이 모두 쓰러졌다. 숨소리마저 적막에 삼켜진 공간 안에서 서 있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기사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난…….

“멀린…… 헉.”

폐가 쥐어짜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크릉…….”

멀린이 작게 포효하자 새하얀 불꽃이 일더니 빛이 되어 흩어졌다.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영애!”

나는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미카엘이 나를 안아 들고 얕은 바위 위에 앉혀 주었다. 기사들은 그제야 연결된 통신석으로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암살자들을 포박했다.

‘기절하면 안 돼.’

다시 암살자들이 올 수도 있어.

이를 악물고 있기를 한 시간 가량쯤. 멀리서 말굽 소리가 잔뜩 들리는가 싶더니 검은 관복의 기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카엘이 멍하니 웅크리고 있는 나를 붙들었다.

“날 봐, 영…….”

“영애!”

익숙한 목소리였다. 다급히 고개를 든 난 미카엘의 손을 뿌리쳤다.

“저하!”

도미니크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내게 다가왔다.

“괜찮은 겁니까.”

“…….”

“영애.”

눈물이 솟구쳤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안심이 되어서. 도미니크는 덜덜 떨며 우는 나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저하…….”

“괜찮아.”

난 그의 옷깃을 붙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 * *

쾅! 황제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물었다.

“어찌 된 일인가,”

황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 또한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미카엘과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려던 것뿐이었다.’

그 때문에 자신은 일부러 목적지를 빙 둘러 갔다. 어떻게 습격당한 건지, 심지어 언제 습격을 당한 건지도 알지 못했다. 대체 얼마나 겁을 상실한 자들이기에 황궁의 마차를 습격했단 말인가!

“기사들의 말로는 예사 인물들이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짐이 그를 몰라서 묻는 것이겠는가!”

“…….”

“프렌시프 영애를 무슨 까닭으로 저택에서 끌어냈지?”

이 사달의 시작은 황후였다. 곤란해하는 세니아나 프렌시프를 끌고 나온 것, 포털로 이동하자는 제안까지 황후 쪽에서 물렸다니 빠져나갈 여지가 없었다.

프렌시프가 그토록 분노한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아서는 바로 금좌 11석을 소집했다. 절대로 쉬이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궁정 대신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 나베리우스 프렌시프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그는 아들보다도 더 눈이 뒤집혀 있었다.

황후는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미카엘이 영애를 지키기 위해 다쳤습니다. 이쪽도 피해를……!”

“결국 황자와 기사들을 구한 건 프렌시프 영애였지.”

“…….”

“앞으로 그대가 프렌시프 영애를 찾는 일은 없어야 해.”

“폐하……!”

“황명이다.”

황후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방으로 돌아온 황후는 테이블 위에 놓인 시계를 내던졌다. 쨍!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난 베젤이 바닥 아래로 우수수 떨어졌다.

“올슨!”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치자 시녀장이 다급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예, 폐하.”

“사비에르 후작을 당장 끌고 와라!”

“후작을 어째서…….”

“프렌시프 영애를 노릴 자가 그자 말고 더 있다더냐!”

“예,”

“미카엘은 뭘 하고 있지?”

“괴한들을 고신하고 계십니다.”

“……서둘러 수괴를 알아내야 한다.”

황제의 명은 세니아나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당분간 자숙하라는 말도 함께 전했다. 황후의 소임은 로웨나 황비와 가브리엘라 황비가 나누어 맡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찢어 죽일……!’

세니아나 프렌시프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면, 황후의 자숙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그 시각, 황궁의 고문실.

“크아악!”

파르르 경련하던 남자가 곧 움직임을 멈추고 축 늘어졌다. 이어 병사가 그의 맥을 짚었다.

“죽었습니다.”

미카엘은 눈매를 나붓이 휘며 숨이 끊어진 자객을 응시했다.

“이런, 재미없게.”

“…….”

“더 팔팔한 놈을 데려와라.”

병사는 서둘러 움직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평소에도 잔인한 사람이라 여기긴 하였으나, 오늘의 그는 지나칠 정도로 섬찟하다. 벌써 죽어 나간 포로만 일곱이었다. 그는 자백을 위해 고문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벌레를 가지고 놀 듯 포로들을 유린했다. 새로운 포로가 끌려 나왔다. 지금껏 고신당한 자 중 가장 젊은 편이었다.

“죽여라, 난 절대로 토설하지 않을…… 컥!”

미카엘이 구둣발로 꿇어앉은 포로의 머리를 짓밟았다. 거친 바닥에 짓이겨지자 얼굴이 흙먼지와 상처로 엉망이 되었다.

“크윽……. 황자란 자가 상스럽기 그지없구나. 화풀이라도 하는 것처…… 아아악!”

“말 많은 놈은 좋아하지 않아.”

미카엘이 병사를 향해 까딱 고갯짓을 했다.

“가시 관을 씌워라.”

“……!”

가시 관은 모두가 알고, 누구나 두려워하는 고문 기구였다. 목까지 이어지는 커다란 관. 관 주변에 마치 가시덩굴처럼 둘린 나사 때문에 불리는 이름. 미카엘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너는 얼마나 버틸지 궁금한데.”

그의 손에서 가시 관을 건네받은 병사가 남자의 머리 위에 가시 관을 씌웠다.

“끄아아악―!”

미카엘은 의자에 걸터앉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저하!]

도미니크를 부르는 애달픈 목소리. 자신을 뿌리치던 손. 그자의 옷깃을 잡고 안심하여 흘리던 눈물. 모든 게 머릿속에서 엉망으로 뒤섞인다. 미카엘은 가시 관을 쓴 채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는 남자를 쳐다봤다.

“맞아.”

그의 눈빛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화풀이다.”

기분이 나쁘거든. 도미니크를 보는 그녀의 표정이 빌어먹게 사랑스러워서.

* * *

나는 내 침대맡을 지키는 도미니크를 힐끔 쳐다보았다.

“돌아가시라니까요…….”

“잠들면.”

“정말로 괜찮아요.”

놀라서 눈물이 터지긴 했다. 죽을 뻔했으니까. 하지만 과거엔 그런 적이 몇 번이나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미니크는 흘러내린 내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넘겼다.

“사람을 죽인 게 처음이었잖습니까.”

“그건 좀 무섭기는 한데요…….”

나는 이불 아래서 양손을 말아 쥐었다. 그렇지만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다. 또 한 번 인생을 빼앗기고 싶지 않으니까.

“괜찮아요.”

“괜찮지 않다고 해도 돼.”

“아우, 정말.”

벌써 몇 번째 듣는지 모르겠다. 가족들도, 도미니크도 계속 내 걱정만 했다. 가족들이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처음 보았다.

감정에 솔직한 가웨인이 드물게 조용했다. 날 선 살기가 요동치는 것만 같았다. 나에게 화난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무서울 정도로. 란슬롯도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미소가 사라진 그의 얼굴은 오싹했다.

‘아빠는…….’

내 앞에서 내색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마음 아팠다. 내내 손마디가 새하얗도록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으면서. 그런 얼굴이 보기가 힘들어서 암살자 처리를 핑계로 가족들을 내보냈다.

‘정말 괜찮은데.’

나는 꾸물꾸물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리고 도미니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우리 즐거운 얘기 해요.”

“어떤 얘기를 할까요.”

이렇게 순순히?

나는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배시시 웃었다.

‘도미니크는 이토록 다정한데 사람들은 왜 모를까.’

“으음, 주변에선 보통 어떤 얘기를 해요?”

“글쎄요.”

“그럼 부대에서는?”

“여자, 술, 게임.”

“게임?”

여긴 전자오락 같은 건 없을 테니까 크로케나 카드놀이일까?

“격투술을 겨루는 겁니다. 부대원들은 판돈을 걸죠.”

“아하, 저하도 겨룬 적 있으세요?”

“저는 늘 승리했죠.”

어쩐지 그의 눈빛이 오만해진 것 같았다. 난 킥킥 웃다가 문득 카페에서 본 로맨틱한 기사를 떠올렸다.

“다비드 기사님과도요?”

“그때 그냥 죽…… 불구로 만들 것을.”

우와, 또 무서운 소리! 가만 보면 정말 간이 큰 사람이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여자 얘기도 하셨어요?”

“안 했습니다.”

“흐음, 거짓말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니 그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입니다.”

“그렇지만 오빠들이 이 세계의 남자는 다 난봉꾼이라고 했는걸요. 오빠들만 빼고.”

“…….”

도미니크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무언가를 억누르듯 눈을 잠깐 감았다가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거짓말입니다.”

“네?”

“경들이 가장 방탕하죠.”

“에이, 설마.”

가웨인은 검술밖에 모르는 바보고, 란슬롯은…… 상상이 안 된다.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니 도미니크는 내게 이마를 맞댔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맞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 그의 숨결이 얼굴을 간질이고 달콤하게 흩어졌다. 난 깜짝 놀라서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거기서 빼야 하는 건 나뿐이야.”

“…….”

“열은 없네요.”

그렇게 말한 그가 다시 떨어졌다. 때마침 문이 열리며 예복을 갖춰 입은 오빠들이 들어왔다. 도미니크가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그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곤 방을 떠났다. 나는 이불 끝만 잡은 채 바짝 굳어 눈을 홉뜨고 있었다. 가웨인이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쯧, 혀를 찼다.

“왜 아직까지 뻗대고 있던…… 세니아나?”

그가 날 보고 한쪽 눈을 일그러뜨렸다.

“왜 그렇게 굳어 있어?”

란슬롯도 의아한 듯 물었다.

“황자와 무슨 얘기를 했지?”

나는 멍하니 대답했다.

“오빠들 방탕하다고…….”

“뭐?!”

“…….”

가웨인이 버럭 소리쳤고, 란슬롯이 인상을 찌푸렸다.

“미친 자식…….”

가웨인은 이를 갈며 나를 붙잡았다.

“거짓말이다. 믿지 마.”

“……잘래요.”

심장이 쿵쿵 뛰어서 진정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불 속에 쏙 숨자 가웨인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아니라니까. 방탕한 건 형뿐이야!”

“죽고 싶어?”

“방탕하긴 했잖아. 형 때문에 길거리에서 여덟 명이 치고받았……!”

뻑! 장딴지를 걷어차는 소리와 함께 윽! 하는 가웨인의 신음이 들렸다. 난 그들이 만드는 소음을 한 귀로 흘리며 베개를 끌어안았다.

이 세계 남자들은 정말 다 위험한가 봐……. 방탕하지 않다는 도미니크도 내게는 이렇게 유해한걸.

사용인들이 소파에 앉아 있는 날 힐끔거렸다.

“저…… 아가씨.”

“응.”

“도련님들은 방탕하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우렁찼다. 마치 방 밖에서 누군가 듣고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 하인을 쳐다보았다.

‘왜 계속 오빠들이 점잖다고 하는 거지?’

집사와 하인, 하녀, 거기다 기사들까지 내 주변을 지날 때마다 저런 말을 했다. 그것도 며칠째. 어제는 웬 기사들이 이상한 말을 주고받으며 지나갔다.

[도, 도련님들은 정말 음란…… 아니, 음전하시다니까! 차, 참 점잖으시지!]

[마, 맞아! 그렇지.]

[푸, 품격이 어찌나 점잖으신지!]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어색한 어조라 의아했다. 하인은 떠듬떠듬 말했다.

“특히 가웨인 도련님께서 어찌나 정중한 분이신지 모릅니다!”

“흐음,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대충 끄덕이고 서류에 집중했다. 란슬롯이 가져다준 황궁의 조사보고서였다.

‘괴한들이 모두 길라게온 출신이라고…….’

길라게온에서 태어나 타국에서 자란 이들이었다. 작정하고 암살자로 키워진 모양이다. 그들은 끝까지 배후를 토설하지 않았고,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그래도 내게 한 가지 이득은 있지.’

황후는 나를 끌어낸 탓으로 황제에게 자숙을 명받았다. 앞으로 나를 찾지 말라는 말도 함께였다고 했다.

이제 귀찮은 일은 없겠어. 황후는 명 받은 즉시 바로 사비에르 후작을 불러들였고, 그녀의 방 안에서 한 차례 고성이 오갔다, 라.

‘사비에르 후작을 의심하는 건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사비에르는 아니다. 괴한은 내게 아주 정중히 손을 뻗었다. 나를 눈엣가시로 보는 사비에르 후작이라면 차라리 죽이라고 명했을 거다. 못해도 황도에 있을 수 없을 지경의 상해를 입히라고 했겠지.

‘대체 누굴까.’

이상한 점은 또 하나 있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 멀린이 나섰을 때. 대기로 뭉쳐진 화살이 허공에 떠올랐을 때. 그들이 나를 보는 눈빛은 두려움이라기보단 경외였다.

‘범인은…… 나를 납치했던 무리일지도 몰라.’

그들이 다시 나섰을 수도 있어.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어째서 하필 지금이지?

이제껏 약탈자 세니아나는 그러한 공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

‘마치 진짜 내가 돌아왔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잖아.’

내가 끄으응, 신음하자 드레스를 가져오던 마릴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응? 아……. 아니야.”

“역시 오늘은 그냥 쉬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괜찮아. 그거 입으면 되지? 단장하자.”

오늘은 황자 대련이 있는 날이었다.

황제가 프렌시프에게 보상으로 다이아몬드 광산을 내렸다. 심지어 궁정 대신을 보내 무려 미안하다는 친서를 보냈다. 황궁의 행렬이 저택 밖까지 이른 것을 보고 귀족들은 기함했다. 하지만 암살자를 보낸 건 다른 쪽이고, 황후는 그저 내게 나들이를 권한 죄밖에 없었다.

‘그래도 가족들은 이대로 넘어갈 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난 황궁과 프렌시프가 나로 인해 틀어지길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러 유감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황자 대련에 참석하기로 했다.

단장을 마치고 나오자 예복을 차려입은 근사한 세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오늘따라 유난히 화려한 미모를 발하는 아빠와 오빠들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아빠는 나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팔짱을 끼라는 듯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나는 냉큼 아빠를 잡고 히히 웃었다.

“왜?”

“엄청 근사하세요!”

“난 늘 근사하지.”

“그렇지요.”

“내 딸은 항상 귀엽고.”

그런 우리를 사용인들이 흐뭇한 눈길로 지켜봐서 난 조금 쑥스러워졌다. 우린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이동했다. 호위하는 기사들의 수가 정말이지 엄청났다.

‘저택 기사들을 다 데려온 게 아닐까.’

내가 위험할 땐 멀린이 날 지켜 준다고 얘기했지만, 아빠와 오빠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우리를 쳐다봤다.

‘창피해…….’

이건 과보호 중이라고 선전하는 꼴이잖아! 그렇게 새빨개진 얼굴로 황궁에 들어갔다.

‘세상에!’

황자 대련을 관람하러 온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수많은 귀족과 영향력 있는 상인, 유명 기사들, 그리고 선발된 평민들까지. 신분도 다양했다. 게다가 황궁이 개방되는 날이니만큼 물샐틈없이 경비하느라 황도군이 대거 투입되어 있었다.

황궁에 사람이 이렇게 많아도 되는 거야?

‘하긴, 16년 만에 돌아온 축제니까…….’

경기장에 들어가니 벌써부터 흥분한 관중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우와!”

내가 탄성을 흘리자 가웨인이 픽 웃으면서 내 코를 살짝 흔들었다.

“바짝 붙어 있어.”

란슬롯도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말했다.

“포털 마원은?”

목걸이를 빼서 그에게 보여 주자 란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뭐라고 했지?”

“위험하면 무조건 영지로 이동한다!”

“그래. 또?”

“남이 죽거나 말거나 내 알 바 아니다!”

“좋아.”

내가 미카엘과 기사들을 신경 쓰느라 바로 포털을 열지 못했다고 하니까 다들 화를 냈다. 가웨인은 벌컥 소리치기까지 했다.

[죽으면 그 새끼 명이 그뿐인 거야!]

그 뒤로 가족들은 마주칠 때마다 귀에 인이 박이게 저 소리를 반복했다. 아빠의 손을 잡고 관중석에 올라가려고 했는데, 때마침 황제와 황비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황가에 광영 있기를.”

우리가 황족에게 인사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

“예, 폐하.”

“이번엔 고생이 많았구나.”

“아닙니다.”

“저택에 있었다면 없었을 일이지. 짐이 미안한 마음이 커.”

그러고 은근히 아빠를 쳐다보는 게 신경전은 이쯤 하자는 뜻인 것 같았다. 아빠는 개가 짖는다는 표정이라 오히려 내가 더 당황했다. 난 얼른 황제의 신경을 돌렸다.

“폐하의 염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보다 주의하도록 하지요.”

그러고 황후에게도 인사하기 위해 그녀를 찾았는데…….

‘응? 없어?’

내 표정을 본 황제가 말했다.

“후는 당분간 황궁 행사엔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거다.”

로웨나 황비는 내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그 정도라고…….’

생각보다 파장이 엄청난걸.

로웨나 황비가 나를 보며 말했다.

“폐하, 황족석에 프렌시프 일가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어떠신지요.”

“흐음, 그럴까.”

나는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로웨나 황비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도미니크의 멋진 모습이 잘 보일 거란다.”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 없었다. 아빠와 오빠들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내 얼굴을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황족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 아래에 있는 금좌 11석 가문의 귀족들이 굳은 얼굴로 높이 있는 우리를 쳐다봤다. 아빠와 오빠는 대수롭지 않게 시종이 준 핑거 푸드를 내게 몰아주었다.

“다 못 먹어요.”

“로열 키친의 카나페인데.”

“로열 키친의 마들렌이야.”

“……잘 먹겠습니다.”

내가 접시를 받자 주변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 그렇지만 로열 키친에서 만든 거잖아.’

나는 요리사니까 좋은 음식은 맛봐 둬야 한다고.

속으로 꽁알꽁알 핑계를 대며 카나페를 집었다. 크래커 위에 연어와 오이, 토마토, 치즈를 얹은 카나페에는 옅은 베이지색의 소스가 뿌려져 있었다.

‘예쁘다.’

오이와 연어, 토마토가 도각도각 네모나게 잘려 있었고, 크래커가 완만한 접시 꼴로 그것들을 감싼 형태였다. 그 위에 지그재그로 얇게 뿌린 소스. 가장 위 화룡점정으로 올라간 것은 작은 식용 꽃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카나페를 입에 넣었다.

“음!”

식용 꽃을 설탕으로 코팅했구나! 소스는 상큼한 파인애플로 만들어서 새콤달콤 맛있었다. 크래커는 담백하고 바삭하며 오이는 아삭아삭하고 산뜻하다. 연어도 얼마나 훌륭한지 모른다. 혀에 감기자마자 부드럽게 녹아드는 것 같았다.

맛있어! 나도 모르게 양손으로 빰을 감싸며 “하아…….” 탄성을 흘렸다.

“아하하.”

로웨나 황비가 웃음을 터뜨렸다. 놀라서 주변을 보니 모두가 날 주목하고 있었다.

‘부, 부끄러워…….’

다들 귀엽다는 표정으로 보긴 했지만, 정말로 창피했다. 황제가 낮게 웃으며 내게 접시를 건넸다.

“들어라.”

“하지만!”

“이토록 행복한 표정이라면 어떤 안주보다 훌륭하지.”

그렇게 말한 황제가 샴페인 잔을 잡았다. 그러고 보니 그는 애주가였다. 아빠를 붙들고 부어라 마셔라 할 정도로.

“감사합니다…….”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접시를 받았다. 절인 통 올리브에 얇게 채 썬 고기를 둘둘 만 요리를 보고 ‘받길 잘했어!’ 하고 생각했다. 맛있게 먹고 있는데 시녀가 새파래진 얼굴로 로웨나 황비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자 황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오디주가 없다니!”

그 말에 황제의 표정 또한 일그러졌다. 시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개를 수그렸다.

“상자를 열었을 땐 병이 모두 깨진 상태였습니다.”

“어찌 관리했기에……!”

나는 란슬롯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디주가 왜요?”

“황자 대련에서 황족과 금좌 11석이 오디주로 건배하는 게 관습이거든.”

“꼭 오디주여야 하나요? 샴페인도 있고…….”

“타라를 기리기 위해서야.”

타라라면 육체에 기억이 남아 있었다.

“삿된 자들을 토벌하고 인간에서 신이 되었다는 길라게온의 모신이요?”

란슬롯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삿된 자들을 피해 산에 숨었을 적에 타라가 오디와 산딸기, 느릅나무 껍질을 먹으며 연명했다고 하지.”

황자 대련 또한 황궁의 무위를 보여 삿된 자들을 쫓기 위해서였다.

‘오디주가 없으면 대련 자체가 무용지물로 여겨질 수도 있겠구나.’

황궁은 망신을 당할 테고. 잠깐만.

‘오디와 산딸기, 느릅나무 껍질이라고?’

황비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어찌합니까.”

“그러게요……. 곧 대련이 시작할 텐데…….”

로웨나 황비가 벌떡 일어났다.

“다른 술이라도 구해 와야지 뭣들 하는 거야!”

“작년부터 올해까지 장마 피해가 심해 성한 오디가 없습니다. 황궁으로 올라온 오디주 또한 겨우 구한지라…….”

“멍청한 것들!”

황후를 대신해 쌍월 축제를 주관하게 된 로웨나 황비는 크게 당황했다. 황제도 언짢아 보였다.

“저…….”

내가 슬그머니 손을 들자 일시에 시선이 쏠렸다.

“술, 제가 가지고 올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뭐?”

“뭐라고?”

황족과 가족들이 모두 놀란 표정으로 날 보았다.

“오디나 산딸기, 느릅나무 껍질로 만든 술이면 되는 거지요?”

“그렇기야 하지.”

“만들어 둔 게 있어요.”

“모두 흔히 마시는 술이 아닌데, 어떻게?”

“허가를 내려 주시면 빠르게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날 지그시 응시하던 황제가 시종에게 손을 흔들었다. 시종은 재빨리 궁정 마법사들에게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계가 해제되었다. 나는 펜던트를 쥔 뒤 영지에 있는 내 조리실로 이동했다.

“여기 있다!”

하인, 그리고 바커스와 함께 만든 복분자주!

함께 마시려고 넉넉히 만들어 놔서 황족과 금좌 11석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마실 수 있겠다. 난 술통을 가지고 이동하려다가 조리대로 달려갔다. 서랍에서 노트를 꺼내 글씨를 꾹꾹 눌러썼다.

[할아버지, 저 왔다 가요. 방학이 끝나기 전에 다시 올게요. 그때까지 운동 열심히 하시고, 편식하지 마요!]

노트를 잘 내려놓고서 술통과 함께 다시 이동했다.

“와아―!”

함성과 함께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헉! 여기가 아닌데!

경기장이 크게 술렁였다.

“포털……. 정말로 프렌시프 영애가……!”

“황궁 결계를 흔들었다지 않소.”

“하지만 어째서 대련장에 포털을 열었단 말인가.”

“폐하께서 이런 날 영애를 위해 결계의 해제령을 내렸다는 것이겠지요.”

“레제와 테르반의 사건, 그리고 황궁 마차 습격 사건의 일로 으름장을 놓으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함부로 덤벼들지 말라는 건가.”

“이 광경을 목격한 자들이라면 절대로 덤벼들 수 없겠지요.”

아니야, 그거 아니야. 나는 그냥 포털 사용이 미숙해서 황족석으로 가야 하는데 여기 덜렁 떨어진 것뿐이라고.

당황해서 굳어 있자 누군가 말했다.

“저런 위엄이!”

그런 거 아니라니까…….

‘어, 어떡하지.’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때, 양옆에 있는 각각의 통로에서 두 남자가 걸어 나왔다. 도미니크와 미카엘. 내 곁에 다가온 남자가 황제를 바로 보며 무릎을 굽혔다.

“광영을.”

“광영을.”

그사이에 나 홀로 우뚝 서 있었다. 도미니크와 미카엘이 동시에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술통을 내려놓고 살짝 무릎을 굽혔다.

“황가에 광영을…….”

그런데 이러면 제가 주인공 같지 않을까요…….

대련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로젠카로튼 황가였다. 나는 황제가 언짢아할까 봐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그는 픽, 실소를 흘릴 뿐이었다.

“장관이로군.”

경기장 기둥마다 달린 마도구를 통해 황제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금좌 11석이 모두 일어나 동의하듯 허리를 굽혔다.

“성녀는 타라가 내세에 내린 축복이라고 하지. 오늘 신성한 존재가 빚은 술을 맛보게 되었으니 짐의 마음이 흡족하다.”

그러자 “술?”, “성녀가 직접 빚은 술이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착하자.’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폐하. 프렌시프에 다시 없을 영광이지요.”

“겸손하기까지 하군.”

시종들이 내려와 내가 가져온 술통을 들고, 다시 관중석으로 올라갔다. 곧 황족을 비롯한 금좌 11석 가문의 사람들에게 술잔이 돌아갔다. 내가 만든 복분자주가 술잔 안에서 가볍게 휘몰아친다. 황제는 크게 기대하진 않는 표정으로 술잔을 들어 올렸다.

“길라게온에 영광을.”

“영광을!”

“영광을!”

금좌 11석이 함께 축사를 외쳤다. 술잔이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하자 나는 긴장으로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급히 오느라 맛도 못 봤는데.’

형편없지만 말아 줘!

“괜찮군.”

황제의 말에 난 한숨을 삼켰다. 열렬한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정도라면 나로서는 충분히 성공이었다. 몇십 년을 숙성시킨 최고급 술만 입에 댄 그였다. 나의 술에 감흥을 느끼기엔 그의 기준이 너무 높았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나는 흘깃 금좌 11석의 표정을 둘러보았다.

“흠, 오디주는 그리 맛이 좋은 편이 아니었지요.”

“이건 꽤 마실 만은 합니다.”

“그렇습니다.”

젊은 영애, 영식들은 달짝지근한 복분자주가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응, 잘됐어.’

그때였다. 한 귀부인이 술잔을 들고 비틀거렸다.

“부인!”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그녀에게 몰렸다.

“오뵈르 백작 부인이군.”

미카엘이 중얼거렸다.

‘아!’

유명한 이름이라서 세니아나의 기억에도 남아 있었다. 남편은 금좌 11석의 한 자리를 차지했고, 그녀 자신 또한 서부에서 가장 큰 항만의 소유주였다. 오뵈르 백작이 걱정 어린 얼굴로 아내를 쳐다보았고, 오뵈르 백작 부인은 휘청였다.

“부인?”

“아…….”

“부인!”

그녀가 풀썩 쓰러져 버렸다. 희게 질린 오뵈르 백작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왜 갑자기 내 복분자주를 마시고 쓰러지는 거지?

나는 황급히 관중석으로 올라갔다. 오뵈르 백작 부인이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직 정신이 있어.’

완전히 혼절한 건 아니었다. 내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는 사이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

“독? 독인가!”

난데없이 일어난 변고에 황족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의사! 의사를……!”

오뢰브 백작이 절규하듯 소리쳤다. 그러자 로웨나 황비가 얼른 의사를 데려오라 명했다. 곧 의사들이 경기장 안으로 뛰어 들어왔고, 백작 부인은 그들에게 업혀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오뵈르 백작과 술을 빚은 당사자인 나 또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어찌 된 것이오!”

백작의 다급한 외침에 의사는 그녀의 눈꺼풀을 뒤집어 보았다.

“위험한 단계는 아닌 듯하지만, 자세히 검사해야겠습니다.”

그들이 검사 기구를 확인하는 동안 난 백작 부인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신가요?”

오뵈르 백작이 내게 날카롭게 소리쳤다.

“괜찮아 보이는가! 대체 술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애처가로 유명한 오뵈르 백작은 거의 정신이 나가 있었다. 백작 부인이 힘없는 손을 들어 그를 붙잡았다.

“전 괜찮…… 영애에게 그만…….”

“이리 안색이 좋지 않은데 괜찮을 리가 있소.”

“독이 들었다면 모두가 당했어야지요. 하지만 쓰러진 건 저 하나가 아닙니까…….”

“…….”

오뵈르 백작 부인이 파리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남편을 대신해 사과드리겠습니다.”

“이해합니다.”

“제가 건강 관리를 잘못한 탓에 성녀님께서 곤욕을 치르셨군요.”

오뵈르 백작이 그녀의 건강에 예민한 이유는 짐작이 간다. 결혼 초에 생긴 병으로 그녀는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백작 부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요새는 이상하게 피곤하고 입맛이 없어서……. 더위가 유난하여 그런 모양입니다.”

‘어?’

뭔가 이상하다.

“저, 부인.”

“예.”

“혹시 속이 안 좋으십니까?”

“요새는요.”

“자도 자도 졸리시고요?”

“그런 편입니다.”

“요의가 잦고, 아랫배가 당기나요?”

“어찌 그리 잘 아십니까?”

때마침 의사가 다가와서 난 급히 말했다.

“검사는 각별히 조심해 주세요.”

“예?”

“임신하셨을지도 모르니까요.”

내 말에 오뵈르 백작 내외가 얼어붙었다. 백작이 난처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백작 부인의 표정은 아주 묘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의 표정.

“영애, 저는 아이를 가질 수 없습니다. 과거에 앓은 병 때문이지요.”

“진단받으신 건가요?”

“십 년간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를 가질 수 없었어요.”

윤세나의 세계엔 십 년이 훌쩍 넘어 아이를 가진 사람도 있다. 시험관 시술에 계속 실패했지만, 포기하자 아이를 가졌다는 해외의 기사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혹시 모르잖아.’

나는 백작 부인과 눈을 맞추었다.

“저는 성녀라잖아요.”

“그렇지요.”

“이번 한 번만 성스럽다는 힘을 믿어 보지 않으실래요?”

“…….”

백작 내외가 시선을 교환했다. 백작은 그녀가 상처받을까 저어했지만, 백작 부인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활짝 웃으면서 얼른 의사의 등을 떠밀었고, 의사들이 진찰을 시작했다.

* * *

대련 중간의 정비 시간이었다. 그 틈에 시녀가 다급히 코트니 황비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오뵈르 백작 부인이 아이를 가졌다고?!”

황비의 고함에 황족은 물론이고 금좌 11석 가문의 사람들, 그리고 황족석과 가까이 있던 관중들의 시선이 모였다. 코트니 황비는 거칠게 시녀를 붙들었다.

“확실하니?”

“예, 궁정의가 확언했습니다.”

어째서! 왜 그 여자만!

아이를 낳지 못하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황비가 되고 몇 년이 지났지만, 신은 그녀에게 아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수로, 왜 갑자기 오늘……!’

그러다 세니아나가 가져온 술통을 쳐다보았다.

“혹시…… 저게 아이를 잉태하게 한 건 아닐까.”

그녀의 말에 로웨나 황비가 미간을 좁혔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프렌시프 영애를 지키기 위해 나타났다는 백사자는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그건 아주 먼 과거에…….”

“신의 축복으로 아이를 가졌다는 얘기도 아주 먼 과거엔 있었지요!”

가까이서 소란을 목격한 귀족들도 묘한 표정이 되었다. 이상하긴 하다. 십 년 가까이 의사부터 용한 마법사까지 오뵈르의 저택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그런데도 아이 울음소리 한 번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왜 하필 오늘 임신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까.’

사람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성녀가 빚은 술…….”

“그러고 보니 오뵈르 부인이 꽤 많이 마셨잖아요?”

막 결혼한 신혼부부가 황급히 남은 술을 찾았다.

“술은!”

“오뵈르 부인의 소란이 있고 치우지 않았습니까. 께름칙해서 다들 마시지 않았지요.”

황궁에서 친자를 두고 있는 건 황후 그라니아가 유일했다. 세 황비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오뵈르 백작 부인은 남편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백작의 눈에도 물기가 어렸다. 한참 어깨를 들썩이던 백작 부인이 내 손을 잡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백작 또한 떨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난……!”

“그보다 이제 부인께선 몸 관리 잘하셔야 해요. 먹고 싶다는 건 다 사다 주시고!”

나는 백작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백작은 다짐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을 두드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 좋네.’

서로를 아끼는 모습이 흐뭇하게만 보인다. 그러다 문득 잡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내가 애를 가지면 어떡하지? 내가 좋아하는 건 순댓국, 곱창, 부대찌개 같은 것들인데.

‘그런 거 구하러 다니려면 나 엄청 힘들겠다.’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백작 내외가 나를 불렀다.

“영애.”

“네.”

“은혜를 갚을 날이 있을 겁니다.”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이렇게 고마워할까.

‘그저 임신을 알아본 것뿐인걸.’

유별난 일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녀는 절대로 임신할 수 없다’는 선입견이 없었다면 모두가 알아봤을 것이다. 내 입장에선 별일이 아닌데, 이렇게까지 고마워하니 민망했다. 하지만 백작 내외의 눈은 아주 진지했다.

“무슨 일이든 영애를 위해 나서지요.”

“감사합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의료실을 나섰다. 서둘러 경기장으로 돌아갔다. 내가 막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우와―!”

커다란 함성이 들렸다. 미카엘이 검을 쥔 채 한쪽 무릎을 굽히고 있었고, 도미니크는 그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결 좋은 흑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날카로운 턱 끝으로 고인 피가 뚝, 뚝, 바닥으로 추락했다. 기수들은 도미니크를 가리키는 흑색의 깃발을 흔들었다. 사람들이 판돈을 주고받으며 신나게 떠들었다.

“제가 뭐랬어요. 평생 전장에서 산 도미니크 황자가 이길 거라고 했죠!”

“모의 대련에선 미카엘 황자의 승률이 더 높았다기에 믿었는데!”

“처음엔 도미니크 황자가 밀리는 듯 보였잖습니까. 왜 갑자기 후반에 움직임이 달라졌을까요.”

“두 분 황자께서 잠깐 대화를 나누시는 듯했지요. 그 뒤로 달라졌으니 뭔가에 불쾌하셨던 게 아닐까요.”

그런 얘기를 들으며 멍하니 서 있는데 황족석에서 가웨인이 날 발견했다.

“세니아나.”

“아, 네!”

“뭐 하고 있어, 올라와.”

“네…….”

나는 도미니크를 힐끔거리며 다시 자리로 향했다. 황제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자식들의 무위가 흡족한 모양이었다. 그는 승자인 도미니크에게 말했다.

“짐의 자랑이구나, 도미니크. 네게 말 이천 마리와 에르왈 섬, 시조의 검을 내리겠다.”

도미니크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영광입니다, 폐하.”

“하면 용맹한 자의 입맞춤을.”

대련에서 이긴 황자가 소중한 사람에게 하는 입맞춤이었다. 도미니크가 성큼성큼 걸어 관중석으로 올라왔다. 귀족 영애들의 뺨이 기대로 붉어졌다. 용맹한 자의 입맞춤은 보통 어머니나 약혼자, 아내의 손등에 한다. 하지만 도미니크에겐 아무도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었다.

“허락하여 주시겠습니까.”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게요?”

“예.”

“왜요?”

그는 대답하지 않고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거절하면 도미니크가 민망해지겠지.’

우물쭈물하던 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도미니크가 내게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뜨거운 손이 목을 감쌌다. 아주 가까이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의 시선이 잠시 내 입술에 머물렀다가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입술이 닿은 곳은 이마였다. 지그시 눌렀다가 애달플 정도로 느리게 떨어졌다.

“어머!”

“어머나…….”

주변에서 황비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아빠가 내 어깨를 덥석 끌어안았다. 가웨인은 튕겨지듯 일어났고, 란슬롯은 한 팔로 내 앞을 막았다. 도미니크는 막아 볼 테면 막아 보라는 듯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 * *

황자 대련의 소식을 전해 들은 황후는 헛웃음을 흘렸다.

“2황자가 정신이 나갔구나.”

“…….”

“그래, 미친 게지.”

감히 제 아들을 이긴 데다 프렌시프의 성녀에게 입 맞췄다고.

시녀장 올슨은 난처한 표정으로 황후에게 말했다.

“폐하, 그리 노여워 마십시오.”

“…….”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들 여깁니다. 도미니크 황자에겐 모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내가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이마에 입 맞춘 이유는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손등의 키스는 복종을 의미하기도 하지.’

입 맞출 수 있는 상대가 모친과 약혼자, 아내뿐인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황자인 도미니크가 후작 영애의 손등에 입 맞추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거다’라는 게 사람들의 의견이었다.

“황비들에게 입 맞췄으면 더 곤란하지 않았겠습니까.”

“…….”

도미니크가 다른 황비의 양자가 되면 황비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그의 휘하에 모일 것이다.

“그래서 부득이 성녀에게 입 맞춘 것이겠지요.”

“미카엘을 이긴 것이 문제지! 도미니크가 이기지만 않았더라면 성녀에게 입 맞추는 건 내 아들이었어!”

황후는 흘러내린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어떻게 이처럼 번번이 일이 어그러진단 말인가! 경기장에서 세니아나가 또 한 번의 기적을 선보였다는 사실이 황궁에 파다했다. 오뵈르 백작 부인의 임신. 정말 그녀의 힘인지 확신할 순 없지만,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이제 곧 수많은 사람의 입을 타고 제국 전역에 소문이 퍼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세니아나의 신성함을 존경하며 따르는 세력이 생길 터였다. 세니아나 프렌시프는 광맥이었다. 미카엘의 미래에 여명을 드리울!

시녀장은 분노로 일그러진 황후의 얼굴을 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

황후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녀장은 황후의 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녀의 말을 들은 황후의 눈이 커졌다.

“사실이냐?”

“예.”

“그렇다면……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황후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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