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아파! 가웨인이 란슬롯에게서 받은 손수건으로 때 밀듯 내 이마를 닦았다.
“내가 언젠가는 그 새끼를 죽이고 말겠어.”
―하고 으르렁거리며.
“아, 아픈데…….”
내가 울상을 짓자 그제야 손이 멈추었다. 가웨인이 아득, 이를 갈고 말했다.
“그 사자는 뭐 하는 거야.”
“멀린이요?”
“네가 위험할 땐 튀어나온다며!”
“그야 위험하지 않으니까 안 나온…….”
나는 어리둥절해서 가족들을 쳐다보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가웨인만 잔뜩 흥분한 줄 알았더니, 란슬롯도 얼어붙을 정도로 차갑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리고 아빠는.
“아빠?”
“…….”
황궁 복도에 새겨진 황가의 가계도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 표정이 없는데 이상하게 가웨인이나 란슬롯보다 무섭다.
“아빠…….”
“그래.”
“기분이 좋지 않으세요?”
도미니크가 입 맞춘 것 때문에 황가 권력 싸움에 엮일까 봐? 나는 걱정 어린 얼굴로 그를 보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마에 한 거니까…… 사람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고요…….”
내가 웅얼거리던 때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도미니크가 다가오고 있었다. 가족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해졌지만, 도미니크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저하.”
“이제 돌아가십니까?”
“네, 무도회가 내일모레니까 준비해야 해서요.”
“에스코트는 저에게―”
가웨인이 눈을 부릅뜨며 막아섰다.
“세니아나는 저희와 갈 겁니다.”
도미니크가 무어라 말하려고 했을 때였다. 란슬롯이 생긋 웃으며 나를 잡았다.
“세니아나.”
“네?”
“황궁 무도회의 에스코트는 연인이 하는 거야.”
“아! 그렇군요!”
사실 난 도미니크에게 부탁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그도 에스코트할 사람이 마땅히 없는 것 같았고, 나도 청을 받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연인끼리 가는 거라면…….’
도미니크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맡겨 달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저하는 지나치게 상냥하세요.”
“……제가 말입니까?”
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오늘 일로 사람들이 이상한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무도회까지 같이 가 주시려고요?”
에스코트해 줄 사람이 없을까 봐 그러는 거지?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니까 도미니크가 미간을 좁혔다. 나는 손을 꽉 움켜쥐고 파이팅 포즈를 했다.
“저하의 연애, 제가 지켜드릴게요!”
“……하.”
도미니크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왜인지 가족들은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 * *
나는 드레스를 입고 거울을 빤히 쳐다보았다.
‘으으음.’
아카데미에 돌아가야 해서 무도회에 참석하지 못할 줄 알고 드레스를 사 놓지 않았다. 영지의 드레스도 되도록 편한 것 위주라 내겐 파티용 드레스라는 게 딱히 없었다. 그래서 있는 드레스를 수선했는데, 제법 괜찮았다.
“마릴린, 수선을 잘하는구나.”
“외가가 의상실을 했거든요. 어릴 때부터 일을 도와드렸더니 바느질에 요령이 생겼지요.”
마릴린과 시트론은 내 옆에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름다우세요, 아가씨!”
시트론은 다 큰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처럼 감동에 겨워했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마릴린도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예술품을 보듯 황홀한 탄성을 흘렸다. 나는 거울 앞에서 한 번 빙글 돌았다.
“드레스가 예쁘긴 하지만…….”
“왜요, 아가씨?”
“나한텐 안 어울리는 거 같아서.”
상체 부분은 화려한 레이스에 오프 숄더이고, 허리선을 꽉 조여 골반이 두드러져 보였다.
‘이런 건 입어 본 적 없는데.’
윤세나일 적엔 바지와 티셔츠만 입었고, 세니아나가 되고 나선 움직이기 편한 펑퍼짐한 드레스를 입었다. 그래서 난 거울 속의 내가 엄청 어색해 보였다. 마릴린이 펄쩍 뛰었다.
“절대로요! 이 정도는 다들 입는걸요!”
“그런가?”
“그럼요!”
마릴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연하다는 듯 얘기했다.
‘으음, 그래. 사실은 이런 드레스 한 번 입어 보고 싶었어.’
거울 앞에서 요리조리 살피고 있으니 하녀들이 액세서리를 걸어 주고, 화장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내려갔다. 또각, 또각. 높은 굽의 구두 소리를 듣고, 기다리고 있던 오빠들이 고개를 돌렸다. 가웨인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기사들에게 명했다.
“……귀족 출신 기사들을 호위단에 포함해라. 홀 안에서도 호위를 해야겠다.”
란슬롯은 빙그레 웃으며 내 어깨에 재킷을 걸쳐 주었다.
“오늘은 달라 보이는걸.”
“이상한가요?”
“사내들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아서 걱정이지.”
“오빠도 멋져요!”
“영광입니다, 레이디.”
란슬롯이 내 손등에 입 맞췄다.
“갈까?”
“네!”
나는 오빠들과 함께 무도회장으로 향했다. 마르스 홀에서 이뤄지는 무도회는 미혼의 영애, 영식들의 무대였다. 기혼자들은 중앙 홀에서 따로 무도회를 즐긴다.
“란슬롯 프렌시프 님, 가웨인 프렌시프 님, 세니아나 프렌시프 님 드십니다!”
문지기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우리는 마르스 홀에 입장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프렌시프 경들이에요.”
“아아, 란슬롯 님……!”
“가웨인 님은 여전히 근사하시군요.”
영애들은 부채로 황홀한 표정을 감췄다. 영식들도 날 힐끔거렸는데, 그러다 가웨인을 보면 혼비백산하고 사라졌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몰려들었다. 가웨인과 란슬롯은 나를 옆에 딱 붙이고, 대충 참석자들을 상대해 줬다. 내게도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간략하게 무슨 가문의 누구라고 설명하곤 상냥하게 술을 권했다.
“영애, 칵테일을 한 잔…….”
그럴 때마다 가웨인이 눈을 부라렸고, 란슬롯은 말을 돌려 버렸다. 홀엔 냉방 장치가 가동되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열기로 꽤 더웠다. 난 비치된 음료를 마시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새콤달콤한 음료가 마음에 쏙 든다. 두 잔째 마시고 있는데 란슬롯이 빙긋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첫 춤의 영광을 부디 제게.”
아주 달콤하고 정중한 말투였다.
‘춤은 처음인데……!’
‘어쩌지?’ 하는 눈빛으로 란슬롯을 쳐다보았고, 그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그의 손을 잡자 란슬롯이 나를 중앙으로 이끌었다. 그의 어깨와 손을 각각 잡고 엉거주춤 움직였다. 그런데.
‘어?’
춤을 추는 게 생각과 달리 익숙했다. 그러고 보니까 이 스텝, 선생님과 주말마다 손을 잡고 딴딴딴, 춤추며 놀았던 그 스텝이었다. 게다가 란슬롯이 아주 능숙하게 이끌어 줘서 첫 춤임에도 불구하고 어색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춤에 재능이 있는데.”
스스로도 깜짝 놀랐기 때문에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란슬롯은 그런 내가 사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어서 조금 부끄러워졌다. 음악은 달콤하고, 란슬롯의 눈빛은 다정했다.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아서 나는 설레고 즐거웠다.
그와 한 곡을 추고 나자 다음엔 가웨인이 손을 뻗었다. 가웨인은 란슬롯보다는 덜 능숙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우스꽝스러운 모양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춤추는 내내 가웨인이 픽픽, 실소를 흘렸다.
“왜요?”
“깡총깡총 뛰며 춤추는 영애는 처음 보아서 말입니다~”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는 가웨인과 함께 사뿐히 돌며 주변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처럼 가볍게 통통 뛰며 추는 사람은 없었다.
“오빠는 키가 크니까 제가 맞추려면……!”
“굳이? 신이 나서 그런 것 같은데?”
“……비밀로 해 주세요.”
결국 가웨인이 소리 내어 웃었다. 오빠들과 춤을 추고 돌아왔을 때, 미카엘의 입실을 알리는 경비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가 기혼자들과 함께 중앙 홀에 있기 때문에 그는 이 자리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이었다. 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인사했다.
“황가에 광영 있기를.”
“황가에 광영 있기를.”
나도 따라 인사하고서 그를 힐끔거렸다.
‘왜 혼자 왔지?’
나야 오빠들과 함께였지만, 그는 어째서?
곧 미카엘 주변으로 사람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난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마음에 들었던 음료를 마셨다. 가웨인이 미간을 좁혔다.
“뭐 하는 거야.”
“네?”
“그거 술이라고.”
“아……!”
“벌써 얼굴이 붉어졌잖아.”
춤을 추고 돌아와서 더운 줄 알았는데 취기 때문이었나 보다. 난 열을 식히기 위해 가웨인과 정원으로 나섰다. 해가 진 후라 바람이 서늘했다. 가웨인은 달아오른 내 얼굴을 손등으로 식혀 주었다. 그렇지만 한 번 오른 취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잠깐 있어. 사환에게 약을 받아올 테니까.”
홀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귀족뿐이었다. 호위 기사들도 일단 가문의 이름을 걸고 들어오는 거라 이 안에선 사사롭게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가웨인은 호위에게 단단히 지키라 이른 뒤에 직접 약을 가지러 갔다. 벤치에 앉아 기분 좋게 바람을 쐬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로브를 푹 뒤집어쓴 여성이었다. 그녀가 나를 보고 천천히 로브 모자를 벗었다.
‘코트니 황비!’
나는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앙 홀에 있어야 하는 그녀가 왜? 황후나 로웨나 황비도 아니고 하다못해 같은 동부 사람인 가브리엘라 황비도 아니었다.
“부탁이 있단다.”
“네?”
“오뵈르 백작 부인의 임신이 영애의 신성한 힘 때문임을 나는 알고 있어.”
복분자주?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무슨…….”
“부디 신성한 술을 나누어 줘.”
“황비님, 이성적으로 생각하십시오.”
내게 그런 힘이 있을 리 없잖아. 삼신할머니도 아니고.
“제발…….”
그녀는 나를 붙들고 계속 애걸했다.
“나는 황궁에 들어온 후로 줄곧 정 붙일 데 하나 없이 살았단다.”
“술은 남은 게 없어요.”
만들어 둔 것을 통째로 가져왔는걸.
“다시 빚어 줄 순 없겠니.”
“…….”
“뭐든, 영애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 주마.”
그녀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순간, 손등이 따끔했다. 내가 앗! 하고 신음했을 때, 가웨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동생에겐 어쩐 일이십니까.”
황비는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가웨인은 내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연락도 없이 깊은 밤에 은밀히 찾아오신 걸 황제 폐하께서도 아십니까.”
협박하는 듯한 어조라 황비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녀는 주먹을 꼭 쥐고는 손을 거두었다.
“급한 마음에 무례를 범했구나.”
황비가 나를 쳐다보았다.
“날 밝을 때 다시 보지.”
그녀가 떠나자마자 가웨인이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새파란 살기가 몸을 감싸고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너희들은 뭐 하는 것들이야.”
“송구합니다. 황족을 제압할 순 없는지라…….”
가웨인은 변명한 기사의 장딴지를 걷어찼다.
“그건 내가 책임질 일이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기사는 거무죽죽한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수그렸다. 놀란 내가 얼른 그를 붙잡았다.
“오빠……!”
“홀로 돌아가.”
“…….”
“돌아가 있어.”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가웨인과 기사들을 보았다.
‘기사단은 가웨인의 영역이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홀로 돌아갔다.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란슬롯이 내 곁에 다가왔다.
“우리 막내 표정이 왜 이렇게 안 좋을까.”
“그게…….”
그때, 내가 밖에 있는 사이 무도회장에 온 도미니크가 보였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는 곧장 내게로 걸어왔다.
“영애, 혹시 마법―”
“프렌시프 영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카엘까지 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내 곁에 선 세 남자는 벼린 칼날처럼 날카롭게 서로를 바라봤다. 나는 속으로 끄응, 신음을 흘렸다.
‘오늘은 왜 이런 거지요.’
황비 때문에 곤란해지질 않나, 그 일이 끝나니 또 마음이 불편해지질 않나.
미카엘은 빙그레 웃으며 내 앞에 상자를 내밀었다.
“이건…….”
“어울릴 것 같아서.”
그가 상자를 열어 안에 있는 목걸이를 보여 주었다. 진주와 다이아몬드로 엮은 화려한 목걸이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여기서 거절하면 미카엘 황자에게 망신을 주는 게 되어 버린다. 거절할 수 없는 자리에서 호의를 베풀 듯 강요하는 건 황후 가문의 전통인 걸까.
‘모자가 둘 다 왜 이러는 거야!’
나는 침착하려고 애쓰며 고개를 숙였다.
“이미 황제 폐하께 사죄의 선물을 넘치도록 받았습니다.”
미카엘의 눈빛에 재밌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방금 말로 황자의 선물을 ‘황후의 잘못에 대신 용서를 비는 효심’으로 만들었으니까.
‘사비에르 영애와 함께 나를 비로 들이려는 거라면 꿈 깨.’
―라는 의미기도 했다.
미카엘은 빙긋,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런 것으로 해 두지.”
상자에서 목걸이를 꺼내고, 나를 안듯이 앞에서 목걸이의 걸쇠를 잠근다. 흠칫 놀란 나는 바짝 어깨를 좁혔다. 내 당황이 즐거운 듯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니 더더욱 거절해선 안 되겠지.”
낮은 목소리가 귓바퀴를 감고 흘러들었다. 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때 란슬롯이 굳은 얼굴로 미카엘에게 말했다.
“저와 따로 말씀 나누시죠.”
미카엘은 목적을 달성했으니 아무래도 좋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란슬롯이 도미니크를 돌아보았다.
“둘째가 돌아올 때까지 부탁드리죠.”
“제게 말입니까.”
“적의 적은 이따금 동지가 될 수 있는 법이니까요.”
그렇게 말하곤 란슬롯이 미카엘과 함께 사라졌다. 파티장이 술렁여서 곤란해졌다. 그 분위기를 피하기 위해 도미니크가 나를 테라스로 이끌었다. 가웨인이 기사를 두드려 패고 있을 것 같은 정원이 아닌 테라스라서 다행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난간을 잡고 끄응, 신음했다.
‘저 모자 진짜 싫어!’
강요하고! 곤란하게 하고!
미카엘이 나 때문에 다친 일로 마음의 가책을 느꼈는데 오늘로 다 날아가 버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황족인 데다가 내게 악의가 없다는 걸 알아서 지금껏 그냥 두었지만, 이젠 못 참겠다.
‘더는 들러붙지 못하게 해야겠어.’
나 때문에 테라스에 나와 있는 도미니크에게 미안하다. 난 기가 죽어서 도미니크를 흘깃 쳐다보았다.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저하껜 파트너가 있을 텐데…… 저 때문에 제대로 에스코트도 못 하시고…….”
파트너는 엄청 화가 났을 거다.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돌아가 보셔도 괜찮아요. 저하의 파트너에겐 제가 상황을 잘 설명할게요.”
“…….”
“저하와 저는 정말로 친구일 뿐이라고……!”
내가 그렇게 외치던 찰나,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쌍월의 밤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나는 다시 난간을 잡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짙은 감색의 하늘에 수없이 많은 별이 춤을 추듯 가라앉는다.
“아…….”
유성우가 쏟아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나는 이내 도미니크를 돌아보았다.
“보세요, 저하! 너무 예쁘—”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숨이 멈추었다. 그의 표정이, 눈빛이, 나를 향해 내딛는 걸음이 평소와는 달랐으니까. 당황하여 뒷걸음질 치던 나는 난간에 가로막혔다. 가슴이 위험하게 수런거렸다.
“왜…….”
어째서 그런 얼굴로 나를 보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미카엘이 걸어 준 목걸이를 매만졌다. 목에 스치는 손끝이 뜨겁다.
“저하…….”
그의 숨결이 느껴진 순간, 목걸이가 끊어지며 진주가 후두둑 떨어졌다. 놀라 몸을 움츠렸을 때였다. 그가 내 목을 끌어당겼고, 동시에 입술과 입술이 부딪쳤다. 그의 숨결과 열기가 지독하게 뜨거웠다.
밀어낼 생각 같은 건 하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잡고 입술을 받아들일 뿐.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고, 그가 일렁이는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난 이제 친구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아졌어.”
모르겠다.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의 거절이 어째서 이토록 달콤한지. 도미니크는 내 입술을 매만지고, 곧 내게서 살짝 떨어졌다. 시선은 내게 고정한 채. 가슴이 너무 뛰어서 심장이 아프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난 황급히 등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매만졌다.
머릿속이 엉망이 되는 느낌.
‘이상해.’
너무 이상해, 이거.
테라스엔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난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까 봐 두려웠다. 날 찾아 테라스로 들어온 가웨인이 도미니크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도미니크가 나를 보며 말했다.
“경이 왔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네, 그, 그러…… 세요.”
자꾸만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서 혀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미니크가 나서고, 가웨인은 왈칵 인상을 구겼다.
“뭐야, 분위기 왜 이런 건데.”
“…….”
“세니아나.”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난간에 기대 스르륵 주저앉았다.
* * *
파티 홀을 떠나는 도미니크에게 부관 알베르가 따라붙었다. 알베르는 주변을 살피고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애와 만난 사람이 누군지 확인했습니다.”
도미니크가 세니아나와 테라스로 가기 전 내린 명이었다.
“코트니 황비가 정원으로 들어가는 걸 본 자가 있었습니다.”
“……코트니, 라.”
“한데 황비가 접근했다는 걸 어떻게 아신 겁니까.”
마치 본 것처럼 수상한 자가 그녀에게 접근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 않은가.
“마법이 걸려 있었으니까.”
도미니크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파티 홀을 되돌아보았다. 제 인생을 꼬아 버린 힘이 도움이 되었다고 느낀 유일한 순간이었다. 신관의 핏줄을 타고난 그에겐 모친의 능력이 전승되었다. 마력을 감지하고 끊어 낼 수 있는 힘이었다. 파티 홀에서 본 세니아나에겐 붉은 실이 이어져 있었다. 미카엘에게로.
‘그건 매혹이다.’
이민족과 전쟁에서 쓰인 마법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붉은 실에 묶인 병사들은 점점 실이 이어진 자에게 사랑을 느끼고, 종국엔 복종하게 된다. 부관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코트니 황비 가문의 마법사가 정신계 마법을 완성했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부관의 눈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황후겠지요.”
“…….”
“프렌시프에 알리시죠. 성녀를 구한 게 아닙니까.”
도미니크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구해? 아니, 그것은 핑계였다. 마법을 끊어 낸다는 핑계를 스스로에게 대고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미카엘과 이어진 실을 보는 순간부터 참을 수 없었다. 순수한 호의로 가득한 시선이 미카엘에게 향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전신을 옭아맸다.
그건 질투였고, 동시에 집착이었으며 미카엘의 품에서 미소짓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다는 절실함이었다.
도미니크는 즉시 황후궁을 찾았다. 그라니아 황후는 감히 자신 앞에서 살기를 숨기지 않는 그를 보고 조소를 흘렸다.
“폐하께서 끼고도시니 겁을 잃었구나. 황궁 꼭대기에서 뛰노는 것 같으냐.”
“그럴까 싶습니다.”
“감히!”
황후가 벼락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책을 던지듯 내려놓고, 테이블 위에 있던 차를 그에게 끼얹었다. 도미니크는 피하지 않았다. 머리끝으로 물이 고여 그의 턱 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황후가 입술을 짓씹었다. 마주칠 적마다 불쾌하게 만들던 얼굴. 황태자와 미카엘이 모친 쪽을 닮은 데 반해 도미니크는 황제를 판에 박았다. 게다가 신이 정성 들여 빚은 것 같은 얼굴은 미카엘에게 오롯이 가야 할 시선마저 빼앗는다. 황후가 이를 악물었다.
“네가 감히 누구에게…….”
도미니크가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갓 태어난 저를 국경으로 쫓아낸 일도, 전장에서 죽으라 명하신 것도 제게는 의미 있는 일이 아닙니다.”
“너……!”
도미니크의 잿빛 눈동자가 거뭇하게 가라앉았다.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자의 살기는 카렌듈라의 요람에서 자라 황궁이라는 안전한 공간에서 산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후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올랐다. 고작 그릇된 핏줄 따위에게 위압감을 느꼈다는 데 수치심이 들었다. 도미니크는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녀에게 손대지 마십시오.”
“……!”
“한두 사람 죽는 것으론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 시체 더미 속엔 미카엘이 있을 테니. 말뜻을 이해한 황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말을 끝으로 몸을 일으킨 도미니크는 황후가 내던진 책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경고하듯 고개를 가볍게 까닥이곤 방을 나섰다.
* * *
무도회에서 돌아온 후로 나는 내내 멍했다. 그러다 문득문득 새빨개져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런 날 가족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무도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아빠의 물음에 난 화들짝 놀랐다.
“아니욧!”
헉! 당황해서 목소리가 새 버렸다. 가족들이 미심쩍은 얼굴로 날 쳐다봤다.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 그, 아! 저기, 방학이 끝나기 전에 영지에도 내려갈까 하는데요.”
“언제?”
“모레 뜨는 쌍월만 보고요. 관측소에서 보면 더 잘 보인다고 하니까.”
아빠는 잠깐 찡그렸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흘렸다.
“그래.”
그러더니 고기를 잘라 내 접시에 놓아 주며 말을 이었다.
“코트니 황비가 접근했다고?”
난 고기를 오물오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슨 일로.”
“술을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제가 오뵈르 백작 부인에게 아이를 내린 거라고 생각하나 봐요.”
말도 안 되는 일인데.
‘하긴, 포털이나 신수도 말이 안 되긴 하지만.’
황비들은 그저 황제의 아내가 아니었다. 각 부의 운명을 책임진 통솔자인 것이다. 가장 세가 약한 남부에서 온 코트니 황비가 절박할 만도 했다. 황위 싸움에 참가할 수 없으면 애초에 정쟁엔 끼어들 수 없으니까.
‘황후나 로웨나 황비는 의심이 많아서 곁을 잘 내주지 않고.’
가웨인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법 믿는 사람이 많은가 봅니다. 만남을 청하는 편지를 물렸더니 직접 저택 앞을 찾아오는 자들도 있더군요.”
정말로?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 란슬롯이 아빠를 쳐다봤다.
“정보부를 움직이는 게 좋겠군요.”
“정보부라.”
“신성성을 널리 퍼뜨리는 게 막내의 안전에 이롭습니다. 시선이 집중되면 암살자들도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겠죠.”
“그렇겠지.”
하지만 그건 사기가 아닐까?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란슬롯을 보자 그가 빙그레 웃었다.
“책략이지.”
그러곤 내 접시를 가져갔다.
“많이 먹어라.”
고기에, 가니쉬까지 잘게 잘라 되돌려 준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음, 안전을 위해서라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집사 마일로가 상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가웨인이 물었다.
“그건 뭐지?”
“아가씨 앞으로 전달되었습니다.”
“발신자는.”
“무명으로 왔습니다만―”
말하던 그가 잠깐 주저하며 아빠를 쳐다봤다. 본래 우편물은 저택의 우편국에서 까다로운 검사를 걸쳐 주인에게 전달된다. 마일로처럼 꼼꼼한 집사가 그런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긴급 전달 표식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게 뭐냐는 듯 란슬롯을 보자 그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족과 금좌 11석 사이에만 쓰이는 비밀 기호야.”
그렇다면 엄청 중요한 거잖아! 그런 걸 내게 왜?
마일로는 ‘마력이나 신성력이 스며 있는지 확인했지만 어떠한 것도 잡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상자에 든 건 책과 편지였다. 나는 책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삿된 자들의 기록!’
“도미니크 저하께서 보내셨나 봐요.”
그러고 가족들에게 속닥속닥 “황궁에서만 열람할 수 있는 거거든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가웨인이 물었다.
“삿된 자들의 기록은 왜?”
“일단 알아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삿된 자들은 포털 안으로도 들어올 수 있다고 하니까.”
“전설 속에서만 등장하는 거잖아. 삿된 자라는 거.”
“그냥요. 신수도 있는데 삿된 자들은 없을까 싶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니 가웨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부터 꺼내 읽은 난 우뚝 굳어졌다. ‘코트니 황비가 내게 금술을 걸었고, 정화되었으나 혹시 모르니 마법사에게 검사를 받아 보라’는 내용이었다.
마릴린이 저택의 마법사 중 친분이 있는 자를 내 방으로 은밀히 데려왔다. 마법사는 구리색 머리칼을 가진, 내 명치까지 오는 작은 키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내 손목과 어깨, 무릎, 발등에 인을 그리고 마법을 발동했다. 한 시간에 걸쳐 검사를 하고 난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금술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자 마릴린이 마법사를 붙들고 소리쳤다.
“우리 아가씨 괜찮으신 거예요?”
“금술이 정화되며 남은 흔적일 뿐이다. 일주일쯤이면 흔적조차 사라질 거야.”
나는 마법사에게 물었다.
“무슨 마법인지도 알 수 있어?”
“제 식견으로는 정신계 마법의 일종인 듯합니다. 매혹, 이라는.”
그녀는 매혹 마법이 어떤 것인지 설명했다. ‘……복종하게 된다’까지 들은 난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날 보고 시트론이 말했다.
“주인님과 두 분 도련님께 말씀드리지요.”
“아니, 말씀드리지 마.”
그렇지 않아도 몇 번이나 황궁과 부딪쳤다. 여기서 일이 한 번 더 벌어진다면 프렌시프와 황궁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이대론 못 넘어가지.’
난 그날 오후 바로 코트니 황비의 궁을 찾았다. 집에서 만들어온 자두 셰이크를 든 채. 자두의 씨를 제거한 뒤 꿀과 우유를 넣고 갈았다. 위엔 민트나 아몬드 대신 잡곡을 불에 한 번 구워서 곱게 간 잡곡 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영애!”
코트니 황비는 벌떡 일어나 나를 반겼다.
“와 주었구나. 이렇게 기쁠 데가!”
그녀는 내 손에 들린 병을 보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코트니 황비와 함께 있던 가브리엘라 황비에게 먼저 눈인사했다. 보통 때라면 열등감을 느꼈을 코트니 황비는 신경을 온통 병에 쏟고 있었다.
“어서 이리 앉으렴!”
코트니 황비가 얼른 내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렇게나 빨리 술을 만든 거니.”
“술은 시간이 걸려서 다른 것을 가져왔지요.”
‘복분자도 임신에 도움 되긴 하지만, 자두도 아주 좋거든.’
우유와 잡곡은 물론이고.
“성녀가 만든 거라면 뭐든 좋겠지.”
코트니 황비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녀가 병에 손을 뻗으려던 찰나에 내가 먼저 나섰다.
“가브리엘라 황비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마침 같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브리엘라 황비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고, 코트니 황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이엔 관심 없다고 했으면서 뒤에선 달리 행동하신 모양이군.”
“가브리엘라 황비님께선 제게 그런 부탁을 하시지 않았어요.”
누구와는 다르게.
그러자 코트니 황비가 흥, 코웃음을 쳤다.
“같은 동부 사람끼리 돕기로 했나 보지? 그럼 내 것은 언제 만들어 줄 거니.”
“시간이 나면요.”
황비가 기가 차다는 듯 나를 쏘아보았다.
“부탁하지 않은 가브리엘라에겐 이토록 빨리 만들어 주었으면서 나는 어째서……!”
“황비님께선 좋은 마법사를 곁에 두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차갑게 그녀를 응시했고, 내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코트니 황비가 숨을 들이켰다.
“무슨…… 무슨 말인지…… 나는 잘…….”
“누군가는 그들을 이용해 금술도 쓴다지요?”
“……!”
코트니 황비의 낯빛이 점점 새파래졌다. 난 모른 척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 못된 사람이에요.”
“……그렇지.”
“만약 제가 정말로 신성한 힘이 있다면 저는 그런 사람에겐 절대로 힘을 쓰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녀는 목이 바짝 타는 모양인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쥐었다. 그리고 난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아니, 막아야 하려나요.”
“뭐?”
“원하는 바를 절대로 이루지 못하도록. 온 힘을 다해서.”
비단 아이를 얻는 일뿐만 아니다. 그녀가 하는 모든 일에 훼방을 놓을 거라는 뜻이었다. 코트니 황비의 눈이 커지더니 벌떡 일어나 나를 붙잡았다.
“내, 내가 아니야! 그 일은 전부……!”
알아, 황후가 시킨 거겠지. 코트니 황비는 그녀의 충실한 끄나풀이었다. 황후의 가문에서 원조를 받고 있으니까.
나는 빙그레 웃었다.
“명 내린 사람이나 이행한 사람이나 몹쓸 짓을 한 건 같잖아요?”
“영애, 제발……!”
나는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떼어 내고 속삭였다.
“앞으로 각별히 주의하세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요?”
그렇게 말한 후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해드렸으니 저는 가 보겠습니다. 대부인을 뵈러 입궁한 거라.”
활짝 웃은 뒤에 그녀의 궁을 빠져나왔다. 이제 코트니는 종이에 베이는 아주 사소한 불행에도 겁을 먹게 될 거다. 내가 정말 신성한 힘을 가지고 있는 줄 아니까.
‘이건 사기가 아니라 책략인 거야!’
란슬롯이 한 말을 떠올리고 나는 응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소피아 부인을 보고 나서 이번엔 로웨나 황비의 궁을 찾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제 궁에 찾아온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내가 코트니의 다음 차례로 벌을 받는 걸까?”
벌써 귀에 들어갔다고? 아직 한 시간도 안 됐는데?
황비는 내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곳저곳에 귀가 있거든. 네 덕에 얻은 황후의 권한이 이렇게 큰 도움이 된단다.”
“아…….”
“그래서? 나는 영애에게 무슨 잘못을 했을까.”
“벌이라니요. 제가 어떻게 황비님들께.”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황비는 깔깔 웃었다.
“네가 가고 코트니가 혼절했다더구나. 아주 매섭게 혼을 낸 모양이지.”
“황비님껜 아닙니다.”
“그럼 가브리엘라에게 주었던 상일까?”
“필요하지 않으시잖아요.”
“영리하기는.”
로웨나 황비는 내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우리 전하면 되었다. 선대 황후 폐하와 굳게 약속했거든. 전하를 지키기로.”
그래서 스스로 독을 먹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구나.
“멋지세요.”
“무슨 일로 날 찾아왔니.”
“음, 선물을 드리려는 것이긴 합니다.”
로웨나 황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물?”
“저는 황비님께서 아주 오래 황후 폐하의 권한을 맡으시길 바라요. 그래서…….”
나는 목소리를 바짝 낮추고서 이어 말했다.
“코트니 황비님을 이용하세요.”
“이용?”
“그분께서는 황후 폐하와 공모하여 제게 금술을 사용했어요.”
“하!”
로웨나 황비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정신이 아니군!”
음, 나도 사실 그렇게 생각하긴 했어.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고, 로웨나 황비는 콧방귀를 뀌었다.
“욕망 때문에 너와 사비에르 영애를 저울질하더니. 그 대가로 궁지에 몰려서 이제 뵈는 게 없는 거야.”
“제 몸에 금술의 흔적이 남았긴 하지만 곧 사라질 테고, 코트니 황비님이 금술을 썼다는 증거는 따로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용하라는 말이지?”
나는 히죽 웃었다.
“궁지에 몰리면 변절하기도 쉽지요.”
“아하!”
잠시 내 말을 곱씹던 그녀가 깔깔 웃었다.
“이리 영특할 수가!”
영리한 황비는 금세 내 말을 알아차리고 아주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래.’
코트니 황비가 변절해서 황후와 싸우게 하란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나 때문에 겁을 먹었는데 로웨나 황비까지 숨통을 조이면 설 자리를 잃는다. 당연히 일을 지시한 황후에게 기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황후가 바로 코트니를 받아 줄까? 절대로 아니지. 꼬리 잡히기 싫어서 코트니를 아예 끊어 낼 것이다.
화가 난 코트니가 황후와 치고받고 싸우면 로웨나 황비는 즐겁게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황제가 알아서 둘을 제재하려 들 테니까. 그럼 황후의 권한은 오래도록 로웨나 황비가 쥐고 있겠지.
‘응, 좋아.’
로웨나 황비는 당장에 코트니를 박대하러 갔고, 난 저택으로 돌아가서 황후에게 편지를 썼다. 간략하게 말하면―
[코트니가 내게 금술을 써서 너무 무서움! 님이 직무 정지 중이라 로웨나한테 말하려고 찾아갔었는데, 그래도 난 님이랑 더 친하잖아? 그러니까 님한테 조언을 구하고 있는 거임.
코트니 말로는 시킨 사람이 따로 있다고 하는데 대체 누굴까? 로웨나한테 말하는 게 좋겠음?]
―이었다. 선생님과 식당의 요리 재료를 다듬으면서 봤던 온갖 드라마의 계략이 도움이 되는 때가 오다니.
‘인생은 모르는 거라니까.’
편지는 저녁 무렵에 황후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코트니 황비가 황후를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당했다는 얘기가 귀에 들어왔다.
난 드레스룸과 방안을 돌아다니며 으음, 침음했다. 오빠들이 영지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왜 짐을 챙기지 않았는지 알겠다.
‘다시 올 테니까.’
웬만하면 졸업 후엔 영지에 콕 박혀 있고 싶지만. 그래도 여기엔 아빠가 있고, 아빠는 할아버지가 있는 한 영지에 잘 내려오지 않을 거다.
‘두 분이 화해하시면 좋을 텐데.’
그래, 옷은 몇 벌 안 되니까 그냥 두고 가자. 난 그렇게 생각하고 아카데미에서 가져왔던 것들만 다시 챙겼다. 내 가방에 짐을 꾸리던 마릴린이 훌쩍훌쩍 울었다.
“왜 울어?”
깜짝 놀라서 물으니 마릴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아가씨를 모시기 시작했는데 제대로 시중을 들지도 못하고 이렇게 보내게 되니…….”
원대한 포부씩이나?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니 마릴린은 흑흑 울면서 말했다.
“아가씨를 성의 사용인보다 잘 모시려고 했어요…….”
나는 마릴린 앞에 쪼그려 앉아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충분히 잘해 줬어.”
매일매일 화병의 꽃을 바꿔 주고, 마사지를 하루도 거르지 않은 데다가 황도에 대해 알려 주려고 소문까지 열심히 수집했다. 내 말에 마릴린은 감동한 듯 더욱더 펑펑 울었다.
‘가려니까 아쉽긴 하다.’
별일이 다 있었지만, 즐거운 일도 있었는걸. 아빠와 만난 것도, 가족들에게 마음을 열게 된 것도, 그리고 도미니크와 가까워진…….
그러다 시무룩 고개를 떨궜다.
‘이제 친구 하기 싫다고 했지.’
그럼 우리는 뭐야? 왜 나한테 키스한 건데.
나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서 베개를 꽉 끌어안았다.
‘호, 혹시 이게 썸인가?’
끄응, 신음하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해 본 적이 있어야 그게 맞는지 알지…….
윤세나의 세상엔 오직 선생님과 적뿐이었다. 미용실 언니라든가, 이웃이 있긴 했지만 그다지 깊은 관계는 아니었다. 그래서 난 이럴 때면 인간관계를 잘 모르는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도미니크가 날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사실은 바람둥이라서 날 재미로……?
“너무해!”
그렇게 생각하자 울컥 화가 나서 소리쳤다. 방으로 들어오던 오빠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니아나?”
란슬롯이 무슨 일이냐는 듯 물어서 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닌데?”
가웨인이 주름진 내 미간을 꾹 눌렀다.
“뭐길래 그래?”
묻는 란슬롯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나는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웅얼거렸다.
“오빠는 언제 입 맞추세요?”
란슬롯이 내 머리카락 끝에 살짝 입 맞췄다.
“지금.”
“그런 거 말고요…….”
애 어르듯 하는 거 말고!
나는 가웨인을 쳐다봤다.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여성과 입 맞춘 게 언제예요?”
“열한 살 때였나?”
나는 가웨인을 빤히 쳐다봤다.
“왜?”
그가 물었다.
“사용인들이 오빠는 음전하다고 했는데…….”
“…….”
“……?”
“……볼에 했다고, 열한 살에.”
그의 눈이 잠깐 흔들린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리고 이번엔 란슬롯을 쳐다보았다.
“오빠는요?”
“출발 준비 끝났어. 가자.”
그러더니 평소보다 더 환하게 웃고는 먼저 등을 돌렸다.
“형은 나보다 더 일―”
가웨인이 낄낄거리며 말하다가 란슬롯에게 얻어맞았다.
나는 오빠들과 호위를 이동시켰다. 관측대는 황궁처럼 결계가 쳐진 곳이 아니라서 포털을 열 수 있었다. 오로지 쌍월을 관측하기 위해 지어진 관측대는 귀족만 출입이 가능했다. 그런데도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건물은 마치 몇 층이나 되는 웨딩케이크처럼 생겼다. 중앙엔 계단만 있고, 문을 열고 나오면 창 없는 테라스처럼 바로 하늘과 마주할 수 있었다. 나와 오빠들은 관측대의 가장 꼭대기로 올라갔다.
“와―! 여긴 우리밖에 없네요!”
내가 소리치자 황궁에서 곧바로 온 아빠가 말했다.
“내가 입장권을 전부 사들였으니까.”
“그걸 다요?”
세상에나. 쌍월 관측대의 입장료는 엄청나게 비싸다. 이렇게 꼭대기면 더더욱.
‘웬만한 귀족들도 혀를 내두르는 가격이라고 했는데.’
순간 수십 번쯤 보고, 듣고, 읽은 장면들이 떠올랐다.
[여긴 왜 사람이 없죠?]
[내가 이 놀이동산, 통째로 빌렸으니까.]
그런 일이 나한테 벌어진 거야? 내가 멍하니 서 있자 아빠와 오빠들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엔 관측대를 짓도록 하죠.”
란슬롯의 말에 가웨인이 미간을 좁혔다.
“조부님이 필요 없다고 헐어 버리셨잖아.”
“이제 필요하지. 세니아나가 보고 싶어 하니까.”
“그렇군.”
아빠도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서 난 헉, 숨을 들이켰다.
‘부자들의 감각이란.’
빨라야 십 년에 한 번 정도 뜨는 쌍월을 보려고 관측대까지 짓는단 말이야? 소시민 중에서도 소시민이었던 내가 겪기엔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다.
“저는 괜찮―”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웨인이 하늘을 가리켰다. 나는 하던 말도 잊고 얼른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로 하늘에 뜬 붉은 달이 분열하듯 갈라지고 있었다. 몇 시간은 걸리겠구나 싶었는데, 제법 빠르게 움직인다.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개의 달로 나뉘었다. 각각의 달 가운데서 검은 그림자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때, 푸드덕! 참수리가 머리 위를 날아갔고, 깜짝 놀란 나를 아빠가 감싸 안았다. 새가 지나간 뒤 아빠의 옷깃을 잡으며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와―!’
그림자가 완전히 퍼지자 붉게 빛나는 달이 누운 ‘8’자 모양이 되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간 머리가 아찔해지고, 가슴이 울렁거린다. 도미니크가 가지고 있던 포털 마원에 닿았을 때와 같은 감각이었다.
“아…….”
작게 신음하는 걸 본 가족들이 급히 날 에워쌌다.
“왜 그래?”
“괜찮은 거야?”
“무슨 일이냐.”
다정한 염려 안에서 난 가늘게 헐떡였다. 쿵, 쿵, 쿵. 심장이 거세게 뛰고 이명이 머릿속을 가른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건. 아주 기묘한 느낌이었다. 빼앗겨 텅 빈 부분에 갑자기 무언가 욱여넣어진 것 같은 느낌. 난 아빠의 옷깃을 꾹 붙든 채 입을 막았다.
“우욱.”
“세니아나!”
가웨인이 급히 나를 흔들었다.
“흔들지…… 토할 것 같…….”
과식한 것 같다고요!
* * *
사비에르 저.
“꺄아악―!”
비명에 놀란 사람들이 황급히 에이레네의 방에 뛰어들었다. 사비에르 후작과 주방에 있던 그녀의 오빠, 조슈아도 함께였다. 후작이 바닥에 주저앉은 에이레네를 붙잡았다.
“무슨 일…… 에이레네!”
“아버, 아버지…… 저, 저…….”
그녀는 바들바들 떨며 한쪽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드러난 눈에서 피눈물이 줄줄 흘렀다.
“에이레네, 에이레네!”
부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절규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유일하게 침착한 건 사비에르의 장남인 조슈아였다. 그가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녀의 손을 내렸다. 드러난 얼굴을 본 후작이 숨을 삼켰다. 얼굴에 곪은 것 같은 흉측한 검은 반점이 생겼다. 에이레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창을 가리켰다.
“달을……!”
후작과 조슈아는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환히 빛나는 무한의 달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조슈아가 급히 커튼을 쳤다. 그제야 에이레네가 바닥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빼앗겼어…….”
정신이 나간 것처럼 가늘게 경련하는 그녀를 보고 후작이 소리쳤다.
“당장 그들에게 연락해!”
사비에르의 집사장이 황급히 뛰쳐나갔다. 동시에 에이레네가 축 늘어져 혼절했다. 후작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대체 왜 딸이……!
불현듯 온몸이 새카맣던 ‘그들’의 실패작들이 떠올랐다. 공포가 다리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라 왔다.
‘아니야, 실험은 성공했다.’
그들은 분명히 말했다. 에이레네는 위대한 힘을 나누어 받았노라고!
* * *
파르뎅 남작은 나베리우스의 집무실에 노크하려다 말고 눈을 꽉 감았다.
‘오늘 난 죽겠구나.’
성질을 참지 못하고 타 영지와의 협상을 그르쳤다. 그것도 어르신이 주시하고 있던 일이었다. 다른 가신들이 그를 위로하듯 어깨를 두드렸다. 파르뎅 남작이 마른침을 삼키고 겨우겨우 노크했다.
“들어와라.”
입실을 허락하는 소리가 망자를 부르는 사신의 목소리 같았다. 파르뎅 남작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천천히 문을 열었다.
“어, 어르…….”
파르뎅은 말을 잇지 못하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모두 못난 제 탓……!”
―이라고 말하던 그가 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끔뻑거렸다. 노성이 들려오지 않는다. 날아와야 했을 펜이라든가, 컵 또한 없었다. 그보다 먼저 집무실에 들어와 있던 마담 버지니아가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아가씨께서 돌아오신다니 얼굴에 꽃이 피셨습니다.”
“꽃은 무슨. 때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게 당연하지.”
“그럼 그건 그만 보시고 서명해 주시지요. 뚫어지겠습니다.”
“누가 보면 끼고 사는 줄 알겠군.”
“끼고 계시잖습니까.”
파르뎅 남작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나베리우스의 얼굴엔 노기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기분은 최악을 달렸다. 손녀에게 괴한이 들이닥친 일 때문이었다. 프렌시프가 자랑하는 정보기관이 괴한의 정체를 밝히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했는데도 영 단서가 잡히지 않았다. 사소한 실수에도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분명히.
마담 버지니아는 소파에 앉아 입매를 비틀었다.
“아가씨의 편지가 그리 좋으십니까?”
“누가 그리 좋다더냐. 조손간에 서로를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이지.”
나베리우스는 아닌 척 파르뎅 남작에게 보이도록 종이를 내려놓았다.
‘편지?’
편지라기엔 짧고, 메모라기엔 얼마간 정성이 들었다.
‘아, 아가씨의 편지로군.’
왔다 간다고 한 말 뒤로 온통 조부의 걱정이었다.
“아가씨께서 다녀가셨군요.”
“듣자 하니 황도의 일로 급히 챙겨갈 게 있던 모양이더군.”
“들었습니다. 아가씨께서 빚은 술 덕에 오뵈르 백작 부인이 아이를 잉태했다지요.”
파르뎅 남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말했다.
“급하셨을 텐데도 어르신께 편지를 남기신 겁니까. 정말이지 사려 깊으십니다.”
나베리우스는 다리는 꼬며 편지의 끝을 잡았다. 그가 큼, 헛기침하며 말했다.
“뭐, 이렇게 할애비를 잘 챙기는 손주가 없다고는 하더군.”
“예? 아, 예. 그렇지요…….”
“커흠!”
그가 편지를 슬쩍 더 내밀었다. 더 보라는 듯이. 파르뎅 남작은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뭐지, 뭐를 보라는 거지.
‘사실은 편지가 아니라 암호문인가?’
그가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쓰는 사이 마담 버지니아가 옜다, 하는 듯 소리쳤다.
“아가씨 글씨가 참 예쁩니다!”
그러자 나베리우스는 편지를 잘 접으며 중얼거렸다.
“예쁘긴, 좀 단정한 편이지.”
“…….”
“동글동글한 게 노인네들 글씨와는 다르긴 하군. 요새 애들은 이렇게 글씨를 쓰나 보지?”
“허.”
“필압도 적당하고.”
마담 버지니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손녀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서럽다.’
저는 죽은 남편이 남긴 자식 하나뿐이었는데, 개차반으로 자라 빈 몸으로 쫓아냈다. 감히 주인의 핏줄에게 수작을 벌였던 그는 쫓겨나서도 오만하게 지내다가 얻어맞고 불구가 되었다. 젊을 때 지은 죄가 있어서 자식 복이 없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자신보다 더 죄 많은 저 노인네는 대체 무슨 복으로!
파르뎅 남작이 나베리우스의 눈치를 보며 서류를 내밀었다.
“저, 어르신……. 거래는 정말 송구…….”
“거래? 아, 거래.”
“예.”
“그르쳤다지.”
“그, 그렇습니다.”
“오늘의 실수를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파르뎅 남작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끝인가?
나베리우스는 손녀의 편지를 서랍에 곱게 집어넣으며 그를 흘깃 쳐다보았다.
“더 할 말이 있나?”
“아닙, 아닙니다!”
“나가 봐.”
“예!”
파르뎅 남작은 잡힐세라 후다닥 그의 집무실을 나왔다. 그러고 방에서 멀찍이 떨어져 뒤를 돌아보았다.
‘자비라고? 어르신께서?’
두 눈으로 보고, 겪었는데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 * *
한참 구역질을 하던 나는 세면대를 붙잡고 신음했다.
“으…….”
마릴린과 시트론이 옆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세요?”
“으응.”
이제 슬슬 정신이 돌아온다. 입을 헹군 뒤에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마릴린이 재빨리 말했다.
“아가씨께서 나오시면 주인님과 도련님들께서 모시러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휴게실은 여성용과 남성용으로 나뉘어 있다. 그런데 여성용 휴게실 앞을 아빠와 오빠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못했다. 그래서 제발 가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릴린이 얼른 달려갔다. 시트론은 여전히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날 부축했다.
“정말 괜찮으세요?”
“응, 걱정하지 마.”
달이 다시 겹쳐진 후로 울렁임이 조금씩 가시더니 지금은 괜찮아졌다.
“영애.”
복도 끝에서 들린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겨우 멈춘 심장이 다시 쿵쿵, 거세게 뛴다.
‘도미니크.’
그의 머리카락 끝이 땀으로 약간 젖어 있었다. 그리고 굳은 얼굴.
“쓰러졌다던데.”
“제가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휴게실까지 아빠가 안아 들고 왔지.’
사정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내가 기절한 줄 알았을 수도 있겠다.
“아니에요.”
그러자 그가 한숨을 흘렸다. 날 찾으러 뛰어다녔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목 끝이 간지럽다.
“잠깐 시간을 내주시죠.”
난 시트론을 쳐다봤다. 그녀는 걱정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떠났다.
어느새 달에서 붉은 기가 사라지고 평소처럼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어두운 복도에 달빛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그사이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날카로운 옆선을 타고 달빛이 새하얗게 부서진다. 그가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생각 하십니까.”
“잘생겼…… 아니―!”
여기서 그런 말이 나오면 어떡해! 얼굴이 새빨개지자 도미니크의 잇새로 가벼운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렇습니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져서 얼른 말을 돌렸다.
“저 화났어요!”
“왜.”
“그런 일을 해 놓고 연락도 없으셨잖아요.”
“…….”
묘한 눈빛으로 나를 지그시 쳐다보던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렇군요.”
화제가 돌아간 것에 기분이 좋아져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네, 아주 화가 많이 났다고요!”
“내가 연락이 없었던 것에.”
그의 말을 듣고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입맞춤 말고 연락 없었던 것만 신경 쓴 것 같잖아.
“그런 거 아니에요.”
“기다렸다고 해 주시면 기쁠 텐데요.”
새빨개진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벽 쪽으로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다. 벽에 내려앉은 달빛에 그와 나의 그림자가 비치었다. 커다란 그림자의 손이 작은 쪽을 향해 움직였다가 도로 거두어졌다. 나는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
이전에도 그랬을까? 나를 향해 뻗었던 손을, 이토록 애처롭게 다시 거둔 적이 또 있는 걸까.
‘……미치겠다.’
심장 소리가 귓가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도미니크는 허리를 조금 굽혀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어떻게 하면 영애의 기분이 풀리겠습니까.”
“뭐예요. 뭐든지 해 줄 것처럼…….”
“뭐든지 해드리죠.”
“정말로? 뭐든 전부?”
“전부.”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얽으며 그를 힐끔 쳐다봤다. 그럼 이번 기회에 물어볼까? 왜 항상 그렇게 다정한 눈으로 나를 보는 거예요? 어째서 제게 키스하신 거죠? 심지어 내가 원하는 뭐든 걸 해 준다고……, 왜요?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난 상처를 보는 순간 전부 잊었다. 난 깜짝 놀라서 그의 얼굴을 덥석 잡았다. 그도 당황했는지 눈이 커졌다.
“상처 났잖아요.”
“…….”
“대련 때 다친 건가. 아닌데, 무도회에선 없었는데.”
걱정되어서 울상을 지으니 그는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온기가, 눈빛이, 생명줄인 양 내 손을 붙들고 있는 그의 감촉이 너무나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도미니크의 시선을 타고 내게로 고동이 전달되는 것만 같았다. 기묘하고도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여기서 입 맞추면 그건 네 탓이야.”
“……맨날 내 탓이래.”
저번엔 끌어안는 것도 내 탓이라고 했으면서.
“이제 친구도 아닌데.”
“너와는 안 해.”
“……왜 반말?”
“세니아나.”
그에게 이렇게 달콤하게 이름이 불린 건 처음이라 절로 눈이 커졌다. 도미니크가 고개를 돌려 내 손바닥에 입 맞췄다. 아주아주 간절한 표정으로. 난 슬그머니 그의 얼굴을 놓고, 손을 뒤로 감추었다. 손바닥이 자꾸만 간질거렸다.
“우리 무슨 사이예요?”
“친구는 아니죠.”
“몇 번이나 말씀하시지 않아도 안다고요.”
내가 그를 뾰로통 흘기자 그가 미소 지었다.
“저하.”
“예.”
“제게 호감이 있나요?”
“…….”
“……왜요?”
“남다른 반응일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을 줄은 예상 못 해서.”
“아니에요?”
“있습니다. 많이.”
그가 웃는 눈으로 물었다.
“영애는?”
“모르겠어요. 이런 적이 처음이라.”
심장이 이렇게 쿵쿵 뛰는 걸 보면 그의 말대로 정말 그, 호감이라는 게 있구나, 싶다. 하지만 그가 황자라는 걸 떠올리는 순간 찬물 맞은 듯 정신이 돌아온다.
내가 도미니크 황자의 손을 잡으면 프렌시프는 틀림없이 황위 경쟁에 휘말릴 거다. 그도, 가족들도 황위에 관심이 없지만, 사람들 생각은 다를 테니까.
견제받을 거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칼을 들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사랑해서 도무지 견딜 수 없을 때, 그런 확신이 들 때가 아니고선 연인이라고 땅땅 못 박을 수 없었다.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그, 그러면 썸부터 할까요?”
“썸?”
“연인으로 가는 단계요.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의 길 같은?”
가만히 날 바라보던 그가 내 손을 잡았다.
“원한다면.”
내가 헤헤 웃자 도미니크도 날 따라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어떤 경우에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는 겁니까?”
“저하께 다른 사람이 생기면?”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아니면 제게 다른 사람이 생길 때?”
그가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를 걸쳤다.
“그런 일도 없어야 할 겁니다.”
“네?”
“제가 질투가 심하거든요.”
어쩐지 으스스한 표정이었다. 내가 ‘으응?’ 하는 얼굴로 보자 그는 내 눈가에 짧게 입 맞췄다.
“……!”
“가 보겠습니다.”
그러더니 복도 코너 쪽을 힐긋 쳐다보았다.
“방해꾼들이 와서.”
코너 뒤에서 들리는 건 가웨인의 목소리였다. 나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흐트러진 내 머리를 정리해 주고 떠났다. 가족들이 코너를 돌아 이쪽으로 왔을 때 난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아빠가 내 이마를 짚었다.
“열이 있나?”
“아니요…….”
란슬롯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트론은 어디 가고?”
“먼저 마차에 가 있을 거예요.”
가웨인이 인상을 썼다.
“혼자 있지 말랬잖아.”
혼자 있던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가족들에게 말할 순 없어서 나는 황급히 변명했다.
“혼자서 조용히 달구경을 하고 싶어서요.”
“위험하니까 다신 그러지 마.”
“네…….”
나는 가족들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이 성화여서 의사에게 진단을 받았다. 이상이 없다는 소견을 듣고 나서야 방으로 올라가 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일 오전에 영지로 떠날 예정이라서 마지막 점검 차였다. 그러면서도 자꾸 도미니크 생각이 났다.
‘내게 썸남이 생겼어!’
하지만 아카데미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못 볼 거다.
‘연락해 볼까?’
나는 으으음, 하고 고민하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야, 내일 떠나니까 오늘은 아빠와 시간을 보내자.’
그러고 침대를 폴짝 내려와서 가족들이 모여 있는 아빠의 서재로 향했다. 오빠들도 함께 떠나기로 했기 때문에 황도에서의 일을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나는 열린 문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저 들어가도 돼요?”
란슬롯이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난 소파에 얌전히 앉아서 그들이 일을 끝내길 기다렸다. 삼십 분가량이 지나 아빠와 오빠들이 소파에 앉았다.
“무슨 일이지?”
“내일 가니까요. 아빠 얼굴 많이 봐 두려고요.”
아빠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서 난 히히 웃었다.
“하고 싶은 건?”
“하고 싶은 거요?”
“평소에 생각해 둔 거라든지.”
윤세나였을 적에 꿈꾸던 게 있긴 했다. 명절에 가족들끼리 다 함께 윷놀이를 하거나 화투를 치는 거. 그게 정말로 부러웠다. 나는 선생님과 둘뿐이었으니까. 떠오르는 기억에 잠깐 머뭇거리자 아빠가 말했다.
“괜찮으니까 말해 봐라.”
“그러면 다 같이 할 수 있는 게임을 하고 싶은데…….”
가웨인은 허탈하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고작 그거?”
“그렇지만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걸요.”
선생님과 카드 게임을 하긴 했다.
‘하지만 단둘이서 하는 것과 가족 여러 명이 모여 하는 건 뭔가 다른 느낌인걸.’
티브이에서 보는 것처럼 복작복작하지도 않고, 훈수 두는 다른 사람도 없었고. 저렇게 다 같이 깔깔거리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내가 우울한 표정을 지으니까 란슬롯이 빙그레 웃었다.
“로토헤도 괜찮아?”
로토헤면 길라게온의 전통 게임이지? 화투와 아주 비슷하니 옆에서 방식을 알려 주는 사람이 있으면 할 만할 것 같았다.
“전 해 본 적이 없으니까 시트론과 한편으로 해도 돼요?”
“그래.”
그러자 가웨인이 끼어들었다.
“판돈 걸어. 탈탈 털어 주지.”
우리는 널따란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로토헤 카드를 돌렸다. 연습 게임을 한 판 하니 감이 왔다.
‘정말로 화투랑 비슷하네.’
다른 점이라고 하면 남의 카드와 내 카드를 교환할 수 있다는 거다. 거래를 해야 하긴 하지만.
로토헤는 가웨인의 무대였다. 그의 앞에 수표와 교환으로 받은 서약서가 가득했다.
‘으아아, 다 잃게 생겼어.’
판돈이 엄청 큰 판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컸다. 도박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카드를 쥐고 끙끙, 앓고 있으니까 내 곁을 지키던 기사 바커스가 슬쩍 말했다.
“나이트 3번만 있으면 점수가 납니다.”
“3번?”
난 얼른 아빠와 오빠들이 맞춰 놓은 패를 살폈다.
“있다!”
……하필 가웨인에게. 나는 그를 간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교환해 주세요.”
“대가는?”
“으음, 필요하실 때 포털 열어드릴게요.”
“안 끌리는데.”
“그럼요?”
가웨인이 히죽 웃었다.
“도미니크야, 나야?”
또 이 질문!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도미니크와 단순한 친구가 아니게 된 지금은 이전보다 더 곤란한 질문이었다. 가웨인이 고민하는 내 눈앞에 나이트 3번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럼 뭐, 지는 거지.”
“……으.”
마릴린이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아가씨, 기회가 있어요. 아직 안 나온 엘프 2번이 있으면 역전이에요!”
맞아, 엘프 2번. 나는 냉큼 가웨인의 카드를 포기했다. 나와라, 나와라. 빌고 또 빌자 드디어 엘프 2번이 판에 깔렸다.
‘다음 차례가 나니까 내가 가져와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막내에게 미안해서 어쩌지.”
란슬롯에게 가 버렸다.
“교환해 주세요!”
가웨인은 악랄하게 대가를 요구하지만, 란슬롯과 아빠는 내겐 무른 편이었다. 아까도 카드를 교환할 때 만세 삼창만 시켰다. 란슬롯이 빙그레 웃었다.
“도미니크 황자야, 나야?”
“…….”
나는 카드를 내려놓고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졌어요.”
다음 판에서 만회해야지. 굳게 다짐했지만, 이번에도 궁지에 몰린 건 나였다. 아빠가 가지고 있는 고블린 4번이 있어야 만회할 수 있었다.
“교환…….”
아빠야말로 쉽게 해 주겠지. 믿어 의심치 않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2황자인가, 나인가.”
저거 유행어인 걸까.
로토헤에서 대패를 한 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집사 마일로가 쿡쿡 웃으며 나와 가족들 앞에 차를 내주었다. 가웨인은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러니까 대답했으면 좋았잖아.”
“놀리려고 하신 거잖아요!”
내가 교환하자고 할 때마다 ‘도미니크야, 나야?’ 하고 물었다. 난 차를 마시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기 전에 연락해 볼까?’
윤세나의 세계 사람들은 썸 탈 땐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던데, 여기서도 그래도 되나?
‘아무리 그래도 황족과 귀족 사이고…….’
여기서는 연애 전에 뭘 하지? 나도 그렇지만, 세니아나도 이성에게는 일절 관심이 없어서 기억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혼자 고민에 빠져 있으니 란슬롯이 물었다.
“우리 아가씨께서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실까.”
“그게요…….”
“뭐길래?”
“연애하기 전엔 대개 뭘 해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으니 가웨인이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게 왜 궁금한데.”
“그,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연애하게?”
“아니요!”
아뿔싸. 제 발에 저려서 대답을 너무 빨리했다. 란슬롯은 묘한 표정으로 날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눈을 데루룩, 굴리자 그가 생긋 웃었다.
“서로 머리카락 한 올 만져선 안 되고, 연락은 되도록 자제하지. 연인보다는 가족들과 더 많이 시간을 보내.”
그러자 가웨인이 그를 보며 허, 실소를 흘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란슬롯이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고, 가웨인은 “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석 달에 한 번쯤 만나지.”
“정말이요?”
나는 진짜냐는 듯 아빠를 쳐다보았다.
“……그래.”
“아빠도 엄마와 그러셨나요?”
“…….”
“……?”
“반년에 한 번쯤 만났던 것 같군.”
나는 시무룩해졌다.
‘진짜로? 이상한데…….’
하지만 아빠의 말이니까 절대로 아니다! 하고 단정할 수 없었다. 하긴, 조선 시대엔 얼굴도 못 보고 결혼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까. 이 시대와 조선은 엄청나게 다른 것 같은데 그런 부분은 비슷한가 보구나. 아니, 근데 도미니크는 왜 내 눈에 입 맞췄지? 손도 막 잡고. 내가 생각하던 썸과는 너무 다르다.
‘아니야, 사람들과 똑같이 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나중에 도미니크에게 그래도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보자고 말해 봐야지.
이튿날, 오빠들과 나는 아빠와 아침을 먹은 후 출발 준비를 했다. 할아버지가 영지에서 데려온 고레일과 바커스, 시트론도 함께였다. 마릴린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가 집사 마일로에게 꾸중을 들었다. 난 아빠를 보며 말했다.
“아카데미 무사히 마치고서 올게요.”
“그래.”
“잘 계셔야 해요?”
아빠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 큰 저택에 아빠가 혼자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화해하시면 좋을 텐데.’
그럼 영지에 함께 갈 수 있을 테고.
“항상 조심해라.”
“네.”
마저 인사를 하고, 난 포털을 열었다. 초록의 향기가 공기를 타고 훅, 떠밀려 왔다. 그리웠던 프렌시프 령이었다.
* * *
“자, 이것도 들어라.”
나는 내 앞에 가득한 접시를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이거까지 다 먹으면 배가 터지는 게 아닐까? 그렇지만 할아버지와 성의 사용인, 그리고 만찬에 참석한 몇몇 가신들까지 잔뜩 기대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이것만 먹자.’
그렇게 생각하고, 포크를 다시 잡는데 가웨인이 접시를 조금 밀었다.
“체한다.”
“괜찮아요. 아곤의 음식은 다 맛있어서…….”
“그러니까 더 쉽게 체하겠지.”
하지만 할아버지가 실망하실지도 모르는데. 나는 할아버지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는 가웨인의 말에도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흠, 체하면 안 되지.”
―라고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 건강을 염려해 주는구나. 난 가슴이 간질간질 해져서 웃음을 삼켰다.
‘아, 맞다, 건강.’
“제 쪽지 보셨어요?”
“그래.”
“식사 잘하시고 운동 많이 하셨나요?”
내 물음에 할아버지는 어쩐지 오만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만찬에 함께 참석한 주치의 마티스 남작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마티스 남작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 모두 잘하셨습니다. 약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드셨지요.”
정말로? 여름엔 바빠서 제대로 식사할 시간도 없다고 들었는데!
내가 와― 하고 탄성을 흘리니 할아버지가 헛기침을 했다.
“황도에서는 별일 없었느냐?”
별일 뿐이었다. 두 달쯤 되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가 벌어졌는지.
‘그래도 얻은 건 있지.’
삿된 자들의 기록, 그리고……. 나는 얼굴이 발그레해져서 포크로 콩을 꾹꾹 으깼다.
“좋은 일이 많으셨나 봅니다.”
내 얼굴을 본 가신들이 껄껄거렸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왜인지 인상을 찌푸렸다.
“기분 나쁜 감이 드는데.”
“감이요?”
“아니다. 괴한들에 관해선 짚이는 게 있느냐?”
그걸 떠올리자 찜찜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짐작은 가지만 확신할 순 없지.’
그래도 다행히 괴한들은 황궁까지 발칵 뒤집힌 일과 멀린, 그리고 내 주변의 경계가 엄청나게 강화된 점 때문에 더는 접근하지 못했다.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할아버지가 말했다.
“조사 중이니 곧 밝혀낼 거다.”
―라고 말하며 어떤 가신 하나를 슥 쳐다보았다. 가신의 어깨가 흠칫, 솟았다. 그러곤 희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 정보부에서 소문을 취합하는 베랑 자작이다.’
아무래도 그의 철야가 계속 이어질 것 같았다. 식사를 하고 나서 할아버지와 가볍게 차를 마셨다. 그 사이 오빠들은 밀린 일 때문에 각각의 부관에게 애걸을 들으며 사라졌다. 나도 할아버지와 몇 마디 더 얘기를 나누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 책을 읽어야겠어.’
짐 가방에서 삿된 자들의 기록을 꺼내려다가 난 멈칫했다.
“시트론.”
협탁 위에 캔들을 내려놓던 시트론이 날 돌아보았다.
“예, 아가씨.”
“혹시 사용인들이 내 방에 들어왔어?”
“아니요?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방을 비운 적은?”
“제가 잠시 옷을 갈아입으러 갔던 십 분 정도는 아무도 없었지요. 왜 그러세요?”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사라졌어.”
삿된 자들의 책과 로열 키친 응시원이.
“네?!”
시트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물론 응시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책이다. 그건 황족만 열람할 수 있는 책이었다. 도미니크가 장서실에서 가져와 내게 주었으니, 없어지면 그가 질책받을 거다.
‘찾아야 해!’
책의 대여 기간은 한 달 정도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곧 아카데미에 가야 하니 찾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며칠뿐이었다.
“아가씨, 확실히 황도에서 가져오신 거지요?”
“응.”
떠나면서도 두 번, 세 번 확인했다.
‘성에서 없어진 거야.’
가신은 내 방에 절대로 못 들어오니까 제외, 기사도 허락 없이는 들어올 수 없다. 시트론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사용인 중에 있을 겁니다.”
“응, 청소를 하거나 물건을 가져다 둔다는 핑계가 있으니까.”
“일단 청소 당번부터 알아볼게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은밀하게.”
그렇지 않으면 훔쳐 간 자가 겁을 먹고 책과 응시원을 처리하려 들 수도 있었다. 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서 생각했다. 내 방엔 가족들이 사 준 고가의 물건이 잔뜩 있다. 통신석부터가 엄청난 고액으로 거래되지 않는가.
‘재물 충동 때문에 한 일은 아니야.’
희귀한 책은 비싸게 팔 수도 있다. 하지만 로열 키친 응시원은 전혀 아니었다. 나를 제외한 사람에게는 그저 종잇조각밖에는 되지 않는 서류. 내가 로열 키친에 들어가지 않길 바라는 사람이 했다기에도 이상하다. 그렇다면 책을 가져갈 이유가 없으니까.
‘다른 목적을 가진 무리가 있다.’
사용인이 그들의 명을 받았다고 하면 일이 심각해진다. 세드릭이 배신하여 전염병을 퍼뜨린 뒤엔 새로운 사람을 고용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아주 오래 프렌시프를 따른 충복들 외엔 내성에 남기지 않고, 외부로 보냈다.
‘각 부처에서 더 이상 변절자가 생기지 않게 조치까지 했고.’
배반을 제안하는 사람이 있으면 발고 하라고 했다. 제시한 돈이나 자리의 곱절을 주겠다고. 그 말인즉.
‘변절이 아니라 세작이 있다는 거야.’
그것도 아주 오래된. 그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왔던 것이다.
청소 당번에, 책이 없어진 때를 즈음해서 내 방 앞 복도를 지난 사람까지 포함하면 총 열한 명이었다.
“신디는 몸이 아파서 오늘 결번이래요. 그리고 한스 집사님과 애덤은 함께 복도를 지났기 때문에 가능성이 없어요.”
그러면 살펴야 하는 사람은 일곱 명일까. 나는 일단 세작일 가능성이 낮은 한스와 애덤을 불렀다.
“예, 아가씨.”
그들이 고개를 숙였다.
“복도를 지나갈 때 별다른 건 보지 못했어?”
한스와 애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글쎄요, 수상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물었다.
“그럼 근처에서 마주쳤던 사람은?”
“마리아를 보았습니다. 아, 그리고…….”
그리고?
“집사장님을 뵈었죠.”
나는 대번에 얼굴을 구겼다. 집사장이라면 할아버지의 전담을 맡은 사람이었다. 플로헤타에게 썩은 연어를 먹였을 때 할아버지의 명으로 날 부르러 왔었다.
그리고 내가 할아버지의 방에 들어가지 못할 때면 인자하게 웃으면서 괜찮다고 등을 밀어주기도 했다. 집사장의 이름이 나오자 시트론이 숨을 들이켰다. 나와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내 가라앉은 표정을 본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가 아! 하며 황급히 소리쳤다.
“그분일 리 없어요!”
“어째서?”
“그분이 얼마나 프렌시프를 위해 헌신했는데요.”
“세드릭도 헌신하긴 했지. 헌신한 뒤에 전염병을 퍼뜨렸어.”
“그렇지만…….”
“그가 세작이라면 정말로 큰일이야. 집사장은 웬만한 비밀을 다 알고 있잖아.”
세작이라는 말에 한스와 애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는 시트론과 함께 그들을 둘러보았다.
“혹시 집사장이 이상하진 않았니?”
한스와 애덤이 얼굴을 찌푸리곤 머뭇거렸다.
“그게…….”
애덤이 입을 떼려고 하자 한스가 그를 휙 노려봤다.
“그만! 그 일은 우리의 오해인 걸로 마무리했잖아.”
난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서 그들을 쏘아보았다.
“하나도 빠짐없이 알려 줘야 해. 프렌시프의 미래가 달린 일이야.”
애덤이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가끔 근무 중에 사라지실 때가 있습니다.”
“사라진다고?”
“그게…….”
주저하며 말을 아끼는 애덤을 다그치자 그가 입을 열었다.
“사라졌다가 돌아오셨을 때 마주쳤던 적이 있는데 무언가를 황급히 숨기기도 하셨고.”
“뭔데!”
“소리는 약병인 것 같았죠.”
약? 나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아가씨!”
시트론이 걱정된다는 듯 미간을 좁히고 나를 불렀다.
“그만.”
“하지만―”
“그게 몸에 쌓이는 독이라면?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 약이라면?”
“…….”
“정신이 혼미한 틈을 타서 몰래 할아버지의 인장을 훔쳐냈으면 어떻게 해.”
“그건…….”
“아니면 우리 가족 모두에게 그랬을 수도 있지.”
그러자 시트론이 얼어붙었다. 나는 한스와 애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나를 도와줘야겠어.”
“뭐든 하명하십시오.”
“집사장의 뒤를 캐. 그리고 삼십 분마다 교대로 와서 나에게 보고해.”
“한 번에 받으시지 않고요?”
“집사장이 뒤를 밟혔다는 걸 알면 즉시 너희를 처리하려 들 수도 있어. 그건 생사 확인이기도 해.”
“알겠습니다.”
“미안하지만 며칠간은 철야야.”
아카데미에 가기 전에 끝내야 하니까. 그 뒤로 이틀간 그들은 나에게 집사장의 행각을 보고 했다. 깊은 밤과 새벽에도.
오랜만에 할아버지와 함께 산책했다. 오빠들은 정신없이 바빴기 때문에 단둘이서 나왔다. 나는 할아버지의 팔을 잡고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고개를 흔들었다. 이틀이나 한숨도 못 잤더니 졸려 죽겠다.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바쁜 게냐.”
“마무리되고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아직 확인 단계라.”
“흠…….”
할아버지는 졸음기 가득한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녀석과는 무슨 얘기를 했느냐.”
“아빠요?”
“그래.”
“아빠와는 이것저것…… 함께 살롱도 가 주셨고, 꽃도 사 주셨어요.”
그때를 생각하니까 또 기분이 좋아져서 난 헤헤 웃었다. 할아버지가 미간을 좁혔다.
“꽃은 무슨. 다 늙은 놈이 징그럽게.”
“하지만 저는 정말 기뻤다고요?”
아빠가 준 장미는 잘 말려서 망에 넣어 놨다.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정원의 꽃줄기를 뚝 분질러서 내게 주었다. 빛깔 고운 라벤더였다.
“그깟 시장 꽃보다 내 성의 꽃이 낫지.”
“…….”
할아버지는 대답하지 않는 나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보았다. 나는 천천히 눈썹을 늘어뜨렸다.
“할아버지…….”
“고맙다는 말은 됐다.”
“이렇게 꽃을 뚝뚝 분지르시면 어떻게 해요.”
“아니, 시장 꽃도 분질러서 파는 게 아니냐…….”
할아버지는 어쩐지 당황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상인에겐 생계 수단인 거고, 쓸데없이 꽃을 분지르는 것과는 다르죠.”
“아니, 나는, 그……!”
그가 커흠! 헛기침을 했다. 그때 하인이 땀 닦을 물수건을 가져왔다. 할아버지는 손수건을 집다가 벌컥 화를 냈다.
“왜 이렇게 찬 것이냐!”
‘그야 시원하라고 일부러 차게 해서 가져온 거잖아?’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버럭버럭 소리치는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 * *
어두운 방. 남자는 방 밖의 기척을 살폈다. 발걸음 소리, 기척 하나 없이 고요하다. 그는 모포에 싼 책과 응시원을 가지고 방을 빠져나왔다. 소리 없는 걸음이 몹시 능란했다. 한참 성의 복도를 걷던 남자가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인기척 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순찰을 도는 경비병인가.’
돌아가 다른 길로 가려 했지만, 등 뒤에서도 발소리가 들려왔다.
‘쯧.’
남자는 소리 없이 혀를 차고, 창문을 뛰어넘었다.
‘정원 샛길을 통해 나가야겠다.’
이곳에서 오래 일한 만큼 그는 성내에 익숙했다. 재빠르게 정원으로 들어섰는데―
“여기서 뭐 해?”
그가 흠칫, 물러났다. 벤치에 앉아 있던 세니아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가씨께선 여긴 어쩐 일로.”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잖아.”
“……긴한 일이 있습니다.”
“그렇구나.”
“그럼 전 이만.”
“손에 든 건 내려놓고 가.”
모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니아나를 보는 남자의 표정이 점점 서늘해졌다.
“송구하지만 이건 제게 아주 중요한 물건입니다.”
세니아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어둠에 가려진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남자의 눈빛이 새파랗게 빛났다. 이대로 실랑이를 하다간 사람들이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그럼 지금 책과 응시원을 가지고 있는 자신은 꼼짝없이 추포될 것이다. 그가 잠깐 고개를 숙였다.
이대로 그분들에게 데려가야 하나.
‘위험하긴 하나, 어쩔 도리가 없는 노릇이다.’
마차를 습격했던 자들은 결국 실패했다. 어쩌면 제가 데려가는 게 ‘그분’들껜 더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호기심과 만용을 구분하셔야 할 텐데요, 성녀님.”
그가 얼굴을 들며 히죽 웃었다.
“아무래도 그곳에 가서 재교육을 받으셔야겠군요.”
그때, 정원 등에 불이 들어왔다.
“아가씨께선 이미 훌륭하시다.”
세니아나 앞을 막아선 자의 목소리는 몹시 익숙했다. 남자가 숨을 들이켜기 무섭게 순식간에 다가온 기사들이 그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수고했어―”
세니아나는 그녀를 지켜 준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집사장.”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프렌시프의 충실한 집사장이 가슴 한쪽에 손을 올리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리고 세니아나는 등 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쿵, 쿵, 쿵―! 워커 소리와 함께 “끄윽…….” 하는 신음이 들려왔다. 제압당한 자가 끌려 나온 자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얼굴에 당황이 역력했다. 나는 생긋 웃었다.
“한스.”
뒤를 쳐다보며 끌려 나온 자를 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애덤.”
한스가 경악하여 더듬거렸다.
“어떻게…… 어떻게……!”
“그야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
“세작이 한 사람이라는 법은 없지.”
한스, 애덤과 처음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범인은 이들이란 것을.
[복도를 지나갈 때 별다른 건 보지 못했어?]
[수상한 일은 없었습니다.]
나는 별다른 일이라고 했지, 수상한 일이라고 특정하지 않았어.
내가 물건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복도에 떨어진 걸 보지 못했느냐는 별것 아닌 물음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저들은 굳이 ‘수상한 일은 없다’고 대답했다. 한스의 동공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그럼 교대로 보고하라고 한 건…….”
“너희가 책과 응시원을 성 밖으로 보내지 못하게 하려고.”
“하지만 아가씨는 분명 시트론과 언쟁을……!”
“우리 시트론은 눈치도 빠르고 연기도 잘하지.”
그러자 시트론이 수풀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랑했다. 그녀는 한스와 애덤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사용인의 수치로군요. 어떻게 16년 동안이나 주인을 속이고…….”
그녀는 얼굴을 흉흉하게 일그러뜨리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는 사이 집사장이 한스에게서 모포를 빼앗아 내게 가져왔다. 둘둘 만 모포 안에 책과 응시원이 고스란히 있다.
‘여름이 물러가지 않아서 다행이야.’
찢자니 누가 쓰레기를 볼까 봐 그럴 수 없었겠지. 태워서 증거를 없애자니 그것도 수월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름에 불을 피우는 것을 들키면 주변인들이 수상하게 여겼을 테니까. 나는 기사의 검을 받아서 그의 목에 겨누었다.
“그럼 이제 말해.”
“…….”
“왜 응시원을 노린 거야.”
아마도 책은 응시원을 훔쳐 내려다가 발견해서 가져간 걸 거다. 황궁의 책이 내 손 안에 있다는 건 가족들과 도미니크, 시트론 밖에 모르니까.
“고문실에 가둬. 고문은―”
“내가 하지.”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삐딱하게 선 가웨인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오빠가 곧장 걸어왔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렇게 물으니 가웨인이 말했다.
“기사들을 쓰면서 내 귀에 안 들어갈 거라고 생각한 거냐.”
“…….”
“저 녀석이 책을 훔친 건가? 응시원은 뭐고.”
“그게…….”
“네 표정을 보니 금전 때문에 벌인 짓은 아닌 모양이군.”
가웨인은 금세 저들 뒤에 흑막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황실이나 금좌 11석의 하수인, 아니면 타국의 밀정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가웨인이 한스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렸다.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거 오래 본 얼굴이잖아.”
“크윽…….”
그가 한스의 목을 잡고 기사들에게 내던졌다.
“오래 본 만큼 더 귀여워해 줘라.”
싸늘하게 읊조리며.
오빠와 기사들이 한스와 애덤을 고신하러 가고, 난 집사장, 그리고 시트론과 함께 방으로 향했다. 방 앞에 이르러서 집사장이 허리를 굽혔다.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아가씨.”
“왜?”
“이 늙은이를 믿어 주셨잖습니까.”
그의 눈이 인자했다. 나는 양심이 콕콕 찔려서 미안하다고 웅얼거렸다.
“사실은 의심하기도 했어.”
가장 가능성이 크다고 여긴 건 한스와 애덤이었지만, 누구라 해도 의심의 대상에서 제외하지 않았다. 시트론이 나를 감싸듯 말했다.
“집사님의 잘못입니다. 수상한 약통은 뭔가요? 정말로 가지고 계신 걸 본 사람이 있다고 해서 놀랐어요.”
나는 씩 웃었다.
“그건 내가 알아.”
그러고 집사장에게 속닥속닥 말했다.
“할아버지의 혈압약이지?”
“맞습니다.”
의심했다고 하는데도 그의 얼굴은 여전히 인자했다.
“훌륭하게 성장하셔서 기쁩니다.”
“내가?”
“감정이나 위치, 평판을 고려하지 않고 선입견 없이 이성적으로 판단하시지 않았습니까.”
모두가 존경하는 그에게서 칭찬을 들으니 민망했다. 그러다가 아! 하고 집사를 보았다.
“스스로 평판이 좋은 걸 알고 있어?”
“그럼요.”
“어떻게?”
“그쯤은 되어야 프렌시프의 일등 집사가 아니겠습니까.”
집사장은 가슴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이 늙은이도 아가씨를 본받아 선입견 없이 사용인들을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응, 믿음직스러워. 그런데 프렌시프의 정보가 한스를 통해 빠져나가진 않았을까?”
“그 점은 안심하십시오.”
집무실과 회의실에 출입이 가능한 건 이등 집사부터라고 했다. 한스는 삼등 집사니 기밀에 접근하진 못했을 거다. 일반 하인인 애덤은 더더욱 가능성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에 들어갔다. 며칠째 잠을 자지 않아서 침대에 눕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푹 자고 일어난 나는 얼른 씻고, 맑은 정신으로 삿된 자들의 기록을 읽었다. 책의 중간에 접힌 부분이 있었다. 이런 거 황도에선 본 적 없어.
‘한스나 애덤이 표시한 건가.’
[신의 딸은 삿된 존재의 천적인 동시에 조립자……
성스러운 힘이 그릇된 방향으로 발동하면……
삿된 존재는 인력으로 다스릴 수 없는 강대한 어둠이 되어…….]
‘조립자…… 설마!’
난 삿된 자들이 뭉쳐진 것을 보았다. 하지만 여기엔 만 구(具)의 삿된 자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때 뭉쳐진 건 고작 서넛이었다.
‘아! 그런 건가!’
만 구가 뭉쳐진 게 아니라서 선생님의 기억이 그것을 쓰러뜨릴 수 있던 거다! 나는 서둘러 페이지를 넘겼다.
[의식에 필요한 재료는 총 다섯. 조율하는 자와 빼앗긴 자와 빼앗은 자, 그리고…….]
“이거였어…….”
머릿속에서 퍼즐이 짜 맞춰졌다. 삿된 자들이 공격하려 했던 일. 어째서 내가 납치되었는지. 황궁 마차가 어째서 습격당했는지.
‘모두 이것 때문이었어.’
인생을 빼앗겼던 ‘나’와 내 인생을 빼앗은 ‘세니아나’가 의식의 재료였던 거다! 이걸 내가 알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응시원만 가져가려다가 책까지 훔쳐 낸 것일 터.
‘하지만 아직 모르겠는 게 있어.’
왜 하필 응시원을 훔쳐 내려고 했을까.
난 생각을 정리하자마자 고문실로 달려갔다. 문 안에서 끔찍한 냄새와 숨이 끊어지는 것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앞을 지키던 기사들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안은 보기 좋지 않습니다.”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야.”
나는 단호하게 말하며 문을 열었다. 바깥보다 더 지독한 냄새, 그리고 생각보다 더 엉망인 한스와 애덤. 한스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애덤은 가웨인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비비는 중이었다.
“너, 왜……!”
가웨인이 얼른 한스를 가렸다. 난 침착하게 물었다.
“한스는 죽었나요?”
“…….”
대답이 없는 걸 보면 역시 내 생각이 맞는 모양이었다. 윤세나의 친부를 찾던 사채업자 사무실에서 본 적 있었다. 시체가 어떻게 생겼는지. 가웨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진했다. 그만큼 비밀을 지키려고 한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괜찮아.’
스스로 다독이듯 되뇌는 동안 겁에 질린 애덤이 내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왔다.
“아가씨, 아가씨! 살려 주십시오!”
“…….”
“저는 그저 한스 님께, 아니, 한스에게 고용된 용병이었을 뿐입니다.”
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내게 손을 모아 빌었다.
“16년이나 프렌시프에 있으면서 이곳을 제 고향처럼 여기게 되었……!”
가웨인의 그를 걷어차 내게서 떨어뜨렸다.
“입에 발린 말 집어치워.”
“사, 살려 주…….”
나는 오빠의 팔을 잡고 애덤을 쏘아보았다.
“살고 싶으면 아는 걸 모두 털어놔.”
“저는 정말로 한스에게 고용된 용병이었을 뿐이라 자세한 건…….”
“알고 있는 것 모두, 라고 했어.”
바닥에 납작 엎드린 애덤이 떠듬떠듬 말했다.
“아가씨께서 아카데미에 막 입학하셨을 때 통신하는 걸 들었습니다.”
이 몸에 세니아나가 들었을 때다.
“뭐라고 했는데?”
“요리엔 통 재능이 없으니 졸업만 시키자고. 그럼 로열 키친에 들어가도록 손 쓰는 건 그쪽에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그거였구나.’
세니아나가 요리를 끔찍하게 싫어하면서도 아카데미에서 버틴 이유.
애덤은 벌벌 떨면서 이어 말했다.
“그, 그런데 이번에 복학하신 뒤로 갑자기 로열 키친에 들어가야 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그래서 응시원을 훔친 건가. 나를 아카데미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아.’
로열 키친에 뭐가 있는 거야. 내가 손에 넣어선 안 되고, 약탈한 자들은 얻어야 하는 무언가가!
“통신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
“얼핏 들었습니다. 이름은―”
난데없이 그의 몸 안에서 푸른 빛이 퍼졌다. 가웨인은 나를 황급히 끌어안았고, 난 그의 어깨너머로 애덤을 보았다. 빛이 줄어들고 전신에 어떤 문양이 나타났다. 애덤이 컥, 꺼걱―! 신음하기가 무섭게 선혈이 터져 나왔다.
“애덤!”
“사, 살려, 살려 주…… 크악!”
한순간에 그의 몸에 불이 붙고, 그는 구할 새도 없이 잿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죽음의 냄새가 분연하다. 내가 가웨인의 옷깃을 잡고 헐떡였다.
“오빠, 저건―”
“금술의 일종이다. 비밀을 토설하면 죽게 되지.”
“…….”
그가 내 눈을 빤히 응시했다.
“무슨 일인 건지 들어야겠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가웨인은 나를 데리고 할아버지와 란슬롯에게 갔다. 난 얘기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했다.
1. 나를 납치한 세력과 세니아나, 황궁의 마차를 습격한 괴한, 한스와 애덤은 같은 편이다.
2. 그들은 나를 이용하기 위해 계략을 꾸미고 있다.
3. 당하지 않기 위해선 로열 키친에 있는 것을 손에 넣어야 한다.
나는 납치와 세니아나의 이야기만 빼고 가족들에게 지금껏 겪은 일을 토대로 추정한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어떤 무리가 나를 노리고 있고, 로열 키친에 내가 찾아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내 얘기를 가만히 듣던 란슬롯이 말했다.
“아카데미에도 무언가 있을 거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우리와 네가 떨어진 아카데미는 습격하기 최적의 장소야.”
란슬롯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굳이 황도에 올라오고 나서야 납치를 시도한 건 아카데미에 무언가 있다는 뜻이겠지.”
“그렇겠네요…….”
“아카데미가 더 안전할 수도 있겠구나.”
우리는 모두 고심했다. 고민하는 목적은 단 하나뿐이었다. 나의 안전을 지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아카데미는 안전이 확보된 곳이었다. 가족들은 고민 끝에 나를 아카데미에 보내 주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 일은 통신석을 통해서 아빠의 귀에도 전해졌다.
* * *
나는 뺨을 양손으로 착착 때리고 눈을 부릅떴다.
‘기운 내자.’
어차피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분명했다. 좋은 성적을 받아서 로열 키친에 입관하고, 숨겨진 것을 찾는다. 아카데미에서는 날 습격할 수 없고, 황궁은 집보다 안전하다.
“좋았어.”
나는 모레에 떠나기 위해 조리 기구를 점검했다. 그때 통신석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도미니크의 신호다!’
나는 주변을 샥 둘러보고 얼른 통신을 연결했다.
[우리 아직 연애로 가는 단계를 밟고 있는 겁니까?]
그의 말에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죠.”
[그런데 연락 한 통 없고?]
“저하도 안 하셨으면서.”
[했습니다.]
“아……. 제가 요새 바빠서 통신석을 못 봤어요.”
통신석에도 부재중 기능이 있으면 좋겠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어 말했다.
“그래도 자주 연락하는 건 일반적인 일이 아니니까.”
[무슨 말입니까.]
“길라게온은 연애 전에 연락을 최대한 자제하고 가족들과 더 시간을 많이 보내는 거잖아요?”
란슬롯은 말했다. 연애는 어른의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라고. 진정한 어른이 되기 전에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라는 의미란다.
[……누가 그럽니까?]
“가족들이요.”
[…….]
“……?”
그때 방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세니아나.”
란슬롯의 목소리다!
“아카데미에서 봐요.”
나는 재빨리 말한 뒤에 통신을 종료했다. 그러고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면서 “왜요?” 하고 물었다.
“놀러 가자.”
“이 시간에요?”
곧 해가 지는데?
란슬롯은 빙그레 웃었고, 그의 옆에 있던 가웨인이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허둥지둥 그들을 따라갔다. 밖으로 나가는 건가 싶었는데 본성 뒤에 있는 작은 건물로 들어갔다. 안을 본 나는 탄성을 터뜨렸다.
‘실내 수영장?’
“대욕탕인데 쓰지 않아서 개조했지.”
그의 말에 따르면 저 풀은 아주아주 큰 욕조였다. 그 옆으로는 선명한 빛깔의 플루메리아가 가득하다. 마치 남쪽 섬에 온 것만 같다.
‘가족들이랑 물놀이하는 건 처음이야!’
나는 엄청나게 설레서 깡충깡충 뛸 뻔했다.
“아, 그런데 저는 지금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입은 채로 들어가면 되지.”
가웨인의 말에 나는 질겁했다.
“옷을 다 버릴 텐데요?”
“새로 사면 돼.”
그러더니 나를 번쩍 들고 물에 첨벙 빠뜨렸다.
‘으아아!’
빠진다! 나는 엄청나게 버둥거렸다. 그런데 정수리 위에서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얕아.’
수위가 내 무릎 정도라 주저앉았는데도 가슴 밖에 오지 않는다. 내가 가웨인을 흘겨보자 그는 ‘왜, 뭐.’ 하는 눈으로 싱글거렸다.
란슬롯이 그를 발로 찼다. 한순간에 균형을 잃은 그가 윽! 하며 물에 빠졌다. 물에 젖은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시중을 들기 위해 실내 수영장 안에 있던 하녀들이 합창이라도 하듯 “하아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 드레스는 짙은 색이고 안이 겹겹이라 괜찮은데, 가웨인은 달랑 셔츠 하나라서 물에 젖으니까 탄탄한 가슴과 복근이 비친다. 나는 킥킥거리며 가웨인을 쳐다보았다. 청녹발의 머리칼이 물에 젖으니까 미역 같았다.
“어, 웃었다 이거지?”
그가 도깨비처럼 나를 쫓아와서 혼비백산하고 도망쳤다.
‘으아아!’
드레스가 물을 먹어서 빨리 달릴 수가 없잖아!
“항복, 항복! 졌어요!”
소리치니 그는 씩 웃으면서 나를 안아 들었다. 공주님 안기로 다시 풀장에 들어간 난 얼른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하지 마요! 무서워!”
무릎밖에 안 와도 빠지면 귀와 코에 물이 다 들어간단 말이야! 그건 꽤 고통스러운 일이라 난 질겁했다.
“도미니크야, 나야.”
“이씨―!”
왜 거기에 그렇게 집착하는 거람!
“욕?”
그가 나를 안고 부웅― 돌았다.
“아니야! 잘못했어요!”
“누구야?”
“오빠예요! 오빠가 최고예요!”
가웨인이 아주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의 품에서 살포시 내려왔을 때 나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그는 나와 가웨인이 꽥꽥거리는 걸 다 들었는지 픽 웃었다. 나는 가웨인에게 흥! 하고 할아버지에 곁에 갔다.
“다 젖었구나.”
“가웨인이 나빠요.”
“빠뜨려 주랴?”
할아버지가? 난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턱을 살짝 치켜들고 오만한 표정으로 가웨인을 쳐다봤다.
“빠져라.”
“……예?”
“빠지라고.”
아니, 직접 하시는 게 아니고?
가웨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나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보았다. 시선이 점점 무시무시해져서 난 할아버지의 뒤에 쏙 숨었다. 할아버지는 내 앞을 든든하게 막아 주었다.
“세 번까지 말하게 하지 마라.”
“…….”
가웨인은 망했다는 표정으로 물속에 대자로 누웠다. 첨벙! 물 튀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배영 하는 자세로 둥둥 떠올랐다. 고소해서 손뼉을 짝짝 치다가 할아버지를 보았다.
“같이 해요.”
“내게 그런 말을 한 놈은 네가 처음이구나.”
난 히히 웃으며 팔을 좀 더 당겼다.
“오냐, 가자.”
집사장이 허허 웃으면서 내게 발리볼 같은 가벼운 공을 건네주었다.
“이게 필요하실 듯하여.”
“응!”
나는 가족들에게 공으로 시합을 하자고 했다. 네 명이서 공을 돌리는데 떨어뜨리는 사람은 게임에서 빠진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남은 사람이 승리하는 간단한 규칙의 게임이었다. 가웨인이 공을 텅, 튕기며 말했다.
“내기해.”
“판돈 거는 건 싫어요.”
그렇지 않아도 로토헤로 탈탈 털렸는데. 우리 집 사람들의 금전 감각을 난 따라갈 수가 없다.
“그럼?”
그의 물음에 난 고민하다가 말했다.
“소원 들어주기로 해요. 돈 드는 거 말고.”
란슬롯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하루 종일 데이트도 해 주나?”
‘큰오빠는 정말 로맨틱해.’
“그런 거야 뭐.”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자기 세 남자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할아버지가 로브를 벗었고, 가웨인도 웃옷을 집어 던졌다. 란슬롯의 눈빛까지 변했다. 공을 잡은 가웨인이 할아버지를 힐긋 쳐다보았다.
“쉬시죠. 연로한 몸엔 부담이 클 텐데요.”
할아버지가 오만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기술은 연륜에서 나오는 법이지. 란슬롯, 너는 이만 공을 놓지 그러느냐.”
“몸 쓰는 일엔 빠지는 편이 아니라서요.”
세 사람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공을 돌리는지 나는 공 한 번 제대로 못 받고 빠졌다.
“긴장 푸시죠, 조부님. 가웨인에게 던질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내게 던지려는 속셈이 훤히 보이는군.”
“공 받는 중에 발길질하시는 게 어디 있습니까!”
“안 된다는 규칙은 없잖느냐.”
각종 책략과 반칙이 난무했다. 십 분쯤 구경했는데도 도무지 승자가 가려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난 흥미를 잃어서 혼자서 참방참방 물장구를 쳤다. 그러자 시트론이 어깨에 타월을 걸쳐 주었다.
“밤공기를 무시하시면 안 됩니다.”
“시트론은 항상 세심하네.”
“칭찬 감사해요. 그런데 상은 없나요?”
시트론이 눈을 찡끗거렸다.
“다음에 상점 거리로 놀러 갈까?”
“세상에나, 너무 기뻐요!”
“내가 에스코트해 줄게.”
“멋진 데이트겠어요.”
우리는 농담을 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음, 좀 춥다.”
“가서 옷을 갈아입어요.”
나는 시트론과 함께 실내 수영장을 빠져나갔다.
나중에 들으니 공놀이의 승자는 없었다. 공놀이 중간에 영지 일이 터져서 급히 마무리됐다고 했다. 거의 다 이겼던 할아버지가 벌컥 화를 냈단다.
모레 아침. 교복을 입고 할아버지와 오빠들에게 인사했다.
“다녀올게요.”
“조심해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한 마음이 있기야 하지만, 설레는 마음이 더 컸다. 요리하는 건 언제나 즐거웠고, 쟝뤼크 교수님이 나를 직접 수련시켜 주겠다고 했다.
‘열심히 배워야지!’
난 조심해서 있겠다고 열 번은 약속한 후에 아카데미의 기숙사로 이동했다. 개학식을 한 뒤,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회포를 풀러 갔다.
‘좋겠다.’
나도 친구 있었는데. 그렇지만 이제는 썸남이 되어 버려서 없어졌어. 시무룩 어깨를 늘어뜨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냐, 날 괴롭히던 프란츠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그는 이번 학기에 기어이 자퇴서를 냈다. 애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자 하니 좋은 꼴로 살진 못할 것 같았다.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멀리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쟝뤼크 교수님이다!’
나는 지도 교수가 되어 준 그에게 냉큼 달려갔다.
“교수님.”
“응시원은 가져왔나?”
지도 교수 신청서와 로열 키친 응시원을 함께 내야 2차 시험을 볼 수 있었다. 난 의기양양 고개를 끄덕였다.
“행정처에 제출했어요.”
“앞으로 잘 생각은 일절 마라.”
그러고는 나를 개인 연구실에 딸린 부엌으로 데려갔다. 그의 연구실 부엌은 실습실의 조리대보다야 조금 작지만 필요한 건 다 갖춰 있었다.
“우와!”
칼의 종류가 엄청 다양했다. 손잡이가 잡는 모양대로 약간 패였다. 오래 사용한 흔적이었다. 냄비며 프라이팬, 사소하게는 후추 그라인더에 이르기까지 모두 반짝반짝했다. 모든 도구가 길이 잘 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요리에 대한 그의 마음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쟝뤼크가 날 보며 말했다.
“증명해. 내가 너를 도울 가치가 있는지. 지도는 그 후 순서다.”
그는 앞으로 이 주간 양파와 당근, 호박, 가지, 파 등을 썰어 붉은 통에 가득 채우라고 했다. 김장 대야의 두 개 정도의 크기였다. 그리고 생선 서른 마리, 소와 돼지 닭 등을 각각 10kg씩 손질. 조미료, 혹은 향신료를 하루에 세 종씩 지역별, 브랜드별, 종류별로 전부 맛보고 리포트 작성. 시키는 게 엄청 많아서 난 멍해졌다.
“그걸 다요?”
나는 수업까지 받아야 하는데? 하지만 쟝뤼크는 단호했다. 그러고는 일단 테스트를 해 보자며 키조개를 꺼내 올려놨다. 키조개는 조개의 왕이라고 불릴 만큼 크기가 큰데, 이건 보통 키조개의 몇 배는 될 것 같았다. 진심으로 놀라서 혀를 내둘렀다. 허풍을 보태면 껍데기가 내 상체만 했다.
“손질해 봐라.”
난 머리를 묶은 뒤 조리모를 쓰고 손을 닦았다. 껍데기 틈을 칼로 벌리고 양쪽으로 분리했다. 내장을 뚝 뗀 후에 스푼으로 관자까지 빼냈다. 내장을 넣어 뒀던 볼에 관자도 함께 넣으려는데―
“뭐 하는 거지?”
쟝뤼크가 물어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야 이제 세척하고 불순물을 제거하러 가려고…….”
“애써 분리한 내장과 관자를 왜 함께 두느냐고 묻는 거다.”
쟝뤼크가 왈칵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바다 재료 중 독성이 있는 것을 말해 봐라. 미미한 복통을 일으키는 것까지 전부.”
“복어, 군소라의 알과 내장, 여름철의 자연산 홍합, 그리고―”
거기까지 말하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헉.’
큰일 났다.
“그리고?”
쟝뤼크가 한 손으로 허리를 잡은 채 물었다. 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웅얼거렸다.
“키조개의 내장입니다…….”
“이렇게 큰 키조개라면 독성이 더 강하겠지.”
“그렇습니다.”
사람 몸에 해로운 건 즉시 처리가 원칙이었다. 그가 조리대를 쾅! 내리쳤다.
“이런 것도 하나하나 알려 줘야 하는 건가.”
“죄송합니다.”
“형편없군. 내가 가르칠 의미가 전혀 없겠어.”
“교수님!”
“당장 나가.”
그가 축객령을 내렸다. 지도 교수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 * *
쟝뤼크는 자작가의 외아들이었다.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유년기가 행복했던 기억은 없다. 모친은 몸이 약해 언제나 시름시름 앓았고, 부친은 모친의 숨이 끊어지는 와중에도 약과 노름에 빠져 있었다.
가문의 영지는 북부로 척박하고도 척박한 땅이다. 겨울만 되면 사람들이 죽어 나가기 일쑤였다. 그런 와중에도 부친은 가문의 재산을 노름으로 탕진하길 멈추지 않았다. 때문에 어린 쟝뤼크는 귀족의 몸으로도 배를 곯을 수밖에 없었다.
요리를 하기로 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식칼을 들면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 같아서. 제 손은 영 쓸모없지는 않았다. 재능이 있었고, 거기다 치열하게 살았다. 수련생 시절엔 수면 시간이 하루에 서너 시간 정도였다.
‘그런데 이놈들은.’
아카데미엔 제대로 된 놈이 없다. 재능이 없으면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데 저놈들은 그마저도 못했다.
‘빌어먹을.’
로열 키친을 나선 후 교단을 찾은 건 자신의 재주가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죽기 전에 물려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 명이 없어, 한 명이.’
그나마 쓸 만하다고 생각한 놈은 생각이 틀려먹었다. 아소가 쟝뤼크 앞을 가로막고 말했다.
“지도 교수가 되어 주시죠.”
“싫다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센을 쫓아내셨다면서요.”
재주가 부족해도 도와줘 볼까 생각한 녀석은 실망스러웠다. 아소의 눈이 집념으로 일렁거렸다.
“교수님께서는 범재를 가르치실 수 없습니다.”
“뭐라고?”
“천재는 좌절해 본 적이 없죠. 늘 스스로 깨우쳤기에 평범한 사람이 무엇을 고민하는지도 모르실 겁니다.”
“그래서.”
“적어도 재능의 수준이 비슷해야 얘기가 통하겠지요.”
아소는 자신이 쟝뤼크 수준의 천재라고 단언하며 협박까지 해 왔다.
“센이 없으니 이제 저밖에 방법이 없지 않으십니까.”
강의 평가는 이 년 연속 최악. 이번에도 지도까지 맡지 않으면 짐을 쌀 수밖에 없다. 아카데미를 떠나면 황제와 금좌 11석, 타국의 황족, 고위 귀족들이 들러붙어 올 거다.
귀찮게.
‘그래도 저놈은 아니지.’
쟝뤼크는 딱 잘라 말했다.
“주방에 정치를 끌고 들어오려는 놈에게 가르칠 건 없어.”
제 손이 정쟁에 휘말리는 건 로열 키친에서 지낸 세월로 충분하다. 선배이자 휘하의 요리사였던 아곤은 말했다.
[제자의 성장은 기쁘지. 내 성장은 보이지 않지만, 제자의 성장은 눈에 보이거든.]
노년의 즐거움을 위해 제자를 키워 볼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곤 제레미란 이름의 밉살맞은 녀석을 데리고 로열 키친을 떠났다. 제레미는 쓸 만한 놈이었다. 듣자 하니 아곤의 밑에서 수셰프 노릇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소 정도는 아니지만 감각이 있었다.
‘그런 놈 정도라도 돼야 키우든가 하지.’
쟝뤼크는 아소를 지나치면서 쯧, 혀를 찼다. 로열 키친에서 퇴직한 후 아곤과 나누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자네도 제자를 키워 보는 게 어떻겠나. 자식 기르는 것만큼이나 즐겁다네.]
[자식 키우는 것만큼 고통스럽기도 하겠죠.]
[우리 스승님들께서도 그러셨겠지. 하지만 돌아가시기 전엔 한바탕 축제 같았다고 하셨다네.]
[제 스승께선 다음 생엔 보지 말자고 하시더군요.]
냉정하게 대꾸했지만, 흥미가 일었다. 그래서 아카데미에 온 것이다.
‘그게 잘못이었지.’
매사 허허실실한 아곤을 믿는 게 아니었다.
‘권태롭군.’
아카데미 교수 생활은 로열 키친에서보다 더 지루하다.
쟝뤼크는 생각에 잠긴 채 교내 복도를 걸었다. 연구실로 돌아가면 새로운 교감이 떽떽거리려고 기다리는 중일 거다. 늘 가던 산책 코스엔 아소가 떡 버티고 있다. 하는 수 없이 시간을 죽이기 위해 구석진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낡은 실습실이 있다. 수업이 다 끝났는데도 불이 켜져 있기에 쟝뤼크가 미간을 좁히고 창 안을 들여다보았다.
‘저 녀석, 뭐 하는 거야.’
세니아나가 끙끙거리며 웬 통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더니 허리를 툭툭 치고, 죽을 것 같다는 표정으로 칠판에 머리를 기댔다.
‘저건…….’
조리대에 깔려 있는 것은 생선, 소, 돼지, 닭이다. 그것 또한 빠짐없이 모두 손질되어 있었다. 그가 벌컥 문을 열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움찔, 어깨를 좁혔다.
세니아나가 옮긴 통에는 채소가 한가득이다. 모두 자신이 손질하라 일렀던 채소였다. 썰기 쉬운 재료를 택할 만도 한데 종류의 비율은 일정하다. 쟝뤼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시위하는 거냐?”
“아, 아닌데요.”
그녀는 억울한 표정이었다. 한숨을 크게 내쉬느라 바짝 묶어 올린 말총머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아무리 이래도 지도할 생각 없어.”
세니아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웅얼거렸다.
“치사해…….”
“뭐?”
“아,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쟝뤼크는 삐딱하게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저기…….”
세니아나는 힐끔힐끔 눈치를 보다가 쟝뤼크를 조그맣게 불렀다.
“지도는 안 해 주셔도 되는데요. 하나만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뭘.”
세니아나는 얼른 가서 키조개를 가져왔다.
“아무리 열심히 손질해도 구우면 질겨요.”
“…….”
“품질 탓일까요?”
“…….”
“아, 안되나요?”
“어떻게 했는지 보여 줘야 말을 할 거 아니야.”
세니아나는 재빨리 칼을 들고 요령 좋게 관자만 분리해 냈다.
‘늘었군.’
지시했던 걸 다 하면서도 키조개까지 계속 만져 왔던 거다. 그녀가 프라이팬에 기름을 올렸다. 지금 손질한 키조개는 자신이 준 것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커서 관자도 일반적인 것보다는 크다. 치익―! 기름에 익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생각보다 오래.
세니아나가 익혀 온 관자를 그는 맛보지 않았다. 조리하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이것도 틀림없이 질길 거다.
“손질까지는 문제가 없어.”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조리실을 나섰다. 교감이 퇴근할 때가 되어서 연구실에 돌아왔다. 의자에 앉으며 그는 생각했다.
‘근성은 있군.’
재능도 없고 끈기도 없는 놈들보다 소금 한 꼬집 정도는 낫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출근했더니 연구실 앞에 조리복을 입은 녀석이 웅크리고 있었다.
“교수님!”
“또 뭐냐.”
그는 세니아나를 보자마자 왈칵 인상을 썼다.
“저 알아냈어요. 키조개를 부드럽게 조리하는 법이요.”
그러더니 접시를 불쑥 내밀었다. 오래 기다린 듯 관자가 식어 있었다. 어제와는 빛깔부터 달랐다. 쟝뤼크가 관자를 입에 넣었다.
“…….”
“어때요?”
“어떻게 한 거냐?”
“관자가 너무 크니까 속까지 익히려고 오래 구웠잖아요? 그래서 질겼던 거였어요.”
제법 고민하기는 했나 보다. 세니아나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육수에 살짝 데쳐서 칼집을 낸 다음에 구웠죠!”
“머리가 아예 돌은 아니었군.”
“감사합니다!”
그녀는 헤헤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깡충깡충 뛰듯이 되돌아갔다. 연구실에 들어가니 우아한 노년의 여성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올해도 기어이 학생을 지도하지 않을 건가요?”
교감은 쟝뤼크를 향해 눈을 희번덕거렸다.
“저번 학기 강의 평가가 최하위예요, 최하위!”
새로 교감으로 승진한 그녀는 교수일 적에도 깐깐하기로 안팎에서 명성이 높았다.
“압니다.”
“쟝뤼크 교수 수업을 두 명밖에 신청하지 않았다는 것도 아나요?”
세니아나와 아소였다. 교감은 이번에야말로 퇴직서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제 커리어에 먹칠을 하는 원수! 쟝뤼크의 표정을 본 교감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 말이 우스워요?”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즐거운 표정이에요!”
“지도 맡을 겁니다.”
“뭐라고요?”
“신청서를 낸 학생이 있습니다. 오늘 수락할 예정이었죠.”
그제야 교감의 표정이 풀렸다.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시죠.”
그녀가 후후 웃었다.
“내일까지 서류 제출하세요. 꼭, 내일까집니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방을 나섰고, 쟝뤼크는 수업 시간표를 확인했다. 마침 한 시간 뒤가 세니아나의 수업이었다.
그는 강의가 끝난 후 세니아나를 불렀다.
‘뭐, 도저히 못 봐 줄 실력은 아니니까.’
근성이 있는 점은 제법 괜찮고. 세니아나는 무슨 일로 불렀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쟝뤼크가 헛기침을 했다.
“아직 지도 교수를 못 구했겠지.”
다른 학생들은 1차 시험이 끝나고 바로 교수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손이 남는 교수가 없을 거다.
“아니요?”
“뭐?”
“레아 교수님이 함께하자고 하셨어요!”
그렇게 말한 세니아나가 활짝 웃었고, 쟝뤼크는 얼어붙었다.
* * *
나는 쟝뤼크 교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응시원을 돌려주세요.”
레아 교수님에게 신청서를 내려면 필요하거든. 행정처에 물어보니까 원래 신청했던 교수가 허가해야지만 응시원을 돌려준다고 했다. 그런데 쟝뤼크 교수님에게서 말이 없었다.
“왜.”
“네?”
“내 실력이 더 좋은데 어째서 레아 교수지?”
‘그야 교수님이 안 하겠다고 하셨으니까요.’
솔직히 나도 걱정이 많았다. 저번 학기와 이번 학기는 졸업 시험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랐다. 로열 키친에 가야 한다. 그래서 날 납치했던 자들의 목적을 알아내고 상황을 타개할 묘책도 손에 넣어야 했다. 그런데 지도 교수가 없으면 시험도 못 보는걸!
어제 조리실에서 끙끙거리고 있으니까 레아 교수가 먼저 지도해 주겠다고 했다.
[쟝뤼크 교수에게서 쫓겨났다지?]
[네…….]
[그럼 내 밑으로 들어오는 게 어떻겠니?]
레아 교수는 인기인이었다. 하루 만에 신청을 마감할 정도로 학생들이 밀려들었다.
[괜찮으세요?]
[그래, 네 콩국수가 마음에 들었거든.]
‘레아 교수님이 친절하셔서 정말 다행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쟝뤼크를 올려다보았다.
“…….”
“교수님?”
“바빠.”
먼저 붙든 사람은 그쪽이면서?
나는 갑자기 떠나는 쟝뤼크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행정처에 연락해 주셔야 해요!”
―하고. 그러고 나니까 곧 자습 시간이었다. 자습은 실습과 연구 중 원하는 걸 택할 수 있었다. 나는 쟝뤼크의 지시 중 하나였던 ‘향신료와 조미료의 종류별, 브랜드별, 지역별 리포트 작성’을 위해 빈 강의실로 갔다.
쟝뤼크 교수의 지도대로 따르니까 실력이 상승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을 직접 받을 수 없어도 나 혼자서 열심히 하기로 했다. 강의실에 들어가려고 하던 찰나, 학생들이 하나둘 다가왔다.
“센!”
1차 시험이 끝난 후 친해진 여자애들이었다.
“이제야 보네. 이번 학기엔 강의가 겹치는 게 없어서 얼굴 보기 힘들다.”
그러고 이런저런 말을 걸어 줘서 난 발그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개학식 때도 같이 놀자고 찾았었는데.”
“정말로? 고마워!”
“뭘 이런 걸 가지고 고마워한담.”
다른 여자애들이 아하하,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센, 너 머리 헝클어졌다. 땋아 줄까?”
“부탁해도 돼?”
“물론이지.”
여자애 두 명이 양쪽에서 내 머리를 땋아 주고 있는데 남자애들도 다가왔다. 몇몇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고, 몇몇은 싱글벙글했다.
“빌어먹을, 다 잃었어.”
“교장이 대련에서 4황자에게 이길 줄 누가 알았느냐고.”
“어, 센이잖아.”
그들이 내게 손을 가볍게 들었다.
“오랜만. 잘 지냈어?”
“응.”
“으악, 하필 스위트피에게 머리를 맡기다니.”
그러자 내 뒤에서 머리를 땋고 있던 오렌지색 머리칼의 여자애가 하하, 웃었다.
“우리 친구가 아무래도 내 엉두이에트(일종의 프렌치식 순대. 내장에 속을 채워 만드는 요리)의 재료로 쓰이고 싶은 모양이구나.”
“무섭다고.”
“나는 아주 잘 땋고 있으니 넌 신경 끄렴.”
“데커레이션 꼴찌가.”
스위트피라고 불린 여자애가 남자애를 잡으러 뛰어다니자 다른 애가 내 머리를 땋겠다고 나섰다.
“자, 봐. 데커레이션 파트 수석의 이 몸이 제대로 솜씨 발휘를 하지.”
곰처럼 덩치가 큰 남자가 내 뒤로 걸어오더니 손을 꼬물꼬물 움직였다. 다른 아이들이 인상을 썼다.
“그게 뭐야. 엉켰잖아.”
“이, 이상하다.”
“이리 나와.”
“기다려. 아직 육수도 안 낸 단계거든?!”
내 머리카락은 다시마가 아닐 텐데 어째서 육수 이야기를 하는 거니?
‘신세대들의 농담인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복도를 걷던 교수들이 우리를 쳐다봤다. 제일 앞에 있는 도미니크의 시선이 강렬했다.
‘아!’
“거기.”
반가워서 얼굴을 활짝 펴니 그가 말했다. 웃고 떠들던 아이들이 우뚝 멈췄다. 도미니크가 내 뒤에서 머리카락을 잡고 있는 남자애를 빤히 보며 말했다.
“시끄럽군.”
그러자 아이들이 엄청 긴장해서는 “죄,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도미니크가 날 가리켰다.
“따라오세요.”
“저만요?”
“예.”
내가 제일 조용했는데!
저번에도 그러더니 맨날 나만 부른다. 하지만 도미니크가 먼저 가 버려서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함께 교장실에 들어갔다. 그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고 날 빤히 응시했다. 나는 자꾸만 입술이 튀어나오려고 해서 미간을 좁혔다.
“저는 안 떠들었는데.”
“압니다.”
그가 내게 바짝 다가왔다. 나는 깜짝 놀라서 움찔, 몸을 뒤로 뺐다. 그의 시선이 눈에서 귀, 그리고 머리카락으로 이동했다.
“제가 부패, 비리, 폐단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것참…… 몰상식한 취향이시네요.”
나는 누가 들었을까 봐 문과 창문을 힐끔거렸다. 도미니크가 그런 날 보고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영애에게도 받지요, 뇌물.”
“뇌물이요?”
정말로 그런 취향이었던 거야? 나는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면 안 돼요!”
“왜?”
“그야, 음, 양심적으로……?”
“애초에 없던 거라.”
그는 다시 멀어지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도미니크, 정말 양심이 없구나’ 생각하며 재킷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 그의 손바닥에 올려놨다. 그런데―
“앗!”
그가 날 휙 끌어당겼다. 촉. 간지러운 소리와 함께 코에 부드러운 것이 스치듯 지나갔다.
“돈은 됐습니다.”
―하며 내게 금화를 돌려줬다. 난 새빨개져서 그가 입 맞춘 코를 손으로 가렸다.
“관측대에선 눈에 했고, 오늘은 코에 했으니 다음은 어딜까요, 영애.”
나는 얼른 손을 입술 쪽으로 내렸다. 도미니크가 픽 웃고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런 그를 흘깃 쳐다봤다.
“이건 너무 진도가 빠르지 않나요? 연애하기 전엔 머리카락 한 올 안 만진다고 했는데.”
“우린 입 맞추고 시작했으니 남들과는 다르죠.”
그러면서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건…….”
마침 부관이 차를 가져다주고 나갔다. 이제 슬슬 가을이라 벌써 국화차가 나온 모양이다. 따뜻한 차 속에 핀 말린 국화를 보고 있는데 도미니크가 말했다.
“후작과 경들이 영애에게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까?”
“네.”
“아쉽네요. 중요한 것을 빠뜨리셨는데.”
“그게 뭔데요?”
도미니크가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연애 전과 후는 다릅니다. 영애.”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런 말은 들은 적 없는데……’ 라고 조그맣게 말하며 손을 꼼질꼼질 얽었다. 오빠들에게는 연애 전에 뭘 하는지만 물어봤는걸.
“많이 다른가요?”
“연애를 시작하면 하루도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말, 을 안 해 주셨군요.”
“떨어지지 않는다고요?”
“시작하기 전엔 가족과 시간을 보냈으니, 시작하면 연인과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하.”
그렇구나.
“그런데 우리는 남들과 다르게 시작했으니까 그것도 다르지 않나요?”
내가 갸웃하며 물으니 도미니크는 여상한 투로 대답했다.
“관례상 안 됩니다.”
“그런 관례가 있구나……. 몰랐어요.”
이상한 관례네. 가족들이 서운해하겠다.
“영애는 내내 영지에만 계셨으니까요. 이제부터라도 아시면 됩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왜인지 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교장실을 나오자 어느새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앗, 신청서를 내야 하는데!’
도미니크가 주는 과자를 먹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가 자꾸만 과자를 주기에 ‘왜 이렇게 먹이세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와 있는 시간이 달콤했다고 기억하길 바라서.]
그의 말을 떠올리자 얼굴이 붉어졌다. 난 양 볼을 감싸고 교장실 문을 흘깃 쳐다봤다.
‘아, 아니야. 정신 차리자.’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점심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그전에 응시원을 받아야 지도 교수를 신청할 수 있었다. 나는 레아 교수의 서명이 들어간 신청서를 끌어안고 쟝뤼크 교수를 찾아갔다.
똑, 똑. 몇 번이나 노크를 했지만 대꾸가 없었다. 학생과의 대화를 사절하는 성격 때문에 없는 척하는 건가 싶었는데, 인기척조차 없었다.
“어디 계시…… 아, 교수님!”
복도 반대편에서 쟝뤼크 교수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난 얼른 그를 향해 뛰었다.
“교수님, 교수님.”
“…….”
“응시원 주세요.”
“…….”
“어디 가시는데요, 네?”
쟝뤼크는 말없이 어떤 문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마음이 급해서 그를 따라갔다.
“아!”
교수들의 연구실에조차 없는 신기한 마도구들이 가득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구경하는 동안, 쟝뤼크는 무언가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볼 주변으로 뿌연 연기가 흘러나온다.
“아, 저 이거 알아요!”
“네가?”
액화 질소. 티브이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극저온의 무기물로, 재료를 순식간에 꽝꽝 얼린다. 언 재료를 갈아서 이런저런 요리에 활용할 수 있었다. 옆에 있는 드레싱을 보니 저걸 얼리려는 모양이다.
“과일 베이스의 드레싱이라서 여름엔 활용도가 높겠어요.”
“……네가 이걸 어떻게 알지? 빙원을 요리에 활용하는 건 나 홀로 생각해 왔던 것인데.”
헉.
“그게, 그러니까, 아…… 공부를!”
나는 눈을 도르륵, 굴리며 재빨리 눈치를 봤다.
“네, 요리의 기본은 과학, 아니, 마도학이니까 여러모로 알아봐서…….”
“…….”
그가 흘깃 나를 쳐다보더니 큼, 헛기침을 했다.
“뭐, 영 재주가 없는 건 아니군.”
“그건 비아냥인가요?”
“아니, 내 말은…….”
“……?”
“아니다.”
“응시원 주세요. 오후 수업 전에 내야 한단 말이에요.”
십 분 후면 점심시간이 끝나서 나는 마음이 조급했다. 쟝뤼크 교수는 칼을 마른행주에 닦으며 슬쩍 나를 보았다.
“그…… 뭐, 레아 교수는 지도하는 학생이 많지 않나?”
“올해는 세 명밖에 안 받으셨대요.”
“네가 레아 교수 그룹에 들어가면 민폐지. 넌 실습도 그렇고 필기 성적도 하위권이라던데.”
“교수님도 강의 평가 꼴찌셨으면서…….”
나는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 작은 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그가 버럭 소리쳤다.
“나는 내가 안 한 거고!”
“저도 제가 안 한 건데요.”
그건 내가 아니라 세니아나의 성적이라고.
“한 마디도 안 지는군. 레아 교수가 아주 피곤하겠어.”
“…….”
“어쩔 수 없지. 내가 받아 줘야겠군.”
“네?”
“네가 마음에 쏙 들어서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좀 머리도 쓸 만하고 근성도 있으니까 다른 놈들보다는 아주 조금 나아서……! 알겠어?”
그가 변명하듯 쩌렁쩌렁 소리쳐서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로요?”
“내가 제자는 무조건 1등이어야 한다. 실습도, 필기도, 졸업 시험도.”
나는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몇 번이나 그의 손을 잡고 흔들면서 “네, 네!” 하고 대답했다. 나는 그날부터 쟝뤼크와 함께 수련하기로 했다. 지도 교수의 허가가 있으면 수업엔 들어가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었다. 레아 교수에겐 미안하다고 말했다. 있었던 일을 말해 주니까 그녀는 하! 하며 기가 찬 실소를 흘렸다.
[내 생각 퍽도 하는군.]
하면서.
쟝뤼크는 매우매우 엄했다.
“손목 나가고 싶어서 작정했어?! 누가 프라이팬을 그따위로 돌려!”
“이걸 비늘 손질이라고 한 건가.”
“혀가 제대로 기능하긴 하나. 왜, 차라리 설탕을 넣지 그랬어.”
매일매일 혼이 났다. 그래도 내가 ‘그냥 레아 교수님께 갈걸…….’ 하는 표정을 지으면 커흠, 커흠! 헛기침하며 반질반질한 사과 같은 과일을 슥 내밀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렇게 몇 주를 엄청나게 바쁘게 보냈다.
쟝뤼크는 내가 만든 콩피(지방, 혹은 기름에 절여 조리한 고기 요리)를 맛보았다.
‘제발.’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오늘은 욕만 듣지 말자. 몇 번 고기를 씹던 그가 나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래, 이게 요리지.”
“야호!”
나는 쟁반을 든 채 만세를 불렀다. 그가 물로 입안을 헹군 후에 중얼거렸다.
“이제야 쓸 만해졌군.”
“교수님이 너무 잘하시는 거거든요.”
내가 그를 뾰로통 흘기며 말했다. 몇 주 동안이나 하루 종일 붙어서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났더니, 이제 무섭지 않았다.
“내 제자라면 날 뛰어넘어야지.”
‘자꾸 제자라고 하시네.’
나는 아곤에게 들어 요리사들에게 ‘제자’가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제자란 자신의 정수를 모두 쏟아부어 키우는 사람을 의미했다. 실력 위주로 사람을 보는 쟝뤼크가 날 제자로 여길 리는 없는데.
‘아, 그렇지.’
정통만을 거친 요리사들에게는 상식인데, 그렇지 않다면 모르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나는 나중에 쟝뤼크가 알면 부끄러워할까 봐 정정해 주었다.
“제자가 아니라 학생이지요.”
“…….”
“네?”
“누가 그걸 몰라! 나보다 더 나은 스승이 어디 있다고!”
그렇게 외치며 조리실을 빠져나갔다.
‘왜 그러신담.’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다가 복도로 나섰다.
“영애.”
도미니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걸어오는 그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려다가 움찔, 주변을 둘러보았다. 목소리를 바짝 낮추고 속삭였다.
“그렇게 부르시면 어떡해요.”
“세니아나가 좋겠습니까?”
그때, 인기척 소리가 들려서 나는 질겁하고 벽 쪽으로 붙었다. 그가 픽 웃으며 로브로 날 가려 주었다. 나는 그의 셔츠를 잡고 있다가 조리화를 주로 신는 학생의 발소리와는 달랐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살짝 들었다.
“알베르…….”
도미니크의 부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숨어계시니 못 뵌 것으로 하지요.”
그러고 보니까 이거 얼굴만 숨기면 숨은 줄 아는 사슴과 똑같은 꼴이었다. 난 당황해서 머리가 새하얘졌었지만, 도미니크는 알고도 날 놀린 것 같았다.
“……저 정말로 놀랐거든요.”
내가 세니아나 프렌시프인 게 알려지면 2차 시험도 못 보고 쫓겨날 게 아닌가.
“놀라라고 한 겁니다.”
“왜요!”
“귀여우니까.”
나는 말도 못 하고 속으로만 ‘지… 짓궂어…….’ 하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그가 부관 알베르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지.”
“2차 시험 심사자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도미니크가 무표정해지자 알베르는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래도 직접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우리는 얼른 심사자가 왔다는 대강당으로 갔다. 교수들과 학생들이 바글바글했다. 심사 위원이 도착했다는 게 벌써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빼빼 마른 남자가 교감을 붙들고 왈칵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청녹발에 연한 붉은색 눈을 가진 여학생을……!”
그의 얼굴을 본 도미니크의 얼굴이 서늘해졌다.
“콜린 백작.”
콜린 백작?! 가족들이 얘기하는 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콜린 백작이라면 아빠, 할아버지와 같이 금좌 11석을 이루는 한 명이었다. 도미니크가 걸어가자 홍해의 기적처럼 학생들이 쫙 갈라져 길을 비켜 주었다.
“저하!”
콜린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미니크를 반겼다.
“여전히 존안이 훤하십니다.”
“심사자로 초청한 건 공이 아닐 텐데.”
“제 가문의 가신이었지요.”
“그런데.”
“몸이 아파 중요한 자리에 갈 수 없게 되었으니 주인이 대신 수습해야지 않겠습니까.”
말도 안 돼. 콜린 백작은 가신의 일을 대신 처리하기 위해 올 만한 신분이 아니다. 그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물론 로열 셰프의 허가를 받고 왔으니 안심하십시오.”
이곳 아카데미는 황궁 직속인지라 졸업 시험의 심사자를 로열 키친에서 선발한다. 입관 시험의 권리를 주는 만큼 청탁이 난무하였기 때문이었다. 교장이라 할지라도 심사 위원을 물리기 위해선 로열 키친과 협의가 필요했다.
“그런데―”
콜린 백작은 얼굴을 구기며 교감을 쳐다보았다.
“여긴 말귀를 못 알아먹는 놈들이 많군요.”
“하지만 백작님―!”
교감이 말하자 콜린 백작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청녹발에 연한 붉은 눈을 가진 여학생을 찾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던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오오!”
나는 에이프런을 꾹 말아 쥐었다.
‘내가 세니아나 프렌시프라는 걸 알고 있어.’
내 외양을 정확히 댄 데다가 나를 찾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날 만나려고 일부러 온 거구나.’
그가 날 콕 집고는 교감에게 말했다.
“저 여학생에게 시중을 들라 하지.”
교감은 화를 눌러 참듯 말했다.
“계시는 동안 시중을 들 사람들이 따로 있습니다.”
“전부 사내놈들이 아닌가.”
그는 큰 목소리로 들으라는 듯 말했다.
“시중인은 야들야들한 맛이 있어야지.”
“저희는 시중인이 아니라 요리사입니다.”
“술 한 잔 따르는 게 뭐가 어렵다고 그리 투덜거려. 여자 요리사는 어차피 현장에 나가면 술 한 잔씩은 따를 게 아닌가.”
그 얘기를 듣자마자 여성 교수들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콜린 백작은 여성 요리사를 술집 작부 정도로 취급하는 저질이었다. 식당을 할 때 술을 따라 보라며 진상을 부리던 손님들이 떠올라서 난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니까 콜린 백작이…….’
가족들이 얘기하는 걸 들은 적도 있고, 사교계에서도 유명한 인물이라 나도 얼마간 아는 게 있었다. 길라게온을 세운 다섯 가문 중 하나. 시간이 지나며 권력은 약화 되었지만, 여전히 명예는 어떤 가문보다 드높았다. 그 덕에 명예가 권력보다 중해지는 순간엔 언제나 승리했다.
‘명예는 무슨.’
나를 따로 만나고 싶으면 댈 수 있는 핑계가 시중 외에도 있을 거다.
‘그런데 굳이 시중이라고? 무슨 생각인 거야.’
나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도미니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아카데미에 접대부는 없습니다.”
그러자 콜린 백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가 어물쩍 농담으로 넘기려고 느물느물하게 굴었다. 도미니크도 평이하게 대꾸했다.
“그런 의미로 들렸으니 말실수겠군요.”
“물론 그렇지요.”
“그럼 사과를 해야지.”
“……예?”
“아무래도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건 공인 모양입니다.”
교수와 학생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콜린 백작은 이를 악물었다.
대강당을 떠나는 도미니크를 따라갔다. 사람 없는 곳에 이른 뒤에 나는 괜찮냐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콜린 백작은 금좌 11석이야.’
나는 황제도 아빠에게 한 수 물러 주는 것을 보았다. 이 나라에서 가장 지체 높은 금좌에 앉았다는 건 그런 힘을 가졌다는 말이다. 도미니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멱을 따지 않는 것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
“다시 헛소리를 하면 다른 쪽으로 최선을 다하겠지만요.”
죽여 버리겠다는 말 같아서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남자가 정말.’
매번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만 한다. 도미니크는 염려가 잔뜩 깃든 내 눈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최대한 빠르게 로열 키친과 협의해서 저자를 내보낼 겁니다.”
“네.”
“학사 외에선 알베르를 붙여 두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미니크는 로열 키친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 갔고, 나는 교내로 들어가 쟝뤼크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는 연구실 내에 있는 조리실에서 칼날을 다듬고 있었다. 나도 놓고 간 내 식칼과 숫돌을 꺼냈다. 그러자 쟝뤼크가 물었다.
“점심 먹으라고 보내 놨더니 왜 벌써 온 거야?”
“입맛이 없어요.”
내가 우울한 목소리로 답하자 그는 칼을 내려놓았다.
“표정이 왜 그래?”
“2차 시험 심사 위원이 너무 마음에 안 들어요.”
“누가 왔기에.”
“콜린 백작이요.”
쟝뤼크는 한 눈으로 날을 확인하며 말했다.
“개차반이 왔군.”
“콜린 백작에 대해 아세요?”
“그런 놈에게는 안 걸리는 게 상책이야.”
“그런 사람이 어떻게 금좌 11석을 차지하고 있을까요?”
“삼 년 전에 아비가 죽고 이어받은 거다. 하지만 워낙에 멍청해서 자리가 위태롭지.”
그래서 굳이 아카데미에 날 찾으러 왔구나. 밀려나지 않으려고 프렌시프와 포털의 힘을 빌리려는 것이다.
‘확실히 생각이 없기는 해.’
사고는 늘 그런 자들 때문에 생긴다. 나는 칼을 갈던 손을 멈추고, 펜던트를 잡았다.
‘도망은 칠 수 있지만.’
포털이 완벽한 해답이 아니라는 걸 황궁에서 배웠다. 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포털이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당하면 포털을 열 수조차 없어.’
미카엘 황자가 피운 수면 향처럼. 약을 공기 중에 퍼뜨리거나, 먹는 것에 넣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은 차단하기 힘들다는 거다. 숨을 안 쉴 수도, 음식을 안 먹을 수도 없으니까. 쟝뤼크의 말처럼 만나지도 않는 것이 상책이었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설마 그렇게까지 정도를 모를까 싶긴 하지만.
내가 기숙사에 들어가면 알베르가 지키기 어려워서, 난 최대한 오래 학사 내에 있었다. 그러고 깊은 밤에 그의 호위를 받으며 학사를 나섰다. 그런데 기숙사로 들어가는 인적 드문 샛길에 몇몇 남자가 서 있었다. 콜린 백작과 그 호위였다. 백작이 히죽 웃으며 내게 다가오려 했지만, 알베르가 그를 막아섰다.
“2황자께서 영애에게 접근하는 자를 막으라 명하셨습니다.”
“영애에게 신경을 많이 쓰시는군. 의아할 정도로.”
“학생을 지키는 것이 소임이신 지라. 게다가 이분은 길라게온엔 몹시 특별한 학생이라서요.”
알베르가 비킬 의향이 없어 보이자 백작은 날 쳐다봤다.
“잠시 대화를 청하는 것뿐입니다, 영애.”
“거기서 듣지요.”
더 다가오지 말라는 소리에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이내 불쾌한 표정을 지우고 하하, 웃었다.
“오늘의 무례는 영애 신분의 기밀을 지키기 위함이었다는 걸 아시겠지요.”
“지나친 무례였지만요.”
“……다시 사과드리지요.”
저 사람은 내가 프렌시프 영애가 아니거나, 성녀라 불리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사과하지 않았을 거다.
‘나는 그런 사과를 받고 싶은 게 아니야.’
그리고 사과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나 말고도 많이 있다.
“받지 않겠습니다.”
단호한 거절에 기어이 백작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제안 드릴 것이 있습니다. 저자를 물리시죠.”
“황족의 배려가 우선이라.”
알베르를 절대로 물리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는 미간을 좁히다 후, 한숨을 내쉬었다.
“영애가 어째서 한낱 식칼을 드셨는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포털을 가지셨으니, 물류권까지 손에 넣고 싶으신 게지요.”
그렇게 말하곤 알베르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제게는 영애가 목표에 다다를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요.”
얼핏 좋은 스승이라도 구해 주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사실 저건 로열 키친과 물밑에서 거래해 나의 입관과 영전을 돕겠다는 말이었다.
“그래서요?”
“저는 아직 미혼입니다.”
“…….”
“가문의 격도 맞는 데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니 우리는 잘 맞는 한 쌍일 겁니다.”
내 표정이 일그러지자 그가 씩 웃으며 숱 없는 머리칼을 매만졌다.
“영애에게 저만큼 잘 어울리는 남편감은 없을 겁니다. 외양도 이만하면 훌륭하지 않습니까.”
‘아아.’
그러고 보니 무도회에서 얼핏 들은 것 같다. 엄청난 거구였던 콜린 백작이 지옥의 다이어트를 거친 후 심각한 자만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죄송하지만 제가 주변 환경상 눈이 하늘에 있어서요.”
“하, 하하.”
그가 억지로 웃었다.
“저를 프렌시프 경과 견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내라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첨입니다. 한 귀로 흘리세요.”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나는 고개를 까닥이고, 알베르와 함께 그를 지나쳤다. 걸으면서도 알베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죽어가는 소리를 내며 웃는 그를 난 이상한 얼굴로 쳐다봤다.
* * *
콜린 백작은 심사 위원을 위해 마련된 방으로 들어오며 의자를 걷어찼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의자가 나뒹굴었다.
‘빌어먹을 년!’
란슬롯 프렌시프가 자신을 보던 눈과 너무나 비슷했다. 사람을 벌레 취급하는 눈. 자신은 비슷한 나이대인 그와 사사건건 비교당했다. 프렌시프 후작의 외모와 능력을 그대로 물려받은 프렌시프의 장남. 콜린 백작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콜린 가의 외아들.
[리올 영애가 콜린 경과 약혼하기 싫어서 약을 먹었다면서요?]
[란슬롯 님을 가슴에 품고 다른 남자에게 갈 수는 없다고 했다고 하더랍니다.]
[콜린도 훌륭한 가문이긴 하지만, 굳이 택해야 한다면 역시 프렌시프 아니겠어요?]
[후계가 든든하니 흔들릴 걱정이 없지요.]
평생을 그 자식 그늘에 가려 살았다. 부친이 작고하신 후, 그보다 먼저 작위를 물려받았을 땐 쾌재를 불렀다. 이제 자신을 그와 비교하는 것들은 없겠지.
다시는 비교 당하고 싶지 않아서 금술까지 써가며 체중을 줄였다. 그후 제 앞에서 란슬롯의 이름을 꺼내는 자는 없었다. 이번 쌍월 축제에서 제대로 콧대를 눌러 줄 생각이었다.
나는 너와 다르다. 난 황제와 함께 건배사를 외칠 수 있지만, 너는 그저 네 아비 후광에 힘입어 축하주를 나누어 마시는 게 고작이다. 그러한 상상이 짜릿해 오로지 황자 대련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어머머, 프렌시프 경께서 황족석에 계시잖아요!]
란슬롯은 제 위에 솟은 자리에 앉아 동생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자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저 여자를 가질 수 있으면.’
내 손 위에 저 여자를 올려 둔다면……! 란슬롯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지는 꼴을 보고 싶었다. 그리되면 저를 쫓아낼 궁리만 하는 금좌 11석의 다른 귀족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으리라.
“내가 친히 찾아와 줬는데……. 감히, 감히!”
그가 테이블 위에 놓인 것들을 죄 쓸어 넘어뜨렸다. 쨍―!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이성의 끈이 뚝 끊어졌다.
“빌어먹을 년.”
내 손에만 들어오면 두드려 패서 예의를 가르쳐주마.
* * *
다음 날. 팔찌를 누르며 교정을 지나던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귀빈실 통유리 앞에 학생들이 우글거렸다. 그 안엔 나와 함께 점심을 먹는 애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날 발견하고 손짓했다.
“센!”
“무슨 일이야?”
스위트피가 유리창 안을 노려보며 속삭였다.
“콜린 백작이 교수님들이 만든 음식에 하나하나 어깃장을 놓고 있어.”
졸업 시험을 위해 학교를 방문한 심사 위원에게는 교수들이 음식을 대접했다. 창 안에서 콜린 백작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름에 튀겨 놓기만 하면 음식인가?”
레아 교수를 세워놓은 그가 스푼으로 그녀의 허리를 쿡, 찔렀다. 그녀는 실력으로만 따지면 아카데미 내에서 1, 2위를 다투는 실력자였다.
‘게다가 저건 꿔바로우(넓적하게 자른 돼지 안심으로 만드는 중국식 탕수육)잖아!’
꿔바로우는 레아 교수의 주특기였다. 나도 시연한 걸 먹어 봤는데 이런 만든 사람에게 배울 수 있다니, 감격할 정도로 엄청난 요리였다. 동부 출신이 절대다수인 이 아카데미에서도 그녀의 꿔바로우는 극찬을 받았다. 레아 교수는 침착하게 말했다.
“시식부터 하시고 말씀하시지요. 맛에도 불만이 있으시다면 다시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콜린 백작이 입매를 비틀곤 천천히 포크를 들었다. 튀김옷을 뒤적이던 그가 욱, 헛구역질을 했다. 교감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백작님, 지나치십니다!”
그때, 알베르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학사 내로 가시죠.”
“하지만…….”
“곧 저하께서 오실 겁니다.”
다른 애들도 얼른 가 보라고 했다. 애들은 백작이 내게 다시 눈독을 들일까 봐 도미니크가 일부러 부관을 붙여 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 눈에 띄어 봤자 좋을 거 없어.”
“듣자 하니까 네가 저 새― 아니, 저 사람 취향인 것 같은데.”
“하필 청녹발이라 고생이 많다.”
사람들의 말이 맞다. 콜린 백작이 나를 발견하면 더 곤란한 일이 생길 거다. 어쩔 수 없이 알베르를 따라갔다. 학사 내까지 나를 데려다준 그가 말했다.
“저는 항의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네.”
“오늘 내로 콜린 백작의 퇴교 요구서를 받아올 테니, 그동안 학사에 계셔야 합니다.”
“알겠어요.”
알베르가 떠나고, 난 조리 도구를 챙기기 위해 사물함을 찾았다. 콜린 백작의 소란을 구경하러 간 학생들이 많아서 교내가 조용하다. 한숨을 내쉬며 사물함을 열었다. 그런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건이 안에 있었다.
“이게 뭐―”
순간, 번쩍! 빛이 났다.
‘마도구야!’
나는 재빨리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두 걸음도 못 가서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뒤를 돌아보자 보인 건 마찬가지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모셔가겠습니다, 영애.”
다리가 휘청이고 의식이 점점 멀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이 든 나는 뻑뻑한 눈을 겨우 떴다. 온몸에 기운이 없고 정신이 몽롱했다. 뿌옇게 번진 눈앞에 작은 창이 보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특이한 나무로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긴 아카데미 근처다. 그때 밖에서 쿵!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계집애는?”
콜린의 목소리.
“모셔 왔습니다.”
“그래.”
“어찌하실 겁니까? 프렌시프에서 알면…… 아니, 당장 도미니크 황자가 알게 되면 가문이 풍비박산 날 겁니다.”
“그 전에 저 계집애를 내 것으로 만들 거다. 약에 절이거나, 아니면…….”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포털…… 열어야 …… 멀, 린…….’
정신이 혼미해서 포털이 열리지 않았다.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는 것보다 백작이 내가 있는 곳으로 들어오는 게 먼저였다. 술병과 와인 잔을 가지고 들어온 그는 쓰러진 날 보고, 씩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보면 나도 란슬롯 프렌시프만 한 미남인가?”
“……꺼……져.”
그가 입매를 비틀었다.
“곧 죽어도 입만 살아서.”
“…….”
“널 데려올 틈을 만들려고 소란을 피워서 로열 키친의 인맥 하나를 잃었지.”
“…….”
그가 잔에 술을 따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탓에 널 로열 키친에 들여보내진 못하겠어.”
술 안에 가루약을 털어 넣고는 날 힐긋 쳐다보았다.
“뭐, 원래 달갑지 않은 일이었으니 나로선 나쁘지 않군. 계집애는 집에 틀어박혀서 애나 보면 되지. 안 그래?”
그가 쪼그려 앉아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걱정하지 마라. 외출은 가끔 허락할 테니까. 날 위해 포털을 열어 줘야지.”
그는 빙글빙글 술잔을 돌렸다.
“시간…… 얼마나…….”
“네가 아카데미를 나온 지 삼십 분쯤 되었나.”
나는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죽고 싶지 않으면…… 날 돌려보내…….”
“보내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게 될걸. 이게 아주 기분 좋은 약이거든. 한 번 맛보면 절대로 날 거역할 수 없을 거다.”
그가 내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입을 억지로 벌리고 와인 잔을 기울이던 찰나였다. 쾅―! 문이 부서지듯 커다란 소리와 함께 “크악!” 하는 비명이 들렸다. 콜린 백작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동시에 내가 있는 침실의 문이 열렸다.
“어, 어떻게……!”
도미니크. 땀에 젖은 이마와 거친 숨결. 분노로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와 검을 그러쥔 손. 그의 주변으로 일렁이는 새파란 살기에 백작이 소리쳤다.
“이, 이건, 그러니까……!”
벌떡 일어난 그가 나를 가리켰다.
“프, 프렌시프 영애가 저를 유혹……!”
퍽! 도미니크가 주먹을 내질렀다. 얼굴이 돌아간 백작은 휘청이다 벽에 부딪혀 주저앉았다. 문 안으로 알베르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알베르는 나를 일으키며 함께 들어온 자에게 소리쳤다.
“확인해라.”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내 얼굴 앞에서 손바닥을 가볍게 휘저었다.
“금술입니다. 마비지요.”
“풀어낼 수 있겠나.”
“그리 어렵지 않은 마법이니, 당장이라도.”
알베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브 입은 사람이 내 손등에 어떤 문양을 그렸다. 마지막 선을 그려 넣자 갑자기 섬광이 번쩍!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아…….”
눈앞이 선명해지며 후들후들 떨리던 몸도 가뿐했다. 내가 한숨을 내쉰 찰나 “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베르가 얼른 도미니크에게 달려갔다. 콜린 백작이 어느새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사, 살려…… 살려 주십시오!”
“저하! 이대로 죽이시면 안 됩니다!”
도미니크가 검 자루를 말아 쥐었다. 그걸 본 난 퉁겨지듯 일어나서 그의 팔에 매달렸다.
“안 돼요, 저하!”
“…….”
철창에서 풀려난 야수처럼 살기등등하던 기세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도미니크는 지금 이것이 현실인지 확인하듯 내 뺨을 쓸어내렸다. 지옥을 헤매다 겨우 지상에 올라온 사람처럼. 나보다 더 간절한 얼굴이었다.
“전 괜찮아요…….”
그의 손에서 스르륵, 검이 빠져나갔다. 날 끌어안고 숨을 고르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네. 딱 좋은 타이밍에 오셨어요.”
난 그에게서 살짝 떨어져서 웃는 얼굴을 보여 줬다. 그러고 콜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너처럼 비열한 놈이 그냥 포기할 리 없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난 내 포털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 당연히 대비책을 마련해야지. 난 손을 살짝 흔들었다. 방울이 딸랑―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이건 호출용 마도구였다.
어젯밤 콜린 백작을 만난 후에 난 바로 영지로 가서 가문 소유의 마도구를 빌려 왔다. 15분에 한 번씩 누르지 않으면 내가 정한 사람에게 비상시 보내기로 한 신호가 전해진다.
‘정신을 잃어도 이거면 안심이라고.’
이동한 경로까지 추적할 수 있으니까.
나는 그가 테이블에 내려놓은 약봉지를 잡았다. 와인에 전부 집어넣은 건 아니었는지 꽤 많이 남아 있었다. 새 잔에 와인을 따르고 가루약을 털어 넣었다. 그리고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더러운 펜으로 와인을 휘휘 저으면서 말했다.
“알베르.”
“예, 영애.”
“잡아요.”
콜린 백작을 가리키자 알베르는 함께 데려온 기사를 향해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그와 기사들이 백작의 사지를 붙들었다. 나는 와인 잔을 쥐고 그의 턱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렇게 이 약이 기분 좋으면 너나 많이 먹어.”
약을 푼 와인을 입안에 쏟아 버렸다.
“꺽, 꺼억, 컥!”
혀로 어떻게든 와인을 밀어내려 했으나 도미니크가 그의 목을 쥐고 억지로 식도 부근 근육을 움직이자 어쩔 수 없었다. 약이 섞인 와인이 속절없이 쿨렁, 쿨렁 그의 위장으로 들어갔다.
* * *
미친놈! 온몸을 비틀며 실금한 콜린 백작을 떠올린 나는 욕설을 뱉었다. 약은 생각보다 더 위험했다. 완전히 정신이 나가서 침을 질질 흘렸으니까.
알베르가 데려온 마법사 말로는 고대에 사용된 아주아주 위험한 물건이라고 했다. 백치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했는데 콜린이 딱 그 짝이었다.
‘그나저나.’
난 도미니크를 슬쩍 쳐다보았다.
“이제 그만 내려 주시면 안 될까요?”
“싫어.”
그는 내가 엄청나게 충격받았다고 생각했는지 좀처럼 내 발로 걷지도 못하게 했다. 지금 가는 곳이 아카데미가 아니어서 망정이지…….
“저보다 저하가 더 놀라신 것 같은데.”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신 포털을 없애 버리고 싶어.”
나는 도미니크의 얼굴을 잡고 픽 웃었다.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웃습니까.”
“다들 제 포털을 가지고 싶어 하는데, 저하는 싫다시니까요.”
“…….”
“그런데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한참 걸었는데도 온통 잡초가 무성한 숲뿐이었다.
“곧 도착합니다.”
그러니까 그게 어딘데. 이제 슬슬 무섭다고요.
도미니크는 그 후로 십 분쯤 더 가서 날 내려 주었다. 엄청나게 큰 아름드리나무 기둥에 이글루처럼 동그란 공간이 있었다.
“와―! 이런 걸 어떻게 찾으셨어요?”
“어릴 때 이 근방에 잠시 있었습니다.”
“아하, 소년병일 때?”
“네.”
나는 냉큼 기둥 안에 들어갔다. 좁은 곳은 어째서 이렇게 안심이 되는 걸까. 어릴 때는 이런 아지트를 꿈꿨었다. 어린 도미니크도 그랬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응?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이 부근엔 전투가 없었잖아요?”
“도망쳤었죠, 이곳으로.”
“저하가요? 여기는 프렌시프 령 근방인데…….”
황제도 프렌시프 령엔 쉽게 접근할 수 없다고 자랑하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러자 도미니크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서 그랬죠.”
“네?”
“여기서 날 찾긴 쉽지 않을 테니까.”
나는 벽에 딱 붙어 앉아서 옆자리를 두드렸다. 앉으라는 표정을 지으니 그가 픽 웃고 내 옆에 앉았다. 어깨와 어깨가 맞닿고, 서로의 숨결이 달콤하게 섞여들었다.
“더 해 주세요. 그래서? 도망쳐서 어떻게 됐어요?”
“열흘쯤 있다 돌아갔습니다.”
“혼자서요?”
“예.”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누군가 찾으러 오길 바랐구나.”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거야.”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는 걸 알지만, 그래서 더더욱 꼭꼭 숨고 싶었다. 그러면 내가 몰랐던 ‘날 찾아 줄 사람’이 나타날까 봐.
“전장에서 힘들었구나.”
“그렇진 않았습니다. 익숙한 일이라.”
“그럼 왜 도망친 거예요?”
“글쎄요. 계속 찾게 되더군요.”
그가 내 눈가를 가볍게 문질렀다.
“평소엔 겁먹은 고양이 같지만, 어느 땐 전장에서 굴러먹은 나보다 더 강인해서―”
“…….”
“매 순간 가슴 뛰게 만드는 사람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난 마른침을 꼴깍 삼킨 후 조그맣게 물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 오는 거예요?”
“쓸 만했습니까?”
그가 짓궂게 웃으며 묻기에 눈을 가늘게 뜨고 흘겨보았다.
“엄청이요.”
“하하.”
낮은 웃음소리를 들을 때면 가슴에 찰랑찰랑 꽃물이 드는 것 같다. 그가 발그레해진 내 볼을 다정하게 매만지면서 물었다.
“키스, 해도 됩니까?”
“……내 입으로 말하면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요.”
그가 내 목덜미를 가볍게 끌어당겼다. 입술과 입술이 뜨겁게 맞닿았다. 아주 오랫동안 엉겨들다 떨어진 후에 그는 손끝으로 내 입술을 살짝 문질렀다.
“키스는 아직 많이 배워야 할 것 같군요, 센 양.”
아카데미에서만 불리는 이름을 장난스럽게 말해서 난 그를 새침하게 올려다보았다.
“가르쳐 주세요, 교수님.”
도미니크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다정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흉포해진 것 같다고 느낀 건 착각일까.
“네가 시작한 거야.”
음, 아무래도 내 착각만은 아닌 것 같군.
깊이 닿을 적엔 언제나 정중하고 부드럽던 그가 이번엔 매우 달랐다. 달려들 듯 입을 맞추고 탐욕적으로 굴었다. 거칠고, 뜨겁고, 뱃속이 찌르르할 만큼 난폭한 입맞춤이었다. 그에게 스칠 때마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나는 나만 이렇게 떨리는 건가 싶어서 어쩐지 약이 올랐다. 그를 조금 깨물었다. 도미니크가 살짝 입술을 떼고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습득력이 빠른 학생이네.”
―하고.
‘난 몰라.’
연애, 엄청 재밌어.
* * *
아카데미에 돌아간 나는 잔뜩 혼날 생각에 어깨가 무거웠다.
‘오늘 수업을 깡그리 제쳤으니 이제 난……. 으아아.’
쟝뤼크 교수님한테 죽었다! 무서워서 연구실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문 앞에서 우왕좌왕하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교, 교수님.”
“문 앞에서 정신 사납게 뭐 하는 거야.”
나는 얼어붙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쟝뤼크 교수가 그런 날 흘끔 내려다봤다.
“2차 시험은 교내 테스트로 대체 된다더군.”
그건 아까 도미니크에게 들었다. 콜린이 날 납치할 틈을 만들려고 깽판을 친 덕에 일어난 일이었다.
“훈연법을 아나?”
“네? 아, 아니요.”
“훈제 베이컨은 시험에 빠지지 않아.”
“네?”
“가르쳐줄 테니까 들어와.”
쟝뤼크가 문을 열어 놓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게 다야?’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따라 들어갔다.
“안 혼내세요?”
“약은 먹었나.”
“약…… 안 먹었는데요.”
“놀랐을 것 아니냐.”
콜린의 일을 들었구나. 다른 교수나 학생들은 못 들은 것 같았는데, 왜지?
“언제까지 서 있게 할 거야.”
“가, 가요!”
나는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 그를 따라 들어갔다. 쟝뤼크는 내게 훈제 방법을 꼼꼼하게 알려 주었다. 시연까지 해 준 다음에 내게 해 보라고 했다.
“아무래도 코가 삐뚤어진 것 같군. 이게 어딜 봐서 베이컨이―!”
버럭 소리칠 거라고 생각해서 난 어깨와 목을 자라처럼 바짝 움츠렸다. 그런데 그는 크흠! 헛기침을 하더니 작게 말했다.
“다시 해.”
응? 저러다 목이 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매번 소리치던 그가 오늘은 어쩐지 좀 다정했다.
‘걱정해 주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아져서 헤헤 웃었다가 볼을 꾹 잡혔다.
“아바요, 고후임!”
오늘로 이틀째 훈제를 맹훈련 중이었다. 쟝뤼크 교수님이 제대로 하기 전까진 연구실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해서 개방된 훈연실로 가야만 했다. 그는 그때 딱 하루 친절하더니 다음 날부터는 완전히 도깨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