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사람이 바글바글하네.’
교수와 같이 온 그룹도 있었다. 쟝뤼크 말처럼 다들 테스트의 종목을 훈제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몇 시간째 연기 속에서 단백질이 서서히 응고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실 훈제가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닌데.’
다른 학생들도 교수가 몇 번 설명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쉽네요!”
그런데 우리 교수님은 아니래…….
그때 레아 교수의 그룹이 안으로 들어와서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자기 학생들에게 간략하게 설명했다.
“보통은 시간이 없으니 그릴을 이용해서 간단하게 굽지. 바비큐처…… 아소는 안 왔니?”
“수련은 혼자 하겠답니다.”
“그 녀석…….”
‘아소가 레아 교수님 그룹에 들어갔구나.’
쟝뤼크 교수는 나 말고 학생을 받아 주지 않아서, 2차 시험을 보려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레아 교수는 한숨을 푹 내쉬다가 나를 보았다.
“센.”
“안녕하세요, 교수님.”
“콜린 백작 일로 고생이 많았지?”
나는 그녀도 일을 아는 걸까 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중이라니 가당치도 않지. 우리가 웨이트리스도 아닌데 말이야. 아니, 웨이트리스도 술 시중을 들지 않아.”
아, 그 일 말이구나.
레아 교수와 교감은 콜린 백작이라면 학을 뗐다. 콜린 일은 그가 아카데미에서 마약을 하다가 양을 조절 못 해서 정신이 나간 것으로 처리되었다. 도미니크 말로는 가문 내에도 적이 많아서 보살펴 줄 사람이 없을 거라고 했다.
[객사할 겁니다.]
너무나 단정적인 말이길래 그가 객사시키려는 건가, 싶었다. 레아 교수는 내가 만든 베이컨을 보고 말했다.
“그건 네가 한 거니?”
“아, 네.”
“맛봐도 될까?”
난 베이컨을 접시에 담아서 내밀었다. 조금 잘라 맛본 레아 교수는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원래 훈연법을 익히고 있었니?”
“아니요, 그저께 쟝뤼크 교수님께서 방법을 알려 주셨어요.”
“괜찮은걸. 고급 레스토랑에 납품되는 베이컨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겠어.”
눈이 동그래진 내가 물었다.
“정말이요?”
“그럼. 쟝뤼크 교수가 말해 주지 않았어?”
“아니요…….”
“칭찬에 박하다니까.”
그녀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가 날 흘깃 쳐다보았다.
“지금이라도 내 제자가 되지 않을래?”
“됐소! 내가 잘 가르치고 있으니.”
어느새 쟝뤼크 교수가 들어와서 레아 교수를 노려보았다. 레아 교수는 입매를 우그러뜨리며 팔짱을 끼었다.
“내 제자가 될 수도 있었는데 비열하게 응시원을 돌려주지 않았다죠?”
“이 녀석이 먼저 찾은 건 나요!”
“처음엔 거절했다면서요.”
두 사람이 날 사이에 두고 싸워대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그렇게 언성을 높이는 중에 레아 교수 그룹 학생 중 한 명이 살짝 내게 손짓했다.
“센, 훈연재는 뭘 썼어?”
“매스킷이야.”
“음, 아카시아 나무의 일종이네. 생일상에 올리는 의미가 있겠다. 아카시아는 흉사를 막아 준다고 하니까.”
“생일상?”
“베이컨은 칠면조 구이와 함께 생일상의 주요리잖아.”
나는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우뚝 멈췄다. 생일?
‘헉! 맞아, 아빠의 생일이 이번 달이잖아!’
황도에서 마릴린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어떡하지!’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어! 난 울상을 짓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야, 지금이라도 준비하면 돼. 난 주변을 살짝 살피고 레아 그룹의 학생들에게 물었다.
“있잖아.”
“응, 말해.”
“너희는 아빠 생일에 어떤 선물을 드렸어?”
“작년엔 모자. 우리 아버진 탈모라 정수리가 텅텅 비었거든.”
우리 아빠는 머리카락 풍성하던데. 모자는 제외해야겠다.
“그러면 올해는?”
“올해? 올해는…… 일주일 내내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느라 돈이 없었어. 칠면조 구이로 끝냈지 뭐.”
“아……. 연인이 있구나.”
“연인은 무슨. 그냥, 음, 친구 이상 애인 미만이지.”
이 애도 나처럼 썸을 타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 그런데 그렇게 많이 만나도 되나.’
“그런 사이는 원래 석 달에 한 번쯤 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자 훈연실에 있던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 질문을 받아 주던 여자애가 깔깔 웃으며 날 끌어안았다.
“오구오구, 그걸 아직도 믿고 있었어요~”
나는 애들이 왜 웃나 싶어서 어리둥절했다. 그러자 여자애가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애기네, 애기야.”
“왜?”
“석 달에 한 번 만나고, 가족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내야 하고, 뭐, 이런 건 어릴 때 아버지들이 딸 뺏기기 싫어서 하는 거짓말이잖아.”
다른 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는 요정이 데려다준다, 같은 거지.”
뭐라고! 나는 화르륵 달아올라서 굳어졌다. 훈연실은 학생들이 웃는 소리와 레아, 쟝뤼크 교수가 꽥꽥대며 싸우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기숙사 방으로 돌아오자 통신석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세니아나.]
“네.”
[잘 있었어?]
란슬롯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자 옆에서 가웨인이 끼어들었다.
[내일 주말인데.]
오라는 뜻인 것 같았다. 나는 오후 수업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며 퉁명스레 말했다.
“안 가요.”
[왜!]
[어째서?]
“데이트할 거라서요.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사람과.”
가웨인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데? 그리고 말했잖아. 가족과 더 많이 시간을 보내야……!]
“거짓말쟁이.”
나는 흥, 하며 통신석을 종료했다. 꺼지기가 무섭게 다시 깜빡거렸지만, 난 베개 밑에 쑥 밀어 넣어버렸다.
‘진짜 창피했다고.’
이제 애들 얼굴을 어떻게 보냔 말이야.
‘오후 수업이 세 시니까, 음, 두 시간 정도 남았네.’
쟝뤼크 교수가 표시해 준 것들을 외우면서 밥을 먹으면 되겠다. 일단 노트와 새 에이프런을 쟝뤼크의 연구실에 놓고, 서랍에 잘 넣어둔 노트를 꺼냈다. 그러고 복도를 걷다가 도미니크를 보았다.
옆에 지나가는 학생들이 있어서 우리는 시선을 교환했다. 내가 가던 길을 되돌아가서 창고에 들어가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도미니크가 들어왔다.
“저하!”
그가 팔을 펼쳐서,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폭 안겼다. 내 행동에 그는 살짝 의아한 얼굴이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순순히?”
항상 머뭇거리다가 포기했었잖아? 하는 표정이라 난 손을 꼬물거렸다.
“부패, 비리, 이런 거 좋아하신다면서요. 그래서 뇌물…….”
“원하는 게 뭡니까?”
“이번 달 말 즈음에 나흘 정도 외박계를 써 주시면 안 될까요? 아빠 생일이라.”
“나흘씩이나.”
‘아, 안 되나?’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자 그가 씩 웃었다.
“포옹으론 수지가 안 맞는데.”
“네?”
그러고 쪽― 입 맞췄다.
“이걸로 나흘.”
“네…….”
난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 말했다.
“아, 참! 왜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썸 탈 때는 석 달에 한 번만 만나야 한다는 거 거짓말이잖아요.”
“제가 비밀을 지켰다는 게 언젠가는 후작의 귀에 들어갈 테니까요.”
“……?”
“그래야 점수가 쌓이지 않겠습니까. 생전 처음으로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거든요.”
“아빠가 무섭긴 하죠.”
처음엔 나도 질겁했다니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그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래서 말인데요.”
“주말에 시간 있으십니까?”
그가 먼저 데이트를 청해 왔다! 나는 냉큼 네, 라고 하려다가 그에게서 살짝 떨어졌다.
“없긴 한데, 한 번 만들어 볼게요.”
―라고 하랬다. 애들이. 내가 이제 어리숙해 보이지 않으려고 공부를 해 왔다고. 도미니크는 쿡쿡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광입니다.”
“오후에 저 혼내러 오세요. 교장실로 가서 우리 어디 갈지 정해요.”
“그러죠.”
우리는 그렇게 몇 마디 더 나누다가 엄청 아쉽게 헤어졌다. 그가 먼저 나가고 나는 한 십 분쯤 지난 후에 창고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다 지나가던 사람과 눈이 마주쳐서 흠칫, 놀랐다. 다행히 알베르였다.
“……또 창고에 가신 겁니까.”
도미니크와 내가 만날 때면 항상 창고에 있다는 걸 알아서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민망한 표정을 짓고, 창고를 살짝 빠져나왔다.
“비밀로 해 주세요.”
“꼭 비밀이어야겠죠.”
그가 날 빤히 응시했다. 손에 들린 서류를 검지로 툭, 툭 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저하의 수급이 성문에 걸리길 바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예요.”
“영애께서 저하를 선택한다면 그렇게 될 겁니다.”
“…….”
“권좌를 욕망하는 자에겐 포기하기 힘든 보석이지 않습니까, 영애는.”
그가 혼잣말하듯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차라리…… 쪽이 더 안전할 만큼…….”
―하고. 잠깐 가라앉은 시선으로 창밖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에스칼로테 나무는 겨울에 열매를 맺습니다. 겨울이 지나면 가지가 앙상해져서 도태당하죠. 그래서 날이 온화해지면 나무꾼에게 잘려 목재로 쓰입니다.”
“…….”
“저하가 그렇습니다.”
그는 허리를 깊게 숙이고서 내게 말했다.
“용서하십시오. 두 분의 감정을 응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아니었더라도 저하의 계절은 언젠가 온화해지지 않았을까요?”
알베르가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좋은 부관이 있으니까.”
“…….”
“염려 고마워요. 저도 저하의 기둥이 잘려 나가지 않길 바라요.”
빙그레 미소 짓자, 그는 허탈한 표정이었다.
“마음 단단히 먹고 드린 말씀인데, 영애껜 필요 없었나 보군요.”
“아닌데.”
“아니라고요?”
나는 주변을 둘러본 후에 속닥속닥 말했다.
“정치적인 일만 아니었더라면 제가 저하를 냉큼 받아 올 줄 알았거든요. 간섭할 사람이 없어서.”
황제는 그렇게까지 아들 바보는 아닌 것 같았고.
알베르는 무슨 말이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나는 씩 웃고, 그의 정강이를 살짝 찼다.
“그런데 여기 있었네.”
“……이렇게 때리면 하나도 안 아픕니다.”
“저하를 염려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기분 좋아서 힘은 좀 빼 봤어요.”
“…….”
“하지만 다음엔 이런 간섭 안 받을 거예요.”
‘나쁜 의미의 판타지 시월드를 내가 얼마나 많이 본 줄 알아?’
물론 드라마와 인터넷으로 보고 들은 게 있어서 나도 상 뒤집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두 번째엔 확!”
“……확?”
“저하한테 일러 버릴 거예요.”
그러자 부관이 헉, 숨을 들이켰다.
그 후에 난 점심을 먹기 위해 기숙사로 향했다. 그러는 중에 벤치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아소다.’
아카데미에서 아무도 모를 적에 가장 먼저 친절하게 대해 준 상대였다. 난 활짝 웃고,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응?’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자 생기 없는 눈이 나를 향했다.
“괜찮아?”
“안 괜찮으면.”
“어?”
“됐으니까 꺼져.”
이렇게까지 날 선 반응이 나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얼굴을 굳히고 그를 쳐다봤다. 내가 쟝뤼크 교수의 지도를 받게 된 일 때문에 기분이 상한 걸까.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닌 것 같은데…….’
오늘의 그는 정말로 이상했다. 루어에 걸린 물고기처럼 버둥거리는 것 같은 그런 느낌.
“몸이 안 좋아 보여서 묻는 거야.”
방학 전보다 야위기까지 했다. 아소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네겐 반가운 일이 아닌가.”
“그게 왜 나한테 반가운 일이야?”
“그럼 뭔데.”
“걱정되는 일이지!”
나는 눈을 찌푸리고 아소를 쳐다봤다. 그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순진한 얼굴로 사람 흔들어 놓지 마.”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그는 머리가 지끈지끈한 듯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의사에게 가자, 응?”
“네가 알 바 아니잖아.”
“알 바야!”
“……네가 왜.”
“학우니까 그렇지.”
네가 날 이것저것 도와주기도 했고.
“…….”
“아소.”
“아니야.”
“어?”
“내 이름은 그게 아니라고.”
갑작스러운 말에 난 눈을 깜빡였다. 특이한 이름이라서 가명이겠거니, 생각하긴 했었다. 내가 가명을 썼듯 그도 사정이 있어서 이름을 숨기고 있는 거라고 여긴 것이다. 그의 시선 안엔 오롯이 나만 담겼다. 고운 선의 눈매 안,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 속에 내가 비추었다.
“조슈아.”
“……어?”
“내 이름은 조슈아야.”
아주아주 낮고, 심연처럼 깊은 목소리였다. 나는 그의 시선도, 교칙을 어기는 그도 당황스러웠다. 잠깐 머뭇거리던 난 그를 힐끔 쳐다봤다. 진명을 밝혔는데 나는 아닌 척 계속 가명을 되도 되는 걸까. 양심이 콕콕 찔렸다.
“나는…… 나도 사실은 이름이 다른데…….”
“세니아나.”
“…….”
“세니아나 프렌시프.”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졌다. 이 아카데미에서 도미니크 외에 다른 사람에게 내 진짜 이름을 들을 거라곤 생각한 적 없었다.
어떻게. 그가 어떻게.
떨리는 내 눈을 본 그는 표정 없이 말했다.
“그리고 내 성은 사비에르지.”
“……!”
불현듯 떠올랐다. 별궁에서 들었던 사비에르의 이야기.
“쫓겨나듯 떠났다는 사비에르의 장남이 너야?”
“비슷한 처지였지, 너와.”
“…….”
그때 나와 점심을 함께 먹는 애들이 달려왔다.
“센, 2차 시험 공지 들었어?”
“공지가 내려왔어?”
모두 잔뜩 흥분해 있었다. 남자애들을 환호성을 내질렀고, 여자애들도 기대감에 들떴다.
“2차 시험 심사자가 에이레네 사비에르래!”
“사비에르의 성녀 말이야!”
뭐라고? 난 아소, 아니, 조슈아를 쳐다봤다.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인지 그는 침착했다.
“지금 마차 들어오고 있다니까 구경하러 가자!”
학생들이 소리치며 먼저 달려가기 시작했다. 조슈아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학우니까 조언 하나 하지.”
“…….”
“조심해라.”
“무엇을?”
“뭐든.”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네가 교장과 관계가 있다면 더더욱 조심해야 할 거다.”
난 눈을 가름하게 뜨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귓전에 “크릉…….” 하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펜던트를 잡으니 포털의 마원에 희미한 열기가 감돌았다.
아카데미에 도착한 에이레네를 향해 학생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녀는 기대와 설렘으로 어쩔 줄 모르는 학생들에게 생긋 웃으며 눈인사했다. 과연 길라게온의 수선화라 불리는 자태였다.
“황도 제일의 미인이라더니……!”
누군가 소리치자 동조하는 말이 쏟아졌다. 에이레네는 교수들의 안내를 받으며 교장실로 향했다. 문 안에 들어가기 전 그녀가 교수들을 쳐다보았다.
“황자님과 단둘이 할 얘기가 있습니다.”
교수들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고 흩어졌다. 에이레네가 문 앞을 지키고선 도미니크의 부관 알베르를 바라봤다. 알베르가 두어 번 노크한 뒤 문을 열어 주었다. 에이레네는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볍게 걸었다. 책상에 자리하고 있는 도미니크를 본 순간 그녀의 눈이 유하게 휘어졌다.
“황궁에서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아 놀라셨겠어요.”
2차 시험 심사자로 예정된 사람은 그녀가 아니었다. 그가 황궁에서 이야기를 전달받은 건 고작 십여 분 전이었다.
“안다니 놀랍군요.”
조롱 같은 말에 에이레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소파에 가볍게 앉으며 도미니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서늘했다.
“무엇을 노리는 겁니까.”
“아시잖아요. 제가 바란 것은 늘 하나였죠.”
“…….”
“저하 한 사람.”
군사들에게 포털을 열어 주기 위해 전장에 갔을 때 그를 보았다. 흑마 위에서 보란 듯이 화려한 투구를 쓰고 있었다. 지휘관은 나이니 노릴 테면 노려보라는 듯.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죽고 싶어 하는 미치광이인 건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 떠오른다.
“그 전쟁에서 저를 구해 주셨잖아요.”
포털이 열리지 않아 적군에게 고스란히 노출된 저를 홀로 구하러 왔었다.
“포털이 필요한 전쟁이었으니까.”
“저는 저하의 진심을 알아요. 저하께서도 제 진심을 아시고 계시지요.”
도미니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전쟁 이후로 몇 달가량 광기 같은 집착을 보였다. 프렌시프에 포털을 찾으러 가게 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황후가 에이레네 사비에르의 마음을 조금씩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그 시선은 내 아들에게 오롯이 향해야지. 그렇지 않은가?]
프렌시프에 다녀온 후, 바로 황후와 사비에르 사이에 균열이 생긴 덕분에 다시 경계하진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에이레네의 마음은 그에게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분명히 거절한 것으로 아는데.”
“잔인하신 분. 제가 이 모습으로 다시 저하의 앞에 서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모르실 테지요.”
“가진 자리에 만족하시죠. 원해서 오른 자리가 아닙니까.”
“저하…….”
“돌아가십시오. 가능하면 내 아카데미에서 아주.”
에이레네는 입술을 깨물고 눈물이 어린 눈 안에 탐하듯 그를 담았다.
“우리 도망쳐요.”
“……하.”
도미니크는 제가 나서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배웅은 않겠습니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황급히 뛰어온 그녀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제발, 저하…….”
포털을 여는 한 반점의 확산을 막을 수 없을 거다. 이제 와 무엇을 욕망하겠는가.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그가 간절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랬어야 했던 거다.
* * *
사비에르 영애가 왔다는 말에 난 얼른 교장실을 찾아갔다. 교정을 뛰면서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이상했다. 콜린 백작 일이 있고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 로열 키친은 심사자를 잘못 선발했으니, 이번엔 도미니크에게 선택권을 넘겨야 마땅하다. 문 앞에 도착해서 알베르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표정이 이상했다.
“여, 영애.”
“무슨 일이에요?”
그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때, 문이 열리고 물기 어린 눈의 여성이 걸어 나왔다.
‘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펜던트에서 멀린의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으니까.
저 사람이 에이레네 사비에르다. 조슈아와 쌍둥이라는 걸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조슈아는 타오르듯 새빨간 적발을 가진 반면에, 에이레네는 백색에 가까운 아름다운 은발을 가지고 있었다. 눈동자의 색마저 달랐다. 조슈아는 청안, 에이레네는…….
‘뭐지?’
푸른 기가 돌긴 하지만, 저 색은 분명 잿빛이었다. 도미니크와 똑같은. 그녀는 나붓이 눈을 휘며 나를 바라봤다.
“프렌시프 양이로군요. 여기선 센 양, 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뒷조사를 하셨나요.”
“제 아버님의 무례에 대신 사과드리지요.”
그렇게 말한 에이레네는 문 안을 바라보았다.
“함께 식사는 해 주시리라 믿고 있겠습니다.”
도미니크가 대답하기도 전에 고개를 숙이고 가 버렸다. 나는 문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 본 도미니크의 얼굴이 굳어졌다.
‘기분이 이상해.’
도미니크를 쳐다보던 눈, 나를 보던 표정. 뭔가 께름칙했다.
‘식사는 뭐야?’
매우 의뭉스러운 말투였다. 마치 내가 들으라는 듯이.
윤세나였을 적엔 15년이 넘도록 타인과 마찰하며 살았다. 인간관계엔 몹시 약해도, 적의를 보는 눈만큼은 자부할 만큼 밝았다. 그를 보는 시선의 위치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셔츠의 복부 부분이 우그러져 있었다. 누군가 끌어안은 것처럼.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예?”
“지금 오해할 타이밍 맞지요?”
소설이나 드라마에선 그러더라.
오해 후 자리 회피―오해가 깊어짐―흔들림―이별의 갈등
대충 이런 순서던데. 그런데 실제로 겪어 보니 첫 번째부터 무리였다. 회피하며 도망가기는커녕 지금 뭐 하고 있던 거냐고 목을 짤짤 흔들고 싶어졌다. 이건 내 별명이 ‘싸움만 안 걸면 순둥이’였기 때문일까. 싸움 모드가 될 것 같단 말이지.
“영애, 그게 아닙―”
“일단 들어갈까요.”
그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얘기할래?’라는 표정으로. 나는 도미니크를 끌고 가서 책상 의자에 앉히고 커튼을 쳤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그를 쳐다보았다.
“사비에르 영애가 왜 찾아왔죠?”
“2차 시험의 심사자로 왔죠.”
“명분 말고 진짜 이유요.”
도미니크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긴 눈이 한숨을 삼키듯 한 번 감겼다.
“제가 그녀를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곧장 대답할 줄은 몰라서 난 눈이 동그래졌다.
“……사비에르 영애가 저하를 좋아하나요? 좋아한다고 한 거예요?”
“예.”
“저와 만나는 중에 그녀를 홀렸어요?”
“홀렸…… 아닙니다.”
그는 드물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럼 언제 만났는데?”
“글쎄요, 신경 쓰고 있지 않아서 잊어버렸습니다.”
내 손을 쥔 그가 손바닥을 입술로 지그시 눌렀다.
“내 마음은 이미 주인이 있어서.”
“…….”
가늘게 한숨을 흘렸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함께 있으면서 확실히 자각하게 되었다. 연인이길 바란다고 말하지 않는 건, 그도 나도 서로를 너무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 도미니크가 납득이 안 되는 거짓말을 한다면 즉시 만남을 종료할 생각이었다.
난 행복해질 의무가 있었다. 내 행복을 비는 할아버지와 아빠, 오빠들. 그리고 내게 모든 시간을 바친 선생님을 위해. 그가 거짓말을 한다면 나는 더 이상 그를 믿지 못할 거다. 신뢰 없는 만남은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불행할 테니까.
나는 그를 새초롬하게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좀 덜 근사했으면 좋았잖아요.”
이래서 미남 기피증이 생기는 건가 봐. 내가 탓하듯이 얘기하니까 그가 허리를 끌어당겼다. 난 그의 어깨를 잡고 놓으라며 웅얼거렸다.
“조금만.”
“…….”
그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입 맞춰 달라는 듯이. 난 해 줄까 하다가 그의 셔츠에 잡힌 주름을 보았다.
“이거, 뒤에서 끌어안은 거죠?”
“…….”
그리고 그의 손을 떼어 내고 흥, 고개를 돌린 뒤 책상을 벗어났다.
에이레네 사비에르가 이르게 도착한 바람에 테스트가 당겨졌다. 당장 내일이라 훈연실은 만원이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쟝뤼크가 어흠, 커흠, 헛기침을 하고 주변을 맴돌았다.
“……레아 교수의 방으로 갈 건가?”
저번에 훈연실에서 레아 교수가 한 말을 들은 모양이다. 혹시 자리가 없다면 그녀의 연구실로 와도 좋다고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허공을 보며 말했다.
“뭐, 거기까지 갈 필요가 있나. 내 연구실도 있는데.”
“베이컨을 제대로 못 만들면 오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
그때 등 뒤에서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교수들과 에이레네가 함께 있었다. 에이레네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 숙소에서 하는 건 어떤가요? 아카데미 내부에 있어서 그런지 조리 기구가 많던데요.”
“…….”
“거절하지 말아 줘요. 나 때문에 테스트가 빨라져서 곤란해하는 거잖아요.”
그러더니 주변에서 대기 중인 학생들을 보고 상냥하게 말했다.
“물론 여러분들도.”
학생들이며 교수들이 모두 그녀의 자애로움에 감탄했다. 학생들이 뛸 듯이 기뻐했고, 교수들도 흐뭇한 표정으로 에이레네를 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내 옆, 쟝뤼크에게 향했다.
“이런 곳에서 뵙네요.”
그러자 교수들이 물었다.
“자네 성녀님을 아는가?”
에이레네는 고개를 나긋이 끄덕였다.
“여기서는 본명을 쓰시나 보네요.”
쟝뤼크는 굳은 얼굴로 그녀 주변의 교수들을 쳐다봤다.
“심사자는 학사 내 출입을 제한하잖소.”
학사 내에선 교수들 및 학생들의 레시피를 보관하는데, 심사자로 왔던 자가 훔쳐 낸 일이 있었다. 아카데미에 심사하러 오는 사람들은 대형 레스토랑을 운영하거나, 본인이 요리사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 일로 심사자들은 시식을 할 때, 혹은 학교장과 대화할 일이 있을 때나 학사 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한 교수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성녀님이 설마 레시피를 훔치시겠습니까.”
그러자 에이레네를 데리고 들어온 교수들이 맞장구를 쳤다.
“준비 과정도 심사의 일환으로 생각하시겠다 하셨지요.”
“예, 역시 생각이 깊으시지요.”
에이레네는 생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럼 다 함께 이동하지요.”
그러고 보란 듯이 포털을 열어서 우리를 이동시켰다.
순식간에 우리는 에이레네가 머무는 숙소에 도착했다.
‘귀빈이 머물기엔 허름한데.’
왜 조리 기구가 있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학사를 개축하기 이전에 조리실로 쓰인 곳인 듯했다. 마당 맞은편으로 거대한 건물이 보인다.
‘저긴…….’
내 시선의 방향을 눈치챈 에이레네가 말했다.
“저하께서 머무시는 곳이지요. 아는 분과 가까이 있으면 마음이 편할 듯하여 일부러 부탁드렸답니다.”
그리곤 교수들 사이에 끼어 있던 중년의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행트 기올 행정 처장님.”
행정 처장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제,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신 겁니까?!”
“그럼요. 일 처리가 참 빠르다고 느끼고 있었어요.”
“이, 이런 영광스러운 일이……!”
행정 처장은 얼굴이 무릎에 닿을 것처럼 허리를 굽혔다. 에이레네는 조리실을 내준 뒤 나를 불렀다.
“환복을 도와줄 수 있을까요?”
여기 있는 여자라곤 나뿐이라 미안하다고 하면서.
“영광이겠구나!”
교수들이 얼른 내 등을 밀며 껄껄 웃었다. 난 그녀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급하게 방으로 개조했는지 외관보다 더 낡아 보였다. 에이레네는 의자에 앉으며 맞은 편을 가리켰다.
“앉으세요.”
“환복을 도와 달라고 하지 않았나요?”
“핑계였답니다.”
테이블엔 차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그녀는 찻잔을 들었다. 그러느라 드러난 손목 아래로 검은 반점이 얼핏 보였다.
“말이란 게 참 재미있죠. 시중을 들라고 하면 반감을 사지만, 도와달라고 하면 그쯤이야, 싶거든요.”
콜린 백작과 자신을 비교한 말이었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그녀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생각보다 더 사랑스러운 분이라 놀랐어요.”
“…….”
“궁금했거든요. 조심성 많은 저하가 남들 보는 앞에서 이마에 입 맞췄다고 들어서.”
“요지가 뭐지요?”
“제가 먼저였어요.”
에이레네 사비에르는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염려가 되네요.”
“…….”
“저하의 눈빛이 묘해서요.”
“묘하다고요?”
“본래 힘을 욕심내시는 분이 아닌데, 황궁 생활이 많이 고되었던 모양이에요.”
도미니크가 날 보는 시선은 애정이나 설렘이 아닌 권좌에 대한 욕망이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만약 프렌시프 양이 그 시선에 흔들렸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리지요.”
“…….”
“그분을 이해하세요. 외롭고, 힘든 시간을 오래 보낸 분이시랍니다.”
에이레네는 나를 다독이듯 말했다. 내 우위에 서서 어차피 그는 자신의 손을 잡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찻잔에 크림을 넣으며 말했다.
“흠, 미카엘 황자님께서 저를 그런 눈으로 보셨나요.”
“영애, 제가 말씀드리는 저하는―”
“미카엘 황자님이셔야지요.”
너, 4황자의 혼약자잖아. 그런 눈으로 보니 그제야 눈빛이 흔들렸다.
“만인이 행복하길 바랐으니까요. 아버지의 바람을 들어드리고 싶었고, 저는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생각했어요.”
에이레네는 내 손을 잡았다.
“영애가 날 도와주세요.”
나는 도미니크와의 관계를 다른 사람에게 밝힐 수 없다. 그가 권력 싸움에 엮이게 될까 봐서. 하지만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우리의 일에 말려들 가족들이 염려된다. 하지만―
“그건 안 되겠어요.”
“……네?”
“저도 저하가 좋거든요.”
내 마음이 약점이 되어 누군가에게 ‘도미니크에게 다가갈 수단’이 되는 건 싫다. 에이레네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그녀는 차갑게 손을 뗐다.
“이런, 얼마간의 지혜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에이레네가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다시 목격하게 되었다.
‘뭐지.’
손목 아래의 점이 더 커진 것처럼 보인다. 마치 먹이에 몰려든 벌레 떼처럼. 내 시선을 느낀 에이레네가 소매를 끌어내리면서 말했다.
“아시나요?”
“네?”
“프렌시프 가의 차남이 황도에 있느라 못다 한 하계 훈련에 나섰다고 하더라고요.”
순간 불길한 기운이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나는 굳은 얼굴로 에이레네를 보았고, 그녀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영지 내 훈련이 아니라 꽤 먼 곳까지 가신 듯했어요.”
“무슨 뜻이죠?”
“가령 이런 거예요.”
에이레네가 쿠키가 든 티 푸드 그릇을 중앙으로 옮겨 왔다.
“훈련을 간 곳에―”
그리고 찻잔을 들어 쿠키에 부어 버렸다.
“알 수 없는 포털이 열려서 홍수를 만난다면.”
“……!”
병정 모양의 쿠키가 젖으며 엉망으로 녹아들었다.
“쿠키는 젖어도 먹을 수 있지만, 사람은 물에 빠지면 죽겠죠?”
난 에이레네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왜냐면 그녀는 나와 도미니크의 관계를 모르고 있었으니까. 만약 우리가 목적지로 함께 걷는 관계라는 걸 안다고 해도, 우린 확실한 연인이 아니기에 그녀가 끼어들 여지는 있는 거다.
오늘의 대화는 그를 너무나 사랑해서 뭐라도 해 보려는 간절함으로 여기려 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우리 오빠, 지금 어디 있어.”
“글쎄요. 프렌시프에서 더 잘 알지 않을까요?”
난 당장 통신석으로 프렌시프에 연결했다. 그런데 통신을 받는 건 할아버지도, 란슬롯도, 지금 찾는 가웨인도 아닌 집사장이었다.
[아가씨.]
“가웨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
[그걸 아가씨께서 어떻게……!]
에이레네는 입꼬리가 살풋 올라갔다. 그리고 내 통신석을 조작해 통신을 종료시켰다.
“프렌시프 양은 미카엘 황자님을 사랑하시지요?”
“…….”
“그래서 오늘 밤 황제 폐하께 미카엘 황자님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씀드리는 걸 테고요.”
“…….”
“황후 폐하와 카렌듈라 후작(황후의 부친) 앞에서 입 맞추신다니 정말 낭만적이에요.”
“…….”
“도미니크 저하께는 그리 매정하게 대하진 마세요. 적당히, 헛된 의심이 없도록 처신하셔야겠죠?”
그렇게 말하며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저는 괜찮아요. 약혼자를 빼앗겼지만, 황후 폐하께서 제게 미안한 마음이 크실 테니 다시 황족으로 함께할 기회를 주실 테니까요.”
그녀의 말을 모두 따라야 가웨인을 돌려보내 주겠다는 말이었다. 포털이 있어도 정확한 위치를 모르면 이동할 수 없다. 포털 마원을 처음 찾았을 때 외엔 늘 똑같았다. 에이레네가 내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오늘 일정이 복잡하실 텐데, 가 보시지요.”
나는 도미니크를 좋아한다. 물론 가웨인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도미니크는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가웨인은 가족으로서 마음 깊이 좋아하는 거니까.
에이레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그녀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내가 오늘 그녀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가웨인은 죽는다.
에이에네의 숙소를 나온 나는 서둘러 교정을 걸었다. 어서 기숙사로 돌아가 자초지종을 들을 생각이었다. 걷는 내내 선생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전체를 먼저 보렴. 네 시야 밖에 있는 것이 분명 있을 테니까.]
납품업자들과의 거래에 실패하고 우울해하는 내게 해 주신 말씀이었다. 생각하자. 선택지는 두 가지가 아닐지도 몰라.
‘우리 군의 이동 경로를 알아야 해.’
에이레네의 포털로 이동하면서 느꼈다. 그녀의 포털은 왜인지 불안했다.
‘장거리로 열지는 못했을 거야. 그 근방을 수색하면…….’
그러나 자꾸만 불안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녀가 내게 허락한 시간은 반나절뿐이다. 그동안 수색을 완료할 수 있을까? 이 도박에 걸린 건 가웨인의 목숨인데. 그때―
“센.”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등을 돌린 나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아소.”
조슈아가 보고 있었다.
“에이레네를 만나고 가는 길인가.”
“그래.”
“그 애는 지금 복용 중인 진통제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너와 마찰이 있었다면…… 그 애의 본심이 아닐 거다.”
“뭐?”
“원래 그 애는 사려 깊고 다정해.”
그 사려 깊고 다정한 아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너는 알까. 난 얼굴을 왈칵 구기고 짓씹듯이 말했다.
“넌 틀렸어.”
“뭐?”
“에이레네 사비에르는 나쁜 계집애야.”
“……너.”
“그게 본심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진통제를 복용 중이라 제정신이 아니었다더라도 마찬가지야.”
“…….”
“에이레네 사비에르는 이미 그 일을 저질렀고, 나는 그 애가 본심도 아니고 제정신도 아니라 저지른 일에 목숨보다 소중한 게 위협당했어.”
검 끝이 가족들에게 향하는 건 내 목에 칼날이 들어오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웨인이 주말에 집에 오라고 했었다. 내가 보고 싶어서. 나는 토라졌었기 때문에 ‘거짓말쟁이!’ 하고 소리친 후 통신도 받아 주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한 마지막 말이 원망이었던 거다. 주말에 영지에 갔더라면. 사소한 것에 토라지지 않았더라면.
‘그럼 가웨인은 지금 성에 있을 텐데.’
나 때문에 에이레네로부터 위협당하고 있지도 않았을 테지. 짙은 자괴감과 후회, 불안이 목을 조였다. 나는 조슈아를 매섭게 노려봤다.
“너한테 분명히 얘기하지.”
“…….”
“나는 이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한 난 바로 등을 돌렸다.
* * *
“흐…….”
숨을 헐떡이던 에이레네는 급히 약병을 찾았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검은 물을 삼켰다. 그제야 손목 안의 반점이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
“욱……!”
비위가 상한다. 구역질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검게 일렁이는 오물 같은 이 약은 삿된 자들의 일부였다.
‘도미니크를 봐야 해.’
오직 그의 앞에서만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힘을 억누를 수 있었다. 자신에겐 이제 그것 외엔 방법이 없다. 쌍월이 뜨던 밤, 가호를 빼앗긴 일로 점점 힘이 약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든 힘을 끌어내려면 삿된 기운을 필요로 하고, 삿된 기운은 자신을 점점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로 변이시키고 있었다.
에이레네는 손수건을 움켜쥐고, 세니아나가 앉아 있던 자리를 노려보았다.
‘왜 하필.’
도미니크가 입 맞췄다던 사람이 세니아나 프렌시프만 아니었더라면 이토록 조급하진 않았을 거다.
‘조율자는 내 것이야.’
힘은 네가 가지고 태어났지만, 조율자만은, 도미니크만은 제 것이다. 내일이면 일이 무사히 끝날 것이다. 황후에게 세니아나는 흡족한 며느리이니, 제가 떠나겠다고 해도 붙잡지 않을 터였다. 아니, 오히려 먼저 떠나라고 제안할 수도 있다. 사비에르와 프렌시프의 관계를 생각해서.
‘이제 곧.’
그렇게 생각하며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도미니크 황자와 그의 부관이 맞은 편에 있는 건물 쪽으로 걷고 있었다. 에이레네가 얼른 방을 나서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저하.”
도미니크는 서늘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 건가, 라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애달픈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온 마음을 내준 상대가 있기에 제게는 시선 한 줄기 내어 주실 수 없다셨지요.”
“그런데.”
“기다리겠습니다, 다음 차례를.”
그리고 마음을 내줄 상대가 사라졌을 때, 자신을 봐 주면 된다. 도미니크가 기어이 미간을 좁혔다.
“다음 차례는 없습니다.”
그러곤 그녀를 지나쳐 걸었다. 에이레네는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가 한숨을 삼켰다.
‘저하, 확신하지 마세요.’
매몰차게 버려졌을 때 잡을 손이 필요하실 테니까요.
에이레네는 굳어진 표정을 수습하고,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갔다. 방 안에 가만히 앉아서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더디게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달이 가까워진 것만 같은 만월의 밤. 에이레네는 함께 온 시중인을 호출했다. 가서 세니아나가 기숙사에 있는지 알아보라 명하자, 그는 허리를 굽힌 후 떠났다. 삼십 분 후쯤, 돌아온 하인이 소식을 가져왔다.
“기숙사 방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드디어 황궁으로 간 것인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데 하인이 낮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향신료 밭에 있는 듯했습니다.”
“아직 교내에 있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에이레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혈육보다 남자를 택하겠단 말인가. 어리석은 계집애.
“향신료 밭으로 안내해요.”
“하지만 아가씨, 오늘 밤은 조슈아 도련님과 일정이 있으십니다만…….”
“조슈아는 이해할 거예요.”
그와 자신은 쌍둥이였다. 함께 태어나 그가 떠날 때까지 매일을 함께 했다. 부친인 사비에르 후작을 끔찍하게 혐오하는 그가 가문의 이름까지 버리지 못한 건, 오직 에이레네를 위해서였다.
그녀를 다정하고, 상냥하고, 벌레 한 마리 어찌하지 못하는, 지켜 줘야 할 사람으로 여겼으니까. 그런 그가 이런 사소한 일을 이해하지 못할 리 없다.
에이레네는 다시 시종에게 안내를 명했다. 향신료 밭에 이르자 그녀의 팔찌에 달린 포털 마원이 가늘게 진동했다. 에이레네가 인상을 쓰며 팔을 잡던 그때, 나무 그늘 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이제 왔군.”
세니아나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만월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비껴가고 새하얀 달빛이 주변을 어슴푸레 비추었다. 에이레네는 하인에게 눈짓하여 그를 떠나보내고, 세니아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폐하께서 침소에 드시기 전에 황궁으로 가셔야 할 텐데요.”
“굳이 그래야 할까요.”
“오늘의 이야기는 농담이 아니었답니다. 허투루 넘기시면 아름다운 눈이 슬픔으로 젖어 들 거예요.”
상냥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가웨인의 명줄을 들고 흔들었다. 세니아나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사실 오후까지는 황궁으로 가야 할까 생각했지요.”
“오후의 영애는 현명하셨군요.”
“그런데 누군가를 만나고 생각이 달라졌어요.”
에이레네가 미간을 좁혔다.
“무슨 말씀이신지.”
“혹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 아세요?”
“무슨―”
그때, 세니아나가 날카롭게 읊조렸다.
“끌고 와.”
나무 밑에서 나온 건, 프렌시프의 문양이 새겨진 관복을 입은 기사들이었다. 아카데미에 기사를 끌어들였다고?
‘급했군.’
하지만 제겐 포털이 있다. 도망치려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다. 오만하게 미소지으려던 그녀가 우뚝 굳어졌다. 포박당한 채 기사들의 손에 끌려 나온 사람을 보고.
“……!”
한 기사가 포박당한 사람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었다. 에이레네는 다급히 세니아나를 노려봤다.
“당신……!”
세니아나가 손을 들자 검 끝이 금세라도 포박당한 자의 목을 파고들 것처럼 가까워졌다. 새하얗게 질린 에이레네는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조슈아!”
세니아나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나만 오빠가 있는 건 아니잖아?”
―라고 말하며. 에이레네는 완전히 표정이 무너져 있었다. 한참 숨을 고르다가 치맛자락을 꽉 말아 쥐곤 날 노려보았다.
“당신……!”
“오빠의 장례를 치러야 한다면,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
“그러니까 말해. 가웨인, 지금 어디 있어!”
마디가 새빨개진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갈등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 눈에 선하다. 에이레네는 굳은 조슈아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이내 눈을 피했다. 조슈아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에이레네.”
“……프렌시프 양은 절대로 널 죽이지 못할 거야.”
“어떻게 된 거야.”
“……”
“말해! 정말로 네가 인질을 잡은 거냐고!”
혈육의 간절한 목소리에도 에이레네는 입을 열지 않았다. 변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그는 나무 그늘 안에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다 들었으니까. 나는 포털을 열어 기사들과 조슈아를 이동시켰다. 그 후에야 에이레네가 나를 서슬 퍼런 눈으로 쏘아보았다.
“후회할 짓을 하셨군요.”
“글쎄요. 후회하는 게 나일까요, 영애일까요.”
에이레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 나는 낮게 말했다.
“저도 시간을 드리지요. 답을 가져오세요. 물론 그땐 가웨인이 살아 있다는 증거도 함께여야겠지요.”
입술을 짓씹은 그녀가 떠나고 난 눈을 꽉 감았다.
‘됐어. 시간은 벌었어.’
나는 조슈아와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기사들은 포박한 조슈아를 지키고 있었고, 내가 오자 몇 걸음 물러나 자리를 내주었다.
난 조슈아를 내려다보았다. 표정을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갔다. 교정에서 에이레네에 관해 말하던 그의 목소리엔 애정과 믿음이 담겨 있었다. 여동생을 무척 사랑했던 거다. 이런 일을 벌이리라곤 상상조차 못 하고.
“생각 정리는 끝났니?”
내 물음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야.”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올 뻔했다. 애초에 조슈아를 인질로 잡은 건 에이레네가 마음을 돌려먹길 바라서가 아니다. 조슈아를 버릴 거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혈육을 생각한다면 가웨인을 납치하는 위험한 일 따윈 하지 않았을 거다. 드러나면 가문이 풍비박산 날 일이 아닌가. 그녀에게 답변을 가져오라고 한 건 그저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조슈아가 그녀에게 실망하게 만들기 위해서.
‘내가 가진 진짜 타개책은 조슈아니까.’
나는 굳어 있는 그에게 말했다.
“사비에르 암군(귀족들이 황궁에 보고 없이 비밀리에 기르고 있는 군사) 정보를 줘. 현재 어디에 주둔하고 있고, 어디로 이동했는지까지 모두.”
란슬롯의 조언이었다. 그는 에이레네 혼자서 일을 전부 꾸미진 않았을 거라고 했다.
[가웨인과 우리 군을 포털로 이동시켰다고 해도, 근방 지리에 훤한 그들이라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 거다.]
[전투로 발목을 붙잡았겠지.]
[용병은 못 썼을 거야. 프렌시프에 덤빌 간 큰 용병단도 없을뿐더러 소문이 새어 나가면 끝장일 터.]
그러니까 그 애가 움직인 건 분명 암군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찾기 쉽지.’
조슈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버지가 암군을 움직였을 리 없어. 그들이 움직였다면 에이레네의 독단이다. 정보는 남아 있지 않겠지.”
“그래, 그러니까 후작에게 네 동생이 암군을 움직였다고 말해.”
그럼 후작은 펄쩍 뛰고 조사할 수밖에 없다. 어디에 있는지, 왜 이동했는지까지 확인할 테니 그 정보를 내게 가져오면 된다. 말뜻을 알아차린 조슈아가 날 빤히 보았다.
“내가 하지 않겠다면?”
“할 거야.”
“뭐?”
나는 무릎을 굽혀 꿇어앉은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넌 인사밖에 나누지 않았던 내가 프란츠 무리에게 괴롭힘 받고 있을 때 구해 줬지.”
“…….”
“프란츠가 내 레시피를 훔쳤을 때도 증언해 주겠다고 했어.”
“…….”
“쟝뤼크 교수님께 가르침 받고 싶다면 가문의 힘으로 억누를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고.”
나는 생긋 미소지었다.
“넌 좋은 사람이야.”
“…….”
“네 동생이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침묵할 리 없어.”
“너…….”
“하지만 정 네가 가져오지 않겠다면―”
목소리가 절로 낮아졌다.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난 천천히 이어 말했다.
“―난 에이레네 사비에르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뭐라고?”
“신수로 그 애의 목덜미를 물어뜯든, 포털에 평생 가둬 버리든, 어떻게든지.”
“…….”
“그러니까 가져와. 네 동생 살리고 싶으면.”
조슈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 * *
세니아나는 조슈아를 사비에르의 황도 저택으로 이동시켜주었다. 복도를 걷던 후작이 제 집무실 앞에 서 있는 아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것이냐.”
“…….”
“조슈아.”
문고리를 쥔 조슈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넌 좋은 사람이야.]
다정하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황당한 녀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믿는 게 자신의 양심이라니. 세니아나에게 납치당할 적에도 기가 찼다.
[내가 지금 너를 납치하고 싶은데 혹시 곱게 따라와 줄 의사가 있니?]
순진한 눈으로 종알거리다가 자신이 대답하지 않자 ‘그럼 실례할게.’ 하고 말했다. 그러더니 어디에서 나온 건지 모를 사람들이 순식간에 저를 포박했다. 문고리에서 손을 놓고 부친을 바라보았다.
“……에이레네가 암군을 움직였습니다.”
“뭐라고?”
후작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에이레네가 일언반구도 없이 그런 짓을 했을 리 없다.
“무슨 헛수작을 부리는 거야.”
“확인해 보시면 아실 게 아닙니까.”
조슈아의 단정적인 어조에 사비에르 후작은 얼굴을 굳혔다. 불안이 가슴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즉시 사비에르의 기사단장에게 명했다.
“파스칼(사비에르의 암군 군단장)의 위치를 확인해라.”
“예.”
암군의 존재는 수면 위로 노출되는 순간 가문에 큰 위협이 된다. 따라서 군단장이 매번 보고하고 움직이지 않아도 이동지를 확인할 수 있는 마석을 몸에 박아넣었다. 사비에르의 기사단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동 기록을 가지고 돌아왔다.
“각하.”
“그래, 영지 내에 있는 것이지?”
“그게…… 파스칼의 위치가 동부 산맥으로 잡힙니다. 게다가 근경으로 암군이 뿔뿔이 흩어져 있습니다.”
“뭐라!”
암군이란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누구나 기르고 있지만, 드러날 적엔 애써 쌓아온 황금 더미가 와르르 무너진다. 폭정 황제가 충신을 치우고 싶을 때, 가장 먼저 찾는 게 암군이니까. 그래서 암군은 비상시에, 가주나 가문 원로원의 승인이 있어야만 움직인다. 후작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원로원이다.’
만약 정말로 에이레네가 암군을 움직였다면 원로원과 은밀히 접촉한 것이다. 자신은 절대로 허락할 리 없으니까.
‘원로원이 나를 버리고 에이레네를 택하려는 것인가.’
주먹을 움켜쥔 그가 원로원장을 만나기 위해 황급히 뛰쳐나갔다. 조슈아는 기사단장이 가져온 기록지를 잡았다.
‘에이레네, 네가 정말로…….’
머릿속에 떠오른 에이레네의 미소가 점점 일그러졌다.
* * *
조슈아에게 기록을 건네받은 난 당장에 영지로 향했다. 그리고 란슬롯, 군사들과 함께 암군의 위치가 잡히는 곳마다 이동했다. 란슬롯이 물었다.
“어때?”
가웨인은 아마 전투를 한 번으로 끝내지 않았을 것이다. 물리치고 나면 길을 찾기 위해 떠날 수 있을 테니. 수없이 전투를 치르게 해야만 움직이지 못하게 할 터. 다수의 암군을 계속 이동시키는 것보단 소수의 가웨인 부대를 암군의 주둔지로 이동시키는 게 쉽겠지.
‘그러니까 가웨인 주변에 계속 포털을 열어 놨을 거야.’
에이레네의 포털이 열려 있다면 난 포털을 열 수 없다. 즉, 포털이 열리지 않는 곳에 가웨인이 있는 거다. 난 집중하고 문을 열었다.
‘열린다.’
“여긴 아니에요.”
우리는 계속 사비에르 암군의 신호가 잡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아……!”
일곱 번째 발신지에 도착한 후 난 펄쩍 뛰었다. 안 열려!
“여기에요!”
란슬롯과 기사들이 근처를 수색하기 위해 움직이려 할 때였다.
“크악―!”
거대한 파동과 함께 익숙한 비명이 들렸다.
‘바커스의 목소리!’
우리는 얼른 소리의 진원지로 향했다.
“오빠!”
가웨인과 우리 군사들이 검은 제복의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우리 쪽 사람들은 겉보기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란슬롯과 함께 온 기사들이 서둘러 전투에 뛰어들었다. 암군이 조금씩 물러나는 틈에 난 가웨인에게 향했다. 그 순간. 쾅―! 굉음과 함께 하늘이 열리고 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짜다.’
바닷물이야. 설마―! 포털에서 쏟아진 물에 의해 순식간에 휩쓸려 버렸다. 사비에르의 암군까지도. 전투가 오르막길에서 벌어진 탓에 우리는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나는 황급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절벽!’
다들 나무를 붙잡으려 했지만 크게 다친 가웨인과 그의 부대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열려!’
하지만 오늘 내내 열 번도 넘게 문을 연 탓에 이전처럼 에이레네의 힘을 튕겨 낼 수 없었다. 난 눈앞에 있는 단단한 가지를 잡고 떠내려갈 것 같은 가웨인의 소매를 붙들었다.
“으윽―!”
성인 남자의 무게를 버틸 수 없었다. 나무뿌리가 점점 젖은 흙 밖으로 튀어나왔다. 가웨인이 소리쳤다.
“놔―! 너까지 휩쓸린다고!”
나는 펑펑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
“싫어! 안 놓을 거야. 죽어도 안 놓을 거야!”
“……하여간 말 더럽게 안 듣지.”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오빠!”
검으로 소매를 베어 냈다. 머릿속에 그와의 일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벚꽃색 구두를 사 주었던 일. 나를 안고 ‘절대로 다치지 않게 하겠다’ 맹세했던 일.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멀린!’
귓가에 그의 포효가 들렸던 것 같다. 천지가 진동하고, 희뿌연 빛이 사방을 감쌌다.
“헉―!”
온몸을 가로지르는 것 같은 격통이 느껴졌다. 쨍―! 하늘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다. ……그게 내 기억의 끝이었다.
타닥, 탁. 나무가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나는 정신을 차렸다. 내가 끙끙, 뒤척이자 누군가 내 어깨를 붙들었다.
“세니아나!”
익숙한 목소리. 번쩍 눈을 뜨니 눈앞에 란슬롯과 가웨인이 보인다. 난 가웨인의 얼굴을 덥석 잡았다.
“……귀신인가.”
“아직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그가 양손으로 내 볼을 잡고 흔들었다.
“아바―!”
아프다! 아파! 만세, 생시야! 난 펄쩍 뛰며 그를 끌어안았다. 자꾸만 눈물이 샘솟아서 펑펑 울자 그는 내 등을 토닥였다.
“나쁜 놈! 오빠는 나쁜 놈이에요!”
그렇게 소매를 잘라 버리는 게 어디 있어! 으허엉, 울면서 말하자 그가 킥킥거렸고, 란슬롯도 픽 실소를 흘렸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쓰리고 코가 얼얼했다. 퉁퉁 부은 날 보고 가웨인이 자꾸만 픽픽 웃어서 난 뾰로통해졌다. 란슬롯이 물었다.
“몸은?”
아직 정신이 없고 몸살처럼 욱신거리긴 해도 이쯤이면 괜찮다.
“괜찮아요. 그런데 어떻게 된 거예요?”
“네가 포털을 열었지. 순식간에 물이 사라졌어.”
“사비에르의 암군은요?”
가웨인과 란슬롯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가웨인이 말했다.
“죽었어.”
“전부요?”
“그래. 어찌할 사이도 없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지. 애덤이 죽었던 것처럼.”
“그건 고대 마법이라면서요. 토설할 때나 그렇게 되는 게 아닌가요?”
“아무래도 고대 마법을 다른 쪽으로 변형한 것 같다. 그들 몸에 나타난 문양까지 애덤 때와 같았어.”
“……!”
“게다가…….”
“네?”
그는 말을 하려다가 말고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의아해하는 내게 란슬롯이 말했다.
“포털, 열 수 있겠어?”
난 펜던트를 잡고 이동지를 생각했다. 잠잠하다.
‘하긴, 오늘 내내 열었다 닫은 데다가 에이레네의 힘까지 튕겨 냈으니까.’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어렵겠다고 하니 란슬롯이 기사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라고 명했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볼 정신이 들었다.
‘동굴이네.’
주변에 상처 입은 기사들이 엄청 많았다. 그래도 죽을 정도의 상처는 아닌지, 골골대긴 했지만 살아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계속 있으면 위험할 텐데.’
뭐라도 먹여서 기력을 차리게 해야 한다.
“보급품은요?”
내가 묻자 란슬롯이 동굴 안쪽에 쌓아 둔 주머니들을 가리켰다.
“물에 젖어서 전부 상했어.”
“으음……. 그럼 주변에 도움을 구할 곳이 없을까요?”
근처에 자생 부족이 있긴 하지만, 외부 접근을 몹시 싫어한다고 했다.
‘도움은 어렵겠다.’
나는 끙차, 하고 일어나서 오빠들, 기사들과 함께 동굴을 나섰다.
‘혹시 나무 열매 같은 걸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주변에 강이 있다고 했으니까 민물 생선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걷다 말고 란슬롯이 나를 감쌌다. 가웨인까지 인상을 쓰고 검을 빼 들었다.
“몬스터다.”
‘몬스터라고?’
나는 란슬롯의 어깨 위로 고개를 빼꼼 들었다.
“어?!”
내가 버럭 소리치니 오빠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날 봤다.
“저거 몬스터 아닌데. 낙지인데.”
에이레네가 이동시킨 바닷물에 딸려온 모양이었다. 낙지가 젖은 땅으로 들어가려 다리를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동부엔 바다가 없어서 해산물이 귀한 데다가, 오빠들은 항상 조리된 음식만 먹었으니 모를 만도 했다.
‘엄청 크기도 하고.’
일반 낙지의 서너 배쯤 되어 보였다.
‘낙지는 기력 회복에 좋지.’
나는 쪼그려 앉아 낙지를 보았고, 오빠들과 기사들은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먹을 수 있어요.”
“이런 걸 먹는다고? 크라켄의 새끼가 아닌가?”
가웨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기사들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다들 “네가 잡아”, “네놈이 해”, “아가씨께서 가져가신다잖아” 하며 서로에게 잡기를 미뤘다. 난 란슬롯에게 검을 받아서 손수건으로 검날을 슥슥 닦았다. 그리고 낙지를 덥석 잡았다.
“헉……!”
“……!”
기사들이 엄청 놀란 표정이라서 난 고개를 갸웃했다. 낙지를 평평한 돌에 올려둔 뒤 다리를 탕! 내리쳤다. 잘린 다리가 꿈틀꿈틀 움직이자 다들 소리 없이 경악했다.
‘초장이나 참기름이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없으니까. 낙지를 맛보려다가 슬쩍 가웨인을 쳐다보았다.
[하여간 말 더럽게 안 듣지.]
그렇게 말하며 희미하게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고맙고 미안했다. 난 첫 시식의 기회를 양보하기로 했다. 수줍은 표정으로 꿈틀거리는 낙지 다리를 잡고 그에게 내밀었다.
“드세요.”
“……내가?”
“네.”
“…….”
왜인지 그가 마른침을 삼켰다. 가웨인은 잠깐 침묵했다. 표정이 엄청 이상해서 어리둥절해 하다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워서 그러는구나.”
몬스터의 새끼처럼 보이면 무섭고, 징그러워서 먹지 못할 거다. 나만 해도 어릴 땐 닭발을 못 먹었다. 내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가웨인이 휙! 낙지 다리를 잡았다.
“안 먹어도 되는……!”
“이딴 거 하나도 안 무서…… 윽.”
낙지를 씹던 가웨인은 빨판이 입천장에 붙는지 내내 인상을 찌푸렸다.
‘가웨인한테 이런 건 주면 안 되겠다…….’
란슬롯은 괜찮을까 싶어 그를 쳐다보니 아주아주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배고프지 않아서.”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동굴 밖을 보았다. 우리가 동굴로 돌아왔을 즈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멈출 기미가 안 보였다.
‘동굴에도 빗물이 들어왔어.’
조금만 더 있으면 발목까지 물이 찰 것 같았다. 통신석으로 지원군과 이야기를 나눈 란슬롯이 말했다.
“폭우 때문에 산과 이어진 다리가 끊어졌다더군.”
가웨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다리는 하나가 아닐 것 아니야.”
“사비에르의 암군이 통로 하나만 남기고 죄다 끊어 놓은 것 같다.”
“빌어먹을.”
부상자들의 상태는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었다. 부상이 큰 사람도 있는데 동굴에 고인 빗물 때문에 누워 쉬지 못했다. 하루 내내 먹은 게 없기도 했다.
낙지를 구워서라도 기사들의 배를 채우게 할까 싶었지만, 동굴에 들고 오니 기사들이 순식간에 검을 빼 들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몬스터의 새끼인 줄 알고. 억지로 먹이면 그 검으로 스스로의 가슴을 찌를 것 같은 예감에 포기하고 말았다.
“크윽…….”
바커스가 복부를 잡고 신음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는 랜스에 막 복부를 맞은 상태였다. 결국, 가웨인이 결단을 내렸다.
“근처 부족에 도움을 요청하지.”
“하지만 외부 접근을 몹시 꺼린다지 않았나요?”
“이대로 다 죽게 할 순 없으니까.”
우리는 동굴을 나와서 한참을 걸었다. 산 중턱에 이르자 마을이 보였다. 부족장 보좌라는 노년의 사내가 난색을 표했다.
“여기는 11대 프렌시프 후작이 불가침령을 내린―!”
“침략이 아니다. 우리에겐 머물 곳과 식량이 필요할 뿐.”
“하지만―!”
란슬롯의 말에 사내가 소리쳤다. 그러자 란슬롯이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의 프렌시프 후작은 11대가 아니지.”
환히 미소짓고 있는데 등줄기가 오싹했다. 노년의 사내 또한 그런지 마른침을 꼴깍 삼키더니 미간을 좁혔다.
“잠자리와 식재료만 내드릴 수 있습니다. 폭우가 쏟아져 시중을 들 만한 여력이 없어요.”
란슬롯이 고개를 끄덕였고, 깡마른 여자와 그녀의 다리에 붙은 작은 소녀가 우리를 안내해 줬다. 오두막 안에 들어오고 얼마 안 되어 돼지 반 마리와 몇 가지 채소가 전달되었다. 내가 바로 팔을 걷어붙이자 기사들이 나섰다.
“저희가 하겠습니다.”
“왜? 요리사는 나인데.”
“귀한 손을 저희 같은 놈들 때문에 쓰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나보다 더 요리에 익숙한 사람 있어?”
“그건…….”
“괜찮아. 우리 오빠 더 다치지 않게 해 줬잖아. 보답이라고 생각해.”
내 요리를 가만히 앉아 받아먹는 게 미안한 것 같아서 변명했다. 그러자 젖은 로브를 벗던 가웨인이 움찔, 하고 나를 쳐다봤다. 입꼬리가 계속 실룩거려서 난 왜 저러나 싶었다. 기사들에게 재료만 부엌으로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찬장에서 양념거리와 향신료를 확인한 뒤에 손을 씻었다.
‘돼지 사골을 하자.’
윤세나였을 적엔 여름이 되기 전에 늘 잔뜩 만들어 놨었다. 소는 너무 비싸서 쉽게 못 샀기 때문에 돼지 사골을 썼다. 기사들은 식칼을 잡고 뼈를 쾅! 쾅! 잘라 내는 날 당황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왜?”
“아, 아닙니다.”
‘……?’
난 돼지를 보고 속으로 쟝뤼크를 떠올렸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그가 통돼지 손질하는 법까지 익히게 한 덕에 기괴하거나 무섭다는 생각 없이 능숙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뼈를 샥샥 발라내 사골 거리와 살코기를 따로따로 담았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자꾸만 기사들과 오빠들이 주방을 기웃거렸다. 가웨인이 크흠, 헛기침을 하고 들어오더니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맴돌았다.
“그, 뭐, 도와줄까.”
“하실 수 있으세요?”
“자르고 굽는 것쯤이야.”
그 자르고 굽는 게 어려운 건데. 하지만 기사들의 수는 족히 30명, 나 혼자서 만들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사골은 내일이나 다 고을 테니 당장 먹을 것도 해야 하고.’
난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프라이팬을 쥐여 주었다.
“안심을 잘라서 구워 주시면 돼요.”
“쉽네.”
그가 자신만만해서 안심구이는 그에게 전부 맡기기로 했다. 그러고 다시 뼈를 손질하는데 옷이 너무 불편했다. 다 젖어서 쿰쿰한 냄새가 나기도 하고.
‘내가 입을 만한 게 없을까.’
“잠깐만요”
나는 나가서 오두막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다 우리를 안내해 준 여자와 소녀를 발견했다. 날 보자마자 여자가 깜짝 놀라서 소녀를 가렸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아……. 옷을 좀 빌릴 수 없을까 해서……. 미안,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야.”
“귀족 나리께서 입으실 만한 옷은 없습니다.”
“그냥 편한 옷이면 돼.”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보던 여자는 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따라오시죠.”
여자는 내게 옷을 내주었다. 조금 크긴 하지만, 치맛단이 발목까지밖에 안 와서 움직이기 편했다. 난 보답으로 내 드레스에 있던 토파즈를 떼서 건넸다. 그러자 소녀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토파즈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으앗!”
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소녀가 토파즈를 와작 깨문 것이다. 그러곤 인상을 찌푸리며 테이블에 휙 내던졌다.
“뭐야, 먹을 수도 없는 거잖아.”
“족장님!”
여자는 당황하여 말했다.
‘족장이라고?’
많이 쳐줘 봐야 열 살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소녀가 팔짱을 끼고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자기들은 소중한 식량을 가져가 놓고 먹지도 못하는 걸 주잖아.”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소녀가 후다닥 뛰쳐나갔다. 여자도 당황해서 내게 급히 허리를 숙이고 따라 나갔다.
‘사랑스러운 족장이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부엌으로 되돌아갔는데……. 매캐한 냄새.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프라이팬들. 새카맣게 타서 쏟아져 있는 고기. 난 멍하니 가웨인을 보았다. 그러자 시선을 눈치챈 그가 고개를 돌렸다.
“왔냐.”
“이게 뭐예요?”
“프라이팬이 이상해.”
“그래서 지금 냄비에 굽고 있는 거라고요?”
아까운 프라이팬, 돼지고기! 내가 저 돼지를 얼마나 열심히 손질했는데. 나는 인상을 쓰다가 가웨인이 들고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건 뭐예요?”
“내 검.”
“부엌에 왜 검을 가져오셨어요?”
“고기가 안 잘리기에.”
“지금 이걸 사람을 찔렀던 검으로 자르는…….”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다.
‘내가 란슬롯의 검을 쓴 건 사람 피가 안 묻어서고!’
게다가 성에서 나올 때 막 받은 새 검이었다. 급한데 식칼도 없었고. 나는 가웨인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러자 함께 ‘검’으로 고기를 자르던 기사들과 당사자인 가웨인이 움찔했다.
“이 여름에 사람 피가 덕지덕지 묻은 검으로 고기를 자르셨다고요?”
“무, 물로 닦았는데.”
“소독도 아니고 그냥 물?”
“어차피 자른 고기는 구우니까…….”
“남은 건요. 저걸 다 먹진 못할 거 아니에요.”
표정과 목소리가 절로 싸늘해지자 기사들이 그를 손가락질했다.
“저희는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주군이 듣지 않으셨습니다!”
가웨인이 눈을 부라리며 기사들을 노려봤다.
“이 새끼들이……. 성에 가면 뒈질―”
“오빠.”
“…….”
“여기 정리하세요.”
“……그래.”
벽에 기대 있던 란슬롯이 고개를 숙이고 가늘게 떨었다.
난 한숨을 내쉬고 다시 요리를 시작했다. 사골은 피를 빼기 위해 물에 담가 놨고, 안심은…….
‘내 안심! 다 버렸잖아!’
옆에서 눌어붙은 프라이팬을 닦고 있는 가웨인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내며 배를 잡았다. 깜짝 놀라서 얼른 그에게 달려갔다.
“아프세요? 어디, 어디?”
“으…….”
“그런데 다친 곳은 옆구리 아니었나요?”
왜 배꼽 쪽을 잡고 있는 거지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자 그가 눈을 데루룩, 굴리곤 말했다.
“이쪽도 다쳤어.”
“가서 쉬세요.”
“됐어.”
“얼른요. 사실 그냥 가는 게 절 도와주시는 건데…….”
‘설거지한다고 그릇도 깨 먹었잖아.’
그는 한참 침묵하더니 프라이팬을 놓았다. 가웨인을 멀리 쫓아 보내고 난 잘라놓은 등심을 잡았다.
‘도와주려고 하는 건 고맙지만.’
진짜로 성가셨다. 왜 티브이 속 부모들이 아이가 도와준다고 하면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거야’ 하고 말하는지 알겠다.
‘정말 대단한 분들이셔.’
난 부모들에게 깊이 공감하며 마음속으로 손뼉을 쳤다. 그러고 등심을 칼등으로 퍽퍽 두드려 폈다. 두드린 고기에 후추와 소금으로 간한 뒤에 등심을 찾는데 란슬롯이 말했다.
“이건 내가 할게.”
“하지만…….”
가웨인에게 당한 난 불신의 눈으로 란슬롯을 쳐다봤다.
“두드리는 것만 하는 거니까.”
“그럼…….”
칼과 고기를 건네고 란슬롯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우와.’
평범한 사람만큼은 한다! 성에서 란슬롯이 데려왔던 기사들도 돕기 시작했는데, 그들도 아주 평범했다.
‘역시 란슬롯 직속 엘리트 부대!’
나는 엄청 감동해서 눈을 반짝이며 란슬롯과 그의 기사들을 보았다. 그러니까 문밖에 있던 가웨인과 그의 기사들이 그들을 노려봤다.
“우리도 저런 거 했으면 잘했을 텐데.”
“곱상하게 생긴 것들이 하는 짓도…….”
“간교한 새끼들.”
왜 저렇게 사이가 나쁘담. 성에서도 가웨인의 기사들과 란슬롯의 기사들은 은근히 서로를 견제했다. 특히 내가 바커스에게 보쌈을 줬다는 걸 들었을 때, 란슬롯의 기사들은 환히 웃으며 그들을 욕했다.
‘사이좋게 지내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부엌에 있는 재료들을 챙겨 왔다. 그래도 밀가루나 계란은 있어서 다행이다. 빵가루는 없지만 대신에 굳어서 딱딱해진 식빵을 쓰기로 했다.
‘아예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다행이야.’
그래도 미안하니까 부족에겐 성에 돌아가서 다른 식료품을 전달해야지.
내가 만든 건 포크커틀릿이다. 예전 윤세나일 적 쓰던 말로는 돈가스였다. 안심을 가웨인이 몽땅 망쳐 놔서 구이로 먹일 수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등심을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부족들이 준 야채 중 토마토가 있어서 돈가스 소스도 만들 수 있었다. 오두막에 둘러앉아 오빠들과 기사들이 완성된 요리를 먹길 기다렸다.
“오오오―!”
“고기를 튀기면 이런 맛이 나는군.”
“이건 데미글라스 소스일까요? 달짝지근한 게 아주 맛있습니다.”
“데미글라스는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서부에서 한 번 먹어 봤지. 포, 포크? 포크 어쩌구 하던데.”
“우리가 지금 쓰는 포크? 그것도 이렇게 맛있습니까?”
“아니, 비교 불가다.”
“씹는 느낌도 바삭바삭한 게 아주 좋아.”
“크으, 이런 고급 요리를 우리가 먹게 되다니!”
오빠들도 놀란 얼굴이었다. 가웨인이 눈을 크게 뜨더니 물었다.
“이게 돼지로 만든 거라고?”
난 고개를 끄덕이고 헤헤 웃었다. 내가 맛봤을 때도 아주 맛있었다. 쟝뤼크에게 허구한 날 혼나기만 했다고 생각했는데, 실력이 꽤 좋아진 모양이었다.
‘내일은 남은 돈가스로 반찬을 하고, 사골국을 먹이면 되겠다.’
하지만 둘뿐이라면 느끼하겠지? 식사 후에 양파 장아찌와 피클이라도 만들어 둬야겠다.
‘익힐 시간이 없으니까 칼집을…….’
그렇게 생각하다가 눈이 스르륵 감겼다. 이것저것 피곤한 일이 많아서 도무지 잠을 물리칠 수 없었다. 꾸벅꾸벅 졸자 란슬롯이 빙그레 웃으며 날 안아 들었다.
‘아냐, 자면 안 돼. 난 장아찌와 피클을 만들어야 해.’
피클……. 장아찌…….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그러니까 네놈이 훔쳐 먹으려던 거 아니야!”
“아니라니까 난 막 부엌에 들어갔던 거라고!”
나는 부스스 일어나 눈을 비볐다.
‘아직 해도 뜨지 않았는데 뭐지.’
방 밖에서 고함이 오가고 있었다. 덮고 있던 담요를 내려놓고 문을 나서니 기사들이 헉, 하고 날 쳐다봤다.
“무슨 일이야?”
“저는 한 조각 먹었습니다!”
“저, 저도 막 부엌에 들어갔던 겁니다! 그러니까…… 물을! 물을 찾으려고!”
갑자기 변명을 해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응?”
“돈가스를 전부 훔쳐 먹은 건 절대로 제가 아닙니다.”
그들이 믿어 달라는 듯한 결연한 눈으로 날 봤다. 무슨 소린가 싶어 주방에 가자 남겨 둔 돈가스가 전부 사라졌다.
“누가 다 먹었지?”
기사들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 사이 소란을 듣고 다른 기사들과 오빠들이 부엌 쪽에 다가왔다. 부족민들까지 문틈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무슨 일이야?”
가웨인이 물어서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남겨 놓은 돈가스가 사라졌어요.”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이 새끼들이.”
“훔쳐 먹으려고 했던 건 맞지만 훔치진 않았습니다!”
“개소리.”
가웨인이 기사의 장딴지를 퍽 걷어찼다. 나는 부족민들 틈에 보이는 소녀를 쳐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소녀가 흠칫 놀라 부족민의 등 뒤로 숨었다. 난 음식을 하다가 만들어 놓은 달고나를 들고 소녀에게 다가갔다.
“안녕.”
“……나, 나 아니다!”
난 킥킥 웃으며 소녀의 입가에 묻어 있는 돈가스 부스러기를 떼어 주었다.
“그래, 아니야.”
“…….”
“이거 먹을래?”
소녀는 움찔움찔하다가 조심스럽게 달고나를 받았다. 살짝 핥아 보고는 눈이 커다래졌다.
‘귀여워!’
열심히 달고나를 먹는 소녀를 지켜보았다. 그러고 고개를 들었는데.
‘응?’
왜 부족민들 입가가 기름으로 번들거릴까. 그때, 황급히 뛰어온 부족장 보좌라던 남자가 소녀를 끌어안았다.
“족장님!”
“소만…….”
“외지인과 어울리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씀드려야겠습니까!”
그렇게 소리치고는 소녀를 번쩍 들고 부족민들을 노려보았다.
“너희들도!”
부족민들이 당황해서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왜?’
왜 저렇게 외지인을 경계하는 거지? 그러다 문득 의아해졌다.
‘11대 프렌시프 후작은 왜 불가침령을 내렸을까.’
무슨 신세라도 진 건가. 하지만 그랬다면 영지로 내려와서 살게 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일단 여긴 동부고 프렌시프 령과 그렇게 멀지 않은데.
그러고 보니까 이 마을에 오면서도 이상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해 보이는 길이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그래서 삼십 분도 안 되는 거리를 뱅뱅 돌아서 가야 했다. 이건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게 아니라 마치…….
‘고립시켜 놓은 것 같잖아.’
부모가 위험한 물건을 아이 손에 닿지 않도록 숨겨 놓은 것처럼.
‘어?’
나는 족장 소녀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부족장 보좌에게 안겨 있느라 조금 밀려 올라간 치마 아래로 얼핏 문신이 보였다. 애덤이 죽기 직전 그의 몸에 나타난 것과 같은 문양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사골의 밑준비를 하는 내내 고민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11대 후작은 왜 불가침령을 내렸는가.
‘게다가 그 아이 몸에 왜 애덤에게 떠올랐던 문양과 같은 문신이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피를 뺀 사골을 한 번 우르르 끓인 후, 물을 버렸다.
‘그 아이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쉽게 대답해 주지 않겠지?’
먹을 걸로 꼬셔 볼까……. 나는 두 시간쯤 곤 사골을 기사에게 부탁했다.
“불이 거기서 더 세지거나, 약해지지만 않게 지켜보면 돼.”
그러고 주방에 있던 감자를 납작하게 잘라서 튀긴 뒤 기름을 빼내기 위해 망 위에 올려놨다. 그 후에 감자칩의 반엔 소금과 후추를 뿌리고, 남은 반은 버터와 꿀을 넣어 볶았다. 그러자 기사가 물었다.
“그건 뭡니까?”
“감자칩. 족장이라는 아이에게 주려고 하는데 새벽이라 자고 있겠지?”
“우물가에서 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새벽에?”
“예.”
“으음, 그럼 지금 주고 와야겠다. 사골 잘 부탁해.”
바구니에 잘 담아서 우물가로 가자 정말로 소녀가 우물가 근처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뭐 해?”
“헉!”
소스라치게 놀란 소녀는 얼른 우물 뒤로 숨었다.
“미안, 놀랐어?”
“외, 외지인과 얘기하면 안 돼.”
“간식만 두고 갈게.”
“……간식?”
소녀는 살그머니 얼굴을 내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옳지!’
일부러 버터를 잔뜩 넣어서 냄새에 혹하도록 만들었다고.
우물쭈물 눈치를 보던 소녀가 살금살금 걸어 나와서 바구니를 휙 빼앗아갔다. 그리곤 다시 우물가 뒤로 포르르 뛰어가 와작와작 감자칩을 먹었다.
“나 옆에 앉아도 돼?”
내가 조심스럽게 물으니 한참 침묵한 뒤에 대답했다.
“으응.”
난 소녀의 옆에 살짝 앉았다.
“이름이 뭐야?”
“슈라.”
“그렇구나. 뭘 찾고 있었어?”
“……네 잎 클로버.”
“네 잎 클로버는 왜?”
“쥬크니 아저씨 관에 넣어 줄 거야.”
“돌아가셨어?”
“이제 죽을 거니까. 어둠에 좀먹히면 죽여야 한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어.”
뭐라고? 나는 깜짝 놀라서 소녀를 붙들었다.
“어둠에 좀먹히다니?”
내 말에 소녀가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날 힐끔힐끔 쳐다보더니 감자칩 바구니를 꼭 끌어안는다.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 있잖아, 우리는 나쁜 일을 당해서 화가 나면 어둠에 좀먹혀.”
“나쁜 일?”
“아탈란의 자식들은 거짓말쟁이라서 우리를 속이고 나쁜 짓을 했어. 그래서 우리는 자식의 자식, 그 자식까지 끔찍한 저주를 안고 살―”
그때였다.
“크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들리자마자 부족민들이 튀어나왔다. 슈라는 감자칩 바구니를 내동댕이치고,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울타리 대신 밧줄이 쳐진 막사 앞까지 달려가자 부족장 보좌라는 남자가 슈라를 끌어안았다.
“안 됩니다!”
“아저씨! 쥬크니 아저씨!”
“제발, 족장님……!”
“싫어, 아저씨!”
내가 다가가니 부족민들의 얼굴이 굳어지고, 동시에 막사에서 어떤 물체가 기어 나왔다.
“세니아나!”
“아가씨!”
오빠들과 프렌시프의 기사들이 내 앞을 막아섰다. 나는 란슬롯에게 안겨진 채 막사 밖으로 흘러나온 물체를 쳐다보았다. 저것이 무엇인지 난 알고 있다. 아직 반쯤은 인간이지만, 그렇지만, 저건……!
‘삿된 자.’
그건 오직 나를 향해서만 기어왔다. 조금씩 다가올 때마다 남은 피부에 균열이 생기고, 소름 끼치는 파열음이 들려왔다. 물체가 밧줄에 가로막혔다. 그러자 소녀의 몸, 아니, 애덤의 몸에 있던 문양이 밧줄에 나타났다.
핑―! 이미 오물이나 다름없던 몸이 뚝, 뚝, 무너졌다. 기사들이 검을 빼 들었을 찰나, 나에게 옷을 주었던 여자가 밧줄을 디디며 뛰어올랐다. 그리고 순식간에 삿된 자의 머리 위로 검을 꽂아 넣었다. 배를 감싼 채 새파래진 얼굴로 검을 들고 있던 바커스가 소리쳤다.
“당신들의 동료가 아니오?!”
“그래서 바하의 위대한 전사로 죽게 해 주었잖소.”
“뭐?”
바커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족민들이 모두 가슴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치 묵념하듯이.
“미친, 이런 미친……!”
슈라가 빽 소리쳤다.
“오레레를 욕하지 마! 오레레는 쥬크니 아저씨가 이지를 잃고 모두를 죽이기 전에 우리를 지켜 준 거야!”
“지켜 주다니…….”
“완전히 어둠에 먹히면 우리 힘으로는 없애지 못하니까!”
“족장님!”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된 마을 안에서 난 생각했다. 이제야 앞뒤가 맞는다. 어째서 11대 후작이 이들을 감금하듯 산속에 숨겨 놨는지.
* * *
나와 오빠들은 새벽같이 떠나기로 결정했다. 힘이 어느 정도 돌아와서 포털을 열 수 있었고,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부족민들도 우리가 더는 이곳에서 머물지 않길 바라는 눈치였다. 난 오레레의 등 뒤에 붙어 있는 슈라에게 말했다.
“너희 부족, 상단과는 거래하지?”
옷이라든가 주방의 물품, 생필품 같은 것이 있는 걸 보면 아주 가끔 상단이 이곳을 찾는 것 같았다. 슈라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슈라가 집어던졌던 토파즈와 란슬롯에게 미리 받아 놓은 다이아몬드를 건넸다.
“상단과 거래할 때 내면 될 거야.”
슈라는 꾸물꾸물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약초가 아니어도 받아 줘?”
“약초를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살 수 있어.”
“그, 그럼 소나 과자도?”
“응!”
슈라는 조심스럽게 토파즈와 다이아몬드를 받았다.
“다음엔 여기 오지 마, 언니. 위험하니까…….”
나는 스스로가 위험하다고 말하는 슈라가 안쓰러워서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잘 지내.”
“응.”
난 기사들과 오빠들을 영지로 옮겨 주고, 아카데미 기숙사로 이동했다. 그리고 얼른 기숙사 방을 나섰다.
‘테스트!’
2차 시험을 대신하는 테스트는 어제였다. 세니아나의 성적은 밑바닥이라 졸업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로열 키친에 들어갈 수 없다.
‘보충 시험이라도 봐야 해.’
점수는 본 테스트의 반밖에 들어가지 못할 테지만, 그것조차 내겐 너무나 소중했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종알종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미쳐, 정말!”
점심을 함께 먹던 아이들이 벌컥 성을 냈다. 나는 뛰어가다 말고 그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센! 어제 어디 갔었어?”
“어……, 그게…… 몸이 안 좋아서.”
“흐음, 너한테는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제 시험 취소되었잖아.”
“왜?!”
“교수들이 어제 모두 징계를 받아서.”
“징계?”
“어제 새벽에 교장이 갑자기 교수들 숙소를 뒤졌대. 반입 금지 물품을 살핀다고.”
어제 새벽이라면 내가 도미니크에게 영지로 가야겠다고 말한 후다. 이유를 묻는 그에게 대답도 않고, 급히 떠났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반입 금지 물품?”
“술 말이야. 원칙상은 금지인데 보통은 눈감아 주거든.”
“맞아! 근데 갑자기 교장이 그 일로 징계를 내렸다는 거야! 아무튼 그래서 테스트가 미뤄졌…….”
다른 학생이 내게 이야기해 주던 아이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도미니크의 부관인 알베르가 우리 쪽을 보고 있었다.
“수업 종이 울렸습니다. 다들 지도 교수에게 가시죠.”
“하지만 교수님들은 징계를 받고 계시는데요?”
“이제 풀릴 테니까요.”
“예?”
알베르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해서 난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교수들에게 향하고, 알베르는 내게 다가왔다.
“이번에 써야 할 보고서가 총 몇 장인지 영애는 모르실 겁니다.”
“제가 말도 없이 아카데미를 떠나서요?”
“그것도 있지만요. 가시죠, 저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아, 나중에요. 지금은 볼 사람이 있어서.”
나는 그렇게 말하고 얼른 에이레네의 숙소로 향했다. 에이레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무언가 억지로 참아내는 듯한 얼굴이었다. 방 안엔 약병으로 보이는 것들이 무수히 굴러다니고 있었다.
“……약 올리려는 건가요?”
“…….”
“가족을 지켰다고 자랑이라도 하려는 거예요?”
날카로운 목소리에 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것도 있고 돌려줄 것도 있고.”
“무슨……!”
짝! 난 에이레네의 뺨을 내리쳤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붉어진 뺨을 감쌌다.
“이게 무슨 짓……!”
“이건 우리 오빠 일.”
짝! 에이레네의 반대쪽 뺨을 내리쳤다. 비틀거린 그녀가 기어이 바닥에 넘어져 버렸다.
“이건 내 일.”
“천박하게……!”
“너, 나를 납치하려는 사람들과 한패지.”
“……!”
“아탈란 교.”
애덤의 몸에 나타난 문장, 소녀의 몸에 있는 문신, 에이레네가 보낸 암군들에게 있던 문양. 모두가 나를 납치하려는 세력과 관련이 있었던 거다.
아탈란 교는 대륙 전쟁에서 길라게온과 맞섰던 종교 세력이다. 선생님이 선두에 서서 지켰던 종교 말이다. 그들이 슈라의 부족을 실험체로 써서 삿된 자를 만들려고 했던 거다.
[신의 딸은 삿된 존재의 천적인 동시에 조립자…… 성스러운 힘이 그릇된 방향으로 발동하면…… 삿된 존재는 인력으로 다스릴 수 없는 강대한 어둠이 되어…….]
‘인력으로 다스릴 수 없는 강대한 어둠’을 만들려고 했던 거다. 위험이 있어야 종교를 믿는 사람이 늘어날 테니까. 어둠을 소환해서 종교를 더 부흥시키려고 했던 거다.
‘대륙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로는 더 간절해졌겠지.’
그래서 나와 선생님을 납치하는 무리수까지 썼던 거고. 나는 숨을 몰아쉬며 바닥을 노려보는 에이레네를 말없이 응시했다.
* * *
집사 마일로가 종종걸음으로 아서의 집무실에 들어왔다.
“아가씨께선 아카데미로 돌아가셨답니다.”
“에이레네 사비에르는?”
“아직 아카데미에 있습니다.”
아서는 테이블을 툭, 툭, 두드렸다. 가웨인이 무사하고, 세니아나도 다친 곳 없이 잘 돌아갔다지만 딸의 곁에 아직 불안 요소가 숨 쉬고 있었다. 마일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찌하실 겁니까?”
“더는 내 딸 곁에 붙어 있을 수 없도록 목을 조여 줘야겠지.”
“예?”
“사비에르와 거래하는 상단의 목록을 가져와라.”
아서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사비에르 후작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벌써 열두 군데 째. 열두 곳의 거래처에서 거래 종료를 알리는 서한이 도착하고 있었다.
“주인님!”
사비에르의 집사가 양피지 꾸러미를 가지고 뛰어 들어왔다. 후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설마 그것도냐.”
“남부의 상단은 전멸입니다. 북부에서도 족족……!”
“빌어먹을!”
모두 사비에르의 가장 큰 거래 품목인 전력석의 거래처였다. 일주일 전만 해도 물량을 조금만 더 공급해 달라며 애걸복걸하던 인간들이 어째서 갑자기! 정보부의 행정관이 다급히 방으로 들어왔다.
“보그입니다!”
“뭐라?”
“프렌시프에서 영지 내에만 돌리던 보그를 제국 전역에 풀었습니다! 우리와의 거래를 중단하면 당분간 반값에 공급하겠노라 프렌시프 후작이 직접 약조했답니다.”
사비에르 후작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에이레네 이 정신 나간 계집애가 가문을 풍비박산 냈구나!’
그렇지 않아도 프렌시프의 전염병 배상금과 에이레네가 포털을 열 수 없었을 당시 타 가문에 낸 배상금으로 가문의 기둥이 몇 개나 날아갔다. 그때, 집사와 행정관의 뒤를 이어 사비에르의 황도 기사단장이 다급히 들어왔다.
“피하셔야겠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황제 폐하께서 프렌시프의 황도 내 군사 훈련을 허가하셨습니다. 황도 군이 저택 근처에 집결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 돼! 황도 내 군사 훈련이라니! 그런 전례는 전무후무…… 황제도 보그를 받아 처먹었구나!”
사비에르 후작이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기사단장이 새파래진 얼굴로 말했다.
“훈련을 핑계로 군사를 모아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설마 폐하의 허가도 없이 나를 죽일까!”
“자식이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짓을 할지 예상할 수 없지요.”
“빌어먹을!”
이 와중에 에이레네와는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 몇 번이고 통신을 보냈지만, 번번이 받지 않았다. 기사단장이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마차를 대기시켜 놨습니다. 가시죠.”
사비에르 후작은 거무죽죽한 안색으로 그들을 따라나섰다. 마차에 오른 후작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레네가 암군을 풀었다는 것을 알고 원로원장을 찾았을 때, 원로원장은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다른 원로원은 에이레네를 만나러 간 후로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대체 무슨 짓을……!’
원로원은 개인적으로는 걸림돌이지만, 공적으로는 든든한 자문기관이자 타 귀족들과의 인맥 기반이었다. 그런 자들을 처리하는 게 어떤 위험을 불러올지 모른다는 말인가!
‘영지로 돌아가 아탈란의 대사제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대륙 전쟁 이후 그들의 손이 곳곳에 뻗쳐 있었다. 그들이라면 이번 일을 다시……! 그때 마차가 덜컹! 움직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창밖을 바라보던 후작이 눈을 크게 떴다.
“어, 어르신……!”
납작한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나베리우스가 턱짓하자 마차를 둘러쌌던 검은 예복의 기사들이 사비에르 후작을 끌어냈다.
“이, 이것 놔라! 놔!”
후작이 비명을 질러댔다. 어떻게 마차의 이동 경로를 알았단 말인가.
‘기사단장과 집사가 산길을 통해 은밀히 움직이겠다고…… 설마!’
사비에르의 기사단장, 집사, 그리고 행정관이 나베리우스 앞에 허리를 굽혔다. 나베리우스는 프렌시프의 기사 칼립스에게 눈짓을 보냈다. 칼립스가 사비에르의 무리에게 절그럭거리는 주머니를 건넸다. 사비에르 후작이 새파래진 얼굴로 소리쳤다.
“이, 이, 이 개자식들……!”
나베리우스는 검집을 짚은 채로 천천히 일어났다.
“어, 어르신…….”
그의 검집에서 스릉, 소름 끼치는 마찰음과 함께 새파란 검날이 드러났다. 목 앞에 검을 겨눈 나베리우스가 실금하는 사비에르 후작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내가 몹시 언짢구나.”
“사, 살려, 살려 주십……!”
“가뜩이나 연약한 아이에게 그리 힘을 쓰게 하다니 말이야.”
사비에르 후작이 벌벌 떨며 손을 비볐다.
“따, 딸을 엄히 벌하겠습니다. 어르신, 이번 일은 저도 정말로 모르는……!”
“귀한 곳에서 귀한 음식만 먹이고, 귀한 옷만 입히려 하였는데.”
“…….”
“허름한 곳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고, 낡아 빠진 옷을 입었다니 이 늙은이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는가.”
“여, 영애에겐 제가 사죄를……! 귀한 집과 음식, 옷을 제가…… 컥!”
순식간에 그의 목에 검이 박혔다. 컥! 단말마와 함께 바르르 떨며 실금한 후작을 나베리우스는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끄, 끄억…….”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를 보고 나베리우스가 검을 집어던졌다.
“로열 키친에 전해라.”
“말씀하십시오.”
“사비에르의 딸을 아카데미로 보낸 놈들의 얼굴을 내가 봐야겠다고.”
그놈들 눈알을 쑥 빼내 손녀의 놀잇감으로 줄 예정이었다.
나베리우스가 떠나고 사비에르의 기사단장이 후작의 시체를 수습했다.
“어찌할까요?”
“어르신께서 자살로 마무리 지으라 말씀하셨다. 아카데미에 먼저 부고를 보내라.”
“그렇군요. 자식들이 그곳에 있으니…….”
“그래야 제 아비 죽은 줄 알고 사비에르의 딸이 아카데미를 떠날 게 아닌가.”
사비에르의 기사단장은 황당한 눈으로 나베리우스가 앉았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설마 그것 때문에 죽이신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손녀 곁에서 에이레네 사비에르를 떼어 놓는 수단으로 금좌 11석이었던 자를 죽인 것은 아닐 것이다.
―라고 믿고 싶었다.
* * *
말을 잇지 못하는 에이레네를 두고서 방을 떠났다.
‘일단은 테스트부터.’
아탈란은 내가 로열 키친에 들어가길 바라지 않는다. 그 안에 숨겨진 것을 찾아내야만 완전한 안전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내가 학사에 도착했을 땐, 테스트장에 학생들이 모인 상태였다. 시간이 꽤 지난 터라 테스트 준비가 끝난 모양이다. 교수들은 거무죽죽한 얼굴로 지도하는 학생들에게 마지막 조언을 하는 중이었다. 난 테스트장 앞에서 삐딱하게 서 있는 쟝뤼크를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교, 교수님.”
“말도 없이 출석하지 않은 이유는 내일 묻지.”
난 죽었다……. 그가 쯧, 혀를 차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어진 재료를 모두 써서 두 접시 이상의 요리를 만드는 것이 테스트 과제다. 고기는 따로 조리하지 말고 베이컨을 만들어라.”
“네, 훈제는 열심히 익혔어요.”
그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내 제자는 어째야 한다고 했지?”
“무조건 일등!”
쟝뤼크가 조리모를 건네고 문 앞에서 비켜 주었다. 시험을 볼 생각에 심장이 쿵쿵 뛴다.
‘배운 대로만.’
열심히 했으니까 괜찮아. 난 숨을 크게 들이켜고 내 이름이 붙은 조리대로 향했다.
이윽고 시험 시작. 학생들을 조리대에 놓인 천을 걷었다. 쟝뤼크의 예상대로 딱 베이컨을 하기 좋은 고기가 있다. 그리고 각종 야채와 해산물, 밀가루, 향신료…… 한눈에 담기 힘들 만큼 많은 재료가 있었다. 다른 조리대에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섯 시간 동안 어떻게 이걸 다 하라는 거야!”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다들 초조한 기색이었다.
‘침착하자.’
식당이 한창 바쁠 땐 혼자서도 한 번에 많은 요리를 만들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을 하나둘 정리했다.
‘일단 베이컨부터.’
쟝뤼크가 맛보게 했던 온갖 양념들을 떠올리고 이 중 가장 적절한 소금과 향신료를 골랐다.
교수들은 조리대를 지나며 하나같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에도 로열 키친에 입관시키긴 글렀군.”
“어째 다들 하나같이…….”
“가르치면 뭘 합니까. 제대로 하는 놈이 없는데.”
레아 교수는 빈 아소의 조리대를 보고 한숨을 삼켰다.
‘이 녀석이 정말.’
재주가 아깝고, 제 밑에서도 이제 슬슬 로열 키친 입관자가 나왔으면 하는 마음에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에 정신이 쏙 빠졌는지 모르겠다. 이전엔 싹수는 없었어도, 성실은 하더니 이젠 매일같이 성녀의 숙소만 드나든다고 했다.
‘망할.’
센을 제자로 데려왔어야 했는데. 올해 들어 갑자기 할 마음이 생겼는지 뽈뽈거리는 센이 귀여워 보였다. 배움에 목말랐던 것처럼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흡수하고, 본래 과제보다 더한 것을 만들어 냈다.
‘일이 년 더 가르쳐서 로열 키친의 권외 시험을 치르게 하려고 했는데.’
그녀가 쟝뤼크를 노려보았다. 엉망으로 반죽한 생면을 보고 인상을 쓰던 쟝뤼크가 뻔뻔한 표정으로 레아를 돌아보았다.
“왜요. 뭐요.”
“……재수 없는 놈팡이.”
속삭이듯 중얼거린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쟝뤼크는 대번에 미간을 좁혔다.
“방금 뭐라고 했소?”
“이제 귀까지 먹으셨나.”
기욤 교수가 쯧, 혀를 차며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허, 신성한 시험장에서 무슨 짓들이오! 꼭 실력 없는 교수들이 입씨름을 하지.”
그러고는 은근히 깎아내리는 시선으로 쟝뤼크와 레아를 쳐다보았다. 쟝뤼크는 기욤의 지도를 받는 학생을 흘깃 쳐다보았다. 학생은 야채마다 토치를 쓰고 있었다.
“아주 잘 가르치셨구려. 가뜩이나 부족한 시간을 무척이나 잘 활용하는군.”
“아니, 우리 헨델이 어때서! 시험만 보면 다섯 손가락 안에서 밀려난 적이 없는데!”
기욤은 인재를 제자로 들이는 것도 교수의 능력이라며 코웃음을 쳤다. 쟝뤼크가 거만하게 세니아나가 만든 파스타 면을 눈짓했다. 그러자 기욤이 인상을 찌푸렸다.
“뭘, 우리 헨델과 비슷한 실력…… 저거 카펠리니(Capellini: 엔젤헤어라고도 불리는 가는 파스타 면)를 하는 거요?”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급하게 만든 베이컨을 단품으로 내는 것보다는 요리의 재료로 쓰는 쪽이 현명하지.”
게다가 있는 채소는 모두 쓸 생각을 않고, 육수에 활용하고 있었다. 쟝뤼크는 커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원, 저 녀석도……. 저런 건 가르친 적이 없는데 시험만 보면 그저 두각을 나타내니.”
기욤 교수의 얼굴이 왈칵 찌푸려졌다. 레아 교수도 쟝뤼크를 매섭게 노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직접 응시원을 빼앗아 와야 했다. 그럼 저런 재수 없는 놈이 뻗대는 꼴은 보지 않았을 텐데……!
시험이 끝나고 난 끙끙거리며 다리를 주물렀다. 다섯 시간 동안 쉴 틈 없이 움직였더니 다리 근육이 찢어질 것 같았다. 다른 학생들도 나와 비슷한 모양인지 죽을 것 같은 얼굴로 팔을 주무르고 있었다.
“성적표는 언제 나오지…….”
“내일 오전에 붙는다던데.”
“망했네, 나는 망했어! 채소는 하나도 못 썼다고!”
교수들에게 혹평을 받은 학생들은 울먹이고 있었고, 괜찮은 평가를 받은 학생들은 잔뜩 기대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혹평일까, 호평일까.’
쟝뤼크는 내 요리를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교수들이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혹평 쪽에 가까운 것 같아서 나는 시무룩해졌다.
‘아냐, 그래도 시험은 봤잖아.’
못 본 것보다야 낫지. 테스트는 봤으니까 이제 에이레네만 몰아내면 되겠다.
‘그 일은 할아버지가 해결하시겠다고 했어도…….’
어쩐지 불안했다. 가웨인을 찾기 위해 영지에 갔을 때 사정을 설명했는데 당장 황도로 옮겨 달라며 성화였다. 벌컥 화를 내니 무서워서 이동시키긴 했지만, 할아버지가 나서기 전에 내가 처리하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나는 일단 땀에 젖은 조리복을 갈아입으려고 기숙사로 향했다. 서둘러 가기 위해 인적 드문 지름길로 들어갔다.
“영애.”
나는 얼굴을 굳히고 등을 돌렸다. 에이레네가 창백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따라와요.”
“싫은데요.”
“……제가 지금 영애를 참아 주고 있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
그녀가 이동시킨 바닷물에 휩쓸려 죽을 뻔한 가웨인을 떠올리면 여전히 울컥 화가 치민다. 마음 같아선 목이라도 물어뜯고 싶었다. 에이레네가 조소를 흘렸다.
“당신은 내가 끝이라고 생각하겠죠.”
“…….”
“천만에.”
그녀가 나를 향해 한 발 내디뎠을 때였다. 우리 쪽으로 사비에르의 기사가 뛰어왔다.
“당장 황도로 귀환하셔야겠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슨 일이에요.”
“주인님께서…….”
그가 마른침을 삼키고 굳은 얼굴로 에이레네를 보았다.
“자진하셨답니다.”
“……뭐라고?”
에이레네의 동공이 바짝 수축되었다.
“말도 안 돼! 아버지가 갑자기 그러실 리 없잖아!”
“황도 기사단장이 시체를 수습했고, 주인님께서 집사에게 유언을 남기셨답니다.”
그녀가 벌벌 떨리는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럴 리가……!”
기사의 뒤로 조슈아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자.”
“조슈아…… 아버지가…….”
“놀란 건 알지만 일단은 황도에……!”
“친척들에게서 가문을 지켜야 해! 원로원! 원로원에…… 아, 원로원은 내가…….”
조슈아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그게 중요해?!”
“아, 아아……!”
그녀는 사고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에이레네는 성녀에 걸맞게 자애롭고, 유한 성품을 가졌다는 말이 각지에서 들려왔다.
지금껏 오만하고, 잔인한 품성을 숨겨 왔다고 해도 이상하다. 그렇게 교활한 사람이 단번에 무너지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순간 예전에 들었던 조슈아의 말이 생각났다.
[그 애는 지금 복용 중인 진통제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해.]
‘저 애가 먹는다던 약 때문이구나!’
키에엑! 진원지를 알 수 없는 비명이 들리고 쿵! 조슈아가 나무 기둥에 처박혔다. 나무가 술렁이고, 푸드덕! 새의 날갯짓 소리가 적막을 지웠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그는 흘러내리기 시작한 에이레네의 얼굴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손목 안 반점이 점점 커지더니 손에서부터 목 끝까지 온몸이 새카매졌다.
나는 그것을 보고 슈라의 마을에서 삿된 자가 되었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와 몹시 비슷한 모습이다.
‘에이레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아탈란의 실험체였던 거야.’
나는 마원을 손에 쥐고 주춤, 뒷걸음질 쳤다.
‘멀린.’
귓가에 작은 목 울림이 들려왔다. 그때 에이레네가 어깨를 파르르 떨며 팔을 감쌌다.
“싫어……, 안 돼.”
“에이레네!”
조슈아가 그녀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가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 나를 끌어당겼다.
“저하!”
나를 품에 안은 도미니크가 서늘한 얼굴로 에이레네를 노려보았다. 검은 오물 덩어리 같은 것이 나와 도미니크를 향해 날아왔다. 그는 내 허리를 잡고 신속히 몸을 틀었다. 쾅! 오물에 맞은 나무 기둥이 갈라지며 염산이라도 닿은 것처럼 녹아내렸다.
“흑, 흐윽, 흑.”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가 화살처럼 귀 안을 가로지르는 것만 같았다. 눈이 새카매진 에이에레는 검은 눈물을 흘렸다. 목 위로 반점이 핏줄처럼 도드라져 올라오기 시작했다.
“거짓…… 말…… 실험은…… 성공했다고…… 아탈란!”
궤에엑! 지네 다리 같은 것이 나를 향해 날아들기 무섭게 도미니크가 검으로 그것들을 베어 냈다. 하지만 그 하나로 모든 다리를 막아 낼 순 없었다.
“멀린!”
내가 소리치자 마원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크르릉! 거대한 사자가 에이레네를, 아니, 삿된 자를 향해 포효했다. 멀린이 순식간에 뛰어들어 앞발로 그녀의 몸을 찍어 눌렀다. 검은 핏줄이 멀린의 발을 향해 몰려들다 주춤, 물러났다.
쾅! 쾅! 빛과 어둠이 마주칠 때마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늘어진 촉수가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러나 완전한 삿된 자가 되지 않은 에이레네의 힘으로는 멀린을 벗어날 수 없었다. 멀린이 삿된 자의 목덜미를 거칠게 물어뜯자―
“끼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었다. 검은 오물이 잡초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순간, 에이레네와 시선이 마주쳤다.
“센!”
조슈아가 나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쉬익―! 빠져나온 촉수가 나를 향했다.
“아……!”
눈을 꽉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격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살그머니 눈을 뜨자 어느새 다시 도미니크의 품 안에 있었다. 희미하게 웃는 도미니크를 올려다보았다.
“저하…….”
“괜찮아.”
다정한 목소리. 상냥한 눈빛. 그리고 촉수에 꿰뚫려 검게 물들어 가는 어깨. 그의 등 뒤로 가냘픈 목소리가 들렸다.
“조율자는 내 것……. 조율자…… 도미니크…….”
도미니크의 어깨를 꿰뚫은 부분부터 점점 촉수가 굳어지기 시작하더니 종국엔 그녀의 다리, 몸통, 팔이 모두 돌덩이처럼 변했다. 그리고 멀린의 포효와 함께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도미니크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를 끌어안았다.
“저하.”
“…….”
“저하……!”
뒤늦게 알베르가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귓전에서 들리는 이 소리가 언제나와 같은 이명인지,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인지 나는 도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 *
도미니크는 어두운 길을 걸었다. 악의와 모멸, 스승님의 질책이 등 뒤로 모질게 달라 붙였다. 유년이 꼭 지금과 같았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끔찍했던 시절 말이다.
[죽이지 않으면 죽습니다.]
[이 노병(老兵)이 죽어도 저하께선 시체를 방패 삼아 적군을 죽이셔야 합니다.]
‘알고 있어, 빌어먹을 늙은이.’
결국은 그리했다. 죽은 스승의 시체를 방패 삼아 전장에서 승리했다. 승리의 보상은 자신을 키운 스승의 시체조차 묻어 줄 수 없는 허무였다.
[나는 다 알아. 친구가 있는 걸 보면 이건 꿈이지?]
검은 머리의 깡마른 여자애가 움찔움찔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 쳤다. 아주 어릴 적 자주 꾼 꿈에서 나온 여자애였다. 저보다 더 깡마르고, 저보다 더 털을 바짝 곤두세우고 주변을 경계했다. 그런 주제에 그의 팔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걱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파……?]
‘몰라.’
[거짓말. 아파 보이는데…….]
‘글쎄.’
상처를 고통스럽다고 느꼈던 적이 아주 오랜 옛날의 일이라 잘 모르겠다.
[우리 선생님이 그랬는데…… 아프면 아프다고 해도 된다고…….]
제 스승님은 아프다고 호소하면 검집으로 머리를 후려쳤다. 도미니크는 우물쭈물하며 포르르 다가오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녀석을 찾아 헤매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와 꼭 닮은 미소를 짓는 여자를 찾기 전까진 그러했었다.
“저하…….”
꿈속으로 스며든 목소리에 도미니크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가야겠다. 그녀가 걱정하기 전에.
눈을 뜬 도미니크는 침대 끄트머리에 기대 잠들어 있는 세니아나를 보고 픽 실소를 흘렸다. 얼굴이 눈물 자국으로 온통 엉망이었다.
“이미 걱정시켰나 보군.”
“맞습니다.”
문가에 서 있던 알베르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못 피하십니까. 전장에서 구른 세월이 아깝군요.”
밉살맞은 말에 도미니크는 대꾸 없이 몸을 일으켰다. 세니아나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히고서야 알베르를 돌아보았다.
“에이레네 사비에르는?”
“혈육이 자살로 종결짓자고 하더군요.”
“개소리. 괴물로 변해 신수의 손에 죽었다는 것을 제국 전역에 퍼뜨려라.”
알베르는 기가 찬 헛웃음을 흘렸다. 속이 빤하다. 에이레네가 세니아나와 동일 선상에서 언급되는 게 싫은 것이다.
“몸은 어떠십니까.”
도미니크는 셔츠 안을 살폈다. 검게 물들었던 부근이 어느새 문양에 뒤덮여 사라졌다.
“늘 마찬가지지.”
전장에서 부상당했을 적에도 이러한 문신이 생기고, 금세 회복했다. 그때는 신관 어미로부터 물려받은 정화 능력이 회복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조율자.’
에이레네 사비에르는 분명 자신을 조율자라 불렀다.
“알베르. 조율자라는 것을 조사해 둬라.”
“이미 정보 길드에 접촉했습니다. 치료는 더 받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그래.”
“영애가 걱정을 덜겠군요.”
도미니크는 끙끙거리는 세니아나의 머리를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으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당분간 일정을 취소해라.”
“몸은 괜찮으시다지 않았습니까.”
“엄살을 피울 예정이니까.”
알베르는 뻔뻔한 표정의 도미니크를 보고 실소를 흘렸다. 제 주군이 언제 저렇게 교활해지셨는가.
‘흠.’
그것도 며칠 못 가겠지만.
그는 손에 들린 3차 시험 심사자의 신상 명세를 보고 야비하게 웃었다. 프렌시프의 어르신이 얼마나 로열 키친을 발칵 뒤집었는지, 몇 시간 만에 3차 시험 심사자가 결정되었다. 도미니크보다 더 교활한 남자로.
나는 울먹이며 도미니크를 쳐다보았다.
“아파요? 많이 아파요?”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어깨가 꿰뚫렸는데…….”
나 때문에 다친 도미니크를 두고 잠들어 버리다니. 멀린을 불러냈더니 몸이 말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쓰러지듯 눈을 붙인 거라곤 하지만, 정말로 미안했다. 도미니크는 침대 헤드에 기대 내게 손을 뻗었다.
“화는 다 풀린 겁니까?”
“화? 아, 에이레네가 저하를 안았지요…….”
“등에 부딪친 거죠. 삿된 자가.”
“끌어안은 거잖아요.”
“접촉 사고 같은 겁니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몸이……!”
나는 알베르를 보고 왜 의사를 얼른 데려오지 않느냐고 닦달했다. 그러자 알베르는 도미니크를 쏘아보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영애가 잠드셨을 때 왔다 간 것으로 하지요.”
“네?”
“진료하고 돌아갔습니다.”
나는 다시 도미니크를 보았다.
“의사는 괜찮다고 하나요?”
“당분간 요양해야 하지만요.”
“그렇구나……. 제가 도와 드릴게요!”
“괜찮습니까?”
도미니크가 고개를 모로 꼬고 묻기에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테스트도 끝났고, 이제 에이레네도 없으니까 3차 시험 심사자가 올 때까지는 한가해요!”
“그럼 부탁할까요.”
“네, 네.”
나는 도미니크를 얼른 눕히고, 알베르가 가져온 사과를 샥샥 깎아서 접시에 잘 놓았다.
“입맛 없어도 드세요. 그래야 얼른 나을 거예요.”
“아.”
그가 입을 벌렸다.
“……제가 먹여 드려요?”
“요양을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사과를 먹여 주는 것쯤은 어려운 게 아니지만. 나는 알베르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는 도미니크를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곤 허리를 깊게 숙였다.
“저는 이만.”
왠지 쫓아낸 것 같은 기분이라 민망해하고 있는데 도미니크가 다시 말했다.
“어서요.”
“어리광쟁이 같아요.”
“안 됩니까?”
“환자는 괜찮아요.”
도미니크에게 사과를 물려주자 그가 내 손까지 살짝 깨물었다. 눈을 크게 뜨니 픽 웃고는 내 눈을 문질렀다.
“눈이 부었습니다.”
“그야 걱정했으니까.”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가 내 눈에 촉, 입 맞췄다. 나는 얼굴이 발그레해져서 슬쩍 물러났다.
“그, 시, 식사…… 제대로 된 식사를 하셔야죠. 제가 만들어 올게요.”
내가 일어서려고 하니까 도미니크가 제 어깨를 쥐었다. 난 화들짝 놀라서 얼른 다시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아픈 거지요! 의사가 돌팔이인가 봐!”
“옆에 있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사과도 계속 먹여 주고.”
“네!”
“가끔 입도 맞추고.”
“……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나를 쳐다보며 윽, 하고 신음을 뱉었다.
“알겠어요!”
그가 내 쪽을 향해 살짝 얼굴을 기울여서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눈을 꽉 감고 쪽, 입 맞췄다. 도미니크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이게 진짜 요양을 돕는 건가?’
내가 한 거라곤 사과를 먹여 주고, 함께 책을 읽고, 종알종알 떠들다가 그가 얼굴을 내밀면 눈이나 볼, 코에 입 맞추는 것뿐이었다. 의아해하면서 걷는데 기숙사 앞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조슈아.’
핏기없는 얼굴과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보고 난 잠시 침묵했다. 그러자 조슈아가 먼저 다가왔다.
“줄 것도 있고, 부탁할 것도 있어서.”
“뭔데?”
조슈아는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에이레네의 팔찌에 달려 있던 포털 마원이었다.
“이걸 왜?”
“언젠가 네가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머뭇거리니 그가 직접 내 손 안에 마원을 올려 주었다. 에이레네의 마원이 닿자마자 작은 동물이 기지개 켜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라서 마원을 보다가 다시 조슈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부탁은 뭔데?”
“날 황도로 보내 줘. 아버지와 동생의 장례는 치러야 하니까.”
“…….”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건 알아. 보답할 거다. 사비에르 후작이 되어서.”
“원하지 않잖아. 다른 곳으로 보내 줄 수도 있어. 길라게온이 아닌……!”
“남겨진 것들에겐 죄가 없으니 지키러 가야 해.”
“하지만…….”
“멍청이.”
그는 쓰게 웃었다.
“누가 누굴 걱정해.”
“어?”
그가 어떤 책으로 내 이마를 툭 쳤다.
“시험, 잘 봐라.”
책을 펼친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조슈아의 레시피 수첩이었다. 요리사에겐 천금과 같은 재산이라 난 당황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아소.”
“조슈아지.”
“못 받아. 이건 네게 소중한 거잖아.”
“더 소중해질까 봐 도망치는 거다.”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또 한 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중해질까 봐.”
나는 쉽사리 대꾸할 수 없었다. 그가 얼마나 큰 정열을 요리에 품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슈아는 고개를 떨군 내게 손을 뻗으려다가 다시 주먹을 말아 쥐었다.
나는 조슈아를 황도로 이동시켜 주었다. 떠나는 그를 보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자꾸만 우울해질 것 같아서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아빠의 생일 선물.’
란슬롯, 가웨인과 함께 논의하려고 프렌시프 영지로 통신을 연결했다.
[예, 아가씨.]
집사장이 받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오빠들은?”
[잠시 영지를 떠나셨습니다.]
“무슨 일 있어?”
[큰일은 아닙니다.]
“할아버지도 황도에 계시는데 괜찮을까…….”
통신석에서 마담 버지니아가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르신이 안 계신다고 일을 이따위로 하는 거냐는 둥, 그런 꼴은 내가 못 본다는 둥.
[―이런 상황이라.]
“으음, 든든하네.”
[그렇죠.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야. 오빠들에게 직접 얘기할게.”
[예.]
통신을 종료하고 나는 턱을 괴었다.
‘생신이 열흘도 안 남았는데 어쩌지.’
그런 생각을 하며 베개에 푹 기댔다. 그런데 꾸앙―! 자꾸만 에이레네의 마원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멀린의 마원이 위협하듯 크르릉거려서 깜짝 놀랐다. 에이레네의 마원은 기죽은 듯 금세 조용해졌다.
‘뭐야, 무서워.’
나는 마원들에 살짝 손수건을 덮어 책상 위에 놓고 씻으러 갔다.
방 안에 있는 작은 욕실에서 씻을까 했는데, 오늘은 따뜻한 물에 들어가고 싶어서 공용 욕실에 갔다. 스위트피가 옷을 벗다가 나를 보며 아는 체를 해 왔다.
“센! 안녕?”
“안녕!”
“들어갈 거야?”
“응.”
“그럼 같이 가자.”
다른 애들도 나와 함께 씻자며 다가왔다. 나는 애들과 함께 서로 등에 거품칠을 해 줬다. 그러고 따뜻한 물 안에 들어가 헤롱헤롱한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했다. 여자애들이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쳐다봤다.
“함께 목욕해 줘서…….”
“센은 별 걸 다 고마워한다니까~! 왜? 또 뭐 하고 싶은데? 다 해 줄게!”
“정말로?”
스위트피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그, 그러면 같이 요구르트 마셔 줄래?”
“요구르트?”
“음, 요거트!”
“그게 뭐 어렵다고. 두 잔도 마셔 주지.”
얘들은 천사인가 봐……. 나는 상냥하고, 친절하고, 다정한 학우들에게 엄청 감동했다.
다음 날 아침, 난 오전 수업 전에 도미니크를 간병하기 위해 그의 숙소로 갔다. 어제 스위트피를 비롯한 여자애들과 함께 만든 요거트를 그에게 건네고 종알종알 떠들었다.
“―그래서요, 어제 목욕은 정말로 좋았어요.”
도미니크는 발그레해진 내 뺨을 보고 픽 웃었다. 그러곤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온 것만 같은 알베르에게 말했다.
“공용 욕실을 개축해라.”
“……여기서 제게 더 일을 시키시겠다고요?”
“당장.”
도미니크의 말에 알베르는 소리 없이 절규했다.
“저하, 부관은 소중하게 여기셔야 하잖아요.”
저러다가 과로사하면 어쩌려고. 내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알베르의 얼굴이 단숨에 밝아졌다.
“맞습니다. 누가 게으름을 피우셔서 아카데미 일도 다 제 몫이 되었습니다, 영애.”
“으음, 하지만 이번엔 저하가 아프시니까 어쩔 수 없지요.”
“그건 다 사기……!”
퍽! 알베르의 옆으로 포크가 박혔다. 나는 깜짝 놀랐고, 도미니크는 “이런.” 하며 손목을 털었다.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아서 조절이 어렵군요.”
“네?”
“얼굴에 꽂아 버리려고 했는데.”
그런 무서운 소리를!
“왜 그렇게 거칠게 애정 표현을 하세요…….”
나는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알베르가 새하얗게 질려서 웅얼거렸다.
“그게 아니라 협박…….”
뭐라고 막 웅얼거렸는데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물어볼까 했지만, 알베르가 내 뒤에 도미니크를 보더니 허겁지겁 문을 나섰다.
“저, 저는 그만―!”
“……?”
다시 도미니크를 돌아보자 그는 다정하게 웃었다.
“산책하러 갈까요?”
“하지만 사람들이 보면 안 되잖아요.”
“근방 숲에 출입을 통제해 놨습니다.”
“그래도…….”
그가 다시 자신의 어깨를 잡는 모습에 나는 펄쩍 뛰며 가자고 말했다. 도미니크가 픽 웃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혹시라도 숲에 가는 걸 누가 볼까 봐 포털로 이동했다. 이제 가을이라 바람이 선선한 데다, 숲이 조금씩 붉게 물들고 있어서 산책하기 딱 좋았다.
“나오길 잘했다.”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니 도미니크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손잡을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레이디.”
“그런 거 안 어울린다니까요?”
“로맨틱한 쪽이 취향이라기에.”
“정말…….”
나는 새초롬하게 그를 보고 덥석 손을 잡았다. 우리는 한가로이 걸었다. 도미니크의 손은 따뜻하고, 풍경은 예뻐서 자꾸만 가슴이 콩닥콩닥 설렜다.
“저하.”
“예.”
“있잖아요…….”
내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하자 도미니크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무슨 일인가요?”
“조슈아요. 아, 아소인데 원래 아카데미 학생.”
“압니다.”
“후작이 되어야 해서 요리는 하지 않기로 했나 봐요.”
“그렇습니까.”
“제가 저하와 이어지면 저도 요리를 할 수 없게 되겠지요? 황자의 아내니까.”
“그럼 황자의 권리를 포기하죠.”
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그래도 돼요?”
“예.”
“하지만 그러면 공작님이 되시는 게 아닌가요? 올리비에 공작처럼.”
나는 ‘저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건가, 황족의 권리라는 게…….’ 생각하며 그가 놓지 않은 손을 조금 더 꽉 잡았다.
“작위가 있다고 대외 활동을 무조건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럼요?”
“저는 살림을 하겠습니다.”
나는 킥킥 웃으며 그를 쳐다봤다. 가정주부가 된 도미니크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빨래는 할 줄 아세요?”
“배우겠습니다.”
“설거지는?”
“그릇을 물에 씻어 내는 건 종기사 시절에 해 봤습니다.”
“잘하셨어요?”
“두 번은 시키지 않더군요.”
“음, 제가 돈을 많이 벌어야겠네요. 사용인들이 필요하겠어요.”
그렇게 말하니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청혼할 테니 됐습니다.”
그가 나를 살짝 끌어안았다. 나는 따뜻한 품에 얼굴을 비비며 그의 등을 꼭 껴안았다. 이런 실없는 이야기를 이 남자와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었다.
* * *
도미니크는 말간 눈으로 자신을 보는 세니아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와 나눈 모든 이야기는 농담이 아니었다. 원하는 건 뭐든지 해 주고 싶다. 가정주부가 아니라 황제가 되어 달라 한다면 황위를 찬탈하리라. 언제부터였을까. 이 사람의 바람에 인생을 걸고 싶어진 건.
도미니크는 그녀의 뺨을 가볍게 감싸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세니아나의 눈꺼풀이 조금씩 내려갔을 때였다. 목에 걸린 그의 통신석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도미니크가 받지 않자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안 받으세요?”
“됐습니다.”
“하지만 급한 일일 수도 있잖아요.”
미카엘이 반역을 일으켰다는 말 외엔 이 상황에서 더 급한 일은 없다. 도미니크는 소리 없이 혀를 차고 통신석을 조작했다.
[저하.]
“용건.”
[3차 시험 심사자가 도착했습니다.]
킬킬거리는 야비한 웃음소리가 통신석에서 흘러나왔다.
[3차 시험 심사자로 오신 프렌시프 경이 영애를 뵙길 청하십니다.]
뭐? 도미니크가 미간을 좁히기 무섭게 세니아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오빠는 어디 있어요?”
[교장실에 계십니다.]
세니아나는 환히 웃고 포털을 열었다. 도미니크와 함께 단숨에 교장실로 이동했다. 란슬롯이 빙그레 웃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빠!”
그가 팔을 벌리자 세니아나는 냉큼 달려갔다.
“잘 있었어?”
“네.”
“사비에르의 성녀가 괴물이 되었다던데.”
“다치진 않았어요. 하지만 저 대신 저하가…….”
세니아나가 우울한 표정으로 도미니크를 바라보았다. 란슬롯이 화사하게 웃으며 도미니크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프렌시프의 보물을 구해 주셨으니 마땅히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죠. 돈으로 보상하겠습니다.”
“돈은 차고 넘쳐서. 다른 것으로 받죠.”
“보그를 보내겠습니다.”
“그 또한 마음에 차는 선물은 아닙니다, 형님.”
“과분한 호칭 거두십시오.”
“전혀. 존경하고 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존경은 다른 분께 넘기죠. 르마르 영식이라던가.”
도미니크가 고백을 거절했던 영애의 가문이었다.
“르마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세니아나가 침음을 흘리던 차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가웨인이 들어왔다.
“마차로 기숙사를 부숴 먹었다.”
알베르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한 치만 벗어나면 과로사가 눈앞에 있는데 뭘 부쉈다고? 가웨인이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는 태연하게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아주 송구하다.”
그러자 란슬롯이 곤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다시 지어야겠군요.”
“내 실수니 돈은 이쪽에서 내지.”
“업자들도 저희 쪽에서 부르겠습니다.”
알베르는 허허 웃으며 사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황후는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사비에르 후작은 자진했고, 에이레네 또한 괴물이 되어 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이 제국 전역을 뒤덮었다.
‘내 아들의 혼약자가 괴물이 되었다고……!’
그때 황후궁의 시녀장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폐하!”
황후가 다급히 시녀장을 붙들었다.
“거짓이지? 그렇지? 에이레네가 그리 죽을 리 없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애는 언제나와 같았다.
[저를 동부 아카데미로 보내 주세요. 폐하께서 원하시는 바를 제 손으로 이뤄드리겠습니다.]
차분하고 자신만만한 어조. 품격 있는 태도와 우아한 눈빛. 어디에서도 흉물스러운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시녀장이 새파래진 얼굴로 속삭였다.
“도미니크 황자가 괴물이 된 사비에르 양을 처리하였답니다.”
“말도 안 돼! 도미니크의 계략인 것이다! 거짓이야!”
“아발론에 사비에르의 장자가 들어 괴물이 된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 증언하였습니다.”
“사비에르의 장자?”
“조슈아 사비에르입니다. 마침 동부 아카데미에 있던 모양입니다. 로열 키친에서 재학생 명단을 확인했는데 사실이었습니다.”
“정신 빠진 놈! 제 오라비가 시체에 먹물을 뿌리는구나!”
쾅! 테이블을 내리친 황후가 이를 악물었다.
* * *
중앙탑(금좌 11석의 회의가 이뤄지는 길라게온 권력의 중추).
아서는 나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아서와 언쟁을 벌이던 라가세 백작이 흠칫하여 인상을 찌푸렸다.
“프, 프렌시프 영애와 엮이면 매번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소. 콜린 백작도……!”
“약쟁이가 약을 하다 실성한 것이 내 딸과 무슨 상관이지.”
“동부에 가기 전까진 멀쩡하던 인사요!”
“샤르파크 후작의 생각도 그런가.”
아서는 금좌 11석 중 유일하게 콜린 백작과 친분이 있는 샤르파크 후작을 쳐다보았다. 그가 양손을 들어 올리며 난색했다.
“나는 그 얘기에서 빼 주시오.”
그러자 오만하게 다리를 꼬고 있던 나베리우스가 눈썹을 까딱 들었다.
“여기서 공을 빼면 어찌해. 그 약이 누구 손에서 나왔겠는가.”
샤르파크 후작의 이면이 어둠의 세계를 주름잡는 마약왕이라는 건 금좌 11석 사이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빌어먹을.’
콜린 백작이 약의 공급량을 늘려달라 애걸할 때부터 찜찜하더라니. 실성한 콜린이 약에 중독되어 객사한 일로 황제가 마약 유통을 본격적으로 단속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프렌시프와 척을 지면…….’
아서와 나베리우스가 마음에 안 들긴 하다만, 지금은 달리 도리가 없었다. 샤르파크 후작은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했다.
“콜린 백작이 생전에 약물을 대량으로 사들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군. 스스로 사들였으니 영애와 연관 지을 일이 아니지.”
그제야 아서가 시선을 돌리고 라가세 백작을 쳐다보았다.
“더 할 말은?”
“하면 사비에르 영애의 일은 어떻게 설명할 거요! 길라게온의 수선화라 불리던 이가 어찌 타지에서 괴물이 되어 죽는단 말이오!”
“그건 사비에르 후작의 시체에 대고 묻든가 하시지.”
“하지만 동부 아카데미에서 난데없이 일어난……!”
백작이 소리치자 아서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
“나도 에이레네 사비에르가 왜 하필 괴물이 되기 직전에 내 딸이 있는 동부 아카데미로 내려간 건지 몹시 궁금해.”
그러자 이때까지 침묵하던 르마르 공작이 마른침을 삼켰다. 로열 키친을 들쑤셔 에이레네를 심사자로 보낸 건 그였다.
‘젠장, 황후의 청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었는데.’
줄을 잘못 잡았다. 이번 일에 엮이면 가문의 기둥이 몇 개가 날아갈지 모른다. 그가 헛기침하며 말했다.
“라가세 백작은 왜 그리 프렌시프 영애를 물고 늘어지는 거요.”
“내가 무슨……!”
“프렌시프 양은 우연히 동부 아카데미에 있었을 뿐이지 않소. 사비에르의 성녀가 사실은 괴물이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될 일을 왜 이리 어렵게 만든단 말이오.”
“아니, 이 사람이……!”
“이미 조슈아 사비에르가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지 않았소. 혈육이 확인했다는데 여기서 더 물고 늘어질 까닭이 없네.”
두 사람의 설전을 지켜보던 나베리우스는 입꼬리를 느른히 끌어당겼다. 조슈아 사비에르는 말이 통하는 녀석이었다.
[네 혈육이 벌인 일이니 네가 수습해야겠지. 내 칼에 부자의 피가 차례로 묻는 건 서로에게 유쾌한 일이 아닐 거다.]
[협박하지 않으셔도 압니다. 이미 퍼진 소문이라면 모두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겠습니다.]
나베리우스가 탁자를 내리쳤다.
“내 손녀를 모욕하고 싶다면 장갑부터 던지게.”
아서가 목을 주무르며 가볍게 덧붙였다.
“결투에 걸리는 건 명예가 아닌 명줄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아서와 나베리우스의 협공에 다른 금좌들은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회의가 파하고 프렌시프 부자가 돌아간 뒤. 라가세 백작이 회의장에 마지막까지 남은 남자를 보고 흠칫, 어깨를 좁혔다.
“고, 공…….”
남자의 시선이 라가세 백작을 향해 돌아가자 그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소, 송구합니다. 다음 일은 절대로 그르치지 않도록 잘 단속하겠습니다.”
“그래야 할 것이다. 그 목, 온전히 붙여 놓고 싶다면.”
남자가 가라앉은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타르의 사신으로 줄리아 리올이 오는 것은 확실하겠지?”
“물론입니다.”
“확실히 마음을 얻어야 한다. 그 늙은이가 황제와 들러붙으면 골치 아파질 테니.”
“예, 옛! 이미 늙은이가 쥔 것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겠습니다.”
라가세 백작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 * *
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부서진 기숙사 외벽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부쉈잖아.’
학생들은 꺅꺅거리며 양 볼을 감쌌다.
“교장이 황자라 좋기는 하네. 프렌시프 경들이 다 오시고!”
“란슬롯 님은 정말 소문처럼…… 아아.”
여자애들은 란슬롯을 말하며 앓는 소리를 뱉었고, 남자애들은 가웨인을 부르짖었다.
“크―! 내 눈으로 동부 최고의 기사를 보다니.”
“생각했던 것처럼 끝내주지는 않던데. 얄쌍한 게.”
“그게 다 실전으로 다져진 근육이라는 거 아니냐!”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사실은 그렇게 멋지지 않은데.’
가웨인만 해도 마부 없이 혼자 마차를 몰다가 이 사달을 내지 않았는가.
“테스트 성적 붙었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학생들이 우르르 뛰어갔고, 나도 허둥지둥 게시판으로 향했다. 난 기도하듯 양손을 맞잡고 눈을 감았다.
‘제발.’
10등 안에만 들면 돼! 그렇게만 되면 로열 키친 입관이 꿈만은 아니었다. 살짝 실눈을 떴다.
[수석, 센]
‘선생님!’
나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교수들의 반응이 좋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야.’
싱글벙글해서 성적 명단을 바라보고 있는데 주변에서 헉,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란슬롯과 가웨인이 교수들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란슬롯이 빙그레 웃으며 중얼거렸다.
“시험 결과인가 봅니다.”
“그렇습니다.”
“수석이 센, 이라. 귀여운 이름이군요.”
아니, 저 오빠가!
나는 혹시라도 내가 오빠들의 동생이라는 걸 들킬까 봐 겁이 나서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레아 교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름만큼 귀여운 학생이지요. 습득력이 빠르고, 성실해서 가르치는 보람이 있습니다.”
가웨인이 작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리하고, 착하고, 성실하고, 사랑스럽고, 뭘 해도 귀엽다니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군.”
“그렇게까지 말씀드리진 않았습니다만…….”
“그러니까 보자고. 어떤 사람인지.”
나를 발견한 교감이 흐뭇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센.”
“……네, 교수님.”
“이리 오렴.”
학생들이 부러운 듯 나를 주목해서 정말로 쥐구멍에 숨고 싶어졌다. 란슬롯은 교수들에게서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다며 나와 따로 걷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심사자보다 학생들을 우선하시죠.”
“세상에나.”
교감과 교수들은 감동한 얼굴이었고, 나는 그의 뻔뻔함에 한숨을 삼켰다. 교수들이 떠나고 우리 남매는 함께 교내를 걸었다. 사람들이 없는 곳에 이르러서 오빠들을 쳐다보았다.
“정말로 3차 시험을 오빠들이 심사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가웨인이 뻔뻔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부정행위잖아요.”
“좋은 성적을 주겠다고 한 적 없는데?”
“가족이 심사하는 것부터 문제라고요. 제가 졸업하고 나면 다들 신분을 알 테니 여기저기서 말이 나올걸요?”
학부모 상담 때 내 신분을 안 교수들이 깡그리 쫓겨나서 망정이지 아니었더라면 벌써 소문이 났을 거다. 란슬롯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
“네?”
“말이 안 나오게 할 방법이야 많으니까.”
여느 때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데 어쩐지 오싹하게 느껴졌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으니 가웨인이 씩 웃었다.
“내일은 주말이니 쉬겠군.”
“그렇긴 한데…….”
“나가자.”
“우리끼리요?”
“그래.”
“안 돼요.”
나는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미간을 좁혔다.
‘누가 보면 어떻게 해.’
가웨인이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그럼 어쩔 수 없군.”
“네?”
“센 양은 이번 시험 꼴찌인 걸로.”
“비겁해!”
내가 울상을 지으며 란슬롯을 쳐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안 되지.”
역시 란슬롯! 활짝 웃으려고 했는데 그의 말이 이어졌다.
“꼴찌는 눈에 띄니 하위권 정도로 해야―”
“안 돼요!”
내가 울상을 지으니 가웨인이 허리를 굽혀 나와 시선을 맞추고 빙글빙글 웃었다.
“가 주면 제대로 심사해 줄 수도 있고.”
“치사해요…….”
란슬롯이 쿡쿡 웃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버지 생신 선물도 살 겸.”
“아, 아빠 선물이요?”
“사람들 눈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어쩐지 불안했지만, 아빠의 선물은 사야 했다. 난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나는 오빠들과 함께 이동했다. 그곳은 아카데미 근처에서 가장 큰 잡화상이었는데, 판타지 게임에 나올 것 같은 커다란 2층 오두막이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없을까?’
내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란슬롯을 보니 그는 잘됐다며 나를 끌고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생신 선물은 뭐로 할 거야?”
“으음, 그걸 잘 모르겠어요. 다른 애들은 모자 같은 것을 줬다는데 아빠는 머리카락도 많고…….”
게다가 지금은 초가을이라 모자를 쓰기엔 덥다. 아무래도 다가오는 겨울에 쓸 수 있는 물건을 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난 오빠들과 함께 가게 안을 구경했다. 물건이 이것저것 많아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아, 예쁘다.’
유리로 된 모조 꽃 장식품이 눈에 들어왔다. 화병 안에 작약이 들어있는 형태인데, 작약 꽃송이 안에 조그만 요정 모양 인형이 있었다. 꽃잎을 톡 건드리니 금세 꽃이 오그라져 요정을 숨겨 버렸다.
“수줍은 시계랍니다.”
점원이 싹싹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 알려 주었다.
“이게 시계라고?”
점원이 화병을 들고 밑에 있는 다이얼을 조작했다. 그러자 다시 꽃송이가 만개하며 요정이 수줍은 얼굴로 나타났다.
[주, 주인님, 일어나셔야 하는데…….]
―하고 웅얼거리며.
귀여워!
“레이디와 잘 어울리지요?”
내가 눈을 반짝이니까 점원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얼마야?”
“마법사가 제작한 상품이라 가격이 제법 나간답니다. 만이천 피니지요.”
난 헉, 숨을 들이켰다. 한화로 치면…….
‘천삼백만 원?!’
얼른 고개를 젓고 수줍은 시계를 내려놓았다.
“다른 걸 볼래.”
그러자 가웨인이 다시 시계를 집고 점원에게 말했다.
“계산.”
“안 돼요! 싫어요! 안 받을 거예요!”
내가 단호히 고개를 젓자 가웨인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형, 아무래도 센 양은 꼴찌가 하고 싶은 모양이야.”
“그래? 유감인데.”
나는 당황해서 뻔뻔한 표정의 란슬롯과 가웨인을 번갈아 보았다.
“이런 게 어딨어요!”
“꼴찌?”
가웨인이 오만하게 웃으며 점원이 가져온 영수증에 인장을 찍었다. 이런 일이 한 번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뭔가를 볼 때마다 “꼴찌?” 하면서 자꾸만 계산하려고 해서 심장이 쪼그라들 것 같았다. 얼른 나가자고 애걸하자 란슬롯이 물었다.
“더 안 보고?”
“안 볼래요. 못 보겠어요…….”
그는 낮게 웃고 내 볼을 살짝 두드렸다.
“장난은 그만할까?”
“제발.”
“여기 있을 테니 천천히 보고 와.”
“……정말이에요?”
“그래.”
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가웨인을 돌아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오늘은 그만하지.”
그제야 난 마음을 놓고 아빠의 생일 선물을 고를 수 있었다. 이 층으로 올라가서 끙끙 고심하며 상품을 둘러보았다. 그런 날 보고 점원이 상냥한 어투로 물었다.
“찾는 물건이 있으신가요?”
“아빠 생신 선물을 사려고 하는데…….”
“요새는 수제품을 많이들 하더군요. 곧 겨울이니 이런 것으로 직접 만들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점원이 가져온 것을 보고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금술사 시온의 솜씨랍니다. 보온 마법이 깃들어서 아주 따뜻하고 포근하지요.”
“괜찮다―! 색은 어떤 게 있어?”
“이쪽으로.”
점원이 보여 주는 물건을 보던 나는 선물 중 하나를 이것으로 결정하기로 했다. 점원에게 계산을 부탁하고, 따라 내려가려다가 쇼케이스에 보이는 물건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저 만년필, 볼 수 있어?”
“아버님 생신 선물로는 다소 디자인이 가벼운 편인데요.”
“아니, 다른 사람에게 선물할 거라서.”
검고, 늘씬한 만년필이 그의 손에 꼭 어울릴 것 같았다. 펜촉과 하단부에 있는 가는 링이 진짜 금이라서 우아하고, 고급스러웠다.
“캡에 보석을 박을 수 있는데, 어떤 것으로 하시겠어요?”
“으음…….”
“아가씨의 머리칼과 같은 에메랄드라면 선물 받는 분께서 기뻐하실 거예요.”
“그, 그럴까?”
“그럼요.”
나는 발그레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저기……. 만년필은 다른 사람들 모르게 살짝 줬으면 좋겠는데…….”
“그리하겠습니다.”
점원은 정말로 가게를 벗어나기 이전에 내 주머니에 살짝 만년필 상자를 넣어 주었다.
‘저하가 좋아하실까.’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내내 나는 가슴이 콩닥콩닥 설렜다.
* * *
세니아나가 가져올 것이 있다며 학사 내로 향하고 가웨인은 통신을 연결했다.
“상점 근처에 통행 금지령을 해제해라.”
[예.]
짧게 명한 그가 다시 통신석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러고 학생들이 임시로 머물고 있는 아카데미 근처 호텔과 연락을 취하는 중인 란슬롯을 쳐다보았다.
“세니아나의 방은 어디로 결정했어?”
“로열 스위트룸.”
“저만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걸 알면 또 벌벌 떨 테니 핑계를 만들어 줘야 할 텐데?”
란슬롯은 서늘하게 웃었다.
“당연한 말을.”
그제야 가웨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세니아나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았다.
“받을 땐 모르는 척해야겠군.”
가웨인은 아카데미로 돌아올 때의 세니아나를 떠올렸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주머니를 쥐고 흠칫, 어깨를 좁혔다. 뭔가 몰래 산 게 분명하다. 부친의 생신 선물을 감추진 않았을 테니, 그 선물의 주인은 따로 있을 것이다.
‘나지.’
란슬롯은 픽 웃는 동생을 보고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네 것이 아닐 수도.”
“아니면 줄 사람이 누가 있다고.”
“나라든가?”
“헛소리. 그건 내 거야.”
“착각은 자유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 * *
쟝뤼크는 연구실을 찾아온 도미니크와 알베르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알베르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타르 사신단의 환영 연회에서 솜씨를 보여 주십시오.”
“로열 키친의 셰프들은 장식입니까. 제가 아니어도 될 텐데요.”
다시 로열 키친과 얽힐 마음 따윈 개미 눈곱만큼도 없었다. 정쟁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재주를 썩히는 건 이때껏 겪은 날들만으로 충분했다. 알베르는 한숨을 삼켰다.
‘하여간 저 고집.’
마도 국가 아타르. 과거엔 길라게온과의 전쟁에서 패전하여 왕세자를 볼모로 보내기도 하였으나, 마법사 동맹의 주추가 되며 세를 불렸다. 십여 년 만에 어떤 나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강대국이 된 아타르에선 길라게온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
‘과거의 치욕은 화합을 위한 가시밭길이었다 여기며, 친교의 의미로 왕세자와 재상 줄리아 리올이 직접 길라게온에 방문하겠다’라는 정중한 친서를 보내온 것이다. 길라게온에서도 흡족한 일이라 황제는 이번 아타르 사신단 접대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알베르가 다급히 말했다.
“아타르 왕세자가 직접 쟝뤼크 님의 요리를 맛보고 싶다 청해 왔습니다.”
“로열 키친은 장식입니까.”
왕세자가 볼모 시절 들었던 음식을 요청하는 건 모든 것을 잊겠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아타르엔 그때의 치욕에 이를 가는 호전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고작 요리더라도 원하는 것을 내주지 않는다면, 제국이 여전히 아타르를 무시한다며 꼬투리를 잡아 동맹을 재고해야 한다고 외칠 것이다.
알베르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이리 계속 거절하신다면 서로에게 곤란한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협박입니까.”
쟝뤼크가 눈을 부릅뜨며 알베르를 노려보았다.
“그런 것이 아니라―”
도미니크는 태연하게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스승의 레시피 수첩이 줄리아 리올 손에 있더군요.”
쟝뤼크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그게 왜……!”
“리올 재상이 제자에게 수첩을 돌려주고 싶으니 따로 자리를 마련해 달라 청하였습니다.”
“…….”
“거절하신다면 수첩도 돌려받지 못하시겠죠.”
쟝뤼크가 이를 악물었다. 스승은 뛰어난 요리사였다. 그가 생전에 남긴 레시피는 1,200종. 쟝뤼크는 그의 모든 것을 이어받지 못했다. 스승은 말년에 치매를 앓았다. 치매 환자가 가장 먼저 잊는 것이 바로 요리법이었다. 속절없이 스러지는 기억에 레시피의 행방을 제자에게 전해 주지 못했다.
[내 분명히 그 사람과 만나러 가며 그것을…… 그것을 어디에……, 너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데…… 내 모든 것을 전수해야 하는데…….]
아쉬움에 눈조차 제대로 감지 못한 스승이 떠오르자 쟝뤼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타르 왕세자가 볼모 시절에 위안을 얻은 건 제 요리가 아닙니다.”
도미니크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왕세자 볼모 시기와 경이 로열 키친에 있던 시기가 다르니.”
도미니크는 낮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줄리아 리올을 위해서일 겁니다.”
리올 재상은 그의 장모였다. 젊을 적 외교대신이었던 그녀는 볼모로 간 어린 원자(왕의 장자)를 위해 길라게온을 자주 오갔다. 그러며 쌉싸름한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다. 적국 요리사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였다.
“스승의 레시피 수첩을 돌려받으셔야지 않겠습니까.”
“…….”
쟝뤼크가 쳇, 혀를 찼다.
* * *
쟝뤼크의 연구실에 들어간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으응?’
쟝뤼크는 굳은 얼굴로 조리실에 우뚝 서 있었다.
“교수님.”
“……무슨 일이냐.”
“교재를 가지러 왔어요. 그런데 이건 뭐예요?”
그의 앞에 금방 만든 것 같은 요리가 몇 가지나 있었다. 하나 같이 육류를 메인으로 한 요리였다.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자 그가 픽 웃으며 식기를 건넸다.
“맛보겠느냐?”
“정말이요?!”
쟝뤼크는 내게 여러 가지를 가르쳤지만, 요리를 시연해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교수님의 요리를 잔뜩 맛볼 수 있다니!’
나는 활짝 웃으며 두툼한 스테이크를 썰었다. 5센티는 될 만큼 두꺼운 고기가 엄청나게 부드럽게 썰렸다. 특제 피쉬 소스에 콕 찍어 입에 집어넣자마자 탄성이 흘러나왔다.
“진―짜 맛있어요!”
“육질은?”
“부드러워요.”
“소스는 어때.”
“훌륭하지요.”
그는 라즈베리 소스를 내밀었다.
“이것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잘 어울리지?”
난 고기를 라즈베리 소스에 찍어서 먹어 보았다.
“아무래도 라즈베리 소스 쪽이…….”
“그렇군. 다른 것도 맛봐라.”
나는 스푼으로 테린(육류와 채소, 양념 등을 단지에 담아 굳힌 요리)을 살짝 떴다.
‘젤라틴으로 굳혀서 모양을 잡았네.’
육류층, 채소층이 롤케이크처럼 나뉘어 각각 다른 색으로 반짝였다. 너무 예쁘다.
‘맛은…….’
나는 으으음―! 하고 감탄하며 발그레해진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고기 군내가 하나도 안 나요.”
“그렇겠지. 내가 했는데. 식감은 어떻지?”
“탱글탱글한데 입안에서 삭― 놓아서 목으로 넘어가요. 푸딩처럼.”
“흐음…….”
이렇게 훌륭한 요리를 하고도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만드시려던 요리가 이게 아니었나요?”
“그래.”
“그럼 어떤 요리를……?”
그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모른다.”
“네?”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요리지. 맛본 사람의 기억을 바탕으로 재현해야 한다.”
“굳이 그 요리여야 하나요? 교수님의 요리도 훌륭한데요.”
“내 스승의 요리를 다시 먹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
“레시피는 전혀 모르세요?”
쟝뤼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참 까다롭다. 레시피는 조금도 모르는 데다가 맛본 적도 없는 요리를 재현해야 한다니. 나는 조리대 앞에 서서 그가 만든 음식을 빤히 보았다.
“어떤 맛이었다고 하던가요?”
“식감이 특이했다고 했지. 고기로 만들고, 어류로 만든 소스가 들어가며, 채소와 함께 먹으니 개운하다더군.”
“으음, 교수님도 잘 모르는 요리라면 남부 음식일 수도 있겠어요.”
쟝뤼크는 동부, 서부 음식이 특기니까. 남부 지방 음식이라면 내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남부의 음식은 아시아권 음식과 비슷했다. 쟝뤼크는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스승님은 남부 출신이셨지.”
“식감은 정확히 어땠지요?”
“탱글거리고 쫄깃했다더군.”
“그럼 쌀가루를 썼을 수도 있겠네요.”
떡처럼. 함께 고민하던 우리는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라이스 페이퍼!”
“라이스 페이퍼.”
쟝뤼크가 재료실에서 라이스 페이퍼와 야채, 오리고기를 가져왔다. 나는 재료를 보고 작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스프링롤(월남쌈)이라면 피쉬 소스가 어울리지요.”
“쫄깃하고, 채소와 함께 먹기도 하지.”
쟝뤼크는 그 자리에서 뚝딱 월남쌈을 만들었다. 난 그의 특제 피쉬 소스를 찍어 월남쌈을 맛보고 입을 막았다.
“이것도 너무너무 맛있어요. 소스가 산뜻하고 전혀 비리지 않아서 누구나 잘 먹을 거예요.”
“그래.”
쟝뤼크는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는 당분간 자리를 비워야 하니 그동안 과제를 내주마.”
“앗, 저도 아빠 생신이라서 황도에 다녀와야 해요.”
쟝뤼크는 묘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쉬지 않고 이동해도 몇 달은 걸릴 텐데? 나야 황궁에서 마법 마차를 내준다지만 넌…….”
나는 당황해서 눈을 도르륵 굴렸다.
“그, 마, 말실수였어요. 황도가 아니라 동부예요.”
“흠…….”
“그러는 교수님께선 왜 황궁에 가세요?”
쟝뤼크도 눈을 데구르르 굴리고 떠듬떠듬 말했다.
“황궁이 아니야.”
“하지만 황궁 마차라고 하셨잖아요?”
“그, 그럴 일이 있어!”
갑자기 버럭 소리쳐서 난 어리둥절해졌다. 놀란 내가 시무룩해지자 그는 어물쩍 말을 돌렸다.
“아무튼 넌 먼저 3차 시험을 준비하고 있어라. 모르는 게 있으면 연락하고.”
그러더니 내게 통신석 코드를 알려 주었다.
“연락해도 돼요?”
“하루에 한 번씩만 해.”
“그렇게 많이는 안 해도 되는데…….”
조그맣게 중얼거리는데 그가 나를 홱 쳐다보았다.
“레아 교수에게 물어보지 말고 내게 하란 말이야.”
“……그럴게요.”
쟝뤼크는 커흠, 헛기침하며 내가 조리대에 올려둔 교재를 들려주었다. 나는 그에게 인사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기숙사 대신 쓰고 있는 호텔로 갈까 하다가 걸음을 돌려 교장실로 향했다. 주말이라 교장실 앞에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난 살짝 문을 두드렸다.
“저하.”
내 목소리를 들은 도미니크는 직접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 난 얼른 교장실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꼭꼭 닫았다.
“몸 괜찮으세요?”
“그럭저럭.”
“아프실 땐 무리하시면 안 되는데…….”
“무리까지는 아닙니다. 차를 내오라고 하지요.”
“아니에요. 금방 가 봐야 해서.”
“무슨 일 있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아빠 생신이라서 황도에 갈 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외출 허가해 주시겠다고 했던 거 안 잊으셨죠?”
“사흘.”
“나흘인데.”
“사흘로 하죠.”
내가 그를 새초롬히 노려보며 소파에 앉자 그는 다정하게 내 뺨을 매만졌다.
“눈에 가시가 돋을 것 같으니까요.”
“사람 눈엔 가시가 돋지 않아요.”
“그런 게 아니라…….”
나는 그의 얼굴을 덥석 잡았다.
“저 없는 동안 꾸준히 치료받으셔야 해요?”
“그러죠.”
“보고 싶을 거예요.”
“…….”
도미니크의 눈이 일렁거렸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쥐고, 가볍게 입 맞췄다.
“다시.”
“보고 싶을 거예요.”
“한 번 더.”
“엄―청 보고 싶을 거예요.”
다정한 눈을 빤히 보던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주머니에서 상자를 꺼냈다.
“이거, 저하께…….”
도미니크가 상자를 푸는 것을 보던 나는 얼굴이 붉어져서 딴청을 부렸다.
“아빠 생신 선물을 사다가…… 그냥 보이길래…….”
만년필을 지그시 바라보던 도미니크가 얼굴이 붉어진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이지.”
“……꺄악!”
그는 나를 번쩍 들어 무릎 위에 앉히고는 내 약지를 매만졌다. 아주아주 조심스럽고, 달콤하게. 도미니크의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나는 화르륵 달아올라서 고개를 조금 숙였다.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영애.”
나지막이 말하는 그의 얼굴이 무척 진지했다. 나는 화르륵 달아올라서 고개를 조금 숙였다.
“불순 이성 교제는 학칙에 어긋나는데…….”
내 말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이 정도로 불순하다고 하진 않을 텐데요.”
그가 무언가를 바라듯 애달픈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 얼굴은 치사해요.”
“어떤 얼굴일까요.”
“귀여운 얼굴.”
“……제게 귀엽다고 하는 건 영애뿐일 겁니다.”
“싫으세요?”
“그것마저 좋으니 당황스럽군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고 코끝에 살짝 입 맞췄다. 그는 소리 없이 웃고는 내 턱 끝부터 조심스럽게 입 맞추며 올라왔다.
입꼬리에 달콤한 숨결이 스치고 지나가자 나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곧 입술이 겹쳐졌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다정하게 몇 번이고 입술을 부딪치다가 천천히 더 깊게.
나는 어제의 입맞춤을 떠올리고 끙끙거렸다. 반들거리는 입술을 손끝으로 닦아 주며 ‘떨어지면 늘 아쉬우니.’ 하고 중얼거리던 그는 정말이지…….
‘야해.’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입술을 매만지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니아나.”
나는 흠칫 놀라서 란슬롯을 쳐다보았다.
“네, 넷!”
가웨인은 새빨개진 나를 보고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니에요!”
“하는 것 같은데.”
“이, 이제 황도로 출발하는 거지요?”
나는 누가 볼지도 모르니 얼른 출발하자며 오빠들을 마차로 떠밀었다. 마차째로 황도로 이동하자 미리 란슬롯에게 연락받은 사용인들이 우리를 반겼다. 황도 저택의 집사 마일로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말씀대로 오늘의 방문은 비밀에 부쳤습니다.”
“아빠는 저택에 계셔?”
“사신단 접대 때문에 황궁에 계십니다.”
그때, 마릴린이 곤란한 얼굴로 다가왔다.
“황궁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가씨께서 오셨다면 황궁에 꼭 초대하고 싶다고 하세요.”
“황궁 결계가 이동을 잡아냈구나.”
나는 으음, 신음했다.
“왜 갑자기 오라고 하시는 걸까.”
란슬롯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타르 사신단과의 오찬이 오늘이지.”
“사신단 접대에 제가 가야 하나요?”
가웨인이 쳇, 혀를 차며 말했다.
“자랑하려는 거겠지.”
아아, ‘우리 성녀 있다―!’ 하고?
“음, 그럼 가 보지요.”
“됐어, 황궁 사정 따위 네가 알 게 뭐야.”
“하지만 황제 폐하께 빚을 지게 하면 더 큰 것을 받을 수 있잖아요?”
“그런 걸 그렇게 순진한 얼굴로…….”
가웨인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엉큼한 계략이 있는 얼굴인데요?”
“그 엉큼한 계략이 뭔데?”
“로열 키친에 들어가면 황궁에 입관한 거니까 그 핑계로 제 포털을 이용하려고 들 수도 있잖아요.”
이번에 빚을 지게 해서 딱 요리만 할 거라고 꽝꽝 못 박아 놓을 생각이었다. 가웨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럴 땐 영리하단 말이야.”
가웨인은 란슬롯을 쳐다봤다.
“혼자 보내도 되겠어?”
“조부님과 아버님이 함께 계실 테니까.”
“흠.”
나는 오빠들과 사용인들에게 인사하고 황궁으로 출발했다.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나를 오찬 중인 대식당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시끄럽지?’
“전하!”
아타르의 사신으로 보이는 여자가 쓰러진 남자를 끌어안고 소리치고 있었다. 황제는 진노하여 소리쳤다.
“요리사를 포박해라!”
기사들이 테이블 끝에 서 있던 요리사에게 달려갔고, 그 순간 나와 요리사의 눈이 마주쳤다.
‘쟝뤼크 교수님!’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