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셰프 영애님 4권
10장
의사들이 오찬장 안으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갔다. 그러자 아타르의 사내가 의사의 손을 쳐 내고 소리쳤다.
“길라게온 황궁에서 쓰러졌는데 그대들을 어떻게 믿는단 말입니까!”
“우리가 음식에 독이라도 넣었다는 겁니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요! 전하는 아타르의 의원이 살피겠습니다.”
길라게온과 아타르가 서로 나뉘어 소리치자 황제는 인상을 찌푸리고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교수―”
내가 당황하여 그에게 다가가려 했을 때, 만찬장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니아나.”
아빠와 할아버지였다.
“오오, 성녀님이 아니십니까!”
“프렌시프 양.”
다른 귀족들도 나를 아는 체해 왔다. 내 이름을 들은 쟝뤼크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 아빠가 내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황도에 왔다고는 들었는데, 무슨 일이지?”
“아, 주말이라서 오빠들과 함께 두 분을 뵈려고…….”
“그렇구나. 들어가자.”
아빠와 몇 마디를 나누는 동안 쟝뤼크가 끌려가고 있었다. 난 얼른 아빠를 붙잡고 말했다.
“아빠, 저분이요. 제 지도 교수님이에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할아버지가 미간을 좁혔다.
“루크, 저놈이 아카데미에 있었다고?”
“루크?”
“선대 로열 셰프인 쟝의 제자였지. 현 로열 셰프와 경합을 벌였던 불세출의 천재가 저 녀석이다.”
뭐라고?!
왕세자가 쓰러진 바람에 오찬은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나는 황제와 로웨나 황비에게 인사만 한 뒤 할아버지를 졸랐다.
“네? 할아버지~”
그런 나를 보고 할아버지는 커흠!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황궁 옥사에 가는 건…….”
그가 나를 흘끔 보더니 다시 크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안 돼.”
안 되신다면서 왜 입꼬리는 올라가 계신 거지요.
‘놀리는 건가.’
난 이번엔 아빠를 쳐다보았다.
“아빠, 잠깐만 다녀올게요. 한 번만요.”
“드디어 떼를 쓴다 싶으면 남의 일이니.”
“네?”
“가자.”
아빠가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웃더니 성큼성큼 걷기 시작해서 난 활짝 웃었다.
“그런 곳에 애를―!”
할아버지가 역정을 냈지만, 아빠는 한 귀로 흘렸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황궁 옥사에 들어가려면 황제와 거래를 해서 허가를 받아야 하나 싶었는데, 아빠는 바로 옥사로 향했다. 옥사장은 아빠와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넙죽 엎드렸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거든 언제든, 무엇이라도……!”
그러면서 열쇠를 통째로 넘겨 줬다.
‘세상엔 권력으로 안 되는 일이 없나 봐…….’
난 그렇게 생각하고 아빠가 건네는 열쇠를 받았다.
“십 분 이상은 안 돼.”
“네, 누가 보면 안 되니까요.”
“옥사에 널 오래 두고 싶지 않으니까.”
다정한 미소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난 고개를 끄덕인 후 아빠와 할아버지를 두고 재빨리 옥사로 향했다. 옥사라 하면 춥고, 어둡고, 창살이 가득한 곳인 줄 알았는데 생각과는 꽤 거리가 멀었다. 밝은 복도에 각각 방이 있어서 옥사라기보단 차라리 여관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미리 옥사장에게 들은 쟝뤼크의 방 번호를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교수님.”
“너……!”
소리치려던 쟝뤼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나를 노려보았다.
“이제 무릎 꿇어 인사하면 되나.”
“무슨…….”
“프렌시프의 무궁한 영광을 빈다고 네 앞에 두 손을 모으면 되냐는 말이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날 속였어, 네가.”
나는 어리둥절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연한 호박색 눈이 깊게 가라앉아 일렁였다. 난 그가 처음 지도 교수를 맡겠다고 했을 적을 떠올렸다.
[요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놈은 질색이야.]
‘그렇구나.’
쟝뤼크는 아소가 조슈아 사비에르라는 걸 알고 있었어. 권력과 엮이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래서 재능 있는 그가 아닌 바닷가에 작은 식당을 여는 게 꿈이라고 했던 날 택한 것이었다. 나는 쟝뤼크를 빤히 쳐다보았다.
“굳이 왜요?”
“뭐?”
“제가 요리사로 성공하고 싶었다면 굳이 교수님 밑에서 수양하는 게 아니라 아빠와 할아버지를 졸랐겠지요.”
“허…….”
“교수님도 제 앞에 무릎 꿇고 두 손 모으시겠다고 하시는데 로열 키친의 다른 셰프라고 다르겠어요?”
“…….”
“마찬가지로 명성을 등에 업고 싶었으면 가문의 힘을 이용해 교수님을 찍어 눌렀을 거예요.”
“너…….”
난 그를 새초롬히 노려보았다.
“그리고 교수님도 저를 속이셨잖아요!”
“내가 언제!”
“본명도 안 가르쳐 주시고! 저를 제자라고 하셨으면서!”
“그, 그건……!”
“저야 아카데미 교칙 때문에 신분을 못 밝혔지만, 교수님은 작정하고 속이신 거잖아요!”
마른침을 꼴깍 삼키는 그의 얼굴에 당황이 역력했다.
“일부러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니야…….”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그가 할 말이 없는 듯 허공을 바라봐서 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일은 어떻게 된 건데요.”
“……몰라.”
“네?”
그가 헛기침을 하고는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줄리아 리올이 원하는 요리는 스프링롤이 아니었다더군.”
“아니었다고요?”
“그래. 그러던 찰나에 왕세자가 나서 ‘그래도 길라게온에서 특별히 준비해 온 음식이니 맛을 보자’며 시식했지.”
“그 후에 쓰러진 건가요?”
쟝뤼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알레르기였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왕세자는 볼모 시절 특정 재료에 알레르기를 일으킨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 만약 알레르기가 있었다면 사신단에서 미리 주의를 기해 달라고 연락했겠지.’
나는 흐음, 침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독?”
“그런 일이 있을까 봐서 재료 구입부터 나르는 것까지 모두 내가 했다.”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럼 이번 일은 꼼짝없이 교수님 탓이 되겠어.’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아빠가 말한 십 분이 다 되었다. 난 내 쪽에서 방도를 찾아보겠다고 한 뒤, 옥사를 나섰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내내 왕세자의 일을 고민했다.
‘정리해 보자.’
1. 왕세자 주변엔 아타르의 사신단뿐이었다.
2. 길라게온의 사람 중 가장 가까이에 있던 건 황제.
황제는 음식에 독을 넣을 이유가 없다. 아타르와 친교를 맺길 가장 바라는 사람이 그이니까.
3. 왕세자는 아타르의 의원들이 진료 중이다.
왕세자가 정말로 알레르기가 맞는지 확인하려면 사신을 통해야 한다. 난 머릿속으로 줄리아 리올의 이름에 별표를 쳤다.
‘리올 재상을 만나자.’
그녀가 먹고 싶다고 했던 쟝뤼크 스승의 요리. 그걸 내가 만들어 간다면 만남의 계기로는 그럴듯하다. 나는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
“오냐.”
“아타르 왕세자가 볼모로 있던 시절에 할아버지가 프렌시프 후작이셨지요?”
“그래.”
“리올 재상이 당시 맛있게 먹었다던 음식이 있었나요?”
할아버지는 과거를 되짚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자와의 일이라면 황궁에서 난데없이 울음보를 터뜨린 것밖엔 기억나지 않는군.”
“울었다고요?”
“날 보더니 아타르를 무시한다며 소리쳤지.”
“무시하셨어요?”
그러자 아빠가 조소를 흘렸다.
“어르신은 본인 외엔 모두 벌레로 보시니 아타르만 무시한 건 아니었을 거다.”
할아버지가 얼굴을 찌푸렸다.
“벌레 정도는 아니야.”
“하면요.”
“멍청한 놈들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뿐.”
난 아빠와 할아버지의 싸움을 한 귀로 흘리며 고민을 이어갔다.
‘월남쌈이 아니면 대체 뭐지.’
고기. 피쉬 소스. 특이한 식감.
‘남부풍 요리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게 대체 뭘까.’
저택으로 돌아와서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황도 저택의 주방장이 날 보고 펄쩍 뛰어오르듯 일어나 다가왔다.
“아이고, 아가씨! 허기지십니까? 간식이라도 내갈까요?”
“그보다 냉장창고를 봐도 될까?”
“물론이지요!”
주방장과 함께 창고로 가서 이것저것 재료를 살폈다. 피쉬 소스는 생각보다 종류가 많지 않았다. 브랜드 별로 맛보았지만, 다 거기서 거기라 나는 끄응, 신음을 삼켰다. 피쉬 소스라면 역시 베트남 요리겠지?
‘아, 분짜(소스에 숯불 돼지고기, 채소, 쌀국수를 함게 적셔 먹는 음식)일 수도 있겠어!’
분짜에도 고기와 피쉬 소스가 쓰이니까. 하지만 고기가 메인인 건 아닌 데다가 쌀국수의 식감은 그리 특이하지 않다. 그때, 란슬롯이 나를 찾아왔다.
“세니아나.”
“네.”
“아버님 생신 파티는 유리관에서 하는 게 어떠냐고 묻더구나.”
“네. 그런데, 은밀히 준비하고 있는 거지요?”
뒤이어 온 가웨인이 픽 실소를 흘렸다.
“어찌나 은밀히 준비하는지 밤에만 들락거리겠다던데.”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야.’
근무 외 시간에도 이것저것 도와주고. 나는 감동해서 요리사들을 쳐다보았다. 눈 밑이 거뭇한 걸 보니 모두 함께 아빠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이따 밤참이라도 가져다 줘야겠…… 밤참?’
“야식이다!”
내가 소리치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난 황급히 육류를 뒤졌다.
“저기, 새우젓은 없어?”
“새우가 새끼에게 젖을 물립니까?”
주방장은 그런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며 눈을 깜빡거려서 난 손을 내저었다.
“젖이 아니라 젓! 젓갈 말이야.”
“글쎄요, 그런 건…….”
난 얼른 영지로 통신을 연결했다. 집사에게 아곤을 바꿔 달라고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예, 아가씨.”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곤, 혹시 새우젓을 구할 수 있을까?”
동부에선 거의 쓰이지 않는 고추장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혹시 몰라 물어본 것이다.
[제가 가진 게 조금 있긴 합니다.]
“가져갈래! 된장도 있을까?”
[예,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런데 새우젓은 왜…….]
“족발의 소스로 쓸 거야!”
[족발이요?]
그래, 족발. 식감이 특이하고, 고기를 메인으로 쓴 음식인 데다 채소와 함께 먹을 수 있는 남부풍 요리!
‘피쉬 소스는 베트남의 그것이 아니었어. 어쨌든 어패류가 들어가서 피쉬 소스라고 했던 거야.’
나는 얼른 포털을 열어 영지 주방으로 향했다. 아곤은 새우젓을 챙기는 날 보고 묘한 얼굴을 했다.
“돼지 발도 구할 수 있어?”
“근처 푸줏간에 말하면 될 겁니다.”
아곤이 족발을 구해 오는 동안 나는 월계수 잎과 통후추 등을 준비해 놓았다.
‘콜라가 있으면 좋을 텐데.’
난 잡내를 없앨 때 콜라를 이용하는 편이었다. 콜라에 일정 시간 담가 놓으면 잡내도 덜하고, 육질도 연해지는 데다가 은은한 단맛이 돌아서 맛있었다.
‘콜라나 소주는 없으니까 대신 보드카를 쓰자.’
알코올이 기화하며 잡내를 없애 줄 거다. 아곤은 금세 족발을 가져왔다. 난 한참 핏물을 뺀 뒤에 준비한 것들과 함께 다시 황도 저택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된장과 간장, 월계수 잎, 통후추 등등을 넣어 푹 끓였다.
“으음, 그런데 줄리아 리올에게 어떻게 연락하지…….”
내가 중얼거리자 옆에서 자잘한 것을 돕고 있던 마릴린이 말했다.
“어르신께 부탁드리면 어떨까요? 리올 재상과 인연이 있으실 수도 있잖아요.”
“할아버지가 해 주실까.”
그러자 마릴린이 주방에 막 들어오고 있는 마일로를 흘끔거렸다.
“제가 저희 아빠에게 부탁할 때 쓰는 방법이 있는데 알려드릴까요?”
“마일로에게? 뭔데?”
“린은 아빠를 이―만큼 사랑해요. 뭐, 요새는 징그럽다고 싫어하시지만요.”
고개를 주억거리던 마릴린이 말했다.
“한 번 해 보세요.”
내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우물쭈물하자 마릴린과 하인들이 “밑져야 본전이라니까요~” 하며 내 등을 떠밀었다. 난 냄비를 주방장에게 부탁한 뒤에 할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자 행정관과 이야기를 나누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그가 안경을 벗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
“그게……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부탁?”
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세, 세니안은, 할아버지를 이만큼 사, 사랑…….”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쥐구멍. 쥐구멍이 필요해!’
결국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귓가에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실소가 들려왔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헛기침을 하며 행정관을 쳐다봤다.
“그, 뭐, 세금이 걱정이면 미리 상속을 하면 될 게 아닌가.”
“하면 명의를 각하께 옮길까요?”
“고마운 줄도 모르는 놈에게 주어 무얼 해!”
“그럼 란슬롯 도련님께?”
“이번 생일에 남부 항만을 주었으니 더는 과하다.”
“가웨인 도련님은…….”
“허구한 날 검만 휘두르는 놈에게 재산이 뭐가 필요하다고.”
“아가씨―”
“그렇게 하지.”
“그런 건 됐어요!”
나는 펄쩍 뛰며 할아버지에게 매달렸다. 그러자 그는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항만을 네 이름으로 사들일까? 후계에 이름을 올려 주랴? 황도 저택을 네 명의로 해 줄 수도 있지.”
그거 아직 아빠 명의가 아니었나요.
‘아니지, 그게 아니라!’
“다른 게 필요해요.”
“뭐기에.”
“리올 재상에게 루크의 제자가 스승을 대신해 요리를 만들었으니 시식을 해 달라고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할아버지는 마뜩잖은 듯 침음을 흘렸다.
“흐음.”
“안 되나요?”
“황제와 리올을 만나 보마.”
“감사합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내가 잡는 바람에 구겨진 할아버지의 소매를 살살 펴 주었다.
‘무서우니까 이제 사랑한다고는 하지 말자.’
―하고 생각하며. 진짜로 황도 절반을 주는 줄 알고 심장이 콩닥거렸다.
다음 날, 할아버지와 나는 함께 황궁에 들었다. 할아버지는 황제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고 나와서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허락하셨나요?”
“네가 대신 아타르의 마음을 풀어 준다면 황제에게도 나쁠 게 없는 일이지. 저 너구리는 루크의 제자가 너라는 걸 알고 있는 듯하구나.”
“그렇군요…….”
우리는 줄리아 리올에게 가기 위해 황궁 복도를 걸었다. 마침 왕세자의 병실에서 나오고 있던 노년의 부인이 할아버지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아, 왕세자를 끌어안고 있던 사람이다.’
저 사람이 줄리아 리올이었구나. 흰머리가 성성했지만, 그것마저 매력적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줄리아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눌 말이 있으니 자리를 마련해 주시오.”
“다 삭은 후에야 제가 그리우십니까?”
“헛소리하는 건 여전하군.”
나는 미리 조사해 두었던 줄리아 리올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철혈의 이국인이 황궁 요리사와 사랑에 빠졌다는 얘기였는데.’
이렇게 보니 요리사가 아니라……. 나는 할아버지를 힐끔 쳐다보았다.
“따라오시지요.”
내가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에 줄리아가 훌쩍 먼저 떠났다.
“할아버지.”
“음.”
“혹시 젊었을 적 만났다는 일곱 분 중에 저분이 포함되어 있었나요?”
할아버지가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보았다.
“전혀! 그리고 일곱 명이 아니라……!”
“흐음.”
나는 줄리아의 뒷모습을 보고 저택에서 보았던 할머니의 초상화를 떠올렸다.
“바람둥이.”
그러고 줄리아를 향해 따라 걸었다.
“그게 아니, 나는 전혀 관심이, 아니, 잠깐, 세, 세니아나!”
할아버지가 나를 허둥지둥 따라왔다.
줄리아가 머무는 귀빈관에 도착하자마자 할아버지의 통신석이 울렸다.
“무슨 일이냐.”
[카렌듈라 후작이 저택으로 찾아왔습니다. 어르신을 뵙길 청하십니다.]
“내일쯤 일정을 잡지.”
[다급한 일이라 전하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미간을 좁혔고, 나는 그에게 얼른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카렌듈라 후작이면 금좌 11석의 수장이잖아. 그가 직접 찾아올 만한 일이면 정말로 큰 일일 것이다. 할아버지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금방 돌아오마.”
“네, 이동시켜드릴게요.”
그러고 할아버지를 저택으로 이동시켜 주었다. 먼저 소파에 앉은 줄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성녀라더니 참말이었군.”
중얼거리듯 말한 그녀는 내게 자리를 내주었다.
“앉으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아 줄리아를 힐끔힐끔 보았다.
‘할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은데.’
나한테도 벽을 세우면 어떡하나. 줄리아의 마음을 열어야 왕세자의 몸 상태를 알 수 있을 거다. 나는 가져온 상자를 슬그머니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줄리아가 묘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뇌물이라면 받지 않습니다.”
“아, 뇌물이 아니라요.”
나는 얼른 상자를 열어 안에 있는 음식을 꺼냈다.
“이건―!”
“교수님께, 아니, 루크 님께 부탁하신 요리가 이건가 싶어서 만들어 보았는데…….”
“요리를 하십니까?”
“네. 루크 님은 제 스승이세요. 이 요리를 부탁하신 게 맞나요?”
“……그렇습니다.”
내 생각이 맞았어!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식기 전에 드세요.”
나는 미리 가져온 접시에 새우젓과 족발을 덜어 주었다. 그녀는 잠깐 멈칫했다. 같은 요리라지만 내가 만들었다니 맛에는 신뢰가 없는 모양이었다.
“향은 추억 속의 요리와 비슷하군요.”
천천히 포크를 들어 새우젓을 찍은 고기를 입에 가져갔다.
“……!”
“괘, 괜찮나요?”
“비계는 꼬들거리는 편인데 살코기가 전혀 퍽퍽하지 않아요.”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족발을 한 번,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게다가 소스가…….”
“매콤하지요?”
새우젓이 오래되어서 약간 군내가 났다. 그래서 파와 고추기름 등을 넣어 특유의 좋지 않은 냄새를 가리려고 했는데 의외로 합이 좋았다.
“촉촉하고 부드러워서 잘 넘어갑니다. 음, 고기에서 나는 이 향은…….”
“된장과 간장이에요.”
“장?”
“길라게온 남부에서 쓰는 소스의 한 종류랍니다.”
“달큰하고 짭짤해서 자꾸 손이 가는군요.”
“파절이와 함께 드셔도 맛있어요.”
나는 시종에게 손 씻을 물을 부탁했다. 가루비누로 손을 깨끗이 씻은 다음, 상추 위에 미리 소금에 절여 둔 배추와 파절이, 족발, 얇게 저민 마늘을 올렸다. 한입에 들어가도록 잘 싸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드세요.”
“……?”
“원래 이렇게 드시지 않았나요? 그, 야채와 함께 드셨다고…….”
“당근과 무를 절인 것과 함께 먹었지요. 동그랗게 말아 먹는 것은 처음입니다.”
족발이나 보쌈은 쌈으로 먹어야 제 맛인데!
“저런…….”
나는 이때껏 이 맛있는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한 그녀가 안타까워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영애, 그것은 어떻게 먹는 거지요?”
“그냥 한 번에 드시면 돼요.”
“그럼 입을 쩍 벌리게 되지 않습니까?”
“맞아요.”
그게 포인트라고. 줄리아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쌈을 받아서 살짝 고개를 돌리고 입에 넣었다. 손끝으로 입을 막고 우물거리던 그녀가 음, 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요. 마늘 향이 좋아요. 적당히 짭짤하고, 채소도 잔뜩 먹을 수 있으니 건강식이라고 해야 할까…….”
“한데 뭉쳐지는 느낌이 좋지요?”
쌈처럼 와구와구 씹어야 하는 음식을 먹을 땐 입안에 침이 가득 돌고, 턱관절이 벌어지는데 그게 뇌를 자극한다고 했다. 조금씩 천천히 먹는 것보다 더.
“하나 더 싸 드릴까요?”
“부탁하죠.”
복스럽게 잘 먹는 게 좋아서 나는 열심히 쌈을 싸 주었다. 그녀는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다른 사람이 보면 스승 걱정 때문에 온 줄 모를 겁니다.”
“음, 교수님이 걱정되기도 하지만, 이건 공께는 추억의 음식인 거잖아요. 맛있게 드셔 주시면 그걸로 기뻐요.”
쌈을 내밀며 말하자 그녀가 나를 묘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손녀에게 홀딱 빠진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
“네?”
줄리아가 쌈을 받으며 빙그레 웃었다.
족발을 반이나 해치운 뒤, 줄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많이 먹은 게 얼마 만인지.”
맛있었나 봐.
‘기쁘다!’
나는 헤헤 웃으며 손을 꼼질거렸다. 그러다 문득 할아버지의 일이 떠올랐다.
“저……. 리올 공.”
“말씀하세요.”
“제 조부님과는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그녀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대 조부는 후레자식입니다.”
그 얘긴 소피아 부인에게서도 들었는데!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사신단 오찬에서 보았던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테거 공작이 뵙기를 청하십니다.”
“무슨 일로?”
남자가 줄리아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였다. 그녀는 쯧, 혀를 차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 얘기는 내일 다시 하지요.”
“네.”
“그리고 혹시…….”
그녀가 큼,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족발…… 이란 걸 맛보여 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더 얻을 수 있을까요?”
그야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족발은 잔뜩 만들어 뒀으니까. 나는 저택으로 돌아가서 줄리아가 보낸 아타르의 시종에게 족발을 전달했다. 저택에서 쉬는 내내 할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무얼 들은 거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나는 눈을 데구루루 굴리다가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후레자식이셨다고…….”
“뭐?! 이 할망구가!”
“좋은 분이셨어요. 제게 서글서글하게 대해 주시고.”
“믿지 마라. 젊었을 때의 나는 행실 바르고, 정결하고, 네 할미밖에 모르던……!”
“거짓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더니 할아버지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무, 무서워.’
마침 아빠가 지나가기에 후다닥 그의 등에 숨었다.
“가서 로토헤라도 할까?”
“좋아요! 돈 거는 건 없기예요?”
“그래.”
아빠와 내가 손을 잡고 지나가자 할아버지가 “이 할망구를!” 하며 허공을 향해 한 번 더 소리쳤다. 아빠, 오빠들과 로토헤 게임을 새벽까지 한 후, 다음 날 오전에 졸린 눈으로 다시 성으로 찾았다. 줄리아는 어제와 달리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차는 어떤 종류를 즐기죠?”
“전 홍차면 뭐든 좋아요.”
그녀가 황궁 시종에게 차를 부탁했다. 그러곤 손등으로 다정히 내 부은 눈꺼풀의 온도를 가늠했다.
“이런, 무심결에 실례를.”
전혀 실례한 것 같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따뜻한 냄새.’
식당에 자주 오시던 단골 할머니에게서 이런 햇볕 냄새가 났다. 줄리아는 그녀의 손에 얼굴을 맡긴 날 가만히 보며 쿡쿡 웃었다.
“그자의 혈육이 이리 사랑스러울 줄이야.”
“오빠들도 사랑스러운걸요?”
어제 로토헤 게임은 란슬롯의 대승이었다. 분한 표정을 짓는 가웨인에게 귀엽다고 말했더니, 얼굴이 새빨개졌다.
[나는 멋있는 거라고!]
하며 소리치기에 가웨인은 역시 무서울 때가 더 많다고 생각했다.
“가끔이요.”
내가 서둘러 덧붙이자 그녀가 유쾌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조부의 이야기를 물었던가요.”
“네!”
* * *
줄리아는 눈을 반짝이는 세니아나를 흘깃 쳐다보았다.
“처음 만남은 손수건 때문이었지요.”
“손수건이요?”
“울고 있는 내게 그대 조부가 손수건을 내어 주었습니다.”
세니아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바람둥이” 하고 중얼거렸다. 줄리아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젊은 날을 떠올렸다. 어린 원자(왕의 장자)를 이국의 땅에 남겨 놓는 것이 원통하여 떠날 때마다 숨어서 눈물지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부친이 작고하고 어깃장을 놓아 작위를 물려받았다. 왕궁에서 일할 기회조차 겨우 얻었다. 통한의 눈물이 감정에 약한 계집이기 때문이라 여겨질까 봐 그녀는 울부짖는 사신들 속에 섞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나베리우스는 우연히 마주친 제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공무로 온 주제에 눈물을 흘리는 건 계집이기 때문이 아니오! 나는 그저, 그저……!]
[전장에서 우는 사내놈들도 있소.]
[…….]
[계집이든 사내든 분하고 서러우면 눈물이 나지.]
[어째서 내게 준 거요, 이거.]
손수건을 쥐며 묻자 나베리우스는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우는 사람에게 손수건을 건네는 게 무례요?]
그러곤 휙 떠나 버려서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죽은 아내가 힘겨워할 적에 손수건 한 번 내준 적 없었던 것이 한이었기에 그런 줄은 모르고.
‘두 번째로 설렜던 건 언제였나.’
원자가 풍진을 앓을 적에 면회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했을 때였던 것 같다. 불가하다고 외치는 길라게온의 중신들 사이에서 그만이 유일하게 찬성표를 던져 주었다.
‘그것도 책략이었는데. 빌어먹을 늙은이.’
그 덕에 나베리우스는 사신단의 총책임자와 연을 맺었다. 나베리우스의 인품에 감탄한 총책임자가 프렌시프 마법사들이 아타르에서 수련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사소한 것들이 켜켜이 쌓여 가슴에 봄바람을 불러왔다. 무뚝뚝한 표정에 설레고, 의미 없는 말에 밤잠을 설쳤다.
“제가 먼저 만남을 청했지요. 이따금 만나 사소한 잡담을 나누고 싶다 하였습니다.”
그 말에 세니아나가 깜짝 놀라 줄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래서요? 그래서 할아버지는 뭐라고 하셨나요?”
줄리아가 인상을 쓰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날만 생각하면 복장이 터진다.
“그런 바람을 지닌 여자가 기백을 넘으니 원한다면 줄 서서 기다리라더군요.”
줄리아의 표정이 험악해지자 세니아나는 눈치를 보며 손을 꼼질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그 덕에 쟝이 고생했지요.”
“쟝이라면 선대 로열 셰프인가요?”
“예. 당시엔 제가 총책임을 맡았을 때라 그가 접대해야 했는데, 어떤 것도 먹지 않으니 곤혹이었을 테지요. 성실한 남자기도 했으니까요.”
“족발도 그래서…….”
“맞습니다.”
줄리아가 세니아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하여 영애.”
“네?”
“저는 영애의 연애를 몹시, 아주, 매우 응원한답니다.”
세니아나가 당황하자 줄리아는 생긋 웃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 영감탱이도 홀로 사랑하는 기분을 맛보길 바란다. 자기 품에만 끼고돌고 싶은 손녀가 다른 사람에게 애 닳는 모습을 보고 인생이 덧없다는 걸 느끼길!
* * *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어물쩍 말을 돌렸다.
“아, 그런데 왕세자께서는 괜찮으신가요?”
“뵈러 가시겠습니까?”
“괜찮나요?”
“길라게온의 황자님들처럼 고운 젊은이는 아니지만, 식견을 나눌 수 있는 아저씨이긴 하지요.”
“아저씨…… 따님의 부군이시라고 들었는데…….”
그런 말 해도 괜찮은가요…….
“그러니 쉽게 말하는 게지요.”
그녀가 후후 웃으며 나를 일으켜 주었다. 그러자 사신으로 온 젊은 남자가 당황하며 “고, 공…….” 하고 줄리아를 불렀다.
“어찌 전하의 병상에 길라게온의 사람을……. 이번에도 아타르가 제국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라 떠드는 자들이 생길 겁니다.”
“숙여야 한다면 숙여야지.”
“공!”
“이깟 무릎, 몇 번이라도 꿇을 수 있네.”
“…….”
“새파랗게 어린 병사들을 전장에 보내지 아니할 수만 있다면 광대 옷 입고 춤이라도 춰야지.”
단호한 태도에 남자는 침음을 흘렸고, 나는 눈을 반짝이며 줄리아 리올을 쳐다보았다.
‘멋있어!’
권좌에 오른 사람일수록 명예를 목숨처럼 여긴다. 대의를 위해 수치를 감수할 수 있는 용기는 아무에게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줄리아와 함께 왕세자의 병실로 향했다. 병실엔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줄리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시종에게 창문을 열라 지시했다.
“연초는 끊을 수가 없으십니까.”
왕세자는 껄껄 웃으며 담배를 비벼 껐다. 생각보다 더 인상이 좋은 아저씨였다. 아빠보다는 열 살쯤 많아 보이는데 실제로는 훨씬 연하라고 했다. 내가 치마를 넓게 펼치고 무릎을 굽히자 왕세자는 빙그레 웃으며 날 맞아 주었다.
“프렌시프의 성녀님.”
난 깜짝 놀라서 손을 내저었다.
“말씀 낮춰 주십시오, 전하.”
“그럴까.”
왕세자가 침대 맡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서 얘기하지.”
나는 의자에 살포시 앉았다. 침대 옆 협탁에 족발이 담긴 접시가 있었다.
‘드셨나.’
내 시선을 느낀 왕세자가 빙그레 웃었다.
“아주 맛있더구나.”
“다 식었을 텐데…….”
“식어도 맛이 좋던걸.”
나는 그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 존체는 어떠십니까?”
“많이 좋아졌어.”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두 손을 모았다.
“스프링롤을 내온 요리사는 제 스승이십니다.”
“흠, 귀족 영애가 요리를 한다고?”
“길라게온에선 드문 일이 아닙니다.”
줄리아가 말해 주었다. 왕세자는 거뭇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군. 스승이 걱정되어 제자가 나선 건가.”
“그렇습니다.”
“아쉬운데.”
“네?”
“아타르에 관심이 있다면 홀랑 업어 가고 싶었거든.”
내가 당황해서 마른침을 삼키자 왕세자가 껄껄 웃었다.
“장모님 말처럼 사랑스러운 아이로군요.”
“그렇지요.”
왕세자가 협탁에서 쿠키를 꺼내 내게 쥐여 주었다.
“억지로 데려간대도 포털로 도망치면 도리가 없지 않나. 나는 길라게온과 척을 질 일은 하지 않을 생각이야.”
“그, 그럼 스승님의 일도…….”
“이리 귀여운 제자가 스승의 걱정이 태산 같으니 어서 황제께 풀어 달라 청해야겠군.”
“감사합니다!”
줄리아도 그렇고, 왕세자도 너무너무 좋은 사람들이라 나는 엄청나게 감동했다. 그때, 주머니에 넣어 온 에이레네의 마원이 마구 진동했다. 다른 사람에겐 끄아앙, 하고 우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마원이 금세라도 터질 것처럼 뜨거웠다. 그리고―
“앗!”
붉은빛이 퍼져 나간다 싶더니 순식간에 공간이 바뀌었다.
* * *
주변에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비비고 옆을 바라보았다.
“내가 지켰다! 내가 지켰다!”
캐러멜색의 조그만 반달곰이 콩콩 뛰며 몹시 기뻐하고 있었다.
‘귀, 귀엽긴 한데.’
뭐지? 반달곰은 내게로 휙! 뛰어들었다. 화들짝 놀라 주저앉으니 가슴에 마구 얼굴을 비비며 물어왔다.
“내가 잘했지?”
“어, 어?”
“내가 지켰잖아. 형아가 아니라 내가 했어. 그렇지?”
“형아가 누구―”
“나쁜 사람이 나를 마구 써서 나는 슬프고, 괴로웠는데 누나가 나를 찾아 주었어. 내 목소리를 들어 주었어!”
나쁜 사람이 마구 썼다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달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곰이 내 볼에 얼굴을 비볐다.
“잠깐만!”
“누나…….”
“나는 네 누나가 아닌― 혹시 너도 성수야?”
멀린과 같은? 곰은 히죽 웃었다.
“으응.”
“나를 지켰다는 건 무슨 소리야?”
“내가 독에서 누나를 지켜 주었어. 형아는 독인 줄도 몰랐는데.”
그러고는 양 앞발로 입을 가리고 킥킥거렸다.
“내가 형아보다 더 도움이 되지? 누나는 내 거야. 내 거야!”
그러곤 다시 자기 얼굴을 퍽퍽 들이밀었다.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곰을 떠밀자 엄청나게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곰의 몸에서 붉은빛이 퍼져 나왔다. 이윽고 캐러멜색의 머리칼을 가진 미소년이 주저앉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곰이 있던 자리에서.
“누나…….”
“…….”
“내가 싫어?”
애처로운 눈빛으로 쳐다봐서 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 건 아닌데…….”
그가 다시 나를 꽉 껴안았다.
“누나 좋아!”
무릎까지 오는 꼬마 곰이 안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라 정말로 당황스러웠다.
“이, 일단 곰돌이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곰돌이?”
내가 고개를 돌리며 말하자 반달곰 미소년이 물었다.
“곰 말이야.”
“누나는 그 모습이 더 마음에 들어?”
“어?”
“그렇다면 좋아.”
―하더니 또 붉은빛과 함께 반달곰이 되어 버렸다. 음, 훨씬 보기 편하다. 나는 쪼그려 앉아 반달곰과 눈을 맞추었다. 그러자 활짝 웃으며 내 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왔다.
“잠깐만!”
“잠깐만 싫어! 싫어!”
이 애 어리광에 엄청 능숙하다.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곰을 번쩍 들었다.
“소개가 먼저야.”
“으응?”
“이름부터 알려 줘.”
“그럼 귀여워, 귀여워― 해 줄 거야? 쓰다듬어 줄 거야? 얼굴 비비게 해 줄 거야?”
“그래.”
반달곰이 활짝 웃으며 양 앞발을 번쩍 들었다.
“나는 이름이 없어!”
“없다고?”
“그래서 우리는 형아를 부러워하고 또 부러워했지. 누나의 엄마가 형아에게 멀린이라는 이름을 주었어.”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 애는 누군가와 대화를 해 본 적이 없는지 알아듣기 힘든 말만 했다. 누나의 엄마가 멀린이라는 이름을 주었다는 건…….
‘선생님이 사자를 멀린이라고 불렀다고 했지.’
그런데 우리?
“너 말고 성수가 또 있어?”
“형아가 있고, 동생이 있고, 내가 있지.”
“형아는 멀린?”
“응.”
“그럼 동생은?”
“나쁜 사람들이 나를 가져갔을 때, 동생도 함께 가져갔어. 형아는 못 했어. 형아가 어디 있는지 아는 건 누나의 엄마뿐이었어.”
“너희는 형제야?”
“그렇게 부르면 형아가 싫어해. 으르릉, 해.”
그러더니 “무서워, 무서워” 하며 내 품에 꼭 안겼다. 나는 반달곰의 등을 토닥이며 생각했다. 성수는 총 셋인 듯하다. 멀린과 반달곰, 그리고 확인되지 않은 ‘동생’.
‘동생이 깃든 마원을 아탈란이 가져갔다는 뜻일 거야.’
그렇다는 건 에이레네가 아닌 실험체가 또 있다는 걸까?
“너희끼리는 연락을 할 수 있지? 그러니까 선생님이 멀린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걸 아는 거잖아.”
“으응, 하지만 나쁜 사람들과 만난 후로는 느낄 수 없어.”
“그렇구나…….”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탈란은 대체 언제부터, 어디까지 준비를 한 걸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반달곰을 쳐다보니 눈이 반짝반짝하다. 약속대로 귀엽다고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름이 필요하겠다.”
“뭐라고 부를 거야?”
“곰돌이니까, 으음, 테디 베어라고 하자.”
테디는 번쩍 일어나더니 깡충깡충 뛰며 내 주변을 맴돌았다.
“테디다! 나는 테디다! 누나가 이름을 지어 줬다!”
기뻐하니 흐뭇해져서 킥킥 웃으며 테디를 쳐다봤다. 그러다 “아!” 하고 소리쳤다.
“독은 무슨 소리야?”
그때였다.
“그건 내가 설명하겠소.”
―하더니 푸른빛이 곰돌이의 공간 안에 스며들었다.
나는 익숙한 고양이를 보고 소리쳤다.
“멀린!”
“주인.”
테디는 내 등 뒤에 숨어 움찔움찔하며 멀린을 훔쳐보았다. 테디와 눈이 마주친 멀린이 순식간에 커다란 사자로 변하더니 크르르릉! 포효했다.
“꾸아앙!”
펄쩍 뛰어오를 듯 놀란 테디는 내 품에 숨어 양 앞발로 눈을 가렸다. 멀린이 위협하듯 소리쳤다.
“멍청한……!”
“나, 나는 테디야. 멍청이 아니야! 내, 내가 누나를 구한 거잖아. 형아는 느림보야! 느림보야!”
“마법사들의 결계를 깨뜨렸다.”
결계가 깨졌다고?
내가 깜짝 놀라 테디를 쳐다보자 테디는 억울한 얼굴로 멀린을 새초롬히 노려보았다. 테디가 시무룩해져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건 삿된 자들의 독이었단 말이야…….”
“삿된 자들의 독이었다고?”
“누나의 육체엔 영향이 없어도 그게 삿된 자들을 불러들이면 안 되니까 나는……. 곤란해진 거야?”
어제 할아버지가 황제를 만나며 황궁 내에서의 포털 사용 허가를 받아 왔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포털로 옮겨 주었지.’
사신단 앞에서 내가 포털을 여는 건 제국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니 황제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이동은 황도 내로 한정했었는데…….’
결계가 깨졌다는 건 초장거리, 그러니까 엘트라로 이동할 때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황제 폐하께 제대로 변명해야 할 거야.”
“누나를 곤란하게 하는 인간은 내가 다 죽여 줄게. 내 커다란 앞발로 황제를 때려 줄 거야!”
정말로 황제를 앞발로 후려치러 갈 것처럼 몸에서 붉은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나와 멀린이 동시에 소리쳤다. 그건 반역이라고! 난 테디가 어디 가지 못하게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금세 흐물흐물해져서 중얼거렸다.
“누나가 나를 꼭 안아 줬어.”
‘테디와는 말이 안 통하겠어.’
멀린을 바라보았다.
“독이란 건 무슨 소리죠?”
“공기 중 미량의 독이 섞여 있었다오.”
공기 중이라면…….
‘연초?’
왕세자가 피운 연초에 독이 들어 있었단 말이야? 담배 내의 니코틴과는 다른 성분이었을 거다. 아카데미에서도 종종 교수들이 담배를 물고 있었는데, 그때는 테디가 날 이동시키지 않았다. 멀린은 테디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미 독성의 대부분은 남자가 흡수하였고, 연기에 포함된 소량의 독성도 흩어지고 있었으니 주인을 이동시킬 까닭이 없었소.”
“……병실로 돌아가야겠어요.”
멀린은 고개를 끄덕였고, 테디는 울망울망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내가 나빴어? 그래서 날 버릴 거야? 아프게 해도 돼! 버리지 말아 줘, 누나.”
“버리지 않아. 하지만 앞으로는 내 허락 없이 날 이동시키지 마.”
정말로 위험한 순간이 온다면 그땐 테디보다 이성적인 멀린의 도움을 얻어야겠다. 그런 뜻이 담긴 눈으로 멀린을 보자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누나를 돌려보내 줄게.”
시무룩해진 테디가 말했다. 나는 생긋 웃고 테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만나서 반가워.”
“히히.”
곧 붉은빛이 퍼지기 시작하더니 소용돌이처럼 나를 감싸왔다.
퍼뜩 눈을 떴을 땐, 병실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황급히 탁상 위에 놓인 달력을 쳐다보았다.
‘아직 12일이야. 다행이다.’
처음 포털에 갇혔다가 돌아왔을 땐 며칠씩이나 지나 있었다. 창밖을 보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성에 온 게 오전이니까 아마 대여섯 시간쯤은 지난 모양이다. 순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줄리아가 들어왔다.
“영애!”
줄리아는 놀란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리올 공…….”
“무슨 일이었던 겁니까. 갑자기 황궁이 진동하더니 영애가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그보다 왕세자 전하의 연초요. 그건 누가 관리하나요?”
“예?”
“말씀해 주세요!”
내가 다급하게 줄리아를 붙잡았다. 그녀는 잠깐 침음한 후에 입을 열었다.
“아타르 성에서는 시종들이 관리합니다만, 이번엔 쥬다 경이…….”
“쥬다 경이요?”
“예, 일전에 함께 있었던 젊은 사내 말입니다.”
내가 왕세자의 병실에 가는 것을 반대했던 그 남자다!
“전하는 어디 계시죠?”
“황제 폐하와 독대 중이십니다.”
왕세자가 쓰러진 건 쟝뤼크의 스프링롤 때문이 아니었다. 연초의 독성이 몸에 쌓여 때마침 혼절한 것이다.
‘황제와 독대 중에 왕세자가 쓰러진다면…….’
큰일이다! 화친은커녕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나는 황급히 아발론(황제의 궁)으로 달려갔다.
테디는 분명 그 독이 삿된 자들의 것이라 했다. 삿된 자들의 기록은 황궁 비밀 서고에나 있었는데, 그 안에서도 삿된 자들의 독 같은 내용은 없었다. 아타르의 의원들이 그런 독을 쉽게 치료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렇다는 건…….
‘쥬다 경과 의원들은 모두 아탈란의 세력이야.’
아탈란의 세력이 제국과 아타르 사이에 전쟁을 부추기려는 것이다. 나는 황제의 응접실에 도착해서 숨을 몰아쉬었다. 문 앞을 시키던 시종장이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를 뵈어야겠습니다.”
“폐하께선 지금 아타르의 왕세자와―”
“알아요, 그러니까 지금 뵈어야……!”
그때, 커다란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기사들이 나를 포위했다. 나는 깜짝 놀라 기사들 앞에 선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거 일이 곤란하게 되었군.”
중년의 남자가 제비 꼬리 같은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저 사람은 세니아나의 기억 속에 있었다.
‘라가세 백작.’
금좌 11석의 한 사람으로 안보대신이었다. 그가 히죽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궁의 결계를 이번에도 요란하게 깨 버렸으니.”
“…….”
“그리 자랑스레 포털을 열면 영애를 사랑하는 부친과 조부가 곤란해지지 않나, 응?”
“폐하께 포털 이용 허가를 받았습니다.”
“황도 내로 한정된 허가였겠지.”
“아직 포털 사용에 미숙하여 일어난 실수였을 뿐이에요.”
“변명은 심문실에서 듣도록 하지.”
라가세 백작이 눈짓하자 기사들이 나를 제압해 끌고 갔다.
라가세 백작은 회의장으로 향했다. 안보 회의가 끝난 후 남아 있던 남자가 들어온 백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니아나 프렌시프는?”
“구금실에 가둬 놓았습니다.”
남자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우리의 성녀님께서는 참으로 말괄량이시군. 그새를 못 참고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려 하시니.”
“금세 프렌시프 저에 소식이 들어갈 겁니다. 프렌시프 후작과 나베리우스가 황궁에 오면 가장 먼저 황제를 만나려 할 겁니다.”
하면 왕세자와의 독대가 물거품이 돼 버릴 것이다. 남자가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프렌시프에 있는 우리 사람은 몇이나 되지?”
“한스와 애덤의 일로 대부분이 일선에서 멀어졌습니다.”
남자는 쯧,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황도로 오는 길목에 사람을 풀어라.”
“괘, 괜찮을까요? 우리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면…….”
“그 전에 아타르와의 전쟁이 일어날 것이니 정신없는 사이에 흔적을 지워라.”
“줄리아 리올이 끝끝내 전쟁을 반대한다면 어찌합니까.”
남자는 검지로 테이블을 툭, 툭, 두드렸다.
“하면 왕세자를 죽여야겠지.”
“……!”
“줄리아 리올은 왕세자에게 애정이 깊은 인사다. 설마 사위가 길라게온 황궁에서 죽어 나가도 침착할까.”
“……그녀 손에 있는 것은 어찌할까요.”
“때를 봐서 쥬다에게 그것을 훔쳐 내라 일러라.”
남자의 눈이 번뜩였다. 라가세 백작은 마른침을 삼키고 허리를 깊게 굽혔다. 그는 즉시 아탈란의 살수들을 황도로 오는 길목에 풀었다. 그리고 한 시간 뒤. 프렌시프의 마차는 시간에 맞춰 황궁에 도착하지 못했고, 왕세자는 황제 앞에서 쓰러졌다.
황궁이 발칵 뒤집혔다. 아타르의 사신들이 당장 아타르로 복귀해야 한다고 외쳤고, 라가세 백작은 황제가 소집한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아타르에서 꼬투리를 잡기 위해 병든 왕세자를 보낸 것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누군가 외치자 호전적인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미간을 좁히며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눈을 가늘게 뜬 그가 라가세 백작을 쳐다보았다.
“공의 생각은 어떠한가.”
라가세 백작은 조소를 숨기고 태연히 입을 열었다.
“대륙 전쟁의 피해를 수습하기까지 이십 년이 걸렸습니다.”
“그렇지.”
“성국의 신관들이 망가뜨린 땅에서 이제야 겨우 곡식이 나고 있는데 또다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아무래도 서로 곤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흠…….”
그러자 대신들이 다시 한번 소리치기 시작했다.
“억류하는 것부터 우리가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다 선포하는 거요!”
“아타르의 사신들이 왕세자의 병실에서 몇 시간 째 나오지 않고 있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 또한 전쟁을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이라도 줄리아 리올을 비롯한 사신들을 추포하여 이곳에 억류해야 합니다.”
“논지를 흐리지 마시오!”
“왕세자가 정신을 차린 후 논의해도 늦지 않은 일입니다.”
그때 시종이 회의장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폐하! 아타르의 왕세자가 깨어났습니다!”
황제는 그와 이야기를 따로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며 회의장을 떠났다.
몇 시간 뒤, 왕세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온 황제가 집무실에 틀어박혔다. 라가세 백작이 아타르의 사신으로 온 쥬다 경을 은밀히 만났다.
“라가세 공.”
쥬다 경은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이런 시점에서 만나는 것은…….”
“어찌 되었느냐?”
“리올 재상과 왕세자가 따로 황제를 만났고, 대화 후에 병실을 나온 황제의 표정은 좋지 않았습니다.”
라가세 백작이 조소를 머금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지.’
하기야 왕세자도 사람인 이상 몇 번이고 쓰러진 후에도 화친을 주장하진 못할 것이다. 아타르에게 있어 길라게온은 이제 적지였다. 적지 내에서 아무렇지 않게 계속 머무르진 못할 터.
“하지만…….”
쥬다 경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당장 아타르로 돌아가겠다고 하진 않았습니다.”
“어째서?!”
“리올 재상이 확실히 병명을 알아내기 전엔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옳다 주장하고 있지요.”
“빌어먹을 늙은이.”
그가 쯧, 혀를 찼다.
‘하여간에 계집애들은 겁만 많아서.’
역시 쐐기를 박아야겠다.
“왕세자를 완전히 보내 주어라.”
“예?!”
“그분께서도 허락하신 일이다.”
“하, 하지만 그건…….”
“일이 어그러지기 전에 어서.”
“그렇게까지 해야 한다고는 들은 바 없습니다! 그, 그건 반역이 아닙니까! 연초를 바꿔치기만 하면 된다고……!”
쥬다 경이 손을 내저었을 때였다.
“재미난 얘기들을 하시는구려.”
나이든 여자의 목소리가 코너 뒤에서 들려왔다. 라가세 백작과 쥬다 경이 굳어진 얼굴로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몸을 틀었다. 줄리아 리올과 왕세자, 그리고.
‘세, 세니아나 프렌시프!’
그 뒤에 보이는 사람은……. 라가세 백작이 새파래진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저 영악한 년이 설마―!’
몇 시간 전. 기사들에게 끌려간 나는 심문관을 협박했다.
“어떡하지요, 프렌시프 저로 이야기가 들어가면…….”
“거,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애. 이건 그저 절차상의―!”
“절차상의 일이란 건 알지만, 사람이니 앙심을 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 어르신과 프렌시프 공께는 부디!”
“아니요, 제가 경에게 말이에요.”
심문관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굳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난 활짝 웃었다.
“연락을 취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럼 오늘 일은 잊지요.”
“외부에 연락하는 건 곤란합니다.”
“궁 안에 계신 분께 말씀만 전해 주시면 돼요.”
“궁 안이라시면…….”
나는 로웨나 황비에게 연락을 취해 달라 부탁했다. 심문관은 내 부탁을 들어주었고, 그녀는 나를 은밀히 찾아왔다. 기사들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로웨나 황비를 막아서려 했지만.
“이자들이 미친 걸까? 내가 누군지 몰라?!”
심문실 밖에서 내궁 총책임자의 당당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벌컥 문이 열렸다.
“세상에, 귀한 아이를 이리 대하다니. 부끄럽구나.”
“황비님!”
로웨나 황비가 “오냐, 오냐.” 하며 내 손을 잡고 심문관을 노려보았다.
“저들은 후에 호되게 단속하마.”
나는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황비님은 황제 폐하 다음으로 내궁에서 가장 강한 분이시지요?”
“내게 황후의 인장이 있으니. 우리 아기가 도와주었지 않니.”
그러더니 다정히 내 뺨을 두드렸다.
“도와주신다면 보답하겠습니다.”
“영애가 주는 선물은 늘 다디달지.”
눈치 빠른 로웨나 황비는 나를 심문실에서 풀어 주고, 알아서 기사들의 입단속도 시켰다. 그리고 황제와 연락해 그의 응접실로 은밀히 들여보내 주었다. 인맥은 쌓아 놓을 만하다는 선생님의 말이 정말이었다.
* * *
나는 라가세 백작을 가리키며 로웨나 황비를 쳐다보았다.
“선물입니다, 황비님.”
황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라가세 백작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요요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이래서 영애를 좋아한다니까.”
라가세 백작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어, 어떻게…….”
그야 처음에 나를 잡았을 때부터 눈치챘지. 이상하지 않은가. 결계를 깨뜨린 일로 잡아들이려 하였다면 내가 포털에서 돌아왔을 때 들이닥치는 게 옳다. 굳이 아발론(황제의 궁)에 도착했을 때 나를 잡으려 한 건 누가 봐도 독대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게 아닌가.
아타르의 사신이 길라게온 황궁에 독성이 있는 연초를 들여오는 것부터 무리였다. 이국 사신의 물품은 혹여라도 황족에게 해가 될 수 있으니 철저히 검사한다.
‘길라게온의 누군가가 도왔다는 거야.’
안보대신인 라가세 백작을 최우선으로 의심하는 게 당연했다. 나는 사뿐사뿐 걸어 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당신, 아탈란의 하수인이지.”
“……!”
라가세 백작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사비에르가가 엮여 있더니 라가세 백작까지. 대체 아탈란은 어디까지 침투해 있는 것일까. 그때 기사들이 우르르 달려와 그를 포박했다. 기사들의 뒤를 이어 도착한 건 할아버지와 황제였다. 흰 로브에 핏자국이 엉겨 붙어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피가……! 괜찮으세요?”
“내 것이 아니야.”
설마 아빠가? 겁먹은 나를 본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네 아비도 무사하다. 너는 상한 곳은 없느냐?”
“네.”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할아버지와 아빠가 늦더라니.’
아탈란에서 수작을 부렸던 걸까. 다치지 않아 천만다행이지만 가슴이 쿵쿵, 뛰었다. 황제는 기사들에 의해 꿇어 앉혀진 라가세 백작을 바라보았다.
“들을 얘기가 많겠군.”
“폐, 폐하, 이건 오해……!”
황제가 하하, 낮게 웃고 그의 턱을 단단히 잡았다.
“더는 짐을 능멸치 마라.”
“……!”
“4차까지 고신하고, 그 후에도 입을 열지 않으면 자백제를 써라.”
4차 고신이라면 나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가시관이라는 것을 씌우는데 나사를 조일수록 쇠꼬챙이가 머리를 파고든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의 팔을 꼭 잡으니 그가 괜찮다는 듯 내 손등을 두드렸다.
황궁의 일이 일단락되었다. 왕세자와 줄리아는 내게 감사를 표했고 언젠가 이번 일을 보답하겠노라 약속했다. 로웨나 황비는 신이 났다. 황제의 뜻에 반하는 무리를 솎아 냈으니 입지가 더 단단해질 것이다. 나는 저택으로 돌아가는 내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때문이야.’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나 혼자 아탈란을 처리하겠다는 만용이 아빠와 할아버지를 위험하게 만들었다. 할아버지의 로브 끝에 묻은 피와 아빠의 손등에 난 상처를 볼 때마다 가슴이 조여들었다.
“세니안.”
가라앉은 눈으로, 가만히 앉은 내게 아빠는 손을 내밀었다.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얘기하지 않기로 한 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누가 믿을까, 그런 일. 사실은 약탈자와 몸이 바뀌었고, 다시 돌아온 내가 진짜라는 말 같은 건 나조차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가짜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속였다고, 거짓말쟁이라고 힐난하면 어떻게 하지. 나를 보는 다정한 눈빛이 혐오 일색으로 바뀌면, 그러면……. 나는 이제 이 온기가 사라지는 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무서워.’
차게 식은 내 손 위로 커다란 손이 올라왔다. 한 쌍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아빠의 손을 꾹 붙들었다.
‘선생님.’
오늘따라 그녀가 너무나 간절하게 보고 싶었다. 저택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자 오빠들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미리 이야기를 들었던 그들은 걱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얼굴이 새하얀데.”
“마일로, 따뜻한 차를.”
그러자 사용인들이 허겁지겁 움직였다. 란슬롯은 허리를 굽히고 나와 눈을 맞추었다.
“우리 막내가 왜 이렇게 기운이 없으실까.”
나는 란슬롯을, 가웨인을, 그리고 할아버지와 아빠를 쳐다보았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치맛자락을 꾹 붙들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일단 쉬고. 손이 차다.”
“……아니요, 지금.”
지금 할래요. 영영 용기를 낼 수 없기 전에.
가족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함께 정원으로 향했다. 테이블에 앉기 무섭게 마일로가 얼른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는 찻잔을 양손으로 꽉 그러잡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 년 전의 저는 세니아나가 아니었어요.”
* * *
사고를 당해 윤세나의 세계에서 길라게온으로 왔고, 이곳에서 지내며 신수의 도움으로 내가 진짜 세니아나라는 걸 알았다. ―까지 설명하자 정수리 위로 가웨인의 헛웃음이 칼날처럼 떨어졌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억지로 웃고 있는 가웨인이 보였다.
“인심 써서 12점 줄게. 그런 농담에 후한 점수지.”
“…….”
“자러 가자.”
가웨인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는 차마 그의 손을 잡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앉아.”
란슬롯의 목소리가 싸늘할 정도로 낮았다. 가웨인이 움직이지 않자 란슬롯이 다시 소리쳤다.
“앉으라고 말했다.”
“형은 저런 말을 믿어?”
“가웨인.”
“세니아나, 네가 말해. 농담이지?”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꾹 베어 물었다.
“거짓말이라고 하라니까.”
“…….”
가웨인의 얼굴이 살벌했다.
“좋아, 네 말이 맞다 쳐. 지금껏 왜 얘기를 안 한 건데.”
“…….”
“넌 우리를 조금도 믿지 않았다는 거잖아. 내가, 형이, 조부님과 아버님이 우스웠어? 그래?”
란슬롯은 감정을 누르듯 눈을 감았다. 다시 나를 본 그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지금까지 세니아나로 생활할 수 있었지? 다른 세계에서 왔다면 모르는 것이 분명 있었을 텐데.”
“육체에 세니아나의 기억이 일부 남아 있었고, 모르는 건 시트론에게…….”
“…….”
“…….”
“아무래도 이 얘기는 다음에 다시 해야겠다. 우리에게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란슬롯과 가웨인이 떠나고, 할아버지도 몸을 일으켰다. 수없이 많은 감정이 얽혀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에 나는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모두 떠나고 테이블엔 나와 아빠만이 남았다. 나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아빠가 한숨을 쉬며 한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모두 혼란스러울 거다.”
“……네.”
“너와 미아가 납치당한 뒤 금술을 써서 네 육체를 조사하던 나를 만류한 게 저들이니까.”
“…….”
“죄스럽고 복잡하겠지. 아버지는 특히 더.”
“아빠는 절 믿으세요?”
그가 쓰게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아비가 어떻게 자식을 못 알아봐.”
그러고 보니 아빠는 처음부터 나와 세니아나를 다르게 불렀다. 나를 ‘세니안’이라고 불렀고, 약탈자를 칭할 땐 ‘세니아나’라고 불렀다. 내가 아빠 딸이 맞노라 말한 뒤에야 나를 세니아나라고 불러 주었다. 믿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지금껏 참아 온 눈물이 조금씩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빠…….”
“그래.”
“아빠, 아빠…….”
펑펑 우는 나를 그는 내내 다정히 안아 주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가웨인의 방문을 빼꼼 열었다.
“저기, 식사를…….”
“…….”
“저는 식당에 안 갈게요. 그러니까 오빠는 편히 아침 드세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웅얼거렸다.
“갈게요…….”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내 방으로 올라갔다. 침대에 앉자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저택이 고요했다. 란슬롯과 가웨인, 할아버지가 모두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가족들의 분위기를 눈치챈 사용인들은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움직였다.
‘으…….’
자꾸만 가슴이 아파 왔다. 처음엔 슬프고 불안해서 심장이 뛰는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테디를 만난 후로 내내 수런거렸던 것 같다. 마치 멀린의 마원을 발견했을 때처럼. 새벽엔 어떻게 버텼지만, 갈수록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목과 팔에 각각 차고 있는 멀린과 테디의 마원이 진동했다.
[누나, 누나!]
[주인.]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끙끙거렸다.
* * *
가웨인은 짜증 섞인 손짓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저 바보가.’
시무룩한 목소리가 내내 귓전에 맴돌았다. 믿어 주지 않는다고 소리치고 우는 게 아니라 움찔움찔 눈치를 보는 게 더 보기 싫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벌컥 열리고 란슬롯이 들어왔다.
“뭐야.”
가웨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자 란슬롯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아직 골이 났나?”
“형은 괜찮은가 보지?”
“설마.”
어깨를 으쓱한 란슬롯이 동생을 바라보았다. 막내를 탓해 놓고 한숨도 자지 못했는지 얼굴이 온통 까칠했다. 그때 위층에서 꺄악―! 하는 비명이 들려왔다. 세니아나의 방이다.
시선을 마주친 두 남자가 급히 뛰쳐나갔다. 세니아나의 방 앞에 도착하자 “으아앙!” 하는 낯선 울음소리와 함께 마릴린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고, 곰이, 사자가―!”
“죽일 거야! 죽일 거야! 누나를 아프게 한 인간은 다 죽여 버릴 거야!”
소란에 놀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서와 나베리우스가 그들 틈에서 나타나 세니아나의 방문으로 들어갔다. 무릎까지 오는 작은 반달곰이 가웨인을 보고 희번덕 눈을 부라리더니 아장아장 달려와 투닥투닥 다리를 때렸다.
“너 때문이야! 나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이라고!”
“뭐? 이 코딱지만 한 게 어디서…….”
그러자 크르릉! 포효 소리가 들렸다.
“주인.”
점잖은 목소리의 사자에게서 번쩍 빛이 나더니 곧 새하얀 고양이가 되어 웅크려 있는 세니아나의 뺨을 핥았다.
“으아앙―! 누나―!”
반달곰이 얼른 세니아나에게 달려갔다. 고양이가 반달곰을 위협하듯 하악―! 털을 곧추세우고 소리쳤다.
“현신을 풀고 네 길로 돌아가. 주인의 의식을 찾아와라.”
고양이가 소리치자 반달곰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폴짝폴짝 뛰었다.
“하, 하려고 하는데, 계속 돌아가려고 하는데…….”
“현신해! 멍청이! 주인을 죽일 셈이냐!”
순간 반달곰의 눈이 붉은빛으로 번쩍 빛났다. 쾅―! 저택이 흔들리고 거대한 곰이 되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서가 굳은 얼굴로 고양이를 보았다.
“나는 그대를 압니다. 전장에서 보았지요. 미아의 성수.”
“그대 딸의 길이기도 하오.”
아서가 쓰러진 세니아나를 부축하며 말했다.
“어찌 된 일입니까.”
“힘이 안정되지 않은 시점에 길을 하나 더 소유하게 되었으니 육체가 버티지 못한 거요. 그런 와중에 감정까지 다스리지 못하였으니.”
“뭐―?!”
가웨인이 희게 질린 얼굴로 소리치며 세니아나를 끌어안았다.
“이깟 힘 필요 없어! 다들 내 동생에게서 꺼지라고!”
“불가하오. 이미 주인이 새로운 길에 이름을 붙여 주었으니. 그 녀석은 완전한 주인의 소유가 되었소.”
란슬롯이 세니아나의 어깨를 흔들며 소리쳤다.
“세니아나! 세니아나!”
나베리우스가 당장 마법사들을 불러오라 명했다.
새벽이 되어서야 세니아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깜빡, 눈을 감았다 뜬 그녀가 주변에 몰려 있는 가족들을 보고 흠칫, 어깨를 좁혔다.
“누, 누구…….”
“세니아나.”
그녀가 바짝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었다.
“아, 아빠가 어디 있는지 저도 몰라요. 때리지 마세요. 때리지 마세요.”
나베리우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서는 다급히 멀린에게 물었다.
“어찌 된 겁니까.”
“억지로 육체에 정신을 붙여 놔 충격을 받은 모양이군. 하루 이틀이면 본래대로 돌아올 거요.”
멀린이 겁먹은 세니아나의 뺨을 핥았다. 그녀는 여전히 경계 어린 눈빛으로 후다닥 침대 헤드에 붙어 무릎을 끌어안았다. 꾸륵. 배 속에서 나는 소리에 세니아나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어제부터 제대로 먹은 게 없으니 배가 고플 만도 했다.
란슬롯이 마일로에게 음식을 가져오라 명했다. 마일로는 허겁지겁 달려가 부드러운 빵과 묽은 스프를 가져왔다. 쟁반을 내밀자 고개를 빼꼼 들곤 눈치를 본다.
“아가씨…….”
마릴린이 훌쩍이며 스푼을 건넸다.
“좀 드세요, 네?”
마릴린의 손은 거절하지 않는다.
‘설마…….’
란슬롯이 미간을 좁히고 세니아나의 근처에 있는 사내들을 몰아냈다. 그들이 비켜 주자 그제야 슬그머니 빵을 잡더니 이내 허겁지겁 입에 욱여넣었다.
[윤세나였을 때, 처음엔 아빠와 단둘이 살았고 나중엔 고아원으로 갔어요.]
[아빠가 빚이 많아서 차라리 고아원에 있는 게 더 좋았어요.]
“켁!”
“물이요, 물! 아가씨, 물 드세요.”
평소엔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사람처럼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 안달이었다.
‘음식조차 먹을 수 없는 삶이었다고?’
세니아나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서는 집사 마일로에게 세니아나가 포털의 충격으로 인해 기억에 혼란이 온 점을 인지시켰다.
“예. 사용인들도 단속하겠습니다.”
“그래.”
세니아나는 그동안 빵을 두 덩이나 해치웠다. 그러곤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
그녀가 불편한 듯 우물쭈물하자 마릴린이 상냥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아가씨? 어디 불편하세요?”
“……아니요.”
그럼 왜 치맛자락을 꼭 잡고 안절부절못하실까.
마릴린이 괜찮다며 손을 붙잡자 화들짝 놀란 세니아나가 침대 헤드에 바짝 붙었다. 그러고 또 한참을 눈치를 보았다. 가족들은 그런 그녀를 보고 도무지 말을 붙일 수 없었다. 세니아나가 끙끙거리며 문가를 바라보았다. 가웨인은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조금씩 다가갔다.
“세니아나.”
“…….”
“어디가 아픈 거야?”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이불을 끌어안는다.
“말하지 않으면 몰라.”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이제 그만……!”
대체 뭘. 네가 뭘 잘못했다고. 가슴에 뭐라도 얹힌 것처럼 답답하고, 화가 났다.
“제발 좀.”
“…….”
“뭐야, 어? 어디가 불편한 거야.”
“……화, 화장실.”
“뭐?”
“쉬야…….”
세니아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혼이 날까 봐 어쩔 줄 몰랐다. 그러자 마릴린이 “아!” 하며 세니아나를 잡았다.
“가요. 화장실은 저쪽이에요.”
마릴린의 부축을 받으며 우물쭈물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가웨인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 * *
나는 치마를 정리해 주는 언니를 보고 시무룩 고개를 숙였다. 참지 못했다.
‘혼날 거야.’
저번에 만난 무서운 아저씨들은 나를 몇 시간이나 벽에 세워 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화장실이 가고 싶다고 우니까 낄낄 웃음을 터뜨리며 한참을 보내 주지 않았다.
그때 입었던 바지는 헌 옷 수거함이나 구청에서 얻어 온 게 아니라 아빠가 시장에서 직접 사 준 것이었다. 소중한 옷을 망칠 수 없어 후다닥 도망쳐 화장실에 가니까 머리를 쥐어박았다. 재미없다면서.
“이제 괜찮으세요?”
까만 치마를 입은 언니가 상냥하게 물었다. 나는 움찔, 하고 뒤로 물러났다.
“아가씨…….”
“이제 밥 안 줘요?”
“네?”
“쉬야, 못 참았으니까…….”
“그렇지 않아요!”
화들짝 놀란 언니가 나를 끌어안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마음 아프게 왜 그러세요…….”
언니는 나를 끌어안고 소리 없이 울었다.
‘밥은 줄 건가 봐.’
다행이다. 여기는 처음 보는 곳이었다. 아빠도 없는 데다가 주말에 주먹밥을 얻으러 나눔센터에 갈 수 없으니 꼼짝없이 굶을 줄 알았는데.
“이러면 안 돼.”
언니는 한동안 울다가 소매로 얼굴을 북북 닦았다.
“갈까요?”
“…….”
여기 더 있고 싶은데. 침대 주변에 있던 할아버지와 아저씨, 젊은 삼촌들은 되게 무섭게 생겼다. 아빠는 그렇게 생긴 사람들을 보고 ‘기생오라비 같은 게 딱 사기꾼 상이네.’ 하며 혀를 찼다.
‘사기꾼…… 조심해야 돼.’
나는 언니의 손을 잡고 걸으며 한숨을 삼켰다. 이곳은 정말로 으리으리했다. 티브이에서 보던 호텔이 이런 곳이었던 것 같다. 매끈매끈한 바닥이라든지, 화려한 장식이라든지, 어디에도 먼지 한 톨 찾아볼 수 없다든지 하는 것을 보면.
‘처음 일어났던 방도 엄청 예뻤지.’
인형도 잔뜩 있고, 온통 핑크색인 데다가 이불도 폭신폭신 따뜻했다. 이런 데서 사는 아이는 어떨까? 공주님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울 거야.
‘좋겠다, 그 아이…….’
방문 앞에 다다라서 나는 다시 우물쭈물했다. 겁이 나서 자꾸만 다리가 얼어붙는다. 아까 본 할아버지 엄청 무서웠는데 나한테 화를 내면 어쩌지. 아빠가 이번에도 자기가 있는 곳을 말하면 내다 버릴 거라고 했다. 조용히 있다가 도망쳐 나오면 젤리를 사 준다고 했다.
‘아빠가 휴게소에서 사 준 포도 모양 젤리.’
그건 쫀득쫀득하고 달콤해서 정말로 맛있었다. 너무너무 맛있고 소중해서 하나씩 숨겨 두고 먹었는데. 아빠…….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잘생긴 할아버지와 아저씨, 젊은 삼촌들이 나왔다. 나는 코가 따끔따끔해졌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고개를 푹 수그리자 할아버지가 물었다.
“세니아나?”
“…….”
“더 불편한 게 있느냐? 배탈이 난 게야?”
“……빠.”
“네?”
“아빠……, 보고 싶어요……. 보내 주세요……. 잘못했어요. 제가 크면 갚을게요. 돈 갚을게요. 보내 주세요.”
“…….”
할아버지의 표정이 아픈 사람처럼 일그러졌다. 그러자 잘생긴 아저씨가 내 손을 붙잡고 있는 언니를 보았다.
“마실 것을 정원으로 가져와라.”
“예, 주인님.”
언니가 후다닥 떠나고 아저씨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꽃이라도 보면 기분이 나아질 거다.”
“…….”
아저씨는 다정하게 손끝으로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주 조심스럽고, 소중한 것을 다루는 것처럼.
“세니아나.”
내 이름은 순이인데 여기 사람들은 왜 자꾸 나를 세니아나라고 부르는 걸까.
아저씨가 다시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서 나는 눈치를 보다가 살그머니 손을 잡았다. 아저씨와 내가 먼저 걷자 할아버지와 삼촌들이 우리의 뒤를 쫓아왔다. 얼마쯤 걸어 푸릇푸릇한 잔디가 깔린 곳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와―!”
여기는 그냥 집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런 데를 뭐라고 하는데. 뭐였더라.’
“수, 수…… 수목원! 수목원이다!”
단어가 생각난 게 기뻐서 소리쳤다가 움찔, 어깨를 좁혔다.
“재밌어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
아저씨는 희미하게 웃었다.
‘웃으니까 더 잘생겼다.’
우리 동네에서 제일 잘생긴 숙희 아줌마네 아들보다도. 아까 보았던 착한 언니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서 예쁜 컵을 내밀었다.
“뜨거우니까 호호 불어서 드셔요?”
“……여기 곰팡이 피었는데.”
사실은 나쁜 사람이었던 걸까. 썩은 음식을 먹이고 재밌어하는 건 무서워…….
내가 눈치를 보면서 말하자 삼촌들이 다가와서 컵 안을 들여다보았다. 노란 머리의 예쁜 삼촌이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초콜릿에 마시멜로를 넣은 거야.”
“초콜릿은 딱딱한 건데…….”
“녹여서 우유를 넣은 거지.”
이 삼촌은 착한 삼촌인가 보다. 계속 물어보는데도 잘 알려 주고.
‘그런데 저 삼촌은…….’
녹색 머리의 삼촌은 자꾸만 딱딱한 표정으로 날 보아서 정말로 무서웠다. 나는 컵을 꽉 쥐고 살그머니 언니의 뒤로 숨었다.
“언니…….”
“마릴린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저기 삼촌이랑도 걸어야 돼요?”
내가 속닥속닥 물어보자 마릴린 언니는 깜짝 놀라 녹색 머리의 삼촌을 보았다.
“가웨인 도련님이요?”
“네, 저 삼촌.”
“삼……!”
녹색 머리의 삼촌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노란 머리의 삼촌이 다른 삼촌을 밀어냈다.
“싫으면 여기 있으라고 할게.”
“……정말요?”
“응.”
“그러면 저기 무서운 할아버지는…….”
“나, 나도?”
이번엔 할아버지가 충격받은 얼굴로 물었다. 나는 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잘생긴 아저씨가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여기 계시죠.”
“……네놈은?”
“저야 세니아나가 두려워하지 않으니.”
“빌어먹을.”
화가 났나 봐!
난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할아버지는 손을 다급하게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다, 아니야! 네게 욕을 한 게 아니야.”
“…….”
“여기 있으마. 필요한 게 있거든 말해라. 응?”
“…….”
내가 어쩔 줄 모르니 노란 머리의 삼촌과 잘생긴 아저씨가 다가왔다.
“저쪽으로 갈까? 코스모스가 피기 시작했어.”
나는 둘과 함께 걸었다. 잔디는 폭신폭신하고, 나무와 풀잎 냄새는 새콤한 데다가 언니가 가져다준 초콜릿은 정말로 맛있어서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커다란 잔에 있는 초콜릿이 바닥을 보였다. 그러자 노란 머리의 삼촌이 컵을 잡았다.
“들어 줄게.”
아직 마시멜로라는 게 조금 남았다. 아쉬움에 꾸물거리자 잘생긴 아저씨가 물었다.
“더 가져올까?”
“……그래도 돼요?”
“그럼.”
여기 사람들은 착했다. 초콜릿도 한 잔 더 주고, 내가 꽃반지를 만들어도 되냐고 물으니까 밀짚모자를 쓴 아저씨들이 우르르 와서 꽃을 이것저것 잘라 주었다.
“온실에서 꽃을 더 가져올까요? 색이 고운 튤립이 있습니다.”
“수국도 있지요.”
“아가씨는 무슨 꽃을 제일 좋아하십니까?”
그리곤 언니들이 와서 꽃반지 말고 화환 만드는 것도 도와주었다. 정원에서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있다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니 맛있는 냄새가 났다. 나는 커다란 식탁에 잔뜩 차려진 음식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 우와―!’
이것도 티브이에서나 보던 음식들이었다. 할아버지와 아저씨, 삼촌들이 자리에 앉았고 나는 오도카니 서서 침을 꼴깍 삼켰다.
‘소시지…… 맛있겠다.’
“이리 와.”
초록색 머리의 삼촌이 말해서 난 손을 꼬물거렸다.
“돈…… 없는데…….”
삼촌은 한숨을 내쉬고 나를 끌고 옆자리에 앉혔다.
“뭐부터 먹을래?”
“……소시지.”
삼촌이 빙그레 웃곤 소시지를 잘라서 내 접시 위에 놓아 주었다.
“평소엔 뭘 먹었어?”
나는 소시지를 우물우물 먹으면서 말했다.
“김이랑 밥이랑…… 가끔 계란도 먹고…….”
“계란? 스크램블 같은 건가? 프라이?”
“가스에 손대면 혼나니까 그런 건 아빠 있을 때만.”
하나 있는 프라이팬을 홀라당 태워 먹어서 엄청나게 혼났다. 집주인도 막 뭐라고 하고.
‘소시지 맛있어!’
나는 초록색 머리의 삼촌이 잘라 준 소시지를 금방 다 먹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알았다. 이 사람들은 하나도 안 먹고 있다는 걸.
“왜 안 드세요? 맛있는데…….”
“우리 막내 먹는 걸 보는 게 기뻐서.”
노란 머리의 삼촌이 다정하게 말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많이 먹는 애는 싫잖아요…….”
우리 아빠도 내가 많이 먹는다고 싫어했다.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노란 머리 삼촌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함께 살던 사람이 네게 음식을 주지 않았어?”
“아빠요?”
“……그래.”
“우, 우리 아빠는 나쁜 사람 아니에요!”
왈칵 화를 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빠가 나한테 화를 내는 건 내가 잘못해서 그러는 거예요. 집에 들어올 때는 라면도 끓여 주고, 빵도 사 줬어요!”
이번엔 잘생긴 아저씨가 물었다.
“집을 자주 비웠나?”
“그냥, 조금…….”
“너를 때렸던 사람이 그자인가.”
아저씨의 얼굴이 차가워지길래 그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저번에도 센터에서 나왔다는 아줌마가 이런 걸 물었다.
[아이 상태만 확인하려는 겁니다.]
[너희가 뭐라고 내 자식을 확인해!]
뒷집 사는 할머니도 가세해서 아빠를 몰아붙였다.
[매일 술 처먹고 들어와서 애를 학대하잖아!]
[애비가 자식한테 훈계도 못 해!? 이거 미친 할망구 아니야!]
한 시간 가까이 소리치며 싸워서 정말 무서웠다. 이불 속에 숨어 벌벌 떨고 있는데 아빠가 돌아와서 말했다.
[너 아빠랑 떨어져 살고 싶어?]
아빠가 나를 때리고, 추운 겨울에 내복만 입혀 쫓아냈다는 걸 말하면 더는 같이 살 수 없다고 했다. 뻥튀기도 안 사 주고, 맨날맨날 고아원에서 구박만 받을 거라고 그랬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 우리 아빠는 나한테 잘해 줘요. 아빠가 나를 교육하는 거예요. 때리는 거 아니에요.”
“…….”
“아, 아빠는, 아빠는…… 가끔 우리 순이라고 하면서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돈을 많이 따는 날엔 햄도 구워 줘요.”
“…….”
“내가 머리 아프다고 하면 소화제도 준단 말이에―”
갑자기 나를 끌어안은 아저씨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저씨의 어깨 뒤로 보이는 삼촌의 표정이 너무너무 아파 보여서 나는 더 말할 수 없었다.
정원에서 잔뜩 논 뒤에 밥도 배부르게 먹었더니 금세 눈이 가물가물 감겨 왔다. 나는 커다란 소파에 누워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따뜻한 손이 내 뺨을 감싸 왔다. 흐린 시야 사이에 초록색 머리칼이 얼핏 보였다.
“미안.”
“…….”
“잘못했어.”
“…….”
이 사람은 왜 자꾸만 내게 사과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 * *
잠에서 일어난 나는 천장을 가만히 보며 굳어 있었다.
‘마, 망했다.’
어제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화, 화장실.’ 하면서 울먹이던 내가 생각나자 나는 또 한 번 쥐구멍을 찾았다.
‘가족들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내가 아주 멍청하게 굴었다는 것과 마릴린이 친절했다는 것, 그리고 초콜릿이 맛있었다는 것, 또…….
[누나아―!]
[주인!]
나를 찾던 테디와 멀린의 목소리만 기억났다.
‘으아아―!’
쓰러지기 전에 테디와 멀린의 대화로 생각해 보자니, 아무래도 테디에게 이름을 준 것이 이번 일에 영향을 미친 모양이었다.
‘왜 하필 어제…….’
그렇지 않아도 가족들이 화가 나 있는데! 어쩌지. 어떻게 하지.
‘일단 사과를 하자.’
난 얼른 옷을 갈아입고 살금살금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사용인들이 ‘아가씨!’ 하며 나를 불러왔다.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대답했다.
“으응. 할아버지와 오빠들은?”
“아래 계셔요. 아가씨가 깨어나셨다고 전할까요?”
“아니야……. 내가 갈게.”
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가족들은 대거실에 모여 있었다. “저기…….” 하고 불렀는데 뭔가에 집중해 있던 가족들은 목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인형이라니까.”
“의외로 목검을 좋아할 수도 있지 않나.”
“차라리 승마를…….”
“다들 멍청하군. 그런 것으로 어떻게 아이의 마음을 열겠느냐!”
아이? 마음? 내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을 찰나에 할아버지가 나를 발견했다.
“순이야!”
“……네?”
그는 고깔모자와 기괴한 안경을 황급히 쓰고는 물었다.
“이제 무섭지 않지? 오늘은 함께 산책하게 해 줄 게냐?”
―하고.
‘그러니까 진짜 무서운데요.’
뭐라고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나는 어색하게 눈만 데구르르 굴렸다.
“주인님.”
그때 사용인들이 방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손엔 이상한 물건들을 각각 든 채로.
“구두입니다.”
“드레스입니다.”
“장인의 디저트입니다.”
그리고 마일로가 활짝 웃으며 나를 불렀다.
“순이 님.”
“……?”
그건 대체 뭔가요. 사람만 한 곰 인형을 내 앞에 내려놓은 그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어제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지고 싶은 건?]
[없는데…….]
[인형이나 옷, 음식 같은 것. 뭐라도 좋으니까.]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세상에……, 선생님.’
질린 표정으로 어린 애들이 좋아할 것 같은 꽃분홍 레이스가 휘황찬란하게 달린 물건들을 쳐다보았다. 가족들은 내 표정을 당황과 공포로 오인한 듯싶었다. 란슬롯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캐물으려고 주는 뇌물이 아니야.”
가웨인은 드레스를 받아서 내게 턱, 안겨 주었다.
“공주님 드레스 입고 싶다고 했잖아.”
“그게…….”
“초콜릿 필링이 든 빵도 먹고 싶었다고 했지?”
“아니, 저기…….”
“또 뭐라고 했더라.”
나 정신 돌아왔다고! 말할 틈을 주지도 않고 그들은 또 선물이 있다며 나를 끌고 정원으로 향했다.
“아―!”
정원에 가자마자 황금색 털을 가진 커다란 강아지가 컹! 울며 내게 다가왔다. 골든래트리버다! 어렸을 때 커다란 강아지랑 뛰어노는 게 꿈이었는데 그것도 말했던가?
윤세나, 아니, 순이의 친부와 살던 동네에 하얗고 커다란 이층집이 있었는데 거기서 이런 개를 키웠다. 그 집 아줌마가 오전마다 골든래트리버를 데리고 산책했었다. 개가 엄청 순하고 귀여워서 마주치려고 아줌마의 산책 코스를 기웃거렸던 기억이 있다.
개는 꼬리에 모터를 단 듯 빠르게 흔들며 내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개가 왕! 왕! 울며 내 치맛자락을 물고 끌어당겼다.
“어어―!”
“오마르!”
아차 하는 사이에 개에게 끌려간 나는 잔디에 풀썩 넘어졌다. 개가 잽싸게 내 위로 올라타서 볼이며 머리칼을 싹싹 핥아 주었다. 나는 꽁꽁 얼어서 마른침을 삼켰다.
‘제발.’
“으, 으으…….”
울먹거리는 나를 보고 가족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큰 개를 좋아하는 건 어릴 때였다고요!
고아원에서 들개에게 물린 뒤로는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무서웠다. 개의 주둥이에 물린 전적이 있는 어깨에 다가오자 나는 공포가 극에 달해 “으악!” 하고 소리쳤다. 화들짝 놀란 사용인들이 다가와 나와 개를 떨어뜨려 놓았다.
“세니아…… 순이야?”
할아버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벌벌 떨며 엉거주춤 땅을 짚었다.
‘무, 무서웠다.’
물기 어린 눈을 본 가족들이 우뚝 굳어졌다. 아빠가 나를 일으켜 주며 할아버지를 쏘아보았다.
“그래서 새끼가 낫다지 않았습니까.”
“큰 개를 만져 보고 싶다기에…….”
할아버지는 변명하듯 말했고, 아빠는 인상을 썼다.
“마일로, 주인에게 개를 데려가라 일러라.”
“예.”
다행이다. 주인이 있는 개였나 봐. 계속 같이 살면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내가 한숨을 내쉬니 오빠들이 다가왔다.
“괜찮아?”
“네…….”
란슬롯이 손끝으로 내 눈을 문질렀고, 가웨인은 쯧 혀를 차며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내가 아빠와 오빠들에게 부축받으며 가는 동안 할아버지의 시무룩한 시선이 등 뒤로 달라붙었다.
저택으로 돌아오니 테이블에 온갖 디저트가 늘어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혀가 녹아내릴 정도로 단것투성이라 나는 흘깃 가족들을 쳐다보았다. 이번엔 가웨인이 아주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어린애들이 좋아하는 것들로 준비해 봤다.”
얼른 먹자며 나를 의자에 앉히고 이것저것 내밀었다. 캐릭터 모양의 마카롱을 한입 베어 문 나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이렇게 다디단 디저트가 들어가니 속이 엄청 부대꼈다. 가웨인은 내가 억지로 받아먹을 때마다 다른 접시를 앞에 놓아 주었다.
“딸기 케이크, 좋아하지?”
“…….”
속으로 제발 그만! 하고 외치고 있는데 저 웃는 얼굴 때문에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디저트를 네 접시나 꾸역꾸역 받아먹고 결국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욱!”
아빠와 란슬롯이 내 등을 두드리며 가웨인을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아침부터 이런 자극적인 건 안 된다고 했잖아.”
란슬롯이 탓하듯 말하자 가웨인은 먼젓번 할아버지처럼 시무룩 어깨를 늘어뜨렸다. 약을 먹고 겨우 진정된 내게 란슬롯은 옷더미를 안겨 주었다.
“공주님 드레스야. 구두와 보석, 인형도 잔뜩 있어.”
“…….”
나는 꽃핑크와 레이스가 잔뜩 달린 드레스를 입어야 했다. 치마의 프릴이 대체 몇 겹인지 무서워서 세지도 못했다.
“악!”
거대하리만큼 풍성한 치마를 입은 난 뒤뚱뒤뚱 걷다가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소스라치게 놀란 하녀들이 내게 달려왔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어머머, 무릎이 새빨개요!”
“의사! 의사!”
할아버지가 란슬롯에게 벌컥 화를 냈다.
“이런 옷을 입고 애더러 어찌 걸으라는 게야!”
“…….”
란슬롯은 드물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가 선물한 옷을 벗고 평소처럼 단출한 차림으로 돌아왔다. 시무룩한 표정의 할아버지와 오빠들을 본 아빠가 혀를 차곤 내 손을 잡았다.
“가자.”
“…….”
“내가 준비한 건 저들과는 질적으로 다르지.”
아빠는 오만한 표정으로 나를 데리고 성큼성큼 걸었다. 본저 내에 쓰지 않는 방문 앞에 다다라 내게 열쇠를 건네주었다.
“열어 봐라.”
나는 의아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방을 열었다. 그리고―
“꺄악!”
나는 펄쩍 뛰며 등 뒤에 있던 마릴린의 품에 뛰어들었다.
이게 뭐야, 대체 뭐야!
방 안엔 웬 마네킹과 옷이 가득했는데 너무 사람과 똑같아서 오히려 무서웠다. 기괴한 자세로 천장에 매달려 내려다보는 인형은 꿈에 나올까 무섭다. 할아버지는 마릴린의 품에 안긴 나를 쓰다듬으며 소리쳤다.
“왜 애를 겁먹게 하느냐!”
“인형 옷을 갈아입히는 게 애들 사이에서 유행이라기에…….”
아빠가 당황한 표정으로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고개를 홱 돌려 아빠와 할아버지의 손을 떼 내고 엉엉 울었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세니아나와 몸이 바뀌었던 걸 말하지 않았다고 이런 방식으로 벌을 주는 건가?
‘너무해!’
말로 하면 되지 사람을 이렇게 괴롭히다니! 가족들은 우는 나를 보고 안절부절못하며 “세, 세니아, 아니, 순이야!” 하고 불렀지만, 난 마릴린의 손을 잡고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나는 소파에 앉아 퉁퉁 부은 눈을 문질렀다. 가족들은 앉지도 못하고 내 주위를 빙 둘러서서 마른침을 삼켰다.
“수, 순이야.”
“…….”
“우리는 그런 게 아니라…….”
“…….”
“저기, 그게…… 미안하다.”
내가 아무런 말 없이 냉침한 차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으니 가족들은 더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니까 우린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선물을…….”
“그래, 네가 즐거웠으면 해서!”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그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진짜요?”
“그럼!”
“물론이지!”
“진짜야.”
“정말이다.”
나는 코를 훌쩍 들이마시고,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럼 화는 풀리셨어요?”
“……화?”
“제가 몸이 바뀐 걸 말씀드리지 않아서 화가 나셨잖아요.”
“너, 설마…….”
정신이 돌아왔냐는 듯한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웨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 났어. 처음부터.”
“……하지만 소리 지르셨잖아요.”
란슬롯이 무릎을 굽혀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네게 화가 난 게 아니야.”
“네?”
“너를 알아보지 못한 스스로가 싫어서, 아니 혐오스러워서.”
다정한 목소리였다. 자조 섞인 미소는 안쓰러울 만큼 아파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그가 가만히 눈을 감고 내 손에 얼굴을 맡겼다.
“저는 괜찮아요.”
“…….”
“그러니까 오빠도, 할아버지도, 아빠도 모두 괜찮았으면 좋겠어요.”
가웨인이 굳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괜찮아. 어린애가 기댈 데도 없이 그 고통을 혼자 다 견뎠으면서, 어떻게 괜찮다고……!”
“오빠.”
“아파도 약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하고, 아프다고 소리치지도 못했으면서.”
“…….”
“너는 그런 것들이 어떻게 괜찮을 수 있어.”
“그래서 더 소중해졌잖아요.”
“뭐?”
나는 살짝 일어나 그의 손을 잡았다.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꽉 쥐었던 손에서 마법처럼 스르륵 힘이 풀렸다.
사실은 억울하다. 그때만 생각하면 화가 나고 가슴이 아프다. 누군가에게 필요 없는 짐이었다는 게, 버려졌다는 게, 내 삶이 그들에게 아주 하찮았다는 게.
윤세나의 아빠가 아주 많이 아파했으면 좋겠다. 먼 훗날 나이 들고 병들어 기댈 데가 없을 때 나를 생각하며 가슴을 쥐어뜯기를 바란다. 고아원의 원장이 나를 학대한 것에 죄스러워했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죄가 드러나 법의 심판을 받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나는. 나는.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다. 지나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고, 남은 상처는 아마 평생 남아 있겠지만, 다시 찾은 내 삶이 계속 과거에 머무는 건 싫다.
“저는 할아버지도, 아빠도, 오빠들도 너무너무 좋아요.”
“…….”
“그래서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 더 많이 사랑하고 웃고 싶어요.”
“…….”
“가족들이 죄스러워한다면 저 또한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나를 가웨인이 꽉 끌어안았다.
“바보같이 착해 빠져서.”
나는 그의 가슴에 가만히 귀를 댔다. 쿵, 쿵, 뛰는 소리는 여기가 현실이라고 알려 주는 것만 같았다. 평생 사랑받지 못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의 내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있었다. 나는 오빠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나는 가족들에게 아탈란에 관해 설명했다. 내 몸을 빼앗은 이들이 그들이고, 대귀족까지 관여하고 있다고 말하자 할아버지는 미간을 좁혔다.
“사비에르의 성녀가 아탈란의 실험체였다라.”
할아버지의 말에 란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가세까지 그들의 심복이었다면 다른 금좌 11석의 귀족 중에도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아빠는 가만히 앉아 테이블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
나는 서늘한 아빠를 보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왜요?”
“……테르반이 걸리는군.”
테르반 백작이라면 릴리의 외조부 말인가? 올리비에 폐공작의 역모에 그가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 가문이 풍비박산 났다. 사형당했다고 들었는데 그가 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빠를 쳐다보았다.
“뭐가 걸리시는데요?”
그러자 란슬롯이 대신 설명해 주었다.
“역적은 사형 후 이레간 성문에 목을 걸어 놓거든.”
“그렇군요.”
“그런데 시체의 부패가 생각보다 빨랐어.”
“여름이라 그런 게 아니라요?”
아빠가 대답했다.
“검은 오물 같은 것이 흘러내렸다고 하지. 테르반이 금술사와 가깝게 지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사후에 금술의 부작용이 나타난 거라 여겼지만…….”
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탈란과 관련되었을 수도 있겠어요.”
“마일로!”
아빠가 땅에 묻힌 테르반 백작의 남은 시신을 살피고 오라 일렀다. 조사 후에 그들이 가지고 돌아온 것을 본 오빠들과 나는 깜짝 놀랐다.
“이거 슈라의 마을에서 본……!”
슈라의 부족민 중 삿된 자로 변한 남자가 꼭 이런 모양을 하고 있었다.
“테르반이 아탈란과 관계가 있었던 게 확실해요.”
이 울렁거림. 모두가 느끼는 불쾌감. 이건 분명 삿된 자의 찌꺼기였다.
“올리비에 폐공작의 역모에도 아탈란이 관련되어 있을지 모른다.”
아빠의 말에 할아버지가 황궁에서 기록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황궁…… 아!’
“쟝뤼크 교수님!”
깜빡하고 있었어! 나는 벌떡 일어났다.
* * *
황궁은 아타르 왕세자 음독 사건으로 정신이 없었다. 쟝뤼크는 그 덕에 아직도 옥사에 갇혀 있었다. 나는 바로 황제에게 부탁해 쟝뤼크를 풀어줄 수 있었다. 옥사에서 나온 쟝뤼크가 손목을 돌리며 인상을 썼다.
“빌어먹을.”
“……괜찮으세요?”
“그럴 리가! 라가세 백작, 이 개자식.”
그는 고함을 내질렀다.
“일이 마무리되었으면 얼른얼른 풀어 줘야지 왜 사람을 이렇게 붙들어 놓는 거냐!”
그러다 나를 쳐다보았다.
“너도 나를 잊고 있었던 게냐?”
“아니욧!”
지레 찔려서 소리치니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에게 봉지를 건넸다.
“뭐야, 이건?”
“두부…….”
“……?”
“감옥에서 나오면 두부를 드시는 거래요.”
“……처음 듣는 소린데.”
그는 쯧, 혀를 차고 봉지를 노려봤지만 내가 눈짓하니 한입 먹는 시늉을 했다. 때마침 할아버지가 다가왔다.
“세니아나.”
“네.”
“올리비에 폐공작의 기록은…… 루크.”
“격조했습니다, 어르신.”
그가 허리를 굽혔지만, 할아버지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기록은 내가 알아볼 테니 너는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 있거라.”
“그럴게요. 아, 교수님도 함께 가시면 안 될까요?”
내내 동부에만 있던 사람이라 황도엔 머물 만한 곳이 없을 거다. 할아버지는 쟝뤼크를 흘깃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쟝뤼크와 함께 마차를 탔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올리비에 폐공작은 왜 찾는 거지?”
“일이 있어서…… 아, 교수님 혹시 아세요? 올리비에 폐공작과 엮인 사람.”
“글쎄. 귀족들이야 나보다 어르신과 각하가 더 잘 아시겠지.”
하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쟝뤼크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뭐, 한 사람 알고 있긴 하다만.”
“누군데요?”
“너와도 관련 깊은 사람이 아니냐.”
“……네?”
나와 관련 깊은 사람이라니? 나는 쟝뤼크에게 다급히 캐물었다.
“그게 누군데요?”
내 표정을 본 그가 잠시 미간을 좁혔다. 올리비에 폐공작과 엮인 사람을 생각조차 하기 싫다는 듯이.
“현 로열 셰프인 고프레도 말이다.”
“……네?”
“그자가 올리비에 폐공작의 저택에서 수셰프로 있었지.”
“막역한 사이였나요?”
“글쎄. 그야 그들만이 알 일이지. 하지만 고프레도는 아카데미를 거쳐서 정식 입관되진 않았어. 올리비에 폐공작의 추천서를 받아 권외 시험에 합격했지.”
그것만으로 로열 셰프가 아탈란과 관련이 있다고 확신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아탈란이 나의 로열 키친 입관을 막으려 하는 까닭을 생각하면…….
‘걸리긴 해.’
쟝뤼크는 내 표정을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혹시 로열 셰프가 라가세 백작이나 사비에르 후작과도 관계가 있었나요?”
“그놈이 로열 셰프가 된 이후의 일은 모르겠군. 직후에 바로 황궁을 나왔으니까.”
나는 흠, 침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마차가 저택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뒤 쟝뤼크를 돌아보았다.
“내리세요, 교수님.”
“…….”
“교수님?”
“어마어마하다는 건 익히 들어 알았지만…….”
그는 저택의 외관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아, 그렇네.’
대문 밖에서도 한참 마차를 타고 들어와야 하니 프렌시프 저를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을 거다. 쟝뤼크가 마차를 나서자 이 열로 정렬해 있던 수많은 사용인이 나와 그를 맞았다. 나는 그 사이로 걸으며 다시 쟝뤼크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왜요, 교수님?”
“……혹시 말이다.”
“네.”
“내가 아카데미에서 네게 소리치고 엄하게 꾸짖었다는 걸 이를 테냐…… 요.”
“……?”
“아, 아닙니다.”
왜 갑자기 존댓말이실까. 내가 눈을 끔뻑이고 있으니 마일로가 나와 허리를 깊이 숙였다.
“프렌시프 저의 집사 마일로입니다. 아가씨의 손님을 귀하게 모시라 명받았습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거든 언제든 저를 찾아 주십시오.”
“교수님께서 입을 옷을 준비해 줘.”
“예, 아가씨.”
쟝뤼크는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들어가지 않으세요?”
내가 물으니 쟝뤼크가 말했다.
“귀족가를 방문할 때 외부인은 몸수색을 하지 않나.”
마일로는 빙그레 웃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귀하게 대접하라 명받았습니다.”
몸을 수색하지 않겠다는 말에 쟝뤼크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나와 함께 저택에 들어온 그는 한 번 더 혀를 내둘렀다.
“로열 키친에 있을 때도 못 받은 귀빈 대접을…….”
“황궁에선 황족들의 사저로 로열 키친의 셰프들을 보내는 일이 많지 않나요?”
생일 때라든지. 비단 황족뿐만이 아니라 귀족들도 포상할 일이 생기면 황제가 가끔 로열 키친의 요리사들을 보내 주기도 했다.
“어쨌든 요리를 하러 가는 것이니 이런 환대까지는 못 받지.”
“흐음, 그래도 황궁보다는 못한데…….”
그러니까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다는 말에 쟝뤼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말이 로열 키친이지 로열 셰프가 아닌 요리사들은 행정관과 비슷해. 게다가 이런 저택은 황도엔 카렌듈라 저 외에는 없을…….”
“세니아나.”
“오빠!”
란슬롯과 가웨인이 아빠와 함께 나오고 있었다. 쟝뤼크는 아빠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각하를 뵙습니다.”
“딸의 스승이라고.”
“그렇습니다.”
“아카데미에서 내 딸에게 그리 소리를 쳤다던데.”
“…….”
그가 굳은 얼굴로 아빠를 쳐다보았다. 마른침까지 꿀꺽 삼켜서 나는 힐끔힐끔 아빠와 쟝뤼크를 쳐다보았다.
“그, 그건…….”
“딸의 스승이라면 프렌시프엔 다시 없는 귀인이다. 편히 지내도록.”
“……예.”
아빠가 가웨인을 힐끗 보며 말했다.
“막내 눈에서 눈물 나게 한 놈을 내가 어찌 처리한다고 했었지.”
가웨인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손모가지부터 자르고 목을 분지른다셨습니다.”
“내 눈 닿지 않는 곳에서 내 딸을 위협하는 놈은 어찌 처리한다고 했던가.”
그러자 이번엔 란슬롯이 해사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그건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동부 아카데미의 주제 모르는 애송이는 아킬레스건이 끊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빠가 다시 쟝뤼크를 바라보며 표정 없이 말했다.
“개의치 말게. 나이 들어 가물가물한 기억을 짚어 보았을 뿐이니까.”
“……예.”
“다시 말하지만, 편히 지내도록.”
쟝뤼크가 새하얀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왜 교수님의 표정이 감옥에서보다 더 안 좋을까. 아, 그보다 먼저 교수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었는데!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교수님, 교수님! 리올 재상이 말한 추억의 음식은 족발이었어요. 만들어 둔 게 있는데 맛보실래요?”
“예…….”
“왜 말을 높이세요?”
아까부터 자꾸만.
“아카데미에서처럼 편하게 소리치셔도 되는데…….”
쟝뤼크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소, 소리친 건 안 들리실까 봐. 예, 그런 거지요.”
내가 의중을 모르겠다는 듯 그를 보자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불편하신가 보다.’
얼른 모시고 올라가야겠다. 나는 아빠에게 고개만 꾸벅 숙여 인사하고 쟝뤼크를 끌어당겼다. 내 방 응접실에 들어온 후에야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카데미로는 언제 돌아가느냐.”
“내일 새벽엔 가야 해요.”
아빠 생일 때문에 왔는데 다른 일에 얽혀 버려서 남은 시간이 없다. 쟝뤼크는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안심한 그를 보고 킥킥 웃었다.
“황제 폐하 명에도 불복하는 고집쟁이라셨는데 여긴 불편하세요?”
“너는 전장에서의 네 가족을 본 적이 없으니 모르는 것이다.”
그가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전장에서요?”
“어릴 적에 잠시 네 할아버지의 군세를 뒤따른 적이 있다.”
“군인이셨어요?”
“난 북부 자작가의 외아들이라 대륙 전쟁에 징용됐지. 그때 잠시 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어.”
“그런 얘기는 못 들었어요.”
“나 같은 한미한 자작가의 외아들을 어떻게 기억하겠나.”
쟝뤼크가 고개를 젓고는 이어 말했다.
“그때 일은 트라우마가 되었지. 어르신과 각하가 네 앞에서는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구는 것 같지만, 그들은 태생부터 맹수야.”
“흐음.”
“얼마나 잔혹한지, 직접 본 사람이 아니면 모를 거다.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내가 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근처는 가지도 않았어.”
“그렇구나.”
왜 다른 귀족들도 할아버지나 아빠만 보면 호랑이 앞의 생쥐처럼 굳어지는지 알겠다.
‘그때 진짜로 무서우셨나 보다.’
지금도 조금 무섭긴 한데, 사실 무서운 것보다는……. 고깔모자를 쓰고 ‘산책해 줄 거냐?’ 하고 묻던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나는 비밀이라도 얘기하는 것처럼 속닥거렸다.
“사실은 저희 할아버지 엄청 사랑스러우세요.”
“……!”
쟝뤼크가 샛노래진 얼굴로 그런 두려운 소리는 하지 말라며 펄쩍 뛰었다.
“아 참! 교수님 이거요.”
나는 오늘 성에서 줄리아 리올에게 받은 책 두 권을 그에게 전달했다.
“쟝 님의 레시피북이래요.”
쟝뤼크는 묘한 표정으로 책등을 매만졌다.
“그래, 본 적이 있어.”
추억에 잠긴 듯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그를 보고 나는 생긋 웃었다.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네 덕이다.”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니 그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보답하마.”
“스승과 제자 사이에 보답이 어디 있어요.”
내가 골이 난 표정으로 말하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교수와 학생이라면서?”
“제자 시켜 주세요. 저 열심히 할 수 있어요.”
쟝뤼크가 쳇 혀를 찼다.
“귀족 나리의 취미 요리에 동참할 생각은 없었는데.”
“취미 아니에요!”
“아니까.”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보았다.
“너라면 그렇지 않을 것을 알아서.”
“…….”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전수하마. 내 스승이 내게 그러했듯 자식처럼 아끼고, 너를 내 인생의 전기(傳記)라 여길 것이다.”
그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가 내민 손을 꽉 맞잡았다.
아주 먼 훗날 알았다.
내 진정한 스승이 되기로 결심한 그날. 그가 포기한 것이 무엇인지. 목숨처럼 아끼던 자유와 소신마저 버리고, 책임이라는 이름에 빛나는 두 날개를 족쇄처럼 달았다. 그는 나에게 세 번째 아버지였고, 동시에 풍랑 속에서 오롯이 빛을 발하는 등대였다.
* * *
늦은 밤. 나베리우스가 황궁에서 가져온 서류를 확인한 아서는 몸을 일으켰다. 로브를 테이블에 걸쳐 두고 침실 안으로 들어간 그가 침대에 걸터앉았을 때였다.
끼익, 조심스러운 마찰음과 함께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살금살금 걷는 소리를 듣던 그가 미간을 좁혔다. 침대 맡에 놓인 검집을 들으려다 “으아.” 하는 작은 탄성을 듣고 빙그레 미소지었다. 딸이다. 아비가 자는 줄 아는 모양인지 세니아나는 아주 조심스레 움직였다.
그는 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침실 문틈 사이로 고물고물한 손가락이 슬쩍 튀어나오더니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세니아나가 조심조심 침대맡으로 들어왔다.
“아빠.”
조그맣게 속삭이며 살짝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빠, 일어나세요.”
“…….”
“어쩌지, 어쩌지.”
아서에게서 대답이 없자 끙끙거리더니 조금 더 힘을 주어 어깨를 흔든다.
“아― 으악!”
아서가 휙 팔목을 잡자 소스라치게 놀란 세니아나가 펄쩍 뛰었다.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져서 딱딱하게 굳어진 딸을 보고, 아서는 협탁 위에 놓인 스탠드를 켰다.
“놀랐어?”
“……네.”
그가 빙그레 웃었다.
“무슨 일이냐.”
딸은 등 뒤에 무언가를 숨기고 꼬물거렸다. 아서가 고개를 기울이자 우물쭈물하더니 침대 끝을 잡고 쪼그려 앉았다.
“사실은 파티를 크게 하려고 준비했는데요.”
“파티?”
“제가 어제 쓰러져 버려서 무산됐어요. 놀라서 다들 정리했나 봐요. 파티할 때가 아니라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눈썹을 늘어뜨린 세니아나가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아빠 생일은 제대로 축하하고 싶어서…….”
생일. 오늘이 생일이었나. 어려서부터 생일에 의미를 둔 적이 없었다. 그에게 태어난 날 같은 건 귀찮기만 한 것이었다. 귀족들을 초대해 인맥을 쌓는 자리.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세니아나가 감추었던 상자를 살그머니 내밀었다.
“지금 풀어 봐도 되나?”
“네.”
리본이 풀고 상자를 열자.
“장갑?”
“이제 곧 겨울이니까요.”
“…….”
“아빠 손은 늘 찬데 항상 제가 잡아 드릴 수 없으니까. 그래서.”
세니아나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마법사가 만든 거라 보온 마법이 들어갔대요. 손등의 장식은 제가 단 거예요. 소원을 빌면서 달면 이뤄진다고 해서.”
“무슨 소원을 빌었지?”
“아빠가 오래오래 행복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리고―”
“그리고?”
“할아버지랑 사이가 좋아지기를.”
아서는 세니아나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상냥한 딸은 부자 관계가 냉랭한 것이 내내 마음 쓰인 모양이었다. 아서가 제 눈치를 보는 딸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침대 옆자리를 두드렸다. 세니아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서가 딸의 손을 잡고 장갑을 꺼냈다. 아래엔 두툼한 편지 봉투가 들어 있었다.
“안에 또 선물 있어요!”
봉투를 열자 허브 향이 나는 편지 몇 장과 절취선이 있는 몇 장의 종이가 함께 있었다. 절취선이 있는 종이를 본 아서가 중얼거렸다.
“소원권?”
“저를 키워 주신 선생님의 생일 때마다 매번 드리던 거예요. 선물보다 더 좋아하셨어요!”
윤세나였을 적의 추억을 얘기하면 늘 빠지지 않는 선생님이란 사람.
“좋은 사람이었나.”
“세상에서 제일이요.”
“그런가.”
“선생님의 생일은 3월 3일이에요.”
“…….”
편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니아나는 빙그레 웃으며 아서의 손등 위에 돋은 핏줄을 매만졌다.
“선생님은 거울처럼 예쁜 회색 눈에 눈가엔 갈고리 모양 상처가 있어요.”
“…….”
“첫사랑이 만든 상처래요.”
“…….”
“처음엔 엄청 싫은 사람이었대요. 무시무시하게 잘생겨서는 그렇게 차가울 수가 없었다고.”
“그 사람―”
“언젠가부터 시선이 가더래요. 가슴이 뛰고, 그 사람과 함께할 수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대요.”
“…….”
“엄마는 아빠를 사랑한다고 했어요.”
아서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너를 찾으러 간 건가, 그 사람.”
“네. 우리는 함께 있었어요.”
“그렇군. 그 사람이 너와…….”
세니아나는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저도 아빠를 사랑해요.”
아서가 딸을 꽉 끌어안았다. 몇 번이나, 얼마나 해야 이 마음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까. 사람의 말로는 제 감정을 전부 전달할 수 없는 게 애달프다고 느꼈다. 너를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세상에 너만큼 소중한 것이 있을까. 너보다 귀한 것이 존재할까.
세니아나는 히히 웃으며 그를 껴안았다.
“생일 축하드려요, 아빠.”
“…….”
“아빠가 제 아빠라서 행복해요.”
끌어안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아가 낳은 갓난아이를 보았을 때 느꼈다. 내 인생의 주인이 이 아이가 되겠구나, 하고. 사실이었다. 인생의 주인이. 숨이. 심장이. 모두 이 아이였다.
* * *
새벽녘이 되었다. 3차 시험의 시험관인 오빠들과 나, 쟝뤼크를 배웅하기 위해 할아버지와 아빠, 사용인들이 나섰다. 할아버지는 장갑을 끼고 있는 아빠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 더운 날에 땀띠 나겠군.”
“세니아나가 준 겁니다.”
“뭐야?!”
할아버지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할애비는!”
“아빠 생일 선물인데.”
“내 생일은 겨울이다.”
“그럼 겨울에 챙길게요.”
내가 가볍게 대답하자 할아버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깨를 떨구었다. 쟝뤼크는 그런 할아버지를 보고 공포 영화라도 본 사람처럼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그럼 가 볼게요.”
멀린의 마원을 잡자 아빠는 내 어깨를 가만히 잡았다. 그리고 이마에 살짝 입 맞춰서 나는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선생님의, 아니, 엄마의 말이 맞았어요.”
“미아가 네게 뭐라던가?”
“네. 아빠는 바람둥이라고.”
“…….”
“밖으로 내보내기 불안하셨대요.”
“……그렇지 않아.”
아빠가 굳은 얼굴로 떨어지자 오빠들과 할아버지가 조소를 삼켰다.
가족들과 인사를 나눈 나는 아카데미 내에 있는 란슬롯과 가웨인의 숙소로 이동했다. 쟝뤼크는 질렸다는 듯 도착하자마자 숙소를 벗어났고, 오빠들과 나는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라가세 백작은 확실히 심문하실 거야. 그리고 올리비에 폐공작의 일은 조사 중이니 밝혀지는 대로 곧 알려줄게.”
란슬롯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로열 셰프인 고프레도 님도 살펴 주세요.”
고프레도가 올리비에 폐공작의 추천을 받아 입관했다고 말하자 가웨인은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고 대답했다. 란슬롯도 동의했다.
“아탈란이 로열 키친에 무언가를 숨겨 놨다면, 파수꾼을 세워 놨을 수도 있지.”
현 로열 셰프가 그들의 파수꾼이라면 골치 아파진다. 나는 섣부른 추측이었길 바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로열 키친 입관 준비를 열심히 할게요.”
“시험 내용 알려 줄까?”
가웨인이 짓궂게 웃으며 말해서 나는 뾰로통해졌다.
“제힘으로 입관할 거예요.”
로열 키친은 천재들의 영역이었다. 가문의 힘이라든지, 누군가의 도움으로 그곳에 들어간다면 어차피 버티지 못할 거다.
“우리 막내는 현명하지.”
란슬롯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후, 나는 남몰래 오빠들의 숙소를 나와서 멍하니 걸었다.
아탈란. 로열 키친. 삿된 자. 그리고 실험체들. 머리가 복잡했다. 한참 걷다가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기숙사였다. 나도 모르게 익숙한 길로 온 모양이었다.
‘기숙사가 아니라 호텔로 가야 하는데!’
가웨인이 외벽의 일부를 무너뜨린 바람에 공사가 한참이었다. 돌아가려다가―
“조심.”
손목이 끌어 당겨진다 싶더니 내가 있던 자리로 돌이 쿵! 떨어졌다.
“위험합니다.”
“저하!”
나는 활짝 웃으며 도미니크를 올려다보았다.
“공사 중이니 출입을 금한다고 팻말을 세워 놓지 않았습니까.”
그가 교장령이라고 쓰인 팻말을 가리켜서 난 어색하게 웃었다.
“멍하니 걷다가…….”
웅얼거리는 나를 보며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말 안 듣는 학생이군요.”
“어떻게 여기 계세요?”
“공사 진척을 확인하러 왔습니다.”
“언제 끝날까요?”
아카데미 근처에 호텔이 있다지만, 기숙사보다는 오가는 시간이 오래 걸려서 번거롭다.
“일주일이면 마무리될 겁니다.”
“그렇게나 빨리요?”
내가 깜짝 놀라서 묻자 그가 건물을 힐긋 쳐다보았다.
“마탑 재직 경험이 있는 마법사 서른 명이 왔더군요.”
“헉.”
“공사가 목적의 전부는 아닐 테지만.”
그가 작게 중얼거려서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네?”
“아닙니다.”
“……?”
“교칙을 어겼으니 교장실로 가실까요.”
“좋아요!”
“벌을 이렇게 좋아하셔서야.”
내가 밝게 대답하자 도미니크는 픽 웃었다. 그를 따라 걷다가 시선을 느꼈다. 의아함에 뒤돌아봤지만, 날 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영애?”
“아니에요. 갈게요.”
* * *
건물 뒤에 숨어 있던 남자가 통신석을 들었다.
“도련님.”
[그래.]
“아가씨가 도미니크 황자와 함께 계십니다.”
[……빌어먹을. 어디로 갔나?]
“교칙을 어겼으니 교장실로 가야 한다더군요.”
[밀폐된 방에 단둘이? 변태 새끼! 가서 죽여 버―]
[가웨인.]
통신석 안에서 [죽여 버려야 한다] 느니, [세니아나가 알면 안 되니 힘줄을 끊어 놓는 것으로 마무리하라] 느니 하는 살벌한 모의가 이루어졌다. 기둥 뒤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던 마법사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들은 인재 중의 인재였다. 마탑 재직 경험, 타국 유학, 참전 경력, 그리고 무수히 많은 연구 성과. 어디를 가도 환영받는 이들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아가씨에게 붙은 날벌레 감시’였다.
[교장실 안까지 투시해라.]
“그건 황족 사찰이 아닙니까.”
[그런데.]
“황자는 반마법 마도구를 지니고 있어서 힘든―”
[그래서.]
“……해 보겠습니다.”
남자의 얼굴이 거무죽죽해지자 마법사들은 소리 없이 절규했다.
통신석을 내동댕이친 가웨인이 창문 밖에 보이는 도미니크의 숙소를 험악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저거 정말 죽여 버릴까.”
“아직은 곤란하지.”
란슬롯의 여상한 말에 가웨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저 새끼가 세니아나에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막내가 입관하면 볼 일 없을 놈이다.”
도미니크는 계속 동부 아카데미에서 자빠져 있을 테니까. 그렇게 되게 만들 생각이고.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지. 그보다 서류나 확인해라.”
“이 많은 걸 전부 확인해야 한단 말이지.”
가웨인은 테이블 한편에 산처럼 쌓인 교수진과 학생 명단, 건축물대장 등의 서류를 질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란슬롯은 다리를 꼬고 앉아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아탈란이 아카데미 내에선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를 황실보다 먼저 찾아야 하니까.”
그들이 바라는 건 오로지 가문과 막내의 안전뿐이었다.
‘아탈란을 제지할 수 있는 수단을 황실보다 먼저 찾아 손에 넣는다.’
그것이 프렌시프 형제가 아카데미로 온 까닭이었다. 아탈란이든 전쟁이든 프렌시프와는 하등 상관없었다. 프렌시프의 목표는 제국의 안녕이 아니니.
“3차 시험은 어떻게 할 거지?”
가웨인이 묻자 란슬롯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렸다.
“진행해야지.”
“졸업 후에 신분이 밝혀지면 성적 조작이니, 비리니 하며 개떼들이 시끄럽게 굴 텐데.”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 과제를 낼 거다.”
란슬롯이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속내가 검은 미소를 본 가웨인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젖혔다.
“비열한 방법이라도 쓰려고?”
“설마. 막내가 싫어하는 짓은 안 하지. 난 너와 달리 사랑받는 오빠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세니아나는 날 제일 좋아해.”
“착각은 자유다.”
란슬롯이 어깨를 으쓱하자 가웨인은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 * *
“―그래서요, 아타르 왕세자는 무사하고……!”
내가 종알종알 얘기하자 턱을 괸 채 날 빤히 보던 도미니크가 빙그레 웃었다.
“무사하고?”
“쟝뤼크 교수님도 풀려나셨어요.”
“풀려났군요.”
무슨 말을 하든 그의 목소리와 눈빛이 엄청 다정해서 부끄러워졌다. 내가 붉어진 얼굴로 꼼질거리자 도미니크가 물었다.
“영애의 일은요?”
“네?”
“제가 궁금한 건 영애의 일입니다.”
“아……! 아빠에게 생일 선물을 드렸어요. 좋아해 주셔서 기뻤어요.”
“그리고?”
또 뭘 말해야 하나. 나는 눈을 데구르르 굴리다가 “으음.” 하고 입을 열었다.
“어……, 밥도 잘 먹고…….”
“잘했네요.”
“잠도 잘 자고…….”
“그렇습니까.”
“그, 그리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목소리를 한껏 죽였다.
“저하가 보고 싶었어요.”
도미니크가 내 눈가를 손끝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보고 싶었습니다.”
“바쁘셨을 텐데 제 생각하셨어요?”
“매일.”
“저도요.”
도미니크가 뺨에 입을 맞춰서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의 입술이 코로, 또 입술로 내려왔다. 새가 서로 부리를 비비듯 가벼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옆으로 긴 나른한 눈, 오뚝한 콧날, 좋은 향기가 날 것 같은 부드러운 입술, 칼로 베어 낸 것 같은 단정한 턱선도 모두 사랑스러웠다.
‘우우.’
가슴이 간질거린다. 나는 그의 얼굴을 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 거였으면 좋겠다…….”
도미니크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이내 다정하게 휘어졌다.
“당신 겁니다.”
“정말요? 전부 다 주실 거예요?”
“예.”
“신난다!”
나는 그의 눈에 쪽, 입 맞췄다. 그러자 도미니크의 눈이 깊게 일렁였다. 그는 엄지 끝으로 내 입술을 살짝 벌렸다.
“제 겁니까.”
“지금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말하니 도미니크가 달려들 듯 입술을 삼켰다. 한참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다 숨이 차서 살짝 입술을 떼어 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나는 소파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이거 위험한 자세지요?”
“이런. 눈치채지 않길 바랐는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약간 쉰 듯했다. 귓바퀴를 감고 들어온 짓궂은 말에 가슴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서 나는 화들짝 놀라 그를 떠밀고 퉁겨지듯 일어났다. 도미니크는 문을 향해 인상을 썼다.
“저하.”
그의 부관인 알베르의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프렌시프 경들이 시험 과제를 논의하시고 싶다 전하셨습니다.”
“…….”
도미니크는 소파 끝에 걸쳐 둔 재킷을 들고 일어났다.
‘응?’
방금 혀 차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
“함께 가시겠습니까.”
“아니요. 시험 과제까지 들으면 정말로 성적 비리가 될 테니까요.”
그리고 어쩐지 내가 교장실에 있다는 것을 오빠들이 알면 무슨 일이 날 것 같다. 난 도미니크에게 인사하고 포털을 열어 호텔로 이동했다.
다음 날, 오빠들이 낸 시험 과제가 공지되었다. 게시판에 붙은 시험 내용을 보고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떠들었다.
“축제에서 음식을 판매하는 거라면 매출순으로 순위를 매기겠네?”
“가판대 자리 선정이 중요할 것 같은데.”
“그건 제비뽑기로 한다나 봐.”
나는 시험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 오빠들이 성적을 매기는 게 아니라면 졸업 후에 학생들이 내 신분을 알게 되어도 이의를 제기하진 못할 것이다.
“센!”
아카데미에서 친해진 아이들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아버지 생신은 잘 치렀어?”
떠나기 전에 이들에게 아빠 생신으로 나흘 정도 자리를 비운다고 말해 놓은 걸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응.”
“오자마자 시험이라 싫겠다.”
“하지만 마지막 시험이니까!”
내가 밝게 대답하니 가까이 서 있던 여자애가 나를 답싹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으아! 이제야 친해졌는데 너무 아쉽다!”
“나도…….”
인생에서 처음으로 또래들과 친해졌는데 졸업하면 못 본다고 생각하니 시무룩해졌다. 내가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애들이 졸업 후에 모이자고 말해 주었다.
“저, 정말로? 졸업해도 만나 줄 거야?”
“그럼!”
나는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다가 여자애들 틈에 있는 스위트피를 보았다. 그녀는 내가 아카데미에 와서 가장 많은 얘기를 나눈 학생이었다. 우리 나이대 학생답지 않게 똑 부러지고 멋져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학우이기도 했다.
“스위트피, 무슨 일 있어?”
“집안 어르신이 근처에 오셔서 신경 쓰이네.”
“만나 뵈러 가야 해서?”
“그런 건 아닌데 축제 일정과 맞물려서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웬만하면 뵙기 싫은 분인데.”
“어려운 분이야?”
“특이한 분이라……. 나도 몇 번 못 만났기도 하고.”
스위트피는 아무래도 신경 쓰인다며 집안 어른이 언제 오는지 알아보러 간다고 떠났다. 애들이 스위트피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스위트피는 아무래도 귀족인 것 같지?”
“그렇지. 입고 쓰는 걸 보면. 통신석도 있잖아.”
“제임스가 통신하는 걸 들었는데 꽤 고위 귀족인 것 같았대.”
그러자 한 남자애가 농담하듯 물었다.
“프렌시프 영애님이 사실은 스위트피인 것 아냐?”
학생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왜소한 남자애가 말했다.
“사실은 나도 통신하는 걸 들었는데 분가인 것 같더라고. 본가 어른께 지원받으려면 무조건 로열 키친에 입관해야 한다고 통신 상대가 닦달하는 걸 들었어.”
난 속으로 스위트피가 많이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저, 저기.”
내가 입을 열자 아이들이 날 쳐다봤다.
“신분 얘기는 학칙 위반이잖아…….”
그러자 여자애들이 소리쳤다.
“맞아! 스위트피에게도 실례야, 너희!”
다그치듯 말하는 소리에 남자애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우리는 몇 마디 더 나누고 헤어졌다. 난 바로 쟝뤼크의 연구실에 가서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쟝뤼크가 메뉴는 정했냐고 물어서 난 펜을 물고 끙끙거렸다.
“눈에 띄는 메뉴여야 할 것 같은데 통 모르겠어요.”
“빵은 피해. 들고 다니며 먹기 좋으니 웬만한 녀석들이 선점할 거다.”
“그렇지요.”
그럼 대체 뭘 해야 하지.
‘축제의 먹거리라면 일단…….’
1. 들고 다니며 먹기 쉬울 것.
2. 향이 강해 주의를 끌 수 있을 것.
두 조건을 충족시켜야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고 지갑을 열 수 있을 거다.
‘날씨도 고려해야 해.’
겨울에 아이스크림을 판다거나 여름에 뜨거운 어묵을 파는 건 난센스다.
“교수님, 축제는 며칠이나 하나요?”
“사흘이지. 학생들도 사흘간 간이 상점을 열어 총매출을 합산할 거다.”
“일단 가판대가 어디 설치되는지 보고 올래요.”
도구를 손질하던 쟝뤼크는 픽 웃었다.
“그렇지. 위치가 중요해.”
그는 지금쯤 가판대를 설치하려고 준비하는 중일 거라며 지도와 외출 허가서를 주었다.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상점 거리로 향했다. 나 말고도 미리 와서 가판대 설치 장소를 보는 학생들이 있었다. 가판대는 인적 드문 골목에까지 설치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걷는데 웬 고함이 들려왔다.
“장사 시작하자마자 재수 없게!”
괄괄하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조리모를 쓴 덩치 큰 남자가 낡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를 밀쳐 넘어뜨렸다. 아무도 그 남자를 도와주지 않았다. 나는 깜짝 놀라서 넘어진 남자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
덩치 큰 남자가 씩씩거리며 침을 탁 뱉었다.
“돈이 없는데 왜 가게는 기웃거려, 어?!”
로브를 쓴 남자의 입매 주름이 깊어졌다.
“지갑을 잃어버린 것이라지 않았소. 곧 사람이 올 터이니―”
“흥, 비렁뱅이 말을 누가 믿어. 처먹고 나서 배 째라고 드러누울 테지.”
그러곤 쿵! 가게 문을 닫았다. 난 로브를 쓴 남자를 빤히 보았다. 꾸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와 비슷한 연배인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안 좋아졌다.
“이쪽으로 가세요. 음식을 사 드릴게요.”
“난 밀가루는 먹을 수 없어.”
이곳은 온통 밀가루로 만든 음식 천지였다. 빵부터 파스타 등의.
‘고기 요리…… 살 수 있을까.’
나는 주머니를 매만졌다. 가판대 위치만 볼 생각이라 돈을 따로 챙겨오지 않았다. 혹시 몰라 평소에 가지고 다니는 십 피니가 전부였다.
“아……!”
좋은 생각이 났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를 간이 벤치에 앉혀 준 후에 바로 뛰어갔다.
* * *
남자는 소녀가 떠난 후에야 도착한 부관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거북이도 네 놈보다는 빠르겠군.”
“소, 송구합니다, 주인님.”
“저 건물 즉시 사들여라.”
그가 자신을 내몬 요리사의 가게를 가리켰다.
“하지만 동부엔 더 이상 건물을 늘리지 않으시겠다고…….”
남자가 부관을 싸늘히 쳐다보자 부관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 후에야 남자는 천천히 로브를 벗었다. 석양처럼 짙은 주홍색의 머리칼이 드러나자 부관이 펄쩍 뛰며 말했다.
“신분이 드러날 겁니다.”
어떤 면에선 프렌시프 어르신보다 유명인사가 아닌가. 금좌 11석 중 하나이자 지하의 거목이라 불리는 샤르파크 후작은.
샤르파크 후작이 가볍게 대답했다.
“나베리우스의 영역에서 날뛸 무뢰배가 몇이나 되겠나. 근처에 호위나 몇 붙여 놓아라.”
“하, 하면 시장하실 테니 음식점에…….”
“됐어. 준다는 사람이 있으니 기다리겠다.”
“예?”
샤르파크 후작의 식사를 준비하는 건 연차 높은 노련한 사용인들조차 골머리를 썩이는 일이었다. 밀가루는 입에도 안 대서 단백질로 된 요리만 전부 섭렵한 그가 길거리에서 남이 주는 음식을 먹는다고? 부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그 녀석에게 연락이나 해 두어라.”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샤르파크 후작이 직접 동부를 찾은 건 아카데미에 다니는 먼 친척 아이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세니아나 프렌시프를 어떻게든 데리고 나오라 전해.”
“청녹발의 붉은 눈은 동부에선 그리 희귀하지 않습니다. 분가의 아가씨가 성녀를 확실히 데려오리란 보장은 없지요.”
“프렌시프의 성녀가 아카데미 내에서 쓰는 이름을 알고 있으니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지금은 프렌시프 경들이 아카데미에―”
샤르파크 후작은 미간을 좁혔다. 가뜩이나 날카로운 인상이 더더욱 험악해지자 부관은 마른침을 삼켰다.
“하면 다른 방도가 있느냐.”
“…….”
“프렌시프가 싸고도는 통에 그들 눈길이 닿지 않는 아카데미에서 만나는 것밖엔 방법이 없지 않아!”
부관이 거무죽죽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샤르파크 후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프렌시프의 성녀 때문에 일이 틀어진 게 몇 번인가. 제가 넘긴 약을 가지고 콜린이 그녀에게 헛짓거리를 했다. 그 탓에 황제는 약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사비에르의 성녀가 죽는 바람에 마약 유통 자체가 어려워졌단 말이다.
‘이번엔 라가세 백작까지…….’
라가세의 땅에서 은밀히 재배하던 양귀비와 대마가 홀라당 황실에 넘어가게 생겼다. 부관은 주변을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만나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거래를 해야지.”
사비에르 성녀 대신에 그녀에게 유통을 맡길 거다. 이제 라가세의 땅은 쓸 수 없으니 타국에 길을 열어 양귀비와 대마를 재배할 땅을 관리하는 일도 맡길 생각이었다.
“재물은 부르는 만큼 줄 것이니 제대로 준비해 둬라.”
“영애가 끝내 하지 않겠다면 어찌합니까.”
“강경책을 쓸 수밖에.”
그는 선대 후작의 사생아로 매춘부 어미에게서 태어났다. 선대 후작의 적자는 무려 다섯. 맨손으로 그들을 뛰어넘고 한미한 가문을 금좌 11석에 이름을 올려 두었다. 뭐든 끝까지 가는 사내였다, 자신은.
‘내게 이만한 피해를 주고도 기어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사생결단이라도 내야지. 그래야지.’
후작의 눈이 음험하게 일렁였다. 부관이 굳은 얼굴로 명을 수행하기 위해 떠났다.
* * *
상점가라 다행이다! 근처에 재료 상점이 있고, 가게 주인 중엔 인심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내가 생각한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나는 재료가 든 종이봉투를 끌어안고 얼른 벤치로 뛰어갔다.
“아저씨!”
“……아저씨, 라고.”
어느새 로브를 벗은 사내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배고프시지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대체 뭘 가져왔기에.”
나는 봉투 안에서 사 온 것들을 하나둘 꺼냈다. 상점에서 사 온 싸구려 컵과 스푼까지 본 그가 미간을 좁혔다.
“이게 뭐지?”
“이렇게 하는 거예요.”
나는 식당에서 싸게 산 소량의 밥과 조림 고기, 달걀 프라이를 털어 넣었다. 그리고 잎채소를 뚝뚝 분질러 그 위에 올렸다.
‘마지막으로 버터와 간장을 살짝 뿌리면.’
샥샥 비벼서 그에게 컵째로 건넸다.
“개밥인가.”
아저씨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컵을 보았다.
“컵밥인데…….”
“컵밥이라고?”
“드세요. 시장하시잖아요.”
내가 그를 바라보자 그는 난감한 얼굴로 컵을 들여다보았다. 천천히 스푼을 들었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비빔밥을 맛본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말은 없지만, 꽤 마음에 든 모양인지 작게 중얼거렸다.
“버터가 밥과 제법 어울리는군.”
“즉석에서 만든 것치고는 괜찮죠?”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하니까 그는 크흠, 헛기침을 했다.
“소, 돼지에 물려서 밥이 괜찮은 거야. 내가 원래 이런 싸구려 음식을 먹는 사람이 아니다.”
“네네.”
나는 가볍게 대꾸하고 그의 스푼에 피클을 올려 주었다.
“뭐, 뭐 하는 짓이야!”
“버터가 느끼할 것 같아서…….”
나는 눈을 깜빡이고 웅얼거렸다.
“함께 먹으면 맛있어요.”
“…….”
“드셔 보세요, 네?”
그가 슬쩍 스푼을 입에 넣었다. 꼬득꼬득 씹히는 소리를 들으며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보았다.
“……뭐.”
“맛있죠?”
“젊은 녀석이라 재밌는 요리를 아는군. 이건 리소토인가?”
반숙 달걀이 섞이면서 밥이 촉촉해졌다. 그래서 그렇게 느끼는 것 같은데, 사실은 리소토(육수로 졸인 쌀 요리)라고도 하기 애매하고, 필래프(팬에 볶은 쌀 요리)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졸이거나 볶지 않으니까. 불도 전혀 필요하지 않고.’
“비빔밥이에요.”
“컵밥이라면서?”
“컵에 넣어서 먹는 비빔밥이라서요.”
몇 마디 주고받은 후에 아저씨는 식사에 집중했다.
“별로야, 나는 이런 엉망인 요리는 즐기지 않는다고!”
―라고 하면서도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모른다.
‘재밌는 아저씨네.’
난 킥킥 웃으며 그에게 물을 챙겨 주었다.
“네, 알겠으니까 천천히 드세요.”
“내가 이런 데서 이런 걸 먹는 사람이 절대로 아닌데 성의를 봐서―!”
“네네.”
저렇게 우걱우걱 먹다가 체하겠다. 나는 물을 더 얻어오기 위해 남은 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가 밥이 든 컵을 양손으로 감싸고 휙, 몸을 돌렸다.
“…….”
“…….”
“안 덜어 주셔도 돼요…….”
근처 식당에서 물을 얻어 와서 다시 벤치로 돌아갔을 때 아저씨는 없었다. 남은 건 오직 밥알 하나 남지 않은 깨끗한 컵과 은으로 된 단추 하나뿐이었다. 은 단추를 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답인가.”
남루한 로브를 걸쳤던 그를 떠올리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차라리 이걸로 더 좋은 음식을 사드시지.’
그렇게 생각하고 널브러진 컵과 스푼을 봉투에 잘 넣어서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교내는 3차 시험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과제가 장사이다 보니 손이 필요해서 후배들과 무리를 이룬 학생이 대다수였다.
‘어쩌지.’
난 아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재료 준비부터 손님 접객까지 하는 건 힘들 거다.
‘손이 덜 가려면 메뉴를 하나로 한정하는 게 제일 좋긴 한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취향이 다른 손님들은 포섭하기 힘들 거다. 일단 가게 앞에 줄이 늘어져 있어야 한 번이라도 더 사람들의 시선을 얻을 수 있다. 문득 손에 쥐고 있던 봉투가 떠올랐다.
‘그렇지!’
기본 메뉴는 하나로 두고 거기에 이것저것 조합하면 되잖아.
‘비빔밥처럼.’
좋은 생각이 났다!
나는 얼른 쟝뤼크의 연구실로 뛰어갔다.
“설치 장소는 보고 왔나.”
쟝뤼크가 물어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메뉴도 정했어요!”
“잘됐군.”
그는 내게 웬 종이를 내밀기에 자세히 보니 부자재 신청서였다.
“교수님 혹시 종이로 된 컵은 없을까요?”
“종이로 컵을 만들면 물이 다 샐 텐데.”
“내부에 코팅을 해서 물이 새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뭐, 신청하면 만들어 주기는 할 테지.”
나는 냉큼 신청서를 작성했다. 단면도와 제작 과정을 자세히 서술해서 행정처로 넘기자 직원도 기막혀했다.
“이런 걸 뭐에 쓰려고?”
“이 안에 이것저것 담을 거예요.”
“그럼 차라리 저렴한 컵을 사지 그러니.”
“아무리 저렴해도 유리컵이 나무 꼬챙이보다 저렴하진 않을 것 아녜요.”
이번 시험은 매출로 겨루는 것이다. 원가가 저렴하면 저렴할수록 이득이다.
‘공장에서 제작하는 게 아니라 마법사와 연금술사가 만들어 주는 거라 다행이야.’
원자잿값만 내면 품이 드는 값은 원가에 포함되지 않았다. 직원은 작게 침음하며 신청서를 받았다.
그리고 난 즉시 3차 시험 준비에 들어갔다. 실습실엔 학생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모두 마지막 시험에 사활을 걸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의 집중력과는 전혀 달랐다. 나도 열심히 소스를 만들고 있는데 옆 조리대에서 와르르, 쿵! 하고 물건이 떨어졌다.
“스위트피!”
시험 준비로 예민한 학생이 고함을 내질렀다.
“대체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는 거야!”
“……미안.”
“짜증 나게. 스토브가 또 엉망이 됐잖아!”
깡마른 남자애가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스위트피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주섬주섬 조리 기구를 줍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스위트피…… 괜찮아?”
“응. 내가 정신 놓고 방해한 게 맞으니까.”
“집안 어르신 때문에 계속 신경 쓰여서 그래?”
볼을 꽉 그러쥔 그녀가 인상을 썼다.
“센, 너 혹시…….”
“응?”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고 내게 속삭였다.
“사채 썼니?”
“어―?!”
내가 깜짝 놀라 소리치자 다른 애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미안하다고 애들에게 말한 뒤 스위트피를 보았다.
“사, 사채?”
나는 이제 그 단어는 정말로 끔찍하다. 스위트피는 목소리를 더욱 한껏 죽이고 말했다.
“아니면 마약 해?”
“……?”
“대금을 못 냈어? 그래서 쫓기는 중이야?”
“나 마약 안 하는데!”
내가 펄쩍 뛰자 스위트피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대체 그분이 왜…….”
“응?”
“아냐…….”
스위트피가 바닥을 노려보다가 내 어깨를 꽉 잡았다.
“웬만하면 밖에 나가지 마.”
“어?”
“누가 센이 맞느냐고 물으면 절대로 아니라고 해. 알았지?”
“…….”
“응?”
“알았어……. 근데 무슨 일인데?”
“나중에.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니고.”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스위트피를 쳐다보았다. 실습실에서 호텔로 돌아온 나는 불안한 얼굴로 통신석을 쳐다보았다.
‘설마.’
아빠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사채라는 말은 내겐 트라우마였다. 나는 황도로 통신석을 연결했다.
[세니안.]
여느 때처럼 다정한 목소리였다.
“아빠, 저기…….”
[그래.]
“혹시 지금 집안 사정이 어렵나요?”
통신석에서 픽, 하는 실소가 들렸다.
[내 딸이 원한다면 공국을 하나밖에 세우지 못할 정도로 어렵지.]
“농담하시는 거죠?”
나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통신석을 쳐다보았다.
“정말로 괜찮은가요?”
[네 손주의 손주까지도 평생 재물 걱정 없이 살 정도라고 하면 안심이 될까.]
귀족이 사채를 쓰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들었다. 귀족 영애의 지참금을 마련할 때라든지, 결혼 자금에 어마어마한 금액이 들어서 이따금 고리대금에 손을 대는 일이 있다고 했다.
“아빠, 제가 결혼을 할 때는…….”
[결혼?]
어쩐지 목소리가 서늘한 것 같아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도 언젠가는 결혼을 할 테니까요. 보통 제 나이 때 하잖아요?”
[…….]
“어쨌든 그땐 거액의 지참금이나 결혼 자금이 필요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혹시나―”
[소원권 말이다.]
“네?”
[지금 쓰마.]
그의 소원을 들은 나는 “네?” 하고 되물었다.
[무슨 소원이든지 가능하다고 했지.]
“그렇기야 한데…… 두 장밖에 없는 소원권을 그렇게 쓰시려고요?”
[그래.]
“……네.”
어렵지야 않은 일이지만, 정말로 그걸로 괜찮을까. 포털을 쓰고 싶다고 해도 괜찮은데. 통신을 종료한 나는 한참 의아한 얼굴로 통신석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