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장 (12/24)

12장

“앉으렴.”

고저 없는 목소리에 나는 눈을 도르르 굴렸다. 남편과 싸운 것 같은데도 후작 부인은 동요 하나 없었다. 난 그녀의 눈치를 보며 소파 끝에 살짝 걸터앉았다.

“본자의 말이 들리지 않느냐, 편히 앉으래도.”

“본자요……?”

“아.”

그녀는 다 비운 그릇을 내려놓으며 “이건 익숙해지질 않는군.” 하며 비단 같은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공주님이셨지요.”

“정확히는 왕녀였지. 한 치만 벗어나지 않았더라면 왕이 되었을 거다.”

“아하.”

“우스우냐. 후계 싸움에 밀려 제국에 팔려 온 주제에 보위를 언급하는 것이.”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아니에요!” 하고 소리쳤다. 후작 부인이 표정 없이 얼굴을 갸웃 기울였다.

“그래? 다들 우습게 여기던데.”

대수롭지 않은 투였다.

‘트, 특이한 분이시네.’

쌀국수를 가져왔을 때도 그랬다.

[처음 보는 계집이군. 후작이 날 독살하라 보냈더냐.]

하고 묻기에 농담인 줄 알고 헤헤 웃었는데 ‘진담인데.’ 하고 팔짱을 꼈다. 난 그녀의 눈치를 보며 손을 꼼질꼼질 매만졌다. 마담 버지니아나 황후 같은 위압감이 풍기는 후작 부인은 정말로 멋진데, 함께 있으면 어색했다.

‘왜 안 보내 주시지.’

십 분쯤 흘렀는데도 나가라는 말이 없었다.

“저, 마님…….”

“그래.”

“혹시 하실 말씀이……?”

“없어.”

그런데 왜 안 보내 줘? 난 울상을 지었다. 이건 후작과 다른 괴롭힘인가. 그녀는 그렇게 한 시간을 넘도록 말없이 나를 지켜본 후에야 “가 봐.” 하고 말해 주었다. 난 얼른 방을 빠져나갔다. 주방으로 돌아가자 어느새 요리사들이 돌아왔다.

“으으, 죽겠다.”

폴리가 끙끙거리며 다리를 주물렀다. 요리사들도 마찬가지로 피곤한 얼굴이었다.

“병사들 아침을 겨우 먹였어.”

“그러셨군요, 선배.”

내 말에 폴리는 어흠! 하고 뻐기더니 가슴을 쭉 폈다.

“병영 주방엔 안 가 봤지?”

“네.”

“엄청 빡센 곳이라고~!”

그가 소리치자 중년의 요리사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선배님 말투가 애송이 같습니다요.”

놀리듯 하는 말에 폴리는 칫, 혀를 차더니 나를 빤히 보았다.

“그런데 후배, 너는 마님 식사를 제대로 준비한 거야? 어려웠지? 혼나진 않았어? 엄청 혼났을 거야, 그렇지?”

“아니요. 상냥하게 대해 주셔서…….”

“으엑! 마님이? 설마!”

그 말에 다른 요리사들도 기함을 하고 내 주위에 몰려들었다.

“무슨 요리를 한 거냐? 응?”

“쌀국수를 만들었어요.”

“쌀국수? 쌀국수라……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아! 남부를 여행할 때 어느 구석진 식당에서 먹어 본 것도 같은데.”

요리사들이 “아카데미에서 배운 거냐?”, “쌀로 만든 국수는 어디서 구한 거야?”, “간은 뭘로 했지?” 하고 물어왔다.

“아카데미에서 배운 건 아니고, 쌀로 만든 국수는 재료 창고에 있던 걸요. 간은 소금과 간장으로 했어요.”

정신없이 대답하는데 “야!” 하는 고함이 들려왔다. 수셰프 루시가 개수대를 보고 버럭 소리친 것이었다. 그녀는 내 이마를 꾹꾹 누르며 날카롭게 말했다.

“수련생 주제에 조리 도구를 만졌으면 정리를 해 놔야 할 것 아냐!”

“그게, 계속 마님과 함께 있어서…….”

“네깟 게 뭐라고 마님과 함께 있어. 이 성에서 십 년 넘게 일한 나도 뵙기 힘든 분인데! 어?!”

“…….”

그러곤 폴리의 허리를 퍽! 걷어찼다.

“너는 머리에 뭘 처바른 거야! 내가 주방 들어올 때 단장 같은 허튼짓 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요리사들이 그녀의 눈치를 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루시는 조리모를 쓰지 않은 나이 많은 요리사의 머리채를 휙! 잡고는 소리쳤다.

“내가 너 모자 한 번만 더 안 쓰면 어쩐다고 했어. 머리통을 갈아 버린다고 했지!”

주방의 규율이 엄격하다지만, 머리채가 잡힌 요리사는 루시의 아버지뻘이었다.

‘저런 폭력은 너무 하잖아.’

나는 굳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지만,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돌린 채 일부러 할 일을 찾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루시가 내게 걸어오더니 턱을 강하게 잡아챘다.

“윽!”

“곱상한 얼굴로 주인님 홀려서 편하게 지낼 생각은 집어치워라. 내 주방에선 절대 안 돼.”

그러더니 던지듯 턱을 놓곤 쯧, 혀를 찼다. 루시가 나선 후에야 요리사들은 앓는 신음을 흘렸다. 폴리가 “괜찮아?” 하고 물었다. 나는 붉어진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쓰지 마. 병영 같은 데서 요리를 했다고 자존심 상한 거야. 화풀이하는 거지, 뭐.”

다른 요리사가 말하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에 자존심 하나는 로열 셰프급이지.”

“수련생이 마님께 눈도장을 찍은 것 같으니까 더한 것 같은데.”

“아, 주방장님이 얼른 돌아오셔야 루시 님이 눈치를 좀 볼 거 아냐.”

“돌아오신다고 뭘 하시겠어. 평소에도 늘 허허실실하신 분이잖아. 그러니까 루시, 저게 더 기고만장한 거고.”

그러자 폴리가 펄쩍 뛰며 “루시 님께서 들으시면 어쩌시려고요!” 하고 말했다.

“저번에도 뒤에서 한 소리를 누가 일러바쳐서 죄 없는 카토 선배님의 머리가 깨질 뻔했잖아요.”

요리사들이 루시에게 머리채가 잡혔던 중년의 사내를 돌아보았다.

‘저 사람이 카토인가 보네.’

카토 요리사가 어색하게 웃자 다른 요리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집사님이라도 아셔야 루시가 쫓겨날 텐데.”

“윗사람한테는 설탕처럼 달콤하게 굴잖아요. 매번 요리를 해 주면서.”

“뇌물도 바친다는 소문이 있지.”

“집사님 딸의 결혼식에선 나서서 하객 요리를 총괄했다며.”

주방에는 악마가 하나씩 꼭 있다고 하더니, 이 주방의 악마는 루시인 걸까.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안 건 저녁 식사를 준비할 때였다.

“야!”

그녀는 저러다 목이 찢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게 호통을 쳤다. 난폭하게 지시하는 통에 카토 요리사는 손을 불에 지질 뻔했다. 재료 창고에 난 작은 창으로 상황을 살피던 폴리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가여워.”

“유난히 카토 선배님을 안 좋게 보시는 것 같은데요.”

“그야 그렇지. 제대로 찍혔으니까.”

폴리는 양배추를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너도 알겠지만, 이 저택의 왕은 사실 마님이시거든.”

어떤 성이든 그렇기야 할 거다. 내성을 관리하는 건 안주인의 몫이니까.

“마님이 카토 선배님의 요리를 좋아하셨어.”

“지금은 좋아하지 않으세요?”

“카토 선배님의 요리에 머리카락이 들어간 적이 있거든. 집사님이 펄쩍 뛰면서 선배님의 요리는 절대로 주인님과 마님 식탁에 놓지 말라고 하셨어. 그 덕에 경력으로 따지면 원래 수셰프는 카토 선배님이신데 루시 님이 떡 하니 차지한 거야.”

위생은 중요하지. 나는 카토 요리사를 안됐다고 생각하면서도 감싸 줄 순 없었다. 그런데 폴리가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바짝 낮췄다.

“그런데 사실 말이야…….”

“네?”

“카토 선배님의 요리에 머리카락이 들어갔을 때, 루시 님이 수상했어.”

“뭐라고요?”

“내가 분명히 봤거든. 루시 님이 카토 선배님의 요리가 든 접시를 만지는 거.”

난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밝히지 않으시고―!”

“그야 증거가 없잖아. 접시를 만지는 것만 봤고.”

만약 추측이 사실이라면 루시는 정말로 나쁜 사람이다. 내가 미간을 좁히니 폴리는 내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니까 너도 웬만하면 마님 곁에 있지 마.”

그렇게 말한 폴리가 음식물 쓰레기가 든 통을 질질 끌며 뒷문을 나섰다. 내가 양배추를 들고 재료 창고를 나설 때, 루시가 “쓸모없는 굼벵이 자식!” 하고 소리쳤다. 고개를 숙이고 다시 조리대로 돌아와 양배추를 손질할 때였다. 쿵, 쿵, 쿵. 발소리와 함께 주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마, 마님!”

루시가 얼른 그녀를 향해 뛰어갔다. 후작 부인은 루시에게 아는 체하지 않고 나를 향해 다가왔다.

“함께 가자.”

“저, 저요?”

“그래.”

“하지만 저는…….”

집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무슨 일이십니까?” 하면서 주방에 들어왔다.

“마님,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하녀를.”

“이 애가 마음에 들어.”

“예?”

“난 귀여운 게 좋거든.”

주방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황당한 표정이었다.

‘으응?’

후작 부인은 거절할 새도 없이 문을 향해 고갯짓하고 사뿐사뿐 주방을 나섰다.

‘따, 따라오라는 건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눈만 끔뻑이고 있자, 곁에서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샤르파크 성의 집사였다.

“마님을 따라나서라.”

“지, 집사님!”

루시가 기가 막힌 얼굴로 얼른 내 앞을 막아섰다.

“수련생입니다. 성의 사정은 물론, 귀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전혀 모를 터인데 어떻게 마님을 모시겠습니까.”

“마님께서 원하시니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시간 끌지 말고 비켜서게.”

그렇게 말한 집사는 직접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마님께 가거라.”

“…….”

“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주방을 나섰다. 복도를 걷는 내내 주방에서 새어 나오는 루시의 고함이 등 뒤를 따라붙었다.

“이게 무슨 경우냐고! 젠장!”

날카로운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폴리로부터 들은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너도 웬만하면 마님 곁에 있지 마.]

‘으아아.’

곤란해지게 생겼다. 방 앞에 도착하자 하녀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내게 조용히 당부했다.

“마님이 물으실 땐 고개를 숙이고,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일정한 소리로 대답해야 하며, 먼저 말을 거시기 전까진 입을 열지 마라. 그리고―”

귀족을 만날 땐 이렇게 빡빡한 규칙이 있구나. 이 세계로 와서는 귀족 영애로 지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전담 시녀나 직급 높은 기사들과 달리 나는 현재 하급 사용인인 입장이었다. 지킬 것이 엄청나게 많다.

‘이런 것들까지 전부 조심하려면 숨 막히겠다…….’

그러고 보니 ‘귀족인 나’의 주변에 있던 사용인들은 온통 계급이 높은 편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시트론도 플로헤타의 눈 밖에 난 상태여서 홀대받은 거지, 그 전엔 꽤 직급 높은 하녀였다. 그러니 내성의 정보를 그렇게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고.

마릴린도 황도 저택에선 높은 하녀고, 뺀질뺀질해 보이는 바커스마저 한 부대의 책임자였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덜컥 걱정이 들었다.

이 세계에선 대귀족가의 고위 사용인들은 대기업의 직원쯤 되는 위치였다. 그들마저 귀족들 앞에선 사소한 것까지 규제받는데 평범한 소작농은 어떨까. 아카데미에도 장학금이 절실하다고 한 애들이 있었다. 그 애들에게 내 신분이 드러나면 이제까지처럼 편하게 지내진 못할 거다.

‘졸업이 가까워지면 싫어도 다들 알게 될 텐데.’

졸업식에선 졸업장을 줄 때 본명을 부르니까.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방 안에 들어갔다.

“이리로.”

기다리고 있던 후작 부인이 내게 말했다. 그녀가 두드리고 있는 곳을 본 나는 움찔했다.

“거, 거기로요?”

등 뒤에서 또각, 하는 발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님께서 명하시면 즉시 수행해야 한다. 두 번 묻는 일은 없어야 해.]

아차. 당황해서 잠시 잊었다.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슬쩍 걸어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곳이 아니야.”

하, 하지만! 나는 ‘어쩌지요.’ 하는 표정으로 하녀장을 보았다. 그녀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꼼지락거리며 후작 부인에게 바싹 붙었다.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아, 마님의 식사를 준비하느라 빵을 굽고 있어서요. 몸에 뱄나 봅니다.”

“밀가루는 좋지. 뭘 해도 맛있지 않니.”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책을 편다.

“와―!”

화가가 직접 그린 듯한 알록달록 아름다운 그림, 테두리엔 금사와 은사로 장식하고 말린 생화까지 곱게 붙어 있다. 윗면엔 큼직큼직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글은 읽을 줄 아니?”

그야 당연히.

‘―가 아닌가. 나를 평민으로 알고 있다면.’

아무래도 이 부부는 어색한 사이니만큼 후작 쪽에서 부인에게 내 얘기를 하진 않은 것 같았다.

“네. 아카데미에 있으니까요.”

“그래도 내가 읽어 주마.”

나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안젤리카는 작은 토끼예요. 엄마 토끼가 매어 준 아름다운 리본이 안젤리카의 보물이랍니다.”

“……?”

왜 후작 부인이 내게 동화책을 읽어 주는 거지. 당황스러운 건 나뿐이 아닌지 하녀장도 황망하게 자리를 피했다. 난 멍하니 후작 부인을 쳐다보았다.

“재미없니?”

“아니요…….”

“거짓말을 못 하는구나.”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과 어투로 다른 책을 펼쳤다. 이번에도 그림책이라고 부르기 힘들 만큼 화려한 책이었는데, 이전 책과 달리 요정들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공주님의 생일 파티를 위해 꼬마 키키는 커다란 초콜릿 케이크를 준비했어요.”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읽더니 “난 생일은 아니었는데.” 하고 중얼거린다. 난 점점 더 그녀를 알 수 없어져서 고개만 조금 수그렸다.

“농담이었단다. 웃어도 좋아.”

내가 눈치를 보며 입꼬리만 슥 위로 올리자 후작 부인은 고개를 모로 꼬며 미간을 찌푸렸다.

‘시, 심기가 상하셨을까.’

후작 부인이 검지와 엄지로 가볍게 내 턱을 들어 올렸다. 새파란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맞는 건가!’

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런데―

“귀여워.”

나도 모르게 ‘네?’ 하고 반문하려다가 황급히 “……가, 감사합니다.” 하고 수습했다.

“네 얼굴이 마음에 들어.”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후작 부인은 가볍게 입매를 휘었다.

“소녀를 닮았거든.”

그러더니 또 새로운 책을 꺼내 무릎에 올려 두었다. 나는 양손으로 소파를 디딘 채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이전에 본 화려한 책들과는 달리 커버에 손때가 묻은 데다 다소 밋밋하기까지 한 그림이었다. 얼마나 봤는지 책등이 다 헤졌다.

후작 부인이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책을 열었다. 오래된 책에서 텁텁한 향기가 훅 풍겨왔다.

“아, 소녀군요!”

내가 소리치자 후작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책 안엔 정말로 소녀가 그려져 있었다. 산양 뿔을 가진 작은 소녀였는데 머리 양옆의 뿔이 동그랗게 휘어 있어서 마치……. 나는 정면에 있는 커다란 거울을 쳐다보았다.

‘나 같네?!’

옆머리가 유난히 곱슬이 심한 내게 시트론이 자주 해 주는 머리였다. 양옆으로 머리를 돌돌 말아서 고정시키는 것인데, 이제는 너무 익숙해서 아침이면 당연히 머리를 돌돌 말고 있었다. 오늘은 주방에 들어가야 해서 뒷머리를 남기지 않고 전부 말아 버렸다.

“닮았지 않니.”

“으으음,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내게는 소중한 책이지.”

“그렇군요.”

“그래서 널 보자마자 첫눈에 알았단다.”

무얼?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후작 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리 오렴.”

후작 부인은 대뜸 나를 식당으로 끌고 갔다. 주방에선 이미 요리를 끝내고 수셰프 루시가 오늘의 메뉴를 설명하기 위해 도착해 있었다. 루시의 눈빛이 매서웠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나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자, 이리.”

방에서처럼 나를 옆에 바싹 앉히고 잘게 썬 고기를 포크에 찍은 채 내밀었다.

“꼭꼭 씹으렴.”

“…….”

“너무 크게 자른 걸까.”

중얼거리다가 루시를 보며 “너.” 하고 부른다. 그러자 루시의 얼굴이 단숨에 환해졌다.

“예, 마님!”

“잘게 잘라.”

“예, 예?!”

‘아, 두 번 되물었다.’

후작 부인의 표정이 매서웠다. 나이프를 가볍게 쥔 그녀가 서늘한 목소리로 하녀장을 불렀다. 그리고.

“마, 마님!”

날을 하녀장의 턱에 가까이 가져갔다.

“집안 관리에 이리 어수룩하면 내 심기가 불편해지지 않니.”

“소, 송, 송구합― 마님.”

“소녀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마라. 저 애는 데려가서 예의를 가르치렴.”

“며, 명 받잡겠습니다.”

루시가 변명할 새도 없이 사용인들에게 끌려나갔다.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후작 부인을 돌아보았다. 후작 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이내 입가에 빙그레 호선이 드리웠다.

“겁먹지 마라, 소녀야. 네겐 화내지 않는단다.”

“…….”

“귀여운 것에겐 관대하거든.”

그러더니 루시가 있던 자리를 힐끔 보며 “저건 귀엽지가 않잖아.”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포악한 것은 귀엽지 않지.”

중얼거리듯 하는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알고 계셨구나.’

루시가 주방에서 가혹하게 호령한다는 것을. 나는 잠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떤 것에도 신경 두지 않을 듯한 냉소적인 눈빛이었는데 의외였다.

‘웬만큼 유능한 귀부인도 사용인 사이의 알력은 잘 모르는 법인데.’

“고기가 마음에 들지 않니? 갈아 오라고 하는 건 어때?”

그녀의 물음에 나는 빙그레 웃었다.

“제가 썰어도 될까요, 마님?”

“그래.”

나는 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후작 부인의 접시에 내려놓았다.

“……선왕께서 돌아가시고 처음이군. 이런 다정한 일은.”

후작 부인이 묘한 표정으로 포크 끝을 매만졌다.

한숨을 내쉬던 나는 막 방 안으로 들어오던 후작과 눈이 마주쳤다.

“……뭐 하는 게냐.”

굳은 얼굴로 내 머리를 땋고 있는 후작 부인과 호화로운 드레스를 입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저도 잘…….”

주방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십 분도 안 돼서 “소녀야.” 하고 부르며 들어오는 통에 당할 재간이 없었다.

“용건만 말씀하시죠.”

후작 부인이 남편을 향해 차갑게 대꾸했다.

“오늘 장부가 이상하기에.”

후작은 인상을 찌푸리며 두툼한 양피지 뭉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구두며 인형, 장난감이 뭐 때문에 필요합니까?”

“제 돈으로 산 것이니 개의치 마십시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구매 목록이 마치…….”

그가 잠시 침묵하자 후작 부인이 표정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어린애 물건을 사들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어린애 물건이니까요.”

“설마 부인, 혹시 혼외자가 있으십니까.”

혼외자?! 내가 들어도 되는 이야기일까. 나는 거울에 비치는 후작 부인을 힐끔힐끔 보았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후작 부인이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했다. 그러자 샤르파크 후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방법이라니. 무슨 좋은 얘기라도 들은 것 같습니다.”

“좋은 방법이긴 하지요. 샤르파크 공, 저는 자식이 가지고 싶습니다.”

쿨럭! 쿠울럭! 거칠게 기침하던 샤르파크 후작이 손등으로 입을 막은 채 밭은 숨을 내쉬었다.

“뭐, 뭐라고.”

“천하에 빌어먹을 고리대금업자와 단둘이 사는 건 이제 질렸습니다. 딸이 가지고 싶어요. 새싹 같은 머리칼에 꽃잎 같은 눈동자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후작의 시선이 내 머리카락과 눈을 스치고 지나쳤다.

“부인, 저 아이에게는 부모가 있습니다.”

후작 부인이 내 어깨 위의 레이스를 매만지며 말했다.

“제가 더 잘해 줄 수 있습니다.”

“부인.”

그녀는 후작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돈이고 목숨이고 약이고 다 빼앗는 분이 어찌 자식은 못 빼앗으십니까. 저는 이 아이가 좋습니다.”

“부인, 제발 이성적으로―”

“하면 이제 갈라서지요.”

“뭐라고?!”

나는 헉, 숨을 들이켰다. 후작 저에서 일하게 되며 알렉시아에게 부부의 일을 들었다. 샤르파크 성의 사용인들이 한 말처럼 이 가문의 대장은 후작 부인이었다. 온갖 범법을 저질러 돈을 쓸어 담는 후작의 안전망이 일국의 공주이자, 황제의 이종사촌인 후작 부인이었던 것이다.

후작은 당황한 얼굴로 후작 부인의 팔목을 잡았다.

“쉽게 입에 담을 수 없는 내용이라는 건 아시겠지요.”

“오래 고심했습니다. 이제 공의 얼굴이 지긋지긋합니다.”

“……!”

“가진 것은 고작 얼굴뿐이었는데, 그마저 이제 다 삭았으니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자식 키우는 정도 아니면 어찌 함께 살겠습니까.”

“사, 삭았…… 제가 이래 봬도 프렌시프 후작 다음으로 매력 있다는 소리를 듣던―!”

“차이가 큽니다.”

단호하게 말한 후작 부인이 내 머리를 땋으며 중얼거렸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드레스 치마 끝만 매만졌다.

부부의 대화가 끝나고 나는 겨우 풀려났다. 주방으로 돌아갔을 땐 이미 일이 끝나 불이 꺼진 상태였다. 난 끙끙거리며 몇 겹이나 되는 드레스 자락을 질질 끌고 복도를 걸었다.

“아가씨.”

어둠 속에서 나타난 알렉시아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응.”

“괜찮으십니까.”

“오늘은 별로 한 일도 없고…….”

엄청 바쁠 거라고 각오했는데 막상 한 건 후작 부인과 함께 있는 것뿐이었다.

“가시죠.”

“그래.”

숙소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시아가 얼른 한 팔로 나를 가린 채 다른 손으로 검집을 쥐었다. 나는 다가온 사람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각하.”

“거래를 변경하자.”

“네?”

“원하는 건 뭐든 해 주지. 대신 너는 닷새간 내 딸이 되어야겠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후작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는 아빠가 있는데요.”

“나도 딸은 필요 없어!”

“저도 저희 아빠가 좋아요!”

“며칠이면 된다잖아.”

“싫―”

“실습 평가서.”

그 말에 나는 움찔, 어깨를 좁혔다.

“오늘은 하루 종일 놀았더군.”

“그건 마님께서―”

“평가할 만한 요리를 내준 것도 아니지.”

나는 비열한 후작을 흘겨보았다.

“그럼 마님께 받으면 돼요.”

“아내는 나와 이혼하면 더 이상 샤르파크의 일원이 아니지. 실습 평가를 할 자격이 없다는 소리다.”

“……비열해요!”

“비열하지 않았다면 매춘부의 자식이 어찌 후작이 될 수 있었겠느냐.”

나는 이마를 잡으며 신음했다.

‘어떻게 하지.’

실습 평가서를 받아가지 못하면 학점을 다 못 채울 테니 로열 키친과도 멀어지고 말 거다.

“……하루에 두 시간.”

내 말에 후작이 콧방귀를 뀌었다.

“반나절.”

“세 시간이요.”

“열 시간.”

“다섯 시간!”

“아홉 시간.”

“……일곱 시간.”

“그쯤에서 합의하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고, 후작은 만족스럽게 웃었으며, 알렉시아는 묘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 * *

가웨인은 싸늘한 표정의 란슬롯과 아서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서류를 확인하며 복도를 지나던 나베리우스도 평소와 달리 노기 서린 기운에 우뚝 멈춰 섰다.

“아서, 무슨 일이냐.”

“제가 동부로 내려가야겠습니다. 어르신은 황도를 지켜 주시죠.”

“무슨 일이기에.”

나베리우스는 굳은 얼굴로 아서의 손에 들린 편지를 빼앗았다.

[―하여 당분간 아가씨는 샤르파크 후작의 딸 역할을…… 오늘은 놀이공원이란 곳을 함께 가신다고…… 호위하겠습니다.]

나베리우스가 버럭 소리쳤다.

“미친 게 아니냐! 왜 남의 손녀를―! 가웨인, 내 창을 가져와라! 당장!”

놀이공원은 제가 제일 처음으로 데려가려고 벼르고 있던 곳인데.

[할아버지가 최고예요!]

신이 나서 웃는 세니아나가 눈앞에 아른거리다 멀어졌다.

“쳐 죽일 놈!”

때마침 황도 저택의 집사 마일로가 급히 들어왔다.

“송구합니다, 주인님. 아뎅(프렌시프의 정보부 총괄) 경으로부터 급보입니다.”

프렌시프 정보부는 최소한의 인력 외엔 모두 아탈란과 3차 시험에서 세니아나를 납치하려 했던 용병단의 뒤를 캐고 있었다. 마일로에게 보고서를 전달받은 아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용병들에게 납치를 사주한 자가 샤르파크의 부관, 이라.”

낮게 읊조리는 말에 나베리우스와 란슬롯, 가웨인이 동시에 얼굴을 굳혔다. 나베리우스는 다급히 아서의 보고서를 빼앗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하면 세니아나가 납치 세력의 한복판에 있다는 말이냐!”

테이블을 검지 끝으로 툭, 툭, 두드리던 아서가 이내 입을 열었다.

“……가웨인.”

“예.”

“영지군을 집결시켜라. 샤르파크를 친다.”

* * *

“…….”

“…….”

‘어, 어색해.’

나는 대화 한 마디가 없는 부부를 힐끔힐끔 훔쳐보다가 앓는 소리를 삼켰다. 샤르파크 성에서 목적지까지 세 시간가량.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

“마님에게 그쪽 창문을 닫으라고 해라.”

드디어 샤르파크 후작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직접 말하지 않고?’

좋아하고 있던 것도 잠시. 나는 후작 부인의 눈치를 보며 웅얼거렸다.

“마님, 창문을 닫아 주시라고 각하께서…….”

그러자 후작 부인이 읽던 책을 탁, 덮으며 말했다.

“나는 바람을 쐴 거다. 싫은 사람이 나가라고 전하렴. 그리고 내 자식을 하인 부리듯 하는 사내는 꼴 보기 싫으니 나가는 쪽으로 결정하기를 바란다고도 전해 줘.”

후작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네 어머니’께! 흙먼지가 마차 안으로 다 들어와서 내가 주제넘은 걱정을 했다고 전해라. 아주! 미안하다고.”

“알면 됐다고 전하렴.”

“이깟 역할극 때문에 내가 오늘 어떤 거래를 포기했는지 아느냐고 물어봐라.”

“됐다고 하는데도 부득불 쫓아온 사람이 할 말은 아니라고 전해.”

내가 한숨을 푹 내쉬었을 때, 마차가 멈추었다. 나는 반색하고 얼른 문을 열었다.

“도착했나 봐요!”

마부가 오기도 전에 폴짝 뛰어내려 멀찌감치 섰다.

‘피곤해…….’

후작 부부는 마차에서 내린 뒤에도 나를 사이에 두고 말이 없었다.

“저, 저기!”

결국 어색함에 져 버린 내가 말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날 쳐다보았다.

“놀이공원이라는 건 누가 만든 건가요?”

여기도 그런 게 있다고 해서 놀랐다. 샤르파크 후작은 입장 전 대기소에서 나눠 준 발찌를 매며 말했다.

“서부 자금이 동부 사업가에게 흘러든 걸 거다. 고매한 귀족 나리들이 사업에 눈 벌게 투자를 했다는 걸 밝힐 수 없으니 아닌 척하고 있지만.”

“돈을 버는 것이 왜 창피한 일인가요?”

“날 때부터 금자인 그네들 속내를 천박한 태생의 내가 어떻게 짐작하겠나.”

빈정거리는 말에 나는 “흐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찰나, 지배인으로 보이는 멀끔한 남자가 후작 부인에게 다가왔다.

“샤르파크 부인을 뵙습니다.”

“그래.”

“송구하지만, 놀이공원 내에서 높은 구두는 위험합니다.”

후작 부인이 구두를 갈아신는 동안 후작과 나는 놀이공원에 입장했다.

“와―!”

윤세나 세계의 놀이공원과 무척 비슷하다. 하지만 그곳처럼 알록달록하지는 않고, 꽤 고풍스럽다.

‘놀이기구는 스릴을 즐길 수 있는 것들은 아닌가 봐.’

느릿느릿 우아하게 움직이는 회전차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는, 이런 데 놀러 올 수 있는 사람은 귀족 내지는 최소 평민 졸부일 테니까.

‘저 딱총새 기구 재밌겠다!’

이런 유원지는 텔레비전에서만 봤지 가 볼 생각을 못 했다. 윤세나의 친부와 함께 살 때, 고아원에 살 때는 꿈도 꾸지 못했고, 선생님과 살 때도 돈이 아까워서 쳐다도 보지 않았다.

나는 공중에서 땅까지 위아래로 움직이는 기구를 보며 “우와―! 우와―!” 소리쳤다. 직원이 “타시겠습니까?” 하고 상냥한 어투로 물었다.

“아, 하지만…….”

나는 돈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끌려온 거라 챙길 생각을 못 했던 것이다. 내가 시무룩 어깨를 떨구자 후작이 말했다.

“타든가.”

“빌려주시게요? 하지만 저는, 사채 금리로 돈을 빌리는 건…….”

나는 사채가 지긋지긋했다.

“누가 고리금리로 빌려주겠대!”

“……네?”

“타. 그리고 네 아버지더러 내가 아주 잘해 줬다고 전해 줘라. 응?”

그러더니 내 등을 밀며 “들어가.” 하고 말한다. 난 엉겁결에 기구에 앉아 안전바를 잡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크게 후회할 것도 모르고.

후작 부인은 주저앉은 채 헐떡이는 내 등을 두드렸다.

“우욱.”

토할 것 같다. 기구를 타면서 발밑으로 쑥 꺼진 심장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만 같아서 나는 기둥을 잡은 채로 울먹였다.

‘죽는 줄 알았어.’

밖에서는 서행하는 것 같았는데, 직접 타 보니 그렇게 빠를 수가 없었다. 속으로 몇 번이나 신에게 빌었는지 모르겠다. 제발 살려 달라고.

‘선생님…….’

그때, 마침 통신석이 깜빡였다. 나는 훌쩍이며 일어나 후작을 흘끔 쳐다보았다.

“잠깐 다녀올게요.”

“……그래.”

나는 후작 내외를 떠나 인적 드문 곳에서 통신을 연결했다.

[세니아나.]

죽는 줄 알았다가 세상에서 가장 안심되는 목소리를 들으니 긴장이 풀려 버렸다.

“아, 아빠…….”

목소리가 떨리자 시끄러운 잡음이 들려왔다.

[뭐야. 우는 건가?]

[뭔데, 무슨 일인데.]

[세니아나! 할애비다!]

다 함께 있는 모양인지 가족들은 시끄럽게 떠들었다.

“아니에요. 그냥 긴장이 풀려서…….”

[긴장할 일이 있던 건가.]

아빠의 목소리가 어쩐지 서늘해서 “그런 게 아니라” 하고 우물쭈물 변명했다.

“그렇게 큰일은 아니고요. 그냥 놀―”

“소녀야.”

때마침 후작 부인의 소리가 들려와서 나는 후다닥, 통신을 종료했다.

“마님.”

“근처에 휴게실이 있다더구나. 차를 준비하라 할 테니 가서 쉬자.”

“하지만 놀이공원을 기대하셨잖아요?”

“가자.”

내 물음엔 대꾸하지 않고 손목을 잡더니 성큼성큼 걸었다. 복작복작한 유원지 내부엔 사람들이 한가득이었다. 근처에 아이스크림 판매점이 있었는데, 어린애가 재빨리 그 앞으로 뛰어가더니 “어머니!” 하고 소리쳤다.

“어머니, 이거요! 사 주세요!”

“오늘만 찬 것을 몇 번이나 먹는 거니. 배탈 난다.”

“조금만 먹을게요. 네~?”

“나 참.”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는 여자와 그녀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며 인자한 표정을 짓는 남자. 그리고 그들의 아래서 방방 뛰는 어린애. 후작 부인은 걸음마저 멈추고 가족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마님?”

“……가자.”

부인은 걷는 내내 조용했다. 그전에도 그리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분위기마저 고요해서 난 힐끔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후작과 합류해서 휴게실을 향했다. 그도 왜인지 어두운 후작 부인의 표정이 의아한 듯싶었다. 나는 그들을 따라 걷다 말고 “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그들이 날 돌아보았다. 나는 주변을 휙휙 돌아보다가 간식을 파는 가판대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저, 저거 사 주세요.”

얼굴이 붉어져서 웅얼거리는 날 보고 후작은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후작 부인은…….

“찬 것을 먹으면 배탈 난다.”

―하면서도 먼저 가판대를 향해 걸었다. 그러고는 후작에게 “계산하세요.” 하고 말했다.

“예―?!”

“계산이요.”

“돈. 가져오셨잖습니까.”

“샤르파크 공이 계산한 것을 이 아이에게 주고 싶습니다.”

“그건 무슨…….”

후작은 기가 막혀 했지만 계산해 주었고, 나는 손에 살구 셔벗을 쥐게 되었다. 조금 퍼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드세요, 마님.”

후작 부인의 표정이 묘해졌다.

“소녀는 눈치가 빠르구나.”

조그맣게 중얼거리다가 희미하게 웃으며 셔벗을 받아먹는다. 그리고 난 조금 더 퍼서 후작에게 내밀었다.

“뭐, 왜.”

“드세요.”

“찬 건 별로―”

난 그의 팔을 꾹 잡고 “그냥 드세요.” 하고 속삭였다. 후작은 나와 후작 부인의 시선을 받고 다소 당황스러운 듯 움찔했다. 그러나 이내 입을 열어서 얼른 그의 입에 셔벗을 넣어 줬다.

‘마님은 이런 걸 하고 싶었구나.’

유원지에서 놀이기구를 타고 싶은 게 아니라, 화려한 퍼레이드를 구경하고 싶은 게 아니라 가족처럼 지내고 싶은 것이었다. 외로워서.

하기야 황제가 친척이고, 외가는 길라게온에 터를 두고 있다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녀는 이국의 사람이다. 타국에서 정 없는 남편과 단둘이서 지내며 십여 년째 홀로 버티는 건 외로운 일일 터였다.

휴게소에 이르기 전, 나는 후작 부인을 들여보낸 후에 안으로 들어가려는 후작의 옷깃을 잡았다.

“저기 꽃집이 있어요.”

“그래서.”

“꽃집이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뭘.”

한숨을 푹 내쉬고 그를 끌고 꽃집 앞으로 갔다.

“저희 아빠는 꽃집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대요.”

“느끼하군. 사내놈이 무슨―”

구시렁거리는 그를 보고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 어머니께 가실 적엔 늘 꽃이나 케이크 같은 작은 선물을 하셨어요.”

“나도 분기마다 부인에게 선물을 한다. 내 것이 훨씬 고가야.”

뻐기듯이 말하는 그를 보고 난 아빠의 멋짐을 아로새겼다.

‘우리 아빠 멋있어.’

“선물 크기나 가격이 중요한 게 아닌데요.”

매 순간 그녀를 떠올린다는 의미라면 그게 얼마든, 뭐가 됐든 기쁜 것이다. 나도 아빠에게 꽃을 선물 받았을 적에 엄청 기뻤고.

“선물해 보세요.”

“쓸데없는 일에 돈 쓰는 건 혐오하는―”

“좀!”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는 “참나.” 하더니 주인에게 아무거나 한 다발 내놓으라고 했다.

“제 것도요.”

“뭐 이렇게 당당하게 선물을 요구하는 거야.”

구시렁거린 그가 꽃다발에서 한 송이 빼내어 내게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휴게실로 향했다. 후작이 귀찮은 표정으로 후작 부인에게 덥석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후작 부인은 눈을 홉뜨며 내가 든 꽃과 꽃다발을 번갈아 쳐다봤다.

“…….”

말 없는 그녀를 보고 후작은 밉살맞은 투로 중얼거렸다.

“들고 다니기 귀찮으면 하인에게 맡기세요.”

“귀찮지 않습니다.”

“……예?”

“귀찮지 않습니다.”

“…….”

“귀찮지 않아요.”

몇 번이나 중얼거린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내 것이 더 크다.”

“그러네요, 마님.”

“같은 꽃을 들었구나. 정말로 가족 같아.”

“맞아요.”

우리가 함께 웃자 후작은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곤 얼굴이 새빨개져서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뭐 하시는 겁니까.”

후작 부인의 말에 후작은 헛기침을 하더니 고개를 약간 돌렸다.

“그, 그런 게 필요했으면 말을―!”

“예?”

“이런 걸 좋아하는 줄 몰랐잖습니까…….”

“샤르파크 공이 내게 관심이 없는 게지요.”

후작은 이제야 부인이 뭘 바랐는지 깨달았나 보다.

‘눈치는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생긋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오른쪽엔 후작 부인이 앉았고, 왼쪽엔 후작이 엉거주춤 걸터앉았다.

“그, 뭐, 크흠! 유원지 안에 식당이 있다던데…… 함께 가서 먹을까요.”

“……그런 돈 쓰시는 건 싫어하시잖습니까.”

“부인에게 쓰는 돈은 아까워한 적 없습니다.”

“거짓말은.”

응, 거짓말. 나와 후작 부인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자 후작은 마뜩잖은 듯 휙! 고개를 돌렸다.

“안 아까우니 그냥 좀 갑시다!”

―하고 말한 그가 박력 넘치게 손을 끌어당겼다. 내 손을. 여전히 아내와 손잡는 건 어색한 모양이었다. 함께 식당에 들어가자 직원들이 창밖이 보이는 좋은 자리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아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오픈 키친이네.’

주방이 보이는 구조는 믿음이 간다. 위생에 자신이 없다면 내부를 보일 리 없으니까. 요리사 입장에서는 공부도 된다. 나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주방 안을 구경했다.

‘응?’

요리마다 붉은 가루를 넣고 있었다. 저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아!’

샤르파크 성 주방에도 저런 가루가 몇 통이나 놓여 있었다. 폴리가 근래 인기 있는 조미료라고 했다.

‘미원 같은 건가.’

하지만 MSG를 쓰는 걸 저렇게 훤히 보여 준다고? 내가 눈을 끔뻑거리고 있자 샤르파크 후작이 오픈 키친을 주시했다.

“성식(聖食)이로군.”

“성식이요?”

“그래. 값비싼 향신료인데 저렇게나 듬뿍 쓰는 건가. 과연 서부의 자금이 흘러들어 온 유원지다.”

“향신료…… 조미료가 아니고요?”

“글쎄, 난 요리사가 아니니 정확히는 모르지. 하지만 몸에 아주 좋다고는 들었다. 다 죽어가는 환자도 성식을 일 년만 먹으면 기운을 차린다지.”

그런 대단한 것이라고? 나는 무의식중에 가져온 셔벗을 휘저으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런데 셔벗 그릇 바닥에도 채 녹지 않은 붉은 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여기에도?’

같은 가루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 색이 아주 비슷했다.

“꽤 오래전부터 제국에 풀렸는데, 사용하는 귀족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 지금에서야 너나 할 것 없이 쓰고 있다. 아카데미에서는 쓰지 않느냐?”

“화학적 합성품이 5할 이상인 조미료는 쓰지 않는 게 원칙이라서요.”

“그런가. 금좌 11석 가문에서는 많이들 쓰는데 말이지.”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프렌시프 성에서도 쓰지 않나?” 하고 물었다. 프렌시프의 총요리장인 아곤은 자연주의 요리사였다. 소금, 설탕, 장 외에 조미료를 혐오했으니 주방에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성식…….”

“오래 섭취하면 성식이 들어 있지 않은 요리는 먹기 힘들지. 그만큼 맛있거든.”

“그럼 각하께서도……?”

“난 그다지. 부인의 요리엔 항상 들어 있다는 것 같지만. 임신에 좋다고 해서 오뵈르 백작 부인은 차에도 타 마셨다더군.”

오뵈르 백작 부인이라면 황자의 검술 시합에서 내 복분자주를 먹고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이다. 그렇게 오래 섭취했는데도 임신이 쉽지 않았던 걸 보면 성식의 소문은 과장된 모양이었다.

‘아이라.’

그런데 왜 샤르파크 내외에겐 자식이 없는 걸까. 후작 부인이 이렇게 간절히 자식을 바라는데. 후작 부인을 힐끔 쳐다봤을 때였다. 쿵, 쿵, 쿵! 입구 쪽에서 구둣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꺄악!”

놀란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윽!”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샤르파크 후작의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 나와 후작 부인은 벌떡 일어났다. 목을 겨눈 남자가 천천히 로브를 벗었고, 그와 눈이 마주친 난 “으응?!” 하고 소리쳤다.

“할아버지?”

내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샤르파크 후작 부인이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황도 사교계에 거의 나선 바 없는 그녀조차 할아버지는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후작 부부가 할아버지 얘기를 했었지.’

“이 무슨 짓입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오.”

“알아듣게 말씀하시죠.”

할아버지가 검 끝으로 샤르파크 후작의 턱 끝을 툭, 쳤다.

“내 손녀를 납치하려 한 연유를 지껄여 봐라.”

납치?

‘설마 용병들에게 나를 데려오라 지시했던 사람이 샤르파크 후작이란 말이야?’

나는 굳은 얼굴로 후작을 쳐다보았고, 후작은 양손을 들며 동시에 눈썹을 까딱 올렸다.

“오해라면 어찌하시려고.”

담담한 어투지만 눈빛에 스민 동요는 완전히 숨기지 못했다.

‘설마 진짜로?’

할아버지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손주가 기름에 데고 뺨까지 얻어맞았는데 오해였다는 말로 넘어갈 할애비가 어디 있겠나.”

“……컥!”

할아버지는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 후작의 목을 틀어잡았다.

“어디 한 군데는 부러져야 수지가 맞지.”

“크흑.”

“비열한 수로 성에까지 불러들였으니 내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서 말이다.”

“……어, 큭, 어르신.”

“어디 지껄여 봐라.”

그때, 샤르파크의 호위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왔고, 프렌시프의 기사들과 대치했다.

‘헉.’

프렌시프의 기사를 지휘하고 있는 자는 비상군 대장인 칼립스였다.

‘비, 비상군까지 데려오신 거야?.’

어쩐지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쉽게 끝날 성싶지 않았다.

“내 남편을 놓으세요.”

샤르파크 후작 부인이 날카롭게 소리쳤지만, 할아버지는 후작을 놓아주지 않았다.

“공, 내 말이 들리지 않습니까.”

대답 대신 기사들 사이로 란슬롯이 걸어 나왔다. 그는 눈매를 나붓이 휘며 부드럽게 읊조렸다.

“송구합니다, 마담. 프렌시프가 따르는 것은 오직 황명뿐인지라.”

“하여 본자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는 거요?”

“그리 들으셨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나는 클리오라의 개국왕 엘더왈의 15대손, 현왕의 누이요. 프렌시프는 타국의 왕족을 이리 홀대한단 말이오?”

“아쉽게도 지금은 납치범의 처이시지요.”

후작 부인은 할아버지에게 붙들려 있는 남편을 매서운 표정으로 흘겨보았다. 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내가 남편의 죄를 대신 사죄하겠소.”

“받지 않겠습니다.”

란슬롯은 단호히 거절하면서도 빙글빙글 아름다운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맹랑하군.”

“어여삐 봐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는 물러서는 기색 없이 빈정거렸다. 분위기는 점점 더 날이 섰고, 가만있다간 샤르파크 후작의 숨이 꼴딱 넘어갈 것 같았다.

“하, 할아버지!”

나는 얼른 할아버지의 팔에 매달렸다.

“일단 손을 놓아주세요.”

“…….”

“할아버지, 제발…….”

할아버지는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곤 이내 천천히 손에서 힘을 풀었다.

“큭.”

할아버지와 떨어진 후작이 몇 차례나 기침을 하며 붉어진 목을 매만졌다.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된 식당 내부를 둘러본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사람들은 내보내는 것이 좋겠어요.”

내 말에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칼립스 경에게 단단히 입단속을 부탁하고, 손님들과 함께 각 가문의 기사들 또한 내보냈다. 후작 부인은 샤르파크 후작을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했다.

“설명하십시오.”

“……보신 대로.”

“소녀가 프렌시프의 막내이며, 공은 소녀를 납치하려 했다. 내가 이해한 것이 맞습니까?”

후작이 미간을 좁히며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올렸다.

“납치를 명하진 않았습니다.”

그러곤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대화를 나누길 바랐을 뿐.”

란슬롯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신분을 밝히지 않고, 용병을 고용해서 말이지요. 그 과정에서 제 동생은 뺨을 얻어맞고 끓는 기름에 다쳤습니다.”

미소짓고 있으나 눈빛은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러자 샤르파크 후작이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소통의 오류였을 뿐이다. 고용한 용병들이 예상치 못한 무뢰배인 탓이었어.”

“애초에 프렌시프에 일언반구도 없이 제 동생을 만나려 한 저의가 문제였지요.”

“영애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리라 여겼다.”

“마약의 유통이 말입니까? 고작 스무 살, 갓 성인이 된 아이에게, 그것도 각하께서 유통한 약으로 인해 위험에 처할 뻔했던 아이를 홀로 만나러 와서요?”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지 마라. 스무 살이라면 홀로 결정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닌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후작 부인이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테이블이 흔들리며 후작이 선물한 꽃다발이 툭, 바닥으로 떨어져 망가졌다.

“공은 입을 다무세요.”

“부인.”

그녀가 할아버지를 똑바로 응시했다.

“하여 폐하께 이번 일에 관해 알리실 참입니까. 아니면 이미 개전(開戰) 허가를 받아오신 겁니까.”

“그런 방법도 선택지에 있소.”

할아버지의 말에 후작 부인이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하는 선까지 보상하겠습니다.”

“보상이라…….”

“보상이 아니라면 샤르파크는 맞서 싸울 수밖에요.”

식당 안에 할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새끼의 목숨을 재어 비교할 수 있는 저울이 있나?”

“…….”

“내 새끼가 입은 상처와 피해를 재물로 덮을 수 있는 자가 세상천지에 존재하는가?”

“진정 칼부림을 원하시는 것은 아닐 텐데요. 말장난은 그만하고, 확실히 말씀하십시오.”

“샤르파크 후작의 목.”

실내 분위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나는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고, 란슬롯은 조소를 머금었으며, 후작 내외는 딱딱하게 굳어졌다. 할아버지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기름에 지져 내 손녀에게 장난감으로 주어야겠다.”

그런 장난감 필요 없는데요…….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한 장난감이다.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란슬롯을 붙들었다.

“오, 오빠.”

란슬롯이 검지를 입술에 붙인 채로 다정히 눈꼬리를 접었다. 후작 부인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이내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마님!”

나도 모르게 소리치자 란슬롯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찬 바닥에 무릎 꿇은 후작 부인이 고개를 숙였다.

“클리오라의 왕녀가 체면을 저울에 걸겠습니다.”

“부인!”

“입 닥쳐요.”

후작의 얼굴이 거무죽죽해졌지만, 후작 부인은 외려 더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부디 자비를.”

할아버지가 “쯧.” 하고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평생 자비라곤 모르고 산 몸이다.”

분노와 수치, 아내에 대한 미안함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후작의 턱을 할아버지가 단단히 그러잡았다.

“내 새끼를 건드린 놈은 사지를 찢어 버리는 게 내 방식이야.”

“……!”

“목이 떨어지는 날, 다시 보지.”

할아버지가 “가자, 세니아나.” 하며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가면서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후작 부인이 후작의 뺨을 내리쳤다. 짝!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샤르파크 후작의 고개가 돌아가는 것이 내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찬바람이 곱게 손질한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지나갔다. 나는 프렌시프의 마차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놀이공원에 왔으니 놀다 가야겠지?”

할아버지가 나를 향해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딱총새 기구가 재미지다더구나. 할애비가 다 알아 왔지.”

뿌듯한 표정으로 껄껄 웃던 그가 커흠, 헛기침을 했다.

“너를 납치하려 한 것들은 죄다 요절을 낼 것이다.”

“…….”

“그리 감동할 필요는 없으니―”

“……빠요.”

“뭐?”

“나빠요!”

나는 할아버지와 오빠를 흘겨보았다. 오늘에서야 겨우 가까워진 후작 부부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 말에 할아버지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세니안.”

“할아버지는 악당이에요?”

“아, 악당?”

“사람들이 할아버지더러 악당이라고 하더니 정말로 그러신 거예요?”

커다란 유리창 안으로 보이는 샤르파크 후작 부인의 표정이 너무나 쓸쓸하고, 아파 보여서 폐가 꽉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후작에겐 잘못이 있다. 소통의 오류였든, 아니었든 간에 나를 억지로 끌고 가려던 건 맞으니까.

‘하지만 후작 부인은 죄가 없는데.’

이렇게까지 수치를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세니아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나는 얼른 그에게 달려갔다. 아까 할아버지와 란슬롯은 너무 무서웠다.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안심되는 목소리를 들으니 훌쩍훌쩍 눈물이 새어 나왔다.

“무슨 일이지?”

“할아버지가 너무하세요.”

“아, 아니, 세니아나, 나는―!”

할아버지가 펄쩍 뛰며 내게 달려왔다. 아빠는 나를 끌어안은 채로 할아버지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난 그저 평소처럼…….”

“평소처럼 찔러 죽이셨습니까?”

뭐라고? 평소엔 그런 일도 서슴없이 하시는 건가?

‘역시 무서워.’

할아버지가 내게 손을 뻗었지만, 난 흠칫 놀라 아빠의 품에 매달렸다. 아빠는 인상을 쓰며 할아버지의 손을 밀쳐냈다.

“오지 마십시오.”

“내가 왜!”

“세니아나가 어르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

“가자. 따뜻한 차라도 마시면 진정이 될 것이다.”

등 뒤로 할아버지의 시무룩한 시선이 달라붙었다.

* * *

퍽! 샤르파크 후작에게 얼굴을 얻어맞은 그의 부관이 바닥에 넘어져 마른침을 삼켰다.

“소, 송구…….”

“내가 너를 어찌해야 할까. 명줄을 끊어 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겠는데, 응?”

그가 엉금엉금 기어가 후작의 다리를 붙들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각하―!”

“내 아내가 프렌시프 늙은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

처음이었다. 그녀가 그리 맑게 웃는 모습을 본 것은. 세니아나 프렌시프 앞의 그녀는 한 꺼풀 벗어 낸 사람처럼 환히 빛났다. 가슴 한편으로 정말로 저 애가 내 딸이었다면, 우리에게 저런 자식이 있다면, 하고 상상하게 할 만큼.

살며 지어 온 죄가 수두룩했다. 있는 자부터 없는 자까지 빼앗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빼앗아 기어 올라왔다. 제가 유통한 마약에 절어 부랑자로 죽은 사람을 보아도 그러려니 했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것이다. 없는 놈이 살아남기 위해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고 여겼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에 후회 따윈 없을 것이라 믿었는데.

[공이 비열한 수단으로 지은 둥지 속에서 가만히 누워 지낸 벌을 나는 이렇게 받는가 봅니다.]

[저열한 사람.]

[공의 아내가 된 것을 후회합니다.]

[당분간 성으로 돌아오지 마십시오. 떠날 준비가 끝나면 연락하겠습니다.]

샤르파크 후작은 소파에 걸터앉아 이마를 쥐었다. 그러던 찰나, 후작이 운영하는 조직 사무실을 찾은 자가 있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남자가 가슴에 손을 올린 채로 허리를 깊이 숙였다.

“샤르파크 공을 뵙습니다.”

후작은 거칠어진 얼굴로 그를 흘깃 쳐다보았다.

“누구냐.”

“오늘의 소동에 관해 귀동냥한 필부이지요.”

그렇게 말한 의문의 사내는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서부에 터를 두고 있습니다.”

서부 귀족의 끄나풀인가. 입단속을 시키긴 했지만, 놀이공원에 서부 귀족들이 눈과 귀를 숨겨 둔 모양이었다.

“서부에서 나를 무슨 까닭으로 찾았지?”

“제 주인께선 오랫동안 은밀히 공을 흠모하게 계셨습니다. 가까워질 방도를 찾으시다 오늘의 소식을 듣게 되어―”

“본론!”

후작이 날카롭게 소리치자 의문의 사내는 쿡쿡, 웃었다.

“오늘의 수치를 갚아 주고 싶으실 겁니다.”

“…….”

“하면 제 주인께 좋은 방도가 있습니다.”

“방도?”

“성녀란 무릇 품 안에 있을 때라야 귀중한 선물. 울타리 밖에 있는 범은 위협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면…….”

남자는 고개를 모로 꼬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가둬야지요.”

뒷골목에서 평생을 쌓아 온 감이 예리하게 빛났다. 저것은 위험하다. 머릿속의 경고등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내 앞에서 개수작은 삼가라. 당장 목을 비틀어 버리기 전에.”

“프렌시프에서 그리 끼고돈 들, 황제와 금좌 11석 과반수가 합의한다면 황궁에 가둬 버릴 수 있습니다.”

“……금좌 11석의 과반수를 확보한 것처럼 구는군.”

“과연 현명하십니다!”

그가 낄낄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각하의 표만 있으면 세니아나 프렌시프를 전쟁의 도구로 전락시킬 수 있지요.”

후작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의문의 사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네 주인은 누구냐.”

“사람은 주(主)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생을 바친 이는 오직 신.”

“……설마.”

“공께서 자비로운 아탈란의 품에 안길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의문의 사내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깊이 숙였다.

* * *

샤르파크 성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카데미로 다시 갈 수도 없어서 우리는 동부의 호텔로 들어왔다. 나는 소파에 웅크려 앉은 채 통신석을 빤히 보았다.

‘후작 부인의 코드는 아는데.’

샤르파크 성에서 들었다.

연락해 볼까. 나는 끙끙 신음을 흘리며 고민했다.

“쾅쾅!”

문밖에서는 내내 쾅쾅!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식사는 해야지! 어? 세니아나!”

어느새 도착한 가웨인이 내 방문을 부서져라 두드리고 있었다.

“아니, 조부님은 대체 무슨 짓을 하셨기에 애를 이렇게까지 골나게 한 거야?! 형이 나서 봐!”

“…….”

“뭐야, 형은 왜 조용해?”

방 밖에서 잠시 침묵이 들리더니 “헹.” 하는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형한테도 화가 났군.”

“……화가 난 게 아니라 내 다른 모습에 놀란 거지.”

“다르긴 무슨. 야! 세니아나, 밥은 먹고 화를 내라니까. 밥!”

나는 씨! 소리치고 문을 빼꼼 열었다.

“안 먹어요.”

“왜?!”

“샤르파크와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하실 때까지 안 먹기로 했어요.”

그러자 방 밖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가족들이 눈을 홉떴다.

“안 먹는다고?”

할아버지는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충격을 받았다.

“아니, 나는 본보기가 필요해서―!”

“그래도 죽이실 것까지는 없잖아요. 목도 떨어뜨리시겠다고 하고…….”

할아버지의 표정을 보니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려고 해서 나는 홱,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본보기는 있어야지. 그래야 정신 놓고 덤비는 녀석이 없―!”

“안 먹어요!”

할아버지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는 나를 빤히 보더니 결심한 사람처럼 말했다.

“차라리 내가 굶겠다!”

“네?”

“내가 굶을 테니 너는 식사를 해라.”

초점이 많이 어긋나지 않았나요?

나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 눈치를 보았다.

‘밤이 깊었는데.’

요리는 두 시간에 한 번꼴로 새것으로 교체되고 있지만, 아무도 식당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식사…… 정말로 안 하세요?”

책을 읽던 란슬롯이 빙그레 웃었다.

“막내가 굶는데 우리만 먹을 수야 있나.”

“그래도, 그래도……!”

나야 샤르파크 성에서 이동했으니 아침도 먹었고, 마차 안에서 간식도 먹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황궁의 마차로 동부까지 이동해 왔다. 황궁 마차는 마법으로 움직이는 거라, 다른 마차보다는 훨씬 빠르게 이동하지만 그래도 포털과는 다르다.

아무리 빨리 이동해도 이틀은 넘게 걸렸을 것이다. 그동안 식사할 시간을 따로 내기는 힘들었을 터. 오늘까지 따지면 무려 사흘간 제대로 식사를 못 한 것이다. 가웨인이 목을 주무르며 일어났다.

“난 물이라도 마셔야겠다.”

물이 아니라 식사를 하라니까. 나는 눈치를 보며 가웨인을 따라나섰다.

“오빠, 오빠.”

복도로 나온 후에 조그맣게 속삭이자 가웨인이 나를 돌아보았다.

“왜?”

“식사하셔도 돼요. 몰래 하셔도 안 말할게요.”

내가 양손을 꽉 쥐며 다짐하듯 말하자 가웨인이 픽 실소를 흘렸다.

“안 해.”

“고집쟁이!”

엄청 배고파 보이는데.

“이제 잘 거야. 며칠 밤을 새웠더니 피곤해.”

그러니까 괜찮다는 듯 그는 내 머리 위에 툭, 턱을 걸쳤다.

“밤도 새웠어요?”

“그래.”

“마차 안에서 주무시지.”

“네가 샤르파크의 손아귀에 있는데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가웨인이 허리를 약간 굽혀 나와 눈을 맞추었다.

“아버님도, 조부님도, 형까지 아무도 눈을 붙이지 않았어. 단 한 순간도 말이야.”

“하지만 마님과 후작은 제게 해를 가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것만은 단언할 수 있다. 오히려 후작 부인은 내게 정말로 잘해 주었지. 가웨인은 다른 가족들이 있는 방을 흘끔 쳐다보며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름에 덴 곳, 아직 아프지?”

“…….”

“넌 샤르파크가 고용한 용병들에게 뺨을 맞고 머리채를 잡혔어. 호위들이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

“후작의 잘못이 의사소통에 실패한 것뿐이라고 쳐. 실패한 상태로 용병에게 끌려갔으면? 더 큰 위협을 가하지 않았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나? 만에 하나, 그 개자식들이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다른 짓을 하려고 했으면?”

“저는 포털이 있으니까…….”

변명하듯 웅얼거리자 가웨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완벽한 방어 수단인가, 네 포털은?”

아니다. 일련의 사건으로 나는 의식이 없을 때, 혹은 약에 취했을 땐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내게서 말이 없자 가웨인이 내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조부님은 배다른 형제에게 몇 번이나 칼을 맞았어.”

“할아버지가요?”

“그래. 그리고 형은 외조부와 모친이 프렌시프에 전쟁을 걸었지. 어린 형이 홀로 영지를 지키고 있던 시기에 말이야.”

“…….”

“우리가 사는 세계는 피붙이도 믿을 수 없는 곳이야. 하물며 남, 그것도 너를 공격했던 작자가 아무리 잘해 준들 어떻게 믿을 수 있지?”

“…….”

“결과적으로 돈벌이를 위해 네게 협력을 강요하려던 인간인데.”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세니아나.”

“……네.”

“너는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신분이 드러날 거다.”

“그렇겠지요.”

“자연히 3차 시험에서 납치당할 뻔한 일이 소문 날 테고. 정보력이 있는 자들은 그 전에 알아낼 테고.”

“…….”

“그런데 우리가 납치를 지시한 샤르파크를 그냥 넘긴다면 어떻게 될 것 같지?”

“그건…….”

프렌시프는 무르구나. 납치하려고 해도 무릎 꿇고 용서를 빌면 넘어가 줄 거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래서 본보기가 필요하지.”

“…….”

“네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릴 생각도 못 하도록.”

“오빠…….”

“그러니까 네가 받아들여. 미안하지만―”

드물게 진중한 말을 한 가웨인은 이내 평소처럼 개구지게 웃었다.

“우린 널 지키기 위해서라면 수천이든, 수만이든 거침없이 도륙할 악당이 맞거든.”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문고리를 잡았다. 슬쩍 문을 열고 안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안에 모여 있던 가족들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달콤한 거 있어요?”

“뭐?”

할아버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단 거 먹고 싶어요…….”

“아서, 단것을 내오라 해라! 호텔에 있는 단것들은 모두 내오라고 해. 아니지, 프렌시프 성으로 가서 파티시에를 데려와라.”

“호, 호텔 디저트면 돼요.”

내가 웅얼거리자 아빠는 즉시 사람을 불러 디저트를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리가 다시 세팅되었다. 나는 할아버지 옆에 앉아 포크를 들었다. 가족들은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달그락. 스푼을 입에 넣자 란슬롯이 희미하게 웃었다.

“맛있어요.”

“그, 그러냐? 더 내오라고 하마. 종류별로―”

“할아버지도 드세요.”

내가 케이크를 퍼서 내밀자 할아버지는 반색했다. 그러고 얼른 입을 벌려 내가 준 것을 받아먹었다.

“맛있지요?”

“그래!”

아빠가 기가 찬 목소리로 “단것은 질색하시지 않습니까.”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케이크 싫어하세요?”

“아니!”

……대답이 빠른 것 같은데? 내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보니 그는 케이크를 조각 채로 집어 입에 넣었다.

“아주 맛있다.”

그런데 왜 눈살을 찌푸리고 계시지.

‘너무 맛있어서 그런가 보다.’

내가 보기에도 이 호텔의 초콜릿 케이크는 아주 훌륭했다. 난 쿠키도 집어 할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좋아하시지요?”

“……그, 그래.”

타르트도 줬다.

“마, 맛있구나.”

할아버지가 기뻐하니 나도 좋았다.

식사를 하고 나니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할아버지와 오빠들은 방으로 가고, 난 아빠와 단둘이 남아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케이크부터 짭짤한 닭 날개 조림, 크림 파스타 등을 잔뜩 먹은 나는 부른 배를 땅땅 두드렸다.

‘너무 먹었나 봐.’

이것저것 내미는 가족들을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빠가 준 것을 먹으면 할아버지가 내밀고, 할아버지가 준 것을 먹으면 란슬롯과 가웨인이 경쟁하듯 입안에 음식을 밀어 넣었다.

“소화제를 가져오라고 할까?”

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런 비싼 음식을 약으로 소화시키는 건 아깝다. 아빠는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

‘누우라고?’

내가 묻듯이 쳐다보니까 아빠는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부끄럽지만…….’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벌러덩 누워 있는데 아빠의 손이 머리 위로 다가오다가 멈칫했다. 가볍게 주먹을 쥔 그는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쓰다듬으셔도 돼요.”

“……그런가.”

머리끝을 부드럽게 매만지다가 엄지로 내 눈가를 다정히 문질렀다.

“저는 할아버지를 닮았지요?”

“어떤 작자가 네게 그따위 말을 했지?”

“……할아버지가 하셨는데.”

“전혀. 너는 나를 닮았어.”

에이. 아빠는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아름답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어릴 때는 어땠지?”

“저요?”

“그래.”

“으음, 그냥 평범한 어린애였지요?”

“응석은?”

“아주 어릴 때는 하지 않았을까요?”

기억엔 없지만. 너덧 살일 적엔 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해 봐.”

“네?”

“응석이든, 어리광이든.”

나는 몸을 뒤척여 배를 깔고 누워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그냥 계속 보았다.

다음 날 아침. 옷을 갈아입고 테라스로 나온 나는 턱을 잡은 채로 끙끙 고민했다. 어리광은 어떻게 부리는 거지?

‘해 본 적이 있어야 알지.’

햇살을 받으며 내내 고민하던 난 또각또각, 하는 걸음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알렉시아.”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여느 때처럼 갑주 차림이 아니라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바지 차림이긴 하지만.’

긴 머리를 갑주 속에 감추고 있을 땐 몰랐는데, 이렇게 땋아서 한쪽으로 늘어뜨리니 확실히 성별을 알겠다. 알렉시아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호텔 내에선 손님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으니 평상복 차림을 하라는 명이 내려와서요. 불편합니다.”

“아름다워, 멋져!”

“과찬이십니다.”

그녀는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그러다 내가 들고 있는 책을 보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게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거?”

“예. <응석쟁이 육아법>은 아가씨가 읽으시기엔 아직 이른 듯한데요.”

나는 턱을 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가…….”

“주인님께서?”

“응석을 부려 보라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알렉시아는 해 본 적 있어?”

“그야 저도 어릴 때가 있었으니까요.”

“어떻게 했는데?”

고개를 모로 꼰 채 허공을 바라보던 그녀가 흠, 하고 침음을 흘렸다.

“과자나 장난감을 사 달라고 떼를 썼지요.”

역시 물건을 사 달라고 조르는 일인가. 책에서도 응석의 유형 중 가장 먼저 나온 게 조르기였다.

‘좋아. 졸라 보자.’

점심을 먹은 후 우리 가족은 호텔 주변을 간단히 돌아보기로 했다. 나는 양옆에 아빠와 할아버지, 뒤로는 란슬롯과 가웨인을 대동한 채로 걷다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부끄러워!’

사람들이 죄다 우리만 보고 있었다. 알아보는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라 허리를 숙였고, 모르는 사람들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디 불편한가?”

아빠가 물어서 난 조그맣게 속삭였다.

“우리만 봐요.”

“내가 잘생겼으니까.”

“…….”

역시 가웨인은 아빠의 아들이 맞구나. 가웨인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거리를 비워 주랴?”

할아버지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어떻게 거리를 비워요?”

거리는 우리 것이 아닌데.

할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따르는 기사들에게 명했다.

“치워.”

그러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사람들을 몰아내려 했다.

‘정말로 비우려나 봐!’

나는 펄쩍 뛰며 할아버지를 붙잡았다.

“아니에요!”

“불편하다면서?”

“복작복작한 게 좋아요…….”

귀찮게 말을 바꾼다고 혼날까 봐 시무룩해졌는데 할아버지는 “크흐음―!” 헛기침만 할 뿐이었다.

“……?”

“가자?”

“손을 놔주셔야―”

놀라서 붙잡은 손을 그대로 잡은 채 할아버지는 성큼성큼 걸었다. 왜 안 빼 주시지?

‘헉.’

나이가 들어서 가는 귀가 먹으셨나 봐.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봤으나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보청기 해 드려야겠다.’

비슷한 마도구가 있을 거다. 나는 할아버지와 손을 잡고 걸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타이밍, 타이밍.’

응석을 부릴 절호의 시기를 찾느라 수색병처럼 날카롭게 주변을 살폈다.

“황제에게 란슬롯, 네 작위를……”

“교육이 끝나고 받아도…… 그보다 새로운 금좌들을…….”

“기사단도 단속…….”

힐끔 뒤를 돌아보니 아빠와 오빠들은 내가 잘 모르는 정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역시 응석은 다음에 부리는 게 나을까. 마땅히 사 달라고 할 것도 없― 어?’

가판대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굉장히 호화롭게 생긴 타진(뚜껑이 원뿔형으로 솟은 내열 냄비)을 끌어안고 있었다.

‘이거다!’

나는 얼른 가판대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가지고 싶습니다.”

그러자 가족들이 나를 주목했다.

“이거요.”

“……가지고 싶다고?”

“네.”

“쓸 만해 보이지 않는데.”

가판대에서 파는 것이니 저렴하게 떼어 온 것이긴 할 거다.

“그렇지만 가지고 싶은걸요.”

그러자 할아버지와 아빠가 눈을 가늘게 뜨고 가판대 안을 살폈다.

“뭐.”

“가지고 싶다지 않느냐.”

아빠가 가웨인에게 눈짓했다. 가웨인은 아주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역시 응석은 보기 좋은 건 아닌가 봐.’

아빠가 보고 싶어 해도 이제 그만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가웨인이 성큼성큼 가판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의 턱을 한 손으로 쥐더니 말했다.

“너, 얼마냐.”

“예, 예?!”

“귀족가의 고용인으로 일했던 경험이 있나.”

“무, 무슨 말씀을…….”

“네놈이 얼마면 되냐고 묻잖아, 내가.”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엄청나게 당황해서 아빠와 할아버지, 그리고 란슬롯을 쳐다보았다. 저 오빠 좀 봐요. 이상한 짓 하고 있어요! 얼른 말려 달라고 하려 했는데.

“하인으로 교육하려면 일단 성에서…….”

아빠가 말하자―

“황도에서도 충분할 겁니다. 손은 야무진 편이 아닌 듯싶군요. 일단 기사로 쓸 수 있는지 테스트를 한 뒤에…….”

란슬롯이 말했고,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세니아나의 놀이 상대를 하는 건 어렵지 않겠지. 가문의 역사와 예절부터 가르쳐라.”

역시 이 사람들은 이상해.

난 타진을 끌어안고 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람을 살 뻔했네…….’

그 남자가 아니라 타진을 사 달라는 거라고 하자 가족들은 외려 날 이상하게 보았다.

“정말로 그거면 돼?”

“장인에게 의뢰하면 더 좋은 것을 가져올 텐데.”

난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 문득 꽃집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튤립이다. 샤르파크 후작이 후작 부인에게 선물했던 꽃. 내게도 한 송이 빼서 준 게 있는데 호텔에 장식해 놨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샤르파크 후작에게 죄가 있다지만, 후작 부인에게는 죄가 없으니까. 그녀의 미소를 앗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기이한 불안감이 자꾸만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세니아나?”

앞서 걷던 가족들이 멈춰 서서 나를 불렀다.

“할아버지.”

“그래.”

“저, 응석 부려도 돼요?”

그렇게 말하자 할아버지의 눈이 커졌다. 그러고 이내.

“물론!”

“저기, 그러면 부탁드릴 게 있어요.”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족들은 내 말을 듣는 내내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진정 원하는 것이라고?”

할아버지의 질문에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빤히 나를 쳐다봤지만,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나를 쏙 뺀 내 새끼다.”

그러자 아빠가 표정 없이 말했다.

“저를 닮은 겁니다.”

란슬롯은 묵묵했고, 가웨인은 어쩐지 골이 나 보였지만, 나는 얼른 오빠들의 팔에 매달렸다.

“도와주셔야 해요?”

오빠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 *

아베트 클리오라.

클리오라 선왕과 길라게온 대귀족 가문의 영애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클리오라 왕국의 가장 고매한 핏줄이었다. 날 때부터 고귀했던 그녀는 손가락 하나로 타인의 인생을 좌지우지했다. 스스로의 인생이 불행하다 여겼던 적은 없다. 애초에 타인과 비견할 수 없는 삶.

왕궁의 보물 상자 속에 있던 그녀는 상자 밖의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았다. 그녀의 인생이 달라진 건 선왕의 서거 직전이었다. 배다른 남동생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한 후, 그녀는 상자 속에서 끌려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배다른 남매가 그리 잔악하지 않고, 겁 많은 성격이라는 것이었다. 왕이 된 동생은 누이의 목숨을 빼앗지 않았고, 그저 제 권좌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그녀를 멀리 제국으로 보냈다.

소국이 아닌 누이의 외가가 있는 제국으로 보낸 것 또한 얼마간 그녀를 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생활의 연속이었다.

생이 지루해진 것은 언제부터인가. 무료함을 견디기 싫어진 것은 언제부터였나. 태어났을 때부터 그다지 재미있는 삶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마님, 식사를 올릴까요?”

하녀장의 말에 아베트는 낮게 중얼거렸다.

“재미가 없구나.”

의미 모를 말에 하녀장은 한숨을 삼켰다. 상태를 보아하니 음식을 올려 봐야 오늘도 먹지 않을 듯했다.

“간단한 티 푸드와 차를 올리겠습니다.”

“그래.”

하녀장이 나가고 그녀는 멍하니 창밖 풍경을 지켜보았다.

‘뭐지.’

정원의 나무 앞으로 무언가 빼꼼,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무 기둥 앞에서 털 뭉치 같은 것이 흔들렸다.

‘동물?’

성안에 동물을 들이는 것을 허락한 기억은 없다. 후작 부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무 뒤에서 총총 걸어 나오는 작은 동물을 응시했다.

‘저건…….’

작달막한 동물이 두 발로 서서 콩콩 걷다가 잔디 위에 주저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끄아앙!”

보채는 듯한 소리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귀여워.’

정원과 이어진 문을 열고 나서자 동물이 깜짝 놀라 물러서다가 눈을 홉떴다.

“놀라지 마라.”

한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린 그녀가 동물이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작구나.”

번쩍 서서도 무릎을 조금 넘는 작은 크기다. 동물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우다다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너지? 너 맞지? 그렇지?”

동물의 주둥이에서 나온 사람 말에 후작 부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꿈인가.’

“가자, 누나가 너를 데려오라고 했어.”

“무슨―”

묻기도 전에 동물의 몸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눈 부신 빛에 둘러싸인 그녀가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눈을 떴을 땐―

“아! 오셨군요!”

후작 부인이 굳은 얼굴로 난데없이 나타난 사람과 본 적 없는 풍경을 둘러보았다.

“너…….”

“누나!”

동물이 여성의 품에 뛰어들어 마구 뺨을 비볐다.

“누나, 누나!”

“자, 잠깐만, 으윽!”

“내가 데려왔다. 누나가 데려오라던 사람이 맞지? 테디는 똑똑하지?”

“그래. 잘했어.”

‘소녀…….’

아니, 세니아나 프렌시프가 동물, 그러니까 작은 반달곰을 끌어안은 채 자신을 보고 활짝 웃었다.

“여긴 어디냐. 어떻게 내가 이곳에…… 포털인가.”

성녀라더니 사실이었구나. 후작 부인의 말에 세니아나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맞아요, 마님. 제가 마님을 모셔오라고 했어요.”

“내 의사도 묻지 않고 말이냐.”

“그렇지만…….”

세니아나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마님의 부군께서도 제 의사를 묻지 않고 끌고 가려고 했는걸요?”

“…….”

“하지만 저는 각하께서 고용한 용병처럼 머리채를 잡거나 주변을 망가뜨리거나, 뺨을 때리며 모셔오지 않았지요.”

세니아나가 헤헤 웃자 후작 부인은 미간을 좁혔다.

“이건 마치 납치 같은데.”

“맞아요, 납치!”

세니아나는 밝게 소리쳤다.

“뭐라고?”

“제가 마님을 납치한 거예요.”

후작 부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호화로운 방, 테이블에 준비된 차 두 잔과 다과, 그리고 그녀가 좋아하는 그림책들. 게다가 납치범은 아주 귀여운 곰이었다. 이런 납치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쟁반을 들고 후작 부인의 방으로 들어간 샤르파크의 하녀장은 빈방을 보고 멈칫했다.

“마님?”

방 안은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했다. 쟁반을 내려놓은 그녀가 복도로 나서 방 앞을 지키던 집사를 붙잡았다.

“마님은 어디 계십니까?”

“방에 계시겠지. 나오시는 것은 보지 못했네.”

“안 계십니다.”

“뭐?”

집사가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 방 안을 살폈다.

“나가시는 것을 보지 못하였는데…….”

“하면 어디 계신단 말씀입니까.”

방과 이어진 정원까지 샅샅이 살핀 샤르파크의 사용인들은 새하얗게 질려 서로를 쳐다보았다.

“큰일이다.”

집사가 중얼거리자 하녀장이 비틀거리며 이마를 쥐었다. 마님이 사라지셨다!

다음 날, 후작 부인이 사라졌다는 알림이 샤르파크 후작에게 전달되었다. 마차를 타고 황도로 이동 중이던 그는 급히 정차시키고 소식을 전해 온 사용인의 멱살을 잡았다.

“무슨 소리냐. 그 사람이 왜 갑자기 사라져!”

“저, 저희도 까닭을 모르겠―”

“성에서 난데없이 사라지는 게 말이 되는 소리야!”

후작이 날카롭게 고함을 내지르자 사용인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후작이 마차를 짚은 채로 거칠어진 숨결을 정리했다. 아내가 떠나겠다고 으름장을 놓긴 했지만, 이렇게 기가 막히게 떠날 사람은 아니다.

“유령도 아니고 그리 홀연히 사라질 리가…… 포털인가!”

기어이 프렌시프에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세니아나에게 포털을 열라 지시한 것인가!

‘이런 정신 나간―!’

눈앞이 새하얘지고,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잇새로 “빌어먹을, 빌어먹을.” 하는 욕설이 연신 새어 나왔다.

“세니아나 프렌시프가 있는 곳을 당장 알아내!”

“저…… 그보다…….”

사용인의 난처한 목소리에 후작이 미간을 좁혔다.

“내 아내가 사라졌는데 더 급한 일이 뭐가 있다는 것이냐!”

“그, 마님과 관련된 일이긴 합니다…….”

“무엇이기에.”

“벌써 동부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통신석을 통해 황도에까지 전해진 듯하고, 파리스가(황제의 모친인 소피아 대부인의 친정이자 샤르파크 후작 부인의 외가)에선 진위를 묻는 서한이 왔습니다.”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제게 소식이 들어온 것이 오늘이다. 아무리 황도로 떠나는 중이라 전달이 늦어졌다고 하더라도 이상하다.

‘이틀 만에 이렇게 빠르게 소문이 퍼졌을 리 없다.’

누군가 작정하고 소문을 내지 않은 이상은!

* * *

나는 잠든 샤르파크 부인에게 담요를 덮어 주고 끙, 신음을 흘렸다. 그녀가 테디를 좋아해서 계속 현신시키고 있었더니 피로감이 어마어마했다.

“이제 잘 거야? 코 잘 거야?”

“아니?”

“자자, 으응?”

어제 침대에서 함께 끌어안고 잔 것이 몹시 좋았나 보다.

‘귀여워!’

귀여워서 테디의 말을 들어 주고 싶었지만, 오늘 미룰 수 없는 예정이 있다. 이제 슬슬 샤르파크 후작의 귀에 소식이 들어갔을 테니 그가 이곳에 들이닥칠 차례였다.

“아가씨.”

알렉시아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돌아보자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왔구나!’

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알렉시아를 따라나섰다. 호텔에서 내어 준 응접실에 들어가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후작이 나를 노려보았다.

“내 아내는 어떻게 된 것이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자리에 앉았다.

“후작과 프렌시프의 노인네는 어디 있지? 네 오라비들은?! 너 홀로 이런 일을 벌였을 리 없다! 그들을 만나게 해 줘!”

“가족들은 모르는 일이에요.”

나는 시침을 뚝 떼고 준비해 둔 찻잔을 들었다.

“하면 네가 지시한 일이란 것이냐.”

“정확히 말하면 의사소통의 오류이지요.”

“너―!”

내 납치 일로 따지는 우리 가족들에게 한 말과 비슷하지? 나는 생긋 미소지었다.

“마님을 보고 싶어 했더니 제 성수가 뜻을 오해하고 직접 모셔 온 듯합니다.”

“……돌려다오.”

“흐음.”

“내 탓이잖아! 내 잘못이다! 그녀에겐 죄가 없어.”

“하면 제겐 무슨 죄가 있었나요?”

“……!”

“무슨 죄가 있었기에 사내들에게 얻어맞고 끌려가 위험한 일을 당할 뻔하였나요?”

후작은 할 말이 없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저는 각하께 잘못한 것이 없잖아요.”

“말꼬리 잡는 건 그만해라! 당장 내 아내를 돌려주지 않으면 너를―!”

“협박 전에 하실 게 있잖아요!”

내가 벌떡 일어나 소리치자 후작은 굳어졌다.

“사과하지 않으셨어요. 제게.”

“…….”

“각하의 욕심이 아니었더라면 그런 무서운 경험을 하지 않았을 제게, 그로 인해 놀라고 두려웠던 제 가족들에게 한마디 사과가 없으셨어요.”

“…….”

“의사소통의 오류라고 변명하시기 전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납치하라 사주한 적 없다고 변명하시기 전에 제게 진심으로 사과하셨다면.”

“…….”

“제가 그렇게 다친 걸 안 후에라도 저와 제 가족들에게 미안하다고, 잘못이었다고 사과하셨더라면 이 지경이 될 일은 없었어요.”

후작은 허공으로 고개를 돌린 채 말이 없었다. 사과를 한 건 후작 부인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마음 쓰이고, 미안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녀는 죄가 없으니까. 그런 그녀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외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부인은, 내 아내는 안전한 거냐?”

나는 후작을 매섭게 노려보고 소파를 벗어났다. 문을 열자 방 밖에 모여 있던 가족들이 보였다. 표정 없이 침묵하는 할아버지와 아빠, 그리고 오빠들을 보기 미안해서 난 고개를 숙였다. 그들에게 부린 응석. 그건 후작에게 마지막 기회를 달라는 것이었다.

[무작정 용서해 달라는 말이 아니에요.]

[세니아나.]

[실수였다면, 사과하고 바로잡을 기회를 주고 싶어요. 할아버지와 아빠, 오빠들이 느꼈던 불안감과 상처를 그 또한 느끼고 얼마나 잘못했는지 알기를 바라요.]

내가 틀린 걸까. 쿵! 문 닫히는 소리가 너무 크고 날카로워서 나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때 다시 벌컥, 문이 열렸다.

* * *

며칠 후, 황도 외곽. 사비에르 후작과 콜린 백작, 라가세 백작 대신 임명을 앞둔 귀족들이 설레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이제 중앙탑에 들어갈 일이 얼마 남지 않았군요.”

“보름 뒤면 임명식입니다. 제 아내는 벌써 임명식에서 입을 예복을 준비해 놨습니다.”

“으하하! 중앙탑(금좌 11석의 회의가 이뤄지는 길라게온 권력의 중추)에 들어가는 것만이 중요하겠습니까. 앞으로의 일도…….”

“하여 우리가 이리 모인 것이 아닙니까.”

껄껄, 웃으며 잡담을 나누던 귀족들이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황궁에 프렌시프의 성녀를 가둬 놓기만 하면 폐하와 그분의 눈에 들겠지요.”

“샤르파크 후작과도 친분을 다질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잘된 일입니까.”

“애초에 성녀씩이나 되는 인물을 한 가문 안에 두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특별한 힘엔 책임이 따르는 법!”

“맞습니다!”

금좌에 앉을 날만 고대하던 귀족들은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를 보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르마르 공작!”

카렌듈라(황후의 부친, 미카엘 황자의 외조부)와 프렌시프 다음으로 입김이 강한 금좌인 르마르 공작이 오만한 표정으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제국의 앞날을 책임질 명신(名臣)들이 모두 모였군.”

입에 발린 칭찬에도 귀족들은 기쁜 기색이었다.

“자자, 이리 앉으십시오.”

가장 상석에 앉은 르마르 공작은 시계를 확인했다.

“다 모인 건가?”

“아직 샤르파크 후작이 오지 않았습니다.”

“오기는 하는가?”

“그렇겠지요. 듣자 하니 프렌시프와 샤르파크 가에 메꿀 수 없는 균열이 생겼답니다.”

르마르 공작이 낄낄, 낮게 웃었다.

“프렌시프의 노인네가 샤르파크 후작의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지.”

“게다가 후작 부인을 납치한 것도 프렌시프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래서 늙으면 죽어야 하는 거야. 여기가 굳거든.”

그가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말했다.

“권력이 개편되는 시기에 그리 강경하게 구니 손녀까지 빼앗기게 되는 게 아닌가.”

“근래엔 손녀 보는 재미로 산다는데 외로워서 병이라도 걸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귀족 중 한 사람이 빈정거리자 르마르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 내가 정 붙일 곳을 마련해 주려 하네.”

“예?”

“손자며느리도 딸처럼 귀엽겠지.”

“설마 영애를―!”

르마르 공작이 입꼬리를 올리자 귀족들은 재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르마르 영애라면 도미니크 황자에게 공개적으로 청혼했다가 망신을 당한 일이 있었다. 명문가 중에 명문가인 르마르 공작가에 한동안 혼담이 들어오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 그렇겠지요! 영애라면 확실히 어르신도 어여쁘게 보실 겁니다.”

“하면 프렌시프 경들 중 누구와 이어 주실 참입니까?”

르마르 공작이 눈썹을 까딱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당연히 후계이지.”

“아아, 란슬롯 프렌시프.”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와중, 문이 열렸다. 붉게 노을처럼 일렁이는 머리칼을 본 귀족들이 몸을 일으켰다.

“샤르파크 공!”

“어서 오십시오. 잘 생각하셨습니다. 자, 이리― 헉.”

그의 뒤를 이어 들어온 사내들을 보고 귀족들은 동시에 굳어졌다. 샤르파크 후작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했다.

“프렌시프의 일이 논의되는 자리에 장본인을 빼놓아서야 되겠습니까.”

아서 프렌시프와 나베리우스 프렌시프가 싸늘한 표정으로 장내를 둘러보았다. 나베리우스가 말했다.

“아쉽구나.”

“어, 어르신.”

“이리 재미난 일을 논의하는데 늙은이만 쏙 빼놓다니. 나이 들었다고 그리 차별하면…….”

그가 손을 벌벌 떨고 있는 귀족들을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어지는데 말이야.”

나베리우스는 귀족들이 앉은 테이블을 빙 둘러 느릿하게 걸었다. 날카로운 발소리가 가까이 느껴질 때마다 귀족들은 흠칫, 어깨를 좁혔다.

“그리 생각하지 않는가.”

나베리우스에게 어깨를 잡힌 귀족은 뻣뻣하게 굳어 마른침을 삼켰다.

“어, 어르― 어르신…….”

그는 커다란 손으로 희멀건 귀족의 목을 붙들었다.

“이거 참. 분지르기엔 영 가냘프군.”

“이, 이번 일은, 그, 그러니까, 어르신―!”

“목이 분질러진 시체를 보면 내 새끼가 나를 악당이라 여길 텐데 말이야.”

“…….”

“공은 어찌 생각하나, 응?”

살벌한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이건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나베리우스 프렌시프의 고삐를 잡은 사람이 누구인지, 아로새기라는. 아서는 딱딱하게 굳은 귀족들을 느른히 훑어보며 말했다.

“공들의 면면은 눈에 새겨 두지.”

“……!”

“다시 내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반가움에 무슨 짓을 할지, 나는 아직 모르겠으니까.”

르마르 공작은 마른침을 삼켰다.

* * *

며칠 후. 나는 마주 앉아 서로 딴청을 부리는 샤르파크 후작 부부를 바라보았다.

‘아이고.’

벌써 삼십 분이나 지났는데 누구 하나 먼저 말 붙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난 후작 부인의 옆자리에 앉아 그녀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드세요.”

“……처음 보는 차인데.”

“각하께서 가져오셨어요. 마님께서 좋아하실 거라고.”

나는 ‘그렇지?’ 하는 눈으로 후작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큼.” 헛기침만 할 뿐 달리 말이 없었다. 바보! 내가 대화의 물꼬를 터 주었잖아.

후작 부인은 찻잔 안에 핀 마른 장미를 내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사람이 바뀌는 건 죽을 때가 다가와서라던데요.”

후작의 무릎에 올라가 있던 손이 움찔했다.

“주, 죽기를 바라십니까?”

아니야, 그거 아니야! 그런 주제로 대화를 이어가려 하지 마. 나는 당황한 눈으로 후작을 쳐다보았다. 후작도 아차 싶은지 표정에서 동요가 엿보였다. 후작 부인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도 나쁘지 않군요. 장례는 치러드리죠.”

“……말을 왜.”

“공의 말도 그리 예의 바른 편은 아니었습니다만.”

싸움 나겠다……. 내가 슬쩍 후작에게 눈짓하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저……. 각하.”

“그, 그래.”

“무릎은 괜찮으십니까?”

그러자 후작 부인이 나를 빤히 응시했다.

“무릎이라니?”

“며칠 전에 제게 무릎을 굽히시며 사과하셨어요.”

그러자 후작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내, 내가 언제―!”

“하셨잖아요?”

“그걸 이 사람에게 말하면 어찌해!”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인지 후작은 얼굴이 바짝 달아올랐다. 후작 부인은 그를 묘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사과……. 이 아이를 납치한 일을 이르십니까.”

후작이 헛기침을 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척 말했다.

“뭐……. 겪어 보니 혼이 나갈 만한 일이긴 하더군요.”

“저를 걱정하셨습니까?”

“부부가 아닙니까.”

“서류상은 그렇죠.”

“서류상이 아니라―!”

울컥 화를 낸 그가 고요한 후작 부인의 얼굴을 보곤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남편이 아내를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낮은 목소리와 함께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작 부인은 그런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

“그러네요. 네, 그래요.”

“…….”

“저도 공이 납치된다면 걱정…… 할 듯합니다.”

두 사람은 여전히 묘한 분위기이긴 하지만, 이전보다는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나는 안도감을 느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다행이네.’

이대로 이혼하게 될까 봐 염려스러웠다. 후작보다도 후작 부인이 말이다. 배다른 동생에게 밀려 팔려오듯 제국으로 온 사람이니, 모국으로 돌아가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그녀의 외가인 파리스가로 간다 해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타국의 왕족인 그녀는 껄끄러운 존재니까.

‘차라리 껄끄러워하면 다행이지. 이용하려 들 수도 있어.’

어쨌거나 표면적으로 후작 부인은 클리오라와 제국의 연결구였다. 제국과 클리오라 왕국, 두 나라가 그녀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혹여라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전쟁을 피하기 어려울 거다.

‘그리고 전쟁이 나면 포털을 가진 나는 끌려갈지도 모르지요.’

이혼까지는 가지 않을 것 같아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나는 샤르파크 부부를 응접실에 두고 가족들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오빠들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선 채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르마르가 흉계의 구심점이라면 그쪽을 먼저 쳐야지.”

“그리 쉽사리 쳐낼 수 있는 가문이라면 아버님과 조부님께서 진즉 쳐냈을 거다. 차라리―”

무언가 진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기에 나는 소파에 앉아 얌전히 기다렸다. 눈을 깜빡이고 있자 오빠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어쨌거나 한 놈은 죽여 버리고 싶은데.”

가웨인이 이를 갈 듯 중얼거려서 나는 흠칫 놀라 어깨를 좁혔다. 그러자 란슬롯이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날 빤히 쳐다보던 가웨인이 곧 우리 쪽으로 움직였다. 중앙에 앉은 나는 눈을 도르륵 굴리며 눈치를 보았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샤르파크 후작이 내게 무릎을 꿇고 사과한 그날. 그는 나를 제외한 가족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아빠와 할아버지는 즉시 샤르파크 후작과 어디론가 향했고, 오빠들은 내내 무언가를 상의 중이었다. 가웨인이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친 채 날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거슬리는 쥐새끼들을 몰아내려고.”

“흐음, 쥐…….”

윤세나의 세계에서도 쥐는 골칫거리였다. 창고에 숨어들어 곡식을 축내는 데다 전염병을 옮기기도 하니까.

“나쁜 쥐인가요?”

“뭐, 병든 쥐이긴 하지.”

가웨인이 씩 웃으며 물었다.

“좋은 생각 있어?”

“그렇다면 역시 쥐덫이 제일 좋지 않을까요?”

“쥐덫이라.”

“생쥐가 좋아하는 달콤한 것들로 꼬여내서 스스로 쥐약을 먹게 하는 거예요.”

“쥐약을 먹고도 죽지 않으면?”

보통은 쥐약을 먹으면 다 죽지 않나? 하지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냥 두자고?”

“태워 버려야 해요.”

내가 음산하게 말하자 오빠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워 버린다, 라. 한 마리가 아니면?”

“그렇다면 창고째로 태워야지요.”

“…….”

“전염병은 면역에 취약한 어린아이나 작은 동물들부터 옮는 법이니 되도록 빠르게.”

란슬롯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렇구나. 우리 막내는 영리하네.”

이런 건 누구나 아는 것일 텐데.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오빠들을 바라보았다.

“참, 있잖아요. 할아버지께서 약속을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나는 샤르파크 후작이 뉘우치고 용서를 빈다면 실습을 속행하기로 했다.

“뭐.”

가웨인은 마뜩잖은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소문도 냈고…… 네가 내건 ‘두 번째 조건’은 우리 생각에도 나쁘지 않으니까.”

사실 후작 부인을 납치했다고 소문을 퍼뜨린 건 프렌시프였다.

‘본보기가 필요하다는 것엔 나도 동의하거든.’

프렌시프의 새로운 가훈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것을 제도 전역에 퍼뜨린 것이다. 다른 귀족들이 무례하고 난폭한 짓이라고 힐난해도 사실상 우리에게 피해는 없을 거다. 샤르파크 후작이 그런 일은 없었다고 잡아떼기로 했으니까.

하지만 증좌가 없을 뿐 모두 의심은 할 것이다. 왜냐면 후작 부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에, 프렌시프에게 막대한 배상과 더불어 우리가 요청할 때엔 어느 때든 군사를 내어 주겠다는 협정서를 쓸 테니까.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고 예상할 수밖에.’

샤르파크 후작 같은 수전노가 이런 배상과 협정을 아무런 이유 없이 할 리 없으니까 말이다. 이게 바로 내가 내건 실습으로 돌아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었다.

“이 작은 머리에서 그런 생각은 어떻게 나오는 거지?”

가웨인이 신통방통하다는 듯 말해서 나는 눈을 깜빡였다.

“평화로운 해결책을 생각하려고 하면 되지요.”

“우리는 무자비하다는 거야?”

“…….”

나는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대답을 피했다.

며칠 후, 나는 다시 샤르파크 성으로 향했다. 이번에야말로 많은 것을 배워가겠다고 다짐하며 조리복으로 갈아입었다.

“아가씨.”

마침 알렉시아가 들어왔다.

“응.”

“샤르파크 내외는 정문으로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다행이네.”

난 에이프런을 두른 후, 조리모까지 반듯하게 쓰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돌아온 후작 내외를 위해 정신없이 프라이팬을 흔들던 요리사들이 나를 주목했다. 가장 상석에서 요리의 마무리를 확인하던 수셰프 루시가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멋대로 주방에 들어오라고 했지?”

“네?”

“연락도 없이 사라졌던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주방에 들어오는 거야!”

그녀가 왈칵 화를 내서 난 고개를 수그렸다. 내가 샤르파크의 성을 떠나있던 건 무려 열흘이었다. 납치 사건의 마무리로 바빴던 데다가 실습을 연장하겠다는 서한을 아카데미에 보내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던 것이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몸이 좋지 않아서…….”

미리 준비해 놨던 변명을 했지만 루시의 눈초리가 싸늘해졌다.

“마님이 귀여워한다고 뵈는 게 없는 모양이지?”

“…….”

“그따위로 게으름을 부리는 새끼가 뭘 배우겠다는 거야! 수련생 주제에 아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벼락같은 고함이 칼날처럼 고막을 파고들었다. 나는 허리를 깊이 숙이고 소리쳤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수련생 신분으로 주방 일에 소홀했던 건 무슨 이유든 간에 제 탓입니다.”

“정신 빠진 놈!”

루시가 씩씩거리며 행주를 조리대에 집어 던졌다. 그래도 다행히 다시 나가라는 말은 없었다.

“냉장 창고에서 고기나 다져 놔.”

“네!”

나는 얼른 손을 씻고 냉장 창고로 들어갔다. 막내 조리사인 폴리가 추위로 곱은 손을 호호 불며 고기를 다지고 있었다.

“왔구나!”

“네.”

“어디 갔었어? 왜 주방에 나오지 않은 거야? 응?”

“아……. 몸이 좀 안 좋아서…….”

“아하.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참, 루시 님도 너무하시지. 몸이 안 좋아서 나올 수 없었던 건데 그렇게 면박을 주고.”

바깥에서 루시와 나눈 이야기를 다 들었는지, 폴리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나는 루시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련생들은 모두 요리 하나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나는 운 좋게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아카데미에 들어가 정규 과정을 밟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훨씬 많았다. 가진 게 많은 만큼, 더 노력해야 하는 입장인 거다. 피할 수 없는 일이 있다면, 주방을 총괄하는 루시와 먼저 의논하는 게 옳다.

“고기도 왜 냉장 창고에서 다지라는 거냐고. 씨이, 사람 괴롭히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야.”

폴리는 연신 투덜대며 칼등으로 고기를 다졌다.

“주방은 더우니까요.”

가을이라지만 아직 두, 세 시 경엔 덥다. 무엇보다 샤르파크 성은 주방이 좁은 편이라 열기가 고기에 그대로 전해진다. 후작이 엄청난 짠돌이라 좋은 고기를 사 오지 못하니 더더욱 열기를 조심해야 할 거다.

‘위생을 신경 쓰시는 건데.’

생각해 보면 루시 님에 관한 평가는 몹시 박했다. 틀린 말은 그다지 하지 않는데도. 난폭해서 그런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폴리와 함께 고기를 다졌다.

“너 없을 때도 말이야. 카토 선배님을 얼마나 구박하던지 별것도 아니었는데 완성된 요리를 집어 던져서…….”

우리는 두 시간쯤 준비된 육고기와 해산물을 손질했다. 그 후, 폴리는 다른 요리사들을 돕기 위해 냉장 창고를 나섰고, 나는 손질한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나자 끼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창고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카토 선배님.”

루시에게 특히 구박을 많이 받는 중년의 요리사였다. 아빠뻘인데, 하도 얻어맞는 걸 자주 봐서 그런지 나는 그에게 마음이 쓰였다.

“주, 준비는, 다, 다 끝냈어?”

‘아.’

말이 조금 어눌했다. 경력도 그렇고, 나이를 따져도 수셰프 밑에 있을 땐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 때문이었던 것 같다.

“네.”

“주, 주인님 식사, 다, 나, 나갔어. 요리사들도 시, 식사하러 갔으니까 너, 너도 가.”

“아, 저는 가 볼 데가 있어서요.”

내가 실습을 위해 가족들에게 내건 두 번째 조건을 확인하러 가야 한다. 그건 내가 실습을 끝낼 때까지 아빠와 오빠들이 샤르파크 성에 손님으로 머문다는 것이었다. 물론 내 신분은 드러내지 않아야 하니 서로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이제 곧 도착할 때이니 멀리서라도 인사를 할 생각이었다.

“선배님은 식사하러 가시지요?”

“그, 그래.”

“함께 갈까요?”

내가 냉장 창고의 문을 열기 위해 나서려고 할 때였다. 쿵! 그가 문을 거칠게 밀며 얼른 잠금쇠를 채웠다.

“너, 너, 나 좋아하지?”

“……네?”

“포, 폴리랑 내 얘기를 많이 하, 한다며.”

폴리 쪽에서 많이 하기에 맞장구를 쳐 주긴 했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자, 자꾸 날 쳐다보잖아.”

그야 루시에게 자주 얻어맞는 게 안쓰러웠으니까. 도와줄 일이 없을까 고민하기도 했고.

카토는 내 손목을 잡고 휙! 끌어당겼다.

“잠깐, 이거 놓으―”

“왜, 왜 그래? 너, 너도 꽃뱀이야?”

“무슨……! 놔요!”

“나, 나는, 가만히 있으려고 하는데, 네가 자, 자꾸 꼬셨잖아.”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계, 계속 나를 힐끔거리고.”

“그건 루시 님에게―”

“그, 그년이, 나를 괴, 괴롭히지 않을 때도 그랬어.”

“수련생은 선배들의 기술을 눈으로 배워야 하니까요.”

“아, 아니야. 부,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 다, 다 알아. 네, 네 눈빛이 내게 말했다고. 너, 너는, 나를 좋아하고 있어.”

미친 사람! 카토는 정말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뿌리치고 마원을 잡았다. 이동해야 하나. 아니면 신수를 현신시킬까. 그렇게 되면 실습을 마무리 지을 수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저 남자는―!’

온갖 위험한 상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너, 너, 꼬, 꽃뱀이구나.”

“…….”

“나, 나를, 유, 유혹해 놓고서 뻔뻔하게 모른 척하는 걸 보, 보면 넌 꽃, 꽃뱀이 맞아. 나, 나쁜 년들에겐 벌을 줘, 줘야 돼.”

그가 손을 휙 치켜들었을 때였다. 쾅! 냉장 창고의 문을 걷어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안에 누구야!”

루시의 목소리였다. 카토는 크게 당황했고, 나는 그가 머뭇거리는 틈에 재빨리 자물쇠를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 들어온 루시가 나와 카토를 돌아보았다. 상황을 살피듯 침묵하기를 수 초. 그녀가 득달같이 카토에게 달려들었다.

“이 미친 새끼가―!”

“컥!”

루시에게 멱살이 잡힌 그는 당황하여 버둥거렸다.

“이따위 짓 두 번 다시 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내, 내 잘못이 아닌―”

“개소리! 내가 널 몰라? 어?!”

솥뚜껑 같은 손으로 카토의 뺨을 올려붙인 그녀는 비틀거리다 주저앉은 카토를 노려보았다.

“오냐, 너 오늘 한번 죽어 봐라.”

그녀가 조리화를 신은 발로 카토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요리사들은 위험한 조리 도구가 떨어져도 발이 상하지 않도록 발등에 철판을 덧댄 조리화를 착용한다. 그런 조리화에 걷어차인 카토는 금세 엉망이 되어 머리를 감쌌다.

“끄윽―!”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올 즈음, 다른 요리사들이 냉장 창고로 달려와 그녀를 뜯어말렸다.

“이거 놔! 안 놔?!”

루시와 카토의 사이를 막아선 젊은 남자 요리사가 버럭 소리쳤다.

“이제 그만 좀 하시라고요!”

그러자 다른 요리사들도 하나둘 말을 보탰다.

“그래요, 이제 질릴 때도 되었잖습니까!”

“지긋지긋합니다. 이런 폭행은!”

“우리에게 더는 손대지 마십시오!”

폴리도 다른 요리사 등 뒤에 쏙 숨어서 “옳소!” 하며 동조했다. 나는 당황하여 입을 열었다.

“그런 게 아니라―”

“놔둬!”

“루시 님…….”

“됐다니까!”

루시는 벼락같이 소리치며 내 손목을 끌고 주방을 나섰다. 나는 그녀에게 잡힌 채로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돌아가서 말할래요.”

그녀가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헛웃음을 터뜨렸다.

“뭐라고 할 건데?”

“루시 님의 잘못이 아니라 카토 요리사가 제게 몹쓸 짓을 하려던 거라고요.”

그녀는 삐딱하게 서서 허리춤을 잡았다. 그리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너 좀 사는 집 자식이냐?”

“네?”

“아니면 네 스승이 필드에서 이름난 요리사냐? 그래서 뒷배가 든든한 거야?”

“…….”

“둘 다 아니면 아무 일 없어서 운 좋았다고 여기고 입 닥쳐. 한 번 추문이 생기면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거다. 성과 관련된 추문이라면 더더욱.”

그녀는 점점 북받치는 듯 거칠게 조리모를 내던지며 씩씩거렸다.

“그런 스캔들을 가진 여성 요리사는 취업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단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잘못이 없잖아요.”

루시는 자조 섞인 실소를 흘렸다.

“나도 그런 줄로 알았는데.”

“…….”

“여자가 남자의 영역에서 뻗대고 있는 것도 잘못이라더라.”

루시는 몸을 구부려 떨어진 조리모를 주었다.

“되도록 성에서 혼자 있지 마. 숙소 문도 잠가 두고.”

그 말을 끝으로 루시는 자리를 떠났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서였구나.’

도가 넘도록 난폭하게 굴었던 이유. 대부분 가정에서 부엌일이 여자의 몫이라고 해서 요리사들의 세계에서도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여성 요리사는 도태되는 편이었다.

대다수 요리사들은 보조부터 시작하는데, 보조 일은 중노동과 다름없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밤늦게까지 움직이고 또 움직인다. 눈이 시리도록 재료를 다듬고, 정신없이 선배 요리사들의 지시를 따르고, 무거운 조리기를 옮기고, 손바닥이 다 벗겨지도록 설거지를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식당의 주인이나 주방장은 체력이 약한 여자보다 남자를 선호했다. 여성 요리사는 보조 자리조차 구하기 어려워서 어느덧 주방의 중심은 남성 위주로 돌아갔다.

아카데미에도 여성 교수가 딱 둘 뿐이었다. 레아 교수와 교감. 하지만 두 사람은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제대로 된 정규 과정을 밟고 유명한 스승 밑에서 수련하여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없는 집에서 자란 여성 요리사 중 주방장 휘장을 단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루시 님은 일부러 사내처럼 난폭하게 군 거야.’

내게 유난히 외모를 언급했던 이유도 이제는 이해가 된다. 입은 원래 험한 것 같지만. 나는 속으로 헤헤 웃었다. 때마침 멀리서 익숙한 면면이 보였다. 벌써 도착한 아빠와 오빠들이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세니―”

가웨인이 나를 부르려 하자 란슬롯이 인상을 쓰며 그의 복부를 팔꿈치로 찍었다.

“다물어라.”

“윽.”

샤르파크의 사용인들은 없었고, 대신에 후작이 직접 그들을 안내 중이었다. 샤르파크 후작은 가족들의 눈치를 보더니 내게 말했다.

“함께 식사하지. 사용인들을 물려두마.”

그의 말에 가족들이 동의했다.

“가자.”

“그래, 세니아나.”

“네…….”

나는 루시가 떠난 자리를 잠깐 보다가 그들을 따라나섰다. 주방에서 준비한 식사는 사용인들의 접근을 막은 후작 부인의 정원으로 옮겨졌다. 자리에 앉은 난 기계적으로 식기를 들었다. 음식을 먹는 내내 루시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겪어 보긴 했지만.’

보조 자리조차 구할 수 없어 곤란했던 적이 내게도 있었다. 샤르파크의 주방은 내가 막연히 생각하던 문제를 극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한숨을 내쉬며 음식을 입에 집어넣던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윽.”

신음이 절로 나왔다. 부패한 듯한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황급히 냅킨을 들어 파스타를 뱉어냈다.

“왜?”

“입에 안 맞아?”

오빠들이 물었다.

“네……. 역한 냄새가 나요.”

샤르파크 후작 부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향긋하기만 한데.”

“로제 파스타를 싫어하니?”

후작과 후작 부인이 차례로 물었다. 난 고개를 저었다. 크림류의 파스타는 종류에 상관없이 아주 좋아한다. 후작 부인은 포크를 들어 파스타를 맛보았다.

“못 느끼겠는걸. 오히려 아주 맛있다.”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맛있다고?’

의아한 표정으로 파스타를 맛본 가웨인이 미간을 좁혔다.

“확실히 이상한 냄새가 나긴 하지만, 역한 건 모르겠는데.”

란슬롯과 아빠, 그리고 후작도 각각 파스타를 집었다. 평가는 극명하게 나뉘었다. 프렌시프의 사람들은 파스타에서 기분 나쁜 느낌을 받았지만, 후작 부부는 훌륭한 파스타라며 눈만 끔뻑거렸다.

대체 뭘까. 식사를 끝내고 나오며 난 미간을 좁혔다.

“분명히 이상했는데.”

참아내지 않았더라면 구역질이 났을지도 모른다.

‘로제 파스타는 카토 요리사가 만든 거였지.’

요리에 무슨 짓이라도 한 걸까. 하지만 그걸 프렌시프 사람들만 느끼는 건 아무래도 이상한데. 주방에 들어서려는데 문틈 사이로 씨근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루시 저 계집애가 나대는 꼴은 더 못 보겠다.”

“대체 주방장님은 언제 돌아오시는 거야?”

“와 봐야 뭘 하시겠어. 사실은 성실하고 좋은 녀석이라며 우리더러 이해하라고 하겠지.”

“아무리 봐도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거야. 아니면 그런 독한 계집애를 싸고돌 이유가 없잖아. 안 그러냐, 카토?”

“화, 확실히, 뭔가, 이, 있어. 내 보기엔 오, 오래된 관계야. 그 계, 계집애 어렸을 때부터 싸고돌았으니까.”

카토의 말에 폴리는 “정말이요? 어릴 때부터 루시 님을 편애하신 거예요?” 하고 물었다.

“그, 그래. 그년 되바라진 게 하,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고.”

“우와.”

폴리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젓자 카토는 웅얼웅얼 말했다.

“여, 여자는 편하지. 조, 조금 귀엽게 태, 태어나면 살기 편하잖아.”

“그런가요?”

“궈, 권력자에게 알랑거릴 수도 있고.”

더 못 들어 주겠다. 나는 문을 벌컥 열려다가 인기척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루시 님.”

요리사들의 이야기를 들었을까? 걱정 어린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마롱라떼, 먹어 봤냐?”

“……아니요.”

뜬금없는 말이었다. 내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따라와.” 하더니 앞서 걸었다. 나는 허둥지둥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녀가 향한 곳은 성과 이어진 작은 화단이었다. 익숙하게 쪼그려 앉은 그녀가 낡은 컵에 밤 절임을 넣고, 데운 우유를 가득 부었다.

“꽤 맛있을걸? 자신작이거든.”

난 눈치를 보며 마롱라떼를 홀짝 들이켰다.

“아, 고소해요!”

고구마라떼와 비슷한데, 더 고소한 데다가 너무 달지 않아서 술술 넘어간다.

“그렇지? 내가 좋은 밤을 구한답시고 얼마나 산을 헤맸는지 모를 거다.”

그녀는 개구지게 웃으며 밤 절임이 든 통을 흔들었다. 그러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넌 성공하기는 힘든 타입이네.”

“네?”

“불의에는 눈감아. 억울해도 내색하지 말고. 그래야 성공한다.”

“루시 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면서.”

내가 볼멘소리로 말하자 그녀가 무릎에 팔꿈치를 받친 채 턱을 괴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런 사람이었더라면 저를 구해 주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그녀는 불의에 눈감지 않았다. 식당으로 먼저 갔는데도 타이밍 좋게 다시 냉장 창고로 돌아온 건, 카토가 없어진 걸 보고 나를 걱정했기 때문일 거다.

“제가 성에 온 날, 밤늦게 도착한 저를 직접 기다리신 이유도 그렇잖아요.”

“흥.”

“남자 요리사들에게 숙소 안내를 맡기면 혹여라도 제가 위험해질까 봐서요.”

그녀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쳇, 하며 혀를 찼다.

“눈치 빠른 녀석이었잖아.”

나는 그녀의 옆에 슬쩍 앉았다.

“요리사들이 험담하는 걸 알면서 왜 넘어가세요?”

“원래 공공의 적이 있어야 단합되는 법이니까. 주방은 단합이 중요하고.”

루시는 좋은 사람이었다. 악역을 자처하는 건 힘들 텐데도 내색 하나 하지 않는다.

“……카토 요리사의 일을 왜 말씀하지 않으세요?”

“쫓겨나서 다른 주방에 가면 또 다른 여자 요리사가 피해를 입을 테니까.”

그런 적이 있었구나. 내 표정을 본 루시가 이마를 장난스럽게 튕겼다. 루시는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멋졌다. 강단 있고, 성실한 데다 가슴에 품은 열정이 반짝반짝 빛났다. 나는 금세 그녀가 좋아졌다.

“아, 그런데요.”

“뭔데.”

“카토 요리사의 접시에 손을 대셨다고…….”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루시를 싫어하게 된 이유가 그것이었다. 루시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구시렁거렸다.

“맞아, 내가 손을 댔어.”

“헉.”

숨을 크게 들이켠 나는 “왜요!?” 하고 물었다.

“그 녀석 요리는 뭔가 이상하다고. 다른 놈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은데, 기분 나쁜 냄새가 나.”

맞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 파스타도 그랬어요.”

“만든 걸 먹어 보았어?”

그 말에 난 눈을 도르륵 굴리며 변명했다.

“아, 그게, 냄새…… 를 맡았는데 이상했어요.”

“그래, 분명히 이상한데 마님이 그 녀석의 요리를 마음에 들어 하셔서 자주 드셨단 말이야.”

“염려가 되어서 그러셨군요.”

“사실 카토는 실력이 좋은 편은 아니야.”

“하지만 파스타는 잘한다고…….”

“특히 파스타의 성식 배율을 잘한다던데.”

성식이라면 일전에 샤르파크 후작에게 들었다. 근래 급격히 부상한 향신료이자 조미료라고 했다.

“나는 성식을 써 본 적이 없어서 얼마나 잘하는지 가늠이 안 되지만.”

“써 본 적 없으세요?”

“그야 이상하잖아. 주원료가 뭐고, 어떻게, 어디서 만든 건지도 모르는 재료라고.”

그렇다. 아카데미와 프렌시프 성에서 성식을 쓰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나는 흐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성식이란 걸 알아봐야겠어.’

주방 정리가 끝난 깊은 밤. 나는 성식을 확인하기 위해 재료실을 기웃거렸다. 성식은 종류가 많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부분 비슷한 향과, 비슷한 색이다. 이렇게 보기만 해서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문제가 없는 종류라 그런 걸까. 다른 종류도 확인하고 싶은데.

‘뒤뜰 쪽 창고에도 성식을 놔둔댔지.’

그리로 가 보자. 난 성식을 다시 선반 위에 가지런히 두고 뒤뜰로 향했다. 재료 창고로 가려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 너.”

카토였다.

‘올 줄 알았지.’

루시가 말했다. 카토는 미친개라서 한 번 물면 절대로 놔주지 않는다고.

“이, 이, 더러운 년, 나를, 노, 농락하고, 루, 루시 년과 붙어서―”

“경고하는데 거기서 더 다가오지 마세요.”

“네, 네까짓 게 어쩔 건데.”

“강경책을 쓸 거거든요.”

“해, 해 보든가.”

카토는 비열하게 웃으며 기어코 내게 다가왔다. 그가 내 턱을 잡은 채 거친 콧김을 뿜었다.

“머, 머리는 풀어헤쳐서. 누, 누굴 꼬시려고.”

“저는 분명히 경고했어요.”

“왜, 왜, 울기라도 하시게?”

그가 히죽 웃었을 때였다. 쉭―! 재빠르게 거리를 좁힌 사람이 그의 팔을 비틀었다.

“끄윽, 읍―!”

비명이 터지기 직전에 카토는 입이 틀어막혀진 채 커다란 나무 기둥에 쿵! 얼굴이 찍혔다. 인중부터 턱 끝까지 쌍코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크앗!”

달을 가리던 구름이 걷히고 나무 기둥에 짓눌린 채 제압당한 카토와 그를 제압한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러니까 제가 강경책을 쓴다고 했잖아요.’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카토를 제압한 사내는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귀한 내 딸 몸에 손이 닿았으니 내 기분이 얼마나 역겹겠나.”

나는 아주 강경하게! 아빠한테 일렀다. 아빠가 커흑, 신음하는 그의 손등을 툭 쳤다.

“신음이 새어 나오면 하나 더.”

뚝! 손가락이 분질러지는 소리와 함께 “크아악!”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아빠가 표정 없이 새파랗게 질린 카토의 다른 손가락을 쥐었다. 그리고 한 번 더 뚝!

‘으아, 아프겠다.’

“끄아악!”

카토는 비명을 참지 못했고, 아빠는 쯧 혀를 찼다.

“내 말을 귓등으로 듣는 녀석은 오랜만이군.”

“……사, 살려, 크학!”

난 저 사람을 가엽게 생각하지 않는다. 카토는 아빠에 이어 달려온 가웨인과 란슬롯에 의해 곤죽이 되었다. 넝마처럼 널브러진 그를 보고도 감흥이 일지 않았다. 카토는 냉장 창고에서도, 이곳에서도 사람 없는 틈을 타 접근했다. 이유는 명백하다.

내게는 포털도 있고, 도와줄 수 있는 아빠도 있는 데다 그전엔 루시가 달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끔찍한 일을 당했을 거다. 카토는 아빠의 앞에서 벌벌 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 하지 말라고 해 줘. 사, 살려 달라고 해 줘!”

“싫어요.”

“제, 제발.”

“아빠가 아니었더라도 내가 직접 했을 거예요. 그런데 굳이 아빠를 부른 건 그쪽 말버릇 때문이에요.”

“뭐, 뭐?”

“걸핏하면 여자는 살기 쉽다, 권력자에게 알랑거린다고 했잖아요?”

“그, 그건―!”

“살기 쉽게 권력자에게 어리광부리는 게 뭔지 모르는 것 같기에 보여 주는 거예요.”

카토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고, 난 그를 매섭게 흘겼다.

“실제로는 이래. 정말로 겪어 본 적이 없어서 몰랐지?”

“…….”

“그러니까 이제 망상 속에서 살지 마.”

아빠가 카토의 손을 얼마나 아작내 놨는지, 그를 살핀 가웨인이 다시 날붙이를 드는 건 힘들 거라고 했다. 다행이었다. 다른 주방에서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지 않을 테니까.

다음 날 새벽, 카토는 쫓겨났다. 간밤의 사건을 들은 후작 부인은 전후 사정을 모두 살피더니 퇴직금 한 푼 없이 그를 쫓아냈다. 샤르파크 후작은 그를 쫓아낸 후에도 분개했다.

“빌어먹을, 사용인 하나 잘못 들여서 내가 죽을 뻔했잖아.”

이를 득득 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카토가 제대로 사는 건 힘들 것 같았다.

나는 부족한 잠 때문에 퉁퉁 부은 눈을 억지로 비비며 재료 창고를 뒤졌다.

“카토가 쓰던 성식이…… 으음.”

“이거야.”

흰 손이 불쑥 튀어나와서 나는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루시는 그런 날 보더니 킥킥거렸다.

“기름에 넣은 새우 같네.”

“새우요?”

“펄쩍 뛰면서 오그라지는 게.”

그녀는 내게 새빨간 가루가 잔뜩 든 잼 병을 쥐여 주었다.

“이걸 썼어.”

“아……. 다른 성식과 다르긴 하네요.”

색깔부터 다르다. 다른 성식이 연한 분홍색이라면 이건 짙은 선홍빛이었다. 나는 잼 병의 뚜껑을 열었다.

“윽!”

이 냄새다! 시체가 부패한 것 같은 역한 냄새. 루시도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더는 참기 힘들어서 얼른 뚜껑을 닫았다.

“다른 성식도 살폈는데 이런 냄새는 안 났어요. 왜 이것만 이렇게 독한 냄새가 나는 걸까요?”

“종류가 다른 거 아니야?”

“그런가…….”

색은 비슷하긴 한데.

나는 흐음, 하며 잼 병을 흔들었다.

“돌아가기 전에 정체를 알아내야 하는데.”

“가지고 가도 돼.”

“된다고요?!”

내가 눈을 크게 뜨며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토가 직접 구해 온 거라 샤르파크의 재산이 아니거든. 쫓겨났으니 어차피 버려야 할 텐데 뭐.”

대외적으로 카토는 식자재를 비롯한 샤르파크의 재산을 빼돌린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걸 알아챈 후작 부인이 손을 부러뜨려 쫓아낸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그녀는 상쾌하게 웃었다.

“아, 다시는 요리를 못 하다니 얼마나 다행이냐.”

“그러게요. 하지만 카토가 없다고 해도 주방 분위기가 말이 아니라 힘드실 텐데요.”

카토를 폭행한 일로 요리사들의 불만이 터져 버렸으니까.

“단합해서 쫓아내려고 들면 어쩌나요?”

그녀는 산뜻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걱정하지 마. 난 내 요리에도 자신 있으니까. 절대로 쉽게 안 물러나지.”

그녀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정 내가 꼴 보기 싫으면 맞짱이라도 떠야 할 거다.”

“그게 제일 자신 있으신 것 같은데요.”

“들켰네.”

난 킥킥 웃으며 그녀와 함께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화합이 잘됐던 만큼 카토가 쫓겨난 것이 내심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무거운 분위기가 풀릴 줄 모르자, 보다 못한 루시는 타개책을 냈다.

“마님 생신 파티에 낼 요리를 공모한다.”

“마님 생신은 내년인데 뭘 벌써…….”

요리사들이 구시렁거리자 루시가 주방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요리가 선발된 놈은 집사님께 말해 급료를 인상시켜 주지. 십 퍼센트.”

요리사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그게 가능합니까?”

“안 되면 내 급료에서라도 떼 줄 테니까 칭얼거리지 말고 식칼이나 들어.”

“우와아―!”

주방은 어느새 활기를 띠었다.

‘음, 루시는 좋은 관리자야.’

샤르파크의 주방장이라는 사람이 왜 그녀를 유난히 아끼는지 알 것 같았다. 루시가 나와 보조 요리사들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보조들도 참가해. 선배 요리사에게 가장 많이 도움이 된 사람은―”

그녀가 조리대 서랍에서 작은 노트를 꺼냈다.

“준다, 이거.”

루시의 레시피북이었다!

“그리고 보너스까지.”

보조들은 환호성을 내질렀고 나는 깡충깡충 뛰었다. 실력 있는 요리사의 레시피북이라니!

‘가지고 싶어!’

주방은 정신이 없었다. 일이 끝난 밤늦게까지 레시피를 연구했는데, 보조들도 요리사들에게 도움이 되려고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나는 선배 요리사에게 토치를 가져다주다가 멈칫하고, 재료를 살폈다.

“아.”

내가 재료를 빤히 보고 있자 곤약을 썰던 요리사가 물었다.

“왜?”

“저…… 곤약과 고기를 함께 쓰시려고요?”

“그래.”

“둘을 함께 넣으면 고기가 질겨질 텐데요…….”

선배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실례일까 봐 나는 우물쭈물하며 웅얼댔다.

“질겨진다고?”

“곤약의 칼슘은 고기를 질기게 하거든요. 채끝살은 부드러운 게 가장 큰 장점인데 그걸 죽이는 건…….”

그러자 요리사들이 나를 주목했다.

“아카데미에선 그런 걸 가르쳐주나?”

그러고 보니 샤르파크의 요리사들은 대부분 아카데미를 나오지 않았다. 주인인 후작이 엄청난 짠돌이였기 때문이었다. 아카데미를 나온 요리사들은 기본 급료가 높은 편이라서 고용을 꺼린 것이었다.

‘칼슘 같은 걸 배우진 않지만.’

어쨌든 곤약과 고기는 함께 쓰지 말라고 배우긴 하지.

“네.”

“칼슘이라…… 그런 게 있군.”

다른 요리사가 나를 부르며 물었다.

“그럼 내 것은? 내 건 같이 써도 되나?”

나는 그의 재료를 살폈다.

“균형이 좋은 편이에요.”

탄수화물과 단백질, 지방을 적절하게 사용해서 한 그릇으로 영양을 모두 섭취할 수 있겠다. 경력이 긴 요리사들은 보조에게 배운다며 혀를 찼다.

“그런 건 너희들이 알아서 공부해야 할 것 아냐.”

“하지만 선배님―”

“됐고, 센은 이쪽으로 보내라. 폴리는 영 손이 느려.”

“아! 저도 센이 필요합니다!”

“비겁해. 보조 중에서 제일 쓸 만한데 독점하려고?”

나는 바빠서 눈이 팽팽 도는 것 같았다. 일이 마무리되고 나니 열 시가 넘었다. 나는 주방 정리를 하고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배고프다.”

조리대 앞에서 축 늘어진 난 끙끙 신음했다.

‘야식이라도 만들어 먹을까.’

오늘은 요리사들이 레시피를 만드느라 재료가 잔뜩 남았다. 남은 건 보조들도 써도 된다고 했다. 나는 식칼과 도마를 꺼낸 뒤에 다시 재료를 살폈다.

“고기만 쓰시더니 내장이 많이 남았네.”

내장 손질은 쟝뤼크에게 질릴 때까지 배웠다. 나는 곱창을 꺼내어 껍질과 불순물을 제거했다.

‘나만 먹을 거니까 많이 할 필요는 없지.’

빠르게 손질을 끝낸 후에 소주 대신 보드카에 담가서 잡내를 제거했다.

‘양념 곱창을 할 거니까 커피도 넣어서 잡내를 빠르게 빼야겠어.’

그리고 양념 준비. 고춧가루와 마늘, 간장 등을 섞어 손질한 곱창에 버무린 뒤에 팬에 볶았다. 치이익―! 언제 들어도 좋은 소리였다. 양념의 톡 쏘는 매콤한 향과 곱창의 녹진한 기름 냄새가 주방을 가득 메웠다.

나는 잘 익은 곱창을 그릇에 옮기고, 다 쓴 조리 도구를 정리했다. 먹을 생각에 신이 났다. 설거지를 마친 후 조리대 앞에 앉으려는데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가웨인이 삐딱한 자세로 나를 쳐다보았다.

* * *

가웨인은 포크를 든 채 자신을 보는 세니아나를 보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인데 아직 숙소에 없다기에 뭘 하나 싶었는데, 요리 삼매경이었다.

‘요리 같은 건 때려치우지.’

로열 키친에 들어가야 아탈란를 제압할 무언가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건 알지만, 가웨인의 생각은 달랐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

‘내가 지킬 텐데.’

손이 데고, 다리가 퉁퉁 부어서까지 요리 같은 것에 집중하는 까닭을 모르겠다.

“어제도 못 잤는데 오늘도 밤샐 생각이야?”

시계를 확인한 세니아나는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자정이네요.”

“들어가서 쉬어.”

“맛만 보고요.”

가웨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가라니까.”

“애써 한 건데요?”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계속 먹고 싶었단 말이에요.” 하고 말했다.

“오빠도 맛보실래요?”

“됐어.”

“하지만 곱창볶음은 처음 드실 텐데. 매운 걸 좋아하시니까 마음에 드실지도―”

“다른 녀석에게 시켜도 되잖아.”

가웨인의 말에 세니아나는 눈을 깜빡였다.

“네?”

“요리는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는데 뭣 하러 네가 직접 하냐고.”

세니아나는 울상을 지으며 웅얼거렸다.

“개나 소나 아닌데…….”

“자르고 굽는 게 뭐가 어렵다고. 너 아니라도 요리사는 잔뜩 있다고. 귀찮은 일은 직접 하지 말고 시켜.”

주방에서 뽈뽈대다가 다치는 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저 녀석은 아프고 힘들어도 내색하는 법을 모른다. 다리가 퉁퉁 부어서도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힘들다는 말 한마디가 없었다.

“그리고 이따위 일은 그만 때려―”

“씨!”

세니아나가 울컥 화를 내며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제게 이렇게 씩씩대는 세니아나를 보는 건 손에 꼽는다.

“……씨?”

“왜 그렇게 못된 말만 하는 거예요!”

“나는 네가 걱정되어서―”

“그럼 좋게 말씀하시면 되잖아요. 맨날 화만 내시고…… 무섭게…….”

속으로 꽤 안절부절못했던 모양인지 세니아나는 잔뜩 토라져서 홱 고개를 돌렸다.

“개나 소나 아닌데.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 위해서 다들 얼마나 노력하는데…….”

세니아나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던 찰나, 다시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야?”

동생들을 찾으러 온 란슬롯이 미묘한 분위기를 느끼고 가웨인을 쳐다보았다. 가웨인은 큼, 헛기침을 했고, 세니아나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란슬롯이 세니아나에게 다가가서 허리를 굽혔다. 그녀와 시선을 맞춘 채로 “응? 무슨 일이지.” 하고 다정히 물었다.

“……작은오빠가 나빴어요.”

란슬롯은 당황해 있는 가웨인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게 아니라고 몇 번을―!”

그가 소리치자 흠칫 놀란 세니아나가 란슬롯의 품으로 쏙 숨었다. 란슬롯은 은근히 오만한 표정으로 눈썹을 슥 들어 올렸다.

“가웨인이 뭔가 크게 잘못한 모양이네.”

“…….”

란슬롯은 또 가웨인에게 호통을 들을까 봐 손을 꼼지락거리는 세니아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세니아나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가 가까이 다가온 가웨인과 눈이 마주치고 깜짝 놀라 란슬롯의 허리춤을 잡았다.

“나는 그저 널 걱정해서―”

“갈까?”

가웨인의 말을 뚝 끊어 먹은 란슬롯이 세니아나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열하긴―!’

독사 같은 형님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냉큼 세니아나를 귀여워할 기회를 차지했다.

“잠깐,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달콤한 우유라도 먹으면 우리 막내 기분이 나아질까.”

란슬롯은 가웨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세니아나의 손을 잡은 채 주방을 나서 버렸다. 가웨인이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미치겠네.’

그는 쯧, 혀를 차며 란슬롯과 세니아나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대체 이깟 게 뭐라고 사서 고생을 하는 거야.”

가웨인은 세니아나가 만들어 놓은 곱창볶음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대체 뭐길래 이걸 자정이 다 되도록 만드는 거냐고.’

그는 세니아나가 내려놓은 포크를 잡고 곱창볶음을 맛보았다. 입에 넣자마자 알싸한 매운맛이 혀를 때렸다. 씹을 때마다 흘러나오는 고소한 곱과 매콤짭짤한 양념. 곱창 특유의 향은 구리구리하지만 왜인지 중독성이 있었다.

질겅거리는 듯도 하고 쫀득한 듯도 한 식감이 재미있다.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데 느끼할 법한 끝 맛을 매운 양념이 꽉 잡아줘서 자꾸만 손이 가게 만들었다.

‘이건 깻잎이라고 했던가.’

길게 자른 깻잎의 산뜻한 향과 곱은 몹시 잘 어울렸다. 아삭한 양파와의 조화도, 익힌 마늘 특유의 부드러운 블루스도 멋졌다. 가웨인은 습, 입으로 숨을 들이켰다.

‘이건 소주다.’

언젠가 남부에서 맛보았던 그 술이야말로 환상의 짝꿍일 게 틀림없다. 매워서 관자놀이가 얼얼한데도 도무지 포크를 놓을 수가 없었다. 정신 차려 보니 어느덧 접시 안이 텅텅 비었다.

“빌어먹을.”

고생하는 게 보기 싫어서 요리는 그만두라고 하고 싶은데, 만드는 것마다 이 세상의 것인가 아리송할 정도로 맛있었다. 치킨도 그렇고, 이것도 그렇고.

그 후로 이틀. 곱창볶음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성에 돌아가서 똑같이 만들어 보라고 할까 싶은데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모르니 그마저 어려웠다. 복도를 걷던 가웨인은 창밖에서 삐죽 솟은 청녹색 머리를 발견했다. 세니아나였다. 그는 주변을 살피고 동생에게 다가갔다.

“크흠.”

“……?”

“뭐 하냐.”

“쑥 캐는데요.”

자세히 보니 삽 같은 것을 들고 있다.

“사면 되지.”

“샤르파크 후작은 짠돌이예요. 이런 것도 사려면 일일이 확인받아야 한 대요.”

한숨을 폭 내쉰 세니아나는 “무슨 일 있으세요?” 하고 물었다. 가웨인은 딴청을 부리듯 말했다.

“그 새빨간 음식을 한 번 더 만들어라.”

곱창볶음을 말하는 걸까? 세니아나는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부탁을 하실 거라면 정중하게 ‘곱창을 만들어 주세요’라고 하셔야죠.”

으득, 이 갈리는 소리가 살벌했다.

‘화났나?’

세니아나가 움찔, 눈치를 보았다. 가웨인은 짓씹듯 말했다.

“……요.”

“네?”

“곱창볶음 주세요.”

세니아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가웨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요.”

“……언제 해 줄 건데?”

“생각해 보고?”

그녀가 쑥이 잔뜩 든 바구니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가웨인이 미간을 좁혔다.

“성에 돌아오면 해 줘.”

“실습이 끝나면 바로 황도에 돌아갈 텐데……. 그리고.”

“그리고?”

그녀가 새초롬히 가웨인을 흘겼다.

“미워서 나―중에 해 주고 싶어요.”

그러곤 “흥.” 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바구니를 끌어안고 총총 사라지는 세니아나를 보며 가웨인은 당황 어린 표정을 지었다.

* * *

나는 멍하니 쑥을 곱게 간 가루를 쌀가루 안에 넣었다.

성식. 로열 키친. 가족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그런 날 본 루시가 허리를 툭, 치고 지나갔다.

“어디다 정신을 판 거야?”

주방엔 단둘뿐이라 루시의 말투가 사람들 앞에서보다 다정했다. 난 한숨을 내쉬고 루시를 쳐다보았다.

“루시 님은 언제부터 요리를 하셨어요?”

“열둘. 식당에서 잡일꾼으로 일하다가 요리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

“……후회한 적은 없으세요?”

“왜 없어. 매일같이 했지.”

그녀는 뭉근하게 끓고 있는 크림소스를 확인하며 이어 말했다.

“계집애라서 보조 자리조차 구하기 힘들 때. 겨우 얻은 보조 일에 끝이 보이지 않을 때. 그래서 스스로 실망스러울 때. 또…….”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후회되었던 때를 회상하던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재능의 한계를 경험했을 때.”

“한계요?”

루시는 훌륭한 요리사였다. 물론 프렌시프 성의 총요리장 아곤이나, 불세출의 천재라는 쟝뤼크보단 아니었어도. 그녀는 그들에 비해 한참 젊었다. 아직 가능성이 충분히 남은 것이다.

‘그런 루시 님이 한계를 경험했다고…….’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자 루시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 사실 로열 키친의 권외 시험을 본 적이 있어.”

아카데미를 거치지 않은 요리사들, 혹은 아카데미에서 로열 키친 응시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보는 시험이었다.

“그전만 해도 내가 천재라고 생각했었거든. 하지만 권외 시험을 보면서 느꼈지. 나는 평범할 뿐이었다는 걸.”

“…….”

“1차에서 낙방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그녀가 킬킬거리며 읊조렸다.

“내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래서 아카데미에 갈 수 있었더라면, 좋은 스승을 만났더라면.”

“…….”

“이뤄지지 않을 가정을 하면서 출생을 원망했지만, 사실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어.”

“무엇을요?”

“이 문제의 결론은 내 재능의 부족이다, 하는 것.”

루시는 불을 줄이며 소스 냄비의 뚜껑을 닫았다. 그러곤 나를 빤히 응시했다.

“각오가 모자랐다는 것도.”

“각오…….”

“평범할 뿐인 내가 노력하는 천재들 사이에서 각오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이길 수 있을 리가.”

“…….”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주방의 일이 끝난 뒤 뒤뜰로 나왔다. 나는 화단 앞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잠이 안 온다…….”

혼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시름이 실렸다.

“누가 내 딸에게 잠을 빼앗았나.”

다정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홉떴다.

‘아빠다.’

난 민망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주무시지 않고 왜…….”

“네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난 히히 웃으며 “거짓말.” 하고 말했다. 아빠는 부드럽게 미소짓고 내 곁에 앉았다.

“부모는 모두 마법사거든.”

“선생― 엄마도 그러셨어요.”

“고민을 나누어 주면 기쁠 텐데.”

아빠의 단단한 어깨에 기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그냥…….”

시무룩한 표정으로 웅얼거렸지만, 아빠는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루시는 내가 만난 최초의 ‘평범한 여성 요리사’였다. 나보다 앞서 내가 겪어야 할 일을 겪었다.

그녀는 말했다. 로열 키친은 천재들의 세계라고. 그럴 것이다. 아카데미의 교수들은 훌륭한 요리사였지만, 쟝뤼크를 제외하면 로열 키친의 문턱조차 밟아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천재인가? 아니. 아소(조슈아, 사비에르의 장자)처럼 섬세한 손기술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스위트피처럼 뛰어난 미각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런 내게 지금 가장 부족한 것은 각오였다.

다른 훌륭한 요리사들도 요리 하나만을 보고 산다. 아니, 요리 하나만을 보고 살기에 훌륭한 요리사가 될 수 있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제겐 각오가 모자라요…….”

“흠.”

“제가 요리를 하려는 건 아탈란의 계략을 저지하고, 우리 가족이 안전하기를 바라서인데…… 고작 그런 것들로 천재들의 세계에서 버틸 수 있을까요?”

“…….”

가웨인이 내게 요리를 하지 말라고 했을 때, 선뜻 ‘싫어요, 할 거예요.’ 하고 말하지 못했다.

“다른 요리사들에 비해 저는 너무 초라한 꿈을 꾸는 것 같아서 부끄러워요. 아빠가 제게 실망하실까 봐 두렵고…….”

아빠는 고개를 모로 꼰 채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다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왜, 왜 웃으세요?”

“자식의 진로 상담은 이런 기분이었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로 상담이요?”

“그런 게 아닌가.”

그, 그렇기야 하지.

졸업 시즌이 되면 많이들 고민한다. 나는 얼굴이 붉어져서 아빠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우와, 나 부모님한테 진로 상담하는 거구나.’

아빠는 헝클어진 머리를 내 귀에 꽂아 주며 미소지었다.

“네 앞에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가 있을 테고, 그때마다 너는 고민하겠지.”

“…….”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선택해라. 선택이 옳았는지 잘못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

“고민과 후회 속에서 분명 배우는 점이 있을 테니까. 사람은 그렇게 평생을 자라는 것이다.”

“아빠…….”

“고민은 성장의 증거고, 난 내 딸이 어제보다 한 뼘 더 자란 것이 자랑스럽구나.”

아빠는 울상을 짓는 나를 끌어안고 다정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나를 좋은 부모가 되고 싶게 만들어.”

가슴이 간질간질하고 코끝이 찌릿했다. 난 아빠의 품에 얼굴을 문대며 훌쩍훌쩍 울었다. 아빠는 다정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 오늘의 내 꿈인데, 초라한 거냐.”

“아니요!”

아빠가 내게서 몸을 조금 떼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 가족의 안전이 요리사에게 초라한 꿈이라고 말하는 놈들이 있다면 네가 비웃어 줘라.”

그가 “초라한 마음을 가진 놈들, 하고.”라 말하며 눈을 초승달처럼 둥글게 휘었다.

무엇을 고민했던 걸까. 내 꿈은 전혀 초라하지 않고, 아빠가 나를 실망스럽게 여길 일은 없었다. 나는 오늘 아빠의 품에서 한 뼘 더 자랐다.

다음 날, 나는 힘차게 복도를 걸었다. 고민이 사라지니 날아갈 듯 몸이 가벼워졌다. 복도 끝에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나를 본 가웨인이 주변을 살피며 다가왔다.

“아직 삐쳤어?”

그의 말에 난 고개를 바짝 치켜들며 말했다.

“아니요.”

나 이제 당당하니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걸.

“저는 요리를 할 거예요.”

“기어코 해야겠단 말이지.”

“오빠도 제 요리 좋아하시면서.”

그는 투덜거리듯 “그야 그렇지만…….” 하고 말했고, 난 헤헤 웃었다.

“저는 오빠를 지키고 싶으니까 할 거예요.”

“땅딸막한 게 어떻게 나를 지키려고.”

“그리고 저 요리하는 거 즐겁다고요.”

확신을 가득 담아 말하자 가웨인은 “쳇.” 혀를 찼다.

“평생 즐겁지 않을걸? 그렇게 고생하는 일을 직업으로 택하는 건.”

“그래도 상관없어요. 그때 가서 고민하면 되니까.”

당당하게 말하며 지나치는 나를 보고 가웨인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뭘 잘못 먹었나. 오늘은 왜 이렇게 당차.”

“제겐 좋은 부모가 있어서 그렇지요!”

“웃기고 있네. 이 땅콩 같은 게.”

가웨인은 장난스레 웃으며 내 볼을 꾹꾹 눌렀다.

오늘은 실습의 마지막 날이었다. 루시는 조리대에 놓인 접시를 돌아보다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먹을 만한 요리는 있네. 파스칼, 네놈 요리가 제일 낫다.”

그녀의 말에 파스칼 요리사가 펄쩍펄쩍 뛰었다.

“보너스? 보너스 나오는 겁니까?!”

―하고 외치자 루시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레시피 수첩 끝으로 조리대를 툭, 툭 두드리다가 나를 보았다.

“자.”

“저, 저요?”

“그래.”

가장 도움이 된 보조에게 주겠다고 한 레시피 수첩! 나는 뛸 듯이 기뻐하며 그녀가 준 수첩을 끌어안았다.

“센이 잘해 줬지.”

“그래.”

“센, 졸업하면 이쪽으로 와라.”

요리사들은 이견이 없었고, 폴리는 조금 서운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나를 칭찬해 주었다. 그리고 오후가 되어 떠나는데, 요리사들과 후작 내외가 나를 환송해 줬다. 마차 안에서 아빠에게 통신석을 연결하자, 그는 해결할 일이 있다며 내일쯤 출발할 거라고 했다.

[몸조심해서 다녀와라.]

“졸업식 끝나고 황도에서 뵈어요.”

[……뭐.]

어쩐지 의뭉스러운 말투였지만, 나는 바빠서 그러겠거니 생각하며 통신석을 종료했다. 아카데미에 도착하자 쟝뤼크가 나를 데리러 왔다.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일이 있어서요.”

“다른 스승을 만난 게 아니냐?”

마치 바람난 제자 단속하듯 말해서 난 고개를 갸웃했다.

“스승…… 아, 좋은 스승님이 있었지요.”

루시가! 내 말에 쟝뤼크가 왈칵 성을 냈다.

“흥! 그래 봤자 풋내기겠지. 나보다 더 좋은 스승이 어디 있다고.”

“좋은 분이셨는데. 이것저것 가르쳐 주시고, 그분 덕에 진로 고민도 했는걸요.”

그러자 그는 어쩐지 충격받은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지, 진로 고민이 있었다고……. 요리를 하고 싶지 않은 게냐? 응?”

“그런 게 아니라…… 아무튼 다 해결되었어요.”

“왜 그 작자에게만 상담한 건데!”

“상담은 아니었고…… 아무튼 짐을 풀어야 해서 이만.”

“잠깐, 센! 센! 이봐!”

쟝뤼크의 고함이 들렸지만, 난 얼른 고개를 숙이고 기숙사로 향했다. 알렉시아가 도와줘서 수월하게 짐을 풀 수 있었다. 이제 졸업이 2주도 안 남았다. 황도로 가면 도미니크를 보기 힘들 테니까 그 전에 잔뜩 봐 둬야지.

‘오늘은 주말이니까 숙소에 있겠다.’

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포털을 열었다. 도미니크의 숙소 앞에 도착해서 똑똑 문을 두드렸다.

‘응?’

평소 같으면 알베르가 얼른 나오는데 조용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없나.”

돌아갈까, 하는데 문이 꽉 닫히지 않았던 모양인지 스르륵 열렸다. 도미니크와 알베르는 모두 세심한 성격이라 문단속을 철저하게 한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그는 황자고, 현재는 황위 싸움으로 진흙탕인 시기였다. 덜컥 걱정이 들어서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계세요?”

―라고 부르던 찰나, 끼익―! 도미니크의 침실 쪽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난 멀린의 마원을 잡은 채 얼른 그의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보인 건 잠든 것처럼 누워 있는 그와 그의 입술을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는 짙은 갈색 머리의 여자. 두 사람의 입술이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아서 난 얼른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여자는 왈칵 인상을 쓰며 날 노려보았다.

“뭐야, 넌.”

그건 내가 할 말인데.

“그러는 그쪽…….”

신분을 물으려던 찰나, 쾅! 문이 열리더니 알베르가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함께 등장했다.

“어서 저하를― 영애?”

그러자 여자는 저를 부른 줄 알았는지 내 손을 홱! 쳐내고 알베르를 돌아보았다.

“이 계집애는 누군데 저하의 침실에 드나드는 거지?”

“그분은…… 아니, 르마르 영애야말로 왜 침실에 들어오신 겁니까. 응접실에서 기다리시라 말씀드렸는데요.”

르마르 영애라면 도미니크에게 청혼을 거절당했다는 르마르 공작의 딸이잖아. 르마르 영애는 쯧, 혀를 차며 말했다.

“저하께서 이리 몸이 좋지 않으신데 내가 어떻게 얌전히 기다리겠어?”

“침실에 들어오신 것을 저하께서 아시면…….”

몸이 좋지 않다고?

나는 얼른 도미니크를 살피려다가 그와 손이 스쳤다. 순간 찌릿, 정전기 같은 것이 일더니 그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저하?”

내 말에 알베르와 설전을 벌이던 르마르 영애가 나를 거칠게 떠밀고 그에게 다가갔다.

“저하, 괜찮으세요? 저예요, 카트린이랍니다.”

도미니크가 스르륵 눈을 떴다. 눈꺼풀에 감춰져 있던 청회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저하, 저하!”

카트린이 울먹이며 그를 끌어안으려 할 때였다.

“세니아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그가 내 손목을 쥐었다. 르마르 영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의사가 도미니크를 진료하는 동안 나와 르마르 영애, 그리고 알베르는 응접실로 향했다. 르마르 영애는 나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며 알베르에게 물었다.

“대체 이 계집은 뭐야.”

알베르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영애, 부디 언사를…….”

그녀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내가 저하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모양이야. 그러니 취향에도 맞지 않은 계집애를 데리고 노신 게지.”

“데리고 놀았다고요?”

“아니면 정말로 그분께서 마음에 너를 두셨을 리 있겠니?”

“제가 알기로 영애는 저하께 청혼을 거절당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카트린 르마르의 눈이 희번덕 빛났다.

“황가와 공작가의 사정 때문이었을 뿐이야!”

그녀가 버럭 소리쳤을 때였다. 응접실의 문이 열리더니 가운을 걸친 도미니크가 들어왔다. 카트린은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저하, 몸은 괜찮―”

“소리치지 마.”

“……네?”

“이 사람에게 소리치지 말라고 명했다, 내가.”

도미니크가 내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말하자 카트린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이런 모습의 도미니크는 처음 본다. 황자임에도 귀족 여성들에겐 공대를 빼먹지 않는 남자였다. 다소 날카로운 분위기이긴 했지만, 아이와 여자에겐 조심스러웠던 사람이 어째서…….

카트린이 눈물을 터뜨렸다.

“너무하세요! 어떻게 저하께서 제게……!”

도미니크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않고 나를 일으켰다.

“제 침실로 가 계십시오. 금방 돌아가겠습니다.”

“하지만…….”

“보고 싶었습니다.”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이어서 찢어질 듯한 카트린의 고함이 들려왔다.

“이제 그만 하세요! 모두 잘 풀렸잖아요!”

그녀는 도미니크에게 달려와 팔을 끌어안았다.

“황제 폐하께서도 우리의 결혼을 찬성하셨잖아요.”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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