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셰프 영애님 5권
13장
나는 피곤한 표정의 도미니크와 그에게 매달린 카트린 르마르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니까 이건 도미니크가 결혼을 한다는 소리였다.
‘르마르 영애와.’
* * *
며칠 전, 황궁. 일신상의 이유로 동부에 내려간 프렌시프 후작 대신 나베리우스 프렌시프가 다시 황도의 집권을 맡았다. 그가 프렌시프 황도 저택의 지휘봉을 잡은 건 십여 년 만의 일이었으나, 황도는 전에 없는 긴장에 휩싸였다.
“어르신이 무슨 일로 황도에 올라오셨을까요.”
“부자(父子) 다툼이 파국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있더이다.”
“그것보다는 새로운 금좌 선발에 어르신께서 직접 개입하시는 게 아닙니까.”
“모르긴 몰라도 한바탕 피바람이 불겠지요.”
나베리우스의 그림자 뒤로 호사가들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황궁 복도를 성큼성큼 걷는 그에게 금좌들이 다가왔다. 금좌 11석의 수장, 카렌듈라 후작이 싱긋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나베리우스, 자네는 볼 때마다 젊어지는군.”
“그쪽은 볼 때마다 쪼그라들고 말이지.”
“이 사람, 여전히 말투가 호탕해.”
“잡소리 집어치우고 르마르를 내놓게.”
나베리우스의 눈에 시퍼런 안광이 일렁였다. 그러자 카렌듈라 후작이 희게 센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내가 르마르 공작을 숨겨 주기라도 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무슨 수로 다 큰 사람을 숨기겠나.”
“내게는 자네 개수작이 안 통한다는 사실을 다시 짚어 줘야겠는가. 20년 전처럼.”
나베리우스의 말에 카렌듈라 후작과 함께 있던 귀족들이 난색을 표했다. 20년 전, 카렌듈라와 프렌시프는 동부와 서부의 경계에 있는 고원으로 인해 마찰을 빚었다. 수력석이 내장된 고원을 두고 두 가문은 칼부림을 마다치 않았다. 결과는 카렌듈라의 패배. 카렌듈라 후작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은 사건이었다.
후작이 어깨를 으쓱하며 낮게 웃었다.
“글쎄, 다시 맞붙으면 누가 이길지 나도 궁금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제국의 기둥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진 않으실 텐데.”
“무너지는 기둥이 황후의 외척이기 때문이겠지.”
“설마.”
금좌들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빌어먹을,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게 생겼군.’
동년배, 그것도 같은 후작이었던 두 사람은 철천지원수였다. 나베리우스가 서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일주일 주지. 그 안에 르마르를 내놓아야 할 걸세.”
나베리우스가 떠나자 카렌듈라 후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르마르 공작은 무얼 하고 있느냐.”
“살 방법을 모색 중이겠지요. 아발론(황제의 궁)을 찾아 살려 달라 애걸했답니다.”
“쓸모없는 작자 같으니. 살고 싶으면 나다니지 말라고 전해라. 나베리우스, 저 늙은이가 바짝 독이 올랐으니.”
“그리 멍청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겁에 질린 생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법이었다. 르마르 공작이 그러했다.
얼마 전, 아발론. 황제는 애걸하듯 말하는 르마르 공작을 보며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그래서.”
“나, 나베리우스 프렌시프의 교만이 도를 넘었습니다. 감히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의 권위에 도전하니, 이 이반 르마르! 폐하를 도와―”
“요점.”
“……프렌시프 부자를 말려 주십시오.”
“살려 달라는 말을 뭐 그리 길게 하나.”
황제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짐을 난처하게 하는가.”
“저는 그저 폐하께 선물을…….”
“성녀의 관리를 바란 적 없네. 공이 언제부터 그리 짐을 생각했다고.”
쯧쯧, 혀를 찬 그는 납작 엎드려 벌벌 떠는 르마르 공작을 쳐다보았다.
“폐, 폐하, 저희는 이제 사돈이 될―”
“도미니크를 방패막이로 쓸 생각 마라.”
황제는 르마르 공작이 괘씸했다. 저놈은 도미니크가 황자로 인정받지 못했을 적엔 딸이 죽고 못 산 대도 ‘절대 불가’를 외치던 놈팡이였다. 그런데 목이 달아나게 생겼으니 이제 와 사위로 달라며 징징이다. 도미니크는 황제가 유난히 아끼는 자식이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근처에 있는 자들이 황제의 심중을 모를 리 없다.
‘도미니크 황자를 사위로 들이면 황제도 모른 척하기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황자 저하의 연치를 생각하십시오. 장성하셨으니 가정을 두셔야지요.”
황제는 별생각이 없다는 듯 눈을 감았다.
“폐하께서도 손주를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손주? 그의 머릿속에 저를 닮은 손녀딸이 스쳐 지나갔다.
[하바맘마, 하바맘마, 아나 주떼요!(할바마마, 할바마마, 안아 주세요!)]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며 어리광 피우는 손녀…….
황태자와 4황자(미카엘)의 아이는 달갑지 않다. 자식만 낳으면 황위를 달라 칭얼댈 터이니. 황제는 “흠…….” 침음하며 실눈을 떴다. 르마르라면 도미니크와 수지가 맞는 가문이었다. 격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황위 싸움의 판도를 단숨에 바꿔 버릴 만큼 권력가도 아니니.
“도미니크가 원한다면 굳이 결혼을 반대할 생각은 없다.”
공작의 얼굴이 단숨에 환해졌다.
“자리만 마련해 주십시오.”
“……도미니크는 아카데미에 있을 것인데.”
“곧 저하의 생신이 아닙니까. 딸을 보내 축하하도록 하겠습니다.”
―라는 일이 닷새 전. 카트린 르마르가 그러한 이유로 아카데미에 들이닥쳤다. 도미니크는 피곤한 표정으로 매달린 손을 떼어 냈다.
‘빌어먹을.’
카트린의 손엔 황제의 친서가 들려 있었다.
[……다 늙은 짐이 이제 와 무엇을 바라겠느냐. 다만, 손녀 재롱이나 보며 여생을 보내길 바랄 뿐이다.]
콕 집어 손녀를 언급하는 까닭을 모르지 않는다. 도미니크는 [하면 종마로 쓸 아들을 하나 더 낳으시지요.] 하고 답장을 보냈다. 그랬더니 잔뜩 골이 났다.
‘노인네, 갈수록 유치해지는군.’
도미니크는 떼어 낼수록 더 달라붙는 카트린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 * *
카트린은 받아 주지 않는 도미니크 때문에 결국 눈물을 터뜨리며 숙소를 떠났다. 난 소파에 가만히 앉아 도미니크를 지그시 응시했다.
“영애.”
“저하는…….”
“예?”
음, 그러니까 이렇게 여자들을 몰고 다니는 남자를 뭐라고 부르더라.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아.” 하고 말했다.
“난봉꾼.”
“……!”
얼굴이 굳어진 그가 “아닙니다!” 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에이레네 사비에르 때도 그랬고, 지금도…….”
“모두 제 의사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대답이 없자 도미니크는 굳은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눈치를 보듯 말을 고른 그가 “영애…….” 하며 애처롭게 날 불렀다.
“이런 상황에서 애교는 비겁해요.”
“애교…… 먹히겠습니까?”
“먹히면요?”
“부려 보죠.”
그가 결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순간 풉! 하는 실소가 들려왔다. 알베르가 손등으로 입을 막은 채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었다. 도미니크에게 발등을 밟힌 알베르는 펄쩍 뛰어올랐고, 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도미니크가 얼른 나를 쫓아왔다.
“어디 가십니까?”
“침실이요. 저하가 쉬셔야 할 것 같으니까.”
나는 침실로 가서 문을 열어 주었다.
“일단은 쉬세요.”
“괜찮습니다.”
나는 왈칵 인상을 찌푸리고 “떽!” 소리쳤다. 도미니크의 눈이 동그래졌다.
“혼절하셨다면서요.”
“…….”
도미니크는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 나는 간이 의자를 끌어와 침대 맡에 자리 잡았다.
“어디가 아파서 혼절하신 거예요?”
“해마다 앓는 몸살입니다.”
“몸이 약하셨군요.”
“마력 때문이죠. 이 시기엔 감당하기 힘들거든요.”
“아하, 젖몸살 같은 거군요.”
산모도 모유가 많이 돌면 아프지 않은가. 딱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아플 때도 있다고 했다.
“젖몸살…….”
그가 당황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난 그의 이마를 짚었다.
“음, 열은 없네요.”
“한 번 앓고 나면 고통은 금세 사라집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지금은 괜찮다는 말에 난 한숨을 내쉬었다.
“실습에서 막 돌아오셨으니 피곤하실 텐데요. 돌아가 보셔도 됩니다.”
“지금 기숙사로 가면 카트린 르마르가 쫓아올 것 같아요.”
“……경비대를 보내 호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저하와 제 사이를 모두가 알게 될 텐데요? 저희 가족들도요.”
나와 도미니크의 사이를 가족들이 알면…….
왠지 저하가 엄청 위험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나는 덜컥 겁이 나서 도미니크의 이불을 목 끝까지 바짝 올린 뒤에 토닥토닥 두드렸다.
“나을 때까지는 들키지 말아야 할 텐데. 카트린 르마르가 일러바치면 어떡하지요?”
“하면 결혼해야죠.”
“카트린과요?”
그가 미간을 좁혔다.
“당신과.”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르마르 영애와의 결혼을 추진하신다고…….”
“곧 해결할 겁니다.”
나는 흐으음, 하고 믿을 수 없다는 침음을 흘렸다.
“되게 피곤한 남자였네요, 저하는.”
“제가요?”
“선― 아니, 어머니가 왜 잘생긴 남자를 피하라고 했는지 알겠어요.”
[세나야, 어차피 얼굴은 늙으면 다 찌그러지는 거란다. 웬만하면 적당히 생기고, 성격 좋은 남자와 살아. 애초에 처음부터 결혼을 하지 않는 것도 좋겠지.]
선생님은 첫사랑 얘기를 할 때마다 내 어깨를 잡고 주의시켰다. 그리고 우리 선생님의 말은 항상 옳다.
“불안하게 하고.”
내가 골이 나서 웅얼거리자 도미니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언제 저하를 불안하게 했지요?”
아닐걸! 나는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카엘과 사비에르의 애송이도―”
“두 사람이 왜요?”
여기서 왜 그 둘 얘기가 나오는가. 난 고개를 갸웃했고, 도미니크는 그들을 떠올리듯 싸늘한 얼굴로 “아닙니다.” 하고 말했다.
“아무튼 르마르 양은 지금 당장 저를 방해꾼 취급하는걸요. 저하 잠드셨을 때 키스도 하려고 하고―!”
“……죄송합니다.”
잊으려고 해도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기분 좋은 생각을 하자.’
나는 눈을 꼭 감고서 가족들을 떠올렸다. 시트론. 칭찬하는 쟝뤼크. 마릴린. 알렉시아. 각종 맛있는 음식들. 버터를 잔뜩 녹인 뜨거운 팬에서 치익― 익는 스테이크. 알이 큰 고운 빛깔의 딸기. 그 위에 주르륵 흘러내리는 달콤한 휘핑크림. 루시, 스위트피, 그리고…….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고 있는데 볼에 차가운 손끝이 닿았다. 도미니크였다.
“그거 아냐.”
내가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자 도미니크는 “예…….” 하며 애처롭게 손을 내렸다.
* * *
다음 날. 졸업식을 목전에 둔 터라 학교는 한산했다. 로열 키친 응시가 안정권인 학생들만 아침부터 지도 교수에게 교육을 받았다. 나도 쟝뤼크에게 수업을 받기 위해 아침 일찍 교정에 나왔다. 학사로 향하고 있는데 “이봐요.”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르마르 영애.”
날 찾을 줄은 알았지만, 기숙사도 아니고 학사 앞에서 당당히 찾을 줄은 몰랐다.
“얘기 들었어요. 프렌시프 영애라지요?”
신분을 알아서인지 그녀의 말투가 어제보다는 무례하지 않았다. 난 주변을 살피고 목소리를 죽였다.
“아카데미 학생의 신분을 드러내는 일은 황제령으로 금했습니다. 주의하세요.”
“잘난 척은, 고작 식칼이나 든 주제에.”
그녀가 입매를 비틀며 나를 노려보았다.
“남의 것을 탐내는 건 프렌시프의 특성인가요?”
“뭐라고요?”
“집안 어른들 욕 먹이고 싶지 않다면 처신 똑바로 하세요. 모친 핏줄 자랑하는 건가요?”
날카롭게 빈정거리는 말에 나는 기분이 상했다. 선생님은 이민족 신관이지만, 대외적으론 매춘부라고 알려져 있었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낸 소문이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선 기분이 단단히 상할 수밖에 없다.
“영애야말로―”
“센! 돌아왔구나!”
멀리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스위트피가 나를 발견하고 냉큼 뛰어왔다.
“언제 왔― 르마르 양.”
카트린을 본 스위트피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여기서 뵙는군요. 샤르파크 양.”
샤르파크? 나는 깜짝 놀라 스위트피를 쳐다보았고, 스위트피는 마른 침을 삼켰다.
“여기서 할 얘기가 아닌 듯싶군요. 무슨 일로 아카데미까지 오셨습니까.”
“저하를 뵙기 위해서지요. 한데…….”
카트린이 나와 스위트피를 번갈아 가리켰다. 그리곤 우습다는 듯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프렌시프 영애와 샤르파크 영애의 사이가 이리 좋은 줄은 몰랐어요.”
프렌시프 영애라는 말에 스위트피가 나를 쳐다보았다.
“프렌시프 영애라니 무슨―”
“모르셨구나. 친구 사이에도 신분을 숨겨야 한다니 아카데미 학칙 한번 무섭네요. 아니면 누군가 뒤에서 희롱한 건가.”
카트린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조소했다.
“샤르파크 영애의 오라비가 프렌시프 영애 때문에 후작의 눈 밖에 났잖아요?”
“네?”
내가 묻자 카트린은 “모른 척은.” 하며 혀를 찼다.
“프렌시프 양의 일로 문제가 생겨서 샤르파크 후작이 영애의 오라버니를 후계자리에서 물러나게 했어요. 부관직도 거뒀고요.”
부관? 그럼 샤르파크 성에서 본 후작의 부관이 스위트피의 오빠였단 말이야?
“샤르파크의 방계라고 해도 사정이 어려운 모양이던데요. 아들을 후계로 내준 덕에 겨우 풀칠하고 산다죠?”
“…….”
“프렌시프 양은 음흉하네요. 지기의 앞날을 망쳐 놓은 주제에 모른 척이라니.”
나는 스위트피를 얼른 쳐다보았다.
“스위트피, 나, 나는―”
“미안.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은 좀…… 혼란스럽네.”
스위트피는 아카데미에 와서 내가 처음 사귄 친구였다. 또래, 그것도 같은 목표를 가진 친구는 처음이라 그녀는 내겐 소중한 사람이었다. 자리를 떠나는 스위트피를 쫓아가려 했으나, 카트린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당신 같은 비열한 사람이 저하 곁에 있는 건 더 보고 싶지 않아요.”
“…….”
“프렌시프의 딸이라고 내 앞에서 잘난 척할 생각은 말아요. 나는 황위 계승권을 가진 공작 가의 영애입니다. 신분으로 함부로 누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죠.”
카트린은 거센 콧김과 함께 내 어깨를 거칠게 밀치며 지나갔다.
“저하!”
그녀의 목소리가 밝아지며 발이 빨라졌다. 도미니크가 굳은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네가 왜 이 사람과 함께 있는 거지?”
“교정에서 만났어요. 그보다 몸은 괜찮으세요? 어제는 흥분해서 저하를 곤란하게 했어요. 부끄럽게 생각해―”
“저하.”
나는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도미니크와 카트린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르마르 영애가 제게 손을 댔어요.”
“무슨―!”
카트린이 기가 막힌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난 그녀에게 잡혔던 손목을 들어 보여 주었다. 얼마나 거칠게 잡았는지 잔뜩 붉어졌다.
“어깨도 막 밀치고.”
“정신이 나갔군.”
“저하에게서 떨어지라고 협박하기도 했지요.”
“빌어먹을! 더 다친 데는 없습니까?”
“……마음이?”
도미니크가 카트린을 살벌하게 쳐다봤다.
“마음이 다치셨다잖아.”
고저 없는 싸늘한 목소리에 카트린은 기막힌 얼굴로 나를 흘겼다. 카트린은 주먹을 꽉 움켜쥔 채로 바르르 떨었다.
“…….”
“사과는?”
도미니크의 종용에 그녀는 짓씹던 입술을 억지로 움직였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억지로 고개를 숙인 그녀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고, 동시에 학생들이 와글와글 떠들며 교정에 들어섰다. 나와 도미니크는 눈빛을 교환한 후 서로 멀어졌다. 난 학사 내로 들어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카트린보다 스위트피가 더 염려된다.
‘어쩌지…….’
스위트피가 교육받는, 레아 교수의 연구실 안을 힐끔거리다 손을 꼼지락거렸다.
* * *
카트린은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나, 아가씨!”
르마르가의 유모가 그녀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
“우리 아가씨가 무슨 일로 이리 서럽게 우신담.”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린 채 눈물을 뚝뚝 흘리던 카트린이 웅얼거렸다.
“저하의 앞에서 망신을 당했어! 프렌시프 영애는 영악해! 못됐다고!”
카트린이 교정에서의 일을 털어놓자 그녀의 유모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이런…….”
“물론 귀족의 몸에 손을 댄 것은 나빴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쁘다니요!”
유모가 버럭 소리치며 카트린의 어깨를 잡았다.
“전혀요. 르마르 공작 가의 영애님이 이 세상에서 못 할 일이 뭐가 있나요.”
“……하지만.”
카트린은 유모의 팔에 매달려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저하가 원하지 않는데 내가 매달리는 것은 아닐까? 그건 수치스러운 일이잖아.”
그녀의 유모가 인자하게 미소지으며 카트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럴 일은 없어요. 저하께 어울리는 분은 특별하고도 특별한 아가씨뿐이랍니다.”
“나도 나 싫다는 사람은 싫어!”
“이런.”
그녀는 곤란한 얼굴로 눈물로 범벅이 된 카트린의 볼을 문질렀다.
“마음 잡지 못하는 사내에게 품이라는 쉼터를 내주는 것도 레이디의 미덕이라 가르쳐 드렸죠?”
“…….”
“차라도 드시면서 마음을 다독이셔요. 훌륭한 레이디는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답니다.”
카트린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그녀의 유모는 얼른 차를 내왔다. 일렁이는 검은 액체를 크림 대신 듬뿍 넣고, 가볍게 젓자 찻잔 안에서 기분 좋은 향이 퍼져 나왔다. 카트린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 유모가 내주는 찻잔을 잡았다. 한 모금 목 안으로 흘려 넣자 수치로 죄어들던 가슴이 진정된다.
‘신기한 일이지.’
어릴 때부터 유모가 끓여 준 차를 마시면 놀랍도록 마음이 진정되며 머리가 맑아진다. 그리고―
‘그분이 그리워지지.’
성장(盛粧)한 그를 처음 보았던 날. 피부를 스쳤을 때 정전기 같은 푸른 빛이 퍼지며 손끝이 찌릿하던 일.
유모는 제 어깨에 기댄 카트린을 다정히 토닥였다.
“그분의 운명의 상대는 아가씨뿐이에요.”
낮은 목소리가 화살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
카트린이 잠든 것을 확인한 유모는 주변을 살피며 호텔을 나섰다. 인적이 드문 으슥한 곳에 접어든 후에야 발걸음을 멈추고 통신을 연결했다.
“연락드립니다, 형제님.”
[오르가. 르마르의 딸에게 문제는 없나.]
“워낙 어릴 때부터 성식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지금만 같다면 염려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다만.”
[다만, 이라니.]
“조율자에 대한 집착이…….”
[그건 성식 중독 증상 중 하나지 않은가. 그 문제는 걱정하지 마라. 에이레네 사비에르 때도 보았지.]
강해지는 게 아니라 약해지고 있었다.
‘성녀의 힘 때문일까.’
유모, 아니, 오르가는 찝찝한 기분을 거둘 수 없었다.
[감정만 잘 추스르면 돼. 올리비에 때처럼 모성에 감복해 일순이라도 제정신이 돌아오면 곤란하다.]
올리비에 폐공작은 잠시 제정신을 차렸었다. 정신이 돌아온 올리비에 폐공작은 소피아 대부인(황제와 올리비에 폐공작의 모후)에게 역모에 가담한 자들을 고해바쳤다. 그 일만 아니었더라면 오늘날 테르반(릴리 레제의 외조부)을 잃는 일은 없었다.
‘물론 부모 자식 간의 정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십여 년 전 황제의 명으로 올리비에 폐공작을 처리한 사람은 어린 도미니크. 노망이 든 소피아 대부인이 여전히 도미니크를 두려워하는 까닭이 바로 그것이었다. 조율자의 힘으로 일순 정화되어 제정신이 돌아온 것일 터.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지요. 당시엔 조율자의 힘이 안정되지 않아 저도 모르는 새 제 백부를 정화시킨 것이겠지만, 지금은 안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안심하지 말라 그리 일렀거늘.]
“카트린 르마르를 직접 키운 접니다.”
[흠…….]
“카트린은 지고는 못 사는 아이입니다. 삿된 힘을 몰아낼 만한 이로운 감정을 가질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야.]
“그 아이는 계획대로 길라게온의 두 번째 반마(半魔)가 될 겁니다. 믿고 기다려 주십시오.”
[카트린 르마르가 조율자와 이뤄져도 되겠는가.]
“반마와 조율자의 혼약이라면 응당 이뤄져야겠지요.”
[그분께 연락드려 결혼을 빠르게 추진하도록 하지.]
“예.”
통신을 종료한 오르가는 음험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탈란이 십수 년을 그려온 청사진이 이제 곧 완성될 것이다.
* * *
다음 날. 나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쟝뤼크를 쳐다보았다. 볶은 당근을 맛본 그가 “크흠.” 침음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기는 이만하면 되겠군.”
“신난다!”
활짝 웃으며 양팔을 쭉 펼치자 쟝뤼크가 내 이마를 꾹 눌렀다.
“신나긴 무슨. 이제 응용하는 법을 배워야지.”
“배움엔 끝이 없군요…….”
“죽을 때까지 정진해야 해.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레시피 점검에 들어갈 테니 꼼꼼하게 준비해 둬라.”
“내, 내일이요? 그럼 오늘은……?”
“쉬어.”
세상에! 나는 감동한 얼굴로 시계를 바라보았다. 두 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교육이 끝나다니!
‘뭘 하지? 뭘 할까?’
맘 편하게 쉰 날이 얼마 만일까. 실습 때는 샤르파크와의 일도 있어서 전혀 쉬지 못했고, 돌아와서도 짐을 푼다고 나만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
‘오늘은 스위트피를 만나자.’
음식이라도 해서 같이 먹으며 이야기를 할 참이었다. 달콤한 걸 만들어 가면 이야기도 달콤하게 풀리지 않을까.
“마카롱이 좋겠다.”
학교에 있는 재료를 가지고 후식 조리실에 들어가서 끙끙거리며 마카롱을 만들었다. 제과와 요리는 궤가 조금 다른 편이었다. 요리는 재료 상태 등을 고려해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간을 맞추는 게 좋은데, 제과는 계량 싸움이었다. 몇 그램이라도 오차가 생기면 실패한다. 그리고 나도…… 실패했다.
“으아, 코크 겉면이 다 깨졌네.”
보기 좋지 않은데 시간이 없어서 다시 만들기도 어려웠다.
‘마카롱은 제과 초보자에겐 난제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정리하려다가 손을 우뚝 멈췄다. 겉면만 가리면 되지 않을까. 코크 자체는 부드러운 데다 쫀득쫀득해서 맛있으니까. 그러고 보니까 한국에서 인절미 마카롱이 유행이었던 게 기억났다.
“콩가루, 콩가루.”
쟝뤼크가 낸 레시피 과제에 쓰려고 만들어 둔 게 있었다. 난 얼른 콩가루를 가져왔다. 미리 만들어 놓은 커스터드 필링에 콩가루를 넣어 섞었다. 그리고 코크 사이에 샌드한 뒤, 분무기를 찾았다. 설탕 시럽을 마카롱 위에 칙칙 뿌린 다음, 콩가루에 잘 묻히자 제법 그럴듯한 인절미 마카롱이 완성되었다.
인절미 마카롱이 든 접시에 덮개를 씌우고 복도를 걷는데,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얘기 좀 하죠.”
카트린이 오만한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싫은데요.”
“해요.”
“싫어요.”
“하자니까!”
교장실이 바로 밑층이었다. 나는 창문에 다가가 “저―!” 하고 도미니크를 부르려고 했다. 카트린이 쏜살같이 다가와 내 입을 틀어막았다.
“프렌시프의 미친개라더니.”
그건 내가 아니라 내 몸에 들었던 가짜 세니아나다.
“기가 막혀.”
난 얼른 그녀의 손을 떠밀었다.
“이거 놔요.”
“정신 나갔어요? 소란을 일으켜서 좋을 게 뭐예요! 저하와의 일, 전부 퍼뜨려 버릴까요? 매춘부의 자식이라 요망하다는 소리라도 듣고 싶은 거예요?!”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난 그녀에게 바싹 다가가 낮게 읊조렸다.
“한 번만 더 내 어머니에게 매춘부 운운했다간 그 혀 온전하지 못할 거야.”
“뭐, 뭐라고?!”
“저하와의 소문을 내든 말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그 일로 프렌시프가 곤경에 처한다면.”
나는 멀린의 마원을 쥐고 음산히 덧붙였다.
“이 대륙이 아닌 저기 저 오지로 날려 버릴 거예요.”
멀린이 타이밍 좋게 “크르릉.” 울어 주었다. 카트린은 새하얗게 질려서 한 발 멀어졌다.
“감히 날 협박하는 거예요?! 나는 이 제국에 둘 뿐인 공작 가의 영애라고요!”
“…….”
“나를 오지로 날려 버리면 당신이 무사할 것 같아요?”
“포털은 편하지요. 먼 곳으로 한 번에 이동할 수도 있고―”
“……?”
“증거도 없고.”
카트린의 얼굴이 새하얘졌다가 새파래졌다가 종국엔 거무죽죽해졌다. 나는 그녀를 노려본 뒤에 다시 걸음을 옮겼다. 카트린은 씩씩대며 날 쫓아왔다.
“증거가 왜 없어요. 마법사들이 있는 이유가 뭐예요?”
“그럼 해 보시든가요. 마법사들이 오지까지 구해 주러 올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천박해요! 알아요? 힘으로 협박하는 일은―!”
이대로 계속 종알거리며 쫓아올 기세였다. 나는 우뚝 멈춰 서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흠칫 놀라더니 뒷걸음질 쳤다.
“공작가의 영애라고 날 협박하던 건 누구지요?”
“그, 그건―!”
할 말이 없는지 “이익!” 하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나는 접시 위에 놓인 마카롱을 꺼내서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
“단 거라도 먹으면 제대로 생각할 수 있으려나.”
콜록! 콩가루 때문에 기침한 그녀가 붉어진 눈으로 날 노려봤다.
“천박하다기에 천박한 짓을 했는데 뭐가 문제예요?”
난 가던 길로 다시 걸었고, 카트린은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기숙사로 돌아간 난 입실 명부를 확인했다.
‘아, 스위트피가 있다.’
스위트피의 방에 올라가서 콩콩, 문을 두드렸다.
“저…… 스위트피.”
안에서 인기척 소리는 들리는데 답이 없다. 난 문 앞에 쪼그려 앉아서 웅얼거렸다.
“저기, 아카데미에서는 신분을 드러내면 안 되니까…… 그래서…… 고의로 널 곤란하게 한 건 아닌데…….”
우물우물 변명하던 난 한숨을 내쉬었다. 십 분이 지나도, 삼십 분이 지나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아!”
“센, 돌아가자. 스위트피는 나오지 않을 거야.”
스위트피와 절친하게 지내는 남자애였다. 이 아카데미에서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 준 무리 속 애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정은 나도 알아.”
안다고? 난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고, 남자애는 곤란한 듯 웃었다.
“저 녀석과 알고 지낸 지 십육 년이거든. 정확히 말하면 내 아버지가 스위트피 가문의 유일한 고용인이었어.”
“아…….”
“스위트피는 나오지 않아, 아니―”
그가 한숨을 내쉬며 꽉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못 나오지.”
못 나온다니. 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그는 함께 가자며 엄지로 뒤편을 가리켰다. 인절미 마카롱을 문 앞에 잘 놔둔 후에 그를 따라 기숙사 밖으로 향했다. 향신료 밭에서 우리는 한참을 침묵했다. 이내 남자애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스위트피의 가문은 귀족이긴 하지만 재정이 많이 어려워.”
“으응, 들었어.”
“샤르파크 후작께선 능력 없는 방계들이 세금을 축내지 않도록 쳐냈거든. 그중 하나가 스위트피의 아버지야.”
“그렇구나…….”
“운 좋게 도련님이 후작의 보좌이자 후계로 본가에 들어가기 이전엔 빚이 산더미였지.”
“…….”
“그 빚의 대부분이 르마르 공작가에서 나왔고.”
르마르 공작가? 카트린의 가문 말인가.
“스위트피는 어릴 때부터 르마르 양의 시녀처럼 살았어.”
그래서 카트린이 스위트피를 알고 있던 건가.
아카데미의 재학생, 혹은 재학을 예정에 둔 학생들은 데뷔탕트를 하지 않는다. 아카데미 학칙을 위해서였다.
“도련님이 본가에서 쫓겨난 지금 르마르 양의 눈 밖에 나면 그 많은 빚은 어떻게 되겠어.”
남자애는 표정 없이 기숙사를 돌아보았다.
“네게 미안해도 르마르 양의 허락 없인 절대로 널 만나지 않을 거야.”
어쩐지 말투가 수상쩍었다. 나는 미간을 좁힌 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카트린 르마르가 날 만나지 말라고 한 거야?”
“……그건 내가 말할 수 없어.”
“카트린이 스위트피를 협박한 거야. 빚을 가지고! 그렇지?”
“…….”
비열하고 천박한 쪽은 카트린이었다. 내게 무례한 것은 몰라도, 나를 가지고 내 친구를 협박하는 건 도를 넘는 일이다. 나는 굳은 얼굴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마침 통신석이 가늘게 진동했다. 남자애는 통신을 받으라며 떠났고, 난 굳은 얼굴로 통신석을 잡았다.
[세니아나.]
란슬롯이었다.
“네.”
[우리 막내 목소리가 왜 이렇게 안 좋을까?]
“……아니에요. 무슨 일이세요?”
[황도로 가다가 아카데미를 지나게 되어서. 잠깐 전해 줄 게 있는데 이쪽으로 올래?]
나는 카트린이 머문다는 커다란 호텔을 노려보며 “네.” 하고 말했다.
* * *
카트린은 짜증 어린 얼굴로 호텔의 사환에게 소리쳤다.
“그래서 계단은 언제 수리된다는 거야!”
“송구합니다, 영애. 앞으로 한 시간은 더―”
“쓸모없는 것들! 아버님께 다 고해바칠 줄 알아라.”
“여, 영애!”
“이거 놔!”
기분이 나빠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 계집애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
‘유모는 대체 어딜 간 거야!’
가슴이 울렁거린다. 이럴 땐 유모가 타 주는 차 한 잔이면 가라앉는데, 도무지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호텔의 지배인이 다가왔지만, 카트린은 그를 거칠게 밀치며 호텔 밖으로 나섰다. 르마르의 기사들이 허둥지둥 그녀를 따라갔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가 가장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자 종업원이 다가왔다.
“테라스로.”
“죄송하지만, 테라스엔 예약하신 분이…….”
“테라스에 자리가 하나뿐이야?!”
“2층을 전부 예약하신지라…….”
“시끄러워! 난 르마르 공작가의 사람이라고!”
종업원을 휙 밀치고 마구잡이로 계단에 올랐다.
‘기분 나빠. 기분 나빠!’
가슴이 빠르게 뛰고 손이며 발이 저려 왔다. 그녀가 쿵쿵 걸으며 고개만 돌려 기사를 돌아보았다.
“유모더러 당장 차를 챙겨서 이쪽으로 오라고 전― 꺄악!”
발이 접질려 넘어진 카트린이 의자를 붙잡고 신음했다.
“으…….”
“괜찮으십니까.”
낮은 미성이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피아노 선율처럼 감미롭고 아름다운 소리였다. 카트린이 인상을 확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괜찮은 거로 보……!”
결 좋은 금발, 투명하고도 짙은 청안, 오뚝한 콧날이며 빚은 듯 섬세한 얼굴의 선.
“……여요. 괜찮아요.”
“다행이군요.”
그녀는 멍하니 의자에 앉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워.’
신화에 나오는 청년 신의 모습이 이러했을까. 한 폭의 그림 같은 미남이었다. 어딘지 익숙한 얼굴이기도 했다.
‘누군가와 매우 닮았는데…….’
남자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하면 일어나십시오.”
“……네?”
“일어나라고. 내 동생이 앉을 자리거든요, 그 자리.”
* * *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눈앞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어디지.’
아카데미 앞 상점가의 세 번째 골목. 호텔의 바로 뒤편 흰색 지붕의 건물. ……은 여러 채인데요.
“디아쥬, 디아쥬가…….”
이럴 땐 윤세나 세계의 휘황찬란한 간판이 그립다. 수도처럼 큰 상점가가 아닌 이상 가게 이름은 대부분 작은 입간판으로 구분했다.
‘그런데 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입간판이 안 보여.’
나는 건물 앞에 포진한 사람들 뒤에서 폴짝폴짝 뛰며 입간판을 확인하려 애썼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통신석에 란슬롯의 코드를 입력했다.
[세니아나?]
“비슷한 건물이 많아서 어딘지 모르겠어요.”
[앞에 뭐가 있지?]
“으음, 꽃집이요. 앞에 프리지어 꽃이 잔뜩 있어요.”
[그쪽이야. 내가 내려갈게. 꽃집 골목 안으로 우리 마차가 있으니 거기서 기다릴래?]
“네!”
나는 통신을 종료하고 꽃집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 근처에 있던 마부가 “아가씨!” 하며 나를 반겼다.
“잘 지냈어, 도노반?”
“물론이지요. 아가씨께서는 별고 없으셨습니까?”
있었지. 별고는 많았다. 그러나 나는 “으응.” 하며 애써 표정을 수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란슬롯이 마차 앞에 도착했다. 늘 그렇듯 녹을 것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은 그가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오빠!”
“오늘따라 유난히 반가운걸.”
“헤어진 지 며칠밖에 안 된걸요.”
“며칠이나 된 거지?”
그는 빙그레 웃으며 내게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와!”
올포러브(장미의 일종)다. 영지 정원에 만개했던 올포러브처럼 근사한 꽃다발이었다.
“네 눈동자 색과 똑같지?”
“그런 것 같아요.”
“발견하자마자 네게 선물하고 싶었거든.”
“이거 주시려고 오신 거예요? 바쁘시잖아요.”
“널 만나는 일보다 바쁜 일은 없지.”
나는 란슬롯을 꽉 끌어안으며 “고마워요, 오빠!” 하고 말했다. 안겨 든 나로 인해 잠시 당황했던 란슬롯이 이내 싱긋 미소지었다.
“이런 답례를 받을 줄 알았다면 더 일찍 올 걸 그랬군.”
란슬롯은 정말로 다정했다. 카트린과 스위트피의 일로 신경이 바짝 서 있던 차에 그의 다정함이 날 안심시켰다.
“나온 김에 함께 식사하고 갈까?”
“좋아요! 아빠와 작은오빠는요?”
“다른 마차로 떠났지. 슬슬 동부를 벗어났을 거야.”
오빠가 내 손을 가볍게 잡으며 “가자.” 하고 말했다.
* * *
카트린은 몽롱한 얼굴로 호텔에 돌아왔다.
[괜찮으십니까?]
묻던 목소리가 세상 어느 디저트보다 달콤했다. 호텔의 계단 수리가 끝나서 방에 올라가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모가 허겁지겁 들어왔다.
“아, 아가씨.”
“대체 말도 없이 어딜 갔던 거야?”
“아가씨 좋아하시는 차를 구하러 갔었지요.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던 터라…… 한데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카트린은 베개를 끌어안으며 소파 등받이에 깊게 몸을 기댔다.
“운명은 뭘까.”
잠시 눈을 크게 뜬 유모가 낮게 웃으며 카트린의 손등을 두드렸다.
“아가씨와 저하를 운명이라 부르지요.”
“……저하 말고.”
“예?”
“저하 말고! 유모는 저하 없이는 말이 안 나오는 거야?!”
날 선 반응에 유모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아가씨?”
“됐어. 나가 봐.”
“우리 아가씨 심기가 불편하신 모양입니다. 프렌시프 영애가 무슨 짓이라도 한 건가요?”
“그 여자는…… 됐어. 말하고 싶지 않아.”
기분 나쁜 여자. 황비들도 한 수 물러 주는 제게 감히 고개를 빳빳하게 드는 데다 한마디도 지지 않는다.
“운명은 예기치 못한 것이지.”
“예, 아가씨와 저하의 만남처럼 말이에요.”
카트린의 눈초리가 샐쭉 올라갔다. 유모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차라도 내올까요?”
“안 먹어!”
“하지만 아가씨―”
“됐다니까! 당분간 떨어져 있어.”
“아가씨, 제가 무슨 실수라도―”
“듣기 싫단 말이야. 나가, 나가!”
카트린은 유모를 방 밖으로 밀어냈다. 쿵! 문을 닫고서도 한참을 씨근덕거렸다.
‘나도 나 싫다는 남자는 싫어.’
도미니크는 제가 그렇게 매달렸는데도 시선 한 번 내주지 않았다. 반면에 오후에 본 사내는 얼마나 근사하던가. 말투도, 표정도 녹을 것처럼 다정하다.
‘유모에게 말하면 금세 아버님 귀에 들어갈 테지?’
아버님은 가문을 위해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 확답을 받아 오라고 했다. 과거엔 도미니크가 무뢰배라도 되는 양 질색을 하더니.
“정말이지 운명은…… 예기치 못한 것이라니까.”
카트린은 또 한 번 베개를 끌어안은 채 앓는 신음을 터뜨렸다.
* * *
“아곤이 스승님과 함께 로열 키친에 있었다고요?”
“아곤 쪽이 기수가 더 높다고 들었어.”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입을 헤, 벌리고 있었더니 란슬롯이 빙그레 웃으며 입에 고기를 넣어 주었다. 나는 열심히 고기를 씹었고, 란슬롯은 “잘 먹어 주니 고마운걸.” 하며 뺨을 쿡 찔렀다. 그때 레스토랑 내부에서 움직이던 여성이 “앗!” 하며 란슬롯 쪽으로 쓰러졌다. 그녀가 허둥지둥 일어나며 고개를 수그렸다.
“시, 실례를 범했네요. 저 때문에 재킷이 구겨졌으니…….”
“배상은 됐습니다.”
“네?”
“배상도, 사과의 편지도 모두 됐으니 돌아가 주시죠. 소중한 사람과 식사 중이라.”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돌아갔고, 란슬롯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내린 냅킨을 가지런히 무릎에 올렸다. 식사 후 레스토랑을 나서자 이번엔 다른 여성이 그의 앞에서 넘어졌다.
“기사를 대동하셨으니 일으켜 드리지 않아도 되겠죠.”
그렇게 말한 란슬롯이 나를 끌고 그녀를 지나쳤다. 그리고 얼마쯤 더 걷다가.
“어머! 제 손수건이―”
“제 손수건이!”
“죄송하지만, 손수건을 주워 주시겠어요?”
정확히 란슬롯 앞에 흰 손수건이 몇 장이나 떨어졌다. 그는 첫 번째 여성과 두 번째 여성 때와는 달리 손수건을 주워 주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이,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란슬롯은 다정하게 그녀들과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았다. 이전엔 완곡히 거절하더니 이번엔 고작 몇 마디뿐이었지만, 대화를 나눈다. 그녀가 대화 중에 나를 흘깃 보더니 “그런데 이분은…….” 하고 물었다.
“제 동생입니다.”
“그렇군요~! 세상에, 사랑스러워라.”
그녀는 과하게 흥분하여 내 손을 답삭 잡았다.
“어쩜, 오빠를 쏙 빼닮았네요.”
“앗, 네…….”
“영애에게는 에메랄드로 만든 머리 장식이 잘 어울리겠어요. 에메랄드 좋아하세요? 마침 저희 상단에―”
그러자 다른 여성이 불쑥 끼어들며 제 머리 장식을 휙! 뜯어내 손에 쥐여 주었다.
“에메랄드는 아니지만 아주 좋은 루비랍니다. 아끼는 것인데 영애께 더 잘 어울릴 것 같군요.”
“아니, 괘, 괜찮―”
다른 여성들도 반지며 목걸이를 빼서 얼른 내 손에 올려 두었다.
“보석은 다이아몬드가 제일이지요. 반지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요새 누가 산호나 다이아를 하나요? 동대륙에서 넘어온 비취랍니다. 아름다운 연홍색이에요.”
경쟁하듯 내게 패물을 넘겨준 그녀들은 란슬롯을 힐끔힐끔 보며 호호호 웃었다. 그녀들이 돌아간 후 나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오빠의 이상형이 저분들 중에 있던 것이지요? 그렇지요?”
오빠의 연애라니! 생경한 일이라 나는 몹시 들떴다. 그러나 란슬롯이 픽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네?”
“방금 본 붉은 머리의 여성분은 동부에서 제일 큰 상단의 장녀고, 금발의 여성은 서부의 유서 깊은 자작가의 영애지. 그리고 흑안의 여성은 조부가 타국의 재상이야.”
“그런 걸 어떻게 아세요?”
“웬만한 유명인사는 다 머릿속에 있어서.”
나는 “아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란슬롯 대(代)에서 프렌시프가 몰락할 일은 절대로 없겠다.
“오빠는 눈치가 빠르시군요.”
“내가?”
“네. 세 여성분이 다가오실 때도…….”
사람이 엄청 많았는데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 귀신처럼 눈치챘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보자 그는 픽 실소를 흘렸다.
“내게 호감을 가진 사람의 눈빛을 분간할 수 있으니까.”
“아, 어릴 때부터 인기가 많았지요?”
그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난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오빠를 두고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치고받고 싸운 거구나. 오빠는 연애의 고수군요.”
오빠가 움찔,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누가 우리 막내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작은오빠가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오빠도 거기에 계셔놓곤.”
란슬롯은 “역시 혀를 지져 놨어야…….” 하고 중얼거렸다.
“네?”
“아니야, 가자.”
“다른 때에도 이렇게 많은 분이 다가오세요? 제가 오기 전에도요?”
“오늘 널 만나기 전엔 황도 귀족이 접근했지.”
“황도 귀족이요?”
“그쪽에선 내 신분을 모르는 것 같지만.”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아무래도 좀 더 이 근방에 있어야겠다.”
“오빠가요? 와, 신난다!”
“내일도 함께 식사를 할까?”
“네!”
나는 밝게 대답했고, 그는 귀엽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틀 후, 난 도서관에서 레시피 북을 끌어안고 나오다가 도미니크의 숙소 근처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중 한 사람을 보자 절로 인상이 써졌다.
‘카트린.’
그녀는 중년의 여성과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안 가, 안 간다고!”
“주인님께서 오늘은 꼭 저하와 단둘이 만나게 하라 명하셨어요.”
“싫다니까!”
“우리 아가씨가 요새 왜 이렇게 예민하실까. 그 좋아하시던 차까지 입에도 안 대시고.”
“유모가 이러면 아무것도 안 먹을 거야! 굶어 죽을 거란 말이야!”
카트린은 씨근덕대며 중년 여성의 손을 탁! 쳐냈다. 그러고 쿵쿵, 발을 구르며 뒤돌아 걸었는데 나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카트린이 인상을 팍 찡그린 채 날 쏘아보았다.
“역시 아카데미로 들어오는 게 아니었어. 기분 나쁜 얼굴을 봤잖아.”
혼잣말처럼 빈정거리더니 나를 위아래로 훑는다. 난 고개를 모로 꼰 채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다행이네요. 보기 싫은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대체 집안에서 어떻게 배웠으면 이렇게 매일 무례할까.”
“그러게 말이에요.”
“내가 무례하다는 거예요?”
“네.”
카트린은 화를 참지 못하고 내 어깨를 탁! 밀쳤다. 날카로운 통증에 난 인상을 썼다.
“이거 뭐 하는 짓?”
“왜요? 가서 이르시게요? 그러시든가요. 난 이제 저하는 신경 안 써요!”
신경을 안 쓴다고? 며칠 전과는 다른 반응에 나는 의아해졌다. 카트린은 내게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앞으로도 친구와 이야기 나누고 싶지 않은 모양인가 봐요. 아니면, 그렇게 소중하지는 않은가요?”
스위트피를 운운하는 말에 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스위트피는 건들 생각 말아요.”
“샤르파크 양이 가엽네요. 친구 잘못 사귄 덕에 곤란하게 생겼으니.”
“……카트린 르마르.”
“아니면 어르신께 말씀드려서 샤르파크 양의 빚이라도 갚아 주시든가요. 그런데 샤르파크 양 자존심에 적선을 받을지 모르겠네.”
나는 주먹을 꾹 말아 쥐었고, 카트린은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그녀가 흥, 콧방귀를 뀌더니 내 어깨를 다시 밀치고 사라졌다. 때마침 통신석이 점멸했다.
[세니아나.]
란슬롯이었다.
“네.”
[주말 약속 잊지 않았지?]
[추수 감사절을 앞두고 근방에서 가면무도회가 열리거든.]
[그래요?]
[가면무도회이니 신분이 드러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렇겠지요.]
[하면 데이트 신청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영애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날 보자.]
“네. 그보다 제가 부탁한 건요?”
[준비해 뒀어.]
난 카트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네.” 하고 낮게 대답했다.
* * *
“아가씨, 제발―”
카트린은 유모의 애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호텔을 나섰다. 그녀에게 제일 잘 먹히는 반항이 단식이라는 것은 어릴 때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기사들이 쫓아왔지만, 카트린은 벌컥 성을 내며 그들을 따돌렸다.
‘유모와 기사들은 전부 아버님의 끄나풀이야.’
요새 왜 그리 상점가로 나서는지 안다면 모두 아버님께 고해바칠 것이다. 카트린은 몇 시간 내도록 카페 테라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며칠이나 이 카페에 있었지만, 찾고 있는 남자는 볼 수 없었다.
‘공자님은 어디 계시는 건가요.’
절로 앓는 신음이 나왔다. 오늘도 틀렸나. 한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키려던 그녀가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태양을 한데 그러모은 듯 찬란한 금발과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
“……그분이다!”
카트린은 종종걸음으로 카페를 나섰다. 계단을 내려오는 짧은 찰나에 꽁지깃을 펼친 공작새 같은 여자들이 그의 주변에 포진해 있었다.
“그래서 경, 저는 가면무도회에서 붉은 드레스를…….”
“공자님!”
카트린은 여성들을 뚫고 그에게 다가갔다.
“또 뵙는군요.”
“저, 절 기억하고 계셨어요?”
“물론이죠.”
그는 가볍게 눈을 돌리며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잖습니까.” 하고 말했다.
“이, 이렇게 뵌 것도 인연인데 차라도 한잔 함께 하시겠어요?”
그러자 다른 여자들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저희가 먼저 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잖아요.”
“내가 누군 줄 알고―!”
“어머머, 난폭한 것 봐. 경, 보세요. 저희는 너무 무서워서…….”
카트린이 흠칫하여 그의 눈치를 보았다.
“수, 숙녀답지 않은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림처럼 가만히 있는 분만이 숙녀인 건 아니죠.”
“……!”
‘어쩜, 말도 너무 로맨틱하게 해.’
다정한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온몸이 흐물흐물 녹아드는 것 같다.
“저어…… 그럼 차를.”
“오늘은 동생과 선약이 있어서요.”
그러자 다른 여자들이 아는 체하며 물었다.
“일전에 거리에서 뵌 여동생분이신가요?”
“예.”
“너―무 사랑스러운 분이셨어요. 그런 동생을 둔 경이 부러워요. 제게도 그런 동생이 있다면 좋겠네요…….”
시누이로.
여자들이 볼을 붉히며 란슬롯을 힐끔거렸다. 카트린은 신경질적으로 여자들을 쳐다보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동생과 사이가 좋으신 모양이에요.”
“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죠.”
“그, 그런가요.”
“누이가 정해 주는 여성과 혼인해야겠다, 싶을 정도랄까요.”
란슬롯이 빙그레 미소짓자 카트린을 비롯한 여자들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의 누이다! 누이를 공략해야 한다. 카트린은 “누이…….” 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떻게서든 누이의 마음에 들고 말리라.
* * *
주말이 되었다. 드레스로 갈아입은 나는 스위트피의 방문 앞에 인절미 마카롱을 내려놓았다. 인절미 마카롱을 두고 간 날, 방문 앞엔 깨끗이 씻은 빈 그릇이 있었다.
“저기, 스위트피. 나 오늘은 저녁 밖에서 먹고 오니까…… 그러니까 식당으로 와도 돼.”
나로 인해 카트린에게 행동을 제지받는 그녀에게 미안해서 자꾸만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어깨를 축 떨군 채로 걸으면서 내내 스위트피의 방문을 힐끔거렸다.
‘어제 오빠에게 그걸 받았으니까 이제 곧…….’
나는 한숨을 푹 내쉰 후,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골목 안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란슬롯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와―!”
제대로 꾸민 란슬롯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모델처럼 약간 마른 몸에 꼭 맞게 맞춘 예복엔 화려한 금사가 수놓아져 있었다. 남자치고 약간 흰 얼굴에 검은 재킷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 와― 오늘 엄청 멋있어요.”
“우리 공주님은 항상 아름답고.”
나는 공주란 말이 부끄러워서 손을 꼼질거렸다. 그런데 이 세계엔 진짜로 공주가 있으니까 ‘공주님’이란 말을 내가 듣는 건 엄청 무시무시한 일이 아닐까.
그런 의미를 담아서 쳐다봤지만, 란슬롯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가 내 손끝에 입 맞추며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말했다.
‘낭만 소설에 나오는 왕자님 같다.’
나는 란슬롯이 건네는 가면을 썼다. 고양이 귀가 달린 가면은 포슬포슬 부드러운 데다가 편해서 마음에 쏙 들었다. 일전에 황궁 주최의 무도회는 가 봤지만, 젠트리(성시민: 중산층 백성)까지 포함한 무도회, 그것도 가면무도회는 처음이었다. 조금 설레서 콩콩 뛰는 가슴을 꼭 붙들었다.
“불꽃놀이 이후엔 가면을 벗어도 되지만 세니아나, 넌 되도록 벗지 않는 게 좋겠지?”
“네!”
난 힘차게 대답하고 오빠와 함께 무도회 홀로 들어갔다. 삼삼오오 모여 떠들던 사람들이 입장하는 우리를 주목했다. 정확히 말하면 란슬롯을. 감기와 사랑과 미남은 숨기기 힘들구나. 아무리 가면을 써도 귀티가 줄줄 흘렀다.
“첫 춤은 역시 나와 춰야겠지?”
“그럼 두 번째 춤은 다른 사람과 춰도 돼요?”
“…….”
오빠들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춤은 처음이라 가슴이 콩닥거렸다. 잠깐 대답을 지체한 그는 이내 “물론.” 하며 뒤쪽을 쳐다보았다.
‘으응?’
벽 쪽에 있던 가면을 쓴 남성들과 왜인지 눈짓을 주고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가자.”
황궁 무도회에선 내내 왈츠 등의 느리고 달콤한 선율의 곡이 나왔는데, 이곳은 빠르고 경쾌한 음악이 더 많이 연주되었다. 란슬롯의 손을 잡고 콩콩 뛰다가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잡은 손을 쿵짝쿵짝 흔들며 가볍게 걷기도 했다.
‘즐거워~!’
한 곡이 다 끝났을 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 달뜬 숨이 터져 나왔다.
“재밌어요!”
“마음에 든다니 기쁘네. 음료라도 가져다줄게. 잠시 있어.”
“네!”
오빠가 가고 난 오도카니 서서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남성들이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어떠십니까, 저와 한 곡―”
“제게도 기회를.”
춰도 되겠지? 그런데 이렇게 우람한 사람들과의 춤은 약간 두려웠다.
‘사채업자들과 날 때렸던 용병들이 생각나.’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다른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
세 번째 남성은 어쩐지 익숙했다.
‘아니, 많이 익숙한데.’
다른 사람들보다는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안심이 된다. 나는 그의 손을 살포시 잡고 나섰다.
“…….”
“…….”
우리는 말 없이 움직였다. 춤을 추면서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다른 사람들과는 영 딴판으로. 남자는 굉장히 경직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이런 곳에 자주 오는 사람 같아 보이진 않는다. 탄탄하지만 약간 마른 몸. 굳은살이 배긴 손. 익숙한 체향.
“……고레일?”
“아닙니다.”
맞는데. 우리 집 기사 고레일인 것 같은데.
“아가씨, 해 봐요.”
“…….”
“…….”
“…….”
“고레일 맞지.”
때마침 곡이 끝났다. 남자, 아니, 고레일은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 뒤로 다른 남자들이 접근했는데, 또다시 익숙한 손이 다가왔다. 또 춤을 추다가 보니 이상했다. 새빨간 머리의 남자는 고레일보다 더 춤을 못 췄다. 구체 관절 인형이 삐걱삐걱 움직이는 것 같았다.
“바커스.”
쿠울럭! 쿨럭! 붉은 보랏빛 머리의 남자가 사레들린 듯 격렬하게 기침했다.
“여기서 뭐 해?”
“살려 주십시오. 큰 도련님께 들키면 저희는 다 죽습니다.”
“…….”
다음 사람은 란슬롯 직속 엘리트 부대의 소대장. 그다음 사람도 잘생기기로 유명해서 하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우리 집 기사였다. 나는 어느새 음료를 들고 다가온 란슬롯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기사들에게 휴가를 주셨나요?”
“뭐.”
“휴가라고 다들 무도회에 왔나 봐요. 벌써 우리 기사만 네 명째 보았어요.”
“그랬어?”
란슬롯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어딘가를 쳐다봤는데 붉은 머리, 아니, 바커스가 내게 손을 내밀었던 남자들의 목을 잡은 채 홀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으응?’
란슬롯은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돌려세우며 물었다.
“즐거웠나?”
“네. 제가 우울해 보이니까 일부러 데려오신 거지요?”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란슬롯은 정말로 섬세하다.
“우리 막내의 기쁨이 내 기쁨이지.”
“오빠가 다정해서 좋아요.”
“다시 한 번.”
“네?”
“좋아요, 그거.”
“좋아요!”
“귀엽긴.”
란슬롯이 내 볼을 쓰다듬었다. 곧 불꽃놀이가 시작한다는 얘기가 나왔고, 우리는 테라스에서 함께 불꽃을 구경했다. 영지에서 보았던 불꽃만큼이나 아름다웠다.
* * *
세니아나가 화장실로 향하자 란슬롯은 홀 내에 숨어 있던 알렉시아에게 눈짓했다.
“호위.”
“명 받듭니다.”
그는 벽에 기대서서 시기를 가늠했다.
‘이제 슬슬 우울해하던 이유를 물어도 되겠군.’
세니아나는 억지로 캐물으려고 하면 바짝 털을 곤두세우고 숨어 버린다. 아탈란에 의해 몸을 빼앗겨 살았던 십여 년. 동생은 큰일일수록 침묵하는 법에 익숙해졌다. 마치 몸이 아프면 구석으로 숨어드는 고양이처럼.
‘기분이 고조된 틈을 타서 미끼를 던져야 겨우 입을 열겠지.’
불꽃놀이가 끝나자 무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하나둘 가면을 벗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제게 접근했던 영애들도 가면을 벗고, 회장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을 발견하곤 반색하여 다가왔다.
“경이시지요?”
“들어오실 때부터 알았답니다.”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분위기이시니까요.”
“함께 오신 분은 누이가 맞죠? 일전에 보았을 때 보다 더 사랑스러워서―”
란슬롯은 차게 식은 표정을 순식간에 수습하고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런 모습을 주시하고 있는 여성이 있었다.
‘공자님…….’
막 파티장에 들어온 카트린이 흥분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바로 그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다 뵙네요!”
사실은 그의 근처를 맴도는 날파리 떼들이 하는 말을 주워듣고 찾은 거지만.
[경께서 무도회장이 어딘지 물으신 건, 이번 가면무도회에 오신다는 게 아닐까요?]
[그럴 거예요.]
[이럴 줄 알았으면 드레스라도 챙겨올 것을 그랬어요.]
날파리 떼들은 여전히 공자님 곁에 붙어서 윙윙 거슬리게 굴고 있었다. 그때 한 여자가 뒤를 보며 밝게 소리쳤다.
“어머나, 영애!”
“영애!”
“어디 계신가 했어요.”
“이쪽으로 오셔요. 영애께서 찾아주시니 유난히 홀이 빛나는군요.”
날파리들은 순식간에 한 여자에게 들러붙었다.
‘누이구나.’
카트린은 그들이 멀어진 사이에 란슬롯에게 다가갔다.
“제 소개가 아직이었지요. 공자님, 저는―”
“알고 있습니다.”
“네?”
알고…… 있다고?
카트린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를 알고 있어?’
내게 관심이 있었다는 말씀일까. 심장이 어찌나 뛰는지 무도회장의 소음 속에서도 그에게 전달될 것만 같았다. 도미니크를 처음 보았을 때, 아니, 그보다 더 짜릿한 감정이 전신을 내달렸다.
‘이 남자는 내 거야.’
이 남자가 어떤 한미한 가문의 영식이든, 아니, 귀족이 아니라도 좋다. 그녀가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을 옴짝거렸다.
“서, 성함을 여쭐 수 있을―”
그러던 찰나 날파리들을 벗어난 노란 드레스의 여성이 다가왔다.
“오빠.”
‘공자의 누이구나!’
카트린은 최대한 상냥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어쩐지 목소리가 아주 익숙했다. 그리고 실루엣 또한…….
“……!”
“……!”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이 동시에 멈칫했다.
“르마르 영애가 여긴 왜…….”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여기서 뭐 하는―”
“세니아나.”
란슬롯은 다정히 웃으며 가면을 벗었다. 그러고 카트린을 흘끔 쳐다보며 말했다.
“란슬롯 프렌시프입니다.”
카트린은 와들와들 떨리는 손으로 란슬롯과 세니아나를 번갈아 가리켰다.
“라, 란슬롯 프렌시프라면 영애의……!”
세니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오빠예요.”
말도 안 돼! 운명의 사람이 재수 없는 저 계집애의 혈육이라니!
* * *
카트린이 여기서 뭘 하는 거람.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퍼뜩 드는 생각에 란슬롯의 팔을 끌어안았다.
“스위트피 때처럼 오빠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라면 절대로 안 돼요!”
내가 차갑게 경고하자 카트린은 세상이 무너진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란슬롯에게 호감이 있는 여성들이 “무슨 일 있나요?” 하며 다가왔다.
“……아니에요.”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요.”
“그러게요. 제 시중인 중에 의사가 있답니다. 진료를 받아 보시는 게 어떨까요. 아가씨, 아니! 영애~?”
“제게도 약초에 해박한 하녀가 있어요.”
나는 그녀들에게 상냥한 어투로 “괜찮아요…….” 하고 말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배려라니요. 당연한 일을.”
“그럼요.”
란슬롯은 와들와들 떨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카트린을 지그시 보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곧 들어갈 시간이지?”
“아, 네.”
란슬롯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여성들에게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동생을 배웅해야 해서 이만.”
“아쉬워라. 영애, 다음에 꼭 저희 상단에 오세요. 영애에게 어울리는 아름다운 브로치가 있답니다.”
“제 조부님의 궁에도 오셔요! 솜씨 좋은 제과 장인이 있어요. 꼭 대접을…….”
나는 그녀들의 과한 환대를 받으며 무도회장을 나섰다. 카트린이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나를 쫓아왔다.
“여, 영애!”
난 무슨 일이냐는 듯 카트린을 쳐다봤고 그녀는 란슬롯을 힐끔거리다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조, 좋은 꿈 꾸세요. 내일도 기분 좋은 하루가 되시길 빌어요.”
뭐지? 빈정거리는 건가?
난 오빠의 배웅을 받고 학교로 돌아왔다.
“아가씨.”
교문을 넘자 알렉시아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가시죠. 기숙사로 모시겠습니다.”
“으응…….”
“무엇을 그리 고민하고 계십니까?”
“카트린 르마르가 이상해서…….”
학교 내에서의 호위는 알렉시아 전담이라 그녀는 카트린과 있었던 일의 대부분을 알고 있었다.
“르마르 영애가요?”
“무도회장에서 만났는데…… 음, 좀 이상했어. 왜 그럴까…….”
“다른 영애들과 같은 이유가 아닐까요?”
“같은 이유?”
“란슬롯 도련님 말입니다.”
란슬롯이 왜?
잠깐 고민하던 나는 휙 얼굴을 들고 알렉시아를 쳐다보았다.
“오빠에게 반해서?”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카트린은 저하를―!”
“사람 마음은 언제든 변할 수 있기에 무섭지요.”
“……카트린이 새언니인 건 싫은데.”
“다른 영애 중에는 마음에 드시는 분이 있으셨습니까?”
나는 걸음을 우뚝 멈추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내 마음은 중요하지 않잖아. 영애와 오빠의 마음이 중요한걸.”
“하지만 상냥하시던걸요.”
“그야 오빠에게 마음을 주는 사람들이니까. 감사하잖아.”
“그런가요.”
그녀들이 내게 잘해 주는 이유는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일 거다. 단지 사모한다는 감정만으로 본인의 인생에선 하등 상관없는 내게마저 상냥하려고 애쓴다. 그건 얼마나 다정하고 고마운 일인가.
“하지만 카트린은, 카트린만은…… 으으음.”
“싫어하고 계시다는 걸 알려드리시지요.”
“두 사람이 좋으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글쎄요. 아가씨가 싫어하는 분을 만나실까요.”
그녀는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큰 도련님의 우선순위는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하고 중얼거렸다.
“응?”
“도착했습니다. 안전하게 방으로 들어가시면 불을 두 번 깜빡여 주세요.”
“알겠어.”
나는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 불을 두 번 깜빡였고, 무사히 도착한 것을 확인한 알렉시아는 떠났다.
그리고 이튿날. 나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교감과 함께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내가 만나지 않겠다고 할 것을 알고, 교감을 꼬여내 자리를 만들었다.
“하면 전 나가보지요.”
교감은 아하하, 웃으며 내 귀에 속삭였다.
“이 분의 마음만 살 수 있다면 네 앞날에 큰 도움이 될 거다.”
“…….”
그녀는 어깨를 토닥이곤 방을 나섰다. 나는 카트린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이래도 오빠와의 일은…….”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카트린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영애, 이때껏 있었던 무례는 용서해 주세요.”
“…….”
카트린이 바리바리 싸 온 무언가를 꺼냈다.
“좋은 차가 있어서요! 제가 즐기는 것인데, 영애도 마음에 들어 하면 좋겠네요.”
그녀가 꺼내는 병을 본 난 우뚝 굳어졌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서 넘실거리는 검은 액체.
‘저건…….’
그것을 보자마자 나는 형용할 수 없는 불쾌감에 사로잡혔다. 이러한 기분을 느꼈던 적이 예전에도 있다.
‘삿된 자들을 만났을 때!’
정확히 말하면, 삿된 자가 된 에이레네 사비에르를 마주했을 때와 꼭 닮은 감정이었다. 카트린은 맑은 물에 검은 액체를 넣고, 티스푼으로 가볍게 저었다.
“그걸 먹는다고요?”
“그럼요. 향과 맛 모두 훌륭하답니다. 기분을 좋게 해 주고, 피부며 머리를 맑게 해 줘요.”
“…….”
“이렇게 훌륭한 차는 아마 저희 가문에만 있을 겁니다.”
카트린은 붙임성 있게 웃으며 내 앞에 차를 내려놓았다.
‘역한 냄새!’
나는 코를 막고 고개를 돌렸다. 이게 향이 좋다니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이건 샤르파크 성에서 맡았던 성식의 냄새와 유사했다.
‘그보다 더 기분 나빠.’
유리병 안의 검은 액체는 끊임없이 일렁였다. 카트린은 말릴 새도 없이 검은 차를 입에 머금었다. 한두 번 더 홀짝인 그녀는 “하아.” 신음을 흘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역시 좋네요. 며칠 만에 마시거든요. 란슬롯 님을 뵙고 나선 전혀 못 마셨었는데…….”
“…….”
“저, 영애. 제게 감정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요.”
그러더니 내 손을 덥석 잡고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과드릴게요. 그러니까 그간의 일은 없던 것으로 해요.”
“이미 생긴 일이 어떻게 없던 것이 되지요?”
“란슬롯 님께만은 저와의 일을 전하지 말아 주세요.”
그녀는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고, 나는 정말로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손을 떼어 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란슬롯의 미모는 놀랍구나.’
왜 길거리에서 몇 사람씩이나 치고받고 싸웠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카트린은 대답 없는 나 때문에 목이 타는지 연신 차를 마셨다. 나는 말 없이 카트린이 차를 마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찻잔에서 차가 반쯤 사라진 후.
‘이만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한 나는 슬쩍 몸을 일으켰다.
“저는 이제 그만…….”
“…….”
“르마르 양?”
“……저하가 보고 싶어.”
뭐?
“저하는 어디에 계시죠?”
“무슨―”
조금 전만 해도 란슬롯의 이야기를 하며 그렇게 간절해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도미니크는 왜 찾는 거지?
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저하를 뵈어야 해. 내가 그의 곁에 있어야 해.”
“잠깐만요, 잠깐, 영애!”
아무래도 이상해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이거 놔요!”
그녀는 벌컥 성을 내며 나를 떠밀었는데, 그 탓에 풍성한 소매가 나부끼며 팔등이 보였다.
‘어?’
“저하를, 저하를―”
난 얼른 카트린을 붙들었다.
“이거 뭐예요?”
그녀의 팔등에 검은 반점이 보였다. 마치 에이레네에게 생겼던 반점처럼!
“이 점, 원래 있던 건가요?”
“……점이라니요?”
“반점이 있잖아요. 영애의 팔등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반점은 무슨.”
카트린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내 팔을 쳐 내고, 교감의 집무실을 떠났다.
‘말도 안 돼. 저렇게 큰 점이 안 보인단 말이야?’
차를 마시기 전 내 손을 잡았을 땐 분명 없던 점이었다. 나는 카트린이 놓고 간 검은 차를 들었다. 가까이 마주하니 점점 더 기분이 나쁘다. 병을 열어 냄새를 맡아 본 나는 “우욱―”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에이레네의 냄새다.’
정확히 말하면 삿된 자가 된 에이레네에게서 나던 냄새. 시체가 부패한 것 같은 역한 냄새 말이다.
난 검은 병을 가지고 쟝뤼크의 연구실을 찾았다.
‘성식을 분명히 여기에 두었는데…….’
조미료가 든 찬장을 뒤지고 있을 때, 덜컹! 문이 열렸다.
“아직 수업 시작 전인데 벌써 온 것이냐.”
“교수님.”
쟝뤼크가 성식 병을 든 채로 내게 말을 걸었다.
“그거―!”
“아, 그렇지. 이건 네가 가져온 것이지.”
“교수님께서 그걸 왜…….”
“내 스승의 일기에 쓰인 것이 이것과 비슷하거든.”
“일기장에요?”
쟝뤼크는 성식 병과 어떤 책을 조리대 위에 올려 두었다. 저 책은 내가 줄리아 리올 재상으로부터 찾아다 준 쟝뤼크의 스승, 쟝의 레시피북이었다. 책장을 넘기던 쟝뤼크가 표시한 곳을 발견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옥타비우스력 12년 4월.
어느 귀족이 나를 찾아와 붉은 가루를 건넸다. 온갖 조미료를 가진 내게 붉은 가루에 관해 물으려던 것이다. 하지만 나조차도 육십 년 평생 본 바 없는 조미료였다. 제국 사방(四方)에서 모인 로열 키친의 요리사들에게도 물었으나 아무도 정체를 알지 못했다.]
[옥타비우스력 12년 5월.
내게 붉은 가루를 맡겼던 귀족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효험을 눈으로 확인했다는 그는 흥분한 기색이었다. 그는 죽을 날을 받아 온 환자가 기력을 차리고, 시력을 잃은 기사가 다시 세상을 보았으며, 아둔한 자의 머리에서 세기의 지략이 나왔노라 말했다.
이 신비한 조미료를 로열 셰프의 령으로 제국에 퍼뜨린다면 제국은 역사에 다시 없을 강대국이 될 것이라 호언장담했다. 나는 잠꼬대는 밤에나 하라며 그를 쫓아냈다.]
[옥타비우스력 13년 2월.
로열 키친에서 쫓겨났다. 내 휘하의 요리사가 노쇠로 미각을 잃었다며 나를 발고한 것이다. 개자식들. 내가 미각을 잃은 이유는 음독 때문이다. 나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내게 독을 먹인 건 분명 그 귀족이다. 붉은 가루의 수입을 허가하지 않아 앙심을 품은 게 틀림없다.]
[옥타비우스력 13년 3월.
나는 로열 키친에 다시 입관하기 위해 아발론을 찾으려 했지만, 그 귀족 때문에 단념했다. 제자의 앞날이 나로 인해 망가지길 바라느냐는 협박 앞에서 난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옥타비우스력 18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느낌이 온다. 이런 시기에 붉은 가루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다행일까, 불행일까.
붉은 가루는 절대로 제국에 퍼져서는 안 되는 삿된 물건이다. 아탈란이 성식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삿된 자의 덩어리를 일부 떼어 낸 검은 액체에서 가공한 것이다.
내가 있는 지역의 관리들에게 고발장을 썼지만, 노망난 늙은이의 헛소리로 치부되었다. 전설 속에나 나오는 삿된 자들의 시체로 만드는 조미료라니. 나조차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쟝뤼크와 나는 굳은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검은 액체라면 이거예요.”
쟝뤼크에게 병을 건네자 그는 서둘러 뚜껑을 열어 냄새를 확인했다.
“맞구나.”
“성식이 널리 퍼지고 있어요. 어떡하지요? 폐하께 말씀드려서―”
“삿된 자를 보이지 않는 한, 스승님 때처럼 헛소리로 치부될 거다.”
그는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쥐었다.
“보인다 해도 거리낄 뿐이지 계속 쓰일 테지.”
맞아. 아둔한 자가 영리해지고,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사람이 건강해진다면 절박한 자들은 외려 성식을 찾을 거다.
“하지만 성식엔 부작용이 있어요!”
“부작용?”
“에이레네 사비에르가 이걸 복용했던 것 같아요.”
나는 검은 액체가 든 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애는 종국엔 삿된 자가 되어서 죽었어요.”
“……!”
카트린 몸의 반점을 보면 내 추측이 맞을 거다.
“하지만 그걸 증명하기 위해 산 사람을 붙잡아 이것을 계속 복용시킬 수도 없지 않으냐.”
“그런데 아탈란은 삿된 자들을 어디서 데려오는 걸까요…… 아!”
“에이레네 사비에르 때 그러했듯 직접 만드는 거겠지. 실험장이 있을 거야.”
실험장이라고 하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우리 영지 근처에 있는 슈라의 부족 마을이야!’
하지만 슈라의 부족은 아탈란을 몹시 경계하고 있었다. 분명 그런 실험장이 하나 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지? 제국민을 삿된 자로 만들어서 좋은 게 뭐야.”
순간 황실 서고에 있던 삿된 자와 관련된 책이 떠올랐다.
‘삿된 자 만 구의 시체와 다섯 가지의 재료가 모이면 인력으로는 다스릴 수 없는 거대한 어둠이 도래한댔어.’
그거다! 아탈란의 목표는 강대한 어둠을 도래시켜 다시 종교를 부흥시키려는 거야.
‘잠깐만.’
[조율자는 내 것……. 조율자…… 도미니크…….]
에이레네는 삿된 자가 되어 죽기 직전에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조율자가 도미니크라는 건가.
‘그래, 에이레네도 카트린처럼 도미니크에게 집착했어.’
내가 알고 있는 바를 쟝뤼크에게 말하자 그는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개자식들.”
“저는 저희 가족에게 이 일을 알릴게요.”
“그래.”
나는 즉시 통신석을 들고 아빠에게 이 일을 알렸다.
“―그렇게 된 거예요.”
[해서 너는.]
“네?”
[너는 괜찮으냐.]
“아직까지는요.”
[곧 졸업이니 일단 황도로 돌아와. 카트린 르마르에게 반점이 생겼다는 건 그녀가 삿된 자화될 거라는 의미일 거다.]
“여기서 더 성식 원액을 복용하지 않으면 괜찮을지도 몰라요. 아직 알아볼 것도 있고요.”
[어떻게 막으려고?]
“으음, 그 애가 성식 원액을 멀리할 정도로 집착할 만한 게 있어요.”
[집착할 만한 것?]
“그러니까…… 큰오빠요.”
내가 어색하게 웃자 아빠는 [그렇군.] 하더니 잠시 침묵했다.
* * *
난 카트린과 란슬롯을 흘끔흘끔 쳐다봤다.
‘우와…….’
아빠에게 지시를 받은 란슬롯은 작정하고 달콤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영애.”
“그럼요! 란슬롯 님께서도 잘 지내셨는지…….”
“저야 물론. 한데 얼굴이 상하셨습니다.”
“그, 그런가요?”
“염려를 숨길 수 없음을 용서하십시오.”
“용서라니요! 전혀!”
란슬롯은 싱긋 웃으며 그녀의 손등에 입 맞췄다.
“다시 뵈어 영광입니다.”
본래 로맨틱한 남자가 마음먹고 유혹하려 드니 세상에 저런 요물이 없는 것 같다. 카트린은 흐물흐물 녹을 것 같았다.
“아차! 란슬롯 님께 드릴 것이 있는데, 잠시만요.”
그녀가 후다닥 사라지자 란슬롯의 표정이 단숨에 변했다. 지루하다는 듯 미간을 약간 좁히다 내 머리칼을 살짝 쥐고 끝에 입 맞췄다.
“소독.”
“……?”
“귀찮은데 가 버릴까.”
그가 짓궂게 말해서 난 펄쩍 뛰며 반대편 머리칼도 그에게 쥐여 주었다.
“하세요. 마음껏 소독하세요.”
쿡쿡 웃은 그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요, 오빠…….”
“음?”
“연기 천재예요. 완전 요물! 깜짝 놀랐어요. 최고!”
내가 엄지손가락을 들며 칭찬하자 란슬롯의 표정이 묘해졌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다행이라고 하면서 어쩐지 떨떠름한 기색이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카트린이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환히 웃으며 몸통만 한 꽃다발을 들고 오더니 란슬롯 앞 테이블에 풀썩! 내려놓았다.
‘엄청 크다.’
란슬롯이 내게 준 올포러브 꽃다발의 서너 배쯤은 되겠다. 란슬롯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게 뭡니까?” 하고 물었고, 카트린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수그렸다.
“란슬롯 님과 꼭 어울리는 프리지어랍니다. 첫 데이트의 선물로…….”
“그러니까 제게 말이죠……. 꽃다발을 영애가 제게…….”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란슬롯은 기막힌 듯 실소를 흘리며 “강적인데.” 하고 중얼거렸다. 카트린이 못 들었는지 “네?” 하고 되물었다.
“아닙니다. 그럼 식사하러 가실까요? 우리 막내가 점심때라.”
“아……. 프렌시프 영애는 계속 여기 계시는……?”
“저는 데이트를 할 적엔 늘 막내를 데리고 다닐 생각입니다. 싫으시다면―”
그가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만남은 이것으로 마칠까요.”
돌려보내는 게 아니라? 나는 그냥 가면 안 될까?
카트린은 얼른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식사하러 가지요!”
우리는 식사를 했고, 오빠는 계산을 마치자마자 말했다.
“잠시 걸을까요. 막내에게 보여 주고 싶은 산책로가 있어서.”
산책이 끝나면.
“잡화점은 어떠십니까? 막내에게 사 주고 싶은 물건이 있어서.”
잡화점에 들렀다 나오는 길엔.
“아카데미로 걸으실까요. 막내가 낮잠을 잘 시간이어서.”
이거 아무리 봐도 데이트 아닌 것 같아…….
나는 기숙사 침대에서 뒹굴뒹굴 구르며 가웨인과 통화했다.
“네! 엄청 이상한 데이트였는데요, 카트린은 좋아했어요.”
[그렇겠지. 형은 사람 다루는 데는 천재거든. 특히 본인에게 반한 사람.]
가웨인은 헹, 코웃음 치며 말해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검은 성식을 가져왔다는 카트린 르마르의 하녀 말인데.]
“네.”
[조사해 보니 확실히 미심쩍은 구석이 있더군. 과거에 일했다던 귀족가가 전부 올리비에 폐공작과 연관된 곳이었어.]
“그럼 제가 직접 만나서 수사를―”
[안 돼!]
[절대로.]
[하지 마!]
가웨인의 말에 이어서 아빠와 할아버지가 버럭 소리쳤다. 난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지금 화내신…….”
무서워.
그러자 통신석에서 당황한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를 낸 게 아니라, 아탈란의 끄나풀일 것이 뻔한데 굳이 네가 직접 만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지.]
할아버지가 변명하듯 말했다.
[기사들을 시키면 되고.]
[우리가 잡아들일 테니 너는 아카데미에 얌전히 있어라. 아무래도 도미니크 황자 때문에 아탈란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
“저하요?”
[그래. 삿된 자화 된 자들이 모두 그에게 집착했다는 건 삿된 자들이 도미니크에게 우호적이란 뜻이겠지.]
[만 구의 삿된 자를 만들어야 한다면, 만드는 동안 그들을 사육할 방도도 필요할 거다.]
[조율자라는 게 그런 역할을 하는 자일지도 모르지.]
아하.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럼 저하에게 딱 붙어 있어야겠군요!”
잘됐다.
내가 밝게 얘기했다.
[……딱 붙어 있을 필요는 없어.]
[굳이 뭘 붙어 있어.]
[그래.]
[되도록 멀찍이.]
[옷깃이 스치지 않는 안전거리로.]
[맞다.]
언제는 도미니크의 옆에 있으랬으면서?
나는 통신을 종료하고 흠, 침음을 흘렸다.
‘저하도 일에 엮인 장본인이니 아는 게 좋겠지?’
시간을 확인하니 때마침 도미니크가 숙소로 돌아올 즈음이다. 나는 알베르에게 연락해서 숙소에 가 있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예, 저하께 전달하겠습니다. 곧 돌아가실 테니 응접실에서 기다리시지요.]
허락을 받은 후 포털을 통해 숙소로 이동했다. 그런데 가지고 있던 검은 성식이 난데없이 격렬히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삿된 자의 일부라서 도미니크의 공간에 있으니 동요하는 걸까.’
내가 본 삿된 자들은 덩어리가 뭉쳐져 커다란 괴물이 되기도 했다. 혹시나 검은 액체가 다른 삿된 자를 몰고 올까 봐 불안해졌다. 난 멀린과 테디의 마원을 쥐었다.
‘현신해 주세요.’
그러자 마원들이 밝게 빛나며 땅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멀린과 테디가 금세 현신하여 내 앞에 나타났다.
“아앗!”
테디는 몰라도 멀린은 너무 크다! 응접실이 부서질지도 몰라.
“머, 멀린, 여기 소파에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지세요.”
“누나, 나도? 나도? 나도 소파에 앉아?”
테디는 이미 작지만,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번 빛이 퍼졌고, 두 성수는 다른 것으로 변모했다. ……사람으로.
“멀린도 사람으로 변할 수 있었어요?”
“주인이 원하는 모든 것으로 변할 수 있다오.”
상한 곳 하나 없이 매끄러운 은발과 새파란 눈동자를 가진 미남이 대답했다. 말투를 보고 인간으로 현신하면 할아버지쯤 되는 줄로 알았더니, 도미니크 또래로 보였다. 테디가 나를 꽉 끌어안아 왔다. 일전에 보았던 것처럼 아이돌 인상의 귀여운 미소년이 되어서.
“잠깐만, 숨 막혀.”
“누나 좋아. 누나는 내 거야.”
“주인이 숨 막힌다지 않느냐.”
멀린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고, 테디는 내게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오셨습니까, 영…… 너희는 뭐 하는 새끼들이야.”
도미니크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테디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누나 건데.”
“나도 그렇소.”
도미니크가 나를 쳐다봐서 난 해맑게 “네, 제 거예요!” 하고 외쳤다.
“…….”
“……?”
도미니크가 미간을 엄지로 꾹 눌렀다.
“그러니까 저들이 성수라는 겁니까.”
“네.”
“인간 남자가 말이죠.”
“동물로도 변할 수 있어요. 멀린은 엄청 멋진 백사자고, 테디는 귀여운 반달곰이에요.”
“멋지고 귀엽다…….”
“네!”
“나보다?”
“네?”
“…….”
“……?”
도미니크는 한숨을 가늘게 내쉬고 멀린과 테디를 쳐다봤다. 테디는 여전히 내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테디의 말에 멀린은 침묵했지만, 왜인지 동의하는 것 같아서 난 민망해졌다.
“면전에서 그런 말 하면 못써.”
“하지만 저 꼬맹이는 면전에서 눈으로 말하는걸. ‘너 싫어’ 하고.”
도미니크가 “꼬맹이…….” 하며 인상을 썼다.
“누구더러 꼬맹이라는 거야. 이 꼬맹이가.”
“꼬맹이지! 나는 네 조상의 조상의 조상이 젖 투정할 때부터 이만했다고!”
“빌어먹을 신수가…….”
“누나, 쟤 나쁜 말 써요.”
테디가 나를 보며 눈썹을 착 늘어뜨렸다.
“저하도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돼요.”
도미니크는 짓씹듯 “약아빠져선.” 하고 테디를 노려봤다.
“누나, 쟤가 나 노려봐요.”
“왜 영애는 ‘누나’고 난 ‘꼬맹이’지?”
“누나는 누나니까 그렇지. 넌 바보야?”
“내 조상이 젖 투정하는 것도 봤다면서 왜 영애가 네 누나가 되느냔 말이다. 누나란 손위 여자 형제를 가리키는 말인데.”
“누나, 쟤가 어려운 말 해…….”
테디가 울먹거렸고 난 당황해서 그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아, 아무튼! 아무튼 제가 온 이유는 성수를 보여드리기 위해서가 아니고요.”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소파에 삐딱하게 앉아 있던 도미니크가 자세를 바로 했다.
“일전에 에이레네 사비에르가 저하를 조율자라고 부른 것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삿된 자를 부리는 신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알고 계세요?”
“제 쪽에서도 조사를 진행해 왔으니까요. 황족이니 정보에 접근하는 게 영애보다는 쉽습니다.”
나와 도미니크는 서로 알고 있는 정보에 관해 교환했다.
“……올리비에 폐공작 사건에도 연루되었다, 라.”
“르마르 영애도 검은 성식을 복용 중이에요. 에이레네 사비에르와 르마르 영애가 저하께 집착했던 건…….”
“제가 조율자이기 때문이었군요. 하면 어둠을 도래시키기 위해 필요한 재료는…….”
조율자. 빼앗긴 자. 빼앗은 자. 성수. 만 구의 삿된 자. 이렇게 다섯이 아탈란에서 필요로 하는 재료였다.
“하면 영애는 빼앗긴 자입니까, 빼앗은 자입니까.”
“그걸 모르겠어요. 제가 재료 중 하나라는 건 확실한데…….”
“영애가 로열 키친에 입관할 수 없도록 방해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어쩌면 그건 로열 키친에 가면 알게 될 수도 있습니다.”
“네.”
이대로 도망친다고 해도 아탈란의 목적에 나와 저하가 필요하다면 언제고 공격해올 거다. 또다시 그들에 의해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지기 전에 계략을 저지한다. 그게 우리의 결론이었다. 그때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알렉입니다.”
나는 도미니크에게 얼른 “들어와도 되죠?” 하고 물었고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와!”
이내 알렉시아가 들어왔고, 난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오늘은 유난히 멋지네.”
저 옷은 소대장급이나 입는 게 아닌가? 고레일과 바커스 그리고 빅터, 카터 형제가 입던 화려한 정복이었다. 알렉은 아직 그렇게 높은 직급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가 당황해서 말하자 알렉시아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영광입니다. 한데 두 분은…….”
그녀가 내 양옆에 있는 성수들을 쳐다보았다.
“으응. 내 성수들.”
“그렇군요. 한데, 아가씨. 밤이 깊었으니 이제 기숙사로 돌아가시는 게 어떨까요. 두 분 도련님께서 걱정이 크십니다.”
“가야지……. 금방 나갈게. 먼저 나가 있어.”
“예.”
알렉시아가 나가고 난 성수들을 다시 마원 안으로 불러들였다. 응접실엔 도미니크와 나만 남았고, 그의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저하.”
“……예.”
“눈 아프실 것 같은데.”
“안 아픕니다.”
“엄청 힘줘서 문과 마원을 노려보고 계시잖아요.”
“괜찮습니다.”
나는 눈을 도르륵 굴리다가 그의 옆에 착 앉았다. 그의 몸이 잠깐 흠칫, 굳어졌다. 혹여나 문밖의 알렉시아가 들을까 봐 양손으로 입을 모은 채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은 저하가 제일 멋져요.”
“…….”
“알렉과 성수들이 알면 서운해할 테니까 비밀이에요?”
도미니크는 한숨을 푹 내쉬며 “정말이지.” 하고는 나를 끌어안았다.
“나를 얼리는 것도 녹이는 것도 영애뿐일 겁니다.”
난 헤헤 웃으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가 내 뺨을 가볍게 잡고 입 맞췄다. 촉, 촉. 떨어지는 게 아쉽다는 듯 몇 번이나 달콤하게 입 맞추곤 내 어깨에 턱을 괴었다.
“제게 마음을 주고 계십니까.”
“물론이지요.”
“나만 애걸하는 것 같은데. 증명해 보세요.”
그가 짓궂게 말해서 난 “으음.” 하고 신음하다가 그의 입술에 쪽 입 맞췄다. 도미니크는 얼굴이 약간 붉어진 날 보고 픽, 실소를 흘렸다.
“말은 언제까지 높일 겁니까?”
“하지만 저하는 저하고 또 교장이기도 하고…… 말을 놓은 걸 들키면 저는 벌을 받을 테고…….”
“해 봐요. 말.”
“말.”
“그게 아니라…….”
도미니크는 고민하듯 한쪽 눈을 찌푸리고 나를 보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공대가 편하다면 됐습니다.”
“편한 건 아니야.”
“……!”
그의 눈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한참 나를 보던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가늘게 떨었다.
“나도 참 중증이군.”
“중증?”
“이마저 좋으니까요.”
“너는 안 놔?”
도미니크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너?” 하고 물었다.
이건 심한가.
“그러면 오빠?”
“프렌시프 경들도 다 듣는 말은 싫습니다.”
“그럼…….”
나는 끙끙 고민하다가 슬쩍 그를 쳐다봤다.
“자기?”
“…….”
“꺄악!”
순식간이었다. 그가 나를 소파에 휙! 눕혀선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한 번 더.”
“자기야.”
난 킥킥 웃으며 말했고, 그는 내 코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좀 더.”
“이제 그만할래요. 이러다가 입에 붙어서 남들 앞에서 말을 놓으면 어떻게 해요? 자기라고 부르면 정말 큰일 난다고요.”
나는 ‘제발 봐주세요’ 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도미니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알베르가 들어왔다.
“저하, 황궁에서 급한 전갈…….”
우리의 자세를 본 알베르는 잠깐 굳어져서 입을 뻐끔거렸다.
“그, 저기, 음…… 마저 하십시오.”
으악! 난 얼른 도미니크를 밀어내고 벌떡 일어났다.
“겨, 경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어, 그러니까…… 저하가 미끄러져서! 네! 미끄러져서요!”
“소파에서 어떤 일을 해야 미끄러지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으로 하지요.”
“아니, 그게―!”
난 몰라.
온몸이 화르륵 달아오르는 것만 같아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뛰어나갔다. 뛰어가는 중에 퍽! 누군가 얻어맞는 소리가 들렸다.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통신석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도미니크였다.
[카트린 르마르가 영애에게 검은 성식을 주었다는 걸 알게 되면 아탈란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그렇겠지요.”
[당분간 아카데미에서 나가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호출하십시오.]
“그럴게요.”
짧은 대화를 마치고 난 다시 양 뺨을 감쌌다. 자꾸만 알베르에게 들켰던 순간이 떠올라서 쥐구멍을 찾고 싶어진다.
‘빨리 졸업을 해야 해.’
아카데미 내에서 다시 알베르와 마주치면 얼굴이 터질지도 모른다. 나는 후하, 후하, 심호흡한 뒤 침대에 살포시 앉았다.
‘큰오빠가 카트린을 잘 데려다줬으려나?’
둘이 있을 때 검은 성식을 구해 온 하녀에 관해 묻는다고 했는데.
나는 통신석에 란슬롯의 코드를 입력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그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그가 내 통신을 받지 않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뭐지.”
일찍 잠든 걸까?
어쩐지 불안해져서 난 시계를 확인했다.
‘잠들 시간이긴 해.’
내일이면 내 코드가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연락해 올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혹시 몰라서 아빠와 가웨인에게 란슬롯과 연락이 되면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다음 날에도 란슬롯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알렉시아가 불안에 떠는 내게 말했다.
“긴한 용무가 있어 연락이 어려우신 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빠와도 연락이 안 된다고 하는걸! 호위들은? 마부는 뭐래?”
“……어젯밤엔 숙소로 돌아오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이상해. 벌써 대낮이야. 세 시라고!”
나는 알렉시아에게 카트린의 통신석 코드를 알아 오라고 지시했다. 알렉시아는 황도의 정보부에게 연락해 카트린의 코드를 알아 왔는데, 카트린과도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카트린이 삿된 자가 된 게 아닐까. 그래서 란슬롯이 그녀를 막아 내다가…….’
하지만 그렇다면 ‘그것’이 발동했을 텐데.
자꾸만 끔찍한 상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 * *
카트린의 유모로 일한 아탈란의 수족, 오르가는 호텔 방에 늘어진 남자를 지그시 응시했다.
“물러나라.”
그녀가 쓰러진 남자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검은 덩어리에게 외쳤다. 그러자 검은 덩어리가 기괴하리만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키에엑―!”
“물러나!”
오르가가 수정구를 들이밀자 검은 덩어리가 주춤, 물러섰다. 이윽고 덩어리는 오물 같은 검은 액체로 변모해 사라졌다.
어젯밤, 그녀는 검은 성식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을 빼낼 만한 이는 카트린 르마르 하나뿐. 즉시 카트린을 추적했고, 란슬롯 프렌시프가 그녀에게 검은 성식에 관해 묻는 것을 보았다.
‘카트린 르마르가 생떼를 써서 주변의 기사들을 물려 놨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란슬롯 프렌시프를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르가는 품 안에서 통신석을 꺼냈다.
“접니다.”
[란슬롯 프렌시프는.]
“명하신 대로 잡아 놓았습니다. 어찌할까요.”
[빌어먹을! 빌어먹을! 일이 이리 갑자기 틀어져서……!]
통신석 속의 남자는 잔뜩 흥분한 기색이었다. 오르가가 쓰러진 란슬롯을 흘깃 쳐다보았다.
“처리해야 합니다.”
[프렌시프의 후계를 죽이자는 말이냐? 노인네가 어찌 나올지 알고!]
“하지만 살려 보내는 게 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
“저와 사제들만으로는 처리할 수 없었기에 삿된 자들까지 불러들였습니다.”
란슬롯 프렌시프가 삿된 자를 목격했다. 이 영리한 자라면 아탈란의 계획을 쉽게 알아차릴 터. 지금에 와서 일을 그르치느니 차라리 처리하는 게 낫다.
[시체는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겠느냐.]
“어둠을 틈타 처리할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카트린 르마르는?]
오르가가 침대 맡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카트린을 흘끔 쳐다보았다.
“억류하여 검은 성식에 중독시키겠습니다. 이번 주 내로 삿된 자로 만들어 지부에 인계하지요.”
[실수가 없어야 할 것이다.]
“예.”
통신을 종료한 오르가는 쓰러진 란슬롯에게 다가갔다. 카트린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공자님께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들으신 대로지요.”
“유, 유모!”
오르가는 새파랗게 질린 카트린을 보며 히죽 웃었다.
“하루라도 더 명줄을 붙들어 놓고 싶으시다면 침묵하십시오.”
“나, 나는 살려 주는 거야? 삿된 자로 만들겠다는 건 무슨 소리―”
오르가가 피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후―, 하고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트린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오르가는 그녀의 멱살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유, 유모, 컥!”
짝! 뺨에 불이 붙은 것만 같았다. 태어나 한 번도 맞아 본 적 없었다. 아버님, 어머님에게도. 카트린은 충혈된 눈으로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는 오르가를 보고 어깨를 발발 떨었다.
“입 닥치라지 않았니.”
“……흑, 흐윽.”
카트린은 엉망이 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오르가가 카트린을 내던졌다. 쿵! 침대 모서리에 등을 찍힌 카트린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신음했다.
“왜 네 멋대로 성식을 가져간 거야. 네가 섣불리 움직이지만 않았어도 프렌시프의 후계가 죽는 일은 없었잖아.”
그때 검은 로브를 쓴 남자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르마르 가의 기사와 시중인은 모두 처리했습니다.”
“호텔을 은밀히 빠져나갈 루트는.”
“찾았습니다.”
“란슬롯 프렌시프를 옮겨라.”
검은 로브의 사내가 란슬롯을 둘러맸다. 오르가는 카트린에게서 통신석을 빼앗고 그녀가 있는 방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두려움에 떠는 카트린은 어떤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방 안에 갇혔다.
아카데미 근처 숲. 검은 로브의 사내가 나무 기둥에 그를 던져 놓자 오르가는 그의 주변에 기름을 뿌렸다.
“정말로 이리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검은 로브의 사내는 찝찝하다는 표정이었다.
“무엇이 문제란 말이냐.”
“근처에 성녀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곳에서 죽이는 것이지. 세간엔 성녀가 후계 자리가 탐나 제 오라비를 죽였다고 알려질 것이다.”
“프렌시프 일가가 그것을 믿을는지요.”
오르가가 입꼬리를 바짝 올렸다.
“처음에야 믿지 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사소한 논쟁이라도 오가면 다를 것이다. 그것이 균열을 만들어 불신을 심어 줄 테니까. 정말로 세니아나가 란슬롯을 죽인 게 아닐까, 하고.
“사람은 믿는 것보다 불신하는 것을 더 잘하는 생물이거든.”
성냥을 갑에 밀자 화르륵 불이 붙었다. 오르가는 빙그레 웃으며 성냥을 던졌다.
“다음 생엔 이런 개죽음은 당하지 않기를 우리의 신, 아탈란께 빌겠습니다.”
―하고 말하며.
“멀린!”
등 뒤에서 비명 같은 고함이 들려왔다. 오르가와 검은 로브의 사내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강렬한 빛이 사방을 뒤덮었다.
오르가가 눈을 찡그렸을 때였다. 쿵! 커다란 소음과 함께 천지가 요동치며 “크르릉―!” 거대한 사자가 하늘을 찢어발길 듯 날카롭게 포효했다. 툭, 투둑, 툭. 머리 위에서 하나둘 빗방울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세찬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형제님!”
검은 로브의 사내가 란슬롯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오르가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옷깃을 태우던 불씨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오빠!”
오르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세니아나를 쳐다봤다.
‘저 계집애가 여길 어떻게―!’
오르가와 검은 로브의 사내가 자리를 피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크르릉! 멀린이 그들을 막아서며 위협하듯 우짖었다.
‘삿된 자들을 다시 불러들여야 한다.’
사람의 힘으로는 성수를 물리칠 수 없다. 게다가 세니아나의 성수인 백사자는 성수들 중 가장 강력한 공격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탈란의 신관이었던 미아(세니아나의 모친)의 성수였기에, 그의 힘이 얼마나 강대한지 잘 알고 있었다. 삿된 자가 아니고서는 상대할 수 없다.
“형제님.”
검은 로브의 사내가 오르가에게 눈짓했다. 오르가가 삿된 자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수정구에 손을 올렸을 때였다.
“움직이지 마라.”
멀린의 뒤에서 도미니크가 걸어 나왔다.
‘조율자!’
“제기랄…….”
조율자가 있는 한 삿된 자들은 불러들일 수 없다. 공격하기는커녕, 까딱 잘못하다간 삿된 자가 도미니크의 수중에 떨어질 수도 있었다. 성수가 푸른 빛에 휩싸여 사라지더니 등 뒤에서 다시 나타났다. 앞은 도미니크, 뒤는 성수. 도망칠 곳이 없다.
“오빠! 란슬롯!”
나는 축 늘어진 란슬롯을 흔들었다.
“오빠, 오―”
그의 긴 속눈썹이 미약하게 떨려왔다.
“정신 드세요?”
“그……래.”
희게 질린 입술 사이에서 쉰 소리가 흘러나왔다. 란슬롯이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괜찮은 거예요?”
손발이 벌벌 떨리고 자꾸만 눈물이 솟구쳤다. 란슬롯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내가 염려할까 봐 애써 웃는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벌떡 일어나서 아탈란의 수족들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중년의 여성이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겁이 없으십니다, 성녀님.”
“네가 우리 오빠를 이렇게 만들었어?”
“모든 일은 신이 안배하신 것이지요. 섭리가 그리 흘렀을 뿐―”
짝! 뺨을 내리친 나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사람을 죽이려고 한 주제에 섭리라고.”
“…….”
“그럼 오늘 너희가 내 손에 죽는 것도 섭리겠군.”
검은 로브의 사내는 움찔, 뒷걸음질 쳤고 중년의 여자는 이를 악물었다.
“제 뒤에 누가 있는 줄 아시고 이리 무례하게 나오실까요.”
“아탈란의 신 따위 하나도 무섭지 않아.”
내 입에서 ‘아탈란’이라는 말이 나오자 여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떻게 당신이―”
“너나 내 뒤에 있는 사람을 두려워해야 할 거야.”
“인간은 신의 피조물일 뿐. 신의 품 안에 있는 제가 누구를 두려워한단 말입니까.”
“나다.”
쿵, 쿵, 쿵! 구둣발 소리와 함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주변을 에워쌌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온 인물은―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싸늘한 얼굴로 중년의 여자와 검은 로브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검은 로브의 사내가 겁을 집어먹은 채 “오르가 님…….” 하며 중년의 여자를 불렀다. 할아버지는 성큼성큼 걸어 여자, 아니, 오르가에게 다가갔다.
“내 성에 쥐새끼를 숨겨 놓질 않나, 내 손녀는 납치하려 하질 않나―”
“…….”
“후계를 죽이려고 하질 않나.”
“…….”
“이리 방자하게 구니 늙은이가 쉬지를 못하지 않으냐. 칼립스!”
비상군의 대장 칼립스가 발을 구르자 프렌시프의 기사들이 그녀와 검은 로브의 사내에게 검을 겨누었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달려가서 물었다.
“죽이실 건가요.”
“너는 신경 쓰지 마라. 이 일은 할애비가―”
“안 돼요.”
나는 할아버지의 팔을 얼른 붙잡았다. 그러자 바커스와 고레일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의 상냥함은 잘 알고 있지만, 부디 이번 일은 지나치시기를 바랍니다.”
“예, 그렇습니다. 프렌시프의 혈족을 공격한 것은 전쟁의 효시입니다. 피하는 건 프렌시프의 명예에―”
아니, 그게 아니라!
“쉽게 죽이면 안 된다고!”
“……뭐라?”
할아버지가 눈을 홉뜨고 물었다.
“그러니까 죽는 것보다 더 괴로워야 한다는 말이에요.”
나는 오르가를 노려보며 음산히 중얼거렸고, 알렉시아에게 부축을 받던 란슬롯이 픽 실소를 흘렸다. 할아버지는 얼빠진 얼굴로 나를 가만히 보다가 이내 으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내 손녀다.”
“…….”
“네 말대로 절대 쉬이 죽이지 않을 테니 안심하여라.”
어느 정도 상황을 정리한 후 호텔로 왔다. 나는 란슬롯의 옆에 딱 붙어서 그에게 미음을 먹였다.
“입맛 없어도 드세요? 약 드시기 전엔 속에 뭐라도 채워 두는 게 좋아요.”
“그래.”
란슬롯은 빙그레 웃으며 내 머리를 두드렸다. 내가 그를 구하러 가기 전에 포털로 이동시킨 할아버지와 아빠, 가웨인은 내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르마르 가의 유모였던 여자와 로브를 입은 놈이 사라진 후 형이 모습을 드러내면 우리 쪽에서 저들을 처리한 걸 아탈란이 알게 될 텐데요.”
“그러니 미끼가 필요하지. 우리가 전쟁을 벌이려는 상대는 대외적으론 르마르여야 한다.”
“굳이 미끼가 필요합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쓸어 버리지요.”
“르마르 공작가와 내 성에도 숨어든 놈이다. 황제의 형제인 올리비에 폐공작까지 이용해 먹은 놈들이니 쉽사리 움직이는 건 멍청한 짓이다.”
“이번엔 어르신의 말씀이 맞으니 자중해라.”
란슬롯은 미음을 먹는 내내 가족들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다.
“한 입만 더요.”
“이제 괜찮아.”
“안 괜찮아요! 한 번만요. 네? 오빠…….”
내가 간절한 표정으로 그를 보자 란슬롯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벌렸다.
“아이, 잘한다! 한 번 더요.”
“아.”
“자, 또 한 번.”
열심히 죽을 먹이느라 몰랐는데, 어느새 내게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할아버지가 “어흐흠.” 헛기침하며 말했다.
“나도 약 먹을 시간이 됐는데 말이지.”
그러자 아빠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어르신이 무슨 약을 잡수신다는 겁니까.”
“나도 약 먹어! 그렇지, 세니아나?”
‘음, 드시기야 하지.’
혈압약.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란슬롯에게 한 번 더 죽을 먹였다.
“옳지, 잘하셨어요. 이제 딱 한 스푼 남았으니까 이것만 마저 드세요?”
가웨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꾀병 아니야?”
스푼으로 그릇을 싹싹 긁어서 한 스푼을 가득 모으던 나는 가웨인을 새초롬히 노려봤다.
“이렇게 다쳤는데 무슨 꾀병이에요. 작은오빠, 나빠요.”
“아니, 죽기 직전에 맞춰서 신호를 보낸 것도 그렇고…….”
“그건 팔찌 때문이거든요!”
나는 인상을 쓰고 란슬롯의 손을 들었다.
“팔찌? 그거…….”
“네, 콜린 백작이 졸업시험 2차 심사자로 왔을 때 영지에서 가져왔던 팔찌요.”
“그게 왜 형 손에 있는 거지?”
“원래 제가 쓰려고 큰오빠에게 가져다 달라고 했어요.”
카트린이 란슬롯에게 홀딱 빠진 걸 몰랐을 때. 나를 원망해서 스위트피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염려되었다. 그래서 스위트피에게 차고 있으라고 하려 했는데, 일이 바뀌며 란슬롯에게 채웠다.
이 팔찌형 마도구는 누를 때마다 위치를 신호로 잡아서 영지로 전송한다. 그래서 이동 경로와 현재 위치를 잡을 수 있었다. 란슬롯이 아카데미 근처 숲으로 이동하며 정신을 차리고 버튼을 누른 덕에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잔머리는 확실히 프렌시프의 혈족 답네.”
가웨인이 씩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칭찬인지 아닌지 모를 말에 난 입을 부루퉁 내밀었다.
‘아차차.’
마지막 미음! 나는 식기 전에 미음을 란슬롯의 입에 넣어 주고, 약을 손에 쥐여 주었다.
“드세요.”
“이런 대접이라면 다칠 만한걸.”
“그런 말씀 마세요!”
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란슬롯의 로브에 불이 붙는 걸 봤을 땐 무슨 정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 들어서 냅다 멀린만 불렀다.
‘멀린이 현명하게 공중으로 바닷물을 이동시켜서 다행이지.’
성수가 어떤 능력이 있는지도 모르고 위험하면 멀린만 찾다니. 이 기회에 멀린과 테디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자세히 얘기를 들어 봐야겠다.
난 란슬롯이 약을 먹는 걸 확인하고 이불을 가슴까지 올려 주었다.
“쉬세요.”
“우리 막내도 쉬어야 할 텐데. 얼굴이 새하얘.”
본인이 훨씬 많이 다쳤으면서 내 생각을 먼저 하는 게 마음 아프고 고맙다.
“오빠…….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을까.”
란슬롯은 고민하는 척 허공을 보다가 날 보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걸.”
“제가 카트린을 만나 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기뻤어.”
“네?”
“네가 의지해 주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야.”
“…….”
“네가 날 죽이라고 지시한 게 아니니 사과할 필요가 없지.”
“오빠…….”
“어제 일은 그저 사고야. 피하지 못한 나도 나빠.”
피하지 않은 거면서.
나는 오빠의 속내를 알고 있다. 팔찌를 가지고 있으니 위험 신호를 보내면 내가 포털로 이동시켜 줄 텐데, 란슬롯은 그러지 않았다. 일부러 저들에게서 도망치지 않은 것이다. 아탈란의 수족을 수중에 넣기 위해서.
‘매번 빚만 지는 것 같아.’
마음의 빚을 어떻게 해야 갚을 수 있을까. 난 한숨을 내쉬며 그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맞아. 사고를 피하지 못한 형이 나쁘다고.”
“그래.”
“그러니 마음 쓰지 마라.”
“세니아나, 넌 잘못한 게 없어.”
“사과는 그만하려무나.”
아빠와 할아버지, 가웨인이 입을 모아서 말하는 바람에 난 기가 막혔다. 생각해 보니 이들은 나처럼 마음 졸인 건 아닌 것 같다. 란슬롯이 없어졌을 때도 굉장히 이성적이었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조사를 명했을 뿐.
‘그러고 보니까 이상하다.’
가족이 납치당했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침착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랑 아빠, 그리고 작은오빠는요…….”
그들이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매사 그리 침착하실 수 있으세요?”
“더한 일도 숱하게 겪으니까.”
아빠의 말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위치에 오르기 위해선 포기해야 하는 것들도 있지.”
“어떤 것들이요?”
“감정 같은.”
가웨인과 란슬롯도 고개를 끄덕여서 난 가족들이 정말로 대단해 보였다. 이렇게 무서운 일은 어떻게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할까. 지금까지 이만한 일을 숱하게 겪었다니 정말로 대단하다.
“힘드셨겠어요. 대단하시고…… 음, 저는 그렇게 못할 것 같아요.”
“그러지 않아도 돼.”
“그래.”
난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계세요. 저는 저하께 다녀올게요.”
“네가 왜!”
가웨인이 버럭 소리쳐서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와주셨잖아요. 아마 아탈란의 수족들이 삿된 자를 풀지 못한 건 저하 때문일걸요?”
“그건……!”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해요.”
“…….”
난 “다녀올게요.” 하고 말한 뒤 종종걸음으로 호텔 복도를 걸었다. 계단을 걷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여간에 사기꾼들이란.”
“그런 비상한 머리를 가졌으면 뭘 해도 될 텐데 왜 하필 사기를 친담.”
“그러게 말이에요.”
“뭔데요? 무슨 일 있었나요?”
“요새 통신 사기꾼들이 기승을 부린다잖아요.”
통신 사기꾼? 나는 걸음을 멈추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호텔에서 묵는 귀족들을 노리는 사기꾼들이래요.”
“호텔 로얄층에는 통신석이 비치되어 있잖아요?”
“그렇죠.”
“아! 통신을 걸어서 ‘내가 네 자식을 데리고 있다. 돌려받고 싶으면 지시한 곳에 금을 보내라’ 하고 말하는 사기꾼들 말이죠?”
젊은 여자는 들어 봤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는 한 단계 더 발전한 모양이더라고요.”
“호텔 통신석은 음질이 안 좋잖아요. 목소리를 구분하기 힘들고, 끊겨서 들리니까 그걸 이용해서 ‘나야 나!’ 하며 사기를 친대요.”
“세상에!”
듣던 나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상한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런 사기, 윤세나의 세계에도 많았는데.’
보이스 피싱 말이다.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 * *
“뭐 하느라 이렇게 안 오는 거야.”
가웨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창밖을 노려보았다. 도미니크를 만나러 간 세니아나가 두 시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나베리우스와 아서의 심기도 불편했다. 참다못한 나베리우스는 세니아나를 찾으러 가겠다며 방을 나섰다. 그때 뚜르르― 방에 비치된 통신석이 울리기 시작했다.
‘세니아나인가.’
나베리우스가 얼른 통신석을 연결했다.
[나야 나!]
한참 통신석에서 나오는 목소리와 대화하던 나베리우스가 통신석을 내던지고 벌떡 일어났다. 쾅! 아서와 가웨인, 란슬롯이 모인 방문을 연 그가 새파래진 얼굴로 소리쳤다.
“돈! 돈을 보내야 한다!”
나베리우스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 아서는 미간을 좁혔다.
“난데없이 무슨 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세니아나가 사고를 냈단다.”
그러자 가웨인이 “사고라고요?!” 하고 소리쳤다. 침대 헤드에 기대있던 란슬롯도 반쯤 몸을 일으켰다.
“당장 돈을 가져오지 않으면 잡혀간다더군! 이 지역 감찰관이…… 그래, 렌달이로군. 어서 그자에게 연락해라.”
나베리우스는 이마를 짚으며 이어 말했다.
“헌병 대장과 이 지역의 영주인 코티아르 백작에게도.”
“헌병 대장에게까지요?!”
“사람을 죽였다더군.”
“성수가 말입니까.”
“아무래― 에잇! 가타부타 물을 것 없이 바로 연락해라. 아니지, 차라리 황궁에 연락을 해야겠다!”
나베리우스는 “내가 황제를 직접 만나겠다고 전해라!” 하며 펄펄 뛰었다. 아서는 긴가민가한 표정이었고, 란슬롯은 다급한 나베리우스와 가웨인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잠깐, 가웨인.”
“형은 가만히 있어. 이번 일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어떻게 처리한다는 거야.”
“일단 시체부터 처리해야지.”
가웨인과 나베리우스가 뛰쳐나갔다. 아서는 가만히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다 통신석을 꺼냈다. 세니아나에게 통신을 연결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나가 봐야겠군.”
아서마저 나베리우스의 뒤를 쫓아 방을 나섰다. 홀로 남아 있던 란슬롯은 열린 방문을 흘깃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이거 그것 같은데.’
근래 기승을 부린다는 좀벌레들 말이다. 사기꾼들이 호텔에 비치된 통신석에 마구잡이로 연락해서는 사고를 쳤으니 어서 돈을 보내 달라고 혼을 쏙 빼놓는다고 했다. 란슬롯은 협탁에 놓인 제 통신석을 향해 손을 뻗다가 공중에서 우뚝 멈추었다.
‘굳이 조부님과 가웨인만 좋은 일을 해 줄 필요는 없지.’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니.
란슬롯이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 * *
도미니크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난 기숙사에 들렀다.
“코트가…… 아, 짐가방에 있구나.”
란슬롯의 신호를 받자마자 정신없이 나선 덕에 얇은 실내용 드레스만 달랑 입은 채였다. 이제 가을이 지나고 초겨울에 접어들었다. 새벽엔 입김까지 뽀얗게 나올 정도라서 몸이 으슬으슬하다. 코트를 찾기 위해 짐가방을 풀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무 일찍 정리했나 봐.’
곧 졸업이라 일찌감치 정리했는데, 너무 서두른 모양이다. 짐 속에서 코트를 찾는다고 시간을 꽤 잡아먹어 버렸다. 난 얼른 외투를 두르고 기숙사를 나섰다. 포털로 이동할까 하다가 아카데미 앞 가판대에서 파는 병아리콩 수프가 떠올랐다.
엄청나게 맛있다고 다들 호평이던데.
‘란슬롯에게 사다 줘야지.’
걸어서 아카데미를 나섰다. 그런데 길거리에 평소 보지 못한 제복의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헌병대가 무슨 일로 이렇게 많이 모였을까요?”
“뭔가를 찾는다던데.”
“살인 사건이라도 난 게 아닐까요?”
“모르긴 몰라도 큰일인 모양이야.”
헌병대라고?
‘대체 무슨 일이람.’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병아리콩 수프를 파는 노점상으로 갔다.
“저, 수프를 사려고 하는데요.”
“장사 끝났소.”
“벌써요?”
아직 해도 안 떨어졌다.
“살인범이 숨어 있다는데 무서워서 어디 장사하겠소? 아가씨도 괜히 어슬렁거리다가 위험한 일 당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시오.”
수프 장수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가판대를 정리했다. 나는 소득 없이 노점을 벗어나서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호텔 안도 혼잡스러웠다. 웬 자루를 둘러맨 자들이 속속들이 로비로 모이고 있었다.
“그쪽도 그분께 연락을 받고 온 거요?”
“예, 하면 그쪽도……?”
“돈 있는 졸부들은 모두 불러모았다던데.”
“당장 현금을 가져오라고 하시니…… 이게 강탈이 아니면 뭡니까.”
“돈을 약탈하는 분은 아니셨는데…….”
“역시 귀족 나리들 속은 모르는가 봅니다. 괜히 악당 위에 어르신 있다는 소리가 있는 게 아니었어요.”
‘어르신이라고?’
우리 할아버지 말고 어르신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또 있나 보다. 그 어른은 정말 나쁜 사람이네. 남들 돈을 강탈하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아니, 올라가려고 했다.
“찾았습니다!”
누군가 외치자 헌병대가 우르르 몰려와 나를 포위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뭔데, 무슨 일인데!’
헌병대라면 한국으로 따지면 경찰 아닌가. 나는 일생 경찰에 둘러싸인 적이 없었다. 굳이 따지면 경찰보다는 조폭이나 사채업자 쪽이 익숙한 인생이었다. 처음 겪는 일에 덜컥 겁이 났다. 어깨를 바짝 움츠린 채 굳어져 있으니, 나를 포위한 헌병들 사이로 꽤 직급이 높아 보이는 사내가 걸어 나왔다.
“녹색 머리, 붉은 눈이라. 맞군.”
“무, 무슨 일로 저를…….”
엄청나게 무섭게 생겨서 정말로 겁이 났다. 그가 내게 바짝 다가와서 속삭였다.
“사람을 죽였다고.”
“네―?!”
내가 왜 사람을 죽인단 말인가!
‘오르가는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건 그냥 관용적 의미였는데…….’
그것도 죄가 되는 건가요? 하지만 그쪽이 먼저 내 가족을 죽이려고 했는데요.
처음 겪는 일이 두려워서 눈이 팽팽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힘들어서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치, 침착해야 해.’
마른 침을 꼴깍 삼킨 나는 눈에 힘을 주었다.
“저는 사람을 죽인 적이―”
“모시겠습니다.”
“으엉? 아니, 네?”
“어르신의 명을 받고 왔으니 안심하십시오. 시체는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아무런 일이 없었던 듯 사실 수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예?”
그게 무슨 말이람.
‘그래도 되는 건가요?’
난 눈을 도르륵 굴렸고, 사내는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이제 사고를 낸 곳으로 안내해 주시지요.”
“저는 사고를 낸 적이 없는데요?”
“사람을 죽였다고 호텔로 연락하셨다지 않았습니까?”
“아니요?”
“예?”
“아니라니까요?”
나와 사내는 눈을 끔뻑거리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거 설마…….’
난 한숨을 푹 내쉬고 허리를 짚었다.
“할아버지는 어디 계시나요?”
“그게, 헉!”
사내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는 방에 올라가 있어도 되겠지요?”
“그……! 예, 예! 그럼요!”
사내가 지나가라는 듯 몸을 틀어서 난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갔다. 뒤에서 “이 등신들! 이거 그거잖아!” 하고 소리치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앗―!”
“뻘짓만 했군. 어떤 놈이 어르신의 연락을 받은 거야! 제대로 상황을 들었어야지!”
“연락받은 분이 헌병 대장님이셔서…….”
“빌어먹을! 창피만 당하게 생겼군. 헌병대가 사기에 놀아나다니! 당장 아랫놈들 입단속부터 시켜!”
헌병대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난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호텔 방으로 올라가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벌컥! 문이 열렸다.
“세니아나야!”
“세니아나!”
“세니안.”
할아버지와 가웨인, 아빠가 순서대로 방에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다급히 내 어깨를 잡고 물었다.
“괜찮아, 괜찮다. 이 할애비가 아무런 일 없었던 것처럼 살게 할 것이다. 나를 믿어라.”
“……제가 통신을 연락해서 뭐라고 하던가요?”
“뭐?”
할아버지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사람을 죽였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돈을 내놓으라고 했지요?”
“그래.”
“할아버지.”
“그래.”
“당하셨어요.”
내 말에 할아버지와 가웨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사기라고요. 요새 유행하는 통신 사기예요.”
“……뭐라?”
할아버지와 가웨인은 얼이 빠졌다. 방에선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붉어진 얼굴의 할아버지를 보다가 허탈한 표정의 가웨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대체 왜 헌병대에게…… 설마 다른 곳에도 연락하셨어요?”
“…….”
“…….”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란슬롯이 픽 실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다행히 황궁엔 아직 연락이 가지 않았어.”
“황궁에도요!”
내가 정말로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천만다행이다.
‘제국이 들썩일 뻔했어.’
권력자 할아버지는 무척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다시 아로새겼다. 조심해야지.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돈은 보내셨어요?”
“아직…….”
“다행이네요. 돈까지 잃지는 않아서.”
그러자 아빠가 “체면을 잃었지.” 하고 신랄하게 중얼거렸다. 할아버지가 아빠를 홱 노려보았다.
“네놈도 나서긴 하지 않았느냐.”
“세니안과 연락이 안 되니까요. 연락을 취한 다음 움직이려 했습니다.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능구렁이 같은 놈이.”
“로비에 있는 자들은 어찌하실 겁니까.”
로비에 있는 사람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빠를 쳐다보았다.
“협박까지 해서 현금을 모으시지 않았습니까.”
“협박이요?”
나는 깜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 설마 악당 위에 있다는 어르신이 우리 할아버지였던 건가!
“어떻게 해요! 얼른 돌려보내세요.”
“…….”
“정말로 빼앗으려고 하신 건 아니시죠?”
“…….”
“……할아버지?”
“아니, 영지나 황도 저택에서 현금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그래서 빼앗으려고 하신 거예요?”
“…….”
나는 호텔 로비로 연락해서 돈을 가져온 사람들을 방안으로 불러모았다. 돈 자루를 짊어진 이들이 희게 질린 표정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가, 가져왔습니다, 어르신.”
“필요한 만큼 쓰시고 또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예, 예.”
나는 할아버지의 허리를 쿡 찔렀다. 할아버지는 커흠, 헛기침을 하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돈은 다시 가져가도 좋다.”
나는 사람들이 다행이라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사람들의 얼굴은 이전보다 더 안 좋아졌다. 낯빛이 쑥색이 되어 벌벌 떨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통신석을 들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당장 있는 대로 현금을 전부 가져와라!”
“이걸로는 부족하다신다. 어서!”
“전 재산이라도 가져와!”
난 당황해서 할아버지를 보았고, 할아버지는 왈칵 인상을 쓰며 말했다.
“됐다니까!”
그렇게 말하니 이번엔 얼굴이 거무죽죽해져서 “저택을 팔아서 현금을 만들어라!” 하고 통신석에 소리쳤다.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사신 걸까…….’
눈을 가늘게 뜨고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오해다.”
할아버지가 당황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난 겁을 잔뜩 집어먹은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그제야 사람들은 정말로 돌아가도 좋다는 뜻이었다는 걸 알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면 돈은 왜 가져오라고 하신 거지?”
누군가 중얼거리자 다른 사람이 “아하!” 하며 소리쳤다.
“충성도 시험이었군요!”
“아아―!”
사람들은 껄껄 웃다가 손바닥을 비볐다.
“저희는 어르신의 명이라면 언제든 전 재산을 헌납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믄요, 그러믄요.”
“언제라도 불러 주십시오.”
그러더니 할아버지에게 무릎을 꿇고 “영원한 프렌시프의 종으로 살겠나이다, 어르신!” 하며 사극을 방불케 하는 연출을 했다. 그들을 돌려보내고 나니 다른 문제가 있었다.
‘헌병대는 어떻게 한담.’
현금 부자들로 경험한 것으로 볼 때 무서워서라도 소문을 퍼뜨리진 않겠지만……. 걱정이 되기는 했다. 그런데 기우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졸부들이 나서자마자 이 지역 헌병대를 총괄한다는 사람이 헐레벌떡 들이닥쳤다.
“어, 어르신!”
―하며 납작 엎드린 그가 절절 사정했다.
“이런 저속한 사기는 헌병 대장님께까지 소식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하여 앞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프렌시프의 평판을 망치기 위해 일부러 헌병대를 소집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변명하기도 전에 자신들이 먼저 변명하며 애걸복걸했다. 할아버지가 벌컥 성을 냈다.
“손녀 앞에서 창피를 당했다. 이 내가!”
그러자 남자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부, 부디 용서를!”
나는 그 광경을 보며 할아버지의 무서움을 아로새겼다.
‘우와…….’
권력자는 본인이 실수해도 아랫사람이 싹싹 비는 거구나.
“당장 내게 사기를 친 놈들을 잡아 와라!”
“예, 예! 이미 동부를 발칵 뒤집어서라도 잡아 오라 명했습니다.”
“오늘 내로!”
“헌병대 전원을 수색에 투입하겠습니다.”
그 사기꾼이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목이 계속 붙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사기 사건은 금세 마무리되었다. 헌병대가 총력을 기울인 수색이라 그런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사기꾼이 체포되었다.
“아무튼 이상한 사기가 많으니까 조심하시는 게 좋겠어요.”
내 말에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내 원래 이리 사기에 당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 일을 보니까 엄청 잘 당하시는 것 같은데…….”
“매사 흥분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잘하시던데…….”
“…….”
“아무튼 감사합니다.”
할아버지와 가웨인이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제가 걱정되어서 그러신 거지요?”
“……뭐.”
“지은 죄를 없던 것으로 만드는 건 안 되지만, 그래도 되게…… 의지가 되었어요.”
나는 헤헤 웃으며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가웨인이 씩 웃으며 내 볼을 꼬집었다.
“그러니까 통신은 재깍재깍 받으란 말이야.”
“으얼에오. 응에 이언 옴 아우이엉 앙 대가오?(그럴게요. 근데 이건 좀 놔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웅얼웅얼 말하자 아빠가 가웨인의 손을 탁 쳐 냈다. 난 조금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아빠의 뒤에 쏙 숨었다. 가웨인은 쿡쿡 웃고는 날 빤히 쳐다봤다.
“아직도 애 같아선.”
“애 아니에요. 보통 제 나이 때 다들 결혼하잖아요?”
이 세계에선 말이다. 그러자 가족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직은 일러.”
“애가 무슨 결혼을 한다고.”
“그래.”
“한 십 년쯤 뒤면 몰라도.”
“십 년도 부족하지.”
“맞습니다.”
너무나 쿵짝이 잘 맞아서 난 ‘우리 가족이 이렇게 사이가 좋았나?’ 하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때 쿵쿵, 노크 소리가 들렸다.
“2황자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2황자라면 도미니크다!
난 반가워서 한달음에 달려나갔다. 문을 열자 깔끔하게 차려입은 도미니크가 들어왔다.
“저하!”
도미니크가 나를 내려다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폐하의 명을 전달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러셨군요. 아! 여기 앉으세요.”
나는 그에게 소파를 내어 주며 방긋 웃었다.
“내 딸과 막역해 보이십니다.”
아빠가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러자 도미니크가 아빠와 할아버지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
황자님이 이렇게 허리를 굽히셔도 되는 건가?
나는 당황해서 가족들을 쳐다보았다. 가족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역시 안 되나 보다.’
도미니크는 그에 지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님.”
침대에 누워 있던 란슬롯과 굳은 얼굴의 가웨인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친놈이.”
―하고.
‘다 들리는데요.’
난 당황해서 우물쭈물 눈치만 보고 있었다.
‘도미니크가 화를 내면 어쩌지.’
그런데 도미니크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날 선 반응인 건 오히려 우리 가족이었다.
“황자님의 아버님은 황제 폐하시죠.”
“낳아 준 사람만이 아버지인 것은 아니죠.”
“저는 아니니 호칭 거두십시오.”
두 사람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나는 “아, 아차!” 하며 손바닥을 짝! 쳤다.
“벌써 식사 때네. 다들 식사 안 하셨지요?”
가족들은 대답이 없어서 나는 도미니크를 쳐다보았다.
“저하께선요?”
“저도 아직 식사 전입니다.”
“그럼 같이할까요?”
나는 아빠의 소매를 흔들며 “네?” 하고 물었다.
“…….”
“아빠…….”
내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웅얼거리자 아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가웨인.”
“예, 아버님.”
“식사를 내오라 연락해라.”
가웨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도미니크를 보더니 호텔 로비에 연락했다. 우리는 방에 딸린 다이닝룸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커다란 원형 식탁에 빙 둘러앉았는데, 내 양옆엔 할아버지와 아빠가 자리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올라왔다. 간단한 수프가 먼저 나왔고, 그다음엔 여러 요리가 한꺼번에 식탁에 차려졌다. 나는 가장 먼저 무화과 베이컨말이를 내 접시에 집어 왔다. 길게 썬 버섯을 베이컨으로 둘둘 말아서 구운 뒤, 무화과 소스를 뿌린 요리였다. 나이프로 베어 내 소스를 듬뿍 찍어 입에 넣었다.
‘맛있어!’
버섯은 향이 좋은 데다 꼬들꼬들 잘 구웠고, 베이컨은 바삭하며 짭짤한데 무화과 소스는 달콤한 편이라 균형이 잘 맞는다. 열심히 먹고 있자니 아빠가 내 접시 위에 베이컨말이를 하나 더 올려 두었다.
“많이 먹어라.”
“네, 아빠도 많이 드세요.”
나는 베이컨말이를 입에 쏙 집어넣으며 다음엔 무얼 먹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알았다. 도미니크는 샐러드만 조금 깨작거리고 있다는 걸.
“많―이 드십시오.”
가웨인이 도미니크 주변에 음식을 열심히 바꿔 주고 있었다.
“이것도.”
란슬롯도 함께.
“관자가 괜찮군. 이것도 놔 드려라.”
할아버지까지 도미니크를 챙겼다. 도미니크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손님이라 이것저것 챙겨 주는 모양이었다. 전부 해산물로.
‘응? 잊어버리셨나?’
나는 도미니크의 앞에 열심히 해산물을 놓는 할아버지의 소매를 흔들었다.
“할아버지, 저하는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
“네?”
“……그런가.”
“직접 과제를 내주시고선.”
도미니크에게 해산물을 먹여서 사재를 되찾았다.
‘그때는 어묵을 만들었지.’
시간이 꽤 지나서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도미니크의 앞에 규카츠를 내려놓았다.
“튀긴 고기는 좋아하시지요?”
“예.”
그러자 가웨인이 입매를 삐뚜름하게 올리며 규카츠 옆에 있던 고추냉이를 듬뿍 올렸다.
“아앗! 너무 많아요.”
“이런 것쯤이야. 설마 매운 음식은 못 드십니까?”
가웨인이 씩 웃으며 이어 말했다.
“어린애같이?”
“예.”
도미니크는 빙그레 웃으며 선뜻 대답했다. 그러니까 오히려 가웨인이 당황해서 멈칫했다.
“……못 먹는다고요?”
“예. 고추는 좋아하지만, 고추냉이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경은 좋아하시는 듯하니 많이 드십시오.”
도미니크가 빙그레 웃으며 가웨인의 접시에 고추냉이를 잔뜩 올린 규카츠를 내려놓았다.
“오빠가 고추냉이를 좋아하셨나요?”
먹는 걸 못 본 것 같은데.
내가 빤히 쳐다보자 가웨인은 “조, 좋아해.” 하며 억지로 규카츠를 입에 넣었다.
“…….”
‘엄청 맵겠다.’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규카츠를 우적우적 씹는 가웨인을 쳐다보았다.
“괘, 괜찮으세요?”
“……괜찮…… 아.”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나도 규카츠를 하나 맛보았다. 가웨인에 비해 아주아주 조금 올렸는데도 코가 뻥 뚫릴 것처럼 알싸하다.
‘그래도 맛은 괜찮은걸.’
규카츠와 와사비를 함께 먹는 건 처음 경험하는데, 꽤 재밌는 맛이다. 란슬롯이 고개를 푹 숙인 가웨인을 보며 ‘등신.’ 하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형은…… 윽, 얼마나 잘하나 보자고.”
“내가 나설 필요가 있나.”
“왜?”
“장수가 둘이나 있는데.”
란슬롯이 어깨를 으쓱하며 아빠를 보았다. 아빠가 도미니크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러자 도미니크는 등을 곧게 세우고 몸을 일으키곤 양주병을 들었다.
“한잔 어떠십니까.”
“술, 잘하십니까?”
“자주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즐거운 자리에서 피하는 편도 아닙니다.”
아빠가 잔을 내밀자 도미니크는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술을 따랐다. 잠시 잔을 흔들던 아빠가 한 모금 마신 뒤에 술병을 잡았다. 도미니크가 잔을 내밀었고.
‘히익!’
원래 저렇게 많이 따르는 건가. 도수…… 높아 보이는데.
“와인 도수에 무너지는 놈은 문턱도 넘을 수 없지.”
아빠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도미니크가 얼음도 들어 있지 않은 양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한 잔 더?”
그가 손등으로 입을 막으며 콜록, 기침을 했다.
“예…….”
나는 오도카니 앉아서 두 사람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내 접시 위에 회가 올라왔다.
“먹어.”
란슬롯이 턱을 괸 채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식사를 더 할 분위기가 아닌데요.
내가 눈치를 보자 란슬롯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으니까.”
“……그럼.”
난 란슬롯이 준 회를 고추냉이 간장에 콕 찍어 입에 넣었다. 말랑말랑한 회는 씹을수록 고소했다.
란슬롯과 함께 다이닝룸을 빠져나오며 나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아빠가 술을 너무 많이 드시는 것 같은데…….”
“괜찮으실 거야.”
“하지만.”
“아버님 별명 알아?”
“알지요!”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며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았다.
“제국의 절세미남, 냉혈한, 길라게온의 수문장, 그리고…….”
“깨진 술독.”
“……네?”
“웬만해선 취하는 법이 없으시지.”
“하지만 예전에 폐하와 술자리가 있었을 땐…….”
“보드카를 세 병 비우셨다고 했나.”
“우와!”
그렇다면 도미니크가 걱정이다. 난 걱정 어린 눈으로 목이 붉어진 도미니크를 쳐다보았고, 란슬롯은 어깨를 쥐었다.
“아야야.”
“아파요?! 의사를 불러올까요?”
아탈란의 수족들과 삿된 자들에게 당한 곳이 아픈 모양이다.
“……그런데 아까는 오른쪽 어깨가 아프시지 않았나요?”
“…….”
란슬롯이 슬쩍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로 바꿔 잡았다.
“좀 안 좋네. 간병 도와줄래?”
“의사를 불러오는 게 좋지 않을까요?”
“좀 더 두고 본 후에.”
“그렇지만…….”
“윽.”
“가요! 가요! 얼른 가요!”
난 란슬롯을 부축해서 침실로 돌아갔다. 늦은 밤까지 란슬롯을 간병한 뒤 방을 나왔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도 다이닝룸은 불이 켜져 있었다.
‘저러다 정말 누구 하나 죽어 나가는 게 아닐까.’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다시 다이닝룸에 들어갔다.
“…….”
“한 잔 더?”
“……주십, 예.”
도미니크가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술잔을 내밀었다. 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아빠의 양쪽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가웨인과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도미니크만 취하고 아무도 안 취했다.
“그만요!”
난 도미니크의 잔을 휙! 빼앗았다.
“괴롭히시는 거지요?”
내가 새초롬히 그들을 노려보자 가웨인이 “아니?”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괴롭히시는 거 맞는 거 같은데.”
“……눈치가 빨라졌잖아.”
“역시!”
난 술잔을 쾅! 내려놓고 도미니크를 흔들었다.
“저하.”
“…….”
“저하, 정신 차려 보세요.”
“……세니아나.”
그가 나를 올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엄청나게 순진한 얼굴이었다.
‘귀, 귀여워.’
“정신 드세요? 저 알아보시겠어요?”
“내가 어떻게 널 몰라. 내 꼬마…….”
“네?”
“우린 어릴 때에도 몇 번이나 만났지. 몇 번이나…….”
“아유, 인사불성이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문밖에 있는 기사를 불러왔다.
“오늘은 호텔에서 재워야겠어요.”
그렇게 말하자 가족들이 벌컥 소리쳤다.
“왜!”
“안 돼!”
난 아빠와 할아버지, 가웨인을 새초롬히 노려보았다.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으시면 어떡해요. 숙소로 못 돌아가시잖아요.”
“주는 대로 받아먹은 사람이 잘못이지.”
“오빠!”
내가 그를 날카롭게 부르자 가웨인은 큼,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틈에 도미니크를 부축한 기사가 물었다.
“어떤 방으로 모실까요.”
“……방이 부족하네.”
방은 셋뿐인데 하나는 아빠가 쓰고, 또 하나는 할아버지가 쓰고, 남은 방은 란슬롯과 가웨인이 함께 썼다. 나는 안내데스크에 연락해서 남은 방이 있는지 물었다. 하지만 주말을 앞둔 오늘은 방이 없었다.
“아빠의 방에서 재우면…….”
“…….”
“그럼 할아버지…….”
“싫다.”
“오빠들은?”
“절대로.”
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소파에서 재우는 수밖에.”
“그러든가.”
“차라리 거실 소파가 낫겠어요. 세 분은 인사불성인 사람을 보살필 수 없으실 테니, 거실에서 제가 함께 있는 게 낫지요.”
가웨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너도 자고 간다고?” 물었다.
“밤이 깊어서 걸어서는 못 돌아가요.”
“포털은?”
그렇지 않아도 도미니크를 포털로 옮기려고 했는데, 열리지 않았다. 아까 란슬롯을 구하면서 멀린의 힘을 쓴 탓에 하루 이틀은 포털을 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설명하자 할아버지가 도미니크의 목을 휙! 잡았다.
“내 방에서 재우지. 그럼 너도 할애비 방에 있을 게지?”
“그렇지요.”
“아닙니다, 제가 재우겠습니다.”
아빠가 축 늘어진 도미니크의 팔을 잡았다.
“두 분은 쉬십시오. 저희 방에서 재우겠습니다.”
이번엔 가웨인이 도미니크를 잡았다.
“……?”
왜 갑자기 도미니크의 인기가 폭발하는 걸까.
세 사람은 한참을 옥신각신했다.
“놔라.”
“제 방에서 재운다지 않았습니까.”
“두 분은 쉬시라니까요.”
그 모습을 보던 나는 결국 팔을 걷어붙였다.
“세 분 다 놓으세요.”
“아니, 내가―”
“놓으세요.”
목소리가 절로 낮아졌다. 난 오늘 멀린을 성수화시켜서 힘을 발휘한 데다 하루 종일 마음 졸이고 뛰어다닌 탓에 엄청나게 피곤했다.
이제 좀 쉬고 싶다고요!
“그렇게들 재우고 싶으시면 거실에서 모두 함께 자요.”
“……뭐?”
“뭐라고?”
“어?”
“거실에서, 함께!”
내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외치자 세 사람은 멀뚱히 서서 눈만 깜빡였다. 나는 시중인들에게 거실에 이불을 펴달라고 했다. 커다란 러그가 들어오고, 각자의 방에서 베개와 이불이 나왔다.
난 도미니크를 중앙에 눕힌 다음 아빠와 할아버지, 가웨인에게 그 주변에 한 자리씩 내주었다. 그러고 있자니 어느새 란슬롯도 나와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소파는 내 몫이 되었다. 난 불을 끄고 소파에 가지런히 누웠다.
“손주와 오붓하게 잠들 줄 알았더니.”
“딸과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게 누구십니까.”
“남매끼리 정다운 밤을 망치신 분들이.”
“그러게 말이야.”
난 옆에 있는 소파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그제야 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주무세요.”
“그, 그래…….”
“…….”
“알겠어…….”
“으응…….”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고 돌아눕자 방이 고요해졌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까. 난 눈가를 매만지는 촉감에 눈을 떴다.
“……으응.”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자 간이 조명에 어스름히 비치는 도미니크의 얼굴이 보였다.
“저하?”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그 후로 아직 두 시간.
‘술이 안 깼겠는데.’
“목마르셔서요?”
“……널 보려고.”
“아직 얼굴이 붉은데.”
“아직 몽롱하니까.”
“나 참, 바람이라도 쐬러 갈까요?”
나는 도미니크를 부축해서 테라스 밖으로 향했다. 그는 눈을 반쯤 감은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사이 난 물을 가져와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드세요.”
“…….”
“한 모금만.”
“마시면 뭘 해 줄 건데?”
“뭘 해 줄까?”
내가 장난스럽게 묻자 그가 내 코를 살짝 깨물었다.
“해 주지 않아도 좋아.”
“그러면서 뭘 묻는담.”
“대화가 좋으니까.”
바보 같은 대화라는 건 알지만, 난 조금 즐거워졌다. 이렇게 순진한 표정의 도미니크는 처음 보아서 자꾸만 짓궂은 마음이 생긴다.
“대화가 좋아?”
“응.”
“그러면 내가 묻는 말에 전부 대답해 줄 거야?”
“응.”
“보자, 뭘 물어볼까…….”
난 내내 웃고 있는 그를 빤히 보며 양손으로 턱을 괴었다.
“왜 해산물을 싫어해?”
“냄새가 이상해.”
그가 눈을 찡그리며 말해서 난 킥킥 웃었다.
“귀여워라.”
“그건 너지.”
“아이고……. 이렇게 취했으니 내일은 머리가 깨지겠다.”
“세니아나.”
“……응.”
“세니아나.”
“응.”
“세니아나.”
“그래요.”
“세나.”
“……!”
도미니크는 희미하게 웃으며 내 뺨을 감쌌다.
“세나야.”
“……어떻게.”
그가 어떻게 윤세나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일까.
도미니크의 머리칼 끝에서 달빛이 산산이 흩어졌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가 윤세나를 알 리 없잖아. 치맛자락을 꽉 틀어쥔 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떻게 그 이름을 알아요?”
“네가 알려 줬으니까.”
“…….”
“괴롭다고 느꼈을 때,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을 때 네가 왔어.”
“…….”
“내 눈이 예쁘다고 했잖아. 그래서 나는 네가 못난이라고 했지.”
그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눈이 되게 예쁘다!]
[시, 시끄러워. 못난이가!]
[아닌데. 나 예쁘다고 하셨는데…….]
[부모니까 자식이 예뻐 보이는가 보지.]
[나 부모 없는데.]
[……뭐?]
[엄마는 없고, 아빠는 날 버렸어.]
도미니크는 내 뺨을 가볍게 문질렀다.
“부럽네.”
[부럽네. 그래도 예쁘다고 해 줄 사람은 있잖아.]
말도 안 돼.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나는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말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