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장 (14/24)

14장

그날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날이었다. 운동회. 늘 삭막하던 운동장에 색색의 고운 천이 걸리고, 교사들이 부지런히 설치한 계단의 천막 아래서 학부모들이 제 자식을 응원하는 날.

발이 빠른 나는 쪽지 달리기의 마지막 선수였다. 쪽지 달리기는 일반 달리기 경주와 비슷한데, 중간에 쪽지를 뽑아서 쪽지 내용에 해당하는 사람을 데려가면 승리하는 게임이었다. 발이 빠른 나는 가장 먼저 도착했고, 그 덕에 우리 반은 1등을 했다. 문제는 그 후였다.

[야!]

쪽지 달리기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다른 반 아이들이 무리를 이뤄서 다가왔다.

[윤세나, 너 반칙했지?]

[반칙 안 했는데…… 내가 제일 일찍 들어왔어…….]

[거짓말하고 있네! 쪽지에 아빠라고 쓰여 있었는데 미소네 아빠를 데려갔잖아!]

다른 반 아이들이 나를 에워싸고 힐난했다.

[미소 운단 말이야!]

[어떻게 할 거야! 이 거짓말쟁이!]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오도카니 서 있었다. 소란에 놀란 아이들의 부모와 교사가 달려오기 전까지.

[왜 그래.]

학부모가 교사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얘가 반칙했단 말이에요…….]

[반칙?]

[쟤 쪽지에 아빠라고 쓰여 있었는데, 미소네 아빠를 데려갔어요.]

남자애는 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쟤는 고아란 말이에요.]

[아유, 선생님. 우리 승준이가 원래 착한 앤데 미소가 걱정돼서…….]

[알죠, 어머니. 승준이가 의협심이 강해요.]

교사가 어색하게 웃으며 나를 붙잡았다.

[세나, 괜찮지?]

[…….]

[괜찮다고 말씀드려야지.]

[괜찮아요…….]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애들이 입을 삐죽이며 나를 스쳐 지나갔다.

[친구랑 싸우지 말라고 엄마가 그랬지.]

[쟤가 이상하잖아요. 반칙이나 하고.]

[불쌍하잖아. 불쌍한 애들한테는 특별히 더 잘해 줘야 해.]

[안 불쌍해 보이는데.]

[저런 애들을 사회배려자라고 하는 거야. 사회배려자. 우리 같은 사회 구성원이 배려해 줘야 하는 애라고.]

정말로 운동회가 싫었다. 불쌍한 사람이라는 걸 만천하에 드러내는 행사 같아서. 그날, 운동회가 다 마치고 나서야 선생님이 일을 끝내고 헐레벌떡 도착했다. 나는 선생님의 손을 잡고 걸으며 물었다.

[선생님, 저는 불쌍한가요?]

[뭐?]

[사회 구성원들이 배려해 줘야 하는 사람이니까…….]

[…….]

[나도 부모님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문득 선생님을 쳐다봤다. 선생님은 말을 잇지 못하고, 우뚝 멈춰 서서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을 참듯이. 내가 선생님을 곤란하게 했구나. 또 슬프게 만들었어.

운동회보다 선생님을 아프게 한 스스로가 더 싫었던 그 날. 난 꿈을 꿨다. 기이한 옷을 입은 사내아이가 상처투성이가 되어 웅크려 있었다.

[넌 누구야?]

[내가 누군지 알아서 뭐 하게.]

사내아이는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첫눈에 알아봤다. 이 남자애도 ‘불쌍한 애’라는 걸. 왜냐하면 나도 그랬으니까.

사내아이와 나는 서로 털을 곤두세운 채로 내내 말이 없었다. 그래도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기분이 안 좋으니?]

[…….]

[나도 오늘 슬픈 일 있었는데…….]

[난 안 슬퍼.]

[그럼?]

[무서운 거지.]

사내아이는 피에 젖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바지춤에 슥슥 닦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왜? 원장 선생님이 때렸어?]

[시끄러우니까 저리 꺼져.]

[간식을 훔쳐먹은 걸 들켰구나! 나도 알아. 그때 되게 무섭지.]

[…….]

[괜찮아. 우리 선생님이 애들은 뒤돌아서면 배고픈 거라고 그랬어.]

[그런 거 아니라고!]

사내아이가 벌떡 일어나서 나를 노려보았다.

[사람을 죽였어!]

[……어?]

[내가 검으로 사람을 찔렀단 말이야. 내일도, 모레도 그래야 한다고.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아…….]

[간식이나 훔쳐 먹는 네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

사내아이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언제 암살자가 올지, 내 옆의 누가 돈을 받아 처먹고 배신할지, 이런 고민을 왜 나만 해야 하는지! 너 같은 녀석은 이런 마음 모르겠지.]

사내아이가 피 묻은 손으로 이마를 쥐었다.

[황제라는 새끼는 애만 싸질러 놓고 한 번도 찾아오질 않고.]

[…….]

[어딜 가도 그릇된 핏줄이라며 손가락질하고.]

사내아이는 숨을 헐떡이며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가만히 서서 그 아이를 보던 난 팔을 뻗었다. 내 손에 닿은 그가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뭐, 뭐 하는 거야.]

[슬픈 일은 곱씹으면 더 슬퍼진대. 우리 선생님이 그랬어.]

[…….]

[그러니까 슬플 땐 이렇게 서로를 끌어안아 주는 거래.]

[서로 동정하는 게 뭐가 남는데.]

[그렇지만, 기분은 좋아지는걸?]

나는 사내아이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봐 봐. 마음이 따뜻해지지?]

사내아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는 ‘에헴!’ 하며 양손을 허리춤에 올렸다.

[우리 선생님 말은 항상 맞거든!]

[헛소리하네.]

[그런데 너…… 눈이 되게 예쁘다!]

[시, 시끄러워. 못난이가!]

[아닌데. 나 예쁘다고 하셨는데…….]

[부모니까 자식이 예뻐 보이는가 보지.]

[나 부모 없는데.]

[……뭐?]

[엄마는 없고, 아빠는 날 버렸어.]

내가 ‘난 선생님뿐이야.’ 하고 말하니 사내아이는 내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부럽네.]

[내가?]

[그래도 예쁘다고 해 줄 사람은 있잖아.]

그러더니 ‘늙은이는 항상 개소리만 하는데.’ 하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입가엔 얼핏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오늘이 꼭 싫은 날만은 아닌가 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사내아이의 미소가 예뻐서, 초라한 나도 꼭 그만큼 예뻐진 것 같아서.

그 후로도 하루가 버거운 날이면 꼭 사내아이의 꿈을 꿨다. 꿈속에서라지만, 몇 번이나 만나서 그런지 우리는 꽤 친해졌다.

[그런데 너, 이름이 뭐야?]

[내 이름을 알아서 뭐하게?]

[대화하는 게 좋으니까 그렇지. 바보. 그럼 몇 살인데?]

[열둘.]

[히익!]

나는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사내아이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며 미간을 좁혔다.

[뭔데.]

[그러면 오빠지? 나는 아홉 살이니까 네가 오빠야. 그렇지?]

[그렇겠지.]

[나 오빠는 처음이야!]

[너 고아원에 산다며. 너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있을 것 아냐.]

[옛날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아. 입양을 못 가서.]

사내아이가 멈칫하더니 날 빤히 쳐다봤다.

[왜 못 갔는데?]

[괴물이라서.]

[……그런 게 어딨어.]

[진짠데.]

나는 팔을 걷어서 피부병이 난 부분을 보여 주었다.

[여기도 그렇고, 또 여기도.]

이번엔 얼굴의 버짐을 가리키자 사내아이는 잠시 말을 잃었다.

[누가 너더러 괴물이라고 해?]

[고아원 애들도 그렇고, 반 친구들도 그렇고, 원장 선생님이랑…….]

[…….]

[근데 괜찮아. 옛날엔 슬펐는데, 지금은 많이 들어서 아무렇지도 않아.]

사내아이는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참을 침묵하다가 어색하게 내 등을 두드렸다. 나는 해맑게 웃었다.

[거봐. 마음이 따뜻해지잖아.]

그 후로도 계속, 계속 우리는 꿈속에서 만났다.

[오늘 나만 케이크 못 먹었어. 엄청 예쁜 케이크였는데……. 원장 선생님이 나는 먹을 자격도 없대.]

[우리 선생님 손이 다 까졌어. 맨날 식당일 하셔서……. 속상해.]

[철민이가 전학 갔다! 이제 애들이 나 고아라고 안 놀리겠지?]

[나, 나 정말로 지갑 안 훔쳤어. 정말로 안 훔쳤는데…… 자꾸 담임선생님이 솔직하게 얘기하래. 나 정말로…… 정말로…….]

사내아이는 언제나 조용히 내 얘기를 들어 주었다. 우리 선생님이 들으면 속상해할까 봐 말하지 못한 것들을 그 애에겐 모두 말할 수 있었다.

[우리 반에서 선녀와 나무꾼 연극 하는데, 내가 주인공이 됐어. 나무꾼 역할 하는 남자애가 나랑 같이 연극 하기 싫다고 울었어.]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나랑 부부 역할 하고 싶지 않대. 괴물 부인은 싫다고…….]

[웃기는 놈이네. 고간을 차 버려.]

사내아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도 내 남편 역할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담임선생님이 애들을 막 혼냈어.]

나는 ‘아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하면 되지.]

[……응?]

[내가 하겠다고, 네 남편.]

사내아이는 귓불이 약간 붉어져서 헛기침을 했다. 그러곤 ‘그, 그러니까 너 나랑―’하며 무어라 말하려고 하길래 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어떻게? 전학 오려고? 그런데 어떻게 열두 살이 아홉 살 반에 오지?]

[그게 아니잖아…….]

[아! 학교 입학을 늦게 했구나!]

사내아이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고, 난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 고아원에도 그런 애 있어. 호적이 없어서 그렇대.]

[…….]

[저기, 그러면 ‘가나다라’는 알아? 글 쓸 수 있어? 내가 알려 줄까?]

[…….]

사내아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후로 3개월. 그 애가 ‘늙은이’라고 부르는 스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 나는 차마 눈물도 흘리지 못하는 그 애를 끌어안아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 * *

도미니크가 내 뺨을 감싸 쥐었다.

“처음 너를 보았을 땐 대낮에 꾸는 꿈인 줄 알았지.”

“…….”

“내 꼬마와 너무나 닮은 여자라서.”

“언제부터 내가 꿈속의 꼬마라는 걸 알았어요?”

“네가 프렌시프 성에서 선인장 이야기를 해 주던 날부터 어렴풋이.”

“……아.”

그는 내게 이마를 맞댄 채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널 그리워했어.”

“…….”

“현실이 꿈속에 번져 들어 그날의 기억이 희미해져도, 네게 받은 온기를 잊은 적이 없다.”

그의 손이 뜨거운 건 취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는 떨리는 눈으로 희미하게 웃는 도미니크를 바라보았다.

“한순간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

“내 처음이 너였듯, 마지막도 너일 거다.”

도미니크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주 간지러운 감촉이었다.

“사랑해.”

이상한 기분이었다. 가슴이 아리고, 코끝이 쓰린 데도 아주아주 행복한, 그런 이상한 기분.

* * *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도미니크가 주변을 살폈다.

‘호텔?’

어제 돌아가지 못한 건가.

그는 머리를 잡은 채 눈을 찡그렸다. 이렇게 취한 건 살면서 처음이다. 프렌시프 후작은 밑 빠진 독이었다. 연거푸 들이켜도 말짱한 얼굴로 ‘한잔 더?’하고 물어오는 통에 정신을 놓을 때까지 마셨다. 도미니크는 찌르는 듯한 시선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프렌시프 형제가 각각 다른 표정으로 도미니크를 쳐다보고 있었다.

“일어났으면 식사하시죠.”

란슬롯은 미소짓고 있었으나 눈빛은 싸늘했고.

“무슨 식사까지. 찬물이면 될 것을.”

가웨인은 표정도 눈빛도 싸늘했다. 그때 콩콩콩, 발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저하, 해장국 드세요?”

세니아나가 밝게 물었다.

“해장국이…… 뭡니까.”

“해장하기 위한 국이지요. 뼈다귀해장국 끓였어요.”

“뼈다귀…….”

“등뼈랑 얼갈이배추를 넣어서 얼큰하게 끓였어요.”

세니아나가 종알거리고 있을 때 시중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아가씨, 찾으시는 들깻가루가 이게 맞을까요?” 하고 물어왔다.

“응, 잠깐만!”

그렇게 대답한 세니아나가 국자를 흔들며 “나오세요.” 하고 말했다. 도미니크가 세니아나를 따라 움직였을 때였다. 란슬롯과 가웨인이 앞을 막아섰다.

“잠시 대화 나누시죠.”

때마침 방에 들어온 나베리우스가 검집을 손바닥에 툭, 툭, 내리쳤다.

“가시죠.”

“……여기서 하면 안 되는 말입니까.”

“가서 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제국에 황자가 셋이나 될 필요는 없지요.”

나베리우스가 눈을 부라렸다.

‘피할 수 없겠군.’

도미니크가 재킷을 주워들려고 했을 때였다. 앞주머니에 꽂혀있던 만년필 끝이 얼핏 보였다.

“잠깐.”

가웨인이 왈칵 인상을 썼다.

“그 만년필, 어디서 많이 봤는데.”

세니아나가 선물한 만년필로, 그녀가 쇼핑할 적에 가웨인과 란슬롯도 함께 있었기에 익히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좀 보겠습니다, 그거.”

“무슨 말씀이신지.”

들키면 빼앗길지도 모른다. 도미니크가 펜대를 쑥 밀어 넣으며 여상한 척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없습니다만.”

“저하, 보통 이럴 땐 뒤져서 나오면 1g당―”

그때, 세니아나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뭐 하시는 거예요?”

움찔. 프렌시프의 세 남자가 동시에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아무것도.”

“그래.”

“안 했어.”

도미니크의 팔을 잡은 가웨인이 “웃으십쇼.” 하고 속삭였다. 세니아나는 고개를 모로 꼰 채 가족들과 도미니크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하를 괴롭히시는 거예요?”

가웨인이 도미니크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니!”

미심쩍은 표정을 짓던 그녀는 이내 국자를 흔들며 말했다.

“식사하세요.”

“그래.”

“저하도.”

“예.”

도미니크가 세니아나를 따라나서자 가웨인은 쳇, 혀를 찼다. 아무래도 세니아나 앞에서는 저 빌어먹을 놈팡이를 떨구어 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끌어안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주먹을 내질렀던 지난번에도 미움받을 뻔했다.

[오빠, 나빠요!]

미워요. 미워. 미워……!

세니아나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프렌시프 일가의 귓전에 메아리쳤다. 가웨인이 으득, 이를 갈며 도미니크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저 새끼, 저거 어떻게 조지지.”

“기다려.”

란슬롯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가웨인이 울컥하여 소리쳤다.

“저 만년필, 분명 세니아나가 선물한 거라고. 가만뒀다간―!”

“그러니까 기다려. 뼈를 쳐낼 타이밍이 올 때까지.”

가웨인은 제 형을 흘끔 쳐다보았다. 내내 웃고 있어서 몰랐는데, 눈빛이 오뉴월 서리처럼 싸늘했다. 그도 저만큼이나 저 ‘황제의 자식’이 거슬리는 모양이다.

“타이밍만 오면―”

가웨인이 중얼거리는 순간, 나베리우스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넌 내 손에 죽는다.”

* * *

그 시각, 아서는 르마르 공작과 통신 중이었다. 금좌 11석에게만 하사되는 영상 통신석에선 팔뚝만 한 르마르 공작의 홀로그램이 공중에 띄워졌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공작은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

[아탈란, 이 개자식들…….]

오르가(카트린의 유모로 가장한 아탈란의 수족)가 프렌시프에 의해 추포되었고, 호텔에서 구출한 카트린 르마르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온몸에 있는 구타의 흔적을 보고 르마르 공작 부인은 혼절하고 말았다.

[프렌시프 공. 혹시나 하여 말하지만, 이 일은 나완 관련 없는……!]

“이번 일에 관여하지 않았더라도 그간 아탈란의 개로 충성했다는 건 변함이 없지.”

아서의 고저 없는 목소리에 르마르 공작은 마른침을 삼켰다.

[나, 나 또한 피해자요! 내 딸은 충격으로 말문을 닫고 침실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단 말이오! 공 또한 딸자식 둔 아비이니 내 심정을 알지 않소!]

“그러니 내 딸을 황궁의 노예로 만들려 한 네놈을 참아 주기가 얼마나 힘들겠나.”

[그 또한 아탈란의 명이었소. 난 어쩔 수 없이…….]

“어린애 같은 변명을 하기엔 너무 오래 살았지, 공은.”

[…….]

르마르 공작은 울화가 치밀었지만, 대꾸하지 못했다. 아탈란과 손을 잡긴 했지만, 딸의 유모인 오르가가 아탈란의 사람인 줄은 몰랐다.

‘대사제는 내 뒤통수를 칠 궁리를 하고 있던 거다.’

무엇보다 오르가가 딸을 폭행하여 감금했다. 아비인 자신은 생각지 않은 처사였다. 그렇다는 건…….

“공을 버리겠다는 것이지.”

아서의 말에 르마르 공작이 흠칫했다.

“내 자식들이 예기치 않게 그대 딸의 은인이 되었어.”

[…….]

“프렌시프의 후계가 위험에 처했고, 내 딸은 성수를 불러내 당신 딸을 구했지.”

[보답하겠소.]

“첫째, 난 주제를 모르는 놈은 싫어해. 감히 내 앞에서 공손하지 않은 놈은 더더욱.”

아서의 목소리에 날이 서자 르마르 공작은 새하얗게 질렸다. 이를 악문 그가 엉거주춤 무릎을 굽혔다.

[보답하겠…… 습니다.]

아서가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둘째, 네 주변의 놈들을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보내라.”

세니아나를 황궁에 붙들어 놓으려 작당한 이들을 불구덩이에라도 처넣으라는 뜻이었다.

[그리하겠습니다.]

“셋째, 아탈란에 붙은 귀족이 몇이나 되고 누가 있는지 속속들이 알아야겠다.”

[우리는 누가 동지인지 알지 못합니다. 내용을 자세하게 아는 것은 오직 대사제와 ‘그분’이라 불리는 길라게온의 고위 귀족뿐입니다.]

“그분, 이라.”

[확실치는 않지만…….]

르마르 공작이 마른침을 삼켰다.

[아탈란은 저를 ‘3월’이라고 불렸습니다. 사비에르 후작이 ‘4월’이었지요.]

“네 위로 ‘1월’과 ‘2월’이 더 있다?”

[제 위에 있는 자이니 분명 금좌 11석에 속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짚이는 이들이 있다. 아서는 손안에서 금화를 굴리며 낮게 읊조렸다.

“너는 계속 아탈란에 붙어 있어라.”

[하지만 이미 대사제에게 신뢰를 잃었습니다! 제게 기밀을 알려 줄 리가……!]

“신뢰를 회복하는 것까지가 네 임무지.”

[…….]

“매달 초하루에 정보를 교환한다. 장소는 따로 공지하지.”

[예.]

통신을 종료한 아서가 눈을 느른히 감았다. 생각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이다. 방문 앞에 대기해있던 기사 칼립스가 물었다.

“‘그분’이라는 자가 만약 제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다면 나라가 두 쪽이 날 겁니다.”

“두 쪽이 나든 가루가 되든 나와는 상관없지.”

“…….”

“다만 내 딸을 노린다면 나라가 아니라 세상을 뒤집어서라도 목구멍에 검을 처넣을 것이다.”

아서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칼립스를 쳐다보았다.

“영지에 비상령을 내리고, 물밑에서 운영 중인 상단을 정리해라. 재물을 쓸 일이 있을 것이다.”

“예.”

“……그리고 그자에게 연락을 취해라.”

“그 자라시면…… 설마! 아가씨의 외가를 이르십니까!”

아서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자 칼립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식사를 마치고, 나는 도미니크를 배웅했다.

“모레가 졸업식입니다. 준비는 끝내셨습니까?”

“네!”

“졸업식이 끝나면 황도로 가십니까?”

“그렇겠지요? 그다음 주가 로열 키친 입관 시험이니까요.”

도미니크는 내 뺨을 다정히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눈에 아른거리겠군.”

다정함이 듬뿍 배인 혼잣말에 난 배시시 웃었다. 술에 취해서 순진하게 웃던 그가 자꾸만 떠오른다.

“저하.”

“예?”

“세나야, 하고 불러 보세요.”

“……!”

도미니크가 눈을 크게 떴고, 난 놀리듯 고개를 우로, 또 좌로 기울였다.

“꿈속에서 만났다는 걸 기억했으면 말해 주지.”

“……역시 당신이 맞군요.”

“왜 물어보지 않으셨어요. 저…… 이곳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처음부터 아셨어요?”

“처음엔 그저 닮았을 뿐이라고 생각했죠. 동부제를 위해 별궁에서 재회했을 때부터 어렴풋이 눈치챘습니다.”

“어떻게요?”

“길라게온에서 평생을 산 사람이 타국 사람들보다도 이 세계에 대해 모르니까요.”

정말?!

‘나 꽤 아는 척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니 도미니크가 빙그레 웃었다.

“예를 들면…… 연인은 삼 개월에 한 번씩 만난다, 라는 말에 속는다는 점?”

“으아, 그거 바보 같았지요…….”

“귀여웠죠.”

나는 정말로 내가 사랑스럽다는 듯 웃는 그 때문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제게 어떤 일이 있던 건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기다리겠습니다.”

“네?”

“영애가 얘기해 줄 마음이 들 때까지.”

“……하지만 그래도 궁금하실 것 같은데.”

“내 호기심 따위가 영애보다 우선일 수는 없죠.”

우리는 마주 보며 미소지었다. 다정한 눈빛으로 보던 그가 내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코가 붉은데요.”

“아, 환절기라서 코감기가 약간.”

나는 훌쩍이며 코를 문질렀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볍게 감기를 앓았는데, 몸이 바뀌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꿈속에서도 몸이 약하더니.”

도미니크는 걱정이 되는 듯 중얼거렸다.

“기억하세요?”

“영애에 관한 건 뭐든.”

정말로? 나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어떤 말을 했었지요?”

“연극에서 주인공을 맡았다고요.”

“아, 맞아! 그때 선녀와 나무꾼 연극에서 남자애들이 전부 나무꾼 역할이 하기 싫다고 해서 결국 반장이었던 재민이가 맡아 줬어요.”

“재민이?”

“착하고, 바르고, 공부도 잘해서 제가 조금 좋아했었어요.”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미니크의 표정이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첫사랑이었습니까?”

“그건 아니에요. 제 첫사랑은 다른 사람이거든요.”

첫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이에 꿈속에서 보는 남자애를 마음에 품었다. 잠이 들 땐 늘 그 남자애가 나오는 꿈을 꾸게 해 달라고 소원했고, 남자애의 꿈을 꾸고 일어난 다음 날엔 설레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데 이렇게 실제로 만나게 되었네요.’

나는 내 첫사랑을 앞에 두고 헤헤 웃었다. 도미니크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누군데요.”

“비밀이에요.”

부끄러움에 손을 꼼지락거리며 그를 힐끔거렸다.

“잘생겼습니까?”

“네!”

“머리는 좋습니까?”

“그런 것 같아요.”

“싸움은?”

“아주 잘한대요.”

“……성격은 좋습니까?”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려다가 그의 뒤에서 희노래져서 달려오는 알베르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내게는 좋은 사람이지만, 남들에게는 좀 아닌 것 같은데…….

“그건…… 으음.”

도미니크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잘생기고, 머리 좋은 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죠. 남자는 성격입니다.”

“그런…… 가요?”

“물론. 성격이 괴팍한 놈들은 바람도 잘 피울 겁니다.”

“……그럴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되도록 만나지 말아야 하죠.”

“그건 너무 심하지 않을까요?”

“전혀. 성격이 괴팍한 놈들은 필시 바람기가 있을 겁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그를 보고 난 “으음.” 침음을 흘렸다. 생각해 보니까 여자 문제가 있기는 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좋아요, 그럼 졸업식 전까지는 되도록 만나지 말도록 해요.”

“예?”

도미니크는 미간을 좁히고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눈을 홉떴다.

“설마, 영애의 첫사랑이…….”

“그럼 가세요.”

내가 등을 돌리자 도미니크가 얼른 내게 따라붙었다.

“정말입니까? 제가 영애의 첫사랑입니까?”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그는 쿡쿡 웃고 나를 끌어안으려 했는데, 나는 손을 탁, 쳐 내고 물러났다.

“바람 피울 생각이 만만이었군요.”

“아닙니다!”

“하지만 저하가 바람도 잘 피울 거라고…….”

“잠깐, 영애! 아니, 그게 아니라 첫사랑이 나인 줄 모르고……!”

“저기 알베르가 오네요.”

도미니크가 당황해서 나를 쫓아왔다.

* * *

졸업식이 모레였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내 졸업식이 끝난 후 모두 함께 황도로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이틀간 로열 키친 응시 예정자들과 함께 수련에 매진했다. 응시 예정자는 총 셋인데 각각 지도 교수가 달랐다. 나는 내 옆 조리대의 스위트피를 힐끔 쳐다보았다. 스위트피가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튀김 탄다.”

나는 얼른 튀김을 건져내며 “으응.” 하고 대답했다.

“센, 네가 만든 석류 소스 맛있더라…….”

“으응, 네가 만든 크림 리소토도 훌륭했어…….”

“레시피…… 알려 줄까?”

“그래도 돼?”

“뭐…….”

“그, 그럼 나도 석류 소스 레시피 알려 줄게…….”

“고마워…….”

우리가 어색하게 대화하고 있자 뒤 테이블에서 요리를 하던 조이가 벌컥 소리쳤다.

“아, 정말! 너희 무슨 연애 초기냐! 사람 신경 쓰이게 왜 이렇게 어색하게 굴어!”

스위트피와 나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탈란의 일로 르마르 공작가에선 프렌시프에 막대한 보상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스위트피 가문이 진 빚의 이관이었다. 스위트피 가문에서는 이제 빚을 프렌시프에 갚으면 된다. 빚이 아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이자를 대폭 줄여 줬다.

‘르마르의 이자가 워낙 셌기도 하고. 7할이나 되는 고리 이자였으니까.’

이자가 적어진 것만으로도 스위트피의 가문에선 환호성을 내질렀다. 스위트피가 조이를 보며 소리쳤다.

“우리 안 어색하거든.”

“지나가던 개도 안 믿겠다.”

“어색한 건 네 반죽이지. 케이크라도 구우려고? 파티시에로 전직할 생각이야?”

“뭐, 이 계집애야?!”

“뭐, 이 사내새끼야!”

조이와 스위트피는 틈만 나면 싸웠다. 그리고…….

“센은 여전히 불 조절에 미숙하군.”

조이의 지도 교수인 기욤 교수가 중얼거리자 쟝뤼크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젠 별것 가지고 다 트집이지.”

“지? 말이 짧은데?”

“저게 어떻게 미숙한 거요. 예술이지, 예술.”

“환상적인 건 우리 조이의 파스타면 같은 것을 말하는 거요.”

“우리 센이 로열 키친에 입관할 것 같으니 기를 죽여 볼 참인 게지.”

“우리 조이는 아카데미 재학 동안 한 번도 5등 안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재원……!”

“졸업시험 성적으로 따져 볼까.”

“자꾸 말이 짧은데?!”

“센은 3차 내내 일등! 어디 보게, 조이는 몇 등이었나!”

쟝뤼크가 기욤이 들고 있는 조이의 성적표를 빼앗으려 했다. 기욤은 벌컥 성을 내며 성적표를 등 뒤에 감추었다.

“남의 제자 성적에 왜 관심을 갖는 거야!”

“흐응, 이제 보니까 교감이 우리 센의 석류 소스 스테이크를 칭찬했다고 성깔을 부리는 게로군.”

“성~깔~?!”

쟝뤼크와 기욤이 서로의 멱살을 잡았다. 스위트피의 지도 교수인 레아 교수가 사내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좀! 두 분은 만났다 하면 싸우십니까!”

“쟝뤼크, 저자가―!”

“남의 제자 품평한 게 누군데!”

뒤에선 스위트피와 조이가 싸우고, 앞에선 쟝뤼크와 기욤이 싸워서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레아 교수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내 등을 두드렸다.

“졸업식 시작하겠다. 가자.”

“교수님들과 애들은요?”

“치고받고 싸우다 다 죽어 버리게 둬라.”

레아 교수가 상냥하게 내 손을 잡았다. 난 뒤를 힐끔 쳐다보다가 그녀를 따라 조리실을 나섰다.

“아, 교복으로 갈아입어야 하는데.”

내가 중얼거리자 레아 교수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조리복을 입고 졸업식을 가는 건 로열 키친 응시자들의 특권이지. 다들 너를 부러워할 거다.”

레아 교수는 호호 웃으며 나를 끌어당겼다.

“들어가 있어라. 나도 준비하고 곧 들어가마.”

“네.”

조리복을 입은 채 들어가자 레아 교수의 말처럼 정말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벌써부터 도착한 학부모들과 교복을 갖춰 입은 학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에 로열 키친에 응시한다던 그……?”

“멍청해 보이는걸. 우리 아들보다 나을 게 없는데.”

“센이 로열 키친 응시라니 말도 안 돼.”

“졸업시험 전엔 매번 꼴찌였잖아.”

“기가 막혀. 저런 애가 로열 키친 응시? 동부 아카데미 망신이나 안 시키면 다행이겠군.”

시기와 질투로 가득한 시선에 나는 민망해졌다. 손을 꼼지락거리며 맨 앞자리로 걷는데, 학부모로 보이는 부부가 나를 툭 쳤다.

“얘.”

“……네?”

“늦게 왔으면서 왜 남의 자리를 차지하니.”

나는 눈을 꿈뻑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로열 키친 응시자들은 맨 앞에 서는 거라고 했는데.’

레아 교수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여긴 제 자리예요.”

“여긴 성적 우수자 자리야. 우리 아들 자리라고.”

“저는 로열 키친 응시자라서…….”

그러자 남편 쪽이 신랄하게 중얼거렸다.

“그전까지는 내내 꼴찌였다면서. 아무튼 너 저 뒤로 가라. 우리 아들은 재학 내내 필기시험 수석이었다.”

“아, 아버지, 저는 3등…….”

“수석과 차석이 모두 자퇴했으니 네가 일등이지.”

아소와 말롬이 자퇴를 해서 3등이었던 저 애가 수석 자리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여기는 로열 키친 응시자들이 서는 자리예요, 아버지.”

아들로 보이는 학생이 제 부친을 뜯어말렸지만, 부친 쪽은 도통 물러서질 않았다.

“하멜턴 자작인 네 할아버지가 오실 텐데 꼴찌나 하는 녀석 뒤에 서 있으려고? 응? ‘하멜턴 자작인 네 할아버지’ 말이다!”

은근히 가문을 자랑하며 나를 힐끔거렸다.

“하지만 교수님께서 제 자리는 여기라고 하셨어요.”

“말이 안 통하네, 정말. 뒤로 가라니까?”

“대체 부모가 어떻게 가르쳤으면 어른 말씀을 귓등으로 듣는 거야.”

그때였다. 졸업식장이 술렁이기 시작하더니 내게 시비를 걸던 부부가 출입문을 주목했다.

‘할아버지다!’

졸업식을 앞둔 대강당은 일순 고요에 휩싸였다.

“어, 어르신!”

할아버지와 안면이 있는 듯한 신사가 나서 가슴에 손을 얹은 채 허리를 굽혔다. 할아버지가 표정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누구냐.”

전혀 모르겠다는 어투에 신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그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는 껄껄 웃었다.

“일전에 개국 기념일 파티에서 뵈었지요. 스왈랭 백작입니다. 동부 농지 개간 건으로 몇 번 연락을 드렸었는데 여기서 만나 뵙게 되었―”

할아버지의 부관과 기사 칼립스가 신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르신과 대화를 나누시려거든 프렌시프 령에 연락하여 제대로 된 절차를 밟으십시오.”

“내 조모님이 선대 후작 부인의 파티에 초청받은 적이 있다오.”

“그런 분은 셀 수 없이 많은지라.”

“아, 아니, 인사 몇 마디도 절차가 필요한 거요?”

“어르신께 인사드리기 위해 선 줄이 동부를 한 바퀴 감쌀 테지요.”

할아버지는 신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무표정했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단숨에 밝아졌다.

“세―!”

소리치려다 움찔, 하더니 뒤이어 들어온 란슬롯에게 물었다.

“이제 신분이 밝혀져도 되는 게냐.”

“학칙상 신분을 밝혀도 되는 건 졸업식 이후입니다.”

할아버지와 란슬롯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교수진이 헐레벌떡 도착했다.

“아이고, 어르신!”

“오시는 줄 알았으면 마중을 나갔을 텐데요!”

“누추한 곳에 귀한 걸음 해 주셨습니다. 이보게! 어서 의자를 가져오게!”

“의자! 의자가…… 아, 여기!”

“그런 낡아 빠진 의자가 어르신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교수진들이 할아버지와 오빠들을 둘러싸고 어쩔 줄을 몰랐다. 내 옆에 있던 부부가 내 등을 툭 밀쳤다.

“얘, 너 프렌시프와 아는 사이니?”

내가 대답하려던 찰나, 남편 쪽이 입매를 비틀었다.

“이런 녀석이 프렌시프를 어떻게 알겠어?”

“하지만 어르신이 이 애를 보면서…….”

“무슨, 잘못 본 거야.”

“그러고 보니까 이 애가 어르신과 비슷하게 생긴 것 같기도 한데요.”

“머리가 푸르다고 죄다 어르신과 아는 사이라면 우리 저택의 마부도 어르신과 아는 사이겠군.”

“하기는. 프렌시프 어르신과 관련된 학생이 있다면 이렇게 조용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래, 동부 아카데미니 축사라도 해 주려 오신 걸 테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부부가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뒤로 가라.”

“여긴 제 자리라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요.”

“그럼 양보해.”

양보를 청하는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오만한 어투였다.

“너 같은 애송이는 프렌시프 어르신과 엮일 일이 없겠지. 우리 애처럼 귀한 핏줄이어야 눈도장도 찍을 수 있는―”

“세니아나.”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출입구 쪽을 쳐다보았다.

“아……!”

아빠다! 아빠가 나를 향해 곧장 다가왔다.

“어머나, 사람이 어쩜 저리 생겼을까.”

“설마 저 사람……!”

“아시는 분입니까?”

“아서 프렌시프 말입니다!”

“아서…… 황도에 있다는 프렌시프 후작 말입니까?”

“저 사람이 동부에는 왜…….”

“그러게요. 부자간에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더니. 무슨 일로 함께 왔을까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틈에 아빠는 내게 다가왔다. 그러자 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할아버지가 소리쳤다.

“저, 저―!”

할아버지는 얼른 교수들을 헤치고 나에게 다가왔다.

“학칙상 신분을 드러내는 건 졸업 후라기에 나도 이때껏 참았는데!”

아빠는 할아버지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나를 보았다.

“구두끈이 풀렸구나.”

“묶을…… 아!”

아빠가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아빠를 주시하던 학생들이며 학부모, 교수들까지 기함을 한 채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얼른 아빠의 손을 잡았다.

“제가 해도 되는데!”

‘아빠의 예쁜 옷이 망가질 거야.’

오늘 아빠는 평소와 약간 달랐다. 눈을 살짝 가린 부스스한 머리를 옆으로 넘기고, 평소엔 잘 입지 않는 화려한 재킷을 걸친 데다가, 향수를 뿌린 건지 좋은 향기가 난다. 엄청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았는데도 정말로 멋있어서 난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오늘 굉장히 멋지세요.”

“그런가.”

“과연 제국의 절세미남!”

아빠는 픽 웃곤 몸을 일으켰다.

“따님이 그리 봐 주니 영광이군.”

“와 주셔서 기뻐요, 아빠!”

내 말에 대강당은 또 한 번 소란에 휩싸였다.

“아, 아빠?!”

“프렌시프 영애가 아카데미에 있었다고?!”

교수들의 얼굴이 죄다 흙빛이 되었다. 내게 엄하던 교수는 양 뺨을 붙잡은 채 소리 없이 절규했고, 카트린 르마르에게 나를 붙이려 했던 교감은 잠시 비틀거렸다. 나를 밀치며 시비를 걸던 부부까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어버버거렸다. 아빠는 부부를 힐긋 쳐다보았다.

“한데 내 딸에게 무슨 볼일이지.”

나와 언쟁을 벌이는 것을 보았는지 아빠의 표정은 더없이 차가웠다.

“그, 그게, 그게…… 프, 프렌시프 영애인지 몰라 봬서…….”

“몰라 봬서.”

부부가 대답하지 못하고 마른침만 삼키자 아빠는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아, 여긴 성적 우수자 자리라고 비키라고 했어요.”

그러자 교수들이 펄쩍 뛰며 말했다.

“여긴 센의 자리가……! 아니, 아니, 아가씨의 자리가 맞습니다. 로열 키친 응시자들이 제일 앞줄에 서지요.”

아빠가 부부를 다시 보며 물었다.

“그렇다는데 내 딸이 어째서 비켜줘야 하지.”

“그, 그게……!”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동동거리던 아내는 남편이 밀쳤던 내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우리가 잘 몰라서 무례를……!”

그러자 할아버지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내 손녀에게 손을 댔나.”

우와, 눈치가 귀신 같다. 부부가 거무죽죽해져서 대답하지 않으니 할아버지의 표정이 점점 더 험악해졌다.

“손을 댔냐고 물었다!”

부부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부관과 칼립스가 그들을 끌고 나갔다.

“어, 어르신 살려 주십시오! 어르신!”

“아가씨―!”

부부의 아들은 제 부모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눈치를 보며 웅얼거렸다.

“저기…… 부모님 일은…….”

“응?”

“기분 나쁘지 않아?”

“죽일 거냐?”

“어……?”

“그게 아니라면 됐어. 언젠가 한 번은 된통 당해야 저 성질머리가 고쳐질 거라고 생각했거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애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 애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

“나는 뭐, 실수한 거 없어…… 요?”

난 킥킥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졸업식이 시작되었다. 도미니크의 축사가 끝나고, 상장을 수여하는 순서가 시작됐다. 학업 성적 우수자의 발표 이후, 로열 키친 응시자를 호명했다.

“룩소 조이드.”

조이가 “예.” 하고 대답하며 단상에 올랐다.

다음은 스위트피의 차례였다.

“피스 쥬다흐 샤르파크.”

스위트피도 곧장 단상으로 올라갔다.

‘아, 본명이 피스였구나!’

그래서 아카데미에서 쓰이는 이름을 ‘스’위트‘피’라고 지은 모양이다.

“세니아나 프렌시프.”

나는 조그맣게 대답하고 다른 애들 옆에 섰다.

“화가! 화가!”

“옛! 어르신!”

“어서 그려라. 한 치도 달라서는 안 될 것이다!”

“세니아나를 제일 크게 그려야지.”

“막내는 그렇게 얼굴이 크지 않은데.”

조용한 대강당에서 우리 가족들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져서 난 조금 창피했다. 몰래 한숨을 내쉬다가 도미니크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고 상장을 읊기 시작했다.

졸업식이 끝나고 가족들은 내 학교생활을 듣겠다며 교감을 따라갔다. 나는 기숙사에서 짐을 꺼내 왔는데, 웬일로 기숙사 문 앞이 와글와글했다.

‘교수들까지 여긴 무슨 일이지?’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조이의 지도 교수인 기욤이 헐레벌떡 내 앞으로 뛰어왔다.

“저, 정말이냐? 네가 정말로 프렌시프의……!”

그러고 보니 기욤과 레아, 쟝뤼크는 졸업식이 시작하고 대강당에 와서 그 소란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다.

“네. 맞아요.”

기욤이 새파래져서 마른세수를 했다.

“내가 네, 아니, 아가씨의 요리에 혹평을 한 건 정말로 요리 실력이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쟝뤼크 그 작자가 꼴 보기 싫어서……!”

“좀 비켜 보시오!”

다른 교수가 기욤을 떠밀며 내 앞에 바짝 다가왔다.

“아가씨, 재작년 실습에서 F를 준 건 제가 아니라 카리만 교수……!”

“이리 나와 보게! 아가씨, 삼 년 전 일은 잊어 주십시오. 벌점은 주고 싶어서 준 게 아닙니다.”

교수들뿐 아니라 학생들까지 매달렸다.

“센, 센! 여기 내가 빌려 간 노트! 너무 늦게 줘서 정말로 미안하다.”

“아가씨~! 저번 달에 교복 재킷에 주스를 흘려서 죄송해요. 마음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벌을 주셔도 달게 받을 테니 제발……!”

“조별 과제에 끼워 주지 않아서 미안해. 아니, 죄송합니다. 제, 제가 철이 없어서…….”

여긴 무슨 초상집인가. 다들 엉엉 울어 버리는 바람에 난 당황스러웠다.

‘이래서 졸업식까지 신분을 숨기라고 했구나.’

아카데미 교칙에 깊이 감사해하며 손을 내저었다.

“마음에 두고 있는 일 없어요. 그러니까 교수님들, 고개 드세요. 너희들도.”

펑펑 울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교수들과 이들을 떼어 내고 나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아가씨.”

알렉시아가 내 짐 가방을 받으며 빙그레 웃었다.

“가족들은?”

“마차에서 기다리신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알렉시아가 슬쩍 비켜섰고, 그녀의 등 뒤에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시트론!”

이게 얼마 만에 보는 거야!

나는 너무 반가워서 폴짝 뛰며 그녀에게 안겼다.

“시트론, 시트론.”

“고생 많으셨어요, 아가씨.”

“어떻게 왔어?”

“이제부터 황도에서 모시게 되었답니다.”

“정말로?”

“그럼요.”

우리는 얼싸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시트론과 손을 잡은 채 마차로 향하자 가족들이 내게 커다란 꽃다발을 건넸다.

“졸업 축하한다, 아가야.”

할아버지가 알록달록한 수국 꽃다발을 건넸고.

“잘 버텼네, 우리 돼지.”

“축하해.”

오빠들이 올포러브 꽃다발을 각각 건넸으며.

“사랑한다.”

아빠가 샛노란 프리지어 꽃다발을 건넸다. 끌어안기도 힘들 정도로 가득한 꽃다발을 받은 나는 히히 웃다가 아빠 품에 쏙 안겼다.

“감사해요.”

아카데미 생활은 힘든 일도 있었지만, 그보다 즐거운 일이 더 많았다. 세니아나로서 겪은 십 대의 마침표는 행복으로 남았다.

나는 오늘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 * *

포털을 열어 마차째로 황도에 이동했다. 황도 저택에 들어가자마자 사용인들이 우리를 반겼다.

“아가씨!”

마릴린이 방긋 웃으며 내 코트를 받았다.

“다시 모시게 되어 영광이에요.”

집사 마일로도 나를 반겼다.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저기, 그런데…….”

나는 마일로를 붙잡고 속닥였다.

“개인 하녀는 두 명을 둘 수 있는 거지?”

“마릴린을 개인 하녀로 두시는 게 아닙니까?”

“영지에서 시트론이 와서. 황도에 계속 있을 거래.”

“그건…….”

마일로가 마릴린을 힐끔 쳐다보더니 날 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물론입니다.”

나는 “다행이야.” 하고 손뼉을 짝 쳤다. 시트론 외에도 황도에서 사용인들이 잔뜩 왔다. 할아버지가 꽤 오래 황도에서 머물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영지의 집사장인 안토니오도 함께 왔는데, 그는 황도의 집사장인 마일로와 한참 시선을 교환했다.

“안토니오 님께서도 오신 겁니까.”

“어르신 계신 곳엔 늘 내가 있지.”

“성의 일로 바쁘실 텐데요.”

“자네와 달리 난 후진 양성에 충실했었으니 안심하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 옆에선 빅터, 카터 형제와 고레일, 바커스가 대화를 나누었다. 카터가 입매를 비틀며 중얼거렸다.

“또 너희냐.”

“아가씨를 지키기 위한 정예지.”

“개소리하는군.”

“너야말로 잡소리 집어치워라.”

왜인지 오늘 저택의 분위기는 몹시 뒤숭숭했다. 할아버지와 아빠는 바로 집무실에 들어갔고, 나는 오빠들과 함께 온실로 향했다.

“분위기가 이상해요.”

“그렇겠지.”

“왜요?”

“성과 저택의 사용인들이 한동안 기 싸움을 할 거야.”

“사이좋게 지내면 안 돼요?”

가웨인이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온실 문을 열어 주었다.

“황도와 영지가 개싸움을 한 세월이 20년인데 그게 쉽겠어.”

란슬롯은 내게 의자를 내주며 말했다.

“그래도 여기는 황도니 황도 저택의 사용인들이 우위에 있겠지.”

“프렌시프를 오래 보좌한 건 영지 사용인이지.”

“황도 저택의 고용인들이 그들보다 못한 건 아니잖아.”

“후계 님은 황도에 계실 거라 황도 저택 사용인들의 편이시다?”

“저급하게 편 나누지 마라.”

“형은 의리가 없어.”

“너야말로 작위를 받으면 영지에서 지낼 테니 영지 사용인들의 편을 드는 거냐.”

오빠들이 서로를 노려보다가 쯧, 혀를 차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세니아나, 식사부터 하자.”

“의사 진료가 우선이다. 코감기로 고생 중이잖아.”

“식사부터야.”

“진료부터.”

아니, 왜 이렇게 싸우는 거람.

나는 둘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 * *

시트론이 세니아나의 이불을 정리하고 있자 마릴린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뭐 하는 거예요?”

“잠자리를 정리하고 있잖습니까.”

“이 추운 날에 그렇게 얇은 이불로 되겠어요? 리나, 가서 거위 털 이불을 가져와라.”

“아가씨는 무거운 이불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건강이 우선이죠.”

마릴린이 이불을 빼앗자 시트론은 기막히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아가씨를 보필하는 데에 꼭 경쟁의식을 불태워야 하나요? 이전처럼 편하게 대해 줄 수는 없나요?”

이전에야 금세 돌아갈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참은 거다.

“경쟁?”

마릴린이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내가 왜 아가씨를 미친개라고 부른 영지 사용인과 경쟁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때의 일은 할 말이 없어요. 하지만 전 지금은 아가씨를 제 동생처럼 사랑…….”

“동생? 사랑? 기가 막혀. 주인에겐 오로지 충성뿐이죠. 목숨을 바칠 기세로요.”

마릴린은 하녀가 가져온 이불과 시트를 침대 위에 놓으며 시트론을 힐긋 쳐다봤다.

“주제넘은 생각은 하지 말란 말이에요.”

“주제넘었다고 해서 내 충심이 그쪽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마릴린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시트론은 묵묵히 베개의 먼지를 털어 낼 뿐이었다. 침대 정리를 끝낸 마릴린이 세니아나의 침실을 나섰다. 쿵! 문이 닫히자마자 그녀는 시트론이 있을 방문을 노려보았다.

“해 보자는 거지.”

중얼거리는 소리에 복도를 지나던 빅터, 카터 형제와 마일로가 그녀를 주목했다.

“무슨 일이야.”

“영지 놈들,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들어.”

카터는 아래층에서 얼핏 보이는 기사 고레일과 바커스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내 말이.”

“지금껏 아가씨를 홀대한 주제에.”

“그러게 말이다.”

“포털이 있으면 우리 아가씨고, 없으면 미친 망나니야? 그따위 충심이 어디 있어.”

카터가 “그렇지, 암.” 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마릴린이 제 부친이자 황도 저택의 총괄 집사인 마일로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영지파에게 절대로 지지 마세요!”

다른 때라면 철이 없다고 나무랐을 마일로는 “흠.” 하고 침음했다.

‘여기서 밀리면 사용인들이 각하보다 어르신을 우선하겠지.’

그는 종자 시절부터 아서를 보필해 온 뿌리부터 ‘아서의 사람’이었다.

“아가씨를 모시는 데에 실수가 없어야 할 것이다.”

“물론이죠.”

“경들도.”

“예.”

“당연하죠.”

빅터, 카터 형제의 표정에도 결기가 어렸다.

영지의 총괄 집사 안토니오는 한숨을 내쉬며 나오는 시트론을 붙들었다.

“무슨 일이냐.”

영지의 사용인이었던 시트론의 부모가 예기치 않은 일에 휘말려 죽고, 안토니오는 시트론을 자식처럼 돌보았다. 시트론이 아서의 약혼녀였던 플로헤타의 눈 밖에 났을 때 쫓겨나지 않았던 것도 안토니오의 비호가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시트론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도 생활이 쉬울 것 같지 않아서요.”

“남의 구역이 녹록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지.”

“…….”

“그래도 밀리지 마라.”

안토니오의 말에 시트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안토니오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 본다.

“그럼요!”

바커스가 버럭 소리쳤다. 뒤이어 온 고레일 또한 말이 없었다. 시트론이 눈을 끔뻑였다.

“어머, 고레일 경까지…….”

“저와 바커스가 아가씨 호위 명단에서 빠졌습니다.”

“네?!”

바커스는 분통을 터뜨렸다.

“아가씨 호위는 영지에서부터 우리 몫이었단 말입니다! 너구리 같은 놈들이 얕은수를 쓰고 있어!”

시트론이 에이프런을 꽉 그러쥐었다.

‘손 놓고 있다간 나도 아가씨의 개인 하녀 자리를 잃겠어.’

안토니오의 말이 맞다. 시트론은 위층 난간 사이로 보이는 영지 사용인들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밀려선 안 돼요.”

황도와 영지, 전쟁의 시작이었다.

* * *

나는 요 며칠 아주 곤란했다. 황도 사용인과 영지 사용인, 란슬롯과 가웨인, 그리고 아빠와 할아버지가 틈만 나면 싸워 댔다. 그리고 난…….

“세니아나, 소시지 좋아하지?”

“클램차우더가 괜찮구나.”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게 생겼다. 내 앞에 수북하게 쌓인 음식들을 보다가 신음을 삼켰다.

‘배…… 터질지도.’

식사 때마다 이 모양이라 며칠째 소화제를 상비하고 있었다. 겨우겨우 식사가 끝나고 침실로 들어와서 더부룩한 배를 두드렸다.

‘체할 것 같다.’

끙끙거리며 소화제를 먹은 후, 소파 쿠션을 끌어안은 채 통신을 연결했다.

[예.]

“저하, 잘 계세요?”

[영애가 눈에 아른거리는 것만 빼면요.]

그때, 밖에서 집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도 업무 보고서를 올리지 않았더군.”

“하하. 안토니오 님, 황도 일은 제가 잘 처리하고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염려가 안 되게 해야 말이지.”

또 시작이었다. 내가 한숨을 내쉬니 도미니크가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네…….”

저택의 일을 종알종알 털어놓자 통신석에서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재밌으세요?”

나는 아주 곤란한데!

[프렌시프의 권력 구도가 꽤 재밌군요.]

“권력 구도요?”

[지금 상황이 마치 저희 형제 같지 않습니까?]

“저하의 형제…… 황자님들이요?”

[폐하의 눈에 들려 안달하는 모습이 비슷하죠.]

“우리 집엔 폐하가 안 계신데…….”

내가 중얼거리자 도미니크는 달콤한 목소리로 [손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점도 재밌죠.] 하고 속삭였다.

‘으응?’

[영애의 역할이 중요할 겁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에나 있는 신경전이라고 하던걸요?”

[감정의 골로 시작한 문제가 가장 무서울 때도 있습니다. 특히 프렌시프처럼 권력의 정점에 있는 가문이라면.]

“흐음…….”

나는 그의 말을 곰곰이 곱씹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지구의 역사에도 감정싸움에서 전쟁으로 번진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영애는…….]

“네?”

[제가 보고 싶지 않습니까?]

“바쁜데?”

내 말에 도미니크는 못마땅한 침음을 흘렸다.

“―도 보고 싶어서 큰일이에요.”

[나 참.]

“왜요?”

[계속 휘둘리기만 하는 것 같군요.]

“휘둘리셨어요?”

[많이.]

나는 쿠션에 기대 배시시 웃었다. 도미니크가 자꾸만 귀여워지는 게 기분 좋았다. 우리는 그 뒤로 삼십 분쯤 더 사소한 대화를 하다가 통신을 종료했다. 그리고 그날 밤 도미니크의 예상대로 감정의 골에서 문제가 발발했다.

쿠당탕―! 주방에서 재료를 다듬던 난 난데없는 소란에 놀라 뛰쳐나갔다. 복도 한가운데서 란슬롯과 가웨인이 서로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정신 나간 놈.”

“형이라고 봐줬더니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게.”

“애송이라고 귀여워해 줄 때 엎드려야 밥그릇까지 뺏기는 일이 없을 거다.”

“붙어 볼까.”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깜짝 놀라서 아빠의 부관을 잡고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게…….”

부관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설명한 말에 난 기가 막혔다. 사정은 이랬다. 로열 키친 시험을 치르는 나흘간 응시자들은 성에서 숙식하는데, 짐꾼들을 한 명씩 데려갈 수 있었다. 란슬롯은 마릴린을 추천했고, 가웨인은 시트론을 추천했다. 그 때문에 다투다가 다른 문제까지 하나둘 엮이며 이 사달이 난 것이다.

“내가 후계 자리를 탐낼까 봐 찌그러져 있으라는 거 아니야!”

“내가 너 따위를 견제한다고?”

때마침 할아버지와 아빠까지 목소리를 높이며 다가왔다.

“금좌들의 포섭이 우선이다!”

“귀족들을 포섭하면 황제가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주시할 겁니다.”

“하면, 금좌들 중에 아탈란의 끄나풀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그저 지켜봐야― 왜들 모여 있는 것이냐.”

할아버지가 “안토니오.” 하고 영지의 집사장을 불렀다. 사용인들이 아빠와 할아버지에게 까닭을 설명했다.

“하면 시트론을 붙여야지. 세니아나와 함께한 세월이 기니 손발이 잘 맞을 것이다.”

“마릴린이 황도 사정에 더 밝습니다.”

“마일로, 네 녀석은 왜 안토니오에게 일과 보고를 하지 않는 게냐. 성에서는 늘―”

“황도 저택을 관리해 온 건 마일로죠.”

할아버지와 아빠까지 가세해서 싸움엔 더더욱 불이 붙었다. 투닥거리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졌다.

“네놈이 선을 넘는구나.”

“이 꼴이 보기 싫으시면 영지로 내려가십시오.”

“작위를 물려 줬다고 해서 네가 프렌시프의 가주가 된 줄 아는 게야!”

“싫다는 사람 붙들고 귀찮은 직책을 넘긴 건 어르신이시죠.”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만!”

내가 소리를 빽 지르자 복도에 와글와글 모여 있던 사람들이 나를 주목했다. 눈을 부릅뜨고 가족들과 사용인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못 써! 같은 프렌시프의 사람들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나는 가웨인을 노려봤다.

“형아 멱살을 쥐는 게 어디 있어요!”

“형이 먼저……!”

“떽!”

“…….”

이번엔 란슬롯을 쳐다봤다.

“동생을 협박하면 못써요!”

“협박이 아니…….”

“어허!”

“…….”

나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선언했다.

“서로 사과하세요.”

“…….”

“…….”

두 사람은 서로를 쏘아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안 하시겠다는 거죠? 좋아요.”

나는 척척척 걸어서 내 방에서 외투를 가져왔다.

“이런 모습은 보기 싫으니까 제가 나갈게요.”

“뭐?!”

“세니아나!”

오빠들이 나를 뜯어말렸다.

“몸도 약한 게 이 추운 날 어딜 가겠다는 거야.”

“그래, 갈 데도 없잖아.”

저택에서 눈치 보는 게 더 몸에 안 좋다고요. 나는 흥! 하고 저택을 나섰다.

황도 근처 객점에 방을 잡았다. 낡은 침대 위에 앉아 있으니 방 밖에서 애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니아나, 세니아나!”

“이런 헛간에서 어떻게 잔다는 거야.”

“아, 아가씨.”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오빠들과 사용인이 세 시간째 애걸복걸했지만, 난 방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아우, 추워라.’

낡은 객점이라 그런지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얇은 코트를 가지고 오는 게 아니었나 봐.’

난 무릎을 끌어안고 바들바들 떨며 소리쳤다.

“여기서 평생 지낼 거예요!”

너무 추워서 이가 딱딱 부딪쳤다. 그 소리를 듣고 오빠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애달파졌다.

“알았어! 내가 졌다! 화해하면 되잖아!”

“그래, 사과할 테니 제발 나와.”

나는 양팔을 교차해 어깨를 비비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살짝 열었다. 나를 본 사람들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고, 난 복도에 나서서 오빠들을 올려다보았다.

“…….”

“…….”

사과한다면서?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니 가웨인이 헛기침을 하고 란슬롯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 형님 멱살 잡아서 미안.”

“사과 받아 주지.”

나는 란슬롯을 “오빠.” 하고 불렀다.

“협박해서 미안하다.”

“……그래.”

“자, 이제 ‘형님, 아우야, 싸우지 말자’ 하고 서로 안아 주세요.”

이어진 내 말에 오빠들이 움찔하며 나를 쳐다봤다.

“어서요.”

“…….”

“…….”

“안 하세요?”

“혀, 형님 이제 싸우지 말자.”

“아우야, 싸우지 말자…….”

나는 오빠들이 끌어안는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사용인들을 쳐다봤다.

“마일로와 안토니오도!”

“저는 손주가 있는…….”

“아가씨, 저도 나이가 이제 오십…….”

“안 할 거야?”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두 사람이 눈치를 보다가 서로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자, 잘 부탁하네.”

“마, 많은 가르침 주십시오.”

이번엔 마릴린과 시트론을 쳐다봤다. 그녀들은 따로 말할 것도 없이 눈치 좋게 내가 쳐다보자마자 얼른 서로를 끌어안았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시트론 님.”

“저도 잘 부탁드려요, 마릴린 님.”

기사들 차례였다. 그들은 마른침만 꿀떡꿀떡 삼키다가 사람들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받고 슬쩍슬쩍 서로의 갑주를 두드렸다.

“자, 잘해 보지.”

“그, 그러지.”

진중한 빅터와 고레일이 새빨개진 얼굴로 말하자 카터와 바커스도 억지로 입을 열었다.

“싸우지 않도록 하겠다.”

“네가 시비만 안 걸면?”

“씁.”

내가 입소리를 내니 카터와 바커스가 얼른 서로를 끌어안았다.

‘어휴, 다행이야.’

나는 해맑게 웃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사이좋게 지내니 얼마나 좋아요. 이제 싸우면 안 돼요?”

“으응.”

“……그래.”

“예……, 아가씨…….”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내려갔다. 시무룩해진 오빠들과 사용인들도 나를 쫓아서 내려왔고, 밑에서 기다리던 할아버지와 아빠는 어쩐지 긴장한 표정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빠는?”

“화해했다!”

“……그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재빨리 아빠의 어깨를 끌어안고 말했다. 아무래도 위층에서 있던 소란을 듣고 있던 모양이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배시시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에요. 두 분이 다투시면 사용인들도 혼란스러워진다고요.”

나는 아빠와 할아버지의 손을 각각 잡으며 “이제 갈까요?” 하고 물었다.

“부디.”

“제발.”

“가요!”

―하고 말하니 프렌시프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마차로 가시지요.”

“마부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집사들이 문을 열며 밝게 말했다. 객점에 모여 있던 이들은 우르르 빠져나가는 프렌시프의 사람들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프렌시프의 왕이 어르신이 아니었군.”

“오, 오늘 해가 어디서 떴나?”

“살면서 이런 구경을 하게 될 줄이야.”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금좌 11석을 두 자리나 차지한 동부의 세도가, 권력의 정점에 선 맹수들 머리 위에 털이 몽실몽실한 병아리가 있었다.

* * *

시험을 앞두고 마지막 점검을 위해 쟝뤼크가 저택에 도착했다. 별채 주방의 오븐에서 라자냐를 꺼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보다 더 익었네…….”

“오븐이 작아서 그렇지.”

“시험장에서는 대형 오븐을 쓰지요?”

“그래. 황궁에서도 대형 오븐을 쓰니까.”

“그럼 역시 본채의 오븐으로 연습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원래는 시설이 좋은 본채 주방에서 수련하기로 했는데, 쟝뤼크가 워낙 할아버지와 아빠를 껄끄러워해서 별채 주방에서 수련 중이었다.

“작은 오븐으로도 추, 충분하지!”

쟝뤼크가 커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황궁 오븐과 완벽하게 같은 기종이 아니라면 오븐별로 불 조절 감을 익히는 게 좋을 거다.”

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쟝뤼크를 쳐다봤다.

“할아버지가 있는 본채가 싫으신 게 아니라요?”

“……그럼!”

대답이 늦은 것 같은데.

내 눈빛에서 의심이 가시지 않자 쟝뤼크는 어어흠! 커흠! 큼! 연신 헛기침을 했다.

“일 분 일 초가 아까운데 그리 미적거릴 테냐!”

“…….”

“내 분명 채소를 일정하게 썰어야 한다고 했을 텐데, 왜 이리 썬 것이냐!”

“아, 그건 자르고 남은 부분이 아까워서…… 꼭지라든가, 아깝잖아요.”

내가 웅얼거리니 쟝뤼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마를 튕겼다.

“아야!”

“일반 가정에서나 그리 생각할 테지.”

“…….”

“로열 키친은 황족과 귀족들을 위한 곳이다. 그네들이 어디 재료 아까운 줄 알겠느냐.”

“그렇지요…….”

하지만 정말로, 정말로 아까웠다.

‘뿌리 쪽에 영양분이 가득한 채소들도 있는데.’

쟝뤼크는 내게 두툼한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역대 시험관들의 자료라고 교감이 전해 주라더구나.”

나는 “우와!” 소리치며 눈을 반짝였다.

“이런 게 있으면 시험에 정말로 도움이 되겠어요.”

“그래서 대형 아카데미 졸업생들이 로열 키친 입관률이 높은 것이지. 매년 몇은 꾸준히 시험을 보고, 시험장 안의 정보를 후배들에게 물어다 주니까.”

그러니까 이게 족보라는 거구나.

난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흠칫했다.

“그럼 이거 반칙 아닌가요?”

“…….”

쟝뤼크는 팔짱을 끼며 혀를 찼다.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도리가 없다는군. 다른 응시자들도 대부분 자료를 가지고 들어갈 테니.”

그렇구나.

나는 서류의 끝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 * *

쟝뤼크는 서류를 끌어안다가, 또 조리대에 내려놓기를 반복하는 세니아나를 가느다란 눈으로 주시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저까짓 족보를 확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우수한 성적으로 시험을 통과했다 한들, 족보를 보았다면 백 퍼센트 실력으로 인한 결과라고 확신할 수 없다.

‘어렵군.’

제자를 키운다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의 일이었다면 저따위 족보는 이미 불태워 없앴을 것이다. 하지만 로열 키친은 제자의 앞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제 신념을 우선하자고 제자를 가시밭길로 인도해야 하는가. 아니면 신념에 어긋나고, 제 자존심을 깔아뭉개더라도 제자의 미래를 위해 침묵해야 하는가.

그는 서류를 건네기까지 고민을 거듭했다. 세니아나는 끙끙거리며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고 서류를 잡았다.

‘보는 건가.’

그런데 세니아나가 서류를 화로에 던져 버렸다.

“……괜찮으냐?”

“네?”

“그 서류가 로열 키친 입관에 한 발 더 다가가게 할 수도 있어.”

“그렇지만…… 족보를 보았다면 백 퍼센트 제 실력으로 입관하는 게 아니잖아요?”

“…….”

“아휴, 교수님, 붙잡지 마세요. 욕심이 불쑥불쑥 고개를 든단 말이에요.”

세니아나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불쏘시개로 서류를 불에 깊이 집어넣었다. 쟝뤼크의 입가에 미소가 머물렀다.

‘환장하겠구만. 즐거워 죽겠어.’

왜들 제자를 키우고 싶어서 안달인지 알 것 같았다. 제자의 성장을, 자신과 같은 신념을, 확고한 의지를 지켜보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다니. 세니아나가 싱글벙글 웃는 쟝뤼크를 보고 흠칫 물러났다.

“왜, 왜 그렇게 웃으세요?”

“내가 뭘.”

“아하! 또 어려운 과제 주시고 구박하시려는 거지요?”

“…….”

세니아나는 다 알아봤다며 울상을 지었다. 쟝뤼크는 턱을 쓰다듬으며 “어려운 과제라…….” 하고 중얼거리다가 실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

“카프레제 샐러드, 만들어 볼 테냐?”

“으아아, 어려운 과제일 줄 알았어요!”

카프레제 샐러드란 건 슬라이스한 토마토 사이에 치즈를 넣을 뿐인 간단한 음식이다. 쉬운 요리일수록 특별히 맛좋게 만들기 어렵다. 세니아나가 “나빴어요!” 하며 울상을 짓자 쟝뤼크는 모래시계를 뒤집으며 “자, 시작.” 하고 선언했다.

“토마토, 토마토……!”

발을 동동 구르는 세니아나를 보고 쟝뤼크는 껄껄 웃었다.

* * *

이윽고 로열 키친 시험날이 밝았다. 나는 아침부터 준비를 마치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아가씨, 식사하셔야지요!”

“벌써 출발하시는 거예요?”

“시험장 조리대가 오래되어서 일찍 가야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있대.”

마릴린과 시트론이 헐레벌떡 주방으로 가더니 샌드위치와 우유를 들고 뛰어 왔다. 나는 시트론이 건넨 샌드위치를 물고 후다닥 소거실로 향했다. 어제 다 못 본 책을 집어 들었을 때, 가족들이 급히 들어왔다.

“조리화, 조리화!”

“이봐, 세니아나의 머리를 묶어 줘라!”

가웨인은 오늘을 위해 산 조리화를 양손에 들고 날 쫓았고, 할아버지는 하녀들을 재촉했다. 하녀들이 내 옆에 다닥다닥 붙어 머리를 묶고, 구두를 신겨 주었다.

“새 조리화는 길이 들지 않아서 못 신는다니까요…….”

그러자 할아버지와 가웨인이 내 짐가방에 억지로 조리화를 넣었다.

“입관 시험 수석의 조리화란다. 내 직접 빼앗아 온 것이니―”

“빼앗으셨다고요?”

“아니, 사 온 것이니 가방에라도 넣어 두어라.”

란슬롯이 외투를 입혀 주며 물었다.

“시험은 언제 끝나지? 데리러 갈게.”

“음, 정확한 건 가 봐야 알 것 같― 아앗! 벌써 일곱 시다!”

나는 펄쩍 뛰며 정문을 향해 뛰었고, 하인들과 가족들이 내 뒤를 쫓아 달렸다.

“수험표는 챙겼어?”

“좋은 숙소를 얻으려면 궁관 놈들에게 얼마간 쥐여 줘야 한다는데.”

“금화, 금화가……!”

“어르신, 제게 있습니다!”

나는 문 앞에 멈춰 서서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했다. 마차 앞으로 가자 아빠가 기다리고 있었다.

“잘하고 와라.”

어젯밤부터 새벽까지 긴 회의가 이어졌다는데 잠 한숨 안 주무신 모양이다. 나를 배웅하려고. 나는 아빠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고, 아빠는 내 등을 다정히 두드려 주었다.

“다녀올게요.”

“그래.”

마차에 올라 저택을 빠져나왔다.

“아가씨, 잘하실 거예요!”

내 곁에 앉은 마릴린이 양 주먹을 꽉 쥐고 나를 응원했다. 난 짐꾼으로 마릴린을 택했다. 아무래도 황도 사정은 마릴린이 더 훤하기 때문이었다. 난 긴장된 표정으로 “으응.” 대답했다.

“포털로 갈 것을 그랬나 봐요. 응시생들 마차 때문에 길이 꽉 막혔어요.”

마릴린은 초조한 기색으로 창밖을 보았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황궁 결계 때문에 길을 여는 것 자체도 쉽지 않은 데다가, 보란 듯이 포털을 열면 응시생들을 압박하는 것 같아서 저어되었다. 그래도 일찍 출발한 덕에 길이 꽉 막혔어도 아홉 시가 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검문소 앞에서 내리자 쟝뤼크가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는 마쳤느냐?”

“네.”

“시험장은 실내가 아니니 첫째도 위생, 둘째도 위생이다.”

“명심할게요.”

“그리고…….”

쟝뤼크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소리를 죽였다.

“네가 어르신의 손녀라는 건 강력한 힘이지만, 이곳 시험장에선 그렇지 않아.”

“네?”

“응시생들은 너부터 견제하려 들 거다.”

“…….”

“로열 키친에 사활을 건 사람이 부지기수야. 비열한 수작이 들어올지 모른다. 경계해라.”

난 고개를 끄덕이고 수험표를 그러쥐었다. 쟝뤼크와 인사한 후 검문소로 향했다.

“프렌시프 가의 세니아나 님이십니다.”

마릴린의 말에 따분한 듯 턱을 괴고 있던 경비병이 펄쩍 뛰어올랐다.

“서, 성녀님!”

그러자 주변 사람들 모두가 나를 주목했다.

“세니아나 프렌시프?”

“성녀라고…….”

경비병은 손바닥을 비비며 속삭였다.

“로웨나 황비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거든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불편한 기색으로 나를 흘끔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이번 시험 수석은 정해진 거라더니.”

확실히 프렌시프 가의 딸이라는 건 이 시험장에서만큼은 내 발목을 붙잡을 것 같았다. 시험장에 들어가자 사람이 가득했다.

“벌써부터 사람이 많네요.”

“으응. 더 일찍 출발할 걸 그랬나 봐…….”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도 있었고, 작은 꼬마도 있었다.

“센!”

스위트피가 손을 흔들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늦었다고? 아직 시험 시작 세 시간 전인걸?”

“나와 조이는 어젯밤부터 검문소 앞에 줄을 섰어.”

나는 조이를 쳐다봤다. 그는 쭈뼛쭈뼛하며 고개를 수그렸다.

“저기…… 그…… 자리는 맡아 줄 수가 없어서…… 죄, 죄송합니다.”

“아니야. 괜찮―”

“정말 죄송합니다!”

조이가 겁먹은 얼굴로 주춤거리자 스위트피가 그의 등허리를 퍽 걷어찼다.

“우리만큼은 센을 어려워하지 않기로 했잖아.”

“아, 알고 보니까 어르신과 너무 닮아서 오금부터 저리다고.”

스위트피는 그의 머리를 퍽 후려쳤다.

“개소리.”

나는 아카데미 때의 일이 떠올라서 킥킥 웃었다. 스위트피 덕에 조이도 한결 긴장을 풀었다.

“제일 무서운 게 권외 응시자들이야.”

“권외 응시자?”

“가난해서 아카데미를 못 나온 천재들이거나, 혹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도 한 번 떨어진 사람들이거든.”

아하, 그렇지. 원래 재수생들이 무서운 법이다. 우리는 시험 시작 전까지 정보를 나누었다.

“확실히 센을 흘끔거리는 사람이 많네.”

“그럴 수밖에. 나 좀 전에 황비님의 시녀를 뵈었거든.”

“황비님?”

“코트니 황비님이 어떻게든 센을 만나야 한다고 했다나 봐.”

“도움이 안 되는군. 가뜩이나 다들 예민한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스위트피와 긴장이 풀린 조이가 “우리만은 안심해.” 하면서 다독여 주었다. 그렇게 정오가 되자 로열 키친의 셰프들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몇 마디 인사를 한 그는 시험에 관해 공지했다.

“제군들은 성에서 머무는 동안 수없이 많은 시험대 앞에 설 것이다.”

“규칙을 어겼을 때, 요리 실력이 로열 키친에 미치지 못할 때 등의 경우 점수가 감점되는데 0점이 되는 순간, 남은 시간에 관계 없이 퇴출된다.”

“이곳에서 나흘을 버틴 사람만이 입관 명단에 이름을 올릴 테니, 모두 주의를 기울이도록.”

응시생 하나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점수를 얻는 방법은 없습니까?”

“매일 진행되는 과제에서 좋은 성적을 얻으면 점수를 얻을 수 있지만…….”

로열 키친 셰프의 입매가 삐뚜름히 올라갔다.

“우리들 입맛에 맞는 요리가 나왔을 때나 가능한 일이지.”

저들은 미식의 나라 길라게온에서도 가장 훌륭한 실력을 가진 요리사들이었다. 물론 미각도 일반인과 비교할 수 없을 거다.

‘절대로 쉽게 점수를 얻지 못할 거라는 뜻이네.’

그리고 성에서 지내는 동안 머물 숙소로 안내했다.

“여기가 황제 폐하가 머무시는 궁이구나…….”

조이를 비롯한 응시생들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궁을 바라보아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긴 외궁이야.”

“외궁?”

“황족들이 머물거나 귀족들이 입궁하는 곳은 내부 검문소를 두 번이나 더 넘어야 해. 내궁은 여기와는 비교할 수 없이 으리으리하지.”

“과연 프렌시프 영애님이다……. 와 본 거지?”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중간에서 길이 갈려 남자 응시생들과 여자 응시생들이 나뉘었다. 여자 응시생들은 시녀를 따라 조금 더 깊이 들어갔다.

“방 하나에 세 명이 짝을 지어 머물 겁니다.”

그러자 흑발의 응시생이 손을 들었다.

“숙소를 함께 쓸 사람은 응시생들끼리 정할 수 있는 건가요?”

“이름이 뭐죠?”

“세르비입니다.”

“20점 감점.”

세르비라는 이름의 여학생이 눈을 홉떴다.

“어, 어째서?”

“로열 키친의 셰프들을 비롯한 우리는 모두 궁인이죠. 궁인의 몸으로 황족, 그리고 궁에 초대되는 고위 귀족 앞에서도 질문을 할 셈입니까?”

“하, 하지만?!”

“30점 감점. 경비병, 저 응시생을 끌어내세요.”

세르비라는 이름의 응시생은 새파랗게 질려서 끌려나갔다. 시녀는 빙그레 웃으며 겁에 질린 응시생들을 둘러보았다.

“말대답은 절대로 허락되지 않으니 주의하세요.”

“…….”

“몇몇 고위 궁인들을 제외하면 우리는 모두 궁을 이루는 톱니바퀴입니다.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쓸모없는 톱니바퀴는 폐기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응시생들은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스위트피가 주먹을 꽉 쥐고 중얼거렸다.

“사람답게 살고 싶으면 성공하라는 뜻이네.”

“……응.”

뒤이어 방의 구성원이 벽보로 붙었다. 나는 다행히 스위트피와 함께 방을 쓰게 되었고, 우리는 기뻐서 서로를 얼싸안았다.

“다행이야, 센!”

“응, 응! 남은 한 사람도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스위트피가 우리의 이름 뒤에 이어진 이름을 보고 딱딱하게 굳어졌다.

“헤리엇 콜먼이라고?!”

스위트피는 “젠장.” 하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러고 나를 쳐다보았다.

“센, 우리 아무래도 똥 밟은 것 같다.”

그게 대체 누구기에?

그때였다. “꺄아―!” 하는 밝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우리를 양팔로 끌어안았다.

“후배님들과 한 방이잖아!”

스위트피가 이를 악물고 등 뒤의 여자를 곁눈질했다.

“헤리엇 선배.”

‘헤리엇…… 선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헤리엇이라 불린 여자를 쳐다봤다. 헤리엇은 싱글벙글하며 스위트피의 볼을 양손으로 꾹꾹 눌렀다. 격의 없는 태도라 일순 ‘친한가?’ 하고 생각했는데, 스위트피의 표정이 점점 떫어지는 것을 보고 금세 관계를 다시 정의했다.

‘고양이와 생쥐구나.’

물론 고양이는…….

“반가워, 후배님.”

내게 손을 내밀고 있는 ‘헤리엇 선배’ 쪽일 거다.

“뵙게 되어 영광이라거나 두 손으로 악수 받아야 하는 건 아니지?”

“선배!”

스위트피가 인상을 쓰며 말하자 헤리엇은 “농담, 농담.” 하며 깔깔 웃었다.

“가자. 동부 아카데미 출신끼리 단합을 다져야지.”

스위트피에게 짐가방을 턱 던진 그녀가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짐꾼 안 데려오셨어요?!”

“좁아터진 방에 짐꾼까지 재울 수 없잖아.”

그러더니 내 짐꾼인 마릴린과 스위트피의 짐꾼 하녀를 슥 돌아보고 빙그레 미소 짓는다.

“내 덕에 널널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선배님의 지혜랄까.”

스위트피는 “재작년에 입관 시험을 봐서 그런 거지. 뚝 떨어졌지만.” 하고 투덜거렸다. 헤리엇이 그런 스위트피의 이마를 꾹 눌렀다.

“안 본 새에 나불나불 잘도 말하게 됐네~?”

“나불나불……!”

스위트피가 기가 막힌 듯 헤리엇을 바라보자, 헤리엇은 양손으로 스위트피의 볼을 잡고 흔들었다.

“아유, 귀여운 애송이~ 확 물어 버릴까 보다.”

“선배!”

“얌전히 따라와~?”

헤리엇이 생글생글 웃으며 먼저 걸었고, 스위트피는 씩씩거리다 짐가방을 주웠다.

“하필이면―!”

“괜찮아?”

“조심해, 저거 완전히 개니까.”

“개? 아, 문다는 비유를 했지.”

“비유가 아니야.”

“응?”

“저건 실제로 문다고!”

헉! 내가 숨을 들이켜자 마릴린이 헤리엇을 힐끔거렸다.

“아가씨, 조심하세요.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

스위트피도 혀를 차며 헤리엇의 등을 노려보다가 힘없는 목소리로 “가자.” 하고 말했다. 방 안에 들어가자 헤리엇은 가장 큰 침대를 차지하고 앉아 발을 까딱거렸다.

“뭐 해?”

“뭘요.”

“점심을 받아 와야지. 첫째 날은 직접 받아 와야 하거든. 나는 버터롤이 좋으니까 챙겨 와.”

“그건 선배가 해―”

“어서.”

나는 스위트피에게 “내가 다녀올게.” 하고 말했지만, 스위트피는 “됐어. 네 것도 받아 올게.” 하고 답하며 헤리엇의 짐가방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쿵! 문 닫히는 소리가 살벌했다. 마릴린은 헤리엇을 잔뜩 경계하며 내 짐을 풀었다. 조리 도구를 내려놓고 있는데, 헤리엇이 다가왔다.

“팬 좋네. 시중에 있는 브랜드는 아닌 것 같은데 제작?”

마릴린이 팬을 꼭 끌어안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어르신이 아가씨를 위해 연금술사에게 의뢰한 소중한 팬이에요!”

헤리엇이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침음을 흘렸다.

“뭐, 좋아. 어차피 주방 안에선 못 쓸 테니까.”

마릴린은 그런 헤리엇을 노려보며 “밉상이야.” 하고 속닥거렸다. 짐을 풀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스위트피가 그녀의 짐꾼과 함께 쟁반을 가지고 들어왔다.

“점심 먹자.”

“스튜네!”

“좋아해?”

“응!”

스위트피가 짐가방 위에 쟁반을 내려놓자 짐꾼들이 문 쪽으로 물러났다. 헤리엇은 짐꾼들을 흘끔 쳐다보다가 침대에서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저들은?”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요, 선배.”

“같이 안 먹는 거니? 귀족 나리는 하인들과 함께 식사할 수 없어?”

“선배도 귀족이잖아요. 콜먼 백작가의 따님이 무슨.”

“나 말고, 너희 의사를 묻는 거야.”

“하인과 식사하는 건 제겐 하루 이틀 일이 아니거든요? 가난한 귀족은 하인이 있는 일도 드물다고요.”

그렇게 말하던 스위트피가 “센은?” 하고 물었다.

“나도 괜찮아.”

그런데 짐꾼들이 오히려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그럴 수야 없지요! 아가씨와 겸상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예, 저희는 괜찮습니다.”

몇 번 권유했지만 그들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끝끝내 다가오지 않았다. 헤리엇은 빙그레 웃고 말했다.

“짐꾼들의 식사 시간은 따로 있으니까 우리 먼저 먹자.”

스위트피가 “알면서 왜 물어봐요!” 하며 스푼을 들었다. 스튜를 입에 넣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간이 이상한데.’

스위트피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미간을 좁히며 스튜를 쳐다봤다.

“뭐야, 로열 키친의 음식이라서 기대했더니.”

“간이 부족하지?”

“향신료 배합도 틀려먹었어. 아, 이런 걸 먹고 어떻게 시험을 보라는 거야. 입맛만 상하겠어.”

나는 짐가방에서 가져온 조미료를 꺼냈다.

“우리가 조절하면 되지.”

“그래, 방에 간이 웍도 있으니까 다시 끓이면 되겠다. 센, 네가 간을 볼래?”

“좋아! 그런데…… 선배는요?”

헤리엇은 생글생글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난 너희들이 해 온 걸 맛볼래.”

스위트피는 “기대도 안 했어요.” 하며 스튜를 작은 냄비에 옮겨 담았다. 냄비 안에서 뭉근하게 끓어오르는 스튜를 보다가 소금을 조금 추가했다. 하지만 간을 다시 해도 영 개운치 않았다.

‘고기 자체가 하급이라 잡내가 가시지 않아.’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스위트피는 이제 슬슬 귀찮아졌는지 “그냥 먹을까?” 하고 물었다. 헤리엇이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그건 좋은 생각 같지 않은데.”

난 헤리엇을 힐끔 쳐다봤다.

‘이상한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미묘한 구석이 있었다.

“센, 어떻게 할까?”

“음…… 카레 가루를 추가해 볼까?”

“그렇구나! 카레는 향이 강하니까 잡내가 덜 느껴질 거야. 아, 나 월계수 잎이 있어.”

“넣어 보자!”

우리가 떠들며 요리를 하는 동안 헤리엇은 가만히 냄비를 주시하고 있었다. 스튜를 다시 그릇에 옮겨 담으려고 하니, 헤리엇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냥 넣으려고?”

“뭐 어때요. 우리끼리 먹는 건데.”

“흐음…….”

나는 얼른 스위트피를 붙잡았다.

“다른 그릇에 담아서 먹자. 나, 그릇을 몇 개 가져왔어.”

“설거짓거리만 늘 텐데?”

“애써 다시 만들었는데 이전 그릇에 묻어 있던 여분과 섞이면 아깝잖아.”

“흐음.”

“위생에도 좋지 않고.”

스위트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가 내준 접시를 물에 잘 씻어 왔다. 물기를 꼼꼼히 제거한 후 다시 스튜를 부었다. 맛을 본 헤리엇이 나와 스위트피를 번갈아 보았다.

“피스, 넌 저 애에게 고마워해야겠다.”

“센에겐 늘 고마워하고 있다고요.”

다시 만든 스튜는 꽤 괜찮았다. 카레 가루를 추가해서 ‘스튜’라고 보기엔 어렵지만, 어쨌든 카레도 넓게 보면 스튜의 일종이긴 하다.

‘그보다 헤리엇 선배가 신경 쓰이는데…….’

자꾸만 느껴지는 기이한 위화감에 헤리엇을 빤히 보자 그녀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식사를 마친 후, 헤리엇은 씻겠다며 먼저 방을 나섰고 스위트피는 투덜거리면서 헤리엇의 접시까지 씻어 놓았다.

“이대로 있다간 계속 선배에게 말리겠어. 방책이 필요해.”

침대에 앉은 스위트피가 투덜거렸지만, 난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응?”

“선배가 시키는 대로 하자.”

“……무슨 소리야?”

나는 짐이 별로 없는 헤리엇의 가방을 쳐다보며 “혹시 모르니까.” 하고 중얼거렸다.

내 추측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건 그 뒤로 세 시간 뒤, 응시생들이 다시 조리장에 모였을 때였다. 조리장에 모이기 전부터 붙은 벽보를 확인한 응시생들은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내가 왜 탈락이냐고!”

“말도 안 돼!”

“점수 깎일까 봐 식사도 안 하고 쥐죽은 듯이 있었는데!”

스위트피와 조이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뭐야,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우리가 모르는 새에 시험이라도 보고 있었던 건가.”

그때, 단상 위로 서른 명 남짓의 로열 키친의 셰프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뭐, 뭐야!”

단상을 보던 스위트피와 조이가 버럭 소리쳤다.

‘역시.’

그들 중엔 헤리엇이 있었다. 헤리엇은 로열 키친을 상징하는 휘장과 금색의 타이를 매고 있었다.

“벽보에 붙은 이들은 성을 떠나고, 남은 자들은 정렬해라.”

회장이 터져나갈 듯 시끄러워졌다. 퇴출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응시생이 항의했다.

“제가 왜 퇴출이라는 겁니까!”

그가 소리치자 셰프들 사이에서 누군가 손을 올렸다.

“네놈과 한 방에 있던 제4키친의 루터다.”

“……!”

“너는 불결한 손으로 음식을 만졌고, 같은 방 응시생을 협박해 조리서를 갈취했으며 무엇보다.”

루터 요리사가 쯧, 혀를 찼다.

“코가 형편없어. 스튜에 소금만 때려 넣고, 잡내를 없앨 생각을 하지도 않은 주제에 실력을 과신했지.”

“그, 그건……!”

“그게 맛있긴 뭐가 맛있다는 거야. 황궁의 돼지도 네가 만든 요리보다 나은 걸 먹을 거다. 썩 꺼져!”

루터 요리사의 말에 응시생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으, 응시생을 더러운 수로 속이는 게 로열 키친에서 하는 일인가! 한 방을 쓴 사람이 시험관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그렇게 쉽게 간을 맞추지는 않았을 거라고!”

“어리석은 놈!”

나이 지긋한 로열 키친의 셰프가 일갈하자 응시생은 움찔, 뒷걸음질 쳤다.

“시험관 앞이 아니라고 그따위 요리를 내는 놈을 어찌 요리사라고 부르겠느냐!”

시험장이 고요해졌다. 다른 응시생들은 마른침을 삼켰고, 셰프는 인상을 찌푸린 채 조리장을 둘러보았다.

“폐하께서 보시지 않는다고 더러운 손으로 식칼을 잡을 테냐.”

“…….”

“사람 입에 들어가는 음식은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어. 그래서 요리사는 무엇 하나 소홀해선 안 되는 것이다.”

“…….”

“탈락자들은 어서 황궁을 떠나도록 해라.”

응시생들은 여전히 억울한 표정이었지만, 하나둘 어깨를 떨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이와 스위트피가 질린 표정으로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엄청나네.”

“그러게 말이다.”

탈락자들이 조리장을 떠나고 로열 키친의 셰프들이 조리대 사이사이를 걸으며 응시생들의 차림을 점검했다.

“조리모에서 머리카락이 빠져나왔군. 30점 감점.”

“손톱 밑이 더럽잖아! 이따위 손으로 음식을 하겠단 말이냐! 50점 감점! 퇴출이다!”

“에이프런의 매듭이 느슨하구나. 요리 중에 떨어지면 요리하던 손으로 다시 잡을 생각이니? 10점 감점.”

그들 틈에서 헤리엇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어머나, 조이 주제에 로열 키친에 응시를 했네~”

“서, 선배. 언제 입관하신 거죠?”

“작년 시험에서 붙었지.”

“그런데 왜 학교에 알리지 않으시고……!”

“권외 응시자들은 알리는 경우가 거의 없잖아? 그래서 나처럼 쓰이는 거고.”

그녀가 까르륵 웃고 조이의 조리모를 툭 쳤다.

“모자 엉성하게 썼구나? 20점 감점~”

“으윽.”

“스위트피는…… 고집 세게 생겼으니 50점 감점시킬까?”

“선배!”

“농담, 농담.”

헤리엇이 까르륵 웃으며 스위트피의 어깨를 탁, 쳤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세니아나 프렌시프 양.”

“……네.”

“너, 내가 시험관이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지?”

그러자 학생들의 차림을 점검하던 시험관들이 내게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눈치챘다고? 어떻게?”

“헤리엇, 네가 말해 준 거 아냐? 프렌시프 영애님이라고.”

헤리엇은 팔짱을 낀 채 “설마요~” 하고 중얼거렸다.

“어떻게 알았니?”

“그야…… 이상했으니까요.”

“이상하다고?”

“여기 있는 권외 응시자들을 보면 다들 살벌한 눈빛이거든요. 그런데 선배님은 여유로웠고, 또…….”

응시자들과 로열 키친의 셰프들이 나를 주목했다.

“선배는 귀족 출신인데, 짐꾼들과 함께 식사하지 않느냐고 물으셨지요.”

“그런데?”

“귀족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나요?”

윤세나의 세계에서 살다 온 나도 의아한 질문이었다. 귀족은 태어날 때부터 평민들 위에 선다. 처음부터 ‘남들과 다른 나’가 익숙한 것이다. 스위트피처럼 타인에게 상냥한 사람조차 하인과의 겸상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하인들과 함께 먹지 않냐고 물은 건 이상하잖아요.”

“…….”

“로열 키친의 셰프들 중에 귀족이 많지만, 본인보다 신분이 낮은 궁인들을 위해 요리할 때가 있지요. 그래서…….”

“그래서?”

“선배의 말이 그런 일에 자존심 상해하지 않을 수 있냐는 시험…… 같았어요.”

다른 일도 수상하긴 했다. 스위트피에게 힌트를 준 일 말이다. 잡내가 나는 스튜를 그냥 먹자는 스위트피에게 ‘그건 좋은 생각 같지 않은데’ 하고 말하거나, 음식을 새 그릇에 담아 먹도록 한 일.

‘헤리엇은 꽤 스위트피를 아끼고 있는 거야.’

“그리고 처음에 시험관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매 순간 시험대에 설 거라고요. 그게 힌트가 아닐까 싶었어요.”

“그랬지.”

“그리고 항상 정오에 시험을 본다고 하셨는데, 선배님과 만난 게 마침 정오였기도 하고…….”

우물쭈물하며 헤리엇을 바라보니 그녀는 깔깔 웃었다.

“꽤 영리한걸.”

“가, 감사합니다.”

“기대된다, 너.”

“…….”

“추가 점수 15점.”

“앗!”

내가 깜짝 놀라 그녀를 보니 헤리엇은 곁눈질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추가 점수를 얻은 사람은 너뿐이네.”

다른 셰프들도 “호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프렌시프의 힘으로 응시권을 따낸 건 아닌 모양인데.”

“그렇군.”

셰프들이 응시생들의 점검을 마치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눈도장은…… 찍은 것 같은데.’

다행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첫날의 두 번째 시험이 시작되었다. 초청한 귀족이 가장 맛있게 먹는 음식을 만드는 자에게 추가 점수가 있는 시험이었다. 곧 초청한 귀족이 올라왔고, 시험장은 또 한 번 소란에 휩싸였다.

‘아, 아니!’

뭐야. 왜 여기 계신 거야!

위풍당당하게 단상 위에 오른 사람은 샤르파크 후작이었다. 술렁이는 응시자들 사이에서 나 홀로 기가 막힌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샤르파크 후작이 왜?’

내가 알기로 그는 이익 없는 장사엔 절대로 발을 디밀지 않는 사람이었다. 시험관인 로열 키친의 셰프가 그를 소개했다. 금좌 11석의 한 사람이며 동부의 거두, 샤르파크 가의 가주라는 간략한 말 뒤로 그의 소문을 들은 응시생들의 중얼거림이 따라붙었다.

“길라게온 제일의 현금 부자라던데.”

“지하의 거목이라 불린다고 들었어요. 마약왕이라지요?”

“과연 로열 키친. 심사자의 급이 다르군.”

“대체 저런 분이 무슨 까닭으로 심사를…….”

시험 과제는 샤르파크 후작을 만족시키는 요리를 내는 것이었다. 밀가루로 만든 음식은 기피한다는 시험관의 말에 면 요리가 특기인 응시생들은 좌절했다.

“세계 제일의 밀가루 산지에 터를 둔 사람이 어떻게 밀가루를 못 먹을 수 있냐고!”

조리장 뒤편에 마련된 재료 창고 앞에서 누군가의 절규가 들려왔다.

‘으음, 밀가루를 드시지 않는다는 건 익히 알긴 하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이유를 알아둘 걸 그랬다. 밀가루를 꺼리는 이유가 글루텐(불용성 단백질) 때문이라면 곡류를 재료에서 제외해야 한다.

‘하지만 일전에 보리를 먹는 것을 보았으니까 그건 아닐 거야.’

한약을 먹고 있어서 밀가루를 자제하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후작 앞에 응시생 몇이 모여 있었다.

“외람되지만 후작님, 몇 가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송구하지만 질문이 있습니다.”

그들은 후작에게 무언가를 물었고, 후작은 친절하지는 않지만 일단 답변을 주었다. 질문한 이들이 밝은 얼굴로 돌아와 재료를 집었다. 그들 중엔 조이도 있었는데, 스위트피가 그에게 물었다.

“뭐라셔?”

“너도 가서 묻지? 넌 샤르파크의 방계이니 다른 사람보다 한결 편하게 질문할 수 있잖아.”

“그러니까 갈 수가 없는 거지.”

스위트피는 쯧, 혀를 차더니 후작을 힐끔 쳐다보고 “왜 하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센, 너는 가지 않아도 돼?”

“나는 샤르파크 성에서 실습을 한 적이 있는 데다가…….”

“그렇네. 신분상.”

쟝뤼크의 말대로 내 신분은 이번 시험에선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든 응시생이 나를 주목하고 있어서 심사자인 샤르파크 후작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부담이 된다. 스위트피와 나는 마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밀가루나 곡류는 피하는 게 좋겠어.”

“응, 안전하게 가야지.”

자꾸만 손에서 식은땀이 난다. 재료를 고를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전혀 감이 오지 않으니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침착해.’

침착하게 생각하자.

‘후작이 성에서 즐겨 먹던 게 뭐였지.’

일단 간이 세지 않은 연한 육류. 과일과 과즙. 현미로 만든 오트밀. 채소 포타주. 그리고 내가 만든 컵밥도 좋아했었다. 일단은 그런 요리와 비슷한 재료로 요리해 볼까.

나와 스위트피, 그리고 조이는 재료를 골라서 조리대로 돌아왔다. 여전히 샤르파크 후작 주위에 몰려 질문을 하는 응시생들이 몇 있었다. 그리고―

‘시험관들이 왜 펜을 움직이고 있지?’

질문을 하고 돌아가는 응시생들의 번호표를 유심히 보고 서류에 무언가를 기재했다.

“너, 이름이 뭐지?”

“조지아 들롱입니다.”

일부러 이름을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설마!”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스위트피가 고개를 갸웃했다.

“센?”

“스위트피, 우리도 질문하러 가야 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때, 단상 위에서 시간을 재고 있던 시험관이 종을 울렸다.

“일 분 후에 조리를 시작한다. 모두 조리대로 돌아가도록.”

큰일 났다. 늦었어!

내가 입술을 깨물자 스위트피는 “무슨 일이야?” 하고 물었다.

“각하께 밀가루를 먹지 못하는 이유를 질문하는 것까지가 시험이었던 거야.”

“뭐?!”

“이번 과제로 점수를 얻을 수 있다고만 했지, 감점하지 않겠다고는 안 했잖아. 각하께서 왜 밀가루를 못 먹는지 물어보지 않는 사람들은 감점일 거야.”

스위트피가 굳은 얼굴로 시험관들을 쳐다보았다.

“그래, 정확한 이유를 모른 채 요리하는 건 시식자 몸에 나쁠 테니까.”

내 생각이 맞았던 거다. 단순히 ‘밀가루를 싫어한다’라.

‘잠깐만. 후작이 즐겨 먹던 음식의 재료들은 모두…….’

나는 재료를 골라서 돌아가는 스위트피의 팔을 잡았다.

“스위트피.”

“응?”

“각하가 과거에 피부병을 앓은 적이 있니?”

“글쎄.”

그러자 조이가 “네 백부님이신데 그걸 모른단 말이야?” 하고 물었다. 스위트피는 어깨를 으쓱했다.

“선대 샤르파크 후작도 모를걸.”

“왜?”

스위트피는 주변을 둘러보고 목소리를 바짝 낮추었다.

“각하는 정부인 소생이 아닌 혼외자거든. 그것도…….”

“아, 매춘부의 자식이라고 했지.”

“열 살이 넘어서 가문에 들어왔고, 정부인 소생 장자가 불의의 사고로 죽기 전까진 지하에 갇혀 살았대.”

“그렇군.”

“집안 행사에도 얼굴을 전혀 비춘 적이 없었으니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지.”

조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아랫도리 잘못 놀리는 놈들이란. 낳은 제가 잘못이지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가둬 놓고 키운…… 아, 실례.”

조이가 샤르파크 가의 사람인 스위트피를 보고 헛기침을 했다.

“뭐, 내 백조부님이시지만 나도 그분이 썩 좋은 건 아니라. 이해도 안 되고.”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한 스위트피가 재료를 담은 바구니를 가지고 조리대로 돌아갔다. 조이도 몇 가지 재료를 더 고른 후 발걸음을 돌렸다.

‘밀가루와 기름진 음식을 끊으면 피부가 좋아지지.’

우리 식당 옆 미용실에 다니던 동네 언니가 연예인을 준비하고 있어서 피부에 예민했다. 피부과나 피부 관리실에 갈 돈이 없어서 예민하게 음식을 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오늘 입양 때문에 손님이 오시니까 세나, 너는 시설 안으로 들어오지 마라.]

고아원의 원장은 피부병을 앓는 나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 제 관리 소홀로 여겨질까 봐 저어한 것이다.

‘샤르파크 후작이 밀가루를 싫어하는 것도 트라우마와 관련된 걸지도 몰라.’

나는 재료가 들어 있는 바구니에서 쓸 만한 것들을 골라냈다. 다행히 시금치와 당근, 쌀과 녹차 등이 있어서 내가 생각하는 요리를 할 수 있었다.

‘몇 점을 감점당했는지 모르겠어.’

조리모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꽤 많은 점수를 잃었다. 그런데 시식자의 건강과 관련된 일이라면…….

‘고작 10점, 20점 깎이는 건 아닐 거야.’

이번 과제에서 무조건 점수를 얻어야 한다. 나는 얼른 손을 닦고 재료를 다듬기 시작했다. 시금치를 갈아서 밥과 함께 안친 다음, 소스를 만들었다. 잘게 다진 파와 간장, 고춧가루, 깨소금, 참기름 등을 넣어 만들었다.

‘콩나물 대신 피부에 좋은 시금치로 시금치 밥을 만들고.’

다음엔 곁들여 먹을 요리를 하기로 했다.

[시험 과제가 나오면 일단 육고기와 해산물, 채소, 곡류를 모두 써야 한다. 2:2:4:2의 비율을 맞추면 더욱 좋겠지.]

쟝뤼크의 말을 떠올리고 바구니 속에서 우렁이를 집었다.

‘우렁이로 된장찌개를 끓이자. 시금치와 잘 어울릴 거야.’

된장을 한 스푼, 고추장을 반 스푼 넣고 손질한 우렁이를 함께 볶았다. 타지 않도록 잘 살핀 다음, 구수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을 때, 쌀을 씻으며 덜어 둔 쌀뜨물을 부었다. 그리고 애호박과 양파, 감자 조금을 넣고, 재료가 끓기 시작했을 즈음 두부를 투입. 거품을 걷어 내 가며 청양고추와 파를 넣었다.

‘육고기는…… 으음.’

조금 전 재료를 고를 때 유난히 신선한 소고기를 발견했다. 마블링이 완벽한 소에 양념을 잔뜩 넣어 볶는다는 건 소시민이었던 나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굽자!’

쟝뤼크는 불 조절에 약한 내게 고기 굽는 법을 맹훈련시켰다. 그래서 이제 굽는 것이라면 뭐든 자신 있었다.

‘고기는 식으면 냄새가 나고 맛이 떨어지니까 기다려야 해.’

요리 시간이 끝나기 직전 구우면 야들야들해서 더욱 맛있을 것이다. 나는 디저트를 준비하면서 시간을 가늠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아슬아슬할 때까지 기다린 나는 고기를 구웠다. 막 조리를 마쳤을 때,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난 한숨을 내쉬며 쟁반 위에 만든 요리를 가지런히 올려 두었다.

시식이 시작되었다. 샤르파크 후작 혼자서 이 많은 응시생의 요리를 어떻게 다 맛보려나 싶었는데, 대부분의 요리는 그의 앞에 가지도 못했다.

“해산물은 쓰지도 않았군.”

“그, 그렇지만 맛은 확실히?!”

“맛볼 가치도 없어.”

“세상에! 탄 음식을 금좌의 식탁에 올리라는 말이냐! 실격! 조리장을 떠나라!”

“그럴 수가…….”

“어머~ 우리 집 개도 이따위 오트밀은 안 먹는단다~”

지금까지 샤르파크 후작의 식탁에 오른 요리는 단 네 접시였다. 스위트피의 차례였다. 설탕을 쓴 요리가 특기인 그녀는 설탕 세공을 한 나무를 중앙에 세우고 그 주변으로 잔디를 연상시키는 녹색의 수프를 부었다.

“손재주가 좋군.”

“이 아이는 저와 동문인데 저학년 때부터 애피타이저와 디저트가 특기였답니다.”

“이렇게 얇은 가지까지…….”

스위트피의 평가는 좋은 편이었다. 나와 조이는 서로를 마주 보며 씩 웃었다.

“스위트피는 동부 아카데미의 자랑이라고.”

조이가 으쓱하자 주변에 있던 응시생들이 혀를 찼다.

“저거 바보 아니야.”

“아카데미마다 로열 키친에 한 명씩 뽑히는 게 관례인데.”

“그러니까 말이다. 동기의 성적이 좋으면 제가 떨어질 텐데.”

그러자 조이가 울컥한 표정으로 주변을 노려보았다.

“조이.”

“하지만?!”

“휩쓸리면 안 돼.”

이를 악문 조이가 쟁반 끝을 꾹 잡은 채 고개를 수그렸다. 스위트피의 요리는 샤르파크 후작의 식탁에 올라갔다. 후작이 천천히 스푼을 들었다. 묵묵히 맛을 본 그가 그녀를 흘끔 쳐다보았다.

“가문 망신 시킬 실력은 아니군.”

“…….”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곁에 있던 시험관이 서류에 무언가 적었다. 다음은 조이.

‘아이고.’

조이의 요리는 식탁에 올라가지 못했다. 그는 얼굴이 거무죽죽해져서 조리대로 돌아왔다.

“…….”

“조이.”

“괜찮아?”

나와 스위트피가 물었지만, 조이는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엔 내 차례가 되어 나는 쟁반을 든 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한 상을 다 차렸군.”

“화려한 맛은 없군요.”

“죄다 갈색이니…….”

시험관들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금좌의 식탁에 올릴 만큼 뛰어난 요리로 보이지는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단점도 보이지 않습니다.”

“…….”

“그냥 통과시키죠. 프렌시프 어르신께서 또 주방을 뒤집으면 어쩐단 말입니까.”

“그럴 수야 없지.”

눈꼬리가 올라간 셰프가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신분으로 뽑는다면 작년에 세자르 백작 영애가 떨어질 일이 있었겠느냐.”

“맞습니다.”

“121번 응시생. 말해 보게.”

그들이 날 쳐다보았다.

“무슨 까닭으로 그 요리를 만들었는가.”

“저는…….”

난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입을 열었다.

“후작 각하께서 밀가루를 드시지 못하는 이유가 어쩌면 피부 때문이 아닐까 싶었어요.”

“피부?”

흥미 어린 눈으로 이곳을 쳐다보던 후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매춘부의 자식이라 과거에 피부병을 앓은 게 트라우마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어떻게 하지.’

난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동부는 바다가 없는 땅인 데다 척박해서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밀가루를 많이 먹잖아요.”

“밀가루가 많이 나는 땅이기도 하지.”

“더더군다나 후작께서 젊을 적엔 성녀가 없었으니 포털을 열어 재료를 가져오기도 힘들었겠지요.”

“그래.”

“거기다 십수 년 전부터 개발 중인 땅이 많기도 하고요.”

“그래서?”

“피부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환경이니 나이 지긋한 분들은 피부병을 많이 앓았다고 들었어요.”

“…….”

나는 샤르파크 후작과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귀족에게 체면은 목숨과도 같은 것.”

“…….”

“귀족 중의 귀족인 후작께서 밀가루를 저어하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었지요. 그래서 피부에 좋은 요리를 만들었습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시험관들이 커흠, 헛기침을 했다.

“가 봐라.”

다행이다. 변명이 먹혔나 봐.

내 요리도 식탁에 올라갔다. 후작은 된장찌개를 몇 번 휘저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피부병을 앓았다는 것을 누구에게 들었느냐. 피스(스위트피)는 모를 터인데.”

“추측했어요.”

“……추측?”

“저도 앓은 적이 있었으니까요.”

지금도 피부가 뒤집어지면 겁부터 난다. 애들이 나를 또 괴물이라고 부르면 어쩌지. 흉한 괴물이라고 사람들이 나를 꺼리면 어떻게 하지.

후작은 나를 흘끔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군. 너도 사생아였지.”

“……?”

나는 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그게 아닌데! 우리 아빠는 나를 가둬서 키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아빠’가 그랬던 거지!

내가 눈을 홉떴지만, 샤르파크 후작은 다 안다는 듯 어쩐지 인자하게 웃었다. 그가 된장찌개를 떠서 입에 넣었을 때였다.

“……!”

다정하던 후작의 표정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이상한 점을 느낀 시험관이 다가왔다.

“각하, 제가 잠시 맛을 보겠습니다.”

된장찌개를 맛본 시험관의 얼굴도 딱딱하게 일그러졌다.

“프렌시프 영애께선 이 시험이 장난으로 보이시나 봅니다.”

“네?”

“이따위 소금국을 사람더러 어찌 먹으란 말씀이십니까!”

소금국이라니?

난 황급히 새 스푼을 들어 된장찌개를 맛보았다.

“윽!”

형편없을 만큼 짜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는 국에 소금을 전혀 쓰지 않았는데! 어째서 갑자기 간이 변한 거지.

나는 조리를 하면서도, 그릇에 담으면서도 간을 봤다. 내가 요리가 든 쟁반과 떨어져 있던 시간은 고작 5분가량. 그것도 시험관인 로열 키친의 셰프들이 단상 앞에서 최종 점검을 할 때뿐이었다.

“조리장에서 퇴장하십시오.”

쟝뤼크의 곁에 있던 시험관이 단호히 말했다.

“잠시만요!”

“변명은 통하지 않―”

“저는 요리에 소금을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조리대를 보시면 알 거예요. 저는 소금 통을 개봉하지도 않았어요.”

시험관들이며 학생들까지 크게 술렁였다. 내가 만든 요리는 간장 양념을 쓰는 시금치 밥과 된장찌개, 그리고 간을 하지 않은 소고기구이다.

“소금을 전혀 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처럼 짤 수 있나요?”

내 조리대에 다녀온 동문 선배, 헤리엇이 개봉하지 않은 소금 통을 흔들었다.

“맞습니다. 소금은 전혀 쓰지 않았어요.”

단상 아래 있던 셰프들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맛을 본 그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간장으로 간을 한 걸까요.”

“아니, 간장으로 이렇게 짜게 간을 했다면 향이 남았겠지. 마로스, 어떠냐. 코가 좋은 너라면 보다 정확히 알 수 있겠지.”

“간장은 아닙니다.”

“된장을 많이 썼다면 국물 색에서 티가 났겠죠.”

의견을 나누는 셰프들을 지켜보던 난 에이프런을 꾹 말아 쥐었다.

‘쟝뤼크가 말한 간교한 계략이라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너무 빠르다. 첫날부터 이런 수작이 들어올 줄은 몰랐다.

‘소금을 쓰지 않은 메뉴라서 다행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된장찌개가 이들에게 생소한 요리인 것도 정말로 다행이고.’

설마 소금을 쓰지 않은 수프가 있다곤 짐작하지 못했을 테니까.

나는 두 손을 꽉 맞잡으며 입을 열었다.

“소금을 전혀 쓰지 않은 제 요리가 이렇게 짜다는 건 누군가 저를 일부러 시험에서 떨어뜨리려고 했다는 게 맞겠지요.”

그러자 시험관 중 하나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관리하지 못해 황족의 음식에 독이 들어갔다면 그건 누구의 책임인가?”

“그래, 요리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건 응시생의 책임―”

“하면.”

나는 시험관들을 바라보았다.

“시험관님들이 과제를 낸 후에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뭔가요?”

“그건―!”

“부정행위의 제재를 위해서일 테지요. 하지만 시험관님들은 불온한 수작을 제재하지 못하셨으니 책임을 피하실 수 없어요.”

“비약하지 마라. 일이 어찌 되었건 간에 넌―”

“제가 이 시험장에서 쫓겨난다면 저는 바로 황궁에 투서할 겁니다.”

“뭐, 뭐라고?”

나는 시험관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내 요리에 손을 댈 수 있었던 건 시험관들뿐이다. 그리고 황궁에 입관한 로열 키친의 셰프들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귀족뿐. 내가 입관한다고 해서 피해를 보는 귀족은 없다. 그렇다는 건…….

‘아탈란의 짓이라는 거야.’

이렇게까지 내가 로열 키친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절대로 쫓겨날 수 없어.

“이 일이 제 책임이기에 쫓겨나야 한다면, 그건 시험관님들도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

로열 키친 셰프들의 안색이 변했다.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셰프들이 한곳에 모여 의견을 나누었다.

“어림없는 소립니다. 시험 때문에 투서한 이들이 지금껏 없던 것도 아니잖습니까.”

“하지만 프렌시프 가의 영애요. 어르신께서 또 한 번 나서신다면…….”

“아무리 그래도 로열 키친에 입관시키지 않았다고 우리에게 따질 수는 없지.”

“내궁을 총괄하는 로웨나 황비님이 그리 귀여워하신다지요.”

“그래. 더더군다나 우리를 질책할 까닭이 아예 없는 게 아니니…….”

팔짱을 끼고 있던 헤리엇이 말했다.

“이대로 통과시킬 수도 없지 않나요? 요리는 엉망이 되어 평가할 수 없고, 다시 만들 시간도 없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시험의 총책임자에게 모였다. 고민하던 그가 이내 단상 중앙에 나섰다.

“부정행위를 제재하지 못한 우리의 책임도 일부 있으나, 요리를 관리하지 못한 응시생의 책임도 없다곤 할 수 없을 것이다.”

“…….”

“퇴출령은 거둔다. 하지만 121번 응시생은 추가점을 받을 수 없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시식의 마지막 순번이 나였기 때문에 응시생들은 모두 조리대를 정리했다. 스위트피와 조이가 내게 다가왔다.

“센, 괜찮아?”

“으응. 쫓겨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간도 크다. 거기서 시험관들의 책임을 운운하다니.”

스위트피가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리자 조이가 시험관들의 눈치를 보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속은 시원한데. 로열 키친의 셰프라고 재더니만.”

“뭐…….”

스위트피가 헛기침을 하더니 “나도 그래.” 하고 속삭였다. 우리는 한참 킥킥거리고서 조리장을 떠났다.

해가 질 즈음, 중간 점수를 집계한 벽표가 붙었다.

‘어디 보자, 나는 121번이니까…….’

[89번, 63점.

.

.

121번, 20점.]

처음 시작 점수가 50점. 헤리엇에게 15점을 얻었으니 난 65점이었다. 샤르파크 후작이 밀가루를 먹지 않는 이유를 묻지 않아서 45점이나 감점된 모양이었다.

‘한 번만 더 감점당하면 퇴출일지도…….’

“5점뿐인 사람들도 많은걸.”

“점수가 남은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지. 퇴출자가 절반이잖아.”

벽보 앞엔 주저앉아 우는 사람들, 절규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어디 보자, 일등은…… 히익! 81점이라고!”

“대체 누구야?”

“샤를리나 알레그레…… 아! 서부 아카데미 출신의 천재 말이지?”

스위트피가 고개를 갸웃하며 “난 들어 본 적 없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혜성같이 등장한 신예라던걸. 서부 아카데미 졸업시험의 심사자로 금좌가 갔었는데 극찬을 했다지.”

조이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서부. 심사자가 금좌였다니.”

“우리도 있었잖아. 금좌는 아니어도 확실한 차기 금좌인 란슬롯 프렌시프 경이.”

“그건 센 보러 온 거 아냐? 아무튼 센, 너와 비슷한 점이 많은 요리사라고 들었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나?”

조이가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바짝 낮췄다.

“서부 아카데미 졸업식에 금좌가 나타났대.”

“알레그레 양의 요리를 극찬했다던?”

“아니, 다른 금좌.”

“그럼…….”

“금좌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있어.”

그러자 스위트피가 조이의 허리를 퍽! 걷어찼다.

“말조심 못 해?”

“아니, 남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미안, 센.”

난 어색하게 웃었고, 조이는 어쩔 줄을 몰랐다. 스위트피가 조이의 귀를 잡고 흔들며 “지켜볼 거야, 너.” 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아, 아무튼 가십시다, 레이디들. 오늘 저녁엔 파티를 한다잖아.”

“뭘, 파티씩이나. 귀찮게.”

“여기서 인맥을 터놓을 수 있으면 좋지. 예복 있냐? 빌려줘.”

“치마 입게?”

나는 스위트피, 조이와 함께 웃으며 숙소로 돌아갔다. 파티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땐 해가 완전히 진 밤이었다. 나는 외부 정원을 가로질러 걸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별이 안 떴네.’

하늘을 지키고 있는 건 구름에 반쯤 가려진 붉은 달뿐이었다. 기분이 이상하다. 가슴이 술렁거리는 느낌이었다.

파티장에 들어갔을 땐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응시생들끼리 인사를 나누기 위해 마련된 조촐한 자리라지만, 가족들 없이 참석하는 파티는 처음이라 난 쭈뼛쭈뼛했다.

‘친구…… 사귈 수 있으면 좋겠다.’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친구란 얼마나 소중한가. 서로 이끌어 주며 선의의 경쟁을 하는 건 너무나 멋진 일이다. 아카데미 졸업생들 중에 친구가 있지만, 신분이 드러나고 나서 날 어렵게 여겼다. 난 볼을 발그레 물들이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스위트피와 조이는 벌써 사람을 사귄 모양이네!’

나도 얼른 말을 걸어 봐야 하는데…….

난 용기를 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저기, 저는―”

“프렌시프 영애!”

펄쩍 뛰어오른 남자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다른 사람들도 어색한 표정이었다.

“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말로, 정말로 가문의 영광…….”

“예, 예……! 영광입니다!”

“샤, 샴페인이라도 가져다드릴까요? 티 푸드도―!”

엄청나게 불편해하는 사람들을 보고 난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아, 예……. 그럼 저희는 이만…….”

사람들은 이때다 싶어 도망쳤고, 난 시무룩해져서 테라스로 나섰다.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통신석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영애?]

“저하!”

밝게 소리치자 통신석에서 낮게 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지내셨습니까?]

“네.”

[시험에선 별일 없었고요?]

“아, 그게…….”

오늘 있던 일을 종알종알 말하자 도미니크는 침음을 흘렸다.

[수작을 부린 자를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요.]

“그렇겠지요…….”

[그 일이 못내 신경 쓰이십니까?]

“네?”

[목소리가 시무룩하셔서.]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그게 아니라요…….”

나는 웅얼웅얼 말했다.

“파티가 있어서 친구를 사귀고 싶었는데 다들 절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아카데미 동문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해도…….”

황도 친구가 가지고 싶었다. 스위트피와 조이는 시험이 끝나면 동부에 내려갈 거라고 했다. 붙어도 황궁에 계속 있을 테니 만날 시간은 없을 거다.

‘아카데미당 한 명씩만 뽑는다니까 같이 붙을 일은 없을 테고…….’

우울한 목소리를 들은 도미니크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나로는 부족할까요.]

“저하는 친구가 아니라 애인이잖아요.”

[애인…….]

그는 한동안 침묵했다. 내가 “저하?” 하고 물으니 그제야 픽 웃으며 말했다.

[듣기 좋은 말이라. 이제 우리 애인이군요.]

세상에, 내 입으로 애인이라고 했어!

얼굴에 화르륵 열이 올라서 난 파닥파닥 손부채질을 했다.

[보고 싶―]

[저하! 제발 이 건부터 결재해 주시고 통신해 주십시오!]

[닥쳐.]

[오늘은 찢어 죽이셔도 못 나갑니다! 제 눈이 푹 꺼진 게 안 보이십니까!]

알베르의 절규를 듣고 난 히히 웃었다. 아카데미 시절이 떠올라서 기분이 좋아졌다.

“바쁘시니 다음에 다시 연락해요.”

[괜찮습니다.]

“알베르가 과로사로 죽는 건 싫어요.”

[…….]

“열심히 일하세요.”

도미니크와 통신을 종료하고, 난 양 주먹을 꽉 쥐었다.

‘기운 내자.’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홀로 돌아가려는데―

“앗!”

테라스로 들어오려는 누군가와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달빛을 그러모은 것 같은 아름다운 은발과 테두리가 약간 밝은 짙은 회색의 눈동자.

‘아…….’

빚은 듯 아름다운 여자는 나를 보며 생긋 미소지었다.

“프렌시프 양?”

“저를 아세요?”

“유명한 분이시니까요.”

여자가 치맛자락을 잡은 채로 무릎을 가볍게 굽혔다.

“샤를리나 알레그레입니다.”

“아…… 일등!”

나도 모르게 소리치자 그녀는 눈매를 반달꼴로 휘며 말했다.

“운 좋게 말이지요.”

“하지만 천재라고 하던걸요!”

내가 눈을 반짝이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손등으로 입가를 부드럽게 눌렀다.

‘세상에, 손도 예쁘다.’

수련하느라 온통 데고 베여 투박해진 내 손과는 달랐다. 얼마나 천재면 그런 실수 하나 없이 저토록 손이 고울까. 존경스러워!

샤를리나는 내 주변을 둘러보았다.

“짐꾼은 함께 오지 않았나요?”

“네.”

“이런, 밤공기가 차니 겉옷을 챙겨 주어야 할 텐데. 미오라.”

그녀가 뒤에 있던 하녀에게 손짓하자 하녀는 내게 얼른 숄을 걸쳐 주었다.

“괜찮아요! 저보다 더 춥게 입으셨는걸요.”

“나라의 보물인 영애를 보호하는 건 제국민의 의무랍니다. 그러니 저어하지 말아 주세요.”

미오라라 불린 하녀는 “아가씨, 따뜻한 차라도 가져올까요?” 하고 물었고, 샤를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가 떠나자 샤를리나가 내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들어가셔요, 영애.”

“아…….”

그녀가 테라스 앞을 서성이는 무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 나와 샤를리나가 불편해서 들어오지 못하고 있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샤를리나는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나를 배려해 곁을 떠나지 않았고, 이것저것 챙겨 주기도 했다.

“동부에서 나고 자라셨는데 남부 요리가 특기시라지요?”

“특기는 아니고…… 좋아해요, 남부 음식.”

나는 한국에서 십 년이 넘도록 살았으니까.

“저도 서부에서 자랐지만, 동부 음식이 특기랍니다.”

조이의 말처럼 나와 샤를리나는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괜찮으시면 서부 아카데미의 동문들을 소개시켜 드릴―”

“꺄아악!”

“불이다!”

갑작스럽게 소란이 일었다. 나와 샤를리나는 얼른 소란의 진원지를 쳐다보았다. 테라스 유리 안으로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어떻게 해! 얼른 나와야― 문이 안 열리는 거야?!”

경비병들이 다급하게 뛰어들어와 테라스 문을 부수려 했지만, 황궁의 문은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여기는 3층이야!’

뛰어내리면 최하 골절이다. 운이 나쁘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구하러 가기 위해 포털의 마원을 잡았을 때였다.

“미오라!”

샤를리나가 소리쳤다. 차를 가지고 오던 하녀, 미오라가 순식간에 커다란 여우가 되어 문짝에 달려들었다.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아름다운 금빛 여우였다.

쾅! 콰광! 커다란 마찰음과 함께 문짝이 부서졌다. 샤를리나가 가슴의 브로치를 꾹 눌렀다. 순식간에 빛이 뿜어나오더니 하늘에 구멍이 생기고 그 안에서 폭포수 같은 물이 뿜어져 나왔다.

“……!”

나는 굳어진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포털. 저건 분명 포털이다. 벽과 바닥에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결계가 흔들리는 거야.’

카를리나가 포털을 열 수 있다는 완벽한 증명이다.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경악한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뛰어온 별궁 관리자들도 허둥거렸다.

“포, 포털!”

“프렌시프 영애인가?”

“하지만 성수를 불러낸 건―!”

누군가 “포털을 연 게 알레그레 양입니까?!” 하고 소리치자 샤를리나는 쓰러진 사람들을 부축하며 소리쳤다.

“그게 중요한가요? 어서 의사를 불러와요!”

“아……!”

“요리사들이라고요. 손이 명줄과도 같은!”

테라스 안에서 금세 구해 냈기 때문에 질식한 이들은 없지만, 몸 곳곳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화상을 입으면 큰일이야!

나는 테이블에 비치된 물을 그들의 화상 부위에 급히 붓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걸론 턱도 없어.’

나는 바로 멀린의 마원을 잡았다. 황도 근처 강의 위치를 떠올리고 공중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 수도처럼 만들었다.

‘하나론 안 돼.’

테라스에 있던 사람은 모두 셋. 셋이나 되는 통로를 열 수 있을까 싶었지만,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난 최대한 집중해서 허공에 구멍을 만들었다. 귓가에 파직, 하는 균열음과 함께 또 한 번 궁이 크게 진동했다.

‘열었다!’

허공에 뜬 세 개의 구멍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세, 셋! 포털을 한 번에 세 개를―!”

“말도 안 돼! 사비에르 양도 한 번에 하나 이상 열 수 없었는데!”

이번엔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샤를리나는 굳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부축하고 있는 분을 홀 쪽으로 데려가요.”

“…….”

“알레그레 양?”

“아…… 네.”

샤를리나가 신음하는 남자 응시생을 내가 만든 구멍 앞으로 데려갔다. 팔 위로 물을 댄 그녀는 “어때요?” 하고 물었다.

“가, 감사…….”

“뭘요. 인사는 프렌시프 양에게 해야죠.”

그녀는 나를 보며 상냥하게 웃다가 고개를 조금 수그렸다.

“나는 역시 도움이 안 되나 봐요.”

“무, 무슨! 알레그레 양이 저희를 구해 주셨잖습니까.”

“포털을 한 번에 세 개를 열다니. 전 그런 건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어요. 역시 프렌시프 양은 제국의 보물이에요.”

“포털…… 역시 포털이 맞는 겁니까!”

그녀는 희미하게 웃다가 몸을 일으켰다.

“미오라.”

문 주변에 가만히 대기해있던 금빛 여우가 금세 다시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성수.’

혹시 저 애가 테디의 누이인 걸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별궁의 건물 관리장이 새파란 얼굴로 홀 안에 들어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불이 꺼진 테라스를 살피고 있던 행정관이 타고 남은 담배 도막을 들며 말했다.

“테라스에서 누군가 연초를 태운 모양입니다.”

“연초를 피웠다고 테라스가 홀라당 탔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화상을 입은 사람 중 하나가 “저…….” 하며 손을 들었다.

“연초 때문에 불이 붙은 게 맞는 것 같아요. 커튼부터 타올라서 순식간에 옮겨붙었는데, 커튼 뒤에서 저 사람이 연초를 피고 있었거든요.”

그녀의 시선이 유난히 화상을 크게 입은 남자에게 향했다.

“그, 그게―”

“황후 폐하의 정원과 근접한 별궁은 금연 구역이라고 공지했을 텐데!”

나는 한숨을 내쉬고 어쩔 줄 모르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커튼 뒤에 숨어 담배를 피운 거구나.’

관리장은 길길이 날뛰었고, 남자는 화상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로 끌려나가고 말았다.

파티가 소란 때문에 일찍 파한 후, 나는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포털을 열 수 있는 사람.’

성녀가 아탈란의 수족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샤를리나에게도 의심이 옮겨 갔다. 누이를 아탈란이 데려갔다는 테디의 말도 의심의 일부분을 차지했다.

“테디.”

내가 테디의 마원을 쥔 채 낮게 속삭이자 “아우웅―!” 하는 울음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미오라가 혹시 너의 누이인 거니?”

마원에 붉은빛이 어리더니 눈앞에 작은 반달곰이 나타났다. 내 무릎을 끌어안은 테디가 눈을 끔뻑거리며 웅얼거렸다.

“아니!”

“……아니라고? 하지만 성수였는 걸.”

“우리 말고 다른 형제가 있는 모양이지.”

그러자 목걸이가 푸르게 빛나고 은발의 미남이 나타났다. 멀린의 인간형이었다.

‘멀린의 성수형은 너무 커서 성수화할 수 없구나.’

멀린은 테디를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우린 형제가 아니야.”

“형아는 못됐어.”

테디가 부루퉁 입을 내밀었다.

“하지만 누이는 아니야. 누이는 아주아주 좋은 냄새가 나는데 그 여우는 아닌걸.”

테디가 내 다리에서 떨어지더니 양 앞발로 코를 가리며 “지독해, 지독해.” 하고 말했다.

“지독하다니, 그건 무슨 뜻―”

“아탈란이 만든 성수기 때문이에요.”

나는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샤를리나가 미오라와 함께 내게 다가왔다.

‘아탈란이라는 걸 직접 밝힌다고?’

나는 모른 척 잡아뗐다.

“아탈란?”

“사라진 신, 아탈란을 모시는 종교랍니다. 미오라는 아탈란이 실험을 거듭해 만든 인공 성수고요.”

인공 성수라니. 엄청나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나는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지며 입을 열었다.

“그런 걸 내게 말해 줘도 되나요?”

“아탈란은 바라지 않겠지요. 그들은 영애의 인생을 쥐고 흔든 장본인이니까.”

“…….”

“알아요, 나.”

샤를리나가 묘한 눈으로 나를 직시하며 이어 말했다.

“영애가 본래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

“영혼이 바뀌었죠?”

“어떻게…….”

“들었거든요. 아탈란의 대사제에게.”

난 표정이 굳어졌고, 샤를리나는 처연히 어깨를 떨구었다.

“괜찮다면, 아니, 괜찮지 않아도 시간을 내주셨으면 해요. 프렌시프 양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와 샤를리나는 인적 드문 별궁 뒤편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제게 하실 말이 뭐지요?”

“조심하라는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조심?”

“아탈란이 영애를 노리고 있어요.”

샤를리나는 인공 성수인 미오라를 데리고 다닌다. 그렇다는 건 아탈란의 사람이라는 것일 텐데, 어째서 내게 이런 걸 알려 주는 걸까.

“무슨 의도로 그런 조언을 해 주시는 건가요?”

“제가…… 영애에게 몹쓸 짓을 했으니까요.”

“몹쓸 짓?”

“영애의 요리에 소금을 넣은 건 나예요.”

“뭐라고요?”

샤를리나는 죄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가 포털을 열어서 소금을 이동시켰어요.”

“왜 그런 짓을……! 아니, 묻지 않아도 알겠어요. 아탈란의 명이죠?”

“그래요.”

그녀가 이마를 쥐며 내게서 한걸음 물러났다.

“사실은 그런 짓 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무서워서…… 아버지를 실망시키는 게 너무나 무서워서…….”

“아버지라면 금좌라던…….”

“카렌듈라 후작이 제 부친이랍니다. 저는 그분과의 정을 통한 시골 작부의 딸이죠.”

샤를리나는 말했다. 가난한 작부의 딸이 꿈을 펼치기 위해선 재물이 필요했다고. 우연히 포털을 열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혹시나 꿈을 위해 도움이 될까 싶어 그 지역 감찰관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를 데리러 온 것은 황궁의 사람이 아닌 아탈란의 사제였단다.

“아탈란의 신전에서 저는 이전처럼 배를 곯지 않았고, 하고 싶은 요리를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랬군요.”

“제 아버지는 황후 폐하의 부친이고, 황위 다툼에 참전한 미카엘 황자님의 조부시죠.”

“…….”

“도덕적 흠이 없어야 하는 그분은 저를 절대로 찾지 않으셨어요. 아탈란의 힘으로 마원을 얻게 될 때까지.”

포털을 열기 위해선 두 가지가 필요하다. 성녀와 마원. 마원이 없으면 성녀라 할지라도 포털을 열 수 없는 것이다.

“제가 성녀라는 걸 알게 된 아버지는 저를 만나 주셨고, 저는 아버지의 일을 조금씩 돕게 되었어요. 처음으로 부녀의 정을 안 거예요.”

“…….”

“아탈란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제게서 마원을 빼앗을 테고, 전 다시 아버지를 잃었을 거예요.”

“…….”

“그런 것들이 두려워서 아탈란이 시키는 대로 포털을 열었어요. 하지만 영애도 아실 거예요. 대륙 전쟁 이후 제국은 아탈란 교를 탄압하고 있다는걸.”

“영애가 아탈란의 일을 도왔다는 걸 황궁에서 알게 된다면…….”

“그래요. 저뿐만이 아니라 아버지, 황후 폐하, 그리고 미카엘 황자님까지 위험에 처할 거예요.”

약점이 다른 약점을 낳은 꼴이었다.

“알레그레 양은 그게 두려워서 아탈란이 시키는 대로 제 요리에 소금을 넣은 건가요?”

내가 굳은 얼굴로 묻자 샤를리나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이러지 마세요!”

당황한 난 얼른 그녀를 잡고 일으키려 했다.

“어떤 말로도 사죄할 수 없다는 걸 알아요. 죄송하고, 또 감사해요.”

“감사하다고요?”

“제가 소금을 넣은 일로 영애가 쫓겨났다면 저는 평생 마음에 짐을 얹고 살았을 거예요.”

샤를리나의 아름다운 두 눈에서 눈물이 이슬처럼 흘러내렸다.

“……일단 알겠어요. 일어나세요.”

“용서…… 해 주시는 건가요?”

“영애가 악의를 가지고 제 요리를 망치지 않았다는 건 알겠다는 의미예요.”

“프렌시프 양!”

그녀는 감동한 사람처럼 내 손을 꽉 잡았다.

“듣던 대로 프렌시프 양은 정말이지 상냥하군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일어난 샤를리나는 다정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샤나라고 편하게 불러 주세요.”

“네. 그럼 저도―”

“세니아나.”

그녀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리고 멀찍이 서 있던 미오라에게 손짓했다.

“아탈란의 성수이지만, 제게는 유일한 친구랍니다. 이 아이도 저를 많이 아껴 주고요.”

“인공 성수인데도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미오라는 생글생글 웃으며 “아가씨는 제게 가장 소중한 분이시죠.” 하고 대답했다. 샤를리나가 미오라의 손을 꼭 잡고 나를 보았다.

“이 아이를 잃고 싶지 않은 것도 제 두려움 중 하나랍니다. 인공 성수이니, 아탈란은 언제라도 미오라를 폐기할 수 있거든요.”

나는 내 곁에 바짝 서서 경계 어린 눈빛을 하고 있는 두 명의 미남을 돌아보았다. 테디도 미오라를 의식하는지 어느새 인간형이 되어 있었다.

“이들은 제―”

“소개할 필요는 없을 듯하오, 주인.”

“누나 말고 다른 사람 같은 거 알고 싶지 않은걸.”

왜 내 성수들은 하나같이 친화력이 결여된 걸까.

난 한숨을 폭 내쉬고 어색하게 웃었다.

“저기, 샤나. 미안해요.”

“괜찮아요.”

“그런데 성녀라는 게 밝혀져서 어떡하지요?”

“어쩔 수 없죠. 사람이 죽는 걸 눈앞에서 보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대사제에게 혼은 나겠지만.”

샤를리나의 말에 미오라는 우울한 표정으로 “저는 아가씨의 상냥함을 사랑하지만, 때로는 걱정이 돼요.” 하고 중얼거렸다. 참 보기 좋은 관계였다.

‘샤를리나에게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샤나.”

“네?”

“또 누군가요?”

“무슨…….”

“아탈란의 수족 말이에요. 시험관 중에도 있죠?”

샤를리나는 눈을 크게 뜨고 날 쳐다보았고, 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야 당연히 이상하지.

“샤나는 소금을 이동만 시킨 거잖아요?”

“그래요.”

“그렇다면 된장찌개에 소금이 고루 녹아들도록 저을 사람이 필요한걸요.”

샤르파크 후작이 한두 차례 뒤적이긴 했지만, 딱 먹기 좋을 정도로 식어 있었기 때문에 소금 알갱이가 전부 녹진 않았을 거다.

“소금 알갱이가 씹혔다면 분명 그 부분을 지적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러지 않았잖아요?”

샤를리나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영애는 정말이지 영……리하군요.”

“시험관 중 누군가요?”

“그건―”

샤를리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 * *

별궁 화재 사건 한 시간 뒤. 시험관이자 아탈란의 수족인 윌토르는 팔짱을 낀 채 팔 안쪽을 두드렸다.

‘빌어먹을.’

오후 과제에서 세니아나 프렌시프를 퇴출시킬 생각이었는데, 그 계집애는 만만치 않았다. 시험관을 협박해서 기어코 궁에 남을 줄이야.

‘간이 큰 거야, 멍청한 거야?’

프렌시프의 딸이라 두려운 게 없는 모양이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직접 수를 쓰는 건 먹히지 않을 듯했다. 워낙에 영악한 계집애라 이번에도 혀를 놀려 빠져나갈지도 모른다.

‘이대로 끝낼 순 없다.’

아탈란의 성녀님께 도움까지 받았다. 그런데도 실패한다면 제 앞에 놓인 황금의 왕국이 영영 멀어진다.

“어디서 그따위로 씨불이는 거야!”

코너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윌토르가 미간을 좁혔다.

‘세니아나 프렌시프의 짐꾼인가.’

오전에 세니아나 주변을 살피느라 본 적이 있다. 마릴린이 다른 짐꾼들을 보며 씨근덕거렸다.

“새로운 성녀가 나타난 게 뭐! 성녀라고 확인된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포털을 열었다고. 곁엔 모시는 성수까지 있던걸.”

마릴린의 앞에 선 하녀가 머리끝을 배배 꼬며 중얼거렸다.

“성녀가 하나일 때야 귀하지. 하지만 둘일 땐 어디 그래?”

“입 닥치지 못해!”

“내 말이 틀린 것도 아니잖아. 둘 중 누가 나은지 끊임없이 경쟁해야지.”

“우리 아가씨가 그따위 사생아와 왜 비교당해야 해!”

“너희 아가씨도 따지면 사생아―”

마릴린이 하녀를 퍽! 밀치며 살벌하게 소리쳤다.

“계속 씨불여 보랑께. 주둥이를 짝 찢어서 왕복으로 돌려 버릴라니까.”

“그렇잖아!”

하녀는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같은 사생아에 요리하는 것도 같고! 외모나 요리 쪽은 너희 아가씨가 알레그레 양에게 한참 못 미치는 것 같지만.”

“오늘 니는 내 손에 뒤져 부렀어야.”

마릴린은 정말로 입을 찢어서 돌려 버릴 것처럼 하녀에게 달려들었다. 쌍코피를 터뜨리고 나서야 푸닥거리를 멈춘 마릴린이 한참을 씩씩거렸다.

“어디서 감히 샤를리나 알레그레 따위와 우리 아가씨를!”

그래도 분한 모양인지 발을 쿵쿵 구르며 가는 마릴린을 보고 윌토르는 혀를 찼다.

‘계집애가 난폭해서는.’

여자란 모름지기 가냘파야 하는 법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그가 멈칫했다.

‘가만, 저 짐꾼을 이용하면 쫓아낼 수 있겠는데.’

그가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킬킬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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