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장 (15/24)

15장

샤를리나는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랐지만, 황궁에서 허가 없이 포털을 열었으니 그냥 지나갈 수는 없었다. 숙소로 함께 걷는 와중에 황궁의 경비병들이 다가왔고, 나와 샤를리나는 아발론(황제의 궁)의 호출을 받았다. 궁에 들어가자 황제를 비롯해 황후와 내궁을 총괄 중인 로웨나 황비, 그리고 할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의 노인이 보였다.

‘저 사람이 카렌듈라 후작이구나.’

나와 샤를리나가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했다.

“황가에 광영 있기를.”

“황가에 광영 있기를.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황제는 다리를 꼬며 두 손을 한쪽 무릎에 포갰다.

“프렌시프 영애는 벌써 세 번째인가.”

그는 빙그레 웃으며 “결계를 깨뜨린 게 말이야.” 하고 이어 말했다. 난 고개를 푹 숙였다.

“송구합니다, 폐하. 늘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지는지라.”

첫 번째로 결계를 깨뜨린 건 황후 때문이고, 두 번째는 타국의 왕세자 때문이었으며, 이번엔 화재 때문이라는 걸 돌려 말한 것이다. 그러자 황제가 나를 빤히 보다가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영애에겐 매번 짐이 폐를 끼치는군.”

“과분한 말씀 거두어 주세요. 만백성의 어버이이신 폐하를 위해서라면 하지 못할 일이 없지요.”

“결계를 깨뜨린 건 모두 짐을 위해서였다는 뜻이군.”

“민망합니다.”

황제가 나를 빤히 보다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에 영리한 아이야. 어린 영애가 말재간이 뛰어나구나.”

“황공합니다.”

“프렌시프 공은 복도 많지.”

로웨나 황비가 빙그레 미소짓고는 “그렇습니다, 폐하.” 하고 동조했다. 황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나를 싫어하기 때문인가 싶었는데, 그녀의 시선 끝엔 샤를리나가 있었다.

‘아, 샤나가 카렌듈라 후작의 딸이니 황후와는 배다른 자매가 되는 거지.’

황후 입장에서 샤를리나가 편할 리 없다. 더군다나 포털이라는 힘을 가진 이복동생이라면. 로웨나 황비는 심기가 불편한 황후를 보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저리 재주 좋은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황후는 로웨나 황비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런 대화를 나눌 자리가 아니지 않은가.”

“성녀인 동생을 이리 숨겨 두시다니요. 국모로서 적절한 행동이었을까요?”

로웨나 황비가 황제를 흘끔 쳐다보자 황후의 낯빛이 변했다.

“자네!”

“참으로 궁금합니다. 성녀인 동생이 있는데, 사비에르 양과 4황자의 결혼을 추진하신 이유는 뭔가요? 포털을 독점이라도 하시려던 걸까.”

“사비에르 영애는 포털 때문이 아니라 품격과 지혜로움을 높이 산 것이었지. 결과적으로 미카엘과 그 영애를 결혼시키지 않았네.”

“그렇다 한들 추진했던 과거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황후가 이를 악물자 황제가 손을 올렸다.

“그만.”

“…….”

“…….”

황제는 카렌듈라 후작을 쳐다보았다.

“짐도 궁금하군. 성녀인 딸을 어째서 숨겨 두었는가.”

후작이 샤를리나를 등 뒤에 감추듯 황제의 앞으로 나섰다.

“딸이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는 애끓는 부정이라 여겨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폐하.”

황후가 굳은 얼굴로 치맛자락을 잡았다.

‘카렌듈라 후작이 황후에게 엄격했다는 건 유명한 일이랬는데.’

황후의 입장에선 기가 막힐 노릇이겠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황후가 몸을 일으켰다.

“몸이 좋지 않아서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러곤 나를 보며 “시험이 끝나면 퇴궁 전에 한번 보자꾸나.” 하고 아발론을 떠났다. 그 후로도 황제와 카렌듈라 후작은 몇 마디 말을 더 섞었다.

“공이 충심보다 부정을 우선할지 몰랐군. 의외라고 해야 하나, 실망스럽다고 해야 하나. 응? 어떻게 생각하지?”

“충심과 부정을 어찌 비교하겠습니다. 제 충심은 늘 한결같습니다.”

그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칼리나 해(海)에 있는 폐하의 근심, 이 제라르 카렌듈라가 선봉을 맡아 해결하겠습니다.”

“공이 직접 말인가!”

황제가 팔걸이를 잡은 채 반쯤 몸을 일으켰다.

“군자금 또한 카렌듈라에서 해결하고, 바다에 잠든 드롱 백작의 보물까지 인양해 돌아오겠습니다.”

“하면 인양 후엔…….”

황제가 은근한 눈빛으로 카렌듈라 후작을 보자 후작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이 제라르 카렌듈라! 폐하의 백성입니다. 인양에 성공한다면 당연히 어버이이신 폐하께 바칠 것입니다.”

“막대한 자금이 들 터인데.”

“그깟 재물이 폐하의 근심보다 우위에 있을 순 없지요.”

황제는 으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충신이로다!”

그는 기분 좋은 얼굴로 나와 샤를리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시험 준비가 급할 테니 돌아가 보도록 해라.”

샤를리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하지만 폐하, 저는 허가 없이 포털을 연 죄인인데 어찌…….” 하고 중얼거렸다.

“나의 백성을 구한 이들을 어찌 죄인이라 하겠느냐. 장하고, 장하도다.”

“화, 황공합니다!”

로웨나 황비는 흥, 콧방귀를 뀌며 몸을 일으켰다.

“하면 폐하 저도 돌아가 보지요.”

“그래.”

나와 샤를리나, 황비가 함께 아발론을 나섰다. 황비가 내 손을 잡고 걸었고, 샤를리나는 우리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늙은 구렁이가 딸 하나 구하자고 가문의 기둥 하나를 통으로 바쳤군.”

“‘기둥 하나를 통으로’라니요?”

황비는 샤를리나를 흘끔 쳐다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공해(주권을 가진 나라가 없는 바다)인 칼리나 해에는 역사상 가장 많은 전력석과 수력석, 화력석을 보유했다던 드롱 백작의 재물이 묻혀 있거든.”

“……?”

“인양만 할 수 있다면 금맥이 따로 없겠지만, 워낙 해적 떼가 기승을 부리는 데다가 재물이 너무나 많이 드는 일이라 다들 저어했지.”

“하면 폐하께서도…….”

“이번에 맥테왈 공화국에서 본격적으로 인양을 준비한다니 욕심이 나셨겠지. 그런 것을 카렌듈라에서 직접 가져다준다고 하니 얼마나 기쁘시겠니.”

로웨나 황비는 픽 웃고 내 뺨을 쓰다듬었다.

“우리야 신경 쓸 일 있겠니. 알아서 재물을 바치고 자멸해 준다면 좋지.”

“…….”

“그저 뒤에 앉아 즐기자꾸나(Sit back and enjoy the ride: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와 비슷한 속담).”

나는 깔깔 웃는 황비를 마주 보고 미소지었다.

“한데 왜 이리 살이 빠졌을까. 시험 준비가 고되니? 내가 로열 키친에 한마디 해 주면 어떨까?”

“저기, 그럼…….”

내가 황비에게 무언가 속삭였을 찰나였다.

“저…….”

샤를리나가 다가와서 말을 붙였다.

“이번 일로 염려를 끼쳐서 송구합니다.”

“나와 귀염둥이의 대화에 끼어들지 마라.”

로웨나 황비가 날 선 투로 대답하자 샤를리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알면 가 봐. 네 얼굴에서 황후 폐하와 같은 구석을 찾게 되는 건 본궁에게 기쁜 일이 아니니.”

황후의 혈육과 대화할 마음이 없다는 뜻이었다. 로웨나 황비는 나를 보며 미소지었다.

“영애도 가 보려무나. 준비 때문에 바쁠 테지?”

“예, 황비님.”

“네가 입관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으마.”

그러곤 시녀들에게 “가자.” 하더니 나와 샤를리나에게서 멀어졌다. 샤를리나는 황비의 뒷모습을 보며 내게 물었다.

“로웨나 황비님과 절친하시군요.”

“귀여워해 주시니 감사하죠.”

귀염둥이라는 말은 정말로 민망하지만.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샤를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상이 좋은 분이세요. 강단 있고, 아름다우시고, 지혜로워 보이시기도 하고요.”

“응.”

“저런 분을 동경해 왔는데, 직접 보니 더욱 친해지고 싶네요.”

그러더니 “황비님과 친해지고 싶다는 건 불경한 말이지만.” 하고 눈꼬리를 접었다.

“마지막 날엔 황족들의 식사에 요리를 낸다지요? 저는 로웨나 황비님께 요리를 낼까 봐요. 영애는요?”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건 나흘째까지 남을 수 있게 되면 그 후에 생각하려고요.”

샤를리나가 내 손을 꽉 잡으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영애는 섬세하고 손재주도 좋으니 남을 거예요.”

“…….”

“영애와 함께 입관해서 서로 북돋아 주며 성장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또래에 사정도 비슷하니까 선의의 경쟁자가 되겠지요.”

그러고 “잘 부탁해요.” 하며 상냥하게 웃었다.

숙소로 돌아가고서 몇 시간 후. 응시생들 사이엔 내일 아침 필기 테스트를 본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인지 다들 밤늦게까지 작은 조명에 의지해 요리서를 달달 외웠다. 나와 스위트피도 졸린 눈을 비비며 책을 보았다. 참으려고 했지만, 새벽이 다 되자 졸음이 참을 수 없이 밀려온다.

“으음, 난 씻고 올게, 스위트피.”

“그래, 잠 깨야지. 내일 시험은 중요하니까.”

스위트피가 몽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릴린과 함께 옷을 챙겨서 공용 욕실로 향했다.

‘난 점수가 간당간당하니 내일 시험에서 감점당하면 끝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모퉁이를 도는데 속닥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샤를리나 알레그레가 카렌듈라의……?”

“게다가 성녀라잖아. 힘이 어찌나 강력한지 프렌시프 양은 상대도 안 된다고 하던걸.”

“그 정도로?”

“내가 직접 봤어.”

“그래?”

“응. 오늘 별궁에 화재가 났을 때 샤를리나 알레그레는 하늘에 엄청나게 커다란 홀을 만들어서 불을 껐는데, 세니아나 프렌시프는 요―만한 구멍 세 개를 겨우…… 헉!”

욕실 앞에서 수다를 떨던 사람들이 나를 보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여, 영애.”

그녀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른침을 삼켰다.

“저희가 한 말은……! 그러니까 그게―”

“욕실에 들어갈 거예요. 비켜 주세요.”

“저, 저희는 뒷말을 한 게 아니라……!”

“뒤에서 말했으니 뒷말이지요.”

중앙에 있던 사람이 한 발 앞서 나왔다.

“하지만 실제로 있던 일을 말하는 것이니 실례는 아니지 않……을까요…….”

“귀하의 손을 보니 옆 응시생보다 깔끔하지 않군요. 요리사는 언제나 위생을 생각해야지요. 옆 응시생이 요리사로서 더 훌륭하네요.”

“뭐라고요?!”

그녀가 발끈해서 말하자 난 어깨를 으쓱했다.

“실제로 있던 일을 말하는 것이니 실례는 아니죠?”

“……!”

“보세요, 비교당하면 기분이 상하잖아요.”

그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고개를 수그렸고 나는 빙그레 웃으며 욕실에 들어갔다. 마릴린이 목욕용품을 챙겨 주며 씨근덕거렸다.

“자기들은 얼마나 잘한다고 비교를……! 아가씨, 내일 시험에서 저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셔야 해요!”

“시험을 잘 봐야 말이지.”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마릴린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아가씨가 일등 하셔야 하는데…….”

―하고 말하면서.

* * *

윌토르는 복도 한편에서 조급하게 한쪽 다리를 떨었다.

‘세니아나 프렌시프의 이불을 망가뜨렸으니 이쯤이면 하녀가 다시 이불을 받으러 올 때가 됐는데.’

그런 생각을 했을 찰나,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회중시계를 확인하는 척 케이스를 열고 내부에 있는 작은 거울을 통해 뒷사람을 확인했다. 세니아나의 하녀, 마릴린이 맞다. 그는 자연스럽게 시험지를 떨구고 앞서 걸었다. 코너를 돈 후에 흘긋 돌아보자 마릴린이 시험지를 줍고 눈을 홉떴다.

“이건―!”

윌토르가 입꼬리를 씩 끌어당겼다. 제 주인이 비교당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니 내일 테스트에서 좋은 성적을 얻길 바랄 거다. 그러한 찰나에 시험지가 손에 들어왔다면―

‘그렇지.’

마릴린이 주변을 둘러보고 얼른 시험지를 품에 감추었다. 그러곤 이불을 가지러 온 것도 잊은 모양인지 헐레벌떡 뒤를 돌아 뛰어갔다.

‘좋아, 좋아.’

윌토르는 얼른 제 방으로 향해서 통신을 연결했다.

“윌토르입니다.”

[어찌 되었나.]

“세니아나 프렌시프는 오늘 황궁에서 쫓겨날 겁니다.”

[오늘 말이냐? 대체 어떻게?]

“시험지를 하녀의 손에 쥐여 줬습니다. 제 주인이라면 껌뻑 죽는 녀석이니 세니아나 프렌시프에게 전해 주겠지요.”

잠시 침묵하던 통신 상대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세니아나 프렌시프 손에 들어갔을 때를 노려 발고하겠다는 것이군.]

“이번에야말로 궁에서 쫓아낼 테니 기다려 주십시오, 형제님.”

시험지를 빼돌렸다는 것을 들키면 퇴출되는 것은 물론, 평판이 바닥에 떨어질 거다. 세니아나 프렌시프가 예뻐 죽는 로웨나 황비도 도와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우리의 성녀님은?]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이대로 수석을 한다면 무리 없이 본궁에 배속되시겠지요.”

[네가 잘 살펴야 한다. 고집이 세신 분이잖은가. 네 제안은 모두 물리실 테니, 뒤에서 애써야 한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통신을 종료한 윌토르는 비열한 표정으로 통신석을 말아 쥐었다.

‘내가 로열 셰프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

얼마 후, 시간을 가늠한 그가 시험 책임자의 집무실로 뛰어갔다.

“큰일입니다, 셰프님!”

서류인듯한 종이를 확인하고 있던 요리사가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이냐.”

“프렌시프 양이 시험지를 빼돌렸습니다.”

“……뭐라고?”

“그러니까, 시험지를―!”

또각, 또각, 구두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시험지라면 지금 셰프 님의 손에 들린 그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윌토르는 딱딱하게 굳어졌다.

‘세, 세니아나 프렌시프?’

책임자인 요리사가 서류인 줄 알았던 종이를 뒤집어서 윌토르에게 보여 주었다.

“짐꾼이 복도에서 주웠다고 영애께서 직접 가져오셨네.”

“……!”

세니아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나요? 제가 시험지를 주웠다는 걸.”

윌토르는 희게 질린 얼굴로 웅얼거렸다.

“그, 그건―”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제가 줍기를 바라고 일부러 떨어뜨린 줄 알겠어요.”

윌토르가 경직되어 그녀를 쳐다봤다.

‘어, 어떻게.’

* * *

몇 시간 전, 샤를리나는 내게 아탈란의 하수인이 누군지 알려 주었다.

[시험관 중 아탈란의 사람은 윌토르라는 요리사예요. 갈색 머리에 녹안이고…….]

이번 일을 실패해서 독이 올랐을 테니, 다른 수작을 부릴 테고 그렇다면―

‘내 쪽에서 먼저 공격해야지.’

샤를리나에게 아탈란의 개가 누구인지 듣자마자 통신석을 통해 마릴린을 움직였다. 나는 윌토르에게 속삭였다.

“우리 마릴린이 타이밍 좋게 네 앞에서 짐꾼들과 싸운 이유가 뭐게?”

“……!”

“왜 이 저녁에 난데없이 내일 필기시험을 보자고 한 걸까?”

“설마―”

“내가 시킨 거라고, 바보야.”

내가 생글생글 웃자 윌토르는 “이, 이―!” 하며 흥분했다.

“무, 무슨, 그럴 리가요!”

윌토르가 버럭 소리쳤다. 그가 잡아떼리라는 건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시험의 총책임자에게 시선을 돌려 차분하게 말했다.

“시험관님, 오늘 과제에서 누군가 제 요리에 소금을 넣었던 일을 기억하시나요?”

“그렇소.”

“저는 내내 궁금했어요. 국을 그릇에 옮겨 담았을 때까지 멀쩡하던 요리가 왜 심사대 앞에서 엉망이 되었는지.”

시험관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댄 채 깍지를 끼었다.

“학생들은 수많은 시험관이 감시하고 있었으니 불가능하지요.”

“…….”

“하지만 시험관 자신이라면 감시가 없을 테니 소금을 넣기 수월해요. 무엇보다—”

나는 윌토르와 다시 시선을 맞추고 말했다.

“심사대에서 샤르파크 후작께 음식을 전하며 기미 했던 저 시험관이라면.”

내가 손가락을 쭉 뻗어 윌토르를 가리키자 그는 흠칫하여 총책임자에게 달려갔다.

“저, 저는 억울합니다!”

“하면 시험지가 영애의 손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그건…… 우연히 영애와 하녀가 쑥덕이는 소리를 듣게 되어서……!”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나!”

“하, 하지만 증거도 없잖습니까! 제가 시험지를 흘렸다는 증거요!”

마릴린이 울컥해서 소리쳤다.

“제가 분명히 보았어요! 그쪽이 일부러 시험지를 흘렸잖아요!”

“시험지를 흘리긴 누가! 나를 매도하라고 네 주인이 명한 것이겠지!”

“거짓말! 우리 아가씨가 무슨 까닭으로 그쪽 따위를 매도한단 말이에요!”

윌토르는 비열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날 힐끔 돌아보았다.

“과제에서 퇴출령을 내린 사람이 나이니 앙심을 품었을 수도 있지.”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어쩌면 이렇게 예상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을까. 차라리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면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았을 거다. 난 침착하게 그의 말에 대꾸했다.

“그렇다면 범인은 샤를리나 알레그레 양이군요.”

“뭐, 뭐라고?! 알레그레 양이 무슨―!”

저자는 아탈란의 세력이고, 샤를리나는 아탈란의 성녀. 그러니 샤를리나만은 지키기 위해 안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 요리에 소금을 넣을 수 있던 건 딱 둘뿐이죠. 윌토르 님과 포털을 열 수 있는 알레그레 양.”

“……!”

“윌토르 님이 아니라고 하신다면 남는 건 당연히 알레그레 양뿐이잖아요?”

새하얗게 질린 윌토르는 마른침을 삼켰다. 성녀를 지켜야 하는가, 제가 살아남아야 하는가 맹렬히 고민하는 게 역력했다. 나는 총책임자를 똑바로 보며 힘 있게 말했다.

“오늘 제 과제를 망친 범인을 색출해 주시길 정식으로 요청드립―”

윌토르가 다급히 외쳤다.

“그래! 내가 했소!”

“윌토르!”

총책임자가 버럭 소리치며 그에게 삿대질했다.

“대체 무슨 연유로 프렌시프 양의 요리를 망친 것이냐!”

“그, 그건…….”

그는 까득, 이를 갈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로열 키친의 셰프들은 모두 프렌시프의 딸이 로열 키친에 들어오길 바라지 않을 겁니다.”

“무슨 헛소리를―!”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천재 소리를 들으면서도 손에 물집이 가실 날 없이 수련했습니다!”

“허!”

“한데 프렌시프 영애가 입관한다면 어찌 편히 일하겠습니까. 가문의 힘으로 로열 셰프가 될지도 모르지―”

퍽! 책임자가 그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큿…….”

“네놈은 퇴출이다! 궁을 떠나서도 다시 주방에 발 딛지 못할 것이야!”

윌토르가 흠칫 놀라 책임자를 바라보았다.

“그, 그렇게까지……! 저는 어찌 살란 말씀입니까!”

“감히 로열 키친의 명예를 더럽혔으니 그래도 마땅하다!”

윌토르가 책임자를 붙잡았지만, 책임자는 매정히 손을 떼어 내고 로열 키친의 다른 요리사들을 호출했다.

나와 마릴린은 로열 키친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고 방을 나섰다. 마릴린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뒤를 노려보았다.

“기가 막혀서……. 그런데 아가씨.”

“그래.”

“저놈이 왜 저렇게 쉽게 토설했을까요?”

“토설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샤를리나가 진범이 되든, 자신이 진범이 되든 오후의 사건에 관여하긴 했으니까. 그리고…….”

샤를리나가 범인이 되면 아탈란이 그를 살려 둘 리 없다. 그게 두려워서 그리 쉽게 자백한 것이겠지.

“아가씨?”

“아니야……. 어쨌든 마릴린, 잘했어. 실감 나는 연기가 아니었다면 윌토르가 네게 속지 못했겠지.”

“사실 진심이 섞여 있었거든요.”

마릴린은 사람들이 나와 샤를리나를 비교하는 게 정말로 화가 났다고 했다. 난 픽 웃으며 마릴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음날, 윌토르가 내 요리를 망쳤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졌다. 사람들은 ‘이게 무슨 기가 막히는 일이야!’ 하며 기함을 했고, 로열 키친의 평판은 곤두박질했다. 물론 이번 소문도 내가 마릴린을 시켜서 낸 거다.

‘시험관들이 더 이상 다른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남은 아탈란의 수족이 있다면 겁먹고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테스트는 새롭게 출제되었고 난 꽤 좋은 성적을 얻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 * *

조이는 시험 둘째 날에 내년을 기약하며 성을 떠났다. 시험관 앞에서 한 사람씩 해산물을 손질하는 것이 과제였는데, 시간도 부족한 데다 시험관은 압박을 주기 위해 일부러 신랄한 말을 뱉어냈다.

조이는 압박에 졌고, 소라 독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해서 실격당했다. 그리고 오늘은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셋째 날이었다. 나와 스위트피는 순위표 앞에 서서 기도하듯 손을 꼭 잡았다.

‘7위까지만 남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떠난댔어.’

7위. 제발 7위까지만.

나는 긴장된 표정으로 벽보에 적힌 순위를 확인했다.

[1. 샤를리나 알레그레, 102점.

.

.

7. 세니아나 프렌시프 90점.

8. 피스 쥬다흐 샤르파크 88점.]

나는 깜짝 놀라서 스위트피를 바라보았다. 스위트피는 예상외로 침착했다.

“여기까지네.”

“스위트피…….”

그녀는 부러 밝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동부 아카데미에선 너만 남았어. 꼭 붙어서 동문의 자랑이 되어 줘. 알겠지?”

“…….”

스위트피는 정말로 열심이었다. 학교에서도 이곳에서도 밤낮없이 요리에 매진했다. 그런 그녀가 탈락한 것이 너무나 슬퍼서 나는 대신 서러워졌다.

“뚝!”

“…….”

“난 내년에 다시 올 거야. 꼭 붙어서 네 후배가 될 테니까 넌 여기서 날 끌어 주기 위해 최대한 성공해 놔야 한다?”

나보다 더 서럽고 슬플 텐데 내가 걱정할까 봐 내색도 하지 않았다. 떠나는 순간까지 스위트피는 미소 짓고 있다가, 검문소를 통과하고 나서야 우뚝 멈춰 서서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숙소로 돌아오자 샤를리나가 나를 반겼다.

“세니아나, 축하해요!”

그녀는 내가 마지막 7인에 남은 것이 몹시 기쁜지 내 양손을 꼭 잡으며 밝게 웃었다.

“아, 샤나가 일등이지요? 벽보 보았어요. 축하해요.”

“꼭 함께 입관했으면―”

“샤나!”

멀리서 한 무리의 응시생들이 다가왔다. 남은 7인이었다. 나와 달리 샤를리나는 이곳에서 꽤 많은 인맥을 만든 모양이었다. 그들은 날 발견하고 주저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샤를리나의 팔을 잡았다.

“식사…… 함께하자고 하려고 했는데, 프렌시프 양과 선약이 있으셨나 봐요.”

“네.”

“그럼 저희는 저희끼리 따로…….”

“그러지 말고 다 함께 먹는 게 어떨까요?”

샤를리나가 내 팔을 살짝 끌며 말했다. 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그래도 돼요?” 하고 물었다. 샤를리나는 입가를 가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귀여워라. 당연하죠.”

그러더니 다른 사람들을 보고 “괜찮지요?” 하고 되물었다. 사람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다른 이들과 함께 쭈뼛쭈뼛 원탁에 둘러앉았다.

‘우와……!’

학교 친구들이나 가족 외에는 이렇게 둘러앉아 식사를 할 일이 없었기에 나는 가슴이 콩닥거렸다.

“이번에도 일등이네요. 나는 언제 일등 해 보나. 좀 봐주세요~”

샤를리나와 다른 사람들은 화기애애했지만, 내겐 질문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한테도 말을 붙여 줬으면 좋겠다.’

내가 용기를 내서 먼저 붙여 볼까, 하고 고민하는데 누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세나.”

“네, 네!”

나는 말을 걸어 준 게 기뻐서 냉큼 대답했다.

“아…….”

“네?”

“샤나, 라고 불렀는데요. 그러니까 샤를리나 양을…….”

말을 붙인 사람이 어색한 표정으로 스푼을 들었다.

“그, 그렇군요.”

‘세나’라고 부른 줄 알았다.

‘그렇지, 여기선 날 세나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어.’

식탁엔 침묵이 감돌았다.

내가 불편한가 봐. 괜히 식사에 끼어든 것 같네.

나는 식사로 나온 클램차우더를 조금 먹다가 불편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슬그머니 식판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아직 정리하지 못한 일이 있어요.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샤를리나가 “하지만 식사는…….” 하고 물어서 난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에게 인사한 후 식판을 가지고 모퉁이를 돌자 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다시 종알종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후, 불편해서 정말.”

“가까이서 보니 고위 귀족답지 않게 수더분한 구석도 있는 것 같네요.”

“눈치가 없잖아. 다들 불편할 텐데 일부러 식사에 끼어드는 건.”

그러자 쨍! 하고 거칠게 스푼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샤, 샤나.”

“세니아나는 좋은 사람이에요. 뒤에서 이런 얘기를 나누는 건 보기 좋은 일은 아니네요. 저는 이만 가 보겠어요.”

“우리는 그게 아니라―!”

“샤나, 사람에게서 좋은 면만 보려고 하지 말아요. 못 들었어요? 시험관이 부정을 저지른 일로 기회를 잡아서 샤나를 끌어내리려고 했다잖아요.”

윌토르의 일로 샤를리나를 언급한 게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그런 게 아니었는데!’

윌토르가 샤를리나를 끌고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한 말이었다.

“그만들 하세요. 직접 본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애초에 소문이 왜 났을까요? 그런 건 시험관들만 알 일인데요. 마치 세니아나를 고립시키려고 악의적으로 낸 소문 같지 않나요?”

샤를리나가 벌떡 일어난 모양인지 끽! 의자가 거칠게 밀리는 소리가 났다.

“반성들 하세요.”

또각, 또각 구두 소리가 가까워졌다. 모퉁이를 돈 샤를리나가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나에게 속삭였다.

“저런 말에 휩쓸리지 마세요. 세니아나의 좋은 점을 몰라서 하는 말이니.”

난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였다.

다음 날, 시험관은 남은 7인을 불러 마지막 과제를 내주었다. 황후와 세 황비 중 한 사람을 골라 요리를 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고심했다.

“누구로 해야 하나.”

“역시 황후 폐하지요?”

“전 남부 출신이라 코트니 황비님을…….”

“가브리엘라 황비님이 점수에 후하다고 들었어요.”

사람들이 하나둘 황족을 선택했다. 겹쳐서 선택하는 것도 가능해서 네 명이 한 번에 황후를 택했다.

“다음 황위 계승자의 모후에게 잘 보여 두는 게 좋으니까.”

“아하하, 검은 속내를 그렇게 드러내도 되겠어요?”

“로웨나 황비님이 들으시면 경을 칠 텐데.”

난 고민을 거듭했다.

‘가브리엘라 황비님은 같은 동부 사람이고 상냥한 편이셔서 편할 거야. 하지만 로웨나 황비님이…….’

이런저런 일에 도움을 많이 주었다. 게다가 내가 가브리엘라 황비를 택하면 잡은 줄을 변경하려는 걸로 알고 고민할 것이다. 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결국 로웨나 황비를 택했다. 시식자를 기입하러 가는데 내 곁에 샤를리나가 섰다.

“저도 로웨나 황비님께 요리를 내려고요.”

저번에 들었기에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나와 샤를리나가 기입 후 돌아오자 시험관들과 응시생들이 우리를 빤히 쳐다보며 속삭였다.

“일등과 꼴찌의 시합이라.”

“하지만 로웨나 황비님이 프렌시프 양에게 푹 빠지셨다면서요.”

“그래요, 몹시 귀여워하신대요.”

우리의 경합 결과가 몹시 궁금한 모양이었다.

마지막 시험은 다른 날과 달리 황비궁에서 진행되었다. 나는 응시생들과 함께 복도를 걸으며 고민했다.

‘로웨나 황비님은 단 음식을 좋아하시니까 데리야끼 소스를 써 볼까.’

샤를리나도 말이 없는 게 고민이 많은 모양이었다.

“세니아나, 뭘 할 거예요?”

“저는 데리야끼 소스를 써서 닭조림을 할까 싶은데요.”

“이런!”

그녀가 곤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그 생각을 했어요. 단 음식을 좋아하신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겹칠까 봐 물었더니…… 역시나…….”

“…….”

“제가 다른 것을 할 테니 세니아나는―”

그때였다. 복도 끝에서 “세니아나!” 하고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들!”

난 화들짝 놀라 어깨를 좁혔다. 란슬롯과 가웨인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잘 지냈어?”

“뭐야, 살 빠졌잖아. 시험관 놈들이 얼마나 애를 들들 볶았길래!”

가웨인은 내 어깨를 잡고 이리저리 돌리며 살폈고, 란슬롯도 내 뺨을 손등으로 가볍게 눌러 주었다.

“날이 추운데 왜 이렇게 얇게 입고 있어?”

“조리복이에요. 다들 이렇게 입는걸요.”

“두툼한 조리복을 사야겠다. 시험이 끝나면 함께 쇼핑 가자.”

응시생들은 다정한 오빠들을 보고 마른침을 꿀떡꿀떡 삼켰다. 남자들의 시선은 소년의 우상이라는 가웨인에게 꽂혀있었고, 여자들의 시선은 아무래도 란슬롯 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응시생들의 눈치를 보고 란슬롯과 가웨인을 밀어냈다.

“시, 시험 준비를 해야 해요. 가세요…….”

가웨인이 짓궂게 웃으며 내 볼을 살짝 꼬집었다.

“뭐야, 방해되니까 꺼지라는 건가?”

“그게 아니라.”

“가웨인.”

란슬롯이 내 볼을 잡고 있는 가웨인의 손을 쳐내며 낮게 말했다. 그러곤 응시생들을 쳐다봤다.

“내 동생과 함께 시험을 보는 사람들이군.”

“프, 프렌시프 경을 뵙습니다!”

“이, 이, 이렇게, 뵈, 뵙게 되어 저, 정말이지 여, 여, 영광―!”

“하아아…….”

란슬롯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응시생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저, 저희 같은 것들이 어찌!”

“내 동생의 지인이라면 프렌시프의 귀인이지.”

가웨인은 귀찮은 표정이었지만, 란슬롯이 슥 쳐다보니 큼, 헛기침을 하며 남자 응시생들에게 악수를 건넸다. 오빠들과 악수를 한 응시생들은 모두 몽롱한 표정이었다. 란슬롯이 흥분해 있는 응시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린 아이니 잘 부탁한다.”

“예, 옛! 물론!”

그러곤 여자 응시생을 보며 “레이디, 부디.” 하고 눈매를 나붓이 휘었다.

“물론이지요……, 프렌시프 경……. 온몸을 바쳐서 영애를 잘…….”

아니, 오빠들이 어떻게 온 거람? 내가 응시생들과 잘 지내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난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옆에서 킬킬 웃고 있는 마릴린을 보았다.

“역시 연락드리길 잘―”

“마릴린?”

“……어머~! 아가씨의 펜을 놓고 왔네! 내 정신 좀 봐!”

그러더니 그녀가 헐레벌떡 뛰어갔다.

마릴린이 오빠들에게 전했구나! 나는 도망치는 마릴린을 기가 막힌 표정으로 보다가 오빠들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저는 시험 중이니 사사로운 잡담은 불가해요.”

란슬롯이 “인사일 뿐이야.” 하며 다른 응시생들을 쳐다보았다.

“그렇지 않은가?”

“무, 무, 물론! 물론입니다!”

“예! 며칠 만에 본 동생이니 당연히 반가울 만도 하지요! 인사쯤은!”

“예, 예! 인사쯤은―!”

나는 기가 막혔고, 란슬롯은 내 손등에 입 맞추며 “저녁에 보자.” 하고 인사했다. 가웨인도 픽 웃으며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응시생들은 우리를 지나치는 오빠들을 보고 입을 “하아―” 하고 벌린 채 신음했다.

“듣기야 했지만, 란슬롯 님은 정말…….”

란슬롯이 조각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고 호들갑을 떠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맙소사! 내가 가웨인 님을!”

가웨인과 악수한 몇몇은 악수한 손을 허공으로 들어 보이며 감격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들은 란슬롯에게 배우를 본 것 같은 기분을, 가웨인에게서는 스포츠 스타를 본 것 같은 기분을 느낀 듯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슬금슬금 먼저 걸었다. 나를 보는 시선이 변한 것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샤를리나가 나를 따라 걸으며 빙그레 웃었다.

“형제들인가요?”

“네.”

“영애를 몹시 아끼나 봐요.”

나는 어색하게 웃고 “감사한 일이지요.” 하며 말을 흐렸다.

주방에 들어가서 손을 씻은 뒤 본격적인 요리 준비에 들어갔다. 황비궁 주방에선 로열 키친의 요리사들도 함께 요리를 하기에, 우리는 그들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황비의 마음에 드는 요리를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응?’

요리에 마늘과 생강을 과할 정도로 쓰고 있잖아? 저렇게 많이 넣으면 요리가 텁텁해질 텐데. 무엇보다 황제와 후·비들의 가장 큰 소임은 황족 생산이었다.

‘황제를 모셔야 한다면 냄새나는 마늘과 생강을 주의해야 하는 게 아닐까?’

반대로 생각하면 마늘과 생강은 임신에 좋은 재료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이상해서 응시생들을 감독 중인 헤리엇에게 슬쩍 물었다.

“혹시 로웨나 황비님께서 오늘 황제 폐하를 모시는 건가요?”

팔짱을 낀 채 턱을 매만지던 헤리엇이 움찔하고 나를 쳐다봤다. 다른 감독들도 “호오.” 하고는 서로를 쳐다봤다.

“프렌시프 양은 세심하군.”

“그렇군요.”

“황비의 식사를 준비한다면 가장 먼저 살펴야 할 일이지.”

“다른 놈들은 그저 시험에만 정신 팔려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잊고 있군.”

“그래도 로웨나 황비님을 택한 응시생들은 꽤 수준이 있는 모양인데.”

“그래, 알레그레 양도 내게 질문을…….”

헤리엇이 빙그레 웃으며 내게 말했다.

“오늘 밤은 아니야.”

“오늘…… 은 아니라고요?”

“하지만 로웨나 황비님께서 곧 황손을 보셔야 하니 자궁에 좋은 음식을 준비하라는 얘기를 들었지.”

그게 이상하단 말이다.

[나는 우리 전하면 된다.]

로웨나 황비는 제 아이에게 줄 여력도, 시간도, 마음도 부족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를 갖지 않겠노라 단호히 말했다.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만…….’

고민하는 나에게 헤리엇이 시계를 가리켰다.

“그렇게 끙끙거릴 시간이 없을 텐데.”

“네…….”

나는 조리대로 돌아가서 바구니를 끌어안았다.

‘그래, 이것저것 신경 쓰지 말고 내 할 일에 집중하자.’

황비의 취향에 꼭 맞는 음식을 만들어야겠다. 데리야끼 소스를 쓴 닭조림을 할까 했는데, 내 옆에 있던 로열 키친의 요리사가 닭을 쓰는 것을 보고 포기했다. 소는 아무도 쓰고 있지 않으니까 소를 쓰는 편이 좋겠다.

‘소, 하면 역시―’

소갈비지!

난 냉장창고에 들어갔다가 황홀한 표정으로 뺨을 감쌌다.

‘과연 황궁의 재료 창고!’

어디를 봐도 신선한 재료로 가득하다. 난 질 좋은 갈비와 재료를 가지고 조리대로 돌아오다가 주방 한편에 세워져 있는 기계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절단기잖아!

‘세상에, 정말 없는 게 없구나.’

황궁의 주방, 최고야!

갈비는 정말로 맛있지만, 귀한 황비님이 손으로 들고 뜯어먹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이게 있으면 LA갈비를 할 수 있겠다. 한결 먹기 편해지겠다는 생각에 나는 기뻐서 폴짝폴짝 뛸 뻔했다.

감독관의 도움을 받아 고기를 잘라서 다시 내 조리대로 돌아왔다. 설탕을 듬뿍 넣고, 간장과 배즙, 곱게 간 양파와 마늘 등을 넣어 양념을 준비했다.

‘오래 재울 시간은 없으니까 간을 좀 세게 하는 편이 좋겠어.’

갈비를 한 시간가량 재워 두는 동안 냄비를 이용해서 갈비와 잘 어울리는 흰쌀밥을 지었다.

‘새콤한 곁요리로는…… 그래, 피클이 있으니까 식초 물을 쭉 짜서 매콤하게 무치자.’

피클을 물에 헹구고 깨끗한 천으로 물기를 쭉 짠 후 오이지처럼 새콤하게 무쳤다.

‘단맛이 빠지진 않았지만, 황비님은 달콤한 요리를 좋아하시니까.’

갈비를 졸이며 맛을 본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오늘은 정말이지 요리가 잘 되었다. 시간 분배를 잘해서 꽤 여유로웠기 때문에 오래 졸일 수도 있고.

난 냄비 안에서 고기가 눌어붙지 않게 살피다가 옆 조리대에서 속삭이는 로열 키친 요리사들의 얘기를 들었다.

“주방 이동은 언제 한대?”

“이번 입관자들이 뽑히면 하지 않겠어? 보통 그렇잖아. 이동 요청했냐?”

“당연하지. 요즘만 같으면 황비궁 주방보다 병영 주방이 편하겠다.”

“그러게. 로웨나 황비님의 신경이 갈수록 날카로워지시니…….”

“하녀들도 난리다. 달에 몇 번이나 달거리를 하시는지, 매번 신경질이시라고.”

샤를리나가 그들을 힐끔거리며 내 조리대에 다가왔다.

“다들 겁이 없네요. 황비님과 관련한 이야기를 저리 함부로…….”

내가 어색하게 웃자 샤를리나가 속삭였다.

“어찌 되었든, 우리도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자주 하혈하신다니 신경이 예민하실 거예요.”

난 손을 우뚝 멈췄다. 과할 정도로 쓰는 생강과 마늘. 날카로운 신경. 하혈.

‘설마!’

난 얼른 주변을 살폈다. 로웨나 황비님에게 올라가는 음식은 죄다 달고 기름진 것들이었다. 샤를리나도 기름을 잔뜩 쓴 튀김을 만드는 중이었다.

‘안 돼!’

난 하던 요리를 얼른 치우고 양배추를 잡았다.

* * *

온실에서 체스 말을 매만지고 있던 로웨나 황비는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하는 시녀들을 흘깃 쳐다보았다.

“프렌시프 양의 요리가 올라오는 날이 오늘이지?”

“예.”

“제일 앞에 그 아이의 요리를 올려놓으렴.”

“다른 응시생의 요리는 어찌할까요? 샤를리나 알레그레 또한 황비님의 식사를 만들었습니다.”

“황후의 이복자매가?”

황비는 입매를 비틀고 체스 말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본궁을 음독이라도 시킬 생각인가 보지?”

시녀가 고개를 푹 수그리자 로웨나 황비는 인상을 찌푸리곤 다리를 꼬았다.

“멀리 치워 둬. 음식에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모르니.”

음식이 차려지고 감독관과 응시생이 온실 안에 들어왔다. 로웨나 황비는 눈썹을 까딱 들어 올린 채 그들을 쳐다봤다.

“프렌시프 양은?”

“그게…….”

감독관들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프렌시프 양은 어디 있냐고 묻지 않아.”

그러자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샤를리나가 한 발 앞서 나왔다.

“황비님.”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황비를 올려다보았다.

“프렌시프 양은 황비님께 더욱 훌륭한 요리를 내기 위해 다른 응시생들보다 오래 불과 싸우고 있습니다.”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황비님.”

샤를리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가슴 앞에 손을 모았다.

“세 시간을 꼬박 불 앞에서 고통받고도 더 멋진 요리를 황비님 앞에 대령하려 애쓰는 모습이 요리사의 귀감이었습니다.”

“…….”

“그러니 황비님, 부디 조금만 더 요리가 나오길 기다려 주시면―”

“됐다.”

황비의 말에 샤를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좋은 요리를 내오기 위해서라니 기다려야지. 네 무릎을 꿇렸다고 황후궁에서 본궁을 핀잔하겠구나. 일어나렴.”

“……예.”

샤를리나가 일어나자 황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훑어보았다.

‘성정은 황후와 다른가.’

경쟁자를 감싸는 모습이 퍽 진솔해 보였다.

‘수작이라면 상당한 고단수고 말이야.’

그녀는 흥, 콧방귀를 뀌며 스푼을 들었다.

“샤를리나 알레그레의 것부터 맛보지.”

시녀가 음식을 덜어 주자 황비는 향부터 맡아 보았다.

“특이한 음식인데.”

“닭과 송이버섯을 튀겼습니다. 백설탕과 석류를 넣어 만든 소스에 찍어 드시면 더욱 맛이 좋을 거예요.”

향은 합격점이다. 소스의 냄새도 새콤달콤해서 입안에 침이 고였다. 헤리엇은 샤를리나의 어깨너머로 접시를 응시했다.

‘송이를 튀겨?’

송이의 가장 큰 장점인 향이 기름 냄새에 가려질 텐데.

게다가 크기도 일정하지 못하다. 어느 것은 너무 크고, 어느 것은 또 너무 작아서 도무지 수석인 응시생이 한 음식이라곤 믿기지 않았다. 황비는 송이 튀김을 소스에 찍어 맛보았다.

“향이―!”

입을 가린 그녀가 황홀한 표정으로 요리를 응시했다. 튀김옷이 약간 무른 데 반해 안에 있는 송이는 탱글탱글한 데다 향이 몹시 좋았다. 입에 넣자마자 기름 냄새는 온데간데없고 송이의 짙은 향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송이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소스가 일품이구나. 어떻게 만든 거니?”

“별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저 좋은 석류를 골라 그중에서도 좋은 알을 한 알 한 알 골라내 짓이겨 즙을 냈지요.”

헤리엇과 감독관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고생이었겠는데.’

‘믹서라는 마도구가 있는데도 굳이…….’

‘그렇지. 요리는 정성이야.’

얄미운 황후의 이복자매가 만든 음식은 더 입에 넣고 싶지 않은데, 어찌나 훌륭한지 홀린 듯 자꾸만 손이 간다. 송이를 두 점이나 맛보고 닭을 포크로 집었을 때였다.

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세니아나가 들어왔다. 로웨나 황비는 상냥하게 웃으며 “왔구나.” 하고 말했다. 세니아나는 황비에 포크에 들린 닭튀김을 보고 얼른 달려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드시면 안 됩니다!”

“뭐?”

샤를리나와는 너무나 다른 반응이었다. 경쟁자를 감싼 그녀와 달리 세니아나는 몹시 초조해 보였다. 감독관이 당황하여 말했다.

“프렌시프 양의 요리도 곧 시식의 기회가 있을 거요. 그러니 무례는 그쯤하고 어서 황비님의 손을―”

“드시면 안 돼요!”

황비가 굳은 얼굴로 세니아나를 쳐다봤다.

‘이 애가 정말…….’

영리한 줄 알았더니 아니었던 걸까. 사람 많은 자리에서 이런 어깃장이라니. 차라리 샤를리나 쪽이 더 현명했다.

“프렌시프 양. 일단 내 손을 놓는 게 좋겠구―”

세니아나가 주변의 눈치를 보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궁에 문제가 생기셨지요?”

“……!”

“몸이 안 좋으신 거예요. 그렇죠?”

“너, 어떻게―!”

“달거리를 자주 하는 게 아니라 하혈하고 계시잖아요. 이렇게 기름기 가득하고 단 음식을 드시면 안 돼요.”

로웨나 황비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 * *

나는 굳은 황비를 단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황비가 어째서 건강이 나쁜 것을 숨겼는지 알고 있다. 황후에게서 인장을 빼앗아서 내궁을 총괄하는 지금, 몸이 안 좋다는 것을 들키면 그 틈을 타 황후가 다시 인장을 돌려받겠다고 나설지도 모른다.

‘게다가 비의 소임은 황족의 생산이야.’

자궁이 얼마나 안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영영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한다면 로웨나 황비의 추락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나는 요리를 식탁에 올려두고 조심스레 덮개를 치웠다. 자궁에 좋은 강황을 넣어서 만든 미음. 그저 미음이었다. 감독관들이 화들짝 놀라 나를 힐난했다.

“121번 응시생!”

“이게 무슨― 어디 이따위 요리를 황비님의 식탁에 올린단 말입니까!”

아프지 않은 사람에게 죽을 내는 건 길라게온에선 굉장한 무례였다. 널 병상에 드러눕게 만들어 주겠다, 하는 협박이었으니까. 황비는 제 몸이 아프다고 말할 수도 없었으므로 입만 꾹 다문 채 포크를 그러쥐었다. 샤를리나가 얼른 내게 다가왔다.

“아니에요! 프렌시프 양이 만든 요리는 이게 아니었어요. 분명 요리에 문제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낸 걸 겁니다. 황비님! 제발 영애를 용서해 주세요.”

감독관들이 기가 막힌 목소리로 소리쳤다.

“요리에 문제가 생겼다고 황비님의 상에 죽을 낸단 말이오!”

“방자하기 짝이 없군! 프렌시프 영애라고 해서 이런 방종이 묵인되는 건 아냐!”

가장 분노한 건 로웨나 황비의 시녀들이었다. 그중 소수는 황비의 몸이 안 좋다는 것을 아는 듯 침묵했지만, 대다수는 모르는 모양인지 길길이 날뛰었다.

“프렌시프 영애가 황족을 모독했습니다! 지금 바로 경비병을―!”

“그만!”

황비가 손을 들어 올리자 그제야 온실 안이 고요해졌다.

“본궁이 고뿔을 앓고 있어서…… 그래서 이 아이가 죽을 내온 것이야.”

“하지만 황비님―!”

“그만하라지 않았어!”

“…….”

황비는 급히 스푼을 들고 내 미음을 맛봤다.

“맛이 좋구나. 그저 싱겁지만은 않은 좋은 음식이야. 본궁을 위해 애쓴 영애가 기특해.”

황비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녀는 내 미음 앞에 스푼을 내려놓았다.

“오늘의 승자는 프렌시프 영― 흐…….”

황비가 배를 쥐더니 몸을 웅크렸다. 로웨나 황비궁의 시녀장이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황비님!”

“……난 괜찮―”

“황비님? 황비님!”

로웨나 황비가 무너지듯 쓰러졌다.

“꺄악!”

“황비님!”

“궁정의! 어서 궁정의를―!”

온실이 터져나갈 듯 소란스러워졌다. 황비가 쓰러진 자리엔 피가 흥건했다.

나와 샤를리나는 구금되었다. 황비가 오늘 넘긴 음식은 오직 나와 샤를리나의 요리뿐이라서 음독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황궁 옥사에 갇히게 된 것이었다. 경비병들은 곤란한 표정으로 옥사 안에 있는 나와 샤를리나를 힐끔거렸다.

“이게 무슨 일이야.”

“카렌듈라의 딸과 프렌시프의 딸이 나란히 구금이라니…….”

“괜히 우리한테 불똥 튀는 거 아니야?”

그들은 속닥거리다가 우리의 눈치를 보고 슬금슬금 옥사를 나섰다.

“저, 프렌시프 영애…….”

샤를리나가 애써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황비님께서 일어나시면 우리도 곧 풀려날―”

“왜 그런 요리를 만들었어요?”

“네?”

감독관들의 말에 따르면 그녀도 마늘과 생강을 자주 쓰는 이유를 물었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도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자주 하혈하신다니 신경이 예민하실 거예요.]

난 샤를리나를 빤히 쳐다봤다.

“황비님이 하혈하셨다는 걸 어떻게 아신 거죠?”

“달거리를 달에 몇 번이나 한다고 했으니까 하혈이 아닐까 했던 거지요.”

“주기가 짧은 사람들은 시기가 잘못 겹치면 달에 두 번도 달거리를 하기도 한다는 걸 여자인 영애가 모른다고요?”

샤를리나가 우뚝 굳어져 양손을 맞잡았다.

“‘몇 번이나’라고 했으니까요. 두 번이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

“샤를리나 카렌듈라.”

목소리가 절로 낮아졌다. 나는 그녀를 똑바로 응시한 채 말했다.

“난 바보가 아니에요.”

“……!”

샤를리나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말을 고르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영애가 당황스러울 수 있다는 점, 이해해요.”

그녀는 기가 막힌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고작 하혈이라고 언급한 것 때문에 저를 의심한다는 건…… 글쎄요. 제가 보기엔 옳지 못한 판단인 듯싶네요.”

나는 가늘어진 눈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는 샤를리나를 응시했다.

“증거가 없으니까?”

샤를리나는 산뜻하게 웃곤 “그런 의미가 될 수도 있겠네요. 듣기에 따라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저는 황비님께 해를 가할 생각이 절대로 없었지만요.”

“샤나.”

“말씀하세요.”

“진짜 선의와 가짜 선의는―”

나는 예고 없이 샤를리나의 손끝을 잡았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내 손을 세차게 뿌리쳤다.

“……!”

샤를리나는 내게 잡혔던 손을 다른 손으로 꽉 쥔 채 표정을 굳혔고, 나는 생긋 웃었다.

“본인이 제일 잘 아는 법이에요. 방금처럼.”

만들어진 선의는 악취를 풍긴다. 나를 고아원에 버리고 가기 전의 아빠가 그랬고, 자신의 폭행으로 내가 몇 군데나 골절되자 경찰 앞에 선 원장이 그랬다. 아무리 가면을 겹겹으로 쌓아도 결코 숨길 수 없는 불쾌한 냄새. 그것은 샤를리나를 처음 볼 때부터 느껴졌다.

“나를 싫어하잖아요.”

입매를 비틀던 샤를리나가 노래하듯 우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여워라.”

“…….”

“얼마나 고되게 살았으면 타인의 마음을 점쟁이라도 되는 양 다 안다고 생각할까.”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샤를리나는 입가를 살짝 가린 채 이어 읊조렸다.

“피해망상이라고 하죠, 그런 것을.”

“…….”

“나는 알아요, 영애. 우리는 비슷하니까.”

샤를리나는 차분한 눈빛으로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비슷하면서 또 다르기도 하죠.”

“뭐가요?”

“영애는 애초에 음지에서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대사제께서 말씀하셨어요.”

“음지?”

그녀가 내게 다가와 손마디로 볼을 쓰다듬었다. 불룩 솟은 뼈마디가 이상하게 싸늘한 기분이었다.

“영애는 오직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

“내가 진짜예요. 진짜 성녀, 진짜 귀족, 진짜 요리사.”

“…….”

“나는 궁금했어요.”

샤를리나가 고개를 모로 기울인 채 빙그레 미소 지었다.

“어째서 다들 가짜를 진짜라고 여기는 걸까.”

“무슨―”

“이전엔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이젠 알아요.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 간절해지는 법이죠.”

샤를리나는 내게서 떨어져 흘러내린 머리칼을 정리하며 눈매를 나붓이 휘었다.

“나는 영애에게 미안하게 생각해요. 내 선의가 가짜라고 느낄 만큼 열등감을 느꼈다면 사과하겠어요.”

“아무래도 망상은 내가 하는 게 아닌 것 같군요.”

샤를리나와 내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친 순간, 옥사 안으로 사람이 들어왔다.

“카렌듈라의 성녀님을 아발론으로 모시겠습니다.”

샤를리나는 고개를 까딱 숙이곤 “그럼 먼저.” 하며 옥사를 빠져나갔다. 나는 철창 안에 우두커니 서서 계단을 사뿐사뿐 걸어 올라가는 샤를리나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오싹한 기운이 경고하듯 전신을 옥죄었다. 에이레네를 만났을 적에도 느낀 적 없는 감각이었다.

내가 풀려난 건 할아버지와 아빠가 황궁을 발칵 뒤집은 후였다. 풀려났을 땐 이미 시험이 끝나 있었고, 최종 입관자는 로열 키친에서 개별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난 아빠와 할아버지 사이에 서서 걸으며 샤를리나와의 대화를 곰곰이 생각했다.

“……니안.”

“…….”

“세니안.”

퍼뜩 고개를 들자 아빠와 할아버지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네.”

“무슨 생각을 그리하지?”

“황궁 놈들이 내 손녀를 홀대한 것이냐!”

나는 손을 내저으며 “그런 게 아니라…….” 하고 말했다.

“하면?”

“샤를리나 알레그레는 아탈란의 사람이에요.”

“……!”

할아버지와 아빠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포털을 연다던데. 아탈란에서도 성녀를 데리고 있었단 말이냐?”

“그게 이상해요.”

“이상하다고?”

“아탈란에선 에이레네 사비에르를 실험을 통해 성녀로 만들었잖아요?”

“그렇지.”

“샤를리나가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포털의 개화가 요즈음이라면 에이레네 사비에르가 필요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 애는 뭐랄까…….”

나는 “으음.” 하고 침음하다가 황궁을 돌아보았다.

“처음부터 아탈란에서 자란 사람 같았는데.”

내 말에 할아버지가 미간을 좁혔다.

“무슨 소리냐?”

“예를 들면 그런 거예요. 그게, 저는 다른 세계에서 가난하게 자랐잖아요. 그래서 아빠와 할아버지가 선물을 엄청 많이 주셨는데도 일 피니가 엄청 소중하단 말이에요?”

아빠가 고개를 끄덕여서 난 말을 이었다.

“몸에 내재된 생활 방식이나 사상은 변하기 힘든데 샤를리나는…….”

“모든 게 아탈란 쪽인 듯하다?”

“네.”

아빠와 할아버지가 시선을 교환했다.

“수상하긴 하군.”

“그래.”

우리는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면서 정보를 서로 교환했다. 아빠는 르마르 공작을 통해 ‘2월’이 카렌듈라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프렌시프 수중에 있던 오르가와 아탈란의 살수를 고신하여 정보를 캐냈다.

“서부와 남부의 대부분은 아탈란에 넘어간 듯싶더군.”

“그럼 동부는요?”

“슬슬 동부 쪽에도 손을 뻗치고 있는 모양이다. 샤르파크 후작을 휘하에 두려 한 것을 보면.”

그렇게나 많이 아탈란에 넘어갔다면 위험하다. 사람들은 날 성녀라고 부르지만, 난 사실 세계 평화 같은 건 관심이 없다. 나와 우리 가족의 안위. 내가 신경 쓰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면 그마저 지키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단 말이지요.’

일단은 샤를리나의 도약을 멈출 필요가 있겠다.

‘그렇다면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건데.’

나는 마차 창문턱에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택에 도착하자 사용인들과 오빠들이 나를 반겼다. 란슬롯은 무릎을 약간 굽혀 나와 시선을 마주치며 눈매를 나붓이 휘었다.

“오랜만에 보니 좋은걸.”

“오전에도 뵈었는데요?”

“저택에서 말이야.”

응응, 그렇긴 해.

나는 헤헤 웃고 란슬롯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그러자 눈앞에 또 하나의 손이 내밀어졌다.

“나도.”

“…….”

“왜 형만!”

“좋아요.”

내가 가웨인의 손을 덥석 잡자 그는 “웬일로 순순히?” 하며 놀라다가 픽 실소를 흘렸다.

“집 떠나 있는 게 나쁜 일만은 아니군. 기왕 선심 쓰는 거, 업어 주는 것도 허락해 주면 어때?”

“그건 싫어요.”

내가 오빠들의 손을 각각 잡고 고개를 젓자 하녀들이 입가를 가린 채 키득키득 웃었다.

“유리관으로 가자. 별을 보면서 식사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놨어.”

“백마를 하나 데려왔는데, 더 추워지기 전에 타 볼래?”

“특이한 호박이 들어왔어. 감정사가 보니 제법 괜찮은 모양이야. 구경하러―”

“네가 좋아하는 호두 밀푀유를 사 놨는데―”

나는 오빠들에게 “네.”, “좋아요.”, “멋져요.” 하고 열심히 대답하다가 방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얼굴이 환해졌다. 오빠들의 손을 휙! 놓고서 얼른 그녀에게 뛰어갔다.

“마담 버지니아!”

“우리 아가씨!”

나는 버지니아의 품에 안겨 빙글빙글 돌았다. 이게 얼마 만이람! 졸업하고 영지에 내려가지 못해서 통 얼굴을 못 봤다.

“보고 싶었어요.”

“기뻐라!”

“어떻게 오셨어요? 영지는 괜찮아요?”

“이제 파르뎅 남작이 제법 합니다. 움직여도 되겠다 싶어서 냉큼 올라왔지요.”

할머니뻘인 마담 버지니아는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도 나를 진짜 손녀처럼 귀여워해 줬다.

“다른 가신들도 함께 왔답니다.”

“누군데요?”

로제스 자작, 뱅숑 남작 등이 “아가씨!” 하며 내게 달려왔다. 두 사람은 가짜 세니아나를 몹시 혐오해서 나를 껄끄럽게 대했었는데 이젠 손녀나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예뻐했다.

“다들 어떻게 올라오신 거예요? 황도에 무슨 일이 있나요?”

“있지요!”

“무슨 일인데요?”

“우리 아가씨의 데뷔탕트가 있지요.”

맞다. 아카데미 학칙상 신분을 드러낼 수 없어서 데뷔탕트를 미뤄놨었는데 이제 졸업을 했으니 할 시기가 왔다.

‘다들 입관 전에 한다고 했지.’

나는 데뷔탕트를 도와줄 엄마도, 할머니도 없어서 마담 버지니아가 직접 온 모양이었다.

“아가씨의 데뷔탕트는 어르신과 영지의 일원들이 조금씩 준비했었어요. 남은 건 몇 가지 마무리뿐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초대장은요?”

“대부분 고위 귀족의 자제나 귀부인들에게 가겠지만…… 원하시는 분이 있다면 추가하겠습니다.”

“저기, 그럼 저는 스위트피, 그러니까 피스 샤르파크 양과 조이…… 그리고…….”

마담 버지니아와 가신들은 내가 아카데미에서 친구를 사귄 게 몹시 기쁜 모양이었다.

“그럼 아가씨 친구분의 좌석은 이쪽으로…….”

“좋아요!”

내가 여는, 아니, 정확히 내가 준비한 건 아니지만 내 이름으로 여는 파티는 처음이라 콩닥콩닥 설렜다.

* * *

가족들은 음울한 표정으로 신이 난 세니아나와 가신, 행정관, 사용인들을 쳐다봤다.

‘빼앗겼다.’

손녀를. 딸을. 동생을. 이제 시험도 끝나서 하루 종일 품에 끌어안고 예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데뷔탕트를 무기로 웬 도적 떼가 병아리를 빼앗았다.

“그럼 드레스는 이 두 벌로 하고 패물은…….”

“제가 아가씨와 꼭 어울리는 질 좋은 에메랄드를 확보했습죠.”

“에메랄드보다는 핑크 토르말린이―”

저희들끼리만 재잘재잘 떠들더니 드레스를 가봉하러 가야 한다며 세니아나를 끌고 상점 지구로 향했다. 그걸 본 나베리우스가 벌떡 몸을 일으키자 행정관들이 절규하듯 소리치며 그를 붙잡았다.

“어르신―!”

“안 됩니다!”

필사의 각오로 앞을 막아서자 나베리우스가 창대를 쿵! 바닥에 박았다.

“어떤 겁 모르는 놈이 감히 내 앞을 막는 것이냐.”

“아, 아, 안 됩니다!”

“예, 예, 아, 아가씨 시험이 걱정되신다고 결재를 죄다 미뤄 놓으셨는데 이번에도 처리가 안 되면―”

나베리우스가 양팔과 양다리에 매달린 행정관들에게 매섭게 호통쳤다.

“이거 놓으라지 않느냐!”

나도 내 손녀와 쇼핑 갈 테다! 저놈들이 에메랄드와 토르말린을 사 준다지 않아! 나는 다이아를 사 줘야 한단 말이다!

“어르신―, 통촉하여― 주십시오―!”

방 밖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행정관들을 본 집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가 고생이 많네.”

“맞습니다.”

“한데 자네, 왜 아직까지 사용인 명단을 가져오지 않나?”

영지의 총괄 집사가 저택의 집사, 마일로를 은근히 쏘아보자 마릴린과 시트론이 그 사이에 쏙 파고들었다.

“아가씨 아시면 또 끌어안고 ‘사이좋게 지내세―’ 하며 서로 등을 토닥이셔야 할 텐데요.”

“네, 아가씨 걱정시키지 마시라고요.”

집사들이 움찔하여 서로를 쳐다봤다.

“우리는 아가씨께 걱정을 심어드리려는 게 아니라―”

“그, 그래. 내가 성질 급하게 나왔군. 명단은 천천히 넘기게.”

“아, 아닙니다. 일은 빨리 처리해야지요.”

한편, 마담 버지니아와 함께 황도에 올라온 영지의 소년 행정관은 눈두덩이가 거뭇해져서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도 두려워하는 동부 최고의 권력자 어르신도, 천재로 이름 높은 프렌시프의 정예 행정관들도, 사용인들의 귀감이라 불리는 최고의 집사들도 어째 아가씨 앞에선 전부 머저리 천치였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결심했다.

‘이직해야지.’

* * *

시험이 끝나고 나흘. 나는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풀며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데뷔탕트 준비로 조금 바쁘긴 했지만 반쯤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게임처럼 느껴졌다.

“역시 에메랄드가―!”

“아니야! 핑크 토르말린이―!”

“멍청한 것들. 제일 비싼 다이아를 사야지!”

가신들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대수롭지 않게 지켜보다가 보석상의 직원이 안내한 소파에 앉아 차를 마셨다.

‘아, 향 좋다!’

아쌈에 우유와 크림을 듬뿍 넣은 밀크티는 따뜻하고 달콤했다. 밀크티를 호로록 마시다가 이따금 고소한 크래커를 씹으니 정말이지 행복하다. 내 주변으로 보석을 구경하러 온 귀족들이 재잘거렸다.

“샤를리나 알레그레라고요?”

“샤를리나 카렌듈라죠. 이번에 후작이 입적을 결정했대요.”

“세상에, 완전히 신분 상승이네요.”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답니다. 저희 남편이 방금 직접 보고 왔는데―”

귀부인이 경탄하듯 어깨를 떨었다.

“역사상 최초로 세계 끝에 있다는 엘트라에 포털을 여셨대요.”

엘트라?

나는 깜짝 놀라 귀부인들을 쳐다봤다. 그녀들은 내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지 여전히 대화에 열중이었다.

“전력석이 무더기로 있는 황금의 땅이라잖아요. 카렌듈라 양이 글쎄, 보그를 가져왔다지 뭐예요.”

“아니에요, 보그가 있기는 하지만 가져오지는 못했대요.”

“그럼 역시 보그는 프렌시프 독점 판매인가요?”

“아쉬워라. 경쟁하는 사람이 있어야 가격이 내려가는 법인데요.”

보그……. 역시 트리스탄이 있는 엘트라가 맞는 모양이다.

‘이런, 거기까지 포털을 열었다는 거야?’

샤를리나의 능력이 내 생각보다 강력한 모양이었다. 다른 가신들도 내 곁에 다가오다가 귀부인의 이야기를 들은 모양인지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가씨.”

“응, 아빠와 이야기를 나눠야겠어요. 아빠는 어디 계세요?”

“중앙탑으로 가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얼른 마담 버지니아를 비롯한 가신들을 따라 걸었다.

“앗!”

급히 걷다가 로브를 쓴 사람과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마음이 조급해서 사과만 한 뒤, 얼른 보석상을 나섰다.

* * *

흰 로브를 쓴 사내의 곁으로 구릿빛 피부와 푸른 눈을 가진 남자가 다가왔다.

[이리 빠져나오시면 곤란합니다, 왕자님.]

왕자라 불린 이는 흰 로브를 가볍게 벗었다.

“하지만 보고 싶었는걸.”

[대륙어도 그리 함부로 쓰셔선 안 됩니다.]

흰 로브의 남자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종종걸음으로 마차에 오르는 세니아나를 돌아보았다.

“드디어 만났다, 내 여신.”

마그누스는 주변을 살피고 왕자의 로브를 다시 제대로 씌웠다.

[이곳은 신의 땅이 아닙니다. 호위에 틈이 생길 수 있으니 부디, 왕자님.]

“언제 여신과 만날 수 있지?”

[트리스탄 님.]

마그누스가 책망하듯 말하자 트리스탄은 빙그레 미소 짓고 마그누스의 목을 틀어잡았다. 순식간에 벽에 밀어 붙여져 울대뼈를 짓눌린 마그누스가 신음했다.

“나는 묻고 너는 대답한다, 가 기본이잖아. 응?”

순식간에 허리에 찬 단도를 장난치듯 목에 겨눈 트리스탄의 태도와 달리 눈은 순진한 빛을 띠었다.

[죽이시려거든 마지막으로 다른 호위를 호출할 틈을 주십시오.]

트리스탄은 마그누스의 변화 없는 표정을 보더니 단도를 빙글, 돌려 검집에 집어넣었다.

“재미없어.”

그러자 그의 손에서 풀려난 마그누스가 손목으로 기침을 갈무리하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바람이 불었다. 트리스탄의 로브와 마그누스의 새카만 머리칼을 흩날리고 지나간 돌풍은 아름드리 나뭇잎을 세차게 흔들고 사라졌다.

* * *

“아빠.”

나는 중앙탑에서 나오는 아빠에게 달려가다가 그의 주변에 있는 다른 귀족들을 보고 후다닥 걸음을 멈췄다.

“안녕하세요.”

내 인사에 귀족들이 허허, 낮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 마중을 나오신 겁니까?”

“네…….”

“역시 딸이 귀엽군요. 제 아들놈들은 어려서도 아비 마중 나올 줄을 몰랐습니다.”

‘마중 나오는 건 어린애 같은 일인가?’

나는 실수했나 싶어 불안한 표정으로 아빠를 쳐다봤고, 아빠는 빙그레 웃으며 내 어깨에 재킷을 걸쳐 주었다.

“날이 차니 따뜻하게 입고 다녀야지.”

“네! 그런데, 저기…….”

나는 아빠의 팔을 잡고 귓가에 속닥거렸다.

“마차에 가 있을까요?”

내가 방해한 거 아닌가요?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니 아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식이 마중 나온 것은 기쁜 일이지. 가자.”

나는 귀족들에게 다시 한 번 묵례 후 아빠의 팔짱을 끼고서 마차로 함께 걸었다. 우리의 뒤로 귀족들의 탄성이 달라붙었다.

“일전에 프렌시프 령에서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르군.”

“저도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이리 보니 와전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누가 프렌시프 영애를 미친개라 부르겠나.”

인자한 웃음소리에 나는 헤헤 웃으며 아빠를 힐끔 쳐다봤다. 그러자 아빠가 “왜?” 하고 물었다.

“그냥요. 부끄러운 딸은 아니라 다행이에요.”

“네가 뭘 하든 부끄럽지 않아.”

“정말요?”

아빠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여기서 업어 달라고 해도 좋지.”

“오빠도 맨날 업어 준다고 하는데.”

내 입술이 삐죽 튀어나오자 아빠는 바람 들 틈 없이 내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어릴 때 많이 못 해 줬으니 지금이라도 해 보려는 게지.”

“음, 그렇기도 하겠어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시집가면 못 하겠지요?”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아빠?”

“너무 일러.”

“뭐가요?”

시집?

우리의 뒤를 쫓아오던 가신이 껄껄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르긴요. 영애 또래의 숙녀들은 이제 곧 아이를 낳을 텐―”

아빠가 입매를 딱 굳히자 마담 버지니아가 가신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하여간 눈치 없긴.”

“예?”

“입 다물고 걷게.”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아빠는 마차에 멈춰 서서 어리둥절해하는 가신을 돌아보았다.

“마차가 좁군.”

“황도 마차 중에서도 이렇게 큰 마차는 몇 없지 않습니까?”

“좁아.”

“무슨…….”

“걸어와라.”

그러더니 가신을 뚝 떼어 놓고 나와 단둘이서만 마차에 올랐다. 나는 당황해서 허둥지둥하는 가신들을 창밖으로 바라봤다.

이, 이래도 되는 거야? 묻듯 바라보니 아빠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창밖에서 “하여간 저 입!” 하며 분통을 터뜨리는 마담 버지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차 바퀴가 저택을 향해 구르기 시작했다.

“아빠.”

“그래.”

“샤를리나 알레― 카렌듈라가 엘트라로 포털을 열었다고 하던데…….”

“그렇더군.”

“그럼 이제 보그는 우리만 가져오긴 힘들겠어요.”

보그를 독점하고 있는 건 프렌시프엔 꽤 많은 도움이 되었다. 협상이라든지, 영지의 안정이라든지.

‘지금까지 헐값에 사 왔지만, 카렌듈라까지 보그를 확보하려고 한다면 어려울 테고.’

이제 영지에 무상으로 보그를 지급하긴 힘들겠다.

“세니안, 걱정이 많구나.”

“네?”

아빠는 나를 빤히 보며 읊조렸다.

“네가 모든 것을 해결할 필요는 없어.”

나는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아니라―”

“알아. 상냥한 아이니 아탈란이 너를 노리고 프렌시프를 조여 오는 것이 염려되겠지. 하지만 세니안.”

“…….”

“넌 아직 어려.”

아빠가 내 헝클어진 머리를 다정히 정리해 주며 말했다.

“네가 다른 세계에서 몇 살로 살았든, 아직 어린애라는 건 변함이 없지.”

“…….”

“하고 싶은 것을 해라. 걱정보다 즐거운 생각을 더 해.”

아빠는 축 늘어진 내 눈썹을 쿡 찌르며 말했다.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사 달라고 조르고, 어리광도 부려.”

“…….”

“네게 헌신할 기회를 주는 것도 사랑의 한 방식이란다.”

아빠가 무릎을 두드려서 난 그의 무릎을 폭 베고 누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게요.”

아빠는 좌석 밑으로 흘러내린 내 머리칼을 매만지며 낮게 읊조렸다.

“두 번은 안 뺏긴다.”

손길이 너무나 따뜻하고 다정해서 어깨를 짓누르던 책임감이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저택에 도착해서 가족들과 둘러앉았다. 예상과 다르게 다들 아빠처럼 샤를리나가 엘트라로 포털을 연 것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걱정한 거야?”

란슬롯은 내가 귀엽다는 듯 볼을 가볍게 잡아 흔들었다.

“하지만, 하지만 보그는 소중하니까…….”

내가 변명하듯 웅얼거리자 가웨인이 삐딱하게 앉아서 코웃음을 쳤다.

“그까짓 거.”

“그까짓 거라니요. 황제 폐하께서도 탐을 내는 건데요.”

“사비에르가 전력석을 독점한 시절에도 프렌시프의 위상은 드높았어.”

그렇기야 하다만…….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비에르의 전력석 독점 시절에도 아무렇지 않았으니까. 아빠도 걱정하지 말라셨고.’

나는 안심해서 파하,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잡았다.

“데뷔탕트에서 입을 드레스는 가봉을 마친 거야?”

란슬롯의 질문에 나는 “네!” 하고 쾌활하게 대답하고서 쇼핑백에서 부스럭부스럭 드레스를 꺼냈다.

“시착품인데, 보세요. 너무 예쁘지요!”

가슴에서부터 A라인으로 쫙 퍼지는 드레스는 꽃 뭉치를 가득 달아 놓은 형상이었다.

“입어 봐.”

가웨인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하니 마릴린과 시트론이 “저희가 돕겠습니다.” 하고 나섰다. 나는 그녀들의 도움을 받아서 시착품을 입고 돌아왔다.

“여기서 더 알록달록해지고 보석도 잔뜩 달릴 거래요.”

“귀엽네.”

“응, 잘 어울려.”

오빠들이 칭찬하자 하녀들도 “맞아요, 아가씨.” 하며 동조했다. 나도 드레스가 마음에 쏙 들었다. 항상 가족들이 골라 주거나 가짜 세니아나에게 있는 드레스를 수선해서 입었던지라 내가 고른 드레스는 정말로 특별했다.

“첫 춤은 누구와 출 거야?”

가웨인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지, 참.

데뷔탕트의 첫 춤은 가장 소중한 사람과 춘다. 나는 “으음.” 침음하며 가족들을 돌아보았다.

“나지.”

“나거든.”

“나다.”

“당연히 나지.”

가족들이 으르렁거리듯 말해서 난 움찔, 어깨를 좁혔다. 가족들뿐 아니라 사용인들의 시선까지 모두 내게 집중되었다.

“누구와 출 거야?”

“편히 말해 봐라.”

“그래, 편히 나라고 해.”

“세니안.”

고, 곤란해!

가족이 많은 것도 그렇게 좋은 건 아닌가 봐…….

나는 한숨을 내쉬고 금방이라도 치고받고 싸울 것 같은 아빠와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농땡이 피우지 말고 저리 썩 꺼져. 세니아나의 댄스 연습 상대는 나로 충분하다.”

“관절을 조심하셔야 할 나이에 괜한 욕심 부리지 마십시오.”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댄스 강사로 초빙된 토투 남작을 힐끔 쳐다보았다.

“저…….”

“예엣! 예! 여, 영애님!”

“차라도…… 너무 긴장하신 것 같은데…….”

“아, 아, 아닙! 아닙니…… 쿨럭!”

당황한 토투 남작은 사레가 들린 건지 격하게 잔기침을 했다. 아빠와 할아버지는 내 양옆에 앉아 남작을 쳐다봤다.

“가르쳐 봐.”

“가르쳐라.”

“저, 저, 저는 남성 스텝만 가르칠 수 이, 이, 있는―”

“그러니까 나를 가르치란 말이다.”

“나를.”

토투 남작이 새하얗게 질려 할아버지와 아빠를 쳐다봤다. 프렌시프에서 춤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란슬롯이 유일했다. 예술에 밝은 모친의 기질을 물려받은 거겠지. 반면 가웨인과 할아버지는 춤에 전혀 재능이 없었다. 감히 춤을 청할 레이디도 없었기 때문에 배울 생각조차 없었다.

‘아빠는 과거엔 평범한 사람만큼은 한다고 했는데 춤을 안 춘 지 너무 오래됐다고 하고.’

그래서 강사를 초빙한 것이었다. 토투 남작은 가엽게도 벌벌 떨며 할아버지 허리에 손을 감고 삐걱삐걱 움직였다.

“제대로 해 봐.”

“예, 옛!”

“닷새 동안 내 손녀의 상대로 부끄러움이 없도록 확실히 가르쳐라.”

“그, 그건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지…….”

할아버지는 턱을 쓰다듬으며 “흐음.” 신음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렌듈라 놈팡이만큼은 되어야지.”

“그, 그, 그분의 스텝은 저조차 감탄할 만큼―!”

“내가 그놈보다 못하단 말인가.”

낮아진 목소리에 토투 남작은 오들오들 떨며 “아, 아, 아, 아닙니― 쿨럭!” 하며 대답했다.

프렌시프 저엔 때아닌 댄스 붐이 일었고, 할아버지는 생애 최초로 재능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렇게 사흘 후, 새벽. 나는 할아버지의 방문에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슬슬 정한 상대와 춤 연습을 해야지.”

어쩐지 목소리가 시무룩한 것 같아서 문 안으로 쏙 들어갔다.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살포시 앉아서 양손으로 턱을 받치자 할아버지가 “크흠.” 헛기침을 했다.

“할아버지랑 할래요.”

할아버지가 실눈을 뜨고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춤에 재능이 없는데…….”

“그렇긴 하지요. 어제도 제 발을 네 번이나 밟으셨고.”

“…….”

할아버지가 다시 시무룩해져서 난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렇지만 첫 춤의 상대는 실력으로 뽑는 게 아니라 제가 정하는 거잖아요?”

“정 할애비와 추어야겠다는 거냐?”

“네!”

할아버지의 입매가 부들부들 떨렸다.

“뭐, 크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손녀가 이리 원하니.”

할아버지가 허허 웃다가 아차! 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얼굴을 딱 굳혔다.

“따, 딱히 내가 추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야!”

“네네.”

“정말이다!”

“아무렴요.”

나는 활짝 웃고 “제가 간절히 부탁드리는 거지요.” 하자 할아버지가 다시 헤벌쭉 웃었다.

“그럼 연습하러 갈까?”

그러자 사무관들이 죽을 기세로 소리쳤다.

“어르신, 결재부터 해 주셔야 합니다!”

나는 사무관들이 “이제 겨우 책상에 앉으시나 했더니……!” 하며 절규하는 목소리를 듣고 움찔했다. 할아버지의 등 뒤에서 가신들이 소리 없이 손을 비비며 내게 간절히 애원했다. 눈치를 보다가 펜을 놓으려는 할아버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 서류만 다 보고요.”

“이건 그리 바쁜 일이 아니야.”

사무관들이 펄쩍 뛰는데요…….

나는 할아버지의 등 뒤에 있는 사무관들을 향해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하시겠다는 걸 어떡해요. 그러자 사무관들이 또 소리 없이 손을 비비며 애걸했다. 난 그들의 입 모양을 보며 웅얼웅얼 말했다.

“그러니까, 으음, 일, 하시는 할아버지, 멋, 있어요?”

“그, 그러냐?”

할아버지의 입매가 허물어졌다. 사실은 다 똑같이 보이지만 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멋있어요.”

할아버지가 곁에 있는 사무관을 힐끔 쳐다봤다.

“그, 뭐, 더 처리할 서류를 가져와 보든가.”

“예?! 괜찮습니까?!”

“아니, 뭐, 시간이 났을 때 보는 거지. 가져와라.”

사무관들이 엄청나게 기뻐하며 “어서! 서류를!”, “멍청하긴, 그걸 낱장씩 가져오면 어떻게 해! 수레째로 가져와야지!” 소리쳤다.

할아버지가 일을 다 끝내고 나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완성된 드레스를 찾으러 갔다가 내 데뷔탕트를 할 무도회장을 찾았다.

“저택에서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큰 무도회장에서 하는 건가요.”

“내 손녀가 다른 것들에게 꿀릴 수야 없지.”

나는 “와!” 소리치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크고 화려한 무도회장은 내가 영화에서 보던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대리석…… 멋있어.’

마침 사람이 없어서 할아버지를 끌어당겼다.

“여기서 연습해요!”

“여기서?”

“저택에선 카펫을 깔고 연습하잖아요. 이런 맨질맨질한 바닥에서도 해 봐야 넘어지지 않지요!”

할아버지가 “그럼 그럴까?” 하며 내 어깨와 허리를 잡았다.

“오른발, 오른발, 왼발, 잘하시네요!”

내가 소리치자 할아버지는 으하하 웃었다.

“내 그리 못하는 것은 아니야. 아서보다 약간 부족할 뿐이다.”

아빠는 스텝을 하루 만에 다 외우고 엄청 멋지게 췄는데, 할아버지는 아직 스텝도 못 외운 것 같은데요…….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 윽!”

할아버지가 내 발을 꾹 밟아서 난 울상을 지었다.

“이건, 그러니까, 그래! 네가 ‘오른발, 왼발’ 말해 주지 않아서―!”

“네……. 오른발…… 오른발…… 왼발…….”

나는 아주아주 느리게 할아버지와 왈츠를 췄다.

‘데뷔탕트 당일에도 악사들에게 곡을 아주아주 느리게 연주해 달라고 해야지…….’

그때였다. 나와 할아버지, 프렌시프의 사용인들만 있던 무도회장에 익숙한 면면이 나타났다.

“이런, 나베리우스가 아닌가.”

카렌듈라 후작과 샤를리나였다.

“네가 무슨 일이지?”

할아버지가 얼굴을 왈칵 구기며 묻자 카렌듈라 후작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내 딸의 데뷔탕트가 모레라 무도회장을 살피러 왔지.”

“뭐라고?”

할아버지는 카렌듈라 후작 곁에서 새하얗게 질려 있는 무도회장의 관리인을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냐! 모레는 내 손녀의 데뷔탕트야!”

관리인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소리쳤다.

“송구합니다, 어르신! 제가 일정을 착각하여……!”

“멍청한 놈!”

할아버지는 카렌듈라 후작을 노려보며 낮게 읊조렸다.

“네놈이 물러서.”

“그럴 수야 있나. 내 딸도 데뷔탕트를 기대했네.”

“내 알 바 아니다.”

“자네가 양보하지.”

“개소리.”

카렌듈라 후작이 나를 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부디 양보해 줬으면 좋겠군. 영애와 달리 내 딸은 입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

“황도에 영애가 프렌시프의 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하지만 내 딸은 달라.”

그는 “양보해 주겠지?” 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야비해.’

나이 많은 어른이 청하면 젊은이들은 거절하기 어렵다. 할아버지가 울컥한 표정으로 입을 열려고 하던 찰나, 내가 먼저 말했다.

“싫어요.”

“……나는 영애가 사려 깊다고 들어 왔는데.”

“저도 각하께서 점잖은 분이라고 들었는데 어째서 제게 양보를 강요하시나요?”

카렌듈라 부녀의 표정이 굳었고, 할아버지는 히죽 웃으며 “그렇지!” 하고 동조했다. 단안경 속의 가느다란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카렌듈라 후작은 나를 빤히 보다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무도회장의 관리인에게 말했다.

“내 딸이 가여워졌으니 이걸 어쩐다. 일이 틀어지게 만든 놈의 목이라도 쳐야 하나.”

“가, 각…… 각하.”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오들오들 떨던 관리인이 애원하듯 나를 쳐다봤다. 할아버지는 코웃음을 쳤다.

“저놈이 목을 치는 것은 두렵고, 내가 치는 것은 두렵지 않은 모양이지.”

“어, 어르신……!”

카렌듈라 후작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샤를리나가 모두를 말리기 시작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버님.”

“데뷔탕트를 기대하지 않았나.”

“아버님의 딸이라는 것을 인정받는다는 게 기뻤던 거지, 데뷔탕트를 어디서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러자 관리인은 “오오! 과연 성녀님, 사려 깊으십니다!” 하며 울먹였다. 샤를리나가 제 부친의 팔을 잡고 나와 할아버지를 향해 가볍게 묵례했다.

“즐거운 파티가 되길 빌게요.”

“…….”

“초대를 청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한날 파티를 하는지라…….”

그녀는 곤란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초청객이 나뉠지도 모르겠네요.”

―하며.

‘초청객 수에 따라 가문의 힘이 여실히 보일 거라는 거야.’

저택으로 돌아간 후, 나는 소파에 앉아 고민을 거듭했다. 집사, 안토니오와 마일로가 내게 초콜릿이 든 접시를 내밀었다.

“달콤한 것은 쓴 고민에 큰 도움이 되지요.”

“응, 고마워.”

“무슨 일 있으십니까?”

“저기, 있잖아. 이 나라의 권력 관계가 어떻게 돼?”

마일로와 안토니오는 아빠와 할아버지가 깊이 신뢰하는 집사인 만큼,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토니오가 흠, 침음하며 말했다.

“글쎄요. 너무 포괄적인 질문이신지라.”

“그럼 프렌시프와 카렌듈라는?”

그러자 마일로가 대답했다.

“백성들의 말을 빌리자면 프렌시프는 동부의 패왕, 황제 다음으로 영향력 있는 가문이지요. 그리고 카렌듈라는 그런 프렌시프와 유일하게 어깨를 겨눌 수 있습니다.”

“비등하다는 거야?”

“가문의 힘은 숫자로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군사의 수에서는 프렌시프가 조금 더 우위, 당파 수는 카렌듈라가 조금 더 우위. 이런 식으로는 나눌 수 있겠습니다만.”

“그럼 황도에서의 영향력은?”

마일로가 잠시 침묵하자 안토니오가 대답했다.

“카렌듈라겠지요.”

“황후의 외척이니까?”

“그렇습니다. 황위에 가장 가까운 미카엘 황자가 있는 한, 황도 내에서 카렌듈라를 따르는 귀족의 수를 넘길 순 없을 겁니다.”

집사들은 말했다. 그건 역대 후작들의 성향 때문이기도 하다고.

“프렌시프는 중앙 권력 다툼에 참전한 적이 없으니까요.”

“음유시인들은 프렌시프를 고독한 맹수라고 표현하죠.”

나는 초콜릿을 오독오독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뷔탕트 날, 카렌듈라에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몰릴 수도 있다는 건데.’

샤를리나가 우위를 점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앞으로 판세를 뒤집기 힘들 거다.

‘어쩌지…….’

나는 끙끙거리며 고민했다.

그 후, 샤를리나는 황후와 함께 온갖 파티에 얼굴을 비쳤다. 황후는 마뜩잖은 기색이었으나 부친의 닦달에 어느 곳에서나 샤를리나를 데리고 다녔다. 그러한 까닭으로 샤를리나는 벌써부터 영향력 강한 귀부인과 미혼의 레이디를 꽤 많이 포섭했다.

“말도 안 돼!”

참석 의사가 적힌 편지를 정리하던 마릴린이 씩씩거렸다.

“다들 미친 거 아니야? 왜 우리 아가씨의 데뷔탕트보다 샤를리나 카렌듈라의 데뷔탕트에―!”

대부분 ‘초청에 감사하지만 그날은 선약이 있어 어렵겠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시트론이 가는 한숨을 흘렸다.

“황후 폐하와 미카엘 황자가 참석하니까요.”

에이레네가 죽고, 미카엘에겐 약혼자가 없었다. 다들 이번 기회에 황후와 카렌듈라 후작의 눈에 들어 딸을 미카엘에게 붙여 주려는 것이다.

“사교계란 인맥의 세계인데, 인맥을 물려줄 귀부인이 없으니…….”

마릴린이 중얼거리자 시트론이 “마릴린 님.” 하며 그녀를 다그쳤다. 화들짝 놀란 마릴린이 “아, 아가씨, 제 말은―” 하며 손을 내저었다.

“왜? 맞는 말인걸.”

프렌시프는 여성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다.

‘나를 포함하면 딱 세 명이라고 하니까.’

그중 두 명은 병환 중이라고 하고.

“그래도 샤르파크 후작 내외와 스위트피 아가씨는 이쪽으로 참석하신다고……!”

“으음, 그래서 총 몇 명이나 올까?”

“스물이 조금 넘어요.”

“샤를리나는?”

“…….”

“괜찮으니까 말해도 돼.”

“초청객이 너무 많아서 1부, 2부로 나눠서 파티를 진행한다고…….”

벌써 너무 차이 나네.

“흐으음.”

“아가씨, 손님의 수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누가 오느냐가 중요하죠.”

“가자.”

“네?”

“내가 직접 초청하려고.”

“네에―!?”

나는 당황한 마릴린과 시트론을 달고서 주방에 들어갔다.

‘응, 그건 좀 무리지.’

대부분의 젊은 레이디들은 부모님의 닦달 때문에 카렌듈라 쪽으로 가기로 했다니까.

나는 밀가루와 기름을 꺼내며 시트론에게 말했다.

“시트론, 시나몬 있지?”

“네.”

“가져다 줘.”

두 사람은 “요리를 하시려고요?”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선물로 가져갈 거야.”

나는 찹쌀가루와 전분, 밀가루를 소량 넣은 다음에 뜨거운 물을 두세 차례에 걸쳐 붓고 반죽을 했다. 그리고 발효되는 동안 안에 넣을 잼을 만들기로 했다. 땅콩, 호두, 아몬드, 해바라기 씨 등을 잘게 부순 후에 쫑쫑 썬 대추와 흑설탕, 그리고 계핏가루를 조금 넣었다.

발효된 반죽을 동그랗게 굴린 후 안에 잼을 듬뿍 넣어서 기름을 부은 팬에 구웠다. 치이이익―! 기분 좋은 소리가 들리고, 고소한 기름 냄새가 주방을 넘어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무슨 냄새야?”

가웨인과 기사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가왔다.

“호떡이에요!”

“호떡? 이상한 이름인데……. 이게 떡(Rice cake)이라고?”

“좀 다르긴 한데 아무튼 맛있어요.”

겨울엔 호떡이지! 남녀노소 다들 좋아하는 따끈따끈한 겨울 간식. 선물로 주려고 만들었다기보단, 사실 내가 먹고 싶었다.

“드셔 보실래요?”

“뭐, 맛봐 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

“그냥 잘 먹을게, 한 마디면 되는데.”

밉살맞기는. 나는 치, 하며 호떡을 건넸고 가웨인은 헛기침을 하더니 내가 준 호떡을 받아서 입에 물었다.

“윽!”

“그렇게 급하게 드시면 안 돼요. 설탕소가 엄청 뜨겁단 말이에요.”

가웨인이 손등으로 입가를 누르며 신음했다.

“일부러 늦게 말했지. 입천장 다 데라고…….”

나는 눈을 도르륵 굴리며 모른 체했다.

“이게, 정말.”

“시, 싫으시면 드시지 마세요. 줘요!”

“……누가 싫대?”

가웨인은 빼앗길세라 등을 돌려 호떡을 감추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호호 잘 불어서 먹는다.

“맛있죠?”

“…….”

“맛없어요?”

“……먹을 만은 하네.”

난 히히 웃었다. 귀족들이 먹는 티 푸드나 간식은 대부분 찬 것이었다. 호떡은 가장 맛있는 온도로 먹는 간식. 마음에 들 거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간식이라는 건 생소할 테니까 재밌기도 할 거야.’

기사들과 하인들에게도 주었는데 반응이 좋았다.

“아, 뜨거!”

“으윽!”

“이렇게 잘 불어서 드시라니까요.”

“하나 남은 건 내가…….”

“무슨 소리야! 도운 내가 먹어야지!”

“아가씨~ 남은 건 제게 주시면 안 되나요?”

생각보다 더 좋은 반응인데. 나는 하나 남은 호떡을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내 거야.”

“주군!”

“도, 도련님!”

다들 날름 호떡을 가져가는 가웨인을 보며 비열하다는 표정이었다.

“반만 주십시오!”

“이 새끼가 정신이 나가서…….”

나는 호떡을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 틈에 들어가 “그만, 그만!” 하고 소리쳤다.

“더 만들 테니까 싸우지 마세요!”

“……넉넉하게 여러 개 더 만들어.”

“그렇게나 많이는 안 돼요. 반죽이 부족해서.”

“반죽도 더 만들면 되잖아.”

“굽는 데도 시간이 걸린단 말이에요. 나가 봐야 해서 안 돼요.”

난 단호히 말하고 가웨인과 기사, 하인에게 딱 하나씩만 더 만들어 준 후에 선물용 호떡을 구웠다.

“아가씨, 중앙탑으로 가시는 거지요?”

마릴린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탑에 가서 아빠와 주변의 사람들에게 호떡을 주면서 내 데뷔탕트에 초청할 생각이었다.

“응. 아, 할아버지도 중앙탑에 계시지?”

“아니요, 어르신은 이 근처에서 옛 동료분들과 만나고 계세요.”

“동료?”

“네.”

함께 대륙 전쟁에 나섰던 과거 공, 후, 백작들이었다. 대부분 아들, 손주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영지에서 여생을 보내느라 이렇게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했다.

“그럼 들러서 인사하고 가자.”

마릴린이 “네.” 하고 대답하며 마부석과 연결된 창을 열어 말을 돌렸다.

마차에서 내리자 아주아주 고풍스러운 객점이 보였다. 마치 아카데미 근처에 있는 호텔처럼 보였다.

“클럽이랍니다.”

“클럽? 살롱과 비슷한 거야?”

“살롱엔 젊은 귀족들이 더 많이 다니지만, 클럽은 작위를 가진 고위 귀족이 찾지요.”

클럽 안으로 들어가니 당구대와 카드 테이블이 보였다.

‘으음, 과연 살롱과 비슷하네.’

귀족들의 놀이 시설 같은 곳인가?

나는 클럽을 구경하면서 걷다가 칼립스를 발견하고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아가씨께서 여긴 왜…….”

“중앙탑에 가는 길인데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려고.”

그는 빙그레 웃으며 “어르신께서 기뻐하시겠군요.” 하며 안에 잠시 들어갔다가 나왔다.

“입실을 허가하셨습니다.”

방 안으로 들어가니…….

‘으윽!’

무슨 너구리 굴인가! 담배 연기가 안개처럼 자욱했다. 나는 당황해서 우뚝 서 있었고, 할아버지는 주변인들에게 벌컥 성을 냈다.

“환기를 시키라니까!”

“늙은 몸에 찬 바람이 얼마나 안 좋은지 모르나.”

“몸에 안 좋기로 담배보다 나쁜 게 있어?! 내 손녀 건강이 상하면 다 삭은 목을 베어 버릴 테다.”

“하여간 자네 성질은 어째 다 늙어서도 변하지를 않는군.”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끌끌 웃었다. 하인들이 환기를 시키자 그제야 내부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와!’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우아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다.

‘배우 같은걸.’

주름이 짙고, 흰머리가 성성하지만 고상한 데다 기이한 위압감까지 느껴졌다.

‘과연 몇십 년간 권력의 정점을 지키던 사람들이네.’

마릴린은 이들을 백사자회라고 불렀는데, 정말이지 이름과 꼭 어울리는 모임이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할머니.”

나는 덥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노인들은 눈이 동그래져서 “뭐라고?” 하며 물었다.

“네?”

서로를 쳐다보던 그들이 이내 “으하하!”, “오호호!” 하며 웃기 시작해서 난 의아해졌다.

“할머니라니. 처음 듣는 말이네요. 내 손주들도 ‘조모님’이라 격식 차려 부르는데 말이지요.”

“누가 아니래. 나도 그렇네.”

“귀엽군, 귀여워.”

“나베리우스가 푹 빠진 이유를 알 것도 같군.”

나는 실수했나, 하는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보았다. 할아버지는 헤벌쭉 웃으며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이리 와라.”

나는 우물쭈물 할아버지의 곁에 앉았다.

“식사는 했나?”

“호떡을 먹고 왔어요.”

“호떡? 흠, 몸에서 기름 냄새가 나는군.”

“네, 기름에 구운 빵 같은 거예요.”

그러자 노인들이 “요새 애들은 재밌는 것을 먹네. 기름에 구운 빵이라니.” 하며 웃었다.

“드셔보시겠어요?”

“좋지. 젊은 애들은 뭘 먹는지 궁금한데.”

“주책이군. 다 늙어서 젊은 애들 하는 건 해 보고 싶은가 보지?”

“칼리안, 이 사람 밉살맞은 건 죽어서야 끝나겠어.”

노인들은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카드를 돌리기 시작했다. 나는 칼립스와 마릴린에게 마차에 있는 호떡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그러고서 할아버지의 옆에서 카드를 구경했다.

‘응?’

그런데 이상하다. 칼리안이라고 불린 할아버지가…….

‘반칙 쓰네!’

눈 깜짝할 새에 손목에 숨겨 둔 카드를 본인의 카드 패에 넣으며 안경을 슥 올렸다.

“오늘은 로자리오가 운이 나쁘군. 얼마나 잃었지?”

“이백만 피니쯤.”

‘이, 이, 이백만?!’

로자리오 할머니는 흐으음, 신음하며 곱게 땋아 올린 머리를 매만졌다.

‘이건 도박이 아닐까.’

고민하고 있을 때, 로자리오 할머니가 자신의 카드를 내려놓으며 손을 올렸다.

“내가 졌어. 서부 항만은 내 쪽에서 맡지.”

그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백만 피니나 들 생각을 하니 속이 쓰린걸. 거기, 단 과자를 가져와라.”

때마침 칼립스가 내 호떡을 가지고 들어왔다.

“호떡도 단데 드셔 보시겠어요?”

“그럴까.”

호떡이 하나씩 돌아가고, 노인들은 별말 없이 받아 입에 물었다.

“어머머!”

“오오!”

호떡은 적절하게 식어서 저택의 사람들처럼 입안을 데지 않고 바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너무 달지 않을까 싶었는데 잘 드시는걸.’

생각해 보니 미각이 다소 둔해진 연세라 그리 달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마냥 단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군.”

“그렇네요. 견과류가 약간 짭짜름하지 않나요?”

“쌀쌀한 날씨에 딱이야.”

호떡 안의 설탕소만 쭙쭙 빨아먹는 노인도 있었다.

“이 사람이. 젊은이 앞에서 노인네 망신은 다 시키는군.”

“잼이 맛있어.”

치아가 없는 노인이 호떡을 든 채 손을 가느다랗게 떨었다.

“빵 자체도 상당히 부드럽습니다. 이가 약한 노인네들에게 잘 먹히는 간식이군요.”

평가가 좋아서 나는 흐뭇한 기분이었다. 할아버지도 몹시 잘 드셨다. 설탕소가 손에 다 묻을 정도로. 나는 손수건에 물을 묻혀서 할아버지의 손가락과 소가 떨어진 소매를 닦았다.

“칼립스, 나이프를.”

“예, 아가씨.”

나는 호떡을 조그맣게 잘라서 포크로 집은 후, 그것을 할아버지의 손에 들려주었다.

“마음에 드세요?”

“흠.”

이제는 안다. 할아버지가 짧게 침음을 흘릴 땐 긍정적인 답변이라는 걸.

“저택에 반죽이 남았으니까 내일 또 해 드릴게요.”

“그래?”

“네.”

노인들은 내가 하나씩 돌린 호떡을 깡그리 먹은 후에 다시 카드를 집었다. 게임에서 빠진 로자리오 할머니가 “아가, 먹어 보련?” 하며 땅콩 한 줌을 건넸다. 나는 땅콩을 오독오독 씹으며 게임을 관전했다. 우리 할아버지 미간에 주름이 짙게 잡혔다.

‘아, 풀하우스다!’

돌아가는 상황을 볼 때 포카드(같은 숫자 네 장의 카드가 모인 것)만 아니면 할아버지의 승리였다. 판돈이 정말로 기함할 정도의 숫자라 할아버지가 이기길 바랐다. 그런데.

‘응?’

칼리안 할아버지가 하품을 하는 척 손등으로 입가를 누르더니 순식간에 카드를 바꿔치기했다.

“아아앗―!”

내가 버럭 소리치자 노인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뭐야?”

나는 칼리안 할아버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카드, 또 바꿔치―!”

그러던 찰나 칼리안 할아버지가 급히 “쉬!” 하며 검지로 입을 꾹 눌렀다. 우리 할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게…… 으으음…….”

노인정에서 고스톱 때문에 반백 년 지기가 절교하는 것을 숱하게 봐 왔다. 우리 할아버지 성격이라면 칼리안 할아버지를 그냥 둘 리 없다.

‘어쩌지, 어쩌지.’

나는 고민하다가 우리 할아버지의 귓가에 손을 모아 속삭였다.

“이번 판은 포기하세요.”

“내 카드는 괜찮은 편이야.”

나는 눈썹을 착 늘어뜨리고 “할아버지…….” 하며 웅얼거렸다. 할아버지는 잠시 고민하더니 “쳇.” 혀를 차고 카드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칼리안 할아버지가 껄껄 웃으며 카드 패를 공개했다.

“자네 운이 좋군. 나는 포카드였네.”

‘거짓말쟁이~!’

내가 힐난하는 눈으로 쳐다보니 그는 히죽 웃으며 내가 든 그릇에서 땅콩을 빼앗아 먹었다.

“늙은이들만 있는 자리니 자네 손녀가 심심하겠어.”

칼리안 할아버지의 말에 우리 할아버지가 나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갈 테냐?”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아니요.” 말했다. 사실 내 또래보다는 노인들이 더 편했다. 선생님과 살기 시작했을 때의 나는 초등학생이었는데, 선생님은 저녁까지 식당 일을 하느라 매일 집에 혼자 있었다. 그래서 옆집 할머니를 따라 노인정에 자주 갔다.

“아가도 게임을 함께하는 게 어떠냐.”

로자리오 할머니가 상냥하게 웃으며 물었다.

“저는 이렇게 큰 판돈을 못 거는데요…….”

“아가는 돈을 걸지 않으면 되지.”

“하지만 그건 재미없잖아요. 그리고 이런 포커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본격적인 도박 같아서 하기 싫다.

‘어릴 때 윤세나의 아빠를 따라갔던 도박장에서 포커를 쳤었지.’

“요새 젊은 애들은 무얼 하고 놀려나.”

로자리오 할머니가 한 손을 뺨에 대며 중얼거리자 다른 노인들이 대답했다.

“모르지. 내 손주들은 나만 보면 도망치기 바쁘니.”

“내 손녀도 나를 어려워해서.”

“자식들도 아비를 멀리하는데 손주들이야 오죽할까.”

나는 클럽의 노인들이 안쓰러워졌다.

‘그렇구나. 영화에서도 권력가 집안엔 여러 가지 가정불화가 많다고 했어.’

노인정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그래도 명절에 자식들 오기를 기다릴 수는 있었는데. 나라도 잘해 드려야겠다.

나는 “저기, 저기!” 하며 손을 번쩍 들었다.

“바니바니 당근당근 같은 거요!”

사실은 나도 젊은 애들이랑 놀아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전에 티브이에서 본 유명한 게임을 말했다.

“바…… 뭐?”

“그러니까 지목받은 사람이 바니바니하면 양옆에 사람은 당근당근하고 외치는 건데요.”

게임을 설명하자 노인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로자리오 할머니는 곤란한 표정으로 “요즘 애들은…… 이해할 수 없어.”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칼리안 할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패배하는 자는 어떻게 되지?”

티브이에서는 벌주를 마셨던 것 같은데 노인들에게 폭탄주 같은 것을 마시라고 할 수는 없었다.

“으음, 꿀밤?”

“꿀밤?”

“맞는 거예요, 이렇게.”

내가 내 이마에 시범을 보이자 노인들의 눈이 번뜩 빛났다.

“이거 잘하면 잘난 나베리우스의 낯짝에 한 방 먹일 수 있겠어.”

“하지만 남사스러워서…….”

“젊은 애들은 한다잖아.”

“요새 애들은 참…….”

낯부끄러운 사람은 빠지기로 하고 게임이 시작되었다.

“바니바니 바니바니!”

“당근! 당근!”

애들이 하는 게임이 어떤 건지 알려만 주려고 했는데…….

“바니―!”

“네놈은 당근이지!”

“나를 지목했잖아!”

“눈도 고장이 난 게야?!”

“오호호―!”

다들 즐거워하니 됐지, 뭐.

한 시간가량 게임을 한 노인들은 발그레 달아오른 뺨에 부채질을 했다.

“꽤 운동이 되는군.”

“공은 운동을 좀 하셔야지요. 활동이라곤 뒷짐을 지고 몇 걸음 걷는 것뿐이니 골골대는 겁니다.”

“덥지 않나? 이봐, 창문을 좀 열게.”

“담배 태울 시간도 없이 했구려.”

노인들이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칼리안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 이마가 새빨개요.”

“빌어먹을 놈들……. 무슨 흉계를 부린 게 틀림없어. 아니면 왜 나만 당하느냔 말이야!”

나는 얼음주머니로 칼리안 할아버지의 이마를 문질렀다.

“할아버지처럼 속임수는 못 쓰셨을걸요?”

그때 우리 할아버지가 얼음주머니를 휙 빼앗아 던지며 나를 끌어당겼다.

“남의 손주에게 그리 붙어 있지 마라.”

“더럽고 치사해서, 원. 누가 보면 닳는 줄 알겠어.”

“닳진 않아도 노인네 쿰쿰한 냄새가 배지.”

“저도 늙어 꼬부라진 놈이……. 흥.”

난 킥킥 웃다가 시계를 보고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 봐야겠어요. 초대장을 돌리러 가야 하거든요.”

“초대장? 네 데뷔탕트 말이냐?”

칼리안 할아버지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가 직접 초대장을 돌린다고?”

로자리오 할머니는 “그렇지.” 하며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다.

“황후가 사교계를 장악하고 있으니 모두 카렌듈라의 새로운 영애에게 가겠구나.”

“아무래도요.”

“파티를 미루는 건 어떠니?”

그러자 칼리안 할아버지가 얼음주머니를 쥐며 “그건 안 되지.” 하고 중얼거렸다.

“아기가 지레 겁먹고 도망치는 줄 알 것 아니냐. 면 상하는 건 피차 같겠군.”

로자리오 할머니가 “흐음.” 침음했다.

“이리 착한 아가의 면이 상하면 안 되지. 내게도 한 장 다오.”

“괜찮으세요?”

내가 반색하며 묻자 로자리오 할머니는 후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칼리안 할아버지도, 막심 할아버지도, 안젤라 할머니도, 모두 초대장을 달라고 했다.

“칼리안 할아버지도 오시게요?”

“왜? 싫으냐?”

“아니요! 좋아서요!”

칼리안 할아버지는 헤헤 웃는 날 보고 픽 실소를 흘렸다.

“거 참, 귀엽단 말이야.”

“할아버지도 귀여우세요.”

“뭐라?”

칼리안 할아버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멍하니 나를 보다가 이내 껄껄 소리 높여 웃었다.

“으하하! 하하!”

“……?”

“나베리우스 이놈은 무슨 복에 너같이 깜찍한 것을 두었을꼬. 그래, 초대장을 다오. 내 아기의 데뷔 선물을 가져가마.”

“오시는 것도 큰 선물이에요.”

“아니지, 아니야. 내 좋은 선물 하나 가져가야지.”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를 힐끔 쳐다보자 그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 선물을 한사코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죽어서 돈을 싸 짊어지고 갈 것도 아니니 받아 두어라.”

“……네, 감사합니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야.

할아버지 친구들은 전부 유쾌했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에 기뻤다. 그리고 내게도 오늘, 다소 나이 차이가 나지만 좋은 친구들이 생겼다.

* * *

햇살 좋은 오후의 황후궁. 샤를리나는 카렌듈라 후작, 그리고 황후와 차를 마시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가족이 모여 한갓진 시간을 보내는 건 참으로 기분이 좋네요, 언니.”

황후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되지도 않는 호칭 거둬. 본궁이 미천한 너와―!”

“황후 폐하.”

그녀를 부르는 후작의 목소리가 꾸짖는 듯 낮았다. 황후가 입안의 여린 살을 짓씹으며 찻잔을 꽉 그러잡았다.

‘하필이면.’

미천한 계집이 자신과 같은 핏줄 행세하는 것도 기막힌데 하필 성녀에, 하필 제 아들보다 어리다. 온기가 뚝뚝 흐르는 샤를리나의 얼굴은 볼 때마다 불쾌했다.

‘로웨나를 마주할 때보다 더 께름칙해.’

샤를리나가 황후의 찻잔에 각설탕을 넣어 주며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언니, 이제 한 가족이니 저는 언니를 위해 헌신할 생각이랍니다.”

“혓바닥은 융단보다 부드러운데, 눈빛은 뱀보다 표독하구나.”

“그런…… 서운한 말씀 마셔요, 언니.”

“그 언니 소리 좀 그만하지 못하겠니!”

“황후!”

황후가 치맛자락을 꾹 말아쥐었다. 카렌듈라 후작은 황후가 뭘 하든, 어디에 있든 샤를리나를 그 옆에 붙여 두었다. 황후가 화를 참듯 미간을 검지로 꾹 눌렀다.

“너는 나가 있어라.”

후작을 힐끔 쳐다본 샤를리나는 황후를 향해 묵례한 후 방을 나섰다. 황후가 후작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아버님이야말로 자중하십시오!”

“뭐라?”

“자식뻘 되는 이복동생이 기꺼울 리 있습니―”

“딸아.”

“말씀하십시오.”

“추하구나.”

황후가 흠칫, 찻잔을 말아 쥐었다. 떨리는 눈으로 부친을 쳐다보았으나 그의 표정은 아주 고요할 뿐이었다.

“궁의 전권은 로웨나 황비에게 빼앗기고, 황제의 총애는 가브리엘라 황비에게 빼앗겼지 않으냐.”

“…….”

“권력이라도 움켜쥐지 않는 한 카렌듈라와 서부는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제게는 미카엘이 있어요! 그 애가 있는 한―!”

“국모라는 이름만은 유지할 수 있겠지. 허울뿐이겠으나.”

“미카엘과 세니아나 프렌시프를 결혼시키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미련한 것. 하면 동부와 프렌시프도 함께 크겠지.”

“하지만……!”

“세니아나 프렌시프가 중앙에 등장한 후 동부는 커질 대로 커진 아귀가 되었어.”

“…….”

“네가 그 계집애를 손에 넣는 것이 아니라 그 계집애가 너를 집어삼킨다는 것을 어찌 몰라.”

황후가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처럼 고개를 돌렸고, 카렌듈라 후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순순히 샤를리나의 기반을 마련해 줘라. 하면 내가 너를 황태후의 자리에 올려 줄 터이니.”

“아버님의 딸은 저를 집어삼키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합니까?”

황후의 눈빛에 서리가 서렸다. 후작은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읊조렸다.

“그건 네가 제국을 치마폭에 감싼 후의 문제지 않으냐.”

“…….”

“샤를리나가 세니아나 프렌시프를 누른다면 우리는 이 제국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어.”

황후가 입술을 꾹 깨물며 표정을 굳히자 후작이 그녀의 뺨을 툭, 툭 두드렸다.

“귀부인들을 단속해라. 한 명도 세니아나 프렌시프에게 빼앗겨서는 안 될 것이다.”

인장을 빼앗기고, 총애에서 멀어진 상황에 부친까지 등을 돌리면 자신과 아들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폐가 비틀릴 것처럼 자존심이 상했지만, 황후는 억지로 입술을 열었다.

“……예, 아버님.”

후작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방을 나섰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샤를리나가 그를 향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로 인해 언니가 마음이 상하셨을까 봐 염려됩니다.”

“마음이 상해 봐야 제깟 것이 어쩌겠느냐.”

여상하게 대답한 그가 샤를리나를 쳐다보았다.

“손에 든 건 무엇이냐?”

“황제 폐하께 드릴 커스터드 파이랍니다.”

그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황제의 혼을 쏙 빼놔. 네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도록.”

“황제 폐하께선 모후인 소피아 대부인에게 정이 깊으시다고 들었어요.”

“그래.”

“퇴궁 전에 대부인을 뵈어 친분을 쌓는 것이 어떨까요?”

“영특하구나.”

그가 껄껄 소리 내 웃자 샤를리나는 눈꼬리를 사르르 접었다.

“한데, 아버님.”

“그래.”

“언니는, 뭐랄까, 조금…… 남들 보기에 답답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후작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맹랑한 것. 벌써부터 그라니아(황후)와의 싸움을 준비하는군.’

세니아나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으로 가득한 것이 흡족했다.

“그래, 이 제국의 앞날을 맡기기엔 부족하지.”

“어서 성장해 아버님을 기쁘게 해 드릴게요.”

그녀가 카렌듈라 후작의 팔짱을 끼며 애교 있게 웃었다.

“네가 성장한다면 세니아나 프렌시프, 그깟 계집애가 무슨 수로 너를 이길까.”

“과찬이세요.”

“가자, 황제가 기다릴 터이니.”

황후궁 복도를 걷는 카렌듈라 후작과 샤를리나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 * *

시간이 흘러 데뷔탕트 당일이 되었다. 나는 무도회장 휴게실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드레스를 이리저리 살폈다.

“나 어때? 괜찮아?”

“그럼요. 우리 아가씨는 항상 아름다우시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아름다우세요.”

마릴린이 흥분한 표정으로 소리쳐서 난 조금 민망해졌다. 내가 볼을 긁적이니 옷매무새를 점검해 주던 시트론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긴장되세요?”

“처음 여는 파티인데 서른 명이나 온다니까…….”

그러자 마릴린이 불만 어린 얼굴로 투덜거렸다.

“샤를리나 카렌듈라의 파티에 간 사람들은 모두 후회할 거예요. 우리 파티가 더 재미있을걸요! 아가씨가 요리 준비를 직접 지휘하셨잖아요.”

결국 내 데뷔탕트에 오기로 한 사람은 서른여 명이 전부였다. 그에 반해 샤를리나에겐 내 세 배가 넘는 사람이 몰렸다. 초청객이 하도 많아서 1, 2부를 나눠서 하는 데다가, 본래 예정했던 회장을 내 데뷔탕트 홀과 비슷한 크기의 홀로 변경했다고 했다.

“이제 들어가셔야지요?”

“으응.”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켜고서 홀 안으로 들어갔다. 가족들을 비롯한 초청객들이 벌써부터 회장을 채우고 있었다.

“스위트피! 조이! 와 줬구나!”

나는 반가움에 그들에게로 얼른 다가갔다.

“세상에, 이게 누구야. 요정이 따로 없네.”

“오오, 오늘은 봐 줄 만한걸.”

스위트피와 조이가 내 손을 각각 잡고 호들갑을 떨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초청객 수가 얼마 안 된대서 우리라도 계속 홀을 채우고 있으려고 했지. 그런데―”

조이가 질린다는 얼굴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초청객들이 다 무시무시하잖아. 금좌가 넷이나 있다고!”

아빠와 할아버지, 그리고 샤르파크 후작과 오뵈르 백작이었다. 오뵈르 백작과는 백작 부인의 임신으로 인연을 맺었는데 본래 카렌듈라 후작과 더 친했지만, 고맙게도 내 파티에 참석해 줬다.

“좀 한산한 편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질적으로 훌륭하잖아?”

조이의 말에 스위트피가 울컥 인상을 썼다.

“질이 뭐야. 그리고 한산하긴 뭐가 한산해. 회장이 워낙에 넓어서 그런 거지. 역대 황후 폐하들이 모두 이 홀에서 데뷔를 했을 만큼 큰 홀이잖아.”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다른 초청객들도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나와 친분이 있는 게 아니라 프렌시프와의 인맥을 위해 참석한 이들이 쯧쯧, 혀를 찰 만큼.

“차라리 카렌듈라 쪽에 가는 편이…….”

“입 조심하세요. 어르신과 각하께서 들으시면―”

“그래도 초청객 수로만 따지면 지방 영애, 영식의 데뷔보다 못한…….”

나는 민망하게 웃었고, 스위트피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출입구 쪽에서 경비병이 소리쳤다.

“칼리안 앙투안 대공, 막심 라그렝 백작, 안젤라 K 블란제 공 드십니다!”

할아버지의 친구들이다! 나는 활짝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 할머니!”

“초청해 줘서 영광이구나.”

안젤라 할머니가 오호호,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먼 길 와 주셔서 영광이에요.”

내가 얼른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히자 노인들은 귀엽다는 듯 나를 보았다.

“할머니, 좋은 냄새가 나요.”

내가 안젤라 할머니의 품에 폭 안기자 “우리 아가는 사람을 참 기분 좋게 해.” 하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런데―

‘으응?’

왜 사람들이 이렇게 술렁거릴까.

“마,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저분들이―!”

“황궁 행사에도 절대로 얼굴을 비추지 않던 전 금좌 11석이 왜 여기 모인 거야?!”

사람들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 금좌 11석?’

한적한 곳에서 샴페인을 마시며 얘기하던 샤르파크 후작과 오뵈르 백작까지 펄쩍 뛰었다. 두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와 허리를 굽혔다.

“노, 노공(老公)들을 뵙습니다.”

“어찌 연락도 주시지 않고 귀한 발걸음하셨습니까!”

금좌인 두 사람이 이렇게 절절매는 건 처음 본다. 황제 앞에서도 이렇게 당황하진 않은 것 같은데.

막심 할아버지가 “샤르파크의 꼬맹이로군.” 하며 허허 웃었다.

“꼬맹…… 노공, 저도 이제 마흔 줄입니다.”

“선대에게 궁둥짝 맞는 것도 보았다, 이놈.”

“노, 노공!”

샤르파크 후작이 다급히 주변을 돌아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할아버지의 친구이니 꽤 높은 귀족이리라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생각보다 더 대단한 분들이었다.

‘칼리안 할아버지는 대공이시고…….’

대공, 하니까 머릿속에 번뜩 이전 세니아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플리뱅스 공국의 왕. 대륙 전쟁을 기점으로 제국에 통합되었으나, 대공의 호칭과 예우는 그대로 따른다고 했다.

처음엔 그냥 도박 사기꾼인 줄로만 알았는데. 역시 사람은 겉으로 보기만 해선 모르는 거구나. 깨달음에 고개를 주억거리다 불현듯 ‘선물을 주겠다’던 말이 떠올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대공 전하의 선물이라니. 체면이 있으니까 호화로운 것일 텐데. 역시 거절할 걸 그랬나 봐! 나는 불안한 얼굴로 칼리안 할아버지의 소매를 잡았다.

“저기, 할아버지, 선물은…….”

괜찮아요, 하는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칼리안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내 볼을 손바닥으로 북북 쓰다듬었다. 안젤라 할머니와 막심 할아버지가 따라 웃으며 “선물을 조르는 손녀는 귀엽지.”라든가 “이리 귀여운 어리광을 볼 줄 알았더라면 나도 준비해 왔을 텐데.” 하고 말했다.

“그게 아니라요. 저는 너무 과한 선물은 받고 싶지 않아요. 오신 것만으로도 기쁜걸요.”

“로자리오가 옳았군. 상점 지구의 일부를 네게 줄까 하였는데, 부담스러워할 거라더구나.”

상점 지구의 일부라니……. 지금 있는 건물에서 들어오는 세도 무서워서 잘 쓰지 못한다. 막심 할아버지와 안젤라 할머니가 선물이 무엇이냐 묻자 칼리안 할아버지는 씩 웃었다.

“이제 곧 올 때가 되었으니 직접 보시게.”

“기대는 된다만, 나만 하겠나. 나는 이텁시온이 직접 세공한 30캐럿 다이아 목걸이를…….”

“나도 말이지, 꽤 재미난 것을 선물로 가져왔어. 세니아나, 이 두 노인네보다 내 것이 마음에 들 거란다.”

그러던 찰나, 경비병이 목소리를 높였다.

“헬리오스 로젠카로튼 님 드십니다!”

순간, 파티장이 터져 나올 듯 거세게 술렁였다.

* * *

“말도 안 돼!”

통신구에 떠오른 문자를 본 귀부인이 기겁하여 소리쳤다.

“어머, 부인. 좋은 날 교양 없이 무슨 소란이에요.”

다른 귀부인이 공작 깃을 뽑아 만든 부채를 나붓나붓 흔들며 핀잔을 주었다.

“프렌시프 영애의 데뷔탕트에 어떤 분들이 가셨는지 아십니까?”

“뭐, 프렌시프 휘하 귀족들이겠지요. 뻔한 것 아니겠어요? 샤르파크라든지.”

부채를 흔드는 귀부인이 “금좌가 오는 것 때문에 이렇게 소란을 벌이는 거라면 부인의 꼴만 우습답니다.”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곳에도 금좌는 넘치지요. 무엇보다 미카엘 황자께서 오시는 자리라고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이 나라에 4황자(미카엘)보다 나은 남편감이 어디 있답니까. 잘만 하면 우리 딸이 황후의 금관을 쓸지도요.”

우후후, 웃는 소리에 주변에 있던 귀부인들이 “야망도 크셔라.” 하며 키득거렸다.

“그게 아니라―!”

통신구를 쥔 귀부인이 다른 이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자 소란에 핀잔을 주던 자들이 입을 모아 비명을 내질렀다.

“뭐, 뭐라고! 노공들이!”

동, 서, 남, 북부의 기둥. 황제보다 만나기 어렵다는 이들이 어째서 황후가 주관한 이복동생의 데뷔탕트가 아니라 세니아나 프렌시프에게 갔단 말인가. 그들은 나베리우스와 카렌듈라 후작의 정확히 중앙에 서 있었다. 노공들과 달리 일선에서 물러나지 않은 두 남자, 양극의 어느 쪽으로도 가까이 가지 않는 자들이었다.

통신구를 쥔 귀부인이 서둘러 이어 말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미소를 띤 채로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던 샤를리나의 시선이 소란스러운 무리에게 향했다.

“상드르 백작 부인, 팔리에르 백작 부인.”

샤를리나는 귀부인을 부르며 사뿐사뿐 다가갔다.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신지요.”

다정하게 웃으며 “아직 배울 점이 많으니 딸처럼 편달해 주시면 기쁠 거예요.” 하고 말하자 귀부인들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부인, 뭐하러 그런 이야기를 전하십니까. 속이나 상하실 텐데.”

때마침 황후와 미카엘이 회장으로 들어왔다. 미카엘은 평소처럼 미소를 두르고 있었으나, 어쩐지 오늘은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였다.

“4황자께서 끌려 나온 모양인걸요.”

“사실 불편한 자리지 않습니까. 저보다 어린 이모라니…….”

“그렇지요.”

“차라리 프렌시프 영애의 파티에 가는 쪽이 낫겠어요. 괜히 말 붙이려다 눈 밖에 나지 않으면 다행이겠네요.”

샤를리나의 표정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카렌듈라 후작은 회장의 미묘한 분위기를 살피다가 샤를리나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

묻기도 전에 다른 무리에게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황태자가 프렌시프 영애의 데뷔탕트에 갔다고?!”

뭐라고?

카렌듈라 후작과 샤를리나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가고 싶지 않은 자리에 억지로 나오고도, 주인공이 되지 못한 황후 또한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그 사이에서 미카엘만 묘한 표정으로 창밖에 보이는 세니아나의 무도회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태자라.’

꽤나 깜찍한 짓을 벌였군. 어디로 튈지 모르니 매번 흥미를 일으킨다.

통신구를 통해 소식을 접한 이들이 술렁였다.

‘미카엘 황자에게 딸을 붙이긴 글렀고…… 차라리 황태자 쪽이.’

‘황후의 위세가 기울었으니 어쩌면 황태자가 옳은 선택일지도.’

‘노공까지 있다고 하니…….’

귀족들이 딸을 데리고 하나둘 샤를리나에게 향했다.

“어쩌지요, 영애. 급한 약속을 잊고 있던지라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사실은 저도 몸이 좋지 않아서…….”

“친정의 아버님께서 황도에 올라오셨다지 뭐예요.”

샤를리나가 치맛자락을 꾹 말아 쥐었다. 절로 얼굴이 어두워진다. 카렌듈라 후작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는 샤를리나를 향해 미간을 좁혔다.

“……리나.”

“…….”

“샤를리나.”

“예, 아버님…….”

그는 쯧, 혀를 차며 바짝 힘이 들어간 딸의 손을 쳐다보았다.

“영리해서 쓸 만할 줄 알았더니, 멍청하기 짝이 없군.”

힐난하는 듯한 어투에 샤를리나가 홱 고개를 들었다.

‘안 돼!’

애써 쌓은 신뢰가 무너진다. 그녀는 얼른 후작의 옷깃을 잡았다.

“저는 그런 게 아니라, 아버님!”

후작이 매정히 샤를리나의 손을 쳐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는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렸고, 황후는 입가에 조소를 걸치며 제 아비에게 다가갔다.

“이번엔 오판을 내리신 모양입니다.”

“그라니아!”

“제가 뭐라 했습니까. 저 애가 세니아나 프렌시프를 이기긴 힘들 거라 하였지요.”

후작이 인상을 찌푸리자 황후는 쿡쿡, 웃으며 샴페인을 내려놓았다.

“이번엔 아버님보다 제 판단이 옳았던 모양입니다. 미카엘, 얼굴을 비추었으니 이제 환궁하자꾸나.”

미카엘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손마디가 새하얘지도록 치맛자락을 꾹 쥔 샤를리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예, 모후.”

목적이던 황후와 미카엘, 카렌듈라 후작까지 떠나자 초청객들은 꽁지에 불이 붙은 것처럼 서둘러 문을 빠져나갔다. 미어질 것 같던 파티장이 금세 한산해졌다.

* * *

“가서 음식을 더 가져와라.”

“초청인 수에만 넉넉하게 맞춰 준비한지라……!”

“요리사들을 불러. 저택에서라도 재료를 가져와!”

프렌시프의 사용인들은 환희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종종걸음으로 회장을 들락거렸다. 노공들과 황태자의 등장 후, 귀족들은 돌아가는 길에 얼굴을 비추러 왔다며 회장에 모였다. 마릴린은 술이 잔뜩 든 카트를 밀며 연신 싱글싱글거렸다. 그러자 시트론이 픽 웃으며 물었다.

“그리 좋으세요?”

“샤를리나 카렌듈라의 데뷔가 완전히 망했잖아요! 시트론 님은 기쁘지 않으세요?”

“뭐…….”

시트론이 의뭉스럽게 말끝을 흐리자 마릴린은 양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킬킬거렸다.

“1부에 참석한 사람의 대다수가 이쪽으로 왔대요. 2부는 결국 취소했나 봐요.”

나는 그녀들과 함께 걸으며 정신없이 회장에 있는 요리사의 수를 헤아렸다.

“큰일 났다!”

우뚝 멈춰 서서 소리치자 마릴린과 시트론이 날 쳐다봤다.

“왜요, 아가씨?”

“재료는 포털로 가져온다고 쳐도 요리사가 부족해. 이 많은 수의 손님을 어떻게 대접한담…….”

“이익을 좇아서 이리저리 붙는 하이에나들인걸요. 초대에 응하겠다는 말도 없이 왔으니 비스킷 하나도 과하지요.”

마릴린이 흥! 콧방귀를 뀌며 말했고, 시트론은 내 손에서 요리사 명단을 가져갔다.

“그보다 회장으로 돌아가셔요. 주인공이 자리를 비우시면 안 되지요.”

“그렇기는 한데…….”

사전에 약속한 손님들은 아니지만 축하하러 온 이들이었다. 제대로 응접하지 못하면 두고두고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세니아나 프렌시프의 파티에는 갔으나, 역시 샤를리나 카렌듈라 쪽이 훌륭하더라― 라는 말이 나오면 곤란하다. 그때, 스위트피와 조이가 내게 달려왔다.

“어떻게 음식은 해결할 수 있겠어?”

“아무래도…….”

“남는 조리복 있지. 우리가 도울게.”

“괜찮아?”

“물론! 서서 지겨운 대화나 나누느니 요리하는 쪽이 훨씬 즐겁지.”

조이도 “친구 좋다는 게 뭐야.” 하며 팔을 걷어붙였다.

‘든든해!’

나는 활짝 웃다가 다시 “아.” 하고 신음했다.

“그렇지만 미리 주방을 예약하지 않아서 우리가 쓸 수 있는 건 제3 주방뿐이야.”

지금이라도 쓰겠다고 했지만, 이전에 예약한 사람이 있어서 그들의 파티로 조리 기구가 모두 나갔다고 했다. 조이가 “홀 안에 오픈 키친이라도 내 올까?” 하고 물었다. 그건 요리를 데우거나 즉석에서 고기를 굽기 위해 마련된 조리장이었다.

“아……!”

순간 머릿속의 전구가 번뜩였다.

좋은 생각이 났어!

* * *

황태자는 무료한 표정으로 샴페인 잔을 흔들었다. 대부인 칼리안의 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석한 자리라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성의 없이 제 쪽에 몰려드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잔을 내려놓았다.

‘이만하면 얼굴마담은 한 듯하고.’

돌아갈까.

칼리안에게 인사만 한 뒤 떠나려는데 드르륵, 하는 바퀴 소리와 함께 카트를 미는 세니아나가 등장했다.

‘사교 데뷔를 하는 영애가 조리복을 입었어?’

세니아나 프렌시프는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교 데뷔를 축하하러 와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니까. 어째서. 왜 사교 데뷔를 하는 영애가 조리복을 입고 있는가. 회장에 가득 들어찬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세니아나는 술렁이는 분위기에도 차분히 말을 이었고, 내내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미리 긍정적인 답장을 주신 분들도, 그렇지 않은 분들도 이리 뵙게 되어서 정말로 기뻐요.”

헬리오스의 눈에 흥미가 담겼다.

“사교 데뷔는 저를 소개하는 자리잖아요?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드리는 것이 더 분명하게 전달될 듯하여 이렇게 조리복을 입었답니다.”

황태자 헬리오스는 문 쪽으로 향하던 걸음을 다시 바로 하고 세니아나를 주시했다.

“저는 세니아나 프렌시프입니다. 앞으로 저와 만날 일이 많으실 거예요. 이제 조부님과 아버님의 안전한 울타리에서 나와 세상을 알 나이이니, 여러분께서 많이 가르쳐 주세요.”

똘똘한 말에 나이 든 귀족들이 딸, 손주 보듯 허허 웃었다.

“이런 소개는 처음이네요.”

“어른들 앞에 두고 사교 데뷔하는 아이들이 다 큰 체하는 건 징그럽잖아요. 훨씬 나은걸요.”

노공들이 “귀엽기도 하지.” 하며 껄껄 웃었다. 회장의 분위기가 온화해지자 세니아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평생 식칼을 잡고 살자고 결심했답니다. 오늘 제 요리를 맛보고 괜찮으시다면 응원을 부탁드려요.”

헬리오스는 웃음을 삼켰다. 얼마나 순진하면 이런 자리에서 두고두고 곱씹힐 이야기를 하는 걸까 싶었는데 말재주는 있었다. 답장을 주지 않고 참석한 이들을 언급해 계획이 어그러진 점을 짚어 두고 조리복을 입었으니 다들 상황을 파악했다.

‘음식이 부족할 만도 하지.’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뭐라도 하려는 게 기특한걸.’

무엇보다 오뵈르 백작 부인의 임신으로 세니아나에겐 특별한 힘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행운을 부른다는 성녀의 요리를 맛본다면 일부러 시간을 낼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 * *

회장을 둘러본 나는 칼자루를 꼭 말아 쥐었다.

‘다행히 싫은 기색은 아니야.’

천박한 데뷔탕트로 사교계의 물을 흐려 놨다고 할까 봐 걱정되었는데.

“무슨 요리를 할 건가요?”

“일전에 황자 검술 시합에서처럼 술을 빚는 걸까……?”

이런 질문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여러분이 도와주셔야지 좋은 요리가 나올 수 있어요.”

절호의 타이밍에 마릴린과 시트론이 트레이를 끌고 들어왔다. 물에 적신 수건을 하나씩 건네자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위트피와 조이도 커다란 볼을 들고 나타났다.

“반죽은 이 정도면 돼?”

“충분히 휴지되지 않았는데 괜찮을까.”

나는 반죽을 꾹 눌러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씬피자를 만들 거니까!

‘재료만 준비되어 있으면 굽기만 해도 되지. 간단해.’

거기다 오븐만 크면 대량으로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난 판에 반죽을 잘 펼치고 그 위에 토마토소스를 듬뿍 발랐다. 이건 쟝뤼크가 만들어 둔 특제 소스인데 애걸을 해서 받아 왔다. 그리고 조리대 앞에 바짝 선 꼬마 아이를 향해 물었다.

“소공자님이 좋아하는 재료는 뭘까요?”

“으으음, 고기. 베이컨 좋아요. 채소는 싫어…….”

웅얼웅얼거리는 말에 꼬마 아이의 손을 붙잡고 있던 귀부인은 “제제, 편식하면 못써!” 하고 볼을 붉혔고 회장에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쓰고 매운걸…….”

“좋아요. 그럼 고기와 옥수수를 듬뿍 올려 줄게요.”

나는 베이컨과 얇게 저민 고기, 옥수수 등을 듬뿍 올리고 그 위에 치즈를 잔뜩 뿌렸다. 스위트피는 판을 미리 예열해 둔 오븐에 넣었고, 난 다시 다른 귀부인에게 물었다.

“마담께선 어떤 것을 좋아하세요?”

“과일을 주로 먹어요. 채식 중이라. 그런데 치즈가 올라가나요? 과일과 치즈는 어울리지 않는데요.”

“잘 어울리는 종류의 과일이 있지요!”

올리브와 피망, 양파를 파바밧 썬 후에 그것들과 함께 파인애플을 올려 하와이안 피자를 만들었다. 다음은 신사.

“단 게 좋지. 졸인 고기를 좋아하거든.”

저민 고기에 설탕과 간장을 넣고 빠르게 볶았다. 치이익―! 고기가 익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팬을 한 손으로 휙휙 돌리자 “어머머!” 하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고기가 대충 익은 것을 확인한 후, 조이에게 팬을 넘겼다. 조이는 마저 고기를 볶았고 나는 다른 재료들을 올렸다.

그리고 다음. 또 다음. 다음, 다음. 몇 판이나 되는 피자를 만들어서 오븐에 넣으니 회장에 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을 반짝였다. 사람들은 피자란 것을 잘 몰랐다. 요리가 발전한 나라에서 왜 피자를 모를까 고민하다가 나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는.’

피자 시초는 기원전이지만, 윤세나의 세계에서 익숙하게 여기는 토마토소스의 피자는 오래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토마토가 쓰인 건 콜럼버스가 발견하고도 2세기 후라고 하니까.’

곧 오븐에서 고소한 냄새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입맛을 다시며 오븐을 힐끔거렸다. 음식이 곳곳에 비치되어 있긴 하지만 역시 분자가 휘발하며 퍼지는 향이 가장 강렬한 법이다.

이십 분이 넘어가자 첫 피자가 나왔다. 고기를 사랑하는 꼬마 공자님의 피자였다. 나는 일부러 조리대에서 피자를 들었다. 기름진 치즈가 주우욱― 늘어나며 옥수수 알이 폭신한 도우에 툭, 툭 떨어졌다.

“우와아―!”

접시에 잘 담아서 주니 눈이 반짝반짝하다. 포크로 치즈를 긁어모아 볼이 빵빵해지도록 도우를 문 꼬마애가 “완전 맛있어!” 하며 폴짝거렸다.

“얘가 왜 이런담. 제제, 교양있게 굴어야지.”

어머니가 타박했지만, 꼬마애는 우걱우걱 피자를 먹고 얼른 접시를 내밀었다.

“엄청 맛있어요! 채소가 없어서 좋아!”

나는 킥킥 웃으며 스위트피에게 피자 판을 넘겼다. 스위트피는 “채소가 들어간 것도 엄청 맛있을 텐데~?” 하며 피자를 주었다 뺏었다 장난을 쳤다.

“줘요, 줘요!”

“다음 것도 먹겠다고 약속하면.”

“약속, 약속!”

꼬마애에게 피자가 하나 더 돌아가고 힐끔힐끔 눈치를 보던 아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도 먹을래요.”

“주세요.”

고기가 잔뜩 든 피자는 스위트피에게 맡겨 두고 하와이안 피자를 꺼냈다. 하와이안 피자를 주문한 귀부인은 눈을 홉뜨며 “어머머, 정말 치즈와 잘 어울리잖아.” 놀라워했다. 다음 피자, 또 다음 피자. 나는 정신 없이 피자를 나눠 줬다.

* * *

헬리오스는 세니아나가 “처음 드시는 분들은 콤비네이션 피자부터 도전해 보세요.” 하고 추천한 줄에 다가가 피자를 받았다.

‘피자라.’

비슷한 음식을 로열 키친에서 내온 적이 있기는 하지만, 묘하게 다르다. 빤히 내려다보다가 포크로 일부를 잘라 입에 넣었다.

‘……!’

황태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그의 표정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하, 입에 안 맞으십니까?”

“아니……. 맛이 좋군. 모두 들어 보시오.”

크게 손이 많이 간 요리는 절대로 아니었다.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았는가. 그런데 제법 균형 잡힌 맛이 나고 굉장히 자극적이었다. 느끼한데도 하나를 끝까지 다 먹고, 아쉬워서 그릇 바닥을 긁을 만큼. 헬리오스가 줄 선 이들을 지그시 보다가 크흠, 헛기침을 하고 맨 앞사람을 물러나게 했다.

“뒤로 가지.”

“아……. 예, 전하.”

당황한 사내가 주춤주춤 물러나고 헬리오스는 새 접시를 조리대에 올려 두었다. 피자를 자르던 세니아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줄 서셔야지요.”

“……뭐라고?”

“줄이요.”

“나는 길라게온의 황태자 헬리오스 로젠카로튼이다.”

“그러니 더더욱 본을 보이셔야 하잖아요?”

움찔한 황태자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접시를 세니아나 쪽으로 밀었다.

“황태자가 두 번이나 시식한다는 건 큰 영광이야.”

“그렇죠!”

“그러니까 어서―”

“두 번이나 줄 서서 드셔 주신다니 정말로 기뻐요.”

황태자가 당황하자 뒤에서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렌시프의 장남 란슬롯이었다.

“이 아이 고집이 쇠심줄입니다, 전하.”

“알긴 하는군!”

“폐하께도 고집을 접지 않아 때로는 다소 당황스럽기도 하죠.”

황제도 물러날 땐 물러나는데 황태자가 어깃장을 놓을 순 없다는 의미였다. 황태자는 혀를 차고 돌아서려다 땡! 오븐이 다 돌아간 소리를 듣고 우뚝 멈추었다.

헬리오스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감자였는데 지금 오븐에서 막 나오고 있는 피자는 그런 감자를 무려 튀겨서! 올린 피자였다. 길라게온에서 감자는 평민들의 음식으로 여겨지는 탓에 황태자의 상엔 올라오지 않았다.

군주의 기본은 ‘욕망하지 말 것’. 그래서 황태자는 재물은 물론 음식까지 원하는 바를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황태자는 번뇌에 휩싸였다.

‘저까짓 것 안 먹으면 그만이지.’

지금 매몰차게 돌아가면 황태자에게 맹랑했던 세니아나는 자연히 사람들의 도마 위에 오른다. 그럼 싫어도 제게 공손해질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간다, 밖으로.’

“감자가 포슬포슬한 게 부드럽고 촉촉한 치즈와 잘 어울리네요.”

으으윽! 포테이토 피자 줄에서 칼리안이 황태자를 향해 손짓했다.

“전하, 전하.”

“……지금 줄 서신 겁니까?”

“규칙이라지 않습니까. 감자 좋아하시잖아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칼리안의 목소리가 성자를 유혹하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느껴졌다. 나이 어린 레이디 손에 들린 포테이토 피자가 제게 눈빛을 보내며 ‘먹고 싶지? 나를 먹고 싶지요?’ 하고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얼마 후, 정신없이 피자를 돌리던 세니아나는 팬을 털며 중얼거렸다.

“죄송하지만 포테이토 피자는 이제 끝…… 전하, 줄 서셨군요. 만백성이 본받을 길라게온의 차기 태양이십니다.”

세니아나가 활짝 웃자 황태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데뷔탕트는 성황리에 끝났다. 무도회장에서 돌아온 나는 소파에 주저앉아 팔을 주물렀다. 피자를 몇 판이나 만들고 나눠 줬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예정한 건 아니었지만, 도우가 하나를 하기엔 많고, 두 개를 만들기엔 모자라서 어떻게든 늘려 보려고 반죽을 휙휙 돌렸다.

‘우와아―!’

‘멋지다!’

저 반죽이 얼마나 늘어나는지 궁금하다고 사람들이 눈을 빛내는 통에 예정에도 없던 퍼포먼스 같은 반죽 돌리기까지 해 버렸다.

‘아르바이트를 서너 개쯤 끝내고 온 것 같아.’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있자 시원달콤한 민트티가 쑥 내밀어졌다.

“고생 많았다.”

“아빠…….”

나는 힘 없는 손으로 민트티를 받아들었다. 머리카락이고 옷이고 전부 기름 냄새가 배어서 산뜻한 걸 마시고 싶었는데 어떻게 아셨을까.

“제가 오늘…… 아빠를 부끄럽게 했으면…….”

내 나름대로 손님 대접이었고 생각한 바가 있었지만, 부모가 보기에는 싫은 일일 수도 있었다.

“반죽, 잘 돌리던걸.”

“네?”

“아카데미에서 그런 재주를 배우나.”

아빤 희미하게 웃으며 내 옆에 앉았다.

‘다행이다. 괜찮으신가 봐.’

난 아빠의 팔짱을 끼고 듬직한 팔에 머리를 기대면서 “그런 건 아니고요…….” 하며 히히 웃었다.

“씻고 자야지.”

“네…….”

“꿉꿉할 텐데.”

“네에…….”

선생님 향기를 맡으면 언제나 안심이 되었듯, 아빠의 냄새도 나를 안심시켰다. 긴장이 풀어지니 눈이 슬슬 감겨왔다.

“대답만 잘하는군.”

낮게 웃는 소리가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세니아나, 나는 피자를 성에 차게 못 먹었으니까 만들어 줘. 반죽 돌리는 것도 다시 보게. 잘하던―”

가웨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는데 퍽! 책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끄악!” 비명이 터졌다.

무슨 일…… 싸우면 안 돼…….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땐 내 침대 위였다. 나는 후다닥 몸을 일으키고 이불을 살폈다.

‘으아아, 좋은 이불에 음식 냄새가 뱄어!’

시무룩하게 이불을 내려보다가 곧 온몸이 꿉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욕실로 가서 얼른 씻고 나오자 왜인지 저택이 시끄러웠다.

“아가씨!”

시트론이 종종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아가씨께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

저택에 내 손님이 왔다고? 올 사람이 누가 있지. 조이는 초대를 해도 무섭다며 오지 않았다. 쟝뤼크도 마찬가지였고.

‘아, 도미니크!’

―는 아니겠지. 남들 시선이 있으니 쉽게 오갈 수 없다. 그러면……. 나는 핫! 하고 숨을 들이켰다. 스위트피가 제도에 있지!

묵을 곳이 없어서 곤란해하기에 초대를 했었다. 나는 얼른 1층으로 내려갔다. 응접실에 도착하자 할아버지와 함께 등 돌리고 있는 여성이 보였다.

“아가야.”

“로자리오 할머니!”

스위트피가 아니었구나.

‘맞다, 어제 할아버지 친구들이 다 오셨는데 로자리오 할머니는 안 오셨지.’

나는 냉큼 달려가다 우뚝 멈춰 서서 치마를 잡고 무릎을 굽혔다.

“저택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예의 바르기도 하지.”

“젖은 채로 인사드려서 죄송해요. 친구가 온 줄 알고.”

“예정 없이 왔으니 실례는 내가 범한 게지. 머리를 말리고 오렴. 전해 줄 말이 있단다.”

“네.”

나는 순순히 대답하고 다시 응접실을 나섰다.

‘로자리오 할머니가 내게 전해 줄 말이 뭘까?’

고민하는데 어느새 나를 쫓아온 마릴린이 뒤를 흘끔거리며 말했다.

“카르샤 백작께서 무슨 일이실까요.”

“로자리오 할머니의 가문이 카르샤 가였어?”

“네. 정보 길드의 수장이세요. 양지의 것부터 음지의 것까지.”

“그렇구나.”

“활동은 쭉 음지에서 하신다고 해요.”

“어둠의 세력 같은…… 뭐 그런 거?”

마릴린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지하의 거목이라는 샤르파크 후작과는 돈독한 사이시죠.”

헉, 저렇게 인자한 로자리오 할머니가 노공들 중에 제일 무서운 사람이었나.

‘그런데 왜 내게?’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계단을 올랐다. 시트론과 마릴린이 양옆에 붙어서 머리를 말려 주었다. 말끔한 드레스까지 차려입고 다시 내려갔을 때 로자리오 할머니는 우리 가족 모두와 함께 차를 마시고 계셨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차가 좋아서 기분 좋게 있었단다. 다들 훤칠하니 꽃밭에 있는 기분이었고.”

나는 농담이라고 생각해서 웃어 버렸다.

“그런데 할머니.”

“그래.”

“제게 전해 주신다는 이야기가…….”

“두 가지가 있지.”

“두 가지나요?”

“하나는…….”

로자리오 할머니가 소파 테이블에 편지를 내려놓았다.

“로열 키친 응시 결과란다.”

“…….”

나는 떨리는 눈으로 봉투를 쳐다보았다. 조심스럽게 집자 할아버지가 급히 레터 나이프를 건넸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가족들이 모두 소파 뒤로 다가와 편지에 집중했다. 나는 눈을 꽉 감고 편지를 펼쳤다.

눈을 감은 채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는데, 주변이 고요해졌다. 나보다 먼저 내용을 보았을 가족들도 말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떨어졌나.’

나는 조금씩 실눈을 뜨고 편지를 바라보았다. 첫머리에 있는 인사말을 지나 시선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세니아나 프렌시프 님께 합격을 알려드립니다.]

‘합격’이라는 글자가 클로즈업이라도 된 것처럼 커다랗고 진하게 보였다.

‘하, 합격……!’

입을 틀어막고 가늘게 떨던 난 이내 만세를 부르며 소리쳤다.

“됐다! 합격했어요!”

내가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자 가족들과 로자리오 할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다행이에요. 마지막 과제 때문에 합격을 못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내가 활짝 웃으며 말하니 로자리오 할머니가 티 코스터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간도 하지 않은 죽을 내었으니 걱정이 될 만도 하지.”

과연 정보 길드의 수장이다. 황궁의 일을 빤히 아는 것을 보면.

할아버지가 “미음을 내었다고?” 말하자 가웨인도 의아한 얼굴로 “왜?” 하고 물었다.

“아무리 시험이 중요해도 사람 몸에 해로운 음식을 낼 수 없으니까요.”

“해롭다?”

아빠와 란슬롯이 묘한 눈으로 내 말을 곱씹었다. 그러다 무언가 깨달은 듯 시선을 교환한다. 황비가 소금기조차 해로울 정도로 몸이 상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로자리오 할머니는 후후 웃었다.

“나베리우스는 복이 많군. 이리 영리하고 귀여운 손녀를 두었으니.”

내 뺨을 살짝 두드리곤 무릎에 손을 포갰다.

“다음 소식은 데뷔탕트 선물이란다.”

“선물이요?”

“그래, 이 소문을 취합하느라 어제 아기의 파티엔 가지 못했어. 파티장을 찾겠노라 약속하였는데,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일이 우선이지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로자리오 할머니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아가야.”

“네.”

“로열 키친 합격자들이 부서를 지원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니?”

“들었어요.”

대부분 아발론(황제의 궁)을 선호하는 것도.

‘샤를리나도 황제 궁을 지원한다고 했었어.’

로자리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말했다.

“한 곳에 지원이 몰리면 성적순으로 자르지. 희망하지 않은 궁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관리자들이 임의로 배정시킨단다.”

“그렇군요.”

“그러니 너는 황제 궁을 지원해선 안 돼.”

“……제가 수석이 아니군요.”

로자리오 할머니는 침묵으로 대신 답변했다.

“황제 궁엔 카렌듈라의 성녀가 가게 될 거야.”

샤를리나가 수석이구나.

“그런데 왜요? 임의로 배정되어선 안 되는 이유가 있나요?”

“그래. 네가 로웨나 황비나 황태자 궁에 들어가면 곤란해질 거야.”

“그 말씀은…….”

로자리오 할머니의 눈이 선득하게 빛났다.

“곧 황태자가 바뀔 거다. 가장 가능성 큰 사람은 당연히―”

“미카엘 황자로군요.”

내가 굳은 얼굴로 말하자 할머니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로자리오 할머니가 돌아가고 우리 가족들은 소파에 둘러앉아서 생각을 정리했다.

‘황태자가 바뀐다고 확신하는 건 황제가 마음을 정했다는 거겠지.’

할머니가 직접 와서 내게 선물이라며 소식을 전한 건 카렌듈라와 맞서지 말라는 뜻일 거다. 미카엘이 황위에 오르면 내가 위험해질 테니까, 이제라도 끈을 만들어 두라는 의미.

소파 팔걸이를 검지로 툭, 툭, 두드리던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이제 결단을 할 때가 왔지.”

란슬롯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누가 황제가 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뀔 겁니다.”

가웨인은 “미카엘만은 안 돼. 그자의 외척인 카렌듈라는 아탈란이 확실하잖아.” 하고 혀를 찼다. 다들 동의하는 기색이었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둘이다. 황태자 헬리오스이냐, 도미니크이냐. 황태자에게선 이미 황제가 마음을 돌렸고, 도미니크는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모친의 신분에 문제가 있다.

가족들이 모두 아빠를 쳐다보았다. 결정은 그의 손에 달렸다.

* * *

시녀가 가져온 쟁반을 본 헬리오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놈의 약.’

어찌나 많은지 약만 먹어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헬리오스는 신경질적으로 약을 쥐며 시녀에게 물었다.

“궁정의가 오늘도 요양해야 한다더냐.”

시녀가 말을 못 하고 고개를 수그리자 헬리오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왜 오늘도…… 윽!”

고함을 내지르자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막 황태자의 방에 들어오던 로웨나 황비가 깜짝 놀라 달려왔다.

“전하!”

“……크으.”

“의사! 의사를 불러라!”

황태자가 로웨나 황비의 팔을 잡고 이를 악물었다.

“됐습니다. 의료원에 황제 폐하의 눈이 몇입니까. 오늘도 통증이 있었다고 다 고해바칠 거예요.”

“하지만…….”

로웨나 황비가 걱정되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은 건강하셨는데 어째서 다시…….”

세니아나 프렌시프의 데뷔탕트의 앞뒤로 며칠은 건강해서 안심하고 있었더니.

“어제 무리해서 등청하셨나 봅니다. 오늘은 누워서 푹 쉬세요.”

“매일 같이 누워만 있으니 등에 진물이 생기겠어요.”

“전하, 몸이 우선이에요.”

“나으면 무얼 합니까! 나아 봤자 황제 폐하께선 불러 주시지도……! 사신단 접대까지 미카엘에게 맡기셨습니다!”

수년간 왕래하는 나라의 접대라면 몰라도, 첫인사를 나누는 접대 자리에선 나라의 후계가 빠지지 않는다. 이번 접대는 엘트라와의 첫인사 자리였다.

‘그쪽에서도 나라의 후계가 나온다고.’

로웨나 황비는 한숨을 내쉬고 시녀에게서 물컵을 받아 황태자에게 쥐여 주었다.

“어미가 노력하고 있어요. 어떻게든 엘트라의 사신단과 만나는 자리에 전하께서 나서게 만들 겁니다.”

“…….”

“그러니 전하께서는 건강에 더욱 신경을 쓰셔야죠. 접대 날에 쓰러지시면 안 되잖습니까.”

황태자가 칫, 혀를 차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아침 식사를 들이겠습니다.”

로웨나 황비가 대신 “들여라.” 명하자 트레이를 밀고 시종들이 들어왔다. 메뉴를 설명하기 위한 요리사도 함께였는데 그 옆엔……. 황태자와 로웨나 황비의 눈이 커졌다.

“프렌시프 영애!”

로웨나 황비가 활짝 웃으며 세니아나에게 다가갔다.

“오늘 입관하였구나.”

그러자 요리사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비님, 이제 이 아이는 황궁 요리사의 신분이니 영애라는 호칭은 거두어 주십시오…….”

“아아, 그렇지. 한데 어떻게 제1황자궁에 온 거지? 누가 배속시킨 거야? 기특한 일을 하였네.”

“프렌시프가 제1황자궁을 희망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기쁠 데가!”

로웨나 황비는 활짝 웃었지만, 황태자는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미카엘이 음식에 독이라도 넣으라 시키던가.”

“전하, 그런 말씀을…….”

황비는 민망한 얼굴로 세니아나를 쳐다봤다.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란다.”

황태자가 “나쁜 뜻이 맞습니다.” 하고 빈정거렸다. 모든 입관 예정자들은 스스로 희망하는 궁을 택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아니, 거의 모든 자들이 황제 궁을 희망했다. 그게 예의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황후가 며느리로 들이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세니아나 프렌시프가 내 궁에?’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 * *

우와, 밉살맞아!

이곳이 일터만 아니었더라면 나는 인상을 팍 쓰고 쏘아붙였을지도 모른다. 로웨나 황비는 몇 차례나 “전하, 제발……!” 하며 황태자를 말렸다.

“오늘 유난히 심기가 불편하셔. 영애, 아니, 네가 이해하렴.”

“예, 황비님.”

나와 선배 요리사는 황태자가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벽 쪽에 붙어 대기하다가, 그가 스푼을 놓고 나서야 밖으로 향했다. 선배 요리사는 복도를 걸으며 “으으.” 신음했다.

“살얼음판이다, 살얼음판.”

“…….”

그가 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너는 왜 하필 제1황자궁에 온 거야? 로웨나 황비님의 궁에 갔다면 편했을 텐데. 아니면 황후궁이나.”

내가 황자 중에 요리를 해 주고 싶은 사람은 도미니크뿐이었다.

‘하지만 도미니크는 여기 없는걸.’

또 황후궁이나 로웨나 황비궁을 갔으면 일을 배우긴커녕, 두 사람과 내도록 붙어 있어야 했을 거다. 그러니까 차선책을 택한 거지 뭐.

“경쟁률이 적을 것 같아서요.”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선배 요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야 하지. 끈 떨어졌다고들 하니까…… 헉.”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주변을 휙휙 살피고 나를 붙잡았다.

“다른 사람들한텐 비밀이다?”

“그럼요.”

“어쨌든 너도 기간만 채우고 빨리 이동 요청을 해. 미카엘 황자님 궁이 제일 좋을걸.”

그렇게 중얼거리곤 “가자.” 하고는 나를 재촉했다.

“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거야. 오늘 넌 죽었거든.”

“……네.”

주방에 들어간 나는 선배 요리사의 말을 실감했다.

“접시!”

“막내들, 뭐 하는 거야! 빨리 못 움직여?!”

“굼떠! 재료는 재깍재깍 가져와야 할 것 아냐! 이봐, 접시!”

전쟁통이었다. 이렇게 바쁜 건 세니아나가 되고 처음이라 나는 눈이 팽팽 도는 것 같았다.

“막내들!”

“막내!”

“야!”

들어온 지 2년 이내의 막내들은 정말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선배 요리사들이 요리를 마치고 쉴 때도 다음 타임 재료 준비를 해야 했다. 내일 아침 준비까지 마치니 깊은 밤이었다.

“흐윽, 흑!”

나와 함께 입관한 동기들이 펑펑 울며 조리복 소매로 눈을 북북 비볐다.

“이런 일을 하고 싶어서 로열 키친에 들어온 게 아니라고. 식당 보조와 뭐가 다르냔 말이야!”

“……황후궁 키친의 선배 말이 우리 같은 새끼 요리사들은 식칼도 제대로 못 잡는다더라.”

“황제궁으로 간 샤나와 미카엘 황자님 계시는 제2황자궁은 편하겠지…….”

“거긴 궁인 수가 무시무시해서 보조 일은 하인, 하녀가 대신하니까.”

“빌어먹을!”

퇴궁할 시간이었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다리가 퉁퉁 부어서 일어나려고만 하면 새끼 염소처럼 후들후들 떨며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동기들이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공을 세워야 해. 그럼 새끼 요리사들도 승급할 수 있다면서. 그래야 이런 지옥에서 벗어나지!”

“그야 그렇지만, 로열 키친에서 몇 년씩 일한 선배들을 제치고 어떻게?”

“궁에 큰 행사가 있을 땐 새끼 요리들도 식칼을 잡는대. 가령 곧 있을 엘트라 사신단 접대 같은 일 말이야.”

다들 눈을 부릅떴다. 우리는 한 시간가량 끙끙거리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너무 힘드니까 마차로 가지 말고 궁 결계만 넘으면 포털을 열어야지…….’

끙끙거리며 어두운 복도를 걷던 난 인기척을 듣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전하.”

맞은 편에서 걸어오던 황태자가 날 발견하고 인상을 썼다.

“이 늦은 시간에 왜 퇴궁하지 않고. 내 음식에 수작을 부리려고 틈을 노리고 있는 거냐?”

“내일 아침 준비 때문에 퇴궁이 늦어졌을 뿐입니다.”

미심쩍은 시선으로 날 바라보던 그가 주변을 둘러보고 큼, 헛기침했다.

“그, 뭐, 포테이토 피자란 건 맛있었나?”

“그렇죠, 참. 결국 전하는 못 드셨군요.”

포테이토 피자가 막 소진되었을 때가 황태자의 차례였다. 없으니까 기다려서 받으라고 하니 인상을 쓰며 그냥 휙 돌아갔다.

“그 뒤에 세 판 더 만들었는데 아쉽네요. 인기가 좋았거든요.”

“…….”

“감자가 포슬포슬해서 짭짤한 베이컨, 고소한 치즈와 엄청 잘 어울렸어요.”

내가 만들었지만 참 맛있었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가서…… 라.”

뒷말이 뭉개져서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네?” 되묻자 황태자가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가서 야식을 만들어 오란 말이다.”

“번을 서는 요리사들이 있습니다. 주방에 말을 전하지요.”

“됐으니까 네가 만들어 오란 말이야. 검증된 요리로. 그…… 뭐, 피자라던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는 황족의 요리를 할 수 있는 직급이 아니에요.”

새끼 요리사인 내가 황족의 요리를 했다는 걸 알면 로열 키친에선 프렌시프의 영애가 특혜를 받았노라 떠들 터였다.

“안 하겠다는 거냐?”

“규칙이니까요.”

“어떻게 한 마디도 지지 않지?”

“물으셔서 답변한 것뿐인데요.”

“…….”

“……?”

황태자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선 나를 휙! 지나쳤다.

‘왜 저러시지?’

내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나.

나는 휴, 한숨을 내쉬고 다시 주방에 가서 “전하께서 야식을 들이시라 명하셨습니다” 하고 전했다. 번을 서던 요리사들이 후다닥 버섯 수프를 만들었다.

“나는 재료 점검을 하러 갈 테니 야식은 네가 가져다드려라. 드시기 전에 레몬즙을 조금 뿌리고.”

“네.”

쟁반을 들고서 황태자가 있는 제1황자궁의 집무실에 들었다. 경비병에게 야식을 전하러 왔다고 하니 문을 열어 주었다. 탁자에 쟁반을 올려 두고 나오려는데, 집무실과 이어진 서재 쪽에서 가는 신음이 들렸다.

“크흑…….”

무슨 소리지?

‘설마 몸이 안 좋으신가?’

조심스럽게 서재 쪽으로 향해서 “전하……?” 하고 불렀는데.

“전하!”

그가 바닥에 쓰러져 몸을 웅크린 채 밭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나는 후다닥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전하! 괜찮으세요?”

“저리…… 으윽…… 꺼져.”

“얼른 가서 의사를 데려올게요!”

황태자가 얼른 내 옷깃을 잡았다.

“부황에게…… 내가 쓰러졌다고 일러바칠 셈이냐.”

“하지만.”

이렇게 괴로워하잖아! 나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면서. 일단 어디라도 눕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를 부축하려다가 목덜미를 만지고 화들짝 놀랐다.

“놔!”

황태자가 나를 거칠게 떠밀었다.

“고장 난 물건이라고 고해바치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

“떽!”

내가 빽 소리치자 황태자의 눈이 커다래졌다.

“너, 감히…….”

“이렇게 열이 펄펄 끓잖아요!”

“…….”

“황제 폐하께서 아픈 걸 아시면 좀 어때요. 들키지 않으려고 하다가 죽는 것보다 낫지!”

나는 얼른 그의 팔을 목에 걸고 끙끙거리며 일어났다. 힘이 빠진 그를 부축해 겨우겨우 서재 너머에 있는 소파로 옮겼다. 일단 쟁반에 놓여 있던 냅킨을 음수에 적셔서 그의 이마에 올렸다.

“의료실에 전하의 사람은 없나요? 몰래 데려오면 황제 폐하께 들키지 않고 진료받을 수 있을 거예요.”

“……왜 이렇게 잘해 주지? 뭘 얻어 가려고.”

황태자가 경계 어린 눈으로 봐서 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하.”

“…….”

나는 흘러내리려는 물수건을 다시 잘 올려 두고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저는 전하의 편이에요.”

“……!”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보았다.

“거짓말.”

“진짜예요.”

그쪽이 황제가 되길 바란다고요. 도미니크는 하기 싫댔거든.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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