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셰프 영애님 6권
16장
사실 먼저 의사를 물었던 건 도미니크였다. 황제의 심중에 없는 황태자보다는 도미니크 쪽이 황위에 오를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황태자는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
“네? 의료실에 끈 있는 의사요!”
“로웨나 궁이 알고 있을 거다.”
“전할게요.”
나는 후다닥 로웨나 황비에게 가서 얘기를 전달했다. 황비는 즉시 제 휘하의 의사를 데리고 은밀히 황태자 궁을 찾았다. 진료 후 의사가 빠져나가고 나서 황태자는 꽤 편안한 얼굴로 잠들었다.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황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전하께 와 주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운이 좋았지요.”
황비는 내 손등에 제 손을 포개곤 다정한 얼굴로 물었다.
“전하께서 묘한 말씀을 하시던데…….”
내가 그의 편이 되겠다고 한 말을 전해 들은 모양인지 황비는 눈에 이채를 띠고 있었다.
“뭐, 그렇지요.”
“정말이니?”
그녀는 본심을 확인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살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만…….”
“다만?”
“그러기 위해선 황비님이 저를 도와주셔야 해요.”
“돕다니?”
난 주변을 휙휙 둘러보고 목소리를 바짝 낮추었다.
“황비님도 몸이 안 좋으시지요?”
황비는 잠깐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황후가 그걸 알고 터뜨릴 시기를 엿보고 있어요.”
“뭐……?”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로웨나 황비는 얼굴을 굳혔다.
‘그야 샤를리나가 만든 음식을 보면 알지.’
마지막 시험에서 샤를리나는 일부러 자궁에 좋지 않은 재료를 넣어 음식을 만들었다. 그 애가 황비의 병을 알고 있다면, 황후의 귀에 들어가는 건 금방이었다. 그런데도 소식이 없다는 건 터뜨릴 절호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거겠지. 내가 의심하고 있던 부분을 말하자 황비는 입술을 꽉 짓씹었다.
“입속의 혀처럼 굴더니…… 간사한 계집애.”
“지금도 황비님께 연락을 취하나요?”
“오늘 오전에도 제가 만든 것이라며 과자를 이것저것 보내왔단다. 황후 몰래 보낸 것이니 황후의 앞에선 내색하지 말라 하였지.”
왜 아직도 로웨나 황비에게 붙어 있으려고 하지?
시험 때 쓰러뜨린 것만으로도 황후 측에선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룬 거다. 나중에 로웨나 황비의 몸 상태를 폭로했을 때 뒷받침할 증거를 마련한 거니까.
‘황후와 샤를리나의 사이가 정말로 나쁜 거야.’
그렇다면…….
내가 입을 열자 로웨나 황비의 눈빛이 묘해졌다.
* * *
이튿날. 새벽부터 입궁한 샤를리나는 에이프런을 걸치며 창밖에 보이는 황후궁을 힐끔 쳐다보았다. 어제 잠시 시간이 났을 적에 황후궁을 찾았다. 신선한 아보카도로 만든 과카몰리를 가져갔지만, 황후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들러붙지 마라.]
[자매간에 그런 말씀을……. 아버님께서 걱정이 많으세요. 우리 사이가 원만해야 기분이 나아지실 거예요.]
[아버님 심기가 불편한 것이 나 때문이겠니. 온갖 재물과 인맥을 다 끌어들였던 네 데뷔탕트가 무참히 끝이 나서겠지.]
말꼬리에 조롱이 잔뜩 섞여 있었다. 샤를리나가 입술을 꾹 깨물던 때에 선배 요리사가 다가왔다.
“영애…… 가 아니라, 크흠!”
그가 헛기침을 하자 샤를리나는 상냥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 가요, 선배님.”
“아니야.”
“그럼……?”
“로웨나 황비님께서 너를 찾으신다.”
“아…….”
샤를리나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쳐졌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말씀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업무 중이니 황비님껜…….”
“아냐, 가 봐.”
“그래도 될까요?”
“그럼!”
샤를리나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조리실 밖으로 향하자 요리사들이 모여 쑥덕거렸다.
“카렌듈라 후작의 자식이라기에 뻣뻣할 줄 알았더니 전혀 아닌데.”
“크, 얼굴도, 몸매도 착한 게 성격까지 착하네.”
“실력도 좋다잖아. 이번 시험 수석이라지?”
지나가던 여성 요리사가 우뚝 멈춰 그들을 바라봤다.
“실력이 좋은 편은 아니던걸요. 채소를 엉망으로 써는 걸 보면. 불도 무서워한다고요.”
그러자 모여 있던 남성 요리사들이 쯧, 쯧 혀를 찼다.
“하여간 계집애들은. 같은 여자라면 책 잡지 못해서 안달이지?”
“무슨……! 정말로 이상했다고요. 보세요. 당근을 썰면 이렇게 이어져 있잖아요.”
“그런데?”
“로열 키친의 요리사가 썬 당근이 이런 건 이상하다고요.”
여성 요리사가 채 썬 당근을 들었다. 제대로 다 썰리지 못해서 이어져 있었다. 초보나 하는 실수였다.
“바빠서 실수한 모양이지.”
“아무리 바빴다고 해도 로열 키친의 어떤 요리사도 이런 실수는 안 할걸요.”
“그렇게 실력 나쁜 녀석으로 몰아가고 싶냐. 샤를리나, 그 귀여운 게 뭔 잘못이 있다고.”
“그게 아니라요.”
“원래 예쁜 애들이 맘도 착한 법이지. 못생긴 것들은…… 쯧.”
“아니라니까요!”
여성 요리사가 억울한 표정으로 소리치자 다른 사람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만해.”
“하지만……!”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생각하고 싶어서 안달인데 네가 뭐라고 하든 변명이라고 생각하겠지.”
여성 요리사가 인상을 쓰며 볼을 끌어안고 지나갔다. 모여 있던 사내들이 낄낄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이 자식 목소리 들었어? ‘로웨나 황비님께서 너를 찾으신다’. 목소리 느글거리는 것 봐라.”
“땅까지 뚫을 기세던데.”
“아서라, 아서. 그런다고 후작 영애께서 너 같은 놈 거들떠나 보시겠냐.”
그러자 샤를리나에게 말을 전한 요리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혹시 알아? 여기서 카렌듈라 후작의 사위가 될 사람이 나올지.”
“그게 너라고 하고 싶은 건 아니지?”
문밖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샤를리나가 픽 실소를 흘렸다.
‘멍청한 것들.’
웃어 주기만 해도 사르르 녹아서 제가 원하는 대로 장단을 맞춘다. 그녀는 싸늘한 얼굴로 문을 돌아보고 로웨나 황비의 궁으로 향했다. 로웨나 황비 궁 정원으로 들어가자 신문을 읽던 황비가 생긋 웃으며 그녀를 맞았다.
“왔구나.”
“황가에 광영 있기를. 찾아 주셔서 영광입니다, 황비님.”
“앉으렴.”
황비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샤를리나가 착석하자 그녀는 테이블에 작은 주머니 하나를 내려놓았다.
“이건…….”
“과자의 답례란다. 아주 맛있었어. 황후 폐하가 부럽던걸. 친정에서 항상 맛좋은 음식을 먹을 테니.”
“과찬이세요.”
주머니를 살짝 열어 본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고혹적인 빛깔과 우아한 자태의 물방울 모양 진주가 고운 천 안에 곱게 누워 있었다.
‘티어 블랙이잖아.’
황후가 예비 며느리였던 에이레네에게 선물했고, 로웨나 황비가 세니아나의 마음을 사기 위해 선물했던 그 귀한 흑진주. 황비는 턱을 괴며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성녀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니 새로운 성녀인 영애도 가져야 마땅하지.”
“이런 귀한 것을…….”
황비는 후후 웃으며 샤를리나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황후와 사이가 좋지 못하다지? 데뷔탕트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어.”
“마음을 열어 주지 않으세요.”
샤를리나가 부러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저런. 이렇게 귀여운 동생에게 왜 마음을 열지 않을까.”
“…….”
“고민이 있거든 나를 찾아오렴. 황후 폐하의 동생이라면 내 동생과도 같지.”
“……!”
샤를리나가 눈을 크게 뜨고 황비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될까요?”
“물론.”
황비는 은근한 손길로 샤를리나의 약지를 훑었다.
“레드 다이아가 잘 어울릴 손이구나.”
레드 다이아몬드는 오직 황후의 인장에만 들어가는 고귀한 보석이었다. 샤를리나의 눈이 커졌다. 황비는 지금 황태자의 짝으로 샤를리나를 생각하고 있음을 어필한 것이었다.
“일이 바쁘지? 가 보렴.”
“네, 황비님.”
“네가 내 궁을 찾는 날을 기다리고 있으마.”
샤를리나는 황비에게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궁을 나선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고 티어 블랙을 꾹 말아 쥐었다.
‘황후 말고 저를 택하라는 거야.’
사실 카렌듈라만 아니라면 황비가 자신을 탐낼 이유가 충분했다. 아니, 어쩌면 카렌듈라라서 더더욱. 카렌듈라 후작이 딸과 손주를 버리고 황태자를 지지하기만 해 준다면 로웨나 황비는 날개를 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영 바보는 아닌 모양인걸.’
샤를리나의 얼굴에 오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황태자궁의 요리사들이 본 주방에서 내려온 공지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또, 또! 아발론(황제의 궁)의 요리사들만 차출되었어!”
오늘 내려온 공지는 사신을 응접하는 아네모네 궁에 차출된 요리사 명단이었다.
‘드디어 내려왔구나.’
슬슬 내려오게 될 줄 알았다. 선배 요리사가 분한 얼굴로 짓씹듯 말했다.
“심지어 샤를리나 카렌듈라 같은 새끼 요리사도 차출했으면서 우리는…….”
한 요리사가 이를 악물고 말하자 다른 요리사들이 쯧,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아무리 수석이라고 해도 너무하잖아. 이런 새까만 후배에게도 밀려야 한다니.”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속으로 좀 의아했다. 원래 사신 접대 땐 새끼 요리사가 수프를 만드는 것이 관례였다. 샤를리나 카렌듈라가 수석이니 아네모네 궁에 차출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분한 것도 이해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른 요리사가 나를 흘끔 쳐다봤다.
“영애도, 아니, 너도 안되셨네요, 아니 아니, 안됐다.”
“네?”
“샤를리나 카렌듈라만 없었으면 차석인 네가 사신 접대 요리를 할 텐데.”
내가 차석이었구나. 마지막 시험 전엔 꼴찌였는데 차석이 된 걸 보면 그래도 내 강황 미음이 꽤 괜찮았던 모양이다.
‘그건 기쁘다.’
나는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헤헤 웃었다. 다른 요리사들은 한숨을 푹푹 쉬며 투덜거렸다.
“얼른 아발론에 가고 싶어도 기회가 아발론의 요리사들에게만 있으니.”
“그러니까 말이다. 대체 어쩌라는 건지.”
그들이 저렇게 아발론을 부르짖는 게 나는 의아했다.
“왜 꼭 아발론에 가야 하나요? 여기서도 충분히 요리할 수 있잖아요.”
“당연히 아발론의 요리사들만 로열 셰프로 승급할 수 있으니까!”
그렇구나. 일단 황태자의 신임을 받아야 하니 지금은 무리지만, 언젠가는 아발론에 가야겠구나.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데 황태자궁의 주방장으로부터 불호령이 터졌다.
“다음 타임 준비도 소홀한 것들이 아발론은 무슨!”
그제야 요리사들은 후다닥 제자리로 돌아갔다. 재료 창고에서 오늘 메뉴에 쓸 양고기를 살피고 있는데 덜컹, 문이 열렸다. 침입자를 본 난 눈을 크게 떴다.
“전하.”
황태자가 삐딱하게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와라. 잠깐 얘기를 나누자.”
“제가 지금은 바쁘니까 여기서 하시면 안 되나요?”
“냉동 창고에 날 세워 두겠다고?”
“그렇게 춥지 않은…… 아, 환자시구나.”
그러자 그는 울컥한 표정으로 창고 안에 성큼성큼 들어왔다. 환자라는 말이 콤플렉스인 모양이었다. 난 걱정 어린 눈으로 그를 빤히 보았다.
“들어오셔도 괜찮으세요?”
그가 문을 쿵! 닫고서 나를 노려보았다.
“어제 한 말, 무슨 뜻이지?”
“제가 전하의 편이라는 말이요? 들으신 그대로예요.”
“미카엘이 이번 사신 접대에서 마저 두각을 나타내면 난 영영 밀려날 거다. 그런데 왜 굳이 날 선택한 거지. 프렌시프 영애님께서 말이야.”
난 또렷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신 접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건 미카엘 황자님이 아닌 전하이실 거예요.”
“……뭐?”
“제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요.”
“사신 접대에 요리도 내지 못할 네가 어떻게.”
황태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고 나는 개구지게 웃었다.
* * *
황제는 외알 안경을 슥 올리며 신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매일 같이 도적 떼들이 기승을 부리니.”
음식을 집어 황제의 접시에 놓아 주던 가브리엘라 황비가 차분히 대답했다.
“전력석 때문이겠지요.”
필요하지만 구할 수 없으니 도적질을 해서라도 빼앗아 오는 것이다. 황제가 쯧, 혀를 차며 신문을 내려놓았다.
“그러니 엘트라 사신과의 자리가 중요해. 전력석이 잡초처럼 생기는 나라라고 하니 도움이 크게 되겠지.”
“잘되면 좋겠군요.”
황제는 벽 쪽에 정렬해 있던 요리사들에게 물었다.
“대접할 음식 준비는 잘 되고 있나.”
“소홀함 없이 정성을 다하고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로열 셰프 고프레도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엘트라는 포털을 가진 성녀를 여신이라 생각한다지요. 성녀인 샤를리나 카렌듈라가 직접 요리를 만들어 내갈 테니 그들에겐 특별한 경험일 겁니다.”
“그렇…….”
황제가 대답하려던 중에 가브리엘라 황비의 시녀가 급히 식당에 들어왔다. 그녀가 황비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 속삭이자 황비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째서?”
“그건 저도 잘…….”
가브리엘라 황비는 한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폐하.”
“무슨 일이냐.”
“그게…….”
“짐이 묻고 있지 않나.”
“황후 폐하께서 성녀들을 잡아들이셨답니다.”
“뭐라?”
황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황후가 제 이복동생과 프렌시프 영애를 잡아들였단 말인가.
“짐도 가지.”
황제가 몸을 일으키자 식당에 있던 모두가 그의 뒤를 따랐다. 황후궁에 들어가자 정말로 세니아나와 샤를리나가 황후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황제의 등장에 황후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폐하.”
“무슨 일이냐.”
“성녀들이 감히 황궁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다투었습니다.”
황제가 기가 막힌다는 듯 세니아나와 샤를리나를 바라보았다. 샤를리나는 가녀리게 어깨를 떨며 두 손을 가슴께에 포갰다.
“저는, 저는 세니아나가 무슨 일로 제게 이러는지…… 난데없이 싸움을 걸기에 피하려 하였을 뿐이에요.”
황후는 은근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로웨나가 내궁을 어떻게 관리하는 건지. 저였다면 이런 소란은 생기기도 전에 가라앉혔을 텐데요.”
쯧, 혀를 찬 황제는 세니아나를 쳐다봤다.
“무슨 일로 소란을 벌였느냐.”
“저는 억울합니다, 폐하.”
세니아나는 또랑또랑한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애가 제 물건을 훔쳐 갔어요.”
샤를리나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외쳤다.
“말도 안 돼. 내가 네 물건을 훔쳐 갈 리 없잖아.”
세니아나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황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황족이 내린 물건이 사라졌습니다, 폐하. 심지어 황궁에서 일어난 도둑질인데 어떻게 침묵할 수 있겠습니까.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지만, 도무지 돌려주지를 않아서 일이 이렇게 되었답니다.”
샤를리나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난 정말 네 물건을 훔치지 않았어.”
“폐하, 샤를리나의 몸을 수색하시면 아실 겁니다.”
황제가 두통이 인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대체 무엇이 없어졌기에.”
“로웨나 황비님께서 제게 내리신 티어 블랙입니다.”
샤를리나는 발작하듯 외쳤다.
“거짓말! 내가 가진 건 황비님이 내게 주신…… 주신…….”
설마. 샤를리나의 얼굴이 굳어졌을 때, 로웨나 황비가 등장했다.
“무슨 소란인가요?”
황제는 그녀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대가 샤를리나 카렌듈라에게 티어 블랙을 내렸나.”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티어 블랙을 내린 건 프렌시프 영애가 유일합니다.”
샤를리나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당했어.’
영악한 게!
샤를리나는 매서운 눈길로 세니아나를 쳐다봤다. 처음부터, 로웨나 황비궁에 불려 갔을 때부터가 이 계집애가 만든 함정에 발을 디민 것이다.
‘황비를 구슬려서 내게 티어 블랙을 쥐여 준 거야.’
세니아나는 자신이 요리를 망쳐도, 한 편인 듯한 로웨나 황비를 쓰러뜨려도 달리 반격하지 않았다. 겉으로도 말랑한 게 속도 없구나 싶어서 바짝 경계하지 않은 게 실책이었다. 로웨나 황비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뻔뻔했고, 황후는 잠깐 당황하였지만 제 탓은 아니라는 듯 침묵했다.
* * *
카렌듈라 후작이 급히 궁에 들었다. 그는 황후궁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샤를리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미쳤군. 정신이 나갔어.”
“아버지……! 그게 아니에요! 전 로웨나 황비와 세니아나의 수작에 놀아났을―!”
“가서 그렇게 변명해 봐라. 네 손에 티어 블랙이 있고, 그 둘은 준 적이 없다고 부정하지만 넌 그저 수작에 놀아났을 뿐이라고 변명해 봐!”
팔짱을 끼고 앉아 있던 황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님의 멍청한 딸 덕분에 황후궁의 면이 상했습니다.”
“그라니아!”
황후는 소파 팔걸이를 내리치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로웨나에게 인장을 찾아올 수 있겠거니 싶었는데 이 아이가 모든 걸 망쳤다고요!”
“…….”
“이제 다시 당분간 내궁의 일엔 간섭할 수 없을 텐데 어찌하실 겁니까.”
“엘트라 사신 접대가 끝나면 시기를 봐서 내가―”
황후는 하, 실소를 흘리고 제 부친을 쏘아보았다.
“엘트라 사신 접대요? 다 틀렸다고요.”
“뭐?”
“도둑질을 했으니 근신이랍니다. 아버님의 자랑스러운 성녀 따님이 말이죠.”
“……!”
카렌듈라 후작은 희게 질린 샤를리나를 흔들었다.
“무슨 소리야. 그럼 네가 아네모네궁(사신 접대가 예정된 궁)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거냐?”
“그, 그게…….”
엘트라로 포털을 연 당사자인 샤를리나가 아네모네궁에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 빼앗겨?!
“하면! 하면 누가 너 대신에 아네모네궁에 들어간단 말이야!”
황후가 쯧, 혀를 차고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누구겠어요. 차석을 한 세니아나 프렌시프겠지요.”
“이런……!”
이마를 쥔 채 생각을 정리하던 카렌듈라 후작이 급히 시녀를 찾았다.
“가서 사신 접대 만찬의 책임자를 데려와라. 당장! 아니야, 내가 가서―”
“아, 아버님.”
샤를리나가 후작의 팔을 급히 붙잡았으나 후작은 그녀를 거칠게 떠밀었다.
* * *
황태자는 “이 여자가 제정신인가…….” 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사신 접대 만찬에 들어가기 위해 그런 일을 꾸몄다고? 심지어 네가 황비궁 어머니를 들쑤셔 공모한 걸 내게 고스란히 털어놓는단 말이야?”
“네!”
내가 해맑게 대답하자 황태자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프렌시프 어르신의 손녀라더니 과연 빼닮았군.”
“감사합니다.”
나는 수줍게 고개를 숙였고 황태자는 “칭찬 아니었어.” 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체 뭐야, 왜 내 편을 들겠다는 건데. 누가 봐도 미카엘 쪽이 이득인 장사 아닌가.”
황태자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황후가 카렌듈라 후작의 딸이란 게 불만이라면 그리 걱정할 필요 없잖아? 황후는 핏줄에 연연할 사람이 아니니까. 제 부친 대신 프렌시프가 도움이 되어 준다고 하면 냉큼 손을 잡을 텐데.”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설마…….” 하며 가늘어진 눈으로 날 쳐다봤다.
“그, 뭐, 혹시, 가정을 하면…… 가정이야. 가정. 가정이 무슨 뜻인지 알지?”
“……?”
“영애도 나도 함께하는 쪽이 이롭지 않나, 뭐, 그런…… 그러니까 결혼 같은…….”
“아니요?”
“아니, 그럴 수도 있지 않…….”
“아닌데요.”
“그, 이성적인 호감…….”
“절대로요.”
내가 냉큼냉큼 대답하자 황태자는 벌건 얼굴로 소리쳤다.
“나도 됐어!”
“정말 다행이에요!”
내가 눈에 띄게 안심하자 그는 매우 기분이 상한 듯했다. 한동안 황태자의 서재엔 침묵이 감돌았다. 침묵 후 먼저 입을 뗀 건 황태자였다.
“그래서 나는 사신단 접대 전까지 뭘 준비하면 되지?”
“일단 건강하게 계셔야 해요.”
그러고 나서 난 손을 하나하나 꼽으며 말했다.
“일단 식사를 제대로 하시고, 편식하지 마시고, 또 아픈 걸 숨기지 말고 진료받으세요.”
“숨기지 말라고?”
“자꾸 숨기니 덧나시잖아요.”
“…….”
“전하의 몸 상태를 보고 개괄적인 건 다시 의논하도록 해요.”
그렇게 말한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문고리를 잡았다.
‘결혼이라니.’
난 도미니크와 사귀는데 형님인 황태자와 결혼하면 그게 무슨 콩가루람!
‘황태자도 설마 싶어 물어본 거겠지만…….’
고개를 슬쩍 돌리자 황태자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난 웅얼웅얼하며 말했다.
“저 좋아하시면 안 돼요……?”
“안 해!”
버럭 소리친 그는 “좋아하면 아주 멱살이라도 잡겠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날 저녁부터 난 아네모네궁에서 준비에 들어갔다. 황태자궁에서 며칠간은 식칼도 잡지 못했는데, 지금은 재료도 탕탕탕 썰고, 간도 보는 것이 아주 즐거웠다.
“아네모네궁에 차출되려고 카렌듈라를 도둑으로 몰아서…….”
“비열한 수작…… 프렌시프 영애이니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어.”
“카렌듈라가 가엽지.”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등 뒤로 달라붙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전복 내장을 잘라 냈다. 이런 얘기가 오갈 줄은 예상하고 있었다. 사실 비열한 수작이 맞기도 하고.
‘만찬을 완벽하게 준비해야 하는 저들 입장에선 내 실력이 불안하기도 하겠지.’
그보다 내게 중요한 건 사신단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엘트라를 떠올리면 기억나는 건 보물 창고 같은 곳에서 트리스탄이 진득한 과자를 손으로 덥석덥석 집어 먹은 것이었다.
윤세나의 세계에선 고물이 잔뜩 묻은 떡 같은 것도 손으로 잘만 집어 먹지만, 길라게온에서는 쿠키 외엔 손으로 집어 먹는 걸 못 봐서 특이하게 느꼈었다.
‘엘트라 사람들의 입맛을 알면 좋을 텐데. 트리스탄에게 뭘 좋아하는지 물어볼 걸 그랬나 봐.’
“저기, 선배님.”
나는 옆에서 요리 중이던 여성 요리사에게 물었다.
“네?! 아……. 그, 그래.”
“혹시 사신들 음식 취향에 관해서 들으신 게 있나요?”
“글쎄요……. 가 아니라 글쎄. 사면이 바다인 외딴 섬나라라 해물을 많이 접했다는 것밖에는…….”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레시피 수첩을 꺼냈다.
‘생선 육수를 베이스로 해서 문어와 신선한 해물을 잔뜩 넣은 매콤한 수프가 좋겠어.’
그렇게 결심한 나는 요리에 집중했다. 수군거리던 이들도 어느새 조리대로 돌아와 해물을 이것저것 만지고 있었다.
“내 스파이스 챙긴 놈 누구야! 몇 개나 비잖아!”
벼락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내 곁에 있던 여성 요리사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케이퍼, 파더몬, 큐민, 페퍼, 시나몬…… 말씀하신 것들은 다 챙겼는데요?”
“내가 언제! 전부 가져오라고 했잖아, 전부!”
버럭 소리치자 그의 질문에 대답했던 요리사는 “또 저 지랄이군.” 하고 작게 투덜거리곤 식칼을 놓았다.
“다녀올게요.”
“넌 요리를 해야 하니까 너 말고…… 그렇지, 프렌시프.”
갑자기 이름이 불려서 난 “네?” 하고 대답했다.
“가서 내 스파이스를 가져와라.”
투덜거렸던 요리사가 내 어깨를 잡고서 나를 지목한 요리사에게 말했다.
“프렌시프는 아발론에 처음 가잖아요. 선배 자리가 어딘지 아는 제가 다녀오는 게 더 빠른…….”
“다녀오라면 다녀오지 뭔 말이 많아!”
그 말에 그녀가 나를 대신해 기가 막힌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왜 갑자기…….”
싸움이 날 것 같아서 내 편을 들어 주던 요리사를 얼른 붙잡았다.
“제가 다녀올게요.”
“하지만…….”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발론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방에서 일하는 궁인에게 물어서 선배 요리사의 향신료를 챙겼다. 향신료 통을 들고 복도를 걷는데 멀리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아네모네궁에선 즐겁나요?”
샤를리나가 빙그레 웃으며 묻기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막상 가니 더 좋은가 봐요?”
“맞아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샤를리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고 억지로 상냥한 목소리를 냈다.
“지금이라도 말해 주세요. 내가 당신의 물건을 훔치지 않았다는 걸.”
“…….”
“세니아나, 당신을 이해해요. 아네모네궁이 아발론을 향하는 계단으로 보였을 수 있어요. 훌륭한 실력을 갖춘 당신보다 못한 내가 아발론에 들어가서 속이 상했을 수도 있지요.”
“……?”
“그렇지만, 이건 아니잖아요. 영달을 위해 남을 도둑으로 몰다니요.”
순간 이상한 촉이 왔다. 눈빛은 살벌한데 목소리만은 나긋나긋하다. 마치 누가 듣고 있기라도 하는 양.
‘그 요리사는 왜 굳이 내게 스파이스를 가져오라 했지?’
옆 조리대의 요리사 말로는 가져오라는 것들은 다 챙겼다고 했는데. 그녀가 다시 다녀온다고 해도 부득불 나를 보냈다.
샤를리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세니아나, 솔직하게 말해 줘요. 어째서 나를 도둑으로 몬 거죠? 그 보석은 로웨나 황비님께서 내게 주신 게 맞잖아요.”
아하. 나는 빙그레 웃고 어깨를 으쓱였다.
“샤를리나. 전 걱정이 돼요.”
그렇게 말하자 그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나 때문에 아발론에 들어올 수 없을까 봐서요? 아니면 성녀가 하나 더 있는 게 께름칙해서?”
“당신 말이에요.”
“네?”
나는 스파이스 통을 뒤적거렸다. 샤를리나의 표정이 당혹에 물들었을 때, 자그맣고 붉은 돌멩이 하나를 찾았다.
“거짓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감히 아발론에 마법석을 가지고 오다니요.”
“그건―!”
“마법사들이 확인하면 금세 소지자를 찾아낼 수 있을 테지요.”
샤를리나가 내게서 마법석을 빼앗으려 들었다. 여기서 한 가지. 샤를리나가 이토록 가녀린 팔과 고운 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선 아주아주 얌전히 지낸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럼 나는? 졸업 시험부터 실습, 쟝뤼크의 지옥 훈련을 모조리 견뎌 냈다. 그 말인즉 샤를리나는 힘으론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난 샤를리나를 멀찍이 밀어 넘어뜨렸다.
“이 마법석은 시종장에게 전하도록 하죠.”
그렇게 나는 황제에게 또 일러바쳤다.
* * *
사신단 접대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황태자는 착실히 진료를 받았다. 질색하는 콩이니, 잎채소니 하는 것들도 주는 대로 잘 먹는다고 했다. 그렇게 며칠 후 접대 만찬의 날이 다가왔다. 난 새벽같이 일어나 입궁 준비를 했다. 아빠와 오빠들이 열린 문 앞에 서서 나를 쳐다봤다. 가웨인은 퀭한 눈의 날 보고 쯧, 혀를 찼다.
“때려치워.”
“무슨 그런 말씀을……. 아직 일한 지 한 달도 안 되었는걸요.”
“애가 다 죽어가잖아.”
“오늘이면…….”
나는 말하다 말고 하품을 쩍 했다. 그러자 아빠가 양손으로 내 뺨을 잡고 미간을 좁혔다.
“눈이 새빨간데.”
“며칠 못 자서……. 그래도 접대가 끝나면 아네모네궁에 차출된 요리사들에게는 며칠 휴가를 준대요.”
“세니아나,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지―”
난 아빠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품에 얼굴을 비볐다. 안심되는 향기로 기운을 충전하고 다시 고개를 들어 활짝 웃었다.
“쉽게 포기 안 해요. 아빠 딸인걸!”
내가 배시시 웃으니 아빠도 픽 실소를 흘렸다. 아빠와 할아버지는 만찬에 참석하기로 해서 이따 보자고 약속한 뒤, 나는 저택을 나섰다.
궁에 도착하고 쉴 틈 없이 만찬 준비를 했다. 재료 준비부터 식기 점검까지 마치고, 요리사들은 짧은 휴식을 가졌다. 내 옆 조리대의 여성 요리사가 친근한 표정으로 말을 붙였다.
“지금까지 고생 많았어. 오늘만 잘 해내자.”
“네.”
“귀하신 영애님이래서 깍쟁일 줄 알았더니 꽤 성실하던걸.”
그러자 내 조리대 주변의 요리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말로 아발론의 요리사들은 모두 무서울 줄 알았는데 마음이 맞는 사람도 꽤 있었다. 내 편을 들어줬던 여성 요리사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번 일만 잘 해내면 아발론으로 이동 신청을 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힘내.”
“그럴게요.”
“네가 왔으면 좋겠어. 아발론의 새끼 요리사는…….”
아발론의 새끼 요리사라면 샤를리나였다. 나는 왜 그러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 기울였고, 여성 요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자, 가자.”
요리사들이 휴식을 마치고 다시 주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마주했다.
“이, 이게 뭐야.”
“무…… 무슨―!”
주방의 접시란 접시는 모두 깨져 있는 데다 준비해 둔 해산물이 모두 엉망이 되었다. 엉망이 된 해산물 무더기 사이에서 무언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야옹―!”
고양이 두 마리가 순진한 표정으로 발바닥을 싹싹 핥았다.
“주방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놈 누구야!”
총주방의 수셰프 마피레온이 버럭 소리쳤고, 사람들은 나를 쳐다보았다. 난 굳은 얼굴로 마피레온을 바라봤다.
“저는 분명 문단속을 했어요.”
“그럼 어떻게 고양이가 주방에 들어왔단 말이야!”
그건 내가 궁금한 말이다. 대체 어떻게……! 그때, 또각또각 구두 소리와 함께 한발 늦은 요리사가 등장했다. 내게 스파이스를 가져오라고 했던 남성 요리사였다.
“아이고, 난리가 났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침착한 목소리. 저 남자가 날 곤경에 빠뜨릴 이유는 없다. 그렇다는 건…….
‘샤를리나!’
난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마피레온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다가와 내 멱살을 쥐었다.
“귀하신 영애님은 나랏일도 하찮아 보이든? 몇 날 며칠을 준비한 연회를 망치고도 뻔뻔하게 고개를 들어?!”
“…….”
“어떻게 할 거야. 당장 수프를 내야 할 시간이 삼십 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식기가 없다고!”
이곳 식기는 쓸 수 없으니 당장 다른 궁에서 식기를 빌려와야 한다. 하지만 식기 관리를 못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여기 있는 요리사들은 모두 문책받을 것이다. 아네모네궁에 차출된 일로 우쭐했던 요리사들이 모두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해결하겠습니다.”
“뭐? 포털을 열겠다는 거야? 그건 더 큰 일―!”
“포털을 열지 않고 식기 문제를 해결하겠어요.”
“어떻게…….”
나는 마피레온의 눈을 피하지 않았고,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 *
황제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미카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맞은 편 상석엔 자리가 비어 있었다. 통역사에게 물으니 사신단의 총책임자로 온 왕자가 몸이 미령해 만찬에 참석할 수 없다고 했다.
‘글쎄.’
정말로 몸이 좋지 않은 건지, 아니면 거래의 주도권을 자신들이 쥐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인지.
‘후자라면 만만한 상대는 아니군.’
엘트라는 왕권보다 신(神)권이 강한 나라였다. 왕과 선대 대신관의 피를 이은 왕자, 트리스탄은 그 모든 것을 손에 쥐었다.
‘황금을 이고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지.’
황후가 미카엘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어떻게든 보그의 거래를 성사시켜야 한다.”
“압니다.”
그래야 황태자를 완전히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테니.
황후가 고개를 돌려 시종장을 쳐다봤다.
“음식은 어찌 나오지 않고.”
“확인해 봤습니다만,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귀빈을 허기지게 한단 말이냐. 로웨나는 내궁을 어찌 관리한 거야.”
그렇게 말하며 은근한 눈빛으로 황제를 보았다. 황제 또한 마뜩잖은 기색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로웨나.”
황제가 묻자 황비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게…….” 하며 말을 흐렸다. 그때였다. 만찬장의 문이 열리고 트레이 몇 대가 들어왔다. 식기 매트 위에 얇은 종이 호일을 몇 장씩 덧대 올린 후, 나온 건…….
‘이게 뭐야.’
로웨나 황비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저 빵이었다. 동그랗고 커다랗고 퍽퍽해 보이는 빵 하나. 황후가 미간을 좁히고 말했다.
“이까짓 빵이 귀빈 상에 오를 요리인가! 이게 로열 키친에서 준비한 요리가 맞는 게냐.”
요리를 소개하기 위해 온 세니아나가 허리를 굽혔다.
“로열 키친에서 준비한 요리가 맞습니다.”
“뭐라고?”
“귀빈의 상에 올려도 손색없는 요리라 확신합니다.”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에 황후는 기가 막힌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이게 무슨…….”
“Quid est hoc?(이게 뭐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빵을 보고 있던 엘트라 사람들이 스푼으로 빵을 툭툭 두드렸다. 그런데, 난데없는 감탄이 터져 나왔다. 황후와 로웨나 황비도 놀라 빵을 내려다보았다.
빵 윗면을 걷어 내자 안에 뭉근한 수프가 들어 있었다. 매콤한 후추 냄새가 일품인 크림 수프였다. 미카엘도 빵 뚜껑을 열고 스푼으로 가볍게 내부를 저었다.
‘수프…… 라기엔.’
스튜에 가까울 정도로 건더기가 많았다. 엘트라의 사람들은 신기한 수프를 보며 껄껄 웃었다. 그리고 하나둘 스푼을 들고 맛보기 시작했다.
“호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고소하고 짭짜름한 국물. 푹 익은 베이컨은 입안에 넣자마자 스스로 풀어 헤쳐지듯 혀에 감겼는데, 반면에 브로콜리 등의 채소는 아삭아삭 씹히는 게 식감도 좋았다. 특히 식감이 좋은 건 옥수수였다. 깨물 때마다 톡, 톡 터지는데 약간 달아서 짭짤한 국물에 아주 잘 어울렸다.
“Delectamenti!(맛있어!)”
무엇보다 좋은 건, 수프에 푹 젖은 빵을 스푼으로 박박 긁어먹는 것이었다. 아예 뜯어 먹는 사람도 있는 것을 보면 빵 그릇이 아주 마음에 드는 듯했다.
* * *
난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성공이야.’
일전에 엘트라에 갔을 때 보니 이들에겐 우유가 몹시 귀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게 사시사철 여름과 가을의 중간쯤 되는 계절인 데다가 교통수단도 발달하지 않아서 우유를 유통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니 당연히 크림이나 치즈도 구하기 어려울 테고.’
빵 그릇을 생각하자마자 떠오른 게 빠네 파스타라서 크림 스튜와 잘 어울리겠다 싶었다. 황제는 맛있게 잘 먹는 사람들을 보고 껄껄 웃다가 나를 쳐다봤다.
“빵 그릇이라니. 신기하군. 네가 생각한 것이냐?”
“그렇습니다, 폐하.”
“어찌 이런 깜찍한 생각을 하였어.”
그가 아주 만족스럽다는 표정이라 함께 앉아 있던 할아버지와 아빠도 픽 실소를 흘렸다. 아탈란의 귀족들은 난감한 얼굴로 카렌듈라 후작을 힐끔거렸고, 카렌듈라는 후작은…….
‘아이고.’
아주아주 살벌한 표정이었다. 나는 황제의 눈치를 보며 조그맣게 말했다.
“힌트를 주신 분이 있습니다.”
“힌트?”
“제가 모시고 있는 황태자 전하께서 겉모습의 화려함보다는 정성과 마음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러 주셔서…… 식기에도 정성을 들이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황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으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프렌시프 공.”
“예, 폐하.”
“그대 딸은 참으로 영리하군. 아주 지혜로워.”
아빠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오히려 내가 부끄러워져서 허둥거렸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
“아니야, 마음을 다하랬다고 빵 그릇을 만들 생각은 누구도 못 할 것이다.”
그러더니 황제는 턱을 쓰다듬으며 “황태자라…….” 하고 중얼거렸다.
“황태자는 지금 어디에 있나.”
로웨나 황비가 황급히 말했다.
“제1황자궁에 계십니다.”
“안 본 지 오래됐군.”
그녀는 서운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예, 폐하. 그리 찾아 주지 않으시니 전하의 몸이 많이 나아졌다는 것도 모르시지요.”
“그래? 몸이 나아졌다고?”
호오, 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황제가 나를 쳐다봤다.
“영애가 볼 때도 몸이 좋아 보였나?”
“예, 폐하!”
나는 냉큼 대답했다.
“아들의 건강이 폐하의 심중을 어지럽힐 수 없다며 진료도 열심히 받으시고, 또 건강식 위주로 식사하시는 데다 운동도 꾸준히 하십니다.”
“그래? 웬일로 기특한 짓을 하였군.”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황제가 시종장을 불렀다.
“황태자를 데려와라.”
‘해냈어!’
나와 로웨나 황비는 시선을 맞추고 소리 없는 쾌재를 불렀다. 곧 부름을 받은 황태자가 도착했다. 부황 앞에 잠시 무릎을 꿇은 그가 다시 일어나며 허리를 깊게 굽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요새 제대로 마음을 먹었다더군. 프렌시프에게 좋은 조언도 해 주었고 말이야.”
“조언…….”
황태자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힐끔 쳐다봤다. 내가 입 모양으로 ‘그렇다고 하세요!’ 하고 말하자 그가 실소를 흘렸다.
“지나가듯 한 말을 조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프렌시프가 현명한 것이지요.”
그러자 황제를 비롯한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폐하.”
“이번 입관자들이 특히 인재가 많군요.”
“휘하에 인재를 둔 것도 황태자 전하의 복이지요.”
통역사들이 엘트라의 사신들에게도 말을 전했다. 대신관이라 불리는 노인도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물었다.
“대신관이 무어라 하는가.”
“과연 신의 권속이라 하셨고, 신이 권속을 내린 땅의 지배자가 부럽노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으하하! 부럽단 말이지!”
황제는 내내 웃었다. 내심 보그가 나는 땅을 부러워하던 황제는 그들의 말에 크게 흡족해하였다. 카렌듈라 후작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자 그 주변에 앉은 귀족들이 어색하게 웃었다.
“모든 일이 궁인 프렌시프의 공로만은 아니지요. 로열 키친 모두가 합심한 덕에 훌륭한 요리가 나온 게 아닙니까.”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로웨나 황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로웨나가 고생이 많았네.”
그러자 이번엔 황후의 얼굴이 매서워졌다. 수프가 나오고 이십여 분쯤 후. 무사히 식기를 들인 모양인지 요리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난 한숨을 내쉬고 만찬장을 빠져나왔다.
만찬이 끝난 후, 요리사들은 모두 기진맥진했다. 며칠 내내 고생한 데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다들 은밀히 식기를 구하러 다녔기 때문에 혼이 나간 얼굴이었다. 나는 아직 불 켜진 만찬장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황제와 황태자가 아직 남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잘되어야 할 텐데…….’
“네 덕분에 살았다.”
내내 내 편이 되어 준 요리사가 따뜻한 밀크티를 내밀며 말했다.
“빵 그릇이라니…… 재밌는 생각이네.”
그러자 고양이를 풀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남성 요리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냐?”
“선배는 또 무슨 말씀이세요. 프렌시프가 뭐하러 그런 짓을 해요.”
“그렇잖아. 어떻게 그 상황에서 빵 그릇 같은 절묘한 수를 생각해 내지? 혼자 튀기 위해 식기를 깨부순 것 아냐? 일부러 걸쇠를 헐렁하게 꽂아 두고 고양이가 들어오길 기다린 걸지도 모르지.”
요리사들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허……. 거봐, 내가 뭐랬어. 이렇게 고백하잖아. 그래도 양심은 있는 모양―”
“그게 아니라 걸쇠가 헐렁하게 꽂혀 있었다는 거요.”
“……뭐?”
나는 컵을 탁, 내려놓고 요리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 중 아무도 그걸 몰랐는데 가장 늦게 오신 선배님은 그걸 어떻게 아신 거예요?”
“그건…… 다, 당연한 거잖아! 고양이가 들어왔다는 건 걸쇠가 완벽하게 잠기지 않았기 때문이지!”
“잠그는 것을 잊고 있었을 수도 있지 않나요?”
그의 얼굴이 벌게졌다. 지친 얼굴로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아네모네궁 주방의 책임자 마피레온이 반쯤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프렌시프가 문단속을 했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거지?”
“그, 그건…….”
“넌 냉동고에 가야 한다고 휴식 전부터 주방에 없지 않았나. 세니아나가 말하는 것도 못 들었을 텐데.”
그러자 투덜거리던 요리사가 마른 침을 삼켰다.
“무슨…… 무슨 그런 말씀을……! 절 의심하시는 겁니까?!”
“단순한 물음이 의심으로 들릴 정도로 당혹스러운가 보지요?”
내 말에 그는 뻣뻣하게 굳어져 있다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당연한 추측이 아닙니까! 문단속은 막내들이 했겠죠!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가 문을 박차고 나섰다. 내 편을 들어준 요리사가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널 의심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 저 작자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아랫사람이 저보다 잘난 건 못 견디거든.”
나는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이며 그가 나선 방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 * *
아네모네궁을 나선 카리울은 씩씩거렸다.
‘망할 뻔했네.’
샤를리나를 위해 나선 일은 모두 허사가 되고, 도리어 제가 덤터기만 쓸 뻔했다.
‘빌어먹을 년.’
샤를리나의 말대로 세니아나 프렌시프는 보통 간사한 게 아니었다.
[제게…… 제가 여기서 믿을 분은 카리울 선배님뿐이에요. 로열 키친이 이렇게 무서운 곳일 줄이야…….]
어깨를 떨며 가련하게 울던 샤를리나가 떠오르자 카리울은 혀를 찼다. 하여간 계집애들은 아름답고 순수한 영혼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어쨌든 일이 허사가 되었다고 해도 내가 저를 위해 나서 준 게 있으니 샤를리나는…….’
그가 히죽 웃었다. 카렌듈라의 사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외모도 이 정도면 준수하고, 요리를 하느라 살이 조금 찌긴 했지만, 남자가 이 정도 풍채는 되어야 듬직한 법이었다. 로열 키친, 그것도 아발론에 소속된 요리사인 데다가 부친은 단승 작위이긴 해도 귀족이다.
‘샤를리나와 나는 어울리는 한 쌍이지.’
곧 제 여자가 될 샤를리나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날 의심한다고 징계를 줄 거야, 뭐야.’
문제 제기를 하는 순간 아네모네궁에 있던 일이 드러날 텐데. 제 명예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마피레온이 저를 징계할 수 있을 리 없다. 아발론에 돌아가서 샤를리나나 위로해 줘야지.
‘그리고 주말에 데이트 신청을 하면…….’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뒤쪽에서 바스락, 마른 풀이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카리울은 익숙한 인영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세니아나 프렌시프가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증거도 없는 주제에 따지러 온 거냐? 이거 정신 나갔군. 어디 새까만 후배가 선배를 똑바로 쳐다봐!”
그가 버럭 소리치며 허리를 짚었다.
“네가 후작 영애라고 궁 안에서도 영애님 소리를 들을 줄 알아? 여긴 지엄한 황궁이다. 신분보다 선후배 간의 서열이―”
“그러니까요.”
“뭐?”
“여기서는 선배 취급을 해 드릴 거예요.”
“알긴 하는 모양이군.”
“하지만 황궁 밖에선 아니죠.”
“……무, 무슨 소리를!”
세니아나는 그의 가슴에 걸린 휘장을 단번에 잡아 뜯었다.
“카리울 마커.”
“……!”
“최대한 오래 황궁에 계세요. 웬만하면 시종들 기숙사를 빌리는 게 좋을 거예요.”
“뭐, 뭐 하는 수작……!”
세니아나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내가 당신 이름.”
“…….”
“기억했으니까.”
세니아나는 휘장을 허공에 던졌다가 다시 받으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카리울은 그녀가 떠난 후에도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져 있었다.
‘비, 빌어먹을 년!’
감히 선배를 협박해?! 제가 아무리 후작가의 영애라도 선배에게 이럴 수는 없다. 그는 당장에 본주방으로 향하려다 멈칫했다.
‘이러다 프렌시프가 쫓겨나면 이젠 후배가 아니니까 날…….’
낮게 가라앉은 세니아나의 눈빛을 떠올리면 어쩐지 숨이 턱 막혀왔다. 아니다. 자신은 로열 키친의 요리사다. 후작가라고 해서 황제 폐하의 궁인을 해칠 수는 없다. 그가 다시 본주방을 향해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휙! 바람이 부는가 싶었는데 목덜미에 격렬한 통증이 일었다.
“누, 누구……!”
“죽고 싶으면 소리 질러.”
“……!”
익숙한 목소리였다.
‘도, 도미니크 황자?’
동부 아카데미에 있어야 할 그가 어떻게……!
도미니크는 카리울의 목덜미를 찍어누른 채 조용히 읊조렸다.
“내가 지금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아.”
“저, 저하…….”
“내 애인이 요새 바빠서 연락도 잘 받지 않거든. 그런데 찢어 죽일 개새끼까지 내 애인 근처에서 짖어 대니 기분이 좋을 리 없겠지?”
카리울은 벌벌 떨며 “예, 예……!”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너는 하필이면 지금, 하필이면 내가 기분이 더러울 때 걸려서 손목이 부러지는 거야.”
“저, 저하, 저― 끄아악!”
어둠이 낮게 가라앉은 황궁 안에 소름 끼치는 비명이 메아리쳤다.
이튿날, 새벽. 아네모네궁의 뒷정리를 하던 나는 이상한 소식을 듣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 선배님 손목이 부러졌다고요?”
함께 정리하던 기수 낮은 어린 요리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패악을 부리고 가더니 자빠져서 손목이 뚝 부러졌다던 걸.”
그러자 내 바로 위의 기수인 남성 요리사가 킬킬거렸다.
“어찌나 엉망으로 부러졌는지 뼈가 붙어도 팬 잡기 쉽지 않을 거래요.”
“신이 있었던 거지. 아직 세상은 살 만해.”
내가 처리할 것 없이 손목이 분질러졌다면 좋은 일이지만…….
‘타이밍이 너무 좋네.’
나는 무슨 조화일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 가리지 않고 원망을 사던 작자이니 나 말고도 노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어쨌거나 나한테는 좋은 일인 데다가 내일부터 휴가였다! 황제는 만찬을 몹시 흡족해해서 예정된 이틀의 휴가 외에 사흘을 추가해 무려 닷새나! 쉴 수 있게 되었다.
빌려온 식기를 반질반질하게 닦아서 돌려주고, 아네모네궁 주방 바닥을 먼지 한 올 없이 싹 쓸고 닦았다. 확인하러 온 선배 요리사가 “이 정도면 요리사가 아니라 청소부로 취직해도 되겠는걸.” 하며 칭찬해서 뿌듯했다.
궁을 나서자 프렌시프의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나온 선배 요리사들은 아주아주 질 좋은 나무로 만든 거대한 마차를 보고 기함했다.
“무슨 마차가…….”
“세상에, 황궁 마차 같네. 황제 폐하라도 타시는 줄 알겠어.”
“너, 너희 집 마차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정확하게는 저희 집 마차가 아니고…….”
“설마 네 마차야?”
대답을 못 하고 눈을 허공으로 도르륵 굴렸다. 저 마차는 내 입관식 전날에 할아버지가 난데없이 끌고 온 마차였다.
[황궁에서 일하면 결계 때문에 포털은 못 쓰겠지.]
[그렇긴 한데…… 할아버지, 이게 뭐예요?]
[뭐긴. 네 출퇴근을 맡아 줄 마차다.]
고가의 자작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연한 베이비 핑크색 마차는 앞, 뒤, 좌, 우, 사면에 모두 프렌시프의 문장이 들어가 있었다. 그 근처로 청녹색 마법석과 투명한 마법석, 짙은 자주색 마법석이 눈꽃 모양으로 펼쳐져 내구성을 높이고, 보온과 냉방 기기를 대신했다.
선배 요리사들은 몇 차례나 탄성을 흘리며 마차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금수저가 좋긴 좋구나…….”
“빌어먹을, 나는 말도 없어서 황궁 밖까지 걸어가야 하는데.”
내 마차를 둘러보던 선배 요리사가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외제지?”
“글쎄요…….”
“그…… 저기 말이야. 안도 구경해도 되나? 내가 마차를 워낙에 좋아해서.”
“네, 괜찮아요.”
선배들은 펄쩍펄쩍 뛰며 안을 구경했다.
“세상에 내부 좀 봐. 엄청나게 고급스럽잖아!”
“대박, 마차 안에 테이블이…… 이거 달리면 쓰러지는 거 아니냐.”
“바닥에 고정되어 있잖아. 아아앗! 문을 닫으니까 천장을 투명하게 만들 수 있어!”
얼굴이 벌게져서 마차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프렌시프 저가 황궁에서 얼마나 걸리기에 이런 좋은 마차를……. 이 근처에 있는 저택은 본저가 아닌 모양이지? 얼마나 더 가야 너 사는 곳이 나오는 거야?”
“……이 근처에 있는 저택이 본저가 맞아요. 거기 살아요.”
선배는 당황한 얼굴로 담 넘어 보이는 프렌시프 저택을 바라보았다.
“저기가 그러니까 두 시간쯤 걸렸나?”
“…….”
“한 시간?”
“이, 이십 분…….”
“아……. 그…… 가족들이 너를 몹시 아끼나 보네…….”
나는 새빨개져서 손만 꼼지락거렸다. 이래서 웬만하면 황궁 안으로 들어오지 말랬는데!
“저기…… 괜찮으시면 다 함께 타고 나가시는 게…… 어차피 검문소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만…….”
내가 웅얼웅얼 말하자 선배들이 “물론!” 하며 소리쳤다.
“우리야 고맙지!”
“언제 이런 걸 타 보겠어?”
막내가 벌써부터 이런 마차를 탄다고 싫어할 줄 알았는데, 선배들은 크게 기뻐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들과 함께 궁을 빠져나갔다.
“아아, 따뜻해~!”
“그러니까 말은 그만 좀 타고 다니시라니까요. 겨울엔 사람 죽겠어요.”
“타고 싶어서 타냐. 집이 멀어서 타지. 으으.”
얘기를 듣던 난 어리둥절할 표정으로 선배를 쳐다봤다.
“그럼 황궁 내 궁인 숙소에서 지내면 되지 않나요?”
“네, 선배님. 저야 집이 가까워서 입·출궁이 어렵지 않지만, 선배님은 좀 숙소에 들어가세요. 2급 요리사부터는 고위직이라 들어가지도 못할 텐데 아직 직급이 낮을 때 숙소에서 한 번 지내보는 거죠.”
급?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게 뭔가요?”
선배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막내 요리사가 5급. 일반 요리사들이 4급. 요리사들끼리 이루는 조의 조장이 3급. 각 궁의 주방장들이 2급이었다.
‘1급은 오직 로열 셰프라고…….’
내가 이해한 게 맞는지 묻자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5, 4급 요리사는 일반 궁인들의 요리를 하고, 3급은 고위 궁인. 그러니까 기사단장이라든지 고위 행정관의 요리를 하지. 2급부터는 황족과 귀족의 요리만 해.”
“그럼 4급까지는 귀족의 요리를 못하나요?”
“그래. 막내들에겐 아네모네궁이 특별한 경우인 거야. 그리고 아발론(황제의 궁)에 배속되면 실적을 쌓을 필요 없이 3급이 되지.”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요리사가 말을 보탰다.
“3급까지 되려면 적어도 5년은 걸려서 다들 아발론에 들어가려고 안달인 거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검문소를 넘어 궁 밖이었다. 나는 나온 김에 선배들을 집 앞까지 데려다준 후,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에 들어온 후에는 입관할 적에 받은 안내를 보았다.
‘일이 너무 많아서 안내서 볼 시간도 없었어.’
읽었다면 각 급의 요리사들이 뭘 하는지 미리 알았을 텐데.
안내서를 읽고 중요한 부분을 외우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가물가물한 눈을 비비며 방을 나섰다. 비척비척 걷고 있으니 뒤에서 “어이쿠.” 소리가 들렸다.
“넘어지시겠습니다, 아가씨.”
아가씨래서 하인인 줄 알았더니 란슬롯이었다. 그가 비틀거리는 나를 잡고 빙그레 미소지었다.
“오빠.”
“피곤하면 푹 쉬어도 되는데.”
“네, 물 한 잔 마시고 씻은 다음에…….”
그러자 란슬롯이 지나는 하녀를 불러 물을 가져오게 했다. 나는 소거실 소파에 앉아서 찬물을 꼴깍꼴깍 마셨다. 너무 피곤해서 물을 마셨는데도 졸음이 전혀 가시지 않았다. 하품을 쩍쩍하고 있으니 어느새 가웨인과 아빠가 소거실에 들어왔다. 가웨인이 자꾸만 떨어지려는 내 고개를 붙들고 쯧, 혀를 찼다.
“이럴 거면 황궁이고 뭐고 다 때려치워.”
“……무슨 그런 말씀을.”
“다 죽어 가잖아.”
“이제 자면 괜찮아질…….”
말도 맺지 못하고 소파 등받이에 기대 웅얼거렸다. 정신이 멀어지던 찰나,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제가 안겠습니다, 아버님.”
“아니요, 제가.”
오빠들의 목소리와―
“됐어. 내가 한다.”
아빠의 목소리가 꿈 안에 스며들었다. 나는 머리를 넘기는 다정한 손길이 좋아서 품에 얼굴을 비볐다.
“이게 강아지지 뭐야.”
가웨인이 픽 웃으며 내 눈가를 살짝 문질렀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여기는 아빠의 침실이잖아.’
나는 두툼하고 검은 이불을 들치다가 문득 시계를 보았다.
“하루가…… 사라졌어?”
오후 네 시. 점심 먹을 시간도 훌쩍 지났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이불을 꼭 끌어안았다.
‘소중한 휴가가―!’
오늘은 책도 읽고, 영지에도 잠깐 다녀오려고 했는데. 계획이 틀어지니 우울해져서 아빠의 이불에 얼굴을 묻고 버둥거렸다.
“몸이 불편한가.”
구석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퍼뜩 들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아빠가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서류를 보고 계셨다.
“아니요…….”
“그럼?”
“하루가 아까워서요.”
아빠는 픽 웃고 내게 다가왔다.
“낮잠 자는 걸 제일 좋아한다면서?”
나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그렇기야 하지? 휴가가 닷새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아까워서 잊고 있었나. 나는 취미도 특기도 숙면이었다. 특히 햇살 좋은 오후에 선생님과 딱 달라붙어 자는 걸 몹시 좋아했다.
‘그럼 뭐, 오늘은 취미 생활을 한걸로.’
나는 이불 속에서 뒹굴뒹굴하며 헤헤 웃었다.
“아빠 냄새나요.”
“무슨 냄새기에.”
“가을 햇볕 냄새요.”
아빠는 내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뜨렸다.
“계절 햇볕 냄새도 구분하는군. 가웨인의 말이 맞나.”
[이게 강아지지 뭐야.]
개 코라는 걸까.
나는 킥킥 웃으며 아빠의 손길을 받았다. 이불 안은 따끈따끈하고, 아빠의 손길은 아주아주 다정해서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삼십 분쯤 뒹굴거리다가 배가 고파져서 아빠와 함께 방을 나섰다. 어제 파자마 차림으로 안내서를 읽은 데다 씻지도 않고 자서 꼴이 후줄근했다.
“먼저 가세요. 저는 씻고 온실로 갈게…… 요?”
난 복도 앞에서 마주친 인영을 보고 깜짝 놀라 말을 잃었다.
“영애.”
“저, 저하?!”
도미니크가 왜 우리 집에 있지?
그는 빙그레 웃으며 “사신의 안내를 맡았습니다.” 하고 말했다.
“엘트라의……?”
“예.”
“아, 그렇…….”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내 꼴을 보고 헉 숨을 들이켰다. 나 지금 잠옷 차림인데! 씻지도 않고 자서 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진 데다 눈곱이 잔뜩 끼어 있을 거다. 난 허둥지둥하며 아빠의 뒤에 숨었다.
“제, 제가 맨날 이런 차림으로 있는 건 아니고…… 오늘은 특별한 경우…… 그러니까, 그러니까!”
“피곤하셔서.”
“네!”
이래서 남자친구는 오기 전에 연락을 해 주는 게 좋은 건가 봐. 나는 울상을 짓고서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씻고 올게요…….”
“예.”
아빠가 묘한 눈으로 나와 도미니크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 “안 씻어도 귀여워.” 하고 못마땅하게 말했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귀여운 법이랬다고.’
고슴도치는 진짜로 귀엽지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슴도치 아빠를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후다닥 뛰어갔다. 정신없이 씻고, 준비해서 내려가자 응접실에 가족들과 도미니크가 모여 있었다. 삐딱하게 앉아 있던 가웨인은 나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뭐야, 그 드레스는.”
“그냥 드레스인데요.”
집안에서 입기엔 좀 화려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남자친구인걸!’
도미니크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가 입 모양으로 ‘예쁘네요.’ 하고 말했다.
* * *
응접실 한구석에 서 있던 알베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좋아 죽는군.’
아침부터 일어나 운동을 하더니만.
약간 마른 몸에 꼭 맞는 재킷 위로도 꽉 조여진 등이 보일 듯하였다. 졸지에 비밀 연애에 끼여 아침부터 운동 상대로 개고생을 한 알베르는 심기가 매우 좋지 않았다.
‘그냥 여기서 둘이 사귄다고 밝히고 도망쳐 버려?’
그러면 손녀, 딸, 동생의 일에 비이성적인 프렌시프의 남자들이 세니아나를 저 먼 땅끝에 숨겨 둘지도 모른다. 그런 상상을 하며 비열하게 입꼬리를 올리던 알베르가 뚝 미소를 거두었다. 상상 끝엔 도미니크에게 얻어맞아 곤죽이 된 자신이 있었다.
도미니크와 세니아나의 시선이 달콤하게 얽혀들자 가웨인이 날카롭게 분위기를 끊어 냈다.
“그래서 저하께선 누굴 데려오신 겁니까.”
란슬롯도 웃으며 끼어들었지만, 눈은 아주 차갑다.
“예. 직접 오신 걸 보면 꽤 높은 대관 고작일 테죠?”
아니면 죽여 버리겠다는 목소리라 도미니크는 픽 웃었다. 예상은 했지만, 가드가 만만치 않다.
“그렇습니다.”
나베리우스가 물었다.
“누굽니까.”
“엘트라의 사신단 총괄이 여신의 권속을 만나 뵙고 싶다 청하였습니다.”
“사신단 총괄이라면 대신관을 이르십니까.”
“아니요. 대신관이 아니라……!”
그때였다. 누군가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Dea!” 소리쳤다. 도미니크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저 새끼가.’
오늘 프렌시프 저를 찾겠다고 억지를 부린 사람은 엘트라의 왕자, 트리스탄이었다. 황제는 황궁에서 단둘이 자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는데 도미니크는 일부러 그를 프렌시프 저로 안내하겠다고 청했다.
“뭐야, 저 새낀.”
“가웨인, 입조심해라.”
“형은 저게 마음에 들어? 왜 항상 남자가 붙냐고.”
“…….”
저보다 더 확실히 방어해 줄 남자가 넷이나 있었으니까.
트리스탄을 본 세니아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다가 “어……?!” 소리쳤다.
“어어……?!”
그녀가 눈을 홉뜨자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나베리우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엘트라의 공주?”
그러자 가웨인은 눈이 삔 게 아니냐는 듯 제 조부를 보며 말했다.
“저게 어떻게 공주입니까. 징그러운 사내놈인…… 설마.”
란슬롯은 벌써 눈치를 채고 싸늘한 눈빛으로 트리스탄을 쏘아보았다. 세니아나가 만났다던 엘트라의 공주. 지금은 전혀 공주로 보이지 않는 저 자인 게 틀림없었다. 세니아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 * *
이게 뭐람! 내가 알던 트리스탄은 아주 고운 공주님인데 이 트리스탄은…….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공주 트리스탄과 이 사람은 동일인인 것처럼 똑 닮았는데 이전과 달리 남자로 보였다.
“트리스탄…… 맞아?”
“응!”
“어떻게…… 공주가 아니었어?”
“공주, 라고, 한 적, 없는걸.”
그가 부루퉁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나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예뻐서 오해하고 있었다. 남자였구나.
‘그런데 원래 엘트라 사람들은 이렇게 빨리 자라는 건가?’
작았던 공주님이 일 년도 지나지 않아서 나보다 한 뼘은 더 큰 왕자님이 되었다.
“보고, 싶었어, 여신.”
어눌한 발음으로 말한 그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떨어져!”
“떨어졋!”
“떨어져라!”
“떨어지시오!”
“떨어지십시오!”
순간 사방에서 고함이 날아들었다. 트리스탄은 나를 끌어안은 채 쯧, 혀를 찼다.
“귀찮은 것들이 늘었잖아.”
……아주 멀쩡한 발음이었다.
“왕자.”
문을 넘어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난 눈을 크게 떴다.
“아―!”
대륙어를 할 줄 알던 트리스탄의 시종 마그누스였다. 그는 왕자를 보며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떨어지십시오.”
트리스탄은 다시 한 번 쯧, 혀를 차더니 떨어졌다. 그러고 나서 날 보고 생글생글 웃었다.
“오랜만, 여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으응.” 하고 말했다.
“아까 되게 유창하게 말했던 것 같은데…….”
“나, 잘한다, 말.”
그 애는 정말로 해맑게 웃었다. 난 잘못 들었나 싶어서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인 줄 몰랐어. 아니, 몰랐어요.”
이제 우리 말도 잘하는 타국의 왕족에게 반말은 안 될 것 같아서 공대를 쓰자 트리스탄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썹을 늘어뜨렸다.
“친하지, 않아, 나?”
“응?”
“좋아하는 사이, 말 편하게.”
여기선 좋아하는 사이끼리 반말을 한다는 뜻일까.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하지만…….” 하고 말했다. 트리스탄이 활짝 웃으며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몇 개의 손이 나를 홱! 끌어당겼다. 란슬롯과 가웨인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트리스탄을 쏘아보았다.
“무례하십니다.”
“아주.”
오빠들의 말에 트리스탄은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어째서?”
그러자 마그누스가 다가왔다.
“이 나라에선 왕자와의 접촉이 영광이 아닙니다.”
“흐음, 이상하네.”
고개를 모로 꼰 채 우리 가족과 도미니크를 바라보던 그가 히죽 웃었다.
“그럼, 내가 영광.”
내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춘 그는 사르르 녹을 것만 같이 달콤하게 미소지었다.
* * *
카렌듈라 후작이 거칠게 황후궁 온실 문을 열었다. 황후는 테이블에 앉아 손마디가 하얗게 셀 때까지 찻잔을 꽉 붙들고 있었다. 그녀가 부친을 보자마자 바닥에 찻잔을 내던졌다. 카렌듈라 후작의 얼굴이 노기로 일그러졌다.
“대체 넌 무엇 하는 계집이야!”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아버님은 이때껏 무얼 하셨습니까!”
아네모네궁 만찬 후, 황제는 황태자에게 사신 접대를 일임했다. 미카엘과 황후가 심혈을 기울이던 접대가 한순간에 황태자의 손에 떨어졌단 말이다. 게다가 엘트라 사신의 총책임자이자 엘트라 신전의 비호로 왕보다 더한 권력을 쥐었다는 그들의 왕자, 트리스탄이 프렌시프 저로 향했다.
“그까짓 애새끼 하나 구슬리지 못해?!”
“아버님의 귀한 성녀 딸이 제대로 했다면 달랐을 테지요!”
“그라니아!”
“그만, 그만! 그만 좀!”
황후가 양 귀를 막고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내가 그라니아 카렌듈라였던 것은 이십 년도 더 지난 일이었어요! 나는 황훕니다. 이 나라의 국모예요! 언제까지 나를 종 부리듯 할 거야!”
일이 모조리 틀어졌다. 인장을 빼앗기고 유폐되듯 황후궁에 처박혀 원수 같은 로웨나와 황태자가 승승장구하는 꼴만 보고 있었다. 모두가 세니아나 프렌시프가 가져온 작은 날갯짓 때문이었다. 날갯짓이 폭풍이 되어 저와 제 아들을 짓눌렀다.
“처음부터 세니아나 프렌시프를 택해야 한다고 말했잖아……. 내가 그랬잖아…….”
눈이 쑥 꺼져 음험하게 중얼거리는 딸을 본 후작이 미간을 좁혔다.
“너……!”
“내가 분명히…… 왜 내 말을 안 듣고…… 나는 당신 노예가 아닌데…… 그런데…….”
“그라니아?”
후작은 완전히 무너진 표정의 딸을 붙들었다.
“너 성식을 얼마나 먹은 거냐.”
그라니아는 초점 없는 눈빛으로 제 부친을 쳐다보았다. 후작이 급히 황후의 소매를 밀어붙였다. 팔꿈치 아래로 검은 반점이 내려오고 있었다.
“멍청한 것! 일정량 이상은 섭취해선 안 된다고 내 그리―!”
“성식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합니다. 다 아버님 때문이에요. 아버님이…….”
지금껏 쌓아 온 것에 균열이 생기자 그라니아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루에도 열댓 번씩 울화가 치밀어 숨 쉬는 것마저 편치 않았다. 하지만 성식을 먹으면 다르다. 거짓말처럼 차분해지고, 원망만이 가득한 마음에 희망이 차올랐다. 처음엔 음식에 조금 넣어 먹던 것을 차에도 넣기 시작했고, 그 후엔 병째로 퍼먹었다.
“그라니아, 너……! 당장 성식 섭취를 중단해라. 이러다 불사의 몸이 되기는커녕 삿된 자가 될 거야.”
“…….”
황후가 축 늘어지자 시녀장이 급히 달려왔다. 후작과 시녀장은 황후를 부축해 침대에 눕히고, 정신을 잃듯 잠든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얼마나 먹은 게냐.”
“반병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섭취량이 급격히 늘어나 정신이 혼미하신 것뿐, 일어나시면 본래대로 현명한 판단을 내리실 겁니다.”
“잘 살펴야 할 것이다.”
“예.”
후작이 황후의 침실을 나섰다. 문밖에 서 있던 샤를리나가 그를 쳐다봤다.
“언니는 괜찮으신가요?”
“대사제에게 전해라. 그라니아에게 성식을 보내는 것을 중단하라고.”
“네…….”
“그리고 너는 나와 함께 나서야겠다.”
“어디로……?”
후작이 쯧, 혀를 찼다.
“엘트라의 이들이 성녀를 여신의 권속이라 믿으니 그들 앞에서 세니아나 프렌시프보다 네가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야지.”
“하면…….”
“프렌시프 저로 간다.”
샤를리나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그의 뒤를 쫓았다.
* * *
트리스탄과 마주 앉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의 핏줄은 원래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는 거라고요?”
그들의 말로는 마치 애벌레가 나비로 성장하듯 우화 하는 거라고 했는데, 나는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그런 게 가능해?’
내가 눈을 끔뻑거리자 마그누스가 말했다.
“성화(聖化)의 기적이 발현된 건 오백 년 만이지요. 엘트라의 모두가 왕자의 성화를 기뻐하고 있습니다.”
“트리스탄…… 굉장하구나.”
나는 트리스탄을 보고 짝짝, 손뼉을 쳤다. 그러자 그가 활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반지를 맞춰. 지금!”
“네?”
마그누스는 한숨을 내쉬며 트리스탄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이 나라에서 굉장하다는 말은 프러포즈가 아닙니다.”
프, 프러포즈?
가족들과 도미니크가 왈칵 표정을 구기고 트리스탄을 노려봤다.
“프러포즈는 무슨!”
“예의상의 칭찬일 뿐입니다.”
트리스탄이 흥, 하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나는 좋아.”
“네?”
“세니안, 결혼하고 싶다, 생각해. 나랑.”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왕자와 하자고요?”
“응!”
그러자 양쪽에서 “아니야!” 하는 고함이 들려서 난 한숨을 삼켰다. 도무지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문이 급히 열리고 마일로가 들어왔다. 아빠가 굳은 얼굴의 그를 보고 물었다.
“무슨 일이냐.”
“카렌듈라 공을 비롯한 금좌들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이 왜.”
마일로가 아빠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사신단의 총책임자’, ‘사사로이’, ‘항의’ 등의 단어가 오가는 것이 조그맣게 들렸다.
‘사신단의 총책임자가 사사롭게 귀족 저를 찾은 것에 항의했고, 황제가 저들을 보내서 다시 데려오라 했나 보다.’
아빠가 얼굴을 구기는 것으로 내 추측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대문 앞에 마차 행렬이 있는데 어찌 처리할까요.”
“들여라.”
“예.”
마일로는 다시 문을 나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얼굴의 사람들을 데려왔다. 카렌듈라 후작과 새로운 금좌라는 몇 명의 사내, 엘트라 사신들, 그리고…….
“샤를리나.”
“여기서 보니 더 반갑네요, 세니아나.”
사람들이 워낙에 많이 모여서 우리는 파티용의 더 큰 응접실, 유리관으로 이동했다. 유리관의 커다란 테이블 앞에 둘러앉자마자 날카로운 말이 오갔다.
“타국의 왕족을 사사롭게 저택에 초청한 이유가 뭡니까, 프렌시프 공.”
“말이 이상하군. 초청이 아니라 요청이지. 내 집을 구경하고 싶다는.”
“왕자, 타국에서 마음대로 행동하시면 곤란합니다. 마그누스, 이놈! 왕자의 고집을 마냥 다 들어 주면 어찌해!”
“송구합니다.”
난 그 속에서 샤를리나와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샤를리나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마셔요. 듣자 하니 왕자님께서 프렌시프 영애와 인연이었던 것 같더군요.”
그녀는 생긋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고향이 그리워 친분 있는 영애를 찾으셨을 수도 있지 않나요. 아직 어리신 왕자님이시니.”
“흐음…….”
샤를리나가 트리스탄에게 살갑게 말을 붙였다.
“왕자님, 고향이 그리우시면 잠시 돌려보내 드릴까요.”
“네가, 나를?”
“예, 내일 아침 다시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러자 카렌듈라와 함께 온 귀족들과 엘트라의 사신단이 놀라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 먼 곳에 짧은 시간 동안 몇 번이나 오가실 수 있으십니까?”
“호오……. 길라게온의 성녀님은 대단하시군.”
샤를리나는 부끄러운 척 고개를 숙였다가 트리스탄과 시선을 맞췄다.
“어떠신가요, 왕자님?”
트리스탄은 삐딱하게 앉은 채로 한쪽 눈을 찌푸렸다.
“마그누스.”
“예, 왕자.”
“저 여자, 기분 나쁜 냄새, 치워.”
그러자 우리 가족과 도미니크를 제외한 사람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와, 왕자님! 어찌 그런……!”
금좌들이 소리치자 엘트라의 사신들도 곤란한 얼굴로 트리스탄을 말렸다.
“왕자, 그런 말씀은…….”
“저 계집에게 내 앞에서 입을 열라 허락한 적 없는걸.”
트리스탄의 말에 샤를리나는 치맛자락을 꾹 쥔 채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불편한 기색을 보고도 여상하게 중얼거렸다.
“내 앞에서 힘자랑이라도 하려고? 하면 멋대로 나를 휘두를 수 있을 줄 알았어? 길라게온의 성녀는 간사하다.”
“왕자님,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트리스탄은 흥, 코웃음을 치고 내 손을 살짝 잡았다.
“기분 나빠, 나 돌아가.”
기분 나빠서 돌아가겠다고? 나는 다시 어눌해진 발음의 트리스탄을 의아하게 보다가, “아……, 네.” 하고 대답했다.
“여신, 배웅해, 나.”
“배웅해 달라고요?”
“응!”
나는 좀 감탄했다.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하는 데도 엘트라의 사신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만 내쉬었다.
‘신의 혈통이라더니 대단하다…….’
트리스탄이 돌아가겠다고 하자 항의를 위해 온 귀족들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나와 사람들은 그를 배웅하기 위해 유리관을 나섰다.
“그럼 왕자님,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내가 말하자 트리스탄이 활짝 웃었다. 그리고……. 촉! 간지러운 것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또 보게 될 거야.”
나는 당황해서 뺨을 문질렀고, 트리스탄은 “아, 그렇지.” 하며 마그누스를 돌아봤다.
“그건?”
“가져왔습니다.”
“여신, 여신.”
나를 부르기에 “네?” 대답하니 그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재회의 선물을 가져왔어.”
“선물……?”
마그누스가 마차 앞에 정렬해 있던 엘트라의 종들에게 눈짓했다. 그들은 마차 안에서 상자를 몇 개씩 꺼냈다. 상자를 열자 사람들이 모두 기함했다. 나마저 놀란 얼굴로 트리스탄을 보았다.
“여신은 잡초를 좋아하니까.”
“이, 이렇게 많이요?!”
열댓 개가 넘는 상자 안에 보그가 가득했다! 일전에 할아버지와 함께 엘트라로 가서 받아온 양보다 더 많은 보그. 카렌듈라와 금좌들이 굳은 얼굴로 보그 상자와 나, 그리고 트리스탄을 바라보았다.
“왕자님, 이건 아직 폐하와 상의 안 된……!”
“내 것을 선물하는데 어째서 너희 황제의 허락이 필요하지?”
“그, 그렇지만…….”
“이곳 사람들 이상해. 기분 나빠. 돌아갈래.”
트리스탄이 홱 등을 돌렸다. 마차에 탄 그가 창을 조금 열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벼락같은 소란을 투하하고 사라지는 그를 보며 말을 잃었다.
‘저번에 가져온 보그를 돈으로 따지면 국가 예산 정도랬으니까…… 그럼 저건…….’
난 무서워져서 생각하길 포기했다. 프렌시프의 사람들은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헹가래라도 칠 기세라 난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엘트라의 사신들이 트리스탄의 마차를 뒤쫓아 떠나고 우리 집엔 카렌듈라와 금좌들이 남았다. 금좌들은 마른침을 삼키고 번쩍번쩍 빛나는 보그를 쳐다봤다.
“저게 다 얼맙니까…….”
“쉿.”
누군가 카렌듈라 후작의 눈치를 보며 검지로 입을 눌렀다. 카렌듈라 후작은 싸늘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프렌시프는 자식을 잘 두어 앞으로 걱정이 없겠어.”
할아버지는 입매를 비틀며 동의했다.
“그렇지.”
빈정거리는 것 같았는데 냉큼 대답하자 카렌듈라 후작의 얼굴이 더욱 차가워졌다.
“대단도 하군.”
“맞네.”
“하지만 폐하께서 보시면 그리 좋아하시진 않을 광경이야.”
“왕자의 말이 틀린 게 없지. 내 손녀가 좋아서 선물한 것인데 뭐 문제가 있나?”
“…….”
후작과 할아버지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얽혀들었다. 할아버지는 입꼬리를 바짝 올리며 말했다.
“세니아나.”
나와 샤를리나가 동시에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
왜 나를 부르는데 샤를리나가 반응하지? 난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보았고,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할아버지는 내 손을 다정히 잡으며 물었다.
“저것은 네 것이지.”
“네…….”
“욕심내지 않을 테니 뭐든 원하는 대로 하려무나. 길거리에 뿌리고, 네가 원하는 사람에게 쥐여 준다고 해도 우리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금좌들의 눈이 번쩍했다. 나를 보고 “여, 영애!” 하며 부르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마른 침을 삼키는 이들도 있었다.
* * *
카렌듈라 후작이 “영악한 늙은이.” 하고 중얼거리며 마차에 올랐다. 샤를리나는 잠깐 뒤를 돌아봤다. 프렌시프의 사람들이 모두 세니아나를 보며 다정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왜.’
어째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이유로, 대체 왜! 내게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눈빛을 저 애에겐 보이는 것일까.
‘내가 진짜인데.’
필요 없어져 버렸던 것이 다시 탐나기 시작했다. 세니아나 프렌시프의 이름이.
카렌듈라 후작과 함께 마차에 탄 샤를리나는 돌아가는 내내 표정이 없었다.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후작이 사납게 읊조렸다.
“쓸모없는 것.”
“…….”
“고작 열일곱짜리에게 마음을 그리 훤히 들켜! 네 힘을 증명하라 했지 언제 과시하라 했더냐! 저 많은 보그를 빼앗겼으니 이제…… 빌어먹을!”
“……겠습니다.”
“뭐?”
“가야겠습니다.”
샤를리나는 말릴 새도 없이 포털을 열어 목적지로 이동했다. 짙푸른 휘장이 드리운 신전 안에 이른 그녀를 보고 로브를 걸친 자들이 급히 다가왔다.
“성녀님, 어찌 이런 시각에…….”
“성녀님, 성녀님!”
샤를리나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곧장 신단으로 향했다. 중앙에 커다란 십자 단상이 있고 그 주변으로 연결된 조그만 원형 단상이 다섯 개. 샤를리나는 십자 단상 위로 향한 뒤 중앙에 놓인 검은 구슬을 손에 올렸다.
“성녀님!”
찢어지는 듯한 고함이 들리고, 성기사들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성기사들이 순식간에 그녀의 몸을 제압하였으나 샤를리나는 구슬을 쥔 채로 몸을 버둥거렸다. 희게 질린 사제가 소리쳤다.
“조심해라! 성구(聖球)가 깨져선 안 돼!”
성기사들이 “성녀님! 제발―!” 하고 그녀를 불렀다.
“놔! 이거 놓으라고! 삿된 자를 불러들여서 다시 몸을, 내 몸을 되찾아야 해!”
그때였다.
“뭐 하는 짓이야!”
벼락같은 고함과 함께 흰 로브를 뒤집어쓴 대사제가 신단에 등장했다. 그는 노기가 가득한 얼굴로 십자 단상에 올라 샤를리나의 뺨을 내리쳤다. 짝!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샤를리나의 얼굴이 돌아갔다.
“주제도 모르는 년이. 이게 무엇인 줄 알고―.”
“날 때렸어……? 감히, 감히!”
“비천한 것을 거두어 성녀로 만들어 주었더니 어디서 이따위 짓이야! 프렌시프 성녀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려 봐라. 당장에 네년 목을 분질러 버릴 테니.”
성구를 빼앗은 대사제가 쯧, 혀를 찼다.
“왜요! 그 애는 제물이고 내가 진정한 성녀라고 했잖아요!”
샤를리나는 눈물을 터뜨리며 주저앉았다.
“다 했잖아요. 시키는 대로 다! 전부! 화를 죽이래서 죽이고! 지혜롭게 대처하래서 그 계집애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자꾸…… 그 계집애는 자꾸 내 것을 빼앗잖아…….”
억울하고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 * *
샤를리나의 모친, 마리는 열넷 무렵에 프렌시프의 사용인이 되었다. 그녀는 주인의 외아들인 아서 프렌시프와 마주친 날은 잊지 못했다.
[이 꽃, 네가 가져다 놓았나.]
[아……. 그, 그렇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얼른 치, 치우겠…….]
[그냥 둬.]
[네?]
[향이 좋아.]
매사 무심하던 도련님이 꽃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을 때, 그는 그녀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되었다. 나이 든 아서는 두 번이나 웨딩 마치를 들었다. 마리는 란슬롯의 모친, 또 가웨인의 모친을 모셔야 했는데, 그녀는 언제나 들끓는 살의를 눌러 참아야 했다.
‘피아노만 두드리는 이 여자는 도련님과 어울리지 않아.’
‘성정이 불같은 게 도련님과는 상극이야.’
‘집안의 격이 맞다는 이유만으로 도련님을, 나의 아서를 차지하고…….’
‘아서는 내 것인데.’
내 것인데.
부모의 닦달에 비슷한 신분의 사용인 마부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후에도 그녀는 오직 아서만을 사랑했다. 그와 맺어질 수 없는 신분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그가 대륙 전쟁 이후, 프렌시프 성에 미아라는 여자를 데려오기 전까지.
[결혼할 겁니다.]
[정신 나간 놈! 그냥 평민이라도 기함할 노릇인데, 그 여자는 아탈란의 신관이었어!]
말도 안 돼. 평민이라고? 그것도 아탈란의 신관?
나베리우스와 대화를 마치고 나오는 아서를 뒤쫓았다.
[도련님!]
[누구……?]
[저, 저를 기억 못 하세요? 마리예요! 예전에 제가 드린 꽃을 좋아하셨는데…… 그, 그리고 도련님 정복에 수놓았던 적도 있고 또…… 아니, 그보다!]
마리는 두 손을 꼭 맞잡고 아서를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그런 여자와 결혼을…… 말도 안 되잖아요. 도련님이 왜 그깟 계집을 아내로……. 신분에 구애받지 않으신다면, 그렇다면 더 좋은 사람이 있어요.]
나. 지금 당신을 보고 있는 나.
아서와 마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마리는 붉어진 얼굴을 손등으로 누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쩌면.’
어쩌면 그의 여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낫잖아. 아탈란의 신관이었다는 그 여자보다는 내가 훨씬 나으니까.
[그러니……!]
[입 다물어.]
[도련님?]
[네게 그런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다.]
왜? 어째서? 어떻게 내 앞에서 그 계집애 편을 들어?
자신을 지나쳐 걷는 아서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보잘것없는 여자를 안아 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내 옆에 있어.]
아서는 기어이 미아를 곁에 두었다. 세간의 시선에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으나 반지를 나눠 끼고 틈날 때마다 그녀를 찾았다. 마리는 미아의 출산을 돕게 되었다. 사용인이 된 제 딸 샤를리나 또한 제 어미의 앞치마 자락을 잡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서는 갓 태어난 딸을 안고 몹시 기뻐했다.
[미아, 고생 많았어.]
[죽는 줄 알았어요…….]
[그래.]
[우리 딸 예뻐요?]
[세상에서 제일. 황태후께서 이름을 지어 주셨어. 세니아나, 만인의 사랑을 받을 사랑스러운 아이라는 뜻이래.]
[좋은 이름이네요.]
견딜 수 없었다. 화가 나고 억울해서. 저 꼴을 더 보느니 차라리 딱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문제였을까. 마리 부부를 실은 마차가 눈길에 미끄러진 것은. 프렌시프의 집사장은 한날한시에 부모가 죽은 샤를리나를 가엽게 여겼다.
[아가씨의 놀이 친구로 지내다 나이가 들면 이곳에서 하녀로 일할 수 있도록 조치해 놓았다.]
[…….]
[정성을 다해서 아가씨를 모셔야 할 것이다. 응?]
샤를리나는 프렌시프의 사용인 숙소에서 지내게 되었다. 프렌시프의 사용인들은 세 살짜리 하녀를 귀여워해 줬다. 아이를 갓 낳은 하녀들은 샤를리나에게 젖 물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짬이 날 때마다 숙소로 가서 아이를 돌봐 주었다.
사용인들 사이에서 샤를리나는 공주 대접을 받았다. 때때로 나오는 귀한 간식도 모두 샤를리나의 몫이었다. 쉬는 사람이 없을 적엔 하인들은 이따금 샤를리나를 성안으로 데려갔다.
[으아아앙!]
[아유, 아가야. 여기서 울면 안 돼. 어르신께서 호통을 치실…… 어르, 어르신!]
[웬 아이냐.]
[저……, 그게…… 죽은 마리와 데이빗의 아이인데 갈 데가 없어서 사용인 숙소에서 맡아 기르고 있습니다……. 그, 오늘은 돌봐 줄 사람이 없어서 잠깐…….]
[데이빗은 성실한 녀석이었지. 성에 둬라. 그리고 다음번엔 아이를 돌볼 사람이 숙소에 남을 수 있도록 번을 짜고.]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는 나베리우스도 아주아주 고급 과자를 쥐여 줬던 적이 있었다.
[우리 공주, 귀엽기도 하지.]
[자자, 많이 먹고 쑥쑥 커라.]
모두 공주라고 불렀기에 그녀는 정말로 제가 공주처럼 귀한 아이인 줄로만 알았다. 샤를리나는 네 살이 되자 예정대로 세니아나의 놀이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진짜 공주는 제가 아니라 세니아나라는 걸.
[하바빠, 빠…….]
이 성의 왕인 나베리우스도 제 손녀의 옹알이에는 흐물흐물 녹았다. 세니아나는 제 어머니가 아플 때나 일이 있을 때만 성에 왔는데, 사용인들은 모두 그때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나베리우스마저 세니아나가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산책하는 척 성문 앞을 서성거렸다.
‘난 저 애가 싫어.’
얄미워.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예쁜 드레스를 입고, 나베리우스 무릎에 앉아서 높으신 나리들의 귀여움을 받는다.
[세니아나!]
[빠빠!]
[오래 기다렸지. 미안하다.]
멋진 아빠와.
[못생긴 게 또 왔네. 야, 너 검이 뭔지 아냐? 이렇게 크고 날카로운데 나는 이제 검도 잡는다! 멋지지?]
[가웨인, 아기는 그렇게 높이 들면 안 돼.]
은근히 그 애를 챙기는 오빠들도 있었다. 세니아나가 올 적이면 샤를리나는 패악을 부렸다.
[안 먹어! 안 먹어!]
[어휴, 정말! 이제 다섯 살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어리광이야? 더는 안 봐 줘. 자, 제대로 앉아서 먹어!]
[나도 세니아나가 먹은 거 먹을래!]
[그게 얼마짜린 줄 알고……!]
사용인들이 울며 잠든 샤를리나가 안쓰러워서 돈을 걷어 케이크를 사 왔지만, 그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니아나가 먹던 구름 같은 생크림이 잔뜩 얹어져 있고, 반짝반짝한 과일 젤리가 콕콕 박힌 그 예쁜 케이크가 아닌걸. 케이크를 먹여 주는 사람이 동부의 왕이 아니잖아. 제가 케이크를 먹고 있으면 가신들도 일을 멈추고 구경 오지 않잖아.
미워. 저 애가 미워!
나베리우스는 세니아나를 무릎에 앉히고 제 이름을 알려 주었다.
[나뻬리쯔.]
[나베리우스.]
[나뻬쯔…….]
[나베…… 에잉! 왜 아직 제 할애비 이름도 제대로 말을 못 해. 알베르토, 저 애는 몇 살 때부터 말을 제대로 했나.]
[샤를리나는 말을 빨리 배웠지요.]
[어디 해 봐라.]
샤를리나에게 말을 걸자 그 애는 냉큼 말했다.
[나베리우스.]
[봐라! 저 애는 저리 잘하잖아. 응? 손녀를 바꿔 버릴까.]
[하부디 무쪄…….]
세니아나가 콧잔등을 실룩이며 울음을 터뜨리자 나베리우스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아이를 둥기둥기 얼렀다.
손녀를 바꾼다고?
‘내가 프렌시프 영애가 되는 거야?’
그럼 얼마나 멋질까. 편식한다고 혼내는 미에나도, 성에선 울면 안 된다고 소리치는 알베르토도 다 머리를 숙일 텐데. 잘난 척하는 가신들도 제 앞에선 어찌할 바를 모를 텐데.
‘내가 더 똑똑하잖아. 어르신도 내가 손녀인 편이 더 좋을 거야.’
신이 난 샤를리나는 복도를 뛰어갔다. 뒤에서 [옹니…… 가티 가…….]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제가 먼저 세니아나의 방에 들어갔다. 아서가 세니아나를 위해 사 온 머리핀도 꽂아 보고, 나베리우스가 직접 사 온 구두도 신어 보고, 란슬롯이 커다란 글자로 써 준 동화책도 읽었다.
[세상에! 너 뭐 하는 거야!]
그 모습을 본 하녀가 기함했다.
[아가씨 물건을 마음대로 하면 어떡해!]
[씨이―! 놔! 어르신이 나를 손녀 삼을 거랬어! 그럼 다 내 거잖아!]
[그야 농담이지! 헛소리 말고 어서 그 핀 빼고 구두 벗어.]
[싫어! 싫다고!]
[샤를리나!]
핀과 구두를 빼앗겼다. 잔뜩 혼이 나 펑펑 우는 샤를리나의 곁으로 세니아나가 다가왔다.
[온니…… 아퍼? 그래서 울어?]
[저리 가! 난 네가 싫어! 싫다고!]
세니아나를 휙! 밀쳐내고 소리치자 사용인들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엉덩방아를 찧은 세니아나를 얼른 안아 들고 [괜찮으세요?] 물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샤를리나!]
그날은 이상했다. 어떤 실수를 해도 감싸 주던 알베르토마저 샤를리나를 붙들고 엄하게 소리쳤다.
[당장 아가씨께 사과드려라.]
[싫어요……. 싫어…….]
[쫓겨나고 싶으냐!]
벼락같은 고함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왜 나만, 왜 맨날 나만 가지고! 쟤가 나빴어요. 저는 이런 거 엄청 많은데, 내가 한번 해 본 걸 가지고―!]
[안 되겠군. 레오나, 회초리를 가져와라.]
[……!]
태어나 처음으로 종아리를 맞았다.
[너는 사용인이야. 감히 아가씨께 공손하지 않으면 사용인은 목이 떨어지는 법이다!]
왜? 왜? 왜?! 나는 왜 사용인이고 쟤는 아가씨인 건데? 내가 더 똑똑하고 예쁜데. 다들 공주라고 했는데. 저 애만 저렇게 사랑받는 거야?
미움은 나날이 깊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세니아나와 함께 산책하던 중에 새로 들어왔다는 하인이 아이들 앞에 무릎을 굽혔다.
[안녕?]
[……누구세요?]
[너 참 귀엽게 생겼다. 아가씨보다 더 사랑스러운걸.]
[…….]
[이렇게 예쁜 아이가 아가씨 시중만 들다니 속상하겠다.]
[……세니아나가 죽어 버렸음 좋겠어.]
샤를리나가 웅얼거리자 하인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아가씨가 죽으면 넌 놀이 친구도 할 수 없을 텐데. 귀한 과자도 못 먹고 예쁜 옷도 더는 못 입어.]
[……그래도 돼. 나는 이 애가 너무 싫어! 내가 더 착하고 예쁜데 다들 얘만 귀여워하잖아.]
[그럼 바꿔 볼래?]
바꾼다고?
[뭘요?]
[아가씨와 네 인생.]
[……할 수 있어요?]
[그래. 해 볼래?]
[좋아요! 할래요!]
[그럼…….]
하인은 내일 오전에 세니아나에게 약을 먹여서 몰래 성의 뒷문으로 데려오라고 했다. 그게 해서는 안 될 짓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알베르토가 안전과 보안에 대해 늘 주의를 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가씨>가 된다면.’
샤를리나는 제 옷깃을 잡고 잠든 세니아나를 노려봤다. 어쩌면 이렇게 되어야 맞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 필히 그럴 것이다. 더 예쁘고 똑똑한 제가 있는데 이런 멍청이가 ‘프렌시프 영애님’으로 태어난 건, 애초에 잘못된 일이 아닌가.
샤를리나는 하인의 말대로 남모르게 세니아나에게 약을 먹이고 뒷문으로 데려갔다.
[온니, 이 아저씨 누구야? 나 할부디랑 산책가야 하는데…….]
[시끄러워! 가자면 얌전히 가!]
[구티만 할부디가…….]
세니아나는 뒷문으로 다가오는 하인들을 보고 겁을 먹었다.
[온니, 나 갈래. 무셔…….]
샤를리나는 세니아나가 도망갈까 싶어 얼른 손을 붙잡고 하인들을 향해 밀쳤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참 쉬웠다. 하인들에 의해 세니아나는 끌려갔으니까. 마침 그 애를 데리러 오기로 한 미아가 뒷문을 통해 들어왔다.
[샤를리나.]
[…….]
[왜 여기 나와 있니. 추운데 이렇게 얇게 입고.]
미아는 상냥하게 웃으며 샤를리나의 어깨에 제 코트를 걸쳐 주었다.
[세니아나는?]
세니아나를 태운 마차가 멀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 말하면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샤를리나는 치맛자락을 꽉 그러쥔 채 고개를 숙였다.
[……몰라요.]
그 애가 어디로 갔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미아는 얼굴이 어두운 샤를리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가야?]
[착한 아이구나, 샤를리나. 이제 미아 란체에게 이 말을 전해 주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질 거다.]
샤를리나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카틀레아 숲.]
[뭐?]
[카틀레아 숲에…… 갈 거라고. 엄마를 기다리러.]
미아는 샤를리나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샤를리나가 말괄량이를 찾으러 나왔나 보구나.]
[…….]
[세니아나와 친구가 되어 줘서 고마워. 그렇지, 아줌마가 상점가에 갔다가―]
낡은 가방에서 붉은 구두와 코르사주가 달린 머리핀을 꺼낸 미아는 생긋 미소지었다.
[자, 선물이란다.]
샤를리나가 세니아나의 물건을 만진 일로 호되게 혼이 났다는 것을 들었다. 그녀와 딸을 돌봐 주는 하녀가 아픈 몸을 이끌고 어디를 가냐며 핀잔을 주었으나, 기어코 상점가로 가서 하루 종일 소녀가 좋아할 만한 것을 골랐다.
미아에게서 구두와 핀을 받은 샤를리나는 그녀가 카틀레아 숲으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아가 사라지고 성에 다시 들어오자 하녀들이 다가왔다.
[그건 뭐야?]
구두와 핀을 본 하녀가 묻자 샤를리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쓰레기통에 그것들을 내던졌다.
[새것 같은데 버리려고?]
[이제 이런 거 안 할 거예요.]
[어휴, 성질 하고는. 토라진 거지? 알베르토 님도 널 위해서 구두를 사러 가셨어.]
[……됐어요.]
[그런데 아가씨는 어디 계시고 너만 오는 거니?]
[미아 님이 데려가셨어요.]
[그래? 말씀도 안 하시고 무슨 일이시지…….]
그 후,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미아가 세니아나를 데리고 사라졌다고 믿은 사람들은 입을 모아 모녀를 힐난했다.
[각하의 사재를 들고 튀었다며?]
[아가씨도 각하의 씨가 아니라던데.]
[역시 이민족 따위를 아내로 두는 건…….]
[각하가 가여워.]
샤를리나는 내내 불안에 떨었다. 나쁜 짓을 한 것 같은 죄악감이 온몸을 옥죄었다.
‘아니야.’
세니아나가 나빴어. 자기는 그렇게 좋은 것들을 전부 가졌으면서 내겐 하나도 내어 주지 않았잖아. 그 애가 나빠. 그 애는 정말로 나빠!
그러던 어느 날, 세니아나를 뒷문으로 데려오라던 하인이 다시 샤를리나를 찾아왔다.
[함께 가자.]
[어디를요……?]
의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하인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프렌시프 영애가 될 시간이다.]
하인을 따라간 곳은 어느 신전이었다. 풍랑이라도 만난 조각배처럼 기둥부터 바닥까지 성한 곳이 없었다. 중앙에 그려진 기괴한 문양만이 온전했다. 문양 앞에 시체처럼 널브러진 사람이 익숙했다. 그녀는 원형 단상 위에 쓰러진 아이에게 기어가다 쓰러지고, 다시 기어다가 넘어졌다.
[세니, 세…… 나.]
미아는 피범벅이 되어 딸을 부르짖다가 신전 안으로 들어온 샤를리나를 보고 기함했다.
[샤를리나!]
하인이 상냥하게 웃으며 샤를리나의 등을 두드렸다.
[자, 반대쪽으로 가서 서 있어라.]
[뭐 하려는 거야! 안 돼! 샤를리나, 도망쳐! 도망―]
덜컥 겁이 났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지? 두려움에 오들오들 떨고 있자 하인이 귓가에 속삭였다.
[‘서약’만 끝나면 너는 프렌시프 영애가 되는 거야.]
[…….]
[온갖 귀한 것들을 몸에 걸치고, 나베리우스 프렌시프의 손녀로 세상을 호령할 거다.]
[…….]
[강인한 아버지와 아름다운 형제들, 만인의 존경이 모두 네 것이야.]
샤를리나는 홀린 것처럼 세니아나의 반대편 단상에 올랐다. 열두 명의 사제들이 두 아이를 둘러섰다. 의미 모를 이국의 언어가 사제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아이들이 서 있는 단상 위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러자 세니아나는 마치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숨을 쉬지 못하고, 흰자위가 새카매져서 커헉! 단말마 같은 신음을 내뱉었다.
세니아나보다는 덜 했으나 샤를리나 또한 괴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폐가 꽉 조여진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는 것 같은 순간, 두 아이의 시선이 마주쳤다.
[……마. 엄마…… 아빠…….]
세니아나의 입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세니아나는 없었다.
샤를리나는 거울을 보다가 탄성을 터뜨렸다. 정말로 세니아나의 몸이다!
서약 때의 고통이 거짓말처럼 아무렇지 않았다. 이제 신전은 제집처럼 편안했다. 사제들은 샤를리나에게 아주 상냥했고, 곧 프렌시프 성에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거울을 보며 신이 난 샤를리나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성녀.]
나이 지긋한 목소리였다. 그는 사제들과 달리 호화로운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저요?]
[그래, 우리의 성녀님.]
[…….]
그 사람은 샤를리나의 손을 잡고 몹시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그간 타인의 몸에 들어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타인의 몸…….]
[하지만 이제 걱정하지 마라. 본래의 삶을 찾았으니 아탈란께서 점지하신 대로 거룩한 삶을 이룰 것이다.]
[본래의 삶이요? 제가 원래 세니아나였다고요?]
호화로운 로브의 사내가 빙그레 웃자 샤를리나는 치맛자락을 꽉 비틀었다.
역시 그랬던 거야. 나는 아가씨였고, 내 몸에 기생충 같은 세니아나가 들어 있던 거야.
샤를리나가 흥분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자 사내는 그녀의 손등을 다정히 두드렸다.
[태양을 안고 태어난 아탈란의 고귀한 딸아.]
[…….]
[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 그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기 위해선 해야 할 일이 많단다.]
[무슨 일인데요?]
자애롭기 그지없던 눈빛이 단숨에 돌변했다. 어깨를 꽉 그러쥔 그가 사납게 외쳤다.
[백사자를 손에 넣어라!]
[사자…….]
[포털을 찾아서 우리에게 낙원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좁아진 청회색 동공을 본 샤를리나가 움찔, 몸을 굳혔다.
[저, 저는 그런 거 몰라요…….]
그는 샤를리나의 어깨를 쥐어뜯듯 잡고 거칠게 욕설을 뱉었다.
[미아 란체, 그 빌어먹을 년은 끝끝내 토설하지 않았지만 세니아나 프렌시프의 몸이라면 찾을 수 있어!]
[…….]
[나는 알지. 나는 알아. 세니아나 프렌시프가 태어날 적에 우레가 하늘을 가르고 하늘이 붉어졌지. 신이 점지한 핏줄이 태어났다는 징조다.]
[…….]
[그런데 감히 내게 이런 금광을 숨겨?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년.]
짓씹듯 읊조린 그는 다시 상냥한 표정으로 샤를리나를 쳐다보았다.
[평생 귀족 영애로 호의호식하고 싶지?]
[……네.]
[다시 비천한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요.]
[그래, 그래. 내 말만 잘 들으면 일생을 세상에서 가장 귀한 레이디로 살아갈 거야. 영리한 아이이니 잘할 수 있겠지?]
샤를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시는 하녀의 딸로 살지 않을 거다. 이 몸은 원래 내 것이었으니까!
* * *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쥔 샤를리나가 대사제를 노려보았다.
“시키는 대로 다 했잖아요!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왜, 왜!”
16년을 줄곧 대사제의 개로 살았다. 신의 딸로 세상을 호령할 날을 기다리며!
대사제는 바닥에 엎어진 샤를리나를 노려보았다.
“하녀의 딸을 두 번이나 후작 가의 영애님으로 살게 해 주었더니 은혜도 모르는 소리 하고는.”
그는 쯧, 혀를 차고 샤를리나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그 자리까지 잃고 싶지 않거든 시킨 일이나 제대로 해.”
“……!”
“세니아나 프렌시프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리면 다시 하녀의 딸로 살아야 할 테니까.”
대사제가 신전을 빠져나가자 샤를리나는 주먹을 꽉 말아쥔 채 바르르 떨었다. 전부 하라는 대로 했다. 세니아나에게 접근하라기에 토악질을 참아가며 그 애 앞에서 상냥하게 굴었다. 미천한 것들이 접근해도 내내 웃어 주었단 말이다.
‘내가 이대로 당할 줄 알고.’
세니아나 프렌시프를 짓밟으면 저들조차 제 앞에서 고개를 조아릴 거다. 진짜 성녀는 나야.
샤를리나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 * *
도미니크가 돌아가겠다고 해서 나는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말했다.
“저기, 배웅은…….”
그러자 가족들이 “마차 대기소가 코앞인데 무슨.” 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다들 바쁘시지요?”
“그래.”
“응.”
나는 활짝 웃으며 “그럼 제가 배웅할게요!” 하고 도미니크의 옆에 섰다.
“생각해 보니 안 바쁜 것 같기도…….”
가웨인이 나와 도미니크 사이에 슥 들어와서 중얼거렸다.
“아, 아닐걸요! 바쁘실 텐데!”
“안 바쁘다니까.”
“아니에요, 바쁘세요!”
“안 바―”
기어코 따라올 기세라 나는 “아, 아 참! 그, 그렇지!” 하고 짝! 손뼉을 쳤다.
“맞다, 맞다. 성에 레시피북을 놓고 왔네~? 차, 찾으러 가야겠다. 저하! 저도 함께 성에 가면 안 될까요?”
“괜찮습니다.”
“정말 친절하세요!”
그러고 나는 얼른 도미니크를 끌고 마차 대기소가 있는 쪽으로 걸었다.
“이상한 내색 없이 모셔 와서 다행이지…….”
내가 중얼거리자 도미니크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날 빤히 바라보았다.
“왜요?”
“이상한 내색 없이…….”
“네! 잘했지요?”
내가 헤헤 웃자 도미니크는 나를 따라 픽 웃었다.
“그렇군요.”
난 주변을 휙휙 돌아보다가 보는 눈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그를 흘겼다.
“말씀도 없이 오시면 놀라잖아요.”
“오늘 점심 즈음 연락드렸는데 안 받으시더군요.”
“그건 아빠 방에서 자고 있어서…… 아니, 오늘도 그렇지만! 아카데미에서 언제 올라오신 거예요?”
“어제 새벽에 올라왔습니다.”
“그럼 놀란다고요.”
내가 입을 삐죽 내밀면서 말하자 그가 쿡쿡 웃고, 내 입술을 부드럽게 눌렀다.
“놀라라고요.”
“네?”
“더 오래, 더 많이 내 생각했으면 좋겠으니까.”
그러더니 “요샌 다른 일만 머릿속에 가득하잖습니까.” 하고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내가 마차에 냉큼 올라가서 앉자 그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부관인 알베르가 따라 올라타려고 했는데, 도미니크는 사정없이 문을 쾅! 닫았다.
“저하!”
알베르가 소리치자 도미니크는 싸늘한 표정으로 창문 밖 알베르를 보며 말했다.
“따로 와라.”
“아니, 말도 데려오지 않았―”
“그럼 걸어와.”
“잠― 저하, 저―!”
도미니크가 마부석과 이어진 창문을 두드리며 “출발.” 하고 말했다. 그러자 정말로 마차가 출발했다. 알베르가 “저하, 저하! 저도 데려가셔야―! 저하!” 소리치는 것을 보고 당황한 난 도미니크를 쳐다보았다.
“두고 가도 돼요?”
“알아서 잘 옵니다.”
“전에도 그런 적 있으신가 봐요.”
“뭐…… 불손한 생각이 티가 날 때면 가끔.”
우와, 나빴어!
나는 창문에 붙어서 우리 집 마부를 닦달하는 알베르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마차를 타고 오겠네.’
걸어오진 않아서 다행이다.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마차가 바닥 요철에 덜컹! 움직였다. 나는 위로 통, 튀어 오를 뻔했다. 도미니크가 재빨리 허리를 잡아 주지 않았으면.
“조심하셔야죠.”
“네…….”
내 얼굴을 빤히 보던 그가 미간을 좁혔다.
“눈이 충혈됐습니다.”
“아, 요새 바빠서.”
“…….”
“그래도 오늘은 많이 잤어요!”
“바빠서 내 생각할 시간도 없었겠군요.”
나는 “해, 했는데?” 하고 변명했다. 도미니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보았다.
“속아드리죠.”
“……아니, 정말로 바빴단 말이에요.”
“그래서 재회의 인사도 잊으신 걸 테고요.”
인사? 아! 나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서 말했다.
“황도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
“고생 많으셨어요?”
“…….”
“여기서 보니 반가워요?”
“…….”
“올라오는 길이 고되지는 않으셨습니까?”
“…….”
다 아니면 뭐지?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의 뺨을 잡고 입술에 쪽! 입 맞췄다. 그러고 의기양양해져서 “맞죠?” 하고 말했다.
“……나쁘진 않군요. 이건 아니지만.”
“그럼 뭔데요?”
도미니크가 다정한 눈빛으로 날 보았다.
“보고 싶었습니다.”
“아…… 저도요. 보고 싶― 아앗!”
뽀뽀는 괜히 했다! 생각하니까 부끄러워져서 나는 울상을 짓고 손을 꼼지락거렸다. 도미니크가 그런 나를 귀엽다는 듯이 봐서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검문소를 지나서 마차 대기소에 도착했다. 도미니크는 나를 마차에서 내려 주었다. 우리 둘은 헤어지기 아쉬워서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도미니크의 시선이 내 등 뒤로 향하더니 금세 날카로워졌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저하?” 하며 그를 불렀다. 그가 내 등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인기 많은 여자친구를 둔 건 괴롭군요.”
“인기요?”
“엘트라의 왕자도 영애를 흠모하지 않습니까.”
“설마요. 그 애가 저를 좋아할 리는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나는 헤헤 웃고 손을 내저었다. 트리스탄이 나를 좋아한다니 말도 안 돼.
“하면 황태자 전하는 어떻습니까?”
“전하도 절대요! 절대!”
“미카엘은?”
“말도 안 되죠.”
나는 그의 농담이 웃겨서 실소를 흘렸다. 그런 사람들이 다 나를 좋아하면 난 왕국도 하나 세울 수 있겠다. 도미니크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영애는 어떻죠?”
“다들 좋은 사―”
―까지 말한 난 불현듯 아카데미에서 친구들이 하던 말을 떠올렸다.
[퀴즈에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해서 헤어질 뻔했잖아.]
[퀴즈?]
[연인끼리는 사랑을 확인하는 퀴즈를 내거든. 틀리면 그날은 대판 깨지는 거지.]
그러며 소름이 돋은 듯 어깨를 부르르 떨던 친구가 떠올랐다.
[이성에 관해서 물어보면 답은 세 개 중에 하나야.]
[그게 뭔데?]
[‘걔는 성격이 나랑 안 맞아. 진중한 자기가 최고!’라거나 ‘누구~? 아아, 인상에 안 남아서 기억도 안 났네’라거나 ‘자기야 사랑해’. 이 세 개지.]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생각도 해 본 적 없어요.”
“황태자 전하와 결혼하면 황후가 될지도 모르는데요.”
“절대요. 성격도 안 맞고, 까탈스러우시고…… 저는 진중한 저하가 더 좋아요.”
“미카엘은?”
“누구요~? 아, 인상에 안 남아서 기억도 안 났네요.”
나는 친구가 알려 준 해답을 척척 말하고 뿌듯해져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퀴즈 다 맞혔다!’
그런데 그때였다.
“인상에도 안 남았다니 아쉽네.”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감겨들었다. 헉! 나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미카엘이 해사하게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까탈~? 까~탈?!”
까탈스러운 황태자도 있었다. 나는 헉, 숨을 들이켜고 굳어졌다. 망했다…….
미카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은 인상에 남길 수 있도록 시간을 내주지. 응, 영애?”
그러자 황태자가 내 앞에 서서 소리쳤다.
“변명을 들어야겠으니 제1황자궁으로 따라와.”
도미니크가 두 사람을 가로막으며 날 보았다.
“재회의 인사를 나누러 가시죠.”
엄마야……. 어떡해!
어떡하죠, 선생님…….
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앞엔 도미니크, 양옆엔 미카엘과 황태자.
‘도망을―’
미카엘이 빙그레 웃으며 내 팔목을 덥석 잡았다.
‘―못 가는구나…….’
황태자가 마뜩잖은 얼굴로 미카엘의 손을 잡았다.
“레이디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건 신사가 아니지.”
그러자 미카엘은 아무렇지 않게 실소를 흘렸다. 황태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눈빛이 불경하군.”
“이런, 실례. 몹시 ‘형님’다운 조언인지라.”
“아우의 결례를 바로잡는 게 형의 몫이지.”
“맞습니다. 그저 평소와는 다르셔서 말입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날카로워지자 나는 도미니크에게 눈빛을 보냈다. 날 여기서 꺼내 주세요! 나는 그냥 귀족인데, 내가 황족을 직접 뿌리칠 수는 없잖아.
그러자 이들과 같은 황족인 도미니크가 나섰다.
“놓으시죠.”
역시 도미니크다. 안심하고 있는데 그는 가볍게 말을 덧붙였다.
“치고받고 싸우려거든 폐하 앞에서나 하고.”
미카엘과 황태자가 동시에 도미니크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도미니크는 이 공방전의 구경꾼이 아니라 참전자라는 것을.
“내가 자리를 오래 비웠군. 아우란 것들이 모두 형에게 이토록 무례한 것을 보면.”
“미령하신 몸이니 도리가 없지요. 오늘도 그리 괜찮아 보이시진 않은데 이만 들어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큰형님. 작은형님도 오랜만에 귀환하셨는데 폐하를 만나 보셔야지. 비빌 곳은 아발론뿐인데.”
“너야말로 황후궁에 갈 시간이 아닌가. ‘엄마’가 기다리잖아.”
“두 사람 모두 그 손 놔라. 길라게온 차기 태양의 명이다.”
“그리 황태자 위(位)가 흡족하셔서야. 잃으시면 어찌 사시려고. 영애는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영애는 내 손님이다.”
서로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는 세 사람을 보다가 눈빛이 흐려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프렌시프가 여긴 무슨 일이지?”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세 여성이 등장했다. 황후. 로웨나 황비. 그리고 가브리엘라 황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오늘 하루는 운이 없나 봐.’
황후와 로웨나 황비까지 나를 사이에 둔 전쟁에 끼어들어 말을 보탰다.
“잘됐군. 그렇지 않아도 부를 생각이었는데. 영애, 미카엘과 함께 내 궁으로 가지.”
“프렌시프는 제1황자궁의 요리사이니 사사롭게 다른 궁을 찾아선 아니 되지요.”
“본궁의 명이다.”
“아직 내궁은 제 소관이랍니다, 폐하.”
가브리엘라 황비가 난처한 표정으로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소란이 일면 아발론(황제의 궁)께서 불편해하실 겁니다.”
그러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로웨나 황비는 황후와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나를 쳐다봤다.
“그런데 프렌시프는 무슨 일로 황궁에 있니?”
휴가 첫날부터 다시 입궁했으니 궁금할 만도 했다. 내가 “그게…….” 하고 말을 흐리자 도미니크가 대신 대답했다.
“소피아 대부인을 뵈러 오셨습니다.”
좋은 핑계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군. 그래서 도미니크와 같이…… 흐응.”
가브리엘라 황비는 나를 힐끔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다들 영애에게 볼일이 있는 모양인데 하면 함께 가시는 게 어떨까요.”
황후와 로웨나 황비는 서로를 보다가 크흠, 헛기침을 했다. 난 가브리엘라 황비를 빤히 보았다.
‘아, 가브리엘라 황비는 좋은 사람이네.’
두 사람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내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수 없을 테니, 가브리엘라 황비는 눈치 없는 행동을 한 거다. 황후나 로웨나 황비는 나를 포기하지 않을 거고, 내가 한 사람을 따라가면 누군가에겐 미움을 사게 될 터. 차라리 본인이 눈치 없는 척 행동하여 내가 곤란해지지 않게 한 것이었다.
두 황후와 황비는 고민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황궁 내 유리온실로 이동했다. 황후는 나와 속도를 맞춰 걸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도미니크와 인연이 많은 건 안다만, 남녀가 단둘이 마차에 타는 건 보기 좋은 그림이 아니지.”
“…….”
“다음부턴 조심해라.”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유리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황후와 황비들, 황자들은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말이 없었다. 마차 앞에서의 치열한 말다툼이 거짓인 양 조용해지자 난 엄청 불편했다.
‘돌아가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손끝에 온기가 닿았다. 도미니크의 손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봤고, 그는 날 보며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아니, 이 남자가!’
들키면 어쩌려고. 하지만 불안한 공간에서 익숙한 온기가 닿으니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영애는 실론을 좋아하지?”
로웨나 황비가 내 앞에 찻잔을 내밀며 말했다.
“아, 네. 좋아해요.”
그러자 황후가 다른 차를 내어 주며 “앞으론 다즐링을 즐겨 보렴.” 하고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차거든.”
“취향을 강요하지 마셔요, 폐하.”
“선택의 폭을 넓혀 주는 거지.”
“언제나 말씀은 참 잘하십니다.”
“빈정대는 건가?”
“설마요.”
나는 눈치를 보다가 찻잔 두 개를 한 번에 쥐었다.
“둘 다 마시면 되지요! 아…… 욕심쟁이 같을까요…….”
가브리엘라 황비는 후후 웃고 고개를 저었다.
“다과 욕심도 부려도 된단다.”
나는 가브리엘라 황비에게 호감이 생겼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항상 자신보단 남을 먼저 생각해 주었다.
‘우리 선생님 같다.’
나는 가브리엘라 황비와 마주 보고 미소짓다가 찻잔을 집었다. 그런데―
‘윽.’
찻물에서 불쾌한 향이 올라왔다. 살이 썩어들어가는 것만 같은 불쾌한 냄새, 성식의 향이다.
‘뭐지? 성식이 벌써 황궁까지 흘러든 건가.’
성식을 처음 맛보는 사람들은 불쾌한 향을 느낀다. 샤르파크 저에서 만났던 루시 요리사와 나처럼. 그런데 나와 도미니크를 제외한 황족들은 다들 말없이 성식 향이 나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저…… 황비님, 폐하.”
내 말에 두 사람은 “응?” 하며 나를 보았다.
“차향이 어떠신지요?”
“다른 때보다 훌륭하군.”
“역시 황제 폐하께서 주신 차야.”
뭐라고? 황제까지 성식을 섭취하고 있단 말이야?
성식은 많이 먹으면 삿된 자가 되어 아탈란의 명에 복종하게 된다.
‘에이레네처럼.’
“영애도 들어 보렴.”
“그래.”
황후와 황비 두 사람이 나를 재촉했지만, 난 차를 마시고 싶지 않았다. 이건 삿된 자의 일부를 떼어 내 정제한 것이다. 꺼려지기도 했지만, 기록에 따르면 ‘성녀’는 삿된 자와 상극이었다. 내가 이걸 마시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마시겠다고 했는데 거절할 수는…….’
내 눈에 스친 난처한 기색을 본 가브리엘라 황비가 나섰다.
“참, 그렇지. 영애가 준 주스 말이야.”
“주스…… 아, 셰이크요.”
방학 때 그녀에게 셰이크를 만들어 가져간 적이 있었다.
“맛이 좋던데 어떻게 만드는 거니?”
“그건 오곡 가루와…… 간단한데 지금 만들어 올까요?”
“괜찮겠니?”
“저는 황궁의 요리사이니 편하게 부려 주세요.”
“그럼 부탁하마.”
가브리엘라 황비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황후와 황비는 “그런 것은 다른 요리사들도 할 수 있지 않나.” 하며 투덜거렸다.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일부러 가브리엘라 황비가 만들어 준 틈인데, 놓칠 순 없었다. 온실을 나서 궁에 딸린 작은 다이닝룸에 들어갔다.
‘성식을 넣은 차가 이곳에 있을 텐데.’
찬장을 뒤지다 붉은 찻잎이 든 병을 발견했다.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는데…….
“윽!”
냄새가 몹시 독했다.
‘샤르파크 저에서 가져온 성식만큼 독해.’
그렇다는 건 사람 몸에 큰 악영향이 올 수도 있다는 건데……. 병을 손에 든 나는 고민했다. 아탈란이 나를 황궁의 요리사로 들이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가 성식을 퍼뜨리기 위해서인가. 하지만 저들은 내가 성식의 정체를 안다는 것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대체 왜…….”
“영애가 왜 궁에 있죠?”
등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조리복을 입은 샤를리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일이 있어서요.”
“무슨 일? 설마 후·비, 황자들과 함께 유리온실에 들었다던 사람이 영애인가요?”
그녀의 손엔 반질반질하게 닦은 호프 팬, 계량스푼 등의 베이킹 도구가 들려 있었다.
‘다과를 만든 사람이 샤를리나구나.’
징계를 받았다더니 근신 기간을 줄이기 위해 아발론이 아닌 유리온실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나 보다. 샤를리나는 제가 만든 요리가 내 입에 들어간 것이 몹시 분한 모양이었다.
“또 알량한 혀 놀림으로 황족들을 구슬린 모양이네.”
신랄하게 중얼거리던 샤를리나가 베이킹 도구를 던지듯 내려놓고 나를 노려보았다.
“스스로 저질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상대방보다 자신을 먼저 점검하세요.”
“뭐라고?”
“그런 말을 들을 사람은 내가 아닌 것 같으니까.”
새하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입을 열던 찰나, 내 손에 들린 병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그게 왜 영애의 손에 있죠?”
“…….”
“왜 네가 그 병을 들고 있냐고 묻잖아!”
“후·비님들을 위해 음료를 만들어 드리려고 찬장을 살피다 발견했어요.”
시침을 뚝 떼자 샤를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나를 떠밀며 병을 빼앗았다.
“쓸데없는 짓 말고 사라져.”
“왜 그렇게 흥분해요? 그게 내 손에 있어선 안 되는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건……!”
입술을 꾹 베어 물던 그녀가 앞치마 속에 병을 숨기고 나를 살벌하게 응시했다.
“황족들의 음식에 영악한 짓을 할지도 모르니까요.”
“흐응…….”
“간악한 당신이라면 그럴 수도 있잖아요?”
샤를리나는 금세 표정을 수습하곤 입꼬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알아요? 다른 요리사들은 영애에게 요리를 맡기는 걸 불안해해요.”
“…….”
“요리에 무슨 짓을 하진 않을까. 형편없는 실력이지만 황비님의 귀여움을 받아 들어온 불순물이 로열 키친을 흐리진 않을까.”
“…….”
“아발론 주방의 책임자들은 영애를 절대로 아발론에 들이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킥킥, 웃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쉬워서 어떡하죠? 이제 사신 접대 같은 일은 없을 테니, 영애는 쭉 제1황자궁에서 썩겠군요.”
“…….”
“차라리 그게 좋을지도 모르죠.”
샤를리나가 내게 바짝 다가와서 속삭였다.
“다들 싫어한단 말이야, 당신.”
“……그동안 아발론에서 제대로 이간질을 했나 봐.”
“늘 그랬듯이 후·비들의 밑이나 닦아 주면서 도약을 꿈꿔 봐요. 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참!”
그녀가 짝! 손뼉을 치고 나를 쳐다봤다.
“저는 당신 때문에 근신을 받아서 듀란 공작의 생일 파티에 가요. 젊은이들이 잔뜩 모일 거라던데…… 오빠들도 있겠군요.”
“오빠?”
“란슬롯과 가웨인.”
샤를리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나는 굳은 얼굴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우리 오빠들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짓이라니. 나는 너 같은 일은 안 해. 그냥 이번엔 친해져야겠다는 뜻이야. 오빠들과.”
“너―!”
내가 소리치려던 때였다. 샤를리나가 울상을 지으며 내 곁에서 떨어졌다.
“무슨…… 너무해요, 영애.”
다이닝룸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요리사와 시녀, 시종이 놀라서 샤를리나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인데 황궁 안에서…… 세상에! 카렌듈라, 손목이 새빨갛군요.”
“세니아나가…….”
“네?”
그녀는 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그냥…… 프렌시프 경들의 이야기가 나오니 세니아나가 조금 흥분했을 뿐이에요.”
“프렌시프 경들이라면…….”
“세니아나는 아직도 정말로 순수해요. 오빠들 얘기만 나와도 빼앗길까 봐 겁내는 건, 가족을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겠죠.”
사람들은 기가 막힌 얼굴로 날 보았다. 이곳의 책임자인듯한 시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프렌시프, 이곳은 황궁입니다. 규율이 존재하는 한 이곳에서도 영애님이라 불리길 기대하지 마세요.”
“……예, 시녀장님.”
“정리는 카렌듈라가 할 테니 나가보세요.”
나는 고개를 숙이고 다이닝룸을 나서다가 잠시 멈춰 뒤를 바라보았다.
“샤나.”
내가 상냥하게 부르자 샤를리나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오늘 좋은 방법을 알려 주었네요.”
“무슨 뜻인지?”
“어떤 나라엔 이런 속담이 있어요.”
“속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나는 샤를리나처럼 해사하게 웃고 다이닝룸을 빠져나왔다. 빈손으로 유리온실로 들어가자 황후와 황비, 그리고 황자들이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주스를 만들러 가지 않았나?”
“그게…… 아닙니다. 황비님, 송구하지만 셰이크는 다음번에 만들어 올게요.”
로웨나 황비가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한 모양이에요.”
“그럴 리가. 영애처럼 훌륭한 요리사이자 레이디가 어디에 있다고.”
로웨나 황비는 내 뺨을 다정하게 두드리며 어르듯 말했다. 나는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아니에요, 화를 참지 못하는 걸 보면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해요.”
“화라니?”
“샤나의 말에…… 아니, 어느 요리사의 말에 화를 참지 못하고 소란을 일으켰어요. 내궁을 관리하시는 후·비님들께 송구할 따름입니다.”
샤나라는 말에 황후가 움찔하여 나를 쳐다봤다.
“샤를리나와 일이 있었군.”
“…….”
“말해 봐라. 무슨 일이니.”
“하지만 황궁엔 규율이 있으니…… 아래에서 벌어진 일을 궁의 주인들께 고하는 건…….”
“괜찮네. 본궁이 묻지 않나.”
나는 눈을 내리깔며 웅얼거렸다.
“후·비들의 밑이나 닦아 주면서 도약을 꿈꿔도 저는 제1황자궁에서 썩을 거라고…….”
제1황자궁의 주인인 황태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는 황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는, 제가 화가 난 건 황후 폐하의 혈육이 고매하신 후·비님들께 그런 저열한 말을 했기 때문이에요. 황후 폐하의 입장은 고려치 않고……. 그런 말에 화가 난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한 것이겠지요. 좀 더 수양할게요.”
황후의 표정이 살벌해지더니 이내 벌떡 일어났다.
“영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네. 내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말이었어. 영애가 속상해할 이유가 없으니 개의치 말게.”
“…….”
“나는 볼 사람이 있으니 먼저 가지.”
유리온실을 떠나는 황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황후와 미카엘이 나선 뒤 로웨나 황비는 실소를 흘렸다.
“별……. 해괴한 게 황궁을 다 흐려 놓는구나.”
“…….”
“카렌듈라엔 제대로 된 종자가 없어. 기가 막혀서. 황후 면이 단단히 상했겠구나. 프렌시프 앞에서 자존심이 완전히 뭉개졌으니.”
입꼬리를 비죽 올린 그녀는 황후가 나선 문을 지그시 응시했다.
* * *
미카엘과 함께 황후궁에 돌아온 그녀는 샤를리나를 데려온 시녀장을 향해 소리쳤다.
“내 그리 입단속을 시키라지 않았어!”
황후의 진노에 시녀장을 포함한 황후궁의 시녀들이 거무죽죽한 얼굴로 무릎을 굽혔다.
“송구합니다, 폐하.”
“로웨나와 황태자 앞에서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이야!”
미카엘은 표정 없는 얼굴로 샤를리나를 바라보았다. 수치심에 얼굴이 붉게 물든 샤를리나는 고개를 수그렸다. 황후가 샤를리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이 황궁이 네 세상인 듯한가. 그래? 그래서 앞뒤 분간하지 못하고 천방지축 날뛰는 게야?!”
“세니아나가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했는진 모르겠지만, 제 말을 들어 보세요. 모두 오해― 꺄악!”
황후가 협탁에 놓였던 유리잔을 내던졌다. 샤를리나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 벽면에 처박힌 잔이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우수수 떨어졌다.
“어디 더 지껄여 봐라.”
새하얗게 질린 샤를리나가 주춤 뒷걸음질 치자 시녀들이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막아섰다. 황후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아버님이 노망이 드신 거지. 그러니 저따위 것을 황궁에 들이신 게야!”
“언니, 저는……!”
“후·비의 밑이나 닦아?”
샤를리나가 움찔, 몸을 굳혔다.
[늘 그랬듯이 후·비들의 밑이나 닦아 주면서 도약을 꿈꿔 봐요. 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그 말을 그대로 일러바쳤구나.
샤를리나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황후의 팔을 붙들었다.
“언니, 그게 아니에요. 저는 그런 의미로 한 말이―!”
“무슨 의미든, 뭐가 됐든!”
그녀는 샤를리나의 팔을 쳐내며 고함을 내질렀다.
“이 궁에선 말 한마디로 명운이 달라지는 것이다. 너 같은 망아지를 이복동생으로 둔 내게도 여파가 미친단 말이야. 황위가 본격적으로 논의되는 시기에 감히 내 면을 상하게 해?”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그게…… 그게, 저는…….”
웅얼거리던 샤를리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세니아나, 그게 거짓말을 한 거예요.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어둡게 가라앉은 방 안에 날카로운 실소가 울려 퍼졌다. 벽에 기대 있던 미카엘이 샤를리나를 빤히 바라봤다.
“금방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더니, 이제는 그런 말을 한 적 자체가 없다.”
“……!”
“아무래도 우리 어린 이모님께선 나와 모후가 우스운 모양인데.”
“저, 저는―”
성큼성큼 걸어온 그가 순식간에 샤를리나의 목을 틀어쥐었다. 깊게 가라앉은 그의 눈에 당황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샤를리나가 비쳤다.
“이모님.”
“끄으……. 끅― 화, 황자……!”
“제 인내가 나날이 짧아지고 있습니다.”
“크흑!”
“사고를 치려거든 부디 내 눈에 안 띄는 곳에서, 조부님이 해결 가능한 선 안에서 부탁드립니다.”
“흑, 흐윽……!”
미카엘이 그녀를 내팽개쳤다. 바닥에 널브러진 샤를리나는 잔뜩 붉어진 목을 떨리는 손으로 매만졌다.
‘저자가 정말로…….’
정말로 날 죽이려고 했어.
죽음의 고통은 ‘서약’ 때 외에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어릴 땐 부모 잃은 아이를 가여워하는 사용인들에게, 세니아나가 되어서는 프렌시프 휘하의 만인에게, 이 몸에 들어와선 아탈란에게 귀여움을 받았다.
세니아나 프렌시프로 살 적엔 귀족의 생리를 몰라 미움을 받았으나, 아탈란의 대사제가 지시한 대로만 따르면 모두가 자신을 좋아했다. 그런 자신을 죽이려고……. 죽이려고.
팔짱을 낀 채 오들오들 떠는 샤를리나를 보던 황후가 쯧, 혀를 찼다.
“더는 내 눈에도, 프렌시프 영애의 눈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마라.”
“…….”
“썩 꺼져!”
샤를리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황후궁을 벗어났다. 복도 벽면에 기댄 그녀는 입을 틀어막았다.
“흑, 흐윽……!”
감히 내게 이따위 짓을 해.
샤를리나의 눈이 수치와 분노로 검게 물들었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얼굴이 푹 젖어 들도록 눈물을 흘리던 샤를리나가 이를 악물었다. 나는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성녀다. 고매한 귀족 레이디며, 아탈란의 오롯한 태양이란 말이다.
그녀는 걸음을 재촉했다. 궁을 나선 후 바로 카렌듈라 저로 이동했다. 소파에 앉아 서류를 살피던 카렌듈라 후작은 엉망이 된 꼴로 들어온 샤를리나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미카엘 황자가 저를 죽이려고 했어요.”
“뭐?! 그게 무슨―”
“황후는 저를 불러 야단이었고. 단지 세니아나에게 말실수를 했다는 이유 하나로 말이에요.”
“말실수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2월―!”
샤를리나가 서릿발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아탈란 내에서 불리는 암호명을 부르짖자 카렌듈라 후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게 중요해? 나를 보필하는 게 당신 일이잖아. 내가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원하는 건 모두 이룰 수 있도록!”
“…….”
“대사제에게 말할까? 그래? 당신 손주가 나를 해하려 했다고 고해바쳐야겠어? 미카엘의 황위가 멀어지는 건 물론, 눈엣가시 같은 북부 세력이 황태자를 등에 업고 희희낙락하는 꼴이 보고 싶어?”
“너…….”
“당신 딸과 손주를 내 앞에 꿇어 앉히고 사과시키란 말이야!”
치맛자락을 꽉 비틀고 소리를 내질렀다. 후작은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대사제와 거래하여 아탈란의 성녀를 서녀로 공표했다.
그의 입장에선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였다. 서자를 보는 귀족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사교계에선 그의 도덕성을 헐뜯겠지만, 지나는 바람일 뿐이었다. 성녀를 딸로 들이고, 아탈란과의 끈을 공고히 할 수 있다면 고작 그따위 대가쯤 몇 번이고 내줄 수 있었다.
‘……빌어먹을.’
하지만 딸과 아탈란의 성녀는 내내 서로를 견제했다. 만나기라도 하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고, 황후와 샤를리나는 번갈아 가며 사고를 쳐댔다.
“일단 얘기부터 들어 보자. 그래야 뭐든 수가 생기지.”
샤를리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여전히 아린 목을 매만졌다.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 세니아나 프렌시프도, 제 앞에서 뻗대는 황후와 미카엘도.
* * *
나는 도미니크와 아쉬운 작별 후 집에 돌아왔다. 셔츠 차림으로 문 앞에서 기다리던 가웨인이 눈을 번뜩였다.
“좋은 시간 보내고 오셨나 보지?”
참, 핑계를 대고 저택을 빠져나왔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고, 살금살금 그의 옆을 빠져나갔다.
“이리 와, 이리 와.”
그가 내 드레스의 카라를 잡으며 으르렁거렸다.
“어……. 그게, 그러니까…….”
나는 후다닥 물러서며 “잘 다녀왔습니다.” 하고 귀가 인사했다.
“소용없어.”
“와! 셔츠가 잘 어울려요.”
“얼씨구.”
“식사는 하셨어요? 곱창볶음을 만들어 드릴까요?”
가웨인은 잠시 움찔했지만, 다시 나를 노려봤다.
“지금 몇 시야.”
“……열한 시요.”
“이르게도 귀가하셨네. 아주 새 나라의 어른이야. 너무 발라서 조카가 태어나면 알려 줘야겠어.”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수그리고 그를 슬쩍 올려다봤다.
“황궁에서 황후 폐하와 황비님들을 만나서요…….”
“그 속에 도미니크도 있었겠지.”
“…….”
그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실눈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뭐라고 했어.”
“그 속에 도미니크도 있었겠지?”
“말고! 남자가 네게 수작을 부리면 어떻게 하라고 했어.”
“어……, 정강이를 걷어차고, 쓰러뜨린다.”
“그리고.”
“일어서기 전에 칼로 찌른다……. 그치만 저하는 황자인데 칼로 찌르면―!”
“정강이 정도는 걷어차야 할 것 아냐.”
“수작 안 부렸어요!”
“부리기도 전에 넘어가 주셨지.”
“씨!”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가웨인을 흘기자 가웨인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내게 바짝 다가왔다.
“씨이―?”
“……아니, 자꾸만 오빠가…… 나도 이제 어른인데…….”
“아직 스무 살 생일 안 지났잖아!”
“이 나라에선 성인이잖아요! 저는 다른 세계 있을 때도 성인이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다른 세계에서도 이렇게 늦게 들어오셨다?”
“그건…….”
내가 주저하니 가웨인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형! 아버님! 조부님!”
나는 놀라서 “히익!” 하고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른들 깨시겠어요!”
앞에서 다정하지만 이상하게 오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자고 있었으니 걱정하지 마라.”
란슬롯이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크, 큰오빠…….”
“조부님과 아버님도 기다리시니 가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들어야겠어.”
“…….”
아빠와 할아버지가 있다는 서재가 어쩐지 평소보다 어두워 보였다.
이건 취조실 같은데…….
2인용 소파에 혼자서 덜렁 앉은 난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오빠들과 맞은 편의 할아버지, 그리고 그 뒤의 아빠를 번갈아 힐끔거렸다.
“이건 그저 네 일상이 궁금하여 하는 질문일 뿐이니 편하게 대답해라.”
편하게 대답하라는 사람의 표정이 마치 저승사자 같았다. 할아버지는 입꼬리를 실룩이며 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놈이 뭐라고 너를 꼬여내더냐.”
“꼬여내지 않았는데.”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내 손녀가 냉큼 그 작자를 따라갔을 리 없다. 협박을 한 게지?”
“…….”
“가서 무얼 했어. 한 공간에 있던 거냐?”
“한 공간이긴 했지만 다른 사람도 있었어요…….”
“이런 쳐죽일 놈! 너와 함께 있으려고 수작을 부렸구나!”
“아닌데…….”
“이렇게 순진해서야!”
그는 이마를 쥐고 분하다는 듯 씨근덕거렸다.
“너무 맑고, 순진하고, 순수하고, 사려 깊게 컸어. 그래서 개수작을 분간하지 못하는 게야.”
아니, 나는 맑고, 순진하고, 순수하고, 사려 깊지 않은데…….
오늘 이복 자매를 이간질하고 온 터라 양심이 콕콕 찔렸다.
“자, 세니아나. 나를 보아라.”
할아버지가 마치 기도하듯 내 팔을 잡고서 말했다.
“자, 따라 해라. 남자는 다 쓰레기다.”
“남자는 다…… 그럼 할아버지랑 아빠랑 오빠도요?”
“우리는 달라.”
“하지만 다들 남잔데…….”
내가 웅얼거리자 할아버지가 당황한 듯 얼른 말을 돌렸다.
“다시 따라 해라. 남자와는 옷깃도 스치지 않는다.”
“옷깃도…… 지금 제 손 잡고 계시잖아요, 할아버지.”
“우리는 달라.”
자꾸 다르다고 하는데 왜 다른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내놈이 저는 가정적이고, 다정하고, 때때로 꽃을 선물할 줄 안다고 하면 전부 개수작이다.”
“진심일 수도 있잖아요.”
“아니야! 나도 네 할머니 꼬실 땐―”
“꼬실 땐?”
“아니, 이게 아니라…….”
할아버지가 허둥지둥하자 아빠가 그를 밀어냈다.
“말실수 그만하시고 나와 보십시오.”
할아버지는 시무룩해져서 순순히 일어났다. 아빠가 진지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세니아나.”
“네?”
“너는 이 세계에서 자라지 않았으니 모를 테지. 달콤한 말을 하는 놈들은 전부 개자식들이다.”
“개…… 왜요?”
아빠가 잠시 침묵했다. 그러자 내 등 뒤에 있던 가웨인이 냉큼 말했다.
“변태야, 변태.”
나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변태요?”
“그러니까 그게…….”
가웨인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자 란슬롯이 다정히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세니아나, 네가 살던 곳에도 어떤 행동이 때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되기도 하지?”
“아……. 네, 있어요!”
연인 사이에 반지를 돌려주면 헤어지자는 의미였다. 마찬가지로 연인에게 구두 같은 건 선물하지 않는다. 바람난다고.
란슬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 세계에선 얼굴을 만지면 잠자리로 가고 싶다는 거야.”
“헉!”
도미니크는 엄청 많이 만졌는데!
“머리카락을 만지면 단둘만의 장소에서 은밀한 행위를 하고 싶다는 거고.”
“그런…….”
“손가락을 만지면 나를 때려 달라는 거다.”
“왜요?! 왜 맞고 싶어 하지요!?”
“성적 취향이 특이한 사람들인 거지.”
나는 질겁해서 입을 틀어막았다.
이튿날, 도미니크가 연락했다. 일전에 만났던 오두막 카페에서 만나자는 얘기였다.
“영애.”
“저하!”
나는 반갑게 인사하고서 자리에 앉았다.
“어제는 잘 들어가셨습니까.”
“네…….”
오기는 잘 왔다. 와서 두 시간 동안 잔소리를 들어서 그렇지.
“다행이군요.”
그는 다정히 웃으며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흠칫해서 얼른 얼굴을 피했다.
“고, 곤란해요.”
그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걸. 내가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하자 그는 잠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미소지었다.
“그럴 때가 있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샤를리나 카렌듈라의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내가 눈을 깜빡이자 도미니크는 실소를 흘렸다.
“어제의 일로 황후궁에서 큰 소리가 오갔다더군요. 카렌듈라에 심어 둔 세작에 의하면 저택에서도 소란이 일었고요.”
“그랬나요…….”
역시 현시점에서 가장 강력한 공격은 이간질일 수도 있겠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테이블을 두드렸다.
‘황후와 샤를리나에게 싸움을 붙여서 세를 약화시켜야 해. 그동안 아탈란이 나를 로열 키친에 오지 못하도록 한 이유를 찾고.’
생각을 정리하던 중에 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이 흩날려 입가에 감겼다. 도미니크가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꽂아 주며 손을 내려 손가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떡해……. 나는 정말로 당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남자친구의 소망이라면 들어줘야 하는 걸까. 하지만 난 좋아하는 사람을 때리는 건 정말로…….
속으로 끙끙 앓다가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마음이 불편할 적엔 상대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방법 중에 하나란다. 홀로 멀어져 버리면 상대는 어찌할 바를 모를 테니까.]
나는 치맛자락을 꾹 쥐고 웅얼거렸다.
“여, 역시 저하는…….”
“예?”
“변태인가요?”
내가 울상을 짓고 얘기하자 도미니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예?” 하고 되물었다.
* * *
가웨인은 기분이 좋았다. 제 형과 함께 조부에게 서류를 올리는 중에도 싱글벙글이었다.
“가웨인, 조부님 앞이다. 표정을 단속해야지.”
“도미니크, 그 자식 애 좀 탈 거다.”
이 세계에 온 지 아직 일 년밖에 되지 않은 세니아나는 순진했다. 여기의 관습이라는 말엔 깜빡 속아 넘어갔다.
“귀여워 죽겠네.”
가웨인이 실소를 흘리자 란슬롯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베리우스 또한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