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장 (17/24)

17장

그 시각, 도미니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왜 그런 생각을?”

“그게…….”

나는 웅얼대다가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길라게온에선 남녀 사이에 머리카락을 만지는 건…….”

“뭐가 됐든 아닙니다.”

“……아?”

“프렌시프의 사람들은 영애를 아주 귀여워하나 보군요.”

이해가 안 돼서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아앗!” 소리쳤다.

또 속았다! 길라게온은 한국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어느 부분에선 전혀 다르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선 타인의 집 안에서도 신발을 벗는 게 당연하나, 길라게온에선 타인의 집에서 신발을 벗는 건 몹시 무례한 행동이었다.

또 노년의 윗사람에게 흰색의 물건을 선물하는 것도 결례였다. 성성한 흰머리를 조롱하는 행동이라고 했다. 이런저런 다른 점이 있다 보니 나는 ‘길라게온의 관습’이라는 말에 몹시 약했다.

‘알면서 자꾸 속이고……!’

화도 나고 창피하기도 했다. 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저기, 그게…….” 하며 웅얼거렸다.

“제, 제가 평소에도 저하를 변태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고요…… 가끔 그러긴 했는데, 아주 가끔이었고…… 아니, 그러니까 그게……!”

턱을 괸 도미니크가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원하시면 새로운 취향에 눈 떠보죠.”

“아니에요!”

“또 뭐라고 하십니까. 가족들이?”

“…….”

“말씀해 보세요.”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얼굴을 만지면 잠자리로 가고 싶다는 거라고…….”

“그리고?”

“머리카락을 만지면 단둘만의 장소에서 은밀한 행위를 하고 싶다는…….”

“아, 그래서.”

“또 손가락을 만지면…… 때려 달라는 거라고…….”

도미니크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사람을 변태로 만들었군.” 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엄청나게 미안해져서 그의 눈치를 보았다.

“죄, 죄송…….”

“됐습니다.”

“네?”

“그런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니까.”

뭐라고?

의미를 생각하고 있는데 도미니크가 내 목을 끌어당겼다. 입술이 달콤하게 뭉개지며 그의 숨결이 입안으로 훅, 밀려들었다. 한참 그에게 끌려다니다 숨이 부족해서 얼굴을 떼어 내자 도미니크는 희미하게 웃었다.

“아주 오래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 알아 두십시오.”

나는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뭘 기다리고 계시는……?”

도미니크는 내 볼을 쓰다듬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난 헉, 하고 숨을 삼키고 떠듬떠듬 물었다.

“……잠자리를?”

그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지었을 뿐.

“뭐야……, 야해요.”

내가 울상을 짓자 도미니크가 쿡쿡 웃으며 눈가에 입 맞췄다.

집에 돌아온 나는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도미니크가 걸쳐 준 재킷은 크고 따뜻해서 내가 여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것만 같았다.

‘아우우!’

붉어진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헤어지기 전까지도 그는 아주 달콤했다.

[저하…… 이제 슬슬 가야 하는데. 놔 주세요.]

[보내고 싶지 않아.]

[…….]

[이제 더는 헤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내내 안겨 있다가 이따금 입을 맞추고, 카페 주인인 기사가 질색을 하면 떨어져서 손을 잡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보다 더 애틋해져서 난 심장이 아릴 정도였다.

‘저하, 살이 빠진 것 같았지…….’

그래서 평소보다 더 위험한 분위기…… 아니, 이게 아니라! 일이 많은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찰나 “아가씨?”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시트론이 다정하게 웃으며 계단으로 올라왔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어? 아, 아니!”

시트론은 내 드레스를 빤히 보다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걸치고 “흐응.”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군요.”

“……할아버지랑 오빠들한테는 비밀이야?”

시트론이 후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환복하시고 내려가셔요. 다들 찾으세요.”

“……안 갈래.”

오늘 창피했던 걸 생각하면 울컥 화가 치민다고.

내가 계단을 올라가자 시트론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쳐다봤다.

옷을 갈아입고서 책상 앞에 앉으려는데 쾅! 쾅!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니아나, 세니아나.”

“얘기 좀 하자.”

“무슨 일이냐, 응? 누가 널 불쾌하게 하든?”

“세니안.”

방 밖에서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문을 열고 빼꼼 얼굴만 내밀어 그들을 쳐다봤다. 시트론이 ‘보고 싶지 않다’던 내 말을 전한 모양인지 그들은 몹시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식사도 않고 왜 방에만 있는 게야. 자, 어서 내려가자.”

“흥.”

내가 고개를 휙 돌리자 할아버지는 엄청나게 충격받은 얼굴로 주춤 물러났다. 가웨인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뭐야, 왜 골이 났는데?”

“오빠랑 얘기 안 할 거예요.”

“뭐?!”

가웨인도 당황해서는 “왜?!” 하고 소리쳤다. 란슬롯이 다정하게 웃으며 내게 말을 붙였다.

“우리 막내가 왜 화가 났을까. 오빠한테 알려 주지 않을래?”

“싫어요!”

“…….”

가웨인이나 할아버지한테라면 몰라도 란슬롯에게 ‘싫다’는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는 내 단호한 대답에 놀라 움찔 굳어졌다. 할아버지와 가웨인이 어느새 다시 내 방문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왜! 왜 나랑 얘기하지 않겠다는 거야!”

“무슨 일이냐, 세니아나!”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동동 구르는 그들을 새초롬히 노려보았다.

“거짓말쟁이…….”

“뭐?”

“어?”

나는 허리춤에 양손을 올리고서 말했다.

“자꾸 속이고! 미워요!”

* * *

그 말을 끝으로 세니아나는 방 안에 쏙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복도를 지나던 사용인들이 하늘이 무너진 얼굴의 나베리우스를 보고 크게 당황했다. 하녀들은 “무슨 일일까요?” 하고 속삭였고, 집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세니아나의 방을 향해 턱짓했다.

“아.”

“그렇다면.”

그들은 금세 납득했다.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네 남자를 한순간에 무너지게 할 유일무이한 사람. 어느새 프렌시프 제일의 권력가로 부상한 세니아나였다. 사용인들은 불똥이 튀기 전에 얼른 복도를 지나갔다. 나베리우스는 멍하니 세니아나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미워요. 미워요. 미워요~!

사랑하는 손녀딸의 냉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몇 번이나 울려 퍼졌다.

“누구냐. 누가 세니아나를 저리 화나게 한 것이야.”

“조부님이 가장 가능성 크지 않겠습니까.”

“아니지, 가웨인 너지.”

“형일 수도…….”

“아서 너일 수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황을 짚어 보던 란슬롯이 짓씹듯 말했다.

“아무래도 전략에 구멍이 있었던 듯싶습니다.”

“무슨 소리야.”

“어제의 이간계가 드러난 모양이지요. 역풍.”

“……이런!”

나베리우스는 통탄한 얼굴로 벽을 내리쳤다.

“적에게 우리의 전략을 알린 세작이 있던 것이 아니냐.”

가웨인은 방문 반대편 벽에 도열한 시트론과 마릴린, 그리고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마릴린이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서운합니다, 어르신! 저희는 대의를 가지고 뭉친 결사대가 아닙니까!”

아가씨를 능구렁이에게 빼앗기지 않을 테다! 마릴린의 이글이글한 눈엔 진정한 충의가 엿보였다. 가웨인이 고개를 젓고 나베리우스를 쳐다봤다.

“세작의 수에 놀아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면 어찌 우리의 진영에 불화살이 넘어왔단 말이냐! 어떤 놈이 이런 사달을 낸 게야!”

란슬롯이 고개를 젓고 말했다.

“지금은 아군의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다음 수를 생각해야지요.”

“어찌하면 좋겠느냐.”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빅터·카터 형제 중 형인 빅터가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저…… 어르신.”

“말해 봐라.”

“비통하나 지금은 신임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자비를 구하십시오, 어르신.”

“자비?”

빅터의 의도를 정확히 짚은 가웨인이 일전에 에이레네의 납치 사건 때 다친 팔을 잡으며 커다랗게 신음했다.

“날씨가 궂으니 다친 곳이……!”

방 안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다 나으셨잖아요!”

흥! 콧방귀 소리가 들리자 가웨인은 시무룩해졌다.

“안 통하는데…….”

형제의 아우인 카터가 얼른 말했다.

“부러뜨려 보십시오!”

내, 내 팔을……?

가웨인이 당황하자 방 안에서 세니아나가 소리쳤다.

“그러기만 해봐요!”

프렌시프의 사람들이 가웨인을 노려봤다.

‘세니아나가 듣기 전에 부러뜨렸어야지!’

힐난의 시선이 가웨인에게 모였다. 그는 어쩐지, 여전히 팔이 멀쩡한 것이 죽을죄를 진 것만 같아 시무룩해졌다.

세니아나의 화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저녁도 먹지 않겠다고 해서 나베리우스는 하늘이 노란 표정으로 세니아나의 방 앞을 서성였다.

“차라리 내가 굶으마!”

“…….”

“누가 네게 간악하게 속살거렸는진 모르지만, 나와서 오해를 풀자.”

“…….”

부서져라 노크하던 나베리우스가 “으응?” 하며 문에서 떨어졌다. 왜 갑자기 조용하지.

가족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방문을 응시했다. 서, 설마 화가 나서 또 가출을―! 동시에 같은 걱정을 한 가족들이 득달같이 방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어머…….”

그들을 따라서 들어온 시트론이 침대에 누워 잠든 세니아나를 바라봤다. 마릴린은 “우리 아가씨, 귀엽기도 하시지.” 하며 얼른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러다 세니아나가 끌어안은 재킷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건…….”

못 보던 재킷이다. 사이즈를 보면 큰 도련님의 것은 아니고, 가웨인 도련님은 이런 화려한 재킷은 취향이 아니었다. 그녀가 살며시 세니아나에게서 재킷을 빼 오며 프렌시프 일가를 쳐다봤다. 나베리우스, 아서, 란슬롯과 가웨인이 대번에 얼굴을 구겼다.

“빌어먹을 도미니크.”

“그놈이었구나.”

시트론은 끄응, 끙, 신음하는 세니아나의 잠자리를 정리해 주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아가씨 표정이 어제보다 좋아진 이유가 있었군요.”

다들 마뜩잖은 표정이었는데, 그녀만은 아주 자애로운 얼굴이었다.

“이리 다정한 친구가 있으니 아가씨께서 기분이 좋아지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냥 인정해 주는 게 어때? ―하는 소리였다. 나베리우스가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안 돼!”

여태 세니아나라고 알고 산 건 악귀였다. 진짜 손녀를 만나서 가족의 정을 쌓은 건 고작 일 년도 되지 않았다. 세니아나의 또래는 슬슬 결혼을 했다. 빠른 사람들은 이미 자식도 보았을 것이다. 알고 있지만, 그렇지만 이제야 만난 친손녀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도미니크라면.’

란슬롯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가웨인과 란슬롯은 두 사람의 사이가 그저 친구가 아니란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끌어안고 있던 둘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도미니크 로젠카로튼은 그릇된 핏줄이었다. 피의 절반은 황제로부터 났으나 절반은 아탈란의 신관이었다.

“도미니크를 보는 황제의 시선이 묘했습니다.”

“……그래.”

아서가 낮게 대답했다. 자식에 관해서는 호불호를 드러내지 않는 황제가 도미니크만은 끼고돌았다. 오래 황제를 봐 온 아서는 그의 속내를 알고 있었다.

다들 우습다 여기지만, 황제의 심중에 후계로 자리 잡힌 이는 도미니크일 것이다. 그러니 황태자와 미카엘에겐 싸움을 붙여 놓고, 도미니크는 안전한 동부로 피신시켜 두는 것이다.

과거 도미니크를 전장에 전전하게 한 것도 황후와 4비의 시야 밖에서 도미니크를 지키기 위해서일 터. 그에게 붙여 준 노기사만 봐도 그랬다. 그는 황제가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모시던 자였다. 황제가 가장 신임하며 아버지처럼 여기던 자.

“하필이면 도미니크인가.”

가웨인이 쯧, 혀를 찼다.

“우리가 황태자를 민다고 해도 황제의 뜻이 도미니크에게 있다면 제위의 향방을 확신할 수 없겠죠.”

“그가 황제가 된다면 세니아나는…….”

나베리우스가 눈을 부릅떴다. 세니아나를 황후로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후궁들이 생길 것 아냐!”

나베리우스가 소리치자 프렌시프 남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보기만 해도 아까운 아이가 내궁 암투에 휩쓸린다고?

“개소리.”

“절대 안 돼.”

“기필코 방해하고 말겠다.”

아서는 미아의 말을 떠올렸다.

[세실 언니가 아이를 낳았대요. 아주 예쁜 왕자님이라고 하더라고요.]

도미니크의 모친은 미아와 친자매 같던 신관이었다.

[내가 딸을 낳으면 그 아이와 맺어 주기로 했어요.]

아서는 침대 밖으로 나온 딸의 손을 이불 안에 넣어 주며 한숨을 삼켰다.

‘미아.’

나는 그 새끼가 아주 마음에 안 들어.

* * *

다음 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눈을 끔뻑였다.

‘배고프다…….’

생각해 보니 어제 먹은 건 스콘과 차 한 잔이 전부였다. 나는 끙끙거리며 일어나서 방을 나섰다. 식당으로 가다가 가족들과 마주쳤다.

“세니아나, 일어났구나.”

란슬롯이 다정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퉁퉁 부은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대답했다.

“네에…….”

“배고프지?”

“네…….”

대답하던 나는 “아, 맞다.” 하고 가족들에게서 물러섰다.

“나 화났는데.”

내가 가늘게 뜬 눈으로 보자 란슬롯이 곤란한 듯 웃으며 말했다.

“미안.”

“…….”

“뭐든 우리가 다 잘못했어.”

“…….”

“네가 너무 예뻐서. 우리에게도 예쁜 동생이 다른 놈들에겐 얼마나 예쁠까 싶어서 걱정이 됐거든.”

그의 말을 들은 난 으으음, 신음하다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다음부터는 그러시면 안 돼요?”

“응. 아, 참. 오늘 갈 데가 있어.”

“어딘데요?”

란슬롯이 쓱 입꼬리를 올리자 아빠와 할아버지, 가웨인도 히죽 웃었다.

“……?”

왠지 엄청나게 불안한데…….

정신없이 씻고, 옷을 차려입고 나오자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모두 달리는 마차에 앉아 있었다. 나는 불안한 얼굴로 창을 보다가 아빠를 힐끔거렸다. 그러자 아빠가 다정한 눈빛으로 “왜?” 하고 물었다.

“어디에 가는 건가요?”

“클럽.”

“사교 클럽이요? 살롱 같은?”

“그래.”

“어째서…….”

란슬롯이 빙그레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모처럼 얻은 휴가인데 집에서만 있으면 서운하잖아. 또래가 많을 테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야.”

아, 놀러 가는 거구나.

나는 불안하게 생각했던 게 괜히 미안해져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아빠와 란슬롯은 그런 나를 귀엽다는 듯 보았고, 가웨인은 불쑥 얼굴을 내밀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왜, 서커스단에라도 팔아 버리러 가는 줄 알았어?”

“아니에요…….”

“그럼?”

“그냥, 으음, 아! 저 건물이죠!”

나는 얼른 말을 돌리며 창문 밖을 가리켰다. 가족들이 픽픽 웃었지만, 난 모른 척 “와!” 소리쳤다. 엄청나게 커다란 건물이다. 릴리의 모친이 운영하던 살롱과 비슷한 크기였는데, 젊은이들의 놀이 장소답지 않게 고풍스럽다.

마차에서 내리니 클럽에 들어가기 위해 줄은 선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귀족 청년이었다. 나도 얼른 그들의 뒤에 섰다. 다른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던 남자가 곁눈질로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펄쩍 뛰었다.

“아니, 프렌시프 영애!”

그가 황급히 내게 달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서 주춤 물러섰다.

“어찌 서 계십니까.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하지만 다들 기다리는데…….”

“영애 같은 귀한 분을 어떻게 대기줄에 세우겠습니까. 자자, 이리로.”

남자는 대기자를 기입하던 명단을 다른 일꾼에게 던지듯 떠넘겼다. 할아버지와 아빠, 오빠들은 아무렇지 않게 앞장서 걸었다.

‘나만 불편한가 봐.’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가족들을 따라서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거대한 문이 열리고 클럽 내부로 들어갔다.

“세상에…….”

프렌시프 성도, 저택도, 심지어 황궁까지 본 나에게도 놀라운 인테리어였다. 그보다 더 호화로워서가 아니라―

‘신식이야!’

마치 윤세나의 세계에 있는 고급 호텔 같은 느낌. 대리석 바닥과 벽, 화려한 샹들리에, 중후한 분위기의 가구 등은 비슷했으나 한쪽 벽면을 통으로 차지한 스크린은 전에 보지 못한 것이었다.

“오빠, 오빠!”

내가 란슬롯의 팔을 잡으며 부르자 그가 빙긋 웃었다.

“그래.”

“저건 뭐예요? 티브이예요?”

“티브이……?”

“광고 같은 거 나오잖아요.”

“티브이가 뭔지는 모르지만 저건 마법사들이 움직이는 거야.”

“그럼 통신료나 전기세는 안 내나요?”

가웨인이 “통신료, 전기세? 그딴 걸 왜 내?”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더니 씩 웃으며 천장에 붙은 조명 같은 것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지?”

“네.”

“저걸론 우리를 볼 수 있어.”

“아하, CCTV 같은 거구나. 제가 살던 세계에도 있었어요.”

“거긴 뭐든 티브이라고 하나? 냉장창고도 냉장 티브이라고 해?”

그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냉장고라고 하는데…… 아, 티브이가 되는 냉장고도 있기는 하다.”

“호오……. 거기 사람들은 티브이라는 것 없이는 못 사나 보군.”

“그런 건 아닌데요. 오빠도 그 세계에선 놀랄 게 많을걸요?”

내 말에 가웨인은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정말이에요. 엘리베이터 같은 것도 있는데.”

“엘리베이터?”

“서 있기만 하면 계단을 오를 필요도 없이 원하는 층에 저절로 올라가요.”

“거짓말.”

나는 억울해져서 “아닌데!” 하고 소리쳤고 가족들은 다들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래. 우리 막내의 말이 다 맞지.”

“정말이에요!”

그런 잡담을 하며 올라가자 엄청나게 화려한 문이 보였다. 이름을 대지도 않았는데, 경비병들은 당연한 양 문을 열었다.

‘파티장인가?’

노인부터 청년까지 나이를 막론하고 여러 사람이 있었다. 클럽이라더니 사교회를 하는 모양이다. 나를 본 사람들이 하나둘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머나, 우리 성녀님을 이런 데서 다 뵙는군요.”

“아…… 반갑습니다, 마담.”

“로벨리아 백작이랍니다.”

다음엔 흰머리가 성성한 중년의 신사가 다가왔다.

“파티장이 밝아졌다 싶었더니 이리 귀여운 숙녀분께서 걸음해 주셨기 때문이군요.”

“과찬이세요.”

“클라리올 리엥스터입니다.”

리엥스터라면 사신단 접대 때 있던 사람이다. 그러니까…… 아!

“리엥스터 후작님.”

“기억력도 좋으셔라. 일전에 아네모네궁에서 맛본 수프는 극상의 맛이었습니다.”

그다음은…….

나는 내게 샴페인 잔을 내민 사람을 보고 활짝 웃었다.

“칼리안 할아버지!”

내가 그의 품에 안기자 칼리안 할아버지, 그러니까 대공은 허허 웃으며 등을 두드렸다.

“오냐, 오냐.”

“서운해라. 나는 보고 싶지 않았니?”

어느새 다가온 로자리오 할머니도 생긋 웃었다. 다들 반가운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엄청나게 높은 사람들.’

나는 내게서 샴페인 잔을 빼앗아 가서 다른 테이블에 내려놓는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놀러 간다고 하셨잖아요.”

“놀아라. 저기 당구대도 있고, 저긴 다트판도 있단다.”

이런 데서 어떻게 논담. 클럽을 기대하던 나는 조금 시무룩해져서 어깨를 떨궜다. 그때였다.

“벌써들 모이셨습니까.”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을 본 나는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다.

‘황후가 여긴 왜.’

그녀가 직접 참석하는 파티는 황궁 주최 파티 외엔 몇 없었다. 샤를리나의 데뷔탕트 또한 무려 석 달 만에 참석한 개인적인 파티였다. 나는 얼른 란슬롯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내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황후의 책무지. 이 클럽과 클럽 안의 귀빈들이 허튼 생각을 못 하도록 관리하는 건.”

황후는 나를 보고 빙그레 미소지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더라니, 반가운 사람을 만나려고 그랬나 보군. 게다가…….”

그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리 가족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영애 덕에 놀라운 면면도 보게 되고 말이야.”

“황가에 광영 있기를.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내가 치맛자락을 손끝으로 잡으며 인사하니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5번가의 클럽에선 그런 인사는 필요치 않지. 앉게.”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도 없이 곳곳에 있는 의자에 말이다. 황후도 마찬가지였다. 리엥스터 후작이 앞으로 나서 말했다.

“자, 오늘 의견을 나눠 볼 책은 <전장에 버려진 아이>입니다.”

토론?

나는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우리 가족을 제외하고는 손을 들며 각자 <전장에 버려진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이상했다. 책 내용에 빗대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잖아? 잠깐만 저거…….

‘도미니크의 얘기다.’

“시궁창에서 자란 생명이라고 모두 하찮은 것은 아니죠.”

“하지만 시궁쥐는 만악의 근원입니다. 황도에 창궐한 역병도 쥐를 말미암은 것일 수도 있을 터.”

“비약하지 마세요. 그리 따지면 세상의 나무를 모두 뽑아야지 않겠습니까. 병든 나무가 토양을 오염시키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잖습니까. 아주 낮은 확률로.”

도미니크의 거취에 관해 논의하고 있는 거다.

‘그렇구나, 여기가 사교계의 중추인 거야.’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황후에게 뜻을 전하고, 황후는 그것을 또 황제에게 귀띔하는.

“주인공에게 분란의 소지가 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지.”

“그릇된 핏줄이 황자― 아니, 태양의 보물이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작가의 의도는 대체 무엇일지. 등장인물들의 분열을 초래하기 위해서가 아닐는지요.”

나는 굳은 얼굴로 란슬롯을 쳐다봤다.

“……자주 오가는 주제야. <전장에 버려진 아이>는.”

“…….”

“황후가 아주 싫어하는 책이거든. 어쩌면 <병약한 후계자>보다 더.”

도미니크가 얼마나 위태로운 사람인지 알려 주려고 데려왔구나.

“오빠는…… 나빠요.”

나는 란슬롯과 그 곁에서 묵묵히 사회자인 리엥스터 후작을 바라보는 가족들을 쳐다봤다. 란슬롯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더 나빠질 수도 있어. 너를 위해서라면.”

“그건 저를 위한 일이 아니에요.”

“그래, 나를 위한 일이지. 내 동생이 정쟁에 휘말리는 걸 보느니 차라리 원흉을 죽이고 싶은 건.”

처음이었다. 란슬롯이 내게 이토록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는 건. 그러한 찰나, 누군가 또다시 문으로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고개 숙인 그녀는 샤를리나였다. 황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고, 나는 미간을 좁혔다. 아빠가 “세니아나?” 하고 물었다.

“……샤를리나 카렌듈라예요.”

순식간에 아빠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황후가 반쯤 몸을 일으키고서 샤를리나를 노려봤다.

“네가 여길 어떻게―!”

“아버님께서 데려다주셨어요. 바쁜 일이 있어 함께하지는 못하신다고 말씀 전하셨습니다.”

“너, 이……!”

그녀가 소리치려고 하자 시녀장이 황급히 귓가에 속삭였다. 아마도 여기가 어딘지 상기시킨 듯했다. 황후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 앉았다.

“세니아나, 잘 지냈나요?”

샤를리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우리 쪽을 다가왔다. 그리고 굳이 아빠와 할아버지 사이에 있는 의자에 앉아 고개를 모로 꼬았다.

“눈이 붉은데요. 무슨 일 있었나요?”

“지금 생겼어요.”

“저런. 속상해라.”

샤를리나는 아무렇지 않게 웃고 사회자를 응시했다. 그의 손에 잡힌 책을 본 그녀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손을 올렸다.

“저도 좋아하는 책이랍니다. <전장에 버려진 아이>요.”

“허허, 그렇습니까. 하면 영애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저는…….”

그녀가 나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주인공이 가여워요.”

“가엽다?”

“주인공은 모친에 의해 전장에 버려져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죠. 본래 남작의 아들이었는데 말이에요.”

“흐음…….”

“그러는 동안 남작이 입양한 늙은 종의 아들은 호의호식하며 살았어요. 가짜가 진짜의 것을 빼앗은 거예요.”

사람들이 묘한 눈으로 샤를리나를 쳐다봤다. 할아버지와 아빠, 오빠들 또한. 샤를리나는 처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주인공은 얼마나 속상했을까요. 또 남작은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가짜는 가짜일 뿐인데.”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상하다. 정말로.

잠시 쉬는 시간이었다. 나는 내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온 시트론과 함께 화장실을 찾았다.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눈 안이 쓰리다. 손을 씻고 있는데, 마릴린이 얼음주머니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이걸로 눈을 식히세요.”

“고마워.”

“별말씀을요. 그런데…….”

마릴린은 입매를 우그러뜨리며 화장실 문을 노려봤다.

“샤를리나 카렌듈라는 왜 온 거람.”

“글쎄.”

황후를 엿 먹이거나, 나를 엿 먹이거나. 둘 중에 하나는 하려고 온 듯했다. 나는 마릴린이 가져온 얼음주머니를 눈가에 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트론이 걱정스러운 듯 나를 쳐다봤다.

“아가씨, 요새 너무 피곤해하시는 것 같아요.”

“일이 많아서…….”

“아카데미에서는 이 정도로 피곤하지는 않으셨지요?”

“어……?”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아카데미에선 이보다 더 바빴던 적도 있었다. 그것도 꽤 자주. 그런데 왜 요새는 이렇게 피곤한 거지?

‘잠이 너무 많이 늘었어.’

나답지 않게 하루 종일 자기도 했고. 그것도 이틀 연속으로. 눈이 자주 붓기도 한다. 오늘도 그랬고 어제나, 그저께도…….

‘뭐지? 그동안의 피로가 축적된 걸까?’

아니면 마음을 놓아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시트론이 “감기 기운 때문일 수도 있겠어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일단 외투를 가져올게요. 마릴린 님은 감기약이 있나 알아봐 주세요.”

“네.”

두 사람이 밖으로 가고, 나는 잠깐 화장실에 서 있다가 휴게실로 가기 위해 나섰다. 휴게실 쪽으로 가기 위해 코너를 돌려는데 그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겐 무슨 볼일이시죠?”

시트론의 목소리에서 불쾌한 기색이 느껴졌다.

“시트론…….”

그리고 이건 샤를리나의 목소리다. 시트론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나는 얼른 그쪽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순간 땅이 크게 진동했다.

‘클럽 결계가 흔들렸어?’

그렇게 느끼고 정면을 보았다. 시트론과 샤를리나가 사라졌다.

* * *

주변을 둘러본 시트론이 날카롭게 말했다.

“영애, 이게 무슨―!”

“아가씨, 잖아.”

샤를리나의 표정을 본 시트론은 미간을 좁혔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샤를리나의 말을 곱씹다가 표정을 굳히고 대답했다.

“제게 아가씨는 세니아나 프렌시프 님 단 한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네?”

“그런 너를 알아서, 네게 제일 먼저 온 거야.”

샤를리나가 한 발, 한 발 다가오자 시트론은 주춤 물러섰다.

“그게 무슨…….”

“플로헤타가 그토록 혹독하게 매질해도 나를 지키려 했던 너니까.”

“이보세요, 영애.”

“네 호의가, 애정이 무섭고 부담스러웠던 나를 용서해.”

“그게 대체 뭔…….”

“하지만 약속했잖아.”

샤를리나가 울먹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를 동생처럼 여긴다고.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본심을 숨긴들 전부 알아낼 수 있다고. 내가 아무리 밀어내도 나를 지킬 거라고.”

“……!”

“시트론, 나야.”

말도 안 돼.

시트론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시트론은 샤를리나에게서 한 발짝 멀어지며 고개를 돌렸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뛰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샤를리나의 입에서 쏟아진 말들은 분명 제가 한 것이 맞다.

[하인에게 과분한 말이란 건 압니다. 하지만 아가씨, 저는…… 아가씨를 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항상 조급해 보이시니까요. 진심을 숨기려고 하셔도 알 수 있어요. 부디, 아가씨. 제가 아가씨를 도울 수 있게 해 주세요.]

[밀어내신다고 해도 쉽게 나가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아시잖아요.]

분수에 넘치는 말을 입에 담았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왜. 어떻게 그녀가 이러한 말을 알고 있는 걸까.

샤를리나는 입술을 꾹 베어 물며 중얼거렸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했지.”

“…….”

“언제나 등 뒤에 있을 거라고.”

시트론의 떨리는 눈동자가 샤를리나에게 고정되었다. 샤를리나는 울먹이며 그녀의 손을 잡고 읊조렸다.

“나, 네 도움이 필요해.”

“무슨, 무슨…….”

샤를리나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치맛자락을 말아쥐었다.

“다 날 싫어해서, 그래서 내 자리가 아니라고 여겼지만……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는데…… 그래도, 나!”

샤를리나가 눈물을 터뜨리며 시트론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돌아가고 싶어.”

“그게 무슨 소리…… 대체…….”

이마를 쥔 시트론은 당황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지금 있는 세니아나 프렌시프는 가짜야.”

쿵! 커다란 파열음이 귓속을 가로질렀다.

시트론은 비척비척 걸었다. 샤를리나와 헤어진 후 무슨 정신으로 클럽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약병을 손에 쥔 마릴린이 “시트론 님?” 하고 불렀다.

“아…… 네.”

“외투를 가져오신다더니 어째서 그곳에서 오시나요?”

“잠깐 만날 사람이 있어서.”

정신을 반쯤 놓고 얘기하는 시트론을 보고 마릴린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어서 가시죠. 아가씨가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아가씨.

시트론이 코트 자락을 꽉 비틀었다.

[기억나지 않아. 자살 시도 후에 몇 가지 기억을 잃었거든.]

[약속했잖아. 나를 동생처럼 여긴다고.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본심을 숨긴들 전부 알아낼 수 있다고.]

세니아나와 샤를리나의 목소리가 마구 뒤엉켰다. 이전엔 모른 척 넘어간 것들에서 이제야 모순이 느껴졌다. 아가씨는 기억의 일부를 잃었다. 기억의 ‘일부만’ 잃었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인 양 변했다.

재작년만 해도 아카데미의 시험조차 보지 않던 사람이 저도 모르는 제국 구석의 음식을 안다. 지혜로워졌다. 목숨같이 여기던 자존심보다 타인을 우선할 수 있게 되었다. 언변은 당당해졌다. 단 한 달 만에.

‘아가씨……!’

약병과 함께 가져온 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걷던 마릴린은 우후훗 웃었다.

“아가씨를 모시는 건 기쁜 일이죠?”

“…….”

“저는 프렌시프의 막내 따님을 모시는 걸 몹시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참!”

그녀가 빙글 몸을 돌리며 속닥였다.

“사실은 저, 어릴 때의 아가씨를 본 적 있어요. 저희 아버지가 프렌시프에서 오래 일하셨잖아요. 아버지 따라 영지 성에 간 적이 있거든요.”

“…….”

“새순 같은 보드라운 머리칼이랑 아장아장 걸으면서 어르신을 쫓던 모습이랑 하인의 자식인 저를 보면서 ‘언니!’ 하다가 ‘……동생이야?’ 하던 모습. 다 생생해요.”

마릴린은 킥킥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기사가 되어서 아가씨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검엔 재주가 없어서…… 하녀가 되었지만 원하던 주인을 모실 수 있어서 기뻐요. 시트론 님은요?”

“저는…….”

그녀 또한 그랬다. 시트론의 부모는 아서와 나베리우스에게 신임받는 사용인이었다. 그래서 유일하게 미아의 출신을 알고, 엄마 잃은, 아니, 엄마에게 버려진 세니아나를 전담하게 되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시트론을 성으로 데려와서 잠든 영애님을 보여 주었다.

[보렴, 시트론. 아가씨란다.]

어머니의 팔뚝엔 생채기로 가득했다. 패악이 늘어난 세니아나는 이따금 발작하듯 사용인들의 몸에 손을 댔다. 우직한 부모님은 시트론에게 ‘평생 모실 분이니 아끼고 사랑해 드리렴’ 당부했다.

[싫어요.]

[응?]

[다들 못된 영애님이라고 했다고요. 저는 아가씨가 싫어요.]

곤란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를 보고 어머니가 나섰다. 시트론의 어깨를 가볍게 쥔 그녀는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프면 속상하고 예민해지지? 일전에 다리가 부러졌을 때 시트론도 그랬잖아, 그렇지?]

[네…….]

[아가씨도 그런 거야. 마음이 아파서, 속상해서. 그래서 예민하고 난폭해지셨단다. 상처가 있는 아가씨를 동생처럼 보듬어 주렴.]

“시트론 님?”

“저는 아가씨가 가여워서……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외로워하는 심중을 헤아릴 수 있게 되어서…… 그래서.”

웅크려 잠든 아가씨는 정말로 외로워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의 말씀처럼 아가씨를 아끼고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어린 날의 다짐이 눈앞에 잡힐 듯 선명했다.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정말로 샤를리나가 진짜 아가씨라면. 그렇다면…….

‘여전히 웅크려서 외로워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자신을 잃고, 그렇게 스스로마저 잊어버리는 건 아닐까. 그때 마릴린이 “아가씨!” 하며 소리쳤다. 세니아나가 급히 시트론에게 다가갔다.

“시트론!”

“……네, 아가씨.”

“괜찮아? 방금 샤를리나와 함께 있었지? 무슨 일이 있진 않았어? 다친 곳은? 응?”

세니아나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보았다. 시트론은 그런 그녀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이 불안과 공포, 서운함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진짜 주인이 홀로 외로워할까 봐? 아니면…….

시트론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하지만 샤를리나와―!”

“……잘못 보신 거겠지요. 외투부터 입으세요. 감기 걸리시겠어요.”

시트론은 말을 돌리며 세니아나의 어깨에 외투를 걸쳐 주었다.

* * *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가족들은 내 눈치를 살폈다. 말이 없어지고, 표정이 가라앉자 막상 일을 저지른 이들이 더 당황한 것이다.

“……니아나.”

“…….”

“세니안.”

“……아, 네.”

할아버지와 가웨인은 커흠, 헛기침을 하며 나를 힐끔 쳐다봤다.

“오늘 일은 앞날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뭐랄까, 음…….”

“사람을 사귈 땐 좀 더 세세한 부분까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

“……네.”

내가 기계적으로 대답하자 마침 마차가 저택에 도착했다.

“저 먼저 들어갈게요!”

나는 멈춘 마차에서 얼른 내려서 뛰어갔다.

“세니아나!”

“세니아나! 우리는 그게 아니라……!”

“잠깐, 아가―!”

뒤에서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난 시트론을 찾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상해. 분명히 뭐가 있어.

시트론이 날 제일 잘 알 듯, 나도 시트론을 잘 알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다. 나는 가족의 마차를 따라온 사용인 마차로 달려갔다.

“마릴린!”

“아가씨? 추운데 바로 내저로 들어가지 않으시고요!”

“시트론은?”

“저택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마저 이상했다. 시트론은 외출 후엔 늘 내 뒤를 쫓으며 ‘손을 씻어라’, ‘추운 날 밖에서 고생하셨으니 모과차로 몸을 녹여야 한다’며 나를 챙겨 주기 바빴다.

난 저택으로 들어갔다. 방과 다이닝룸엔 없어서 사용인 숙소까지 살폈다. 시트론의 방문이 열려 있기에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시트론, 얘기 좀―”

“3년 전, 아가씨 생신 때 말이에요.”

시트론이 무언가를 들고서 낮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응?”

“아가씨 생신 때 마담 버지니아로부터 받은 선물이 뭔가요?”

“…….”

“아가씨가 열세 살일 적에 영지 상점가에서 잠시 사라지셨잖아요. 그때, 제가 아가씨를 발견한 곳이 어디죠?”

“…….”

“여덟 살 생신 때, 사용인들이 돈을 모아 선물했던 것은요?”

“…….”

시트론이 내게 어떤 사진을 보여 주며 물었다.

“이 사람들이 누군가요?”

“…….”

“말씀해 주세요. 이 사람들, 기억나세요?”

“……아니.”

시트론은 힘없이 팔을 떨구었다. 사진이 팔랑,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시트론, 그 사람들 혹시…….”

“고용인들이에요. 어려서부터 아가씨를 모셨던.”

“…….”

“부모 잃은 저를 맡아 준, 제게는 가족 같은 사람들이고…… 란슬롯 도련님의 외가가 영지로 쳐들어왔을 때 성을 지키려다 죽었지만, 모두 기억하고 있는…….”

힘없이 중얼거리던 시트론이 “죄송해요.” 하고 말하며 짐가방에 사진을 넣었다.

“저기, 시트론! 사실은…… 사실은 할 말이!”

“이제 와서요?”

나는 움찔 몸을 굳혔다.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시트론은 내겐 정말로 소중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가족보다 더 의지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시트론에겐 사정을 말하지 않았어.’

가족들에겐 내가 사실 세니아나고, 아탈란에 의해 오랫동안 몸이 바뀌어 있었다고 말했지만 시트론은 전혀 모른다. 사실, 나는 여전히 무서웠다. 내가 진짜 세니아나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 몸에 남은 기억의 주인도, 세니아나로 더 오래 산 것도 내가 아니었으니까. 혹시나 시트론이 오해할까 봐, 그래서 나를 믿지 못할까 봐서. 나는 차마 그녀에게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시트론이 고개를 돌리고 중얼거렸다.

“불충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용서하세요.”

“……아니야.”

“씻으셔야죠. 목욕물을 받아 놓을게요.”

“잠깐만, 시트론!”

나는 떠나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내 말을 들어 줘. 나는―!”

“다음에요. 다음에 들을게요.”

“변명까지 들어 주지 않는 건 잔인해.”

시트론의 손이 보였다. 새빨갛게 튼 손, 곳곳에 얼룩이 가득했다. 그녀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언제나 피곤에 절어 잠든 내 몸을 주물렀다.

이 세계에서 사용하는 파스 대용의 약물은 과하게 사용하면 손이 갈라지고, 종국엔 곪아 진물과 피가 줄줄 새어 나오는 부작용이 있는데도 시트론은 하루도 마사지를 거르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꽃을 사 오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시장에 다녀왔다. 아침이면 발이 시릴까 양말과 신발을 데웠다. 이른 아침에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오는 나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기다렸다.

“…….”

“가 보겠습니다.”

나를 스쳐 지나간 시트론의 옷깃이 쇠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깊은 밤. 나는 서재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가족들이 란슬롯을 떠밀었다.

“어서.”

“빨리!”

란슬롯은 내 옆에 앉아서 찻잔을 내밀었다.

“세니아나, 오늘 일은, 그러니까……. 준비되지 않은 너를 몰아붙였을 수도 있―”

“오빠.”

“응?”

“오빠…….”

나는 그의 허리춤을 잡고 품에 얼굴을 묻었다. 가슴이 시려서 냉기가 손끝, 발끝까지 전달된 기분이었다. 란슬롯은 당황한 표정으로 잠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가족들이 슬금슬금 곁으로 다가왔다. 란슬롯이 어색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세니아나?”

“…….”

“무슨 일이 있어?”

“…….”

싸웠다, 시트론과. 아니, 서운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 세계에 온 후 처음 마음을 연 사람. 언니이자…… 첫 친구.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과 처음 마찰이 생긴 나는 너무너무 겁이 났다. 시트론이 영영 전처럼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겁이 났다곤 하지만 사실은 그녀를 믿지 못해서 사정을 털어놓을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시트론이 준 마음에 반도 보답하지 못했다. 나는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의아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하던 가족들이 나를 둘러싸고 말했다.

“무슨 일이냐, 응? 세니아나.”

할아버지가 다급히 닦달했고,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어깨를 툭 치며 고개를 저었다. 가웨인이 “누구야? 어? 죽여 줄까? 내가 다 죽여 줘?” 하고 소리치자 란슬롯은 그의 발을 지근지근 밟으며 말했다.

“우리 막내가 왜 그럴까. 오빠 속상하게. 응?”

“친구랑, 친구랑…….”

“그래.”

참으려고 했는데도 자꾸만 눈물이 비죽 솟았다. 나는 어린애처럼 얼굴을 엉망으로 일그러뜨리고 흐어엉 소리 내 울었다.

“친구랑 싸운 거야, 그래?”

“화해하고 싶은데……. 면목이 없고,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흑, 흐으윽!”

“그랬구나.”

나는 어린애처럼 펑펑 울다가 코를 훌쩍이며 가족들을 올려다보았다.

“친구랑 화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

“…….”

“…….”

“…….”

가족들은 전부 말이 없었다. 난 딴청을 부리는 가웨인을 쳐다봤다.

“오빠?”

“……화해할 일이 따로 있나, 친구면 뭐…… 치고받고 싸우다 진 쪽이 비는…… 아! 내가 대신 때려 줄까?”

“안 돼요!”

할아버지도 눈을 데루룩 굴리다가 커흠, 헛기침을 했다.

“내가 화해하라고 명령, 아니, 말해 보마.”

“그것도 안 될 것 같은데…… 큰오빠?”

“싸울 일이 딱히 없어서…….”

그러자 가웨인이 “형은 친구가 없잖아. 다 추종자지.” 하고 중얼거리다가 란슬롯에게 얻어맞았다. 한심한 표정으로 할아버지와 오빠들을 보던 아빠가 무릎을 굽히고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세니아나.”

“……네.”

“사과는 했니?”

“하고 싶은데…… 무서워서.”

사과를 하려면 지금까지의 일을 전부 말해야 하고, 그럼 시트론이 더 실망할까 봐…….

내가 웅얼거리자 아빠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게 그토록 소중한 친구라면, 친구에게 너도 몹시 소중할 거다. 싸운 게 속상하고 괴로운 건 상대방도 마찬가지겠지.”

“…….”

“네 친구는 네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옹졸한 녀석이냐?”

“아니에요! 엄청 상냥하고, 선하고, 성실한 데다 사려 깊어서 제가 아주 좋아하는― 아……!”

아빠는 빙그레 웃었다. 나는 후다닥 일어나서 치맛자락을 꾹 잡았다.

“사과하고 올게요.”

“그래.”

* * *

재빨리 서재를 떠나는 세니아나를 보던 가족들이 실소를 터뜨렸다.

“아쉬워라. 계속 속상했으면 귀여운 모습을 더 볼 수 있었을 텐데.”

란슬롯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가웨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귀엽긴 하지만 보기 힘들잖아. 서럽게 우는 건.”

“뭐.”

“시트론인 것 같지?”

“어떤 친구보다 세니아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면.”

다른 하인이었다면 세니아나 모르게 ‘내 손녀 눈에서 눈물을 내다니 온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게 해 주지’라고 협박이라도 할 텐데, 시트론은 달랐다. 시트론이 세니아나에게 얼마나 헌신하는지는 지척에서 본 가족들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 시각, 시트론은 통신석을 보며 표정이 굳어졌다.

“도련님들을 만나게 해 달라고요……?”

[그래, 오빠들.]

“곤란합니다.”

[나, 변했어. 알잖아, 시트론! 이제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단 말이야. 오빠들이 보고 싶어…….]

“…….”

[오빠들도 진짜 동생이 보고 싶을 거야.]

시트론이 침묵하자 통신석에선 침울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빠들과 내가 과거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시트론, 우리는 가족이잖아. 관계는 언제든지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

[가족들이 날 오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

“오해…… 라고요.”

[그래, 여전히 내가 가족에게 상처 주기 위해 우리 군의 정보를 적군에게 넘겼다고 생각하지.]

“……!”

시트론은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그건 오직 프렌시프 일가와 그들이 신임하는 소수의 몇몇만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이 사람이…….’

[하지만 생각해 봐, 시트론. 적군은 큰오빠의 외가였어. 그웬에 의해 찢어 발겨진다면 큰오빠와 그들이 어떻게 화해할 수 있겠어?]

“……그래서 그런 일을 하셨다고요.”

[그래, 모두 가족을 생각한 일―]

“몇만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어르신과 각하가 비운 성을 지키기 위해 사용인들마저 칼을 들었고, 모두…… 모두…….”

부모님처럼 여기던 사람들이 죽었다. 성문 앞에 넝마처럼 너덜거리는 반백 년 지기 전우의 시체를 보고, 어르신은 석 달 열흘을 잠들지 못했다.

아서가 유일하게 마음을 내어 주던 사촌 형제도, 가웨인이 부모처럼 믿고 따르던 검술 스승까지 전부. 모든 질책과 힐난은 적군의 핏줄인 란슬롯의 몫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지금도 하루에 네 시간을 채 자지 못한다.

“그건 가족을 위한 일이 아니라―!”

순간, 등 뒤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려왔다. 시트론은 황급히 통신을 종료하고 뒤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통신 중이었어?”

“……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필요하신 게 있다면 설렁줄을 당기시죠.”

“나는, 네게…….”

중얼거리던 세니아나가 시트론이 든 통신석을 빤히 쳐다봤다.

“누구야?”

“개인적인 일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목소리였어.”

“…….”

“누군지 내가 말해?”

세니아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시트론은 고개를 돌리고 묵묵히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샤를리나.”

“…….”

“맞지?”

통신석을 쥔 시트론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시트론, 이건 네 주인으로서 묻는 거야. 네가 왜 샤를리나와 연락하고 있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시트―”

그때였다.

“네 이놈!”

문밖에서 벼락같은 고함이 들렸다. 부모 잃은 시트론의 보호자가 되어준 영지 성의 총괄 집사, 안토니오였다. 그의 곁으로 램프를 들고 있는 마릴린과 저택의 총집사 마일로도 보였다. 성큼성큼 걸어온 안토니오가 시트론의 뺨을 올려붙였다. 짝!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시트론의 얼굴이 돌아갔다.

“아가씨께 무슨 말버릇이냐!”

“……송구합니다.”

“사용인이 절대 잊어선 안 되는 두 가지가 뭐야!”

“…….”

“마릴린.”

대신 대답하라는 듯 안토니오가 마릴린을 쳐다봤다. 마릴린은 당황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웅얼거렸다.

“보안과 충심입니다…….”

안토니오는 다시 시트론을 사납게 쏘아보았다.

“잘한다, 잘한다 하였더니 어디서 이따위로……!”

“…….”

“당장 말씀드려! 네가 왜 카렌듈라 영애와 연락을 취하는 게야!”

시트론은 고개를 수그린 채 고집스레 입을 닫았다.

“이 녀석이 정말! 마일로, 가서 징벌방을 열어라!”

그러자 마릴린이 놀라 펄쩍 뛰었다. 징벌방은 가문에 피해를 입히거나 사용인으로서 분수를 잊었을 때 열리는데, 징벌방에 들어간 사용인은 대부분 불구가 되어 기어 나왔다. 마릴린이 희게 질린 얼굴로 “하, 하지만 징벌방은……!” 하고 소리치자 마일로가 딸의 팔을 잡고 단호히 고개를 돌렸다.

“가서 하녀장과 집사들, 마부장, 보안대장을 데려와라.”

마릴린은 말려 달라는 듯 세니아나를 쳐다보았다.

“분명 뭔가 착오가 있었을 겁니다. 시트론 님이 아가씨를 배신할 일은―”

“나는 배신당해도 괜찮아.”

사용인의 시선이 동시에 세니아나에게 향했다. 그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트론을 쳐다봤다.

“시트론, 너라면 괜찮아.”

“…….”

“하지만 나는 아가씨잖아. 나 하나 배신당하는 거로 끝나지 않아.”

세니아나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나는 가족들과 우리에게 헌신하는 사용인들, 영지의 모두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

시트론의 배반을 감당하는 게 오로지 자신이라면 얼마든지 당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니니까. 그녀의 배반을 감당해야 하는 건 프렌시프의 모두라서, 세니아나는 결코 시트론을 용서해 주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네 발로 징벌방으로 가.”

안토니오와 마일로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언제 저렇게 자라셨는가.’

어린 주인은 자신의 기분보다 어깨에 멘 짐의 무게를 우선하게 되었다. 마릴린은 불안한 얼굴로 시트론을 쳐다봤지만, 시트론은 고개를 수그리고 징벌방으로 향했다.

다음 날, 시트론은 끝끝내 통신을 취한 이유를 털어놓지 않았고, 곤죽이 된 상태로 의무실에 옮겨졌다.

샤를리나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래, 시트론이 징벌방에 들어갔단 말이지…….”

요요한 웃음을 머금고 중얼거리자 소식을 전한 하인이 고개를 숙였다.

“세작에게선 성녀님과 접촉한 이유를 토설하지 않았다고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정말일지는…….”

그의 중얼거림에 샤를리나는 픽 실소를 흘렸다.

“사실일 거다.”

“예?”

“그런 사람이거든, 시트론은.”

목숨보다 충성을 우선하는 사람. 세니아나의 몸에서 빠져나오기 직전, 영지에서 득세한 것은 아서의 약혼녀로 내정되었던 플로헤타 메리아덴이었다. 플로헤타는 세니아나를 감싸는 시트론을 갖은 방법으로 괴롭혔다.

어느 겨울밤엔 총괄 집사 안토니오의 눈을 피해 시트론을 끌고 나와 마비약을 입속에 쏟아 넣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트론은 굴하지 않았다. 마비약 때문에 몇 달을 고생했어도, 뼈가 부러질 때까지 맞은 적이 있더라도 세니아나의 앞을 묵묵히 지켰다.

‘그런 시트론이 토설할 리가 없지.’

제가 ‘진짜 세니아나’라는 걸 알아차린 순간부터 시트론의 목줄은 제 손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의무실에 있다고?”

“예.”

“첩자에게 내 편지를 전하라고 해. 저택 근처에서 오빠들을 봐야겠으니 데려오라고.”

“하지만 운신도 못 할 정도로 엉망이라던데요.”

“죽은 건 아니잖아.”

샤를리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하인은 고개를 수그렸다.

편지는 곧 프렌시프 저택에 심어 둔 첩자에 의해 전해졌다. 시트론은 또 한 번 은밀히 샤를리나에게 통신을 취했다.

“그래, 나야.”

[정말로…… 정말로 세니아나 아가씨십니까?]

“증거를 원한다면 뭐든 물어봐.”

[삼 년 전 아가씨의 생신 때…….]

샤를리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분해. 프렌시프 앞에선 넙죽 엎드려도 못할 계집애들이 내가 가족과 사이가 나쁘다고 이죽거렸으니까.”

[……그날, 마담 버지니아에게 받은 선물은 뭐죠?]

“팔찌였잖아. 싸구려라 버렸지만.”

[아가씨가 열세 살일 적에 상점가에서 사라지신 적이 있잖아요.]

샤를리나의 손이 움찔했다. 그땐, 급작스럽게 아탈란의 대사제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시트론과 하인들을 따돌리고 몰래 대사제와 만났다.

[제가 아가씨를 찾은 곳이 어디죠?]

“웬 노파가 하는 무기거래소였지. 노인네 주제에 상냥한 척, 배려심 넘치는 척. 내게 그따위 치킨 수프를 먹이려고 한 것만 생각하면 화가 난다고.”

그녀가 흥, 코웃음 쳤다. 시트론은 한참 침묵했다.

“그래서? 더 물어보고 싶은 건 없니?”

[란슬롯 도련님의 외가가 쳐들어온 날.]

자신을 키워 준 본성의 사용인들이 모조리 도륙당한 날이었다. 지금 총괄 집사인 안토니오의 형인 알베르토는 자신을 대신하여 아니, 대신한다고 믿으며 칼을 맞았다.

[아가씨, 도망…… 도망치십……!]

다 죽어가면서도 적군의 다리를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혹여 소중한 아가씨를 쫓아갈까 봐서. 그녀는 그를 비웃어 주었다.

[내가 왜 도망을 쳐?]

[……예?]

[내가 불러들인 사람들인데.]

알베르토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죽어갈 때가 되니 우둔한 노인네에게도 눈치가 생겼다.

[너, 아가씨가 아니구나.]

[역시 바보는 아니네.]

그를 ‘집사 할아버지’ 하고 부르며 키득거리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았다.

[샤를, 샤……샤를리나.]

그의 잇새에서 마지막으로 새어 나온 사실은 비통했다. 근처에 있던 하인과 하녀 몇도 그 목소리를 들었다.

[설마 너……!]

[어떻게 네가…… 샤를리나, 샤를리나가 맞는 거야?!]

다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하녀의 딸로 살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지.’

모두 죽었으니까.

샤를리나는 침울한 척 말했다.

“그래, 그 가슴 아픈 날.”

[……아가씨는 어디에 계셨나요?]

“뭐?”

샤를리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성에 있었지. 알베르토가 날 지키려다가 죽었잖아.”

[그다음, 말이에요. 아가씨를 찾기 위해 제가 온 성을 뛰어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어요.]

“그건…….”

아탈란의 군사들과 함께 있었다. 피 웅덩이가 있는 곳이 싫었으니까. 아름다운 드레스가 젖을까 봐서.

“나도 숨어 있었어. 별채…… 옷장 말이야. 별채의 옷장에.”

[그렇군요. 역시 당신이…….]

“그래, 내가 진짜야.”

[어떻게든 도련님들을 모시고 가겠습니다. 진짜 동생과 화해하셔야 할 테니…….]

시트론의 목소리가 우울했다. 샤를리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저녁, 달이 뜨면 일러 준 오두막으로 와.”

[예.]

통신을 종료한 샤를리나는 키득거리며 머리카락 끝을 꼬았다. 세니아나가 그 광경을 본다면 좋을 텐데. 제 노릇을 대신하는 가짜가 진짜의 앞에서 절망하는 얼굴은 절경일 터였다.

다음 날, 샤를리나는 아침 일찍부터 오두막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과거에 즐겨 입던 브랜드의 드레스를 구매해 왔다. 그대로 입을까 하다가 가슴이며 치맛단에 붙은 비즈와 장식을 다 떼어 냈다.

플로헤타가 들어오기 일 년쯤 전에 나베리우스는 그녀의 사재를 몰수했다. 제 취향과는 동떨어진 밋밋한 옷들만 겨우 구매할 수 있게 했다. 그래서 그녀는 엉망인 꼴로 영지 성을 활보했다. 자, 어떠냐. 네 덕분에 내가 거지만도 못한 꼴로 지낸다. 나베리우스 보란 듯이.

‘익숙한 모습이 좋겠지.’

“수수하게 꾸며, 수수하게.”

“예.”

매일 꽃 기름을 발라서 한 올, 한 올 정성껏 손질하던 머리를 세니아나일 적과 같은 엉망인 꼴로. 새하얀 분과 화사한 블러셔로 단장하던 얼굴을 화장기 없는 초췌한 꼴로. 준비를 마친 샤를리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거울을 쳐다봤다. 하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외출하시는데 그런 모습으로 괜찮으세요?”

“그래.”

란슬롯과 가웨인이 가슴 아플 정도로 못난 꼴이어야 호사를 누리는 가짜 세니아나가 더 가증스러울 것이다. 대사제로부터 배운 처세였다. 해가 저물 무렵, 샤를리나는 오두막으로 향했다. 마차에서 내리자 익숙한 문양의 다른 마차가 보였다.

‘왔구나.’

그녀는 은근했던 미소를 지우고, 오두막 안에 들어갔다. 오두막 내부는 어두컴컴했다. 그녀가 조명의 스위치를 더듬거리며 찾다가 인기척 소리를 듣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시트론!”

반갑게 소리치며 달려갔다.

“왔구나. 고생했다는 말 들었어.”

“네…….”

“내 몸에 든 악귀는 잔인하기도 하지.”

“…….”

“너를 알아. 충성심 강한 네가 악귀에겐 오죽 잘했겠니? 그런데도…….”

샤를리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시트론의 손을 잡았다.

“너를 징벌방에 보내다니.”

“…….”

“정말이지 못돼먹은 여자야. 세상에, 손이 다 텄구나. 마일로니? 안토니오가 그런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내 몸으로 돌아가면 그것들은 모두 네가 당한 것의 몇 배로…….”

“제가 징벌방에 간 건 어떻게 아셨나요?”

잠깐 주춤한 샤를리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저택 일이 궁금해서 알아봤지.”

“제게 편지를 전한 사람은 누구예요?”

시트론이 간절한 목소리로 샤를리나의 팔을 잡았다.

“아가씨, 그런 일은 이제 그만 하세요.”

“……가족 일이 궁금한 거야 당연한 일이지.”

“이제 죄는 그만 지으세요.”

시트론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반성하시고, 사과하세요. 벌은 제가 나누어 받을 테니 제발…….”

샤를리나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시트론을 보다가 거칠게 팔을 떼어 냈다.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건데? 내 자리를 빼앗기고도 그저 침묵해야 한다는 거니? 바보처럼?”

“…….”

“오빠들은 어디에 있어. 내가 봐야겠으니까 얼른 나오라고 전해.”

“역시 반성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그놈의 반성, 반성! 그만 좀 해! 네가 바보처럼 산다고 나도 바보처럼 살아야 하―”

“시트론은 바보가 아니야.”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를리나의 등허리로 흠칫, 소름이 내달렸다.

‘이 목소리…….’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조명이 탁! 켜지며 굳은 얼굴의 여성이 보였다.

“세니아나…… 네가 어떻게…….”

설마! 샤를리나는 얼른 시트론을 돌아보았다.

“너야? 네가 내 말을 저 악귀에게 전한 거야?!”

말도 안 돼! 어떻게 시트론이……!

“내가 진짜라고 했잖아. 내가, 나만이 진짜 프렌시프 영애님이라고 말했잖아! 믿지 않았어? 그래서 저 계집애를 불러들인 거야?”

시트론은 고개를 수그린 채 비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아요. 아가씨가 제가 모시던 분이라는 걸.”

“그런데 왜……!”

시트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가씨.”

“뭘, 대체 뭐가!”

“저는 이제 선대의 인연이 아니라…… 제가 모시고 싶은 분을 모시려고 합니다.”

갈등했다. 평생 모셔 온 사람이 샤를리나라면, 그렇다면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은 오직 하나뿐이니까.

[시트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신의다.]

[너 하나로 사용인 기천의 목숨이 경각에 달릴 수 있음을 명심해라.]

어머니와 안토니오가 평생을 주의시킨 말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진짜 주인을 도와야 해. 하지만 진짜라는 게 뭐지. 선대의 선대부터 모셔 온 가문의 친딸, 아니면…….

[나는 가족들과 우리에게 헌신하는 사용인들, 영지의 모두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

따르고 싶은 사람은 달리 있었다.

[겁이 나서 그랬어! 친절이 나를 약하게 만들까 봐서 그래서 사람들의 동정에 익숙해질까 봐 무서웠어…….]

[상처 줘서 미안해.]

사용인을 생활의 편의를 위해 부리는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고, 지켜야 할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 저보다 한참 못한 자도 ‘사람’으로 여겨 주는, 그래서 선뜻 사과를 하는 그런 사람.

고민을 하고, 또 했으나 결론은 하나였다. 가짜라 할지라도 지금 세니아나의 몸에 있는 그녀를 버릴 수 없었다. 징벌방행을 명했으면서도 쓰러져 의무실로 옮겨진 시트론을 보며 눈물짓고, 애탄 한숨을 짓는 사람을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샤를리나는 제 반대편에서 일그러진 얼굴로 눈물 흘리는 시트론을 노려봤다.

“너…… 감히 네가 나를!”

시트론의 우직한 성품을 잘 알았기에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저 바보가, 어떻게 저 미련한 계집애가 나를 배신할 수 있어?

샤를리나의 눈빛이 번뜩였다. 득달같이 시트론에게 달려들려는데 세니아나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높게 쳐든 샤를리나의 손목을 틀어쥔 세니아나가 소리쳤다.

“그만둬!”

“이거 안 놔?! 감히 네깟 게 어디서 나를―!”

짝! 마찰음이 고성을 갈랐다. 붉은 뺨을 감싸 쥔 샤를리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세니아나를 쳐다봤다.

“너…… 감히, 감히 나를…….”

짝! 반대편 뺨까지 내리친 세니아나는 당황하여 주저앉은 샤를리나를 노려봤다.

“시트론, 나가 있어.”

“하지만 아가씨……!”

“나가 있어.”

시트론은 잠시 머뭇거렸다.

‘내가 있으면 방해만 될지도.’

세니아나는 성수를 가진 강력한 성녀이고, 샤를리나도 마찬가지였다. 힘이 비등하다면 지켜야 할 게 있는 쪽이 약세일 터. 시트론은 결국 오두막을 나섰다. 샤를리나는 부들부들 떨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한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세니아나는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악을 내지르는 샤를리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감히, 감…… 히…….”

표정 없이 고요하기만 한 얼굴이 어쩐지 섬뜩했다. 샤를리나는 마원이 달린 초커의 브로치를 쥔 채 성수의 이름을 소리쳤다.

“미오라!”

순간 바닥이 가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진동은 벽을 더듬고 올라와 천장까지 이어졌다. 순식간에 콰광―! 굉음과 함께 온몸이 짓눌렸다.

“미오라, 미오라!”

아무리 불러도 성수는 응답하지 않았다.

“뭐, 뭐야. 왜 갑자기…….”

포털이 열려 있으면 다른 포털은 열 수 없다. 포털이 실체화된 성수도 마찬가지였다. 아탈란의 후원에서 곱게 자란 샤를리나는 아직 모르는 사실이었다.

세니아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고, 겁에 질린 샤를리나는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사제와 카렌듈라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성기사들을 두고 왔다. 근처에 있던 마부도 치워 두었기에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 오지― 꺄악!”

샤를리나의 손등을 밟은 세니아나는 낮게 읊조렸다.

“너였구나.”

“…….”

“내 몸을 훔친 약탈자가.”

“……!”

* * *

샤를리나는 일순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시트론이 변심한 이상 내게 들킨 건 당연한 일이라고 정리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꽉 깨물고, 짓씹듯 말했다.

“누가, 누구더러.”

그러곤 날 매섭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약탈자? 하!”

“…….”

“본래 내 몫이던 인생을 빼앗아 간 기생충은 너야! 너 때문에 나는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어!”

“그럼 왜 내 몸에서 도망쳤니?”

“그건……!”

“어째서 가족들이 널 인정하지 않았어?”

“…….”

“네 것이라면서 내 인생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이유가 뭐지?”

“…….”

그녀는 대답하지 못한 채 이를 악물었고, 난 그런 그녀의 손목을 꽉 틀어잡았다.

“이거 놔! 아프―”

“아파? 고작 이게 아파?”

샤를리나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양 잘게 흔들렸다. 나는 핏발이 선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너로 인해 가족도, 인생도 빼앗긴 난 어린 시절 내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며 살았어!”

“그, 그게 왜 내 잘못이야! 애초에 그 삶은 신이 나를 위해 안배한……!”

“망상은 그만해! 네 자기합리화 따위 지겨우니까.”

“…….”

나는 샤를리나를 벽으로 떠밀며 소리쳤다.

“이건 내 몸이고, 내 인생, 내 가족, 내 사람, 모든 게 내 거야.”

샤를리나의 낯빛이 새파래졌다가 하얘졌고, 종국엔 붉어졌다. 오두막이 크게 진동했고, 내부에 있는 가재들이 바닥으로 와르르 떨어졌다. 챙강―! 날카로운 파열음이 귀를 가로질렀다.

[누나, 내 ‘길’이 닫혔어!]

테디의 전음이 느껴졌다.

[오물 여우가 온다!]

바람이 휘몰아쳤다. 순식간에 2층과 지붕이 파열하며 나뭇더미들이 쾅! 쾅! 굉음과 함께 쏟아졌다. 멀린의 마원이 새파랗게 빛나며 그가 현신했다.

“주인!”

눈부신 은발이 휘날리는가 싶더니 나는 어느새 그의 품 안에 있었다. 캐애앵―! 찢어지는 듯한 포효와 함께 새카만 검은 여우가 샤를리나의 앞에 나타났다.

“죽여 버려. 죽여 버려, 미오라!”

여우가 울부짖으면 울부짖을수록 괴로워졌다. 머릿속으로 온갖 사념이 억지로 흘러드는 기분이었다. 내가 신음하며 떨자 멀린이 앞을 가로막고 “크르릉!” 포효했다.

“사라져라, 삿된 것.”

허공에 금사 같은 실선이 잔뜩 떠오르더니 이윽고 뭉쳐져 수없이 많은 화살이 되었다. 화살이 장대비처럼 검은 여우를 향해 쏟아졌다.

“아!”

나는 깜짝 놀라 얼굴을 굳혔다. 멀린의 화살은 검은 여우에게 직격하였으나, 상처를 내지 못하고 그대로 흡수되었다. 마치 늪지에 빠진 것처럼.

“캐애앵!”

검은 여우가 절규하듯 울부짖으며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멀린은 순식간에 백사자가 되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커다란 앞발로 주둥이를 후려쳐 짓밟고, 단숨에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검은 여우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괴로워 보이는 건 멀린도 마찬가지였다. 산에 녹기라도 한 양 아름다운 털이 검은 것에 엉망으로 젖어 들었다. 멀린이 비틀거리던 찰나, 검은 여우가 도약했다. 십(十)자로 벌어진 입 사이에서 기괴하리만큼 많고,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그 순간, 붉은빛이 사방으로 퍼지며 구구궁, 천지가 요동쳤다.

“테디!”

커다란 곰이 포효하자 마치 오물이 씻겨 내려가듯, 일렁이던 검은 오라가 뒤로 밀려났다. 멀린과 테디가 동시에 검은 여우에게 달려들었다.

“캐애앵―!”

괴롭고 괴로워서 내 사지가 발발 떨릴 만큼 고통스러운 비명이었다. 나는 벽면 앞에서 떨고 있는 샤를리나를 향해 소리쳤다.

“그만둬! 성수를 물러나게 해!”

샤를리나의 눈빛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났지만, 그녀는 이내 표독스럽게 눈꼬리를 올리며 검은 여우를 힐난했다.

“미오라, 이 쓸모없는 것! 뭐 해! 당장 저년을 죽여!”

바닥에 무너졌던 여우가 바들바들 떨면서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여우는 일전에 보았던 하녀의 모습으로 돌아와 허공으로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불쾌감이 온몸을 옥죄고, 오두막을 향해 무언가 움틀거렸다. 수 초 후, 오두막으로 기어든 것은…….

‘삿된 자들!’

영지 근처 부족에서 보았던 것이나 란슬롯을 공격했던 것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더 커다랗고, 소름 끼치도록 음울한 느낌의 괴물. 마치 에이레네가 삿된 자화되었을 때처럼!

“칫!”

혀를 찬 테디가 인간화되어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멀린도 동시에 돌아와 내 앞을 막았다.

“가자, 누나.”

“하지만…….”

“도망쳐. 지금 누나의 몸 상태론 우리가 저것들을 모두 이길 수 없어.”

나는 왜인지 계속 피곤한 상태였다. 지금 멀린과 테디를 현신시킨 것만으로도 온몸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쉽사리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누나의 하녀라면 내가 데려올 테니까!”

“아니……!”

나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저게 말을 걸고 있어.”

“뭐?”

나는 테디를 밀어내고 어느새 불에 그을린 시체처럼 새까매진 미오라를 쳐다봤다.

[구…… 해 줘.]

마치 테디나 멀린이 전음을 보낼 때 같았다.

“누나?”

“주인.”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구해…… 주세요.]

[나…… 를 구…… 해 줘.]

[돌아가고 싶어!]

미오라가 오열하듯 소리치고 있어서 나는 차마 멀린과 테디를 따르지 못했다. 멀린과 테디는 정신없이 달려드는 삿된 자들을 떨쳐내고 있었다.

[우리 공주님이 요새 왜 이렇게 오래 주무실까. 몸이 아픈 건 아니니?]

[아니에요.]

[아프면 솔직하게 말해야 해. 넌 참는 게 너무 익숙한 아이라 걱정이 되니까.]

[그게 아니라……. 선생님 저, 요새 이상한 꿈을 꿔요.]

[기다리던 첫사랑 소년이라도 보았어?]

[그 애는 아니고…….]

[응?]

[여우예요. 두 손에 들어갈 것처럼 작은 사막여우가 자꾸만 제 뒤를 쫓아와요.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지난날, 윤세나의 세계에서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리고―

[날 찾아 줘. 찾아 주세요. 그리고 이름을 불러 주세요. 제 이름은…….]

“치요리나타.”

홀린 듯 이름을 불렀을 때였다.

“주인!”

“누나!”

“아으윽…….”

온몸을 칼날로 베어낸 듯 격통이 전신을 내달렸다. 드레스 위로 핏물이 배어들자 테디가 이를 악물고 검은 여우를 노려봤다.

“너, 죽여 버릴 거― 으응?”

그녀의 표면을 둘러싼 검은 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황금색 머리칼과 흰 피부, 그리고 샛노란 눈동자가 점점 드러났다.

“미오라, 뭐 하는…… 꺄악!”

샤를리나가 찬 쵸커의 브로치가 챙―! 균열음과 함께 바스러졌다. 동시에 사람의 몸으로 서 있던 여우가 무너졌다. 테디는 황급히 달려갔다. 오물 속에 파묻힌 아주 작은 여우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테디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누나…… 동생이야.”

“…….”

“우리 동생이 여기에 있었어.”

그리고 난…….

“다행이다.”

그 말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 * *

“……나.”

목소리가 들린다. 아주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

“세나야.”

“…….”

“세나야, 우리 공주님. 일어나세요.”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난 얼른 눈을 뜨고 주변을 더듬거렸다. 고아원에서 처음 만난 모습 그대로 선생님은 빙그레 웃고 있었다.

“선생님!”

나는 얼른 그녀의 품에 안겨 들었다.

“선생님, 선생님…….”

“그래.”

선생님은 눈물 고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연신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왜 안 나타나셨어요? 보고 싶었는데……! 할 말이 엄청 많아요. 선생님 저……!”

“아서를 만났구나.”

“…….”

“행복해져서 다행이야.”

나는 다정한 얼굴의 선생님을 보면서 손을 꾹 말아 쥐었다.

“행복하지 않아요.”

“어째서?”

“선생님이 여기에 없으니까.”

그녀는 내게 어머니였고, 언니였고, 친구였고, 동시에 내 삶이었다. 그녀의 뼛가루를 끌어안던 날, 난 심장을 한 움큼 떼어 낸 것 같았다. 믿을 수가 없어서. 선생님이 살아계시지 않다는 것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어서. 가족을 만나고, 그들이 내 진짜 가족이라는 걸 알고 나서도 마음 한켠이 허전했다.

“난 홀로 외로울 텐데, 혼자서 행복해질 수 없어서? 세나야, 내가 네 불행의 원천이었니?”

“그건…… 선생님 때문에 불행했던 게 아니라…….”

선생님은 희미하게 웃었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 할아버지도 있고, 형제도 있고, 또…….”

그녀가 우후후, 웃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꿈속의 소년도 만났잖니.”

“……!”

나는 깜짝 놀라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아세요?”

“늘 세나를 지켜보고 있으니까.”

“…….”

“네가 꿈을 펼치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지금보다 몇 배는 더한 행복에 파묻히길 바라.”

“그럼 선생님은요?”

그녀는 날 위해 모든 걸 희생했다. 사랑하는 남자를 버려야 했고, 만인에게 오해를 사야 했고, ‘미아’로서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쳐야 했다. 오직 나를 쫓아 다른 세계로 오기 위해.

“네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를 거야.”

“…….”

“네가 날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 학교에서 돌아와 ‘다녀왔습니다’ 하고 말해 줄 때, 어버이날에 나를 위해 카네이션을 접어 왔을 때. 나는 태어나길 잘했다고 생각했단다.”

그녀는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 때문에 내가 무언갈 잃거나 포기했다고 생각하지 말렴, 세니아나. 네가 내게 준 게 훨씬 많으니까.”

한숨과 함께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난 아주 많은 사람의 피를 이 손에 묻혔어.”

“……아탈란의 신관이었기 때문에요?”

그녀는 쓰게 웃었다.

“그래. 그들의 이상향을 위해 해선 안 될 일을 무수히 많이 했단다. 너를 볼 때마다 그런 내가, 이토록 나쁜 내가 이만큼 행복해도 되는 걸까, 고민했지.”

선생님은 나를 꽉 끌어안았다.

“세나야, 세나야.”

그녀의 말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마.”

“…….”

“엄마.”

선생님의, 아니, 엄마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입을 틀어막고서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했다.

“부족한 나를 엄마라고 불러 주는구나.”

엄마는 울면서도 미소지었다. 아주, 아주 행복하다는 듯이.

그녀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곧 일월이 너를 찾아갈 거야.”

“일월…… 아탈란의 일월이요?”

“그래, 그는…….”

그녀가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찰나였다.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해선 안 될 말’을 할 때 나타나는 징조였다.

“미아!”

어떤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얼른 나와 선생님을 떼어 냈다.

“가야 해!”

“하지만, 언니―!”

“어서!”

신관의 예복을 입고 있는 여성을 본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어쩐지…….

“아가씨!”

울먹이는 목소리에 나는 눈을 비볐다.

“시트론……?”

“아, 세상에…… 아가씨.”

시트론이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꽉 붙들었다. 나는 멍하니 주변을 보았다. 내 방이다.

‘꿈이었나.’

퍽! 시트론이 내 팔을 내리쳤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손을 올리려다가 멈칫하고 고개를 수그렸다. 시트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도망치셨어야죠!”

“……어?”

“성수들이 가자고 할 땐 얼른 따라가셨어야죠! 이렇게……, 이렇게 걱정시키시고!”

밖에서 다 들은 모양이었다. 내가 정말로 세니아나라는 것도.

나는 시트론의 손을 쥐며 말했다.

“시트론, 아직 네게 못한 말이 있어. 나는 사실…….”

“뭐라도 괜찮아요.”

“응?”

“아가씨가 악마라도, 괴물이라도 괜찮아요. 악마라시면 뿔을 닦아 드릴 테고, 괴물이라시면 인간이라도 담을 수 있는 접시를 준비하겠어요.”

시트론은 의지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녀의 말이 우습고, 또 감격스러워서 입술만 꾹 베어 물었다.

“시트론…….”

“아가씨…….”

마침내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사실은, 사실은 처음부터 이상한 느낌을 받고 있었어요. 기억을 잃었다는 게 이상하다고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했어요. 아가씨를 계속 모시고 싶어서. 그런 제가 혐오스러워서 더 못된 말을― 흑흑!”

“무서워서 말 못 했어! 가짜라고 생각해서 더는 내 곁에 있어 주지 않을까 봐! 어허헝!”

“사실은 결혼하시는 건 싫어요! 옆에서 더 모시고 싶어요!”

“결혼해도 데려갈 테야!”

“아가씨 코 고는 소리가 귀여워서 어르신과 주인님들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다들 함께 구경했어요!”

“시트론이 매일 갈아 준 녹즙, 너무 써서 마릴린한테 준 적이 있어!”

“네?”

“뭐?”

우리는 어벙벙해져서 서로를 쳐다봤다.

“코 고는 걸 구경한 건 너무해…….”

“그걸 마릴린 님한테 주셨다고요? 그게 얼마나 비싼 건데!”

그러던 중에 밖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놔! 놔아―! 이 못된 계집애!”

“그 나이 먹고 귀여운 척하는 멍청한 곰돌이가 어디서 말대꾸쵸!”

“너도 하잖아, 너도 하잖아! 누나한테서 떨어져!”

“시끄러워~! 주인님은 날 더 쵸아해요! 내 이름도 알고 있었다고요!”

“쵸쵸거리지마, 바보야!”

“당신이나 징징거리지 마쩨요!”

무릎까지 오는 반달곰과 사막여우가 서로 들러붙어 머리채를 잡고 있었다.

“테디!”

내가 테디를 부르며 그들을 떨어뜨리자 테디는 양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낄낄 웃었다.

“봐! 누나는 내 이름만 얘기하잖아.”

“대체 무슨…….”

나는 당황해서 사막여우를 쳐다봤다. 금빛이 너울너울 퍼지더니 사막여우를 감쌌다. 대여섯 살 꼬마 숙녀가 된 사막여우가 치마를 넓게 펼치며 무릎을 굽혔다.

“만나 뵙길 오랫동안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주인님.”

“아…….”

나는 눈을 끔뻑였다. 멍하니 꼬마 숙녀를 보고 있자 테디가 불안한 표정으로 “누나, 누나?” 하며 날 쳐다봤다.

“귀여워~!”

인형처럼 생긴 꼬마 숙녀를 보고 나는 눈을 반짝이며 무릎을 굽혔다.

“네가 테디의 동생이야?”

“그렇쯥니다, 주인님.”

“우리 꿈속에서 봤지?”

“저는 정신계와 이어지는 길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렇구나. 세상에, 너무 귀엽다.”

“영광이에요.”

“그러니까 이름이 치요…….”

꼬마 숙녀는 눈을 깜빡이며 내게 안겨들었다.

“쵸라고 불러주쩨요.”

이름도 귀여워! 나는 눈을 반짝였고, 문 앞에서 기웃거리던 하인들도 꺄악,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인형 같아요!”

“역시 아가씨의 성수라서 사랑스럽기가……!”

집사가 커흠, 헛기침하며 말했다.

“아가씨의 성수님께 무슨 무례냐.”

그러자 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 애는 내 품에서 폴짝 뛰어내리고 다시 치마를 잡고 무릎을 굽혔다.

“주인님을 위해 애써 주시는 분이시군요. 감사합니다.”

집사가 “뭐…….” 하며 허허 웃었다.

“애쓰고 있긴 합니다만, 잘하고 있는지는…….”

“멋진 신사는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하쵸.”

하녀들이 “어머머, 말도 잘하네!” 하며 까르륵 웃었다. 테디가 씩씩거리며 나를 붙잡았다.

“누나, 저거 다 내숭이야. 쟤가 얼마나 포악한데!”

뭐라고 말했는데 나는 쵸의 귀여움에 푹 빠져 테디를 잊고 있었다.

테디는 볼을 뿌, 부풀린 채 흥!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안 먹을래? 달콤한 거 좋아하잖아.”

미안해진 나는 초콜릿을 들고 테디를 살살 구슬렸다.

“못된 곰돌이! 주인님을 곤란하게 하면 안 되쵸!”

어느새 사막여우가 되어 내 어깨에 올라탄 쵸가 테디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씨이― 씨!”

“씨라니……. 주인님, 저 곰돌이는 말버릇도 나쁘군요.”

쵸는 은근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고, 난 곤란해졌다.

“싸우면 안―”

“이 살쾡이가!”

“여우예욧!”

둘은 다시 들러붙어 투닥투닥 싸우기 시작했다.

“이, 이 못된, 못된 바보!”

“등신이.”

그러자 테디는 엄청나게 충격받은 얼굴로 얼어붙었다.

“혀, 형아가 그건 나쁜 말이랬어!”

“좋은 이에게 쓸 때나 나쁜 말이쵸. 그것도 몰랐어요? 머저리, 천치, 등신!”

“이익―!”

그는 씩씩거리다가 쵸를 가리키며 나를 쳐다봤다.

“쟤 나빠, 나쁘다고!”

“테디……. 동생이랑 싸우면 어떡해.”

“하지만 쟤는 엄청 못됐고, 또 거짓말쟁이야! 쟤는, 쟤는 남자애란 말이야! 근데 치마를 입고!”

남자애라고?

“여동생이라고 하지 않았어?”

쵸는 움찔하더니 서글픈 척 나를 쳐다봤다.

“성수는 성별이 없는걸요. 인간체는 남자지만, 저는 여자애가 더 좋아서 여동생으로 여겨 달라고 했어요……. 안 되는 건가요?”

“그건…… 으음.”

나는 고민하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쵸가 원하는 대로 살면 돼.”

“상냥한 주인님.”

쵸는 작은 얼굴을 내 목에 비비며 킹, 킹, 하고 애교스럽게 울었다.

“으아아앙―!”

테디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자박자박 달려가더니 어떤 남자의 다리에 매달렸다.

“우아아아앙! 형아! 쟤 좀 봐! 우아아앙!”

긴 은발과 시리도록 푸른 눈을 가진, 멀린의 인간체였다. 그는 쯧 혀를 차고 테디의 목덜미와 내게 들러붙은 쵸의 목덜미를 잡고 내던졌다.

“주인을 귀찮게 하지 마라.”

둘이 “킹!”, “꾸아앙!” 울더니 순식간에 인간체로 변했다. 붉은 머리를 가진 미소년과 멀린처럼 긴 금발을 가진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이었다.

‘머리 색이 알록달록해서 아이돌 같다.’

아이돌처럼 잘생기기도 했고.

쵸는 흠칫하고, 얼른 일전에 보았던 꼬마 숙녀의 모습으로 변했다. 테디가 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쟤가 누나 마력 낭비한대요!”

“으응? 마력 낭비?”

“본래 가진 인간체가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바꾸려면 마력이 엄청 많이 든다고!”

테디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좀 피곤해진 것 같다. 쵸는 깜짝 놀라서 내게 달려왔다.

“주인님, 주인님, 저는 주인님을 피곤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귀여워.”

“그, 그런가요?”

쵸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뺨을 가렸다. 드레스 엉치 쪽 구멍으로 튀어나온 꼬리가 빠르게 흔들렸다.

‘여우도 갯과였던가. 기분이 좋은가 봐.’

킥킥 웃고 있던 찰나였다.

“다 웃었으면 일어나지.”

아빠가 팔짱을 낀 채 문에 기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서늘한 목소리였다.

“아, 아빠…….”

“따라와.”

나는 얼른 멀린과 테디, 쵸를 다시 마원화시키고 아빠를 따라서 방을 나섰다. 서재에 들어가자 할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곁에 있는 란슬롯과 가웨인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거기가 어디라고 너 혼자 간단 말이야!”

가웨인이 소리를 쳐서 나는 움찔 어깨를 좁혔다. 시트론에게서 사정을 들은 가족들은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게…… 일단 샤를리나는 카렌듈라 가의 영애니까 군사를 움직이면 황궁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다고 혼자 가면 어떻게 해! 쓰러져서 온 널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할아버지도 “오늘은 네가 잘못했다.”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다음?”

아빠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렇게 무서운 아빠는 처음 봐서 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아빠의 눈치를 보았다.

“일이 잘못되었다면 다음이 없었을 수도 있지.”

“그, 저에게는 멀린과 테디가 있고…….”

“세니아나!”

벼락같은 고함이었다. 화를 낼 준비를 하던 할아버지와 가웨인, 란슬롯도 놀라서 아빠를 쳐다봤다.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아빠가 나를 매섭게 쳐다보며 말했다.

“가족들을 걱정시키고, 멋대로 다쳐 왔으니 외출은 금지한다.”

“하지만 곧 휴가가 끝나니까 입궁을……!”

“멋대로 굴 생각이면 일도 그만둬.”

“아빠!”

나는 얼른 아빠의 팔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잘못했어요!”

“네가 가진 힘에 어떤 위험이 따라오는지 누누이 주의시켰을 텐데.”

“그렇지만…….”

“네게 일이 생기면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로 약속했다.”

“…….”

할 말이 없어서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빠의 옷깃을 쥐었다.

“일은 그만둬.”

“그것만은……! 차라리 벌을 받을게요!”

아빠가 미간을 좁히고 날 빤히 쳐다봤다.

“팔이 내려가는구나.”

아빠가 무섭게 말하기에 나는 얼른 팔을 번쩍 들었다.

“끄응…….”

팔이 마구마구 저리고 아파 오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어흠, 헛기침을 하며 아빠를 슬쩍 쳐다봤다.

“그, 좀, 너무 오래 벌을 세우는 게 아니냐.”

“아직 십 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가웨인도 내가 점점 울상이 되자 당황한 얼굴로 아빠를 쳐다봤다.

“저…… 세니아나도 반성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너도 곁에서 함께 손을 들 테냐.”

“…….”

란슬롯이 “아버님” 하고 나섰다.

“세니아나의 나이가 이제 스물입니다. 말로 충분히 알아들었을―”

“네가 언제부터 내 앞에서 그리 말을 잘했지.”

“…….”

아빠는 정말로 무서웠다. 나는 한 시간을 꼼짝없이 손을 든 후에야 다시 소파에 앉을 수 있었다. 아빠가 “반성은?” 하고 물었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독단으로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게요…….”

“입궁·출궁 시 마차와 기사들을 보낼 것이다. 다른 곳에 새지 말고 바로 저택으로 돌아와.”

“네…….”

철석같이 약속을 한 후 나는 서재를 나섰다. 팔을 주무르고 있자 시트론이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으응…….”

마사지를 받고 밥을 먹으면서도 나는 우울했다. 나보다 가족들을 우선순위에 뒀다. 나 때문에 다치고 고생하는 게 싫어서.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가족들이 날 위한다는 이유로 홀로 위험에 처하는 건 싫다.

‘내가 잘못했어…….’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아 차를 마시면서도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과를 맛보아라. 저녁도 시원찮게 먹었잖아.”

“……입맛이 없어요.”

“어제도 시트론 일로 전혀 먹지 않았잖아.”

나는 살며시 아빠를 쳐다보고 시선이 마주치자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빠의 시선이 옆얼굴로 따라붙었다.

“저, 저는 올라갈게요.”

“더 들지 않고?”

“네.”

나는 후다닥 방으로 올라가서 문을 꼭 닫았다.

‘어쩌지, 어쩌지.’

아빠가 무섭다. 삿된 자들보다 더 무서운 것 같아서 눈이 마주치자 엄청나게 오금이 저렸다. 그때 문밖에서 익숙한 구두 소리가 들렸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서 난 우물쭈물했다.

“세니아나.”

“……네, 아빠.”

“들어가마.”

스르륵 문이 열렸다. 내가 손톱 끝만 매만지며 우물쭈물하자 아빠가 들고 있던 접시를 내밀었다. 계란과 감자, 오이 등이 든 샌드위치와 간장소스에 달게 조린 닭 날개였다.

“…….”

“…….”

“테라스에서 먹을래요…….”

“그래.”

아빠와 함께 테라스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서도 머뭇거리자 아빠는 직접 샌드위치를 들어 내 입에 넣어 주었다.

짭짤하게 간이 된 고소한 달걀노른자와 묵직한 감자가 부드러운 빵과 함께 씹히니 입맛이 슬쩍 돌아왔다. 나는 눈치를 보다가 냉큼 샌드위치를 받고 허겁지겁 먹었다. 아빠가 픽 웃으며 내 입가에 묻는 오이를 떼어 주었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혼자서 결정하지 않을 거지?”

“…….”

나는 슬그머니 샌드위치를 내렸다.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만약 시트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예를 들어 소중한 내 가족이 위험에 처한다면 난 또 독단을 내릴 테니까.

“고집은 네 엄마를 닮았구나.”

“아빠를 닮았다던데요?”

“미아가 그러던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첫사랑 말이니? 음……, 후후.]

그때를 추억하며 코웃음 치던 선생님, 아니, 엄마의 얼굴이 선명했다.

“할아버지랑 싸워서 가출하셨다면서요?”

“……어렸으니까.”

“스물일곱 살 때라고 하시던데. 그때 선…… 엄마를 만나셨다고…….”

“인생에 오점 하나씩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

“할아버지랑 싸우고 혼자서 나쁜 사람들…… 아마 적군이겠죠? 적군과 맞서신 적도 있다면서요.”

“……샌드위치가 하나론 부족하겠군. 가서 더 가져오마.”

아빠가 말을 돌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해서 난 고개를 갸웃했다.

“설렁줄 뒤에 있는데. 하인에게 시키면 되지 않나요?”

“……먹어, 얼른.”

“아! 맞다!”

나는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제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랑 싸우고 가출한 적도 있으시다면서요?”

“…….”

“그때 무슨 오두막의 욕실 청소 문제로 다투셨다고 들었는데…….”

나는 슬쩍 아빠를 보며 물었다.

“그렇게 청소하기 싫으셨―”

아빠는 딱딱하게 굳어져서 허공을 바라보며 가는 한숨을 흘렸다.

“……?”

“젊을 때 제대로 못 산 벌을 너에게 받는 건가.”

“저요?”

“어르신도 나만큼이나 속이 탔을지도 모르겠군.”

아빠가 희미하게 웃고는 접시를 더 밀어 주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우린 화해했다는 걸.

‘싸운 건 아니지만.’

일방적으로 혼난 거지. 나는 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짝! 대사제에게 뺨을 맞은 샤를리나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틀어쥐었다. 허락받지 않은 사람은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릴 수 없는 제가 몇 번이나 맞았다. 그것도 찢어 죽일 세니아나 프렌시프와 제 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대사제에게!

“이 미련한 년!”

“…….”

“쳐 죽일―!”

사제들이 얼른 달라붙어 노쇠한 몸을 진정시켰다.

“성녀님, 어서 잘못을 비십시오!”

“대사제님, 성녀님도 본래 이런 결과를 원한 것은 아니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샤를리나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내가 다시 세니아나가 되면 당신들에게도 좋잖아요. 포털도 그 애가 가진 성수들도 전부 내 것이 되면―!”

“마원이 사람의 육체를 보고 따르는 줄 알아!”

벼락같은 고함이 신전을 흔들었다.

“성수의 영혼에 새겨지는 건 주인의 진명이다! 너 같은 가짜가 창조신이 내린 신성한 맹수들을 부릴 수 있을 줄 아느냐!”

“가짜라니……, 내가 왜 가짜예요? 진짜라고 했잖아요! 내가 진짜잖아!”

샤를리나는 발작하듯 귀를 막고 소리를 내질렀다. 대사제가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놀란 샤를리나가 “컥!” 숨을 들이켜자 대사제는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읊조렸다.

“다시 하녀로 돌아가고 싶으냐.”

“무, 무슨…… 나는 성녀라고요! 이만한 힘을 가진 내가 왜 하녀로―!”

“네 힘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느냐.”

“…….”

“세 마리 성수 중 하나를 네게 붙여 놓기 위해 삿된 자 기백 마리를 털어 넣었어. 미오라가 없으면 넌 일반인보다 못한 해충이란 말이다.”

그는 진노를 가까스로 잠재우며 말을 이었다.

“이제 포털도 쓸 수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할 테냐.”

“……다시 찾아올 거예요. 미오라를, 아니, 그보다 더한― 그, 그래! 미아, 그 여자가 부렸다는 신묘한 백사자 말이에요! 그 사자를 보았어요. 제가 빼앗아 올 수 있어요.”

샤를리나가 다급히 대사제의 팔을 붙들었다.

“그, 그래! 성수를 붙잡기 위해선 이름이 필요하다고 했죠? 저 알아요. 세니아나 그게 분명 그 사자를 멀린이라고 불렀―!”

“머저리 같은 년. 이름을 짓는 건 주인이지. 이미 주인에게 귀속된 성수를 어찌 찾아온단 말이야.”

“그, 그럼, 뭐라도…… 뭐라도…… 오늘로 근신이 끝나니까 다시 로열 키친에서 애쓰면……!”

하녀로 돌아갈 순 없다. 이 아름다운 드레스도, 몸에 찬 고가의 패물도, 저를 향해 엎드리는 자들의 존경도. 그 어떤 것도 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돌아가긴 싫었다.

대사제는 짓씹듯이 억지로 입을 열었다.

“마지막 기회다. 로열 키친은 오랫동안 준비한 계획의 마지막 단계라는 걸 잘 알겠지.”

“네…….”

“계획이 어그러지지 않게 성녀를 로열 키친에서 도태시켜라.”

샤를리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해 주신다면 스스로 황궁을 나서도록 만들 수 있어요.”

대사제가 샤를리나를 내던지듯 옷깃을 놓고 다른 신관을 불러들였다.

“로열 키친에 있는 우리 사람이 몇이나 되지.”

“3급 이상은 총 여섯입니다.”

“모두 샤를리나와 연결해라.”

황궁에 숨겨 둔 아탈란의 사람들은 철저한 보안을 유지했다. 그래서 같은 아탈란의 신자끼리도 서로를 알지 못했다. 샤를리나조차 그들의 명단을 본 건 처음이었다. 명단을 확인한 샤를리나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로열 셰프 고프레도가 우리 사람이었다고요?!”

“그 녀석을 로열 셰프로 만들기 위해 얼마만큼의 자금과 사람이 들었을 것 같으냐.”

“……그럼 혹시 고프레도가 일월인가요?”

일월만큼은 샤를리나도 정확한 신분을 알지 못했다. 대사제는 흥, 코웃음 치며 상아로 만든 거대한 의자에 앉아 팔을 괴었다.

“그자는 아니지.”

“하면 일월은…….”

“재촉하지 마라. 곧 모습을 드러낼 터.”

샤를리나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명단을 끌어안았다.

* * *

휴가가 끝났다.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입궁 준비를 했다. 씻고 옷을 입었는데도 제대로 잠이 깨지 않아 비척비척 걷자, 가웨인이 “이런.” 하며 나를 붙잡았다.

“넘어진다.”

“……네.”

“조심하라고.”

“……네.”

“내 말 제대로 듣고 있는 거야?”

“……네.”

그가 픽 웃으며 어느새 다가온 란슬롯을 향해 “오늘 출근 못 하겠는데?” 하고 말했다. 그러자 란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출근시키면 위험하지.”

“그러게. 오늘은 자체 휴가라도 내야겠는걸.”

나는 깜짝 놀라서 잠이 확 깼다.

“아니에요!”

정말로 못 나가게 할까 봐 눈을 번쩍 뜨고, 팔까지 들었다.

“잠 다 깼어요! 정말이에요!”

가웨인이 웃음을 터뜨리며 내 코를 잡고 흔들었다.

“황궁에 과자라도 숨겨 놨어? 왜 그렇게 가고 싶어 해?”

“오늘 혜성우의 밤(12월 말일. 한 해를 마무리하기 위해 가족들만의 파티를 여는 공휴일. 나무 열매 등을 이용한 요리를 먹는다.) 준비를 한다고 했단 말이에요…….”

가장 훌륭한 요리를 만드는 사람은 황족의 모임에 낼 수 있다고 하니, 다들 엄청 열심히 준비를 해 왔을 거다.

‘나는 새끼 요리사라 못 내겠지만 맛은 볼 수 있으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로열 키친이다. 이곳의 요리사들은 어떤 것을 만들지 궁금하다.

나는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성에 도착했다. 원래 새끼 요리사들은 새벽같이 나와서 밑 재료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아네모네궁에서 요리한 사람들은 오전 열 시에 입궁하라는 배려가 있어서 평소보다 늦게 도착했다. 조리복으로 갈아입고 황태자궁 주방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숙였다가 자세를 바로 했는데…….

‘뭐지?’

분위기가 이상하다. 다들 어색한 듯 고개를 돌렸다. 나는 일 년 위 선배에게 물었다.

“저…… 무슨 일 있었나요?”

“아, 있었지. 축하할 일. 승진했거든.”

“와―! 정말 축하드려요!”

내가 활짝 웃자 다들 떨떠름한 기색으로 날 주목했다.

“……?”

황태자궁의 총괄 요리사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축하한다, 프렌시프.”

“네?”

“이제 아발론의 주방으로 가겠구나.”

그는 내 손에 아발론을 뜻하는 쌍용(雙龍) 휘장을 쥐여 주었다.

“무슨…… 저는 아직 막내인데요…….”

물론 승진을 거듭해 아발론으로 향한다면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뭔가 께름칙하다. 보통 궁 이동 순서는 황비궁, 황자궁, 제1황자궁, 황후궁, 황제궁이었다.

‘그런데 황후궁을 뛰어넘고 바로 아발론으로 간다고?’

나는 이동 신청을 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동 신청을 할 수 있는 주제도 아니거니와 아네모네궁의 공로를 인정받았다고 해서 순서를 무시하고 바로 아발론에 들어갈 순 없었다. 당황한 얼굴로 휘장을 쥐고 있자 총괄 요리사는 말했다.

“본주방의 결정이니 넌 지금 바로 아발론으로 향해라.”

“하지만―!”

“어서.”

총괄 요리사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황태자궁의 대부분은 아발론으로 가기 위해 밤낮없이 점수를 쌓고 있었다. 그런데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된 내가 아발론으로 간다고 하니 시선이 곱지 않았다.

‘내가 프렌시프 영애라서 내색조차 못 하는구나.’

나는 고개를 수그리며 휘장을 꽉 쥐었다.

“네.”

제1황자궁에서 짐을 챙겨 아발론으로 향했다. 그러느라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아발론 요리사들의 휴게실에선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왜 프렌시프가 아발론으로 이동한 건데!”

“프렌시프 영애님이 제1황자궁에서 썩고 있으니 관리급 속이 안 편하겠지.”

“빌어먹을! 쥐새끼가 물을 다 흐려 놓고 있어.”

“이런 일이 벌어질지 예상 못 했던 건 아니잖아.”

“하지만 이상하지 않아? 재작년에 금좌 11석의 후계가 주방에 왔을 땐…… 물론 제풀에 나가떨어졌지만, 이 정도로 대우해 주진 않았잖아.”

“그냥 금좌 11석도 아니고 두 자리나 차지한 프렌시프다. 황가에 견주는 가문이라면 그놈과 비교 불가지.”

“이래서 금수저들이란.”

쯧쯧, 혀 차는 소리가 싸늘했다. 그때였다. 내 등 뒤로 다가온 사내가 문을 벌컥 열며 고함을 내질렀다.

“네 이놈들!”

“수, 수셰프!”

수셰프라면…….

‘로열 셰프인 고프레도 님의 최측근 이랬던가.’

그가 내 눈치를 과하게 보며 요리사들을 힐난했다.

“할 짓 없이 남의 흉이나 볼 생각이면 이 궁에서 썩 꺼져! 네놈들 아니라도 대체할 자는 차고 넘친다!”

“저, 저희는 그런 게 아니라……!”

“영애님이, 아니, 프렌시프가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느냐!”

그가 내 손을 덥석 잡으며 야살스레 눈을 접었다.

“안심해라. 이놈들이 그렇게 박정한 건 아니다. 서운한 맘에 말실수를 하긴 했지만 속은 환영하는 맘이 더 커. 저…… 아버지께는 말씀드리지 않을 거지?”

“…….”

“응?”

“……아니에요.”

그가 헤벌쭉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그래, 그래. 사려 깊기도 하지. 참, 칼질은 얼마나 하나? 오늘 저녁에 폐하께 낼 야참을 네가 한 번 만들어 볼래?”

그러자 요리사들이 기겁하여 수셰프를 쳐다봤다.

“수셰프, 야참은 제 순서―”

“씁.”

그가 입소리를 내며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요리사를 노려봤다. 요리사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수그렸다.

“자, 따라와라. 아! 짐을 풀어야지. 얼른 풀고 주방으로 와.”

수셰프가 휴게실을 나섰다. 남은 요리사들은 나를 노려보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리며 방을 빠져 나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동부 아카데미의 선배인 헤리엇이었다.

‘선배도 아발론 소속이구나.’

그녀는 나를 힐끔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너.”

“……네?”

“여기 오래 있긴 힘들겠다.”

그렇게 중얼거리곤 어깨를 으쓱하며 내 등을 툭툭 치곤 휴게실을 나섰다.

수셰프의 환대는 과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무실에서 보내는 로열 셰프 고프레도 대신 주방의 지휘를 맡은 그는 무조건 나를 우선했다.

“소스가 좀 단 편…… 이 아니라 훌륭하군, 훌륭해! 이 요리는 폐하의 식탁에 내야겠다!”

“저…… 수셰프.”

“오, 그래! 다리 아프지? 쉬고 있어. 선배들 기술은 눈으로 훔쳐야 하는 법이니…… 거기, 너! 주방에 의자를 가져와라!”

요리사들의 시선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보통 후배의 지도는 선배가 맡는 편인데 수셰프의 과도한 대접 때문에 나를 가르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면에.

“샤를리나, 이 부분은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해. 요리에선…….”

“칼질이 서툰 편이네. 안 되겠다. 오늘은 남아서 나와 칼 잡는 법을 연습하자.”

“달게 졸이고 싶다고 무작정 설탕만 넣으면 재료의 풍미가 상해. 이럴 때는…….”

샤를리나는 선배들의 엄격한 지도를 받으며 성장하고 있었다. 그 후로 며칠, 결국 참지 못하고 수셰프와 맞섰다.

“수셰프님, 이런 특별 취급은 저로선 달갑지 않아요. 감사하지만 이젠…….”

나는 그가 부끄럽지 않도록 조그맣게 속삭였지만, 수셰프는 와하하! 웃으며 커다란 목소리로 떠들었다.

“특별 취급? 아…… 남들 눈치가 보여서? 걱정하지 마라. 누가 감히 프렌시프 영애님에게 눈치를 주겠어?”

“그게 아니라―”

“아니면.”

수셰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주방에서 바쁘게 손을 놀리던 요리사들이 날 쳐다봤다. 수셰프는 입꼬리를 히죽 올리며 허리춤을 잡았다.

“내가 너한테 뭐라도 요구할까 봐서? 하하, 무슨.”

그러더니 그가 내 귓가에 입을 바짝 붙이고 속삭였다.

“설마 남들 보는 앞에선 그러겠어? 필요한 게 있으면 다음에, 은밀히 전하마.”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단호히 말했다.

“전 주방에서 프렌시프의 힘을 이용할 생각도 없고, 요구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따르지 않을 거예요. 이곳에서 저는 오직 요리사입니다.”

내 말에 수셰프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는 기가 막히단 얼굴로 중얼거렸다.

“은혜도 모르는 게…….”

“…….”

“아, 그래? 하! 아주 의로운 요리사였군!”

수셰프는 쯧, 혀를 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를 향한 요리사들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했다.

“그럼 혼자서 잘해 보시던가.”

그는 “못 해 먹겠네.” 중얼거리며 조리모를 던지고 주방을 나섰다. 그 순간, 샤를리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입꼬리가 요요하게 올라가 있었다.

‘설마 네가 이 상황을 만든 거야?’

수셰프를 부추겨서?

샤를리나는 눈썹을 까딱 들어 올리며 다른 요리사를 붙들고 말했다.

“데코레이션이 어려워요. 지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 그래. 이쪽으로 와.”

나는 에이프런을 꾹 말아 쥐었다.

그 후로 일주일이 지났지만, 나를 지도하려는 요리사는 없었다. 수셰프는 이제 내 요리를 식탁에 내주지 않았고, 나는 할 일 없이 밑 준비만 할 뿐이었다. 식사를 함께할 사람도 없어서 주방에 우두커니 앉아 끼니를 때웠다.

주방 밖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식사하러 나갔던 요리사들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샤를리나를 구박하지 마세요. 이제 칼질도 제법 늘었습니다.”

“아카데미에서 뭘 배워 온 거야? 그래도 간은 기가 막히게 맞추지만.”

“과찬이세요.”

화기애애하게 들어오던 사람들이 나를 보고 말을 뚝 멈추더니 다시 문을 닫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잡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았다. 순간 통신석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떠오른 코드를 본 난 반가움에 얼른 통신을 연결했다.

“교수님!”

[점심시간이지?]

“어떻게 아세요?”

[나도 로열 키친의 요리사였으니까.]

“네, 점심시간이에요.”

쟝뤼크는 웃으며 물었다.

[선배들에게 많이 배웠느냐?]

“아…….”

나는 움찔해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그럼요! 다들 친절하세요.”

[로열 키친에서 성장하려면 주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 훌륭한 요리사인 그들이 널 돕는다면 입관 전보다 크게 실력이 늘 거다.]

“네……. 열심히 할게요.”

[잠깐 성 근처에 갈 일이 있는데 얼굴 볼 짬이 나겠느냐?]

“네!”

나는 몇 마디 얘기를 더 나누다가 통신을 종료했다. 이런 일은 윤세나일 적에도 비일비재했는데 왜인지 그때보다 더 서글픈 것 같았다.

며칠 후, 나와 샤를리나는 재료 창고에서 마주쳤다. 토마토를 매만지던 샤를리나가 빙그레 웃으며 날 보았다.

“요새 힘들지?”

“너와 말 섞고 싶지 않으니까 다물어.”

“무섭기도 해라.”

그녀는 킥킥 웃으며 바구니에 내가 골라 둔 토마토를 담았다.

“여기서 있어 봐야 넌 천덕꾸러기 취급만 당할 텐데 그냥 네 발로 나서지그래?”

“네가 원한다면 꼭 버텨야겠는걸.”

샤를리나가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녀의 바구니를 빼앗으며 말했다.

“너야말로 도망치지그래.”

“……내가 왜? 가족과 동료들을 두고 내가 어째서 도망쳐야 하는데?”

나는 바구니를 끌어안은 채 쵸, 그러니까 샤를리나가 가지고 있던 마원을 잡았다. 캥―! 날카로운 목울음에 놀란 샤를리나가 주춤, 뒷걸음질 쳤다.

“쵸, 아니, 미오라가 너를 노리고 있거든.”

“……너.”

“샤를리나.”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속삭였다.

“내가 지금 널 참아 주고 있어. 당장 쵸에게 네 목덜미를 물어뜯으라고 명하지 않는 건 너와 네 동료들을 뿌리째 뽑아 버리기 위해서야.”

샤를리나는 부들부들 떨다가 휙! 등을 돌리고 성큼성큼 걸었다. 주방 문의 손잡이를 잡은 그녀가 중얼거렸다.

“아, 그래? 그럼 더 열심히 참아 봐. 아무도 널 지도해 주지 않고, 만인이 널 싫어하는 이곳에서.”

그녀가 문을 활짝 열었을 때였다. 문틈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입고 있는 조리복은…….

‘로열 키친의 조리복이잖아.’

샤를리나가 미간을 좁히며 나를 보는 남자를 쳐다봤다.

“당신은 누구기에 본주방에…….”

남자가 테이블을 탕, 내리치며 말했다.

“루크 쟝. 네 녀석들의 까마득한 선배인 내가 폐하의 명으로 너희들을 지도하기 위해 본주방에 다시 왔으니―”

그는 샤를리나의 이마를 꾹 누르며 말했다.

“앞으로 기대들 해라.”

말도 안 돼! 어떻게 스승님이 이곳에……!

요리사들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쟝뤼크 밑에서 일했던 자들은 “죽었다…….” 중얼거리며 난색을 표했고, 그의 위명만 알고 있는 자들은 설렘을 금치 못했다. 샤를리나 또한 그의 이름은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눈빛에 잠시 낭패감이 어렸지만, 이내 화사하게 웃었다.

“대선배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다만…….”

그녀는 당혹스러운 얼굴의 수셰프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발론에서 셰프님의 역할은 무엇인지요. 말씀처럼 지도를 위해 오셨다면 잠시 머물다 가시는 건가요.”

그러자 수셰프와 쟝뤼크 휘하에서 일한 적 있는 요리사들의 표정이 일순 밝아졌다. 쟝뤼크는 뻔뻔한 표정으로 목을 주물렀다.

“아니.”

“그럼……?”

“수셰프로 아발론 주방을 진두지휘하게 될 것이다.”

말도 안 돼! 나 외에도 곳곳에서 기함이 터져 나왔다.

“루크 님이 수셰프로?!”

“수셰프를 할 경력이 아니잖아!”

“아발론의 주방에선 수셰프가 총괄하는 일이 많지만…… 그래도 이건…….”

“그래, 고프레도 님과 사연이 깊으신데.”

“사연?”

“라이벌이었잖아. 아니, 원수에 가까울까.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을 정도로.”

듣자 하니 현 로열 셰프 고프레도와 쟝뤼크 사이엔 깊은 골이 있는 모양이었다. 본래 수셰프가 쟝뤼크에게 뛰어갔다.

“그게 무슨―! 이 주방의 수셰프는 접니다!”

“그런데.”

“그런데, 라니……!”

수셰프는 한동안 소리치며 분개하다가 로열 셰프 고프레도의 집무실로 뛰쳐 갔다.

“뭣들 해.”

쟝뤼크가 뻔뻔한 얼굴로 요리사들을 쳐다봤다. 요리사들은 어리둥절하여 “예……?” 되물었는데, 나는 쟝뤼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허둥지둥 자리에 가서 식칼을 들었다. 왜냐하면―

“안 움직이냔 말이다, 이 굼벵이 같은 놈들!”

이렇게 호통이 시작되거든…….

“이건 수프를 만들려고 한 거지? 난 도무지 볶음 요리로는 보이지 않는데. 안 그래?!”

“로열 키친?! 로―열 키친?! 개소리! 삼류 나부랭이들이 잘도 왕궁의 휘장을 달았구나!”

“정신 빠진 놈! 지금까지 뭘 배운 거야!”

“오오, 귀한 재료로 쓰레기를 만들었구나! 아주 대단해!”

로열 키친, 그것도 아발론의 요리사들은 언제나 위풍당당했다. 미식의 나라 길라게온에서 평생 천재 소리를 듣고 자라서 당당히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한 그들은 실패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까지는 말이다.

“이걸 요리라고 만들었어―?!”

그들도 깐깐한 쟝뤼크를 넘어설 순 없었다. 점심 타임이 끝났을 땐 모두 혼이 빠져서 패잔병의 몰골로 나뒹굴었다. 끙끙 신음하던 선배 요리사가 울컥 소리쳤다.

“루크 쟝인지, 개잡놈인지 난 못 참아!”

“그래! 천재였던 것도 다 옛날 일이지. 결국은 고프레도 님께 패배했으면서 무슨……!”

“가서 항의하자고. 저 작자가 아발론의 물을 흐리는 건 두고 보지 못하겠으니까!”

원래 수셰프가 씩 웃으며 흥분하는 요리사들을 쳐다봤다. 그때, 시종장이 주방 휴게실을 찾았다. 수셰프가 헐레벌떡 그의 앞으로 뛰어가 허리를 굽혔다.

“아, 아니, 시종장께서 여긴 무슨 일로―!”

“황제 폐하께서 자네들의 공을 치하하셨네.”

“예?”

“오늘 요리는 유난히 훌륭했다더군. 다들 고생 많았어. 소정의 포상금이 나올 예정이니 자네는 점심에 힘쓴 요리사들의 명단을 재정부에 넘기게나.”

시종장이 인자하게 웃자 수셰프와 요리사들의 표정이 거무죽죽해졌다.

‘스승님의 성질머리와 실력은 비례한다고요…….’

오죽했으면 쟝뤼크만큼 성격 더럽고 야비한 동부 아카데미의 전대 교감이 그를 쫓아내지 못했겠는가. 나는 휴식 시간을 틈타 쟝뤼크를 찾았다.

“스승님!”

복도 끝에서 보이는 그에게 달려가자 쟝뤼크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냐?”

“제가 드릴 말씀이에요. 어떻게 오신 거예요? 스승님이 정말로 아발론에서 일하시는 건가요?”

“그래.”

“하지만…….”

스승님 자존심에 라이벌 밑에서 수셰프로 일하신다고?

그의 본명을 알게 된 후, 나는 종종 로열 키친에서의 생활을 들었다. 그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온 이름이 ‘망할 쓰레기’였다.

‘로열 셰프이신 고프레도 님을 엄청나게 싫어하시는데…….’

아마 과거에 황궁을 나선 것도 고프레도 밑에서 일할 수 없기 때문일 거다. 쟝뤼크가 나를 빤히 보다가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퉁겼다. 딱! 소리가 나게 얻어맞은 나는 “으앙앙!” 소리치며 이마를 문질렀다.

“아파요, 스승님!”

“내겐 팔푼이들에게 기죽는 제자는 없다.”

그가 인상을 쓰며 나를 노려보았다.

“내 제자는 어때야 한다고 했어!”

“최고여야 한다고…….”

“그래, 저깟 놈들 다 씹어 먹어 버려라.”

내가 요리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걸 알고 계셨던 걸까. 나는 그를 빤히 보다가 이내 히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쟝뤼크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 픽 웃었다.

* * *

세니아나와 헤어진 후 쟝뤼크가 향한 곳은 황자궁의 뒤뜰이었다.

“저하.”

도미니크가 고개를 돌리고 표정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영애는 어떻습니까.”

“말씀대로 아발론의 요리사들에게 도태되는 중이었던 듯합니다. 예상하신 것과 같이 기묘한 부분이 있더군요.”

쟝뤼크를 성으로 불러들인 건 도미니크였다. 세니아나가 바쁜 관계로 만나진 못하지만, 그녀의 주변은 항상 살피고 있었다. 아탈란의 끄나풀들이 프렌시프의 시야 밖에서 그녀에게 어떤 수작을 걸어올지 모르므로.

쟝뤼크는 낮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아발론의 수셰프는 물욕을 전혀 모르는 인물은 아니나, 내색할 만큼 아둔한 인사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프렌시프의 위상에 기대고 싶었다면 이처럼 천박하게 세니아나를 챙기려 들지 않았을 겁니다.”

“샤를리나 카렌듈라의 농간대로 놀아나 준 것이겠지.”

어린애들 따돌림 같은 얕은수는 분명 샤를리나의 머릿속에서 나왔을 터였다. 쟝뤼크는 실소를 흘렸다.

“따로 방법이 없었겠지요. 이번에도 과한 수로 세니아나를 저격한다면 프렌시프에서 가만있지 않았을 테니.”

큰 분란을 야기하는 것보다 세니아나를 흔들어 제 발로 황궁을 나서게 하려던 것이다. 도미니크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말했다.

“이토록 영애를 황궁 밖으로 내몰려는 데엔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요.”

두 남자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 * *

그 후 며칠간 수셰프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로열 셰프를 찾아갔지만, 로열 셰프 고프레도는 별말이 없었다.

‘황제가 직접 윤허한 일을 가타부타할 순 없겠지.’

쟝뤼크는 펄펄 날아다녔다. 어느 정도냐면, 아카데미에서의 지옥 훈련 동안 그가 어쩌면 자비로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의 고함을 듣다 보면 귀가 멍멍해졌다. 그는 요리사들을 하나하나 돌려 가며 구박하면서 지도했는데, 그날 걸리는 요리사는 눈물을 폭포처럼 쏟았다.

“미치고 팔짝 뛸 수밖에 없는 건 루크 쟝이 시키는 대로 하면 실력이 는다는 거야!”

“아으윽!”

“그 실력에 성격까지 좋으면 다들 얼마나 편할 거냐고!”

그리고 오늘은 샤를리나의 차례였다. 주방은 어제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요리사들은 제 차례가 언제 올까 두려워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쟝뤼크 또한 달랐다. 아카데미에서도 그의 이런 표정은 본 적 없었다.

“너는 대체 로열 키친에 어떻게 들어왔지.”

“……다시 만들겠습니다.”

쟝뤼크가 고르지 못하고 삐뚤빼뚤 각양각색의 크기로 잘린 무를 하나 들어 올렸다. 싸늘한 얼굴로 무 조각을 보다가 옆에 죽처럼 뭉근해진 시금치로 시선을 옮긴다.

“허.”

그의 잇새에서 기가 찬다는 실소가 흘러나왔다.

“로열 키친은커녕 아카데미도 졸업 못 할 실력으로 어떻게 아발론에 남아 있느냐고 물었어.”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컨디션?”

그가 도각도각 자른 무와 시금치를 쓰레기통에 처넣으며 소리쳤다.

“어제도 컨디션이 안 좋아서 손질하라던 복어를 다른 요리사에게 떠넘겼나!”

우레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쟝뤼크는 샤를리나 앞에 새 도마를 던지듯 내려놓고 생무를 올려놓았다.

“채 썰어.”

샤를리나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식칼을 잡았다.

“얼씨구.”

“…….”

“허.”

“…….”

요리사들이 술렁거렸다.

“저 정도로 실력이 형편없다고?”

“칼질에 능숙하지 않은 건 알고 있었지만, 저건 심하잖아.”

“저 녀석, 장난치는 거 아니야? 아발론에 막 들어왔을 적엔 재료를 썰어 두라고 하면 기가 막히게 다듬어 놨잖아.”

나는 샤를리나의 벌벌 떨리는 손을 주목했다.

‘그렇구나.’

지금까지 포털을 이용해서 요리하는 척했던 거다. 누군가 사람들의 시선을 잠시 돌리는 사이 이미 잘린 재료를 포털을 통해 옮겨 온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황궁 마법사 중에도 아탈란의 졸개가 있다는 소리야.’

결계에 걸리지 않도록 손을 쓴 자가 있을 테니까. 그리고 당연히 다른 요리사들의 시선을 차단한 그녀의 끄나풀이 이 주방에 있다는 소리.

‘주방에 있는 아탈란의 사람은 누구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제 그만하십시오!”

수셰프가 벌건 얼굴로 샤를리나의 역성을 들었다.

‘역시 수셰프였구나.’

지금껏 다른 요리사들이 얼마를 당하든 나서지 않던 수셰프가 눈을 까뒤집고 쟝뤼크와 맞섰다.

“주방 분위기가 이따위인데 신입이 어떻게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쟝뤼크는 입매를 비틀곤 나를 쳐다봤다.

“세니아나.”

“네…… ”

“이리 와서 네가 마저 썰어라.”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도마로 다가갔다. 그리고 눈치를 보며 식칼을 잡았다. 탕, 탕, 탕, 탕. 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무를 썰었다. 누군가 “시원하네.” 하고 중얼거리다가 수셰프의 살기등등한 눈빛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쟝뤼크는 가지런하게 일정한 크기로 썰린 내 무와 샤를리나의 무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똑같은 신입이지. 안 그런가?”

“프렌시프는 배포가 좋은…….”

“개소리 집어치워. 아무리 상황에 휘둘리는 놈도 이따위로 칼질을 하진 않아.”

수셰프가 입술을 꽉 베어 물었을 때였다.

“그만들 하지.”

낯선 목소리가 주방에 울려 퍼졌다. 나는 흠칫 놀라 막 주방에 들어온 남자를 쳐다봤다.

‘로열 셰프 고프레도!’

검은 타이를 매고 새카만 머리를 뒤로 쓸어넘겨 고정한 그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루크, 자네는 여전하군. 주방 분위기를 해치는 데엔 당할 자가 없어.”

“어디 자네만큼 변함이 없을까. 여전히 요리보단 쓸데없는 곳에 관심이 많군.”

고프레도는 픽 실소를 흘렸다. 눈빛이 북풍한설보다 더 싸늘했다.

“애꿎은 막내는 그만 괴롭히고, 저녁 준비에나 힘써.”

“로열 키친에 뇌물을 먹이고 들어온 미꾸라지라면 애꿎은 게 아니지.”

“뇌물을 먹여?”

“네가 받아먹은 것처럼 펄쩍 뛰기는.”

스승님…….

그가 여상한 표정으로 고프레도의 성질을 벅벅 긁었다.

“샤를리나의 자질은 심사관 모두가 인정한 것이다.”

“그 심사관들을 유심히 살피게나. 다들 재물에 눈 벌건 쓰레기일 테니.”

“샤를리나는 특별한 자질을 가진 아이지. 간을 보는 능력에 있어선 너나 나 또한 능가하는 천재다.”

쟝뤼크가 껄껄 웃으며 샤를리나가 썬 무를 들어 올렸다. 미처 다 자르지 못해 주르륵, 이어진 그것을.

“이따위로 재료를 낭비하는 녀석이 수석이고 세니아나가 차석?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대번에 표정이 바뀐 그가 소리쳤다. 고프레도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오만한 자존심이군. 네 제자가 수석이 되지 못한 데에 앙심을 품었나?!”

“고프레도! 네놈도 요리사라면 이제 헛짓거리는 이제 그만……!”

고프레도가 쟝뤼크의 휘장을 거칠게 떼어 내고 타이를 끌어내려 짓밟았다.

“더는 못 봐주겠군.”

“네놈……!”

“내게 불복하고자 한다면 나와 같은 위치에 서. 패배자가 떠드는 말 따위 들을 생각 없으니까.”

그러곤 수셰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징계위원회를 소집해라. 저자가 내 주방에서 물 흐리는 꼴은 더 두고 보지 못하겠으니―”

그때였다.

“뭣들 하는 짓입니까!”

황제의 시종장이 희게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그대들의 고함이 폐하의 후원에까지 넘어왔습니다!”

고프레도는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수그렸다.

“오만한 휘하의 요리를 벌하고 있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서둘러 정리할 터이니―”

“뇌물을 받아 처먹은 쓰레기를 발고하려던 중이었습니다.”

쟝뤼크가 그의 말을 끊으며 얘기하자 고프레의 얼굴이 한순간에 살벌해졌다.

“루크 쟝! 얼마나 더 오만하게 굴어야겠는가!”

“요리사의 본분을 잊은 당신이야말로 정신 차려!”

시종장 뒤로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개판이로군.”

“폐하!”

화들짝 놀란 요리사들과 굳어진 고프레도, 그리고 쟝뤼크가 한쪽 무릎을 굽혔다. 황제는 유쾌한 듯 그들을 둘러보다가 시종장에게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미친 두 놈을 다 옥사에 가둬라.”

“폐하!”

“천지 분간 못 하는 놈들은 곤죽을 내야지, 안 그런가?”

으아아!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산뜻한 표정으로 명한 황제와 병사들에게 손짓하는 시종장을 쳐다봤다. 그리고 고프레도와 쟝뤼크는 정말로 병사들의 손에 끌려갔다.

‘못살아, 정말!’

나와 샤를리나는 희게 질려서 병사들을 쫓아갔다.

“못살아, 정말!”

나는 쟝뤼크를 흘기며 소리쳤다.

“성질 죽이시라고 그만큼 말씀드렸으면 좀―”

“커흠!”

그가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이 꼴이 뭐예요! 스승님이 옥사에 끌려가신 게 벌써 두 번째란 말이에요!”

“그, 뭐, 크흠! 스승에게 그리 대들어서야……!”

“상관에게 대드는 스승도 있는데요, 뭘!”

그는 민망한 듯 콜록! 기침하며 시선을 허공에 돌렸다. 그때였다. 옥사 안으로 낮은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도미니크가 쯧, 혀를 차며 쟝뤼크를 쳐다봤다.

“영애를 지키라고 불러 놨더니, 수습 못 할 사고를 쳤군.”

으르렁, 위협하는 것 같은 시선에 쟝뤼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고개를 수그렸다. 나는 “저를 지키라고요?” 하고 말했다.

“말이 헛나왔습니다.”

“……?”

“이제 어쩌실 겁니까. 폐하께선 소란을 가장 싫어하시니 쉽게 풀어 주시진 않을 텐데요.”

쟝뤼크가 뻔뻔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방책도 없이 사고를 쳤구나!’

나는 씩씩거리다가 어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요.”

“그러하시다면……?”

“뇌물을 먹이는 수밖에.”

내가 결기 어린 눈으로 중얼거리자 도미니크와 쟝뤼크는 기가 막힌 얼굴로 날 쳐다봤다.

* * *

“어찌합니까, 성녀님.”

수셰프의 말에 샤를리나는 칫, 혀를 찼다.

“빌어먹을 놈들!”

노골적인 욕설을 뱉은 그녀가 분하다는 듯 발을 굴렀다. 세니아나를 몰아붙여 스스로 성을 나서게 하는 건 실패했다.

‘왜 갑자기 루크 쟝이 튀어나온 거야!’

선대 로열 셰프의 제자, 불세출의 천재. 요리를 맛본 자들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금은보화를 짊어지고 바짓가랑이를 붙든다는 길라게온의 대표 요리사. 그가 세니아나 프렌시프를 비호하는 이상 그녀를 주방에서 몰아내는 건 무리였다.

“이 와중에 고프레도까지 잡혀가고……. 되는 일이 없어!”

샤를리나가 고성을 내지르자 수셰프는 거무죽죽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루크 쟝 쪽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겠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이대로 구금이 지속되면 성식을 제국 전역에 퍼뜨리는 건……!”

“누가 그걸 몰라?!”

손톱을 까득까득 물어뜯던 샤를리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고프레도가 없으면 우리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그는 위대한 성전의 주축이야.’

카렌듈라 후작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까. 하지만…….

때마침 수셰프가 그녀를 닦달했다.

“지금 당장 2월(카렌듈라 후작)에게 연락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황제가…….”

“예?”

“고작 주방이 소란스러운 거로 로열 셰프를 구금까지 한 이유가 뭐겠어. 내궁의 기강을 잡으려고 한 걸지도 몰라.”

“그건…….”

“내 생각이 맞을 거야. 올 한 해 내궁에서 이런저런 사건이 많았잖아. 황후와 황비 세력은 각각 미카엘 황자와 황태자를 등에 업고 다퉜어.”

“궁인들의 대부분이 양 파로 갈라졌지요.”

“황제의 권위를 잊지 말라는 훈계라면, 여기서 카렌듈라 후작을 이용해 그를 압박하는 건 위험해.”

수셰프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과연!” 하고 소리쳤다.

“물론 황제를 구슬리려고 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지.”

“하면 어찌합니까.”

“자존심이 상한다고 광고를 하시니 맞춰 드려야지. 눈물로 읍소하는 수밖에.”

그녀는 씩 웃으며 창밖으로 보이는 황제의 집무실을 바라보았다.

샤를리나는 즉시 수셰프와 함께 아발론의 요리사들을 이끌고 대전 앞에서 무릎을 굽혔다.

“폐하, 셰프님을 용서해 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폐하!”

“폐하!”

벌써 두 시간째. 무릎을 굽힌 채 절절매는 요리사들을 보고 궁인들의 안색이 변했다. 황제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로열 셰프를 구금했다는 건 그의 심기가 몹시 불편하다는 뜻. 잘못 걸리면 제 자리도 위태로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모두 숨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었다.

귀족들까지 마른 침을 삼키자 샤를리나는 남몰래 웃음을 삼켰다.

‘귀찮은 일이지만, 이만하면 황제도…….’

그러한 찰나에 또각, 또각, 구두 소리와 함께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세니아나가 등장했다. 요리사들은 귀족 영애의 모습으로 대전을 찾은 그녀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너, 로열 셰프께서 구금된 상황에 뭐 하는……!”

세니아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복도에 세워진 괘종시계를 가리켰다.

“저는 오늘 오전 근무만 있어서.”

샤를리나가 기가 차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저게 돌았구나.’

일부러 반감이라도 사려는 거야?

그렇지 않아도 요리사들은 신분 때문에 차별받는다고 느껴서 세니아나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반면에 자신은 저 계집애와 다르게 로열 셰프를 구명하자고 앞장서며, 귀족 영애의 몸으로 두 시간째 찬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여론이 어디로 움직일지는 빤한 일이었다.

‘멍청하기는.’

샤를리나가 입매를 비틀자, 세니아나도 생긋 웃고는 사뿐사뿐 대전으로 들어갔다. 열린 문을 통해 세니아나가 황제에게 무언가 전달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거 대체 무슨 수작을…….”

“이 상황에서 뭐 하는 거야. 제 스승도 옥사에 갇혔는데!”

황제는 세니아나가 내려놓은 상자를 보며 “호오.” 탄성을 흘렸다.

“내게 주는 선물이라?”

“예, 폐하.”

“궁인이 사사롭게 궁주에게 선물을?”

“궁인의 선물이 아니라 프렌시프의 딸이 폐하께 드리는 선물이에요.”

황제가 껄껄 웃으며 상자를 매만졌다.

“프렌시프 영애가 내게 무슨 선물을 가져왔는지 볼까.”

그의 손에 의해 상자가 열렸다. 황제는 상자 속 내용물을 보자마자 딱딱하게 굳어져서 세니아나를 쳐다봤다.

“이건……!”

“보그입니다, 폐하.”

그것도 정제되지 않은 보그. 상자에 든 것만으로 황궁의 모두가 일 년은 넉넉히 쓸 양이었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제를 보고 세니아나는 생글생글 미소지었다.

이건 엘트라의 왕자, 트리스탄이 준 보그의 극히 일부였다. 저보다 족히 열 배가 넘는 보그가 저택에서 잠자고 있으니 아까울 것도 없다.

“이런 것을 대가 없이 바치겠다고?”

“폐하께선 만백성의 어버이시니, 자식인 제가 아버님께 귀한 것을 바치는 건 당연하지요.”

“뇌물이냐?”

“기부, 혹은 충심이랍니다.”

현재는 이 나라의 모두가 전력석 수급에 허덕이고 있다. 세니아나가 엘트라에서 보그를 가져오기 전까진 이 나라의 전력석은 사비에르가 독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비에르는 코앞에 멸문이 닥친 데다가, 유통마저 난항을 겪는 중이었다.

이제 사비에르엔 포털이 없으므로 제국 전역에 전력석을 고르게 나누는 데에 막대한 금액이 들었다. 때문에 전력석의 값이 천정부지로 솟고, 사재기가 횡행했다. 그러니 황제에게도 보그는 엄청난 가치의 보물이었다. 멍하니 보그를 보고 있던 황제는 으하하,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충성스러운 프렌시프의 딸이다!”

“마음에 드신다니 기쁩니다.”

세니아나의 모습을 보고 있던 궁인들이 할 말을 잃었다. 어버버거리는 것은 요리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저게 말로만 듣던 보그…….”

“엄청난 양이잖아! 정제하면 보그 하나당 전력석 일만 개의 가치가 있다면서.”

“그런 걸 저렇게 대뜸……!”

프렌시프의 부는 익히 들었지만, 이만큼 대단할 줄이야. 요리사들은 혀를 내두르며 세니아나와 황제를 지켜보았다. 세니아나는 앙큼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럼 폐하,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니지, 아니지. 충성스러운 백성을 그냥 보낼 수야 없지.”

황제는 시종장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가서 차를 내오너라.”

세니아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폐하!”

“바쁜 일이라도 있느냐.”

“그게 아니라…….”

그녀가 침울한 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스승께서 옥사에 갇혀 계신데 저만 호사를 누리는 건…….”

“흐음.”

“충심이 앞서 폐하를 찾아뵙긴 하지만, 지금 바로 신전에 들러서 스승님을 위한 기도를 올릴 생각입니다.”

황제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

‘이것 봐라.’

깜찍하게 구는 것이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황제는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영애가 루크의 제자라고 했었지. 스승을 향하는 마음이 갸륵하구나.”

“예, 폐하.”

“그러고 보니 짐이 억지를 부려 그를 데려왔는데, 챙겨 주지도 못하였군.”

그가 은근한 눈길로 세니아나를 쳐다봤다.

“루크는, 그러니까, 몸이……?”

“약하시지요! 오래 옥사에 갇혀 계시면 혼절하실지도 몰라요.”

요리사들은 기함했다.

‘거짓말!’

몸이 약한 사람이 그렇게 호통을 치고 펄펄 날아다닌단 말인가! 하지만 황제와 세니아나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장단을 맞췄다.

죄인은 곧 풀려났다. 두 사람의 죄인 중 쟝뤼크만.

* * *

요리사들이 아무리 애원해도 황제는 고프레도를 풀어 주지 않았다. 주방 관리에 소홀했으니 총책임자인 그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구실이었다. 결국, 요리사들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휴게실에 모인 요리사들은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무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무리 빌어도 소용이 없더라니까.”

“있을 리가요. 감히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혔다고 우리까지 잡혀가지 않은 게 다행이지.”

“하지만 이대로 볼 수는 없잖아.”

“차라리 프렌시프처럼 뇌물이라도 바쳤어야…….”

“그만한 금액이면 뇌물이라고도 못 하지. 국가 예산급 뇌물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요리사들은 혀를 내둘렀다.

“으, 삭신이야. 무릎 꿇는 것보다 뇌물이 더 가치가 있는데 괜한 고생을 했어.”

“카렌듈라도 그렇지. 프렌시프만큼 대단한 가문이라면 그 애처럼 뭐라도 바쳤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싸게 해결 보려고 했던 거지.”

문밖에서 요리사들의 낄낄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던 샤를리나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함께 있던 수셰프는 불편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저…… 성녀님. 그, 카렌듈라 후작에게 말씀하셔서 우리도 뭐든 바치는 게…… 아니면 성녀님께서 대사제께 받은 재물 중에서라도…….”

샤를리나가 매섭게 노려보자 수셰프는 헛기침을 했다.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내일 당장 월례 회의가 열릴 텐데 그곳에서 ‘그 일’을 마무리 지어야지요.”

“…….”

“아니면 우린 또 몇 달을―”

“시끄러워!”

날카로운 고함에 휴게실 안 요리사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카렌듈라의 목소리 아닌가.”

“나가 보자고.”

수셰프가 당황한 사이 샤를리나는 그의 어깨를 밀치며 걸음을 재촉했다. 황궁 복도에 어둠이 짙게 드리웠다. 희미한 불빛이 일렁이며 샤를리나의 그림자가 짙어졌다가 흐려졌다. 입술을 짓씹으며 걷던 그녀가 중얼거렸다.

“황제는 대체 무슨―!”

그때, 코너를 돌아오던 인영과 마주쳤다.

“세니아나……!”

“퇴궁할 시각 아니야?”

“너야말로 왜 아직 황궁에 남아 있어. 꼴 보기 싫으니 썩 꺼져.”

세니아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지나쳤다. 샤를리나의 잇새에서 으득, 소리가 새어 나왔다.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 그따위 천박한 수라면 역풍 맞기 십상이니까.”

“천박한 수?”

“뇌물 같은 게 어디까지 통할 줄 아는 거야? 내일이라도 귀족들이 들고일어나면―”

세니아나가 빙글빙글 웃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누가 들고 일어나?”

“카렌듈라 후작이 가만있지 않을……!”

“바보, 폐하께서 왜 스승님을 불러들이셨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뭐?”

황제가 쟝뤼크를 불러들인 건 비단 요리 때문만이 아니었다.

‘더 큰 이유는 고프레도를 견제할 세력을 만들려는 거야.’

과거, 황제는 올리비에 폐공작의 역모로 크게 진노했다. 때문에 올리비에와 엮인 자들은 남녀노소,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핍박받았다.

고프레도는 올리비에의 저택에서 일한 바 있는 데다, 그의 추천서를 받고 로열 키친 권외 시험을 본 사람이니 설 자리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 고프레도를 지원하여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한 것이 카렌듈라 후작. 그러한 이유로 고프레도는 카렌듈라에 충성했다.

“폐하의 목적은 고프레도와 악연인 쟝뤼크를 끌어들여서 황위 다툼에 더 큰불을 지피려는 거야.”

황위 쟁탈전이 뜨거워질수록 황권은 공고해질 테니까.

샤를리나가 발작하듯 소리쳤다.

“말도 안 돼! 황제는 황태자를 버렸어.”

“지금은 아니지.”

“……!”

“그런데 네가 카렌듈라 후작을 들쑤셔서 폐하가 뇌물을 받았다고 압박하면 어떻게 될까?”

“그건……!”

“완전히 미카엘을 황제의 눈 밖에 나게 하려거든 그러든가.”

세니아나는 희게 질린 샤를리나를 보고 생긋 웃었다.

“잘해 봐.”

그 말을 끝으로 세니아나는 복도를 벗어났다.

“영악한 계집애!”

샤를리나가 타이를 내던지며 울부짖었다.

* * *

마차 앞에서 날 기다리던 쟝뤼크는 겸연쩍은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오늘은 고생 많았다.”

나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그를 흘겨보았다.

“대책도 없이 사고 치시면 어떡해요. 용돈을 엄한 곳에 썼잖아요!”

“……용돈?”

“네!”

“용돈이라고…… 그만한 양의 보그가……?”

“아빠랑 할아버지가 용돈 하라고 하셨는데요?”

“……이래서 금수저란.”

쟝뤼크는 질린다는 얼굴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아무튼, 가세요.”

“어디를?”

“저희 집이죠.”

“싫어!”

나는 도망치려는 쟝뤼크는 붙잡았다.

“오늘 일로 아탈란에서 약이 바짝 올랐을 거라고요.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저희 집에 계시는 게 제일 안전해요.”

“그, 그렇지만……!”

나는 그의 등을 탁탁 밀며 “들어가세요.” 하고 말했다. 마차에 있는 내내 쟝뤼크는 몹시 불안한 얼굴이었다. 내려서 가족들을 보고는 그답지 않게 마른침만 꿀떡꿀떡 삼켰다. 할아버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쟝뤼크를 쳐다봤다.

“저택에서 머물게 해 달라고?”

“네, 위험해서요.”

쟝뤼크가 “아, 아니……! 나는 괜―!” 하고 버럭 소리를 쳐서 며칠간 주방에서 지옥 훈련을 받은 난 움찔하고 몸을 움츠렸다. 할아버지가 “호…….” 하고는 쟝뤼크 주변을 느리게 걸으며 말했다.

“그간 내 손녀에게 아주 잘 해 준 모양이군?”

“그, 그게 아니라…….”

“잘 왔네. 며칠이든 머무르게나.”

“아, 아닙, 아닙니―”

“술은 좋아하나?”

“아니요!”

그가 새파랗게 질려서 소리쳐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술 좋아하시는데?’

아카데미 연구실에도 각종 술을 모아 놓고, 때때로 홀짝이곤 했다. 할아버지가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음산하게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라도 좋아해 보도록 해.”

“그, 그 말씀은…….”

“자, 내 서재로 가지.”

쟝뤼크는 할아버지에게 끌려가면서 “세, 세, 세, 세니아나!” 하며 절규하듯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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