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저택에 돌아온 나는 아빠를 찾았다. 집무실에서 가신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가 날 보고 서류를 내려놓았다.
“나가 봐라.”
“예.”
가신이 나가고서 난 쪼그려 앉아 아빠의 책상 위로 빼꼼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냐.”
“아빠, 폐하한테 예쁨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뭐?”
아빠는 일순 당황하여 몸을 일으키곤 내 손을 끌고 소파로 이끌었다.
“무슨 소리냐, 네가 왜 황제의 눈치를 본단 말이야.”
탐탁지 않은 목소리에 나는 “그게…….” 하고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으음, 권력자의 애정은 받아 둘 만한 것 같아서요.”
“오늘 네가 보그를 가져간 것과 관련된 일이냐.”
우와, 벌써 상황을 파악하고 계셨구나. 프렌시프의 정보력은 생각보다 더 훌륭한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폐하의 의중에 따라서 흔들리는 것보다, 폐하를 흔드는 쪽이 우리 목적 달성에 유리하다는 걸 알았어요.”
아빠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는 나를 빤히 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나를 닮은 구석을 이런 데서 발견하니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안 될까요……?”
“전혀.”
그는 다리를 꼬고 소파 팔걸이를 검지로 툭, 툭 두드렸다.
“너는 하필이면 내 딸로 태어나, 하필이면 막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지.”
“좋은 일 아닌가요?”
“가까이 보면 그렇겠지만, 멀리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아.”
“그럼……?”
“지금이야 나나 어르신이 있지만, 우리가 죽어 없을 땐 틈을 타 흔들려는 자들이 분명 생기겠지.”
“그런 말씀은 싫어요!”
끔찍한 생각에 나는 울상을 짓고 씩씩거렸다. 아빠가 픽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든 상황을 가늠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와 어르신 사후에 란슬롯과 가웨인이 얼마나 잘해 줄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해.”
“…….”
“시류를 읽는 법을 알아야 한다. 군림하는 법을 알아야 스스로 지킬 수 있어.”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아빠는 쿡쿡 웃으며 내 눈가를 가볍게 문질렀다.
“오늘은 잘했구나.”
“오늘요?”
“보그를 가져다준 것 말이다.”
“왜요?”
“현재 황제가 가장 필요한 것이 그것이거든. 사람은 원하는 것을 쥐여 주는 이에게 약한 법이지.”
그렇다는 건 엘트라와의 거래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는 소리구나.
‘잠깐, 그러면……!’
“아! 뭘 해야 할지 알았어요!”
내가 손뼉을 짝 치며 소리치자 아빠가 빙그레 웃었다.
“과연 내 딸, 영리하기도 하지.”
나는 히히, 하고 영악하게 웃었다.
다음 날, 아발론의 주방. 로열 셰프가 구금되고, 함께 일을 만든 쟝뤼크만 풀려나자 아발론의 요리사 몇은 시위하듯 주방에 나서지 않았다. 그 중엔 수셰프와 샤를리나도 함께였다. 나는 요리를 점검하는 쟝뤼크의 곁으로 다가갔다.
“스승님, 오늘 폐하께 점심 설명은 제가 해도 돼요?”
“흠……. 오늘은 카렌듈라의 차례인데 오지 않았으니, 뭐.”
그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나는 오늘 점심으로 통과된 음식을 만든 요리사들에게 설명을 전해 듣고, 트레이를 미는 시종들과 함께 아발론의 대식당으로 향했다.
황제와 함께 앉아 있던 가브리엘라 황비가 빙그레 웃었다. 아름다운 회색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나는 그녀를 보고 얼굴을 조금 붉혔다.
‘가브리엘라 황비님은 정말 예뻐.’
황비 넷은 모두 아름답지만, 가브리엘라 황비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오, 프렌시프가 아닌가.”
황제는 호탕하게 웃으며 날 아는 체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난 음식을 설명하며 기회를 엿봤다. 황제는 가브리엘라 황비를 보며 말했다.
“로웨나가 엘트라 사신들을 잘 다독이고 있나?”
“로웨나 황비님은 맡은 바 소임을 훌륭히 해내시고 있습니다. 다만, 사신들이 타국에서 예민하여…….”
“흥, 예민은 무슨. 짐이 원하는 것을 쥐었다고 경망을 떠는 게지.”
그가 마뜩잖은 듯 쯧, 혀를 차자 가브리엘라 황비는 곤란한 표정이었다.
“왕자는 어찌 지내고 있어?”
그때였다.
“폐하!”
시종장이 다급히 식당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엘트라의 사신들이―!”
황제가 벌떡 일어났을 찰나 익숙한 얼굴의 사신이 어흠, 헛기침을 하며 들어왔다. 그러곤 희게 질린 통역관을 슥― 바라봤는데, 통역관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른침만 꿀떡꿀떡 삼켰다. 황제가 인상을 찌푸리며 짓씹듯 중얼거렸다.
“갈수록 오만불손하군.”
감히 독대를 청하지도 않고 들어온 사신을 보고 황제는 몹시 불쾌한 얼굴이었다. 엘트라의 사신은 마치 강대국이 소국에게 하듯 무례했다. 카렌듈라와 그 당파가 보그를 얻어 내기 위해 절절맸기에 본인들이 쥔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통역관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구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저, 폐하……. 그, 엘트라의 대신관이…….”
“대신관이!”
황제가 버럭 소리치자 통역관은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엘트라의 신을 모시는 제단을 설치하고 싶답니다…….”
“뭐라!”
제국은 타라 신을 모신으로, 단일교를 이루었다.
‘으음, 역사 시간에 배웠던 것 같아.’
왕이 종교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민심을 융합하기 위해서였다. 타국의 종교를 핍박하는 이유도 민심의 분열을 막으려는 것이다. 아무리 엘트라의 신관이라고 해도 타국에서, 그것도 황궁에 다른 종교의 제단을 설치하는 건 몹시 무례한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짐을 우롱하려는 것이냐!”
황제가 버럭 소리치자 통역관으로부터 말을 전달받은 사신이 팔짱을 끼며 무어라 말했다.
“저자가 지금 뭐라는 게야!”
“…….”
“짐이 묻지 않느냐!”
“그게…… 수락하지 않는다면 엘트라로 돌아가겠다고…….”
어느새 다른 사신들도 들어와 황제를 압박했다.
‘아, 이때다!’
나는 타이밍을 잡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저, 폐하…….”
그가 붉어진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신관들에게 한마디 올려도 될까요?”
황제는 미간을 좁혔지만, 가브리엘라 황비가 “영애는 엘트라의 왕자와 막역한 사이라 들었습니다. 맡겨 보시는 게 어떨까요?” 하며 내 편을 들었다.
“……그리해.”
난 허리를 굽히고 엘트라 사신들 앞에 나섰다.
“어떻게 돌아가시려고요?”
역관이 통역하자 사신들은 뻔한 것을 묻는다는 얼굴로 흥, 콧방귀를 뀌었다.
“당연히 왔던 길을 통해서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통해서 오셨지요?”
역관의 말에 사신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카렌듈라의 포털을 통해서 오지 않았소!]
[카렌듈라의 성녀가 우리를 데려온 것을 모르시오?]
역관은 통역했고, 나는 생글생글 웃었다.
“이제 그 길은 쓸 수 없습니다.”
[뭐라고?]
“카렌듈라의 성녀는 이제 포털을 열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못 믿으시겠으면 확인해 보시든가.”
내 표정이 변하자 사신들은 우왕좌왕했다. 그리고 난 쐐기를 박았다.
“이제 엘트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제가 길을 열어드리는 것뿐인데, 저는 이 나라의 백성이니 황제 폐하의 자식이나 마찬가지.”
[무, 무슨…….]
“어느 딸이 부친께 무례한 작자들에게 호의를 베푼단 말입니까!”
황제와 황비, 그리고 제국의 궁인들이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주목했다.
[말도 안 돼!]
[이런 무례가 어디에 있소! 당신들이 필요해 불러왔으면서, 이제 돌려보내지 않겠다니!]
[여신의 권속이 우리를 협박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사신들이 당황한 얼굴로 무어라 소리쳤다. 사신단의 대표인 흰머리의 사내가 앞으로 나와 나를 쳐다봤다.
“여신의 권속이 어찌 사사로운 일에 개입한단 말입니까.”
제국어를 알아?
‘그런데도 굳이 모국어로 통역관을 통해 대화했단 말이지.’
처음부터 기 싸움을 할 요량이었던 거다. 보그를 내놓을 생각이 없었던 거야.
“제가 왜 여신의 권속이지요?”
“그야, 신이 내린 힘을 쥐고 있으니……!”
“저를 여신의 권속이라 규정한 것은 엘트라지, 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신의 권속이라 믿고 베풀던 것을 거두는 수밖에요. 우리는 이제 프렌시프와 보그를 거래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생긋 웃었다.
“그러세요.”
“뭐, 뭐라고?! 이 나라에선 보그가 필요하지 않소!”
“그럼 저는 더 확실히 여러분께 매정할 수 있겠군요.”
“여신의 권속!”
‘멀린!’
내가 속으로 멀린의 이름을 외치기 무섭게 황궁이 크게 흔들렸다. 쿠구궁―! 바닥과 벽이 빠르게 진동하자 사신들은 겁먹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만, 그만!]
[그만두시오!]
유약한 자는 부들부들 떨며 주저앉기까지 했다. 대신관이 거무죽죽한 얼굴로 황제를 쳐다봤다.
“사신에게 무례한 백성을 그냥 두실 겁니까?”
황제는 히죽 웃었다.
“영애는 그냥 백성이 아니라서.”
“폐하! 무도한 계집입니다! 당장 잡아들여 고신하셔야―”
“어허!”
황제가 크게 일갈했다.
“영애는 짐의 보물이오!”
한순간에 황제의 보물이 된 난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사신들을 바라보았다.
“배로 가시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 먼 곳을 어찌……! 우리가 다 죽는 꼴을 봐야겠소!”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지요. 저는 ‘아버님’께 효를 다해야 하니까요.”
사신들의 총책임자는 이를 악물었지만, 대꾸하지 못하고 끄응, 신음을 흘렸다. 난 생긋 웃었다.
“무례했던 것을 인정하시고 폐하께 사과하시겠지요?”
“…….”
“네?”
그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하지만 이내 황제에게 고개를 푹 수그렸다.
“신심이 깊어 폐하께 과한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흐으음…….”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폐하.”
나는 앙큼하게 “어찌할까요, 폐하?” 하고 물었고 황제는 껄껄 웃으며 인자하게 대답했다.
“이리 사과를 하니 아량을 베풀어 볼까.”
“과연 성군이십니다, 폐하. 황은이 하늘과 같습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식당 안의 모든 제국민이 무릎을 굽히고 삼창했다.
“황은이 하늘과 같습니다!”
“황은이 하늘과 같습니다!”
사신들은 희게 질린 얼굴로 인사 후, 도망치듯 식당을 빠져나갔다.
* * *
황제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속이 시원하고, 어깨가 으쓱으쓱 솟았다. 그는 예정도 없이 황족들의 만찬을 열었다. 황후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유난히 유쾌해 보이십니다.”
황제는 고기를 썰며 껄껄 웃었다.
“역시 딸이 귀엽지. 그렇지 않은가?”
가브리엘라 황비를 제외한 다른 황비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황제는 턱을 쓰다듬었다.
“짐의 나이에 새로이 딸을 보기엔 늦었고, 흠……. 아들들은 쓸 데가 없는데.”
코트니 황비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리 훌륭한 황자를 셋이나 두셨으면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것들은 징그럽게 크기만 해. 딸처럼 귀엽지가 않다고.”
로웨나 황비는 눈치 빠르게 물었다.
“귀여운 아이가 있었습니까?”
“프렌시프 영애 말이야, 참으로 사랑스럽지. 영리하고, 귀여워서 보고 있으면 지루하지가 않네.”
으하하― 황제가 웃는 소리에 가브리엘라 황비는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쿡쿡 웃었다. 그러자 황후와 로웨나 황비가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사신들과 무슨 일이 있었다더니, 혹……?”
그 말에 가브리엘라 황비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어찌나 말을 잘하는지, 놀랐습니다. 제 속이 다 시원하여서 상을 내릴까 하였지요.”
그러자 황제가 “그렇지!” 하며 테이블을 두드렸다.
“좋은 생각이야. 영애는 무엇이 필요할까. 로웨나가 사이좋으니 영애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있겠지?”
“글쎄요. 부족한 것이 있을까요.”
“도미니크, 네가 영애를 오래 보아왔지 않으냐. 가지고 싶다던 건 없나?”
도미니크는 표정 없이 고기를 썰며 말했다.
“모릅니다.”
“그러지 말고 생각해 봐. 얼마든, 뭐가 됐든 내 귀여운 딸에게 내릴 것이야.”
도미니크는 미간을 좁히며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영애가 어찌 폐하의 딸입니까.”
“내 백성이니 내 자식과 다름없지! 흐응, 질투하는 것이냐?”
도미니크는 속으로 혀를 차며 다시 나이프를 들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프렌시프에서 들고 일어날 겁니다.”
“치사하기는. 그런 딸을 가지려면…… 아, 그래. 며느리로 들이면 되겠군!”
황후와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듯 소리쳤다.
“현명하십니다, 폐하!”
“그래, 그래. 누구와 어울릴꼬.”
황제는 세 아들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황태자는…… 몸이 약하지.”
로웨나 황비가 펄쩍 뛰었다.
“뭐가 약합니까! 이제 건강해지셨는데요!”
“그래도. 흠, 그럼 미카엘은…….”
황후가 후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카엘과 잘 어울릴 듯하지요? 연배도 비슷하니.”
“연배는 다들 비슷하지만…… 사비에르의 딸과 약혼한 경험이 있으니 프렌시프에서 난색을 표하겠군.”
“결혼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황제는 단호히 고개를 돌렸다.
“도미니크는…….”
황제가 턱을 문지르며 도미니크를 빤히 쳐다보았을 때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폐하.”
한 편에서 뾰루퉁 입술을 우그러뜨리고 있던 코트니 황비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오늘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아십니까?”
“소문?”
“샤를리나 카렌듈라가 포털을 열 수 없다던데요.”
황제가 “흐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프렌시프 영애가 사신단에게 한 말이라네. 짐이 직접 들었지.”
“사신단을 압박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나요?”
“프렌시프 영애는 금세 들통날 거짓말을 할 만큼 아둔한 아이가 아니야.”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드러나면 체면이 매우 상하고, 엘트라와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정말로…….”
코트니 황비는 황후를 은근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녀는 황후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다. 과거 황후의 명을 받고 세니아나에게 매혹 저주를 걸어 미카엘과 이어 주려던 적이 있다. 결국 꼬리가 잡혀서 크게 곤란해졌던 일이었다. 그런데 황후는 제 명 때문에 곤란해진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을뿐더러 일을 그르쳤다며 괄시했다.
“황후 폐하께서 말씀해 주셔요. 어떻게 된 일인가요?”
황후는 대꾸하지 못하고 나이프만 꾹 말아 쥐었다. 샤를리나의 포털에 관한 이야기라면 듣자마자 확인하기 위해 친정으로 사람을 보냈다.
‘아버님도 모르는 일 같았어.’
저보다 더 길길이 날뛰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지 않았던가. 외부에 있는 샤를리나를 찾아 사람을 풀고 있는 듯했으니 이제 곧 소식이 들려올 것이다. 그러나 황후는 시침을 뚝 떼고 아무렇지 않게 와인 잔을 잡았다.
“본궁은 모르는 일일세.”
“모르신다니요. 자매의 일이잖아요?”
“내가 그 아이와 남보다 못하다는 걸 모르는가.”
“아무리 그래도 포털이에요. 제국의 보물이란 말입니다. 그런 걸 확인도 안 해 보셨다는 건―”
쾅! 황후가 거칠게 잔을 내려놓자 코트니 황비는 움찔 어깨를 좁혔다.
“어머머, 뭘 그렇게 화를…… 무서워서 여쭙지도 못하겠네요. 그렇지 않나요, 가브리엘라?”
가브리엘라 황비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삼켰고, 대신 로웨나 황비가 말했다.
“확실히 이상하지요. 포털이라는 게 그렇게 갑자기 사라질 수 있는 건가요?”
“자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내 아버님께서 가짜 성녀를 만들어 황실을 우롱했다고 하고 싶은 건가!”
“그리 생각한 적은 없지만, 정말로 샤를리나 양에게 포털이 사라졌다면 합리적인 의심이긴 하겠네요.”
“로웨나!”
“제 말이 틀렸습니까!”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황제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그만!”
“…….”
“…….”
황후와 로웨나 황비가 고개를 수그렸다.
“그 이야기의 진위는 내일 짐이 확인할 터이니 후·비는 말을 아끼시오.”
황후가 다급히 “폐하!” 하고 소리쳤으나 황제는 단호히 말했다.
“진정 난데없이 포털이 사라졌다면 이상한 일이지 않소. 모든 가능성을 고려할 수밖에.”
황후가 입술을 꽉 짓씹었다.
만찬이 파하고 황후는 아발론을 빠져나왔다. 황후가 급히 걸으며 시녀장에게 소리쳤다.
“아버님께 어서 소식을 전해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포털이 건재함을 증명토록 하라고!”
“예.”
황후가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 빌어먹을 계집애가 내 아들의 앞날을 망쳐 놓는다면 내 손으로 명줄을 끊어 줄 것이야.”
잇새로 새어 나온 목소리가 살벌했다.
* * *
카렌듈라 후작이 아탈란의 대사제를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말이 되는 소리요! 갑자기 포털을 쓸 수 없다니!”
대사제는 하하, 낮게 웃으며 그를 다독였다.
“애석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애석? 애석―! 내가 왜 출신도 모르는 계집애를 딸로 삼아 내 명예를 손수 더럽혔는지 잊으셨소!”
“각하, 그리 흥분하지 마시고 앉아서 이야기하시지요. 마원에 문제가 생겨서 잠시 포털을 열지 못하는 겁니다.”
“하면 언제 다시 열 수 있는 거요.”
“그건…….”
대사제가 침음을 흘리며 신전 한 편에서 희게 질린 낯으로 웅크린 샤를리나를 쳐다보았다. 득달같이 아탈란 신전으로 쫓아온 후작은 샤를리나에게 포털에 관해 묻다가 분을 참지 못하고 뺨을 올려붙였다. 대사제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시일은 확언하지 못합니다.”
“이제 다시는 열지 못할 수도 있단 말이오?!”
“……새로운 마원을 준비 중이니 기다리십시오.”
“언제까지! 황제가 내일 당장 황궁으로 들어오라는 전서를 보냈소!”
“각하, 제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일이 있으십니까. 이번에 느낀 불안과 공포는 곱절로 갚아드릴 터이니 그만―”
카렌듈라 후작이 샤를리나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머리채를 잡았다.
“꺄아악―!”
“너, 말해 봐라.”
“무, 무슨 말을……!”
“정말로 포털이 있기는 한 것이냐. 네가 성녀가 맞긴 한 게야?!”
“제, 제가 엘트라의 사신들을 데려오는 걸 보셨잖습니까!”
“아탈란에서 진짜 성녀를 숨겨 두고 가짜를 내밀어 나를 속인 게 아니냐고 묻는 거야!”
날카로운 고성이 신전에 울려 퍼지자 신관들은 곤란한 듯 대사제의 안색을 살폈다.
‘빌어먹을.’
대사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대사제님! 보고만 계실 거예요?! 이 자를……!” 하며 울부짖는 샤를리나를 노려보았다.
‘저런 멍청한 것을 위대한 계획의 부속품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샤를리나는 ‘어둠’을 도래시킬 몇 가지 재료 중 하나였다. 샤를리나를 대체할 ‘재료’를 만들기 위해선 다시 긴 시간을 낭비해야 할 터였다.
“그만하시지요.”
대사제가 카렌듈라 후작을 뜯어말리자 후작은 대사제를 노려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이 계집애를 도륙하든, 마원을 만들어 내든 뭐라도 해!”
“…….”
“내가 평생을 일군 가문이 이깟 계집애 때문에 흔들린다면, 그때는 내 손으로 저년 목을 칠 테니까.”
후작은 샤를리나를 내동댕이치듯 머리채를 놓고, 신전을 빠져나갔다.
“2월이 미친 게 분명해요! 어떻게 나를……!”
대사제는 눈물 바람으로 저를 붙잡는 샤를리나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정신 빠진 년.”
“대사제……. 어, 어떻게 대사제까지 그런 말을!”
“대체 네가 제대로 하는 게 뭐야?!”
“세, 세니아나가 나쁜 거예요. 그 애가 영악하게―!”
그는 샤를리나의 말을 들어 주지 않고 쯧, 혀를 찼다. 신관 하나가 대사제에게 다가갔다.
“이제 어찌합니까. 포털 문제는 수습해야 할 텐데요. 우리로서도 포털이 없으면 일을 진행하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인상을 찌푸린 대사제가 신경질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모든 달들에게 전해라. 어떻게든 세니아나 프렌시프가 가진 마원을 가져오라고. 빼앗든, 훔치든 뭐라도 해서.”
그가 등을 돌리다가 멈칫하고 신관을 바라봤다.
“세니아나 프렌시프의 지척에 있는 1월에게 가장 먼저 내 말을 전해.”
“예, 대사제.”
신관은 서둘러 나라 각지에 퍼진 아탈란의 끄나풀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 * *
퇴궁 준비를 하던 중에 통신석이 빠르게 점멸했다. 나는 살짝 탈의실을 빠져나가 인적 드문 곳에서 통신을 받았다.
[세니아나.]
“큰오빠?”
[르마르 공작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르마르 공작이라면 아탈란의 ‘3월’로, 란슬롯 납치 사건에서 우리 편으로 흡수하여 세작으로 부리고 있는 자였다. 나는 다시 한번 주변을 살피고 물었다.
“무슨 연락이었는데요?”
[네게서 마원을 빼앗기 위해 제국에 숨어 있는 아탈란의 수족들이 모두 나설 거라고.]
샤를리나가 포털을 열 수 없다는 걸 황제가 알았으니 조급해진 거구나.
[살수까지 풀었다고 하더군.]
“아마 길목마다 저를 기다리고 있겠군요.”
[우리도 암군을 소집했다.]
황궁 앞까지 정규군을 끌고 올 순 없었다. 그건 잘못 엮이게 되면 반역으로 보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황도 근경에 있잖아요?”
[그래, 도착하려면 두 시간쯤 걸리겠지. 그동안 어떻게든 버텨야 해.]
‘포털로 저택에 가면 되지만, 황궁을 나서는 데 한 시간 정도 걸려.’
황궁 내에선 포털을 열 수 없다. 황제에게 허가를 받아도 마탑에 명이 전해지고 결계를 해제할 시간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허가를 받으려면 명분이 있어야 해.’
아탈란의 일을 전할 수는 없다. 그들이 내가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오히려 더욱 거리낄 것 없이 접근하려 할 터. 무엇보다 황제 측에 아탈란의 사람이 없다고 확신할 수 없다. 황제 자신이 아탈란의 세력 중 하나가 아니라는 확신이 없기도 하고.
“어떻게든 두 시간 동안 버텨 볼게요.”
[로웨나 황비나 도미니크에게 도움을 청해라. 우리는 지금 바로 황궁으로 출발할 테니까.]
“네.”
통신이 종료되고, 나는 얼른 탈의실로 들어갔다. 내가 없는 사이에 아카데미 동문 선배인 헤리엇과 아탈란의 다른 요리사들이 모여 있었다. 다른 요리사들은 나를 보고 떨떠름한 기색으로 수군거렸다. 헤리엇이 그들을 보며 콧방귀를 뀌고는 내게 일부러 말을 붙였다.
“오늘도 후배님 이야기로 떠들썩하던걸. 폐하 앞에서 사신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줬다면서?”
“네, 뭐…….”
“가브리엘라 황비님도 너를 귀여워하시는 모양이고.”
“감사한 일이지요…….”
“오늘 가브리엘라 황비님은 무슨 드레스를 입으셨든?”
그러자 다른 요리사들이 움찔하더니 반짝이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헤리엇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킬킬거렸다.
“워낙 미모가 출중하신 분이잖아. 그분이 입고, 쓴 건 모두 유행하거든.”
그러자 다른 선배 요리사들이 하나둘 말을 보탰다.
“가브리엘라 황비님 성향도 한몫하지.”
“맞아!”
“황후 폐하나 로웨나 황비님, 코트니 황비님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꿈도 못 꾸는 고가의 옷을 입잖아?”
“하지만 가브리엘라 황비님은 다르시지.”
“수더분하시고, 현명하시고, 침착하시고, 지혜로우시고.”
“아아, 가브리엘라 황비님은 내 우상이야.”
“그럼! 새카만 머리칼은 밤하늘처럼 깊고 우아하고, 제비꽃 같은 보라색 눈동자는……!”
“뭐라고요?”
나는 미간을 좁히며 요리사의 어깨를 잡았다.
“뭐, 뭐야. 왜?”
“보라색 눈동자라고요? 가브리엘라 황비님이요?”
“그래. 자수정 같은 청보라색이잖아?”
“무슨! 회색이잖아요. 도미니크 황자님이나 샤를리나와 같은.”
그러자 요리사들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헤리엇도 의아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무슨 소리야. 샤를리나의 눈은 녹색이지.”
“그래, 황후 폐하와 같은.”
뭐라고?
난 굳어져서 말을 잃었다.
‘샤를리나의 눈은 분명 회색이야. 가브리엘라 황비님도 마찬가지고.’
가까이서 그들을 자주 본 내가 모를 리 없다. 그때, 헤리엇이 “다 갈아입은 사람은 가라. 서 있을 데가 없다고.” 하며 선배 요리사들을 문밖으로 밀어냈다.
“세니아나.”
“네?”
“너, 방금 그 회색 어쩌고 한 거 말이야.”
“……네.”
“아무리 프렌시프 영애라도 그런 말은 조심하는 게 좋겠어. 무엇보다 너는 성녀잖아?”
나는 도미니크의 말을 떠올렸다.
[잿빛은 부정한 색이죠.]
눈동자를 가리키며 했던 말. 회색은 아탈란의 세례를 받은 사람의 색이었다!
나는 걸음을 재촉하며 신음했다.
‘동부에서 오래 지내서 신경 쓰지 못했어.’
동부는 이민족, 그러니까 아탈란과 관련되었던 소수민족을 가장 많이 받아들인 지역이었다. 선생님, 아니, 엄마가 대륙 전쟁 후 동부로 온 것도 그 이유에서였으니까. 동부 아카데미에도 회색 눈동자가 심심치 않게 보여서 도미니크의 말보다는 배척받는 색이 아닌 모양이라고 여겼다.
‘샤를리나는 흑마법으로 사람들에게 눈동자 색을 다르게 인식시킨 거야.’
그런데 나는 어째서 그들의 진짜 눈을 볼 수 있었던 거지? 마원들과 관련된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나는 도미니크가 있는 제2황자궁에 다다랐다.
“정지, 신분을 확인하겠소.”
경비병이 막아서서 난 “아발론의 요리사인 세니아나 프―” 라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경비병이 든 램프로 인해 그 뒤에서 다가오는 자들의 얼굴이 보였다.
‘잿빛 눈동자!’
램프를 든 자의 눈은 갈색이었지만, 그와 같은 경비대 차림의 사내들은 모두 회색 눈동자였다. 램프를 든 경비병이 허허 웃었다.
“요리사님이셨군요. 예, 들어가십―!”
“피해요!”
“컥!”
램프를 든 경비병이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잿빛 눈동자를 가진 경비대의 칼날에서 피가 뚝, 뚝, 떨어졌다.
“성녀님을 뵙습니다.”
히죽 웃는 그들을 보고 나는 뒷걸음질 치다가 황급히 뛰어갔다.
“잡아!”
등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웨나 황비궁으로 가야 해!’
난 정신 없이 뜀박질했다. 수련하며 체력이 많이 좋아졌지만, 평생 검을 잡아 온 사내들을 완전히 따돌릴 순 없었다. 그들은 나를 인적 드문 곳으로 몰아서 바짝 추격해왔다. 등 뒤로 손끝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 난 빽! 소리쳤다.
“살려 주세요!”
이번에 잡히면 정말 어떻게 될지도 몰라. 마원을 빼앗기는 것뿐만이 아니라 또 한 번 인생이 송두리째 갈기갈기 찢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목을 옥죄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 많던 경비병이 왜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거지?’
황궁 경비대에도 아탈란의 사람이 있는 걸까. 그러한 생각에 닿을 즈음 내 앞에 경비 대장 차림의 중년 사내가 나타났다.
“세니아나 프렌시프.”
“경비 대장…… 헉!”
역시 잿빛 눈동자다. 대체 아탈란은 어디까지 손을 뻗친 걸까. 나는 희게 질린 얼굴로 앞뒤를 가로막은 아탈란의 하수인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끝났습니다, 성녀님.”
“자, 이리로.”
“대사제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경비병 복장의 사내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을 때, 난 마원을 잡으며 소리쳤다.
“멀린!”
그들은 내가 성수를 꺼낼 줄 알고 주춤하며 물러섰다. 그리고 난……. 냅다 뛰었다! 숨이 목 끝까지 차고 온몸이 후들후들 떨린다.
‘성수를 꺼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탈란이 날 역모를 저지르려 했다고 몰아세울지도 모른다. 그럼 가족들이―! 머리가 새하얘졌다.
[세나야.]
[우리 영리한 공주님.]
선생님의 목소리가 귓가를 아른거렸다. 그때 휙! 누군가 내 손목을 틀어잡았다. 나는 딱딱하게 굳어져서 나를 잡은 여자를 쳐다봤다.
“가브리엘라 황비…….”
그녀가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말했다.
“또 다른 이름으로 불러 줬으면 좋겠구나.”
“……1월?”
그녀는 쿡쿡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내 이름 중 하나지.”
“이거 놔요, 성수를 부를―”
그녀는 내 턱을 단단히 쥔 채 눈을 가늘게 좁혔다.
“어리석은 아이야. 네가 궁지에 몰리면 성수를 불러 내리라는 걸 아탈란이 몰랐을까?”
“……!”
“아탈란은 뭐든 준비하고 있단다.”
달빛이 비치었다. 불씨가 사그라지고 남은 재와 같은 눈동자가 달빛에 비치어 날카롭게 빛났다. 경비대장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나타났다. 그러자 가브리엘라 황비는 빙그레 웃으며 내 손을 꽉 잡았다.
“우리에겐 또 다른 이름이 있어.”
“아탈란의 하수인?!”
“아니.”
경비대장을 쫓아 경비대가 우리를 둘러쌌을 때였다. 경비대장은 단숨에 칼을 뽑아 그들을 제압했다.
“무슨……!”
황비는 내 뺨을 감싸 쥐며 말했다.
“네 이모와 외숙부이기도 하지.”
“……뭐라고요?”
“우리가 네 어머니의 친남매라 말하고 있는 거란다.”
한순간 나는 주춤했다. 가브리엘라 황비와 경비대장이 선생님의 친남매라고? 선생님이 환히 웃던 얼굴과 가브리엘라 황비의 희미한 미소가 겹쳐졌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죠?”
경비대장이 “세니아나―” 하고 불렀지만, 가브리엘라 황비는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맞아.”
“……네?”
“네 의심은 합리적이야. 가족이라는 말에 덥석 믿지 않으니 오히려 안심이지.”
난 그녀에게서 물러나 마원을 잡았다.
“성수를 불러들일 수 없다는 게 무슨 뜻이죠?”
“카렌듈라 후작의 일파가 황궁에 들었다. 마탑에선 결계를 점검 중이지.”
“그렇다면…….”
“네가 지금 성수를 불러들이면 카렌듈라 후작은 마탑에 사람을 심어 두고 황제를 해할 틈을 노리고 있다고 읍소할 거야.”
“……프렌시프에서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
“그래, 하지만 한시적이라도 네가 옥사에 갇힐 수밖에 없어. 아탈란이 너에게 접근할 만한 절호의 찬스지.”
“…….”
“운이 나쁘면 다시 아탈란 신전으로 끌려가 평생을 그곳에서 살다 어둠을 도래시키기 위한 재료로 생을 마감할 거다.”
“…….”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고 황비는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어서 가자. 내 궁에 비밀 통로가 있어. 은밀히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단다. 아서와 암군에겐 통로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라 전해.”
“그마저 신뢰할 수 없어요.”
“이해해, 하지만 지금은―”
경비대장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움찔, 어깨를 좁혔고 가브리엘라 황비가 그를 제지하려 했다.
“뭐 하려는 거야, 에단!”
경비대장이 손수건으로 내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난 반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어느 순간 시야가 좁아지고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쓰러진 세니아나를 보고 가브리엘라는 에단을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야! 아탈란의 약물을 세니아나의 몸에 쓰다니!”
“말씨름할 시간이 있어?”
치맛자락을 꽉 틀어쥐고 있던 가브리엘라 황비가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곧 자정. 이때까지 세니아나를 잡지 못했으니 마탑에 숨겨 둔 아탈란의 마법사들이 동원될 것이다.
“가자.”
가브리엘라 황비가 고갯짓하자 에단은 세니아나를 둘러멘 채 소리 없이 움직였다. 가비리엘라 궁에 이른 후엔 세탁물 트레이 안에 세니아나를 숨겨서 통로로 이동했다. 가브리엘라 황비는 고개를 끄덕였고, 시녀로 분장한 에단은 통로 앞에서 쯧, 혀를 찼다.
“조카를 잘 둬서 고생이군. 내 나이가 벌써 서른 중반이라고.”
가브리엘라 황비는 시트를 들추었다. 세상모르고 잠든 세니아나를 보던 그녀의 표정에 그리움이 서렸다.
“우리 어렸을 땐 너를 자주 꾸며 주었는데.”
“특히 미아가.”
후후, 웃던 가브리엘라 황비가 에단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쥐어박았다.
“미아가 들었으면 뭐라고 할지 알지?”
“뻔하지. ‘누나라고 부르랬지, 이 콩알만 한 게’ 할 거야.”
에단이 세니아나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처음부터 아서 프렌시프와의 결혼을 반대하지 말 걸 그랬나.”
“네 탓이 아니야. 내 탓이지.”
에단은 가라앉은 표정의 가브리엘라 황비를 보고 말없이 트레이를 움직였다.
“조심해.”
“아서, 그놈에게 연락이나 해 둬.”
가브리엘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단은 통로를 나섰다. 그녀는 즉시 아서에게 연락했다.
“세니아나는 우리가 데리고 있습니다.”
[내 딸을 어떻게 했지?]
“6년 전에 만났던 오두막에서 뵙죠. 에단이 세니아나를 데리고 그리로 가고 있습니다.”
[……무사한가.]
“당신을 찢어 죽이고 싶어도 미아의 핏줄에게 손대는 짓은 하지 않아요.”
[고맙게 생각한다.]
통신을 종료한 가브리엘라가 회중시계를 다시 꺼냈다. 회중시계 안에 담긴 사진을 보는 눈빛이 흔들렸다. 에단과 자신, 그리고 미아, 또…….
‘세실.’
[넌 언젠가 분명 미아와 관련한 일을 후회하게 될 거야.]
네 말이 맞았어. 그 순간을 처절하게 후회한다. 사라진 아이를 찾아 울부짖던 미아를 외면한 일을, 세실과 미아의 조언을 듣지 않고 아탈란을 신뢰했던 일을. 미아의 시체를 끌어안고 오열하던 에단을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내.
가브리엘라 황비가 눈을 꾹 감으며 팔목을 부여잡았다. 팔뚝 안이 검게 녹아들고, 그 틈으로 삿된 액체가 일렁이고 있었다.
“미아, 내가 네 딸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줘.”
내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 * *
“으으.”
머리가 아프다. 나는 실눈을 뜨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세니아나!”
“막내야!”
가족들이 침대 주변을 에워싸고 나를 불렀다.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빠의 방.
난 한숨을 내쉬는 아빠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네 외숙부가 너를 데리고 왔다.”
“경비대장?”
“그래.”
정말로 나를 돕기 위해 나타난 걸까. 아니면 내가 그들을 믿게 하려고 술수를 부리고 있는 걸까.
“아빠는 가브리엘라 황비, 아니, 이모가 아탈란의 1월이라는 걸 알고 계셨어요?”
그러자 아빠를 제외한 가족들의 표정이 경악에 물들었다.
“가브리엘라 황비가 아탈란의 1월이라고?”
“이모라는 건 또 무슨 소리야!”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아에게 형제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미아가 너를 낳았을 때, 잠깐 가브리엘라와 에단이 로브를 뒤집어쓰고 찾아왔었지. 난 뒷모습밖에 보지 못했지만.”
“그럼…….”
“마지막으로 재회한 건 7년 전이야. 자신을 황비로 만들어 달라고 했지.”
“그 말을 들어 주셨어요? 어떻게 믿고요?”
“언젠가 돌아올 너를 위해 자리를 잡아 놔야 한다고 간청했으니까.”
아빠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아빠가 가브리엘라 황비의 말 한마디로 넘어갔을 리 없다. 그런 눈빛으로 아빠를 보니 그는 미간을 찌푸리곤 내 뺨을 가볍게 문질렀다.
“아비인 이상 자식의 이름 앞에선 약자가 될 수밖에.”
“그럼…….”
“네가 돌아온다고 믿을 수만 있다면 황비로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당시엔 까닭을 알 수 없었지만, 가브리엘라는 이미 동부 귀족의 양녀가 된 상태였으니까.”
그래서 가브리엘라 황비가 ‘동부’를 대표해서 황비가 된 거구나.
“가브리엘라는 가족에게서 미아를 빼앗아 간 나를 싫어했지만, 이따금 정보를 주었지.”
“정보라면…….”
“적군의 책략, 정보를 넘긴 것이 세니아나 몸에 든 악귀라는 것도.”
나는 이불을 꽉 끌어안고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는 그 사람들을 완전히 믿을 수 없어요.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그들은 아탈란의 신전에 있었을 테니까요.”
“그건 달라.”
“다르다니요?”
“막내인 에단은 성력이 없지만, 가브리엘라는 미아만큼은 아니더라도 성력이 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빠는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미아와 음지의 마녀, 그리고 도미니크의 모친인 세실은 우리 군의 골칫덩이였어.”
“……도미니크의 어머니요?!”
“그래, 세실은 전쟁 중에 변절하여 제국으로 넘어와 황제와 아이를 낳았고, 미아는 전쟁 종반에 살생에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자취를 감췄지. 하지만 음지의 마녀는 달랐다.”
“음지의 마녀라는 게 가브리엘라 황비를 말하는 건가요?”
“기상천외한 마법을 부리며 세작으로 정보를 취합하고, 검은 안개를 끌어들여 아군끼리 정신을 놓고 싸우게 만드는 골칫덩이인데 아무도 그녀의 얼굴을 몰랐지.”
“그래서요?”
“음지의 마녀는 네가 납치되기 전까지도 사람들을 홀리는 포교 활동을 계속했어.”
역시 아탈란에 충성하고 있었구나.
내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아가 죽을 때 가브리엘라와 에단은 대사제의 명으로 타국에 있었다.”
“……그럼 아빠는 저를 납치한 게 아탈란의 사람들이라는 걸 알고 계셨군요.”
“눈치만 채고 있었을 뿐이지. 증거가 없었으니까.”
“제게 가브리엘라 황비의 정체를 알려 주지 않은 것도―”
“지금은 황비라도 음지의 마녀였다는 게 들통나면 처형대에 세워질 거다.”
내가 알면 마음이 아플 테니까 굳이 말하지 않은 거구나.
‘또 웬만하면 엮이지 않기를 바란 거야.’
나는 아탈란에서 가장 강력했던 전투 신관인 미아의 딸인 것만으로도 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꼴이다. 그런데 이모는 여전히 아탈란에서 활동 중인 음지의 마녀라면 나는 빼도 박도 못 하고 도태될 테니까.
“일단 알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빠를 쳐다봤다.
“그런데―”
그리고 눈에 바짝 힘을 주고 흘겨보았다.
“저도 이제 비밀을 만들 거예요.”
흥.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리자 아빠가 “뭐?” 하고 물었다.
“그런 중요한 것도 안 알려 주시고!”
“그건…….”
“됐어요, 미워!”
아빠는 당황해서 움찔하고 내 손을 꽉 잡았다.
“그게 아니라―”
“제 나이가 몇 살이든 저는 아빠에겐 귀여운 딸이고, 어린 애 같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이건 정말로 중요한 일이잖아요?”
“…….”
“그런 걸 모르고 있었다면 전 오해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했을지도 몰라요.”
“…….”
“가령 궁지에 몰린 제가 이모와 외숙부를 성수로―”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자 아빠는 내 손에서 조금 힘을 뺐다. 나는 실눈을 뜨고 아빠를 보았다.
“잘못하셨지요?”
“그래…….”
“그럼 이번 일은 제게 맡겨 주셔야겠지요?”
“……뭐?”
나는 입꼬리를 씩 끌어당기고 음험하게 웃었다. 우리 선생님이 그러셨다. 뺨 한 대를 맞으면 난 두 대를 때려 주라고. 나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전투 신관 미아의 딸이며, 내 별명은 건드리지만 않으면 순둥이였다. 건드렸으니까 물어뜯어 줘야지. 잘못 건드렸다는 걸 제대로 보여 주마.
[네가 나에게 연락해 올 줄은 몰랐어.]
아빠의 통신석에서 가브리엘라 황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든 거니? 에단은 네게 해를 끼치려던 게 아니라―]
“알아요. 저는 제 발로 두 분을 따라가지 않았을 테니, 긴박한 상황에서는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어요.”
통신석에서 가는 실소가 흘러나왔다.
[어쩌면 그렇게 미아를 닮았는지.]
“황비님, 아니, 이모.”
[…….]
그녀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잠시 후 [그, 그래] 하고 들려온 말엔 물기가 배어 있었다. 내게서 ‘이모’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이.
“조카가 부탁이 있어요.”
[……뭐지?]
“하면 안 되나요.”
[그럴 리가. 무엇이든 해 보렴. 네 이모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황비다. 외가가 친가보다 못할까.]
나는 히죽 웃고 떨떠름한 표정의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친가보다 못하지. 외가가 무슨―”
쳇, 콧방귀를 뀌던 할아버지가 내 눈치를 보고 커흠, 헛기침했다.
“할아버지랑 둘이서 도와주셔야 하는데요. 그게 뭐냐면…….”
내 이야기를 들은 가브리엘라 황비와 할아버지는 펄쩍 뛰었다.
[그건 위험해!]
“위험해!”
난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뼈를 치려면 살쯤은 내줘야 하잖아요? 그마저도 별로 내주고 싶진 않지만.”
[뼈를 친다라…….]
흐음, 신음하던 가브리엘라 황비가 픽 실소를 흘렸다.
[아무래도 미아만 닮은 건 아닌 모양이구나. 계략 쪽은…… 프렌시프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모양이지?]
난 히히 웃으며 “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황궁에 구금됐다.
* * *
카렌듈라 후작이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1월이 해낸 모양이군.”
대사제도 흘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대장이 증언했다. 세니아나 프렌시프가 황궁에 성수를 풀어 놓았노라고. 이제 세니아나 프렌시프는 꼼짝도 하지 못한 채 황제의 손에 떨어질 것이다. 이 틈을 노려 그 애를 아탈란으로 데려오기만 하면 계획의 한 부분은 마무리될 터.
대사제가 카렌듈라 후작을 닦달했다.
“어서 가서 중죄를 물어야 한다 주장하십시오.”
“물론이지. 오늘 중으로 마원도 빼앗을 거요.”
“샤를리나에겐 아직 전해 주지 마십시오.”
“어째서?”
“이 기회에 버릇을 잡아 놔야지요. 그간 제가 너무 어리광을 받아 준 모양입니다.”
그는 허허 웃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카렌듈라 후작을 바라보았다.
“버릇을 잡는 건 후작께 일임하겠습니다.”
후작이 눈썹을 슥, 들어 올렸다. 저 말은 샤를리나를 카렌듈라에게 바치겠다는 말과 진배없다.
‘포털과 관련된 실수를 이렇게 갚으시겠다?’
카렌듈라에겐 나쁠 것 없는 거래였으므로 그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은 즉시 당파를 모아 황궁으로 향했다.
“폐하, 프렌시프 영애를 이대로 풀어 줄 수는 없습니다!”
“폐하의 황궁에서 성수를 강림시켰습니다! 무슨 의미일지 아시겠지요!”
황제는 길길이 날뛰는 귀족들을 보고 침음을 흘렸다.
‘흐음, 영리한 아이가 웬일로 실수를 했을꼬.’
아니, 실수라기엔 너무 큰 일이다. 그도 내심 불쾌하긴 했다. 세니아나 프렌시프가 역모를 저지르려 했다고 믿는 건 아니나 제 앞마당을 휘저어 놓은 건 사실이니. 그는 마뜩잖은 표정의 나베리우스와 아서를 보다가 손을 올렸다.
“일단 프렌시프 영애의 이야기부터 들어 보지. 데려와라.”
그러자 시종장이 경비병에게 눈짓했고, 세니아나는 그들에 의해 끌려 나와 맨바닥에 꿇어 앉혀졌다.
“반역의 증좌입니다!”
“벌을!”
“프렌시프 영애에게 벌을!”
카렌듈라 후작의 일파가 소리치자 황제는 턱을 괸 채로 세니아나에게 물었다.
“무슨 연유로 황궁에 성수를 불러들였느냐.”
세니아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폐하.”
“그래.”
“저는 억울합니다.”
“뭐라……?”
“저들이 왜 저리 화를 내는지도 모르겠고, 입궁하자마자 끌려온 까닭도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며 카렌듈라 후작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까닭으로 저를 끌고 오라고 명하셨나요?”
카렌듈라 후작이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마탑의 결계를 점검하는 틈에 성수를 불러들이지 않았나.”
“성수요?”
세니아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무슨 성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저는 아닌데요?”
“경비대장이 증언하였네! 성수를 보았다고! 거짓말은 그만―”
“백사자였습니까?”
“뭐?”
세니아나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아닐걸. 성수는 여우였을 테니까.’
세니아나는 황제를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
“폐하, 이 나라의 성녀는 저뿐만이 아닙니다.”
그녀의 말에 카렌듈라 후작 당파의 귀족들이 펄쩍 뛰며 소리쳤다.
“어제 황궁에 있던 성녀는 프렌시프 영애 하나요!”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려 하지 마시오!”
“인정하시오. 반역을 꾀하지 않았소!”
“반역자!”
귀족들이 겁박하듯 사납게 일갈하였으나 세니아나는 태연했다.
“황궁 결계를 점검하는 틈을 타 허가받지 않고 성수를 불러냈기에 반역이라 하시는 게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귀족들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결계가 해제되었다면 남몰래 포털을 열어 황궁에 들어올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러자 프렌시프 측의 귀족들이 이때다 싶어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습니다, 폐하!”
“앞뒤 상황을 잴 시간도 없이 프렌시프 영애를 추포한 까닭이 수상합니다!”
“제 발이 저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죄를 뒤집어씌운 게 아닙니까!”
“맞습니다, 폐하!”
황제는 골치 아픈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목격자들을 데려와라. 성수가 어떤 동물의 형태였는지 확인해야겠다.”
시종장은 성수를 목격하였다는 궁인들을 아발론으로 불러들였다.
* * *
“여우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두워서 잘 보지는 못하였는데 짐승은 맞았고 또…… 아, 사자는 아니었습니다.”
“여우가 확실합니다.”
“사자는…… 아니었던 듯합니다.”
목격자들이 증언했고, 난 남몰래 히죽 웃었다. 가브리엘라 황비에게 ‘부탁’을 하고 난 후, 나는 그녀를 통해 쵸를 들여보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여우의 모습으로 궁 안을 활보하게 했다.
아탈란이 경비대에 숨겨 둔 사람뿐만 아니라 일반 궁인들까지 잔뜩 목격하였으니 증언을 조작하긴 힘들 터였다. 마지막 목격자의 증언을 듣고 난 뒤, 황제는 카렌듈라 저로 병사들을 보내 샤를리나를 추포했다.
대전으로 끌려들어 온 샤를리나를 보고 카렌듈라 후작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황제가 샤를리나를 향해 물었다.
“묻겠다. 그대가 오늘 새벽, 황궁의 결계가 해제된 틈을 타 성수를 소환했는가.”
“무, 무슨! 그럴 리 있겠습니까! 폐하, 전 억울합니다!”
샤를리나가 울먹이며 소리치자 황제는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한데 어째서 궁인들이 황궁 안에서 영애의 성수를 목격한 거지?”
“저, 저는…… 저는…….”
샤를리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카렌듈라 후작을 쳐다봤다. 이 일을 어찌하느냐는 시선에도 후작은 나서지 못했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이 여우를 목격했으니 아니라고 해 봐야 믿어 주지 않을 거다. 그럼 성수를 소환한 건 샤를리나가 될 테고, 그렇게 되면 역모죄를 뒤집어쓰게 될 터.
역모는 드러난 즉시 재판 없이 처분이 가능한 죄다. 옥사로 들어가자마자 모진 고문이 샤를리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탈란이 아무리 저 애를 구하고 싶어도 고문이 끝날 때까지는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물론 운이 좋은 경우에 그렇다는 소리고,
‘운이 나쁘면 취조 과정도 없이 목이 떨어질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저 애의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성수가 없어요, 저는!”
그렇지. 이거 말이야.
장내가 또 한 번 크게 술렁였다. 카렌듈라 후작은 눈을 꽉 감은 채로 마른침을 삼켰고, 황제는 대번에 인상을 썼다.
“성수가 없다?”
“그렇습니다, 폐하!”
“일전에 황궁에 소환한 성수는 어찌 되고.”
샤를리나는 두 손을 꼭 맞잡더니 “그건…… 그건……!” 하고 중얼거렸다.
“짐이 묻지 않았느냐!”
“서, 성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근래에…… 그러니까…….”
샤를리나는 테디가 오물 속에서 여우를 끌어안는 것을 보았으니, 쵸가 내 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말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쵸를 내게 빼앗겼다고 말했겠지.’
지금 내가 쵸와 테디를 쓰는 것을 자제하는 건 멀린을 제외한 두 마리 성수가 내게 더 있다는 것을 남들이 모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과시하게 되면 주변은 안전해질 것이다. 하지만 황궁이나 다른 귀족들이 내 힘을 두려워하여 나를 어떻게든 잡아 두려 할 테니까.
아탈란은 저들의 ‘준비’가 끝나지 않은 지금, 내가 성수 셋을 모두 부리고 있다는 게 알려지는 건 피하고 싶을 거다. 샤를리나가 내 손에 쵸가 있다고 밝히는 건 아탈란이 스스로 안전핀을 뽑는 것과 다름없다.
‘무엇보다 내게 성수가 셋이나 된다고 밝히게 되면 역모로 엮을 수 없지.’
황제나 귀족들은 그런 힘을 가진 날 처분하려 들지 않을 테니까. 없애는 것보다 구슬려서 쥐고 있는 쪽이 제국의 안녕을 위한 일이 아니던가.
“성수가 없다는 것은 포털을 열 수 없다는 뜻이냐?”
“…….”
“카렌듈라 후작!”
황제가 고함을 지르자 사람들의 시선이 후작에게 몰려들었다. 하지만 내 생각대로 그도, 샤를리나도 대답하지 못했다.
“너희들이 없는 능력을 만들어 짐을 우롱하였구나.”
샤를리나가 황급히 소리쳤다.
“아닙니다, 폐하! 저는 분명 포털을 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엘트라의 사신들을 데려올 수 있었던 게 아닙니까!”
“최악의 경우, 네가 타 대륙의 성녀에게 힘을 빌렸을 수도 있지!”
“그, 그런……! 하, 하면 제가 어떻게 입관 시험 때 화재를 정리했겠습니까!”
“그렇지. 그도 이상하군.”
황제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화재 또한 네가 꾸며낸 것이 아니냐? 그래, 담뱃불이 화재로 이어지는 시간이 기이하도록 짧았지.”
“폐하!”
황제는 진노하여 노성을 내질렀다.
“저 불온한 부녀를 잡아들여라! 짐이 직접 고신할 것이다!”
카렌듈라 후작 측의 귀족들은 황망한 표정이었고, 그 외의 귀족들은 일시에 무릎을 굽혔다.
나는 아빠, 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아발론을 나섰다. 할아버지의 곁으로 귀족들이 급히 따라붙었다.
“카렌듈라에게 금좌 11석의 수장 자격을 빼앗으려면 지금이 적기입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빠가 말했다.
“즉시 우리 측의 금좌와 귀족들을 모두 황도로 불러들여라.”
귀족이 허리를 굽히며 헐레벌떡 성을 떠났다. 나는 아빠에게 물었다.
“수장 자격을 빼앗으면 어떻게 돼요?”
“제일 골치 아팠던 것이 귀족 처결권이다. 금좌 11석이 회의를 통해 처결하긴 하지만 수장의 입김이 강력하게 작용하니까.”
“그럼 자격을 빼앗게 되면…….”
“내전이 아닌 이상 카렌듈라와 아탈란이 우리에게 손을 댈 수 없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아빠나 할아버지가 수장이 되면 우리가 저들을 칠 수도 있다는 소리군요.”
“그래.”
황후와 미카엘의 지지 기반이 크게 흔들릴 테니, 그 틈을 타서 황태자의 후계위를 공고히 할 수도 있겠다.
“세니아나.”
“네, 아빠.”
“너는 가서 로웨나 황비를 만나라. 지금 바로 황태자를 아발론에 들여서 황제에게 수장 자격을 거두어들이도록 해.”
“아빠와 할아버지는요?”
“우리는 금좌들을 압박해 수장위를 가져올 테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즉시 흩어졌고, 그날 저녁에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할아버지가 금좌 11석의 수장이 된 것이다.
* * *
아탈란의 신전. 쾅! 테이블을 내리친 대사제가 벌떡 일어나 날카롭게 소리쳤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대, 대사제, 일단 진정하시고 2월(카렌듈라 후작)과 우리의 성녀를 구할 방도를 내려 주십시오.”
“이 상황에서 어찌 카렌듈라 후작을 구해! 프렌시프에서 기회를 놓칠 듯싶으냐!”
“그건…….”
“금좌들을 선동해 없는 죄도 뒤집어씌우려 하고 있을 게야. 내전이 아니면 그를 구할 방법이 없어!”
“하면 성녀님은 어찌합니까.”
대사제가 으득, 이를 갈자 신관은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샤를리나는 우리에겐 없어선 안 될 제물입니다. 그 애가 사라지면 또 다른 제물을 만들기 위해 몇 년을 허비해야 할지 아시지 않습니까.”
“…….”
“대사제.”
“가브리엘라 황비에게 연락해라. 우리가 심어 둔 금좌들에게도.”
“어찌 전할까요.”
“카렌듈라 후작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샤를리나만은 살아서 황궁을 나서야 한다.”
“예.”
신관이 재빨리 신전을 빠져나가자 대사제는 샤를리나로부터 계속 수신 중인 통신석을 내던졌다. 깡―!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널브러진 파편을 보던 그가 이를 악물었다.
‘세니아나 프렌시프.’
마지막 순간, 울부짖던 미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다시 돌아올 거다…….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딸에게 인생을, 가족을 돌려줄 테니까…….]
그때 대사제는 미아를 비웃었다. 돌아와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세니아나가 돌아올 때면 모든 것이 정리되고, 아탈란의 세상이 도래했을 테니까. 미아는 그런 자신을 보며 뇌까렸다.
[처절하게 후회할 너를 지옥불 속에서 기다리마.]
대사제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세계에 돌아온 세니아나 프렌시프를 본 순간, 미약한 불안감이 움텄다. 미아가 평생을 다해 피워 낸 그 계집은 미아와 같은 표정, 같은 눈, 너무도 닮은 얼굴이었다. 대륙 전쟁에서 가장 날카롭던 자신의 검이 이제 자신을 향해 겨눠지게 될 거라는 불안감. 대사제는 주먹 쥔 손에 더욱 힘주었다.
‘아니, 네 바람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아탈란의 화톳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는 소매 안에 감춘 또 다른 통신석을 꺼내 연결했다.
[예, 대사제.]
“고프레도, 계획을 시작해라.”
[벌써 말입니까? 아직 준비를 다 마치지 않았습니다. 지금 움직이는 건 위험한……!]
“이제 우리는 물러설 수 없어.”
대사제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읊조렸다.
* * *
저택으로 뛰어들어간 나는 쟝뤼크의 방문을 쾅! 쾅! 두드렸다.
“스승님, 스승님!”
잠들어 있었는지 쟝뤼크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내가 몇 번이나 더 문을 내리친 후에야 방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냐.”
부스스한 차림의 그를 얼른 끌어당겼다.
“빨리 씻으세요.”
“왜.”
“황궁에 가야죠.”
“난 오늘 휴일이야.”
그러더니 “엊그저께 네 조부가 내게 얼마나 술을 먹였는지 오늘도 죽겠어.” 하며 끙끙거렸다.
“휴일이어도 얼른 가셔야 해요!”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는 거냐.”
“로열 셰프가 되셔야죠!”
쟝뤼크는 잠이 확 달아난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로열 셰프라니.”
“스승님, 고프레도와의 승부에서 정말로 패배하셨나요?”
쟝뤼크가 고개를 돌려 허공을 바라봤다.
‘아니겠지.’
그는 성격은 더럽지만,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 정말로 패배했다면 고프레도를 그처럼 혐오하진 않았을 것이다.
“고프레도에겐 뒷배가 있고, 스승님에겐 없었죠.”
“그런데.”
“그래서 억울하게 승부에서 진 거잖아요, 그렇죠?”
“…….”
“스승님이 승부를 위해 귀족들에게 알랑방귀를 뀌었을 리는 절대 없으니까.”
쟝뤼크가 크흠, 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뭐! 내가 나빴다는 게냐!”
“아니요. 나쁜 건 고프레도죠. 비열한 방법으로 로열 셰프가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하지만 이젠 달라요. 스승님에게도 뒷배가 있으니까!”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뒷배?”
“우리 할아버지가 금좌 11석의 수장이 되었거든요!”
쟝뤼크는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남 밑에서 있는 건 못 버티는 사람이니 언젠가 수장이 될 거라고 생각했…….”
내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쟝뤼크는 놀란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네 할아버지가 금좌 11석의 수장이 된 것과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야!”
“로열 키친에서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뭐?”
나는 쟝뤼크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성식을 들여왔죠. 황족들이 중독되었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쟝뤼크가 날 쳐다봤다.
“황궁에 그런 조미료를 들일 수 있는 건 로열 셰프뿐이야.”
“그러니 고프레도가 어떤 것을 준비 중이라는 뜻이겠죠.”
“…….”
“저를 도와주세요, 스승님. 저는 로열 셰프가 되어야겠어요. 제게 스승님의 제자 자격으로 로열 셰프 시험을 보게 해 주세요!”
쟝뤼크는 잠시 말없이 무언가 고민했다.
“로열 키친에서 즐거우셨죠?”
“…….”
“스승님은 즐거우실 때 더 야멸차게 가르치시잖아요. 그렇지 않을 땐 누구보다 게으르다는 걸 전 알아요.”
쟝뤼크는 커흠! 헛기침하더니 중얼거렸다.
“뭐, 그, 내가 게으름을 피우는 건 아냐! 그리고 뭐가 재미있다는 거야! 다들 못 봐주겠더니만.”
“못 보겠다 싶으면 포기하시잖아요. ‘너, 너, 너, 나가’ 이렇게 말하면서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니 그는 슥, 눈을 피했다.
“실력 있는 요리사들을 기르는 것, 그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 훌륭한 재료로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갖는 것.”
“…….”
“모두 스승님이 꿈꾸시던 거죠?”
“…….”
“제가 이룰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드릴게요.”
“너는?”
“네?”
“너는 그 대가로 무엇을 받을 수 있지?”
쟝뤼크의 손목에서 손을 떼고, 조심스럽게 치맛자락을 잡았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나는 결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가족의 평화요.”
“…….”
“어머니의 복수요.”
“…….”
“마음껏 요리하고, 꿈을 펼칠 수 있는 세계요.”
쟝뤼크와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그는 가만히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조급해졌다. 카렌듈라 후작에게서 수장 자격을 빼앗고, 후작과 샤를리나를 모두 구금시켰다. 현재 황궁에서는 황제가 직접 두 사람을 대질하고 있었다.
‘아탈란은 이제 궁지에 몰렸어.’
그러니까 무슨 짓을 해 올지 모른다. 계획의 중심지인 로열 키친을 틀어쥐어야 그들과의 전쟁에서 고지를 차지할 것이다. 쟝뤼크의 도움이 아니라면 힘든 일이었다. 가족들이 안다면 그를 협박해서라도 로열 셰프로 만들겠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불안한 얼굴로 방문을 쳐다보고 있자 이십 분쯤 후, 문이 벌컥 열렸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그가 재킷을 입으며 턱짓했다.
“가자.”
나는 활짝 웃고 “네!” 대답했다.
쟝뤼크와 나는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마차 안에서 쟝뤼크에게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그는 기가 막힌다는 투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카렌듈라와 르마르, 사비에르 등의 금좌들이 아탈란에 대거 포섭되었고, 그들 위에 가브리엘라 황비가 있다?”
“……네.”
“그 가브리엘라 황비는 네 이모이고, 평생 아탈란의 신관으로 산?”
“맞아요.”
“허…….”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이마를 쥐었다.
“무슨, 이런 일이……. 제국의 뒤편은 곪을 대로 곪아 있었군. 올리비에 폐공작 사건에까지 아탈란이 연루되어 있다니…….”
“그러니까 스승님, 마지막 기회를 드릴게요.”
“뭐?”
“멈추려면 지금이에요. 이 이상 저와 관련되면 싫어도 아탈란과 맞서는 수밖에 없어요.”
그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칫, 혀를 차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이미 그들과 엮여 있어.”
“……네?”
“내 스승님을 내몬 자는 아무래도 카렌듈라 후작인 듯싶으니까.”
‘아.’
나와 쟝뤼크는 선대 로열 셰프의 일기장을 읽었고, 그가 억울하게 로열 키친에서 쫓겨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식의 유통을 거절하자 앙심을 품은 카렌듈라 후작이 그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다. 선대 로열 셰프는 바로 항의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아탈란에서 제자인 쟝뤼크의 미래를 운운하며 그를 협박한 것이다.
쟝뤼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스승은 아버지였고, 형제였으며, 길잡이였다. 그런 그가 나를 볼모로 아탈란에게 협박당했다면 참을 수 없지.”
“…….”
“그러니까 내가 이번 일에 엮이는 건 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라는 거다.”
나는 그를 보다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러자 그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왜 그렇게 웃는 게냐.”
“스승님은 새침하고 부끄러움을 잘 타시지만, 저를 아주아주 사랑하고 계시지요.”
그가 펄쩍 뛰며 “내, 내, 내가 뭘! 눈이 삐었군!” 하고 말했지만 난 그저 히히 웃을 뿐이었다.
다 안다고요. 나 때문에 위험에 처한다고 하면 내가 마음 아파할까 봐 선대 로열 셰프 핑계를 대는 것쯤은.
“제가 지켜드릴 테니까 안심하세요, 스승님!”
쟝뤼크는 호언장담하는 날 보고 픽, 실소를 흘렸다.
* * *
“황후 폐하, 고정하셔요!”
황후궁의 시녀장은 새빨개진 얼굴로 술잔을 내던지는 황후의 붙잡고 소리쳤다.
“멍청한! 이 멍청한 작자!”
기어코 샤를리나 그 망할 계집애가 사달을 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가 직접 샤를리나와 부친을 대질한다는 건 황후의 몰락을 예고한 일과 진배없었다.
“처음부터 감이 좋지 않았어. 그래서 내 그리 그 계집을 들이지 말라 일렀거늘!”
“폐하, 옥체가 상하십니다. 진정하시고……!”
“진정하게 생겼어?! 족히 삼십 년이다. 삼십 년을 준비한 일이 물거품 될지도 모른단 말이야!”
서부의 대표로 황후가 되어 삼십 년 평생 미카엘의 황위 계승을 목표로 살았다. 그 긴 시간 공들인 일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지게 생겼는데 미치지 않고 어찌 배기겠는가!
황후가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자 시녀장은 미카엘 황자를 바라보았다.
“저하, 부디 폐하를.”
“두어라.”
“……예?”
그는 빙그레 웃으며 황후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저러다 자진이라도 하면 내가 황제 폐하의 연민이라도 사서 기회를 얻겠지.”
“저, 저하!”
시녀장은 망연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냉정한 사람인 건 알았지만, 모후에게 어찌 저런 말을…….’
황후도 오만상을 한 채로 미카엘 황자를 노려보았다.
“하면 어미가 죽어 주랴?”
“하실 수 있다면.”
“미카엘!”
그는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대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중얼거렸다.
“연민하지 말라. 기대려 하지 말라. 욕망하라.”
“……!”
“모후께서 그렇게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그는 턱을 괸 채로 눈을 사르르 접으며 달콤하게 이어 말했다.
“황비들을 밀어내기 위해 자식에게 독을 먹이신 분이 아닙니까.”
“…….”
“황제에게 갸륵하게 보여야 한다고 한겨울에 맨몸으로 아발론 앞에서 기도를 드리게 한 적도 있으셨죠. 그게 제가 여섯 살쯤이었나.”
황후는 굳은 얼굴로 아들을 돌아보았다.
“원망하는 것이냐?”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더불어―”
그는 희게 질린 모후를 아무렇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 키운 아들에게 혈육의 정을 기대하지 마시라는 당부와 함께.”
산뜻하게 몸을 일으킨 미카엘이 황후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방을 빠져나갔다. 황후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시녀장이 그녀를 부축하며 중얼거렸다.
“저…… 폐하, 저하께서 진심으로 하는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그저 속이 타시니…….”
“나를 버리겠다는 것이다.”
“……예?”
황후는 멍하니 미카엘이 나선 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나와 아버지를 버리겠다고 말하는 거야.”
“그럴 리가요. 모자 사이가 어떻게 갈라지겠어요. 무엇보다 폐하와 각하께선 저하의 가장 든든한 지지 기반이잖습니까.”
“미카엘에게 나와 부친 외에 선택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
시녀장은 허탈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황후 폐하께선 4황자 저하의 친모십니다. 저하께서 친모를 버리고 누굴 선택하시겠어요.”
“코트니 황비라면 두 팔 벌려 환영할 테지.”
코트니는 남부의 황비이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다. 가장 자질이 뛰어난 황자가 자식이 되겠노라 한다면 거절할 리 없다. 무엇보다 그 애가 코트니에게 간다면 서부 귀족과 확실한 연결 끈이 생길 터였다.
미카엘이 이 상황에서 카렌듈라 후작과 황후를 버린다면, 서부 또한 난파선에서 버티느니 미카엘을 따라 새로운 배에 올라타려 할 테니까.
“코, 코트니 황비는 성정이 천박하고 생각이 짧습니다. 황후 폐하와 비견할 수 있는 양모가 아니죠.”
“그렇다면 가브리엘라가 있지.”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니 조급해지셔서 해괴한 상상을 하시는 겁니다. 폐하, 그러지 마시고 쉬셔요.”
시녀장이 다독였으나 황후는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황후의 방 문가에 서 있던 미카엘이 입매를 비틀었다.
“광기가 돈다고 해서 멍청해진 건 아닌 모양이군.”
그래도 제 속으로 낳았다고 속내를 훤히 짚으시니.
부관이 “저하, 진심이십니까.” 하고 묻자 미카엘은 미소로 대답하곤 걸음을 옮겼다. 모자의 정이 있을 리가. 황후는 한평생 자신의 영달을 위해 산 사람이고, 저 또한 황후의 핏줄이었다. 모자간의 정을 운운하며 다 떨어진 연을 쥐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정 같은 게 생길 수 없는 관계였다.
사십 도에 가까운 고열로 사경을 헤맬 때도 황후는 황궁의를 부르지 않았다. 혹여라도 몸이 약한 게 드러나면 황태자처럼 불량품으로 여겨질 것이라면서.
군왕은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고, 어미에게도 마찬가지라며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준 적 없다. 공을 세우라고 어린 자식을 야만인의 소굴로 밀어 넣은 적도 있다. 원망하진 않으나, 의미 있지도 않은, 그저 협력 관계. 그뿐이었다.
‘그러니까 이상하지.’
친모에게도 그러할진대…….
복도 끝에서 마주친 세니아나가 그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무릎을 굽혔다.
“황가에 광영 있기를…….”
동그란 눈이 움찔거리며 주변을 훑었다. 늘 저렇게 자신만 보면 도망칠 구석을 찾으니 심술이 나는 것이다. 미카엘은 세니아나의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어딜 가는 길이지?”
그녀가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
“자중하는 게 좋을 텐데. 카렌듈라 후작을 처리하기 위해 기를 쓰는 것으로 보이거든.”
“……그래서 불쾌하신가요?”
“내가 불쾌하게 생각하면 하지 않으려고?”
그가 웃으며 묻자 세니아나는 눈을 데구르르 굴리고선 대답했다.
“아뇨.”
“정말로 간이 크네.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안 하실 거잖아요.”
“……어떻게 확신하지?”
세니아나가 픽 웃으며 말했다.
“저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요.”
“뭐?”
“거슬린다고 막 죽이는 그런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미카엘은 세니아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러니까 자꾸 건드리고 싶어지지.’
마법처럼 이 순간 간절히 바라는 말만 뱉어내니까. 미카엘이 팔짱을 끼며 장난스레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나로 해.”
“네?”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내가 황위에 올라도 문제가 없잖아?”
“…….”
“황태자를 위해 깜찍한 수를 쓰는 건 그만두고 나를 선택하라는 뜻이다.”
“……알고 계셨어요?”
“모르는 게 이상하지.”
세니아나는 그를 힐끔힐끔 올려다보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저는 저하가 나쁘지 않다고 했지, 좋은 사람이라곤 안 했는데…….”
그 말에 미카엘이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군.”
“그럼 저하는 재밌어하시고, 저는 걸으면 안 될까요? 기왕이면 저하를 지나치고 싶은데요.”
“내 궁으로 와라.”
“……?”
“잘해 줄게.”
세니아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보다가 “스카우트인가요?” 하고 진지하게 물었다.
“어떻게 보면.”
“제 요리가 마음에 드셨어요?”
그녀는 활짝 웃었고, 미카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쪽 눈을 찌푸렸다.
“……청혼이라고는 생각 못 하는 건가?”
“그건 안 돼요!”
“왜?”
“저는 남자친구가 있…… 그게 아니라, 가족들한테 허락을 받아야 해서요.”
“나 정도면 괜찮은 사윗감일 텐데?”
“네, 일단 말씀은 드려볼게요.”
“설레하거나 떨려 하는 감정은 없나? 청혼받은 사람의 표정이 아니잖아.”
“설레도 되는지 물어볼게요.”
“가족들 허락 없인 아무것도 못 하는 건가, 영애는.”
미카엘이 짓궂은 얼굴로 묻자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손녀가 효녀라서!”
나베리우스가 으르렁거리듯 소리치자 곁에서 함께 오던 아서 프렌시프도 굳은 얼굴로 “그렇습니다.” 하고 동조했다. 그 뒤로 싸늘하게 웃는 란슬롯 프렌시프와 사납게 인상을 찌푸린 가웨인 프렌시프도 얼핏 보였다. 그들은 얼른 세니아나를 둘러쌌다.
“프렌시프 공주님의 창문을 열려면 돌파해야 할 장애물이 많은 모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하.”
란슬롯이 대답했고,
“특히 개소리하는 쓰레기는 주둥이부터 찢습니다.”
가웨인이 덧붙였다. 미카엘이 “흐음.” 신음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프렌시프의 남자들은 혹시 팔불출이라는 단어를 아십니까.”
“자주 듣습니다.”
아서가 뻔뻔한 표정으로 동의하자 미카엘은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그러곤 세니아나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가웨인이 “뭐 하는―!” 하고 소리쳤을 때, 미카엘은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 맞췄다.
“……!”
가뜩이나 큰 세니아나의 눈이 더 커다래졌다. 미카엘은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영애는 설레지 않아도 돼.”
“네?”
“내가 영애 몫까지 가슴 떨려 할 테니.”
세니아나는 묘한 표정으로 “진짜 이상해.” 하고 중얼거렸다.
“맞아, 난 이상한 놈이야.”
나베리우스가 “그 손 놓으십시오!” 하고 길길이 날뛰자 미카엘은 손을 놓으며 빙그레 웃었다.
“또 보자. 가능하면 자주.”
쿡쿡 웃으며 가는 그의 뒤로 불쾌한 시선이 잔뜩 달라붙었다.
* * *
나는 자꾸만 내 손을 끌어가서 소매로 벅벅 비비는 가웨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등 다 까지겠어요.”
“다음부터 저 새끼가 개수작을 부리면 뺨을 날리라고.”
“황자인데요?”
“알 게 뭐야!”
난 ‘이 사람 좀 보래요’ 하는 눈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봤고, 할아버지는 아주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강이를 차도 돼. 그쯤은 내가 수습해 줄 테니.”
아무래도 이상한 사람은 미카엘만이 아닌 것 같다…….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걷다가 “아!” 하고 가족들을 돌아보았다.
“카렌듈라 후작은요?”
“곧 처리될 거다.”
“네.”
“이제부터 어떻게 하려는 거냐.”
“일단 첫 번째는 로열 셰프 자리를 교체하려고요. 아, 아빠가 황제 폐하께 언질해 주실래요?”
“아탈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가브리엘라가 널 위한다고 해서 아탈란을 완전히 놓은 건 아니다.”
“…….”
“그녀는 날 혐오하지. 미아의 죽음에 일조한 게 나라고 생각하니까.”
“알고 있어요.”
“이제 카렌듈라 후작이 사라질 테니, 그 자리를 메꾸기 위해 가브리엘라 황비가 전면에 나설 거다.”
“아빠.”
“그래.”
“아빠가 우려하시는 게 뭔지 알고 있어요. 좋든 싫든 가브리엘라 황비는 제 이모이고, 그녀가 완벽히 제 편이 되지 않는다면 전 이모와 맞서게 되겠지요.”
가족들은 날 지그시 바라봤고, 난 생긋 웃었다. 창밖으로 가브리엘라 황비의 궁 첨탑이 보였다. 나는 어떤 표정도 짓지 않은 얼굴로 그것을 보다가 읊조렸다.
“제게 생각이 있어요.”
얄팍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아주 잘 먹힐지도 모르는 계획이 말이다.
아빠와 할아버지는 내 대신 로열 셰프에 관한 말을 황제에게 전하러 갔고, 난 가브리엘라 황비의 궁을 찾았다. 외숙부인 경비대장 에단도 황비궁에 있어서 난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뭐야, 네가 왜…….”
그는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더니 내 손목을 끌어당겼다.
“어째서 여기에 온 거야. 우리 관계를 생각하면 더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는―”
“이렇게 보니까 선생님, 아니, 엄마랑 닮았네.”
“……뭐?”
“코랑 입이랑.”
“…….”
“황비님은 엄마랑 눈이 똑같은데.”
“무슨…….”
“가요. 저 황비님과 경비대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헛기침을 하고 날 비밀 통로로 이끌었다. 비밀 통로를 통해 황비의 정원으로 들어가자 차를 마시고 있던 황비가 날 발견하고 눈을 홉떴다. 잠시 당황해서 굳어 있던 그녀가 정원 밖에 도열한 시녀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가서 서고를 정리해라. 뒤따라가마.”
시녀들을 모두 물린 후, 황비가 에단을 노려봤다.
“왜 세니아나를 이곳에 데려온 거야!”
“내가 데려온 게 아니야. 직접 왔다고.”
“세니아나가 직접?”
그녀가 미간을 좁히며 날 쳐다봤다.
“……무슨 일이 있니?”
“왜요?”
“네가 날 찾아올 이유가 없잖아. 넌 날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텐데.”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우리는 아탈란의 중추에 있었지만 미아와 너를 지키지 못했으니까.”
“사실은 불편하긴 해요. 저와 엄마를 지켜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처음 만난 이모와 외삼촌이니까요. 또 우리 아빠랑 할아버지, 오빠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고.”
황비는 찻잔을 코스터 위에 올려두며 날 쳐다봤다.
“알면서 왜 온 거니.”
난 묻지 않고 황비의 옆에 앉으며 에단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앉으세요.”
내게 끌려 의자에 앉은 그들이 나를 쳐다봤다. 에단이 말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저를 좀 도와주셔야겠어요.”
“……뭐?”
“아탈란보다 저를 선택하세요.”
두 사람의 얼굴이 금세 굳어져서 난 히히 웃으며 두 사람에게 팔짱을 끼었다.
“외삼촌.”
“외삼……! 뭐, 뭐야. 왜 갑자기 친한 척. 너는 네 친가를 더 좋아하잖아.”
“외삼촌이랑 이모도 좋아해요.”
난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저 돼지갈비 엄청 잘하는데 드셔보실래요?”
이 사람들을 꼬셔서 아탈란의 등 뒤에 칼을 꽂는 게 내 두 번째 계획이었다. 가브리엘라와 에단은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두 사람 모두 내 손에서 팔을 빼냈다.
“일단 돌아가렴.”
가브리엘라가 말하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의 궁엔 아탈란의 사제들이 자주 드나들어.”
“그래. 오늘 같은 위험한 일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두 사람이 같이 있으니까 방어가 센걸.
‘역시 한 사람씩 공략하는 게 좋을지도.’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오오―! 대장님, 이건 웬 도시락입니까?!”
에단이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자 그의 자리엔 라탄으로 된 도시락 가방이 놓여 있었다.
‘뭐지?’
그가 미간을 좁히고 가방 안에서 음식을 꺼냈다. 두툼한 바게트 사이에 검은 양념에 졸인 고기와 상추, 양파 등이 껴 있는 샌드위치였다. 그 옆엔 신선한 우유와 포장지에 쌓인 몇 개의 캐러멜이 있었다.
“누굽니까, 예? 로웨나 궁의 시녀죠?”
“로웨나 궁의 시녀?!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야!”
“아, 일전에 보니까 대장님한테 슬쩍 커피와 스콘을 가져다주더라고!”
“시녀면 귀족……?! 으아아, 왜 대장님 같은 늙다리에게!”
에단이 “늙다리 말고 젊은 내가 있는데, 이 더러운 외모지상주의 세계―!” 하며 울부짖는 경비병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우유병 뒤에 붙어 있는 메모를 본 그가 큼, 헛기침했다.
[맛있게 드세요, 삼촌.]
세니아나의 속셈이 뭔지 알고 있다. 가브리엘라와 자신을 이용해 아탈란에 한 방 먹이려는 거겠지.
‘이렇게 쉽게 넘어가 줄까 봐?’
그는 코웃음 치며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다음 날. 또 다음 날. 그다음 날. 세니아나는 매일 같이 도시락과 메모를 보내왔다. 일주일이 지나자 메모보다는 편지에 가까운 길이였다.
[어제는 일이 일찍 끝나서 저택에서 사과잼을 만들었어요. 엄마에게 배운 레시피 대로 만들어서 비슷한 맛이 나요. 그래서 오늘은 도시락에 사과잼을 함께 넣을 수 있었어요. 디저트로 넣은 쿠키와 함께 드시면 좋겠어요.
삼촌, 오늘 아침에 재밌는 일이 있었어요. 아빠와 함께 출근하는데 황궁 가는 길에 마부가 배탈이 났지 뭐예요? 대로 말을 몰게 하면 위험할 것 같아서 아빠가 말을 몰았답니다. 저는 아빠가 뭐든지 다 잘하는 줄 알았는데, 엄청 무서웠어요~!
탈 때는 무서웠는데 내려서 보니까 아빠도 제가 다칠까 봐 되게 무서웠나 봐요. 표정이 재밌었답니다.]
편지엔 제 일상을 적거나 이전 세계에서 미아와 있던 일을 적었다. 먹은 도시락을 정리해서 집무실 한편에 두자 경비병들이 볼멘소리를 했다.
“이번에도 답장 한 줄 안 쓰십니까?”
“우와, 무정해!”
“우리 딸은 저런 남자 만나면 안 되는데 말이야.”
에단은 쯧, 혀를 차며 그들을 흘겼다. 경비병들은 얻어맞을까 봐 달아났고, 홀로 남은 그는 잠시 멈칫했다.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조카인데 좀…… 무정한가.’
그는 큼, 헛기침을 하더니 종이 귀퉁이를 찢어서 무언가 휘갈겨 적었다.
[나는 마차도 잘 몰아.]
그러고 도시락에 사탕 몇 개와 함께 넣어 두었다. 집무실을 나서고 경비병들의 훈련을 지켜보던 에단은 “어후!” 하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빌어먹을!’
사탕은 왜 남겼단 말인가! 그는 훈련을 보다 말고 다시 집무실로 돌아갔다.
“윽, 벌써 가져갔잖아.”
빠르기도 하군. 그가 한숨을 내쉬다가 책상에서 웬 쪽지를 발견했다.
[삼촌,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쪽지 아래엔 으쌰! 하고 주먹을 쥔 소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제기랄!”
쪽지를 쥐고 부들부들 떨던 에단은 가브리엘라에게 달려갔다. 정원에서 아탈란이 보내온 서류를 확인하던 가브리엘라가 미간을 좁히고 그를 쳐다봤다.
“예고 없이 들이닥치지 말라고 몇 번을 일렀니.”
“큰일이야.”
“무슨 일인데?”
가브리엘라가 인상을 찌푸리자 에단이 신음하며 말했다.
“귀엽다고!”
“뭐?”
“왈가닥의 딸이 이렇게 귀엽다니, 제기랄!”
뻔히 수작인 걸 아는데도 넘어가게 생겼다. 에단이 분하다는 듯 테이블을 내려치자 가브리엘라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너도 참.”
“귀여워서 흐물흐물 녹게 생겼다고! 누님이 그 녀석이 보낸 쪽지를 봤어야 해! 도시락은 또 얼마나 잘 만드는지 입에서 살살 녹는다고.”
가브리엘라는 서류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혀도 녹고 너도 녹으면 세니아나의 생각대로 일이 흐르겠구나.”
“…….”
“멍청한 짓 하지 마.”
가브리엘라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에단은 칫, 혀를 찼다.
에단이 돌아가고 가브리엘라는 어휴, 한숨을 내쉬었다.
‘세니아나가 생각보다 노련한걸.’
일주일도 안 되어 제 외삼촌을 정신 못 차리게 만들었다. 자신보다 에단 쪽이 정 많고, 구슬리기 쉽다는 걸 아는 것처럼 공략할 상대를 정했다.
밤이 깊어지자 시녀가 다가왔다.
“황비님, 잠자리를 정리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오늘은 아발론에서 주무실 듯합니다.”
“그래, 다들 수고 많았어. 돌아가서 편히 쉬렴.”
시녀들이 허리를 굽히자 가브리엘라는 침실로 돌아갔다. 씻은 후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로 들어갔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밤은 싫다. 특히 홀로 보내는 밤은.
[침대가 좁단 말야. 넌 바닥에서 자, 에단!]
[으아아앙! 큰누나, 작은누나 좀 보래요! 나 괴롭혀!]
[너희들 정말. 계속 싸울 거면 둘 다 내려가서 자.]
[아하하, 너희 남매는 항상 보기 좋네.]
사랑하는 사람들과 옹기종기 모여 잠들던 기억이 자신을 괴롭혔다. 제 손에 죽어간 사람들의 비명이 온몸을 옥죄어 오고, 그 속에서 미아와 세실의 목소리를 느낀다. 가브리엘라는 한참을 뒤척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자긴 틀렸군.’
침대 밖으로 나서려던 그녀가 인기척을 느끼고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베개를 끌어안은 세니아나가 “이모…….” 하며 웅얼거렸다.
“너……!”
“저 오늘 당직인데, 선배들이 그냥 가서 자래요.”
“그럼 궁인 숙소로 갔어야지.”
“침대가 딱딱하고, 방은 어둡고, 좁고, 더럽고, 창문도 없고…….”
“그렇다고 여길 와? 사람들이 보면―!”
세니아나는 헤헤 웃고 침대로 쏙 들어왔다.
“세니아나!”
“비밀 통로로 왔어요. 갈림길이 있길래 삼촌이랑 갔던 길 말고 오른쪽으로 도니까 침실이 나오지 뭐예요? 아무에게도 안 들켰어요!”
가브리엘라의 표정은 굳었지만, 세니아나는 아무렇지 않게 양손을 쑥 내밀었다.
“……손이 왜 이래?”
“오늘 굴을 얼마나 많이 깠는지 몰라요. 또 카렌듈라 후작 때문에 귀족들이 연일 아발론에 와서 음식도 엄청 많이 해야 하고…….”
“…….”
“손이 퉁퉁 부었어요. 가엽지요?”
가브리엘라는 조카를 빤히 보다가 협탁에서 약통을 꺼냈다.
“치료 끝나면 돌아가.”
“밖에 엄청 추운데!”
“이 녀석.”
“감기 걸렸나 봐……. 콜록콜록.”
가브리엘라가 약을 발라 주자마자 세니아나는 딱 엉겨 붙었다.
“이모한테서 엄마 향 난다…….”
“……자매니까.”
“따뜻하고 다정한 향.”
가브리엘라는 꼬물꼬물 품에 안겨 오는 세니아나를 보다가 졌다는 듯 누웠다.
“우리 엄마는 잠이 많았는데 이모도 그래요?”
“미아만큼은 아니지. 그 애는 번번이 늦잠을 자서 수련 어머니가 늘 데리러 가셨지.”
“수련 어머니요?”
“어린 신관들을 보살피는 신관을 말한단다.”
“그럼 친부모님은요?”
“……어머니는 풍토병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목을 매셨지.”
“왜요?”
“포악한 영주 밑에서 살았거든. 매해 기근이 심해 풀뿌리를 캐 먹으며 겨우 연명했는데 세금은 나날이 많아졌으니까. 버티지 못하셨어.”
“…….”
“그래서 난 살기 위해 동생들을 데리고 아탈란 신전으로 갔지.”
그때 자신의 나이는 일곱이었다. 미아는 다섯, 에단은 갓난쟁이. 어린아이들에겐 선택지가 몇 없었다. 그대로 굶어 죽길 기다리거나 매음굴에 가거나 동생들을 오컬트에 미친 귀족에게 제물로 팔거나. 아탈란에 가는 것만이 세 사람 모두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미아는 나를 원망하겠지.”
“스스로를 원망하셨어요, 이모처럼.”
“…….”
“자신에게 힘이 없어서 소중한 사람에게 족쇄를 채웠다고 생각하셨으니까요.”
“바보 같긴.”
“이모도 그러시면서.”
세니아나가 히히 웃자 가브리엘라는 무심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멈칫했다.
“쓰다듬어 주세요!”
“……너도 참.”
“이모.”
“그래.”
“행복해질 수 있어요.”
세니아나의 머리를 유리 인형 만지듯 아주아주 조심스럽게 쓰다듬던 가브리엘라가 멈칫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행복해질 거라고 믿으면서 살아갈 수 있어요.”
“……나 같은 죄인에겐 해당하지 않은 얘기지. 누구도 내가 살아 있길 바라지 않을 거야.”
“제가 바라는걸요.”
“…….”
세니아나는 가브리엘라를 꽉 끌어안고 말했다.
“이모, 그, 저번에 말이에요.”
“저번?”
“이모가 우리 이모인 걸 알고 나서 막 인상 쓰고 그랬던 거…….”
“그래.”
“죄송해요.”
“넌 충분히 그럴 만해.”
“그래도…….”
세니아나가 가브리엘라의 품에 얼굴을 비비며 웅얼거렸다.
“저 이모 좋아해요.”
“그래.”
“정말로.”
“그래…….”
에단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애는 바라는 말만 해 준다. 그래서 이 애의 곁에서라면 평범한 사람처럼 평범한 행복을 거머쥘 수 있지 않을까, 헛된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이다.
“네 어머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어느새 제 품에서 잠든 세니아나를 보며 가브리엘라는 픽 웃었다. 보는 것도 아까워서, 곁에 두면 흐물흐물 녹아들 것 같아서 아쉬운 아이. 미아는 그런 널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가브리엘라가 눈을 꽉 감은 채 세니아나를 끌어안았다.
‘미아.’
자꾸만 욕심이 나. 이 아이가 꿈을 이루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아이를 낳고,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고 싶어져. 좋아하는 남자라고 데려오는 녀석을 날카로운 눈으로 가늠하고. 내 조카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놈인지 몇 번이나 고심하고. 조카 손주를 위해 옷을 짓고.
그렇게 오래오래 이 아이의 미래를 지켜보고 싶어져. 나에겐 시간이 없는 데도.
* * *
나는 한참 달게 자다가 몸을 흔드는 손길에 부스스 눈을 떴다.
“끄으응…….”
“일어나야지. 사람들이 올 시간이다. 어서 나가렴.”
“졸려…….”
“어휴, 눈곱이 이렇게 잔뜩 껴서.”
가브리엘라 황비는 손수건에 물을 묻혀 눈곱을 떼 주고, 헝클어진 머리를 바로 묶어 주었다.
“추우니까 조심하고, 응?”
“네…….”
“그리고 다음 당직 때…….”
그녀는 흠, 헛기침을 하다가 슬쩍 나를 쳐다봤다.
“또 와도 돼.”
“하지만 이모는 잘 못 주무신 것 같은데.”
“와도 돼.”
“숙소에서 자도 돼요.”
“와.”
“……네.”
가브리엘라 황비가 내게 숄을 걸쳐 주고 통로로 데려다주었다. 밖으로 나오자 내게서 통로의 위치를 들었던 할아버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새벽부터 입궁하셨어요?”
“아주 잘 잤나 보구나!”
“네?”
“이 할애비는 네가 잠은 잘 자나, 어? 가브리엘라에게 쫓겨나지는 않았나, 어? 그런 고민으로 밤을 하얗게 새웠는데!”
“…….”
“그래~! 외가 가족을 찾았으니 이제 친가 가족보다 더 정이 가겠군! 보통 그렇잖아.”
“뭐…….”
나는 “그런가?” 하고 고민했고, 할아버지는 크게 충격받은 얼굴로 “뭐, 뭣?!” 소리쳤다.
“정말이냐? 응? 아니지! 할애비를 놀린 게지!”
“저 졸려요……. 얼른 퇴궁할래요…….”
“속 시원히 말해 보래도! 할애비를 놀린 게 맞지?!”
할아버지가 뭐라고 막 소리쳤는데 나는 너무 졸려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모한테 엄마 향이 나서 엄청 푹 잤다.’
다음에 또 오랬으니까 가야― 그렇게 생각하다가 나는 멈칫했다.
“아.”
“역시 할애비를 놀린 게지?”
“성공했다.”
“……뭐?”
“이모요. 이제 저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제 슬슬 아탈란의 얘기를 꺼내도 될까. 아닌가, 좀 더 확실히 꼬셔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하는데 멀리서 프렌시프의 사무관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어르신!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
“카렌듈라 후작이……!”
그는 새파래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고, 할아버지는 벌컥 소리쳤다.
“그 늙은이가 어쨌단 말이냐!”
“자결했습니다!”
“……뭐?”
나와 할아버지는 딱딱하게 굳어져 말을 잃었다. 할아버지는 싸늘한 표정으로 아발론을 돌아보았다.
“자결이 아닐 것이다.”
“그럼요?”
“그 늙은이를 평생 보아 온 내가 모르겠느냐. 궁지에 몰려도 포기할 녀석이 아니야. 이건 자결이 아니라…… 살해당한 거다.”
“아탈란일까요.”
“…….”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미카엘 황자일 수도 있겠군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사무관에게 물었다.
“서신은 남기지 않았느냐.”
“남겼습니다.”
그가 대필해 온 서신을 넘겼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했다. 샤를리나에게 성력이 있고, 포털을 열 수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불운하게도 힘은 오래도록 이어지지 못했다. 포털을 열 수 없게 되고도 사실을 숨긴 건 내 죄이나, 샤를리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내 뜻을 따랐을 뿐이니 선처를 바란다.
황제의 믿음을 배반한 것이 수치스러워 떠나지만, 한평생 제국의 안녕을 빈 공로를 생각해서 가문만은 이어지게 해달라. 그리고 가문의 모든 것은…….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미카엘 로젠카로튼에게 상속한다?!”
“……이걸로 확실하군. 미카엘 황자가 제 조부를 죽인 것이다.”
이제 판이 크게 흔들리게 생겼다.
“우리에게 좋은 일일까요.”
“두고 봐야 알 일이겠지.”
“일단 폐하께서는 곤란해지시겠군요. 황제가 몰아붙여서 카렌듈라 후작이 자결한 것이라 떠들 테니.”
“이 또한 미카엘에게 나쁜 일은 아닐 테지.”
그때 란슬롯이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조부님, 어서 아발론으로 가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이냐.”
“미카엘 로젠카로튼이 황제에게 정식으로 세니아나와의 결혼을 청했습니다.”
“뭐라고?!”
할아버지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나는 우두커니 서서 고민했다.
‘이런 상황에 청혼?’
외조부가 자결했다. 본인이 죽였지만 어쨌거나 사람들 눈엔 그렇게 보일 거라는 뜻이다. 그런 와중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외조부의 원수 같은 ‘나베리우스 프렌시프의 손녀’에게 청혼을 한다는 건…….
“무서운 사람이야.”
내가 중얼거리자 할아버지가 날 쳐다봤다.
“이거 아무래도 우리가 카렌듈라 후작을 살해한 것으로 몰아가려는 것 같죠?”
란슬롯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와 미카엘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 가령…….”
“우리가 카렌듈라 후작을 살해하고 가문을 상속시켜 줄 테니 세니아나 프렌시프와 결혼해라, 같은.”
“그래.”
“아니면 미카엘이 외조부를 죽인 범인을 알아차리고 자신과 모후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팔려가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할아버지는 입매를 비틀었다.
“오랜 세월 ‘프렌시프는 악당, 카렌듈라는 영웅’이라는 선입견이 있었으니까 동정을 제대로 살 수 있겠군.”
“서부 세력을 모으기에도 좋은 계획이지요. 실수를 했어도 카렌듈라 후작은 서부의 거두. 거두를 원수의 손에 잃은 것이니, 미카엘은 새로운 구심점이 될 수 있을 거예요.”
곰곰이 생각하던 아빠가 입을 열었다.
“황제가 미카엘과의 결혼을 허락할 리 없습니다.”
“그래.”
“황제는 동, 서, 남, 북부를 황위 싸움에 참전시켜 균형을 이루고, 황권을 공고히 했으니 서부의 구심점이 된 미카엘과 동부의 가장 큰 세력인 우리를 연합시키지 않을 테죠.”
“이번 청혼은 그저 연출에 불과하다?”
“황좌에 가장 가까운 황자가 일부러 동정을 사려는 연출을 했으니 남부에서 쉽게 접근할 겁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카렌듈라 후작을 무너뜨리니 더 큰 장애물이 등장한 것 같다. 무엇보다 카렌듈라 후작의 유서에 ‘샤를리나의 선처’를 언급한 게 걸렸다.
‘미카엘이 아탈란과 협력하고 있다는 거겠지?’
나는 아빠와 할아버지, 그리고 란슬롯을 아발론에 보낸 다음 황궁 경비대 본초로 향했다. 나를 본 에단이 움찔하더니 모른 척 경비대원들을 물린 후 자리를 만들었다.
“도시락은…… 크흠, 이미 받았는데.”
“네!”
“……뭐, 오늘도 나쁘지 않은 맛이더군.”
“여쭤볼 게 있어요, 외삼촌.”
“……뭔데?”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아탈란과 미카엘 황자가 관련이 있나요?”
“…….”
“네?”
그는 잠깐 침묵했지만, 이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용건이냐?”
“그런데요?”
“역시 이용해 먹으려고 날 꼬드긴 게로군.”
“서운한 말씀!”
“하면!”
“외삼촌과 친해지고 싶었는데, 우연히 도움받을 일이 생겼다! 정도지요.”
“말이나 못 하면.”
그는 흥, 콧방귀를 뀌더니 나를 힐끔 쳐다봤다.
“미카엘이 아탈란 신전에 온 것을 본 적이 있긴 하지.”
“언제요?”
“삼 년 전쯤인가. 도미니크가 공을 세웠을 때였다.”
그때부터 아탈란과 끈이 있던 걸까.
“하기는 2월인 고위급 사제의 외손주이니까…….”
“카렌듈라 후작과 관련은 없는 것 같던데.”
“네?”
“미카엘 황자는 대사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카렌듈라 후작이 신전에 왔다는 얘기를 듣고, 대사제가 은밀히 황자를 내보냈거든.”
이럴 수가.
‘처음부터 제 외조부를 무너뜨릴 순간만 노리고 있던 거야!’
황후는 아마 모르고 있었겠지? 알았더라면 지금껏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까. 둘 사이를 저울질해서 뭐라도 얻어 냈을 인사다.
에단은 “무슨 일 있나?” 하고 날 보았고, 난 멍하니 생각을 정리하다가 그를 쳐다봤다.
“이거 어쩌면…….”
“뭐?”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서 난 히죽 웃어 주었다.
“손 안 대고 코 풀 수도 있겠어요.”
“……?”
미카엘과 황후가 잘만 해 주면 로열 셰프도 교체하고, 황태자를 황위에 올릴 수도 있겠다!
* * *
예상대로 황제는 미카엘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궁인들은 미카엘의 면이 상했다고 수군덕거렸지만, 그의 궁엔 코트니 황비와 그녀의 숙부인 남부의 거두가 들어갔다.
‘모두 미카엘의 계획대로 이뤄졌네.’
그렇다면 난…….
“스승님, 스승님.”
“왜, 뭐, 왜!”
그는 엄청 날카로웠다.
“아직 서류가 다 안 끝나셨어요?”
“빌어먹을, 뭔 놈의 일이 이렇게 많은 거야!”
카렌듈라의 일로 고프레도는 황제의 머릿속에서 잊혔고, 구금이 길어졌다. 그래서 쟝뤼크가 로열 셰프의 일을 대신하고 있는데, 요리는 몰라도 서류 보기는 젬병이어서 그는 아주아주 예민한 상태였다.
“아니, 대체 이건 뭔데 이렇게까지 많이 수입하는 거야? 제대로 된 성분표기도 없이……! 일을 헛했군, 헛했어!”
“열심히 하세요, 스승님. 지금 잘해 둬야 나중에 로열 셰프가 되기 유리하단 말이에요.”
그래서 일부러 휴가까지 반납시키고 로열 셰프 집무실에 앉혀 둔 게 아닌가.
“……넌 네 할아버지를 꼭 닮았어.”
“네?”
“상대가 없는 틈을 타서 비열하게 영역을 넓히는 건 네 할아버지 주특기가 아니냐.”
그때였다.
“호오, 손녀의 선생은 날 아주 잘 알고 있군.”
아발론에서 황제와 이야기를 마친 할아버지가 음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어, 어, 어, 어르, 어르신.”
“날 잘 아는 상대와의 대화는 즐겁지. 좋은 술이 들어왔으니 일이 끝나거든 냉큼 들어와라.”
“저, 저, 저는 이제 제 숙소로 들어가는 게……!”
“무슨! 손녀의 선생을 위험한 곳에 둘 순 없지. 마차를 보낼 테니 아홉 시 이전에 들어오게.”
“어, 어르, 어르― 자, 자, 잠시만―!”
쟝뤼크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 떠나는 할아버지를 황망한 눈으로 쳐다봤다.
“바쁘신 와중에 죄송하지만, 스승님.”
“……뭐.”
“잠깐 황후궁에 다녀와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라…….”
그는 힘없이 중얼거렸고 나는 냉큼 황후궁으로 향했다. 황후궁은 완전히 초상집이었다.
‘초상이 난 게 맞긴 하지만…….’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으니 황후가 제정신일 리 만무하다. 황후의 침실을 나오던 시녀장이 나를 발견하고 표정을 굳혔다.
“무슨 일이십니까.”
“황후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폐하께선 편찮으시니 나중에 다시…….”
“올슨 시녀장님은 이대로 괜찮으신가요?”
“……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미카엘 황자님 궁에 코트니 황비가 제 숙부와 함께 찾아갔어요. 이제 황후궁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
“시녀장님도 살길을 찾으셔야지요. 황후 폐하의 곁에서 오래도록 안위를 지키신다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
“아, 이건 그냥 생각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제가 로웨나 황비님과 막역한 사이잖아요? 가브리엘라 황비님도 귀여워해 주시고.”
자리를 마련해 줄 수도 있다는 건가? 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던 시녀장은 야살 맞게 웃었다.
“폐하께서도 영애를 좋아하시니 위로가 되겠지요. 잠시만 기다리셔요. 여쭙고 오겠습니다.”
“네.”
시녀장이 뭐라고 했는지 황후는 금세 나를 들였다.
“나를 조롱하러 왔느냐.”
항상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리지 않도록 잘 정돈해 올린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잠옷 차림에다 퀭한 눈, 쏙 들어간 뺨. 황후는 생각보다 더 궁지에 몰린 느낌이었다.
“그럴 리가요.”
“하면!”
“저는 그저 폐하가 걱정되어서…….”
“걱정?!”
하! 실소를 터뜨린 황후는 비척비척 걸어 소파에 무너지듯 앉았다.
“네깟 것도 나를 무시하는구나.”
“…….”
“본궁은 태어날 때부터 황후가, 황태후가 되기 위해 살았어.”
“…….”
“황족으로 태어나지 못해 황제가 될 순 없었으나 이 배로 낳은 황제를 손에 넣어 제국을 주무를 운명이었다.”
황후가 자조 섞인 눈빛으로 “나는 그리 살았어.”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 욕망하고, 또 욕망할 것이다. 내 손에 금좌를 틀어쥘 때까지! 내 아들이 나를 버렸다고 해서―”
“그리하시면 됩니다.”
“뭐?”
나는 황후 앞에 쪼그려 앉아 거칠어진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폐하.”
“……미카엘 없이 나 홀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게냐?”
“아발론이 가장 견제하는 카렌듈라의 딸이었지만 황자를 낳아 지금까지 세력을 이루셨잖아요. 어떤 대장부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자리를 되찾는 것도 하실 수 있겠지요.”
“……미카엘은 나를 버렸고, 황태자는 로웨나의 손에 있어. 그런데 황태후가 될 수 있다고?”
“모후가 없는 황자가 있지 않습니까.”
황후는 멍하니 나를 쳐다보더니 홀린 듯 중얼거렸다.
“도미니크…….”
“복수하고 싶지 않으세요?”
나는 하고 싶은데. 우리 엄마를 죽이고, 내 인생을 뺏어가 놓고, 또다시 내 가족들을 위협하는 아탈란에게. 그 아탈란의 개들에게 철퇴를 내려 주고 싶다.
“……본궁이 어떻게?”
“현재 황궁에 심어 둔 세력은 미카엘 황자가 모두 흡수했겠지요.”
“그래. 그러니 네 말대로 되기는 어려운 일이지.”
“하지만 미카엘 황자 측 세력은 모두 황후 폐하의 도움으로 자리를 얻은 게 아닙니까? 그들의 약점도 폐하께서 제일 잘 알고 계실 테고요.”
“……그들의 약점을 잡아 다시 끌어들여라? 하지만 내겐 이제 뒷배가 없어. 뒷배 없는 나를 순순히 따르려 하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교체하세요. 황후 폐하의 사람으로.”
“…….”
“가장 높은 직위를 가진 로열 셰프 고프레도부터 교체하시면 다들 두려움에 떨며 황후 폐하의 앞에 무릎을 꿇을 테지요.”
황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았다.
“본궁이 그리하지 않는다면? 지금 바로 미카엘에게 가서 네가 모자 사이를 이간질했노라 말한다면 어찌할 게야?”
“그러지 않으실 겁니다.”
“……어째서?”
나는 생긋 웃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제 말을 듣고 황후 폐하의 눈이 이전처럼 반짝이고 있으니까요.”
목표가 생긴 사람은 생기가 돌지. 이미 내 말에 혹했다는 거잖아?
황후는 픽 실소를 흘렸다.
“수작인 줄 알면서도 당하게 되니, 과연 총명한 아이다.”
나는 고개를 숙였고, 황후는 바로 설렁줄을 잡아당겨 시녀장을 호출했다.
“아발론으로 갈 채비를 할 것이다. 미용사들을 들이고, 황궁의 기록관들을 데려와라.”
시녀장은 난데없이 바뀐 황후의 태도에 의아한 듯했지만, 곧 그녀의 명을 따랐다.
그리고 그날 오후, 황후는 아발론의 대전을 찾아 무릎을 꿇었다.
“폐하! 저를 폐하여 주십시오.”
황제의 곁에 선 황비들은 의아한 기색이었다. 로웨나 황비는 헛웃음을 터뜨렸고, 가브리엘라 황비는 침착한 표정으로 황후를 주시했으며, 코트니 황비는 “또 무슨 수작이야.” 하며 빈정거렸다. 황제가 골치 아프다는 듯 황후를 쳐다보았다.
“부친의 일로 짐에게 감정이 상했을 수 있겠지. 하지만 황후, 그대는 제국의 국모요. 사사로운 감정으로 황후위를 거론치 마시오.”
“그것이 아닙니다, 폐하.”
“아니다?”
“폐하,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황후가 가련한 얼굴로 고개를 수그리자 황제는 미간을 좁혔다.
“죄라니.”
“지금껏 부친의 명예를 위해 거론할 수 없었지요.”
“…….”
“하지만 부친이 돌아가시고 나니 이것이 천벌이 아닐까 싶어 도무지…….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소상히 말해 보시오.”
황후가 숙였던 고개를 들며 눈물을 흘렸다.
“로열 셰프 경합에 불의가 있었나이다.”
“불의?”
“고프레도는 로열 셰프가 되기 위해 카렌듈라 후작과 공모하였고, 카렌듈라 후작은 그의 청을 받아들여 심사 당일 쟝뤼크의 요리에 손을 댔습니다!”
아발론이 크게 술렁였다.
경합에서 고프레도가 어떤 수작을 부렸으리라는 건 예상한 바였다. 우리 스승님이 질 리가 없거든. 만약 패배했다고 해도, 정당한 대결이었다면 인정했을 거다.
“뿐만 아니라 당시엔 허가받지 않은 조미료를 넣어 폐하를 속였으니 중죄, 일국의 국모가 그 일을 알고도 모른 체하였으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기가 막히는군.”
황제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그는 즉시 시종장에게 명해 고프레도를 끌고 왔다. 소식을 들은 미카엘과 귀족들도 재빠르게 아발론을 찾았다. 고프레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억울합니다, 폐하! 감히 폐하께서 주관하신 경합에서 그런 일을 벌였다면 천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지요!”
나는 고프레도가 소리치는 동안 귀족들의 낯빛을 살폈다.
‘얼굴이 거무죽죽한 귀족들이 꽤 보이는걸.’
아탈란의 사람들이 분명하다. 로열 키친에서 은밀히 계획하던 일이 물거품이 되게 생겼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크으―!’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과연 황후. 이빨이 빠졌어도 맹수다. 일을 이렇게까지 크게 만들어 줄 줄이야!
‘잘한다, 잘한다!’
내가 신이 나 있자 함께 불려온 쟝뤼크가 어리둥절해져서 속삭였다.
“뭔 짓을 한 게냐, 너.”
“잘했지요?”
“내가 아주 대단한 제자를 뒀구만. 황후까지 체스 말로 이용해 먹다니.”
나는 히히 웃었고, 쟝뤼크는 픽 실소를 흘렸다. 그도 아닌 척하지만 내심 속이 시원한 모양이었다.
‘그야 억울하셨겠지. 실력으로 진 게 아니니까.’
황후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증거가 있습니다!”
“즈, 증거라니! 황후 폐하, 어찌 그런 거짓을 고하십니까! 제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황후가 기록관을 들이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경합 당일, 카렌듈라 후작은 요리사들을 격려한다는 핑계로 주방에서 불러냈습니다. 그 사이에, 현재 아발론의 수셰프로 일하는 자가 냉장창고에 들어가 전력석을 빼냈지요.”
그녀는 기록관에게서 받은 냉장창고 출입일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가 들어간 후, 냉장창고가 망가졌고 쟝뤼크는 요리를 망쳤습니다. 이후 전력석을 빼낸 요리사는 공적 없이 아발론으로 차출되어 수셰프 자리에 올랐습니다.”
“……기묘한 일이로군. 그렇지 않은가, 고프레도.”
황제가 싸늘하게 중얼거리자 함께 끌려온 수셰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른침을 삼켰다.
* * *
대사제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이야. 황후가 고프레도를 발고하다니!”
“모르겠습니다. 대체 무슨 수작인지……!”
“그래서 고프레도는 어찌 되었어!”
신관은 새하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게…… 황제가…….”
“어서 말하지 못해! 숨넘어가는 꼴을 봐야겠느냐!”
“고프레도와 쟝뤼크의 재경합을 명하였습니다!”
쿵! 대사제가 이마를 쥐며 비틀거렸다.
그 시각, 황궁.
“재경합이라.”
“황후가 내민 증거도 어쨌든 의혹에 가깝잖아요. 보다 명확한 근거가 없으면 아예 몰아낼 수는 없겠지요.”
그래도 앞뒤가 맞는 얘기라 재경합까지 오게 된 거지.
할아버지는 네 목적이 그것이었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내가 황후를 끌어들인 건 고프레도를 위협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재경합까지 하게 해 줄 줄이야.’
나는 일의 진행이 빨라진 게 기꺼워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카렌듈라 후작의 장례가 끝나고 바로 경합이 시작될 테니까 준비를 해야겠는걸.’
카렌듈라 후작은 국구(國舅: 왕의 장인)라 나라 단위로 장례가 진행된다. 하지만 죄인의 신분으로 죽었기 때문에 절차가 축소되어서 아마 경합의 날짜는 일주일 내로 진행될 터였다.
“스승님, 이제 준비를 해야겠지요?”
“그래. 보조 셰프로 널 지목했으니 너도 당분간 아발론의 일에선 제외될 거다.”
“고프레도는 보조로 누굴 들일까요?”
“일단 수셰프는 아니겠지. 샤를리나도.”
샤를리나는 오늘 판결이 났다. 카렌듈라 후작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죽은 덕에 그녀는 별다른 일 없이 풀려났다. 다만 그녀 또한 황제를 속인 죄인이니, 로열 키친의 셰프직을 잃고 퇴직금 없이 퇴직 처리되었다.
“그 애는 어차피 당분간 식칼을 못 들 거예요. 카렌듈라 후작 생전에 함께 받은 고신이 엄청났다던데요…….”
“그래, 스푼도 제대로 쥐지 못한다지. 어쨌든, 우리는 우리 요리에 집중하면 돼. 당분간 아발론의 제3조리장을 쓰기로 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즉시 경합 준비에 들어갔다. 나와 쟝뤼크는 이틀 밤을 꼴딱 새우며 여러 요리를 연습했다.
‘스승님은 정말이지…….’
놀라운 요리사였다. 그의 별칭이 왜 불세출의 천재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아카데미에서 맛본 요리는 그의 역량의 8할도, 아니, 6할도 드러내지 않은 것만 같았다.
“혀가 녹을 것 같아요……. 우우, 맛있어! 이건 연어 뱃살인가요?”
“머릿살이다.”
“머릿살은 퍽퍽할 줄 알았는데 적당히 기름져서 뱃살보다 맛있는걸요.”
“어떻게 조리하느냐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로 나뉘는 게 생선이지. 그래서 조리하는 재미가 있는 것이고.”
나는 레시피 수첩에 메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 드레싱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평범하게 맛보던 건 아닌 것 같고, 간장 베이스이긴 한 것 같은데…….”
“이건 굴 소스와 유자를―”
얘기하던 쟝뤼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보았다.
“경합을 도우려는 게 아니라 레시피를 훔쳐 가려고 곁에 있는 게로구만.”
나는 히히 웃으며 “겸사겸사요.” 하고 말했다. 머리 아픈 사건이 지나가고 온전히 요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자 나는 엄청나게 즐거워졌다.
‘그래서 그런가. 덜 피곤하고.’
왜인지 모르게 입관 후로 난 항상 피곤했다. 황족, 귀족들 요리를 한다고 긴장해서 그런 걸까 싶었는데 아카데미에서 수련할 적엔 혼나느라 더 많이 긴장하고, 더 많이 요리했다.
‘일의 양으로만 따지면 아카데미에서나 지금이나 비슷한데 왜 그럴까…….’
더 이상한 건 경합 준비를 도우며 이틀째 밤을 꼴딱 새우고 있는데 잘 자던 이전보다 훨씬 몸이 가뿐했다.
“세니아나!”
“네……. 아아앗! 탄다!”
“이 녀석, 잘한다 싶더니 또―!”
나는 쟝뤼크에게 꿀밤을 맞고 울상을 지었다. 이틀 내내 제3조리장에서 보내고, 쟝뤼크는 이제껏 시험한 레시피를 혼자 정리해 보아야겠다며 돌아갔다. 뒷정리를 마치고 나가려는 길에 창밖에 보이는 궁을 보고 나는 멈칫했다.
‘도미니크의 궁이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바빠서 보지 못했지. 몇 번이나 연락이 왔었는데, 타이밍이 안 맞아서 연결되지 않았다. 나는 슬쩍 조리장을 둘러보다가 남은 재료를 집었다.
“이대로 두면 연어가 아까우니까. 응, 그래서.”
쫑알쫑알 중얼거리고 연어를 잡았다.
‘연어는 구워도 맛있지만 역시 생으로 먹는 게 좋지.’
연어를 약간 두툼하게 잘라서 착착 올려두고 양파를 채 썰어 잠시 물에 담가 두었다. 그리고 파인애플과 겨자, 그리고 쟝뤼크의 비법을 내 식으로 바꾸어 만든 마요네즈까지 섞어 세니아나식 홀스래디쉬 소스를 만들었다.
‘음, 새콤해서 맛있다.’
와사비 간장과 초장까지 만들어서 연어회 중앙에 잘 놓은 후 살금살금 조리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몰래 도미니크의 궁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너.”
“으아앗!”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아서 난 펄쩍 뛰어올랐다.
“외, 외삼촌. 여기서 뭐 하세요.”
“경비대장이 뭘 하겠냐.”
“아……, 순찰.”
에단은 내가 든 접시를 보더니 흠, 침음하고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너 말이다.”
“네?”
“이건 그냥 내가 황궁의 안전을 책임지는 경비대장이니까. 그래서 말하는 거야.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병균을 옮기면 안 되니까, 어?”
“……?”
“옷이 좀 얇지 않나.”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내 옷을 내려다보았다.
“조리복인데요? 요리사들은 다 이렇게 입고 다니는데…….”
“그러니까 외투라도 걸치라는 말이지.”
“별로 안 추워요. 황궁엔 외부에도 난방시설이 있고 또…….”
“그냥 입으라면 입어.”
“네?”
그가 커흠! 헛기침을 하더니 제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황궁의 안전을 위해서! 네가 감기에 걸리면 다른 사람들도 안전하지 못하니까! 너를 걱정해서 한 말은 아니―”
“네네. 알겠어요.”
“…….”
“외삼촌이 걱정하니까 이제 따뜻하게 입고 다닐게요.”
그는 붉어진 얼굴로 “아니라니까.”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를 슬쩍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것보다 걱정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아서 병이 생길 것 같은데…….”
“걱정?”
“아탈란 말이에요. 이다음엔 무슨 계략을 꾸밀―”
에단은 내 코를 쥐고 살짝 흔들었다.
“영악해서.”
“아니, 걱정하시니까 그냥 제 상태를 알려드린 거죠…….”
“어디 또 깜찍하게 말 해봐라, 응?”
“아파요!”
내가 울상을 짓자 그는 흠칫해서 손을 놓았다.
“아파?”
“아플 것 같았어요.”
“이게 정말…….”
히죽 웃으니까 그는 졌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당분간은 로열 셰프 경합 때문에 허튼 수는 못 쓸 거다. 대사제에게서 따로 지령이 내려온 건 없어.”
“흐음, 그렇구나. 그럼 지령이 내려오면 알려 주실래요?”
“시끄러워.”
그가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정말로 꿀밤을 맞을 것 같아서 난 “그럼 외삼촌도 추위 조심하세요!” 하고 후다닥 도망쳤다. 접시를 들고 걷느라 자꾸 외삼촌의 재킷이 흘러내렸다. 복도에 서서 재킷을 추스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좋은 향이 나는 사람.
“저하!”
나는 활짝 웃으며 뒤를 바라보았고, 나를 뒤에서 끌어안은 도미니크는 희미하게 웃었다.
“오늘도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 줄 알았더니.”
“바빠서…….”
“당신은 늘 바쁘죠. 연인은 내팽개칠 정도로.”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로, 정말로 바빴어요.”
“흐음.”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보아서 난 어색하게 웃으며 접시를 들어 보였다.
“이거 뇌물…….”
“뇌물?”
“통신 못 받아서 미안하다고…….”
접시 위에 올려 둔 돔을 살짝 들어 보인 그는 함께 온 부관, 알베르에게 접시를 맡겼다. 그리고 나를 힐끔 쳐다봤다.
“이게 내가 원하는 뇌물 같습니까?”
“아니에요? 음, 다른 건…….”
그가 내게 조금씩 다가와서 나는 그의 입을 손으로 막고 펄쩍 뛰었다.
“사람들이 봐요.”
“보라지.”
“그럼 안 되죠!”
“내 사람이라고 선언하면 다른 놈이 옷 같은 건 걸쳐 주지 않을 게 아닙니까.”
옷……? 아!
어깨에 걸쳐진 재킷을 보고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내가 “이건…….” 하고 중얼거리자 도미니크는 팔짱을 끼고 내게서 한 발 멀어졌다.
“이건?”
“그러니까 이건 말이죠. 말하려면 복잡한데, 사실은―”
“사실은?”
도미니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도미니크의 등 뒤로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봤다.
‘참, 제2황자궁은 도미니크와 미카엘이 같이 쓰지.’
미카엘은 가벼운 로브를 걸친 나른한 차림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도 궁금한데. 영애에게 옷을 걸쳐 준 새끼.”
도미니크가 나를 가리며 미카엘을 쳐다봤다.
“네가 알 바 아니지.”
“우리 형님은 내가 영애에게 청혼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한 모양이야. 황자궁에 처박혀 있었더니 세상 돌아가는 일은 안 들리나?”
“그 청혼, 폐하께서 물리셨다는 얘기는 들었지. 처박혀 있던 나보다, 활개 치고 다니는 네놈 꼴이 우스워졌군.”
“날이 갈수록 버릇이 없네. 집 지키는 개 따위가.”
“황후궁이 아닌 곳에선 조심해야지. 지켜 줄 엄마가 없잖아, 안 그래?”
도미니크가 무표정한 얼굴로 빈정거리자 미카엘의 표정이 변했다.
‘설마 여기서 싸우진 않겠지?’
다 큰 성인인데, 그것도 황자들이…… 궁에서 치고받고 하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쩐지 불안했다.
미카엘이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족보 없는 똥개라고 귀여워했더니, 겁도 없이.”
“똥개 새끼는 수틀리면 물어뜯으니 주둥이 간수 잘해라.”
“아, 그렇지. 형님 스승이었나, 그 노기사가 주둥이 간수를 못 해서 찔려 죽었지.”
도미니크의 표정 또한 변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주먹을 말아쥐었고, 나는 기겁해서 소리치며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잠깐, 악!”
그러다가 발에 걸려 철푸덕, 추하게 넘어져 버렸다.
“영애!”
“프렌시프!”
도미니크와 미카엘이 재빨리 넘어진 나를 붙잡았다.
“아파…….”
바닥에 코를 제대로 박아서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팠다.
“궁에서 주먹질하면 어떻게 해요.”
“주먹질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미카엘이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폐하의 앞마당에서 주먹질은 하지 않지.”
“그렇지만, 다들 주먹을 쥐고 그러니까 놀라서…….”
내가 노려보자 미카엘과 도미니크의 눈이 커졌다.
“피!”
“피가―!”
피? 나는 뜨끈한 것이 주르륵 흐르는 것 같은 코밑을 훔쳤다.
“피다…….”
피를 본 건 오랜만이라 놀란 데다가 너무 아파서 눈물이 비죽 솟았다. 내가 억울한 표정으로 “이게 뭐예요!” 소리치니 두 황자는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다.
“네놈이 아니었으면―”
“형님이야말로, 주제를 알았으면 이런 일이―”
두 사람은 나를 사이에 두고도 옥신각신했다.
“난잡한 바람둥이가.”
“천박한 똥개 새끼가.”
“그만―!”
나는 벌떡 일어나서 두 사람을 노려봤다. 그러고 팔을 탁! 놓고 쿵쿵, 발을 구르며 제2황자궁을 나섰다. 두 사람은 나를 쫓아왔지만, 나는 제3조리장으로 가기 위해 정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아니, 세, 프렌시프!”
정원 앞에서 마주친 가브리엘라 황비가 나를 보며 눈을 홉떴다. 황비는 코밑이 새빨간 나를 보고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아니, 네 얼굴이 왜!”
그녀는 놀란 얼굴로 내 얼굴을 살피다가 뒤이어 달려온 황자들을 쳐다봤다.
“황자들까지……. 대체 무슨 일입니까.”
“때리―!”
“뭐?! 너를!”
가브리엘라 황비가 잔뜩 흥분해서 두 황자를 노려봤다.
“신사의 몸으로 레이디를 때렸다는 건가요! 두 사람 다 정신이―!”
“아니, 때리려고 했어요. 두 분이서. 저는 말리다가 다쳤습니다. 이거 보세요. 피가 막―!”
내가 이모한테 이러쿵저러쿵 일러바치자 도미니크와 미카엘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황비는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성녀는 제국의 보물이에요. 두 황자께서 함께 계시는데 다치는 모습을 그냥 보기만 하신 겁니까? 더욱이 두 분 때문에 다쳤다는 건―”
늘 차분하고 상냥하던 가브리엘라 황비가 다그치자 그들은 말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말이 없다고?’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눈빛이 고정된 곳을 따라 시선을 이동시켰다.
“헉, 폐하!”
“재미난 구경을 하는군.”
황제가 정원 테이블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제 아들들을 쳐다봤다.
“일국의 황자들이 서로 치고받으려, 응?”
우리의 뒤를 이어서 헐레벌떡 쫓아온 도미니크의 부관과 미카엘의 부관이 변명했다.
“그게 아니오라, 폐하!”
“예, 잠시 언쟁이 오갔을 뿐입니다.”
“당황한 영애께서―”
“예, 예. 영애께서 주먹을 쥔 것으로 오해를 하셔서.”
그러자 황제가 주먹으로 관자놀이를 받친 채 말했다.
“금좌 11석 수장의 손녀 앞에서 그런 꼴을 보였다?”
황제가 멀뚱멀뚱 서 있는 날 보고 손짓했다.
“이리 오려무나.”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그에게 다가갔고, 그는 손수건으로 내 코밑을 닦아 주며 아이 어르듯 말했다.
“오냐, 오냐. 얼마나 아팠겠느냐.”
“그, 별로 아프지는 않았…….”
“짐의 보물이 이토록 상하다니. 마음이 아프구나.”
“…….”
“네 조부에겐 이르지 않을 게지?”
그게 목적이었구나. 나는 등 뒤에 황자들을 힐끔 쳐다보다가 황제가 쥐여 준 손수건으로 코를 감싸며 말했다.
“네…….”
“상냥하기도 하지. 자, 이리 앉아 함께 차라도 들지. 그런데 저건 뭐냐?”
황제는 도미니크의 부관 알베르가 들고 있는 접시를 바라보았다.
“아, 이건 연어 사시미…… 가 아니라 회인데.”
“영애가 만들었나?”
“네.”
“그럼 짐이 맛을 볼까?”
그가 은근한 눈빛으로 접시를 쳐다보았다. 황제의 청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다. 내가 눈짓하자 알베르가 테이블 위로 쟁반을 올려 두었다. 돔을 올린 황제는 “호…….” 신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어로구나. 흠, 회라……. 궁에선 접하기 힘든 음식이로군.”
포털이나 황궁 마차가 없던 시절엔 날생선, 날고기는 황족의 식탁에 오르지 못했는데 그것이 관습이 되어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었다. 황제는 와사비 간장에 연어를 콕 찍어 입에 물었다.
“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군. 입에서 녹아드는 것 같구나. 비도 들지.”
그가 가브리엘라 황비에게 연어를 권하자 그녀 또한 포크를 집었다.
“어머나.”
황비는 입을 가리며 우물거렸다.
“부드럽고 고소하군요. 폐하의 말씀대로 정말 부드럽습니다.”
황비의 표정이 밝아졌다. 연어가 입맛에 꼭 맞는 모양이었다.
“이 양파는…….”
“괜찮으시면 먹는 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황제가 “좋지.” 하며 웃었다. 나는 만들어 온 파인애플 홀스래디쉬 소스를 아린 기를 뺀 양파에 버무려 연어살 위에 올렸다. 황제와 황비가 소스에 버무린 양파와 연어를 함께 입에 넣었다.
“연어 살은 부드러운데 양파의 아삭아삭한 식감이 더해져 조화가 훌륭합니다.”
“그렇군. 연어의 기름기를 파인애플이 잡아 줘서 먹기에 편해.”
“달콤하기도 하고, 짭짤하기도 하고, 또 고소하기도 해서……. 으음, 어쩜 이렇게 비린내 하나 없을까.”
황제도, 황비도 연어가 정말로 맛있는지 꽤 많은 양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기뻐!’
내 요리를 잘 먹어 주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다. 헤헤 웃으며 그들을 보던 난 잠시 멈칫하고 이마를 쥐었다.
‘뭐지?’
이상하다. 조금 전만 해도 멀쩡하던 몸이 난데없이 무거워졌다. 피로감이 역력하게 느껴져 몸이 무거워지자 나도 모르게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양파가 특히 아삭하고 맛있구나. 아린 맛도 전혀 없고, 어떻게 한…… 영애?”
요리에 대해 묻던 가브리엘라 황비가 비틀거리는 날 보고 얼굴을 굳혔다.
“영애.”
“아……, 이상하―”
시야가 좁아지고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조금 무겁다 싶었던 어깨가 거대한 추를 매단 듯 훅, 무너졌다.
“왜…….”
“영애!”
“프렌시프!”
황족들의 비명 같은 고함이 들리는 것 같았는데 대답할 수 없었다. 온몸에 힘이 빠지는 동시에 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눈 안이 뜨겁고 쓰렸다. 귓가엔 웅웅거리는 이명이 들리고,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니아나!”
날 부르는 목소리에 난 겨우 눈꺼풀을 들었다.
“……이모?”
가브리엘라 황비가 한숨을 내쉬며 내 어깨에서 손을 거두었다.
“괜찮은 거니?”
“네. 여긴…….”
“내 궁이다.”
황비의 궁이 정원과 가까워서 이리로 옮긴 모양이었다. 나는 부스스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모밖에 없는 줄 알았더니 반대쪽 침대 맡에 도미니크가 서 있었다.
“저하…….”
“……제게 여전히 비밀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모라고 한 말을 들었나 보다.’
나는 “그게…….” 하고 말하며 눈치를 보았고, 가브리엘라 황비는 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비밀은 아니고요. 저도 안 지 얼마 안 되는…….”
“일단 쉬십시오. 나중에 얘기하죠.”
“저기, 저하. 화나셨어요?”
그는 말없이 내 팔을 잡았다. 도미니크가 잡은 부분부터 샛노란 빛이 포자처럼 일렁이더니 빠르게 몸이 따뜻해졌다.
“아…….”
포근한 느낌이 기분 좋아서 나도 모르게 눈이 스르륵 풀렸다. 내 안색을 확인한 그가 손을 거두고 멀어졌다.
“자리를 피해 드리죠.”
“저하―!”
그는 대답 없이 문을 나섰다.
‘서운한가 보다.’
나라도 도미니크가 내게 비밀을 만들고, 위험에 빠졌다는 것도 말하지 않는다면 속상할 것 같았다. 시무룩한 얼굴로 닫힌 방문을 보고 있자 가브리엘라 황비가 이마를 만졌다.
“열은 내렸구나.”
“열이 올랐었나요?”
“그래. 의사는 피로가 축적되어 그랬다더구나.”
“그렇게 피곤하지 않았어요.”
이전과 비교하면 확연히 몸이 가뿐했다. 밤을 꼴딱 새우며 쟝뤼크를 도울 때도 멀쩡했는데, 왜 갑자기 피로해졌을까.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몸을 내려다보았다. 황제와 이모가 내 요리를 먹은 순간부터 그랬다.
‘어?’
그러고 보니 근래 내가 피곤했던 건 ‘요리를 할 때’가 아니라 ‘내 요리를 누군가에게 먹일 때’였다.
‘이상하잖아, 그건.’
“어쨌든 세니아나 넌 쉬는 편이 좋겠어.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렸으니 너는 몰랐어도 몸은 피곤했을…….”
“이모.”
“그래.”
“아탈란이 절 로열 키친에서 쫓아내려는 이유가 뭐예요?”
이모의 안색이 변했다. 나는 이번엔 꼭 대답을 듣겠다는 듯 고집스레 그녀를 응시했고, 그녀가 가는 한숨을 흘렸다.
“몰라.”
“하지만 이모는 아탈란의 1월이잖아요! 어떻게 이모가 모를 수 있겠어요.”
“정말이야.”
“……그럼 죽은 카렌듈라 후작이나 미카엘 황자도 모르나요?”
“월은 외부 세력을 뜻하는 말이다. 정확하겐 선을 나눈 거지. 뜻을 함께하고 있지만, 아탈란에게 협력할 뿐인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이모는 어렸을 때부터 신관으로 살았으니 2월, 3월과는 다르잖아요.”
“나는 미아의 핏줄이야. 네겐 이모이고. 아탈란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했지만, 대사제는 너와 관련된 일엔 나와 에단에게 쉽게 입을 열어 주지 않는다.”
내가 시무룩해지자 이모는 날 빤히 보더니 “짚이는 게 있긴 하지만.” 하고 중얼거렸다.
“짚이는 거요?”
“성식 말이다.”
“성식이라면 삿된 자의 일부로 만드는 그…….”
“그래, 아탈란이 로열 키친을 손에 넣으려 기를 쓰는 건 제국에 성식을 퍼뜨리기 위해서지.”
로열 셰프가 식료품 유통 허가권을 가지고 있으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고, 가브리엘라는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를 쫓아내려는 이유도 성식과 관련 있지 않겠니. 무엇보다 ‘성녀’는 ‘삿된 자’와 대척점에 있는 존재, 천적과 다름없으니까.”
“천적…….”
천적이라는 건 서로를 위험하게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거지? 삿된 자는 나의 천적이 될 수 있다. 그들은 나를 죽일 만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겐 뭐가 있다는 거야? 호랑이와 병아리의 관계를 천적이라고 하진 않잖아.
‘성수 때문일까?’
하지만 그렇다면 ‘성수’와 ‘삿된 자’를 천적이라고 명명해야지, 왜 성녀를 천적이라고 한단 말인가. 성수를 부릴 수 있는 존재이기에 천적이라고 하는 건 이상하다.
“어쨌든 도미니크 말대로 쉬는 게 좋겠다.”
“하지만 저는 스승님을 도와서 경합 준비를 해야―”
“쉬어. 도미니크가 질색하는 성력까지 발휘해 널 회복시킨 이유가 뭐겠니.”
“성력……. 방금 그 빛이요?”
“그래.”
“저기, 이모. 저하는 ‘조율자’라고 했죠?”
“그래, 성녀와 삿된 자의 중앙에 있는 존재지. 둘 모두를 회복시킬 수도 있고―”
그녀는 가라앉은 눈으로 날 응시하다가 중얼거렸다.
“죽일 수도 있는.”
―라고.
* * *
가브리엘라 황비는 세니아나를 억지로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괜찮다고 하지만 여전히 얼굴이 새파랬다. 몇 번이나 쉬라고 종용한 그녀는 문을 나섰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에단이 물었다.
“그 녀석은?”
가브리엘라는 대답 없이 걸음을 옮겼다. 통신석을 통해 아서에게 세니아나의 소식을 전하자 허공에 문자가 떠올랐다.
[고맙다.]
가만히 문자를 보고 있던 그녀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가브리엘라 황비는 어느새 눈이 내리고 있는 창밖을 응시했다. 스산한 풍경이었다. 마른 땅과 앙상한 가지 위로 고요가 쌓이고, 소리가 좀먹혔다.
“아탈란은 계획에 성공할 거다. 기어코 이 땅에 종말을 도래시킬 테지.”
“…….”
“몇십 년이나 이어진 계획. 삿된 자의 수가 대륙 전쟁 때의 천 배에 이르는 지금, 아탈란과 맞설 자는 없어.”
그들이 삿된 자를 세상밖에 내보이지 않는 이유는 하나였다. 아직 그 모두를 조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성녀와 조율자, 약탈자, 만 구의 삿된 자를 모두 모아 의식을 치르면 ‘종말’을 조종할 수 있게 된다.
창밖으로 세니아나가 잠든 방 창문을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고 있는 도미니크가 보였다.
‘세실.’
네 말이 맞았어.
목숨 같던 미아와 세실을 잃고, 단둘이 남은 남매는 처절하게 후회했다. 지겨운 삶을 이어가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들이 남긴 아이들이 종말 후에도 살아갈 수 있도록 지키기 위해. 속죄할 방법은 그뿐이었으니까.
“아탈란이 의식에서 약탈자가 아닌 세니아나를 선택한다면 그 아이는 살아남을 수 있어.”
에단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탈란이 세니아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남매의 목표였다.
“종말을 담는 병이 되어서 근근이 목숨을 이어갈 뿐인 생을 원할까, 저 아이가.”
“에단.”
그가 책상 위에 놓인 가브리엘라의 회중시계를 바라보았다. 저것을 선물하며 웃던 미아와 세실을 떠올리며.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이, 아탈란에서 세니아나에게 경고를 시작했어.”
가브리엘라가 그를 쳐다보자 그는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프렌시프 령에 삿된 자 일백 구(具)가 내려갔어.”
가브리엘라의 눈이 커졌다.
“일백 구(具)라니!”
대륙 전쟁에서도 고작 여섯 구(具)만이 쓰였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만의 정예병이 목숨을 잃었다.
‘프렌시프의 영지민을 몰살시키겠다는 건가.’
가브리엘라가 이마를 쥔 채 비틀거리자 에단은 침통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베리우스 프렌시프가 오늘 영지로 출발했지.”
“……!”
“삿된 자 일백 구(具)가 도착하는 건 나흘 뒤. 이틀 뒤, 나베리우스 프렌시프가 도착하면―”
“그는 죽을 거야.”
필시.
가브리엘라가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 * *
도미니크에게 내가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쟝뤼크는 퇴궁하라며 닦달이었다.
“하지만 수련을 도와야지요!”
“너 없으면 더 편히 할 수 있으니까 얼른 꺼져.”
“…….”
나는 치, 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스승님은 말을 너무너무 못되게 하세요.”
“알아.”
알면 좀 고치든가!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마음이 앞서도 이 몸으론 돕지도 못하겠지.’
난 알겠다고 말한 뒤 퇴궁 준비를 했다. 아빠가 보낸 마차를 타고 저택에 도착하자 어쩐지 평소보다 한산했다.
‘으응?’
영지에서 올라온 사용인들이 보이지 않는걸. 내가 의아한 얼굴로 마릴린에게 묻자 그녀가 말했다.
“어르신이 오늘 영지로 내려가셨거든요. 다들 영지 성을 오래 비웠다고 따라가셨지요.”
“할아버지가? 말씀하시지! 포털로 보내드리면 되는데.”
“황궁 마차를 빌려 가셔서 이틀이면 도착하신대요.”
“그래도…….”
“아가씨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으셨거든요. 걱정되셔서 부탁하지 않으신 거예요.”
아우, 하필이면 이런 일이 있을 때 쓰러져서.
할아버지는 다른 노인들보단 건강하지만, 손녀 입장에선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할아버지의 몸으로 이틀이나 마차에서 지내실 수 있을까. 내가 우울해하자 가웨인이 픽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조부님은 나보다 힘이 좋으실 거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무릎도 안 좋으신걸요. 게다가 고혈압도 있으시고……! 어? 오빠들은 같이 가지 않으세요?”
“응.”
“란슬롯도?”
“오지 말라고 하시던데. 금방 오실 거라고.”
“영지는 무슨 일 때문에 가신 건데요?”
“금좌 11석의 수장이 되었으니 본격적으로 황도에서 지내셔야 할 것 아냐.”
“아, 그 전에 영지를 정리하러 가신 거군요?”
가웨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내게 슬쩍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할아버지의 편지다!’
나는 기쁜 마음에 얼른 레터 나이프로 봉투를 베어, 편지를 열었다.
[세니아나 보아라.
오늘 쓰러졌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하였다.]
편지는 아주아주 어색했다.
‘하긴 할아버지가 이런 편지를 써보셨을 리가.’
난 쿡쿡 웃으며 편지를 읽었다. 가웨인과 란슬롯도 내 곁에서 함께 편지를 읽었다.
[다시 돌아온 너를 만나고, 할애비는 일상의 즐거움을 찾았다.]
“이거 분명 사무관들이 써 줬을 거다.”
“그래.”
오빠들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픽 실소를 흘렸다.
[늘 열심히 하는 너를 보고 할애비 또한 인생을…… (중략)…… 하지만 너무 걱정시키지 마라. 일을 해도 네 몸 챙겨 가면서 해야…….]
할아버지의 진심이 느껴져서 난 감격했는데, 오빠들은 “아닌가, 마담 버지니아가 써 줬나.” 하고 대필한 사람을 추측하기 바빴다.
“설마 대필했겠어요?”
“이것 봐. 마지막 줄만 글씨가 다르잖아!”
그 말을 듣고 난 얼른 마지막 문장을 살폈다.
[너를 사랑한다.]
정말로 글씨체가 달랐다. 윗부분도 비슷한 글씨체이긴 했지만, 맨 아랫줄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난 빙그레 웃으며 마지막 문장을 매만졌다.
나도 말해 줘야지. 할아버지가 돌아오시면, 꼭 말해 줘야겠다. 저도 할아버지를 사랑해요. 아주아주 많이.
그때, 알았더라면. 표현은 미루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사랑한다’는 말이 가슴에 멍으로 남지 않았을 텐데.
편지는 내겐 아주 감동적이었지만, 다른 가족들에겐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가웨인에게서 요약한 내용을 들은 아빠의 표정이 미묘했다.
“노인네가 노망이 들었군.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날이 다가온 것인데.”
그가 신랄하게 빈정거리자 란슬롯과 가웨인이 웃음을 삼켰다. 난 인상을 찌푸리고 “아빠!” 하고 소리쳤다.
“…….”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 잘못이에요.”
“…….”
“그렇지요?”
내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눈을 부릅뜨자 아빠는 “……그래.” 하고 중얼거렸다.
“할아버지랑 영지 사람들이 없으니까 집이 휑해요. 난 자리는 티가 나는 법인가 봐요.”
내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리자 란슬롯이 다정하게 말했다.
“금세 돌아오실 거다.”
“그랬으면 좋겠다.”
난 환히 웃었고, 가족들은 나를 따라 미소를 머금었다. 그날은 편히 쉬었다. 저녁엔 동부 영지로 향하는 할아버지와 마담 버지니아에게 연락이 왔다. 잘 먹고, 잘 쉬고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몸 건강히 지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그리고 이틀 후. 당장 내일 경합 내용 발표가 있어서 나는 더 입궁을 미룰 수 없었다. 나와 쟝뤼크는 정신없이 준비를 해야 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요리를 다 할 수는 없으니 황제가 낼 경합 주제를 읽어 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황제의 평소 식단 기록을 살피던 나는 끙끙거렸다.
‘가리는 음식이 없으시잖아.’
하기는 황태자도 호불호를 드러내기 쉽지 않으니 황제도 마찬가지겠지. 그러다 눈에 들어오는 내용이 있어서 “응?”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쟝뤼크가 의아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무슨 일이냐?”
“작년 오 월부터 두 달간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으셨는데요?”
“아, 그거?”
쟝뤼크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에서 역한 냄새가 난다고 식사 때마다 역정을 내셨다더군.”
“심각한 일이잖아요, 그건?”
“조금만 더 식사 거부를 하셨으면 고프레도가 경질당했을 수도 있지. 오죽했으면 로열 키친의 요리사들이 내게 연락해서 조언을 구했을까.”
역한 냄새라고? 로열 키친에선 식재료를 아주 까다롭게 관리한다. 특히 여름엔 냉장창고에 보관하더라도 이틀이 지난 육류와 해산물은 모두 폐기할 정도였다.
‘그런데 냄새라니……. 이상한걸?’
로열 키친엔 미식의 나라 길라게온에서도 손에 꼽는 천재들이 모여 있다. 그들이 제대로 요리하지 못했을 리도 없고. 황제가 식사 거부까지 했다면 로열 키친이 발칵 뒤집혔을 텐데 두 달이나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난 인상을 쓰며 그 당시의 기록을 살폈다.
“스승님.”
“왜?”
“폐하께서 식사를 거부한 이유는 왜 기록해 두지 않은 걸까요?”
“그럴 리가. 제대로 봐라, 기록하지 않았을 리 없어.”
페이지를 넘기며 이리저리 살피던 난 고개를 저었다.
“없는걸요?”
쟝뤼크는 “이리 줘 봐.” 하며 기록지를 가져가서 뒤적였다.
“이상한데. 그런 일을 기록하지 않았을 리 없다. 내 스승님은 선황 폐하께서 속이 더부룩하다고만 하셔도 꼼꼼하게 기록했다고.”
“하지만 없잖아요?”
“자료 보관실에 가 봐라. 따로 보관해 놨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료 보관실 쪽으로 걷는데 입구 쪽에 알베르가 보였다.
“알베르 님.”
그가 나를 보고 눈을 홉뜨더니 “흠.” 하고 신음했다.
“서고에 용무가 있으십니까?”
“네, 자료 보관실에 가려고요.”
“들어가십시오.”
경비병 대신에 보초라도 서고 있었던 건지 그는 나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묵례하고 다시 복도를 걸었다. 자료 창고 옆에 있는 도서관의 유리문을 보자 안쪽으로 얼핏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도미니크다!’
나는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고 유리문을 톡톡 두드렸다. 책장 앞에 서서 책장을 넘기던 도미니크가 고개를 돌렸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옆선에 닿으며 희게 부서졌다. 나른히 떨어지던 머리칼이 고개를 들자 뺨을 부드럽게 감았다. 그가 한 손으로 들고 있던 책을 탁, 접으며 눈짓했다.
‘들어오라고?’
여기 황족 전용 서고인데? 내가 머뭇거리자 그는 문을 열어 줬다.
“드, 들어가도 돼요?”
“예.”
“하지만…….”
“알베르가 주변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분간 근처로 오지 못할 거예요.”
그래서 알베르가 경비병 대신에 서 있었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 그거.” 하고 중얼거렸다. 도미니크가 들고 있는 책은 삿된 자의 기록이었다. 내 시선이 책등에 닿자 그가 대답했다.
“당신은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까.”
“그런 게 아니라요…….”
“걱정만 제 몫으로 남겨 두셨죠.”
나는 눈치를 보다가 손가락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이모 일은 저도 알게 된 지 얼마 안 돼서…… 정신이 없었기도 하고요. 그래서 말씀을 못 드린 거예요.”
“압니다.”
“하지만 서운하시잖아요…….”
“아니까 더.”
정말로 화가 났는지 그의 목소리가 건조했다. 그가 내게 냉랭한 건 처음이라서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어쩔 줄 모르고 입술만 깨물고 있자 그는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궁의 경비병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후에 시체로 발견되었죠. 황궁에 성수가 나타난 날에 말입니다. 당신과 관련 없는 일입니까?”
아탈란 소속의 경비병들에게 찔렸던 남자가 떠올랐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고, 도미니크는 그런 날 보고 잠시 침묵했다.
“그건, 저하…… 전……!”
“이전번엔 운 좋게 아무런 일이 없었지만, 다음엔 다를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에도 저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당신과 마주칠 순간만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늘 그랬듯이.”
“…….”
도미니크가 한숨을 삼키고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난 매일 당신 연락을 기다려.”
“…….”
“마주치는 순간을 고대하며 아발론을 맴돌지.”
“…….”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당신이 위험한 순간에도 난 등신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설레하며 당신과 마주칠 순간을 기다릴 거라는 거야.”
“…….”
“내가 기다려 마주칠 게 당신인지 당신의 시체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그의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았다. 어깨에 닿은 온기가 아려서 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베어 물었다.
“미안…….”
“알면 다음엔 부디, 지킬 기회를 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도미니크는 내게서 떨어져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그를 생각하지 않는 순간에도 그는 오직 나만을 떠올리고 있었을 거다. 어제 가브리엘라 궁을 나서고 마냥 해맑던 내가 미워서 눈물이 비죽 솟았다. 그는 곤란한 듯 희미하게 웃으며 내 눈가를 손끝으로 훔쳤다.
“울길 바라서 한 말이 아닙니다.”
“잘못했어요…….”
“이리 마음이 약하셔서야. 더 골내지도 못하겠습니다.”
도미니크는 다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코를 훌쩍였다.
“그, 성수를 불러낸 날 제게 이모와 외숙부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아탈란의 신관으로 지냈대요. 우리 엄마도 아탈란의 신관이었는데, 그러니까…….”
내가 웅얼거리니 그는 “외숙부라고요?” 하고 되물었다.
“황궁 경비대장인 에단이 제 외숙부예요.”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와 도미니크는 황족 전용 서고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앉아 그간의 일을 공유했다.
“그러니까 당신의 이모가 대륙 전쟁에 적군으로 참전했다는 겁니까.”
“네, 그리고 제 어머니는―”
그때 에이프런 안의 통신석이 가늘게 진동했다. 나는 말을 멈추고 통신석을 꺼냈다. 통신석은 붉은색으로 변해 쉴 새 없이 점멸했다.
‘오빠들의 신호인데 이상하네. 이런 색으로 변한 적은 없는데.’
난 고개를 갸웃하고 통신을 연결했다.
“네.”
[세니아나.]
란슬롯이었다. 내용을 듣지 않았지만, 이상한 예감이 발밑부터 스멀스멀 밀려왔다.
“무슨 일이 있―”
내가 입을 열던 찰나, 서고의 문이 벌컥 열리며 새파랗게 질린 알베르가 뛰어 들어왔다.
“저하!”
그는 도미니크와 나에게 달려와 소리쳤다.
“프렌시프에서 황궁 내에서의 포털 사용 허가를 요청했습니다.”
“무슨 소리냐.”
“프렌시프 영지에 삿된 자들이 출현했습니다!”
난 딱딱하게 굳어져서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벌떡 일어나 소리치자 란슬롯이 말했다.
[우리도 상황을 파악하는 중이야. 아버님이 황제와 직접 이야기하셨으니 너는 바로 포털을 열어 저택으로 이동해라. 영지로 길을 연결해야 해.]
“그런……!”
당황해서 입을 열던 난 멈칫하고 통신석을 꽉 쥐었다.
“할아버지는요?”
[…….]
“란슬롯!”
[사망이 확인된 건 유스벨 남작과 당통 자작뿐이야.]
유스벨 남작과 당통 자작은 할아버지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간 사람들이다.
[삿된 자들이 영지에 도착한 조부님의 마차를 덮쳤어.]
그 뒤로 란슬롯이 무어라 말했지만, 목소리가 뭉그러졌다. 삐익―! 이명이 귀를 가르고 정신이 혼미했다. 그가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건지,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너를 사랑한다.]
편지의 마지막 문장만이 선명했다.
“……니아나.”
“…….”
“세니아나!”
도미니크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아, 아아…….”
나는 입을 틀어막고 스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해. 우리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배웅도 못 했는데. 이제 편해졌다고 못된 말만 했는데. 내 일이 바쁘다고 신경조차 쓰지 못한 날이 많았는데. 누구에게도 표현한 적 없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두렵다고 하는 그가 애써 애정을 표현해도 감사의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주름진 눈매가 다정하게 휘는 모습이 떠오르며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정신 차리십시오!”
“……저하.”
그가 나를 일으켰다.
“포털을 열어요, 어서.”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멀린의 마원을 손에 쥐었다.
목적지를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나와 도미니크, 알베르는 저택에 도착해 있었다. 가웨인과 란슬롯은 벌써 갑주를 차고 진군 준비를 마친 채였고, 아빠도 굳은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아빠가 희게 질려 어쩔 줄 모르는 내 어깨를 꽉 잡았다.
“저택의 군사들을 소수만 두고 모두 이동시켜야 한다. 할 수 있겠니?”
“네.”
“힘에 부치면―”
“할 수 있어요. 할 거예요, 저.”
아빠가 내 눈을 지그시 응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난 멀린과 테디, 그리고 쵸의 마원을 모두 쥔 채 목적지를 떠올렸다. 할아버지가 있는 우리의 집을.
* * *
첨탑 위에서 영지를 내려다보던 프렌시프 기사 졸로단이 새파란 얼굴로 손을 가늘게 떨었다. 기사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와 소리쳤다.
“북문을 지키던 경비대는 전멸. 삿된 자들이 영지 내부로 들어왔습니다!”
“이런…….”
“명을 내려 주십시오!”
“도망…… 도망쳐야 해. 도망…….”
영지를 에워싼 삿된 자가 여섯. 그들 주변으로 검은 인간들이 무려 백에 가까운 숫자였다. 동문을 지키던 졸로단은 검은 인간이 시간이 지나자 피부가 기괴하게 녹아들며 삿된 자가 되는 광경을 목격했다.
‘저들이 모두 삿된 자가 되면…….’
대륙 전쟁 때도 이만한 수의 삿된 자가 나타난 적은 없었다. 종기사 시절 스물의 대대가 사력을 다해 고작 일 구(具)의 삿된 자를 물리친 것을 목격한 적 있었기에, 삿된 자란 것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잘 알고 있었다.
평생 전장에서 살아왔지만, 이만큼 희망이 없는 전쟁은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삿된 자를 마주한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다. 단순히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었다. 삿된 자들은 마치 공포 그 자체를 구체화시킨 존재 같았다.
“도, 도망, 다들 도망―”
“정신 차리십시오! 주군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성을 지켜야 합니다!”
성 밑의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스스슷―! 기어온 삿된 자 하나가 도망치던 아이를 잡아 통째로 삼키려는 듯 기괴한 이빨을 드러냈다.
“엄마! 으아아앙! 엄마―!”
그 광경을 보고 뒷걸음질 치던 졸로단이 돌부리에 걸려 쿵!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쉬이익―! 화살 하나가 허공을 가르고 날아들어 삿된 자의 눈알에 박혔다.
“키에엑!”
정확히 눈을 맞은 삿된 자가 꿈틀거리며 가라앉았다. 졸로단의 옆으로 드레스를 입은 중년의 귀부인이 뛰어들었다.
“마담 버지니아!”
졸로단은 멍하니 피 묻은 드레스 차림의 버지니아를 올려다보았다.
“썩 일어나지 못해! 못난 놈!”
“다, 단장님…….”
그녀는 한 손으로 졸로단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나의 6사단을 이어받은 놈이라면 기개를 보여!”
그녀가 소리치자 졸로단의 눈이 흐려졌다.
“우리는 질 겁니다……. 성은 함락당하고, 우리는 모두 저것의 먹이가…….”
버지니아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졸로단을 멀리 내던진 그녀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활시위를 잡았다.
‘빌어먹을!’
삿된 자가 덮친 마차에서 겨우 탈출하며 다친 왼팔이 떨리는 바람에 활을 제대로 고정할 수 없었다.
‘나이가 든 것인가. 이깟 상처에……!’
그때 흰 손이 오금을 잡았다.
“넌…….”
“6사단의 알렉시아입니다, 단장. 돕겠습니다.”
“여자인가.”
“기사지요.”
“도망칠 생각은 없는 눈이로군.”
알렉시아는 활을 단단히 받치고 삿된 자를 쏘아보았다.
“오실 테니까요. 프렌시프의 주인들이.”
“어르신은…….”
버지니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단장님께서 들어오신 동문에 제가 있었습니다. 상황은 압니다.”
“그런데.”
“단장의 영웅이자 주인은 어르신이시겠지요.”
“…….”
“제 영웅이자 주인은 다릅니다.”
버지니아는 결기 어린 눈을 빤히 쳐다보았고, 알렉시아는 신의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실 겁니다, 아가씨는.”
그런 사람이니까. 포기 같은 건 모르고, 아무리 거대한 적이라도 당당히 맞서는.
버지니아가 활시위를 당겼다. 또 한 번 활이 정확히 삿된 자를 꿰뚫었다. 한 구의 삿된 자는 다가오지 못하고 “키에에엑!” 비명을 내질렀지만, 그뿐이었다. 삿된 자에게 달려든 군사들이 성냥개비처럼 우수수 무너졌다.
기어코 한 구의 삿된 자가 성벽을 타자 알렉시아는 검을 빼 들고 탑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머리 위로 착지해 정수리를 꿰뚫었다. 삿된 자가 크게 떨며 “쉬익―!” 소리를 내고 고개를 털어 냈다.
“크윽―!”
기사들이 삿된 자를 에워싸 맹공을 펼쳤으나 검은 오물 같은 피부에 닿자마자 녹이 슬 듯 부러졌다.
“케에엑!”
정수리 위로 새로운 입이 벌어지며 기괴하리만큼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아!”
알렉시아의 자세가 무너지던 그때였다.
“알렉!”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성문 위에 등장했다.
“아가씨!”
누군가 소리치자 모두 일시에 성문 위의 여성을 쳐다봤다. 마담 버지니아가 그녀를 보고 “세니아나 아가씨!” 소리쳤다. 순간, 땅이 울렸다. 세니아나를 본 삿된 자는 이전과 다른 강도로 날뛰었고, 성벽이 크게 흔들렸다.
“키엑!”
세니아나가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내 집에서 사라져.”
그리고 창공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며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에 감싸인 삿된 자는 비명을 내질렀고, 눈 깜짝할 사이에…….
“허.”
누군가 신음했다. 수백의 군사가 달려들어도 꿈쩍을 하지 않던 삿된 자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포털…….”
“포털이다!”
“아가씨가! 우리의 주인이 돌아왔다!”
전의를 상실했던 군사들이 비로소 환희에 찬 함성을 내질렀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