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셰프 영애님 7권
19장
‘바다에 수장시켜야 해.’
나는 대륙과 멀리 떨어진 바다의 한복판을 떠올리며 멀린의 마원을 그러잡았다. 사람이나 물건을 이동시킬 때와는 현저히 다른 날카로운 감각이 몸을 가로지르는 것만 같았다. 포털을 타게 만드는 것조차 어렵다고 생각하는 순간 허공에 홀이 생기며 빛이 쏟아졌다.
“흐윽―!”
태풍에 휩쓸린 것도 같고, 좁은 벽틈 사이에 끼인 것도 같은 압박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쿵! 기이한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 심장을 꽉 틀어쥔 듯한 격통이 느껴졌다. 빛이 삿된 자의 오물에 닿을 때마다 찌르르, 가는 전기가 발끝을 타고 오른다.
“학!”
내가 신음하며 물러서자 다급히 달려온 란슬롯이 내 어깨를 감쌌다.
“세니아나!”
“……아직 남았어.”
눈앞이 희뿌옇게 변하고 오직 영지 내에서 활개를 치는 삿된 자들만이 선명했다.
죽여. 죽여. 죽여. 죽여!
내 안의 무언가가 날카롭게 종용했다.
“아직―!”
“그만해!”
그가 나를 강하게 끌어당기고 양손으로 내 뺨을 감싼 후에야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 알았다.
“아…….”
몸 곳곳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비릿한 냄새. 피다. 나는 베인 것 같은 상처를 보다가 마른 침을 삼켰다.
“군사를 얼마나 많이 이동시켰는지 잊은 거야?! 삿된 자까지 날려 보냈으니 몸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저는 괜찮아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요?”
그때 마담 버지니아가 내게 달려왔다. 그녀 또한 성한 몸이 아니었다. 팔 한쪽이 연신 부르르 떨렸고, 희고 고운 얼굴은 어딘가 찢어져 피가 줄줄 흘렀다.
“마차! 할아버지와 마차를 함께 타고 계셨죠!”
“…….”
“어떻게 되었어요, 할아버지는!”
“어르신이 저와 소년 관리들을 탈출시키셨습니다. 영지에 상황을 전하라 명하셨어요.”
“상황이라니. 그쪽은 더 심각하다는 건가요?”
그녀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섯 구였습니다.”
“……삿된 자가요?”
“예.”
고작 셋으로 북문이 뚫리고, 영지는 아비규환이 되었다. 그런데 두 배가 넘는 수라고?
“북문을 지키는 6사단의 단장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가웨인이 노성을 내질렀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 중년 기사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지휘관인 네놈이 도망쳤으니 군사들은 오합지졸이 된 게 아니냐!”
그래서 북문이 이렇게 쉽게 뚫린 거구나!
“하, 하지만, 삿된 자입니다. 대륙 전쟁에서 보았던, 그……!”
“졸로단!”
“저, 저는, 저는 보았습니다. 성을 둘러싼 검은 인간들이 삿된 자가 되었습니다…….”
“뭐라고?”
나는 땅에 떨어져 렌즈에 미세한 금이 간 망원경을 주워 들었다. 렌즈를 통해 살피자 성벽 아래로 사람 형상을 한 이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백에 가까운 숫자.’
삿된 자화된 사람이다! 에이레네나 슈라 부족의 남자가 그러했듯 사람에게 성식을 먹여 삿된 자화시킨 거야.
저들은 에이레네가 삿된 자화되기 직전과 같이 온몸이 검게 물들어 일렁이고 있었다. 졸로단은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었다.
“저, 저들에겐 활도, 검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마법마저 소용이……!”
“하여 네 군사들을 버리고 영지 안으로 도망쳐 온 것이냐!”
성벽 위에 함께 있던 군사들마저 잔뜩 겁을 집어먹은 졸로단을 보고 말을 잃었다.
“주, 죽고 싶지 않아서…… 저, 저는 노모와 자식뻘의 동생이 줄줄이 있는―!”
가웨인의 검이 허공을 가르는가 싶더니, 졸로단이 단말마를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너 대신 죽은 녀석들도 부모와 자식과 형제가 있겠지.”
가웨인은 즉시 칼립스를 찾아 자세한 상황을 들었다. 북문은 뚫렸으나 동, 서, 남문에선 아직 군사들이 항전 중이었다.
“즉시 북문을 봉쇄하고, 영지 내의 삿된 자를 처리한다.”
다행히 북문 영지 성과 인접한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아직 삿된 자들이 밀려 들어오지 못했을 터였다. 란슬롯은 마법사들을 호출했다.
“우리는 지하로 간다. 마도병과 마도 전차를 가동시킨다!”
아빠는 휘하의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성녀가 도착했으니 삿된 자들은 성녀가 있는 성으로 몰려들 것이다. 기마대는 저것들의 이동 경로 내에 있는 영지민을 피신시켜라!”
아빠와 오빠들이 성에 돌아오고 난맥이 조금씩 바로잡히기 시작했다. 나는 마담 버지니아를 채근했다.
“우리는 할아버지에게 가요.”
“하지만 아가씨, 몸 상태가…….”
“그런 건 상관없어!”
쓰러져 주저앉아 있던 알렉시아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호위하겠습니다.”
“넌 몸이나 추슬러. 아가씨를 지키는 건 우리의 몫이다.”
“그래.”
바커스와 고레일이었다. 나는 마담 버지니아의 손목을 잡고 소리쳤다.
“어디예요!”
“……가시죠.”
포털을 열려고 했지만, 마원엔 반응이 없었다.
‘멀린!’
[…….]
‘테디…….’
[하, 하지만 지금 길을 열면 누나가 죽을지도 모르는걸.]
쵸 또한 대답이 없었다.
“걸어서 이동해야겠어요.”
“말을 타시죠.”
도미니크였다. 그는 아빠와 오빠들의 거절에도 기어코 영지까지 따라왔다.
“하지만 저는 말을 못 타는걸요.”
“제 뒤에.”
그가 나를 말에 올려 주고 고삐를 쥐었다. 마담 버지니아도 어느새 안장에 앉았고, 달리는 우리의 뒤로 기사들이 따라붙었다. 말을 타고 달리는 내내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도미니크의 옷깃을 잡은 손이 자꾸만 떨려서 그는 한 손으로 내 손등을 꽉 쥐고 있었다.
마차가 공격받은 곳은 영지 안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성 밖으로 나서야 했다. 사문은 모두 봉쇄 중이라서 난 할아버지의 진료 때문에 알게 된 비밀통로로 도미니크와 버지니아, 기사들을 안내했다. 고레일과 바커스는 통로를 보고 “허…….” 하며 한숨을 삼켰다.
“이런 곳을 통해 나갈 수 있을 줄은…….”
“이 아름드리나무가 출구였구나.”
성 밖으로 나서자 비릿한 냄새가 훅, 코안으로 밀려들었다. 영지를 둘러싼 ‘검은 인간’들의 냄새였다.
“이 앞입니다, 아가씨!”
나는 마담 버지니아의 뒤를 필사적으로 쫓았다.
‘제발.’
제발 할아버지. 이제 역정 내신다고 골내지 않을게요. 내 일이 바쁘다고 뒷전에 두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할아버지, 살아 계세요. 믿지 않는 신에게 간곡히 빌며 할아버지만 살려준다면 뭐라도 하겠다고 애원했다.
“여깁니다!”
마담 버지니아가 소리쳤다. 그녀의 말처럼 프렌시프의 마차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어요!”
내가 새파랗게 질린 채로 말하자 버지니아는 마른 침을 삼켰다. 설마 잡아먹힌 걸까.
“……가씨…… 아……가씨.”
어디에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토니오!”
영지의 총집사장 안토니오는 상태가 엉망이었다. 피투성이인 데다, 동시에…….
“검은 인간이 되었어!”
기사 중 하나가 소리쳤다. 안토니오 몸의 절반이 오물처럼 변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어르신은, 모두는……!”
“끌려 갔…… 습니다.”
“뭐라고?”
“삿된 자들이 마차를 완전히 포위하고…… 로브를 입은……, 입은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나와 도미니크는 시선을 맞췄다.
‘아탈란이다.’
“몸은 어떻게 된 거지? 왜 검은 인간이 된 건가, 안토니오.”
마담 버지니아의 말에 안토니오가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검도, 마법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어르신을 지키기 위해 삿된 자를…… 물어뜯었는데, 그 뒤로 이렇게…….”
성식은 삿된 자의 일부를 정제해서 만든 것이다. 안토니오는 성식의 원료를 삼킨 것이나 다름없으니 삿된 자화가 빠르게 진행된 것이었다. 난 고레일과 바커스에게 명했다.
“안토니오를 성으로 데려가.”
“하지만, 집사장님께서 성안에서 삿된 자가 되신다면.”
“그때는…….”
나는 안토니오의 손을 잡았다.
“내 손으로 죽일 거야.”
안토니오는 눈에 물기가 어린 날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고향에서, 프렌시프의 신하로 눈감을 수 있게 해 주시는 겁니까.”
“…….”
“상냥하신 분.”
고레일이 침통한 얼굴로 그를 부축했다. 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탈란.’
아탈란. 아탈란. 아탈란! 분해서 참을 수 없었다. 내 감정에 동요한 마원들에 빛이 감돌며 크게 진동했다.
[주인, 위험하오!]
멀린의 전음이 느껴졌다.
검은 인간들은 걸을 때마다 피부가 녹아드는 것처럼 오물 같은 것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얼마나 빠른지 아무리 뛰어도 따돌릴 수 없었다. 기어코 검은 인간 몇이 내 뒤로 바짝 달라붙었다.
“주, 주, 죽…… 주, 죽여.”
“주,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주, 죽, 죽여.”
어느새 검은 인간들이 내 사방을 포위했다. 그들이 역한 냄새가 풍기는 썩은 팔을 뻗어 왔다.
‘잡힌다!’
나도 모르게 눈을 꽉 감았는데. 쉭!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내 앞으로 누군가 뛰어왔다.
“저하!”
그는 단숨에 검은 인간 하나를 베어 내고 내 손목을 잡은 채 제 등에 바짝 붙였다.
“떨어지지 마십시오.”
“네……. 네!”
도미니크는 또 한 번, 내게 다가오는 검은 인간의 다리를 걸어 균형을 잃게 하더니 단숨에 도약해 가슴을 꿰뚫었다.
“죽일 수 있잖아!”
“어떻게 된 거지?”
기사들과 마담 버지니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아!’
가브리엘라의 말이 떠올랐다. 조율자는 성녀와 삿된 자의 중앙에 있는 존재라고 했다.
[둘 모두를 회복시킬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그래서 도미니크의 공격은 통하는 거다. 공격해 온 검은 인간들의 수는 다섯. 도미니크가 아무리 대단한 검사라고 해도, 나를 보호하며 이들을 전부 처리하기는 무리였다. 무엇보다 검은 인간들은 다칠수록 흥분하여 점점 인간의 형태를 잃고 있었다.
‘삿된 자가 되면 처리할 수 없다고 했어!’
내가 다시 마원을 잡으려던 찰나.
“아가씨!”
등 뒤로 등이 굽은 검은 인간이 “키엑!”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멀리서 로브를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그만.”
짙은 보라색의 수정을 양손으로 받든 사람이 말하자, 검은 인간들은 “크아악!” 비명을 내질렀다.
‘뭐지?’
고통스럽다는 듯 그 자리에서 온몸을 비틀던 검은 인간들이 이내 로브의 명을 따라 움직였다.
‘저 수정이 검은 인간들을 조종하는 매개체구나.’
로브는 검은 인간들을 물린 후 몇 걸음 다가왔다. 도미니크와 마담 버지니아는 그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앞을 막아섰다.
“이런, 그리 경계하지 마십시오. 저는 해를 입히지 않을 겁니다.”
그가 “아직은.” 하고 덧붙였다.
“대사제께서 성녀님과 대화를 나누시길 바라십니다.”
“아가씨를 불러내서 무슨 짓을 하려고!”
“불쾌하군요. 귀한 옥체를 상하게 하겠습니까.”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보았다.
“하지만 대사제께선 성녀님의 우려를 헤아리셨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시겠지요.”
“나를 우려하는 사람이 내 할아버지를 납치해?”
내가 날카롭게 묻자 그는 입매를 비틀었다.
“평화를 위한 작은 희생이라고 여겨 주시지요.”
그가 바닥에 작은 쪽지 하나를 내려놓고는 이어 말했다.
“신전의 코드입니다. 성녀님께서 연락을 주시면 북문에 사제들을 보내 모시겠습니다.”
“……내가 가지 않겠다면?”
그가 히죽 웃었다.
“도리가 없지요. 억지로 모셔오는 수밖에. 그땐 프렌시프의 몰락과 함께.”
“……!”
“되도록 빨리 연락 주셔야 할 겁니다. 어르신께서 노쇠한 몸으로 얼마나 버티실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잖습니까.”
버티고 있다니!
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할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글쎄요. 다만 확실한 건 오늘을 넘기진 못할 겁니다.”
기사들이 벌건 얼굴로 고성을 내질렀다.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아는데 아가씨를 보낼 성싶어?!”
그러자 그가 무언가를 툭, 던졌다. 피 묻은 머리카락 뭉치였다. 그것을 확인한 마담 버지니아는 진노하여 주먹을 말아 쥐었다.
“에드에게 무슨 짓을 한 게냐.”
“갸륵한 청년이더군요. 끝까지 저항을 포기하지 않아 신의 곁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이놈!”
“성녀께서 오지 않으신다면 어르신뿐만 아니라 프렌시프의 수행인들이 모두 신의 곁으로 향하게 될 거요. 한 사람으로 수십, 나아가 천만이 넘는 프렌시프 영지민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마담 버지니아가 그에게 달려들자 어느새 다가온 수십의 검은 인간들이 우리를 포위했다. 그들에게 가로막힌 사이 로브의 사내는 킥킥 웃으며 떠났다.
* * *
마담 버지니아와 기사들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란슬롯은 나를 별채에 가두었다.
“열어 줘요! 열어 줘!”
“영지만 정리되면 아탈란의 신전을 칠 거다. 조부님은 우리가 모셔 올 테니 허튼 생각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하지만 할아버지가, 가신들이 그때까지 무사할 거라곤……!”
내가 흥분해 소리치자 문 너머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대신 손녀가 희생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실 거다.”
“아빠……!”
“내 선택은 하늘이 무너져도 너다.”
서글픈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서 갈등해야 하는 아빠가 나보다 몇 배는 더 힘들 터였다.
그 후로 세 시간, 가족들은 정말로 별채의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보초를 서던 경비병들이 군에서 지급한 통신석을 확인하고 초조한 얼굴로 바깥을 살폈다.
“무슨 일이야?”
“……아닙니다.”
나는 인상을 쓰고 그들에게서 통신석을 빼앗았다.
“아가씨!”
“……성문 봉쇄에 실패했다고? 동문과 남문까지 뚫리고? 영지에 삿된 자들이 더 들어온 거야?”
“…….”
“대답해!”
“검도, 마법도, 활도, 심지어 마도 전차의 포탄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북문엔 가웨인이 있었잖아……. 작은오빠는?”
“……살아 계십니다.”
‘살아’만 있다고?
“다쳤다는 거잖아!”
“…….”
삿된 자를 물리치지 못하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
‘역시 삿된 자화되기 전인 검은 인간들을 처리해야 해.’
슈라 부족에서 듣지 않았던가. 삿된 자가 되면 인력으로는 처리할 수 없으니 완전히 삿된 자가 되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고. 하지만 검은 인간들에게 맞설 수 있는 건 도미니크뿐인데, 그가 저 많은 수의 검은 인간들을 처리할 수― 어?
‘잠깐만.’
슈라의 부족은 삿된 자를 어떻게 처리한 거지? 슈라의 부족은 삿된 자가 되기 직전의 사내를 처리했잖아.
“또 인력으로 처리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걸까…….”
“예?”
“나가야겠어!”
“안 됩니다, 아가씨.”
“삿된 자들을 처리할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경비병들이 눈을 홉떴다.
“그런…… 어떻게!”
“삿된 자들을 물리치던 사람들이 있어. 분명히 방법을 알고 있을 거야.”
경비병 하나가 대장 격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중년의 사내가 잠시 침음했다.
“각하께 말씀 올리겠습니다.”
발 빠른 경비병 하나가 즉시 문을 나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가 도착했다.
“삿된 자를 물리칠 방법이라고?”
“가웨인이 납치당했을 때 동부 인근의 산에서 발이 묶인 적이 있었죠. 그때 방문한 마을에서 그들이 삿된 자가 된 부족민을 처리하는 걸 봤어요.”
“…….”
“정말이에요.”
뒤늦게 달려온 란슬롯이 이야기를 전달 듣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걸 잊고 있었지.”
란슬롯 곁의 기사들도 마찬가지로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오빠들과 나, 그리고 기사들은 그 광경을 함께 목격했다. 그런데 이때까지 아무도 그 일을 떠올리지 못했다니.
‘이상해.’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던 아빠가 말했다.
“지금 당장은 네게 군사를 빼줄 수 없어. 사령관인 나와 보좌 격인 란슬롯이 빠질 수는 더더욱 없다.”
“저는 성수가 있으니까……!”
“지금은 쓸 수 없는 상태지. 그래서 마차를 찾으러 갈 적에도 달려서 이동한 것이 아니냐.”
“하지만…….”
그때 문 근처에 있던 도미니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함께 가죠.”
아빠는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허락했다. 삿된 자들이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 도미니크만큼 든든한 호위는 없었다.
나는 혹시나 해 마원을 잡았다. 몇 시간은 쉬었으니 성수를 불러내진 못해도 가까운 곳으로 이동하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다행히 포털은 열렸다. 눈을 뜨자 도미니크와 난 루브스 산 어린 족장 슈라가 이끄는 부족 마을에 있었다.
“뭐, 뭐, 뭐야!”
부족민이 난데없이 나타난 우리를 보고 소리쳤고, 곧 주변에 병사들이 나타나 우리에게 창을 겨눴다.
“우리는 족장 슈라와 이야기를 하러 왔어요!”
“예정도 잡지 않고, 이토록 무례하게 말입니까!”
어느새 나타난 부족장 사내가 소리쳤다.
“우리는 한시가 급해요. 슈라와 만날 수 있게 해 주세요.”
“불가하다면요.”
“그럼 모두 도륙하는 수밖에.”
도미니크의 말이었다. 그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당황한 부족장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자 부족장이 마른침을 삼키고 인상을 찌푸렸다.
“기, 깊은 산 속에서 지낸다고 세상일을 전혀 모를 성싶으십니까. 삿된 자들과 전투를 치르고 있다는 건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프렌시프에선 우리 부족에 전사를 보낼 여력이 없으실 텐데요.”
“누가 프렌시프의 병사들이 올 거라고 했지?”
“……예?”
도미니크가 땅에 검집을 쿵! 박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미니크 로젠카로튼, 길라게온 황가의 핏줄. 건국왕의 영혼에 서약한다.”
“……!”
“이 사람 눈에 눈물이 나면 너희 부족은 어린애 하나 남지 않을 것이다.”
“그, 그런…….”
“중앙군의 군마에 짓밟히고 싶은 자, 누구냐.”
“화, 황족이 왜 우리를 협박하는 거요! 이건 프렌시프와 우리의 문제―!”
“이 사람도 곧 황족이 될 테니까.”
그가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하자 부족민들의 얼굴이 거무죽죽해졌다. 황제의 허가 없이 중앙군을 언급해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나는 마음이 급했다.
“어서 슈라를……!”
내가 소리치자 부족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달려갔다. 곧 슈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니가 왜…….”
나는 그녀에게 달려가 손을 꽉 잡았다.
“슈라, 부탁이야!”
“부탁?”
“너희 부족은 부족민이 삿된 자화되면 자력으로 처리해 왔지?”
“으응.”
그녀가 움찔움찔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삿된 자를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줘.”
“못 해.”
“제발, 무엇이라도 보답할게.”
“방법을 알아도 언니는 못 한다는 말이야.”
그녀가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부족장은 투덜거렸지만, 족장인 슈라의 명에 길을 터 주었다. 나와 도미니크는 슈라를 따라 마을 깊숙한 곳으로 걸었다. 커다란 움막 앞에 서자 부족장이 문을 대신한 천막을 걷어 주었다. 슈라가 “들어와.” 하고 말해서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왔다.
“욱!”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어떤 문양이 새겨진 천과 천에 이어진 밧줄로 둘둘 매인 남자가 “키에에엑―!” 비명을 질렀다.
‘검은 인간!’
“삿된 자화된 우리 부족민이야. 오늘 관에 넣어 줄 날이지.”
슈라의 얼굴이 아주아주 어두워졌다.
‘아…….’
나는 저 부족민을 알고 있다. 슈라의 유모처럼 그녀를 보살피던 부족의 전사, 오레레.
“왜 검은 인간이 된 거지? 그녀가 일전에 삿된 자화된 부족민을 없앴었잖아.”
“삿된 자를 없앴으니까.”
“뭐?”
부족장은 굳은 얼굴로 벽에 걸린 창을 빼 들었다. 그리고.
“앗!”
단숨에 검은 인간이 된 오레레를 꿰뚫었다.
“인간의 힘으론 삿된 자를 없앨 수 없어.”
슈라가 그렇게 말하며 부족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부족장은 곧 청년 하나를 데려왔다. 그는 무언가 각오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때.
“쉬익―!”
밧줄이 끊어지며 검은 인간이 된 오레레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도미니크가 나를 막아서기 무섭게 청년이 오레레의 다리를 찔렀다.
“키에엑!”
오레레가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아!”
다리에서 짙은 보라색의 핏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어떻게!”
부족장의 공격은 소용이 없었는데, 왜 청년은 다른 거지? 무기의 문제인가 싶었는데, 이제 보니 그는 부족장이 떨어뜨렸던 창을 들고 있었다. 슈라가 말했다.
“카탄, 보여 줘.”
청년은 아무렇지 않게 셔츠를 걷었다.
“……!”
청년의 상체에 커다란 반점이 있었고, 반점 안은 오물로 채워진 듯 검게 일렁였다.
“삿된 자를 없애려면 삿된 자가 되어야 해.”
“너희도 성식을 가지고 있는 거야?”
“우리는 부족에서 삿된 자가 생기니까 성식 같은 건 필요 없어. 시체를 보관하고 있지.”
“그런…….”
슈라는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삿된 자와 고리를 끊을 수 없는 이유가 이거야.”
청년이 오레레를 제압하자 다른 부족민들이 얼른 다시 밧줄을 둘러 그녀를 제압했다.
“카탄은 오레레의 동생이야.”
“…….”
“부모는 일찍이 삿된 자화되어 거룩한 처형을 당했고, 오레레가 평생 카탄을 돌봤지.”
“…….”
“언니는 병사들을 삿된 자로 만들 수 있어?”
아니.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슈라 부족의 방법으로 삿된 자를 물리친다고 해도 그 후가 문제였다. 토벌 후엔 영지민이 삿된 자가 될 거다. 그럼 우리 또한 슈라의 부족처럼 다시 삿된 자를 만들어 삿된 자가 된 이웃을, 어쩌면 부모와 형제를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슈라는 다시 묶여 신음하는 오레레의 앞에 작은 접시를 내려놓았다.
‘감자튀김.’
내가 슈라에게 만들어 줬던 음식이었다.
“오레레도 좋아했으니까, 이거.”
슈라가 울먹였다.
“언니처럼 맛있게 만들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슈라가 애써 웃었다.
“오레레가 언니 요리 아주 좋아했어. 옛날에 만들어 두고 간 토마토소스도 엄청 잘 먹었어. 다른 부족민들도.”
부족장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 우리가 외지인의 음식이 좋아서 버리지 않고 계속 먹은 건 아닙니다.”
“네?”
“저 모르게 족장이 부족민들에게 먹인 거죠.”
슈라는 그릇을 끌어안으며 웅얼거렸다.
“언니 음식은 정말로 특별하단 말이야. 아무도 내 말은 안 믿고. 치…….”
“그런 말로 부족민들에게 헛된 희망을 주지 말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
“하지만 언니 음식을 훔쳐 먹었던 사람 중엔 삿된 자화 되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
“우리의 기도가 우연하게 힘을 발휘한 거예요.”
“우리 기도가 언제 소용이 있었다고. 늘 기도하지만 한 사람도 살리지 못했는데.”
슈라가 씩씩대며 말했다.
“하지만 내가 두 달쯤 전부터 삿된 자화를 앞둔 사람들에게 토마토소스를 먹였는데 분명히 삿된 자화가 느리게 진행되었단―”
“뭐라고?”
“응?”
“내가 만든 요리를 먹이기 시작한 게 언제랬어?”
“두 달쯤 전…….”
내가 피곤해지기 시작한 것도 두 달쯤 전이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까.’
나는 얼른 도미니크의 옷깃을 잡았다.
“돌아가요, 어서!”
“예?”
그러고 난 슈라에게 “고마워, 다시 연락할게! 꼭 보답할게, 기다려 줘!” 라 말하며 포털을 열었다. 다시 성으로 들어온 나는 아빠에게 헐레벌떡 뛰어갔다.
“아빠, 아빠!”
“그래.”
“르마르 공작과 지금 연락할 수 있어요?”
“그렇기야 한데, 이 상황에서 그와 연락하겠다는 거냐?”
“네!”
아빠와 란슬롯이 묘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나는 슈라에게 들었던 삿된 자를 없앨 방법을 알려 주었다. 란슬롯이 미간을 좁혔다.
“우리는 그 방법을 쓸 순 없겠군. 루브스 산의 부족처럼 삿된 자가 소수인 게 아니니, 더 많은 사람을 삿된 자화시켜야 할 겁니다.”
아빠도 동의했다.
“그렇게 되면 지금 상황은 정리할 수 있어도 나중이 문제지. 그런데 르마르 공작은 왜 찾는 게냐.”
“르마르 공작의 딸 카트린 말이에요! 계속 성식을 먹었잖아요. 곧 삿된 자화를 앞두고 있었다고 아탈란의 신관이 말했었지요?”
아빠가 고개를 끄덕여서 난 급히 말했다.
“삿된 자들은 조율자에게 집착해요. 도미니크 저하 말이에요!”
“그래.”
“그런데 제가 만든 음식을 먹은 뒤 갑자기 도미니크를 멀리하고 큰오빠에게 빠지기 시작했어요.”
란슬롯이 고개를 끄덕였고, 난 다시 말을 이었다.
“방금 들었는데, 슈라의 부족민 중에도 제 음식을 먹고서 삿된 자화가 진행되지 않은 사람도 있대요.”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삿된 자의 천적은 성녀라고 했다. 하지만 성녀는 삿된 자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못하니 천적이라고 부르긴 어렵다.
‘성수가 있다고 해도, 마원이 있어야만 그들을 불러낼 수 있으니까.’
그런 내게 삿된 자를 정화시킬 능력이 있다면 ‘천적’이라고 불릴 만할 것이다.
“아탈란은 제가 로열 키친에 있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어요.”
“그렇지.”
“황족들에게 성식을 섭식시키고 있었고요. 만약, 제게 정화 능력이 있다면 앞뒤가 맞지 않나요?”
“황족들을 삿된 자화하여 주무를 계획이었는데 네가 정화를 시킨다면 방해가 되겠군.”
“네. 가능성 있는 얘기예요.”
란슬롯도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 마법 중엔 매개체를 신체 내에 주입하여 몸을 보호하는 마법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성녀의 손이 닿은 음식이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
“예.”
아빠가 눈을 가늘게 뜨자 란슬롯이 말했다.
“만약 추측이 맞다면 우리도 루브스 산 부족의 방법을 써서 삿된 자들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검은 인간을 잡아 와라. 실험을 해 봐야겠으니.”
란슬롯은 즉시 성문 쪽에 있는 칼립스에게 연락했다.
* * *
대사제는 신관들에 의해 꿇어 앉혀진 나베리우스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 연세에 참으로 정정하십니다. 아직 입을 열 생각이 없으십니까?”
나베리우스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윽 그윽, 쇳소리만 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한창의 청년들도 견디지 못할 모진 고문에 노쇠한 몸은 엉망이 되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그를 보며 대사제가 끌끌 혀를 찼다.
“이만큼 당하셨으면 이제 현명해질 때도 되셨을 텐데요.”
“…….”
“이렇게 계속 제 화를 돋우셔서야 돌아가서도 오래 살긴 글렀습니다.”
늙은 몸이 고문의 여파를 견뎌낼 수 있을 리 없다. 나베리우스의 한쪽 눈은 떠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짓물러서 터진 것처럼.
“아서 프렌시프는 어떻게 영혼을 구별한 것입니까.”
“…….”
“당신들은 어떻게 약탈자와 성녀의 영혼을 구분할 줄 아는 거죠?”
나베리우스가 바짝 다가온 대사제의 얼굴에 침을 탁 뱉었다.
“이런!”
신관이 당황하자 대사제는 일그러진 얼굴로 나베리우스의 머리채를 잡았다.
“늙은이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그가 근처에 선 성기사의 검을 빼앗아 나베리우스의 허벅지에 찔러넣었다.
“크아앗!”
“빌어먹을 노인네.”
나베리우스의 머리채를 던지듯 놓은 대사제가 쯧, 혀를 차고 신관으로부터 손수건을 건네받았다. 피 섞인 침을 닦아낸 대사제는 짓씹듯 물었다.
“11대 프렌시프 후작이 고대 마법에 통달한 자였지? 너희 혈족에 어떤 힘을 남긴 거야. 그래서 약탈자와 성녀를 알아본 것이지. 맞지?”
“……할애비가…… 새끼를 못…… 알아볼까…….”
“개소리.”
“짖어대는 건…… 네놈이…… 잘하는 짓이지……, 신을 참칭하는 악마의…… 졸개들아.”
대사제가 뻣뻣하게 굳었고, 신관들은 기함했다.
“미친, 신과 통하는 창구 안에서 신을 조롱해?!”
“아탈란이 신…… 이라. 우습군…….”
“정신 나간 늙은이가!”
“너희가…… 대륙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너희 신은 무엇을 하였……느냐.”
“우리의 발전을 위해 역경을 내려 준 것이다!”
“구원 없는 역경은…… 희롱이지. 너는 그저 악마에게 희롱당하고 있을 뿐.”
흥분한 대사제가 검집으로 나베리우스를 후려쳤다. 몇 번이나 후려치다 검집을 내던지고, 구둣발로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밟거나 주먹을 내질렀다.
“거래도 전에 죽겠습니다. 그만하십시오, 대사―”
대사제를 뜯어말리던 신관 하나가 우뚝 멈추었다. 그제야 진정된 대사제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신관이 달려가 나베리우스를 살폈다.
“숨을 쉬지 않습니다.”
“뭐라고?”
대사제는 잠시 당황하여 마른침을 삼켰다.
“빌어먹을 늙은이!”
곧 죽어도 고집은 버리지 못해서 명줄을 재촉했다. 그가 얼른 나베리우스의 맥을 짚었다. 아직 미약하게나마 맥이 잡히지만, 끊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신관이 발을 동동 구르며 “치료사들을―” 하고 외쳤으나 대사제는 칫, 혀를 찼다.
“어차피 노인네는 죽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의 말에 신관은 당황하여 소리쳤다.
“그럼 이대로 두신다는 겁니까. 하지만 성녀가―”
“성녀야 신전에 발 디딘 순간부터 우리 손아귀에 떨어질 테니 제 할애비가 산 채든, 시체로 나뒹구는 상태든 따질 겨를이 있겠느냐.”
“그, 그렇기야 하지만…….”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내던져 둬라.”
신관은 마른침을 삼키고 성기사들에게 눈짓했다. 기사들이 축 늘어진 나베리우스를 옮기자 대사제가 물었다.
“성녀에게서 연락은?”
“아직입니다.”
“조부나 손녀나 애먹이는 건 똑같군.”
그가 짓씹듯 뱉은 말에 신관은 히죽 웃었다.
“발버둥일 뿐이지요. 영지의 함락과 함께 마차에 있던 자들의 명줄까지 일러 놓았으니 곧 연락이 올 겁니다.”
대사제는 호언장담하는 신관을 보고 픽 실소를 흘렸다.
아탈란의 옥사 내에 갇혀 있던 프렌시프의 가신들과 사용인들은 성기사들이 내던진 나베리우스를 보고 기함했다.
“어르신, 어르신!”
“이놈들 어르신께 무슨 짓을 한 게야!”
울부짖는 사람들을 보고 성기사들은 입매를 비틀었다.
“혀를 잘못 놀리면 먼 길 떠나는 어르신 곁으로 가게 될 거요.”
성기사가 침을 탁, 뱉고 떠나자 사용인들이 울부짖었다.
“어르신……!”
“금수만도 못한 놈들!”
가신이 분통을 터뜨렸다.
“공! 어떻게든 해 보십시오. 이러다 어르신 숨이 넘어가겠어요!”
나베리우스의 몰골을 본 자칼 자작은 신음하며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어르신을 치료조차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은 애초에 살려 줄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르신마저 이 꼴이 되었으니 우리는…….’
“영지에선 어째서 소식이 없는 겁니까!”
“우리가 끌려갔다는 걸 알고서도 연락이 없다는 건 역시 마차를 덮친 삿된 자들이 영지로 향한 게 아니겠습니까.”
젊은 가신이 나베리우스의 옷깃을 꽉 말아 쥐었다.
‘제길!’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믿던 평화는 허상이었고, 그들이 이룬 모든 것은 북풍 앞 낙엽과 같았다. 긴 세월 영지를 지켜 온 자의 죽음을 도리 없이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신세가 비참했다. 그때 옥사를 지키던 문지기들이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프렌시프의 영감은?”
“다 죽어가는 중입니다.”
문지기가 비열하게 웃자 옥사에 들어온 남자가 힐긋 창살 안을 바라보았다.
“너희는 나가 있어라.”
“하지만 대사제께서 물샐 틈 없이 경비하라 명하셨―”
“나가 있어. 원수를 저리 편히 죽일 수야 없지. 저 늙은이는 차라리 죽고 싶다 애걸하다 벌레처럼 처절하게 뒈져야 해.”
남자와 프렌시프의 사정을 아는 수위장이 문지기를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문지기들이 더는 군말하지 않고 옥사를 나섰다. 수위장이 남자에게 옥사의 열쇠를 건넸다.
“시체가 더 상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곧 성녀가 도착할 테니까요.”
“그래.”
수위장은 고개를 수그리고 문지기들을 따라서 옥사를 벗어났다. 가신들과 사용인들은 기골이 장대한 남자가 옥사의 문을 여는 것을 보고 바짝 긴장했다.
“뭐, 뭐 하려는 거야!”
“어르신께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사용인들이 날카롭게 소리치자 남자는 쯧, 혀를 찼다.
“하여간에 주인이나 아랫것이나 멍청하기는 똑같군. 프렌시프의 것들은 제대로 된 놈이 없어.”
“뭐?!”
“이 상황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면 명줄이 끊어지는 법이다, 애송이들아.”
성큼성큼 들어온 남자가 흘깃 뒤를 쳐다보았다.
“큰 누이.”
남자의 뒤에 서 있던 여자, 아니, 가브리엘라가 천천히 로브를 벗었다.
“……!”
프렌시프의 가신이 눈을 홉떴다.
“화, 황비!”
“황비? 황비라고요?”
가브리엘라는 쓰러진 나베리우스 앞에 무릎을 굽혔다. 그녀가 손을 뻗자 가신들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네년이 아탈란의 졸개였나!”
에단이 무표정한 얼굴로 뇌까렸다.
“프렌시프에 터를 둔 자와 말 섞을 생각 없으니 그 입 다물어.”
“우리가 네게 뭘 어쨌다고……!”
“내 누이를 비난하고 홀대하였으니 너희 모두는 우리에게 원수다.”
“누이……?”
가브리엘라가 “그만.” 하고 경고하듯 말하자, 검은 머리칼 사이 흰머리가 성성한 가신이 가브리엘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 설마…….”
“…….”
“미아 님의 혈족이오?”
“미아를 아나?”
숨을 크게 들이켠 가신이 엉금엉금 기어 가브리엘라를 떠밀고 나베리우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르신께 무슨 짓을 하려는 거요!”
“비켜.”
“우리가 각하와 미아 님의 결혼을 반대한 일로 앙심을 품은 모양인데, 어리석은 생각 마시오!”
“비키라고 하지 않았나.”
“아탈란 신관과의 결혼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일이오. 당신네들이 제국민을 얼마나 죽였는지 잊었소! 어르신과 우린 응당 해야 할 반대를 했을 뿐―”
“그래, 맞아. 해야 할 반대였지.”
가브리엘라와 에단 또한 그렇게 믿고 반대했다. 끝내 미아가 아서를 택해서 더는 남매로 여기지 않겠노라 소리치고 원망했다. 그 아이에게 낸 상처가 제게 곱절로 돌아올 줄 모르고.
“당신들도 우리처럼 후회했으면 좋겠군.”
“뭐?”
팔짱을 낀 채 창살 밖을 쳐다보던 에단이 가신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어냈다.
“그 소중한 어르신 뒈지는 꼴 보기 싫으면 비켜.”
“무슨……!”
가브리엘라는 다시 나베리우스의 몸을 잡았다. 그의 턱을 벌린 그녀가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그의 입에 흘려보냈다.
“컥!”
나베리우스가 크게 몸서리를 치며 피고름을 뱉어 냈다.
“어르신!”
가신들과 사용인이 그에게 달려갔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자, 잠깐.”
“……?”
“보십시오. 어르신께서 제대로 숨을 쉬십니다.”
“뭐?”
가신이 나베리우스에게 바짝 다가갔다. 쉬익, 쉭……. 곧이라도 끊어질 것 같지만, 시체처럼 조용하지는 않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브리엘라를 쳐다보았다.
“왜 도와준 거요?”
“…….”
“당신 남매에게 프렌시프는 원수일 텐데.”
“우리 대신 미아의 딸을 아끼고 보듬는 자들이니 은인이기도 하니까.”
가브리엘라의 말에 가신은 입을 닫았고, 에단은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성인 났수. 아주 대단한 포용력 지니셨어.”
빈정거리는 말에 가브리엘라는 “그만해.” 하고 중얼거리다 힘이 빠져 비틀거렸다. 에단이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
새파랗게 질려 파들파들 떠는 그녀를 본 에단이 짓씹듯 중얼거렸다.
“우리 배려 같은 건 모를 거야. 누아제가 되어 눈뜰 테니, 곧 다시 악을 내지르며 돌려내라 소리치겠지.”
가신이 “누, 누아제?” 하고 물었다.
“삿된 자가 되기 전 검은 인간들을 누아제라고 부른다.”
“설마 어르신을 괴물로 만든 거요?! 치료를 한 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치료까지 해 줄 정은 없지. 죽지 않은 것에 감사해라.”
성식은 마치 마약과 같아서 처음 제대로 섭취했을 땐 몸에 이롭기도 했다. 곧 중독되어 누아제가 되는 수렁에 빠진다는 건 마약보다도 더 나쁜 점이었지만.
* * *
성공했다! 내 음식을 먹은 검은 인간은 잠시나마 이지가 돌아왔다.
“……보, 카밀리아.”
아내의 이름을 간절하게 부르던 검은 인간은 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아직 십 분이지만, 계속해서 제 요리를 먹이면 완전히 돌아올 수도 있어요.”
“그래.”
“게다가 성식을 먹고 검은 인간이 될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래, 검은 인간이 되기 전에 네 요리로 정화할 수 있겠구나.”
“제게 성식이 있어요.”
샤르파크 후작가의 성에서 카토 요리사의 성식을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혹시 몰라서 영지에 보관하고 있길 잘했어.’
성식을 가져오려고 포털을 열지 않아도 되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한 번 한 번이 귀해서 되도록 포털을 쓰고 싶지 않았다.
“부족하면 삿된 자의 일부를 섭취하면 되겠지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검은 인간을 잡아 와 내 요리를 먹이고 정화하는 장면까지 본 기사들이 침음을 흘렸다. 정화할 수 있다고 해도, 성식이라는 것 자체가 꺼려질 거다. 시체나 다름없다고 여겨질 테니까. 그런데.
“오빠!”
란슬롯이 내가 가져온 병을 채가서 성식을 마셨다.
“……윽.”
몹시 역한 모양인지 그는 고개를 돌릴 채 몇 번이나 잔기침을 했다.
“괜찮아요?”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곤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억지로 성식의 섭취를 명하지 않겠다.”
“……!”
“가족을, 이웃을, 연인을 구하고 싶은 자, 프렌시프의 내일을 지킬 의지를 가진 자만이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빠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의 위치에서, 스스로 성식을 먹지 않고선 누구의 마음도 움직일 수 없다. 무엇보다 삿된 자에 가까울수록 강력한 힘을 지니므로 성식을 먹게 한다고 해서 삿된 자와 검은 인간에게 얼마나 통할지는 미지수였다.
명을 내려 성식을 먹인다고 해도, 싸울 의지가 없다면 저 많은 검은 인간과 삿된 자들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난 숨을 크게 들이켜고 오빠가 든 성식 병을 잡았다.
“세니아나?”
“…….”
“뭐 하려는…… 잠깐!”
내가 성식을 꿀꺽꿀꺽 들이켜자 아빠와 란슬롯, 그리고 도미니크가 내 곁으로 달려왔다.
“너……!”
“으윽……, 역겨워…….”
내가 울상을 짓자 란슬롯은 호통을 내질렀다.
“미쳤어! 네가 왜……!”
“저도 가족과 이웃, 연인을 구하고 싶으니까요.”
“…….”
“프렌시프의 내일을 지킬 의지, 제게도 있어요.”
나는 양손으로 성식 병을 쥔 채 기사들 앞으로 내밀었다.
“뜻을 함께할 사람은 없나요?”
하지만 그들은 역시나 손을 들길 주저했다.
‘틀린 건가.’
방법을 알았어도, 쓸 수 없는 걸까. 나는 긴장된 얼굴로 그들의 면면을 바라보았다.
* * *
“대사제!”
신관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자 손안에서 체스 말을 굴리던 대사제가 느른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이냐.”
“연락이 왔습니다.”
대사제는 움찔, 의자의 팔걸이를 쥐고 신관을 쳐다보았다.
“성녀가 드디어 마음을 굳혔구나!”
“예. 이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네가 직접 가서 성녀를 데려와라.”
신관이 고개를 숙이자 대사제가 손을 들며 말했다.
“성기사 몇도 함께 데려― 아니지, 아니지. 그 깜찍한 계집애가 또 어떻게 머리를 굴릴지 모르니, 소대 몇을 아니, 대대를 이끌고 가라.”
“그리하겠…….”
대답하던 신관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샤를리나 님.”
“저도 가겠어요.”
“무슨―”
“그 계집애, 제가 가서 데려와야 그럴듯한 연출이죠. 안 그래요?”
대사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비죽 입꼬리를 올린 샤를리나를 쳐다봤다.
“흐음…….”
그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세니아나 프렌시프, 그 계집애 하나에게 얼마나 당했던가.
‘샤를리나가 직접 간다면 표정이 볼 만하겠는걸.’
“그래. 샤를리나, 네가 성녀를 신전으로 데려와라.”
대사제가 그녀에게 짙은 감색의 작은 보석을 건넸다. 이전 세기에 존재하던 성녀의 마원이었다. 세니아나의 마원처럼 성수가 담겨 있지도 않고, 주인이 아닌지라 흑마법을 통해 개량할 수밖에 없어서 목적지가 신전으로 한정되어 있지만 마원은 마원.
‘이번 일만 넘기면 다시 나를 성녀로 대접해 주겠다는 거야.’
마원을 쥔 샤를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두고 보라지. 그 망할 계집애에게 제가 당한 만큼, 아니, 그보다 수천 배 더 고통스럽게 만들어 줄 테니까.
‘이제 더는 아무도 나를 무시하지 못할 거야.’
프렌시프의 진정한 주인이 세상을 호령할 일만 남았다. 샤를리나와 성기사단, 그리고 신관 마레농은 함께 프렌시프로 떠났다.
프렌시프 북문 앞에 도착한 샤를리나가 우후훗,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인걸.”
“감회가 새롭겠습니다, 성녀님.”
“물론.”
손끝으로 성벽을 매만지던 그녀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이제야.’
샤를리나는 성벽 앞의 병사를 향해 소리쳤다.
“아버지께 전해. 진짜가 돌아왔다고!”
그녀의 말에 병사들 사이에서 가웨인이 걸어 나왔다. 근사한 얼굴엔 곳곳이 상처로 가득하고, 얼마나 궁지에 몰린 건지 숨이 거칠었다.
“오랜만이에요, 오빠―라고 하는 건 이상하려나.”
“…….”
“그렇지만 성에서 뵈었긴 해도 본래 이름으로는 정말로 오랜만이니까.”
그녀는 제 가슴을 손끝으로 꾹 짚으며 말했다.
“가짜로 인해 도래한 절망에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어요. 하지만 대사제께서 말씀하셨답니다.”
“…….”
“신께선 프렌시프의 몰락을 아직 바라지 않으신다고.”
그녀가 천천히 가웨인에게 다가갔다.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프렌시프를 구원해 드릴 테니. 자, 가짜를 내어 주세요.”
샤를리나가 손을 뻗었다.
“쏴라!”
가웨인이 소리치자 성벽 위에서 화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컥!”
아탈란의 성기사들이 단말마와 함께 주저앉았고, 샤를리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무, 무슨……!”
신관 마에농도 크게 놀라 소리쳤다.
“삿된 자들이 두렵지 않은 거요?”
그때였다.
“이걸 말하는 거야?”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또 한 번 성벽에서 무언가 쿵! 떨어졌다.
‘삿된 자!’
그것도 한 구가 아니었다. 연이어 성벽 주변으로 삿된 자들이 떨어졌다.
“무, 무슨……!”
자그마치 여섯 구.
‘누, 누아제는!’
그러고 보니 누아제, 그러니까 검은 인간들이 보이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세니아나를 노려보던 찰나 성벽 위의 그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난 여기에 있어.”
샤를리나의 눈앞에 나타났다.
“너, 너, 어떻게…… 어떻게 삿된 자들을!”
신관 마에농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소리치며 손을 뻗자 세니아나는 단숨에 그의 배를 꿰뚫었다.
“커헉!”
그가 무릎을 꿇으며 무너졌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세니아나에게 겁먹은 샤를리나가 주춤 뒷걸음질 쳤다.
“신전의 위치를 대.”
세니아나는 검을 내팽개치고 샤를리나의 멱살을 쥐었다.
“내가 지금 대사제의 목, 분지르러 가야겠으니까!”
샤를리나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저 눈은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날 죽이려는 거야.’
엄습한 죽음의 공포가 폐부를 꽉 옥죄였다.
* * *
“뭐라고?!”
대사제가 소리치자 신관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러니까 연락이…… 마에농 님과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샤를리나는? 그 애와도 연락이 닿지 않는 게냐!”
“예.”
프렌시프 령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아냐, 그럴 리 없다.’
누아제를 일백 구(具)나 내려보냈고, 그중 마차를 덮친 여섯을 포함해 총 열두 구나 삿된 자가 되었다. 대륙 전쟁에도 이만한 수의 삿된 자가 동원되진 않았다.
‘프렌시프에서 그 많은 수의 누아제와 삿된 자를 물리쳤을 리 없다.’
그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 벅찰 텐데, 성기사들까지 대동하고 간 샤를리나와 마에농을 당해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프렌시프에 타개책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이한 위화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프렌시프에선 따로 연락이 없느냐?”
“아탈란 쪽에도, 황실에도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빌어먹을!”
대사제가 의자의 팔걸이를 내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당장 프렌시프에 사람을 보내.”
“예.”
“그리고…….”
초조한 표정으로 마른세수를 하던 대사제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신전을 정리해라.”
“정리라 하시면……?”
“감옥의 노인네와 프렌시프의 버러지들 말이다.”
신관들은 고개를 숙인 후, 즉시 지하 옥사로 내려갔다. 수위장은 난데없이 몰려든 신관들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베리우스는 숨이 끊어졌느냐?”
“아직인 듯하지만…… 에단 님께서 다녀가셨으니 곧…….”
“에단? 흥, 알아서 어련히 죽여 줄 텐데.”
신관이 비죽 입꼬리를 올리자 수위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분의 사정을 아시잖습니까.”
“에단이 안쓰러워 옥사의 문을 열어 주었다고? 헛소리! 가브리엘라 때문이겠지! 네놈이 허튼 감정에 취했다는 걸 모를 줄 알아!”
신관이 소리치자 수위장은 커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수위장을 밀치고 옥사로 들어갔다. 신관들의 등장에 놀란 가신들이 나베리우스를 감싸며 “썩 꺼져라, 이놈들!”, “어르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하고 소리쳤지만 이내 성기사들에게 제압당했다. 옥사 안으로 들어간 신관이 미간을 좁혔다.
“뭐야.”
“늙은이의 숨이 끊어졌습니까?”
“아니…….”
옥사에 던져 주기 전보다 상태가 나아졌다. 고문으로 흉하던 피부에 새살마저 돋아 있었다.
‘무슨 조화란 말인가.’
에단과 가브리엘라 남매는 미아의 일로 프렌시프에 유감이 많다고 들었다. 특히 에단은 프렌시프의 문장만 봐도 길길이 날뛰던 사내였는데, 어째서 그가 다녀가고도 이렇게 멀쩡하단 말인가.
‘멀쩡할뿐더러 마치 치료를 한 것처럼…….’
신관이 눈을 가늘게 떴을 때였다.
“헉!”
누군가 숨을 크게 들이켰고, 고개를 돌리던 신관의 목 아래로 검이 들어왔다.
“누, 누구―”
“어르신 몸에서 손을 떼라.”
“당신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검을 들이민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신관과 프렌시프의 가신이 눈을 홉떴고, 그제야 눈을 뜬 나베리우스가 쇳소리와 함께 중얼거렸다.
“도…… 미니크 황자…….”
“무사하십니까.”
“……세니아나는?”
“곧 올 겁니다.”
“왜 황자가 먼저 온 겁니까…….”
“황족만 사사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라서요.”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는 간 큰 두 남자를 본 가신들이 긴장했고, 신관들은 틈을 엿봤다.
‘나베리우스가 살아 나가서 증언하면 우리는 끝이다.’
신관이 소매에서 은밀히 단도를 꺼내던 순간이었다. 스겅―! 신관의 목 아래로 툭, 투둑, 핏물이 떨어졌다.
“말하지 않았나. 쓸데없는 짓 말라고.”
순식간에 급소를 베여 쓰러진 신관을 본 수위장과 성기사들이 검을 말아 쥐었다. 그러자 다른 신관들이 소리쳤다.
“조율자다!”
“상한 곳 없이 제압해!”
가신들과 나베리우스의 앞을 막아선 도미니크가 이죽거렸다.
“이런, 저는 날뛰어도 죽이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하면 저희를 버리고 가시렵니까.”
나베리우스가 흥, 코웃음 치며 묻자 가신들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저, 저하!”
“살려 주십시오…….”
검을 말아쥔 도미니크가 기사들과 대치하며 물었다.
“살려 드리면 무엇을 해 주시겠습니까.”
“뭐, 뭐든. 뭐든지요!”
나베리우스가 “이놈들이…….” 못마땅한 얼굴로 가신들을 보았지만, 도미니크는 입꼬리를 바짝 올렸다. 챙! 수위장의 검과 도미니크의 검이 맹렬하게 부딪쳤다.
그 시각, 아탈란의 신전에 프렌시프의 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한순간에 아비규환이 된 신전에선 신관들의 비명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짓……! 신이 두렵지도 않으냐!”
“지금 너희가 두려워해야 할 건 달리 있을걸.”
빈정거린 기사 바커스가 등 뒤를 힐끗 쳐다보았다.
“우리 아가씨가 단단히 화나셨거든.”
굳은 표정의 세니아나가 성큼성큼 신전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성녀!’
샤를리나의 멱살을 질질 끌고 들어온 세니아나는 신전 한복판에 그녀를 내던지며 소리쳤다.
“대사제에게 전해. 너희들이 그토록 원하는 내가 왔노라고.”
“알고 있습니다.”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하얀 로브를 뒤집어쓴 노인이 휘장 뒤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로브를 천천히 끌어내린 그가 허리를 굽혔다.
“성녀님을 뵙습니다. 인사드리지요.”
“당신인가, 대사제가.”
“그렇습니다. 제가 마르스 한, 서른세 번째 신의 대리자입니다.”
그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 * *
마르스 한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대사제는 겉으로 보기엔 우아한 노인이었다. 할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임에도 등 하나 굽지 않고, 풍채가 남다르며 기이한 위압감이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대단도 하네. 이곳이 본거지일 줄은 몰랐어.”
“때론 등불 아래 그림자가 가장 안전한 법이니까요.”
“그래서 다른 신의 신관을 행세하며 아탈란을 모시고 있었나. 그것도 동부의 별궁에서!”
아탈란의 본거지는 내가 황후와 황비를 처음 만났던 동부 별궁이었다. 제국의 모신 타라신의 신관으로 분장하여 이곳에서 아탈란을 숭배하고 있던 것이다.
‘처음부터였어.’
내가 ‘세니아나의 몸’을 되찾은 순간부터 그들은 내 주변을 맴돌고 있었던 거다.
‘황후가 나를 동부 별궁으로 부른 것도 저들이 죽은 카렌듈라 후작에게 입김을 불어 넣었기 때문이구나.’
저들이 지금껏 얼마나 내 인생을 쥐고 흔들었는지 깨닫게 되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할아버지를 어떻게 했어.”
“저부터 질문하지요.”
그는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어떻게 삿된 자들을 물리친 겁니까? 어떻게 그 많은 누아제를 물리치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거죠?”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어?”
내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자 대사제의 표정에 균열이 생겼다.
“……맹랑하기도 하셔라.”
“지금 당신이 물을 건 하나야.”
“무엇입니까.”
“내가 당신을 죽이는 게 지금일지, 아니면 내일일지.”
대사제의 표정이 그제야 완전히 굳어졌다. 입매를 비튼 그가 나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삿된 자 몇 마리와 누아제 몇십을 상대했다고, 나를 완전히 이겼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그가 흘흘, 웃으며 양팔을 활짝 펼쳤다.
“이곳에 총 몇 구의 삿된 자와 누아제가 있을까요.”
“…….”
“저는 이 제국 각지에 몇이나 되는 삿된 자와 누아제를 숨겨 두었을까요?”
그와 시선을 마주치며 나 또한 생긋 웃었다.
“누아제라면 검은 인간을 말하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 누아제, 몇 구나 삿된 자로 만들 수 있어?”
“뭐라고요?”
“완전히 삿된 자로 만들지 않고 누아제로 만들어 보관하는 이유가 뭐지?”
“…….”
“난 바보가 아니야.”
“…….”
“너희들, 삿된 자들을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거지?”
“…….”
“그래서 일부러 누아제 상태로 사람들을 억누르는 거잖아.”
“……빌어먹을 년이 입만 살아서.”
“너희는 그 빌어먹을 년의 능력이 무서워서 지금껏 시시한 뒷공작으로 나를 황실에서 쫓아내려고 했잖아.”
“……뭐?”
“나한테 누아제를 정화할 능력이 있는 거,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줄 알았어?”
대사제가 희게 질린 얼굴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때마침 신전 밖을 정리한 아빠와 란슬롯, 가웨인, 그리고 우리 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프렌시프 군이 거무죽죽한 얼굴로 주춤거리는 신관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대신관은 로브 안에서 일전에 누아제를 제압하던 신관이 가진 것보다 짙은 자수정을 꺼내 들어 올렸다. 신전이 크게 진동하며 발끝에서부터 기묘한 진동이 웅웅 울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새카만 인간들이 신전을 둘러쌌다. 대사제가 비열한 얼굴로 소리쳤다.
“네가 누아제를 정화하는 동안 프렌시프의 군사들이 몇 명이나 살아 있을까! 네가 그리 사랑하는 네 가족들 중에 살아남는 사람은 누구일까!”
내가 겁을 집어먹었다고 생각했는지 대신관의 눈빛이 점점 오만해졌다. 난 아하하, 웃고 고개를 삐딱하게 젖혔다.
“그럼 죽지 뭐.”
“뭐라고?!”
“아빠와 오빠가 죽으면 나도 따라가면 그만이야.”
란슬롯과 가웨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 세니아나, 너!” 가웨인이 소리쳐서 난 그의 입을 얼른 틀어막고 대사제를 보았다.
“난 우리 가족이 없는 세상에 미련이 없거든.”
“허세 부리지 마라.”
“내 첫 기억이 뭔지 알아?”
“무, 무슨…….”
“한겨울에 내의만 입고 눈 쌓인 담벼락 밑에 쪼그려 앉아 있던 거야.”
“……!”
“친부라고 믿었던 남자에게 어릴 적부터 셀 수 없이 맞았어. 그 남자가 도박하러 떠난 며칠 간은 굶주리다가 쓰레기통을 뒤져서 개중 성한 음식을 찾아 먹어야 했지.”
“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처음 읽은 글자는 ‘분리수거함’이었어.”
“뭐?”
“거기서 빈 병을 훔쳐 와 팔아야 하니까 어디 있는지 찾아놔야 했거든. 돈을 벌 줄 알면 아빠가 날 버리지 않을 것 같아서.”
“…….”
“하지만 기어이 버려졌어. 그래서 난 아직도 무서워, 누군가에게 귀찮은 대상이 되는 게. 버려질 것 같으니까.”
대사제는 거짓을 찾으려는 것처럼 내 면면을 살폈다.
“그런 내가 겨우 진짜 가족을 찾았어.”
“…….”
“난 매일 잠에서 깨는 게 무서워. 눈을 뜨면 다시 눈 내리는 담벼락 아래일까 봐. 죽어서 지옥 불에 떨어져도 좋으니까, 가진 걸 다 털어서라도 보답할 테니까 제발 하루라도 더 이곳에서 살게 해 달라고 빌었어.”
난 가라앉은 눈으로 대사제를 직시했다.
“그런 내가 뭘 못 할 것 같은데.”
가웨인의 검을 빼앗아 스스로 목에 검 끝을 겨누었다.
“너희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이거지. ‘의식’ 전에 내가 죽는 것.”
“너, 너―!”
“날 더 자극하지 마. 확! 죽어 버리기 전에!”
목에 검을 바짝 붙이자 쓰라린 감각과 함께 피가 툭, 툭 떨어졌다.
“그만!”
새파랗게 질린 대사제가 소리쳤다. 그는 이를 악물며 수정을 내려놓았다. 금방이라도 “키에엑!” 소리치며 달려들 것 같던 누아제들이 조금씩 신전에서 멀어졌다. 가웨인은 기가 막힌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소리쳤다.
“뭐 해요!”
“뭐?”
“잡아!”
내가 소리치자 군사들이 달려들었고, 동시에 고레일이 “아가씨, 여깁니다!” 소리쳤다.
“옥사로 가는 길입니다! 어르신께서 밑에……!”
나는 얼른 고레일에게 달려갔다. 저들의 수법은 어찌나 음험한지, 한쪽 벽면을 차지한 만찬의 그림 뒤에 통로를 숨겨 두었다. 난 기사들과 함께 얼른 옥사로 달려갔다.
‘할아버지는 무사하실 거야.’
몇 번이나 자신을 세뇌하듯 말했지만 손이 덜덜 떨렸다.
‘도미니크를 보내 놨잖아.’
조율자인 그라면 나와 같이 신관들이 손댈 수 없는 존재다. 공격받지 않고 할아버지를 지켰을 거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계단을 내려가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끝없는 어둠 속에서 홀로 헤매는 기분이었다. 지하에서 할아버지의 주검과 마주할까 봐 너무 두려워서. 옥사 앞에 다다르자 온몸이 벌벌 떨렸다. 창살 안엔 익숙한 가신들이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모두 침통한 얼굴이었다.
“아가씨!”
“……버지는?”
“괜찮으십니까?”
“할아버지는요?”
그들이 천천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가신들의 사이에 있던 도미니크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도 말이 아니었다. 그가 어두운 얼굴로 부축하고 있던 사람을 바라보았다.
쿵! 심장이 발밑으로 꺼지는 기분이었다. 늦어 버린 걸까.
“할아버지…….”
“…….”
“할아버지.”
“…….”
“할……!”
“……아직 귀가 멀지는…… 않았어.”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에 힘이 빠졌다.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았다.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숨을 고르자 놀란 할아버지가 다가왔다.
“세니아나!”
“……랐잖아요.”
“으응?”
“놀랐잖아요!”
난 으허엉! 울며 내게 다가온 그의 가슴을 퍽! 퍽! 내리쳤다. 그런데…….
“왜 웃어요!”
나는 잔뜩 화가 나서 소리쳤다.
“아니, 커흠!”
그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그리 할애비 걱정을 했느냐?”
“당연하죠!”
“오냐, 오냐.”
“웃지 마시라니까요?”
원망스럽게 보면서 히끅히끅 우는 데도 할아버지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픽픽 실소를 흘릴 뿐이었다.
“으하하! 보아라. 내 새끼 얼굴이 아주 우스꽝스럽구나. 귀엽지 않으냐~?”
가신들도 기가 막힌 얼굴이었다. 난 이제껏 마음 졸인 게 억울하고 화가 났다.
“이게 뭐예요! 제가 얼마나……!”
“할애비는 괜찮아.”
“…….”
“내 새끼가 괜찮으면 난 늘 괜찮아.”
“씨이……. 얼굴이 저보다 더 상하셨잖아요. 상처가 가득해요.”
“상처는 남자의 훈장이지.”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는 사람이, 악질 중의 악질이라는 노인은 나를 보면 늘 해맑게 웃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나를 사랑한다고. 한평생 쌓아온 명예 같은 건 나를 향한 애정 앞에선 모래성이라 여기며.
“사랑해요, 할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퉁퉁 부어 잘 떠지지도 않는 충혈된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래.”
“저 할아버지 많이 사랑해요.”
“그래, 그래.”
애정에 답하는 법이 고작 이런 대답뿐인 나의 할아버지.
“내가 오늘을 위해 살아 온 모양이군.”
“그게 뭐예요.”
내가 히히 웃자 할아버지가 나를 감싸 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이렇게나 잔뜩 다쳐 놓고도 내가 우선인 나의 할아버지.
나는 후회했다. 애정의 말을 미뤄 둔 것을. 사랑한다는 한 마디가 그의 인생에 이토록 다정한 온기가 될 줄 알았더라면 더 많이, 더 이전부터 말할 것을. 그리고 결심한 것이다. 다시 얻은 기회에 감사하며 더 많이, 더 오래 사랑한다고 표현하자고.
나는 할아버지의 품에서 훌쩍훌쩍 울다가 문득 느껴지는 묘한 기분에 그의 팔을 얼른 잡았다. 그리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성식을 드셨어요?”
팔 안쪽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기이한 색과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래.”
“어떻게! 대사제가 억지로 먹인 건가요?”
그러자 “그게 아닙니다, 아가씨.” 하고 가신이 나섰다. 그는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가브리엘라 황비와 에단이 할아버지를 도왔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야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기가 좋았네.’
이제 누아제를 정화시킬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할아버지를 부축했다. 그런데.
쾅―!
“으아악!”
“꺄악!”
굉음과 함께 벽과 바닥이 크게 흔들렸다.
“뭐야……!”
위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나는 기사들에게 할아버지의 부축을 부탁하고 얼른 위로 뛰어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매캐한 연기가 코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사선으로 이어진 세 개의 제단 가운데서 희뿌연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제단 가까이 있던 군사들은 몸 곳곳에 화상을 입고 신음했다.
“무슨 일이에요!”
내가 소리치자 쯧, 혀를 찬 가웨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사제와 신관들이 사라졌다.”
“어떻게요? 그들은 포털도 없을 텐데요.”
“있던 모양이지. 우리가 모르― 무슨 소리지.”
우르릉! 땅이 울리고 천장이 크게 진동했다. 지하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할 무렵 벽면에 균열이 생기더니 이내 콰광―! 요란한 소리와 함께 파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피해! 무너진다!”
우리는 정신 없이 신전을 빠져나갔다. 다행히 지하에 있던 가신들과 할아버지까지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별궁의 신전은 폭삭 주저앉아 과거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빌어먹을.”
신전의 잔해를 둘러싼 병사들 사이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이제 어찌합니까.”
바커스가 묻자 아빠는 가라앉은 얼굴로 신전에서 끌고 나온 사람을 쳐다봤다.
“아직 하나, 남아 있지.”
샤를리나. 그녀가 흠칫 놀라 나와 아빠의 시선을 피했다.
* * *
프렌시프 성.
세니아나가 연 포털로 귀성한 이들은 가족이며 연인, 이웃과 뜨거운 포옹을 나누고,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아가씨.”
“아가씨!”
“돌아오셨습니까.”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사용인들이며 가신, 마담 버지니아와 알렉시아가 그녀의 귀환에 감사했다.
“다들 괜찮은 거야?”
“저희야 물론. 아가씨께서 지켜 주셨으니까요.”
프렌시프의 함락을 막은 일등 공신이 세니아나라는 점에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버지니아는 무사히 돌아온 세니아나를 다행이라는 듯 끌어안았다. 성을 지키고 있던 가신들도, 영지를 방어하기 위해 검을 든 자들도, 아탈란의 신전에 끌려갔던 자들까지 모두 세니아나를 감싸고 다정히 웃었다. 주변으로는 사용인들과 가신들이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병사들에게 제압당한 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샤를리나가 이를 악물었다.
“너와 내가 뭐가 다르기에.”
짓씹듯 중얼거린 말에 성안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
세니아나는 표정을 굳힌 채로 그녀를 쳐다봤다.
“날 그렇게 쳐다보지 마.”
“어떻게?”
“벌레 보듯 하지 말란 말이야!”
샤를리나가 악을 내지르자 그녀를 보던 이들이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저, 저―! 어디 아가씨께 감히 소리를 쳐!”
“더러운 아탈란의 졸개!”
“가짜 성녀!”
“이 악독한!”
“죽여라!”
“죽여라!”
힐난의 말이 쏟아지자 샤를리나는 새빨개진 눈으로 세니아나를 쳐다보았다.
“저 계집애와 내가 뭐가 다른 거야……. 너희는 다 속고 있는 거라고……!”
세니아나는 미아와 아서의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모든 것을 차지했다. 이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저보다 나을 것 하나 없는 저 계집애가 차지한 그 자리. 그 자리 하나를 위해 제가 지금껏 무슨 짓을 강요받고, 험한 세월을 어떻게 견뎌 왔는지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자리를 위해 애쓴 건 나인데, 그런데 왜.
고개를 푹 수그렸던 샤를리나가 짓씹듯 말했다.
“……빠.”
“…….”
그녀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아서와 그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본 아서는 미간을 좁혔다. 그는 저 눈을 본 기억이 있었다. 딸의 모습과 악귀가 겹쳐 보였을 때.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샛노란 드레스 자락을 양손으로 말아 쥔 채 꼭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보며 말했다.
“아빠.”
―하고.
당황한 표정의 가웨인과 굳은 란슬롯이 서로를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샤를리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가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
“내가 조금 투정을 부려도 나를 이해해 줘야 하잖아.”
“…….”
“가족은 그런 거니까.”
“…….”
“내가 화를 내고 소리쳐도, 나를 마냥 예뻐해 주고 내 쉼터가 되어 줘야 하잖아요.”
치맛자락을 말아 쥔 손이 희게 질려 바르르 떨렸다. 처음 세니아나가 되었을 적을 기억한다. 고통 끝에 다시 눈을 떴을 땐, 프렌시프의 왕으로부터 물려받은 청녹발과 여린 적안이 자신의 것이었다. 그저 밉기만 했던 그 아이가 거울 속에 비쳤던 그때를, 샤를리나는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때만큼 환희에 찼던 적이 없으니까.
‘나도 가족이 있는 거야.’
동부를 호령하는 할아버지. 아름다운 아버지. 다정한 큰 오라버니와 장난기 많지만, 속은 따뜻한 작은 오라버니까지. 밥투정을 한다고 혼낼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눈부신 드레스를 입고 동화책에 나오는 공주님의 구두를 신고,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의기양양 뽐낼 날만이 있다고 믿었다. 아서의 눈을 보기 전까지.
[너, 누구냐.]
그는 ‘아빠’하고 부르는 자신의 어깨를 아프게 쥔 채 사납게 소리쳤다. 내 딸은 어디 있느냐고. 그 아이를 어떻게 한 거냐고.
[아서!]
[아버님, 그만 하세요!]
할아버지와 란슬롯이 뜯어말리고, 겁을 먹은 가웨인이 저를 끌어안았지만, 아서는 미친 사람처럼 악을 내질렀다.
[내 딸을 돌려줘!]
세니아나, 세니아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계집애의 이름이 싫었다. 미아의 속박 같아서.
그가 자신을 알아본 그날, 얼마나 두려웠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린 채 한참을 떨었다.
모두 알아차리면 어쩌지. 내가 한 짓을 저들이 알아차리면 난 어떡하지.
실핏줄이 자글자글 터진 새빨간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미아,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고통에 몸부림치다 쓰러지길 반복한 세니아나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니야.’
아냐. 아냐. 아니야.
‘난 잘못하지 않았어.’
대사제는 말했다. 아서 프렌시프는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라고. 그러니 곧 자신을 받아들일 거라고. 그의 다정한 속삭임에 안심했던 것도 잠시였다. 자신을 멀리하는 건 아서 뿐만이 아니었다. 란슬롯과 가웨인도 어느 순간부터 점점 저를 멀리했다.
[어디 가? 나랑 놀아 줘야지.]
[난 오늘 승마 수업이 있다니까. 스승님이 얼마나 귀찮게 하는지 알아? 말을 한 몸처럼 여기려면 정이 들어야 한다고 여물도 내가 직접 주라고 한단 말야. 그런데 아냐? 이벨린은 내가 준 여물밖에 안 먹는다? 참, 귀찮게 됐지 뭐야.]
[안 가도 돼.]
[뭐?]
[이제 그 말, 없으니까.]
가웨인은 헐레벌떡 마구간으로 뛰어갔지만, 말이 떠나고 남은 자리만 허망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벨린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화를 내? 오빠가 그 말이 귀찮다고 했으면서. 그래서 내가 치워 준 거잖아!]
란슬롯은 그런 자신에게 훈계했다.
[이벨린은 가웨인이 아끼는 말이야. 동생처럼 여기는……!]
[동생이 여기 있는데 동생처럼 여기니까 그런 거지.]
[너…….]
[내가 동생이잖아! 내가!]
떼를 쓰고, 응석을 부리고, 화를 내게 만든 건 그들이었다. 원한 만큼 사랑해 주지 않았으니까. 모든 걸 다 버리고, 이따금 이불 속에 숨어 덜덜 떨면서까지 세니아나가 되었는데 그 애처럼 사랑해 주지 않았잖아.
“나는 그냥…… 그냥 아빠가 나를 다정하게 봐 주길 바랐다고요.”
“…….”
“오빠들이 나를 사랑해 주길 바란 것뿐이란 말이야.”
아서는 가만히 그녀를 쳐다봤다.
“‘그 애’구나, 너.”
“……!”
샤를리나의 눈에 또 한 번 환희가 깃들었다.
기억하는 거지? 그렇지? 세니아나처럼. 세니아나를 기억했듯이.
“맞아요, 아―!”
그녀가 환히 웃던 찰나였다.
“컥!”
순식간에 다가와 샤를리나의 멱살을 잡은 가웨인이 소리쳤다.
“너냐.”
“오…… 컥!”
“내 동생의 인생을 훔친 계집애가 너란 말이지.”
놀란 이들이 가웨인을 부르며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
“저 계집은 아탈란이 범한 죄의 증거예요!”
“주군!”
“이거 놔!”
가웨인이 충혈된 눈으로 샤를리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고작 네 살짜리였어! 네 살배기 어린애가 굶어 죽지 않으려고 쓰레기통을 뒤지고, 친부라 믿던 작자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얻어맞았다고!”
포털의 충격으로 잠시 어린애가 되었던 세니아나를 기억한다. 물 한 잔 얻어 마시지도 못하고 구석에 웅크려 눈치만 보았다. 화장실이 가고 싶어 얼굴이 샛노래졌으면서도 때릴까 봐, 맞을까 봐 무서워 한마디를 못 했다.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그 어린애가 폭력에 익숙해져서, 어리광부리는 법보다 참는 게 익숙해서. 하루가 멀다 하고 굶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얼어 죽을까 헌옷더미에서 실밥이 다 터진 낡은 외투를 끌어안은 채.
“너 때문에!”
“나, 나도 노력했을 뿐이야. 나도…… 나도 부모 없는, 불쌍한 아이였단 말이야.”
흥분한 가웨인을 한 팔로 가로막은 아서가 표정 없는 얼굴로 샤를리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을 노력이라고 부르나.”
“……그건!”
“약탈이지.”
“…….”
“죽을죄고.”
“나도 어렸다고요. 나도 아탈란에게 이용당했을 뿐이에요. 난 그냥, 사랑이 필요한 어린애였어요!”
병사들을 뿌리친 샤를리나가 아서에게 달려갔다.
“나도 고작 일곱 살이었단 말이에요. 그렇게 어린애 앞에 거짓말처럼 달콤한 것들이 놓여 있었단 말이야.”
샤를리나는 온 얼굴을 적시며 울부짖었다.
“나도, 나도 무서웠어요. 내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알아요? 세니아나만 어렸던 게 아니에요. 왜 내가 힘들었던 건 생각해 주지 않아요. 저 애만―! 나도 아이였는데!”
“지금은 아니지.”
“…….”
“어린애가 아닌 지금도 너는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어.”
“나는…….”
그때, 사람들을 비집고 사용인에게 부축받은 채 성의 집사 안토니오가 다가왔다.
“샤를리나.”
“……!”
그는 샤를리나가 하녀의 딸이었던 시절, 그녀를 보살핀 전대 총집사 알베르토의 동생. 알베르토와 같은 얼굴로, 몹시 비슷한 목소리로 그는 샤를리나를 쳐다봤다.
“너, 마리의 딸이구나.”
“어떻게…….”
알베르토는 죽었다. 자신을 세니아나로 알고 아탈란에게서 지키기 위해서. 그 시절의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모두 죽었다. 그녀가 본래의 이름을 쓴 건 과거를 기억하고, 돌아가고 싶지 않거든 아탈란에 충성하라는 대사제의 강요가 있었기도 하지만,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마리?”
“마리의 딸이라고?”
“샤를리나!”
“그 애 말이지, 누나가 챙기던!”
사용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성의 사용인들은 선대에 선대, 선대를 이어 프렌시프를 모신 이들이었다. 샤를리나를 직접 보살핀 사람은 없었으나 죽은 가족이, 친척과 이웃이 챙기던 아이가 있다는 것은 기억했다.
“누나가 살뜰히 보살피던 아이였어.”
“할아버지가 마음 쓰던 아이였지. 상점가를 지날 때마다 그 애를 생각해서 과자를 샀거든.”
“제프 아저씨가 귀여워하던 아이 말이지.”
“이모가 천둥이 칠 적엔 그 아이가 두려워할 거라며 휴일에도 성을 찾았어.”
사용인 숙소에서 지내던 아이. 붉은 머리칼을 가진 꼬마 숙녀. 모두 귀여워했잖아. 자식처럼 챙겼지.
사용인들이 하나둘 말을 보태기 시작하자 아서의 품에 안겨 있던 세니아나가 그녀를 쳐다보며 다가갔다.
“외로운 아이였다는 말이 얼마나 부끄러운 건지 스스로 깨달았으면 좋겠어.”
“잘난 척하지 마! 나도 너로 태어났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어. 내게 다정한 아버지와 나를 사랑하는 형제, 강인한 할아버지가 있었더라면……!”
“다른 세계의 나였더라면 너를 부러워했을 거야.”
“뭐?”
“내게는 죽은 동료의 자식에게 이토록 마음 쓰는 사람이 없었어.”
“…….”
“밥투정에 혼을 내놓고도, 마음이 쓰여서, 더 많은 걸 해 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살이 에일 것 같은 추위 속에서 하루 종일 구두를 고르는 집사 할아버지도―”
“……!”
“주방에서 크림을 훔쳤다고 매질 당해도, 숙소에서 기다릴 널 생각해 퉁퉁 부은 다리로 달려가던 하녀 언니도, 아무도.”
그 시절의 사용인들이 떠올랐다.
‘샤를리나.’
‘어쩌면 이렇게 예쁠까.’
‘귀여워.’
‘많이 먹고 쑥쑥 커라.’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아득히 멀어졌다. 샤를리나는 치맛자락을 꾹 말아 쥔 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가르치려고 하지 마. 어차피 전부 위선일……!”
“네가 부러웠던 게 정말 가족이었어?”
“…….”
“아니, 넌 프렌시프의 영애님이 되고 싶었던 거야. 동부 왕의 손녀가, 후작의 딸이.”
“너…….”
“비열하고, 악독한 어린애였을 뿐이라고. 그러니까.”
짝! 샤를리나의 뺨을 내려친 세니아나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대가를 치르도록 해.”
“뭐?”
“제대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너……?”
쿵, 쿵, 쿵, 쿵! 등 뒤에서 워커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샤를리나는 새파랗게 질렸다.
‘황군!’
“이거 놔!”
샤를리나의 비명이 영지의 성안에 메아리쳤다.
“내가 나쁜 게 아니야, 아빠! 아빠!”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소리치는 샤를리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마치 악귀를 볼 때와 진배없었다. 황군들에게 포박당해 꿇어 앉혀진 그녀의 앞으로, 모여 있던 이들이 홍해 갈라지듯 양쪽으로 나뉘었다. 그 사이로 나베리우스가 마담 버지니아와 칼립스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왔다.
“할아버지…….”
샤를리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자 할아버지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반백 년이 넘도록 살았지만 너와 같이 악독한 자를 보지 못했다.”
“난 열심히 산 죄밖에 없어요! 당신 핏줄만 온갖 금은보화를 끌어안고, 당신이 만든 황금탑 안에서 살 수 있다면 나도 당신 핏줄이 될 수밖에!”
“아둔하고, 처량하다.”
“그런 나를 손녀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어요. 할아버지…….”
나베리우스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샤를리나의 눈에 잠시 희망이 스쳤을 때였다.
“컥!”
“내 모든 명예와 남은 생을 걸고 단언하지.”
살이 떨리는 위압감이었다. 붉은 눈동자가 타오르듯 일렁였고, 목소리 곳곳엔 살기가 배여 있었다.
“훗날 너를 사랑하는 자, 혹은 네가 사랑하는 자가 생긴다면 늙은 것, 젊은 것, 어린 것 가리지 않고 도륙할 것이다.”
“흐…….”
“곁에 누구 하나 남지 않은 널 세상 끝까지 쫓을 터. 내가 두 눈 뜨고 사는 한, 내 자식이, 그 자식의 자식이, 내 피를 이어받은 자가 단 하나라도 존재하는 한 너는 필사적으로 도망쳐야 해.”
“…….”
“피죽도 얻어먹지 못하고, 아사의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걸어야 할 거야.”
“…….”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도록!”
성안의 고요가 노성에 의해 찢어 발겨지고, 나베리우스의 목엔 핏줄이 굵게 돋아났다.
“나를, 내가, 손녀로 어여뻤던 시절이 있었을 거예요. 단 하루라도!”
“너를 사랑한 적 없어. 단 하루도.”
샤를리나와 나베리우스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 들었다. 그가 다시 몸을 일으키며 읊조렸다.
“몹시 다행인 일이지.”
희망 한 줌 남기지 않은 완벽한 부정이었다.
* * *
샤를리나는 황군에게 끌려가고, 우리는 폐허가 된 영지에 불을 밝혔다. 혹독했던 밤이 지나고, 빛과 함께 남은 건 무너진 건물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니아나.”
“…….”
“세니아나.”
멍하니 성 아래를 내려다보던 나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았다.
“네?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란슬롯과 가웨인이었다.
“그냥…… 그냥요.”
삿된 자들로 인해 망가진 영지를 보자니 마음이 아프다.
‘너무 약한 것 같아, 나.’
나는 영주의 가족이고, 프렌시프 령을 책임질 사람 중에 하나다.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진 만큼 책임감도 막중해서 아수라장이 된 영지를 보니 괴로웠다.
“폐하께 친서가 왔다.”
“할아버지와 아빠에게요?”
“프렌시프 모두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오빠들을 따라갔다. 귀빈 접견실에 이르자 황제의 성지를 받든 사자와 그 아래 무릎을 굽힌 할아버지와 아빠가 보였다.
‘할아버지…… 몸도 좋지 않으신데.’
내가 걱정하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오빠들이 등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사자에게 턱짓했다. 나는 오빠들과 함께 아빠와 할아버지 뒤에서 함께 무릎을 굽혔다. 사자가 황제의 성지를 읽기 시작했다.
“프렌시프 령에 일어난 흉사에 참담한 마음 감출 길이 없노라.”
영지에 일어난 사건에 관련하여 몇 마디 위로를 전하고, 삿된 자와 관련해서는 즉시 조사에 임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영화에 나오는 ‘전쟁 후의 황제의 위로’ 같은 건 줄로만 알았다.
“영지를 수비한 세니아나 프렌시프의 공을 치하하는 바, 로열 키친에서 중앙군 수비대로 이동을 명한다.”
뭐라고? 가족들의 표정이 굳어졌고, 나는 눈을 홉뜬 채 사자를 쳐다봤다.
“중앙 수비대로 이동이라니요?”
내가 묻자 사자는 오만하게 웃었다.
“제국의 아버지 폐하께서 영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도록 배려해 주신 게지요.”
배려라고? 이건 배려가 아니라 강압이다.
‘그렇구나.’
삿된 자들을 몰아낸 게 모두 내 공인 줄 아는 거야.
대륙 전쟁의 몇 배나 되는 삿된 자를 영지의 인력만으로 처리한 게 꺼림칙한 거다. 프렌시프의 힘이 황궁을 넘어선다고 생각한 황제가 이번 일의 중심인 나에게 수비군 감투를 씌워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말도 안 돼!”
가웨인이 버럭 소리쳤다.
“폐하의 성지 앞에서 말을 가리시오.”
사자가 눈을 부라리자 가웨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로열 키친의 셰프는 일반 궁인과 다릅니다. 특별 입관자라고요! 이제껏 파트가 이동되는 경우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폐하께서 영애를 아끼신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어허!”
사자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제국의 아버지께서 명하신 바요. 자식 된 도리를 잊지 마시오!”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 란슬롯마저 차게 식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자는 다시 입꼬리를 끌어당기고 할아버지를 향해 성지를 건넸다.
“프렌시프 령의 영주는 성지 앞에 절하고 제국의 아버지께서 내린 명을 받드십시오.”
성지와 함께 온 황궁의 사자들과 군사들은 오만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금좌 11석의 수장이며 동부의 왕이라도 제국 황제에게 항명할 수 없으리라 여긴 것이다. 할아버지의 눈썹이 꿈틀거리던 찰나, 나는 입을 열었다.
“그렇지요. 폐하께선 제국의 아버지시고, 우리는 모두 그분의 자식이지요.”
“과연 영민하십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선 자식이 위험할 때 어디에 계셨나요?”
“……뭐라고요?”
“이 많은 자식이 죽어갈 때, 아버지께서 무슨 일을 하셨어요?”
잠깐 얼이 빠진 얼굴로 날 보던 사자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버럭 소리쳤다.
“영애! 그 무슨 무엄한―!”
“황궁의 사정도 이해는 갑니다. 너무 빠르게 전투가 진행되어 황군을 보낼 시간이 없었던 거겠지요?”
사자는 큼, 헛기침을 하고 “당연히―” 중얼거렸지만, 나는 바로 말을 끊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침, 우연히! 전투가 끝나자마자 황군을 보내신 걸 테고요.”
“그, 그건…….”
“제게 포털을 열라는 말씀 한마디만 하셨어도 될 일이었으나, 수비를 지휘하던 제 정신이 사나울까 봐 전투에 집중하라 연락하지 않으신 걸 거예요.”
내가 순진한 표정으로 빈정거리니 사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마른침을 삼켰다.
“마음으론 몇 번이고 황군을 보내고 싶으셨겠지만, 다른 귀족들이 형평성을 운운할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요. 다른 곳에선 전투가 벌어져도 황군을 투입하지 않으니까.”
“…….”
“그러니까 무려 대륙 전쟁의 두 배가 넘는 수의 삿된 자들에게 프렌시프 령이 괴멸을 앞두었어도, 참담한 심정으로 황군을 이동하지 않으셨지요!”
가물가물한 얼굴로 날 보던 사자들도 내 원망을 읽고는 얼굴을 딱 굳혔다. 사자 중 하나로 온 클류어드 백작 부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앞에 나섰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말씀인지 아십니까.”
“압니다. 그래서 저는, 저 또한 폐하와 같은 참담한 마음으로 배려를 물려 주시길 청합니다.”
“……그 말씀, 그대로 전하지요.”
그녀가 엄포를 놓듯 말해서 난 산뜻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사자들이 돌아간 후 좀 전의 광경을 목격한 가신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어찌합니까. 황제가 노하면 아가씨는―!”
“섣부른 판단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속은 시원하였지 않습니까, 허허.”
인상 좋은 가신이 껄껄 웃자 다른 가신들이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공은 정말이지! 이 와중에 속 얘기가 나오십니까.”
“누가 감히 폐하께 그런 말을 전하겠습니까. 우리 아가씨나 되어야―”
“공!”
“진정하게, 자작. 나 또한 파비르 공에게 일견 동의하네.”
“그래. 속은 시원했지…….”
내심 황제의 명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던 모양인지 하나둘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불편한 몸으로 꽥 소리치셨다.
“정신 빠진 작자가! 전투 내내 관망하다가 내 손녀 능력이 제 생각보다 출중하니 빼앗겠다고 나서는 게지! 염려하지 마라, 세니아나! 이 할애비가 황제 멱살을―”
“쥐시면 안 돼요. 소리치셔도 안 되고요.”
내가 허리에 손을 바짝 붙이고 인상을 찌푸리자 할아버지는 시무룩해지셨다.
“칼립스.”
“예, 아가씨.”
“할아버지를 방으로 모셔 주세요.”
할아버지는 우울한 목소리로 “하지만…….” 하고 웅얼거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폐하는 제게 쉽게 손을 대지 못하실 테니까요.”
“어떻게……?”
“폐하께서 갑질을 하시면, 저라고 못할 건 없지요.”
“갑질?”
갑질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갑질이라니?”
나는 황제의 성지를 노려보며 흥, 콧방귀를 뀌고, 팔 한 짝과 다리 한 짝에 나란히 부목을 댄 파르뎅 자작을 불렀다.
“공.”
내가 손짓하자 그 또한 성지를 노려보고 씨근덕거리며 대답했다.
“예!”
“우리가 유통하는 보그의 값을 이제부터 일곱 배로 올리세요.”
“예, 예?!”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 되면 담합하여 구매하지 않겠다고 할 텐데요. 영지가 망가진 지금은 재물이 아주 많이 필요합니다, 아가씨.”
마담 버지니아가 날 달래듯 말했다.
“그래도 사게 될걸요.”
“어떻게요?”
“먼저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에겐 기존가의 여섯 배만 올리겠다는 말을 덧붙일 테니까요.”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난 벽면에 붙은 제국의 지도를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이제 포털 장사를 해야겠어요.”
“사비에르처럼 말입니까?!”
“네. 포털 이용료는 사비에르 영애의 반값이나 이용자는 내부 기준을 통해 심사합니다.”
“내부 기준이라고 하시면…….”
악랄한 표정으로 히죽, 입꼬리를 올린 난 쐐기를 박았다.
“제 마음에 드는 사람이요.”
내가 오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바짝 올리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가신들이 하나둘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마담 버니지아는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말했다.
“아가씨는 정말이지……. 어르신의 핏줄이 확실합니다.”
―하고.
* * *
“이런 고얀―!”
황제가 버럭 소리치자 프렌시프와 척을 진 귀족들이 얼씨구나 하여 그의 화를 돋웠다.
“폐하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겠다는 게 아닙니까.”
“방종한 계집입니다.”
“포털 하나 가지고 있다고 제가 또 다른 황제라도 되는 양 구는 꼴이……!”
황제가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알면 방도를 내시오, 방도를!”
“당장 중앙군을 프렌시프에 내려보내 방만한 성녀를 잡아들이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폐하!”
황제가 인상을 찌푸린 채 신경질적으로 다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게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잖소!”
“하, 하지만 성녀도 사람이 아닙니까. 그것도 어린 여자애입니다.”
“예, 폐하. 황명으로 잡아들이면 겁을 먹고…….”
“겁을 집어먹고 내 명을 따를 아이였다면 애초에 삿된 자들 앞에 나서지 않고 도망쳤겠지!”
“하면 프렌시프를 두고 거래를 하셔야―”
“삿된 자들로 인해 망가진 터에서 전전긍긍하는 백성들을 두고 제국의 아비가 거래를 하라! 백성들이 짐을 우러러보겠소이다!”
지금은 겨울이고, 계절이 계절인 만큼 보릿고개를 겨우 넘고 있는 백성들이 수두룩했다. 이 와중에 프렌시프를 그렇게 쥐어짜면 가뜩이나 힘든 백성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나.
지금 성녀는 삿된 자들을 물리친 영웅이다. 영웅과 맞서는 자는 악당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물꼬가 되어 제국 곳곳에서 봉기를 들고 민란을 일으킬 터. 백성만 황제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었다. 황제 또한 민심을 살폈다.
‘내게 항명한 데다 보그의 가격을 올리고, 포털로 장사를 해?’
누가 그 할애비에 그 손녀가 아니라고!
‘짐이 너무 귀여워한 게지.’
그러니 이리 날뛰는 게 아닌가. 황제는 이마를 쥔 채 벌떡 일어났다.
“헬리오스와 미카엘을 서재로 불러라.”
귀족들은 시종장에게 소리치며 나서는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이런.’
프렌시프의 딸이 황제에게 항명한 데다, 지금 프렌시프는 영지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을 때였다.
‘기회를 제대로 잡아야 하는데.’
‘구심점이던 카렌듈라 후작이 죽었으니 뜻을 모아도 지휘할 자가 없으니 오합지졸의 꼴이 아닌가.’
‘황후는 프렌시프 영애에게 푹 빠졌고, 로웨나 황비 또한…….’
그들의 고민이 깊어졌다.
황제의 부름을 받고 서재 앞에 도착한 황태자 헬리오스와 4황자 미카엘은 싸늘한 눈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형님께서도 부름을 받으셨습니까.”
“폐하께서 무슨 일로 너 같은 종자를 불러들이셨을까.”
“저야 늘 폐하의 말벗이었지요.”
“혀엔 여전히 기름칠을 하는군. 네 모후가 기뻐하겠어.”
근래 보이는 황후와 미카엘의 삭막한 사이를 조롱하는 말이었다. 미카엘은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황태자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가뜩이나 병약한 몸, 심보를 곱게 쓰지 않으면 더 망가집니다.”
“뭐라고?”
“갈기갈기 찢어져 내장을 쏟고 싶지 않으면 입단속 잘하라는 뜻이야, 형님.”
평소와 다른 살벌한 말투였다.
“너……!”
“내가 지금 형님을 참아 주고 있습니다.”
다시 빙그레 웃은 미카엘이 먼저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저놈이…….’
등줄기가 오싹할 만큼 살기 가득한 눈빛이었다. 나라 제일가는 외조부가 죽고 기세가 꺾였으리라 여겼는데,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방해꾼이 사라진 듯 미카엘은 한 꺼풀 벗은 것만 같았다. 새로 나온 알맹이에선 소름 끼치는 악취가 났다. 괴물이라도 깨어난 양.
황태자는 께름칙한 시선으로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서재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있던 황제가 아들들의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프렌시프의 행보가 과하다.”
황태자는 큼,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감히 폐하를 협박하였다고. 하지만 그런 말 몇 마디가 어찌 폐하께 영향을 줄 수 있겠―”
“……먹혔어.”
“예?”
“빌어먹을! 먹혔단 말이다!”
황제가 술잔을 내던지듯 내려놓으며 머리를 쥐었다.
“보그를 일곱 배나 올렸어. 일곱 배!”
“평민들에게서 먼저 앓는 소리가 나올 겁니다. 원망의 시선은 자연히 프렌시프에게―”
“고가의 보그를 어디 평민들이 쓰겠느냐!”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미카엘이 입을 열었다.
“고가인 데다 유통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직까진 귀족들의 전유물이겠죠. 앓는 소리는 귀족들에게서 나올 겁니다.”
황제가 쯧,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귀족이란 것들 생각이야 빤하지. 프렌시프에 맞서기보단 권력에 융화되기를 원할 거다.”
“성녀는 권력을 탐하는 성정은 아니니―”
황태자가 은근히 세니아나를 감싸자 황제의 눈이 희번득 빛났다.
“제1황자궁에서 정이 깊었는가 보군, 으응?”
“폐하, 저는 그런 게 아니라…….”
황태자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혜를 입은 몸이니까.’
이전 같았으면 자신이 황제의 서재로 불려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황제는 도미니크를 총애했고, 지지기반이 없어 늘 살얼음판을 걷는 도미니크를 생각하여 공적인 일엔 되도록 미카엘을 부르는 편이었다.
병약하고 정 없는 맏이는 늘 뒷전이었던 터라 서재에 출입할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세니아나가 사신 접대의 공을 황태자에게 돌려준 일로 여기까지 왔다.
‘폐하께서도 내막은 눈치채고 계셨겠지만.’
오히려 내막을 알고 있기에 자신에게 ‘사람을 얻는 재주’가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황제가 난처한 표정의 황태자를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봤다.
‘아직 부족해.’
저렇게 속내를 감추지 못해서야. 이런 부분에선 시종일관 미소 띤 얼굴의 미카엘이나 포커페이스의 도미니크가 낫다.
‘하지만…….’
미카엘은 께름칙한 부분이 있었다. 카렌듈라 후작의 외손주라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어릴 적부터 묘하게 신경이 거슬렸다.
미카엘은 독사였다. 부황이라 할지라도 조금만 경계를 낮추면 단숨에 독니를 드러낼. 그런 주제에 명석한 두뇌와 폭넓은 시야, 사람을 구슬리는 법을 알았다.
‘군왕의 면모로 따지면 삼 형제 중 제일이지.’
그러했기에 미카엘은 더더욱 꺼림칙한 아들이었다. 황태자는 워낙에 병약했고, 속을 숨기지 못했다. 정이 많은 점을 기특하게 여겼지만, 오히려 그 점이 황위를 잇기에 큰 단점이었다. 그래서 도미니크를 유난히 아꼈다. 정이 넘치지도, 야욕이 강하지도 않은 아들.
곁에 두고 키울 수 없어서 유독 마음이 쓰이기도 했다. 황태자와 미카엘은 서로를 견제하며 외줄 타기를 했으나, 지켜 줄 황후와 황비가 있었다. 때문에 직접적으로 목숨이 위험할 일 같은 것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도미니크는 달랐다. 나기는 황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자라며 매 순간 죽을 위기에 놓였다. 적국에 넘어가 사경을 헤맨 것도 여러 번이었다. 오직 살아남는 것만이 목표였던 아이. 그래서 황태자와 달리 인간적인 부분을 숨기고 제어할 수 있었고, 미카엘처럼 탐욕에 빠지지 않는다.
‘그 녀석이 지지기반만 확실했어도.’
아니, 아탈란에서 나고 자란 신관 어미의 태생만 아니었더라도 황위 문제로 골머리 썩을 필요는 없을 텐데.
“제기랄!”
황제가 욕설을 뱉으며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서의 자식 복은―!’
첫째인 란슬롯 프렌시프는 그린 듯한 후계자감이었다. 현명하고 영리하지만, 이상을 따르기보단 현실을 가늠할 줄 알았다. 그러면서도 나베리우스나 아서처럼 너무 곧지 않고, 유한 구석이 있었다.
둘째에겐 권력가의 차남이 가져야 할 최고의 면모가 있었다. 장남에겐 부족한 천부적인 검술이라든지, 군사학에 유난히 뛰어난 점은 차치할 정도로 가장 중요한 점. 우애가 깊고, 욕심이 없는 것.
거기에 막내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근래에 길라게온의 사람들은 세니아나를 일컬어 ‘신의 사랑을 받는 아이’라고 불렀다. 역사에 다시없을 강력한 포털과 단신으로 군대에 맞설 수 있는 성수를 소유했다. 유하고 사랑스러운 데다, 성실한 성격은 어디에서나 사랑받았다. 프렌시프 일가뿐 아니라, 가신, 영지민…… 거기에 몇몇 귀족과 황족까지도.
프렌시프에 일이 터진 후, 그는 세 명의 부인으로부터 닦달을 들었다. 로웨나야 세니아나를 귀여워하는 것으로 워낙에 유명하니 올 줄은 예상하고 있었다.
[폐하, 동부는 폐쇄적인 편인데 황실과 이어지는 거점인 프렌시프의 위기를 관망하는 것은…… 그러니까…… 폐하, 무슨 말씀을! 제가 영애를 아껴서 하는 말을 아니옵고, 황실의 안정을 책임지는 자로서 충언을 올리는 거예요.]
로웨나 후엔 황후가 찾아왔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삿된 자이지 않습니까. 프렌시프가 뚫리면 황궁까지 올라오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수가 적을 때 나서는 것이 아무래도…….]
세니아나가 어떻게 구슬린 것인지 황후는 제 상황을 타파할 방법이 오직 프렌시프뿐이라고 여겼다.
‘둘이야 그럴 수도 있겠다고 여겼지만, 가브리엘라까지 날 찾아올 줄은 몰랐지.’
[동부에 다녀오게 해 주십시오.]
[동부 귀족들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건가.]
[저는 동부의 황비입니다. 폐하의 고민을 알고 있기에 청하지 않을 것이나, 저 스스로 나설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십시오.]
늘 조용하고, 사려 깊기만 하던 가브리엘라의 눈이 그처럼 단호한 것은 처음 보았다. 후·비들뿐만이 아니었다.
[출정 명을 내려 주신다면 이 땅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삿된 자들을 토벌하고 귀환토록 하겠습니다!]
금좌 중 하나인 오뵈르 백작이 갑주를 차고 와선 부르짖듯 외쳤다.
[곧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될 공이 굳이 지원군의 선봉에 설 필요는 없네.]
그러자 남편과 함께 온 서부의 거두 오뵈르 백작 부인이 말했다.
[은혜를 입었습니다. 영애가 아니었더라면 저희는 끝내 이 아이와 만나지 못했을 테지요.]
[백작 부인.]
[폐하, 저는 아이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응당 보답해야 한다고 가르칠 생각입니다. 아이가 신의를 배우며 태어나길 바랍니다.]
그 뒤로 샤르파크 후작 부부도 찾아왔다. 황제의 이종사촌 누이인 후작 부인이 말했다.
[여전히 배포가 작으십니다, 폐하.]
[가뜩이나 시끄러운 속을 더 어지럽히지 말고 네 영지로 썩 돌아가라.]
[제가 폐하의 속을 모를 성싶으십니까?]
[허.]
[프렌시프에게 지원군을 내리자니 병사를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귀족들이 한데 뭉쳐질 것 같아 불안하시지요? 카렌듈라 후작이 갔으니,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할 텐데, 이 기회에 뭉쳐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제왕의 고민을 가늠치 말라!]
[서부의 우두머리로 가장 가능성 높은 건 미카엘 황자인데, 외조부를 잃고 조급해진 미카엘 황자가 황위 싸움은커녕 폐하의 금좌를 노려올까 봐 염려하시는 거죠?]
[이 녀석!]
샤르파크 후작은 ‘부, 부인.’ 하며 그녀를 말렸지만, 후작 부인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황군을 투입하면 적국이 기회를 노리고 쳐들어올까 두려운 것일 테고요.]
[그만!]
[동쪽으로는 카르스토 국이 눈을 부라리고 있고, 서쪽으로는 레겐이, 남쪽으론 럭스탄트가 침략의 때를 보고 있죠. 참 열심히도 척을 지셨습니다.]
[…….]
[그러니까 왜 독선가를 자처하셔서 협력국 하나 만들어 두지 않으셨습니까? 이건 폐하가 겁쟁이인 탓인데, 왜 마땅히 지원받아야 할 프렌시프가 위기에 놓여야 합니까?]
[자네 부인을 데리고 돌아가게! 아니면 내가……!]
[그러니 저희가 나서겠습니다. 저희가 프렌시프를 지원할 테니 황명만 내리면 된다고요.]
샤르파크 후작까지 눈치를 보며 ‘저희는 같은 동부에 터를 두고 있으니 명분도 있지요……. 프렌시프가 뚫리면 금세 샤르파크 령입니다.’ 하고 말했다.
나라의 권력자들이 차례대로 와서 들들 볶아 댔다.
‘보내지 않으려던 게 아니야.’
고작 이틀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무리 급한 일이어도 처리할 시간이 필요했단 말이다.
‘그걸 아는 놈들이 다 짐만 천하에 다시없는 폭군 보듯 몰아붙여서는―!’
씨근덕거리는 황제를 보던 황태자가 “저…….” 하며 입을 열었다.
“세니아나 프렌시프는 아직 어립니다. 혈기가 왕성할 때이니 서운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
“짐이 그를 모를 듯하느냐.”
“……송구합니다.”
“문제는 왕성한 혈기가 아니라 왕성한 혈기를 가진 자가 나라를 뒤집을 힘이 있다는 것이다.”
황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번 일로 그 아이는 제가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 증명한 것이야. 이제 오만 국가에서 모두 접촉을 해올 것이다.”
“…….”
“그 아이가 레겐이나 카르스토에 넘어가면 어찌 될 것 같으냐.”
“그건…….”
술잔을 돌리던 황제가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전쟁이라 부를 수 없겠지. 그건 재해와 같을 테니까.”
“…….”
“세니아나 프렌시프는 빼앗기느니 차라리 없애야 할 존재다.”
황태자가 마른침을 삼켰고, 미카엘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황제를 주시했다.
“짐은 그 애가 두렵고도 탐이 난다. 하여 짐의 수비군으로 첨탑을 만들어 ‘보관’하려던 것이다.”
“…….”
“…….”
“짐의 자리를 이을 수 있는 너희는 짐과 같은 고민을 언제고 하겠지. 하면 묻겠다. 너희라면 어찌할 것이냐. 재해일 수도 있고, 선물일 수도 있는 존재라면.”
황태자는 어두운 얼굴로 답했다.
“두렵습니다. 하지만…… 폐하, 저는 안정을 바랍니다. 협력을 바라고, 그를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이번엔 미카엘이 대답했다.
“탐이 납니다. 그런 것이라면 날개를 꺾어서라도 제 곁에 두어야죠. 발전을 위해.”
안정과 발전이라. 아들들을 가만히 쳐다보던 황제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퇴실을 명했다. 그가 테이블 한 편에서 빛나고 있는 통신석을 응시했다.
“네 형들은 그렇다더군. 네 생각은 어떻지, 도미니크.”
프렌시프 령의 귀빈실에서 황제와 황자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도미니크가 무표정한 얼굴로 통신석을 매만졌다.
내뱉지 못한 진심을 갈무리하고. 그녀가 레겐의 사람이 되길 원한다면 레겐을 수복하리라. 카르스토의 사람이 되길 바란다면 제국을 송두리째 카르스토 왕에게 바치겠다.
[도미니크.]
“폐하의 물음에 영애의 의사는 어디에 있습니까.”
[뭐라.]
“재해일지, 선물일지 택하는 것은 오직 그녀 자신뿐.”
[그것이 일국의 황자에게서 나올 대답인 것이냐.]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한참 꾸물거리다가 “계세요?” 하고 묻는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가 문을 열어 주자 세니아나가 활짝 웃었다. 도미니크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대답하지 않고 통신을 종료한 그가 세니아나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왜 쉬지 않고.”
“할아버지와 성의 사람들에게 치료식을 만들어 줘야 해서.”
헤헤 웃다가 “그래서 저하는 뭘 드시고 싶은지 여쭤보려고 왔어요. 참고할게요.” 하며 눈을 빛냈다.
“글쎄요. 해산물은 싫습니다.”
“편식하시면 안 돼요~!”
“의사를 물으러 오신 게 아닙니까.”
“좋아하는 걸 물으러 왔죠.”
“해산물이 아닌 것을 좋아합니다.”
“나 참. 어? 그런데 왜 이렇게 얼굴이 새하야시지? 몸이 안 좋으세요?”
“조금.”
세니아나는 걱정이 담뿍 배인 눈으로 그의 얼굴을 덥석 잡고 이리저리 돌렸다.
“감기일까요? 찬 데서 계속 있었잖아.”
“글쎄요.”
“기다리세요. 약 가져올게요.”
세니아나가 쪼르르 달려나가자 도미니크와 함께 방 안에 있던 알베르가 어두운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환궁해야 합…… 저하!”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문을 닫은 도미니크가 문에 기대 미끄러졌다. 알베르는 서둘러 그의 셔츠를 열고 몸을 살폈다. 태어날 적부터 가지고 있던 문장이 짙어졌다.
그는 신관인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치유력으로 숱한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에이레네가 삿된 자가 되었을 때도 살아남은 건 문장의 덕이었다.
친모의 피가 남긴 선물이라 여겼다. 그러나 사실은 목을 조일 밧줄이었음을 안 건 최근이었다. 가브리엘라 궁에서 쓰러진 세니아나를 치유한 후, 사경을 헤맸으니까.
“가브리엘라 황비의 말을 잊지 마십시오.”
[삿된 자화 된 사람이 저하께 빠지고, 삿된 자들이 당신에게 애정을 느끼는 이유는…… 당신이 절망이기 때문이에요.]
조율자는 삿된 자들 만 구가 모이면 ‘절망’이 되고, 성녀는 절망을 제어하는 ‘병’이 된다. 절망은 삿된 자들의 사념을 힘으로 하는 자, 삿된 자들에게 천적인 성녀를 치유하게 되면 육체가 반발한다.
알베르가 식은땀을 흘리는 도미니크를 살피며 빈정거렸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 내내 영애를 치유하셨으니 이 얼마나 멋진 순애보입니까.”
“그만.”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얼마나 현명한지 저 같은 소인배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입을 찢어 줘야겠어?”
별궁으로 군사들을 옮기고, 다시 성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도미니크가 내내 그녀를 치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을 잡을 때. 눈을 마주칠 때. 사랑한다는 말을 삼킬 때. 언제나.
문 넘어 타다닥,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도미니크는 알베르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다시 문을 열어 준 그는 “저인지 어떻게 아셨어요?”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녀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 발소리, 숨결, 눈빛.”
그가 조심스레 손목 안을 짚었다.
“고동까지도 모두 새겨 두고 있으니까.”
세니아나가 빙그레 웃으며 그의 눈가를 매만졌다.
“나도 그래야겠다. 당신 눈빛―”
그녀의 손이 코끝에 닿고.
“숨결―”
그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고동까지 다 새겨 둬야지.”
“그래.”
“그보다 쉬세요. 죽을 쒀서 올―”
세니아나를 끌어안은 그가 그녀의 머리칼에 입술을 묻었다.
“그러자.”
“저하……?”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잡은 도미니크가 진중한 눈으로 말했다.
“포털 거래를 할 적엔 황도로 이동하는 자들을 우선하십시오.”
“네?”
“되도록 강력한 포털을 열어서 황궁의 결계까지 흔들리게 해야 합니다.”
“어째서요?”
“그래서 부황이 겁을 먹고 섣불리 당신을 압박해 오지 않을 테니까.”
그녀가 묘한 표정으로 도미니크를 바라보았다.
“지금 아버지를 협박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해야만 한다면 할 수밖에요.”
그녀가 아하하 웃으며 “이상해.” 하고 중얼거렸다.
“당분간 나를 돌려보내지 마세요.”
“그건 또 왜요?”
“전 인질입니다. 부황에게 먹힐 테고요.”
“좋아요. 신난다!”
“황제를 협박하는 게 신이 납니까?”
그가 짓궂은 표정으로 묻자 “저하와 오래 있을 수 있잖아요!” 하고 세니아나는 활기차게 대답했다.
그날 밤, 황제는 뒷목을 잡았다.
“도미니크―!”
그의 노성에 놀란 궁인들이 황급히 고개를 수그렸고, 그에게 물을 가져다주던 시종장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쾅! 그가 통신석을 테이블 위로 내던지자 도미니크가 보내온 문자가 홀로그램처럼 일렁였다.
[……하여 저는 프렌시프에 구금되길 자청하였으니 부황 심중에 있는 모든 계략은 가여운 아들을 헤아리시어 접어 두시길 청합니다. 안타깝지만, 부황의 생각보다 제 입은 무겁지 않습니다.]
음지에서 황제의 밀명을 수행하던 그가 입을 연다면 황실의 체면이 상하는 건 당연하고, 나라가 두 쪽이 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추신. 프렌시프에 재정 지원 바랍니다. 통 크게 쓰십시오.]
그가 전송한 내용을 읽던 황제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쌍놈의 새끼―!”
그는 기어이 체통을 잃고 황자 시절에나 쓰던 걸걸한 입담을 자랑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나는 침대에서 폴짝 내려와 손과 발을 흔들었다.
‘좋아.’
며칠 내내 과하게 힘을 썼으니 곤죽이 되거나, 최악의 경우 영영 다시 눈을 뜨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난 괜찮았다. 하지만 평소처럼 쌩쌩한 건 아니고, 몸살기 정도는 있었는데 이제 웬만큼 회복이 된 모양이었다.
‘회복이 빨라서 다행이야.’
할 일이 쌓여 있어서 쉬면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일단 씻고 내려가자.’
그렇게 생각하고서 욕실에 들어가자 눈치 빠른 사용인들이 물을 받아두었다. 난 향긋한 오일을 푼 욕조 안에 들어가서 “하아아.”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 목욕 최고…….”
일어나자마자 후다닥 해야 하는 샤워와는 차원이 다르다. 따뜻하고 향기로운 물속에서 꾸벅꾸벅 졸며 머릿속으로 하루 일정을 정리하는 기분이란.
‘물고기가 되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란 말이지요.
삼십 분쯤 지나자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하녀들이 들어왔다.
“돕겠습니다.”
하녀장이 고갯짓하자 하녀들이 다가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욕조에 기대어 있으면 하녀들이 머리맡에서 거품을 잔뜩 내선 머리를 감겨 주었다.
‘이런 일은 어색했는데.’
시트론이 목욕을 도와준다고 하면 낯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던 것이 벌써 일 년 전이었다. 나는 기분 좋은 목욕을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방을 나섰다.
“아가씨, 좋은 꿈 꾸셨나요?”
하인들이 상냥하게 물어서 난 밝게 “응!” 하고 대답했다. 조금 걷다 보면 서류를 옆구리에 낀 사무관들이 날 발견하고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저는 아니지만.”
“왜요?”
“어제도 철야였거든요.”
“저런.”
파르뎅 자작은 샛노란 얼굴로 아침 해가 너무 밝다며 끙끙 앓았다. 할아버지 방 앞에선 마담 버지니아와 가신들이 행정관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날 발견하고 미소지었다. 그녀가 팔을 활짝 열어서 난 포옹으로 인사하고 그들이 들고 있는 서류를 보았다.
“영지 복구 예상액인가요?”
“예.”
“저도 봐도 돼요?”
“물론이죠.”
사실 난 서류 같은 건 잘 볼 줄 모른다. 이 서류도 그랬다. 꼬부랑 글씨와 숫자들이 한데 얽혀 왈츠를 추는 것만 같았다.
‘저쪽 세계에서도 여기서도 요리만 했으니까 이런 건, 으으음…….’
내가 인상을 쓰면서 서류를 보고 있는데, 머리 위로 무언가 툭, 올라왔다.
“작은오빠.”
가웨인이 정수리에 턱을 걸친 채 내가 들고 있는 서류를 대충 훑었다. 곧이어 란슬롯이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우리 아가씨, 잘 주무셨나요?”
“네, 도련님.”
그러자 가웨인이 짓궂게 웃으며 “이제 받아칠 줄도 아네.” 하더니 내 손째로 서류를 잡았다.
“생각보다 피해 규모가 더 큰걸.”
란슬롯도 고개를 끄덕였다.
“필사본 있습니까, 이 서류.”
“그럼요.”
“이쪽은 제가 가져가죠.”
“예.”
우리는 가신들의 인사를 받으며 셋이서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난 란슬롯의 소매를 흔들었다.
“있잖아요.”
“음?”
“이런 서류는 어떻게 쓰는 거예요? 수리공들에게 하나하나 물어봐서요?”
“우리 같은 경우엔 노역을 쓸지, 영지민의 지원을 받을지 등을 결정한 후 자재 비용을 검토하고…… 그런 걸 우리 공주가 왜 궁금해하실까.”
“저도 이런 걸 써야 할 때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래서 꼼꼼하게 작성하는 법을 알면 좋지 않을까 싶었어요.”
“알면 좋겠지만…….”
란슬롯이 곤란한 듯 웃자 가웨인이 내 코를 살짝 흔들었다.
“쓰는 건 행정관들이 할 일이지. 우리에게 필요한 건 판단력이야. 이대로 실행하느냐, 마느냐.”
“그리고요? 또 뭐가 필요해요?”
“사람을 보는 눈이라든가…… 인재는 항상 부족하니까.”
가웨인은 쯧, 혀를 차며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무관의 무리를 힐끔 쳐다봤다.
“창고를 안전하게 지킬 사람인지, 쥐새끼가 되어 숨어들 사람인지도.”
“그리고, 그리고?”
란슬롯과 가웨인은 묘한 눈으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이내 픽 웃어 버렸다.
“이제 행정까지 배워 보시려고?”
가웨인의 말에 “도움이 되면 좋지요!” 하고 말했다.
“이러다 형 자리도 노려 오는 거 아니야?”
“아니에요!”
“어째서?”
“그야…… 큰오빠가 훨씬 잘할 테니까요.”
란슬롯은 쿡쿡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마든지 뺏어 봐. 우리 아가씨께 뭘 못 드릴까.”
“아니라니깐…….”
“서류 보는 법부터 알려 줄게. 이건…….”
나는 란슬롯과 가웨인의 곁에서 이것저것을 배웠다.
‘아, 설명을 듣고 보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다.’
선생님은 식당을 차리며 내게 ‘식당을 운영하는 법’을 알려 주었는데, 차이가 아주 크긴 하지만 도움이 됐다. 돌이켜 보면 그게 선생님 나름의 교육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내가 이 세계로 돌아와도 잘 적응하도록.
우리는 점심을 먹고 성 앞 계단에 나란히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저 녀석은?”
가웨인이 파르뎅 자작을 가리켰다.
“음, 신경질적이고 호전적이긴 하지만…… 데리고 있어야 할 사람!”
“정답. 신경질적이란 건 섬세하다는 거고, 호전적이라는 건 나 대신 판을 뒤집어 버릴 수 있다는 거니까.”
란슬롯이 잘했다며 쿠키를 쥐여 줬다.
“그럼 저 사람은?”
“유피스 공은……. 언젠가는 쳐내야 할 사람이요. 하지만 지금은 곁에 둘래요.”
“왜?”
“야욕이 강하다는 건 발전엔 크게 도움이 되지만, 그가 위로 올라왔을 땐 안정이 되지 않겠지요.”
“훌륭해.”
나는 쿠키 하나를 더 받고 활짝 웃었다.
* * *
난 도미니크가 쉬고 있는 정원으로 향하다가 알베르를 발견했다. 그는 굳은 얼굴로 내게 인사했다.
“영애님을 뵙습니다.”
“……충신.”
“예?”
“아니에요, 저하는요?”
“…….”
그는 잠깐 침묵하다가 “안 계십니다.” 하고 답했다.
‘응?’
하녀들이 금방 여기서 봤다고 했는데.
“어디 가셨어요?”
“예.”
“어디에 계실까…….”
나는 중얼거리며 걸음을 돌리려다가 우뚝 멈춰 섰다.
“거짓말이다.”
내 말에 알베르는 움찔했다.
“저하가 안 계신데 왜 여기에 서 있지요?”
“산책 중이었습니다.”
“아닐걸요.”
“예?”
“알베르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잖아요. 황족의 부관이 영지 성을 함부로 거닐 때의 최악까지도 생각하는.”
“…….”
“왜 그런 거짓말을 했어요?”
“영애는 바쁘시잖습니까. 저하를 뵐 틈이 없으실 텐데요.”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죠.”
오후부터는 삿된 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누아제가 된 사람들을 정화하기 위한 요리를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를 볼 짬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알베르는 처음엔 나와 도미니크의 만남을 기껍게 생각하는 편은 아니었다. 아카데미에서도 한 차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엔…….’
오히려 응원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줬는데.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얼굴을 굳혔다.
“무슨 일이에요.”
“…….”
“저하께 지금 무슨 일이 있는 거죠?”
“아닙니다.”
“저하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을 테고요.”
“아닙…… 영애!”
난 문고리를 잡고 정원의 문을 벌컥 열었다.
“저하!”
테이블 밑에 주저앉은 그가 새하얀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난 얼른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런데, 쿵! 정원과 온실을 가로막은 문이 거세게 흔들리며 성수 셋이 모두 현신했다.
“누나, 안 돼!”
테디가 나를 붙들었고, 멀린과 쵸가 도미니크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발밑으로 무언가 스멀스멀 밀려왔다. 검은 기운.
‘삿된 자의 것이다.’
검은 기운의 진원지는 도미니크였다. 그는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내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정신이 불안정한 사람처럼.
그의 잇새에서 으득, 소리가 나자 쵸가 그르륵 울며 순식간에 여우로 변했다.
“안 돼, 쵸! 그만!”
“하지만, 주인님, 저건……!”
“그만해! 저하, 저―”
도미니크가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주변의 풀이 검게 물들며 바스러졌다.
‘도미니크가 누아제로 변한 거야? 왜?’
아탈란이 황궁에 성식을 들이긴 했지만, 그동안 그는 아카데미에 있었다. 다른 황족들보다 성식의 섭취가 현저히 적으니, 그가 누아제가 되었다면 다른 황족들은 이미 삿된 자가 되었어야 할 터.
멀린은 그에게 다가가려는 날 끌어안았다.
“다가가지 마시오.”
“그렇지만……!”
“저건 이제껏 느껴본 바 없는 불온한 기운이야!”
늘 내게 정중한 말투였던 멀린이 강경하게 소리쳤다. 쵸가 이빨을 드러내자 테디까지 성수의 몸이 되어 크르릉, 낮게 울었다.
핏물이 고인 것처럼 도미니크의 눈이 새빨개졌고, 그의 손은 허리춤에 있는 검에 닿았다. 나는 가느다랗게 속삭였다.
“저하.”
“…….”
“저하, 정신 차리세요.”
“…….”
“정신 차려, 제발.”
금세라도 이를 드러내고 공격해 올 것 같았던 도미니크가 이를 악물고 팔을 잡았다.
“저하.”
“……나.”
“…….”
“세나.”
나는 멀린을 뿌리치고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을 놔요.”
“……나.”
“할 수 있지? 응?”
“……세나.”
순간, 그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저하!”
나는 얼른 달려가 그를 잡았다. 새빨갰던 눈이 점차 제 색을 되찾고 있었다.
“정신 들어?”
“……그래.”
“왜 갑자기 이런…… 언제부터!”
내가 소리치자 알베르가 달려왔다.
“부축하겠습니다, 방으로 돌아가시죠.”
“언제부터 이랬어요.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요.”
“…….”
“내가 묻고 있잖아!”
알베르가 난처한 표정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
“알베르 피아텐!”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영애를 치유하며 점점 상태가 나빠졌고, 프렌시프 영지민들이 누아제가 된 다음부터는 하루에 한두 번 이처럼 눈이 붉어지고 정신을…….”
“나를 치유했다고요?”
내가 몸 상태가 좋았던 이유가 도미니크 때문이었단 말이야?
“그런데 왜 돌아가지 않고…….”
“영애를 지키기 위해서죠.”
나는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도미니크의 뺨을 매만졌다.
“이런 바보가 어디 있어…….”
가슴이 너무 아려서 차마 그를 부를 수조차 없었다.
* * *
[또 만나.]
늘 그리던 소녀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꿈속의 존재라 믿던 이가 현실이 되어 나타난 기적. 기적과 조우한 후 도미니크는 운명을 믿었다.
쓰린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정신이 드십니까.”
알베르의 목소리에 도미니크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2황자궁인 것으로 보아 잠든 새 그녀가 포털을 연 모양이다.
“성수를 셋이나 현신시켜서 벅찰 텐데 포털을 열도록 내버려 둔 거냐.”
“하마터면 그 성수에게 목덜미가 물어뜯길 뻔했는데 할 말이 고작 그뿐입니까.”
“그럼?”
“심장이 떨어질 뻔한 부관을 챙겨 주실 정은 없으시고요?”
알베르가 쳇, 혀를 차며 말하자 도미니크는 침대에서 벗어났다.
“세니아나는.”
“함께 오셨습니다.”
“황궁에?”
도미니크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이미 황제와 한 차례 척을 졌다. 그의 부황은 겉으론 호탕해 보여도 속은 뱀처럼 간교했다. 스스로 덫에 들어온 나비를 풀어 줄 리 만무하다. 도미니크는 당장에 셔츠를 걸쳤다.
“저하, 일단 휴식을……!”
“그녀는 어디에 있어.”
“몸 상태가 말이 아닙니다. 가브리엘라 황비가 살폈지만, 차도가 없을 거라고―”
“어디에 있어!”
이런 눈의 도미니크는 말려 봐야 소용이 없었다. 알베르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폐하를 만나 뵙고 계십니다. 황태자와 4황자가 함께 계시지요.”
“그 둘은 왜.”
“둘만이 아닙니다.”
“귀족들도 함께 있단 말이냐.”
“폐하께서 아탈란의 계략이 밝혀졌으니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하셨습니다.”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허울이겠지만요.”
“다른 일이 있었나.”
“저하를 모셔오기 전, 프렌시프에 청혼서가 도착했습니다.”
“청혼서라니. 세니아나에게?”
“예.”
알베르가 창밖에 보이는 아발론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황태자와 4황자가 프렌시프 영애에게 청혼하였지요.”
후계 싸움 중인 두 황자가 모두, 라는 것은 황제에게 의중이 있다는 것이다.
“프렌시프 영애와 맺어지는 자가 황위를 이을 겁니다.”
알베르는 서늘한 눈빛을 도미니크에게 고정했다.
“세니아나 프렌시프에겐 그런 힘이 있습니다. 길라게온 제일의 권력가에서 태어나 삿된 자를 물리쳐 민중의 영웅이 되었고, 홀로 황군에 필적하는 힘을 가졌죠.”
“…….”
“포기하십시오.”
알베르가 그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이제 그분은 기반조차 없는 황자가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입 닫아.”
“죽습니다! 권력 혈투에 엮어 저하는 비명에 가실 테죠!”
도미니크는 말없이 문을 열었다.
“저하!”
도미니크의 걸음이 빨라졌다. 이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던 게 아니다. 그녀를 보며 하루하루 불안에 발목을 잡혔다. 그럼에도 한순간이나마 네 손을 잡을 수 있다면, 네 미소를 볼 수 있다면 목숨 따위야 내줄 수 있었다.
그가 아발론에 도착했을 때는 귀족들이 구름떼같이 몰려 있었다. 그 사이로 황제와 마주 보는 세니아나가 보였다. 황제의 앞에 성장(盛裝)한 황태자 헬리오스와 4황자 미카엘이 보였다.
황태자의 앞으론 로웨나 황비를 비롯한 북부의 거두들이, 미카엘의 앞엔 카렌듈라 후작 사후 흡수된 금좌들과 서부의 거두들이 있었다. 황제는 입꼬리를 올리며 세니아나에게 물었다.
“그래, 영애가 내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은 오후에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과 관련된 것이겠지.”
황제는 두 황자의 청혼을 난처한 일로 치부하며 발을 빼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세니아나는 시침을 떼는 황제를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그녀만 황도에 올라온 것이 아니었다. 몸이 미령한 나베리우스 대신 아서와 란슬롯, 가웨인이 함께 있었다. 가웨인이 울컥 인상을 쓰자 란슬롯이 한 팔로 그를 가로막았다. 세니아나는 황제의 뜻대로 움직이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무릎을 굽히며 말했다.
“두 황자님의 결정에 난처하실 폐하를 모르지 않으나, 폐하께 꼭 청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
“폐하, 제게 아드님을 주세요.”
맹랑한 말에 대전에선 웃음이 터졌다. 황제마저 껄껄 웃으며 “아드님이라. 그가 누구이려나.” 하고 세니아나를 쳐다봤다.
“저는…….”
헬리오스가 마른침을 삼켰고, 미카엘의 입가엔 호선이 드리웠다.
“도미니크 님을 사랑합니다.”
세니아나의 목소리는 아주 또렷하고도 진중했다. 아발론이 크게 술렁였다. 사람들은 “2황자?”, “도미니크라니.”, “말도 안 돼!” 떠들썩해졌고, 이내 좌중 속에서 도미니크를 발견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이 홍해가 갈라지듯 나뉘었고, 도미니크는 틈 안에 오롯이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묻고 싶었다.
‘너는 어떻게 그토록 용감한 걸까.’
기반 없는 황자. 신관의 핏줄이라 드러난 자. 평생을 음지에서 살았고, 남은 생 또한 양지를 기대할 수 없는 사람. 그런 이에게 내딛는 걸음이 어쩌면 저리 강인하단 말인가.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갛게 웃는 그녀를 보며 다시 묻고 싶어졌다. 그런 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황제는 묵묵히 서서 세니아나와 시선을 교환하는 도미니크를 보고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도미니크라니. 황실의 장자로 태어나 가장 막강한 정통성의 헬리오스도 아니고, 작고한 외조부 대신 서부 귀족을 모두 흡수한 미카엘도 아닌 도미니크라니!
언제 둘이 그런 사이가. 아카데미인가. 아니면 마원을 찾으라는 밀명을 받고 프렌시프 령에 내려갔을 때? 그래서 아카데미로 떠나라는 명을 순순히 따른 것인가. 그럼 언질이라도 할 것이지. 짐만 바보가 되지 않았나. 아니, 그게 아니라……!
‘도미니크는 안 돼.’
세니아나 프렌시프가 원한다면 그 누구라도 그녀의 짝이 될 수 있겠지만, 도미니크만은 안 된다. 지금껏 도미니크가 재능이 부족하여 황위 싸움에 참전할 수 없었겠는가.
그에겐 제국의 그 누구도 메꾸지 못할 결함이 있었다. 신관의 아들이라는 것. 사람들은 도미니크의 모후를 제국의 모신 타라를 섬기는 신관 레오나라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달랐다.
아탈란의 품에서 나고 자란 세실. 그녀가 그의 모후였고, 그것은 황족과 귀족 사이에선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삿된 자를 물리친 영웅과 아탈란 신관의 아들이 결혼을?
위험할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도미니크가 프렌시프의 사위가 된다면 황자 중 가장 앞서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 헬리오스를 따르는 북부와 미카엘을 따르는 서부는 결탁하여 가장 우세한 도미니크를 떨쳐 내려 할 것이다. 그에겐 결함이라는 명분까지 있지 않은가.
‘빌어먹을.’
하필 왜.
* * *
황제는 제국에 삿된 자가 출현한 지금 나눌 이야기가 아니라며 자리를 피했다. 파장은 엄청났다. 프렌시프가 황위 싸움에 관여하기 시작했다는 둥 시끄러웠다. 황위에 눈을 부릅뜨던 북부 귀족들, 미카엘에게 규합된 서부 귀족들까지 혼란스러웠다.
외부 세력뿐 아니라 프렌시프를 따르는 귀족들이며 영지 내 가신들까지 우왕좌왕이었다. 프렌시프 측의 귀족과 가신들은 황도 저택에 모여 목소리를 높였다.
“영지의 피해 복구는 시작되지 않았고, 군사의 대부분은 누아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상의 없는 결정은……!”
“하지만 황실의 뜻이 빤하지 않소. 어떻게든 영애를 황실에 구속하려는 거요. 황태자비나 4황자비가 된다면 우리는 영애를 북부와 서부에 눈 뜨고 빼앗기게 되는 게 아니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차라리 세력이 없는 도미니크 황자 쪽이…….”
“아가씨가 물건입니까. 어디에 넘기다니요!”
“섣부른 판단이었습니다. 이런 큰일에 언질조차 주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프렌시프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황제와는 완전히 척을 진 게 아니오. 폐하의 성정에 이런 일을 용서하실 리가…….”
“황제의 생각이야 뻔하지. 혹여라도 타국과 혼맥을 가질까 전전긍긍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도미니크도 일단은 황자, 아가씨의 생각이 옳습니다.”
저택의 회의실은 밤중에도 터져 나갈 듯 시끄러웠다. 나는 묵묵히 주방에 있었다. 누아제가 된 사람들 중에 진행이 빠른 자들은 그냥 둘 수 없어서 데리고 왔다. 그들에게 뭐라도 먹여야 진행을 늦출 수 있을 테니까.
“역시 오트밀로 할까요?”
시트론과 마릴린은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녀들은 오늘 일어난 일로 마음이 괴로울 거라고 생각하는지, 그쪽으로는 얘기를 꺼내지 않으려 애썼다.
“괜찮아, 누아제들은 환자가 아니니까.”
“환자가 아니면요?”
“오히려 일반인보다 건강한 편이지. 삿된 자가 되면서 힘이나 체력이 오르고, 회복력도 사람의 것과는 달라지는 것 같아.”
“괴물이 되어 가고 있는 거군요. 강력한…….”
마릴린이 중얼거리자 시트론이 “마릴린 님.” 하며 그녀를 주의시켰다.
“아……, 제 말은 그게 아니고요, 아가씨.”
“맞는 말이지.”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 괴물이.
‘도미니크.’
차라리 그가 누아제라면 마음이 편할 텐데. 내가 정화시킬 수 있으니까.
보통 인간은 삿된 자의 일부를 섭취하면 누아제가 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도미니크처럼 인간의 이성과 삿된 자의 힘이 맹렬히 부딪치지 않는다.
‘괜찮을까.’
그는 황제에게 불려갔다. 불안한 얼굴로 보는 내게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입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괜찮아.]
뭐가. 뭐가 괜찮은데.
머릿속이 헝클어지는 기분이었다.
“……가씨.”
“…….”
“아가씨!”
“응?”
“타요!”
“아앗!”
나는 매캐한 연기가 오르는 프라이팬을 보고 당황해서 허둥거렸다.
“주세요.”
시트론은 내게서 뒤집개를 받고 프라이팬의 손잡이를 잡았다.
“못 쓰겠네요. 뒷면이 다 탔어요.”
“미안…….”
“그런 말씀이 어디 있어요. 이렇게 열심히 하시는데.”
그러자 마릴린이 “맞아요!” 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녀들은 시무룩한 날 보며 말했다.
“머릿속이 복잡할 수도 있지요. 아가씨에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잖아요.”
“누아제가 된 영지민을 보살펴야지, 아탈란을 경계해야지, 잡혀간 샤를리나의 재판까지 신경 쓰셔야지, 삿된 자 때문에 미뤄진 로열 키친 경합도 준비해야지, 결혼도 생각하셔야지. 할 일이 얼마나 많아요.”
“내가 그걸 다 할 수 있을까…….”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시트론이 날 주방 한쪽에 놓인 작은 간이의자에 앉히고,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었다.
“못 해요.”
“…….”
“못 하는 게 당연한 거예요.”
“…….”
“남자친구에게 일이 생기면 우울한 게 당연한 거고, 가족이 납치될 뻔한 위기를 겪었으면 의기소침해질 수도 있고.”
“…….”
“그렇게 많은 짐을 어깨에 얹고 있으면 요리쯤은 태워도 돼요.”
“시트론…….”
“아가씨는 모든 일을 혼자서 끌어안으려는 경향이 있어요.”
날 빤히 보던 시트론이 내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건 저희는 알지 못하는 과거의 경험 때문이겠지요.”
마릴린도 영지민들로부터 대강 이야기를 전달받은 모양인지 의아한 기색이 없었다.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내게 일어난 일을 전부는 아니어도, 일부 눈치채고 있을 텐데 사용인들이나 가신들은 내색하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 쉬쉬하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내게는 이런 사람들이 있구나.’
이곳에서의 일 년간 나는 이토록 다정한 내 편을 만들었다.
“응. 혼자 할 수는 없는 일이네.”
시트론과 마릴린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녀들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잘할 수 있어. 더 많은 내 편을 만들 수 있어.
―그런 생각.
* * *
프렌시프 군의 주축인 칼립스는 오랜 세월 나베리우스의 곁에서 영지에 헌신한 군인이었다. 나고 자란 고향을 사랑했고, 고향을 굳건히 지켜온 프렌시프 일가에 충성했다. 그랬기에 군사들 중 가장 처음으로 성식을 섭취했으며 동시에 가장 많은 성식을 먹은 인물이기도 했다.
누아제 중 제일 진행이 빠른 그는 세니아나와 함께 황도에 올라왔다.
“크…….”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간호를 받던 그가 시트를 말아 쥔 채, 신음했다. 누아제가 아닌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공격적이 된다. 살해 욕구가 번뜩, 고개를 들 때면 눈앞이 캄캄해졌다. 침대에 엎드려 누워 사람의 기를 읽지 않으려 애쓰는데 순간, 커튼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녀인가.’
칼립스가 지내는 병실은 진행 빠른 누아제 중에서도 실력이 좋은 기사들이었다. 그는 이불을 걷어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위험하니 들어오지 말라고 분명히…….”
“아…….”
새빨갛게 충혈된 그의 눈과 커튼을 친 하녀의 눈이 마주쳤다.
“아가씨가 기사님들은 햇빛을 많이 보아야 한다고 해서…….”
황도 저택 총집사의 딸인가. 아가씨 곁에서 하루 종일 종알거리던 것을 본 기억이 있었다. 칼립스는 땀으로 젖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할 테니 너는 나가 봐라.”
“아니에요, 제가, 앗!”
고집스레 다른 커튼을 치려다가 커튼 걸이를 엉키게 만들었다. 마릴린이 얼른 창틀에 올라가 커튼 걸이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순간,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넘어진다!’
놀라서 눈을 꽉 감았는데.
“어……?”
단단한 것이 허리를 감쌌다.
“위험해.”
“…….”
“……?”
“섹시해…….”
무심코 중얼거리자 칼립스는 미간을 좁혔다.
“뭐?”
마릴린은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았다. 땀에 젖어 반질반질 빛나는 약간 짙은 근육이라든가, 나른한 눈, 낮은 목소리.
“너, 침.”
입을 헤, 벌리고 있었더니!
마릴린은 새빨개진 얼굴로 입을 가렸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나 참.”
칼립스는 픽 웃으며 손등으로 가볍게 그녀의 입술을 문질렀다. 그러한 찰나에.
“둘이 뭐 해?”
세니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곁엔 음식 트레이를 밀고 있는 시트론이 보였다.
“오빠.”
시트론의 말에 칼립스는 마릴린을 가볍게 들어 바닥에 내려 주곤 허리를 굽혔다.
“아가씨를 뵙습니다.”
“으응, 나를 뵙기 전에 뭐 하고 있었어?”
“이 아이가 넘어질 뻔해서 도와주었습니다.”
“그으래?”
세니아나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몽롱한 표정의 마릴린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마릴린은 퍼뜩 놀라 소리쳤다.
“네! 저를 도와주셨어요.”
“흐음, 그렇구나.”
“정말, 정말로 도와주시기만!”
“응, 그래.”
세니아나가 시트론을 보며 “이건 아무래도 마릴린이 먹여 주는 게 좋겠지?” 하고 물었다. 시트론은 웃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아무래도요.”
“시트론 님~!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네네.”
* * *
나는 칼립스와 기사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고 나온 마릴린을 슬쩍 보며 말했다.
“나 모르게 연애도 하고 말이야.”
“여, 연애라니요!”
“좋을 때야.”
“아가씨!”
“어휴, 난 남자친구와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여긴 봄이네.”
그러자 시트론이 “그렇네요.” 하며 쿡쿡 웃었다. 마릴린은 새빨개져선 “정말…….” 하고 웅얼거렸다.
“연애는 무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데…… 시트론 님은 칼립스 님과 잘 아는 사이인가 봐요?”
“같은 마을에 자랐거든요. 제가 부모님을 잃었을 무렵 칼립스도 키워 주신 할아버지를 보내드렸어요. 그러다 보니 서로 의지하는…… 물론, 완전히 형제 같았지만요.”
“형제?”
“남매도 아니고 형제요.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우리는 킥킥 웃으며 복도를 걸었다. 마릴린은 시트론을 힐끔힐끔 보면서 물었다.
“하지만 칼립스 님은 저렇게 멋지신데 전혀 마음이 없으셨던 건가요? 저기, 시트론 님. 절 생각하셔서 하는 말씀이라면 정말로―!”
“절대! 절대로요. 칼립스의 어디가 멋진지도 모르겠는데요.”
“말도 안 돼! 엄청 멋지시잖아요. 제국에서 제일 잘생겼다는 도미니크 저하보다……!”
나는 “에엥!” 소리치며 마릴린을 보았다.
“도미니크가 더 멋져.”
“하지만 남자는 얼굴이 다가 아닌걸요. 목소리라든지…….”
“도미니크의 목소리가 얼마나 멋진데!”
“성격도.”
“좋단 말야.”
나는 흥분해서 “정말로!” 하고 소리쳤는데, 왜인지 마릴린과 시트론에겐 대답이 없었다. 의아해진 나는 그녀들이 보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헉.’
왠지 무섭다. 란슬롯과 가웨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쳐다봤다.
“아, 그래?”
“그렇게 멋졌나. 도미니크가.”
어쩐지 목소리가 싸늘한 것 같아서 난 무심코 뒷걸음질 쳤다.
“아니……. 사실이잖아요…….”
“나보다?”
가웨인이 물었다. 나는 대답 없이 눈을 도르륵 돌렸다.
“…….”
“하, 말도 안 돼. 장난이지?”
“…….”
“어디가!”
“오빠는 좀…… 무섭게 생겼잖아요.”
“도미니크는 아니야?!”
“저하는 무섭진 않은…….”
“그럼 형은!”
가웨인이 란슬롯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란슬롯은 아주아주 상냥하게 웃으며 고개를 모로 꼬았다.
“궁금한걸.”
“그 오빠는, 뭐랄까, 그림 같은, 으으음……. 잘생겼지만요.”
나는 당황스러워서 시트론을 보며 “그, 그렇지?” 하고 물었다. 시트론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제깟 게 어떻게 도련님과 저하의 외모를 평하겠습니까.”
우와, 치사해! 나는 “배신자!” 하며 그를 보았고, 오빠들은 양쪽에서 내 손을 잡았다.
“그렇다니까 네게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야겠네.”
“살살해라, 가웨인.”
“으아아, 잘못했어요!”
나는 울상을 짓다가 구원자를 발견하고 “아빠!” 소리치며 후다닥 달려갔다. 아빠의 허리를 끌어안고 등 뒤에 쏙 숨어 경계 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괴롭혀요…….”
아빠가 싸늘한 시선으로 란슬롯과 가웨인을 쳐다보자 가웨인은 큼,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장난을 치던 중이었습니다.”
“무슨 장난이기에 동생의 입에서 비명이 나오게 해.”
“세니아나는 도미니크 황자가 그렇게 잘생겼다더군요.”
“…….”
아빠가 날 힐끔 쳐다봤다. 정말이냐고 묻는 것 같아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잘생기긴 했지요?”
“…….”
아빠는 여느 때처럼 표정이 없었다. 나는 해맑게 “그렇죠?” 하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