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누아제가 된 병사들까지 살핀 뒤에 난 방 안에서 내내 고민했다. 시트론, 마릴린과 주방에서 나눈 대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
나 홀로 모든 것을 처리할 수는 없다. 아빠와 오빠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날 생각한다는 이유로 홀로 많은 일을 끌어안으려고 한다면 난 몹시 서운할 것이다. 결심을 마친 뒤 아빠를 찾아갔다. 밤이 늦었지만 집무실엔 불이 켜져 있었다. 똑똑, 노크하며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들어가도 돼요?”
“그래.”
난 헤헤 웃고 의자를 끌어와 아빠의 책상 앞에 앉았다.
“드릴 말씀이 있는…… 그건 뭐예요.”
아빠가 책상 위에 사진 같은 그림을 올려 두었다.
“도미니크 나이의 나.”
“아빠요?”
“그래.”
“……?”
그런데 이걸 왜 보여 주시지요? 난 고개를 갸웃하며 사진을 들었다.
‘와.’
인화한 마법사가 건드린 것이 아니라면 정말로 제국의 절세 미남이라 불릴 만한 외모였다. 매끈한 피부라든지, 긴 눈매, 그 속에서 묘한 이채를 띤 눈동자, 오뚝한 콧날과 약간 얇지만 보기 좋게 자리 잡은 입술, 칼날로 뚝 베어 놓은 것 같은 턱선.
‘선생님이, 아니, 엄마가 왜 그런 말을 하셨는지 알겠다.’
[선생님은 첫사랑의 어디에 매력을 느끼셨는데요?]
잠시 고민하던 엄마는 아주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얼굴.]
그리곤 몹시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만하면 성격이 더러워도 데리고 살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대체 어느 정도일까 싶었는데,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모습이었다.
“근사하다.”
내가 중얼거리자 아빠는 날 흘깃 보며 말했다.
“도미니크보다?”
“네?”
“…….”
“……?”
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빠를 보았다.
‘잘못 들었나.’
사진을 내려놓고 자세를 고친 후 다시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보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
어쩐지 못마땅한 눈빛이었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릴 게 있어요.”
그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서 난 냉큼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세 가지.”
“세 가지나?”
“네…….”
아빠가 눈을 가늘게 뜨곤 “일단 들어 보지.” 하고 말했다.
“첫 번째는, 샤를리나의 처분이에요.”
“사형.”
아빠의 말투가 차가워졌다.
“그 외에 다른 결정은 있을 수 없어.”
샤를리나는 지금껏 못 할 짓을 많이 했다. 아탈란에서 명을 받고 천에 가까운 수의 영지민을 죽였고, 제 정체를 숨기려 충성스러운 사용인들의 숨을 끊어 냈다. 뿐만 아니라 몇 번이고 날 해치려고 한 데다가 영지에 아탈란의 신관과 성기사들을 끌고 왔으니, 아빠는 단호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알아요. 다만 사형의 이유에 어머니, 그러니까 미아의 납치와 살해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너……!”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부탁과 연관된 일이죠. 아빠, 저는 더 이상 엄마를 숨기고 싶지 않아요.”
“…….”
“제가 ‘미아의 딸’이란 것을 공표해 주세요.”
“그게 명분이 되어 황실의 개가 될 수도 있어.”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우리 엄마를 숨기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죄를 짊어져야 할지언정.
“그리고 세 번째는…….”
나는 손을 꼼질꼼질 매만지다가 아빠를 슬쩍 쳐다봤다.
“도미니크와의 사이를 인정해 주세요.”
“안 돼!”
아빠의 목소리가 짐짓 엄해지는 것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고 오빠들이 들어왔다.
‘듣고 있었어?’
가웨인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며 길길이 날뛰었다. 란슬롯도 드물게 굳은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란슬롯이 한쪽 무릎을 굽히고 내 손을 잡았다.
“황제에게 도미니크와의 결혼을 청한 건 황태자와 4황자의 청혼을 물리기 위한 계책이었어. 그렇지?”
“…….”
그렇게 말하고 아빠와 오빠들의 허락을 얻어 내긴 했지. 나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하지만 이미 청한 일이고…… 엎지른 물은 다시 담을 수 없기도 하고…….”
“물이 엎질러졌으면 새로 따르면 될 일이야.”
가웨인도 맞장구를 쳤다.
“아직 열아홉이라고, 너.”
아빠와 란슬롯이 고개를 끄덕여서 환히 웃었다.
“저 이제 곧 생일이잖아요!”
가웨인은 움찔하더니 다시 눈을 부릅떴다.
“황태자와 황자의 청혼서도 완전히 물린 게 아니고…….”
“그건 곧 처리될 텐데요.”
“누아제가 된 영지민과…… 그래! 조부님의 몸 상태도…….”
“영지민들은 차도를 보이고 있어요. 할아버지께도 좋아하시는 음식 잔뜩 만들어 드리고 왔으니까 곧 회복하실 거예요.”
가웨인은 더 할 말이 없는지 “크윽.” 신음하다가 아빠를 쳐다봤다. 테이블을 툭, 툭, 두드리던 아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네 오빠들도 결혼 전이지 않으냐.”
“아…….”
큰오빠 란슬롯이 결혼도 안 했는데, 막내인 내가 먼저 약혼하는 건 보기에 좀 그런 걸까. 가웨인과 란슬롯은 아빠와 시선을 교환하다가 나를 쳐다봤다.
“그래, 아직은 이른 얘기야.”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다, 동생아.”
걸핏하면 형에게 대드는 아우가 자랑스레 말했다.
* * *
아빠와 오빠들은 ‘세 번째 부탁’에 몹시 단호했다. 결국, 난 그것과 관하여는 별 소득 없이 방으로 돌아왔다.
‘그럼 어떻게 한담.’
황제도 난색, 우리 가족도 난색. 가족들의 동의가 없으면 약혼조차 힘들 텐데.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배를 깔고 누운 난 통신석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더는 도미니크를 황궁에 두고 싶지 않아.’
황태자를 제외한 길라게온의 황자들은 결혼 후 작위를 받고 황궁 밖에서 가정을 꾸린다. 그에게 황궁은 감옥 같은 곳이었다. 삿된 자의 힘과 싸우고 있는 지금은, 훨씬 위험한 곳이 되었고.
‘황태자나 미카엘 측에 그걸 들키면 어떻게 될지 몰라.’
그때는 할아버지가 직접 나서도 구할 수 없을 터. 내가 이번에 그와의 관계를 밝힌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나는 끙끙 신음하며 중얼거렸다.
“어렵다, 연애…….”
원래 이렇게 어려운 거야?
시무룩하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통신석이 깜빡였다.
‘도미니크의 코드!’
나는 냉큼 통신을 연결했다.
“저하!”
[예.]
“폐하와는 이야기를 잘 끝내셨어요?”
[예.]
아닐 텐데. 나를 위한 그의 거짓말이 쓰라려서 난 한숨을 내쉬었다.
[프렌시프는 어떻습니까.]
“누아제가 된 사람들이요? 아니면 영지 복구? 우리 결혼에 대한 가신들과 귀족들의 의견이요?”
[당신.]
나는 멈칫하고 통신석을 꽉 쥐었다. 내가 도미니크를 청했던 그날, 황제는 말을 삼켰다. 그리고 난 그가 무슨 말을 삼켰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도미니크의 무엇이 헬리오스나 미카엘과 다르냐고.
그가 생각하는 도미니크의 ‘다른 점’은 오직 정치적 견해일 것이다. 그리고 사실 나도 그가 수많은 남자와 뭐가 다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그가 꿈속의 소년이라서, 이제껏 나를 도와준 사람이라서, 내게 다정한 사람이라서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알겠다, 도미니크가 좋은 진짜 이유를.
그에겐 오직 나뿐이다. 궁금한 것도, 염려하는 것도. 그를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며, 또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오직 나뿐이었다. 그의 물음은 언제나 나였다.
“보고 싶어.”
내가 중얼거렸을 때였다. 창문에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설마.”
[…….]
“아니죠?”
[글쎄요.]
“말도 안 돼. 이런 거 드라마에서만 봤단 말이에요.”
나는 얼른 테라스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아래에 있는 인물을 보고 난 입을 틀어막았다.
“아, 진짜…….”
“이번에도 내가 빨랐습니다.”
“뭐가?”
“먼저 보고 싶었거든.”
“아니, 대체 어떻게 온 거람. 경비병들이 순순히 문을 열어 줘요?”
“프렌시프 령에 있는 어린 아들이 내 덕에 살았더라고. 은혜는 입혀 둘 만하군요.”
내가 난간을 꽉 잡은 채 몸을 기울이자 그가 미간을 좁혔다.
“위험해.”
“진짜 신기하다. 실제로는 이런 기분이구나. 갑자기 찾아오는 거.”
“위험하다니―”
그때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통신석에 속삭였다.
“순찰병들 중에도 은혜를 입혀 둔 사람 있어요?”
[글쎄요.]
위에 있던 나는 도미니크 쪽으로 가고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빅터, 카터 형제다!’
으아아. 저들은 은혜를 입었어도 얄짤 없다. 황자고 뭐고 침입자는 즉시 두드려 팰 것이다. 나는 얼른 포털을 열어 그를 내 방으로 옮겼다. 테라스 안으로 이동한 그가 잠시 휘청이더니 중심을 잡았다. 난 재빨리 테라스 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안 봤겠죠?”
“쫓아오지 않는 걸 보면요.”
“정말이지. 이렇게 오면 어떻게 해요.”
“싫습니까?”
“아니요, 좋아서! 그런데 정말로 왜 오신 거예요? 그냥 내가 보고 싶어서? 진짜, 진짜?”
도미니크는 픽 웃곤 내 뺨을 매만졌다.
“오늘 프러포즈 받았잖습니까.”
“아…….”
[폐하, 아드님을 제게 주세요.]
나는 얼굴이 조금 붉어진 채로 헛기침을 했다.
“그건…… 그러니까…….”
어떻게 변명할까 하다가 그의 눈빛을 보고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건 내가 빨랐네요.”
도미니크는 나를 지그시 보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살던 곳에선 프러포즈를 어떻게 합니까.”
“프러포즈요? 으음…… 무릎을 꿇고, 반지를 주고, ‘결혼하자’ 하지요.”
도미니크는 천천히 내 앞에 무릎을 굽혔다.
“……!”
난 깜짝 놀라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 “저하!” 소리치자 그는 아주아주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나는 당신처럼 재밌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웃기다는 거예요?”
그는 쿡쿡 웃고 말을 계속했다.
“당신처럼 사랑스럽고, 사랑하는 사람도 내 인생엔 없었어요.”
“치……. 거짓말, 전 애인들은?”
그가 잠깐 당황했다.
“그건 폐하의 명으로 선을 본 거고, 어쩔 수 없이…….”
“거짓말쟁이.”
“첫사랑도 마지막 사랑도 당신일 거예요.”
나도 쪼그려 앉아서 양손으로 턱을 괴고 그를 흘겨보았다.
“거예요? 아닐 수도 있다는 거네요.”
“……프러포즈가 원래 이런 겁니까? 하다가 싸우는 연인도 있습니까?”
나는 킥킥 웃고 “알았어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하세요, 저하.”
그는 잠깐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당신과 함께라면 평생을 재밌고, 행복하게 보낼 것 같은데.”
“글쎄요~”
내가 자꾸 장난을 치자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내 뺨을 가볍게 잡고 약간 골이 난 듯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아니, 부끄러우니까…… 난 프러포즈는 처음이라서.”
“두 번째면 안 될 텐데?”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어색하단 말이야.”
도미니크는 내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결혼하자.”
“…….”
“내 곁에 있어 줘.”
나는 입술을 살짝 베어 물고, 손을 살짝 내려 그를 곁눈질로 보았다.
“맨입으로?”
“어떻게 할까요.”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설거지는 누가 할 건지, 외식은 한 달에 몇 번, 이런 구체적인 거.”
“설거지는 하인이 할 테고, 외식은 원한다면 매일 하죠.”
“으음……, 그것만으론…….”
“내 인생을 다 줄게.”
그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나는 손을 무릎에 포개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세나.”
“…….”
“세나야.”
“응.”
“네 전부를 달라고 하지 않을게. 내가 첫 번째가 아니라도 좋아. 너는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해.”
“…….”
“요리사가 되어도 좋고, 산적이 되겠다고 해도 함께 산채로 들어갈게.”
“…….”
그가 내 손등에 입술을 맞댄 채 말했다.
“결혼해 주십시오.”
그는 애원하듯 덧붙였다.
“부디.”
―하고.
나는 붉어진 얼굴을 양손으로 숨기고 그를 곁눈질로 힐끔힐끔 쳐다봤다.
“생각해 볼게요…….”
그러자 눈이 가늘어진 도미니크가 내 턱을 끌어와 다정히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부드럽게 뭉개지고 달콤한 숨결이 느껴졌다. 오늘의 입맞춤은 평소와 달랐다. 아주아주 다정하고도 깊고, 어쩐지…….
‘야, 야해!’
한참을 그에게 끌려다녔더니 숨이 차서 어깨를 쿵쿵 내리치자 겨우 입술이 떨어졌다.
“더 장난쳐 보든가.”
그가 짓궂은 표정으로 “프러포즈에 관한 답변은?” 하고 물어서 난 붉어진 얼굴로 웅얼거렸다.
“좋아요. 결혼하자.”
그렇게 말하며 그의 목을 확 끌어안았다. 도미니크는 이제껏 본 적 없이 아주아주 환히 웃었다.
* * *
다음 날 아침, 뜬 눈으로 하얗게 새벽을 보낸 난 침대에 누운 채 이불을 끌어안았다.
‘나 어제…… 프러포즈 받았어.’
왼손 약지에 그가 끼워 준 반지가 반짝였다. 반지를 끼워 준 후 약지에 입 맞추던 그는 엄청 달콤했다. 멍하니 반지를 쓰다듬다가 “아가씨.” 하는 음울한 목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시, 시트론, 마릴린!”
“행복하신가요…….”
“행복하시군요…….”
두 사람은 퀭한 눈으로 각각 자신의 팔을 주물렀다.
“……미안.”
내가 헤헤, 어색하게 웃자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동틀 무렵, 난 그를 이동시켰다. 황궁엔 결계가 있으니 포털을 열어 줄 수 없어서, 그가 타고 온 말이 있는 뒷문으로 이동시켰다. 그런데 혼자 보내는 건 너무 아쉬워서 뒷문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다가 마일로에게 들켰다.
마일로는 아빠와 오빠들에게 일러바치진 않았지만, 다른 면에서 날 곤란하게 했다. 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전속 하녀들을 몇 시간이나 벌세운 것이다.
“열두 살 이후로 팔 들고 벌서는 건 처음이에요.”
“저도 아주 오랜만이었어요. 그것도 두 시간이나.”
두 사람이 음울하게 중얼거려서 난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소갈비 해 줄까?”
“…….”
“…….”
“붕어빵도 만들어 줄게.”
“……호떡보다 맛있나요?”
“……그런가요?”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붕어빵에 팥도 넣고, 슈크림도 넣어 줄게. 엄청 맛있을걸!”
그들은 큼,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네 개 해 주시면 안 되나요? 두 개는 칼립스 님께 드려도 돼요?”
“그럼 저도 네 개.”
나는 활짝 웃으며 “좋아!” 하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누아제가 된 사람들에게 소갈비와 간식을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달랠 사람도 있고.’
황궁에. 나는 곧장 세수를 하고 옷을 입었다.
* * *
그 시각, 프렌시프의 남자들은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세니아나는 보고가 들어가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프렌시프의 경비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도미니크가 몰래 저택에 숨어들어 새벽녘까지 세니아나와 함께 있었다는 것은 이미 그들 귀에 들어갔다.
‘빌어먹을.’
‘제기랄.’
‘개자식.’
즉시 불호령을 내려 쫓아내면 세니아나에게 미움받을까 나서지 못했지만 언짢은 기분이 도무지 나아지지 않았다.
“그 새끼를 어떻게 죽이지.”
“쳐죽일 놈.”
“…….”
세 남자가 살해 계획을 세우고 있던 그때, 마일로가 급히 들어왔다.
“주인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예정도 없이 온 자는 받지 않는다.”
“하지만…….”
마일로가 곤란한 얼굴로 중얼거리다가 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서와 란슬롯, 가웨인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다. 그리고.
“저 새― 아니!”
가웨인이 벌떡 일어나 불청객을 쳐다보았다. 도미니크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버님.”
“……예고도 없는 불청객이 내 집을 막무가내로 들어왔는데 좋은 아침일 리가.”
그가 대답하자 도미니크는 약간 긴장한 얼굴로 허리를 구부렸다.
“예뻐해 주십시오, 아버님!”
가웨인은 당황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고, 아서는 싸늘한 눈빛이었다. 얼어붙은 듯한 고요 속에서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란슬롯이었다.
“황망한 말씀 거두어 주십시오. 제왕께 충성하는 것이 도리인 저희가 어떻게 제왕의 핏줄을 어여삐 여길 수 있겠습니까.”
미소짓고 있으나 그것은 완곡한 거절이었다. 도미니크는 허리를 깊게 굽히며 말했다.
“저는 귀댁의 금지옥엽을 포기할 마음이 없습니다.”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도미니크를 주시하던 아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문의 사정을 알고 계실 테니 긴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한 번 그 아이를 잃었고, 다시 만난 지 겨우 일 년입니다.”
도미니크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 아서를 바라보았다. 도미니크의 앞에선 아서는 아주 낮고도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그렇다 한들 언제까지 품에 끼고 살 수는 없을 겁니다. 언젠가는 다른 사내의 품에 그 아이를 보내야 한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
“다만, 그 사내가 제 딸의 안전한 쉼터가 되어 주길 바랍니다.”
“…….”
“필연적으로 황위 싸움에 얽혀 내 딸에게까지 검 끝을 향하게 할 사내가 아니라.”
“…….”
“그릇된 핏줄이라 여겨져 전장을 전전한 살인귀가 아니라.”
“…….”
“유년의 기억으로 감정이 메마르고, 오직 살아남는 것이 목표인 가련한 자가 아니라.”
아서의 눈빛이 도미니크의 몸 곳곳에 닿았다. 목 끝으로 올라온 실금 같은 상처 자국, 가라앉은 눈빛, 타고 남은 재와 같은 청회색 눈동자. 가만히 그를 눈에 담던 아서는 물었다.
“저하께선 제가 바라는 사내이십니까.”
“……아닙니다.”
“포기하십시오. 전 나라가 두 쪽이 날지언정 딸의 행복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아서의 양옆으로 선 란슬롯과 가웨인의 표정은 차갑고도 무거웠다. 도미니크가 그들 앞에 부복했다.
“무슨―!”
가웨인이 소리치자 고개를 든 그가 아서의 눈을 응시했다. 도미니크가 부복하며 말했다.
“제가 황실의 핏줄이라 저어되신다면 자리를 버리겠습니다.”
“…….”
“제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할 나약한 사내라 여겨지시면 황위에 오르겠습니다.”
“…….”
“뭐라도 합니다, 저는. 그 어떤 벽이라도 뛰어넘을 생각입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아서가 느른히 물었다.
“뛰어넘지 못할 벽이라면. 산맥이고, 해일이라면.”
“부숴서라도.”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란슬롯은 환히 웃었다. 그러자 가웨인은 인상을 쓰며 제 형의 팔을 툭 쳤다.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란슬롯이 어깨를 으쓱했다.
“벽도 뛰어넘고, 산맥이며 해일은 부순다는 분을 어떻게 말리겠습니까.”
“뭐?! 형, 너!”
가웨인이 소리치기 무섭게 란슬롯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열심히 해 보십시오. 잘될지는 모르겠으나.”
“형!”
“저쪽은 저쪽 일을 하면 되고, 우리는 우리 일을 하면 되는 거지.”
그러며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도미니크를 흘긋 바라보곤 말했다.
“기사들이 마구간의 건초더미를 옮기고 있다고 했나.”
“이 상황에서 무슨―”
“묻잖아.”
“……뭐, 병영 마구간에 문제가 생겼다고는 하더군. 기병 훈련이 코앞이라 기사들까지 자원해서 마구간을 수리 중이라던데.”
“이거 곤란한걸.”
란슬롯이 가웨인을 힐끔 쳐다보았다. 가웨인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곤란하지!”
그들의 속내를 눈치챈 도미니크가 가는 한숨을 내쉬고 손을 들었다.
“그럼 제가.”
“무슨! 어떻게 저하께 그런 부탁을 하겠습니까. 곤란한 말씀은 거두시고 환궁하시죠.”
“아닙니다. 프렌시프의 기병은 훌륭하다는 평판이 자자하니 황궁의 발전을 위해 훈련법 등을 살피고 가겠습니다.”
“정 그러시다면야……. 가웨인, 안내해드려라.”
가웨인이 히죽 웃었다.
‘하여간 독사라니까.’
사내란 팔을 걷어붙이고 말리면 오히려 불이 붙는다. 오기가 생겨서 어떻게든 난제를 해결하겠다고 들 터. 자존심이 상해야 스스로 나가떨어지지.
“안내해 드리죠.”
가웨인이 문을 열어 주자 도미니크는 아서에게 또 한 번 허리를 굽히곤 문을 나섰다.
* * *
‘강적이다.’
네 시간째 이어진 마구간 수리를 지켜보던 가웨인의 얼굴이 점점 새파래졌다. 란슬롯의 표정도 드물게 좋지 않았다. 근사한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머리칼은 약간 젖은 데다 너무나 필사적이라 오히려 기사와 사용인들이 당황했다.
“저하, 망치질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됐어. 너희는 목재를 더 가져와라.”
‘저 미친놈이!’
가웨인은 안절부절못했다. 기사들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이내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던 도미니크는 겉옷까지 벗어 둔 채 수리를 돕고 있었다.
“이거 소문나면…….”
“소문이 나야 우리에겐 이득이지.”
“무슨 소리야?”
“황자 신분에 저택까지 와서 막노동을 했다는 얘기가 돌면 황궁에선 면이 상해서 길길이 날뛸 테고, 세니아나의 청혼은 당장에 물릴 거다.”
황제는 기분 나쁜 내색이야 하겠지만, 프렌시프를 벌하진 않을 거다. 그가 내린 명에 프렌시프는 강경책을 썼고, 황제 입장에선 어떻게든 구슬려서 관계를 돌이키고 싶을 테니까. 이건 좋은 구실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이쪽에서 됐다는데 부득불 나선 건 황자 본인이고.”
그보다 문제는……
“세니아나가 알면?”
“…….”
란슬롯이 구겨진 얼굴로 짓씹듯 말했다.
“입단속 철저하게 해.”
“저 새끼…… 고단수인가.”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가웨인은 눈빛이 싸늘한 제 형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 * *
쇠고기의 경우엔 돼지고기보다 살이 부드러워서 간이 쉽게 밴다. 나는 핏물을 뺀 쇠고기를 한 시간가량 재워 놓고, 바로 냄비에 넣었다.
‘압력 밥솥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으니까…….’
냄비 뚜껑 위에 납작한 돌을 잔뜩 올려 두고 그대로 오븐에 넣었다.
“아가씨, 반죽은 이 정도면 될까요?”
“음, 좀 더 묽어도 돼.”
“빵을 하는데요?”
“틀에 넣어서 구울 거라 괜찮아.”
“네.”
반죽을 잘 섞은 마릴린이 “여기요!” 하며 소리쳤다. 시트론은 그런 마릴린을 보며 쿡쿡 웃었다. 마릴린이 “왜, 왜요?” 하고 묻자 시트론이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은 유난히 열심히시라.”
“저, 저는 언제나 열심히 했거든요?!”
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정말?”
“그럼요!”
“난 칼립스에게 줄 거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무, 무슨, 전혀 아니에요!”
말을 그렇게 하면서 얼굴은 새빨개졌다. 나와 시트론은 시선을 교환했다. 마릴린이 우물거리다가 “빠, 빨래를, 이, 잊었네!” 하며 주방에서 후다닥 도망쳐서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귀여워라. 사랑하는 사람들은 왜 저렇게 항상 귀여운지.”
마릴린 대신 반죽을 젓던 시트론이 중얼거려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아가씨도요.”
“나?”
“요리하시면서 눈이 반짝반짝하신걸요. 이거 혹시 황자님께 드리려는 건가요?”
오븐 안을 살피던 내가 움찔하며 “아니!” 하고 소리치자 시트론은 “흐응.” 하며 고개를 모로 꼬았다.
“아니시라고요?”
“아, 아닌, 아닌데!”
“그런가요?”
“아, 아니야!”
“정말?”
“……맞아.”
내가 울상을 지으며 “아빠랑 오빠들한테는 비밀이야?” 하고 말하니 시트론이 깔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그럼 병영으로 가실 거죠?”
“병영?”
“저하께서 병영에 계시잖아요?”
“정말? 왜?!”
“글쎄요. 듣기론 각하와 도련님들을 뵈었다고 하신 것 같은데.”
아빠와 오빠들을 보고 병영에 갈 일이 뭐가 있지?
‘뭔가 군사에 관해서 얘기할 게 있는 걸까.’
황자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중앙 기사단 기사서임을 받는다. 가웨인처럼 기사단에 몰두하지는 않지만, 도미니크는 황태자나 미카엘에 비해 기사단과 관련한 공무가 많았다.
‘아무튼 다행이다.’
식기 전에 전해 줄 수 있겠어. 음식은 갓 완성해 따뜻할 때가 제일 맛있으니까! 나는 헤헤 웃고 평소보다 열심히, 세심하게 요리했다. 겨울이 되기 전에 영지 대장장이들로부터 의뢰한 붕어빵 틀을 꺼내서 버터를 슥슥 발랐다.
“그런데 아가씨.”
“응?”
“이 빵은 꼭 붕어 모양이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왜인지 맛있어져.”
“네?”
사실 빵을 틀에 구워서 그 안에 팥이나 슈크림을 넣는 것뿐인데, 붕어 모양이면 이상하게 맛있단 말이지. 중앙이 볼록하고 위아래로 갈수록 납작한 모양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빵은 모양에 따라 미묘한 맛 차이가 나니까.’
내 말에 시트론은 “그게 뭐예요.” 하며 킥킥 웃었지만, 난 진심이었다.
‘비슷한 특징을 이용해서 색다른 요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쟝뤼크의 로열 셰프 경합을 도와야 하는데, 애피타이저나 디저트는 보조들이 맡는 경우가 더러 있다.
‘대개 디저트를 맡는다고 했지.’
카렌듈라 후작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삿된 자들의 일도 진정되었으니 조만간 경합을 치르겠지. 나도 집안일이 정리되는 대로 쟝뤼크를 도울 방법을 궁리해야겠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요리를 완성했다. 누아제가 된 사람들이 먹을 만큼 나누어 준 후에 도미니크가 먹을 양을 따로 담아서 쟁반에 올렸다. 요리에 돔을 씌운 후, 뜨겁게 달군 돌멩이까지 돔 안에 넣어서 식지 않게 했다. 그리고 병영으로 향했다.
“아우우, 춥다.”
“마지막 달이니까요. 그래도 이번 주는 유난히 추운 것 같아요.”
“응, 그러게.”
나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시트론이 걸쳐 준 숄을 꽉 끌어안았다. 정원을 지나 병영 앞으로 가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오빠!”
가웨인과 란슬롯이 병영 안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세, 세니아나?”
가웨인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활짝 웃으며 그들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여기 계셨어요?”
“뭐, 그…… 렇지. 그런데 너는 웬일로?”
“그…… 러니까, 그게…….”
도미니크에게 주러 왔다고 하면 구박받을지도. 나는 고민하다가 병영 뒤로 보이는 유리관을 발견하고 “저거요!” 소리쳤다.
“유리관에서 먹으려고요. 하늘 구경하면서.”
내가 재빨리 변명하자 가웨인은 ‘정말이냐?’ 하는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그건 뭔데.”
“소갈비요.”
“갈비라면 저번에 만든 그거?”
“그건 돼지갈비고요. 이건 소! 더 부드러워요.”
가웨인이 돔을 살짝 들어 보더니 “그 옆에 있는 건?” 하고 물었다. 붕어빵이었다.
“그건 붕어빵이라고 하는 거예요.”
“빵이라고, 이게?”
“특이한 모양이죠? 오빠들도 드셔 보실래요?”
내가 란슬롯을 쳐다보며 물으니 그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난 시트론이 든 쟁반에서 돔을 완전히 올리고 접시 위 붕어빵을 그들에게 하나씩 건넸다.
“큰오빠가 든 건 슈크림이고, 작은오빠가 든 건 팥이에요.”
“팥?”
“콩처럼 생긴 건데 콩보다 더 달콤하고, 으음…… 일단 드셔 보세요.”
붕어빵을 하나씩 든 란슬롯과 가웨인은 잠시 당황한 얼굴이었다.
“이건 어떻게 먹는 거지? 위에서 아래로? 아니면 생선을 먹을 때처럼 등 쪽으로?”
“아무렇게나요. 그냥 드시고 싶은 대로.”
가웨인은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머리 위부터 단숨에 물었다. 란슬롯은 붕어빵의 중앙을 뜯어서 중앙부터 먹는 쪽이었다. 내가 히히 웃자 시트론이 “왜요?” 하는 표정으로 물어서 난 속삭였다.
“나는 머리부터 먹는 파거든.”
붕어빵은 먹는 법을 보는 것도 재밌단 말이지.
가웨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빵인데 따뜻해! 호떡 같은 거냐?”
가웨인은 호떡을 몹시 좋아했다. 일전에 내가 만든 호떡을 먹은 후로 가끔씩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따뜻한 게 먹고 싶은데.” 하고 중얼거렸다. 그래서 따뜻한 밀크티나 커피, 차, 코코아 등을 추천하면 “그거 말고! 든든한 거 말야.” 하고 말했다.
[그럼 스튜?]
[축축한 건 싫어.]
[고기를 구워 드세요.]
[그…… 밀가루로 된 거 말이다.]
[아~! 만두요!]
그때 시무룩해지던 가웨인의 얼굴이 기억난다. 한참 뒤에 란슬롯이 조언해 준 후에야 알았다. 호떡이 먹고 싶었다는걸.
“호떡과 비슷하면서 다르지요. 그건 기름기도 많고 너무 달아서 한두 개 먹으면 질리는데 붕어빵은 그렇진 않거든요.”
“이쪽이 더 마음에 들어!”
“속에 팥 말고 이것저것 넣을 수 있어요.”
“이것저것?”
“큰오빠가 먹는 슈크림이나 피자…… 또 불고기 같은 것도 넣을 수 있고…… 그리고!”
하나를 금세 해치운 가웨인은 “호오.”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란슬롯을 쳐다보았다.
“그거 맛있어?”
“너도 먹었잖아.”
“슈크림 말이야.”
“그래, 아주 맛있어.”
란슬롯은 호떡보다 슈크림이 든 붕어빵이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이거 괜찮은걸.’
슈크림이라면 황비들이 아주 좋아하는 것이다. 겨울이니 따뜻한 빵도 좋아할 거고, 황궁에서 선보이면 정말로 괜찮겠다. 가웨인이 “나도 줘 봐.” 하고 란슬롯이 들고 있는 슈크림을 쳐다봤다. 란슬롯은 붕어빵을 흘깃 쳐다보더니 단숨에 입에 넣었다.
“치사하게!”
“더 있잖아. 달라고 하든지.”
가웨인이 큼,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 하나로는 맛을 잘 모르겠군.”
“네?”
“내가 맛 평가를 해 볼 테니까, 그, 뭐, 하나 더 줘 보든지.”
내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슈크림 붕어빵을 집던 그때였다.
“……저하?”
땀에 젖은 채 재킷도 입지 않고 병영에서 나오는 도미니크가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도미니크는 내게 가볍게 묵례한 후 란슬롯과 가웨인에게 다가갔다.
“끝냈습니다. 더 도울 일은 없겠습니까?”
돕다니? 마침 아빠까지 병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아서가 움찔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미간을 좁힌 채 가족들을 쳐다봤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 * *
프렌시프의 사내들은 생각했다. 동시에.
‘큰일 났다.’
―하고.
가족들이 대답하지 않자 세니아나는 도미니크를 쳐다보았다.
“여기서 뭐 해요.”
“프렌시프의 기마술을 배우는 중입니다. 도중에 마구간에 문제가 생겨 돕던 중이었고요.”
“저하께서?”
“군의 훈련은 황자라 할지라도 쉽게 참여할 수 없습니다. 프렌시프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 몸으로!”
세니아나가 버럭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굳어져 있었다. 가족들 앞에선 보인 바 없는 모습이라 모두가 당황했다.
일 났다, 정말로. 가웨인이 당황해서 허둥거렸고, 란슬롯이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세니아나, 이번 일은 저하께서 강권하신지라 어쩔 수 없었어. 상황이 민망했기 때문에 우린 쌓여 있는 일도 뒷전으로 하고 저하를 지켜보고 있었거―”
“놓으세요.”
“……뭐?”
“놔.”
란슬롯이 당황하여 굳어지자 세니아나는 매정하게 그에게서 손을 빼냈다. 그녀가 도미니크의 손목을 거칠게 잡고 끌어냈다.
“가요.”
“잠깐, 영애―”
“가자니까!”
세니아나가 또 한 번 소리치자 아서가 나섰다.
“세니아나.”
“……저하는 아파요.”
“뭐?”
가웨인과 란슬롯의 눈도 커졌다. 세니아나는 입술을 꾹 베어 물고 가족들을 쏘아보았다.
“영지에 삿된 자들이 왔을 때, 우리를 돕느라 몇 번이나 혼절했었어요. 내색도 없이.”
“…….”
“제게 아빠와 오빠들이 귀한 만큼, 아빠와 오빠들에게도 귀한 딸이고 동생이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
“내가 귀하다고 해서 남이 하찮은 건 아니잖아요.”
세니아나가 눈물을 뚝, 뚝, 흘리자 프렌시프의 사내들은 말을 잃었다.
“아빠는 내가 도미니크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황제 폐하께 구박을 받아도 좋으세요?”
“그건―!”
“큰오빠는 몸이 이렇게 안 좋아도 폐하의 눈치를 보느라 내가 억지로 몸을 움직이길 바라는 거예요?”
“아니.”
“작은오빠는 내 감정 때문에 타인에게 자존심 상하고, 비참해도 애써 괜찮은 척하는 걸 보고 싶어요?”
“절대!”
세니아나가 씨근덕거리며 가족들을 흘겼다.
“진짜 미워!”
흐어엉! 울며 도미니크를 끌고 가는 세니아나를 보며 가족들이 탄식했다.
“빌어먹을, 이게 다 형 때문이야.”
“좋다고 말 맞춘 사람이 누구더라.”
“너희들이 지금 싸울 때냐.”
그들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란슬롯은 쟁반을 든 채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트론을 바라보았다.
“세니아나를 잘 다독여 주어라.”
“그러기야 하겠지만…… 외람되지만 한 말씀 올리자면.”
그녀가 속으로 혀를 차며 패잔병 같은 몰골의 프렌시프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큰일 나셨습니다.”
가웨인이 힘 빠진 목소리로 “네가 보기에도?” 하고 중얼거리자 시트론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망하셨지요.”
……어떻게 하냐, 이거.
* * *
도미니크는 훌쩍훌쩍 우는 내 눈가를 엄지 끝으로 매만졌다.
“저는 괜찮다지 않습니까. 그만 우십시오.”
“거기서 왜 그런 걸 하고 있어요!”
“기사들이며 하인들도 하던 일입니다.”
“당신은 내 기사나 하인이 아니잖아!”
화가 나고, 미안하고, 면목이 없었다. 그가 날 좋아한다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기를 펴지 못하고 종노릇을 하는 건 정말로 보고 싶지 않았다. 도미니크가 나를 끌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정도 일은 애교지.”
“…….”
“프렌시프 공이나 경들이 정말로 나를 당신 인생에서 배제하려 했다면 나라가 두 쪽이 났을 겁니다.”
“…….”
“진심으로 나선 아서 프렌시프는 이렇게 녹록한 사람이 아니에요.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이 맞다. 아빠나 오빠들이 진심으로 도미니크를 쫓아내려 했다면, 그는 저승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공과 경들은 내 몸이 좋지 않다는 걸 몰랐고.”
“……하지만.”
“나라도 그럴 겁니다. 당신과 내 자식 곁에 위험 인자가 있다면 당신 가족들보다 더한 짓도 서슴없이 했을 거예요.”
나는 그의 가슴을 퍽, 때리며 노려봤다.
“다시 이런 짓 하기만 해 봐. 나도 황궁에 가서 잡초를 잔뜩 뜯을 테니까. 막 폐하께 구박도 받을 거예요!”
도미니크가 픽 웃으며 “그건 너무 무서운 협박인데.” 하고 미간을 좁혔다.
“누우세요.”
“당신 방에서?”
“빨리! 식은땀 흘리잖아요.”
나는 도미니크를 내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끌어 올렸다.
“식사도 안 하셨죠?”
“아직입니다.”
“저하 주려고 소갈비를 했는데…….”
그녀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무 화가 나서 두고 왔어요. 어쩌죠?”
“그건…… 아쉽긴 하군요.”
“주방에 조금 남긴 했어요. 가져올 테니까 여기 누워 계세요.”
“예.”
“믿을 수가 있어야지……. 절대로 움직이면 안 돼요.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도미니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 손을 쳐다봤다.
“약속을 할 땐 이렇게 손가락을 거는 거예요.”
그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어기면 손가락 관절을 뽑아 버리겠다는 암시입니까?”
“그렇게 될지도 몰라요.”
“……예.”
나는 몇 번이나 그와 손을 걸고 방을 나섰다. 주방으로 가려다가 마주친 가족들이 날 불렀다.
“세니아나.”
가웨인이 다급히 날 부르며 소리쳤다.
“이번 일은 우리의 실수―”
내가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그의 눈동자가 란슬롯 쪽으로 데루룩 굴렀다.
“―가 아니라 형의 실수야.”
란슬롯이 그를 노려보았고, 난 인상을 찌푸리며 란슬롯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못됐어.”
“아니, 세니아나, 그건―”
“흥!”
내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주방으로 들어가자 세 남자가 나를 졸졸 쫓아왔다.
“오해다, 막내야. ‘우리’는 저하의 몸이 미령하신 건 정말로 몰랐어.”
“몰랐으면 그런 일 시켜도 돼요? 자존심 상하게 하려고 일부러 한 거죠?”
“저하께서 강권하시는지라 어쩔 수 없이…….”
내가 팔짱을 끼고 그를 쳐다보자 그는 아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버님께서 허락하셨어.”
“아빠가요?!”
아빠는 굳은 얼굴로 란슬롯과 가웨인을 노려봤다.
“너무해요, 아빠.”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오빠들을 쳐다보니 가웨인은 아빠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침묵은 곧 허락…… 그 자리에 계셨지만, 아무런 말씀하지 않으신 건…….”
“아무래도.”
가웨인과 란슬롯의 협공에 아빠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오해다, 세니아나.”
나는 인상을 쓰며 세 남자를 보다가 남은 붕어빵을 챙겼다. 그러자 가웨인이 눈을 빛냈다.
“슈크림이 든 걸 내게 준다고 했지?”
“오빠.”
“응?”
“당분간 제가 만든 것 못 드실 줄 아세요.”
“왜!”
“왜?”
내가 눈을 부라리자 그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깨를 떨구었다.
“아니……. 내가 미안하다고…….”
그제야 난 시선을 거두었다.
* * *
세니아나의 화는 쉽게 풀릴 기미가 없었다. 도미니크가 돌아간 후에도 온종일 졸졸 쫓아다녔지만, 저녁이 되어서는 말도 섞어 주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하냐고.”
가웨인이 세니아나의 방을 흘끔거리며 묻자 란슬롯이 의자의 팔걸이를 검지 끝으로 툭, 툭,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쉽게 풀리진 않겠지.”
“그걸 누가 몰라서 물어? 저녁도 안 먹었잖아!”
세니아나는 화가 나면 일단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프렌시프 남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작고 마른 녀석이 식사까지 하지 않으면, 삐쩍 곯아 뼈가 툭툭 부러질 것 같았다.
“빈혈이라도 생기면.”
“속이라도 쓰리면.”
형제가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차를 테이블에 내려놓던 마일로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저, 도련님……?”
그들이 마일로를 쳐다보자 그는 단호히 말했다.
“저녁을 한 번 굶었다고 없던 병이 생기진 않습니다.”
그러자 가웨인이 버럭 소리쳤다.
“아무것도 안 먹는데 병이 안 생긴다고! 저 녀석은 작고! 여리고! 연약하단 말이다!”
그 작고 여리고 연약한 아가씨가 삿된 자들과의 전투에서 누아제들을 거의 쓸어 버렸다는 기억은 지워진 모양이었다. 세니아나의 공복 시위로 발을 동동 구르는 건 아서나 란슬롯, 가웨인뿐만이 아니었다.
시트론, 마릴린, 그리고 호위 기사들은 그녀가 쓰러지기라도 한 듯 야단이었다. 마릴린은 세니아나의 방 앞에서 거의 울부짖다시피 소리쳤다.
[아이고, 아가씨! 우리 아가씨 어쩌나!]
펑펑 우는 딸이 기가 막혀서 ‘너 애비가 한 끼 굶어도 그리 울 테냐?’ 하고 묻자 그녀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눈을 희번덕 빛냈다.
[아빠는 좀 굶어야지. 뱃살 어떻게 할 거야, 뱃살! 성인병 걸린다고?]
[…….]
[아이고, 아가씨! 우리 아가씨! 저 포악한 주인님과 도련님들! 작고! 연약하고! 여린! 우리 아가씨가 식사를 안 하시다니! 으허엉!]
빅터, 카터 형제나 고레일, 바커스도 발을 동동 굴렀다.
[쓰러지십니다, 아가씨!]
[차라리 저희가 굶겠습니다!]
난리가 아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고민하던 란슬롯이 몸을 일으켜 아서 앞에 부복했다.
“아버님.”
“…….”
“가문을 위해 희생해 주십시오.”
“뭐?”
“오늘의 죄는 분담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책임지는 게 아무래도.”
그러자 가웨인이 의자에서 튀어 오르듯 일어나선 제 형 옆에 무릎을 굽혔다.
“아버님의 은혜, 희생! 잊지 않겠습니다.”
“이 새끼들이…….”
아서가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왜 나야. 일을 벌인 건 너희들이니 너희들 중에서 한 놈이 희생해야지.”
“이럴 땐 역시 가문의 대들보인 아버님께서…….”
“다물어.”
아서와 란슬롯, 가웨인은 한참을 싸워 댔다. 먼저 도미니크를 구박하자고 물꼬를 튼 건 란슬롯이니 그가 희생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 군의 책임자는 가웨인이니, 역시 가웨인이 희생하는 쪽이 옳다. 가문의 일이니 가주인 아서가 나서는 게 백번 맞다. 어느새 가신들과 사용인들까지 나서 그들 토론에 끼어들었다.
“이러다 끝이 없겠다고!”
가웨인이 버럭 소리쳤다.
“운에 맡기는 수밖에. 제비라도 뽑읍시다.”
“제비에 무슨 수작을 할 줄 알고!”
“다수결! 다수결이어야 한다!”
“수작 부리기엔 그게 가장 좋지!”
곧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의 사람들을 보며 시트론이 “저어…….” 하고 손을 올렸다.
“이럴 때, 쓰기 좋은 방법을 제가 압니다. 아가씨께서 가르쳐 주셨지요.”
시트론에게 시선이 모였다. 마일로가 물었다.
“그게 무엇이냐.”
“가위바위보, 라고 한답니다.”
그녀는 세니아나에게서 배운 가위바위보를 가르쳐 주었다.
“호……. 이거 괜찮군.”
“전략과 반사 신경을 필요로 하지만, 짧은 시간에 모두의 앞에서 해야 하는 만큼 반칙하긴 쉽지 않군요.”
“훌륭합니다.”
아서와 란슬롯, 가웨인이 나서자 가신들과 사용인들이 그들을 빙 둘러서서 긴장된 표정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 그럼!”
가위, 바위, 보!
세 남자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나는 눈을 느리게 끔뻑이며 비척비척 일어났다.
‘아우, 피곤해.’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잠들었다. 누아제가 된 사람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정화시킨 탓에 피로가 몹시 축적된 모양이었다.
‘세상모르고 잠들었네.’
눈을 비비다가 뱃속에서 꾸륵, 소리가 나길래 아랫배를 살살 문질렀다. 그러고 보니까 저녁도 안 먹었잖아.
“뭐라도 먹어야겠다.”
가웨인은 새벽부터 기사단 훈련에 참관하는 경우가 많아서 주방은 아침마다 샌드위치 등의 가벼운 음식을 준비해 놓는다.
“샌드위치, 샌드위치.”
나는 요리를 하는 만큼 먹는 것도 좋아해서 샌드위치를 먹을 생각에 신이 나 방을 나섰다. 신선한 양상추와 토마토를 잔뜩 넣고, 햄을 두툼하게 썬 샌드위치를 먹어야지.
계단을 콩콩, 내려가다가 하녀장을 발견했다. 그녀가 고개를 숙여서 나도 밝게 인사했다.
“안녕!”
“어머, 아가씨.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오늘? 으음, 평소와 같은데?”
“어제 화가 많이 나셨잖아요?”
맞다. 나 화났었지. 자느라 다 풀렸다. 게다가 도미니크가 돌아가면서도 가족들의 변명을 해 주어서 마음이 많이 가벼워졌다. 무엇보다 가족들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하고.
‘나를 사랑하니까.’
그리고 나도 가족들을 너무나 사랑한다. 도미니크만큼. 아무리 화가 나도 사랑하는 사람에겐 오래 이어지지 않는단 말이지요. 참 신기한 일이었다.
1층으로 내려가서 주방에 들어가려던 나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으앗!”
눈이 퀭하고 좀비 같은 사람들이 나를 보며 울먹이고 있었다.
“아가씨…….”
마릴린이 내 손을 덥석 잡으며 울먹였다.
“이제 방에서 나와 주시는군요. 저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그러고 보니까 잠결에 ‘아이고, 아가씨!’라든지 ‘제발 식사만이라도 해, 세니아나!’라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꿈이 아니었단 말이야?’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마릴린을 쳐다봤다.
“걱정했어?”
“당연하지요. 어제 아무것도 못 하고―!”
“어제, 칼립스에게 간다고 하지 않았어?”
“아, 맞다.”
좋아하는 남자가 아니라 내가 우선인 건 기쁘지만, 묘한 기분이다. 내가 어색하게 웃고 있던 찰나, 뒤에서 무거운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와 오빠들이었다. 그중 한 사람이 나를 보며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이번 일을 주도했다.”
가웨인이었다.
“네?”
“내가 도미니크에게 마구간에서 청소를 하라고…… 하지만 세니아나, 부디 ‘미워’는 하루에 한 번만 해 줘.”
“잉?”
이게 무슨 소리람. 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가웨인을 보다가 픽 웃어 버렸다.
“미운 짓을 안 하면 되지. 밥 먹으러 가요. 배고파요.”
내가 헤헤 웃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던 사람들이 활짝 웃었다. 커다란 창밖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집 안은 부지런한 하인들이 살뜰히 보살핀 허브의 달콤한 향으로 가득했고, 나를 둘러싼 온기는 다정하고 또 다정했다.
좋은 아침, 정말로 좋은 아침이었다.
식사를 한 후엔 가족, 가신들과 앞으로의 일을 상의했다. 영지 복구는 할아버지가 몸을 회복하는 대로 전담하기로 하였고, 마담 버지니아를 필두로 한 가신들이 그를 보좌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할아버지가 황도에서 보던 일은 아빠의 몫이, 아빠가 진행하던 일은 란슬롯이 대신하기로 했다.
“그럼 큰오빠에게도 작위가 필요하겠군요.”
“아무래도.”
“괜찮을까요?”
가웨인이 쿠키를 집어 먹으며 가볍게 대답했다.
“형은 다른 가문의 후계자들보다 작위 수여가 늦은 편이지.”
“왜요?”
“아버님과 조부님 성정을 알잖아. 완벽한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하시면 시작도 않으시지.”
란슬롯만큼 훌륭한 후계가 어디에 있다고?
로열 키친에서 일할 때도 귀족들은 모였다 하면 프렌시프의 후계를 부러워했다.
‘세심한 데다 지혜롭고, 시류를 잘 읽되 휩쓸리진 않으며 판단이 빠르고 정확하다.’
좋은 말만 들려서 나마저 어깨가 으쓱으쓱할 정도였다.
‘솔직히 중앙과 마찰이 있는 이 시점엔 할아버지보다 란슬롯에게 믿음이 간단 말이지요.’
할아버지는 이따금 너무 대쪽같으니까. 하지만 란슬롯은 융통성과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그럼 이제 큰오빠는 백작님이네.”
내가 중얼거리자 란슬롯은 다정하게 웃으며 가웨인이 집으려던 마지막 쿠키를 빼앗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난 늘 우리 막내의 ‘오빠’였으면 좋겠는걸.”
“오빠이자 백작님이고, 가문의 든든한 후계님이시지요.”
“말도 예쁘게 하시긴.”
그가 턱을 괴며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나는 쿠키를 오독오독 씹고, 아빠를 쳐다봤다.
“그럼 아탈란의 추적은요.”
“그건 이 자작님이.”
가웨인이 슬쩍 손을 올리자 아빠가 팔짱을 꼈다.
“누구 마음대로 ‘자작님’이야.”
“저도 이제 작위를 주셔야…….”
“쓸데없는 소리.”
아빠가 일축하니 가웨인은 시무룩해졌다. 란슬롯이 그런 가웨인을 싱글싱글 웃으며 쳐다봤다. 나는 그들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
“아탈란 추적을 작은오빠가 하면 확실히 믿을 수 있겠어요.”
“그렇지?”
“네. 아탈란이 어디까지 사람을 숨겨놨는지 모르니까요. 가문 내부에도 그들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요.”
“순둥이가 사람도 의심할 줄 알아?”
가웨인이 킬킬거리며 말해서 나는 양손을 허리춤에 얹고 말했다.
“당연하죠. 전 늘 의심해 왔다고요?”
가족들과 가신들은 뻐기는 나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샤를리나 쪽은요?”
“그쪽은 황제가 알아서 하겠지. 욕심만 많은 능구렁이는 아니거든.”
“그럼 지금 제가 할 일은 누아제가 된 기사들의 정화뿐이군요.”
로열 키친을 손에 넣는 건 일단 두 번째 문제였다. 아탈란이 로열 키친을 통해 하고 있는 일을 내가 알았으니, 현 로열 셰프 고프레도도 섣불리 나서지 못할 터. 무엇보다 나는 지금 황제에게 중앙 기사단으로 이동을 명 받은 상태라 로열 키친엔 갈 수 없었다.
아빠가 말했다.
“고프레도의 견제는 네 스승인 쟝뤼크가 돕겠다고 하더군.”
“네, 스승님은 믿을 수 있는 분이에요.”
정리는 끝이 났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구역에서 맡은 임무를 진행할 것이다.
그렇게 석 달이 흘렀다.
* * *
쾅! 서부의 거두 중 하나이자 미카엘의 휘하에서 새롭게 금좌 11석이 된 발드롬 백작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이번에도!”
“바, 발드롬 공, 진정하십시오.”
서부 귀족들이 난색을 표하자 백작은 고성을 내질렀다.
“이번에도 프렌시프의 뜻대로 흘러갔어!”
삿된 자들이 프렌시프의 영지를 덮친 지 세 달. 세니아나의 무리수로 프렌시프와 황제는 잠시 틀어졌다. 서부 귀족들은 기회를 잡아 금좌의 공석에 한 편을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했다. 서부의 귀족 넷, 서부와 손잡은 남부의 귀족 둘.
11석 중 과반수인 6석을 차지한 데다 수장인 나베리우스 프렌시프는 병을 얻어 영지에 내려갔다. 이제 중앙탑은 서부의 손에 있다고 기뻐하던 것도 잠시. 란슬롯 프렌시프가 새로운 금좌가 되더니만, 회의 때마다 남부 귀족들을 쥐고 흔들어 중요 안건이 가결하도록 만들었다.
“프렌시프 령의 복구가 곧 마무리될 테니 나베리우스 프렌시프가 돌아올 거다! 그땐 프렌시프를 막을 수도 없어!”
“그러니 최대한 빨리 황위를 결정지어야……!”
“황제에게 후계를 정할 생각이 있어야지!”
프렌시프가 도미니크를 선택하고, 몹시 언짢아하던 황제는 곧 의외의 결과에 만족했다.
황태자―미카엘 간의 경쟁은 사실 미카엘에게 몹시 유리했다. 황태자는 병약하고 때때로 쓰러지기까지 해 중요한 공무는 모두 미카엘의 차지였는데, 도미니크가 황위 싸움에 끼니 세 아들의 권력이 균형을 이루었다.
“도미니크 황자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권력을 잡고 있다는 건 거슬리지만…….”
서부의 귀족 중 하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껏 웅크려 있던 게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프렌시프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황제는 ‘그 사건’으로 프렌시프에게 등을 돌린 것과 마찬가지고요.”
“……그렇지.”
“이런 상황에서 황제가 도미니크를 후계로 낙점할 리 있겠습니까. 프렌시프에게 권력을 넘기려 하지 않을 겁니다.”
“…….”
“안심하십시오. 아직 가장 선두에 있는 것은 우리의 황자, 미카엘 로젠카로튼이에요.”
“때를 놓치면 안 돼. 사라진 대사제는 아직 연락이 없는가.”
서부의 귀족이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왔습니다.”
“……!”
가웨인 프렌시프의 추적을 피해 숨어 있던 대사제가 다시 나타났다.
* * *
“이건 제 겁니다.”
“이 자식이 어디서…….”
“어른 무서운 줄 모르고. 어린 것들은 꺼져!”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나는 흐린 눈으로 오늘도 싸워대는 기사들을 보다가 그들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고기 한 점이 남은 그릇을 휙 끌어안았다.
“아, 아가씨.”
“아가씨!”
시트론과 마릴린은 호호 웃고는 말했다.
“혼날 줄 알았지.”
“허구한 날 싸워 대니.”
“우리 아가씨를 피곤하게 하지 말고 다들 적당히들 처드세요~”
“작작 드세요, 작작.”
삼 개월 전엔 그래도 내가 만든 요리를 먹는 것을 미안해하던 기사들이, 이젠 한 점을 가지고 엄청나게 싸웠다. 가장 상석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칼립스가 슥, 손을 올렸다.
“아가씨, 저는 누아제입니다.”
그러자 누아제가 되었던 기사들이 “저, 저도!” 하며 소리쳤고, 다른 기사들도 질세라 맞붙었다.
“이제 다 정화되었잖아!”
“너, 가서 검은 나무를 베어 봐라. 네놈이 아직까지 누아제라면 이길 수 있겠지.”
우리는 삼 개월간 누아제가 될 수 있는 건 사람뿐만이 아니라는 걸 알아냈다. 검은 나무는 밑동까지 베인 뒤에도 이내 오물 같은 것이 일렁이며 되살아났다. 나무를 벨 수 있는 건 오직 누아제뿐이라 나는 그렇게 정화된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검은 나무를 벨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그릇을 건넸다.
“이거 노인네가 호강하는군요.”
영지의 총집사 안토니오. 그가 흘흘 웃으며 고기를 낼름 삼켰다. 난 손뼉을 짝! 치고 단호한 눈빛으로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싸우면 내일 피자는 없어~!”
“…….”
“…….”
내 엄포에 기죽은 기사들이 어깨를 떨구었고, 나는 “어휴.” 한숨을 내쉬며 병영을 나섰다. 시트론과 마릴린이 종종걸음으로 날 따르며 말했다.
“이제 거의 정리가 되었군요.”
“맞아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이지 피곤한 삼 개월이었어.”
“고생이 많으셨죠. 몇 번 쓰러지기도 하셨잖아요.”
처음 정화할 때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너무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하지만 정화도 하면 할수록 익숙해지는 건지 이젠 이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아무래도 삿된 자에 가까울수록 힘이 더 드는 것 같아.’
지금은 누아제가 안토니오 한 사람만 남은 데다, 거의 정화가 다 된 상태라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저택으로 들어가려다가 익숙한 마차를 발견하고 얼른 뛰어갔다.
“할아버지!”
오늘은 할아버지가 삼 개월 만에 황도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내가 품으로 뛰어들자 할아버지는 새빨간 귓불로 험험, 헛기침을 했다.
“뭘……. 누가 보면 몇 년 만에 보는 줄 알겠군.”
“역시 제가 포털을 열어 드릴 걸 그랬어요. 오시느라 고생하셨지요?”
“황궁 마차를 타고 왔는데, 뭘. 포털은 함부로 열지 마라. 또 쓰러져.”
“괜찮은데……. 할아버지를 빨리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그, 그래?”
“엄청!”
내가 가슴팍에 뺨을 비비며 소리치자 할아버지는 입꼬리가 흐물흐물해져서 버럭 소리쳤다.
“어, 어린애 같기는!”
“하지만……. 영지에는 잠깐씩밖에 못 내려갔잖아요. 요리만 보낼 때도 많았고…….”
내가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가신들이 껄껄 웃었다.
“어르신은 어찌 그리 복이 많으신지요. 이리 사랑받으시니 기쁘시겠습니다.”
할아버지는 다시 헛기침하고 말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귀찮기나 하지!”
그러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뭐, 친구 놈들은 부러워하더군. 조손간엔 우리만큼 사이좋기가 힘들다지?”
“그럼요! 아가씨는 특별하지요.”
“특별…… 으하하! 특별하지. 아무렴, 내 새끼인데!”
“손주들에게 아가씨 손톱의 때라도 달여 먹여야겠습니다.”
“아~니! 내 새끼 손톱에 무슨 때가 있다는 거야! 네놈이 봤어? 봤어?! 어?!”
“그게 아니라…….”
할아버지가 펄펄 뛰자 가신들이 쩔쩔맸다. 나는 어색한 얼굴로 할아버지의 팔을 끌어당겼다.
“들어가세요. 할아버지 오시는 날이라 제가 칠면조찜을 해 놨어요.”
“그, 그래? 손이 많이 갈 텐데 생일 때나 하지. 이제 곧인데.”
“생신엔 더 좋은 걸 해 드려야지요!”
이제 곧 할아버지의 생신이다. 그리고 나와 할아버지는 함께 생일 파티를 하기로 했다. 가족들은 내 생일을 무슨 나라 축제하듯이 준비했는데, 하필이면 그때 누아제가 된 사람이 삿된 자가 되어서 난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또 내 생일 파티를 준비하길래 엄포를 놓았다.
[돈 낭비예요! 생일은 이미 잔뜩 축하받았다고요.]
[하지만……!]
[떽!]
[그래도…….]
[정 아쉬우면 곧 할아버지 생신이니 함께해요.]
그렇게 할아버지의 생일이 찾아왔고, 저택의 모두는 합동 생일 파티를 할 생각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세니아나!”
“세니안.”
저택에 들어가자 오빠들이 양손에 카탈로그를 든 채 다가왔다.
“드레스는 이쪽? 아니면 저쪽?”
“마흔두 번째 선물은 뭘 받고 싶지?”
“아, 서른일곱 번째 선물 때문에 말인데. 아무래도 노란색보다는 청녹색이…….”
나는 슬슬 후회가 되었다.
‘그냥 내년에 하자고 할 걸 그랬어.’
창고에 쌓여 있는 내 선물만 마흔하나인데 또라니……. 피곤하다.
“오빠들, 할아버지 오셨어요.”
그러자 오빠들이 할아버지를 흘긋 쳐다보고 말했다.
“조부님, 오셨습니까. 세니아나, 드레스는 다섯 벌을 맞추는 게 좋겠지?”
“피곤하실 텐데 쉬십시오. 세니안, 마흔두 번째 선물은 역시 이게―”
한숨을 푹 내쉬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나.”
“파티는 그레이트홀에서 안 할―!”
지레 놀라서 소리치다가 아빠의 얼굴을 보고 할아버지에게 끼고 있던 팔짱을 스르륵 풀었다. 아빠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무슨 일 있나요?”
“……황궁에 가 봐야겠다.”
“무슨…….”
“가브리엘라가 쓰러졌어.”
“이모가요? 몸이 안 좋으시대요?”
“황궁이 난장판이 되었다더군.”
“네?”
“황비가 괴물이 되었으니까.”
뭐라고? 뿌리가 내린 듯 그대로 굳어져 있던 나는 치맛자락을 꾹 말아 쥐었다.
급히 황궁으로 간 나는 입궁하지 못하고 경비병들에게 가로막혔다.
“왜 못 들어간다는 거죠?”
내가 소리치자 황궁의 경비병은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영애가 소지하신 출입패로는 입궁 허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난 정식 입관자예요. 로열 키친의 요리사라고요.”
“그…… 삼 개월 전의 일로 퇴관명이 내려진지라.”
황제, 이 쪼잔한 아저씨가! 어째 조용하다 싶더니 대기 발령이 아니라 퇴관을 시켰단 말이야?
난 입술을 꾹 베어 물고 그에게 로열 키친 요리사의 출입패가 아니라 다른 출입패를 건넸다.
“이건……!”
“황제 폐하께서 ‘프렌시프 영애’에게 내린 상시 출입패예요.”
소피아 대부인을 보살피면서 받은 출입패였다. 그제야 경비병들이 물러났다. 입궁한 나는 정신 없이 가브리엘라 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통제 구역이라고? 가브리엘라 황비님의 궁이?”
그렇다면 역시…….
‘삿된 자가 된 걸까.’
이명이 귓속을 가로지르고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어떻게 하지. 어떡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진정해!’
난 스스로에게 소리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완전히 삿된 자가 되었다면 황궁에선 이모를 제압할 수 없다. 그녀가 얌전히 궁에 있다는 건 아직은 시간이 있다는 말.
‘비밀 통로가 있어. 그쪽으로 들어갈까.’
아니야. 괴물이 되었다면 경계하고 있는 자들이 궁 내에 포진하고 있을 터. 잘못 들어갔다간 꼼짝없이 황제의 명에 항명한 반역자가 될 것이다.
“황제에게 허가를 받아야 해.”
하지만 그는 이제 나를 믿지 않는다. 황족의 치부를 내 앞에 보일 리 없다.
‘결국은 그건가.’
황제를 꼬드겨야 해. 그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 이모를 구할 수 있다. 나는 멀리 보이는 아발론으로 시선을 돌리며 이를 악물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황제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
나는 아발론으로 향했다. 황제에게 독대를 청하기 위해선 까다로운 절차가 있었지만, 나를 본 시종장은 말없이 황제에게 안내했다. 내가 들어간 곳은 ‘황제의 서재’였다. 황자들조차 출입을 허가받기 힘든 곳.
가브리엘라 황비의 일이 황제에게 어느 정도의 위기감을 줬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서재 테이블에 있던 황제가 나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황가의 광영을.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앉지.”
그가 소파를 가리켰다. 마주 보고 앉은 우리는 서로를 가만히 응시했다.
“프렌시프에서 동부의 황비를 살피고 오라더냐.”
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피로했다. 평소엔 허허실실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의 그가 이처럼 날카로운 속내를 빤히 드러낸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독단으로 왔습니다. 가브리엘라 황비님은 제게 은인 같은 분이라서요.”
“은인이라. 가족이어서가 아니고?”
쿵!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황제는 굳어진 날 보고 재미있다는 듯 실소를 흘리다가 나른히 목을 주물렀다.
“너를 황궁에 붙잡을 방법이 없어 그간 침묵한 줄 아느냐.”
“…….”
“너와 프렌시프의 힘에 겁먹어 못 본 체했다고 믿는 게야?”
“…….”
“네 아비와 나는 치부를 공유했지. 자식의 피 절반이 아탈란 신관의 것이니까.”
“알고 계셨습니까?”
“도미니크의 모후인 레오나와 짐은 한날한시에 신탁을 받았다.”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황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탈란과 전쟁 중의 일이었지. 신이 인도한 곳에 어린아이가 있었지. 그는 말했다. ‘인세를 수호할 방패가 나와 적으로부터 날 것이다’라고.”
“그래서 두 분이…….”
황제가 신관을 범해 그릇된 핏줄을 낳았다는 소문은 거짓이었다. 황제와 도미니크의 모후는 서로 목적하는 바가 같았던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일주일을 함께 지냈지. 레오나는 날 버러지 보듯 하였고,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즐거웠어.”
“즐거우셨다고요?”
“재밌는 사람이었지. 감히 제국의 황제를 깔아뭉개 놓고 ‘아이를 낳아야겠으니 벗으라’더군.”
쿡쿡 웃던 황제의 시선에 회한이 들었다.
“난 그녀가 미친 줄로만 알았다.”
어느새 그는 자신을 ‘짐’으로 칭하지 않고 ‘나’라고 말했다. 레오나와 함께 있던 순간의 그는 황제가 아니라 그저 사내였을 뿐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찌 그리 절박한 것이냐 물으니 자매와 동생이 있다고 말했다.”
“자매와 동생?”
“가브리엘라, 에단, 그리고…… 미아.”
“……!”
엄마. 순간 윤세나의 세계에서 들었던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절친한 친구가 있었지. 아들과 딸을 낳으면 사돈이 되는 것이 우리의 꿈 중 하나였어.]
그러고 보니 궁금했었다. 내가 도미니크의 꿈을 꾸고, 그가 나의 꿈을 꾸었던 이유가.
‘만약 레오나 님에게 엄마나 이모와 비슷한 힘이 있었다면 꿈은 그녀가 안배한 것일지도 몰라.’
황제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가브리엘라가 황궁에 왔을 적엔 놀라웠지. 레오나와 함께 있을 적에 멀리서 본 얼굴이었으니까.”
* * *
황위에 올라 만인지상의 자리를 차지한 그에게도 이름이 있었다.
옥타비우스 로젠카로튼.
제위에 오른 후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는 자는 없었다. 모후인 소피아 대부인마저 정신을 잃기 전엔 그를 오직 황제라 칭했다.
[그래서 당신, 이름이 뭐예요?]
몸을 겹친 후, 침대에서 벗어나던 레오나는 물었다. 제 이름을.
[짐은 오직 황제일 뿐.]
오만한 투로 말하니 인상을 찌푸리며 사납게 맞섰다.
[내가 물은 건 나와 밤을 함께 보낸 사내의 이름이라고요.]
[…….]
[그러니까 뭐냐고, 이름이.]
[너 왜 반말…….]
[이름!]
[……옥타비우스.]
[이름이 뭐 그리 길담. 부르기 불편하니까 나는 음, ‘오토’라고 부를게요.]
그건 유년 시절의 애칭이었다. 이젠 더 이상 누구에게도 불리지 못하는. 형제를 찍어 누르고 제위에 오른 후 모후의 관심사는 오직 황제가 되지 못하고 속이 문드러진 올리비에였다. 황제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했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다.
그런데 이름이란 건 신기하지. 자신을 황제가 아니라 ‘오토’라고 부르며 웃는 여자를 본 순간부터 그는 그저 사내가 되어 버렸으니까. 일주일을 그녀와 함께 보냈다. 호화로운 음식이 아니라 별궁에서 자라는 풀떼기를 캐서 억지로 먹이고, 거절하면―
[그럼 굶으시든지.]
뾰루퉁해져서는 프라이팬을 떠넘겼다.
[직접 해 드세요. 하는 김에 제 것도 부탁해요.]
별난 일이었기 때문일까. 그는 그녀와 보내는 시간이 즐거워졌다. 일주일 후 떠난 그녀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으면 신경이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워질 정도로.
[당신의 아이를 가졌어요.]
그녀에서 서신을 전해 받았을 땐 어떤 기분이었더라. 기뻤던 것 같다. 아이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그 핑계로 한 번 더 그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왜 자꾸 찾아오는 거예요? 누가 보면―]
[내 아이가 여기에 있잖아!]
[……애가 무사한 걸 봤으면 이제 가요.]
[내 아이가 뭘 먹는지 봐야지!]
[영양 잘 챙겨서 먹고 있으니까 제발 좀 가라고.]
[내 아이가 잘 자는지 볼 거야!]
[미친놈이.]
구박받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아니, 그것마저 즐거웠다. 배가 불러서 저리다는 손발을 웃는 얼굴로 주무르고 있으면 그녀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황제가 시중드는 걸 이렇게 기뻐한담.]
[당신은 왜 내게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지?]
[네?]
[난 알려 줬다고.]
[……저는 제 이름을 싫어해요. 뜻이 거지 같거든.]
[괜찮아.]
[네?]
[그게 뭐든 난 괜찮다고. 당신 이름이라면.]
그녀는 묘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봤었다.
[세실. 내 이름은 세실이에요. 신의 눈이라는 뜻이죠.]
[나쁘지 않은 뜻인데 어째서 싫어하지?]
[내가 신의 눈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오토, 당신은 모를 거예요.]
그녀의 눈빛이, 표정이, 목소리가 너무나 고요했다. 그때 알았다. 아, 이 여자도 나만큼이나 자신을 죽이며 살아왔구나.
[그럼 내가 새로 지어 주지. 보자, 어떤 이름이 좋을까.]
[무슨…….]
[……레오나.]
[…….]
[레오나.]
나의 영웅. 누구보다도 따사로운.
일렁이는 그녀의 동공을 본 순간 알았다. 그때부터 자신은 그녀에게 또한 사내가 되었다는 것을. 먹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면 온 제국을 뒤졌고,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하면 황도에서 동부 별궁까지 정신없이 달려가는 나날. 그런 날이 그는 몹시도 행복했다.
[오토.]
[그래.]
[아이가 태어나는 날, 당신 친구를 불러 주세요.]
[난 친구 같은 건 없어.]
[루스.]
[……당신이 그를 어떻게 알지? 아니, 그 녀석은 내 친구가 아니야. 황자 시절의 호위 기사였을 뿐이라고.]
[나는 알아요, 모두.]
대수롭지 않게 나누었던 말들이 유언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아이를 낳으며 점점 희미해지는 그녀의 눈빛을 보고서야 바보 같던 스스로를 원망했다. 신탁을 내리고, 그녀를 앗아 가려는 신을 증오했으며 원망했다.
[정신 차려, 제발…… 세실.]
[레오나, 잖아…….]
[……레오나.]
[오토, 당신이 나를 대신해 지켜 주세요. 우리 아들과 내 자매와 동생, 그리고…….]
[그만, 레오나, 난 당신을 대신하지 않아. 살아 남아서 당신이 지키란 말―]
[세니아나.]
[…….]
[세니…… 아나.]
제 품 속에서 차가워진 그녀를 끌어안고, 오열하던 순간을 그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 후로 얼마나 감정 없는 인형으로 살았을까.
몇 년 후, 아탈란과의 싸움이 끝나고 소피아 대부인은 드물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서가 딸을 보았단다. 내게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였어. 그 아이에겐 어떤 이름이 어울릴까.]
―세니아나.
[세니아나.]
* * *
“세니아나.”
“…….”
“알려다오. 짐은 ‘황제’여야 할까, ‘레오나의 사내’여야 할까.”
“무슨 일이 있으셨군요. 황비님. 아니, 이모와 관련해서 그렇죠?”
황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미간 사이에 패인 고민의 흔적이 몹시도 깊었다.
“아탈란의 대사제로부터 연락이 왔다.”
“대사제……!”
“가브리엘라를 그들에게 보내 달라고. 보내 준다면 아탈란에 충성하는 귀족들의 명단을 건네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삿된 자들이 황궁을 덮칠 것이라 말하였다.”
왜 갑자기?
아탈란은 이모가 나를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모는 아탈란의 1월. 그녀가 자리를 유지하고, 길라게온에 군림하는 건 그들에겐 다행인 일일 터. 그런데 갑자기 보내 달라니.
‘설마…….’
“황비님이 쓰러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함께 차를 마시던 중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목부터 피부에 홈이 파이더니 그 아이에게 오물 같은 것이 흘러들었어.”
“그 차는 누가 준비한 것이고요?”
“차엔 문제가 없어. 가브리엘라뿐만이 아니라 나와 다른 황비 또한 함께 마셨지만 다른 점은…….”
“그러니까 그 황비가 누구예요!”
내가 버럭 소리치자 황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코트니.”
“……!”
그래서였구나.
이제 ‘가브리엘라 황비’가 필요하지 않은 거야. 새로운 황비를 득세시키기 위해.
‘남부와 결탁했어.’
아탈란은 내가 미아의 딸이라는 걸 아니, 가브리엘라 황비는 이모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가브리엘라 황비가 아무리 신뢰를 쌓아도 저편엔 항상 의심이 도사리고 있을 터.
나를 제물로 삼기 위해 프렌시프와 전쟁을 준비한다면 의심을 지울 수 없는 가브리엘라 황비보다, 나완 접점이 없는 코트니 황비를 득세시키는 쪽이 나은 것이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가보겠습니다.”
“잠깐, 이야기는 마저―”
후다닥 나서려던 난 우뚝 멈춰서 황제를 노려봤다.
“폐하는 지금 ‘황제’도 ‘레오나의 남자’도, 그 무엇도 아니에요!”
“뭐?”
“레오나 님은 어머니의 절친한 친구였으니 저한테도 이모거든요?”
“…….”
“그런데 저는 폐하 같은 이모부는 사절이에요. 겁쟁이!”
“무엄하다!”
“아탈란의 협박이 겁나서 사랑하는 사람의 유언도 지키지 못하고, 황비를 그저 가둬만 놓으셨어요.”
“…….”
“그런 분이 백성은 어떻게 지키실 수 있겠어요!”
나는 그를 매몰차게 노려보고 얼른 코트니 황비의 궁으로 향했다.
“황비님을 뵈어야겠습니다.”
시녀에게 말을 전하자 코트니 황비를 만나고 온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코트니 황비님께선 영애를 궁에 들이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다 이거지?
난 눈살을 찌푸렸다. 카렌듈라 후작이 죽기 전, 그러니까 남부가 아탈란과 결탁하기 전엔 나를 만나려고 안달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 * *
코트니 황비는 세니아나와 만나고 온 시녀에게서 이야기를 전달 듣고 깔깔, 소리 높여 웃었다.
“그래? 표정이 볼 만했다고?”
“예. 어찌나 당황하던지요.”
“흥, 이제야 나를 찾아? 재수 없는 계집애.”
코트니 황비는 차를 홀짝이며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이제 끈 떨어진 연 신세이니 내가 필요하겠지.”
“아무렴요. 하지만 황비님께선 황후 대신 미카엘 황자님의 교육을 맡으신 후로 남부엔 사람들이 넘쳐나지 않습니까~”
저를 우습게 여기던 귀족들이 궁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고, 때마다 보석이며 드레스 등의 호화로운 선물을 보냈다.
“우후후, 이제 미카엘 황자님께서 황위에 오르시면 황비님께선 황태후가 되어 세상을 호령하실 일만 남았습니다.”
시녀들이 곁에 붙어 야살을 떨자 황비는 키득키득 웃고 어느 귀족이 뇌물로 보내온 반지를 매만졌다.
“암. 그땐 날 무시하던 황후나 로웨나가 관에 들어가는 날이지.”
“황후와 황비야 위치상 그럴 수도 있지만, 가장 불쾌한 건 프렌시프 영애예요.”
“그래. 성녀랍시고 날뛰는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아탈란의 대사제와 결탁하며 들었다.
‘곧 그 계집애의 힘이 아탈란 손에 들어간다고 했지.’
힘만 잃으면 발모가지를 모두 끊어 내고, 목줄을 감아 노예로 부리리라.
‘그래, 이젠 정말 내 세상이라고.’
그때였다.
“잠깐, 들어가시면 안―”
“감히 누구 앞을 막아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웨나?’
코트니 황비가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고, 로웨나 황비가 들어왔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자네는 내궁의 총괄자가 불러도 오지 않기에, 내 직접 왔네.”
로웨나 황비가 오만하게 말하자 코트니 황비는 기가 막힌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이렇게 무례하게…… 잠깐, 누굴 달고 오신 겁니까?”
로웨나의 뒤에 있는 사람은 세니아나 프렌시프였다. 그녀는 코트니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로웨나 황비를 향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비님, 주변을 물려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로웨나가 턱짓했다. 로웨나 궁의 시종, 시녀들이 코트니 방에 모인 시녀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무슨―! 부끄러운 줄 아세요! 황비씩이나 되어서 고작 귀족 영애의 명에 움직이다니!”
세니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족 영애의 명에 움직이다니요?”
“그게 아니면 무슨―”
“성녀의 부탁을 들어주시는 거지.”
세니아나가 음습하게 웃었다. 어느새 시녀들이 끌려나가 방엔 세니아나와 코트니, 로웨나뿐만이 남지 않았다.
“난 영애를 볼 마음이 없다고 분명히 말 전하지 않았어!”
“하지만 코트니 황비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뭐?”
“가브리엘라 황비님께 성식을 먹이셨죠? 함께 있던 폐하께도.”
코트니가 마른침을 삼켰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버럭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야!”
“황비님 문제를 낼게요.”
세니아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다가갈수록 코트니는 움찔움찔 뒷걸음질 쳤다.
“이, 이런 오만방자한―! 감히 황비에게……!”
“첫째, 아탈란이 언제까지 황비님을 비호할 것 같은가요?”
“아, 아탈란이라니. 나는 모르는 얘기야!”
“둘째, 미카엘 황자가 즉위한 후에 버려지지 않을 자신 있으세요?”
“……뭐, 뭐?”
“셋째, 날 얼마만큼 알아?”
“감히 반말을―!”
코트니 황비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쳐올리자 세니아나는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난 말야. 죽어도 혼자는 안 죽어.”
“……!”
“내게 포털이 있잖아?”
“…….”
“돌아 버린 내가 당신이 잘 때 포털로 황궁에 침입해서, 당신 가슴을 찌르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해?”
“너, 너…….”
“그리고 나는 지금 얼마큼 돌았을까?”
코트니는 남부에서 가장 이름난 가문의 고명딸로, 금지옥엽으로 자라다 황비가 되었다. 같은 황족을 제외하면 평생 협박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라는 뜻이다. 물론 폭력에 노출된 적은 전무했으므로, 그녀의 얼굴은 시체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내가 잡은 손목이 파르르 떨렸다.
“무, 무슨…… 감히 황족을 겁박하고도 살아남길 바라?!”
“말했잖아요. 나는 절대로 혼자 죽진 않는다고.”
“너……!”
“궁금하네요. 애초에―”
난 그녀의 눈을 빤히 보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가둘 수 있는 감옥이 있나요?”
“……!”
“내가 벗어나지 못할 만큼 강력한 결계를 펼칠 수 있는 마법사가 세상에 존재해?”
코트니 황비가 마른침을 삼키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즉결 처형이 아니라면 당신은 죽어.”
“나, 나한테 뭘 어쩌라는 거야.”
이제야 고분고분해진 황비가 기죽은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성식, 누구에게 전달받았지요?”
“…….”
“아탈란의 대사제에게 직접 전달받은 건 아닐 테고. 분명히 연락책이 있었을 거야. 당신에게 명을 내린.”
“그, 그건…….”
나는 도망치려 손목을 비트는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그러쥐었다.
“누구야. 누가 가브리엘라 황비를 해하라고 한 거냐고!”
“흐…….”
나에게 잡힌 어깨가 고통스러운지 그녀는 신음을 흘리며 바르르 떨었다.
“당장 오늘 밤부터 두려움에 떨고 싶으신가요?”
“……고프레도.”
역시. 내가 노려보자 그녀는 움찔 고개를 숙였고, 나는 그녀의 어깨를 놓아주며 손을 내밀었다.
“줘요.”
“뭐, 뭘…….”
“남은 성식!”
우물쭈물하던 코트니 황비는 이내 서랍장으로 향했다. 내 눈치를 흘끔흘끔 보다가 서랍을 열고는 커다란 유리병을 몇 개나 꺼냈다. 척 보기에도 엄청난 양. 어린애 팔뚝만 한 높이의 병은 벌써 절반이나 비어 있었다.
“누구에게 먹인 거예요?”
“…….”
코트니 황비는 로웨나 황비 쪽을 보고 대답을 주저했다. 나는 “답하세요!” 하고 소리치며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가, 가브리엘라 황비…… 폐하, 그리고…… 또 시녀들에게도 나누어 주었고…….”
“시녀들?”
“근래 황도에서 성식이 유행이거든……. 고귀한 자들만이 얻을 수 있는 극상의 맛이라고 서민들까지 사들이려 안달을 하는 추세라…….”
‘이런!’
고위 귀족들에게 알음알음 성식이 퍼졌다는 건 알고 있었다. 샤르파크 후작 성에서 실습을 할 적부터 익히 알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벌써 이렇게나 퍼졌을 줄은.’
코트니 황비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걸 어떻게 할 셈이지? 필요하다면 나누어 줄 수는 있어.”
‘성식이 뭔지 모르는구나.’
그러고 보니 코트니 황비가 마시고 있던 차에서 역한 냄새가 났다. 그녀도 이 징그러운 것을 먹고 있었던 거다.
“이게 뭔 줄 알고…….”
“뭐긴, 악한 자와 선한 자를 판가름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성물이지.”
“뭐라고요?”
“그, 그러니까 가브리엘라가 괴물이 된 거잖아. 겉으로는 선한 척,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지만 사실은 제일 악독한……!”
나는 성식이 담긴 유리병을 단숨에 팔로 쓸어버렸다. 쨍―!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깨진 유리병들 사이로 검은 성식이 줄줄 흘러내렸다.
“무슨 짓……! 이게 얼마나 귀한 건지 알아?!”
잔뜩 화가 난 나는 그녀에게 매섭게 쏘아붙였다.
“귀해? 저건 오물이라고요!”
“뭐?”
“삿된 자들의 일부란 말이에요!”
“말도 안 돼.”
“삿된 자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아요? 시체에서예요.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파먹고 다 썩은 육신에서 삿된 자가 만들어져요. 당신은 시체를 먹어 왔던 거라고!”
“거, 거짓말!”
“믿지 못하겠거든 계속 드세요. 당신도 곧 괴물이 될 테니까.”
얼굴이 샛노래진 코트니 황비가 곧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더니 토악질을 했다.
“우욱! 웩!”
“멍청한 사람.”
나는 그녀를 노려보고 방을 나섰다. 로웨나 황비가 날 쫓아와 물었다.
“정말이니? 저게 정말로 사람의 시체로 만들었단 말이야?”
“네. 프렌시프 령에서 확인했어요.”
“어떻게 그런…….”
표정이 썩어들어 가는 것으로 보아선 로웨나 황비 또한 성식을 먹은 모양이었다. 걸음을 우뚝 멈춘 그녀가 나를 돌려세웠다.
“우리 전하는!”
“네?”
“황태자 전하께서도 성식을 드셨다. 육신을 보하는 명약이라기에 내가……!”
자신보다도 황태자가 우선이구나. 미카엘과 달리 황태자에게 인정이 있는 것은 그의 보호자가 로웨나 황비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얼마나 드신 거예요? 혹시 피부에 홈이 파이고 오물이 일렁인다거나 하는 증상이 있나요?”
“그건 아냐.”
“그렇다면 아직 시간이 있어요. 정화한다면 몸을 되돌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다행…… 아아.”
로웨나 황비가 이마를 쥐고 비틀거려서 난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황비님!”
“……제1황자궁으로 가야겠어. 당장 성식을 치우고, 내 이것들을!”
“이것들이라고요?”
“성식을 가져온 게 내 궁의 시녀야.”
“……어쩌면 그 사람이 아탈란의 끄나풀일 수도 있어요.”
로웨나 황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그녀가 코트니 황비궁에 온 것도 아탈란에 관하여 알고 있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내 부탁이기 때문이었다. 난 그녀를 빤히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드릴 얘기가 있어요. 제국의 앞날이 달린.”
“제1황자궁으로 가자. 전하도 함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해 주렴.”
“……네.”
우리는 함께 황태자가 있는 제1황자궁으로 향했다.
“하.”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황태자는 실소를 터뜨렸다.
“아탈란이 카렌듈라 후작, 르마르 공작과 결탁했고, 서부의 귀족 대부분은 그의 휘하에 있단 말이지.”
“맞아요.”
“미카엘도 이 얘기를 알고 있나?”
“4황자님은 아무래도…….”
“카렌듈라 후작의 사후 서부를 틀어쥔 건 그 녀석이니, 아탈란의 끄나풀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가브리엘라 황비가 사실은 내 이모고, 대륙 전쟁에서 활약한 아탈란의 신관이었다는 이야기까지 안다면 혼절할 기세였다. 고민하던 로웨나 황비가 말했다.
“해결만 할 수 있다면 나쁜 일은 아니군요. 황후는 몰랐다 해도 아탈란의 도움을 받았고, 코트니는 직접적으로 연계되었으니 그들 모두 벌을 피하지 못할 거예요. 그렇다면 차기 황위는 자연히…….”
황비의 말에 황태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황비님, 말씀 거두십시오.”
“예?”
“황위 싸움의 이득을 가릴 사건이 아닙니다. 나라의 앞날이 달린 일이라고요.”
“……그야 그렇지만.”
황태자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하면 되는 거지?”
“일단 더는 성식을 유통하지 못하게 해야 해요.”
“로열 셰프를 교체하자는 말이군.”
“네.”
“좋아, 내가 폐하께 경합을 주청 드리지.”
“그리고 또 한 가지.”
“말해 보아라.”
“도미니크 황자님과 더는 권력을 두고 다투지 마세요.”
“그건…….”
로웨나 황비의 눈초리가 삐죽해졌다.
“약혼자라 이거니?”
“그게 아니라 적과 아군을 명확히 하자는 거예요. 적의 적은 아군이잖아요. 도미니크 황자님과 황태자 전하는 이 시점에선 아군이지요.”
“흐응…….”
로웨나 황비는 마뜩잖은 듯 신음했지만, 곧 황태자를 쳐다봤다. 황태자는 커흠,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도미니크와 싸울 생각은 애초에 없었어.”
“하지만 견제하고 계시잖아요?”
“……그야 프렌시프 영애와 결혼을 한다니까 남부에선 불안에 떨 수밖에. 그래서 말인데.”
“네?”
“너, 나와 결혼할 생각은 없냐?”
로웨나 황비까지 눈을 반짝였다.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예?” 하고 되물었고, 황태자는 어쩐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투덜거렸다.
“그 녀석과 나는 특별히 다른 점도 없잖아. 네가 나와 결혼하면 도미니크와 싸울 일은 없고, 또…… 난 꽤 괜찮은 남자라고?”
“…….”
“황제가 되면 남부 출신 레이디가 아니라 널 황후에 앉혀 주지.”
“황후 자리는 탐이 나지 않는데요.”
“그럼 왜 도미니크와 결혼하려는 거야?!”
그가 벌컥 성을 내며 물어서 난 고개를 갸웃했다.
“전하께선 저를 좋아하시나요?”
“뭐, 뭣?! 그, 그런 걸 왜 물어!”
“그게 중요하다고요. 도미니크 저하께선 저를 좋아하시는걸요.”
“나도 널―!”
황태자가 급히 답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로웨나 황비는 “어머, 어머!” 하며 입을 막았고, 난 눈을 깜빡였다.
“제가 왜요?”
“……제기랄.”
“……?”
“별 얘기 아니야!”
그런데 왜 화를 낸담.
‘이상한 사람이야, 정말.’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황비는 한 손을 뺨에 댄 채 고개를 저었다.
“너무 숫기 없이 키운 걸까.”
좌우지간 황태자, 그리고 로웨나 황비와의 이야기는 그렇게 정리되었다. 제1황자궁을 나서자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나는 조금씩 굵어지는 빗방울을 가만히 보았다.
‘선생님……. 엄마.’
여기는 엄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간 사람도, 남은 사람도 엄마를 아주 많이 사랑해요. 이런 사람들을 뒤로하고 온 엄마의 기분은 어땠을까. 홀로 십 년 가까이 이웃 하나 없는 세계에서 나를 찾아 살아 온 엄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엄마를 떠올릴 적마다 생각하게 된다.
‘나는 행복해질 의무가 있어.’
―하고.
나는 돌아가지 못하고, 다시 가브리엘라 황비궁을 찾았다. 황제에겐 폭언을, 코트니 황비에겐 폭력 가까운 협박을, 그리고 황태자의 청혼은 거절하고 와서 오늘 이모를 보는 건 포기해야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걱정이 되어서.’
들어가지도 못할 걸 알면서 문 앞을 기웃거렸다.
‘모습이 어떤지 보고 싶은데.’
“영애?”
나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황가에 광영을…….”
미카엘 황자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군.”
“그러네요.”
“영애가 내 청혼서를 물린 후로 처음이니 석 달쯤 되었나.”
“그걸 기억하세요?”
내가 으윽,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미카엘의 얼굴이 점점 더 짓궂어졌다.
“일생 처음으로 차인 날인데, 잊을 리가.”
“어차피 제가 저하의 청혼을 받아들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런데도 왜 굳이…….”
볼멘 목소리로 말하니, 그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프렌시프 령에 도미니크가 있다니까 참을 수가 있어야지.”
“네?”
미카엘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어쩐지 당황스러운 기분이라 나는 한 발, 물러나며 그를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을…….”
“원래 개새끼는 첫 주인을 잊지 못한다잖아.”
“도미니크 황자님께선 개새끼가 아닌―”
그가 내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나 말이야.”
“…….”
“누가 간호해 주는 건 처음이었어, 알아?”
“으음……, 그거참…… 안 되셨네요.”
“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도.”
“…….”
“황후가 아니라 나 자체를 보는 사람도.”
“…….”
“내가 네게 반할 이유, 충분하지 않아?”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그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어떡하지.’
나 이런 고백은 처음인데. 도미니크 말고 나를 좋아한다는 이성도 처음이다.
“죄송…… 저기, 근데 저는…….”
내가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하자 그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윽!”
“왜 도미니크지?”
“놔요.”
“그 녀석과 나의 어디가 달랐던 거야.”
“저하는 저를 좋아하시고, 저도 저하를―”
휙! 그가 한순간에 내 허리를 휘어 감고, 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그의 품에서 강하게 버둥거렸으나, 내 허리를 감은 팔은 점점 더 조여 올 뿐이었다.
“이거 놓으세요!”
“나를 선택해.”
“놓으란 말이에요! 싫다고요!”
“네게 나 말고 다른 선택지는 없어. 평화로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
“싫―”
퍽! 소리와 함께 미카엘이 밀려나고 나를 끌어안는 다른 손이 있었다. 익숙한 체온, 안심되는 향기.
“도미니크…….”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으나, 동공은 새카맣게 일렁였다.
“괜찮으십니까.”
“……네.”
도미니크가 나를 뒤에 감추듯 앞서 나가며 바닥에 주저앉은 미카엘을 응시했다.
“일어나.”
“그게 영애의 마음에 든 비결인가. 뭐 마려운 개처럼 주변을 맴돌다가 우연치 않게 기회를 잡으면 개 껌 물어뜯듯 달려드는 거.”
“터진 입이라고 주절거릴 시간 있으면 네 걱정이나 해. 아발론 뒤뜰에 묻어 버릴 예정이니까.”
“묻히는 게 정말 나일까.”
나는 어쩔 줄을 모르고 도미니크의 옷깃을 잡았다.
“저하, 저는 괜찮으니까 그만 하세요. 누가 오기라도 하면……!”
먼저 때리면 어떻게 해! 한 대라도 맞고 시작해야 변명할 수 있지!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저하, 그만……!”
퍽! 이번에 주먹을 내지른 건 미카엘이었다. 앗, 하는 사이에 들러붙은 두 남자가 빗속에서 엉망으로 나뒹굴었다.
“그만하시라니까요!”
현재 가브리엘라 황비궁은 경비가 삼엄하다. 누가 치고받는 소리를 듣고 오기라도 하면―!
싸움판으로 다가가자 도미니크는 내가 다칠까 봐 잠시 주저했다. 미카엘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미니크의 복부를 걷어찼다. 도미니크가 균형을 잃고 쓰러지기 무섭게 그를 제압하곤 얼굴을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안 돼!’
그러던 찰나, 빗소리를 뚫고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황제와 아빠, 그리고 할아버지였다. 기가 막힌 얼굴로 치고받는 아들들을 쳐다보던 황제가 두통이 인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미친놈들이.”
“…….”
“프렌시프 공의 딸은 대단도 하군. 내 자식들이 영애 하나를 사이에 놓고 개싸움을 벌이는 걸 보면!”
그러자 아빠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태생이 귀여운 걸 어찌합니까.”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암.”
나는 창피해서 쥐구멍으로 숨고 싶어졌다.
“아, 아빠…… 할아버지.”
망했다, 망했어. 나는 속으로 한숨으로 내쉬며 절규했다. 왜 일이 이렇게 되는 거냐고요!
미카엘과 도미니크는 황제에게 끌려갔지만, 내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난 끌려가는 도미니크를 보다가 아빠에게 시선을 돌렸다.
“괜찮을까요…….”
“치고받은 놈들이 잘못이지 태생이 귀여운 네가 잘못인 건 아니잖아.”
아빠가 또 기가 막힌 말을 해서 난 끙……, 하고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게 아니라 도미니크 괜찮을까 물은 건데.
‘뭐, 폐하 표정이 그렇게 나쁘지도 않았고, 설마 형제끼리 주먹질 좀 했다고 죽이진 않겠지.’
속으로 그렇게 정리하고 털어 낸 뒤 내게 우산을 기울여 주는 아빠와 할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난 그들의 우산 안으로 쏙 들어가서 물었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네가 가브리엘라 궁에 들어가지 못하고 끙끙댈 것 같아서.”
“와, 신기하다. 어떻게 아셨지.”
아빠가 날 보며 희미하게 웃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자. 황제에게 허가를 얻어 놓았다.”
“협박하셔서요?”
“비슷해.”
아빠가 아무렇지 않게 산뜻하게 말해서 난 킥킥 웃었다. 가브리엘라 황비의 궁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삼촌.”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벽에 기대 서 있던 에단이 날 보고 흠칫 놀라 주변을 살폈다. 우리 가족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는 내게 달려왔다.
“너……!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와!”
“하지만 이모가 쓰러졌다고 해서…….”
“누님이 삿된 자가 되면 성녀인 널 공격하려 들 거라고. 황궁 결계 때문에 넌 쉽게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데다, 아무리 공격을 받았다 한들 황궁에서 포털이나 성수를 쓰면 잡혀간단 말이야. 이런 시기에 옥사에 갇히면 아탈란이 널―!”
속사포처럼 소리치던 그가 아빠와 할아버지를 보고 움찔, 물러났다.
“뭣들 하러 오셨습니까.”
“어렴풋이 기억나는군. 미아가 사라졌을 때 내 멱살을 잡던 소년.”
“그때 죽이지 못한 걸 평생 후회하고 있죠.”
할아버지는 아빠와 허구한 날 싸워대면서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 건지 “말버릇이 아주 훌륭하군.” 하며 비리게 웃었다. 에단은 “어르신도 살려드리는 게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하며 맞부딪쳤고 나는 “떽!” 소리치며 두 사람 사이에 쏙 들어갔다.
“이모가 아프신데 여기서 이렇게 싸우시면 안 돼요. 사람들이 본다고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시무룩해졌고, 아빠는 말이 없어졌다. 에단만이 ‘떽!’에 당황해서 어버버거릴 뿐이었다.
“뭐, 뭐?”
“삼촌, 폐하께서 저희에게 이곳 궁에 출입을 허락한 건 이모가 완전히 삿된 자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가브리엘라가 삿된 자가 되었다면 레오나, 그러니까 도미니크 모후와의 약속 같은 건 지키지 못했을 거다. 삿된 자는 가둔다고 가둘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죽일 수밖에 없었을 테니.
“이모에게 가요.”
“…….”
에단은 잠시 말이 없었으나, 곧 한숨을 쉬고 “따라와.” 하며 우리를 안내했다. 그가 데려간 곳은 침실이 아닌 정원이었다. 그녀의 성정답게 소담한 들꽃으로 꾸며진 정원 한가운데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이……!”
이모, 하고 부르며 달려가려던 난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이 냄새…….’
영지 성벽을 둘러싼 누아제들에게서 나는 냄새와 비슷하기도 하고, 또 엄마의 병실에서 맡았던 죽음의 냄새와 비슷하기도 했다. 이모는 나를 보지 않았다. 그저 정원에 핀 꽃만을 바라보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
“하지만…….”
“돌아가렴. 나는 아주 피곤해서 더는 견딜 재간이 없단다. 이젠 쉬고 싶어.”
비단 몸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생에 미련이 없다는 뜻. 나는 그녀에게 한 발 내디뎠다.
“이모 향을 맡고 싶어요.”
“…….”
“이모한테서 나는 겨울 냄새를 좋아해요.”
에단이 무심코 “겨울 냄새?” 하고 중얼거렸다.
“바람 냄새, 눈이 녹는 냄새, 난로에 바싹 말라가는 이불 냄새, 데운 우유 냄새, 사람 냄새― 그런 거요.”
“……돌아가.”
그렇게 말하는 이모의 목소리는 잘게 떨렸다. 내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녀는 어깨를 웅크렸다.
“난 네게 그런 말을 들을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야.”
“…….”
“세니아나, 나는 네게 죄인이다.”
“…….”
“네가 아탈란에 납치되기 전에 난 미아를 찾아갔어. 그 애가 적군의 품에서 웃고 있는 게 속이 타서. 모진 말로 그 애 가슴을 얼마나 할퀴었는지 모른다.”
“…….”
“그래서 미아는 불안했던 거야. 똑똑한 그 애가 주변에 알릴 생각 하나 못하고 홀몸으로 널 찾아 아탈란에게 간 건 내 탓이지.”
“…….”
“내가 네게서 어머니를 빼앗았다. 틈날 때마다 찾아가 저주를 퍼붓고, 끌고 오려 안달을 하고, 그래서 기어이 너희 가족의 단란한 일상을 망치……!”
난 그녀의 등을 끌어안았다.
“이모 탓이 아니에요.”
“…….”
고개 숙인 그녀는 아주 작게 흐느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홀로 짐을 끌어안고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렇게 평생 동안 스스로를 원망하였나. 매일, 매번 스스로 가슴을 할퀴고 상처를 벌려가며, 진물이 줄줄 흘러도 약 한 번 바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런 이모가 안타깝고 마음 아파서 난 그녀의 등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함께 살아요.”
울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자꾸만 목소리가 떨리고, 젖어 들었다.
“좋은 아침이라고, 행복한 하루였다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되길 바란다고. 누구나 하는 시시한 인사를 하면서 평범한 하루를 보내요, 우리.”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얼굴의 반이 흉하게 일그러지고 틈 사이로 검은 오물이 흘러내렸다. 엄마와 닮은 아름다운 눈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애써 웃으며 십자로 갈라지기 시작한 입술을 매만졌다.
“큰일이다. 여전히 예뻐서.”
“뭐라고?”
“엄마가요. 이모는 어릴 때부터 인형처럼 예뻤다고 했어요.”
나는 쿡쿡 웃고 엄마의 말투를 따라 했다.
“하지만 진흙에서 뒹굴고도 예쁜 건 반칙이지~! 함께 거울에 비치는 동생은 민망하잖아?”
“…….”
“―라고 항상 말씀하셨지요.”
이모와 에단이 픽 실소를 흘렸다. 엄마의 목소리를 꼭 닮은 내가, 말투까지 비슷하게 흉내 내자 정말로 엄마를 보는 것 같은 모양이었다.
“우리 엄마, 또 민망하시겠다. 이모가 아직도 예뻐서.”
이모는 울면서 웃었다.
이모를 침대에 눕히고서 방을 나선 난 아빠에게 매달렸다.
“폐하에게 제가 가브리엘라 궁에서 요리를 전담할 수 있도록 말씀해 주세요.”
“…….”
“네? 네? 아빠!”
아빠와 할아버지는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모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정화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언제 삿된 자가 되는가’였다. 이성을 잃고 날 공격하면, 황궁에선 그녀를 막아 낼 수 없을 테니까.
“아빠~!”
“……조건이 있다.”
“조건이요?”
“첫째, 보호자 동반일 것.”
“전 아이가 아닌……!”
아빠가 눈에 힘을 주어서 난 우물쭈물하다가 “네…….” 하고 말했다.
“둘째, 보호자가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즉시 귀가할 것.”
“네.”
“그리고 셋째.”
나는 아빠의 세 가지 조건에 합의한 뒤에야 가브리엘라 궁의 출입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아빠와 할아버지는 즉시 황제와 거래했고, 나는 가브리엘라 궁에 한하여 황궁 셰프 신분을 회복했다.
다음 날부터 보호자 동반의 가브리엘라 궁행이 시작되었다. 오늘의 보호자는…….
“이모를 잠깐만 보고 오면―”
“정화 후에.”
“그래도 기왕 왔는데 인사를―”
“정화 후에.”
“하지만…….”
“어느 정도 정화 후에 하자, 막내야.”
큰오빠 란슬롯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허리에 에이프런을 맸다.
‘큰오빠는 가끔 할아버지나 아빠보다도 더 매몰찰 때가 있어.’
말로 설득하거나 매달리면 벌컥 화를 낼지라도 못 이긴 척 들어 주는 가웨인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난 공수해 온 재료들을 보며 고민했다.
“으으음.”
“오늘 메뉴는 뭐야?”
란슬롯이 물어서 나는 끙끙 앓으며 대답했다.
“그게 고민이에요.”
누아제가 된 기사들을 보살피며 알았다. 일단 성식을 섭취해 누아제가 될 정도로 ‘물든’ 사람은 사람의 음식을 입에 대려고 하지 않는다.
‘누아제란 시체가 되는 마지막 단계이기 때문일 지도.’
극단적으로 식욕을 잃기 때문에 웬만큼 맛있지 않으면 먹이기 힘들었다.
‘이모는 뭘 좋아할까.’
한참 고민하던 난 도움을 줄 사람을 찾았다. 외삼촌인 에단이었다.
“누님이 좋아하는 건…… 글쎄, 음식에 호불호를 드러낸 걸 본 적이 없는데.”
“흐음, 삼촌은 도움이 안 되는구나.”
“뭐?!”
버럭 소리치던 에단은 내 등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란슬롯을 보다가 쯧, 혀를 차고 입을 다물었다.
“어린 게 무슨 위압감이…….”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맛이라도 봐 주세요. 두 분이선 계속 함께 지내셨으니 입맛이 비슷하실지 모르잖아요.”
“그래.”
나는 꺼내 온 재료를 바라보다가 식칼을 잡았다.
‘일단 계란.’
고기보다는 먹기 쉬운 단백질인 계란을 메인으로 하자. 내가 고기를 멀리 치워 두자 란슬롯이 물었다.
“기력 회복엔 고기가 낫지 않겠어?”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로열 키친에서 수습 생활을 하면서 황족이 꺼리는 음식에 대해선 달달 외워야 했다. 가브리엘라 황비의 경우 육류를 좋아하지 않아서, 단백질은 해산물로 섭취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러자 에단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어릴 적엔 자주 먹었는데, 없어서 못 먹을 정도였지. 나이 들면서 입맛이 바뀌었나.”
“제 생각엔 아마도…….”
“아마도?”
“육류는 포유류의 살점이잖아요?”
에단은 “그냥 고기라고 해 주면 안 될까.” 하며 신음했다.
“우리 엄마도 그래서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으니까요. 특히 삼겹살 같은 건 입에 대는 일이 없으셨지요.”
“왜?”
“사람 타는 냄새와 비슷한 냄새가 나잖아요.”
그러자 에단이 “우리 집 여자들은 이상해…….” 하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고기를 보더니 슥 밀어 놓았다.
‘응? 맞는 말이지 않나.’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볼을 꺼냈다. 이모는 빵을 아주 좋아하니까 계란을 이용해서 빵을 만들자. 겨울에 먹는 빵 하면 호떡과 붕어빵도 있지만, 역시…….
‘계란빵!’
계란 하나를 통째로 넣을 테니까 반죽은 가볍게 만드는 게 좋겠어. 그리고 나는 가볍고도 간단한 반죽을 만드는 법을 안다.
‘핫케이크나 팬케이크 가루를 이용하면 쉽지.’
쉽고 간단한 식사 대용 빵이라 황궁에서도 궁인에게 자주 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리 가루를 믹스해 소분하여 보관하는데 난 그걸 쓰기로 결정했다.
로열 키친에서 소분해 둔 가루를 볼에 쏟은 후, 일정량의 물을 붓고 덩어리가 지지 않도록 잘 섞었다. 그리고 버터를 칠한 깊은 팬에 반죽을 넣고, 그 위로 계란을 톡 깨서 통째로 얹었다. 소금과 후추를 약간 넣어 간한다. 그 후로는 아주 간단했다. 오븐에서 익기만을 기다리면 되니까.
그동안 난 계란빵과 함께 먹을 수 있는 국물 요리를 만들기로 했다.
‘옥수수 수프가 정말 잘 어울리지만, 그건 탄수화물 비율이 너무 높으니까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것으로 하자.’
기력 회복엔 아무래도 단백질이 최고니까 말이지요.
‘그렇다면 좋은 게 있지.’
난 오징어와 새우살, 그리고 흰살생선을 아주아주 잘게 다지고 계란 흰자와 전분, 그리고 소금으로 약간의 간을 한 후에 끈기가 생길 때까지 반죽했다.
밀가루를 넣으면 오랫동안 부드럽게 보관할 수 있어서 좋지만, 소량만 만들어서 국으로 끓여 먹을 거라 생선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도록 밀가루는 넣지 않았다.
동글하게 말거나, 판판하게 편 상태로 기름에 투하할 즈음 계란빵이 모두 익었다. 나는 어묵이 타지 않게 신경 쓰며 오븐을 열었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향이 진동하는 맛있는 계란빵이 완성되었다.
“삼촌, 시식해 주세요.”
하나를 꺼내서 건네자 에단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계란빵을 살폈다. 워낙에 조리법이 간단해서 맛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나를 힐끔 보다가 계란빵을 덥석 물었다.
“……!”
“어, 어때요?”
난 긴장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게 눈 감추듯 하나를 홀랑 삼키는 것으로 보아선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인데……. 그는 부스러기가 묻은 엄지와 검지 손끝을 핥으며 커흠, 헛기침했다.
“모르겠는데.”
“네? 별로인가요?”
“하나로 어떻게 알아. 하나 더 줘 봐.”
하나로 왜 모르지? 불안한 표정으로 하나를 더 건네자 그는 한 번에 계란빵을 입에 넣어 우적우적 삼키더니 말했다.
“잘 모르겠군.”
“……?”
“또 줘 봐.”
“……정말로 모르시는 거 맞아요?”
“그, 그럼!”
그러면서 왜 아쉬운 눈빛을 하시나요. 난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를 보며 계란빵 하나를 천천히 내밀었다. 그는 마치 맹수가 먹잇감을 발견한 듯 순식간에 빵을 빼앗아 입에 넣었다.
“아우애오 오으에운. (아무래도 모르겠군.)”
그러곤 네 번째로 손을 내민다.
“맛있지요.”
“모, 모른다니까?”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계란빵이 식지 않게 돔을 씌웠다.
“모르겠다고! 하나만 더 달라고!”
“이모도 드셔야죠.”
“누님은 입이 짧아서 많이 안 먹어. 내가 잘 익었나 맛을 봐 줄게!”
“그만큼 드셨으면 잘 익은 거겠지요.”
난 고개를 단호히 젓고 잘 익은 어묵을 거름망에 올려 두었다.
‘어묵탕 끓이는 것도 간단한 편이지.’
옆에서 “하나만 더 먹어 보자!”라는 둥 “치사하기는!” 하며 소리치던 에단은 어묵탕에서 고소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자 정신을 홀랑 빼앗겼다.
“그것도 맛보자.”
“아직 안 익었어요.”
“언제 익는데!”
그러고 보니 어른들 입맛엔 계란빵보다 어묵탕이 더 맞는 편이지. 특히 술꾼들이 아주 좋아하고. 술꾼 하니까 생각났다. 이 나라 최고의 술꾼이자 지엄한 아발론의 주인이.
‘드셨으면 좋아하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난 국자를 들었다.
* * *
가브리엘라 궁을 찾은 황제는 주방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걸음을 멈추었다.
“이건 무슨 냄새지?”
보드카가 간절하게 생각나는 냄새였다. 그가 시종장을 향해 커흠, 헛기침했다.
“누가 만들고 있는 거냐.”
“프렌시프 영애가 아닐는지요. 오늘부터 입궁을 허락받지 않았습니까.”
“무슨 요리를 하고 있는 거지?”
“글쎄요……. 영애야 로열 셰프도 모를 기발한 요리들만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황제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중얼거렸다.
“그…… 짐의 비가 시식할 음식이지 않으냐.”
“예?”
“괜찮은지 짐이 맛을 보는 것이 좋지 않겠나.”
“뭐…… 예, 그렇습니다, 폐하.”
“그럼 들어가 봐라.”
“예?”
“하면 짐이 들어가랴?”
“아, 예.”
시종장이 서둘러 주방으로 뛰어갔다. 그 앞에서 뱅뱅 맴돌던 황제는 얼마 후 돌아온 시종장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왜 빈손인 것이냐.”
“그게…… 없답니다.”
“뭐?”
“황비님을 위해 딱 1인분만 준비한 터라 양이 부족하다고…….”
“뭐야? 새로 만들라고 이르면 되지 않아. 수프라면 모두 금세 내오지 않느냐.”
“역시나 특이한 요리였습니다. 수프에 넣은 재료 하나하나 모두 영애가 직접 만들고 준비한 터라 다시 만들려면 시간이 걸린답니다.”
“핑계야. 짐이 로열 키친에서 쫓아냈다고 앙심을 품은 게지.”
옆집 아저씨 보듯 비겁하다고 소리치더니, 정말로 옆집 아저씨인 줄 아는 건가!
‘맹랑해. 아주 맹랑해.’
레오나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처럼. 황제는 미련 넘치는 얼굴로 주방 쪽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돌렸다.
* * *
준비를 마친, 난 트레이에 요리를 옮겨 담았다. 계란빵은 먹기 좋게 식어 있었고, 어묵탕엔 김이 모락모락 오른다. 직접 쟁반을 들고 이모의 침실을 찾았는데 문이 열려 있었다. 누군가 막 빠져나간 모양이다.
‘폐하겠지.’
쟁반을 들고 다가가자 천을 동여매 얼굴의 절반을 가린 이모가 고개를 들었다.
“식사하셔야죠.”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폐하의 애가 탈만 해.”
애가 탔나. 확실히 술꾼들이 혹할 만하긴 하지. 나는 침실 한 편에 있는 티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려놓고 이모를 부축해 테이블로 이끌었다.
“식욕이 없어도 드셔야 해요.”
“생경한 음식인데.”
“계란빵이랑 어묵탕이에요. 어묵은 엄마도 아주 좋아하셨어요.”
“그래?”
“겨울이면 거리 곳곳에 포장마차가 서는데요. 아, 포장마차라는 건 간이 판매점 같은 거예요. 축제에서 자주 보이는 노점상이요.”
“미아는 어릴 때도 노점상을 아주 좋아했지. 워낙에 말괄량이라 신전 근처에서 축제만 했다 하면 개구멍을 파서 빠져나갔어.”
내가 그렇게 얌전한 편은 아니었는데도, 엄마가 나만 보면 ‘세나는 너무 젊잖아서 선생님은 걱정이구나.’ 했던 이유가 납득이 갔다.
‘본인이 그렇게 말괄량이셨으니까.’
“맞아요. 엄마는 포장마차를 좋아하세요. 길을 걷다가 발견하면 꼭 들어가서 어묵과 떡볶이를 사서 먹었어요.”
“그렇구나.”
“제가 살던 세계에서는요. 어묵을 미리 잔뜩 만들어 두고 퉁퉁 불 때까지 계속계속 끓이다가 손님이 오면 하나씩 팔아요. 거기다 고추나 파, 부추 같은 것을 넣은 양념장에 찍어 먹는 거예요.”
나는 종알종알 윤세나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모는 내 이야기를 듣는 것을 아주 좋아해서 나는 뭐라도 계속 얘기하고 싶었다.
“어묵탕은 식기 전에 드세요.”
그녀가 스푼을 들자 난 바짝 긴장이 되었다. 누아제가 된 기사 중에서 예민한 사람들은 아무리 평이 좋은 요리를 해도 한동안 넘기지 못하고 계속 토악질을 했다.
‘이모도 그러면 어떡하지.’
그들과 달리 이모는 상태가 몹시 안 좋았다. 금방이라도 삿된 자가 되어 버릴 것 같아서 시간이 별로 없다. 이모도 엄마와 입맛이 비슷하면 좋겠다. 엄마가 좋아하는 요리라면 잔뜩 알고 있는데.
선생님도 입이 짧은 편이라 나는 그녀가 배를 땅땅 두드릴 수 있도록 입에 맞는 요리를 하기 위해 평생을 매달렸다.
‘제발, 제발.’
국물을 맛본 이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특이하구나. 생선이 없는데 어떻게 생선 맛이 나지?”
“어묵이 생선 살을 다져서 튀긴 거니까요!”
내가 ‘엣헴’ 하는 표정으로 으스대자 이모는 쿡쿡 웃었다.
“달짝지근하지만, 짭짤하고, 비리지 않으면서 구수해. 아주 맛있어. 이 어묵이란 건 탱글탱글해서 식감도 아주 좋고.”
“양념장도 가져올까요?!”
“그럴래?”
“물론이죠!”
신난다! 나는 기뻐서 펄쩍펄쩍 뛸 기세였다.
‘역시 자매라 그런가 입맛이 비슷한가 봐.’
엄마도 겨울에 입맛이 없으면 어묵탕만 달고 살았는데. 나는 재빨리 주방에 가서 양념장을 만들어왔다. 간장을 베이스로 고춧가루나 몇 가지 채소만 들어가면 되기 때문에 아주 간단하다.
“이모, 매운 건 어떠세요?”
“좋아해.”
“그럼 고추기름을 조금 넣을게요. 더 맛있어요!”
신이 나서 양념장을 내밀었다. 이모는 정말로 어묵탕을 맛있게 먹었다. 외삼촌 에단이 입맛을 쩝쩝 다실 정도로.
“남길 생각은 없어?”
그가 묻자 이모가 “환자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면 못써.” 하며 남은 국물을 싹싹 긁어 먹었다.
“정확히 말하면 환자는 아니지.”
“비슷하긴 해.”
“쳇.”
“네가 좋아할 맛이긴 하다. 안주로 최고겠어.”
“내가 누나만 한 술꾼은 아니지.”
이모가 술을 좋아했나?
‘과연 엄마의 핏줄이다.’
나는 또 한 번 통감했다. 선생님은 주량이 센 편은 절대로 아니었는데, 술은 몹시 좋아하셨다.
어묵탕은 성공이었다. 다만 계란빵은 그만큼 좋아하진 않았는데, 그래도 하나는 모두 먹었다.
‘좋아. 토하지도 않으셨어.’
나는 두 개 남은 계란빵을 치우려다가 애타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외삼촌…… 드려요?”
그가 커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조카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으니 먹어 줄까…….”
“싫으시면 괜찮은데요.”
“주십시오.”
“좋아요.”
냉큼 말을 바꾼 그에게 계란빵을 건네고 주방으로 돌아왔다. 란슬롯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오빠 몫의 뇌물이에요.”
나는 계란빵을 그의 손 위에 올려두었다.
“뇌물?”
“우리 오늘 집에 늦게 들어가면 안 돼요?”
“왜 안 돼? 되지.”
“정말이요?!”
“그런데 어디 가려고?”
“시장이요.”
난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장을 볼 거예요.”
“황궁엔 재료가 충분하잖아.”
“하지만 그곳에서만 떠오르는 요리들이 있거든요. 가서 보고 맡고, 만지면서 술꾼들이 좋아할 요리를 만들 거예요.”
란슬롯은 픽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방을 정리한 난 가브리엘라와 에단에게 인사하고 란슬롯과 함께 시장에 갔다. 주말을 앞두어서 그런지 인파가 가득했다. 얼마나 많은가 하면 조금만 정신을 놔도 사람의 파도에 휩쓸릴 것 같았다. 란슬롯은 행인에게 부딪쳐 비틀거리는 내 손을 얼른 잡았다.
“조심하셔야죠, 아가씨.”
란슬롯은 정말 낭만적이란 말야. 비단 말투뿐만이 아니라 행동이며 목소리까지 아주 로맨틱한 사람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상점 지구가 이 주변이죠?”
“응.”
“상점가에서 오빠를 두고 몇 명이나 머리채를 붙들고 싸웠다는 게 이쪽?”
“…….”
란슬롯은 빙그레 웃었다. 사람 소리에 묻혀 잘 듣지 못했지만, 얼핏 그가 “가웨인 이 새끼…….” 하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여긴 아니야.”
“으음, 그렇구나.”
“세니아나,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혹시 나를 난잡하다고 생각한다면…….”
“아닌데요?”
“그럼?”
“그냥 사람들이 오빠를 두고 싸울 만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동생인 내가 봐도 멋지잖아요. 시장 구경을 데이트처럼 만들어 주는 사람인걸.”
란슬롯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귀여운 소리만 하는 건 위험해. 개떼들이 보물을 알아보고 노릴지도 모르니까.”
“개떼들이요?”
“뭐, 지키는 건 가족의 몫이지. 가자.”
난 오빠와 함께 시장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길라게온엔 재밌고 흥미를 끄는 것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건 역시 마법이었다.
‘마법이 있으니까 사철 재료를 한 번에 볼 수 있잖아.’
뿐만 아니라 쉽게 구할 수 없는 싱싱하고 희귀한 재료들도 있었다. 마치 대형 마트처럼! 나는 재료를 꼼꼼히 살피며 생각했다.
‘안주…… 하면 이상하게 걸쭉한 소주 안주가 떠오른단 말이야.’
엄마가 소주를 각별히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엄마를 위해 직접 만들어 왔기 때문일까. 소주 안주로 좋은 것들은 정말 여러 가지를 알고 있었다.
‘일단 탕류. 그중에서도 찌개가 아주 잘 어울리고 또…….’
이전에 만들었던 곱창볶음이나 연어회와도 궁합이 잘 맞는다. 그리고 순대볶음, 삼겹살, 골뱅이 소면, 파전……. 그런 생각을 하며 걷던 난 마침 발견한 재료를 보고 소리쳤다.
“우와!”
말도 안 돼. 이것까지 판단 말이야? 황도 시장 최고야!
황궁 재료 보관실이 아니라 시장에 오길 잘했다. 난 눈을 빛내며 ‘그것’에 바짝 다가갔다.
“손질한 것도 있나요?”
“물론이죠!”
“엄청 크다. 이렇게 큰 건 처음 봐요.”
“이게 다 애정으로 키워서 그렇습니다요.”
나는 그것을 반짝반짝한 눈으로 보며 생각했다.
‘매운 걸 좋아한다고 하셨으니까 괜찮은…… 아, 하지만 고기는 싫어한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향신료를 때려 넣고 볶는 요리니까 육류를 구울 때 나는 특유의 향은 나지 않을 거다.
‘괜히 요리했다가 만에 하나라도 식욕을 잃으면…… 아아, 어떻게 하지.’
난 끙끙거리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주세요, 이거!”
사 두면 어쨌든 먹을 사람은 있겠지.
다음날. 중앙탑에서 금좌 11석이 모이는 날이라 보호자로 무려 아빠와 할아버지, 란슬롯이 모두 오기로 했다. 난 그들이 오기 전에 이모를 보지 않기로 철석같이 약속한 후에야 가브리엘라 황비궁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어제 시장에서 사 온 ‘그것’을 밀가루로 벅벅 닦았다. 하지만 손질을 다 하고 양념장까지 준비한 후에도 선뜻 요리할 수 없었다.
‘어쩌지, 어떡하지.’
오랜 시간 고민하는 중에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어제 보았던 아발론의 시종장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폐하께서 황비님께 내갈 요리를 기미하셔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그럼 기미할 궁인을 불러 주세요.”
“……‘폐하께서 직접’ 하시겠다고 명하셨습니다.”
“…….”
“…….”
우리는 묘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몇 번 헛기침을 한 시종장이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으시면 어제 만들었던 수프를 또 한 번 내시는 게 어떠십니까.”
“……어묵탕이 보드카와 어울리긴 하지요.”
황제가 보드카 귀신이라는 얘기는 워낙에 유명하고. 중국 고량주와 비슷한 남부의 술을 즐겨 마시기도 한다고 했다.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묵을 튀기지 않을 거라서요.”
“그렇습니까…….”
시종장은 몹시 아쉬운 얼굴이었다.
‘가여워라.’
황제가 그를 꽤나 닦달한 모양인지, 몹시 피곤한 듯했다. 난 철부지 황제를 모시는 시종장이 가여워서 오늘 만들 안주, 아니, 요리를 나눠 주기로 했다.
“네, 완성되면 아발론으로 가져갈게요.”
시종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가 돌아가고서 난 결심을 마쳤다.
‘일단 해 보자. 재료는 준비해 놓았으니까.’
가브리엘라 황비와 틈만 나면 대작해 온 황제이니 엄마처럼 그녀와 입맛이 비슷할 수도 있겠지. 내가 황제를 기미역으로 써먹어야겠다.
* * *
황제는 점심 식사도 대충 한 채로 ‘술과 기가 막히게 어울릴 술꾼의 촉이 발동하는 요리’를 기다렸다. 언제 올까 싶어 술까지 준비해 둔 채로 초조하게 기다리던 황제는 노크 소리를 듣고 퉁기듯이 일어났다.
“그것이냐!”
“저…… 폐하, 오늘은 ‘어묵’이란 것이 준비되지 않아서 다른 안주, 아니, 다른 요리를 내왔습니다.”
황제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그는 힘이 쭉 빠진 얼굴로 입맛을 다시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근엄한 척 말했다.
“몸이 미령한 비가 먹을 음식이니 짐이 그녀를 아끼는 마음에 살펴보겠다고 한 것이야.”
시종장의 얼굴이 떨떠름해졌지만, 오랜 세월 황궁의 궁인으로 지낸 그는 순식간에 표정을 수습할 수 있는 남자였다.
“과연 성군이십니다.”
그렇게 말한 시종장이 황제의 앞에 세니아나의 요리를 내려놓았다.
‘호오, 이것도 꽤…….’
어묵탕과는 다른 냄새지만 술욕, 아니, 식욕을 동하게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고추를 얼마나 쓴 건지 맛보기도 전에 코가 얼얼할 지경이다. 황제는 신이 나서 술병 마개를 따고, 술잔에 아끼고 아끼던 비장의 술을 꼴꼴 따랐다. 그리고 접시 위를 덮은 돔을 열었는데…….
“이게 무엇이냐?”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닭발이라는 요리입니다.”
“보면 알아! 이건 누가 봐도…… 닭발이지!”
그가 오만상을 찌푸린 채 시종장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닭발로 만든 이 요리의 이름이 뭐냐고.”
“저도 수차례 물어보았지만 닭발이라고 했습니다……. 굳이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국물 닭발’이라고 부른답니다.”
“이런 고얀―!”
역시 앙심을 품은 게 틀림없다. 레오나가 죽기 전부터 신경 쓰고, 프렌시프의 노인네와 돌덩이가 애지중지 아끼는 데다 제국 유일의 성녀라 너무 봐준 게지.
‘황제 알기를 개똥으로 아니 이따위 것을 내오는 게 아닌가!’
“당장 치워!”
“하지만 폐하, 영애가 고생하여 만드는 것을 보았……!”
“치우라지 않아!”
그가 탕! 테이블을 내리쳤다. 어찌나 세게 내리쳤는지 국물이 손이며 입가에까지 튈 정도였다.
“짐의 불쾌한 심기를 전하도록 해라.”
“예…….”
시종장이 요리를 들고 떠나고 황제는 씨근덕거리며 의자에 풀썩 앉았다.
‘고얀 것.’
그리고 입가에 묻은 국물을 손끝으로 닦아 내려다가 얼떨결에 맛을 보고 말았다.
“뭐지.”
뭐야, 이건. 징그럽게 생긴 요리였는데 왜…….
‘맛있어.’
소스를 조금 핥은 것뿐인데도 입 안이 불 난 듯 엉망이 되었다. 손끝에 묻은 양념은 마냥 맵기만 한 게 아니었다. 통각을 자극하는 아린 맛을 중심으로 짠맛과 단맛, 감칠맛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었다. 황제는 당황했다. 재료도, 완성된 모습도 흉물스러운 요리에서 이런 맛이 나다니.
‘더 맛보고 싶어……!’
사실 도미니크가 매운 음식을 몹시 즐기는 건 유전 때문이었다. 황제는 황자 시절부터 소피아 대부인이 질색할 만큼 매운 요리를 달고 살았던 것이다. 덕분에 속병으로 고생한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어릴 땐 모후와 의사들이, 나이 들어선 황비와 자식, 그리고 친황파 늙은이들까지 ‘건강!’을 부르짖으며 귀찮게 했다. 황궁의들은 매운 것을 먹을 거라면 차라리 술을 끊길 권했다. 하지만 술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던 주정뱅이는 주변의 만류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매운 것을 포기했다.
속이 확 풀릴 정도의 매운 것을 마음껏 즐겨 본 게 언제였더라. 오늘 세니아나가 만든 요리는 아주 괜찮았다. 소스가 마음에 쏙 드는 데다, 일단 모양이 눈에 보이지 않자 저도 모르게 편들어 줄 생각도 들 정도로.
‘사실 그만큼 고약하게 생긴 요리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원기 보충이 필요하다며 자라 하나를 통째로 식탁에 올리는 일도 있었다. 눈을 부릅뜬 생선의 토막 난 머리를 요리에 장식하는 것도 보았다. 식사 내내 거슬려서 도무지 속이 편하지 않았다. 동물의 내장도 먹고 사는데 닭의 발쯤은 양호한 게 아닐까.
‘너무 섣불렀나.’
그래, 자신은 옥타비우스 로젠카르튼. 고귀하고도 고귀한 이 나라의 군주였다. 세니아나가 그런 자신을 무시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는 다시 시종장을 불러들였다. 시종장은 맨손으로 들어와 허리를 굽혔다.
“그…… 아까 그것 말이다.”
“영애의 요리를 이르십니까?”
“그래.”
시종장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가슴을 두드렸다.
“염려 마십시오, 폐하. 영애에겐 제가 따끔하게 한마디 하였습니다.”
“……했다고?”
“예! 핏줄을 앞세워 황궁의 권위에 도전하는 작자들의 비참한 최후를 일러 주었습니다.”
“…….”
“또한 부디 조심 또 조심하라 일렀고, 황제 폐하의 심기가 상하셨다는 말도 잊지 않았지요.”
“…….”
“이깟 요리를 낼 거라면 황궁의 주방이 아닌, 시장으로 가라 매섭게 다그쳤고―”
“…….”
“다시는! 그따위 요리를 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일렀습니다.”
황제가 말이 없자 시종장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동안 시종장을 빤히 보던 황제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래서……?”
“예?”
“다시는 하지 않겠다던가?”
“물론이죠!”
빌어먹을. 일 잘하는 녀석이란.
황제가 몹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귀족 영애의 신분으로 짐의 요리사가 되기 위해 피땀 흘려 수양하는 자에게 그리 말할 것까지는 없지 않았나.”
“예? 하지만 폐하께서…….”
“짐이 언제 그렇게까지 다그치라 했던가! 짐은 그저…… 그저―”
황제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더욱 정진하길 바라는 마음에 따끔한 충고를 하라고 했던 것이지. 그런데 이런 눈치 없는 인사를 보았나!”
“…….”
“그래서 닭발…… 이란 것은 어떻게 되었지?”
“제 눈앞에서 치우라 명했…….”
“뭐야?!”
아깝게시리!
황제가 불안한 표정으로 가브리엘라의 궁을 쳐다봤다. 세니아나가 다시는 닭발을 만들지 않으면 어찌하지…….
* * *
나는 가브리엘라 황비에게 우유를 챙겨 주었다. 황제가 닭발에 질색을 하기에 황궁에선 더 이상 흉측한 음식은 만들지 말자고 결심했는데, 이모가 먼저 냄새의 정체를 묻더니 ‘내가 한 번 먹어 볼까?’ 하고 넌지시 말했다. 그리고 닭발을 가져다주자 그녀는 정말로 잘 먹었다.
“맵지 않으세요?”
“매운 편이지만, 아주 맛있어. 여기엔 도수 높은 술이 어울리겠어. 보드카나 쌀로 빚은 술이나.”
“아직 술은 안 돼요.”
누아제들이 갑작스럽게 삿된 자로 변하는 건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렸을 때였다. 맨정신일 적엔 그나마 감정을 다스릴 수 있지만, 술을 마시면 격해지므로 아주 위험하다. 내 생일 무렵에 누아제가 된 영지민도, 그리 주의를 주었는데 술을 훔쳐 마셨더랬다.
‘일단 삿된 자가 되면 돌이킬 수 없어.’
“이모, 갑자기 매운 게 들어가면 속이 다 망가지니까 오늘은 적당히 드세요. 다음에 또 만들어 드릴게요.”
“그래.”
에단은 어쩐지 부러운 얼굴이었다. 그래도 또 환자의 음식을 빼앗아 먹을 수는 없는지 얌전히 문가에 서 있었다.
‘이렇게 칼칼한 음식이 잘 맞는 모양이네. 메뉴는 앞으로도 소주에 어울리는 것을 떠올려야겠어.’
며칠을 애썼더니 이모의 상태는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다. 열십자(十)로 벌어지기 시작하던 입이 다시 한일자(一)로 돌아오고, 새빨갰던 눈은 얼마나마 본래의 색이 되었다. 난 콧노래를 부르며 황비의 침실을 빠져나왔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하자.’
이제 슬슬 괜찮아지고 계시니, 앞으로 더 좋아지실 거라고 믿자.
빈 접시를 들고 주방으로 가려는데 누군가 쏜살같이 뛰어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여, 영애!”
“……네?”
오늘 나를 된통 다그치고 간 황제의 시종장이었다.
“무슨……?”
아앗, 더 혼내려고 그런 걸까. 충분히 반성했는데! 난 울상을 짓고 시종장에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폐하께 다시는 그런 요리를 내가지 않겠어요.”
“그, 그게……!”
“절대로요.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는 한 제 손으로 폐하 앞에 요리를 내지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해, 해가 서쪽에서 떠야 요리를 해 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뭐, 정리하면 그런 이야기긴 하다만…….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시종장은 하늘이 무너진 표정으로 이마를 잡았다.
“사직할 때가 온 것인가…….”
중얼거리는 것으로 보아선 황제에게 단단히 혼난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억울해졌다. 이모한테 내갈 요리를 나눠 달라고 한 건 황제 자신이면서.
‘다시는 해 주나 봐라.’
닭발이 좀 기괴하게 생겼다는 건 인정하지만, 아주 맛있는 음식인데. 그렇게 결심한 나는 쟁반을 들고 시종장을 지나쳤다.
주방을 깨끗하게 정리한 난 주스를 가지고 가브리엘라 궁 뒤편으로 나왔다.
‘조금 힘든걸.’
예상은 했지만, 정화는 정말로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이모의 상태는 다른 누아제들에 비해 훨씬 심각해서 음식을 먹인 후엔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픽 쓰러질 것만 같았다. 뒤뜰에 앉아 어깨를 쿵, 쿵, 두드리던 난 인기척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저하.”
도미니크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피곤하십니까.”
“조금요. 그보다 저하는 괜찮으신가요?”
“예.”
“하지만 그날 황제 폐하께선…….”
황제가 흥분하는 건 차라리 덜 무서웠다. 그건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의 얼굴이 고요해 보일 때야말로 정말 위험한 것인데, 그날 황제는 아주 무미건조한 얼굴로 두 황자를 끌고 갔다.
“황태자에겐 좋은 일이었죠. 제게도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왜요?”
“공무에서 제외되어서 쉴 시간이 생겼거든요. 그래서 영애와 이렇게 함께 있을 수도 있고.”
도미니크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난 “그게 뭐예요.” 하며 울상을 지었다.
“정말로 괜찮으신 거예요?”
“당신이 괜찮다면 난 언제나 괜찮습니다. 그래도 정 염려된다면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좋아요!”
내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뭘 하면 되지요?” 하고 물으니 그가 팔을 활짝 벌렸다. 안아달라는 듯이. 난 킥킥 웃으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조금만 더 힘내요. 이제 끝이 머지않았으니까.”
이모를 정화하고, 로열 셰프 자리를 빼앗은 후 아탈란을 정리한다. 그것만 끝내면 우리는 평화로워질 수 있었다. 나와 도미니크는 끌어안은 채로 서로에게서 위안을 얻었다. 그때였다.
“신수가 훤하십니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방금 전. 나베리우스와 아서, 란슬롯, 가웨인은 “그래도 정 염려된다면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하며 팔을 벌리는 도미니크를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건 뭔 개소리냐.”
나베리우스가 아서와 란슬롯, 가웨인을 돌아보며 음산하게 물었다.
“너희들은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뭘 하고 있었어.”
저 빌어먹을 놈팽이가 내 손녀를 끌어안고 있잖아. 정확히 말하면 안은 쪽은 세니아나지만, 팔불출 계의 떠오르는 신성인 프렌시프 사내들은 그런 것쯤은 뇌 내에서 달리 치환할 수 있었다. 가웨인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도미니크를 노려보았다.
“얼마나 영악한 놈인지 모릅니다.”
“영악해?”
“놈은 비상합니다. 세니아나의 측은지심을 일으키는 데 도가 텄습니다.”
일전에 도미니크를 구박한 일로 무려 한 달 가까이 세니아나의 눈치를 살피며 살았다. 그들은 첫 전투의 뼈아픈 패배를 아로새기고 한동안 전열을 가다듬는 중이었다.
“멍청한 놈들.”
나베리우스가 쯧, 혀를 차며 도미니크를 쏘아보았다.
“영악한 놈을 칠 때는 함께 비열해져야 하는 법이다.”
비열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동부의 왕이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선봉을 맡으시겠습니까.”
“부족한 투사들을 두어 늙은이가 말년에 고생하겠구나.”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눈은 누구보다 투지로 불타고 있었다. 그가 커흠! 헛기침을 하며 세니아나와 도미니크에게 다가갔다.
“신수가 훤하십니다.”
도미니크가 몸을 일으켜서 그를 향해 고개를 수그렸다.
“할아버님, 황도로 귀환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할아버님~?!
‘어쭈, 이놈 봐라.’
나베리우스는 비릿하게 웃고는 고개를 숙였다.
“부족한 늙은이를 환대하여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염려해 주신 덕에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렇게 말한 나베리우스가 이마를 쥔 채 비틀거렸다.
“할아버지!”
깜짝 놀란 세니아나가 그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왜 또……. 다 나으신 게 아니었나요?”
“잠시 빈혈이 일었을 뿐이다.”
“갑자기요? 어떡하지……. 아무래도 다 나은 건 아닌 모양이에요.”
세니아나는 걱정이 담뿍 밴 얼굴로 나베리우스를 살폈다. 황도로 돌아온 후 젊은이들보다 건강하게 지내서 안심했었는데 아무래도 착각이었나보다. 나베리우스는 처연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말래도.”
“아탈란에서 고문을 당하신 것 때문에 더 그러실 거예요.”
“그렇지 않아. 이 나이가 되었으면 어디 하나는 상하지 않는 게 당연하지.”
그러며 아탈란의 대사제에게 찔렸던 옆구리를 감싸 쥐고 신음했다. 세니아나는 “역시 고문의 여파가!”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얼른 가세요. 쉬어야겠어요.”
그가 옆구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구나.”
“그런데 할아버지.”
“그래.”
“아탈란의 신전에서 찔린 건 왼쪽 옆구리가 아니었나요?”
왜 오른쪽을 잡고 계실까.
“…….”
“……네?”
나베리우스는 말없이 손을 오른쪽 옆구리에서 왼쪽 옆구리로 옮기며 희미하게 웃었다.
“신전에서 다친 것 때문이 아니래도 그러는구나. 후……. 그저 갈 때가 왔을 뿐이야.”
과연 비열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동부의 왕! 가웨인은 존경스러운 조부를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자연스럽게 세니아나와 도미니크를 떨어지게 만들더니, 그녀의 염려를 불러일으켜 도미니크 쪽엔 신경도 쓰지 못하게 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대사제에게 차였던 다리가 아프긴 해. 노인은 골병이 들면 끝이라던데. 아쉬워서 어떻게 널 두고 떠날까.”
진짜로 병자라도 된 것 같은 말투였다.
‘역시 조부님은 치졸하기론 따를 자가 없으시다.’
가웨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베리우스는 흐린 눈빛으로 오른쪽 허벅지를 짚었다.
“계속 그런 말씀 하시면 화낼 거예요! 저택으로 돌아가요. 그런데 할아버지.”
“그래.”
“차였던 쪽은 왼쪽 다리였는데…….”
나베리우스는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손을 옮기며 비틀거렸다.
“부축을 부탁해도 되겠느냐.”
“그럼요!”
세니아나는 의아하다는 생각도 잊고 얼른 나베리우스의 허리를 붙잡았다. 설마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손녀와 손녀 사윗감을 떼어 놓겠다고 거짓말을 줄줄 입에 담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란슬롯이 걱정 어린 얼굴의 막내를 보며 픽 웃었다. 세니아나는 모를 것이다. 손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면 치매 노인 행세도 능히 할 사람이 저 나베리우스 프렌시프였다.
* * *
‘닭발…….’
보드카와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그 탕 요리……. 닭발……. 탕 요리……. 닭발…….
어두운 표정으로 세니아나의 요리를 떠올리고 있던 황제는 끙끙 앓았다. 손에 넣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간절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었다.
‘어떻게 체면 상하지 않고 마음을 돌려세울 방법이 없을까.’
내내 고민하던 그는 아침이 되어서야 묘수를 떠올렸다. 그가 얼른 도미니크를 불러들였다. 아침부터 끌려 나온 그는 몹시 귀찮은 얼굴로 황제에게 부복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너는 생각이 있는 놈이야, 없는 놈이야!”
“또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도미니크가 길게 한숨을 내쉬자 황제는 옳다구나 싶어 커흠! 헛기침했다.
“너는 짐을 아비로 여기긴 하는 것이냐?”
“그러니 황궁에서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데 왜 아직도 황자비 얘기가 없어!”
“……예?”
“이 나이 되었으면 아비가 챙기지 않아도 황자비 하나둘은 데려와야지.”
“둘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어쨌든 말이다! 뭐…… 흠, 마음에 드는 처자가 있으면 따로 보아도 좋고.”
“대체 무슨 말씀을―”
“그, 왜…… 보통 시댁에 인사 갈 적엔 선물 하나씩들 가져오지?”
“관습이지 않습니까.”
“짐이 뭘 좋아하는지 2황자는 알고 있느냐?”
황제가 은근한 눈길로 도미니크를 쳐다보았고, 도미니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황제가 좋아하는 것들이야 수도 없이 많았다. 권좌. 황권 강화를 할 수 있는 정치적 무언가. 자식 간에 싸움을 붙이는 일. 기타 등. 황제의 눈을 벌겋게 하는 것들은 대체로 자신과 무관하며 이롭지 않은 것들이었다.
도미니크는 딱 잘라 말했다.
“우둔한 제가 감히 폐하의 심중을 어떻게 헤아리겠습니까. 제게는 어려운 질문이니 거두어 주십시오.”
들을 필요도 없다는 대답이었다. 황제는 움찔, 하고 뻔뻔한 표정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짐의 심중을 살피는 것은 자식 된 도리이지. 잘 헤아려 보아라.”
“훌륭한 형님과 영민한 아우만 못한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하면 짐이 알려 주마.”
“아닙니다.”
“알려 준다니까.”
“괜찮습니다.”
망할 놈의 새끼. 황제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결국 그는 버럭 소리쳤다.
“영애를 구슬려서 뭐라도 만들어와!”
“예?”
“세니아나 프렌시프 말이다.”
도미니크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 * *
저택으로 돌아간 나는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점멸하는 통신석을 연결했다.
“예, 전하.”
[오늘 무슨 요리를 한 겁니까.]
“네?”
[가브리엘라 황비궁에서 말입니다.]
“오늘이요? 오늘은 닭발을 하였는데, 계란국이랑.”
[그중 폐하께서 홀리신 게 뭡니까.]
자꾸 무슨 소리람. 나는 의자에 걸어 놓고 통신석을 집어 들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셔야 속속들이 알려드리지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리고 이어진 도미니크의 말을 들은 난 기가 막혔다. 황제가 도미니크를 불러들여 애인을 운운하면서 요리를 가져오라고 했다니. 묘한 얼굴이 된 나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폐하께선…… 으음, 조금…….”
통신석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본래 탐욕적인 분이십니다. 특히 음식과 술에 말이죠.]
“온갖 산해진미를 입에 달고 사셨을 텐데 왜 그러실까요.”
[입에 달고 살지 못했으니까요.]
“왜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배를 깔고 침대에 누웠다.
[황족은 금욕적이길 강요받습니다.]
그것참 황제와는 정반대의 이야기다. 나는 어느 책에서도 길라게온의 황제만큼 유치하고 욕심 많은 군주를 본 적 없었다.
‘뭐, 하나하나 뜯어보면 비슷한 왕이 있기야 하겠지만.’
남의 아내를 빼앗으려고 강제 노역거리를 만들었다는 왕도 있지. 성욕에 눈이 머는 것보다 식욕이 강한 쪽이 양호한 편이긴 했다.
[황족은 어떤 것에도 호불호를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음식에조차.]
“아아, 황태자 전하께서도 음식에 호불호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쓰시긴 하셨어요.”
[지금 그렇게까지 하는 건 자리가 위태로운 황태자뿐이겠지만, 폐하께서 황자였던 시절엔 달랐습니다. 올리비에 폐공작은 특정 차를 자주 찾는다는 이유로 선황에게 꾸중을 들었을 정도였으니까요.]
듣자 하니 정말로 엄청났다. 음식을 잔뜩 차려 놓고도 소식하는 게 미덕이었다거나, 식사를 할 적엔 폭식하지 않도록 티스푼만 한 수저를 써야 한다거나, 승마에 정신이 팔린 황자에겐 스스로 말의 목을 베도록 한다거나.
‘김유신은 스스로 하기라도 했지!’
나는 질려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절제를 강요받았다면 그 반동으로 황제가 술과 음식이라면 정도를 모르는 게 이해가 갔다.
“그럼 제가 닭발을 만들어 가야 하는 걸까요?”
[아니요.]
으응? 부탁하려는 게 아니었어? 난 고개를 모로 꼬며 물었다.
“왜요?”
[영애가 폐하의 마음에 꼭 드는 음식을 만든다면 황궁의 유령이 되어서도 주방에 묶여 살아야 할 겁니다. 그 닭발이라는 것을 손질하면서요.]
나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고 킥킥 웃었다.
“알겠어요. 그래도…… 한 사람에게라도 인정받으니까 기분은 좋은데요. 폐하께서 저를 저하의 애인으로 인정해 준 거잖아요.”
난 헤헤 웃다가 멈칫하고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사귀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요?”
어영부영 사귀기 시작해서 청혼을 들었다.
[말이 꼭 필요합니까.]
“아니면 혼자서 착각할 수도 있잖아요. 나는 사귄다고 생각하는데 저하는 아닐 수도 있고. 그리고 시작! 하고 만난 게 아니니까 제게 저하는 그냥 저하이고, 저는 저하께 영애잖아요.”
[달리 부르는 게 좋겠습니까.]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어들었다. 나는 “으음…….” 하고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어째서?]
“영애라고 부르는 저하는 정중해서 좋아요.”
[전 그렇지 않습니다만.]
어쩐지 투덜거리는 느낌이라 난 킥킥 웃고 “어허, 황족은 금욕적이어야지요.” 하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식사를 하실 때 티스푼을 쓰게 될지도 몰라요.”
[그 정도쯤이야.]
“그럼 말의 목을 베게 될지도!”
[그건 좀 곤란하군요.]
이렇게 느긋하게 대화를 하는 건 오랜만이라 그런지 그는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내일 보호자는 누굽니까?]
“네?”
[늘 보호자 동반이시지 않습니까.]
그가 장난스럽게 물어서 난 얼굴을 조금 붉혔다. 이 나이에 보호자 동반이라니……. 나는 우리 가족이 조금…… 아니, 꽤 과보호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몹시 부끄러워졌다.
‘그렇지만 나는 특이한 케이스니까.’
아탈란에서 언제 공격받을지 모르고, 이모가 삿된 자가 되면 죽을지도 모른다. 응, 그런 거지. 난 속으로 합리화를 하면서 대답했다.
“내일은 할―”
그때, 쾅쾅쾅! 문이 부서질 것 같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세니아나, 큰일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무슨―]
“다음에 연락해요.”
재빨리 통신을 종료하고 문을 나섰다. “무슨 일이에요?!” 하고 소리치며 주변을 둘러보자 무언가가 불쑥 앞으로 튀어왔다.
“널 먹이려고 사 왔는데, 잊고 있었어.”
체리가 올라간 초콜릿 바움쿠헨을 든 가웨인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큰일이라고 하셨잖아요.”
“큰일이지. 하마터면 케이크가 맛없어질 뻔했잖아.”
“정말!”
오랜만에 기분 좋게 통화 중이었는데. 나는 가웨인을 흘겨보았다.
“이건 큰일이 아니라고요.”
“그래서 안 먹을 거야?”
“먹을 거지만…….”
“가자.”
나도 황제만큼 식탐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를 따라갔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가족들의 ‘큰일’은 계속 일어났다. 이상하게 도미니크와 통신만 하려고 하면 “큰일이다!” 하고 나타났다. 이틀째만 해도 그러려니 했는데 사흘이 넘어가자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럼 내일은 호숫가로―]
“세니아나, 큰일이다!”
밖에서 소리가 들리는지 도미니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다음에 다시 하죠.]
“예…….”
나는 벌컥 문을 열고 쿵쿵쿵 발을 구르며 가웨인을 흘겨보았다.
“또 뭔데요.”
“저택에 토끼가 들어왔어.”
“우와! 볼래요! 으음, 그런데 이 계절에, 이 삼엄한 감시를 뚫고 토끼가 어디서 왔을까요?”
“……털이 북슬북슬해!”
“와!”
문제는 가족들이 들고 오는 ‘큰일’은 흥미로운 것들이라 나는 화를 내려던 것도 잊고 그들을 따라갔다.
* * *
이젠 이렇게 치졸하게 나오신다 이거지.
통신석을 빤히 보던 도미니크가 헛웃음을 흘렸다. 마구간 사건 이후로 잠잠했던 프렌시프의 사내들은 나베리우스라는 지원군이 올라오자 작전을 바꿔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도미니크는 일주일째 세니아나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이야기가 이어질 만하면 “큰일이다!” 하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세니아나가 “우와!” 하며 냉큼 통신을 종료했다.
그때마다 도미니크의 곁을 지키던 알베르는 배를 잡고 굴렀다. 도미니크가 이번에도 꺽꺽 웃는 알베르의 장딴지를 걷어찼다.
“윽…….”
그는 걷어차인 부분을 매만지며 콜록, 헛기침을 했다.
“프렌시프 일가의 하는 짓이 우습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하께도 지원군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도미니크의 눈이 가늘어지자 알베르는 비열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본래 그는 중앙 기사단의 수뇌부 출신으로 군사 작전을 계획, 주도했다. 특기는 뒤통수치기, 취미는 적군 분열시키기. 이간질엔 도가 튼 인사였다.
“가브리엘라 황비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도미니크의 최측근으로 세니아나의 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조언이었다.
“황비라. 가능하겠나.”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죠.”
“가브리엘라 황비궁으로 간다.”
도미니크가 황비궁을 찾자 에단과 함께 책을 읽던 가브리엘라가 몸을 일으켰다. 도미니크는 그녀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굽혔다.
“과한 예는 부담스러울 뿐입니다, 저하. 이 시간에 이곳엔 무슨 일이십니까.”
“도와주십시오, 이모님.”
“……무슨 까닭인지는 알겠으나, 글쎄요. 제가 도움이 될 일이 있을까요.”
“프렌시프에서 가장 염려하는 건 제 출생이 아닙니다.”
“그렇겠지요. 그들이 저하의 출생을 물고 늘어지는 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할 테니.”
“영애가 황자비가 되어 황궁에서 생활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죠. 외척이 되면 사사로운 출입을 불가할 테니까요.”
에단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도미니크를 쳐다보았다.
‘이놈 봐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 세니아나가 황궁에서 지내는 것은 프렌시프에겐 공포지만, 에단과 가브리엘라에겐 달랐다. 지금껏 생사도 알리지 못하고, 남남처럼 살던 조카를 품에 끼고 지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황비는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으며 말했다.
“그 애가 황궁의 정쟁에 휘말리는 건 우리에게도 기쁜 일은 아니랍니다.”
“이미 그녀는 정쟁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습니다. 저와의 결혼을 하나 더 얹는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죠. 오히려 타국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도미니크가 에단을 쳐다보자 그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이야, 우리 조카 사위님께서 맞는 말만 하시는군.”
세니아나를 끼고 살 수 있는 데다 프렌시프 놈들의 콧대까지 납작하게 할 수 있는 일인데 무얼 망설이겠는가!
“누이, 저하는 세실의 핏줄이잖수. 우리는 처음부터 인연이었다고.”
잠시 고민하던 가브리엘라 황비가 도미니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잘해 봅시다.”
“영광입니다.”
세니아나를 가운데 둔 양 진영의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