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장 (21/24)

21장

나는 오랜만에 쟝뤼크를 만났다. 그는 얼굴이 반쪽이 되었는데, 말끝마다 욕설을 뱉었다.

“여긴 사람 살 데가 아니야, 빌어먹을.”

“그렇게 힘드세요?”

“무슨 놈의 서류가……! 고프레도 이 개자식은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산 건지 모른다. 온통 도둑놈들 천지야! 오만 곳에 구멍이 뻥뻥 뚫려서는! 썩을, 젠장, 빌어먹을!”

일주일 동안 식칼은 잡아 보지도 못했다는 쟝뤼크는 눈이 썩은 동태처럼 쑥 들어가 있었다.

“경합 준비도 하셔야 할 텐데……. 괜찮으세요?”

“그래서 말인데.”

쟝뤼크가 눈을 번쩍이며 내 어깨를 잡았다.

“예?”

“복귀해라.”

“잘렸는걸요. 이젠 로열 키친의 출입패로는 입궁도 못 해요.”

“폐하께서 어제 나를 부르더니 너무 오래 쉬면 칼이 무뎌지는 게 아니냐고 묻더군. 널 데려오라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도미니크가 닭발 얘기를 딱 잘랐더니 이제 쟝뤼크 쪽을 공략하는 모양이었다.

‘그놈의 닭발.’

그냥 한 번 만들어 줘 버릴까.

“아직 가브리엘라 황비님의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서요.”

“가브리엘라 황비궁은 네가 전담해라.”

“전 아직 궁을 담당할 정도가 아닌데요?”

“폐하께서 조치를 취하실 거다.”

아니, 이 사람들이 대놓고 낙하산을 날리려고 하잖아. 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쟝뤼크를 보다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볼게요.”

“생각은 무슨. 나 죽어! 죽는다고! 궁 밖에서 느긋하게 살던 나를 끌고 왔으면 책임을 지란 말이다!”

정말로 힘이 들긴 한 모양이었다. 애처럼 떼를 쓰는 걸 보면.

“아무튼, 알겠어요. 곧 경합이니 도우러 오긴 해야 해요. 그때까지만 어떻게 버텨 보세요.”

“빨리 와……. 제발…….”

황태자는 황제에게 내가 지시한 대로 주청했고, 경합 날짜는 이 주 뒤로 잡혔다. 내가 “고작 이 주인걸요?” 하고 말하자 그는 이 주도 버티기 힘들다며 생떼를 부렸다.

“금방 연락드릴 테니 몸 관리 잘하세요.”

“그래…….”

그가 힘없이 터덜터덜 주방으로 돌아갔다.

‘이제 슬슬 돌아가긴 해야지.’

이모는 정말로 많이 나아졌다. 이젠 겉으로 보면 평범한 사람 같았다. 아직은 눈이 약간 붉고 성력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며칠만 더 애쓰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주방에 들어간 나는 멈칫했다.

‘이상하다. 왜 식칼이 여기에 있지?’

나는 소독을 위해서 일부러 식칼을 햇빛 아래에 두고 나갔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식칼은 꽂이에 걸려 있었다.

“세니아나!”

“세니― 영애!”

할아버지와 에단이 나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할아버지는 내 오른손을 잡고서 “가자!” 하고 말했고, 에단은 내 왼손을 잡고 “잠깐!” 하고 소리쳤다.

“어서 돌아가자!”

“황비님이 영애를 찾으십니다!”

둘은 흡사 이글거리는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아니, 무슨 일인데…….”

“날이 어두워졌어!”

“황비님이 찾으십니다!”

“놓지 못해! 명이다!”

“황족의 명이 우선이라.”

“그 황족 명패는 내 아들이 줬어!”

“황비님이 홀로 애쓰신 게지요.”

두 사람이 티격태격해서 난 사이에 서서 인상을 찌푸렸다.

“왜들 그러시는 거예요.”

“저놈들이 그 녀석과 한편을……!”

“글쎄, 아니라니까!”

그 녀석이 뭔데 그런담.

“놔라.”

“놓으십시오.”

“놔―”

“놓으―”

“잠깐!”

나는 두 사람의 입을 막고 식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에단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내가 물었다.

“오늘 출입 제한이 풀렸나요?”

“그럴 리가.”

“그럼 이곳에 출입 허가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나요? 주방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요.”

에단은 의미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시트를 갈기 위해 하인 하나가 들어왔을 뿐이다. 주방으로 갈 일은 없었어.”

“무슨 일인데 그래?”

“좀 이상해서요. 누군가 들어왔던 것 같은…… 설마!”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모의 침실을 향해 뛰어갔다. 아탈란이 이모를 처리하려고 들었을 수도 있다. 대사제는 프렌시프 령에서의 일 이후로, 이모에게 전혀 연락을 취하지 않고 있다. 그 말인즉, 그녀가 내 사람이라는 걸 눈치채고 있다는 것이다.

‘이모 덕분에 할아버지가 살아난 것과 다름없으니까.’

그리고 그녀를 처리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삿된 자화하는 것일 테고. ‘가브리엘라 황비’를 돌보는 건 나였다. 그녀가 삿된 자가 된다면 나는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삿된 자들이 프렌시프 령에 나타났다는 것을 빌미로 내가 삿된 자를 몰고 온다는 이야기로 들쑤실 수도 있을 터.

나는 황급히 이모의 침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보인 건.

“이모…….”

나는 황망한 얼굴로 아무도 없는 방을 둘러보았다. 에단이 내게 알려 준 책장 뒤편의 비밀통로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침대부터 통로 앞까지 핏물처럼 뚝뚝 떨어진 검은 오물.

“누님!”

“세니아나!”

에단과 할아버지가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에단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난 협탁 위에 놓인 램프를 들고, 통로 안을 살폈다. 방과 마찬가지로 오물이 잔뜩 떨어져 있었다. 프렌시프 령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삿된 자들이 이동할 적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당황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은 에단이 중얼거렸다.

“황군을…… 일단 수색해야―”

“제정신이냐. 방엔 저항한 흔적이 없어. 그렇다는 건 황비가 직접 통로를 열어 이곳을 나섰다는 게야. 필시―”

할아버지가 날 힐끔 쳐다봤고, 난 눈을 꽉 감았다.

‘구금되기 전보다 상태가 심각해졌다는 거야. 이모는 스스로 도망쳤어.’

내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현재 황궁에서 쓸 수 있는 우리 사람이 몇이나 되죠?”

“열둘……, 중앙 기사단에 심어 둔 자들까지 포함하면 스무 명 남짓이겠구나.”

“그중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연락해 주세요. 삼촌은 통로 안을 수색하시고요.”

고개를 끄덕인 에단은 즉시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방을 빠져나가려 하자 할아버지가 손목을 잡았다.

“세니아나, 황비를 찾아도 넌 접근해선 안 돼. 명심해라.”

완전히 삿된 자가 되어 이지를 잃어버리면 가장 먼저 나를 공격할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뛰쳐나갔다.

‘삿된 자가 되었으면 돌이킬 수 없어. 최대한 빨리 찾아서 정화해야 해.’

나와 에단, 그리고 할아버지는 정신없이 궁을 뒤졌다. 할아버지에게 연락받은 아빠와 오빠들까지 입궁하여 그녀를 찾았지만,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궁은 너무나 크고, 건물이 잔뜩 있어서 소수만으로 수색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세니아나!”

가브리엘라 황비궁의 뒤뜰에서 모인 우리는 수색지를 공유했다.

“황비 궁은 물론 근처의 아발론에서도 보이지 않아. 빌어먹을! 대체 어디에……!”

장소라도 특정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이대로는 절대로 이모를 찾을 수 없을 터였다. 인상을 찌푸린 가웨인이 해가 넘어가고 있는 산마루를 바라보았다.

‘큰일이야.’

삿된 자들의 힘은 낮보다 밤에 더 강력해진다. 그래서 낮에는 기운을 가까스로 삭이던 누아제들이 밤엔 결국 삿된 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자꾸만 땀이 배어 나오는 손바닥을 치맛자락에 문질렀다.

‘진정하자. 진정하고 생각해야 돼.’

어떻게 해야 이모를 구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가족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세니아나, 원한다면 내가 황제를 만나 보마.”

아빠의 말은 황군을 동원해 이모를 찾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황제의 입장에서도 황비가 삿된 자화되는 것만은 막고 싶을 것이다. 드러나면 얼마나, 어디까지 소란이 일지 알 수 없으니.

그렇다고 해서 황제와 우리가 완전히 한편은 아닐 것이다. 아마 황제가 내게 황비를 돌보아도 좋다고 허락한 건, 그녀가 삿된 자화된 책임을 내 쪽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일 테니까. 조급해하는 쪽이 밑지는 장사다, 이건.

“이모가 소중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모르진 않아요.”

“…….”

“제가 지금 생각해야 하는 건…….”

나는 입안의 여린 살을 꾹 깨물었다.

“이모가 삿된 자가 되고 난 이후의 상황이겠지요.”

황궁에서 내 책임하에 있는 이모가 삿된 자가 된다면 아탈란은 이번 기회를 이용해 나를 옭아매려 할 테니까.

프렌시프가 타격을 입는 건 물론이고, 나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황궁에 묶여 도구로써 쓰이는 건 당연하다. 최악의 경우, 감금되어 아탈란이 그리도 바라는 절망을 소환할 도구가 되겠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에 대한 방비책은 딱 하나다. 내가 먼저 이모가 삿된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내 손으로…….

‘이모를 죽이는 것.’

이모의 목숨. 다른 가족들과 내 앞날. 그 둘을 두고 저울질하는 기분은 끔찍했다. 가능성 낮은 전자보다 후자를 위해야 한다는 걸 안다.

‘황제에게 현재 상황을 알리고, 삿된 자가 된 황비의 토벌령을 받아와야 해.’

나는 아빠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제에게…… 황제에게…….”

도무지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영애.”

도미니크의 목소리였다. 그는 미간을 좁히고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무얼 하고 계십니까.”

“그게…….”

“황궁이 술렁이고 있습니다. 프렌시프가 모두 가브리엘라 황비궁에 모였으니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요.”

“……이모가 사라지셨어요.”

그러자 도미니크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군가 주방에 들어와서 음식에 성식을 넣었어요. 상태가 최악으로 다다라서 스스로 몸을 숨기신 것 같아요. 절 공격하게 될까 봐서요. 그래서 통신도 안 되고, 아무리 찾아도…….”

침착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목소리 끝이 떨렸다.

“찾기만 하면 되는데…… 그럼 어떻게든 정화시키면…….”

“영애.”

“나 때문에…… 내가 성녀라서……. 날 공격하게 될까 봐 이모가…….”

이모는 날 최우선으로 생각했지만, 난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나 괴롭고 마음이 아팠다.

“세니아나!”

도미니크가 눈빛이 흐려진 나를 붙들며 소리쳤다.

“정신 차리세요.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네?”

그는 품속에서 작은 펜던트를 꺼냈다.

“그건…….”

“통신을 방해하기 위한 장칩니다.”

“통신 방해 장치요?”

그걸로 이모를 어떻게 찾는다는 거지?

* * *

본래 이건 세니아나와 둘만의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마탑에서 받아 온 마도구였다. 둘만 있다 싶으면 프렌시프의 사내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방해하니, 둘만 있을 적엔 통신석의 전파를 교란시키는 마도구를 이용해서 세니아나의 통신석을 먹통으로 만들 셈이었다.

“저뿐만 아니라 황비님도 가지고 계시죠.”

도미니크와 만나기 전에 프렌시프에서 그녀를 채가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되니까 나눠 가진 것이다.

“통신 중에 전파가 끊기는 곳이 있다면 근처에 황비님이 계신다는 거죠.”

가웨인은 기가 막힌 표정이었지만, 세니아나는 얼굴이 환해져서 얼른 그의 통신석을 잡았다. 도미니크는 제 휘하의 황궁 기사들을 동원했고, 프렌시프의 사람들과 에단, 그리고 도미니크는 계속 통신하며 황비궁 주변을 탐색했다. 그리고…….

“이 주변에서 통신이 끊겨요.”

“여기서 숨을 수 있는 곳은…… 지하에 장서실이 있습니다.”

“입구는요?!”

에단이 서둘러 입구를 찾아 문을 열었다. 그곳으로 뛰어 들어간 세니아나는 웅크려 있는 검은 것을 보고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이모…….”

가브리엘라의 온몸이 새카맸다. 고름이 터져 나온 듯 몸에서 수십 개의 다리가 뻗어져 나왔고, 상반신만 겨우 사람의 것으로 보였다. 눈은 실핏줄이 자글자글 터져 피눈물이라도 흘리는 양 새빨갰다.

“오, 오면, 오면 안 돼……!”

그녀는 팔을 교차해 어깨를 끌어안고 벌벌 떨었다.

“제발, 세니아나…… 제발.”

“…….”

“내가 널 죽, 죽일, 죽일 거야…….”

치미는 살의를 참을 수 없었다.

‘저것을 죽여.’

저건 적이다. 사지를 찢고, 목덜미를 물어뜯어라. 의식 깊은 곳에 가라앉은 삿된 자가 자신을 날카롭게 종용했다.

“선하디선한 너를, 내가…… 미아의 딸을 내가……!”

“이모.”

세니아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가브리엘라의 등을 끌어안은 채 숨죽여 눈물지었다.

“괜찮아요, 이모.”

“괴, 괴물…… 나는 괴물……. 오지 마, 오지 마…….”

[넌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거야.]

세실이 생전에 했던 말이 귓속을 가로질렀다. 후회한다, 모든 것을. 미아의 가슴을 후비고 천 갈래, 만 갈래 찢어 놓던 자신을, 제가 믿는 것만이 옳다고 확신하던 그 시절을. 미아를 지키지 못하고도, 그릇된 선택을 한 스스로가 찢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세니아나가 그녀를 돌려세웠다.

“돌아가요.”

“…….”

“가요, 이모.”

가브리엘라가 고개를 젓자 세니아나는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가! 제발, 좀……!”

“세니아나…….”

“이런 희생은 하나도 안 기뻐! 이모가 희생하면 내가 기뻐할 줄 알았어요?”

“…….”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해요. 저는 이모를 찾지 못했다면 제 발로 아발론에 가서 삿된 자가 된 이모의 토벌령을 받아 왔을 거예요. 이모는 그게 기쁜가요?”

가브리엘라는 말없이 세니아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것 봐요. 그런데 왜 다들 나를 위한 결정이 희생뿐이라고 생각하냐고요!”

“…….”

“나를 위한다면 제발 그런 짓은 하지 말란 말이야…….”

세니아나는 펑펑 울며 가브리엘라의 어깨를 찰싹 내리쳤다.

“이모도, 엄마도, 아빠랑 할아버지, 오빠들 전부! 왜 항상……!”

“…….”

어째서 세니아나를 위한 일이 희생이라고 믿었을까. 아탈란을 나서고, 세니아나에게 사죄할 생각을 왜 하지 못한 것일까. 대사제의 신뢰를 얻기 위해 스스로 성식을 마셨다. 십여 년이 넘게 누아제의 상태로 살아오며 사실은 꽤 지극한 이모라 생각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살고 싶어.’

이 아이의 곁에서, 미아를 대신해서 아이를 지키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아이의 미래를 지켜보며 함께 웃고 싶어졌다.

“어째서 나는…… 왜…… 왜…….”

사무치게 후회하면서도 또다시 실수를 반복하고 마는 걸까.

훌쩍이던 세니아나가 팔을 활짝 열었다.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거란 말이에요. 안아 주는 거, 기쁜 일을 나누는 거.”

“…….”

“나를 위한 희생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내일을 사는 거.”

가브리엘라는 벌벌 떨리는 손을 겨우 내밀었다. 세니아나를 끌어안은 그녀가 끊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래, 그래……. 그래, 세니아나.”

하루라도 더 오래 살고 싶어졌다. 미아, 네가 나를 용서한다면 조금만 더. 아주 조금이라도 더 이 아이의 곁에 있게 해 줘.

그녀는 간절히, 아주 간절히 소원했다.

어느새 황궁엔 어둠이 완연했다. 이모를 재워 두고 나온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이 내게 물었다.

“황비의 상태는?”

“아직은 잘……. 일단 뭐라도 먹여 두긴 했는데 오늘은 황궁에서 밤을 새워야 할 것 같아요.”

“그래.”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창밖을 보았다.

“삼촌.”

오늘 내내 거무죽죽한 얼굴을 하고 있던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만약에 오늘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저는 같은 결정을 할 거예요.”

“…….”

“아발론에 갈 거고, 토벌령을 받아서 올 테지요. 이모 한 사람을 위해서 모든 걸 감수하기엔 제겐 이미 지켜야 할 사람이 많아요.”

“…….”

“저를 원망하셔도 좋아요.”

에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말이 맞아. 그렇게 해야겠지. 너는 내일을 살아야 하니까.”

“그러니까 삼촌. 더는 그럴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서 막아야 해요. 그래서…….”

나는 입술을 꾹 베어 물고 가족들을 돌아보았다.

“이제 해야겠어요.”

가웨인이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무엇을?”

“……과거의 일을 더는 묻지 않을 거예요. 제게 있던 일, 아탈란이 한 일, 우리 엄마는 매춘부가 아니고 나를 몹시 사랑하는 아주 평범하고 용감한 사람이었다는 걸 밝히겠어요.”

가웨인이 눈을 크게 떴고, 란슬롯이 소리쳤다.

“세니아나……!”

“네.”

“네가 아탈란 신관의 딸이라는 걸 밝힌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아는 거야? 도미니크 황자가 신관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잊었어?”

가족들과 함께 있던 도미니크마저 나를 만류했다.

“냉대, 무시. 비단 이런 것들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그릇된 핏줄로 살아야 할 거예요.”

“그런 게 두려웠다면 저는 아마 지금까지 살아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더한 굴욕도 상관없어요.”

“…….”

나는 입술을 다시 한 번, 꾹 베어 물며 소리쳤다.

“이제 당할 만큼 당했어요, 난!”

나는 이제 결심을 마쳤고, 결심하였으니 뒤를 돌아볼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다.

“아탈란을 뿌리 뽑겠어요.”

“…….”

“전쟁을 벌일 거예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난 아주 오랜만에 로열 키친의 휘장을 단 채 황제 앞에 무릎을 굽혔다. 부복한 나를 본 황제의 표정은 미묘했다. 의아한 듯도 했고, 호기심이 이는 듯도 했는데 어딘지 모르게 가라앉아 보이기도 했다. 그건 아마도 황제가 보이는 것만큼 물렁한 인사가 아니기 때문일 거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겠지.’

어제의 소동은 황제의 앞마당인 황궁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황제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 없다. 겉보기엔 마냥 느물거리는 아저씨처럼 보여도 그는 권력의 정점에서 노회한 귀족들을 두루 상대해 온 사람이었다. 허허실실한 표정 속엔 구렁이 수십 마리가 있고, 능청스러운 얼굴 뒷면에 누구보다 냉정한 권력자가 있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길라게온 황가에 광영을.”

“어쩐 일로 영애가 나를 찾았는가. 그것도 내가 거둔 로열 키친의 제복을 입고서.”

“제가 기사라면 갑옷을 입고 갑주를 찼겠으나, 요리사인지라 앞치마를 매고 조리모를 썼습니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황제는 나를 빤히 보더니 이내 다리를 꼬았다.

“영애는 참 재미있어. 언제든 예상을 빗나가거든.”

협탁 위에 놓인 술잔을 들고 가볍게 원을 그렸다. 잔 안의 황금빛 물결이 금세 모였다가 떨어지며 그 자리를 휘휘 맴돌았다.

“겁이 많은 듯하면서도,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도록 용감하지.”

“…….”

“마냥 순진하게 보이지만, 어느 부분은 놀랄 만큼 세속에 찌들었어.”

“…….”

“그런 양면성 덕분에 눈을 뗄 수가 없지. 다음엔 무슨 일을 벌일까 기대하게 되거든. 아마 내 자식들이 영애를 두고 치고받고 싸운 이유도 비슷할 테지.”

황제가 빙그레 웃으며 “그렇지 않은가?” 하고 물었다. 난 쉬이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가만히 수그렸다.

“짐은 영애의 용기와 재치를 높게 평가하네. 감히 어느 놈이 짐을 감히 ‘겁쟁이’라고 부르겠는가. 그건 영애밖에 못 할 일이지, 암.”

나는 ‘칭찬인가, 욕인가’ 하는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썹을 까딱 들어 올리며 상체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그건 영애가 프렌시프의 딸이기 때문이다.”

황제는 비밀이라도 얘기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바짝 죽인 채 속삭였다. 내 표정을 살피다가 동요를 보이지 않자 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영애가 성녀이기 때문이며 성수의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지.”

“…….”

“프렌시프 영애, 성녀, 성수. 그것을 빼면 영애에게 무엇이 남는 것이냐.”

“…….”

“영애는 말이다. 언제나 강자의 입장에서 싸워 왔다.”

“…….”

“감히 누가 프렌시프의 딸이자 세상 유일의 성녀에게 대항하겠느냐. 그건 짐마저 못 할 일이지. 그렇지 않은가?”

아탈란은 지킬 것이 없고, 나는 지킬 것이 있다. 아탈란과의 싸움은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불리하다는 뜻이었다.

“세니아나 프렌시프.”

“예, 폐하.”

“아탈란이 제국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는 걸 모를 성싶으냐.”

“알고 계시지요,”

“하면 짐이 어째서 아탈란을 그냥 두었을까.”

“아탈란을 뿌리 뽑으려 드는 즉시 숨어 있는 아탈란의 세력이 고개를 들 테니까요.”

황제의 눈이 부드럽게 휘며 눈꼬리에 짙은 주름이 생겼다.

“과연 영민하구나. 영애의 말이 맞다. 아탈란은 이미 제국에 깊숙이 파고들었지. 그들을 섬멸하려 한다면 그들에게 흡수된 세력은 이제 숨을 필요가 없어. 그 많은 수의 놈들과 전면전이란 말이다.”

“…….”

“그리고 이건 짐에게 전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지. 앗으려는 자도, 지키려는 자도 모두 짐의 백성이고, 전쟁이 일어날 격전지는 짐의 길라게온이다.”

“…….”

“그런 것들을 모두 감수하고 짐이 영애를 도와야 할 이유가 있는가. 짐의 입장에선 차라리 아탈란을 흡수하여 평화를 택하는 쪽이 이로운데 말이야. 만에 하나, 정말로 만약의 경우! 짐이 ‘겁쟁이’에서 탈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치자. 지킬 것이 그리도 많은 영애가, 과연 짐의 손을 끝끝내 놓지 않을 수 있을까.”

“…….”

“잡은 손을 놓는다면 한쪽은 끝장일 터. 그리고 아주 높은 확률로 끝이 나는 쪽은 짐이겠지. 영애는 소중한 성녀이니까.”

황제가 자세를 바로 하고 나를 똑바로 직시했다.

“자, 그럼 말해 보아라. 이 많은 위험 요소들을 감수하고 짐이 영애의 손을 잡아야 하는 이유를.”

이제까지 웃고 있던 그는 대번에 표정을 지웠다. 웃지 않는 황제의 눈빛은 몹시 매서웠다. 여느 때처럼 장난스럽지도, 철없는 아저씨 같지도 않았다. 몹시 진지하고, 싸늘하도록 이성적이었다.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물으시니 감히 대답하겠습니다, 폐하.”

“그래.”

“첫째로 저는 프렌시프의 딸과 성녀라는 이름, 성수들, 어느 하나 빼지 않을 겁니다.”

“뭐라?”

“그 모두가 저인데 왜 굳이 빼야 하나요?”

황제는 벙찐 얼굴이 되었다. 그가 “허…….” 하고 당황스러운 신음을 흘렸고, 난 고개를 갸웃했다.

“둘째, 아탈란과의 싸움이 폐하께 불리한 것은 맞지만 제게 불리하지는 않습니다.”

“…….”

“그들은 제 주변 사람을 쉽게 건드릴 수 없어요. 왜냐면 저는 그들의 소중한 성녀님이거든요.”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건 정말로 싫지만.” 하고 중얼거렸다. 황제의 표정은 더더욱 이상해졌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들의 목적에 매우, 몹시, 아주 많이 필요한 사람이라 저는 절대로 죽어선 안 되거든요? 그런데 저는 제 주변 사람들이 없으면 생에 미련이 없답니다.”

“……뭐?”

“그 작자들이 제 주변 사람에게 손을 대면 저는 콱 죽어 버릴 생각이에요.”

황제는 이제 입까지 떡 벌렸다. 그는 “무슨 저런…….” 하고 중얼거리다가 골이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대체 너는……. 오냐, 그래. 들어나 보자. 계속 말해 보아라.”

“셋째, 폐하가 겁쟁이라서 저를 신뢰할 수 없다는…… 아니, 그게 아니라 폐하께서, 으음, 그…… 신중하셔서? 네, 그래서 여러 면을 고려해 보시는 건 말이지요…….”

“……됐으니까 말해. 네게 겉치레를 듣는 건 기대도 하지 않았다.”

“네……. 아무튼 그건…….”

나는 그를 힐끔 쳐다보고 스르륵 눈을 돌렸다.

“솔직한 말로 그건 폐하께서 겁이 많아서―가 아니라, 신중하셔서 그런 것이지 제 탓은 아니니 드릴 말씀이 없겠습니다.”

황제가 이마를 쥔 채로 눈을 꾹 감더니 중얼거렸다.

“뭐, 저런…… 허어…….”

나는 손가락을 꼼질꼼질 매만지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정말로 할 말이 없는걸.’

본인이 의심과 겁이 많은 성격인 걸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믿으라고 매일같이 종용한다고 날 믿을 수 있겠어?

‘신뢰를 얻기 위해 뛰어다니면 그 성격에 날 더 의심할 텐데.’

손톱 끝에 거스러미를 매만지던 나는 어느새 날 보며 인상을 팍 찌푸린 황제를 시무룩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저…… 제 말은…… 으음.”

“변명이라도 해 볼 참이냐?”

“시간을 주시면…….”

“시간을 줘야만 생각할 수 있겠다?”

벌떡 일어난 그가 내게 바짝 다가오더니 볼을 꾹 붙잡았다.

“아으아아!”

나는 얼른 떨어져서 살짝 얼얼한 볼을 매만졌다.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얼른 수습하고 고개를 팍 수그렸다. 그러자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 목은 열두 개라도 되는 게야, 응? 다른 놈들은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그리 애를 쓰는데 어찌 이 녀석은……!”

“…….”

“머리통을 열어 봐야 하나.”

나는 깜짝 놀라서 얼른 머리를 붙잡았다.

‘여, 열려고?’

내가 그런 눈빛으로 황제를 쳐다보자 그는 기가 막힌 얼굴로 이마를 딱! 튕겼다.

“아파요!”

내가 울상을 지으니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오냐! 다 짐의 탓이다. 짐이 못난 탓이야!”

“그…… 송구합니다.”

“그래서, 뭐야.”

“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뭘 어찌하려는 게야.”

“도와주실 건가요?”

내가 헉! 숨을 들이켠 후 눈을 반짝이자 황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들어나 보지.”

나는 이때다 싶어 냉큼 대답했다.

“일단 로열 셰프 경합이요. 판을 크게 벌여 주세요.”

아탈란은 판이 크게 벌어질수록 좋아할 거다. 로열 셰프 경합은 사실상 우리에게 유리하다. 고프레도를 지원하던 카렌듈라 후작은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죽었다. 고프레도 본인조차 명예롭지 못한 사건에 연루되어 오랜 기간 구금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황제의 의중은 쟝뤼크 쪽에 쏠릴 수밖에 없을 터.

이런 때에 판을 크게 키우면 온전히 실력으로만 겨룰 수 있게 된다.

“아탈란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구나.”

“네.”

“그들 좋은 일을 시켜 무엇하게.”

“그들 좋은 일이 아니에요. 저희 스승님은 실력으론 절대로! 고프레도에게 지지 않으니까요.”

“흐음……. 쟝뤼크야 뭐. 네 스승을 그리 믿느냐?”

“물론이지요. 게다가 판을 키우면 심사자를 늘리는 것 또한 자연스럽겠지요?”

“심사자를 늘려 무엇 하려고. 쟝뤼크나 고프레도가 고생이나 하겠지.”

“그야 그렇지만, 저희에겐 비장의 수가 있답니다.”

난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음식을 먹여야 한다. 그래야 누아제들을 정화할 수 있고, 누아제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건 아탈란은 모르는 비밀이지! 나는 히죽 웃었고, 황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요리로 사람들을 회유할 생각이거든요.”

“뭐?”

* * *

“축하한다.”

로열 키친의 사람들이 내 복귀를 환영해 주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반씩인 것 같네. 환영하는 쪽과 불만을 가지는 쪽.’

좌우지간 나는 기뻤다. 다시 일터로 복귀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내 일터는 가브리엘라 황비궁이었다. 이모를 돌보면서 월급도 받고, 아탈란을 견제할 수도 있다니.

‘꿈의 직장이야.’

나는 헤헤 웃으며 쟝뤼크의 집무실로 향했다.

“스승님! 저 왔…… 스승님!”

헉! 나는 깜짝 놀라서 바닥에 널브러진 그를 부축했다. 과로한 모양인지 눈 밑이 검고, 눈은 말라붙었으며 볼이 홀쭉했다.

“스, 스승님…….”

“……몇 시냐.”

그가 비척비척 일어나 이마를 짚었다. 커피로 수혈하듯 버틴 모양인지 옷 곳곳에 커피 자국이 가득했다. 나는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일단…… 서류 정리부터 도울까요?”

“네가?”

“네.”

그는 좀 미심쩍은 듯했다. 사실 난 쟝뤼크에게 요리하는 법은 배웠지만 서류 정리 등의 일은 배우지 못한 것이다.

‘스승님이 펜을 굴리는 일은 쥐약이기도 하고.’

그래도 혼자 하는 것보다는 내가 돕는 게 나은지 그는 슬쩍 서류를 넘겼다.

“저…… 스승님.”

“왜?”

“혹시 이거 잘하면 저 좀 도와주실래요?”

“뭐?”

“오늘 내로 다 정리하고, 스승님을 서류 더미에서 탈출시켜드리면 시간이 나잖아요? 물론 경합 준비를 하셔야 하긴 하지만, 으음, 한 시간 정도…….”

내가 웅얼거리자 그는 눈을 번뜩이며 내 어깨를 잡았다.

“여기서 벗어나게만 해 준다면 발가벗고 춤이라도 못 추겠느냐!”

그렇게까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펜대를 입에 문 나는 머리를 질끈 올려 묶었다. 그리고 서류를 짚어서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왕년에 엑셀과 가계부 등을 돌리던 실력을 자랑하면서.

* * *

쟝뤼크는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제 앞을 범람한 서류 더미들이 어느새 하나씩 사라지더니 분류별로 뚝딱뚝딱 정리되었다.

“넌 대체 이런 걸 언제 배운 것이냐…….”

쟝뤼크가 기함하면서 묻자 세니아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없는 돈 쪼개 쓰는 건 이골이 났거든요. 삼만 원으로 삼 주를 버틴 적도 있어요.”

“원……?”

“아, 그건 제가 있던 세계의 화폐 단위인데…… 어쨌든요.”

쟝뤼크는 이때까지 부잣집 딸내미로 어떻게 돈을 펑펑 쓰고 살아왔는지 모를 만큼 궁상맞은 귀족 영애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녀는 정말로 쪼개 쓰기의 귀재였다.

“일단 주방용 살충제는 굳이 사들일 필요가 없어요.”

“왜?”

“남은 재료로 만들어 쓸 수 있거든요. 그리고 이것도 살 필요 없고, 이것도. 낭비예요, 낭비!”

지금껏 로열 키친을 맡아 온 놈들이 얼마나 돈을 펑펑 써재끼고, 빼돌렸는지 모른다. 회계 장부는 이미 에멘탈 치즈 버금가게 구멍이 뻥뻥 뚫려 있었다.

얼마 없는 예산으로 어떻게 황족과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식사를 유지할지가 관건이었는데 세니아나는 정말로 놀라운 사람이었다. 쟝뤼크의 밑에서 서류 정리를 돕던 요리사들도 혀를 내둘렀다. 그중엔 세니아나라면 학을 떼는 인물도 있었는데, 그 사내 요리사조차 기함하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이 정도로 정리하고…… 으음, 다른 건 관리들과 상의해야 할 것 같아요. 파티를 우리 멋대로 줄일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던 세니아나가 “아!” 하며 쟝뤼크를 쳐다봤다.

“제가 로웨나 황비님을 만나 뵐까요?”

로웨나 황비! 내궁의 총책임자인 그녀가 세니아나를 몹시 귀여워한다는 건 유명한 일이었다. 내궁의 책임자가 살롱이나 티파니만 조금 줄이려 들어도 주방은 어마어마한 돈을 절약할 수 있을 거다. 지금껏 쟝뤼크와 함께 고생한 요리사들이 세니아나에게 달라붙었다.

“세니아나 님!”

그녀는 당황해서 “님……?” 하고 중얼거리다가 거의 눈물을 터뜨릴 지경인 쟝뤼크를 보고 눈을 끔뻑였다.

“스, 스승님?”

“내가…… 크흑…….”

그는 얼마나 고생했는지 차마 말조차 잇지 못했다.

“네네, 교수님 마음 다 알아요.”

“난 정말이지…….”

“고생 많이 하셨어요.”

“크흐흑……!”

그는 세니아나 품에 안겨 서럽게 포효했다.

한참 푸념하던 그가 정신을 차린 듯이 물었다.

“그런데 너, 내가 도울 일이 있다지 않았느냐?”

“아, 맞아요!”

“무엇이기에.”

세니아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아주 음험한 얼굴로 말했다.

“감히 제 주방에 들어와서 성식을 탄 놈을 단죄해야 하거든요.”

쟝뤼크는 세니아나를 보며 잠깐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내 픽 실소를 흘렸다.

“단죄할 자가 누구냐.”

“몰라요.”

“뭐?”

그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세니아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금부터 알아봐야 해요. 그것도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대체 어떻게? 쟝뤼크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입관식에서 들었는데 로열 키친의 요리사들은 분기별로 테스트를 한다지요?”

“그래. 내일 예정되어 있지.”

분기별 테스트는 로열 키친 요리사들에게 있어 사활을 건 시험이었다. 이 시험에 승진이 걸려 있기도 하고, 두각을 보이면 다른 궁으로 이동도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세니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든 궁의 요리사들을 모아서 시험을 치게 해 주세요.”

“그럼 단죄할 자를 알 수 있다는 게냐?”

“네!”

세니아나는 호기롭게 대답했고, 쟝뤼크는 잠시 그녀를 빤히 보았다.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오전 일을 마친 요리사들이 대조리장에 모였다.

‘입관 시험을 본 곳이네.’

하기야 이 많은 요리사들을 한 번에 모으려면 이렇게 커다란 곳이 아니면 힘들 거다. 요리사들은 조리대 앞에 섰고, 쟝뤼크와 궁의 주방장들이 조리장에 들어왔다. 현 로열 셰프 고프레도가 가장 먼저 단상 위로 올라갔고, 그다음 차례는 쟝뤼크였다.

‘경합이 코앞까지 다가와서 고프레도가 복귀했구나.’

쟝뤼크와 고프레도는 서로 옷깃도 닿기 싫다는 듯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고프레도가 주방장들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다소 긴장된 얼굴의 요리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번 시험의 주제는 토마토와 밀가루를 이용한 요리이다.”

아무래도 이번 주제는 고프레도가 결정한 듯했다. 주제를 듣고도 고프레도 휘하의 요리사들은 태연했다. 그들 중엔 승진이 예정된 것처럼 뻔뻔한 태도로 구는 자들도 있었다. 반면에 다른 요리사들은 당황이 역력했다.

‘어려운 주제이긴 해.’

토마토와 밀가루를 이용한 요리라면 파스타가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그걸 하기엔…….’

대부분이 토마토 파스타를 할 테고, 파스타는 아주 기본적인 요리였다. 그런 것일수록 두각을 나타내기 어려운 법이었다. 거기다 현재 로열 키친은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으므로 각 궁에서 남은 재료를 이용한다.

구매 후 나흘을 넘긴 토마토, 무른 아스파라거스, 오래돼서 냄새가 좋지 못한 면, 양파는 죄 반절뿐이었다. 활용할 수 있는 재료가 많지 않아서 더욱 어렵다.

‘으으, 스승님.’

시험은 내가 청하긴 했지만…….

역시 쟝뤼크,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테스트의 남은 시간을 알리는 거대한 모래시계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돌아갔다. 모래가 쏟아지기 무섭게 요리사들은 헐레벌떡 재료가 마련된 곳으로 뛰어갔다.

“이건 내가 먼저 집었다고요!”

“이야, 요새 궁이 개판이라더니 선배도 못 알아보는군. 놓지 못해!”

“잠깐, 그걸 다 가져가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라는 거야!”

“좀 나눠 주세요, 네? 전 일전에 징계를 받아서 테스트 성적까지 안 나오면 꼼짝없이 쫓겨납니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후배 요리사들은 선배 요리사들에게 재료를 번번이 빼앗겼다. 아예 “어허!” 호통을 치는 이들도 있어서, 입궁 기간이 짧은 자들은 어쩔 수 없이 선배 요리사들이 재료를 다 고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은 다 같은 요리사라고 하지만, 이 시험이 끝나고 나면 상사와 후배의 관계인 것이다. 파트장에게 대들 수 있는 간 큰 요리사들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말단인 새끼 요리사였다. 선배들이 모두 골라서 돌아가자 남은 건 다 시든 채소쪼가리가 전부였다.

그나마 동기들은 파트의 선배들이 하나둘 나눠 주었는데, 나는 아니었다. 아발론은 경쟁이 아주 치열한 데다, 무엇보다 난 삿된 자가 영지를 덮친 일로 내내 아발론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선배들과 관계를 다질 시간이 없었다.

‘토마토 파스타…… 이걸로는 못 해.’

난 당황한 얼굴로 반절은 잘라내야 하는 작은 토마토 두 개를 쳐다보았다. 파스타는커녕 요리 위에 장식을 하기에도 힘들겠다.

‘내게 여러모로 불리한 시험이야.’

그나마 나은 건 내가 첫 번째 심사자라는 걸까.

‘어쩌지, 어떻게 해야…….’

고민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작은 실소가 터졌다.

“루크 님의 애제자라고 잘난 체하더니 꼴좋다.”

“얘, 들리겠어…….”

땅딸막하고 빼빼 마른 남성 요리사가 입매를 비틀자, 어딘지 익숙한 얼굴의 여성 요리사가 불안한 듯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남성 요리사는 헛기침을 하더니 토마토가 잔뜩 든 볼을 끌어안고 자리로 돌아갔다. 주뼛거리던 여성 요리사가 내게 다가왔다.

“저…….”

“네?”

“부족하면 제 것을 조금 나눠 드릴 수 있어요.”

그녀의 바구니 안에 겨우 네댓 개의 토마토와 파스타 면, 몇 종의 해산물만이 있어요.

“부족하실 거예요.”

“하지만 영애가…… 아니, 후배님이 가진 것만으론 요리가 힘들 텐데요.”

“그건 제가 감당해야지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주변을 슬쩍 돌아보며 목소리를 바짝 낮췄다.

“파스타는 이번 주제에 맞는 요리가 아니에요.”

“네?”

“면 요리가 아니라 밀가루를 이용한 요리를 하라고 했잖아요? 정 파스타를 만들어야 한다면 반죽부터 직접 하세요.”

“아……!”

그녀는 깨달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런데 정말로 토마토를 나눠 주지 않아도 되나요?”

나는 남은 재료 상자를 뒤지며 “괜찮아요.” 하고 말했다. 그러다 구석에서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은 상자를 발견했다.

“앗!”

내가 밝은 표정으로 상자 속에서 내용물을 꺼내니 그녀는 “아…….” 하며 우물쭈물했다.

“저기…… 그걸 쓰는 건 좋지 못한 생각 같아요. 그건 너무 작고 시어서 파스타 소스엔 만들기엔 적합하지 않은 재료예요.”

“파스타에 쓰지 않을 거예요!”

“네?”

난 헤헤 웃고 모래시계를 가리켰다.

“늦기 전에 시작하셔야지요.”

“네…….”

그녀는 불안한 얼굴로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지만, 곧 조리대로 돌아갔다. 나도 내 자리에 앉아서 가져온 재료를 꺼냈다.

‘방울토마토!’

내가 복숭아 다음으로 좋아하는 과채류였다. 봄이면 상자째로 사서 먹곤 했는데, 마트에서 팩으로 파는 것보다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양이 너무 많아서 다 먹기도 전에 무르는 일이 빈번했다. 무른 토마토를 활용하려고 인터넷이며 책을 뒤진 적이 있었다.

‘그래서 자주 쓰던 방법이 있지.’

나는 토마토를 흐르는 물에 씻고, 냄비에 물을 받았다.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 후에 토마토를 투하. 적당히 시간이 지난 후 물기를 뺀 토마토의 껍질을 벗긴 뒤에 꾹꾹 으깼다. 그리고 체에 거르면 덩어리가 사라지고 빛깔 고운 액체만 남게 된다. 거기에 소금과 설탕, 후추, 간 고기를 넣고 부글부글 졸였다.

‘다음은 만두피 반죽.’

반죽이야 아카데미에서 이골이 나도록 수련했기 때문에 금방 뚝딱뚝딱 만들 수 있었다. 반죽을 만들고 그 안에 토마토소스에 졸인 간 고기를 넣은 후 미리 반쯤 익혀 둔 새우살과 옥수수, 그리고 치즈를 듬뿍 넣었다. 속을 채운 반죽을 초승달 형태로 빚은 다음엔 기름에 넣어 튀겼다.

치이이익―! 튀겨진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 거름망에 올려 두자 시선이 느껴졌다. 언젠가부터 조리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어 있었다. 조리대 사이를 거닐며 요리 과정을 지켜보던 각 궁의 주방장들이 목을 쭉 빼며 중얼거렸다.

“무슨 요리지?”

“작은 토마토라……. 괴짜 마법사들에 의해 개량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다들 꺼리는 재료지 않나.”

쟝뤼크마저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하긴, 튀김이 퍼포먼스 면에서는 최고지.’

튀기는 소리, 진동하는 기름 냄새, 재료에 모여들며 스파크 튀기듯 부글거리는 모습까지. 난 고개를 주억거리며 남은 토마토를 채 썰어 올렸다. 완성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래시계 안의 모래가 모두 떨어졌고, 요리는 시험대에 올랐다.

* * *

고프레도는 세니아나를 힐끔 쳐다보며 그녀의 요리가 든 그릇을 잡았다. 쟝뤼크가 끼고 키웠다는 세니아나 프렌시프. 콧대 높은 쟝뤼크는 누구에게도 곁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연을 쌓은 것도 아니고 무려 제자를 들였다.

얼마나 훌륭한 녀석이기에 제자로까지 들이냐고 생각했지만, 막상 본 세니아나 프렌시프는 평범했다. 지금 만든 요리 또한 그랬다.

‘그리 시선을 끌기에 무슨 대단한 걸 만드는가 싶었더니.’

그저 평범한 튀김 요리. 특별한 향은커녕 장식도 그저 토마토를 올린 것뿐이다. 다른 요리사들의 것과 비교하면 밋밋하기 그지없었다.

이따금 황족이나 고위 귀족이 그녀의 요리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일이 있어서 역시 특별한 면이 있는 건가 했지만, 결국 첫인상대로였던 거다. 고프레도는 쟝뤼크를 보며 픽 실소를 흘렸다.

“네가 제자를 들였다기에 얼마나 대단한가 하였더니 결국 이거였나.”

“네 제자들이야말로 평범의 극치지.”

“뻔히 보이는데도 눈 가리고 아웅인가. 내가 키운 아이들과 네 제자가 만든 요리를 비교해 봐라.”

심사대에 놓인 요리 중 현란한 칼솜씨를 자랑한 것들은 모두 고프레도 제자들의 솜씨였다.

“너와 똑같군. 알맹이 없이 겉만 번드르르한 것이.”

고프레도는 실로 우습다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그렇게라도 자위하게나. 공개 석상에서 제자의 실력이 까발려졌으니 속상할 만도 하지.”

쟝뤼크는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망할 놈팡이 같으니.’

울적한 건 고프레도의 말을 완전히 비웃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프레도가 키운 자들은 확실히 뛰어난 실력이었다. 개중엔 쟝뤼크에 필적하는 칼솜씨를 가진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세니아나는 겉에 보이는 것으론 특출나지 않다. 포부가 크지도, 야망이 넘치지도 않기에 겉에 보이는 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제자로 삼았지만.’

이렇게 비교가 될 때는 솔직히 분하긴 했다. 세니아나가 부끄러운 건 아니었으나, 고프레도 저 빌어먹을 놈에게 밀리고 싶진 않았다.

“그럼 시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고프레도와 쟝뤼크를 비롯한 주방장들은 각자 취향껏 세니아나의 요리를 맛보았다. 고프레도는 나이프로 만두의 절반을 갈랐다. 만두피 속에 갇혀 있던 향이 비눗방울 터지듯 툭, 피어올랐다.

“향은 일반적인 토마토 페이스트의 것과 다르지 않군.”

“그렇군.”

쟝뤼크는 만두 하나를 통으로 베어 물었다. 속에서 녹은 모차렐라 치즈가 주르륵 늘어났다.

‘괜찮은 맛이다.’

그가 슬쩍 고프레도를 쳐다봤다.

“…….”

말은 없지만, 그 또한 맛은 인정하는 듯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고프레도는 만두 속을 살폈다. 일반적인 토마토소스보다는 시지만, 그렇다고 불쾌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산미가 새우살과 아주 잘 어울려.’

새우살뿐이라면 다소 가벼운 맛일 듯하지만, 간 고기가 묵직하게 중심을 잡아 준다. 고명처럼 올린 토마토는 차갑고, 만두피는 뜨겁게 바삭하며 치즈와 간 고기는 촉촉한 데다 새우살은 적당히 부드러웠다. 거기에…….

‘옥수수!’

달콤한 옥수수알이 씹을 때마다 톡, 톡 터지는 재미가 있었다. 어우러지지 않을 것 같은 재료가 막상 요리로 완성되고 나니 이처럼 흥미로운 집단일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사실 맛은 피자나 토마토 파스타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주 영리한 요리야.’

토마토라는 것을 써야 한다면 대부분 소스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건 얼마나 훌륭한 요리사가 만들든 맛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시험의 요지는 ‘평범한 것으로 어디까지 특색을 보일 수 있느냐’인 것이다.

피자도, 파스타도 아니지만 거부감을 느낄 정도로 특이하지는 않은 맛. 거기에 튀김.

‘순서를 잘 이용했어.’

세니아나의 토마토소스 만두 튀김은 맛도 강한 데다 뭣보다 기름을 사용해 묵직했다. 이런 요리를 가장 처음 맛보았으니 다음 차례 요리의 인상은 희미할 터였다. 쟝뤼크는 곁에 앉은 주방장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주방장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괜찮은데.”

“머리를 쓸 줄 알아.”

“아주 영리하지 않습니까.”

“영리한 것도 영리한 거지만, 그것보다 전…….”

“그래, 맛도 괜찮구먼.”

“만두 속을 보면 말입니다. 새우와 졸인 고기의 비율이 아주 좋습니다.”

“기본기가 있다는 거지.”

주방장들의 얼굴이 밝을수록 고프레도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쟝뤼크는 이때다 싶어 입꼬리를 바짝 올리며 말했다.

“요리는 뭐니 뭐니 해도 맛이지. 겉이 아무리 화려하면 뭐 하나, 맛있는 요리야말로 진짜지 않은가.”

주방장들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채점표에 점수를 기입했다. 고프레도의 얼굴은 썩어들어갔다. 쟝뤼크가 긴장한 세니아나를 보며 크흐흠! 헛기침했다.

‘귀여운 것!’

실망시킬 줄을 모른다. 그는 껄껄 웃으며 다음 요리를 들었다. 주방장들이 고프레도를 슬쩍슬쩍 살피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이게 그가 아끼는 요리사가 만든 것인 모양이었다.

“토마토 파스타구만.”

쟝뤼크가 부러 크게 다시 한번 소리쳤다.

“에잉, 그냥 ‘평범한 토마토 파스타’야.”

고프레도는 인상을 쓰며 단상 아래 선 땅딸막한 사내를 쳐다봤다. 시험 시작 전에 주제를 언질해 줄 적엔 저만 믿으라며 가슴을 땅땅 두드리던 놈이었다.

[세니아나 프렌시프보다는 나은 것을 만들어야 한다.]

[저만 믿으십시오. 제가 아무리 루크 님의 애제자라 봐야 저만하겠습니까?]

[잘할 수 있겠지?]

[물론이죠.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겠습니다.]

땅딸막한 남성 요리사는 히죽 웃으며 가슴을 쭉 내밀었다.

“어서 시식해 주십시오. 제 요리는 보기에도, 맛에도 훌륭합니다.”

그러더니 세니아나를 힐끔거리며 “누구와는 다르게.” 하고 중얼거렸다.

“피에르의 순서인가.”

“피에르? 황후궁의 피에르 폴로?”

“그래. 파스타가 특기인…….”

“이런. 앞 순서에 기대주들이 몰렸구만.”

사람들이 수군거렸고, 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내 쪽을 힐끔거리는 땅딸막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의 그 사람이네.’

쟝뤼크의 애제자라고 잘난 척한다며 빈정거리던 요리사였다. 피에르 폴로라면 들어 본 적이 있다. 파스타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했다. 거기다가……

‘날 무척 싫어한다고 했지.’

그게 내 귀에 들려올 정도면 평소에 얼마나 학을 뗐는지 눈에 훤했다. 동부 아카데미의 선배인 헤일럿의 말로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몰라? 피에르 폴로 말이야.]

[네, 저는 잘…….]

[우리 동문이야. 칠 년쯤 전에 졸업했고…… 귀족 요리사를 싫어하기로 유명하지.]

[그래요? 길라게온에서는 귀족 출신 요리사들이 꽤 많잖아요? 특히 단승작의 남작가 영애, 영식이나…… 헤일럿 선배도 귀족이고요.]

[그는 평민 출신이거든. 주방이라고 해도 완전히 별세계인 건 아닌지라, 평민들은 귀족들에게 번번이 밀리지.]

[그렇군요.]

[자존심이 강해서 저보다 나은 사람을 견디지 못하는 거야.]

헤일럿은 어깨를 으쓱하며 이어 말했다.

[너는 날던 새도 떨어뜨린다는 프렌시프의 영애님인 데다가 무엇보다…… 그는 쟝뤼크는 몹시 존경하거든.]

[우리 스승님이요?]

[제자가 되길 청했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했는데, 네가 떡하니 제자가 되었으니 그 자존심에 못 견디겠지.]

난 헤일럿의 말을 떠올리며 피에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처럼 그의 눈은 적의로 가득했다. 하지만 내가 눈을 피하지 않자 그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러는 동안 시식이 시작되었다. 각 궁의 주방장이며 고프레도까지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과연 파스타로 이름난 요리사다웠다.

‘얼마나 맛있으려나. 아우, 나도 맛보고 싶다!’

난 반짝이는 눈으로 시식을 지켜보았고, 주방장과 고프레도를 이어 쟝뤼크가 파스타를 입에 넣었다. 그런데.

“퉷!”

로웨나 황비궁의 주방장이 파스타를 바닥에 뱉으며 황급히 물로 입안을 헹궜다. 몇몇 주방장들, 거기에 쟝뤼크마저 새파란 얼굴로 몇 번이나 구역질을 했다.

“뭐, 뭐야.”

단상 아래의 누군가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로웨나 황비궁의 주방장은 한참을 컥컥거리다가 새빨개진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어디서 이따위 요리를!”

그가 고함을 내지르기 무섭게 구역질을 한 주방장들이 날카롭게 동조했다.

“로열 키친에서 이따위 요리가 말이 됩니까! 이 요리를 낸 자가 누구냐!”

“썩은 재료가 섞인 게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요리가―!”

하지만 황후궁과 제2황자궁, 중앙 기사단 병영의 주방장 등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요. 내 평생 이만큼 훌륭한 요리는 몇 번 보지 못했소. 이 섬세한 칼 솜씨와 불 조절 솜씨를 보시오.”

“기술이 아무리 좋다 한들 맛이 이따위여서야 요리라고 할 수 있겠소!”

“맛이야말로 완벽하지 않소!”

“혀가 어떻게 된 것 아니오?!”

“그쪽이야말로!”

파스타의 평가는 극과 극이었다. 각 궁의 주방장들이 날카롭게 대립했고, 대조리장은 크게 술렁였다.

‘저렇게 평가가 다르다고?’

나는 쟝뤼크를 쳐다보았다. 그는 오만상을 한 채 피에르의 파스타를 포크로 뒤적였다. 고프레도 또한 미간의 주름을 잡고 있지만, 로웨나 황비궁의 주방장이나 쟝뤼크처럼 역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몇 번이나 다시 음미하는 것으로 보아선 굉장히 흡족한 맛인 듯했다.

‘이렇게까지 평가가 나뉘는 건 하나밖에 없지.’

성식. 거기다 내가 요리를 시작하기 전에 보았던 피에르의 재료들은 이 조리장에서 가장 나은 것들이었다. 피에르는 새파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 말도 안 돼. ‘그것’의 맛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절대로……!”

역시. 성식은 강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나를 제외하면 일단 맛을 본 자들은 모두 역한 냄새를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선 성식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왜 피에르의 요리에 분개한 사람들이 나왔냐 하면.

‘내 요리를 먹었으니까.’

누아제가 된 게 아니라면 소량으로도 정화할 수 있고, 성식 본래의 역한 맛과 향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극찬한 사람들은 누아제가 되기 시작했다는 거다.

‘주방장 중 누아제는 총 넷이라는 거네.’

예상보다 많은 수다. 최악의 경우 격전이 벌어지면 누아제들은 아탈란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저들은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첫 번째 목적은 이뤘어. 그리고 두 번째는…….’

난 새빨간 얼굴로 “그럴 리 없습니다!” 하고 소리치는 피에르를 빤히 쳐다보았다.

시험은 로열 셰프 경합 이후로 기약하고 흐지부지 끝이 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시험관인 각 궁 주방장들의 의견이 너무나도 반대라 절충안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식을 쓴 요리사들이 너무 많아.’

나는 황궁 복도를 걸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막 입관했을 시점엔 이렇게 성식을 많이 쓰진 않았다.

‘그동안 성식이 자리를 잡았다는 건데.’

걱정스러운 반면, 얻은 것도 있었다.

첫째, 성식을 쓰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둘째, 성식은 순도가 높을수록 정화된 자들에게 큰 반발이 생긴다. 피에르의 파스타처럼 토악질을 할 정도라는 건 순도가 몹시 높다는 뜻이다.

셋째, 순도가 높은 성식은 시중에선 구할 수 없다.

‘즉, 순도 높은 성식을 가진 자들은 아탈란의 끄나풀이다.’

난 순도 높은 성식을 가진 자들을 머릿속으로 재차 확인하며 가브리엘라 황비궁으로 걸었다. 황비궁에 도착한 후 기다리고 있던 에단에게 말했다.

“아탈란의 끄나풀 중 가브리엘라 황비궁에 숨어들었을 가능성이 높은 건 루이스, 젤다, 주드, 그리고 피에르 요리사예요.”

“……!”

크게 놀란 에단이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왜요?”

“피에르라면 누님의 시녀장인 트리시아의 친동생이다.”

“오누이 사이라면 그녀 또한 아탈란의 사람일 가능성이 몹시 크겠군요.”

“트리시아는 누님을 가장 지척에서 모셨지. 본래 아발론에서 직위가 높았던 녀석이 왜 누님의 궁으로 왔는가 했더니…….”

“대사제가 감시 격으로 붙여 둔 거겠죠……. 아! 설마, 이모가 사라졌던 날 세탁물을 핑계로 궁인을 보낸 사람이……!”

“그래, 트리시아일 가능성이 높다.”

에단은 “일단 그쪽을 털어 보지.” 하며 서둘러 가브리엘라 황비궁을 빠져나갔다. 난 도미니크에게 연락을 취해 내가 알아낸 아탈란 끄나풀들의 명단을 넘겼다.

[많이도 넘어갔군요.]

“네.”

[제가 뭘 하면 영애에게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 사람들의 약점이요.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하지만 워낙 인원이 많아서……. 이 많은 사람을 다 조사할 수 있을까요?”

[그럴 겁니다.]

……겁니다?

‘도미니크가 하는 건 아니라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통신석에서 “으아아아!” 하는 낮은 비명이 들렸다. 알베르였다. 나는 “아!”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도미니크에겐 비밀 병기가 있었지, 참.

“알베르는 능력 있는 남자지요.”

[…….]

못마땅한 침묵이었지만, 나는 헤헤 웃으며 말했다.

“알베르는 아주아주 뛰어나고, 성실하고, 또 이런 조사쯤은 휘리릭 끝낼 인재 중의 인재니까 다음 달 영전 심사에서 저하께서 힘을 써 주시겠지요?”

[……뭐.]

“그럼 막 뇌물도 받는 높으신 분이 되겠네요. 저도 축하의 의미로 화분을 하나 보내야겠어요.”

[예?]

“혹시 아나요. 화분 흙 아래에 아주 특별한 게 있을지도. 가령 ‘보’로 시작하는―!”

그러자 알베르가 냉큼 대답했다.

[뒷조사가 제 취미인 건 어떻게 아시고!]

나는 웃으며 “그러신가요?” 하고 물었고, 알베르는 호탕하게 웃었다.

[물론입니다. 그럼 전 명을 받들러 이만.]

그 말을 끝으로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주실 겁니까? ‘보’로 시작한다는 그것.]

“그럼요. 보리 씨앗을 잔뜩 넣어서 드리려고요.”

내 말에 도미니크가 드물게 큰 소리로 웃었다.

알베르는 정말로 능력 있는 남자였다. 하룻밤 새에 내가 부탁한 일을 말끔하게 처리한 것이다.

“낮에 제가 들은 소리는 그저 엄살이었나 봐요.”

“비슷합니다.”

“역시 알베르! 대단해요.”

“이쯤은 되어야 도미니크 황자의 부관 노릇을 하지요.”

알베르가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에단도 들어와서는 알아낸 바를 공유해 주었다.

“트리시아를 붙잡아서 확인했다. 아탈란의 세작이 맞고, 대사제의 명으로 세탁물을 핑계 삼아 사람을 들여보냈다더군.”

“그 사람이 누군지 토설했나요?”

“역시 피에르겠지.”

“확실하게 토설한 건 아닌가요?”

“궁에 숨어든 자를 밝힐 바에야 자진이라도 할 기세더구나. 제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면 무엇이겠어.”

나는 “흐음.” 신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 내 시선은 알베르의 조사서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알베르.”

“예.”

나는 양피지에 이름 몇 개를 휘갈겨 쓰고 그에게 건넸다.

“이 사람들은 좀 더 자세히 조사해 주세요.”

“피에르 폴로와…… 아아, 예. 알겠습니다.”

알베르가 쪽지를 쥔 채 빠져나갔고, 나는 무감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누구든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아.’

이번 기회에 내 가족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 줄 생각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가브리엘라 황비궁의 주방에서 필요한 요리 재료와 기구들을 정리해서 아발론으로 향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복도엔 작은 조명 몇 개만이 띄엄띄엄 켜져 있었다. 아발론의 주방 옆 로열 셰프의 집무실엔 불이 꺼져 있었다.

‘스승님이 또 분통을 터뜨리시겠네.’

[난 야근인데 그 자식은 벌써 퇴근이라니!]

소리칠 게 눈에 훤했다. 나는 그 옆 방인 쟝뤼크의 집무실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로열 셰프의 집무실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로열 셰프의 집무실을 빠져나오다가 놀라서 어깨를 흠칫 좁혔다.

“아……!”

“앗!”

우리는 서로를 보고 눈을 끔뻑였다.

“프렌시프 영…… 아! 아니, 후배님…….”

“조리장에서 토마토를 나눠 주시려던 선배님!”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세요?”

“그게…….”

그녀가 입을 열려던 순간, “로열 셰프의 집무실 앞에서 무엇 하고 있느냐.” 하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발론의 수셰프였다. 난 서류를 흔들었다.

“루크 님께 지출 결의서를 제출하려고요.”

수셰프는 쯧, 혀를 차더니 로열 셰프의 집무실에서 나온 여성 요리사를 보았다.

“시에나, 넌?”

“아, 저는…… 그게…… 프렌시프를 따라왔어요!”

“따라와?”

“루크 님을 도울 일이 없을까 해서요. 매번 밤을 새우며 과로하시니까…….”

수셰프는 눈살을 찌푸리곤 중얼거렸다.

“흥, 제가 일을 하면 얼마나 한다고.”

“…….”

“쓸데없는 짓 말고 아발론의 일이나 도와. 너희 둘은 주방으로 들어가서 홍합이나 손질해라.”

“…….”

“…….”

우리가 말이 없자 그는 “알았어?!” 하며 소리쳤다. 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렇게 되면 꼼짝없이 야근이겠다.

“네.”

“아, 알겠습니다.”

우리는 함께 아발론의 주방으로 들어갔다.

‘보조는 어디에 있지?’

사람은 전혀 없고, 홍합이 가득 든 대야만 주방에 덜렁 놓여 있었다. 난 “할까요?” 하고 물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대야 앞에 쪼그려 앉아서 홍합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고, 그녀는 날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저…….”

“네?”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요.”

“아…….”

“그 말이 먼저인데 인사를 못 한 것 같아서. 저는 시에나라고 해요. 고아라 성은 따로 없고…….”

나는 눈을 깜빡였고, 시에나는 민망한 얼굴로 웃었다.

“이런 얘기 갑자기 하는 게 좀 당황스러우시지요?”

“아니에요. 그보다 말씀 낮추세요.”

“그, 그래도 될까요? 하지만 프렌시프 영애님이신데…….”

쭈뼛쭈뼛 눈치를 보던 시에나가 헤헤 웃으며 “그럼 편하게 할게요…… 아니, 할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기, 내가 거짓말한 이유를 물어보지 않아 줘서 고마워.”

“…….”

“궁금할 텐데. 사려 깊구나.”

나는 홍합에 시선을 집중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돼요.”

“정말…….”

시에나는 휴, 한숨을 내쉬고 눈썹을 늘어뜨렸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너를 피에르는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응! 너라면 내가 로열 셰프의 방에 왜 들어갔는지 알려 줄 수 있어.”

“…….”

“사실은 피에르가…….”

그녀가 주변을 살핀 후 목소리를 바짝 낮추었다.

“피에르와 고프레도 님의 관계가 수상해.”

“수상하다고요?”

“스승과 제자를 넘는 무언가가 그들 사이에 있는 것 같아. 피에르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요리사는 모두 사라졌거든. 고프레도 님에 의해.”

“……무슨 뜻이에요?”

“두 사람은, 뭐랄까…… 동료 같달까. 로열 키친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함께 일하는 자들 같달까.”

“…….”

“나, 보았거든. 오늘 두 사람이 몰래 네 얘기를 하는 것. 서류라는 말도 얼핏 들었고.”

“그래서 그걸 살피러 왔다고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시에나는 민망한 듯 웃었다.

“고아라 오갈 데 없는 나를 키워 주신 좋은 분들이 계시는데, 이번에 동부에서 삿된 자가 나타났을 때 네게 도움을 받았어. 그래서…….”

“대단하다.”

“어? 어어, 그렇지. 넌 대단해.”

“그게 아니라, 선배님이요.”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그녀를 쳐다봤다.

“거짓말을 정말 잘하네요.”

“……어?”

“모두 거짓말이잖아. 아탈란의 사제님.”

순간, 주방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굳어 있던 시에나는 이내 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 내가 사제라니. 아! 농담인 거지?”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야로 시선을 내렸다.

“프렌시프는 다 잘하는데 농담은 못 하는구나. 내가 사제라니…… 종교는 어릴 때 잠깐 간식을 나눠 준다고 해서 갔을―”

“보통은 말이지요.”

난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모로 꼬곤 이어 말했다.

“‘사제’보다 ‘아탈란’쪽에 초점을 맞춰요.”

“…….”

“아탈란은 이십 년이나 전에 대륙 전쟁에서 패배했잖아…… 라든지.”

“…….”

“내 가족, 친인척, 친구, 이웃을 죽인 살인마들이야…… 라든지.”

“말했잖아. 난 고아라고. 그래서 그런가…… 그들이 살인마라는 데엔 동의할 수 없어. 길라게온 사람들도 그들을 죽인 건 마찬가지 아냐?”

나는 일부러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전쟁을 선포한 건 그쪽이잖아요? ‘우리의 신 아탈란을 믿지 않는 우매한 길라게온의 백성들을 교도한다’면서.”

“…….”

“우리를 죽이려고 칼을 든 사람들을 그냥 두고 봐요? 내 나라, 내 가족을 지키지 않고?”

“으응,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이상하지 않아요? 아탈란 교는 그들의 신을 평화를 수호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자비로운 신이라고 했는데 왜 그들의 교리만이 옳다고 생각하죠?”

“글쎄……. 그보다 얼른 일을 끝내야지 않겠어?”

“교리를 널리 퍼뜨린다는 이유로 전쟁을 하고, 아이에게서 부모를 빼앗고, 부모에게서 아이를 빼앗잖아요.”

“……그만하고―”

“아, 알겠다. 이제 아탈란 교에는 제대로 된 사도가 없는 거야. 신을 믿는다는 건 그럴듯한 변명이고, 다들 돈과 권력에 미쳐서 아무렇지 않게 살인을―”

“그만! 그만!”

결국 시에나가 고함을 내질렀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던 그녀가 천천히 나를 쳐다보았다. 온화하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서늘한 민낯이 드러났다.

“네가 뭘 알아.”

그렇지, 걸렸다.

시에나는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언제부터 알았지. 내가 아탈란 교의 사제라는 걸.”

“지금.”

“뭐?”

“사실은 떠본 거거든.”

나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사실 대조리장에서 테스트를 볼 적만 해도 그녀를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시에나가 정말로 수상하다고 여긴 건 알베르가 피에르를 조사해 온 후였다.

피에르는 틈만 나면 시에나를 찾는다고 했다. 특히 중요한 행사를 앞두었을 때, 고프레도와의 만남은 현저히 적었고, 그가 구금된 후엔 달에 한 번도 얼굴을 보지 않았다.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나자 대조리장에서의 일이 마음에 걸렸다.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왜 시에나는 내게 부족한 토마토를 나눠 주려고 했을까? 그녀가 마냥 친절한 사람이라서?

아니, 대조리장에서의 그녀는 소극적이고 남의 눈치를 살피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피에르가 몹시 혐오한다는 나’를 그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도와준다고?

‘이상하잖아.’

내게 토마토를 나눠 준다고 했던 것은 역시 토마토에 무슨 짓을 해 놓았기 때문일 거다.

‘내가 성식을 정화할 수 있다는 걸 아는 거야.’

무엇보다 그녀는 ‘가브리엘라 황비궁 침입자 후보’ 중 하나였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면.

“왼손잡이잖아, 당신.”

“뭐?”

“내가 테스트를 대조리장에서 다 함께 보자고 한 건, 어느 쪽 손을 쓰는지 확인하려고 한 거거든.”

“뭐?”

“가브리엘라 황비궁 주방에서 내 칼을 썼잖아. 도마에 고기 핏물이 왼쪽으로 몰려 있었어.”

“그게 무슨…….”

“모르겠어? 도마 중앙에 재료를 올리더라도 어느 쪽 손을 쓰느냐에 따라 핏물이 드는 방향이 다르단 말이야. 오른손잡이는 오른손. 왼손잡이는―”

시에나가 무심코 제 왼손을 붙들었다. 피에르와의 잦은 만남. 왼손잡이. 성정과 다르게 굴던 일. 거기에 로열 셰프의 방에서 은밀히 빠져나오고 있었고, 무엇보다.

‘회색 눈.’

그녀의 얼굴이 익숙했던 이유는 동부에서 보았던 아탈란의 사제 중 시에나의 가족이 있었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그 가족은―’

시에나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내게 득달같이 달려들어 목을 조였다.

“정말 잘나셨네요, 성녀님.”

“크윽!”

“맞아요. 제가 아탈란의 신관이랍니다. 하지만 성녀님께 했던 말이 모두 거짓은 아니었어요. 어릴 적에 부모를 잃고 고아원을 전전하긴 했거든요. 오빠와 함께였지만.”

“흐으…….”

“그리고 제 유일한 가족을 성녀님께서 친히 찔러 주셨지요.”

샤를리나와 함께 프렌시프 성에 찾아온 신관이 오빠였구나!

시에나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사제께서 성녀님을 안전히 모셔오라 명하셨습니다.”

“흐으…….”

“성녀님, 이 얼마나 갸륵한 일인지 아시겠습니까? 당신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내가!”

“…….”

“오로지 이 세상에 도래할 평화를 위해 분노를 삭이고, 혀를 씹는 심정으로 얌전히 모셔 간단 말입니다.”

“크흑―!”

“물론, 목적지에 도착한 후엔 차라리 죽여 달라 애원하게 될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고통이 끝난 후, 진정한 평화를 맞이하게 되실 겁니다.”

그녀가 히죽 웃으며 점점 더 손에 힘을 주었다.

“지도에서 길라게온이 사라지고, 성국이 생길 테니까!”

“…….”

그녀가 아둔한 개를 어르듯 “쭈쭈쭈” 소리 내며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러니까 멍청한 성녀야. 너는 오늘의 이 잘난 체를 평생 후회하게 된다는 뜻이란다.”

그때였다.

“그녀가 멍청할 리가.”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었다. 주방의 문이 벌컥 열리며 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 사이로 걸어 나온 건 도미니크였다. 그는 단숨에 시에나의 손목을 비틀고,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콜록, 콜록!”

나는 한참 기침하며 목을 문질렀다.

‘조금만 토설이 늦었으면 죽을 뻔했네.’

어느새 시에나는 병사들에게 제압당한 채 꿇어 앉혀져 있었다. 시에나가 어느새 순진하기 그지없는 가면을 다시 썼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모양이었다. 나는 도미니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폐하와 귀족들은요?”

“듣고 있습니다. 영애의 통신석을 통해서.”

그제야 시에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 * *

[지도에서 길라게온이 사라지고, 성국이 생길 테니까!]

날카로운 목소리가 대회의장에 널리 울려 퍼졌다. 가장 상석에서 눈을 감고 있던 황제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긴급령에 의해 황궁에 모인 귀족들은 각기 다른 얼굴로 테이블 중앙에 놓인 통신석에 집중하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이들. 얼굴이 타오르듯 붉어져 분노하는 이들. 황제와 같이 짐작한 듯 침착한 이들. 마지막 부류는 모두 프렌시프와 관련된 자들이었다. 황제는 아서 프렌시프와 시선을 교환했다. 아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제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십여 년 전 토벌했다 믿었던 아탈란의 잔당이 살아남아 있었군.”

대회의장이 쥐죽은 듯 고요했다. 틈만 나면 편을 갈라 죽을 듯, 혹은 죽일 듯이 싸워 대던 이들조차 감히 입을 열지 못할 대사건.

“감히 짐의 턱 밑에까지 아탈란의 잔당이 똬리를 틀고 있었구나.”

황제가 일갈하자 전쟁의 시작을 예감한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 * *

시에나가 추포되고, 난 도미니크의 닦달에 못 이겨 의무실로 향했다.

“괜찮다니까요.”

자상을 입은 것도, 멍이 든 것도 아닌데 약이 있을 리가 없지.

“일단 의사에게 보이세요.”

“정말로 괜찮―”

“제발!”

나는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봤다.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눈만 깜빡이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나를 의자에 앉혔다.

“눈앞에서 목이 졸리는 당신을 바로 구해 내지 못하는 내 심정도 이해해 달란 말야.”

“…….”

나는 기가 바짝 죽어서 손가락만 매만졌다. 그에겐 정말로 못 할 짓을 했다.

‘나라도 무서웠을 거다.’

상상하는 것도 싫다. 눈앞에서 목이 졸리는 도미니크를 보는 건.

“당신은…….”

도미니크가 붉어진 내 목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주변 사람들이 당신을 위해 희생하는 건 싫으면서.”

이어질 말이 뭔지 알 것 같아서 난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하고, 민망하고, 또 내 고집을 들어 준 그가 고마워서. 찬장 안의 약병과 연고를 살피는 도미니크의 등을 빤히 보다가 조그맣게 그를 불렀다.

“저하.”

“부르지 마십시오. 지금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저하…….”

한숨을 푹 내쉰 그가 내 쪽으로 등을 돌려서 난 팔을 활짝 벌렸다.

“……안 합니다.”

“저하…….”

“안 한다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갈등에 휩싸인 듯 단호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나는 헤헤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

“…….”

그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나를 끌어안았다.

“언제 이렇게 영악해진 거지.”

“제가요?”

“……예.”

“화 풀리셨어요?”

도미니크는 분하다는 듯 잠깐 이를 악물곤 대답했다.

“예.”

난 웃으며 그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이제 아탈란과 전쟁만 끝나면 우린 평화로울 수 있어요.”

“그렇겠죠.”

“저는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고…….”

“바닷가에 푸른 지붕을 가진 새하얀 식당을 짓고서 말이죠. 외딴곳에 권력가들이 줄지어 서 있겠군요.”

“장사가 잘되면 기쁘지요! 그리고 저하는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돼요.”

“…….”

“이제 전쟁터에서 남을 죽이지 않아도 되고, 핏줄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고.”

나는 헤헤 웃다가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이런 것도 마음껏 하고.”

“그건 좋군요.”

도미니크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신의 자식들과 싸워야 한다는 걸 알지만, 간절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요?”

“제발 당신이 무사하길 바란다고.”

“…….”

“이깟 목숨 같은 건 얼마든지 내어 줄 테니 당신만은 안전하게, 다치지 않고, 무사하길.”

“아, 나도 똑같은 걸 빌었는데!”

우리는 마주 보며 미소지었다. 가라앉은 눈빛이 너무나 다정하고, 달콤해서 나는 그의 눈가를 조금 문질렀다. 도미니크가 나의 목을 부드럽게 잡았고, 우리는 서로를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그러한 찰나.

“세니아나!”

―라는 말과 함께 문이 벌컥 열리며 가족들이 뛰어 들어왔다.

‘헉!’

깜짝 놀란 나는 얼른 그와 떨어져 홱! 등을 돌렸다.

“…….”

“…….”

“…….”

“…….”

어쩐지 등 뒤에서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것만 같았다. 나는 애써 “아…… 어…… 으음, 아! 참 밝네.”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등 뒤에서 “밤인데.”라고 말하는 가웨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전등이! 전등이 참 밝다.”

뒤통수가 따가워서 난 고개를 돌리기 무서워졌다.

“이 새―”

“가웨인.”

란슬롯의 말에 가웨인은 얼른 말을 바꿨다.

“―분이 눈만 떼면 이런 일을…….”

도미니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글쎄요. 눈을 떼는 시간이 어찌나 짧은지,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차갑게 말을 받았다.

“제대로면 곤란하죠.”

“할아버님.”

“할아버―!”

으득, 이가는 소리가 들려와서 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가족들과 도미니크 사이에 이상한 긴장감이 흘렀다.

‘싸, 싸우는 거야?’

당황해서 얼른 사이에 파고들려던 찰나, 드르륵! 문이 열리더니 예상치 못한 인물이 안으로 들어왔다.

“참으로 듣기 좋은 호칭이구만!”

황제가 껄껄 웃으며 시종장에게 “그렇지 않은가?” 하고 물었고, 시종장은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수그렸다.

‘아니, 이분은 왜―!’

난 얼른 치마 끝을 붙잡고 무릎을 굽혔다.

“황가에 광영을. 폐하를 뵙습니다.”

“오, 그래, 우리 세니아나. 몸은 괜찮으냐?”

우, 우리 세니아나? 호칭에 당황한 사이, 아빠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폐하, 제 딸에겐 분수에 넘치는 호칭입니다. 과분한 호칭 거두어 주십시오.”

아빠가 딱 잘라 말하자 황제는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닐세, 아닐세. 짐의 귀염둥이에겐 과분한 것이 존재하지 아니하네.”

할아버지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황제를 쏘아보았다. 마치 ‘쟤는 내 귀염둥이야!’라는 표정이라 난 정말로 민망해졌다.

“하하, 도미니크가 숫기 없다 여겼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만도 않았군. ‘할아버님’이라. 참으로 정겨운 호칭이 아닌가.”

“그런……!”

가웨인이 눈을 홉뜨며 입을 열자 란슬롯이 한 팔로 그를 가로막았다. 오빠들은 몹시 분한 듯했지만, 황제에게 반발할 수는 없는지 속으로 울화를 삼키는 듯했다.

‘얼른 전쟁이 끝났으면!’

황제가 두 손으로 할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눈을 찡끗했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엄마야!’

나는 황제에게마저 몹시 단호한 할아버지를 보고 놀라고 당황해 마른 침을 삼켰다. ‘과연 할아버지’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간이 너무 큰 건 아닌가’라고 고민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여간에 공의 농담은 하나 같이 재미없군.”

“농이 아닙니다.”

“짐이 듣기엔 정겹기만 한데 말이지. 짐도 우리 세니아나가 참으로 귀엽다네.”

“제 손녀에겐 과분한 호칭임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잘 어울려 보이기도 하는군.”

“전혀요.”

할아버지의 말을 하나같이 무시하는 황제도 대단하고, 황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맹렬하게 부정하는 할아버지도 대단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 마디씩 주고받는 황제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제 좀 말려야 할 것 같은데.’

내가 “저…….” 하고 입을 열던 때였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세니아나를 짐에게 며느리로 주지 않겠나.”

황제가 폭탄을 투하했다.

“아니, 폐하! 무슨 그런……!”

할아버지가 버럭 소리치자 황제는 들은 척도 않고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어때, 세니아나. 짐의 며느리가 되지 않겠느냐.”

‘아니, 폐하는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야!’

전쟁은 아탈란과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다른 쪽에서도 발발해 버렸다!

“저기! 그…… 일단! 밤이 늦었으니까요. 나중에 다시 얘기하는 거로 해요……!”

내가 가족들과 황족들을 막아선 채로 소리치자, 점점 날카로워지던 두 진영의 기세가 사그라들었다. 난 못마땅한 표정들의 가족들을 떠밀며 말했다.

“일단 전 폐하와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먼저 돌아가 계세요.”

할아버지는 몹시 마뜩잖은 모양이었지만,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하며 문을 나섰다. 가족들이 나간 후 황제는 낄낄거리며 웃었고 난 그런 그를 보며 한숨을 터뜨렸다. 내가 도미니크를 쳐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 사람이 진짜.’

말려 보라는 뜻이란 말이야. 평소엔 눈치 빠른 남자가 이럴 때만 모르쇠로 구는 게 얄미워서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난 크게 한숨을 내쉬고 황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폐하, 이제 장난은 그만하시고…….”

“장난? 누가 짐더러 장난을 친다더냐.”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눈빛은 진중했다.

‘뭐야, 그럼 진짜로?’

내가 어리둥절해 있으니 황제는 문밖으로 나서며 고개를 까딱했다. 따라오라는 뜻인 것 같아서 먼저 나서자, 도미니크 또한 내 뒤를 따랐다.

“네놈은 돌아가라. 영애와 따로 할 말이 있으니.”

“무슨 말씀을 하시게요.”

“이놈이……. 언제부터 짐이 할 말을 네놈에게 일일이 검토받았느냐!”

그가 버럭 소리치자 도미니크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날 쳐다봤다. 괜찮겠냐는 표정이라 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도미니크가 물러서고, 황제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키가 큰 그가 성큼성큼 빠르게 걸으니 나는 종종걸음으로밖에 따라갈 수 없었다.

‘황태자와 미카엘, 도미니크까지 훌쩍 큰 건 유전인가 봐.’

그를 따라가는 데만 집중해 있었는데 어느새 걷기가 편해졌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제를 쳐다보다 헤헤 웃어 버렸다.

“뭐냐.”

황제가 눈을 찌푸리며 물어서 난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정하셔서요, 몰랐는데.”

“……몰랐는데―라는 말을 굳이 붙일 필요가 있나.”

“저하에게 유전된 건 큰 키만이 아니었나 봐요.”

황제가 “도미니크?” 하고 물어서 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도미니크는 짐을 많이 닮은 녀석이지. 짐도 내 사람에겐 끝없이 다정하거든.”

“흐음…….”

“그러니 어떠냐. 짐의 사람이 되어 보는 건.”

“네?”

“짐의 며느리가 되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묻는 게야.”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고, 황제는 온실과 이어진 문을 열었다.

‘아…….’

황제만이 출입 가능한 온실은 온통 해바라기로 가득했다. 길라게온에만 있는 특별한 해바라기종. 가장자리는 타오르는 석양을 닮은 주황색이고 안으로 갈수록 본래의 샛노란 색이 보이며, 얼핏 사자의 갈기 같기도 한 그것의 이름은 레오나(Leona)였다.

“이 온실에 언젠가 너를 닮은 올포러브가 피어날 수 있도록.”

황제의 온실에 피어날, 나를 닮은 장미.

“역시 폐하께선 황위의 주인으로 2황자님을…….”

황제는 말없이 벤치에 앉으며 나를 옆자리로 이끌었다.

“세니아나.”

“예, 폐하.”

“짐은 네가 아주 어여뻐.”

“…….”

“감히 황제의 앞에서 말을 가리지 않는 것도 귀엽고, 성실한 면도 보기에 기껍지. 내가 지키지 못한 아들을 대신 지키려 하는 점엔 몹시 감사하다.”

“…….”

“도미니크의 곁에 네가 있고, 네 곁에 도미니크가 있다면 짐은 더 바랄 것이 없을 거야.”

황제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히 웃었다.

“어떠냐, 세니아나.”

“…….”

“세상에 온통 데기만 하여 욕심도, 감정도 죽여 왔던 그 아이에게 네가 욕망의 이유가 되어 주는 건.”

나는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자 그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짐이 잘 해 주마.”

“……얼마나요?”

“으응?”

나도 짓궂게 웃으면서 팔짱을 끼었다.

“제가 밑지는 장사잖아요, 이건?”

“밑진다고?”

“시어머니가 네 명에 아주버님도 많고! 가족 행사는 또 좀 많나요? 제사도 신에게 지내고, 선조들에게 지내고…… 우와! 엄청 고생인데요!”

황제는 낄낄거리며 웃다가 무릎을 내리치곤 “좋아!” 소리쳤다.

“짐은 무조건 새아가의 편이다. 어떠하냐?”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좋아요!”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황제가 내 뺨을 상냥하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짐은 언제나 네 편이 되마.”

“약속이에요?”

“그래.”

날은 선선했고, 온실은 아름다웠으며 나와 황제는 마주 보며 웃었다. 그래서 난 평화가 조금 더 간절해졌다.

* * *

나라 안팎이 떠들썩했다. 아탈란의 재래. 대륙 전쟁을 겪었던 자들은 공포에 질렸고,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자들은 분개했다. 길라게온을 중심으로 대륙 전쟁에 참전했던 나라는 앞으로의 일에 대비하여 회합을 가졌다. 덕분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아탈란과 그들에게 회유된 귀족 세력이었다.

아탈란의 3월로 일찍이 그들에게 회유되었던 르마르 공작이 은밀히 프렌시프 저를 찾았다. 응접실로 안내된 그는 끔찍한 것이라도 본 양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집사가 물잔을 내려놓자마자 벌컥벌컥 물을 들이켠 그가 덜덜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지, 질 겁니다. 우리는…… 길라게온은 아탈란에게 지고 말 거라고요.”

아빠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진정하고 정확히 전후를 설명하십시오.”

“오늘 아탈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불안해하는 휘하 귀족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겠지요.”

그럴 것이다. 르마르 공작 휘하의 귀족들이 이대로 아탈란을 따라도 되는 것이냐며 그를 들볶았으니까. 세작에 따르면 아탈란에 먹힌 것이나 다름없는 서부 귀족들은 연일 회동하고 있다고 했다. 황제의 입에서 아탈란이 거론되었으니 언제고 토벌령이 떨어질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거기에 아탈란은 프렌시프에 밀려 거점까지 옮긴 상태. 불안에 떨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르마르 공작은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탈란의 대사제가 우리에게 삿된 자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가웨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삿된 자들은 이미 프렌시프 령에서 한차례 토벌되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뭐가 두려워서―”

“우리가 본 것만 기백에 가까운 수였단 말이오!”

“……!”

“대사제는 말했어요. 수십 배는 되는 누아제들이 준비되어 있다고…….”

나는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벌써 그렇게?’

그들이 누아제들을 계속해서 준비해 왔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의식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많은 수를 삿된 자화했다니.

‘삿된 자 일만 구를 모아서 의식을 행하지 않으면 그들은 절망을 제어할 수 없어.’

제어할 수 없는데도 그렇게나 많은 수를 삿된 자화했다니.

‘미쳤어.’

“대체 어떻게 하려고……!”

내가 소리치자 르마르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 우리도 그것이 두려워 묻자 대사제는 곧 의식이 있을 거라고 했소.”

“누아제를 일만 구나 모아 놨다는 소리예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에게 성식을 나눠 주며 영지민들에게 유통시키라 명하였소.”

“……그건 이상해요.”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가족들을 보자 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휘하 귀족의 영지민들에게까지 성식을 먹일 필요는 없어요. 까딱 잘못해서 바로 삿된 자화 된다면 영지는 난리가 나 버릴 거라고요. 그건 귀족들에겐 큰 위협일 텐데, 그들이 선뜻 명을 받아들일 리 없잖아요.”

르마르 공작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바로 삿된 자화될 수는 없지.”

“네?”

“성식을 한 달 이상 일정량을 꾸준히 먹어야 누아제가 되고, 누아제에서 바로 삿된 자가 되는 자들은 극히 드무니 말이오.”

“그게 무슨……. 프렌시프 령에 삿된 자가 나타났을 땐, 우리 기사들이 바로 누아제가―!”

그러자 가웨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아니라니요?”

“성문 밖의 기사들에게 성식을 전달했을 땐, 바로 누아제가 되지 않았어. 즉시 누아제가 된 사람은 오직 성안에 있던 자들이다.”

란슬롯이 덧붙여 말했다.

“성 밖에 있던 자들도 즉시 누아제가 되긴 했었지. 도미니크가 성식을 전달해 주었을 때.”

“도미니크…… 아!”

도미니크가 즉시 누아제가 될 수 있는 열쇠라는 건가.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도미니크가 유난히 괴로워했던 이유가 오직 나와 함께였기 때문이라면 처음부터 괴로워해야 하지 않은가. 그가 계속 누아제를 만들어 냈다면 갑작스레 몸 상태가 안 좋아진 이유도 납득이 간다.

‘아탈란에선 이 일을 모르고 있어. 그렇다는 건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있다는 거야.’

나는 벌떡 일어났다.

“황궁으로 가 봐야겠어요.”

“황궁은 왜?”

“성식 유통을 금지해야 해요. 그렇게만 된다면 아탈란은 더 이상 누아제를 만들 수 없을 테니까요!”

난 즉시, 황궁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빠르게 검문소를 통과해 아발론으로 향했다. 정신없이 궁으로 뛰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세니아나!”

“스승님?”

쟝뤼크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붙잡았다.

“오늘은 휴일이 아니냐.”

“네. 폐하를 뵐 일이 있어서 왔어요. 스승님, 제가 지금 바빠서―”

“폐하라면 우리도 명을 받아 뵈러 가는 길이야.”

“명이요?”

“그래, 폐하께서 나와 고프레도를 부르셨다.”

무슨 일로?

‘곧 있을 경합 때문인가?’

“저도 같이 가요.”

“그래, 그렇지 않아도 부르려던 참이었지. 가자.”

나는 쟝뤼크와 함께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방 앞엔 고프레도와 수셰프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눈이 마주치자마자 서로 인상을 썼다. 쟝뤼크는 쯧, 혀를 차며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대낮부터 기분 나쁜 얼굴을 보려니 속이 안 좋군.”

고프레도는 흥, 코웃음 치며 쟝뤼크를 곁눈질로 쳐다볼 뿐이었다.

‘뭐지…….’

오늘의 고프레도는 이상했다. 평소라면 쟝뤼크와 맞붙었을 그가 입매를 비틀 뿐, 전혀 대꾸가 없었다. 쟝뤼크도 그 점이 이상한지 오만한 얼굴로 회중시계를 확인하는 고프레도를 쳐다보았다. 쟝뤼크가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폐하!”

황제의 집무실 안에서 벼락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시종장의 목소리였다.

“거기 누구 없느냐! 의사! 의사를 불러와!”

나와 쟝뤼크는 딱딱하게 굳어졌고, 곧 집무실의 문이 활짝 열리며 궁인들이 뛰어 들어갔다. 문틈 사이로 쓰러진 황제가 보였다. 나는 서둘러 궁인들 뒤를 따라 들어갔다.

“폐하! 폐하!”

시종장이 내내 황제를 흔들고 있지만, 그는 의식이 없었다. 난 시종장을 붙들고 다급히 물었다.

“뭐예요, 어떻게 된 거예요!”

“저, 저도 잘…… 난데없이 쓰러지신 터라……!”

황제의 입가로 거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독?’

“폐하께서 오늘 무엇을 드셨습니까! 누구와 함께 계셨어요?!”

“오늘은 기침 후 종일 집무실에 계셨던 터라 마주친 사람은 없고…… 드신 거라곤 주방에서 올라온 수프 조금이 전부입니다.”

주방에서 올라온 수프? 나는 쟝뤼크에게 소리쳤다.

“오늘 본 주방에서 수프를 만든 사람이 누구예요?”

“…….”

“스승님!”

“……나다.”

“뭐라고요?”

“나야. 오늘 폐하의 요리는 모두 내가 만들었어.”

쟝뤼크의 표정이 굳어졌고, 나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쓰러진 황제와 쟝뤼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폐하!”

미카엘이 황제의 집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가 소리치기 무섭게 의사들이 들어왔고, 황제를 살핀 의사들은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독입니다…….”

고프레도가 쟝뤼크의 멱살을 잡은 채 소리쳤다.

“이놈! 폐하께 무슨 짓을 한 게냐!”

“…….”

고프레도가 미카엘을 보며 소리쳤다.

“이놈입니다, 저하. 폐하께서 이놈이 만든 수프를 드시고 쓰러지셨습니다!”

나는 희게 질려 소리쳤다.

“말도 안 돼! 스승님이 요리에 독을 넣다니요! 하늘이 무너져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하면 폐하께서 어째서 쓰러지셨단 말이냐!”

고프레도가 고성을 내질렀고 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스승님이 폐하의 요리에 독을 넣을 이유가 없잖아요!”

“모르지. 누구와 결탁했을 수도.”

“결탁이라니요!”

고프레도 곁에 서 있던 수셰프가 히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황태자 전하께서 루크 님을 찾으셨지요.”

“뭐라고요?”

“근래 두 분 사이가 꽤 다정하였습니다. 본 주방에서 일하는 자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말이지요.”

황제의 집무실은 난리 통이 되었고, 모두의 시선은 황제를 붙들고 있는 미카엘에게로 향했다. 그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쟝뤼크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저자를 잡아들여라.”

경비병들이 쟝뤼크를 제압해 끌어냈고, 난 희게 질려 그들을 쫓았다.

“스승님! 스승님!”

말도 안 돼.

스승님은 황태자의 명으로 독을 넣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 사람이었다. 그는 설령 권력에 마모된다 하더라도, 요리에 독을 넣는 일 같은 건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남자였다.

“스승님!”

내가 소리치자 쟝뤼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으니 돌아가 있어.”

“하지만…… 하지만!”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너는 나를 믿지 않은 게냐?”

“알아요, 알지만 이건―!”

음모였다. 음모가 분명한 일이다. 황제는 쓰러졌고, 저들 입에서 황태자가 나온 것으로 보아 이미 둘을 엮어 버릴 생각인 것이다. 황태자까지 엮였으니 이제 재판과 처결은 미카엘이나 도미니크의 몫. 도미니크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황자이니 황태자를 대신해서 평생 황궁의 일을 보아오던 미카엘이 나설 것이 분명하다.

‘저들이 스승님을 살려 둘 리가 없어.’

나는 새파랗게 질려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

“세니아나.”

“스승님…….”

“주방을 네게 부탁하마. 잘하고 있으면 난 금세 돌아올 거다.”

그가 빙그레 미소지으며 경비병에게 끌려갔다. 그 후 황제가 침실로 옮겨진 뒤 도미니크가 급히 아발론을 찾았다.

“저하, 스승님이…… 폐하가…….”

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나를 붙잡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당신은 저택으로 돌아가세요. 미카엘에게 전권을 빼앗기면 황궁은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하께선―!”

“난 괜찮으니까.”

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표정이지만, 손끝이 차다. 부친이 음독하였고, 황제가 없는 성이 안전하지 않은 건 그도 마찬가지일 터. 나보다 상황이 낫지 않은 그가 이토록 차분한 것은 내가 염려할까 저어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의 손을 꽉 붙들었다.

“할아버지와 아빠가 곧 오실 거예요.”

“예.”

그가 먼저 회합실로 들어가고, 난 아발론을 나섰다. 마차가 대기한 곳으로 향하자 아빠와 할아버지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희게 질린 날 붙들었다.

“세니아나.”

“할아버지, 이건 우리가 성식 유통을 막지 못하게 하려는 아탈란의 술수예요.”

“그렇겠지.”

“미카엘이 전권을 잡게 해선 안 돼요. 어떻게든 스승님이 로열 셰프가 되어 성식 유통을 막지 않으면 폐하께서 일어나신다고 해도 우리에겐 승산이 없어요.”

“그래. 우리 휘하의 귀족들을 불러들였다. 저들이나 우리나 당파의 수로는 비등해. 아무리 미카엘이 황태자를 대신하여 공무를 보아 왔더라도 우리가 그리 쉽게 밀리지는 않을 게야.”

“네.”

아빠는 내 등을 토닥이며 “먼저 돌아가 있으려무나.” 하고 말했고, 난 두 사람의 마차를 타고 성을 빠져나갔다. 저택에 도착했을 땐 사용인 모두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마릴린과 시트론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가씨!”

“무슨 일이야?”

“어서 작은 도련님께 가 보셔요.”

나는 그들과 함께 오빠들과 가신들이 있는 회의장으로 뛰어갔다.

“세니아나!”

“뭐예요, 뭐가 어떻게 된― 저택에 왜 이 난리가……!”

“가웨인과 기사들을 프렌시프 령으로 보내다오.”

“네?”

“영지 인근에서 민란이 나서 영지민들이 휘말렸어. 영지 기사들로선 민란을 처리할 수 없다는구나.”

“그럴 리가―!”

프렌시프의 정예병들이 민간인을 처리할 수 없다니 말도 안 된다.

“설마 누아제인가요?”

“그런 듯해.”

나는 치맛자락을 꽉 말아 쥐고 이를 악물었다.

“……싫어요. 누아제들을 처리해도 아탈란에서 삿된 자들을 보내오면 끝이라고요! 이건 아탈란이 우리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려는 수작이란 말이에요!”

“세니아나.”

“그전과는 달라요! 이전엔 기사들을 누아제로 만들어도 제가 정화할 수 있었지만, 미카엘이 전권을 손에 넣게 되면 전 움직이지 못할 수도 있다고요! 그럼 오빠와 기사들은 꼼짝없이……. 민란쯤은 두고 봐도 되잖아요!”

묵묵히 서 있던 가웨인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볼을 꾹 꼬집었다.

“너, 날 못 믿어?”

“…….”

“네 성수가 없으면,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바보로 보이냐?”

“그건 아니지만…….”

“네가 없던 시절에도 숱하게 많은 전투를 헤쳐 왔어. 나를 비롯한 이 녀석들 모두.”

가웨인의 뒤에 도열해 있던 칼립스와 기사들이 평온한 눈빛으로 나를 주목했다. 가웨인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시선을 맞추었다.

“우리는 남들보다 좋은 것들을 누리는 만큼 의무가 있어. 영지민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 그렇지?”

그의 눈빛은 진지했고, 나는 뺨이라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영지민을 지킬 수 있다면 지키고 싶다. 하지만 내 가족을 대가로 내어놓아야 한다면 그럴 수 없다. 사실, 그 전의 일도 할아버지가 납치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리 득달같이 영지로 가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날 어린애처럼 보는 가족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들이 만든 안전한 울타리에서 뛰어노는 어린애에 불과한 건 나였다. 내게 주어진 힘은 내 가족이 짊어진 의무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세니아나.”

“…….”

“세나야.”

“……네.”

“난 반드시 승리해서 귀환할 거다.”

“약속이에요. 꼭, 무사히 돌아오시는 거예요.”

“그래.”

결국, 난 가웨인과 기사들을 영지로 보내 주었다.

할아버지와 아빠는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고, 나와 란슬롯은 황급히 물었다.

“어떻게 되었어요?”

할아버지의 눈빛은 처음 보았을 때의 그처럼 냉혹하리만치 서늘했다.

“황제의 대리인은 미카엘로 낙점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의 7할이 미카엘의 손을 들어 주었어.”

“그런―! 당파의 수는 비등하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누아제가 되었기 때문이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측의 귀족들은 모두 관리하고 있었잖아요.”

“귀족들은 관리했어도 그들의 가족까지 신경 쓸 수는 없었으니까.”

“네?”

“아로트 후작의 장인, 게스탈드 백작의 혼외 자식, 로헨루드 백작의 막내 누이. 다들 누아제가 되어 이지를 잃었다더군.”

“……가족이 삿된 자가 될까 봐 두려워서 미카엘의 손을 들어 준 거라고요?”

“그래. 다만, 로열 셰프 경합만은 예정대로 치르게 되었다.”

마담 버지니아가 비명이라도 지르는 것처럼 “기가 막혀!” 하고 소리쳤다.

“쟝뤼크가 없는 상황에서 무슨 경합입니까! 그거라도 먹고 떨어져 나가라는 게 아닙니까!”

나 또한 입술을 깨물고 눈을 꽉 감았다. 현재 로열 키친엔 고프레도에게 대적하여 경합을 치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로열 키친에서 20년 이상 근무했을 것. 2급 이상…… 즉, 한 궁의 전담자였을 것.

초조한 표정으로 손톱을 물어뜯던 마담 버지니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쟝뤼크도 복직한 것이 아닙니까. 복직할 수 있는 자라면 붙어 볼 수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스승님이 복직할 수 있었던 건, 폐하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무엇보다 재직 중에 받은 훈장이 있어야 하고, 고프레도에게 상대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은…….”

“이런…….”

나는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경합은 언제 하지요?”

“본래 내일 이뤄졌어야 하나, 황제가 쓰러졌으니 경합자 등록까지 하루의 말미를 주고, 그다음 날 당장에 치른다더군.”

로열 셰프 자리는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이었다. 두 시간이 넘도록 회의가 이어졌지만 이렇다 할 방법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일단 영지의 술렁이는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영지로 떠났고, 나는 알베르에게 로열 키친 퇴직자 명단을 요청했다. 그는 즉시 명단을 보내 주었고, 나는 홀로 서재에서 명단을 확인했다.

“이 사람은…… 서부 출신이고, 이 사람도 아탈란 휘하의 귀족이야.”

아무리 찾아도 내일 등록시킬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 해. 어떻게 해야 하지.’

고프레도에게 상대가 될 만하면 서부 출신, 아탈란 휘하. 그게 아니라면 훈장을 받은 적이 없다. 자꾸만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나는 다음 명부를 가져오기 위해 다급히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다리가 꼬여 주저앉았다.

“악!”

“세니안!”

서재로 들어오던 아빠가 서둘러 달려와 나를 부축했다.

“아빠…….”

그는 굳은 얼굴로 나를 의자에 앉혀 주고 내가 찾아오려던 명부를 가져다주었다.

“어떡하죠……. 어떻게……, 아무리 찾아도…….”

“진정해.”

“아빠……. 저요, 저는―”

“세니안!”

아빠가 나를 크게 부르자, 머릿속에서 혼란스럽게 꼬여 가던 실이 움직임을 뚝 멎었다.

“……네.”

“이제 진정이 좀 되니.”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저는 다 컸다고 생각했어요. 이제껏 앞에 놓였던 수많은 일을 모두 해결해 왔으니까 목적지에 다다랐다고…… 그렇게 여겼어요.”

황제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영애는 말이다. 언제나 강자의 입장에서 싸워 왔다.]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난 언제나 강자의 입장에서 싸워 왔고, 어떤 불합리한 일이 있더라도 내게 유리한 조건임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의 편’이던 나라의 최고 결정권자가 쓰러진 상황.

이대로 황제가 승하하고, 황태자와 쟝뤼크가 황제 독살의 범인으로 몰리면 이 나라는 아탈란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난 더 이상 강자의 입장일 수 없었다. 평소처럼 진정할 수 없는 건 내가 더는 강자가 아니기 때문인가.

“저는…… 전…… 이제 강자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우리에겐 방법이 없는 걸까요…….”

“세니아나.”

아빠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앉아 나와 시선을 맞췄다.

“네 목표는 우리 가족의 평화니?”

“……네.”

“그것만이 의미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지금의 위기는 어떤 의미도 없고, 그저 고통스러울 뿐인 덧없는 시간이라고 여기니?”

“…….”

“내 생각은 달라.”

“네?”

“네가 쓴 페이지의 모든 순간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은 평화가 아니라 성장이야.”

“…….”

“네 목표가 오직 행복한 끝이라면 우리는 이대로 도망쳐 살면 되겠지.”

“…….”

“우리에겐 재물이 있고, 아직 아무도 죽지 않았으니까 이대로 도망쳐 행복한 일상을 영위하면 되는 것이다.”

“…….”

“네가 더는 강자가 아니기에 버틸 수 없다고 여기면 함께 도망치자. 그러면 되는 거야.”

“아빠는 모든 걸 버리고 저를 위해 함께 도망치실 수 있으세요? 오빠들도, 할아버지도, 저하도, 이모도. 모두 그럴까요?”

“내 딸이 더 나은 내일이 아니라, 어제와 같은 평화를 원한다면.”

아빠가 다정한 얼굴로 내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조급해하지 마라. 우리의 끝은 오직 실패만이 아니야.”

“……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아빠의 손을 잡았다. 왜 조급함에 사로잡혀 있었을까. 내가 강자였던 건 여기 온 근 일 년뿐이었다. 나는 늘 결핍된 채로, 약자의 입장에서 살았다. 영지 성에서 있을 때도 약자의 입장에서 플로헤타를 몰아냈고, 아카데미에서도, 내가 성녀나 프렌시프 영애란 걸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이겼으니까.

그러다 움찔, 하고 눈을 홉떴다.

“아!”

“……세니아나?”

“있어요!”

“뭐?”

“있다고요! 당장 복직할 수 있는 우리 편!”

나는 후다닥 일어나 통신석을 집었다.

* * *

미카엘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황제의 집무실 테이블 위의 모래시계를 매만졌다. 사비에르와 카렌듈라를 대신해 서부의 거두가 된 에듈라 백작이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오직 이 순간을 위해 평생을 송두리째 바치시지 않으셨습니까.”

“……글쎄.”

미카엘이 손안에서 굴리던 모래시계를 쓰레기통에 처박으며 의자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생각보다 더 재미있어. 네놈들 하는 짓을 보는 게.”

에듈라 백작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하를 위해 무엇인들 못 하겠나이까.”

“감히 부황의 입에 독을 처넣는 일도 서슴없이― 말이지.”

백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새 시대를 위한 가슴 아픈 선택이었지요.”

“흐음.”

“이거 참, 녹슨 것이 하루빨리 물러났다면 저하의 금좌가 더러워지는 일은 없었을 터인데 말이지요.”

에듈라 백작은 소파 등받이에 깊이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서부의 승리입니다. 이제 아탈란의 절망만 이 땅에 도래하면 우리는 제국을 넘어, 온 세상을 손아귀에 넣게 될 겁니다.”

“승리라 확신하나.”

“물론입지요. 동부의 귀족들도 우리 손아귀에 있습니다. 제 부모, 새끼가 삿된 자가 되는 것을 보고 싶은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을 위해 가브리엘라 황비를 삿된 자화시키고, 세니아나 주변을 끊임없이 들쑤셨다. 세니아나 프렌시프, 그 맹랑한 년과 프렌시프의 멍청한 놈들은 아탈란의 손에 놀아나 주변을 살필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미카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물었다.

“성식 유통은.”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내 말은 유통을 막을 놈이 더 없겠느냐는 것이다.”

에듈라 백작이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훈장이 있는 놈들은 대부분 우리 수중에 있고, 복직자를 찾는다 해도 쟝뤼크만 한 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

“예. 유통권이 우리 손을 떠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요.”

그때 미카엘의 부관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저하!”

“무슨 일이냐.”

“복직자가 나타났습니다. 복직 요청서와 함께 경합 참가 신청서를 보내왔습니다!”

에듈라 백작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부관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은 에듈라 백작의 표정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아곤 필스너]

“아곤?”

“프렌시프 성의 총주방장인 놈입니다. 게다가 이자, 복직 요건을 모두 갖춘……!”

미카엘이 턱을 괴며 해사하게 웃었다.

“바깥의 놈들을 관리하느라 프렌시프 턱 아래의 놈은 신경도 쓰지 않았군.”

에듈라 백작의 얼굴이 새빨개지자 미카엘은 흥, 코웃음을 치며 복직 요청서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세니아나 프렌시프.’

언제나 재밌는 여자였다.

* * *

“제, 제가 할 수 있을지…….”

프렌시프 성에서 데려온 총주방장 아곤과 수셰프 제레미는 황궁을 올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그 둘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가요. 준비는 스승님이 해 두셨으니 우리는 요리만 하면 돼요.”

제레미가 새파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못 합니다, 못 해요! 10년이 넘도록 프렌시프에서만 일해 왔습니다. 아곤 스승님도 칼을 안 잡으신 지 오래되었다고요.”

제레미는 나를 붙들며 벌벌 떨고는 이어 말했다.

“게다가 경합의 심사자들이 모두 아탈란 휘하의 놈들이라면서요!”

“아우, 정말 괜찮으니까 들어가!”

나는 겁에 질린 듯 부산을 떠는 그의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요리는 내가 해. 아곤과 제레미는 이름만 올려 둔 거야.”

“아, 아가씨도 루크 님에 비하면…….”

“날 믿어 보라고.”

아빠는 내 인생의 목표가 성장이니 실패해도 된다고 했다. 내 생각도 비슷하지만, 다른 게 딱 하나 있다. 나는 그래도 지는 것보다 이기는 게 좋단 말이야. 이번 경합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서 가자니까.”

하지만 제레미는 아곤의 허리춤을 붙잡고 도통 떨어지질 않았다.

“못 갑니다! 아가씨도 스승님이 소중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저도 제 스승이 소중합니다. 한 입이라도 덜려고 부모에게서 팔려 간 저를 데려와 사람 만들어 주신 분이 아곤 님이십니다. 자식처럼 키워주셨다고요! 그런 분이 다시 로열 키친에 들어가서 치이는 꼴을 어떻게 봅니까!”

“왜 아곤이 망신을 당해?”

“그야 스승님 실력은 이제 다 녹슬었으니까요! 이제 꼬부랑 할아범이 되어서 손까지 떨릴 지경이라고요! 루크 님과 같은 줄 아십니까?!”

제레미는 버럭 소리치며 “그렇죠, 예?!” 하고 아곤을 쳐다봤다.

“…….”

“못 한다고 하십쇼. 로열 키친을 떠난 지 이제 이십 년이 다 되어 갑니다. 기술과 센스로 무장한 요리사들을 다 녹슨 실력과 굳은 머리로 어떻게 이깁니까? 예? 예?!”

“이놈이…….”

“복직해서 개망신이나 당하시려고―”

퍽! 아곤이 제레미의 뒤통수를 내려쳤다.

‘얻어맞을 줄 알았지.’

제레미는 맞은 부분을 문지르며 “제 말이 틀렸습니까…….” 하고 웅얼댔고, 아곤은 콧방귀를 뀌며 기세 좋게 성으로 들어갔다.

“스승님은 무슨 객기를…….”

제레미가 억울한 듯이 중얼거려서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쨌든 제레미 덕분에 아곤에게 의욕이 생긴 듯하네.’

제레미와 나는 아곤을 따라 성으로 들어갔다. 그는 황궁 복도를 걷는 내내 탄성을 터뜨렸다.

“프렌시프 성만 한 곳이 세상에 또 있다니…….”

“당연하지. 황궁인데.”

아곤이 아발론 복도 끝의 방문을 열자 황궁을 구경하느라 약간 뒤처져 있던 제레미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여기가 스승님의 방입니까?”

“그래, 본래 내가 쓰던 곳이지.”

“왕년에 잘 나가셨다는 말은 다 허풍인 줄 알았더니만.”

아곤이 손을 홱! 치켜들자 제레미는 팔로 가위표를 그리며 움찔, 물러났다.

“그, 그래도 4황자가 순순히 복직을 시켜 주네요. 그렇죠, 아가씨?”

“순순히 시킬 수밖에 없겠지.”

“어째서요?”

“폐하께서 쓰러지시자마자 황태자를 밀어내고, 전권을 차지했어. 이 와중에 로열 키친 경합까지 막는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어?”

“이 틈을 타서 폐하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한다…… 거나?”

“혹은 폐하의 음독 사건에 관여된 자가 사실은 황태자가 아닌 4황자다…… 라거나.”

내 말에 제레미는 헹, 콧방귀를 뀌며 “둘 다 맞는 말이지만요.”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튼 내일 당장 경합이니까 다들 주의해야 해. 특히 제레미!”

“예, 아가씨.”

“너를 데려온 건 로열 키친의 요리사들은 모두 믿을 수 없기 때문이야. 아곤에게 무슨 짓을 한다거나, 우리 요리에 술수를 쓰려고 할 수도 있으니까 각별히 조심해야 해.”

“물론입지요.”

제레미가 주먹을 불끈 쥐어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곤은 스승님의 수첩을 살펴봐 줘. 경합에 무슨 요리를 내려고 하셨는지 적어 놨을 테니까.”

“예.”

고개를 끄덕인 후에 아곤이 집무실을 나섰다.

‘일단 출전권은 확보했고. 다음은…….’

난 쟝뤼크가 구금된 지하 옥사를 찾았다. 날 기다리고 있던 알베르가 고개를 저었다.

“물샐틈없이 경계 중입니다. 면회는 어려울 듯하군요.”

그야 그렇겠지. 황제 음독 사건의 용의자이니 쉽게 면회가 될 리 없었다.

“아탈란 세력이 황실 경비대장인 에단 님까지도 옥사 경비에서 제외했습니다. 들어갈 방법은 전무한 게지요.”

“평화롭게…… 는요.”

“예?”

나는 옥사를 지키고 선 병사에게 다가갔다.

“내가 잠깐 들어가야겠는데요.”

“불가합니다.”

내 말이 기가 막힌 모양인지 그는 실소를 흘렸다. 난 주변을 살피며 에이프런에서 주머니 하나를 슬쩍 꺼내 병사에게 내밀었다.

“섭섭하진 않을 거예요.”

“뇌, 뇌물입니까.”

“약간의 성의예요. 나라를 위해 밤낮으로 애쓰고 계신 분들께 전하는 정성이랄까요.”

내가 생긋 미소짓자 경비병은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주변을 살폈다.

“십 분. 그 이상은 힘듭니다.”

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고, 그는 문을 열어 주었다. 나를 따라 옥사 내부로 들어온 알베르는 기묘한 표정이었다.

“왜요?”

“아니, 뭐…… 이렇게 막 뇌물을…… 그래도 됩니까?”

“할아버지가 괜찮댔는데요? 말로 안 먹힐 땐 검이나 돈, 둘 중의 하나를 들면 된다고. 검보다는 돈 쪽이 평화로운 방법 아닌가요?”

“그야 그렇지만…… 아니, 그래도 옳지 못한 방법 아닙니까.”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알베르를 쳐다보았다.

“저들은 황제에게 독까지 먹였는데 우리는 뇌물도 먹이지 말아야 하나요?”

“그, 그건 아니죠.”

“사람이 안 죽었다고 전쟁이 아닌 건 아니죠. 그리고 전쟁에서 방법 가리는 거 봤어요?”

저들은 수단, 방법을 안 가리는데 우리 쪽이라고 가리면 되겠는가. 내가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쳐다보니까 알베르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쪽입니다.”

난 황급히 알베르가 가리킨 곳을 향해 뛰어갔다.

“스승님!”

창살 안의 쟝뤼크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온몸이 고문당한 흔적으로 엉망이었고, 옥사 내부는 비릿한 피 냄새로 온통 가득했다.

“스승님…… 스승님…….”

“……니아나.”

목이 쉬어 쇠 긁는 것 같은 소리가 난다. 나는 창살을 사이에 두고 그가 뻗어 온 손을 붙잡았다.

“괜찮으신 거예요? 네?”

“어떻게든…… 내게…… 거짓 자백을 받아 내려고…… 하고 있어…… 황태자도 나와…… 비슷한 상황일 거다.”

쟝뤼크는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나 때문이야.’

내가 고프레도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끌어들이지만 않았더라면. 자꾸만 눈물이 배어 나와서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세니아나…….”

“네, 네…… 스승님.”

“내겐…… 쉽게 포기하는 제자 따윈…… 없어. 이깟 일로 눈물 바람인…… 제자 또한 두지 않았다.”

“…….”

“경합은 어찌 되었느냐?”

“스승님을 대신해서 아곤을 출전시켰어요.”

“그래……. 그라면 도움이 되겠지……. 출전은 받아 주었어도…… 경합 내용은 고프레도에게 유리할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쟝뤼크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잘 들어라.”

“네.”

“형평성을 고려해서 몇 가지 주제를 주고, 주제 중에서 고프레도와 네가 한 가지씩 선택할 거다. 남은 하나는…….”

“미카엘이 고르겠지요.”

“그래. 고프레도가 가진 비장의 레시피는 모두 갑각류를 메인으로 했어. 바닷가재라든가, 게라든가. 특히 매운 소스를 이용한 바닷가재 요리가 특기인 놈이니 피하도록 해.”

“그럴게요.”

“아발론 주방 뒤뜰에 내 스승이 직접 만들어 묵혀 놓은 장들이 있다. 도움이 될 테니 경합 전에 가져오도록 해라.”

쟝뤼크는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더 설명하고 내 손등을 두드렸다.

“잘할 수 있을 거다.”

“스승―”

우리에게서 얼마쯤 떨어져 시간을 확인하던 알베르가 나를 잡아끌었다.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이제 나가야 해요.”

“하지만―!”

“어서요!”

나는 알베르에게 끌려가며 말했다.

“스승님, 기다리고 계세요. 포기하시면 안 돼요! 제가 곧 꺼내드릴 테니까, 그러니까!”

쟝뤼크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옥사를 나선 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스승님 손이…… 손이…….’

내겐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렇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었다. 쟝뤼크의 한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오른손이었어.’

쟝뤼크는 오른손잡이였다.

“영애.”

어느새 나타난 도미니크가 황궁 복도에 주저앉은 날 일으켜 세웠다.

“가십시오. 날이 밝는 대로 경합이 시작됩니다.”

“저하, 스승님이…….”

“쟝뤼크가 오늘을 예견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까.”

“…….”

“젊은 날을 모두 황궁에서 보낸 사람입니다. 이 주방에 얽힌 탐욕도, 탐욕의 희생자들도, 모두 보고 겪은 사람이에요.”

“…….”

“당신의 손을 잡은 날부터 그는 오늘을 예견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 왔단 말입니다. 책임은 손을 내민 자가 지는 게 아니에요. 잡은 자가 지는 것이지.”

도미니크가 나를 끌어안으며 이어 말했다.

“손 내민 당신은 쟝뤼크를 구할 방법을 고심하면 되는 겁니다.”

나는 도미니크의 허리춤을 잡으며 눈을 꽉 감았다.

‘그의 말이 맞아.’

이럴 시간이 없다.

“저하, 제가 경합을 치르는 동안 우리를 향한 감시가 줄어들 거예요.”

“예.”

“그동안 폐하의 제1집무실을 수색해 주세요. 미카엘이 쓰는 집무실이 아니라 폐하께서 쓰러지셨던 그곳이요.”

“집무실…… 말입니까.”

“아직 스승님이 자백하지 않으셨으니, 제1집무실은 폐하가 쓰러졌던 날 그대로 유지해서 수색해야 하잖아요.”

“예. 그곳은 미카엘이 도착한 이후 봉쇄되었습니다. 제가 살피고 있었으니 누구도 들어가지 못했을 테지요. 다만…….”

도미니크가 미간을 좁혔다.

“봉쇄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현 로열 셰프 고프레도와 수셰프까지 들어갔었고요. 그 틈에 요리에 무슨 수작을 했다면…….”

“요리는 분명히 아니에요. 그러니까 폐하께서 쓰러진 정확한 이유를 밝혀내 달라는 뜻이지요.”

도미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오전. 경합을 위해 대조리장으로 향한 난 단상 위에 오른 미카엘과 이모를 제외한 황비들, 그리고 몇 명의 귀족들을 쳐다보았다.

‘저들 중 우리 사람은 고작 셋.’

과반수가 아탈란 휘하의 귀족이었다. 조리장을 둘러싼 구경꾼 중에도 아탈란 휘하의 귀족들이 꽤 보였다.

“패배는 예정된 거지.”

“멍청하긴. 일부러 망신을 당하러 나오다니.”

이죽이는 소리에 아곤은 괜찮겠느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괜찮아.”

“하지만 아가씨…….”

“맛있다는 말을 듣는 거라면 자신 있잖아. 아곤도, 나도.”

아곤은 빙그레 웃는 날 보고 픽 실소를 흘렸다. 고프레도와 수셰프는 히죽거리며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절대로 질 리 없다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부우우웅―! 경합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와 함께 나와 아곤, 그리고 고프레도와 수셰프는 미카엘 앞에 부복했다. 곧 경합의 주제가 발표되었다.

‘역시.’

스승님의 예상대로 고프레도가 자신 있어 하는 것들 위주였다.

“바닷가재……, 강황……, 양고기……. 아가씨, 저는 양고기라면 자신 있습니다.”

“그럼 양고기로…… 잠깐만.”

나는 재료가 준비된 조리장 뒤편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곤이 로열 키친에 있을 때 고프레도도 함께였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피하자.”

“예?”

“아곤의 특기라는 걸 아는데 양고기에 수작을 부리지 않았을 리 없지.”

“그렇군요…….”

고프레도 측에선 예상대로 바닷가재를 택했다. 나는 고민 끝에 테이블에 놓인 표를 잡았다. 그것을 들어 보이자 곳곳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차피 예견된 패배라 이건가.”

“멍청하긴.”

대조리장은 비웃는 자들로 가득했고, 미카엘은 마지막 주제를 발표했다. 나와 아곤, 그리고 고프레도 측은 미카엘의 앞에 고개를 숙인 뒤 각자의 조리대로 향했다. 첫 시합은 바닷가재를 주재료로 한 요리였다.

* * *

같은 시각, 아발론의 제1집무실.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집무실에 숨어든 도미니크는 다 쉬어 버린 쟝뤼크의 수프를 살폈다. 은침을 찔러본 그가 미간을 좁혔다.

‘역시 봉쇄되기 전 누군가 독을 넣었다.’

“저하.”

함께 제1집무실에 들어온 알베르가 물잔이며 그릇 앞에 놓여 있던 스푼을 가리켰다.

“이상합니다. 음식뿐만 아니라 물잔이며 스푼도 모두 변색되어 있습니다.”

“스푼…….”

“스푼에 독을 발라 둔 게 아닐까요.”

스푼을 든 도미니크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은이야. 독을 발라 두었다면 폐하께서 먼저 알아차리셨을 거다.”

“하면…….”

황제의 식기는 대부분 은으로 되어 있다. 식기에 묻혀 들어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은에 반응하지 않는 독이…….”

“그쪽이 더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폐하께서 드신 독은 은으로 변색되는 독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이 많은 은 식기를 사용해 식사를 하셨는데도 말야.”

“가장 큰 의문점은 어떻게 독을 드셨느냐, 이군요…….”

고민하던 알베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시종장이 아닐까요.”

“시종장?”

“그가 폐하를 붙들고 독을 먹였다면…….”

“그렇다면 반항하셨겠지.”

“……폐하의 옥체에 반항의 흔적은 없었죠.”

대체 어떻게.

도미니크는 서늘한 시선으로 방 내부를 샅샅이 훑었다.

* * *

고프레도가 팔뚝만 한 바닷가재를 단숨에 뒤집어 손질하자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대조리장을 주목하고 있는 요리사들이 흥분된 기색으로 소리쳤다.

“과연 고프레도 님!”

“이십 년이 넘도록 동부에 처박혀 지시만 하던 늙은이나 새파란 애송이는 절대로 따라 하지 못하는 솜씨지!”

으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조리장을 가득 메웠다.

아곤은 고민했다.

‘나도 뒤집어야 하나.’

하지만 젊을 때도 저만한 바닷가재를 단숨에 해체하는 일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때였다.

“우왓!”

좌중이 또 한 번 탄성을 터뜨렸다. 고프레도보다 두 뼘은 작은 세니아나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바닷가재를 단번에 뒤집고, 손질을 시작한 것이다.

‘뭐, 뭐야.’

아곤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언제 이렇게 솜씨가 느셨습니까.”

“재료 손질이 뭐가 대단하다고. 아카데미에서 지겹도록 했어. 아곤, 물이 끓는지 봐 줘.”

“아, 예!”

그는 솥의 뚜껑을 열며 재료를 빠르게 써는 세니아나를 쳐다봤다.

‘손이 빨라.’

고프레도나 수셰프보다도.

물이 끓어오르는 것을 확인한 아곤은 세니아나가 손질해 놓은 채소를 넣으며 시계를 확인했다.

‘한 요리당 한 시간.’

넉넉한 시간이지만, 조림류의 요리를 하기엔 빠듯하다. 그가 자신 있는 요리는 대체로 재료 하나하나에 공을 들여 소스에 푹 절이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경합에선 재료 손질에까지 시간이 걸리니 특기 요리를 하기엔 무리. 아곤은 세니아나가 손질해 놓은 해산물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싱싱하고 좋은 재료들입니다. 회를 떠서 겨자 소스에 무치면 좋겠군요.”

“응, 맛있을 거야.”

세니아나는 순순히 조리대에서 물러났다. 경위가 어떻든지 간에 이번 경합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올린 자는 아곤이었기 때문이다. 세니아나는 고프레도 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퍼포먼스가 화려했다. 애초에 요리 경연이란 남들에겐 축제와 같았다. 조리 과정 또한 일종의 공연. 상대는 그런 면에선 충실하지만, 너무 충실했기에 미묘한 구석이 있었다. 그녀가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저들은 보여 주기에 너무 심취하지 않았어?”

“예?”

“고프레도의 주특기인 바닷가재찜은 섬세한 불 조절로 재료 본연의 맛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들었어.”

“그렇지요.”

“그러려면 껍질과 함께 찌는 쪽이 좋지 않을까.”

“맞습니다, 껍질 안에 진한 바다의 맛이 배어들게 말이죠.”

“그런데 부러 딱딱한 껍질을 벗기고, 화려한 칼질을 보이는 데만 치중하는 게 뭐랄까…….”

세니아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화려한 공연을 보이면 그뿐, 요리 자체에 정성을 쏟는 것 같진 않았다.

“흐음…….”

아곤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다가 이내 고개를 젓곤 손을 움직였다.

“심사자들 중에 제 편이 많으니 안심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

“방심한 쪽이 우리에겐 유리하고요. 아가씨, 겨자를 준비해 주십시오.”

세니아나는 아곤의 지시대로 소스를 준비하며 고프레도를 살폈다.

‘방심했을 뿐이라고?’

그들이 이상하다는 건 시작할 때부터 느끼고 있었다. 저들은 마치 승부는 뒷전인 것 같았다. 승패가 이미 결정된 사람처럼.

‘하지만 그건 이상해.’

시식을 하는 건 심사자들뿐만이 아니다. 오직 심사자들만 맛을 보았더라면 자신은 애초에 승부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합을 지켜보는 귀족들도 시식의 기회를 얻는다. 확실히 제치지 못한다면 역시 승자는 정해져 있던 것이라고 말을 듣기 십상.

‘그런데도 요리엔 집중하지 않는다는 게…….’

쟝뤼크를 대신해 나선 사람이 아곤이기 때문일까. 황도의 화려한 필드와 멀어져 있던 사람이니 저쯤만 해도 괜찮다고 여기고 있을 수도 있었다.

“아가씨, 집중하십시오.”

“어? 으응…….”

아곤은 어느새 바닷가재를 회 치는 것을 마친 상태였다.

‘역시 아곤!’

깔끔하고 섬세한 칼솜씨다. 세니아나가 활짝 웃으며 배합해 놓은 겨자 소스를 내밀었다.

“여기.”

“은은하게 유자 향이 나는데요. 생각보다 맵지 않고요.”

“가재가 싱싱하길래. 소스가 너무 튀면 아까울 것 같아서.”

“훌륭하십니다.”

아곤은 서둘러 바닷가재 회에 어울리는 탱글탱글한 식감의 횟감을 준비했다. 바닷가재는 굽거나 찌게 되면 게살과 달리 살이 단단해지지만, 생으로는 꽤 무른 편이었다. 식감을 위해 탱글탱글한 우럭을 얇게 썰어 가재 살 주변에 꽃잎처럼 펼쳐 두었다.

그리고 윤기 흐르는 부드러운 연어를 정육면체로 작게 썰어 뒤에 뿌리자 횟감만으로도 근사한 모양이 되었다.

“예쁘다!”

“그리고 여기에…….”

아곤이 새로운 해산물을 들었다. 세니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해파리!”

“함께 먹으면 맛있을 겁니다.”

“맞아. 해파리도 겨자에 잘 어울려. 아! 그럼 준비할 게 있지.”

세니아나가 얼른 오이와 당근 등을 채 썰었다. 그녀가 채소를 써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곤의 눈이 커졌다. 프렌시프 성에서 지낼 때보다 확실히 성장했다.

‘바닷가재를 손질할 때도 그랬지만…… 칼을 다루는 게 예사 솜씨가 아니야.’

빠르고 정확한 리듬으로 칼질을 하는 그녀를 본 구경꾼들 또한 혀를 내둘렀다.

“제법인데.”

“귀족 아가씨가 취미로 주방에 선 건 아닌 모양이야.”

“맞아, 꽤…… 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황궁의 총주방장과 수셰프의 실력을 어떻게 따라가겠나.”

“그, 그래! 경험치가 다르다고. 경험치가.”

고프레도의 제자로, 이전 수셰프가 강제로 물러난 뒤에 그 자리에 오른 칼리소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 계집애가……. 고작 채 써는 게 뭐 어떻다고.”

“…….”

“저쯤은 주부들도 얼마든지 하지 않습니까. 그저 귀족 아가씨가 하는 양이 신기해서…… 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흥, 그래 봐야 햇병아리. 저들 하는 꼴을 보아라. 고작 횟감을 겨자 소스에 무칠 뿐이야.”

칼리소는 칫,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첫 번째 조리 시간이 종료되고, 두 개의 접시가 단상 위로 올라갔다. 시종이 손을 올리자 고프레도와 아곤이 앞으로 나서 요리를 설명했다. 고프레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 요리는 바닷가재구이입니다. 이렇게 큰 바닷가재는 살이 너무 단단해서 먹기 힘들기도 하지요.”

미카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오만하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제 요리는 삶기 전 살을 발라내고 칼집을 내서 비법 장을 푼 물에 삶았습니다. 다른 바닷가재와는 비교할 수 없이 연하고 부드러울 겁니다.”

미카엘을 비롯한 심사자들이 그의 요리를 맛보았다.

“음! 과연……!”

바닷가재답지 않게 부드럽다. 1차로 삶아낸 후 연해진 살을 분리해 놓았던 껍질에 다시 넣었다. 거기에 버터와 달걀노른자 등을 바르고 2차로 구운 것이다.

“아주 고소하고 부드럽군요.”

“음, 가재에 버터 향이 잘 배어들었습니다. 황홀한 맛이에요.”

살이 너무 단단한 집게 살은 버리고, 그나마 부드러운 편인 몸통의 살만을 이용한 데다가 대체 육수에 어떤 장을 넣었는지 입에 넣자마자 부드럽게 풀린다.

세니아나와 아곤은 저희들에게 온 고프레도의 바닷가재 요리를 먹어 보았다. 시식한 아곤의 얼굴이 거무죽죽해졌다.

‘맛있다.’

확실히 굉장한 맛이었다. 퍼포먼스에만 치중한 줄 알았는데, 그 와중에도 이런 요리를 내다니. 과연 미식의 나라 길라게온에서도 바늘구멍과 같다는 로열 키친. 그곳의 수장이라고 할 만한 실력이었다. 고프레도의 바닷가재를 먹어 본 세니아나가 미간을 좁혔다.

“키위와 파인애플…….”

그녀의 중얼거림에 고프레도와 칼리소의 표정이 달라졌다. 재빨리 세니아나를 쳐다본 고프레도의 얼굴엔 당황이 역력했다. 아곤이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비겁해!”

세니아나가 굳은 얼굴로 고프레도를 노려보았다.

“키위와 파인애플로 미리 가재 살을 녹여 둔 거죠! 쪘을 때 부드러워질 수 있도록!”

“무, 무슨―!”

“오랜 시간 절여 두지 않으면 이만큼 부드러워지기 힘들어요.”

“무슨 소리야, 그게. 네깟 게 그걸 어떻게 안다고…….”

“안다고요. 내가 다 해 봤으니까.”

“무슨…… 이건 내가 평생을 실험을 거듭해 알아낸 것이다. 너 같은 햇병아리가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키위와 파인애플은 단백질을 녹이는 성분이 다량 포함되어 있잖아요!”

아곤이 헉,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가씨의 칠면조 찜!’

성에서 요리를 시작했을 적에 그녀가 맨 처음 선보인 요리에도 이와 같은 방식이 있었다. 고프레도가 사나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물자 세니아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화려한 퍼포먼스로 사람들을 주목시키고 뒤에선 미리 준비했던 재료와 바꿔치기했죠?”

고프레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마른침을 삼킨 그는 이내 버럭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키위와 파인애플 향을 숨기려고 향이 강한 버터와 달걀노른자를 이만큼이나 넣었잖아요.”

‘그걸 어떻게…….’

칼리소가 주춤 물러나자 아곤이 그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세니아나는 미카엘을 보면서 소리쳤다.

“신성한 경연장에서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저하! 고프레도를 벌하여 주십시오!”

고프레도는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억울합니다! 억측이에요!”

그는 제 요리가 든 접시를 올려 보이며 심사자들에게 물었다.

“제 요리의 어디에서 파인애플이나 키위 향이 난다는 겁니까.”

“난다고요, 향!”

세니아나의 말에 고프레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다 진 싸움이라고 여기니 거짓말이 술술 나오는군. 그렇게 해서라도 나를 끌어내리고 싶나.”

“부끄러운 줄 아세요. 당신은 이 나라 모든 요리사들의 우상이에요. 그런 당신이 부정이라니. 스스로 수치스럽지 않으십니까.”

대조리장이 술렁였다. 아탈란 휘하의 귀족들이나 고프레도를 존경하는 구경꾼들이 목청 높여 고함을 내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거짓말!”

“비열한 수를 쓰는 게 누구인데!”

“허튼수작 말고 물러나라!”

“물러나!”

“햇병아리 주제에 어디서!”

프렌시프 측의 귀족들 또한 얼굴을 붉히고 맞섰다.

“확인도 해 보지 않고 무작정 거짓말이라니!”

“그래! 햇병아리 요리사가 두려워 부정한 수를 쓴 거다!”

미카엘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희게 질린 고프레도와 굳은 세니아나를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하면 제가 시식해 볼까요.”

대조리장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세니아나는 놀란 얼굴로 대조리장에 들어온 사내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 * *

황제의 집무실. 테이블 주변을 샅샅이 뒤지던 알베르는 인기척 소리에 놀라 문가를 바라보았다.

“저하.”

스푼을 든 채 변색된 자리를 살피고 있던 도미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야……!”

“아직 독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이곳에 들어온 일을 어떻게 변명하시려고요.”

“아직은 안 돼.”

세니아나와 약속했다. 쟝뤼크의 억울함을 반드시 풀어 주겠다고. 도미니크가 스푼을 그러쥐자 알베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미카엘이 이런 기회를 놓치겠습니까.”

“…….”

“가뜩이나 저하는 그들에겐 눈엣가시라고요. 들키면 우리까지 범인으로 몰릴 겁니다.”

이 순간에도 제1집무실 문 쪽으로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미니크는 스푼을 꽉 그러쥐었다.

‘대체 어떻게.’

어떻게 황제가 모르도록 은에 노출되는 독을 먹일 수 있었을까. 도미니크가 움직이지 않자 알베르는 그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약속 때문에 목숨을 버리실 겁니까.”

“…….”

“난 당신에게 내 인생을 다 걸었다고. 이렇게 뒈질 순 없어요. 갑시다.”

“…….”

“저하!”

옥신각신하던 틈에 테이블에 놓여 있던 서류가 툭, 떨어졌다. 뒤집혀 있던 서류를 확인한 도미니크가 미간을 좁혔다.

‘이런 게 왜 폐하의 집무실에…….’

황후가 입궁했을 당시 행적을 좇은 일지였다. 도미니크는 무심코 서류를 들었다.

[옥타비우스력 7년 모월 모일.

황후 그라니아는 칩거를 끝내고, 요양을 이유로 황궁을 떠났다. 목적지는 서부의 카렌듈라 가라고 기록되었으나, 황도 길목에서 마차를 놓치고 말았다.]

“폐하께서 이런 걸 왜…… 아무튼 저하, 어서 가셔야 합니다.”

알베르가 채근했지만, 도미니크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서류를 살폈다.

‘이건 그 사람의 필체다.’

황제의 친우이자 도미니크가 태어나자마자 그를 데리고 떠났던 노기사, 그의 필체.

[옥타비우스력 7년. 모월 모일.

황후의 마차를 재추적했다. 카렌듈라 가로 들어가는 마차를 확인했으나, 황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옥타비우스력 7년. 모월 모일.

카렌듈라 후작이 은밀히 동부 별궁 인근을 찾았다. 황족을 잉태하신 레오나 님을 위해 누이를 레오나 님께 보냈다. 누이의 말에 의하면 별궁 인근의 마을에서 황후와 비슷한 차림의 여성을 목격했다고 했다.]

‘동부 별궁?’

그즈음이라면 도미니크의 친모인 세실, 아니, 레오나가 별궁에서 머물고 있을 즈음이었다.

‘황후가 별궁으로 향했다고…….’

대체 왜? 제 모후와 관계된 일이라면 황제가 물샐틈없이 살피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모후에게 손을 대려고 했을 리 없다. 카렌듈라 후작이나 황후는 그만큼 멍청하지 않았으니까.

[옥타비우스력 7년. 모월 모일.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동부 별궁 인근의 마을을 찾았다. 수색해 보니 이상한 내용은 없었다. 늙은 산파 하나가 마을 뒷산의 버려진 신전을 찾았고, 이틀 정도 행방불명된 것 외에는.]

“산파…….”

“저하, 제발!”

“알베르. 미카엘이 몇 년 몇 월 태생이지?”

“그건 왜…….”

“어서.”

“저하보다 반년 정도 늦게 태어나셨지요. 우량아라고 들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눈을 뜨셨고…… 발달이 빨랐다고 하지요.”

알베르가 흥,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신이 다 자란 천사를 내려보낸 게 아니냐고 다들 얼마나 난리를 쳤습니까.”

도미니크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옥타비우스력 7년. 모월 모일.

황후가 환궁했다. 평소보다 수척한 상태였고, 도착하자마자 복통을 호소했다. 기이한 것은 황궁의를 대신해 친정에서 데려온 민간 의사만이 그녀의 궁에 출입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발달이 빨랐던 게 아니고, 일찍 태어났던 거라면?”

“예?”

“미카엘이 나보다 먼저 태어났고, 황후가 그것을 숨겼던 거라면.”

“숨길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황후가 황족을 낳은 것보다 더한 경사가 이 나라에 어디에 있다고…… 잠깐.”

알베르의 얼굴이 굳어졌고, 도미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씨가 아니라면 필히 숨겨야 하는 일이겠지. 그리고 이것이 들통났다는 걸 안 미카엘은 어떤 방법을 택했겠나.”

“……하지만 그걸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폐하의 성정이라면 분명 은밀히 진행하셨을―”

“폐하의 곁에 세작이 있다면 다를 얘기지.”

“설마 범인이―!”

도미니크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 * *

나는 놀란 얼굴로 조리장에 나타난 사내를 쳐다보았다.

“아소!”

조슈아 사비에르. 아카데미 동기이자 사비에르의 장자인 그였다. 아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아는 분입니까?”

“으응……. 사비에르의 장자야.”

“예?!”

그가 여기 어떻게. 아니, 그보다 무슨 생각으로! 나는 대조리장을 가로질러 단상으로 다가가는 아소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의 등장으로 주변이 시끄러웠다.

“후작이 죽고 빚더미에 올랐다면서?”

“그래. 금좌에서도 물러나야 했고, 뭣보다 성녀가 괴물이 되어 죽었다고 해서 사람들이 사비에르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렇게 소식이 느려서야. 새로운 사비에르 후작의 능력이 출중해서 그 많은 빚을 해결하고 다시 황도로 올라왔다잖아.”

내가 정신없던 사이, 그도 많이 변한 모양이었다. 아름답다는 말이 더 어울렸던 그가 어느새 선이 굵직해졌고, 다소 신경질적으로 보이던 얼굴에 여유가 생겼다.

그를 본 아탈란 세력들의 표정은 밝았다. 사비에르는 그들 휘하에서 성장한 귀족가였고, 무엇보다 나와는 악연이었다. 단상 위 심사자 몇몇의 입매가 비틀렸다.

“저하, 새로운 사비에르 후작이 요리에 재능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유명한 신동으로 동부 아카데미에서 은밀히 수련했다지요.”

“시식을 맡겨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묘한 눈으로 조슈아를 바라보던 미카엘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조슈아는 그의 앞에 부복해 고개를 숙이곤, 다시 일어나 요리가 마련된 테이블로 향했다. 고프레도의 요리를 포크로 찍어 유심히 살피던 그가 냄새를 맡았다.

‘아소는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야. 하지만…….’

그가 내게 유감이 없느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부친과 누이의 죽음에 일조한 것은 나였으니까. 어쨌든 그에게 있어서 난 부모·형제를 죽인 원수였다. 불안한 시선으로 요리를 맛보는 조슈아를 응시했다.

단상 위의 귀족이 “어떻습니까?” 하고 묻자 조슈아는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요리를 가볍게 훑고는 미카엘에게 몸을 틀었다.

“제 견해로는…… 글쎄요. 향만으로 부정을 단정하기엔 어렵겠습니다.”

“……!”

나는 굳은 얼굴로 조슈아를 쳐다봤다. 미카엘이 등받이에 깊게 몸을 기대며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고, 좌중은 실소를 터뜨렸다.

“그럼 그렇지. 애초에 그런 미미한 향이 어떻게 증좌가 될 수 있겠나.”

“다만.”

조슈아가 달칵, 포크를 내려놓으며 고프레도의 조리대를 바라보았다.

“프렌시프의 주장이 허무맹랑한 것은 아닙니다. 조리 과정에서 보지 못했던 재료의 맛이 느껴지긴 하지 않습니까.”

고프레도의 보조로 나온 칼리소가 펄쩍 뛰며 말했다.

“그건 고프레도 님의 비법 육수에서 배어든 겁니다.”

“비법 육수는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렇구나. 가재에만 정신이 팔려서 그 점을 놓치고 있었어.’

좌중 속 누군가의 말처럼 이 정도로 미미한 향은 증거가 되기 어렵다. 조슈아는 내가 놓친 점을 지적하고, 그게 훨씬 훌륭한 꼬투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준 거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프레도와 칼리소 쪽을 쳐다보았다.

“비법 육수를 조리장에서 직접 만든 게 아니라 기존에 만들어 둔 것을 썼나요?”

“그, 그건…… 하지만 그쪽도 선대 로열 셰프가 만든 장을 가져왔고…….”

“경합의 규칙!”

내가 소리치자 칼리소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조리장에 들여오는 모든 소지품은 경합 관리처에 허가를 받는다!”

그리고 허가받은 재료는 상대방에게 공유되는데 이건 모두 형평성을 위한 규칙이었다.

“우린 비법 육수 같은 것을 가져온다고 들은 적 없어요.”

“…….”

나는 얼른 미카엘을 바라봤다.

“저하, 기존에 만들어 둔 것을 들여와 요리했다면 애초에 조리장에서 경합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게 아닌가요? 공정한 승부가 아닙니다!”

고프레도와 칼리소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아탈란 휘하의 귀족들조차 당황하여 말을 잃었다. 모두의 시선이 미카엘에게 향했다. 느른히 회장을 훑은 미카엘은 이내 실소를 흘렸다.

“영애의 말이 옳다. 이번 승부는 승패를 가릴 가치가 없지.”

“하면 실격을―!”

귀족 중 하나가 소리치자 아탈란 휘하의 귀족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첫 시합은 고프레도의 패배로 하고, 경합을 지속하시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부정을 저지른 자는 실격이오!”

“고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경합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한 멍청함은 탓하여 마땅하지만, 실수로 비롯된 것이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오.”

“신성한 경합장을 부정으로 더럽힌 작자가 로열 셰프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겠소?!”

“하면 자격을 증명하지 않고 오직 상대의 실수로 로열 셰프가 되는 것은 옳단 말이오!”

“하지만……!”

경합장이 터질 듯 시끄러워지자 미카엘이 나섰다.

“그대들의 의견이 모두 틀리지 않았다.”

미카엘이 의자 팔걸이에 팔을 받친 채 턱을 괴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열 키친의 경합은 황궁에선 드문 축제다. 난 모처럼의 축제를 더 즐기고 싶어. 첫 번째 경합은 패배로 처리하고 지속하지. 물론―”

그가 나를 보며 미소지었다.

“상대 쪽의 수긍이 있어야겠지만.”

회장의 시선이 나와 아곤에게 모였다. 아곤이 곤란한 표정으로 내게 속삭였다.

“틀렸습니다, 아가씨. 미카엘 황자가 이리 나오는 이상 우리는 수긍하는 수밖에…….”

나는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미카엘을 올려다보았다.

“겁박입니까.”

“겁박?”

순간 아탈란의 귀족들이며 좌중들이 “저, 저―! 감히 황제의 대리인을!”이라는 둥, “아무리 프렌시프 영애라도 너무 무례하지 않소!”라는 둥 고함을 내질렀다. 미카엘이 자세를 바로 하며 호선을 머금었다.

“그럴 리가. 내 의견을 말했을 뿐이지.”

“정말 실수가 맞는 겁니까?”

“흐음.”

“고프레도 님에게서 반성의 빛을 찾아볼 수 없지 않습니까. 실수를 하였다면 반성하고, 사과해야 옳지요.”

내가 고프레도를 가리키며 말하자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미카엘이 그런 그를 힐끔 보며 말했다.

“그렇다는군.”

“…….”

“내 생각에도 영애의 말이 맞는 듯싶은데.”

고프레도의 자존심이 하늘을 찌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본래 미천한 출신이었던 그는 실력이 없는 주제에 귀족의 핏줄이란 이유 단 하나만으로 승승장구하는 요리사들을 몹시 혐오했다.

로열 셰프가 되기까지 오랜 세월 귀족 요리사들에게 치였던 그가 거나하게 취해 ‘다시는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고 선언한 일은 유명했다. 고프레도는 마디가 하얗게 셀 때까지 주먹을 말아 쥐고 있었다.

“고프레도, 이깟 일로 내 언성이 높아지게 할 참인가.”

칼리소가 “스, 스승님.” 하며 그를 불렀다. 고프레도는 늪지에 빠진 사람처럼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내 실수를 사과하지. 긴장이 풀렸었네.”

아곤은 인상을 찌푸리며 “허…….” 실소를 흘렸다.

“그건 내가 만만해 보였다는 뜻이 아닌가.”

“원하던 사과라네.”

“이놈, 고프레도!”

고프레도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이어 말했다.

“당신이 내 선배였던 것은 아득히 오래된 일일세. 나는 이 나라 요리사들의 수장이니, 예의를 잊지 않는 게 좋겠군.”

나는 쟝뤼크에게 그가 로열 키친에 있던 시절의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그때도 아곤은 아주 상냥하고 바른 사람이었다. 권력자의 청으로 특별 입관한 고프레도는 요리사들에게 외면받았는데, 그 와중에도 그를 살뜰히 살펴 주고 지도해 준 게 아곤이라고 했다. 은인에게 무례하고, 경합에선 부정을 저지른다.

‘대체 얼마나 썩은 거야?’

나는 오만한 고프레도를 똑바로 직시했다.

“받지 않겠어요.”

“뭐? 저하의 말씀을 듣지 않았느냐! 경합을 계속 보고 싶으시다고……!”

“명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고프레도를 쏘아본 난 목소리를 바짝 낮추고 이어 말했다.

“그래, 미카엘의 의견이 그렇다면 우리는 경합을 계속할 수밖에 없겠지. 이번 경합을 끝내도 쉽게 자리를 내주려 하지 않을 테니 다른 경합을 해야 할 테고.”

“잘 아는군.”

“하지만 죽어도 당신과는 경합할 수 없다고 하면 어쩔래?”

“너……!”

“이번에 보니까 아탈란엔 경합이 가능한 요리사들이 대거 포진해 있던데.”

“…….”

“당신과 못 하겠다면 다른 사람을 보낼 거야.”

“한시가 급할 텐데. 차라리 나와 경합을 치러서 빠르게 끝을 보고 싶지 않으냐.”

“상관없어. 하지만 당신은 다르지 않나. 그 자리, 다른 사람에게 뺏기고 싶어?”

“…….”

“당신 목줄, 우리가 쥐고 있단 말이야.”

그제야 고프레도의 오만한 표정이 무너졌다. 그는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숙였다.

“사과…… 드립니다…….”

목소리에 처참한 심정이 그대로 묻어났다.

“무엇을요?”

내 말에 귀 끝까지 붉게 물든 그가 으득, 이를 갈며 대답했다.

“아둔한…… 실수로 경합장을 어지럽힌 점, 그런 와중에도 인정하지 않고 오기를 부린 점, 부족한 주제에 실력을 과신하여 긴장을 풀고 있던 점…… 모두.”

“…….”

“제 잘못이 맞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이해하여 주시길 청합니다.”

“그래서요?”

“……될 수 있다면, 아니, 제발…… 경합을 계속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곤은 우물쭈물하며 나를 쳐다봤고, 난 한참을 고개 숙인 고프레도를 보고 있었다.

“아곤.”

“예, 예?!”

“제대로 사과받았어?”

“아, 예! 제대로…… 예, 아주 제대로지요.”

그가 히죽 입꼬리를 올린 후에야 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아곤 님께선 아둔하고 비열한 실수를 너그럽게 이해해드리겠다고 하십니다.”

“……감사드립니다.”

그에게 감사까지 알뜰히 챙긴 후에 미카엘에게 말했다.

“경합을 이어가도록 하지요.”

미카엘은 손등으로 입가를 가린 채 부들부들 떨다가 곧 소리까지 내며 폭소했다.

‘왜 저래.’

미카엘이 너무 웃어서 괴로운 표정으로 여전히 잔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주 너그러운 결정이었어. 잠시 휴식 후, 두 번째 경합을 시작하지.”

고프레도는 미카엘의 말이 끝나자마자 창백한 얼굴로 도망치듯 회장을 빠져나갔다. 난 아곤과 함께 우리의 조리대로 향했다. 아곤도 미카엘만큼이나 유쾌한지 조리대를 정리하는 동안에도 껄껄 웃고 있었다.

“살다 살다 고프레도에게 이런 사과를 받을 줄이야.”

“그렇게 좋아?”

“그러믄요! 제가 아가씨 덕에 호강합니다.”

“미안해. 이런 경합, 불편할 텐데……. 나도 할 수만 있다면 경합을 종료하고 싶었지만…….”

“아닙니다. 아가씨의 말마따나 어차피 다른 경합을 치러야 할 테고, 우리에겐 일 분 일 초가 급하죠.”

그는 빙그레 웃었고, 나는 그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황제의 제1집무실. 문 너머로 느껴지던 인기척 소리는 다행히 집무실을 지나쳤다. 알베르는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살폈다.

“이건 이십 년이 훨씬 넘은 자료가 아닙니까. 폐하의 최측근이 작성한 일지를 어째서 이 시점에서 얻으셨을까요?”

“지금에서야 얻은 게 아니라 이제야 꺼낼 생각이 드신 거겠지.”

“예?”

“폐하께선 처음부터 미카엘이 당신의 핏줄이 아니라는 걸 알고 계셨을 거다.”

알베르가 기함했다.

“말도 안 돼! 그렇다면…… 설마.”

도미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미카엘의 혈통을 밝혀내고 황후를 내쳤더라면 서부와 황실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었을 거다.

당시엔 대륙 전쟁의 막바지였으므로 무엇보다 제국의 화합이 중요한 시점이었다. 전쟁 후엔 친자식 간의 골육상쟁을 피하기 위해, 또 도미니크를 지키려 미카엘을 전면에 세운 거다.

“폐하가 이 자료를 찾은 것을 아는 건 시종장일 겁니다. 그놈이 범인이니 잡아서 자백을 받아 내면…….”

“무작정 잡아서 고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증거가 필요해. 그보다 이 자료가 더 큰 수확이지.”

“예.”

알베르는 페이지를 넘기려다가 긴장으로 땀이 잔뜩 배어 나온 손을 바지춤에 비볐다. 그 후에야 다시 페이지를 넘기며 내용을 확인하고 일지를 내려놓았다.

“이거면 미카엘을 실각시킬 수 있을 겁니…… 왜 그렇게 보십니까?”

도미니크가 알베르의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아, 아니, 왜…….”

“이거다.”

“예?”

알베르는 의미를 알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고, 도미니크는 그를 붙잡은 채 서둘러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 *

조리대를 정리하고, 아곤은 재료를 살피러 갔다. 나는 내가 뽑은 경합의 주제가 적힌 나무 조각을 쥔 채 눈을 꽉 감았다.

‘이 재료면 내 특기 요리를 만들 수 있어.’

하지만 첫 번째 경합처럼 쉽지는 않을 거다. 고프레도는 약이 바짝 올랐고, 아탈란은 궁지에 몰렸으니 이번 경합은 더욱 어려워지게 생겼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지?”

미카엘의 목소리에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왜 내려오셨어요?”

“보고 싶어서.”

“왜 자꾸 이상한 말씀만 하시는지…….”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물을 것도 있고.” 하고 말했다.

“말씀하세요.”

“내 청혼에 대한 대답, 아직 못 들었는데.”

“저하.”

“가장 높은 자리에서 군림하도록 해 줄 수 있어. 나라면 지금 영애가 처한 상황을 단번에 뒤집을 수 있고.”

나는 미카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저를 행복하게 하실 수는 없으세요.”

“도미니크의 곁에선 행복하다는 말인가. 그와 내가 다른 게 뭐지?”

나는 쟝뤼크의 레시피 수첩을 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경합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저하. 돌아가 주세요.”

내가 등을 돌리자 그가 날 붙들었다.

“나도 네게 다정할 수 있어. 그 녀석만큼 너를 사랑할 수 있다고 확신해.”

“……왜 저인데요.”

“처음이라서.”

“네?”

“내게 선의를 베푼 사람.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사람. 영애가 처음이라.”

내가 간호해 주었던 때를 잊지 못하는 건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만이 아닐 거예요. 저하 하나만을 바라보며 사신 황후 폐하도 계시고, 또 저하를 신뢰하는 황제 폐하도 계시니―”

“그게 내 딱한 점이지. 부모가 모두 이기적이거든.”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손을 끌어 제 뺨으로 가져갔다.

“여자들은 가여운 남자에게 약하지 않나. 가엽잖아, 나.”

“솔직히…… 황후 폐하는 모르겠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진심으로 저하를 사랑하신다고요.”

“목수가 망치를 사랑하나? 요리사가 식칼을 사랑해? 아니, 그저 필요로 할 뿐이야.”

“…….”

“폐하께 난 그저 차양에 불과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빗물과 눈발에서 지키기 위한.”

난 미카엘의 가라앉은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폐하께 가장 소중한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권력, 나라.”

“그렇게 소중한 것을 아무리 목적을 위해서라도 빌려줄 수 있을까요?”

“…….”

“프렌시프 저에 금으로 된 올빼미 상이 있거든요?”

그가 갑자기 무슨 말이냐는 듯 미간을 좁혔고, 난 여상하게 이어 말했다.

“번쩍번쩍하고, 올빼미와 똑같이 생겨서 진짜로 무섭단 말이에요? 그걸 벌벌 떨면서도 매일같이 닦는 사용인들이 가엽기도 하고요. 그래서 보는 것만으로도 싫었어요.”

“…….”

“그런데 지금은 소중해요. 가끔 저도 닦아요. 앞에 앉아서 주절주절 떠들기도 하고요.”

“고가의 보물이라서?”

“그런 건가 싶었지요. 하지만 아니었어요. 팔 기회가 무수히 많았어도 결국 팔지 않았거든요.”

나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정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 올빼미가 너나 가족을 해하여 든다면 다를걸.”

“실수로 베이게 할지는 몰라도 정말로 공격하려 들지는 않을걸요.”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지?”

“정이라는 건, 그런 믿음이 들게 만드는 거니까요.”

미카엘은 허탈하게 웃었고, 곧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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