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장(8권) (22/24)

로열 셰프 영애님 8권 (완결)

22장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경합이 시작되었다. 내게서 메뉴를 들은 아곤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미간을 좁혔다.

“푸아그라와 송로버섯을 쓰시겠다고요. 거기에 캐비어를 곁들여서?”

“응! 재료장에 있더라고.”

윤세나의 세계에서는 무려 ‘세계 3대 진미’라고 불리던 것들이다. 여기서도 고급 식재료로 제대로 맛을 내기엔 까다롭다고 여겨졌다. 아곤은 미묘한 얼굴이었다.

“다뤄 본 적이야 많지만…… 아가씨, 그것들은 이번 경합의 주재료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무엇보다 주재료를 포함한 그 세 가지는 모두 향과 개성이 강해서 한 그릇에 내기엔 적합하지 않아요.”

“이겨야 하는걸! 나, 스승님에게 푸아그라 손질하는 법과 캐비어 요리를 많이 배웠어. 송로버섯은 로열 키친에 들어와서 많이 다뤄 봤고.”

“…….”

“아곤이라면 나보다 더 잘할 거야. 그렇지?”

나를 한참 쳐다보던 아곤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조리대에서 물러났다.

“직접 하십시오.”

“뭐?”

“제레미에게 말씀하셨잖습니까. 경합에 나서는 건 아가씨일 거라고. 저는 첫 번째 경합만으로 할 도리를 다한 듯싶습니다.”

그렇기야 한데 말이지요. 마냥 자신감 넘치기엔 고프레도와 내 사이엔 경험이라는 강이 있었다.

‘어? 나 지금 요리하는 게 겁나나.’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 손을 내려다보았다. 선생님, 아니, 엄마와 단둘이 살았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요리는 내게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취미이자 특기였고, 생계의 수단이던 소중한 것.

취미가 생계 수단이 되면 괴롭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매일 매일 행복했다. 그래서 이 세계로 온 뒤 요리를 배운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뻤나. 고급 요리, 어려운 요리를 배웠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조금 더 깊이 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는 게 기대되고, 잠드는 게 아쉬웠던 시간들. 분명 그럴 때가 있었는데, 난 왜 두려워졌을까. 애초에 스킬이 필요한 어려운 요리를 척척 만들어 내고, 상대방에게 승리하며 명예를 차지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는데.

‘져도 괜찮아.’

이길 수 있는 요리가 아니라 맛있는 요리를 하자. 어차피 이 경합은 내게 몹시 불리하다. 여기서 하나를 더 얹는다고 해서 딱히 달라지는 건 없다. 나는 히히 웃으면서 아곤을 보았다.

“아무래도 셋 다 섞는 건 힘들겠네.”

“이제야 앞이 제대로 보이시는 모양입니다.”

아곤이 어흠, 헛기침했고 난 민망한 얼굴로 칼을 잡았다.

‘하기로 한 걸 하자.’

단상 위에서 절대로 질 리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당황할 정도로 맛있게.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켜고, 테이블에 놓인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번 경합의 주재료는 ‘고춧가루’였다.

* * *

고프레도는 보조인 칼리소에게 손을 뻗었다.

“스푼.”

“…….”

“스푼!”

고함에 놀란 칼리소가 펄쩍 뛰며 스푼을 찾다가 조리대 위의 소스 통을 와르르 쓰러트렸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못해!”

“죄, 죄송…… 죄송합니다, 스승님.”

“대체 뭘 보고 있기에…….”

고프레도는 칼리소가 물끄러미 보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니아나 프렌시프?’

빌어먹을 계집애에게 한눈을 파느라 아까운 조리 시간을 허비한 칼리소를 노려보았다.

“무슨 헛생각을 한 거냐.”

“아니, 그게…… 저…… 냄새가 좋아서…….”

칼리소가 머뭇머뭇 변명을 하며 고프레도의 손에 스푼을 쥐여 주었다. 그러자 고프레도는 쯧,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가열 중인 국물 요리의 향이 강한 것은 당연하지.”

“저쪽은 두 번째 경합에 프렌시프의 요리를 낼 생각인 것 같습니다.”

“멍청한 게지. 이런 중요한 때에 칼 잡은 지 얼마 안 된 애송이를 내보내다니.”

경합에서 애제자의 실력을 선보이기도 하지만, 디저트를 내는 세 번째 경합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것도 각별하게 아끼는 애제자에게나 허락되는 스승의 배려였다. 이런 큰 경합에서 실력을 선보이는 것만으로도 요리사의 주가가 크게 상승하기 때문이었다. 칼리소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이름을 알릴 기회라고 여겼는데, 스토브 앞에는 서지도 못하겠구만.’

어차피 이만큼 귀족들이 포섭되어 있다면 이기는 게 당연한 데도,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겠다고 야단이었다.

“세 번째 경합에선 제게 기회를 주실 거죠? 야심작인 블루베리 팬케이크를 하려고 합…….”

“쓸데없는 소리. 그렇게 빵이 굽고 싶거든, 빵집에라도 가지 그래!”

“그게 아니라 뭐가 됐든 불 앞에 서고 싶어서……. 프렌시프, 저 녀석이 참 재밌게 하는구나 싶고…….”

“뭐?”

“눈이 반짝반짝합니다. 요리하는 게 재밌는 모양이에요.”

세니아나는 소스를 이리저리 배합하고 맛을 보며 “음! 좋다. 이걸 활용해 볼까 봐!” 소리쳤다. 그러느라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면서.

“별…….”

제깟 게 저를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한 데도 즐거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세니아나의 요리를 지켜보던 이들이 픽 실소를 흘렸다.

탕, 탕, 탕. 채소를 써는 소리가 듣기에 굉장히 좋았다. 그녀는 재료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피고 채소 부스러기 하나까지 싹싹 씻었다. 젊은 요리사가 픽, 웃으며 말했다.

“채소를 껍질까지 쓸 생각인가.”

그 소리를 들은 세니아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껍질에 영양분이 얼마나 많은데! 육수로 내면 맛도 좋다고.”

“할머니냐.”

그 말에 좌중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네. 꼭 우리 할머니 같다. 꼭 저렇게 요리하셨는데.”

전문적으로 배우고 필드에서 활약하는 요리사들처럼 화려한 맛 없이 투박하나 섬세하게 움직인다.

“맞아, 우리 어머니도. 저 소리를 들으면 식사가 기대돼서 완성도 전에 주방을 기웃거렸었지.”

“우린 아버지가.”

“아, 맞아. 우리 아버지도 낚시 다녀올 적엔 꼭 저렇게 생선으로 요리하셨어.”

좌중의 시끄러운 수다를 들은 아곤은 쿡쿡 웃으며 세니아나를 지켜보았다. 그녀의 특별한 무언가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요리를 전문적으로 배워서 화려한 재료와 기술, 레시피에 몰두하는 요리사가 아니라서. 그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좋고, 제 음식을 좋아해 주는 게 기뻐서 기상천외한 요리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기이한 조합도 두려워하질 않지.’

실패하면 아쉬운 거고, 성공하면 기쁠 뿐. 그건 그녀가 전담 요리사를 두고 매번 완벽한 요리를 먹고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성껏 만든 따뜻한 요리는 모두 훌륭하다.

세니아나는 생선을 잘 씻은 후 뚝딱뚝딱 잘라서 육수에 집어넣고, 다듬어 놓은 채소를 듬뿍 올렸다.

“아! 아가씨 제가 돕겠습니다. 생선 비린내를 제거할 수 있도록 이전에 쓴 유자를…….”

“응? 아니 됐어.”

“하지만 비린내가―”

“흐르는 물에 잘 닦아서 쌀뜨물에 담가놨는걸. 생선 비린내 성분은 수용성이라서 물에 잘 씻기만 해도 사라지는데 쌀뜨물에 담가 놓기까지 해서…….”

“쌀뜨물이요?”

“응, 쌀뜨물에는 전분이 있어서 비린내를 사라지게 하는데…… 아무튼 그래. 탕을 할 거기도 하고, 거기에 쑥갓도 올릴 거라서 괜찮아.”

탕? 아곤이 눈을 끔뻑이자 세니아나는 “괜찮아, 괜찮아.” 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고추장과 고춧가루, 마늘과 생강 등을 듬뿍 넣고 탁, 탁, 소리가 나도록 저었다. 그리고 양념을 냄비에 적당히 부은 뒤, 냄비 뚜껑을 약간 어긋나게 닫은 다음 불을 켰다.

탕에 열이 오르기 시작하자 매콤한 향이 조리장에 진동을 했다. 어느 정도 탕이 끓기 시작한 후, 시간을 살피고 나서 숙주와 쑥갓을 올렸다. 다음은 잎채소를 씻고, 다 지은 밥을 휘적휘적 뒤집었다. 마지막으론 그저 돼지고기를 잘라서 팬에 구울 뿐이었다.

“아가씨, 이제 5분도 남지 않았습니다. 제가 도울 테니 할 일을 알려 주십시오.”

“끝인데?”

“예?”

“끝입니다.”

세니아나는 고기 기름이 고인 프라이팬을 개수대에 집어넣으며 생긋 웃었다.

‘이게 끝이라고?’

세니아나의 요리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고프레도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뭐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중요한 시합에서 고작 저까짓 요리라니. 경합 종료를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리고, 세니아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심사대에 쟁반을 올려 두었다. 갖은 정성을 다해 만든 요리를 그녀의 요리 옆에 내려놓은 고프레도가 속삭였다.

“무슨 수작이냐.”

“왜요?”

“중요한 경합에 고작 이까짓 요리를……!”

“고프레도 님도 고작 순대를 만들었잖아요.”

“순대?! 이건 그냥 순대가 아냐! 송로버섯과 함께 A급 살치살로 만들었고, 특제 칠리소스와 함께 먹으면……!”

“맛있어요, 제 요리.”

“뭐?”

“맛있다고요. 하면서 엄청 즐거웠어요.”

그럼 됐지 뭐, 하는 표정으로 고프레도를 쳐다본 세니아나가 히죽 웃었다.

이제 심사의 시간이었다. 고프레도의 요리가 먼저 심사되었다. 그의 요리를 먹은 이들의 표정은 모두 만족스러웠다. 무거울 정도로 진한 맛에 질려 하나를 모두 먹은 사람은 없으나, 훌륭한 요리라는 데엔 이의가 없었다. 다음은 세니아나의 차례였다. 요리를 살핀 세니아나가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안 식었어요. 뜨거울 때 드셔야 더 맛있는데. 드셔 보세요.”

미카엘이 묘한 얼굴로 요리를 바라보았다.

“설명은 그것으로 끝인가.”

“아, 매운탕과 삼겹살 구이, 그리고 밥이에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조합이랍니다.”

“……이번에도 생선인가.”

“첫 번째 경합에선 저희의 가재 요리를 못 드셨으니까요.”

그녀가 “원래 회를 먹고 난 뒤엔 매운탕이기도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사자로 참석한 샤르파크 후작이 기가 막힌 얼굴로 쟁반을 내려다보았다.

“삼겹살은 또 뭐야…….”

“그건 안심 윗부분에 기름기가 많은…… 구이로 하면 맛있어요.”

얼핏 보기에도 화려한 고프레도의 요리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아주 투박하고도 밋밋하다.

‘냄새는 좋지만…….’

서부 대표로 참석한 에듈라 백작은 다 이긴 싸움이라는 듯 실소를 흘렸다.

‘이런 요리라면 고프레도가 고생해서 경합을 치를 이유가 전혀 없군.’

다들 당황한 얼굴이라 백작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자, 다들 어서 시식합시다.”

“어떻게 이런 요리를…… 내 성의 하인도 이런 요리는 내게 안 내올 거요.”

“영애가 애써 만든 요리이니 맛이라도 봐 줘야지요.”

에듈라 백작은 먼저 삼겹살이라는 것을 들었다. 세니아나가 “거기 있는 기름장이나 쌈장에 찍어 드세요.” 하고 말하자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주황색 소스를 쿡 찍어 입에 물었다.

“으음.”

소에 비에서 약간 질긴 감이 있지만, 아주 괜찮은 맛이다. 씹을 때마다 고소한 육즙과 기름이 듬뿍 배어 나오고, 지방은 약간 느끼한 듯하나 촉촉하고 거슬거슬한 살코기와 함께 어우러지니 몹시 괜찮은 조합이었다.

“어머, 이렇게 기름기가 많은데 기름장과 잘 어울려요. 짜지만 고소해서……!”

삼겹살 구이를 맛본 귀족이 손끝으로 입을 가리며 주억거렸다.

“소와는 다른 풍미군. 이 쌈장이라는 것이 아주 괜찮아. 살짝 매콤해서 삼겹살이란 부위의 느끼한 맛을 잡아 주는군.”

“하지만 많이 먹기엔 부담스럽겠소.”

그러자 세니아나가 “그럴 땐 매운탕을 드셔 보세요.” 하고 말했다. 삼겹살을 세 조각째 삼킨 샤르파크 후작이 얼른 매운탕을 맛보았다.

“크으―! 술이 당기는 맛이군!”

다소 맵지만, 아주 얼큰하다. 푹 익은 생선 살은 담백했고, 생선과 함께 익은 채소의 맛이 듬뿍 배여 있었다. 식도를 타고 뜨겁고도 매운 국물이 스르륵 흘러내려 갈 쯤엔 어느새 다시 삼겹살을 찾게 되었다.

샤르파크 후작은 제게 돌아간 다섯 조각의 삼겹살을 모두 해치우고 하이에나처럼 주변을 살폈다. 삼겹살은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시식자들에게 돌아갔는지, 세니아나가 든 그릇엔 남은 게 없었다.

‘에듈라 놈팡이가 남겨 두었군!’

“안 먹을 거요? 그럼 내가?”

“아니, 누가 안 먹는다고 하였소! 남겨 둔 거요!”

샤르파크 후작이 쯧, 혀를 찼다. 누가 좀팽이 늙은이 아니랄까 봐 좋은 것은 꼭 남겨 두고 찔끔찔끔 먹는다.

“마음에 안 들면 주시오. 내가 먹을 테니.”

“누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였소!”

“하면 고프레도의 요리보다 맛이 좋소이까?”

“그, 그건……!”

에듈라 백작은 당황해서 헛기침을 했다.

“판가름하기엔 이르니 더 시식을 해 봐야 한다는 소리요.”

그가 팔로 그릇을 슥 가리자 샤르파크 후작은 다른 먹잇감을 찾았다.

“렉스터드 백작! 더 안 먹을 거면 내가……!”

“어머, 이거 왜 이래요!”

그녀가 후작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

“샤르파크 공, 품위를 지키세요.”

“품위는 무슨. 다 묻히고 먹는 그쪽이나…….”

어찌나 급하게 먹었는지 입가가 새빨갰다.

* * *

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접시를 싹싹 비운 귀족들을 쳐다보았다. 입 짧은 미카엘까지 남김없이 모조리 먹었다.

‘기뻐!’

메인 요리인 매운탕보다 삼겹살 쪽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난 기분이 좋았다. 생선보다 고기이긴 하지.

‘삼겹살은 언제나 옳고.’

내가 한 요리를 맛있게 먹어 주는 건 언제나 행복한 일이었다. 아곤도 조리대에 남은 삼겹살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삼겹살이라는 거군요. 으음, 소와는 다른 풍미지만 맛이 아주 좋습니다.”

“아곤.”

“매운탕이 삼겹살의 기름기로 더부룩한 속을 정리해 주고…… 특히 이 쑥갓의 향이 아주 훌륭한……!”

“아곤!”

“예?”

“이리 와서 서야지. 거기에 있으면 어떻게 해.”

나는 먹는 데 정신이 팔린 아곤을 끌고 왔다.

“냄새가 너무 좋은 데다 다들 맛있게 먹는 모습에 궁금해서…… 이런.”

“고마워.”

“고프레도의 요리보다 저는 이쪽이 훨씬 만족스럽습니다. 제대로 승부하면 분명 아가씨의……!”

“제대로 승패를 가리지 않을 거야, 저들은.”

나는 귀족들을 쳐다보았다. 요리를 다 먹은 후엔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더니만, 어느새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고프레도는 저들이 내 요리를 시식할 땐 당황하더니만, 어느새 다시 기세등등해져 있었다. 아곤이 앓는 신음을 흘렸다.

“이런 식일 줄이야 알았지만, 분합니다.”

저들의 대부분이 고프레도의 요리보다 내 매운탕과 삼겹살을 더 좋아했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 고프레도의 손을 들어 주려고 하겠지.’

에듈라 백작이 소리쳤다.

“그럼 이제 결과를 말씀해 주시죠.”

그때, 내가 번쩍 손을 올렸다.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건 결과 발표 후에……!”

“제가 요리에 수작을 좀 부렸습니다.”

난 생글생글 웃으며 덧붙였다.

“아주 위험한 수작이요.”

“뭐, 뭐?!”

사람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떨리는 동공으로 빈 그릇을 보던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고 실소를 흘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유쾌한 농담이라는 듯 낄낄거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더러는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나 위험한 농담인지 자각하지 못하는 거요? 황궁에서 독을 소지하고 있다는 건…… 더욱이 성녀가!”

샤르파크 후작도 픽 웃으며 “장난엔 재주가 없군.”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입니다.”

“프렌시프……!”

“독을 넣었다고는 하지 않았지만, 사람에 따라선 아주 위험하지요.”

회장이 술렁이기 시작해서 나는 몇 걸음 앞으로 나서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요리엔 누아제들을 사살하는 약이 들었습니다.”

“뭐, 뭣?! 거짓말! 그런 약이 있을 리가……!”

“하면 프렌시프 령의 누아제들을 제가 어떻게 죽였겠습니까.”

사실은 기사들을 누아제로 만들어서 물리쳤지만, 저들은 모를 것이다. 아탈란에서 누아제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을 말해 주었을 리 없으니까.

‘그야 삿된 자가 최고의 무기인 작자들인데, 삿된 자와 누아제를 물리칠 수 있는 간편한 방법이 있다고 말해 줄 리가 없지.’

접착제를 팔아야 하는 회사가 구매자들에게 ‘사실은 우리 상품에 문제 있어요. 물에 닿으면 녹아 버린답니다!’ 하고 고백한다면 누가 구매하려 들겠는가.

단상 위의 귀족들이 벌떡 일어나거나 구토를 하려 애쓰는 둥 법석을 떨었다. 샤르파크 후작을 비롯한 프렌시프 휘하의 귀족 셋을 빼면 하나같이 전부.

‘역시 저들도 성식을 복용했구나.’

사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타국, 그것도 적대국이었던 길라게온의 귀족들을 포섭하면서 아탈란이 안전핀 하나 꽂아 두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함께 성식을 나누어 먹는 건 무엇보다 강력한 연맹장이 되었을 거다.

‘프렌시프 령에 쳐들어왔던 사제가 누아제를 조종했던 것처럼, 저들도 확실하게 조종하려 들었겠지.’

끝까지 거부하는 귀족이 있다면 카트린 르마르에게 그러했듯, 사제를 잠입시켜 억지로 성식을 먹였을 것이다. 그리고 누아제로 변화한 기미가 보여 당황한 귀족들에겐 이렇게 말했을 터.

[누아제가 된다고 해서 모두 삿된 자가 되는 건 아닙니다. 저희에겐 정화할 방도가 있지요.]

방법 같은 건 없는 주제에 그런 허풍으로 사람들을 달랬을 거다. 그리고 내 추측은 르마르 공작으로부터 사실임을 확인받았다.

“몸이 나른해지고, 졸음이 오지 않으세요? 목이 타지는 않나요? 약의 효과입니다.”

샤르파크 후작이 “으응?”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떠서 나는 그에게 얼른 눈치를 주었다.

‘쉿, 쉿. 누아제가 아니라도 모두 같은 증상이라는 건 잘 안다고.’

그건 식곤증이고, 또 짠 음식을 대량으로 섭취해서 느끼는 갈증이니까. 이상한 점을 느낀 귀족 누아제들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상관없었다. 바보가 한 사람만 있으면 괜찮거든.

“사, 살려 줘! 나는 누아제라고!”

그렇지. 이겁니다. 조리장이 시끄러워졌다. 희게 질린 귀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살려 달라 애걸하는 남자를 붙들었다.

“실바트롱 백작, 가만히…… 제발!”

“아악! 이래서 대사제의 협박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어. 누아제만 죽일 수 있는 약이라니…… 그런 말은 못 들었다고……!”

“입 다물어요!”

그러자 좌중 속에서 내가 원하는 반응이 슬슬 나오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러게 말이야. 대체 이게…….”

지금까지 조용히 경합을 관전하던 아빠가 나섰다.

“누아제라. 그게 무엇이기에 다들 이리 겁에 질린 거요.”

“사, 살려 달라고, 제발! 개처럼 일한 건 개죽음을 바랐기 때문이 아니야! 중화제를 어서―”

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보세요, 저 농담에도 재능이 있지요?”

“뭐……?”

“다들 속으셨잖아요. 제 말에.”

“……!”

“그런 독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너, 이……!”

소리친 실바트롱 백작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새파랗게 질렸다. 그가 쉴 새 없이 비밀을 털어놓던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슬슬 졸리실 것 같아서 귀여운 장난을 쳐 보았어요.”

“이게 무슨 장난이야!”

“그보다 대답해 주시지 않겠어요? ‘프렌시프 후작’이 물었습니다. 누아제가 대체 무엇인지.”

“크윽…….”

“제가 대신 대답할까요?”

“지,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해! 경합 중이 아닌가! 투표! 투표를 해야 해.”

‘멍청이. 보라고, 당신 빼고는 다들 난색이 되었잖아.’

내 농담에 흔들린 자가 누구인지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확인했다. 그런 와중에 그들이 전부 고프레도를 찍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누아제’란 연합이 있다는 게 제국 전역에 소문이 날 거다.

경합 결과는 공개 투표로 결정된다. 담합하지 못하도록 상의할 시간은 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요지는.

‘누가 의심을 피하기 위해 배신하느냐.’

―라는 거다. 다들 어쩔 줄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는 시종을 보며 말했다.

“투표를 시작하신다고 하잖아요. 나팔을 부세요.”

“아……. 예, 옛!”

부우우웅―! 나팔 소리가 하늘을 가르자 귀족들의 낯빛이 점점 더 거무죽죽해졌다.

“자, 그럼 샤르파크 공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나야 당연히 프렌시프의 요리였소. 입에 넣자마자 촤악― 퍼지는 돼지고기 특유의 풍미. 기름진 지방층은 입에서 녹아들었고, 담백한 살코기는 씹을 때마다 육즙을 뿜어 댔지. 매콤한 매운탕으로 입 안의 기름기를 씻어 낼 때의 짜릿함이란!”

그가 으하하 웃으며 덧붙였다.

“윤기 흐르는 촉촉한 흰쌀밥에 매콤한 매운탕 국물과 연한 우럭 살을 걸쭉하게 비벼 입에 넣을 때의 기분은 뭐라 설명하기 힘들 만큼 만족스러웠소.”

샤르파크 후작의 다음 차례인 아탈란 휘하 귀족이 난감한 얼굴로 한참을 주저하다가 말했다.

“나, 나도 샤르파크 공과…… 같은 의견이오.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은 날, 먹은 뜨거운 국물에선 배려가 느껴졌고…….”

그리고 다음. 또 다음. 모두 나를 택했다.

‘이기적인 사람들이 있을 줄 알았지.’

애초에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나라를 배신한 역적들이니까.

심사 발표 후, 고프레도의 얼굴은 새파래졌다.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던 그에게 나는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총주방장의 휘장.”

“…….”

“어서.”

“……비열한 수로 내 휘장을 빼앗겠다고!”

그가 고함을 내지르자 사위가 고요해졌다. 그는 벌게진 얼굴로 휘장을 그러쥔 채 내게서 몇 걸음 물러나 단상 위의 귀족들을 쳐다보았다.

“계집애의 말 몇 마디에 놀아나다니! 멍청한 작자들!”

“말을 가리시오!”

“이 자리가 어떤 자린데.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이 자리까지 기어올라 왔는데! 안 돼! 나는 못 줘. 이 자리는 내 것이다!”

“고프레도!”

고프레도가 붉게 충혈된 얼굴로 나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너 같은 것은 상상도 못 할 가시밭길을 헤치고 겨우 손에 넣은 금관이다! 세 치 혀 따위로 내 것을 탐할 수 있을 줄 아느냐!”

“…….”

“내가 진정 실력을 발휘하면 어린 애 장난 같은 요리를 가지고 날 상대할 수 있을 성싶어? 그래?!”

“그렇다면 처음부터 실력으로 맞섰어야지.”

“뭐?”

“그래요. 내가 공정하게 경합을 치렀더라면 졌을 수도 있겠죠. 처음부터 비열한 술수를 부려 홀로 자멸한 건 당신이에요.”

“귀족으로 태어난 넌 모른다. 이 로열 키친이 없는 자들에게 얼마나 불합리한 곳인지 넌 몰라! 이곳에서 배운 모든 것이 반칙이고, 부정이야!”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어!”

“누가, 어떤 바보가!”

“내 스승! 쟝뤼크! 네가 비열한 수로 밀어냈던 최고의 요리사!”

나는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멱살을 쥐었다.

“내놔. 이건 네 것이 아니야.”

그의 가슴에 달린 휘장을 떼어 냈을 때였다.

“고, 고프레도가 승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심사자들이 프렌시프의 세 치 혀에 놀아난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게 아닙니까!”

에듈라 백작이었다. 내게 투표하지 않은 두 사람 중 하나. 그는 절대로 로열 셰프를 놓칠 수 없다는 의지로 가득했다. 미카엘은 느른히 눈을 감았고, 백작은 그를 독촉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하!”

“…….”

“누아제라는 이상한 말로 사람들을 들쑤시고 틈을 교묘히 파고들었습니다.”

미카엘이 대답하지 않자 에듈라 백작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말이 되지 않는 결과가 증명합니다! 저들 모두를 겁박해서 승부를 조작했어요! 보십시오, 저하! 이 심사자들이 가엾지 않으십니까!”

궁지에 몰리자 저희들의 계획을 내게 뒤집어씌우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네년, 스승의 복수를 하려고 이런 짓을 벌인 게지! 옳지, 심사 전에 스스로 자백하지 않았습니까. 약을 넣었다고……!”

“…….”

“농담으로 무마시키려 했지만, 진정 약을 넣은 게 아닌지 조사를 해야 합니다.”

그러자 희게 센 얼굴로 상황을 가늠하던 이들이 동조하기 시작했다.

“에듈라 공의 말이 옳소!”

“옳기는! 그렇다면 처음부터 조사를 했어야지! 결과가 나온 뒤에 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를 만큼 바보로 보이는가!”

에듈라 후작이 병사들을 보며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 계집을 잡아들여라!”

병사들이 우르르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빠와 란슬롯, 그리고 아곤이 내 앞을 막아섰다. 프렌시프 휘하의 귀족과 흥분한 샤르파크 후작마저 뛰어 내려와 내 주변을 감쌌다. 그러한 찰나.

“그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미니크!’

그가 조리장에 들어왔다. 황군과 함께 들어온 도미니크를 본 미카엘이 단상에서 일어났다.

“감히 내 명도 없이 황군을 움직였나.”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한 범인을 잡았다.”

도미니크의 뒤로 누군가의 멱살을 잡아 질질 끌고 들어오는 알베르가 보였다. 그의 손에 붙들려 있는 남자는…….

“시종장.”

황제의 곁에 언제나 달라붙어 있던 사람이라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저하, 설마 범인이―”

내 말에 도미니크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폐하가 찾으신 자료 첩에 독을 발라 둔 것을 확인하였고, 시종장이 제 입으로 토설하였습니다.”

“자료 첩에 독을 발랐다고요?”

“나이 든 사람은 손끝이 마르지요. 그래서 종이를 넘길 적에…….”

좌중 속에 누군가 “그래, 침을 발라서 넘기지.” 하고 소리쳤다.

“온도 차가 나며 잔 주변에 생기는 이슬로 인해 은잔이 변색되었고, 물기가 스푼에 옮겨지며 폐하의 손이 닿은 곳마다 독이 묻어났습니다.”

시종장은 겁에 질린 개처럼 벌벌 떨며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당황한 귀족이 그에게 물었다.

“아니, 시종장이 폐하를 시해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도미니크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새파랗게 질린 에듈라 백작을 가리켰다.

“에듈라 공에게 받은 황금 더미를 시종장의 숙소에서 발견했습니다. 흉사 후 에듈라 공에게 처분당할까 두려워 그와 나눈 편지를 모두 보관하고 있었죠.”

백작이 “흐으, 흐…….” 신음하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미니크가 눈짓하자 그가 끌고 온 황군들이 달려가 에듈라 백작을 제압했다.

“자, 잠깐, 잠― 미, 미카엘…… 저, 저하!”

미카엘이 황군을 향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놓아라. 내가 아직 명하지 않았다.”

도미니크는 단상 위로 올라가 어떤 양피지 더미를 들어 올렸다.

“죄인의 명을 폐하의 황군이 들을 이유가 무엇이냐.”

“너…….”

“미카엘 카렌듈라. 그릇된 피로 지엄한 군주의 눈을 속이고 황족을 사칭한 죄로 구금한다.”

대조리장은 터질 것처럼 시끄러웠다.

“황족을 사칭했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미카엘 님이 황자가 아니라고? 황후 폐하께서 부정을 저지르셨단 말이야?!”

“말도 안 돼!”

이건 에듈라 백작 외에 누구도 몰랐던 모양인지, 귀족들마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어버버거렸다.

“거짓말! 거짓말이다!”

귀족 중 하나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황후의 행적을 기록한 자료에 폐하의 서명과 황언이 남겨져 있었다.”

도미니크는 그 말을 끝으로 선언했다.

“죄인들을 끌고 가.”

파란만장했던 경합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조리장을 떠나 아발론의 복도를 걷던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아고고…….”

내가 신음하자 아빠와 도미니크가 한달음에 내 쪽으로 다가와 부축했다.

“괜찮으냐.”

“네……. 그냥 긴장이 풀려서…….”

사실은 많이 긴장하고 있었으니까. 조리장에 있던 매 순간, 엄마에게 기도했다.

‘엄마, 제게 약해지지 않을 힘을 주세요.’

―하고.

“결과가 잘 나온 것도, 저하께서 무사히 증거를 찾아와 주신 것도 다행이에요. 그리고…… 조리장에서 생각대로 움직여 주는 사람이 있던 것도.”

“저를 이르십니까.”

으응?! 나는 등 뒤에서 들려온 실바트롱 백작을 보고 기함을 했다. 도미니크는 인자하게 웃고 있는 백작에게 고개를 조금 숙였다.

“훌륭하게 움직여 주셨습니다.”

“백치 연기야 평생 해 왔으니, 자신 있지요.”

나는 깜짝 놀라 “뭐라고요?!” 하고 소리쳤다.

“연기였다고요?!”

“경합 전 저하의 부탁을 받았었지요. 제가 바로 저하를 위해 일하는 개들 중 하납니다.”

“정말로 훌륭한 연기였어요. 깜빡 속았다니까요! 진짜로 아둔하신 줄……!”

그래서 일부러 실바트롱 백작을 노리고 그런 수를 쓴 거다.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죄송해요…….”

“으하하! 연기 칭찬이라면 감사하죠. 젊을 땐 배우가 꿈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그는 “아직 연기가 필요한 시기라 사람들 눈에 띄기 전에 실례하죠.” 하며 인사하고 떠나갔다. 나는 도미니크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말씀해 주시죠, 놀랐잖아요.”

“실바트롱 백작에겐 틈을 봐서 사람들을 선동하라고만 말해 두었습니다.”

“…….”

“그가 영리한 것이었죠.”

“제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던 거면서?”

도미니크는 빙그레 웃었다.

“영애라면 기상천외한 수를 부리실 거라고 생각하긴 했죠. 생각보다 더 놀라운 수였고요.”

실바트롱 백작이 그렇게 명연기를 펼치지 않았어도 사람들은 충분히 흔들렸지만, 큰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었다. 아빠가 나를 쳐다봤다.

“괜찮은 거냐.”

“저요? 왜요?”

“싫어하잖느냐. 신성한 경연에 비겁한 수 말이다. 특히 요리 관련이라면.”

“그렇지만, 상대 쪽에선 비열하게 나오는걸요?”

나는 히히 웃으며 아빠의 팔에 팔짱을 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은 프렌시프의 가훈이고, 저는 프렌시프 영애잖아요.”

아빠가 기특하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이제 가요. 스승님을 모시고서. 준비해야죠.”

“그래, 아탈란에서 이렇게 순순히 황궁을 빼앗길 리 없지.”

궁지에 몰렸으니 빠른 시일 내에 과격한 수단으로 황궁을 재차 빼앗으려 들 테니까.

그리고 우리의 예상대로 아탈란은 황도로 진격했고, 역사에 기록된 2차 대륙 전쟁의 화톳불이 올랐다.

* * *

“아이고, 어깨, 등, 허리, 발목이야. 좀 살살해라! 날 죽이려는 것이냐!”

쟝뤼크가 꽥꽥 소리치자 마릴린은 그를 한 대 치고 싶다는 얼굴로 붕대를 발목에 둘둘 감았다.

“세니아나, 좀 살살 하라고 해!”

“전 살살하고 있어요, 아가씨. 쟝뤼크 님이 엄살을 부리시는 거라고요…….”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어색하게 눈치만 볼 뿐이었다. 내내 고문당하고 반송장 상태로 저택에 이송된 후, 겨우 눈을 뜬 쟝뤼크가 안쓰럽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루 종일 저 비명과 신경질을 감당하는 마릴린이 가엾지 않은 건 아니라…….

“내가 할게. 가 봐.”

붕대를 들자 마릴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귀한 손에 피를 묻힐 수야 있나요.”

쟝뤼크는 흥, 콧방귀를 뀌며 “온갖 육고기, 해산물의 피를 묻히는 손인데 뭘.” 하고 중얼거렸다.

‘제발 좀…….’

할 일이 산더미였다. 프렌시프 령 인근의 누아제들을 제압하기 위해 성식을 섭취한 기사들을 정화할 요리를 보내야 하지. 미카엘과 황제 시해 사건으로 난리 통 속에 파묻힌 도미니크도 도와줘야 하지. 황궁과 저택에 숨어든 세작까지 솎아 내야 하지. 무엇보다.

“그만, 그만! 그만 싸워. 삿된 자들이 제국 각지에 나타났는데 이럴 때야?!”

그것도 프렌시프 휘하 귀족들의 영지에 대거 나타났고, 이미 많은 지역이 삿된 자들로 인해 폐허가 되어 갔다.

어느새 방으로 들어온 시트론이 깨끗한 물이 든 대야와 수건을 쾅!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가씨의 말이 맞아요. 다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세요. 저택이야 기사들이 자발적으로 성식을 먹고서 지켜 주고 있지만, 다른 곳은 난리도 아니라고요.”

시트론은 마릴린에게서 붕대를 받아 제가 직접 쟝뤼크를 맡았다. 마릴린은 조금 전과 달리 얌전해진 쟝뤼크를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시트론 님의 곁에선 아주 얌전하세요.”

거의 다섯 살배기 어린애에게 하는 것 같은 말이었다. 나는 킥킥 웃고, 두 하녀가 쟝뤼크의 붕대를 새로 감아 준 뒤 나설 때까지 기다렸다.

“시트론 앞에서는 왜 이렇게 조용하세요?”

“……무서운 여자야.”

“네?”

“내가 고통을 호소하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군.”

“뭐라고요?”

“……‘정말로 아프게 해 드릴까. 다시 부러뜨리기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하고.”

“거짓말. 시트론은 엄청 자상하다고요. 그런 말을 할 리 없어요.”

“정말이야!”

나는 얼핏 영지의 총집사에게서 들은 ‘아가씨는 시트론이 수틀릴 적엔 어디까지 가는지 모르시지’ 하는 말과 한숨을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털어 냈다.

“어쨌든 얌전히 저택에 계세요.”

“궁의 주방은?”

“로열 셰프 아곤 님이 맡고 계시지요.”

“로열 셰프는 무슨.”

꿍얼거리던 그는 통증이 이는지 손목을 등 뒤로 슥, 가렸다.

“오른손, 아프세요?”

“아프기는 다른 곳이 아프지.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모를 것이다. 그놈들, 얼마나 지독한지 무려 가시 방석에 앉히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어지는 고문 일화가 또 시작되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는 내내 손을 바라보았다. 쟝뤼크는 실수로도 절대 ‘손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스승님……, 의사가…….”

“그런데 이 집 요리는 왜 이렇게 맛이 없어. 이 샌드위치에 아보카도가 어울린다고 보느냐?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어디에나 넣는 모양인데, 절대로―”

“말 돌리지 마시고요.”

오른손은 못 쓸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러나 쟝뤼크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내가 어릴 적에 왼손잡이였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시중엔 칼이 오른손잡이용으로만 나와서 기를 쓰고 바꾸셨다면서요.”

“그래, 나는 가난해서 제작할 생각은 꿈에도 못 했거든.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딱 2년 걸렸다.”

그때야 어렸으니까. 이제 20년이 훌쩍 넘도록 쓴 손을 어떻게 쉽게 바꾸겠는가.

“무엇보다 내겐 제일 소중한 게 멀쩡해.”

“어떤 건데요?”

“절대 미각의 혀.”

그가 오만한 표정을 지어서 나는 픽 실소를 흘렸다.

“스승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그렇지. 난 대단하지.”

“비아냥댄 건데.”

“뭐?! 이놈! 어딜 스승을……!”

그때 문이 스르륵 열리곤 영지에서 돌아온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며 들어왔다.

“아이고, 우리 손녀의 스승님.”

“어, 어, 어, 어르, 어르신…….”

“목소리가 우렁차십니다, 그려. 몸이 다 나은 모양이구만!”

“아, 아, 아니, 아닙, 아닙니다. 아, 아직 환자…… 술은 의사가 절대로 먹지 말랬……!”

“그렇지. 환자지. 내 손녀의 은인이고. 그러니 내가 직접 간호해야겠어.”

“아, 아, 아닛! 아닙니닷!”

나는 할아버지에게 입 모양으로 ‘너무 심하게 하지 마세요’ 하고 말했고, 할아버지는 씩 입꼬리를 올렸다. 할아버지에게 쟝뤼크를 맡기고 방을 나섰다. 오늘 저녁에도 쟝뤼크가 ‘왜 나를 혼자 두었냐’며 원망할 게 눈에 빤했다.

‘저래 봬도 고마워하시는 건데.’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 할아버지가 남의 수발을 드는 건 상상할 수도 없다. 일단 동부의 왕이 별칭이니까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가자 중간에서 마릴린과 마주쳤다. 그녀는 목소리를 바짝 낮추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영애와 영식들이 본저택으로 오셨습니다.”

“뭐? 병영 쪽에 안 있고?”

아탈란이 삿된 자를 풀기 시작한 후, 성수가 있는 데다 어마어마한 누아제들과 삿된 자를 물리친 프렌시프 저는 어쩐지 방공호처럼 되어 버렸다.

부모들은 ‘저희는 몰라도 자식만은 지켜 주십시오’ 하며 소중한 자식을 보내온 것이다. 할아버지와 가웨인은 귀찮아했지만, 란슬롯이 그들을 받아들이자는 의견을 냈다.

[왜! 우리 사람들 지키기도 벅찬데 어째서 그것들까지 지켜 줘야 하는 거야. 귀찮은 짐이라고.]

[짐이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인질이지. 아탈란에 넘어가지 못하도록 할.]

[인질?]

[자식을 보내 두었는데 애끓는 부모가 어떻게 배반을 하겠어.]

틀린 말이 아니라며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나둘 받아 주었더니 아탈란에서 버림받거나, 그들에게 신뢰를 잃은 귀족들까지 자식을 보내 왔다. 심지어는 저 자신도 받아 달라고 애걸이었다. 성질 급한 영애와 영식이 씨근덕거리며 계단을 올라왔다.

“이봐요, 프렌시프 양.”

거기엔 로웨나의 말벗이며 나와 척을 졌던 크리스틴도 있었다. 아탈란에게 팽당해 우리에게 붙었지만, 배신할 가능성이 몹시 높아서 받아 주기로 했다.

“무슨 일인가요?”

“우리를 언제까지 더러운 병영에 가둬 놓을 참인가요?”

“가둬 놓다니요. 거기가 제일 안전해서 모셔 둔 거죠.”

“하루 종일 천박한 병사들이 훈련하는 꼴이나 지켜봐야 하는 병영이 안전한 장소라고요? 우릴 우습게 보지 말아요!”

마릴린이 소리 없이 혀를 차며 “철부지.” 하고 속삭였다. 동감이다. 부모는 자식을 살리려고 어떻게든 프렌시프에 고개 숙여 지낼 자리 하나를 마련했는데, 저쪽은 여전히 오만하니까.

대륙 전쟁 이후에 태어난 젊은 귀족들은 이 난리 통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정리될 일인 것처럼. 어쨌든 부모의 명으로 프렌시프에 왔지만, 은혜를 입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귀빈으로 여겨 주길 바라지.’

게다가 걸핏하면 나를 잡고 아우성이었다. 할아버지나 란슬롯보다는 겉보기에 만만한 내가 대상인 것이다. 그래서 내 근처에 할아버지와 란슬롯이 없을 때만 골라서 찾아왔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내가 묻자 크리스틴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 저택의 자랑인 유리관에서 묵도록 조치하세요.”

“그건 안 되겠는데요. 영애와 영식들을 유리관에 모시면 그곳에 또 상당수의 병사를 붙여 호위해야 해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유리관은 공격당하면 쉽게 무너지는 구조라고요.”

“유리관과 붙어 있는 본저택은 위험해서 어떻게 지내세요?”

“그야 내게 성수가 있으니까 저택에서 일하는 우리 사람을 지켜 주려고―”

크리스틴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놈의 성수. 있는지 없는지 눈으로 본 것도 아닌데 알게 뭐람.”

영식들이 “있기는 하다잖습니까. 목격한 사람이 있으니까요.” 하며 이죽거렸다.

“정말 그렇게 강한지는 봐야 알 일이죠.”

크리스틴의 말에 덩치가 몹시 큰 영식이 껄껄 웃으며 계단을 한 칸 더 올라왔다.

“우리가 오죽했으면 이런 요구를 하겠습니까. 우리도 멀쩡한 데서 지내야 서로 간에 좋죠.”

제일 거슬리는 건 이거였다. 집에 의탁하러 온 영식들이 자꾸만 추파를 던졌다.

[프렌시프 영애만 자빠뜨리면 인생 쫙 피는 거지. 이게 다 우리 거라고.]

저택을 쓰다듬으며 하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며칠은 참았지만, 이제는 슬슬 기분이 나빴다. 내가 그녀를 향해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사방에서 통신석이 울리더니 콜센터처럼 시끄러워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통신을 받은 이들이 경직된 목소리로 상황을 공유했다.

“발렌슈드 령에 삿된 자 네 구(具)가 출현했습니다. 백작가의 지원 요청입니다.”

“손이 부족해! 그쪽에서 성식을 먹여서 상대할 수는 없나? 누아제가 되면 삿된 자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걸 알려 줬잖아!”

“그쪽 영지에 지원자는 없고, 억지로 먹이면 분노로 제정신이 아니게 된답니다.”

“이런…… 샤르파크 령에도 누아제들이 스무 구(具)나 나타났다는데. 곧 삿된 자화될 것들이 수두룩하다.”

나는 황급히 소음의 중심에 있는 란슬롯에게 달려갔다. 영애와 영식들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를 쫓았다.

“발렌슈드와 샤르파크를 넘으면 곧 프렌시프 령이잖아요! 우리 쪽은 무사한 거예요?”

“아버지가 영지에 내려가셨고, 가웨인도 애쓰고 있어. 게다가 그것들이 모두 우리 영지 쪽으로 온다고 확신할 수도 없고. 삿된 자들은 아탈란에서도 쉽게 움직일 수 없으니까.”

행정관 하나가 “그보다 문제는…….” 하고 중얼거렸다. 란슬롯이 얼른 그를 쏘아보았다.

“…….”

행정관이 입을 다물어서 난 그의 손에 들린 서류를 빼앗았다.

‘삿된 자들의 이동 경로.’

각지마다 나타난 삿된 자들이 주변을 폐허로 만들면서 황도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내게 오고 있는 거야…….’

백여 구(具)에 가까운 숫자가 모두.

“세니아나.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그런―”

“꺄아아악!”

“아악!”

난데없는 비명이 난무했다.

‘이 느낌……. 삿된 자다!’

저택 내부를 지키던 기사들이 일시에 밖으로 나섰다. 내가 서둘러 창을 열자 이전엔 보지 못했던 거대하고도 거대한 오물 덩어리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건물 중 하나인 유리관을 덮치려는 중이었다.

“쏴라!”

궁수들이 쏜 화살 비가 삿된 자에게 직격하였으나, 워낙에 거대한 탓에 완전히 막아 내지 못했다. 결국 삿된 자가 유리관을 덮쳤고, 유리관과 이어진 본저택이 지진이라도 난 듯 크게 흔들렸다.

“세니아나!”

“아가씨!”

란슬롯이 나를 감싸자마자 커다란 샹들리에가 떨어지며 엄청난 파열음이 들려왔다.

“오빠!”

란슬롯이 감싸 줘서 난 하나도 다치지 않았는데, 그는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괘, 괜찮아요? 괜찮은 거야? 어떡해…….”

“난 괜찮으니 넌 어서 후문으로 저택을 나서.”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쾅! 소리와 함께 다리인지 촉수인지 모를 것이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죽…… 인…… 다…… 죽인다…… 죽여…… 죽여!]

먼저 들어온 촉수로 바닥을 짚은 삿된 자가 엄청난 속도로 내게 돌진했다. 키에에엑―! 기괴한 비명이 귓속을 가르고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입이 십자로 벌어지며 무수히 많은 이빨이 드러났다.

[이놈―!]

목걸이에 걸린 마원들이 뜨거워진다 싶더니만, 작은 반달곰이 된 테디가 불쑥 뛰어갔다. 그러곤 콩, 하고 발을 걷어찼다.

“이놈이야! 아주 나빠! 누나를 무섭게 하면 못써!”

그 순간,

“비켜욧! 바보 곰!”

현신한 쵸는 순식간에 거대한 황금빛 여우가 되어 삿된 자를 물어뜯었다.

“주인.”

스르륵 무너진 란슬롯을 대신해서 은발과 청안의 잘생긴 사내가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멀린!”

“내게서 떨어지지 마시오.”

쵸가 삿된 자에게 달려들 때마다 사방에 삿된 자의 오물이 튀었다. 머리에 검은 오물을 뒤집어쓴 젊은 귀족들은 거의 졸도할 기세였다.

“사, 사, 살…… 살…… 살려 줘.”

“어, 어머니……. 어머니!”

바닥에 주저앉아 실금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동안 나는 끙끙 앓았다.

‘마원들…… 제발 하나만 나서 주면 안 될까.’

마원들의 죄다 현신하자 나는 온몸의 피가 쑥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폐가 꽉 짓눌리는 것 같아서 헐떡이며 씩씩거리는 테디에게 손짓했다.

“테, 테디…….”

“으아아앙! 우리 누나 죽는다! 죽는다!”

반달곰이 정신 사납게 주변을 콩콩콩! 뛰어다니며 꺼이꺼이 울었다.

“들…… 가.”

“누나, 죽는다! 으아앙! 나쁜 놈 때문에 죽는다!”

아니, 너 들어가라고……. 도움이 안 되잖니. 나는 멀린에게 파묻히다시피 기대고 씨근덕거리는 테디에게 손짓했다.

“테, 테디…….”

“죽일 거야. 죽여, 나쁜 놈은 죽어야 해!”

그르르릉. 어디선가 묘한 울음소리가 전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케에에에엑!”

거대한 곰으로 변하더니만 앞발로 삿된 자를 후려쳤다. 거대한 덩어리가 일순간에 쾅! 주저앉았다. 저택이 크게 흔들리며 중심을 잃은 크리스틴의 앞에 십자로 벌어진 입 부위가 떨어졌다.

“꺄아아아악!”

테디의 시선이 주저앉은 크리스틴에게 향했다.

[너, 걔지. 못된 애.]

테디의 말을 들은 크리스틴이 “뭐, 뭐?” 하며 중얼거렸다.

[자꾸만 누나를 괴롭히는 못된 애야.]

“으……, 으으.”

[누나, 내가 쟤 죽여 버릴까?]

그가 히히힛! 하고 앞발로 입가를 가리며 말했다. 나는 축 늘어져 대답할 힘도 없었고, 테디의 시선이 덩치 큰 영식에게 향했다.

[오호라! 못된 애가 또 있었구나!]

“아, 아니, 아니야……. 아니야…….”

[누나를 화나게 하는 애는 거시기를 잘라야 해.]

귀엽기만 했던 목소리가 어쩐지 음산하게 들렸다. 순간 거대한 촉수가 날카롭게 허공을 가로질렀다. 쵸는 삿된 자에게서 분리된 오물에 휘감겨 있었고, 테디는 정신이 팔려 있는 상태. 나를 향해 가해지는 삿된 자들의 공격을 막아 낸 건, 순식간에 거대한 백사자의 형상으로 변한 멀린이었다.

크르르릉―! 멀린은 날카로운 포효와 함께 삿된 자의 촉수를 물어뜯었고, 허공에 가느다란 실선이 생기는가 싶더니 수많은 화살이 되어 떠올랐다.

[주인!]

그의 전음이 느껴지기 무섭게 나는 몸이 꽁꽁 얼어붙은 듯 경직되었다. 머릿속에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문자가 떠올랐다. 후들후들 떨리던 몸과 세차게 뛰던 심장이 고요에 파묻히고, 나는 조용히 삿된 자들을 바라보았다.

‘쏴.’

내가 한 것은 그저 속으로 화살의 방향을 떠올린 것뿐이었다. 허공에 떠올랐던 화살이 일제히 멀린이 앞발로 찍어누른 거대한 오물을 향해 쏟아졌다.

그 순간, 난 무너지듯 쓰러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건 “세니아나!” 하고 나를 부르는 란슬롯의 목소리, 그리고 찢어지는 것 같은 삿된 자의 비명이었다.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고통스럽다.

“……씨, 아가씨!”

끙끙거리며 뒤척이던 난 울먹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침대 주변에 모인 하녀들이 깨어난 날 보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일어나셨어!”

“괜찮으세요?”

“어르신과 도련님을…… 어서!”

주변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어떠세요? 네?”

“어지럽거나 토할 것 같다거나 하지는 않으세요?”

나는 신음하듯 “으응…….” 하고 대답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된 거야?”

“성수들을 불러내신 게 힘에 부쳤던 모양이에요. 삿된 자를 물리친 후에 혼절하셨어요.”

마릴린의 대답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을 크게 떴다.

“삿된 자를 물리쳤어?”

“네. 아가씨께서요.”

“사람들은? 병사들이나 사용인들, 아……! 오빠는? 오빠는 괜찮아?”

“모두 무사해요. 도련님도 크게 상하신 곳은 없으시고요.”

“다행이다…….”

나는 침대 헤드에 축 무너져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삿된 자는 정말로 거대해서 무서웠어.’

그런 게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 공포였다.

“의사를 불러올게요!”

“아니야. 이건 마원 때문이니까 의사에게 진료를 받아도 소용없어. 잘 먹고 잘 쉬면 금세 나을 거야.”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시트론은 걱정 어린 얼굴로 나를 부축했다.

“삿된 자 때문에 본채가 엉망이 되었어요.”

그러고 보니 내 방의 가구들도 죄 상해 있었다. 벽에 실금 같은 균열이 생긴 것을 보니 수리 전엔 본채에서 생활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럼 당분간 다른 곳에서 지내야겠네.”

“별채 두 채에 각각 나눠서 짐을 옮기고 있어요.”

“별채는 무사해?”

“네. 어르신과 도련님은 아가씨와 같은 아네모네 관에서 묵으실 수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가로질러 걸었다. 문손잡이를 잡고 “병영은?” 하고 물었다.

“병영에도 여파가 있긴 하지만, 막사가 일부 무너진 정도예요.”

“영애와 영식들이 거기선 못 지내겠다고 하겠는걸.”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에요. 병영에서 짐을 옮기라 지시했답니다. 그런데…….”

대화를 하며 문을 열었을 때였다. 나는 문 앞에 옹기종기 모인 영애와 영식들을 보고 눈을 홉떴다.

“여기서 뭐 하세요?”

“짐을 별채로 옮긴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더군요.”

“우리도 세컨드 하우스로 거처를 옮기라더군요.”

병영 막사에서 지내기 싫다고 그렇게 떼를 쓰더니. 저들에겐 차라리 잘된 일이다.

“그래요? 잘되었네요. 세컨드 하우스에서도 병사들이 호위할 테니 안전의 염려는 없겠어요.”

“병영도……!”

황급히 대꾸하던 영애가 마른 침을 삼키며 눈치를 보았다.

“저기, 병영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네?”

“아니, 뭐, 몸을 의탁 중인 입장인데 이러저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염치없는 일이고…… 병영도 괜찮아요.”

이 사람들이 왜 이런담. 삿된 자가 나타나기 전과는 딴판이다.

“할아버지가 결정한 일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 말을 끝으로 영애와 영식들을 지나치자 샛노란 드레스를 갖춰 입은 영애가 헐레벌떡 나를 쫓아왔다.

“아뇨, 우리는……!”

“그만 해요. 뭐 하는 짓이에요. 구걸하는 것처럼.”

크리스틴이 날카롭게 만류하자 영애와 영식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영애만 세컨드 하우스로 떠나면 되겠네요.”

“방해하지 말고 비켜요.”

“그래요.”

그러자 크리스틴은 얼굴을 붉히며 “이봐요!” 하고 소리쳤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나를 쫓는 젊은 귀족들과 대치했다.

“싫다는 사람 붙잡아서 얻는 게 뭐예요. 우리가 귀찮다는 말이잖아요.”

이 사람은 대체 무슨 소리래. 난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트론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야?”

시트론이 내 귓가에 입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

“삿된 자가 나타나고서 겁에 질린 모양이에요. 그 많은 병사가 모두 달려들어도 막지 못했던 삿된 자를 아가씨 홀로 물리쳤다고…….”

“그래서?”

“아가씨 곁이 제일 안전한 자리라고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아하, 그래서 이렇게 떠나기 싫다고 난리였구나. 영애와 영식들은 내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했고, 크리스틴은 그런 그들이 마뜩잖은지 몹시 불쾌한 표정이었다. 크리스틴이 입매를 비틀며 이죽였다.

“홀로 안전하면 그만인가 봐요.”

“…….”

“신이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뜻에서 허락한 힘일 텐데 말이죠.”

“…….”

“포털 장사를 하거나 보그를 독점했을 때부터 느낀 바지만, 영애는 좀, 뭐랄까…….”

그녀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눈을 치켜떴다.

“의롭지는 못한 모양이에요.”

“그게 왜요?”

내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크리스틴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왜라니요? 잘못된 것을 모르겠나요?”

“남보다 탁월하게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모두 나라를 위해 애쓰나요? 좋은 머리로 번 돈을 전부 기부해야 해요?”

“네?”

“남들에 비해 뛰어난 육체를 가진 사람은 무조건 전장에 나가 무공을 세워야 해요? 본인에게 뜻이 없어도?”

“이봐요, 영애.”

“제가 가진 힘을 저를 위해 쓰는 게 무슨 잘못이 있다는 거죠?”

내 말에 크리스틴은 기가 막힌 듯이 입을 뻐끔거렸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모로 꼬았다.

“물론 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기면 할 수 있는 한 도움이 되어야겠지만, 그건 소수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닐 테죠.”

“뭐라고요?!”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만 지켜 주는 건 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세요?”

“……!”

“그건 사설 경호원과 뭐가 다른 거죠?”

“세니아나 프렌시프!”

나는 크리스틴에게 바짝 다가가서 말했다.

“도덕을 잣대로 나를 폄하하고 싶다면 본인부터 돌아보세요.”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리자 비명 같은 고성이 등 뒤로 따라붙었다.

“그 잘난 체!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두고 볼 거야! 삿된 자만 없어지면 너도……!”

계단을 내려가려던 난 고개를 약간 돌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크리스틴을 쳐다봤다.

“삿된 자가 나타난 지금, 우위에 있는 쪽은 나라는 뜻인가요?”

“그래요. 위기로 이득을 삼는 비열한 족속이라는 말이에요.”

나는 빙그레 웃고 말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정말로 비열해져야겠네요.”

“무슨 뜻이죠?”

나는 난간을 잡은 채로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당신 앞에 삿된 자가 나타난다면 절대로 구해 주지 않겠어요.”

그제야 크리스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가 당황하여 나를 향해 몇 걸음 내디뎠다.

“잠깐! 그건 너무 치사한……!”

“당신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구해 주지 않을래요.”

“…….”

“그게 비열한 족속들이 하는 짓 맞죠?”

크리스틴이 입을 뻐끔거리기 무섭게 다른 영애와 영식들이 나를 쫓아왔다.

“자, 잠깐만요. 우리는 아니지요? 저는 크리스틴을 옹호한 적 없어요!”

“삿된 자가 나타나기 전에 억지를 쓴 점은 사과드릴…… 잠깐, 영애!”

꿀 먹은 벙어리가 된 크리스틴을 잠깐 쳐다본 나는 영애와 영식들을 떼어 내고 계단을 내려왔다. 시트론이 쿡쿡 웃으며 물었다.

“정말로 구해 주지 않으시게요?”

“눈앞에서 죽어 간다면 구해 주겠지. 그대로 죽으면 찜찜해질 테니까. 저런 사람의 죽음이 짐으로 남는 건 절대로 싫은걸.”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좀 조용히 하라고.”

그러며 “좋은 말로 타일러서는 절대로 듣지 않는 부류잖아.” 하고 가볍게 덧붙이자 시트론은 푸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1층으로 막 내려왔을 때였다. 행정관 하나가 헐레벌떡 복도를 뛰어갔다.

‘또 무슨 일이 생겼나?’

나는 덜컥 겁이 나서 그를 붙잡고 물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황제 폐하께서 깨어나셨답니다!”

나는 눈을 홉떴다.

‘드디어!’

쓰러진 지 2주일 만의 일이었다. 그동안 도미니크가 필사적으로 상황을 다스렸지만, 황제가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한 이상 완벽한 수습은 어려웠다. 난 행정관으로부터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와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 * *

눈을 뜬 황제의 곁엔 도미니크가 있었다. 그는 서늘한 얼굴로 지금까지의 일을 보고 받는 황제의 곁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희게 질린 얼굴로 상황을 헤아리는 황제는 마치 기계 같았다. 독을 준비한 이가 수십 년을 함께한 시종장임을 들었을 때조차 그의 표정은 몹시 고요했다.

“시종장은 고신을 이기지 못하고 자진한 것이냐.”

“예.”

“시체는?”

“안치실에 보관 중입니다.”

지독하게 사무적인 부자를 지켜보던 알베르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경직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한 알베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아직 옥체가 회복되지 않았으니 공무는 나중으로 미뤄 두시는 게…….”

“형제가 역모를 저질렀을 때도 짐은 집무실에 처박혀 있었어. 이깟 것도 이겨내지 못하면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을 수 있겠느냐.”

“하지만…….”

친자식은 아니어도 이십 년 넘게 지켜본 아들과 벗과 같은 시종장이 공모한 일로 목숨을 위협받은 사람이다. 알베르가 말끝을 흐리자 도미니크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건 더는 황제를 만류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알베르가 작성한 보고서를 마지막까지 살핀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폐하!”

“미카엘에게 가봐야겠다.”

“일어나신 지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감히 짐의 걸음을 막겠다면 목 하나로는 어림없을 것이다.”

도미니크는 쩔쩔매는 부관을 밀어 둔 채 문을 열었다.

“가시죠.”

황궁 옥사까지 걷는 내내 부자의 사이엔 어떠한 말도 없었다. 철창 앞에 선 황제는 만신창이가 된 미카엘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미카엘과 함께 갇혀 있던 황후가 엉금엉금 기어 철장에 다가가 소리쳤다.

“폐하, 폐하!”

평소의 모습이 온데간데없는 황후는 눈물로 애원했다.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세요! 부친의 강요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저, 저는 폐하를 배신할 생각 따윈……!”

“누가 누구를 배신했다는 거요.”

“폐, 폐하…….”

“우리 사이에 있는 것이라곤 옆자리를 공유한 정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부부로서 바라본 적이 없으니 황후는 나를 배반한 적이 없소.”

황후가 몸을 동그랗게 말며 입술을 짓씹었다. 황제의 시선은 황후의 뒤편, 벽에 가만히 기대앉은 미카엘에게 향했다.

“꼴이 볼만 하구나.”

미카엘은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완벽하게 보내드리지 못한 점,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말본새하고는.”

그가 혀를 차자 미카엘은 느른히 눈을 떴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미약한 빛을 발했다.

“깨어나지 않으셨다면 더러운 꼴은 보지 않으셨을 텐데요.”

“아비에게 독을 먹이고 맛본 영광은 재미가 있더냐.”

“몹시.”

미카엘이 빙그레 미소지으며 이어 말했다.

“재미있는 일이야 많았지요. 특히, 제 자식이 아닌 것을 알고도 이십 년이 넘도록 손안에 쥐고 있던 부성애가 참을 수 없이 유쾌했습니다.”

“그것참 잘 되었구나.”

“한순간이라도 저를 자식으로 여긴 적이 있으셨습니까.”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은 황제가 여상한 눈빛으로 피투성이가 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 위로 서너 살 무렵의 사내아이와 선이 굵직해지기 시작하던 소년이 겹쳐졌다.

[폐하.]

미카엘이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뱉은 말은 그것이었다. 작은 소쿠리 같은 아이를 무릎에 앉힌 채로 제국의 지도를 보여 주던 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정을 붙이려 들지 않았으나, 필사적으로 제 뒤를 따라오던 아이에게 눈길이 머무는 일은 다짐만으로 막을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어린 녀석이 밥투정 한 번을 안 하는군. 황태자는 피망이나 당근을 원수 보듯 하는데 말이지.]

[모후께서 폐하를 실망시키지 말라 하셨습니다.]

고작 다섯 살 먹은 아이가 의젓하게 대답할 적이면 가슴이 시큰거릴 때도 더러 있었다.

[4황자께서는 하늘이 내린 재보십니다. 걸음마와 함께 글자를 뗀 것은 물론,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리신 황자께서 인재의 중용이 나라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막힘 없이 강연하시니 이가 바로 제국의 홍복이 아니겠습니까.]

황자들의 스승이 혀를 내두를 적마다 어깨가 으쓱했다. 유약한 황태자와 차마 제 손으로 기르지 못해 짐승 새끼처럼 세상을 경계하는 도미니크 대신 그를 의지했다. 드물게 몸이 아플 적이면 밤 중에 그의 방을 찾아 이마를 매만졌고, 의사들을 닦달했더랬다. 키운 정이 어찌 낳은 정만 못하겠는가.

황제는 미카엘의 질문에 대답했다.

“짐은 단 한 순간도 너를 자식으로 여긴 적이 없노라.”

“다행입니다.”

“내 자식들의 우산이 되고, 차양이 되어 준 점은 갸륵하게 생각하마.”

“예.”

“못난 놈.”

어찌 이리 야위었어.

“정신 빠진 놈.”

할 것이라면 틈 없이 마무리할 것이지.

“짐승만도 못해서.”

어찌 아비 앞에서 이런 꼴을 보여.

늘 그랬듯이 본심을 삭이고. 애끓는 부정을 부정하면서. 그는 그런 방법밖에 알지 못했다. 권력을 쥐는 법은 알았어도 아들을 끌어안는 방법만은 알지 못하는 남자였다.

입궁한 나는 황제를 알현하기에 앞서 알베르를 먼저 만났다. 그는 내가 바리바리 싸 온 것들을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이것들은 다 뭡니까?”

“이건 욕창에 좋은 연고라고 해서 가져왔고, 이건 파스예요. 밀가루랑 마늘로 만든 것과 무즙으로 만든 것, 또 멘톨이랑 천을 이용해서 붙일 수 있는 것도 있고……. 계속 누워 계셨으니까 움직이시면 관절이 아프실 것 같아서요.”

“파스?”

“네, 파스요.”

―하고 대답하던 난 “아, 여긴 파스가 없지.” 하고 간략하게 파스에 대해 설명했다.

“굉장하군요, 파스!”

“네? 뭐, 그렇…… 지요?”

“파스, 오오, 이게 파스라!”

탐이 나는 것처럼 눈이 반짝여서 난 “한 번 해 보실래요?” 하고 물었고, 알베르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법을 알고 있는 내 기사들이 그의 손목이며 등에 수제 파스를 발라 주는 동안 나는 도미니크의 서재를 구경했다.

“서류가 많네요.”

“이런저런 일이 많았잖습니까. 수습하느라 고생하고 계시죠.”

알베르는 곧 화끈거리기 시작한 멘톨 천연 파스가 몹시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파스를 붙인 손목에 정신이 팔린 채로 연신 “호오……, 오!” 하고 감탄했으니까.

“폐하께서는 괜찮으세요?”

“몸은…… 속이야 그렇지 못하시겠지만요.”

“속이 왜요?”

“4황자…… 아니, 미카엘을 만나고 오시더니 내내 방에 틀어박혀 계십니다.”

그에게 미카엘과 황제 사이의 이야기를 듣던 난 가늘게 신음했다.

‘황족이란 것도 마냥 편하진 않구나.’

그들 어깨에 짊어진 짐이 얼마나 무거울지 짐작도 되지 않아서 나는 어떤 말도 쉽게 내뱉지 못했다. 내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동안 알베르는 그간의 일을 말해 주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고신 후유증으로 제1황자궁에서 나오질 못하시고, 로웨나 황비님께서도 전하를 간병한다고 황궁의 일은 뒷전이십니다.”

“…….”

“황후도 없고, 가브리엘라 황비는 와병 중, 코트니 황비는 미카엘과 엮여서 황비궁에 구금되셨고요.”

“…….”

“이러니 우리 저하께서 눈 붙일 시간조차 없으시죠.”

“연락할 적엔 그런 말씀…… 없으셨는데.”

“원래 힘든 내색할 줄 모르는 분이시죠. 엊그제 황궁 시종 하나가 삿된 자가 되었을 때도…….”

“삿된 자가 되었다고요?”

“예, 황궁에도 성식이 흘러들었으니까요. 황궁에서도 삿된 자가 나타났다는 얘기가 돌면 민심이 걷잡을 수 없게 동요될 테니, 홀로 수습하셨지요.”

“…….”

“그 와중에 귀족들이 연일 찾아와 시끄럽게 굴고.”

“…….”

“동부를 제외한 각 부의 귀족들은 성녀에게 주어진 의무를 행하게 하라고― 아…….”

정신이 팔려서 주절거리던 알베르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어색하게 웃었다.

“영애께선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테이블에 널브러진 서류를 주워든 그가 “저하가 늦어지시는군요. 모셔오겠습니다.” 하더니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커다란 창으로 가득 내리쬐는 햇살이 눈을 찌르는 것 같았다.

얼마 후, 방문 너머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쿵! 문이 열렸다. 땀으로 범벅이 된 도미니크가 숨을 정리하며 맞은편에 앉았다.

“회의가 길어졌습니다.”

아발론에서 제2황자궁까지 가볍게 걸어서 삼십 분. 알베르가 말을 전하러 간 지 삼십 분이 채 되지 않았으니, 그는 틀림없이 뛰어왔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늘 그랬다. 내가 그를 필요로 할 때마다 언제나 이렇듯 필사적으로 나를 향해 뛰어왔을 터였다.

“…….”

“홀로 계시기에 무료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경합부터 삿된 자들이 이 땅에 도래한 지금까지 나는 수없이 칭얼거리고 힘들다며 어리광을 부렸으나, 그는 늘 다정하게 내 말을 들어 주었다. 내가 그에게 기댈 수 있었던 시간들은 전부 그가 부족한 잠을 쪼개고, 없는 시간을 겨우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며칠 사이에 수척해진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좀 주무셨어요?”

“예.”

거짓말쟁이.

“식사는요?”

“간단하게 했습니다.”

그의 방 어디에서도 식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커피잔만 가득 쌓여 있을 뿐. 그는 손등으로 내 뺨을 가볍게 문질렀다.

“창백한 것 같은데.”

“…….”

“성수 때문에 괴로울 텐데 황궁까지는 왜 오셨습니까. 쉬시죠.”

제 몸이 부서져도 내 미열이 우선인 사람이었다. 나와 그가 만나고부터 내내 그는 상냥한 거짓말을 수도 없이 했다는 것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힘들진 않으십니까.”

“……힘들어요.”

그가 미간을 좁히며 내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마탑에 결계를 해제하라 이르겠습니다. 포털로 귀가하십시오.”

“여기서 눈 붙이면 되지요.”

“……여기서요?”

“네.”

그가 설렁줄을 잡고 “담요를…….” 하고 말해서 나는 얼른 그의 손목을 끌어당겨 내 옆에 앉혔다.

“저하면 돼요.”

난 무릎을 툭툭 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릎 담요가 되어 주세요.”

“내가 올라타면 부러질 텐데.”

“머리만 살짝 올려 주셔도 충분합니다.”

나는 애써 장난스럽게 웃고 그를 끌어당겨 눕혔다. 내 무릎을 베개 삼아 누운 그가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네.” 하며 픽 실소를 흘렸다. 머리를 쓰다듬자 그는 금세 눈을 감았다. 흑단 같은 머리칼이 손가락에 가볍게 감겼다가 녹아들 듯 스르륵 빠져나갔다.

“프렌시프에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니요.”

“아니면.”

약간 붉은 그의 눈가를 손끝으로 매만지다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꿈에 왜 나타나지 않았어? 기다렸는데.”

“가고 싶었는데 갈 수 없었지.”

“마지막으로 당신을 보았을 때를 기억해.”

“선생님이 아픈 게 당신 때문이라고 울던 날 말이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본 건 칠흑같이 검은 어둠 속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우린 오직 서로만을 보고, 대화할 수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을 적엔 달랐다.

눈이 아주 많이 오는 곳. 마법처럼 아름답지만, 그러했기에 외려 스산한 곳에 홀로 선 그는 야트막한 무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털이 바짝 선 살쾡이 같던 어린아이가 아니라 선이 굵어지고, 그만큼 더 메마른 눈빛으로. 그는 천 쪼가리를 겨우 기운 듯한 망토를 무덤 위에 덮어 주었다.

[노인네, 그리도 이승을 지겹게 여기더니.]

바람 소리에 파묻혀 바스러진 목소리가 애달팠다. 눈발 속에서 한참을 고개 숙이고 있던 그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때는 도무지 알 수 없던 말이 이제야 들리는 것만 같았다.

“가기 싫어요, 스승님.”

“…….”

“그렇게 말하던 당신을 보았어. 그러니까, 황궁이 싫다면 더는 그 무게 감당하지 않아도―”

도미니크는 벌떡 일어나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이 커져서 입을 열던 그는 황급히 등을 돌렸다.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게 얼핏 보였다. 나는 고개를 모로 꼬고 그의 등을 빤히 보았다.

“왜요?”

“…….”

“저하, 몸이 안 좋으세요?”

“…….”

“저하.”

나는 깜짝 놀라서 그의 팔을 잡았다. 도미니크는 “괜찮습니다.” 하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나는 계속 염려되었다.

“무슨 일인데요.”

“아닙니다.”

“근데 왜 나를 못 보는 건데. 네?”

“……쪽팔…… 서.”

“네?”

그가 큼, 헛기침을 하더니 슬쩍 나를 돌아보았다.

“잊어 주십시오.”

“……?”

“사춘기엔 누구나 도망치고 싶은 법이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내가 미간을 좁히자 도미니크도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 뒤는 못 보셨습니까?”

“네.”

“…….”

“……?”

그가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친 채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구나!’

나는 눈이 반짝반짝해져서 그에게 매달렸다.

“뭔데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

“네? 알려 주세요!”

“…….”

“궁금하단 말이에요.”

뭐길래 도미니크가 이렇게 부끄러워할까. 그는 궁금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보더니 곤란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저하!”

“……니다.”

“네?”

“울었습니다. 황궁에 가기 싫다고.”

말도 안 돼! 꿈에서 본 작은 도미니크는 몹시 조숙했다. 피범벅이 된 몸으로도 절대 울지 않는 아이였다. 그런 그가 다 커서 울었다고? 정말?

‘보고 싶어!’

나는 그의 팔에 매달려서 “왜요? 왜요? 아빠를 보러 가는 거잖아요!” 하고 물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아버지를 본 게 한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타인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래서 가기 싫었어요? 모르는 사람만 있는 황도가 싫어서?”

“……예.”

“겁먹었구나~!”

“열여섯 즈음이었습니다. 사춘기였기도 하고요.”

그가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난 웃으면서 얼굴이 붉어진 도미니크를 빤히 보았다.

“그랬구나~ 가기 싫어서 엉엉 울었구나~”

어쩐지 즐거워서 난 그가 부끄러워하는 것을 알고도 자꾸만 픽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람이 황도에 가기 싫어서 울었다니.

‘엄청 귀엽잖아~!’

도미니크는 “그만.”이라고 하며 내 양 볼을 한 손으로 잡았다.

“그만 놀리세요.”

난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덥석 잡은 채 눈을 빛냈다.

“또 울어 봐요.”

“……예?”

“지금 울어도 엄청 귀엽겠지요? 귀여울 거예요, 분명!”

아아, 꿈이 더 이어졌으면 좋았을 텐데. 등교하라고 선생님이 깨워서 더 못 봤지 뭐야.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어이없는 표정의 도미니크를 쳐다봤다.

“원하는 건 전―부 해 줄 정도로 귀여울 거라고요.”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재워 주려는 게 아니었습니까? 그런 느낌이었는데.” 하고 말했다.

“그러려고는 했지요. 그래야 하는데…… 으음.”

도미니크가 다시 내 무릎 위에 벌러덩 누웠다.

“계속 재워 주시죠.”

아우, 피곤한 사람에게 계속 떼를 쓸 수도 없고. 나는 엄청나게 미련이 남은 표정으로 꿋꿋이 눈을 감은 도미니크를 쳐다보았다.

도미니크를 두어 시간가량 재운 후에 난 아발론으로 향했다. 그즈음, 저택의 사고를 정리한 할아버지와 란슬롯도 입궁해서 우린 함께 황제의 앞에 부복했다.

미카엘을 만났다고도 하고, 음독한 후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황제가 몹시 걱정스러웠는데, 그는 평소처럼 느물느물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았다.

“아, 세상모르고 잤지 뭐요. 덕분에 깨보니 귀찮은 일이 전부 처리되어 있더군.”

그러더니 “충분한 휴식보다 좋은 명약은 없다니까.” 하며 껄껄 웃는 바람에 할아버지는 몹시 언짢은 얼굴이었다.

“제국 각지에 삿된 자가 나타났습니다.”

“알고 있소.”

“하면 이리 용안이 개운하여서는 아니 될 것인데.”

할아버지가 혼잣말하듯 힐난했고, 나는 할아버지의 소매를 쭉 끌어당겼다.

“할아버…… 조부님.”

할아버지는 입을 다물었고, 그 모습을 본 황제가 무릎을 치며 껄껄 웃었다.

“황명도 개가 짖는 줄 아는 ‘어르신’이 손녀딸에겐 이처럼 약하시군.”

란슬롯이 빙그레 웃었다.

“집안이 다복한 편입니다.”

어쩐지 ‘누구와는 다르게’ 하고 뒷말이 이어지는 것 같아서 난 당황스러웠다. 황제도 란슬롯이 웃는 얼굴로 빈정거린 것을 아는지 눈빛이 묘해졌다.

“겁이 없는 건 가풍이었나.”

하지만 그 외에 별다른 말은 없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겁이 없는 것을 보면 내 땅을 쑥대밭으로 만든 놈들을 토벌할 확실한 계획은 가지고 있는 것이겠지. 프렌시프의 후계.”

란슬롯이 고개를 수그리곤 대답했다.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겠습니다.”

“일어나시오.”

황제가 소파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할아버지와 란슬롯, 나는 맞은 편에 앉았다. 도미니크는 황제의 뒤편에 서 있었다. 황제와 우리 가족은 내내 머리 아픈 회의를 이어갔다. 나는 ‘여기 계속 있어도 되는 걸까’ 하는 표정으로 보았는데 다들 정신없이 집중한 듯하여 가만히 손만 매만졌다.

“영애의 생각은 어떻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물었고, 난 움찔해서 눈을 깜빡였다.

“글쎄요……. 사실 제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포털을 열거나, 성수를 불러내거나, 누아제들을 정화하는 것밖에 없어서.”

황제가 한쪽 눈을 찌푸린 채 말했다.

“능력이 출중한 점을 자랑하는 건가.”

“……?”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자 란슬롯이 빙그레 웃었다.

“너야말로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무기이지. 그래서 계책을 낼 수 있는 것이고.”

“할 수 있는 선에선 제국을 위해 애쓸 생각이에요.”

할아버지가 뿌듯하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황제는 어쩐지 언짢은 얼굴이 되었다.

“핏줄 복이 많구려.”

“그런 편입니다.”

“그렇게 뻔뻔하게 대답하면 자식 한 놈은 구금되어 있고, 자식 한 놈은 쓰러져 빌빌대고 있는 짐의 심기가…….”

농담이 오가는 것을 보니 아직까지는 그리 큰 위기는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얌전히 이야기를 듣다가 시계를 보고 “아.” 소리쳤다.

“가브리엘라 황비님께 가 봐야 할 시간이라서 실례하겠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폐하!”

새로 임명된 시종장이 새파란 얼굴로 황제의 집무실에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황도 경계선이 무너졌습니다.”

“뭐라!”

황제가 벌떡 일어나 소리치자 거대한 양피지를 끌어안고 온 시종장이 마른 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황도 근경을 지키던 오뵈르 군이 전멸했습니다. 삿된 자들이 황도로……!”

뭐라고? 황제가 벌떡 몸을 일으키자 시종이 거대한 양피지 두루마리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삿된 자들의 이동 경로를 체크한 지도였다.

나와 할아버지, 란슬롯, 그리고 도미니크가 황제에 이어 지도를 확인했다. 현재 황도로 넘어온 삿된 자들의 수가 서른하고도 둘이었다. 황도 근처에서 제국군과 대치 중인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대로 가다간 일백 구가 넘는 수의 삿된 자가 황도를 덮칠 것이다.

‘너무 빨라.’

우리 측의 예상으론 삿된 자가 황도에 도착하는 건 적어도 보름 뒤였다. 굳은 얼굴로 지도를 보던 할아버지가 시종장을 돌아보았다.

“한 구(具)를 퇴치했다는 소식을 어제 느지막이 전달받고, 오늘 낮엔 지원군까지 내려보냈어. 그런데 갑자기 전멸이라니!”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 삿된 자 네 구(具)가 들이닥쳤다고 들었습니다.”

“누아제가 삿된 자화된 것이냐.”

시종장이 고개를 저었다.

‘완전한 삿된 자가 튀어나왔다고?’

이렇게 갑자기?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탈란이 삿된 자를 풀고 있는 근거지가 황도 근처라는 건가.”

황제의 말에 란슬롯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삿된 자가 제국에 출몰한 후 즉시 황도를 수색하기 시작해서 근경까지 조사를 마쳤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아탈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탈란에 의해 보고서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은 없는가.”

“몇 번이나 확인을 거쳤습니다. 말씀하신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하면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 것은 누아제가 삿된 자화 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지.”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황제가 “오뵈르 군에게 다시 한 번 확인하라.”라고 시종에게 명했다. 황제와 란슬롯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지도에 표시된 삿된 자의 이동 경로를 지긋이 응시하던 내가 말했다.

“포털이에요.”

“뭐?”

“뭐라?”

란슬롯과 황제, 할아버지가 나를 쳐다보았다. 황제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럴 리가. 현재 이 제국에서 포털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영애가 유일하지 않나.”

“대사제는 포털을 쓸 수 있어요.”

아탈란의 사제가 삿된 자, 그리고 샤를리나와 함께 프렌시프 령으로 이동한 것을 보았다. 게다가 프렌시프 군이 그들의 본거지였던 동부 별궁을 포위했을 적에 포털을 이용해 빠져나가지 않았는가.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대사제가…….”

란슬롯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도에 이어진 실선을 매만졌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습니까.”

“포털이 있다면 이상할 것은 없지.”

황제의 말에 란슬롯이 대답했다.

“포털이 있다면 현재 아탈란의 방식은 너무나 비효율적입니다.”

“그건…….”

“저라면 즉시 황도로 진격해 폐하를 비롯한 황족 모두를 해하였을 겁니다.”

“…….”

“전쟁이란 건 체스와 다름없습니다. 킹을 잡은 쪽이 승리하는 게임이란 말입니다.”

“…….”

“아탈란이 삿된 자를 풀기 시작했을 당시, 폐하께서는 음독하여 쓰러진 상태로 황궁은 몹시 혼란스러웠습니다.”

턱을 쓰다듬던 황제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럴 때 삿된 자를 풀었다면 황궁은 손쉽게 무너졌을 테지.”

“예, 게다가 황도는 제국에서 가장 굳건한 수비를 자랑하는 곳입니다. 거점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황도의 이점을 흡수할 수 있을 테지요.”

도미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관을 잃은 오합지졸들만 정리하면 끝이 나는 게임을 이렇게까지 어렵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의 말을 가만히 듣던 내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하나뿐이군요.”

“그래…….”

“그렇구나.”

황제와 할아버지가 차례로 대답했고, 내가 쐐기를 박았다.

“저들의 포털을 열기 위해선 조건이 필요한 거예요.”

황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그 조건이 무엇이냐. 날짜? 아니면 날씨?”

아탈란의 사제가 프렌시프로 나타났을 때. 대사제가 동부 별궁을 빠져나갔을 때. 두 번 모두 날짜도, 날씨도, 하다못해 포털을 연 자도 달랐다.

“……장소예요.”

“장소!”

“지금 생각해 보니 이전에 그들이 동부 별궁을 거점으로 삼은 게 이상해요.”

“이상하다니?”

“동부 별궁은 레오나 님과 폐하께 추억의 장소죠. 즉, 폐하의 눈길이 가장 많이 닿는 곳이라는 뜻이에요.”

등잔 밑이 어둡다는 생각만으로 동부 별궁을 거점으로 삼진 않았을 거다.

“그래, 이상하지. 몹시.”

“한 번 프렌시프에 패배한 뒤에 다시 프렌시프 근처에서부터 삿된 자를 보낸 이유도요.”

“동부 근처에서만 포털이 사용 가능하다는 말이냐?”

“예.”

나는 얼른 란슬롯을 쳐다봤다.

“오빠, 동부에 연락을 취하세요.”

“그래.”

“동부를 샅샅이 뒤져 거점을 알아내야 해요. 그리고 아탈란을 쳐야 우리에게 승산이 있어요.”

란슬롯이 통신석을 잡았고, 황제와 할아버지는 황도에 나타난 삿된 자들의 처리를 논의했다.

“일단 중앙군을 풀어야겠소.”

“사람은 당해 낼 수 없습니다. 황궁 안에까지 성식이 퍼져 있으니, 그것들을 수거해 누아제로 만든 뒤에…….”

“즉시 누아제가 될 수 있는 거요? 다른 귀족들이 올린 보고에 의하면 성식을 먹여도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도 걸렸다던데.”

“프렌시프에서는 가능했습니다.”

“어떻게 말이오.”

그게 가능했던 것은 우리 군사들이 성식을 섭취할 때 도미니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도미니크는…….’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황도에 쳐들어온 삿된 자의 수는 프렌시프 때와 비교할 수 없다. 몇 배에 이르는 수의 누아제가 필요하고, 그렇다는 건 도미니크가 감당할 위험이 훨씬 더 커진다는 말이었다. 나는 치맛자락을 꽉 쥐고, 황제에게 말했다.

“……제가 갈게요.”

“뭐라?”

“저는 삿된 자들에겐 천적이라, 그들은 저를 최우선으로 노려요.”

“무슨…….”

“제가 황도와 반대편으로 이동하면 삿된 자들도 따라올 게 분명해요!”

내가 미끼가 된다면 삿된 자들을 황도 밖으로 끌고 올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들은 할아버지와 란슬롯이 소리쳤다.

“세니아나!”

“아가!”

도미니크까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내 팔을 잡았다.

“안 됩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몰라서 그래!”

도미니크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집무실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그 후 한 시간이 넘게 씨름이 이어졌다.

“간다니까요!”

“안 돼!”

할아버지는 내 손을 붙잡고서 놓아주지 않았고, 란슬롯도 얼굴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도미니크까지 나를 뜯어말렸다.

누아제가 된 프렌시프의 암군이 삿된 자들과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나무 몇 뿌리로 강둑이 무너질 시간을 지체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곧 더 많은 수의 삿된 자가 황도로 넘어올 거예요. 그럼 우린 이대로 죽을……!”

“그럼 죽어야지!”

할아버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너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 승리가 무슨 의미가 있어!”

“할아버지…….”

“정히 막아 낼 수 없다면 너와 함께 죽을 것이다.”

“…….”

할아버지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나는 한 번도 나를 보는 세간의 시선을 부정한 적이 없다. 난 이기적이고 추악한 노인네가 맞아.”

“…….”

“세니아나. 내겐 저들 수천, 수만의 목숨보다 내 손녀 하나가 중하다.”

“…….”

“이 제국도 네 목숨 하나만 못해.”

“아니, 왜…….”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할아버지를 쏘아보았다.

“왜 자꾸 제가 죽는다고 하세요!”

“뭐?”

“안 죽어요. 죽기 싫어요. 저는 오래오래 살 거란 말이에요!”

나는 해 보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가족들이랑 여행도 가야 하고, 스위트피의 집에 파자마 파티도 하러 가기로 했다. 바닷가에 예쁜 식당도 차려야 한다. 쟝뤼크가 손이 나으면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잔뜩 만들어 주기로 했으니 그것도 먹어야 한다.

아빠가 생일 때 편지를 써 주기로 했는데, 그것도 엄청 기대하고 있다. 나는 백 살이 넘도록 오래오래 살다가 자식 손주 옆에 두고 옛날이야기도 하고 싶단 말이다. 그런데 내가 왜 죽어.

“그냥 삿된 자들을 황도 밖으로 몰아내기만 할 거라고요.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어요?”

“중앙군을 누아제로 만들면―”

“싫어요!”

“도미니크가 네 할애비보다 중요하다는 게냐!”

할아버지가 버럭 소리치자 란슬롯이 “조부님.”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란슬롯은 내 어깨를 잡고 시선을 맞추었다.

“세니아나, 너는 우리가 삿된 자들에게 미끼가 된다고 하면 보내 줄 거니.”

“…….”

“가웨인이 누아제의 민란을 처리하기 위해 프렌시프로 갔을 적에도 그렇게 마음 아파했지?”

“…….”

“우리도 그래. 가웨인 때보다 몇십 배는 더 위험한 일을 한다는 걸 두고 볼 수 없잖아.”

“하지만 갔잖아요.”

“뭐?”

“가웨인도 갔잖아!”

나는 울먹이며 란슬롯을 노려보았다. 그는 또 한 번 한숨을 크게 내쉬고 고개를 숙였다. 다시 얼굴을 든 그가 말했다.

“이건 떼를 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난 포털도 있고, 성수도 있단 말이야. 그저 유인하는 것뿐이라고.”

“세니아나!”

“오빠가!”

나는 꽥 소리쳤다.

“오빠가 위험해도 난 이렇게 할 거야. 나도 할아버지 핏줄이니까. 이기적이래도 좋아.”

“…….”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왜 하지 말라고 해?”

“…….”

“나는 언제까지 어린애여야 해?”

“…….”

“오빠, 나는 성인이야.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결정한 일을 실행할 수 있어.”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벅벅 닦은 난 할아버지와 란슬롯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난 오빠와 할아버지, 가족들이 지고 있는 짐을 상상할 수도 없어.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으니까.”

“…….”

“가족들이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으니까.”

“…….”

“할아버지와 오빠는 왜 내게서 가족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기회를 박탈하는 거야?”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가족들이 만든 울타리 안에 있는 지켜 줘야 할 어린애가 아니에요.”

“…….”

“내게서 선택권을 박탈하지 마세요.”

란슬롯의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졌다. 멍하니 날 바라보는 그들을 뒤로하고 난 복도를 걸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윤세나일 적엔 뭐든 혼자 하던 내가 어느새 모든 일을 가족들과 상의하고, 그들 품에서 앳된 막내로 살고 있었다.

‘그건 싫어.’

나는 지켜 줘야 할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 황도엔 할아버지가 있었다. 큰오빠가 있다. 아빠와 작은오빠가 돌아올 집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도 잔뜩 있었다. 나는 내 집을 지킬 것이다.

저택에 돌아온 나는 통신석을 통해서 아빠와 아주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빠는 내 이야기를 오랫동안 묵묵히 들어 주었다.

“그러니까 저는 가족들의 결정에 따라 제 선택을 번복하는 게 아니라 제가 하고 싶은 일을―”

[그렇다면 내 딸은 지금 아비에게 통보를 하고 있는 게로구나.]

통보……. 나는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요.”

[세니아나.]

“네.”

[너를 사랑해서 말리고 싶다는 말은 통하지 않을 시점인 것이냐.]

“……네.”

통신석에서 아빠의 가는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고심해서 결정했다면 그리해.]

“아빠……!”

내가 밝게 소리치자 아빠는 [다만.] 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네게 가족들을 지킬 기회가 필요하듯, 우리에게도 너를 지킬 기회가 필요해.]

“그 말씀은……?”

[너 또한 네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 선에서 가장 안전한 호위 정도는 감당해야겠지.]

차마 그마저 거절할 수 없었다. 홀로 생각에 잠겨 있느라 대답이 지체되자 아빠가 먼저 물었다.

[그마저 싫다면 떼를 쓰고 있는 걸 테고.]

“……아뇨, 싫다는 게 아니라요.”

[아니라?]

“그냥…… 아빠가 제일 반대하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쉽게 허락해 주셔서요.”

[믿으니까.]

“……네?”

[아비가 자식을 믿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아빠가 한숨을 작게 쉬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새카맣게 타들어 재가 되더라도.]

그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이 가슴 아프긴 했으나, 한편으로는 벅차올랐다. 나를 이렇게 믿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게 몹시 행복해서.

“돌아올게요. 무사히.”

[그래.]

끝없이 다정한 그와 통신을 마치고, 겨우 밖으로 나서자 의기소침해진 할아버지가 방 앞을 맴돌고 있었다.

“할아버지……?”

“네 선택을 번복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가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이어 말했다.

“손님이 왔다.”

지금?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할아버지와 함께 응접실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은 도미니크가 보였다.

“저하?”

“……말리셔도 듣지 않으신다기에.”

서로 싫어할 때는 언제고 이렇게 죽이 맞았담?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요?”

“……한 번 울어 보려고 합니다.”

나는 기가 막혀서 인상을 찌푸렸다.

“뭐라고요?”

“울며 애원하면 마음을 바꿔 줄까 해서.”

정말로 눈빛이 촉촉해졌다. 나는 움찔, 하고 뒤로 물러났다.

“안 돼요.”

“영애…….”

“안 돼, 안 돼.”

저런 얼굴로 우는 건 반칙이다. 귀여울 게 당연하잖아. 난 고개를 팩 돌리고서 말했다.

“울어도 마음은 안 바뀌어요.”

“…….”

“아, 안 된다니까. 해 줄 마음 없어, 돌아가세요.”

“…….”

말이 없는 게 더 무서워서 슬그머니 다시 그를 보았다. 고개를 푹 수그린 그는 생각보다 더 귀여워서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으아아, 귀여워! 끌어안고서 마구 예뻐하고 싶어! 나는 끙끙거리며 고민하다가 버럭 소리쳤다.

“너무해!”

“……예?”

그가 고개를 들자 시무룩한 얼굴이 드러났다. 결 좋은 머리칼이 매끈한 얼굴에 감겼다가 떨어졌다.

“우는 게 어디 있어요!”

“당신도 울었다던데.”

“…….”

“황궁에서, 울면서 뛰쳐나갔다고 들었습니다만.”

“……저는 박력 있게 울었어요.”

“저도 박력 있게 울어 보죠.”

정말로 울 것처럼 미간이 일그러져서 난 얼른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막아 버렸다.

“소용없어요. 결정했으니까.”

“애원도 통하지 않겠습니까.”

“네.”

나는 스르륵 손을 내리고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사히 다녀오라고, 잘할 거라고 말해 주세요.”

“…….”

“그럼 전 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그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무사히 다녀오세요.”

“네.”

“잘하실 겁니다.”

“그래요.”

쥐어 짜낸 목소리는 그답지 않게 가늘게 흔들렸다. 모두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 걱정이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나를 기쁘고, 용감하게 만들었다.

무사히 다녀올 거야. 아주아주 잘할 거야. 이들이 나를 사랑한 시간이 후회로 남지 않도록.

할아버지는 내 작전에 프렌시프 암군의 일부와 뛰어난 기사들을 투입했다. 프렌시프 휘하의 귀족들 앞에선 나의 작전을 위해서라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댔지만, 사실 할아버지는 오직 호위를 위해서 이들을 내주었을 것이다.

우리는 동이 트기 전 저택을 나섰고, 난 밤하늘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삿된 자들의 힘은 낮보다 밤에 강하고, 달빛이 닿지 않는 하늘 아래서 가장 강력하다.

‘오늘은…….’

구름에 가려 달이 보이지 않는다.

‘좋아.’

힘이 강력할 땐, 이동 속도마저 놀랍도록 향상된다. 그렇다면 동이 트기 전에 삿된 자들을 모두 황도 밖으로 내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군사들을 돌아보았다. 내 호위역인 고레일과 바커스, 그리고 빅터, 카터 형제가 날 선 눈빛으로 사방을 경계하고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비롯한 군사들에게 말했다.

“나를 따라 줘서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할게.”

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도.”

“당치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고레일과 빅터가 말하자 군사들은 동조하듯 고개를 숙였다. 난 벼린 칼날처럼 예리한 기세의 군사들을 둘러보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작은오빠나 도미니크 황자님처럼 천부적으로 전투에 소질이 있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내겐 그런 재능은 없지.”

“…….”

“검에도, 전술에도 밝지 않아서 당신들을 지켜 낼 여력이 없어.”

“…….”

“하지만 당신들이 나를 무능해지지 않도록 애써 줬으면 좋겠어.”

몇몇 군사들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그럴 만도 했다. 나를 위해 방패가 되고, 검이 되어서 모든 공을 내게 돌리라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으니까. 난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러니까 여러분, 살아남아 주세요.”

“……예?”

그러자 그들은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지휘관의 능력은 부하의 목숨을 얼마나 잘 보전하는지에서 알 수 있잖아?”

“그게 무슨…….”

나는 양손을 허리에 올리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살아남는 것으로 내가 재능은 없어도 지휘관에는 꼭 어울리는 사람이었다는 걸 보여 줘.”

바커스와 카터가 소리 없이 웃었다. 난 활짝 웃고서 소리쳤다.

“자, 그럼 가자. 삿된 자들을 황도에서 몰아내러.”

내 인생의 최초이자 최후의 군사 작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황궁 근경의 산꼭대기로 이동한 난 한눈에 보이는 황도를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빛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횃대를 치켜든 자들이 필사적으로 삿된 자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우선 멀린.’

나는 멀린의 마원이 박힌 목걸이를 잡았다. 어둠 가운데 강렬한 섬광이 퍼졌다. 섬광과 함께 나타난 백사자를 본 산 아래의 백성들이 크게 술렁였다. 거대한 백사자가 하늘을 향해 포효하자 산이며, 건물이 맹렬하게 흔들렸다.

‘다음은…….’

쵸의 마원이 든 브레이슬릿을 매만졌다. 작은 사막여우의 형태로 현신한 쵸가 내 주변을 총총총 맴돌다가 내가 뻗은 팔을 타고 올라와 어깨에 자리 잡았다.

힘에선 멀린이 셋 중 가장 뛰어나고, 테디는 체력과 방어에 강하다. 두 성수는 공격 특화형인 데 반해 쵸는 잔재주가 많았다. 특히 마법에서 잔재주가 많은 아이였다.

“이 주변을 밝혀서 시선이 집중되게 해 줘.”

“네!”

쵸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밝게 대답했다. 우리가 선 산꼭대기 주변이 다시 한 번 환히 빛났다. 산 아래 어디에서도 보일 정도로.

“역시 쵸는 재주가 많네.”

“그렇쵸! 바보 곰과는 다르다고욧.”

테디의 마원이 파르르 떨렸다.

[저주만 잘하는 바보 여우!]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네요, 곰탱이.”

[나쁜 말 했어! 나쁜 말 했어!]

두 성수가 다투기 시작해서 나는 어휴, 한숨을 내쉬었다.

“싸우면 안 되지.”

쵸는 테디의 마원을 향해 흥! 콧방귀를 뀌더니 작은 얼굴을 내 뺨에 비볐다.

“바보 곰 때문에 주인님이 곤란해지셨군요.”

[바보라고 하는 애가 바보다!]

“또 어린애같이 굴쵸.”

[조그만 건 너잖아, 너잖아! 내가 현신하면 너보다 훨―씬 크다, 뭐.]

“지적 수준은 한참 떨어지잖아요?”

[뭐라고~!]

테디와 쵸가 투닥거리는 사이 우리를 발견한 삿된 자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산 아래로 몰려들었다.

“얘들아, 그만―”

내가 인상을 찌푸리기 무섭게 “크르르릉!” 하는 멀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끄앙―!]

“캐앵―!”

멀린의 위협에 놀란 성수들이 각각 비명을 질렀다. 쵸가 내 품속으로 쏙 뛰어들었고, 테디의 마원은 부르르 떨리다가 잠잠해졌다.

[주인, 준비하시오.]

나는 멀린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얼른 멀린을 다시 마원 상태로 만들었다. 성수를 쓰면 훨씬 편하겠지만, 과하게 쓰면 몸이 버틸 수 없다. 포털을 잔뜩 써야 하는 지금은 성수의 사용을 조절해야 했다. 미끼가 되어서 삿된 자들을 끌어들이려면.

‘황도의 시장.’

산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이동했다. 삿된 자들이 놀라운 속도로 시장으로 따라왔다. 그들이 지나올 때마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검은 오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케에엑―!”

유난히 거대한 삿된 자 하나가 기어이 등 뒤까지 따라붙었다. 삿된 자는 기괴하리만큼 많고도 날카로운 이빨을 쩍 드러내며 내게 달라붙었다.

고레일과 바커스, 그리고 빅터, 카터 형제가 내 주변을 둘러싸며 삿된 자를 막아섰다. 미리 성식을 섭취해 누아제가 된 그들의 검이 삿된 자에게 박혀들 때마다 검은 오물이 뚝뚝 떨어지며 점점 더 역겨운 형태로 변해 갔다.

고레일이 나를 향해 뻗어온 촉수를 베어 내자 그 속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의 팔이 튀어나왔다. 검버섯이 핀 노인의 팔, 손톱이 덜렁덜렁한 여자의 팔, 게다가 어린애의 것으로 보이는 짤막한 팔까지. 모두 잔뜩 썩어 곪은 데다 단면이 드러나 흉측했다.

‘그렇구나!’

저 거대한 삿된 자는 누아제 하나가 변한 것이 아니었다. 누아제들을 섞어서 삿된 자화시킨 것이 분명하다.

‘대체 몇 명이나……!’

“카터!”

바커스의 비명 같은 고함이 들렸다. 그가 카터를 재빨리 부축했다.

“크…….”

“정신 차려, 이봐!”

삿된 자의 촉수에 배가 꿰뚫린 카터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카터, 안 돼!”

카터의 형인 빅터가 나를 끌어당겼다.

“이동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카터는 포기하십시오.”

“빅터!”

“저 수준이라면 더 이상 이동할 수 없습니다. 발목만 붙잡을 뿐이에요.”

지금 이 순간에도 삿된 자의 공격이 맹렬했다. 나를 지키던 군사들이 점점 뒤로 밀려 나갔다. 거기다 점점 더 강해지는 고약한 냄새들. 삿된 자들이 이쪽으로 대거 이동 중이라는 얘기다. 나는 입술을 꾹 베어 물고, 카터를 붙잡았다.

“내 말 잊지 않았지?”

“허억, 헉…….”

“살아남아야 해.”

“크흑…….”

“꼭.”

카터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훌륭한…… 판단이십니다…… 아가씨.”

가슴이 너무나 아프다.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정신 차려.’

이 정도쯤은 예상했잖아. 누아제의 몸이라면 사람보다 쉽게 삿된 자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내가 미끼만 잘 되어 준다면 곧 이곳을 벗어나서 치료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가족들과 사용인, 기사와 병사들까지 나를 믿고 기다려 주고 있었다. 나도 이들을 믿어야 했다. 나는 카터가 떨어뜨린 검을 주워서 삿된 자의 촉수를 꿰뚫었다.

“이리 와, 멍청이! 나는 여기에 있어!”

내가 소리치자 병사들에게 가로막혀 있던 삿된 자가 “케에에에엑―!” 울부짖으며 유리 조각 같은 것들이 박힌 날카로운 촉수를 뻗었다. 그때 멀린의 마원을 잡고서 포털을 열었다. 상점 지구.

첫 전투였는데도 대다수의 군사가 상해 있었다.

‘곧 삿된 자들이 올 거야.’

나는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차례 삿된 자들에게 휩쓸린 상점가는 온통 엉망이었다. 주인과 종업원들은 피난을 가서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았다. 한 곳만 빼면.

‘레스토랑.’

제도에 오고서 처음으로 아빠, 할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했던 곳.

“아……!”

멀리서 우리를 향해 따라붙은 삿된 자 몇 구(具)가 보였다. 난 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저쪽이야!”

나를 따라 군사들이 이동했다. 레스토랑의 문을 쾅쾅 두드리자 겁에 질린 얼굴로 창 안에서 얼굴을 내민 지배인이 보였다.

“프, 프렌시프 영애?”

“열어요! 어서!”

지배인이 허둥지둥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간 나는 지배인에게 물었다.

“왜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거예요!”

“다, 다친 종업원들이 있어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저들을 두고서는 모, 못 가요.”

“종업원들은 어디 있어요!”

“저, 저쪽…….”

나는 지배인을 끌고서 종업원들에게 향했다. 삿된 자들에게 당한 모양인지 팔다리를 한 짝씩 잃은 자도 있었고, 어깻죽지가 날아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자도 있다. 대부분 다리를 다쳐서 걷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난 테디의 마원을 잡았다.

“구호소로 이동시킬 거예요. 처음 이동하면 어지럼증을 느끼거나 구토를 할 수 있어요.”

“이, 이동시켜 주시겠다고요?”

“정신을 잃은 사람은 괜찮은지 바로 확인하세요. 구토 때문에 숨을 쉬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아, 아가씨!”

지배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난 즉시 부상당한 종업원들과 지배인을 구호소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군사들을 돌아보았다.

“주방과 창고를 찾아서 흩어져. 가서 밀가루 자루를 이곳으로 모두 가져와.”

“밀가루를요?”

그들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곧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홀에 분진 자루가 가득 모였다. 나는 군사들에게 자루를 모두 터뜨리라고 명했다.

“무슨……! 뭘 하시려고요!”

바커스가 이 상황에서 무슨 짓이냐는 듯 다급히 소리쳤다.

“공중에 분진이 잔뜩 날아다니면 작은 불꽃으로도 폭발을 시킬 수 있어.”

“예?”

1900년대 초반 미국에서 일어난 제분소 폭발 사건이 그러한 이유로 일어난 것이었다.

“날 믿어. 할 수 있어!”

“아무리 큰 폭발이 일어난다고 한들 누아제가 아닌 삿된 자를 죽일 순 없어요.”

쉽게 죽일 수 없다는 거지, 아예 못 죽이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아제를 가지고 있던 아탈란이 왜 1차 대륙 전쟁에서 패배했겠는가. 한 구(具)당 수만이 달려들어야 겨우 없앨 수 있겠지만.

“내 목표는 누아제를 죽이는 게 아니야. 공격력을 감소시키는 거지.”

붙어 보고 알았다. 누아제가 몇이나 융합되어 삿된 자가 된 거대한 것들과는 전투를 할수록 이쪽만 불리해진다.

‘하지만 상처 입은 상태로 쫓아온다면 전투를 하지 않고 도망칠 수도 있어.’

고레일은 군사들에게 명해 자루를 터뜨리고 허공에 뿌려 엉망으로 만들었다. 작업을 마치자마자 삿된 자들이 건물 곳곳을 무너뜨리며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우선 군사들을 이동시켰다.

“잠깐, 아가씨―!”

바커스의 고함을 마지막으로 모두 이동시킨 후, 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성냥 몇 개비를 잡았다. 타이밍 싸움이다. 불을 놓자마자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 수많은 군사와 함께 몇 차례 이동한 상태고, 거기다 성수를 두 마리나 현신시켰다. 타이밍을 제대로 맞출 수 있을까.

‘제발……!’

사방을 포위한 삿된 자들이 일시에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시각 동부. 샤르파크 군과 함께 동부를 샅샅이 수색하던 가웨인이 막사 안에서 수색지를 점검했다.

‘대체 어디에…… 제기랄.’

이 잡듯이 뒤졌지만, 그 어디에서도 아탈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주군.”

프렌시프의 병사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웬 아이가 주군을 찾습니다.”

“아이? 연합한 귀족의 자제이냐.”

“그게…….”

주저하던 병사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귀족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면!”

이런 시국에 어린애의 투정이나 들어 줘야겠느냐는 표정에 병사가 황급히 부복했다.

“소, 송구합니다. 굉장히 급박해 보였던지라…… 게다가 ‘언니의 오빠’를 찾는다는 게 아가씨를 알고 있는 듯도 했고…….”

“잠깐. ‘언니의 오빠’라고……?”

이 근처에서 세니아나를 아는 녀석이라곤 하나뿐이었다.

“들여라.”

“예? 아……, 예!”

병사가 황급히 아이를 데려왔다. 역시 그 녀석이었다. 부족 마을의 어린 족장.

“무슨 일이냐, 꼬맹이.”

“꼬, 꼬맹이가 아니라 슈라예요.”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

슈라는 “언니는 친절한데 언니의 오빠는 못됐잖아…….” 하고 웅얼거렸다.

“가르쳐 주지 말까 보다…….”

“뭐?”

슈라가 토라진 얼굴로 입술을 삐죽이다가 어휴, 한숨을 내쉬고 가웨인과 시선을 맞추었다.

“우리 부족민이 대사제를 발견했대요.”

가웨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 * *

스르륵 주저앉은 나는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 다행…… 다행이다.’

성공했다. 불을 놓자마자 이동했다.

‘제대로 폭발했으려나.’

나는 얼른 통신석으로 상점가 근경에 있는 우리 군에게 연락했다.

[예, 아가…… 씨.]

“칼립스!”

통신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았다. 목소리가 끊겨서 들리고 이따금 기분 나쁜 소음이 들려왔다.

“칼립스, 칼립스!”

[……들……리십니……까!]

“그래! 상점가에서 폭발음이 들렸어?”

[그렇지 않아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군사……들을 보내려던 참이었습니다. 큰 폭음……이 들렸고, 인경의 군……사들이 폭발을 목격……했다고…….]

“아아……. 다행이네.”

[혹시 그 폭……발이―!]

“으응, 내가 했어.”

[아가씨!]

칼립스가 다급히 고함을 내질렀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폭발까지……! 호위들……은 무엇하고!]

“괜찮아, 다들 무사해. 우린 다시 이동하려고 해. 그것보다 시장으로 사람을 보내 줘. 카터가 크게 다쳤어.”

[카터가……. 예, 알겠습……니다.]

“할아버지랑 아빠한테는 비밀이다?”

그러지 않아도 가슴 졸이고 있을 텐데, 폭발까지 있었다는 것을 알면 더 크게 걱정하실 거다. 칼립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응.”

통신을 종료하고서 난 나무 기둥을 잡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군사들은 어디에 있지?’

커다란 떡갈나무, 그 곁으로 초봄에 달맞이꽃이 잔뜩 핀 것으로 보아선 난 목적했던 곳으로 이동한 게 분명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군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잘못 이동시켰나 봐.’

군사들부터 이동시켜야 한다는 생각만 하느라 목적지를 제대로 떠올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걷던 난 불안한 얼굴로 회중시계를 꺼냈다.

‘세 시가 넘었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니, 큰일이다. 해가 뜨기 전에 삿된 자들을 모두 황도 밖으로 몰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 황도로 더 많은 삿된 자들이 몰려올 것이다. 지금 황도에 있는 수만으로도 어마어마한데 삿된 자들이 더 합류하면 황도는 금세 무너지고 만다.

나는 통신석으로 고레일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연결되지 않았다. 칼립스와 통신할 적에도 상태가 좋지 못하더니, 마법사들이 주둔하고 있는 통신탑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난 쵸의 마원을 붙잡았다.

“쵸.”

[예, 주인님.]

“혹시 사람들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럼요! 저는 눈이 좋거든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주체요.]

“다행이다.”

이 근방에 가족들과 함께 쌍월을 구경했던 관측탑이 있었다. 포털을 열어서 이동하려고 하는데 길이 열리지 않았다.

‘이런…… 너무 많이 이동했나 봐.’

힘을 이렇게 많이 쓸 때면 삼십 분 정도는 휴식을 취해야 다시 길을 열 수 있었다.

‘멀지 않으니까 뛰어가자.’

그곳에서 군사들을 찾을 즈음이면 다시 이동할 수 있을 거다. 관측소를 향해 달리는 중에 난데없이 등줄기가 오싹했다.

‘삿된 자가 다가올 때의 기분이야.’

심장이 덜컥 내려앉기 무섭게 통신석에서 멀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하시오, 주인!]

순간 날카로운 촉수가 허공을 가리고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으악―!”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가까스로 촉수를 피했다. 촉수를 피하며 넘어진 바람에 다리가 욱신거렸다. 사사사삭―! 삿된 자들이 주변을 에워쌌다.

‘어떡하지.’

마원은 삿된 자가 다가올 적부터 빛나고 있지만, 성수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현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포털도 열지 못하는 상황에서 성수를 현신시킬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누, 누나, 누나―!]

[주인님!]

도망쳐야 해. 나는 덜덜 떨리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하지만 발목이 접질린 모양인지 날카로운 격통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죽…… 여…… 성녀를…… 죽인다…… 성녀를…….”

“씹어 먹어야지…… 뼈를 씹고…… 피를…… 피를…… 마…… 마시고.”

기분 나쁜 목소리와 함께 이지를 잃은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살려 줘.’

할아버지, 아빠, 오빠……. 그들의 얼굴이 차례로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 후,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난 여기서 죽을 거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삿된 자들 손에 가루가 되겠지. 그럼 가족들은…….

[무사히 돌아와야 한다.]

[제발, 세니아나.]

차마 나를 붙잡지 못하고 걱정 어린 눈으로 이를 악물던 할아버지와 란슬롯. 그리고.

[너를 믿으니까.]

아빠……. 나를 향한 믿음 때문에 평생 스스로를 원망하게 될 아빠.

‘정신 차려!’

나를 입 안의 여린 살을 질끈 깨물고 나무를 붙든 채로 몸을 일으켰다. 발목은 여전히 끊어질 듯 아팠지만, 이를 악물었다.

순간, 삿된 자 하나가 스르륵 무너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건 마치 커다란 젤리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점점 밑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러고 보니 처음보다 이동 속도며 공격 속도가 현저히 낮아졌다.

‘그렇구나!’

레스토랑 폭발에 휩쓸린 삿된 자들이다. 누아제가 아닌 이상 저들을 죽일 순 없지만, 큰 폭발이었던 만큼 타격을 입힌 것이다.

‘도망칠 수 있어.’

나는 삿된 자들을 둘러보고 가장 형태가 온전치 못한 것을 찾았다. 7시 방향의 삿된 자. 진흙을 억지로 뭉쳐 놓은 것처럼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로브를 잡고 휙! 벗어 던졌다. 삿된 자들이 일시에 로브를 쳐다보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7시 방향으로 냅다 뛰었다. 삿된 자를 막 벗어나려던 찰나, 촉수가 달려들었지만 다행히 피할 수 있었다.

‘관측탑.’

관측탑으로 가야 해! 허겁지겁 뛰어 도망치자 삿된 자들이 사사삭! 빠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숨이 턱 끝에 찼으나 조금만 속도를 늦추면 잡힐 것만 같았다.

* * *

황궁의 사무관과 마법사들이 정신없이 복도를 내달렸다.

“황군과 대치 중이던 푸른 눈이 난데없이 공격을 멈추고 이동했습니다.”

푸른 눈이라면 황도에 쳐들어온 삿된 자 중 가장 거대한 개체였다. 몸에 달린 수십 개의 눈 중 하나가 청안이라 하여 붙은 별칭이었다. 황제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다행이군. 황군의 피해는 크지 않겠구나.”

푸른 눈은 아마도 성녀에게 향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긴 합니다만, 푸른 눈이 이동 중에 통신탑을 무너뜨렸습니다. 통신을 담당하는 마법사 대부분이 큰 부상을……!”

“뭐라고?!”

황제가 샛노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전역으로 퍼져 있는 통신탑은 제국의 자랑이기도 하였지만, 너무나 편리한 탓에 통신을 몹시 의존하게도 했다. 전시에 통신이 마비되면 사령부의 명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

“즉시 황궁의 마법사들을 통신탑으로 보내고…… 제도 내의 모든 마법사들을 통신탑으로 집결시켜 복구를…….”

이마를 쥔 채로 중얼거리던 황제가 이어 소리쳤다.

“수석 마법사에게 황궁의 긴급 통신망을 가동하라 전해라.”

“예!”

시종장이 뛰어나가기 무섭게 황제와 함께 있던 도미니크가 검을 잡았다.

“도미니크!”

황제가 그를 붙잡았다.

“거기 서라.”

“통신탑이 무너졌으면 프렌시프 영애의 소대 또한 우왕좌왕하고 있을 겁니다.”

“프렌시프 영애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어딜 간다는 게야.”

아직 밤인 데다가 달도 뜨지 않았다. 삿된 자들이 가장 강력할 시기에 목적지도 모른 채 헤매고 있다간 불똥을 맞기 십상이다.

“네가 가 봤자― 잠깐, 도미니크!”

황제가 그를 뜯어말렸으나 도미니크는 다급히 부황의 손을 뿌리쳤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의 작전이 시작된 후 불안하지 아니한 적이 없으나 얼마 전부터 자꾸만 조급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놈! 게 서지 못해!”

“…….”

도미니크가 대꾸 없이 문을 나서려던 때였다.

“폐하!”

또 다른 시종이 다급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긴급 통신망을 연결하지 못한 게야?!”

“가동에 성공했습니다.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프렌시프 경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동부에 무슨 일이 있다더냐!”

“대사제의 거처를 찾았답니다!”

황제와 도미니크의 눈이 커졌다.

* * *

“아악!”

관측탑을 목전에 두고 삿된 자들에게 발목이 붙들렸다. 크게 넘어진 나는 다리를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이,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삿된 자의 입이 십자로 벌어지고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입 속에 난 무수히 많은 이빨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난 치마 속을 더듬었다.

“케에에엑!”

내 손에 들린 칼에서 오물이 뚝뚝 떨어졌다. 저택을 떠나기 전에 시트론이 들려 준 단검이었다.

[나는 칼을 못 쓰는걸. 내가 달려들어도 생채기 하나 못 낼 거야. 오히려 위험하기만 하고.]

[알렉시아가 그러더라고요. 검을 차는 건 적을 베기 위해서만이 아니라고.]

[그럼?]

[각오래요. 살아 돌아오겠다는.]

내 손을 붙들고 가늘게 떨던 그녀는 미소를 쥐어 짜냈다.

[꼭 돌아오셔요, 아가씨.]

시트론의 얼굴이 너무 간절해서 가지고 왔는데, 정말로 크게 도움이 되었다.

‘시트론, 고마워!’

나는 다시 삿된 자들에게서 빠져나오기 위해 엉금엉금 기었다. 저기만 올라가면 군사들을 찾을 수 있다. 나 홀로 움직이는 건 무리여도 군사들의 도움을 받으면 다시 삿된 자들을 몰아서 황도 밖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필사적으로 땅을 디디며 뛰어가려는 중에 또 한 구(具)가 나를 막아섰다. 도망치면서 시간이 꽤 흘러서 그런지 삿된 자들도 회복을 마친 모양이었다. 아주 멀쩡하고도 거대한 모양새로 내 앞을 가로막더니 금세 나를 향해 돌진했다. 그때 무언가 나를 휙! 끌어당겼다.

“테디!”

사람 형태로 현신한 테디가 나를 끌어안더니 우다다다 뛰어가기 시작했다.

“테디, 테디!”

“나, 나, 커다랗게 현신 못 해. 도망쳐야 돼. 으아아앙! 한심해!”

아니, 네가 커다랗게 현신하지 못하는 건 내 체력 문제인데, 아니, 그보다!

“그쪽이 아니야! 관측소! 관측소로 가야 해!”

“관측소가 어디야?”

“왼쪽!”

“왼쪽!”

테디가 내 말을 따라 하며 왼쪽을 향해 재빨리 뛰었다. 뛰는 내내 테디의 몸이 거품처럼 녹아들고 있었다.

‘억지로 현신을 해서…….’

그의 얼굴이 점점 샛노래지는 걸 보니 몹시 고통스러운 것이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탈란. 아탈란. 아탈란!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어째서 모두를 괴롭게 하는 거지. 그들 손에 죽어 간 사람들, 억지로 삿된 자가 되어 사람을 죽이는 것들. 무너지는 건물들과 그 속에 담겨 있는 꿈과 미래. 모두 소수의 욕망으로 비롯된 일이었다. 대체 욕망이 무엇이건대 남을 짓밟고서 이루어야 하는가.

테디가 관측소에 뛰어들기 무섭게 우리는 우당탕탕 넘어져 나뒹굴었다. 거품처럼 녹아든 테디가 에헤, 웃으며 말했다.

“어서 가.”

“너……!”

나는 엉금엉금 기어 테디에게 다가갔다. 괜찮은 걸까. 다시 마원으로 되돌아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이대로 놓고 가도 되는 걸까. 테디는 바닥에 누워 히히, 웃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누나를 지켰어. 그렇지?”

“……응.”

“나는 바보 곰이 아니라 멋진 곰이야.”

“응, 테디는 아주 멋져.”

“가, 누나. 나는 조금만 쉬고서 따라갈 테야.”

테디가 억지로 나를 떠밀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뛰어가는 동안 테디가 있는 곳에서 커다란 파열음이 들렸다. 그의 마원이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치맛자락을 꽉 붙들었다.

‘괜찮아.’

쉬고서 따라온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다시 올 거야.

쵸의 마원이 가늘게 흔들렸다. 나는 관측소의 문을 쾅! 열고서 탑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쵸! 보여?!”

쵸는 대답이 없었지만 마원은 빛나고 있었다. 곧 마원이 황금색으로 빛나더니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다!’

그때 엄청난 굉음과 함께 관측소가 크게 흔들렸다. 나는 황급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몸에 달린 수십 개의 눈 중 하나가 푸른 삿된 자. 저택을 덮쳤던 삿된 자보다 거대한 개체로, 내가 지금껏 본 모든 삿된 자를 통틀어 가장 컸다. 촉수가 벽을 관통할 때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관측소가 휘청거렸다.

“으악!”

‘반대쪽으로 뛰어내리면…….’

아래를 내려다본 나는 움찔, 뒤로 물러났다. 아찔한 높이였다. 삿된 자들에게 벗어나겠다고 뛰어내려 봐야 즉사.

“도망쳐야……!”

문을 향해 뒤로 돈 순간, 덜컹. 덜컹. 덜컹, 덜컹. 덜컹덜컹덜컹! 꽁꽁 닫아 놓은 나무문으로 화살촉 같은 촉수가 튀어나왔다. 기어이 작은 놈들이 문 뒤까지 따라붙은 것이다. 촉수에 달린 수많은 눈이 나를 발견하고 희번덕 붉게 빛났다.

빠르게 흔들리던 문이 이내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부서지고 작은 놈들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산 넘어 산이다. 뒤엔 다른 삿된 자들이, 아래엔 푸른 눈이 기어오고 있었다.

‘이동, 이동! 제발……!’

포털을 열려고 했지만, 아직까지 몸이 회복되지 않았는지 마원만 빛날 뿐 길이 열리지 않는다.

“케에엑―!”

성 아래에서 올라온 푸른 눈이 나를 향해 입을 벌렸다.

‘엄마!’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우뚝 굳어졌다. 그런데.

‘어?’

금세 사지를 물어뜯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살금살금 실눈을 뜨자 눈앞에 익숙한 등이 보였다.

“저하…….”

“뒤로 붙으십시오.”

도미니크가 내 손목을 잡고 제 등 뒤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를 넘어서 소름 끼치는 비명을 내지르는 푸른 눈이 보였다. 커다란 눈알에 박힌 것은 늘 도미니크가 가지고 다니던 검이었다. 푸른 눈이 비명을 내지르는 사이, 작은 놈이 달려들었다. 도미니크는 내 허리를 끌어안고 요령 좋게 피하며 작은 놈을 걷어찼다.

그가 조율자이기 때문일까. 문을 통해 들어온 삿된 자들은 도미니크에게 달려들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도미니크는 틈을 놓치지 않고 내 손을 잡더니 재빠르게 작은 놈들을 피해 문으로 달렸다.

“어서!”

난 도미니크를 따라 허겁지겁 달렸다. 계단을 통해 몇 층을 빠르게 내려가다가 “윽…….” 신음하며 이를 악물었다. 넘어질 때 다쳤던 발목이 퉁퉁 부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십 개의 바늘이 찔러오는 것만 같았다.

“다쳤습니까.”

“괘, 괜찮…… 앗!”

작은 놈들이 등 뒤를 바짝 추격해 왔다. 다급히 주변을 둘러본 도미니크가 바로 앞에 보이는 문을 향해 나를 밀어 넣었다.

‘관측 기록실인가.’

책장에 양피지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내가 방을 둘러보는 동안 그는 문 앞에 탁자며 책장들을 옮겨 두었다. 하지만 벌써 안으로 들어오려는 삿된 자들이 덜컹덜컹! 문을 소름 끼치도록 빠르게 흔들었다.

“작은 놈들이라 들어오려면 시간이 걸릴 겁니다.”

“하지만 이번엔 쉽게 저들을 넘어서 빠져나가지 못할 거예요.”

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고 그는 무릎을 꿇고서 내 발목을 살폈다. 발목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크게 부어 있었다.

“……더 달리지 못할 겁니다.”

“아, 아니에요. 달릴 수 있……!”

덜컹! 기어이 문짝이 쪼개졌다. 희게 질린 내가 움찔, 물러나자 도미니크는 방에 딸린 창을 활짝 열었다.

“뛰어내리죠.”

“여기서요?!”

3층이라고! 잘못 떨어지면 정말로 못 걸을 것이다. 아직 성벽에 푸른 눈이 매달려 있는데 움직이지 못하면 옴짝달싹 못 하고 잡아먹힐 게 분명했다. 스스슥―! 삿된 자들이 넝마처럼 널브러진 테이블과 책장을 넘어 다가오기 시작했다. 도미니크가 나를 얼른 끌어안았다.

“저, 저하!”

“…….”

“잠깐, 잠깐! 도미니― 꺄악!”

“입 다무세요. 혀를 씹을 수도 있습니다.”

으아아! 선생님…… 엄마! 그의 어깨를 꽉 끌어안음과 동시에 휙! 몸이 떠오르는 것 같더니 그대로 추락했다. 스그그그극! 무언가 긁히는 소리와 함께 파삭! 다시 한 번 몸이 튀어 올랐다.

성벽을 붙잡은 채 그대로 뛰어내리다 커다란 나무에 부딪히기 전에 거대한 기둥을 발로 찬 것이다. 도미니크가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잔가지를 휙, 휙, 옮겨 잡으며 잔디 아래로 뛰어내렸다.

“…….”

“…….”

나는 꽁꽁 굳어서 움직이지 못했다.

‘주, 죽는 줄 알았어.’

다행히 내 몸은 말짱했다. 이런 거 영화에서만 봤는데……. 퍼뜩 정신을 차린 난 “우와!” 소리치다가 잔디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았다. 그의 손이 너덜너덜했다. 손바닥의 살점이 떨어지고, 먼지와 피가 엉망으로 뒤섞였다.

“저하…….”

“업히세요.”

그가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등을 내보였다.

“…….”

“어서!”

푸른 눈이 우리를 발견하고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그에게 업혔다. 뛰는 내내 그의 거친 숨소리가 화살촉처럼 귀 안을 가로질렀다. 등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는 포털을 쓰지 못한다. 이곳은 나무가 울창한 숲이라 말이나 마차로 들어오기도 힘드니, 이곳까지 오기 위해 한참을 달려왔을 터였다. 도미니크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뛰어내리며 다친 게 분명했다. 한참을 뛰었으나 푸른 눈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우리를 추격해 왔다.

쉬이익―! 푸른 눈의 촉수가 나를 향해 돌진하자 도미니크가 땅을 강하게 디디며 재빨리 공격 영역을 벗어났다. 나를 나무 기둥 아래에 내려 주고 그는 푸른 눈을 막아섰다. 그의 검은 여전히 푸른 눈에게 꽂혀 있었다.

‘무기도 없이 혼자서 어떻게 하려고―!’

내가 “저하!” 소리치자 푸른 눈이 “케에에엑!” 울부짖었다. 흰자위마저 붉어진 푸른 눈은 완전히 이지를 잃은 듯했다. 푸른 눈은 나를 막아선 조율자를 향해 달려들었고, 도미니크는 질퍽한 오물을 밟고 도약해 꽂혀 있는 검 손잡이를 잡은 채로 쭉 미끄러졌다.

“키에엑!”

푸른 눈이 고통으로 크게 버둥질함과 동시에 박혀 있던 검이 빠지며 손잡이와 분리되었다. 쯧, 혀를 찬 도미니크는 날이 부러진 손잡이를 내던졌다.

‘저하의 눈이…….’

프렌시프 령을 구한 후 보았던 붉은 눈. 입술 중앙에서 코 아래까지 실금 같은 상처가 생겼다.

‘삿된 자화되려는 거야!’

나는 허겁지겁 그를 향해 뛰어갔다.

“가요! 가세요!”

누아제는 삿된 자가 되기 전이라면 내가 정화시킬 수 있지만, 도미니크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조율자’가 ‘삿된 자’로 변하면 그 뒤엔 어떻게 되는지 기록에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괜찮으니까 제발 가란 말이야!”

도미니크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가늘게 숨을 몰아쉬었다.

“내일……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서 함께…… 차를 마십시다.”

“키에엑―!”

푸른 눈이 도미니크와 나를 향해 돌진했다. 도미니크는 재빨리 나를 밀치고 푸른 눈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먹혔는가 싶었는데, 도미니크의 주먹이 오물을 파고들었을 뿐 푸른 눈은 동요조차 하지 않았다.

“저―!”

“당신은 허브티를, 나는…… 커피를.”

“…….”

“당신이 좋아…… 하는 버터가 듬뿍 든…… 스콘과 함께.”

“…….”

“어르신과 후작…… 프렌시프 경들도 부르죠.”

듣지 않아도 그가 뱉지 않은 말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살아 돌아가서. 평소처럼. 내일이 올 거라는 당연한 믿음과 함께 한가로이.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베어 물었다. 그리고 도미니크가 그와 대치하는 동안 손잡이와 분리되어 떨어진 칼날을 꽉 잡았다.

“세니아나!”

잘 벼린 날이 손바닥을 파고들자 불이 붙은 듯 화끈하고 고통스러웠다. 고통스러웠지만 나는 칼날을 놓지 않은 채로 삿된 자를 향해 돌진했다. 퍽! 촉수가 땅을 내리쳤다. 거대한 채찍처럼.

피하려고 하였지만, 발목의 부상 때문에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왼쪽 어깨부터 허벅지까지 몸이 쇠사슬에 갈린 것 같은 격통이 느껴졌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세니아나!”

도미니크의 고함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아래에서 세 번째, 왼쪽 끝.’

저 눈만 푸른 색이었다. 흰자위까지 온통 새빨간 데도 오직 저 눈만이 사람의 것 같은 청안이었다. 이렇게 거대한 삿된 자를 만들기 위해선 무리하게 누아제들을 합쳐야 한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 하나 어긋났다면, 그래서 저 눈만큼 변이하지 않았다면…….

‘약점일 수도.’

다시금 입술을 꾹 베어 물고서 푸른 눈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저 남자와 함께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와, 또 가족들과 함께 차를 마실 테다. 설탕을 잔뜩 넣은 달콤한 허브티를 마시고, 버터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는 스콘을 라즈베리잼에 묻혀서 입안 가득 베어 물어야지.

가웨인은 나를 아기 돼지라며 놀리면서도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볼 테고, 란슬롯은 그런 가웨인을 타박하며 내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줄 거다.

아빠는 내가 먹는 것을 좋아하니 당신 몫의 스콘을 반으로 나눠 쥐여 줄 테지. 할아버지는 분명 도미니크를 마뜩잖은 눈으로 볼 테지만, 내가 팔짱을 끼고 있으면 그를 타박하기 힘들 거다.

도미니크는 가족들 눈치를 볼까? 그라면 뻔뻔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나는 그가 돌아가는 길에 그를 끌어안고서 오늘 정말 고마웠다고, 너무너무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해 줄 것이다.

이모와 외삼촌에게 티 타임에서 있었던 일을 종알종알 떠들고. 잠들기 전엔 스위트피에게 연락해서 파자마 파티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해야지. 샤르파크 성의 루시를 소개해 주고 싶으니까. 나는 오늘 이 사지에서 살아남아서 꿈같은 일상을, 꼭…… 꼭.

“영애―!”

찢어지는 것 같은 고함이 들렸다.

* * *

“으하하하!”

대사제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신전에 울려 퍼졌다.

“세니아나 프렌시프, 그 빌어먹을 년이 드디어 삿된 자에게 먹혔구나!”

빌어먹을 년. 뭐든 저 홀로 하겠다고 나댈 때부터 이 순간을 예감했다. 대사제의 수척한 얼굴 위로 오랜만에 즐거운 홍조가 드리웠다.

“아쉽구나. 내 손으로 찢어 죽여 주고 싶었는데 말이지.”

그리고 손녀라면 끔찍한 늙은이에게 그 계집애의 수급을 선물로 보내는 것이다. 세상이 무너진 표정으로 주저앉을 나베리우스 프렌시프는 볼 만할 텐데. 그의 곁에 도열해 있던 아탈란의 신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대사제가 폭소를 뚝 그치고 신관을 노려보았다. 신관은 움찔, 고개를 수그리며 웅얼거렸다.

“계집이 죽었으면 어찌합니까. 의식은…….”

“빌어먹을 년이긴 하지만 성녀다. 삿된 자 만 구를 담기 위한 병으로 우리의 신, 아탈란께서 낙점한 년이니 삿된 자의 손에 그리 쉽게 죽지는 않아.”

“그럼…….”

“삿된 자에 흡수되었을 뿐이지.”

“그대로 흡수된다면―!”

“하여 푸른 눈과 같은 거대한 것들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냐.”

일반적인 삿된 자에게 먹혔다면 혼까지 금세 흡수될 테지만, 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삿된 자들은 인간을 쉽게 ‘소화’시키지 못했다. 누아제를 억지로 이어 붙여 놨기에 그 속에 있는 수십, 혹은 수백, 수천의 삿된 자들이 제가 혼을 흡수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 댔기 때문이다. 그제야 신관의 얼굴이 밝아졌다.

푸른 눈은 삿된 자 수천을 이어 붙여 만들어 낸 개체였다. 속에 그만큼 많은 삿된 자가 있다면 흡수되는 속도마저 현저히 느릴 것이다. 대사제는 와인 잔을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사납게 뇌까렸다.

“푸른 눈을 거점으로 이동시켜라. 삼켜진 채로 의식을 치러야겠다.”

“의식의 재료인 샤를리나와 조율자 도미니크는 어찌합니까.”

“조율자야 그년에게 푹 빠졌으니 구하기 위해 제가 알아서 달려올 테지. 샤를리나는…….”

그가 곤란한 어조로 물었다.

“버려졌다고 생각하여 약이 바짝 올랐을 겁니다. 쉬이 오겠습니까?”

대사제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피차 의식이 시작되기 전에 죽여야 할 년. 황궁에 있는 우리 사람에게 넝마 짝으로 만들어 데려오라 일러라.”

대사제가 와인 잔을 내려놓자 신관들이 허리를 굽혔다. 의식을 준비하기 위해 그들이 와르르 빠져나가는 걸 지켜보던 대사제는 상아 의자 뒤, 커튼을 쳤다.

“……대사제!”

황도에 난리가 난 후, 수비를 위해 황도군을 이끌던 에단이 세작에 의해 잡혀 온 것이다. 대사제가 느른히 입꼬리를 올렸다.

“쥐새끼 같은 놈에겐 어울리지 않은 축복이겠으나, 혈족이 내일을 위한 위대한 희생을 치르는 만큼 관람은 허하도록 하마.”

“개자식!”

에단이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탁! 뱉었다.

“세니아나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손등으로 침을 훔친 대사제가 쯧 혀를 차며 에단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말했지 않으냐. 위대한 희생, 이라고.”

“그 아이를 내버려 둬!”

대사제가 손끝으로 그의 뺨을 툭, 툭, 치며 빙그레 웃었다.

“네놈도 곧 죽은 누이의 곁으로 보내 주마.”

“돌았어, 넌……!”

“너희 남매에게는 감사하고 있단다.”

“…….”

“한 년은 가슴에 비수를 품은 주제에 나를 위해 애썼고, 또 한 년은 내게 ‘재료’를 낳아 주었으니.”

그가 쿡쿡 웃으며 에단의 머리를 놓아주었다.

“이 정도면 알뜰히도 써먹었지.”

“개자식! 죽여 버릴 거야! 내가 기필코 너를―!”

축제의 시작이었다. 광분하는 에단을 즐거이 바라보던 대사제가 이윽고 몸을 돌렸다.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에단을 지나치는 대사제의 곁으로 신관 하나가 따라붙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황도로 집결한 삿된 자들이 외곽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삿된 자들은 천적인 성녀를 따라 황도로 이동한 것이 아니냐. 성녀가 사라졌으니 황도에 있을 턱이 없지.”

“하지만…….”

흩어지는 속도가 예상을 뛰어넘는다. 신관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삿된 자들이 빠져나가기 무섭게 누아제가 된 기사들로 황도 주변을 감싸고 있습니다.”

“누아제들로?”

걸음을 우뚝 멈춘 대사제가 미간을 좁히고서 턱을 쓰다듬었다. 누아제들은 어떻게 보면 삿된 자의 새끼와 같다. 따라서 허기지지 않은 삿된 자들은 자연스럽게 누아제가 결집한 곳을 피해서 이동했다.

“제국에서 어떻게 삿된 자의 습성을 알아차린 것일까요.”

“……프렌시프 령에서의 일을 유심히 살핀 것이 아니겠느냐.”

프렌시프 령의 성벽을 누아제들로 감싼 것은 영지 안으로 투입한 삿된 자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친 것과 진배없었다.

“흥, 프렌시프 놈들이겠군.”

악독한 만큼 비상한 놈들이었다. 신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누아제 결계’의 지휘관이 나베리우스 프렌시프와 란슬롯 프렌시프입니다.”

누아제들로 결계를 만들자 황도에서 빠져나온 삿된 자들은 황도 반대편을 향해 이동했다. 황도 함락을 지원하기 위해 보낸 삿된 자들조차 이동 경로를 바꾸었다. 신관이 짓씹듯 “쳐죽일 사도 놈들이 영악한 수를…….” 하고 중얼거리며 물었다.

“그냥 두어선 안 됩니다. 황도를 빠르게 무너뜨리지 못하면 제국의 백성들이 아탈란에 저항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되었다. 어차피 의식만 끝이 나면 자연히 무너질 터.”

의식 후, 세니아나 프렌시프가 ‘절망을 담는 병’이 된다면 절망을 컨트롤할 수 있다. 실험을 거듭해 억지로 이어붙인 삿된 자들이 아니라 아탈란이 안배한 위대한 어둠을.

그깟 누아제 벽 따위 절망을 맞이한 순간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질 것이다. 절망은 인력으로 당해 낼 수 없는 것. 제국의 모든 백성이 누아제가 되어 검을 든다고 해도 감히 맞설 수 없는 완벽한 힘이었다. 그러면 자연히 제국이 손아귀에 들어올 터이니 더 이상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의식이었다.

“샤를리나는 어찌 되었느냐?”

“제국에 난리가 난 틈을 타 지하 옥사에서 무사히 빼돌렸습니다. 의식 전에 도착할 터이니 염려 놓으십시오.”

“도미니크 황자는?”

“푸른 눈을 따라 이동 중입니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대사제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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