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장 (23/24)

23장

나흘 후, 어둠이 가고 여명이 비추었다. 신전 아래 모인 사제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대사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드디어. 1차 대륙 전쟁에서 아탈란의 대신전이 무너진 후 수십 년. 사무치도록 야멸찬 세월이었다. 신성한 교리는 부정당했으며, 위대한 신 아탈란의 안배를 마귀의 횡포라 비난받았다. 가련한 아탈란의 동포들은 무지한 자들에게 핍박받고 어둠 속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숨죽이고, 숨죽이고, 또 숨죽이며. 오직 이날만을 위해 칼날 같은 추위를 견뎌냈다. 비록 프렌시프 령 전투에서 패배하여 거점을 옮겼고, 그러는 동안 삿된 자 만 구(具)의 준비가 늦어졌으나 끝끝내 의식을 맞이했다.

“아탈란의 아들딸들아, 거룩한 평화의 서막이 올랐도다.”

대사제의 목소리가 지하 신전에 울려 퍼지자 신관들은 일제히 무릎을 굽혔다.

“우리의 신 아탈란을 위해!”

입을 모아 소리친 자들을 둘러본 대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먼저 끌려 나온 건 새파랗게 질린 샤를리나였다.

“놓으란 말 안 들려?!”

지하 옥사에서 끌려 나온 후, 사제들의 행동이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제 앞에선 고개도 들지 못했던 자들이 이제는 마치 짐짝처럼 내던지고, 난동을 피우는 제게 서슴없이 손을 올렸다.

‘이상해.’

이상하다. 대사제는 늘 세뇌하듯 말하였다.

[의식은 오롯한 권좌로 가기 위한 통과점일 뿐, 네게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정말인지 몇 번을 확인하면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하지 마라. 너는 ‘병’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조건’일 뿐이야.]

[그래도…….]

[내가 언제 네게 해가 되는 일을 하더냐.]

[그건 아니지만…….]

세니아나 프렌시프가 ‘절망을 담는 병’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조율자는 삿된 자들을 ‘병에 담는 역할’. 그렇다면 약탈자인 자신은 어째서 의식에 필요한 것일까. 샤를리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 대사제가 어깨를 붙잡고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너는 우리의 상징이 될 아이야. 평화의 상징 말이다.]

[…….]

[우리는 약탈자를 찾기 위해 몇 번이나 실험을 거듭했다. 신관의 핏줄, 왕족, 귀족. 모두 조건에 부합하지 않았지.]

[조건이요? 그게 뭔가요.]

[욕망.]

[욕망이요?]

[네 안의 평화를 위한 욕망. 세상 어디에도 너만큼 특별한 아이는 없어.]

샤를리나가 ‘저는 특별한가요?’ 하고 물으면 그는 언제나 빙그레 웃곤 고개를 끄덕였다.

[평화를 위한 욕망이 절망의 발동 조건이야.]

[…….]

[샤를리나, 너는 이 세계에 평화를 드리우기 위해 우리의 신 아탈란이 안배한 고귀하고도 특별한 아이다.]

[고귀하고 특별한 아이…….]

[영웅이 되어라.]

영웅에게 있어 시련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 그러했기에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일을 겪으며 자라난 것이라 대사제는 말하였다. 이전엔 그의 말을 믿었다. 하지만 지하 옥사에서 갖은 곤욕을 겪은 후에 알아차렸다. 소중한 영웅이 될 사람이라면 저를 그리 방치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나는 그저 제물인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제단을 둘러싼 신관들의 표정이 오싹하게 느껴졌다.

“이, 이거 놔……! 놓으란 말야!”

지하 신전의 중앙으로 끌려 나온 샤를리나는 성기사들에 의해 꿇어 앉혀졌다.

“가련한 아이야. 고통은 순간일 뿐이란다.”

대사제의 목소리가 지하 옥사에 음산하도록 낮게 내리깔렸다.

“시, 싫어, 싫어!”

비명을 내지르며 버둥거리는 샤를리나의 시야로 서늘하게 빛나는 단검이 들어왔다. 천천히 그녀의 곁에 다가간 대사제가 무릎을 굽히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정말이지 괴로운 날이었지.”

“대, 대사제님…….”

샤를리나가 애원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들오들 떨며 대사제의 옷깃을 붙들었다.

“부모 없는 제게 대, 대사제님은 아버지 대신이었잖아요……. 네?”

세니아나가 되었지만, 원하던 가족은 가질 수 없었다. 가족이 되어 주지 않는 프렌시프 일가에 상처 입고 분노할 때마다 그는 아주 다정하게 샤를리나는 안아 주었다.

[오냐, 오냐. 마음이 많이 상하였겠구나.]

마치 지금처럼 미소지으며, 세상에 다시 없을 만큼 인자하게 다독여 주었다. 지금껏 대사제를 신뢰했던 것은 그러한 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샤를리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제가 지금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

“평소처럼 상냥하게 알려 주세요. 지금 제가 느끼는 이 공포는 심약한 마음에서 비롯된 어리석은 추측일 뿐이라고.”

“…….”

“그렇죠?”

샤를리나가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손으로 대사제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저는 ‘특별한 아이’잖아요.”

“…….”

“세니아나처럼 가짜가 아닌 진짜 성녀요. 아탈란의 상징! 그렇지요?”

“…….”

“대사제님은 저를 아끼고 사랑하시니까……!”

“……말하지 않았니. 괴로운 시간이었다고.”

대사제가 샤를리나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네가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단다.”

“……!”

“미천한 계집애가 진실로 특별하다 믿는 것이 우스워 견딜 수 없었지.”

“거, 거짓…… 거짓말……!”

소리침과 동시에 복부에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대사제의 검이 꽂힌 복부에서 검붉은 핏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샤를리나는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다시 일어선 대사제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쓰러진 세니아나를 보며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어가던 미아처럼.

[분명 후회할 날이 올 거야.]

미아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대사제는 제단에 퍼진 약탈자의 검붉은 피를 눈에 담곤 소리쳤다.

“절망의 먹이는 준비되었다.”

그가 벽 쪽에 선 신관을 향해 눈짓하자 신관이 휘장을 올렸다. 휘장 뒤에 난 작은 쪽문을 통해 누군가 걸어들어왔다. 대사제가 그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오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

“황자님.”

도미니크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대사제를 응시했다. 푸른 눈과의 싸움 후, 도미니크는 황궁으로 향했다. 황궁에 들어가기 전 행정관 하나가 앞을 가로막았다.

[홀로 돌아오신 것을 보니 성녀님을 구해 내진 못하신 모양입니다.]

[너는 누구냐.]

[조율자께 인사드립니다. 아탈란의 말석입니다.]

미처 다 솎아 내지 못한 아탈란의 끄나풀이었다. 도미니크가 그에게 달려들어 소리쳤다.

[눈 하나가 푸른 놈이 영애를 삼켰다! 당장 대사제를 불러! 성녀는 네놈들에게도 소중한 존재이지 않으냐!]

[대사제께선 오지 못하십니다.]

[네놈……!]

[다만, 저하께서 찾아가실 수는 있지요.]

행정관 행세를 하는 신관은 히죽 웃으며 황궁에서 빼 온 ‘황궁 마차’를 가리켰다. 함께 가자는 말에 도미니크가 움직이지 않자 행정관은 쐐기를 박았다.

[다시 성녀님을 뵙고 싶지 않으십니까.]

마차에 올라타는 것 외엔 도리가 없었다. 도미니크는 그렇게 신전으로 끌려 왔다.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군.”

대사제를 노려본 그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겁도 없이 프렌시프 령 근경에.”

“언제나 그림자 안이 가장 안전한 법이지요.”

“네놈들이 쓸 수 있는 포털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고.”

“…….”

대사제가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영민하시군요. 그를 눈치채고 계셨습니까.”

“그래.”

“칭찬해 드리지요. 늦었지만.”

이미 의식은 모두 준비되었고, 이제 와 제국군이 이곳을 덮쳐 봤자 개죽음만 당할 뿐이었다.

“세니아나는 돌아올 수 있는 것이겠지.”

도미니크의 말에 대사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분은 평화를 위해 할 일이 많이 있으시지요.”

무사하지는 않겠지만. 이미 삿된 자에게 먹혔으니 그 배를 갈라 꺼내더라도 너덜너덜할 것이다. 삿된 자 속에서 살점이 뜯겨 나가고 뼈가 부러졌을 터이니 인간의 꼴은 아닐 터. 그 고통을 겪으며 정신이 온전할 순 없다. 버러지 같은 꼴이나마 살아 있기만 한다면 재앙을 담는 병으로는 쓸 수 있다.

‘미련한 년.’

감히 제게 반항하지만 않았더라면 안전한 제 품에서 무사히 지냈을 텐데. 대사제는 도미니크의 굳은 얼굴을 보고 킬킬, 기분 나쁜 실소를 흘렸다.

“의식 후엔 그녀를 돌려드리지요. 물론, 두 분 모두 일생을 이 신전 안에서 보내실 테지만.”

“……상관없어. 그녀만 돌아올 수 있다면.”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제국의 백성을 모두 버리고 부황마저 저버리시는 겁니까.”

“…….”

“순애보는 갸륵하나 제국에 있어선 애석한 일입니다.”

“쓸데없는 말 따윈 집어치워. 의식을 시작해라!”

도미니크가 조급하게 소리치자 대사제는 “성격도 급하셔라.” 하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푸른 눈을 들여라!”

신전의 문이 열리기 무섭게 “케에에엑!” 푸른 눈의 비명이 천장을 흔들었다. 성녀를 흡수하기 전 크게 당한 모양인지 푸른 눈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진흙 덩어리 같았다. 그럼에도 움직일 때마다 아탈란이 갖은 실험을 거듭하여 만든 ‘검은 사슬(누아제를 이용하여 제작한 사슬. 삿된 자를 옭아맨다)’에 균열을 만들어 냈다.

“오냐, 오냐, 귀여운 것.”

대사제가 흐뭇하게 웃으며 제단의 중앙을 가리켰다. 몇십이나 되는 아탈란의 성기사들이 힘을 쥐어짜 끌어내자 푸른 눈이 조금씩 움직였다.

세 개의 원이 일렬로 이어진 제단 위. 중앙엔 푸른 눈. 양옆으로 쓰러져 피 흘리는 샤를리나와 도미니크가 섰다. 제단 위에 선 ‘의식의 재료’를 확인한 대사제가 땅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 아래에 삿된 자 만 구가 있었다. 모든 것이 완료되었다. 이제 의식만이 남았을 뿐.

제단을 에워싼 신관들 사이로 합류한 대사제가 무릎을 굽히기 무섭게 신관들이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생전 들어 본 적 없는 언어였다. 신관들이 신어(神語)를 외기 시작하자 이윽고 제단 주변으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뿌옇게 흩어졌다.

“커흑!”

샤를리나가 각혈하며 꿈틀거렸다. 도미니크 또한 격렬한 두통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한 손으로 땅을 디뎠다.

“크…….”

그것은 한 번도 느껴본 바 없는 고통이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음습한 감정이 새어들어 오는 것 같은 느낌. 그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형태를 띄워 온몸을 압박했다.

“꺄아아악―!”

살려 줘. 살려 주세요. 구해 줘. 엄마…… 아빠……! 제발!

발아래서부터 들려오는 소름 끼치는 비명. 삿된 자가 된 인간들의 마지막 의식이 제단으로 빨려들었다.

‘아아, 이제…… 드디어!’

신어를 외며 제단을 보는 대사제의 눈빛에 희열이 떠올랐다. 그때였다.

“신전을 포위해라!”

신전의 문이 벌컥! 열리고 제국군이 그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신어를 외기 시작한 사제들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대로 멈춰서 저희들을 포위한 자들을 본 신관들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크윽…… 움직이지 마라……! 의식을 맺어야 해!”

대사제가 짓씹으며 소리쳤을 때였다.

“그거 소용없을걸.”

등 뒤로 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세니아나 프렌시프!’

어떻게, 저년이 어떻게 여기에―!

“너……, 너……!”

대사제가 무심코 몸을 움직인 순간, 바닥에서부터 파지직! 올라온 스파크에 신관들의 관절이 절로 비틀렸다.

“이런.”

세니아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의식 중에 움직이니까 그렇지. 여기에도 써 있잖아. 정신이 흐트러지면 삿된 자에게 먹힌다고.”

그녀가 헌책을 톡톡 두드리며 말하자 신관들의 낯빛이 허옇게 질렸다.

‘저걸 어떻게―!’

의식에 맞춰 도착한 것이 아니라 이때를 노리고 숨죽이고 있었던 건가. 대사제가 크윽, 신음하자 문을 통해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 가웨인이 그의 멱살을 잡아 제단 밖으로 내던졌다.

“크아아악―!”

사지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 듯한 격통이 온몸을 내달렸다. 침을 질질 흘리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대사제를 보고 가웨인은 쯧, 혀를 찼다.

“하필 이런 구석에 숨어 있어서 찾느라 고생 좀 했다.”

그러자 프렌시프의 기사, 알렉시아의 등 뒤에 숨어 있던 슈라가 얼굴을 쏙 내밀었다.

“내가 알려 줘서 찾은 거면서!”

“……어쨌든.”

세니아나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대사제에게 다가갔다. 그가 도망치기 위해 손을 뻗기 무섭게 손등 위로 날카로운 구두 굽이 직격했다.

“큭―!”

대사제의 손등을 지그시 밟던 세니아나가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드디어 제대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어.”

“너, 너어…….”

“소개부터 할까. 잘 알고 있겠지만.”

“빌어먹을 계집이―!”

“당신들이 죽인 미아의 딸이야.”

빙그레 웃는 세니아나의 얼굴 위로 그 여자의 얼굴이 겹쳐졌다.

[당신이 처절하게 후회하는 날, 지옥에서 다시 만나자.]

죽어가면서도 눈빛에 살기가 스미던 맹랑한 계집. 제 손으로 키웠으나 손아귀에만은 쥘 수 없었던, 아탈란을 지키기 위한 검임과 동시에 그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오롯한 창.

미아.

세니아나는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대사제를 향해 빙그레 미소지었다.

“덕분에 이십 년 가까이 다른 세계에서 죽도록 고생하고 왔거든.”

“…….”

“쉽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

* * *

내가 천천히 허리를 굽히자 딱딱하게 굳어 있던 대신관은 으득, 이를 갈았다.

“우매한 놈들. 너희들은 무슨 일을 벌였는지 모를 것이다.”

“뭐?”

“너는 이 땅에 드리울 영겁의 평화를 찢어발겼어.”

“평화라고?”

난 몹시 기가 막혀 헛웃음조차 나지 않았다.

“평화가 아니라 종속이겠지!”

“멍청한…….”

“너희들만이 이 세계에서 군림하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또 죽이고.”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알고 있어? 자식을 잃은 어미, 부모를 잃은 아이, 평생을 가꿔온 터전이 무자비하게 무너지는 걸 보아야 했던 자들.”

“…….”

“너희가 군림하여 전쟁이 사라진다고 그들이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미래를 봐야지! 그들의 자식이, 또 그 자식이, 자식의 자식이 살아갈 내일 말이다! 후손들은 아탈란이 선사한 평화 속에서 전쟁이 없는 삶을 누릴 수 있었어!”

대사제가 악을 내지른 후 살벌하게 덧붙였다.

“서로 가치관이 달랐을 뿐이다. 난 후손들의 거룩한 평화를 위해, 무지한 종자들을 품에 안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을 뿐이야. 세상을 위해 헌신한 내게 무슨 죄가 있느냐!”

“네 가치관만이 옳다고 믿는 오만.”

“……뭐라고?”

“남 위에 올라서고 싶다는 욕망 따위를 세상을 위한 일로 포장한 어리석음.”

“…….”

“수많은 사람을 무참하게 살해하고도 용서를 빌지 않는 몰염치함.”

“…….”

“내게서 어머니를 빼앗고, 인생을 빼앗고, 겨우 찾은 내 사람들 눈에서 피눈물이 나게 한 비정함.”

난 입술을 꾹 깨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 모든 게 네 죄야.”

대사제가 주먹을 불끈 쥔 채로 바르르 떨었다. 난 군사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추포해라!”

그때, 구구구구구―! 굉음과 함께 땅이 요란스레 흔들리고, 대사제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말했지. 너희들은 무슨 일을 벌였는지 모를 거라고.”

그가 말을 맺자마자 제단 위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악―!”

“아악!”

“사, 살려 줘…… 살려……!”

신관들의 목에 굵은 핏줄이 도드라졌다. 새파랗게 변한 그들은 순식간에 컥! 단말마와 함께 쓰러졌다. 칼립스가 허겁지겁 달려가 신관의 맥을 잡았다.

“……죽었습니다.”

가웨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의식을 중단해서인가…….”

“아무래도.”

“일단 도미니크 황자를 챙겨서 빠져나가야겠다. 세니아나, 너는― 세니아나?”

그가 나를 쳐다본 그가 얼굴을 굳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양팔을 교차한 채로 팔뚝을 잡았다. 발밑에서부터 오스스 소름이 밀려들었다. 땅 아래에서 죽은 듯 잠잠하던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의식을 제대로 맺지 못했기에 잠들어 있던 삿된 자들이 눈을 뜨기 시작한 건가.’

의식을 위해 필요한 삿된 자들의 수는, ……일만 구.

“세니아나.”

내게로 바짝 다가온 가웨인이 어깨를 조금 흔들었다.

“왜 그러느냐니―”

“도망……, 도망쳐야 해……. 도망…….”

“뭐?”

“도망쳐!”

콰과과광―!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균형을 잡지 못해 휘청인 아탈란의 성기사 몇이 순식간에 그 아래로 빨려들었다.

“끄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우두두둑, 뼈가 끊어지는 소리가 메어리쳤다. 그리고 이어진 고요 속에서 희게 질린 우리 군사들과 나, 가웨인이 땅을 내려다보았을 찰나였다. 쉬이익―!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촉수가 땅 위로 솟구쳤다.

“아아악―!”

“꺄악!”

비명이 난무했다. 나는 우리 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도망쳐! 어서!”

모두 누아제가 된 군사들이지만, 만 구나 되는 삿된 자들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아니, 제국의 백성이 모두 누아제가 된다고 해도 저들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가웨인을 떠밀며 말했다.

“가요, 빨리!”

“너는―”

“가라니까!”

주춤거리는 가웨인을 칼립스에게 맡겼다.

“어서 오빠를 데리고 나가!”

“하지만 아가씨는―!”

“난 포털을 열어서 도망칠 테니까.”

“…….”

“이 작전의 지휘관은 나야.”

“…….”

“명령이다!”

내가 단호히 소리치자 칼립스는 이를 악물고 가웨인을 붙들었다.

“잠깐……! 이거 놔! 세니아나, 세니아나!”

“가십시오, 주군. 위험합니다!”

“세니아나……!”

가웨인의 고함이 점점 멀어졌고, 나는 제단을 향해 뛰었다.

‘도미니크!’

제단 중앙에 쓰러진 도미니크는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재빨리 제단에 올라간 난 그를 끌어당겼다. 곧바로 포털을 열려고 했으나 마원이 빛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이곳으로 향할 때 마원들과 나눈 말이 있었다.

[멀린, 테디는 어떻게 되는 거야? 혹시…… 죽은 거야? 다시는 그 애를 볼 수 없어?]

초조한 물음에 멀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수를 인간과 같은 선상에 놓아선 아니 되오. 인간은 사망 후엔 되돌아올 수 없지만 성수는 다르지. 빛 속에서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난다오.]

[그래요, 주인님! 바보 곰은 우리에게 맡기체요!]

그들은 사라진 테디의 마원을 재구성하기 위해 모든 힘을 집중했다.

[아, 아직이에요, 주인님! 테디를 구성해 내지 못해서 길을 열 수 없쳐요!]

쵸의 울먹임이 전음으로 느껴졌다. 난 입술을 꽉 깨물고 도미니크를 부축하려 했다.

“걸어서 나가야겠어요. 빨리 일어나요!”

그가 나를 밀어냈다.

“도미니크!”

“나는 두고…….”

“그런 말 듣기 싫어. 살 때도, 죽을 때도 우린 함께 있을 거야!”

“당신…….”

“내 고집 알죠? 내가 더 살길 바란다면 빨리 내 손 잡아!”

나는 도미니크를 부축해서 억지로 일으켰다. 조율자인 그와 붙어 있어서인지 삿된 자들의 공격이 비껴갔다. 하지만 점점 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촉수가 우리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조율자보다 천적인 성녀를 먼저 인식하는 것들이 있어. 빨리 가지 않으면―’

그때, 무언가 내 발목을 잡았다.

“나, 나도…… 나도 데려가…….”

“샤를리나.”

“여, 여기서 죽기 싫어. 제발…….”

간절한 표정으로 울먹이던 그녀가 가까스로 내 다리를 끌어안았다.

“너는 착한 애잖아. 그렇지, 세니아나?”

“…….”

“기, 기억 못 하겠지만 우리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어. 내가 너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지 아니?”

“…….”

“그때를 기억해 봐, 응?”

“하나 기억나는 게 있지.”

난 눈빛에 희망이 떠오른 샤를리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네게 손을 뻗으며 살려 달라던 나를 외면하던 너.”

[어, 언니…… 언니……! 으아아앙! 아파! 아파! 살려 줘!]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선 죄다 검붉은 피를 쏟으며 고통에 몸부림치던 날 보고 샤를리나는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어서 죽어. 죽어! 죽어 버리라고! ]

[언니…… 으아아앙!]

[그래야 내가 예쁜 구두를 신을 것 아니야.]

“세, 세니아나! 나는 어렸다고, 어려서…… 대사제의 말에 놀아나서, 그래서……!”

“그때의 너는 어렸지만, 지금의 너는 다르잖아.”

“……!”

“그때도 지금도 너는 나를 노려 왔고.”

“세니아나!”

“잘 가, 마음 아파하지는 않을 거야.”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매정히 발을 떼었다. 문 앞에 이르렀을 때, 기어이 땅이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는 비틀거리다가 넘어져 버렸고, 내게 기대 있던 도미니크도 함께 바닥에 널브러졌다.

“아가씨!”

고레일과 바커스였다. 삿된 자 유인작전에서 부상을 입고 신전에 투입하지 못했던 그들이 회복 후 이곳에 돌아온 것이다.

“바보들! 왜 여길―!”

“제 성격 아시잖습니까. 말은 더럽게 안 듣죠.”

바커스가 빙그레 웃곤 도미니크를 쳐다보았다.

“갑시다, 약골 황자.”

“나서고 보자…….”

도미니크가 바커스를 노려보았다. 바커스는 “나선 후에 얼마든지.” 하며 그를 업고는 냅다 뛰었다. 고레일은 나를 부축했다.

“저는 모범생인 편이지만, 인생에서 한 번은 막 나가도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정말…….”

그가 나를 공주님 안듯 양팔로 안고는 문밖을 뛰쳐나갔다. 우리가 문을 나서자마자 입구가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헉, 허억, 숨을 몰아쉬며 이마를 잡았다. 건물은 무너졌지만, 그 아래에 있던 삿된 자 만 구는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서 산 아래로!”

우리가 재빨리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으나 어느새 돌무더기에서 빠져나온 삿된 자들이 단숨에 따라붙었다.

“으, 으으으, 으…….”

지금껏 삿된 자들을 상대해온 누아제 기사들도 어마어마한 숫자에 기가 질려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거대한 삿된 자가 십 자 입을 쩍 벌리며 나를 향해 돌진했다.

“세니아나!”

“영애!”

도미니크가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몸을 돌렸고, 가웨인이 삿된 자를 밟고 튀어 올라 정수리에 검을 꽂아 넣었다.

“키에에엑!”

삿된 자가 몸부림치자 가웨인이 휘청였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앞으로 십 분!]

멀린의 목소리였다.

‘십 분?’

십 분이면 포털을 쓸 수 있다는 소리인가? 내 물음을 긍정하듯 마원에서 번쩍 빛이 났다.

무너진 건물에서 삿된 자들이 계속 튀어나오고 있는 지금 십 분을 어떻게 버틴단 말인가. 게다가 사위가 온통 어두컴컴하다. 밝은 낮에도 도망치기 어려운데 지금이라면 더더욱.

무엇보다, 삿된 자들은 나를 쫓아올 거다. 내가 산 아래로 내려가면 민가와 근처에 있는 프렌시프 령이 큰 피해를 입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알렉시아의 등 뒤에 붙어 어쩔 줄 모르는 슈라와 눈이 마주쳤다.

“슈라!”

“으, 으응?”

“네 부족 마을에 결계가 있지? 삿된 자들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결계 말이야!”

“으응, 부족민이 삿된 자가 되어 빠져나가면 우리 부족이 곤란해지니까…….”

“우리를 네 마을에 숨겨 줘!”

결계가 있다면 못해도 십 분쯤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슈라가 곤란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거 빚이야.”

어느새 삿된 자의 정수리에서 뛰어내린 가웨인이 슈라의 머리를 휙휙 쓰다듬으며 말했다.

“프렌시프의 이자는 뭐든 수십 배지. 보복도, 은혜도.”

슈라가 ‘치!’ 입술을 삐죽 내밀다가 팔을 뻗었다.

“저쪽이야!”

우리는 슈라의 안내를 받아 뛰었다. 뛰는 동안 난 슈라에게 통신석을 빌려주었다.

“이거…… 소중한 보석이잖아. 멀리 있는 사람과도 연락할 수 있는 거! 우리 마을에도 있어.”

“그래, 코드를 알지?”

“그럼! 난 족장인걸!”

그녀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락해서 부족민들을 프렌시프 령으로 먼저 내려보내.”

혹시 피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까. 부족민 걱정으로 얼굴이 샛노랬던 슈라가 환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래도 돼?”

“물론!”

삿된 자 만 구가 근처에 있는 지금은 우리가 마을로 가지 않아도 그들은 피신해야 할 거다. 슈라는 얼른 부족장에게 연락했다. 우리가 슈라의 부족 마을로 도착했을 땐 움막이 모두 텅텅 비어 있었다.

“저기, 언니……. 프렌시프 사람들이 우리 부족 마을 사람들을 핍박하지 않을까……?”

“그럴 리 없어. 가웨인이 오면서 프렌시프에 연락해 두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보다 다른 게 걱정이었다. 마을로 들어온 후로 결계 때문에 삿된 자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으나,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들어오고서부터 내내 결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내가 양손으로 이마를 꾹 눌렀을 때였다.

“세니아나?”

가웨인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마원이 모두 환히 빛났다. 나는 시야에 가득 배어들어 온 빛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꽉 감았다.

* * *

“헉!”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모르는 공간에 있었다.

‘아니, 아니야.’

나는 여기를 알고 있어. 이곳은…….

“주인.”

“주인님!”

“누나!”

마원들이 나를 반겼다. 포털의 안, 이곳은 포털의 안이 분명하다. 포털이 안정되지 않았을 적에 나를 지키기 위해 삼키던 공간 말이다. 마원들이 일제히 몸을 비켜 주었다. 그 사이에서 나타난 사람은…….

“세나야.”

“……선생님.”

언제나 궁금했다. 그녀를 다시 보게 되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어떤 생각과 어떤 모습으로 마주하게 될까. 그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온 마음과 시간, 정성, 생을 모두 희생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지킬 수 있을까. 그건 얼마나 소중하고 다정한 감정인가.

그러니까 말해 주어야지. 나는 행복하다고. 낳아 줘서, 오랜 세월 나를 지켜 줘서 감사하다고. 그녀가 그리운 밤엔 이뤄지지 않을 다짐을 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하고 나니 그런 다짐들은 전혀 쓸모 있지 않았다. 진심은 눈물 안에 감춰지고, 나는 그저 그녀의 품 안으로 뛰어들 뿐이었다.

“선생님……, 엄마…….”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애써 미소지은 선생님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고생 많았어, 정말로.”

“…….”

“엄마…….”

“우리 세나를 키우면서 엄마는 늘 행복했어. 고마워, 우리 딸. 엄마 딸로 태어나 줘서.”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고생만 시킨 못난 딸인걸요.”

“세나야.”

“……네.”

“엄마는 이 세상에 빚이 아주 많은 사람이야.”

“…….”

“나 살자고,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무수히 많은 사람을 해쳤어. 누군가의 자식, 누군가의 부모. 헤아릴 수 없는 자식과 부모들이 내 손에 목숨을 잃었단다.”

“그건…….”

엄마는 흐리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죽어 지옥에 떨어지는 게 당연한 사람이지. 그래서 감히 행복을 바라지 않았어.”

“엄마…….”

“하지만 아서를 만나고…… 네가 태어나고 난 정말로, 정말로 행복했어.”

“…….”

“네가 내 품에서 고물거려 줄 때, 나 같은 못난 사람을 사랑하고 아껴 주는 너를 볼 때, 어버이날에 카네이션을 달아 주었을 때, 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해 주는 너를 볼 때.”

“…….”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두려울 정도로 행복했단다.”

나는 엄마의 옷깃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말해 주는 엄마가 고맙고도, 가슴 아팠다.

“훌륭하게 자란 네가 세상에 빚이 많은 엄마 대신 세상을 지키고, 사람을 지키고, 숱한 상처를 받아도 다정함을 잃지 않아 주었지.”

“…….”

“너는 엄마 인생의 구원이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제 지키지 못할지도 몰라요. 의식이 실패해서 삿된 자 만 구가 모두 깨어났어요. 그러니까……!”

“나는 이곳에서 너를 지킬 거다. 그리고 너를 지키려는 내가 네 힘이 되겠지.”

“네?”

그때였다. 엄마의 뒤에서 낯익은 사람이 나타났다.

“이제 가야 해, 미아. 우리에겐 아직 소임이 끝나지 않았어.”

“……아!”

일전에 엄마를 만났을 적 보았던 여성이었다.

“저…… 당신은 알고 있어요.”

그녀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나도 마찬가지란다. 늘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었지.”

“역시…….”

“부족한 아들이 신세를 졌구나.”

“레오나!”

황제의 처음이자 마지막 연심, 그리고 도미니크의 모친.

“영리하구나, 세니아나.”

“도미니크가 당신, 아니, 저기! 아, 아줌마?”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서 동동거리자 엄마와 레오나는 쿡쿡 웃었다. 레오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아줌마는 너무 한걸.”

“그게 아니라…….”

“그러게.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모…… 라기엔 내 아들과 너무 깊은 사이지?”

“저기, 그러면…….”

어머님?

나는 차마 소리 내지 못하고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엄마가 “너무 놀리지 마, 언니.” 하며 나를 감싸 안았다. 레오나는 입가를 주먹으로 가리며 우후후, 소리 내어 웃었다.

“아들과 그 사람이 앞으로도 신세를 지겠지. 혼을 낼 땐 매섭게, 가끔은 타일러도 보면서 휘어잡고 살아. 알았니?”

“……네!”

“잘 부탁한다.”

레오나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고 엄마가 또 한 번 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공간이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어, 엄마! 엄……!”

그렇게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완전히 빛 속에 파묻혔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땐 슈라의 마을이었다. 나는 헉, 숨을 삼켰고 가웨인과 도미니크가 날 흔들었다.

“세니아나!”

“영애!”

“엄마…….”

가웨인이 굳은 얼굴로 “뭐?” 하고 물어왔다.

“무슨 일 있었어?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나서 놀랐다고.”

“그게…… 아, 참! 시간! 어떻게 되었어요? 얼마나 지난 거예요?! 결계는 무사해요?”

가웨인과 도미니크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입을 연 건 도미니크였다.

“보름이 지났습니다.”

“뭐라고요?!”

거짓말! 내가 선생님과 만난 건 고작해야 오 분일 터였다. 아니, 그보다 더 짧았으면 짧았지 결코 보름이나 지나진 않았을 시간이란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상해.’

엄마가 이 세계에서 죽은 후, 윤세나가 된 나를 찾아왔던 건 십 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엄마는 길라게온에 있을 때와 같은 젊은 모습일 수 있었을까. 또 처음 멀린의 마원을 손에 넣었을 적, 힘이 불안하여 포털에 삼켜졌을 때도 순간이라고 여겼지만 돌아와 보니 며칠이 지나 있었다.

‘혹시 포털은 공간뿐만이 아니라 시간도 넘나들 수 있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보름이나 지났으면 삿된 자들이 결계를 깨뜨렸을 텐데…… 어떻게 무사하실 수 있었지요?”

“네가 사라지고 난 후, 이 구역에 내내 빛이 뿜어져 나왔어. 삿된 자들은 그 빛 때문에 접근하지 못했고. 그들은 그냥 산을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확신할 순 없었지만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레오나 님이 도와주신 걸지도…….’

두 사람은 아탈란에서 사력을 다해 키운 강력한 신관이었으니까.

“그럼 제국은…….”

“곳곳이 초토화되었다. 이곳에 남아 있던 기사들이 오전부터 이상한 빛이 가라앉기 시작했다기에 혹시 네가 돌아왔을까 싶어 온 거고.”

“그랬군요…….”

“일단 내려가자. 빛이 사그라들었으니 삿된 자들이 접근해올 거다.”

가웨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들과 함께 내려가면서 궁금한 점을 몇 가지 더 물어봤다.

“산 아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어요?”

“일단 동부 사람들은 황궁 마차와 아탈란이 두고 간 포털 등을 이용해서 황도로 이동시켰지.”

듣자 하니 아탈란의 포털은 내 생각대로 지역에 이어진 듯했다. 마치 지하철이나 버스 역처럼. 그곳을 통하면 지정된 한 곳으로만 이동할 수 있는데 황도 근처에 ‘역’이 있었다.

“그렇군요. 황도에 누아제 기사들로 결계를 만들어 두었으니…….”

“하지만 그것도 더는 버티지 못할 듯싶다.”

“왜요?”

“잠에서 깬 삿된 자들에겐 먹이가 필요하더군.”

내가 “먹이?” 하고 가웨인을 쳐다보자 그가 쯧, 혀를 찼다.

“사람 말이다.”

“……이 인근에서 민란을 만든 게 프렌시프의 눈길을 돌리기 위해서만이 아닌 거군요.”

“누아제를 한 마리씩 깨우면서 민란에서 죽은 자들을 데려와 먹이로 써먹은 거겠지. 개자식들.”

“먹이를 찾아 사람이 많은 황도 쪽으로 이동하고 있나요?”

“허기로 제정신이 아닌지 이동 속도가 놀랍더군. 뭣보다 진화하고 있어.”

“진화라면…….”

“지혜가 생겼다. 아탈란이 남긴 포털을 이용할 줄 알아.”

이런. 나는 경직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삿된 자들이 황도로 집결하는 건…….”

“오늘, 늦어도 내일까지는 모두 도착할 거다.”

나는 걸음을 우뚝 멈추고 두 사람의 옷깃을 잡았다.

“뭐, 뭐야?”

“영애?”

“그럼 우리도 황도로 가요.”

“포털, 이제 쓸 수 있는 거냐?”

열흘 전에 포털이 열렸었다면 지금도 열 수 있겠지.

‘컨디션도 좋고.’

난 고개를 끄덕이고 당장 포털을 열었다.

* * *

“으아아악!”

기어이 누아제 결계가 뚫리고 수많은 삿된 자가 내부로 밀려들었다. 사람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삿된 자를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운 건 황궁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삿된 자 하나가 황궁의 담을 부수고 내부로 이동했다.

“꺄아악―!”

“아, 아아, 아으으…….”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는 자도 있었고, 처음 맞는 공포에 질려 실금하는 자도 있었다. 황군들이 삿된 자에게 달려들었으나 성냥개비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그즈음, 옥사가 무너지며 갇혀 있던 황후가 기어 나왔다.

“히, 히익―!”

눈앞에서 목격한 삿된 자를 피해 달아나던 그녀는 황비, 그리고 시녀, 시종들이 잔뜩 모여 겁에 질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로웨나가 두 팔을 벌리며 삿된 자를 막아섰다.

“화, 황비님!”

시녀들이 뜯어말렸으나 그녀는 그들을 밀쳐냈다.

“너희는 어서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모시고 달아나라.”

“하면, 하면! 황비님은 어찌하시려고요―!”

“나는 내궁의 주인이야. 주인이 집을 비우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이냐.”

“황비님!”

어쩔 줄 몰라 하던 시종들은 “어서!” 하는 황비의 고함에 못 이기고 곧 달아나기 시작했다. 후들후들 떨리는 팔을 꾹 부여잡은 로웨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삿된 자들에게 쫓겨오는 황후가 보였다.

“황후?”

“……로, 로웨나.”

행색이 말이 아닌 황후는 삿된 자의 눈을 피해 도망치다 로웨나에게로 향했다. 로웨나가 그녀의 팔뚝을 붙들었다.

“이 뒤가 아발론이에요!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요! 당신이 여기서 도망치면 삿된 자를 유인하는 꼴이 아닙니까!”

“모, 몰라, 난 그런 것 모른다고! 이거 놔!”

“당신 아들이 아발론으로 옮겨지지 않았습니까!”

“놔, 놔! 난 죽기 싫단 말야!”

“당신, 한때 국모였잖아! 못 가! 안 돼! 헬리오스가 아발론에 있다고!”

제가 키운 아들이 저곳에 있다. 처음, 북부의 귀족들에 의해 황궁에 올라왔던 때를 기억한다. 마음 붙일 곳 하나 없이 외롭던 그녀에게 유일한 벗은, 아이러니하게도 자리를 빼앗아야 할 선대 황후였다.

[이리 와서 북부의 이야기를 더 해 주렴.]

[폐하께선 제가 밉지도 않으십니까. 북부 귀족들이 당신을 버리고 저를 택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요.]

[미안할 따름이지.]

[예?]

[황궁의 밤은 사무치게 외롭거든. 나 대신 밤을 견뎌야 할 네게 미안하구나.]

아들을 부탁한다던 선대 황후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말대로 황궁의 밤은 사무치게 외로웠다. 그 밤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건, ‘엄마…….’ 하고 부르며 저를 찾던 작은 손.

‘헬리오스.’

혹자는 말했다. 로웨나가 성공을 위해 모후 잃은 가여운 황자를 이용하고 있노라고.

‘아아…….’

내 속으로 낳지 않았다고 자식이라 부를 수 없는가. 아이를 사랑하는 건 오직 낳은 부모뿐인 걸까. 그렇다면 이리 애끓는 마음은 무엇일까. 사내와 마주 볼 때보다, 나 자신을 생각할 때보다 더 뜨겁게 그 아이를 사랑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온 정성을 다해서.

그 아이가 위험하지 않기를 바랐기에 황위를 갈망했다. 미카엘의 정적으로 스러지길 바라지 않아서 영악하고도 교활한 삶을 택했다.

헬리오스. 헬리오스. 헬리오스야.

황후가 로웨나를 떠밀었다. 그 탓에 황후에게 집중되어 있던 작은 삿된 자의 시선이 로웨나를 향했다. 황후는 도망쳐 아발론을 향해 뛰었고, 삿된 자가 로웨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 아들아…….’

그녀가 눈을 꽉 감았을 때였다.

“비키세요!”

황궁 위에서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콰과광―! 굉음이 들려왔다.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뜬 로웨나가 제 앞을 가로막은 사람을 보고 중얼거렸다.

“세, 세니아나…….”

“괜찮으세요, 황비님?”

“그래…….”

“다른 사람들은요?”

“폐하와 황태자 전하는 아발론의 비밀 통로를 통해서…….”

“가브리엘라 황비님은요?”

“함께 계신다.”

세니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쵸!”

[말씀하체요, 주인님!]

“정리하고 따라와.”

[네!]

여우는 씩씩하게 말하며 삿된 자들을 향해 크르릉, 포효했다.

[바보 곰, 거기서 지켜보라고요. 내가 얼마나 잘하는지 말이에요.]

[테디는 바보 아냐! 아냐!]

거대한 여우와 곰이 삿된 자들을 막아 냈고, 세니아나는 황비의 손을 잡고 냅다 뛰었다. 로웨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세니아나를 쳐다봤다.

“왜, 왜 날 구해 주는 거니…….”

“네?”

“우리가 손을 잡긴 했지만 미카엘이 없는 지금, 도미니크를 황위에 올리려면 내가 방해될 텐데.”

“그런가요. 음, 도미니크 저하도 그렇게 생각하시려나.”

“너는 다르다는 거야?”

“네.”

세니아나가 히히 웃고 로웨나를 돌아보았다.

“제가 황비님을 좋아하거든요.”

“……다들 교활하다던데, 넌 이상도 하다.”

“뛰면서 말하면 혀를 씹으실 수도 있어요!”

두 사람은 금세 아발론에 도착했다. 황족들은 아발론의 비밀 통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시종이 그들을 보호했다.

“폐하, 어서 가셔야 합니다……!”

“일어나지 못해!”

미카엘이 황제의 손을 뿌리쳤다.

“두고 가시라니까요. 전 여기서 죽는 게 폐하께 이롭지 않습니까. 죄인을 어디로 데려가시려는 겁니까!”

황제가 그의 뺨을 철썩 내리쳤다.

“죽어도 내 품에서 죽어.”

“…….”

“자식이 찬 바닥에서 식어 가는 꼴을 아비가 어찌 본단 말이냐!”

황제와 미카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이내 황제는 아들을 끌어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

황제에게 손이 잡혀 걷는 미카엘은 고개를 떨구었다. 잡힌 손이,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너무나 생경해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일은 서로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자.”

“…….”

“너 좋아하는 것도 먹으면서. 그래, 애플파이를 좋아했던가.”

“애플파이는 제가 아닙니다.”

멈칫한 황제가 그를 슬쩍 돌아보았다.

“……아냐?”

“도미니크 녀석이었죠.”

“형에게 녀석이 뭐야.”

“제대로 따지면 제가 형입니다. 도미니크가 해를 넘기고 태어났으니, 확실히 위죠.”

“그런가…….”

“그렇습니다.”

“애플파이는 도미니크……. 그럼 네 녀석은 무엇을 좋아하지?”

“…….”

“…….”

“…….”

침묵이 길어지자 황제가 버럭 소리쳤다.

“바쁜 짐이 궁인들을 찾아다니면서 네놈 좋아하는 것을 물어야 했겠느냐! 알려 주지 않은 놈이 잘못이지!”

괜스레 성을 낸 황제가 헛기침을 하며 앞서 걸었다.

“하면 내일 이야깃거리는 정해졌구나. 네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이야기하자.”

내일은. 그래, 내일은.

미카엘이 머뭇거리며 입을 떼려던 그때, 아발론의 커다란 창이 부서지고 삿된 자가 들어왔다.

“뭐 하시는 거예요!”

세니아나가 버럭 소리치고 그들을 떠밀었다.

“어서 나가세요!”

“세니아나.”

“프렌시프!”

미카엘과 황제가 그녀를 보고 눈을 홉떴다.

“언제 황도로 올라온 것이냐.”

“방금이요. 그보다 빨리―!”

“짐을 구하러 왔느냐.”

“네.”

“미카엘과 헬리오스, 황비들을 부탁하마.”

“폐하께서는요?”

“황궁은 제국의 상징이며 기둥이야. 황제가 어찌 그것을 저버리겠느냐.”

“버리세요.”

“뭐?”

“제가 오늘 황궁을 없애 버릴 생각이니까.”

황제는 “그게 무슨 말이야, 궁을 없앤다니!” 하며 소리쳤으나, 마침 황비궁의 삿된 자들을 정리하고 나타난 거대한 여우 성수로 화제가 돌아갔다.

“저, 저건……!”

“염려하지 마세요. 제 성수예요.”

“성수? 네 성수는 하나가 아니었단 말이냐?”

게다가 저건 일전에 황궁에 나타나 샤를리나를 추포하게 만들었던 여우 성수잖아!

‘짐을 속였어?’

황제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그때 삿된 자의 촉수가 날아왔고, 쵸는 쾅! 소리를 내며 앞발로 촉수를 붙잡았다. 하마터면 죽을 뻔한 황제가 주르륵 미끄러졌다.

[주인님, 이 어린 것을 구할까요?]

“어린 것?”

세니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쵸는 흥! 하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는 이 어린 것이 젖 투정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는걸요.]

“그야 그렇겠지만…… 으응, 뭐. 구해드리자.”

그러자 쵸가 눈을 가늘게 뜨며 황제에게 말했다.

[어린 것, 주인님을 방해하지 말고 뒤로 붙으렴.]

“무엄한……!”

다시 삿된 자가 쉭!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자 황제가 움찔, 몸을 굳혔다. 미카엘이 제 아비를 끌어 쵸의 뒤로 향했다.

“무엄한 것에게 목숨을 구걸하란 말이냐.”

“살고 싶으시다면 구걸밖에 답이 없을 듯합니다.”

[저 어린 것은 눈치를 볼 줄 아는구나.]

“감사합니다, 여우님.”

쵸가 황제를 쳐다보았다.

[저 어린 것과 주인님을 보아 등에 태워 줄 터이니 감사하렴.]

“뭐야?! 이놈― 으읍!”

미카엘은 부황의 입을 틀어막고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짐은, 우웁! 이거 놓지 못해!”

[시끄럽긴. 너는 어느 상황에서나 입을 가만두질 못하는구나. 네가 주인님을 괴롭히는 것을 다 보았어. 물어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 감사하지 못하고……!]

“쵸.”

세니아나가 그를 엄히 불렀다.

“그만하고 어서 두 분을 모시고 황궁을 나서야지.”

그녀가 눈을 부릅뜨자 황제에게로의 날카로운 기세가 거짓인 양 쵸는 끄으응…… 울며 몸을 낮췄다.

[화내지 마체요, 주인님……. 쵸는 주인님의 어린 양이랍니다.]

“그래, 그래. 쵸는 참 착해. 두 분을 모셔다드리고 빠르게 돌아와야 한다?”

[네.]

황제와 미카엘을 호위하던 시종들이 세니아나의 앞에서 놀라울 정도로 나긋나긋해진 쵸를 보고서 혀를 내둘렀다. 쵸는 황제와 미카엘의 옷깃을 가볍게 물어 던지듯 등 위에 올려 두었다. 앞발론 남은 이들을 잡아채 재빨리 뚫린 창문을 향해 뛰어내렸다. 창문 아래로 소스라치게 놀란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때마침 도미니크와 프렌시프 일가가 군사들을 이끌고 아발론에 나타났다. 누아제 기사들이 삿된 자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세니아나가 도미니크에게 달려갔다.

“황도에 모인 사람들은요?”

“영애의 말씀대로 내보내고 있습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요?”

“앞으로 두 시간.”

세니아나가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 황태자 헬리오스와 로웨나가 그녀를 찾아왔다.

“왜 빠져나가지 않으시고!”

“아직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영애를 도울 수 있지?”

세니아나는 빙그레 웃고서 입을 열었다.

“숨어 있는 백성들도 있을 테니 마법사들에게 황도 내에 대피령을 내리도록 하세요. 그리고 두 분도 어서 황궁을 벗어나시고요.”

“그래.”

모두 바삐 움직였다. 그 사이에서 홀로 선 세니아나가 멀린과 테디의 마원을 꽉 그러잡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 * *

명을 내린 지 십 분. 황궁의 마법사들이 황도 곳곳에 설치된 마탑을 통해 안내 방송…… 아니, 대피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사이렌 같은 긴급음과 함께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황도 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군사들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황궁의 시종들을 돕기 위해 삿된 자들과 맞서기 시작했다.

황제와 미카엘을 황궁 밖에 내려두고 온 쵸는 마원이 되어 내 손 안에 갈무리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제도는 고요해졌고, 선득한 공포가 폐를 꽉 옥죄었다. 백성들이 빠져나가고 삿된 자들이 황도에 집결한 것이다. 난 마지막으로 황궁에 남은 군사들과 도미니크, 그리고 우리 가족들 이동시켜 주려 했다.

“넌 어떻게 하고!”

가웨인이 내 손목을 붙들었다.

“저도 금세 갈 거예요.”

“삿된 자의 수를 알고 있어? 무려 만 구라고, 만 구! 너 홀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괜찮아요. 든든한 아군이 있으니까.”

“뭐?”

난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가 오빠들을 데리고 가주세요.”

“…….”

“저를 믿어 주실 거지요?”

침묵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란슬롯은 “조부님!” 하고 소리쳤다. 할아버지가 란슬롯과 가웨인의 어깨를 잡았다.

“가자.”

“하지만―!”

할아버지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란슬롯과 가웨인은 이를 악물고서 각각 내 손을 꽉 그러잡았다.

“약속하는 거지?”

“네.”

“언제나 약속을 지켜 주었으니까. 그러니까…….”

“반드시 돌아갈게요.”

나는 헤헤 웃으며 길을 엶과 동시에 허공에서 번쩍, 빛이 났다. 다시 눈을 뜬 순간 황궁에 남은 것은 오직 나와 도미니크, 그리고 아빠뿐이었다.

“아빠.”

“그래.”

“아빠.”

“……그래.”

나는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꼭 말하고 싶었어요.”

“…….”

“저, 아빠의 딸이라서 정말로 행복했어요.”

새까만 밤, 길을 찾을 수 없어 홀로 헤매고 있을 때 다정하게 주변을 밝혀 주는 내 가로등이며 등대. 그를 만나고 난 더 이상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울타리가 나를 지탱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서로 어떤 말도 하지 않았으나 나는 그가 나를 바라볼 때마다, 나를 향해 웃을 때마다, 내 손을 잡아 줄 때마다 그가 삼킨 말을 선명하게 느꼈다.

너를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어떤 남자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나를 뜨겁게 사랑한 사람. 완벽한 사랑 하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난 누구보다 용감해질 수 있었다.

아빠는 희미하게 웃으며 무릎을 굽혔다.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가에 다정한 주름이 생겼다.

“너는 내 봄이고, 숨이야.”

“…….”

“네 아비로 산 매 순간이 내겐 기적과 같았다.”

“…….”

“기다리고 있으마.”

나는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내 긍지임과 동시에 나를 긍지로 여겨 주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기사님. 돌아올게요, 당신 품으로.

‘아버지.’

실낱같은 빛이 그를 감쌌다. 이내 그는 내 품에서 사라졌고, 난 씩씩하게 고개를 들었다.

“갈까요!”

도미니크가 나를 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 * *

겨우 제도 외곽에 다다른 사람들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멀리 우뚝 선 황궁을 바라보았다. 검은 물결이 황궁으로 몰려들고, 휩쓸릴 때마다 삶의 터전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어느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저것은 어둠이며 종말이다.

황궁을 향해 우르르 몰려가는 삿된 자들의 수에 질린 병사가 마른침을 삼켰다. 심약한 자들이 먼저 눈물을 터뜨리기 시작하자 누군가는 탄식했고, 누군가는 주저앉았다. 그 속에서 아서와 나베리우스는 눈을 떼지 않고 황궁을 지켜보았다.

“아서.”

“예.”

“그 아이는 돌아올 수 있을까.”

“돌아올 겁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아이가 아닙니까.”

단호한 말과 달리 불안이 말끝에 묻어났다.

“저건―!”

누군가 소리쳤다. 우레가 하늘을 가르기 무섭게 허공에 거대한 백사자와 곰, 여우가 나타났다. 그들은 검은 물결을 황궁으로 몰아가며 커다랗게 포효했다. 성수가 발을 옮길 때마다 섬광이 번쩍이며 검은 파도가 밀려났다.

“일레인!”

황제가 소리치자 붉은 로브를 입은 여성이 병 안에 담긴 물을 바닥에 뿌렸다. 흙바닥에 물이 번져가며 타원형의 테두리가 되었다. 원형 내부에 푸른 실선이 이어져 한 면이 되더니 그 안에 황궁을 비추었다. 탑 꼭대기에 선 사람은.

“세니아나…….”

란슬롯이 중얼거렸다. 탑 위에 우뚝 선 세니아나가 자신을 향해 몰려오는 삿된 자들을 보며 소리쳤다.

[난 여기에 있어.]

검은 물결이 난폭하게 휘몰아치자 그녀는 또 한 번 나긋이 중얼거렸다.

[나를 삼키고 싶거든 이리로 와라.]

기어이 검은 물결이 탑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작은 개체, 혹은 큰 개체, 가리지 않고 올라오는 자들과 맞서는 건 도미니크였다.

“저 녀석.”

헬리오스와 미카엘이 그에게 집중했다.

“멍청이, 뒤야!”

헬리오스가 도미니크의 뒤로 달려드는 삿된 자들을 발견하고 소리치자 황제가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동시에 도미니크의 검이 등 뒤로 다가온 삿된 자의 미간 정중앙에 박혔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아비 심장 멎게 하긴……!’

당최 제대로 된 놈이 없다. 고집 세고, 아비 알기를 우습게 알아서…….

‘장하지.’

그래서 도무지 말릴 수 없었던 것이다. 또 한 번 도미니크에게 날카로운 공격이 행해졌다. 가슴을 졸이며 화면에 집중하던 황제는 이마를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아서가 그를 부축했다.

“자식놈들 때문에 공이나 짐이나 고생이 많소.”

“아비 때문에 자식들이 고생 많은 게지요. 살아 돌아온다면 누가 저 애들을 탓하겠습니까.”

그래, 살아만 돌아온다면.

‘제발.’

제국의 모든 이가 저들의 귀환을 빌었다.

* * *

이제 됐다. 다 모였어.

‘이 정도 범위면 길에 들어갈 수 있어.’

“영애!”

도미니크가 나를 끌어안고 세 시 방향에서 달려든 삿된 자를 쳐냈다. 휘청이는 바람에 떨어질 뻔했다. 나는 도미니크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조심스레 바닥에 발을 디뎠다.

“저하, 이제 됐어요. 내려가셔도 돼요.”

“안 갑니다.”

“고집은!”

“당신 고집도 보통 고집이 아닐 텐데요.”

“…….”

“살 때도, 죽을 때도 함께 하자고 한 사람이 누굽니까.”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를 빤히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래요. 함께 가요.”

“이제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기도요.”

“예?”

난 그의 손을 잡은 채로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삿된 자들을 황궁 쪽으로 몰고 오던 성수들이 이내 뿌연 빛이 되어 흩어졌고, 내 손엔 각각 색이 다른 마원이 나타났다. 나는 마원을 꽉 잡았다.

‘도와줘.’

그들이 화답하듯 손안에서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큰 범위를, 알지 못하는 공간으로 이동시킨 적은 없었다. 성수들은 삿된 자들을 몰고 오며 이미 힘을 잔뜩 소진한 상태. 어쩌면…….

‘길을 열 수 있는 건 이번뿐일지도 몰라.’

모든 힘을 소진한 마원은 테디 때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그땐 다른 두 성수가 테디를 실체화시켰으나 이번엔 모두 사라지게 될 테니까.

쵸의 마원이 가늘게 흔들렸다.

[주인님.]

이어서 [주인], [누나] 하는 작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마원의 온기가 다정할 뿐이라 나는 가슴이 저며 들었다. 탑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삿된 자들이 바글거리는 지옥도.

‘괜찮아.’

몇 번이나 되뇌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포털 안에서 엄마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이곳에서 내가 삿된 자를 죽이는 것만이 평화의 방법이 아님을.

[너를 지키려는 내가 네 힘이 될 거야.]

포털에 만 구의 삿된 자를 가둔다. 육체가 없는 두 강인한 영혼이 삿된 자를 섬멸할 때까지. 나는 강하게 바랐다. 다시 그녀들을 볼 수 있기를.

콰과과과광―! 또 한 번 우레가 하늘을 가르고 마원에서부터 날카로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난 도미니크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길이 열렸다.

나를 향해 미소 짓는 엄마를 본 것 같은 건 내 착각일까. 나와 도미니크는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빛 속에 녹아들었다.

* * *

검은 물결과 함께 황궁이 사라졌다. 화면 속에 남은 것은 오직 빈터가 되어 버린 땅과 스산한 바람 소리뿐. 굳은 얼굴로 화면을 주시하던 사람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맙소사…….”

무거운 침묵이 내리깔렸다. 앙상한 빈 몸을 드러낸 가지가 세차게 흔들리며 고요에 파묻혔던 사람들이 이윽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삿된 자가 사라졌다……!”

“살았다! 살았어!”

혹자는 곁의 사람을 얼싸안으며 기뻐했고, 혹자는 두 손을 모은 채로 주저앉아 환희했다. 그 속에서 프렌시프의 사람들과 황족들은 황망하게 빈터를 바라보았다. 이 속에 없는 자들을 떠올리며.

세니아나와 도미니크가 사라졌다. 이 땅에 도래한 어둠과 함께.

* * *

몇 개월 뒤, 황도. 무너진 건물 무더기 사이로 옷을 얇게 입은 아이들이 쾌활하게 달려나갔다.

“내가 세니아나다! 사자는 조엘! 여우랑 곰은 미티, 코르티가 해! 해리는 황제 해!”

“아, 왜 나만 계속 황제야. 또 숨어 있어야 하잖아!”

“유디스, 욕심쟁이! 만날 저만 세니아나 하고!”

아이들이 히히덕거리며 뛰어놀자 벽돌을 옮기던 인부들이 씁, 입소리를 내며 손을 내저었다.

“이 녀석들! 위험하니까 여기서 놀지 말랬지! 애들은 저―기 공터에서 놀아.”

삿된 자가 없어진 후, 나라는 다시 활력을 찾았다. 제국민의 대부분은 재건에 정신이 없었고, 아이들은 내일이 오는 것이 당연하게 여기며 즐겁게 뛰놀았다.

“점심 드시고 하세요!”

누군가 소리치자 정신없이 움직이던 인부들이 제 허리를 두드리며 식사를 위해 마련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메뉴는 뭐요?”

인부가 묻자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닦아 낸 요리사가 소리쳤다.

“제철 채소 샐러드와 완두콩 수프, 오믈렛이오. 잠깐, 잠깐! 새치기하지 말고 줄을 서시오, 줄을!”

“미천한 놈들 사이에 껴서 식사를 하는 것도 불쾌한데 줄까지 서란 말이냐!”

귀족 청년이 평민들 틈을 파고들며 인상을 찌푸리자 누군가 그의 목덜미를 휙! 잡아챘다.

“다른 사람들은 한가해서 점심이 되기 전부터 줄을 섰을까, 응?”

“쟈, 쟝뤼크 님.”

“정말로 돌아가시고 싶지 않으면 줄 서시지.”

쟝뤼크가 청년을 휙, 밀어내며 수프가 가득 든 통으로 다가갔다. 그가 맛을 보자 요리사들뿐만 아니라 줄을 선 사람들마저 잔뜩 긴장하여 마른침을 삼켰다.

“이 수프에 후추가 어울린다고 보느냐.”

“그, 그게…….”

“어째 두 달을 내내 가르쳐도 늘지를 않아!”

요리사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우물쭈물하자 그가 버럭 성을 냈다.

“엊그제 낸 과제가 재료에 어울리는 조미료 아니었느냐! 생각 없이 책의 내용만 베껴 오니 제자리걸음을 하지!”

“하, 하지만, 이 많은 요리를 하려면 손이 열 개여도 부족합니다…….”

“그, 그렇습니다……. 자는 시간도 쪼개가며 요리를 하는데 수양할 틈이 있을 리가요…….”

“세니아나는 학기 중에 수업을 들으면서 시험 준비를 했는데도 내가 낸 과제를 소홀히 여긴 적이 없다!”

“그야 그분은 천재시니…….”

쟝뤼크가 웅얼거리며 변명하는 요리사의 이마를 꽝 쥐어박았다.

“그 아이가 천재라고 누가 그러더냐. 처음 나와 만났을 적엔 칼도 손에 익지 않은 생 풋내기였어.”

“거짓말―!”

“정성이 부족한 것이다, 정성이.”

어째 마음에 드는 놈이 하나도 없다. 쟝뤼크가 눈을 부라리자 천막 너머로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열 셰프!”

어린 요리사가 눈을 반짝이자 아곤이 씩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성질 더러운 사수를 만나 너희들이 고생 많구나.”

“아닙니다. 저희 같은 것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모든 요리사들의 꿈인 로열 셰프. 그들 중에서도 아곤은 유난히 존경하는 요리사가 많았다. 정치에 눈이 벌겋던 다른 로열 셰프들과 달리 후진 교육에 힘쓰는 데다가, 특히 배움의 기회를 얻을 수 없는 가난한 평민 아이들에게 로열 키친의 셰프들을 보내 가르치도록 했다.

요리사들이 존경으로 눈을 반짝이며 아곤을 바라보았다.

“뵈, 뵈, 뵙게 되어 여, 여, 여, 영광이, 입니다!”

소년·소녀들이 아곤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굴을 붉히자 쟝뤼크가 마뜩잖은 듯이 아곤을 보았다.

“무슨 일이우.”

“상사에게 말버릇하곤.”

“내 제자 덕에 좋은 자리 차지하셨군.”

“탐이 나면 빼앗아 보든지.”

쟝뤼크는 칫, 혀를 차며 에이프런을 의자에 걸쳐놓았다. 그러곤 아곤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요리사들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배식 후에 시험을 볼 테니 긴장들 하고 있어.”

“또요?!”

“세니아나는 매일같이 시험을 봤어!”

“으아아!”

아곤이 신음하는 요리사들을 둘러보다가 픽 웃으며 쟝뤼크를 쫓아 배식장을 벗어났다. 반쯤 탄 아름드리나무 앞에서 쟝뤼크가 그를 흘끔 쳐다보았다.

“고매하신 아곤 님께서 황도 외곽까진 무슨 일이오?”

“네놈을 보러 왔지.”

“누가 보면 다정한 사이인 줄 알겠군.”

“나만큼 네놈에게 다정한 사람은 많이 없지.”

“그런 사람이 몇 개월 내내 귀찮은 일만 맡겨?”

아곤은 쟝뤼크를 전역에 보내 가난한 평민들을 교육하게 했다.

“성질은 더러운 놈이 꽤 잘 가르친단 말이지.”

그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쟝뤼크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따위 칭찬은 됐으니 쉬게나 해 주시지. 어떻게 휴일 한 번을 안 주나.”

“휴일을 주면 아가씨를 찾으러 다니려고?”

“…….”

세니아나를 자식처럼 사랑한 쟝뤼크는 내내 그녀를 찾아 헤맸다. 닮은 사람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만 들으면 제국뿐 아니라 타국행마저 불사했다. 그리고 매번 실망하는 것이다.

“손은?”

아곤의 말에 쟝뤼크가 고신으로 다쳤던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나아지는 중이우. 비 오는 날엔 움직이기 힘들지만.”

“돌아와라.”

“남 밑에서 일 못 하는 것 모르시우? 난 최고 아니면 안 해.”

그가 오만한 얼굴로 말하자 아곤이 가벼운 어투로 대답했다.

“그러니 돌아와.”

“무슨 소리유?”

“오늘 사직서를 제출했다. 폐하의 인가가 떨어졌어. 너 아니면 로열 키친을 맡길 사람이 없더군.”

“……프렌시프로 돌아가려고?”

“어르신 곁에 내가 필요할 것 같아서.”

쟝뤼크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르신에게 문제가 생긴 거유?”

“언제나처럼 당신 고통은 내색하지 않으시지.”

“……그리 아끼던 손녀가 사라졌으니 오죽할까.”

쟝뤼크가 주머니를 더듬어 연초를 찾았다. 연초를 입에 물고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땅은 이제 조금씩 이전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는데, 이 땅을 지킨 이는 사라져 찾을 수 없었다. 쟝뤼크가 연초에 붙을 붙이곤 후, 새하얀 한숨을 뱉어 냈다.

“난 됐수. 애초에 그 아이 아니었으면 쳐다도 보지 않았을 자리였는데, 무슨.”

“로열 키친에서 새로운 제자를 찾아봐. 평생 그리 살 수는 없지 않으냐.”

“난 하나면 됐수다.”

쟝뤼크가 희미하게 웃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 들여 키워 낸 나무가 너무나 흡족하여 다른 곳을 볼 여유 따윈 없었다.

쟝뤼크와 아곤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갔지만, 마음 한구석만은 누군가 한 움큼 뜯어낸 듯이 허전했다.

그 시각, 프렌시프 성.

“고얀 놈들!”

마담 버지니아가 고함을 내질렀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가신들을 노려본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이 나라와 우리의 고향을 지킨 게 누구인지 잊었는가!”

“압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청드리는 것이 아닙니까.”

가신 하나가 인상을 쓰고 마담 버지니아를 마주 보았다.

“아가씨가 지킨 이 나라, 우리의 고향을 재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 한데 사라진 아가씨를 찾기 위해 얼마만큼의 사람과 재물이 들고 있는지……!”

파르뎅 남작이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은혜도 모르는 금수 같으니!”

“재물과 사람만이라면 몰라도 프렌시프의 혈족이 한 곳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러니 우리만 다른 곳과 달리 재건이 늦어지는 게 아닙니까!”

“당신들, 그게 지금 말이라고……!”

“각하께서 홀로 황도에서 프렌시프를 위해 애쓰고 계십니다. 그분의 힘이 되어드리는 것이 돌아가신 아가씨에게도……!”

“누가 돌아가셨다는 거야!”

가웨인이 버럭 소리쳤다.

“세니아나는 살아 있어.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노년의 가신이 침통한 얼굴로 이를 악문 가웨인을 바라보았다.

“아가씨께선 제국의 영웅이십니다. 온 백성이 모두 그녀를 칭송하고, 아가씨의 이름을 딴 호수와 신전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모두 그녀에게 감사해하지요. 이 늙은이 또한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아가씨는 저희에게도 자랑이고 존경하는 주인.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저희라고 편하겠습니까.”

“……!”

“아가씨가 사라지신 지 몇 개월이 지났는지 아십니까.”

“고작 몇 개월이잖아! 몇 년이 지나도 우리는 그 아이를……!”

“그것을 아가씨께서 정녕 바라시겠습니까…….”

란슬롯은 차디찬 얼굴로 가신들을 쏘아보았고, 가웨인은 주먹을 불끈 쥐며 벌떡 일어났다.

“세니아나를 핑계로 이용하지 마라!”

“도련님!”

“그 아이는―!”

“그만.”

나베리우스가 낮은 목소리로 장내를 정리했다.

“조부님!”

“어르신.”

세니아나의 행방을 계속 수색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이들과 수색을 멈춰야 한다는 이들이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공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무슨……!”

란슬롯이 드물게 목소리를 높였다. 나베리우스가 말라붙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재건을 우선해야지. 그래야지.”

“세니아나를 포기하자는 말씀입니까!”

“그렇게 정리하고 회의를 이만 마무리하겠다.”

가신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고, 가웨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나베리우스를 응시했다. 세니아나가 사라진 후, 가장 조급하게 그녀를 찾아 헤맨 이가 나베리우스였다.

하루도 성에 있지 못하고, 제국 전역을, 타국을 헤맸다. 이제는 ‘터미널’이라고 불리게 된 아탈란의 포털에 막대한 재물을 투자한 것 또한 그였다. 오직 세니아나를 다시 보기 위해서.

란슬롯이 그를 향해 달려갔다. 복도에서 그를 붙들고 고성을 내질렀다.

“정정하십시오!”

“…….”

“분명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

“정정하란 말이야!”

란슬롯이 이렇게 속내를 훤히 드러내며 흥분하는 일은 없었다. 사용인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자, 회의장에서 나온 가웨인이 제 형을 붙들었다.

“형, 그만…….”

“포기하려거든 당신 홀로 해. 난 포기 못 해! 못 한다고!”

날카로운 고함이 성을 흔들었다. 가웨인은 잔뜩 흥분한 제 형의 허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제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우리가 찾아 주기를, 다른 세계에서 매일 밤 가족을 그렸듯이 지금도……!”

란슬롯에게 붙들려 우뚝 서 있던 나베리우스가 기계처럼 그의 손을 떼어 내곤 걷기 시작했다. 영지의 총집사가 “괜찮으십니까?” 물었으나 그는 대답 없이 서재로 들어갔다.

[아아! 안 돼요! 다 드셔야죠.]

건강에 좋다는 채소를 몽땅 갈아서 만든 주스를 들이밀며 인상을 쓰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테이블 위에 빼꼼 튀어나와서 히히 웃던 모습이 환상이 되어 아른거린다.

[산책갈 시간이에요, 할아버지.]

제 팔을 잡고서 ‘오늘은 저―기 뒷산까지 가 봐요.’ 하던 모습도.

미친 사람처럼 그 애를 찾아 헤맸다. 살아만 있어 준다면, 그렇다면 신에게 제가 가진 것들을 모두 내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목숨마저 말이다. 어깨를 떨군 채 멍하니 소파에 앉은 그가 소파 테이블 한 편에 놓인 세니아나의 사진을 들었다.

[할아버지.]

못난 것.

[할아버지.]

어찌 이리 늙은이의 마음을 괴롭게 해.

[할아버지!]

나도 데려가라, 이놈아. 너 없는 곳에서 나는 이제 더 살 수 없으니. 우는 법을 배우지 못한 노인은 그저 사진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숨도 쉬지 못하고서 그저 가만히, 소중히, 품에 안고 고개를 숙였다.

“세니아나…….”

* * *

나베리우스는 낯선 들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봄에 코스모스가 활짝 핀 풍경을 보니 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녹색 줄기 위에 붙은 여린 분홍색 꽃망울을 본 그가 언제나와 같이 손녀를 떠올렸다.

“너와 닮은 꽃이 더 있었구나.”

“저와 닮았나요?”

나베리우스는 숨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제가 앉은 의자 위로 빼꼼 고개를 내민 세니아나가 히히 웃었다.

“도미니크는 아니랬는데.”

그 아이의 곁으로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좀 더 강인한 꽃이 어울리죠.”

도미니크였다.

“그렇대요.”

“너…….”

나베리우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제 무릎에 고개를 올려 둔 채 빙그레 미소 짓는 손녀를 바라보았다.

“너…… 너.”

“할아버지, 저 보고 싶었어요?”

“……!”

그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손등을 짚었다. 세니아나는 그의 손에 얼굴을 비비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보고 싶었는데.”

“……하나도 안 보고 싶었어.”

“정말이요? 너무해!”

“할애비 가슴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놓은 놈이 뭐가 예쁘다고.”

그런 말을 하는 주제에 팔은 세니아나를 꼭 끌어안았다. 누군가를 끌어안고 평생 처음으로 어린애처럼 눈물을 터뜨렸다. 정말로, 정말로 보고 싶어서. 꿈인 것을 알면서도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서.

그의 등을 힘주어 잡은 세니아나가 훌쩍였다.

“잘못했어요.”

“…….”

“잘못했어요, 할아버지. 마음고생 하게 해서 죄송해요.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그런데…….”

나베리우스는 손녀의 뺨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돌아와 주면 돼. 그러면 돼.”

“…….”

“돌아와만 준다면 이깟 마음고생 따위 잊어버릴 수 있어. 뭔들 못 해 주겠느냐. 내 손녀가 바란다면 뭐든 들어 주마.”

조손이 마주 안은 채로 엉엉 울고 있자 그 모습을 지켜 보던 도미니크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뒤로 새하얀 빛과 함께 나타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나쁜 생각을 하는 표정이구나.”

“좋은 기회다 싶은 표정이었습니다.”

“이런. 우리 아버님, 고생 좀 하시겠군.”

쿡쿡 웃은 도미니크가 세니아나의 등을 두드렸다.

“갑시다.”

그러자 나베리우스가 그의 손을 휙! 쳐내며 말했다.

“누굴 데려가려고! 나도 데려가라 이놈아! 나도 데려가!”

“그럴까요?”

세니아나가 퉁퉁 부은 눈으로 “안 돼요!” 소리쳤다. 그녀는 제 조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런 생각 하시면 안 돼요. 기다리고 계셔야 해요?”

“…….”

“금방 갈 테니까요.”

세니아나가 몸을 일으키며 나베리우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빛을 향해 뛰어가자 도미니크는 잠시 나베리우스를 바라봤다.

“정말로 뭐든 들어 주시겠습니까.”

“당연하지. 네놈이 세니아나만 데려와 준다면 제국을 네 품에 안겨 주마.”

“제국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것을 소원하죠.”

“데리고만 와. 빌어먹을 녀석.”

빙그레 웃은 도미니크가 “그럼 다시 뵙죠.” 하곤 세니아나가 사라진 방향으로 다가갔다.

그는 생각했다. 언제가 되더라도 기다리겠다고.

이른 아침, 소파에서 일어난 나베리우스는 눈물이 말라붙은 눈가를 매만졌다.

‘역시 꿈이었나.’

희망은 때론 절망보다 더 간악했다.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킨 그가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 어르신……!”

“무슨 일이냐.”

“결계가 흔들렸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포털이 열리지 않는 한 결계가 흔들릴 일은 없다. 그리고 이 대륙에 더는 포털을 가진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헛소리라는 듯 인상을 찌푸리던 나베리우스는 떠올렸다. 꿈에서 들은 말을.

[금방 갈 테니까요.]

얼굴을 굳힌 나베리우스가 헐레벌떡 방을 달려나갔다. 진원지를 향해 정신없이 달렸다. 성에 이상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복도로 나온 가웨인과 란슬롯이 헐레벌떡 그들을 지나치는 조부를 보고 시선을 교환했다.

“뭐야, 무슨…….”

가웨인이 의아한 듯 중얼거리자 란슬롯의 동공이 흔들렸다. 란슬롯이 즉시 그를 따라 뛰기 시작하자 가웨인은 “뭐야, 뭔데!” 하며 제 형을 쫓았다. 프렌시프의 사내들이 정신없이 뛰어 진원지에 도착했을 때, 바글바글한 사람들이 보였다.

사용인이며 가신들이 얼떨떨한 눈으로 한 곳을 응시했다. 웅성이던 사람 가운데 누군가 눈물을 터뜨렸다. 나베리우스가 그들을 헤치고 그제야 느린 걸음으로 앞서 걸었다. 홍해가 갈라지듯 길을 내준 사람들이 훌쩍이거나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

가웨인이 사람들 사이를 걷는 나베리우스를 따라 걷다가 중앙에선 사람을 발견하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마치 모든 소리가 고요에 먹힌 듯한 시간.

그가 허탈한 듯 “하.” 실소를 흘리고 어깨를 떨구었을 때, 나베리우스는 낡은 로브를 걸친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순간, 푸드덕! 소리와 함께 흰 비둘기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세니아나!”

“세니안!”

란슬롯과 가웨인이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가웨인이 “이 바보가―” 하며 목소리를 높이려던 찰나 란슬롯이 세니아나의 손목을 끌어당기며 엄히 소리쳤다.

“너……!”

“오빠.”

“왜 이제야 돌아와! 가족들 가슴이 썩어 문드러지게 하고 이제야―!”

“오빠…….”

“이럴 거면 어째서 약속을 했어! 아버지가, 나와 가웨인이, 조부님이 어떤 심정으로 널 보내 줬는데―!”

겉이나마 언제나 상냥했던 란슬롯이 눈꼬리를 사납게 올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세니아나가 종잇장처럼 그에게 흔들리다가 엉엉 눈물을 터뜨렸다.

“어허엉―!”

로브는 잔뜩 헤졌고, 안에 받쳐 입은 옷이 군데군데 찢어졌으며 온몸에 생채기가 생겼다. 새빨갛게 튼 그녀의 두 뺨 위로 주룩주룩 눈물이 흘러내리자 가웨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제 형을 붙들었다.

“혀, 형. 이제 그만……. 세니아나가 놀랐잖아.”

“이리 와, 이 녀석!”

그들보다 먼저 세니아나를 만난 마담 버지니아와 파르뎅 자작이 란슬롯을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나베리우스가 눈물을 터뜨린 세니아나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렸다.

“되었다. 왔으면 되었어.”

“허어엉, 할아버지…….”

“왔어. 그래, 와 주었어.”

“빨리 오려고 했는데, 그래서 서둘렀는데……. 죄송해요, 할아버지. 죄송해요.”

“그래…….”

“계속, 계속 돌아가려고 했어요. 잘못했어요, 할아버지…….”

“그래.”

평생을 세상 위에 군림했던 노인은 눈물 대신 목소리와 손을 가늘게 떨며 귀환한 손녀를 가만히 끌어안을 뿐이었다. 란슬롯이 잠잠해지자 가웨인은 한숨을 터뜨렸다.

“형.”

“…….”

“돌아왔잖아.”

“……돌아왔네.”

“그래.”

형제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가웨인이 “칫.” 혀를 차며 세니아나에게 달려갔다. 그가 애타게 그리고 그리던 누이의 정수리를 꽝, 쥐어박았다.

“바보가.”

“아, 아파요…….”

“너, 이제 큰일 났다. 형이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아버님한테도 잔뜩 혼날 거다, 아마.”

“놀리기나 하고. 저, 하나도 안 보고 싶었어요? 저는 엄청엄청 보고 싶었는데.”

“내가 바보를 왜 보고 싶어 해.”

가웨인이 씩 웃었다. 세니아나는 그를 빤히 보다가 헤헤 웃었다.

“울고 있으면서.”

“안 울어, 바보야.”

가웨인이 손바닥으로 눈가를 비비며 허세를 부렸다. 기사들이 놀림감을 찾았다는 듯이 껄껄 웃자 가웨인이 “이 새끼들, 빠져 가지고―!” 하며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이에서 미소 짓던 세니아나는 저를 지그시 바라보는 란슬롯의 시선을 느끼고 기가 죽어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

“…….”

“식사는 했니.”

“배고파요…….”

“가자.”

손 내민 란슬롯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자 세니아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한 손에는 란슬롯의 손을, 다른 한 손에는 나베리우스의 손을 잡은 그녀가 싱글벙글 웃으며 성으로 향하자 가웨인이 “나는!” 하며 헐레벌떡 뒤쫓았다.

성은 일부 무너졌고 벽돌 무더기가 곳곳에 쌓여 있었으나, 하늘은 아주 맑고 산과 들은 오색찬란한 꽃과 새순이 가득했다.

* * *

‘밥이다!’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음식이 가득한 식탁을 본 나는 눈을 반짝이며 포크를 끌어안다시피 했다.

세상에, 진짜 밥이야! 해산물을 잔뜩 넣은 진한 토마토 수프. 고소한 치즈가 그릇을 범람할 것처럼 무시무시하게 올라간 달콤짭짤한 콘샐러드. 노릇노릇 구운 부드러운 안심 스테이크. 라즈베리 잼이 들어간 커다란 파이 등등.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넣기 시작하자 가웨인은 턱을 괴고 날 구경했다.

“누가 보면 음식 구경도 못 해 본 사람인 줄 알겠어.”

나는 커다란 고기를 와구와구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에서 이동한 후에 아무것도 못 먹― 콜록콜록!”

급하게 먹어 사레가 들자 란슬롯이 미간을 좁히며 달콤한 샴페인을 건넸다. 나는 샴페인을 쭉 들이켜고 푸하―! 한숨을 내쉬었다.

“포털 안엔 음식이 없거든요.”

“이때까지 풀떼기 하나 못 먹었다고?”

나는 란슬롯이 껍질을 까 준 새우를 덥석 입에 물며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능해? 아사해야 정상아냐?”

“포털 안에선 다행히 허기도 안 느껴지고,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더라고요.”

하지만 사람은 허기만으로 음식을 먹는 게 아니잖아! 포털 안에서 있는 동안 음식이 엄청나게 그리웠다. 내가 우울한 표정으로 ‘짜고, 달고, 매운 거…….’ 라고 중얼거리면 도미니크가 ‘나가면 배가 터지도록 먹읍시다.’ 하고 달래 줬다.

“지금까지 뭘 한 건데. 네가 사라진 지 삼 개월이 넘었다고.”

가웨인이 쯧, 혀를 차며 물어서 난 가족들의 눈치를 봤다. 정말로, 정말로 돌아오고 싶었다. 매일 할아버지와 아빠, 오빠, 그리고 사용인들 친구들이 그리웠다. 그렇지만 돌아올 수 없었던 건…….

“엄마와 레오나 님이 포털에서 삿된 자들과 싸우고 계세요. 도미니크와 저는 그분들과 함께 싸웠어요.”

“뭐라고?”

가족들이며 가신, 사용인들이 모두 놀란 얼굴로 날 집중했다.

“굉장하더라고요. 누아제 기사들은 상대도 안 되던 거대한 삿된 자들이 막 성냥개비처럼 우수수 쓰러지고…….”

레오나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리 강하냐고 물으니.

[우리 아가도 죽으면 이 정도로 강해지지 않을까?]

그렇게 말해서 도미니크가 인상을 썼다.

“엄마의 말로는 육체란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끈이래요. 매개 같은 거죠.”

“매개라…….”

“쉽게 말해 육체는 항아리, 영혼은 항아리에 담긴 물 같은 거라고 하더라고요. 항아리 안에 담겨 있어서 존재할 수 있지만, 대신 아주 연약하죠.”

“삿된 자들은 항아리를 잃은 존재들이니 아직 항아리에 담겨 있는 산사람들은 상대가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봐야겠죠?”

가족들은 그간의 일을 물었고, 나는 음식을 냠냠 먹으며 대답해 주었다.

황궁에서 이동한 뒤 도미니크가 레오나 님을 만났다. 둘은 아주 서먹했지만, 어쩐지 도미니크가 한 꺼풀 벗은 것 같다는 말을 하자 가웨인이 인상을 썼다.

“그런 건 궁금하지 않다고.”

그러다가 “그래서 그 녀석도 포털에서 나온 건가?” 하고 물었다.

“네. 저하는 바로 황도로 이동했어요. 황제 폐하도 저하가 보고 싶으실 것 같아서요.”

“쳇, 안 돌아와도 되는데.”

“너무해!”

도미니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는 포털 안에서 나를 위해 몇 번씩이나 죽을 위기에서 겨우 살아났다. 내가 이렇게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도미니크가 필사적으로 나를 지켰기 때문이었다.

“저하가 정말로 노력하셨어요. 물론 엄마와 레오나 님도 마찬가지로.”

“엄마?”

할아버지가 눈을 홉뜨며 나를 바라봐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분들은 포털 곳곳에 숨은 삿된 자들을 처리하고 계시지요. 엄마 말로는 없애 버려야만 삿된 자가 된 영혼이 안식을 찾는다고 해요.”

“…….”

“두 분이 삿된 자를 처리하는 동안 저하와 전 포털을 돌며 새로운 마원을 찾으러 다녔고요.”

나는 각색의 돌멩이를 꺼내 가족들에게 보여 주었다.

“성수는?”

“…….”

“…….”

“괜찮아요. 언젠가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으니까.”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간 그 날, 나는 분명 마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꼭 다시 만나자.]

다정한 목소리들을.

레오나는 말했다. 마원이 성수가 되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포기하는 것이 마음 편할지도 모른다면서. 하지만 나는 몇 번일지 모르는 기적을 맞이한 운 좋은 사람이었다.

나를 마음 깊이 사랑하는 가족. 나를 위해 몸과 시간을 아낌없이 내어 준 훌륭한 어머니. 열정을 다 쏟을 수 있는 소중한 꿈을 찾은 것. 날 위해 목숨조차 아깝지 않다고 여기는 멋진 남자.

그리고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세 마리의 성수를 만난 일. 그러니까 여기에 기적이 한 가지 더 얻어지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또다시 만날 수 있어.’

언젠가, 분명히.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침대에 뛰어들며 보드라운 이불을 꽉 끌어안았다.

‘우우우, 내 방, 내 침대!’

누운 것만으로도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때, 두어 번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차와 다과거리를 든 할아버지가 “커흠.” 헛기침했다.

“들어가마.”

“네!”

함께 소파에 앉은 후 할아버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아는 돌아오지 않는 건가.”

난 희미하게 웃고 대답했다.

“엄마에겐 이제 육체가 없으니까요.”

“…….”

엄마는 나는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을 포털 안에서 보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영겁일지도 모르는 나날을.

[네가 꿈을 이루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혹시 아이를 낳는다면 그것까지 볼 수 있기를 바라.]

[엄마.]

[네 아이의 아이가, 또 그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게 내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아니.]

[…….]

[그렇게 오래오래 감사한 광경을 지켜보다가 언젠가 잠에 들겠지.]

레오나 님은 ‘네 엄마를 외롭게 두지 않을게’ 하고 약속했다. 할아버지는 걱정되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너…… 괜찮은 거냐?”

난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소원한다. 엄마의 소망이 이뤄지기를.

“다음번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땐 제가 엄마의 엄마가 될 거예요.”

“…….”

“오랜 시간이 흘러 서로 기억을 잊어도 나는 분명 엄마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할 테지요.”

“미아에게 난…… 죄인이다.”

“…….”

“그러나 미아는 내게 은인이지. 그러니 약속하마.”

할아버지가 내 손을 잡으며 다정히 눈가를 휘었다.

“너희 둘이 다음 생에 만난다면, 내가 너희를 지켜 주마. 미아가 나와 너를 지켜 주었듯.”

행복해지자. 엄마를 위해서.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나는 행복해질 자격이 충분하니까.

“아빠한테도 연락해야 하는데! 엄마가 전해 달라는 말이 있거든요!”

할아버지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떠서 나는 한 손으로 뺨을 덮으며 말했다.

“다음번엔 마음고생 하게 되는 건 아빠일 거라고.”

“……뭐?”

“세상에서 제일가는 바람둥이가 다음 생의 목표래요.”

눈을 크게 뜬 채 잠시 굳어 있던 할아버지는 이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 * *

같은 시각, 황도 외곽 별궁. 황제는 표정 없는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빌어먹을 놈.”

“이곳 시간은 몇 달이 흘렀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런데.”

“몇 달 만에 귀환한 아들에게 하실 말씀은 그것 뿐이십니까.”

“그래.”

“그렇군요.”

도미니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황제를 지나쳐 걸었다. 눈치를 보다가 따라 나온 알베르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그게 끝입니까.”

“그렇다는군.”

“프렌시프 령에선 얼싸안고 울었답니다.”

“그렇겠지.”

“…….”

“…….”

알베르는 묵묵히 걷는 도미니크를 보다가 뒤를 힐끔 쳐다봤다. 황제가 주저앉듯 의자에 앉아 어깨를 떨구었다.

‘하여간에.’

아들놈은 키워 봐야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

‘좌우지간 폐하도 오랜만에 달게 주무시겠군.’

아들이 빛 속으로 사라진 후로 좀처럼 잠들지 못하셨다. 몸이 버티지 못해 쓰러지면 얼마쯤 지나 새하얀 얼굴로 이불을 뛰쳐나왔다.

[……오늘도 소식이 없는 게냐.]

묻는 목소리가 사무쳐 시종들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프렌시프처럼 온 나라가 들썩이도록 자식을 찾은 것은 아니나, 황제 또한 그들만큼 애달팠을 터였다.

‘권좌가 좋은 것만은 아냐.’

역시 졸부가 최고다. 돈만 펑펑 쓰면서 인간처럼 살 수 있는 졸부를 인생 목표로 삼은 알베르는 도미니크와 함께 코너를 돌았다.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뛰어나온 누군가가 도미니크의 가슴에 부딪혔다. 황태자 헬리오스였다.

“너…… 너, 이놈……!”

그는 붉어진 코를 잡고 도미니크를 흘겨보았다.

“살아 있으면 연락을 했어야지!”

“포털 안에서 연락을 어찌합니까.”

“역시 포털에 있었던 거냐?”

“예.”

황태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곤 도미니크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요령 좋게 황태자의 발을 피한 도미니크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더 하실 말씀은?”

“내가 널 걱정한 건 아니야!”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아, 알아 두라고!”

그러면서 눈이 새빨개져서 휙! 고개를 돌렸다. 세 황자 중 가장 정 많은 사람이 황태자였다. 알베르가 픽 웃자 도미니크는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알베르는 큼, 헛기침하며 말했다.

“쉬셔야죠.”

“그래.”

“당분간 일정은 잡아 두지 않겠습니다.”

“내일은 프렌시프 령으로 출발한다.”

“예?!”

도미니크는 씩 입꼬리를 올렸다. 드물게 미소 지은 주군을 본 알베르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어째 나쁜 생각을 하는 것 같은 얼굴인데.’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그리 묻자 도미니크는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약속한 것을 받아 내러 가야 하니까.”

―하고 말하며.

마차 안에서 난 “끄으으응” 하며 기지개를 켜고 한가로이 창을 바라보았다.

‘여긴 벌써 삼 개월이 넘게 지났구나.’

포털 안에선 밤과 낮이 없어서 시간을 헤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삼 개월이나 흐르진 않았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열흘 정도일까.’

나른히 창틀에 턱을 괴는 날 보고 란슬롯은 내 얼굴을 살짝 마차 안으로 밀었다.

“다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지.”

“네…….”

나는 눈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졸린 모양이구나.”

“어제 아빠랑 늦게까지 연락해서…….”

황도에 있는 아빠에게도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알려야 했기 때문에 통신을 연결했다. ‘돌아왔어요’라는 말에 아빠는 한참을 대답하지 않았다. 긴긴 침묵 후에야 답이 돌아왔다.

[그래.]

아주 짧은 대답이었지만, 침묵 속에서 안심을 읽는 나도 한참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하염없이 나와서 차마 입을 열지 못하자 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 보자.]

하고.

‘그래서 내가 가지요!’

아빠도, 황도 저택의 사람들도 전부 보고 싶었다. 마릴린. 시트론. 고레일과 바커스. 빅터, 카터 형제. 그리고…….

‘이모와 외삼촌도.’

삿된 자의 습격부터 포털 이동까지 일이 정신없이 진행되어 이모와 외삼촌과는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다. 아탈란의 새로운 거점을 습격했을 때, 외삼촌 에단을 찾았다는 말을 들었다. 무사히 구출했다고는 했는데, 고문의 후유증이 깊었다고 했다.

‘걱정되는데…….’

내가 한숨을 내쉬었을 때, 마차는 황도에 막 들어섰다. 얼마쯤 지나 저택에 도착한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린 나는 황도 저택을 둘러보았다.

‘와―!’

삿된 자의 습격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프렌시프의 황도 저택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정말로 삼 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거지요?”

내가 놀라서 물으니 가웨인은 씩 웃고는 대답했다.

“코트니 황비의 가문을 제외하면 제국에서 마법사를 가장 많이 데리고 있는 곳이 프렌시프라고?”

“그런데 왜 영지 재건은 그렇게 늦어졌어요?”

“황도 저택은 프렌시프 위용의 상징. 마법사들을 총동원해서 우선 수리한 거지.”

“그렇구나…….”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하자 마담 버지니아가 다른 마차에서 내리며 덧붙였다.

“어르신이고, 도련님들이고 다른 일에 매진하고 계셔서 유독 늦어지긴 했죠.”

“다른 일?”

“아가씨를 찾아 헤맸―”

가웨인이 윽! 신음하며 “버지니아!” 소리쳤다. 나는 “흐으응~” 하고 가웨인을 가늘어진 눈으로 쳐다봤다.

“하나도 안 보고 싶었다더니.”

그러자 붉어진 가웨인이 “안 들어가냐!” 소리치며 제가 먼저 휘적휘적 저택으로 들어갔다. 나는 히히 웃었고, 란슬롯도 눈매를 둥글게 휘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갈까. 아버님을 뵈러.”

“네!”

나는 힘차게 대답하고서 란슬롯의 손을 잡았다.

“오늘도 울면 우리 막내의 예쁜 눈이 짓무를 것 같은데.”

“안 울 거예요!”

“정말?”

“그럼요. 영지에서 많이 울었다고요.”

란슬롯은 “씩씩하네.” 말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는 정말로 씩씩하게 그와 함께 저택으로 들어갔다.

“허어엉.”

엉엉 우는 나를 보고 란슬롯은 픽 웃었고, 가웨인은 낄낄대며 놀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거봐. 내가 이겼지?”

가웨인이 란슬롯을 향해 손을 슥 내밀자, 란슬롯이 픽 웃으며 금화 몇 개를 가웨인의 손바닥에 내려놓았다.

‘내기했어!’

나는 엉엉 울다 말고 그들을 노려봤고, 아빠는 그들에게 “나가.” 축객령을 내렸다. 오빠들이 웃으며 문을 나섰다. 방은 눈물 떨어지는 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릴 듯이 고요해졌다. 아빤 내 눈가를 쓰다듬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엄마가 지켜 주셨어요.”

“……그래.”

“저는 아빠가 아주 많이 보고 싶었고, 엄마도 같은 마음이라고 하셨어요.”

“그래.”

지쳐 보이는 그가, 그의 눈가의 주름이 짙어진 것이 몹시 마음 아팠다.

“고집이 센 자식이라서 죄송해요.”

“……벌을 받는 게지. 나도 그만큼 아버지 속을 썩였을 테니까.”

난 눈을 홉뜨고서 아빠를 바라보았다.

‘호칭이 바뀌었어…….’

아빠는 할아버지를 ‘어르신’이 아닌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러고 보니 삿된 자가 습격했을 때도 그리 불렀던 것 같다.

“이제 할아버지를 용서하기로 하셨어요?”

“아버지의 심정을 절절하게 이해할 날이 왔으니까.”

“이해요?”

아빠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은 삿된 자를 물리치기 위해 홀로 가겠다는 네게 화를 내고, 소리치고 싶었지.”

“…….”

“너를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만큼 네 앞의 가시밭길을 견딜 수 없어서.”

내게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지만, 당시의 길라게온 사람들에겐 원수였을 터다. 아무리 전쟁에서의 일이라도 내 부모,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를 죽인 사람이라는 건 변함이 없을 테니까.

삿된 자들을 끌고 포털에 갔을 때, 엄마는 말했다.

[드디어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겠구나.]

할아버지에게 아빠와 엄마의 결혼은 아들 앞에 깔린 가시밭길과 다름없을 터였다. 평생을 엄마와 한 데 묶여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을 테고, 그것이 불씨가 되어 아빠를 삼키는 불이 될까 두려웠을 테니까.

“할아버지께 말씀드리세요.”

“…….”

“자식을 사랑했기에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빠에게마저 죄인은 아니라고.”

나는 아빠의 눈을 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게 사랑받는 사람의 의무예요. 내게 오는 마음을 정면으로 대하는 것.”

“그래.”

나는 아빠를 꼭 끌어안고서 말했다.

“아빠를 많이 사랑해요. 아빠의 사랑에 무척 감사하고요.”

“나도 그래.”

우리는 마주 안은 채로 한참을 있었다. 나는 그사이 늘 하던 다짐을 했다. 이만한 마음을 받는 나는, 꼭 행복해져야 해. 그러다가 “아, 참!” 하고서 아빠를 쳐다봤다.

“엄마가요. 다음 생이 있다면 바람둥이로 살 거라고 하셨어요.”

“……이뤄지지 않기를 바라지.”

“너무 해!”

“너무한 건 그 사람이야.”

아빠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나는 고생하지 않은 줄로 아는데 착각이다. 프라우, 그 새― 남자가 내 손에 죽지 않은 건 하늘이 도운 걸 거야.”

프라우가 누군지 몰라도,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우리 아빠…… 살인자가 되지 않아서 다행이야. 나는 아빠의 팔짱을 낀 채로 소파에 앉았다.

“피곤하냐.”

“네……. 마차를 오래 탔더니…….”

“포털은 이제 못 쓰는 건가.”

“아니에요. 다만, 성수의 포털이 아니라 그런지 이전처럼 단숨에 장거리를 이동할 수 없어요. 게다가 힘이 회복되는 속도도 느려서 단기간에 몇 번씩 쓰기 힘들고…….”

“성수는…….”

아빠가 말을 하다 말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성수가 사라졌다는 건 어젯밤의 통신에서 그에게 알려 주었다. 혹시 그 일로 내 마음이 아플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다시 만날 거예요.”

“그래…….”

동의한다는 듯 대답했지만 확신할 수 없다는 듯 그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말인데. 증거도 있어요.”

“증거?”

“왜냐면 포털 안에서 할아버지를 보았으니까.”

“아버지가 포털 안에 들어갔다고?”

“꿈에서요. 그건 분명 쵸의 힘일 거예요. 아직 형태를 만들지 못하는 거지 성수들은 제 곁에 있는 거겠죠.”

“그런가…….”

아빠가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하품을 하며 눈을 끔뻑거렸다. 초여름, 날은 선선하고 햇살은 따뜻했으며, 곁에선 매일을 그리던 아빠의 다정한 냄새가 난다. 어느 순간 나와 아빠는 서로에게 기대 스르륵 수마에 빠져들었다.

* * *

아서는 낯익은 풍경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꿈, 이것은 꿈이 분명하다. 미아와 세니아나가 떠나고 꿈에서라도 다시 보길 바라던 풍경이 시야를 가득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이윽고 풍경 안으로 한 사내가 들어왔다. 투구를 쓴 남자는 말에서 내려 짓씹듯 말했다.

[비루먹은 놈.]

그러자 말이 푸르르, 울며 고개를 털어냈다. 비루먹었다기엔 말의 털엔 윤기가 흘렀고, 근육은 꽉 조여졌으며 눈은 이채로 반짝인다.

‘게일.’

아서가 말에 다가가 손을 뻗자 말은 안개처럼 흩어졌다. 역시 꿈이다. 게일은 세니아나가 태어나기 전 죽은 그의 애마였다. 제국에서 가장 우수한 혈통을 자랑하는 게일은 대륙 전쟁에서 검상을 입고 쓰러진 그를 태운 채로 100마일이 가까운 거리를 내달린 명마였다. 다만 기세와 낼 수 있는 속력만큼 성격이 고약했다.

[또 뭐가 문제야.]

[히이이잉―!]

말이 발굽을 들며 날카롭게 울다가 이내 잔디를 우적우적 뜯어 먹었다.

[여물은 넘치게 줬……! 됐다.]

남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다 투구를 벗었다. 젊었을 적의 그였다. 아서 프렌시프. 대륙 전쟁을 승전으로 이끈 길라게온의 영웅.

서풍이 불어왔다. 결 좋은 머리칼이 나부꼈고, 금세 턱에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짜증 섞인 시선으로 말을 바라보던 젊은 아서가 흠칫, 숲을 돌아보았다.

[누구냐.]

[…….]

[나와.]

숲에서 얼핏 보이는 그림자는 고집스레 몸을 드러내지 않았다. 잠시 숨죽이고 있던 그림자가 어느새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헉, 허억, 헉.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정신없이 달리던 그림자가 주변을 둘러보며 나무줄기에 기대 미끄러졌다.

[저 작자가 여긴 왜…….]

[내 영지로 가는 길이니까.]

난데없이 들린 목소리에 놀란 그림자가 뻣뻣하게 굳어지자 젊은 아서가 칼을 들이밀었다.

[후드를 벗어.]

[…….]

[누구냐.]

검 끝이 목에 닿자 그림자가 끙, 신음하며 후드를 내렸다. 이윽고 고개를 돌려 젊은 아서를 바라본다. 마주 본 두 사람은 서로 말이 없었다. 잠시 얼굴을 굳혔던 젊은 아서가 중얼거렸다.

[겁대가리가 없는 건지, 정신이 나간 건지 모르겠는데 내 보기엔 후자군.]

[…….]

[미아.]

순간 구름에 가려졌던 태양이 드러나며 왜소한 몸집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둘 다 아니거든.]

맨몸인 주제에 기세 좋게 중얼거린 그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빛 아래에 가장 짙은 어둠이 있다. 몰라?]

[…….]

[영리한 계책이었다고.]

젊은 아서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대륙 전역에 수배령을 내려도 찾을 수 없던 녀석이 감히 길라게온에 숨어들어 있었군.]

[그래서 죽일 거야?]

[아니면.]

[놔주세요…….]

미아가 우물쭈물하다가 그를 팩 노려보았다.

[아탈란에서 도망쳤다는 얘기 못 들었어? 나 이제 사제 아니라고. 죽이면 너 살인자―!]

[입만 살아서.]

젊은 아서가 손을 뻗으려던 그때, 나무꾼 무리가 숲으로 들어왔다. 미아는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도와주세요―!]

그러자 선량한 나무꾼들이 도끼를 든 채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무슨 일이유!]

아서가 인상을 찌푸리고 [하던 일이나 계속…….] 하고 말하던 찰나, 미아가 또 한 번 빽 소리쳤다.

[변태다!]

[……!]

굳어진 아서의 뒤에서 미아는 입은 계속 놀렸다.

[갑자기 막 벗으려고 해요! 변태!]

[너……!]

나무꾼들은 온갖 휘황찬란한 복식을 걸친 건장한 사내보다는 빼빼 마른 몸으로 넝마 같은 옷을 걸친 소녀의 말을 신뢰했다.

[너, 잘 걸렸다. 어디 할 짓이 없어서 변태 짓을 해?!]

[잡아라!]

[잡아!]

나무꾼들이 달려들었고, 미아는 그사이 냅다 도망쳤다. 죄 없는 민간인을 벨 수 없었던 아서는 나무꾼들에게 붙잡혔고 그 후, 위병에게 넘겨졌다. 영지의 행정관이 내려와 그의 신분을 증명한 후에야 겨우 감옥을 나설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끔찍한 경험인데 제일 열이 받는 건 한동안 그의 집무실에 기가 막힌 편지들이 쌓여 있었단 것이다. 몸을 보여 주고 싶다면 파티에 초대하고 싶다는 둥, 성적 취향도 맞출 수 있으니 한 번만 만나 달라는 둥의 이상한 러브레터였다.

나베리우스는 젊은 그에게 말했다.

[등신 새끼.]

그래서였다. 전쟁 이후, 아탈란엔 관심을 거두었던 그가 미아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것은.

‘잡히면 죽는다.’

프렌시프의 정보부가 보름을 꼬박 지새웠으니 연고 없는 그녀쯤은 금세 찾아낼 수 있었다. 어느 지역의 축제에서 다시 조우한 그녀는 젊은 아서를 보고 닭꼬치를 툭, 떨어뜨렸다.

[으아아아―!]

아서가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으르렁 말했다.

[오늘은 옷을 벗지 않을 테니 곱게 가지.]

미아는 와앙―! 눈물을 터뜨리며 부들부들 떨었다.

[나, 나는 잡혀가면 사형이라고. 사지가 찢겨서 죽을 거야.]

[죽을 짓을 했지.]

[알지만……! 알긴 하지만…….]

미아가 처연히 고개를 떨구었다.

[죽기 전에 한 번만 평범하게 축제를 즐기고 싶어.]

[…….]

[한 번도 없었단 말야. 이런 거.]

[…….]

[불꽃놀이만 보고, 사형대에 올라가고 싶어…….]

얼마나 벌벌 떨며 말하는지 아서는 쯧, 혀를 찼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내가 붙어 있을 거다.]

[응!]

그는 미아를 주시하며 걸었다. 축제에서 본 그녀의 얼굴은 놀랍도록 낯설었다. 늘 죽은 생선처럼 말라붙은 눈으로 제 앞에 서서 동포들을 죽여 온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밝고 눈부셨다.

[우와―!]

과자 가게 앞에 선 그녀가 양 뺨을 쥔 채로 발을 동동 굴렀다.

[이거구나. 길라게온의 전통 과자! 먹어 보고 싶어~!]

그러며 주머니를 뒤져 돈을 찾았다. 하지만 탈탈 털어도 고작 1피니 3켈트. 3피니나 하는 비싼 과자를 사 먹기엔 무리였다.

[저기…….]

[뭐.]

[아냐…….]

어깨를 떨군 채 터덜터덜 걸으며 가게를 벗어난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미간을 좁힌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주인에게 돈을 내밀었다.

[주시오.]

그러자 미아가 펄쩍 뛰며 아서에게 달려왔다.

[와아―! 와!]

[시끄러워.]

[너 좋은 놈이구나!]

과자를 와구와구 씹으며 신나 하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더랬다. 저게 개였다면 꼬리가 힘차게 흔들리고 있을 거라고.

[왜 전쟁에 나선 거냐.]

[가족들이 인질로 잡혀 있었으니까. 우리 언니가 나 때문에 손목이 잘렸거든. 아탈란에서 다시 붙여 줬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과자를 먹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네가 길라게온의 백성을 죽인 건 달라지지 않아.]

[알아.]

[…….]

[나는 전투 후에 늘 신전에 끌려가 실험을 당했거든? 살가죽이 찢어지고, 가끔은 눈알도 빼앗기고. 하지만 내 손에 죽은 사람들보다는 나은 처지였지.]

[…….]

[그들에겐 내일은 ‘괜찮을 거야, 덜 아플 거야, 어쩌면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될지 몰라’ 하는 희망이 없었잖아.]

[…….]

[언젠가 나는 죽겠지. 내가 죽인 사람들의 손에 미래를 빼앗기게 될 거야.]

[…….]

[그게 당연한 거지.]

너무나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라 저답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놓아 줄까.’

저렇게 젊은 나이에 생이 저문다는 게 아주 조금, 가엾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풀어 주는 일은 없었다. 잡기 전에 또다시 냉큼 도망쳤으니까.

[그치만 오늘 죽고 싶진 않아. 딱 보름만 평범하게 살아 보고 내 발로 갈게.]

[뭐?]

[변태다!]

이번에도 구금소행이었다.

또다시 같은 수법에 당했다. 부친은 마주칠 적마다 [너, 실은 정말로 변태인 게 아니냐.] 하며 신경을 긁어 댔다. 당연히 다시 한번 미아를 찾았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행방을 쉬이 찾을 수 없었다. 그녀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던 게 아니라―

[황도 외곽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무슨! 서부일세. 인상착의가 틀림없이 그놈이다.]

[말도 안 됩니다. 방금 서부 항구에 파견된 우리 사람이 그녀를 발견했다고―!]

자랑하는 포털로 어찌나 각지를 쏘다니시는지 정확한 위치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축제에서 만났던 날 이후 보름이 지나고, 제국을 발칵 뒤집어도 찾을 수 없었던 녀석에게 연락이 왔다.

『약속은 지켜.』

인사도 없는 짤막한 쪽지였다. 그는 축제에서 나눈 말을 떠올렸다. 제 발로 사형대에 오르겠다는 말이 진심이었던 것인가.

당시, 미아는 정말로 인근의 영주 성을 찾아갔다. 경비병 앞에서 후드를 벗으려던 찰나, 다부진 손이 휙!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너―!]

[날 이렇게 뺑이치게 해 놓고 다른 새끼 손에 붙잡히면 안 되지.]

전쟁 중 아서 프렌시프의 소문은 익히 들었다. 전장에 나타난 전신(戰神). 인세에 강림한 미의 화신. 온통 거북한 별칭 천지라 한 귀로 듣고 흘렸지만, 하나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전장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귀족 중의 귀족―이라면서!’

길라게온에서 조우했을 적에도 어마어마한 현상금이 걸린 악귀에게도 말씨가 제법 정중했다.

[듣던 것과는 달리 말투가 날건달이신데…….]

[변태도 되어 봤는데 날건달쯤이야. 따라와.]

[잠깐! 잠깐! 어디로 데려가는 건데!]

미아가 빽 소리쳤으나 그는 말이 없었다. 결박당한 채 그와 한 마차에 탔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

[…….]

[말이라도 하든가…….]

[우리가 다정히 안부를 물을 사이는 아니지.]

[알긴 하지만요…….]

미아가 칫, 혀를 차자 아서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프렌시프의 이름으로 황궁에 바쳐질 거다.]

[공로…… 뭐, 그런 것 때문에?]

[대충 맞아.]

그를 힐끔 쳐다본 그녀가 늘어지듯이 앉아서 [그러든가.] 하고 대답했다. 아서는 턱을 괸 채로 그녀를 지그시 쳐다봤다.

[쉽게 죽는 건 안 되지. 감히 날 구금소에 두 번이나 가둔 녀석이.]

어쩐지 눈빛이 소름 끼쳤다.

‘죽었다.’

그녀는 프렌시프의 황도 저택으로 옮겨졌다. 아탈란에서처럼 지독한 고문이 기다린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람.]

[얘가, 얘가.]

하녀 하나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못 써!] 소리쳤다.

[네가 누구고, 왜 우리 주인님께서 널 데려오셨는진 모르겠지만, 너는 이제부터 프렌시프의 하녀야. 교양과 품위를 잃으면 혹독하게 체벌할 거야.]

[뭐어―!?]

농담인가 싶었는데 그녀는 정말로 저택의 하녀가 되어 하루 온종일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그 후로 몇 개월간 몇 번이나 도망치려고 했지만, 결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포털을 열었다가 결계에 부딪쳐서 죽을 뻔했다.

‘성수의 도움 없이 포털을 열려니 확실히 힘이 딸려.’

[뭐 해! 현관 청소 마쳤어?!]

[손이 이렇게 굼떠서야 뭘 하겠다는 거야!]

[멍청하긴!]

‘확 성수를 불러내 버릴까 보다.’

고민하다가 마원을 주머니 깊숙이 집어넣었다. 성수의 진정한 주인은 제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힘을 빌려줄 뿐이지 종속되지 않은 성수. 당연히 원주인처럼 섬세하게 조절할 순 없었다.

성수를 꺼내면 저택의 사람들은 모두 죽을 거다. 그러면 아탈란 귀에 소식이 들어갈 거고, 또다시 그들에게 붙잡혀 전쟁 무기로 쓰일 터였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건 싫어.’

[현관 정리가 끝났으면 주인님께 차를 가져가라.]

[내가 왜―!]

[뭐?!]

[아니, 제가 왜요…….]

[가라면 가. 너, 주인님의 차 시중이 얼마나 영광인지 알아?]

‘저 선임 하녀는 정말로 무서워…….’

화가 난 가브리엘라보다 배는 무서운 것 같다.

‘언니는 화를 잘 안 내기도 하고.’

미아가 울상을 지은 채 티 세트를 가지고 아서의 방으로 올라갔다.

[차를 가져왔습니다.]

거대한 의자에 다리를 꼰 채로 앉아 있던 아서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아가 차를 타고 있자, 그제야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법 폼이 그럴듯한데.]

[혼쭐이 나며 배웠거든요.]

[말투도 그럴듯하고.]

[혼쭐이 날 테니까요.]

아서가 픽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차 맛을 본 그가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얼그레이를 부탁했는데.]

[네.]

[네가 내온 차는 얼그레이가 아니고.]

[네.]

[반항인가.]

[주인님은 불면증이 있으시니까요.]

[그런데?]

[국화차가 숙면에 도움을 준답니다.]

[…….]

[……하녀장님께 이르실 건가요?]

당당하게 다른 차를 내온 주제에 기가 죽어 우물쭈물한다. 아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미아는 눈치를 보다가 쏜살같이 내빼 버렸다. 그녀가 나선 후, 부관이 들어왔다. 서류를 내려놓은 그가 찻잔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향기를 맡고서 미간을 좁혔다.

[치우겠습니다.]

[둬.]

[싫어하시잖습니까.]

모친의 장례식 때도 나베리우스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그놈의 영지 일을 본다고 떠났고, 어린 아서는 그녀의 관이 놓인 국화꽃밭에서 며칠을 홀로 서 있어야 했다.

[둬라.]

[……예.]

[…….]

[아탈란의 악마는 어찌하실 겁니까. 하루빨리 황궁에 보내시는 것이 이로울 겁니다. 계속 데리고 있다간 불똥이 튈 텐데―]

양피지를 내려놓은 그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부관을 쳐다보았다.

[내가 기억력이 좋지 않은 모양이군.]

[예?]

[네게 말을 허락한 기억이 없는데 말이야.]

[송구합니다!]

부관은 허리를 굽혔고, 서둘러 문을 벗어났다. 아서의 시선이 찻잔에 닿았다. 부관이 무엇을 우려하는지 잘 알고 있다. 저 녀석을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도.

그저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동이 틀 무렵 창밖을 보면 부지런히 정원을 쓸고 있는 녀석이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이따금 이름 모를 새가 정원으로 날아들 때 ‘아아, 잠깐만, 잠깐만! 너 주려고 모이를 가져왔어!’ 버럭 소리쳐 놓고는 새가 놀라 도망치면 아쉬워하는 게 우스웠다.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나 겨울이 되었다. 영지로부터 편지와 함께 아이들이 왔다. 공무로 바빠 밤늦게야 도착하니 제 집무실 앞에서 예상치 못한 광경이 보였다.

[꼬마도련님, 이제 주무세요. 주인님은 엄―청 늦게 온다고요.]

[꼬마도련님이 아니고, 란슬롯이다.]

[네네.]

[대답은 한 번만.]

[두 번 하면 안 되나요?]

[교양 없는 짓이라고 조부님이 말씀하셨다.]

[왜요?]

[그건…….]

란슬롯이 당황해서 대답이 없자 미아가 킥킥 웃으며 아이를 휙 안아 들었다.

[놔 줘!]

[주무세요. 꼬마도련님은 많이많이 주무셔야 쑥쑥 큰다고요.]

[아버님이 귀가하시면 귀가 인사를 드려야 해.]

[어째서요?]

[그게 자식의 도리라고 조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왜요?]

[그건…….]

란슬롯이 또다시 우물쭈물하자 미아가 픽 웃고 아이의 뺨에 제 뺨을 가볍게 비볐다.

[착해라. 할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귀여운 손자군요.]

[의젓한 거다.]

[네네, 의젓하세요. 하지만 아까부터 아무것도 안 먹고 기다리시잖아요. 따뜻한 우유랑 쿠키를 먹고 코― 자고 있으면 주인님께서 오실 거예요.]

[하지만…….]

[제가 주인님께서 오시면 깨워드릴게요.]

[하지만 조부님이랑 아버님이 아시면 실망하실 텐데…….]

[비밀로 할게요. 약속!]

소지로 고리를 만들어 내밀자 쭈뼛쭈뼛하던 란슬롯이 그녀의 손가락을 덥석 잡았다. 란슬롯은 사실 굉장히 졸렸던 모양인지 안기자마자 스르륵 눈을 감았다. 잠든 아이의 등을 다정하게 두드리던 미아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아이 안는 게 익숙해 보이는군.]

[신성력이 발현하기 전엔 신전에서 꼬맹이들을 보살피는 게 제 일이었거든요.]

[이리 줘.]

아서가 잠든 란슬롯을 받아 집무실의 문을 열자 미아가 말했다.

[프렌시프 령에서 편지가 왔어요.]

[들었다.]

[후작 부인께서 보내셨대요.]

[……그래.]

문이 닫히기 전, 미아는 중얼거렸다.

[결혼했었구나…….]

―하고. 왜 그녀를 따라나서고 싶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난 전쟁 전에 이혼했어.’

말하고 싶어지는 까닭을 그때의 자신은 알지 못했다. 가문의 이익을 위한 사랑 없는 결혼이었다. 무려 두 번째의.

부인들과는 각각 아이를 보았다. 란슬롯과 가웨인. 이전 부인에게도 현 후작 부인인 가웨인의 모친에게도 사랑하는 남자가 따로 있었다. 두 후작 부인은 결혼 생활 중에도 공공연히 애인을 만났고, 그건 당시 귀족 사회에선 흔한 일이었다.

‘결혼이란 가문 간의 비즈니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라는 게 당연한 전제였다. 란슬롯이 가져온 편지도 위자료에 관한 내용이었다. 전쟁이 끝났으니 정산을 마무리하자는 것이 가웨인의 모친이 전 남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였다.

이튿날, 아서는 정원의 쓰레기를 옮기는 미아에게 다가갔다.

[난 이혼했어.]

[그런데요?]

[…….]

[하실 말씀은 그것뿐?]

[……그래.]

[그럼 비켜 주실래요. 하녀는 바빠서.]

어쩐지 하루 종일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왜인지 모르게 미아가 차갑게 느껴졌고, 그건 그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날 저녁 다시 한 번 미아를 찾았다.

[결혼은 했지만 사랑은 하지 않았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 승마는 아니었다―와 뭐가 다른 거지요?]

[나는……!]

그때 하녀가 헐레벌떡 그를 찾았다.

[주인님, 플로헤타 메리아덴 양이 오셨습니다.]

그게 누군데. 미아는 [이혼했지만 애인은 있구나.] 하며 그를 지나쳤고 아서는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 하녀가 [주인님……?] 하고 그를 불렀다.

[보내.]

[예? 하지만 그분은 어르신께서 후작 부인으로 점찍으신……!]

‘그 사람이었나.’

아서가 인상을 찌푸리곤 짓씹듯이 말했다.

[이 밤에 예고도 없이 찾아온 불청객을 받아 줄 만큼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말도 함께 전해라.]

아서는 또다시 눈치를 보며 며칠을 미아만 지켜보았다.

[아하하! 말도 안 돼. 돌고래가 어떻게 ‘나라고’ 하면서 울어?]

[진짜라니까! 아, 안 되겠네. 실제로 보여 줘야지. 주말에 뭐 해? 나와 같이―]

젊은 마부가 그녀에게 수작을 부리기 전까진.

미아가 킥킥 웃다가 말했다.

[주말? 음…… 돌고래가 황도에 있어?]

있긴 뭐가 있어. 황도에 있는 건 돌고래가 아니라 돌멩이 같은 변태 수작남뿐이다. 고민하던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말, 좋아.]

[오오오! 잊지 마라? 데리러 올 테니까.]

[알았어.]

그날 아서는 집사를 불렀다.

[마차 수리를 해야겠더군. 마구간도 재정비를 해야겠고.]

[예?]

[부서졌다.]

[그럴 리가요. 일주일 전에 마차와 마구간을 모두 수리했습니다.]

[확인해 보던가.]

집사는 의아한 표정으로 마구간과 마차를 살피러 갔다. 아서의 말이 맞았다. 일주일 전 수리한 마구간이 일부 부서져 있고, 마차의 바퀴가 모조리 망가졌다. 이상한 건 누군가 도끼질을 한 것처럼 아주 깔끔하게 손상되었다는 것이다. 주말, 미아는 현관 앞에 쪼그려 앉아 양손으로 턱을 괴었다.

[심심해~!]

돌고래를 보여 준다기에 휴가까지 냈는데!

‘돌고래…… 보고 싶었는데…….’

언제 아서의 마음이 바뀌어 사형대에 오를지 모른다. 그 전에 돌고래를 꼭 보고 싶었다. 무료하게 바닥에 그림이나 그리고 있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들자 아서가 보였다.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세요?]

[그 녀석은 그만둬. 유명한 바람둥이니까.]

[주인님처럼요?]

아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해야.]

[글쎄요……. 그보다 저, 언제 황궁으로 보내실 생각이세요? 언질이라도 주셔야 그동안 마음 편하게 있지요.]

[…….]

[네?]

[……안 보내.]

[무슨…….]

[보내기 싫어졌어.]

아서를 빤히 보던 미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흙 묻은 손을 탁탁 털어 냈다.

[대체 무슨 말씀을……. 저는 아탈란의 악마예요. 죽는 게 당연하다고요.]

[알아.]

[아는데 왜.]

[네가 웃는 게 보기 나쁘지 않아서.]

[…….]

[계속 시선이 가서.]

[…….]

[처형대에 오르는 너를 보기 싫어졌으니까.]

[아니…….]

[대답이 되나?]

안 돼!

미아가 기가 막힌 얼굴로 아서를 쳐다봤다. 이내 젊은 아서가 뒤돌아 걷기 시작하자 미아가 그의 뒤를 따랐다.

[잠깐만요.]

[…….]

[서 보라니까요.]

[…….]

[여봐요!]

아서는 젊었을 때의 광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다 픽 실소를 흘렸다. 왜 그녀가 좋아졌는지 이유를 대라면 지금도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그저 꽃물이 들 듯 스며들었을 뿐.

‘너는 언제 내가 좋아졌나.’

“차를 탔을 때부터?”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아서가 고개를 돌렸다.

“……미아.”

기억 속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녀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당신이 하녀장에게 일러바칠까 봐 두려워서 방문 앞을 지키고 있었거든요. 그러다 들었지요. 두고 가라던 목소리.”

“그것뿐?”

“그러니까 말이에요. 고작 그것뿐이었는데 왜 바람둥이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아니래도.”

“몇 명이나 저택을 찾아왔는지 알아요?”

미아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말했다.

“리즈 영애, 에실라벨 가의 고명딸, 타국의 공주님……. 우와, 엄청 많네. 생각해 보니까 화나잖아!”

미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서가 실소를 흘리자 그녀는 골이 난 얼굴로 물었다.

“왜 웃어요!”

“이렇게 보니 세니아나와 판에 박았군.”

“그건…… 기쁜 말이네요.”

두 사람은 한동안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아서는 물었다.

“이제 가야 하나.”

“네.”

잠깐 고개를 떨군 그녀가 이내 다시 얼굴을 들며 마치 젊은 날처럼 장난스럽게 웃었다.

“당신이 잘생겨서 좋았어요.”

“……그래.”

“다음 생에 만난다면 꼭 그 얼굴, 그 몸매 그대로 나타나 줘요. 그땐 내가 마음 고생시킬 테니까.”

“그래.”

사랑했어요. 사랑했다. 차마 말할 수 없어 말을 삼키고 두 사람은 가볍게 손을 잡았다.

‘언젠가 후의 생에서.’

‘그때는 아주 오래 마주 보자.’

맹세하며.

아빠보다 먼저 잠에서 깬 나는 소파에서 살금살금 내려와 그를 쳐다봤다. 굳게 닫혀 가지런하던 입술이 드물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좋은 꿈이라도 꾸는가 보다.

나는 아빠가 깰세라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 계단을 올라 내 방으로 들어가자 문 앞에 저택의 사용인들이며 기사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아가씨!”

“시트론.”

우리는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나보다 한 뼘은 큰 몸이 가늘게 떨리었다.

“이렇게 걱정하게 만드시고…….”

“미안. 미안해.”

마릴린이 울먹이며 다가와서 우리 셋은 서로를 안은 채 울먹였다. 방 안엔 편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통신석으로 연락해 온 사람들도 잔뜩 있다며 마릴린은 명단을 만들어 가져왔다.

샤르파크 후작 부부. 오뵈르 백작 부부. 로웨나 황비와 헬리오스 황태자. 스위트피, 그리고 아카데미의 친구들.

‘아.’

명단을 확인하던 내가 눈을 홉뜨고 예상치 못했던 이름을 지그시 응시했다.

“조슈아도 있네.”

“사비에르 공이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 아가씨의 행방에 관해 여쭈셨어요.”

“고마워라.”

생각해 보면 조슈아, 아니, 아소는 내가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처음 사귄 친구였다.

‘이 세계에서의 첫 친구는 남자친구가 되었지요.’

속으로 쿡쿡 웃고 계속 명단을 확인했다. 조슈아 아래로도 의아한 이름들이 있었다. 생전 들어 본 적 없는 이름도. 내가 “으으응?” 하며 갸웃거리자 마릴린이 어깨를 으쓱으쓱 올리며 말했다.

“아가씨는 제국의 영웅이시니까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부담스러워.’

제일 당황스러운 이름은 트리스탄과 엘트라의 사신들이었다.

“참, 일이 연이어 터져서 돌려보내 주는 걸 잊었다.”

한 번 콧대 높은 엘트라의 대신관과 신경전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겁을 먹었는지 돌려보내 달라고 청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역시 황궁에 가야겠다.

‘이모랑 외삼촌, 황제 폐하도 만나고 또…….’

로열 키친! 엄청 오래 자리를 비웠는데 잘린 게 아닐까.

‘아냐, 그래도 나름 제국의 영웅인데 봐줄 수도 있어. 또 아곤이 로열 셰프로 있으니까…… 하지만 아곤은 그런 데선 딱 부러진 사람이라……’

내가 끙끙거리며 고민하는 사이, 할아버지가 황도에 도착했다. 난 방에서 내려가 할아버지를 마중했다.

“영지 일이 벌써 끝나셨어요?”

“그래.”

―가 아닌 것 같은데. 할아버지의 뒤를 쫓아 들어온 가신들의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그들이 “어, 어르신,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직 산더미같이……!” 하고 말했다. 저 뒤에서 샛노란 얼굴의 젊은 행정관이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 보였다.

“어, 어르신, 이 서류라도 검토해 주십시오.”

누군가 결의에 찬 얼굴로 흡사 죽기 살기라는 듯 할아버지에게 매달렸다.

“제발, 상점가 건이라도 마무리해야……!”

“이 사람이! 내 관할지가 더 급하네. 산적 떼가 내려왔단 말일세!”

“내 쪽은 비축해 둔 보그가 건물 더미에 깔리고 수해까지 입어 전혀 쓸 수가 없습니다. 전력석을 돌려서 겨우 숨통을 트이게 하고 있어요!”

“숨통은 트였지 않나! 우리는 지역에 하나 있는 병원이 무너지면서 의사들이 죄 운신하지 못하고 있어!”

엄청 바쁜데 억지를 부려서 올라오셨구나. 나는 가신들의 눈치를 보았지만, 할아버지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내게 다가왔다.

“식사는?”

“아직 배가 안 고파서요.”

“그러냐.”

인자하게 웃는 모습이 가신들을 볼 때와는 전혀 딴판이라 민망할 지경이었다. 가신들 입장에서 기분이 좋은 할아버지는 신경이 날카로운 할아버지보다 무서운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만 꾹 다물었다. 듣지 않아도 저들이 무슨 생각 중인지 알 수 있었다.

이번엔 기필코 퇴임할 것이다. 이놈의 일, 때려치워야지. 퇴직. 퇴직. 퇴직! 얼굴에 대문짝만하게 퇴직이 쓰여 있다.

“할아버지.”

“오냐, 오랜만에 황도에 왔으니 다들 모여서 카드 게임이라도 할까. 아니지, 아니지. 상점 지구에서 쇼핑을 하는 것도 좋겠구나.”

“…….”

“장미가 흐드러지게 필 시기로구만. 꽃놀이가 괜찮을지도.”

할아버지가 고민하는 사이 오빠들이 나왔다. 어느새 세 남자가 머리를 맞대고 ‘오늘은 세니아나와 무엇을 하며 놀까’ 고민했다. 오빠들도 일이 무척이나 바쁜 건지 그들 뒤에 붙은 행정관이나 부관들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랑 오빠들은…….”

내가 쳐다보자 그들이 “역시 꽃놀이가 좋으냐?” 하고 물어서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성실하진 않으신가요?”

“……뭐?”

“일을 뒤로 미뤄 놓고 놀 궁리를 하는 건 게으르다는 것일까요?”

“아니, 그건 아니고…….”

“저는 성실한 사람이 좋은데.”

내가 중얼거리자 할아버지와 가웨인이 움찔했다. 난 “아냐, 난 성실해!” 하고 소리치는 두 사람을 지그시 보며 말했다.

“게으른 사람은 싫어요.”

* * *

게으른 사람은 싫다. 할아버지와 오빠들은 게으르다. 할아버지와 오빠들은 사람이다. 머릿속의 주판알이 두두두 움직이더니 종국엔 끔찍한 문장이 완성되었다.

할아버지와 오빠들이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싫어! 멀리서 들려온 메아리가 낙뢰처럼 쿵! 떨어졌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의 나베리우스가 주춤, 물러나다가 이윽고 소리쳤다.

“난 게으르지 않아!”

가웨인도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린 성실해!”

그러자 세니아나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역시 그렇지요~?”

“그래!”

“그렇다고!”

“그럼 이제 방으로 돌아가셔서 일을 하실 건가요?”

“그래!”

“쓰러질 때까지 할 거야!”

“우와, 멋있어라.”

세니아나가 히히 웃으며 말하자 나베리우스와 가웨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들은 가신들과 행정관들이 들고 있던 서류를 휙! 빼앗아 들고 서로에게 질세라 집무실로 달려갔다. 세니아나는 뿌듯한 얼굴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신들의 눈엔 마치 그녀의 등에 후광이 비추는 것만 같았다.

‘아가씨…….’

‘아아, 마이 선샤인!’

“최고…….”

“요정…….”

“멋집니다…….”

“사랑스러워…….”

세니아나가 부끄러운 듯 웃고는 “자, 여러분도 가세요.” 하고 말하자 가신들의 얼굴이 환히 빛났다. 그들이 두두두두! 각자의 상관을 향해 달려가자 란슬롯이 픽 실소를 흘렸다.

“우리 아가씨가 두 사람을 아주 잘 다루시는데.”

“2년 차니까요. 이제 신입이 아니라 익숙해졌답니다.”

“호오, 그래?”

란슬롯이 장난스럽게 묻자 세니아나가 허리춤에 손을 착 올리고 “오빠에게도 할 수 있는걸요!” 하고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귀여워.’

란슬롯은 쿡쿡 웃고 그녀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허리를 조금 굽혔다.

“어디 볼까. 얼마나 잘 다루시는지.”

“거래예요.”

“잘 아네. 무슨 거래를 하시려고?”

“가서 일을 하시면 오빠에게 맛있는 요리를 해드리겠어요.”

“흐음, 동하긴 하는데…….”

“함께 식사를 한 후엔 피아노를 같이 쳐요.”

자, 어때? 세니아나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란슬롯을 쳐다봤다. 그는 “이런.” 하고 말하며 곤란한 듯 중얼거렸다.

“정말로 잘 다루잖아.”

“일하실 거예요?”

“쉽게 넘어갈 순 없지. 하나 더 얹어 봐.”

그러던 찰나, 아서가 남매에게 다가왔다. 나베리우스와 가웨인이 집무실로 달려갈 때부터 지켜보던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딸을 쳐다봤다. 세니아나는 끙……, 소리를 내며 고민했다.

‘큰오빠가 좋아할 만한 게 뭐가 있지.’

한참을 고민하던 세니아나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일을 빨리 끝내시면…… 으음, 나들이 갈까요?”

“단둘이?”

“좋아요!”

란슬롯이 제 부관에게 손을 뻗어 서류를 받았다.

“빨리 끝내야겠는걸.”

그가 계단을 오르자 세니아나는 성공했다는 얼굴로 뿌듯하게 웃었다. 그때, 아서가 물었다.

“난?”

“네?”

“내겐 뭘 해 줄 거지?”

“아빠는 성실하시잖아요?”

아서의 눈이 가늘어지자 세니아나가 킥킥 웃고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큰오빠보다 일을 빨리 끝내시면 꽃 보러 가요. 그러니까…… 아빠랑 저랑 데이트!”

나들이보다 듣기 좋은 말이었다. 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을 빨리 끝내면 세니아나와 데이트. 영리한 가신들이 다른 프렌시프의 사내들에게 전하자 모두의 눈이 불타올랐다.

끝낸다, 일. 한다, 세니아나와 데이트! 내가. 아니, 내가!

저택이 조용히 불타올랐다.

* * *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는데. 일 중독 행정관들이 기쁜 얼굴로 서류를 든 채 뛰어다니는 것을 본 나는 조금 곤란해졌다.

‘나가는 게 그렇게 좋은가.’

사실 나는 밖에서 노는 것보다 집에서 얌전히 요리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정원을 산책하는 게 더 좋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나들이 열광이 조금은 의아했다.

“왜 그러실까…….”

중얼거리자 마릴린과 시트론은 내게 찻잔을 내밀며 키득거렸다.

“데이트, 라는 단어 때문이지요.”

“데이트?”

“데이트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잖아요?”

“그렇지……?”

마릴린이 우훗, 웃고 “사랑하는 사람 말이에요.”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잘 모르겠지만, 능률이 올라가면 좋지. 가족들이 일을 끝내기 전에 황궁에 들려야겠다.”

“외출용 드레스를 가져올까요?”

“응.”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황궁으로 출발했다. 출입관리소 앞에 서자 근위병들이 신분패도 확인하지 않고 냉큼 문을 열어 주었다. 그래도 되냐고 묻자 “제국의 영웅에게 신분을 묻는 자가 있다면 천치죠!” 하며 눈을 반짝였다. 걷는 곳마다 호의로 가득한 시선이 쏟아졌다.

‘엄청 곤란한데요.’

‘프렌시프 영애’를 동료로 환영하지 않던 궁인들조차 날 보면 달려와 쿠키나 리본, 고급 찻잎 등의 선물을 잔뜩 안겨 주었다. 아발론에 다다랐을 땐, 하녀 둘에 나까지 짐을 잔뜩 끌어안고 있었다.

“프렌시프 영애를 뵙습니다.”

새롭게 임명된 시종장이 인자하게 미소지었다.

“괜찮으시면 짐을 보관해 드릴까요.”

황제를 모시는 아발론의 궁인들은 행동 하나, 말투 하나 조심했다. 귀족들에게 무례를 범하진 않지만, 그들에게 넘치는 호의도 베풀지 않는다.

“그래도 되나요?”

“제국의 영웅께 이쯤이야.”

“그 별명 언제쯤 잊힐까요…….”

내가 한숨을 내쉬자 새로운 시종장은 “글쎄요, 한 오백 년쯤 뒤엔 잊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고 상냥하게 대답했다. 시종장에게 선물을 맡기고서 나는 주방을 향했다.

‘일단 인사. 그리고 오래 자리를 비워서 죄송하다고 말해야지.’

긴장된 얼굴로 문고리를 잡으려는데 복도 끝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너!”

“아, 스승님.”

“너, 이놈의 새끼!”

쟝뤼크가 쿵, 쿵, 쿵! 발을 구르며 달려왔다.

‘퇴직하시고서 구호소에서 요리사들을 지도하고 계신다고 했는데!’

쓸데없는 짓으로 사람 간 졸이게 했다고 혼이 잔뜩 날 것이다. 그게 무서워서 마음의 준비를 한 뒤 구호소로 그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스, 스승님!”

“이리 와, 이리 와!”

“자, 잠깐만요―!”

으아아아! 나는 그를 피해 쏜살같이 도망쳤다.

“개 놈의 자식! 이리 안 와!”

“자, 잘못했어요! 그리고 저는 개 놈의 자식이 아니라 우리 아빠랑 할아버지 자식인데.”

그가 움찔, 하더니 멈춰 섰다.

“……어르신께 이를 거냐?”

“안 이르면 혼내지 않으실 거예요?”

“그거랑 이건 다르지!”

“그, 그럼 이를 거예요!”

“이리 와! 이 자식! 잔뜩 걱정이나 시키고 말이야!”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아곤이 보여서 나는 그의 뒤에 덥석 매달렸다.

“아니, 아가씨!”

“스승님이 나 죽인다…….”

내가 울먹이며 아곤을 보자 그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결국 쟝뤼크에게 잡혀서 혼쭐이 났다. 사람 지나는 복도에 서서 팔을 번쩍 든 채 “다시는 걱정시키지 않겠습니다. 위험한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가 작다!”

“겁 모르고 괴물에게 달려들지 않겠습니다!”

“요리사가 말이야. 몸 귀한 줄 모르고……!”

“잘못했― 그런데 스승님, 손은 괜찮으세요?”

쟝뤼크가 다친 손을 쥐었다 폈다. 나는 기뻐서 펄쩍 뛰었다.

“움직인다!”

“어어, 손 내려간다!”

“잘못했다니까요……. 이제 안 그럴 거예요.”

우리를 지켜보던 아곤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루크, 이제 그만 해라.”

“제레미가 이렇게 가슴을 졸이게 해도 적당히 하실 겁니까?!”

아곤이 직접 키운 제자이자, 프렌시프 성의 수셰프 제레미가 언급되자 아곤은 “그건 아니지…….” 하고 중얼거렸다.

“폐하를 뵈러 가는 길일 텐데 더 막을 것이냐.”

그 말에 쟝뤼크가 쯧, 혀를 찼다. 손을 내려도 된다는 표정이라 스르륵 팔을 내리고 욱신거리는 부분을 주물렀다.

“아곤은 왜 조리복을 안 입고 있어? 아니, 있어요?”

로열 셰프가 되기 전엔 프렌시프의 사용인이었던 터라 공대가 입에 잘 익지 않는다. 아곤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제 말을 낮추십시오.”

“네?”

“어제가 로열 셰프로 근무한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오늘은 짐을 챙기러 왔지요.”

“어?! 왜?”

“제 자리가 아니니까요.”

“…….”

“경합을 승리로 이끈 건 아가씨였지요. 제 자리가 아닌 곳을 오래 지켜서야 되나요.”

“그럼 스승님이 로열 셰프가 되시는 거야?”

그러자 쟝뤼크가 흥,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나도 네가 아니었으면 황궁은 쳐다도 보지 않았을 거다.”

“안 하실 거예요?”

“그래.”

“어째서……. 지금 제국에서 가장 실력 좋은 요리사는 스승님이신걸요.”

“궁에 갇혀 요리 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는 시무룩 해하는 날 쓰다듬고서 말했다.

“후배를 키우는 것이 적성에 맞더구나. 싹이 보이는 족족 황궁에 보내 주지.”

쟝뤼크와 아곤이 나를 다정한 눈으로 보며 물었다.

“그렇게 됐으니 묻겠는데 네 꿈은 뭐냐.”

“네?”

“아탈란이 사라졌으니 로열 키친엔 더 미련이 없는 것이야?”

사실 그 문제는 계속 생각해 오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그들을 바라보았다.

“답은 잠깐 미뤄 놓을게요. 그 전에 할 일이 있거든요.”

“할 일?”

남은 악당을 처리해야지! 대사제가 아직 죽지 않았잖아. 난 히죽 웃었다.

* * *

두 사람과 헤어진 나는 아발론을 찾았다.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가자 그가 돋보기 대용으로 쓰는 듯한 외 알 안경을 내려놓고 손짓했다.

“앉아라.”

소파에 앉아서 집무실을 둘러보고 있으니 그가 반대편에 착석했다.

“허름한가.”

농담조로 건넨 듯한 말에 나는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이전에 보았던 제1 집무실보다는 확실히 허름하다. 황도 저택의 서재나 집무실보다도.

황제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가볍게 중얼거렸다.

“웬 녀석이 삿된 자들을 이동시키며 감히 성터까지 함께 이동시켜서 말이지. 마법사들이 떼거리로 달려들어도 이것밖에는 복구하지 못했느니라.”

‘우리 집은 복구하고서 마무리 작업 중인데…….’

하기는 황도의 저택 중엔 프렌시프 저가 제일 큰 저택이긴 해도, 황궁의 크기와는 비할 수 없다. 이만큼 복구한 것도 제국의 마법 수준이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이리라.

“짐이 어찌나 고생했는지.”

“…….”

“두 달 전엔 짐이 무려 천장이 날아간 개집에서 잠을 취했단다.”

“…….”

“모두 성터를 없애 버린 자의 덕이다.”

내용과 달리 말투는 여전히 가벼웠다.

“제가 폐하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씀이시지요?”

성터와 함께이긴 해도 삿된 자들을 이동시켜 주었잖아?

뻔뻔한 말투에 황제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에 져 주는 법이 없구나. 어찌 그리 프렌시프 부자를 빼다 박았는지.”

“프렌시프 영애니까요.”

“그래.”

한동안 미소 짓고서 날 보던 황제가 물었다.

“해서, 제국의 영웅이신 프렌시프 영애님이 짐을 찾아온 연유는?”

“폐하께서는 상벌이 확실한 현명한 군주이시지요.”

빙글빙글 웃으며 나를 보던 황제가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제국을 구했으니 상을 내놓아라?”

“그렇습니다, 폐하.”

“내용이나 들어 보지.”

황제가 자세를 고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이 두 가지 있습니다.”

내가 검지와 중지를 펴며 말하자 그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두 가지나?”

“예. 첫 번째는 아탈란의 처분을 모두 제게 맡겨 주셨으면 합니다.”

“대사제만을 이르는 건 아니겠군.”

평소엔 느물느물한 아저씨 같아도 이럴 때 보면 칼날보다도 날카로웠다. 황제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가브리엘라와 그 동생은 사면하겠다?”

“예.”

고민하던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두 번째는?”

“두 번째는…….”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서 입을 열었다.

* * *

옥사 안, 궁인 두엇이 배식을 외치며 철창에 난 납작한 틈에 식판을 걸쳐 놓았다. 대사제는 음식 냄새를 맡자마자 엉금엉금 기어 식판에 다가갔다.

나흘. 장장 나흘을 굶었다. 새벽까지 고문이 이어지는 바람에 음식은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고문으로 죽기 전에 아사할 지경이었다. 죽음은 차라리 달갑다. 버러지 취급을 당하며 살길 바라지 않으니.

하지만 허기가 가져오는 고통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신전에서 온갖 호화로운 음식들만 입에 밀어 넣던 그는 옥수수 몇 알이 든 희멀건 죽을 향해 허겁지겁 손을 뻗었다.

그때, 퍽! 옥사의 경비병이 식판을 걷어찼다.

“이, 이런…… 이런 몹쓸……!”

고문의 여파로 실핏줄이 자글자글 터져 온통 검붉어진 눈에 불똥이 튀었다. 대사제가 식판을 걷어찬 경비병을 바라보았다.

“이, 이……!”

“우리 할매는 네놈들 때문에 눈도 제대로 못 감고 죽었어.”

“그게 내 잘못이냐. 네 핏줄의 명이 그뿐이었던 게지!”

병사가 창살 밖으로 삐져나온 대사제의 옷깃을 우악스레 쥐며 말했다.

“자식새끼들 죄 먼저 보내고 필사적으로 손주를 키운 분이시다. 없는 살림에도 배곯는 아이들을 발견하면 제 입에 있던 것도 꺼내서 주었어!”

병사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었다.

왜 이런 작자를 살려 두는 거야. 왜―!

조모가 돌아가신 날은 마을에서 잔치가 한창이었다. 저는 고작 황궁에 출퇴근하는 경비병이 되었을 뿐인데, 산골짜기에서 제일 출세했다며 마을 사람들이 잔치를 마련해 준 것이다.

팔십 나이에 하루도 쉬지 못하고 곡괭이를 들던 조모가 평생 처음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아이고, 할매. 좋은 날 왜 울고 그래.]

조모의 친구들은 훌쩍훌쩍 우는 할머니를 놀리는 주제에 자신들도 눈가를 적셨더랬다.

[아, 아녀. 나 우는 거 아녀.]

선량한 신혼부부가 허둥지둥 할머니를 달랬다.

가진 게 먼지뿐인 촌장 아저씨는 산을 몇 개나 넘어 대장장이를 찾아가 마을 사람들이 모은 돈으로 그에게 선물할 투구를 사 왔다. 마을에서 가장 어린 네 살, 다섯 살 오누이가 양쪽에서 투구를 들고서 비틀비틀 걸어왔다.

순박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였다. 그런 날이었다. 그렇게 행복한 날, 삿된 자들이 마을을 습격했다. 피범벅이 되어 쓰러진 할머니가 뒤늦게 마을에 도착한 막스를 보고 손을 내저었다.

가라고. 할미는 되었으니, 너는 어서 도망치라고.

[장하다, 내 새끼. 장혀.]

할머니의 목소리가, 산 채로 뜯어 먹히던 마을 사람들이, 불바다가 된 곳에서 부모를 잃고 엉엉 울던 어린애들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이, 이거 놔!”

대사제가 경비병의 손을 붙들고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왜 이런 작자는 편하게 죽어야 하는 거지.’

사형은 안 돼. 쉽게 보내 줄 수 없었다. 이놈의 욕심 때문에 사람들이 몇이나 죽어갔던가!

경비병이 손에 힘을 주었을 때였다. 그의 어깨에 조그마한 손이 닿았다. 상관인가 싶어 황급히 고개를 돌린 경비병은 우뚝 굳어졌다.

“프, 프렌시프 영애님.”

“놓으세요.”

“……저는, ……저는 도저히 이놈을……!”

“이런 작자 때문에 미래를 망치지 말아요.”

경비병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이내 결심하듯 천천히 손을 놓은 그가 “실례했습니다.” 말하곤 몇 걸음 어렵게 떨어졌다. 세니아나는 나뒹구는 죽그릇을 보다가 대사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빌어먹을 년, 기어이 돌아왔군. 기어이!”

“…….”

“어서 죽여라! 죽여!”

“……죽이면? 그 대단하신 아탈란의 품에서 안식을 찾으려고?”

세니아나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알지. 너 같은 종자들은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잖아.”

“뭐?”

“끝끝내 반성하지 않고, 오직 제가 옳다고 믿으며.”

“…….”

“그런 너를 뭐 하러 죽여?”

“뭐?”

나를 살려 두겠다고?

대사제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세니아나는 철창 밖으로 삐져나온 그의 손을 콱! 짓밟았다.

“크악!”

고문을 당하며 손톱 밑에 죄 철심이 박힌 터라 고통이 배가 되었다.

“치, 치워, 치우라고!”

“우리 엄마도 그렇게 애원했니?”

“……!”

“네가 죽인 사람들도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했을까?”

세니아나가 경비병을 향해 소리쳤다.

“열어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던 경비병은 서둘러 철창을 열었다. 세니아나가 그 안으로 들어가자 대사제가 손바닥으로 뒷걸음질하며 소리쳤다.

“오, 오지 마, 오지 마!”

하지만 기어코 그의 앞까지 걸어간 그녀는 고문의 여파로 진물이 줄줄 새어 나오는 복부를 다시 한 번 짓밟았다.

“으아아악!”

“너는 절대로 편하게 죽을 수 없을 거야. 평생 모진 고문에 시달리게 되고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해도 그렇지 못할 것이다.”

세니아나의 눈이 검게 일렁였다.

진심이다. 저 계집애는 정말로 자신을 편히 죽게 놔둘 생각이 없는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죽을 기회가 없다.

대사제가 혀를 씹은 순간 세니아나는 그의 턱을 단단히 붙들었다.

“어디 계속해 봐.”

“크흐흑…….”

“숨이 끊어질 것 같으면 네가 잔뜩 만들어 둔 성식을 먹여 줄게.”

“……!”

대사제의 두 눈이 공포로 물들였다. 세니아나는 빙그레 웃었다.

“누아제도 고통은 느낄 수 있다지. 네 덕분에 우리 군사들이 몸소 겪었으니까 잘 알고 있어.”

“지, 지독한, 지독한 년!”

“그리고 삿된 자가 될 것 같으면 내 힘으로 정화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

“…….”

“오래오래 살아야지. 죽은 사람들이 받은 고통을 곱절로 받으려면.”

성식이 든 통을 꺼내자 대사제가 부르르 떨며 완강히 반항했다. 경비병이 그를 제압하고 입을 벌렸다. 세니아나는 망설임 없이 성식을 털어 넣었고, 익히 알고 있던 것과 같이 상처가 금세 아물었다.

“오늘은 물고문을 받을 거야.”

“크흐흐…… 흐으…….”

“내일은 철관을 머리에 쓸 테고. 녹슨 쇠가 뇌까지 파고들겠지. 그럼 내가 다시 성식을 가져올게.”

“흐윽…….”

공포에 잠식된 대사제가 가늘게 떨며 고개를 저었다.

‘제발, 제발……!’

“모레엔 더 지독한 고문을, 글피는 더더욱 지독한 것을.”

“아, 아아아!”

“너는 평생을 고통받게 될 거야. 기대해.”

세니아나가 그를 떠밀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그는 검붉은 피가 잔뜩 뒤섞인 콧물을 질질 흘리며 오열했다.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는 미련 없이 철창을 나섰고, 그 후 지독한 외형의 사내들이 그를 끌어냈다.

“자, 어르신, 즐거운 고문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네 덕분에 삿된 자에게 씹혀 얼굴이 이렇게 일그러졌거든. 똑같이 경험하게 해줄게.”

“벌써부터 겁먹으시면 곤란하지. 죽어가던 내 새끼 울음소리가 아직 선하다고.”

“으아아악!”

그의 비명이 옥사에 메아리쳤다.

* * *

마차를 타고 황궁을 벗어난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엄마.’

잘했다고 칭찬하시진 않겠지. 마음이 불편할 거라고 다그치실 수도 있겠다. 엄마는 선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나는 엄마와 다르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를 고문하는 것은 그에게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다.

악의엔 악의, 폭력엔 폭력.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프렌시프의 가훈이고, 나는 프렌시프 영애니까.

어느새 마차가 저택으로 들어갔다. 마부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난 익숙한 말을 보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너, 저하의 말이잖아?”

도미니크가 왔나 봐.

윤기가 흐르는 흑마가 히이잉―! 울다가 내 쪽으로 얼굴을 쭉 내밀었다. 순한 눈망울의 말이 내게 얼굴을 비볐다.

“간지러워~!”

나는 말의 얼굴을 가볍게 두드리며 “옳지, 옳지. 착하다.” 하고 웃었다.

“마릴린.”

“네, 아가씨.”

“이 아이에게 건초를 챙겨 줘.”

“네.”

그렇게 말하고 난 저택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도미니크가 온 모양인지 대응접실 앞에 알베르가 서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묵례하고서 노크하기 위해 손을 올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문 틈새로 할아버지의 고성이 흘러나왔다.

‘어어엉?’

무슨 일로 이렇게 화가 나셨을까.

난 문을 빼꼼 열고서 “들어가도 돼요?” 하고 말했다. 일제히 도미니크를 노려보고 있던 가족들이 나를 쳐다봤다. 침묵하고 있지만, 들어오지 말라는 얘기는 없어서 나는 살짝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나요?”

내 물음에 도미니크가 퍽 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렌시프 어르신께 약속한 것을 받으러 왔습니다.”

“약속한 것?”

도미니크에게 무얼 주기로 했다고? 우리 할아버지가?

도미니크 얘기만 나와도 인상부터 쓰기에 사이가 좋아지긴 힘들겠다고 생각했는데 나 모르는 새에 선물 같은 것도 주고받았는가 보다. 나는 생긋 웃고 남은 의자에 앉았다.

“두 분이 친해지셨나 봐요. 신난다!”

도미니크가 “그렇죠.” 하고 가볍게 대답해서 난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희 할아버지가 무뚝뚝해 보이시는데 사실은 아주 정이 깊으세요.”

“압니다.”

“할아버지 최고!”

나는 헤헤 웃고서 할아버지를 쳐다보니 그는 어쩐지 당황한 듯했다.

“으응?”

“…….”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보다가 다시 도미니크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기회에 도미니크와 할아버지가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면 좋겠다!’

“저희 할아버지가 얼마나 멋진 분인지 모르시지요? 영지민들이 얼마나 존경하는데요.”

“그렇습니까.”

“네. 약속을 칼같이 지키시거든요!”

“……그, 그렇게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은 아니다.”

할아버지가 중얼거려서 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엄청 잘 지키시잖아요. 그리고 저하, 저희 할아버지는 적 외엔 정의로운 분이세요.”

“예.”

“제게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니까요!”

“그렇군요. 약속을 잘 지키는 정의로운 분.”

“존경스럽죠?”

“예, 아주.”

아탈란 사건으로 도미니크의 위상이 엄청나게 올랐다. 황제는 그를 요직에 앉힐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런 도미니크와 할아버지를 믿고 힘을 실어 주면 가문엔 좋은 일이야.’

나는 ‘잘했지요?’ 하는 눈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

그런데 할아버지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일을 많이 하셔서 피곤하신가?’

하기는 영지에서 오신 후 바로 일에 집중하셨으니까 피곤하실 만도 하다.

“저하.”

“예.”

“얘기가 끝나셨으면 저희는 이만 가 보는 게 어떨까요? 할아버지는 쉬셔야 하거든요.”

“그러죠.”

도미니크가 일어나며 할아버지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그럼 약속한 것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뭐길래 표정 없는 사람이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 도미니크와 함께 방을 나섰다.

문 안에서 “이제 어쩌실 겁니까! 예?!” 하는 가웨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정말로 이상한 날이었다. 할아버지 앞에선 언제나 긴장하는 가웨인까지 저렇게 편한 태도로 말하다니.

‘사이가 좋아진 걸까나.’

그렇다면 기쁜 일이지!

도미니크가 “갈까요?” 하며 손을 내밀어서 나는 그를 덥석 잡고서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은 아직 황량하군요.”

“건물만큼 수리가 급한 건 아니라 천천히 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식물은 마법의 힘을 빌려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게 가장 예쁘잖아요.”

“예.”

나는 걷다 말고 그를 돌아보았다. 도미니크가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내 눈을 빤히 응시했다.

“대답 말고 다른 얘기 해 보세요.”

“예?”

“그러니까 ‘예’, ‘그렇습니까’ 그런 거 말고요.”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자꾸 대답만 하시니까.”

“그렇군요.”

“또 그런다.”

“그렇네요.”

나는 뾰로통해져서 “나빴어…….”라고 하자, 도미니크는 가늘게 실소를 흘리고서 중얼거렸다.

“대륙의 정세…… 같은 것을 얘기해 볼까요.”

“나 이제 그거 지겨운데.”

“앞으로 정책의 방향?”

“말고요.”

“삼백 가지 독의 활용법.”

“책 이름이에요?”

“쉽고 빠른 암살의 기술은 어떻습니까.”

“그런 거 궁금하지 않아요~!”

자꾸 놀리기만 하고. 나는 토라져서 먼저 걷기 시작했다. 도미니크가 내 뒤를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앞서 걸으며 정원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확실히 황량하긴 해.’

이 시기면 유리관 앞엔 꽃이 잔뜩 핀다는데. 그건 내년에나 볼 수 있겠다.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자 무언가 옆으로 쑥 다가왔다.

꽃이었다.

연분홍색의 라넌큘러스.

나는 깜짝 놀라 꽃다발을 쥔 도미니크를 바라봤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말재주가 부족한 건 아실 테죠.”

“네…….”

“사실은 질투도 꽤 많습니다.”

“그것도 익히 알고 있어요.”

아카데미 복도에서 아소와 떠들었을 때, 나만 벌준 건 질투 때문이었다는 걸 이제는 알지요.

도미니크는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해산물을 싫어합니다.”

“알지요.”

“평범한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

“승부욕도 강한 편이죠.”

“…….”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결혼해 주세요.”

나는 눈을 홉뜨고서 천천히 무릎을 꿇는 도미니크를 지켜보았다. 그는 꽃다발을 내게 바치며 말했다.

“말재주는 없어도 이야기를 듣는 것은 잘합니다. 저는 질투가 많아도, 평생 다시는 당신을 질투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

“해산물을 먹는 건 싫어도 손질은 잘합니다. 승부욕이 강한 대신에 성실합니다.”

“…….”

“일이 하고 싶다면 온 힘을 다해 지원하죠. 당신이 일을 하면 난 살림을 하겠습니다. 가정을 돌보고 아이를 키울 겁니다.”

“…….”

“언젠가 당신이 식당을 차렸을 때 그곳의 청소와 빨래, 정리는 평생 제게 맡겨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꽃다발을 받았다.

“좋아요.”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결혼해요!”

도미니크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 * *

―라고 하긴 했지만, 바로 결혼하진 못했다. 끌어안은 우리를 본 가족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사이에 파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안 돼!

차라리 날 죽여라!

난 사실 약속도 안 지키는 비열한 노인네다!

가족들이 왁왁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도미니크는 정말로 끈질겼다. 하루도 빠짐없이 프렌시프 저에 출석 도장을 찍기 시작한 것이다.

서류를 들고서 복도를 걷던 난 기묘한 광경을 보고서 우뚝, 멈추었다.

“……저하, 여기서 뭐 하세요?”

“어르신과 각하, 경들을 뵈러 왔습니다.”

“아니, 그건 알겠는데…….”

왜 걸레를 들고 계시나요.

나는 한 손엔 걸레와 한 손엔 붓을 든 채 올빼미 상 앞에 서 있는 도미니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게 뭐지요?”

도미니크는 다시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걸레입니다.”

“아니, 그거 말고.”

“붓이죠.”

“그것도 알아요. 그러니까 왜 그런 걸 들고 계시느냐고 묻는 거예요.”

“올빼미 상을 닦고 있습니다. 붓은 틈새에 쌓인 먼지를 빼내기 위해서 가져왔죠.”

“그걸 저하께서 왜 하는 거냐고요!”

내가 빽 소리치자 도미니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올빼미 상을 닦으며 말했다.

“처가의 환심을 사려면 노력해야 한다더군요.”

“청소가 노력이라고?”

“예.”

“잘못 짚었어요!”

나는 씩씩거리면서 도미니크의 손에 들린 걸레와 붓을 빼앗았다. 지나가는 하인에게 그것들을 건네준 후, 도미니크를 끌고서 쿵! 쿵! 계단을 내려갔다. 가족들이 모인 서재 앞에서 도미니크가 물었다.

“어쩌시려고요.”

“다시는 저하를 구박하지 말라고 못 박을 거예요.”

“당신 가족들이 들어줄 리가.”

도미니크가 픽 웃었다. 난 서재의 문을 벌컥 열었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던 가족들이 날 돌아보았다.

“세니아나?”

“저하에게 청소시키셨어요?”

내가 노려보자 눈을 도르륵 굴리던 가웨인이 펄쩍 뛰며 말했다.

“난 아냐!”

“…….”

도미니크에게 마구간 청소를 시켰을 적에 단단히 화가 났던 것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란슬롯도 냉큼 고개를 저었다.

“나도 아니야.”

“그럼 아빠?”

아빠가 슥,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 할아버지가 있었다.

“할아버지.”

“널 위해 뭐든 다 할 수 있다기에 하인 노릇이라도 하겠다는 거냐고 물었을 뿐이다.”

“…….”

“직접 시킨 것은 아니다.”

나는 뻔뻔한 표정의 할아버지를 빤히 보다가 음산하게 말했다.

“계속 저하를 구박하실 건가요?”

“내가 언제 저하를 구박했단 말이냐.”

“좋아요. 그럼 저도 제 마음대로 할 거예요.”

그러자 흥, 콧방귀를 뀌었다.

“뭘 어찌하려고.”

“불량해질 거예요.”

“뭐?”

“공공장소에서 바닥에 침을 뱉을 거고요. 그리고, 그리고…… 머리도 막 무지개색으로 물들여 버릴 테야.”

“…….”

“또, 돈도 잔뜩 쓸 거예요. 식칼을 열 개씩 사 버려야지.”

“…….”

나는 고개를 휙, 치켜들며 쐐기를 박았다.

“종류별로.”

내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자 도미니크가 고개를 숙인 채 가늘게 떨었다.

‘이, 이건 아닌가.’

나는 쿡쿡 웃는 가족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다가 소리쳤다.

“가출도 할 거예요!”

“뭐―?!”

“엘트라 사람들을 데려다주는 김에 아예 거기서 눌러 살아 버릴 테야~!”

어제 엘트라의 사신들과 트리스탄이 날 찾아왔다. 이제 제발 돌려보내 달라며 애걸하기 위해서. 하지만 난 성수가 없었고, 그들을 데려다주기 위해선 단거리로 계속해서 이동해야 했다.

물론 가족들은 ‘우리 애가 데려온 것도 아닌데 왜 데려다줘야 한다는 거냐. 갈 거면 배라도 타고 가든지!’ 하고 펄펄 뛰었다. 황제가 나서 중재하지 않았더라면 엘트라 사신들은 꼼짝없이 배를 타고 갈 뻔했다.

“안 돼!”

가출엔 타격을 받았는지 가족들이 모두 인상을 썼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말했다.

“다시는 저하를 구박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세요.”

“그건…….”

“트리스탄을 부를까요?”

“아니,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누가 싫다더냐. 안 할 거다. 구박하지 않을게야.”

할아버지에게 굳게 약속을 받았다. 물론 오빠들에게도.

아빠를 쳐다보자 “난 구박하지 않았어.” 하고 말하기에 흐음, 신음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도미니크와 함께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방으로 올라가면서 말했다.

“그런 거 하지 말아요.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저하가 부당한 일을 참는 건 싫어요.”

“부당한 일을 참은 게 아닙니다.”

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럼요?”

“영애를 향한 애정에 경의를 표한 거죠.”

“걸레질이 경의예요?”

도미니크가 희미하게 웃으며 내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가족들에게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습니까?”

“네?”

“뺨이 시릴까 바람조차 저어하고, 보는 것이 아까워 눈을 거두며, 당신 눈물 한 방울에 가슴이 저미는 사람.”

“…….”

“그렇게 귀한 당신을 맞이하는 겁니다. 걸레질쯤은 수천, 수만 번이라 해야죠.”

나는 한숨을 내쉬고 도미니크의 옷깃을 잡았다.

“할아버지에게 사과할게요. 못된 말 해서 미안하다고…….”

그가 나를 끌어안고서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아.”

계단 아래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할아버지.”

내가 중얼거리자 할아버지가 도미니크를 힐긋 쳐다보았다.

“함께 내 방으로 와라.”

그렇게 말한 그가 먼저 뒤돌아 갔고, 나와 도미니크는 서로를 쳐다봤다. 할아버지를 따라서 방에 들어갔다.

먼저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우리에게 의자를 권했다.

“…….”

“…….”

우리가 착석하자 할아버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하께선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황위를 이르십니까.”

“예.”

할아버지의 눈빛은 무겁고도 날카로웠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깊게 몸을 기대며 이어 말했다.

“저하께서 황제가 되시면 세니아나는 황후가 된다는 점을 짚어 줘야 할 만큼 미숙한 분은 아니시겠죠.”

“알고 있습니다.”

“식칼을 든 황후가 있습니까?”

“…….”

“황후가 식칼을 들어도 되는 나라가 세상에 존재합니까?”

할아버지는 도미니크를 지그시 응시하고서 다시 말했다.

“우리는 오직 막내를 곁에서 떼어 놓아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결혼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저하껜 사랑의 완성이나, 세니아나에겐 꿈과의 이별이 될 테지요.”

“저는…….”

그는 할아버지를 똑바로 보며 대답했다.

“황위를 잇지 않을 겁니다.”

“꿈꾸지 않는 자는 시체와 다름없지요. 세니아나를 위해 황위를 포기하고, 훗날 이 아이를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황제가 꿈이라 말씀드린 적 없습니다. 또한, 꿈꾸지 않는 시체가 아닙니다, 저는.”

“…….”

“영애가 제 꿈이 될 겁니다. 저는 가장 가까이에서 그녀를 지지하는 것을 욕망합니다.”

도미니크가 내 손을 잡았고, 그 모습을 본 할아버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황제 폐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나는 냉큼 주머니에 넣어 둔 서류를 내밀었다.

“폐하와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어요!”

“뭐?”

“저하를 프렌시프에 주신다고 하셨어요.”

그게 황제에게 청한 두 번째 상이었다.

할아버지는 황제가 휘갈겨 쓴 양피지를 눈으로 훑었다.

[4황자 도미니크 로젠카로튼은 짐에겐 쓸모가 없으니 프렌시프에서 주워 가도 좋다.]

할아버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보기에도 기가 막힌 글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찝찝한 표정으로 양피지를 다시 내게 내밀었다.

“폐하께서 곧 공작위를 하사하시겠군.”

“네!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저하만이 문제가 아니다. 미래를 정하지 못한 애송이에게 결혼은 무리야. 너는 앞으로의 일을 구상해 두었느냐.”

나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할아버지는 그런 날 보며 말했다.

“황후가 아니라도 공작부인이 되는 거다. 바닷가의 하얀 식당을 하는 건 무리야.”

“지금은 그렇겠지요.”

“…….”

“알아요. 저하께서 새로운 가문을 꾸리셔도 황족으로서 제국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는 걸요. 그게 황족의 소임이니까요. 소임마저 빼앗을 순 없어요.”

“하면 네가 꿈을 포기할 테냐.”

“제가 바라는 종착점 앞에 한 가지 꿈을 더 추가할 거예요.”

“뭐?”

“로열 키친의 총주방장이 되겠어요. 새로운 가문에 후계를 세우고, 안정이 되면 그 후에 마지막 꿈을 이룰 거예요.”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도미니크는 놀란 얼굴로 날 쳐다봤고, 난 히죽 웃었다.

“공작부인이라도 로열 셰프는 될 수 있겠지요?”

그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물론.”

우리는 간절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허락해 주세요…….”

내 말에 할아버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눈살을 찌푸린 채 관자놀이를 꾹, 꾹 누르던 그가 말했다.

“내가 널 어떻게 이겨.”

“그럼……! 할아버지!”

“조건이 있어.”

조건?

할아버지는 도미니크에게 말했다.

“도미니크가 공작 위를 받는 건 5년 뒤. 세니아나는 그전까지 로열 셰프가 되어야 한다.”

“말도 안 돼! 그렇게 젊은 나이에 어떻게……!”

“시끄러워. 저 녀석이 공작위를 받으면 넌 꼼짝없이 새로운 가문에 매여 있어야 해. 그때까지 로열 셰프가 되지 못하면 물 건너간 게야!”

나는 울상을 지었고, 할아버지는 도미니크에게 말했다.

“그리고 세니아나의 약혼자로서 프렌시프에 들어와서 일을 배워라.”

“예?”

“황자의 일과 귀족의 일이 비슷해 보여도 전혀 달라. 막내가 능력 없는 놈에게 시집가서 고생하는 꼴은 못 보지.”

“……알겠습니다.”

“내 기준에 맞지 않으면 사윗감 후보에서 영영 탈락이다.”

그렇게 말한 할아버지가 “나가 봐!” 하고 버럭 소리쳤다. 쫓겨난 나는 문밖에서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려운 조건을 내밀어서 결혼을 시키지 않을 생각이실까요…….”

내가 우울하게 중얼거리자 찻잔과 포트가 든 쟁반을 가지고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총집사가 말했다.

“그건 아닌 듯싶습니다.”

“네?”

“저하께 하대를 하시잖습니까.”

맞다, 그랬어!

‘손주사위로 인정하실 생각이 아예 없지 않으시구나.’

집사는 가볍게 묵례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문틈에서 “어르신, 우십니까?!” 하며 집사가 기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빙그레 웃고 도미니크의 손을 잡았다.

“5년 뒤에 결혼해요, 우리.”

“로열 셰프가 되실 자신 있으십니까?”

“이제부터 노력해야지요. 우와, 바빠지겠다.”

나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말했다.

“누아제가 된 사람들도 정화해야 하고, 엘트라의 사신들도 돌려보내 줘야 하고, 또 로열 셰프도 되어야 하고.”

제일 문제는 로열 셰프 경합을 하기 위한 조건인데…….

“몇십 년 이상 근무하지 않은 사람은 경합도 치를 수 없는데 그건 어쩌죠?”

“프렌시프에서 제일 잘하는 게 있지 않습니까.”

나는 “잘하는 거?” 하고 고민하다가 “아하!” 소리쳤다.

“뒷공작이요? 관례를 바꾸려면 어려울 텐데.”

“죽을힘을 다하는 건 영애의 특기잖습니까.”

“맞아요.”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서 빙그레 미소 지었다.

물론, 할아버지가 허락했다고 해서 가족들까지 쉽게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오빠들은 눈을 부릅뜨고 도미니크를 주목했다. 하지만 내 남자친구는 생각보다 더 뛰어난 인재라 실수를 하는 일은 없었다.

아빠는 이상하게 조용했다. 왜냐고 물으니 말씀하셨다.

[꿈에서 미아가 자꾸만 도미니크를 사위로 인정하라고 괴롭히는데 혹시 포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왜인지 아빤 피곤한 표정이었다.

세계는 평화로웠지만, 일상은 바쁘게 돌아갔다. 이상한 건 그게 싫지 않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바라고, 택한 삶이었으니까.

* * *

5년 후.

저택이 정신없이 분주했다.

작년부터 황도에 완전히 자리를 잡은 조부 대신 영지 관리를 맡게 된 가웨인은 마담 버지니아와 파르뎅 자작에게 붙들려 있었다.

“오늘 같은 날까지 사람을 들들 볶아야겠나.”

“재해가 날을 골라서 오는 건 아니지요. 루벨의 관할지에 해충 떼가 나타났습니다.”

“백작님, 이쪽도 확인해 주셔야 합니다.”

“아, 빌어먹을……!”

가웨인의 절규가 저택 곳곳에 퍼져 나갔다.

영지 사람들을 지나 코너를 돌면 대응접실.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은 란슬롯이 빙그레 웃으며 귀족들을 쳐다보았다.

중년의 여성과 영애, 혹은 중년의 남성과 영애.

영애, 영애, 영애.

아서의 뒤를 이어 프렌시프 후작이 된 란슬롯에겐 혼처가 밀려들었다. 그는 수줍은 얼굴로 얼굴을 붉히는 숙녀들을 둘러보다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시겠지만, 제 혼사는 막내의 의견에 달려 있어서.”

소파에 앉아 있던 영애가 번쩍 손을 들었다. 카트린 르마르였다.

“저, 저는 프렌시프 영애의 발닦개가 될 자신이……!”

“기각.”

이번만 통상 열세 번째 거절이었다.

구석에 앉아 있던 오렌지색 머리칼의 여성이 제 아버지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가야 한다고요, 나. 오늘 중요한 행사가 있다니까? 4수 만에 겨우 로열 키친에 들어갔는데 이대로 찍혔으면 좋겠어?”

으르렁거리듯 말하자 란슬롯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아는 얼굴인데.”

“저도 각하의 얼굴은 압니다. 아카데미의 기숙사를 부숴 주셔서 호텔에서 잘 묵었어요.”

“세니아나의 친구? 짜다, 뭐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스위트피요. ‘짠 것’ 과는 거리가 멀죠. 인사도 했으니 가 봐도 될까요?”

“뜻하시는 대로.”

스위트피가 드레스를 벗어 던지며 달려나가자 부친의 안색이 샛노래졌다.

응접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마릴린은 시트론을 힐끔 쳐다보았다.

“밑져야 본 전 아니에요? 고백이라도 해 보시든가요.”

“큰일 날 소리를 하시네요. ”

“소설에는 꽤 있던데요. 하녀와 공작님. 이쪽은 하녀와 후작님이지만.”

“칼립스와 잘 되고 있나요?”

시트론이 말을 돌리자 마릴린은 이를 갈았다.

“세상엔 눈길도 주지 말아야 할 부류가 셋 있다는 걸 알았죠.”

“무슨―?”

“갑주 찬 사람, 검을 배운 사람, 군인인 사람. 아무튼, 고백이라도 해 보시라니까요. 언제까지 애타하시려고요.”

“제 꿈은 아가씨 결혼하실 적에 따라가서 아가씨의 자식, 손주, 증손주까지 키우는 겁니다. 남자는 됐어요.”

그들에게 누군가 비척비척 다가왔다.

“좋은 아침…….”

마릴린과 시트론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아가씨.”

“아가씨!”

그녀들의 소리 높여 부르자 응접실 안에 있던 란슬롯과 가신들에게 붙들려 있던 가웨인이 고개를 내밀고 소리쳤다.

“잘 잤어?”

“잘 잤냐.”

세니아나가 고개를 대충 끄덕이며 하녀들을 쳐다보았다.

“어른들은?”

“큰 주인님은 낚시터에 계십니다.”

“왕 큰 주인님은?”

“후후, 어르신은 보지 못했어요.”

마릴린이 “아마 울러 가시지 않았을까요?” 중얼거리자 세니아나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또?”

나베리우스는 며칠 전부터 세니아나와 마주치기만 하면 “크흑.” 신음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오 년 전의 나를 쳐 죽이고 싶구나…….]

시름시름 앓으면서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모시러 가야겠다.”

세니아나가 졸린 눈을 꿈뻑이며 나베리우스의 서재를 찾았다. 하지만 커다란 방은 주인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여기가 아니면 어디 계시지.”

중얼거리며 방을 둘러보던 세니아나가 책상 위에서 있는 액자를 발견하고 빙그레 미소지었다.

유리에 물기가 어린 것을 보니 나베리우스가 사진을 보다가 울러 간 것이 분명해졌다. 소매로 유리를 깨끗이 닦은 세니아나가 사진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나베리우스를 찾아서 다시 문을 나서려던 그녀가 창밖 정원에서 커다란 인영을 발견했다.

“할아버지!”

창밖으로 몸을 쭉 내밀며 소리치자 나베리우스는 서둘러 눈가를 문지르며 소리쳤다.

“이 녀석, 위험해!”

“거기 계세요. 갈게요!”

세니아나는 재빨리 문을 박차고 나섰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 햇살이 쏟아졌다. 일렁이는 빛무리가 액자 틀에 닿고, 봄바람에 커튼이 휘날렸다.

창문 안으로 나베리우스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난 안 간다. 뭐가 예쁘다고 그 녀석을 보러 황궁까지 가.”

“저하를 뵈러 가는 게 아니라 제 로열 셰프 임명식을 보러 가시는 거지요. 가세요, 칠면조 찜을 해 드릴게요.”

“……칠면조 찜?”

“에이, 기분이다. 호떡도 구워 드릴게요. 세 개!”

나베리우스가 순순히 저택으로 발길을 돌리자 세니아나가 키득키득 웃었다. 멀리서 낚싯대를 든 아서가 걸어왔다.

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팔을 끌어안은 세니아나가 힘차게 저택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녀의 뒤로 반딧불 같은 빛이 모여들었다. 곧 뭉쳐져 세 개의 덩어리가 되었다. 두 개의 덩어리가 세니아나의 주머니 안에서 툭, 고개를 내민 마원을 향해 내달렸다.

남은 하나가 만개한 올포러브 꽃송이 위에서 통, 통, 튀어 오르자 마원을 향해 달려가던 하나의 빛이 회전하며 꽃송이 위의 빛을 이끌었다.

[빨리 와요, 바보 곰!]

[바보 아니다, 뭐.]

[시끄럽다.]

바람 속에 흩어져 버린 목소리를 그녀가 듣게 되는 것은 아직 먼 훗날의 일.

세니아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 좋다.”

―하고 말하면서.

<로열 셰프 영애님 본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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