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포털에서 돌아온 지 두 달이 더 지났다. 서재에 있던 나는 만년필의 끝을 문 채로 앉아 테이블을 툭, 툭, 두드렸다.
“망했다…….”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책장 앞에서 책을 고르던 란슬롯이 실소를 흘렸다.
“무엇이 우리 막내의 속을 그렇게 태울까.”
다정한 중얼거림에 이어 소파에 걸터앉아 있던 가웨인의 가벼운 이죽거림이 들려왔다.
“똥강아지 속을 태우는 게 뭐가 더 있겠어. ‘도미니크 황자님’이시지.”
나는 턱을 괸 채로 입술을 삐죽였다.
“아니에요. 최근에 두 분이 얼마나 사이가 좋으신데요.”
그렇게 말한 나는 시선을 돌렸다. 서재 테이블에서 마주 보고 앉은 할아버지와 도미니크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도미니크를 향해 팔짱을 끼고서 “황실에서 이런 것은 배우지 못한 모양입니다. 아쉽군요. 상식의 문제인데.” 하며 중얼거리던 할아버지가 흠칫했다.
나는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그렇지요?”
“……그럼.”
할아버지는 “허, 허허…… 허.” 하고 웃으며 도미니크에게 말했다.
“차차 배우시면 됩니다.”
도미니크는 표정 없는 얼굴로 날 보며 “그렇습니다.” 하고 답했다. 왜인지 그의 목소리에 피로감이 역력했다. 오빠들이 비죽비죽 입꼬리를 올리더니 날 쳐다봤다.
“그럼 뭐가 걱정인데.”
“엘트라의 사신들이요. 이제 슬슬 보내 줘야 하는데 성수 없이 그들을 옮기려면 적어도 반년이 걸리더라고요.”
로열 키친에도 복귀해야 하는 데다가 영지와 가문 재건으로 정신이 없는데 육 개월이나 자리를 비울 수 있을까.
란슬롯이 내 등 뒤에서 얼굴을 내밀어 양피지를 확인했다.
“포털을 오십 회가량 열어야 하는군.”
나는 펜 끝을 잘근 씹으며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최소한으로 잡은 거예요.”
이제는 황도까지 이동할 때조차 ‘함께 이동할 사람이나 짐의 합이 5톤을 넘는 경우’엔 두 번에 나누어 이동했다. 거기다 영지에서 황도까지가 한계. 더 멀리 이동하려면 여지없이 몇 번에 나누어 이동해야 한다. 그렇게 이동한 후에는 과로로 하루를 꼬박 앓았다.
그런데 지금은 서른 명이 넘는 사신들과 그들의 짐, 프렌시프의 호위 기사들, 황군이며 제국의 사신까지 이동시켜야 했다.
‘난 죽었다.’
성수가 없어지니 거대 여객선에서 조그만 헬리콥터로 격하된 기분이었다. 주변에서 내가 대단하고 특별하다고 할 땐 그런가 싶었는데, 성수가 없어지고 나니 알겠다.
“나 옛날엔 엄청 대단했던 거구나…….”
내가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리자 서재에 함께 있던 가족들과 도미니크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한 것을. 너만 한 성녀는 역사상 처음이라니까?”
가웨인의 말에 란슬롯과 할아버지가 차례로 말했다.
“이동할 수 있는 무게와 거리에 제한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으니.”
“그렇게 옮기고도 너는 몇 시간 앓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비에르의 성녀는 최대로 포털을 열고 나면 일주일은 아예 포털 개방도 불가하다고 했지.”
새삼 대단하게 느껴져서 내가 눈을 크게 뜨자 도미니크가 말했다.
“그 힘의 가치를 모르는 건 영애뿐이었죠.”
“이럴 땐 과거의 능력이 더 아쉬워져요. 성수들도 너무너무 보고 싶고.”
나는 포털 안에서 엄마와 함께 고르고 골라 온 원석 세 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서 다시 만나고 싶어.’
금방이라도 테디가 ‘누나!’ 하면서 튀어나올 것 같고. 쵸가 테디의 뒤에서 ‘주인님을 귀찮게 하지 마체요, 바보곰!’ 핀잔을 주고. 멀린이 그런 둘을 보며 한숨을 내쉴 것 같은데.
기분이 가라앉을 것 같아서 억지로 고개를 붕붕 돌렸다. 그러자 턱을 괴고 있던 가웨인이 쿡쿡 웃으며 내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씩씩하네.”
“제 장점이죠.”
내가 으스대듯 말하자 가족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쯤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시계를 확인한 도미니크가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할아버지와 오빠들이 테이블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도미니크를 배웅했고, 나는 그를 따라 서재를 나섰다. 그와 나란히 걸어가던 난 눈을 끔뻑였다.
어째 분위기가 이상한걸.
‘어쩐지 어색한 이 기분은…….’
나는 도미니크의 옷깃을 조금 끌어당기며 말했다.
“자기, 화났어요?”
“아닙니다.”
도미니크의 대답을 들은 난 걸음을 우뚝 멈추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두 달간 우리는 평범한 연인들처럼 꽁냥꽁냥하기도 하고 대판 싸우기도 했다. 그러며 몇 가지 약속이 생겼다.
1. 서로 기분이 저조할 땐 미운 말이 나올 수 있으니 다정한 호칭으로 불러 주기.
2. 아무리 화가 나도 연락을 무시하지 말기.
―등등.
2번은 내게만 해당하는 것이긴 하지만.
도미니크는 아무리 화가 나도 연락을 무시하는 법이 없었다. 내 시선을 느낀 그가 “……자기.”하고 덧붙였다.
“왜요, 뭔데요? 응?”
“…….”
더 잘 들으려고 발돋움해 그의 입가에 내 귀를 바짝 대자 그는 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화가 난 건 아닙니다.”
“그럼 왜 기분이 안 좋지요?”
“……환멸을 느껴서.”
그의 대답을 들은 난 눈을 끔뻑이다가 헉, 하고 굳어졌다.
그냥 화가 난 게 아니라, 그렇게까지 분노한 거야?
* * *
알베르는 환궁 후 내내 기분이 저조한 도미니크를 보고 소리 없이 투덜거렸다.
‘또 뭐. 왜.’
물으려니 귀찮고, 묻지 않으려니 하루 종일 그의 눈치를 보게 될 제 신세가 가련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에 집중하려고 해도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커다란 창가에 앉아 손안에서 주사위를 굴리던 도미니크의 시선이 느릿하게 알베르에게 향했다.
순간 시중을 들던 시녀들 중 하나가 숨을 삼켰다. 날렵한 몸 선을 따라 부서지는 햇빛, 해 그늘에 짙게 가려진 얼굴은 빚은 듯이 단정했다. 다른 시중인들의 눈총을 받은 시녀는 아차 싶어 손끝으로 입술을 꾹 눌렀다.
알베르가 가볍게 혀를 차며 눈짓하자 시중인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테이블 끄트머리를 엄지로 훑던 도미니크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속이 좁은 편이던가.”
“예?”
“남매가 원래 그렇게 들러붙나. 내가 누이가 없어서 모르는 것이냐?”
“……또 들러붙었습니까?”
“한 놈은 등 뒤에서 끌어안다시피 하고, 한 놈은 빵 반죽이라도 되는 양 레이디의 얼굴을 주물럭거리더군. 보란 듯이.”
작은놈 쪽은 몰라도 큰놈 쪽은 확신범이다. 교활한 프렌시프의 장자. 도미니크의 잇새에서 으득, 마찰음이 새어 나왔다.
“프렌시프 남매들이 유난히 우애 깊은 편이긴 하죠.”
“왜.”
“그야 피가 섞인―”
“반밖에 섞이지 않았잖아.”
“확실히 속이 좁으신 편인 것 같―”
도미니크의 얼굴이 구겨지자 알베르가 황급히 덧붙였다.
“―지는 않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속에 없는 아부는 신뢰를 깎아 먹지.”
도미니크의 말에 알베르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그럼 뭐 어쩌라고!’
붉으락푸르락한 부관의 얼굴을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던 도미니크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속이 좁은 것은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다. 그런 스스로에게 환멸이 느껴질 만큼.
세니아나와 관련되면 자신을 다잡기 힘들었다. 곁에 있는 게 그녀의 피붙이든, 제 피붙이든 꼴 보기 싫었다. 그중에서 제일 거슬리는 건…….
마침 함께 입궁한 세니아나가 제 이모인 가브리엘라 황비와 대화를 마쳤는지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사내 하나가 달려와 무어라 말하기 시작했다.
“센!”
“아, 왕자님. 강녕하셨어요?”
“아―니. 네가 없는 황궁은 지겨운 곳이야.”
입 모양으로 대화를 추측한 도미니크가 몸을 일으켰다.
엘트라의 왕자. 허구한 날 질리지도 않고 추파를 던지는 저 새끼. 저 새끼가 제일 꼴 보기 싫었다.
* * *
나는 트리스탄을 보며 킥킥 웃었다. 어쩜 이렇게 붙임성이 좋을까.
‘부러워라.’
“황궁에 또래가 있잖아요. 황태자 전하도 계시고, 도미니크 황자님이랑 또 미카엘 황…… 아니, 카렌듈라 경이요.”
“하지만 난 네가 제일 좋은걸. 그리고 그들은―”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재수 없어.”
“아이고!”
나는 누가 들었을까 봐 깜짝 놀라서 주위를 살폈다.
“그런 말 하시면 못써요. 여기는 길라게온 황궁이라고요?”
그러자 트리스탄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센은 내가 어려 보이나 봐.”
“어리지요. 아직 성인이 아니신데.”
길라게온 기준이긴 하지만.
내 말에 트리스탄은 “흐음.” 신음하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러고 보니 키가 또 자라셨네요. 성장기라 그런가.”
볼 때마다 자라서 놀랍다. 처음엔 나보다 약간 큰, 아름다운 공주님 같았는데 이젠 꽤 많이 큰 데다가 다부져져서 누가 봐도 청년의 모습이었다.
“더 잘생겨졌고.”
트리스탄이 씩 웃으며 덧붙였다.
‘우와, 신기해.’
충분히 능글맞아 보일 수 있는 대답인데 상큼해 보이다니. 나는 졌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님은 항상 잘생기셨지요.”
“그렇지? 나 잘생겼어. 그러니까…….”
트리스탄이 무어라 말하려고 하던 찰나였다.
“짐의 꿀단지가 여기에 있었구나.”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귀족들과 함께 정원을 가로질러 오던 황제가 보였다.
“황가에 광영을. 프렌시프의 딸이 폐하를 뵙습니다.”
치마 끝을 잡고 무릎을 가볍게 굽히자 황제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다시 입을 연다.
“보기 힘든 얼굴들이 여기 다 모여 있었군.”
여기?
나는 황제의 눈길이 향하는 곳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언뜻 화단 뒤로 삐죽 솟은 정수리 몇이 보인다. 흰머리, 그리고 흰머리, 또 흰머리.
엘트라 사람들의 특징인 백발을 보며 나는 눈을 끔뻑였다. 왜 여기에 다 숨어 있담.
숨어 있던 사람들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트리스탄의 시종들과 부관, 그들 중엔 나이 지긋한 엘트라의 사신도 있었다.
“노공(老公)들이 고생이 많―으십니다.”
황제와 함께 온 샤르파크 후작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말투는 좀 빈정거리는 것 같은데.’
내가 인사를 받은 엘트라의 사신들을 쳐다보자 그들 또한 인자하게 대꾸했다.
“산책이 고생 축에야 들겠습니까. 정말 고생은 ‘홀로’ 나라를 지킨 여신의 권속이 하셨죠.”
다행이다. 기분이 상하지 않았나 봐.
사신의 말에 제국의 귀족 중 하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하늘이 굽어살피시어 영애를 ‘이 땅’에 내려 주셨으니 제국의 홍복입니다.”
“어찌 ‘이 땅’만을 위해 하늘이 권속을 내렸겠습니까. 여신의 권속은 앞으로도 인계를 위해 할 일이 많습니다. ‘제대로 된 곳’에서 모실 수 있다면 하늘과 권속에게 얼마나마 보답할 수 있을 텐데요.”
“예. ‘이 땅’에서 말이죠.”
“글쎄요. 있을 곳을 택하는 건 권속이 아닐까요.”
눈썹이 꿈틀거리던 제국의 귀족 중 하나가 더 환히 웃으며 엘트라 사람들의 뒤편을 바라보았다.
“저하!”
어느새 정원으로 온 도미니크가 나를 흘깃 보다가 황제에게 머리를 숙였다.
“부황을 뵙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고, 제국의 귀족들은 왜인지 기세등등해져서 말했다.
“이리 두 분을 함께 뵈니 장관이 따로 없습니다.”
“사이가 다정하시니!”
“예, 생사고락을 함께한! 신화 속 괴물들도 갈라놓지 못한 정!”
“영애를 ‘황자비’라 칭하게 될 날도 머지않겠군요!”
왠지 여기 좀 불편해…….
나는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폐하, 저는, 으음, 그러니까 일이…… 아! 로열 키친에 볼 일이 있어서!”
내가 다급히 변명을 생각하니 황제는 엄청나게 다정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짐의 꿀단지는 성실하기도 하지.”
“꿀단…… 예…….”
내가 어색하게 고개를 수그리자 황제가 “오냐, 가 봐라.” 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난 도미니크의 옷깃을 남모르게 끌어당기는 것으로 인사하고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부, 부담스러워.’
삿된 자들을 포털에 가두고 돌아온 뒤, 이렇듯 부담스러운 일이 많아졌다. 황제의 행동은 물론이고, 나를 대하는 한 명 한 명의 제국민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정원을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는데 나를 향해 풍채 좋은 사내가 뒤뚱뒤뚱 뛰어왔다.
“여, 여, 영애!”
멀리서부터 뛰어왔는지 숨이 무척이나 거칠었다.
“아, 카델트랑 백작님.”
새로 금좌 11석이 된 사내라 기억에 있었다. 내가 고개를 약간 수그리자 그는 무언가를 찾듯 상의를 마구 더듬더니 함께 뛰어온 시중인에게 말했다.
“조, 조, 종이를……!”
시중인이 양피지와 펜을 건네자 백작은 얼른 그것을 채서 내게 내밀었다.
“패, 패, 팬입니다!”
“예?”
내가 당황해서 “백…… 작님이요?” 하고 조그맣게 물으니 그는 허둥지둥거리며 말했다.
“제, 제가 아니라, 저는 아니고, 그러니까…… 아, 자식이!”
“백작님은 아직 미취하셨다고 들었는데…….”
“형제가……!”
“외동이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게…… 그게…… 아! 배다른 형제가!”
배다른 형제가 있었어? 귀족들의 사생활은 참 문란하구나.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종이를 잡았다. 큼직하게 이름을 써서 주자 얼굴이 환해진 그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고 떠났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황궁뿐 아니라 상점가를 걸을 때, 하다못해 우리 집에서 산책을 할 때조차 물건을 내밀고 서명을 해달라며 얼굴을 붉혔다.
삿된 자를 물리친 것으로 영웅이 되었다더니 이들은 나를 ‘아X언맨’이나 ‘엑X맨’쯤으로 보는 듯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걷다가 마차 대기소 부근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곤 단숨에 표정이 밝아졌다.
“아빠!”
내가 마구 뛰어가자 아빠는 픽 웃곤 팔을 벌렸다. 품에 뛰어들어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니 아빠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회의는 잘하셨어요?”
“그래. 우리 딸은 무슨 일로 황궁에 왔지?”
“엘트라 사신들을 돌려보내야 하잖아요. 일정을 가늠했더니 무려 반년이나 걸려서 폐하와 상의하러 왔어요.”
“그건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아빠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아빠가 마부를 대신해 마차의 문을 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를 대신해 엘트라 사신들을 돌려보낼 사람이 올 거니까.”
“제국에 포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잖아요?”
“멀리 타 대륙엔 있지.”
아, 그러고 보니 이 대륙엔 나 혼자뿐이고 대륙 너머엔 다른 성녀가 두 명 더 있다고 했다. 한 사람은 90세가 넘는 노인이라 병환 중이라고 들었으니 남은 사람은…….
“람시스 대륙의 성녀요? 제 또래라던!”
“그래.”
“언제요?”
“곧 일정을 조율해 입국한다더군.”
벌써? 원래 얘기가 되어 있던 걸까.
“누굴까……. 기대되네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 *
범선이 항구에 다다랐다. 얼마쯤 소란스럽던 배 위에서 목재 계단이 내려지고, 가장 먼저 내린 사람은 중년의 귀부인이었다. 뒤이어 항구에 발을 디딘 숙녀가 귀부인에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여기가 길라게온이군요, 어머니.”
“그래.”
길라게온. 입안에서 단어를 굴리던 귀부인이 느른히 항구를 둘러보았다. 다시 왔다. 지긋지긋하기만 했던 이곳에 또다시.
제 어머니를 따라 항구를 둘러보던 숙녀가 빙그레 웃었다.
“이곳이 ‘오빠’의 나라…….”
―하고 말하며.
* * *
마차는 빠르게 달려 저택에 다다랐다. 아빠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풀썩 뛰어내린 나는 문득 위화감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할아버지와 가신들이 없잖아?’
프렌시프의 사람들은 내가 황궁에 가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도미니크와 공공연한 연인이 된 후, 황족들이 결혼을 종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황비, 황자비, 부마 등 황족의 반려로서 로젠카로튼(길라게온 황가의 성)이 되는 사람은 친정 일에 관여할 수 없으며, 모든 일에 황가의 규율을 우선한다.
즉, 내가 도미니크와 결혼하면 프렌시프는 포털이 필요할 때마다 황제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문화된 법규이고, 황후나 황비는 알음알음 친정 일에 관여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황실에서 물고 늘어지면 이만큼 골치 아픈 게 따로 없었다.
그 때문에 가신들은 내가 황궁에 다녀올 때마다 전전긍긍했는데 오늘은 웬일로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볼 때, 란슬롯과 가웨인이 다가왔다.
“모두 대회의장에 모였습니다.”
란슬롯이 굳은 얼굴로 말하자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확실히 이상하다.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저택에 들어가는 란슬롯과 아빠를 바라보다가 가웨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 있는 거지요?”
“아무래도?”
“무슨 일인데요.”
“글쎄.”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이어 말했다.
“내가 아는 건 버지니아 공과 파르뎅 공까지 터미널을 통해 올라왔다는 것뿐이야.”
터미널이라면 아탈란이 동부에 숨겨 놓았던 포털의 일종이었다. 전쟁 후 할아버지는 마탑에 투자해 민간인이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발했다. 하지만 아직 불안정하여 사용자는 극히 드물었다.
‘영지의 주축인 두 사람이 터미널까지 이용해서 올라올 정도의 일이라고?’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가웨인이 내 이마를 엄지로 꾹 눌렀다.
“걱정이 너무 많은 것도 병이다, 너.”
입술을 삐죽하며 “알아요…….” 중얼거렸다. 마침 영지군의 우두머리 고레일과 프렌시프 황도군의 대장인 빅터가 그를 찾았고, 가웨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힐끗 돌아보았다.
“네 방에 너 좋아하는 거 가져다 놨어.”
그렇게 말한 그가 떠나고, 나는 방으로 올라갔다.
“진짜…….”
나는 가웨인이 내 방 티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인형 놀이 세트를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몇 달 전만 해도 나를 꽃돼지라고 놀리던 가웨인은 할아버지와 마담 버지니아에게 혼쭐이 난 후, 장난의 방식을 바꾸었다. 어린애라고 놀리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구했담.’
테이블 하나를 통째로 차지한 거대한 인형의 집. 무겁기는 또 얼마나 무거운지 마릴린과 시트론, 두 사람이 낑낑거리며 세트를 붙들었다.
“어머.”
인형의 집을 정리하던 마릴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가 해서 그녀들과 함께 안을 들여다보니 내부에 예쁜 컵케이크와 수국 한 다발이 있었다.
“이게 진짜 선물인가 봐요, 아가씨.”
시트론이 컵케이크와 꽃다발을 꺼내 내게 들려 주었다. 나는 웃으며 꽃다발을 매만졌다.
“이렇게 보면 작은 도련님도 큰 도련님만큼이나 로맨틱하시죠?”
그러고 보니 가웨인에겐 철마다 꽃을 받는 것 같았다. 게다가 어딜 다녀올 땐 그 지방에서 유명한 디저트를 사다 주고, 지나가는 말로 무엇이 예쁘다거나 가지고 싶다고 하면 다음 날 내 침대 맡에 꼭 그것을 놓아두었다.
“이런 것을 보면 가웨인 도련님께서 인기가 많은 것도 이해가 간다니까요.”
마릴린이 팔짱을 끼며 주억거려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그럼요. 차가운 외모나 거친 성격 탓에 다가오는 사람이 적을 뿐이지 숨은 추종자가 얼마나 많다고요. 특히…….”
마릴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거렸다.
“아가씨를 대하는 도련님의 태도를 보고 홀딱 빠진 분이 꽤 많으시답니다.”
그녀는 가웨인의 추종자로 유명하다는 레이디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크로커스 영애, 티에거 양. 그리고 라지엥 영애도 은근히…….”
라지엥 영애라고?
“크리스틴 말이야?!”
내가 깜짝 놀라서 소리치자 마릴린이 짐짓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허탈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크리스틴이라면 나를 엄청나게 싫어하잖아?”
로웨나 황비의 말벗 사건으로 엮인 뒤로 쭉 나를 깎아내리고 싶어서 안달을 했는데.
“외모를 보고 빠진 건가?”
가웨인이 외모만큼은 발군이긴 하니까. 그러자 마릴린은 “음, 음.” 하며 집게손가락을 흔들었다.
“세상 차갑고 거친 야생마가 내게만 다정하다―가 포인트라고요.”
몽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마릴린은 다시 날 보고서 흐뭇하게 웃었다.
“하기야 하나 있는 동생이니 얼마나 사랑스러울까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가웨인이 사 온 컵케이크를 쥐었다.
컵케익은 예쁘기만 한 게 아니었다. 크림과 빵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도록 크게 입을 벌려 한입 베어 물자 그윽한 버터크림이 구름처럼 둥실 혓바닥에 내려앉았다. 빵은 또 얼마나 촉촉하고 부드러운지 중앙에 든 살구 잼과 너무너무 잘 어울렸다.
제도에 이렇게 맛있는 컵케이크를 만드는 곳이 있었나?
‘직접 사 온 걸까.’
가웨인에게 고마워져서 나는 헤헤 웃으며 컵케이크를 하나 더 집었다.
그 시각 프렌시프의 대회의장. 초조한 기색으로 서류의 내용을 훑던 마담 버지니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가씨를 대신해 엘트라의 사신들을 귀국시킨다는 게 말이 됩니까? 흉계가 있지 않고서야 헨델에서 우리만 좋은 일을 할 리가요.”
그러자 반대편에 자리한 다른 가신이 대꾸했다.
“명분은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헨델이 제국에 보내온 친서엔 ‘저희의 성녀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성녀인 세니아나에게 경험을 나누어 받기를 원하며, 아울러 프렌시프에서 터미널 개발의 지식을 사사하고 싶다’는 요지가 더없이 정중하게 적혀 있었다.
대신에 헨델의 성녀는 수련을 겸해 엘트라의 사신들을 귀국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제국으로선 나라에 하나뿐인 성녀 세니아나를 국외로 내보내고 싶지 않은 데다, 황실에선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었으므로 수락한 것이다.
버지니아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대답했다.
“속내가 훤하지 않습니까. 아가씨가 아탈란 사건으로 성수를 잃은 것을 알고 저희들 성녀의 힘을 과시하려는 겁니다.”
“…….”
“무엇보다 성녀의 보호자로 동행한 사람이 ‘그분’이십니―”
마담 버지니아와는 상극인 푸아티에 자작이 입을 열었다.
“굳이 득실을 따지자면, 그분이라는 것이 우리에겐 좋은 일이죠. 헨델의 공주이자 성녀의 친모인 네메시스 님은―”
푸아티에 자작의 시선이 아서에게 향했다.
“가웨인 님의 모친이 아니십니까.”
아서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자 자작이 다시 말했다.
“네메시스 님이 성녀의 부친인 러스허 공과 사별하신 지 4년. 이 시기에 헨델의 왕이 그녀를 길라게온에 보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
“잘만 하면 프렌시프에 두 명의 성녀가 생기는 거예요. 우리로선 나쁘지 않은 일이지요.”
마담 버지니아의 얼굴이 흉흉하게 일그러졌다.
“자작은 말을 가리시오.”
“공이야말로 이성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아가씨께서 성수를 부리며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당시, 우리의 위세가 어떠했습니까.”
황실에서조차 프렌시프의 문장 앞엔 한 수 접어 줄 정도였다. 지금이야 온 백성의 영웅이 되어 그 시절의 위세를 유지해 오고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흐려질 터였다. 하지만 가문에 성녀가 둘이라면…….
자작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두 분 도련님과 아가씨께도 좋은 일이 아닙니까. 새로운 형제가 생기는 일이니.”
“헨델 국에서 네메시스 님을 이용해 무슨 수작을 부릴지 훤하지 않소.”
마담 버지니아의 말에 푸아티에 자작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좌우지간에 황명입니다. 이미 성녀와 네메시스 님은 입국하셨고, 우리로선 그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마담 버지니아가 끙, 신음하며 팔짱을 끼었다.
* * *
“아가씨!”
영지에 있는 아곤에게 편지를 쓰고 있던 나는 마릴린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응?”
“저택에 손님이 오는데, 새로운 성녀, 헨델……!”
마릴린은 잔뜩 흥분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쏟아 냈다.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봐. 저택에 손님이 온다고?”
“네, 헨델의 성녀님이 프렌시프 저택에서 묵으실 거래요!”
왜 황궁이 아니라 우리 저택에?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녀는 두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성녀님의 친모가 네메시스 님이시래요. 가웨인 님의 친모 말이에요!”
“뭐?”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왜 갑자기…… 아니, 무슨 일로…….”
“그야 다시 주인님과 잘해 볼 생각이겠지요.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작은 도련님을 그리 무정하게 버리고 가셔 놓고서 필요에 따라 다시……!”
‘오빠…….’
나는 양손을 불끈 쥔 마릴린을 붙잡고 물었다.
“자세히 말해 봐. 언제 오신다는 건데!”
“지금이요.”
“뭐?”
“현관에 계세요. 성녀와 함께.”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나는 후다닥 1층으로 내려갔다. 현관 앞엔 가신들과 고용인들이 빼곡히 모여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헤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열린 문 앞에 호화로운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중년의 부인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엔,
‘가웨인…….’
그가 굳은 얼굴로 제 모친을 바라보았다. 가웨인을 힐끔 쳐다본 네메시스 님은 할아버지와 아빠에게 말했다.
“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외양만큼이나 아름다운 목소리다.
‘우와……. 가웨인과 닮았어.’
가웨인은 할아버지를 쏙 뺐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콧대며 입매가 엄청 닮았다. 아빠는 땅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못하는 가웨인을 살짝 밀어내고서 네메시스 님에게 다가갔다.
“준비할 틈도 없이 오셨습니까.”
“이 아이 덕이지요.”
네메시스 님이 제 곁에 찰싹 달라붙은 숙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자 작은 숙녀가 배시시 웃었다.
‘아…….’
네메시스 님과 달리 가웨인과 하나도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웃는 모습이 판에 찍어 낸 듯이 똑같다.
“길라게온에서 길을 열어 보고 싶어서요.”
그녀가 발랄하게 말하자 네메시스 님이 다시 아빠에게 말했다.
“언질을 드릴 것을 그랬습니다.”
“포털을 열기 전에 그리 생각하셨다면 이렇듯 당황스럽진 않았을 텐데요.”
“송구합니다. 얼마나 당황스러우시면 타국의 사절단을 이처럼 현관에 세워 두기만 하실까요.”
두 사람 사이에 스파크가 튀는 것 같았다. 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푸아티에 자작이 허허 웃으며 아빠에게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 나누시는 게 어떠신지요. 성녀님께서도 ‘남매’간에 나눌 말씀이 있으실 테고…….”
그가 은근한 눈빛으로 가웨인을 쳐다보았다. 아빠는 먼저 응접실을 향해 걸어갔고, 네메시스 님과 헨델의 사절단이 그 뒤를 따랐다. 현관엔 나와 란슬롯, 가웨인, 그리고 헨델의 성녀만이 남았다.
헨델의 성녀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저택을 둘러보더니 곧 가웨인 앞으로 바짝 다가가서 얼굴을 쑥 내밀었다. 그러자 가웨인이 흠칫해서 한걸음 물러났다.
“안녕?”
“…….”
“나는 발렌이야.”
가웨인이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부루퉁 입술을 내밀며 종알거렸다.
“같이 안녕, 해 줘야지.”
“…….”
“우와, 무뚝뚝해.”
발렌은 팔짱을 끼더니 “흐으음.” 신음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하다. 프렌시프의 공자는 꿀처럼 달콤하고 상냥하댔는데.”
그건 란슬롯일 텐데…….
내가 란슬롯을 힐끔 쳐다보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발렌에게 다가갔다.
“헨델의 보배를 뵙습니다. 란슬롯 프렌시프입니다.”
란슬롯이 정중히 허리를 숙이자 발렌은 익숙한 듯 손을 내밀었다. 란슬롯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발렌은 씩 웃고 “달콤한 건 이쪽이었구나.” 하며 중얼거렸다.
“프렌시프 백작이지?”
“예.”
“백작에게 이름을 허락할게. 레니라고 불러도 좋아.”
“영광입니다, 영애님.”
그녀가 우후훗, 웃고는 가웨인과 란슬롯의 사이에서 두 남자의 팔짱을 끼었다.
“길라게온에는 ‘오빠’라는 말이 있다지? 나 불러 보고 싶었어. 그래도 되지? 가웨인 오빠의 방으로 가자. 구경시켜 줘. 그리고 저녁을 함께 먹고 또…… 아, 그렇지. 거기 너.”
발렌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 짐은 가웨인 오빠의 옆방으로 옮겨.”
하녀를 대하는 태도였다. 그러자 가웨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발렌의 손에서 제 팔을 빼냈다.
“이 아이는 하녀가 아닙니다.”
가웨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발렌이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설마 세니아나 프렌시프가 너야?”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뭐야. 그 프렌시프의 딸이라기에 엄청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나를 보고 볼을 부풀린 발렌이 피시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가웨인이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무례하십니다.”
발렌은 깜짝 놀라서 검지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내가? 왜?”
“남의 외모를 품평하는 게 옳은 일입니까?”
눈을 도르륵 굴리던 발렌이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날 쳐다봤다.
“네가 너무 프렌시프 사람들이랑 달라서 놀랐어. 발렌은 세상에서 제일 귀한 몸이라 왕궁에서만 지냈거든. 그래서 가끔 실수할 때가 있대. 내가 사과할게?”
사과라는데 하나도 미안해 보이지 않았다.
“이제 가자. 나,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프단 말이야.”
그러곤 가웨인과 란슬롯을 재빨리 끌고 가 버렸다. 현관에 덩그러니 남은 내 뒤로 마릴린의 울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싸가지!”
시트론이 얼른 마릴린을 단속했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요.”
“하지만……!”
분한 듯 바르르 떨던 마릴린은 내 눈치를 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비겁해요. 작은 도련님의 혈육인 데다가 타국의 왕족이니 이쪽에선 대응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멋대로 굴잖아요.”
“잘 아시네요. 아가씨의 전속 하녀인 마릴린 님이 분란을 만들면 아가씨만 곤란해지실 거예요.”
하지만 시트론도 기분이 상했는지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그녀가 다른 하인들에게 발렌의 짐을 챙기라 이르곤 내게 다가왔다.
“헨델의 성녀는 곧 돌아갈 테니 지금은…….”
“…….”
“아가씨?”
혼자서 생각에 잠긴 날 보고 시트론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속상하신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중얼거리며 헨델의 성녀가 지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언젠가 겪어 본 것 같은 익숙한 위화감이.
* * *
저택에 짐을 풀고 짧은 휴식을 가진 헨델 사절단은 우리 가족과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빠른 사절단의 도착에 황궁에선 작은 소란이 있었다. 하지만 로웨나 황비의 세심한 지휘 덕에 곧 수습이 되었다.
해 질 무렵 만찬장에 불이 켜졌다. 그리고 로열 키친에서 마련한 음식이 거대한 테이블을 빼곡하게 채웠다. 황태자와 도미니크를 포함한 황족 전원의 환대를 받은 헨델의 사절단은 정중하게 감사의 뜻을 비쳤다. 순조로웠다. 여기까지는.
식사를 시작하고 가벼운 대화가 오갔다. 폐위된 황후를 대신해 내궁의 전권을 위임받은 로웨나 황비가 발렌에게 음식을 권했다.
“길라게온의 전통 음식이랍니다. 어떤가요?”
발렌은 순무와 비트를 넣어 진하게 끓인 수프를 맛보더니 곧 미간을 찌푸렸다.
“으…….”
만찬 테이블에 자리한 사람들이 눈을 홉떴다. 발렌의 솔직한 소감에 길라게온 사람들이며 헨델의 사절단까지 모두 당황했다. 네메시스 님이 조용히 “발렌.” 하고 부르며 다그쳤으나 발렌은 “하지만 정말로…….” 하며 인상을 썼다.
로웨나 황비의 입꼬리가 잠시 떨렸다. 그렇지만 그녀는 내궁의 주인답게 침착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람시스 대륙인에겐 생소한 맛이겠지요. 귀인들께서 조금만 침착한 입국을 하셨더라면 더 좋은 맛을 선보였을 텐데 아쉽습니다.”
조용히 로웨나 황비의 말을 듣던 나는 속으로 ‘아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알아. 저건 최근에 란슬롯에게 배운 거야.’
우아한 돌려 까기라는 것! 그러니까 황비의 말은 ‘너희가 너무 빨리 와서 준비할 시간도 없었잖아. 이쪽에서 엄청 당황스러운 거 알지?’라는 뜻일 터다.
발렌의 순진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눈치 주시는 거예요?”
회장은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황후와 내궁 전쟁을 벌인 말싸움 백 단의 고수 로웨나 황비가 미소를 잊을 만큼.
황비는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리가요.”
“하지만 방금 황비님께서 저희가 침착하게 오지 않았다고 하셨잖아요?”
“시간을 주셨다면 성녀의 마음에 드는 대접을 하지 않았을까 싶었을 뿐이랍니다.”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닌데요?”
발렌이 배시시 웃자 황비는 표정 관리를 잊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우와…….’
황비의 면이 면전에서 구겨지자 벽가에 서 있던 황비의 말벗들 또한 표정을 수습하지 못했다. 다시 말하지만, 만찬은 순조로운 편이었다. 발렌이 폭탄을 터뜨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로웨나 황비는 만찬이 끝나자마자 몸살이 났다는 핑계로 아발론(황제의 궁)을 떠났다. 나는 발렌의 무리가 황제, 그리고 엘트라의 사신들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로웨나 황비에게 붙들려 말 상대를 해야 했다. 그것도 장장 두 시간이나.
나는 황태자가 도착한 후에야 겨우 그녀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도미니크에게 가기 위해 궁을 벗어나고 있는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가 막혀!”
말벗들의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화가 단단히 난 건 로웨나 황비만이 아닌 듯했다. 말벗들은 복도 끝에서 동그랗게 모여 분을 터뜨렸다.
“아무리 머리가 꽃밭이라도 그렇지.”
“꽃밭은요. 순진한 척 망신을 준 게 아니면 뭐겠어요.”
“남부와 서부의 황비 후보들이 있는 앞에서 로웨나 황비님의 체면이 완전히 구겨졌어요.”
“모욕이에요. 제국을 향한 모욕!”
어린 레이디들이 파르르 떨며 분통을 터뜨렸다. 말벗들의 리더 격인 엘리자베스와 크리스틴, 루나는 묘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다만, 모두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도 험악한 분위기라 나는 그쪽으로 차마 가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어쩌지. 돌아서 갈까.
‘하지만 도미니크의 궁에 가려면 여기를 지나야…….’
고민하고 있는데 말벗 중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 손짓했다.
“프렌시프 양.”
“어머나.”
말벗들은 표정이 밝아져서 나를 향해 다가왔다.
“오랜만에 뵈어요. 잘 지내셨어요?”
“오늘도 날씨가 좋지요.”
영애들의 표정에 미소가 피어났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들에게 인사했다. 황후가 폐위되고, 남부의 코트니 황비가 아탈란 사건에 엮여 축출되면서 말벗은 내게 호감이 있는 사람들만 남은 편이었는데, 근래엔 더욱더 호의적으로 대했다. 이들 역시 나를 아X언맨으로 여기는 듯했다.
“아직 저희가 어색하신가요?”
엘리자베스의 낮고 그윽한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나는 볼을 발그레 물들이고 조그맣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조, 좋아요…….”
이 세계에 온 후 내게도 스위트피라는 좋은 친구와 친근한 아카데미 동기들이 생기긴 했다. 하지만, 아직 또래와의 만남이 익숙하진 않았다. 말벗들이 까르르 웃었다.
“평소엔 이러시니, 그토록 용감하게 삿된 자들을 몰아낸 분이 맞나 싶다니까요.”
“사랑스러워라.”
엘리자베스는 다정히 웃으며 내 손이며 어깨를 잡은 말벗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영애를 너무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속도가 있답니다.”
“네, 영애.”
나는 손가락을 꼬물꼬물 얽으며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았다.
‘멋져…….’
엘리자베스는 부드러운 위엄까지 있는 좋은 사람이다.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제 뺨을 매만지며 “뭐가 묻었나요?” 하고 물었다.
“오늘도 멋지셔서…….”
엘리자베스가 쿡쿡 웃자 다른 영애들이 짓궂게 말했다.
“프렌시프 양은 엘리자베스 님만 좋아한다니까요. 서운해요.”
나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모두 멋진 분들이신걸요. 반짝반짝하고, 좋은 냄새가 나고 또…….”
내가 헤롱헤롱해서 말하니 말벗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폐하께서 영애에게 짓궂으신지 알 것 같죠?”
“맞아요.”
우리는 화기애애하게 한담을 나누었다.
‘멋지다. 즐거워!’
아카데미 때의 경험 외엔 또래 여자아이들과 어울릴 기회가 없던 나는 크게 들떴다. 그때 코너를 넘어 발소리가 들리더니 발렌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아, 여기 있었네.”
어린 레이디들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굳어지자 엘리자베스가 눈짓으로 눈치를 주곤 앞으로 나섰다.
“엘리자베스 루에브입니다. 성녀님을 뵙습니다.”
“성녀님을 뵙습니다.”
“성녀님을 뵙습니다.”
영애들이 치맛자락을 쥐곤 무릎을 가볍게 굽혔다. 발렌은 그녀들을 흘깃 쳐다볼 뿐, 인사를 받지 않고 나를 붙잡았다.
“있지. 오빠는 어디에 있어? 찾아 줘.”
“예?”
“가웨인 오빠 말이야. 또 사라졌어. 정말…….”
발렌은 투덜거리며 머리칼을 넘겼다. 적보라 빛깔의 눈부신 머리카락이 가는 손가락에 걸렸다가 스르륵 빠져나갔다. 기다란 눈매가 좁아지며 콧잔등에 가느다랗게 잡히는 주름이 놀라울 만큼 가웨인과 비슷했다.
“가자니까.”
“헨델의 예법은 정중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대꾸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발렌은 고개를 갸웃 기울이더니 “흐응.” 하며 엘리자베스를 위아래로 훑었다.
“제국의 예법은 위아래를 따지지 않는 것 같고.”
“예?”
“바보인 거야? 나는 헨델의 왕녀, 람시스의 성녀다. 본녀는 그대에게 질문을 허락한 적이 없어.”
다소 날카로운 말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가자.”
발렌이 내 손을 끌어당기다 말을 이었다.
“오빠한테 사라지지 말라고 해. 네 말은 강아지처럼 잘 듣는다면서. 오빠는 왜 자꾸만 나를 피하는 거야? 우리는 남매인…….”
탁. 나는 발렌에게서 손을 빼냈다. 그러자 그 애는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뭐 하는 거야?”
“…….”
“대답 안 해?”
“제게 대답을 허락하신 줄 몰랐어요. 대답해도 되나요?”
묘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발렌은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오빠가 계속해서 자리를 피하는 이유는 영애가 무례하기 때문이에요.”
“말했잖아. 나는…….”
“귀한 몸이라 왕궁에서만 지내 예법을 모른다고 해서 사람들이 영애를 모두 이해할 순 없지요. 또, 오빠는 강아지처럼 제 말을 잘 듣는 게 아니라 존중해 주는 거예요.”
“…….”
“오빠의 존중을 목줄로 쓸 생각 없습니다. 그리고…….”
발렌은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고, 나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양은 바보가 아니에요.”
내가 울컥한 표정으로 말하자 엘리자베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발렌의 표정은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래, 영애의 뜻은 알겠어.”
휙, 되돌아가는 발렌을 보고 말벗들이 술렁였다. 그녀들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어요, 영애?”
엘리자베스도 염려 어린 눈으로 내 얼굴을 응시했다.
“사절단으로 온 성녀예요. 분란을 만들어서 좋을 게 없을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프렌시프의 생각은 영애와는 다를 수도 있을 텐데요.”
“괜찮아요. 어, 저기 그보다…….”
자존심 강한 엘리자베스가 말벗들 앞에서 깔아뭉개지다시피 했는데 마음이 괜찮을까. 내가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묻자 그녀는 후후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오늘을 떠올리면 무례한 성녀로 인한 불쾌감보다 좋은 친구를 얻었다는 기쁨이 먼저 생각날 거예요.”
그러곤 머리카락 끝에 가볍게 입 맞췄다.
‘역시 멋져…….’
내가 몽롱하게 엘리자베스를 보자 그녀는 나붓이 눈을 휘었다. 다른 영애들도 “사실은 저도 속이 시원했어요.” 하고 말해 줬고, 몇몇은 나중에 함께 나들이나 티 파티에 가자고 청했다.
영애들과 헤어진 후, 나는 도미니크의 궁으로 향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떠들고 있는데 하인들이 식후 차를 가져다주었다. 찻잔을 든 채로 캐모마일 티의 향을 맡고 있던 내게 알베르가 말했다.
“헨델의 성녀는 어디에서나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는군요.”
그의 말에 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만찬에서의 일 말씀하시는 거예요?”
“만찬 후, 폐하 앞에서의 태도도 결코 옳지는 않았습니다.”
“왜요?”
“당황스러울 정도로 관심을 보이셔서…….”
알베르는 도미니크를 흘끔 쳐다보았다.
“저하에게요?”
내가 인상을 쓰며 묻자 알베르는 도미니크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정확히는 저하의 검과 검술 실력에 흥미를 느끼셨습니다.”
그런 내색은 조금도 하지 않았던 도미니크를 슬쩍 흘기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알베르를 향해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어떻게 관심을 보이던가요? 막 만지고?”
“설마.”
도미니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몇 마디 질문을 받았을 뿐입니다.”
“무슨 질문?”
“검은 언제부터 배웠나. 상당한 실력이라고 하던데 나와 검을 맞춰 볼 생각은 없나. 나도 꽤 잘하는데. 뭐 그런?”
“좋아하는 화제라 즐거우셨겠어요, 자기.”
별생각 없이 얘기했는데 왠지 도미니크는 움찔했다.
“지루했죠.”
그러더니 얼른 화제를 돌렸다.
“내일 함께 가브리엘라 황비님께 갈까요. 뵙지 못한 지 오래된 듯합니다.”
이번엔 내가 움찔했다.
“내일은 곤란해요. 선약이 있어서. 트리스탄과 보그 건을 논의해야 하거든요.”
그렇게 말하자 도미니크가 주먹을 꽉 쥐었다.
“자주 만나시는 걸 보면 편한 모양입니다. 그 백발 새…… 왕자가.”
으응? 급하게 단어를 바꾼 느낌인데? 내가 눈을 깜빡이자 도미니크가 다시 말했다.
“그 새…… 왕자는 성녀들에게 흥미를 끌게 하는 매력이 있는 모양이죠. 헨델의 성녀도 관심을 보이던데요.”
“그래요?”
내 물음에 알베르가 대답했다.
“엘트라 사신들이 헨델의 성녀에게서 왕자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엘트라에선 그 말이 가장 훌륭한 칭찬인 모양입니다.”
“그래서요?”
“어릴 땐 여자인 줄 알 정도로 아름다우셨다는 말에 헨델의 성녀가 흥미를 보였습니다.”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니 알베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엘트라의 대신관이 초상화를 보여 주었습니다. 초상화를 본 성녀가 말했죠. 내가 더 여자 같은데?”
“아이고…….”
“엘트라 사신들의 표정이 만찬장에서의 황비님과 같았습니다.”
알베르가 킬킬 웃었다.
‘아이고.’
외양은 나보다 나이 있어 보이는 데도 속은 완전히 어린애인 걸까. 그렇게 적을 만들어서 좋을 게 없을 텐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되네요.”
턱을 괴고 있던 도미니크가 실소를 흘렸다.
“그런 사람이 걱정되십니까.”
“가웨인의 동생이니까요.”
란슬롯이나 내가 처음에 그 애의 무례함을 참아 넘겼던 건 비단 왕족이자 성녀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웨인의 동생이니까.
정 깊은 가웨인이 억지로 제 어머니를 외면하고 있다는 게 보여서 피붙이인 발렌에게만은 마음을 열길 바랐던 것이다.
“발렌 님은 왜인지 이상한 위화감이 느껴져요.”
“위화감이라니요?”
“뭐랄까, 말로 하기는 어려운데…….”
알베르가 눈을 홉뜨더니 테이블에 바싹 다가와 물었다.
“혹시 삿된 자의 기운이 느껴지십니까?”
“네?”
“영애를 제외한 성녀들은 모두 아탈란의 실험체이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질렸는지 알베르는 부르르 떨었다.
“전혀요. 눈도 회색이 아니고, 삿된 자의 기운이 조금도 안 느껴져요. 그리고 아탈란의 성녀들보다는 차라리 다른 사람과 비슷한 느낌을…… 아!”
버럭 소리치자 알베르와 도미니크가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쳐다봤다.
“설마…….”
내가 막 입을 떼려던 찰나, 황궁의 시중인이 말을 전하러 왔다.
“영애,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돌아갈 시간이 되었나 보다. 나는 다른 이야기는 다음에 나누자고 말한 뒤에 몸을 일으켰다. 그는 나를 살짝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언제쯤 헤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귓가에 낮고도 달콤한 속삭임이 밀려들었다.
마차 대기소에 도착한 뒤에도 얼굴이 홧홧했다.
‘도미니크는 날이 갈수록 야해지는 것 같아…….’
뺨을 감싸 쥐고 있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렌과 헨델의 사절단, 그리고 우리 가족이었다. 발렌은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돌아가고 싶어.”
“예?”
사절단이 당황해서 묻자 발렌이 입술을 삐죽였다.
“여기 사람들은 전부 날 싫어해. 오빠도, 영애들도, 그리고 저 애도.”
그녀가 나를 가리키자 이번에 당황한 것은 프렌시프의 사람들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 애가 영애들과 함께 내 험담을 했어. 내가 무례하고 이상하댔단 말이야.”
정말이냐는 듯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니에요.”
“아니긴. 내가 봤는걸.”
“아니라니까?”
발렌이 인상을 썼다.
“말을 높여. 난 헨델 왕의 손주로 준왕족―”
나는 빙그레 웃었다.
“여긴 길라게온. 나도 황자비 후보로 준황족이야. 그리고 제국의 공신이며 너와 같은 성녀지. 네게 하대를 들을 이유가 없어. 지금까지 널 참아 준 건 네가 내 오빠의 동생이기 때문이고.”
블러핑이었다. 도미니크와 내가 황제에게 공인된 연인이긴 하지만, 난 아직 황자비 후보가 아니었다. 할아버지와 아빠, 오빠들이 필사적으로 약혼을 저지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발렌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어버버거렸다. 나는 그 애에게 바짝 다가가며 말했다.
“왜 순진한 체 타인을 상처 입히는 거야? 너는 정말로 상식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잖아.”
“나, 난 거짓말 안 해.”
“아니, 넌 거짓말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거짓말을 했잖아.”
그 애에게 바짝 다가간 나는 속삭였다.
“너, ……지?”
내 말을 들은 발렌의 눈이 커졌다. 무심코 “어, 어떻게…….” 하고 중얼거리던 그 애는 곧 아차 싶었는지 나를 쳐다봤다.
“사과해. 나와 황비님, 엘리자베스 양, 그리고 네 무례한 태도 때문에 난처했던 모두에게.”
“시, 싫―”
“확! 다 불어 버린다.”
발렌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나는 고개를 모로 꼰 채 발렌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이를 악물고 있던 그 애가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해.”
“뭐라고?”
“……미안하다잖아!”
나는 “흐음.” 신음을 내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발렌은 내가 언짢았다고 생각했는지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웅얼거리는 목소리에서 당혹과 두려움이 느껴졌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좋아.”
나는 가족들과 프렌시프의 사람들, 그리고 사절단을 둘러보며 “갈까요?” 하고 물었다. 길라게온의 사람들은 당황스러워 보였고, 헨델의 사절단은 완전히 경악하고 있었다. 이윽고 사람들 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란슬롯이었다.
“그래, 가자.”
내 손을 다정히 잡으며 “저택으로 돌아가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지.” 하고 발렌을 흘끔 쳐다봤다.
여러 대의 마차에 사람들이 나뉘어 착석했다. 나는 아빠를 따라 우리 가족의 마차에 오르려 했다. 발렌이 내 손목을 꽉 잡지 않았다면.
“넌 나와 같이 가.”
“으음, 싫은데.”
“네가 약속을 어기고 ‘그 얘기’를 퍼뜨리면 어떻게 해!”
“약속?”
내가 마차의 문을 잡은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뜨자 발렌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약속했잖아. 내가 사과하면 입 다물어 주기로.”
“내가 언제?”
“뭐?”
“사과하지 않으면 불어 버린다고 한 거지 사과한다고 해서 입 다물어 주겠다고는 안 했는걸.”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자 발렌은 새빨개져서 나를 노려보았다.
“저택에서 보자.”
그러고 마차에 올라탔다.
* * *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발렌은 식은땀이 배어나는 손을 드레스 자락에 문지르며 달리기 시작한 세니아나의 마차를 쳐다보았다.
‘대체 어떻게 안 거야.’
다른 사람은 제 입으로 밝히지 않으면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밝혀지면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네메시스의 곁에 있을 수도 없었다.
‘차, 착하게 굴 걸 그랬나.’
하지만, 하지만…… 얄미웠는걸. 자신과 같은 입장임에도 모두에게 사랑받는 저 애가, 늘 궁금했던 네메시스의 아들로부터 지극한 애정을 받는 저 애가 미웠다. 나는 가질 수 없는 것을 손안에 움켜쥔 세니아나에게 질투가 나 참을 수 없었다.
“발렌.”
등 뒤에서 네메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란 발렌이 고개를 돌리자 여느 때처럼 표정 없이 저를 바라보는 모친이 보였다.
“무슨 일이니.”
“…….”
“두 번 묻지 않아.”
“그런……!”
다급히 네메시스의 치맛자락을 붙들던 발렌은 이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세니아나가 ‘그 일’을 안다고 하면 네메시스는 곤란해할 뿐 자신을 위해 나서지 않을 것이다. 그뿐이었으니까. 그들의 ‘모녀 관계’란.
“아니에요…….”
발렌을 지그시 응시하던 네메시스는 곧 다른 마차에 올랐다. 이것 보라지. 엄마는 ‘성녀인 딸’이 필요한 것이지 내가 필요한 게 아니야.
시무룩한 얼굴로 네메시스를 따라 마차에 오른 발렌은 프렌시프 저택으로 향하는 내내 표정이 어두웠다. 세니아나가 벌써 다른 사람들에게 그 얘기를 했으면 어떻게 하지?
네메시스의 말에 따르면 프렌시프 사람들은 상종 못 할 악당들이었다. 악당들이 제 일을 무기 삼아 헨델을 흔들려 들면, 그러면…….
다정한 헨델 왕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네메시스의 자랑스러운 딸이던 자신은 금세 천덕꾸러기로 추락하게 될지도 모른다. 두려워서 참을 수 없었다.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던 발렌은 마차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세니아나를 찾았다. 발렌은 제 방으로 들어가려는 세니아나를 돌려세우고 다그쳤다.
“말했어?”
“뭘?”
“그거 말이야.”
제발. 제발……!
간절한 얼굴로 쳐다보자 세니아나는 눈을 몇 번 깜빡이곤 “아니.” 하고 대답했다.
“……앞으로도 말하지 마.”
“생각해 보고.”
“너 정말 나쁜 애구나! 못됐어.”
발렌이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그 일이 밝혀지면 모두가 곤란해진단 말이야. 너,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싶어?”
세니아나는 고민하듯 눈을 도르륵 굴리더니 걱정스러운 듯이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렇지!’
마음 약해 보이더니만, 역시. 세니아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걸 사람들은 가스라이팅이라고 해.”
“……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교묘한 말 말이야. 만약에 헨델 사람들이 곤란해진다고 해도 내 잘못이 아니잖아. 속인 네 탓이지.”
“그, 그런…….”
“발렌, 내가 너라면 말이야. 협박이 아니라 자비를 구했을 거야.”
그녀는 곧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양손으로 세니아나를 잡았다.
“그러면 말하지 않을 거야?”
“지금은 늦었지.”
방금 한 말과 다르잖아! 연이어 터지는 예상과 다른 말에 발렌은 정신이 혼미했다.
“사람들이 너더러 순둥이라고 했던 건 다 거짓말이었어!”
악에 받친 발렌이 소리치자 세니아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내 별명이긴 해. 그런데 앞에 한마디 더 붙는단다.”
“뭐?”
“건들지만 않으면 순둥이, 라고 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세니아나는 방에 쏙 들어갔다.
* * *
그 뒤로 사흘 내내 발렌은 나를 감시하는 것처럼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타국의 사절단이자 성녀로서의 일정으로 빼곡한데도 내가 곁에 있지 않으면 어디에도 가지 않겠노라 어깃장을 놓았다.
나로서도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발렌이 프렌시프 저택에 머물고 있으니 그녀가 사고를 친다면 수습은 모두 우리의 몫이었다. 이렇게 매일 매시간 곁에 붙어 있으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좋았다. 내 쪽에서 목줄을 쥐고 있기도 했고.
“두 분 성녀님께서 남부의 가난하고 병든 아이들을 위해 힘을 보태 주시길 간청 드립니다.”
남부의 거두이자 명망 깊은 사회사업가인 에돌턴 백작이 허리를 굽혔다. 나이 지긋한 노인의 간청에 나는 마음이 아팠다.
“죄송해요. 각지의 복지 기관으로부터 선약이 있어요. 남부의 차례가 되려면 적어도 보름은 기다리셔야…….”
지난주, 난데없이 불어 닥친 폭풍이 제국 전역을 쓸고 지나갔다. 삿된 자들로 인해 재건 중이던 건물들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보육원이나 노인요양소 등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자연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지금 내 힘으론 남부의 아이들까지 중앙으로 올려오기란 쉽지 않았다.
에돌턴 백작이 발렌을 바라보았다.
“타국의 성녀께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립니다. 성녀님의 힘으로 터전을 잃은 아이들을 중앙에 데려와 주실 순 없으신지요.”
“내가 왜.”
“집을 잃은 데다 보호소에 역병까지 돌고 있는 터라…….”
“그런 건 너희 황제에게 말하라고. 나는 헨델의 성녀란 말이―”
“발렌.”
내가 부르자 그녀는 흠칫하며 와구와구 먹던 쿠키를 내려놓았다.
“왜…….”
발렌이 불안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폈다.
“들어주면 안 될까.”
“시, 싫어. 이건 너희 나라 문제잖아.”
“들어줬으면 좋겠어.”
발렌은 거절하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켜다가 내가 흐린 눈으로 바라보니 입술을 쭉 내밀며 웅얼거렸다.
“하, 하면 되잖아.”
에돌턴 백작의 표정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잘됐네요. 백작님.”
“프렌시프 영애의 덕입니다. 아아, 이제야 마음이 놓이겠군요.”
그러더니 백작이 발렌의 눈치를 보며 내게 속삭였다.
“말씀하신 건은 제 선에서 도와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네, 꼭 하얀 집이었으면 좋겠어요.”
“식당으로 쓸 만한 바닷가의 하얀 오두막……. 예, 알아보지요.”
그가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돌턴 백작은 인망 있는 만큼 제국 곳곳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 내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을 가져오겠지. 손 안 대고 코 푼 나는 머릿속의 노후 계획 중 한 문항에 동그라미를 쳤다.
퇴직하면 할 식당 마련.
‘신난다!’
또 발렌이 주는 이득엔 이런 것들이 있었다. 현재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을 무보수 노동으로 도와주거든.
에돌턴 백작이 돌아간 후, 로웨나 황비가 우리를 찾아왔다. 그녀는 만찬에서의 사건이 아직 속에 남아 있는지 몹시 언짢은 표정이었다.
“헨델의 성녀가 제국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지요. 폐하께서 감사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네.”
발렌이 소파에 삐뚜름하게 앉아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성의 없는 대답에 황비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발렌.”
내가 부르자 그녀는 또다시 흠칫했다.
“또 뭐가…….”
“공손하게 인사드려야지. 황비님은 제국의 국모셔. 아주 소중한 분이시라고. 너만큼이나.”
“…….”
난 발렌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애는 무어라 조그맣게 구시렁거리다가 일어나 치맛자락을 쥐었다.
“황비님을 뵙습니다.”
“또?”
난 앉아서 발렌을 올려다보며 말했고, 발렌은 고개를 조금 숙였다.
“일전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생각이 짧았어요. 부디 용서해 주세요.”
그러자 황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얼떨떨한 얼굴로 나와 발렌을 쳐다보던 황비는 이내 우후후,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도 못 한 사과라 얼떨떨하네요. 예, 받지요. 어린 왕녀가 뭣 모르고 한 행동을 나무랄 생각은 없답니다.”
발렌은 치, 혀를 차다가 날 보고 움찔하더니 “예…….” 웅얼웅얼 대답했다.
* * *
그날 점심. 성녀들을 만나고 온 로웨나 황비는 이전과 달리 기분이 좋았다. 길라게온의 귀족들과 함께 오찬 중이던 황제가 의아한 듯 물었다.
“황궁에 나 모르는 경사가 있었소?”
로웨나 황비는 냅킨으로 입가를 톡톡, 닦으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제가 기분 좋을 일이 따로 있겠습니까. 늘 그렇듯 폐하의 꿀단지 덕이지요.”
“오, 내 꿀단지가 이번에도 사랑스러운 일을 하였나 보오.”
“얼마나 영특한지 상대가 2황자만 아니라면 우리 전하의 짝으로 빼앗아 오고 싶답니다.”
함께 식사를 들던 프렌시프의 사람들이 미간을 좁혔다. 묵묵히 연한 고기에 칼질을 하던 가웨인은 고개를 들고 화기애애한 황제와 황비를 바라보았다. 로웨나 황비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등으로 입가를 숨겼다.
“헨델의 성녀가 제국의 영웅 앞에서는 기를 못 펴더군요. 국모 앞에서도 방자하던 태도가 프렌시프 영애 앞에선 공손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황제는 흐음, 신음하며 나이프 끝을 매만졌다.
‘꿀단지가 귀여운 수작을 부린 모양이군.’
황제로서야 반가운 일이었다. 제국의 유일무이한 성녀를 호시탐탐 노리는 엘트라인들과 동행시키는 것은 불안한 일이었다. 세니아나는 다시 없을 노다지였다. 세계에 단 셋뿐인 성녀. 삿된 자를 물리친 평화의 수호자이자 강력한 힘의 상징이었다.
엘트라에 빼앗기게 되면 되찾아올 방도가 따로 없다. 헨델의 속을 알 수 없는 제안을 덜컥 받아들인 이유도 그것이다. 세니아나를 빼앗기느니, 헨델의 수작에 놀아나 주는 쪽이 이득이니.
하지만 헨델의 성녀의 오만은 지나쳤다. 황가의 위엄과 관계될 만큼. 그런데 세니아나가 알아서 쥐고 흔들어 준다면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여간 꿀단지는 귀여운 짓만 한다니까.’
그가 음흉하게 으흐흐, 웃자 황태자는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황제는 식사에만 집중하는 프렌시프의 사내들을 흘끔 쳐다보았다.
“나베리우스 공은 이제 슬슬 증손주가 간절하겠군.”
“생각 없습니다.”
“손녀를 쏙 빼닮은 증손주 하나―”
“손자 녀석들도 아직 미취한 몸입니다.”
“요새 누가 위아래 따져 혼인을 하던가.”
“따집니다, 저희는.”
나베리우스의 단호한 대답에 황제는 소리 없이 혀를 찼다.
‘팔불출 영감탱이.’
‘능구렁이 같은 놈.’
황제와 나베리우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맹렬하게 부딪쳤다.
나베리우스는 황궁에서 돌아오고 나서도 내내 씨근덕거렸다.
“부자가 쌍으로 정이 안 가. 염치도 싹수도 없는 놈들이다.”
증손주는 무슨! 손녀도 제대로 끼고 살지 못했는데.
날강도 같은 황가의 부자를 떠올린 나베리우스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평소라면 맞장구를 치며 함께 분통을 터뜨렸을 가웨인이 조용하다.
“가웨인.”
“…….”
“가웨인!”
“아……, 예.”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가웨인이 조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네메시스의 일로 심사가 복잡한 게야?”
“그게 아니라…….”
가웨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본저를 바라보았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발렌…… 성녀 말입니다. 처음엔 세니아나와 그렇게 부딪치더니 난데없이…….”
아무래도 사절단 접대로 모두 함께 황궁에 갔던 날, 세니아나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확! 다 불어 버린다.]
세니아나가 또 가족들을 걱정해 감당하지 못할 비밀을 끌어안고 있는 게 아닐까.
헨델의 사람들이 사실은 굉장히 음흉하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었다. 반은 헨델인의 피가 흐르는 자신이기에 더더욱 잘 알고 있다. 난데없이 제국에만 이득인 엘트라 행을 제안한 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프렌시프라면 학을 떼는 네메시스가 보호자로 동행한 것도 이상하다.
‘안 되겠어.’
세니아나에게 직접 연유를 물어야겠다. 그는 빠르게 저택을 향해 걸었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잊고 살려고 노력했다. 영지에서의 삶에 지쳤던 어린 제가 용기를 긁어모아 ‘저를 보러 오세요’ 하고 편지를 썼던 날이 눈에 선했다. 그의 편지에 대한 모친의 답은 간결했다.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살아가라.]
그런 사람이 왜. 그렇게 지독한 사람이 어째서. 왜 그가 아닌 발렌은 자식으로 여겨질 수 있었던 것일까. 성녀라서? 내가 부족해서?
세니아나의 방 앞에 다다른 가웨인이 문고리를 쥔 채, 이를 악물었다. 그때였다.
“너, 정말로 죽고 싶어?!”
잔뜩 흥분해서 내지른 고함은 발렌의 것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가웨인이 “세니아나!” 하고 소리치자 문 안에서 허둥지둥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 잠깐만요. 잠깐만! 들어오지 마세요.”
왜 이렇게 당황한단 말인가. 발렌에게 무슨 짓이라도 당한 걸까. 가웨인이 다급히 문을 열었다.
“자, 잠…… 오빠!”
왕! 개소리였다. 그리고 세니아나가 끌어안고 있는 것도…….
“개?”
새하얀 코카스파니엘이 겁에 질려 꼬리를 몸쪽으로 동그랗게 말았다. 세니아나도 겁에 질린 건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발렌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은 오직 개 한 마리뿐. 와들와들 떨던 개는 곧 와앙―! 울음을 터뜨렸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못된 계집애야!”
개가 사람 소리를……. 개소리……. 그런데 왜 저 개소리가 발렌의 목소리와 똑같을까.
* * *
황궁에서 돌아온 뒤 발렌은 기분이 저조했다. 내 소파를 차지하고서 쿠션을 끌어안고 있던 그 애는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묶는 날 노려보았다.
“그런데 너, 어떻게 알았어?”
“뭘?”
“내가 성……!”
무심코 소리치다가 문을 쳐다보곤 목소리를 바짝 죽였다.
“……수라는 거 말이야.”
“이상하잖아. 아무리 왕궁에서만 지냈다고 해도 상식을 전혀 모른다는 건.”
“…….”
“그거 꼭 나의 테디가 세상을 잘 모르는 것과 같았거든. 애초에 성수들은 인간의 상식 따위에 물들지 않는 거지?”
“…….”
“인간의 상식은 시대에 따라서, 아니, 몇 년 만에도 바뀌는 거니까. 수백, 수천 년을 살아가는 너희에겐 찰나의 시간일 뿐이라 물들 필요도, 이유도 없는 거야.”
나는 턱을 가볍게 쥐고 “으음.” 신음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프렌시프 사람들은 가족을 알아볼 수 있거든? 내 육체를 빼앗고 있던 샤를리나조차 알아본 사람들이니까.”
잘은 모르지만 아마 오랜 시간, 멀린의 마원을 깔고 앉은 터에서 지내며 자연히 익히게 된 능력이 아닐까 싶다.
‘멀린도 그 능력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런데 우리 가족 중에서 제일 정이 깊은 가웨인이 너를 진심으로 피했잖아.”
진짜 가족이 아닌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낀 걸 테지.
“…….”
“또 ‘여자 같다’는 말도 이상했고. 쵸가 그랬어. 성수들은 남성체로 태어난다고.”
그건 육체의 강도나 힘이 여성체보다는 남성체 쪽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강력한 정신체인 성수를 담아 놓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강한 육체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쵸는 여성이 되고 싶어서 마력으로 본래의 육신을 변화시켜 사용하거든. 너도 그런 거지? 뭐, 그래도 제일 큰 이유는 아무래도…….”
나는 발렌에게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내가 성녀이고 네가 성수이기 때문이야.”
움찔 뒤로 물러난 발렌이 우물쭈물 물었다.
“그게 왜…….”
나는 발렌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느낄 수 있어.”
“…….”
“성수와 성녀라는 건 혼으로 이어져 있으니까.”
겁 많은 내가 성수들이 언젠가 내 곁으로 돌아올 거라는 막연한 믿음만으로도 충분한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발렌이 입을 열었다.
“네 손은 따뜻…… 아냐! 난 네가 싫어, 싫다구!”
발렌이 고개를 팩 돌리더니 후다닥 소파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발렌, 넌 내가 필요하잖아?”
“아, 아니야…….”
“그래서 온 거지? 바깥세상에서 인간체를 유지하려면 성력이 필요한데, 넌 귀속된 성녀가 없으니까 내 힘을 빌리려고.”
“…….”
“헨델 왕이 성녀라고 알려진 널 국외로 보낼 수밖에 없던 이유도 그거고.”
발렌은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기 힘든 게 분명하다. 본래의 육체로도 힘이 소모되는 일일 텐데, 여성체로 둔갑까지 하고 있으니까. 내가 정곡을 찌른 모양인지 발렌은 입술을 우물우물 깨물었다.
“어떻게 인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어?”
“……플리스의 성녀인 미미와랑 계약했어.”
아아, 노환으로 오늘내일한다던 성녀 말이구나.
“플리스는 가난한 나라라 헨델이 물자를 지원해 주고, 내가 플리스의 성녀를 대신해 포털을 열어 주는 거야. 그 대가로 나를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게 했어. 그런데 미미와는…….”
발렌의 목소리가 시무룩해졌다. 이제 더는 인간의 모습으로 유지시켜 줄 수도 없을 지경인 모양이었다.
‘플리스의 성녀가 세상을 떠날 날이 머지않았구나.’
헨델은 왕권이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공주인 네메시스 님이 멀고 먼 제국의 후작가로 시집을 왔던 것만 봐도 그랬다. 네메시스 님은 헨델 왕의 외동딸이었는데, 왕의 조카인 락시온 공이 귀족들을 등에 업고 반강제로 왕세자가 되었다고 들었다.
[네메시스가 성녀를 낳지 않았더라면 헨델 왕은 일찌감치 독살되었을 거다.]
할아버지의 말씀이었다. 발렌이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저기…….”
그때, 발렌의 몸이 마치 신호 장애가 온 듯한 홀로그램처럼 지지직, 거리더니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깽!”
비명과 함께 발렌이 사라졌다.
“……!”
나는 깜짝 놀라서 사라진 발렌을 대신해 바닥에 떨어진 드레스로 향했다.
“발렌! 발―”
“끄으응…….”
드레스가 꿈틀거리더니 옷 아래서 귀가 축 늘어진 하얀 코카스파니엘 한 마리가 툭 튀어나왔다. 목엔 발렌이 매고 있던 리본이 매달려 있었다. 내가 손을 뻗자 코카스파니엘은 네 발로 펄쩍 뛰더니 후다닥 구석으로 달려갔다. 나는 조심스럽게 강아지에게 다가갔다.
“……발렌?”
“아, 아니야.”
그럼 대답을 하면 안 되지. 발렌은 눈이 커다래진 나를 보고 두 앞발로 머리를 푹 눌렀다.
“나, 나는 괴물이 아니야. 나는, 나는…….”
“……워.”
“나는…… 나는…….”
“귀여워!”
나는 주저앉아서 발렌을 향해 손을 뻗다가 움찔, 하고 물었다.
“만져도 돼?”
“……내가 무섭지 않아?”
“왜?”
“하지만 나는 개가 되고, 또…….”
“나는 성수가 세 마리나 있었는걸. 무서울 리가 없지.”
발렌이 슬그머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정말.”
“…….”
“귀엽구나, 발렌. 아주 예뻐.”
“…….”
발렌의 까만 코가 느리게 실룩였다. 허둥지둥하던 그 애는 곧 나를 홱 노려보았다.
“바보! 내가 작아졌다고 날 무시하는 거지. 그렇지?”
나를 위협하려는 것처럼 으르렁거렸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강아지 최고! 고양이인 멀린도, 작은 반달곰인 테디도, 사막여우인 쵸도 귀엽지만, 발렌은 또 다른 류의 귀여움이 있었다.
나는 파들파들 떠는 강아지의 귀여움에 취해 “귀여워, 귀여워.”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발렌은 약이 바짝 올랐는지 소리쳤다.
“너, 정말로 죽고 싶어?!”
그러한 찰나, 덜컹! 문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니아나!”
가웨인이다! 나와 발렌은 문을 쳐다보다가, 강아지가 된 발렌을 보다가 하며 허둥지둥했다.
“자, 잠깐만요. 잠깐만! 들어오지 마세요.”
발렌이 숨으려는 듯 협탁 아래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런다고 안 보일 리 없잖아!’
머리만 겨우 들어가서 파들파들 떨리는 몸이 다 보인다. 나는 얼른 발렌을 끌어안았다.
이불을 덮어 놓을까? 숨이 막히면 어떡하지. 창문 아래로 숨겨 놓는 게…… 아냐, 그게 더 위험하잖아! 오, 옷장? 그래, 옷장에 숨겨 놓으면……!
허둥지둥하는 사이 문고리가 돌아갔다.
“자, 잠…… 오빠!”
“왕!”
벌컥 문이 열리고 굳은 얼굴의 가웨인이 보였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내가 끌어안고 있는 발렌에게로 내려갔다.
“이게 무슨…….”
복슬복슬한 털 뭉치가 와들와들 떨리더니 곧 “와앙―!” 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못된 계집애야!”
“…….”
“…….”
“와아아앙! 나빠, 나빠!”
망했다.
* * *
빠르게 복도를 걸어온 네메시스는 응접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프렌시프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들이 둘러싸고 앉은 원형의 티 테이블 위에는,
“네, 네메시스…….”
두 귀와 꼬리가 축 늘어진 발렌이 겁에 질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결국.’
치맛자락을 꾹 쥐고 있던 네메시스는 굳어진 표정을 금세 수습하곤 남은 자리에 착석했다. 아서가 물었다.
“언제까지 숨길 수 있으리라 여기셨습니까.”
평소와 똑같은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가능한 한 오래. 되도록 평생을.”
“내 딸의 힘을 필요로 하면서 숨길 수 있으리라 여기신 겁니까.”
“피와 머리카락, 그리고 성녀의 곁에서 지내는 며칠이면 본인도 모르는 새에 성력을 나눠 줄 수 있지요.”
그 말을 들은 가웨인이 소리쳤다.
“세니아나의 성력을 훔쳐 가는 것이 목적이었습니까!”
“……그래.”
“그렇다면 당신이 약탈자를 내세웠던 아탈란과 뭐가 달라.”
가웨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세니아나가 “오빠…….” 하며 조심스럽게 그의 소매를 끌어당겼지만 흉흉한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권력이 욕심나시더이까. 자식을 버리고, 버린 자식 대신 성수를 제 자식으로 둔갑시켜 키울 만큼?”
기가 죽은 발렌은 차마 네메시스를 쳐다보지 못했고, 네메시스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래. 욕심나더구나. 버려 두고 온 자식은 생각도 안 날 만큼.”
네메시스는 아서와 나베리우스를 보았다.
“시간 낭비할 필요가 있나요. 원하는 것을 말씀하세요.”
“당신…….”
가웨인이 짓씹듯 말하자 네메시스는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댔다.
“악당이든, 아탈란과 다를 바 없는 쓰레기든 내가 전부 하마. 틀린 말 아냐. 난 지독하게 나쁜 년이고 모정 같은 건 없어.”
“…….”
“그러니 너도 내게 바보 같은 기대는 그만하지그래? 내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지 마라. 세니아나가 네 동생이라고 마음 약해질 거라 여기지 마.”
팔걸이를 가볍게 말아쥔 네메시스가 미간을 좁혔다.
“어릴 때보다 조금은 나아졌을 줄 알았더니 여전히 젖내 나는 애송이로군. 지긋지긋해.”
“가세요.”
대답을 한 건 가웨인이 아니었다. 세니아나는 차분한 표정으로 네메시스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뭐?”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으니 돌아가시라 말씀드렸습니다.”
“이봐요, 성녀. 이건 두 나라의 미래를 건 일대의 거래예요. 천문학적인 돈과 현시점에서는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자원을 움직일 수 있는.”
네메시스가 주름진 미간을 검지 끝으로 꾹 누르며 말했다.
“최소한 대화가 통하는 상대이길 바랐는데 아쉽군요.”
“맞습니다, 네메시스 님. 저는 대화가 통하지 않아요.”
세니아나는 여상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자약한 태도에 네메시스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고, 세니아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어떤 돈과 자원, 미래도 가웨인보다 소중하지 않아요.”
“……피가 반밖에 섞이지 않은 혈육을 대신해 내게 복수라도 할 생각입니까.”
“예.”
“성―”
“그러니까 두고두고 후회하세요.”
네메시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라고?”
“가웨인은요. 세상에 다시 없을 천재 검사예요. 그렇게 멋진 재능을 가지고도 노력을 게을리한 적이 없어요.”
“…….”
“지켜야 할 것이 너무 크고 소중해서 남들 앞에선 냉정한 체하지만, 사실은 아주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에요.”
“…….”
“부모 형제 중 누구라도 잔기침을 하면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섬세한 사람이고요, 다 나을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바보예요.”
“…….”
세니아나를 보는 가웨인의 시선이 가늘게 흔들렸다. 란슬롯이 웃음을 삼켰고, 아서와 나베리우스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세니아나는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이런 멋진 아들에게 상처를 준 걸 두고두고 후회해.”
“이봐요, 성녀!”
“필요 없으면 저 주세요. 더는 상처받지 않게 내가 평생 지킬 테니까.”
주먹을 꽉 쥐고 있던 네메시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빠르게 방을 나서자 허둥지둥하던 발렌도 뒤따라 나섰다.
응접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세니아나는 네메시스가 방을 나선 후로 고개를 푹 수그린 채 훌쩍였다. 가웨인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그녀 앞에 쪼그려 앉았다.
“봐.”
“…….”
“세니아나.”
다정한 목소리에 고개를 조금 들자 가웨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실소를 흘렸다.
“또 우네. 울보.”
“그치만……, 그치만…….”
제 얼굴을 들여다보는 동생의 눈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가족들은 쉬이 입을 열지 못했고, 이 바보는 펑펑 울어 버릴 것 같은 한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웨인이 쓰게 웃자 엉망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세니아나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우리 가족들은 왜 다들 바보인 걸까.’
슬퍼도 내색하지 못하고, 속 시원하게 눈물조차 쉬이 흘리지 않는 바보 같은 사람들. 가웨인이 씩 웃으며 말했다.
“웃겨서 그래. 웃겨서.”
“네?”
“조그만 게 나를 어떻게 지켜 주려고? 어?”
그는 킥킥 웃더니 동생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난 괜찮아.”
“…….”
“네가 지켜 주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괜찮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가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진심이었다. 놀라우리만큼 모친의 서리 문 말에 아무렇지 않았다. 제가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 작은 동생이 사실은 가족 모두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 또한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어머니가 없어도 괜찮았다. 헨델의 공주가 자신을 외면해도, 원하지 않았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도. 가웨인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시집은 못 가겠는데? 날 지켜야 하잖아.”
세니아나가 고개를 슬쩍 들고 코를 훌쩍 들이켰다.
“저 혼자서 지켜야 돼요?”
“뭐?”
“아니, 나는 할아버지랑 아빠랑 큰오빠랑 같이 지키려고 했지. 나만 지켜야 하는 줄은 몰랐지…….”
가웨인은 “뭐?” 하고 멍하게 묻더니만 곧 다시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문밖에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가웨인을 살피려던 기사들이었다. 바커스가 배를 잡고 낄낄거리자 가웨인이 눈을 희번덕 빛내며 문을 향해 으르릉거렸다.
* * *
그날 밤. 복도 앞에서 쟁반을 들고 있던 시트론이 염려 어린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정말 가시게요?”
“응.”
시트론은 푹 한숨을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쟁반을 내밀곤 몇 발자국 물러났다. 난 숨을 크게 들이켜는 것으로 각오를 마치고 손님방으로 내어 준 호화로운 방에 노크했다.
“누구냐.”
문틈 사이로 네메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니아나입니다.”
“…….”
얼마쯤 뒤 침묵하던 네메시스가 대답했다.
“무슨 일입니까.”
“들어가면 안 될까요?”
“용건만 말씀하시죠.”
나는 쟁반을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야식을 좀 가져왔는데요.”
내가 직접 만든 야식을 말이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수면용의 얇은 로브를 입은 네메시스 님은 미간을 좁힌 얼굴로 문고리를 붙잡고 있었다. 그 뒤 문틈으로 소파 위에 앉은 코카스파니엘 모습의 발렌이 보였다.
“야식 같은 것을 부탁한 적 없습니다.”
붉은 입술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는데요. 밤에 혼자서 적적하실 것 같아서…….”
“…….”
“들어가면 안 될까요?”
“어째서?”
“발렌에겐 저와 함께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지요? 피와 머리카락은 가족들과 상의를 해야겠지만, 시간만큼은 낼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자 네메시스 님은 눈살을 찌푸린 채 팔짱을 끼곤 나를 쳐다봤다. 과연 가웨인의 친모라서 그런지 그와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외모라든가, 묘한 위압감이라든가, 또…….
‘무, 무서워.’
무표정하면 무서운 점까지도 모두. 살짝 의기소침해져 있는데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나는 얼굴이 금세 환해져서 “네!” 하고 소리치곤 먼저 들어간 네메시스 님을 뒤따랐다. 곧바로 탁, 작은 소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나는 테이블 위에 쟁반을 올려 두고 슬쩍 방을 둘러보았다.
‘와…….’
손님방이 이런 느낌이었던가. 시트와 이불을 바꾼 것만으로도 ‘우리 집의 손님방’이 ‘네메시스 님의 공간’이 된 것 같았다. 네메시스 님은 침대 앞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맞은편을 가리켰다.
“음식은 거절하죠. 지정된 식사 외에 다른 음식은 섭취하고 싶지 않아요. 속이 불편해서.”
“아, 이건 위에 좋은―”
“차나 한잔하죠.”
네메시스 님은 백색 티팟 옆에 포개진 작은 잔을 내게 내밀었다. 곧 티팟에서 맑은 녹색의 찻물이 꼴꼴 소리를 내며 작은 잔에 차올랐다.
“아, 쑥 냄새…….”
직접 차를 따라 주던 네메시스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티팟을 내려놓았다.
“압니까? 길라게온에선 흔히 아는 차가 아닌데요.”
길라게온에선 몰라도 한국에선 흔히 보던 것이었다. 엄마와 내가 운영하던 기사 식당 인근 공원에서도 쑥이 잔뜩 났다. 봄이면 쑥을 캐와서 떡도 만들고, 밀가루 반죽에 넣어 빵이나 면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저는 좋아해요, 쑥.”
“…….”
“잘 말려서 가루로 내어 얼려 놨다가 철 가리지 않고 많이 먹었어요. 몸에 좋잖아요.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다이어트에도 좋고, 또 각종 부인병에도…….”
“식겠군요. 드시죠.”
네메시스 님이 내 말을 끊어 냈다. 나는 우물쭈물 눈치를 보며 찻잔을 들었다. 긴장으로 바싹 마른 목을 쑥차로 축이고 있자 그녀가 물었다.
“나를 회유하러 오신 겁니까.”
“네?”
“오늘 내게 한 말이 가문에 영향을 미칠까 봐 두려운가요?”
“…….”
“됐습니다. 감정에 치우쳐 이정표를 잃는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다만, 다시 묻지요. 영애가 나를 돕는다면 나 또한―”
“그게 아니라 가웨인이요.”
무감하게 말하던 네메시스가 날 쳐다봤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서 무척 조심스레 말했다.
“저는 제 말을 주워 담을 생각은 없어요. 가문이나 나라의 이익 같은 것은 따질 생각도 없고요. 그렇지만 못다 한 말이 있어서……. 저, 네메시스 님…….”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지긋이 응시했다.
“가웨인 오빠는요, 겨울이 되면 꼭 꽃집 앞에 한참을 서 있는대요. 저는 이유를 몰랐거든요. 그런데 큰오빠에게 듣자 하니 헨델의 어버이날…… 뭐였더라. 부모님에게 낳아 주셔서 감사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국경일인데…….”
네메시스 님의 곁에서 내 얘기를 듣던 발렌이 귀를 쫑긋하고 소리쳤다.
“루피너스의 날!”
그러다가 네메시스 님의 시선이 닿자 발렌이 움찔하고 다시 낮게 엎드렸다. 나는 “맞다. 루피너스의 날!” 하고 고개를 끄덕이곤 이어 말했다.
“헨델에선 그날에 루피너스 꽃다발을 선물한다지요?”
한국에서 어버이날에 카네이션을 선물하는 것처럼.
“꽃집이 보이면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겨우 지나쳐 온대요.”
“…….”
“중년의 여성에겐 답지 않게 정중한 편이고요. 또―”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네메시스 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서 그녀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어머니들이 아이를 낳을 때 자연스럽게 모정이 생긴다고 하지만, 모정이 없거나 부족하다고 해서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머니’가 대단한 것은 자신보다 아이가 소중한 것을 당연하게 느낄 정도로 뜨겁게 사랑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아이는 사랑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모 자신보다 아이가 소중해지는 게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네메시스 님, 아이보다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긴다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에요.”
네메시스 님이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그 점은 사과드릴게요. 아까, 제 말에 스스로 틀렸다고 느끼셨다면요.”
“……당신.”
“하지만.”
나는 그녀를 또렷하게 응시하며 힘 있는 어조로 말했다.
“네메시스 님께서도 사과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무엇을?”
“네메시스 님의 아이가 당신을 줄곧 사랑해 왔음을 외면하신 것을요.”
그렇게 말한 나는 네메시스 님의 손을 꽉 잡았다.
“엄마만 아이를 지극하게 사랑하는 건 아니에요. 아이도 엄마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고요.”
내가 우리 아빠를, 또 엄마를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처럼.
다음 날, 오후.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제 괜히 갔나?’
가만히 있을 걸 쓸데없이 나선 걸까.
오늘 네메시스 님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했다. 아니, 무심한 가운데 눈빛엔 무엇인지 모를 어두운 감정이 스며 있었다.
“…….”
“…….”
복도에서 마주친 모자는 서로를 힐끔 쳐다보더니 투명 인간 취급하며 지나쳤다. 나는 네메시스 님의 뒷모습을 힐끔힐끔 보면서 가웨인의 허리춤을 잡았다.
“저기, 오빠…….”
“응?”
가웨인은 무슨 일이냐는 듯 날 쳐다봤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가웨인은 헨델의 사절단이 오기 전처럼 밝아지긴 했으나, 내가 걱정할까 봐 제 어머니의 일을 뒤로 물려 둔 게 여실히 티가 났다.
“아니에요…….”
시무룩하게 말하자 가웨인은 “싱겁긴.” 하며 내 머리를 벅벅 흐트러뜨리고 멀어졌다. 난 복도에 기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오지랖이었나 봐.’
내가 더 모자 사이를 어긋나게 한 건 아닐까 싶어 걱정하고 있는데 어깨 위로 무언가 툭, 올라왔다.
“끄악!”
깜짝 놀라 펄쩍 뛰어오르자 뒤에서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란슬롯이었다. 그의 뒤로 무슨 일이냐는 표정의 아빠도 보였다.
아빠를 보자 우울감이 바닥을 치는 것 같았다. 시무룩하게 어깨를 떨구니 아빠가 내게 다가왔다. 내 귓불을 쥐고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던 아빠가 말했다.
“얼굴이 붉구나. 열은 없는 듯한데.”
다정한 목소리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세니안?”
“실수했나 봐…….”
울먹이며 중얼거리자 아빠와 란슬롯이 서로를 쳐다보며 눈을 끔뻑였다.
나는 아빠의 손에 이끌려 란슬롯과 함께 서재로 왔다. 의자에 앉아 훌쩍이는 내가 걱정스러운지 란슬롯은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날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속상했던 거야?”
“아무래도 사고 쳤나 봐……. 어떡하지요…….”
란슬롯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더니 눈물이 덕지덕지 말라붙은 내 눈가를 매만졌다. 그러곤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막내가 사고를 한두 번 쳤던가?”
“네?”
“수없이 쳤잖아. 삿된 자들을 물리치겠다면서 포털 속에 몰고 가질 않나, 황제 폐하를 어린애 다루듯 하질 않나.”
놀리는 것 같은 목소리라 나는 뾰루퉁해져서 그를 조금 흘겼다. 란슬롯은 그런 날 보고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수많은 사고에 하나 더 얹는 게 뭐 어때서?”
“하지만, 하지만 가웨인이 상처 입으면…….”
“안 그래.”
이건 란슬롯의 대답이 아니었다. 물론 아빠의 대답도. 서재 문 앞에서 삐딱하게 선 가웨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날 쳐다봤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내 이마를 꽝 쥐어박았다.
“아팟!”
“괜한 걱정이나 하고.”
“그치만…….”
“그딴 거에 상처 입었으면 난 벌써 골백번 자살했어야 했어.”
“네?”
“난 세상 제일가는 이기주의자가 포진한 집안에서 살아왔다고. 조부님이야 말할 것도 없고, 란슬롯. 형은 그냥 뱀이냐? 독사지, 독사.”
나는 슬쩍 란슬롯을 바라봤지만 은은하게 웃는 표정에는 금도 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난 어릴 때 아버지가 마도구로 만든 기계인 줄 알았어.”
마도구?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봤다. 그는 쯧, 혀를 차곤 대답했다.
“표정, 감정, 뭐 하나도 보이지 않고 무섭기만 엄청 무서운데 사람 같았을까? 어?”
나는 눈을 데구르르 굴리다가 아빠를 한 번, 란슬롯을 다시 한 번 힐끔 쳐다보았다. 아빠는 정말로 기계처럼 표정이 없었고, 란슬롯은 오싹하리만큼 더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더 말하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렇지만 가웨인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과 평생 살았단 말야, 내가. 분노 조절 못 하는 괴팍한 조부와 맹독 가진 독사 형에 기계 아버지. 사소한 것에 상처받았으면 지금까지 못 살았지, 암.”
계속 말하면 정말로 더 못살지도 몰라, 가웨인!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냉기가 풀풀 날리는 아빠와 큰오빠를 쳐다봤다.
“할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와 형은 얼굴도 희멀건 해서 말야. 완전히 귀신―”
―까지 말하고 나서야 아빠와 란슬롯의 시선을 느낀 가웨인이 흠칫했다. 란슬롯이 그런 그에게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서 말했다.
“독사에 귀신이라. 내가 네게 잘못을 많이 했나 보군.”
“자, 잠깐…….”
“얼마나 서운했으면 막내 앞에서 이렇게 맹렬하게 흉을 볼까. 그렇지?”
가웨인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곤 도움을 구하려는 것처럼 아빠를 쳐다봤다. 하지만 아빠는 정말로 기계처럼 침묵했다. 가웨인은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 쳤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세니안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나는 조금도 상처 입지 않았으― 아니, 잠깐, 형! 형님!”
“좋은 말 할 때 오는 게 좋을 텐데.”
“끄악!”
맑은 미소로 가웨인의 뒷덜미를 잡아챈 란슬롯이 그를 문밖으로 질질 끌고 갔다. 저택엔 잠시 둔탁하게 터지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우와, 큰오빠 손 매운가 봐. 얻어터지고 온 가웨인의 얼굴엔 화려한 멍 자국이 가득했다. 가웨인은 붉어진 턱을 매만지며 씩씩거렸다. 나는 그에게 바싹 붙어 앉아 눈가에 달걀을 문질러 주었다.
“그러니까 왜 덤벼요. 큰오빠가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데.”
나도 포털에서 몇 개월이나 지나 돌아왔을 때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났다. 가웨인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차를 마시는 란슬롯을 보며 중얼거렸다.
“언젠가 고발하고 말 거야.”
“기대하고 있으마.”
란슬롯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자 가웨인은 약이 바싹 올라 파르르 떨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래도 소란 때문에 고민할 생각은 쏙 들어갔네.’
내가 으구,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니 그가 버럭 소리쳤다.
“이게 다 너 때문―”
순식간에 아빠와 란슬롯 쪽에서 펜이 각각 날아왔다. 퍽! 가웨인의 이마에 정확히 명중한 그것들이 곧 바닥으로 덜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아기에게 소리치지 마라.”
“막내에게 소리치지 마.”
내가 헤헤 웃었다. 그러자 가웨인의 눈이 가늘어져서 난 얼른 아빠의 의자 뒤로 쏙 숨었다.
“맞아요. 소리치지 마세요.”
“이게…….”
“……그렇지만 오지랖 부린 건 잘못했어요.”
아빠의 목을 끌어안고 웅얼대자 가웨인은 “됐어.”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날 위해서 한 일인 걸 아니까.”
“오빠…….”
조금 감동하고 있으니 가웨인은 씩 웃으며 “반했어?” 하고 물었다. 그러곤 고개를 모로 꼰다.
“역시 나랑 결혼하고 싶지?”
그러자.
“아니지, 나지.”
“나다.”
란슬롯과 아빠가 나 대신 대꾸했다.
……아니, 나는 도미니크와 결혼하고 싶은데.
나는 아빠의 목에서 팔을 풀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진실을 말하면 뒤가 무섭고, 거짓말을 하자니 셋 중 누구를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
“어? 세니아나.”
“막내야.”
“딸.”
차마 대답하지 못하니까 세 남자의 시선이 더욱 집요해졌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입을 뗐지만 잇지 못하고 중얼거리다가 “아!” 소리쳤다.
“저, 저는 할아버지랑 하고 싶어요!”
그때였다. 문 앞에서 무언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시선을 돌리자 서류를 떨어뜨린 할아버지가 엄청나게 감동한 표정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었다.
아빠와 란슬롯, 가웨인은 흙이라도 씹은 것 같았지만 할아버지는 좋아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할아버지와 결혼하고 싶은 것으로 하자고 생각했다.
이튿날, 도미니크가 저택을 찾았다. 그는 어린 시절 황궁을 떠나 있었던 터라 황자로서의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나와 공개 연애를 시작한 뒤 날 보러오는 핑계 겸 할아버지에게 행정 전반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있었다.
로웨나 황비는 할아버지가 도미니크의 교육을 맡게 된 것을 알고 슬쩍 투덜거렸다고 했다. 황태자 또한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에게 교육을 청했지만, 거절당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의 교육이 되게 대단한 모양이야.’
그렇지만 초반엔 걱정이 컸다. 할아버지는 나를 제외한 모두에게 혹독하리만큼 냉정했으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둘은 쿵짝이 잘 맞았다. 도미니크의 과제를 훑어보던 할아버지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주변머리가 아예 없는 편은 아니신 모양입니다.”
“예.”
도미니크 또한 별다른 내색 없이 대꾸했다. 서재의 책장 앞에서 책을 들고 두 사람을 흘끔흘끔 훔쳐보던 나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자 내 곁에서 빈둥대던 오빠들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저하가 칭찬받았잖아요.”
맞아, 맞아. 우리 저하는 안 그래 보여도 주변머리가 있는 편이라고.
속닥이며 한 대답에 가웨인은 “저게? 칭찬?” 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 옆에서 란슬롯은 쿡쿡 웃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따라 조부님께서 기분이 좋아 보이시지.”
다른 때 같으면 속닥거리는 우리 남매에게 할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겠지만, 오늘은 굉장히 점잖은 모습이고 고함 같은 건 한 번도 터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왜인지―
‘기분 좋은 것을 엄청 티 내고 계시네…….’
어깨를 으쓱으쓱하며 도미니크에게 신호를 보내거나, 테이블 아래에서 발을 까딱까딱 흔든다거나. 도미니크는 열심히 모른 체를 했는데, 할아버지가 “흐으음, 흠!” 어색한 콧노래까지 일부러 부르기 시작하자 결국 입을 열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한숨과 함께 ‘옛다’ 하고 던져 준 말에 할아버지의 표정이 단숨에 밝아졌다.
“그래 보이십니까~?”
“……예, 뭐.”
“별일은 아닙니다만―”
“예. 별일 아니셨군요.”
도미니크가 딱 잘라 대답하고 수업이나 하자는 듯 책을 펼쳤다. 그의 행동에 할아버지가 움찔했다.
“궁금하시다니 말씀드리죠.”
“괜찮습니다. 어른의 사생활을 캐물을 수야―”
“제자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 스승의 참된 도리―”
“괜찮습―”
“대답한다니―”
“됐습니다.”
서로 말을 맺기도 전에 파바밧 대답하는 것이 마치 검을 챙, 챙, 챙― 하고 맞대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결국 “아니~ 글쎄~” 하며 저 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곤란하게 됐지 뭡니까. 우리 손녀가 성인인데 아직도 할애비 품에서 빠져나오질 못해요~”
“…….”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질 않나, 결혼하고 싶다질 않나― 어허헛!”
그러고 껄껄껄껄 웃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표정과는 반대로 도미니크의 표정이 썩어들어 가더니 곧 나를 흘깃 쳐다봤다. 나는 움찔하고 책으로 후다닥 얼굴을 가렸다.
“이런 어리광쟁이를 시집보낼 생각만 하면 걱정부터 듭니다. 이거 참. 제 할애비 없이 잠이나 자려는지, 껄껄껄껄.”
“…….”
“아직도 제 할애비가 없으면 안절부절못하고 말입니다~ 우리 손녀가~”
나는 정말로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만, 그만! 제발 그 입을 다무세요! 왜 그러시는 거람. 낯부끄러워 죽겠다…….
“매번 그렇게 할애비가 최고라고~ 어휴, 참! 껄껄껄껄.”
할아버지는 끊임없이 나를 부끄럽게 했고, 도미니크의 시선은 얼마나 따가운지 얼굴이 다 홧홧했다.
수업 후, 도미니크는 역시나 기분이 저조했다. 나는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빠르게 복도를 걷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자, 자기~”
내가 어색하게 그를 붙잡자 도미니크는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향해 스르륵 시선을 돌렸다.
“할아버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텐데요.”
화가 많이 났나 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애써 헤헤 웃었다.
“자기가 있는데 왜 할아버지에게 가요.”
“소중한 할아버님께서 서운해하실 텐데요.”
진짜 많이 났나 보다. 평소엔 내가 화를 풀어 주려고 하기만 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안아 주던 그답지 않게 매우 무뚝뚝한 투였다.
“아니, 저하, 그건…….”
“…….”
“그러니까, 그건 말이죠…….”
나는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웅얼거렸다.
“어, 그게…… 저희 가족이 조금 유별나기는 한데요.”
“조금?”
“아니, 좀 많이…….”
도미니크 입장에선 이렇게 황당한 처가가 어디에 있을까 싶긴 할 거다. 데이트에 몰래 따라 나와 감시할 때도 있었고. 만날 틈을 안 주기 위해 과제를 산더미처럼 준 적도 있었고. 밤늦게 알콩달콩 통신하는 것이 싫었는지 제국의 온 통신 전파를 마비시킨 적도 있었…….
가족들의 온갖 방해를 떠올리던 나는 혀라도 깨물고 싶어졌다. 도미니크가 지금까지 참아온 게 용하다 싶었다.
나라도 남자친구의 가족들이 그와 내 사이를 눈을 까뒤집고 반대한다든가, 도미니크가 없을 때마다 구박하고, 아무리 잘 지내려고 해도 벽을 세우면 화가 날 테니까.
도미니크의 흐린 눈을 본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뭐라도 해야겠다.’
나는 도미니크의 허리를 살짝 끌어안고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자기랑 결혼하고 싶지, 나는.”
“……”
“그런데 할아버지 앞에서도 그렇게 말하면 방해가 더 심해질 테니까…….”
“…….”
“또 과제를 산더미처럼 주고, 사고를 쳐서 자기를 바쁘게 만들면 어떡해요?”
“…….”
“나는 자기를 못 보며 막 눈에 가시가 돋고 그래서…….”
그러고 눈을 붙들고 “아야, 아야.” 하며 아픈 시늉을 했다. 도미니크는 그런 나를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봤다.
이, 이건 아닌가.
화를 돋운 걸까 싶어서 눈치를 보는데 도미니크는 한숨을 푹 내쉬며 내 코를 아프지 않게 쥐었다.
“말이나 못 하면.”
“……화 풀렸어요?”
“예.”
픽 웃은 그는 내 눈가에 입 맞췄다. 그의 목덜미에서 쌉싸름하고 달콤한 향기가 났다.
“우리 온실에서 차 마셔요. 그저께 네메시스 님께 드리려고 디저트를 만들었는데 오늘 먹으면 맛있을 거예요.”
내가 그의 손목을 쥐고 말하자 도미니크의 입매가 부드러워졌다. 나는 지나가던 시트론에게 ‘그것’을 온실로 가져와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도미니크의 팔짱을 낀 후 기분 좋게 위층으로 향했다. 온실 초입에 다다르자마자 도미니크는 주변을 살피더니 문을 슬쩍 밀었다.
“왜요, 저…… 으음.”
입술에 부드러운 것이 달라붙었다.
시트론은 어험험, 헛기침을 하고 테이블에 앉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가씨?”
“어?!”
“더우시면 냉방 장치를 가동시킬까요?”
“아, 아닉! 안 더운덱!”
내가 당황해서 외치자 시트론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얼마쯤 후, 내 맞은편에 앉은 도미니크를 보고는 “아…….” 신음하곤 볼을 조금 붉힌 채로 물러났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하더니 어쩐지 음흉하게 웃고 뒷걸음질 쳤다. 나는 당황해서 “아냐, 좋은 시간 아냐!” 하고 소리쳤으나 그녀는 온실을 빠져나간 뒤였다. 도미니크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찻잔을 들었다. 그게 얄미워서 난 삐쭉대며 말했다.
“왜 나만 당황해요.”
“제가 뭘 했습니까?”
그렇게 진하게 키스해 놓고선 시침을 뚝 떼는 게 기가 막혔다. 평소엔 입맞춤이 부드럽고 다정한 편이었는데 오늘은 엄청나게 격했단 말이다. 벽에 밀어 붙여져서 도망치지도 못하게 뒷머리를 감싸 붙잡고서 입안을…….
입맞춤을 떠올린 나는 더더욱 붉어져서 입술을 깨물었다.
‘화 풀렸다는 거 다 거짓말이었어.’
난 아무렇지 않게 내가 만든 디저트를 맛보는 도미니크를 흘겨보았다.
“……맛있군요. 뭡니까, 이게?”
도미니크의 물음에 나는 찻잔을 들며 대답했다.
“송편이에요.”
“송편?”
“제가 살던 세계의 전통 음식인데 추석이라는 명절 때 먹어요.”
보통은 쑥을 넣어 고운 초록색을 내는데, 나는 일반 꿀떡과 같이 단호박 가루로 황금색을 냈다. 도미니크는 송편을 하나 더 맛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겉은 쫄깃하고, 안은 달콤합니다.”
“흑설탕과 깨소금으로 소를 만들었거든요.”
“묘한 향도 나는데…….”
“쉽게 마르지 말라고 참기름을 발랐어요. 엄청 고소하지요? 원래는 쑥을 넣어서 고운 초록빛을 내도록 해요.”
“이건 쑥은 아닌 듯싶은데요.”
“그분이 쑥을 싫어하실까 봐 단호박 가루를 썼거든요. 쑥차를 즐겨 드시는 걸 알았으면 그냥 쑥송편을 할 걸 그랬어.”
“그분?”
나는 차를 호록,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메시스 님을 드리려고 만들었거든요.”
내가 한숨을 내쉬자 도미니크는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쳐다봤다. 잠시 주저한 나는 “그게…….” 하며 네메시스 님과 가웨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 주던 도미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네……. 작은오빠는 아무렇지 않다고 했지만, 저는 자꾸만 마음이 쓰여요. 왜냐면…….”
“말씀하십시오.”
“이상하게 네메시스 님이 정말로 가웨인을 꺼리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무언가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네메시스 님과 가웨인이 영영 서로에게 멀어진 채 이별하게 될까 봐 아쉬웠다.
“당신의 생각이 맞을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세요?”
“헨델의 성녀, 아니, 새로운 성수가 굳이 프렌시프 공자와 비슷한 모습으로 둔갑해 왔다는 점에서.”
나는 “아!” 하고 소리쳤다.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발렌의 인간형 둔갑체는 가웨인과 꼭 닮았다. 그건 가웨인이 네메시스 님을 닮아서가 아니었다.
가웨인은 할아버지의 젊은 모습 반, 네메시스 님의 모습을 반씩 닮았는데 발렌의 둔갑 모습은 굳이 말하면 네메시스 님보다는 가웨인과 닮았다.
“발렌은 네메시스 님을 몹시 사랑하니까 그분이 사랑하는 모습으로 둔갑해 왔을 수도 있겠어요. 그리고…….”
“쑥.”
“쑥…….”
“헨델의 공주가 프렌시프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일 겁니다.”
도미니크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상황을 설명했다.
“헨델의 왕은 ‘네메시스 님의 아이가 강력한 성녀’이기 때문에 권력을 유지해 왔습니다.”
“즉, 그 이전엔 지금보다 더 힘이 미진한 왕이었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왕의 조카이자 공주의 사촌이 귀족들과 결탁해 네메시스 님을 멀고 먼 길라게온에 보내는 것에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요.”
내가 이해했다고 고개를 주억거리자 도미니크는 “지혜로우시군요.” 하며 내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넘겼다.
“……그러니까 저하의 말씀은 네메시스 님께는 길라게온이 유배지와 같았다는 거군요.”
“제가 듣기로 네메시스 님이 후계 싸움에서 멀어진 이유는 헨델 왕의 권력이 약한 것과 더불어…….”
도미니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후사를 잇기 어려운 약한 몸을 가졌기 때문이었죠.”
그래, 쑥은 각종 부인병에 좋은 약재였다. 도미니크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겠다. 그녀는 유배지와 다름없는 길라게온에서, 약한 자궁으로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낳았다.
‘애정이 완전히 없는 게 아니었어.’
도미니크에게 말하길 잘했다.
“그, 그럼 저하, 역시 제가 실수한 걸까요? 밤에 괜히 그녀를 찾아가서…….”
“글쎄요. 제 생각은 다른데요.”
소서에 찻잔을 달칵, 내려놓은 그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
그게 무슨 뜻일까.
* * *
네메시스의 방 소파에 길게 누워 꾸벅꾸벅 졸던 발렌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네메시스가 테이블이며 협탁 위 등을 뒤지고 있었다.
“뭐 해?”
“…….”
“으응? 네메시스~!”
“……프렌시프의 성녀가 가져온 음식 말이다.”
“노란색 동그란 거. 맛있었어!”
발렌이 헤죽 웃었다.
“……네가 전부 먹은 건가.”
“응!”
그러자 네메시스의 시선이 짙어져서 발렌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는 별말 없이 방을 나섰다. 복도를 걷던 그녀는 손님이 머무는 제3저택의 주방에 이르러 무심코 걸음을 멈추었다.
흘깃,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주방에 들어갔다. 그녀를 졸랑졸랑 따르던 코카스파니엘 모습의 발렌이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네메시스, 뭐 해?”
“…….”
“배고파?”
“……아니.”
그럼 왜 시중인을 부르지 않고 주방에 들어왔지? 대체 뭘 하는 걸까 싶어 유심히 보던 때였다.
덜컹! 주방의 문이 열리고 익숙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주방을 이리저리 뒤지는 네메시스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어처구니없는 목소리에 찬장을 뒤지던 그녀의 손이 우뚝 멎었다. 가웨인은 굳은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는 친모를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뭐 하는 거야.’
친모의 기행을 발견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세니아나가 도미니크와 함께 있다는 말을 듣고 방해하기 위해 지름길인 귀빈 숙소로 왔던 것이다.
친모는 일정이 없을 적엔 방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고, 간혹 귀빈 숙소에 딸린 정원을 산책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곳도 아니고 주방을 찾은 데다가 선반까지 마구잡이로 뒤지고 있었다. 길을 잘못 든 모양은 아닌 것 같았다.
“묻지 않습니까. 무얼 하고 계셨느냐고요.”
“네게 대답할 이유가 없다.”
“이유가 왜 없습니까. 제가 프렌시프 군을 총괄 중인데요. 물론 경비대도요.”
무감한 표정으로 냉장창고 문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는 네메시스를 가웨인은 가만히 바라봤다.
‘대체 뭐야.’
왜 주방을 찾은 거지? 기밀 서류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고용인을 시키면 될 것을. 주방에 있는 귀중한 것이라고 해 봐야 세니아나의 요리 정도…….
그렇게 생각하던 가웨인은 불현듯 세니아나가 네메시스를 찾을 때 요리를 가져갔다는 것을 떠올렸다.
“요리?”
“…….”
“세니아나?”
“…….”
네메시스는 스르륵 눈을 돌렸다. 버리고 간 아들과 재회하고도 눈 한 번 피한 적이 없던 네메시스가 시선을 돌렸다.
“세니아나의 조리장은 따로 있습니다. 저택에선 자주 요리하지 않고요. 정 먹고 싶을 땐 잘 구슬려야 하는데, 제일 잘 먹히는 방법은―”
―까지 말하던 가웨인이 왈칵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왜 이런 얘기까지 알려 주는 거야. 거기까진 관심도 없을 텐데.
가웨인은 “어쨌든 여긴 없으니 돌아가십시오.” 하며 등을 돌렸다.
“제일 잘 먹히는 방법은?”
“……예?”
“말하다 마는 것보다 사람을 우습게 만드는 건 없어. 말해. 들어 줄 테니.”
네메시스의 표정은 뻔뻔했다. 가웨인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잠시 제 친모를 빤히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상대방에게 조언을 구할 땐 ‘부탁합니다’라고 해야 한다더군요. 우리 막내가.”
“…….”
“필요 없으시면 말고―”
그가 다시 문을 나서려고 하자 네메시스가 다급히 외쳤다.
“부탁―!”
그러곤 흠칫하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해.”
“…….”
“부탁한다.”
어쩐지 네메시스의 뺨이 약간 상기된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입술을 깨물곤 중얼거렸다.
“부왕이 식사를 못 하신다. 몸에 이상이 있어 입맛이 없는 듯한데 내게는 까닭을 말씀하시지 않아.”
“…….”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없는 병도 생기는 법이지 않니. 프렌시프 성녀의 요리가 부왕의 입맛에 맞을 듯해. 나와 취향이 비슷하시거든.”
맛있었다, 그건. 단 것은 즐기는 편인데 밀가루가 몸에 맞지 않아서 디저트류는 즐기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은 달콤하고, 쫀득하며 아주 고소했다. 크게 자극적이지 않은 데다가 먹기 좋은 크기라 자꾸만 손이 가는 간식.
팔짱을 끼고 있던 가웨인이 물었다.
“혈육에게 그리 정이 깊은 분이셨습니까.”
“조롱해도 좋아.”
지금까지 그리 매정하게 대하던 아들에게 요리 따위로 부탁하다니. 멍청한 짓이라는 건 네메시스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쓸데없는 말을 했군. 신경 두지 마라. 가 볼 테니.”
“……제일 잘 먹히는 방법은 동정을 구하는 겁니다.”
가웨인의 말에 네메시스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뭐?”
“가령, 최근에 힘든 일이 있다든지.”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세니아나의 요리는 황제라고 하더라도 쉽게 맛볼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네메시스는 이 나이에 음식을 얻어먹자고 가련한 척을 할 순 없지 않냐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곤란한 듯 침음하자 가웨인이 “뭐…….”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메시스 님껜 어려울 겁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죠.”
“다른 방법이라…….”
“중요한 건 세니아나의 기분과 체력이 좋을 때를 노려 부탁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전 날 고된 일을 했다거나 다음 날 일정이 있으면 어렵죠.”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일이었던가. 네메시스는 묘한 얼굴로 이야기에 집중하며 가웨인을 바라보았다.
“다른 방법은 없는 게냐?”
“있죠. 있는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무엇이지?”
“볼 때마다 요리를 해 달라고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한 열흘쯤 하면 귀찮아서라도 만들어 주죠.”
“……어렵군.”
“일단 이렇게 해 봅시다. 세니아나는 카리스마 있는 중년의 여성에게 약하니―”
발렌은 어느새 세니아나 공략에 집중하기 시작한 가웨인과 네메시스를 흐린 눈으로 쳐다봤다. 그 아들에 그 어머니였다. 발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이상한 세계(주방)를 탈출했다.
* * *
이튿날. 나는 정원에 앉아 느긋하게 책을 읽던 중에 이상한 시선을 느꼈다. 책에 집중하는 체하다가 불시에 휙! 고개를 틀자 수풀 사이로 머리가 쑥 내려갔다.
‘또야.’
어제 오후부터 오늘까지만 네 번째였다. 나를 감시하는 기사들을 발견한 게!
또 할아버지가 도미니크와의 사이를 감시하기 위해 사람을 푼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왜냐면 저들은 할아버지 직속 정예병이 아니라, 가웨인의 사람들이었으니까. 나는 팔짱을 끼고서 수풀 사이에 숨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바커스.”
“…….”
“고레일.”
“…….”
“직접 올래, 내가 갈까.”
그제야 수풀이 마구 흔들리더니 아래에서 바커스와 고레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쭈뼛쭈뼛하며 내게 다가와서 난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또 뭔데. 왜 감시하는 건데.”
“감시가 아니라―”
“그래, 감시가 아니라 보호겠지. 이번엔 나를 어떤 것에서 보호하려는 거냐고 묻는 거야.”
바커스는 뒷머리를 벅벅 긁더니 “어, 그게…… 안 좋은 기분에서?” 하고 중얼거렸다.
그건 뭔데? 나는 기가 막혀서 “에엥?” 하고 입을 벌렸다. 내 모습에 고레일은 바커스의 장딴지를 퍽, 걷어찼다.
“억!”
나는 ‘그래그래, 고레일이 말해 봐.’ 하는 눈으로 기사들을 보았다.
“아가씨의 기분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내 기분을 왜……?”
“까닭은 듣지 못했습니다.”
“작은오빠가 시킨 거지?”
“……예.”
“작은오빠가 내 기분을 살피는 건, 으음…….”
나는 벌떡 일어나서 물었다.
“또 사고 쳤구나!”
“예?”
가웨인이 내 기분을 살피는 거라면 뻔하지.
나는 어휴, 한숨을 내쉬고 책을 정리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빠와 오빠들, 할아버지가 모여 있는 서재로 향했다. 가족들의 찻잔에 차를 따르고 있던 집사와 시중인들이 나를 보고 고개를 가볍게 숙이곤 벽가로 물러났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쿠키를 와작와작 씹고 있는 가웨인에게 다가갔다.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고 그를 보다가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화 안 났으니까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네?”
“뭐?”
“저번처럼 제 조리실을 박살 내셨나요?”
가웨인은 얼마 전 내 레시피 개발을 돕겠다고 와서는 조리실을 박살 냈었다.
[이상하다. 나는 이 이상한 마도구를 작동시킨 것뿐인데 폭발해 버렸어.]
[전자레인지라는 거예요. 전자레인지에 포일을 넣으면 폭발한답니다.]
[이상하다. 나는 칼질을 한 것뿐인데 날이 다 상해 버렸어.]
[아무리 도마라도 거기에 난타를 치면 안 돼요…….]
[이상하다. 나는 닭을 씻으려고 한 것뿐인데―]
그때의 참상을 떠올린 나는 가까스로 표정을 관리했다. 가웨인은 그런 날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일전에 파티에서 제게 고백한 영식을 때리셨나요?”
저번에 오드몽테 백작의 외동아들을 두드려 팬 것처럼.
“아직 아니야.”
“도미니크 저하를 구박하신 거예요?”
“오늘은 아니야.”
“설마…… 또 제 황금상 세우셨어요?”
포털에서 돌아온 뒤 제일 기함한 일이었다. 황궁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까 저택 앞에 엄청나게 큰 <세니아나가 제일 귀여워>라는 이름의 황금상이 서 있었다.
얼마나 큰지 로웨나 황비까지 몸소 저택 앞을 찾아서 구경하고 갔다. 그녀가 깔깔 웃는 소리가 내 침실에까지 들렸다. 그것 때문에 창피해서 며칠을 집안에만 있었다. 그런 것에 돈을 펑펑 쓰며 낭비한 게 어처구니없었고, 화가 나 한동안 가웨인과 말도 안 했다.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네? 팔뚝만 한 크기의 황금상이라면 용서해 드릴게요. 지난번처럼 5미터나 되는 건 곤란하지만.”
내 말을 듣던 란슬롯이 고개를 푹 수그리고 끅끅 웃었다. 벽가에 서 있던 사용인들도 소리 없이 어깨를 떨었다. 가웨인은 울컥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아니라니까!”
“그럼 왜 제게 감시를 붙이셨는데요!”
내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눈을 부릅떴다. 그라자 가웨인이 움찔하더니 “그, 그건…….” 하며 당황했다.
“역시 무슨 일을 하신 거지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헨델 녀석들이 네게 뭔 짓을 할까 봐서…… 어! 그런 거지!”
그렇게 말한 가웨인이 갑자기 서류를 번쩍 들며 “이 녀석들 내가 없다고 훈련을 개판으로 하는군!” 하며 일어났다.
“혼을 내야겠어!”
엄청나게 어색하게 말하곤 후다닥 서재를 빠져나갔다. 나는 “흐으음…….” 신음했다.
“사고 친 것 같은데. 아니면 사고 칠 준비 중이라든지…….”
내가 중얼거리자 란슬롯과 아빠가 픽 웃었다. 그런 와중에 할아버지가 중얼거렸다.
“황금상이라…….”
그때 할아버지는 영지에 있던지라 황금상 사건을 잘 몰랐다. 황금상, 황금상. 몇 번이나 중얼거린 할아버지가 턱을 쓰다듬으며 일어나 서재를 나섰다. 란슬롯이 그런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턱을 괴었다.
“아무래도 사고는 다른 사람이 칠 예정인 것 같은데.”
“네?”
무슨 말이람.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아빠가 란슬롯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말리지 그러냐.”
“글쎄요. 재미있는데요.”
“성격이 나쁘군.”
“하지만 지난번처럼 세니아나가 토라져서 아버지와 제게만 달라붙어 지내면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자 아빠가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댄 채로 말했다.
“입 다물고 있도록 하지.”
“예.”
나는 두 남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데?
* * *
어두운 방. 자색의 조명 앞에 모인 남녀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작을 들켰습니다. 플랜A는 이쯤에서 중지하는 게 여러모로 안전한 듯싶습니다.”
남자의 말에 여자는 고개를 느른히 젓고는 다리를 꼬았다.
“차라리 지금 세작을 들킨 것이 잘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들로 눈을 가리고 또 다른 세작을 투입한다.”
“하지만 위험합니다.”
“어리석군. 대장부가 이깟 일에 겁을 먹고 물러선단 말이냐.”
날카로운 눈으로 테이블을 노려보던 남자는 결심을 마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래.”
“지금 새로운 세작을 투입하는 것보다는 변절자를 만들어 내는 건 어떨는지요.”
“훌륭하다.”
두 사람이 고민을 거듭하는 동안 멀찍이 떨어져 있던 이가 고개를 들었다.
“뭐 해?”
“…….”
“…….”
두 사람에게서 대답이 없자 발렌이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커튼 쳐. 어두운 거 싫단 말야!”
모자가 붙어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어휴. 한숨을 내쉰 발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나는 창고에 들러 한참 동안 가브리엘라 이모에게 쓸 편지지를 골랐다. 분홍색도 예쁜 것 같고 보라색도 좋은데……. 아, 말린 꽃을 붙인 이 흰색도 예쁘다. 고민을 거듭하는 와중에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곤란합니다!”
마릴린의 목소리였다. 뒤이어 그녀의 도도한 “흥!” 콧방귀와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부탁드립니다.”
이 목소리는 가웨인의 부관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안 돼요. 제 충심을 어떻게 보시고……!”
“칼립스 님과의 데이트는 어떻습니까.”
“데, 데이트?”
조금 전만 해도 단호히 거절하던 마릴린은 데이트라는 말에 잠시 침묵했다.
“프렌시프의 명예를 걸고 약조합니다. 제가 주선하겠습니다. 두 분의 데이트.”
아니, 무슨 일이길래 프렌시프의 명예까지 나오는 거지? 나는 고르던 편지지를 내려놓고 창고 문을 향해 다가갔다. 마릴린이 갈등하며 다리를 달달 떠는 것이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보였다. 그러다가 결심했는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그럼 조금만…….”
“예, 예! 조금이라도 좋습니다!”
“아가씨의 기분은 괜찮은 편이에요. 오늘도 사용인들에게 다정하셨고. 뭐, 우리 아가씨야 늘 성품이 다정하시지만.”
“요리는 언제쯤 하실까요……?”
“글쎄요. 산책 루트를 조리장 쪽으로 잡아 보긴 하겠어요.”
“감사합―!”
“뭐가?”
내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자 마릴린과 가웨인의 부관이 얼어붙었다.
“아, 아, 아가씨. 여, 여, 여기 계셨어요?”
마릴린이 사색이 된 얼굴로 물어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응, 편지지 고르고 있었어. 아무튼 뭔데. 왜 내 기분을 살펴? 조리장은 또 뭐고?”
가웨인의 기사는 사색이 되어 얼어붙었고, 마릴린은 희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더니 곧 철푸덕 엎어져 고개를 조아렸다.
“죽여 주세요, 아가씨!”
“으응?”
“제가 물욕에 눈이 멀어서 충심을……! 어흐흑!”
난데없이 역적 놀이를 하는 마릴린을 보고 난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이제 눈물까지 비치고 있었다. 그러던 때, 창고 앞으로 하얀 코카스파니엘 한 마리가 자박자박 걸어왔다.
“발렌!”
나는 발렌에게 후다닥 달려가 꽉 끌어안았다.
“오늘도 귀엽구나.”
“이거 놔, 바보! 바보!”
“털이 복슬복슬…….”
발렌은 에잇! 하고 내 얼굴을 밀더니 코를 실룩였다.
“요리 해 줘.”
“무슨 요리?”
“저번에 가져온 거 말야. 노랗고 동그란 거.”
송편? 눈을 동그랗게 뜬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웃었다.
“그러지 뭐.”
발렌은 내 품에서 폴짝 뛰어내리더니 어휴우……, 길게 한숨을 내쉬고 종알댔다.
“이렇게 쉬운걸. 바보들.”
―하고.
나는 발렌과 함께 내 전용 조리장으로 향했다. 황도 저택의 조리장은 삿된 자들의 습격 이후 무너진 건물을 수리하며 새로 지은 것이었다.
내 키에 맞춘 조리 테이블과 싱크대, 오븐 등. 모든 것이 오더 메이드인 데다 내 의사를 백 퍼센트 수용해 만들어진 곳이라 동선까지 완벽했다.
‘그래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즐겁지.’
나는 반짝반짝한 조리실을 둘러보고 히히, 웃었다.
‘최근엔 바빠서 자주 못 왔는데, 시트론이 잘 관리했나 보다.’
나는 털이 날릴까 봐서 발렌을 멀찍이 치워 두고 요리를 시작했다. 우선 쌀가루에 단호박 가루, 쑥 가루, 혹은 비트 가루를 종류별로 넣은 뒤에 끓는 물을 조금씩 넣어 반죽을 만들었다. 적당히 차진 반죽 위에 마르지 말라고 물기 머금은 천을 올려 두었다.
다음은 송편 소.
‘기본은 깨소금과 설탕, 꿀을 넣은 꾸덕하고 달콤한 소로 하자.’
단호박과 밤을 잘 으깨 꿀과 우유를 넣은 소. 달콤한 팥 소. 소를 모두 준비한 후엔 아까 만든 반죽에 소를 잘 싸서 예쁘게 빚는다.
“예뻐~!”
나는 싱크대를 붙잡고 끙끙거리며 선 발렌에게 “에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쪽으로 가 있어. 털이 들어간단 말야.”
“치사해!”
코를 실룩이며 자리로 되돌아가는 발렌을 흘깃 보며 나는 송편을 빚었다.
“전에 아탈란에 의해 다른 세계로 간 적이 있었거든. 그쪽에선 송편을 예쁘게 빚으면 예쁜 딸을 낳는다는 말이 있었어.”
“너는 되게 예쁜 딸을 낳겠네?”
“그러면 좋겠다.”
다 빚은 후엔 찜기에 넣고 찌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난 송편을 찌는 동안 남은 재료를 밀봉해 두거나 그릇을 씻거나 하며 어지러워진 주방을 바쁘게 정리했다. 소중한 내 주방. 청소하는 건 하나도 귀찮지 않았다. 얼마쯤 뒤, 송편을 찔러 보았다.
“잘 익었다. 맛볼래?”
“응!”
그릇에 하나를 담아 내려 주자 발렌은 “아뜨! 뜨거워!” 하면서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난 킥킥 웃고 남은 송편을 잘 담아 주었다.
“자, 더 먹어.”
“으으음……. 나는 됐어…….”
“더 먹어도 돼. 하나밖에 안 먹었잖아?”
“그치만…… 그치만…….”
발렌은 눈을 꾹 감으며 애써 그릇을 외면한 채 내 다리에 매달려 말했다.
“이거 싸 줘. 네메시스에게 줄 거야.”
“네메시스 님?”
“네메시스가 좋아해. 카노타에게도 가져다줄 거래.”
카노타라면 가웨인의 외조부인 헨델 왕이잖아?
“무슨 말이야? 자세히 얘기해 줘.”
내가 쪼그려 앉아 캐물으니 발렌은 조금 주저했지만, 곧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귀빈 방 안, 친밀함과는 거리가 먼 모자가 앉아 있었다. 가웨인은 햇볕이 내리쬐는 창 아래서 헨델의 지난주 자의 신문을 읽는 네메시스를 훔쳐보았다.
“할 말 있니?”
네메시스가 묻자 가웨인은 흠칫, 고개를 돌렸다. 잠시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가웨인은 묵묵했다. 모자는 지금, 매우 우스운 관계였다. 세니아나의 요리를 받아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슨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지조차 모르는.
가웨인은 입안의 여린 살을 질끈 물고 가까스로 말을 뱉어 냈다.
“언제 돌아가십니까.”
“너희 성녀는 내게 힘을 빌려줄 용의가 없는 듯하니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지.”
“…….”
“내가 서둘러 돌아가야 너도 편하겠지.”
가웨인이 홱,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얼른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겠네요.”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진심과 달랐다. 더 있어 봤자 뭐하겠어. 어차피 내가 필요 없어지면 다시 얼음장처럼 냉랭할 텐데. 또 속만 쓰릴 뿐이다. 어깨를 늘어뜨린 가웨인이 티 테이블에 널브러진 낙서(세니아나의 요리를 얻어 내기 위한 계획표)를 들고 일어났다.
“쉬십시오.”
“……그래.”
방을 나선 가웨인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땅거미가 지는 오후, 해가 지는 것이 이렇게나 빠르다.
* * *
프렌시프의 가신 푸아티에 자작은 헨델의 사절단이 온 후로 내내 기분이 좋았다.
“오, 노스뱅 경.”
“아…….”
“잘 지냈는가.”
그가 서류를 끌어안고 걷던 젊은 가신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예, 뭐…….”
아탈란의 거사가 물거품이 된 후, 영지를 재건하며 자연스럽게 가신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노스뱅 경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렌시프의 가신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햇병아리였다.
“이런, 이런. 여전히 서류에 파묻혀 사는가 보군.”
“그렇지도 않습니다.”
“언제까지 잔일만 할 텐가. 이제 노스뱅도 큰일을 해야지. 본가의 서류처리나 돕다가 퇴직한 아비처럼 되지는 말아야 해.”
노스뱅 경이 두꺼운 안경을 올리며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푸아티에 자작이 느물느물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이 프렌시프가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네.”
“예?”
“프렌시프의 발전이 어찌 본가의 공뿐이겠는가. 다 아래서 받쳐 주고, 옆에서 밀어준 덕이지. 가신들의 노고가 없다면 이만한 부흥이 가당키나 한가?”
“그건…….”
자작은 노스뱅 경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가가 화목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한 것은 보기에는 좋지만 사실 가문엔 독이지.”
“무슨 말씀을…….”
“설탕 과자가 너무 과하면 성인병이 오는 법이거든.”
본가에서 치고받고 싸워 줘야 콩고물도 떨어지고, 가신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근래의 프렌시프는 세니아나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
“마담 버지니아와 파르뎅은 그저 본가를 위하는 것이 가문에 이로운 일인 줄 아는데, 사실 전혀 아니거든.”
주축인 버지니아와 파르뎅이 횡령에 눈도 좀 감아 주고, 본가를 조여서 균형을 맞춰 줘야 일할 기분도 나고 그러는 거지.
푸아티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노스뱅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버지니아와 파르뎅의 당파가 우세한 것은 그 둘이 아가씨의 사람이라 겁을 먹은 게지.”
“그야, 뭐…….”
재앙과 같던 삿된 자들도 물리친 사람이니 연약한 인간들이야 아가씨 앞에선 풍랑 앞의 촛불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흐름이 우리에게 왔네.”
“예?”
“헨델의 성녀 말일세. 사사롭게는 가웨인 도련님과 혈연이지 않은가. 그러니 성녀는 프렌시프의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겠나.”
“아가씨는 각하의 친자식이지만 헨델의 성녀는 아니지 않습니까. 당연히 친자식인 아가씨 쪽에 힘이 쏠릴 텐데요.”
“지금이야 그렇겠지. 하지만 어르신과 각하께서 물러나신 후엔 다르다네.”
후계로 교육된 란슬롯과 병권을 가진 가웨인이 박 터지게 싸울 때, 헨델의 성녀는 집안의 균형을 맞춰 줄 존재였다.
“아탈란 사건으로 세니아나 아가씨는 힘의 대부분을 잃고 포털만 겨우 열 수 있어. 하지만 헨델의 성녀를 보게. 헨델에서 길라게온까지 한 번에 배를 옮겼다고.”
“…….”
“힘에서부터 비교가 안 된단 말이야, 두 사람은. 우리가 모여 가웨인 도련님께 힘이 되어 드리면 후작 위가 누구의 것이 되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난 말일세. 란슬롯 도련님이 후작위에 적합한 분이라 여기지 않네.”
란슬롯은 타고난 인재였다. 나기를 무장으로 난 가웨인은 주먹다짐으로 가계를 운영할 터이나, 란슬롯은 다르다. 석 달 열흘 동안 꼬박 공들여 조작한 장부를 한눈에 알아보질 않나, 가신들이 똘똘 뭉친다 싶으면 웃으며 파탄을 내질 않나.
그가 가주가 된다면 콩고물을 얻어먹기는커녕 피골이 상접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꽤 많은 가신들의 아내가 내 부인의 살롱을 찾는다네. 헨델의 성녀가 온 후로는 더더욱.”
“…….”
“자네의 아내에게도 초대장을 보내라 일러두지.”
노스뱅 경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자 푸아티에 자작은 음흉하게 웃었다. 그와 대화를 마치고 걷는 자작의 뒤로 수많은 가신들이 따라붙었다.
“헨델의 성녀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셨습니까?”
“네메시스 님의 의사는 어떻더이까?”
그러자 푸아티에 자작이 쯧,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귀빈 룸의 감시가 어찌나 삼엄한지 나돌아다니는 것은 웬 개 한 마리뿐이더군.”
“계획이 물거품 되는 게 아닙니까? 이러다 헨델로 돌아가게 되면―”
“흥, 프렌시프 후작의 힘이면 헨델에서도 위세를 뽐낼 수 있어. 머리가 빈 게 아니라면 우리 제안을 거절할 리 없잖은가.”
“그, 그럼…….”
“내 헨델의 사절단을 통해 헨델 왕에게 서신을 전달할 걸세. 네메시스와 헨델의 성녀는 곧 다시 길라게온을 찾을 게야.”
그때는 분명 욕망에 불타게 되겠지. 푸아티에 자작이 창 너머로 보이는 귀빈 룸을 보며 씩 웃었다.
* * *
그날 저녁.
“네메시스 님이 떠나신다고요?!”
나는 깜짝 놀라서 란슬롯을 붙들고 물었다.
“네메시스 님이 오늘 새벽에 아버님께 돌아가겠다는 말씀을 전하신 모양이야.”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 발렌이 엘트라의 사신단을 돌려보내 줘야 하잖아요.”
“발렌만 남겨 두고 가신다고 해. 일이 끝나면 다시 헨델로 귀환하는 것으로 폐하와 이야기를 끝냈나 봐.”
그야 황제는 허락했겠지. 잘만 되면 성녀라고 생각하는 발렌을 억류시켜 놓을 수도 있으니 제국엔 좋은 일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난데없이…….’
가웨인이 서운해할 텐데.
“네메시스 님은 언제 떠나시는데요?”
“해가 지기 전에 출발하셨어.”
내가 조리실에서 발렌과 함께 있을 때 출발했나 보다.
‘그럼 지금쯤 항구에 도착했을지도 몰라.’
배를 타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포털로 이동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성수가 세 마리나 있던 때와 비교하면 내 힘은 매우 약해져서 배 채로 옮길 수도 없었다. 운이 나쁘면 바다 한가운데에 빠져 표류할 수도 있다.
나는 란슬롯을 두고 얼른 복도를 내달렸다. 헉헉, 숨을 몰아쉬고 가웨인의 방을 벌컥 열었다. 소파에 앉아 무언가를 보고 있던 가웨인이 고개를 돌렸다.
“오빠, 네메시스 님이……!”
“들었어.”
“이렇게 계시면 어떻게 해요! 아직 못다 한 얘기가 많을 텐데!”
“됐어. 그냥 그 정도였던 거야.”
가웨인은 테이블 위에 놓인 양피지를 물끄러미 보며 “그 정도…….” 하고 중얼거렸다. 양피지 위에 빼곡히 적힌 것은 계획표였다. 내 요리를 얻어 내기 위한.
양피지 끄트머리에 적힌 저 낯선 필체는 아마도 네메시스 님의 것일 터다. 나는 가웨인의 손목을 홱! 끌어당겼다.
“가요.”
“됐다니―”
“가자니까, 바보!”
“…….”
난 그를 끌고 내 조리장으로 향했다. 거기엔 완성된 송편과 요리가 있었다. 송편 외의 요리는 모두 가웨인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이걸 만드느라 시간이 너무 걸렸어.’
나는 후다닥 찬합에 요리를 싸서 가웨인에게 들려 주었다.
“이제 가요.”
“세니아나, 나는…….”
나는 양손으로 가웨인의 뺨을 탁! 소리가 나게 쥔 채 인상을 찌푸렸다.
“오빠는 매번 제게 바보라고 하지만, 제가 보기엔 오빠가 더 바보예요.”
“……뭐?”
“네메시스 님이 정말로 제 요리를 헨델의 폐하께 가져다드리려고 그런 우스운 작전을 함께 짰겠어요?”
가웨인은 미간을 좁히며 무슨 소리냐고 물었고,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제 요리가 아주 탐났을 수도 있죠. 왜냐면 내 요리는 아주 맛있으니까!”
기세등등하게 말하다가 가웨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고서 말했다.
“그런데요. 제가 본 네메시스 님이라면 그런 우스운 작전 같은 건 세우지 않았을 거예요.”
“그럼 왜…….”
“왜긴요. 오빠랑 놀아 주려고 그런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답답해서 가슴을 쿵! 쿵! 치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다.
길라게온을 유배지처럼 여긴 데다가 몸이 약한 네메시스 님이 가웨인을 포기하지 않고 낳은 것. 아이를 낳은 후로 몸이 너무나 망가져 부인병에 좋은, 쑥 같은 음식을 달고 살지만 다른 사람에겐 내색조차 하지 않은 것. 그리고 성수인 발렌이 가웨인과 비슷한 모습으로 둔갑하고 있던 것.
모든 이야기를 들은 가웨인은 한동안 침묵했고, 난 그런 그의 손을 잡았다.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이 서툰 분이니까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 드리세요.”
“내가 어떻게…….”
“오빠가 나를 사랑하듯이.”
“…….”
“그렇게 다정하고 상냥하게.”
나는 오빠의 목을 꽉 끌어안고서 말했다.
“난 오빠가 날 사랑해 줄 때마다 너무너무 행복하니까 오빠의 사랑은 분명 옳은 거야.”
가웨인이 나를 부드럽게 떼어 내고서 시선을 맞추었다. 지긋이 내 얼굴을 응시하던 그가 말했다.
“포털, 열어 줄래?”
“네! 아차, 그런데…… 어제 북부의 요청으로 포털을 열어서 한 번에 못 갈 수도…… 앗!”
“왜?”
“방법이 있어요!”
나는 가웨인을 조리실에 두고 또 내달렸다. 내내 뛰어다니기만 해서 등이 땀으로 흥건했지만 멈추지 않고 귀빈 방 안으로 들어갔다.
네메시스 님의 짐이 없는 방에 홀로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발렌이 보였다. 발렌은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날 보고 놀란 듯 눈을 끔뻑였다.
“뭐, 뭐야.”
난 무릎을 잡고 숨을 몰아쉬다가 당황한 발렌을 향해 한 팔을 쭉 뻗었다.
“너 내 성수가 돼라.”
“……?”
“…….”
왠지 밀짚으로 된 모자를 쓰고 있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라 나는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아, 아무튼 내 성수 해. 네 길을 쓰게 해 줘.”
웃기지 말라고 일축할 것 같았던 발렌이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리더니 물었다.
“어디로 갈 건데?”
목적지는 하나다. 네메시스 님을 붙잡으러 가야 하니까.
“바다로!”
그런데 왜 자꾸 밀짚으로 된 모자를 써야 할 것 같은 기분일까.
순간, 발렌의 허상이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뒤이어 땅이 가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미약한 진동이 얼마 지나지 않아 거센 지진이 되어 천지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구우우우웅―! 실낱같은 보라색 빛이 발렌을 감싸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눈부신 빛무리가 방 안 가득 펼쳐졌다. 그리고 눈앞에 은빛 갈기를 가진 아름다운 늑대로 거대화한 발렌이 나타났다.
처음으로 본체를 드러낸 발렌은 힘을 제어하지 못했고, 다른 성수 때와 달리 지진이 조금씩 강해졌다.
‘그렇지, 성수를 제어하려면 성녀가 이름을 불러야 해.’
“발렌!”
이름을 불렀으나 멈추기는커녕 벽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진정해, 발―!”
“크르릉!”
완전히 이지를 잃은 모양인지 그는 나를 향해 거대하고도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며 위협했다.
“컹!”
방아쇠를 당긴 것처럼 둔탁한 포효와 함께 눈이 새빨개진 발렌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겁에 질린 내가 뒷걸음질 치며 눈을 감았을 때였다.
[주인, 그대는 우리의 신이자 피조물, 기쁨과 슬픔, 영광이며 회한이오. 그 무엇도 될 수 있고, 그 무엇도 아닐 수 있지.]
[우리는 주인의 감정에 공명한다오. 그러니 쉽게 주저앉지도 말고, 그 어떤 것에도 눈 돌리지 마시오. 우리에게 신이며 기쁨, 영광으로 남아 주길 청하오.]
멀린의 다정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는 이를 악물며 눈을 떴다. 그리고 달려오는 발렌을 향해 팔을 넓게 펼쳤다.
“진정해, 발렌!”
“크르르릉…….”
“나는 네가 무섭지 않아. 그러니까 너도 내가 무섭지 않을 거야.”
“크릉…….”
나는 송곳니를 드러낸 발렌을 향해 후들후들 떨리는 발을 내디뎠다.
“괜찮아. 괜찮아, 발렌.”
“…….”
씨익, 씩……. 거친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난 조심스럽게 발렌의 갈기에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아 오는 감촉이 몹시 보드라웠다.
“옳지, 착하다.”
새빨갛게 충혈되었던 눈이 조금씩 제 색을 찾았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제비꽃의 색. 그 애의 얼굴을 다정하게 매만진 순간 머릿속에 누군가 알려 준 것처럼 단어가 떠올랐다.
“발렌시아.”
또 한 번 빛이 퍼지고, “캥!” 우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머리가 개운해.”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목소리. 빛이 발렌의 몸을 감쌀 때 눈이 부셔서 감았던 눈을 살짝 뜬 나는 “으아앗!” 소리를 내며 휙 등을 돌렸다.
아니, 왜! 성수들은 인간형이 될 때마다 옷을 입고 있었는데 발렌은 왜 이렇게 홀딱 벗고 있는 거야!
적보라색의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제 손을 내려다보며 “흐음.” 신음했다. 강아지 모습일 때는 귀엽고, 소녀로 둔갑했을 때는 어여쁜 편이었는데, 인간체의 본모습, 그러니까 남성체일 때는 전혀 달랐다. 귀엽다기보다는 잘생겼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엄청 어리광쟁이라 테디만 할 줄 알았더니 더 크잖아.’
남성체를 인간의 나이로 보면 테디가 열일곱쯤인데, 발렌은 스무 살은 더 되어 보였다.
“오랜만이네, 이 모습.”
게다가 목소리까지 완전히 성인의 것이었다. 뒤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흠칫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발렌이 빙그레 웃으며 내 어깨 위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약간 곱슬기 있는 결 좋은 머리칼에선 달콤한 꽃내음이 풍겼다.
“자.”
“어?!”
“내 마원.”
그가 씩 웃으며 어느 틈에 내 목에 걸려 있는 펜던트의 원석을 툭, 쳤다.
“헨델 왕가의 가보라고. 소중히 해야 한다?”
“아……. 이거 걸어 주려고 했구나.”
그는 눈을 사르르 눈을 접으며 “그럼 내가 입이라도 맞출 줄 알았어?” 하고 물었다.
“아니, 변탠 줄 알았지.”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따귀를 날릴 뻔했네…….”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발렌은 “칫.”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그는 어느새 옷까지 입고 있었다. 다행이다. 새로운 성수가 변태가 아니라서.
“좋아, 발렌. 이제 가자.”
가웨인이 기다리는 조리실로 향하려다 멈칫하고 발렌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배시시 웃자 발렌은 “뭐 잘못 먹었어?”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내가 달릴 필요 없잖아.”
“포털이라도 열려고? 살살하지그래? 아무리 나라도 정확한 위치를 모르면 힘이 든다고.”
그렇겠지. 정확한 위치를 알고 방아쇠를 당기는 건 총알 하나만 쓰면 끝나지만, 위치를 모르고 쓰게 되면 난사 수준으로 엄청난 총알을 낭비하게 될 테니까.
“아니, ‘내’가 달릴 필요가 없단 말이야.”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너, 나빠! 나쁘다고!”
늑대로 변한 발렌은 나를 태운 채로 내달리며 꽥꽥 소리쳤다.
‘다행이야. 다시 어리광쟁이로 돌아왔어.’
뇌쇄 미남인 체하던 발렌은 좀 재수가 없었던지라 난 흐뭇한 얼굴로 목덜미를 두들겼다.
“나를 이동수단으로 쓰다니, 무엄해!”
그가 빽 소리를 치며 조리실을 지나가서 난 목덜미 털을 당기며 “저쪽!” 하고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꺄아아아악―!”
우리가 조리실을 향하는 동안 거대한 늑대를 본 사용인들은 입에 거품이라도 물 것처럼 비명을 내질렀다.
“꺄악! 아가씨가 늑대에게……!”
“경비병! 경비병! 늑대가 아가씨를 물어가요!”
“왜들 소란이야. 호랑이와 곰, 여우도 한 번에 본 마당에.”
“하지만 아가씨의 성수는 아탈란 사건으로……!”
“하나 더 주우신 모양이지.”
“그, 그런가. 하기야…… 우리 아가씨라면 어디 길바닥에서 성수를 주워 왔을 수도…….”
그들 중 몇몇이 너무 침착해서 외려 내가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발렌을 탄 나는 조리장을 박차고 들어갔다. 찬합을 들고 있던 가웨인이 눈을 홉뜨고 날 쳐다봤다.
“너……!”
“얘 발렌이에요. 이제 제 성수 하기로 했어요. 항구로 모셔다드릴게요.”
발렌의 정체를 알고 있던 가웨인은 별말 없이 늑대를 응시했다.
“위험하니까 타고 다니진 마.”
“네.”
발렌은 “할 말은 그게 다야?” 하며 앙칼지게 소리쳤으나, 난 곧장 발렌을 마원화했다. 그리고 오빠의 손목을 덥석 잡고 위치를 생각했다.
‘오후에 떠났고, 헨델 행 배를 타려면 르블랑 항구일 거야.’
펜던트를 잡은 채로 눈을 꽉 감았다. 짠 바다 내음이 코끝으로 밀려온다. 슬쩍 눈을 뜨니 역시나 항구. 난 얼른 주변을 살폈다. 밤이라 어두워 얼굴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여긴 아냐.’
으슥할 정도로 인적이 드문 데다가 헨델 사절단이 탈 만큼 으리으리한 배는 코빼기도 뵈지 않았다.
‘다시.’
이동. 여기도 아냐. 이동. 아니잖아! 이동.
성수가 있어도 단시간에 몇 번이나 이동해서 그런지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샛노란 얼굴로 헥헥거리니 가웨인은 내 어깨를 쥐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아직이에요.”
“세니아나, 나는…….”
“어허!”
난 소리치고서 가웨인을 노려보았다.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사람은 프렌시프의 핏줄이 아니에요. 아빠랑 할아버지한테 다 이를 거야.”
그러자 펜던트에서 발렌이 “이히힛!”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난 내 어깨를 쥔 오빠의 손등 위에 손을 포갰다.
“밤새도록 해 봐요. 바다 한가운데라도 좋아. 오빠한테 후회만 남지 않는다면.”
“너…….”
“되게 착한 동생이죠, 나?”
내가 일부러 의기양양하게 말하자 가웨인은 졌다는 듯 내 머리를 비볐다. 그때였다.
“아가씨?”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와 가웨인이 그곳을 쳐다보자 헨델의 사신단과 함께 있는 고레일과 빅터가 보였다.
‘뭐야, 둘이 호위하는 줄 알았으면 통신을 해 볼걸.’
괜히 힘만 낭비한 것 같아서 한숨이 나왔으나, 일단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난 가웨인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가웨인이 엉거주춤 앞으로 나서자 사람들 사이에 있던 네메시스 님이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가웨인은 천천히 발을 내디뎌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찬합을 불쑥 내밀었다.
“무엇이냐.”
“……세니아나의 요립니다.”
네메시스 님은 찬합을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다.
“일부러 가져와 준 것이냐.”
“예.”
“그래.”
“제가, 귀국하시는 게 편하다고 했던 말에 이리 서둘러 가시는 겁니까.”
“……그뿐인 건 아냐. 부왕의 용태도 살펴야 하고.”
마주 본 모자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건 가웨인이었다.
“또 오실 겁니까?”
“그건―”
“오세요.”
고개 든 그는 네메시스 님과 시선을 똑바로 맞추었다.
“……다음엔 그런 핑계 없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가웨인이 찬합을 힐끗 쳐다보자 네메시스 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혹여나 가웨인이 용기를 내서 필사적으로 한 말을 그녀가 거절할까 싶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데.
“사과하마.”
“……예?”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외면한 것.”
[사과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네메시스 님의 아이가 당신을 줄곧 사랑해 왔음을 외면하신 것이요.]
가웨인의 낮은 웃음소리가 어두운 바다에 가라앉았다.
“예.”
“…….”
“예, 어머니.”
처음이었다. 그가 네메시스 님을 ‘어머니’라고 부른 것은.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었고, 나는 왜인지 코가 시큰했다. 나는 무심코 펜던트를 꽉 말아 쥐었다. 발렌의 펜던트 또한 내 코만큼이나 뜨거웠다. 가웨인을 바라보고 있던 네메시스 님이 느른히 그를 지나쳐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움찔, 어깨를 좁혔다. 그녀가 물었다.
“왜?”
“그냥, 그냥…… 제 어머니와 비슷한 것 같아서…… 얼굴이 아니라 뭐랄까, 미소가…… 다, 다정하셔서요.”
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거람. 나는 횡설수설 말한 것이 부끄러워서 우물쭈물하며 화제를 돌렸다.
“저, 저기, 이번 제국행이 네메시스 님께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좋은 기억일 것 같아서…….”
“좋은 기억이지. 아이가 둘이나 생겼으니까. 다시 찾은 아이와 새로운 아이.”
둘이나?
‘가웨인 말고 누구?’
눈을 동그랗게 뜨자 네메시스 님이 손등으로 내 눈가를 가볍게 매만졌다.
“발렌을 잘 부탁해. 일이 끝나면 잠시 돌려 보내다오. 우리에게도 귀한 아이거든.”
“……아! 네, 넷!”
우리를 보는 가웨인의 표정이 부드러웠다. 그녀는 볼이 발그레해진 나를 보며 픽 웃고선 로브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선물이다.”
……선물? 나는 그녀가 건넨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 * *
이튿날, 푸아티에 자작은 일찌감치 저택을 찾았다. 가신들이 황도를 찾은 것은 헨델 사절단의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서였는데, 이제 사절단이 귀국하였으니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곧 영지로 돌아갈 테니 그 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회유해 놓아야 뒤가 편하다.
콧노래를 부르며 회의장의 문을 연 푸아티에 자작은 예상치 못한 인물을 보고 멈칫했다. 회의 테이블 앞에 빼곡하게 모인 가신들 너머로 상석 부근에 서 있는 세니아나가 보였다.
“아가씨.”
“아, 자작!”
세니아나가 방긋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 계집애가 왜.’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이른 시간에 어쩐 일로 회의장을 다 찾으셨습니까.”
“어제 선물을 받았는데 저보다 큰오라버니에게 더 좋을 것 같아서 드리려고요.”
상석에 앉아 세니아나로부터 무언가를 받고 있던 란슬롯이 자작을 힐긋 쳐다보았다. 푸아티에 자작은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이 기회에 가신들을 구워삶아 놓으려고 했건만. 하여간 징그럽게 감 좋은 것들이야.’
능숙하게 속내를 숨긴 그가 인자하기 그지없는 미소로 말을 건넸다.
“오늘도 우애가 좋으십니다.”
세니아나는 헤헤 웃으며 “그렇지요.” 하고 답했고, 자작이 입매를 비틀었다.
“어느 집이나 장자와 막내는 사이가 좋더군요. 저희 집 녀석들도 그렇습니다. 이래서야 둘째가 서운해는 것도 이해가 간달까요.”
뼈 있는 농담에 회의장이 가볍게 술렁였다. 푸아티에 자작은 그에 그치지 않고 껄껄 웃으며 덧붙였다.
“두 분 도련님 외에 좋은 자매가 하나 더 생겼으니 프렌시프의 홍복입니다. 아가씨께서 기쁘시겠어요.”
“네?”
“서로 보듬으며 좋은 자매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가씨께선 비록 헨델의 성녀에게 힘이 미치지 못하나, 과거엔 강력한 성녀로 길라게온의 영웅이 되셨으니 헨델의 성녀를 잘 이끌어 주실 테지요.”
“…….”
“가문으로선 역시 아가씨의 성수가 아쉽기는 합니다만, 가웨인 도련님 덕에 강력한 성녀가 프렌시프의 사람이 되었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수, 있는데요.”
대뜸 튀어나온 말에 회의장이 들썩였다.
“예?”
“무슨…….”
“아탈란 사건으로 성수 셋을 모두 잃으신 게 아닙니까?”
푸아티에 자작은 굳어진 입매를 억지로 움직여 “하,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물론 있‘었’지요. 셋이나 되는 성수가 과거엔―”
“아니요. 지금도 있다는 뜻이었어요.”
세니아나가 열린 문을 향해 손짓하자 새하얀 털과 까만 코를 가진 코카스파니엘이 사뿐사뿐 걸어 들어왔다.
“옳지, 착하다.”
세니아나는 발렌을 끌어안고서 활짝 웃었다.
“새로운 아이랍니다.”
푸아티에 자작의 얼굴이 샛노래졌다.
“어디서 개 한 마리를 주워 오신 게 아닙니까?! 갑자기, 이런 말도 안 되는―!”
컹! 개의 몸에서 자색의 빛이 퍼지는가 싶더니 무언가 둔탁하게 땅을 내리쳤다. 빛이 사그라들고 나타난 것은 은빛 갈기를 가진 우아한 늑대였다.
[죽일까?]
회의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수의 전음이 느껴졌다. 푸아티에 자작이 흠칫, 뒷걸음질 치자 세니아나는 늑대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못써.”
[하지만 저 늙은 꼬맹이가 네게 눈치를 준 거잖아. 나는 다 안다고.]
“응, 그래도 사람들 보는 앞에선 죽이면 안 돼.”
[그러면?]
“그런 일은 몰래 해야 한다구.”
자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가씨, 무슨 말씀이―!”
“아, 생각해 보니까 되게 무서운 일이네.”
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세니아나가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너는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 아무리 문을 꽁꽁 잠가도 소용이 없잖아. 하루 종일 곁에 호위를 붙여 놔도 성수라면 그들까지 단번에 죽일 수 있을 텐데. 침입의 흔적도, 증거도, 목격자도 없이…….”
세니아나가 푸아티에 자작을 보며 목 아래에 손날을 그었다.
“쓱―.”
“……!”
새파랗게 질린 자작이 쿵!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그때 상석에 앉은 란슬롯이 픽, 웃었다.
“그래, 정말 무서운걸, 우리 막내. 하지만 너무 무서워서 유약한 사람은 진짜 그런 일이 생길 줄 알겠어.”
자작은 애써 웃었다.
“그, 그렇죠. 예, 설마 아가씨가 그런 짓을……!”
테이블에 팔을 받힌 채로 턱을 괴고 있던 란슬롯이 빙그레 웃었다.
“그럼 이제 이 편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란슬롯의 손에 들린 것은 조금 전 세니아나가 건넨 것이었다.
‘저, 저건―!’
제가 헨델의 사절단에게 들려 보낸 편지였다. 푸아티에 자작의 얼굴이 다시 희멀게졌다. 파래졌다가 노래졌다가 하얘지며 저 홀로 바쁜 자작을 보고 란슬롯은 다정하게 웃었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환하디환한 미소였다.
* * *
일이 일단락되고 며칠이 흘렀다. 란슬롯이 무슨 수를 썼는지 푸아티에 자작은 가산을 헌납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황도 저택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나는 햇볕이 따뜻한 오전, 서재에서 가웨인과 붙어 앉아 두 시간이 넘도록 심혈을 다하는 그를 돕고 있었다.
“어머니께 쓰는 편지인데 ‘삼가 아룁니다’는 좀…….”
“그럼 어떻게 쓰라는 거야.”
“일단 그 부분을 빼고…… 또 마지막에 ‘추신. 흰머리가 성성하시더군요. 곧 저승에 불려 가실 듯하였습니다’라는 부분도 빼는 게 좋겠어요.”
“왜?”
“시비 거는 것 같잖아요. 몸조심하시라는 한 마디면 되죠.”
가웨인은 다시 끙끙거리며 편지를 수정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무수히 많은 ‘편지였던 것들’을 보며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곤 손에 쥔 것을 쳐다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만년필을 까딱까딱 흔들던 가웨인이 물었다.
“왜?”
“네?”
“계속 쳐다보잖아. 통신석.”
“…….”
“연락 없어, 그놈?”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좀 더 힘을 주어 통신석을 쥐었다. 가웨인의 말이 맞다. 연락이 없었다. 그때 발렌이 “이히힛!” 웃으며 끼어들었다.
“싸웠대요!”
그러자 가웨인이 반색하며 소리쳤다.
“헤어져!”
아니, 자초지종도 안 들어 보고 대번에 헤어지래…….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일어났다. 가웨인이 어디에 가느냐는 듯 쳐다봤지만, 난 “혼자 하세요.” 하고 방을 나섰다. 그러고 복도에 서서 한참 통신석을 흘겼다.
‘진짜 연락 한 통이 없잖아.’
쪼잔해.
“나쁜 놈.”
내가 혼잣말을 하자 복도를 지나던 기사들이 흠칫했다. 그 후로 반나절을 더 기다렸지만, 도미니크에게선 끝끝내 연락이 없었다.
“에잇! 못 참겠다!”
하루 종일 뚫어져라 통신석을 노려보던 난 벌떡 일어났다. 내 곁에서 바느질을 하던 시트론이 깜짝 놀라 날 쳐다봤다.
“아가씨?”
“외출할 거야.”
“해가 다 저물어 가는데 어디를 가시게요.”
시트론은 “또 어르신께서 난리가 나실 터인데.”라며 중얼거렸지만, 나는 쿵! 쿵! 발을 구르며 방을 나섰다.
“마릴린, 마차를 준비해 줘. 궁으로 갈 거야!”
* * *
도미니크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더미를 미뤄 둔 채 책상 위에 올려 둔 통신석을 노려보았다. 세니아나는 이틀째 연락 한 통이 없었다. 처음부터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성수인지 짐승 새끼인지 하는 그 자식이 그녀에게 끈적하게 붙어 온 것이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성수의 목덜미를 잡아채 소파에 던지듯 내려놓자 세니아나는 [저하!] 소리치며 개새― 아니, 개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던지시면 아이가 놀라잖아요.]
[어르신보다 오래 산 아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지만 이렇게나 작은걸요.]
[그렇게 작지만, 어르신께서 똥 기저귀를 갈던 시절부터 모두 보았을 겁니다.]
[저하도 참.]
그녀의 곁에는 남자가 너무 많았다.
[난 누나의 것이야.]
[나도 그렇소.]
[나도, 나도!]
발렌 외의 세 성수라든지.
[황자가 아니라도 가끔 함께 차를 마셔 주겠어?]
미카엘 그 녀석이나.
[황태자비라는 건 대단하다고. 어때? 나의 비가 되는 건.]
황태자 헬리오스. 게다가―
‘찢어 죽일 흰머리.’
도미니크가 인상을 사납게 찌푸렸다. 물론 그들이 세니아나를 흠모한다고 해서 그게 그녀의 탓이라는 건 아니다. 자신이 그녀에게 맹목적으로 끌렸던 만큼, 다른 사내들에게 그녀는 매력적이 사람일 터다.
알지만, 그들이 애끓는 눈으로 제 연인을 바라볼 땐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이번엔 특히.
[너무 들러붙는 게 아닙니까. 그 개새― 개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제 성수인걸요.]
[맞아, 난 세니안의 성수란 말야. 쫌팽아.]
그 후로 성수와 신경전을 벌이다가 세니아나에게 한 소리를 들었고, 두 사람은 다투었다.
“빌어먹을.”
세상이 연애를 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다면 삿된 자들을 물리치지 말 것을.
‘멸망해 버려라.’
통신석을 거칠게 서랍에 처박으려던 도미니크는 멈칫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자 필사적으로 서류를 하나하나 해결하던 알베르가 움찔! 고개를 들었다.
“어디 가십니까, 저하. 저하? 저하!”
도미니크는 대답 없이 집무실을 나섰고 알베르는 절규를 내질렀다.
“멸망해 버려라, 육시럴!”
―하고.
* * *
마차에 오르려던 나는 멀리서 보이는 익숙한 인영을 보고 아랫입술을 꾹 사려 물었다. 날 발견하고 다가온 도미니크도 나만큼이나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나 나나 미간엔 굵은 주름이 잔뜩 잡혀 있었다.
“왜 오셨어요?”
“당신은 이 시간에 어딜 가십니까.”
“그야 당연히……!”
그렇게 말하던 나는 입을 다물고 홱 고개를 돌렸다.
“남이사.”
구시렁거리자 도미니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성수에게 가십니까?”
“발렌은 저택에 있지요!”
“하면 헬리오스?”
“제가 왜 황태자 전하를 만나러 가요?”
“트리스탄입니까.”
나는 그를 팩! 노려보았다.
“자꾸 삐딱하게 나올 거예요? 왜 계속 화만 내는 건데요!”
소란에 놀란 오빠들과 아빠, 기사들, 그리고 시중인들이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란슬롯은 실실거리며 우리를 쳐다봤고 가웨인이 “그래, 헤어져!” 하며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아빠는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오빠들만큼이나 이 상황이 반가운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쭉 둘러본 뒤, 마지막으로 도미니크를 쳐다봤다.
“화가 나면 이유를 말해 주기로 약속했으면서…….”
“…….”
“자기는 매번 속으로 삭이기나 하고 나는 말해 주지 않으면 모르는데…….”
이럴 때면 인간관계에 어두운 내가 싫어진다. 윤세나일 적에 좀 더 사람들과 교류했다면, 그랬다면 나도 모르게 도미니크를 상처 주는 일이 없었을 텐데.
속이 상해서 코가 시큰거렸다. 주변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이제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란슬롯이나 가웨인, 아빠 또한 서럽게 울먹이는 날 보고 말을 잃었다.
“저하는 매번…… 매번.”
“당신이 인기가 많은 게 싫습니다.”
“……예?”
코를 훌쩍이던 난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듣고 어벙벙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귓불이 조금 붉어진 그가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성수들이 당신의 것인 게 싫습니다. 그들의 인간형이 미남인 건 더더욱.”
“…….”
“트리스탄이 당신을 애끓는 눈으로 바라볼 때면 죽여 버리고 싶어집니다.”
“…….”
“헬리오스나 미카엘도 눈깔― 눈을 빼 버리고 싶어지죠.”
난 이를 악물고 말하는 도미니크를 빤히 보며 눈을 끔뻑였다.
“당신 가족들이 잘생긴 게 화가 나요. 당신 눈만 높여 놨잖습니까. 저도 어디 가서 못하단 말은 못 들어봤지만…….”
중얼거리던 그는 기어이 화가 났는지 아빠를 가리키며 벌컥 소리쳤다.
“후작을 어떻게 이깁니까!”
“……엥?”
“절세미남이라고 불리지 않았습니까. 제국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의 딸이라고요, 당신은.”
아니, 우리 아빠가 잘생긴 게 왜 화가 날 일이야.
나는 기가 막혀서 고개만 모로 꼰 채 오도카니 서 있었다. 도미니크는 제가 말하고도 수치스러운지 목이 벌게져서 콜록, 헛기침을 했다.
“뭐 하나라도 특출난 게 있어야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텐데. 내겐 그런 것이 없습니다.”
“…….”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아침을 맞게 하고픈 연인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주 사소한 일뿐입니다.”
“…….”
“불안합니다. 당신이 언젠가 나보다 나은 남자를 찾아 가 버릴까 봐. 그런데.”
도미니크는 손바닥으로 눈가를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난 이제 너 없는 삶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고. 그런 난 한―!”
“한심해라…….”
내가 중얼거리자 도미니크는 움찔, 굳었고, 오빠들은 신이 났다. 가웨인이 또다시 “헤어져!” 소리쳤다.
나는 도미니크에게 다가갔다. 그는 붉어진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며 날 외면했다.
“나 봐요.”
“…….”
“보라니까, 이 한심한 남자야.”
도미니크가 시무룩해져서 느른히 손을 떨구었다. 나는 고개 숙인 그를 올려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닿은 뺨이 따뜻했다.
“있지요. 나는 아빠만큼 잘생긴 남자가 와도, 란슬롯만큼 똑똑하거나 가웨인처럼 강한 남자가 와도 괜찮아요.”
“…….”
“성수들은 정말로 잘생겼고, 트리스탄은 정말로 매력적인 사람이지만요.”
“…….”
“나는 이렇게 한심한 당신한테만 가슴이 뛴다고요.”
귀여워 죽겠어.
난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도미니크가 조그만 목소리로 “정말?” 하고 중얼거려서 난 “정말!” 단호하게 소리치며 히히 웃었다. 꽉 끌어안던 팔을 느슨하게 한 채 조금 떨어져 도미니크를 쳐다봤다.
“…….”
“울어요?”
“아닙니다.”
도미니크는 벌게진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사랑스러워~!’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강인한 남자가 내게만 한심해진다는 건 정말로 가슴 벅찬 일이구나. 왜 영애들이 내게만 다정한 가웨인에게 앓는 한숨을 내쉬는지 이해가 된다.
“봐요.”
“됐습니다.”
“세상에, 진짜 울잖아. 귀여워!”
“안 웁니다.”
달콤한 바람이 결 좋은 도미니크의 머리칼을 나부끼게 했다. 날렵한 눈에 물기가 어리고 시린 눈매가 발그스름히 달아올랐다.
아주 어릴 때부터 전장에서 생과 사를 가르는 전투를 벌여온 단단하기 그지없는 그다. 그런 도미니크가 고작 이런 사소한 고민으로 가슴이 문드러졌다는 건 가슴 아프지만,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으으…….”
나는 부끄러운지 자꾸만 한 손으로 얼굴을 덮으려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쪽.”
뺨에 입 맞췄다. 도미니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날 보았고, 그 순간 가족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우리 사이에 파고들었다.
“세니아나!”
“막내야!”
“딸.”
아빠와 오빠들이 성벽처럼 나를 가리고 도미니크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도미니크는 더 이상 불안한 표정이 아니었다. 우린 가족들 사이에 가로막혀서 쿡쿡 웃었다.
하늘을 붉게 물들인 석양이 아름다웠다. 내 가슴에 스민 꽃물만큼이나.
* * *
도미니크와 나는 손을 꼭 잡은 채 아름다운 초승달이 든 정원을 걸었다. 어느새 대문과 이어진 곳까지 이르러 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밤엔 역시 좀 춥네요.”
“겉옷을 가져오겠습니다.”
“괜찮…….”
그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겉옷을 가지러 떠났고, 난 그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때, 긴 창살이 이어진 대문 너머로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바람을 타고 넘어온 살 내음이 익숙했다.
“트리스탄?”
그가 흐리게 웃으며 날 바라봤다.
“여기 어떻게 왔어?”
“…….”
“잘됐다.”
나는 뜻밖의 만남에 반가워 그를 향해 말했다.
“내가 내일 엘트라로 데려다주려고 했거든. 그 전에 주고 싶은 게―”
“한심한 남자라도 좋아?”
그의 물음에 난 대문에 뻗으려던 손을 거두었다.
“해 질 녘에 우리 저택에 왔었니?”
“그런 한심한 남자와 미래를 걷는 게 네겐 행복한 일이야?”
“…….”
“나라면 그자보다 너를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그의 눈이 더없이 진중했다. 창살을 잡은 그의 손등 위로 힘줄이 도드라졌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이토록 완연한 남자의 손을 하고 있었던 거지. 그의 눈을 지긋이 응시하던 나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
“그 사람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길 바라지 않아. 내 행복은 나 자신이 만드는 거니까.”
트리스탄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거면 됐어.”
그가 아스라이 사라질 것만 같아서 나는 얼른 손을 뻗었다.
“트리스―”
창살을 넘어 뻗은 손에 트리스탄이 가볍게 입을 맞췄다.
“Dea mea.(나의 여신)”
순간 바람이 불었다. 나는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사라져 있었다. 내가 멍하니 그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던 중 저택에 불이 켜지며 내 겉옷을 든 도미니크가 다가왔다.
“세니아나?”
“…….”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젓곤 그를 바라보았다.
“사랑해요.”
내 말을 들은 도미니크는 미소 지었다.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후회가 되지 않았다. 조금도. 내 행복은 여기에 있었으니까.
나를 세상이라 여기는 남자가 이곳에 있었다. 그거면 됐어.
난 다시 도미니크의 손을 잡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일도 날이 좋으면 좋겠어요.”
“그럴 겁니다.”
매일 즐거운 날을 보내자.
나를 사랑해 준 사람들이, 나를 위했던 선택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로열 셰프 영애님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