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급작스레 레드비트의 집에서 가정부 일을 시작하게 된지 사나흘 정도가 지났을 때 그들의 전원주택이 시 외곽에 자리하고 있는 탓에 희원이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 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준희의 자상한 배려로 희원은 아예 간단한 짐을 꾸려 그들의 집에 들어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렇지만 가방을 챙겨들고 집안에 들어섰을 때 누구보다 희원의 입주를 제일로 반기는 사람은 성진이었다.
"어머 그럼 혹시라도 내가 한 밤중에 배가 고파지면 야식도 먹을 수 있는거야-?!"
아이처럼 좋아라 박수를 치는 성진을 보며 희원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준희가 나서서 희원의 권리를 단호하게 공표했다.
"물론 야간수당을 지불하는 사람은 한 밤중에 야식을 시킨 장본인이 되겠지."
"야..야간...수당?" 성진이 준희를 향해 왕방울 만한 눈을 껌뻑거리며 물었다.
"아니예요. 어차피 입주 가정부인데 야간수당이라뇨 당치 않아요. 약속 받은 보수만으로도 충분해요."
희원이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준희를 말렸다. 그러자 다소 샐쭉한 표정이 되었던 성진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그래, 그래 그건 얘 말이 맞아. 입주 가정부한테 야간수당이라는 소린 첨이다, 야."
"좋아. 그건 그렇다쳐도 희원씨한테 가정부 가정부하니까 왠지 좀 그렇네."
준희가 곁눈질로 희원을 흘깃 바라보곤 괜스레 멋적어 하며 뒤통수를 긁자 희원이 배시시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가정부한테 가정부라고 하는 게 뭐가 이상해요. 괜한 맘 쓰지 마세요. 전 진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요."
하지만 준희는 여전히 멀쓱한 얼굴로 못내 개운치 않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자 또 다시 성진이 나섰다.
"야, 그렇다고 얘를 가정 관리사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닭살 아니냐? 아님 입주 도우미양 하고 부를까?!" 성진이 코맹맹이소리를 섞어가며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성진의 목소리는 아무래도 천의 얼굴을 가진 것 같다.
"하하하하."
희원은 성진의 익살맞은 표정과 너스레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준희도 결국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성진을 쳐다보다 픽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희원씨 방은 2층이예요. 아시죠? 전에 희원씨가 하룻밤 묵고 갔던......"
준희가 2층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씨익 웃었다. 희원은 대꾸 대신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가방 이리 주세요."
준희가 희원의 가방을 대신 들고 먼저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희원도 곧 그의 뒤를 따랐다. 2층에 다다라서는 준희가 각 방들의 임자를 알려주었다.
"저기 첫 번째 방이 제 방이구요 두 번째는 욕실, 이쪽은 옷이랑 뭐 장신구들이랑 한데 모아 놓은 곳이구 여기는 선우형 방. 그리고 그 바로 옆 방이 희원씨가 쓰게 될 방."
'그랬구나. 그날은 몰랐었는데 내가 잠들어 있던 방하고 맞붙어 있는 방이 은선우씨가 쓰고 있는 방이었구나.'
앞으로 희원이 쓰게 될 방과 선우의 방이 나란히 붙어있다는 사실에 희원은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오늘은 은선우씨가 안 보이네요?"
희원이 선우의 방을 힐끔 돌아보며 물었다.
"아 선우형이요. 누구랑 데이트가 있는 모양이던데 잘 모르겠어요. 워낙 시시콜콜 얘기하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성진이형이랑은 완전 대조되는 성격이죠. 오늘 희원씨 입주 기념으로 환영식이라도 하자고 했는데 선우형은 선약 때문에 참석하기 어려울 거 같다고 하더라구요."
환영식 같은 건 기대한 적도 없었지만 선우가 같이 하지 못할 거란 얘기에 희원의 맘속엔 까닭을 알 수 없는 서운함이 몰려들었다.
"다 같이 함께 했으면 했는데. 희원씨가 이해하세요. 같이 지내다 보면 곧 알게되겠지만 선우형은 좀 밖으로만 도는 편이예요. 하는 수 없죠 뭐. 선우형은 빼고 우리끼리라도 재미있게 놀아요."
준희가 희원이 쓰게 될 방의 문을 열고 가방을 들여 놓아주며 말했다.
"아무튼 입주를 환영합니다, 희원씨.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희원은 준희가 내민 손을 마주 잡고 힘껏 흔들면서 밝게 웃었다. 준희가 방을 나간 뒤 희원은 간단히 꾸려온 짐 가방을 풀어 옷가지들과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강 정리를 마친 뒤 한숨 돌릴 겸 창 밖 풍경을 내다보면서 희원은 슬그머니 혼자 미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아. 가정부면 어때. 내가 지금 어딜 가서 그만한 보수를 받을까. 게다가 이 사람들... 모두 좋은 사람들이잖아. 미랑이 때문에 속이 많이 상하긴 했지만 차라리 더 잘된 일인 것 같기도 해. 그나저나 미랑이가 내가 레드비트의 집에서 같이 살게된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방방 뛰고 난리도 아니었겠지. 후훗. 자, 새로운 각오로 열심히 하자. 뭐든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잖아?!'
그 날 희원은 무슨 일이든 주어진 일에 끝까지 최선을 다 하겠다고 굳게 자기 자신과 약속했다.
날이 거듭될수록 희원도 세 남자들도 함께 생활하는 데 점점 적응이 되어갔다. 희원은 세 남자들을 내조(?)하는 일에, 남자들은 희원의 살뜰한 내조를 받는 일에 모두 충실했다.
성진은 멤버의 맏형격이었지만 투정에 가까운 까탈을 가장 많이 부렸고 희원에게 이 것 저 것 요구가 제일 많았다. 하지만 도통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리광 섞인 애교로 희원을 가장 많이 웃게 만드는 인물이기도 했다.
또한 얼떨결에 희원을 그 집의 가정부로 고용하게 된 선우 역시 집에 있는 동안은 이 일 저 일 희원을 부려먹는 데는 결코 성진보다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선우가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희원이 짐을 꾸려 들어오던 날 준희가 했던 말처럼 선우는 밖으로 도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성진과 달리 그가 희원을 웃게 만드는 일 따위도 거의 없었다. 오히려 희원이 그에게서 느꼈던 첫인상처럼 내내 모호한 냉랭함으로 둘러싸인 그와 거리감을 좁히는 일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멤버의 막내 준희의 푸근한 성품은 희원으로 하여금 그가 진짜 친오빠였으면 하고 바랄 만큼 느껴지게 만들 때가 많았다. 그는 늘 희원의 노고에 틈틈히 고마움을 표하며 세 남자들 중 희원의 입장을 가장 많이 배려해주는 원군 같은 존재였다.
아무튼 희원이 그 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 이후로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이 있다면 스케줄에 쫓겨 기획사 사무실이나 연습실에서 대강 먹고 대강 구겨져 새우잠을 자곤 하던 세 남자들이 가능하면 꼬박꼬박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 패턴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선우도 한밤중이 되었건 새벽녘이 되었건 잠만큼은 꼭 집에 들어와 잤다. 희원이 가정부로 들어온 지 채 한 달도 못되어 멤버들은 그렇게 희원이 만들어 주는 음식, 옷가지나 소지품을 일일이 챙겨주는 일부터 시작해 아주 작고 사소한 시중에까지 알게 모르게 온통 그녀에게 의존하는 생활에 길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인가부터 성진과 선우 두 남정네들은 희원을 순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순이라는 호칭에 함축된 의미가 그닥 나쁘다고 생각지 않았기에 희원은 거부감 없이 그 호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희원은 그들 세 남자들을 오빠라고 불렀다. 그래서 희원은 레드비트 하우스의 일 잘하고 순종적인 순이가 되었고 세 남자들은 그런 순이의 세 오빠들이 되었다.
"순이야, 빨랑 밥 줘."
"네에."
"순이야, 내 노랑 줄무늬 팬티 어디다 뒀어?"
"거기 서랍장 두 번째 칸 열어보세요, 성진오빠."
"순이야, 나 계란 후라이 써니사이드 업으로 한 개 더."
"네, 금방 올리겠습니다."
"순이야, 이거 빨리 다림질 좀 해 줘."
"이것 좀 헹궈놓고...아, 예, 곧 가요!"
"준희오빠, 여기 감기약." "고마워, 희원씨."
"순이야, 오늘 녹음실에서 밤늦게까지 야간 작업 있을 거니까 야식 좀 푸짐하게 싸와라."
"야, 오늘 공개방송에 입고 나갈 의상 컨셉이 바뀌었으니까 내 알바니 선글라스 좀 찾아서 빨랑 갖고 나와, 빨랑. 알았지?!"
한 달 여의 시간이 흐르고 하루가 다르게 집안 일에 능숙해져 가던 희원은 시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이용해 짬짬히 자신의 전공과목과 관련된 공부도 해나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늘 희원을 배려하는 준희가 곧 그런 사정을 눈치를 채고는 오후 시간을 이용해 희원이 학원을 다닐 수 있도록 두 형들을 설득해 주었다. 희원은 처음에 부득부득 사양을 했지만 성진과 선우 역시 긍정적인 태도로 희원을 독려하는 분위기였던지라 결국 희원은 그들의 뜻을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 원래 전공이 미술 쪽인가요?"
준희가 희원의 설거지를 도우며 물었다. 설거지거리가 좀 많아 보인다 싶은 날이면 희원이 극구 말리는데도 준희는 종종 희원과 주방에 남아 설거지를 돕곤 했다.
"예. 응용미술 이예요. 전 나중에 동화 일러스트레이터 일을 하고 싶어요."
"그럼, 그렇게 틈만 나면 카메라를 들고 나가 자주 사진을 찍는 게 그것과도 관련이 있나보네?"
"네. 작품 구상에 도움될 때가 많거든요. 그대로 모방해 그림 연습도 하고 때때로 아이디어를 내는데 도움도 되고요. 하지만 다 떠나서 원래 사진 찍는 걸 좋아해요. 아빠를 닮았나봐요. 저희 아빠가 워낙 사진 찍으러 다니는 걸 좋아하셨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아빠를 따라다니며 이 것 저 것 배우기도 했어요."
불현듯 아빠의 손을 잡고 들로 산으로 사진을 찍으러 다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자 희원의 입가엔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촬영 솜씨도 꽤 수준급 이겠네. 언제 내 사진도 한 번 멋지게 찍어줘요, 희원씨."
"연예인들만 전문으로 찍는 사진사들이 있잖아요. 그 분들이 찍은 사진이 훨 폼날 걸요 뭐."
"뭐가 폼이 난다고?" 성진이 물을 마시기 위해 왔다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 들었다.
"응, 형. 희원씨가 어렸을 때부터 아빠한테 사진 찍는 걸 배웠다고 하길래 언제 내 사진도 좀 멋지게 찍어 달랬지." 준희가 웃으며 성진을 향해 말했다.
"야, 니가 사진 얘기하니까 다시 생각났는데 우리도 틈날 때 사진 좀 찍어서 미니 홈피에 올려보자. 요즘 연예인들도 개인 미니 홈피 만들어서 일상 생활 중에 찍은 사진들도 올리고 그런 다매." 성진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래, 것두 재미있겠다." 준희가 맞장구 쳤다.
"히야- 그래. 너 지금 그대로 그림 된다. 앞치마 두르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 황준희. 네 팬들이 아마 난리들일 거다. 우리 준희오빠 귀여워 죽겠네 어쩌네 하면서. 순이야, 순이야, 얼른 카메라 좀 가져와라. 흠... 그럼 난 어떤 포즈의 사진을 찍지?" 성진이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곰곰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형, 자연스러운 모습 있잖아. 왜 머리에 터번처럼 수건 두르고 얼굴에 덕지덕지 두꺼운 팩 바르고 있는 모습 그런 거." 말을 마친 준희가 쿡쿡 거리고 웃자 희원도 소리를 억누르며 따라 웃었다.
"떽! 어린것들이 감히 어른을 놀림감으로 삼다니!"
성진이 예의 그 파워풀하고 우렁찬 목소리-희원으로선 아직도 인물과 목소리의 매치가 불가사의하게 느껴지는-로 두 사람을 어르는 시늉을 했다.
"뭐야 다들 여기서. 나만 빼고 무슨 담합이라도 하는 거야?!" 어쩌다 주방에 모여있게 된 세 사람이 수군덕거리는 소릴 듣고 까만 생머리를 자연스럽게 풀어 내린 선우가 나타나 말했다.
'아... 저 예쁜 머리결.....'
희원은 감탄 어린 시선으로 선우의 머리결을 훑어 내렸다. 그의 풍성하고 윤기나는 머리채를 볼 때마다 그녀는 한 번 쓰다듬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우리도 미니 홈피 같은 거 만들어서 사진 찍어 올리자고 그 얘기하던 중이었어. 선우야, 어때? 재미있겠지?!" 성진이 말했다.
"난 또 뭐라고. 그야 하고 싶은 사람 맘이지 뭐." 선우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가지고는 곧 돌아서 가버렸다.
"하여튼 저 녀석은 무슨 재미로 사는 놈인지 모르겠다니까."혀를 끌끌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성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 번 주엔 스케줄이 빡빡해서 힘들고 다음 주에 우리 도시락 싸 가지고 놀이 공원 같은 데 놀러가자 오랜만에. 가서 사진도 좀 많이 찍어 오구. 주말엔 사람들이 많을 테니 그렇구 주중에 하루 날 잡아서 가자. 어때?" 성진이 어린애처럼 미리부터 잔뜩 들뜬 얼굴을 해 가지고선 희원과 준희를 바라봤다.
"글세... 나도 가고야 싶지만 놀이 공원이라... 평일이라도 방학중이라 사람들이 적지 않을텐데......" 그러나 준희는 고개를 설레 설레 저으며 난색을 표했다.
"그러니까 007 작전을 써야지. 둘 씩 조를 짜 가지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다니는 거야. 게다가 요즘엔 놀이 공원에서 캐릭터 가면쓰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많다던데 우리도 그런 거 쓰고 다니면 돼지. 야, 더 스릴 있고 재미있지 않겠냐? 안 그래?" 성진이 마치 특급비밀 프로젝트라도 발표하는 양 잔뜩 무게를 잡고는 매우 진지한 얼굴로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그거 괜찮은 아이디어인데. 좋아, 나는 찬성! 희원씨는 어때요?" 준희가 희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순이가 괜히 이름만 순인 줄 아냐? 우리 착한 순이 이 오빠 말대로 할거지?" 성진이 생글생글 웃으며 희원을 쳐다본다. 성진의 팬들이 이른바 살인 미소로 부르는 바로 그 웃음이다. 희원은 새삼 여자처럼 곱상하고 예쁘장한 성진이 한국을 대표하는 롹 그룹의 리드보컬이라는 사실이 거짓말 같이 느껴진다.
"예에... 저야 뭐... 좋지요." 희원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홋! 좋아 좋아. 순이야, 도시락 꼭 맛나게 싸야 돼. 알았지잉?!"
"어휴, 이제보니 형은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네. 모처럼 하루 놀러 가는데. 희원씨, 도시락 싸는 거 부담 갖지 마세요. 그냥 가서 사 먹으면 되요." 준희가 성진을 향해 고개를 살살 저어 보이곤 다시 희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안돼, 안돼. 소풍에 도시락 빠지면 무슨 재미야. 게다가 공원 같은데서 사먹는 음식은 특별히 더 맛이 없단 말이야." 성진이 빨간 입술을 내밀고 툴툴거리며 불평을 해댔다.
"맞아요. 그런 데서 사 먹는 음식은 정말 다들 맛이 없더라고요. 성진오빠, 드시고 싶은 거 말하세요. 김밥으로 할까요? 아니면 초밥? 샌드위치?" 희원이 성진의 불평에 전적으로 수긍하며 도시락을 싸겠다고 하자 잔뜩 구기고 있던 성진의 얼굴이 대번에 활짝 펴졌다.
"오오, 김밥, 초밥, 샌드위치! 순이야, 그거 꼭 그 중의 하나만 선택해야 되는 거야? 그냥 그거 다 준비하자면 니가 힘들까?" 성진이 희원에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그의 특허인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말했다.
"당연히 힘들지!" 희원이 대답도 하기 전에 준희가 먼저 나섰다.
"야, 순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왜 니가 먼저 나서냐. 저 녀석이 순이가 오고 나서 부턴 순딩이 가면을 벗어버렸다니까. 그 전엔 순전히 다 내숭이었지, 너. 곰의 탈을 쓴 순한 양 인줄 알았더니 요즘보니 완전히 양의 가면을 쓴...... 거, 거 뭐시라고 해야되나... 그러니까 그 양의 가면을 쓴.... 저..... 시어머니! 맞다, 시어머니였어. 췟!" 성진이 입술을 실룩대며 준희를 향해 궁시렁 거렸다.
"약자의 고충과 비애는 같은 약자만이 진정으로 헤아려 줄 수 있는 거야. 악덕 고용주들의 지나친 착취로부터 희원씨의 권리를 옹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 순간부터 나까지 더 이상 순딩이로 남아있을 수만은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거든."
"아...악덕 고용주?!"
준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빙글빙글 웃으며 느물대자 성진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는 높아졌다.
"괜찮아요 준희오빠. 그 정도쯤 같이 준비하는 거 힘들지 않아요. 놀러가서는 먹는 재미도 한 몫 하잖아요. 이왕이면 푸짐한 게 저도 좋아요."
희원이 웃으며 준희를 만류하자 그제서야 준희는 성진을 향한 공세를 멈추었다.
"희원씨가 좋다면야 뭐......"
"것 봐, 짜샤."
성진이 기특해 죽겠다는 듯이 희원의 어깨에 두르고 있던 팔에 힘을 주면서 준희를 향해 혓바닥을 낼름 내보였다.
"나 일이 생겨서 좀 나갔다 온다." 거실에서 불현듯 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갑자기 무슨 일이야. 오늘 약속 같은 거 없다고 했잖아." 성진이 쪼르륵 거실로 쫓아나가며 물었다.
"응... 그렇게 됐어." 별로 자세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투로 대충 대꾸를 한 선우는 꾸역꾸역 신발을 신더니 그대로 현관문을 나섰다.
설거지를 모두 마친 희원과 준희가 거실로 나오자 성진이 혼자 투덜거리고 서 있었다.
"저 녀석은 가끔씩 저렇게 정나미 떨어지는 얼굴을 한다니까. 뭔 비밀이 그렇게 많다고. 지가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이지. 그래 오늘은 웬일로 얌전히 집에 붙어 있는다 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지은인가 뭔가 하는 그 애가 또 울고불고 하면서 전화한 거 아니야?" 준희가 성진에게 다가가 짐짓 목소리를 낮추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에이 설마...... 요즘 선우 쟤 한채린하고 목하 열애 중 아니시냐. 보나 마나 걔가 스케줄 펑크났다고 전화했나보지 뭐." 성진이 풀썩 소리가 나게 소파 위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누구? 그 모델인가 하다가 요즘 드라마에 출연하는 그 얘?" 준희도 성진을 따라 소파 위에 앉으며 왠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맞어. 이 번에는 도대체 얼마나 갈지...... 한 달이 멀다하고 바꿔칠 거 같으면 기자들한테 들키지나 말지 도대체가 쟤는 스캔들 무서운 줄 몰라요." 성진이 마땅찮은 얼굴로 혀를 끌끌찼다.
그 때 희원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마른 걸레로 소파 앞 유리 탁자를 그저 기계적인 동작으로 문지르며 성진과 준희가 선우에 대해 나누고 있는 대화를 귀가 솔깃해져서 듣고 있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역시..... 흐응, 여자나 남자나 잘난 사람들은 다 인물값 한다는 옛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라니까. 에효... 근데 왜 갑자기 이렇게 기운이 하나도 없는 것이...... 에고, 힘 빠져. 오늘 저녁은 밥도 두 공기나 먹었는데 왜 그러지. 아무래도 좀 있다 성진오빠랑 야식이라도 먹어야 할까보다.'
"난 선우형이 밤중에 전화 받고 저렇게 나가면 왠지 걱정부터 앞선다니까. 그 지은인가 하는 그 얘가 또 자해소동이라도 벌이고 난리 난리치면 어쩌나 해서......" 준희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이제 다 끝난......" 성진이 말을 다 맺지 못하고 문득 희원을 돌아본다.
왠지 잔뜩 시무룩해진 얼굴을 한 희원이 애꿎은 유리탁자만 벅벅 문질러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야, 대패질 하냐?"
"예에?!"
성진이 별뜻 없이 툭하고 건넨 말에 희원이 도둑질이라도 하다 들킨 사람 마냥 화들짝 놀라며 소리치자 성진과 준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런 희원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 시간에 선우는 검은 색 두카티를 몰고 시외곽 도로를 질풍처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 그의 가슴속을 채우고 있는 답답함은 조금도 가셔지질 않았다.
- 선우야. 늦더라도 꼭 좀 보자.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응?
- 제발 이런 전화 하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자꾸 귀찮게 왜 이래요. 난 안 나가요. 그러니 기다리지 마세요.
- 선우야, 부탁이야. 잠깐이면 된다.
- 끊습니다.
선우는 그녀의 목소리만 들으면 화부터 치밀어 올랐다. 아니 생각만으로도 부아가 치밀었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그녀는 선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곳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선우는 두카티에 몸을 바짝 붙이고 속도를 최고로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