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다음 날 희원은 학원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오며 복도에서 혹 수영의 모습이 눈에 띌까 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분명 어제 일로 기분이 상했을 텐데...... 그러나 저러나 만나도 걱정이네. 선우오빠가 내 팔촌오빠라고 계속 수영선배를 속여야 하는 건지 원......'
하지만 선우의 얼음장같은 표정을 생각할 때 수영선배에게 곧이곧대로 사실을 밝힐 엄두도 희원은 나지 않았다.
'하여간 선우오빠는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야. 수영선배를 두고 바람둥이라니... 그럴 사람이 따로 있지. 수영선배는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닌데 말야. 흐응, 자기가 바람둥이니까 다른 남자들도 다 그런 줄 아나보지? 피이...... 에잇, 나도 모르겠다. 얼른 영서 얼굴이나 한 번 보고 가야지.'
복도 창가에 서서 잠시 혼자 생각에 골몰해 있던 희원은 사무실을 향해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뭐, 뭐얏! 네가 그 레드비트 멤버들이 사는 집에서 가정부 노릇을 하고 있단 말이야!" 영서가 너무도 놀란 나머지 세차게 손을 떨구는 바람에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자판기 커피가 모두 쏟아질 뻔했다.
"야아, 커피 쏟겠다. 그리고 목소리 좀 낮춰." 희원이 주위를 의식하며 영서를 진정시켰다. "이거 너니까 얘기하는 거야. 그러니까 조용히 너만 알고 있어야 돼. 알았지?!"
학원 입구에 비치된 자판기 앞에서 커피 한 잔씩을 뽑아들고 서 있던 두 사람은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지 확인한 후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니까 알바로 그 집에서 가정부를 한다? 어우, 야아, 좋겠다. 나도 레드비트 너무 너무 좋아한단 말이야." 영서가 발을 동동 구르며 한 톤 죽인 목소리로 진짜 부러워 죽겠다는 듯이 말했다.
"좋기는 뭘......"
"그럼 안 좋아?! 난 돈 안 받아도 좋으니 그 집에서 같이 살 수 만 있으면 빨래든 뭐든 하겠다. 오, 유성진 그 리드보컬 말야. 목소리 정말 죽이지 않니? 카리스마가 절로 우러나오는 그 파워풀한 보컬....."
영서가 성진을 두고 하는 얘기를 듣고 있자니 희원은 속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토록 파워풀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희원에게 애교를 부리며 코맹맹이 소리를 하는 모습이 떠오르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영서조차 레드비트의 열렬한 팬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자 희원은 새삼 레드비트의 인기를 다시 실감했다.
"아무튼 내가 그래서 쉽사리 저녁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영서야.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아줘."
"알았어. 그럼, 오늘도 들어가서 그 사람들 저녁 해줘야 하는 거야?"
"응. 보통들 연습실에서 늦게 들어오는 편이긴 한데 오늘은 아예 기획사 빌딩 내에 있던 연습실을 집으로 옮긴다고 악기들이랑 뭐 몇 가지 집기들 실어오기로 했거든. 그래서 얼른 들어가 봐야 돼."
"오, 연습실까지 아예 집으로 옮기면 거의 하루 종일을 같이 있을 수 있겠네!" 영서가 더더욱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응. 아마도 잔일은 더 늘어나겠지만 연습실을 옮겨온다니 나도 든든하고 좋아." 희원이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아 참, 그리고 나 어제 수영선배 봤다."
"그랬어? 그래, 넌 금방 알아보지?" 영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 어어... 아니 내가 먼저 알아보고 인사했어. 내가 인사하고 좀 있다가 생각이 났는지 아는 척 하시더라고." 희원은 영서의 기분을 생각해 거짓말을 했다.
"그랬구나. 근데 수영선배 훨씬 더 근사해지지 않았니?"
수영선배의 이름을 말할 때 영서는 마치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모습은 여전히 사춘기 시절의 어린 소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으응. 그렇더라. 사실... 어제 선배가 집까지 차로 바래다 줬어."
"뭐어?! 니가 그 람보르기니를 얻어 타고 집에까지 갔단 말이야? 야아, 채희원 너 정말 영광인 줄 알아라. 여기 학원 다니는 여학생이랑 서무과 여직원들을 다 통틀어서 그 람보르기니에 같이 타고 수영선배랑 드라이브 한 번 해보는 게 소원인 여자들이 아주 줄줄이 사탕으로 늘어섰구만 아직 누구 하나 소원성취 했다는 소리 못 들어봤는데 너 정말 재주 좋다." 영서가 눈을 크게 떴다 가늘게 떴다 하며 과장된 표정으로 그렇게 희원에게 말했다.
"그, 그래? 그 차 이름이 람보...뭐시기라는 차였어? 그래... 하여간 멋진 차더라."
"물론 차보다 더 멋진 차주가 여자들의 타겟이겠지만. 그나저나 희원이 넌 여러 가지로 정말 운이 좋다, 얘. 레드비트네 집에서 같이 살지를 않나 만나자마자 수영선배가 람보르기니로 집에까지 데려다주기도 하구. 기집애! 샘난다, 야!"
영서가 짐짓 샘을 내는 표정으로 뾰루퉁한 얼굴을 해보이자 희원이 영서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럼 넌 이렇게 운 좋은 나를 가지면 되잖아, 영서야!"
"꽥! 야아, 징그러. 빨랑 저리 떨어져! 안 떨어질래?!" 영서가 웃으며 희원을 밀쳐내는 시늉을 했다.
영서와 학원 앞에서 헤어진 뒤 희원은 귀가를 서둘렀다.
레드비트들이 기획사에서 연습실 집기들을 옮겨올 때 조금이라도 거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릴 때쯤엔 사위가 제법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늦여름인지라 더위도 한 풀 꺾이고 해도 조금씩 짧아져 가는 것 같았다.
총총 걸음으로 대문 안으로 들어선 희원이 막 현관문을 열어 젖힐 때였다.
"피다, 피! 오오... 피야, 피!" 성진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이층으로부터 구르듯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성진오빠, 무슨 일이예요?!" 희원이 깜짝 놀란 얼굴로 황급히 성진을 향해 물었다.
"나는 정말 피는 질색이야. 정말! 아유, 소름끼쳐!" 성진은 희원에게 대꾸할 생각도 않고 혼자 몸서리를 치며 소파로 다가갔다.
"어휴, 성진이 형 오버하는 건 알아줘야 해."
희원이 의아한 얼굴로 성진을 바라보고 있을 때 마침 준희가 성진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선우형이 연습실 집기들 자릴 좀 잡다가 키보드 받침대 밑에 튀어나온 쇠못에 손등 쪽을 좀 많이 긁혔거든요. 그래서 피가 좀 나오는 걸 가지고 저렇게 호들갑이예요. 쯧쯧."
"호들갑?! 야, 나 원래 피에 민감한 거 너도 잘 알면서 그래! 어렸을 때 안 좋은 기억이 있어 가지고 난 아주 조금이라도 피만 보면 소름이 끼치고 심장이 벌렁거린단 말야!" 성진이 실지로 사색이 되어 가지고 준희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항변했다.
"선우오빠는 그럼... 얼마나 다쳤는데요?" 희원이 걱정스런 얼굴로 준희에게 물었다.
"안 그래도 약상자 가질러 내려오던 길이었는데... 잘 됐다. 희원씨가 약상자 좀 가지고 가서 선우형 좀 봐줄래요. 난 성진이 형한테 냉수라도 한 잔 가져다 줘야겠어요."
"네, 그럴게요."
대답과 동시에 희원은 부랴부랴 구급상자를 찾아들고 바쁘게 계단을 뛰어올라 갔다. 그런 희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준희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희원이 약상자를 들고 성진의 방으로 가보았지만 성진은 방에 없었다. 희원은 침대 위에 상자를 내려놓고 성진을 찾기 위해 다시 방을 나왔다. 욕실 쪽에서 물소리가 들려 가보니 그가 흐르는 수돗물에 상처를 씻고 있었다.
"저런! 생각보다 상처가 많이 났네요." 희원이 선우의 상처를 보고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까짓 걸 뭐." 선우가 휴지를 풀어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는 손을 닦아내며 대꾸했다.
"빨리 소독부터 해야겠네요. 약상자 가져왔어요." 희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채근하 듯 선우에게 말했다.
"됐어. 좀 있으면 피도 멎을 거야."
"어디 쇠에 긁혔다면서요. 파상풍 걸린단 말예요. 빨랑 나와요."
희원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강압적인 어조로 말하고는 선우의 방쪽으로 앞장서 걸어갔다. 아주 터프하게! 그런 희원의 뒷 모습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던 선우는 결국 아무 소리 않고 희원의 뒤를 따랐다.
방으로 들어온 선우를 침대가에 걸터 앉힌 희원은 매우 능숙한 솜씨로 치료를 시작했다. 그녀는 먼저 소독약에 적신 솜을 핀셋으로 집어들고 상처에 톡톡 두드렸다.
"아얏!"
소독약이 상처에 닿는 순간 따가움 때문에 선우가 절로 손을 피하자 희원이 다시 그의 손을 다부지게 잡아채며 말했다.
"어허! 엄살은. 이제 마이신 가루."
희원은 상처에 마이신가루를 뿌린 후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해주는 연고를 다시 덧발랐다.
"자, 이젠 이렇게 거즈로 마무리하고......"
그러는 동안 선우는 그의 손을 조물딱 거리며 치료에 여념이 없는 희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희원은 이제 거즈 위에 붙일 반창고를 입으로 끊고 있었다.
선우가 불현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넌... 재주도 많구나."
"네? 아아... 이런 건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건데요, 뭘. 하기야 전 이런 일에 꽤 익숙하긴 해요. 대학진학 때문에 서울로 오기 전까지 일 나가시는 엄마를 대신에 두 동생들을 제가 키우다시피 했으니까. 제 바로 밑에 동생이 남자녀석인데 어찌나 극성맞은지 하루가 멀다하고 여기 저기 터지고 깨지고......"
주절 주절대던 희원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선우가 뜻 모를 미소를 지은 채 희원의 얼굴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순간 희원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음은 물론이거니와 온몸 구석 구석의 세포 하나 하나가 달궈진 후라이팬에 흩뿌려진 물방울들처럼 이리 튀어 오르고 저리 튀어 오르고 하는 것 같은 전율감을 느꼈다.
단 몇 초간이라도 그렇게 더 있다간 분명 선우를 향한 희원의 마음을 들키고 말리라. 희원은 어떻게든 그 위기의 순간을 넘겨야 했다.
"자아, 아직 치료가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진짜 중요한 마지막 단계가 남았거든요." 희원이 일부러 과장되이 너스레를 떨며 선우를 향해 말했다.
"다 끝난 거 아니냐?" 선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요. 제 치료는 바로 이 치료의 주문을 외워줘야 비로소 완벽해지거든요." 라고 말하며 희원은 치료가 끝난 선우의 손 위에 자신의 콧기름을 세 번 갖다 바르는 시늉을 하곤 괴상망측하기 이를 데 없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아아... 수리수리 마수리 아브라카 다브라 폼푸리 폼폼 이타비 오올라스 프로모티우스 이갈레스 오르코 마우 텔레타르칼 아렉시아 추코네스 파리스테아 디아모노스....."
"야아, 뭐야. 뭐가 그렇게 길어?!" 선우가 눈을 부릅뜨고 황당한 얼굴로 희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 아직 안 끝났어요. 조용히 좀 하세요! 김 센단 말예요. 에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겠네. 수리수리 마수리 아브라카 다브라 폼푸리 폼폼......"
희원이 선우의 손을 끌어다 쥐며 눈쌀을 찌푸리고 면박을 준 후 요상한 주문을 다시 시작했다. 선우는 결국 그녀의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주문이 몇 분 여에 걸쳐 계속 되는 동안 찍소리 않고 주문이 끝나길 기다리고 앉아있었다.
"... 모티우스 이갈레스 오르코 마우 텔레타르칼 아렉시아 추코네스 파리스테아....."
희원은 알지 못했다. 그녀가 눈을 감고 짐짓 심오한 표정으로 주문을 외우고 있는 동안 선우의 얼굴에 평화롭기 그지없는 미소가 잔잔히 퍼져나가고 있음을. 그녀가 아이스맨이라고 부르는 선우가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음을.
"... 아스텝톤 에스테 케......"
"이제 다 끝났냐?"
"네."
"고맙다."
"고맙긴요 뭘."
약상자를 챙겨들고 성진의 방을 나서며 희원은 소리 없이 키득거리며 생각했다.
'큭큭큭. 그건 치료의 주문이 아니라 사랑의 주문이었는데. 으훗, 그나저나 선우오빠 손을 그렇게 오래도록 잡아보다니... 음, 흐뭇하군.'
"야, 방금 전화 받았는데 오늘 화보촬영 시간을 좀 앞당기고 대신 연예잡지 인터뷰 스케줄 하나가 늘었단다. 인터뷰는 오후 4시쯤 사무실에서 있을 예정이라는데 너희들도 그렇게들 알아둬라."
아침 식탁에서 성진이 다른 멤버들에게 변경된 스케줄에 대해 이야기 했다.
"제기랄. 우리가 뮤지션이지. 잡지 모델이야. 걸핏하면 사진 촬영이니 못해 먹을 노릇이군." 선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러게 말야, 형. 난 카메라보고 억지 웃음 지을 때 내가 세상에서 제일 바보멍청이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라니까." 어지간해선 불평을 모르는 준희도 마땅치 않은 기색을 드러내며 선우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건 감수해야지. 우리가 무명시절 때 겪은 설움들 잊었냐? 아무리 잘난 뮤지션도 성원해주는 팬들이 없으면 서러운 법이야. 화보촬영이다 인터뷰다 그게 다 팬서비스 차원에서 한다 생각하고 기분 좋게 해라."
성진이 두 동생들을 다독이며 하는 말이었다. 평상시 애교도 제일 많이 부리고 어린애처럼 장난도 좋아하는 성진이지만 역시 맏형은 맏형이었다. 레드비트가 그만큼 성장하는데는 따지고 보면 중요한 대사 결정에 있어서 늘 이성적이고 냉정한 성진의 판단력이 크게 주효했다.
희원은 간간히 성진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감탄스러움과 존경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또한 그토록 의젓하며 청중들을 사로잡는 파워풀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코맹맹이 소리로 순이야 순이야를 외쳐대며 애교를 부리고 어리광을 떠는 모습으로 180도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잡지사 인터뷰때 우리 팬클럽 회장하고 부회장도 동참한다더라. 지영이랑 소희 알지? 아참 그리고 또 누구 한 사람이 더 온다고 하던데... 신인 탈렌트라는데 걔도 오래전부터 우리 팬클럽 회원이었다나 어쨌다나......"
성진의 얘기에 희원은 순간 미랑을 떠올렸다.
'에이... 설마... 아마 뒤지고 보면 신인탈렌트 중에 레드비트 팬클럽 회원인 사람들 한 둘이 아닐 걸.'
멤버들은 스케줄 시간표에 맞춰 움직여야 했으므로 아침식사를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세 사람이 빠져나가고 난 뒤 희원은 부지런히 집안 청소를 마치고 셔츠와 바지 몇 개를 다림질 한 후 한가한 시간을 맞았다. 토스트 두 쪽으로 간단히 점심을 떼운 희원은 마침 토요일이라 수업이 없는 날이었으므로 혼자 드로잉 실습을 몇 장 해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빠른 시간 내에 세 장의 드로잉을 완성한 희원은 틈틈히 찍어두었던 디카 사진들을 천천히 훑어보며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간단한 뎃생을 해두었다. 창 밖이 조금씩 어둑어둑해지는 느낌에 시계를 보니 6시가 좀 못 된 시각이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슬슬 저녁 준비나 해야겠다."
그 때 불현 듯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성진오빠. 무슨 일이세요?"
"순이야, 너 지금 뭣 좀 가지고 나와겠다."
"네? 뭘요?"
"응, 잡지기사에 실릴 사진을 찍는 중인데 팬들한테 받은 선물들 몇 개 들고 찍으면 좋겠다고 해서. 빨랑 가지고 나올 수 있지?!"
"네, 그럼요. 근데 뭘 챙겨가야 하지요?"
"너도 대강 알잖아. 선우랑 준희 것도 알아서 니가 한 두 개 챙겨오면 돼."
"그럴 게요, 그럼."
"그래, 순이야 그럼 이따가 보자."
전화를 끊은 뒤 희원은 먼저 준희와 선우 방에서 각각 팬들로부터 선물 받은 모자와 종이별을 담은 유리병을 가지고 내려왔다. 그리고 팬들이 선물해준 인형들로 가득 차 마치 인형가게를 방불케 하는 성진의 방에서 눈에 띄는 인형 두 개를 골라잡아 커다란 쇼핑백에 넣은 뒤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택시를 잡아타고 사무실에 도착한 희원은 미스 김에게 인터뷰가 있는 장소를 물었다.
"전에 연습실로 쓰던 곳. 그냥 거기서 찍고들 있어."
희원은 커다란 인형 두 개와 유리병과 모자가 든 백을 힘겹게 들고 이 전 연습실로 향했다. 문 앞에는 사진 촬영을 위해 간단한 조명기구를 들고 서 있는 조명기사와 낯 모르는 남자 둘이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잠깐만요..."
문 앞에 서있는 남자들 사이를 뚫고 연습실 안으로 들어간 희원이 금새 성진을 발견하고는 목소리를 낮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성진오빠."
"아, 순이 왔구나. 여기야, 이리 가져와." 성진이 희원을 반기며 말했다.
희원이 성진과 함께 준희와 선우 곁으로 다가가 그녀가 챙겨온 물건들을 각기 임자들에게 건네주고 있을 때였다. 문득 희원의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가... 성진오빠가 말한 그 순이라는 가정부였어요?"
"어엇... 미랑아......" 희원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 참. 기가 막혀서!" 온몸의 실루엣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옷을 야사시하게 차려입은 미랑이 팔짱을 끼고 서선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희원을 째려보고 있었다.
"어, 뭐야? 둘이 서로 아는 사이였어?" 성진이 의아해하는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선우와 준희도 의아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예에....." 희원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억지 웃음을 웃으며 대꾸할 때 였다. 인터뷰 나온 기자들이 독촉을 했다.
"자아, 선물 들고 몇 컷 만 찍으면 끝나니까 얼른들 가십시다. 저녁식사 시간도 다 돼고 했으니까요."
레드비트 멤버들이 먼저 앞장을 서고 미랑이 그 뒤를 따르며 희원을 향해 소리 내지 않고 입모양을 크게 해서 말했다.
"너 이따 보자."
희원은 처음보는 팬클럽 회장과 부회장이라는 여자애들과 레드비트의 세 멤버, 그리고 미랑이 남은 몇 컷의 사진을 찍는 동안 그야말로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사실 희원이 딱히 미랑에게 잘못한 일도 없었건만 미랑의 불같은 성미를 알기에 뒷일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자아, 오늘 모두 수고들 하셨습니다."
이윽고 인터뷰와 사진촬영이 모두 끝나고 잡지사 기자인 듯한 여자가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레드비트 멤버들이 잠시 동안 팬클럽 회장과 부회장, 잡지사 기자들과 이런 저런 얘기들을 좀 더 나누고 있을 때 미랑이 희원에게 다가왔다.
"채희원. 너 정말 웃기는 애로구나." 나머지 사진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누구보다 활짝 웃는 표정을 자연스럽게 연출하던 미랑이었으나 희원 앞에 선 지금은 놀랄만큼 표독스러운 얼굴이 되어 잡아먹을 듯 희원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 그 때 그 일을 빌미로 선우 오빠한테 협박이라도 한 거야?!"
"협박이라니 미랑아... 그게 아니구......" 미랑의 기세에 눌려 희원이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였다.
"어쩐지 낯이 익다했더니. 니가 그 때 그 희원이랑 좌판 알바하던 얘였구나. 맞지?" 선우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선우오빠. 얘가 그 때 그 일을 핑계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오빠를 물고 늘어진거죠. 그쵸?" 미랑이 조소 어린 시선으로 희원을 훑어보며 말했다.
"함부로 넘겨짚지 마라. 희원인 내가 부탁해서 우리 집에 있는 거니까." 선우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미랑을 향해 말했다. 그 즈음해서 성진과 준희도 선우 옆으로 다가 들었다.
"오빠가요? 설마......"
미랑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 끝을 흐리더니 세 멤버들을 하나 하나 번갈아 쳐다보며 확신에 찬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저 앨 잘 아는데요 저 앤 돈 생기는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는 애예요. 아마... 몸이라도 팔 걸요."
"뭐라구? 이봐요, 이미랑씨. 말이 지나치군요."
미랑의 말에 준희가 제일 먼저 흥분해서 나섰다. 성진은 미랑이 내뱉은 말이 너무도 기가 막힌 지 입을 딱 벌린 채 말문이 막혀버린 듯 했다.
당사자인 희원 역시 하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아무런 말도 못한 채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억누르기 위해 기를 썼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랑이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너 정말 희원이 친구 맞아?! 야, 채희원. 쟤 니 친구 맞냐?"
급기야 냉정함을 잘 잃지 않는 선우도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희원은 당장이라도 터져나올 듯한 흐느낌을 참느라 주억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채희원. 너 정말 재주 좋구나. 어떻게 세 오빠들을 구워 삶았길래 다들 나만 잡아먹을 듯 하니. 오빠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얌전한 척 혼자 다 하면서 뒤로 호박씨 까는 애가 바로 쟤니까." 미랑은 세 남자들의 기세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기가 꺽이지 않았다. 다만 증오에 가득찬 시선으로 희원을 노려보며 계속되는 악담을 퍼부을 뿐이었다.
"재주는 니가 더 좋은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갑자기 뜰 인물은 아닌데 무슨 재주로 여기까지 왔는지. 몸 쓰는 재주는 니가 부린 거 아냐?" 냉소적인 독설이라면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선우가 급기야 한마디했다.
"뭐, 뭐라구요? 선우오빠?!" 제대로 한 방 먹은 미랑의 낯빛이 붉그락 푸르락 하더니 이내 흑색으로 변했다.
"누가 니 오빠야. 징그러우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라."
찬바람이 쌩 돌 정도로 냉랭하게 말을 내뱉은 선우가 희원을 향해 돌아서더니 그녀의 팔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가자."
"오... 오빠!"
미랑이 격분한 목소리로 선우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지만 선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성진과 준희도 마치 벌레라도 씹은 듯한 얼굴로 미랑을 한 번씩 흘겨주고는 선우와 희원의 뒤를 따랐다.
희원의 팔을 끌고 연습실을 막 나서려던 선우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미랑을 향해 한 마디 덧붙였다.
"야, 웬만하면 뽕브라라도 좀 차고 다녀라. 그래가지고 어디 장사 되겠니."
"어머머..... 기가 막혀!"
미랑이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였다. 선우를 뒤따라 나가던 성진도 문득 걸음을 멈추고 특유의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라 얘. 아스팔트 껌딱지도 무슨 자랑이라고, 흥!"
"뭐, 뭐, 뭐라구?! 아아아악!"
이리 깨지고 저리 깨진 미랑이 결국 또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 동안 그녀의 뒤에서 모든 상황을 흘금거리고 있던 팬클럽 회장인 지영과 부회장인 소희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서로 마주보며 이렇게 수근 거렸다.
"소, 소희야... 너 방금 전에... 그... 성진오빠 목소리 들었니?"
"으응. 그런 것 같애. 지영언니... 성진오빠 목소리가... 왜 그런 거야?" 부회장 소희가 울상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너도... 들었구나. 난 잠깐... 내 귀에 이상이 생긴 줄 알았어."
두 사람은 그렇게 망연자실한 얼굴로 성진이 사라진 연습실 입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어우, 정말 몹쓸 기집애다, 얘. 어떻게 친구한테 그럴 수가 있니. 난 그런 애인줄도 모르고 히히닥 거리며 같이 사진까지 찍었는데. 아우, 재수 없어."
성진이 한껏 풀이 죽어있는 희원을 위로하기 위해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하지만 희원은 이미 기운을 차린 후 였다. 세 오빠들이 악의에 찬 미랑의 공격을 철통처럼 막아주었는데 어찌 기운이 나지 않으랴. 다만 맘에 걸리는 것은 미랑이 왜 그토록 희원을 미워하느냐 하는 까닭이었다. 희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까지 미랑의 미움을 살만한 행동을 한 기억은 나질 않았다.
"야, 넌 왜 바보같이 찍소리도 못하고 걔한테 당하고만 있냐? 우리라도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멋모르는 사람들은 걔 말만 믿고 너한테 손가락질하고 그랬을 거 아냐."
선우가 희원을 나무라듯 한 마디 하자 성진이 다시 희원의 편을 들어주었다.
"얘가 달리 순딩이 소릴 듣냐. 그렇게 바보 같으니까 순딩이 소리도 듣는거구 또 그러니까 우리들 비위 다 맞춰주고 사는 거지."
성진의 말에 선우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희원은 그 날 비록 미랑을 만나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모욕을 받았지만 또한 레드비트의 세 멤버들이 얼마나 희원을 아껴주고 있는 지를 절실히 깨닫게 된 날이기도 했다. 때문에 집으로 향하는 그녀의 마음은 기쁘기 그지 없었다.
"야아, 오늘 기분도 그렇잖은데 어디서 외식이나 하고 들어갈... 어!"
준희가 분명 희원을 위해 외식 제의를 하던 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말을 맺지 못하고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앞서가던 선우를 불러 세웠다.
"선우형, 저기......"
준희가 가르키는 쪽을 바라보던 선우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희원은 의아해하며 역시 준희가 가르키던 쪽을 바라보았다. 빌딩 입구 오른 편에 무척 귀티가 흐르는 여자 하나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희원은 왠지 그 여자가 무척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어, 저 여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