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나연희씨...?!'
분명 그녀였다. 희원이 어린시절 안방극장과 은막을 넘나들며 주로 비련의 여주인공역을 도맡아 실감나는 눈물연기로 대중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배우 나연희가 분명했다. 아무리 연예계 소식에 깡통인 희원 조차도 그녀의 이름 석자와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만큼 과거 그녀의 인기를 능가하는 대배우는 없었다.
그러나 세월에는 장사 없다고 그녀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치고 올라오는 젊은 후배들에게 한 번 두 번 히로인 자리를 내어주는 듯 싶더니 결국 소리 소문 없이 연예계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선우야....."
그녀가 돌처럼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서있는 선우에게 다가오며 친숙한 어조로 선우의 이름을 불렀다.
"여긴 웬일이세요." 선우가 그녀를 외면한 채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선우야, 잠깐만 나 좀 보자. 잠깐이면 돼." 안타까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그녀가 부탁했다.
"제 말 못 알아들으셨어요! 자꾸 귀찮게 왜 이러세요!" 불현듯 화가 치미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며 선우가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야, 은선우... 아, 안녕하셨어요."
성진이 난처한 표정으로 선우의 팔을 슬쩍 잡아당기고는 앞으로 나서며 나연희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자 준희도 덩달아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왠지 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 그 상황을 어리둥절해서 지켜만 보고 있던 희원도 얼떨결에 그녀를 향해 얼른 고개를 숙였다.
"다들... 오랜만이네요. 잘들 지내죠?" 꺼질 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도 인사를 건넸다.
중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미모는 여전한 것 같았다. 하지만 어딘가 매우 피로하고 수척해 보였다. 그리고... 아주 슬픈 눈빛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녀가 선우와 무슨 관계이고 지금은 또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인지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희원이었지만 왠지 그녀의 그런 눈빛을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저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선우야, 우리 먼저 들어갈게."
성진이 자리를 비켜주려는 듯 준희와 희원의 등을 슬며시 밀며 선우를 향해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나도 지금 갈 거야."
선우는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까지 오싹해 질만큼 싸늘한 얼굴로 홱 돌아서서는 입구를 향해 성큼 성큼 앞서서 걸어갔다.
"선우야! 선우야!"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뒤따라가던 그녀가 몇 걸음 못 가 멈춰 서더니 힘없이 고개를 떨군다.
"어휴, 선우 이 자식 진짜......"
성진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나즈막히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떨군 채 서있는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오늘은 아무래도 그냥 돌아가셔야 될 것 같네요." 성진이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 그래야 겠네요. 선우한테... 다시 연락하겠다고 전해줄래요?"
그녀가 민망한 듯 성진을 외면하고 돌아서선 다급한 손놀림으로 핸드백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찍어냈다.
"네, 꼭 그렇게 전할게요."
"고마와요. 그럼 이만 나 먼저..."
그녀는 고맙다는 듯 성진의 팔을 가볍게 툭툭 두드리곤 입구를 향해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휴우......"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났을 때 준희는 초긴장 상태에서 해방된 사람처럼 긴 한숨을 내뱉았다.
"저 분... 나연희씨... 맞죠?" 희원이 조심스러운 어투로 준희에게 물었다.
"네, 맞아요. 선우형... 친엄마예요."
"예에?!" 희원은 너무도 뜻 밖의 사실에 눈만 휘둥그렇게 뜨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자세한 사정 얘기는 나중에 들려줄게요. 지금은 우선 집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네요. 선우형 혼자 밴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아아... 예에...예."
준희의 말처럼 선우는 먼저 밴에 들어가 앉아있었다. 희원과 준희는 그저 선우의 눈치만 살피며 밴에 올랐지만 성진은 밴에 오르려다 말고 선우를 힐끔 바라보더니 한 마디 했다.
"야 임마. 너 그럼 못 써."
"......" 그러나 선우는 못 들은 척 아무런 반응도 대꾸도 없었다.
"어휴, 누가 널 말리겠냐. 지석아, 빨리 차나 출발시켜라." 밴에 자릴 잡고 앉은 성진이 고개를 절레 절레 젓고는 로드 매니저인 지석을 재촉했다.
레드비트 멤버들과 희원이 탄 밴이 기획사 빌딩을 앞을 벗어나고 있을 때 미랑은 건물 입구에 서서 멀어져 가는 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은선우와 나연희라...... 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거지?'
묘한 기류가 흐르던 선우와 나연희의 대면 장면을 미랑도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미랑은 백 안에서 핸드폰 꺼내들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오빠, 나야. 누구긴 누구야 오빠 동생 미랑이지! 하도 여자 전화가 많아서 동생 목소리도 구분 못하겠나보지?! ... 아, 몰라. 그 딴 소리 집어치우고 뭐 하나만 알아봐 줘..... 은선우랑 나연희에 대해서 좀 알아봐. 이 잡듯 샅샅이, 세세하게...... 아, 그건 니가 알 거 없구! 시끄러, 끊어!"
신경질 적으로 전화를 끊은 미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혼자 생각에 골몰했다.
'은선우. 너 사람 잘 못 건드렸어. 이 번에 뭐 한 가지라도 걸리기만 하라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너를 옭아매 버릴 테니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방으로 올라간 선우는 저녁식탁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준희가 선우를 부르러 그의 방으로 가보았지만 결국 혼자 내려왔다.
"생각 없대. 문도 아예 잠궈놓고 있더라고."
"제가 다시 한 번 올라가 볼게요." 희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층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됐어. 그냥 혼자 있게 놔 둬. 하루 밤 자고 나면 또 괜찮아질 거야." 성진이 희원을 말렸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셋이서만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보통 때와는 달리 그들은 별로 주고받는 대화도 없이 매우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밥을 먹었다. 집 밖에서는 180도로 달라지는 성진이지만 집안에서는 어지간한 일로 무게 잡는 법이 없는 그도 심난한 표정으로 거의 말이 없었다.
다들 별로 식욕이 없었기에 식사시간은 금세 끝났다. 설거지를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희원은 살금살금 베란다로 나가 선우의 방 창가 쪽으로 길게 목을 빼고 무슨 소리라도 들리지 않을까 귀를 쫑긋 세워 봤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결국 베란다에서 기웃대기를 포기하고 방으로 들어온 희원은 책상 앞에 앉아 일러스트 이론 책을 펼쳐 들었다. 그러나 몇 십 여분이 지나가는 동안 첫 줄만 수도 없이 반복해서 되읽곤 되읽곤 했다.
'휴우...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군.'
희원은 결국 책 읽는 일도 포기한 채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누워서 천장에 붙어있는 벽지의 무늬를 눈으로 쫓아 그리고 있는 희원의 머리속엔 그러나 선우와 나연희가 대면하던 모습이 떠나질 않았다.
'나연희씨가 선우오빠의 생모라니... 전에 분명 성진오빠가 선우의 부모님 두 분 모두 대학 교수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럼 지금 선우오빠네 집에 계신 그 분은 의붓엄마라는 얘기가 되는 건가?'
준희로부터 나연희가 선우의 친엄마라는 얘기를 듣고 난 후 희원은 사실 저녁 식사 중에 좀 더 자세한 사정을 묻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식사시간 내내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던 두 사람에게 자신의 호기심이나 채우자고 섣불리 말문을 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니 그건 그렇다치고. 헌데 왜 선우오빠는 자기 친엄마를 그렇듯 매몰차게 외면하는 거지? 분명히 뭔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테지... 아휴, 이거 누가 말해주기 전엔 알 수가 없는 일이니 원.......'
궁금증과 답답함으로 괜스레 이리 뒤척 저리 뒤척 거리던 희원은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에 빠져들었다. 심난한 와중에 선잠이 들었던 탓인지 꿈자리도 아주 사나왔다.
갑자기 어느 전쟁터의 한 가운데로 떨어진 희원은 자욱한 포연을 걷어내며 걷고 있었다. 천지 사방에 피를 흘리고 누워있는 시체와 부상자들이 그득했다. 여기 저기서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귀전을 울리고 있었다. 그녀는 두려움과 연민이 뒤범벅된 감정에 휩싸인 채로 바닥에 깔린 시체들을 피해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절망적인 기분으로 몸을 도사린 채 눈물을 삼키며 걷고 있는 데 갑자기 하늘을 쪼갤 듯한 천둥소리에 이어 어디선가 기관총을 쏴대는 것 같은 굉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희원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놀란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사적으로 창가로 달려갔다.
언제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는지 모를 폭우 속에서 희원은 점점 희미해져 가는 선우의 오토바이 소리를 들었다.
'선우오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폭우 속에 오토바이를 타고 나간거야......'
시계를 보니 거의 10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각부터 희원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서성대기 시작했다.
선우가 오토바이를 타고 나간 지 두어 시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자 희원의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갑갑증을 주체하지 못하던 희원은 자신의 방을 나와 발소리를 죽이고 거실로 내려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거실 유리창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거센 빗줄기는 여전히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바심을 치며 그녀가 테라스에서 어정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거실불이 환하게 켜졌다.
"어, 희원씨. 여기서 뭐하고 있어요?" 준희였다.
"선우오빠가... 이 폭우 속에 오토바이를 타고 나간 지 세 시간이 넘었는데 아직 안 돌아왔어요." 희원이 거실 안으로 들어서며 초조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요?" 희원의 얘길 들은 준희도 걱정스러운 안색이 되었다.
"그런데 준희오빤 왜 내려왔어요?"
"아, 난 갈증이 나서... 그럼, 희원씨는 내내 이 시간까지 잠도 안 자고 선우형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초저녁에 잠깐 선 잠이 들었다가 선우 오빠 오토바이 소리에 깼는데 통 잠이 안 오네요." 희원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선우형...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설마 별 일이야 있겠어요." 준희가 희원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따뜻한 우유 한 잔 할래요? 그럼 잠 안 올 때 도움이 되거든요. 자, 와요."
희원이 괜찮다고 하는데도 준희는 희원을 식탁 의자에 앉히고는 손수 우유를 데워다 희원 앞에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캔맥주 하나를 꺼내 들고 희원 앞에 마주 앉았다.
"아까... 많이 궁금했죠?"
"아니라는 거짓말은... 안할래요. 사실... 많이 궁금했어요." 희원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선우형한테 지금 미국서 유학중인 여동생 하나 있는 건 알고 있죠?"
"네. 선우오빠가 무척 아끼는 동생이라고 알고 있어요."
"선우형이랑 나영이 누나는 원래 선우형이 여섯 살 때까지 나연희씨랑 함께 살았대요. 나연희씨가 한창 스타로 발돋움하던 시기에 만난 선우형 아버님과 나연희씨는 서로를 진심으로 많이 사랑하셨지만 대대로 학자 집안인 데다가 가문이나 가풍을 대단히 중시하시던 선우 할아버님 때문에 두 분은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사랑을 키우셨다나봐요. 선우형이 여섯 살이나 되도록 그렇게 감쪽같이 비밀을 지켜오셨다니 정말 대단하죠. 하지만 급기야 선우 할아버지가 그 사실을 아시게 되고 한 바탕 난리를 치룬 후에 선우 할아버지께선 어차피 둘 사이에 벌써 아이가 둘씩이나 있고 하니 나연희씨가 더 이상 배우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며느리로 받아들여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그걸 나연희씨가 거절했다더군요."
"아니, 왜요?" 희원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러니까... 당시 나연희씨는 스타중의 스타였고... 아마도 쉽게 그 자릴 버릴 수가 없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은 선우형 할아버지께서 선우형 남매를 데려가시고 그 이듬해 선우형 아버지께선 지금의 어머님과 결혼을 하셨는데 그 분과의 슬하엔 자식이 안 생기셨다네요. 아무튼 선우형은 그 때 이후로 자신이 친엄마에게 버림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자란 것 같아요. 아직 희원씨는 잘 모르겠지만 원래 선우형은 무척 정이 깊은 성격이거든요. 아마도... 나연희씨랑 떨어질 때 그만큼 상처가 깊었을 거예요. 너무 안타까운 얘기죠."
준희가 얘기 중간에 씁쓸한 얼굴로 한 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난 선우형이 저렇게 맘을 못 잡고 괜스리 밖으로 나도는 이유도 여자들과의 관계를 장난처럼 우습게 아는 것도 다 그런 연유에서 일 거라고 생각해요. 언젠가 선우형이 그러더라구요. 자기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는 여자는 동생인 나영이 하나 뿐이라고. 휴우... 어렸을 때 받은 상처가 오죽이나 깊으면 그러겠어요. 아무튼 오랜동안 나연희씨도 선우형을 찾지 않았던 걸로 아는데 최근 들어 부쩍 선우형을 만나기 위해 애를 쓰는 것 같더라구요. 물론 선우형이 그걸 허락치 않아서 문제지. 아까... 그 분위기 이제 희원씨도 대강 파악이 되죠?"
준희로부터 선우의 아픈 과거 얘기를 모두 들은 희원은 선우가 어렸을 때 받았을 상처가 마치 현재의 자기의 것인 양 아프고 화가 났다. 도대체 인기에 연연해 자식을 포기하는 엄마라니... 희원으로서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핏줄은 천륜이었다. 끊고 싶다고 끊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선우가 아무리 발버둥치며 부정하고 피하려해도 그 사슬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마 선우오빠 자신도 그걸 알고 있기에 저토록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것일 테지...... 선우오빠,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 거예요?'
희원은 주룩주룩 쏟아지고 있는 빗줄기를 걱정과 원망이 뒤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준희와 다시 밤인사를 나누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희원은 한동안을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다. 하지만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어스름한 새벽의 여명 속에서 또 다시 뭔가에 화들짝 놀란 사람처럼 불현듯 잠에서 깨어났다.
"선우오빠!"
탁상시계를 보니 다섯 시 반이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희원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선우의 방으로 가 살그머니 문을 열어보았다.
언제 들어왔는지 침대 위에 잠들어 있는 선우의 모습이 보였다.
희원이 휴우하고 가슴을 쓸어 내리며 막 돌아서려는데 선우가 잠꼬대를 하는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 어디가 아픈 건 아니겠지? 아니야... 만약 어제 그 비를 다 맞고 돌아다녔다면.....'
희원은 선우가 심한 독감에라도 걸린 것은 아닐까 싶은 마음에 살금살금 선우의 곁으로 다가가 잠들어 있는 그의 안색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긴 머리칼은 물론이거니와 베게며 시트가 온통 젖을 만큼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잠꼬대를 하는 것처럼 간간이 웅얼거리곤 했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희원은 조심스레 선우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식은땀을 많이 흘린 탓인지 다행히 열이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안색이 너무도 창백해 보였다.
그녀는 살며시 침대 가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한동안 선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일까? 감고 있는 눈꺼풀 아래서 끊임없이 눈동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희원은 자신도 모르게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희고 선이 고운 이마.
숱 짙은 검은 눈썹아래 적당히 그늘을 드리울 만큼 살짝 꺼진 눈매.
길고 풍성한 속눈썹......
또르르......
'선우...오빠?'
그의 눈가로... 한줄기 눈물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선우오빠......'
그의 눈물을 보는 순간 형언키 어려운 슬픔이 마치 거대한 해일처럼 들고일어나 선우에 대한 연민으로 흔들리고 있는 희원의 마음을 세차게 할퀴고 갔다.
희원에 눈에는 어느덧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가고 있었다.
또 다시 웅얼거림을 시작한 선우가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젓기 시작했다. 마치 뭔가를 찾기 위한 아니 뭔가를 잡기 위한 것처럼......
그의 길고 섬세한 손가락 끝에서 희원은 어떤 애끓는 갈망을 보았다.
망설임 끝에 희원은 허공중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쥔 채 안정을 찾은 사람처럼 한동안 고요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깜짝 놀란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서 희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가에 고여있던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런 그를 희원은 당장이라도 왈칵 쏟아져 내릴 듯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그리고 너무도 강렬하게 선우가 희원을 그의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안개가 낀 것처럼 몹시도 혼란스러운 눈빛을 하고 희원의 두 눈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희원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그는 발작적으로 희원에게 키스했다.
'선...선우.. 오빠... 선우......'
뜨거운 입술과 차가운 혀.
시시각각 그녀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그의 숨결.
주술적인 리듬감이 느껴지는 그의 심장박동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