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 (16/75)

  

# 15.

 버스에서 내린 희원은 집을 향해 냅다 뛰기 시작했다. 수영 때문에 귀가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지체되었기 때문이었다. 희원이 현관문 앞에 다다랐을 때는 숨이 턱 까지 차올라 있었다. 그녀는 문 앞에서 일단 숨을 고른 후 이마 위의 땀을 닦았다.

  "다녀왔습니다. 늦어서 죄송... 어?"

 집안에 들어서서 막 신발을 벗으려던 희원의 눈에 교복차림을 한 여고생들 세 명의 모습이 먼저 들어왔다. 아마도 재주 좋게 레드비트가 살고 있는 집 주소를 알아내고 찾아온 팬들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헐레벌떡 집안으로 들어온 희원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세 명 모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톱을 세운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삐리리릿.

  "순이 왔니? 여기 얘들은 우리 열혈팬이야. 녀석들 귀신같이 어떻게 여긴 알아내가지고는... 아무튼 너네들 오늘이 처음이니까 집안에 들여준 거야. 담부턴 찾아오구 그러지 말아라. 알았지?"

 성진이 여학생들이 들고 온 자신의 물건들에 열심히 사인을 휘갈기며 말했다. 그 옆에 선우와 준희도 성진과 함께 그녀들을 위해 정성껏 사인을 해주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여학생들은 난데없이 불쑥 나타난 희원을 적개심 서린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 제일 깍쟁이처럼 생긴 여학생 하나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 성진오빠. 그런데 저 여잔 누구예요?"

  "아... 쟨... 니들도 언니한테 인사해라. 저 언니는 일종의... 우리 어시스턴트야. 아주 여러 방면에서 우릴 많이 도와주고 있..."

  "가정부야. 입주 가정부."

 선우가 성진의 말을 자르며 냉랭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어머머, 가정부요? 무슨 가정부가 저렇게 젊어?"

  "야, 가정부 노릇하는데도 무슨 나이 제한 있다든? 아무튼 그랬구나... 가정부.."

  "그런데 가정부께선 지금 본분을 망각하고 어딜 싸돌아다니다 오는 건지 모르겠군." 선우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희원을 쏘아보며 덧붙였다.

 가정부라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던 여학생들은 이내 적개심을 푸는 대신 비웃음이 깃든 표정으로 희원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자기네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속닥거렸다.

  "어쩐지... 촌티가 좔좔 흐른다 했다 내가."

  "누가 아니래니. 그럼 그렇지 레드비트 오빠들이 뭐가 아쉬워서 저런 여잘 상대해 주고 있겠어."

  "열라 실망할 뻔했잖아. 오빠들 안목이 저것 밖에 안되나 싶어서..."

 희원은 여학생들의 조롱 섞인 속닥거림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등골이 오싹해올 만큼 서슬 퍼런 선우의 말투와 눈빛에 희원은 그만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말았다.

  '그래. 나 가정부... 가정부 맞잖아. 선우오빠가 틀린 소릴 한 것도 아닌데 뭘. 본분을 잊은 건 절대 아니었지만 수영오빠랑 있다가 늦은 것도 사실이구. 하지만 선우오빠... 나도 알아요. 내가 이 집의 가정부란 거. 오빠가 그렇게 못 박듯 얘기해 주지 않아도 나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나한테 그렇게 냉정한 얼굴만은 하지 말아요.'

  "죄송합니다. 사정이 생겨서 늦었습니다. 앞으로 절대 그런 일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선우의 차디찬 시선을 마주하던 희원이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사과하고 죄인처럼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모습을 당혹스러운 얼굴로 지켜보던 성진과 준희는 희원의 모습이 2층으로 사라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선우를 흘겨보았다. 

  "야, 넌 짜식이 꼭 말을 그렇게 밖에 못해?!"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과일 접시를 앞에 놓고 거실에 둘러 앉아있던 중 성진이 아직 주방에서 남은 뒷정리를 하고 있던 희원에게 까지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잔뜩 목소리를 낮추며 선우를 질타하기 시작했다.

  "뭘 말야." 

  "몰라서 물어?"

  "응."

  "어휴, 이게 진짜. 너 아까 애들도 있는 앞에서 희원이 한테 왜 그랬어?"

  "아아, 그거. 왜 내가 틀린 소리라도 했나?"

  "선우형, 아까 희원씨 표정 못 봤어? 난 미안해서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어휴."

  "가정부한테 가정부라고 한 게 이렇게 욕먹을 짓인가?"

 선우가 입 끝을 실룩해 보이고는 포크로 사과 한 조각을 찔러 입으로 가져갔다.

  "임마, 넌 그런 말도 몰라. 그..거 머시냐,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또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그런 말 못 들어봤어?"

  "그래서... 순이 기분을 생각해서 그냥 우리 어시스턴트다 뭐 그래줬어야 된다 이거야?"

  "그래,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여자들한텐 그게..."

  "순이가 우리한테 여자야? 걘 그냥 돈 주고 가정부로 고용한 고용인일 뿐이라고."

  

 싸늘한 얼굴로 성진의 말을 가로챈 선우는 빈 포크를 접시 위에 던지듯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이 층으로 총총히 올라가 버렸다. 그런 선우의 모습을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바라보던 성진이 씨근덕 거리며 준희를 향해 말했다.

  "저 자식 왜 그러냐? 여자들처럼 그 날도 아닐 테고. 왜 저렇게 날이 퍼렇게 서서 정나미 떨어지는 소리만 골라서 할 수가 있냐."

  "그러게..."

 준희는 자신의 턱을 문지르며 혼자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분명 선우와 희원 사이에 성진과 자신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게 확실했다. 하지만 그게 뭔지는 준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목을 길게 빼고 주방 쪽을 쳐다보았다. 희원이 아직 잔일을 못 끝내고 있는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괜스레 울적하고 머리 속이 산만했던 희원은 일부러 이 것 저 것 일을 만들어 하고 있었다. 싱크대 안에 있는 식기며 집기들을 몽땅 꺼내서 차례 차례 끓는 물에다 삶는 동안 싱크대 안팎을 광이 나도록 닦고 또 닦았다. 그런 후 소독이 다 끝난 그릇들이며 수저들을 식탁에 모아놓고 마른행주로 다시 또 광이 나도록 닦았다. 집기들을 모두 싱크대 안에다 정리해 들여놓고 있을 때 준희가 저으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주방을 다녀갔다. 희원은 웃는 얼굴로 준희를 돌려보내 놓고는 남은 정리를 다 마친 후 주방 바닥을 훔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걸레질을 거의 마칠 때 즈음 선우가 주방에 나타났다.  

  "커피 한 잔 뽑아서 연습실로 가져와라."

  "예."

 희원은 대답을 마친 후 멈췄던 걸레질을 다시 시작했다. 헌데 선우가 나갈 생각을 않고 그대로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다. 평소의 그는 희원에게 시킬 일을 지시하곤 곧장 횅하니 돌아서 가버리곤 했기 때문에 희원은 다시 손을 멈추고 의아한 얼굴로 선우를 올려다 보며 물었다.

  "또 뭐... 시키실 일이라도..."

 하지만 선우는 잠자코 희원을 내려다보고 서있을 뿐이었다. 그런 선우를 향해 희원이 다소 어색하긴 했지만 눈이 반달모양이 되도록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지금 생각 안 나시면 커피 가지고 올라갔을 때 다시 시키세요."

 선우는 여전히 아무 대꾸도 않은 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잠시 동안 희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결국 아무 말도 않고 돌아서 주방을 나갔다.

 희원은 선우가 나간 후 얼른 손을 씻은 다음 커피 메이커에 물을 채웠다. 부지런히 걸레를 빨아 널은 후 주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윽한 헤이즐넛향이 은은하게 진동했다. 희원은 보라색 아이리스 꽃무늬가 있는 단아한 느낌의 커피잔에 원두커피를 한 잔 따른 후 이 층 연습실로 향했다.

 희원이 연습실 안에 들어섰을 때 선우는 귀 위에다 펜을 꽂고 입에는 담배 한 가치를 문 채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악보를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주위에는 십 여장의 악보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선우오빠, 커피 가져왔어요."

  "응, 여기 옆에다 내려놔라."

 희원은 선우가 턱 끝으로 가르킨 자리에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조용히 한 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정신없이 널브러져 있던 악보들을 모아 대강 순서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선우가 문득 물었다.

  "악보 볼 줄 아니?"

  "예... 피아노를 좀 배웠기 때문에 대강은 볼 줄 알아요."

  "그렇구나."

 악보를 차곡차곡 간추려 선우 옆에 내려놓은 희원이 자리를 뜰려고 할 때였다.

  "그럼... 뭐 아무거나 하나 쳐볼래?"

 선우가 창가 쪽에 붙여놓은 키보드를 고갯짓으로 가르키며 말했다.

  "글쎄요... 쳐본지가 오래라..."

 희원은 선우가 가르킨 키보드를 건너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의 회사가 그처럼 허망하게 부도가 나기 전까지 희원은 피아노에 꽤 심취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피아노에 빨간색 차압 딱지가 나붙은 날 이후로 희원은 피아노 건반에 거의 손을 대보지 못했었다.

  '정말 아끼던 피아노였는데......'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한 곡 쳐봐."

 희원은 선우의 얼굴을 돌아보며 피식 웃고는 키보드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희원은 살며시 눈을 감고 예전에 자신이 즐겨 치던 곡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건반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쇼팽의 이별곡을 치기 시작했다. 

 아름답고도 슬픈 곡조가 연습실 전체에 애잔하게 울려 퍼져 나갔다.

 건반을 누르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들은 마치 꿈결같기만 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듬어 나가는 듯 기꺼워하는 그녀의 마음을 대신 하는 것처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유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별의 노래... 

 고통, 상심, 좌절이란 것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온통 세상이 아름답고 행복하게 보이기만 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안녕을 고하 듯 그녀의 가슴이 뭉클해져 왔다.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괴어왔다.

 어떤 느낌에 문득 고개를 돌린 그녀의 옆에 어느 사이엔가 선우가 다가와 나란히 앉아있었다. 깜짝 놀란 희원이 황급히 눈물을 훔치느라 연주를 멈춘 사이 선우가 대신 뒷부분을 이어서 쳐나가기 시작했다. 

 희원은 말 없이 그의 옆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젖이 살짝 두드러져 보일 만큼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힌 채 어떤 상념에 빠진 듯 허공 중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놀랄 만큼 고요하고 평화스러워 보였다. 늘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기를 휘감고 다니는 듯 보이는 선우였지만 그가 열렬히 사랑하는 음악에 도취되어 있기 때문일까? 그는 마치 싸움이 끊이지 않는 전쟁터에서 돌아와 무기며 갑옷이며 모든 무장을 풀어 던지고 어릴 적 뛰어 놀던 언덕에 올라  앉아 정겨운 고향 산천을 굽어보는 사람처럼 더할 나위 없이 온유하고 충만되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에게 있어 음악이란 것은 사랑하는 연인이자 고향산천 같은 존재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선우의 고요하고도 평화스러운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복받쳐 올랐던 감정을 추스린 희원도 선우의 길고 섬세한 열 손가락과 나란히 열지어 자신의 손가락을 다시 건반에 올리고 합주를 시작했다. 폴란드를 떠나 파리에 머물던 쇼팽이 자신의 조국과 첫사랑이었던 여인과의 이별을 가슴 아파하면서 썼다는, 쇼팽 자신조차도 그토록 아름다운 멜로디는 작곡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 그 곡을 두 사람은 그렇게 나란히 앉아 시름없이 연주해 나갔다.

 이윽고 쇼팽의 이별곡 연주가 다 끝났을 때 선우가 여전히 뭔가에 도취된 듯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희원에게 물었다.

  "이 곡을 치면서 넌 무슨 생각을 했니?"

  "그냥... 전...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여 안녕......

  한 점 티없이 새털처럼 순수하고 가벼웠던 날들이여 안녕......"

  "넌 안녕을 고하면서 눈물을 글썽일 만큼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있어서 좋겠구나."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꿈결 속을 헤매고 있는 사람이 혼미한 상태에서 중얼거리는 것처럼 매우 이질적이고 비현실적인 공명음으로 들려왔던 것은 왜 일까? 

 희원은 그의 존재감을 확인코자 얼른 고개를 돌려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선우오빠는 자신의 친엄마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으로 내내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그렇게 고통스런 어린 시절을 보냈을 거라고 했지... 내가 생각없이 너무 경솔한 얘기를 지껄여 버리고 말았네... 어쩌면 선우오빠는 이별곡을 치면서 나연희씨를 생각했을 런지도 모르는데......'

 또 다른 빛깔의 알싸한 슬픔이 모락모락 희원을 엄습해왔다.

  "아까..." 문득 선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애들 앞에서 내가 했던 얘기 말이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

  "난 희원이 니가 무슨 일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네 꿈을 이뤄가길 바래. 누가 뭐라든 남들이 널 어떤 눈으로 바라보든 그런 것 따윈 괘념치 말고. 무엇에든 쉽사리 상처받지 않을 만큼 강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선우오빠..." 

 희원은 놀라움과 고마움이 가득 찬 눈으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이고 검은 건반과 하얀 건반을 지그재그로 누르는 시늉을 하고 있는 그의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희미하게 걸려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