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자, 다들 준비는 됐겠지?"
미션 임파서블에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비장한 성진의 목소리가 뒤집어쓰고 있는 피터팬 마스크 때문에 왱왱거리며 콧소리처럼 새어나오자 준희가 웃음을 터뜨린다.
"푸흡!"
"준희, 너 왜 웃어?!"
"하핫, 아니 형 목소리가 넘 웃기잖아."
"킥킥..."
"어쭈, 순이 너까지... 그나저나 니들은 왜 안 뒤집어쓰는 거야!"
"성진 오빠, 전 오빠들처럼 유명인도 아니니까 안 써도 될 것 같은데요."
"그, 그런가?"
놀이공원 주차장에서 가장 인적이 뜸해 보이는 위치에 차를 주차시킨 세 멤버들과 희원이 나누고 있는 대화였다.
"어휴,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계속 뒤집어쓰고 다니지. 얼굴에 땀띠 나겠다."
"그러니까 눈치껏 썼다 벗었다 하란 말이야. 야, 계속 여기 차안에서 이러고 있을 거야."
준희가 레이건 마스크를 들고 내려다보며 망설이고 있자 성진이 왱왱거리며 채근했다.
"꼭 이렇게 까지 해가면서 여기서 놀아야 되는 거야? 무슨 미션 임파서블이나 007 작전 수행하러 온 것도 아니고." 그동안 눈쌀을 찌푸린 채 마뜩치 않은 얼굴로 앉아 성진과 준희를 지켜만 보고 있던 선우가 결국 불만을 터뜨렸다.
"이 자식이. 여기까지 따라와 놓고는 또 딴소리야. 쓰고 안 쓰고는 니 맘인데 나중에 사람들한테 치여 죽어도 나는 모른다. 암튼, 준희랑 난 먼저 나간다. 니들 둘은 좀 있다가 따라 와라."
"뭐?"
"난 준희랑 한 조 할테니까 니가 희원이랑 한 조 하라구. 넌 어차피 누가 알아봐도 별로 걱정할 게 없는 놈 아니냐. 스캔들 무서운 줄 모르는 놈이니까." 성진이 힐끗 희원을 의식하며 말했다.
"그래, 여우처럼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니시는 양반이 어련하시겠어."
"짜샤, 공원 들어가기 전에 여기서 한 판 붙고 가리?! 잔소리말고 너넨 좀 있다가 입장해. 우리 먼저 들어갈 테니까. 적당한 장소에서 핸폰으로 연락하고 접선하자구. 오홋, 생각만해도 신나!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으면 같이 어울려도 좋을 것 같은데 그건 들어가서 형편 봐가면서 하자구. 순이야, 미안하다 저 딴 재미없는 놈이랑 한 조로 붙여놔서. 착한 니가 이해해라."
"후훗. 그럼 이따가 봐요, 오빠들."
성진과 준희가 주차장 주위를 살피며 어정쩡하게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희원은 소리없는 미소가 흘렀다. 피터팬과 레이건이라니.....
그나저나 엘비스는 어쩌고 있는 지 희원의 시선이 선우에게로 돌아갔다.
선우는 우스꽝스런 마스크를 뒤집어쓰는 게 못내 내키지 않는 듯 마스크를 얼굴 근처까지 가져갔다 내려놨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야, 왜 웃어?"
그런 모습을 곁눈질로 지켜보며 히죽거리고 있던 희원을 향해 선우가 볼 멘 소리로 말했다.
"웃은 적 없는데요."
"거짓말 하지마. 너 분명히 웃었어."
"아이 참, 안 웃었대두요. 선우 오빤 사람 말을 왜 못 믿고 그러세요. 그렇게 살면 인생이 고달파진다는 거 모르세요." 희원이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짐짓 새초롬한 얼굴을 가장하고 청산유수처럼 말했다.
"어쭈, 짜식이 같이 살면서 느물거리는 것만 늘어 가지고는... 에이..." 선우가 희원을 향해 눈을 흘기는 시늉을 하더니 결국 엘비스 마스크를 훌러덩 뒤집어썼다.
"파하하하!"
"우이쒸!"
"엘비스 오빠 넘 멋져요!"
"맞을래?!"
차 안에서 내린 선우와 희원은 앞서 출발한 성진조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공원 입구로 걸어갔다. 성진의 호들갑(?)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하는 수 없이 티켓을 구입해다 준 로드매니저 덕분에 네 사람은 곧장 공원 안으로 입장했다. 입구에서 티켓을 확인하는 직원이 캐릭터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던 선우를 한 번 흘긋 쳐다보기는 했지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속으로 '무슨 날이야? 좀 전에 어떤 두 놈도 가면을 쓰고 들어가더니.'라고 생각했을 뿐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다.
공원 안은 평일인데다가 거의 대부분의 학교들이 개학을 한 이후라 그런지 제법 한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레드비트 멤버들이 버젓이 얼굴을 들고 돌아다닐 만큼은 아니었다.
"아니, 이 사람들 다 뭐냐? 다 백수냐? 평일 날인데도 뭔 사람이 이렇게 많아?"
성공리에 입장했느냐고 확인차 전화했던 성진이 투덜대듯 내뱉은 소리였다.
아무튼 맨 얼굴로 돌아다니는 만큼은 아니겠지만 캐릭터 가면을 쓴 키 큰 남정네들 세 사람이 붙어 다니는 것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 것 같았기에 그들은 처음에 나눈 조대로 각기 돌아다니다가 한적한 장소을 발견할 때마다 랑데뷰(?)를 하기로 했다.
희원은 시종일관 들뜬 기분이었다. 선우와 둘이서 나란히 놀이공원 안을 돌아다니고 있자니 마치 데이트라도 나온 기분이었다. 성진과 준희의 압력에 못 이겨 마지 못해 따라 나선 선우 역시 막상 공원을 누비고 다니자니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더구나 옆에서 어린 애마냥 폴짝거리며 좋아하는 희원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선우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이 놈의 마스크만 아니면 더 좋겠는데...'
"와아, 저거 재미있겠다! 선우 오빠 우리도 저거 타러가요!"
희원이 가르키고 있는 것은 바이킹이었다. 탈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줄이 길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오래지 않아 놀이기구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러나 바이킹에 오르기 직전 두 사람은 잠시 실랑이를 벌어야 했다.
"맨 뒷줄로 가요, 그래야 스릴 있죠."
"야, 그냥 여기 앞줄에 타도 다 재미있어."
"선우오빠, 설마 무서움 타서 그런 건 아니겠죠?"
"누, 누가! 맨 뒤로 가잣."
바이킹이 왕복운동을 거듭하며 가속을 받는 동안 희원은 만세를 부르듯 두 팔을 높이 올리고 연신 '끼야호'를 외쳐댔다. 고개 숙인 남자 엘비스 옆에서.
"오빠, 괜찮아요?"
바이킹에서 내린 후 근처에 서있던 나무에 기댄 채 한쪽 머리를 짚고 선 선우를 향해 희원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 괜찮지 않구, 그럼. 너무 오랜만에 타는 거라 아직 적응이 안 돼서 좀 그런 거야. 다, 다음엔 뭘로 탈까? 가지."
곧 죽어도 폼생폼사의 선우. 만약 희원이 마스크 속의 창백한 선우의 얼굴을 봤다면 그녀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다른 놀이기구를 향해 앞장서지 못했을 것이다.
"오빠, 저거 타보셨어요?"
"응? 아니... 첨 보는 건데." 선우가 희원이 손으로 가리키는 놀이기구의 그림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최근에 나온 놀이기구 인데요 저 코스 중에 롤러 코스터가 아무것도 안 보이는 암흑 속을 40초 동안 운행하는 구간이 있거든요. 얼마나 스릴있는지 몰라요."
"그러냐."
"같이 탈거죠?"
"물론."
그래서 희원과 선우는 리스키 마인이라는 기차 모양의 놀이기구에 다시 올랐다. 놀이기구의 출발을 알리는 벨이 잠시 요란하게 울리는 동안 선우가 넌즈시 희원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무서우면 이 오빠한테 기대라, 알았지?"
이윽고 롤러코스터가 출발했다. 인공으로 만들어진 광산 모양의 구조물 사이로 난 좁다란 레일을 따라 롤러 코스터가 굉음을 내며 위태롭게 질주하기 시작하기 했다. 그리고 출발과 동시에 경직되었던 선우의 팔은 급기야 희원이 언급했던 암흑의 코스를 굽이굽이 질주하는 동안 아예 희원의 목을 조르다 시피하며 잔뜩 힘이 들어갔다.
"켁켁, 선.. 오빠, 이 팔 좀 풀어줘요."
"으아아아아!"
리스키 마인에서 내린 후 희원은 벌겋게 부은 얼굴로 연신 목을 쓰다듬고 있었다.
"괘, 괜찮냐?"
"켁켁... 오빠 같으면 괜찮겠어요. 그렇게 힘센 팔로 몇 분 동안 계속 목을 졸리다 시피 했는데요."
"......"
"어휴, 목이 탁탁 막히는 게... 시원한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먹으면 좀 나아질 것 같기도 한데..."
"아이스크림? 여기 아이스크림 파는 데가 어딨지? 어디 파는데가 분명 있을텐데....."
선우가 허둥대는 모습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 저기 있다! 기다려. 내가 금방 아이스크림 사 가지고 올게."
부랴부랴 아이스크림 가게로 바삐 달려가는 선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희원이 혓바닥을 낼름 내보인 후 활짝 웃었다.
빰빰빠밤 빠바방. 딩디리딩딩 딩딩 딩디리딩딩...
희원이 선우가 사다 준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할짝거리고 있을 때였다. 영화 007시리즈의 주제곡이 선우의 핸드폰이 부서져라 울리기 시작했다.
"이크..."
요란스런 벨소리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선우에게로 집중되고 있었다. 세 사람의 핸드폰 벨소리를 모두 007주제곡으로 바꾸자던 성진의 어거지 섞인 아이디어를 저주하며 선우는 몸을 움추린 채 얼른 통화버튼을 눌렀다.
"왜? 응, 아직까진 별 탈 없어... 응... 대 관람차?"
대 관람차 안에서 만나 도시락을 까먹자고 한 기발한 아이디어 역시 성진의 것이었다. 그가 대관람차를 운행하는 직원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네 사람은 관람차가 몇 바퀴를 돌도록 내리지 않아도 되었다. 덕분에 그들은 관람차 안에서 희원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도시락을 비교적 한가롭게 까먹을 수 있었다.
"오우, 이 맛이야. 캬아..."
한 손에는 초밥을 다른 한 손에는 샌드위치를 든 채 김밥을 맛나게 우물거리며 성진이 말했다.
"혀엉, 밥풀 튀어. 으유, 정말......"
"아, 정말 소풍삘난다. 이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준희의 빈축을 사고 있다는 사실 따윈 아랑곳 않은 채 미어 터질 듯한 양 볼을 하고 짐짓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진의 모습이 너무나도 희극적이었기에 희원은 웃음을 참느라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오빠, 여기 물 좀 같이 마시면서 천천히 드세요."
"고마워, 순이야."
관람차가 몇 바퀴를 도는 동안 네 사람은 맛나게 도시락을 먹으며 자신들이 탔던 놀이기구 탑승기(?)를 마치 대단한 모험담이나 되는 듯이 서로에게 들려주기 바빴다. 준희는 선우와 희원도 탔었던 바이킹을 성진과 함께 탔었던 얘기를 들려주었는데 성진이 하도 이상한 소릴 내며 괴성을 질러대는 바람에 바이킹에서 내릴 때 자신의 옆에 앉아있던 여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두 사람과 함께 바이킹을 탔던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게 노골적인 눈총을 주는 바람에 무안해서 혼이 났다고 했다. 준희는 덧붙여서 그 때 성진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레드비트의 리드싱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귀신 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 때 희원은 리스키 마인을 탔을 때의 선우의 모습이 겹쳐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짐짓 시치미를 떼고 앉아 무게를 잡고 있던 선우에게 행여 미운 털이라도 박히게 될 까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도 남김없이 도시락을 모두 비운 후 관람차에서 내린 네 사람은 다시 조별로 갈라져 행동하기로 했다. 사실 처음에 사진을 찍을 목적으로 거론됐었던 공원 나들이었지만 역시나 얼굴을 드러내놓고 맘 편히 사진을 찍고 할 상황은 불가했기에 사진촬영은 다음을 기약하며 접어두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성진조와 갈라져 다닌 지 삼 십 여분 정도가 지났을 때였을까? 준희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아무래도 성진이 형 데리고 먼저 돌아가봐야 될 것 같아."
"뭐?"
"어휴 말도 마. 아까 그렇게 꾸역 꾸역 먹어대더니만 결국... 자이로 스윙인지 뭔지 타고 내리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더니 먹은 거 다 토해내고 난리도 아니다 지금."
"그래? 하여간에 성진이 형 애 같은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알았다, 그럼. 니가 고생 좀 해라. 응. 이따 집에서 보자."
핸드폰을 내려놓는 선우를 향해 희원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성진오빠가 왜요? 무슨 일 있대요?"
"니가 도시락을 너무 맛있게 싼 게 그게 문제다 왜."
"예에?"
"야, 어차피 이렇게 한 번 나오기도 힘든데 성진형은 안됐지만 우리끼리라도 형 몫까지 열심히 놀다 들어가자."
"성진오빠 먼저 들어간대요? 그럼 우리도 같이 들어가야 되는 거 아니예요?"
"말했잖아. 형 몫까지 열심히 놀다 가자고."
희원은 잠시 어두워졌던 얼굴을 펴고 앞장서 걷기 시작하는 엘비스의 뒤를 바짝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치사한 자식. 내가 이 모양이란 소릴 듣고도 남아서 더 놀다오겠다고? 우쒸, 안 따라오겠다는 걸 억지로 데려왔더니 이젠 되려... 아, 이렇게 배신을 때리다니, 선우 이 자식."
창백한 얼굴로 준희의 부축을 받다시피 하면서 차에 오른 성진이 툴툴 거리자 준희가 달래듯 성진을 향해 말했다.
"형은 희원씨 생각은 안 해? 우리야 몸만 달랑 나왔으니 억울한 거 없지만 희원씨야 이 나들이 준비한다고 얼마나 고생했어. 선우형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형이야말로 애처럼 그러지 마."
"하긴... 나 때문에 다들 지금 돌아가 버리면 희원이한테 젤루 미안하긴 하지..."
성진이 쌜쭉한 표정으로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대꾸했다. 두 사람이 탄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 도로에 접어들 무렵 선우와 희원은 동물원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오, 공작새다, 공작새!"
희원이 폴짝 뛰어오르듯 공작새가 있는 우리 곁으로 다가가며 소리쳤다.
"오빠, 그거 아세요? 어떨 때는요 막 박수를 쳐주면 공작새가 꼬리를 활짝 펼치기도 해요. 함 보세요."
말을 마치자마자 희원이 열렬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작새들은 시큰둥한 얼굴로 몇 걸음 어슬렁거리더니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이런..."
희원의 뻘쭘해진 얼굴을 보고 선우가 웃으며 말했다.
"야, 아무나한테 박수 받는다고 꼬리를 펼치겠니. 자, 함 봐라."
선우 역시 말을 마침과 동시에 주위를 둘러보더니 마스크를 훌렁 벗어 겨드랑이 사이에 끼곤 큰 소리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박수가 계속 되는 동안 공작새들은 떼를 지어 숙사처럼 보이는 건물 안으로 아예 사라져버렸다.
"프하하하!"
"엇, 저것들이... 야야, 쟤네들이 다 수컷이라서 그런 거야."
두 사람이 동물원 여기 저기를 누비며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동안 늦여름의 오후가 서서히 서녘을 향해 기울어가고 있었다.
"야, 하도 걸어다녔더니 갈증 난다. 음료수라도 사 마시자."
"전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또?"
"네."
"하긴 너 아이스크림 무지 좋아한다고 그랬었지. 그래, 그럼 나두 아이스크림으로 먹지 뭐."
선우와 희원은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비교적 오가는 이가 적은 곳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야, 무슨 아이스크림을 그렇게 강아지처럼 할짝거리면서 먹냐? 이렇게 먹어야지 나처럼."
마스크를 이마 위로 훌렁 넘기고 있던 선우가 날름 날름 아이스크림을 베어먹는 동안 희원은 문득 수영에게 생각이 미쳤다. 선우가 희원을 향해 강아지처럼 아이스크림을 먹는 다는 얘길 하지 않았으면 깜빡 잊을 뻔 했을 것이다.
"저... 전화 좀 한 통화 해야겠어요."
"응? 누구한테?"
"제가 미처 오늘 학원에 못 나간다는 얘길 못해서... 수영 선배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
"그리고 사실... 저 수영선배한테 제가 입주 가정부란 얘기... 다 했어요. 미안해요, 선우오빠... 오빠가 아무한테나 그런 소리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너 같은 애가 언제까지 그런 거짓말에 맞장구를 칠 수 있을까 했지. 미안해 할 필요 없어. 게다가 수영선배라는 사람... 너한텐 그냥 아무나가 아닐 런지도 모르니까."
"......"
선우의 목소리에 눈에 띄게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희원은 왠지 그의 어투에 찬바람이 도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하며 수영에게 전화를 했다.
"선배... 희원이예요. 아, 아니요 어디 아픈 건 아니구요 좀 사정이 있어서 못갔어요. 자세한 얘긴 내일 할게요. 네...네... 그럼, 이만 끊을게요.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고 나서 한 동안 두 사람은 묵묵히 아이스크림 먹는 일에만 열중하는 척 했다. 하지만 결국 선우는 먹다 남은 아이스크림을 들고 쓰레기통 앞으로 가더니 아무렇게나 던져 넣어 버렸다.
그 때였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선우가 잠시 방심하고 있던 참에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은선우다!"
그 단 한 마디의 외침소리가 파생시킨 효과는 생각보다 강력했다.
"어머, 정말 은선우야! 끼야악, 오빠!"
"선우오빠!"
끼야아아아!
마치 그 순간을 위해 숨어서 대기라도 하고 있었던 듯(작가의 농간에 의해) 한 무리의 오빠 부대들이 거짓말처럼 앞다투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크! 안 돼겠다, 뛰자!"
당황한 선우가 얼른 엘비스 마스크를 뒤집어 쓰더니 희원의 손목을 붙잡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떨결에 선우에게 손목을 잡힌 희원이 선우가 달리는 속도를 따라 잡기 위해 사력을 다해 달리던 중 그만 발목을 크게 삐긋하고 말았다.
"아앗!"
"야, 빨리 뛰어!"
워낙 다급했던 상황이라 선우는 희원이 발목을 삐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희원의 손목을 꼭 그러쥔 채 정신없이 달리는 데에만 여념이 없었다.
"아아..."
다행스럽게도 선우의 뒤를 쫓는 무리들의 눈을 간신히 피해 두 사람이 다소 한적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희원은 그만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다.
"아야아....."
"야, 왜 그래?!"
"발목이요... 아야... 발목을 삐었나봐요."
"어디 보자. 이런... 벌써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네."
선우가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 희원의 발목을 들여다보니 걱정스런 어조로 말했다.
"아아... 아퍼요."
"그러길래 왜 어울리지도 않은 뾰족 구두는 신고 나와서 이 난리야!"
"......"
시시각각 눈에 보일만큼 계속 부어오르고 있는 희원의 발목을 내려다보던 선우가 괜스리 역정을 내며 쏘아붙였다. 희원은 욱신거리는 통증도 잠시 잊은 채 있는 대로 인상을 쓰고 있는 선우를 못내 서운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안 되겠다. 업혀라."
"예?!"
희원은 쭈그리고 앉은 자세로 그녀 앞에 넓직한 등을 들이 내밀고 있는 선우의 뒷 모습을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야, 귀까지 먹었냐. 업히라니까."
그렇게 해서 희원은 엘비스 가면을 쓴 선우의 등에 업혀 주위 사람들의 묘한 눈총을 한 몸에 받으며 이상한 기분으로 공원 입구를 나서게 되었다. 그들이 타고 왔던 차는 성진과 준희가 타고 가버린 뒤라 선우는 희원을 업은 채 큰 길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차에 오른 후 희원과 함께 나란히 뒷좌석에 앉은 선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발목 좀 봐봐."
"아아... 아야야......"
"어휴, 코끼리 다리가 따로 없네. 많이 아프냐?"
"네에... 너무 아파요."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두 사람의 대화중에 택시 기사가 끼어들어 행선지를 물었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병원으로 가 주세요."
"보아하니 엘비스 여자친구분 께서 발목을 삐신 모양인데 그럴 땐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는 게 빠를텐데요."
빙그레 웃음을 머금고 있던 택시기사의 말에 선우는 그제서야 엘비스 가면을 벗어제꼈다. 희원 때문에 도무지 경황이 없었던 선우가 택시에 타고서도 가면 벗는 일을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침을요? 그게 빠를까요?"
"보통들 그렇게 하지요."
"그럼, 제일 먼저 눈에 띄는 한의원 앞에서 세워주시겠습니까?"
"네에, 그럽시다. 헌데... 남자손님 얼굴이 많이 눈에 익네요. 혹시 그 그룹 레드비트의 한 사람 아니십니까?"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인상 좋은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선우의 얼굴을 흘끔 거리며 말했다.
"기사님께선 여기 제 옆에 있는 이 아가씨보다 정신연령이 젊으신 듯 하네요."
선우가 입을 내밀고 울상이 되어 앉아있던 희원을 흘겨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예에?"
택시기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 번엔 백미러를 통해 희원을 쳐다보았다.
"여기 이 젊은 아가씨가 말입니다 기사님처럼 연세 있으신 분께서도 알아보시는 저를 못 알아보더라구요."
"이런... 아가씨 댁엔 TV가 없었나 보군요."
"하하하. 그러게요."
"아무튼 영광입니다. 내리시기 전에 사인 한 장 해주시겠습니까? 전 집에 딸들만 줄줄이 셋인데 셋 다 레드비트라면 아주 사족을 못 쓴 답니다. TV에 레드비트가 나오는 날은 지 애비가 집을 드는 지 나는 지도 모르고 아주 TV에 코를 박고들 있다니까요. 아마 제가 손님 사인을 받아 가지고 집엘 들어가면 졸지에 영웅 대접을 받게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사가 껄걸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선우가 진심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기색으로 말하자 택시기사가 흐뭇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딸내미들이 레드비트에 목을 메고 살아도 앞으론 뭐라 그러지 말아야 겠습니다. 손님처럼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저라도 팬이 되고 싶은 심정이니까요."
"아휴, 자꾸 그러시니 점점 더 민망해서 이거......"
선우가 머쓱한 얼굴로 슬쩍 붉어진 뺨을 쓸어 내리는 모습을 보자 희원도 택시기사처럼 덩달아 흐뭇한 표정이 되었다.
"어, 저기 한의원이 한 군데 있군요. 저쪽에서 내려드릴까요?"
"예. 그래 주십시오."
택시에서 내리기 전에 선우는 택시기사가 내민 종이 석 장에 택시기사가 불러주는 세 딸들의 이름과 함께 정성 들여 사인을 해주었다. 그리고 사람 좋아 뵈는 인상의 택시 기사는 두 사람이 내릴 때 극구 택시 요금을 받으려 들지 않았다.
"아이구, 제가 손님한테 택시 요금을 받았다간 영웅 대접이고 뭐고 딸래미들한테 두고 두고 원성을 사게 될 겁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선우는 거듭 감사하는 인사로 요금을 대신한 채 택시에서 내렸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선우는 극구 만류하는 희원을 무시한 채 그녀를 다시 업었다. 그러나 처음 생각과 달리 한의원이 건물 1층에 있지 않고 4층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선우는 계단을 오르는 내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궁시렁 거렸다.
"아니, 한의원이 4층에 있다는 게 말이나 돼. 분명 거동 불편하신 노인네들도 왕래하시고들 할텐데 이래 가지고서야 어디 노인네들이... 에고야... 헥헥, 야, 너 키는 작달막 한 주제에 왜 이렇게 무거운 거야! "
"그러게 제가 업지 말라고 했잖..."
"시끄럽다! 에고......"
한의원 안에 들어선 후 선우는 희원을 대기인들을 위한 쇼파에 조심스럽게 앉혀 놓은 뒤 접수처로 갔다. 접수처의 간호사가 선우의 얼굴을 흘금 거리느라 접수가 더뎌지자 그가 한 마디했다.
"거 빨랑 빨랑 좀 해주십시오."
"아, 예..."
홍당무처럼 얼굴이 빨개진 간호사 움찔하더니 고개를 떨구고 부랴 부랴 형식적인 기록을 써 내려갔다.
진료실 안에 들어서자 그야말로 난 한의사요라고 얼굴에 써있는 것처럼 생긴 한의사가 그들을 맞았다. 그는 희원의 발목을 이리 저리 관찰하더니 자신의 책상 위에서 침통을 가져왔다.
"부기가 꽤 심하군요."
퉁퉁 부어오른 발목 여기 저기에 몇 개의 침을 꽂아 넣기 시작하자 선우는 눈쌀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야야, 아야......"
"어허... 엄살은... 내가 하나도 안 아프게 놓고 있구만."
"진짜, 아퍼요, 선생님."
"허어... 아프다 생각하면 더 아프고 안 아프다 생각하면 하나도 안 아픈 법이라오."
"......"
"부기가 빠질 때까지 각별히 주의하도록 하고..."
책상 앞으로 돌아가 앉은 한의사가 처방전을 휘갈겨 쓰며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 시간 맞춰서 이 약을 꼭 챙겨 먹도록 하고 당분간 부부생활은 필히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는 체위로...."
"에엑! 선생님, 우리는요..."
희원이 진료대 위에서 펄쩍 뛰어오를 듯 놀라며 대꾸하려들자 한의사가 어린 학생을 꾸짖는 선생님같은 태도로 희원을 향해 말했다.
"어허, 의사 앞에선 그렇게 내외할 필요 없대두."
"아니, 그게 아니고 전..."
희원이 말끝을 흐리곤 선우를 향해 뭐라고 말 좀 해보라는 듯 한 시선을 보냈지만 그는 그런 희원을 못 본 척하며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끅끅거리며 웃기만 했다. 다시 희원을 등에 업은 채 한의원을 나선 선우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는 듯 요상한 소리로 킬킬거리며 능글맞은 어조로 말했다.
"이보오, 임자. 아무래도 우리의 2세 계획은 당분간 무리일 것 같소. 안 그렇소, 임자?"
"꽥! 선우오빠!"
"어, 야, 너 그렇게 몸부림치면 앞으로 고꾸라진다! 계단 끝까지 굴러서 내려가고 싶냐?!"
"......"
짐짓 엄포로 희원의 입을 막은 선우는 그의 등에 업힌 채 울그락 불그락 하고 있을 희원의 얼굴을 상상하며 만면에 가득 웃음을 띤 채로 계단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