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안녕하십니까."
"저기... 누구... 아아, 전에 그 희원씨 선배라고 하셨던 분....."
준희는 꽃다발과 함께 커다란 과일 바구니와 커다란 케익 상자를 들고 현관 앞에 서서 활짝 웃고 있는 장신의 미남자가 누구인가를 금방 알아보았다.
"순일아, 밖에 누가 왔어?"
"어어... 성진이형. 희원씨 손님이 찾아오셨어."
"뭐어? 순이 손님?!"
샤워 가운만 걸친 채로 쪼르르 현관 앞으로 달려나온 성진이 순이의 손님으로 불리는 주인공을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쏘아보자 그가 얼른 깍듯한 태도로 성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만나뵙게 되서 정말 영광입니다, 유성진씨. 저는 김수영이라고 합니다."
"희원이 손님이라구요?" 성진이 한 쪽 눈썹을 치켜 뜨며 여전히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수영을 향해 물었다.
"예. 이렇게 미리 연락도 없이 찾아온 무례를 범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희원이가 학원도 못 나올 정도라면 상태가 꽤 안 좋은 듯 싶어 앞 뒤 잴 틈도 없이 문병을 와봐야 겠다는 마음이 앞서는 바람에......"
"그러셨군요. 괜찮습니다. 희원씨 손님이면 저희 손님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어려워 마시고 어서 들어오세요."
"감사합니다."
준희가 예의 바른 태도로 수영을 집안으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성진은 수영이 현관 입구를 거쳐 준희의 안내를 받으며 거실로 걸어가는 동안 내내 미심쩍은 눈초리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놓칠 새라 주시하고 있었다.
'순이 손님이라고? 아니 저렇게 기름 독에서 막 빠져 나온 기생 오라비 같은 자식하고 순이하고 뭔 관계가 있길래 여기 까지 다 찾아온 거야?'
"희원씨는 지금 2층 희원씨 방에 있을 겁니다."
준희가 수영이 버겁게 들고 있던 꽃다발과 과일 바구니, 케익 상자들을 건네 받아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잠시 올라가 봐도 될까요?"
"어?! 너...!"
놀란 목소리에 돌아보던 수영의 시선이 때마침 계단을 내려오던 선우와 마주쳤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은선우씨."
"......"
넉살좋은 웃음을 흘리며 여유있게 인사를 건네는 수영과는 달리 선우의 얼굴은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어쭈, 은선우. 이젠 말까지 씹냐.)
"희원이 말로는 별 일 아니라고 했지만 학원까지 못 나올 정도라니 걱정이 되서 문병차 들렀습니다. 설마... 문병 온 사람을 이대로 내쫓으시지는 않겠지요?"
"으흠."
(왕 뺀질이같은 자식.)
수영의 물음에 선우는 대꾸 대신 괜스레 헛기침을 한 번 해 보이고는 왠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걸음걸이로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우리 선우랑도 꽤 안면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군요."
준희를 따라 거실 소파에 앉은 채 잠자코 수영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던 성진이 선우와 수영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감지해 내고는 커다란 눈동자 가득 호기심이 실린 눈빛으로 말문을 열었다.
"일전에 두 번 정도 뵈었지요." 모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성진의 물음에 대꾸하며 수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다들 나를 대단히 경계하는 눈치로군. 모두들 희원일 단순한 가정부 이상의 존재로 여기고들 있는 모양인데. 훗.'
"그럼... 절 따라 오시겠어요. 희원씨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수영이 준희를 따라 2층으로 사라지자 성진이 수영이 사들고 온 케익상자를 발로 툭 차는 시늉을 하며 뇌까렸다.
"누구 생일이냐. 웬 케익. 쳇!"
똑똑.
"예, 들어오세요."
"희원씨, 손님 오셨어."
"예에? 어? 수영 선배!"
"자식. 발목을 도대체 어떻게 삐었길래 꼼짝달싹 못할 정도야?"
"아니... 아야야!"
"야, 가만있지 않고 왜 일어나."
침대 위에 커다란 베게를 등에 괴고 앉아 화집을 들여다 보고 있던 희원이 너무도 예상 밖이었던 수영의 방문에 놀라 얼결에 발을 내딛으려다 주춤하며 쓰러질 듯 하자 수영이 달려와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문가에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준희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갸웃해 보이곤 입을 열었다.
"그럼, 담소들 나누세요."
"아, 황준희씨,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뭘."
성진, 선우, 준희 세 사람은 거실 소파에 각기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뒤적거리나 TV 리모콘을 가지고 기계적으로 채널을 바꾸거나 손톱 깎기로 손 거스름을 떼어 내거나 하고 있었지만 그들 세 사람의 신경은 사실 모두 2층 희원의 방에 머물고 있었다.
"아얏!"
"왜, 형?" 준희가 깜짝 놀란 얼굴로 성진을 돌아다 보았다.
"아씨, 맨 살을 잘랐어. 아효, 아파랏." 성진이 검지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더니 말했다.
"조심하지 않구."
"희원이 선배라고? 야, 은선우. 넌 만난 적도 있다면서?" 성진이 괜스레 TV 리모콘의 버튼만 꾹꾹 눌러대고 있는 선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응."
"꼭 기생 오라비같이 생겼구만. 야, 그나저나 저렇게 단둘이만 방에 있게 둬도 되는 거야?"
"......"
"아, 이거 참......"
"성진이 형은... 그냥 희원씨 선배가 걱정이 되서 문병을 온 것 가지고 왜 그렇게 안절부절을 못하고 야단이야."
"아 그거야... 야, 솔직히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저 녀석 말이야 어째 통 신뢰가 안 가게 생기지 않았냐? 꼭 기름 독에서 방금 빠져 나온 제비처럼 생겨 가지고..."
"큭큭, 형. 아마 선우형과 나를 뺀 대부분의 남자들이 형을 볼 때도 그런 소릴 할 걸."
"우잇! 어디서 저딴 놈하고 날..."
준희를 향해 주먹질하는 시늉을 해 보이던 성진이 불현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저히 가만히는 못 있겠다. 야, 니들! 나 붙잡지 마라."
말을 마치자마자 성진은 2층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헛 둘, 헛 둘..."
2층에 다다른 성진은 양팔을 상하좌우로 열심히 흔들며 맨손 체조라도 하는 듯한 자세로 은근슬쩍 희원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발소리를 죽이며 희원의 방문 앞에 다다른 성진은 방문 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다 이내 눈쌀을 찌푸리며 입술을 실룩이더니 문 앞으로 바짝 다가가 아예 문짝에 귀를 갖다 붙였다.
'뭐야, 뭐야. 왜 이렇게 조용해. 우쒸, 아무 소리도 안 들리잖아 이거.'
성진이 조바심치며 자신의 귀를 뭉개지듯 방문에다가 들이 밀어대고 있을 때 였다. 뜻밖에도 갑작스레 방문이 벌컥 열리는 통에 성진은 그만 희원의 방바닥에 패대기쳐지듯 엎어지고 말았다.
철푸덕!
"어머, 성진오빠!"
"아야야..."
"이런, 괜찮으십니까?" 수영이 성진을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우이씨..."
(제기랄! 아고, 쪽팔려!)
수영의 손을 뿌리치며 툴툴 거리는 성진의 모습을 보며 수영은 두 사람 몰래 조소 어린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우리 내려가려던 참이었어요, 성진오빠."
"그, 그랬냐?"
"오빠,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희원이 우려 섞인 표정으로 성진을 훑어보며 말하자 성진이 자신의 입술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엄살을 피웠다.
"순이야, 여기..."
"이런, 넘어지면서 입을 찧었나보네... 아휴, 아팠겠다."
"너무 아포... 순이야, 나 여기 호오 해 줘."
"어디, 요기? 호오... 호오..."
성진이 앵두같이 빨간 입술을 뾰족이 내밀며 어리광이 잔뜩 낀 목소리로 칭얼대듯 말하자 희원은 마치 어린 동생을 달래는 큰누이처럼 성진의 어리광을 받아주었다.
희원은 성진이 왜 그녀의 방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에서였으리라. 희원은 그런 성진이 귀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나이만 먹었지 성진 오빤 꼭 어린애 같다니까. 후훗.'
희원은 분명 민망해 하고 있을 성진을 달래듯 그가 해달라는 대로 호오 호오 하고 불어주는 시늉을 하며 그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하지만 그 때 희원과 성진 두 사람은 수영이 맛있게 먹고 난 짜장면 그릇 바닥에서 바퀴벌레라도 발견한 사람 같은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뭐, 뭐냐. 저 놈은... 변..태냐... 우웩, 닭살......!'
"자, 이제 내려갈까요."
희원이 수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수영은 황급히 오바이트 쏠리는 표정을 수습하고 대신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꾸했다.
"그러지."
거실 탁자 주위로 다섯 사람이 둘러 앉아있었다.
그 중 세 사람은 돋아나는 닭살을 주체하기 어려워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한 사람은 다소 상기된 얼굴로 당황스러움을 감추느라 애를 먹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
"희원아, 너는 그냥 푹 쉬도록 해. 과일은 내가 깎을게."
"다 깎았다. 희원아, 자, 아... 해."
"희원아, 이 메론도 좀 먹어 봐. 이거 너 먹으라고 사온 거야. 야, 그냥 아... 하래두. 뭘 그렇게 빼고 그래 너랑 나 사이에. 그렇지, 그렇지. 차암 잘 먹는다 우리 이쁜 희원이."
"아유, 우리 희원이 오물거리는 입도 참 이쁘네. 어쩌면 먹는 모습도 이리 이쁠까. 아이구, 이런... 세 분들도 좀... 드시지 않구... 드세요."
하루종일 직사광선에 노출된 버터조각처럼 노골노골하고 미끄덩 미끄덩한 목소리로 수영이 쉴 새 없이 종알대는 동안 준희는 냉수만 세 컵을 따라 마셨고 성진은 보이지 않게 손을 뒤로 감추고 애꿎은 소파 가죽만 벅벅 긁어댔으며 선우는 연거푸 줄담배를 피워댔다.
"막상 와서 이렇게 보니 맘이 놓이는군요. 세 분께서 우리 희원이를 마치 팔.촌.동.생처럼 여기시고 아껴주시는 것 같아서요. 전 사실 우리 희원이한테 아르바이트로 입주 가정부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을 아주 많이 했답니다. 헌데 다들 우리 희원이한테 팔.촌.오.빠인양 살갑게 대해주시니 한 시름 놔도 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하.하.하."
"이보쇼, 듣자하니 희원이 선배라고 하던데 말끝마다 우리 희원이, 우리 희원이... 좀 닭살 스럽네." 보다못한 성진이 양팔을 긁적거리며 수영에게 한 마디 했다.
"이런, 모르고 계셨나보군요. 희원이랑 저... 교제중인 사이입니다."
"선배......"
희원과 교제중인 사이라는 수영의 발언에 세 사람은 한결같이 입을 딱 벌린 채 할 말을 잊었다. 당혹감에 휩싸인 희원의 시선이 재빨리 선우에게로 향한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잠시 동안의 당황감을 수습하고 선우는 예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하긴... 내가 수영선배와 교제를 하든 말든 집안 일에 지장만 주지 않는다면 눈곱만큼도 상관하지 않을 사람인데 뭘... 그나저나 난 분명 선배한테 거절의 뜻을 전했다고 생각했는데 표현이 너무 약했나...? 아휴, 몰라, 암튼 오빠들 앞에서 정말 챙피해 죽겠네. 수영선배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빠다 냄새나게 구는 거야...'
"나야말로 김수영씨가 그렇게 희원이를 아끼고 걱정하는 줄 몰랐는데." 청동 조각상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선우가 갑작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말투는 어딘가 도전적인 냄새를 은밀히 풍기고 있었다.
"그러셨습니까? 그럼 이제부터 알아두십시오." 한치의 흔들림없는 표정으로 수영이 응수했다.
삐리리릿.
잠시동안 선우와 수영사이에 오고가는 시선에는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몇 만 볼트의 고압전류라도 흐르고 있는 듯 팽팽한 긴장감이 팽배했다.
"그래? 그 말투는 그럼 지금 당장 거동이 불편한 희원이를 위해서 못할 일이 없을 것처럼 들리는데 내가 틀렸나?"
"절 시험 하시는군요. 맞습니다. 희원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겁니다."
"잘 됐군. 알다시피 희원인 우리집 가정부야. 헌데 지금 발목이 저 모양이라 아무 일도 못하고 있는 상태지. 그러니 희원이를 자기 몸처럼 아끼는 자네가 희원이 일을 좀 대신 해줘야 겠어."
"뭐, 뭐요?!"
뜨악한 얼굴로 경악스러워 했던 것은 비단 수영뿐 아니었다. 수영의 옆에 앉아있던 희원도 그리고 성진과 준희 모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선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그건 싫은가?" 선우가 하얀 치아를 살짝 드러내며 승리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오기'하면 결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수영이었다.
'흥, 그 정도에 내가 꼬릴 내릴 줄 알았다면 크게 착각한 거야, 은선우.'
"솔직히 좀 뜻밖이긴 하지만 못 할 것도 없죠, 뭐. 음... 제가 희원이처럼 입주하는 건 세 분들께서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실 것 같고... 아침마다 제가 여기로 출근해서 오전 내에 일 마치고 오후엔 학원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선배, 그건..." 희원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수영을 돌아보았다.
"괜찮아, 희원아. 너 모르지? 요리, 청소, 다림질엔 나도 일가견이 좀 있거든. 유학기간 2년 동안 갈고 닦은 실력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발휘 해보자."
"하지만 선배..."
"쉿! 우리 희원인 나만 믿고 그냥 푹 쉬도록 해.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 걱정 붙들어매고. 자꾸 걱정하고 그러면 우리 이쁜 희원이 얼굴에 주름 생긴다."
수영이 희원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마치 사랑하는 연인에게 아름다운 싯귀절이라도 읊어주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속삭이듯 말하고 있는 모습을 세 멤버들은 그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물론 한 방 먹여주려다 되려 한 방을 먹을 꼴이 되어버린 선우의 얼굴에 순간 곤혹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사라진 것을 수영은 놓치지 않았다.
'후후후. 혹 떼려다 오히려 혹 하나 더 붙인 심정이겠지, 은선우.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