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아침에 희원이 눈을 떴을 땐 8시가 거의 다 된 시각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희원은 깜짝 놀란 나머지 순식간에 잠이 확 깨었다.
'이런... 왜 이렇게 늦잠을 잔 거야.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소리 없이 아침 준비를 하려고 했었는데, 아이 참...'
혼자 인상을 찌푸려 뜨리며 부랴부랴 침대에서 내려서려던 희원의 얼굴이 문득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어라? 내가 언제 방으로 왔지? 도통 기억이 안 나네? 오빠들을 기다리며 심야프로를 보고 있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이상하네.'
잠시 고개를 갸웃대던 희원은 그러나 얼른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살그머니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아직까지 계단을 오르내릴 때 불편함이 있긴 했지만 하루 밤을 더 지내고 나니 발목의 부기나 통증이 훨씬 나아진 듯 했다.
'어? 근데 이게 무슨 냄새야? 음... 김치찌개 냄새 같은데?'
어제 저녁 수영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으로 인한 오해의 소지를 거듭 설명하며 더 이상 자기를 도우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었던 희원은 의아스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주방에 들어섰다.
"엇! 선우오빠!"
"일어났냐?"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진 희원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던 그림은 이러했다.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가 걸린 얼굴로 희원을 돌아보고 있던 선우를 중심으로 그 배경에는 수저까지 세팅된 식탁과 가스렌지 위에서 모락모락 김을 내뿜고 있는 냄비, 그리고 대파 쪼가리가 어수선하게 널린 도마가 보였다.
"이, 이거... 오빠가 다 준비한 거예요?"
"뭐냐, 지금 그 표정은. 못 미덥다 그거냐?"
"네."
희원의 짦막한 대꾸에 갑자기 선우는 할 말을 잊은 채 눈을 껌벅거리기만 했다. 그러자 희원이 밝게 웃으며 선우 옆으로 다가와서는 김이 피어오르고 있던 냄비 뚜겅을 열어보며 말했다.
"와아, 제법 맛있는 냄새가 난다."
희원은 냉큼 옆에 놓인 국자를 집어 찌개 국물을 조금 떠서는 맛을 보았다.
"맛은 더 제법이네요. 오빠, 실수를 해도 아주 크게 했구나."
종달새가 재잘거리듯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희원의 명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선우는 그녀가 연거푸 찌개 국물을 떠서 감탄하는 얼굴로 맛을 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가 아주 조금만 몸을 기울이면 그의 가슴에 곧장 와닿을 거리에 희원의 얼굴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선우는 또 다시 어제 밤처럼 이상스레 요동을 치기 시작하는 심장 박동 소리와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 감각들이 파드득 파드득 거리며 깨어나는 느낌에 당황스러워 해야 했다.
'술기운이 아직 덜 깼나?'
어쨌거나 선우는 희원의 얼굴, 혹은 머리칼, 혹은 어깨가 그의 가슴께에 부딪히는 상상만으로도 왠지 그의 폐부를 날카롭게 관통하는 것 같은 전율감을 맛보았다.
그게 언제부터 였을까.
선우는 언제부터인가 희원과의 사소한 접촉에도 과민반응을 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있었다. 희원을 이성으로 느끼고 그에게 있어선 너무도 생경한 설레임을 경험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여지껏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첫사랑의 실패로 인한 상처 덕분에 더욱 더 여자란 존재에 대해 천옹성 같은 불신감을 품고 있던 선우였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희원이 그 두터운 성벽을 뚫고 들어와 그의 마음을 조금씩 점령해 가고 있었다.
그녀의 따뜻한 성품이, 바보스러우리 만치 순수하고 고운 심성이 얼음장같기만 하던 그의 마음을 서서히 녹여 내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두부만 넣으면 완벽하겠다."
국자를 내려놓은 후 희원이 불쑥 몸을 돌리는 바람에 외우지도 않은 신통한 주문이 효력을 발휘한 듯 그녀의 어깨가 선우의 가슴에 부딪혀 왔다. 그 순간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후끈후끈해 지는 것만 같았다.
냉장고에서 두부를 찾아 꺼내들고 희원이 다시 선우 어깨를 스치며 가스렌지 앞으로 돌아왔다. 그러는 동안 선우는 조심스럽게 희원의 움직임 하나 하나를 눈으로 쫓고 있었다.
익숙한 동작으로 두부의 포장을 벗겨내는 작고 귀여운 그녀의 손.
무슨 일엔가에 집중할 때마다 유독 야무지게 다물어지는 도톰한 입술.
또 어지간한 일엔 쉽사리 흐려지지 않는 생기로 가득 찬 선한 눈망울.
당장이라도 와락 안아버리고 싶은 동그란 어깨.
'와락 안아버리고 싶은...? 이런, 아무래도 어제밤 술기운 속에서 희원이를 안아드는 게 아니었어.'
그대로 희원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는 미친놈처럼 진짜 희원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와락 껴안아 버릴 것 같은 충동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 선우는 얼른 몸을 돌린 후 냉장고로 다가갔다. 문을 열고 생수 병을 꺼내든 선우가 생수병을 그대로 들고 벌컥벌컥 들이키자 희원이 쪼르륵 달려와 선우를 만류했다.
"오빠, 병째로 마시지 말고 컵에다 따라서 마시라니까요."
헌데 하필 선우를 만류하기 위해 생수병을 빼앗듯 하던 희원의 손이 선우의 손과 겹치고 말았다. 그 바람에 적당히 야릇하고 적당히 불순한 상상으로 저으기 흔들리고 있었던 선우가 화들짝 놀라면서 그만 사례가 들고 말았다.
"켁... 쿨럭. 쿨럭. 쿨럭......"
"어머, 선우오빠. 괜찮아요?"
희원이 선우에게 바싹 다가와 그의 등을 쓸어 내리자 선우는 속으로 소리쳤다.
'야, 떨어져! 떨어지라니까!'
그러나 마음속의 외침이 자신도 모르게 행동으로 표출되었던 모양인지 선우는 엉겁결에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듯 몸을 홱 돌렸다. 그 때 아직 온전치 않은 발목 때문에 무게 중심을 한쪽에만 치우쳐두고 서있던 희원의 몸이 휘청하더니 선우의 품안으로 와락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앗!" 두 사람이 동시다발적으로 낸 외침 소리였다.
돌발적인 상황에 당황한 희원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순간 희원은 어딘가 열에 들뜬 듯 불가해한 선우의 시선에 사로잡혀 버리고 말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눈동자로부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결같이 상기된 얼굴을 하고 일부러 부둥켜 안다시피 한 자세로 한동안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희원.....'
불현 듯 선우는 언젠가 악몽을 꾸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도 모르게 그의 머리맡을 지키고 있던 희원을 발작적으로 끌어안고 키스했던 날의 그 기억을 떠올렸다. 새삼 귓볼까지 후끈후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날... 희원을 부서져라 그의 가슴에 끌어안았을 때 맛보았던 그 기분, 그 느낌들을 선우는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녀를 감싸 안았던 팔을 영원히 풀고 싶지 않았다. 정신이 까무룩해질 만큼 고속으로 그녀에게 추락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는 순간 선우는 놀라움과 충격으로 미친 사람처럼 그녀를 떨쳐냈었다.
하지만 나이트에서 수영으로부터 그녀를 빼앗다시피 떼어내고 다시 그녀를 그의 가슴에 안는 순간 선우는 그 자신이 그동안 희원에게 키스했던 날 맛보았던 그 기분, 그 느낌들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희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그의 마음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아마도 그 날의 블루스 타임이 1분만 더 길어졌었다면 선우는 결국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희원에게 키스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선우는 그의 팔을 절대로 풀고 싶지 않았다. 좀 더 그 느낌을, 그녀를 품에 안았을 때 느껴지는 그 짜릿한 만족감을 좀 더 누리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도발적인 충동이 온몸을 한 바퀴 도는데 2~30초 밖에 걸리지 않는 혈류를 타고 순식간에 그를 포획해버렸다.
멈칫. 멈칫. 멈칫... 거리며 그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바보처럼 아직까지도 사태 파악을 못하고 있는 순진한 희원의 얼굴을 향해서.
"니들 두 사람!"
숨막힐 듯한 긴장감을 깨뜨리고 끼어든 것은 성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그동안 나 몰래 연애질하고 있었냐?"
"서, 성진오빠. 그게 아니고 제가 발목... 저기... 중심을 잃는 바람에..." 희원이 화들짝 놀라며 선우에게서 먼저 몸을 떼었다.
"놀라긴... 농담도 못하냐?!"
성진은 아직도 잠이 덜 깬 듯 크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한 번 하고는 아직 선우의 손에 들려있던 생수병을 뺏어들었다.
"형. 여기 컵..." 순간 아찔했던 정신을 황급히 수습한 선우가 빠른 동작으로 컵 하나를 성진에게 건넸다.
"고맙다." 왠지 석연치 않은 선우의 행동과 표정에 짐짓 어리둥절해 하며 성진이 말했다.
"어, 내가 제일 꼴지인가? 다들 일어나셨네." 준희였다.
"근데 뭐냐. 이 근사한 냄새가? 순이 너 무리하지 말랬는데 말 안 듣고 아침했구나."
"아니예요. 오늘은 아침은... 선우오빠가 준비한 거예요." 희원이 아직도 홍조가 채 다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하고 성진을 향해 말했다.
"뭐라고? 선우가?!"
"선우형이?!"
"뭐야, 다들 그 표정은... 아, 내가 이래서 귀신같은 솜씨를 그냥 묻어두고 사는 거라니까." 선우가 어깨에 힘을 주며 좌우로 목 꺾기를 해 보였다.
"유후... 냄새 죽이는데." 어느 새 찌개 냄비로 다가간 성진이 국물을 조금 떠서 맛을 보더니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야, 내 평생 은선우가 만든 김치찌개를 다 먹어보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누가 아니래. 야아... 이거 완전 대서특필감이네... 흠, 근데 선우형이 웬일이야, 안 하던 짓을 다 하구. 밤사이 무슨 심경의 변화라든가... 뭐 그런 일이라도 있었나?" 꼭 다 알고 묻는 사람처럼 묘한 표정으로 빙글거리며 준희가 선우를 향해 말했다.
"얌마, 그런 게 어딨어? 그 왕 뺀질이 자식이 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싶어서 그랬다, 왜."
"어, 정말 그러고 보니 그 희원씨 선배는요?" 준희가 희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 예. 제가 괜찮으니까 더 이상 안 와도 된다고 했어요."
"그랬구나."
"그래... 뭐가 걱정이냐. 이렇게 숨은 재주꾼이 있었는데. 야야, 빨리 먹자 배고프다! 니들 나 배고프면 히스테리 부리는 거 알지? 피곤하기 싫으면 빨랑들 밥부터 먹자."
성진이 제일 먼저 식탁 앞으로 다가앉으며 채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