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아침이라 하기엔 이른 시각에 희원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깨어난 것은 그녀의 의식일 뿐 몇 번의 시도를 거친 후에야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제일 먼저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친숙한 무늬의 벽지가 발린 그녀의 방 천장이었다. 천천히 눈을 껌벅이며 희원은 무엇 하나 이상한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몸을 일으키다 묵직한 두통감을 느끼던 희원은 그제서야 불현듯 뭔가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퍼뜩 깨달았다.
'어?! 내가 어떻게 집엘...?'
아직 찌부듯한 의식 속에서 희원은 어제 저녁의 일을 기억해 냈다. 수영의 집에서 자신이 정신을 잃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하지만 희원은 여전히 무엇 때문에 그녀가 의식을 잃었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또 어떻게 자신이 지금 자기 방 침대에서 눈을 뜨게 되었는지도.
'오빠들이 일어나면 사정 얘기를 들을 수 있겠지.'
자리에서 일어나던 희원은 자신이 아직까지도 수영이 선물해준 원피스 드레스를 입고 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얼른 옷부터 갈아입었다. 그리고 침대를 정돈한 뒤 방을 나와 세수를 하고 아침 준비를 위해 아래층으로 향했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오던 희원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아연한 얼굴로 자리에 붙박인 듯 꼼짝 않고 서서 거실의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족히 수 십여 개는 되 보이는 색색깔의 풍선으로 장식된 거실 벽면을 가로질러 아주 길다란 흰 색 종이가 걸려있었고 그 위엔 'HAPPY BIRTHDAY SUNI!'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벽면과 벽면 사이에 여러 겹의 줄을 빨래줄 마냥 이어놓고 각양 각색의 예쁜 카드들을 걸어놓아 마치 만국기처럼 장식한 모습도 보였다. 거기다 쇼파와 거실 탁자 주변에 놓여있던 알록달록한 고깔 모자 네 개와 작은 종이 폭죽들까지......
희원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어째서 준희가 희원에게 저녁 7시까지는 꼭 돌아오라고 당부했었는지를. 준희가 말했던 단합대회겸 가족회의가 실은 희원을 위한 깜짝 파티였다는 것을.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지는 기분을 느끼며 희원은 또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 냈다.
'준희야, 거기 내가 찧은 마늘로 끓인 미역국 좀 떠와봐라.'
'야, 이렇게 아침에 미역국을 먹고 있으니까 오늘이 꼭 누구 생일날이라도 되는 것 같다야.'
성진의 목소리가 희원의 귓전을 맴도는 것과 동시에 어제 아침 별스럽게도 세 오빠들이 희원보다 먼저 일어나 미역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고 했던 일이 결코 기특한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던 것이었다.
울컥한 기분이 되어 다시 걸음을 뗀 희원은 거실로 내려와 레드비트 멤버들이 오로지 자기 한 사람만을 위해 공들여 만든 생일 파티 장식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그녀를 위한 파티를 위해 저 많은 풍선들을 불고 글자 하나 하나 반짝 종이를 일일이 오려 붙여 HAPPY BIRTHDAY SUNI라는 글귀를 만들었다. 희원은 그들이 가위로 종이를 오리고 풍선을 불고 빨래처럼 카드를 걸고 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가 있었다.
눈가에서 뜨거운 작열감이 느껴졌다. 목구멍에서도. 그리고 가슴에서도.
결국 희원은 무너지듯 소파에 주저앉아 솟구치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너무도 감격에 겨워 벅차오르는 느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바보처럼 난 그런 것도 모르고... 고마워요. 오빠들... 너무 너무 고마워요. 흐흑.....'
"잘 잤니?"
선우의 음성이었다. 채 눈물을 다 훔치지도 못하고 희원은 어느 사이에 거실에 내려와 선 그를 올려다보았다.
"선우오빠."
"콧물 떨어질라."
거실 탁자 위에 놓여있던 티슈케이스에서 티슈 몇 장을 뽑아 희원에게 건네며 선우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희원은 선우의 다정한 표정과 다정한 음성에 그만 더욱 울컥해져서는 아예 울음을 터뜨렸다.
"어허엉..."
선우는 꺼내 든 티슈를 손에 든 채 그런 희원 옆에 나란히 앉아 잠시동안 그녀가 울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심성 여린 그녀가 지금 무엇 때문에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지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그토록 작은 일에 감동을 받아 훌쩍거리는 희원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여 조금은 짓궂은 심정으로 그녀가 우는 모습을 좀 더 지켜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잠시 후 선우는 희원을 달래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올려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려다 얼른 손을 거두었다. 불현듯 어제밤 깊이 잠들어있던 희원에게 자신이 했던 행동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도둑키스. 그것은 명백한 도둑키스였다.
선우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어제밤 그녀에게 입맞추었을 때의 느낌들이 다시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 즈음 울음을 멈추고 감정을 추스린 희원이 눈물을 닦고 코를 한 번 팽 풀고는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코맹맹이 소릴 내며 말했다.
"오빠들한테 정말 너무 고맙고 또 너무 미안해요."
"고맙긴......" 선우는 재빠르게 감정을 수습을 하고 짐짓 덤덤함을 가장하며 대꾸했다.
"제가 좀 더 서둘러 돌아왔어야 했는데... 오빠들이 많이 기다렸을 텐데....."
"......"
"참, 그런데 제가 어떻게 집으로 돌아온 거죠? 수영선배가 데려다 줬나요?"
선우의 얼굴에 순간 그늘이 드리웠다. 희원은 그런 선우의 표정 변화를 보면서 석연치 않은 기분을 느꼈다. 뭔가가 있었다.
"넌... 내가 데리고 왔다."
"오빠가요?" 희원의 눈이 대번에 휘둥그레졌다.
"니가 나한테 전화했었잖아."
희원은 다시 한 번 곰곰히 어제 저녁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의식이 잃어가던 와중에 선우에게 전화를 걸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래. 그랬지. 내가 선우오빠한테 분명 전화를 걸었어. 기억나. 오빠 목소리...... 하지만 오빤 어떻게 내가 수영선배랑 있다는 걸 알았을까? 또 수영선배 집까지 또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그녀는 나름대로 추측해보았다. 자신이 의식을 잃으며 내려놓은 핸드폰을 수영이 받아들었고 그래서 두 사람이 통화를 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하고.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대강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그렇다손 치더라도 희원에겐 여전히 두 가지 의문점이 남아있었다. 딱히 이상한 음식을 먹은 것도 아니고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자신이 왜 갑자기 의식을 잃었는가 하는 것에 대한 것과 낮선 장소에서 혼자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녀는 절박한 심정으로 선우를 찾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선우는 뭔가 혼란스러워 하는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는 희원의 모습을 넌즈시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어제 밤까지만 해도 극단적이리 만큼 수영에게 적개심과 분노를 느꼈었던 선우였지만 솔직히 그런 선우 자신도 수영이 고의적으로 희원에게 술을 먹이거나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고의는 아니었으니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은선우씨.'
왠지 하늘이 꺼지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하고 서서 어눌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하던 수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와아! 이건..."
준희가 건넨 선물 상자 안에는 유명한 G사의 로고가 텍스타일된 크로스 백이 희원의 손길을 기다리며 다소곳이 들어앉아 있었다.
"희원씨 메고 다니는 가방이... 은퇴할 때가 된 것 같아서..." 쑥쓰러운 듯 뒤통수를 긁으며 준희가 말했다.
"준희오빠... 정말 고마워요. 안 그래도 제 가방이 오래 되서 바꾸려던 참이었는데 너무 너무 고마워요..."
희원은 언제나 사소한 부분까지 그녀를 배려해주는 준희가 희원이 들고 다니던 가방이 많이 낡았다는 것을 기억해 두고 있다가 꼭 필요한 시기에 이와 같은 선물을 해주었다는 사실에 또 한번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췟, 자상한 척은... 항상 자기 혼자서만 순이 생각 다 해주는 것처럼 군다니까." 성진이 준희를 흘기더니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성진이 형 선물은 뭐야? 희원씨, 궁금한데 빨리 열어봐요."
자신의 선물에 잔뜩 감동한 얼굴을 하고 있는 희원의 모습이 내내 쑥쓰러웠던 준희가 얼른 다른 곳으로 관심사를 바꾸기 위해 말했다. 세 멤버들과 그들이 희원을 위해 준비한 선물 상자들에 둘러 쌓여 사뭇 들뜬 얼굴로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희원이 이 번엔 성진의 선물 상자로 몸을 굽혔다.
"그래 얼른 내 선물도 열어봐, 순이야."
"설마... 진짜 속옷은 아니겠지?" 준희가 히죽거리며 성진을 향해 물었다.
"우쒸, 속옷이 어때서?" 마치 옆에 앉은 준희의 머리를 들이받기라도 할 것같은 제스추어를 취하며 성진이 대꾸했다.
"그, 그럼 진짜 속옷이란 말야?!"
성진의 대꾸에 눈이 휘둥그레진 준희가 얼른 성진 가까이로 몸을 숙이고는 속삭이듯 되묻자 성진은 준희를 향해 팽하고 토라진 시늉을 해 보이곤 다시 표정을 바꾸어 미소 띤 얼굴로 희원을 향해 말했다.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순이야. 어여, 어여 열어봐라."
성진의 빙글거리는 미소가 못내 선우와 준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선우와 준희 두 사람이 성진의 선물 상자를 왠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희원은 다소 긴장된 심정으로 상자 뚜껑을 천천히 열었다.
"쿨럭!" 제일 먼저 준희가 붉어진 얼굴로 기침을 터뜨리며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에헤엠,, 으흠, 으흠..." 그리고 선우 역시 헛기침을 하며 뒤로 슬쩍 물러나 앉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설마 설마 했던 그들의 예상이 적중했기 때문이었다.
희원이 열어 젖힌 선물 상자 안에는 야리꾸리하기 짝이 없는 디자인의 브래지어와 팬티가 망사 스타킹과 가터 벨트까지 빨강 색과 검은 색으로 두 세트나 들어있었다.
성진은 희원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얼굴을 한 채 끌어안고 있는 선물 상자 안에서 냉큼 빨간색 레이스 브래지어를 꺼내 자신의 가슴께에 대고 흔들어 보이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순이야, 순이야. 어때? 이쁘지? 이쁘지? 야, 이 참에 너도 그 순면 팬티에서 졸업하는 거야."
'켁.'
희원은 마른 기침을 하며 생각했다. 자신의 속옷 빨래는 눈에 안 띄는 곳에 숨겨서 말리곤 했는데 성진이 언제 봤을까하고 말이다.
"다들 표정이 왜 그래? 순이야, 내 선물이 맘에 안 들어?"
"아하하... 아니... 그게 아니구....." 희원이 식은땀을 닦으며 버벅거리자 성진의 얼굴이 점점 시무룩하게 변했다.
"성진오빠, 맘에 안 드는게 아니구요... 저한테 너무... 뭐랄까... 너무 과분한 선물이라... 잘, 잘 입을게요. 고마워요. 성진오빠. 아하하... 오빠 아니면 누가 저한테 이런 선물을 해주겠어요... 안 그래요? 그래서 더 고마워요, 성진오빠."
"그렇지? 그래, 순이야. 나 아니면 누가 이런 데까지 신경 써 주겠니? 진짜 자상한 배려는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라고. 다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췟!"
"맞, 맞아요. 성진오빠. 하하... 근데 오빠, 그 속옷... 계속 그렇게 들고 계실 거예요?"
"아이 참, 그렇구나. 자, 받아."
희원은 성진에게 건네 받은 브래지어를 부랴부랴 상자에 다시 집어넣고는 서둘러 뚜껑을 덮었다.
"하하핫... 고마워요."
"참, 이제 선우형 선물이 남았네. 뭘까... 되게 궁금하네."
희원이 성진의 선물상자를 닫을 때까지 뻘쭘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준희가 아직 풀지 않은 선우의 선물 상자를 내려다보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 번에 희원은 무지개빛 장식리본이 달려있는 회색 상자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아!"
그것은 그랜드 피아노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섬세한 솜씨로 크리스탈을 깎아서 만든 손바닥만한 그랜드 피아노였다. 그것은 마치 보석처럼 샹들리에 불빛 아래 신비로운 광채를 띠며 빛나고 있었다.
"와, 멋진데. 어디서 저런 로맨틱한 선물을 구했어?"
"오오... 은선우, 너 순이 선물이라고 신경 좀 썼다."
희원이 감탄 어린 시선으로 투명하게 빛나는 피아노를 꺼내 들었을 때 준희와 성진 역시 감탄스럽다는 표정으로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으흠... 그거 뚜껑 열면 소리도 난다." 선우가 계면쩍은 기색을 감추며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가르켰다.
"소리요? 그럼 이거... 오르골이로군요?!" 희원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응."
희원이 눈을 빛내며 얼른 피아노의 뚜껑을 열자 크리스탈처럼 맑고 투명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곡은...?!'
언젠가 연습실에서 희원과 선우가 함께 연주했던 쇼팽의 이별곡이었다. 오르골 연주를 들으며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자 희원의 마음은 그네 위에 올라 타있는 것처럼 기분 좋은 흔들림과 함께 다시 설레어 오기 시작했다. 그 때 희원은 마치 자신의 옛날 피아노를 되찾기라도 한 듯 기쁘고 행복했다.
"고마와요... 선우오빠."
고마움과 기쁨이 가득 담긴 눈으로 희원이 선우의 눈동자를 마주 보았을 때 그녀는 선우의 두 눈동자에서 두 개의 별이 빛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수영이 채린의 방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는 그야말로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각이었다. 갈증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 그는 눈쌀을 찌푸리고 자신이 누워있는 낯선 방을 휘 둘러보았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어제밤 채린이 바에 도착하기 전에 필름이 끊겨버린 수영은 그 곳이 채린의 아파트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물론 수영은 벌써 채린과 여러 차례 밤을 보낸 사이이기는 했다. 하지만 채린은 그동안 수영을 한 번도 자신의 아파트에 들인 적은 없었다.
문득 달칵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고 쟁반 위에 물 컵을 받쳐든 채린이 방에 들어서자 수영은 의아한 얼굴로 말없이 채린을 올려다보았다.
"어머, 수영씨 일어났구나. 안 그래도 그만 깨워야 할까 어쩔까 하던 참이었는데." 채린이 침대로 다가와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가 어디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여전히 눈쌀을 찌푸린 채 수영이 물었다.
"어디긴. 내 아파트지."
"뭐? 니 아파트?"
"응. 자기 기억 하나도 안 나나보다."
"기억...? 글쎄... 바에 갔었던 기억까지는 나는데....." 수영이 흐린 눈으로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채린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럼, 우리가 어제 얼마나 뜨거운 밤을 보냈는지 그것도 기억 못하겠네..." 채린이 수영의 팔짱을 끼면서 뾰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어제... 밤?"
수영의 물음에 채린은 여전히 뾰루퉁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수영은 불현 듯 자신의 팔에 매달린 채린을 확 뿌리쳐버리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뿌리치는 대신 그녀의 머리를 감싸안으며 씁쓸하게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랬었군."
"배 안고파? 11시가 다 되가." 채린이 수영의 팔에 안긴 채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이나 한 잔 줄래."
"여기... 꿀물이야." 채린이 얼른 수영에게서 몸을 떼고는 쟁반에 받쳐들고 왔던 물컵을 가져다 그에게 건넸다.
"꿀물? 훗... 그런 것도 챙길 줄 알아?"
"무슨 소리야. 자길 위해 해장국까지 끓여놓고 기다렸는데." 채린이 토라진 시늉을 하며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해장국? 인기스타 한채린양이 날 위해서? 놀라운 걸!"
수영이 짐짓 놀란 시늉을 하며 채린을 돌아보자 채린이 도도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물론 나한테 아무나 그런 대접을 받는 게 아니라는 건 자기도 알지?"
"이거 영광이군."
"빨리 샤워하고 나와. 식사 준비해놓을게."
채린은 마치 귀여운 아이를 대하듯 수영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방을 나갔다. 방을 나서는 채린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수영은 속으로 인기스타라는 말을 한 번 뇌까려보곤 피식 웃었다. 은선우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입 안 가득 쓴 침이 고이는 기분이었다.
수영은 채린이 건네주고 간 물 한 컵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