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5. (35/75)

# 35.

 희원이 병원 침상 위에서 의식을 되찾기 시작한 것은 화재가 났었던 날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였다.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눈을 뜬 그녀의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조도를 낮추어 놓은 조명등 탓에 희미한 그림자가 마치 얼룩처럼 보이던 병실의 벽면이었다. 그 다음으론 반쯤 젖혀진 연녹색 블라인더가 드리워진 창가. 또 머리맡에서 부지런히 수증기를 내뿜고있는 연보랏빛 가습기 한 대와 뽀얀 수증기 너머로 아른거리는... 오색 꽃다발......

 그렇게 드러누운 채 잠시 동안 병실 내부를 둘러보던 희원의 시선이 이내 침상에 붙어 앉아 그녀의 손을 꼬옥 붙잡은 채 잠들어 있던 수영을 발견한다.

  '수영... 선배...?'

 그리고 마치 정전된 상태처럼 까맣게 닫혀있던 그녀의 기억이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래... 선배였어. 그 무서운 불꽃... 처참한 비명 속에서 나를 찾아낸 건 수영 선배였어.'

 매 초마다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거리를 좁혀 들어오던 불꽃과 지훈의 비명소리 속에서 희원은 그 때 서서히 정신을 놓쳐가고 있었다. 정말 끝이로구나 하는 절망감 속에서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우의 얼굴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속으로 천 번 만 번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그녀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희원은 처음에 그 누군가가 선우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혼미함 속에서 가까스로 알아볼 수 있었던 얼굴은 선우가 아닌 수영이었다.

 희원은 침상 위에서 가만히 몸을 일으켜 앉은 뒤 살그머니 수영에게 잡혀있던 손을 빼내려고 했다. 헌데 그 때 문득 자신의 손 위에 얹힌 수영의 한 쪽 손에 붕대가 감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혹... 나를 구해내다가...?'

 수척할 대로 수척해진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그녀는 고마움과 안쓰러움으로 가슴이 뻐근해져 옴을 느끼며 말없이 수영의 손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선잠이 들었다가 뭔가 기척을 느끼고 번쩍 고개를 든 수영의 시선이 곧 희원의 시선과 만났다.

  "희원아! 깨어났구나."

  "선배... 이 손... 나 때문에 다친 거죠? 그렇죠?"

  "어? 이거? 별 거 아냐. 원래 병원에선 별 거 아닌 거에도 붕대를 감아대고 유난을 떨잖아. 정말 별 거 아냐."

 몹시도 가슴 아픈 표정으로 내려 깔리는 희원의 시선을 쫓던 수영이 붕대가 감긴 자신의 손을 발견하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대꾸했다. 하지만 못내 걱정을 거두지 못하는 표정으로 수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희원이 갑자기 한결 더 흐린 얼굴이 되어 물었다.

  "그... 사람... 윤지훈이란 사람... 어떻게... 됐어요?"

  

 분명 엄청난 충격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희원에게 수영조차 되새기고 싶지 않은 그 사건에 대해 섣불리 언급하는 것은 때 이른 일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감에 수영은 선뜻 대꾸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여야 했다. 그러나 어쩐 이유에서인지 그녀의 눈빛에는 수영으로선 해석하기 힘든 간절함이 실려있어 무조건 대답을 회피하고만 있기가 어려웠다.

  "그 나쁜 자식은... 죽었어. 당연한 귀결이야."

  "......"

 희원으로선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안도하는 모습을 보일 법도 하건만 그녀는 오히려 자신과 가까운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처럼 슬프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희원아..."

  "불쌍한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 그렇게 재주도 뛰어나고 영특했던 사람이 어쩌다가 그런 불행한 운명을 타고 나야했는지....."

  "그 사람은 널 죽이려 들었어. 하마터면 정말 그 놈하고 죽을 뻔했다고. 헌데 그 자식이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수영 역시 죽은 지훈이 선우의 스토커였으며, 이른바 게이로 불리는 여자의 정신을 가진 무척 불운한 남자였다는 사실을 사후에 경찰로부터 들은 터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희원을 납치하고 죽이려들기 까지한 그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가질 여유는 없었다.

  "그나저나 아직은 이렇게 오래 앉아 있으면 안돼. 오랫동안 먹은 것도 없고 아무튼 이래 저래 탈진상태라 무조건 푹 쉬고 안정해야 된다고 그랬어. 그러니 얼른 다시 누워 희원아. 말도 너무 많이 하지말고. 기운 빠진다."

 지훈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또 다시 분노가 치솟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얼른 펴며 수영은 자상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다시 희원을 자리에 눕히고는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혹 목 마르면 얘기해. 아직 주스같은 건 무리지만 가능하면 물은 조금씩 자주 마시라고 하더라."

  "고마와요, 선배. 그런데 나... 여기 병원에 언제부터 이렇게 누워있었어요?"

  "너 이틀 만에 깨어난 거야."

  "이틀...? 그럼... 오빠... 들은?" 

  "으응... 벌써들 다녀갔지."

  "그랬... 구나."

 그랬겠지. 오빠들이라면 벌써 알고 당연히 다녀들 갔을거야......

 희원은 그들이 다녀갔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 한 번 병실 안을 둘러보았다. 좀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었는데 수영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간이소파 위에 분명 성진이 사다놓고 갔을 것이 뻔한, 거의 사람크기 만한 가필드 고양이 인형이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순간 희원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내 세 오빠들의 모습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그리고 수영은 분명 세 남자들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에 희원의 표정이 흐려지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희원이 병실은 앞으로 계속 제가 지키겠습니다.'

 수영은 헐레벌떡 숨이 넘어갈 듯한 모습으로 병실을 찾아온 레드비트의 세 멤버들에게 산소마스크를 쓰고 누워있던 희원의 모습을 잠시동안만 볼 수 있도록 허락(?)해준 뒤 이내 세 남자들을 쫓다시피 병실 밖으로 내몰며 말했다.

  "세 분들 모두 자기 일로 바쁘실테니 희원이 곁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희원이에게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건 세 분들 모두 잘 아시겠죠. 당분간은 가급적 면회도 자제해 주십시오."

 물론 수영의 일방적인 태도에 그들 모두가 순순히 응할 리 없었다. 누구보다 성진의 반발이 제일 거셌다. 하지만 수영의 예상대로 선우는 차갑게 굳은 시선으로 수영을 쏘아보기만 할 뿐 그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그래, 은선우. 니가 사내라면 이 번 만큼은 니가 내게 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걸. 불구덩이 속에서 희원일 구해낸 건 나지 니가 아니니까 말이야.'

 결국 선우는 수영의 소리 없는 조소를 고스란히 받아낸 뒤 여전히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나머지 멤버들을 데리고 병원을 떠났다. 그리고 다음 날 수영의 말은 아랑곳 않고 또 다시 레드비트 멤버들이 병원을 찾았을 때 선우는 끼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수영은 알고 있었다. 희원이 병원에 입원한 첫 날도, 다른 멤버들과 함께 찾아오지 않은 그 다음 날도 선우가 병원 건물 바깥에서 밤새도록 서성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마도 어쩌면 그는 지금도 희원의 병실 창가가 올려다 보이는 어딘가에서 초조한 얼굴로 서성거리고 있을 것이다.

  "순이야아, 깨어났구나아."

  "성진오빠."

 희원은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 훌쩍거리며 다가드는 성진의 목을 끌어안았다.

  "우리가 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아니다. 니가 얼마나 무서웠을까를 생각하면 우리가 걱정한 것쯤 뭐가 대수일까. 하여간 다행이다, 다행이야!"

  "희원씨, 미안해요. 좀 더 빨리 찾아내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많이... 무서웠죠?"

 거의 울상이 된 준희가 차마 성진처럼 다가와 희원을 끌어안지는 못하고 커다란 덩치를 엉거주춤하게 굽히고는 희원을 손을 살갑게 잡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나 이제 정말 괜찮아요. 오빠들 정말 내 걱정 많이들 했나보다. 둘 다 얼굴이 반쪽이네."

 희원이 반가움과 고마움으로 글썽해진 눈가를 얼른 손으로 훔치곤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얼굴만 반쪽인 줄 알어. 순이 니가 해주는 밥 먹고 나왔던 똥배 도로 다 들어갔다." 성진이 예의 어리광 낀 표정으로 입술을 뾰족히 내밀며 말했다.

  "저런. 빨리 나아서 집에 돌아가면 매일 매일 맛난 거만 만들어 줘야겠네."

  "그래 그래. 순이야. 빨랑 나아서 얼른 집으로 돌아와. 너 없으니까 우린 엄마 없는 새끼 고양이... 아니다 주인이 내다 버린 강아지라도 된 거 같았아. 흑....." 

 성진이 희원의 등 뒤로 팔을 두른 채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흐느끼는 시늉을 하자 희원은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성진의 어리광(?)에 감격스러운 시선을 던지다 문득 그 때까지 선우가 나타나지 않고 있음을 이상히 여기며 준희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선우 오빠는요?"

  "아아... 선우형은... 그게 그러니까......"

 준희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선뜻 대꾸를 못하고 버벅거리며 뒤통수만 긁어대자 성진이 눈쌀을 찌푸리며 준희를 대신해서 대꾸했다.

  "그 바보같은 자식은 수영이놈이 지껄인 소리에 고분고분 따르기로 작정한 모양이야."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의아한 얼굴로 희원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되물었다.

  "아 그게... 희원씨가 병원에 입원한 날 수영씨가 우리더러 면회도 오지 말라고 했었거든요. 희원씨 쉬는 데 방해된다고. 사실 우리 그날... 수영씨한테 내쫓기다시피 병실에서 나왔어요."

 워낙 누굴 나쁘게 말할 줄 모르는 준희였지만 그런 그의 얼굴에도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 떠오르는 걸 보면 분명 수영이 세 멤버들에게 기분 나쁠만한 행동을 취한 건 사실인 듯 했다. 그가 어째서 그렇게 행동을 했는지 희원으로선 물론 금세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희원은 그저 자신을 걱정하는 수영의 마음이 좀 지나쳐서 그런 것이려니 여기며 더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선우형은 지금... 희원씨가 그런 일을 당하게 된 책임이 모두 자기한테 있다고... 아마도 크게 자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쪼다처럼 면회도 못 오구 빌빌댄다고? 한심한 놈. 앞으로 순이 얼굴 아주 안 볼 것도 아니구, 그렇게 미안하면 와서 직접 빌면 될 거 아냐. 수영이 먼저 순이를 찾아내서 구했다고 지가 그렇게 주눅들 일은 또 뭐고!" 

 성진은 그래도 선우의 입장을 어떻게든 대변해 보려는 준희를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간 결국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렸고 희원은 두 사람의 얘길 통해 곧 선우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를 헤아릴 수가 있었다. 

  

  '성진오빠 말이 맞아. 정말 그렇다면 선우 오빤 진짜 바보야. 바보 선우오빠. 바보......'

 속으로 연거푸 선우 바보라고 뇌까리던 희원은 그러나 간절히 선우의 얼굴이 보고 싶은 마음과 또 그와 동시에 어쩐 일인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수영에게 미안한 마음이 뒤엉켜 심난스러움에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수영은 이제 괜찮으니 충분히 혼자 있을 수 있다는 희원의 얘기는 들은 척도 않은 채 꾸역꾸역 희원의 침상 옆 간이침대에 길다란 몸을 구기고(?) 누워 잠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이미 야심한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희원은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긴 하루 종일 누워 졸다 깨다 졸다 깨다를 반복하고 있으니 때가 야심한 들 잠이 오지 않는 것도 당연하지 싶었다. 게다가 그녀의 머릿속이 내내 이런 저런 상념들로 분주한 지경에 있으니 더더욱 정신이 말똥말똥해 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희원은 한동안 잠든 수영의 고른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가 곤히 잠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살그머니 침상을 빠져 나와 소리나지 않게 병실 밖으로 나섰다. 

 막상 복도에 나와 선 그녀는 방향 감각이 없어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어디론 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언니. 거기... 그 전화 좀 쓸 수 없을까요?"

 희원은 데스크 안 쪽에서 야간근무를 보고 있던 간호사에게 데스크 너머로 보이는 전화기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물었다.

  "이건 병원 내부로만 연결되는 전환데... 저기 저 쪽 모퉁이를 돌아가면 공중전화 있어요. 참, 병실안에도 전화기 있잖아요?" 간호사가 친절한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

  "그치만... 저어 언니 나중에 갚아드릴게 동전 좀 꿔주실래요?"

 희원을 부탁을 받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간호사는 곧 무슨 사정이 있는가보구나 하는 얼굴로 잠시 희원을 바라보더니 이내 주머니를 뒤져 동전 몇 개를 희원에게 건네주었다.

  "꼭 이자 쳐서 갚아줘야 해요."

  "고맙습니다."

 동전과 함께 가식 없는 미소를 건네는 간호사에게 희원 역시 미소로 답하고 그녀는 걸음을 돌려 공중전화기를 찾았다.

 동전을 먹고 뛰이 하는 신호음을 뱉어내는 수화기를 들고 희원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곧 부지런히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그토록이나 그녀의 애를 태우게 만들었던 며칠 전과는 달리 이 번에 그는 너무도 쉽게 금방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겨우 여보세요란 한 마디였을 뿐인데도 희원은 선우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가 왈칵 눈물부터 솟구쳤다. 게다가 목은 또 왜 그렇게 메이는 지. 

 뭐라 대꾸도 못하고 두 손으로 수화기만 꼭 붙들고 섰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희원의 이름을 부른다.

  "희원이구나. 희원아..."

  "......"

 분명 아직 완전치 못한 자신의 컨디션 탓이리라. 

 완전치 못한 컨디션 탓에 자신의 눈물샘에 잠시 이상이 생긴 것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마치 홍수라도 난 듯 이렇게 눈물만 펑펑 쏟아질 리가 없지 않은가.

 여전히 말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희원이 끅끅거리고 있는 동안 수화기 너머로 다시 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의 까칠해진 모습과 깊은 고뇌가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듯한 그런 목소리가.

  "미안... 하다. 미안하다... 희원아."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비통한 한숨소리.

 희원은 저며오는 가슴을 부여잡고 크게 호흡을 한 번 고른 뒤 간신히 입을 떼었다.

  "선우오빠. 나... 괜찮아요. 괜찮아요 오빠."

  "......"

 이 번엔 선우가 한동안 침묵을 지킨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희원 역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막상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그는 이미 희원의 마음이 어떤 지 다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한동안 전화기만 부여잡은 채 침묵을 지키고만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선우는 희원이 헐렁한 환자복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복도로 나와서는 모습을 보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병실을 나와 잠시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서있는 그녀의 모습이 투명해 보일 지경으로 너무도 창백하고 수척해 있던 탓에 선우의 가슴은 마치 쇠스랑으로 훑어내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는 멀찌감치서 소리 없이 희원의 뒤를 밟았다. 희원은 잠시동안 병원 로비를 헤매 다니는 듯 하더니 간호사가 있는 데스크를 발견하고는 비척비척 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걸어가는 뒷모양이 하도 위태스러워 선우는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튀어가 부축해주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러야 했다. 

 하지만 선우는 그녀 앞에 나설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녀를 마주할 자격이 없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선우는 그녀를 그토록 크나큰 위험에 빠뜨린 원인 제공자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 그렇게 업신 여겨왔던 수영만큼도 위험에 빠진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는 사실도 또한 용서할 수가 없었다.

 희원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 선우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 보다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걸음걸이가 훨씬 위태로와 보였지만 선우는 그저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녀의 위태스러운 보행이 멈추었다. 공중전화 앞이었다.

 전화기에 동전을 집어넣고 수화기를 받쳐든 그녀가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파르스름한 손을 들어올려 힘겹게 전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바지 주머니에서 그의 핸드폰이 힘있게 진동했다.

 병원이어서 벨소리를 꺼놓은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선우는 전화기를 들고 유리문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선우는 희원의 파리한 얼굴로 하염없이 굴러 떨어지는 눈물방울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헤아릴 수 있었다. 

 선우는 마치 그녀의 얼굴을 타고 내리는 눈물을 닦아주듯 유리에 투영된 희원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미안... 하다. 미안하다... 희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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