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완전한 일몰이 이루어지고 난 시각 두 사람은 곱은 손을 호호 불며 한강 둔치의 한 선착장 안으로 들어갔다. 선우는 갑작스런 기온 변화로 선글라스에 서린 습기를 연신 옷섶으로 닦아내며 선착장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희원은 왠지 그런 그의 모습이 우스워 피식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선우 역시 내내 굳었던 표정을 풀고는 씨익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난 여기 처음 와보는데 넌?"
"저도요."
"그럼 너 저건 타봤니?"
선우의 손끝이 잠시 정박중인 유람선을 가르키고 있었고 희원은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도 아직 못 타봤는데 우리... 저거 타볼까?"
희원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다시 유람선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동안 선우는 성큼성큼 매표소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이 십 여분 뒤 두 사람은 검은 먹물처럼 까만 물결을 내려다보며 한강의 한 가운데에 떠있었다. 선우와 나란히 선미 난간에 기대 서있던 희원은 휘황한 조명을 받으며 강줄기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구조물들이 하나씩 차례로 그녀의 머리 위를 지나갈 때마다 작은 탄성을 올렸다. 그리고 박여사로 인해 또 왠지 잔뜩 성이 나있는 것만 같던 선우로 인해 예민해졌던 마음이 까만 물결 위에 떨어져 아롱거리는 불빛들을 바라보는 동안 차츰 무디어져 감을 느꼈다.
"실은 오늘..."
희원 옆에서 줄곧 그녀처럼 수면 위에 일렁이는 불빛들에 시선을 던지고 있던 선우가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네 결혼...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 해주러 간 거였는데."
"......"
"네가 수영이를... 그렇게 좋아하는 지 몰랐어. 사실 나... 네가 나를 좋아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거든."
'선우오빠......'
갑자기 발 밑이 푹 꺼져 내리는 듯한 아뜩함을 느끼며 희원이 선우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생기 없는 미소를 지은 채 여전히 먹물 같은 수면 위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잠시 동안 창백하지만 윤곽 짙은 그의 옆모습을 응시하던 희원은 불현듯 시선을 거두고 눈을 내리깔았다. 자칫 선우가 그녀를 돌아보기라도 하면 두 눈에 가득 담긴 그녀의 감정을 고스란히 들키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분명 그러할 것이다. 그는 금세 눈치챌 것이다. 그녀의 두 눈이 크나큰 혼란과 고통으로 흐려져 있다는 사실을.
"축하... 한다면서 나한테 시어머니 될 사람 앞에서 그렇게 깽판을 쳤어요?"
그녀는 그 때 입을 열 때마다 하얀 김이 피어오를 만큼 차디찬 공기가 고맙기 그지없었다. 가까스로 태연함을 가장한다고 가장한 그녀의 목소리가 여지없이 흔들렸지만 한기로 인해 그닥 수상스럽게 들리지 만은 않을 터였기 때문이다.
"그, 그거야... 야, 그 사람이 먼저 잘못한 거잖아. 사람을 앞에다 놓고 그게 할 짓이냐?! 그리고 너 내가 준 돈 봉투는 그래 그렇게 죽어라고 도로 내밀더니 아깐 그 고집 다 어디로 까먹구 바보처럼..... 왜, 그래서 이 결혼 깨질까봐 겁나냐?"
"네. 이 결혼 잘못되면 그거 다 순전히 선우오빠 탓예요."
"알았어, 걱정마. 잘못되면 내가 그 책임 다 진다."
"깨진 결혼을 무슨 수로 책임져요."
"내가 대신.... 너랑 결혼해 주면 될 거 아냐."
"네?"
"아하하. 이건 아닌가. 좋아, 그럼. 아까 내 행동 때문에 잘못되면 내가 그 여자한테 가서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서 안 깨지게 해줄게. 됐지?"
희원은 다시 선우를 돌아다본다. 그리고 선우의 눈빛에 알 수 없는 애틋함이 가득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결국 이 번에 그녀는 자신의 얼굴 전체에 혼란스러움이 번지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말았다.
'이렇게... 이렇게 흔들려서 너 어떻게 선배랑 결혼할래, 채희원. 응?!'
수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희원이 막 자신의 방안에 들어서던 때였다.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로 보아 수심이 가득해 있음이 분명했다.
-"희원아, 좀 전에 우리 엄마랑 통화했어. 오늘... 너 찾아갔었다면서."
"네."
-"너... 괜찮...니?" 희원을 걱정하는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목소리였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선배 어머니 입장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야. 그런 거 네가 절대로 이해 못해도 돼.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어. 난 단지 네가 상처 받았을까봐 그게 너무 걱정이된다, 희원아."
"난 괜찮아요. 하지만 어머니께서 계속 반대하시면..."
-"그런 건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만 믿어. 알았지?!"
"하지만..."
-"나만 믿으면 돼. 희원아, 나 못 믿니?"
"아...아뇨. 믿어요, 선배."
-"그래, 고맙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깊고도 긴 그의 한숨소리가 들려왔고 그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희원은 그가 지금 얼마나 착잡한 심정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말없이 핸드폰에 귀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이내 그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피곤하겠다. 그만 자라."
"네, 선배. 그럼... 잘 자요."
-"그래, 잘 자라. 아 참, 깜빡 잊을 뻔했다. 오늘 우리 엄마의 마수에서 널 극적으로 구출해 준 사람... 은선우씨 맞지? 후후. 선우씨한테 내가 고마워하더라고 그렇게 전해줘라."
통화를 끝내기 전 수영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희원의 마음에 묘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왠지 수영은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불현듯 받았다. 선우를 향한 그녀의 마음도. 또 그와 결혼을 결심한 지금까지도 그녀의 마음이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도.
희원은 수영과의 통화를 끝낸 후 침대에 걸터앉아 좀 전에 수영이 그러했듯 깊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12월 첫 금요일. 성진과 선우가 출연하는 롹오페라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가 각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드디어 첫 공연을 시작했다.
희원은 극장 안을 가득 매운 객석 가운데 수영과 나란히 앉아 공연을 관람했다. 그리고 붉은 커튼이 처음 열리고 마지막 닫히는 순간까지 희원은 그녀가 보았던 그 어떤 연극들보다 몰입하여 출연진들의 호흡 하나 하나, 열기 하나 하나까지 자기 것인 양 느껴지는 짜릿한 전율을 맛보았다. 특히나 성진과 선우가 등장하는 장면에선 마치 성서의 배경에 실존하는 한 인물이 되어 고뇌하는 예수와 유다를 직접 목격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 정도였다.
매번 당신을 뵈올 때마다 느끼는 의문을 지울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뜻대로 할 수 있는 당신인데
왜 하지 않으십니까?
하필이면 그처럼 옛날인 B.C. 4년에
그처럼 이상한 땅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까?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한 오늘에 태어났으면
전세계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데도
예수 그리스도여 당신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당신도 수퍼스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가롯 유다가 부르는 유명한 아리아이자 작품 전체의 내용을 축약시킨 듯한 노래 '수퍼스타'가 끝나고 이어지는, 누구라도 비통함 속에서 숙연해 질 수밖에 없는 십자가 씬을 마지막으로 공연은 끝났다.
벅찬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출연진들 모두가 무대위로 나와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관객들은 극장이 떠내려 갈 듯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보낸다. 그리고 다섯 번이나 계속된 커튼 콜.
"그럼, 선배. 오빠들한테 이 꽃다발만 전해 주고 곧 나올게요."
"그래."
희원이 분장실 근처에 다다랐을 때 예상처럼 꽃다발과 선물꾸러미를 든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일반 뮤지컬 팬들도 있었지만 그보다 성진과 선우를 사랑하는 팬들이 두 사람의 공연 소식을 듣고 축하와 격려를 해주기 위해 잔뜩 몰려와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희원은 로드매니저와 사인을 주고받은 끝에 간신히 그 북새통을 뚫고 무사히 분장실 진입(?)에 성공할 수 있었다.
"축하해요, 오빠들. 정말 너무 너무 멋진 공연이었어요! 정말루요!"
"정말 괜찮았냐?"
그저 공연을 별탈 없이 무사히 끝마쳤다는 사실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던 성진이 다소 홍조띤 얼굴로 물었다.
"최고였어요."
희원이 양 엄지손가락을 높이 치켜들며 콧등을 찡긋해 보이자 성진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야아 말도 마라. 막이 바로 올라가기 전 까진 솔직히 좀 많이 떨렸는데 막상 무대에 올라가서는 무슨 정신으로 공연을 했는지 까맣게 아무런 생각도 안 나고... 박수소리에 정신 차리고 보니 공연이 끝나있더라고.
이거, 무대에 한 두 번 올라보는 것도 아닌데 초짜처럼 왜 그렇게 긴장이 되던지." 성진이 티슈로 입술화장을 쓱쓱 닦아내며 다소 들뜬 어조로 말했다.
"아냐. 오늘 성진이형 정말 멋있었어. 수퍼스타 맞아." 선우가 성진을 향해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찬사를 건넸다.
"너야말로. 확실히 연습 때 보다 실전에서 더 빛난다니까 이 녀석은."
"오빠들 둘 다 똑같이 최고였어요.내가 봤던 지저스 공연 중 아니 내가 봤던 뮤지컬이랑 연극을 통틀어서 제일 환상적이었다니까요. 성진오빠 나 여기... 눈물 자국 안 보여요. 마지막 십자가 씬에서는 눈물까지 흘리고 봤다니까요."
희원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가를 가르키며 목소리에 힘을 주어 오늘의 공연이 정말 멋진 것이었음을, 두 사람의 연기가 최고였음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준희 녀석도 오늘 왔더라면 좋았을 걸. 그 녀석은 하필 이런 때 독감에 걸려 가지고. 쯔쯧."
"그러게 말예요."
성진의 말대로 하필 이런 때 독감에 걸려선 뜻깊은 첫 공연을 놓친 준희를 안타까워하며 희원이 맞장구를 쳤다.
"공연은 앞으로도 한 동안 계속될텐데 다음 기회에 보면 되지. 참, 성공적인 첫 공연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오늘 우리끼리라도 뭉칠까?"
선우가 성진과 희원의 얼굴을 번갈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희원이 난색을 감추지 못하며 대꾸했다.
"어어... 저도 그러고 싶지만... 실은 지금 밖에서 수영선배가 기다리고 있거든요."
"아... 그랬구나." 선우가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듯 말했다.
"야, 은선우. 어차피 오늘은 우리도 힘들 거야. 오선생이 우리 둘만 빠져나가게 둘 것 같아?"
"그렇겠네요, 정말. 그럼 오빠들. 이제 전 이만 가볼게요. 나중에 집에서 봐요."
"그래, 순이야. 이따 집에서 보자."
"어, 그래, 그럼. 가 봐라."
분장실 문가에서 희원은 두 사람을 향해 팔랑팔랑 손을 흔들어 보이곤 곧 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런 희원의 모습을 바라보던 선우의 얼굴위로 부지불식간에 서운한 기색이 떠올랐던 모양이었다. 어느 틈엔가 성진이 그의 곁으로 바싹 다가와 어깨를 툭 치더니 한소리 했다.
"버스는 이미 떠났어, 임마. 그러게 진작에 좀 붙들지 그랬냐. 어휴, 저런 복덩이를 수영이같은 뺀질이 놈한테..... 물론, 네 놈한테도 희원이가 훨 아까운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수영이놈한테 주느니 니가 데려가는 게 나았을텐데. 쯧쯧쯧."
성진의 예측대로 공연 기획자 이하 출연진들 모두는 성공적인 첫 공연을 자축하는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물론 다음 날 있을 공연을 위해 술판이 거나하게 벌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들 첫 공연을 마치고 난 뒤의 소감을 몇 마디씩 표현하느라 모임자리가 쉬이 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우는 화장실을 핑계로 눈치껏 자리를 빠져 나온 뒤 그 길로 곧장 밖으로 나왔다. 그에게도 만족스러운 첫 공연이었음에는 틀림없었지만 왠지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적당한 흥분감에 들떠있는 다른 이들의 분위기에 도저히 동화되질 않았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그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어쩌면 그 시각 즈음엔 희원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일 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어 선우는 그녀의 번호를 누르려다 결국 쓴웃음을 지으며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 속으로 집어 넣었다. 설사 돌아가는 길일지라도 분명 혼자가 아닐 것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서리를 동반한 돌개 바람이 그의 심장 위에서 난동이라도 부리고 있는 듯 가슴이 저미고 시려왔다.
차를 몰고 한동안 하릴없이 이 거리 저 거리를 배회하던 선우는 문득 고급유흥가가 형성된 한 골목 어귀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시디 플레이어에 쇼팽 시디를 집어 넣고는 트랙 전체가 세 번이나 반복해서 도는 동안 자리에서 꼼짝도 않은 채 차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2시가 조금 넘었을 때 즈음이었을 것이다. 줄곧 그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던 한 업소의 문이 주춤 주춤 열리면서 비틀거리는 신사 하나를 부축하며 걸어나오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술집 주인이 직접 부축하고 나오는 모양새로 봐서 가녀린 그녀에게 기대어 비틀거리는 신사는 분명 대단한 고객이거나 아니면... 손님 이상의 관계일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며 선우는 내내 두 사람의 모습을 주시했다. 그리고 위태롭게 남자를 부축해가며 걸어가던 그녀가 환하게 밝혀진 가로등 불빛 아래로 들어섰을 때 선우는 그녀의 얼굴이 기획사 건물에서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보다 놀라우리 만치 많이 상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양미간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문득 전화기 너머에서 쟁쟁거리던 미랑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연희씨 가게에 다녀오는 길이야, 나. 당신 어머니가 하는 술집 말이야. 은막의 여왕의 말로가 영 말이 아니더군. 예전의 명성을 업고 한다는 짓이 겨우 술장사라니. 그나마 몸도 날로 쇠해지고 장사도 고전을 금치 못한다면서?
헌데 최고 인기가도를 달리며 잘 나가고 있는 아들은 그런 자기 생모를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다니... 세상에 그런 불효가 또 있을까?'
선우는 희미하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생각했다. 나연희의 말로가 아무리 비참하고 추해진다 해도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그녀의 선택이 불러온 자업자득일 뿐이라고.
비틀대던 신사를 운전기사의 도움을 받아가며 고급 승용차의 뒷좌석에 앉힌 뒤 그녀는 차가 출발하는 것과 동시에 돌아서서 다시 술집 입구로 총총 걸음치며 돌아갔다. 입구 안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왜소한 뒷모습을 보면서 선우는 알 수 없는 비애감과 울화가 동시에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절대...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선우는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조금 전 술집 안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과 겹쳐지는 어떤 영상이 그의 눈가를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엄마! 가지 마, 엄마! 날 두고 가지마, 엄마! 나도 같이 갈 거야! 어허어엉... 엄마 따라 나도 같이 갈 거란 말야! 엄마! 엄마!'
돌아서는 엄마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울며불며 매달리는 여섯 살 짜리 남자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을 떼어놓기 위해 성인 남자 두 명의 힘이 필요했을 만큼 어린 선우의 절규는 처절했다. 친 엄마에게 버려졌다는 현실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는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선우는 할아버지라고 하는 낯선 노인으로부터 별스러운 놈이라는 핀잔을 받을 만큼 며칠 동안 통곡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먹지도 않고 울기만 하다 지쳐 잠들고 깨어나면 다시 또 울부짖고. 그렇게 정 깊은 어린 아들을 두고 매정하게 돌아선 그녀. 결코 용서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희원을 다른 사람에게 보내야만 한다는 생각에 매사에 의욕을 잃고 헛헛함만을 느끼던 선우가 제일 먼저 떠올린 사람은 여지껏 마음의 의지가 되어주던 동생 나영이 아닌 그녀였다. 왜 그랬을까.
원망과 어떤 갈구의 빛으로 흐려진 시선으로 다시 차창 밖을 응시하던 선우는 이내 차에 급 시동을 걸고 빠르게 골목 어귀를 벗어났다.
누적된 피로감 때문이었는지 아침부터 조금 뻑뻑하다고 느껴지던 성진의 눈에서 어느 틈엔가 착용하고 있던 콘택트렌즈 한 쪽이 벗겨져 나가고 말았다. 선우를 비롯해 함께 있던 단원들이 총동원되어 연습실 바닥을 이 잡듯 뒤진 끝에 성진의 렌즈를 찾아내긴 했지만 이미 누군가의 발에 밟혀 찢겨진 상태였다.
공연이 없는 일요일이었지만 연습실에서 오후 한 나절을 보내고 있던 성진은 결국 부산을 떨며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순이야. 미안해서 어쩌지. 나 지금 렌즈 한 쪽을 잃어버려서 그런데 집에 여벌로 있는 것 좀 빨리 갖다줄래."
-"저런. 알았어요. 택시 타고 금방 갈게요."
"아, 그리고... 이왕 나오는 김에 간단한 간식 좀 싸다주라."
-"수상해요. 렌즈가 목적이예요, 아님 간식이 목적이예요?"
"흐흐. 다 알면서. 자기 미워잉."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성진이 통화를 끝냈을 때 선우가 못마땅한 표정을 드러내며 핀잔을 주었다.
"일요일인데 그냥 좀 쉬게 놔둘 일이지. 아무튼 형도 참."
"뭘?! 너도 내심 좋으면서 뭘 그래. 핑계 김에 희원이 얼굴도 보구. 요즘 걘... 결혼 준비하느라 바쁘고 우린 공연 때문에 그렇고 한 집에 살면서도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었잖아."
"......"
"다 이런 걸 두고 누이 좋고 매부 좋다고 하는 거야."
"참 나. 엄한 사람 괜히 거기다 끌어들이지 말라고."
"췻. 어디 순이 오면 보자. 니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도는지 어떤지."
성진은 선우를 향해 혓바닥을 낼름 내밀어 보이고는 황당해 하는 그를 뒤로 한 채 렌즈 한 쪽이 없어서 핀트가 안 맞네 어쩌네 하면서 호들갑 떨던 게 무색할 만큼 단원들을 향해 깡충깡충 잘만 뛰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희원이 간단한 샌드위치까지 싸들고 부랴부랴 연습실을 찾아 왔을 때 아닌 게 아니라 그녀를 맞는 선우의 얼굴엔 정말 화색이 돌았다. 성진의 말처럼 요 며칠 한 집에 살고 있으면서도 서로 얼굴 보기가 힘들었던 참이라 선우는 희원을 보자 반가운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하지만 이내 선우는 다시 성진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희원이 감기를 앓고 있었던 모양인지 간간히 기침을 해댔기 때문이었다.
"아, 그러길래 간식은 무슨...... 야, 약은 먹었어?" 성진을 한 번 흘겨준 뒤 선우가 다시 희원을 향해 물었다.
"괜찮아요. 점점 나아가는 중인데 기침만 조금 오래 가네요." 두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희원이 손을 가로 저으며 대꾸했다.
"순이야. 감기 걸린 줄 몰랐어. 알았으면 이런 심부름 안 시키는 건데." 성진이 코맹맹이 소릴 내며 희원에게 죽는시늉을 했다.
"다 나았대두요. 괜찮아요, 성진오빠."
"야, 여기서 그만 머뭇대고 얼른 집에 들어가. 아니다. 내 차로 같이 가자. 형, 선생 오면 나 먼저 들어갔다고 해. 뭐 더 남아 있어봤자 별로 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선우오빠, 아니예요. 정말 괜찮대두요."
"뭐... 그래라, 그럼. 나야 아직 선생이 봐주겠다고 하던 씬이 남았으니 할 수 없고. 그래, 순이야. 선우 차 타고 같이 들어가라."
선우는 자신의 쟈켓을 가져오기 위해 성진을 따라 함께 연습실로 들어갔다. 헌데 그가 의자에 걸쳐놓은 쟈켓을 집어들고 다시 연습실 밖으로 나올 때 내내 연습실 밖의 세 사람에게 신경을 쓰고 있던 지윤이 쪼르륵 그의 뒤를 쫓아 나왔다.
"어머, 선우오빠. 벌써 가는 거야?"
"어, 그렇게 됐다. 먼저 갈게, 수고해라."
"그런 게 어딨어?! 아까 내 안무 조금 변형 되서 선우오빠가 같이 호흡 맞춰주기로 했었잖아. 잊었어?"
"아참, 그걸 깜박했군."
"빨랑 들어와. 나 지금 막 그거 연습하려고 했단 말야."
"근데 미안해서 어쩌지. 나 좀 급한 일이 생겨서 말야. 오늘은 그냥 너 혼자 연습해라. 아, 뭣하면 성진형한테 좀 봐달라고 하던지. 자, 희원아 얼른 가자."
뾰루퉁한 기색이 역력한 지윤을 뒤로하고 선우가 희원에게 돌아섰지만 지윤은 그녀의 집요한 성격을 드러내며 포기하지 않았다.
"오빠, 정말 이럴 거야. 약속을 했으면..."
"나중에 보자."
그러나 선우는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 한 마디로 그녀의 고집을 일축시켜 버리곤 괜스리 중간에서 난처한 표정을 하고 있는 희원을 이끌고 유유히 자리를 떴다.
딩 딩동 댕동 딩댕....
선우의 차가 막 대학로를 벗어나고 있을 때 문득 희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아...네. 네. 지금요? 아, 예에. 알겠습니다."
웨딩샵이었다. 얼마전 수영과 골라둔 웨딩드레스의 1차 가봉이 끝났다고 시간 괜찮으면 지금 와서 한 번 입어보자고 웨딩샵의 직원이 전화를 걸어왔던 것이었다.
"누구... 전화야?"
통화를 끝낸 희원이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갑자기 생각에 빠진 듯한 표정이 된 것을 보고 선우가 물었다.
"예? 아아... 별 전화 아니예요. 저... 그런데 선우오빠. 저는 그냥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내려주고 오빠 먼저 집에 들어가요."
희원은 왠지 웨딩샵에 가봐야 한다는 말을 선뜻 내놓지 못하고 어떻게든 선우를 먼저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 다른 데 볼일이라도 생긴 거야? 그럼 거기까지 내가 데려다 줄게."
"아니예요. 여기서 좀 멀어요. 그러니까 전 지하철 타고 갈게 오빠는 집으로 가세요."
"무슨 소리야. 왜 내가 데려다 주겠다고 나왔는데. 아직 콜록거리면서 사람도 많은 지하철은 무슨. 그것두 민폐의 일종이다, 너. 잔소리말고 위치가 어딘지나 말해 봐."
결국 선우의 완강함을 이기지 못하고 희원은 웨딩샵 앞까지 그의 차를 타고 올 수밖에 없었다.
웨딩샵 앞에서 차를 멈춘 선우는 운전대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차창 유리를 통해 샵의 외관을 유심히 바라본 뒤 다시 희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야?"
"네. 실은 결혼식 때 입을 드레스... 1차 가봉이 끝났다고 해서."
"그래? 잘 됐네. 얼마나 예쁜지 한 번 보자."
"같이... 들어가려고요?"
"안돼?"
"아니오... 그건 아니지만."
"됐어, 그럼. 기다리겠다. 얼른 들어가자."
희원은 서둘러 차에서 내리는 선우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도 차 밖으로 나왔다.
왠지 묘한 기분으로 선우와 함께 샵에 들어섰을 때 키가 작고 통통한 여직원 하나가 두 사람을 맞았다.
"저... 채희원이라고 좀 전에 통화하고 온 사람인데요."
"아, 채희원씨. 제가 전화드렸어요. 자, 이쪽으로."
직원은 희원을 커튼이 드리워진 마루 위로 안내했다. 희원은 바닥 보다 한 단 높은 마루 위로 오르기 전에 선우를 돌아보았다. 그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턱짓으로 얼른 들어가 보라는 시늉을 했다.
마루 전체를 빙 둘러치고 있는 커튼 안에서 희원은 금세 눈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은 겨울의 신부로 바뀌어있었다. 드레스를 선택할 때 희원은 그냥 안목 높은 수영에게 선택을 맡겼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누가 봐도 탁월한 것이었음을 희원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실감할 수 있었다.
"어머, 정말 눈부시네요!"
희원의 청순한 이미지를 최대한 살린 듯한 분위기의 드레스는 그녀의 어깨선과 쇄골을 적당히 드러낸 단아한 곡선의 네크라인과 심플한 코사지로 악센트를 준 디자인으로 더할 나위 없이 그녀와 잘 어울렸다.
"자, 이것도 한 번 써보세요."
직원이 그녀의 머리 위에 살포시 얹어 준 것은 드레스와 꼭 어울리도록 아무런 장식도 없는 그저 순백을 강조한 면사포였다.
그녀의 마음속에 그저 드레스만 입었을 때와는 또 다른 감흥이 일어났다.정말... 내가 누군가의 신부가 되는 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그 때 갑자기 직원이 커튼을 걷으면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선우를 향해 외쳤다.
"신랑 분도 와서 보세요!"
"앗! 그게..."
당황한 희원이 직원을 향해 그녀의 오해를 알리려고 몇 걸음 앞으로 나섰을 때 였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지만 놀라움과 감탄 어린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하고 있던 선우와 희원이 시선이 마주쳤다.
'오빠......'
'눈... 부시다, 희원아.....'
그녀가 저토록 이나 아름다웠었나?
선우는 눈이 시릴 지경이었다. 여지껏 보아왔던 어떤 신부보다 아니 어떤 여자보다 아름다웠다. 수줍은 듯 붉힌 두 뺨과 다소 애잔한 빛이 감도는 눈빛까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 어떤 순간보다 그녀가 여자로 보였다.
'그래. 널 따라오는 게 아니었다. 그냥 널 혼자 보내는 거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