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극단 건물 입구까지 희원을 배웅 나온 선우는 먼저 들어 가보겠다고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그 때까지 차마 선우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보지 못하는 희원의 손을 꼭 쥔 채로 한동안 아쉬운 듯 서 있다가 결국 마지못한 기색으로 천천히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래, 이따가 집에서 보자."
선우는 희원의 손을 놓고 싶지가 않아 연습이고 뭐고 그대로 집어치우고 당장이라도 그녀와 같이 그 곳을 나서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저녁에 집에서 다시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으며 내키지 않는 손을 억지로 놓았다.
그에게서 손이 풀려난 희원은 다급히 고개를 숙여 보이곤 총총 걸음으로 부랴부랴 입구를 벗어났지만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던 선우가 한동안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마로니에 공원을 가로질러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는지 희원은 통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아무튼 그녀는 버스 정류장에서 몇 대의 버스를 그냥 지나쳐 보낸 후 일부러 가장 많이 돌아가는 노선의 버스를 골라 올라탔다. 마침 버스 중간 부분에 좌석이 하나 있어 그녀는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아 습관적으로 창 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습기로 뿌옇게 흐려진 유리창을 옷소매로 쓱쓱 닦아내자 채도 낮은 거리 풍경이 버스의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흔들거리며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깊은 상념에 빠진 듯한 얼굴로 희원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선우의 갑작스런 고백!
아, 그래. 그건 분명 현실이야. 현실 이래도.
하지만 희원에게 선우의 고백은 황홀함보다는 충격으로 다가왔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또 그녀는 지금까지도 아침에 깨어나면 달콤했던 만큼 지독한 허탈감에 빠져들고 말 그런 잔인한 단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조차 다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 그녀에겐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던 것이다. 오랜동안 선우를 그토록 애닳게 짝사랑해왔으면서도 감히 그에게 멋들어진 혹은 달콤한 사랑의 고백을 받을 수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던 그녀였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동경하게 되면 당연히 몇 번쯤은 빠져 볼 수 있는 그런 상상을 그녀는 차마 그 조차 하지 못했었던 것이다.
물론 자신을 어리석을 만큼 비하해서 그랬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비현실적인 몽상에 빠져 자신을 상처 내고 싶지 않았던 최소한의 자기방어본능 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아직도 그녀의 손에 남아있는 그의 온기와 부드러운 손의 감촉이 차츰 그녀를 현실로 인도하고 있었다. 그녀의 영혼과 심장을 송두리째 휘어잡고 세차게 흔들어대던 선우의 목소리 그리고 눈빛. 그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다고 일깨워 주었다.
희원은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거리 풍경에 시선을 던졌다. 꿈이라기엔 한 치의 굴절도 없는 너무도 또렷한 영상.
그녀는 고개를 돌려 버스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저 멀찌감치 맨 뒷 좌석에 앉아있는,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남학생의 콧잔등에 난 작고 빨간 여드름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다.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에서 앞으로 세 자리 건너 앉은 어떤 아저씨가 차가운 유리창에 머릴 기댄 채 졸면서 내는 숨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려왔다.
난 지금 절대로 꿈속에 있는 게 아니야.
그제서야 비로소 흥분감으로 인해 살포시 붉어진 그녀의 얼굴에 조금씩 조금씩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하하... 아하... 후후후......"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까맣게 의식하지 못한 채 희원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갑자기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희원은 콧등이 알큰하게 저려오는 느낌을 받으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와 동시에 걷잡을 수 없는 작열감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왈칵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흑... 흐흑......."
그렇게 한동안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그녀의 입가에서 다시 날아오를 듯한 흥분감을 이기지 못하고 키득키득 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갑작스런 고백으로 인한 충격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선우로부터 자신이 사랑 고백을 받았다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희원의 감정은 그렇게 한동안 울컥한 감동과 날아오를 듯한 행복감 사이를 교대로 교차하면서 그녀로 하여금 눈물을 빼도록 만들었다 실소를 흘리도록 만들었다를 반복했다.
하여간 그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혼자 킥킥거렸다가 다시 훌쩍거리며 눈물을 훔치는 일을 반복하는 동안 그녀의 좌석 주위에 서있던 승객들이 슬그머니 그녀로부터 가능한 한 멀찍이 떨어진 자리로 옮겨가는 것을 그녀는 의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았다 해도 희원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선우 역시 나머지 연습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연습이 끝남과 동시에 퉁겨나오 듯 연습실을 빠져 나온 그의 머리 속엔 서둘러 귀가해서 희원을 보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그의 마음이 그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때 문득 성진이 그의 등뒤에서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딱 한잔, 어때?"
물론 선우는 그 순간 성진의 제의를 거절하고 곧장 집으로 향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성진과 함께 가볍게 한 잔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찌 보면 정말 한 잔 하지 않고 지나기엔 섭섭한 날인지도 몰랐다.
"좋아, 딱 한 잔!"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근방에서 멀지 않은 대포집을 찾아 들어갔다. 소주 한 병에 동태찌개 안주를 시킨 두 사람은 서로의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금세 소주 한 병을 비우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 목소리로 소주 한 병을 더 시켰다. 그러는 동안 선우는 성진으로부터 절대로 희원이에게 상처 주는 짓을 해서는 안 될 것이며 사랑에는 그 만한 책임과 의무가 따라야 될 것이라는 등등의 일장연설을 한 시간 가까이 들었다. 물론 선우는 묵묵히 진심 어린 그의 당부를 열심히 경청했다.
두 사람이 집에 당도했을 때 성진은 올라가 봐라 하는 말과 함께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이곤 먼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 2층에 다다른 선우는 곧장 희원의 방문 앞으로 걸어가 3초 정도 망설이다 이내 문을 노크했다. 곧이어 네에 하는 희원의 대답소리가 들려왔다.
선우는 불현듯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가슴이 두 방망이질 쳐옴을 느끼며 다소 떨리는 손길로 문고리를 돌렸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
"네에... 들어오세요."
살짝 열린 문틈으로 선우가 보였을 때 희원은 얼굴부터 달아오름을 느끼며 간신히 입을 떼었다. 그리고 희원의 방안에 들어선 선우가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아 잠시 머뭇거리고 서있자 희원이 침대 가를 가르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여기 앉으세요."
"그, 그럴까 그럼."
웬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거리를 두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두 사람 중 선우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까... 많이 놀랬지?"
"......." 희원은 살짝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실은... 좀 더 무드 있는 장소에서 분위기 있게 고백하고 싶었는데 다 망쳤다."
희원은 여전히 선우를 외면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가 피식 웃음 짓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뭐 좀 쇼킹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터프하고 멋지지 않았냐, 나?"
그렇게 말하며 희원을 돌아보던 선우는 그녀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피어오른 것을 확인하고 이내 얼굴빛이 밝아졌다. 사실 그 때까지 자신의 고백을 희원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오만 가지 시나리오를 머리 속에서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던 선우였던지라 지금 수줍게 미소를 짓고 있는 희원의 모습을 보며 그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한결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된 그는 두 팔로 침대를 짚고 몸의 중심을 팔에 실은 채 비스듬하게 앉아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나... 희원이 너 좋아하기 시작한 거 오래 됐다. 몰랐지? 생각해보면 그 조인트 콘서트홀 분장실에 널 처음 본 순간부터였던 것 같애. 하지만 나도 잘 모르고 있었어. 그 때 이후로 줄곧 내가 널 좋아하고 있었다는 거.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가랑비에 옷 젖듯 그렇게 소리 없이 네가 내 마음을 온통 다 채우고 있더라. 빠져나갈 틈조차 주지 않고.
하지만 너에게 그런 내 마음... 고백하기 쉽지 않았어. 너도 알다시피 그 동안 나 자타가 공인하는 스캔들 메이커였잖아.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할 지 솔직히 자신 없었어. 거절 당할까봐 무지 무서웠다, 나.
희원이 넌... 정말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진정한 사랑을 느낀 여자였는데, 처음으로 상처받는 거 겁내지 않을 만큼 내 사랑을 모두 쏟아주어도 아깝지 않을 그런 사람이었는데 내 섣부른 고백에 네가 멀리 멀리 달아나 버릴 까봐. 그리곤 다시는 날 보지 않으려 들까봐 그게... 너무 두려웠다. 내가 과연 널 사랑할 자격이나 있는지 하는 그런 생각들로......."
잠시 잦아드는 그의 음성 대신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다 왠지 먹먹해진 가슴으로 희원을 돌아보던 선우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자신의 다리 위에 모아 쥐고 있는 그녀의 손 등위로 후두둑하고 굵은 눈물 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희원아......."
"바보같이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오빠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요. 왜 바보 같이......."
희원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숨을 죽이고 흐느꼈다. 한 번도 선우가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리라곤 꿈에서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늘 애가 닳고 짝사랑으로 인해 크고 작게 상처받는 건 자기 혼자뿐이라고 여겨왔던 희원이었다. 헌데 그 동안 그와 같은 이유로 선우가 자신을 비하하며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놓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녀에겐 적잖은 충격이자 또한 아픔으로 다가왔다.
문득 그녀의 뺨 위에서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부드럽고도 조심스러운 손길이. 그녀는 고개를 들고 선우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아, 사랑에 빠진 남자의 눈빛은 바로 저런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이 그녀의 영혼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화인처럼 찍혔다.
선우가 그녀의 눈가에 어린 그의 눈엔 보석처럼 보이는 물방울을 살그머니 떨구어 내며 말문을 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다 비겁한 핑계일 뿐이란 걸 알았어. 정말 사랑한다면 절대로 그 사람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희원아, 나 너 많이 사랑한다. 죽을 때까지 여자란 존재에게 내 마음 열지 않으리라 멩세 아닌 맹세를 하며 살았는데 네가 내 마음을 송두리째 다 가져가 버렸으니 이제 네가 나 책임져 줘야 돼. 그래 줄 거지? 그래 줄 수 있지?"
"......."
희원은 즉시 그래 주겠노라고 그래 줄 수 있노라고 대꾸해 주고 싶었지만 목이 꽉 잠겨버려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 없었던 대신 힘차게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여 주었다.
선우는 만면 가득 환한 웃음을 짓더니 살며시 그녀의 머리를 끌어 당겨 자신의 품안에 감싸 안았다.
"들어봐, 희원아. 내가 만약 너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해도 내 심장은 절대로 그럴 수 없을 거야. 지금... 내 심장이 하는 소릴 들어봐."
그의 가슴에서 후끈한 열기와 함께 정말 그녀를 향해 치닫기라도 하듯 숨가쁘게 펄럭거리는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희원은 세상을 모두 얻은 것만 같은 감격에 휩싸인 채 말없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잠시 후 선우가 그녀에게서 몸을 떼고 다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 속에서 아름다운 별무리를 보았다. 그리고 선우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파르르 떨고 있는 희원의 두 눈꺼풀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두 뺨에도. 그의 깃털처럼 보드랍고 가벼운 입맞춤은 그녀의 콧등을 타고 아담한 콧망울로 이어졌다가 마침내 아기처럼 입술 산이 동그스름하고 도톰한 그녀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매끄럽고 폭신한 그의 입술 감촉에 희원은 아찔함을 느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그녀의 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말캉하고 부드러운 혀의 감촉에 그녀는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하지만 선우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녀가 긴장을 풀 때까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기다렸다. 그가 느끼는 것을 그녀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이윽고 그녀의 혀가 조금씩 반응 해오기 시작했을 때 선우는 조금 전까지 느꼈던 짜릿함의 몇 배나 되는 희열에 휩싸였다.
희원은 선우의 혀가 그녀의 혀를 살짝 살짝 건드릴 때마다 조금씩 반응을 하기 시작하다 어느 순간 점점 더 뭔가를 갈구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로 인한 당황스러움도 잠시. 그녀는 선우의 향기에, 그와의 키스에 도취되어 그녀의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의 혀를 맛보고 애무하며 열락의 나락으로 침잠 되어 갔다. 그렇게 희원은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키스가 주는 희열에 빠르게 눈 떠가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