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와아!"
잠에서 깨어난 희원이 한껏 기지개를 켜며 창가로 다가가 커텐을 젖히자 밤새 소리 없이 내린 눈으로 온통 솜이불을 덮어쓴 것처럼 새하얘진 세상이 그녀를 맞았다. 조금 전 침대 위에서 눈을 떴을 때 그녀가 맞았던 어떤 아침보다 행복한 아침이라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미소지었던 희원은 새하얀 침묵 속에 고즈넉이 잠겨있는 창 밖 풍경을 내다보며 벅찰 만큼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행복감이 더욱 고조되는 기분을 느꼈다.
새삼 가누기 힘든 설레는 마음으로 살그머니 창문을 열어 젖힌 희원은 청랑한 대기를 폐부 깊숙히 심호흡 해보았다. 정말 기분이 그만이었다.
'아아, 너무 행복하다. 너무 행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정말 그래. 정말이야.'
티끌 하나 없이 하얀 눈은 베란다 난간 위에도 소복이 쌓여있었다. 희원은 잠옷차림에 맨발이었지만 추운 것도 잊은 채 팔을 뻗어 난간 위에 쌓여있던 눈을 한 웅큼 잡아보았다.
"앗, 차가워!"
손 안 가득 번져오는 차가운 감촉에 희원이 싫지만은 얼굴로 코끝을 살짝 찡그리며 혼자 미소짓고 있을 때 갑자기 옆 베란다에서 창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불쑥 길다란 팔 하나가 튀어나왔다. 선우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듣기 좋은 목소리...
"와아, 많이도 왔네. 어? 너도 나와있었니?"
희원처럼 베란다 난간 위에 탐스럽게 쌓여있던 눈을 만져보기 위해 막 손을 내밀던 중 희원을 발견한 선우가 반가운 어투로 말했다.
"네에."
희원 역시 가슴이 설레도록 아름다운 이 아침, 멋진 설경이 내려다보이는 베란다에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선우와 마주치게 되자 반가운 마음 한량없었지만 황급히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하고 말았다.
'에구 에구, 눈꼽도 아직 안 뗐는데 어쩜 좋아. 꺅! 그리고 보니 아직 잠옷 차림이었잖아!'
"그나저나 그런 옷차림으로 나와있던 거야? 감기 들려고."
아니나 다를까 희원의 차림새를 눈치챈 선우가 걱정스런 투로 희원에게 말했다.
"그, 그러지 않아도... 막 들어가려던 참이었어요."
"그래. 얼른 들어가라. 공기가 쌀쌀하다."
그러나 희원이 걱정하는 것은 감기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의 걱정거리는 오직 그녀의 눈가에 붙어 있을지도 모를 눈꼽이 행여나 선우에게 들켰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내심 선우와 나란히 좀 더 멋진 설경을 감상하고 싶었던 희원은 내키지 않은 걸음을 마지못해 방안으로 옮겼다.
'아휴 참, 이럴 줄 알았으면 옷 갈아입고 세수부터 하는 건데. 선우오빠도 눈 구경한다고 베란다로 그렇게 나올 줄 알았나 어디. 아, 분위기 좋았는데 아쉽다...'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방 안에 들어선 희원은 부랴부랴 거울 앞으로 다가가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도 왕 눈곱이 붙어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휴우, 다행이네.'
거울을 향해 혼자 미소짓던 희원의 시선이 문득 자신의 입술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얼굴엔 복숭아 빛 홍조가 금세 떠올랐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쓸어보던 희원의 얼굴은 이내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변해버리고 말았다.
"아휴, 채희원. 지금 주책스럽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너 요즘 갈수록 음흉해 지는 거 알어?!"
희원은 자신을 향해 그렇게 혼잣말을 뇌까리곤 세수를 하기 위해 자신의 방을 나섰다.
아침 준비를 하는 동안 희원은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콧노래를 주의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잠깐이라도 주의를 게을리 했다하면 어느 새 절로 콧노래가 새어나와 희원 스스로도 이거 너무 티내는 거 아냐 하는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하물며 누군가 다른 사람이 보기라도 한다면......
"이거, 이거, 희원씨 너무 티내는 거 아니예요?"
"옛?!"
된장찌개 간을 보다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니 주방 입구에 서서 비죽이 웃고 있는 준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빠르고 정확한 소식통에 의하면 희원씨 어제... 좋은 일 있었다면서요?"
"......."
"야, 역시 선우형은 터프가이야. 사랑고백도 그렇게 멋들어지게 하고. 난 죽었다 깨나도 그렇게 박력 있는 고백은 꿈도 못 꾸었을 텐데."
대꾸도 못하고 점점 얼굴만 벌겋게 변해 가는 희원을 조금은 짓궂은 심정으로 바라보며 준희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거 머시냐... 키스...도 했다면서요?"
'꽥! 준희오빠도 저렇게 짓궂은 표정을 지을 줄 알다니. 아아,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드아!'
그 때 준희의 어깨를 툭 치며 성진이 나타났다. "뭐하냐 안 들어가고 여기 서서."
그러나 희원은 그 타이밍에 등장한 성진이 썩 반갑지만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전혀 반갑지 않았다. 어제 오후 연습실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던 성진. 그의 얼굴을 그냥 마주 보기도 낯뜨거울 판에 준희랑 가세해 작정하고 희원을 놀린다면......
"아, 그래 넌 어제 뭘 들었냐. 키스도 했다니까. 그것도 무지 찌인하게."
그러지 않아도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하고 서있던 희원을 향해 성진이 장난스럽게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그렇게 말하자 빨갛게 익을 대로 익은 사과가 나뭇가지에서 절로 떨어지듯 희원의 고개 역시 아래로 푹 꺾이고 말았다. 오 마이 갓! 성진오빠, 저럴 줄 알았어.
"오오...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고나 할까. 고 얄미운 지윤이 계집애가 톡 나서서 희원이를 괴롭히려고 들 때 선우가 갑자기 있는 대로 터프한 척 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더니."
돌연 성진이 실제로 자신이 앉아있던 식탁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공연을 계기로 연기 지도까지 받은 그는 아예 직업적인 연기자로 나서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었다.
"쫘악! 오홋, 솔직히 그 때 난 내심 얼마나 고소하던지.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았다니까. 아우, 지금 생각해도 넘 넘 고소해 죽겠엉." 성진이 자신이 박차내 버렸던 의자를 주섬주섬 다시 끌어다 앉으며 키들거렸다.
"뭐가 또 그렇게 고소해 죽겠는데."
고맙게도 아니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더더욱 난감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준희가 성진 앞에 마주 앉았을 때 선우가 주방으로 들어섰다. 그 때 희원은 몇 번도 더 본 찌개 간을 보는 척하면서 성진과 준희를 최대한 등지고 서 있던 중이었다.
"어제 오후에 연습실에서 있었던 일. 지금 재방송으로 다시 한 번 더 경청중이야, 선우형." 좀 전에 성진이 키들거렸던 웃음을 이 번엔 준희가 선우를 향해 지으며 대꾸했다.
"......."
순간 당황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희원만의 사정은 아니었던 듯 하다. 슬그머니 돌아서 선우의 기색을 살피던 희원의 눈에 그의 낯빛이 조금 불그스름하게 보였던 것은 착각이었을까?
아무튼 희원에게 그 날 아침처럼 행복한 아침도 처음인 듯 싶었지만 그 날 아침처럼 몸둘 바를 모르게 쑥스러웠던 아침도 또 그 날 아침처럼 밥이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식사를 마쳤던 아침도 분명 처음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금방이라도 하늘을 날아 오를 듯 발이 공중에 붕붕 떠있기라도 한 것처럼 행복한 기분이 조금이라도 가라앉은 것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성진과 준희의 놀림 속에 실은 선우와 희원이 앞으로 예쁜 사랑 가꾸어 나가길 축복하는 그들의 진심이 깃들어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고마웠고 또 그만큼 더욱 행복해진 희원이었다.
"같이 가자."
희원이 냉장고 옆에 붙여 두었던 메모지-틈틈히 필요한 부식거리나 생활용품등을 메모해 둔-를 떼내어 들고 주방을 막 나섰을 때 언제 내려와 있었는지 선우가 외출복장을 하고 기다렸다는 듯 희원에게 웃는 얼굴을 하며 다가왔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 때 그녀를 향해 웃고 있는 선우의 얼굴이 어찌나 예쁘게 보이던지 희원은 당장이라도 그를 와락 안아주고 싶었다.
"오늘은 재래 시장으로 갈 건데." 희원이 속마음을 들킬 새라 얼른 덤덤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더 재미있겠네."
선우가 다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를 향해 배시시 마주 웃어주던 희원은 그 때 새로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그동안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선우가 그녀를 향해 웃어줄 때마다 그의 눈동자엔 초롱초롱한 별 하나가 떠오른다는 사실을. 설레임 이상의 뿌듯한 만족감이 그녀를 휩쓸고 지나갔다.
두 사람이 같이 장을 보러 다녀오겠다고 하니까 별스럽게 현관까지 배웅(?)을 나온 성진과 준희가 아니나 다를까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우와, 그림 좋다. 그림 좋아." 준희가 느물거리는 투로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야, 이제 알려질 거 다 알려졌으니까 아주 대놓고 둘이 붙어 다니시겠다? 아무리 그래도 이거 너무 한 거 아니야, 한 집에 살면서. 보면서 속 쓰린 사람 입장도 생각해 줘야지." 성진이 빨간 입술을 있는 대로 쑥 내밀며 말했다.
"형 속이 도대체 왜 쓰린데." 선우가 피식 웃으며 성진을 향해 물었다.
"순이 맘을 독차지 한 것도 모자라 틈만 나면 둘이 붙어 다니는 거 보고 어떻게 속이 안 쓰리냐? 흑, 그러고 보니 나만 외돌토리 신세네."
"억울하면 형도 연애해라. 누가 말려?" 선우가 성진을 등진 채 현관문을 열며 킥킥거렸다.
"우쒸!"
"그럼, 다녀... 오겠습니다."
여전히 그런 상황에 아직 적응이 안 되는 희원은 씩씩거리는 시늉을 하고 있는 성진과 만면 가득 웃음을 짓고 있던 준희를 향해 얼른 인사를 하고는 먼저 현관 밖으로 나선 선우의 뒤꽁무니를 냉큼 따라나섰다. 그렇게 두 사람이 사라진 현관문을 바라보던 성진이 불현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눈을 질끈 감더니 쓰러질 듯 준희에게 기대서며 이렇게 말했다.
"아아, 어쩌지. 질투심 때문에 현기증이 다 나는 것 같아 준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