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공용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시골길이나 다름없는 비포장 길을 걸어가던 선우가 희원을 향해 물었다.
"해가 나니까 눈이 녹아서 길이 엉망이로군. 근데 왜 하필 이렇게 길도 안좋은 데까지 다니면서 장을 보는 거야?"
"건어물은 마트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품질이 좋거든요. 해물들도 그렇고. 게다가 이 곳 재래시장에선 마트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감이 느껴져서 가끔씩 일부러 찾기도 해요."
"그래?" 그러나 선우로서는 금방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으므로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만 그만한 가게들과 좌판들이 닥지닥지 늘어서 있는 시장 골목 안에 들어서자 이 곳 저 곳에서 시장 아낙들이 희원을 아는 척 했고 그 때마다 희원은 일일이 예의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희원이 얘기했던 건어물 가게에 다다르자 돋보기 안경을 코끝에 걸치고 무슨 영수증 같은 것을 들여다보고 있던 나이 지긋한 가게 주인이 의자에서 일어나 반가운 얼굴로 희원을 맞았다.
"아이구, 우리 귀여운 아가씨가 왔군 그래. 오늘은 뭘 줄까? 멸치? 오징어채?"
"그동안 안녕하셨죠, 아저씨? 오늘은 황태랑 마른 새우 좀 사려구요."
"황태랑 마른 새우라......"
선우의 눈에는 시장판에서 뼈가 굵은 듯 에누리에 도통할 것 같은 인상의 가게의 주인이 그닥 선한 인상으로 비치진 않았으나 나무로 만들어진 닳고 닳은 되에 마른 새우를 넘치게 담아주고도 두 주먹을 더 봉투에 넣어주는 그의 후한 인심을 보고는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아저씨, 매 번 이렇게 장사하시면 남기는커녕 손해만 보시는 거 아녜요?"
희원이 불룩한 봉투를 받아들며 진심으로 걱정하는 얼굴로 가게 주인을 향해 말하자 얼굴에 잡힌 주름이 무색할 만큼 환하게 웃으며 그가 대꾸했다.
"당연히 이렇게 장사하면 얼마 못 가 가게 문 닫아야지. 하지만 우리 이쁜 아가씨야 특별한 손님, 그 뭐냐 스페샤루, 스페샤루한 손님이니까 후한 거지."
"하하하, 아저씨도 참. 아무튼 오늘도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먹겠습니다. 아저씨댁 건어물이 너무 좋아 다른 데선 물건 살 생각도 못하는 거 아시죠?"
"그럼, 그럼. 우리 집 건어물이야 늘 최고지. 그나저나 저 뒤에 선 총각은 누군가? 아가씨 애인?"
"네?"
갑작스런 가게 주인의 물음에 희원은 얼른 대꾸를 못하고 그저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벌써 눈치로 감을 잡은 가게 주인이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이었다.
"아깝다, 아까와. 아직 장가 안 간 아들 녀석 하나만 있었어도 알토란같은 아가씨를 놓치는 게 아닌데. 아무튼 저 총각은 복 터졌군 복 터졌어."
건어물 가게를 나서기 바로 직전 가게 주인은 다시 희원을 불러 세웠다. 그는 깜빡 잊어버릴 뻔했다는 말과 함께 아주 탐스러워 보이는 대추가 가득 담긴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요즘 같은 때 차로 다려 먹으면 그만이여."
일부러 희원이 오면 주려고 챙겨두었던 모양인 듯 했다. 희원은 주인 아저씨에게 거듭 거듭 감사 인사를 한 뒤에 가게를 나와 그 곳에서 두 점포 건너에 있는, 정육점이라는 말보다 푸줏간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한 작은 정육점 앞에서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안녕하세요."
"아, 희원씨 오셨군요."
하얀 에이프런을 두르고 커다란 도마 앞에서 고기를 부위 별로 나누고 있던 젊은 남자가 역시나 반갑게 희원을 맞았다. 나이도 그렇고 키도 그렇고 얼핏 준희와 비슷해 보이는 그가 어찌 보면 건어물 가게 주인보다 더 화색이 도는 얼굴로 희원을 보며 반색을 하자 선우의 양미간에 슬그머니 주름이 패였다. 거기다 친한 척 희원의 이름까지 부르다니.
"사업은 잘 되시고요?" 그저 인사치레에 지나는 얘기였겠지만 명랑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희원을 돌아보며 선우의 미간에는 완전한 내 천(川)자가 그려졌다.
"예, 그럭 저럭요. 그나저나 오랜만에 나오셨네요."
왠지 여운이 남는 말투라고 생각하며 선우는 한결 예민해진 기분으로 은근슬쩍 사내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푸줏간 사내의 눈에는 선우가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의 눈에는 오로지 희원만 보이는 것 같았다. 이런, 이런.
'짜식.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하지만 택도 없으니 꿈도 꾸지 마라, 알았냐?!'
사실 푸줏간 사내에게서 딱히 별스런 낌새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선우는 괜스레 오버하는 자신을 깨닫지 못했다. 그저 다른 남정네가 희원을 보고 웃는 꼴이 보기 싫었다. 다른 남정네를 향해 희원이 웃어주는 모습은 더 더 더 더욱!
희원이 주문한 국거리와 삼겹살을 준비하는 동안 끊임없이 이런 저런 얘기들을 걸어오던 사내가 한 순간 선우를 힐끗 의식하자 선우는 보란 듯이 희원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같이 오신 분은... 오빠... 이신가 보죠?"
'짜식. 오빠라니. 그렇게 눈치코치가 없냐. 하긴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흐흥.' 사내의 물음에 선우는 속으로 혼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아아... 예... 예에......"
그러나 어설프게 긍정해 버리고 마는 희원을 보며 선우는 선글라스 안에서 도끼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사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계속 보고 있으니 준희보다 훨 덩치가 좋은 푸줏간 사내가 빙글빙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빠분께서 상당히 멋쟁이시네요. 전 선글라스는 여름에만 끼고 다니는 건 줄 알았거든요."
정육점을 나와 시장 골목을 조금 걷던 희원이 자신보다 한 걸음 뒤쳐져 걸으면서 왠지 뿌루퉁한 얼굴로 갑자기 말수가 줄어든 선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선우오빠, 기분 상하는 일 있었어요?"
"......." 그러나 선우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대꾸가 없다.
"......." 왠지 모를 기세에 눌려 희원 역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
"아까...... 엣헴... 그, 그 놈이 오빠냐고 물었을 때 말야... 너 왜... 그냥 오빠라고 대답했냐?"
"그 놈요?"
희원은 잠시 동안 의아한 얼굴을 하고 선우가 그 놈이라고 지칭한 인물이 누굴까 되짚어보다 이내 픽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서야 희원은 선우가 왜 볼멘 소리를 하는 지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놈이라뇨. 나이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거기 사장님이시라구요."
"쳇, 사장은 개뿔. 요즘은 개나 소나 다 사장이래. 그나저나 그 놈이 희원이 네 이름은 어떻게 알고 말끝마다 희원씨 희원씨 그러냐?"
자존심 때문에 나름대로 초연한 척 애를 쓰고 있는 기색이 역력하긴 했지만 별로 성공적이라곤 할 수 없었다. 그의 말투엔 사소한 자극에도 화르륵 몸을 사를 정도의 질투심이 실려있었고 그것을 감지한 희원은 당장이라도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듯 기뻤지만 시치미를 떼고 이렇게 대꾸했다.
"알고 보니 형준씨랑 나랑 나이도 같고 해서 서로 통성명이나 하고 지내자 했죠 뭐."
"뭐, 형준씨?!"
"네. 난 그냥 내친 김에 서로 편하게 말도 놓자고 했는데 형준씨가 워낙 진중하고 예의바른 성격이라 차마 나한테 반말은 못하겠다고 해서 그냥 말은 안 놓기로 했구요."
희원은 자기 자신이 그렇듯 청산유수로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한편으론 속으로 삐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사실 말을 놓자고 했던 것은 형준 쪽이었고 존대가 더 편하다고 했었던 것은 희원 쪽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선우의 반응은 희원이 예상하고 있던 대로였다. 단순하게도. 후훗!
"야! 너 앞으로 말야, 아무 남자한테나 이름 가르쳐주고 친한 척 하지 마. 알았냐?! 친절한 것도 좋지만 남자들은 너랑 생각이 다르다고!" 선우가 급기야 목에 핏대를 세우며 언성을 높였다.
"그럼, 웃으면서 인사도 건네지 말란 말이예요?" 그에 비해 너무나도 여유만만 태연자약한 희원.
"인사야 안 웃으면서도 할 수 있는 거잖아!"
"그야 그렇긴 하지만... 상냥한 맛이 없잖아요."
"그래, 바로 그 거. 상냥한 거. 너 앞으로 남한테 상냥하게 굴지 마라. 꼭 그렇게 해야 될 사람 있으면 나한테 먼저 허락 받고 그러고 난 다음에 상냥 하라고. 알아들었냐?"
선우는 이제 목에 핏대를 세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검지손가락을 세우고 허공을 마구 찔러대는 과격한 모션을 취하며 더더욱 목청을 높였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어찌 희원이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후후훗."
"어라? 남은 심각하게 말하는 데 얘가 웃어요?"
"알았어요, 알았어. 그러니까 기분 풀고요 우리 오뎅이나 먹으러 가요."
"오뎅?"
"선우오빠 오뎅 좋아하죠? 조오기 모퉁이를 돌면요 정말 정말 끝내주는 오뎅 집이 있거든요."
"그, 그래?"
"자, 그러니까 우리 빨리 가요, 빨리. 빨리요!"
희원이 선우에게 팔짱을 끼고 걸음을 서두르며 재촉하자 얼떨결에 그녀를 따라 걸음을 서두르던 선우는 왠지 모르게 자신이 희원의 페이스에 말려든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지만 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저 자연스럽게 그의 팔에 매달려 걷고 있는 희원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자신을 바보스럽다 생각하면서도 평생동안 그렇게 그녀의 페이스에 휘말려 살아도 좋으니 죽는 날까지 그녀와 떨어지지 않을 수 만 있게 해 달라고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제 정말 다정한 연인이 된 두 사람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훈기와 함께 모락모락 피어나는 하얀 김 사이를 뚫고 그야말로 손바닥만한 분식 가게 앞에 놓인 길다란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아줌마, 안녕하셨어요. 요즘 장사는 잘 되세요?"
"이런, 누군가 했더니 아가씨였구먼. 그런데 오늘은 혼자가 아니네?"
"네에. 오늘은... 제 애인이랑 같이 왔어요, 아줌마. 그러니까 특별히 더 많이 주셔야 되요."
줄곧 선우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희원이 애인이라는 말을 유독 힘주어 말하자 이내 어린애처럼 금새 만면 가득 만족한 미소를 떠올리던 선우가 선글라스를 코끝으로 끌어내리더니 희원의 표정이며 말투를 흉내내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특별히 많이 안 주셔도 돼요, 아줌마. 제발 며느리 삼자는 말씀만 하지 말아주셔요."
"쿡쿡."
"후훗."
"아하핫."
"하하하하."
사랑에 제대로 빠진 사람들끼리는 사소한 일에도 웃음이 헤퍼지는 법.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유쾌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그렇게 주고받았다. 그러는 동안 어느 사이 희원의 손위로 포개어진 선우의 손이 희원을 기쁘게 했고 홍조 속에 피어난 희원의 애정 어린 미소가 다시 선우를 행복하게 했다.
선우는 하루 종일 희원의 눈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에게 사람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켜 준 그녀의 맑은 눈. 아직까지 그를 사랑한다고 그녀의 입으로 말해주진 않았지만 그를 향해 달려오는 티끌 하나 없는 그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내비치는 눈. 그를 사랑함에 있어서 아무 두려움도 담지 않은 용기 있는 눈. 어찌 그가 그런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춥지? 이리로 더 다가앉아, 희원아."
선우는 희원의 어깨와 마주한 팔을 치켜들며 그녀가 좀 더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앉도록 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초승달처럼 예쁘게 휘어진다.
희원의 표현처럼 정말 정말 끝내주는 오뎅을 정말 정말 끝내주는 오뎅국물과 함께 기분 좋을 만큼 포식한 선우는 지금 바지락과 갈치를 고르며 어물전 아낙과 종알 종알 친근하게 수다를 떨고 있는 희원의 모습을 느긋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새삼스러운 생각이지만 희원의 예의바르고 상냥한 품성은 금세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도 남을 만했다. 그런 점 때문에 점점 각박해져 간다는 시장 상인들의 인심도 그녀에게만큼은 여전히 후한 듯 싶어 보였다. 물론 선우 역시 희원이 사람들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이 흐뭇하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희원을 따라 재래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선우는 젊은 놈이나 늙은...끄응...남자나 별나게 그녀에게 친절한 모습을 볼 때마다 불편한 기분이 확 치받아 오르는 경험을 수 차례나 반복했다. 비단 남자들만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아줌마들의 시선도 마땅치 않았다. 그녀들의 시선 속엔 한결같이 아유, 우리 며느리 삼으면 딱 좋겠네 하는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순간 선우에게 날아드는 떨떠름한 시선. 무지 열 받는 경험이었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 희원을 단단히 사수하기 위해서 견제해야 할 대상은 굳이 남자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드는 선우였다.
견제대상 1순위-젊은 놈.
견제대상 2순위-늙은 남자.
견제대상 3순위-결혼적령기 아들을 둔 아줌마.
견제대상 4순위-그 외 아줌마들 다수. 왜냐면 좀 전에 들른 야채 가게 아줌마가 그동안 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호들갑스럽게 반기며 중매를 서겠다고 하지 않겠는가! 뜻밖의 상대에게서 위기 의식을 느낀 선우는 결혼 적령기의 아들을 두지 않은 아줌마들도 곧장 견제 대상 순위에 진입시켰다.
어물전 주인 아줌마가 희원에게 바지락과 토막내 다듬은 갈치 봉투를 내밀 때 선우는 비장한 눈길로 그 아줌마의 입을 주시했지만 다행히 그의 위기 의식을 고취시킬만한 얘기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착한 아줌마 같다.
"아주머니, 그럼 많이 파세요. 다음에 또 올게요."
"그랴, 아가씨. 담엔 꼭 사진 한 장 챙겨 나오는 거 잊지 말구. 우리 조카놈도 신랑감으로는 어따 내놔도 안 빠지는 녀석이니께. 알았지?"
윽! 순간 선우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착한 아줌마 같다는 생각 취소!
또 한바탕 눈발이라도 쏟아질 양인지 잿빛 구름이 묵지근하게 가라앉아 있는 비포장도로를 걸으며 희원이 나즈막이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투덜거리는 이유인 즉슨 시장 골목 어귀를 빠져 나오기 직전 조그만 구멍 가게에 들린 희원이 아이스크림콘 두 개를 집어들었을 때 선우가 그것을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추운 겨울에 먹는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맛있는데요."
"그럼... 한 개만 사."
"좋아요. 대신 내 거 뺏어 먹기 없기."
"좋아."
하지만 막상 주차장으로 향하는 한적한 길에 접어들 때쯤엔 하나밖에 없던 아이스크림은 선우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요. 그냥 두 개 사자니까." 희원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서로 한 입씩 나눠먹는 재미도 있잖아." 희원의 투정은 전혀 아랑곳 않는 얼굴로 선우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치이."
"자, 이제 네 차례야, 한 입 먹어."
마치 자기 것 인심쓰듯 선우가 희원에게 아이스크림을 내밀며 말한다. 그러자 희원은 보란 듯이 커다랗게 한 입 베어 문다. 그리고 다시 선우가 한 입. 또 희원이 한 입. 다시 선우가 한 입. 희원이 한 입. 다시 또 선우가 한...
'핫!'
선우가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먹는 대신 희원의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바람처럼 핥고 지나갔다. 너무도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희원은 얼굴을 붉힐 새도 없었다.
"어... 뭐야. 너 먹을 차롄데. 안 먹을 거야? 그럼 내가 다 먹어버린다."
순식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깨달은 희원이 홍당무처럼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선우가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며 내밀었던 팔을 거두려했다. 그러자 희원이 얼른 그의 팔을 제지했다. 그녀가 질 수 없다는 듯 다시 아이스크림으로 입을 가져가 크게 한 입 베어 무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타이밍을 무시한 선우의 고개가 돌연 아이스크림을 향해 기울어진다 싶더니 막 아이스크림을 베어 문 희원의 입술을 그의 입술로 덮어버렸다. 그리고 바닐라 향이 배어있는 차가운 혀로 바닐라 향이 가득한 그녀의 입안을 마음대로 헤집고 다녔다.
"누, 누가 보면 어쩌려구 이래요?!"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짜르르한 전율 속에서 화들짝 놀란 희원이 그를 얼른 밀쳐내며 말했다. 그러자 선우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길바닥에 내팽개치더니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고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쉬지 않고 달려 주차장에 도착한 두 사람이 차에 올랐을 때 선우는 들고 있던 비닐봉투들을 아무렇게 뒷좌석에 던져놓은 뒤 불현듯 희원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더 이상 좁힐 거리가 없을 만큼 가까워진 두 사람의 얼굴 위로 서로의 가쁜 숨결이 느껴졌다.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듯 펄떡이는 서로의 심장소리도 느껴지는 듯 했다. 문득 선우가 그녀의 귓전으로 입술을 가져가더니 나즈막히 속삭였다.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 먹다 하는 키스가 어떤 맛인지는 알았으니까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 먹고 키스하다 차안으로 뛰어들어와 하는 키스는 또 어떤 맛인지 볼 차례야."
그리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어지는 선우의 키스 세례.
'아아아......'
감미롭고도 아찔한 현기증 속에서 희원은 자신도 모르게 두 팔을 들어올려 선우의 목에 감았다. 그녀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린 선우의 머리칼이 깃털처럼 부드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