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9. (49/75)

# 49.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공연이 모두 마무리되고 난 후 레드비트의 세 멤버들은 그 동안 미뤄두었던 신곡 발표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연 전부터 조금씩 준비해 두었던 몇 개의 곡들-세 사람 모두가 작곡을 할 줄 알았지만 결국 앨범 삽입에 가장 많이 선택되는 곡은 선우가 작곡한 곡들이었다-을 좀 더 매끄럽게 손보아 가며 실제적인 노래의 연습에 들어가 중간 중간 성진의 보컬, 선우의 베이스 연주, 준희의 드럼 연주의 비중에 따라 세부적인 수정, 보완 작업을 하기도 하고 짬짬이 새로운 곡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무튼 신곡 발표를 몇 달 앞 둔 그들은 희원이 존경심을 품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연습벌레들로 돌변했는데 때때로 편곡을 하는 와중에 멤버들 간의 의견이 쉽사리 조율되지 않아 노래 한 곡을 화두로 밤을 새워가며 길고 긴 토론을 벌이기도 했고 어차피 돈벌이가 목적인 기획사 매니저로부터 그들의 취향과는 맞지 않는 다른 작곡가의 곡-대중성이 높다는 평가가 내려진-을 앨범에 꼭 삽입하라는 강요를 받는 경우나 혹은 반대로 그들이 애착을 가지고 있는 신곡을 대중성이 없다는 이유로 새 앨범에서 제외시키겠다는 결정을 통보 받거나 했을 땐 밤을 새워가며 길고 긴 술판을 벌이기도 했다. 

 바로 곁에서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고 있는 희원은 새 앨범 발표를 위해 불철주야 연습에 몰두하는 그들이 육체적으로 뿐 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지를 절감하면서 안쓰러움에 가슴이 다 뭉클해 질 지경이었다. 세상에 정말 쉬운 일은 없다고 새 앨범 하나를 준비하고 발표하기 위해 그들이 기울이는 땀과 노력은 마치 산모가 새 생명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치르는 숭고한 산고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오오, 순이야. 난 새 앨범을 준비할 때마다 꼭 내가 임산부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니까. 그래서 좀 더 많은 영양을 섭취해야만 한다는 강박증을 느껴."

 준희의 표현에 의하자면 연습에 몰입하는 순간부터 폐인모드에 들어간다는 성진이 며칠 째 면도를 걸러 턱 주변이 거뭇해진 얼굴로 주방에서 행주를 삶고 있던 희원에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다 죽어 가는 사람처럼 기운 없는 어조로 말했다. 

  "쉽게 말해 맛있는 걸 좀 더 많이, 자주 먹고 싶다 그 말이죠?"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성진의 어리광 섞인 태도에 희원이 잔뜩 웃음 낀 얼굴로 돌아보며 대꾸할 때였다. 어느 사이엔 가 성진의 뒤를 이어 주방으로 들어선 선우가 희원의 어깨에 기대어 있던 성진의 머리를 슬그머니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자중하시지. 그러다 정말 임산부처럼 되면 어쩌려고. 성진형, 이럴 때 관리 안 하면 지금 그 똥배 아예 굳어져 버린다."

  "똥배는 무슨?! 인격이라니까. 우씨, 그런데 이 자식은 언제 또 따라와 가지고 훼방이야, 훼방은. 아주 희원이랑 나랑 둘이 있는 꼴을 못 봐요." 

 선우의 손에 의해 희원으로부터 떨침을 당한 성진이 콧김을 쉭쉭 내뿜으며 투덜대자 선우는 부러 얄미움을 사기 위해 작정한 사람인 양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뜨고 샐샐 웃으며 성진을 향해 이죽거렸다.

  "형이 걸핏하면 방금처럼 음흉스럽게 희원이한테 들러붙으니까 그렇지."

  "뭐, 뭐얏?! 음흉? 들러붙어? 이 자식이 정말?!"

  "씩씩거리지마. 그래봤자 자꾸 배만 더 고파져."

  "야!!!" 발끈한 성진이 급기야 소리를 꽥 질러댔다.

  "오우, 방금 희원이 어깨에 기대서 다 죽어가던 사람은 어딜 갔나?"

  "이잇, 이 아더메치유 같은 자식."

  "뭐? 아더메치유?"

  "그래.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고 유치하단 뜻이다 왜?! 정말 딱 너 같은 자식을 두고 하는 말이라니까 흥!."

 성진이 선우를 향해 한 대 쥐어 박아주고 싶다는 얼굴로 주먹을 쥐어 코앞에서 한 번 흔들어 보이곤 입술을 씰룩이면서 주방을 나가자 선우가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성진이형도 참. 도대체 저런 썰렁한 소리는 어디서 주워 들어 가지고."

  "성진오빠... 설마 진짜 삐진 건 아니겠죠?" 성진이 사라진 주방 입구를 바라보며 희원이 조금은 우려 섞인 어조로 말했다.

  "삐지긴. 겉으론 그래도 그런 일로 서운해하고 할 사람 아냐, 형은. 그나저나 너도 수료작품 전시회 준비 때문에 바쁠 텐데 요즘 꼬박꼬박 우리들 삼 시 세끼에 야식까지 챙기느라 정신없지?" 

  "아니예요. 오빠들에 비하면 저야 쉬엄 쉬엄이죠 뭐. 오빠들만큼... 큰 부담감 같은 것도 없고..."

  "희원아."

  "네?"

  "난 그냥 네가 나한테......"

  "예?" 희원은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잠시 말을 줄이고 있는 선우를 궁금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조금만 힘든 일이 있어도, 오빠 나 힘들어 죽겠어요 하면서 푸념도 좀 하고 엄살도 부리고 하면 좋겠다."

  "......."

 희원은 말없이 선우의 두 눈을 마주 보기만 했다. 그의 진심이 가득 실린 눈. 따뜻하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두 눈을. 그럴 듯 거창하게 꾸며진 미사여구도 아니었는데 희원은 선우가 건넨 몇 마디에 또 다시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요즘 희원은 너무도 자주 세상을 모두 다 얻곤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불안한 만큼 행복했다.

  "앞으로 나한테... 그래 줄 수 있지?" 

 너무도 자상한 말투로 선우가 희원에게 물어온다. 대답 대신 행복한 미소가 가득 번진 얼굴로 희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기특하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머리칼을 흩으려 놓는다.

  "어때, 수료작품 전시회에 낼 작품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는 거야?"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먼저 희원에게 건네며 영서가 물었다. 희원은 그렇게 자판기 앞에서 친구 영서와 잠깐씩 커피 타임을 갖는 일도 꽤 오랜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영서가 건네는 종이컵을 받아들었다. 세 멤버들이 본격적인 새 앨범 준비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희원은 학원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집으로 직행하느라 영서와의 간단한 커피 타임조차 자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오늘은 웬일인지 영서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희원을 기다리고 섰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그녀의 손목을 끌어당기다 시피 하여 간만에 커피 자판기 앞에 선 두 사람이었다.

  "그럭저럭. 욕심 부리자면 어디 한이 있나 뭐. 그냥 평소 차근차근 해왔던 대로 부담이 없이 가려고. 그런데 그거 물으려고 일부러 엘리베이터 앞에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던 거야?" 영서가 건넨 커피 잔을 예의 상 받아들고 서있던 희원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오늘 오후에, 그러니까 넌 수업 중에 있을 때 수영선배 왔었다."

  "그...래?"

 희원은 눈이 펑펑 내리던 12월초의 어느 날 자신에게 거의 일방적인 결별 선고를 받고 다음 날로 학원을 그만 두어 버린 수영의 얼굴을 떠올리며 절로 낯빛이 흐려졌다. 그 날 이후 희원은 물론이거니와 수영 쪽에서도 전화 연락이 한 번 없었고 희원은 의식적으로 수영에 대한 기억을 빨리 잊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엔 그저 수영의 배신으로 인한 좌절, 회의, 상실감 같은 감정으로 자신이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던 희원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원은 수영에 대한 원망보다 그에 대한 죄책감이 더 커져 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최소한 자신을 향한 수영의 감정은 진실했지만 자신은 결코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과 선우를 잊기 위해 그녀 자신이 수영의 감정을 이용하려다 결국 그마저도 자신이 없어지자 채린을 핑계로 옳다구나 수영을 내쳐버린 것만 같은 자책감이 시시각각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때문에 희원은 선우와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내는 중간중간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는 때도 간혹 있었으나 그녀 자신은 아직까지 그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선우 만이 깨닫고 있는 사실이었다.  

 오늘은 그녀의 친구 영서가 그녀의 얼굴에 드리우는 그늘을 눈치채고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말 안해 주면 내가 모를 줄 알아? 두 사람 사이에 분명 대단한 사건이 있었던 거야. 그렇지?" 말을 마친 영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희원을 탐색하듯 바라본다.

  "사건은 무슨..." 가뜩이나 거짓말엔 젬병인 희원은 영서의 따가운 시선을 외면한 채 손에 쥐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다보며 말끝을 흐리고 만다.

  "그 여자, 탤런트 한채린이랑 같이 왔었어. 학원 원장님이랑 사무실 식구들한테 청첩장 돌린다고 말이야. 모델 출신이라 그런가 키가 장난 아니대. 아무튼 두 사람이 들어서는 데 사무실 안이 정말 환해지더라. 젠장, 아무튼 인물은 잘 나고 봐야 해."

  "그랬구나. 채린씨랑... 수영선배가 같이 왔었구나."

  "채린씨? 갈수록 정말 수상하다니까. 너 한채린 하고도 직접 만난 적 있구나?" 

  "어땠어, 두 사람? 행복해... 보였니?" 영서의 눈흘김 따위는 무시한 채 희원이 되물었다. 그리고 왠지 간절한 마음이 되어 영서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두 사람 정말 행복해 보이더라 라는 말이 흘러나와 주길 바라면서.

  "으응. 그런 것 같았어. 청첩장 같이 돌리러 다니는 것만 봐도 알만 한 거 아니니. 단지......"

  "......?" 희원은 영서가 한 쪽 눈썹을 치켜 뜨며 말끝을 흐리자 초조한 심정이 되었지만 잠자코 그녀의 말이 다시 이어지길 기다렸다.

  "두 사람이 사무실을 막 나왔을 때 내가 수영선배한테 그랬거든. 곧 수업 끝나는 시간이니까 여기 까지 온 김에 희원이 너도 보고 가라고. 그랬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 모두 일시에 안색이 확 변하더라. 그래서 내가 거기서 확실하게 감 잡은 거야, 이 기집애야. 너랑 수영선배 사이 전부터 심상치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어디 네가 자세한 내막을 알려줬어야 말이지. 하긴 너랑 나랑 도통 이런 저런 얘기 시시콜콜 나눌 수 있었던 처지가 못 되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희원은 눈치 빠른 영서가 그동안 궁금한 것도 많았을 터인데 희원의 입장을 배려해 알면서도 모른 척 무던하게 참아주고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고마움을 느낌과 동시에 영서의 믿음직스런 사람 됨됨이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또한 그와 더불어 명색이 친구라 불리 우는 그녀에게 그 동안 제대로 속내 한 번 드러내지 못했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움과 미안함으로 다가서기도 했다.

  "미안해, 영서야. 일부러 네게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야. 사실... 나도 너한테 그 동안 있었던 일들... 속 시원하게 다 털어놓고 싶었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어. 어떨 땐 정말 친구로서 네 위로가 필요했을 때도 있었어. 하지만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친구야. 하지만 앞으로 언제든 시간이 허락될 때 제일 먼저 너한테 자세한 얘기 들려줄게. 약속해."  

  "치이, 기집애..." 

 그렇게 말하며 희원을 향해 슬쩍 눈 흘기는 시늉을 했지만 실은 진실로 미안함이 가득한 희원의 표정을 보며 괜스레 자신이 더욱 미안스러운 마음이 드는 영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내친 김에 희원을 향해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그럼, 그 땐 얼마 전 스포츠 일간지 일면을 장식한 사진이랑 기사에 대해서도 자세히 얘기해 주기다, 알았지?!"

 희원은 친구를 향해 대답 대신 홍조 띤 얼굴로 배시시 웃어주곤 말없이 손을 흔들어 안녕을 고하며 먼저 자리를 떴다. 그리고 학원 입구를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기면서 복도에서 스치는 학원생들을 흘금흘금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 하나도 최고의 탑 스타 은선우와 새로운 스캔들을 일으킨 장본인이 그녀라는 사실을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그 때문에 언론이며 뭇사람들로부터 희원이 시달림을 당할까봐 전전긍긍하던 선우는 크게 한숨을 돌리는 기색이었지만 사실 희원은 내심 서운한 감도 없지 않았다. 다소 시달림을 당하더라도 좋으니 그녀는 은근히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봐 주었으면 하고 바랬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세 오빠들이 알면 그런 그녀를 어리석다고 나무랄 게 뻔하지만 아무튼 희원은 선우의 팬들에게 머리칼을 뜯기는 경우도 웃으면서 받아넘길 마음의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선우의 스토커로 인해 목숨까지 위태로울 뻔하였던 그녀에게 머리칼 좀 뜯기고 계란 세례 정도 받는 것쯤은 애교로 여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대신 희원은 사람들이 그녀를 선우의 여자로 생각해 주길 바랬다. 만인의 불같은 질투를 한 몸에 받아도 좋으니 사람들이 그녀를 기사의 헤드라인처럼 숨겨둔 은선우의 진짜 연인으로 인식해 주길 바랬다. 하지만 워낙 일간지에 실린 사진이 선명하지 못했던 까닭인지 아니면 그녀의 외모가 워낙 평범했던 까닭인지 아직까지 그 사진 속의 인물이 그녀라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친구 영서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희원은 영서와 헤어진 뒤 오래지 않아 그 사실을 눈치챈 또 다른 한 사람과 금세 맞닥뜨리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안녕? 오랜만이다."

 학원 입구를 막 빠져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던 희원을 낯익은 목소리가 불러 세웠다. 돌아보니 눈처럼 하얀 털 코트에 휘감긴 몸통 위로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주먹만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으론 유분기가 지나치게 넘쳐 보이는 장밋빛 립스틱을 원래 입술선 보다 훨씬 두텁게 그린 입술이 실룩 실룩 움직이는 모습에 절로 시선이 끌렸다. 

   "나, 안 반갑니?" 한동안 잊고 지냈던 도도한 목소리.

  "오랜... 만이다, 미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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