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2. (52/75)

  

# 52.

 2월의 첫 날이자 토요일인 그 날은 희원이 다니고 있던 디자인학원 주최로 지역구의 문화센터 2층을 전시장으로 빌어 일정기간의 과정을 수료한 학생들의 수료작품 전시회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물론 첫 날 전시회장을 찾는 손님들은 축하 인사 차 꽃이나 사탕바구니를 들고 찾아 온 수료생들의 지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근방을 지나다 호기심에 들른 일반인들도 몇몇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출현할 때면 수료생들은 눈을 반짝이며 그들을 주시하곤 했다. 왜냐하면 학원생들 사이에선 전부터 수료 작품전에 그렇게 우연히 들른 일반인 행세를 하는 사람 가운데 암행(?) 아닌 암행을 나온 꽤 빵빵한 광고업체의 스카우팅 담당자가 더러 끼어있다는 입소문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신선한 감각을 가진 인물이 눈에 띄면 그 자리에서 곧장 취업제의를 해오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해 특히나 학원 과정 수료 후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은 눈에 불을 켜다시피 한 채 일반 손님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목했다. 

 그러나 당장 취업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았던 희원은 다소 느긋한 마음으로 역시나 당장 취업에 급급하지 않는 다른 수료생 몇 몇과 수다를 떨고 있다 제일 먼저 자신의 작품에 장미꽃 한 송이를 달아 놓고 있는 영서를 발견하고는 얼른 그녀를 향해 총총히 걸어갔다.

  "영서야, 왔구나!" 희원이 반색하는 얼굴로 영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 희원아. 그런데 정말 기대 이상으로 멋진 작품인 걸." 영서가 막 장미꽃을 달아 놓은 희원의 작품을 되돌아보며 진심에서 우러나온 칭찬의 말을 건넸다.

  "고맙다, 친구야. 하지만 여기 전시된 다른 작품들이 정말이지 너무 훌륭해서 난 솔직히 기가 좀 죽는다 야." 희원이 겸손 어린 표정으로 대꾸했다.

  "기가 죽긴. 아직 꼼꼼히 다 둘러보진 못했지만 얼핏 보기에도 네 작품이 제일 멋진 것 같은데." 영서가 다른 수료생들을 흘깃거리며 목소리를 낮추고 희원의 귓가에 소근거렸다.

  "빈 말이라도 고마워."

  

  "정말이래두."

  "정말?! 후훗. 그런 말까지 듣고 한 턱 쏘지 않으면 안 되겠는 걸."

  "그나저나... 그 사람도... 오늘 오겠네?" 

  "그... 사람?" 희원이 의아한 얼굴로 영서를 향해 되물었다.

  "있잖아. 그......" 영서가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새끼손가락을 들어 살짝 흔들어 보였다.

  "아아....." 이내 영서의 말뜻을 이해한 희원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어머머, 설마 했는데 정말 오늘 여기 나타나는 거야? 그런 인기스타가?"

 희원이 지어 보인 미소에서 긍정의 뜻을 확인한 영서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호들갑스럽게 물어오자 희원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와아. 정말 믿기지가 않는다. 내 친구 중의 하나가 대스타의 연인이 될 줄이야. 아잉... 그러나 저러나 이거 낭패네. 하필 오늘 약속이 잡혀 있어서 그 사람 얼굴 못 보고 가게 생겼잖아. 그것만 아니면 하루 종일을 기다려서라도 꼭 보고 갈텐데. 아휴, 정말 우리 엄만 오늘 같은 날 그런 약속을 잡아 가지고."

  "무슨 약속인데?"

  "이잉. 몰라. 나 오늘 선보러 나가." 영서가 울상을 지은 채 입술을 실룩이며 못마땅한 어조로 대꾸했다.

  "뭐, 선?!"

  "놀랍지? 나도 우리 엄마가 선 얘기 첨 꺼냈을 때 너처럼 그렇게 놀랐단다. 뭐 굴지 기업의 대리인데 학벌 좋고 집안 좋고 모아놓은 돈도 꽤 있고 어쩌구 저쩌구...... 

 그래서 내가 엄마한테 물었지. 그렇게 조건 좋은 사람이 전문대 밖에 졸업 못한 나 같은 애 눈에 차겠느냐고. 그랬더니 참 기가 막혀서. 우리 엄마왈 언제 나 몰래 먼저 그 쪽에다가 내 사진을 보냈는데 그 사람이 그걸 보고 아주 마음에 들어하면서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나 어쨌다나. 

 아무튼 난 그런 자리 온 몸에 소름 돋을 거 같아 죽어도 싫다고 했더니 날 호적에서 파내 버리겠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엄마가 하도 호통을 해서 몇 일 동안 실랑이 벌이느라 생쑈를 하다가 결국 내가 손들었지 뭐."

  "하하하. 어쩐지 오늘 차림새가 수상쩍다 했더니. 난 첨에 전시회에 오느라 그렇게 신경을 썼나 했지." 

  "아, 몰라 몰라. 어차피 내키지도 않는 선 자리. 그냥 확 바람 맞추고 여기서 너랑 같이 기다리다 자알 생긴 은선우 실물 구경이나 하고 갈까?"

  "못써. 그 사람은 네가 꼭 나올 줄 알고 기다릴텐데 고의로 바람을 맞추다니."

  "흥. 뭐 어때."

  "너야 그렇겠지만 너희 엄마랑 중간에 다리 놓아주신 분 입장은 어떻게 되고. 선우 오빠야... 나중에라도 볼 기회가 있을 거야."

  "정말?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영서가 문득 눈을 빛내며 희원을 향해 물었다.

  "그래. 분명히 그럴 기회가 있을 거야."

  "채희원, 너. 지금 그 말 꼭 책임져야 한다. 무슨 뜻인지 알지?" 

  "알았어 알았어. 그러니까 약속 시간 늦지 않게 출발해. 몇 시 약속이지?"

  "지금 출발하면 돼."

  "그래, 그럼 얼른 가 봐. 이왕이면 괜찮은 사람이면 좋겠다."

  "피이. 나이가 서른 이라는데 보나 마나 노친네 티 물씬 풍기는 노땅이겠지 뭐. 대머리나 벗겨지지 않았길 바랄 뿐야. 왜 20대 후반부터 대머리 벗겨지기 시작하는 남자들도 많잖아. 오오, 정말 그런 남자는 아니길!" 

 영서가 두 손을 마주 잡고 기도하는 시늉을 하며 너스레를 떨자 희원이 웃음 띤 얼굴로 그녀의 등을 떠다 밀며 말했다.

  "늦겠다, 얼른 가 봐."

  "알았어. 그럼, 나중에 연락할게. 건투나 빌어주라."

  "싸우러 가냐? 건투를 빌어주게. 대신 행운을 빌어줄게. 참, 그리고 오늘 와줘서 정말 고맙다 영서야."

  "뭘. 그럼 담에 보자."

 희원에게 등을 떠 밀리다시피 걸음을 뗀 영서였지만 막상 약속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손목 시계를 확인하며 총총 걸음으로 서둘러 전시장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 모습을 보며 희원은 다시 입가에 미소가 피어 올랐다.

  '기집애. 아닌 척 하면서 남자가 자기 사진보고 한 눈에 반했다고 은근 슬쩍 자랑이네. 후후. 이왕이면 남자도 영서 눈에 드는 멋진 사람이면 좋겠다."

 눈처럼 하얀 오버코트에 길다란 갈색 머리를 공주처럼 커얼하고 보통 때보다 한 톤 짙은 와인색 립글로스를 바른 영서의 모습이 실은 샘이 날 정도로 너무도 예뻐 보였고 무엇보다 그런 친구의 모습이 조금은 낯설 만큼 성숙해 보였던 희원은 선을 보러 가기 위해 약속 장소를 향하는 영서의 뒷 모습에서 어느 새 그녀들도 결혼을 생각할 만큼 나이가 든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다 문득 수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수영선배도 요즘 결혼 준비에 바쁘겠구나. 결혼식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들은 것 같은데.'   

 웬지 수영의 생각을 떠올리기만 하면 가슴 한 켠이 아르르 해지는 희원이 자신의 구두 앞 코를 내려다보며 잠시 상념에 빠져있을 때였다. 문득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느낌에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든 희원이 등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졌다.

  "뭐야, 우리 출현이 그렇게 경악스러운 거야?"

 짐짓 서운하다는 어투를 하고 있었지만 눈매엔 웃음기가 가득한 채 희원의 뒤에 서있던 사람은 수영이었다. 그리고 그와 나란히 전시회장이 일순 환해질 만큼 화사한 미모를 자랑하는 채린도 함께 서있었다.

  "아....."

  "우리가 너무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실례가 안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수영과 채린의 출현이 너무도 뜻 밖이었던 지라 아니 어쩌면 방금 전까지 그 두 사람에 대한 생각을 골몰히 하고 있다가 갑자기 장본인들을 맞닥뜨리자 더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한 채 입만 뻥긋거리고 있던 희원에게 수영 다음으로 채린이 나긋한 음성으로 입을 열자 희원은 무슨 말이든 얼른 대꾸를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예요. 잘... 오셨어요. 아니, 아니. 여기는... 어떻게?"

 뭔가 인사를 건네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내뱉은 말들이 희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참으로 어설픈 모양새로 터져 나오고 말았지만 수영과 채린 두 사람은 그녀의 얼굴에서 그들을 진심으로 반기고 있다는 빛을 읽어낼 수 있었다.

  "수료작품 전시회가 있다길래 희원이 작품도 보고 안부 인사도 물을 겸 겸사 겸사해서 왔지. 자, 미래의 일레스트레이터 대가님께선 약소하지만 이 꽃다발부터 받아주시지요." 

 수영이 채린과 보통의 커플처럼 별 무리 없이 결혼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은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희원이었지만 내심 수영에 대한 미안함과 걱정으로 늘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웠던 그녀는 그러나 수영이 건네는 꽃다발을 안아 들며 채린과 함께 찾아온 그의 얼굴이 매우 밝아 보인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식 날짜... 얼마 남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영서한테. 축하해요, 선배. 그리고 채린씨도요."

  "어, 그래... 고맙다." 수영이 머쓱한 듯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웃음 띤 얼굴로 대꾸했다.

  "고마와요, 희원씨." 그리고 채린 역시 희원에 축하에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엔 뭐랄까... 수영보다는 훨씬 의미심장한 무게가 실려있는 듯 해 보였다.

  "이게 희원이 네 작품이로구나. 와아, 훌륭한데. 역시 넌 이쪽 방면으로 탁월한 재능이 있어. 늘 아이디어도 신선하고. 복학해서 남은 공부 마저 열심히 하고 좀 더 경험을 쌓으면 분명 훌륭한 일러스트레이터로 성공해서 이름을 날릴 거야." 

 어느 새 희원의 작품을 주시해 보던 수영이 진심 어린 찬사를 아끼지 않자 희원이 금세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대꾸했다.

  "아마 다른 수료생들 작품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예요, 선배. 솔직히 제 작품 공도 많이 못들이고 정말 변변치 않아요."

  "얼핏 들으면 겸손한 얘기 같은데 뭐야. 실은 별로 신경도 안 쓰고 대강 만든 작품인데 이 정도다 라는 얘기 아냐." 수영이 실눈을 뜨고 살짝 흘기는 시늉을 하며 놀리듯 말했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저는 정말 그런 뜻이 아니고."

  "하하하, 희원이 넌 여전하구나."

 농담조의 놀림을 곧이곧대로 믿고 어쩔 줄 몰라하며 손을 가로젓는 희원의 모습을 보며 수영이 크게 웃어 젖혔다. 그러자 더욱 난감한 표정이 된 희원이 채린쪽을 바라보았을 때 마치 여신처럼 우아한 미소를 잔잔하게 머금고 있던 채린이 입을 열었다.

  "수영씨가 생각보다 은근히 사람 놀리는 걸 즐기는 악취미가 있는 거 희원씨도 잘 알죠? 전엔 몰랐는데 요즘 들어 나도 나날이 그걸 실감하는 중이에요." 

  "악취미? 언제는 장난꾸러기 같은 그런 점이 내 매력이라면서?! 아얏!"

 아마도 채린은 자신 앞에서 수영의 놀림에 다소 당황해 하는 희원을 감싸주고자 나름대로 배려하는 뜻에서 꺼낸 얘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수영이 눈치 없이 끼어 들어 산통을 깨자 넌즈시 그의 옆구리를 꼬집는 채린의 손길에 수영은 여과 없이 비명을 올렸고 희원은 그만 '풉'하고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휴, 수영씨 당신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니까. 필요 없을 땐 무서울 정도로 눈치가 빠르다 정말 필요할 땐 눈치 코치 하나 없는 사람처럼 굴고. 정말 감을 못 잡겠어." 채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무라듯 수영을 향해 핀잔을 던졌다.

  "어어, 이 봐. 그렇게 인상 찌푸리면 뱃속의 아기도 스트레스를 받는다잖아. 빨리 얼굴 피라고."

 외투를 입고 있어서 인지 겉으로는 그녀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표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수영은 채린의 사소한 짜증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그녀의 배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은 채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알, 알았어요."

 하지만 채린은 그의 그런 태도가 남들의 눈엔 닭살스러워 보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어색한 얼굴로 억지 웃음을 지으며 수영을 달래곤 슬그머니 자신의 배 위에 얹혀진 그의 손을 밀어낸 뒤 이내 희원을 쳐다보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다소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 있는 그녀의 눈빛 속에 부인할 수 없는 행복감과 만족감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희원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물끄러미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던 희원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멋적은 얼굴로 바뀐 수영이 그 답지 않게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뒤통수를 긁적이는 모습을 보이자 희원은 웬일인지 그 동안 자신의 마음 한 켠을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이 사라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의 눈빛과 미소에서 자신과 사귈 때보다 오히려 수영이 훨씬 더 안정감을 찾은 듯 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여어, 이게 누군가. 김수영 선생, 오랜만이야."

  "아, 박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희원의 반을 담당했던 박 선생이 수영을 알아보고 다가와 반색을 하자 수영 역시 활짝 웃는 얼굴로 반갑게 인사를 한 후 박 선생에게 채린을 인사시켰다. 청첩장을 돌리러 두 사람이 함께 학원에 들렀을 때 희원과 마찬가지로 박 선생 역시 수업 중에 있던 터라 수영의 신부가 될 채린과는 그 날 처음 인사를 나누는 것이었는데 그는 채린이 데뷔시절부터 열렬한 팬이었는데 이렇게 실물을 보게 되어 영광이라는 둥 수영도 잘난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래도 신부가 한참 밑지는 결혼이라는 둥 너스레를 떨다 한동안 동료로 지내던 사이끼리 좀 더 사담을 나눌 양이었는지 수영과 함께 잠시 자리를 옮겨갔다.

 그러자 갑자기 둘만 남게된 두 여자들 사이엔 잠깐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으나 이내 채린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나... 실은 희원씨한테 여러 번 연락하려고 하다가 그만 두곤 그만 두곤 했어요. 고맙다는 말...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 그리고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 하고 싶었는데 희원씨 얼굴 볼 용기가 나질 않았거든요."

 희원이 다소 둥그레진 눈으로 채린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희원의 눈을 마주 보기가 어려운 듯 길고 풍성한 속눈썹을 내리깔고 조용 조용히 말을 이어 나갔다.

  "그 날... 내가 희원씨한테 몹쓸 짓을 한 그 날 이후 나 후회도 많이 했어요.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다른 사람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 얼마나 못할 짓인지 그 때 깨달았죠. 결국 그 결과로 수영씨가 내게로 왔을 때 난 당연히 그가 날 증오하리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는 어찌된 일인지 조금도 날 원망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내게 얼마나 따뜻한 배려와 관심을 보여주었는지 정말이지 의아할 정도였지요. 이전에 알아왔던 김수영이란 사람에게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따뜻함이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수영씨와의 대화 중에 그 사람의 내부로부터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함과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을 이끌어 낸 사람이 희원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나와 아기를 위해 희원씨가 그 사람을 보내주었다는 사실도.

 사실 그 사람. 처음엔 나랑 아기를 모른 척하면 결코 희원씨한테 용서 받지 못할 게 두려워서 나한테 왔을 거예요. 하지만 그 때 그 사람은 이미 자기 자신만 알던 예전의 김수영이 아니었어요. 그가 나의 농간에 어쩔 수 없이 내 곁으로 오긴 했지만 그는 내 처지를,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해 주고 안쓰러워해 주었어요. 그리고 희원씨를 향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지금은 나를 조금쯤은 사랑해 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아마도 내가 그의 아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아기에 대한 그의 사랑만큼은 정말이지 얼마나 지극한지... 좀 전에 희원씨도 봤죠? 우리 둘이 있을 땐 사실 더 해요. 얼마나 벌벌 떠는지. 후후.

 희원씨 앞에서 이런 말 하는 거 또 잘못 하는 거 아닌지 사실 걱정도 되지만 나... 행복해요. 그가 날 사랑해 주지 않는다 해도 난 행복해요. 그가 나와 그 사이의 아기를 그토록 사랑해 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난 너무 행복해요.

 그래서... 희원씨한테 너무 고맙고... 또 너무 미안해요. 그래요, 희원씨. 나 정말

... 너무 고맙고 미안해요......"

  "아니예요, 채린씨. 그런 말 마세요. 아마도 수영선배의 베필은 처음부터 채린씨였던 것 같아요. 난... 글쎄요. 채린씨만큼 수영선배를 사랑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그가 나와의 아기를 기뻐하고 사랑한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할 만큼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나한테 고마워 할 필요 없어요. 조금도 미안해 할 필요도 없구요.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건 정말 정말 진심으로 바라는 건 선배와 채린씨의 행복이예요. 채린씨. 선배... 지금처럼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시길 바래요. 채린씨라면 수영선배 꼭 행복하게 해주리라 믿어요. 그래 줄거죠?"

 고마워 할 필요도 미안해 할 필요도 없다며 다정하게 채린의 양손을 마주잡은 희원의 진심 어린 얘기와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그녀에게 수영의 행복을 간곡한 얼굴로 부탁하는 희원의 모습에 채린의 눈가가 촉촉히 젖어들었다. 잠시 동안 희원과 채린은 서로의 손을 마주 잡은 채 서서 서로에 대한 신뢰와 따뜻함이 담뿍 실린 눈길을 주고받았다.  

  "아, 참.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희원씨가 꼭 들어줬으면 해요." 

 채린이 눈가에 괴인 눈물을 부랴부랴 수습하며 밝은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부탁이요?"

  "네. 우리 결혼식날 내 부케 희원씨가 받아줬으면 하는데....."

  "부케...요?"

  "희원씨가 정 내키지 않으시면 어쩔 수 없지만 난 희원씨가 내 결혼식 부케를 받아줬으면 해요."

 수영과 채린이 전혀 예상치 않게 희원을 찾아오기 전까지 차마 그 두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희원이었기에 갑작스런 채린의 부탁을 받고 희원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희원씨, 사랑하는 사람 있다고 들었는데." 

  "예?"

  "은.선.우." 희원보다 머리 하나 만큼은 키가 큰 채린이 희원쪽으로 고개를 바짝 숙이고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아...!"

  "호호호. 금세 얼굴이 붉어지네. 근데 그거 알아요. 나랑 선우씨랑도 잠시 사귀는 사이었었다는 거. 그런데 나 선우씨한테도 채였거든요. 그것도 희원씨 때문에."

  "......" 비록 채린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 앞에서 도대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지 난감한 희원이었다.

  "사실 나중에사 알게 된 사실이긴 했지만. 아무튼 나 희원씨 때문에 두 남자한테 모두 채일 뻔 했다구요. 아, 생각하면 정말 자존심 상해. 음... 외모로 치면 나도 희원한테 떨어지는 편은 아닌데......"

 뾰족히 입술을 모으며 부러 새초롬한 표정을 지은 채 희원을 옆 눈으로 쳐다보는 채린을 바라보며 희원이 생각했다.

  '떨어지는 편은 아니라니. 솔직히 비교할 대상도 안된다고 하는 편이... 으으... 자존심은 누가 상하는데......'

 그러는 사이 장난기 어린 표정을 접은 채린이 다시 부탁조로 말문을 열었다.

  "내 부탁... 들어주지 않을래요?"

  "그건... 너무 갑작스러워서... 뭐라 대답하기가......"

  "아주 거절할 의사가 아니라면 그럼 아직 결혼식까지는 여유가 있으니까 생각해 봐 줄래요?"

  "네. 그럴 게요. 생각... 해볼게요."

 희원이 그 자리에서 거절하지 않아 천만 다행이라는 얼굴로 채린이 다시 희원의 손을 그러쥘 때였다. 조금 전부터 인기탤런트 한채린의 출현을 긴가민가하고 있던 수료생들 중 몇몇이 이내 그녀임을 확실히 알아보고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어머, 탤런트 한채린씨 맞으시죠?"

  "아, 네."

  "것 봐. 내 말이 맞잖아. 어머 어머, 언니 저 언니 팬이에요. 여기다 사인 좀 해 주실래요."

 결국 채린을 알아보고 사인을 받기 위해 다가 든 사람은 서 넛에서 대 여섯으로 다시 여남은 명으로 불어나고 있었고 그녀가 일일이 사인을 해주는 동안 희원은 몇 걸음 물러나 서 있었다.

  "휴우, 결국 또 유명세를 치르는군. 직업이 그렇다보니 무조건 말릴 수만도 없고." 어느 새 희원의 곁으로 다가온 수영이 탄식조로 읊조리더니 문득 뜻 밖의 청을 해왔다. "핑계 김에 나가서 커피나 한 잔만 사주라."

  "커피요?"

  "응. 조기 입구 쪽에 커피 자판기 하나가 있는 것 같던데."

  "자판기 커피요? 선배 원래 자판기 커피 같은 거 비위생적이라고 절대로 안 마셨잖아요." 희원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수영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아, 그게... 채린이가 쟤가 다른 입덧은 없었는데 별나게 자판기 코코아를 찾아대서 틈 날 때마다 따라다니다 보니... 그렇게 됐다. 하하."

 또 다시 머쓱한 표정으로 멋쩍게 웃는 그. 예전엔 볼 수 없었던, 어딘가 나사 한 개가 풀려버린 듯 보이기도 했지만 훨씬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이는 수영의 그런 모습에 희원은 다소 금세 적응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흐뭇한 기분을 맛보았다. 분명 채린의 진심 어린 사랑이 나름대로 상처를 가지고 성장한 수영의 경직된 마음을 서서히 풀어내고 있는 것이리란 믿음에 기뻤다.

 희원은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먼저 수영에게 건네고 자신도 한 잔을 뽑아들고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선배... 사실 그동안 나 선배 걱정 많이 했었는데 이젠 그럴 필요 없겠다."

  "......" 

  "행복해 보여요, 선배."

  "그래 보이니?" 수영이 들고 있던 커피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미소을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

  "네."

  "모르겠어. 이런 게 행복감인지 어떤지. 살아오면서 사실 행복했던 기억은 별로 없어서 어떤 게 정말 행복감인지 아닌지 잘 구분을 못하겠거든. 아마도 내 기억에 가장 행복했다고 느꼈던 순간이 있었다면 그건 네가 내 청혼을 받아들였을 때 또 가장 불행하다고 느꼈던 순간은 네가 나에게 다시 결혼 반지를 돌려주었을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말을 맺고 그가 잠시 침묵을 지켰을 때 희원은 차마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찌르르한 통증이 일어나 그녀의 전신을 엄습해왔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너의 매몰찬 태도에 할 말을 잃은 채 돌아서는 너를 무기력하게 보내고 한 동안 정말 미친 사람처럼 지냈다. 하루의 반은 너를 원망하며 나머지 반은 채린이를 원망하며. 그러다 어느 순간 이건 아니다 하는 깨달음이 왔어. 채린의 뱃 속에 든 아이에게 생각이 미쳤을 때였지. 

 김수영 이 덜 돼 먹은 놈아. 지금 네 꼴을 한 번 봐라. 그동안 네가 그토록 원망해 하지 않던 네 부모의 모습과 지금의 네 모습이 뭐가 다른지.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던 한 여자의 뱃 속에 지금 너의 자식이 자라고 있는데 넌 네 욕심에 눈이 어두워 네 자식 따윈 안중에도 없구나, 이 나쁜 놈! 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던 거야.

 다음 순간, 눈꼽 만큼도 나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내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 뼈에 사무치는 것 같더라. 그리고 나처럼 못된 놈의 아이를 목숨처럼 지키겠다고 울부짖던 채린의 모습에서 내 어머니에게서 찾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던 모성애를 그제서야 비로소 발견한 나는 결심했지. 채린과 아이를 위해 살아보겠노라고. 그들에게 좋은 남편과 아버지로 살아 보겠노라고. 

 물론 그런 한 편으로 사실 걱정되는 면도 없지 않았어. 다른 여자를 사랑했고 그래서 자신과 뱃속의 아이까지 버리려고 했던 무정한 나를 채린이 어떻게 여길지. 우리 두 사람의 관계가 그저 노력만으로 평탄해 질 수 있을지. 또 사랑 없는 관계를 극복할 수 있을지.  

 하지만 채린이가... 정말 나를 많이 도와주었어. 부족한 나를 많이 참아주면서 변함없는 사랑으로 나를 채워주었지. 정말 그녀에게 너무도 고마워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아."

 말을 하고 있는 내내 시종일관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다보고 있던 수영이 시선을 돌려 그윽한 눈길로 사람들에 둘러싸여 사인을 해주는 중간 중간 밝게 웃는 얼굴로 그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채린을 응시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행복해 보인다고 했니? 아마도 내가 너무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서 일 거야. 그녀에게. 그리고 몇 달 후에 태어날 아이한테도. 그 아인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매일 매일 내게 기쁨을 줘. 이런 말하기 조금 쑥스럽지만 얼른 아기 얼굴이 보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야. 지금도 노력하고 있는 중이지만 아기가 태어나면 더 많이 노력할 거야. 아기에게도. 채린이에게도. 그 두 존재가 왠지 텅 비어있는 것만 같던 내 인생을 가득 채워준 느낌이야."

 그가 말을 모두 마쳤을 때 희원은 너무나도 감동스러운 마음에 가슴이 뭉클해 질 정도였다. 아직 수영 본인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그의 가슴엔 아이뿐 아니라 채린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번에야 말로 수영이 진짜 자신의 사랑을 찾은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더라도 본인 스스로 그 사실을 깨달을 날이 머지 않으리라.

  "그러는 넌 어때? 요즘 그 선우오빠랑은 잘 되가고 있니?"

  "......!"

 갑작스레 수영이 화제를 바꾸어 그녀와 선우의 일을 물어오자 괜스리 가슴이 뜨끔한 희원이었다. 하지만 수영은 그런 그녀의 심중을 모두 꿰뚫어 보고 있는 양 피식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나한테 찔려할 거 없어. 사실 처음부터 네 마음이 그 사람한테 가 있다는 거 다 알면서도 오기 반으로 시작한 건 나니까."

  "선배..." 처음부터 희원의 마음을 모두 알고 있었다는 수영의 말에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한편 자신의 마음을 속이려 했던 것과 동시에 수영을 이용하려고 했던 사실에 대해 죄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그런 얼굴 하지마. 그러지 않아도 내가 괜스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너만 더 힘들게 했던 것 같아 미안했는데."

  "선배가 왜요. 선배는 잘못 없어요."

  "바보. 내가 왜 잘못이 없어. 너만 쫓아다니는 시늉하면서 채린이 한텐 애까지 생기게 만든 장본인인데."

  "......"

  "네게 꼭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어. 네가 내 청혼을 승낙했을 땐 분명 나를 믿었기 때문이었을 텐데 그런 식으로 널 실망시키고 배신해서. 정말 미안하다, 희원아."

  "아니에요, 선배. 나 아직 잊지 않고 있어요. 그 위험한 화염 속에서 목숨 걸고 날 구해낼 만큼 선배 마음이 티끌 하나 없이 진심이었다는 거. 그래서 오히려 내가 늘 선배에게 미안했는 걸요. 선배를 용서하고 받아주었어야 하는 건 아니었는지 내내 마음이 무거웠어요.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추고 희원은 수영을 마주 보며 환하게 웃음을 지은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은 그 때 선배를 보내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만약 그 때 내가 선배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선배 얼굴이 이토록 편안하고 기분 좋아 보이지는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너한테도 채린이한테도 내가 몹쓸 놈이었다는 건 분명해."

  "어쨋거나 지금은 아니잖아요."

  "후후. 노력 중이긴 하지."

  "지금도 백 점 만점으로 보이는 걸요."

  "날 놓친 게 후회될 만큼?"

  "음... 쪼금요."

  "하하하하."

  "하하하."

   

  수영과 희원 두 사람 모두는 웬지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밝은 얼굴로 다시 전시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수영은 곧장 채린에게로 다가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채린을 마치 경호원처럼 커버(?)하며 그녀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그녀가 피로감을 느낄 것을 염려하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다소 홍조를 띤 채 수영에게 왕비와 다름없는 대접을 받고 있는 채린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고 빛나 보인다고 희원은 생각했다. 

 이윽고 두 사람이 다시 희원에게 다가와 인사말과 함께 꼭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마지막으로 전시회장을 떠났을 때 희원은 마음 속으로 신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또한 그들의 앞날에 축복만이 함께 하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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