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아얏! 아퍼... 딸꾹!"
"뭐야? 아직도 안 멈췄어?"
성진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딸꾹질을 어떻게든 멈춰볼 요량으로 성진의 한 쪽 팔을 세게 꼬집었던 나영은 그가 꼬집힌 팔을 문지르면서도 여전히 딸꾹질을 계속하자 눈쌀을 찌푸리며 팔짱을 끼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성진 오빠, 그 옷 좀 벗어봐."
"뭐, 뭐얏?! 딸꾹!"
"쟈켓 좀 벗어보라고."
"오, 옷은 왜?"
성진이 두 손을 가슴에 모두어 옷섶을 누른 채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자 나영이 킬킬거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누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서 그래?"
"그, 그러니까... 옷은 왜?"
옷을 벗으란 얘기에 화들짝 놀란 성진의 딸꾹질은 이미 멈췄지만 두 사람은 미처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꼬집어도 효과가 없으니 이 번엔 간지럼을 태워 보려고. 이렇게!"
갑자기 열 손가락을 들어 성진의 코앞에서 꼼지락거려 보이던 나영이 다짜고짜 성진에게 달려들어 마구 간지럼을 태우기 시작했다.
"우헤헤헤헤! 아아... 그만! 그만! 우헤, 우헤! 나 간지럼 많이... 으헤헤헤! 많이 탄단 말야!"
나영의 간지럼 세례에 성진이 어쩔 줄 몰라하며 온몸을 비틀었다.
"성진 오빠 간지럼 많이 타는 거 나도 알아. 얼레? 그러고보니 딸꾹질이 멈췄네. 잘 됐다. 내친 김에 얼른 불어. 빨랑!" 나영이 무차별적인 간지럼 공세를 늦추지 않으며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캬하하핫! 그만, 그만! 아아... 으헤헤! 학, 학! 야야... 거, 거긴... 성감대란 말야... 으흐흐흐!"
"어유, 정말!"
얼굴을 붉힌 나영이 얼른 성진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더니 숨을 고르고 있는 성진을 잠시 흘기다말고 다시 다그치기 시작했다.
"빨랑 말해. 뭔가 있지? 나 그렇게 눈치 없는 애 아니라는 거 오빠도 알잖아."
"아씨... 있긴 뭐가 있다 그래 자꾸."
"오빠,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
"내가 뭘......" 여전히 나영의 시선을 피하며 성진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대꾸했다.
"처음부터 이상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고. 선우 오빠랑 공항에 같이 마중 나온... 그... 이미랑인가 김미랑인가 하는 여자부터. 그 여자 말로는 자기가 선우 오빠랑 결혼할 사이라고 하던데 내가 보기엔 둘 사이 전혀 그런 사이로는 보이지 않았어. 내가 듣기로 선우 오빠한테 분명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했는데 상대가 결코 그 여자는 아니었다고."
"선우한테...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는 얘길 들었다고? 그걸 누구한테?" 성진이 의아한 얼굴을 하며 그제서야 나영을 똑바로 바라본다.
"누구긴. 선우오빠 본인한테지."
"선우... 본인한테...?"
나영은 짙고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콧잔등을 살짝 찌푸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실은 나도 너한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 있다. 나도... 사랑... 하는 사람... 생겼거든.'
귀국 전 통화에서 그녀가 선우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처음 고백하던 날 전화기를 통해서 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지금도 선명했다. 차분한 어조로 천천히 말을 아끼며 조심스럽게 꺼낸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섬세한 떨림이 너무도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생모에 대한 아픈 기억으로 인해 동생인 자신을 빼곤 줄곧 여자란 존재에 대해 품고 있던 선우의 불신감과 혐오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나영이었기에 그녀는 선우가 저토록 입에 함부로 담기조차 아까운 듯 여기는 상대가 누구인지 그 길로 당장 한국으로 날아와 확인하고 싶어 볼 정도였다.
"헌데... 오늘 저 희원인가 하는 아가씨를 바라보는 오빠 눈빛이 장난 아니더만. 그 아가씨 쪽도 마찬가지고. 자고로 가난이랑 사랑은 감출 수 없는 거랬어. 그러니까 되도록 간단명료하게 빨리 설명해 봐. 두 본인들을 포함해서 다들 두 사람의 관계를 내게 쉬쉬하고 있는 것만 같은 이 분위기는 뭐고, 또 공항까지 나왔던 그 성질 더러워 보이는 여자는 또 뭐냐고?!"
나영은 선우의 차를 타고 공항 주차장을 빠져 나오면서 사이드 미러로 목격하고 말았던 미랑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런 나영의 표정을 바라보던 성진은 선우가 혐오감을 드러낼 때의 표정과 지금 그녀의 표정이 너무도 흡사해 피식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선우놈이 그런 얼굴을 할 땐 반경 10미터 내에 북풍한설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는데 나영이 넌 어쩜 그런 얼굴을 해도 그리 사랑스럽기만 하냐?'
"뭐야, 대답은 안하고 왜 남의 얼굴은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며 실실 웃는거야?"
"어? 아아..."
나영이 실눈을 뜨면서 던진 말에 잠시 움찔하던 성진은 이내 세상의 모든 고뇌를 한 몸에 지고 있는 사람 같은 표정을 하더니 벽을 가까이 등지고 서있던 나영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곤 불현듯 그녀의 어깨너머로 박력 있게 팔을 뻗어 탁소리가 나게 벽을 짚더니 나영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젊은이를 열광케 하는 묵직한 허스키 보이스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국... 이게 운명이라면... 나 혼자만의 힘으로 거스를 수는 없겠지."
"무슨... 소리야 도대체. 그, 그리고... 좀 떨어져서... 얘기하지."
평소답지 않게 진지하기 짝이 없는 성진의 얼굴이 자신의 코앞으로 다가들자 어색함을 느낀 나영이 슬쩍 얼굴을 붉히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나영이 물러선 한 걸음만큼 다시 그녀에게 다가간 성진이 천진스럽게만 보이던 꽃사슴 눈망울에 잔뜩 힘을 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도 너의 운명은 나와 이어져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 나영, 고뇌하지 말고 그냥 내게 와라. 와라, 나영."
철썩!
"아얏!"
"아무튼 정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어휴, 차라리 준희한테 물어보고 말지, 내가!"
"나, 나영아..."
성진의 등짝을 한 대 때려주곤 눈을 흘기며 방을 나가는 나영을 도리없이 바라만 보고 있던 성진은 이내 팔을 돌려 나영에게 맞은 등을 문지르고는 우는 소릴 했다.
"기집애, 손대 한 번 되게 맵네."
"뭐?! 그게 사실이야?!"
"어, 으응..."
준희가 커질 대로 커진 나영의 동공을 불안스레 바라보며 곤혹스럽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으으, 난 이제 선우형한테 죽었다!'
나영의 다그침에 별수 없이 선우와 희원의 관계며 미랑의 어처구니 없는 협박등등에 대해 자세한 내막을 얘기해 줄 수밖에 없었던 준희는 그러나 마음 한 구석 차라리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역시 지울 수 없었다. 선우의 바램대로 나영이 설혹 그 모든 사실을 모르고 결혼했다가 나중에라도 뒤늦게 자신의 결혼이 오빠의 희생을 대가로 이루어진 것이란 사실을 알게되었을 때 그녀가 감당해야할 충격과 죄책감 역시 극복하기 수월한 수준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강은 예상했던 나영의 반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준희는 지금 잔뜩 눈쌀을 찌푸린 채 엄지손톱을 깨물어대며 혼자 생각에 골몰해 있는 나영의 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고 있자니 미안한 마음을 가눌 길 없었다. 그녀에게 졸지에 커다란 고민 거리를 한아름 안겨준 장본인이 되고 말았으니까. 아, 물론 나영에게뿐 아니라 레드비트 하우스 식구들 모두에게 그 고민 거리를 안겨준 진짜 장본인은 이미랑이라는 고약스런 여자이지만.
"준희야."
이윽고 혼자만의 상념에서 벗어난 나영이 고개를 들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준희를 올려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응, 누나."
"선우오빠한텐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내가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얘기 말이야."
"응?"
"당분간 선우오빠한테 너랑 나 사이에 이런 얘기가 오고 갔던 거 비밀로 하자는 말이야."
"하지만..."
"부탁이야. 들어줄 수 있지?"
"으응... 누나가 그러길 바란다면. 하지만 왜..."
"내게도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니?"
"......"
자신에게도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나영의 속뜻을 사실 모두 헤아릴 수는 없었던 준희는 그저 묵묵히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며 조금이라도 그녀의 표정을 읽어보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성진 오빠도 네가 입단속 시키고. 아휴, 넌 믿을 수 있는데 성진 오빤 믿을 수가 없다니까. 도대체 성진오빤 사람이 왜 그렇게 생겨 먹었다니? 인간 럭비공이 따로 없어요.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가 없다니까. 하여간 연구 대상감이야, 연구 대상감! 아까도 뭐..."
"아까 뭐?"
"어, 아니... 그냥 너무 장난꾸러기 같기만 하다구."
나영은 성진의 방에서 그녀를 벽 가까이 몰아 부치다 시피한 채 자기에게 와라 어쩌라 했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입을 뗐지만 준희에겐 그냥 다른 말로 얼버무려 버렸다. 워낙 장난스러운 구석이 많아 도통 어디까지가 장난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헷갈릴 때가 많은 그였지만 아까 전 성진의 눈빛은 왠지 평소와는 다르게 예사롭지 않은 구석이 있어 나영은 늘 허물없이 친동생처럼 여기고 있던 준희에게 조차 그 얘기를 꺼내기가 껄끄럽게 느껴졌다.
'언제나 그랬어. 정말 속을 알 수가 없다니까. 그나저나 이미랑인가 하는 그 못된 인간을 어떻게 혼 줄을 해준다?'
다소 호락호락하지 않은 문제를 받아들었을 때면 자신도 모르게 으레히 나오는 습관대로 그녀는 왼 손으로 자신의 턱 밑을 슬슬 문질러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