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3. (63/75)

  

# 63.

  "어째서 답이 뻔한 질문에 대답을 못하는 거지?"

  이제 나영의 어조는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꼭 이렇게 유치한 문답을 해야 겠니?" 

  재섭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나영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당신은 사랑이 그렇게 고상하고 형이상학적이기만 한 감정인 줄 알았어? 그래서 지금 머리 속으로 나와 당신의 미래를 놓고 고상하고 형이상학적인 방법으로 저울질을 하고 있었나?"

  "나영이, 너......"

  

  재섭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지만 정곡을 찔린 사람의 방어적인 태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재섭의 모습을 보며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는 나영이었다. 명석한 두뇌와 그에 걸맞는 학벌을 가진 지적인 여자였으나 그녀 역시 사랑에 대한 이상만큼은 여느 여자들과 다르지 않았기에 지금 그녀 눈에 비치고 있는 재섭의 모습을 수긍하기란 쉽지 않았다. 

  오늘까지 자신을 향한 그의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던 그녀였다. 그녀와 그녀의 오빠가 현재 처해있는 상황을 재섭 역시 함께 안타까워 해주고 어떻게든 도움을 주기 위해 발벗고 나서줄 것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나영은 그 앞에서 제대로 말도 꺼내보기 전에 그가 그녀의 가족들을 치명적인 핸디캡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뿐 아니라 은나영이란 존재 역시 최재섭의 모든 걸 던지고 달려들 만큼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우리가 알고 지낸 지 일 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당신이 실리주의자라는 거, 칼같이 계산에 밝은 사람이란 거 그래서 절대로 자기한테 손해 날 짓은 안 하는 사람이란 것쯤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앞으로 그 상대가 누가 되든 사랑을 가지고 저울질 같은 건 하지마. 나 이만 가볼게." 

  나영은 더 이상 재섭의 얼굴을 마주한 채 있고 싶지 않았다. 말을 맺음과 동시에 그녀는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을 향해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현관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도 재섭은 그녀를 만류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구질구질하고 비참한 기분으로 나영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마구 눌러댔다. 더디게 올라오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녀의 뒤에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재섭이 달려나와 등뒤에서 그녀를 끌어  안으며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지마, 나영아. 나 너 정말로 사랑한다. 너도 나 사랑하는 거 알아.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 지내면 되잖아. 결혼... 꼭 해야되는 거 아니잖아."

  여전히 그를 등지고 서있던 나영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떠올랐다. 

  "여지껏 머뭇거리며 생각해 낸 게 고작 그 거 였어? 미안하지만 당신 같은 속물이랑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오늘 부로 당신은 내 인생에서 영원히 아웃(out)이야."

  '땡'

  기가 막힌 타이밍에 맞추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나영은 매몰찬 손놀림으로 재섭의 손을 끌어내리곤 냉큼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후 닫힘 버튼을 눌렀다.

   

  택시를 잡기 위해 나영이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고 있을 때 한 두 시간 전 만해도 서둘러 다가온 봄 날씨 마냥 환하고 온화했던 날씨가 요상스럽게 변덕을 부려 꼭 폭설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사위가 어둑어둑해졌으며 여기 저기에서 작은 돌개바람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다행히도 오래 기다리지 않고 금방 잡아 탈 수 있던 택시 안에서 나영은 코트 깃을 여기며 가볍게 몸서리를 쳤다. 실질적으로 재섭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도 이상하리만치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저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고 난 뒤처럼 왠지 멍한 느낌이 들뿐이었다. 

  '뭐야... 나 이렇게 담담한 기분 드는 거 뭔가 이상한 거 아냐?'

  어쩌면 너무도 갑작스럽게 다가온 결별이 아직까지 실감나지 않았던 때문일 수도 있었으리라. 그저 멍한 기분으로 무심히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나영은 문득 자신의 두 뺨이 축축해진 느낌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만져보았다.

  '차가와.'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눈물이 그녀의 뺨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던 것이었다.

  '눈...물? 아아... 아마도 아까 그 돌개바람 때문에 눈에 티끌이 들어갔었던 모양이로군. 그랬...었나 봐.'

  하지만 그 이후로 줄곧 그녀의 눈물은 쉽사리 멈추어지질 않았다.

  성진은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씩씩하고 쾌활한 목소리임에는 틀림없었으나 뭐라 꼬집어 말로 표현하기엔 어려움이 있는, 일종의 직감에서 비롯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어쨌거나 바로 그 모호한 느낌으로 인해 성진은 자신도 모르게 잠시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전화를 끊자마자 성진은 부리나케 집을 나와 그녀가 알려준 장소로 향했다. 그곳은 나영이 유학을 떠나기 이 전까지 레드비트의 세 멤버들과 함께 어울려 즐겨 찾던 바였다. 바 안에 들어서서 안을 둘러보던 성진은 구석 쪽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나영의 모습을 금방 발견해 낼 수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눈쌀을 찌푸렸다. 한 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그는 두 번이나 눈쌀을 찌푸린 셈이었는데 피부에 주름지는 것을 저어해 아무리 안 좋은 일이 있어도 하루에 한 번을 초과해서 인상을 쓰는 일이 없는 그로써는 매우 이례적인 날이라 할 수 있었다.

  "야, 은나영. 은나영!"

  성진이 나영 옆으로 다가앉으며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그녀를 흔들었다. 그러자 무겁게 고개를 들어올린 나영이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성진을 바라보며 피시시 웃는다.

  "오빠 왔어? 금방 온다더니 정말 빨리 왔네?"

  "야, 너 뭔 일 있냐? 초저녁부터 웬 술바람이야. 도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여자 입에서 이렇게 술냄새가 진동을 해."  

  "딱 잔 반 밖에 안 마셨어. 딱 잔 반이야....."

  "알았다, 알았어. 우선 일어나자 집에 데려다 줄 테니."

  "아냐, 더 있을 거야. 오빠 오늘 나 친구 해주려고 나온 거 아니야?"

  "그, 그렇지. 하지만 네가 이렇게 취해 있을 줄 알았냐?"

  "왜, 취해 있는 줄 알았으면 안 왔을 거야?"

  "응? 아...아니."

  그녀가 부르기만 한다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뛰어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성진이었다. 그렇기에 빨리 좀 와달라는 나영의 부름에 천하의 유성진이 꽃단장(?)도 건너뛰고 나온 것 아닌가!

  "아하하하, 아하하! 그러고 보니 오빠 추리닝 바람이잖아. 뭐야? 신발도 좀 이상하네?"

  '우쒸, 유성진 오늘 스타일 죄 구긴다. 쳇, 그나저나 무릎나온 추리닝 바람에 뛰쳐나오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제기랄, 하필 선우놈 운동화는 또 거기 나와 있어 가지고! 그 때 그냥 난 핑크색을 샀어야 하는 건데.'

  성진이 하루에 두 번씩이나 눈살을 찌푸리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 번으로 갱신하면서 신고 있던 신발을 내려다본다. 그도 그럴 것이 신고 있던 신발이 오른 쪽과 왼 쪽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 둘 다 오른 쪽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같은 색상 같은 디자인 같은 사이즈인 선우의 운동화를 잘못 끼어 신고 나온 모양이었다. 그것도 하필 두 쪽 모두 오른 쪽 것으로 말이다. 

  나영은 벌레라도 씹은 듯한 성진의 표정을 보며 한참 동안 배꼽을 잡고 웃어대더니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고 돌연 심각한 표정이 되어 다시 말문을 열었다.

  "고마워. 오빠. 내 전화 한 통에 신발 짝도 제대로 못 챙겨 신어가며 이렇게 부리나케 달려와 줘서."

  실지로 나영은 크게 감동하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무작정 시내로 들어온 나영은 혼자서 한동안 거리를 배회하며 쏘다니다 지금 이 바에까지 발길이 닿았고 술이 한 잔 들어가자 몹시도 외로움을 느꼈다. 그 때 생각난 사람이 바로 성진이었고 그녀는 곧장 핸드폰을 열었다. 물론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은 선우였지만 그를 불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성진 오빠, 여기 솔베이지야. 지금 좀... 나와 줄 수 있어? 선우 오빠는 모르게.'

  그리고 통화를 끝낸 지 한 시간도 못 되어 그와는 잘 어울리지도 않는 심각한 표정을 하고 나타난 성진이 나영은 그렇게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편 그녀가 대놓고 외로움을 호소해도 자기가 맡은 일을 완벽하게 끝내놓기 전엔 절대로 움직이지 않던 재섭의 기억이 떠올라 매우 씁쓸한 기분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기억일 뿐이었다. 맺고 끊음이 늘 분명하고 확실한 그녀의 성격은 이미 마음에서 접은 사람과의 기억 따위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빠른 시일 안에 그를 그녀의 마음속에서 단호하게 지워버리리라. 그러나 오늘 하루만큼은 자신에게 그냥 구질구질하고 초라한 모습을 허락해도 좋으리라.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성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지금 그 남자하고 끝내고 오는 길이야."

  나영이 칵테일 잔에 조금 남아있던 마티니를 훌쩍 털어 넣으며 전화기를 통해 성진의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던 예의 그 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뭐?"

  "재섭이란 인간하고 쫑냈다구 오늘."

  "너....."

  "그래. 그 사람은 자기 아버지가 무서워서 아니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잃게 될까봐 아주 사색이 되서 벌벌 떨더라고. 내가 그런 겁쟁이를 사랑했다니."

  "......."

  "다행이야, 늦기 전에 내 환상이 깨져서. 정말 결혼이라도 했다가 그 사람의 그런 실체를 확인했다면... 내 성격에 못 견뎠을 것 같아, 후후. 오빠, 나 오늘 술 고프다. 나랑 대작 안 해줄래?"

  

  나영을 바라보는 성진의 눈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자존심이 세기로는 둘 째 가라면 서러워 할 나영이었지만 그 날은 왠지 자신을 안쓰럽게 여겨주는 성진의 마음이 싫지만은 않았다.

  "나쁜 자식. 재섭이라고 했냐? 잘 됐어. 그 놈은 말야 이름부터 재수 없어. 재섭씨, 재섭씨, 재섭써, 재섭써, 재수 없어. 안 그러냐?"

  "와하하핫! 듣고 보니 정말 그렇네! 아하하하하. 맞아 재섭이 그놈 이름부터 재섭다. 최재섭. 최고로 재수 없는 놈!"

  "맞아. 맞아. 그럼 우리 오늘 최고로 재수 없는 놈 떼내 버린 기념으로 축하주나 할까?"

  "오케이. 듣던 중 반가운 소리."

  "좋아. 그냥 하루 콱 제껴버리고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보자."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먼저 나가떨어진 사람은 술에 약한 성진이었고, 마실수록 정신이 말짱해지는 나영이 결국 그 날 밤 성진을 들쳐 메다 시피하며 레드비트 하우스까지 데려다 주어야 했다.

  

  녹음을 앞두고 하루 이틀 짬이 난 가운데 준희는 데이트 약속이 있노라며 들뜬 얼굴로 외출을 했고 성진 역시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온다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후 레드비트 하우스엔 선우와 희원 두 사람만 남아있게 되었다. 

  얼떨결에 달랑 두 사람만 마주 앉게 된 저녁 식탁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으나 결국 마음을 굳게 다잡아먹은 선우가 그 동안 본의 아니게 미루고 미뤄 왔던 이야기를 꺼내려고 할 때였다.

  "다음 주에 며칠 집을 비워도 될까요?"

  

  희원이 국 한 수저를 입에 떠 넣으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뭐?"

  

  희원이 집을 비워도 되냐는 갑작스런 물음에 선우는 무슨 충격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되물었다.

  "며칠 집을 좀 비워도 되겠느냐고요?"

  "어딜... 가는데?"

  "다음 주에 구정이잖아요. 괜찮다면 춘천 집에 좀 다녀오려구요."

  

  짐짓 식사에 열중하는 척 하느라 선우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희원이 콩나물을 한 젓가락 집어가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아아, 그렇군."

  혼자말을 하듯 그렇게 나즈막히 중얼거리곤 선우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갑자기 온 몸에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미랑의 악독한 계략만 아니었다면 선우는 희원과의 정식 교제를 허락 받기 위해 구정 명절 기간 그녀의 부모님들을 찾아뵐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젠 그런 계획이 모두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리고만 현실을 새삼 곱씹으며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늘어뜨리고 말았다. 그러다 문득 선우의 뇌리에 두려운 예감 하나가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그대로 희원이 영영 이 집으로 안 돌아오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말이다. 아마도 조금 전 집을 좀 비워도 되겠느냐는 희원의 물음에 그가 그토록 과민한 반응을 보이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 돌아... 올 거지?"

  선우의 물음에 그제서야 희원이 고개를 들고 맞은 편에 앉아있던 그에게 시선을 맞춘다. 처음엔 그녀의 눈빛 가득 의아함이 가득했지만 이내 온화한 빛으로 짙어져 가는 시선을 살짝 내리깔며 그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선우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의 내쉬었다. 참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으면 내내 상처만 받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심으론 혹시나 어느 날 갑자기 희원이 정말 자신을 두고 영영 떠나버리기라도 어쩌나 하는 걱정에 자신이 줄곧 전전긍긍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선우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오빠가 등을 떠민다 해도 난 안 떠나요.'

  만약 희원이 속으로 중얼거린 소릴 선우가 들었다면 그는 어떠했을까? 안도했을까? 아니면 더욱 고통스러워했을까?

  "아, 잘 먹었다. 선우 오빠도 밥 다 먹었으면 싱크대에 그릇 좀 갖다 놔줘요. 준희 오빠는 안 그러는데 어떻게 성진 오빠랑 선우 오빠는 내가 그렇게 얘길 해도 맨 날 까먹는 지 원."

  자신이 먹던 밥그릇이랑 국그릇을 챙겨들고 싱크대로 다가가며 희원이 짐짓 큰 목소리로 툴툴거리자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를 걸친 선우가 선심 쓰듯 한 마디 했다.

  "좋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설거지는 내가 한다."

  "어머, 정말요? 아이구,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설거지를 하느라 달그랑거리는 그릇 소리며, 쏟아지는 수돗물 소리를 배경으로 그들은 짧은 동안이나마 평화로운 시간을 만끽하며 그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시름 따윈 모두 잊은 듯 종알종알 수다를 떨었다. 

   "어때, 내가 닦으니 그릇들이 더 반들반들 해진 것 같지 않냐? 야, 눈이 부시다, 눈이 부셔. 내가 이래서 설거지를 안 한다니까. 자칫 주변 사람들이 시력 장애라도 일으키면 내가 얼마나 미안하겠니? "  

  선우가 자신이 닦은 접시 하나를 들어 보이며 너스레를 떨자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희원이 갑자기 선우의 엉덩이를 투덕투덕 두드리며 말했다.

  "아이구, 기특하기도 하지 우리 선우 오빠는."

  "어, 야앗! 어딜 함부로..." 

  "아휴, 수줍어 하긴. 이뻐서 그러는 건데. 어이구구, 이쁜 것."

  하며 희원이 또 한 번 선우의 엉덩이를 투덕거린다.

  "뭐, 뭐얏! 너 이리와! 나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끼야악!"

  불시의 역습에 희원은 그만 선우의 팔에 허리를 감긴 채 두 발이 허공 중에 뜨고 말았다. 그러자 선우가 히죽 웃는 얼굴로 희원의 엉덩이를 팡팡 두드리며 매우 즐겁다는 듯 외쳤다.

  "어이구, 생각보다 엉덩이가 토실토실 하구먼!"

  "내, 내려줘요!"

  "싫은데 어쩌지."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다구요!"

  

  사과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희원이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항복하는 거냐?"

  "항복, 항복이요."

  "쫌 시시하네. 그렇게 쉽게 항복해 버리다니."

  "아, 항복한대두요!"

  

  그러자 흠 하는 소리에 이어 희원의 허리를 감고 있던 선우의 팔이 다소 느슨해지면서 공중에 떠있던 그녀의 두 발이 바닥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를 살며시 바닥에 내려놓은 후에도 선우는 그의 팔을 풀으려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몸을 자신의 품에 꽁꽁 가두어 두기라도 할 것처럼 꼬옥 끌어안았다. 

  그렇게 한동안 두 사람은 석상처럼 서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머리칼에 코를 묻고 있던 선우가 꽉 잠긴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희원아, 우리... 이대로 어디 멀리 멀리 도망가 버릴까?"

  "오빠....."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우리 둘이서만 살까?"

  "......"

  희원은 선우가 실제론 그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녀에 대한 미련으로 번민하는 그의 고통이 가여웠고 한편으론 그만큼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그의 절실한 마음이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가족 중 누구 하나의 행복을 딛고 자신들의 행복을 취할 수 있는 위인은 못된다는 것을 그들 서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거... 오빠도 자신이 더 잘 알잖아요. 부질없는 소리예요. 하지만 선우오빠. 이거 하나만은 알아줘요. 오빠가 날 버리지 않는 한 난 절대로 오빠 안 떠나요. 오빠가... 미랑이랑 결혼한다고 해도 이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예요."

  마치 선우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방금 한 말의 의미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기에 선우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희원아!" 

  

  희원이 선우의 품안에서 천천히 몸을 돌린 후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흔들림 없는 얼굴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떠나지 않아요, 나. 그러니까 오빠만 날 밀어내지 않으면 돼요."

  "너......"

  "나... 안아줄래요?" 

  좀 전과는 달리 슬픔에 가득 찬, 너무나도 가련해 보이는 눈빛으로 희원이 선우를 향해 말했다. 마치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는 한 겨울날 신발조차 신지 못한 채 길바닥으로 쫓겨난 아이처럼 그런 눈망울로.

  마치 온 몸으로 삼켜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선우가 희원을 와락 끌어안으며 애잔한 목소리로 되뇌었다. 

  "바보야. 바보야.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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