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8. (68/75)

  

# 68.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이 차를 세워 아가씨를 내려줄 수도 있어. 대신 아가씨가 사랑해 마지않는 은선우의 목숨을 대신 접수해 가도록 하지."

  "안 돼요!"

  공포심에 사로잡힌 희원이 뒷좌석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어느 덧 흘러 넘치기 시작한 눈물로 시야가 흐려졌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이 피워 물고 있는 담배 연기로 인해 희원은 더더욱 그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잘, 잘못했어요. 순순히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그러니까 선우 오빠만은 절대로 건들지 말아주세요. 부탁입니다."

  도무지 밴에 타고 있는 사내들이 무슨 이유로 자신을 납치했는지, 또 어디로 자신을 데려가고 있는 지 따위를 헤아려 볼 만한 심적 여유가 희원에게는 없었다. 단지 그들의 말에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외모며 분위기 모두 험상궂어 보이기 짝이 없는 그 사내들이 당장이라도 선우에게 해코지를 할까 싶어 걱정되는 마음만 앞설 뿐이었다.

  "후우... 눈물겹군."

  뒷좌석의 사내가 눈물로 범벅이 된 희원의 얼굴을 향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건조한 음성으로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희원은 비록 자욱한 담배 연기에 싸인 채 시트에 깊숙이 몸을 파묻다 시피하고 앉아있는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그가 밴에 타고 있는 무리들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든 선우의 안전부터 약속 받아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서 희원은 다시 한 번 그를 향해 애원하듯 간구했다.

  "부탁드릴게요. 선우 오빠는 건들지 말아주세요. 뭐든, 뭐든 시키는 데로 하겠습니다."

  "......"

  하지만 사내는 담배 연기만 내뿜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희원은 미동도 않고 있는 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대꾸가 없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그들은 자신을 미끼로 선우에게 못된 짓을 할 속셈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그 순간 희원의 가슴이 두려움으로 미친 듯 두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안 돼! 절대로 그런 일이 생기도록 놔둘 수는 없어!'

  당장 자신의 신변에 닥칠지도 모를 위험 따윈 아랑곳 않은 채 오로지 선우에 대한 걱정으로 사고가 마비되다시피 한 희원이 다시 사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만약 선우 오빠의 털끝 하나라도 다치게 한다면 절대로 가만있지 않겠어!"

  "......"

  "내 말 듣고 있어요?"

  "가만 두지 않으면 어쩔 건데 아가씨? 나랑 맞짱이라도 뜰 생각인가?" 

 굳게 입을 다물어 버린 것만 같던 사내가 천천히 시트로부터 몸을 세우며 느릿느릿한 어조로 그러나 아주 흥미롭다는 듯 희원을 향해 그렇게 묻자 밴 안에 타고 있던 덩치들이 키득키득 거렸다. 그들 모두가 절박함 속에서 우러난 그녀의 진심을 웃음거리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만, 만약에 당신들이 선우 오빠를 해친다면 혀라도 깨물고 죽어 원귀가 되서 당신들을 따라다닐 거야. 그래서 죽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될 만큼 괴롭혀 줄 거야.."

  "뭐? 푸흡! 후하하하하!"

  분명 뒷좌석의 사내가 우두머리인 게 분명했다. 그가 먼저 웃음을 터뜨리자 나머지 사내들도 따라 웃기 시작했으니까. 아무튼 한동안 밴 안에는 덩치 큰 사내들의 왁자한 웃음소리로 가득 차 차체가 흔들거릴 지경이었다. 

  "왜 웃는 거죠? 내가 농담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아나요? 내 말이 장난으로 들려요?"

  

  희원이 발끈해서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무리의 우두머리인 듯 보이는 사내가 곧 그녀의 말을 받아 대꾸했다.

  "아니. 귀여운 얼굴로 그런 오싹한 얘길 하니 다들 기가 막혀서 그러는 것 뿐이야. 아무튼 우린 죽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될 만큼 원귀의 괴롭힘을 당하느니 아가씨만 순순히 우릴 따라준다면 은선우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 쪽을 택하고 싶은데 어쩔 텐가."

  사내의 말이 거짓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이런 류의 사람들-그러니까 깍두기 머리에 검은 양복을 입고 사람들을 협박하거나 납치하는 행위를 일삼는-이 하는 약속 따위를 쉽게 믿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는 희원이었지만 왠지 사내의 음성은 진실만을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나도 순순히 따르겠어요.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만 묻겠어요. 도대체 왜 날 납치한 거죠? 우리 집은 부자도 아니도 아니구요, 난 별로 몸값이 나갈 만한 대단한 인물도 아니거든요? 혹 당신들... 인신 매매범들인가요?"

  인신 매매범이란 말을 내뱉을 때 희원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로부턴 아무런 대꾸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뒤이어 다시 가죽시트에 몸을 묻은 사내가 자신의 부하들을 향해 짤막한 명령 하나를 내렸다.

  "눈 가려."

   

  

  

  희원의 눈을 가리고 있던 눈가리개가 풀렸을 때 처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사무실처럼 보이는 공간이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사무실 같았다는 것이지 사실 휑뎅그레한 공간 한 구석을 차지하고 서있는 커다랗고 칙칙한 철제 캐비닛 하나와 사내들이 입고 있던 양복과 색을 맞춘 것처럼 새까만 3인용 가죽 소파 두 개 그리고 마주 놓인 두 개의 가죽 소파 사이에 가로놓인 볼품없는 탁자 하나, 접이식 간이 침대로 보이는 철제가구 두 개가 집기의 전부였다. 아마도 그곳은 그들이 아지트로 이용하는 장소인 듯 싶었다.

  엉거주춤 서있는 그녀의 팔을 또 다시 웬 사내 하나가 잡아끌더니 그 썰렁한 공간을 가로질러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내의 손에 이끌려 걸어가는 동안 희원은 곁눈질로 슬쩍 사내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리고 희원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가 주차장에서 맞닥뜨렸던 사내들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악스럽다거나 사나와 보인다거나 혹은 야비해 보이는 인상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사내들의 무리와 섞여 있다는 사실이 대단히 의외일 정도로 그는 곱상하고 여리디 여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만 야리지. 얼굴 뚫어진다."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사내가 불쑥 내뱉은 말에 움찔한 희원이 얼른 시선을 내리 깔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희원은 사내의 목소리를 기억해 냈다. 밴의 뒷좌석에 앉아 줄담배를 피워대던 그 남자! 굵직하고 힘이 느껴지는 저음의 목소리와는 왠지 매치가 잘 안 되는 얼굴을 가진 이 사내가 무리들의 우두리머리였던 것이다. 

  "자, 들어가지. 넌 당분간 여기서 지낸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나무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그가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는 희원에게 턱짓으로 안으로 들어가라는 시늉을 해 보이며 예의 얼굴과 걸맞지 않는 로우 톤의 목소리로 덤덤하게 말했다. 그리고 희원은 그 때 처음으로 사내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가 있었다. 슬쩍 옆모습만 훔쳐보았던 때보다 훨씬 더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거기다 앳되 보이기까지 한 그의 얼굴은 천진난만한 미소년이란 표현이 딱 걸맞는 그런 인상이었다. 하지만 좀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반대쪽 눈가 부근에 광대뼈 근처까지 이어져 있는 선명한 흉터 하나가 있어 그녀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마치 칼자국처럼 보이는 길다란 흉터가 천사처럼 고운 얼굴을 가진 그 사내가 현재 몸담고 있는 세계가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냉엄한 지표처럼 보였다. 

  '그래서 사람은 겉모습만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거구나.'

  씁쓸함과는 차원이 다른 묘한 비애감을 느끼면서 희원이 문 안쪽의 방처럼 보이는 공간으로 머뭇머뭇 발을 들여놓자 곧 등뒤에서 문을 닫은 그가 부하들 쪽으로 다시 걸어가며 말했다.

  "난 다녀올 때가 있으니까 잘들 감시하고 있어라."

  "예. 알겠습니다, 형님!"

  곧 그가 그들의 아지트로 보이는 장소를 벗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가 그 곳을 떠난 것과 희원의 긴장감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아직도 방 밖에는 무시무시한 인상의 덩치 큰 사내들이 네 명이나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 가에 기댄 채 희원은 방안의 풍경을 한 번 둘러보았다. 조금 전 보았던 방밖의 모습과 별반 다른 것이 없었다. 그다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네모난 공간에 옷장으로 보이는 작은 장롱 하나. 더블침대 하나. 책꽂이와 서랍이 달린 커다란 책상 하나가 각 모서리에 아귀를 맞춘 채 놓여있을 뿐 썰렁해 보이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마주 보이는 벽면 한 쪽에 아마도 욕실입구로 보이는 작은 문 하나가 보였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희원이 갑자기 침대를 밟고 올라서선 블라인더가 내리쳐져 있는 창문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그리고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노력을 기울이며 창문을 옆으로 밀어보았다. 

  '후우, 그럼 그렇지.....'

  별 기대를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깨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혹 창문을 통해 달아날 방도는 없을까 해서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어 보았지만 지상으로부터 4,5층 쯤 되어 보이는 높이도 높이였고 창틀에 덧대어진 굵직한 쇠창살은 희원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견고하기만 했다.  

  '혹, 욕실쪽은 어떨까?'

  희원은 방안에서 들어섰을 때 보았던 맞은 편 문을 열어 보았다. 예상대로 그곳은 욕실이었다. 욕조 없이 간단히 샤워기만 설치되어 있는 쪽에 작은 창문이 하나 나있는 것이 보였다.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희원은 창문으로 다가가 불투명 처리된 유리창을 열어보았다. 굵직한 쇠창살은 없었다. 하지만 주변 건물로라도 건너가 볼 수 있음직한 그 무엇은 아무 것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결국 낙담한 모습으로 방에 되돌아 온 희원은 침대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아 두 무릎을 감싸안았다.

  '어쩌지?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저 사람들이 선우 오빠 이름을 운운하는 걸 보면 단순한 인신 매매범들은 아닌 것 같아. 그렇다면 저들은 무슨 목적으로 날 납치해 온 것일까? 선우 오빠... 아아, 그나저나 선우 오빠는 얼마나 날 걱정하고 있을까? 아마도 지금쯤 성진 오빠랑 준희 오빠도 내가 사라진 걸 알고 있을 거야. 얼마나... 얼마나 내 걱정들을 하고 있을까.....'

  문득 희원은 몇 달 전 자신이 선우의 스토커에게 납치되었던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 당시의 악몽이 떠오르자 희원은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납치해 와 감금해 놓고 있는 자들이 선우의 스토커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에겐 다른 목적이 있음에 분명했다. 

  '채희원. 이대로 낙담만 하고 있어서는 안 돼.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잖아. 뭔가,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그래. 분명히 방법이 있을 거야. 어쩌면 경찰들이 벌써 나를 찾아다니고 있을 지도 몰라. 게다가... 게다가 여긴 그 끔찍했던 창고 보단 훨씬 안락하잖아. 안 그래?'

  쿡. 쿠쿡. 희원은 지금 그녀가 감금되어 있는 방이 스토커에게 감금되어 있던 장소보단 낫다는 생각을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녀의 자조적인 웃음은 이내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선우의 웃는 얼굴이 떠오르는 가운데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가는 흐느낌을 억누르기 위해 희원은 자신의 두 무릎에 깊숙이 얼굴을 묻었다. 

    

  

   주차장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희원을 찾기 위해 사방팔방을 헤매다 새벽녘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온 선우의 안색이 어찌나 창백했던지 전화로 갑작스런 희원의 증발(?) 소식을 듣고 뜬눈으로 밤을 세우며 선우의 귀가를 기다리던 성진과 준희는 안타까움에 미간에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희원이가 어떻게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는 거야?"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인 양 하얗게 질린 얼굴로 넋빠진 사람처럼 앉지도 못하고 멀거니 서있는 선우의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끼면서도 성진은 답답한 마음에 다그치듯 말이 튀어나와 버린다.

  "선우형 우선 좀 앉자. 앉아서 차분히 얘기하자."

  준희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와 보이는 선우를 우선은 소파로 끌었다. 그러자 무너져 내리듯 소파 위에 주저앉은 선우가 자신의 머리를 감싸쥐며 갈라진 목소리로 뇌까렸다.

  "찾아낼 거야. 반드시 찾아낼 거야.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꼭 찾아내고 말거야. 그러니까... 그 때까지... 그 때까지......"

  "......"

  "......"

  선우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선우를 바라보는 성진과 준희도 그저 침통한 표정을 지을 뿐 아무런 말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레드비트 하우스에 다시 한 번 불길한 먹구름이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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