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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로 성장하는 마법사-92화 (92/250)

092화

첫 번째 던전 원정에서 어스는 총 세 번의 힐을 레이몬드 사제에게서 받았다.

첫 번째 힐에선 승리의 노래 칭호가 자그마치 단숨에 2단계 상승하여 그에게 개똥도 약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한데 개똥의 약효는 고작 1회였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 번을 더 받았다.

레이몬드나 교단엔 동전 하나 주고 싶지 않았기에 그럴싸한 말로 상대의 비위를 살살 맞추어주었다.

그때마다 놈이 어찌나 생색을 내던지 놈의 정수리에 콜 라이트닝 한방 내리 꽂는 꿈까지 꿨었다.

“어이쿠, 우리 어스 형제님 밤새 무탈하셨습니까. 허허.”

또 한 번의 기연은 얻지 못했지만 대신 레이몬드 사제의 마음을 얻었다.

“어이쿠, 우리 레이몬드 사제님도 밤새 무탈하셨습니까. 하하.”

덕분에 이런 사이가 되고 말았다.

긁적긁적.

레이몬드의 신분이 사제가 아니었다면 어스는 의형제 하나 더 생겼으리라.

레이몬드 사제의 머리통 위로 루리아의 눈빛이 신기루처럼 등장했다.

못 볼 걸 봤다는 눈빛이었다.

저 신기루는 어스의 기억이 만들어낸 환시였다.

“오늘이지요? 어스 형제님.”

“예, 오늘이네요. 레이몬드 사제님.”

“이번에도 잘해 봅시다. 어스 형제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무리하진 마세요. 몸 생각하면서 하세요. 그럼 식사하러 가실까요?”

“그러시죠.”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되게 어렵던데 어찌 된 영문인지 남자의 마음을 얻는 건 여반장이었다.

부르르.

“아니, 왜 그러십니까? 어스 형제님? 몸이 안 좋으십니까? 힐이라도 넣어 드릴까요?”

귀족들도 대기표를 뽑고 기다려야 받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사제의 힐이다.

그런 힐이 지금은 고갯짓 한 번이면 언제든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사제의 마음을 단단히 사둔 건 무시할 수 없는 인맥이다.

실제 레이몬드 사제의 호감을 사게 되자 이번 원정에서 확보한 몬스터 부산물을 시세보다 높게 판매할 수 있었으며, 레이몬드 사제가 개입하여 루리아의 아버지 오스완드 영주에게서 돈을 왕창 뜯어 낼 수 있었다.

돈을 더 벌었다는 건 좋았지만, 한편으론 기분이 애매했다.

돈을 뜯어낸 대상이 하필이면 좋아하는 여자의 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번 원정으로 오스완드 영주 역시 큰 수익을 얻었으니 손해는 아니긴 해도 받는 입장에선 찝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레이몬드 사제를 냉담하게 대해야 하는데 남은 원정 일정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었다.

교단의 인물인 레이몬드가 꼬투리를 잡고 늘어진다면 원정 자체가 꼬여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계륵이네, 완전 계륵이야.’

“자다 일어나서 그럴 뿐 몸에 문제는 없습니다.”

“아직 젊어서 그렇지 나이 들면 달라요. 아직 한창 때인 형제님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내 나이쯤 되면 후회한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꾸준히 챙기도록 하세요.”

레이몬드 사제는 기껏 서른둘이다.

그리고 뭘 먹고 살았는지 투실한 몸집에다 피부는 어찌나 좋은 지 윤기가 좔좔 흘렀다.

저 인간을 기름틀에 넣어 쥐어짠다면 어마어마한 양의 기름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레이몬드 사제님이 저를 향한 걱정에 늘 감사합니다. 사제님과의 인연은 제 평생 가장 값진 보물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말이 어찌도 이리도 잘 나오는지, 아무래도 얼마 전 레이몬드가 몸에 좋은 약이라며 선물한 그 약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진심은 단 1도 들어 있지 않았지만 레이몬드 사제는 그의 말을 순도 100퍼센트의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덥석.

‘기분 나쁘게 손은 왜 잡아?’

갑자기 짜증이 확 솟구쳤다.

“형제님, 내 형제님을 친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곤란하거나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 내게 말하세요. 내 형제님의 일이라면 보증도 웃으며 설 테니까. 하하.”

하지만 인내심을 발휘하여 이를 삼켰다.

“레이몬드 사제님의 진심에 크게 감복했습니다. 식사하러 가시죠.”

황급히 손을 뺀 어스는 총총 걸음으로 아래층으로 향했고, 레이몬드 사제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었다.

침을 부르는 얼굴, 아니 웃음이었다.

‘오늘도 밥맛 떨어지겠어. 하아.’

이러다 어느 세월에 앙상한 이 몸에 살이라고 불릴만한 게 붙을는지.

넉넉한 풍채를 갖길 소망하는 어스로선 레이몬드 사제가 그저 얄밉기만 했다.

* * *

“루리아 누나.”

“어, 왔어. 그런데 레이몬드 사제는?”

“신전에 잠시 들러야한다고 갔어요.”

“많이 친해졌더라.”

“친하긴 뭘 친해요. 원정에 발목을 잡히면 곤란하잖아요. 그래서 비위를 맞춰준 것에 불과해요. 절대, 친한 거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정색하며 선을 그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줬으면 좋겠어.”

“무슨?”

“레이몬드 사제에게 흑심이 있는 것 같아.”

“흐, 흑심?”

어스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두 팔을 서로 부여잡았다.

“최근 교단에서 실력이 검증된 용병이나 자유 기사의 영입에 열을 올리고 있어.”

루리아의 말에 어스는 그제야 안도했다.

그런 용도로 자신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면 매몰차게 대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디콘이 될 생각은 없었다.

말이 세속 사제지 디콘은 교단의 말단 병사다.

험하고 힘들고 귀찮은 일에 동원되더라도 거부할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제가 디콘이 될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신앙심이 깊은 자들에게 있어 디콘이 되는 건 가문의 영광이겠으나 어스에겐 불편한 족쇄에 불과했다.

그러니 그가 디콘이 될 일은 절대 없었다.

하늘과 땅이 서로 바뀌는 일이 없는 이상.

“디콘?”

“레이몬드 사제가 절 디콘으로 영입하려고 한다는 말 아니었어요?”

“네가 평범한 용병도 아니고 디콘으로 들이겠어?”

“디콘이 아니라고요?”

“너쯤 되면 성기사지.”

“성기사가 그렇게 쉽게 된다고요?”

“5서클 마법사가 흔한 게 아니잖아.”

디콘과 성기사는 노예와 귀족만큼이나 차이가 심하다.

성기사로 출발하여 교황이 된 사람도 있다.

평사제와 성기사 둘이 교황을 목표로 달린다면, 아니 그보다 아래인 추기경을 노리더라도 사제보단 성기사가 윗줄에 있다.

참고로 레이몬드 사제는 평사제다.

‘그자가 그래서 내게 지극정성이었구나.’

“교단에 들어갈 생각이면 모를까 아님 선을 긋는 게 좋을 거야. 난처한 상황에 처하지 않으려면.”

“명심할게요. 그리고 저…… 이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요. 제가 레이몬드 사제를 이용해서 영주님을 편취한 건 아니에요. 맹세코!”

“마음에 두지 마. 나도 아버지도 그 일에 대해선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고 있어. 아니, 오히려 네게 고맙다고 해야 할 거야.”

‘헐, 500만 테슨데…… 안중에 없다니.’

500만 테스면 왕도 1군은 어렵더라도 2군 지역에 집 두 채를 살 수 있는 액수였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경우엔 부지가 넓은데다 2군에서도 꽤나 좋은 지역에 속하는 편이라 매물자체가 귀하다보니 두 채는 어렵겠지만 그보다 다른 2군의 경우에는 가능하다.

그런데 그런 거액을 뜯기고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고 하자 어스는 귀족들의 금전감각이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러나 이는 어스의 착각이었다.

500만 테스는 귀족들에게도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다.

그럼에도 저들 부녀가 이번 일을 마음에 두지 않는 건 어스가 아니었으면 원정 자체가 이뤄지지 않음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 줘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 말이다.

더욱이 수익이 아예 없던 것도 아닌데다, 이번 일로 민심까지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니 오스완드 영주 입장에선 일석이조였다.

“그러면 다행이고요. 그럼, 함께 수련해도 돼요?”

“물론.”

* * *

왕도 2군 지역에서 돌연 자취를 감춘 던전에 대한 조사를 나온 루비오 사제는 실제 던전에 대한 조사는 일절하지 않았다.

헥터 왕국과 마탑에서 적극적인 조사가 이뤄진 상황에서도 찾지 못했던 단서를 제 아무리 교단이라고 하지만 찾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루비오 사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어스 때문이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무슨 일인가?”

“글리시아 남작 영지에서 의아한 추천장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글리시아? 거긴 악의 흔적이 발견된 영지 아닌가?”

“예.”

“보고서가 아니라 추천장이면 그 일과 연관은 없겠군. 그런데 추천장에 관한 건 우리 업무가 아닐 텐데.”

대외적으로 루비오는 사제였지만 그의 진시한 신분은 성전단 13대 대장을 맡고 있었다.

교단에 위험이 될 소지가 있는 자들을 제거하는 일이 바로 성전단의 일이었다.

당연 교단에선 성전단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어, 루비오의 지위는 오직 성전단 내부에서만 사용된다.

그리고 이는 정상적인 교단 내부의 일에는 관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한데 수하가 정상적인 교단 내부의 일에 개입했으니 이는 엄연한 월권행위였다.

루비오는 월권행위를 매우 싫어했기에 수하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할 경우 엄벌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언성을 높이지 않은 건 이러한 사실을 수하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스 마법사에 관한 내용입니다.”

던전이란 존재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벌써 제거 되었을 대상이 바로 어스였다.

천재의 등장은 항상 대륙에 변화를 불러일으켰고 그 피해는 지금껏 고스란히 교단이 받았다. 그래서 교단은 이들에 대한 처리를 고심한 끝에 성전단이란 특별한 조식을 비밀리에 두어 이 문제를 처리해 왔다.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자행된 일로 이 때문에 천재는 단명한다는 말이 통설로 여겨지고 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왕도에 있는 그의 추천장이 왜 글리시아에서 온 거지?”

“알아보니 지금 글리시아에 있다고 합니다.”

루비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스가 외출했다는 보고를 받은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던전의 등장에 성전단 본연의 임무가 중단된 상태이긴 해도 우려 대상에 대한 감시는 지속하고 있었다.

어스 역시 그들이 감시하는 대상 중 하나였다.

그런데 자신들의 눈을 피해 글리시아 영지까지 갔다고 하니 루비오 입장에선 13대의 기강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담당자 불러와. 그전에 추천장의 작성자와 그 내용은 뭔가?”

“추천인은 레이몬드 사젭니다. 내용은 성기사 추천입니다.”

“레이몬드라고?”

“예, 그 레이몬드 사제입니다.”

루비오는 들어선 안 될 이름을 들은 사람처럼 인상을 와락 구겼다.

이를 전하는 그의 수하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 * *

“어스 형제, 조만간 형제에게 큰 선물이 당도할걸세.”

“선물이요?”

“미리 말하면 재미없지. 아무튼 기대해도 좋을 거야.”

레이몬드의 통통한 손이 연방 어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선물이라면 좋은 거다.

하지만 앞서 루리아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보니 반갑긴 커녕 오히려 부담이 가중됐다.

‘설마 성기사로 날 추천한 건 아닐 거야. 분명 그럴 거야.’

사제라고 사유 재산을 갖지 말라는 법은 없다.

결혼 하지 말란 법 역시.

하지만 대부분의 사제들은 사유 재산과 아내를 갖지 않았다.

여기서 문득 하나 궁금해졌다.

레이몬드가 어떤 유형의 사제인지.

‘대답이 뻔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모를 일.

“레이몬드 사제님은 결혼하셨습니까?”

“결혼이란 제도는 남자의 무덤인데 굳이 그런 짓을 왜 하겠나? 내가 바보도 아니고. 흠. 그렇다고 적적하진 않네. 적적함을 달래줄 노예가 몇 있거든.”

헥터 왕국에서 노예는 불법이다.

그럼에도 이를 당당하게 밝히다니…… 제정신일까?

아님,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해서? 그도 아니면 믿는 구석이 있어서? 아무튼 말로만 듣던 노예를 거느리고 있는 자를 실제 눈앞에서 보게 되자 그와 자신이 서로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간신히 진정한 어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불법 아닌가요? 제가 알기로 우리 왕국에선 불법으로 선포한 지 꽤 된 것으로 아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나요?”

“교단에 소속된 인물은 모두 면책특권이 있는데 법이 대순가? 그렇다고 오해하진 말게. 내가 말한 노예는 이종족일세. 그러니 위법을 자행한 건 아니지.”

앞서 놀란 것보다 지금 저 말에 더 놀라고 만 어스였다.

이종족이라니.

‘혹시, 엘프일까?’

그렇다면 꼭 한 번은 만나고 싶었다.

혹시라도 위그드라실에 관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이종족 노예는 엘픈가요?”

“자네도 남자는 남자군. 좋네, 내일 내 집에 오게. 그리고 그때 내가 준비한 선물도 알려줌세.”

내키지 않지만 내일 레이몬드 집에 가야할 것 같았다.

“초대 감사합니다.”

“우리 사이에 뭘.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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